절대회귀 [800-894화]

소금이랑 헷갈리면 안 돼! 맛있게 맵습니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주정뱅이랑 같이 다니면 주정뱅이가 되고 왜 나를 다시 데려온 거냐? 비궤는 모두 내가 가지겠다 하늘이 네 편이라 생각하나? 나 주사 있는 사람이야 주정뱅이들은 아침이 올 때까지 마시거든 평생 아무 일 없다가 극악은 선을 넘지 않는다 여기 계신 분들이 해주신 것처럼 설거지는 누가 하는 거요? 오늘만 친구합시다 마교주는 해도 무림맹주는 못 할 거 같네 내 심장이 뜨거웠으면 너희와 함께 죽었겠지. 같은 천마라는 게 부끄러우니까 너는 살아라 그 사람들 다 여기 있는데 언제나 내 문제는 소교주 때문이지 생긴 것만 봐선 악당이 맞긴 하오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내가 욕을 해야 나타나니까!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우리말로 합시다! 아들 앞이라서 말 많은 나 상대한다고 고생했다 내공이 밀리지 않는다고? 너희들의 천마혼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왜 싸우려 하지 않는지 아느냐? 네 천마혼은 소멸했다 지금까지 어찌 참으셨습니까? 천마혼이 너무 많다 주인공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무림인들에게 사랑받는 마교주 한 시진 후에 넌 죽는다 한 번도 바람이 된 적이 없었잖아? 나만 지키고 있네 너는 왜 나를 원망하지 않냐? 너도 살아남았구나 어떤 인생을 살지 정해졌나? 너 때문에 포기 못 하지 그 무서운 천마혼도 미소를 저는 천천히 이루고 싶습니다 지금도 저를 보고 계실 겁니다. 교주님의 술상을 뒤집어엎지 마라 교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냐? 가면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사기꾼들로 가득합니다 낚시야 다 같이 모일 명분이고 천마배 낚시대회를 시작합니다 너희들에게 이 무림의 운명이 누굴 고를지 결정하셨습니까? 너는 방금 극악소마를 죽였다 술꾼이 무슨 숙취 걱정을 하고 있어 일등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지게 미친놈이다 돌려주기 위해 더 힘든 싸움을 그렇게 쉽게 달아날 수 있으리라 잠옷은 안 챙겨왔네 이때의 너희는 또 어떤가 기억하고 싶어서 입부터 닦아요 아직 안 끌려가 봐서 그래 밤에 몰래 일어나서. 알지? 길거리 음식이 처음은 아니지? 곰 인형이 아니라 늑대 인형이 혹시 제가 주사 부렸습니까? 극락에서 쫓겨난 선녀 같은 분이시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왜 의원 따위를 이제 삼십 년은 더 악명을 실물이 낫지 않소? 돈 많이 모아두셨죠? 친구를 무림공적으로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더라도 소교주의 직속 수하라고?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하였습니다 딴 데 가지 말고 우리에게... 만약 천살성이 오늘 쳐들어왔으면 네가 잘사는 게 복수다 주인 나오라고 해! 내 검만 특별대우할 필요 없어 저 현판에 넘어간 거야? 가서 허락받고 오너라 내 사돈 될 사람이 자네라서 그때 그 교주 신세는 면했다 맨 앞줄은 누굴 위한 자리지? 내 아들과 그쪽 딸 바꿉시다 중원 놈들, 다 내 아래에 있다! 그래, 누구 혼례식인데 좋은 날이잖아? 마차 천천히 몰게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 손녀와 승부를 보시려는 겁니까? 최신화부터 →

소금이랑 헷갈리면 안 돼!

암흑궁주는 방 가운데 서 있었다

그 주위로 오대학사들이 죽은 채 쓰러져 있었다. 무리하게 내력을 사용했는지, 그들은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낸 상태였다.

앞서 그들은 수인을 만들어 허공에 괴이한 문양과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암흑궁주가 앉아 있는 바닥에 글자가 새겨지며 빛이 났었다.

그리고 바닥에 새겨졌던 그 괴이한 글자와 문자들은 암흑궁주에게 옮겨와 있었다. 그의 몸과 손은 물론이고 얼굴에까지 온갖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암흑궁주는 허상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빛에는 알 수 없는 희열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드디어 만났군, 소교주.”

그 모습을 본 가예의 눈빛이 떨렸다.

‘오대학사를 이용한 대법에 성공했어.’

암흑궁주는 그것이 어떤 대법인지 자신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하고 대단한 대법이리라.

가예가 옆에 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아무리 강해도 저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여유를 부렸다.

“문까지 걸어 잠그고. 이렇게 겁이 많은 사람이 대체 무림을 차지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하긴, 회귀 전 세상에서도 암흑궁주는 십이지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신은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아무도 암흑궁주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이렇게 어둠 속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것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나를 이 구석까지 몰았는데, 겁이 날 수밖에 없지 않나?”

암흑궁주도 검무극만큼이나 여유가 있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죽은 사람들을 향했다.

“그 늙은 몸뚱이를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거냐?”

“대의를 위한 길은 시체를 쌓아서 가는 길이지.”

“대의를 위한 희생을 말하는 자치고, 스스로 희생하는 자를 본 적이 없지.”

“그들은 위대한 문장을 남기고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검무극은 그의 얼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글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는데? 억울하다! 분하다! 암흑궁주는 우릴 이용해 먹고 버린 쓰레기다!”

암흑궁주의 몸 주위를 휘돌고 있던 암흑의 기운이 거칠게 꿈틀거리며 주인의 기분을 드러냈다. 검무극 앞에서 평정심을 지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가예를 쳐다보았다.

“자, 못다 푼 화를 푸시오.”

그녀는 들어설 때까지는 기세 좋게 들어섰다. 암흑궁주를 보면 욕부터 한마디 하고 시작하려 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한 이 나쁜 놈아!’

한데 막상 그를 보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암흑궁주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소교주가 자넬 죽이지 않을 거라 확신해서 문을 열지 않은 거니까.”

“그럼 지금은 왜 열었죠?”

“보다시피 대법이 이제 막 끝났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노는 나를 구하려 들지 않았어요.”

암흑궁주의 변명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이지 않나?”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가예는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소교주에게 현혹되지 말게. 그가 어떤 혀를 가졌는지 잘 알고 있지 않나?”

자연스럽게 가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검무극은 담담히 물었다.

“왜 저 말을 믿고 싶은지 아시오?”

검무극은 그녀도 알지 못한 그녀의 마음을 들춰냈다.

“당신은 지금 진실보다는 위안을 얻고 싶어서요.”

가슴이 철렁하는 건, 분명 암흑궁주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는 점이다.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일 수도 있어.

검무극은 그런 그녀를 질책하는 대신 오히려 위로했다.

“사람이 지치면 그렇게 되오. 자기 길을 걸어도 지치는데. 내 길이 아닌 길을 걷다 보면 더 지치기 마련이지.”

검무극은 더는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믿는다면 저쪽으로 가도 좋소.”

가예는 솔직히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갈등하는 그녀에게 암흑궁주는 자신에게 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자신을 향해 내민 그 손을 보는 순간, 그녀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단 한 번도 내게 손을 내민 적이 없었지요.”

앞으로 내민 암흑궁주의 손이 꿈틀했다.

오랜 세월 봐왔음에도 암흑궁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절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잘 몰라도 그의 주위를 맴도는 저 어둠의 연기는 익숙했다. 항상 암흑궁주의 감정을 대변하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으니까.

지금 그의 주위에 흐르는 저 검은 연기는 더없이 음흉하고 초조했다.

어서 와, 어서! 확 집어삼켜 줄 테니까!

먹잇감을 노리듯 도사리고 있었다.

이제 가예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누가 자신을 현혹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세뇌를 당해왔음을.

“이제 알겠소? 왜 신녀궁이 저들을 이끌어야 했는지.”

검무극의 말에 그녀는 억울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어렸을 때에도 암흑궁주는 노인이었고 궁주의 자리에 있었다. 자신을 궁주 자리에 올려준 선대 신녀궁주도 감히 암흑궁주에게 저항할 생각을 못 했다.

“저에겐 힘이 없었어요.”

“힘은 당신이 최고였는데.”

“무슨 말이죠?”

“당신 뒷배가 하늘이잖소?”

가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소. 그걸 인지하지 못했고, 옆에서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

가예는 검무극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약하다고 핑계를 댈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든 바꾸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만약 검무극 같은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바꿀 수 있었을까?

“삼백 년 전에 천의궁이 멸문한 것도 천의궁주가 신녀궁주의 말을 듣지 않아서였소.”

신녀궁주가 천의는 삼백 년 후에 온다고 했지만, 천의궁주는 그 말을 부정했다.

“마치 그 모습을 본 것처럼 말하는군.”

암흑궁주의 말에 검무극은 맑고 깊은 눈으로 웃었다.

정말 과거를 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를 느껴졌기에 암흑궁주의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검무극이 가예를 보며 말했다.

“자,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 하시오. 지금 말 못 하면 평생 후회할 거요. 다음은 없소.”

가예는 암흑궁주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말했다. 오래전에 해야 했을 말이었다.

“평생 옆에서 봐온 당신의 방식은 틀렸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암흑궁주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당신도, 당신을 말리지 못한 나도, 우린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가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냥 홀린 듯 살아왔다. 암흑궁주를 도우며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여러 번 이게 아닌데,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물었다.

“화가 좀 풀렸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하셨소. 나중에 돌이켜보면 오늘 말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요.”

나중에? 과연 자신에게 나중이 있을까? 당장 한 시진 후도 없을 거 같은 인생인데.

“왜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거죠?”

“당신을 이용해서 이 문도 열었고, 당신에게 잘 보여 아까 물은 질문의 답을 듣기 위해서요.”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데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암흑궁주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교주, 정말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에 사람 하나를 바꿔놓다니.”

“내가 대단한 게 아니라 여기 신녀가 대단한 거지.”

검무극이 가예를 바라보았다.

“신녀궁이란 배는 지금까지 항구에 정박해 있었소. 선장인 당신은 배의 원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거지. 이제라도 바다로 나가시오.”

진짜 신녀궁의 궁주로 살아가란 말이었다.

“하늘이 저를 버리지 않았을까요?”

“당신은 한 번도 하늘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오. 바다로 나가야 진짜 하늘도 볼 수 있을 거요. 벼락이 떨어질지 태풍이 불어닥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시오. 내 손에 죽지 말고, 저자 손에도 죽지 말고. 죽어도 그 바다에서 죽으시오.”

가예의 가슴에 격정이 스쳤다. 앞으로 하루를 살더라도 진짜 신녀궁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직접 겪어보니 알 것 같았다. 왜 악군학과 차이란이 이 소교주를 따라갔는지.

이윽고 그녀에게서 앞서 물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여섯 개의 힘은 육도원기라고 부르는 기운이에요.”

암흑궁주는 그녀를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 그것을 그렇게 구하려고 했던 거요?”

“오직 그 힘만이 그 사람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요.”

검무극은 흠칫 놀랐다. 당연히 이 여섯 기운은 화무기가 사용할 힘이라 생각했다. 한데 제어할 힘이라고?

대체 화무기가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육도원기만이 그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암흑궁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가 지배하는 무림은 지금까지의 무림과는 완전히 다른 무림이 될 거네. 지금까지 나쁜 것으로 취급받던 악은 선이 되고, 선은 나쁜 것이 되겠지. 약한 자는 죽을 거고, 조롱받을 거네. 강한 자는 숭배받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존경받는 무림이 되겠지. 태초의 무림처럼 말이네.”

암흑궁주의 몸에서 심연처럼 깊은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소교주, 너만 죽으면 새로운 무림이 펼쳐진다.”

* * *

독왕의 말에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검우진은 말없이 독왕을 응시했다. 할 말을 마친 독왕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우진이 아래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술 한 병 가져오게.”

“네.”

권마가 술을 챙겨서 이 층으로 올라갔다.

검우진이 탁자에 뒤집혀 있던 새 술잔을 독왕에게 내밀었다. 독왕이 공손히 술잔을 받았다.

또르릉.

독왕의 잔에 술을 채워준 후 검우진이 말했다.

“나도 한 잔 주게.”

“네.”

이번에는 독왕이 검우진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세상 사람을 다 죽이겠다고 한 사람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긴장한 손을 떨고 있었다.

“한잔하세.”

검우진이 먼저 술잔을 비웠고 독왕이 술잔을 비웠다.

술을 마신 후 검우진은 독왕을 자신의 자리로 보내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됐네, 가서 편히 있게.”

독왕이 공손히 인사한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 그렇게 말을 잘했냐는 듯,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신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권마는 독왕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철저히 자신만의 세상이 있는 사람이기에, 아까의 그런 모습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소교주가 제일 무섭다고 했나? 나는 자네가 제일 무섭네.’

권마는 새삼 독왕의 무서움을 느끼며 검우진에게 말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곧 식사 만들어서 올리겠습니다.”

권마만이 느끼는 교주의 미세한 표정 변화가 아니더라도, 누가 봐도 지금 검우진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독왕의 대답은 합격이었다. 그것도 수석 합격이었다.

일 층에 있던 풍천교주가 검왕에게 나직이 말했다.

“자네 잘 빠져나왔네.”

풍천교주가 힐끗 이 층을 올려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안 그랬으면 저 사람들하고 싸워야 했을 테니까. 감당할 수 있었겠나?”

말없이 앉아 있는 검우진, 창밖을 바라보는 독왕, 그리고 묵묵히 계단을 내려오는 권마까지.

딱 세 사람이 있는데도 풍천교주는 저들과 절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 징글징글한 검무극이 없는데도 이런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심지어 마존들이 더 남아 있다.

검왕은 관심 없다는 듯 행주질을 다시 하며 풍천교주에게 부탁했다.

“아까 말씀하신 객잔, 이름이나 지어 주십시오.”

* * *

천살성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풍류주점에서 묵었다. 침상이 있는 객잔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검우진이 이곳에 있겠다고 결정했다. 이곳이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장소이기에 그럴 것이다.

검우진과 두 마존, 그리고 풍천교주는 운기조식으로 잠을 대신했다. 워낙 절대고수들이었으니 아무 지장이 없었다.

검왕은 일 층에 의자를 여러 개 붙여서 누워서 잤다. 풍천교주도 그러고 싶었지만, 코골이가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용감무쌍한 자신이지만, 천마의 잠을 설치게 할 만큼 용감하진 않았으니까.

밥도 해 먹고, 풍천교주의 농담에 웃기도 하고.

천살성이 오는데 이런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검우진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식사를 차리겠네.”

그 말에 네 고수는 깜짝 놀랐다.

천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고?

“부담스러워서 그 밥 먹고 소화가 되겠습니까?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풍천교주가 나서려는 걸 권마가 말렸다.

“이번 기회에 교주님 실력도 한 번 보시지요.”

권마는 교주의 요리 실력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았다. 교주는 그 요리 실력을 오랜만에 뽐내려는 거다.

그때 독왕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망부석처럼 이 층 창가에만 앉아 있던 그였는데.

“제가 돕겠습니다.”

검우진이 식사 준비하겠다는 것보다 독왕이 돕겠다고 나선 것이 더 놀라웠다.

앞서 질문에 대답하고, 술을 내려주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독왕은 변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양파 좀 까게.”

“네.”

검우진이 고기를 손질하고 독왕이 양파를 까는 장면은 첫날 권마가 도마질하고 검왕이 행주질하던 장면보다 더 귀한 모습이었다.

맹독도 자유롭게 다루던 독왕이 양파에 눈이 매워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교주가 독왕에게 소리쳤다.

“정신없다고 소금이랑 그 주머니 속 가루와 헷갈리면 안 되오!”

그 걱정 섞인 농담에 검우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검우진의 미소가 사라졌다.

차분히 가라앉은 그의 시선이 주방 밖 주점 입구를 향했다.

곧이어 다른 네 사람도 자연스럽게 그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가촌 거리를 걸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상대는 일부러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벼운 무복 차림의 한 남자.

놀랍게도 그는 사도맹주 백자강이었다. 천살성보다 그가 먼저 풍류주점에 도착한 것이다.

일순간 흐르는 정적.

그 놀람이 만들어낸 침묵을 깬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그가 천마검 대신 부엌칼을 든 채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식사하셨소?”

맛있게 맵습니다

천살성이 언급되자 가예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안다. 그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인간은 절대 풀 수 없다는 칠십이성금혼진의 봉인을 스스로 풀고 나왔으니까.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가예는 이곳에 오기 전 그날을 떠올렸다.

천장 가득 별빛이 반짝이는 그곳에서 그녀는 공포심을 느꼈다.

-이제 떠나셔야 합니다.

천장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별자리는 이제 하나. 저 마지막 별자리마저 불이 들어오면 그는 봉인을 풀고 나온다.

하지만 암흑궁주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 주위에 머무는 암흑도 오늘은 기운이 없었다.

-그가 나오는 걸 막을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가예는 알고 있었다. 저 칠십이성금혼진을 완전히 파괴하면 안에 갇힌 사람을 영원히 못 나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암흑궁주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봉인을 파괴하면? 본궁의 삼백 년 염원은 어쩌고?

-하지만 육도원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나오면…… 그는 궁주님부터 죽일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암흑궁주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봉인을 파괴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세요.

잠시 사이를 두고 암흑궁주가 물었다.

-내게 새로 시작할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나?

가예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암흑궁주가 아무리 고수라도 그는 결국 인간이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 한계를 말하고 있었다.

-먼저 동정호로 가서 내가 말한 것들을 준비하게.

-어쩌시려고요?

암흑궁주는 놀라운 말을 했다.

-그를 만날 거네.

암흑궁주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겹치면서 가예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후에 암흑궁주는 죽지 않고 동정호로 왔다. 봉인을 풀고 나온 그와 만났는지,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를 만났다면 어떻게 살아온 걸까? 애원해서? 아니면 협상해서? 아니면 만나지 않고 온 것일까?

암흑궁주는 검무극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이 세상의 모든 탁자는 다 부서질 거다.”

그는 검무극이 꿈꾸는 마도가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웃기는군.”

그 저주와도 같은 예언에 검무극은 냉소했다.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새로운 무림이라고? 그건 네가 원하는 무림이 아니잖아?”

암흑궁주의 눈가가 꿈틀했다.

“너는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무림을 꿈꾸었잖아? 수하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너는 흑막이 되어 그 위에 군림하는 그런 무림, 아니야?”

암흑궁주는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체 소교주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게 진정 자신이 꿈꾸는 삶이었는데.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뒤덮이면 과연 네 어둠은 의미가 있을까?”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암흑궁주라는 존재가 더는 특별하지 않을 것임을. 한낱 수많은 악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 것임을.

“내가 죽거나 당신이 죽거나, 오늘 우리 중 한 사람은 죽을 거다. 그 전에 당신에게서 듣고 싶어.”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이 암흑궁주가 화무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그와 싸우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화무기에 관해서 알아내야 한다.

그만큼 깊은 운명으로 엮인 사람이라면,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 * *

백자강이 이곳으로 달려올 때만 해도 정말 이런 분위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상 비장하고 진지한 상황이 펼쳐져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마교주에게 인사해야 할까? 자신이 도와주러 온 것을 과연 믿어줄까?

도와주러 왔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너스레를 떨면서.

-천살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러 왔습니다.

온갖 생각을 하면서 왔는데.

밥 먹었냐고?

“아직 식사 전이오.”

백자강의 대답에 주방에서 내민 검우진의 고개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오.”

주방에 난 구멍으로 그가 고기를 써는 장면이 보였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너무 젊어서 숙수나 점소이인 줄 알았다.

그때 백자강의 눈에 남자의 허리에 찬 주머니가 들어왔다.

상대의 병장기를 확인했을 때 보검이나 보도보다 더 가슴을 철렁하게 만드는 것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도 열두 개나.

백자강은 양파를 까는 사람이 독왕임을 알아차렸다.

‘독왕이 양파를 까고 있다고?’

독왕은 사도맹주가 왔음에도 눈길 한번 안 주고 검우진을 돕는 일에만 열중했다.

독왕이 일반적인 예의에 매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백자강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충격적인 사실은 이것이었다.

‘마교주가 요리하고 독왕이 돕고 있다고?’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올 줄 알고 독왕과 함께 독을 탄 요리를 만들고 있는 건가?’

천마와 독왕이 손수 요리해서 밥을 차려준다는 것보다는 이게 더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는 걸 백자강은 잘 알았다.

검우진이 자신을 독살할 리는 없으니까. 저 식칼을 던져서 죽이려면 죽이지, 독살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게다가 독왕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양파를 까고 있었다. 독살당해 죽을 사도맹주가 슬퍼서 우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다.

‘날 독살하려는 게 아니라면?’

혹시 이미 천살성이 와서 검우진을 죽인 후 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건 아닐까?

오죽 놀랐으면 이런 실없는 생각까지 다 들었겠는가?

권마가 그에게 다가와서 정중히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백자강도 권마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고맙소.”

백자강은 풍천교주와도 인사를 나눴다. 이미 아는 사이였기에.

“오랜만에 뵙소.”

“잘 지내셨소?”

비록 풍천교의 교주직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백자강은 그를 새외제일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백자강의 방문이 정말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천마신교에 위기가 닥쳤는데 사도맹주가 도와주러 왔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혼자 오셨소?”

“혼자 왔소.”

심지어 단신으로 왔다? 이건 그가 왔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다 마교주에게 죽으면 어쩌려고?

궁금한 건 못 참는 풍천교주였기에 넌지시 그 의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백 맹주께서 입구로 들어서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었소. 혹시 백 맹주께서 천살성인가?”

원래 풍천교주가 실없는 농담을 잘한다는 것을 알기에 백자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 성질을 못 이길 때면 가끔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하지요.”

그는 풍천교주의 농담을 다섯 배로 불려서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미 이 주점 안에만 천살성이 다섯이 있지 않소?”

나만 천살성이냐? 너희가 더 천살성 같다는 농담에 풍천교주가 소리 내서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들 중 누구라도 강호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역대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천살성이 아니신데, 여긴 왜 오셨을까?”

옆에서 듣고 있던 권마도 구석에 있던 검왕도 궁금한 마음으로 백자강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검우진은 묵묵히 요리하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웃으며 물었지만 웃으면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소 직설적이고 무례한 질문이지만, 오히려 백자강은 풍천교주가 고마웠다.

차라리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물어봐 주는 게 낫다. 적어도 대답할 기회를 주는 셈이니까.

물론 백자강은 호락호락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심해서 놀러 나왔소.”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농담인가 싶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웃음기 하나 없는 말이었다.

“이 정도 일이 아니면 혼자 놀러 나올 명분이 없어서. 기회다, 하고 달려왔지요.”

백자강은 진짜 이유를 입 밖으로 밝힐 수 없었다.

마교주가 죽을까 걱정해서 왔다.

마교가 약해지면 좋아해야 할 상황이지만, 마교주의 무림일통 야욕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려서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제일 친한 친구 아버지가 죽으면 제자 녀석이 크게 상심할 거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이 마교주와는 자식 자랑이나 하면서 함께 늙어가고 싶어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백자강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때 주방에서 검우진이 백자강을 불렀다.

“백 맹주.”

백자강이 쳐다보자 검우진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검우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매운 것도 잘 드시오?”

자신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에서 백자강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왔는지 알고 있다고.

백자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매운 음식 아주 좋아하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고추를 조금 더 썰게.”

아직 양파가 만들어낸 눈물 자국을 채 지우지 못한 독왕이 이번에는 고추를 썰기 시작했다.

이제 풍천교주는 더는 왜 그가 왔는지 묻지 않았다.

“나도 매운 거 아주 좋아하오. 중원에 와서 제일 좋았던 게 매운 음식이 많은 거였소.”

“대단하시오.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이지요.”

풍천교주가 교주직을 버리고 중원에 온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도 인생이 심심했었나 보오.”

그러다 말이 나온 김에 검왕을 소개했다.

“참, 저 사람도 나와 비슷한 신세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소교주 때문에 이 먼 천마신교까지 왔으니 말이오.”

물론 백자강은 검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기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그 강함이 느껴졌다. 천마신교에 저런 전력이 더해졌다는 뜻이니, 사도맹에는 좋을 게 없는 일이다.

“악 무인, 혹시라도 살다가 인생이 심심해지면, 무림맹 쪽이 아니라 본맹 쪽을 바라봐 주시오.”

검왕이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풍천교주가 그를 대신해서 대답해 주었다.

“맹주께는 아쉽게도 저 사람은 이미 인생이 심심해졌을 때 뭘 할지 답을 찾은 것 같소.”

그렇게 검왕과도 인사를 마쳤을 때 주방에서 음식을 볶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이이익.

검우진이 달궈진 솥에 고기와 채소를 볶고 있었다. 독왕이 눈물로 깐 양파도 그곳에 들어가 있었다.

그냥 앉아만 있기 미안해서 백자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내가 도울 일은 없소?”

“괜찮소. 이제 거의 다 됐소.”

백자강은 잠시 주방 앞에 서서 요리하고 있는 검우진의 등을 쳐다보았다. 일부러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요리에 진심이었다.

‘이게 인생의 적적함을 푸는 당신만의 방식이오?’

드디어 요리가 완성되었다.

모두 탁자에 둘러앉아 검우진이 만든 요리를 맛보았다.

풍천교주는 눈치를 보며 먼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검우진과 권마가 먼저 먹고 괜찮은 걸 보고 나서야 젓가락을 들었다.

독왕이 재료를 다듬은 요리를 먹는다는 건 보통 강심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뭐 그리 맛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먹었는데 요리는 뜻밖에도 정말 맛있었다.

“오! 맛있습니다.”

풍천교주가 감탄했다. 천마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고기와 채소도 잘 구워졌고, 양념은 기가 막혔다.

백자강도 검우진의 요리 실력에 놀랐다.

“숙수가 만들었다 해도 믿겠소. 기회가 있으면 배워보고 싶을 정도요.”

“과찬이시오.”

권마는 느낄 수 있었다. 무뚝뚝하게 있어도 지금 검우진은 엄청나게 뿌듯해하고 있다는 것을.

검우진이 젓가락질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와줘서 고맙소.”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백자강이 젓가락 가득 요리를 집어 먹었다.

“맛있게 맵습니다.”

* * *

다음 날, 어둠이 내리는 마가촌으로 무림맹주 진패천이 들어섰다.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되돌아갈까를 고민했는지 모른다.

만에 하나라도 그 천살성이 무림맹으로 갈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천마신교로 왔다.

총군사 제갈현의 필사적인 만류에 진패천은 이 한마디를 했다. 손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처럼.

-내가 맹주가 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내린 결정이라네.

그렇게 어렵게 온 마교행이었지만, 여전히 진패천은 고민이 많았다.

과연 마교주는 자신의 방문을 어떻게 생각할까?

일단 의심하겠지?

천살성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구화마공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려고 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고 자신을 죽이려 들 거로 의심할지도 모른다.

진패천은 허리에 찬 군자검을 내려다보았다. 고금제일검까지 차고 왔으니, 더욱 그런 의심을 할지 모를 일.

괜한 오해가 없게 그를 잘 설득해야 했다.

무겁고 신중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불 꺼진 거리에 딱 한 군데만 불이 켜진 곳이 있었다.

‘저긴?’

예전에 삼자회담을 했던 바로 그 주점이었다.

주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진패천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자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면에 권마와 독왕이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검왕과 풍천교주가 앉아 있었다. 그들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각한 분위기! 게다가 마교주가 없다!’

설마 내가 한발 늦었나?

진패천의 가슴이 철렁하던 바로 그때, 주방 안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렇게 돌려가며 고기에 양념이 골고루 배게 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내공까지 쓸 필요는 없소.”

“기왕이면 멋있게 만들어야 더 맛있지 않겠소?”

“멋 부리다 옆에 다 튀었소.”

그들의 목소리가 누군지 확인한 진패천은 너무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설마! 사술에 걸렸나?’

그때 백자강이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주방에서 혈투라도 벌였는지 옷은 물론이고 얼굴에도 벌건 양념이 묻어 있었다.

그가 환한 얼굴로 진패천에게 물었다.

“식사하셨소?”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진패천은 검을 뽑을까 말까 고민했다.

백자강의 얼굴에 묻은 양념 자국으로도 이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이게 사술이 아니면 대체 뭐가 사술이겠는가?

너무 확실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검우진이 밖으로 나왔다.

“오셨소?”

진패천은 검우진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물었다.

“검 교주, 당신 맞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자강은 여전히 주방에 난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기 검 교주께 요리를 배우던 중이었소.”

정말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천마신교와 사도맹이 작당하고 나를 죽이려는 것인가?’

이 얼마나 완벽한 함정인가? 검우진과 백자강, 그리고 탁자에 앉아 있는 네 고수까지.

군자검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들, 이들을 이길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진패천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죽 놀랐으면 그런 생각까지 들었겠는가?

지켜보고 있던 권마와 독왕, 그리고 풍천교주와 검왕도 진패천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 놀라면 그게 이상한 일이지.

이 긴장된 상황의 해결사로 나선 사람은 역시 풍천교주였다.

“나라면 벌써 검 뽑았을 거요.”

진패천의 시선이 풍천교주를 향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는 생략한 채 풍천교주는 당신 심정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세상에 어떤 사도맹주가 천마신교가 위기에 빠졌다고 도와주러 오겠소? 제발 망해라, 기원하겠지.”

풍천교주가 주방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백자강을 쳐다본 후 다시 그 옆에 있는 검우진을 보았다.

“세상에 어떤 마교주가 그렇게 찾아온 사도맹주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겠소? 저기 독왕에게 이런 전음이나 보내겠지. 사도맹주 국은 소금 대신 무형지독으로 간을 하도록.”

교주와 맹주들을 놀리느라 풍천교주는 신이 났다. 그의 시선이 다시 진패천을 향했다.

“어디 그뿐이오? 세상에 어떤 무림맹주가 천마신교를 돕기 위해 홀로 마교본단까지 오겠소? 이건 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이고 사술 아니겠소? 나 같았으면 이미 여기 다 날렸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패천은 긴장이 풀렸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여기 온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총군사 제갈현은 자신이 단신으로 천마신교 본단으로 갔다고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믿지도 않겠지만, 그걸 그냥 보냈냐고 다들 펄쩍펄쩍 뛸 테니까.

진패천이 다시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씩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검우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 어떤 사술로도 저 사람의 기도, 저 느낌, 그대로 못 만들겠지.

그 옆에 고개를 내민 백자강도 보았다. 자신이 아는 백자강은 절대 저럴 사람이 아니었는데.

당신은 왜 거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거요? 얼굴에 묻힌 건 대체 뭐요?

진패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풍천교주를 향했다.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그는 엄연한 새외의 절대자. 그런 그가 이곳에선 주인공이 아니라 여럿 중 하나가 되어 있다. 놀라운 건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진패천은 두 마존을 보았다.

다른 마존도 아니고 권마와 독왕이라.

‘교주가 정말 끝까지 갈 각오를 했구나.’

마지막으로 검왕을 보았다. 물론 진패천도 검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강자의 신교 합류는 무림맹에게는 큰 화근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검무극이 놀라웠고 대단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가 변하고 있다. 나만 고여 있는 건 아닌가? 라는 초조함이 절로 들 정도로.

그렇게 모두를 쳐다본 후에야 진패천이 비로소 포권하며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소.”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인사를 마친 진패천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안 와도 되었겠소.”

여기 모인 사람들만으로도 무림을 멸망시켜도 몇 번은 시킬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권마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리로 앉으시지요.”

“고맙소.”

백자강은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던 요리 마무리는 내가 하겠소. 두 분은 말씀 나누시오.”

검우진이 진패천 앞에 마주 앉았다. 진패천의 성격상 이런 시기에 맹을 비우고 이곳에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검우진은 잘 알고 있었다.

“혼자 오신 거요?”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혼자 무림에 나와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소.”

맹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로 진패천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최대한 빨리 왔지만, 어쩔 수 없이 객잔에 들러 식사를 해야 하는 순간이 두어 번 있었다.

그때 객잔에서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설마 무림맹주가 혼자 구석 자리에서 국수를 먹고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평소 공식적인 행차에서 온 무림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환영하는 모습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상황이었는데, 그 순간이 새로우면서도 좋았다.

밥을 먹으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누가 잘 나간다더라, 어느 고을에서 후기지수가 나왔다더라, 어떤 표국이 망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만 있어도 재미있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삶이 주는 신선한 기쁨이었다.

급히 와야 할 일이 아니었다면 다루에 가서 차도 마시고, 저잣거리도 혼자 걸어 다녔을 것이다.

진패천은 검우진에게 그런 경험이 있는지 궁금했다.

“교주께선 혼자 다녀보셨소?”

“아들 녀석하고 조용히 여행한 적이 있었소.”

“좋으셨겠소.”

검우진이 진짜 좋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맹에 돌아가시면 손주들과 시간을 가져보시오.”

진하군이나 진하령에게 함께 여행 가자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그때 검우진의 시선이 진패천의 허리에 찬 검을 향했다.

“혹시 그 검, 군자검이오?”

“역시 교주께서는 단번에 알아보시는구려.”

군자검이란 말에 그곳에 있던 네 고수는 깜짝 놀랐다.

고금제일 군자검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무인이다 보니 관심을 보였다.

“이 검은 내 손자 검이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누구 것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가 줬느냐가 중요했다.

“아드님께서 내 손자에게 선물로 주었소.”

검무극의 선물이었다는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곧이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군자검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줄 수 있는 배포는 검무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권마는 교주의 미소에 담긴 기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차고 있는 검은 교주가 직접 내린 흑마검이었다. 그보다 더 좋은 검을 얻었음에도 욕심내지 않은 것에 기분이 좋은 것이리라. 정파를 상징하는 검을 차기 맹주에게 선물하는 현명함에 기쁜 것이리라.

사부인 자신도 이런 말을 들으면 흐뭇한데, 아버지인데 얼마나 좋겠는가?

권마가 독왕을 슬쩍 쳐다보았다. 탁자에 함께 앉아서도 독왕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들을 건 다 듣고 있을 것이다. 그랬기에 소교주가 가장 두렵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도 있었던 것이겠지.

지금 이 일도 소교주가 가장 두렵다는 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일화였다.

물론 모두가 이 일화를 아름답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이렇게 남에게는 잘 주고 잘 베풀면서! 나는!”

버럭 소리친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어디 군자검뿐인가?

괜한 불똥이 검왕에게 튀었다.

“자네 그 백화검도 소교주가 선물로 준 거지? 그 신발도 줬다고 했지! 남들은 다 주면서 왜 내게서는 가져만 간 거냐!”

그러자 검우진이 넌지시 그에게 말했다.

“아들 녀석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지 않으셨소?”

위로는 못할망정, 이걸 이때 말한다고?

풍천교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소교주가 누굴 닮았는지 잘 알겠소.”

아들이 아버지 닮아 지독하다는 말이었음에도 검우진은 오히려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백자강이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여기 검 교주의 가르침을 받아 완성한 내 인생 첫 요리요.”

백자강이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며 진패천은 비로소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새삼 실감했다.

무림맹주가 천마신교 앞마당에서 사도맹주가 해준 요리를 먹는 순간이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 두근거림은 적을 상대할 때의 긴장감과는 달랐다. 이건 흡사 어려서 나쁜 짓을 했을 때의 그 두근거림에 가까웠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자신은 이 자리가 만들어낸 사술의 일부분이 되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면 자신 때문에라도 사술이나 환술이라 여길 테니까.

검우진이 먼저 젓가락을 들어 백자강의 요리를 맛보았다.

백자강이 긴장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검우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산하셔도 될 거 같소.”

백자강이 기뻐하며 이번에는 진패천의 평가를 기다렸다.

진패천이 젓가락을 들었다.

설마 독이 든 것은 아니겠지?

생각 안 하려고 해도 독왕이 함께 있으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진패천은 음식을 천천히 신중히 씹어서 삼켰다. 혹시라도 독이 있으면 재빨리 뱉으려고 한 것이지만, 옆에서 볼 때는 맛을 음미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진패천이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왜…….”

잠시 뜸을 들인 후 놀랍다는 듯 말했다.

“맛있소?”

백자강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두 사람이 맛보자 이제 다른 사람들도 젓가락을 들었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권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인정했다. 물론 충성심에서 나온 평가긴 했다. 누가 가르쳤는데 맛이 없을까!

풍천교주는 조금 냉정하게 평가했다.

“좀 더 매우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오.”

“다음에는 제대로 매운맛을 보여드리겠소.”

듣고 있던 진패천은 내심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만남에 다음이 있을까?

하긴, 첫 삼자대면을 생각하면 이렇게 세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그것도 같은 장소에서.

식사를 대충 마쳤을 때 풍천교주가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여기 백 맹주께서는 심심해서 오셨다고 했는데, 우리 진 맹주께서는 어찌 오신 거요?”

진패천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어디 심심해서 왔겠는가?

“혹시 술 있소?”

진패천의 요구에 검왕이 술을 가져오려고 일어나려는데, 권마가 먼저 일어났다.

“내가 가져오겠네.”

상대는 천마신교에 온 손님이고, 그 손님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독왕이야 원래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권마가 도맡아 손님 접대를 하고 있었다.

앞서 맹주들이 왔을 때도 직접 나서서 자리를 안내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권마가 술을 가져오자 검우진이 진패천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와주셔서 고맙소.”

이번 역시도 백자강의 귓가에는 소름이 돋지 않았다. 교주는 진심으로 자신들이 와준 걸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도 술은 일절 마시지 않았소. 여기서 한 잔 정도는 괜찮겠지.”

술을 마실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진패천은 다른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고 자신만 마셨다.

왠지 한 잔 마시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하군이 때문에 왔소.”

태사의 옆에 놓여 있던 군자검을 보는 순간, 자신은 결국 가게 되겠구나 예감했다.

“난 지금껏 손자에게 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소.”

멸마대주를 맡긴 후 협의지도를 강조했다. 정파의 무인이라면 협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손자에게 한 점의 티끌도 없기를 바랐소.”

그래야 맹주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건 손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소. 역시, 맹주가 교육을 잘했구나. 그런 평가를 듣고 싶었던 것이오.”

진패천은 담담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고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평생 그렇게 밀어붙였으니, 한 번쯤은 손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소?”

진패천이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적어도 이곳에서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죽을 일은 없을 것이오.”

친구 아버지를 도와달라는 손자의 바람을 반드시 지켜줄 작정이었으니까.

검우진과 진패천이 서로를 응시했다. 진패천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않았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검우진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진패천의 눈빛을 담담히 받았을 뿐이다.

풍천교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에 천살성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천살성이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여길 오겠습니까? 세 분까지 모두 모이셨는데.”

풍천교주의 말에 누군가 말했다.

“놈은 올 거요.”

단정하듯 말한 사람은 놀랍게도 검우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그의 차분한 시선이 진패천과 백자강을 향했다.

“두 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었소. 한데 두 분이 오신 걸 보니, 천살성은 반드시 올 것이오.”

풍천교주가 모두 모였기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검우진은 그 반대로 생각했다.

“운명이 우릴 한곳에 모았으니까.”

운명의 이끌림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두 분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처럼, 천살성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거요.”

검우진은 그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쪽을 향해 굴러오고 있음을 느꼈다.

검우진은 평소와 달리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까지 와준 두 맹주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두 분이 나를 경계하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

진패천과 백자강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안다. 이 싸움과 별개로 검우진은 여전히 무림일통을 꿈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쩌면 천살성과의 싸움보다 더 힘들고 무서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치 그걸 인정한다는 듯, 검우진이 말했다.

“단, 이 싸움만큼은 별개로 생각합시다.”

그 이유는 천마신교의 자존심이나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무림의 평화 때문도 아니었다.

“이 싸움은 우리 아이들과 깊이 관계되어 있소.”

검무극은 물론이고, 진하군과 비사인도 놈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해왔으니까.

“세월이 지나면 녀석들도 어쩔 수 없이 바쁘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야 할 거요.”

객잔에서의 잠깐 휴식에 기쁨을 느끼고.

첫 요리 성공에 환하게 웃는.

무림에서 가장 큰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살아가야 할 테니.

“그러니 지금은 애들끼리 모여서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라고 하고.”

검우진은 모두를 쳐다보았다. 진패천과 백자강, 권마와 독왕, 풍천교주와 검왕 그들 모두와 차례대로 눈을 마주친 후.

“이 싸움은 우리 선에서 끝내 줍시다.”

주정뱅이랑 같이 다니면 주정뱅이가 되고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검무극이 천살성에 관해 묻자 암흑궁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할 말이 많은 눈빛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그를 자극했다.

“화가 나겠지. 네가 평생 꿈꿔온 삶인데 그걸 천살성이 차지하게 되었으니.”

암흑궁주는 검무극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야말로 화나지 않나? 마교주가 되면 네 무림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검무극은 대화를 하면서 암흑궁주의 한마디 한마디를 소홀히 듣지 않았다. 화무기와 관련해서는 하나라도 더 아는 게 중요했다.

“당신, 정말 천살성을 믿는구나. 대체 얼마나 강하면 이렇게까지 믿는 거냐?”

그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지만, 모른 척 물었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검무극 뒤에 서 있는 가예를 향했다.

“궁금하면 목숨을 부지하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떠는 저 신녀에게 물어보지?”

자신을 조롱하고 얕잡아보는 말이었음에도 가예는 화를 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그 변화가 암흑궁주의 심기를 건드렸다.

검무극은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사람을 쓰다 버렸으면 그렇게 배신자 취급을 할 게 아니고 미안한 기색이라도 좀 해. 왜들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해?”

가예는 앞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천화루주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쯤은 할 줄 알았다고. 암흑궁주가 당신을 미안함을 모르는 사람으로 키웠다고.

암흑궁주의 태도를 보고 있으니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저렇게 키워졌고, 저런 사람이 된 것이다.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다로 나가야 진짜 하늘도 볼 수 있을 거요. 벼락이 떨어질지 태풍이 불어닥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가시오. 죽어도 그 바다에서 죽으시오.

그녀의 시선이 암흑궁주를 향했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에요. 난 신녀궁의 궁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어요.”

“신녀궁주의 신념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건가?”

암흑궁주는 그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맞아요, 난 이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어려서 신녀궁주가 된 이후, 당신을 도우면서 살아왔으니까. 이제 와서 하늘의 뜻을 이야기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죠.”

그녀가 암흑궁주의 두 눈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내 신념은 쉽게 바뀌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이 마음은 진심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집중했다. 이제 그녀는 암흑궁주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배는 선착장을 떠나 바다로 나왔으니까.

“오늘 당신에게 죽게 되든, 소교주에게 죽게 되든, 나중에 그 사람에게 죽게 되든, 나는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요. 이만 포기하고 소교주에게 알려주세요. 그 사람을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그녀가 담담하게 마지막 진심을 전했다.

“이것이 제 마지막 천의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천의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쇄애애액.

퍼어엉.

그녀를 향해 날아간 장력을 검무극이 선 채로 옆으로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 날린 장력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막아줄 것을 알고 날린 가벼운 공격이었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암흑궁주는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마지막에 있는 최종 수장다운 모습을. 준엄하고 멋있고 신비로운. 어쩌면 마존들 앞에서는 그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검무극과 신녀궁주 이 두 사람 앞에서만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불가능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너는 나를 배신해선 안 되었다.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것들을 생각하면!”

그 원망을 받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속지 마시오.”

검무극이 가예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받아들였든, 무뚝뚝하신 우리 아버지가 받아들였든, 예전의 혈천도마께서 받아들였든, 저 사람이 해준 것 이상으로 다들 해줬을 거요. 저 이기적인 생색에 속지 마시오. 오히려 따지시오. 쥐꼬리를 주고 왜 용 대가리를 준 거처럼 생색을 내느냐고.”

정말 암흑궁주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 망할 소교주 놈아! 당장에라도 살수를 펼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아무리 열 받게 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반면 검무극은 암흑궁주를 계속 자극했다.

“당신은 지독하리만치 당신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 주름들을 펼치면 그 사이사이에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겠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나? 너는 다르다고? 사람들을 위한다고? 마협? 웃기지 마라. 그건 네 만족을 위해 유희를 즐기는 것에 불과해.”

검무극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인정해. 내 유희야. 대신에 내 유희가 다른 사람에게도 유희가 되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다. 너는? 흑막의 수장이 되고자 하는 네 유희의 결과가 뭐지? 네 주변의 모두를 죽이는 게 네 유희였나?”

“그 모두를 죽인 사람은 너였지.”

“다른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였지.”

두 사람의 팽팽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지금 그 천살성은 어디에 있지?”

그는 다른 대답은 다 해도 천살성과 관련해서는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서 가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살성은 스스로 깨어났고, 스스로 칠십이성금혼진의 봉인을 풀었어요.”

그녀는 그것이 검무극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난 소교주 당신 때문에 그가 깨어났다고 생각해요.”

검무극은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회귀로 그의 출현 시기가 바뀐 것이니까.

“그는 이미 봉인을 풀고 나왔소?”

가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생각해요.”

검무극이 암흑궁주에게 물었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나?”

“어디로 갔을 것 같으냐?”

검무극이 생각한 곳은 한 곳이었다.

“본교로 갔나?”

암흑궁주는 이것이 나의 복수다, 라는 표정으로 차갑게 말했다.

“내 주위의 모두를 죽였듯 네 주위의 모두가 죽게 될 거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희다.”

진정 무서운 말이었음에도 검무극은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너는 놀라지 않는군.”

“내가 온갖 걱정을 다 하는 사람이긴 한데.”

검무극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려고. 어차피 아버지가 해결 못 하시면 나도 해결 못 하는 거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에는 이것이 있었다. 회귀 전에는 구화마공을 십성 대성하신 상태였지만, 지금은 십이 성 대성하셨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의 삶 또한 달라지셨으니까.

하지만 가예는 아버지보다 천살성을 더 두려워했다.

“그는 상상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에요. 육도원기로 그를 제어할 수 없으면…….”

마교주도 그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생략되었음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알 수 있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왜 화무기가 은거했는지.

그건 은거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이 암흑궁주가 육도원기의 힘으로 화무기를 제어한 거다. 아마 다시 봉인했거나 어쩌면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육도원기는 어떻게 사용하는 거요?”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암흑궁주가 대답했다.

“그건 내가 알려주지.”

“당신이 제대로 알려줄 리가 없잖아?”

“어차피 우린 그 방법을 알지 못해. 오직 이것만이 가르쳐줄 수 있지.”

스르르륵.

암흑궁주 뒤쪽 벽이 열렸다. 그 뒤쪽 공간에 놓여 있는 걸 보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큰 비궤였다. 이 마지막 싸움에 암흑궁주는 비궤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이게 뭔지 너도 알고 있지?”

암흑궁주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당신들 신물이라고 알고 있다.”

삼백 년 전 그 전쟁도 이 비궤에서 시작했다. 비궤가 작은 비궤를 내놓자 당시 천의궁주는 그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천의를 내렸다고 생각했으니까.

“네 몸에 담겨 있는 육도원기를 하나로 합치려면 이 비궤의 힘을 빌려야 한다.”

검무극은 암흑궁주가 자신이 이미 비궤를 통해 구결을 배웠고, 육도원기의 기운을 하나로 합쳤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탐심대멸공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서, 게다가 알 수 없는 대법까지 성공한 상태. 그럼에도 곧장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았던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 비궤를 통해 육도원기의 기운을 뺏으려는 거다.’

그래, 이런 집요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여섯 기운을 모두 모은 자신과 이 비궤가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순간을 노려서 기운을 뺏으려는 것이다.

얼굴에 가득 새겨진 저 글자들과 관련한 대법이 그것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늦었다. 비궤에 다가가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가까이 가서 봐도 되나?”

암흑궁주는 옆으로 비켜섰다.

검무극이 몇 걸음 걸어가다가 멈췄다.

“왜 이렇게 순순히 보여주는 거지? 혹시 무슨 수작을 부려둔 거 아닌가?”

“가까이서 보겠다고 한 사람은 너다. 싫으면 물러나라.”

“궁금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검무극이 다시 걸음을 옮겨 비궤 앞으로 다가갔다. 마지막 헤어질 때, 운명적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다.

‘비궤야, 반갑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비궤를 보니 정말 반가웠다. 작은 비궤는 마지막 힘을 흡수할 때 사라졌기에, 이제 비궤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검무극이 비궤를 손으로 만졌다.

‘널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다.’

바로 그 순간.

스르르륵.

늪에 빠져들 듯 검무극의 몸이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런 예고도 사전의 기색도 없었다.

“어어?”

한번 빨려 들어가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게 어떤 현상인지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문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녀궁주도 신녀궁주였지만, 세 마존과 천화루주도 아직 배에 있었다. 분명 자신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몸은 반 이상 비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고, 설령 나올 수 있다 하더라도 나가서는 안 될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검무극은 완전히 비궤 속으로 사라졌다.

검무극이 사라지자 암흑궁주가 비궤로 달려왔다. 검무극이 비궤로 다가갈 때만 해도 내심 기대했다.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되기를!

한데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궤가 검무극을 흡수해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암흑궁주가 검무극을 흡수한 부분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댔다.

혹시 자신도 흡수될까 조심했는데, 늪처럼 사람을 흡수했던 비궤의 벽면은 딱딱하고 차가운 쇳덩이였다.

기를 주입해서 내부를 살펴보려 했지만, 안에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암흑궁주가 비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간절히 말했다.

“본궁의 고귀한 신물이시여, 소교주가 얻은 힘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지만 비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힘은 본궁의 힘이고, 저의 힘입니다. 제게 힘을 주십시오!”

간절하게 외쳤지만 비궤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만약 이대로 저를 버리신다면 소교주가 들어간 채로 비궤를 박살 내 버릴 겁니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일단 소교주와의 싸움에서는 승리하게 되니까. 최선의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도 피한 셈.

“제게 천의를 내려주십시오!”

비궤를 박살 내 버리겠다는 듯 암흑궁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엄청난 암흑의 기운이 그의 손에 밀려들었다.

“멈춰요!”

소리쳐 만류한 사람은 가예였다.

“비궤는 천의궁의 절대 신물이에요. 그렇게 부수면 안 돼요!”

암흑궁주가 손을 치켜든 채 가예에게 물었다.

“비궤를 걱정하는 건가? 소교주를 걱정하는 건가?”

그러자 가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암흑궁주는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봐왔기에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그는 알 수 있었다.

“저는 지금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왜 나를 걱정하지?”

“저는 신녀궁주고 당신은 암흑궁주니까요.”

그녀는 신녀궁주로서의 마지막 역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천의는 당신이 아니라 소교주에게 있어요.”

분노로 꿈틀하는 암흑궁주를 보며 그녀는 하던 말을 마저 했다.

“부디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마세요.”

가예는 이 말이 그를 더 자극하고 화나게 하리란 것을 알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게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 여겼다.

오래전에 했어야 했던 말인데, 지금 해서 미안합니다.

“예언도 받지 못하는 신녀 주제에.”

원래는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말이었다.

한데 이 순간 가예는 그 말이 더는 자신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평온한 걸 보는 순간, 암흑궁주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저 평온함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검무극이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분노를 넘어선 살심이 치밀었다.

암흑궁주가 그녀에게 차갑게 말했다.

“난 처음부터 천의 따윈 믿지 않았다.”

쇄애애애액.

암흑궁주가 날린 장력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예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그녀는 갑판에 서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풍랑이 그녀의 배를 향해 닥쳐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녀의 신형이 뒤로 날아갔다.

당연히 일격에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뒤에 누군가 자신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장력에 적중되어 뒤로 튕긴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날린 장력에 암흑궁주의 장력이 파훼 되면서, 그 충돌의 여파로 밀려 날아간 것이다.

가예가 놀라 돌아보니 뒤에 취마가 서 있었다. 그의 옆으로 마불과 섭혼마존, 그리고 천화루주가 모습을 보였다. 때마침 그들이 도착한 것이다.

배는 풍랑에 뒤집히지 않았다. 그녀는 갑판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까?’

가예가 취마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구해준 것이 의아했다. 소교주나 자신을 살려준다고 했지, 마존들에게 자신은 적에 불과한데. 천화루주 때문인가?

“왜 나를 구해주셨죠?”

취마는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대답했다.

“주정뱅이랑 같이 다니면 주정뱅이가 되는 거고, 세상 원망하는 사람하고 다니면 원망하는 사람이 되는 거고, 책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다니면 책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거요. 그리고 우리 소교주 같은 사람하고 다니다 보면 일단 위기에 빠진 사람은 구하고 보는 거요.”

취마가 취한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며 물었다.

“우리 소교주님 어디 계시오?”

왜 나를 다시 데려온 거냐?

취마가 가예를 돌려세웠다.

그가 일장을 날려 가예를 구한 이유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천화루주 때문이었다.

앞서 흑노와의 싸움에서 천화루주는 그녀를 살려주려 했었다. 분명 살려줄 만한 이유가 있을 거로 믿었다.

그리고 암흑궁주가 그녀를 죽이려 든다는 건, 두 사람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의미. 일단 살려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존들에게 가예는 암흑궁주의 수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교주님 어디에 계시오?”

말은 정중했지만, 취마의 눈빛은 강렬했다.

그러는 동안에 마불과 섭혼마존은 암흑궁주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등장했음에도 그는 오만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예는 순순히 대답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고, 소교주와 관계된 일이었다. 자신이 탄 배는 태풍에 침몰하지 않고 여전히 바다에 떠 있었다.

“소교주는 저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모두의 시선이 비궤를 향했다.

저 쇳덩이로 된 상자에 검무극이 빨려 들어갔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 비궤는 천의궁의 신물이에요. 소교주가 저것을 만지는 순간, 저 안으로 흡수됐어요.”

마존들은 그녀를 믿지 않았지만 천화루주는 믿었다.

“신녀궁주가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아요.”

천화루주의 믿음에 마불이 다시 가예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환술을 부려서 끌려 들어가신 건가?”

“아니에요.”

“아니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 저 비궤가 소교주를 흡수해 버렸어요.”

마불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한 번 더 확인하는 차원에서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이 말이 정말 사실일 것 같으냐는 눈빛에 천화루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취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여튼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일등이지. 이제 하다 하다 저런 곳까지 빨려 들어가니.”

말은 실없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비궤를 바라보는 취마의 눈빛은 진지했다. 다시 말해 소교주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의미.

“저 속에 누가 들어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불렀다 싶을 건데.”

그러면서 취마는 두 마존과 눈빛을 교환했다. 소교주의 생사가 불명확한 상황에서 이 암흑궁주를 자신들이 죽여야 한다.

게다가 천화루주는 물론이고 저 비궤까지 지키며 싸워야 할 수도 있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만났던 적들을 생각하면 이 암흑궁주를 상대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암흑궁주는 세 마존과 마주했음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마치 그들을 모두 죽일 자신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암흑의 기운이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건 분명 의지를 지닌 어둠이었다. 어둠은 바닥과 벽을 타고 흐르며 그 공간에 있던 빛을 조금씩 삼켜가고 있었다.

암흑궁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곳에서 무사히 나온다 해도, 소교주는 보게 될 거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런 말을 그냥 넘길 취마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다 죽이려면…… 정말 많이 죽여야 할 거다. 우리 소교주님 어찌나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온 사방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거든.”

암흑궁주가 취마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우선 너부터 죽여 주마.”

암흑궁주의 말에 취마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아니야! 소교주는 나 빼고 다 좋아하거든. 만날 마지막에 찾아오고.”

취마의 끈질긴 뒤끝에 마불도 합류했다.

“그건 나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거네.”

“아, 그렇군요. 우리 마불님은 대공자만 좋아하셨으니. 어찌 모여도 이렇게 찬밥끼리 모였습니까?”

취마가 섭혼마존을 쳐다보았다.

“섭혼마존이 큰일이오. 막내 마존이라고 우리 소교주께서 엄청나게 아끼는데.”

너 먼저 죽으라는 말이었음에도 섭혼마존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의 여유에 암흑궁주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말을 다시 하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교주가 아는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간이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정확히는 어둠이 아니라 밤이었다.

저 멀리서 별 하나가 빛을 내며 밝아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처럼, 그들 주위도 별들이 가득 빛나기 시작했다. 큰 별도 있었고, 작은 별도 있었다. 저 멀리 은하수가 흐르기도 했다.

이 광경은 정말 황홀하면서도 신비했다. 정말 자신들은 별들이 가득한 밤하늘에 떠 있었다.

암흑궁주의 독문무공 암천성혼공(暗天星魂功)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암흑궁주는 그들 앞에 서 있었는데, 아주 가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멀리 서 있는 것 같기도 한 착각이 들었다.

세 마존은 이 마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취마가 주위의 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온갖 곳에서 술을 다 마셔봤지. 지붕에서도 마시고, 설산에서도 마시고 물에 떠다니면서도 마시고, 길에서도 마시고. 한데 딱 한 곳, 하늘에서만 못 마셔봤다.”

취마가 주위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며 감격했다.

“평생 꿈이 하늘에서 술을 마시는 거였는데, 당신이 이뤄주는구나!”

바로 그때였다.

사방에 떠 있던 그 수많은 별 중 하나가 취마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쉬이이이이이이.

별은 혜성처럼 날아왔다. 저 멀리 있을 때는 점처럼 작았는데, 취마 앞에 날아왔을 때는 어른 머리통만 했다.

취마가 내력을 끌어올리며 날아든 빛을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콰아앙!

멀리서는 별이었지만, 가까이서는 강력한 암흑강기였다.

그 충격에 취마가 뒤로 몇 걸음 밀렸다. 단 하나의 별이 날아왔을 뿐인데, 탐심멸마공의 기운을 받은 강기는 더없이 강력했다.

어둠 속에 가득한 별들은 더 없이 위협적으로 느껴졌기에 마불과 섭혼마존도 내공을 끌어올리며 본격적으로 싸울 준비를 했다.

취마는 검무극에게 주려고 남겨둔 술을 마저 마시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어디 가서 별에 맞았다고 하면 취해서 헛소리한다고 하겠지? 아! 이것도 주정뱅이의 숙명인가?”

취마는 전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싸움판 기세라면 섭혼마존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께서 나왔을 때 아는 사람은 다 죽은 모습을 보게 할 거라고 했나?”

그녀의 두 눈에서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어지러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 아는 사람에 당신도 포함되잖아?”

* * *

검무극이 정신을 차렸을 때,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여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큰 비궤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도 와본 곳이기에 검무극은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삼백 년 전 천의궁주와 무황신검의 결투가 있던 백양봉의 산 중턱이다.

암흑궁의 미로진으로 큰 비궤를 숨겨두었던 바로 그 장소!

검무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삼백 년 전으로 돌아왔다.’

비궤가 자신을 다시 그때 그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검무극은 우선 자신의 몸 상태부터 살폈다.

예전에 데려왔을 때처럼 미약한 내공이 전부였다. 그때처럼 시공이환술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

검무극이 그곳 가운데 놓여 있는 비궤에게 다가갔다.

“왜 나를 다시 데려온 거냐?”

물론, 비궤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어느 시점으로 자신을 데려온 걸까? 무황신검과 천의궁주의 싸움이 끝난 상황일까?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싸움인데.

일단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피려던 그때,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을 발휘해서 몸을 숨겼다.

누군가 한 사람을 업고 다급히 이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천의궁 수호궁주 백양기였다. 그가 업고 있는 사람은 천의궁주 위무천이었다. 이미 백양봉에서의 대결이 끝난 상황이었다.

수호궁주가 조심스럽게 위무천을 비궤에 기대 앉혔다.

“괜찮으십니까?”

위무천의 얼굴은 창백했다. 극심한 추위를 느끼는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서 호신갑부터 벗으십시오.”

수호궁주가 위무천의 겉옷을 벗겼다. 안에 빙룡신갑을 입고 있었다.

지난번 이곳에 왔을 때 검무극은 보았다. 암흑궁주가 마교의 복면인에게 받은 빙룡신갑과 천음단을 천의궁주에게 선물로 주는 것을.

무황신검이 극양의 무공을 지녔기에 준 것이었는데.

지금 위무천의 상태로 볼 때 극음의 공격에 당한 것이었다. 천음단과 빙룡신갑이 오히려 그 부상을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암흑궁주가 배신한 겁니다!”

수호궁주는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위무천이 이 선물을 받던 그날 자신도 그곳에 있었다.

수상하다는 의심을 했지만, 위무천이 암흑궁주를 믿는 바람에 끝까지 주장하지 못했다. 당시 천의궁주는 이 싸움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수호궁주가 그의 몸에서 빙룡신갑을 벗겼을 때 품에서 무엇인가 굴러 나왔다.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간 그것은 작은 비궤였다.

극심한 부상에도 위무천은 힘겹게 손을 내밀며 그것을 챙기려 했다.

“저것을 주게.”

“지금 상처부터 다스려야 합니다.”

“주게.”

수호궁주가 바닥에 떨어진 비궤를 주워서 위무천에게 주었다.

위무천이 비궤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럴 거였으면 왜 세상에 나온 겁니까? 내게 끝내 힘을 주지 않을 거라면 왜?”

비궤가 울었다.

위무천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렇게 나를 불렀으면서…… 크에엑.”

위무천이 피를 쏟아냈다.

“궁주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비궤는 자신에게 반응한 것임을.

수호궁주가 그를 앉힌 후 등으로 내력을 주입했다.

우우우웅.

조심스럽게 내공을 주입했음에도 위무천은 큰 충격을 받았다.

위무천이 다시 피를 토해냈다. 지금 그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위무천이 그의 치료를 거절하며 돌아서 앉았다.

“……신녀의 말이 옳았네. 천의는 내게 있지 않았어.”

수호궁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위무천의 상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게 제 책임입니다.”

자신이 말렸어야 했다. 애초에 전쟁을 못 일으키게 말렸어야 했다. 그게 진짜 수호궁주의 임무였는데.

암흑궁주가 딴 뜻을 가졌다면 그것을 알아내는 것 또한 자신의 임무였는데.

“백 궁주,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

“네, 궁주님.”

위무천이 충성심 가득한 수호궁주를 응시하다가 손에 들고 있던 피 묻은 비궤를 내밀었다.

“이 비궤를 가지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수호궁주가 뭐라 하려는 것을 위무천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삼백 년 후에 반드시 천의를 이루시게.”

수호궁주는 비궤를 받지 않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수호궁주입니다. 궁주님을 지켜드리는 역할이 하늘이 내린 제 소명이자 사명입니다.”

위무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마지막 부탁이네.”

그 간절한 눈빛에 수호궁주의 얼굴이 떨렸다.

수호궁주가 무릎을 꿇고 정중히 비궤를 받아들었다.

천의궁의 신물을 받아드는 순간이었다.

설령 이것을 가지고 떠날 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천의를 이어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그 선택은 옳은 일일까?

“백 궁주! 시간이 없네.”

더는 거절할 수 없었기에 수호궁주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 순간, 바깥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바깥에 설치된 미로진이 파훼 되는 소리였다. 암흑궁의 진법이 이렇게 쉽게 파훼 되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누군가 파훼법을 적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곧이어 그곳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가운데 선 사람은 무황신검이었다.

그와 함께 들어온 두 사람은 무황신검 못지않은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함께 들어왔지만, 서로를 경계하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수호궁주가 위무천 앞을 막아섰다.

‘암흑궁주 소행이다.’

배신자인 그가 미로진의 파훼법을 알려줘서 저들을 이곳까지 걸어서 들어오게 했다. 수호궁주는 저들보다 암흑궁주를 더 죽이고 싶었다.

위무천이 뒤에서 말했다.

“……비키게.”

수호궁주가 천천히 옆으로 비켜섰다.

위무천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무황신검이었다.

“……당신이 이래도 되나?”

자신이 당한 극음의 공격은 무황신검에게 당한 공격이 아니었다. 함께 들어온 두 사람 중 한 사람에게 당한 공격이었다.

백양봉에서의 결투는 철저히 준비된 함정이었다.

무황신검은 변명하지 않겠다는 듯, 가라앉은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위무천의 시선이 무황신검 좌측의 남자를 향했다.

핏빛처럼 진한 장포를 입은 그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오는 그의 정체는 바로.

“……마교주, 당신이 이 싸움에 끼어들다니!”

놀랍게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삼백 년 전 당시 천마신교의 교주인 혁도천(赫刀天)이었다.

삼백 년 전 천마신교는 지금과는 달랐다.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의 천마신교.

그 천마신교를 이끄는 사람이 바로 이 혁도천이었다. 그는 전대의 어떤 마교주보다 잔혹하고 비정했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감히 그의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고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검무극은 삼백 년 전 천마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마교가 개입한 줄은 알았지만, 이곳에서 그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사람이 이 시대의 천마.’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그의 머리카락은 휘날리듯 사방으로 솟구쳐 있었고 두 눈에서는 지옥을 담은 것 같은 강렬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무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반대쪽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잘 정돈된 순백의 머리에 고독과 우월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눈빛을 지녔는데, 그의 존재감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사도맹주까지 끌어들이다니.”

놀랍게도 그는 바로 사도맹주였다.

검무극은 그의 정체에 마교주를 본 것만큼이나 놀랐다. 아니 더 놀랐다. 그는 자신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도맹주 주가신.

검무극이 지하 무덤에서 마지막 구슬인 자정을 얻었던 관의 주인, 백골로 만났던 그가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검무극은 그 지하 무덤에 있던 기둥에서 주가신의 행적을 읽었다.

―무황신검과 함께 천의궁을 격파하다.

정말 사도맹주 주가신은 무황신검과 함께 천의궁주를 죽인 것이다. 그 기록에는 마교주는 없었는데, 셋은 함께 있었다.

시공이환술 속에서 검무극은 깊은 눈빛으로 마정사 세 수장을 지켜보았다.

삼백 년 후에 세 수장이 한자리에 모였듯, 삼백 년 전에도 세 사람은 이렇게 모였다.

‘당신들, 이날 다 모였었구나.’

비궤는 모두 내가 가지겠다

천의궁주 위무천은 원망 가득한 눈으로 무황신검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파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그가 마교와 사도맹을 끌어들이다니.

“대체 왜 이런 거요?”

이윽고 무황신검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소. 이제 전쟁을 끝내야 하지 않겠소?”

“헛소리!”

버럭 소리를 지른 위무천이 다시 피를 토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는 이를 악물고 삶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는 부끄럽지 않은가?”

멀쩡한 사람처럼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 있던 수호궁주의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천의궁주는 지금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기운을 분노로 써버리고 있었으니까.

반면 무황신검은 담담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들을 불러들인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오.”

무황신검은 그들과의 전쟁이 이렇게 오래갈지 몰랐다. 천의궁이란 신비 단체가 이렇게 강한 줄도 몰랐고.

“당신이 꿔서는 안 될 꿈을 꾸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오.”

“아무리 그렇다고 마교를 끌어들여? 적어도 당신은 명예를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러자 놀라운 말이 무황신검에게서 흘러나왔다.

“내가 불러들인 게 아니오.”

무황신검의 시선이 마교주 혁도천을 향했다.

“저 사람이 먼저 연락을 해왔지.”

위무천이 놀란 얼굴로 혁도천을 바라보았다. 천마신교가 먼저 무림맹에 연락을 했다고? 대체 왜?

이윽고 혁도천이 입을 열었다. 굵고 나직할 줄 알았는데, 그의 목소리는 생긴 것과는 달리 카랑카랑했다. 자기감정을 감추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천의궁의 신물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다더군.”

그 정보를 알아낸 천마신교가 이번 일에 먼저 개입한 것이다.

검무극은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천마신교가 비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음을 확인했었다.

‘저 신물 때문에 개입했다.’

그가 무림맹을 위해서 끼어들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의구심도 들었다.

‘마교주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을 믿었을 리 없는데?’

그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암흑궁주!’

그가 천의궁의 신물을 전설로 잘 포장해서 천마신교에 흘렸을 것이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서 결국 혁도천이 믿게 한 것이리라.

검무극의 시선이 무황신검을 향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함께 밥을 먹었고, 그와 대화도 나눴다. 심적으로 지쳐 있었지만, 그렇다고 천마신교의 뜻대로 움직여줄 사람이 아니었는데.

검무극의 시선이 마지막 향한 곳은 사도맹주 주가신이었다.

‘저 사람에게 해답이 있겠군.’

무황신검은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것이 위무천임을 다시 강조했다.

“다 당신이 불러들인 거요. 그러니 남 탓은 그만하시오.”

원래 무황신검은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버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전장에서 죽어간 수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물론, 위무천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 탓을 하면서 남 탓을 하지 말라고?”

죽어가는 그에게 무황신검에 대한 실망은 분노로 이어졌다. 그의 눈빛이 이글거렸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렇게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혁도천이 모두에게 선언했다.

“비궤는 우리가 가져간다.”

혁도천이 수호궁주를 바라보았다. 작은 비궤는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리 가져와라.”

수호궁주는 알 수 있었다. 어차피 비궤를 넘겨도 죽고, 넘기지 않아도 죽는다는 것을. 저들은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을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게 하지 않을 테니까.

수호궁주가 위무천을 쳐다보았다. 생기를 잃어가는 눈빛으로 위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모셔 왔기에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있었다.

자네 뜻대로 하게.

수호궁주가 비궤를 양손으로 잡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물러가지 않으면 비궤를 파괴해 버릴 거다.”

순식간에 흐르는 정적도 잠시.

혁도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부순다고 그렇게 쉽게 부서진다면, 그건 가질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겠지.”

혁도천이 차갑게 말했다.

“부숴라.”

그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물론, 수호궁주도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비궤를 내려다보더니.

정말 비궤를 파괴해 버릴 작정으로 내력을 주입했다. 오늘 천의궁의 모든 비극은 이 비궤로부터 시작된 것이니까.

‘이 죄는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천의궁주와 비궤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순간 혁도천이 꿈틀했지만, 그는 지켜만 보았다. 정말 저렇게 박살 나 버리는 존재라면, 이 정보 자체가 잘못된 것이리라.

하지만 수호궁주가 아무리 내력을 주입해도 비궤는 파괴되지 않았다.

방법을 바꿔 수호궁주가 손을 번쩍 치켜들어 그것을 내리치려던 그때.

쉬이익.

한 줄기 검기가 수호궁주의 팔을 지나갔다.

그의 팔이 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파파파파파!

잘린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뜨린 비궤로 그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어느새 혁도천의 검이 뽑혀 있었다.

“그만하면 됐다.”

그가 순식간에 검기를 날려 수호궁주의 팔을 벤 것이다. 아무리 수호궁주가 비궤에 집중하고 있었다 해도, 이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만큼 혁도천의 무공 실력이 대단했다.

수호궁주가 혈도를 눌러 팔을 지혈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위무천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위무천이 팔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비궤를 주워들었다. 자신의 피가 묻어 있던 비궤에는 수호궁주의 피까지 더해져 이제 붉은 상자처럼 보였다. 위무천이 그것을 감싸안았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우선 수호궁주의 충성심이 안타까웠다. 주인을 잘못 섬긴 자의 비극이다. 도와줄 수 없는 처지였고, 설령 도와줄 수 있다 하더라도 과거의 역사를 함부로 바꿔선 안 될 일이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비궤를 향했다.

언제나 친구처럼 대했던 비궤였고, 심지어 웃는 얼굴까지 그려둔 비궤였기에 지금 저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시공이환술 속 해변을 열었을 때 항상 비궤를 옆에 함께 올려두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웃고 있던 친구는 이런 일을 겪은 비궤였다. 마치 전장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무인과도 같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궤를 내려다보던 위무천이 물었다.

“그가 내 자리를 원했나?”

차분한 물음에 혁도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자리를 원했다. 너희의 목숨을 바치는 대가로 더는 천의궁을 뒤쫓지 않는 것을 요구했다더군.”

듣고 있던 수호궁주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충혈된 눈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암흑궁주만은 죽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반면, 위무천은 평온했다. 오히려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허탈한 미소처럼 보였지만, 검무극은 그의 미소에 묘한 희열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검무극은 그 희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직접 본 암흑궁주는 사악한 자였고,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가 천의궁주 자리를 원했는데, 비궤를 포기한다고?’

신물이 없는 천의궁을 과연 차지하려 할까? 그건 마치 알맹이 없는 천의궁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지금 위무천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암흑궁주, 그대가 안배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분명 단순한 배신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혁도천이 무황신검에게 말했다.

“당신이 원하는 건 저자일 테니, 데리고 가시오.”

그때까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사도맹주 주가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비궤 중 하나는 내가 가져가겠소. 먼저 고르시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혁도천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당신이 왜 사도맹을 끌어들였는지 알고 있었지. 내가 비궤를 독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끌어들인 것이겠지.”

무황신검은 오늘 이곳에 주가신이 온다는 사실을 혁도천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백양봉에 나타난 주가신을 봤을 때, 혁도천은 무황신검이 수작을 부렸음을 알았지만 일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 순순히 당할 무황신검이 아니지.

하지만 주가신이 온 이유는 그의 예상과는 달랐다.

“오해요, 나는 사도맹에 먼저 연락한 적 없소.”

다시 말해 사도맹주도 스스로 개입했다는 의미.

그때 위무천이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군.”

예감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암흑궁주가 그대들을 모두 한 자리로 끌어들였다.”

그가 비궤가 천고의 보물이라고 천마신교에도 흘리고 사도맹에도 흘린 것이다.

그때 혁도천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함정이면 어떤가? 다 때려 부수면 되지.”

어떤 함정도 자신을 가둘 수 없다고 자신하는 그였다.

“큰 비궤와 작은 비궤 모두 내가 가지겠다.”

그의 몸 주위로 섬뜩한 마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주가신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는 양보해야 할 거요.”

그가 마교주 앞에서 자신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주가신이 무림맹주 옆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상징적인 발걸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혁도천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둘이 힘을 합치겠다?”

불같이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그는 평온했다. 애초에 사도맹주가 등장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내가 나중에 찾으러 가면 어쩌려고?”

작은 비궤를 얻기 위해 사도맹을 치겠다는 협박이었는데, 주가신에게 통하지 않았다.

“비궤의 힘을 얻고 오는 것보다는 낫겠지.”

비궤에서 힘을 얻게 된다면 어차피 쳐들어오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적어도 주가신은 비궤에 어떤 힘이 담겨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혁도천이 그를 보며 웃자, 주가신도 웃었다.

혁도천의 웃음이 반드시 널 죽인다! 라는 강렬한 의지의 웃음이라면 주가신의 그것은 같이 죽자, 이 새끼야! 라는 광기를 담은 웃음이었다.

혁도천은 마음 같아선 싹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저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자신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싸움.

그는 더없이 잔혹하고 무서운 인물이지만, 함정일 수도 있는 곳에서 무림맹주, 사도맹주와 생사대전을 펼칠 만큼 무모하거나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오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황신검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나의 전쟁은 오늘 끝났지만,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그의 시선이 위무천을 향했다.

수호궁주는 한쪽으로 물러나서 생(生)이 꺼져가는 위무천을 살려내기 위해 남은 하나의 손으로 내력을 주입하며 애쓰고 있었다. 그의 노력에 위무천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래도 당신 탓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 사이 혁도천은 하나만 가져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가 선택한 것은 큰 비궤였다.

“기왕이면 큰 게 좋겠지?”

그가 큰 비궤를 향해 걸어갔다. 두 맹주에게 등을 돌린 상태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호랑이가 자신의 영역을 걷듯 여유로웠다.

그가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우우웅.

조용히 있던 큰 비궤가 진동했다. 비궤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진 묵직한 진동이었다.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비궤가 마교주에게 반응한다고?’

비궤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생각에 혁도천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우우우우우웅.

다가갈수록 비궤는 더욱 크게 진동했다. 단순히 진동하는 게 아니라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사아아아아아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궤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며 신비로운 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인간 세상에는 없는 신묘한 기운이었다.

혁도천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세상을 가질 힘을 얻게 된다면? 이 무림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무림일통의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암흑궁주의 안배다!’

결과적으로 천마신교의 역사에 혁도천이 큰 힘을 얻었다는 기록은 없었으니까. 그가 무림사에 남긴 특별한 업적도 없었으니까.

‘한데 그렇다면 어떻게 암흑궁주는 마교주에게 비궤가 반응할 줄 알았던 거지?’

혁도천이 다가갈수록 비궤의 울림은 더욱 커졌고 흘러나오는 기운 역시 강렬해졌다.

비궤 앞에 선 혁도천이 당당히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네 주인이다.”

그러고는 천천히 비궤에 손바닥을 댔다.

뭔가 더 큰 반응이 있을 거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울림은 사라졌고, 현기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약간 김샌 마음으로 혁도천이 비궤에서 손을 떼려던 순간, 그가 흠칫 놀랐다.

손바닥이 비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궤가 강력한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손만 당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비궤로 끌려가려는 것을 다른 쪽 손으로 짚으며 저항했다.

불길한 예감에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런 썅!”

비궤는 엄청난 힘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힘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성질의 힘이었다. 인간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힘.

혁도천이 받치고 있던 한쪽 손을 떼며 주먹으로 비궤를 강타했다.

쾅! 콰앙!

엄청난 충격에도 비궤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손을 떼면서 내력을 분산하는 바람에 당기는 힘을 버티지 못한 혁도천이 비궤에 얼굴을 부딪쳤다.

천마로서 수치심을 느껴야 할 상황이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림맹주와 사도맹주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수치심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흡인력이 강력해서만이 아니었다. 이 힘이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폭포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강에서 바다로 물이 흘러 나가듯,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혁도천은 극한의 내력을 끌어올리며 버텼다.

“이런 개 같은 것이! 끄아아아아아아아!”

비궤에 얼굴이 짓눌린 채 혁도천이 억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무황신검과 주가신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이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위무천과 수호궁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비궤를 신물로 모셔 왔지만, 비궤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처음에는 간담이 서늘했었다. 혹시라도 저 혁도천을 삼백 년 후로 보내는 것일까 봐.

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흡수할 때는 늪에 빠뜨리듯 푹 끌어들였는데, 지금 비궤의 표면은 딱딱했다.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은 보았다. 혁도천의 몸에서 얼핏 순간적으로 겹쳐서 보이는 하나의 존재를. 무엇인가 일렁이며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은 그게 무엇인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천마혼!’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비궤가 빨아들이려는 것은 혁도천이 아니었다.

‘비궤가 천마혼을 빨아들이고 있다!’

하늘이 네 편이라 생각하나?

‘나를 끌어들이는 게 아니다.’

혁도천은 비궤가 자신의 몸에 깃든 천마혼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자, 비궤는 더 큰 힘으로 끌어당겼다.

차라리 자신을 빨아들이는 게 나았으리라. 자신의 몸과 영혼에서 천마혼을 강제로 뜯어내는 것은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억지로 버티던 혁도천의 기혈이 역류했다.

“크에엑.”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뿜어진 피가 비궤를 타고 흘렀다. 피를 머금은 비궤는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검무극은 다른 이들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혁도천의 몸에 겹쳐 보이는 천마혼은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지금 보이는 것은 무공을 발휘해서 현신하게 한 천마혼이 아니라 혁도천의 영혼에 깃든 혼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혁도천이 비궤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황신검이 주가신에게 소리쳤다.

“마교주가 죽어선 안 되오!”

솔직히 무황신검은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마교주를 죽일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그건 가져서는 안 될 감정적이고 순간적인 염원이었고.

‘그가 죽으면 안 돼!’

만약 이곳에서 마교주가 죽는다면, 천마신교에서는 자신의 함정에 빠져 교주가 죽었다고 오해할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였다.

정마대전.

마교주가 없다고 어디 천마신교를 순순히 이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천마신교에는 교주의 복수라는 강력한 명분이 생기게 된다.

복수심에 미쳐 날뛰는 마인들과의 전쟁?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설령 끝내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수많은 목숨을 바쳐서 얻어낸 껍데기뿐인 승리가 되리라.

그러잖아도 이번 전쟁으로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는데. 맹주로서 그 죄책감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교주를 살려야 할 이유는 또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사도맹주 주가신!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그가 마교주가 죽은 상황에서 어떻게 나올지 절대 알 수 없었으니까.

마음의 결정을 내린 무황신검이 먼저 몸을 날렸다.

“내가 돕겠소.”

무황신검이 혁도천에게 몸을 날렸다. 자신의 인생에서 마교주를 구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도울 테니 거부하지 마시오!”

무황신검이 내공을 끌어올린 후 혁도천의 몸을 붙잡았다.

그를 붙잡아서 잡아당기려던 그때, 무황신검은 보았다. 비궤에 짓눌린 채 이쪽을 쳐다보던 혁도천의 눈동자가 순간 커지는 모습을.

쇄애애애애액!

뒤에서 날아온 일장이 무황신검의 등을 강타당했다. 놀랍게도 주가신이 감행한 기습이었다.

“크윽.”

무황신검이 뱉어낸 피가 혁도천의 등과 비궤로 튀었다.

내상을 입었음에도 무황신검은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순간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면서 치명상을 피했다.

무황신검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사실 무황신검도 만에 하나 주가신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단호하게 공격을 가할 줄은 몰랐다. 자신은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바꿀 결정을 이렇게 본능적으로 내린다고?

두 검이 허공에서 폭음을 터뜨리며 격돌했다.

“당신!”

분노한 무황신검이 교차한 검 너머의 주가신을 노려보았다. 상대의 눈에 담긴 명백한 살의를 보았기에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주가신은 오직 이 순간이 마교주와 무림맹주 모두를 죽일 수 있는 평생에 다시없을 기회라 판단했다.

검을 뽑은 이상 이제 되돌릴 수 없다.

두 사람의 검이 빛처럼 빠르게 오갔다.

주가신의 기습에 내상을 입었지만 무황신검은 격돌에서 밀리지 않았다. 한 걸음이라도 밀리면 죽는 싸움이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피를 삼켰다.

두 사람의 검이 워낙 빨라서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다음 잔상을 남겼다. 마치 두 사람은 수십 개의 팔로 수십 자루의 검을 들고 싸우는 것만 같았다.

무황신검의 독문무공은 극양의 내공을 바탕으로 한 광명무양검술(光明武陽劍術)이었고, 주가신은 극음의 내공을 바탕으로 한 천지음한검술(天地陰寒劍術)이었다.

그야말로 극양과 극음, 뜨거움과 차가움의 싸움이었다. 한쪽이 빛을 뿜어냈다면 다른 한쪽은 빛을 삼켰다.

주가신의 검에서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무황신검의 검에서는 태양처럼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은 여름이 되었다 겨울이 되기를 반복했다.

검무극은 빠져들어 싸움을 지켜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놀라운 한 수, 한 수가 이어졌다. 삼백 년 전의 검술은 지금과는 또 달랐다. 그 다름에서 오는 배움과 깨달음이 있었다.

두 사람의 혈전이 한창이던 그때, 혁도천 역시 비궤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천마혼을 지키려 했지만, 인간이 막을 수 없는 힘이었다.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혁도천의 몸에서 천마혼이 빠져나갔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영혼이 뜯겨 나가는 생생한 고통이 그에게 전해졌다.

검무극은 천마혼이 비궤 속으로 흡수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강력한 천마혼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거대하게 현신하게 했어도 빨아들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천마혼을 흡수하자 비궤는 더는 혁도천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 난장판이 된 모습을 지켜보던 천의궁주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래, 서로 다 죽여버려라!’

반면 수호궁주는 그런 천의궁주의 몸을 감싸안고 있었다. 싸움의 여파가 천의궁주에게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쾅! 콰아앙!

두 맹주의 격전에서 빗나간 공격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극한의 호신강기로 버텼지만, 뼈가 끊어지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천의궁주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천의궁주가 곧 죽을 목숨임을 알았지만, 그 마지막까지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그때 들려온 연속된 폭음.

꽝! 꽝! 콰아앙! 쾅!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강렬했는지 무황신검과 주가신도 싸움을 멈추고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천마혼을 빼앗긴 혁도천이 미친놈처럼 비궤를 주먹으로 치고 있었다.

천마혼을 볼 수 없었던 무황신검 눈에는 그가 빨려 들어가는 것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사도맹주가 우릴 배신했소. 이쪽부터 먼저…….”

순간 무황신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쪽을 쳐다본 혁도천의 두 눈에서 시뻘건 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교주가 주화입마에 빠졌다!’

강제로 천마혼이 뜯겨 나가면서 반쯤 정신이 나간 것이다.

혁도천이 주가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하나의 초식을 발휘하려 했다.

그 순간 검무극은 알았다.

‘안 돼!’

혁도천이 다짜고짜 사용하려는 것은 천마멸세였다. 이렇게 정신 나간 상태로 그것을 썼다가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소멸해 버릴 것이다.

다음 순간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빛은 혁도천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비궤가 사방으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빛의 여파는 시공이환술 속에 있는 자신에게까지 미쳤다.

검무극은 온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치 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그냥 지켜만 봐라.

빛 속에서 멈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손을 내뻗은 혁도천, 그에게 뭔가를 말하려는 무황신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의 주가신, 웃고 있는 천의궁주, 그런 그를 몸으로 지키고 있는 수호궁주까지.

그들은 각자만의 소리 없는 외침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멈춰 있던 혁도천의 몸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황신검, 주가신, 그리고 죽어가던 천의궁주의 몸에서도 뭔가가 빠져나갔다.

금빛 광채가 몸의 윤곽을 따라 빛나더니 그들의 몸에서 또 다른 그들이 분리되어 나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었다.

영혼은 몸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손을 휘저었지만, 마치 죽은 자들이 육신을 떠나듯,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영혼뿐만 아니었다. 단전에서 선천진기와 내공이 광채를 뿜으며 함께 분리되어 나왔다.

검무극은 정말 놀랐다. 지금껏 온갖 경험을 다 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신비로우면서도 괴이했다.

흘러나온 영혼과 선천진기가 한차례 비궤 주위를 휘돌았다.

그때 그들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화입마에 빠진 채 포효하는 혁도천의 모습을, 경악한 무황신검과 이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주가신의 모습을, 그리고 지옥으로 함께 간다고 생각했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천의궁주의 모습까지.

그들이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보이더니.

마치 심연에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그것들이 비궤로 흡수되었다.

남아 있던 그들의 육체가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검무극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죽은 것이 아니었다. 빈 몸만 남기고 비궤가 그들을 모두 흡수해 버렸다. 영혼과 선천진기, 그리고 그들이 지녔던 내공 모두를.

이제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과 수호궁주 뿐이었다.

수호궁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자신이 한쪽 팔로 감싸고 있던 위무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궁주님.”

다행히 위무천의 마지막 모습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수호궁주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죽어도 자신이 먼저 죽기를 바랐는데, 천의궁주가 먼저 죽은 것이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비궤가 수호궁주를 흡수하지 않은 것은 그의 무공이 다른 네 사람에 비해 떨어져서가 아니라는 것을.

수호궁주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평생 누군가를 지켜주며 살아온, 마치 휘와 같은 사람이었기에.

수호궁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사마 세 수장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망연자실 있을 때.

비궤에서 무엇인가를 뱉어냈다.

바닥을 떼구루루 굴러온 그것은 아무런 색이 없는 투명한 구슬이었다. 투명했기에 뒤쪽이 훤히 보였다.

수호궁주가 힘겹게 그것을 주우러 가던 그 순간.

휘이이이이이이이.

그의 다리에서 올라온 검은 기운이 몸을 휘감으며 둘러쌌다.

“으윽.”

암흑의 기운은 엄청난 힘으로 그를 짓누르며 옭아맸다.

이미 팔이 잘리고, 호신강기로 천의궁주를 지키다 내상을 입은 그는 이 압박을 버틸 수가 없었다.

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수호궁주는 왈칵 피를 쏟아냈다.

스스스스.

검은 연기와 함께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은 바로 이 시대의 암흑궁주 화소강이었다.

스르륵.

암흑궁주가 손을 내밀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투명한 구슬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천의가 나에게 있었구나!”

그는 너무 기뻐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어나 경험한 모든 기쁨을 다 합쳐도 이 순간만큼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어둠에 갇힌 채 그 모습을 쳐다보던 수호궁주가 나직한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화소강.”

암흑궁주는 그의 부름에도 오직 투명한 구슬에 빠져있었다.

구슬에서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슬에서 미증유의 힘이 느껴졌다.

“……배신자.”

수호궁주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암흑궁주가 그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패배자인가?”

수호궁주가 인상을 굳히며 암흑 속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속박은 더 강해졌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다시 투명한 구슬로 향했다.

“난 비궤의 비밀을 알아냈었다.”

그는 오랫동안 비궤의 비밀을 찾아왔었고 결국 알아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천의궁주에게 알리지 않았다.

“비궤는 본래 악령을 흡수해서 원기(元氣)로 만드는 절대신물이다. 그것도 모르고 그저 오랜 세월 모셔놓기만 했지.”

조금 전에 보여준 모습만 봐도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혁도천을 향했다.

“천마혼은 악령 중에서도 대악령, 게다가 그 혼을 부리는 혁도천은 사악하고 잔혹한 성격을 지닌 자이니 반드시 비궤가 흡수할 줄 알았다.”

딱 그 정도만 기대했다. 천마혼을 빼앗긴 마교주가 폭주할 때, 이 천마혼이 담긴 구슬만 빼돌려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 힘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한데 비궤는 그보다 훨씬 큰 선물을 주었다. 비궤가 그들 모두를 흡수해 버릴 줄은 이 일을 꾸민 암흑궁주조차 알지 못했다.

“이 힘이면 영원히 무림을 지배하게 될 거다.”

암흑궁주는 홀린 것처럼 구슬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 투명한 구슬 속에서 하늘을 보았고, 바다를 보았다. 빛을 보았고 어둠을 보았다. 삶과 죽음을 보았다.

수호궁주는 온몸이 부서지고 있는 와중에도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늘은 그렇게 강한 힘을…… 너 같은 자에게 허락하지 않을 거다.”

암흑궁주가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정말 하늘이 네 편이라 생각하나?”

적어도 이 상황에서 그렇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사마의 고수들이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암흑궁주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죽였다는 것을 모르는데 어떻게? 천의궁의 신물을 두고 다투다 정사마 세 수장이 양패구상하다!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지. 오늘 이 일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을 거야. 역사에 없는 일이 될 거다.”

꽈드드드드득.

수호궁주의 몸에서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무극이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도와줘서도 안 되지만, 도와줄 수도 없었다.

앞서 빛을 본 이후 검무극은 여전히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비궤는 이 일에 절대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수호궁주가 힘겹게 말했다.

“하늘이 우리 편은 아니었지만…… 네 편도 아닐 거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그제야 그를 둘러싼 어둠이 사라졌고 시체는 바닥에 떨어졌다.

“이 일은 역사에 남지 않겠지만…….”

암흑궁주의 몸이 검은 연기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도 수호궁주의 시체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역사로 남을 거다.”

암흑궁주가 그곳에서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잠시 후, 시공이환술을 풀고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암흑궁주가 떠나자 비로소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화무기의 강함이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천마와 무림맹주, 사도맹주, 거기에 천의궁주와 천마혼까지. 그에게는 다섯 개의 영혼과 그들의 선천진기까지 섞여 있다. 거기에 저 기운을 받아들인 몸의 주인인 화무기의 영혼까지 생각하면 모두 여섯 개의 영혼이 깃들었다.’

왜 육도원기라는 특별한 기운이 없다면 그를 제어할 수 없다고 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육도원기가 왜 그렇게 흩어져서 숨겨져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모은 여섯 개의 기운이 저 여섯 영혼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수호궁주의 시체로 걸어갔다. 그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저 암흑궁주는 천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역사의 어느 한 줄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요.”

저 힘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육도원기가 있어야 저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후대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으리라.

“헛된 야망은 저자의 후예들도 이루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검무극이 수호궁주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었다.

검무극은 그 옆에 떨어져 있는 피에 젖은 작은 비궤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세상에서는 완전히 사라졌기에 이것이 그것을 보는 마지막이 될 것이다.

‘고마웠다, 친구.’

그렇게 작별을 고한 후 검무극은 곧장 큰 비궤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날 다시 보내줘.”

지금까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갔었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요구했다.

“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 주사 있는 사람이야

검무극이 아는 사람을 모두 죽이겠다는 암흑궁주의 말에 섭혼마존이 대답했다.

“그 아는 사람에 당신도 포함되잖아?”

섭혼마존이 기세를 드러내자 취마와 마불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섭혼마존이 암흑궁주와 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마불이 천천히 걸어가서 천화루주 앞에 섰다. 자신이 천화루주를 지킬 테니 마음껏 싸우라는 의미였다.

천화루주가 가예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예는 말없이 천화루주를 응시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도 천화루주가 자신을 살려주려 한다는 것을. 어차피 마존들이 그녀를 지켜줄 테니, 이렇게 붙어 있으면 자신도 덤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왜 이렇게 나를 살리려는 거지? 나는 당신을 함정으로 불러들였는데.’

분명 눈빛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읽었을 텐데, 천화루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암흑궁주와 마존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취마와 섭혼마존이 나란히 섰다.

“또 한 번 제대로 싸워봅시다.”

섭혼마존은 두 마존이 고마웠다. 아무리 자신이 열심히 수련해 왔어도, 나이가 젊기에 다른 마존에 비해 상대적으로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을 한 사람의 마존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암흑궁주와 싸우는데도 말이다.

그녀가 취마에게 가볍게 인사했고, 또 뒤에 서 있는 마불에게도 인사했다. 이번 여정은 그녀를 한 사람의 마존으로 우뚝 서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고 있었다.

섭혼마존이 입김을 불 듯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후우우.

그녀의 숨결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그 숨결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한숨 소리, 악을 쓰는 소리, 슬픔에 울부짖는 소리,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 그 온갖 사람들의 소리가 숨결에 담겨 있었다.

적막한 공간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소리로 채우면서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마불은 몸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면서 어둠의 공간을 밝혀나갔다. 어둠을 잃자 별도 자신의 빛을 잃어갔다.

취마는 강력한 주기를 발출해서 밤하늘을 취하게 했다.

그렇게 세 마존이 동시에 기도를 발출하자 그곳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암흑궁주가 이곳의 주인은 나라는 듯, 검지를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그 순간, 주위를 둘러싼 별의 위치가 바뀌었다.

슥슥슥슥슥슥슥.

마치 별의 위치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그들이 서 있던 위치도 바뀐다는 것처럼, 마존들이 기껏 바꿔놓았던 주변의 기운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이 한 수만 봐도 암흑궁주가 이 공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가 죽을 마존들은 아니었지만.

“앞서 싸움에는 섭혼께서 내 뒤를 봐주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보조를 맡겠소.”

취마가 선공을 양보하자 암흑궁주가 섭혼마존을 도발했다.

“죽는 게 두려워서 너를 앞세우는 거다.”

그 도발은 섭혼마존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습의 빌미를 주었다.

“지금껏 수많은 수하를 희생시키고 이제야 기어 나온 너만 할까?”

그녀의 말은 직접적이었고 거칠었다. 그녀는 대놓고 욕을 해서 상대를 자극하는 방식을 좋아했다.

“이 추한 늙은이야. 곱게 늙지 못한 벌을 받을 시간이다.”

암흑궁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존들 앞에서만큼은 권위와 두려움을 드러내며 고상하게 싸우리라 마음먹었는데.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너희 빌어먹을 마존들은 모두 그놈을 닮았지.”

“그 말은 내게 영광이다.”

주변에 떠 있던 별 하나가 빛을 내더니, 그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쉬이이이이익.

앞서 첫 번째 공격에서 취마를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게 한 위력의 강기였다.

강기가 그녀에게 떨어지려던 그때.

허공에 문양이 그려지더니 날아든 강기를 삼켜버렸다.

공격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는 섭혼마존의 혼원역전술이 발휘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암흑궁주 옆에 문양이 생겨나더니 그곳에서 강기가 튀어나왔다.

암흑궁주가 손을 내질러서 자신이 날렸던 공격을 막았다. 충격에 몸이 흔들렸을 뿐, 암흑궁주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내공이 심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슈우우우욱!

이번에는 그녀에게 세 개의 별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허공에 다시 문양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날아드는 별은 셋이었지만 문양은 하나였다.

콰아앙! 쾅! 콰앙!

세 개의 폭음이 연속해서 들렸다.

섭혼마존이 하나를 다시 돌려보냈고, 다른 두 별을 막은 것은 취마와 마불이었다. 그들이 각자 장력을 발출해서 다른 두 공격을 막았다.

섭혼마존은 혼원역전술을 발휘하면서 두 마존에게 다른 강기를 막아달라 소리치지 않았다. 당연히 막아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고, 취마와 마불은 그 믿음에 부합했다.

거기에 취마는 한발 더 나아갔다.

강기를 막자마자 암흑궁주에게 쇄도한 것이다. 돌진만큼은 취마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번쩍하는 순간 취마는 암흑궁주에게 비수를 내지르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바로 눈앞에 있었던 암흑궁주는 저 멀리 점처럼 멀어져 있었다.

암흑궁주는 자신이 펼쳐낸 이 밤하늘의 공간을 자유롭게 줄였다 늘였다 하고 있었다.

취마가 입에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어르신! 너무 멀리 가시면 길 잃어요!”

취마가 그를 조롱했지만, 눈빛은 신중했다. 방금 펼쳐진 한 수는 결코 얄팍한 속임수가 아니었다. 정말 그는 이 공간을 접어서 이동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는 승산이 없네. 여길 찢고 나가야 해.”

모두 마불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암흑의 벽은 더없이 강했고, 설령 그들이 힘을 합쳐 뚫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암흑궁주가 그냥 지켜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암흑궁주가 다시 공간을 가로질러 십여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너흰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암흑궁주는 자신의 몸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느꼈다.

어느새 붉은 실이 자신의 팔과 어깨, 다리에 묶여 있었다. 마치 줄로 조종하는 인형처럼 보였다.

섭혼마존이 발휘한 혈사인형술(血絲人形術)이 발휘된 것이다.

그의 팔이 휘익 들렸다. 한쪽 팔은 위로, 다른 팔은 아래로.

천하의 암흑궁주가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되었다.

섭혼마존이 혈사인형술을 발휘한 것은 그를 모욕하기 위해서도, 그를 언제까지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해서도 아니었다. 내공이 부족한 데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에도 발휘한 이유는 같이 싸우는 사람의 총명함을 믿어서였다.

과연 취마는 이미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이번 출교에서 보법에 큰 깨달음을 얻은 취마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움직임을 보였다.

취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이 찰나의 순간.

쉬이이익.

이미 취마의 비수는 암흑궁주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푸아악.

허공으로 피가 튀었다.

“아악!”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싸움을 지켜보던 천화루주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허공에 흩뿌려진 피는 섭혼마존의 피였다.

취마와 섭혼마존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수가 벤 것은 섭혼마존의 어깨였다. 비수가 심장을 찌르기 직전, 섭혼마존과 암흑궁주가 자리를 바꾼 것이다.

암흑궁주는 섭혼마존이 서 있던 자리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독문무공 중 하나인 암천환위공(暗天換位功)을 발휘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 비수의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어깨가 아니라 그녀의 심장이 뚫렸으리라. 찰나의 순간 암흑궁주의 눈빛에서 공포가 아니라 희열을 보았기에 본능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취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이지 이런 마공은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만약 이 마공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면,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섭혼, 괜찮소?”

“네.”

섭혼마존이 정말 괜찮다는 표정으로 취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의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

취마가 암흑궁주를 향해 돌아서며 웃었다.

“당신 거기 있었네? 취해서 우리 편에게 달려들다니! 하여튼 주정뱅이들은 이래서 안 돼.”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예가 나직이 말했다.

“탐심대멸공이 지속되는 한, 저 사람의 내공은 무한이나 다름없어요.”

그녀의 말은 모두에게 들렸다.

“바깥에서 누군가 이 배에 탄 사람을 모두 내리게 하고, 탐심대멸공을 멈추게 해야 해요. 그러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 거예요.”

이제 암흑궁주는 그녀에게 배신자라 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무관심이 그녀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이라는 듯.

할 말을 마친 가예 역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평생을 따랐던 사람과 이렇게 적이 되어 서 있다. 단 하루 만에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 건가? 바뀌어도 되는 건가?

가예가 말을 하는 사이, 다시 하나의 무공이 발휘되었다.

방금 죽을 뻔한 섭혼마존의 무공이었다. 워낙 고수들이니 그야말로 눈 깜짝하면 무공이 펼쳐져 있었다.

섭혼마존과 암흑궁주 주위로 문양이 가득 찼다. 그녀 주위에도, 암흑궁주 주위에도, 그들 사이에 길이 나듯 쭉 이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하나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심혼직결(心魂直結).

직접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섭혼술을 발휘한 것이다. 암흑궁주처럼 고수를 직접 섭혼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시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공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마음을 조종하는 섭혼술이었다. 이 싸움을 이기려면 어쩔 수 없었다.

섭혼마존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텅 빈 방이었다.

그 방에 있는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다음 방도 빈방이었다.

이 방들은 섭혼술을 당한 이의 기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냥 기억이 아니라 가장 좋았던 순간의 기억들. 그 가장 좋았던 순간을 이용해서 상대를 조종하는 것이다.

방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세월을 거슬러 간다.

다음 방도 텅 비어 있었다.

섭혼마존은 수많은 섭혼술을 펼쳤지만 이렇게 텅 빈 방은 처음이었다.

노년에서 중년을 지나 청년 시절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청년 시절의 좋았던 기억조차 텅 비어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렇게 마지막 방을 열었을 때, 하나의 기억이 그곳에 있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와 함께 있는 암흑궁주의 모습이 보였다. 함께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며 어린 암흑궁주는 활짝 웃고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이쪽에서는 그가 누군지 보이지 않았다.

평생 그의 마음에 기분 좋은 기억은 이것 단 하나.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해맑게 웃은 것도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혼마존이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사람을 확인하려고 다가서려던 그때.

남자를 올려다보던 어린 시절의 암흑궁주의 눈동자가 슥 움직이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기억 속의 모습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불길한 느낌이 솟구치는 순간, 섭혼마존은 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지나온 방을 지날 때마다 방문이 저절로 닫혔다.

탁! 탁!

방에 갇히면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그건 곧 섭혼술의 실패로 인한 주화입마.

탁! 탁! 탁!

닫히고 또 닫히고. 빠르게 내달린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마지막 방을 나오던 그 순간.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섭혼마존과 암흑궁주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문양들이 파괴되며 깨어졌다.

울컥, 속에서 치미는 피를 그녀가 꾹 삼켰다.

섭혼술은 실패였다.

“그 사람 누구지?”

섭혼마존의 물음에 암흑궁주의 얼굴이 꿈틀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보였다는 분노 때문이었을까? 그의 몸에서 강력한 암흑의 기운이 솟구치더니.

밤하늘의 별 중 일곱 개가 빛나기 시작했다.

북두멸겁(北斗滅劫).

그 일곱 개의 별이 공간을 가득 채우며 섭혼마존에게 쏟아져 내렸다.

쐐애애애애애액!

앞서 날아온 위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공격이었다. 너무나 넓고 빠르게 날아들었기에 피할 공간이 없었다.

그녀가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렸지만, 내상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마불의 목소리.

“여긴 넓어서 좋군.”

이미 마불의 손가락은 수인을 맺고 있었다.

마장멸인!

거대한 혈불이 밤하늘 가운데서 몸을 일으켰다. 날아든 일곱 개의 강기가 혈불을 강타했다.

쾅! 콰아앙! 콰쾅! 콰아앙! 콰앙! 콰앙! 콰아앙!

섭혼마존을 향해 날아든 강기들을 모두 혈불이 몸으로 막아내었다.

거대한 손바닥이 암흑궁주를 향해 내리쳤다.

쿠아아아앙.

원래라면 그 공간에서는 혈불의 손바닥을 피할 수 없었는데, 암흑궁주는 공간을 늘려서 저 멀리 달아났다.

취마는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쪽의 내공이 더 소모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와 거리가 벌어진 사이 취마가 허리에 차고 있던 독문병기 혈루를 꺼내 들었다. 배에 탄 이후 처음으로 혈루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조심해, 나 주사 있는 사람이야.”

조롱박 모양의 혈루에 고유의 내공을 주입하자, 혈루가 진동하며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취마의 독문무공 주신공.

마지막 잔, 주신만취.

취마가 혈루의 마개를 열어서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취마의 몸에서 검은빛 주기가 일렁이기 시작했고, 두 눈에서는 순백의 취기가 흘러나왔다.

“어, 취한다!”

취마가 비수를 뽑아 허공에 휘두르며 주사를 부렸다.

“누가 내 앞을 막는 거냐! 비켜라!”

그 모습을 지켜본 암흑궁주가 새로운 무공을 펼쳤다.

“더 어지럽게 해주마!”

암천회륜성(暗天回輪星).

이번에는 사방에 있던 별들이 주위를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미쳐버린 것처럼 별들이 회전했다.

휘이이이이이이.

너무 어지러워서 천화루주와 가예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암흑궁주를 향해 달려들려던 취마가 비틀거리며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단지 주위가 돌아서 어지러운 것이 아니었다. 상대의 정신을 빼앗는 암흑기류가 함께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내가 취한 거냐? 세상이 취한 거냐? 세상이 막 돌아가는구나!”

입으로는 여유를 부렸지만, 취마의 마음은 급했다. 자신의 가장 강력한 한 수인 혈루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놈에게 붙어야 했다.

마불이 합장하며 마음을 다스렸지만 그렇다고 이 어지러움을 뚫고 암흑궁주를 공격할 수는 없었다.

암천회륜성의 위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별들은 더욱 빠르게 돌았다.

그 와중에 암흑궁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너희를 죽게 하는 건 너희 자신이다. 함정임을 알고서도 제 발로 들어온 너희의 오만이다.”

암흑궁주의 손에 검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소교주에게 보여주마. 너희의 죽음을!”

모두가 어지러워 정신을 못 차리던 그때, 단 한 사람은 예외였다.

섭혼마존은 어지러운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히 내가 있는데 세상을 돌려?’

회오리 문양은 섭혼마존의 상징.

이 어지러움이야말로 그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이 미친 듯한 어지러움 속에서 그녀는 평온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암천회륜성의 기운까지 끌어와서 자신의 힘으로 만들었다. 그 힘을 갈무리한 후에.

그녀의 섭혼술이 발휘되었다.

섭혼술의 대상은 암흑궁주가 아니었다.

그녀가 섭혼술을 발휘한 대상은 놀랍게도 취마였다.

―저를 거부하지 마세요!

주정뱅이들은 아침이 올 때까지 마시거든

취마는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섭혼술을 발휘한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이 어지러움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일 테니까.

섭혼마존이 취마에게 발휘한 섭혼술은 앞서 암흑궁주에게 시도했던 것과는 달랐다.

앞선 섭혼술이 상대를 지배해서 조종하는 섭혼술이었다면, 지금 이 섭혼술은 상대와 의식을 공유하며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섭혼술이었다.

이혼일체술(二魂一體術).

섭혼마존이 취마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여기가 취마님의 마음이구나.’

그곳에서 그녀는 보았다. 취마의 마음 가운데 있는 그것을.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 그것은 바로 대취림 깊숙한 금지에 있는 주정이 담긴 그릇이었다.

실제 대취림의 주정은 상했지만, 그의 마음에 있는 주정은 상하지 않았다. 너무나 깨끗한 주정. 주정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취마란 사람의 중심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섭혼마존이 눈을 감고 구결을 외우자, 그녀와 주정 주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섭혼마존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던 그 순간, 취마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어지럽던 세상이 갑자기 평온해졌다. 머릿속이 맑아졌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그런 여유로운 날, 취몽루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혈루로 발휘한 주신만취의 기운에 섭혼마존이 전하는 기운까지 더해지자, 취마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힘을 느꼈다.

“너 이 새끼, 어디야! 어디에 있어?”

취마가 비틀거리며 암흑궁주 쪽을 향해 가다가 다시 꼬꾸라졌다. 최대한 암흑궁주와 가까워지기 위한 연기였다.

그와 하나가 되어 있던 섭혼마존은 그런 취마의 대응에 감탄했다.

암흑궁주의 손에 강력한 암흑 강기가 모여드는 이 순간에도 취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제 주위를 도는 별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았다.

취마가 다시 암흑궁주에게 달려들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 미친 세상이 나보다 더 취한 모양이다.”

그 말에 암흑궁주가 웃으며 방심하던 바로 그 찰나의 순간!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 속을 취마가 빛이 되어 갈랐다.

쉬이이이이이이.

순식간에 암흑궁주 앞까지 쇄도한 취마의 비수가 번뜩였다.

앞서 섭혼마존과 자리를 바꾸는 암흑마공을 발휘한 그였지만, 취마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빠른 공격을 절대 막지 못할 거로 확신했고, 게다가 암흑궁주는 손에 암흑의 기운을 모으던 중이었다.

취마의 비수가 그의 가슴에 박히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심장을 빗나갔다!’

취마의 예상대로 그는 상대방과 위치를 바꾸는 암천환위공을 발휘하지 못했다. 코앞까지 쇄도한 취마를 상대하는데 오히려 손에 든 강기는 짐만 되었다.

쇄애애액.

버리듯 던진 강기가 빗나갔고.

쉬이이익.

취마의 두 번째 공격이 암흑궁주의 몸에 다시 박혔다.

취마는 이 공격으로 끝장을 보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정확했지만 얕았다.

슈우우욱.

암흑궁주는 순식간에 공간을 늘리며 저 멀리 사라졌다.

인상을 찌푸린 암흑궁주가 가슴의 상처를 지혈했다. 두 공격 모두 정말 위협적이었다. 조금만 대처를 못 했어도 심장이 꿰뚫렸을 공격이었다.

그 공격으로 빠르게 돌던 별들이 멈췄다. 암흑궁주의 부상으로 암천회륜성이 중단된 것이다.

암흑궁주가 놀란 얼굴로 취마를 보았다.

“대체 어떻게?”

이내 암흑궁주의 시선이 여전히 뒤쪽에 말없이 서 있는 섭혼마존을 향했다. 그녀를 보자 취마의 몸에 섭혼마존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섭혼술을 발휘했군.”

한편 취마는 멀리 달아난 그를 뒤쫓지 않았다. 공간을 자유롭게 접었다 펴면서 움직이는 그를 보법으로 쫓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대신 내력을 끌어올리며 가장 가까운 암흑의 벽을 향해 쇄도했다.

“네가 이리로 안 올 수 있나 보자.”

취마가 벽을 향해 비수를 찔러넣었다.

마존들은 이 밤하늘의 암흑 공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겼다. 어떻게든 이 공간을 파훼해야 했다.

취마는 모든 내력을 끌어올려 비수에 집중했다.

하지만 암흑의 벽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때 비수를 찌르고 있던 곳으로 빛이 날아들었다.

화아아악.

어지럼에서 벗어난 마불이 손에서 빛을 발출한 것이다. 마불의 황금빛 광채에 어둠의 기운이 약화되었다.

그때 어느새 섭혼마존이 와서 함께 비수를 잡고 밀어붙였다.

그녀는 섭혼술을 중단하고 취마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어지러운 암천회륜성에서 벗어났기에 더는 취마의 몸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찌이이익.

세 마존이 힘을 합치자 암흑의 벽을 뚫고 비수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취마를 향해 빛처럼 빠르게 별이 떨어져 내렸다.

빛을 비춰주던 마불이 다른 손으로 일장을 날려 취마를 공격하던 강기를 파훼했다.

그렇게 취마의 비수가 거의 암흑의 벽을 뚫으려던 그 순간!

주위의 별자리가 바뀌었다.

“젠장.”

취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탄성.

거의 다 뚫었는데,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바뀐 것이다. 이제 눈앞의 벽은 새 벽이었다.

그사이 암흑궁주는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내공이 심후한 암흑궁주라 해도 이렇게 대단한 암흑마공을 연속해서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가 펼치는 한 수, 한 수는 그야말로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무공들이었으니까.

가예의 말처럼 탐심대멸공이 그에게 끝없는 내공을 주고 있었다.

취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가 언제까지 바꿀 수 있나 보자!”

섭혼마존이 취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 번만 더 들어가겠습니다.

취마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이 몸은 섭혼 그대 것이오.

이번에는 상대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섭혼술이 발휘되었다.

심혼각성(心魂覺醒).

자신도, 취마도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섭혼술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취마의 몸 주위에 새로운 문양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그의 두 눈에서는 더욱 강력한 광기 어린 취기가 흘러나왔다.

“주정뱅이는 원래 다 부수고 찢고 하는 족속들이지. 반드시 찢는다!”

그 엄청난 기세에 암흑궁주가 취마를 공격하려 했다. 저대로 두면 정말 뚫어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때 마불이 암흑궁주를 향해 쇄도했다.

“네 상대는 나다!”

그가 황금빛 광채가 내뿜으며 암흑궁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공 상성으로 따졌을 때, 마불은 암흑궁주에게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천화루주를 지켜야 했지만, 이 싸움에서 자신이 빠져서는 결코 승산이 없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몰아붙여 그가 취마도, 천화루주도 건들 수 없게 해야 한다.

쇄애애액!

암흑궁주와 마불의 일장이 맞부딪쳤다.

두 사람이 격돌의 충격으로 양쪽으로 밀려났다. 더 많이 밀려난 쪽은 내공에서 밀리는 마불이었다.

뒤로 밀려나면서 마불의 두 손은 수인을 맺고 있었다.

황금대라마공!

살법회인!

황금빛 강기가 암흑궁주를 향해 휘몰아쳤다.

쇄애애애애액!

암흑궁주의 정면에서 어둠의 기운이 성벽처럼 솟구쳐 올랐다.

쑤우우우욱!

저 멀리 끝까지 이어진 아주 기다란 벽이었다. 그를 향해 날아든 강기보다 훨씬 길었기에, 왜 저렇게 쓸데없이 기다란 벽을 세우나 했었는데.

벽에 충돌한 황금빛 강기가 성벽을 타고 좌우로 퍼져나갔다.

단단한 벽이 아니라 충격을 흡수하는 성벽이었다. 충격이 파도처럼 출렁대며 분산되었고, 그것이 저 멀리 벽 끝까지 흘러갔다.

마지막까지 도달한 황금빛 강기가 소멸했다.

암흑궁주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기에 마불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강력한 한 수를 발휘했다.

하늘의 별들이 마불에게 쏟아져 내렸다.

암천유성(暗天流星).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유성은 평범한 수법으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황금대라마공

연화만개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지더니 연꽃이 피어났다.

쾅! 콰앙! 콰아앙! 쾅!

연꽃으로 연속해서 별들이 쏟아졌다. 그 충격으로 밤하늘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스스스스.

공격이 끝났을 때 연꽃도 사라져 있었다. 마불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화만개로 막았음에도 내상을 입은 것이다. 내공에서 확실히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불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쌍장을 연속해서 내지르며 맞붙었다.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그 강맹한 장법은 이 한 수를 감추기 위한 허초였다.

화아아악.

마불의 손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손바닥 모양의 강기가 커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아아아앙!

황금빛 물결과 함께 손바닥이 정면으로 날아갔다.

마불이 새로 만든 초식 마장소인이었다.

황금빛 손바닥이 자신을 향해 날아들자 암흑궁주는 순간이동을 하듯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마불의 거대한 손바닥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를 향해 날아갔다.

쑤우우욱.

그의 앞을 앞서의 성벽이 막아섰다.

하지만 마장소인의 공격만큼은 그 충격을 분산하지 못했다. 분산하기 전에 마장소인이 벽을 무너뜨리고 밀어붙였다.

콰콰콰콰쾅!

마장소인의 위력은 대단했다.

암흑궁주는 끝없이 멀리 달아났고, 마불의 손바닥은 계속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밀어붙이지 못했다.

힘이 미치지 못해 마지막에 멈춰버린 마장소인.

바로 앞에 서서 그 황금빛 손바닥이 사라지는 모습을 쳐다보던 암흑궁주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마불에게 쇄도했다.

마불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마장소인을 발휘한 것이다.

암흑궁주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던 순간, 그의 손에 한 자루의 시커먼 창이 생겨났다.

후우우웅!

암흑궁주가 그 창을 마불에게 날렸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암천귀창(暗天鬼槍)이었다.

마불이 몸을 날려 피하려던 그때, 발아래에서 어둠의 기운이 그를 붙잡았다. 암흑궁주의 주위에서 맴돌던 그 암흑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마불이 수인을 맺지 못하게 두 팔까지 붙잡았다.

창만 날아오는 게 초식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못 움직이게 한 후 창으로 꿰뚫는 공격이었다. 창이 너무나 빠르게 날아왔기에 자신을 붙잡은 암흑의 기운을 떨칠 시간이 없었다.

마불이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마불은 즉사하진 않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것을 직감했다.

암천귀창이 마불의 얼굴을 꿰뚫으려던 그때.

콰아앙!

날아든 창이 마불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뒤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불 앞에 취마가 서 있었다. 거의 다 뚫었던 벽을 포기하고 마불을 구하러 몸을 날린 것이다.

비수를 든 손이 축 늘어져 있었다. 마불은 알 수 있었다. 무리하게 창을 쳐내다 그의 팔이 부러졌다는 것을.

“왜 나를 구했나? 저걸 계속 뚫었어야지.”

취마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제게 술 사 주시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 술은 꼭 얻어 마실 겁니다.”

순간 마불의 가슴이 울컥했다.

하지만 자신이 죽더라도 둘은 저곳을 뚫고 나갔어야 그나마 취마와 섭혼마존이 살아날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갔어야지!”

마불이 버럭 소리치자 취마가 주눅 든 어조로 대답했다.

“주정뱅이들이 원래 판단력이 떨어집니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취마의 팔을 향했다.

“팔이 부러졌군.”

취마가 비수를 다른 손에 들었다.

“나을 때까진 술을 자제해야지. 나이 드니까 이제 다친 곳이 금방 잘 안 낫더라고.”

여전히 여유를 부리면서도 취마는 한 가지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혈루를 딱 한 번만 더 쓸 수 있으면!’

이미 혈루의 기운은 사라졌다. 자신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 후였다. 혈루를 다시 쓰려면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섭혼마존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취마가 받은 큰 충격이 섭혼술을 걸고 있던 그녀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세 사람 모두 멀쩡히 서 있긴 했지만, 모두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암흑궁주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소교주는 누구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까?”

대답한 사람은 섭혼마존이었다.

“네 죽음이겠지. 직접 죽여야 하는데, 왜 죽였느냐고 아쉬워하시겠지.”

취마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쉬워만 하겠소? 잔소리도 엄청나게 할 테니 귀마개 미리 준비해 두시오.”

취마와 섭혼마존이 마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들이 배짱을 부릴수록 뒤에 서 있던 마불은 죽음을 예감했다. 기세로 이기기에 상대는 너무 강했다.

마불이 천화루주를 돌아보았다.

‘지켜드리지 못해 미안하오.’

마불의 눈빛에 미안함이 담겼다.

천화루주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런 감정이 담겼다.

‘아닙니다. 오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불은 극악소마에게도 미안했다. 소교주와 자신들을 믿고 그녀를 맡긴 것인데. 마음속으로 극악소마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미안하게 됐네.’

마불이 내력을 모두 끌어올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순순히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

“혈불께서 더는 자비를 베풀지 말라고 하시는군.”

마불도 두 사람의 기세에 동참했다.

그렇게 마지막 싸움을 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팟, 팟, 팟, 파앗.

주위를 밝히고 있던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점차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셀 수 없이 빛나던 별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그곳에는 수십여 개의 별들만 남았다.

암흑궁주의 표정이 굳어졌고, 어찌 된 상황인지 알아차린 사람은 가예였다.

“탐심대멸공이 깨어졌어요!”

그 말인즉 배에 타고 있던 노름꾼들이 배에서 모두 내렸다는 의미.

이제 무한정의 내공도, 원래보다 더 강한 위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의미.

세 마존은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움직였구나!’

바깥을 정리한 그가 배로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바깥의 결계와 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암연을 뚫고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세 마존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였다.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들의 마음을 읽은 암흑궁주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렇다고 너희의 운명이 달라지진 않는다!”

그는 자신감을 가질만했다. 아직 그의 내공은 온전히 남아 있었고, 세 마존은 부상을 입은 데다가 내공마저 거의 소진된 상태였으니까.

암흑궁주가 주위에 떠 있는 수십 개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보다시피 아직 별은 많다.”

취마도 함께 별을 올려다보았다. 취마의 눈빛에 아직 포기란 없었다.

“저 별, 다 떨어뜨려 주마. 주정뱅이들은 원래 아침이 올 때까지 마시거든.”

평생 아무 일 없다가

이제 세 마존에게 희망이 생겼다.

밖에 극악소마가 왔으니, 그가 합류할 때까지 버티자!

한편으론 더 큰 책임과 의무가 생긴 것이기도 했다.

설사 못 버티고 죽게 되더라도, 암흑궁주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야 했다.

만약 멀쩡하게 암흑궁주가 살아 나가면, 이 공간이 깨어지더라도 극악소마 혼자서 그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취마가 마불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가 놈을 붙잡는 순간이 오면 제 생사는 걱정하지 말고 공격하십시오.

자신만만하게 남은 별을 다 떨어뜨리겠다고 했지만, 취마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탐심대멸공이 사라졌다고 해도, 암흑궁주는 여전히 강한 상대.

결정적으로 자신들 모두 내상과 외상을 당한 상태에 내공까지 부족했기에 그를 이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떠올리니 취마는 두 사람이 생각났다.

취몽루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빈이 먼저 떠올랐다. 자신이 죽으면.

‘만날 술만 퍼마시겠구나.’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아쉬움보다 여빈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그게 더 마음이 쓰였다.

다음은 비궤 속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오지 않는 검무극이 떠올랐다.

그래, 걱정할 건 없다. 소교주가 알아서 여빈을 잘 위로해 주고 챙겨줄 테니까. 뒤를 책임져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 무인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은 없으리라.

‘동생, 뒷일을 잘 부탁한다.’

취마가 마불을 쳐다보았다. 두 번이나 그를 구해주게 될 줄은 몰랐다. 살아남는다면 술친구 한 명 생기는 건데.

―술은 나중에 지옥에서 뵙게 되면 사 주십시오.

마불이 그를 응시하더니 차분한 전음을 보냈다.

―술 사서 취몽루로 찾아가겠네. 자네 집으로 초대하시게.

같이 살아남아서 본교에서 술을 마시자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마지막 한 수를 발휘하려 한다는 것을 느낀 섭혼마존도 최후의 한 수를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암흑궁주에게 섭혼술을 발휘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앞서 자신이 부상을 입지 않았을 때도 통하지 않았는데,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암흑궁주의 몸에 들어갔다간, 주화입마를 당하게 될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를 묶어둘 수만 있다면! 운이 좋다면 취마와 마불이 어떻게든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예감하자 그녀는 검무극이 떠올랐다. 지난 위기 때도 그랬듯 아직은 이게 가장 아쉬운 그녀였다.

‘끝까지 보필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그때 취마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섭혼께 부탁이 있소.

―말씀하세요.

취마의 부탁은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내용을 들은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섭혼께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거요.

그렇게 섭혼마존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한 후 취마가 앞장섰다.

“자, 늙은이! 주정뱅이를 초대했으면 다시 연회를 열어야지?”

그의 양옆으로 마불과 섭혼마존이 함께 걸어 나갔다. 오늘 두 마존은 기꺼이 취마의 날개가 되어 주고 있었다.

그들은 더는 천화루주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암흑궁주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인질로 잡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이 싸움에서 지면 그녀도 함께 죽을 것이기에 이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암흑궁주가 세 마존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즐겨라, 너희의 마지막 연회가 될 테니.”

겉으론 자신만만했지만, 그의 몸 주위를 휘감은 어둠의 기운처럼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탐심대멸공이 사라진 이상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다쳐도 마존은 마존이니까.

이제부턴 내공 소모가 큰 암흑마공을 남발하면 안 된다. 그러다 내공이 떨어졌을 때, 한 사람의 마존이라도 남으면 곧 죽음이었다.

“술 내놔라! 소교주도 내놓고!”

취마가 소리치며 미친놈처럼 돌진했다. 한쪽 팔이 부러졌음에도 그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마불과 섭혼마존은 취마의 좌측과 우측 뒤에서 함께 쇄도했다. 서로 작전을 짜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세 마존의 합공이 주는 위압감은 엄청났다.

암흑궁주는 가장 먼저 취마를 노렸다. 취마를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쇄애액, 쇄액!

두 줄기의 장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취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취마가 보법을 발휘하며 장력을 피했다. 이번 출교에서 얻은 보법의 성취가 이 마지막 싸움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암흑궁주가 훌쩍 뒤로 몸을 날리며 다시 쌍장을 내질렀다. 시간차를 두고 날아드는 두 줄기의 장력.

쇄애액! 쇄액!

이번에도 취마는 보법을 발휘해서 잘 피하는가 싶었는데.

단단하던 바닥이 출렁하면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바람에 취마의 보법이 흐트러졌다.

두 번째 장력이 취마의 몸에 작렬했다.

취마가 뒤로 주르륵 날아가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취마를 향해 다시 날아든 장력을 해소한 사람은 섭혼마존이었다.

취마 앞으로 문양이 그려지더니 날아든 강기를 집어삼켰다.

그녀의 혼원역전술은 강기를 암흑궁주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 사이 마불이 취마 앞을 막아섰다.

“괜찮나?”

걱정스러운 물음에 취마가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부러진 팔이 아닌 반대쪽 옆구리 쪽을 강타당했다. 호신강기를 발휘했음에도 뼈가 부러진 것처럼 아팠다.

“괜찮습니다.”

취마는 씩씩하게 몸을 일으켰다.

“술 마시다 다들 한 번씩 자빠지잖아요?”

취마가 다시 암흑궁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출렁, 출렁.

바닥이 출렁거리면 허공으로 날아서 쇄도할 법도 했는데, 취마는 그 출렁이는 바닥을 타고 달렸다. 아주 조금이라도 내공을 아낄 수 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출렁대는 바닥이 취마의 보법을 방해했다.

하지만 취마는 모르고 당하는 것과 알고 가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출렁대는 바닥 위에서 춤을 추듯 공격을 피했고, 미끄러지듯 순식간에 암흑궁주에게 쇄도했다.

지금까지 계속 도망만 다녔던 암흑궁주였는데, 이번에는 취마와 붙어서 싸웠다. 그 늙은 몸이 정말 기민하게 움직이며 취마의 목과 심장을 손으로 가격하려 했다.

암흑궁주에게 일장을 허용했지만, 취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이 다 부러지면 박치기로 싸우고 물어뜯으면서 싸울 기세로 싸웠다.

“주정뱅이들 싸움이 왜 지독한 줄 알아? 취하면 우린 아픈 줄도 몰라.”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취마는 고통을 참으며 그를 밀어붙였다.

두 사람이 너무 빠른 근접전을 벌이는 바람에 마불과 섭혼마존은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았다.

근접전이 극에 달하던 그 순간, 그때까지도 잠자코 있던 암흑궁주의 암흑 기운이 취마를 붙잡았다. 오직 이때만을 기다린 기운이었다.

“안 돼!”

마불이 소리쳤지만, 이미 암흑궁주의 일격은 취마의 가슴을 강타하고 있었다.

퍼어어어억!

취마가 왈칵 피를 뿜어냈다.

그는 멍한 눈으로 한 차례 마불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떨구며 쓰러졌다.

암흑궁주가 차가운 시선으로 취마를 내려다보았다.

“네 술잔치는 끝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불에게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취마의 몸에서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한 수에 절명한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취마가 죽었다고?

암흑궁주를 바라보는 마불의 눈빛에서 짙은 살기를 담은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반면 암흑궁주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합공에서 가까이 달라붙으려던 취마가 까다로웠지, 나머지 두 사람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암흑궁주는 마불의 모습에서 승리를 예감했다. 그는 취마의 죽음에 흥분한 상태였다. 침착하게 싸워도 자신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인데, 흥분까지 했다면 승패는 보나 마나였다.

마불의 손에 황금빛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가 큰 마공을 쓰려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히려 암흑궁주가 바라는 바였다. 큰 무공을 발휘하면 순식간에 남은 내공이 고갈될 것이다.

“너의 혈불이 자비롭지 않다는 건 잘 아는 바지. 한데 그 무자비가 네게도 해당하는군.”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한쪽 팔로 암흑궁주의 목을 휘감았다. 그는 죽은 줄 알았던 취마였다.

“지금입니다!”

취마는 죽지 않았다.

앞서 싸움 시작 전에 섭혼마존에게 전음으로 부탁한 것이 바로 자신을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암흑궁주가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있도록.

오직 이 한 번의 기회를 위해서.

섭혼마존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마지막 섭혼술을 발휘했다.

섭혼귀식(攝魂龜息).

그녀는 완벽하게 취마의 죽음을 위장했다. 마지막 일격의 충격은 자신과 그가 반씩 나눠 가졌다. 심지어 마불조차 속인 완벽한 한 수였다.

후아아아아아아아앙!

마불의 손에서 마장소인이 발출되었다.

콰콰콰콰콰콱!

거대한 황금빛 손바닥이 암흑궁주와 취마를 강타하며 밀어붙였다.

두 사람이 마장소인에 휩쓸려 날아갔다.

취마가 바닥을 뒹굴었다. 울컥 피를 토해내는 그의 몸은 완전히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암흑궁주가 낭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마터면 방금 전 한 수로 죽을 뻔한 그였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의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얼굴에도 큰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 않았다.

취마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마불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그리 약해서 어찌 혈불을 모시는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마지막 순간 마불은 곧장 발출하지 않고 찰나간 망설였다. 그 망설임이 암흑궁주가 빠져나갈 시간을 주었다. 그가 탈출하면서 그에게 붙어 있던 자신도 살아남은 것이다.

마불이 망설인 이유는 취마 때문이었다.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취마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없었다.

그 선택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음에도, 그 마지막 순간 마불은 망설였다.

“죽어도 저런 놈과 함께 죽게 할 수는 없지.”

그 말에 취마가 뒤로 누우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진짜 죽음이 남았다.

“이게 다 소교주 때문입니다.”

마불은 원래 이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긴, 그렇게 따지면 자신도 마불을 두 번이나 구하지 않았겠지만.

마불은 자리에 앉아서 말없이 염주를 굴렸다. 마지막 남은 내공을 다 쏟아부었기에 그는 취마를 도울 수가 없었다.

섭혼마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섭혼귀식을 사용하면서 남아 있던 내공을 모두 소진했다.

암흑궁주가 일장을 가하려고 취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긋지긋한 놈!”

정말 취마는 두 번 다시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늙은이, 그 손 저리 치워라. 하늘이 안 보이잖아.”

암흑궁주가 차갑게 웃으며 장력으로 취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려던 그때.

“멈추세요.”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섰다. 놀랍게도 그녀는 천화루주였다.

그녀가 겁 없이 걸어가더니 취마 앞을 막아섰다.

“이 사람을 죽이면 내게서 마지막 예언을 듣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나서자 취마는 물론이고 마불과 섭혼마존도 깜짝 놀랐다.

암흑궁주의 깊은 주름이 꿈틀거렸다.

“지금에 와서 내가 예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겠느냐?”

천화루주는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 배에서 예언을 받았어요. 그 예언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암흑궁주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어떤 예언이지?”

“마존들을 살려주면 알려드리죠.”

암흑궁주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취마를 향했던 손을 그녀를 향해 내밀었다. 그녀를 먼저 죽이겠다는 듯한 모습에 가예가 소리쳤다.

“안 돼!”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준 천화루주가 이대로 죽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암흑궁주는 그녀를 죽이려고 손을 내밀 것이 아니었다.

암흑궁주는 허공섭물로 천화루주를 남은 이들과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예언을 듣는 걸 포기하더라도 이들을 살려줄 수는 없다.”

그녀만 한쪽으로 옮기는 모습에서 가예는 알 수 있었다. 천화루주는 살려주고 자신은 죽이려 한다는 것을.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저예요.”

가예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모든 일은 하늘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제 책임이니까요.”

암흑궁주가 차갑게 말했다.

“죽을 순서를 정할 필요 없다. 한꺼번에 죽여 줄 테니까.”

그가 손을 치켜들자 하늘에 떠 있던 별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앞서 별이 강기가 되어 떨어지던 것과는 달랐다.

남은 별들이 모두 천천히 내려왔다. 새하얀 빛 덩어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그 별들이 세 마존과 가예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얼굴 앞으로, 또 심장 앞으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 별들이 곧 자신들 주변에서 터질 것임을.

별을 이용한 마지막 초식으로 자신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이제 곧 죽는다는 생각에 마존들이 모두 눈을 감았다.

섭혼마존이 나직이 말했다.

“두 분과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한 사람의 마존으로 대해준 두 선배 마존들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였다.

별들이 폭발하려던 바로 그 순간.

뭔가가 관통되는 소리가 그곳에 울려 퍼졌다.

눈을 감았던 마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앞서 취마가 거의 다 찢었던 그곳으로 한 자루의 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이 약한 곳임을 알고는 밖에서 안으로 찌르고 들어온 검이었다.

탐심대멸공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검 주인의 무공이 너무 고강해서일까?

찌이이이이익.

튀어나온 검이 아래로 암흑의 기운을 찢었다.

그 순간, 이 암흑의 공간이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스스스스스스.

놀랍게도 그들 앞에 떠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별들이 빛을 잃으며 사라졌다.

암흑궁주는 밤하늘에 별이 없기에 별자리를 바꿔서 장소를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암흑궁주가 급히 구결을 외우자, 자신을 둘러싼 암흑의 기운이 몰려가서 아래로 길게 찢긴 부분은 메우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푸아아아아아악!

검이 한차례 아래로 찢은 그 자리로 거대한 무엇인가가 뚫고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대도였다.

위는 대도, 아래는 검.

두 개의 병장기가 동시에 어둠을 벽을 뚫었다.

공간은 귀를 찢는 비명을 질러대더니.

퍼퍼퍼퍼퍼퍼퍼펑.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내며 밤하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암흑궁주가 펼친 암천성혼공이 파훼되는 순간이었다.

지옥 같았던 밤하늘이 사라지고, 그들은 원래 있던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을 보며 취마가 큰소리로 웃으려다가 밀려오는 고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마불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섭혼마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천화루주가 떨리는 눈빛으로 소리쳤다.

“소마님.”

새하얀 가면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가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극악소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세 마존이 이렇게나 안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극악소마 옆에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어떻게 외부의 결계와 배를 둘러싼 암연을 뚫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두 사람이.

“평생 아무 일 없다가 왜 하필 우리가 놀러 갔을 때 이 난리가 났을까요?”

나긋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그 옆에서 대도를 어깨에 걸친 혈천도마가 서 있었다.

“이러니 내가 어딜 갈 수가 없지.”

극악은 선을 넘지 않는다

취마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의 부상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차린 혈천도마가 손을 뻗어 허공섭물을 발휘한 것이다. 부드러운 기운이 그를 감싸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아, 좋다. 너무 편합니다!”

말은 그랬지만 취마는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부드럽게 옮겨도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부상이 덜한 마불과 섭혼마존은 걸어서 혈천도마 쪽으로 왔다.

암흑궁주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손을 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극악소마와 일화검존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로 쳐다만 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닥하면 검기와 강기가 휘몰아칠 긴장감이었다.

비록 수적 우세에 있었지만 마존들도 함부로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쪽의 부상자도 부상자지만, 여전히 암흑궁주는 여유가 있었고 그 존재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 팽팽한 긴장감 사이를 가로질러 날아온 취마가 혈천도마 앞에 내려섰다.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검무극과 헤어진 후 가기로 했던 강소성의 태호로 갔다.

두 사람은 버드나무 아래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너무 변해서 처음 온 것 같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교주와 권마를 만났던 기억이 생생히 났다.

―다 그대로인데 우리만 늙었네요.

일화검존의 아쉬움에 혈천도마는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예전이었다면 훨씬 아쉬워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다.

여기까지 기나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왔고, 요즘은 그 무게가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지 않나?

솔직히 혈천도마는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았다. 멸천대도에 피가 마르지 않던 그 시절보다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요즘이 더 좋았다. 일화검존과의 관계도 그렇고.

다만 이 좋은 지금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었는데. 그조차 검무극이 종유선태와 선도영과로 늘여 주었으니,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혈천도마가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 일화검존은 잘 알았다. 자신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저 멀리 호숫가에 세워진 주점을 가리켰다.

―저기 저 주점 생각나세요? 교주님께서 저기에서 술을 사 주셨잖아요.

―생각나네. 교주가 잔뜩 열받은 날이었지.

―기억하시는군요.

―여기 와서 보니 다 기억이 나네.

―우리 한 번 가볼까요?

두 사람은 천천히 호수를 걸어 그곳까지 걸어갔고, 옛날 생각을 하며 술을 마셨다. 주인장도 바뀌고, 음식 맛도 바뀌었지만 두 사람은 옛 생각에 빠져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태호를 시작으로 여러 곳을 구경했다. 두 사람 모두 안 가본 곳 위주로 유람했다. 소문난 절경도 찾아가 봤고, 솜씨 좋은 숙수가 일하는 객잔에 줄을 서기도 했다. 이젠 줄 서는 것 자체를 즐길 줄도 알았다.

그렇게 중원을 주유하다 마화가 피어올랐다는 소식을 통천각을 통해 전해 들었다. 두 사람은 여행하는 중에도 주기적으로 통천각 지부에 들러서 혹시라도 교에 일이 있는지를 확인했던 것이다. 아직 배후 조직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본단으로 안 가시고 왜 이리로 오셨습니까?”

취마의 물음에 혈천도마는 한 사람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보였다.

“교주님이야 어련히 잘 대처하시지 않겠나?”

거기까지만 말하면 되었을 텐데.

“또 거긴 독왕도 있고, 권마도 있으니까.”

취마가 ‘그럼 이쪽은요?’ 하는 표정을 짓자, 혈천도마가 그의 부러진 팔을 손가락으로 쿡쿡 눌렀다.

“으아아! 아픕니다!”

물론, 아프게 하려고 누른 건 아니었다. 팔을 이리저리 살핀 후에 몇 군데 혈도를 눌러 팔을 제대로 치료해 주었다.

“다행히 깨끗하게 부러졌네. 한동안 정양하면 뼈가 붙을 거네.”

“엉덩이랑 옆구리랑 무릎이랑 목이랑 팔꿈치는요?”

“제대로 다 찾아내는 걸 보니 머리는 괜찮군.”

취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이쪽으로 잘 오셨습니다.”

이들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들은 모두 죽었다. 이들 세 마존이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취마가 혈천도마와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것도 일화검존과 극악소마가 암흑궁주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흑궁주는 무슨 생각인지 그저 말없이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섭혼마존이 와서 취마에게 내상약을 건넸다.

“제게 주신 것보다는 훨씬 못한 거지만, 이거라도 드십시오.”

앞서 취마는 천화루주를 목숨 걸고 지킨 그녀에게 아끼는 내상약을 내주었다.

“감사하오, 섭혼.”

취마가 내상약을 마시면서 멋쩍게 덧붙였다.

“누가 보면 나 혼자 다 싸운 줄 알겠소.”

그러자 이번에는 마불이 금창약을 내밀며 말했다.

“혼자 싸웠지.”

취마가 그가 내민 금창약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랬으면 벌써 전 시체가 되었겠지요.”

취마가 금창약을 몸에 바르며 말했다.

“술은 꼭 사 주셔야 합니다.”

“다 낫거든 취몽루로 초대하게.”

“술이 약이죠!”

그때 섭혼마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저도 불러주세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번 출교에서 취마는 마불과 섭혼마존, 이 두 사람과 깊은 교감을 나눴다. 역시 무인에게 목숨을 걸고 싸울 때보다 더 친해지는 계기는 없는 법이다.

말없이 암흑궁주를 지켜보고 있던 극악소마가 취마에게 물었다.

“소교주는 어디에 계십니까?”

취마의 시선이 한옆에 놓여 있는 비궤를 향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 비궤에 흡수되셨다고 합니다. 나도 직접 본 것은 아니라서.”

자연스럽게 뒤에 도착한 세 마존의 시선이 암흑궁주를 향했다.

“그럼 저자에게 당한 겁니까?”

당연히 암흑궁주의 사술로 저곳에 갇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비궤가 독자적으로 흡수했다고 했습니다.”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다는 건 아직 소교주의 생사가 불명확하다는 의미.

당연히 암흑궁주를 향한 마존들의 눈빛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혈천도마가 천천히 암흑궁주 앞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한데 너는 이 상황에서도 달아날 생각을 안 하는군.”

암흑궁주쯤 되면 탈출하기 위한 수법 하나쯤은 있을 텐데. 다친 마존이 셋이긴 하지만, 여긴 마존 여섯이 함께 있는 자리였다.

이렇게 여섯 마존이 한 명의 적을 상대한 것도 천마신교 역사상 거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암흑궁주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믿는 구석이 느껴지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마존들이 더 왔다고 상황이 바뀔까?”

암흑궁주의 시선이 그들 중 극악소마를 향했다. 뭔가 의도가 담긴 눈빛이었기에 마존들이 긴장했다.

암흑궁주의 눈빛이 깊어지는 순간, 하나의 암흑마공이 펼쳐졌다.

악심종속술(惡心從屬術)!

이 마공은 오직 악한 사람만을 지배할 수 있는, 암흑궁주의 궁극 무공이었다.

악한 사람은 반드시 걸린다는 악심종속술을 악의 화신이라 불리는 극악소마에게 펼친 것이다.

‘악의 화신인 극악소마가 왔으니, 넌 이제 내 것이다.’

물론 상대를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었다. 상대에 따라 짧게는 일각, 길게는 며칠을 지배할 수 있었다.

당연히 상당한 내력이 소모되는 무공이었고 실패했을 시 큰 내상을 입게 된다.

‘일각도 필요 없다. 단, 반 각만 조종하면 된다!’

앞서 세 마존은 내공이 고갈되었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자신과 극악소마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죽이면 되는 것이다.

악심종속술을 펼치는 이 순간은 현실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그것을 펼치는 순간 그 사람만의 동굴로 가게 된다.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으로, 상대가 욕망하는 본능의 공간으로. 그 공간에서 악심을 종속한 후 그를 데리고 나오면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본 장소는 시체가 가득 널린 공간이라거나, 보물이 가득한 방이거나 식탐과 음욕이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암흑궁주는 사방이 온통 새하얀 방에 있었다.

극악소마도 그 방 가운데 홀로 서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평범한 악인들과는 다르구나!’

시간을 길게 끌면 끌수록 내공 소모도 심해지기에 그는 곧장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네 어둠이 나를 불렀다. 네 주인으로 명하니, 나를 따르라!”

악심종속술이 펼쳐지자 극악소마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상대의 악심이 클수록 더 쉽게 걸리는 마공, 다른 사람도 아닌 극악소마였으니.

‘넌 절대 나를 거부할 수 없다.’

암흑궁주가 기뻐하며 방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극악소마만 나오면 되는데.

극악소마는 문 앞에 서서 나오지 않았다.

“어서 나와라!”

그의 명령에도 극악소마는 나오지 않았다.

상대와 종속의 계약을 맺었는데 명령을 거역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때 암흑궁주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문 앞을 가로지르며 선이 한 줄 그어져 있었다.

‘이게 뭐지?’

말 그대로 그냥 선이었다.

암흑궁주는 극악소마가 방을 나오지 않는 것이 이것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대니 선이 만져졌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독특한 촉감이었다.

암흑궁주가 선을 당겨서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선은 끊어지지 않았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강기의 칼날을 만들어서 그것을 잘랐다.

하지만 그 가는 선은 잘리지 않았다. 온갖 수를 다 써도 잘리지 않았다. 선은 만년한철보다 더 강력했다.

“대체 이게 뭐야?”

이 선은 바로 예전에 극악소마가 직접 흰 벽에 그었던 바로 그 선이었다.

한때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선을 그으며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들의 관계가 어디까지 왔느냐고 물어보면서.

그리고 마지막에 극악소마는 절대 훼손하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방 벽에 직접 선을 그은 후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공자, 우린 어디까지 왔습니까?

바로 그 선이 악심종속술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극악(極惡)은 이제 선(線)을 넘지 않았다.

암흑궁주가 그 선 너머에 서 있는 극악소마를 바라보았다.

가면 속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극악소마의 두 눈이 차갑게 웃었다.

그 순간 열려 있던 문이 꽝 하고 닫혔다.

동시에 악심종속술이 깨어졌다.

암흑마공이 실패하면서 암흑궁주의 기혈이 뒤틀렸다. 강력한 마공일수록 실패했을 때의 부작용도 크게 돌아오는 법.

그는 치밀어 오르는 피를 꾹 삼켰다. 암흑궁주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내상을 입은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현실에서 마주 보는 극악소마의 두 눈도 차갑게 웃고 있었다.

암흑궁주는 마공이 실패한 이 순간에도 그 선이 궁금했다.

‘대체 뭐였지?’

마존들은 찰나간의 순간이었지만, 극악소마와 암흑궁주 사이에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다른 마존을 향했다. 이제 내상까지 입은 상태로 새로 온 세 마존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 계획은 틀어졌지만, 아직 한 번의 기회는 더 남아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한때 극악소마보다 더 무섭고 잔혹했다고 알려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암흑궁주의 시선이 혈천도마를 향했다.

이 시도는 큰 모험이었다. 내공 소모도 막대할뿐더러, 이번에도 실패하면 앞서 내상이 더해져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될 테니까.

하지만 암흑궁주는 혈천도마에게 악심종속술을 시도했다. 반드시 한 사람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암흑궁주는 이번에도 방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주위에 책이 가득한 방이었다. 시체가 가득해야 하는 방에 책이 가득했다.

‘여긴 대체 어디지?’

사방 벽은 물론이고 자신이 서 있는 주변에도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혹시 무공비급인가?’

자신의 앞에 쌓인 책 중에서 맨 위에 놓여 있는 책을 넘겨보았다.

‘시화집?’

그 옆에 있는 책은 꽃을 키우는 책이었고, 그 아래에 있는 건 주례를 보는 법에 대한 책이었다.

‘설마 내가 주화입마에 빠졌나?’

순간 자신이 내상을 입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무공을 펼치다 주화입마에 빠진 건 아닌가 싶었다.

바로 그때, 구석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락, 사락.

암흑궁주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혈천도마가 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왜 당신이 이런 곳에서 책을 읽고 있지?’

혈천도마는 책을 읽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오직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암흑궁주가 혈천도마에게 나직이 말했다.

“네 어둠이 나를 불렀다. 네 주인으로 명하니, 나를 따르라!”

책을 읽던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를 따라나섰다.

이제 이 방을 나가기만 하면 된다. 다행히 앞서 극악소마의 방에 있었던 선은 없었다.

암흑궁주가 그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이번에는 나가는 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쌓여 있는 책을 무너뜨리자 그 너머에 또 다른 책 무더기가 나왔다. 그 너머에도 책이었고, 또 책이었다. 그야말로 책이 끝없이 쌓여 있는 방이었다.

시간을 끌수록 내공 소모는 계속되었기에 암흑궁주는 당황해서 더욱 급하게 책 사이를 뒤졌다.

그러다 쌓여 있던 책이 와르르 그에게 무너졌다.

그 순간 악심종속술이 깨어졌다.

암흑궁주는 이번에는 내상을 입은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크에엑.”

왈칵 피를 토해내는 그를 보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뭐하냐, 혼자서?”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암흑궁주가 고개를 들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혈천도마의 눈빛에 자비는 없어 보였다.

앞서 책을 읽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것들이 대체?’

연속해서 궁극의 마공이 실패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암흑궁주가 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의 손바닥이 향한 곳은 비궤였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소교주는 죽는다.”

그 협박은 효과를 발휘했다. 검무극이 저것에 흡수되었다면 적어도 파괴되어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어서 꺼져라.”

장내를 흐르는 침묵.

암흑궁주가 남아 있던 내공을 모두 끌어올리자 손에 맺힌 암흑강기는 더욱 강력해졌다.

“정말 박살 내 버릴 거다.”

어차피 죽게 된다면 그냥 죽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소교주와 함께 간다면 그리 아쉽지만은 않겠지.”

그때 마존 중 한 사람이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부숴라.”

바로 마불이었다.

“어디서 허풍을!”

“부숴라! 산산조각 내버려라!”

마불의 허세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대공자께서 후계자가 되시겠구나!”

정말 기뻐하는 그의 표정에 암흑궁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강기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일촉즉발의 순간!

모두를 놀라게 할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비궤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어이쿠!”

비궤가 뱉어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나오면서 마불이 했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이래서 내가 자리를 못 비운다니까요!”

여기 계신 분들이 해주신 것처럼

암흑궁주는 말할 것도 없고 모두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도 암흑궁주는 비궤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눈치 빠른 검무극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이거 부수려고? 어림없어. 절대 안 부서져.”

삼백 년 전, 천마 혁도천이 미친 듯이 주먹으로 쳐도 꼼짝도 안 했던 비궤였으니까.

“그리고 봐서 알겠지만, 저 비정하고 무정한 마존들에게 인질극은 안 통해!”

그러면서 마불에게 소리쳤다.

“부수라니요! 산산조각 내라니요! 저 저 안에 있었다고요!”

취마가 섭혼마존을 돌아보며 드디어 귀마개를 해야 할 때라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섭혼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의 등장에 대번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직도 형에게 미련을 못 버리셨습니까?”

마불의 깊은 안도가 느껴졌다. 암흑궁주에게 배짱을 부렸지만, 어찌 진심이었겠는가?

암흑궁주가 절대 비궤를 부술 수 없음을 확신했기에 큰소리쳤다. 내상을 입고 피까지 토한 그였으니, 저 비궤는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물론 그렇게 확신했지만, 세상일 어찌 알겠는가? 놈이 진짜 비궤를 박살 내버릴지. 정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던 마불이었다. 이 순간, 검무극이 가장 반가운 사람은 그였다. 물론 그 표현은 이렇게 했다.

“대공자께서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아쉽게 됐군.”

마불이 암흑궁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리 망설였나? 확 부수지.”

검무극이 암흑궁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봤지? 이렇게 지독한 사람들이라고.”

암흑궁주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쳤다. 멀쩡한 세 마존에 검무극까지.

반면 자신은 탐심대멸공이 사라졌고, 궁극의 마공이었던 암천성혼공과 악심종속술마저 실패한 상황에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수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남겨두었던 한 수만이.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보며 짐짓 놀란 시늉을 했다.

“아니, 두 분은 왜 여기 계십니까?”

혈천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검무극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놀라게 해도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누가 쇳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기에 왔지.”

“들어간 게 아니라 끌려간 겁니다. 어휴, 제가 뭘 보고 왔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검무극이 슬쩍 암흑궁주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둠이 드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봤는지 궁금하지?”

검무극은 말해줄 듯하다가.

“안 가르쳐줄 거야.”

순간 암흑궁주의 얼굴이 꿈틀했다. 정말이지 돌아오자마자 이 소교주 놈이 사람을 얼마나 열받게 하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가 비궤에서 바뀐 건 아닌 것 같네요.”

검무극이 그녀에게 물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여행이었네.”

자연 옆에 서 있던 혈천도마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내지 마시고 여행 자주 다니십시오.”

“그럴 작정이네. 다음에는 남쪽 지방으로 가보려고.”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근래 가장 좋아하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어떻게 안 본 사이에 더 젊어지셨습니다!”

괜히 시선을 피했지만, 그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눈 후 검무극은 다음으로 섭혼마존을 챙겼다.

“섭혼, 괜찮소?”

“네, 소교주님.”

그녀 역시 내상을 입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다.

“혹시 저 두 분이 막내라고 구박하고 괴롭히지 않았소? 위험하게 막 앞장서게 하고.”

“오히려 과잉보호 받았습니다.”

섭혼마존은 검무극을 다시 보니 너무 기뻤다.

살아남았기에 다음 세대 마교주의 첫 번째 마존이 될 기회도 함께 살아났다.

이제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할 작정이다.

교주가 가장 믿는 차기 마존.

지금의 교주에게 권마가 있듯, 검무극에게는 자신이 그 자리에 서고 싶었다.

검무극이 취마를 쳐다보더니 뒤늦은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대체 누가 우리 취마님을 이렇게 만들었어?”

검무극이 암흑궁주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냐? 너지? 너 이 자식!”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취마의 목소리.

“연기 그만하시지?”

“연기라니요?”

취마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렇게 걱정이 되면 나한테 먼저 왔어야지! 나부터 살폈어야지! 내가 제일 심하게 다쳤는데! 마지막에 와서는 어디서 걱정하는 척이냐!”

검무극이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취마의 부러진 팔을 살짝 만졌다.

“아니, 무슨 마존이 팔을 부러뜨리고 다닙니까?”

뒤에 온 세 마존도 그 사실만으로도 이 싸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했다. 마존쯤 되면 팔이 부러지는 일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술 먹고 자빠졌다.”

“조심 좀 하시지.”

취마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검무극의 손을 쳐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손에서 검무극의 감정이 느껴졌다.

살아줘서 고마워, 형.

그때 마불이 차분히 말했다.

“취마께서 우릴 살렸네.”

섭혼마존도 그렇다는 표정으로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늦게 온 거야.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고, 주인공에겐 마지막에 가는 법이니까.”

괜히 뿌듯해하는 취마를 두고 극악소마를 향해 돌아섰다. 뒤에서 취마가 소리쳤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잖아!”

검무극이 못 들은 척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밖을 맡았던 그가 합류한 두 마존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의 정확한 판단력이 모두를 살렸으리라.

극악소마가 웃으며 물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극악소마가 있었기에 마음 편히 삼백 년 전 세상에 다녀올 수 있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암흑궁주는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이들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마존들과 가깝게 지낸다는 보고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충격적이었다. 마존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저런 신뢰의 눈빛을 주고받는다고? 자신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심지어 수족인 회에게서조차.

그렇게 검무극이 마존들과 인사를 마치자 혈천도마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저 쇳덩이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암흑궁주에게는 안 가르쳐준다고 했지만, 혈천도마에게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비궤가 제게 삼백 년 전 천의궁이 전쟁을 일으켰던 때를 보여줬습니다.”

삼백 년 전으로 직접 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비궤가 과거를 보여줬겠거니 생각할 것이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검무극이 암흑궁주에게 물었다. 이제 더는 그 이름을 감추지 않았다.

“화무기는 어떤 사람이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화무기를 언급하는 순간이었다.

암흑궁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 이름이 검무극에게서 나올 줄은 몰랐다. 신녀궁주 가예조차 존재만 알았을 뿐, 이름은 모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비궤가 알려줬다.”

마존들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막연히 두려워했던 그 존재가 바로 저 화무기라는 사람임을. 암흑궁주가 마지막 적이 아니었다.

암흑궁주의 시선이 비궤를 향했다.

“이 비궤는 우리의 신물인데 어째서 네게?”

“정확히 말하자면 천의궁의 신물이지. 당신은 그 천의궁 아래에 있던 암흑궁의 후손이고.”

암흑궁주는 궁금했다. 대체 왜 비궤는 자신이 아니라 검무극을 흡수한 것일까? 비궤는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알려준 것일까? 또 무엇을 알려줬을까?

“내게 해줄 말이 없나?”

검무극의 물음에 암흑궁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당신 뜻 존중하지.”

뒤에 서 있던 세 마존들도 일제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일전에 대비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에 암흑궁주가 재빨리 말했다.

“그는! 너희들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검무극은 그가 왜 이렇게 자신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다섯 영혼과 내공이 깃들었는데, 어찌 누군가에게 질 거라 여기겠는가?

“네가 그에 대해 들었다면 여기서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 텐데.”

암흑궁주는 어떻게든 검무극을 이들에게서 떼어내 본단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나마 그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었으니까.

“왜 당장 아버지께 달려가지 않느냐는 말이지? 갈 거야. 대신에 갈 때 가더라도 너는 죽이고 가야지. 네가 내 앞에서 완전히 죽는 걸 보고 갈 거다. 애초에 그러려고 나온 거니까.”

거기가 중요한 만큼 여기도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암흑궁주는 검무극의 여유를 다르게 해석했다.

“그게 아니겠지. 네 아버지가 죽으면 교주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마존들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검무극이 그런 의도를 가졌다고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화무기란 자의 무공 실력 때문이었다.

대화로 볼 때, 화무기는 교주를 죽일 수도 있을 정도의 무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검무극 역시 수긍하는 것처럼 보였고.

“보다시피 우리 집안 혈통이 순순히 자기 자리를 내놓는 성격들이 아니라서.”

암흑궁주가 차갑게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화무기의 패배는 애초에 없었다.

“어차피 너흰 다 죽는다. 너희뿐만 아니라 무림맹과 사도맹 모두 다 쓸려 버릴 거다. 너흰 너무 오랫동안 이 무림을 지배해 왔지.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다.”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그게 너의 성공은 아니지. 네 시대도 아니고. 기껏해야 화무기의 하수인이 되는 거겠지.”

암흑궁주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것이었으니까.

“왜 네가 실패했는지 아나?”

듣기 싫은 말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넌 너무 오랜 세월 어둠 속에만 있었어. 어둠이 너를 잡아먹어 버렸지.”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암흑궁주니까.”

“암흑궁주니까 밝은 곳으로 나왔어야지. 빛을 등졌을 때, 비로소 넌 너의 어둠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볼 수 있었을 테니까.”

검무극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 솔직히 말하지. 난 널 직접 만나고 실망했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멋이 없었거든. 아, 물론 지금까지 네가 선택한 방식을 보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 하지만 그래도 직접 보면 다른 멋이 있을 줄 알았어. 한데 없더군.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어.”

암흑궁주는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웠다.

“넌 너무나 오랜 세월 그 어둠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버린 거야. 멋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지.”

“닥쳐라!”

쏟아진 원색적인 비난에 암흑궁주는 버럭 소리쳤다.

“나는 본궁의 대의를 위해 평생 희생하며 살아왔다. 오직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 대의는 검무극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럼 왜 후계자를 두지 않았지?”

“뭐?”

“진짜 네 목적이 대의를 위해서라면 후계자를 두었어야지. 자신이 못 이룬다면 후계자에게 그 뜻을 넘겨서 이루게 했어야지. 세월이 지나도 그 고귀한 뜻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한데 넌 후계자를 두지 않았지. 그 이유를 말해줄까? 대의를 위해 싸운 게 아니었거든. 오직 흑막의 수장이 되어 이 무림을 지배하고 싶은 욕심뿐이었어.”

암흑궁주는 무섭게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 검무극이 얼마나 사람을 열받게 하는지 당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이윽고 암흑궁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일은 아버지의 꿈이었다.”

암흑궁주의 얼굴에 아련한 추억이 스치는 순간, 섭혼마존은 알 수 있었다.

앞서 싸움에서 암흑궁주의 마음에 들어갔을 때, 환하게 웃으며 올려다보던 상대가 바로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그 단 한 번의 좋은 추억을 가지고 그는 여기까지 온 것일까?

“우리가 얻은 그 힘은 보통의 인간은 감당할 수 없었지. 그 힘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었지. 오직 천살성의 기운을 타고난 인간만이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평생 그 운명을 찾아 헤맸다. 다음에는 천살성에 담긴 그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육도원기를 찾으려 노력했지. 그런 나의 인생을 고작 천마의 아들로 태어나 편히 살아온 네까짓 게 조롱해?”

암흑궁주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내상이 도지면서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반면 검무극은 담담했다.

“아버지의 꿈을 이어받아서 이루려 한다? 효자군. 나는 아버지의 꿈을 막으려는 불효자인데.”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암흑궁주에게는 조롱으로 들렸다.

암흑궁주가 눈에서 깊은 어둠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가 어떤 마음을 굳혔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지막은 어떻게 설계했을 거 같나?”

“최후를 멋있게 끝낼 사람은 아니니, 어떻게든 같이 죽을 생각을 하겠지. 시시한 자멸공 같은 것으로.”

자멸공을 준비했을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암흑궁주의 얼굴에 그려진 글자에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깃든 육도원기를 뺏기 위한 대법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귀문폭천공(鬼文爆天功).

결코 시시한 자멸공이 아니었다. 귀신의 힘까지 빌린 가장 강력한 자멸공이었다.

암흑궁주의 얼굴과 몸의 글자들이 빛나자 바닥과 허공에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방에 있던 그들은 주위를 가득 메운 글자 속에 갇혔다.

“나와 같이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는 거다.”

그가 귀문폭천공을 발휘하려던 그 순간, 이미 세 마존은 움직이고 있었다.

한 줄기 지풍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극악소마의 혈앙지였다. 언제나 그를 보호하던 어둠의 기운이 혈앙지를 막았다.

“너희는 나를 막지 못한다!”

암흑의 기운이 그를 둘러싸서 막고 있는 사이, 그의 몸과 사방에 새겨진 귀문의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암흑마공이 자멸하는 이 순간, 참 모순적이게 그 어떤 무공보다 빛나고 있었다.

슉! 슉! 슉! 슉!

퍽! 퍼억! 퍽! 퍽!

빛처럼 빠르게 날아간 혈앙지가 앞서 맞은 그 자리에 다시 가서 박혔다.

그렇게 계속 같은 곳을 연속해서 적중한 지풍이 암흑의 기운을 뚫었다.

혈앙지가 암흑궁주의 얼굴을 강타하던 그 순간, 암흑기운이 약해졌다.

푸우욱!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암흑의 기운을 단숨에 뚫고 들어간 일화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촤아아아악!

동시에 멸천대도가 그의 어깨에서 가슴까지 시원하게 갈라버렸다.

파아아아아악!

그의 몸이 쩍 갈라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내상을 입은 채 오직 어둠의 기운 속에 숨어 자멸공만을 발휘하려던 암흑궁주는 결코 세 마존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검무극이 바닥에 쓰러진 그에게 걸어갔다.

암흑궁주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너는 그를 막지 못할 거다.”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나는 못 막겠지.”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막아주실 거다. 맹주님들이 막아주실 거고, 마존분들이 막아줄 거다.”

검무극이 뒤에 늘어서 있는 여섯 마존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과 일일이 눈이 마주친 후.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이 해주신 것처럼.”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암흑궁주를 향했다.

“네 어둠은 자신은 숨어서 모든 수하를 희생시킨 그런 어둠이었다. 빛을 마주 보지 않는 어둠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어둠이겠지.”

암흑궁주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 대신 피만 울컥울컥 쏟아졌다.

검무극의 마지막 말은 정중했다.

“그러니 더는 이 세상에 미련 가지지 말고, 당신이 좋아하는 영원한 어둠으로 돌아가시오.”

암흑궁주의 눈에는 여전히 큰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죽음의 부름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주위를 희미하게 맴돌던 어둠의 기운도 허공 속으로 흩어져 영원히 사라졌다.

드디어 마지막 수장이었던 암흑궁주마저 죽는 순간이었다.

이제 단 한 사람, 화무기만이 남았다.

설거지는 누가 하는 거요?

선실에 있던 이들이 모두 배의 갑판 위로 올라왔다.

이제 배를 둘러싸고 있던 암연도, 배 주위 호수에 있던 결계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긴 밤이 지나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검무극은 저 멀리 노름꾼들을 옮기고 있는 배들을 보았다. 수많은 작은 조각배가 부귀선의 노름꾼을 싣고 육지로 가고 있었다.

배에는 귀영대 무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검무극이 그중 이안이 탄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안아!”

검무극이 손을 흔들자, 이안도 기뻐 소리쳤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무사한 걸 보자 그녀는 수하들이 보고 있음에도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체면보단 소교주였다.

사방 배에서 일제히 기쁨과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배에 들어갔던 마존들 모두가 갑판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조각배에는 귀영대의 네 조장 청면, 차이란, 서진, 그리고 지한이 타고 있었다. 그들 역시 기뻐하며 검무극과 마존들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을 향했던 청면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극악소마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오고 싶으면 돌아와도 된다.

돌아가든 돌아가지 않든,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번 출교는 청면에게 너무나 큰 의미가 있는 출교가 되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멀어서 보이지 않겠지만 청면은 정중히 두 사람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싸움에서 저들이 무사히 나왔다는 것은.

‘암흑궁주가 죽었구나.’

자신을 따라붙던 어둠이 영원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당신, 정말 해내는구나.’

검무극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희생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리라.

서진과 지한은 귀영대의 첫 임무가 무사히 잘 끝나자 환호했다.

“그 판은 내가 먹은 판인데! 당신들 때문에!”

지한이 눈이 벌건 도박꾼의 뒤통수를 때렸다.

“우리 때문에 살았지!”

지금은 살았지만,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다른 조각배에 타고 있던 부귀선의 선주인 양동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자신의 배에서 무서운 음모가 벌어진 것을 알았을 때,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인들은 자신들을 살려주었다.

“사도맹에 당신들이 우릴 구해준 것은 꼭 전하겠소.”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말하지 않아도 사도맹 소맹주에게 귀가 아프게 생색낼 사람이 있어 다 알게 되겠지만.

이안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여러 사람 속에 서 있어도 검무극은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서 검무극의 외침이 들려왔다.

“다들 고생했다!”

귀영대 무인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저 멀리서 대기 중이던 마군들의 우렁찬 함성도 들려왔다.

그렇게 수하들의 사기를 올려준 후 검무극이 마존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저는 먼저 본교로 가보겠습니다.”

마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의 경신술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었으니, 혼자서 달려야 가장 일찍 도착할 것이다.

“우리도 최대한 빨리 따라가겠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극악소마는 경공으로 검무극의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부상 때문에 마불과 섭혼마존, 취마는 마차로 돌아가야 했다. 최대한 빨리 가겠지만, 경공술로 가는 속도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예는 갑판에 앉아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암흑궁주의 죽음이 슬프지 않았고 그렇다고 통쾌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더없이 복잡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거지?

‘소교주는 저대로 떠나는 건가?’

그가 떠나기 전에 묻고 확인해야 했다.

“저를 살려주는 건가요?”

“나는 이미 당신을 살려줬소.”

앞서 암흑궁주가 있던 방에 들어가기 전에 검무극은 그녀에게 떠날 기회를 줬었으니까.

“육도원기가 없으면 그자를 제어할 수 없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걱정되지 않나요? 육도원기는 소교주 당신에게 있는데.”

“당연히 걱정되오. 걱정돼서 미칠 정도로.”

가예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런데 나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있나요?”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당신과의 일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가예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니까 마존들과 그런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겠지.

암흑궁주가 이 소교주를 이길 수 없었던 이유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을 이기기에는…… 그래, 너무 화석처럼 굳어버린 것이겠지.

“그래도 한 가지 믿고 있는 건 있소. 육도원기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그리고 마존분들도 모두 강해졌소. 그리고 다들 많이 변하셨지. 나는 육도원기의 힘만큼이나 그 변화의 힘도 믿소.”

가예는 자신이 이 말을 하게 되는 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구결을 외우세요. 저도 이 구결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라요. 예전부터 육도원기와 관련해서 전해 내려온 구결이에요.”

어쩌면 암흑궁주가 가장 두려워했던 게 이 구결을 검무극에게 전하는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검무극은 가예가 불러주는 구결을 정확히 외웠다. 구결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구결이 바로 화무기를 제어하는 데 꼭 필요한 구결이라는 것을.

“정말 고맙소.”

옆에서 지켜보던 천화루주가 그녀에게 말했다.

“하늘은 당신을 버리지 않았어요.”

천화루주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이 모습이 내가 본 예언이었어요.”

“소교주님에게 구결을 전해주는 당신을 보았지요.”

극악소마가 검무극의 심장을 찌르던 예언을 보았던 그녀가 이번에는 이 모습을 예언으로 보았던 것이다.

가예는 놀란 눈을 크게 뜬 채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를 살려준 거군요.”

천화루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자신이 살려주라고 마존들에게 말하기는 했지만. 또 그래서 살아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려준 것이 아니라, 당신은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예는 알 수 없는 벅참을 느끼며 저 멀리 떠오르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하늘이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결을 검무극에게 전해줄 것인지를 보는.

햇빛에 자신의 그림자가 보였다.

문득 검무극이 암흑궁주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빛을 등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어둠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볼 수 있다는 말을.

가예의 시선이 이번에는 하늘을 향했다.

아주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원망하기만 했지,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둠을 밀어내는 빛을 보고 있으니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

‘남은 삶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돕고 살겠습니다.’

두 여인의 대화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예언이 내려올 정도로 육도원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돌아가야 할 때다.

검무극이 모두에게 인사했다.

“먼저 본교로 가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훌쩍 허공으로 뛰어오른 검무극은 순식간에 점이 되어서 사라졌다.

“더 빨라졌군.”

혈천도마의 감탄에 모두 놀랍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마존이 봐도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경공술이었다.

육도원기의 신비로운 기운이 깃든 정순한 내공에, 환골탈태까지 한 검무극의 쾌속보는 극한의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아버지, 제가 갑니다!’

* * *

무림맹주 진패천이 풍류주점에 온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진패천이 불쑥 물었다.

“근데 이 설거지는 누가 하는 거요?”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지 못했는데, 문득 그게 궁금했다.

이곳에는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이들 중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아무리 봐도 설거지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독왕이 한다? 생긴 것만 봐서는 당연히 그가 설거지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니면 권마가? 저 큰 손으로 그릇을 닦을 수나 있을까? 아니다, 그릇 다 깨질 것이다.

그때 검왕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설거지는 막내인 제가 맡고 있습니다.”

“자네가 막내인가?”

“네, 그렇습니다.”

진패천은 새삼 독왕이 동안은 동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내가 도와주겠네.”

다들 놀란 얼굴로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설마 무림맹주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그들의 놀란 눈빛에 진패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 첫째와 막내는 건들지 않는 법이거늘.”

무슨 생각인지 진패천이 검왕을 도와 먹고 난 그릇을 들고 주점 뒤채로 나갔다.

백자강은 진패천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하여튼 사람 욕심은 많아서. 악 무인을 탐내는 거요.”

진패천이 악군학에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것이라는 의미였다.

자신도 악군학을 사도맹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저런 절대고수를 옆에 두면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풍천교주가 열린 문으로 보이는 뒤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교주가 군자검은 내놓아도, 저 사람을 내놓겠소? 어림없지.”

“진 맹주가 공을 들이면 또 모를 일이지요.”

백자강의 말에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사람이 정파에 가까운 기질이긴 하더군요.”

그때 천마 검우진이 단호히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검무극을 지켜주라고 이미 악군학과 약속을 했으니까.

이미 마교주가 수를 썼다는 생각에 백자강이 고개를 내저었다.

“진짜 욕심 많은 분은 여기 계셨네.”

그들의 시선이 다시 검왕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하는 진패천을 향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평생 처음 해보는 설거지일 것이다.

“세상 그릇 다 씻어도 헛수고요, 진 맹주.”

백자강의 나직한 말에 풍천교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강호 역사상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니 잘 봐둡시다.”

* * *

진패천이 풍류주점에 합류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에도 천살성은 오지 않았다.

진패천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이 사람들과 며칠씩 한 공간에서 이렇게 지내게 될 줄은 몰랐다.

무림맹주가 되고 누군가와 같이 이런 좁은 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겠는가?

게다가 그 상대가 마교주와 사도맹주라고?

세상에 이보다 더 불편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과 함께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함께 밥 먹고 세안하고, 같은 공간에서 자는 건 백 배는 더 힘들고 불편한 일이라 여겼었는데.

의외로 괜찮았다.

정말 나쁘지 않았다. 절대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할만했다.

잠시 만나서 보는 사람과 며칠 함께 지내면서 보는 사람은 확실히 달랐다.

자신에게 검우진은 더없이 차갑고 오만한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주무시오. 이 자리가 외풍이 덜하오.”

검우진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이 사람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괜찮소.”

“여기 쓰시오.”

어디 진패천의 무공경지에 외풍이 문제겠는가? 그럼에도 나이가 제일 많은 진패천을 위한 검우진의 배려였다.

“고맙소.”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검우진은 말을 잘했다. 아예 말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신과는 물론이고 사도맹주나 두 마존, 그리고 검왕과도 대화를 곧잘 나눴다.

왜 그가 말이 없는 사람이란 선입견이 있었나 생각해 봤더니, 그는 쓸데없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딱 필요한 말만 하니까, 말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백자강, 이 사람은 요리에 진심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시오?”

“나야 아무거나 잘 먹소.”

“그래도 즐겨 드시는 것이 있지 않소? 내가 검 교주에게 배워서 해주겠소.”

처음에 저 말을 들었을 때 진패천은 혹시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음식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 싶었다. 정말 이 자리에 독왕이 없었다면 그런 의심을 내내 하면서 식사했을 것이다. 독왕이 아니라 사도맹주의 독을 걱정해야 하다니!

한데 며칠 두고 보니, 그는 요리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요리하는 게 재밌소?”

오늘도 백자강은 주방에서 열심히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검우진에게 배운 탕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평생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는 재미가 있소. 맹주께서도 한 번 배워보시오.”

“나는 요리에는 소질 없소. 차라리 설거지를 하면 하지.”

그러자 계산대에 앉아 있던 풍천교주가 말했다.

“우리가 다 같이 객잔을 차려도 되겠소.”

풍천교주가 가상의 객잔을 구상했다.

“검 교주와 백 맹주께서 주방을 맡으시고, 저기 악 무인과 독왕께서는 점소이를 맡고, 권마께서는 주사 부리는 취객 담당, 진 맹주께서는 설거지를 맡으시고.”

정작 풍천교주 자신은 빼자 진패천이 물었다.

“그럼 교주께선 무슨 일을 하시려고?”

마교주와 사도맹주에게 숙수를 맡기고 무림맹주에게 설거지를 맡긴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나야 당연히 계산대에 앉아야지요. 풍채로 봐도 내가 주인장처럼 생기지 않았소?”

듣고 있던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전쟁이 나도 몇 번은 날 수도 있는 이 위험한 만남에, 풍천교주 덕분에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물론 두 맹주도 선을 잘 지켰다. 쓸데없이 심각한 화제는 굳이 꺼내지 않았고, 되도록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를 했다.

다들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천하를 짊어진 그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았다.

검우진이 했던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 선에서 끝내 줍시다.

이 싸움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무림의 평화를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이 싸움은 자식들을 위한 싸움이다.

그 명분은 어떤 명분보다 강력했기에 적어도 여기 이곳에서만큼은 같은 편이라 여겼다. 그렇게 믿었다.

풍천교주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무림은 똑똑하고 젊은 후계자들에게 맡기고, 다들 친구처럼 어울리며 사십시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그만 노려보고 삽시다.”

진패천이 검우진과 백자강을 바라보았다. 사실 풍천교주와 친구처럼 지내라면 어찌 그림이 그려지긴 했다. 워낙 쾌활하고 분위기를 잘 살려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한데 저 두 사람과 친구처럼 어울린다고?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긴 예전이라면 생각조차 해보지 않을 일을, 이렇게 상상이라도 하는 걸 보면 관계가 참 많이 발전하긴 했다.

검우진과 진패천이 마주 앉아 있는 자리로 권마가 차를 가져왔다.

주방에서 백자강이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차 한잔하고 계시오. 식사 곧 준비될 거요! 오늘 요리 기대하시오!”

권마가 두 사람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을 들려던 검우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차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아주 미세한 파문이었다.

다음 순간.

더 큰 파문이 일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점차 파문이 커져갔다.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심장박동처럼 생기는 파문의 정체를.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발걸음을 따라 파문이 일고 있었다.

쿵쿵 힘차게 걸어서 생기는 파문이 아니었다.

소리 없이 걸어오고 있지만 그 존재감이 만들어내는 파문이었다.

앞에 앉은 진패천도, 차를 가져왔던 권마도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파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옆에서 탁자를 닦던 검왕이 행주를 내려놓았고 주방에서 들리던 도마소리가 멈췄다.

자신의 세상에서 나온 독왕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차가웠다.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지 않은 채.

누군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만 친구합시다

그가 다가올수록 존재감은 커졌다.

상대는 자신의 존재로 공간을 밀어버리면서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검우진과 마주 앉아 있던 무림맹주 진패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여유를 부리며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감이 아니었고, 오늘 이곳에서 그를 맞이하는 주인은 어디까지나 검우진이었으니까. 자신과 백자강은 어디까지나 검우진을 도와주러 온 것이다.

진패천이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주방에 내려진 주렴을 식칼이 나와서 걷었다. 그 뒤에 서 있는 백자강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맛있게 잘 끓였는데.”

편안하게 말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끓이던 불을 끄고 식칼을 내려놓고는 주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검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뒤쪽 벽에 섰다. 독왕이 앉아 있는 구석 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독왕이 어떻게 싸울지 알 수 없었지만, 상대가 밀고 들어왔을 때 누군가 막아줘야 독왕의 독공이 빛을 발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의도를 알아차린 것일까?

독왕이 슬쩍 검왕을 쳐다본 후 다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상대는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긴장감을 안고 풍류주점 앞까지 도착했다.

한 남자가 풍류주점으로 들어섰다.

그는 치렁치렁한 짙은 흑발에 훤칠한 키를 지니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공을 익히기에 완벽한 체형이었다. 눈빛은 강렬했으며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살기나 기도가 아니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드러내는 기운이 아니라, 선천적인 기운이었다.

모두 알 수 있었다. 저 기운이 바로 천살성의 기운임을. 이렇게 직접 보는 건 모두가 처음이었다.

그는 한 자루의 검을 차고 있었는데 검집이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나이였다.

남자가 주점으로 들어서자 그 엄청난 존재감이 사라졌다. 자유자재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였기에 오히려 긴장을 풀지 못했다.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검우진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오더니 겁도 없이 진패천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적이 서 있는데 그 옆에서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심지어 서 있는 사람이 무림맹주와 권마인데 말이다.

앞서 보여준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지나가던 취객이 잘못 들어왔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였다.

남자는 진패천을 위해 따라두었던 찻잔을 들어 쭉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정중히 말했다.

“나쁘지 않군.”

차 맛이 나쁘지 않다는 것인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그대가 당대의 마교주군.”

그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차분했다. 일부러 무게를 잡지도 않았고, 거칠고 사나운 기세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가볍게 굴지도 않았다.

무게감을 재기가 어려운 상대. 그게 남자의 첫 느낌이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가 그 천살성이군.”

그러자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치 이 자리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처럼 그의 말은 자연스러웠다.

“웃기지 않나? 사람이 태어나면서 운명을 타고난다는 것이? 내 의지로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결국 나는 혈겁을 일으킨다는 건데. 교주, 당신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하나?”

검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그건 왜 묻나? 이곳에 오는 것으로 그걸 증명했으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천살성이라 불리기 싫으면 이름을 밝혀라.”

“그대라면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지.”

검우진의 옆에 서 있던 권마는 언제든지 주먹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 저 차분함은 극한의 위험이자 오만함이었다.

“화무기.”

남자는 바로 화무기였다. 검무극의 회귀 전 인생에서 이곳에 있던 교주와 맹주들을 모두 죽였던 바로 그가 풍류주점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화무기가 빈 찻잔을 옆으로 내민 후 잡고 있던 손을 펼쳤다.

바닥에 떨어진 찻잔이 깨어졌다.

“그래, 이 잔이 떨어져서 깨어지듯 난 운명을 거역하지 못했지.”

그러자 검우진이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화무기와 똑같이 빈 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깨어지지 않았다.

잔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에 허공섭물로 날아오르더니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앉은 것이다.

“운명은 거스를 수도 있다.”

검우진이 화무기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나도 쨍강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

화무기의 표정이 환해졌다.

“당신에게 제일 먼저 오길 잘했다. 기분이 좋아졌어.”

하지만 눈동자에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화무기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일일이 눈이 마주쳤다.

진패천과 눈이 마주쳤고, 다음으로 백자강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화무기는 진패천이 무림맹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백자강이 사도맹주라는 것도 알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시 그의 시선이 남은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풍천교주와 권마, 검왕과 독왕까지.

그들이 정확히 누군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실력만큼은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화무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말도 엄살처럼 들렸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내가 과대평가한 게 아니다.”

검우진의 입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내 아들이 과대평가했지.”

애초에 마화를 피운 것부터 검무극 때문이었다. 여러 마존들을 데려가는 것부터, 권마와 독왕을 남기고 간 것까지.

모두 검무극의 안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부리는 자가 정말 찾아온 것이다.

‘아들아, 네가 두려워했던 존재가 이자였느냐?’

과연 두려워할 만한 상대였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이 알 수 없는 잠재력은 평생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저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일단 이 상황에서 침착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대는 정말 대단했다.

“사실 제일 보고 싶었던 사람은 당신 아들이었지.”

“그런데 왜 나를 찾아왔나?”

화무기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 아들에게 상처를 주려고.”

화무기는 검우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당신을 죽여서.”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화무기가 찾아온 이유를 확실히 밝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검우진을 죽이러 온 것이다. 검무극의 회귀 전 인생에서는 무림맹을 가장 먼저 갔고, 다음으로 사도맹으로, 마지막을 천마신교로 왔었는데, 이제 반대로 천마신교로 먼저 왔다.

권마가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교주를 죽여서 검무극에게 상처를 주겠다고?

그때 풍천교주가 검우진에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녹인 것은 역시 풍천교주였다.

“교주님을 죽이려는 이유가 하늘의 운명이니 어쩌니 하면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검우진이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럼 내 아들은 상처받아도 좋단 말이오?”

“상처를 갑옷으로 만들 소교주니까 괜찮습니다. 더 좋은 교주가 될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화무기가 활짝 웃었다. 그는 정말 잘 웃었다.

화무기가 주위를 둘러보며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삼자회담이 열렸다지?”

화무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점의 이 층으로 걸어갔다. 원래라면 발걸음 하나 잘못 내디디고, 숨 한번 잘못 쉬어도 목숨이 날아갈 수 있을 상대가 가득한 곳이었다. 누군가 공격하는 순간, 이곳은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움직임이 거창하지 않았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는 너무나 빈틈투성이였기에 오히려 공격할 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 층으로 가는 길에 뒤쪽 벽에 있던 독왕과 검왕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화무기가 이 층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멈춘 후 검왕을 돌아보았다.

“말총머리에 맨발. 너구나! 배신자가.”

검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용감하네.”

배신했으면서 이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검왕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곳에 몸을 담고 있었음에도 눈앞의 이 사람은 처음 보았다.

“당신처럼 용감한 사람은 처음이오.”

화무기가 싱긋 웃으며 검왕에게 말했다.

“그래도 안 봐준다.”

화무기가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벽에 적힌 글자들을 보았다.

“정말 있네.”

그곳에 글귀가 적혀 있다는 걸 알고 온 모양이다. 화무기는 뒷짐을 진 채 그 글귀들을 읽었다. 천천히 하나하나 다 읽더니 이 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아는 정사마와 다르군. 정말 징글징글하게 싸우기만 하던데.”

모두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젊은 그였는데 대체 어떤 정사마를 말하는 것일까?

혹시 전대 고수가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일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신중히 화무기를 관찰했다. 지금 당장은 그가 상황을 주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지금 필요한 건 상대에 대한 정보였다.

“갈 때 나도 글 한 줄 남기고 가야겠군.”

아래층에 있던 사람 중 한 사람은 그의 여유를 두고 보지 못했다.

“남기고 싶은 말은 미리 말해라. 내가 대신 남겨주마.”

풍천교주가 그를 도발한 것이다.

그러자 화무기가 이 층 난간에 기대서서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누구?”

일부러 상대를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그는 놀랍게도 이곳에 누가 있는지 정확히 모르면서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냥 검 한 자루 딸랑 차고 단신으로 천마신교 본단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난 중요한 사람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된다. 네 유언을 남기는 사람으로 기억해라.”

괜히 자존심이 상한 풍천교주였는데, 다행히 뒤늦게 화무기가 그를 알아보았다.

“아, 당신 풍천교주군.”

화무기는 풍천교주를 알아보았다.

“당신도 신교에 있다고 들었다.”

풍천교주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웠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분위기를 보이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너를 보낸 걸 보니 아마 네가 이곳에서 죽기를 바란 모양이다.”

화무기는 도발에 걸리는 대신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그자는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지. 당신들과 함께.”

화무기는 암흑궁주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내가 왜 놈을 죽이지 않았는지 아나? 그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더군. 소교주의 목을 바치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이번 배후의 수장인 암흑궁주가 무릎을 꿇고 비는 상대다. 진짜 수장은 이자였다.

그걸 확실히 알자 검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아들.’

진짜 수장을 자신에게 남긴 아들의 선택에 대한 칭찬이었다.

풍천교주는 확신했다.

“네가 안 죽여도 소교주가 그자의 머리통을 잘랐을 거다.”

“당신들은 정말 소교주를 믿는군.”

그가 다시 이 층의 벽을 돌아보았다.

“하긴, 이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지.”

화무기가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식이 특별난 건 그렇다고 치고. 아무리 그래도 천마신교가 정파와 교류한다? 이건 좀 부끄럽지 않나?”

돌아보지 않고 물었지만, 누구에게 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혀.”

검우진의 단호한 대답에 진패천은 내심 놀랐다.

‘교주가 진심으로 대답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않았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자 화무기는 질문의 대상을 바꿨다.

“우리 무림맹주에게 이걸 물어야겠군.”

화무기가 진패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신은 왜 여기에 있나?”

갑자기 자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물어올 줄 몰랐기에 진패천은 내심 당황했다.

차라리 부끄럽지 않냐고 물었다면, 부끄럽지 않다고 대답했을 거다.

한데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말하자면 길었다.

“무림맹주가 마교주와 이렇게 어울려도 되나?”

“난 무림맹주로 와 있는 게 아니네.”

“그럼 누구로 와 있는 거지?”

잠시 사이를 두고 진패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난 저 사람의 친우로 와 있네.”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진패천은 이게 맞나 싶었다. 친구라니? 아직 친구란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먼 관계이고, 설령 사이가 가까워지더라도 친구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한데 저 화무기란 놈이 몰아붙이니 자신도 모르게 친구라는 말이 나왔다.

그때 검우진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오늘만 친구합시다.’

자신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하는 전음에 진패천이 검우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화무기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인가? 진 맹주! 그대는 여기 있으면 안 돼! 결코 저 사악한 마교와 저 간교한 사도맹과 어울려서는 안 되네!”

진패천은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화무기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다른 느낌으로 말했다.

“저들과 어울리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네.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게.”

그는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처럼 보였다.

갑자기 화무기가 다른 사람처럼 굴자 그곳에 있던 모두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떠나라니까! 어서!”

이 순간만큼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다들 화무기가 연기로 무림맹주를 조롱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검우진만은 보았다. 아주 찰나간 그의 눈빛에 흐르던 붉은 기운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정파의 기도가 스쳐 지나갔음을.

‘분명 정파의 기운이었다.’

다시 말해 그가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 검우진은 오랜 기다림 끝에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자의 몸 안에 뭔가가 들어 있다.’

마교주는 해도 무림맹주는 못 할 거 같네

검우진은 직감했다.

화무기의 몸에 깃든 것이 오늘의 승패에 영향을 끼칠 것임을.

그가 최대한 침착하게 상대를 파악하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 천살성이 자신이 구화마공 대성을 이룬 것을 모르고 왔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풍류주점 이 층에 글이 남겨진 것도 알고 온 자인데.

그럼에도 상대가 저렇게 여유를 부린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

‘네가 구화마공에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이 질문의 답을 알아내야 한다.

갑자기 화무기가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가 웃음을 뚝 그쳤을 때, 그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친우? 다 늙어서 무슨 우정 타령인가?”

진패천은 황당한 마음으로 화무기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정말 정파의 선배가 자신에게 해주는 조언 같았다.

천마신교와 사도맹과 어울리다가 파멸한 누군가가 너는 나 같은 일을 겪지 말라며 해주는 절실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화무기는 앞서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진맹주, 당신 지금 외로운 거야.”

화무기는 차분하게 진패천을 파고들었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짐승이고 사람이고 다들 부대끼고 살고 있지. 다 당신 산에 살고 있지만, 정작 당신은 어때? 거긴 아무도 없지? 평생을 태양 아래 쨍쨍하게 살아왔으니 말 한마디 나눌 구름 한 점 없지?”

화무기는 진패천의 지난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외롭다고 천둥을 잔뜩 안고 있는 먹구름을 친구로 삼으면 되나? 저 구름에서 쏟아진 폭우가 당신 산에 사는 것들을 다 쓸어버릴 텐데.”

젊은 나이임에도 그는 애늙은이처럼 말을 잘했다. 어쩌면 정말 반로환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쨌든 화무기가 이렇게 말을 잘하니 정말 앞에 했던 말들은 그가 진패천을 조롱하기 위해 한 연기처럼 보였다.

외로워서 그렇다는 말.

원래라면 진패천의 마음에 깊이 박힐 말이었다. 애초에 검우진과는 맺어져서는 안 될 관계였으니까.

진패천이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담담한 눈빛으로 화무기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문득 조금 전에 받았던 전음이 떠올랐다.

―오늘만 친구합시다.

그 말이 방패가 되어 주었다. 화무기의 저 말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을 뚫을 수 없었다.

손주를 위해서 온 것이지만, 그래, 하루쯤 마교주와 친구가 되면 어떠하리.

“천살성이 되려면 이 정도는 미쳐야 하나 보네.”

나선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그가 진패천을 대신해서 도발했다.

“그러는 너는 친구 있냐?”

순간 화무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 없을 줄 알았다. 넌 친구 하나 없으면서 누구에게 뭐라고 하는 거냐? 나? 난 하나 있다.”

화무기의 표적이 진패천에서 풍천교주로 바뀌었다.

“그 친구 하나 만들려고 교주 자리까지 버렸다지?”

“제대로 못 들었나 보네. 교주뿐만 아니라 내 신물과 내 자존심까지 모두 버렸다.”

풍천교주가 기분 좋게 덧붙였다.

“대신에 더 재미있는 인생 살고 있다. 새외에 있었다면 이 재미있는 구경도 못 했겠지.”

풍천교주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실없는 소리 담당이었지만, 막상 적이 등장하자 그는 맨 앞에 나섰다.

화무기가 앞서 풍천교주가 했던 말을 꺼냈다.

“소교주가 아버지를 잃으면 그 상처를 갑옷으로 만들어 더 좋은 교주가 될 거라고 했나?”

아까 풍천교주가 검우진에게 했던 말이었다.

화무기가 걸어가서 주점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저 멀리 천마신교 본단에서 피어오르는 마화의 연기가 보였다.

“여기 있는 너흴 다 죽이고 저기 있는 놈들까지 모두 다 죽일 거다. 무공을 익힌 놈도, 익히지 않은 놈도, 남김없이 싹 다. 살아 있는 건 개 한 마리도 남기지 않을 거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그의 살기는 지금껏 경험했던 것이 아니었다. 생소하지만 강렬한. 살기에서 약속이 느껴졌다. 이 살기는 반드시 지켜, 라는.

화무기가 이쪽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교가 통째로 없어지면 좋은 교주도 될 수 없겠네?”

천마신교를 단신으로 몰살시키겠다는 광오한 말이었다.

회귀 전에는 천마전의 식솔들만 모두 죽였던 그였는데, 이제는 천마신교 전체를 죽이려 했다. 검무극의 회귀로 화무기의 운명 역시 바뀐 것이다.

반면 본단을 몰살시키겠다는 말에도 검우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화무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옆에 있던 권마는 검우진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검우진에게 보이는 것은 소리 없는 분노가 아니었다. 그는 분노조차 제쳐두고서.

‘교주님,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시는 겁니까?’

화무기의 오만함은 천마신교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다음에는 무림맹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정파 놈들을 싹 다 죽일 거다.”

은은히 흐르던 살기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백자강이었다.

“마지막은 너희들이다.”

정사마를 모두 몰살시키겠다는, 그야말로 무림 역사상 가장 광오한 협박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화무기가 풍천교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풍천교주, 네가 입을 잘못 놀린 바람에 저 사람들의 수하들까지 다 죽는 거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풍천교주에게 넘겼다.

풍천교주는 마음 같아선 더 입을 잘못 놀려주고 싶었는데, 걸린 목숨이 무림맹과 사도맹 무인들이니 차마 뭐라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화무기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해맑게 웃으며 더없이 여유로운 듯하다가도, 또 수없이 많은 목숨을 몰살시키겠다는 협박을 진심으로 하고 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애초에 다 죽이러 온 놈이니 저놈 말에 신경 쓰지 마시오.”

풍천교주가 진패천을 위해 나섰다면, 그를 위해 나서준 사람은 백자강이었다.

“저기 무림맹주는 친구 때문에 왔다는데, 사도맹주 그대는 뭐 때문에 왔지?”

화무기의 물음에 백자강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천살성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하러 왔다.”

“직접 보니까 어떤가?”

“생각보다 젊네. 보기보단 말이 많고. 아, 나이가 많을지도 모르겠군. 말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평생 두 번 다시 없을 즐거운 자리지 않나?”

그 말은 실컷 가지고 놀다 죽여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화무기는 진패천에게 그랬듯 백자강도 도발했다.

“정파와 마교 사이에 끼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있는 걸 보면 사파 무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백자강의 반응은 진패천과는 달랐다.

“뭘 어떻게 생각해? 살아남으려고 눈치 잘 보고 계시는구나! 잘하고 계십니다! 하겠지. 난 그런 놈들만 뽑아.”

원래도 이런 말에 전혀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는 백자강이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비사인이 좋아하는 것이었고.

백자강은 태양을 바라지도 않았고, 어둠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땅에 발을 딛고 바람처럼 산다.

이게 바로 백자강이 꿈꾸는 사도.

“교주고 맹주라고 대단히 거창한 거 바라지 마라. 천살성인 네가 거창하지 않듯이 말이다.”

검우진과 진패천은 백자강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평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 그였기에, 백자강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특히 진패천은 백자강의 저런 모습에서 자신을 반성했다. 저렇게까지야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맹주인데 자신은 너무 틀에 박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림맹주인데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이런 말을 하면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혹시 이 말이 정파 무림의 명예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스스로 옭아맨 제약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자신은 정말 자유로웠던 사람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진패천이 아닌 무림맹주의 삶만 살아왔음을 느꼈다.

그 넓은 무림맹 맹주전에서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이 좁은 주점에서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많이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화무기는 백자강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내가 본 사파는 음울하고 속을 알 수가 없었는데. 너는 시원시원하구나!”

“너도 내가 생각한 천살성과는 다르군.”

“네가 생각한 천살성은 어땠는데?”

화무기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쳤다.

“천살성을 타고났다고 이렇게 무작정 다 죽이겠다고 설쳐대지 않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밀려나면서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혈겁을 일으키게 되는 게 천살성. 한데 넌 아무 상처도 없는 것 같은데? 잘살아보려는 노력 한번 한 적 없는 그저 살인광 같은데.”

백자강의 도발은 매웠다. 그럼에도 화무기는 더욱 기뻐했다.

“오, 똑똑하기까지! 마음에 들어.”

화무기가 가만히 백자강을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오늘 너는 살려줄까?”

마치 나머지는 당연히 다 죽는다는 확신에 찬 말이었다.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은 언제든 환영이지.”

그러자 화무기가 백자강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며 백자강의 눈이 더욱 작아졌다.

손을 뻗으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거리를 지나 화무기는 아예 백자강 옆에 나란히 섰다.

마치 친구라도 되었다는 듯 함께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저 무림맹주 어떻게 생각하나? 마교주와 친구가 되고자 하면서도 무림의 정의를 지키겠다는 저 위선적인 정의 말이야.”

백자강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진패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백자강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마교주는 해도 무림맹주는 못 할 거 같네.”

처음으로 진패천에게 자기 생각을 밝히는 백자강이었다.

“나쁜 짓도 못 해, 생판 처음 보는 사람도 도와줘야 해,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의협과 선의를 위해 희생해야 해. 위선이라도 떨어야 간신히 갈 수 있는 길 아닌가? 나는 백 번, 천 번 위선을 떨어도 못 갈 길이라서.”

백자강이 천천히 옆에 선 화무기를 쳐다보며 물었다.

“솔직히 너도 그 길은 못 가잖아?”

화무기의 환한 웃음이 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거 실망인데? 나와 마음이 맞는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흐르는 긴장감.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웠기에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아까 네가 그러지 않았나? 네가 아는 정사마는 이렇지 않다고.”

이 층에서 벽의 글귀를 읽던 화무기는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보다시피 이쪽은 예외적인 상황이라서. 친한 척은 그쪽에 가서 하지.”

당연히 화무기의 입에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예외적인 상황이란 어린 소교주의 난장판에 휩쓸려 가는 상황인가?”

백자강이 그의 마음을 훅 치고 들어갔다.

“넌 소교주를 겁내고 있군.”

순간 화무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기 교주를 죽여 소교주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것도 소교주가 두려워서지?”

백자강이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백자강의 눈은 작았지만,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다.

“왜 소교주를 두려워하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화무기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살기였다. 이렇게 강력한 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살기는 인간이 낼 수 있는 살기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는 이 살기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무서운 살기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호신강기가 일제히 발휘되었다.

“이 버러지 같은 사파 잡종 놈이!”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항상 웃음으로 넘기던 화무기였는데, 그가 무섭게 돌변했다.

“그 작은 눈깔 뽑아버리기 전에 눈 깔아라!”

이번에는 앞서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과격한 모습이 튀어나왔다.

화무기가 폭언을 쏟아냈다.

“뒷골목에서 술이나 팔아야 할 사파 놈이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느냐? 진정한 악이 될 배짱도 없는 것들이, 너희는 정파 나부랭이들보다 더 한심한 것들이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백자강과 일전을 벌일 것 같은 기세였다.

두 사람 사이의 위기감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지만, 그것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화무기가 백자강을 조롱하는 거라 여겼다. 워낙 미친놈처럼 여러 모습을 보였으니까.

하지만 한 사람은 예외였다.

검우진은 내내 화무기의 눈동자만 주시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이번에는 마기가 스쳤다. 정말 자신이 아니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잠깐 영혼이 바뀌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과 같았다.

‘저 몸에 마인도 들어 있구나!’

검우진은 화무기의 몸에 앞서 봤던 정파 고수만이 들어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화무기가 자신이 봤던 사파는 안 그랬다는 말로 추측해볼 때.

‘저자의 몸에 마정사의 영혼이 모두 들어 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천살성이었기에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세 영혼뿐인가?’

여러 영혼이 한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는 경우는 검우진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검우진이 권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놈에게 한 방 먹이게.

정말 이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권마였다.

후우웅!

화무기를 향해 쇄도한 권마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백자강을 바라보고 있던 화무기가 살짝 몸을 틀며 뒤로 손을 내밀어 권마의 주먹을 막았다. 주먹은 그의 손바닥에 적중했다.

파아아앙!

충돌의 여파로 엄청난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른 탁자에 있던 젓가락 통과 올려진 빈 잔이 모두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화무기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꼼짝하지 않았다. 권마가 전력을 다해 주먹을 날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쉽게 막을 수 있는 주먹도 아니었다.

“마존이 감히 내게 주먹을 날려?”

화무기가 무서운 눈빛으로 돌아서던 그때.

후아앙!

망설이지 않고 날아든 권마의 두 번째 주먹이 먼저 화무기의 얼굴을 직격했다.

퍼어어억!

앞서 실력으로 볼 때, 분명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화무기는 의도적으로 맞았다.

머리통이 떨어져 나갔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뒤로 젖혀졌던 고개가 다시 앞으로 올라왔다.

그 강한 타격에도 그의 얼굴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엄청난 호신강기였다.

“소문보다는 덜 아프네?”

화무기의 도발에 권마의 무서운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하지만 권마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교주가 내린 명령은 한 방 먹여보란 것이었지 그와 생사결전을 펼치란 것이 아니었으니까.

검우진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화무기를 보고 있었다.

검우진이 알아낸 사실은 둘이었다.

그들은 불쑥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완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아니었다면 앞서 그 마인은 분명 폭주했을 것이다.

검우진은 마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존이 감히 내게 주먹을 날려?

감히? 마존에게 감히, 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마인이라면?

‘저 안에 역대 천마가 들어 있구나!’

전대일지, 전전대일지, 아니면 오래전일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마교주가 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제 처음 했던 질문의 답이 나왔다.

네가 구화마공에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 무엇이냐?

‘이자도 구화마공을 쓴다!’

내 심장이 뜨거웠으면 너희와 함께 죽었겠지.

“그래도 한 방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

화무기가 괜히 생채기 하나 없는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살이자 도발이었다.

하지만 권마는 그 도발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시선은 화무기를 향해 있지만, 그의 마음은 교주를 향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교주인데. 지금은 뭔가 다른 것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분명 자신에게 화무기를 공격하게 한 것으로 뭔가를 알아차린 것이 틀림없다.

그때 검우진의 전음이 권마에게 날아들었다.

―저자가 연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영혼들이 저자 몸에 들어가 있네.

검우진은 자신이 알아차린 것을 권마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중요한 일은 언제나 그에게 먼저 알렸다.

권마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어진 다음 전음이었다.

―역대 마교주 중 한 사람의 영혼이 저자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 같네.

이제야 권마는 알 수 있었다. 왜 검우진이 이렇게 심각한지. 다른 사람이 아닌 마교주가 들어가 있다면 이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대충 짐작 가는 이들이 있네.

아들은 출교했다가 돌아오면 매번 나가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전부 말해주었다.

이번에는 이놈을 이렇게 잡았고, 그 배후에는 뭐가 있는 거 같고, 앞으로는 이걸 조심해야 하고. 아들의 수다를 모두 들어줬던 검우진이었다.

그 시간은 보고를 듣는 시간이 아니라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으니까. 아들과 나누는 대화였으니까.

아들과의 그 시간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했다. 그냥 통천각 보고서만 읽고 지나갔다면 이 순간 곧장 떠올리진 못했을 것이다.

‘삼백 년 전 그들이다!’

이번 음모의 배후인 암흑궁의 시작이 삼백 년 전 천의궁과 무림맹과의 싸움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앞서 진패천에게 말했던 정파 고수는 천마신교와 사도맹과 어울렸다가 절실히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가 무림맹주인데도 그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삼백 년 전 무황신검이었구나!’

무황신검은 검우진도 알고 있는 역대 무림맹주 중 가장 유명한 인물.

자신이 보았던 두 사람이 무림맹주와 마교주라면? 아직 보지 못한 사파의 영혼 역시 그 시대의 사도맹주이리라.

이제 검우진은 화무기가 왜 이렇게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앞서 권마의 주먹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모습으로 볼 때, 단지 영혼만 깃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힘이 저자에게 모두 합쳐졌다!’

만약 그렇다면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이쪽의 숫자가 많다고, 그 숫자만큼 강함이 합쳐지진 않을 테니까.

고수일수록 합공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언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지만, 반대로 다른 이가 극상승의 무공을 펼치고 있는데 개입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

만약 놈이 압도적인 무위로 각개격파를 하려 든다면? 자신과 두 맹주를 제외한 나머지 이들은 놈에게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쪽에서 먼저 단숨에 놈을 죽이는 것.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천마멸세였다.

깔끔하고 확실하게 죽일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이 휘말려서 죽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화무기 역시 천마멸세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천마멸세가 발휘되는 그 찰나의 순간.

대마벽을 세우고.

대마벽이 녹아내리는 그 사이 천마멸세를 발출한다.

만약 상대가 천마멸세를 쓰면 자신은 이렇게 대응할 것이다.

적어도 그냥 죽지는 않는다는 뜻.

만약 저 화무기도 같은 선택을 한다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에 떠오른 방법은 천마혼으로 죽이는 방법이다.

천마혼이 현신하면 천마멸세를 사용할 수 없다. 천마혼은 구화마공이 대성을 이루고 그 무학의 극의에서 탄생한 절대적인 존재였기에, 구화마공으로는 천마혼을 상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태생적으로 천마혼은 서로 싸우기를 거부하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하나가 현신하면 다른 하나는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기에, 과연 누구의 천마혼이 현신할지는 알 수 없었다.

검우진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두 맹주에게 전음으로 전했다.

만약 화무기가 구화마공을 쓴다면 분명 두 맹주에게 쓸 가능성이 컸기에 그들도 미리 알고 있어야 했다.

진패천은 내심 긴장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이었다. 상대가 구화마공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인 것은.

무황신검이 저자 몸에 있다고?

역대 맹주 중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무황신검이었다. 그가 정파 무림에 남긴 역사의 발자취는 그야말로 위대했으니까.

만약 검우진의 말대로 진짜 그라면? 왜 그가 천살성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무림사에 숭고하게 남은 그의 역사 이면에 다른 비화가 있다는 의미인가?

반면 백자강은 몸에 깃든 사도맹주가 누군지는 관심 없었다.

‘저놈이 구화마공까지 쓴다 이거지?’

두려운 마음만큼 호승심이 생겼다. 어쩌면 오늘 드디어 구화마공을 직접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전음이 오가던 그때, 화무기는 새로운 사람을 도발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우리 독왕은 말이 참 없네.”

상대의 정체를 알고서도 독왕을 도발한 사람은 자신들이 아는 한 화무기가 최초였다.

“궁금하지? 내가 만독불침인지 아닌지.”

독왕은 구석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앳돼 보이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깊어진 눈빛으로.

“넌 절대 만독불침이 아니다.”

검우진과의 대화를 제외하고, 독왕이 이곳 풍류주점에서 처음으로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왜 내가 만독불침이 아니라고 확신하지?”

독왕이 그렇게 여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런 고귀한 기연이 네게 주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독을 쓰는 이들에게 만독불침은 천적을 넘어 천재지변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도 독왕은 고귀한 기연이라 표현했다. 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만독불침조차 적대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검무극이 그 귀한 기연을 받은 것은 그만큼 고귀한 성품이기 때문이라 여겼다.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었음에도 화무기는 화내는 대신 웃었다.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지 않는 한 화무기는 어지간한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분노도 웃음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만독불침은 아니지. 대신 구천구백구십구독불침쯤은 되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독에 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

“과연 내게 통하는 독을 정확히 찾아낼 수 있을까? 어떤 독이라도 하독하는 순간, 너부터 죽여버릴 건데.”

화무기가 천천히 독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움직이자 그곳을 흐르던 공기의 결이 달라졌다. 백자강에게 다가갈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아니면 지금 그냥 죽여버릴까?”

화무기의 두 눈빛에서 붉은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당장에라도 독왕에게 쇄도해서 목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반면 위기의 순간에도 독왕은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왜 하독하지 않지? 내가 겁나나?”

하지만 독왕이 무방비로 있는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교주님의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오직 검우진의 명령이 있을 때 하독한다는 독왕의 의지. 다시 말해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그냥 죽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게 통하는 독을 어떻게 찾을 거냐고?”

독왕의 두 눈에서 녹광이 번지듯 새어 나왔다.

“안 찾을 거다.”

이어지는 놀라운 이유.

“명령이 내려오면 난 네게 만 가지 독을 다 하독할 거니까.”

그야말로 광오한 말이었다. 한 사람이 만 가지 독을 어찌 가지고 다니겠는가? 하지만 그 말이 독왕의 입에서 나오자 무게감이 달랐다.

독왕을 바라보던 화무기의 얼굴에 광기에 찬 희열이 스쳤다.

“어서 네 머리통을 잘라서.”

화무기가 검우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에게 가져다주고 싶다. 네 죽음을 저 교주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고 싶다!”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 표가 나진 않았지만, 이곳에 오고 난 이후 화무기의 살심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화무기가 독왕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기던 바로 그때!

소리 없이 뽑혀 나온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앞을 막았다.

놀랍게도 그 검은 검왕의 검이었다.

그가 독왕을 위해 나서주리라 생각지 못했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당사자인 독왕 역시 의외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 처음부터 검왕은 독왕을 지켜주기 위해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었다.

“감히 내 앞에서 검을 뽑아?”

그 말을 검왕에게 했으니 그 역시 실로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사마를 모두 몰살시키겠다고 했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검왕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해해라. 내가 내세울 게 고작 이것밖에 없어서.”

고작이라 하기에는 너무 강력했다. 검왕의 손에 백화검이 들리자 그 기세는 수백 장 높이의 성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무기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검 주위를 흐르는 차가운 한기와 만나자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백화검은 마치 방파제처럼 붉은 기운의 파도를 막고 있었다.

“차가운 남자였네? 우릴 배신하고 소교주와 손을 잡았다기에 아주 뜨거운 심장을 지닌 줄 알았는데.”

검왕이 담담히 대답했다.

“내 심장이 뜨거웠으면 너희와 함께 죽었겠지.”

화무기의 얼굴에 새로운 희열이 차올랐다. 정말 그의 표정이 이랬다. 이거 정말 재미있잖아?

“넌 두 번째로 죽여주지.”

화무기가 그를 지나쳐 독왕에게 다가서려던 그때.

벼락처럼 빠르게 검왕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각도로 치고 올라간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화무기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이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지? 싶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는데, 화무기는 피했다.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화무기는 오만한 눈빛으로 검왕을 쳐다보았다.

“첫 번째가 되고 싶어서?”

검왕은 자신을 베기 전에 독왕에게 갈 수 없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검왕이 차분한 눈빛으로 지난 일을 떠올렸다.

“암흑궁주는 내게 항상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이 일은 천의를 따르는 일이라고.”

“배신자여, 너는 결국 천의를 따르지 않았잖아?”

“천의는 너희에게 있지 않았으니까.”

순간 화무기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럼 그 천의, 어디에 있나? 여기에 있나?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데?”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놀라운 말을 했다.

“천의는 소교주에게 있다.”

검우진도 진패천도 백자강도, 그리고 풍천교주와 권마와 독왕도 모두 말없이 검왕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화무기의 눈빛이 달라졌다.

화무기에게서 새로운 인격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배신자 따위가 천의를 입에 담다니!”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던 영혼임을.

‘사도맹주의 영혼인가?’

아니다. 천의란 말에 저렇게 격렬하게 반응하는 걸로 볼 때.

‘천의궁주구나!’

이걸로 검우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시 전쟁에 천마신교와 사도맹까지 개입했고,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갇힌 영혼들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장장 삼백 년의 시간을.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지금 눈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화무기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너는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나?”

그러자 자유를 꿈꾸었던 검왕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늘의 뜻은 모르지만, 하늘이 뭔지는 알지. 새가 살고, 구름이 살고, 바람이 살고, 해가 사는 곳이지.”

검왕은 하늘을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한 사람을 언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보고 싶은 그를.

“너희가 천의, 천의, 천의 타령을 할 때, 소교주는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했지. 거창한 뜻이 아니라 그냥 허리 펴고 하늘 한번 올려다보라고 했다.”

그 말에 검우진이 아들을 떠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패천과 백자강도 마찬가지였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결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검왕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솔직히 밝혔다.

“소교주를 보면서 알게 되었지. 천의란 거창한 의미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천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에게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천의는 내리는 게 아니라 짊어지는 것이다.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앞에 놓인 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것이지.”

검왕이 화무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너는 네 앞에 놓인 짐이 보이나? 평생 못 본 척하며 천의만 찾은 건 아니었고?”

지금까지 화무기 몸속의 영혼들은 아무리 분노해도 그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의가 없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궁을 배신한 상대에게 들으니, 그 분노는 선을 넘었다.

쉬이이익.

빛처럼 빠르게 화무기의 검이 뽑혀 나왔다.

그의 검은 특이하게도 검날이 검은 흑검(黑劍)이었다.

날아든 검을 막는 순간, 검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쉬이익!

앞서 보다 더 빠른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을 때.

푸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흑검이 찌른 것은 물컹물컹한 사람 모양의 인형이었다. 인형이 화무기를 보며 왠지 씩 웃는 것 같더니.

곧이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뒤에 풍천교주와 검왕이 함께 서 있었다. 화무기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풍천교주가 그를 돕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공격이었기에 풍천교주는 개입을 미루지 않았다.

“주점 이름 아직 못 정했네.”

풍천교주의 농담에 검왕은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화무기의 검에 담긴 엄청난 내공에 하마터면 손목이 부러질 뻔했다.

“대충 지어주십시오.”

“싫네. 멋지게 지어줄 거네.”

앞서 기세로 볼 때, 몇 번이나 달려들어도 들었을 화무기였는데, 그는 둘을 보며 웃고 있었다. 다시 원래의 그로 돌아온 것이다.

화무기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는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뽑아 든 흑검이 기지개와 함께 허공을 향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싸워볼까?”

화무기의 시선이 검왕과 풍천교주, 독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굴 먼저 죽여줄까? 아니면 셋 다 한꺼번에 죽여줄까?”

화무기는 뒤에 있는 다른 네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끼어들 테면 얼마든지 끼어들라는 모습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

“이리로 와라.”

말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화무기가 검우진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우리 교주가 친히 부르는데 어쩌지? 여기 좀 바빠서. 기다려, 머릿수를 좀 줄이고 갈 테니까.”

그러자 검우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놀라운 한마디.

“너 말고.”

검우진의 눈에서 차가운 마기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화무기의 몸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정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도발이 날아들었다.

“병신들처럼 그 안에 있지 말고, 이리 다 와라.”

같은 천마라는 게 부끄러우니까

권마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모처럼 듣는 교주의 욕설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욕을 곧잘 하던 교주였다.

소교주가 되기 전이나, 소교주 시절의 교주는 지금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할 말이 있으면 했고, 감정 표현도 잘했다. 혈천도마를 형이라 부르던 시절도 존재했으니까.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살면서 욕은 자신보다 교주가 더 많이 했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검우진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저 사람이 이런 욕을 할 줄이야?’

진패천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알았소? 하는 눈빛에 백자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이건 알았다. 욕도 하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법.

‘욕쟁이 교주였단 말이지? 지금까지 어찌 참았지?’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전음을 듣지 못했던 다른 이들은 검우진의 말로 알 수 있었다. 화무기가 연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다른 영혼들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검왕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공격을 막아준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고마움을 담은 그의 눈빛에 풍천교주는 든든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만약 화무기의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계속 날아들었다면, 그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 날아든 공격을 막은 것이지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강하다!’

정말 이렇게 심후한 내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내공만이 아니었다. 그 깔끔한 움직임이라니! 검왕은 그와 계속 싸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강자를 만나니 그의 피도 끓기 시작했다.

독왕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화무기가 뒤로 돌아서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교주가 자신에게 향한 화무기의 관심을 돌렸다는 것을.

독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교주는 이 싸움에서 자신의 활약을 바라지 않는다.

교주가 자신에게 바라는 건 그가 이 싸움에 졌을 때, 소교주를 지켜주라는 것.

앞서 그 명령을 내렸을 때 독왕은 말했다. 세상 사람 모두를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소교주를 지켜주겠다고.

그럼에도 오늘 자신을 이 자리에 앉혀 두는 것은 상대가 누군지를 똑똑히 봐두라는 의미이리라. 협박이야말로 상대를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화무기가 천천히 검우진을 향해 돌아섰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의 눈빛은 오직 검우진만을 향해 있었다.

첫 번째로 죽이려던 독왕도, 끼어든 검왕이나 풍천교주도 이제 그의 관심에 없었다.

당연했다. 지금은 화무기가 아니라 다른 영혼이 검우진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검우진은 누가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삼백 년 전 마교주!

“어디서 그딴 말버릇이냐?”

당장에라도 격돌할 것 같은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검우진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누군데?”

이들은 아직 아무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앞서 천의에 대한 해석 차이로 검왕에게 분노한 천의궁주를 제외하고는 검을 뽑아 든 적도 없었다.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저 영혼들에게 제약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제약을 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미쳐 날뛰게 해야 한다.

천살성 속 영혼들이 날뛰면 날뛸수록 천살성을 이길 가능성은 커질 테니까.

원래라면 상대가 혼란스럽고 예측이 불가할수록 불리하겠지만, 이곳에 있는 일곱 고수의 실력이라면 그 혼란은 더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당신이 누구냐니까.”

“나는…….”

화무기 속 마인은 자신이 누군지를 밝히지 못했다. 마교주의 입을 막을 정도로 강력한 제어였지만, 검우진은 더욱 그를 자극했다.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못하는 겁쟁이 새끼가!”

그 말이 화무기에게 전해지던 그 순간.

다음 순간!

하나의 제약이 풀어졌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던 눈동자에 마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검우진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기운이 스쳤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마기를 드러냈다.

화무기 속 영혼이 자신을 밝혔다.

“나는 삼백 년 전 천마신교를 이끌었던 혁도천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후대의 마교주에게 그런 욕설을 듣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밝힌 혁도천이 준엄하게 말했다.

“당장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엄청난 마기가 검우진을 향해 쏟아졌다.

쏴아아아아아악.

주점 내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검우진에게만 쏟아진 마기였음에도,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때 들려온 한마디.

“싫다.”

혁도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노보단 황당함에 가까운 표정이 지어졌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상대하는 마교주가 검무극이 시험에 들었던 소천동의 벽에 선대 교주들에게 병신들이라는 글을 남겼던 사람이라는 것을.

검우진은 삼백 년 전 마교주라고 호락호락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불같은 성격을 이용했다.

“넌 천마가 아니니까.”

자신을 부정당하자 혁도천은 분노했다.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인가? 내가 바로 혁도천이다!”

쩌어어어어억.

바닥이 갈라지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공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오직 마기의 기운으로 부서진 것이다.

사실 이 마기만 봐도 그가 혁도천임을 충분히 증명하고 남았다. 단지 내공이 심후하기에 강한 게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기가 아니라 마교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검우진은 겁을 내기는커녕 그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당신이 진짜 천마라면 이미 그 속에서 나왔겠지. 남의 몸뚱이에 갇혀 본교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진 않겠지.”

정곡을 찔린 분노가 불처럼 치솟았다.

그래, 미쳐라! 네 감정을 드러내라! 네 마기를 폭발해서 다 휘저어버려라! 다른 영혼들을 찢어버려라!

혁도천이 내민 흑검이 검우진을 향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기세였다.

“혹시라도 그대가 진짜 천마라면.”

모두들 천마라는 증거를 보여라, 라는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같은 천마라는 게 부끄러우니까.”

하지만 검우진의 입에서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자결해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패천이 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으로 볼 때, 저 영혼은 그의 말처럼 삼백 년 전 마교주 혁도천이 틀림없었다.

한데 자결하라고? 심지어 상대가 영혼인데?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저 말을 했다는 의미였다.

백자강은 이 분위기에서 하마터면 큰소리로 웃을 뻔했다.

그때 실제로 큰소리로 웃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화무기였다.

마기가 폭발하려던 그때,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폭발 직전의 혁도천이 들어가고 다시 화무기가 나온 것이다.

“소교주가 미친놈처럼 굴면서 사람을 웃긴다더니, 아버지를 닮았군.”

이 순간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튀어나오는 건 무작위로 그때그때 다르게 튀어나오지만, 그들을 제어하는 건 결국 저 화무기라는 사실을.

그가 제어하지 않았다면 이미 혁도천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을 것이다.

화무기가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술을 찾았다.

마치 열받은 혁도천을 달래주기라도 하려는 듯, 술을 큰 잔에 부어서 마셨다.

화무기가 검우진을 향해 당신도 마실래? 하는 표정으로 술병을 들었다.

검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멋이라곤 없군. 천마라면 술병째 마셔야지!”

화무기가 앞서 백자강이 끓였던 탕 요리를 안주로 떠먹었다.

“좀 식어서 그렇지 맛있네. 이건 누가 만든 건가?”

화무기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검우진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보인 이 여유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왜 놈은 곧바로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 걸까?’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기에 즐기고 싶어서? 자신들을 가지고 놀며 강함을 만끽하려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검우진은 점차 고조되는 놈의 살기로 다른 해답을 찾았다.

‘지금 놈도 신중하다.’

검우진은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해도 화무기의 살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음을.

그는 자신의 몸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해서.

‘천살(天殺)을 모으고 있다.’

하늘이 내린 이 살성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렇게 채운 살심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이리라.

화무기는 바로 그때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로 추측한 한 가지.

그에게 이 싸움이 너무나 손쉽다면, 이렇게 살심을 모을 필요는 없겠지.

이제 검우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살심이 더 채워지기 전에 싸우거나!

아니면 그의 몸에 깃든 영혼들을 뒤흔들거나.

검우진이 선택한 방법은 두 번째였다.

이쪽에도 자신과 무림맹주, 사도맹주가 있고, 저쪽에도 삼백 년 전 마교주와 두 맹주가 있다.

운명이 이렇게 만나게 했다면, 분명 저 영혼들이 어떤 역할을 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속에 영혼이 몇 개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정체를 드러낸 영혼은 셋. 무황신검과 혁도천, 그리고 천의궁주.

있다고 추측되지만, 아직 드러내지 않은 영혼은 사도맹주.

검우진이 혁도천 다음으로 노린 상대는 그들 중 가장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검우진은 진패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황신검이 보고 싶지 않으시오?

진패천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무기에게서 무황신검의 영혼을 유도해 내라는 의미임을.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무황신검만큼은 다시 제대로 만나보고 싶었다.

진패천이 화무기에게 말했다.

“술 한 잔 주게.”

화무기가 진패천을 보며 껄껄 웃었다.

“좋구나! 호탕하게 술 마실 것 같은 마교주는 몸을 사리고, 제일 샌님일 것 같은 무림맹주는 아주 호탕하구나!”

화무기가 술병을 들며 어서 가까이 오라고 진패천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내가 직접 따라주지.”

스르르륵.

하지만 진패천은 가까이 가지 않고 허공섭물로 술병을 자신에게 가져왔다.

그러자 화무기가 짐짓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샌님 맞네.”

진패천의 다음 행동이 뜻밖이었다.

그가 술병을 들고 화무기에게 정중히 물었다.

“맹주님, 제 술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화무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지어지던 그때.

일순간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한 잔 주게.”

차분한 목소리로 이미 다른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었다.

진패천은 잠시 말없이 화무기를 응시했다. 그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 진짜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검우진은 진패천이 그를 불러낸 방식에 감탄했다. 무황신검을 자극해서 불러낸 것이 아니라 상대의 성격에 맞게 불러낸 것이다. 단 한 마디의 정중한 말로.

진패천이 술병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또르릉.

진패천이 그에게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술을 비운 후 화무기가 물었다.

“자넨 내가 누군지 아나?”

“무황신검이시지 않습니까?”

“나인 줄 어떻게 알았나?”

정말 그가 무황신검이란 사실에 진패천의 마음에 격정이 흘렀다.

‘검 교주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진패천이 차분한 눈빛으로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맹주님이십니다. 누군가 제게 누굴 제일 존경하냐고 물으면 항상 맹주님이라고 대답했었지요.”

순간 무황신검의 얼굴에 감격이 스쳤다. 악인들이 아닌 정파인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인데, 자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말을 듣다니!

“어쩌다 그 몸에 들어가신 겁니까?”

진패천의 물음에 무황신검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악령을 흡수하는 천의궁의 신물이 있었네. 다른 자들을 흡수하면서 나까지 함께 빨아들였지.”

“하면 아까 그 마교주는 왜 그곳에 있었던 겁니까?”

천의궁주가 있는 건 이해되었다. 한데 왜 마교주가 함께 있는 것일까?

무황신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가장 존경한다는 후대의 무림맹주에게 자신이 직접 그 전쟁에 천마신교와 사도맹을 끌어들였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진패천이 생각하기에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혹 그들을 부른 게 맹주님이셨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무황신검은 대답 대신 다른 날을 떠올렸다.

“천의궁과의 전쟁을 선포하던 날이 기억나네. 모든 정파인들 앞에서 당당히 말했지. 악을 뿌리 뽑고 무림을 지켜내자고. 당시의 난 자신 있었네. 내 손으로 금방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지.”

무황신검의 눈빛에 어둠이 가라앉았다.

“한데 전쟁은 금방 끝나지 않았지. 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네. 모두 다 내 잘못이네.”

같은 맹주로서 그게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궁금한 건 그의 마음이 아니었다. 아직 진패천은 앞서 했던 질문의 답을 듣지 못했다.

“마교주를 끌어들인 게 맹주님이셨습니까?”

결국 무황신검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래, 나였네.”

무황신검의 눈에 여러 감정이 다 피어올랐다. 그중 가장 큰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나는 수하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을 뿐이네. 확실하게 전쟁을 끝내 더는 수하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 설령 내 명예가 훼손되더라도 그게 정파 무림을 위한 길이라 믿었고. 내 선택은 무림을 위해서였네!”

진패천은 그가 점점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하늘은 나를 마교주나 사도맹주와 같은 취급을 했지! 전쟁을 일으킨 천의궁주와 같이 빨아들였지!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진패천은 문득 목구멍으로 치미는 이 말을 애써 삼켰다.

‘과연 그 이유뿐이었을까요?’

진패천이 아무 말이 없자 무황신검은 자신을 비난한다고 생각했다.

“자네였다면 달랐을까?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음에도 마교주와 사도맹주와 함께 있는 자네인데?”

여전히 진패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달랐을 거요.”

진패천을 대신해서 말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손주를 위해 단신으로 이곳까지 달려오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전쟁에 나를 부르지는 않을 것이오. 진 맹주는 그런 사람이지.”

검우진과 진패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진패천은 검우진이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말이 옳다. 자신이었다면 천마신교를 끌어들이지 않았을 거다. 설령 그 싸움에서 자신과 모두가 죽게 될지라도.

반면 무황신검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마교주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정말 치욕적인 일이었다.

검우진이 이렇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는 저 몸에서 변수가 발생하기를 바라서였다.

살심이 쌓이는 만큼 혼란도 커져야 했으니까.

“무림을 걱정해서 그랬다고?”

검우진은 깊어진 눈빛으로 그의 두 눈을 뚫어질 듯 응시했다.

“그럼 증명해 보시오.”

검우진은 무엇을 어떻게 증명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검우진은 그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뭔가를 해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케케묵은 넋두리는 그만하고, 다른 사람 나오라고 하시오.”

너는 살아라

케케묵은 넋두리 그만하고 다른 사람 나오라는 건, 넌 그만 떠들고 이만 꺼지라는 말이었다.

크게 분노했어야 할 상황에서 무황신검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앞서 날아와 박힌 말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림을 위해서 그랬다면 증명해 보시오.

정말 무림을 위해서 마교를 끌어들였을까?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물었고, 긴 고민 끝에 그렇다고 결정을 내린 문제였다.

하지만 무황신검은 안다. 정말 그랬다면 애초에 긴 고민을 하지 않았으리란 것을.

마교를 끌어들인 건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전쟁을 자신이 끝내고 싶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쟁을 끝내지도 못하고 패배한다면?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무황신검의 죽음과 함께 수많은 희생을 낳으며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명성을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패배는 두려웠다.

어떻게든 전쟁에서 이기고 자신이 직접 정파 무인들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전쟁을 일찍 끝내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지만 결국 우린 승리했다고.

검우진이 그를 한 번 몰아붙였다.

“진짜 무림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진 맹주에게 증명할 수 있소?”

무황신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진패천이 나섰다.

“증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황신검은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진패천이 검우진을 먼저 쳐다보았다. 미안하지만 이 일은 내게 맡겨달라는 눈빛을 보낸 후 다시 무황신검에게 말했다.

“맹주님만의 방식으로 노력하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맹주님을 믿습니다.”

순간 화무기의 몸을 빌린 무황신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약 상대가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고 나왔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합리화했을 거다.

하지만 믿는다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무황신검은 상대의 마음을 이용하는 악인은 아니었으니까.

진패천이 어찌 모르겠는가?

무황신검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말 못 할 심정을.

그래서 믿는다고 했다. 진짜 그가 악인이었다면,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뻔뻔하게 진짜 무림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우기고 있었겠지. 어떻게든 증명하겠다고 큰소리쳤겠지.

사람들에게는 각자만의 인생이 있고 각자의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해할 테고, 또 누군가는 비판하겠지.

다른 사람은 그를 몰아붙이더라도 자신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존경했던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대의 무림은 제가 지켜내겠습니다.”

이것이 진패천의 진심이었다.

“맹주님께서 그 몸속에 계시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천살성에게 검을 겨누게 될 겁니다. 그를 죽이려 검을 휘두를 겁니다. 그 점 미리 사죄드리겠습니다.”

진패천은 후배 맹주로서, 정파의 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예를 모두 갖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몰아붙인 것보다 지금 진패천의 저 예의가, 저 바름이 그를 더욱 자극하고 있음을.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진패천은 가장 훌륭하게 자신의 의도대로 해주고 있었다. 무황신검의 영혼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무황신검은 끝내 아무 말도 못 한 채 화무기로 돌아왔다.

화무기는 탁자에 걸터앉으며 짐짓 고약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샌님처럼 굴더니 매운 생강이었네.”

“무슨 뜻인가?”

“늙은이 마음을 제대로 흔들었잖아.”

화무기가 탁자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서 마셨다.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무슨 맹주를 한다고. 맹주쯤 되면 이렇게 독하고 악랄해야지.”

화무기가 진패천을 비난했다. 무황신검을 흔든 만큼 진패천을 흔들겠다는 모습처럼 보였다.

진패천은 그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맹주님을 믿는다.”

그러자 화무기는 진패천이 아니라 검우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당대 무림맹주가 이렇게 순진한데, 아직 정파를 박살 내지 못한 건가?”

검우진과 진패천 모두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물론 검우진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무기의 반응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천살성이 무황신검을 신경 쓰고 있다.’

그렇다는 의미는?

‘천살성과 영혼들이 이어져 있다.’

그 영혼들이 천살성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 영혼들을 뒤흔들겠다는 자신의 선택은 옳았다.

화무기가 술을 마시며 모두에게 말했다.

“정파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지? 믿음? 믿으면 어떻고 믿지 않으면 또 어때서? 당신들은 너무 남을 의식하고 살아.”

진패천이 화무기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가 믿는 건 뭔가?”

“내가 믿는 건 단 하나, 오늘의 이 일이 오직 필연이라는 사실뿐이다.”

“자네는 스스로를 필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나?”

화무기의 눈빛이 오만하게 빛났다.

“그건 너희들이 그렇게 여겨야지. 오늘의 죽음이 우연이라면 너희에게 너무 비극적인 일이지 않나?”

그때 누군가 딱 잘라 말했다.

“우연이다.”

말을 한 사람은 백자강이었다.

“오늘 살아도 우연이고, 죽어도 우연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필연이라 여기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다가 우연히 네가 천살성이 된 거다. 우리도 여러 우연이 겹쳐서 맹주가 된 것이고. 그러니 널 거창하게 포장하지 마라.”

그때 화무기의 눈빛이 바뀌었다. 지금껏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기운, 사기(邪氣)였다.

“내가 있는 걸 알고 있었지?”

그는 삼백 년 전 사도맹주 주가신이었다. 혁도천은 검우진이 자극해서 나왔고, 무황신검은 진패천이 정중히 권해서 나왔다.

한데 주가신은 스스로 나왔다.

“마교주가 있고, 무림맹주가 있으니 당신도 있었겠지.”

백자강은 삼백 년 전 사도맹주가 화무기의 몸속에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한데 왜 나를 찾지 않나?”

“보고 싶지 않았소.”

“왜?”

“어차피 서로 죽일 상대인데 봐서 뭐 하겠소? 찝찝하기만 하지.”

주가신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백자강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사도맹은 어떠한가?”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소.”

주가신의 시선이 검우진과 진패천을 향했다.

“정파는 우릴 언제든 마교와 손을 잡을 기회주의자로 여겼고, 마교는 항상 무시하고 경멸해 왔지.”

주가신의 시선이 다시 백자강을 향했다.

“정파와 마교 사이에서 피를 뒤집어쓴 것은 언제나 우리였다.”

주가신은 무림일통을 꿈꾸었다.

천의궁과 무림맹과의 전쟁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비궤에 빨려 들어가면서 그의 꿈은 무산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그 꿈을 잊고 있었는데, 백자강을 보니 자신의 꿈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남 탓할 일은 아니지 않소? 우리가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이런 백자강의 태도가 오히려 주가신의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삼백 년 후 만난 이 사도맹주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대의 사도는 무엇인가?”

주가신의 물음에 백자강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도? 내게는 그런 거창한 것 없소. 내 밑에 들어오면 잘 먹고 잘살게 해주겠다, 그게 전부요.”

가만히 백자강을 응시하던 주가신이 전음을 보냈다.

―너는 살아라.

정말 생각지 못한 전음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래서 내가 못다 이룬 무림 정복의 꿈을 이뤄라.

화무기나 다른 영혼들에게 대화를 감추기 위해 보내는 전음이 아니었다. 검우진과 진패천, 이곳의 다른 이들이 못 듣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이 싸움에서 너만은 살게 해주겠다.

백자강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말이오?

―천살성을 설득해서.

그 말을 들으니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이 영혼들과 저 천살성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어떻게 무림 정복을 할 수 있다는 거요?

모두 백자강이 화무기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지만,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주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교주와 무림맹주가 죽고, 이후 마교 본단과 무림맹까지 몰살당하면 그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는 거다.

십이지왕이 모두 죽은 지금, 누군가는 실질적으로 무림을 지배해야 했다.

―저 천살성은?

잠시 사이를 두고 주가신이 말했다.

―그를 모셔야겠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서게 되는 거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백자강의 질문이 이어졌다.

―천살성은 당신들 무공을 모두 익혔소?

―그렇다.

―내공도 모두 가졌고?

―우리의 내공은 물론이고 선천지기까지 모두 가져갔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합쳐진 존재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자신들은 삼백 년 전부터 이 몸, 저 몸 온갖 몸에 심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타고난 신체와 정신력을 지녔어도 자신들의 영혼과 힘을 버텨내지 못했다. 대부분 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렸다.

하지만 천살성을 타고난 화무기는 달랐다. 그는 자신들의 내공과 영혼을 받아들이고, 무공까지 모두 흡수했다.

하지만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통하지 않았기에, 결국 암흑궁주는 그를 봉인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약점이 뭐요?

―그건 왜 묻는 거지?

―나중에 그가 나까지 죽이려 들 수도 있지 않소?

―네가 배신하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다.

―약점이 있긴 있소?

없다는 말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백자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저 천살성에게 뭔가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약점을 알려준다면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어떻게든 약점을 알아내려는 모습에서 주가신은 백자강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너,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없군.

백자강의 작은 눈이 웃음으로 사라졌다.

―목숨을 구걸해서 저 천살성 밑으로 들어간다? 지금 마교와 정파 사이에 끼어서 눈치 보는 것보다 더 자존심이 상할 것 같아서.

잠시 사이를 두고 백자강이 물었다.

―삼백 년 전 당신이라면 받아들였겠소?

―나는 받아들였을 거다. 그리고 또 다른 기회를 노렸겠지.

이인자가 되어서 화무기를 죽일 기회를 찾았을 거란 의미.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나?

―그래서 거절하는 거요.

백자강이 거절한 이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난 이쪽이 이길 거 같거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지만, 적어도 오늘 살아남는다면 사도맹이 쉽게 망할 일은 없겠군.

좋은 평가에 백자강도 좋은 말을 해주었다.

―당신도 아깝소. 시대를 잘 타고났으면 꿈을 이뤘을 거 같은데.

화무기가 웃었다. 얼핏 봐선 주가신에서 화무기로 바뀌며 화무기가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마지막 웃음은 주가신의 웃음이었다.

화무기는 전음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백자강을 응시하며 말했다.

“말로는 마교와 정파 눈치를 본다고 하면서, 가장 큰 야망을 지닌 자는 너로구나.”

검우진과 진패천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백자강은 주가신의 제안에 관해 애써 설명하지 않았다. 검우진이나 진패천이 오해할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에서 검우진은 신뢰를 느꼈다. 화무기가 무슨 말을 하든, 그는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모습이었으니까.

대신 백자강은 꼭 알려야 할 것은 모두에게 알렸다.

“영혼들끼리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오. 저자는 우리가 봤던 그들의 무공을 모두 익혔고, 내공과 선천진기까지 가졌다고 했소. 그러니 그들 모두가 합쳐진 상대와 싸운다고 생각해야 할 거요.”

막연히 짐작만 했던 것으로, 이 싸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널 살리려고 애쓰던데, 너는 먼저 죽으려고 안간힘을 쓰는구나.”

화무기는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 가득한 것은 강렬한 살의였다.

물론 백자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상대를 이간질했다.

“사파 놈들이 원래 뒤통수를 잘 친다. 그러니 안에 있는 그 사람 조심해. 언제 네 영혼의 뒤통수를 후려칠지 몰라.”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자 검우진이 나섰다.

“이제 서로 볼 사람도 다 본 거 같으니, 실력을 볼까?”

주가신을 끝으로 화무기에 몸에 깃든 네 사람을 모두 보았다.

이들과의 만남이 화무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검우진은 이 선택이 옳다고 믿었다.

화무기가 흑검을 뽑아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자, 누가 먼저 올 텐가?”

검우진은 화무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우린 우리 편한 대로 싸울 거다. 일대일로 싸우다가 차륜전을 펼칠 수도 있고, 모두 합공을 할 수도 있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싸움을 할 거다.”

그 말은 화무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말한 것이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제약을 두지 말고 싸우라고. 체면도 명예도 다 버리라고.

오직 이기는 것에만 집중한다!

두 맹주는 물론이고 권마와 독왕, 풍천교주와 검왕도 검우진이 무슨 의도로 저 말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아니더라도 이 무림은 조만간에 마교 손에 넘어가겠군.”

검우진의 판단이 훌륭하다는 칭찬이지만, 화무기의 그 말에는 강력한 이간질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간질은 통하지 않았다. 이미 진패천과 백자강이 걱정하는 부분이었고, 오늘 이 싸움만큼은 별개로 하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아들과 손자와 제자를 위한 싸움.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내게 선공의 기회를 주게.”

가장 어려운 걸음을 한 사람이 그였다는 것을 알기에, 검우진은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시오.”

“고맙네.”

진패천이 앞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는 말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 마가촌 자체가 남아날지의 문제였으니까.

화무기 앞에 선 진패천의 기도가 달라졌다.

백옥과도 같은 맑은 기상이 그의 몸을 휘감았으며 두 눈은 차갑게 빛났다.

진패천이 천천히 군자검을 뽑아 들었다. 완벽한 발검에 군자검이 깨어났다.

검을 뽑는 소리가 이렇게 맑고 고울 수가 있을까?

군자검이 검집에서 완전히 나오는 순간, 차가운 광채가 허공을 갈랐다. 보이지 않는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군자검이 나직이 울기 시작했다.

고금제일검이 정파제일고수의 손에서 울고 있었다.

그 위엄에 찬 기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은 두 개다.

군자검을 뽑기 전의 세상과 군자검을 뽑고 난 후의 세상.

진패천이 군자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비록 내 손에 들려 있지만, 이 싸움은 네 주인을 위한 싸움이다.’

그러니 잘해보자, 군자검아.

그 사람들 다 여기 있는데

원래 패도적인 무공 성향을 지닌 진패천이었다.

그런 진패천에게 군자검이 지닌 진중하면서도 더없이 맑은 기운이 더해지자 그는 새로운 기도를 드러냈다.

화무기는 진패천이 들고 있는 검이 어떤 검인지 알아보았다.

“고금제일 군자검!”

군자검을 보자 화무기는 흥분했다.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다.

“봐, 샌님이 아니었잖아? 날 죽이려고 아예 작정하고 왔어.”

화무기의 두 눈이 하나의 감정으로 이글거렸다. 그것은 바로 군자검에 이끌리는 본능적인 탐욕이었다.

감추지 않았기에 모두가 그의 탐욕을 느꼈다.

“가지고 싶나?”

진패천의 물음에 화무기는 가지고 싶다는 대답을 이렇게 했다.

“군자와 살성은 본래 종이 한 장 차이 아닌가?”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대체 얼마나 두꺼운 종이기에?”

그 말에 모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널 봐라. 진 맹주와 네가 어딜 봐서 한 끗 차이냐?”

화무기는 웃었지만, 그 웃음에 담긴 건 명확한 살의였다.

“저 검으로 네 심장을 뚫어주지.”

다시 말해 진패천과 풍천교주 두 사람 모두를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풍천교주는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내가 군자는 못 되어도 겁쟁이는 아니지. 얼마든지 와라. 아니, 진 맹주 손에 죽을 테니 못 오겠지.”

그렇게 풍천교주가 진패천의 사기를 높였다. 그게 어떤 상황이든,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그가 최고였다.

진패천이 천천히 군자검을 화무기에게 겨눴다.

“누구의 무공을 펼칠 거냐?”

화무기는 잔인한 선택을 했다.

“네가 믿는다는 사람의 무공으로 널 죽여주마!”

화무기는 무황신검의 무공으로 진패천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무황신검의 독문무공은 광명무양검술.

진패천의 독문무공은 제왕검식.

극강의 두 정파 무공이 충돌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쇄도하면서 검을 내질렀다.

정말 거짓말처럼 검 끝과 검 끝이 정확히 부딪쳤다. 이렇게 빠르게 서로에게 쇄도하면서 검 끝이 충돌한다? 그야말로 첫수부터 신위를 발휘하는 두 사람이었다.

치이이이이잉.

두 검의 날이 스치며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고.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검날은 순식간에 서로의 귀를 스치며 지나갔다. 두 사람이 얼굴을 틀어 피하지 않았다면 얼굴이 꿰뚫렸을 공격이었다.

두 검이 교차했을 때.

그 찰나의 순간 진패천의 얼굴이 검날에 비쳤다. 흑검이었음에도 또렷이 비쳤다.

언젠가부터 싸움 중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차분하고 태연한 모습이었다.

싸움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더는 긴장하지 않은 얼굴이었고, 삶에 지친 피곤한 얼굴이었다. 점차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늙어만 갔다. 그래서 더는 보지 않게 되었는데.

하지만 오늘 진패천의 얼굴은 달랐다.

긴장하고 흥분해 있었다. 마치 첫 실전을 펼치던 오래전 그날처럼.

진패천의 심장은 전쟁터의 북소리처럼 뛰고 있었다.

캉! 카앙! 캉!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상대의 요혈을 노린 치명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고금제일검이라 불리는 군자검이었기에 당연히 한방에 상대방 검을 부러뜨릴 것 같았지만, 화무기의 검은 멀쩡했다.

일단 그가 들고 있는 흑검 역시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암흑궁 제일의 보검인 암천밀검(暗天密劍).

그 보검을 화무기의 강력한 내공이 지지하고 있었다. 만약 막강한 내공으로 지키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하게 부딪쳤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것이다.

쉬이익!

화무기의 흑검이 정말 빠르게 날아들었다.

눈으로는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본능으로 막아야 했다.

상대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 혹은 응수타진을 위한 허초는 발휘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수, 펼칠 수 있는 최선의 수가 발휘되었을 때 버틸 수 있었다.

“정말 끝내주는 검이다!”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은 알 수 있었다. 화무기의 저런 반응은 탐욕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진패천을 도발하는 것임을.

지금 내가 감탄하는 것은 네 검술이 아니라 네 검이다.

이 싸움은 검술의 극의에 도달한 이들의 싸움.

마음속 티끌 하나의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싸움이었다.

만약 진패천이 저 말에 영향을 받는다면 분명 이 싸움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진패천은 산전수전 다 겪고 온갖 풍파와 혈풍을 거쳐서 이 자리에 선 사람이었다.

자신을 도발한다는 건, 도발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

‘다시 말해 할만한 싸움이다!’

진패천은 상대의 어떤 도발도 싸움에 도움이 되게끔 해석하는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두 사람의 검이 서로를 향해 끝없이 날아들었다.

직선과 곡선을 오가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검선의 궤적들.

그 선들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진패천은 그 길을 군자처럼 걷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내공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버티는 것은 군자검 덕분이었다. 군자검이 워낙 강력해서, 화무기도 자신의 흑검이 부러지지 않게 신경 써야 했으니까.

화무기의 검이 진패천의 목과 어깨와 심장을 연속해서 찔러왔다.

쉭! 쉬이이익! 쉬이익!

진패천이 그 공격을 검으로 튕겨낼 때마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이렇게 빠른 공격에 이렇게 심후한 내공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 빠른 공격 하나하나는, 절대 고수가 심혈을 기울인 한 수처럼 느껴졌다.

이런 공격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속해서 날아드는 것이다.

지켜보던 이들이 동시에 느꼈다.

‘이 싸움은 끼어들기도 어려운 싸움이구나.’

찰나의 순간이라도 집중력을 잃는 순간, 그대로 죽음이었다. 자칫 잘못된 순간에 돕겠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진패천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저렇게 완벽한 싸움을 펼치는 데 어떻게 개입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 싸움은 진패천이 너무 잘 싸워서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검우진은 그들의 한 수 한 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초식을 쫓다가는 자신조차도 개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공방이 오가고 있었으니까.

검우진이 보는 것은 싸움의 흐름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을 보았고, 표정을 보았으며, 호흡을 들었다.

지쳤는지, 두려워하는지, 기회를 노리는지, 아니면 마지막 한 수를 생각하는지. 전체적인 싸움의 흐름을 보았다.

싸움은 점점 거칠어지고 사나워졌다.

잔잔한 호수였던 싸움은 급물살을 타고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패천은 완전히 싸움에 몰입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화무기와 그의 검만 보였다.

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서 싸우고 있었다. 완전히 싸움에 빠져 있었기에 오히려 그보다 더 긴장한 사람은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었다.

검우진도 백자강도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진패천을 걱정했다.

그가 죽으면 다음은 자신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함께 있었음에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하게 될까, 그 소식을 아들과 제자에게 전해야 할까 그게 두려웠다.

그랬기에 지켜보는 이들의 심력 소모도 대단했다.

촤아아악.

무엇인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떨어졌다.

진패천의 옷자락이 길게 잘려 나갔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중상을 입었을 공격이었다.

“하아, 하아.”

진패천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면 화무기는 평온했다.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여러 영혼의 무공과 내공이 합쳐졌기에 강한 것이 아니었다.

천살성에 천무지체까지 타고난 그였다.

천무지체는 엄마 뱃속에서 태동(胎動)을 정권 지르기로 한다는 농담이 있었다. 타고 날 때부터 무공을 익히기 위해 태어난 몸.

그랬기에 화무기는 단지 내공만이 강한 것이 아니라 삼백 년 전 고수들보다 더 뛰어나게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삼백 년 전의 그들이나, 지금의 너희들이나 똑같은 자들이다.”

검우진은 느낄 수 있었다. 싸우는 도중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그 일이 집중력에 방해가 되어 잠시 싸움을 중단한 것임을. 그가 누굴까? 검우진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분노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향했다.

“내가 고작 검 한 자루를 가지려 했다고 탐욕스럽다고 여기나?”

화무기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너희들은 이 무림 전부를 차지하려 하면서.”

이번에는 백자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우연이라고? 나는 필연적인 존재다! 너희들이 만들어낸!”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다시 향한 곳은 진패천이었다.

화무기가 진패천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 정의는 무덤 위에 쌓아 올린 정의 아닌가?”

백자강이 그와 교대하려고 나서려던 그때, 진패천이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더 기회를 달라는 눈빛이었다. 지쳐 있었지만 진패천의 눈빛은 맑았다.

백자강이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당신 생각은 어떻소, 하는 눈빛에 검우진이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저 물음에 답은 해줘야겠지요.”

기회를 더 주자는 말이었기에 백자강이 뒤로 물러났다.

화무기가 진패천에게 물었다.

“너희는 스스로 너희를 정의하고, 너희의 존재 가치를 정했지.”

화무기의 눈에 붉은 기운이 일렁거렸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살심이었다.

“당신은 정말 정의로운가?”

진패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대 말처럼 어쩌면 우린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지.”

진패천은 과거에 자식을 죽인 이들을 다 죽여버리기 위해 홀로 맹을 나선 적이 있었다. 만약 그 일을 저질러 버렸다면?

“그래서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자네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네.”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았기에 화무기는 다시 물었다.

“맹주, 당신이 지키려는 무림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그렇네.”

망설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과연 이 무림은 계속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진패천의 대답은 명확했다.

“있네.”

“왜지?”

“이 무림은 자네나 나보다 더 뛰어난 이들이 나타나서 그 가치를 지켜갈 테니까.”

검무극이나 손자인 하군이가 계속 이어 나갈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무림을 만들어 나갈 것을 믿었다. 이전에는 걱정만 했는데, 이제는 믿는다.

진패천이 당당히 말했다.

“나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네가 그 가치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네.”

그 당당한 대답에 화무기는 차갑게 반응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까 무너뜨리고 싶어지는 거다.”

두 사람이 다시 격돌했다. 너무 지쳐 있어서 걱정했는데 진패천은 앞서 보다 더 잘 싸웠다.

순식간에 수십여 수가 지났고.

두 검이 십자로 교차했다. 검 너머에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화무기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담긴 불순한 의도를 느끼던 그 순간.

갑자기 화무기의 초식이 바뀌었다.

무황신검의 무공을 펼치다가 갑자기 천의궁주의 무공을 펼친 것이다.

“그때 죽이지 못한 무림맹주, 오늘 죽여주마!”

갑자기 검술의 기풍이 바뀌자 진패천은 당혹스러웠다. 몸이 앞서 무황신검의 무공에 맞춰져 있었는데, 갑자기 완전히 다른 검술이 나왔다.

어지간한 고수라면야 상대가 무슨 변화를 주든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상대는 화무기였다.

바뀐 검술이 극한의 속도로 진패천을 향해 날아들었다.

파파팟!

진패천의 어깨와 팔에서 피가 튀었다.

화무기가 진패천을 끝장내려 달려들던 바로 그 순간!

화무기가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허공에서 강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검왕이 날린 무형강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무형강기를 해소한 화무기가 곧장 검왕을 향해 빛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챙챙챙챙챙!

화무기의 연속된 공격에 검왕이 뒤로 밀렸다.

속도와 내공에서 밀렸지만, 검술은 밀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다섯 번은 연속해서 찔렸을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카카카카캉!

화무기는 순식간에 검왕을 벽까지 밀어붙였다.

쇄애액!

검왕의 등이 벽에 닿는 순간, 화무기의 검이 기이한 각도로 날아들었다.

누가 봐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는데.

검왕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주점 벽이 길게 베어졌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두 번째 공격이 다시 날아들려던 그때.

쉬이이익!

뒤에서 쇄도한 진패천의 군자검이 화무기의 등을 찔렀다.

화무기가 몸을 틀어 뒤에서 날아든 검을 쳐내며 옆으로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찌르는 군자도 있나?”

화무기의 조롱에 진패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와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군자가 저런 나쁜 놈들과 어울리니까 이렇게 되는 거지.”

검우진과 백자강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검왕이 한발 먼저 개입하는 것을 보고서 자신들은 개입하지 않았다.

앞서 진패천과 화무기의 공방에서는 검왕이 서 있던 자리에서 돕는 것이 진패천을 다치지 않고 돕기에 최적의 자리였다.

진패천은 부상에도 침착했다.

“나쁜 짓이 이렇게 흥미로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해 볼 걸 그랬네.”

검왕이 진패천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진패천이 쇄도해 주었기에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지 않았다. 아마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면 죽진 않았더라도 크게 베였을 것이다.

“나야말로 고맙네.”

앞서 검왕의 무형검기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 정도 상처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그럴 필요 없었네.”

말을 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설마 진패천을 돕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인가?

다들 의아한 마음으로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검우진이 손바닥을 천천히 들었다. 화무기를 가리킬 것 같았던 그 손바닥이 향한 곳은 주점의 이 층이었다.

쇄애애애액!

콰아아앙!

검우진의 장력에 글자가 새겨져 있던 벽이 박살 나며 날아갔다. 조춘배가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는 벽이 산산조각 나며 사라졌다.

검우진이 그것을 박살 내 버릴 줄 몰랐기에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화무기 역시 그 행동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건 당신 아들이 만들어낸 작품 아닌가?”

그러자 검우진은 검왕에게 말했다.

“방금 위로 뛰어올라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지?”

검우진이 정확히 봤다. 검왕은 조금 전 화무기와의 공방에서 조금 더 쉽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순간적인 본능이 이 층으로 올라가지 않는 선택을 했다. 검무극을 위해서였다. 그가 남긴 저 역사적인 업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검우진이 그의 싸움에서 그 마음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싸움에 그 어떤 제약도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직접 날려 버린 것이다. 이제부턴 모두가 마음 편히 싸우라고.

그리고 조춘배를 위한 대안도 있었다. 더 근사한 주점 새로 지어주고서.

“글이야 다시 써주면 되지. 글 남긴 사람들 다 여기 있는데.”

언제나 내 문제는 소교주 때문이지

검왕은 감격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감동이었다. 검우진이 벽을 날려 버린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순식간에 오간 싸움을 보며 자신이 이 층 벽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검우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물론 벽을 날린 것은 자신만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 모두 신경 쓰지 말고 싸우라는 의미.

검왕은 정중히 포권하며 검우진에게 예를 갖췄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우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무기는 뻥 뚫린 이 층 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이전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자신이 무황신검이나 천의궁주의 독문무공을 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기본 무공만으로 싸운 것은 저 벽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이 이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고 왔으니까.

‘한데 직접 날려 버린다고? 역시 만만한 자가 아니군.’

그 사이 진패천은 자신의 다친 어깨와 팔을 지혈했다.

정말 순식간에 베였다.

삶과 죽음은 한순간이란 말을 절실하게 경험했다.

상처를 살핀 후 진패천이 검우진과 백자강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괜한 걱정을 끼쳤소.”

진패천은 더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릇 나아갈 때보다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지만, 진패천은 알았다.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라는 것을.

검우진은 그가 무사한 것에 기뻐했다.

“멋진 무공이었소.”

이번 싸움은 오직 검과 검, 기본기로만 싸웠다.

하지만 수많은 검기와 검강이 난무한 싸움보다 더 치열하고 대단한 싸움이었다.

백자강은 좀 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솔직히 걱정했었소.”

만약 이 말을 예전에 들었다면 분명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고맙소.”

진패천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걱정해 준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해야지.

화무기는 진패천의 퇴장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려고?”

아직 군자검은 진패천의 손에 들려 있었기에 다시 그를 도발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살아남는 무림맹주라니. 부끄럽지 않나?”

진패천은 그 조롱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군자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맞네, 심히 부끄럽다네.”

솔직히 시인했지만, 심적인 타격은 없었다. 오히려 후련했다. 자신은 할 만큼 했다.

만약 살아남아서 며칠이 지나 오늘을 떠올리면 틀림없이 아쉬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때 이 초식을 쓸걸, 저 때 이렇게 대응할걸. 어디 그뿐이겠는가? 천살성이 이렇게 말했을 때 이렇게 대답할걸. 온갖 생각들로 잠을 설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런 여한이 없었다.

이보다 더 잘 싸울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렇다고 화무기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잘 싸우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최선을 다해 싸웠으니 아쉬울 게 없었다.

그때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끼어들었다.

“부끄럽긴 뭐가 부끄럽소? 수치심은 저쪽이 느껴야지.”

풍천교주가 진패천을 대신했다.

“진 맹주께서 군자처럼 점잖은 사람이라 이렇게 넘어가는 거지. 여러 사람의 무공에 여러 사람의 내공까지. 그걸 다 쓰는 네가 부끄러워해야지. 한 사람의 무공만 쓰고, 내공도 한 사람만큼만 쓰면 그땐 인정하지.”

화무기가 풍천교주를 보며 웃었다. 정말 너만은 꼭 죽인다는 살의를 담았는데, 풍천교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너는 이 자리에 소교주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소교주가 있었으면 너처럼 비겁한 놈은 벌써 울화병으로 쓰러졌을 거다.”

듣고 있던 이들은 모두 울화병에 동의했다.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이번에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는 바로 검왕이었다. 교주가 자신의 제약을 풀어줬으니 마음껏 싸워보고 싶었다.

잠시 그를 응시하던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악군학이란 사람이 주는 믿음이 있었다. 이렇게 나섰을 때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겠지, 하는 왠지 모를 믿음이.

과연 검왕은 호승심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자신이 혼자서 화무기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 번만 더 제 뒤를 봐주시겠습니까?”

그 상대는 바로 풍천교주였다. 앞서 자신을 구해주려고 나섰던 그에게 다시 부탁한 것이다.

“자네도 무형강기를 쓰고, 내 무공에도 무형기가 있으니 서로 잘 어울리겠군.”

풍천교주 역시 자신이 혼자서 화무기를 죽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진패천의 싸움으로 확인했다.

앞서 검우진은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 싸움에 명예나 체면을 생각하지 말라고. 오직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쪽 영혼은 여럿이고 나는 한 사람이지만, 나라도 도와야지.”

화무기를 한 번 더 비꼬며 풍천교주가 돕겠다고 나섰다.

검우진이 검왕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자네는 약속을 잊지 말게.”

앞으로 검무극 옆에서 도와주라는 약속.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든 죽지 말라는 말이었다.

“네, 잊지 않겠습니다.”

검왕이 나선 이유는 그와 싸워보고 싶은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의 내공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내공을 소모 시킬 작정이었다. 그래야 마지막에 그를 상대할 사람에게 승산이 있을 테니까.

검왕이 풍천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리가 저자를 죽이면 좋겠지만, 만약 그게 여의치 않으면 최대한 내력이라도 소진하게 해야 할 거 같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하네.

그때 지켜보던 진패천이 검왕에게 말했다.

“조심하시게.”

검왕이 진패천을 보며 살짝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검왕을 특별히 챙기는 진패천을 보며 백자강은 내심 생각했다.

‘허리에 찬 군자검을 준다 해도, 그는 이미 떠나간 사람이오.’

검우진이 이미 그를 붙잡은 것처럼 말한 것과는 별개로.

앞서 이 층 벽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볼 때, 그는 완전히 검무극 사람이었다.

하긴, 그런 모습에 더욱 욕심이 나는 것이겠지만.

말총머리를 달랑거리며 검왕이 앞으로 걸어 나갔고, 풍천교주가 한 걸음 뒤에 섰다.

물론 둘이 함께 싸운다고 두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합격술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서로 방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그때 알아서 본능적으로 잘 대처해서 싸워야 했다.

화무기는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너희가 싸우겠다고 하면 내가 싸워줄 줄 아느냐?”

화무기가 자신을 향해 소리 없이 날아든 무형강기를 검을 휘둘러 막았다.

쾅! 콰앙! 콰앙!

연속해서 날아든 무형강기를 화무기는 선 채로 모두 막아냈다. 그 강력한 공격을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 막았다.

그에게 무형강기를 연이어 날린 사람은 검왕이었다.

“이래도 싸울 마음이 들지 않나?”

그가 열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표정으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그의 살기는 더욱 강해졌다.

“너희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놈이 없구나.”

그 마음에 안 드는 놈 중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풍천교주였는데. 그는 이번에도 참지 못했다.

“주위의 모두가 그렇다면 혹시 네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화무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턴 우리 모두의 문제겠지.”

말이 끝나는 순간.

쇄애애애액.

화무기는 검왕이 아니라 풍천교주를 향해 쇄도했다. 날아들었던 강기보다 저 입이 더 짜증 났기 때문이리라.

정말 빛처럼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흑검.

파아앙!

사람 모양의 인형들이 순식간에 나타나며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영환인벽(影幻人壁).

풍천교주의 독무무공인 천외혈마공(天外血魔功)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펑! 퍼엉! 퍼엉! 펑!

화무기가 앞을 막아선 인형 모양의 방해물을 베어내며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원래 이렇게 쉽게 잘려서 사라질 것이 아니었음에도, 화무기의 흑검 앞에는 펑펑,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인형 뒤에는 어느새 검왕이 서 있었다.

“나부터다!”

검왕은 싸움을 자신이 주도하려 했다. 풍천교주보다 자신이 강하다고 여겨서가 아니었다.

무공의 상성상 풍천교주가 그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맨손으로 무공을 펼치는 풍천교주인데, 화무기의 검은 너무 빠르고 강력했다. 순식간에 파고들어서 검을 찔러오기에 그를 맨손으로 상대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어지간해야 막지.

그래서 먼저 나선 것이다.

이제 건물이 다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검왕은 자신의 독문무공을 곧장 발휘했다.

무형신검 제일검 무형귀허.

휘이이이이잉!

검왕이 검을 내지르자 화무기의 몸으로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파파파파파파팍!

엄청난 강기의 회오리가 화무기의 몸을 비틀었다. 원래라면 뼈와 살이 분리되면서 회오리 속으로 사라져 버려야 했는데.

화무기의 몸은 비틀리지 않았다. 그의 호신강기는 이 회오리를 봄바람으로 만들었다.

쇄애애액!

그 상태에서 풍천교주의 장법이 그의 몸을 강타했다.

하지만 화무기는 보란 듯이 두 사람의 공격을 버텼다. 정말 이 순간의 화무기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러던 화무기가 순식간에 회오리를 빠져나왔다.

“조심!”

풍천교주의 외침이 터져 나왔을 때, 이미 화무기는 검왕 앞으로 쇄도하며 흑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광명무양검술 제삼식 극양파천(極陽破天).

공간을 가르며 날아든 화무기의 강기는 평범한 강기가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모든 걸 녹여 버릴 것 같은 엄청난 불길의 강기가 검왕을 향해 작렬했다.

그냥은 절대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무형신검 제삼식 무형반천

검왕 앞으로 시커먼 공간이 생겨났다.

날아든 불길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더니.

화르르르륵!

공간이 터져 나오며 빨아들였던 불길을 화무기에게 내뱉었다.

화르르르르르륵!

화무기는 그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받았지만.

촤아아아아악!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뜨거운 불길을 양쪽으로 가르며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화무기가 검을 내질렀다.

카아앙!

검왕은 내공을 극한으로 올려서 막았음에도 손목이 끊어질 거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각오한 충격이었음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공격이 비 오듯 쏟아졌다.

카앙! 카앙! 캉!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주고받자 풍천교주는 그 싸움에 끼어들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자리가 바뀌었다.

검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한 수 한 수 맞부딪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길 수 없다.

빠르고 강했으며 초식에는 그 어떤 빈틈도 없었다.

거대한 벽을 보고 싸우는 느낌.

그리고 이 극한의 싸움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화무기가 내뿜는 태생적인 살기였다. 이제는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 그 살기에 진기의 움직임이 영향을 받았다.

결국 검왕은 화무기의 매서운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공격을 버티지 못한 검왕이 뒤쪽 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검왕이 왈칵 피를 쏟아냈다. 강력한 공격을 연속해서 막아내다가 결국 내상을 입은 것이다.

살기가 더 강해져서일까? 화무기는 앞서 진패천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강했다. 그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쇄애애액.

화무기는 검왕을 끝장내겠다는 듯 그대로 쇄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발 먼저 풍천교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샤샤샤샤샤샤샤샤샥!

화무기를 향해 푸른 선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사람의 몸을 잘라버리는, 천외혈마공의 청선혈망(靑線血網)이었다.

허공을 가르는 수십 가닥의 푸른 선들.

파파파파팍.

화무기는 몸으로 그 선을 뚫고 들어왔다. 청선혈망은 그의 호신강기에 막혀 몸을 뚫지 못했다.

쇄애애애액!

화무기는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바로 그때 허공에 작은 점이 하나 똑 떨어지더니, 갑자기 쑥 커졌다.

휘류류류류류!

검은 구멍이 화무기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화무기는 빨려 들어가지 않고 천근추(千斤墜)를 발휘하며 버텼다.

풍천교주가 발휘한 천외혈마공의 사멸와상(死滅渦狀)을 온전히 힘으로 버텨내는 것이다.

풍천교주는 정말 놀랐다. 사멸와상에 빠진 후 그것을 파훼하고 나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걸 힘으로 버틸 줄은 몰랐다.

풍천교주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장력까지 발출했다.

쇄애애액! 퍼어억!

하지만 그 충격에도 화무기는 빨려 들어가기는커녕 앞으로 걸어왔다.

쿵! 쿠웅!

마치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막지 못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여름밤의 악몽처럼 한 걸음씩 다가왔다.

휘류류류류류.

뒤에서 사멸와상이 더욱 강하게 그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화무기가 풍천교주가 서 있는 앞까지 다가왔다. 어쩌면 내내 얄미운 말을 했던 풍천교주였기에 더욱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또 지껄여봐라!

이제 검을 내지르면 심장이 꿰뚫릴 거리까지 다가왔음에도 풍천교주는 피하지 않았다.

화무기가 흑검을 내지르던 그 순간.

쉬이이익.

흑검보다 먼저 백화검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내상을 입은 검왕이 극적으로 몸을 추스른 것이다.

검왕의 검을 막느라 내공을 분산하는 순간!

휘리리리릭.

화무기가 사멸와상이 만들어낸 검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린 것처럼 검은 구멍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안도하지 못했다. 직접 상대해 본 화무기의 실력으로 볼 때.

“저것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푸우욱.

흑검이 허공을 찢으며 튀어나왔다.

찌이이이익.

쭉 찢어진 공간 사이로 화무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어두운 곳은 안 좋아해서.”

그 어떤 것도 다 소멸시켜 버리는 공간에 몸을 담근 채 화무기는 웃고 있었다.

그 기괴함을 넘어선 놀라운 신위를 바라보며 검왕이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저를 지켜주신 겁니까?”

조금 전 풍천교주는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는 화무기의 검에 찔렸을 거다.

그 이유가 궁금한지 화무기도 어둠 속에서 고개만 내민 채 들었다.

사람이 다섯이나 더 있는데 누군가는 구해주겠지.

당연히 이런 농담을 할 줄 알았는데.

풍천교주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를 댔다.

“언제나 내 문제는 소교주 때문이지.”

모두의 시선이 풍천교주를 향했다.

“자네가 죽으면 이 싸움에서 이긴다 한들 소교주에게는 패배일 거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을 슬퍼할 패배가 되겠지.”

검왕은 풍천교주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풍천교주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풍천교주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리라 생각했다.

아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싸움을 맡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지금 자신의 마음은 이 층 벽을 날려 버린 검우진의 마음과도 똑같았으니까. 모두를 살려 새로운 벽에 글을 남기게 하려는 그의 마음과.

“난 소교주에게 제대로 된 승리를 안겨주고 싶네.”

악몽 같은 존재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풍천교주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린 한 사람도 죽어선 안 돼.”

생긴 것만 봐선 악당이 맞긴 하오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소교주를 위해 한 사람도 죽어선 안 된다는 풍천교주의 말은 자신의 의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권마는 요즘 들어 교주의 저런 미소를 자주 보게 되어서 참 좋았다. 젊은 시절에는 곧잘 보던 미소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지 못했다.

권마는 알고 있었다. 교를 이끌어 가면서 교주가 많이 지쳤다는 것을.

중원을 종횡하던 사람이 태사의에 갇혀 버렸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책임감이 워낙 강한 사람이라 태사의를 박차고 일어나지도 못했고.

아마 교주는 내내 우울함을 느껴왔는지 모른다. 한동안 마존들과의 관계가 소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을 깬 것이 바로 소교주였다. 교주만이 아니었다. 그는 각자의 어둠에 빠진 마존들까지 모두 밖으로 끌어내었다.

절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커다란 구멍에 빠져 있던 자신을 꺼내준 것처럼.

“다 살아남아서 소교주에게 잘난 척 좀 해야 하지 않겠소?”

모두 풍천교주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이 싸움은 아무도 죽지 않아야 한다. 그게 검무극에게 제대로 된 승리일 테니까. 그 새파란 소교주에게 많이 받았으니 이제 돌려줘야 할 때가 되었다.

검왕이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소교주에게 당한 게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풍천교주는 이곳 주점에서도 자신에게 몇 번이나 하소연했다. 검우진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고.

“그렇지.”

“한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풍천교주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받은 게 더 많으니까.”

풍천교주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주점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곳에서 며칠 함께한 정 때문일까?

“그리고 소교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런 자에게 자넬 잃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다 교주님께서 위험할 뻔하셨습니다.”

아까 화무기가 자신을 향해 다가섰을 때, 풍천교주는 죽음을 느꼈다.

이렇게 생생하게 죽음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다섯 명이나 있는데. 자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날 구해줬겠지.”

이제야 농담을 하는 풍천교주였는데, 검왕은 그 농담을 진지하게 받았다.

“그래서 못 구해줄 수도 있었겠죠. 다섯 명이나 있어서.”

“무슨 말인가?”

“서로 구하겠지 해서.”

풍천교주가 짐짓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나 진짜 죽을 뻔한 건가? 안 돼! 나 아직 하고 싶은 게 태산처럼 쌓여 있네!”

검왕의 시선이 다시 화무기를 향했다.

“저자를 못 죽이면 태산이 아니라 한 가지 일도 못 하게 될 겁니다.”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내상을 입었어도 검왕은 계속 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네 괜찮겠나?”

“네.”

검왕은 화무기와 싸우면서 느꼈다.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내공이 남아 있는 한, 저 천살성 역시 조금이라도 더 내공을 소진하게 해서 다음 사람으로 넘겨야 한다.

그에게 남은 내공은 남은 사람에게 날아갈 공격이 될 테니까. 한 방이라도 자신이 대신 맞고 넘겨야 했다.

그리고 내공을 소모하게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 싸움을 아직 싸우지 않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화무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교주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네. 이깟 싸움은 온실 속 싸움이지.”

온실 이야기 꺼낸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풍천교주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고개만 내밀고 있는 화무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온실 속은 따듯하냐?”

찌이이이이익.

화무기는 얼굴 아래 어둠을 손으로 찢어발기며 밖으로 나왔다.

“무공은 보잘것없어도.”

그의 살기는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일곱 고수를 상대하면서 그의 원초적인 살기 역시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구처럼 겁쟁이는 아니군.”

진패천을 조롱하는 말을 검왕이 맞받아쳤다.

“신중하고 현명하신 거겠지.”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해서 싸우다가 군자검이라도 빼앗기면 그것만큼 최악도 없었으니까.

“싸우기 전에 네 몸에 있는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풍천교주라면 모를까 이런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검왕이었기에.

화무기는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누가 책임자시오? 수장께 묻고 싶은 게 있소.”

화무기는 검왕의 의도를 대번에 파악했다.

“그런 말로 내부 분열을 일으키겠다? 제법 머리를 썼다만 소용없는 일이다. 애초에 이 사람들은 한 번도 하나인 적이 없었으니까.”

화무기의 시선이 검우진과 진패천, 그리고 백자강이 서 있는 곳을 향했다.

“저들이 아무리 친한 척해도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처럼 말이다.”

검우진과 두 맹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 싸움이 끝나면 가장 강력한 적의 자리에 서로의 이름을 올려야 하는 관계였으니까.

검왕이 단정하듯 말했다.

“소교주가 있어서 이번에는 다를 거다.”

화무기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천교주에 이어 검왕까지.

“너희는 정말 소교주를 좋아하는구나. 대체 어떤 놈인지 궁금하군.”

“그럼 왜 소교주에게 가지 않았지?”

그 물음에 화무기의 표정이 흠칫했다가 이내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소교주는 암흑궁주에게 맡긴 거다.”

“소교주가 두려워서가 아니고?”

풍천교주의 말에 화무기가 코웃음을 쳤다.

“너희들이 다 모여 있어도 두렵지 않은데 소교주가 두렵겠느냐?”

그 순간 듣고 있던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어떤 부분이 거짓말이었을까? 너희들이 다 모여 있어도 두렵지 않다? 아니면 소교주가 두렵지 않다?

지금까지 그가 보인 여유로 볼 때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천살성이 소교주를 두려워하고 있군.’

백자강은 앞서 주가신과 전음으로 대화할 때, 화무기에게 어떤 약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이제 그 약점이 검무극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백자강이 검무극을 떠올렸다. 이 천살성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하다니.

어쩌면 검무극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무기가 검왕을 향해 쇄도했다.

“너흴 다 죽이고, 소교주도 죽여주마!”

다시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몇 차례 검이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검왕의 내부가 진탕했다.

제법 많은 수를 나눴으면서도 적응되지 않는 속도와 힘이었다. 게다가 더욱 강력해진 살기까지.

하지만 검왕의 의지만큼은 그의 살기 못지않았다.

‘단 한 수에 불과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너를 소진시키겠다.’

물론 풍천교주는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천외혈마공 광사혈풍(狂砂血風).

쇄애애애애애애!

화무기에게 바람이 휘몰아쳤다.

이 상황에서 발휘한 무공이었는데 그냥 바람이겠는가?

호신강기를 찢어발기는 죽음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화무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세찬 바람에도 화무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왕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풍천교주는 놀라지 않았다.

상대는 사멸와상을 천근추로 버텼고, 그곳에 갇혔을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찢고 나온 자다.

그래도 광사혈풍 덕분에 검왕은 본격적으로 독문무공을 발휘할 틈을 얻었다.

내공이 절대적으로 밀리지만, 내공 소모가 큰 싸움을 시작했다.

무형신검 제이식 무형참격(無形斬擊).

백화검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순간.

벼락처럼 빠른 한줄기 검기가 화무기의 몸을 내리쳤다.

피할 수 없을 공격을 화무기는 피했다. 이번에 발휘한 것은 삼백 년 전 사도맹주 주가신의 보법이었다.

광세천왕보(光世天王步).

빛처럼 빠른 공격을 빛처럼 빠른 보법으로 피했다. 지금까지 몸으로 맞아준 것은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음을 알게 하는 신묘한 보법이었다.

검왕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무형신검 제사식 무형풍우(無形風雨).

무형검기가 사방에서 비바람처럼 쏟아졌다.

“좋구나!”

화무기가 신난 얼굴로 사방으로 검을 내질렀다. 그는 자신이 비바람도 막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쾅쾅쾅쾅쾅쾅!

그 충격에 벽이 흔들렸고, 천장에서 부서진 파편과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후드드드득.

부서진 잔해들이 시야를 가리던 그때가 검왕이 노렸던 순간이었다.

바로 이 초식을 발휘하기 위해서.

쉬이이익!

장내를 가로지른 날카로운 바람 소리!

화무기는 정면으로 검을 내밀고 있었다.

찌이이이익.

화무기 뒤쪽 벽에 가로로 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선이 그어지는 위치는 바로 화무기의 목이 있는 높이였다.

벽 끝에서 그어진 선이 화무기가 서 있는 곳까지 계속 이어졌다. 만약 계속 그어진다면 화무기의 목이 잘렸다는 의미.

그어진 선이 화무기의 목 옆에서 멈췄다. 이제 화무기의 목에 붉은 선이 그어져야 했는데.

찌이이이이이익.

화무기의 목을 지나서부터 선이 다시 그어지기 시작했다.

무형신검 제칠식 무형일생.

음왕의 목을 베었던 바로 그 초식.

그 회심의 일격을 화무기가 막아낸 것이다.

“이번에는 좀 놀랐다.”

화무기가 웃었다. 눈앞에 선 화무기는 불멸이자 불사의 괴물이었다.

화무기가 다시 검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캉! 카아앙!

이번에는 반드시 죽일 작정을 했는지, 화무기는 더욱 강력하게 검왕을 밀어붙였다.

검왕은 예감했다. 이제 채 오십 수를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순식간에 십여 수가 지나가는 싸움에서 오십 수는 곧이었다.

바로 그때 검왕은 화무기의 뒤쪽에서 풍천교주가 그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풍천교주의 절세비기.

‘무형창!’

풍천교주가 아껴둔 내공을 모두 주입한 무형창이었다.

찰나간 풍천교주와 검왕의 눈빛이 마주쳤다.

―적중할 수만 있다면 천살성의 몸을 뚫을 자신이 있네.

바로 그때였다.

검왕의 백화검이 더는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다음 순간 검왕의 양손이 화무기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화무기는 알 수 있었다.

검왕이 의도적으로 검을 놓쳤다는 것을.

쉬이이이이익.

동시에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검왕은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모든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화무기는 검왕의 눈빛에서 죽음을 각오한 의지를 읽었다.

나까지 꿰뚫어도 좋습니다!

쇄애애애애액!

다음 순간, 이번에는 검왕이 보았다. 화무기가 씩 웃는 모습을.

휘이익.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막았지만, 화무기의 힘을 버티지 못했다.

화무기가 검왕을 돌려세우자 날아든 무형창이 검왕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액.

그때 화무기는 다시 보았다. 검왕은 당황하지 않았고 그의 두 눈은 차분했다.

‘설마?’

검왕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검왕은 자신이 아무리 힘껏 붙잡아도 이렇게 위치가 바뀐다는 것을 예상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무형창이 자신의 몸을 꿰뚫고 그 기세로 화무기까지 꿰뚫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검왕은 화무기를 붙잡은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죽었어야 할 몸인데,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하늘이 이 순간을 위해 남겨두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무형창은 검왕의 등 바로 앞에서 멈췄다.

풍천교주는 무형창을 던진 것이 아니라 창을 들고 직접 쇄도했던 것이다.

던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이었겠지만, 풍천교주는 자리가 바뀔 경우를 걱정했다. 그는 검왕이 자신을 희생하려 했음을 알지 못했다.

스스스스슷.

풍천교주의 손에 들린 무형창이 사라졌다. 상대가 다른 고수라면 이 무형창으로 그를 죽이려 했을 거다.

하지만 화무기라면, 이 무형창은 오히려 싸움에 방해만 될 뿐이다. 창왕(槍王)이 와도 못 이기는 상대였으니까.

화무기의 일장에 검왕과 풍천교주가 포개지며 뒤로 밀렸다.

“그래! 네가 못하면 내가 같이 꿰뚫어주마!”

화무기가 흑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이익.

검왕은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피하면 뒤에 풍천교주가 찔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화무기의 팔을 붙잡느라 검을 떨어뜨린 상태. 가진 건 몸밖에 없었다.

검왕이 이번에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자신이 꿰뚫리더라도 풍천교주까지 찔리지는 않기를 바랐다.

쉬이익!

푸우욱!

흑검이 호신강기를 뚫고 검왕의 가슴에 박혔다.

완전히 관통해 버리려고 화무기가 검을 밀어붙이던 그 순간.

흑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누군가 그의 검을 맨손으로 움켜쥔 것이다.

“내 검을 손으로 잡아?”

어느새 쇄도해 온 권마였다.

흑검을 움켜쥔 손은 맨손이 아니었다. 권마는 검무극이 선물로 줬던 권갑 투신을 끼고 있었다.

후우우웅!

퍼어어억!

권마의 다른 손 주먹이 그대로 화무기의 얼굴에 박혔다.

우르릉, 쾅쾅!

동시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검왕의 가슴에 박혀있던 흑검이 뽑히며 화무기가 뒤로 날아갔다.

그사이 권마가 순식간에 검왕의 가슴의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 다행히 검은 심장을 빗나가서 박혔고, 관통하기 전에 막는 바람에 치명상은 피한 상태였다.

“피했어야지!”

풍천교주는 자신을 위해 피하지 않고 무식하게 몸으로 막은 검왕에게 버럭 소리쳤다.

“……무형창을 던지셨어야지요.”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구한 셈이 되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왕의 인사에 권마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화무기는 얻어맞은 얼굴 대신 귀를 막고 있었다. 권마의 주먹이 얼굴을 강타할 때 울려 퍼진 천둥소리가 그의 고막을 거의 찢을뻔한 것이다.

그 분노가 권마에게 날아들었다.

“빈 수레가 요란하지.”

하지만 이쪽에는 풍천교주가 있었다.

“그 수레가 왜 비었겠냐? 네 시체를 실어야 하니까 빈 수레지.”

화무기의 살기가 더욱 강렬해졌지만, 이미 풍천교주는 다친 검왕을 데리고 검우진과 두 맹주가 있는 곳으로 간 후였다.

검우진은 검왕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괜찮냐는 말보다는 이 말이 더 듣고 싶을 테니까.

“잘 싸웠네.”

검왕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잘 싸웠으면 좋았겠지만, 이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말게.”

검우진은 그가 스스로 희생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왕이 고개를 숙였다. 소교주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죽으려 했음을 꾸짖는 것이다. 그래,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제게 남은 목숨은 소교주를 위해 쓰겠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권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는 바로 백자강이었다.

화무기가 일격을 허용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권마 혼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지금이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 여겼다.

백자강이 권마 옆에 나란히 섰다. 백자강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 사람과 같은 편이 되어 싸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다시 새로운 두 사람이 등장하자 화무기가 연설하듯 큰소리로 말했다.

“교주와 맹주들이 모여 차륜전을 펼친다! 대체 누가 악당이고 누가 영웅인가?”

풍천교주는 순순히 그 말을 인정하는 것으로 상대의 기세를 꺾었다.

“솔직히 생긴 것만 봐선 두 분이 악당이 맞긴 하오.”

백자강이 권마를 쳐다보며 앞서 싸움의 소감을 밝혔다.

“다들 너무 점잖았소.”

진패천은 말할 것도 없고, 검왕과 풍천교주 역시 자신의 기준에선 그러했다.

하지만 권마와 함께라면?

“저자가 영웅이 되고 싶어 하니.”

백자강의 몸에서 사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더없이 사악하면서도 차디찬 기운이었다.

“우리가 제대로 악당이 되어줍시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백자강이 발출한 사기가 공간을 장악했다.

궁극의 사기.

사기를 느끼자 좁은 상자 속에 갇힌 것처럼 온몸이 갑갑해졌고, 전신에 소름이 돋으며 한기를 느꼈다. 겉은 차가워져서 움직임이 느려졌지만, 심장은 뜨거워졌다.

공포와 위압감, 분노와 증오, 그야말로 모든 부정적인 욕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기운만으로도 짓눌려야 할 상황이었지만, 화무기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그 기운을 만끽했다.

“이렇게 강력한 사기는 처음이군.”

자신의 몸에 깃들어 있는 주가신은 한 번도 이런 기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화무기는 그걸 이렇게 표현했다.

“내 속의 그 사람은 워낙 음흉해서 말이지.”

백자강은 앞서 대화를 나눴던 주가신을 떠올렸다. 그 음흉한 사람이 자신은 살리려 했다. 그가 듣고 있으리라 생각해서, 백자강이 화무기에게 말했다.

“그래도 제안해 줘서 고마웠소.”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다들 추측할 수 있었다. 앞서 전음 대화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삼백 년 전 사도맹주에게 한 말이었으리라.

권마는 옆에 선 백자강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나선 것이 의외라 여겼다.

진패천이 혼자 싸웠기에 그 역시 혼자서 싸우리라 예상했다.

무림맹주가 혼자 싸웠는데 사도맹주인 내가 합공을 할 수는 없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는데 백자강은 체면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권마는 백자강의 눈빛에서 이런 의지를 읽었다.

이 싸움 우리 둘이서 끝냅시다!

순간 권마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권마가 바랐던 바였다. 이 위험한 싸움이 교주에게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은 없었으니까.

권마가 본격적으로 마기를 발출했다. 권마의 마기 역시 평소와 달랐다.

그것은 퍼져나가고 분출되는 마기가 아니었다. 마치 태산이 짓누르는 것과 같은 마기였다. 부서지지 않는 거대한 어떤 것이 화무기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백자강의 사기와 권마의 마기.

두 기운이 동시에 화무기를 압박했다.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의 강력한 기운이었지만, 화무기는 멀쩡했다.

“내겐 이 기운들이 낯설지 않다.”

그러면서 화무기는 마치 진짜 악당을 잡는 영웅이라도 되겠다는 듯.

“그래, 너희들이라면 잡아볼 만한 악당들이지!”

화무기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난 다른 누구보다 너와 싸워보고 싶었다.”

화무기가 흑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 주먹으로.”

화무기는 권마에게 보란 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도발은 없었다. 지금 권마와 주먹 싸움을 하자는 것이었으니까.

“어때? 나와 권법으로…….”

화무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자강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쇄도한 백자강의 검이 화무기의 가슴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권마와 주먹으로 싸우자고 말하는 데 백자강이 이렇게 달려들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쉬이이!

백자강의 검이 화무기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무기가 몸을 비틀어 검을 피하자, 날아들었던 검이 각도를 바꿨다.

다시 백자강의 검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기에 화무기는 앞서 발휘했던 주가신의 광세천왕보를 이용해서 공격을 피했다.

백자강은 그가 다시 검을 뽑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연속해서 공격을 이어갔다.

백자강의 공격은 앞서 진패천이나 검왕과는 또 달랐다.

백자강은 급소만을 노리지 않았다.

화무기의 턱을 노리고 쳐올렸던 검을 다시 사선으로 그었다. 이번에는 어깨를 노렸고, 그다음은 허벅지를 노렸다.

팔도 좋고, 허리도 좋았다. 어디든 상대를 벨 수 있는 곳이라면 상관없었다. 그래서 더 위협적이었다.

휘이익.

결국 화무기가 광세천왕보를 발휘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렇게 물러난 것은 싸움을 시작하고 처음이었다.

“이건 네가 권마를 무시하는…….”

화무기는 이번에도 말은 끝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권마의 주먹에서 발출된 권풍이 날아든 것이다.

후아아아아앙!

권마는 화무기와 백자강이 싸우는 사이 주먹에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랬기에 그냥 권풍이 아니었다. 바위를 가루로 만들 위력이 담긴 권풍이었다.

콰아아아앙!

권풍에 휩쓸리며 화무기가 주점 벽을 부수며 뒤로 날아갔다. 호신강기로 버티려 했는데, 권풍 뒤에서 백자강과 권마가 동시에 날아든 것이다.

화무기가 풍류주점 밖으로 나갔고, 백자강과 권마 역시 그 뒤를 따라 쇄도했다. 두 사람은 화무기가 숨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검기와 권풍이 동시에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화무기가 몸을 솟구쳐 날아올랐다.

콰아아앙!

풍류주점 건너편 건물이 검기와 권풍에 휩쓸려 통째로 날아갔다.

이제 싸움의 무대는 풍류주점이 아니라 마가촌이 되었다.

화무기가 옆 건물 지붕에 내려섰다.

“권마, 당신과는 멋진 싸움을 해보고 싶은데. 저 사파 놈처럼 멋없이 군다고?”

화무기는 어떻게 해서든 권마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었다.

“왜? 자신 없어?”

그의 도발은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의 극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자강에게 그 모습은 다르게 보였다.

―놈이 합공을 피하려 하고 있소.

권마가 화무기와 권법으로 근접전을 벌이면 두 사람이 얽혀 싸우게 된다. 결국 백자강이 화무기를 합공하기 까다로워질 것이다.

권마는 대번에 백자강이 말한 뜻을 알아차렸다.

―놈의 뜻대로 싸워주지 맙시다.

지켜보고 있던 진패천도 화무기의 의도를 읽었다. 그는 합공을 피하는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놈이 내공을 조절하기 시작한 것 같소.

진패천의 전음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호신강기로 버티며 자신의 강함을 보여줬던 천살성이었는데, 이제 공격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아무리 천살성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무한의 내공을 지녔을 리는 없는 법.

또한 그가 모두를 압살할 정도의 힘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진패천에게는 외상을 입혔고, 검왕에게는 내상을 입혔다. 진패천에게는 군자검이 있었고, 검왕에게는 풍천교주가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화무기의 힘은 두 사람이 합공했을 때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 합공이 제대로 되면 팽팽한 싸움도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싸움은 훨씬 더 위험해졌다.

내공의 여유가 없어지면 천살성이 일격필살의 수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앞서 싸움에서도 그랬듯, 돕기 위해 개입하기 전에 상황이 끝나버릴 수가 있었다.

결국 백자강과 권마가 서로 도와야 했다.

과연 서로 어디까지 도울 것인가?

그걸 알 수 없었기에 검우진은 앞서 그 어떤 싸움보다 이번 싸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권마가 지붕에 서 있는 화무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권법으로 싸우자고?”

권마가 그에게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내려와라. 주먹싸움은 땅에 발을 딛고 싸워야 하는 법이다.”

화무기가 지붕에서 훌쩍 권마 앞으로 뛰어내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때를 기다린 백자강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패왕진천검법.

제일식 백천식.

새하얀 강기가 화무기를 향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미 기다렸다는 듯 화무기의 흑검이 허공을 갈랐다.

광명무양검술

제이식 대양생유(大陽生有).

콰아아앙!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상승 무공이 충돌하자 주위는 폭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했다. 화무기는 이미 기습을 예상하고 있었다.

쉬이이익!

피어오른 먼지를 뚫고 화무기가 쇄도했다.

카앙! 캉!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백자강은 앞서 싸운 이들과 똑같은 감상을 느꼈다.

‘강하다.’

화무기의 흑검에는 정말 손목이 끊어질 듯 강력한 내공이 실려 있었다.

‘이제 위력이 줄어들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화무기는 강력했다.

순식간에 십여 수를 나눈 후, 화무기의 마지막 일격에 제대로 내공이 실렸다.

그 한 수로 백자강의 검을 부러뜨리려 했지만,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콰아앙!

백자강이 뒤로 주르륵 밀렸다. 너무 강력한 공격이었기에 뒤로 밀리면서 상대의 힘을 분산해서 흩어버린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내공을 계속 써라!’

그 사이 화무기는 권마의 요혈을 찌르며 공격을 가했다.

쉭쉭쉭쉭!

권마의 덩치가 커서 그 공격을 피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권마의 그 큰 몸이 연속해서 날아든 공격을 모두 피했다. 권마의 보법은 화려했다.

권법에서 권(拳)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步)다.

권마가 수하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때리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

맨손으로 병장기를 상대해야 하기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흘려내는 보법과 체술이 가장 중요했다.

대체 이 큰 덩치로 어떻게 피하지?

권마가 모두에게 행동으로 그 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화무기는 권마만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의 좌측에서 백자강이 공격을 해왔다.

화무기가 백자강의 검을 피하며 검을 내질렀다.

쉬이익!

날아든 검을 피하며 화무기가 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교차하는 두 개의 검은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두 자루의 검이 빗나가던 그 순간.

권마의 주먹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직접 주먹을 강타하는 순간, 권마는 느낄 수 있었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호신강기였다.

처음 그의 얼굴을 적중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제대로 타격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소리는 요란하게 났지만 주먹이 몸에 맞는 순간 주먹으로 물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먹에 담긴 내력이 물에 흩어져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호신강기이기에 다 막아낸 것이구나!’

화무기가 권마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쉬이익.

권마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백자강이 가로채듯 막았다.

바로 그 순간, 권마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날렸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날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권마의 독문무공 벽력수라권

제일권 흑운수라.

꽈아앙!

폭음과 함께 화무기가 주르르륵 뒤로 밀려났다. 벽력수라권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백자강의 독문무공이 다시 날아들었다.

패왕진천검법 제오식 환멸식.

검기가 화무기를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분열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사방에서 날아든 검기가 그대로 화무기의 몸을 강타했다.

지축이 흔들리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화무기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쇄애애애액!

권마의 주먹이 다시 날아들었다.

퍼어억!

화무기가 처음으로 뒤로 붕 날아가더니 바닥을 뒹굴었다.

권마의 주먹 중에서 가장 무거운 주먹인 제삼권 천뢰수라가 정확히 적중한 것이다.

콰르르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화무기가 벌떡 일어나자 백자강의 검에서 발출한 강기가 연속해서 그에게 적중했다.

콰아앙! 콰앙! 쾅!

권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권강을 쏟아부었다.

화무기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모두 맞고 있었다.

그를 죽일 기회였다.

권마가 자신이 지닌 마지막 한 수를 발휘하려 했다.

마지막 제육권 염뢰수라.

몸 안의 모든 내공을 일격에 쏟아내기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마지막 초식이었다.

백자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반드시 베겠다는 마음으로 패왕진천검법의 가장 강력한 한 수를 발휘하려고 내공을 끌어올리던 그때.

바로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잠깐!”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말없이 싸움을 지켜보던 검우진이었다.

그의 제지로 공격이 멈추자 흙먼지가 가라앉으면서 화무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화무기의 몸에서 거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의 살기는 점점 고조되면서 발출되었던 살기였다면, 지금의 살기는 그를 찢고 나온 살기였다.

통제 불능의 제어할 수 없는 살기.

드디어 천살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권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는데 교주님께서는 왜 막으신 거지?’

검우진의 시선이 화무기를 향했다.

화무기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광채. 이렇게 붉은 기운을 띄는 살기는 처음이었다.

검우진이 그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이제 연기는 그만하지.”

연기라는 말에 권마와 백자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깜짝 놀란 표정으로 검우진과 화무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검우진이 백자강에게 말했다.

“저자의 호신강기가 평범한 것이 아닌 것 같소.”

지금까지 화무기가 싸우는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검우진이었다.

그는 앞서 다른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도 피할 수 있는 공격을 호신강기로 막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권마와 백자강의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고스란히 허용하는 것을 보자 검우진은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화무기는 피할 수 있었다. 날아든 공격이 정말 강력했지만, 앞서 보여준 보법을 생각하면 이렇게 연속해서 공격을 허용할 리 없었다.

심지어 내공 관리를 위해 권마와 권법으로 싸우려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공격을 맞고 있는 거지? 내공 소모가 극심할 텐데.

굳이 일부러 불리함을 자초한다는 것은?

검우진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저자의 호신강기가 외부의 공격을 내공으로 흡수하는 것 같소.”

충격적인 말이었기에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화무기를 쳐다보았다.

검우진이 화무기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나?”

스스스스스.

그러자 미친 듯이 피어오르던 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제불능처럼 보였던 살기였는데, 살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놀랍게도 그는 살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분노에 가득 찼던 화무기의 얼굴에 여유가 피어올랐다.

“역시! 당신이 알아차리는군.”

화무기가 공격을 허용한 것은 단지 호신강기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역천흡마공(逆天吸魔功), 내가 창안한 무공이다.”

더 정확히는 그가 몸속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무공이었다.

“너희는 지금까지 내 내공을 소모시킨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너희들의 내공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이쪽은 두 명이 부상을 당했고, 다들 내공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는데.

“내 내공은 다시 다 채웠다.”

만약 검우진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백자강과 권마 역시 내공이 완전히 소진되었으리라

처음부터 맞아준 것은 자신이 호신강기를 맹신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이렇게 맞아도 의심하지 않을 테니까.

화무기는 결코 오만한 자가 아니었다. 오만한 척하면서 확실하고 완벽한 싸움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무기가 진정 오만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었다.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뿐이다.”

내가 욕을 해야 나타나니까!

화무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살기가 폭주하던 모습보다 살기가 완전히 사라진 지금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권마와 백자강의 합공을 버티고, 그 과정에서 내공까지 회복했다는 사실은 모두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무겁게 흐르던 침묵을 깬 사람은 권마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권마는 앞서 주먹으로 화무기의 몸을 강타했을 때, 생전 처음 느끼는 호신강기를 경험했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권마의 자책에 검우진은 단호히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알아내기 어려운 일이었네. 그 힘든 싸움을 하면서 아는 건 불가능했네.”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싸운 우리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소.”

정말 이런 엄청난 무공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랬기에 풍천교주는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이 정도는 되어야 혈겁을 일으킬 수 있다면, 나는 평생 못 일으키겠다.”

한 꺼풀 벗겨진 지금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는 듯, 이제 화무기는 웃지 않았다.

“정사마는 물론이고 새외까지 모두 모여 나를 기다렸다. 과연 너희는 정상이냐?”

앞서 말했듯, 나를 만든 것은 너희란 뜻이 담긴 말이었다.

화무기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에게 날아드는 걸 보면서 진패천은 정말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마교주를 돕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과연 저 괴물 같은 자를 천마신교가 단독으로 상대해 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교를 휩쓴 저 천살성이 무림맹으로 왔다면? 과연 자신은 막아낼 수 있었을까?

손자를 위해 온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군아, 네가 이 할애비를 살리기 위해 보냈구나.’

그것도 군자검까지 들려서 말이다.

검우진이 백자강에게 물었다.

“계속 싸우시겠소?”

호신강기의 비밀을 알아낸 것은 자신이지만, 여전히 이 싸움은 백자강과 권마의 싸움이었다. 싸움을 그만두는 것은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었다.

백자강이 대답에 앞서 권마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권마에게 먼저 의사를 물은 것이다. 함께 싸웠던 권마에 대한 그의 예의였다.

권마는 원래라면 당연히 싸우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상대의 내공만 채워주고 싸움을 끝낸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자강이 자신과 합공하겠다는 선택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는 자존심이나 명예보단 합리적인 실리를 따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존감이 낮아 보이거나, 명예롭지 않은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는데, 무작정 싸운다? 단지 내가 싸우던 중이었다는 이유때문에?

권마 역시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생각하며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맹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백자강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다른 이들에게 물었다.

“좋은 생각이 있으시오?”

그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기에, 오히려 신뢰가 가는 모습이었다.

진패천이 나직이 말했다.

“이런 극단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마공일수록 부작용도 큰 법이오.”

진패천은 그가 내공을 흡수했기에 동시에 희생한 부분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약점을 찾아내야겠지요.”

그러자 화무기가 다시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앞서 보였던 살기와는 전혀 다른 살기였다.

진정한 그의 살기이자 몸에 깃든 영혼들의 살기이기도 했다. 그 살기에는 세월의 힘이 담겨 있었다.

죽음이 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삼백 년간 쌓여 온 살기가 허공을 부유했다.

그 살기가 이렇게 말했다.

내겐 약점 따윈 없다!

풍천교주가 탄식하듯 말했다.

“소교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그 똑똑한 머리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겁니다! 저 괴물 같은 놈과는 이렇게 싸우는 겁니다! 이렇게 말해줘야지. 꼭 필요할 때는 없고, 내 신물 가져갈 때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고월 데려갈 때는 아예 떼로 몰려왔으면서! 내가 욕하고 불평할 때마다 나타났잖아? 어서 나타나게, 소교주!”

검왕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풍천교주를 바라보았다. 이런 순간에 저런 농담을 한다고?

심지어 풍천교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 마가촌 길 끝에서 그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시오? 이런 마음이었지만 검왕의 시선도 풍천교주를 따라 저 멀리 향했다. 그도 검무극이 보고 싶었다.

어디 검왕 뿐이겠는가? 진패천과 백자강의 마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검무극이 보여준 그 놀라운 모습들이 있었기에 이런 기대가 들었다.

분명 소교주라면 이 싸움의 답을 찾아낼 텐데.

그때 진패천과 백자강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두 사람은 순간 같은 생각을 했음을 알아차렸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손자뻘, 아들뻘인 젊은 소교주를 기다리고 있다고?

누가 알까 두려운 그 마음이 그들의 한마음이었다.

그때 검우진이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화무기에게 그것을 묻는다고 대답할 리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내가 그걸 대답해 주리라 생각하나?”

화무기 역시 자신에게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네게 물은 게 아니다.”

검우진의 시선이 화무기 너머 저 멀리 건물 지붕을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을 때, 누군가 저 멀고 먼 지붕 위에서 이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너무 멀어서 그는 점처럼 보였다.

“어서 와라.”

나직한 말이었는데 손을 흔들던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몸을 날렸다.

번쩍하는 순간.

그가 공간을 이동하다시피 순식간에 날아왔다. 정말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고수도 이렇게 빠르게 경공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아는 한 이런 신위를 보일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검우진 앞에 내려선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모두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특히 풍천교주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가득했다. 당장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왔다, 왔어! 정말 소교주가 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검무극이 도착한 것이다.

“서둘러 오느라 아버지 선물도 못 사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물 못 사 온 이야기부터 하는 걸 보니 아들이 틀림없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냐?”

“주점 밖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도착했습니다.”

검무극은 사도맹주와 권마가 화무기와 싸움을 벌이던 그때 마가촌에 도착했다.

“왜 숨어 있었느냐?”

도착했을 때는 마침 내공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아무리 급해도 내공은 채워야 했기에 화무기나 아버지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회복했다.

신안술로 이곳의 모습을 지켜보며 운기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처음 아버지와 산에 올랐을 때 배웠던 그 기술로.

수십 장 밖의 멧돼지를 알아냈던 그 기운을 아버지에게 보냈던 것이다.

“숨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오랜만에 싸우시는데 실력발휘 하셔야죠. 그래서 아들에게 생색도 좀 내시고. 그러니 나중에도 아버지가 싸우십시오. 효자라서 양보해 드리는 겁니다.”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그 비웃음에 검무극도 함께 웃었다.

잘 왔다.

네, 아버지.

이제 눈빛만 봐도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안도했고 기뻐했다.

‘늦지 않게 왔구나!’

누가 죽었을까 봐. 누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을까 봐. 다들 엉망진창이 되었을 때 도착하게 될까 봐.

그런 걱정에 내공을 회복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 잠도 자지 않았고 밥도 먹지 않았다.

걱정 많은 검무극은 오면서 온갖 나쁜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 잡념을 찢어발기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니까 괜찮을 거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자리에는 생각지 못한 이들도 함께 있었다.

“맹주님!”

검무극은 화무기에게 등진 채 인사를 이어나갔다. 그런 검무극의 모습을 화무기는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화무기는 이 철저히 의도된 무시에 분노하지 않았다. 지금껏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신중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진패천의 상처를 향했고, 다음으로 허리에 찬 군자검을 향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패천이 자신의 군자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감사는 하군이에게 하게.”

“이번 모임에서는 하군이를 제일 상석에 앉히겠습니다. 물론 자랑 값으로 술은 사야겠지만요.”

이번에는 백자강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농담을 이어갔다.

“사인이는 뭐 없습니까?”

“나 다칠까 봐 가지 말라고 했네.”

“그럼 말석에 앉혀야겠습니다.”

놀랍게도 검무극은 화무기를 등 뒤에 두고 친구 모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실없는 농담까지 해가면서.

그리고 이어진 하나의 약속.

“오늘 두 분께서 와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훗날 제가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도착해 있을 겁니다!”

진패천과 백자강에게 이보다 더 큰 보답은 없었다. 진하군이나 비사인이 위험에 빠졌을 때, 이 소교주가 구하러 가겠다는 약속이었으니까.

“우리 쪽에 먼저 오게.”

백자강의 농담에 진패천도 미소를 지었다.

두 맹주의 긴장이 풀어지는 모습에 화무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렇게 심각하던 그들이.

‘웃는다고?’

검무극이 도착하자 그야말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칙칙하던 싸움터가 정말 놀랍게도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무기에게 한마디 할 법도 했건만, 검무극은 그를 돌아보지 않고 인사를 이어갔다.

검무극이 회귀 전 인생에서부터 지금까지 화무기를 얼마나 많이 떠올렸는지 모를 것이다.

이 만남이 얼마나 운명적이고 중요한 만남인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얼마나 이 순간을 두려워했고, 또 기다려 왔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화무기보다 더 중요했으니까.

회귀 후 내내 가져왔던 마음가짐 하나.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회귀하지 않았다. 난 이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회귀했다.

검무극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다음으로 인사한 사람은 권마였다.

“사부님, 제자 다녀왔습니다.”

“잘 왔다.”

권마가 가장 좋아할 소식부터 전했다.

“이 대주도 무사히 임무 마쳤습니다. 나중에 수하들과 함께 도착할 겁니다.”

딸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권마의 눈에 기쁨이 스쳤다. 그리고 검무극의 표정이 이렇게 밝다는 건, 그쪽으로 간 마존들과 마인들이 모두 안전하다는 것.

암흑궁주와의 싸움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텐데.

권마가 말없이 그 큰 손으로 검무극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었다.

“고생했다.”

지켜보던 화무기가 나직이 말했다.

“누가 보면 싸움이 다 끝난 줄 알겠군.”

사실 검무극과의 첫 만남이 그의 뒤통수를 보는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검무극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널 높이 사는 거잖아?”

“뭐?”

“죽어도 인사는 드리고 죽어야지.”

네게 죽을 수도 있으니 인사하겠다. 말 그대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 사는 말이었기에 화무기는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이번이 내 차례겠지?

풍천교주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검무극은 짐짓 불평하듯 말했다.

“아니, 교주님은 이런 중요한 싸움을 하시면서도 제 욕을 하십니까!”

“내가 욕을 해야 자네가 나타나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오늘만큼 검무극이 반가운 적은 없었다. 신물이 효험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빌기만 하면 나타나 주니까.

“역시 교주님이십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언제나 본교와 함께하시는군요.”

“억지로 나왔네. 눈칫밥이라도 계속 얻어먹으려면 나와야지.”

검무극 앞에서는 이런 농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풍천교주였다.

화무기는 설마 일일이 다 인사하려는 건가? 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는데, 검무극은 보란 듯이 일일이 다 인사했다.

화무기의 마음속에서 영혼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이 모습을 보고 어찌 그냥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제 밖도 시끄러웠고 안도 시끄러웠다.

다음은 독왕이었다. 독왕은 사람들 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니, 독으로 녹여버리시지 왜 뒤에서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나? 그런 눈빛으로 독왕이 슬쩍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교주에게 이런 농담 반 진담을 전할 수 있는 순간은 유일하게 검무극과 함께 할 때였다.

“아버지, 앞으로는 그냥 독왕님만 보내십시오. 다른 분들이랑 교에서 술이나 한잔하시면서요.”

독왕을 최고로 추앙하는 말이었다. 사실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이 와서 제일 좋은 사람은 독왕이었다.

이 싸움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나면, 자신은 조용히 이곳을 빠져나갈 작정이었다. 검무극을 지키라는 교주의 절대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서, 게다가 교주를 두고 전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던 그였기에 검무극의 등장은 정말 희귀 독충을 연속해서 발견한 기쁨이었다. 한 세 마리쯤.

검무극은 마지막으로 검왕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누가봐도 제일 많이 다친 사람은 검왕이었다.

“악 형이야말로 왜 나왔습니까? 어디 꼭꼭 숨어 있지.”

“알다시피 내가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서. 미처 못 숨었지.”

물론 재회의 기쁨은 기쁨이고, 검무극은 그를 놀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참, 차 조장도 무사합니다.”

차이란이 무사하다는 말에 검왕이 당황했다. 이 상황에서 차이란으로 자신을 놀린다고? 그것도 교주와 맹주들이 보는 앞에서?

“……그걸 왜 내게 말하나?”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러운 재회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검무극은 화무기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야 나를 본다고?

화무기는 자신이 어디 이름 없는 무명소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소교주는 그걸 노린 것이겠지만.

화무기는 알지 못했다. 사실 검무극은 그가 이보다 더 하찮은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검무극은 화무기와 이렇게 되기를 꿈꾸었었다.

아버지와 바둑을 두다가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선 그를 죽이고 돌아오기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서 제가 둘 차례죠?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화무기가 세상에 나오면서 그와 자신의 운명은 달라졌다.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화무기를 바라보았다.

너를 만나기 위해, 너를 막기 위해 내가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모를 것이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화무기 역시 더없이 오랜 세월을 지나온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네가 낯설지 않다.”

“원래 잘생긴 얼굴 보면 그렇지.”

이내 검무극이 웃으며 부탁했다.

“밥도 안 먹고 쉴 새 없이 달려왔더니 배고파 죽겠다. 제발 부탁인데.”

이제 오늘의 이 싸움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우리 밥부터 먹고 싸우자.”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밥을 먹자고? 생사가 오가는 이 싸움 중에?

그 말을 듣는 순간 화무기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지금껏 검무극을 경험했던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해봤던 그 생각.

'미친놈인가?'

물론 미친놈일 리 없었으니까.

'뭔가 노림수가 있다.'

소교주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이들의 반응이었다. 적어도 황당해한다거나, 지금 상황에 뭔 소리를 하냐는 반응쯤은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일곱 명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한데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풍천교주가 배를 쓱쓱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배가 고프네.”

백자강이 요리를 딱 완성했을 때, 화무기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아무도 식사하지 못했다.

저 풍천교주야 아까부터 온갖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던 자니 저럴 수 있다고 쳐도.

백자강이 검무극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내가 교주께 요리를 배웠네.”

사도맹주는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그래서? 요리라도 하겠다는 건가? 조금 전까지 그렇게 싸우던 사람이?

심지어 그 말을 들은 마교주의 얼굴에 뿌듯함이 스쳤다.

소교주가 도착하자 어떤 장치가 켜지면서 단체로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던 그들이 딴짓을 시작했고, 심각했던 표정은 모두 밝아졌다.

검왕은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심연처럼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독왕은 길가에 뿌리째 뽑힌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설마 그 뿌리에서 기어 나온 저 벌레를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들에게 느껴지는 공통된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소교주가 있던 자리에 천마가 도착해도 이런 안도감을 주진 못할 텐데.

화무기는 황당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했다.

'뭐지, 이놈?”

소교주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을 암흑궁주에게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영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검무극이 다시 화무기에게 말했다. 밥 먹고 죽여주마, 이런 괜한 협박은 하지 않았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밥은 먹이고 죽여라.”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있지."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이 순간이 네 인생에서 마지막일 테니까.”

“뭐?”

오늘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이런 뜻으로 말한 줄 알았는데 이 역시 정반대였다.

"만약 네가 이겨서 우리가 다 죽으면, 이런 분위기, 이런 느낌, 이런 긴장감, 네 인생에서 마지막일 거다.”

검무극의 표정은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우리가 다 죽고 나면 네 앞에는 공포에 떨며 오직 충성하는 자들만 남을 거다. 정확하게는 충성하는 척하는 사람들이겠지. 넌 권태로움과 제 성질에 못 이겨 이 사람도 죽이고, 저 사람도 죽이고, 마구 죽여댈 테고.”

잠시 그의 눈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덧붙여 말했다.

"한데 아무리 죽여도 네 심장은 절대 오늘처럼 뛰지 않을 거다.”

검무극을 향하던 화무기의 시선이 그 뒤에 서 있는 검우진을 향했다. 오늘 싸움 내내 자신이 신경 쓰고 있었던 그였다. 그는 아직 검을 뽑지 않았지만, 이미 그와 진한 싸움을 벌인 것 같았으니까.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권마의 주먹은 아직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옆에 진패천과 백자강이 나란히 서 있었고, 그 옆으로 풍천교주와 검왕이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 독왕이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적어도 오늘 같은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 앞에 서서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밥 먹자.”

화무기는 묘하게 설득되었다. 저 소교주가 온 순간부터 어찌 된 일인지 긴장감이 자꾸 떨어진다.

“너 생각 없으면 나라도 좀 먹자! 치사하게 먹는 거로 이러기냐?”

그냥 확 공격하기에는 검무극은 자신의 호기심을 너무 자극하고 있었다.

결국, 화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지금 이 김 빠진 투기로는 싸움을 펼칠 수 없었으니까.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자, 들어가자.”

검무극이 풍류주점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앗! 이게 뭐야!"

풍류주점의 한쪽 벽은 무너져 있었고 글이 새겨져 있던 이 층 벽은 통째로 날아가 있었다.

검무극이 화무기를 향해 홱 돌아섰다.

“이 자식아, 저걸 부숴? 저게 얼마나 소중한 벽인데! 안 되겠다.”

검무극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넌 혼 좀 나야겠다.”

검무극의 난데없는 돌변에 화무기도 흑검에 손을 가져갔다.

싸우는 거야 환영인데, 너 지금 오해하고 있다.

그때 검우진이 툭 내뱉었다.

“내가 부쉈다.”

순간 흐르는 침묵.

검무극이 목소리를 낮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싸움에 방해가 되는 벽은 미리 없애는 것이 상책이지요. 사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다들 처음 글을 남겨서 별로였습니다. 연습도 한 번 했으니 다시 남기면 더 멋진 글을 남기겠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검우진이 뒤따라 들어갔고, 진패천과 백자강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놀랍게도 세 사람은 화무기를 쳐다보지도 않고 들어갔다.

권마만이 화무기가 움직일 것을 끝까지 경계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줄줄이 풍류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남겨두고 다들 들어가 버린다고? 정말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들이!'

방금까지만 해도 영웅이냐 악당이냐로 싸웠던 그였다.

한데 지금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이었다가 갑자기 조연이 되어 버린, 아니 조연조차도 아니었다.

길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단역이었다.

그래, 단역에게 다 죽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지.

주점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무기가 마지막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섰던 검무극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부서졌네요.”

남아 있는 벽도 곳곳에 금이 가 있었고, 부서진 식탁과 의자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검무극이 이 층의 벽이 있었던 자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예전에 여기 주인장과 그런 말을 나눈 적 있습니다. 저 벽이 부서지면 부서지는 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고요.”

그때 검우진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지켜주지 않아서 섭섭하냐?”

부서진 탁자도 벽도, 모두가 아들이 지키고자 했던 마도였으니까.

검무극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이런 질문을 해주신다는 것이 제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인지 모르실 겁니다.

“이미 지켜주셨잖습니까?"

검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검무극은 창밖 저 멀리 본단에서 피어오르는 마화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키려던 건 저 벽이나 탁자가 아니라 여기 주인장이고, 마가촌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아버지께서 이미 마화까지 피우시면서 지켜주셨잖아요.”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아버지를 향했다.

"마가촌 사람들은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못할 겁니다. 정말 멋진 선택이셨습니다. 아버지."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반응을 보인 사람은 듣고 있던 권마였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교주도 사람인데 마가촌 사람들을 교내로 보호하면서, 어찌 검무극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아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순간을 분명 기대했을 거다.

“아버지께서 무림의 운명이 걸린 싸움의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만으로도, 이곳 주인장에게는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겁니다. 벽에 남겨진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가 되겠지요.”

지금 교주가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권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흐뭇한데, 교주는 오죽할까?

“그래도 다행히 여기 멀쩡한 것들이 있네요.”

검무극이 구석에서 부서지지 않은 탁자와 의자를 가운데로 가져왔다.

"앉으십시오, 아버지.”

화무기는 입구에 선 채 검무극이 하는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서 있었다. 네가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겠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번에는 백자강이 먼저 나섰다.

“자네 아버지께 요리를 몇 가지 배웠네. 어떤가? 맛 좀 보겠나?"

"해주십시오! 이 무림사에 사도맹주님이 해주신 요리를 얻어먹어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백자강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살폈다.

"자넨 먹을 복이 있어. 다행히 주방은 크게 안 상했네.”

“저 기대해도 됩니까?"

“기대하게!"

설사 맛이 없더라도 그에게는 탈출구가 있었다.

"자네 아버지가 전수한 실력이라니까.”

조금 전까지 패왕진천검법을 날리던 그의 손에 다시 식칼이 들렸다.

왠지 싸울 때보다 더 흥분하고 신나 보이는 그였다.

“누가 요리 좀 도와줄 사람 있소?”

백자강의 요청에 검우진은 자리를 지켰다. 화무기와 같은 공간에 있는데 자신이 주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양파를 까다 눈물을 줄줄 흘렸던 독왕은 저 멀리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주니까 도왔지, 다른 사람은 어림없다는 의사를 확실히 드러냈다.

“도와드리고 싶소만 나는 너무 소질이 없어서.”

풍천교주는 도움은커녕 사고만 칠 게 뻔했고.

도움이 될만한 검왕은 내상을 입은 상태.

외상을 입기도 했고, 아니더라도 진패천이 나서기도 애매한 상황.

그때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돕겠습니다.”

나선 사람은 권마였다.

이미 앞서 주방에서 당근 썰던 모습을 보였던 그였다. 외모가 어울리지 않을 뿐, 요리 실력은 백자강보다 훨씬 뛰어났다.

권마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화무기와 싸우려던 두 사람이 주방에서 새로운 싸움을 이어간 것이다.

권마가 그를 도우려는 것은 마땅히 도울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순수하게 백자강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번에 그에게서 배운 것이 있다.

실리를 위한 선택.

특히 명예와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겼던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화무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조금 전 자신과 싸우려던 백자강과 권마가 주방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요리를 하러 들어가서도 안 될 일이고, 설령 그렇다 해도.

너와의 싸움은 식사 후로 미루자.

이런 말이라도 한마디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저 소교주가 나를 감당할 거라 믿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독왕이 너희들에게 다 미쳐버리게 하는 독이라도 푼 것이냐?

그때 검무극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리 와서 앉지.”

여전히 화무기가 움직이지 않자 검무극이 덧붙여 말했다.

“우린 밥 먹는 사람은 안 죽여. 그러니까 어서 와.”

화무기는 검무극의 눈빛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눈을 보고 있자니 정말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화무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검무극이 주방에 가서 술과 술잔을 챙겨 나왔다.

“오랜만에 한 잔 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이 맨 먼저 아버지에게 술을 부었다.

"취마님의 맛있는 술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술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 말로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취마가 술을 다 마셔야 하는 싸움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어쩌면 그쪽 싸움이야말로 정말 치열하고 끔찍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진패천을 시작으로 나머지 이들에게 차례차례 술을 부어주었다.

다른 어느 때보다 남다른 감회가 느껴지는 술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괴물 같은 화무기를 보며 답답해하고 있다가, 검무극이 따르는 술을 받는 중이었으니까.

검무극은 마지막으로 화무기 앞에 놓인 잔을 가득 채워준 후 술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나도 한잔 줘.”

검무극은 그에게 술을 받기를 원했다.

화무기는 술병 너머 검무극을 노려보며 물었다.

“뭐 하는 짓이냐?”

“내 인생의 숙적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 한잔하려는 중이다.”

화무기가 뚫어질 듯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검무극에게서는 수작보다는 진심만이 보였다.

“어차피 너와 나는 오늘이 가기 전에 한 사람은 죽을 거다. 나중에 이 무림을 지배해도 이 정도 여유는 가지고 살아라.”

결국 화무기가 술병을 받아 들더니 검무극의 잔에 채워주었다. 술을 따르게 하고선 기습을 할까 대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검무극이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천살성과 한잔하시죠."

애초에 술잔을 잡지도 않은 화무기를 제외하고 모두 술을 마셨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오기 전까지는 막연히 그가 오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자 판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 상대가 천살성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었다.

잠시 후, 백자강이 큰 그릇에 담긴 요리를 가져 나왔다. 권마는 가져온 작은 그릇에 요리를 덜어주었다.

백자강은 기대감으로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자, 모두 드셔 보시오.”

검무극이 냄새를 맡자 감탄했다.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검우진이 백자강에게 말했다.

"함께 드십시다."

백자강과 권마도 자리에 함께했다.

화무기는 앞에 놓인 요리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검무극이 밥 먹자고 했을 때만 했어도, 정말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 상상도 못 했다.

그건 화무기만이 아니었다. 누군들 천살성과 밥상에 함께 앉게 될 줄 알았겠는가?

"정말 맛있습니다!"

검무극의 감탄에 백자강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자네 부친 생각해서 괜히 맛있다는 거 아닌가?”

“제 혀가 아홉 개쯤 있는데, 지금 이 혀는 음식 맛보는 혀지 아부하는 혀 아닙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맛있다고 한마디씩 하자, 그제야 백자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확실히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다음에 놀러 가면 또 해주십시오!”

"얼마든지 오게.”

지켜보던 화무기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너희에게 다음은 없다.

검무극이 화무기를 쳐다보았다.

“왜 안 먹냐?”

화무기는 젓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다들 정신이 나갔다고, 자신마저 정신이 나갈 수는 없었으니까.

가만히 화무기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오늘 화무기는 검무극에게 여러 번 놀랐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를 놀라게 하는 말이었다.

“사실 너와 밥 먹는 거 두 번째다.”

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나와 밥 먹는 게 두 번째라고?'

화무기는 물론이고 자리의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무슨 헛소리냐?”

화무기의 어이없어하는 반응에 그를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자 화무기는 저 인사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맹주님께선 제게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모두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화무기의 몸속에 깃든 두 맹주 중 한 사람에게 말하고 있음을. 대체 누구와 대화하려는 걸까?

"그날 제가 했던 질문 기억나십니까?”

물론 검무극이 말하는 대상은 무황신검이었다.

삼백 년 전으로 돌아갔을 때 검무극은 무황신검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습니까?"

여전히 그는 검무극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이렇게 대답하셨죠. 특별한 방법은 없네.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순간 화무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하는 그의 기억력에 검무극이 쐐기를 박았다.

“조장 혼례식 때 축사해 주기로 하셨었는데.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하셨겠네요.”

화무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바뀌어 있었다. 일어난 사람은 무황신검이었다.

“자네가 어떻게?"

드디어 그날이 기억났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었던 그 무렵, 연설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질문을 던졌던 한 젊은 무인이 있었다.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그는 당돌하게 물었다.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습니까?

얼굴을 보니 이제 확실히 기억난다.

그의 말처럼 그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마교를 불러들였고, 사도맹을 불러들였으니까.

그때 그 무인이 삼백 년 후의 천마신교 소교주라고?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무황신검은 당황했고 충격을 받았다.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앉으십시오. 오늘도 그때처럼 같이 식사하시죠.”

여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무황신검이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래, 같이 식사도 했었지.

화무기는 무황신검의 영혼을 다시 들어가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도 이 상황이 궁금했는지 그냥 놔두었다.

“삼백 년 전에 봤던 자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건가?"

검우진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천살성이 왔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 않은 그였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 놀라게 하는 특기인 검무극이었지만, 이건 놀람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풍천교주는 이럴 줄 알았다며, 네가 삼백 살이나 먹었으니 내가 당한 거지, 라는 농담을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검무극이 솔직히 밝혔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천의궁의 신물인 비궤가 저를 삼백 년 전으로 보내줬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검왕뿐이었다. 그때 비궤를 통해 돌아왔을 때, 비궤를 지키고 있던 그에게는 솔직히 말해줬으니까.

그 말에 무황신검이 ‘아!’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들을 이렇게 흡수한 신비로운 신물이었기에 검무극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그날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더 부연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검무극이 또 놀라운 기연을 얻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화무기가 검무극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무황신검의 잠재의식 속 기억력이 영향을 끼쳤던 것이리라.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던 무황신검이 탄식과도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에게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하네.”

진심이었다. 지난 세월 내내 후회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문득문득 그 젊은이가 생각났다.

워낙 인상적인 사람이었기에 잊기가 어려웠고, 무엇보다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하네.”

“제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삼백 년 후의 사람이고, 천마신교 출신인 사람입니다.”

그 사실은 무황신검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자네가 왜 내게 온 건가? 자네가 선택한 건가?"

“아닙니다. 비궤가 저를 맹주님께 보냈습니다.”

천마신교의 후예라면 천의궁주에게 갔어야 하지 않나? 자신이 마교주를 끌어들였기 때문일까?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회귀와 관련이 있을 테니,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를 부른 이유는 내게 부탁이 있어서겠지.”

무황신검의 시선이 말없이 앉아 있는 진패천을 향했다.

소교주보다도 자신을 제일 존경했다는 후대의 무림맹주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는 지금도 말없이 소교주와 자신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무황신검은 그를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황신검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뭔가?"

화무기가 대화를 끊고 들어올 순간이었다. 싸움을 방해해 달라고 하거나, 천살성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화무기는 그러지 않았다. 너희가 무슨 짓을 해도 자신 있다는 듯.

하지만 검무극이 바란 것은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깬 것이었다.

"천살성이 아니라 무림맹주님으로 식사하시라고 불렀습니다.”

"어차피 천살성의 배를 채워주는 일이긴 하지만, 맹주님으로 식사하십시오."

무황신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뿐인가?"

“네, 그것뿐입니다.”

검우진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이들은 저 말이 검무극의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저 거짓말 같은 진심에 자신들의 마음도 움직였던 것이니까.

하지만 무황신검이 그런 마음을 알 리는 없었다.

“내 도움을 바라지 않는 건 나를 무시해서인가?"

“그 반대입니다.”

검무극의 눈빛과 표정은 더없이 차분하고 진지했다.

"그때 맹주님께서 수하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는 걸 느꼈습니다. 전쟁을 일찍 끝내지 못해 미안해하고 고뇌하는 것도 느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될 줄 몰랐지만, 이렇게 뵈니 식사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검무극이 백자강을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사도맹주님께서 만드신 이 요리, 맛이 너무 좋습니다. 드셔 보십시오.”

무황신검은 말없이 앞에 놓인 요리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더는 권하지 않고 자신도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무황신검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바를 꺼내놓았다. 검무극에게 하는 말이자, 동시에 진패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비궤에 흡수된 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니었네.”

삼백 년간이나 그를 아프게 한 숨겨둔 진실이었다.

“천의궁주나 마교주, 사도맹주와 똑같은 부류이기에 흡수된 것이지.”

생각만 해도 너무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었지만, 결국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선택을 하는 순간, 난 같은 부류가 되었지. 나도 악인이네.”

그랬기에 그는 젓가락을 들 수 없었다.

“나는 자네의 밥을 얻어먹을 자격이 없네.”

검무극은 먹던 음식을 삼키고 물을 마신 후 차분히 물었다.

“왜 이렇게 완벽해지려고 하십니까?"

생각지 못한 물음에 무황신검이 흠칫했다.

검무극이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무황신검님 기준으로 따지면 저기 진 맹주님도 큰 실수를 하신 거겠지요. 마교를 돕기 위해 단신으로 이곳까지 오셨으니까요. 아마 신검님 기준으로 따지면 더 큰 실수겠지요?"

그래서 처음에 진패천에게 말했다. 이들과 어울리면 파멸하게 될 거라고.

검무극이 이번에는 진패천에게 물었다.

"여기 오신 것 실수라고 생각하십니까?"

진패천은 검무극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무황신검의 일은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

“실수지. 아주 큰 실수지.”

말과는 달리 진패천의 표정은 편안했다. 무황신검을 보면서 진패천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았다. 자신도 저러했었음을 느꼈다. 자신도 완벽한 맹주가 되는 것이 삶의 전부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와 조금 달라졌다. 이런 생각을 했고, 또 말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사람인데 실수 좀 하면 어떤가? 평생 실수 없이 살았으니 한 번쯤 실수도 하는 거지.”

이런 대답을 기대했다는 듯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수하들이 더 좋아할 겁니다. 매사 완벽하신 우리 맹주님에게 저런 면도 있구나, 우리처럼 실수도 하시는구나, 하고요.”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무황신검을 향했다. 그를 위하는 것은 진패천을 존경하는 마음이기도 했다.

“신검님이 그들과 같은 부류라고요? 아뇨, 저는 그들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무황신검의 눈빛이 떨렸다.

“평생을 의와 협을 위해 살아오셨고, 무림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분이시잖습니까? 반면 당시의 마교주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습니다. 대체 누구와 비교를 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 대화를 마교주 혁도천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검무극은 거침이 없었다.

“비궤가 마교주를 흡수하지 않았다면 본교의 역사도 많이 바뀌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본교 역사는 분명 나쁘게 흘러갔을 테고,

운명이 바뀌고 바뀌어서 아버지께서 교주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요. 눈앞에 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삼백 년 전의 그 일과 당대의 일은 하나의 큰 인연으로 엮여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 번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무황신검이었다. 이렇게 천마신교의 소교주와 만나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마교와 사도맹을 끌어들였다는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무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이었네.”

“맹주님이 개인을 위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훨씬 더 오래갔을지 모릅니다. 전쟁에서 졌을 수도 있고요.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겁니다. 맹주님 욕심이 무림을 살렸습니다.”

무황신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말, 수백수천 번 스스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네 선택이 결과적으로 좋았다고. 자신의 마음에서 수도 없이 했던 그 생각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고 싶었다.

내 마음속 천 번보다 남이 해주는 한 번을.

그리고 드디어 삼백 년이 지나서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듣고 있다.

“진짜 저들과 같은 부류라면 지금 저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벌써 다 잊었을 테니까요. 삼백 년간이나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분이기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겠지요.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검무극이 놓여 있던 젓가락을 들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무황신검의 가슴에서 알 수 없는 격정이 흘렀다. 지난 삼백 년의 세월 동안 가슴 어딘가에 꽉 막혀 있던 무엇인가가 빠져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무황신검이 떨리는 손으로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진패천이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젓가락이 요리를 집으려던 그때.

쨍그랑.

그가 갑자기 앞에 놓인 그릇을 집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그릇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그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화무기로 돌아온 것이다.

검무극은 그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무황신검이 음식을 먹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자신의 마음이 전달되었을 거라 믿었기에.

"기왕 맹주님을 뵈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나오라고 해라.”

화무기는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왜? 무황신검에게 억지 호감을 산 것처럼 어떤 헛소리로 다른 사람들을 꾀려고? 그러면 그들이 마음을 바꿔먹고 나를 해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반면 검무극은 담담했다.

“그래서 그런 거 아니다.”

“그럼 왜지?"

그건 화무기가 상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다들 이야기하고 싶을 테니까.”

"뭐?"

“너,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네 속에서 항상 그들하고만 대화를 나눴지? 그럼 그들도 지긋지긋한 사람들 말고 남에게, 자신들의 후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나?"

화무기는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그 마음을 현혹해서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거겠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화무기에게 물었다.

“네가 왜 밖에서 싸우지 않고 순순히 밥을 먹으러 들어왔는지 아나?”

그야 검무극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언제든 너희를 죽일 수 있어서지.”

하지만 검무극은 다른 이유를 댔다.

“너도 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네 몸속의 그 지겨운 사람들 말고, 널 이용하려던 암흑궁주 말고, 나나 우리 아버지나 여기 계신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게 자랑이든 울분이든 그게 뭐든.”

검무극의 눈빛은 맑고 깊었다.

“정말 천살성이라고 다 때려죽이겠다는 마음만 있는 건 아닐 거잖아.”

잠시 사이를 두고 화무기가 되물었다.

“내 마음속에 그것뿐이라면?"

검무극이 주방으로 걸어가서 작은 그릇을 가져오더니 다시 요리를 덜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밥 먹고 그 마음속 다시 뒤져봐라. 사람이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까. 밥 먹고 이야기하자. 나도 아직 다 안 먹었다.”

검무극이 다시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화무기는 사정없이 탁자를 내리쳤다.

푸우우웅!

완전히 박살이 났어야 했는데.

탁자는 멀쩡했다.

검무극의 손바닥이 어느새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내력을 발출해서 탁자를 보호한 것이다.

“성질 그만 부려라. 귀한 분들 아직 식사 중이시다.”

화무기가 더욱 내력을 높여 다시 내려쳤다.

푸우우우웅!

하지만 탁자는 부서지지 않았다. 엄청난 내공이었지만, 검무극의 내공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하늘이 네게 사람 죽이고 살라고 거창한 이름표까지 붙여줬다. 평생 지겹도록 죽이고 사는 운명일 텐데. 넌 뭐가 이리도 급하냐?

어차피 오늘 끝나는 싸움이야. 그러니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게 해라. 그 오랜 세월 함께했으면 그 정도 예의는 차려야지.”

화무기는 적어도 그 마지막 말만큼은 반박하지 못했다.

“난 그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검무극이 화무기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네 이야기도 듣고 싶다.”

우리말로 합시다!

“넌 확실히 미친놈이구나.”

화무기의 입에서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검무극은 미친놈처럼 활짝 웃었다.

“그래, 그런 말이라도 일단 하는 거다. 너도, 나도, 그리고 네 몸에 있는 그 사람들도.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거다. 오늘 말 못 하고 죽은 억울한 귀신은 없는 거다.”

검무극이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도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그러자 검우진이 모처럼 농담을 던졌다.

"우리 집안은 너만 해도 충분하다.”

검무극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제가 검 씨 집안 대표로 말하겠습니다!”

그런 검무극을 바라보는 진패천의 눈빛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무황신검과 대화하는 검무극을 보고 그의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무황신검과는 자신이 먼저 대화를 나눴다. 최대한 노력했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한데 검무극은 그를 제대로 위로해 주었다. 늙은 자신보다 백배 나았다.

백자강은 다른 측면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그에게 말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귀에 소름이 돋지 않았던 것. 그 말이 전부 진심이라는 게 놀라울 뿐이다.

“맹주님들도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검무극이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데 풍천교주의 못마땅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내겐 말 편하게 하라는 말 안 하나?"

“하지 말라고 해도 하실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우선 생색부터 내십시오.”

“생색?"

검무극은 마치 도착 전에 있었던 일을 눈으로 본 것처럼 말했다.

“제가 없을 때 우리 쪽 입을 담당하셨을 거 아닙니까? 저 무뚝뚝하고 말 없는 사람들 대신해서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자넨 정말 놓치는 게 없군.”

“다른 건 다 놓쳐도 제가 교주님 활약을 어찌 놓치겠습니까?"

그렇게 풍천교주의 얼굴에 감격을 한가득 안긴 후 검무극은 다시 화무기를 쳐다보았다.

"할 말 있으면 마음껏 하라니까."

물론 화무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내 입을 열 수 있겠느냐, 하는 가소로움이 그의 눈빛에 묻어났다.

“하긴. 자고로 하던 지랄도 멍석 깔아주면 못 한다고 했다. 우리 대화하자, 이러면 나오던 말도 쏙 들어가겠지.”

물론 검무극은 멍석이 있든 없든 잘했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했지? 그럼 너는 더 미친놈이다.”

검무극의 말에 화무기는 어이없었다. 미친놈에게 미친놈 소릴 듣다니! 하지만 이어진 말을 듣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여길 혼자 쳐들어왔잖아? 혼자서 무림 전체와 싸우려 한 사람은 무림 역사에 네가 유일할 거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거다.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거지.”

물론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화무기가 아니었다.

“아양 떨지 마라. 그런다고 네게 할 이야기 없으니까.”

“아양 떠는 것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화무기는 한마디 대화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검무극의 말은 계속 그를 자극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검무극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왜 쳐들어왔냐?”

화무기나 다른 이들은 당연히 이 질문을 이렇게 생각했다. 무림맹이나 사도맹이 아니라 왜 신교가 먼저인가? 하지만 아니었다.

“다른 인생 살 수도 있잖아? 그 무공이면 꽤 멋진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화무기는 대답하지 못했다. 놀랍게도 다른 인생을 산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천살성이니까, 영혼들을 품고 있으니까, 봉인을 풀었으니까.

당연히 쳐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싹 다 죽이고 이 무림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무극의 의문이 이어졌다.

“그냥 이럴 수도 있었잖아? 하늘이 내린 운명? 웃기지 마라, 네 뜻대로 절대 살지 않는다!"

"하늘이 이렇게 큰 힘을 주었는데, 고작 평범한 인생을 살라고 주었겠느냐? 하늘이 나와 같은 사람을 내렸다면 그건 다 너희 때문이다."

이곳에 도착해서 줄곧 했던 말이 다시 나왔다. 하지만 검무극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거 네 생각이냐? 아니면 암흑궁주나 네 속의 영혼들이 했던 말이냐?”

화무기는 자기 생각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려서였을까? 화무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의 일이니까 마음대로 지껄이지.”

“그 점은 미안하다.”

“이게 네 목적이겠지. 그 세 치 혀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검무극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나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대화하자는 게 어디 널 위해서겠냐? 나와 여기 계신 분들을 위해서지. 너를 더 잘 이해해서 더 확실히 죽이려는 거지. 내 말이 구질구질해져도 이해해라."

화무기는 이제 알 것 같았다. 검무극이 오니 왜 다들 돌변했는지.

이 짧은 시간에 사람을 기분 좋게 띄웠다가 화나게 했다가, 이해할 수 없게도 만들었다가, 몇 번이나 감정의 굴곡을 느끼게 했다.

대화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어느새 그와 신경을 곤두세우며 대화하고 있었다.

이제 검무극에 대한 호기심은 여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으려던 그때.

“참, 네 속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드려야 하는데.”

당연히 그 상대가 마교주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이었다.

“사도맹주님 좀 불러줘.”

그 말에 제일 의외라 생각한 사람은 백자강이었다. 무황신검이야 삼백 년 전에 돌아가서 만났다지만, 주가신과는 무슨 인연일까?

“무슨 이유로?”

“그건 지켜보면 알겠지.”

마교주를 불러달라고 했다면 절대 그의 뜻대로 해주지 않았을 거다. 한데 왜 사도맹주에게 감사해야 한다는지 자신도 궁금했다.

“말 못 하고 죽은 귀신은 없기로 했잖아!"

화무기는 검무극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주가신이 등장했다. 그도 검무극이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나를 찾았나?”

모두가 궁금한 질문이었다.

“우리가 오늘 보면 세 번째 보는 겁니다.”

검무극의 대답에 주가신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번째? 삼백 년 전에 보고 지금 보면 두 번째일 텐데?"

“맹주님의 무덤에서 뵈었습니다.”

순간 주가신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곳에서 제게 선물을 주셨지요.”

검무극은 주가신의 시체에서 마지막 구슬을 얻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게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검무극이 육도원기의 기운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화무기는 육도원기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암흑궁주는 화무기를 제어할 수 있는 그 유일한 힘을 그에게 알려줬을 리 없을 테니까.

그날의 일을 보기 전까지는 그날 모였던 정사마의 교주와 맹주들이 육도원기를 나눠서 가져갔다고 생각했다. 그중 일부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빙궁과 풍천교 등으로 흘러 들어갔고.

하지만 그날 그들은 모두 비궤에 흡수되어 투명한 구슬에 갇혔고, 당시 암흑궁주의 손에 들어갔다.

그 이후에 비궤에서 여섯 개의 구슬이 나왔을까? 아니면 애초에 다른 곳에 있었을까?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현실로 왔기에 검무극도 알 수 없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육도원기가 곳곳에 안배된 것은 그날 있었던 이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였다.

“그러니 무황신검님이 못 드신 요리는 사도맹주님이 대신 드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이 요리를 먹으라고 하나?”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짐작했다.

“아직 꿈을 버리지 않으신 분 아닙니까?"

주가신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삼백 년 전 그 일에 개입한 것은 무림일통을 꿈꾸었기 때문일 테니까요.”

듣고 있던 백자강은 내심 감탄했다. 자신은 주가신의 제안을 들었기에 그가 꿈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한데 검무극은 그런 말을 듣지 않고도 정확히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말이 있으면 다 하십시오. 지금이 아니면 할 기회는 없을 겁니다.”

화무기를 죽일 거니 여한을 남기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주가신은 딱 잘라 거절했다.

“난 자네와 할 말이 없네.”

주가신이 사라지려던 그때, 검무극이 불쑥 생각지 못한 존재를 언급했다.

“그 무덤에서 맹주께서 데리고 다녔던 적랑을 봤습니다.”

“아, 물론 실제로 본 것은 아니고, 그림으로 봤습니다. 정말 멋지고 잘 생겼더군요.”

적랑이 언급되자 처음으로 주가신의 눈빛에 어떤 감정이 스쳤다. 그건 그리움이었다.

“함께 계신 그림으로만 봐도 많이 아끼셨던 것을 알 수 있더군요.”

주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주가신은 말을 잇지 않았다. 유일하게 나를 이해해 줬던 녀석이지. 이런 말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적랑을 위해서 한잔하시죠. 아마 맹주님의 죽음을 많이 슬퍼했을 겁니다.”

검무극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다른 이유라면 절대 술잔을 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주가신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술잔을 백자강에게도 들었다.

그도 같이 한잔하자는 의미였다.

여전히 그는 백자강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줄 테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삶을 살아가라고.

백자강이 술잔을 들어서 허공에서 조용히 건배했다.

주가신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그때.

다시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어졌다.

어느새 눈빛이 바뀐 그였다. 그리고 이번에 돌아온 사람은 화무기가 아니었다.

"한심한 인간들.”

그는 바로 마교주 혁도천이었다.

“정파나 사파나 똑같다. 그깟 외부 세력 좀 끌어들인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삼백 년이나 죄책감을 느끼나? 지금 상황에서 그깟 개가 그립다고?"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일단 두 가지는 바로 잡죠. 그깟 외부세력 아니고 천마신교와 사도맹입니다. 그깟 개 아니고 늑대입니다. 적랑이란 이름의 아주 잘생긴 늑대죠.”

혁도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쏘아보았다.

“내가 비궤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본교가 더 나빠졌을 거라고?"

혁도천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첫 만남에서 검우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건방진 것이 제 아비를 똑 닮았군.”

물론 검무극에게는 극찬이었다.

“아버지 닮았다는 말, 제가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기에 혁도천이 꿈틀했다. 마기와 함께 살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감히 선대 교주를 능멸하느냐?”

검무극이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제가 아는 천마는 후대와 삼백 년 만에 한잔하는 술잔을 깨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이만 들어가시고, 진짜 마교주 나오라고 하십시오.”

혁도천이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확실히 보통 놈이 아니구나!"

그가 주가신을 끌어들이고 튀어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널 보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죄책감이나 늑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날 이 몸에서 나가게 해줄 수 있느냐?"

그 물음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그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저런 질문을 할 줄 생각도 못 했다.

“왜 그걸 제게 물으십니까?"

“비궤가 널 삼백 년 전 그곳으로 데려갔었다면, 분명 너를 특별히 여겨서겠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암흑궁주가 말했다. 소교주에게 모든 게 무너졌다고. 정말 그의 말처럼 천살성을 탁자에 앉히고 다루는 것만 봐도 보통 놈이 아니었다.

혁도천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방법을 알고 있느냐?”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아무리 검무극이라도 설마 여기서 알고 있다는 대답이 나오겠느냐 싶었는데.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몸에서 나오게 해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겠지만.

혁도천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있습니다가 아니라 있을 겁니다, 라고 대답했기에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듣고 있던 다른 이들도 모두 놀랐다. 아마 화무기도 놀랐을 테고, 다른 영혼들도 놀랐을 것이다. 귀에 소름이 돋지 않은 백자강이 제일 놀랐다.

이내 혁도천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다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정말이냐?"

그 한마디에 놀람과 의심, 기대와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거짓말이면 널 산 채로 찢어버릴 거다!"

검무극이 바닥에 깨진 그릇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그런 중요한 질문은 술잔을 깨기 전에 했어야지요.”

혁도천은 반신반의했지만, 진짜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검무극에게 제안했다.

“나를 나가게만 해주면,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라도 들어주겠다!”

당연히 원하는 것이 이것일 거라고 확신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무림일통을 이루게 해주겠다.”

그러자 이번에는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 웃음이 기쁨의 웃음이라 여겼지만.

“제겐 지금의 무림일통만 해도 충분히 힘듭니다만, 솔직히 당신들보다 더 힘듭니다!”

혁도천은 그 말뜻을 알 수 없었다.

반면 그곳에 있던 이들은 모두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옅게 웃기도 했고,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오직 검우진만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갈 수만 있다면.............”

기대에 찬 말을 이어가던 혁도천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그는 화무기로 돌아와 있었다. 다른 내용은 다 들어줄 수 있지만, 이 일만큼은 대화를 차단했다.

"역시! 넌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군. 내 몸에서 그들을 빼내 줄 수 있다고? 그런 헛소리로 마교주를 현혹하려 드는 거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너는 싫냐?"

“뭐?”

“그 사람들이 네 몸에 있는 게 괜찮냐고 묻는 거다. 네 생각을 읽고, 네 감정을 읽고. 그거 싫지 않냐고."

화무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영혼들과 자신의 관계만큼은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물었다.

“그들은 네게 어떤 존재냐?"

화무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흑검을 뽑아 검무극에게 겨눴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강력한 살기가 엄습했지만 검무극은 여유로웠다.

“그래, 싸움도 대화의 일종이긴 하지. 그래도 난 말로 하는 대화를 좋아해. 아직 말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하지만 화무기의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이제 더는 검무극의 세 치 혀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검무극이 싸움을 받아들였다.

“그래, 싸우자. 죽도록 맞으면 그땐 이 말이 나올 거다. 우리 제발 말로 합시다!”

당장이라도 팰 듯이 말했지만 검무극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검무극이 한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버지, 저놈 반쯤 죽여서 다시 제 앞에 앉혀 주십시오.”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아직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보지 못해 저런 농담을 한다고 여겼다.

“소교주, 저놈, 보통이 아니야. 심지어 역천흡마공이란 무공으로 내공을 다 회복했다고!”

하지만 검무극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검무극의 두 눈에는 아버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가만히 아들을 바라보던 검우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도 먹었으니 소화나 좀 시켜볼까?"

아들 앞이라서

“잘난 척을 그렇게 하더니, 고작 하는 짓이 아버지 뒤에 숨는 거냐?”

화무기가 노골적으로 검무극을 비웃었다.

하지만 들고 있는 흑검으로 찌르면 모를까, 말로 검무극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럼 아버지 뒤에 숨지, 누구 뒤에 숨을까? 내가 제일 마음 편히 숨을 수 있는 곳인데.”

검무극은 아버지 뒤에 숨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이런 기회에 실력 발휘도 한번 하셔야지.”

검우진이 천천히 탁자 옆으로 걸어 나왔다.

오늘 화무기가 도착하고 처음으로 그가 나서는 순간이었다.

화무기도 옆으로 나왔고, 탁자에 앉아 있던 이들도 모두 탁자에서 일어나 검우진 뒤에 늘어섰다.

아들 앞이기 때문일까?

천살성을 앞에 두고서도 검우진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도하리만치 차분하고 침착했다.

오히려 긴장한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비록 천살성이 검무극의 말에 휘둘리고 있었지만, 자신은 직접 그와 싸워봤다.

그 특별한 호신강기가 아니더라도, 놈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말로는 이겨도 싸움으로 이기기는 쉽지 않은 상대인데.

이쪽에서 마교주가 나서면 저 천살성 역시 지금까지와 다른 수를 쓸 수도 있었고.

그런 천살성을 반쯤 패서 앉혀달라고 하는 아들이나, 그런다고 저렇게 거침없이 나가는 아버지나.

저 두 사람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권마는 왜 저렇게 태연한 거지? 교주와의 관계로 볼 때, 가장 걱정할 사람인데, 그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안 불안하시오? 나만 불안하냐고!'

풍천교주의 시선이 이번에는 독왕을 향했다.

독왕은 검무극이 등장한 이후 반쯤 자기 세상에 가 있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그가 이제 자꾸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세상과 현실의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 어찌 보면 검무극을 가장 믿는 사람은 독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왕은 말없이 내상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도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검우진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역시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검무극이 등장한 후에 아예 표정이 편안해졌으니까.

한편 진패천과 백자강은 풍천교주와 조금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이미 실력을 보였고, 이제 남은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과연 마교주는 얼마나 강할까?

검우진이 그에게 당해도 문제, 그를 압도해도 문제였다.

화무기와 검우진이 십여 걸음 떨어져서 마주 섰다.

화무기가 흑검을 겨누고 있음에도 검우진은 검을 뽑지 않았다.

화무기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맨손으로 싸우겠다고?"

왜 검우진이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죽여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반쯤 두들겨 패서 다시 앉혀 달라고 했으니까. 아무리 자식이 그렇게 부탁했다고.

“날 이렇게 무시하겠다?”

화무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평하게 검 없이 싸우자, 라고 했다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너는 네 마음대로 싸워라, 나는 주먹으로 패주마 이런 식으로 나오니 제대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화무기가 검을 회수했다.

“자식 앞에서 얻어터지면 부끄러울 텐데.”

검무극이 그 말을 대신 받았다.

“아들을 위한 영광의 상처지. 평생 그 상처 보여주시면서 자랑하실 거다. 내가 아들 대신 얻은 상처라고. 이 효자 아들 때문에 멋진 아버지 되시는 겁니다.”

화무기는 어떤 말로도 검무극을 상대할 수 없음을 또다시 확인했다.

화무기는 저 오만한 얼굴을 박살 내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들 앞에서 살려달라고 비는 말이 나오게 해 주리라.

‘그때 네놈이 어떤 말을 할지 보자.’

검무극이 큰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검을 먼저 뽑는 쪽이 지는 거다!”

두 사람이 주먹으로 싸우려 하자 풍천교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자의 호신강기가 외부의 충격을 내공으로 흡수하고 있네. 주먹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한데.”

천살성의 역천흡마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속해서 그 마공이 호신강기와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역천흡마공을 발휘해야 외부 공격이 흡수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화무기는 공격을 당하는 그 짧은 순간 역천흡마공을 발휘했다.

풍천교주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그를 죽이려면 호신강기를 찢고 검을 그의 몸에 박아 넣어야 한다.

함께 싸움을 지켜봤던 검우진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소교주 때문에 무리하는구나.’

검우진이 먼저 들어오라고 손을 까닥했다.

그 도도한 모습에 화무기가 비웃었다.

"공격은 약한 쪽에서 먼저 해야.............”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화무기가 바닥에 처박혔다.

번쩍하는 순간 쇄도한 검우진이 화무기의 멱살을 잡아서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은 것이다.

너무 빨라서 화무기는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바닥에 누운 화무기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이렇게 빠르다고?”

검우진의 주먹이 화무기의 얼굴이 있던 곳에 박혔다.

쩌어어어억!

주먹을 중심으로 움푹 파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그 자리에 있던 화무기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주먹이 날아들던 순간, 순식간에 구르듯 몸을 움직여 빠져나간 것이다.

화무기도 검우진 만큼이나 빨랐다.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화무기는 앞서 자신들과 싸우던 움직임보다 더 빨랐다. 살기의 성격이 바뀌면서 다음 단계의 실력을 보이는가 했는데, 실제로 그러했다.

한데 검우진이 그런 화무기를 제대로 내리꽂은 것이다.

검우진의 신형이 다시 화무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화무기가 검우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내공과 내공이 맞부딪치면 마교주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후우우웅!

쇄애애앵!

양쪽의 주먹이 충돌하려던 그때.

검우진의 몸이 옆으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후우우욱.

검우진의 발차기가 그대로 화무기의 배를 강타했다.

화무기가 몇 걸음 뒤로 주르륵 밀렸다. 화무기도 놀랐고 보던 사람도 놀랐다.

주먹에서 발차기로, 검우진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그야말로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 같은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후우웅.

추격하듯 날아든 검우진의 주먹이 화무기의 얼굴을 스쳤다. 허리를 뒤로 젖혀서 피했는데, 어느새 허공으로 날아오른 검우진이 허공에서 발로 내리찍고 있었다.

검우진이 진각으로 내리친 바닥이 쩍 갈라졌다. 화무기는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저 앞에 섰다.

어느새 그는 뻥뚫린 한쪽 벽 바깥, 풍류주점 앞의 길에 서 있었다.

그는 표정에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우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검우진이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모두 뒤따라 나갔다.

“아버지가 주먹을 쓰고 발을 쓰시는 것 처음 봅니다.”

검무극의 말에 함께 걷던 권마가 대답했다.

“젊은 시절에는 주먹 쓰는 걸 더 좋아하셨다.”

“아버지가요?”

"저 주먹에 박살 난 자들이 많았지.”

검무극이 아버지의 등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한번씩 젊은 시절의 아버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잘 연상이 되지 않는다. 감정 표현을 하고, 주먹을 날리던 시절의 아버지가.

비궤야, 과거로 데려가려면 아버지 젊은 시절로 데려갔어야지.

권마는 내심 안도했다.

'훨씬 강해지셨구나.’

근래 검우진이 무공수련에 몰두했고, 또 성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해진 줄은 몰랐다.

권마가 알아보는 것을 두 맹주가 모르겠는가?

싸움을 지켜보던 진패천은 검우진의 실력에 내심 놀랐다. 그를 응원했지만, 막상 그 실력을 보니 다른 걱정이 뒤따랐다.

진패천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백자강도 자신과 마찬가지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안도가 아니었다.

놀람과 걱정.

'검 교주의 실력이 우리보다 위구나.'

아직 검을 뽑기도 전이었는데, 그게 확실히 느껴졌다. 검을 뽑아서 본격적으로 싸우면 그 차이를 더 크게 느낄 수도 있다는 의미.

그래서였을까? 이 순간에 할 걱정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마교주뿐인가? 마존들의 실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금, 풍천교주와 검왕 같은 걸출한 고수들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만약 저 검무극마저 마교주의 뜻에 따르게 된다면?

어쩌면 무림맹은 사도맹과 손을 잡아야 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생 사도맹과 연합할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검우진과 화무기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벌써 두 번이나 공격을 허용했지만, 화무기는 여유에 넘쳤다.

“마교주의 내공이라 그런지, 더 맛있군.”

풍천교주가 걱정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검우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순식간에 날아든 검우진의 주먹이 연속해서 화무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첫 번째 주먹은 피했지만, 두 번째 주먹은 피하지 못했다.

퍼어억!

검우진의 주먹이 화무기의 어깨를 강타했다.

앞서 발차기를 했을 때도 느꼈지만, 물을 치는 것만 같았다. 정말 처음 느껴보는 감촉의 호신강기였다.

타격이 전혀 전해졌을 것 같지 않았기에 고통 역시 느끼지 않을 것 같은 감촉이었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주먹과 주먹이 오갔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심오한 무의를 그냥 단순히 주먹이 오가는 모습처럼 보이겠지만, 왜 저기서 저 각도로 공격을 하는지, 왜 저렇게 피하는지.

구화마공 십이 성 대성을 이루는 과정에서 얻은 무학의 심득이 발휘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허비되는 공간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공방이 오갔다. 그것은 몸으로 나누는 대화이기도 했다. 공격은 질문이었고 수비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 제대로 질문하고 답하는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붕 날아간 화무기가 미곡상 앞에 진열된 곡물을 부수었다.

촤아아아악.

찢어진 쌀가마니에서 폭포처럼 쌀이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 위로 쌀이 쏟아졌지만 화무기는 웃었다. 마치 얼마든지 때려보라는 듯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싸움이 길어지기 전에 말리게 교주의 내공만 소모되고 있어.

풍천교주는 이 싸움이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는 싸움이라서 검우진이 무리하고 있다고 여겼다.

―자네 때문에 교주가 무리하고 있네.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대답을 보냈다.

-그건 아버지를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ᅳ아버지는 절 위해서 불리한 싸움을 하실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싸움에 있어서는 냉정한 분이시거든요.

인정에 끌려 불리한 싸움을 할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특히 이런 중요한 싸움이라면 더욱더.

ᅳ앞서 했던 싸움, 아버지도 다 보셨죠?

-보셨지.

-그런데도 주먹싸움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건,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있기에 하시는 걸 겁니다. 저 때문이 아니라.

검무극은 이 순간에도 아버지를 믿고 있었다.

-세상 사람 다 걱정해도 아버지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풍천교주는 이 순간만큼은 검우진이 부러웠다. 이렇게 자신을 믿어주는 자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화무기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검우진을 도발했다.

“아들 앞이라서 인정하기 싫지? 오만을 부렸다는 것을.”

쏜살처럼 날아든 검우진의 주먹이 다시 물처럼 흐르는 호신강기에 박혔다.

퍽! 퍼억! 퍼억!

화무기는 연속해서 날아드는 검우진의 주먹을 그대로 다 맞았다.

두 사람은 마치 기 싸움이라도 펼치는 것만 같았다.

한쪽은 어디 때려봐라, 다른 한쪽은 네가 얼마나 버티는가 보자.

“저러다 내공이 다 소진되겠네.”

풍천교주가 소리 내서 걱정했다. 검우진이 들으라고 한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분노에 휩싸여 지금 내공이 소모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화무기가 온몸이 얻어터지면서 뒤로 밀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네 공격은 아무 소용 없다! 하나도 안 아프니까.”

퍽!퍽! 퍼어억!

연속된 공격에 화무기가 큰 소리로 말했다.

“검을 뽑아! 패배를 인정해.”

하지만 검우진의 주먹은 더욱 빠르게 날아들었다.

퍽퍽퍽퍽퍽퍽퍽!

화무기를 벽으로 몰아붙인 후 쉴 새 없이 주먹을 날렸다.

마치 두 사람은 파도와 바위 같았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바위는 꼼짝도 하지 않듯, 화무기는 호신강기로 그 주먹을 모두 견뎠다.

대장장이가 내려치는 쇳덩이 같기도 했다. 내려치면 내려칠수록 더욱 강해지며 완성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검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를 치는 주먹이 더욱 빠르고 강력해졌다.

모두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천교주는 다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야!'

바로 다음 순간!

"그만!"

터져 나오는 한마디 외침.

풍천교주는 그 말이 검무극이 내지른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한 자루의 검.

화무기의 흑검이 허공에 내질러져 있었고, 검우진은 뒤로 물러나 피한 상황.

모두가 놀란 얼굴로 이 난데없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잘 버틴 그였는데.

신나게 내공을 소모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화무기가 검을 뽑아 든 것이다. 그만이라고 소리친 사람은 바로 화무기였다.

"......이제 그만."

화무기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파도에 바위는 깨어졌고, 대장장이의 망치에 검은 부러졌다.

검무극은 아버지가 이 상황을 확신하고 공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가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것,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우진이 그렇게 확신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저자의 무공이 완벽했다면 애초에 우리의 내공을 소모시키려 하지 않았겠지.”

풍천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정말 그렇게 완벽한 마공이었다면, 저자의 성격상 더욱 오만하게 싸웠을 거다.

한데 그는 그런 사실을 처음부터 알리지 않은 채 이쪽의 내공을 소진하게 했고 부상을 입혔다.

거기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

"그런 철저한 자가 왜 나와 싸우면서는 자꾸 아프지 않다고 말했을까? 아픈 척하면서 최대한 내공을 소진하게 하지 않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유를 짐작했다.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겠는가?

“너무 아팠으니까요.”

말 많은 나 상대한다고 고생했다

“아버지, 정말 멋지셨습니다!”

검무극이 환호하며 기뻐했고 권마와 독왕이 검우진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교주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은 마존으로서 큰 영광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우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지만, 권마는 느낄 수 있었다.

교주의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좋다는 것을.

툭 건들면 그 감정이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이기에, 아예 무뚝뚝하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교주가 화무기에게 졌으면, 검무극이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교주는 분명 그 일이 마음에 남았을 거다.

'잘 싸우셨습니다, 교주님.”

권마의 그런 눈빛에 검우진이 답했다.

“어땠나? 자네에게 배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반면 화무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역천흡마공이 깨어졌다.'

역천흡마공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앞서 진패천이 말한 것처럼 이런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마공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

역천흡마공의 부작용은 호신강기로 날아든 외부의 타격을 내공으로 흡수할 때, 원래 받을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전해지는 것이었다.

호신강기가 물을 때리는 것 같아서 하나도 아프지 않을 것 같지만, 그야말로 한 방 한 방이 극심한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참아냈을 때, 상대는 자신의 공격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좌절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역천흡마공의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중단하면 내상과 함께 역천흡마공이 파훼 되기에, 화무기는 극한의 인내력으로 앞서 날아든 공격을 모두 참아냈다.

그 공격이 누구의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화무기는 정말 대단한 무인이었다.

처음에는 검우진의 주먹도 견딜만했다.

하지만 맞고 또 맞으니까, 그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앞서 사도맹주와 권마가 함께 날린 공격도 버텼는데 이 주먹이 왜 이렇게 아픈지 알 수 없었다.

고통을 억지로 참다가 결국 역천흡마공이 깨져버린 것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역천흡마공은 이름 그대로 마공에 속한 무공이었다. 몸속 영혼의 도움을 받아 무공을 만들 때 혁도천이 가장 큰 도움을 주었고.

결국 역천흡마공의 근본이 마공에 기반했기에 모든 마공의 지존마공인 구화마공을 익힌 검우진의 주먹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냥 구화마공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의 십이 성 대성을 이룬 검우진의 주먹이었다.

그만큼 버틴 것만 해도 오히려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화무기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이제 역천흡마공이 파훼 된 이상, 상대의 내공을 완전히 소모하게 해서 죽이는 방법은 무산되었다.

‘결국, 이자를 이길 방법은 그것뿐이겠구나!'

화무기는 마음속으로 한 가지 무공을 떠올렸다.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아버지 자랑을 했다.

“보셨죠? 싸움하실 때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풍천교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검무극의 말처럼 검우진은 아들 때문에 감정적인 싸움을 하지 않았다.

어디 놀란 사람이 그뿐이겠는가? 진패천과 백자강 역시 놀랐다.

검을 뽑지 않은 싸움이긴 했지만, 검우진은 화무기를 압도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상대의 약점을 찾아냈다는 데 있었다. 자신들이었다면 더는 내공을 소모하지 않으려고 물러났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검무극이 특별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소교주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거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화무기가 검우진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검으로 싸우자.”

그걸 검무극이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입가에 피부터 닦아라."

화무기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천흡마공이 파훼 되면서 내상으로 흘린 피였다.

“그리고 약속은 지켜야지. 검을 먼저 뽑으면 지는 거라 말했잖아?”

화무기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림 역사에 유일무이한 이름을 남길 사람이 약속을 저버려서 되겠냐?"

"어차피 너희들이 다 죽으면 나만 기억할 역사다.”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여긴 우리 말고 널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여기 또 누가 있지? 화무기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까지 이런 생각을 하던 그때, 검무극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이들을 언급했다.

“당신 마음에 깃든 영혼들, 그들이 보고 있잖아?”

"우리야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지켜보고 있잖아.”

검무극이 진심 어린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내가 그렇듯, 너도 우릴 죽인 이후의 삶을 생각해야지."

이들을 죽인 이후의 삶? 화무기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너를 죽이고 난 이후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고.”

목적지만 생각하다가 마차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산 정상에서 잠깐의 기쁨을 위해 산기슭에서 숨차하던 시간을 소홀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널 죽이고 나면 난 아버지와 사부님 모시고 여행을 갈 거다. 독왕님과 독초도 캐러 가고, 무림맹주님을 하군이와 하령이 이렇게 셋이 여행도 보내드릴 거다.

사도맹주님께 놀러 가서 직접 만들어주신 요리도 얻어먹을 거고 풍천교주님과 고 군사와 함께 셋이서도 여행을 갈 거다.

저기 내 친구를 좋아하는 차 조장과 이안이와 함께 밤새 술을 마시며 놀 거다. 그 일들이 너를 죽이는 일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중요하다.”

사실 화무기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아버지와 여기 있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그렇게 살자고.

“내게 이 사람들이 있듯이 네겐 그 사람들이 있잖아? 그들에게 약속도 지키지 않는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진 않을 "거잖아?"

화무기의 얼굴이 꿈틀했다. 이렇게 자신을 안다는 듯 말하는 검무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속의 그들이 내게 대단한 의미라도 있다고 여기는 거냐?”

듣고 있던 풍천교주는 그들을 무시한다면 그들의 내공이나 무공을 쓰지 않아야지! 이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 당연히 검무극도 그렇게 받아치리라 여겼는데.

“큰 의미가 있잖아?”

화무기는 흠칫했고, 검무극은 확신하듯 덧붙였다.

“만약 네게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앞서 그들이 자유롭게 나와서 말할 수 없게 했겠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어찌 그들과의 관계가 의미가 없겠는가? 싸우고 화해하고 무시하고, 온갖 일들을 겪으며 미운 정고운 정 다 들었을 텐데.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화무기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래, 약속은 지키지."

놀랍게도 그가 먼저 주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무기는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이 싸움이 이렇게 진행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미친놈과 어울리니 자신도 미쳐가고 있는 건가?

화무기가 처음에 앉았던 탁자에 앉자, 검무극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안으로 들어가서 원래 자리에 앉았다. 결과적으로 검우진이 그를 두들겨 패서 자리에 앉힌 셈이 된 것이다.

“나는 네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검무극의 말에 화무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가 싶더니.

화무기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삼백 년 전에 그곳에 있었다고 했나?”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천의궁주가 등장했음을.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나를 봤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검무극은 천의궁의 진영으로 숨어들어서 그를 보았다.

“당시 궁주께선 신녀의 예언을 부정했었지요."

천의궁주는 그곳에 있었다는 검무극의 말이 사실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일은 자신만이 아는 일이었으니까.

“신녀의 예언대로 나는 천의를 이루지 못했지.”

천의궁주의 얼굴에 깊은 회한이 스쳤다. 그때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자신은 이미 죽었을 거고, 천의궁의 후손이 천의를 이루려 하고 있었으리라.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나?”

"짐작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말 천의가 이뤄지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겠지요.”

정확하다는 듯 천의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녀의 예언대로 삼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천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천의를 다 이룬 것처럼 말했다.

“그 몸에 들어가 있으니 당신이 천의를 이루는 것이라 여기는군요.”

그 말이 불편하게 들렸는지 나오는 말도 날카로웠다.

“오늘 너희는 다 죽을 거다. 예언이 있었으니까."

검무극은 단호히 그 말을 부정했다.

“그 예언은 틀렸습니다.”

"예언은 틀리지 않는다!"

“삼백 년 전 당신이 부정했던 그 예언 말입니까?”

천의궁주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검무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천의궁을 이은 암흑궁주는 죽었습니다. 그의 수하들도 모두 죽었지요. 이제 남은 건 당신의 영혼과 이 천살성뿐입니다.”

“내 영혼이 살아 있는 한, 천의는 이룬 것이다.”

그러자 검무극은 생각지 못한 사람을 언급했다.

"수호궁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팔이 잘려가면서 당신을 지키려 했었지요.”

천의궁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을 지키려던 수호궁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무극이 술을 그에게 따라주었다.

“그를 위해 한잔하십시오."

지금까지 영혼들에게 계속 술을 권하고 요리를 권했지만, 술잔이고 요리고 다 바닥에 내팽개쳐져서 깨어졌다.

드디어 한잔 마시나 했는데.

"됐네."

이번에는 천의궁주가 거절했다.

검무극은 왜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지 짐작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모르네.”

그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더라도 그 말이 거짓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짜 몰랐다면 어떻게 죽었냐고 물었겠지.

“암흑궁주가 그를 죽였습니다. 그를 죽이고 당신들의 영혼이 깃든 구슬을 얻었지요.”

천의궁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써 그가 부정했던 일이었다. 마음속으로 수호궁주가 무림을 떠나 행복하게 살다 죽는 상상을 여러 번 했다.

무관의 관주로 살다 자식들을 낳고 잘 살다 죽는 상상도 했고, 부자가 되어 호의호식하다 죽는 상상도 했다.

하지만 천의궁주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암흑궁주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한 것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서였다.

“수호궁주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덧붙였다.

“내가 눈을 감겨줬지요.”

검우진은 물론이고 모두 놀라운 표정으로 검무극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삼백 년 전으로 간 것도 놀랍지만, 그 사건의 중심에서 수호궁주의 눈까지 감겨주고 왔다니.

“그 수호궁주를 죽인 자들의 후손이 만들어낸 천살성 속에서 당신은 천의를 이뤘다고 말하고 있군요. 당신의 천의는 천살입니까."

천의궁주는 격정과 분노에 휩싸였다.

“너는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나를 원망하는 거지?"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 덕분에 너무 많은 것을 얻었거든요. 그러는 당신은 누굴 원망하십니까?"

"나는................”

천의궁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누구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배신한 암흑궁주인가? 아니면 마교를 끌어들인 무림맹주인가? 자신을 끌어들인 비궤인가? 아니면 저 하늘인가? 아니면..... 헛된 꿈을 꾼 자신인가?

천의궁주의 눈빛이 바뀌면서 다시 화무기로 돌아왔다.

“이렇게 그들을 자극하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거냐?”

검무극이 차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서가 아니다.”

“그럼 뭐 때문이지?”

“삼백 년이나 그 속에 갇혀 있었는데, 진실은 알고 죽어야지. 마지막 한마디 말은 남기고 죽어야지."

검무극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느꼈기에 화무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중요하다. 마음에 담아둔 말을 한다는 건.”

여전히 화무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어차피 죽일 적인데 대체 왜!"

“그래,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너나 저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서 오늘 실컷 다 하는 거다. 너도 할 말 있으면 다 해라.”

화무기는 자신만큼은 검무극에게 휘둘릴 생각이 없었다.

"나는 할 말 없다."

"그럼 나 말고 그 사람들에게 해라. 그 사람들 원수 같기도 하겠지만 네 친구고, 네 스승 아니었나? 내 말 언짢게 듣지 말고 기회 있을 때 해라. 말 나온 김에 나도 해야겠다.”

정말 검무극은 모두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자는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룬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차하면 우리가 질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인사를 못 드리고 죽게 될까 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철없이 휘젓고 다녔음에도 너그러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한 명씩 바라본 후.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아버지였다.

“제 마음 아시죠?”

검우진이 툭 내뱉었다.

“모른다.”

"아니, 너무하십니다!”

옆에 있던 권마가 옅게 웃었다.

“사부님은 아시죠?”

“나도 모른다.”

옆에 있던 풍천교주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제일 모른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들 너무하십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인사한 후 검무극은 뻥 뚫린 천장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더없이 깊었다.

운명이 제시간에 자신을 도착하게 해줬으니.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마지막 싸움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니 마음껏 싸움에 몰두하면 될 것이다. 그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아버지가 대처하실 테니까.

아무도 그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검우진은 원래 자신이 천살성을 마무리 지으려 했었다. 한데 아들이 도착해서 저들과 나눴던 대화를 보면, 이 싸움은 아들의 싸움이 맞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이 깊었지만, 그는 단 한마디만 했다.

“조심해라.”

“네, 아버지.”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화무기도 일어났다.

싸우기에 앞서 검무극은 화무기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말하기 싫으면 술이라도 한잔해라.”

또로롱.

화무기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말 많은 나 상대한다고 고생했다.”

검무극이 자신의 술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이제 끝내자.”

내공이 밀리지 않는다고?

화무기가 검무극이 따라준 술잔을 들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서 내보내달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극심한 분노와 처절한 슬픔이 느껴진다. 이들이 한 번도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말을 마친 화무기가 술을 마셨다. 결국 오늘 술잔을 비운 건 영혼들이 아니라 절대 마시지 않겠다던 화무기였다.

“이 술은 너 때문에 마신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마셨다.”

앞서 검무극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화무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큰 의미가 있는 존재들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화무기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가 술을 마실 때를 노려서 공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네가 대비하고 있었잖아? 이런 대답이거나 아니면 그러면 멋이 없잖아?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다들 보고 계시잖아?"

검무극이 주위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맹주들, 마존들과 풍천교주, 그리고 검왕까지. 당연히 검무극과 화무기에게서 한순간도 시선을 놓치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 시선 엄청나게 의식한다. 내가 남들에게 멋있어 보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모를 거다.”

화무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일 줄은 몰랐다. 설령 그런 이유라 하더라도, 그걸 이렇게 솔직히 말하다니.

화무기가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사실 널 만나기 전까지는 이 무림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한데 갑자기 재미있어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너 같은 자들이 있는 무림이라면."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네 기대치를 너무 높여서 미안하다. 그래도 나 죽인 후에 잘 찾아봐라. 여기저기 재미있는 일도 많고, 재미있는 사람도 많을 거다.

사람 죽이는 것에 재미 들이지 말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 괴롭혀서 우월감 느끼는 것, 그게 제일 하류다.”

“또 가르치려 드는군. 싸우자고 해놓고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고.”

물론 지금의 대화는 자신이 먼저 꺼낸 것이었지만.

하지만 검무극은 순순히 자기 잘못으로 인정했다.

“미안. 이런 말 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니 말이 많아졌다. 원래 말 많은 사람이 실수도 잘한다. 너는 말수가 적어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아주 잠깐 화무기는 이런 놈이 수하로 있으면 심심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교주의 말처럼 공포에 질려 자신에게 거짓 충성이나 하는 자들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분통이 터질지 벌써 상상이 되었으니까.

“자, 이제 진짜 싸우자."

검무극이 먼저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가 주인의 운명적인 숙적임을 알아서였을까?

흑마검이 나직이 울었다.

"네가 강하긴 강한가 보다. 흑마검이 이렇게 우는 걸 보니.”

화무기도 흑검을 뽑았다.

서로를 겨눈 두 검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 검무극이 제안했다.

“답답한데 나가서 싸우자."

화무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지.”

두 사람이 다시 주점 밖으로 나갔다.

마가촌 길 가운데 두 사람이 마주 섰고, 다른 사람들은 풍류주점 앞에 서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검무극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다음 순간 화무기는 하늘에 서 있었다. 원래 검무극의 기도는 심연처럼 깊은 바다였다. 하늘에 서 있다는 착각은 맑은 물에 비친 하늘 때문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짜 하늘이었다.

환골탈태에 육도원기의 신묘한 기운까지 흡수하면서 검무극의 기도가 바다에서 하늘로 바뀐 것이다.

앞서 기도처럼 상대를 심연처럼 깊은 바닷속으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질식의 공포를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그냥 하늘을 보여줄 뿐이었다.

화무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기도였다.

진짜 하늘에 서 있는 기분.

무인이 기도를 드러내는 것은 상대를 압박하고 위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한데 이 하늘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압도당했다. 거대한 대자연 앞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굳이 상대를 위협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강자의 초월적인 기도.

이것이 검무극의 기도에 대한 화무기의 감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화무기가 그 하늘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검무극은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하늘이 곧 검무극이었고, 검무극이 곧 하늘이었다.

‘이렇게 젊은데 이런 절대자의 기도를 보이다니?”

그랬기에 화가 났다. 이 분노는 진심에서 우러난 분노였다.

“이런 대단한 기도를 지닌 자가 고작 여행이나 가고, 독초나 캐고, 밤새 술이나 마시겠다고 한 거냐?”

검무극은 담담하게 그 분노에 대답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무림을 지배하는 것보다 즐겁게 그걸 함께할 사람을 구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울 거다.”

화무기가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흑검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살기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살기는 매서운 북풍이 되어 주위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쩌어억. 쩌억.

폐부를 얼어붙게 하는 강력한 살기.

하늘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주위 곳곳에서 얼음꽃이 피어났다.

그의 살기는 하늘을 거부했다. 대자연을 인정하지 않았고, 검무극의 삶의 태도도 부정했다.

“웃기지 마라. 하늘이 네게 강함을 내렸다면, 그에 걸맞은 곳에 사용하라고 내렸을 터. 너는 무인의 운명을 기만하고 있다.”

화무기가 허공에 얼어붙은 부분을 주먹으로 쳤다.

놀랍게도 하늘이 깨어지며 뒤쪽이 드러났다.

시커먼 어둠이 그 뒤에 있었다.

화무기가 깨진 곳을 통해 어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네 진짜 모습이구나.”

화무기가 깨진 주변을 손으로 뜯어내자 얼음벽이 무너져 내리듯 하늘이 떨어졌다. 그러자 너머에 있는 어둠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

검무극은 화무기가 자신의 기도를 깨뜨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 심연처럼 짙은 어둠이 네 진짜 모습이지? 너는 왜 자신을 숨기고 사는 거지?"

검무극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너머도 나고, 이쪽도 나다. 나를 죽이고 싶은 네가 있고, 나와 대화하고 싶은 네가 있듯이.”

검무극이 천천히 화무기에게 걸어갔다.

검무극이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 왔지만 화무기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번쩍하는 순간 상대에게 검을 내지를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깨진 부분을 수선하듯 손으로 매만졌다. 그러자 그곳은 다시 푸른 하늘이 되었다.

“나는 저쪽보다 이쪽이 더 좋을 뿐이다.”

그리고는 앞에 서 있는 화무기를 응시하며 물었다.

“내가 저 구멍을 메울 때, 왜 공격하지 않았지?"

검무극의 물음에 화무기는 흠칫했다.

기습 따위로 이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아서.

정말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소교주와는 제대로 싸워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를 죽인 다음을 생각해서겠지."

자신의 영혼들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잘하고 있다.”

“널 죽여야 잘하는 거겠지.”

우우우웅!

화무기의 손에 들린 흑검에 내공이 가득 주입되기 시작했다.

우우웅!

검무극의 흑마검에도 내공이 깃들었다.

두 검에 내공을 가득 채운 두 사람이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를 향해 검을 날렸다.

쉬이이이익.

꽈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검과 검이 충돌했다.

두 사람 모두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교차한 검 너머에서 화무기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린 한 수였는데, 검무극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혁도천과 무황신검, 주가신과 천의궁주의 내공과 선천진기가 합쳐진 힘이었는데.

“내게 내공이 밀리지 않는다고?"

검무극의 실력을 떠나 이건 충격적이었다.

“내가 탐욕의 화신이라 이것저것 많이 먹었거든.”

놀라기는 지켜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패천과 백자강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냐, 하는 마음으로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쳐다본 것이다.

검무극의 내공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권마는 검무극이 한두 걸음 정도는 뒤로 물러날 거라 예상했는데,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모습에 내심 놀랐다.

'역시 나보다는 교주님이 정확히 보고 계셨구나.'

옆에 선 검우진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한마디 생색을 놓치지 않았다. 싸우고 있는 검무극에게 말할 수 없었기에 옆에 서 있는 검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 내공에 내 신물이 녹아 있다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검왕도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과거 검무극과 함께 비궤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같이 영약을 배부르게 먹었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그날 잘 먹였습니다.'

물론 검왕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풍천교주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준 후, 검무극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천교주가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검무극이 잘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섬광을 번쩍였다.

검무극은 내공만 많은 것이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고 검을 내지르는 속도 역시 상상을 초월했다.

싸움에 돌입한 두 사람의 감상은 똑같았다.

'강하다!'

화무기는 맹주들을 상대했을 때보다 검무극이 더 힘들게 느껴졌다. 앞서보다 숨겨둔 실력을 모두 발휘하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검무극 역시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화무기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목숨이 오갔다. 단 한 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살수가 오갔다.

챙챙챙챙챙챙!

한 호흡 만에 수십여 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들의 싸움은 팔다리가 싸우는 것도, 검과 검이 싸우는 것도, 초식과 초식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를 죽이겠다는 의지와 의지가 싸우고 있었다.

지금 검무극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실력을 발휘했다. 실력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이 끝낼 것이다. 이 싸움을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넘기지 않을 작정이다.

아버지가 직접 화무기를 죽여 자신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맹주들도 마존들도, 풍천교주나 검왕도 같은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을 지켜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 먼 길을 걸어온 것이니까. 죽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그 힘든 인생을 견뎌낸 것이니까.

'제가 다 살릴 겁니다.’

팽팽한 공방이 오가던 그때.

카아앙!

강력한 한 수에 두 사람이 서로 반대쪽으로 주르륵 밀렸고,

그 순간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회심의 한 수를 발휘했다.

슥슥슥슥!

검무극의 사방을 막아선 네 존재.

그들은 바로 악귀들이었다. 항상 봤던 악귀들이 아닌 낯선 얼굴의 악귀들.

바로 화무기가 날린 구화마공 제일식 인멸식이었다.

검무극이 악귀들에게 갇히는 순간, 화무기는 웃었다.

'넌 이제 끝이다!”

검무극의 방심을 노린 회심의 한 수였다.

동시에 검무극이 날린 수도 발휘되었다.

사방에 암흑이 내려앉는 순간.

쉬이이잉.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검무극이 발휘한 구화마공 제사식 암흑일섬이었다.

구화마공 대구화마공.

지켜보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검과 검만을 겨루다가 이렇게 기습적으로 구화마공을 펼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검왕은 당장이라도 뛰어들려고 했다.

만약 검우진이 그대로 서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면, 이미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사방의 악귀들이 검무극에게 검을 내리치고 있었으니까.

사방의 벽은 죽음의 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쿠아아아앙!

전방에서 검무극을 공격하던 악귀에게 새하얀 것이 겹치는가 싶더니.

쇄애액! 쇄액! 쇄애액!

내리치는 악귀의 검은 셋이 전부였다.

그냥은 절대 뚫을 수 없는 인멸식의 악귀를 사라지게 한 것은 대마벽이었다.

검무극이 사람 하나를 막아줄 크기의 대마벽을 전방의 악귀가 서 있는 곳에 겹쳐서 세우는 순간, 전방의 악귀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검무극은 대마벽을 회수하면서 순식간에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검무극은 방심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구화마공이 발휘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해 두고 있었다.

만약 인멸식이 자신에게 발휘되면 이렇게 빠져나올 거라 마음먹고 있었기에, 인멸식이 발휘되던 그 찰나의 순간 대마벽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화무기 역시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암흑일섬을 막아냈다.

슥슥슥슥.

화무기 주변에 네 악귀가 생겨났다.

카아앙!

암흑일섬이 악귀의 목을 잘랐지만, 화무기를 베지는 못했다. 인멸식을 자신에게 써서 악귀를 방패로 삼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놀란 표정으로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화무기는 정말 놀랐다. 검무극이 인멸식을 대마벽으로 파훼하고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저 대마벽, 내 것만큼 작다.’

검무극 역시 구화마공이 대성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경지가 삼백 년 전의 마교주 혁도천과 버금간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놀람은 검무극이 더욱 컸다.

“어떻게 동시에 두 개의 인멸식을 사용한 거지?"

자신에게 인멸식으로 공격하고, 동시에 인멸식으로 방어도 해냈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설마 구화마공을 십이성 대성을 이뤘나?'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역시 놀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다고 인멸식을 두 개 동시에 펼칠 수는 없다는 의미.

"대체 어떻게 펼친 거냐?"

화무기는 대답 대신 검무극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움직임이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쇄애애애액.

번쩍하는 순간 화무기의 흑검이 앞을 가르고 있었다.

검무극이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검무극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다행히 얕게 베였지만, 하마터면 팔이 잘려 나갈 뻔한 공격이었다.

쇄애액!

두 번째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풍신사보가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그에게 베였을 속도였다.

지켜보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화무기가 실력을 더 숨기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싶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으며 빠른 공격이었다.

화아아아아아.

화무기에게서 강력한 마기가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검게 변해 있었다. 흰자위가 사라지고 온통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검무극이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몸에 솜털이 일제히 곤두서며 천마호신공이 극한으로 발동했다.

화무기의 목소리는 무저갱에서 들려오는 듯한 깊은 울림이 있었다.

“왜 나와는 대화하려 하지 않았지?”

너희들의 천마혼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천마혼!"

검무극은 대번에 상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날 흡수되었던 천마혼이 이렇게 영혼들과 함께 있었다고?'

삼백 년 전 그날, 비궤에 천마혼이 먼저 흡수되었다. 혁도천은 어떻게든 천마혼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악했지만 결국 천마혼은 비궤로 빨려 들어갔다.

남은 사람들이 비궤에 흡수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고.

검무극은 당연히 천마혼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천마혼이 이 영혼들과 함께 있었다니!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검무극이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당황했다.

천마혼의 등장은 검무극은 물론이고 지켜보고 있던 이들 모두에게 경악을 안겼다.

말로만 듣던 그 천마혼이 이렇게 사람의 몸을 빌려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조금 전까지도 실없는 소리를 하던 풍천교주조차 얼어붙었다.

권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다른 적이라면 모를까, 천마혼은 상대하기가 절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저 천마혼은 스스로 생각하고 말까지 하는 천마혼이었다.

앞서 상대했던 천살성보다 더 위험한 적이다.'

권마가 옆에 선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굳은 교주의 표정에서 긴장이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마공도 천마혼에게는 충격을 주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교주나 소교주의 구화마공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마인이라면 절대적으로 삼아선 안 될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검무극이 차분하게 화무기, 아니 천마혼에게 말했다.

“그대가 있는 줄 알았으면 제일 먼저 대화하려고 했을 거다.”

화무기의 몸을 빌린 천마혼이 영혼을 흔드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지?"

인간에게서 나는 소리였지만,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천마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 꿈이었으니까.”

물론, 그 꿈은 자신의 천마혼과 대화하는 것이긴 했지만.

예전에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ᅳ천마혼과 대화를 나눈 천마도 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

그래서 천마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ᅳ천마혼은 위험한 존재다. 자칫 폭주라도 하면 막을 수가 없지. 그래도 수다를 떨고 싶으냐?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지금 폭주 직전의, 아니 어쩌면 폭주를 시작한 천마혼이 눈앞에 서 있다.

“확실히 그대는 다르군.”

다른 영혼들은 화무기의 몸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을 뿐.

한데 천마혼은 화무기의 몸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날 그대가 흡수되는 걸 봤지만, 이렇게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줄은 몰랐다.”

당연히 천마혼은 소멸했으리라 여겼다. 화무기가 구화마공을 익혔으니, 그가 펼치는 구화마공에서 새롭게 출현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천마혼이 없는 구화마공이 되었거나.

"이제라도 만났으니 실컷 이야기하자. 술 마실 줄 알아? 들어가서 한잔하면서..."

그때 천마혼의 나직한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꿇어라."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검무극은 전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릎이야 얼마든지 꿇을 수 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삼백 년 전 천마혼인데. 우리가 가족이라면 가족이잖아? 천마혼 할아버지, 하고 꿇을 수도 있지.”

물론 순순히 무릎 꿇을 검무극이 아니었다.

“단, 허락은 받아야겠다.”

천마혼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허락은 필요 없다. 마교주도 꿇릴 작정이니까.”

그 무례한 말에도 검우진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 집안싸움은 어디까지나 아들의 싸움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버지 허락을 받겠다는 게 아니었는데.”

천마혼이 의아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지켜보던 이들도 그럼 누구 허락을 받겠다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말한 이는 정말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다.

"내 천마혼에게 허락받아야지.”

천마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나야 꿇어야 한다면 주점 주인장에게도 무릎 꿇을 수 있는 사람이다. 한데 내 천마혼이 어떤 성격인지 아직 몰라서.”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언급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까 들었겠지만, 내가 남의 시선 엄청나게 의식한다. 그런데 내 몸에 깃들어 있는 천마혼인데 얼마나 많이 의식하겠나? 지금 내 머릿속에는 내 천마혼에게 멋있게 보일 생각뿐이다.”

그 순간 천마혼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계를 넘어선 마기에 마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일제히 내력을 끌어올려 마기에 저항했다.

휘몰아치는 마기 속에서 천마혼의 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강림한 이상, 너희들의 천마혼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천마혼은 삼백 년 전 잔혹하고 오만했던 혁도천의 천마혼이었다. 천마혼은 검무극은 물론이고 검우진의 천마혼마저 압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검무극은 비슷한 일을 경험했었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천마혼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자신보다 더 강한 천마혼이라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앞 세대 천마혼에게 예를 갖추는 것일까?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불러냈다.

하지만 천마혼의 말처럼, 자신의 천마혼은 현신하지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내 천마혼이 꿇는다는 것, 과연 그대가 그만큼 대단한 존재인가?"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천마혼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봐, 친구. 우리가 이런 놈에게 무릎 꿇어야 해?'

자신의 천마혼은 아무 반응이 없었고, 화무기의 몸에 깃든 천마혼은 분노로 반응했다.

쉬이이이이이!

천마혼이 검무극을 향해 쇄도했다. 앞서 보여줬듯 그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랐다.

속도가 빨라졌는데 공격이라고 그대로이겠는가?

천마혼의 검이 날아들 때마다 공간 자체가 찢기는 파열음이 들렸다.

카카카캉!

그 공격이 어찌나 빠른지 이렇게 막고 저렇게 반격해야지, 그런 의식이 개입할 틈이 없었다.

오직 본능과 수련으로 단련된 육체의 반응만이 이 무시무시한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검이 맞부딪치는 일차적인 충격 이후, 새로운 충격이 파장으로 밀려들었다. 그 파장에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두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구화마공을 대성한 자신에게도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운이라면,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앞서와는 싸움의 깊이가 달랐다. 천마혼의 검은 사람을 베려는 검이 아니었다. 하늘을 베고, 세상을 베는 검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숨을 죽인 채 싸움을 지켜보았다.

모두 검무극의 실력에 놀랐다. 특히 진패천과 백자강은 이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소교주가 우리보다 위다.'

단지 내공만 더 많은 것이 아니었다. 실력도 분명 한 수 위였다. 자신들은 저 천마혼의 공격을 저렇게 막아내지 못할 것이기에.

천마혼의 빗나간 검기가 뒤쪽 건물을 자르며 지나갔다.

사아악!

그 뒤쪽 건물도 잘랐고, 다시 그 뒤쪽 나무들도 모두 잘랐다. 건물과 나무가 종이처럼 잘려 나갔다.

검무극은 점차 천마혼의 공격에 밀렸다. 반격하지 못한 채 방어에만 급급했다.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이대로 소교주를 싸우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담긴 눈빛이었다.

소교주가 감당하기 힘든 상대였다. 여기 있는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모두가 달려들어야 할 텐데.

하지만 검우진은 말없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이 도와달라고 소리치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겠다는 듯.

천마혼에게서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린 검무극이 구화마공을 발휘했다.

검무극 앞에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서남북 중 가장 무서운 악귀.

촤르르르르륵.

그 악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막으려는 것일까? 천마혼은 악귀가 분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천마혼에게 검무극의 대멸식이 발휘되었다.

악귀들이 천마혼을 향해 쇄도했다.

검무극은 보았다.

주위의 다른 악귀들은 모든 것을 다 휩쓸고 지나갔지만, 천마혼을 공격하던 악귀는 스스로 소멸해서 사라지는 것을.

그 충격적인 모습에도 검무극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바를 확인한 것이었으니까.

천마혼에게 구화마공은 통하지 않는다.

구화마공의 극의에서 탄생한 존재가 천마혼이었기에.

"구화마공도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천마혼에게서 기쁨을 느꼈고 우월감도 느꼈다. 천마혼은 원래 이런 존재일까? 아니면 저 천마혼이 특별한 것일까?

이런 상황에서도 검무극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구화마공 안 쓰고 이길 거다.”

천마혼의 시커먼 두 눈이 웃음을 지었다.

"그럼 넌 구화마공에 죽어라!"

천마혼이 검을 내지르는 순간.

하늘에서 검기가 벼락처럼 쏟아져 내렸다.

구화마공 제오식 절혼마격이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그 하나하나의 검기가 절대 고수의 정수리를 꿰뚫을 강력한 공격이었다.

검무극이 풍신사보를 발휘했다. 극한의 경지에 이른 풍신사보를 환골탈태한 검무극이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펼쳐내는 암영보는 이전에 펼치던 것과는 수준이 달랐다.

지켜보는 사람의 눈에는 검무극의 신형이 동시에 여러 개가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신형을 번쩍이며 검기의 빗속을 빠져나왔다. 놀랍게도 비는 한 방울도 맞지 않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절혼마격을 빠져나오던 그 순간, 검무극은 명왕보를 발휘하며 천마혼을 향해 쇄도했다.

풍신사보에 명왕보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떤 방어나 회피도 무력화할 수 있다.

비급에 그 말을 적었던 이는 지금 검무극이 펼치는 명왕보를 보며 감탄해서 소리칠 것이다. 바로 저렇게!

쇄애애애애액!

검무극의 검이 천살성의 가슴을 스쳤다. 몸을 옆으로 틀어서 피한 천살성의 검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이익.

검무극도 천살성의 반격을 피했다.

두 사람이 서로 교차해 지나가면서 자리를 바꿔 섰다.

천살성이 놀란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절혼마격을 일개 보법으로 피해낼 줄은 몰랐군.”

놀라기는 검무극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명왕보로 공격한 회심의 일격을 피했다. 지금까지 펼친 그 어떤 명왕보보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이었음에도.

풍신사보 비급을 적은 그는 한마디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인간' 방어나 회피도 무력화할 수 있다.

자리가 바뀌면서 지켜보던 검무극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이 싸움, 끝까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아들의 전음에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호승심에 날뛰는 아들이 아니니, 분명 생각하는 바가 있음을. 하지만 지켜보기에 너무 위태로운 싸움이었는데.

검우진은 다시 묵묵히 한마디를 전했다.

-조심해라.

검무극과 천마혼이 다시 격돌했다.

검무극은 그야말로 무아지경으로 싸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싸움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슴의 중요 요혈을 일곱 번이나 찔러오는 공격을 막아야 하는 싸움이었다. 그 공격을 모두 막고 마지막 여덟 번째에 반격하는 싸움이기도 했다.

지켜보던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으로 소교주의 실력이 늘고 있다! 아니, 이미 늘었다.’

처음보다 천마혼의 공격이 빨라졌는데도 검무극은 모두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아마 스스로는 무학의 경지가 올랐음을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그럴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아무리 검무극이 성취를 얻었어도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너무나 불안했다. 검무극은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파아악!

검무극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제법 깊게 찔렸기에 허공에 피를 흩뿌렸다.

검무극의 호흡은 거칠었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정말 간신히 피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할 때란 생각에 진패천도 백자강도, 모두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권마는 참았던 전음을 검우진에게 보냈다. 절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극이를 도와야 합니다.

아들이기에 더 냉정한 판단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아들이기에 더 빨리 뛰어들 수도 있지만, 아들이기에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기다리게.

검우진은 기다렸다. 그 말을 하는 교주가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권마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교주님.'

그사이 검무극은 다시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검무극은 오히려 천마혼을 도발했다.

“네가 아버지의 천마혼이었다면, 절대 이길 수 없었겠지. 하지만 너는 아니야.”

이유를 묻는 불쾌한 눈빛에, 검무극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너는 천마혼의 명예와 자긍심을 잃은 자니까.”

검무극은 천마혼의 성질을 긁었다.

“신교를 수호해야 할 존재가 감히 신교의 소교주에게 검을 겨누다니!”

검무극이 준엄한 어조로 호통쳤다.

“꿇어야 할 자는 너다!”

천마혼의 검은 눈동자에서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의 마기는 인간이 내뿜는 마기가 아니었다.

후아아아아아앙!

검무극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고, 마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검우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뒤로 물러났다.

싸움을 지켜보던 권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어설픈 자라면 모를까, 이 불리한 싸움에서.

ᅳ무극이는 대체 왜 저렇게 천마혼을 자극하는 겁니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교주는 알고 있나 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과연 교주는 알고 있었다.

ᅳ저 천마혼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네.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그 말을 곱씹던 권마가 어디엔가 생각이 미쳤다.

'설마?"

천마혼의 일격에 검무극이 바닥을 뒹굴었다.

벌떡 일어난 검무극이 왈칵 피를 토했다. 이번 일격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검무극의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검우진이 나서려는 순간,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끝까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망설이던 사이 천마혼의 검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끝이다!”

쇄애애애액.

모두가 검무극을 향해 움직였지만, 오직 검우진만은 지켜보고만 있었다.

도우려던 이들보다 한발 먼저 천마혼의 검이 검무극의 가슴을 꿰뚫으려던 그 순간.

차아아앙!

누군가 천마혼의 검을 쳐냈다.

그 강력한 제지에 뒤로 물러난 천마혼의 얼굴에 놀람이 피어올랐다.

검무극을 도우러 몸을 날렸던 이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한 곳을 쳐다보았다.

검무극 앞에 한 존재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버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검무극이 자극한 진정한 대상이기도 했다.

“난 믿었다.”

그 등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동자가 떨렸다.

“네가 꼭 나와줄 것이라고.”

검무극의 천마혼이 사람 크기로 강림했다.

왜 싸우려 하지 않는지 아느냐?

“너, 그 모습 그대로구나!”

천마혼의 뒤에 서 있던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가서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큰 천마혼이 그 모습 그대로 크기만 작아져 있었다.

여전히 마주보기 무서운 얼굴과 눈빛을 지니고 있었고, 심장에는 천마혼의 얼굴을 형상화한 그 지옥의 불꽃도 그대로였다.

사람처럼 작아지니까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졌고, 또 한편으론 크기가 작아지니까 어딘지 모르게 더 세련되고 멋있었다.

검무극은 벅찬 마음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친구."

검무극은 그를 친구라 불렀다.

처음 천마혼을 만났을 때 그에게 말했다. 너의 주인이자 친구라고.

물론 검무극은 주인이기보다는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지만,

천마혼의 눈동자가 살짝 검무극을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정면에 서 있는 화무기의 몸에 깃든 천마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구해줘서 고맙다.”

그 말만 하고 넘어가면 어디 검무극이겠는가?

"다들 내 천마혼이라서 말을 잘하리라 기대하는데, 한마디해라.”

기분 탓이었을까? 천마혼이 약간 난감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말 많은 주인의 반가움이 계속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 죽기 직전의 상황에 몰렸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버지께 너와 관계해서 두 가지 바람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너와 대화하는 것이고.”

하지만 천마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네 크기를 작게 만들어서 친구처럼 다니는 것. 두 소원 중 하나는 벌써 이뤘네.”

검무극을 도우려고 몸을 날렸던 이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천마혼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과 가까이에 진패천과 백자강이 있었다. 그들은 천마혼이 이렇게 작게 강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검무극이 그들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천마신교 소교주를 위해 몸을 날리는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어디에 있습니까?”

진패천은 검무극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진정 안도했다.

“지금 자네는 천마신교 소교주가 아니라 하군이 친구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유대감이 있었기에 진패천의 아쉬움은 깊었다.

"자넨 우릴 여러 차례 구해줬는데, 나는 한 번도 자넬 구하지 못하는군.”

“천마혼이 아니더라도 맹주님은 저를 구해주셨을 겁니다.”

과연 구할 수 있었을까? 앞서 검무극을 지켜주려 몸을 날렸을 때, 아슬아슬했다.

천마혼이 강림하지 않았다면, 검기를 날려서라도 막으려 했겠지만 검무극이 무사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분명 한발 늦었다는 후회를 했다.

마교주의 의사를 떠나 자신이 먼저 몸을 날렸어야 했는데.

"이번 일 제가 평생 자랑하고 다닐 겁니다.”

진패천은 이렇게 말해주는 검무극이 고마울 뿐이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백자강을 향했다.

"같이 와주셨네요?”

백자강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우린 정파가 움직이면 본능적으로 같이 움직이는 버릇이 있어서.”

그 농담에 검무극이 웃었다. 전혀 생색내지 않았기에, 오히려 고마움은 더욱 컸다.

검무극이 그에게도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저를 위해 그 귀하신 몸을 날려주신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귀에 소름이 돋지 않는 검무극의 약속이었다.

그들 옆에 권마가 있었다.

"역시! 비정한 우리 아버지보다 사부님이 최고이십니다!"

권마는 교주가 정확히 봤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천마혼을 강림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정말이지 검무극이 아니면 절대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론 검무극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검무극이나 교주의 천마혼이 강림하지 않는다면, 저 천마혼과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검무극이 불리한 싸움의 돌파구를 찾아낸 셈이다.

당연히 그 옆에는 검왕도 있었다. 정말이지 이 대단한 고수들이 동시에 몸을 날린,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사실 난 별로 걱정 안 했다.”

"왜요?"

"네게 생각이 있으니 저렇게 버티는 거겠지, 했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다급히 몸을 날린 검왕이었지만.

풍천교주는 버럭 검무극을 야단쳤다.

“자네,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할 건가? 천마혼이 안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랬나?”

“저도 나름대로 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검무극이 옷자락을 열어젖히니 가슴에 극품천잠사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여기에 천마호신공에 천강신에 금강수라까지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천마혼의 검이었어도 쉽게 뚫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찔리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으면 교주님께 배운 그걸 썼을 겁니다.”

비로소 풍천교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자넨 다 생각이 있었군. 그래, 내 신물 가져갈 때부터 생각이 있었겠지.”

무섭도록 집요한 신물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걸 보니 풍천교주도 한시름 놓은 모양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여전히 제자리에 서 계시는 아버지를 향했다.

"아니, 저 독왕님도 몇 걸음 앞으로 나왔는데.”

그 말에 독왕이 슬쩍 뒤로 물러났다.

“너무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저 말없이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녀석이 어찌 알겠는가? 조금 전 나서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최근에,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느껴지는 저 안도감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평생 처음 보는 안도감이었는데.

검무극이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올렸다. 그냥 인사만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이 벅찬 고마움을 전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었다. 아버지가 믿어주셨기에 천마혼이 강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지켜주려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다시 검무극이 천마혼 옆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두 천마혼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적응해야 해. 네 친구는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다.”

풍천교주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

“자네 천마혼인데 자네보다 말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 지금은 주인처럼 음흉하게 속내를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검무극은 풍천교주의 저 농담처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너와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너와 나누고 싶다.

그러니 이 싸움이 끝나기 전에 한 마디라도 좋으니까 꼭 해줘.

이것이 검무극의 바람이었다.

한편, 화무기의 몸에 깃든 천마혼은 여전히 이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은 듯 보였다.

"정말 강림했다고?”

앞서 자신이 있는 한 너희들의 천마혼은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었다. 한데 그 호언장담을 깨부수고 검무극의 천마혼이 강림한 것이다.

그리고 혁도천의 천마혼을 놀라게 한 또 하나의 사실.

“어떻게 작은 몸으로 현신했지?"

검무극의 천마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상대를 응시할 뿐이었다.

검무극은 자신의 천마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너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께 듣기로 천마혼끼리 부딪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정도만 들었다. 그래서 이런 명령을 첫 명령으로 내려서 미안하다.”

검무극이 천마혼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멸해라.”

명령을 받은 천마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혁도천의 천마혼이 검무극을 비웃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왠지 단순한 짜증이 아닌 말처럼 들렸기에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불러세웠다.

"잠깐."

자신의 천마혼이 멈춰서자, 검무극이 놈에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그러자 대답 대신 날아든 물음.

“왜 천마혼이 서로 싸우려 하지 않는지 아느냐?"

그건 검무극도 궁금해하던 의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놀라운 비밀이 밝혀졌다.

"천마혼끼리 싸우다가 지면 영원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근래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이 사실은 자신도, 아버지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기는 천마혼이 있으면 절대 현신하지 않는다. 그게 천마혼의 타고난 본성이지.”

오직 천마혼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비밀이었다.

“이긴 쪽은 상대의 힘을 흡수해서 더욱 강해진다. 패배한 쪽의 존재는 소멸하고 그가 지녔던 모든 힘을 흡수하게 되지.”

혁도천의 천마혼이 지금껏 드러내지 않았던 하나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건 바로 탐욕이었다.

“네 천마혼은 특별하다.”

검무극의 시선이 자신의 천마혼을 쳐다보았다. 그래, 특별하다. 예전에 맨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자신을 구해줬던 천마혼인데.

“이렇게 작은 몸으로 현신했고.”

혁도천의 천마혼이 이 강림에 놀란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자신이 더 약한 줄 알면서도 강림했다.”

검무극은 말없이 자신의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고만 있는 그 모습을.

'싸움에 져서 소멸할 수도 있는데 나를 위해서 강림한 거냐?'

그랬기에 놈의 야망은 검무극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네 힘을 흡수해서 역대 가장 강한 천마혼이 될 것이다.”

검무극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이냐?"

천마혼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눈동자를 슬쩍슬쩍 움직여 의사 표현을 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이냐고 물었다. 네가 말이 없다는 건 알지만 이건 대답해.”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영원히 소멸한다는 저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다시 들어가라.”

검무극은 천마혼을 다시 사라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천마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명령이다. 어서 들어가.”

검무극의 천마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검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천마혼은 반드시 주인을 지키는 존재. 천마혼은 지금 네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주인의 명령보다, 주인을 반드시 지킨다는 사명감이 더 우선한다는 의미.

당연히 그런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간신히 버티면서 그를 불러낸 것이니까.

'정말 너는 네 본성마저 거스르면서까지 나를 지켜주기 위해 강림했구나.”

검무극은 마냥 감격스러울 수만은 없었다. 어서 천마혼의 고집을 꺾어야 했다.

“이봐, 친구. 우리가 오랜 시간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만큼의 시간은 지났잖아? 내가 반드시 길을 찾아낸다는 것도 알지?

그러니 들어가. 게다가 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도 계시고, 다른 분들도 계신다. 그러니 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라.”

좋게 달래도 천마혼은 들어가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 눈빛에서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마음 말고도 다른 감정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천마혼의 자존심.

그 눈빛이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물러나겠냐?

당연히 지켜야 할 사람을 두고 가지 않겠지.

천마혼은 자신을 쏙 빼닮았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그를 말릴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천마혼이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걸어가서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쇄애애애애액.

엄청난 마기가 휘몰아치며 그들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그 충격으로 마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크기만 작아졌을 뿐, 둘의 싸움은 거대한 두 천마혼의 싸움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후아아아아아아앙!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뒤로 물러났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만 마기를 막을 수 있었다.

천마혼끼리 싸우니까 싸움의 양상은 또 달랐다.

사람처럼 빠른 초식과 보법을 사용하는 싸움이 아니었다.

마기와 마기의 싸움.

기세와 기세의 싸움.

자존심과 자존심의 싸움.

두 개의 다른 성질을 지닌 마기가 팽팽하게 맞섰다.

교차한 검 너머로 혁도천의 천마혼이 오만하게 말했다.

“탄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천마혼이 삼백 년을 살아남은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싸움의 경험에서 압도적으로 앞설 테니까.

그 순간 검무극의 가슴이 철렁했다.

한 가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자신은 아직 구화마공 제구식을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구화마공 칠식에서 구식까지는 천마혼이 사용하는 무공, 자신은 팔식까지만 익혔다.

앞서 천마혼을 불러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나머지 그 점을 잊고 있었다.

분명 혁도천의 천마혼은 마지막 초식까지 익혔을 것이다.

다른 초식도 아니라 마지막 구식이라면?

'이대로라면 진다.'

그래서 천마혼을 영원히 잃게 된다면?

이건 자신의 무공이 약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건 친구를 잃는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해, 검무극! 어서!

그때 검무극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어쩌면?”

미친 생각이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ᅳ아버지, 구화마공 제구식을 지금 전수해 주십시오.

검우진은 아들이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을 것이다.

검우진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선택할 것이라면 시간 싸움이었으니까.

-지금부터 구화마공 제구식을 전수하겠다.

구화마공 제구식 마혼지존(魔魂至尊).

이 마지막 초식을 이 자리에서 전수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전수가 성공하려면,

ᅳ구결을 한 번에 깨우쳐야 한다!

아들이기에 시도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봐왔던 아들이라면, 어쩌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기에.

ᅳ반드시 이해하겠습니다.

지금의 시도는 자신의 천마혼이 상대를 이기라고 익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소멸되지 않을 만큼만 버티라고 하는 시도였다.

'제발!'

검무극이 두 맹주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만 아버지와 저를 저 싸움의 여파에서 지켜주십시오.

진패천과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두 부자가 뭔가 수를 쓰려고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검무극 앞을 막아섰고, 나머지 사람은 검우진 앞을 막아섰다.

검무극 역시 이 마지막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구화마공의 마지막 초식을 익히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검무극은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무공을 익히고 노력해 온 게 이 순간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부디 환골탈태가 도움이 되기를! 앞서 화무기와의 싸움에서 얻은 무학의 성취가 도움이 되길!

'네가 제구식을 발휘해야 할 때까지 반드시 깨우칠 테니.'

전음으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구결을 들으며 검무극이 두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꼭 버텨라.”

네 천마혼은 소멸했다

검우진이 아들에게 마지막 제 구식의 구결을 전수해 주었다.

“마혼의 뜻이 가는 곳에 죽음이 있으니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을 것이다. 진기의 시작은 총회혈에서 시작한다. 결과가 원인에 앞서고 죽음이 삶보다 먼저 온다. 진기가 역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검우진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있었다. 자신은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이 싸움을 온전히 이겨냈을 때, 아들은 성장해서 더 강해질 것이다.

이 싸움은 목숨과 무림의 운명이 걸린 일생일대의 위기였지만 동시에 무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연이기도 했다.

검우진은 기꺼이 그 기연을 아들에게 주었다. 물론 아들을 믿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전적으로 맡기진 못했을 것이다.

구결이 전수되는 사이 두 천마혼은 본격적인 싸움에 돌입했다.

지는 쪽은 영원히 소멸하는 싸움이었다.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검과 검의 격돌 속에서 두 천마혼은 한 발짝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네 힘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 만다!”

혁도천의 천마혼의 검에서는 욕망이 가득했고, 검무극의 천마혼의 검에서는 주인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강력한 마기가 휘몰아쳤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두 마기는 마치 살아서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대멸식이 발휘되었을 때, 상대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도 이 마기 때문이었다. 상대를 빨아들여서 절대 그 공간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절대마기.

천마혼에게서는 대멸식이 발휘될 때보다 더 강력한 마기가 휘몰아쳤다.

하나도 아닌 두 천마혼이 마기를 내뿜자, 진패천과 백자강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천마혼이 싸우는 근처로 갈 수가 없었다.

진패천과 백자강은 싸움에 개입할 생각은 포기한 채 검무극 앞에 서서 날아드는 충격의 여파를 막아주었다.

분위기로 볼 때, 검우진이 검무극에게 뭔가를 전수해 주는 상황, 만약 그렇다면 작은 바람 한 줄기조차 그들에겐 방해가 될 것이다.

권마와 검왕, 풍천교주 역시 같은 마음으로 내력으로 보호막을 세웠다.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검무극은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구결을 외우고 있었다.

이미 구화마공의 팔식까지 익힌 상태였고, 무공이 극의에 다다른 그였다. 대부분 구결에 담긴 뜻을 듣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검무극이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모르는 부분은 넘어가고, 다음 구결에 집중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구결의 전수가 끝났을 때.

ᅳ아버지, 잠시만 여길 지켜주십시오.

검무극은 그대로 시공이환술을 펼치며 그곳에서 사라졌다.

검우진은 아들이 온전히 구결에 집중하기 위해 시공이환술로 들어갔다고 여겼지만.

풍천교주는 검무극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었다.

'저 속에서 시천비술을 발휘하려는구나.'

풍천교주는 자신이 가르쳐준 것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귀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펼쳤다.

처음부터 아버지와 이곳에 들어와서 구결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구결을 전수받는 시간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바깥에 자신과 아버지가 둘 다 없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상대는 혁도천의 천마혼이었다. 놈의 심성은 잔혹하고 비정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사라진 것을 아는 순간, 놈이 남은 이들을 노리고 어떤 수를 쓸지 모를 일이었다.

반드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남아 있어야 한다.

바깥을 신경 쓰면서 이 마지막 초식의 구결에 집중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시천비술로 더 많은 시간을 얻은 검무극은 구결을 곱씹었다. 아는 부분을 다시 확인하며, 모르는 부분을 따로 정리했다.

나가서 아버지께 여쭤볼 부분들이었다. 그것이 생각보다 많았다.

‘늦지 않게 이걸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검무극은 문득 두려움이 들었다. 다른 무공도 아닌 구화마공의 마지막 초식인데.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오만이었을까?

문득 마음속에 불쑥 떠오른 하나의 생각.

‘차라리 이 시간에 그 구결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신녀궁주 가예에게 배운 구결이 있었다.

그 구결을 배우면서 이것이 화무기를 제어하는 데 쓰이는 구결이라 예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구결만을 전수해 줬을 뿐,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도 알지 못했다. 그래, 암흑궁주가 다른 이에게 그 방법까지 알려줬을 리는 없지.

‘그래도 어떤 식으로든 그 구결을 사용할 방법을 찾았어야 했나?'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제 구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할까 두려워서 생기는 심마다.

이미 천마혼이 등장한 이상, 그런 생각은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화무기에게는 통해도 천마혼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 구결이 나중에 어떤 도움을 줄지는 몰랐지만, 우선은 제 구식을 익히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한 번 집중력을 잃으니 다시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을 털어내려 할수록 더 생각이 났다.

시천비술 속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검무극의 마음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눈밭을 홀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과연 대법 재료를 다 찾아낼 수 있을까, 그 막연했던 절망감과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걸어가던 그 순간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이르기 위해.'

구화마공의 구결도 중요하고 육도원기의 구결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먼 길을 걸어 이곳까지 도착한 자신이다.

그 길은 기교를 부려서 온 길이 아니었기에.

'너 자신을 믿어라, 무극아.'

이만큼 노력했는데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흔쾌히 죽어주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하지 않았느냐?

그런 마음이 들자 초조했던 검무극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잡념이 가라앉았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던 시간은 다시 느리게 흘렀다.

‘시간아, 제발 천천히 흘러라.'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구결을 머릿속에 정리한 후 검무극이 다시 시공이환술을 풀고 나갔다.

밖에서는 더욱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장면을 봤음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천마혼이 밀리고 있음을.

하지만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가 있습니다. 우선은 기해혈에서 중극혈로 넘어갈 때 계절이 겨울에서 멈추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진기를 멈추라는 의미인지, 차가운 기운으로 진기를 움직이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은 의문이 남았던 부분을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검우진은 아들의 질문에 성심껏 설명해 주었다.

─둘 다다. 최대한 차가운 기운을 유지하면서 진기를 멈추는 거다. 한데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검무극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이해했다.

ᅳ봄이 언제 오느냐가 중요하군요.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도 중요하다. 얼마나 부드럽게 멈춰두었던 차가운 진기를 푸느냐, 그게 관건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버지.”

검무극은 모르는 것도 질문했지만, 미심쩍은 것도 확인했다.

-양강혈에서 황문혈로 넘어갈 때는 진기를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까?

ᅳ정확히 봤다.

―그럼 태계혈에서 태종혈로 움직여야 할 때는.............

검무극은 계속 질문했고, 아버지가 설명해 준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녹였다.

검무극은 정말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만약 대답해 주시는 아버지가 십이 성이 아니라 십성 대성 시절이었다면? 아니면 자신 역시 그 무렵의 실력이었다면? 오늘 이 문답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쇄애애애액!

검무극의 천마혼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주르륵 밀렸다.

진패천과 백자강이 호신강기를 끌어올린 채 내력을 발출했다.

최대한 부드러운 내력으로 검무극의 천마혼이 다치지 않도록 막았다.

천마혼이 내뿜는 강력한 마기를 참으며 두 사람은 다시 그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천마혼은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겁을 내지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검무극은 자신과 화무기가 내공 대결에서 동수를 이뤘음에도 자신의 천마혼이 밀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예전에 말씀하셨다. 천마혼의 강함은 그것을 불러낸 이가 구화마공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자신이 아직 제 구식을 익히지 않았기에 밀리는 것이다.

검무극이 조급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시 아버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는 검무극은 다시 시공이환술로 사라졌다.

검우진은 내심 많이 놀라고 있었다. 이 짧은 시간에 구결을 완벽히 외운 것도 외운 것이지만, 그 내용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이 예측한 부분을 정확히 질문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묻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분명 물어야 할 부분인데.

알고서 넘어간 거라면 다행인데, 만약 놓친 것이라면? 구결을 완전히 터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혁도천의 천마혼은 싸우는 중에 검무극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모습을 보았다.

분명 검무극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되겠군.'

혁도천의 천마혼이 본격적인 구화마공을 펼쳤다.

구화마공 제칠식 마혼창세

마치 하늘에 그물을 펼친 것처럼 생겨 나는 수많은 강기의 칼날

지켜보던 이들은 알 수 있었다. 저 수많은 칼날이 날아들면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남은 건 호신강기로 과연 부상 없이 막아낼 수 있느냐는 것뿐.

바로 그때.

검무극의 천마혼 역시 지지 않고 똑같은 마혼창세를 펼쳤다.

그들의 움직임은 똑같았다. 검을 내미는 동작도, 팔의 각도까지.

뒤쪽 허공에 생겨나는 수많은 칼날의 강기들까지도 똑같았다.

두 천마혼이 펼치는 마혼창세는 마치 반으로 접으면 똑같이 겹쳐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쇄애애애애액.

쇄애애애애액.

두 천마혼이 만들어낸 수많은 강기가 서로를 향해 쏟아졌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엄청난 강기가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충돌했다.

그 충돌의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후아아아아악.

엄청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거죽이 갈라졌다. 근처에 있던 포목점과 철물점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가득 피어오르던 그때.

콰콰콰콰콰콰콰콱!

연기를 뚫고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일렬로 늘어서서 밀고 나오는 그것은 악귀들이었다.

이번 한수로 혁도천의 천마혼이 노린 것은 검무극의 천마혼이 아니었다.

마혼창세로 시야가 어지러워진 사이에, 진패천과 백자강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대멸식을 발휘한 것이다.

"조심하게!"

진패천이 소리치며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내력을 발출했다.

백자강 역시 마찬가지로 날아드는 대멸식에 대응했다. 백자강은 진패천의 옆에 바짝 붙으며 하나의 악귀를 상대하려 했다.

"일렬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사람보다 덩치가 큰 악귀였기에, 하나가 지나가는 자리에 둘이 서 있어도 충분했다.

힘을 분산하지 않고 하나의 악귀를 막아내고, 다른 이들은 그 뒤에 일렬로 피하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콰콰콰콰콰콱!

악귀가 그들을 덮치던 그 순간!

콰콰콰쾅! 쾅! 쾅쾅!

진패천과 백자강, 그리고 다른 이들은 모두 보았다.

악귀가 자신을 덮치기 전, 무엇인가에 충돌하는 모습을.

진패천과 백자강 앞에 강기의 벽이 세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검우진의 대마벽이었다.

대마벽에 충돌한 악귀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대마벽으로 자신에게 날렸던 인멸식을 빠져나갔듯, 대멸식의 악귀들 역시 대마벽을 뚫지 못했다.

진패천과 백자강이 뒤를 돌아보았다. 검무극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검우진이 자신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피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주려 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두 맹주도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들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저 대마벽이 자신들의 뒤쪽에 세워졌다면?

앞에서는 대멸식이, 뒤에는 대마벽이.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다.

만약 검우진이 뒤에서 대멸식을 발휘했다면?

앞과 뒤에서 밀려든 저 대멸식을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양쪽 악귀들 사이에서 죽었을 것이다. 검우진이 배신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검우진은 자신들의 앞에 대마벽을 세워주었다.

이 상황이 고마우면서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적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혁도천의 천마혼은 시간을 끌지 않고 곧장 제 구식 마혼지존을 펼쳤다.

검무극의 천마혼이 팔식까지는 익혔을지 몰라도 구식은 익히지 못했을 테니까.

"이제 끝이다!"

혁도천의 천마혼의 시커먼 두 눈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공격이 나올지 몰라도, 저 공격을 허용하면 검무극의 천마혼은 소멸하고 말 것임을.

검우진이 나직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다급히 말했다.

“아들, 이제 나와야 한다!”

혁도천의 천마혼의 새하얀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바라보는 그 무엇도 소멸시키는 천마혼을 위한 마지막 초식, 마혼지존이었다.

다음 순간.

검우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검무극만이 홀로 서 있었다.

“아버지.”

검우진은 아들이 자신을 시공이환술 속으로 데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제 구식을 완벽하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 아무리 뛰어난 아들이라도 이 시간 내에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었다.

“아쉽지만 네 천마혼은 소멸했다.”

검우진은 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자신이 말렸어야 했는데, 이건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였다.

검무극은 아버지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마지막 싸움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표정을 자꾸 보게 된다.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전했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검우진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았을 때.

"저길 보십시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시공이환술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그 모습에 검우진은 깜짝 놀랐다.

시간상 아들의 천마혼이 마혼지존에 녹아버렸어야 했는데.

천마혼의 눈에서 날아가는 빛이 허공에서 멈춰 있었다. 완전히 멈춘 게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른 이들 역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 있었는데, 그들 역시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무극은 아쉽게도 시간 내에 제 구식의 구결을 완전히 깨우치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나 절실한 마음으로 시간을 아꼈기 때문일까? 다른 깨우침이 있었다.

"방금 시천비술의 대성을 이뤘습니다.”

지금까지 어찌 참으셨습니까?

“시천비술이라고?”

검우진은 시천비술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검무극이 빠르게 시천비술에 관해 설명했다.

"시공이환술 속에서만 쓸 수 있는 비술로 시천비술이 발휘되면 바깥의 시간보다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방금 그 비술의 대성을 이뤘습니다.”

검우진은 놀란 표정으로 밖을 쳐다보았다. 정말 시간이 멈춘 듯 아주 미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것도 풍천교주님께 배운 겁니다.”

검우진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풍천교주가 왜 그렇게나 신물 빼앗긴 타령을 했는지. 이런 신묘한 비술까지 가르쳐줬다면 그런 말 할 자격 충분하다.

“풍천교주도 이 비술을 쓸 수 있느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풍천교주는 구결을 알았을 뿐 비술을 펼치지는 못했다.

“이 경지에 이른 건 아마 제가 처음일 겁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막 대성을 이뤘기에 저렇게 시간이 흐르지, 만약 대성이 무르익거나 혹은 십이성 대성을 이룬다면 아예 시간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대성을 이루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더는 이곳에서 자신의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원래라면 가령 아홉 배의 시간을 더 얻으면 그만큼 신체 나이도 흘렀다. 물론 지금까지 자신이 워낙 젊으니까 괜찮았다.

화무기를 잡는 일이 너무나 중요했기에 기꺼이 시천비술의 부작용을 감수했다.

한데 대성을 이루는 순간, 시천비술 속에서의 시간도 멈췄다. 신체가 나이를 먹는 것을 멈춘 것이다.

검무극은 이제 완벽한 자신만의 시간을, 덤으로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았다.

아버지를 더없이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이 시천비술만큼은 알려드리지 않을 생각이다.

예전부터 했던 걱정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무공에 심취하신 나머지 시천비술 속에서 나오지 않으실까 봐 두려웠기에.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말 아버지는 무학이라면 그 끝을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도 있는 분이었기에.

게다가 시천비술의 대성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었고, 젊은 자신과는 다른 입장에 계신 아버지시니까.

이번에 자신이 대성을 이룬 것 역시 어떻게 이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큰 운이 따라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구식을 익히기 위해 제발 시간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이뤄낸 성과라 여겼기에.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모든 것은 해드릴 수 있어도, 이것만은 안 되겠습니다.

“아버지, 지금은 시천비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 시간이 완전히 멈춘 게 아니었으니까.

"어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물어보거라.”

검무극이 다시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 구식의 구결 중에서 혼자서는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을 질문했다.

"양지혈에서 양곡혈로 진기를 보낼 때.............”

“안 돼!"

혁도천의 천마혼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순간 소리친 사람은 검왕이었다.

그 순간 검왕은 검무극을 떠올렸다. 그는 검무극이 천마혼을 바라보는 눈빛이 그저 무공의 일부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친구처럼 여기는 저 천마혼을 영원히 잃는다면?

아마 검무극은 평생 자책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물론 검무극의 성격상 천마혼에 관해 더 의식적으로 농담할 거고, 어떻게든 풀려고 노력하겠지.

하지만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대신이라도 막아주고 싶었지만, 이미 번쩍하는 순간 그 빛은 천마혼의 얼굴을 덮치고 있었다.

빛에 적중당한 천마혼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너무 빛나서 천마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빛처럼 빠르고 용암처럼 강력한 강기에 얼굴이 녹고 있을 것이다.

지켜보던 다른 이들도 모두 탄식했다. 검무극은 천마혼을 잃게 될 것이고, 상대 천마혼은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그렇게 천마혼이 소멸하는 모습을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그때!

얼굴의 환한 빛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천마혼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녹지 않았다!'

지켜보던 이들을 놀라게 한 건 얼굴이 녹지 않은 것만이 아니었다.

그 눈에서도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무극의 천마혼도 구화마공 제 구식 마혼지존을 발휘한 것이다.

지이이이이잉.

검무극의 천마혼에게서 나온 빛이 날아든 빛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같은 빛이지만 검무극의 천마혼 것은 푸른빛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빛이 밀려나는 걸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마혼지존 대 마혼지존.

닿으면 녹아버리는 마지막 한 수로 두 천마혼은 팽팽한 힘 싸움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검무극의 천마혼은 밀리지 않았다. 거의 얼굴에 빛이 닿으려는 순간, 뒤늦게 마혼지존을 발휘했음에도 날아든 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검왕은 물론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두가 놀랐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 의문의 대답을 검무극의 응원이 대신했다.

"힘내라!"

시공이환술에 있던 검무극과 검우진은 어느새 밖에 나와 있었다.

혁도천의 천마혼이 내뿜은 빛이 자신의 천마혼을 덮치기 직전, 검무극은 제 구식을 완벽하게 깨우친 것이다.

두천마혼의 중간에서 팽팽하게 맞서던 빛이 굉음과 함께 소멸되었다.

뒤늦게 발휘한 마혼지존이었는데,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낸 것이다. 검무극이 마지막 제 구식까지 터득하자 검무극의 천마혼은 더욱 강해졌다.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다행이다.”

정말 극적으로 소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천마혼이 검무극을 슬쩍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그 시커먼 눈동자에서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천마혼이 자신을 보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래, 원래 천마혼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저 혁도천의 천마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을 절대 드러내지 않을 뿐.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천마혼을 살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 자신 덕분이다. 누가 있어서 이 짧은 시간에 구화마공제 구식을 전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검우진은 알고 있었다. 이 생색을 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이 무림에 아들뿐임을. 아무리 가르쳐도 이해할 수 있어야 배우지.

진패천과 백자강, 그리고 모두는 놀란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검우진이 검무극에게 전수한 것이 조금 전 천마혼이 발휘한 저 초식이라는 것을.

'구화마을, 그것도 천마혼이 사용하는 초식을 이 자리에서 전수했다고?'

정말이지 보고도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직접 본 자신들도 믿기 어려웠으니,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진패천은 다시 불안감을 느꼈다. 이곳에 온 내내 적만큼이나 검우진을 신경 쓴 그였다. 자신들을 위해 대마벽을 세워줬던 마교주는 이 난장판에서 구화마공을 전수했다.

아무리 검무극이 불안을 낮춰도, 검우진은 자신의 불안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저 검우진이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반면 백자강은 그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 불안은 걱정한다고 해결될 불안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제대로 한 판 붙어보고 싶은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천마혼이었다. 과연 저 천마혼과 붙게 되면 어떻게 싸워야 할까? 과연 조금 전 저 눈빛을 피할 수 있을까?

구화마공과 천마혼은 맹주로서의 백자강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백자강을 자극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가장 놀란 이는 혁도천의 천마혼이었다.

이제 눈앞의 저 천마혼이 왜 이렇게 특별한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런 특별한 소교주에게서 창조된 천마혼이었으니까.

“넌 볼수록 대단하구나!"

자신 앞에 강림한 것도 놀라웠지만, 세상에 강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천마혼이 이렇게나 강하다니?

만약 이 천마혼의 힘을 자신이 흡수한다면?

역대 가장 강한 천마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힘이면 그마저 흡수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알 수 없는 욕망이 마기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다시 두 천마혼이 격돌했다.

앞서보다 강력한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몇 걸음 더 물러났다.

다시 천마혼 간에 긴박한 싸움이 시작되었기에 검무극은 진패천과 백자강에게 말로 고마움을 표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살짝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이 긴박한 상황에도 한 가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음을 보냈다.

-조금 전에 시천비술을 발휘한 거지?

ᅳ어떻게 아셨습니까?

비록 풍천교주에게 시천비술을 전수받았지만, 그 성취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는데.

아마도 시공이환술을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모습에서 시천비술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자네라면 해내리라 생각했었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은 처음 풍천교주를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던 그때를 떠올렸다.

'고 군사, 자네 판단이 옳았네.'

풍천교주는 같은 편이 된 후 자신에게 너무나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이 마지막 싸움에서까지도.

콰앙! 쾅! 콰콰콰쾅!

두 천마혼이 움직일 때마다 공간이 일그러졌고, 땅바닥이 박살 나며 튀어 올랐다. 격돌할 때마다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가까이 있던 건물이 그대로 휩쓸려 날아갔다.

마치 마지막 구결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처럼, 검무극의 천마혼은 혁도천의 천마혼에게 밀리지 않았다. 아니, 점점 혁도천의 천마혼을 압도했다.

힘에서도, 속도에서도, 마기에서도, 그리고 기세로도.

콰아앙!

일격을 강타당하고 뒤로 튕겨 날아간 혁도천의 천마혼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구화마공의 이해도가 교주님보다 저 소교주가 더 깊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인데, 심지어 마지막 제 구식을 이제 막 깨우쳤는데.

다음 순간, 화무기의 시커먼 두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화무기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당연히 화무기는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천마혼은 천마혼과 싸운다고 정신이 없었지만, 화무기는 검무극을 주목했다.

“이 천마혼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평범한 천마혼이 아니었으니까. 천살성의 몸을 빌린 삼백 년을 존재해 온 천마혼이었다.

심지어 천마혼만의 초식이 아닌, 구화마공의 다른 초식들까지 모두 사용하는 천마혼이었는데.

“그런데도 밀리다니?"

"날 닮아서 싸움 하나는 끝내주거든.”

화무기의 시선이 검무극의 천마혼을 향했다.

“널 닮아 고집은 있어 보이는군.”

“그러니까 네가 제발 들어가라고 설득 좀 해줘.”

화무기가 차갑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지.”

그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의 두 눈이 다시 검게 변하며 천마혼으로 바뀌었다.

이미 자신의 천마혼에게 밀렸는데, 다시 천마혼을 불러내다니?

검무극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잠시 화무기로 돌아왔다가 돌아간 이유를.

스으으윽.

혁도천의 천마혼 뒤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몸을 일으켰다.

강력한 마기와 함께 엄청난 존재감으로 등장한 그것은 천마혼이었다.

작은 몸집이 아닌 거대한 진짜 천마혼이.

혁도천의 천마혼이 커진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곳에 새로운 천마혼이 강림했다.

“설마?"

그것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혁도천의 천마혼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른 영혼들과 함께 갇혀 있었고, 구화마공 대성을 물려받은 화무기의 천마혼이 새롭게 생겨났다는 것을.

지금 강림한 천마혼은 화무기의 천마혼이었다.

모두 놀란 얼굴로 화무기의 천마혼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덩치의 천마혼과 완전히 달랐다. 거대석상을 보는 듯한 압도적인 덩치, 허리에 찬 검은 일 검에 수십 채의 건물을 박살 내 버릴 것처럼 거대했다.

천마혼이 도도한 눈빛으로 모두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에 담긴 것은 마기와 살기가 뒤섞인 독특한 기운이었다.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과 위압감은 엄청나면서도 특별했다.

천살성의 천마혼.

무림 역사상 최초의 천마혼이 모습을 보인 것이다.

침묵을 깬 것은 혁도천의 천마혼이었다.

“네 천마혼은 원래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존재였다. 나뿐만 아니라 이 몸속에 또 다른 천마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넌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 저쪽에 천마혼이 둘이라는 것을?”

자신의 천마혼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무극을 슬쩍 쳐다봤을 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애초에 자신은 무조건 소멸할 것을 각오하고 나왔다는 의미.

이곳에 다른 고수들도 많으니 어서 들어가라고 아무리 명령해도 들어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상대의 천마혼이 둘이라는 걸 알았기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네 천마혼이 아무리 특별해도, 우리 둘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지.”

쇄애애애애애애앵!

화무기의 거대한 천마혼이 검무극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와 동시에 혁도천의 천마혼도 쇄도하며 날아들었다.

두 천마혼의 공격에도 검무극의 천마혼은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검무극을 지키려는 것이다. 첫 위기를 넘겼지만 다시 소멸의 위기가 닥쳐왔다.

“안 돼! 그만 돌아가!”

검무극이 소리쳤지만 천마혼은 피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검무극은 천마혼을 데리고 시공이환술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건 상책이 아니었다. 남은 이들도 있었고, 잠시 피하는 것으로 이 싸움을 끝낼 수는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

터어엉.

허공에서 내리치던 거대한 검이 중간에서 막혔다.

쇄도하던 혁도천의 천마혼이 제자리에 멈춘 채 놀란 얼굴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도 위를 쳐다보았고 지켜보던 모두가 위를 쳐다보았다.

또 다른 거대한 검이 날아들던 검을 막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천마혼이었다.

이곳에 네 번째 천마혼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역대 무림 역사상 한자리에 가장 많은 천마혼이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지막 천마혼은 특별했다.

검무극의 악귀가 구성일 때와 대성을 이뤘을 때 그 모습과 기도가 달랐듯, 이번에 등장한 천마혼은 기존의 천마혼과 모습이 달랐다.

오히려 몸집은 조금 작아졌는데 존재감은 더욱 컸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더욱 크고 선명했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 손등에 천마혼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육체의 색도 달랐고, 몸의 부분 부분이 조금씩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전체적으로 세련된 모습.

하지만 그 얼굴과 눈빛은 이곳의 어떤 천마혼도 압도할 정도로 무섭고 강렬했다.

검무극이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며 말했다.

“자랑하고 싶으셔서 지금까지 어찌 참으셨습니까?"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검우진의 천마혼이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천마혼이 너무 많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천마혼이었다.

“멋있습니다!”

검무극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천마혼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너도 저렇게 멋있게 성장해야 한다!

키이이잉.

거대한 두 천마혼의 검과 검이 서로를 밀어내며 굉음과도 같은 금속음을 내었다.

화무기의 천마혼은 살기와 마기가 뒤섞인 기운을 내뿜었고, 아버지의 천마혼은 순수한 마기만을 내뿜었다.

금방이라도 혈전을 펼칠 것 같은 상황이었다.

"잠깐!"

검무극이 혁도천의 천마혼에게 말했다.

“싸우기 전에 잠깐만! 무림 역사에 다시 없을 순간인데, 잠시만!"

물론 그의 몸속에 있는 화무기에게 한 말이었다. 저 천마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일 테니까.

그가 검무극의 말을 받아들이자 두 천마혼은 검과 검을 대치한 채로 그대로 서 있었다.

검무극이 아버지의 천마혼을 다시 쳐다보았다.

“네가 완성된 형태구나!"

자연스럽게 드는 하나의 생각. 십이성 대성을 이루면 자신의 천마혼은 어떻게 외형이 변할지 궁금했다.

진패천이 백자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ᅳ검 교주가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을 이뤘소.

다른 모습의 천마혼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마혼을 바라보던 백자강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ᅳ우린 저 천살성 옆에 가서 서야겠소.

백자강의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진패천이었다.

그래도 이번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비록 목숨을 잃을 위기도 있었고, 이렇게 무력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검우진이 어떤 실력을 지녔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 더 큰 위험이 앞에 서 있음을 잊을 정도로, 진패천은 여전히 검우진이 제일 신경 쓰였다.

검무극의 시선이 이번에는 화무기의 천마혼을 향했다. 녀석 역시 일반적인 천마혼이 아니었다.

마기와 뒤섞인 놈의 살기는 단언컨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살기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일반 고수가 저 살기에 노출되면 옆에 누가 있던 죽이려 들 것이고, 만약 죽일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를 해칠 정도로 강력했다.

혁도천의 천마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또 천마혼이 강림한 거지?”

자신이 있는데 화무기의 천마혼이 강림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은 천살성의 몸을 빌린 상황이었고, 두 천마혼은 하나의 몸에서 현신하는 것이었으니까.

저 검무극의 천마혼이 강림한 것까지도 이해했다.

검무극이란 인간이 워낙 특별했으니까.

그 주인에 그 천마혼이라고, 이 세상에 소멸할 각오를 하고 나오는 천마혼도 하나쯤 있을 수 있다고 치자.

그의 시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천마혼을 향했다.

그 의문을 풀어준 것은 검무극이었다.

“아니, 아무리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지만, 이렇게 불러낼 수 있었으면 진작 좀 불러내시지요.”

아버지에게선 검무극이 예상했던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건 네 싸움이지 않느냐?”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검우진은 그 진짜 이유를 밝혀주었다.

"아까도 불러냈었다.”

"네?"

검무극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

“천마혼이 강림하기를 거부했다.”

아까 싸움이라면 혁도천의 천마혼과 싸울 때였는데.

검무극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아버지의 천마혼이 혁도천의 천마혼에게 겁을 먹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삼백 년 전 선대 천마혼이라고 예의를 갖췄을 것 같지도 않고, 아버지의 천마혼이라면 말이다.

“상대를 진짜 천마혼이라 여기지 않았군요."

인간의 몸에 깃든 반쪽짜리 천마혼이라 여긴 게 아닐까? 분명 혁도천의 천마혼은 정상적인 천마혼이 아니었으니까.

따지고 들면 화무기의 천마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인 승계가 아니라 천살성의 육체가 구화마공을 흡수한 셈이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난 그래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검우진의 시선이 검무극의 천마혼을 향했다.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제 천마혼 때문이라고요?”

자신의 천마혼이 더 강해서는 아닐 텐데.

"네 천마혼을 존중해서."

태생적으로 천마혼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그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천마혼이 의지를 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싸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지금은 왜 나온 겁니까?"

그러자 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부탁했다.”

천마혼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부탁을 한 것이다.

“교주가 되고 난 후 처음으로 부탁이란 것을 해봤지."

어쩌면 아버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부탁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분이 아니었으니까.

천마혼은 아버지의 첫 부탁을 받아들인 것이다.

천마혼과 대화한 적은 없다고 하셨지만, 분명 천마혼은 오랜 세월 아버지를 지켜봐 왔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탁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리라.

“아버지가 천마혼에게 부탁하는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질 않습니다.”

사실 검무극이 더욱 감동한 것은 아버지가 단지 부탁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줬다는 데 있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자신이 반복해서 말했던 그것을 몸소 실천해 주시는 순간이었으니까. 그것도 이 사람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한 검무극의 시선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천마혼들을 향했다.

“여긴 천마혼이 너무 많다!"

그 말에 네 천마혼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중 가장 빠르게 쇄도한 것은 검무극의 천마혼이었다.

카아앙! 캉!

앞서 싸움에서도 보여줬듯 자신의 천마혼은 첫수부터 혁도천의 천마혼을 압도했다.

힘과 마기, 속도 모두 압도하며 밀고 들어가던 그때!

검무극은 몰아붙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은 느꼈다.

"잠깐! 물러나!"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불러들였다.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천마혼은 검무극의 명령대로 뒤로 물러났다.

“네가 얼마나 싸우고 싶어 하는지 안다. 한데 뭔가 이상해.”

검무극의 시선이 첫 공방에서 뒤로 쭉 밀렸던 혁도천의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놈은 아까도 너와 싸워서 확실히 밀렸어. 한데 왜 또 싸우려는 거지?”

이대로라면 천마혼은 소멸하고 그 힘이 네게 흡수될 텐데.

물론 혁도천의 천마혼이 자존심 때문에 고집을 부리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저 몸에는 화무기가 있었다. 이렇게 순순히 혁도천의 천마혼을 포기할 리 없는데.

'분명 뭔가를 꾸미려고 했다.’

검무극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그렇듯 방심은 두려움이 줄어들었을 때 하게 된다. 아버지의 천마혼이 나온 바로 지금처럼.

잊어선 안 된다. 저 몸의 주인이 화무기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살겁의 운명을 타고난 자임을.

그러는 사이에 다른 두 천마혼도 격돌하고 있었다.

산과 산이 서로를 밀어붙이자 대지는 비명을 질렀다.

콰드드득.

두 천마혼이 힘을 쓰자 그들이 딛고 있는 땅바닥이 부서지며 움푹 파였다.

그리고 덩치가 크다고 동작이 느릴 거라는 건 잘못된 선입견임을 두 천마혼이 보여주었다.

쇄애애액.

상대를 향해 빠르게 내질러지는 검을 몸을 틀어서 피했다. 날아든 공격을 피하면서 동시에 반격을 가했다.

이 둘의 싸움은 앞서 두 천마혼의 싸움과는 달랐다.

검무극과 혁도천의 천마혼 싸움이 기세의 싸움이고 마기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의 싸움은 훨씬 섬세했다.

천살성의 천마혼과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의 천마혼.

그들은 사람처럼 싸웠다. 휘두르는 검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상대의 급소를 노렸다.

거대한 덩치의 그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니 지켜보는 이들의 놀람은 더욱 컸다.

검무극의 천마혼 역시 그들의 싸움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이 자신의 천마혼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싸움을 배우고 있다.'

쾅! 콰앙!

거대한 검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와 불꽃은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이 싸움은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야 한다.’

천마혼을 부르는 것은 내공이 없이도 부를 수 있지만, 천마혼이 싸움을 시작하면 막대한 내공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버지와 화무기는 엄청난 내공을 소모하고 있었다.

채애앵.

몇 차례의 공격을 검으로 정면 대결하던 검우진의 천마혼이 이번에는 공격을 비스듬히 쳐냈다.

그로 인해 생긴 한 점의 작은 빈틈.

검우진의 천마혼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쉬이이이익!

성벽처럼 큰 자신의 어깨로 상대의 가슴을 강타했다.

터어엉.

어깨가 가슴에 충돌하자 낮고 깊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화무기의 천마혼이 휘청했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아든 검우진의 검이 이번에는 옆구리를 베었다.

파아악!

검에 베인 상처에서 피 대신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검무극은 처음 보았다. 천마혼이 베이니 마기를 피처럼 흘리는 것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쇄도하던 그때.

검우진의 천마혼이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섰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어느새 화무기의 천마혼이 발휘한 제칠식 마혼창세가 등 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검우진의 천마혼은 뒤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강기의 검들을 그 자리에서 쳐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뒤에서 화무기 천마혼의 공격을 허용하게 될 테니까. 자신을 방패로 삼으며 뒤를 노린 정말 영리한 한 수였다.

휘이익.

검우진의 천마혼은 돌아서던 기세 그대로 한 바퀴 더 돌며 옆으로 회전하며 이동했다. 애초에 작정하고 움직였기에 늦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쾅쾅쾅쾅쾅쾅쾅!

검우진의 천마혼이 검을 휘둘러 쏟아지는 강기를 쳐냈다.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은 없었다. 자신이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화무기의 천마혼 역시 쏟아지는 자신의 공격을 막아야 했으니까.

날아든 공격을 쳐내던 순간.

그들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검을 날렸다. 마기와 살기가 서로를 휘감는 가운데 두 천마혼이 다시 격돌했다.

화무기의 천마혼이 한 수 위협적인 수를 발휘했지만, 상대는 아버지의 천마혼이었다.

아무리 화무기라도 아버지가 구화마공을 이해하는 깊이를 어찌 따라가겠는가?

그 심후한 내공과 엄청난 살기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파아악!

다시 화무기의 천마혼의 허벅지가 베어졌다. 베어진 곳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주먹이 얼굴을 강타했다.

화무기는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아버지가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을 이뤘다는 것을. 삼백 년 전 마교주 혁도천이 도달하지 못한 건 물론이고, 십이성에 이른 마교주는 그야말로 천마신교 역사상 한 손에 꼽을 정도일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화무기의 천마혼이 무작정 당하지만 않았다.

뒤로 주르륵 밀리며 거리가 벌어지던 그때.

화무기의 천마혼의 두 눈이 새하얗게 변했다.

구화마공 제구식 마혼지존.

그의 눈에서 번쩍하는 순간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으로 검우진의 천마혼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도 제 구식으로 막을 테니, 이 싸움을 내공 싸움으로 이끌려는 것이다.

그랬는데 검우진의 천마혼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쉬이이이익.

검우진의 천마혼이 달려서 빛의 강기를 피한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어찌 마혼지존을 피할 수 있겠는가?

지이이이이잉.

세상을 자르며 따라오는 그 빛을 피해 검우진의 천마혼이 달렸다. 놀랍게도 발휘한 그것은.

구화마공 제팔식 마혼질주.

원래라면 저 시선을 떨쳐내지 못했을 텐데.

십이성에 이른 마혼질주는 대성의 마혼지존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쉬이이이익.

원을 그리며 화무기 주위를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마치 이곳이다! 하는 것처럼 한 곳에 다다르자 붕, 하고 그 큰 몸이 날아올랐다.

두 눈에서 뻗어나간 빛이 하늘을 갈랐다.

그조차 예상했다는 듯 허공에서 몸을 틀어 피한 검우진의 천마혼이 그대로 떨어지며 검을 내리쳤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설계된 한 수였다.

쇄애애액!

푸아아악!

검우진 천마혼의 검이 상대의 어깨를 가르며 가슴까지 쭉 내려갔다.

갈라진 상처에서 마기가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굵고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촤아아악

어깨를 자르고 내려온 검이 심장에 새겨진 천마혼 문양까지 내려갔다.

그것까지 베어버리면 그대로 끝인 순간에

천마혼의 검이 멈췄다.

처음에는 화무기가 어떤 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검우진의 천마혼이 스스로 멈춘 것이다.

쑤우우우욱.

검우진의 천마혼이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파아아아악.

마기가 피처럼 솟구쳤지만, 소멸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우진의 천마혼이 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철커덕.

지켜보던 이들은 알 수 있었다. 검우진의 천마혼은 상대를 완전히 소멸시키고 그 힘을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천마혼 위에 누군가 겹쳐 보였다. 바로 아버지였다.

'천마혼이 아버지를 닮았구나.'

상대의 힘을 빨아들여서 더 강해지는 선택 따윈 하지 않을 분이셨으니까.

천마혼은 그 주인의 성정을 바탕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내 천마혼은? 첫입만 열면 된다!

화무기의 천마혼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스스스스

살기와 마기가 뒤엉켰던 눈빛에서 살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순수한 마기만이 남았다.

놀랍게도 그 마기 가득한 눈빛에 담긴 것은 감사였다.

검무극은 천마혼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화무기가 죽으면 천마혼도 사라지겠지만, 그 죽음은 다른 천마혼에게 힘을 빼앗기고 소멸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죽음이 된다는 것을 영원히 사라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두 천마혼은 언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느냐는 듯 무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졌지만 수치스러워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무뚝뚝한 눈빛을 보내던 화무기의 천마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 검우진이 있는 앞에서 그는 절대 강림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라지자 자신의 역할도 여기까지라는 듯,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한 차례 바라본 후에 검우진의 천마혼도 사라졌다.

무슨 생각인지 혁도천의 천마혼은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검무극의 천마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검무극이 팔꿈치로 자신의 천마혼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저기에 감동하면 안 돼.”

천마혼이 슬쩍 검무극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은 상황이면 반드시 힘을 흡수해야 해. 멋짐은 순간이지만 강함은 영원하다! 알지? 네 주인이 탐욕의 화신이라는 것.”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다는 눈빛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린 아직 더 강해질 때다.”

주인공의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혁도천의 천마혼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원래 계획은 검무극의 천마혼을 흡수한 후, 그 강해진 힘으로 화무기의 천마혼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두 천마혼의 힘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면?

본래의 천마혼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육체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육체를

자신을 탄생하게 해준 혁도천에게 영원히 충성을 바쳐야 하지만, 삼백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그 충성심도 희미해졌다.

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반쯤 인간화된 천마혼이었다. 그랬기에 화무기의 천마혼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육체만 얻을 수 있다면 누구의 천마혼이 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검우진의 천마혼이 화무기의 천마혼을 소멸시키지 않는 모습을 보았다.

천마혼에게 져서 소멸하면 영원히 사라지지만, 주인이 죽어서 사라지면 언젠가 다른 주인을 만날 수도 있었다.

검우진의 천마혼은 자신이 강해지겠다고 그 기회를 뺏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혁도천의 천마혼은 기억났다.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그래, 자신은 저렇게 도도하고 자부심이 넘치던 존재였다.

남의 힘 따윈 탐내지 않아도 만마가 우러러보며 공포에 떨던 절대적인 존재.

반면 지금의 자신은 머릿속에 온갖 잡생각이 가득 찬 그야말로 잡스러운 천마혼이 되고 말았다는 좌절감이 들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너도 흔들리는구나.

화무기의 목소리였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천마혼의 영혼은 낭떠러지로 추락하듯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검은 눈동자가 사라지며 화무기가 다시 돌아왔다.

화무기는 자신의 천마혼이 패배했음에도 분노하지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너희들은 천마혼의 영혼조차 흔드는구나.”

몸속의 다른 영혼들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몸에 갇혀 있었기에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으니까.

고수였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함께 있었기에 그 긴 세월을 버텨올 수 있었다.

인간인 그들이 흔들리는 거야 그럴 수 있다지만, 정말 천마혼까지 이들에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자신의 천마혼은 물론이고, 혁도천의 천마혼까지 흔들렸다.

정말 이런 물음이 절로 나왔다.

“너희들은 대체 뭐냐?"

그러자 검무극이 뒤에 늘어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긴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묵묵히 이 싸움을 지켜봐 주고 있었다.

“너 때문에 모인 분들이지. 네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화무기란 존재가 없었다면? 그래서 회귀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형이 소교주가 되었을 테고, 어쩌면 자신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 그렇게 되었겠지.

설령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해도 아버지나 마존들과의 관계는 엉망이었을 테고. 저 두 맹주와는 얼굴 한번 보기 어려운 관계였을 것이다. 검왕과는 만나기나 했을까?

“너 때문이 아니라 네 덕분이라 해야겠지."

너 때문에 한평생이 힘들었고, 너 때문에 지금 인생은 너무 행복하다.

화무기는 자신에게 그런 존재였다.

화무기는 검무극의 눈에 담긴 깊고도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것일까? 저 소교주는 처음부터 그랬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눈빛을 가만히 쳐다보던 화무기가 불쑥 말했다.

“나는 후회한다.”

화무기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후회했다.

“하나씩 하나씩 다 죽이고, 마지막에 널 죽였어야 했는데.”

검무극이 그를 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화무기야, 넌 이미 한 번 비슷한 짓을 했었다.

맹주님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 했었으니까. 넌 이미 그런 인생 한 번 살아 봤다.

이어진 화무기의 솔직한 자책.

“내가 오만했다.”

사실 오만할 만도 했다. 그 엄청난 무공과 상상 초월의 내공, 심지어 내공을 채울 수 있는 호신강기와 두 개의 천마혼까지.

대체 어떻게 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화무기의 자책이 이어졌다. 설령 이곳까지는 오만하게 왔더라도 이렇게 했어야했다.

“미친 듯이 몰아붙여서 네가 오기 전에 저들을 다 끝장냈어야 했는데.”

검무극이 오고 나서부터 상황이 엉망이 되었다. 심지어 밥을 먹자고 끌려 들어갔으니. 인정하긴 싫지만, 결과적으로 이 소교주에게 휘둘린 것은 영혼들만이 아니었다.

후회하고 자책하고.

화무기는 이미 진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모습을 믿지 않았다. 앞서 자신의 천마혼이 혁도천의 천마혼을 공격할 때도 뭔지 모르지만, 함정을 파려 했던 그였다.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위험한 상태다. 이쪽의 방심을 유도하며 뭔가를 꾸미고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이렇게 하려고 했다.

아버지, 아들과 함께 싸우시죠.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아버지와 함께 싸워보겠는가? 아버지와 함께 확실하게 그를 없앨 생각이었다.

한데 검무극의 본능이 이렇게 말했다.

ᅳ혼자 싸워라.

검무극은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준 본능의 뜻을 따랐다.

검무극이 화무기를 보며 여유를 부렸다.

“자책하지 마라. 네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거니까.”

겉으론 방심하는 척했지만 검무극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싸움에 앞서 검무극은 자신의 천마혼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시커먼 두 눈으로 화무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은 천마혼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네가 끝까지 싸우고 싶어 한다는 것 안다.”

천마혼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저 화무기를 자신이 없애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주인과 운명적인 숙적임을 천마혼은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검무극이 차분하게 천마혼에게 말했다.

“나는 주인공이 되려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난데없는 말에 천마혼이 슬쩍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풍천교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도 안 돼!'라고 말했고, 옆에 서 있던 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풍천교주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검무극 만큼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도 없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검무극과 만나면 모두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느꼈으니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으로, 심지어 단역이 될지라도 기꺼이 이 자리에 서 있을 마음이 들게 해준 사람이었으니까.

“앞으로 내 천마혼으로 살아가려면 주인공이 아닌 삶에도 익숙해져야 해. 물러나서 지켜보고, 참고 양보해야 할 일이 많을 거다.

아마 네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일도 많겠지. 그래도 나는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지 않을 거다. 앞으로 우린 무림의 운명을 결정짓는 자리가 아니라 수레에 누워 하늘을 보며 중원을 주유하고 있을 거다.”

잠시 사이를 주고 검무극이 자신의 운명을 전했다. 비단 천마혼만이 아닌 모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겠다.”

천마혼의 시선은 계속 검무극에게 머물러 있었다. 지금까지는 슬쩍슬쩍 보기만 하던 천마혼이었는데, 지금은 가만히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검무극이 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오늘 나를 위해 강림해 줘서 정말 고마웠다. 소멸을 각오한 강림이라는 것, 알고 있다. 고맙다, 친구.”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천마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한마디를 안 해주고 가냐!”

그렇게 천마혼을 보낸 후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화무기는 그 모습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저 무공에서 파생한 악령에 불과한 존재인데.

"너는 정말 말이 많을뿐더러 온갖 것에 다 신경을 쓰는구나.”

화무기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렁주렁 달고 사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런 점에서 우린 닮았다.”

닮았다는 말에 '이런 미친놈!'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화무기에게 검무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볼수록 기분 나빴기에 당장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서도 또 무슨 헛소리를 할지 궁금한 그런 인간.

“어때? 난 아직도 너와 대화할 마음이 있어.”

당연히 미친놈 취급을 할 줄 알았는데, 이번 대답만은 달랐다.

"싸움이 끝나면 실컷 해주지."

쇄애애애액.

화무기가 먼저 검무극을 향해 몸을 날렸고, 검무극 역시 피하지 않고 쇄도했다.

앞서 한 차례 싸워봤기에 두 사람의 실력이 박빙이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부터 최선을 다한 수를 날렸다.

첫수를 나누는 순간, 심장까지 짜릿함이 전해져왔다.

이제 감출 것 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마지막 싸움.

쉬이익!

검무극의 검이 화무기의 허리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허리를 노려야지, 하는 생각보다 검은 더 빨랐다.

물론 저 검을 막아야지 하는 생각보다 피하는 움직임이 더 빨랐고.

몸을 틀어서 피한 화무기의 검이 검무극의 목을 찔러왔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검무극이 심장을 찌르자, 화무기는 눈을 노렸다.

조금 전에 실없는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공격은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검무극도 화무기도 느끼고 있었다. 아마 서로를 죽인 다음에는 죽는 날까지 이런 싸움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을.

검광이 쉴 새 없이 번쩍였다.

너무나 빠르게 검이 오갔기에 준비 과정이 필요하거나 내공이 크게 들어가는 초식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지금의 싸움은 오직 살상만을 위한 실전 검술.

아름다움과 우아함도 끼어들지 못했다.

오직 직선의 선들.

죽음으로 이어지는 최단의 선.

상대가 어지간해야 이 직선의 단조로움 속에서 곡선의 미학을 보여주지.

찰나만 망설여도 그대로 요혈을 관통당할 공격이 서로에게 날아들었다.

지켜보는 이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합공을 할 수도 도울 수도 없었다. 너무나 빠르게 위치가 바뀌었기에 검기를 날릴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특히 검을 쓰는 이들은 마치 자신이 직접 싸우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심장이 요동쳤다.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런 싸움을 하고 싶었기에 검무극 대신 싸우고 싶었다.

그 빠른 공격 속에서 검기가 발출되기 시작했다. 짧고 빠른 검기들. 그 모습은 마치 검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착각이 들게 했다.

"아!"

지켜보는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저 빠른 움직임을 하면서 검기까지 발출한다는 것은 정말 보고서도 믿기 힘들었다.

촤악!촤악! 촥촥촥촥!

두 사람 주변에 이미 수십 가닥의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바닥에도, 부서진 벽에도, 그들이 남긴 선들이 가득했다. 그 선들이 너무 많았기에 마치 바둑판 위에서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둑판 위에 갇힌 것이 답답했을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마가촌의 대로를 질주하며 싸웠다.

두 사람은 달려가면서 검을 나눴다.

그들이 만들어낸 검광이 긴 꼬리를 만들었다. 마치 연 꼬리처럼 검선이 이어지며 그들과 함께 마가촌의 거리를 달렸다.

그들은 저 멀리 달려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달려왔다.

미친 듯이 달리면서도 두 사람은 검을 나눴고, 단 한 순간도 상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선을 놓치는 순간 죽음이었다.

분명 두 사람은 이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치명적인 공격이 오갔기에 그 즐거움이 드러나고 있지 않았을 뿐.

말을 할 여유가 없었기에, 미소 한 번 지을 여유가 없었기에 표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에는 그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닥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허공을 디디고 싸웠다.

솟구쳐 날아오르며 싸우는 것은 고수라면 할 수 있지만, 허공을 땅처럼 밟으며 싸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들은 무의 극의에 이른 검술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검은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 가벼울 때는 느렸고, 무거울 때는 빨랐다. 검술의 기본적인 이치를 역행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검무극은 한 가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원래 무아지경에 빠지면 자신이 싸우고 있는지 아닌지를 모르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싸움이 끝나 있어야 한다.

한데 이번에는 반대였다.

지금은 몸에서 영혼이 나와서 제삼자가 되어 자신의 싸움을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다. 자꾸만 몸에서 빠져나와 외부에서 싸움을 보려 했다.

이것은 무아지경을 넘어선 경지인가? 그게 아니라면?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쩌면?'

순식간에 수십 수가 오가면서 더욱 그런 기분이 강해지던 그때.

화무기가 검무극의 검을 쳐내며 소리쳤다.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네가 졌다!"

동시에 화무기의 몸에서 암흑의 기운이 폭사하듯 뿜어졌다.

쏴아아아아악!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고 화무기는 오직 이 한순간만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음을.

화무기의 승부수였다.

몸을 휘감으며 압박하는 엄청난 기운으로 그가 남아 있는 거의 모든 내공을 다 쏟아부으며 이 한 수를 사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뒷일은 어찌하려고?

화아악!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확 자신을 집어삼키던 그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검무극은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주위에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살아서 흐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안개였다.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고,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도 들렸다.

향기로운 냄새도 났고, 피 냄새도 났으며 시체가 썩는 악취도 났다.

바로 그때 안개 속에서 누군가 쑥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나타난 사람은 바로 무황신검이었다.

“소교주."

무황신검은 검무극을 이곳에서 만난 것에 놀라지 않았다. 마치 검무극이 들어온 걸 알고서 일부러 찾아온 사람처럼.

“그가 암천속혼술(暗天束魂術)을 발휘해서 자네 영혼을 가뒀네. 우릴 그의 몸에 집어넣은 암흑마공이지. 여긴 그의 마음속이네.”

그 충격적인 말에도 검무극은 그렇게 많이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무황신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덧붙였다. 왜 화무기가 싸움이 끝나면 실컷 대화해주겠다고 했는지 이유도 함께 밝혀졌다.

“한 시진 내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자넨 이곳에 영원히 갇히게 되네.”

무림인들에게 사랑받는 마교주

검무극이 무황신검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한 모습이었다.

“실례지만 한 번만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영원히 갇힌다는 말을 듣고도 이런 여유라니?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이 소교주는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네. 주어진 시간은 한 시진밖에 없다네.”

안타깝게도 무황신검은 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과연 소교주는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정말이지. 자넬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사실 이번 만남에는 검무극의 의도가 있었다.

검무극은 앞서 화무기와 싸우다가 자신의 영혼이 자꾸 몸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상함을 느꼈고 점멸보로 물러날 수도 있었다. 싸우는 내내 화무기가 비장의 한 수를 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일단 피하려고 하던 그때, 몸속에 있던 그 신비한 기운이 반응했다. 화무기를 만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이곳에 갇히게 된 건 자신의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이곳에서 무황신검을 만났을 때 검무극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분명 육도원기의 기운은 이들의 영혼과 관련이 있었다.

“제가 여기 온 것도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무황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살성의 몸속에서 영혼으로 만나는 일이 어찌 운명적이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바깥 상황을 보거나 들을 수 있습니까?”

이들이 화무기의 몸을 빌려 나왔을 때 바깥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네.”

“저를 그곳으로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따라오게."

무황신검이 안개를 헤치며 앞장서 걸었다.

뒤따라 걸으며 검무극이 물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 겁니까? 저는 신교의 후계자인데.”

무황신검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게 밥을 대접해 주려 했던 마음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게.”

어디 그래서겠는가?

ᅳ맹주님 욕심이 무림을 살렸습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그 말을 검무극이 해주었다.

-이제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검무극의 그 말에 무황신검은 자신을 용서했다. 이제 죽어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지만,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안개가 가득한 곳을 벗어나자 주변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었다.

고개를 들자 해와 달이 동시에 떠 있었고 산이 거꾸로 떠 있었다. 산속의 폭포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왼쪽으로는 늪이 있었다. 독왕이 함께 들어왔다면 당장 늪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늪에는 온갖 독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늪 너머 언덕에는 커다란 성이 있었다. 정말이지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성이었다.

반대쪽 들판에는 시체들이 가득했고 그 너머 작은 마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던 것은 이곳 때문이었다.

미로처럼 벽들이 세워져 있는 공간도 있었고 칼날이 숲처럼 우거져 들어갈 수 없는 곳도 있었다. 길을 따라 세워진 창날들에는 백골이 걸려 있었다.

“신기한 곳이지?”

“네, 이런 곳일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영혼들이 어딘가 좁은 방 같은 곳에 갇혀 있는 줄 알았더니, 하나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은 계속 변한다네. 처음 왔을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지. 자네가 들어왔으니 또 변하겠지.”

화무기의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이곳 내부가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더 걸어가자 깎아지는 절벽이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걸려 있는 허름한 나무다리를 건너며 무황신검이 말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지. 사람의 마음에 이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네. 과연 내 마음속에는 어떤 곳들이 있을까?"

검무극을 통해 마음이 많이 풀어진 그였지만 여전히 그는 두려웠다. 사람들이 무림맹주의 마음이라고 와서 보는데.

“여기보다 더 흉측하고 험한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그러자 검무극이 단언하듯 말했다.

“아닐 겁니다.”

무황신검이 다리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불어온 바람이 다리를 흔들었지만, 검무극은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그런 풍경을 가진 분이셨다면 이렇게 저를 도와주러 오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설령 기대했던 것보다 좀 황량하면 어떻습니까? 이놈들아, 무림을 위해 싸움터를 헤매다 보니 그렇다, 다 너희들 위하느라 그렇게 됐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참 쉬워서 좋다. 무황신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자넨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재주가 있네.”

“그 재주 덕분에 이렇게 신검님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무황신검이 다시 앞장서 다리를 건넜다.

“자네 마음속은 따뜻한 풍경들로 가득할 거네.”

그 뒤를 따라 걷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절벽을 건너서 도착한 들판 바닥에 커다란 하얀색 원이 그려져 있었다. 그 원을 중심으로 알 수 없는 도형들과 문자들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 주위를 흐르는 신묘한 기운. 이곳은 앞서 지나왔던 곳과는 별개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심원(心圓)이라 불리는 곳이네. 이곳에서 바깥 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지. 한데 그가 바깥과 이곳을 완전히 차단했네. 아마 자네를 완전히 가둘 때까지 열어주지 않을 작정인 것 같군.”

모르긴 해도 바깥은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다. 싸우다 자신이 갑자기 픽 쓰러져 버렸을 테니까.

그래도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 믿을만한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알아서 잘 대처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지금은 이곳에서의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와 대화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그는 어디서든 듣고 있네.”

“그럼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그도 듣고 있겠네요.”

무황신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그에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무황신검이 예상하기로는 이 비겁한 놈아, 날 이렇게 가두다니 천살성이란 이름이 아깝다! 이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검무극은 오히려 반갑게 소리쳤다.

"천살성아, 네 마음에 무사히 잘 들어왔다! 여길 구경시켜 줘서 고맙다! 태어나 처음 해보는 경험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도 못 할 경험이겠지. 그리고 덕분에 여기 무황신검님도 다시 뵙게 되어 너무 좋다.”

무황신검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천살성을 비꼬는 말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진짜 좋아하고 있었다.

“싸움 끝나면 우리 대화 실컷 하기로 말한 것, 약속 꼭 지켜라!”

그렇게 허공을 향해 소리친 후 무황신검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도 해줍니까?”

“가끔 해준다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그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이건 무슨 개수작이지?”

이곳의 영혼 중 첫마디로 이런 말을 내뱉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과연 등장한 사람은 마교주 혁도천이었다. 그 역시 과거 비궤에 빨려 들어가기 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의 분노가 향한 곳은 검무극이 아니라 무황신검이었다.

“혼자 빠져나갈 작정인가?"

혁도천이 따지듯 묻자 무황신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을 잡는군.”

둘이 어떻게 지냈는지 이 짧은 대화로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혁도천에게 인사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혁도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자신에게 한 마디 좋은 말도 해주지 않았다. 잔혹하고 악명 높다고도 했으며 비궤에 빠져들어 가지 않았다면 천마신교의 상황이 더 나빠졌을 거란 말도 했었다.

술잔을 깬 것을 두고 진짜 천마라면 그런 짓 하지 않을 거라는 말로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고.

그런데도 혁도천이 검무극을 반기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 줄 수도 있다고 했지?”

“그랬지요.”

“이곳에 나를 꺼내주려고 들어온 것이냐?"

기대에 찬 눈빛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저도 붙잡혀 왔습니다.”

"이런 멍청한!"

혁도천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네가 못 꺼내주면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지. 혁도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

“운이 좋으면 이곳에서 빼내 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안에서 하는 게 더 쉬울 수도 있고.”

치밀어 오르던 혁도천의 화가 가라앉았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경험했기에 자신을 꺼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넌 무림일통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

자신을 내보내 주면 무림일통을 시켜준다고 했는데 검무극은 싫다고 했었다.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 넌 장차 마교주가 될 몸이면서 무림을 손아귀에 움켜쥘 야망조차 없는 거냐?”

"없습니다.”

다른 건 참아도 그건 참기 어려웠다.

“어쩌려고 너처럼 무른 자가 본교의 소교주가 되었단 말이냐? 무릇 천마신교라면 이름만 들어도 세상 모든 이들이 덜덜 떨어야 한다! 그게 본교의 위상이자 존엄이다!”

그러자 검무극이 차분히 물었다.

“무엇이 두려워서요?”

"뭐?"

“남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려는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나 무서운 사람이니까 덤비지 마라.”

자신을 겁쟁이 취급한다는 생각에 혁도천은 버럭 소리쳤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원래 그래왔으니까. 우린 그런 존재니까!"

“무림의 긴 역사에 무림인들에게 사랑받는 마교주가 한 명쯤 있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런 미친!"

혁도천은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아직은 이 소교주에게 희망을 걸어야 했으니까.

"좋다, 헛소리 여기까지 하고.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검무극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한 시진만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나가야 교주님도 나갈 수 있습니다.”

“뭐든 말만 해라.”

"우선 나머지 분들부터 다 불러주십시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

"그럴 필요 없네. 여기 다 왔으니까.”

천의궁주와 사도맹주 주가신이 그곳으로 걸어왔다. 다만 마지막 영혼인 혁도천의 천마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이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거나, 혁도천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다.

천의궁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자네도 별수 없군.”

말은 그러했지만 검무극을 바라보는 눈빛에 큰 적대감은 없었다. 수호궁주의 눈을 직접 감겨주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천의궁주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원래 빈 수레가 시끄러운 법 아니겠습니까? 그 수레를 여러분들이 채워주셔야겠습니다.”

모두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어떤 사술도 파훼법은 있는 법이죠.”

강력한 사술일수록 때론 더 쉽게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여러분들을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앞서 혁도천에게 나갈 수 있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혁도천을 자극하기 위해 한 말이라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믿지 않는다.

"우릴 어떻게 내보낸다는 말인가? 다른 사람의 몸에 넣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천의궁주의 물음에 검무극은 그렇게 하겠다고 거짓 희망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저 역시 예감일 뿐입니다. 운명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했다면, 여러분을 데리고 나가라고 한 것이겠구나.

만약 그 일이 성공했을 때 이곳을 나간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갈지, 다시 태어날지, 아니면 극락이나 지옥으로 갈지 저는 모릅니다. 오직 하늘만이 알겠지요.”

그 말에 혁도천의 인상이 굳어졌다.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갈 거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이 몸에 남는 것이 낫겠지.”

그것은 천의궁주나 주가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적어도 지옥에는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미 삼백 년간 지옥에 갇혀 계셨으니까요.”

그곳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준 후 검무극이 다시 말했다.

“저는 감히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삼백 년간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지금은 또 어떤 생각들을 하고 계시는지. 싫으신 분은 억지로 데려가지 않을 겁니다. 만약 남으시면.............”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그 운명도 결정될 것이다.

"천살성과 함께 이번 생을 보내시거나, 아니면 오늘 그와 함께 죽게 되시겠지요.”

천의궁주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자네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어떻게 믿지?"

“미리 의심하고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나가는 데 실패하면.............”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평생 제게 잔소리할 수 있을 테니까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일 급한 사람은 당사자인 검무극일 테니까.

여전히 가장 적극적으로 검무극을 돕는 사람은 무황신검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무황신검이 자신을 돕는 마음은 그가 이곳을 나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이 나갈 수 있게 해주려고 돕는 것이다.

검무극은 처음에는 쾌속보로 이곳저곳을 달리면서 파훼법을 찾아야 하나, 고민했다. 한 시진 안에 이 넓은 곳에서 파훼법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모두를 불러달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분명 운명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면, 이 영혼들의 도움을 받으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을까? 그래, 혼자 해내려고 하지 말고, 이들의 도움을 받자.

"혹시 이곳 내부에 이상한 곳이 있습니까? 눈에 띄는 곳이거나, 뭔지 모를 특별한 것이 있거나.”

“오면서 자네도 봤다시피 다 이상한 것들 투성이지.”

무황신검의 대답에 검무극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반대로 여쭤봐야겠네요. 혹시 특별하지 않은 곳이 있습니까?”

다들 그런 곳이 있는지 떠올렸다. 너무 오랫동안 있던 곳이다 보니 오히려 쉽게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불쑥 대답했다. 이곳에서 검무극을 만난 후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곳이 있네.”

그는 바로 주가신이었다.

“우리가 온 이후 이곳은 계속 바뀌었지만..............."

평소에도 거의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과연 그가 이곳을 나가고 싶어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검무극을 바라보며 차분히 덧붙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인 곳이 딱 한 곳 있지."

한 시진 후에 넌 죽는다

검우진도 함께 싸우고 있었다.

비록 지켜보고만 있었지만, 그는 마음으로 아들의 싸움을 함께했다.

함께 검을 내질렀고, 날아드는 검을 막았다.

그렇게 한 마음으로 움직였기에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아들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이미 검우진의 신형은 벼락처럼 빠르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검무극이 쓰러지기 전에 이미 검우진은 아들을 받아안았다.

한 손으론 아들을 안았고, 다른 손에 들린 천마검이 화무기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이익!

화무기는 그 자리에 선 채 피하지 않았다.

검우진이 흥분해서 자신의 목을 검으로 찌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화무기는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상대의 실력을 믿은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리라고.

과연 천마검은 그의 목에 닿을 듯 말 듯한 곳에서 멈췄다.

화무기가 자신을 겨눈 그 차가운 검날 뒤에 서 있는 검우진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나를 죽이면 당신 아들은 죽는다.”

검우진은 화무기의 몸에 내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모든 걸 쏟아부은 한 수가 들어갔다.’

그 결과 아들은 자신의 품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내 몸에 손을 대도 당신 아들은 죽는다.”

검우진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더욱 냉정해진 그였다.

그사이 다가온 권마가 검무극을 받아 안았다.

권마가 검무극의 몸 상태를 꼼꼼히 살핀 후 차분히 말했다.

“외상은 없습니다만, 의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진패천과 백자강, 풍천교주와 독왕, 그리고 검왕도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그 말 많은 검무극이 이렇게 눈을 감은 채 입을 닫고 있는 모습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각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검무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독왕이 나서서 검무극을 살폈다.

“독에 당한 건 아닙니다.”

독왕은 평소와 달리 살짝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화무기를 향한 눈빛에 노골적인 짜증이 드러났다. 옆에 검우진이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낸 적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무기가 검우진에게 말했다.

“당신 아들은 내 몸속에 있다.”

그 말에 풍천교주가 화무기의 비술이 무엇인지를 추측했다.

"암천속혼술! 사람의 혼을 몸속에 가두는 암흑궁의 비술이오.”

풍천교주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만약 암천속혼술이 맞다면, 한 시진 내로 파훼하고 나와야 하오. 만약 나오지 못하면... 영원히 저자의 몸속에 갇히게 되오.”

과연 정확히 맞혔다는 듯, 화무기가 검우진을 도발했다.

“궁금하군. 과연 당대 마교주는 적의 몸에 자식의 영혼이 들어 있는데도 죽일 수 있는지.”

화무기는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라는 듯 두 팔을 완전히 벌렸다.

검우진은 말없이 화무기를 응시했다. 상대의 내공이 바닥난 지금, 그를 죽이는 것은 손만 까닥하면 될 일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진패천이 나섰다.

“검 교주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니 널 죽일 수도 있겠지.”

물론 화무기의 도발에 힘을 실어주려 나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지. 소교주는 반드시 네 사술을 파훼하고 나올 테니까.”

화무기의 시선이 검우진 너머 진패천을 향했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겠군.”

자신만만한 화무기의 모습은 모두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쪽이 검무극이라면, 저쪽 역시 천마신교 본단에 단신으로 찾아왔던 천살성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풍천교주가 나섰다.

“너, 자신 있냐? 소교주가 네게 갇히게 되면, 매일 온종일 떠들어댈 텐데. 소교주와 평생 함께 살 자신 있냐고. 나중에 울면서 제발 데려가 달라고 하지 말고, 어서 소교주 내놔라.”

다들 풍천교주의 말을 농담으로 듣지 않았다.

“소교주는 누군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풍천교주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검무극의 영혼이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저주를 퍼붓는다면? 정말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검우진이 화무기에게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냐?"

화무기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를 풀어주면 소교주도 풀어주겠다.”

놀랍게도 화무기는 검무극을 인질로 삼아 이곳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살아남거나 혹은 다 죽이거나. 이곳에서 끝장을 볼 것 같은 천살성이었는데, 그는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소교주는 죽는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검우진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작렬했다. 화무기가 붕 날아서 바닥을 뒹굴었다.

검우진이 그를 예고도 없이 때릴 줄은 몰랐기에 모두 깜짝 놀라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내공을 주입한 주먹이 아니었기에 머리통이 박살 나진 않았다.

자신의 몸을 건드려도 검무극을 죽인다고 했었는데.

검우진은 그가 그러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검우진이 바닥에 누운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비록 내공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었지만 화무기 역시 호신강기 없이 얻어맞았기에 얼굴에 상처가 난 채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단지 이 천살성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 수법을 쓴 것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놈이 꾸미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위기 본능을 자극하는 어떤 위험한 계획을

검우진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무극이가 파훼하고 나오든 나오지 못하든..

잠시 사이를 두고 검우진이 차갑게 말했다.

"한 시진 후에 넌 죽는다."

권마가 걸어가서 화무기의 혈도를 제압했다. 혹시라도 선 채로 내공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마는 조금 전 검우진의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아들을 그 누구보다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과 말이었다. 반드시 파훼하고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진심임을 알았다.

만약 검무극이 파훼하고 나오지 못하더라도, 정말 화무기의 목을 베어버릴 교주였다. 아들이 천살성의 몸속에서 살아가게 하진 않을 교주였으니까.

아들도 바라지 않을 거네.

분명 검우진은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랬기에 권마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니 무극아, 꼭 빠져나와야 한다.'

주가신이 나설 줄 몰랐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검무극이 그에게 부탁했다. 이곳 화무기의 마음속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곳.

“그곳으로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검무극의 부탁에 주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장소를 알려줄 생각이 있었기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러지.”

주가신이 흔쾌히 허락하자 검무극이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이렇게 저를 도와주시면 불이익은 없습니까? 어디 뇌옥 같은 곳에 가둬버린다거나.”

주가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한 사람은 무황신검이었다.

“오히려 상을 받을지도 모르지.”

무황신검은 주가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자넬 돕는 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엉뚱한 곳에 데려가서 시간을 끌어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무황신검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심 불안했다.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음에도 아직 주가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으니까.

지금 이 일만 해도 그랬다. 무슨 의도로 검무극을 도우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반면 검무극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되면 저 말고 혁 교주님께 두고두고 괴롭힘을 당할 테니까요.”

이곳에서 간절히 나가고 싶은 혁도천이 있었으니까. 과연 혁도천은 거짓말을 했다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주가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확실한 요구를 한 혁도천을 제외하곤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아무런 의사도 표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혁도천이 가겠다고 나섰고, 무황신검 역시 끝까지 검무극을 도울 작정이었다. 천의궁주 역시 함께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시간이 없으니 경공으로 가시죠.”

검무극이 손을 양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모두 깜짝 놀랐다.

“설마? 손을 잡고 가자고?"

"내공들이 없으시잖습니까? 제가 옆구리에 끼고 갈 수도 없고요."

이곳에서 영혼들은 영락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내공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검무극은 내공은 물론이고 무공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음을 먹으면 이 마음속 세상을 다 파괴해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마음속이니 다시 온갖 것들이 생겨나겠지만, 지금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검무극 오른쪽에 있던 무황신검은 망설이지 않고 검무극의 손을 잡았다.

반면 반대쪽에 있던 혁도천은 망설였다.

"일부러 우릴 곤란하게 하려는 건가? 허공섭물로 우릴 데려가게. 자네 무공이라면 충분하지 않나?"

검무극은 대번에 거절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렇게 쓸데없이 내공을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싫으시면 여기 계셔도 됩니다. 여기 두 맹주님과 다녀오겠습니다.”

결국 혁도천이 검무극의 손을 잡았다. 차라리 이 이상한 소교주 놈의 손을 잡는 건 오히려 쉬웠다. 문제는 반대쪽 손으로 잡아야 하는 주가신의 손이었다.

한데 주가신은 별다른 고민 없이 손을 잡았다. 혁도천의 손을 잡는 게 내키지 않았을 텐데,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놈!”

혁도천 역시 주가신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

마지막 관문은 무황신검과 천의궁주였다.

원래라면 죽어도 손을 잡지 않을 상대였는데, 무황신검은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잡게."

무황신검은 자신의 감정보다 검무극을 돕는 일을 더 중요시했다. 그는 느꼈다. 운명이 마지막으로 이 소교주를 도우라는 사명을 내렸음을

평소와 다른 무황신검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이 일에 절대 빠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천의궁주도 무황신검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갑니다!”

검무극이 날아오르자 그들도 모두 함께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미친 짓이라 생각했는데, 시원한 바람에 그런 생각이 모두 날아갔다.

이 얼마만의 비행인가?

이 얼마나 이렇게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싶었던가?

앞서 화무기의 몸을 빌려서 싸움을 했지만, 이렇게 허공을 날아서 자신의 세상을 날아가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삼백 년을 함께 한 이들과 처음으로 손을 잡고 처음으로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분이 묘했다.

그때 갑자기 날씨가 바뀌더니 순식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마치 너희들의 비행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번쩍하며 벼락이 내리쳤다.

콰콰콰쾅!

검무극이 허공에서 몸을 틀자 벼락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서 죽으면 어찌 됩니까?"

검무극의 다급한 물음에 무황신검이 대답했다.

“시간을 두고 다시 살아난다네. 금방 살아날 때도 있고, 며칠 후에 살아날 때도 있고.”

비록 내공은 없지만 서로 죽여본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 싸움이 더욱 처절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진 내에는 절대 죽으면 안 됩니다!"

검무극은 정말 다 데리고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번쩍! 번쩍!

우르릉! 콰쾅!

화무기의 방해인지, 아니면 암천속혼술의 방해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벼락이 그들에게 계속 내리쳤다.

하지만 그들을 데리고 날아가는 사람이 검무극이었다. 게다가 비록 검무극의 내공을 이용해서 날아가고는 있었지만 다들 교주고 맹주고 궁주인 사람들이었다.

벼락이 가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가 되어 벼락 사이를 누볐다. 누군가 보았다면 정말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저기네.”

검무극은 모두를 데리고 주가신이 가리킨 곳으로 내려왔다.

그야말로 하늘을 날아서 순식간에 그곳까지 도착한 것이다.

“저는 저 성에 갈 줄 알았습니다.”

늪 너머 저 멀리 언덕에 있는 성으로 데려갈 줄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을 것 같은 고성이었으니까.

하지만 주가신이 안내한 곳은 하늘에 떠 있는 산도 아니었고, 복잡한 미로도 아니었고, 그 기괴한 성도 아니었다.

그곳은 마을이었다. 시체가 널려 있는 들판 너머 연기가 피어오르던 마을. 그곳에도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혁도천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은 처음부터 있었군.”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한 곳이라서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에는 별것 없었다. 그냥 시골의 작은 마을이었고, 전쟁이라도 겪은 듯 시체들이 널려 있던 곳이었다.

그러자 주가신이 불쑥 말했다.

"여기도 많이 변했소.”

모두의 시선이 주가신을 향했다.

“길도 바뀌고, 집과 이 담들도 조금씩 바뀌었지. 어떨 때는 길이 좁아지기도 하고, 담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지. 한데 이 마을의 기본적인 지형은 그대로였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주가신이 이곳에 많이 와봤다는 것을.

어쩌면 이 마음속 세상 곳곳을 가장 많이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은 사람이 주가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님도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던 겁니까?"

주가신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누군들 아니겠나?"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마을을 향했다.

"처음부터 있었다면 이곳은 천살성이 잊을 수 없는 장소겠군요.”

검무극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향일까?"

그러자 혁도천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암흑궁주가 그를 데려오면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몰살한 것이겠군. 천살의 살기를 더욱 북돋우기 위해서."

무황신검이 인상을 굳혔다. 그는 괴로웠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들도 이 무고한 마을을 몰살과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괴로움을 해소해 줄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이곳이 그의 고향집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검무극의 뜻밖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제가 경험한 암흑궁주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이용한 자였습니다. 만약 천살성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그들을 죽이지 않고 이용했을 겁니다.”

무작정 이렇게 몰살시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 무황신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고향집이 아니라면 여긴 그럼 어디인가?"

이렇게 오랫동안 그의 마음에 자리 잡은 곳이라면?

"그가 첫 살인을 저지른 곳이라 생각합니다."

한 번도 바람이 된 적이 없었잖아?

검무극과 네 고수가 마을로 들어섰다.

“이곳에 파훼법이 있다고 생각하나?”

무황신검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주 맹주님이 말씀해 주신 곳이니까요. 제게 또 선물을 주셨을 겁니다.”

그건 좀 부담스러웠는지 주가신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내 말을 믿지 말게나. 난 그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말해줬을 뿐이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저 말고 옆에 계신 분께 말씀하십시오. 못 찾더라도 저는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주가신이 옆에 나란히 선 혁도천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입을 놀렸으면 책임을 져야지.”

주가신은 말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마을을 둘러보았다. 무황신검은 마을 곳곳에 널린 시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많이도 죽였군.”

그야말로 한 마을이 몰살했다.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무황신검은 처음에 한두 번 오고는 이곳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어서였다.

“지금까지 이곳에 대해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네. 그냥 천살성의 마음이니까 시체들이 널린 곳도 있겠구나, 그렇게 당연히 여겼었다네. 이 시체 썩는 냄새가 싫기도 했었고.”

한데 검무극은 이곳이 천살성이 첫 살인을 한 곳이라고 예측했다.

“자넨 오자마자 알아내는군.”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냥 추측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검무극이 알아차린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의 가장자리에 있는 한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찾아야 할 집이 이 집인 것 같습니다.”

마치 알고 온 것처럼 말했기에 무황신검을 비롯한 네 고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들이 볼 때는 다른 집이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집이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나?”

무황신검의 물음에 검무극이 마당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길 보십시오.”

검무극이 가리킨 곳은 처마 아래의 제비집이었다.

“그리고 저기도 보십시오.”

마당에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다른 집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벽에 가지런히 세워진 농기구들도 있었다. 마당 구석에 꽃도 피어 있었고.

“만약 이 마을이 그의 기억력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라면, 여긴 유독 다른 집들에 비해 더 오밀조밀한 것들이 많습니다.”

무황신검은 검무극이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더 상세히 기억하는 집이군.”

“아마 자주 왔던 곳일 겁니다.”

무황신검은 유심히 본다고 보면서 왔지만, 그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에 자주 왔던 주가신조차 그런 차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새삼 그들은 검무극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검무극이 마당을 지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검무극의 말처럼 찾아야 할 집은 이 집이 맞았다.

방문을 열었을 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바로 화무기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한 세월이 얼마인데? 참, 의리 없는 인간들이군.”

자신들의 말을 다 듣는 그였으니, 이 등장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함께한 세월이 그리 긴데도 상대가 이런 선택을 했다면, 그땐 남을 비꼴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겠나?”

검무극의 태도에서 화무기는 알 수 있었다.

“넌 내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구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이야기할 마지막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테니까.”

“마지막이라고? 넌 빠져나가지 못할 테고 우린 평생 함께하게 될 텐데?”

“만약 내가 네 속에 갇힌다면…….”

검무극은 선언하듯 말했다.

“난 네가 죽는 그날까지 너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다.”

화무기는 의아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 말 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믿기지 않느냐고? 아니었다. 화무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소교주는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임을.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네가 날 이곳에 가둬서가 아니다. 무인끼리 싸워서 사술을 파훼하지 못하고 갇혔으면 그 결과를 감수해야지.”

“그런데 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냐?”

“만약 내가 네 안에 갇혀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을 상황일 거라서 그렇다.”

검무극은 아버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못 나가면 아버지는 너를 죽일 거다. 천살성 속에서라도 살아 있어라, 그럴 아버지가 아니시지. 이미 네게 한 시진 후에 죽인다고 말하지 않았나?”

화무기는 말없이 검무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데도 너와 내가 평생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라는 것은, 네가 아버지와 다른 분들을 모두 죽였다는 의미겠지. 그래서다. 내가 말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넌 아버지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죽인 원수니까.”

화무기가 한쪽 손을 허공에 들어 가볍게 움직였다.

“그럼 우린 다 죽겠군.”

화무기의 손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허공에 사람의 눈 모양이 커다랗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곳으로 화무기가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보였다.

저 앞으로 아버지가 권마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검무극은 안다. 저 무뚝뚝한 얼굴 아래 얼마나 큰 걱정이 숨어 있을지.

‘걱정을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아들 좀 살려주십시오!”

물론 소리쳐도 밖으로 들리지 않았다.

한데 그 순간 검우진이 이쪽을 슥 쳐다보았다.

우연이었겠지만 정말 아들의 목소리를 들어서 돌아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화무기를 쳐다보던 검우진이 다시 권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화무기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이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검왕이었다.

그 옆으로 풍천교주가 다가왔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도 알지 않나? 소교주는 지옥에 던져놔도 염왕의 분통을 터뜨리고 빠져나올 거네.”

“걱정 안 합니다.”

“안 한다고?”

“그냥 자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서 보고 있었습니다. 잘 때는 아기처럼 자는군요.”

“소교주가 말을 안 해서 편안한 건 아니고?”

풍천교주의 농담에 검왕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제일 걱정하는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풍천교주가 이쪽으로 다가와서 화무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커다랗게 보였다.

“소교주, 들리나? 이보게. 나이 든 사람들 자꾸 놀라게 하면 심장에 안 좋아. 거기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만 놀라게 하고. 우리도 그만 놀라게 하고. 어서 나오게. 고월이랑 여행 가자면서!”

풍천교주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네, 곧 나갈 겁니다.”

진패천과 백자강은 다른 방향에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맹주님들도 보여줘!”

하지만 화무기의 손짓에 허공에 떠 있던 눈이 사라졌다.

“보다시피 나는 제압당한 상태다. 그런데 내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죽이지? 지금 내공 한 줌 없이 혈도까지 제압당한 상태인데.”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게 네가 바라던 상황이었잖아?”

순간 화무기가 표정이 흠칫했다.

“내공은 충분하잖아?”

왜 모든 내공을 소진하면서까지 이 수법을 썼는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여기 갇히고 한 시진이 지나면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 내공과 선천진기, 그리고 무공까지 네게 흡수된다지?”

여기까진 풍천교주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까지도 알고 있을까?

검무극이 천의궁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때 마혈을 제압당한 것은 어떻게 됩니까?”

암천속혼술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천의궁주였다.

“자네의 모든 내공과 선천진기가 천살성의 것이 되는 순간 모든 혈맥이 열리면서 마혈을 제압한 것도 소용없게 되네.”

검무극의 시선이 화무기를 향했다.

“넌 그 내공으로 기습적으로 천마멸세를 쓸 작정이지?”

과연 화무기는 그 한 수를 노리고 있었다.

마교주를 자극해서 한 방 얻어맞은 것도 그런 숨은 계획이 있어서였다. 상대를 최대한 방심하게 하려고.

만약 성공한다면 한 순식간에 모두를 죽일 수 있으리라. 특히 자신은 내공을 제압당하고 있었기에 상대는 방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화무기는 완벽한 한 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무기가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난 지금 네 마음속에 있잖아.”

검무극의 농담에도 화무기는 웃지 않았다. 정말 놀랍다는 생각뿐이었다.

“소교주, 정말 너를 인정한다.”

화무기는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때 혁도천이 불쑥 말했다.

“칭찬에 빠져서 해야 할 일조차 잊고 있군.”

지금 한가롭게 천살성과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은 초조했다. 무황신검은 아까부터 방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 방에 파훼법이 있다면 어서 찾아야 한다.’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는데, 검무극은 속 편하게 저리 대화만 나누고 있으니 자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이럴 때 신검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고 싶은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파훼법으로 보이는 부분은 없었다.

“저 사람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네.”

화무기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주가신의 말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제가 저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정말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집의 누굴 죽인 건가?”

순간 혁도천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딴 질문을 할 땐가?”

앞서 대화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계획을 파악한 것이었으니까.

한데 누굴 죽였냐니?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서?

시간을 끌수록 유리했기에, 화무기 입장에서야 두 손 들어 환영할 질문이었다.

“이 집에 누가 살았는지 난 모르지. 마을 사람을 다 죽였으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아니, 넌 딱 한 사람을 죽였어. 이 집에 사는 사람만.”

순간 화무기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무황신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손에 이 마을이 몰살한 게 아니라고?”

“네, 이 마을에서 딱 한 사람만 죽였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한 마을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혹한 자라면 이 마을을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겠습니까?”

무황신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런 잔혹한 자가 무슨 양심의 가책이 있다고 이 마을을 그렇게 오랜 세월 가슴에 품고 있었겠는가?

“그럼 오다 본 시체들은 뭔가?”

“죄책감이 만들어낸 환상일 겁니다. 나는 그 사람을 죽인 사람이 아니라 모두를 죽이고 다니는 살성이다. 이런 마음을 먹었어야 버틸 수 있었을 테니까요.”

화무기는 반박하지 않은 채 검무극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첫 살인,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일이 벌어졌었지?”

화무기의 얼굴이 꿈틀하던 그때,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날을 이야기해 줘.”

화무기보다 혁도천이 먼저 반응했다.

“이 귀중한 시간에 그딴 이야기를 듣겠다고?”

혁도천이 검무극의 멱살을 잡았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파훼법을 찾아라! 그 말 많은 입 말고, 그 똑똑한 머리를 쓰란 말이다!”

무황신검은 혁도천을 말리지 않았다. 그도 검무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자포자기한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검무극은 멱살이 잡혔음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혁도천은 결국 멱살을 풀며 신경질적으로 뒤로 밀었다. 내공이 없는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대였다. 아니었으면 반쯤 패서라도 파훼법을 찾게 했을 것이다.

“우린 결국 평생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겠군.”

그 와중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을 보며 화무기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대화하고 싶다고 했던 검무극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내 말을 듣고 싶은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검무극은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천살성, 세상을 놀라게 할 강력한 빛인데 한 번도 네 의지대로 비춘 적이 없었잖아? 바람개비처럼 돌기만 했지 한 번도 바람이 된 적이 없었잖아?”

이렇게 오랫동안 잊지 못할 상처가 될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에는.

“이후에 암흑궁주에게 끌려가서 이분들의 영혼을 네 몸에 심었겠지. 무공을 익히는 것도, 이후에 봉인되는 것도 네 의지가 아니었을 테고. 봉인을 풀고 나와서 이곳에 올 때는 어땠나? 그건 네 의지였나? 아마 암흑궁주가 말했겠지. 마교부터 없애고 무림을 일통하시라고.”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반면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의지가 있었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무림일통을 위해서, 천의를 위해서, 사도천하를 위해서. 그 각자의 의지 때문에 오늘의 이 결과를 만들었다. 그런데 너는?”

검무극이 다시 화무기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의지를 담은 말이 고작 죽여버리겠다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세월 동안 암흑궁주도, 여기 있는 네 고수도 네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들어주마.”

네 덕분에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까. 네 덕분에 나는 행복해졌으니까.

그러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 깊은 한을 내게 풀고 가라.

화무기는 한참 동안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미친 새끼가 날 뭐로 보고!”

그 말을 시작으로 화무기가 욕을 내뱉었다.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검무극은 그가 하는 욕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화무기는 그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을 퍼붓고는.

“네 사람들이 다 죽었을 때도 그 말을 하는지 보자.”

화무기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검무극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화무기가 사라지고 검무극이 돌아섰다.

“그래도 욕이라도 시원하게 하고 갔네요.”

네 사람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으로 남은 욕을 마저 하는 혁도천과 이젠 포기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무황신검,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주가신과, 비웃고 있는 천의궁주까지.

“그대의 거창한 천의는 적과의 대화였군.”

천의궁주의 조롱이었지만 검무극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런가 봅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혁도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그 잘난 대화로 파훼법을 찾아냈어야지! 어차피 이제 다 틀렸다. 헛소리만 떠들어 대다가 시간을 다 흘려보냈으니까.”

남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파훼법을 찾으려는 의지가 없었다.

주가신은 검무극의 선택을 이렇게 생각했다.

“자넨 애초에 파훼법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군.”

무황신검은 자신은 알지 못하는 검무극만의 어떤 특별한 마음을 느꼈기에.

“이 선택이 자네에게 가치 있었기를 바라네.”

그렇게 모두가 포기하던 그때, 검무극은 내력을 발출해서 주위에 막을 쳤다. 자신들이 나누는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만들었다.

그 상태에서 검무극이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전 이미 파훼법을 찾았습니다.”

그가 왜 이렇게 한가롭게 굴었는지를 단번에 설명하는 말이었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더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저와 여러분이 파훼법입니다.”

나만 지키고 있네

“파훼법이 우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무황신검의 물음에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파훼법은 저와 네 분이십니다.”

여전히 그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무기가 암천속혼술을 발휘했을 때 단전의 그 신비한 기운이 반응했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고.

아까 방에서 화무기를 만났을 때, 네 선택이 옳았다는 듯 자신의 몸이 신녀궁주에게 배운 구결로 스스로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나로 합쳐져서 내공에 서려 있던 육도원기의 기운이 온몸의 혈맥을 돌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신비로운 힘을 담은 기운이 외부로 발출되었다.

싸아아아아아아아.

기운이 세상으로 나오자 그 신비로움은 극에 달했다. 마치 선택받은 이들에게 내려지는 빛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놀랍게도 그곳에 있던 누구도 그 기운을 보거나 느끼지 못했다. 이 공간의 주인인 화무기조차도 그런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검무극만이 그 기운을 보고 느꼈다.

검무극에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함께 온 네 사람에게 뻗어나갔다. 그들은 육도원기의 기운이 자신들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 이 심법이 바로 파훼법이구나.’

육도원기의 기운이 암천속혼술을 완전히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신성한 기운이 그들을 이곳에서 해방해 줄 것임을.

왜 육도원기의 기운으로 화무기를 제어할 수 있다고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들이 이곳에서 해방될 때, 화무기에게 가 있던 그들의 선천진기와 내공, 그리고 무공까지 모두 회수할 것이다. 바로 자신의 힘이 된다는 의미.

―이 여섯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대는 능히 고금제일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왜 비궤가 그런 말을 했었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혁도천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파훼한단 말이냐?”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하던 찰나,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조금 전에 제가 익힌 심법이 스스로 운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 심법이 여러분들을 이곳에서 내보내 주는 심법이라 생각합니다.”

“그 심법이 어떤 심법이기에?”

“신녀궁주에게 배운 심법입니다.”

그 말에 천의궁주는 자신을 마지막까지 말렸던 신녀를 떠올렸다. 그 신녀의 후예가 알려준 심법이었다. 과연 그녀는 이 순간까지 보았을까?

“그 심법을 운기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혁도천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도 모릅니다. 영혼이 소멸해서 영원한 잠에 빠져드실지, 새로 누군가의 아기로 태어나실지, 과거로 돌아가실지, 극락으로 가실지, 지옥으로 가실지. 아니면 다른 이의 몸으로 들어가실지. 하늘이 여러분들의 운명을 정하겠지요.”

검무극은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나중에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시면, 저 찾아와서 살짝 신호를 주십시오. 술 한잔할 인연은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해서 정말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혁도천에게 뜻밖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천마혼도 불러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부탁에 혁도천이 놀랐다.

“진심인가?”

“네.”

혁도천과는 영혼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는지, 곧바로 그곳에 천마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도 그 세월을 함께했는데, 선택의 기회는 줘야겠지.”

설마 자기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는지 천마혼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너를 죽이려고 했는데?”

검무극이 그를 부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건 천마혼에 대한 예의다. 너희 천마혼은 이렇게 아무렇게나 버려져선 안 될 존재들이잖아?”

천마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검우진의 천마혼이 화무기의 천마혼을 용서할 때,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새삼 느꼈던 그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아들을 통해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검무극이 다른 영혼들에게 말한 것처럼 그에게도 말했다.

“네가 어떻게 될지 나는 모른다.”

검무극이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산이 거꾸로 떠 있고, 해와 달이 함께 떠 있는 하늘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믿는 건, 그 하늘이 지금 이 하늘처럼 이상한 하늘은 아닐 거라는 것. 네겐 마지막에 물어볼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라.”

검무극이 혁도천을 쳐다보았다.

“가장 시원시원한 성격이시니 교주님께 먼저 여쭙겠습니다. 제 파훼법을 믿으시겠습니까?”

혁도천이 여전히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지옥에 가지 않을 것 같다는 것, 확실하냐?”

앞서 검무극이 말했다. 삼백 년이나 갇혀 지낸 것이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으니 지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했다.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오히려 그게 혁도천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 네가 어찌 알겠냐?”

언제나 자기 뜻대로 살아온 그였다. 더는 이곳에 있기 싫었기에.

“나는 간다! 늦기 전에 어서 파훼법을 실행해라!”

“다른 분들께도 여쭤봐야죠.”

혁도천이 다른 이들에게 소리쳤다.

“어물쩍거리지 말고 빨리 결정해라! 나가기 싫으면 꺼져!”

무황신검은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혁도천의 재촉 때문이 아니라, 이미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다.

“그래, 가세. 이제 끝을 볼 때가 되었지.”

극락에 갈 욕심은 없었다. 지옥을 가게 되든, 그냥 이대로 영원한 잠이 들든. 이제 이 삶을 끝낼 때가 되었다.

“고마웠네.”

무황신검이 정중히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검무극 덕분에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온 고뇌와 번민이 사라졌으니.

“자네가 보내주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기꺼이 가겠네.”

검무극도 정중히 포권해서 인사를 받았다.

“꼭 다시 뵙고, 제대로 식사대접 해드리고 싶습니다.”

다음 차례는 주가신이었다. 그는 혁도천과 무황신검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을 신기해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저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된 건 처음이군.”

주가신이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마음을 두 사람에게 전했다.

“당신들은 나를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자라고 여겼지. 난 그저 당신들이 싫고 짜증 났을 뿐이다. 말도 섞기 싫을 정도로.”

무황신검은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놀라웠다.

“진작 그 짜증이라도 내시지 그랬소?”

혁도천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 음흉한 자지. 이런 말을 이 순간에 하니.”

주가신은 마지막으로 무황신검의 말을 받아들였다.

“짜증 나는 인간들!”

주가신은 끝으로 검무극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사도맹주에게 전해주게. 꼭 원하는 바를 이루라고. 그렇게 말하면 알 거네.”

검무극은 그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바람이 저희와 무림을 위협하겠지만, 그래도 꼭 전하겠습니다.”

주가신이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적랑이었다.

만약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면, 적랑과 같은 늑대로 태어나기를.

검무극이 이번에는 천의궁주를 바라보았다. 앞서 자신을 비웃고 조롱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 가시는데 궁주님도 가셔야지요.”

자신을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에서 천의궁주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가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애초부터 그릇이 다른 사람이구나.’

이 자는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런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작은 새가 하늘을 나는 대붕(大鵬)을 보며 왜 저렇게 힘들게 높이 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삼백 년 후의 그 천의가 자네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마지막까지 천의에 사로잡혀 있는 그였다.

“사실 전 천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 뜻 하나 마음대로 지키기 어려운데, 하늘의 뜻까지 어떻게 신경 쓰고 삽니까?”

검무극은 솔직한 마음을 천의궁주에게 전했다.

“물론 가끔 저도 운명에 기댈 때가 있습니다. 그냥 이게 다 운명이겠거니, 생각하고 싶을 때 말입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항상 제가 힘들 때였습니다. 그렇게라도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고달플 때였죠.”

천의궁주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지금 그 천의가 혹시 현실도피가 아니었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검무극의 두 눈은 너무나 맑고 깊었다.

“궁주님은 천의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과연 그들도 그랬을까요?”

“누굴 말하는 건가?”

“궁주님을 지키려 했던 수호궁주와 그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이들 말입니다. 과연 그들이 천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저 궁주님의 뜻을 믿고 따랐을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예언 같은 게 아니라, 평생 자신들을 돌봐준 궁주님의 판단을 믿었을 겁니다.”

검무극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천의를 말씀하시기 전, 궁주님이 어떤 마음이셨는지 기억나십니까?”

천의궁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에서 나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검무극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이제 예언 같은 건 없으니 물어보지 마십시오. 이제 궁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검무극이 천마혼을 바라보았다.

“함께 가겠나?”

놀랍게도 천마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위대한 본성이 기억났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삼백 년 동안 명예롭게 살지 못했지만, 마지막만큼은.

“내 정신은 너무 오염되어서 다시 태어나선 안 될 몸이 되었다.”

마지막만큼은 잡스러운 천마혼이 아니라 당당한 천마혼이 될 것이다.

천마혼이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혁도천이었다. 그에게 말을 남기진 않았다.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지금은 그가 사라진 것에 대한 감회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검무극이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옆 사람 손을 잡으십시오.”

혁도천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또 잡으라고?”

* * *

화무기는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주마.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건방진 놈, 나를 동정하다니!’

하지만 화무기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을 할 때 검무극은 진심이었음을.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 했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서 어떻게든 잊으려고 애썼던 일이었다.

하지만 잊히지 않았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한 각인으로 남았다.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화무기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권마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각 남았습니다.”

그곳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벌써 한 시진이란 시간이 지나고 이제 단 일각만이 남은 것이다.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보다 교주를 잘 아는 권마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때 풍천교주가 검우진에게로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물었다.

“진짜 저자를 죽이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검우진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대답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찌 죽이겠소? 하는 눈빛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꽉 다문 검우진의 입술에서는 어떤 의지가 느껴졌다.

풍천교주가 이 일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혹시라도 저 몸에 갇히더라도 어떻게든 빼낼 방법이 있을 거요. 아드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속에도 수다 떨 사람이 많아서 늦었습니다, 하면서 깨어날 겁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정말 죽이려고 마음먹었음을.

“당신 미쳤어?”

풍천교주가 처음으로 검우진에게 무례한 언사를 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검우진도, 옆에 있던 권마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냉정한 것도 좋고,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풍천교주가 검우진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소리쳤다.

“꿈도 꾸지 마시오.”

풍천교주가 성큼성큼 걸어가 화무기 앞을 막아서며 자신의 기세를 드러냈다.

“이자를 죽일 거면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요.”

모두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풍천교주는 그들 중 이제 제법 친해진 검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네, 나 도와줄 거지?”

검왕은 곧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검우진이 아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어디 그냥 결정을 내렸겠는가?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계획이나 생각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검우진이 진짜 화무기를 죽이려 들면 그땐 두고 보지 않고 나섰을 것이다.

“친구라면서! 검도 받고 신발도 받았으면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주점 이름 안 지어줄 거네!”

지금은 나서지 않았다. 풍천교주를 위해서.

무림맹주 진패천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는 검우진이 화무기를 죽이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때 묵묵히 있던 사도맹주 백자강이 나섰다.

“저자를 지켜선 안 될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천살성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그는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저자는 우리 모두를 죽일 계획을 세웠소. 누구보다 당신이 제일 잘 알잖소?”

암흑마공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은 풍천교주였으니까.

풍천교주가 뒤에 있는 화무기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음모가 있겠지. 거창하고 대단한 음모가 있겠지. 아니면 이자가 이런 꼴로 있겠소? 자신을 지켜주는 나부터 쳐 죽이려 들겠지.”

“그런데 왜 그러시오?”

풍천교주가 모두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소교주를 죽일 수는 없으니까.”

다들 말없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라면 이 모습이 당연하겠지만, 풍천교주는 조금은 의외였다.

모두 새삼 알 수 있었다. 그가 검무극이 없는 곳에서 욕하고 투덜거렸던 딱 그만큼, 없는 곳에서 그를 지켜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 뒤에서 들려온 화무기의 목소리.

“대체 소교주가 당신에게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풍천교주가 화무기를 돌아보았다.

“소교주의 그 비위나 맞추려는 솔깃한 말에 당신도 넘어간 건가?”

풍천교주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는 넌 남을 위해 그 솔깃한 말 한마디라도 한 적 있냐?”

화무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관계였다. 아니, 이해가 되기 시작해서 짜증이 났다.

‘이 망할 소교주놈!’

화무기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이들의 대화를 듣느라 검무극을 신경 쓰지 못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본 화무기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둥글게 서서 손을 잡고 있었다.

어떤 불길함이 엄습하며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안 돼.”

나직한 말이었지만 바로 앞에 있던 풍천교주는 들었다.

“돼!”

풍천교주가 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소교주지? 소교주가 드디어 움직이는 거지? 소교주 어서 나와서 보게!”

풍천교주가 화무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더욱 크게 소리쳤다.

“나만 자넬 지키고 있네!”

너는 왜 나를 원망하지 않냐?

무황신검이 혁도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하고도 손 한 번 잡아봅시다.”

앞서 비행할 때 천의궁주와 손을 잡아봤으니, 마지막으로 혁도천과도 손을 잡아보려는 것이다.

“당신하고 참 많이 싸웠는데.”

혁도천은 마음이 급했기에 사양하지 않고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 그는 어서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론 손을 잡으면서 한마디 말은 잊지 않았다.

“당신이 좀 답답하게 굴었어야지.”

예전이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무황신검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두 사람도 어서 잡아. 늦어서 못 나가면 내 손에 다 죽을 거다!”

혁도천의 재촉에 천의궁주와 주가신도 손을 잡았다. 다들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재빨리 행동했다.

네 사람이 둥글게 원을 만들며 손을 잡자 검무극이 구결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구결에 따라 진기가 움직이자 육도원기의 기운이 검무극의 손을 타고 그들에게 전해졌다.

혁도천은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기운에 눈을 부릅떴다. 평생 이런 기운은 처음이었다.

옆에 있던 무황신검이나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기운이 인간 세상의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검무극에게서 흘러나간 진기가 그들의 몸을 통과하자, 구결로 하나가 된 그들에게서 신비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곳으로 화무기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이런 수작을!”

풍천교주에게 잠시 신경이 팔렸던 사이 자신의 내부에서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화무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절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한 시진이 다된 상황에서 저러는 건 분명 암천속혼술을 파훼하려는 수작이 틀림없었다.

화무기가 그들에게 달려가서 잡은 손을 떼어놓으려 했다.

그들의 모습으로 볼 때 어떤 심법을 펼치는 게 틀림없었기에 저 손을 떨어뜨려서 진기가 끊어지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본신의 몸이 내공을 제압당한 상태였기에, 그의 영혼 역시 내공을 사용할 수 없었다.

설령 무공을 사용하더라도 이 빛을 뚫을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멈춰!"

화무기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에게 파고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화무기에게 남은 희망은 시간이었다.

거의 한 시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향 하나가 미처 다 탈 시간도 남지 않은 상황.

'운기가 끝나기 전에 한 시진이 되어야 한다!'

네 사람은 몸속에서 변화가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손을 잡고 있던 감각이 희미해졌고, 몸속에 들어온 신비한 기운의 존재도 잊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자신들이 겪었던 온갖 감정들이 각자의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로 합쳐져서 움직이던 육도원기의 기운이 분열되더니 각기 다른 빛이 되어 흩어졌다.

백정의 새하얀 기운이 무황신검의 몸을 휘감았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고맙네, 소교주.”

무황신검은 환하게 웃으며 하얀빛과 함께 사라졌다.

혁도천을 휘감은 것은 검은 흑정의 기운이었다. 그는 캄캄한 밤거리를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넌 너무 무르다! 마교는 거칠고 강해야 해!”

어딘지 모르게 그를 휘감은 어둠이 마지막 만들어낸 모습에서 천마혼의 모습이 스치듯 연상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라도 끝까지 함께하기를

주가신을 휘감은 기운은 적정의 기운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기운은 붉은 늑대의 모양이 되더니 그와 함께 사라졌다.

“그래도 넌 마교 놈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그것이 검무극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마지막 천의궁주를 휘감은 빛은 황금빛이었다. 돌아서는 그 모습은 마치 쓸쓸히 석양 속으로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끝내 버리지 못한 마지막 미련.

“그래도 천의는 있다네. 자네에게 주어진 천의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네.”

그렇게 천의궁주까지 사라졌다.

과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검무극도 알 수 없었다.

“부디 원하시는 곳으로 가셨기를!"

검무극이 그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삼백 년을 넘어 이어진 인연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정확히 한 시진이 되었다.

쏴아아아아아악.

순간 화무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검무극의 선천진기와 내공, 그리고 무공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암천속혼술이 파훼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무기는 크게 기뻐했다.

“그래, 저들은 필요 없다. 그 자리를 네가 대신해라!”

화무기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몸으로 들어온 내공의 성질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순한 내공이 있다니?'

정파의 절대고수였던 무황신검의 내공도 이렇게 정순하진 않았다.

검무극의 선천진기와 내공, 그리고 무공까지 모두 화무기의 몸에 흡수되었다.

바로 그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쏴아아아아아아.

앞서 얻었던 혁도천과 무황신검, 천의궁주와 주가신의 내공도 함께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깥 현실에서는 이미 다 소진된 내공이었는데.

아마 그들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영영 떠나면서 그 모든 힘이 다시 다 채워지는 모양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그 선천진기와 내공이 검무극의 것과 합쳐지자 실로 엄청난 힘을 느꼈다. 이 힘이면 혼자서 무림 전체와 싸울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나는 고금제일이다!"

이 힘이라면 원래 계획했던 천마멸세를 쓰지 않더라도, 나가서 다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무기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파훼법이 있었다면 저들을 구하려 하지 말고 혼자 나갔어야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어쭙잖은 마음이 너를 평생 이곳에 갇히게 했다.”

검무극이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사람에게 큰 약점이 된다는 것 안다.”

모든 걸 포기한 것일까? 검무극은 담담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을. 남들 시선 엄청 의식하고, 남들이 멋있다 멋있다 해주는 걸 바라는 사람인데.”

검무극의 담담함은 자포자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선천진기와 내공이 거짓말처럼 다 빨려 나갔지만, 아직 그의 몸에는 청정의 기운과 자정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우웅.

과연 검무극의 몸에서 청정의 기운이 스스로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무극의 몸에서 푸른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냥 빛이 아니었다.

빛은 화무기의 몸에 있던 모든 선천진기와 내공, 그리고 그가 익혔던 모든 무공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안 돼!"

화무기는 이를 악물고 저항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빛에 노출되는 순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암천속혼술은 이미 파훼된 상태였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앞서 검무극의 내공을 순순히 내어준 것은 이 모든 힘을 한곳에 모아서 한꺼번에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소교주! 이 개자식아! 멈춰! 멈추라고!"

마음속 세상에서 나가려 했지만 그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는 육도원기의 힘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과거의 영혼을 몸에 받아들이는 순간 예정된 일이었다.

화무기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살심을 끌어올렸다.

“죽여버린다!"

화무기의 두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며 가장 강력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금껏 여러 번 놀라운 살기를 보였지만, 지금의 이 살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검무극의 모든 선천진기와 내공, 무공이 되돌아왔고, 다른 네 고수들의 선천진기와 내공이 흡수되었다.

그 힘이 자신의 내공과 합쳐지자 화무기가 왜 고금제일을 외쳤는지 알 수 있었다.

화무기는 발악하듯 버텼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들이 있던 집이 사라졌고, 마을도 사라졌다. 허공에 거꾸로 떠 있던 산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늪이 뒤집히며 온갖 독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늘에 동시에 떠 있던 해와 달이 사라지면서 하늘이 어두워졌다.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바로 그 순간!

그 가운데 하나의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천살성.

천살의 빛이 화무기에게 쏟아졌다.

이제 화무기의 눈에서는 인간의 것이 아닌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운명이 안배한 마지막 힘이 이 순간 화무기에게 주어졌다.

‘제발! 딱 한 번! 그것을 사용할 내공만 남겨주기를!'

그 의지가 천살성에 닿던 바로 그 순간, 천살성의 빛이 검무극의 푸른빛을 끊어냈다.

그 순간, 화무기가 사라졌다.

“두 사람 모두 아직 눈을 뜨지 않고 있습니다.”

한 시진이 지났음에도 화무기도 검무극도 눈을 감은 채 그냥 있었다.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화무기의 마음속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소교주, 어서 나오게.”

풍천교주는 검왕과 함께 검우진 옆에 있었다. 화무기 바로 앞에 서 있는 건 위험하다고, 검왕이 억지로 데려온 것이다.

풍천교주는 검우진 옆에 서서 그가 나서면 당장에 나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 시진이 되는 순간 바로 그를 죽일 것 같았던 검우진이었는데.

검우진은 결국 화무기를 죽이지 않았다.

권마는 알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교주님이 처음으로 뱉은 말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진패천과 백자강, 그리고 독왕 역시 검우진 근처에 와 있었다.

진패천은 검무극을 믿고 기다리자는 쪽이었고, 백자강은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이 위험하다는 쪽이었다.

독왕은 말없이 누워있는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긴장이 흐르던 그때.

화무기가 먼저 눈을 떴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먼저 죽이지 않으면 자신은 죽을 테니까. 검무극이 깨어나기 전에 다 쓸어버려야 한다.

화무기가 손을 들어서 앞으로 내미는 순간.

천마멸세였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태양이 폭발하듯, 이 거대한 폭발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무기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검우진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화무기가 깨어나 천마멸세를 발출하는 순간 그는 대마벽을 세운 후 자신도 천마멸세를 발휘했다.

모두가 가장 두려워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대마벽으로 막은 후, 천마멸세.

양쪽이 공멸하는 바로 그 상황이.

두 사람의 천마멸세는 달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멸하는 화무기의 천마멸세와는 달리, 검우진의 천마멸세는 한 자루의 새하얀 검이 되어 날아갔다.

화무기 뒤쪽 저 멀리 마화가 피어오르는 본단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까지 날려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앞서 십이성 대성을 이루면 이렇게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을 검무극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던 그 천마멸세였다.

소리 없이 날아가는 빛의 검.

화무기의 천마멸세가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있었지만, 검우진의 천마멸세가 만들어낸 검은 계속 날아갔다. 천마멸세에도 소멸하지 않고 날아간 검이.

푸아아아악!

화무기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이제 문제는 이쪽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대마벽이 녹고 있었다. 십이성 대성의 대마벽이었지만, 애초에 대마벽으로 천마멸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검우진과 권마가 가장 앞에 서 있었다.

풍천교주는 시공이환술이라도 발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시공이환술로도 천마멸세만큼은 막을 수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 공간의 어떤 마공이나 사술도 다 소멸시켜 버릴 테니까.

대마벽이 거의 다 녹았을 때, 풍천교주가 참지 못하고 본심을 드러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저 화무기는 죽이지 말았어야 했소.”

저기 누워있는 검무극의 몸도 소멸한다는 사실도 생각지 않고서, 그는 끝까지 이공자, 끝까지 소교주를 지켰다.

“소교주는 어떻게든 살아서 저 몸을 빠져나왔을 거고, 우리보다 더 나은 무림을 만들었을 거요."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욕을 안 하시는데 등장하니까 어색한데요?"

풍천교주가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검무극이 서 있었다.

"인사는 잠시 후에 드리죠!”

검무극이 곧바로 아버지의 대마벽 뒤에 새로운 대마벽을 세웠다.

쏴아아아아아악.

아버지의 대마벽이 녹고 이제 검무극의 대마벽이 천마멸세를 버텼다.

뒤에 선 이들은 두 번째 대마벽이 천마멸세를 막아내는 놀라운 광경을 쳐다보았다. 이전까지의 무림사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없을 장면이었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검우진은 그저 말없이 아들이 펼쳐낸 대마벽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들과 눈이 마주치면 자신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들킬 것이기에 그는 앞만 바라보았다.

권마는 확신했다. 검우진이 천살성에게 천마멸세를 날린 것은 검무극이 깨어났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 아들이 깨어난 걸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리라.

스스스스슥.

대마벽을 뚫으려던 새하얀 강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검무극의 대마벽은 천마멸세를 버텼다.

이미 한 차례 아버지의 대마벽이 막은 데다가 화무기의 몸에 깃든 선천진기와 내공까지 모두 흡수했기에 천마멸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던 빛이 사라지자 화무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슴이 뻥 뚫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여주셨네요.”

검우진은 천살성을 우리가 죽이자는 말을 지켜낸 셈이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화무기에게 걸어갔다. 그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검무극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악인이 죽으면 그 죽음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쳐다보지도 않았었는데, 화무기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할 말 있으면 지금이라도 해라.”

화무기가 입에서 피를 왈칵왈칵 흘리며 말했다.

“......미친놈.”

걸어오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야지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욕은 이미 실컷 했다.

“......원망스럽다.”

반면 검무극은 깊은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화무기는 느꼈다. 그 눈빛에 어떤 악감정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을.

너를 죽이려 했고, 네 아버지와 네가 아끼는 사람을 모두 죽이려 했는데.

"......너는 왜 나를 원망하지 않냐?"

회귀 전 인생에서 실컷 원망했으니까.

“원망은 항상 양날을 가졌다더라. 그래서다. 내가 덜 다치려고. 그러니 너도 너무 원망하지 마라."

“너는 마지막까지.............”

화무기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숨이 끊어지려던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쏴아아아아아악.

검무극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자정의 기운이 흘러나가 화무기의 몸을 휘감았다.

검무극은 이 육도원기의 기운이, 아니 저 하늘이 그 역시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우진을 비롯해서 지켜보던 이들도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검무극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든 싸움을 해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끊어지던 화무기가 다시 눈을 떴다.

잠시 마지막 작별을 나눌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검무극이 처음 이 길을 걸을 때는 왜 무공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죽였냐며 통쾌하게 산산조각 내는 마지막을 생각했었는데, 그와의 이별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섰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그녀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라.”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모습에서 그가 죽인 사람이 좋아했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방에 젊은 여인이 쓰던 물건이 있는 걸 봤다."

그 와중에도 그걸 봤구나 싶어서 화무기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검무극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음 생애는............ 반드시 다 죽일 거다.”

하지만 화무기의 눈에 그 지독한 살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검무극이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상관없다. 그때 그걸 막으려고 고생할 사람은 내가 아닐 테니까.”

자색의 빛이 찬연하게 흩어지면서 화무기도 함께 사라졌다. 밤하늘에서 수많은 파편을 남기며 별이 사라지는 것처럼.

화무기를 만난 이후 천살성이라고 불렀지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

검무극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잘 가라, 화무기.”

너도 살아남았구나

검무극은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생이 내린 가장 큰 과제를 끝낸 기분이 들었다. 홀가분했다.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회귀 전 대법 재료를 찾아 헤맸던 그 모든 시간과, 회귀 후 지금까지 해온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으니까.

이 순간이 가치 있는 것은 화무기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자신의 진짜 인생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서.

검무극은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이렇게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계셨기에 마음 놓고 활개를 칠 수 있었다. 마음 편히 하고 싶었던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아들을 응시하던 검우진이 차분히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검무극이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을 때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검우진이 말없이 아들을 안아준 것이다.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깜짝 놀라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이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안아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가장 놀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너무 놀라서 실없는 농담 한마디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흘러나온 검우진의 한마디.

“내공이 더 늘었구나.”

검무극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제 내공이 얼마나 늘었는지 정확히 알아보시려고 안아주신 겁니까?"

"그럼 내가 좋아서 안았겠느냐?"

볼일 끝났다는 듯 뒤로 물러서는 아버지의 모습에 검무극이 목청을 높였다.

“너무 하십니다!”

하지만 검무극은 느꼈다. 자신을 안을 때 아버지의 손길에 담긴 그 마음을.

걱정 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다음으로 권마에게 인사했다.

“사부님.”

권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고생했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반응이었지만, 사실 교주가 안아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안아줬을 것이다. 고생했다고. 오늘만큼은 그래 주고 싶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두 맹주를 향했다. 우선 백자강에게 먼저 주가신의 말을 전했다.

"주 맹주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맹주님께서 원하는 바를 꼭 이루시랍니다.”

“알겠네.”

검무극은 그게 어떤 꿈인지 정확히 알았지만 능청스럽게 딴소리를 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 아버지와 진 맹주님과 함께 놀러 다니며 여생을 즐기는 일이요.”

그러자 듣고 있던 진패천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나는 괜찮지만, 검 교주께서 원하실지 모르겠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뜻이 담긴 말이었다.

이번 싸움을 거치면서 검우진의 실력을 똑똑히 보았기에, 이 싸움의 끝이 새로운 싸움의 시작은 아닌지 걱정했다.

손자를 위해, 검무극을 위해 도와주러 온 것이지만. 그 좋은 마음과는 별개로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검무극은 진패천에게 아버지도 함께 가실 겁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만약 뜻을 꺾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막는 일은 화무기를 막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과연 아버지는 빈말이라도 그럽시다, 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순간 두 맹주에게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니, 준비들 하라고.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자 풍천교주가 나섰다.

“소교주, 자네가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알려주는 건데. 자네가 저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가 나서서 지켜줬는지 혹시 아는가? 자네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천살성을 죽이려 들던 그 비정한 사람들 속에서 영웅처럼 나선 한 사람 말이야.”

나다, 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검무극은 검왕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제 친구겠지요. 맨발로 달려 나왔을 겁니다.”

검왕은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번 자신의 싸움과 다른 이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크나큰 검술의 깨달음이 있었던 그였다. 거기에 검무극까지 무사하다? 더 바랄 게 없는 결과였다.

풍천교주가 손사래를 쳤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네 친구는 새로 차릴 주점 생각에 자네가 위험한 건 신경도 안 썼다네.”

검왕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지는 걸 보며 검무극이 이번에는 독왕을 쳐다보았다.

“독왕님이 저래 보여도 은근히 정이 많은 분이시죠.”

풍천교주가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춰 검무극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이번 싸움에서 제일 편했던 사람이 독왕이라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더 힘들지 않았을까요?"

속삭이듯 말했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에게 다 들렸다.

“다른 사람이 있다니까!"

“제게 그래 주실 분은 극악소마님이신데.”

“여기 없는 사람 찾지 말고!"

“혹시 두 분 맹주님들 중에.............”

끝까지 장난을 치자 풍천교주의 입이 삐져나왔다.

“결국 그때 그 교주 취급이군.”

그제야 검무극이 그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때 그 교주님이 지금의 저를 지켜주셨군요.”

그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에는 진심 어린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저를 위해 아낌없이 다 내주셨던 그때 그 교주님 말입니다.”

그래, 매번 신물 뺏긴 타령을 했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한 적 없는 검무극이었다. 그래, 그에게 준 것은 어떤 것도 아깝지 않다.

"고월이랑 셋이 여행 언제 갈 건가?"

“가야죠. 곧 갈 겁니다! 대신 당분간은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려있어서 일단 짐부터 싸놓고 기다리십시오!"

그때 검무극의 시선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앗. 저길 보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자신들 뒤쪽을 향했다.

거기에 있는 것을 향해 검무극의 반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도 살아남았구나.”

검무양은 마화를 받쳐 든 거대 악귀상의 손바닥 위에 올라서서 마가촌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버지와 함께 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마화가 피어오르면서 통천각의 정보망은 더욱 신속하게 오가고 있었다.

사도맹주와 무림맹주가 도와주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고, 마지막에는 검무극도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아무 소식이 없습니까?"

검무양의 말에 허공에서 휘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아직입니다.”

한데도 싸움이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걱정되었다. 그들이 모두 있음에도 천살성을 죽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검무양이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농담을 했다.

“무극이가 말을 많이 해서 싸움이 늦어지는 거겠지요.”

나직하게 휘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온 세상이 환하게 빛나는 것을 바라보며 검무양이 깜짝 놀랐다.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휘가 검무양 옆에서 소리쳤다.

“천마멸세가 펼쳐졌습니다.”

검무양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구화마공의 마지막 초식인 천마멸세까지 펼쳐야 하는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을 때 검무양이 휘에게 말했다.

“마화를 끄고 저와 같이 나가시죠.”

휘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안 됩니다.”

교주와 소교주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 남은 교주의 혈육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천마멸세가 펼쳐진 이상, 싸움은 끝났을 겁니다.”

만약 최악의 경우가 펼쳐졌다면.

“우리가 졌다면 이 기관과 진법이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두 사람이 곧장 몸을 날려 본교를 나섰다.

그들이 마가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사라진 무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놀라운 장면.

하나의 탁자.

그곳에 하나의 탁자가 있었다.

앞서 검무극이 바라보며 너도 살아남았구나 했던 대상이 바로 그 탁자였다.

화무기의 천마멸세로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마침 대마벽 뒤쪽 풍류주점에 있던 탁자와 의자가 온전히 남았던 것이다.

일부러 그것을 지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도 그렇게 되었다. 그것도 그들이 함께 밥을 먹었던 바로 그 탁자가.

검무극이 걸어가서 탁자를 어루만졌다.

어쩌면 하늘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앞으로도 네 마도를 지키며 살아가라고.

검무양과 휘가 도착했을 때, 그 탁자에 모두가 앉아 있었다.

검우진을 중심으로 양쪽에 진패천과 백자강이 있었다. 다시 그 옆으로 권마와 독왕이 있었고, 끝으로 검무극과 풍천교주, 검왕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그렇게 앉아 있으니, 그 모습은 그림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형! 여기야! 휘 아저씨! 어서 오십시오!”

검무극의 환한 모습을 보자 검무양은 긴장이 풀렸다. 이곳까지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검무양이 빠른 걸음으로 아버지에게 걸어갔다.

함께 걸어가던 휘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원래 자신의 임무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검무양이 와서 검우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천살성을 격퇴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을 두 맹주에게 돌렸다.

“두 분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이겼다.”

검무양이 두 맹주에게 감사를 전했다.

풍천교주와 마존들에게까지 인사를 마친 검무양을 검무극이 자기 옆자리로 잡아끌었다.

“보고 싶었어, 형."

정말 자신만큼 보고 싶었을까? 처음으로 하늘에 빌었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동생이 너스레를 떨며 자신을 반기기를

검무양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부터 다시 지어야겠네.”

“우리가 새 건물로 근사하게 지어줘야지. 더 크고 높게. 그냥 이번 기회에 다들 푹 쉬라고 해.”

검무양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피곤해 보인다.”

처음이었다. 형이 자신을 보고 피곤해 보인다고 말해준 것은.

검무극이 의자에 비스듬히 허리를 눕히며 다리를 쭉 뻗었다.

“내일은 온종일 잠만 잘 거야. 아니지. 이런 날은 아무리 피곤해도 좋아서 잠이 안 오는데.”

그때 그곳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도착했다.

바람처럼 달려와서 내려선 세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극악소마였다.

일차로 먼저 출발했던 그들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부상 때문에 마불과 섭혼마존, 취마는 마차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세 마존은 마가촌의 모습으로 이 싸움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싸움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어르신! 검존님! 소마님!”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 아이처럼 달려가서 반가워했다. 혈천도마는 자신에게 와락 안기려는 검무극을 보법으로 피하며 검우진에게 걸어갔다.

일화검존이 뒤따라 걸으며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소교주가 먼저 달려갔으니 괜찮을 거라고.”

일화검존이 일러바치듯 검무극에게 말했다.

"빨리 가야 한다고 얼마나 재촉했는지 상상도 못 할 거네.”

검무극이 혈천도마의 등에 소리쳤다.

“어서 어르신 댁에 가서 침상에 책 가득 쌓아두고 누워서 읽고 싶습니다!"

"그게 네 침상이냐!"

마지막으로 걸어온 극악소마가 가면 속에서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도 마주 웃었다. 언제나처럼 재회 인사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 마존이 검우진에게 인사하고, 또 맹주들에게도 인사했다.

두 맹주는 세 마존에게서 예전과는 다른 기도를 느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마존들까지, 그들은 만날 때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인사를 끝낸 후 일화검존이 검우진에게 말했다. 모두가 무사했기에 이런 농담도 할 수 있었다.

"중원 유람을 마저 하고 올 걸 그랬습니다.”

검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러 곳을 다녔다지?”

“태호도 다녀왔습니다. 혹시 기억나세요?"

기억한다는 듯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니 생각보다 많이 안 변했습니다.”

듣고 있던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네 분이 다시 한번 다녀오십시오.”

그러자 듣고 있던 진패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는 꼭 우리에게 기별주시오. 아니면 또 비상이 걸릴 테니까.”

진패천과 백자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우린 이만 가보겠소.”

정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려는 두 사람이었다.

검우진 역시 억지로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고,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검우진이 두 사람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번에 도움 주신 일, 잊지 않겠소.”

서로 인사를 마친 후 백자강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요리 가르쳐 주셔서 고마웠소."

“아껴둔 요리가 남았소.”

“배울 기회가 또 있기를 바라겠소.”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검우진이 먼저 돌아서 걸어갔다. 그 뒤를 형과 다섯 마존이 뒤따랐고, 풍천교주와 검왕이 따라 걸었다.

검무극이 편하게 두 맹주를 배웅하라고 두 사람도 함께 들어간 것이다.

날개를 펼친 듯 걸어가는 뒷모습이, 마존들이 다 모이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진패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번 싸움 내내 화무기보단 검우진과 천마신교를 더 걱정하고 있던 그였다.

검우진은 강했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앞서 검우진이 펼친 천마멸세를 떠올렸다.

빛을 뚫고 날아가던 빛의 검.

물론 천마멸세를 사용하면 거의 모든 내공을 소진하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 공격을 자신은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한마디로 검우진과 싸우면 죽는다는 의미.

거기에 천마혼까지 있었다.

'당대 무림에선 아무도 검 교주를 못 이긴다.'

어디 그뿐인가? 마존들도 강했다. 역대 그 어떤 마존들보다 당대의 마존들이 강했다.

진패천과 마찬가지로 백자강 역시 검우진이 무림일통의 꿈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자신이 이런 전력을 가졌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주가신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사도일통을 이루라고 했소? 너무 어려운 임무를 내리셨소.'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인사했다.

"하군이와 하령이 보러 조만간에 놀러 가겠습니다.”

진패천이 검무극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무림의 운명은 이 소교주에게 달려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부담을 주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겠네.”

백자강과도 인사를 나눴다.

“직접 해주시는 요리 얻어먹으러 가겠습니다.”

“맵고 자극적인 맛으로 해주지.”

아버지는 본단 쪽으로, 두 맹주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검무극은 가운데 서 있었다.

편하게 인사를 나눴지만, 맹주들이 긴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왜들 이러십니까? 벌써 이렇게 팽팽해지시면 안 됩니다!

아직 아버지를 설득하기로 약속한 시간 많이 남아 있다고요!

검무극이 모두에게 들리도록 내공을 실어 큰 소리로 말했다.

“저 이제부터 놀러 다닐 겁니다. 무림에 또 흑막이 출현하면 아버지나 저기 두 분 맹주님께 연락하십시오. 음모, 모략, 암수, 계략, 이제 제게는 없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제게는 휴식, 친구 만나 놀기, 여행, 요리, 술 모임, 춤, 독서 이런 것들만 있을 겁니다! 너무 놀기만 한다고 뭐라 하면 안 됩니다.

또 노냐? 그렇게 놀고 있으면 무림은 누가 지키냐? 그렇게 구박하시면 저, 집 나갑니다.”

어떤 인생을 살지 정해졌나?

검무극이 천마신교 본단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있던 그들이었다.

마화가 피었을 때만 해도 이곳에 나와 있지도 못했다. 정문에 설치된 모든 기관 장치가 발동 중이었고, 자신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대기했다.

한데 마화가 꺼지고, 검우진과 마존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이 싸움이 승리로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마화가 피어올랐던 요 며칠은 두고두고 후배들에게 회자될 일이었다. 어쩌면 과장에 과장이 더해져 종국에는 ‘그날 정문이 뚫렸을 때 말이야…….’라는 모험담으로 전해질지도 모르겠지만.

검무극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마가촌 주민들이 묵고 있는 임시 숙소로 향했다.

“소교주님이다!”

“소교주님이 오셨다!”

검무극의 등장에 마가촌 주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천마신교에서 자신들을 위해서 데려왔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끌려오듯 온 것이라서 다들 불안해하고 있었다.

한데 그들이 가장 믿고 따르는 소교주가 돌아온 것이다.

소교주 주변으로 마가촌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검무극이 그들이 지내고 있던 임시 거처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신경을 써줬다고 해도 임시 거처가 편해 봤자 얼마나 편하겠는가?

“고생들 많으십니다.”

그들 사이에서 조춘배가 달려 나왔다.

“소교주님! 무사하셨군요.”

“주인장, 잘 계셨소?”

검무극이 조춘배의 손을 잡아주었다.

“어이구, 귀하신 분께서 어찌 이러십니까?”

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소교주가 손을 잡아주는 일은 정말 큰 영광이고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바깥의 싸움이 다 끝났소.”

검무극의 말에 모두 환호하며 기뻐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그렇긴 한데, 문제가 있소.”

의아해하는 그들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다들 날 따라오시오.”

검무극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본단을 나섰다.

그렇게 마가촌에 도착했을 때, 마가촌 주민들은 넋을 잃었다.

자신의 집이 있었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무너진 잔해조차 남지 않을 수 있을까?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말했다.

“큰 싸움이 벌어져서 어쩔 수가 없었소.”

모두가 넋이 나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고,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 감정을 드러냈다.

망연자실한 이도 있었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하는 이도 있었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고 검무극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들이 각자 감정을 터뜨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우린 어떻게 살라고요?”

“소교주님! 살려주십시오!”

“너무 하십니다!”

자신의 터전이 송두리째 사라진 충격은 상대가 소교주라는 것도 잊게 했다.

그때 조춘배가 소리쳤다.

“이 사람들아! 지금 소교주님께 이 무슨 무례한 짓들인가? 우리가 여기 있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사라졌을 거네.”

그 말에 모두 정신을 차렸다. 집이 사라진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검우진이 자신들을 데려가 주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조춘배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우릴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조춘배는 고마움부터 표하는 게 우선임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마가촌 주민들도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그래, 다른 사람은 다 원망해도 소교주만큼은 원망해선 안 되었다. 그가 얼마나 자신들을 위해줬는지 다들 잘 알고 있었기에.

검무극이 비로소 그들에게 말했다.

“본교가 나서서 여러분의 집을 다시 지어줄 거요.”

그제야 모두 안도했다. 만약 신교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오늘부터 살길이 막막한 그들이었다.

기쁜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사라진 집기와 물건들도 최대한 원래대로 복구해 드릴 생각이오. 한동안 생활이 되도록 돈도 지원해 드릴 거요.”

그러자 앞서 원망했던 마가촌 주민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처음부터 말씀해 주셨으면 못난 꼴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부드러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게 못난 꼴이라 생각지 않아서 그랬소.”

검무극이 그 말을 먼저 전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더 좋은 건물을 지어주고 내부를 꾸며준다 해도, 여러분들이 수십 년 쌓아온 추억까지 만들어줄 수는 없지 않겠소?”

그 말에 조춘배는 물론이고 마가촌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소교주가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니 더 슬퍼하시고 원망하셔도 되오. 억지로 참으면 화병이 생길 거요. 그러니 지금 실컷 화도 내고 원망하시오.”

몇몇 사람들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찌 이 일이 돈으로 전부 해결될 일이겠는가? 더 높고 좋은 건물도 좋지만, 그 전에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여러분의 추억을 날려버려서 미안하오.”

마가촌 주민들을 대표해서 조춘배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살려주시고 집도 새로 지어주시는 것만 해도 과분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조춘배를 따라 다른 주민들도 모두 소교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니 고맙소. 내일부터 본교의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새로운 마가촌을 건설하겠소. 함께 의논해 가며 새로운 터전을 만듭시다.”

천마신교에서 작정하고 나서면 마가촌을 재건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 그동안 고생들 하셨으니, 인생이 휴가를 주었구나, 여기시고 푹 쉬십시오! 아, 그리고 그 돈은 전부 우리 아버지 돈이오. 나 말고 아버지께 감사하시고.”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가촌 주민들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검무극을 향한 눈빛에는 그야말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고마움과 충성심이 가득했다.

문득 조춘배는 예전에 소교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외압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놈처럼 누가 아버지 불러온다고 겁주면, 나도 우리 아버지 부르겠소!

그때처럼 교주님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때의 소교주와 지금의 소교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소교주님은 정말 멋지게 성장하고 계십니다.’

검무극이 조춘배 옆으로 걸어왔다.

“주인장, 그래도 저놈 하나는 살아남았소.”

검무극이 바라보는 곳에 탁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좋은 생각이 났소. 역사적인 탁자니 그 자리에 앉아서 밥 먹으려면 돈을 두 배로 내게 하시오.”

검무극의 농담에 조춘배가 웃었다. 이 탁자는 따로 챙겨서 집에 가져다 둘 작정이다. 그래서 가보로 물려줄 생각이었다.

“이 층 벽의 글이 사라진 것은 아쉬워 마시오. 건물이 새로 지어지면 그 사람들 모두 모셔서 새로운 글을 쓰게 할 거요.”

“아뇨, 그러지 마십시오.”

검무극의 위로에 조춘배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후련합니다. 전에 말씀이야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누가 훔쳐 갈까, 술 취해서 낙서라도 할까 매일 노심초사했습니다. 차라리 속 시원합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맞소. 굳이 글로 보여줄 필요 없소. 주인장이 직접 겪은 일이지 않소? 손님들에게 그날 일을 일일이 말로 해주시오. 주인장 자체가 전설이시오.”

조춘배는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소교주는 자신에게 항상 이런 마음이 들게 한다.

나 까짓 게 뭐라고.

주점의 늙은 주인장을 전설로 만들어주는 소교주가 여기에 있다.

검무극이 탁자에 앉으며 조춘배에게 말했다.

“주인장, 여기 술 가져다주시오.”

다 사라져서 못 가져다주는 걸 알면서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술 여기 있네.”

검무극이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과거로 보내줬던 그 노인이었다.

“어르신.”

어느새 주위 사람들은 모두 멈춰 있었다. 조춘배도 멈췄고, 함께 왔던 마가촌 사람들도 모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행동이 멈췄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금주 중이어서 못 마시지 않았나? 지금은 괜찮겠지?”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았다.

노인과의 만남은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바람 계곡에서 노인을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고생 많지? 잘하고 있네.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검무극이 술병을 들어 노인의 잔을 채워주었다.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검무극이 노인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이번에는 노인이 검무극의 잔을 채워주었다.

“드디어 자네의 숙원을 이뤘군.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고,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리면서.”

“어르신 덕분입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모두가 자네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할 거네. 내 덕분이 아니라 자네가 해낸 일이지.”

두 사람이 서로 잔을 부딪치고 술을 비웠다. 그가 준 술은 평범한 술이 아니었다.

한 잔의 술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

지금 검무극의 몸에는 여러 선천진기와 내공이 섞여 있었다. 혁도천의 마공에 기반한 내공부터, 무황신검의 정공 내공, 주가신의 사파 내공, 거기에 천의궁주의 독특한 내공까지. 그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성격의 선천진기까지 뒤섞여 있었다.

막대하고 정순한 내공을 지닌 검무극이었기에 보통 새로 들어온 내공은 자신의 정순한 내공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한데 이번에는 워낙 내공의 양이 많은 데다가 각기 다른 성질의 선천진기까지 뒤섞여 있어서, 그것을 하나로 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은 막대했지만 정순함이 떨어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은 버려야겠구나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스스스스스.

한데 그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내공은 내공대로, 선천진기는 선천진기대로.

그리고 그것은 원래 검무극의 정순한 선천진기와 내공이 되어 하나로 합쳐졌다. 애초에 검무극의 것처럼, 그것들은 하나가 되었다.

그 엄청난 내공이 하나가 되자 검무극의 눈빛은 더욱 맑아졌고 깊어졌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이 검무극의 몸속에 가득 흘러넘쳤다.

“저는 이 힘을 회수해 가실 줄 알았습니다.”

조금 전 그 기운들이 하나로 합쳐질 때 노인이 가져가려나 보다, 했었는데.

한데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기운과 똑같이 만들어서 더 큰 힘이 되도록 해주었다.

“자네가 노력해서 얻은 힘인데, 내가 어찌 그러겠나?”

검무극은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육도원기를 무림 곳곳에 안배한 분이 어르신이시지요?”

노인은 그런 것은 알려줄 수 없다는 듯 뜻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 노인이 안배한 것이 틀림없었다.

회귀 대법의 재료를 찾는 과정을 거친 것처럼, 회귀한 후에는 그 여섯 가지 기운을 얻는 시험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노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생했네.”

회귀 전 삶에서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생각나나? 복수를 마치면 어떤 인생을 살고 싶냐고 물었을 때 했던 자네의 대답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나도 모르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마가 될지, 조용히 세상을 등지고 살지, 세상의 미녀들을 다 차지하는 호색한이 될지, 교를 떠나 쓰레기 같은 놈들을 두들겨 패는 삶을 살지, 아니면 내가 쓰레기가 될지…… 나는 아무것도 정한 것이 없소.

노인이 물었다.

“이제는 정해졌나? 어떤 인생을 살지.”

잠시 고민하던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아직 한 마디로 대답할 인생은 찾지 못했습니다. 천마가 될지, 무림을 주유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지. 다만 어떤 인생을 살든 한 가지만은 지킬 겁니다. 그때그때 최대한 즐겁게 살아가자.”

그러다 중요한 한 가지가 생각났다는 듯 검무극이 따지듯 물었다.

“아니, 그리고 이런 질문은 무림일통을 하려는 아버지를 설득하고 난 다음에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겐 이제 화무기를 잡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남았습니다! 아시잖아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노인은 오히려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인생은 고난의 연속 아니겠나?”

“설마 그다음 고난이 또 있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세상일을 어찌 알겠나?”

과연 아버지 일을 제외하고 이 신분과 이 무공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마치 검무극의 그 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자네 자식이 속을 썩일 수도 있고.”

자식이라니! 검무극이 깜짝 놀라 노인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런 일을 준비하고 즐길 준비를 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겠나? 자네 마음에 달렸지.”

“무섭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자식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였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식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저는 아버지 같은 이런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처럼 딱 눈빛으로 제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제가 말이 많아서 잔소리 많은 아버지 예약 아닙니까?”

“대화를 많이 하는 이상적인 부자지간이 될 수도 있지.”

검무극이 노인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지 마십시오. 저 혼인 안 합니다!”

흐뭇한 미소로 검무극을 바라보던 노인이 작별을 고했다.

“자네와 술도 마셨으니 이제 가봐야겠네.”

검무극은 노인과의 이별이 아쉬웠다. 지금의 만남은 첫 만남과도, 또 두 번째 만남과도 달랐다.

“제게 어떻게 살 건지를 물어보셨지만 앞으로의 제 삶이 실망을 끼쳐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멋있음은 거의 다 썼거든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멋있게 만든 주위 사람들이 자네를 더 멋있게 이끌어 줄 테니까.”

노인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검무극이 노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진심을 담아 하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저를 돌려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노인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네의 인생을 지켜봐 온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네.”

그렇게 노인이 사라졌다.

검무극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

그때 뒤에서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한 조춘배가 말했다. 그는 지켜봐 달라는 검무극의 말을 당연히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했다.

“지켜보나 마나 소교주님은 무림 역사상 최고의 교주님이 되실 겁니다.”

너 때문에 포기 못 하지

“이제부터 죽도록 논다더니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검무극은 혈천도마와 마주 앉아서 아까부터 뭔가를 종이에 열심히 적고 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 중입니다.”

“뭐가 그렇게 많아?”

종이에는 할 일이 가득 적혀 있었다. 화무기를 잡으면 해야지 미뤄뒀던 일들이었다.

우선 만날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진하군과 비사인을 만나서 축하주를 마시고 싶었다. 마무리는 본교에서 지었지만, 그 기나긴 과정을 두 사람도 함께했었으니까. 두 사람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우릴 도우러 올 일도 없었다. 아, 진하령과 빙궁의 한설도 보고 싶었고.

오랜만에 서대룡과 장호와도 술 한잔하고 싶었고, 검왕과 차이란과도 한잔할 작정이었다.

마존들과도 만나야 했다. 우선 극악소마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취마가 본단에 도착하면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다.

막내로 훌륭한 싸움을 해준 섭혼마존도 챙겨야 했고 독왕을 찾아가서 이번 싸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도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장 할 말이 많을지도 모른다.

“또 누굴 봐야 하나?”

책을 읽던 혈천도마가 슬쩍 종이에 적힌 것을 쳐다보았다.

“거기 그건 뭐냐? 미남 사인방 중원 출격?”

적혀 있는 글 중 제일 눈에 띄는 내용이었다.

“아, 본교의 대표 미남들끼리 중원에 놀러 나가려고요. 이건 예전부터 세워뒀던 계획입니다.”

“그 사인방이 누군데?”

혈천도마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쳤다.

“당연히 첫 번째는 저고요. 다음이 소마님, 그다음은 독왕님, 그리고 취마님까지. 이렇게 넷입니다. 사실 제가 아버지께 인기에서 밀린 적이 있지만, 그건 대룡이 처제의 독특한 취향 때문이고요.”

혈천도마가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가면쟁이가 그렇게 잘 생겼어?”

“장난 아닙니다.”

살짝 못마땅한 혈천도마의 표정에 담긴 감정은 딱 이러했다.

가면쟁이, 주정뱅이, 독쟁이가 사인방에 묶이는데 내가 빠진다고?

결국 혈천도마는 참지 못하고 넌지시 물었다.

“나는?”

검무극이 도마를 보며 웃었다.

“지금 이 팽팽한 피부로 따지면 당연히 어르신이 저 다음이죠. 한데 오인방으로 출격하면 검존님께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안 괜찮지. 혈천도마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두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말은 그러했지만, 혈천도마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여행이었다. 언제 여길 또 와 보겠나, 하는 곳들도 많이 보았고. 무엇보다 일화검존과 함께라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그녀가 좋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이 적응이 잘 안되는 순간들이 많을 정도로.

아쉬운 건 조금 더 젊었을 때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젊어서 부지런히 다녀라.”

그 말에 검무극은 다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풍천교주, 고월과의 여행, 형하고도 둘이서만 여행, 그리고 이안과의 여행. 그리고 아버지와 여행하기.

“사내들은 왜 그리 챙기나? 이안이 하고나 놀러 가.”

둘이 놀러 가자고 하면 이안은 정말 좋아할 것이다. 평생 그림자처럼 따르며, 묵묵히 옆을 지켜준 그녀였다.

딴 남자를 만나면 그 꼬리 아홉 개 다 발휘해서 훨씬 더 매력적인 모습을 보일 텐데, 소교주인 자신 앞에선 그 꼬리 숨기느라 바쁜 그녀였다.

“어르신은 혼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책장을 넘기던 혈천도마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 나이에 무슨 혼인이냐?”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남들이 손가락질한다.”

“그 손가락 제가 다 잘라버리겠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러는 너는?”

“저야말로 이 나이에 무슨 혼인입니까? 아직 이릅니다. 형도 안 했고요.”

“할 마음은 있고?”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다.

“제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주기는 뭘 해줘? 혼인은 상대가 비를 안 맞게 해주는 게 아니다. 기꺼이 함께 비를 맞는 일이지.”

혈천도마의 시선이 다시 책으로 향했다.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검존님도 어르신과 함께 비 맞기를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죠.”

혈천도마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우린…… 궁상이지.”

잠시 혈천도마를 쳐다보던 검무극이 다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형 혼인시키기, 악군학 혼인시키기 아래에 어르신도 꼭. 이라고 아주 작게 적어두었다.

어디 할 일이 그뿐인가?

이번 싸움의 과정에서 십 성을 넘어 십일 성에 이른 구화마공을 십이 성 대성하는 일도 남았다. 이건 시천비술로 최단 시간 내에 이뤄야 할 일이고.

그리고 시공이환술 속에서 혼자 온종일 뒹굴뒹굴하고 싶었다. 하루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섬에서, 하루는 설경 속 온천에서.

열심히 적고 있는 검무극을 보며 혈천도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니 해도 맨 먼저 자신을 찾아와 주는 검무극이 고마웠다. 뭘 할까 고민을 해도 여기 와서 했으니까. 소교주의 첫 번째라는 뿌듯함이 있었다.

검무극이 종이에 해야 할 일을 적다가 창가로 걸어갔다. 잠시 창에 서서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차분히 혈천도마를 불렀다.

“어르신.”

“왜?”

“이건 정말 꼭꼭 묻어두고 나중에 꺼내고 싶은데, 그래도 이 부분만큼은 어르신이 제일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정말 무림일통을 하시려고 할까요? 제가 결사반대하는 것도 알고 계시고, 두 분 맹주님과도 이전보다 친해지셨고. 그래도 하실까요?”

혈천도마는 잠시 고민에 잠기더니, 이윽고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무림일통은…….”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

“밀어붙이실 거다.”

혈천도마의 표정에 전혀 장난기는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보고 있다는 의미.

“어떻게든 너를 설득하고 결행하시겠지.”

역시! 검무극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 무림일통을 하려면 진작들 하시지. 왜 아버지 대에까지 내려와서 저를 힘들게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 왜 본교가 무림일통을 못 했는지 아느냐?”

“왜 못했습니까?”

“무림맹주와 무림맹에 속한 무인들만 죽인다고 끝이 아니거든. 그 숫자는 전체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고, 강호에는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은 무인이 있다. 그중 정파 무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지. 만약 마정대전이 벌어지면 은거해 있던 정파의 고수들이 셀 수 없이 튀어나올 거다. 정파가 달리 위기에 강하겠느냐?”

어디 그뿐이겠는가? 설사 전쟁에서 이겨 중원을 장악하더라도 앞으로 끝없는 저항이 있을 것이다. 마인을 노리는 암습이 계속 벌어질 것이고, 수많은 마인이 목숨을 잃게 되겠지.

회귀 전 경우처럼 화무기라는 압도적인 존재가 등장해서 마정사를 봉문시켜 버리는 것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마정사에는 오랫동안 쌓여온 서로에 대한 원한과 분노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사파는 절대 본교 편을 들지 않는다. 정파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 없지. 결국 정사 연합을 상대해야 하는 전쟁이 되지.”

“지금 이 말씀 그대로 아버지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어디 교주가 모르겠느냐?”

그래, 맞는 말이다. 누구보다 아버지가 잘 아시겠지.

“저 때문에 포기하실 줄 알았는데.”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정반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너 때문에 포기 못 하지.”

“네?”

“너 때문에 더 밀어붙이실 거라고.”

생각지 못한 말에 검무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때문이라니요? 왜요?”

“네 생각만 하지 말고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 교주 입장에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너만 설득하면 너를 데리고 마정대전을 치를 수 있다. 네가 돕는다면 그 전쟁 몇 배는 쉬워질 거다. 너 때문에라도 이 전쟁, 탐나지 않겠느냐?”

검무극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한데 지금 자신의 무공을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단 네가 강해서만이 아니다. 네가 있으면 훨씬 희생자를 줄이면서 승리를 이뤄내겠지. 그 부분은 네가 간절히 원하는 바일 테니까. 네 똑똑한 머리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치르지 않겠느냐?”

이런 부분 역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혈천도마는 아버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너 같은 아들이 있으면 나 같아도 한번 해보고 싶어질 거다. 너와 함께라면 못해낼 게 없을 거 같으니까.”

말없이 혈천도마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현실도피를 선택했다.

“오늘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할 겁니다. 아버지는 무림일통의 꿈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이 편하다면.”

“괜히 여쭸습니다. 이래서 제가 실컷 놀고 나서 이 이야기 꺼내려고 했는데.”

검무극이 책상에 올려진 종이를 품에 넣고서는 힘없이 작별을 고했다.

“저 이만 가볼게요.”

“이 밤에 어디 가냐? 가면쟁이에게 가냐?”

“아뇨. 적어도 오늘만큼은 본교나 무림일통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그게 누군데?”

검무극이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주점 주인을 꿈꾸는 사람이.”

* * *

검왕은 자신의 거처 마당에 있는 바위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검무극이 들어섰다.

“청승맞게 혼자서 뭐 하십니까? 술이라도 한잔하시든지.”

“술 그렇게 안 좋아한다.”

검무극이 그가 앉아 있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술도 안 좋아하는 분이 뭔 주점을 하겠다고요?”

앞서 풍천교주의 말을 들었을 때 검왕이 주점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 주점 열면 망하겠지. 가게가 망하거나 건강이 망하거나.”

“좋아요, 그건 인정합니다. 한데 주점 주인이 싸움을 잘하는 건요? 잘하면 잘할수록 적성에 안 맞는 거 아닙니까?”

듣고 있던 검왕이 불쑥 말했다.

“이제 말 편하게 해라.”

“네?”

“친구라면서.”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검왕을 쳐다보았다. 검왕은 자신과의 관계에 변화를 주려 하고 있었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은 천살성까지 죽이면서 자신에게 완벽하게 새로운 인생을 주었다. 검무극이 자기를 형으로 모셔라 해도 네, 그러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악 형, 나 이제부터 편하게 말 놓는다. 이제 진짜 친구가 된 거 같네.”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말을 놓으라고 하지 않았을 테고, 상대가 검왕이 아니었다면 말을 놓지도 않았으리라.

“한데 정말 주점 할 거야?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다른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

“왜 하필 주점인데?”

“안 심심할 거 같아서. 손님들 입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들도 들을 수 있고.”

검무극이 검왕이 차린 주점을 상상해 보았다. 말총머리 맨발의 악군학, 얼핏 생각하면 누구보다 잘 어울릴 것 같긴 하지만.

“은퇴한 절대 고수가 주점을 차려서 평범하게 산다? 멋있긴 한데.”

“그런데?”

“그 평범한 생활 금방 질리지 않을까? 나는 한 달만 음식 냄새 맡아도 질릴 것 같은데. 그리고 온갖 진상들 상대해야 하는데, 그 성질에 참을 수 있겠어?”

검왕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은 반드시 해야겠다가 아니라, 한번 해볼까? 이런 마음이었으니까.

“해보고 재미없으면 그만두면 되지.”

가만히 검왕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조언을 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아예 제대로 해보는 건 어때?”

“제대로? 어떻게?”

“규모를 중원에서 제일 큰 객잔으로 짓는 거야. 그 정도 돈은 벌어뒀지?”

해보고 안 맞으면 때려치우겠다는 사람에게 중원에서 제일 큰 객잔을 지으라고?

“최고급으로 지어서 값도 비싸게 받는 거지. 음식도 고급 요리 팔고, 객방도 최고 시설을 갖추는 거야. 점소이들도 다른 곳과 차별화해서 예의 깍듯하게 교육하고. 중원에서 그 객잔이 제일 좋다더라, 돈 벌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객잔으로 만드는 거지.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거야.”

그건 지금까지 객잔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규칙이었다.

“이 객잔에 들어올 때는 입구에서 병장기를 모두 맡겨야 해. 그리고 안에서는 절대 싸워선 안 된다는 규칙을 정하는 거지. 마정사 모든 무인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절대 싸워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규칙을 어겼다? 우리 악 형이 잘하는 거 있잖아?”

검무극이 손날로 목을 스윽 그었다.

“이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객잔을 세우는 거지.”

검왕이 살짝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문나면 온갖 놈들이 다 몰려들 텐데.”

“그 재미에 하는 거지. 매일매일 재미있지 않겠어?”

검무극이 그에게 그런 말을 전하는 이유가 있었다.

“악 형, 그 무공으로 평범하게 살기는 힘들어. 기왕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고 재미있게 살아. 악형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일수록 이렇게 요란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날 수는 없는 삶이었다. 검무극을 지켜주겠다고 마교주와 약속을 했으니까. 어디서 뭘 하고 살더라도 검무극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달려와서 도울 것이다.

“그리고 혼자 할 생각 말고 차 조장하고 둘이서 해. 악 형,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어서 혼자 했다간 만날 손해만 볼 거야.”

차이란이 언급되자 검왕은 흠칫했다.

“악 형도 차 조장 싫지는 않잖아? 객잔에 차 조장 같은 절세미녀까지 있다고 소문나면 아마 떼돈 벌 거야. 객잔으로 대부호가 되는 거지.”

검왕이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정말 검무극다운 조언이었다. 문제는 이 말도 안 되는 조언이 솔깃하다는 점이었다. 이번 싸움에서도 죽음을 각오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 인생인데 뭔들 못 하겠는가?

그때 그곳으로 풍천교주가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객잔 이름은 정해졌네. 영웅객잔(英雄客棧) 어떤가?”

원래는 다른 이름을 준비해 왔었는데, 오면서 검무극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바뀌었다.

“좋은데요? 천하제일 검객과 천하제일 미녀 살수가 운영하는 객잔 이름이 영웅객잔이야.”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무인이라면 참을 수 있겠어?”

그 무서운 천마혼도 미소를

검무극이 술을 가지러 간 사이 풍천교주와 검왕은 나란히 앉아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풍류주점에서의 싸움을 거치면서 제법 친해졌기에 둘만 있는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영웅객잔이라, 너무 멋진 이름입니다.”

검왕의 말에 풍천교주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곳에 들어서면서 검무극의 말을 듣는 순간 생각난 이름이었지만.

“자넬 위해 고민을 많이 했었네.”

“감사합니다. 한데 그런 인생을 제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의 제안은 보통 결심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만 위해서 살아왔는데 사람들을 챙기며 살 수 있겠습니까?”

큰 규모로 객잔을 운영하면 일하는 사람만 수십 명에 달할 것이다. 객잔에서 일하는 이들도 이들이지만, 과연 차이란과도 관계를 잘해 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차이란이 자신과 함께 그런 삶을 살려고 할까?

그럼에도 이렇게 고민이 되는 건 그런 객잔 한번 운영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긴 하는 모양이다. 어딘가로 떠날 생각만 하고 살았던 인생이기에 더욱이.

“마음먹으면 세상에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나? 그놈의 마음 먹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검왕은 풍천교주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기가 아는 한 가장 크게 마음먹고 인생을 바꾼 사람이 이 풍천교주였으니까.

자신이라면 교주 자리를 내던지고 올 수 있었을까? 객잔 하나 여는 일도 이렇게 고민이 되는데.

“교주께서는 그 마음 먹은 일,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풍천교주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그냥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그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왜 안 하겠나?”

특히 고월과 중원을 돌며 은월의 지단과 지부를 만들던 그 시기가 힘들었다. 일에 푹 빠진 고월을 지켜주는 건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은월을 만드는 일이 자신이 원하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풍천교주로 살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잠이 들 때도 있었네. 그 징글징글하던 모래바람이 그리웠지.”

검왕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는 검왕에게 솔직했다.

검무극이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니 분명 괜찮은 사람이겠지, 하는 가산점이 아니더라도, 이번에 지내면서 알게 된 검왕이란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허심탄회하게 한 이야기를 적어도 약점으로 삼을 것 같지 않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지금은요? 지금도 후회하십니까?”

“지금은…… 가끔 한다네.”

그 말에 검왕이 웃었고, 풍천교주도 따라 웃었다.

“이게 다 소교주 때문이라네. 그러니 자네도 조심하게. 객잔에서 누워 잠들 때마다 이 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네. 자네라고 ‘그때 그 말총머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아! 그때 내가 홀렸었지. 객잔에 한번 놀러 오지도 않는 그 소교주에게 내가 왜 홀렸을까?”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역시! 이제야 우리 교주님 같으십니다.”

술을 구하러 간 검무극이 막 도착한 것이다.

“숨어 있다가 내가 욕할 때만을 기다렸다 나오는 자네 아닌가?”

“오해받을 만합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이런 날에는 한잔해야지요. 우리 악형과 말을 편하게 한 의미 있는 날이고, 영웅객잔이란 멋진 이름을 얻은 날이기도 하니까요.”

“아직 결정한 것 아니다.”

검왕이 한발 물러났지만 이미 검무극의 마음에서는 객잔 문을 연 후였다.

“뭘 그리 걱정해? 나중에 골치 아파지고 상황이 복잡해지면 입구에 이렇게 크게 적어서 붙여. 마교 소교주가 내 친구다. 주인백.”

검왕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그 골치 아픈 상황이 열 배는 더 커지겠지.”

“지켜보는 우린 열 배는 더 재미있을 테고.”

검무극은 꼼꼼하게 잔까지 다 챙겨왔다.

“자,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풍천교주에게 먼저 술을 따라주고, 검왕에게도 따라주었다.

“내 술 한잔 받아라.”

검왕이 검무극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그들이 건배하고 술을 마셨다. 마당의 널따란 바위에 앉아서 달빛을 안주 삼아 마시는 이 술은.

“좋네.”

“좋습니다.”

모두의 입에서 좋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검무극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말을 뱉어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풍천교주와 검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얼마나 모두를 살리기 위해 애썼는지 잘 알았기에.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자네가 다 살렸네.”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만날 남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던 그였지만, 자신이라고 어찌 듣고 싶지 않겠는가?

이 말을 정말 듣고 싶었다.

잘했다, 네가 다 살렸다.

이 한마디 말을 듣기 위해 그 긴 세월을 노력해 왔으니까.

검무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풍천교주를 바라보았다.

“교주님께서는 저를 살려주셨고요. 덕분에 저는 여기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생색내는 걸 좋아하는 풍천교주였지만, 적어도 그 마지막 싸움만큼은 아니었다.

“기회다 싶어 먼저 나서서 생색낸 거네. 그 자리에 자네가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를 죽이지 않아서 모두가 죽게 되더라도…… 자네가 그자 몸에 있는 한, 자네 아버지는 그자를 죽이지 않았을 거야. 내가 확신하네.”

검무극은 문득 노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가 멋있게 만든 주위 사람들이 자네를 더 멋있게 이끌어 줄 거라는 그 말이.

“제 앞을 막아서며 아버지께 당신 미쳤어? 라고 하셨다면서요?”

풍천교주가 손사래를 쳤다.

“그땐 내가 미쳤지.”

그 말에 모두 함께 웃었다.

세 사람이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을 다 비운 후 자리를 파하고 일어설 때 검무극이 다음을 기약했다.

“이안이랑 차 조장 돌아오면 넷이 한잔해.”

“그래.”

차이란이 언급되자 살짝 위축되는 검왕이었다. 검무극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악 형에겐 차 조장이 꼭 필요하다고!”

검무극과 풍천교주가 검왕의 거처를 나섰다.

내원을 함께 걸어가다가 풍천교주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소교주.”

“네, 교주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말씀하십시오.”

그의 입에서 뜻밖의 걱정이 흘러나왔다.

“내가 고월 옆에 있는 게,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되는 일일까?”

“부담이라니요?”

“말 그대로일세. 그가 나를 데려왔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을까 하는 말이네.”

“천마신교 소교주 욕은 막 하시면서 그래도 고 군사 눈치는 보시는군요.”

멋쩍게 웃는 풍천교주에게 검무극이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 그렇게 설득해서 교주님을 모셨는데, 부담스러워하다니요! 만약 그러면 확 떠나버리십시오. 없어져 봐야 사람 귀한 줄 알죠.”

“하도 바빠서 나 없어진 줄도 모를 거네.”

누군가를 두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괜한 상상이 관계를 다 잡아먹어 버릴 때가 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말 나온 김에 우리 고 군사 보러 갈까요? 아직 안 자겠죠?”

“일하고 있을 거네.”

“가시죠, 얼굴이나 보고 가죠.”

검무극이 풍천교주와 함께 은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해서 입구를 지키는 무인에게 고월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앞서 풍천교주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고 군사는 이렇게 걱정할 겁니다. 교주님이 날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괜히 내게 묶여 중원을 종횡하며 살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러다가 교주님이 나란 사람에게 흥미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 내색은 안 해도 엄청 신경 쓰고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까?”

“저라면 그랬을 겁니다.”

검무극의 단호한 대답에 풍천교주의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해주는 말임을 알아도, 그 말이 힘이 되었다.

그때 고월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소교주님, 대적을 격퇴하신 것, 감축드립니다.”

고월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자네가 뒤에서 지켜준 덕분이네.”

풍천교주가 괜히 심술을 부렸다.

“나는! 나도 목숨 걸고 싸웠는데.”

고월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교주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눈빛에 살짝 장난기가 담겨 있었다.

소교주만 아니었다면 ‘교주야! 네가 더 고생했다!’라고 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니까 괜한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일한다고 바쁜 고월은 이렇게 변함이 없는데.

고월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시원섭섭하지.”

아직 화무기를 죽이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고월은 검무극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오히려 앞일이 더 걱정되시죠?”

“자네도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이루려 하신다고 생각하는군.”

과연 고월 역시 혈천도마와 같은 생각이었다.

“네, 교주님은 무림일통을 꼭 이루려 하실 겁니다.”

고월까지 그렇게 보고 있다면 적어도 그게 현실이라는 의미.

“군사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마존들은 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따라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극악소마나 섭혼마존은 자신을 따라줄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마존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월은 아직 천마신교의 군사가 아니라 자신의 군사였다.

“무림일통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교주님은 원하지 않는 방법일 겁니다.”

“말해보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고, 또 그의 말처럼 원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약속한 오 년이 되기 전에 소교주님이 교주님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오직 전쟁은 교주만이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문제는 아직 정정하신 아버지를 두고 교주의 자리에 오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는 데 있었다.

“교주가 될 방법은 있고?”

고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반응에서 검무극은 방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비무를 해서 이기는 것.

아들이 자신보다 더 강해지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교주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검무극이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지난번에 임시 교주를 맡은 적이 있었네. 온종일 천마전에 붙잡혀서 일을 했었지. 정말 답답하고 힘들었다네. 한데 아버지가 그 힘듦을 감수해 주시는 덕분에 본교의 그 수많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고월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달을 향했다.

“아버지가 물러나시는 그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날로 만들어 드릴 거네. 평생 천마전을 지키며 헌신하신 노력에 걸맞은 날이 되게 할 거네.”

고월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똑똑한 고월이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것이다. 아버지를 이겨서 교주 자리에 오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의지를 확실히 알았으리라.

가만히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이보게, 소교주. 무림일통을 막을 방법이 생각났네.”

검무극과 고월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생각지 못한 방법이 나왔다.

“혼인해서 손자를 안겨드리게.”

농담이라 여기고 검무극이 웃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진지했다.

“농으로 하는 말이 아니네. 자네 닮은 귀엽고 잘생긴 손자를 품에 안으면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싹 사라질 거네. 아니지, 아들만 키웠으니 손녀를 안겨드리게. 내 말 믿으라니까! 손녀 앞에서는 그 무서운 천마혼도 미소를 지을 거네!”

실없는 소리라며 웃어넘기는 검무극과 달리 고월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검무극이 찾아갔을 때 검우진은 거처의 내원에서 뒷짐을 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찾아온 것 아니냐?”

“네, 맞습니다.”

항상 일찍 주무시는 아버지였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깨어 계실 것 같았다. 그래서 몇 잔 마신 술도 내력으로 주기를 빼고 맨정신에 찾아왔다.

검무극이 아버지 옆으로 다가갔다. 혈천도마 방에서도 봤고, 풍천교주와 검왕과도 봤고, 고월과도 봤던 달이었다. 이제 그 달을 아버지와 함께 올려다보았다.

앞서는 별생각 없이 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달을 올려다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살리고 싶었던 사람 중에 가장 살리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 서 있는 것이니까.

“기분이 어떠냐?”

“좋습니다. 너무 좋아서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 그리고 이것 보십시오.”

검무극이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앞서 혈천도마 방에서 작성한 계획표였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거기 말고 여길 보십시오. 미남 사인방에 껴서 마존들 불편하게 하실 생각 마시고요.”

검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무기가 죽고 난 후 처음 보는 아버지의 반가운 비웃음이었다.

“여깁니다. 아버지와 여행하기! 저 아버지와 또 여행 가고 싶습니다!”

당연히 바쁘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때도 낚싯대를 준비해라.”

낚시 대결의 복수전을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였다.

그리고 오늘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공이환술을 펼쳐라.”

검무극은 시키는 대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그것도.”

검무극은 순순히 시천비술까지 펼친 후 바깥 풍경이 보이도록 했다.

한 번 경험했던 시천비술이지만, 검우진은 다시 봐도 놀라웠다. 시간은 멈춘 것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벽에 걸린 등불로 날아가는 벌레의 그 미세한 날갯짓이 눈으로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시천비술만큼은 알려드리지 않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시천비술을 알려달라고 이곳을 열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이 한 단계 올랐더구나.”

“네, 이번 싸움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십일성에 이른 구화마공이었다. 이제 십이성 대성까지 딱 한 걸음 남았다. 물론 그 한 걸음은 운이 나쁘면 평생이 걸려도 나아가지 못할 걸음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검우진이 천마검을 뽑으며 말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루기 전에는 못 나간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시천비술을 펼치게 한 것은 자신을 수련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늦은 밤임에도 검을 차고 계신 것도 자신이 찾아올 것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이었고.

아버지는 아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당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시천비술을 가르쳐달라고 하는 대신, 아들을 십이성 대성을 이루게 해주려고 하고 계셨다. 이런 아버지이시기에.

이래서 이 싸움이 제게는 제일 어렵습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보셨다시피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며 힘차게 말했다.

“아침이 오기 전에 나갈 겁니다.”

저는 천천히 이루고 싶습니다

검무극은 아버지와의 대결에서 자신의 실력을 모두 발휘했다.

아니, 하기 싫어도 해야 했다.

쇄애애애애액!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아버지의 공격은 과장을 보태지 않고 화무기보다 더 매서웠다.

‘아버지, 저 아들입니다! 적 아닙니다, 천살성 아니라고요!’

이런 너스레를 떨 여유조차 없었다. 집중력을 잃으면 그대로 죽음이었다.

검우진은 맨 처음 등산 갔을 때, 아들의 얼굴에 지풍을 날리던 그 비정한 아버지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수련의 목적을 생각하면 이 살벌한 공격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 대결은 실력 이상의 비범한 마음가짐이 요구되는 수련이었다.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초식들이 난무하면서도 절대 상대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으니까. 극도의 집중력과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애초에 검우진과 검무극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부자지간의 공방에서 정답과 오답이 반복되었다.

이게 답이다, 하고 날아든 아버지의 공격을 검무극이 오답입니다, 하고 막아냈다.

다시 그럼 이게 답이겠구나, 하면서 날아든 공격을 검무극은 필사적으로 오답으로 만들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만 그렇지, 다른 이들에게는 그 모든 수가 정답인 공격이었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피했다.

이 정도 공격에는 죽지 않겠지. 아버지가 정한 기준에 이르지 못하면.

‘정말 죽는다!’

그렇게 시공이환술에 들어온 이후 첫 대결이 끝났을 때, 검우진은 아들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내공만 얻은 것이 아니구나!”

아들의 실력이 확연히 높아져 있었다. 구화마공이 십성에서 십일성에 오른 것과는 별개로, 무학 전반에 대한 깊이와 무공 실력이 향상된 것이다.

“그들의 선천진기와 내공은 물론이고 익히고 있던 무공까지 모두 얻었습니다.”

정말 하늘이 내린 선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각자 평생을 이룬 경지가 그대로 주어졌으니까.

게다가 검무극은 그 무공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원래 마공을 익힌 사람은 정파나 사파의 무공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애초에 기본이 되는 내공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선천진기와 내공이 합쳐지면서 얻은 무공을 다 쓸 수도 있었다.

앞으로 무림에 나가면 정파인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사파인 행세를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검우진이 다시 검을 겨눴다. 과연 이 말을 몇 번이나 해야 나갈 수 있을까?

“자, 다시!”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쉬이이이익.

그들의 움직임은 빛처럼 빨랐지만, 여전히 바깥세상의 벌레는 등불에 도달하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날아가고 있었다.

* * *

“내가 아직 술이 덜 깼나?”

창밖을 바라보던 취마가 놀란 눈을 껌벅였다.

“조금 전에 우리 마가촌에 들어선다고 하지 않았나?”

취마의 물음에 마부석의 무인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여기가 마가촌입니다.”

놀라기는 마부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둥절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차 세우게.”

취마의 마차가 멈추자 뒤이어 달려오던 마차들도 멈춰 섰다.

취마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불과 섭혼마존도 내렸다. 그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가촌이 사라지고 없었다.

세 마존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미 통천각에서 전해온 긴급 전서로 천살성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데 그 싸움이 이렇게나 치열한 싸움이었다고?

그 뒤로 말을 타고 달려온 귀영대와 마군을 태운 대형 마차도 멈춰 섰다.

그들 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이곳이 검무극에게 얼마나 중요한 곳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소교주님!’

마가촌이 사라진 그곳에는 마인들과 인부들이 공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역을 나누고 어디에 어떤 건물을 올릴지 서로 의논하고 있었다.

마인들과 인부들이 마존들을 알아보고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대공자 검무양이었다. 총군사 사마명은 그를 이곳 마가촌 재건의 책임자로 삼았다. 성격이 꼼꼼했기에 이런 실무는 검무극보다 잘 처리하는 그였다.

“대공자님!”

“마불님!”

검무양이 세 마존과 인사를 나눴다. 이안과 장호도 와서 그에게 인사했다.

검무양이 마존들의 부상부터 살폈다.

“다친 곳은 괜찮으십니까?”

“우린 다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마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들으셨겠지만 교주님이 이곳에서 천살성을 격퇴하셨습니다.”

교주도 마가촌 주민들도 모두 무사하다는 덧붙임을 듣자 이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교주님은 괜찮으신가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이안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마가촌이 통째로 날아가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검무극은 어떻게든 막으려 했을 텐데.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다친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소교주도 무사하네.”

“아!”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놀라운 소식이 마존들에게 전해졌다.

“아버님과 무극이가 동반 폐관 수련에 들었습니다.”

동반 폐관 수련이란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지금껏 교주와 소교주가 동반 폐관에 들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폐관에 들어간 지 이틀째입니다.”

마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마불은 두 사람이 다쳐서 치료받는 걸 외부에 숨기기 위해 동반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마불의 걱정을 읽은 검무양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검무양이 밝은 표정에서 그제야 마불을 비롯한 모두가 안도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어서 가셔서 쉬시지요.”

마불이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제 이틀째면 한동안 교가 조용하겠구나!”

취마가 마차에 올라타며 마부를 재촉했다.

“어서 가자. 취몽루에 담아둔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섭혼마존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소교주가 보고 싶었다. 소교주의 첫 마존으로 무사히 싸움을 마쳤으니까.

그렇게 마존들을 태운 마차가 본단을 향해 달려갔다.

이안은 잠시 그곳에 서서 풍류주점이 있던 장소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교주님과 검무극이 무사한 것은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곳 마가촌이 날아가 버린 것은 너무 안타까웠다.

특히 풍류주점은 그녀에게도 추억의 장소였다.

검무극과 함께 술을 마시던 순간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 검무극에게 업혀서 돌아갔었는데. 서대룡과 장호와 술 모임을 하던 순간도 떠올랐다.

삼자회담을 이뤄낸 곳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참 기분 좋았는데.

조금 더 자주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근래 너무 바쁘기도 했고, 서대룡이 혼인까지 하면서 통 술 모임을 하지 못했었다.

그때 장호가 그녀 옆에 와서 섰다.

“이 대주,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장 군주님, 여기 새로 지어지면 우리 술 모임 재개하죠.”

“좋습니다.”

그렇게 다음 만남을 약속한 후 장호가 이끄는 대형 마차들도 그곳을 떠나갔다.

이안도 수하들에게 우리도 이만 가자고 하려는데 차이란이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안이 차이란 옆으로 걸어갔다.

“뭘 그리 보세요?”

“저를 사랑을 방해하는 악독한 수장으로 만드는 현장을 보고 있어요.”

무슨 뜻일까? 이안이 차이란이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이란이 바라보던 사람은 십칠교였다.

십칠교는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인부들 사이에서 한 젊은 남자가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더없이 애틋했다.

남자는 바로 초승달 무면객이었다. 이미 앞서 그녀에게 가면을 벗어서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던 그였다.

그녀가 거의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인부들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가까운 주위의 몇몇만 아는 사이라서 그들은 이렇게 비밀스럽게 만나고 있었다.

“이것들이 염장을 제대로 지르네요.”

그녀의 말에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밥 짓는 연기는 오른다잖아요?”

차이란이 이안에게 말했다.

“대주님도 제 염장 좀 질러보시죠?”

“누가 할 소리인데요?”

두 여인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끝났네요.”

이안이 주변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정말 깨끗이.”

이번 배후 세력을 생각하면 이안은 검무극이 맨 먼저 생각난다. 그가 출교하고 나면, 너무 걱정되어서 무공 수련에만 집중했었다. 그 덕분에 지금 실력이 되었다고 봐도 될 만큼.

이안이 차이란을 바라보았다.

“소감이 어때요?”

자신만큼이나 그녀에게도 이 싸움의 끝났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으리라.

“후련하네요.”

오랫동안 차고 있던 족쇄를 벗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과 이어져 있던 암흑은 완전히 끊어졌다.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차이란이 자신의 조원들에게 말했다.

“자, 여기서 해산. 오늘은 푹 쉬도록!”

십칠교를 위해서 여기서 해산했다. 저렇게 좋아죽는데,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으라는 그녀의 배려였다.

“이따가 조장들끼리 한잔 어때요?”

차이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게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게 삶이라면.

“좋아요.”

이젠 미루지 않을 작정이다.

* * *

시공이환술에 들어온 지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바깥에서의 시간이 이틀이니 이곳 안에서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아침이 오기 전에 나가겠다던 호언장담은 십이성 대성의 어려움 앞에 무너졌다. 그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수련은 계속되었다. 어떤 날은 구화마공을 겨뤘고, 어떤 날은 비천검법으로, 또 어떤 날은 가장 기본적인 검술로 겨루기도 했다.

서로의 검술에 익숙해진다 싶으면 아버지는 여지없이 강력한 수를 펼쳤다. 정말 그 순간만큼은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공격이었다.

오늘도 죽다 살아난 검무극이 식사 시간을 알렸다.

“아버지,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그래, 밥 먹자.”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아름다운 호숫가가 보이는 들판에 식탁이 놓였다.

검무극은 식사때마다 아버지를 위해서 여러 아름다운 장소를 연출했다.

“괜한 내공 낭비하지 마라!”

“안 됩니다. 초식 한 번 덜 발휘하더라도 식사만큼은 제대로 하셔야죠.”

검무극은 한옆에 쌓여 있는 음식 중 몇 개를 가져와서 식탁을 차렸다.

외부에서 음식 제공을 책임진 사람은 휘였다.

앞서 검무극이 잠시 나와 식량을 한가득 챙겨 들어가며 휘에게 시공이환술이 펼쳐진 곳 앞에 계속 식량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몇 달 치 식사를 한꺼번에 가져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아버지께서 육포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말린 음식만 드셔야 했다.

그래서 검무극은 천마전 숙수가 만든 음식을 계속 이곳으로 가져오게 했다.

휘에게는 솔직히 말했다. 지금 펼쳐진 공간에서는 바깥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니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고.

휘는 이틀 내내 천마전 숙수가 요리를 만드는 족족 음식을 그곳에 가져다 두었다. 음식은 가져다 두는 족족 사라졌다.

“오늘 요리 정말 맛있습니다. 숙수께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셨네요.”

“그 사람, 고생이 많겠구나.”

“어쩌겠습니까? 한 며칠 고생해야지요.”

“며칠 안에 나갈 수는 있고?”

“아니, 이 어려운 걸 아버지는 어찌 이루셨습니까?”

검무극이 아버지를 위해 신경 쓴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이곳 시공이환술 안에서도 바깥처럼 시간이 지나가도록 만들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새벽이 오고.

이 역시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젊은 자신이야 낮이거나 밤이거나, 정신없이 지내도 되었지만, 아버지는 장기간 그런 생활을 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주무실 시간이 되면 주무시게 했고, 식사 시간을 정확히 맞췄다.

이곳에서 거의 정확하게 하루를 만들어내는 것은 검무극과 같은 절대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는 것에 검우진은 내심 감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면.

검무극이 주변을 산책로로 만들었다. 어느 날은 아름다운 대나무숲이 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대천산에서 보았던 오솔길이 되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쌓인 길이 되기도 했다. 혼자 걸을 때는 그렇게 외롭던 길이었는데, 이제 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검무극은 아버지와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사실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은 이루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없이 남아 있을 거 같은 이 시간이 얼마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지.

항상 지나고 나서야 그 순간이 얼마나 찬란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도.

그렇게 산책을 마치면 저녁 수련을 했다. 저녁에는 실전 수련보다는 주로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의궁주 무공 중에서 이생전회(二生轉回)라는 초식이 있습니다. 이 초식을 펼칠 때 내력의 움직임이 다른 무공과 다릅니다. 이 초식은 중극혈에서부터 내력이 시작하는데…….”

검무극은 이 소중한 아버지의 시간이 단지 자신을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십이성 대성을 이루셨지만, 무학의 길은 끝이 없는 길.

아버지가 또 다른 경지에 이르실 수도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이번에 무황신검과 주가신, 그리고 천의궁주의 무공을 받아들이면서 얻게 된 여러 깨달음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검무극은 그것을 아낌없이 아버지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버지에게 갔다 다시 돌아올 때면 더욱 깊은 무학의 뜻이 담겨서 돌아왔다.

그렇게 저녁 수련마저 끝나면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공간을 밤으로 바꿨다.

그리고 잠만큼은 제일 편하고 익숙한 곳에서 주무시라고 아버지의 방을 그대로 만들었다.

물론 똑같이 재현할 수는 없었지만, 탁월한 기억력으로 대충 비슷하게 만들었다.

형과 함께 있는 그림도 붙여두었고, 장식장 위의 인형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 큰 침상 옆에 자신의 침상도 하나 놓았다.

잠들기 직전에 아버지와 나누는 몇 마디 대화도 좋았다.

예전 아버지의 소교주 시절에 대해 묻기도 했고, 마존들에 대해 묻기도 했다. 주로 대답을 듣지 못하고 혼자 떠드는 것이었지만.

하지만 단 한 마디로 무림일통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도, 자신도.

“자자.”

“주무십시오, 아버지.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가 어두워졌다.

“내일은 더 힘들 거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자신이 십이성 대성을 이루지 못하면 나가지 않으실 작정이시라는 것을.

‘너무 밀어붙이지 마십시오.’

아버지와의 이 시간이 너무 좋았기에.

‘저는 하루라도 천천히 이루고 싶습니다.’

지금도 저를 보고 계실 겁니다.

수련은 계속되었다.

검무극은 하루하루 노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반드시 십이성 대성을 이룰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야말로 최고를 최고가 최고에게 가르치고 있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노력뿐.

지금껏 여러 번 경험해 봐서 알고 있다. 물은 계속 뜨거워지다가 마지막 한순간 확 끓어오른다. 그 과정에서의 뜨거움을 참지 못하고 멈추면 식어갈 일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뜨거웠다.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을 정도.

“하아, 하아.”

검무극이 바닥에 누운 채 숨을 헐떡였다.

검우진은 그 옆에서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수련의 강도는 하루가 다르게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오히려 가르쳐주시는 아버지가 걱정될 정도로.

후둑, 후둑.

그때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더니.

쏴아아아아아.

이내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앗! 비 옵니다. 갑자기 무슨 비야!”

자신이 내리게 한 비였으면서 이 천연덕스러운 반응이라니?

“아버지, 저기로 잠시 피하시죠?”

어느새 뒤쪽에 작은 정자가 하나 생겨 있었다.

검우진이 옅게 웃으며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의 몸 주위를 지켰기에 비는 그의 몸을 한 방울도 젖게 하지 못했다.

쏴아아아아.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마침 오늘 숙수께서 부침개를 해주셨는데.”

녀석, 다 계획이 있었구나! 그래, 하루쯤은 농땡이 치는 날도 있어야지.

“오랜만에 한잔하자꾸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무극이 순식간에 날아가 술과 부침개를 챙겨왔다.

두 사람은 정자에서 비와 부침개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사실 검무극은 회귀 전 인생까지 통틀더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와 단둘이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일 테고. 검무극은 이 시간이 전혀 어색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바깥에 계신 것처럼 편하게 지내시게 하는 노력이 그런 어색함을 없애주었다.

어색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매번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조금이라도 운치 있는 공간이 되게 하려고 애쓰느라 바빴는데.

쏴아아아아아.

가만히 앉아서 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애써 쌓아 올린 점수를 다 잃게 될 수도 있겠지만, 꼭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언젠가 한 번은 아들이 물어올 것을 예상하고 계셨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형에게 물어봤던 적이 있었습니다. 엄마에 대해.”

둘 다 후계 다툼은 생각지도 않았던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 형이 말했죠. 아버지가 싫어하시니까, 절대 그 말 꺼내지 말라고요.”

그때는 형도 어렸을 때였다.

“그날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마치 언급해서는 안 될 존재처럼 그렇게 지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애틋한 그리움은 없었다. 게다가 화무기의 등장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그를 막는 일에 집중되었다.

이제 화무기가 죽었으니 한번은 아버지에게 물어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실 뿐이었다.

검무극은 굳이 억지로 더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말씀해 주시겠지.

쏴아아아아아아.

* * *

“술 한 병 더 주게.”

무림맹주 진패천의 말에 점소이가 재빨리 달려와서 술을 주고 갔다.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진패천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객잔에 있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다시 주점에 들렀다.

천마신교를 도와주러 갈 때도 주점에 들러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짧은 일탈을 즐겼다.

그때는 여유가 없었는데, 지금은 차분히 이 순간을 즐겼다.

이번 역시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림맹주가 이런 객잔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으리라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는 사람을 만나도 고개를 갸웃하고 지나갈 것이다.

밥을 먹는 사람들, 술을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 가족끼리 식사하는 사람들, 표행 중인 표사들, 정말 많은 이들로 왁자지껄한 그곳에서 진패천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진패천의 눈에, 길가에 서서 객잔 안을 쳐다보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거지 몰골을 한 소년은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진패천이 망설이지 않고 손짓해서 아이를 불렀다.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가 이내 동생을 데리고 들어왔다.

입구에서 주인장이 아이들을 내쫓으려 했을 때.

“내가 부른 아이네. 이리 들여보내게.”

딱 봐도 보통 무인이 아님을 알 수 있었기에 주인장은 아이들을 얼른 그에게 보냈다.

“이 할아버지가 음식을 많이 시켜서 다 먹지를 못하겠구나. 요리를 버리긴 아까우니 너희들이 좀 도와주겠느냐?”

어린 동생은 몰라도 큰 애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아는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소년이 동생에게 먼저 음식을 먹였다. 허겁지겁 먹는 동생을 말렸다.

“천천히! 천천히 먹어.”

그렇게 동생을 먼저 챙긴 후에야 소년이 음식을 먹었다.

“몇 살이냐?”

“열두 살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학대를 받고 동생과 야반도주했다고 했다.

과연 이 아이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진패천은 편히 먹으라고 더는 아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밥을 다 먹었을 때, 진패천은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소년에게 주었다.

“이곳에 무림맹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네, 아까 오다가 봤습니다.”

“그럼 이대로 무림맹 지부로 찾아가거라. 이 서찰을 전해주면 동생을 굶기지 않을 일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소년은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다. 다른 곳에 가보라고 했으면 가지 않았겠지만, 무림맹 지부라면 적어도 자신을 어딘가로 팔아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겁내지 말고 꼭 가거라. 이 할아버지 믿고.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그렇게 소년이 꾸벅 인사를 한 후 동생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갔다.

두 아이가 떠난 자리에 한 사람이 걸어와 앉았다.

그는 바로 진하군이었다.

“맹주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진하군은 진패천이 떠나고 하루도 편히 잠이 든 날이 없었다. 괜히 할아버지께 부탁했나, 몇 번이나 후회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만나자는 할아버지의 긴급 전서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천살성의 격퇴보다 할아버지가 무사하다는 것이 훨씬 기뻤다.

“수하를 보내 저 아이들이 지부로 잘 찾아가는지 확인해라. 지부 사람들에게도 잘 말해주고.”

“네.”

진하군이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멸마대 수하에게 그대로 명령을 전했다.

진하군이 다시 자리에 앉자 진패천이 담담히 싸움의 결과를 전했다.

“여러 싸움이 있었지만 결국 천살성을 격퇴한 사람은 마교주였고, 놈의 마지막 반격을 막은 것은 소교주였다.”

진패천은 솔직한 심정을 손자에게 전했다.

“그들의 강함을 싸움 중에도 걱정했고, 싸움이 끝나고서도 걱정했다. 마교주가 정마대전의 헛된 꿈을 펼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이곳까지 오는 내내 그 걱정뿐이었다.”

한데 조금 전에 아이들을 먹이면서 한 가지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진패천이 손자에게 물었다.

“만약 네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저 아이들을 불러들여서 밥을 먹였겠느냐?”

진하군은 고민하지 않았다. 반드시 그랬을 테니까.

“네, 그랬을 겁니다.”

“그래, 그게 우리지.”

진하군을 소맹주로 삼는 과정에서 손자에 대한 신뢰가 더없이 깊어진 진패천이었다. 이제 그는 체면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았다.

“이 할애비는 마교주의 그 강력한 무공에 눌려 잠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잊고 있었다. 전쟁 걱정만 하고 있었지.”

진패천의 표정에 깃들었던 걱정과 고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에게 그 아이가 동생의 손을 놓치지 않게 해주려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린 지지 않을 거다. 긴 세월 정파 무림을 지켜온 건 마교주의 구화마공을 이길 초식이 아니라 그 마음이었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이 할애비는 잠시 잊었다.”

진패천이 목소리에 굳건한 의지가 담겼다.

“명심해라.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람은 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저 아이들을 지켜주려는 모든 이들이다. 우린 그들 모두를 지켜줄 거다. 그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할애비는 지금부터 더 노력할 작정이다.”

맑게 빛나는 진패천의 눈빛을 바라보며 진하군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멋있게 늙어간다고? 아니다. 멋있는 사람이 멋있게 늙는 거고, 멋없는 사람은 멋대가리없는 늙은이가 되는 거다.

“저는 꼭 할아버지처럼 멋있는 맹주가 될 겁니다.”

진패천이 미소를 지으며 차고 있던 군자검을 풀어 손자에게 내밀었다.

“네 검 받아라.”

* * *

오늘은 구화마공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대멸식 대 대멸식.

촤르르르르르륵륵.

양쪽에서 동시에 악귀들이 분열했다.

검우진 앞에 도열한 악귀들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수없이 대멸식을 펼쳤지만, 지금 아버지가 펼친 대멸식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게 이렇게 변형이 가능한 초식이었습니까?”

놀랍게도 아버지의 대멸식은 두 줄이었다.

원래 한 줄로 쭉 늘어서던 악귀들이었는데, 십이성 대성을 이루면서 두 줄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녀석들이 그렇게 말을 잘 듣는 녀석이었냐고요?”

분열하는 숫자 또한 더 늘어났기 때문에 정말 악귀 군대가 줄지어 선 느낌이었다.

“이건 반칙입니다, 아버지!”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버지의 악귀들이 앞으로 밀려들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

검무극의 악귀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검무극의 악귀와 첫 번째 줄의 악귀가 서로 충돌해서 소멸했다.

하지만 뒤이어 두 번째 줄에 있던 악귀가 덮치듯 밀고 들어왔다.

쾅! 콰앙!

검무극 앞에 세워진 대마벽이 무섭게 밀고 들어오는 악귀를 막았다.

어떤 작정이라도 하신 걸까? 오늘 아버지는 다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내공을 실어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죽을 뻔…….”

순간 검무극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과 아버지가 있는 곳에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죠?”

아버지의 뒤에서 천마혼이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심지어 경고조차 없었다. 강림 즉시 천마혼 뒤쪽 허공에 수십 개의 검 모양의 강기가 별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구화마공 제칠식 마혼창세.

검무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점멸보를 발휘해서 그곳에서 벗어났다.

슉슉슉슉슉슉슉슉!

쾅쾅쾅쾅쾅쾅쾅쾅쾅!

달아나는 검무극의 뒤로 아슬아슬하게 강기가 쏟아져 꽂혔다.

“아무리 마혼창세라도 저는 못 잡죠!”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애애액.

거대한 천마혼이 검무극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했다. 제팔식 마혼질주였다.

엄청난 속도로 검무극을 따라잡은 천마혼의 두 눈이 하얗게 변했다. 제 구식 천마지존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저 죽습니다!

“살려줘, 천마혼아!”

물론 자신의 천마혼을 부르는 외침이었다.

검무극이 대마벽을 세웠다.

지이이이잉!

마혼지존에 대마벽이 뚫리고 있었다. 만약 뚫렸을 때 이건 호신강기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천마혼도 멈추지 않았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차가운 눈빛에서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넌 죽는다!

다음 순간!

대마벽을 뚫고 들어온 강기와 새하얀 빛이 충돌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주위가 진동했다. 뒤집힌 바닥의 흙과 먼지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 사라진 그곳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마혼지존에도 그는 무사했다.

“아버지가 하신 것을 흉내 냈는데, 그게 통했습니다.”

검무극이 천마멸세를 발휘한 것이다. 모든 것을 소멸하는 천마멸세가 아니라 아버지가 빛의 검을 만들어서 화무기를 죽였던 바로 그 천마멸세였다. 검으로 만들어서 발휘하던 그것! 최강의 한 수를 최강의 한 수로 파훼한 것이다.

“죽을 상황이 되니까 그게 흉내 내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흉내 낸다고 흉내 낼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넌 십이성 대성을 이뤘다.”

십이성 대성을 이뤘기에 천마멸세를 변형시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며칠 전에 이뤘지. 너도 알고 있었지?”

검무극이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알고 있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아버지와 며칠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아들을 어찌 속였다고 야단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 다 자신을 어려워하는데, 아들만은 며칠이라도 함께 있으려 하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의 마음은 같았다. 검우진 역시 아들이 십이성 대성을 이뤘음을 며칠 전에 알았으니까.

“드디어 이뤘구나.”

“네, 드디어 이뤘습니다.”

“축하한다.”

“아버지 덕분에 평생을 들여서 이룰 대업을 쉽게 이뤘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검무극이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검우진도 아들만큼 좋아하고 있었다.

“네가 노력한 덕분이다. 고생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저 멀리 평원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마침 해가 지면서 붉은 석양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여기도 마지막이네요.”

잠시 그렇게 서서 석양을 바라보던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이다.”

검무극은 깜짝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석양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그리움이 스쳤다. 정말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검무극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시 어머니를 미워하신 걸까? 어머니를 만난 것을 후회하셨을까? 어떤 말 못 할 사연이 있는 것일까? 온갖 걱정을 했다.

한데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하셨다면.

“세상에서 제일 멋진 분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를 봤으면 아주 좋아했을 거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사시는 한.

“지금도 저를 보고 계실 겁니다.”

검우진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격정이 스쳤다.

그 감정을 감추려는 듯 검우진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석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 나가자.”

“네, 아버지.”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겼다. 시공이환술을 펼친 이래 가장 경쾌하고 기분 좋게, 딱!

교주님의 술상을 뒤집어엎지 마라

검무극과 검우진이 밖으로 나왔을 때, 마침 그곳에 휘가 음식을 가져다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의 등장에 휘는 반가운 얼굴로 포권하며 인사했다.

“교주님과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면서 검우진부터 살피는 그였다. 바깥과 내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해서, 혹시라도 교주에게 변화가 있을까 걱정해서였다. 다행히 검우진은 들어가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아저씨, 고생 많으셨죠?”

“아닙니다. 저야 음식을 나른 것뿐인데요.”

“숙수분들께 전하십시오! 이제 고생 끝이라고요!”

숙수들과 휘 덕분에 아버지와 자신이 잘 먹고 수련할 수 있었다.

“육포나 벽곡단만 먹었으면 아직도 못 나왔을 겁니다.”

휘가 검무극에게 정중히 말했다.

“큰 성취를 이루신 것 축하드립니다.”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표가 납니까?”

“아뇨, 이제 소교주님의 경지는 제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반박귀진의 경지는 예전에 넘어섰고, 이제 검무극은 무학의 마지막 경지에 가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중요한 순간이 아니었다면 동반 폐관은 들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들어간 폐관인데 아무 성과 없이 그냥 나오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휘는 두 사람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특히 누구보다 교주에 대해 잘 아는 그였다. 교주에게 중간에 포기란 없다.

검우진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극이가 본교 역사상 역대 최연소로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을 이뤘네.”

십이성 대성이란 말에 휘가 놀란 얼굴로 검무극에게 다시 축하했다.

“소교주님,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그야말로 천하에서 두 번째로 강한 고수가 된 것이다.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그 탁월한 성취를 생각하면,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휘에게 그보다 더 놀랍게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

‘교주님, 방금 제게 처음으로 아들 자랑하셨다는 것 아십니까?’

검무극이 그 공을 아버지께 돌렸다.

“제가 부모 복만큼은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잖습니까? 세상에 누가 있어 이렇게 젊은 저를 십이성 대성까지 이끌어주겠습니까?”

비단 이번 폐관 수련만이 아니었다. 이전에 십성 대성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아버지의 도움이 가장 컸다.

“알면 됐다.”

사실 검우진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무학의 완성은 멀고도 멀어 구화마공을 십이성 대성하더라도 아직 남은 길이 있음을 깨달은 경험이었으니까.

휘가 두 사람이 있을 때 전해야 하는 소식을 전했다.

“마존들과 마군, 귀영대가 모두 돌아왔습니다. 한데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암흑궁주와의 싸움이 끝나고 그곳에 남아 있던 큰 비궤를 천마신교 본단으로 옮겼었는데.

“수송하는 과정에서 비궤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약탈당하거나 분실한 것이 아니라,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일과 관련해서 지금 황천각이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검우진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비궤와 관련해서는 아들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조사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회귀시켜 준 노인이 비궤를 회수해 갔다는 것을.

비궤의 신묘한 효능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처음부터 비궤는 인간 세상의 물건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비궤는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간 것 같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살성의 몸에 여러 영혼이 들어간 것도 그 비궤 때문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반드시 회수해야 할 물건이었지만, 아들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분명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조사는 중단하도록 하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참, 그리고 아버지. 이번 기회에 천마보고 한 번 활짝 여시죠?”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했다.

“큰 싸움도 끝났는데 조만간에 마존들 다 모아서 대회 하나 개최하시죠? 상품으로 만년설삼 몇 뿌리 걸고요.”

“어떤 대회를?”

“마존들이 치고받고 싸울 수는 없으니 낚시대회 어떻습니까?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을 펼치는 거죠! 아버지와 저, 형도 참석하고요.”

낚시 이야기가 나오자 검우진의 얼굴에 호승심이 스쳤다.

“좋다!”

단번에 승낙한 검우진이 천마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고 휘가 그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던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찌 모르겠는가? 아들이 자신을 위해 마존들을 챙겨주라고 판을 깔아주는 것임을. 낚시대회를 핑계 삼아 고생한 마존들을 다독여주라고.

검우진과 휘가 천마전 쪽으로 걸어가고 난 후에도 검무극은 잠시 그곳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래 계획은 실컷 놀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평생을 통틀어 가장 힘든 수련을 하고 나왔다.

그랬기에 오랜만에 보는 진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말리지 마십시오! 저, 이제 진짜 놀 겁니다!”

아무 대답 없는 하늘에는 무심한 뭉게구름만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 * *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을 이뤘기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은 곧바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푸른 평원이 펼쳐졌다. 검무극은 이 넓은 공간에 잘 어울리는 존재를 불렀다.

거대한 천마혼이 강림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자신의 천마혼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다. 아버지의 천마혼이 달라졌듯, 자신의 천마혼도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가슴의 불꽃 문양은 더욱 크고 선명해졌고, 양쪽 손등에 천마혼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천마혼은 오른손등에만 새겨져 있었는데, 자신의 것은 양쪽 손등 모두 있었다.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몸의 곳곳이 이전과 달랐다. 훨씬 멋있고 세련된 모습이었는데 눈빛만은 더욱 무섭고 강렬했다.

“축하해. 십이성의 천마혼이 된 것.”

천마혼이 천천히 두 손을 모으더니 마치 인간처럼 포권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천마혼이 자신이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을 축하해 주고 있음을.

“고맙다, 친구. 우리 지금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사람 크기로 강림해 줘.”

그러자 천마혼이 사라졌다가 다시 작은 크기로 강림했다.

확실히 작은 모습의 천마혼이 훨씬 강렬한 느낌이었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이 바뀌었다.

검무극이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 작은 섬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새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 그곳에 넓은 잎을 가진 나무가 있었다. 그 그늘에 편안한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여긴 네 자리다.”

그 말에 천마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천마혼의 성격이 주인을 닮는다고, 확실히 검무극 천마혼의 반응은 남달랐다.

검무극이 먼저 의자에 반쯤 눕듯 기대앉았다.

“수련하는 내내 이곳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를 거다.”

검무극이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이렇게 앉아서 바다를 보고 있으면 온갖 걱정도 잠시나마 잊을 수가 있다. 네게도 걱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천마혼은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검무극이 바라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 십이성 되었으니까 말도 할 거지? 솔직히 너도 입이 근질근질하잖아? 아버지가 그러셨다. 과거에 주인과 대화를 나눈 천마혼도 있었다고. 네가 최초가 아니니 말하는 걸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말 좋아하는 주인의 천마혼이 말을 못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여전히 천마혼은 말이 없었다.

사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천마혼이 천천히 옆자리 의자에 앉았다.

검무극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천마혼을 쳐다보았다. 단지 앉으라는 명령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이 행동은 분명 자신과의 감정교류였다. 한 단계 더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천마혼은 무뚝뚝한 얼굴로 저 멀리 바다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 천마혼은 회귀 후 말 많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회귀 전 자신의 성격을 닮은 천마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자신의 성격을 닮은.

“그래, 둘 다 말이 많으면 너무 시끄럽겠지?”

그렇게 검무극과 천마혼은 말없이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 * *

“폐관 수련에서 벌써 나왔어?”

취마가 검무극을 보며 깜짝 놀랐다. 천마혼과 해변의 휴식을 취한 후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이 취마였다.

“교주님과 동반 폐관에 들었다고 해서 한참 있다 나올 줄 알았는데?”

불과 며칠도 안 돼서 나온 것에 놀란 모양이다.

“그렇게 됐어. 다친 곳은?”

“이제 괜찮아. 설마 이 형 걱정해서 온 거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진 술을 다 마시면서까지 치열하게 싸웠던 취마였다. 이번만큼은 꼭 먼저 챙겨주고 싶었다.

“형이랑 축하주 하고 싶어서.”

“좋지.”

취몽루 구석에 있던 술을 가져오려다 취마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아니다, 나랑 갈 곳이 있다.”

취마가 검무극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와 함께 도착한 곳은 대취림 깊숙이 있는 절대금지였다.

바로 주정이 담겨 있는 그곳.

검무극은 왜 취마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천살성까지 죽였으니 주정이 상했는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두 사람이 긴장된 마음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주정을 확인한 취마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주정이 상하지 않았다!”

취마가 큰소리로 환호했다.

“드디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취마는 정말 아이처럼 기뻐했다. 이 주정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

“좋지.”

남들은 미신으로 생각할지 몰라도 취마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축하해, 형.”

“고맙다. 우리 축하주는 여기서 하자.”

“좋지.”

취마가 금지에 보관해 둔 술과 술잔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주정 옆에 앉아서 술을 마셨다. 취마는 맑은 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있었다.

“술맛 끝내준다. 이건 못 마셔본 술인데?”

“아껴둔 술이다. 주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면 마시려고.”

“아껴둔 술이 끝없이 나오는군.”

“너 교주 되는 날 마시려고 담아둔 술도 있다. 그게 제일 아끼는 술이다.”

“형 은퇴할 때 마시려던 술이 최고 아니고?”

취마가 움찔하는 모습에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대취림의 절대금지에서 마시는 술은 또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셨을 때, 취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나중 일 미리 고민하지 마라.”

“표나?”

“얼굴에 고민이 가득하다.”

“알잖아? 내가 원래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 일어나지 않을 일도 미리 걱정하고.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나중 일이라고 미뤄두기가 쉽지 않네.”

검무극이 술을 비운 후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형, 나 조금 전에 이런 못된 생각까지 했어.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무림일통을 하려고 하시면, 이 주정이 다시 상했으면 좋겠다고. 그럼 이걸 내세워서라도 말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교주님은 주정이 상한 것쯤은 신경도 안 쓰실 거다.”

취마가 검무극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그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교주가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따를 사람이니까. 진하군이나 비사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와도 기꺼이 수행할 것이다.

취마는 잠시 자신의 손에 들린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불쑥 생각지 못한 말을 내뱉었다.

“교주님의 술상을 뒤집어엎지 마라.”

검무극이 취마를 바라보았다. 취마는 여전히 시선을 술잔에 둔 채 말을 이어갔다.

“교주님은 오랜 세월 무림일통이란 이름의 술을 마셨고 그 술에 취해 계시지. 한데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술상을 뒤엎고 찬물을 끼얹으면서 술을 깨게 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 아무리 아들이라도 말이야.”

검무극이 취마에게 물었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취마가 자신의 술잔을 비우며 대답했다.

“너도 그 술상에 앉아.”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일단 앉아서 생각해. 무작정 상을 뒤집을 생각 말고.”

아버지의 술자리에 앉는다? 그다음은?

“그러다 나도 취해버리면?”

“그건 나도 모르지.”

취마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검무극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주정뱅이 조언이 그렇지 뭐.”

“아니.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어.”

“정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취마의 말처럼 술상을 엎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술자리를 끝낼까만 생각했다.

한데 취마 말이 옳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고 부당한 일이다.

“전에 빙궁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형 참 똑똑해.”

취마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더해줘, 하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마존들 중에 형이 제일 똑똑해.”

“내가 술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통천각에 군사로 있을지도 모르지.”

고월은 교주가 되라고 했고, 풍천교주는 손주를 안겨주라고 했다. 그리고 취마는 아버지와 함께 취하라고 한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래, 형 말대로 그 술자리에 일단 앉아야겠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버지도 알고 계실 거야. 이 술자리의 숙취가 얼마나 지독할지.”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는 일이었으니까.

‘내가 술 상대가 되어 드리는 대신 영원히 술자리를 끝내지 않는다면?’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방향을 잡았다.

아버지를 무작정 막으려 들지 말아야겠구나.

취마가 금지의 구석에 챙겨둔 술을 한 상자 가져왔다.

“갈 때 가져가, 방금 마신 술이다.”

“이 귀한 걸 왜 줘? 그것도 상자째로?”

똑똑하다고 칭찬해 줘서 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 만나면서 놀 거라면서? 좋은 술은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그 좋은 분위기는…….”

취마가 술 상자를 내밀며 덧붙여 말했다.

“네가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교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냐?

차이란이 검무극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을 만났다.

“어?”

아무리 험악한 마인들과 마주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였는데, 그런 그녀를 당황하게 하는 유일한 사람, 그는 바로 검왕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교주께서 식사하자고 해서요.”

“나도 마찬가지요.”

검무극이 말도 해주지 않고 두 사람을 모두 불렀음을 알 수 있었다.

차이란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미 검왕도 아는 바였기에 이렇게 마주치니 너무 어색했다.

“들어갑시다.”

“네.”

맛있는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는 그곳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악 형, 왔어? 어서 오시오, 차 조장.”

마당에서 검무극이 요리하고 있었다. 큰 식탁에는 이미 술과 요리가 차려져 있었고, 그 옆에서 고기가 구워지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때 이안이 건물 안에서 술잔과 그릇, 젓가락을 챙겨서 들고나왔다.

차이란이 먼저 그녀에게 인사했다.

“대주님.”

“차 조장, 오셨어요?”

차이란이 탁자에 차려진 요리를 보며 이안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그러자 이안이 검무극에게 똑같이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취마님께서 좋은 술을 선물로 주셔서 친구들과 한잔하는 날이지. 더불어 우리 악형이 새로운 인생 설계를 발표하는 날이기도 하고.”

차이란이 무슨 뜻이냐며 쳐다보자 검왕은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당황했다.

차이란의 상황 파악이 끝났다.

“천살성까지 사라졌으니, 새로운 먹잇감이 필요해졌군요.”

그녀의 농담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쪽 출신이잖소?”

이번에는 차이란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 마시오! 오늘의 먹잇감은 제가 요리한 이 고기니까.”

검무극이 굽고 있던 고기를 잘라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넷이서 식사는 처음이잖아?”

검무극이 계획한 자리기도 했다. 이렇게 넷이서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검왕이 명분을, 취마는 좋은 술을 준 것이다.

취마의 술을 맛본 차이란이 그 맛에 감탄했다.

“정말 맛있어요.”

처음 마셔보는, 그야말로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두 사람 이어주려고 이 자리 마련하신 거죠?

―아닌데.

―그럼요?

―너랑 놀고 싶어서. 저 두 사람은 겸사겸사 덤으로 불렀지.

아닌 줄 알면서도 듣기 좋은 그 말에 이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전음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검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 검무극이 무슨 속셈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차이란에게 객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리라.

그때 차이란이 검왕에게 물었다.

“아직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으세요?”

이제 떠나고자 하는 마음은 완전히 버린 검왕이었다.

“떠나서 도착한 곳이 이곳인 것 같소.”

그 말에 차이란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참, 저희 조 검술 수련을 맡아주시기로 했잖아요?”

검무극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어려울 수도 있소. 악형이 새로운 사업을 계획 중이어서.”

“어떤 사업이죠?”

“중원 최대의 객잔을 지으려고 하고 있소.”

검무극이 그 객잔이 어떤 객잔인지 설명해 주었다. 호화롭고 멋지면서도 객잔 내에서는 절대 싸워서는 안 되는 규칙까지.

“지금 동업자를 구하고 있소. 야무지고 딱 부러진 성격이면 좋겠소. 우리 악 형이 은근히 마음이 약해서.”

검무극이 대놓고 본색을 드러냈다.

“차 조장은 이런 사업에 관심 없소? 투자할 돈도 많이 벌어두셨을 거고.”

차이란이 대답을 망설이자, 검왕이 나섰다.

“실없는 소리 그만해라.”

괜히 차이란이 부담스러울까 말린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그만둘 검무극이 아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사귀라는 게 아니야. 차 조장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거지.”

검무극의 시선이 차이란을 향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기회를 주고 있음을.

객잔 사업을 할 기회가 아니라, 이 악군학이란 남자를 붙잡을 기회를.

지금 악군학과의 관계는 애매했다. 차라리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렇게 어색하지는 않을 텐데.

뭔가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이렇게 어영부영 관계가 끝이 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저 객잔 사업을 진짜 진행하면 신교에서 만날 일도 없을 테고.

검무극의 눈빛은 마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 살수잖아? 목표가 눈앞에 있어. 놓치지 마!

이윽고 그녀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관심 있어요.”

차이란이 관심 있다고 할 줄 몰랐기에 검왕은 살짝 당황했다.

“저도 그 사업에 참여하고 싶어요.”

검왕이 그녀에게 물었다.

“객잔 운영에 관심이 있었소?”

차이란이 솔직히 대답했다.

“아뇨. 평생 객잔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한데 왜?”

차이란이 검왕을 응시하며 마지막 용기를 냈다.

“저는 여전히 당신의 오른쪽 발을 붙잡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지 검왕은 알 수 있었다.

천마신교에서 처음 그녀와 재회하던 날, 검무극이 장난치듯 말했었다. 악군학이 도망가지 못하게 자신이 왼쪽 다리 붙잡을 테니, 그녀에게는 오른쪽 다리를 꽉 붙잡으라고.

그랬기에 지금 그녀가 얼마나 용기를 내서 이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녀의 고백이었다.

검왕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천하제일미를 다툴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싫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그녀였기에 부담스러운 점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아직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도 했고.

“우린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않소?”

가만히 검왕을 쳐다보며 차이란이 대답했다.

“오래 본다고 잘 알게 될까요?”

그녀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나서, 당신의 인생을 바꿀 결심을 했나요?”

적어도 자신은 아니었다.

그리고 검왕 역시 아니었다. 아직도 검무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와 친구가 되었다. 한 사람의 좋은 단면을 보고, 그 강렬함에 취해서 인생을 바꾸었다.

검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차이란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후 말했다.

“부담가지지 마세요. 오늘이 아니면 영영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했던 거니까요. 사업 번창하시기를 바랄게요.”

그녀가 검무극과 이안에게도 인사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술이랑 음식 너무 맛있었어요.”

후회는 없다. 이렇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보내면 내내 후회했을 테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검왕이 힘차게 말했다.

“합시다.”

차이란이 놀라서 검왕을 쳐다보았다.

“우리 같이 객잔 차립시다.”

검왕이 술을 받으라고 술병을 들었다.

“객잔 안에서 싸우지 말랬는데 끝까지 말 안 듣는 놈들 두들겨 패 가며 둘이서 한 번 해봅시다. 망하면 둘이 함께 저 친구 욕 실컷 합시다. 이런 이상한 객잔 차리라고 꼬셔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고.”

차이란이 다시 앉아서 검왕의 술을 받으며 말했다.

“전 시작 안 하면 안 하지, 하면 중원제일객잔으로 반드시 만들 거예요.”

그 기세에 검왕이 내심 움찔했다. 이래서 그녀가 필요하단 말이겠지?

차이란이 뒤늦게 이안을 보며 말했다.

“참, 대주님께 먼저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이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게요. 무단이탈은 중죄인데 어쩌죠?”

“이건 어때요? 대주님과 소교주님은 우리 객잔에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드리죠.”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네요.”

그 사이 검무극과 검왕이 전음을 나누고 있다.

―이건 변수인데? 악형! 벌써 차 조장에게 객잔 빼앗긴 것 같아! 어쩌면 악형까지도.

―날 이 길을 가게 하고 너만 빠져나갈 생각 마라.

―난 악형이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보고 판단해야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객잔이나 한 번 해볼까 했던 생각이었는데, 검무극은 그 객잔을 중원제일의 객잔으로 키웠고, 천하제일미와 함께 하라고 판을 만들어주었다.

무림맹주도 사도맹주도 자신을 데려가려고 그렇게 눈치 보고 애썼는데, 이 소교주는 자신을 이렇게 내보내려고 한다. 네 인생 살라고.

‘고맙다, 친구.’

검무극이 술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자, 우리의 평생 공짜 객잔을 위하여!”

* * *

다음 날, 검무극이 술병을 들고 천독림을 찾아갔을 때, 독왕의 오른팔 상선이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교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소교주님, 대적을 격퇴하신 것 감축드립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가는데 상선이 뜻밖의 말을 했다.

“참, 오늘 놀라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마가촌 싸움 이후 독왕님이 조금 변하셨습니다.”

“설마 아예 외부와 문을 닫고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지셨습니까?”

그러자 상선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네?”

“만나보시면 아실 겁니다.”

상선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검무극이 독왕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독왕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홀로 있었다. 커다란 작업대에 걸터앉아 있던 독왕이 고개를 들어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왔어?”

먼저 인사하는 독왕의 낯선 모습에 검무극은 흠칫 놀랐다. 항상 어딘가에 푹 빠져 있던 그였는데.

“밥은 먹었냐?”

심지어 식사했는지까지 챙기는 모습에 검무극이 소리쳤다.

“너 누구냐? 누군데 독왕님 몸에 들어가 있어?”

독왕이 웃으며 검무극이 들고 있던 술병을 보았다.

“그거 술이냐? 이리 가져와라.”

완전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상선이 왜 놀라지 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가 가져온 술을 그에게 건넸다.

독왕이 병째 술을 마셨다. 그는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소맷자락으로 닦았다.

“방금 아쉽게도 혈사맹독(血蛇猛毒) 배합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성공할 줄 알았는데. 한데 무슨 술이 이렇게 맛있냐?”

“술은 취마님이 주신 술이라 맛있습니다만.”

검무극이 독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분이셨습니까?”

“내가 어땠는데?”

“말씀도 없으시고, 만날 딴생각에 푹 빠져계시고.”

“그러면 안 되지. 독을 다루는 사람은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지.”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멍하게 독충이나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어찌 수백, 수천 명을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독을 다룰 수 있겠는가?

고독한 모습의 자신이 있는 것처럼, 독왕도 다른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마불님! 이것 보세요. 지금까지 완전히 속고 계셨습니다! 이런 냉철한 사람에게 약초꾼으로 이용당하신 거라고요!”

검무극의 외침에 독왕이 옅게 웃으며 술병을 내밀었다. 검무극도 시원하게 쭉 마신 후에 다시 물었다.

“왜 그런 연기를 하셨습니까?”

“연기 아니었다.”

“그럼요?”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만으로는 독공의 극의를 깨닫지 못하니까. 독에 미쳐서 온종일 독충을 보고, 독 생각만 해야 독공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

자신만의 세상에 푹 빠져야 할 때는 빠져야 하고, 또 이렇게 이성적이어야 할 때는 이래야 하고.

양쪽 모습이 다 있어야만 진정한 독공의 마지막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독을 잘못 쓰면 자신만 죽는 게 아니다. 가족도 죽고, 동료도 죽고, 지나가던 사람까지 다 죽는다. 그렇기에 독에 미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애초에 독공을 배워선 안 되지.”

아마도 독왕은 그 상반된 두 모습 중 더 편한 쪽이 자신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을 때였을 것이다.

한데 지금은 그쪽 세상의 문을 닫고, 이쪽으로 나온 것이다. 아마 내일 찾아와도, 모레 찾아와도 이 모습 그대로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버지 때문이죠?”

술을 마시던 독왕이 흠칫했다.

지금까지 독왕의 존재는 가장 강력한 전쟁억제력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독왕은 본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 똑똑한 독왕은 아는 것이다. 천살성의 죽음으로 이제 진짜 싸움이 벌어질 것임을.

소교주를 지켜주는 그런 싸움이 아니라 아버지의 무림일통 전쟁이 시작될 것임을. 결국 독왕의 이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독왕이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검무극은 술병을 건네주며 말했다.

“제게 해약 만드는 법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만독불침이 무슨 해약이냐?”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무림일통을 막을 수 있는 해약 말입니다.”

독왕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말과 행동이 달라졌다 해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자신과 개 짖는 소리를 냈던 그 독왕이었다.

“독을 제대로 알아야만 해약을 만들 수 있지.”

예전에 독왕이 말했다. 독공의 꽃은 하독이 아니라 해독이라고.

“너는 교주님이 꿈꾸는 무림일통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냐?”

아직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어떤 세상을 꿈꾸시냐고.

“해약을 만들고 싶으면 그게 어떤 독인지 정확히 알아야겠지.”

독왕의 조언은 취마의 조언대로 그 술상에 앉았을 때, 맨 처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조언이었다.

검무극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독왕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해약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왔습니다.”

하지만 독왕은 해약의 실마리만 주지 않았다. 그 독을 정말 해독해야겠냐는 고민도 안겨주었다.

“그날 교주께선 죽음을 각오하셨다.”

그때를 떠올리는 독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너만은 반드시 살리려 하셨지. 진심이셨다.”

독왕에게 내 안위를 맡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 명령을 받던 독왕의 심정도.

“마지막에 아들을 맡긴 사람이 독왕님인 걸 보면, 아버지가 제일 믿는 사람이 독왕님이셨나 봅니다.”

독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어쩌면 독왕과 아버지의 관계는 회귀 전 나와 아버지의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오해와 경직과 선입견이 벽으로 가로막고 있는.

“언제 아버지와 허심탄회하게 독공에 대해 말씀을 나눠 보십시오. 오늘 이런 모습도 보여주시고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겁니다.”

교주와 대화하라고? 그건 독왕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늘처럼 아무리 노력하고 신경 써도 독 배합에 실패하는 날이 있지.”

그러자 검무극이 넌지시 말했다. 아버지와 독왕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저도 해약 제조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이건 정말 비밀인데 특별히 네게만 알려준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속삭였다.

“오늘부터 낚시 연습 하십시오.”

가면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검무극이 독왕을 만난 후 거처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 서대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내 오른팔!”

검무극이 반갑게 서대룡을 맞았다.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모습에 바쁘신데 괜히 찾아왔나 기다리는 내내 했던 걱정이 풀어졌다.

“바쁘신 줄 알지만, 그래도 얼굴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잘 왔다. 들어가자.”

“아닙니다. 얼굴 뵈었으니 됐습니다.”

“난 안 됐어. 어서 들어와.”

검무극이 먼저 들어가자 어쩔 수 없이 서대룡이 따라 들어갔다.

“영하는 잘 크고 있지?”

서대룡은 아들 이름을 이렇게 기억해 주는 검무극이 너무 고마웠다.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습니다.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 녀석 눈에 선하다. 데려오지 그랬어?”

“아들 좋은 건 좋은 거고. 저도 자유가 좀 필요해서요. 그거 모르시죠? 소교주님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지만 이건 모르실 겁니다.”

서대룡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과장되게 말했다.

“무공 수련보다 애 키우는 게 더 힘들어요.”

그 말에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밤에 깨서 잠을 못 자게 하더니. 이제는 잠시만 한눈팔아도 어찌나 사고를 치는지. 부딪치고 엎어지고 삼키고. 혹시 소교주님이 저희를 보는 심정이 이러셨습니까?”

그러면서 서대룡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혼인도 안 하신 분 앞에서 괜한 말을 했죠?”

“아니, 이 분야에 있어서는 네가 내 선배잖아? 모든 정보를 전수해줘. 자자, 일단 앉아라.”

마당의 탁자에 서대룡을 앉힌 후 검무극은 구석에 놓여 있던 상자에서 술을 꺼내왔다. 술 상자에서 술이 한 병씩 사라질 때마다 검무극 앞에 있는 사람이 달라지고 있었다.

“취마께서 주신 특별한 술이야. 맛이 끝내준다.”

서대룡이 슬쩍 상자에 남은 술을 살폈다. 몇 병 남지 않았다. 마존들만 챙겨도 술이 모자랄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술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검무극이 어찌 서대룡이 눈치 보는 걸 모르겠는가?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마개를 열더니 서대룡에게 따라주었다.

“마셔라.”

“이 귀한 술을 제게 주셔도 됩니까?”

“귀한 술이니까 널 주지.”

서대룡이 감격스럽게 말했다.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제가 죽을 때까지 매일 욕하셔도 됩니다.”

“막상 싫은 소리 한 번만 들어도 당장 이 생각부터 들 거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서대룡이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술맛이 정말 황홀할 정도입니다.”

취마의 말대로 좋은 술이 주는 힘이 있었다. 기분이 더 좋아져서 한마디 할 것을 두 마디 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서대룡의 아내인 단아와 처제들의 안부도 듣고, 이번 싸움의 승리로 아버지와 자신의 인기가 교내에서 하늘을 치솟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검무극이 슬쩍 물었다.

“대룡아, 만약 영하가 커서 네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결사반대하면 너는 어떤 기분이 들까?”

“우리 아들이요?”

다른 때도 아니고 힘든 육아의 고통에 시달리는 요즘이었기에.

“금이야 옥이야 키운 제 아들이요?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키운 제 아들 말씀이십니까? 녀석을 위해서 제 목숨도 기꺼이 내줄 수 있는데. 그렇게 키웠는데 아버지, 싫습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이런다고요? 그랬다간 비무대로 끌고 가서 그냥!”

목청을 높이던 서대룡이 이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지금부터였다.

“섭섭하겠지만 결국은 아들을 이해하고 아들 말을 따를 겁니다.”

“왜?”

“왜냐하면 제 아들이 반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아들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아뇨,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믿어도 되게끔 잘 키울 겁니다. 소교주님처럼요.”

검무극이 살짝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좋은 자식처럼 보이냐?”

“그럼요. 제 아들도 소교주님 같은 아들로 크기를 얼마나 바라는데요. 우리 부부 소원입니다.”

이내 서대룡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백날 아이에게 넌 소교주님처럼 커야 해! 라고 말해도 제 자식이니 서대룡처럼 크겠죠. 그래서 제가 더 멋있어지려고 노력할 겁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아버지가 된 서대룡은 예전보다 어른스러워졌다. 독왕만큼이나 서대룡의 변화가 느껴진다.

검무극이 서대룡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멋지다, 내 오른팔. 오늘 나랑 저 술 다 마시자. 육아에서 오늘만큼은 완전히 탈출하는 거다! 어쩔 거야? 아빠가 좀 취하시겠다는데. 단 소저, 오늘 당신 남편은 내 것이네!”

서대룡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 귀한 술을 자신과 다 마시자고 한다. 마셔야 할 마존들이나 다른 중요한 사람들이 남아 있을 텐데.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식상해하며 인상을 찌푸릴 거다.

―너는 또 소교주에게 감격이냐? 네가 소교주에게 느낄 감정이 감격밖에 없냐?

그런데 어쩌겠는가? 검무극이란 사람이 주는 감동은 이렇게나 변함없는 것을.

만약 자신이었다면 이놈 저놈 다 가리고 가려서 내게 누가 제일 도움 되나 저울질해서 붙였을 오른팔인데.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을 이 귀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오른팔로 삼아주고 있었다.

검무극이 술을 더 가져오겠다고 술 상자로 갔을 때.

서대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후다닥 입구로 달려갔다.

“앗! 제 처가 뭘 사 오란 것을 깜박 잊고 있었습니다. 저 먼저 갑니다, 소교주님!”

* * *

다음 날 검무극이 술 한 병을 들고 찾아간 사람은 권마였다.

“사부님!”

검무극이 찾아갔을 때, 권마는 웃통을 벗은 채 마당에서 권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사부님이 아직도 더 수련하실 게 남았습니까?”

“아니었다면 천살성은 내 주먹에 죽었겠지?”

여전히 수련에 열중하는 권마를 보며 검무극이 가져온 술병을 옆에 내려두었다.

“이 술은 취마님이 선물로 주신 술인데, 뒀다가 나중에 이안이랑 같이 드십시오. 맛이 끝내줍니다.”

그렇게 옆에 서서 권마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사부님이 주먹을 휘두르시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검무극이 웃통을 벗고 수련에 뛰어들었다.

경지에 오른 두 벽력수라권이 허공에서 예술을 만들었다.

똑같은 동작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아버지가 어머니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순간 권마의 주먹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랬냐?”

“네.”

권마에게 어머니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권마의 주먹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으니까.

수련이 끝나자 권마는 무슨 생각인지 검무극을 그 절벽으로 데려갔다.

검무극이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절벽은 변함이 없네요.”

“어떠냐? 이제는 일권에 무너뜨릴 수 있을 거 같으냐?”

검무극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모든 내공을 이 주먹에 실으면, 일권으로 저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권마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네게 이 절벽은 어떤 의미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검무극은 쉽게 그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에 대해선 권마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일권에 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어도 아마 무너뜨리지 않을 거다. 실력을 자랑하는 성격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절벽이 무너지면 이곳에 사는 나무며 동물이며 다 죽겠구나, 생각하겠지. 그냥 놔두면 조화롭게 살아갈 텐데 하면서.”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무너뜨릴 수 있어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기에.

“자, 올라가자.”

“이 절벽은 오르는 용도가 아니라 무너뜨리는 용도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권마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 큰 몸이 가볍게 절벽을 타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절벽에 튀어나온 부분을 밟아서 도약하며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이제 검무극은 중간 도약 없이도 정상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지만, 권마가 밟은 곳을 그대로 따라 밟으며 날아올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절벽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서 내려다보자 동권문은 물론이고 본단의 정경이 훤히 보였다. 저 멀리 천마전의 모습까지 보였다.

“얼마 만에 올라와 보신 겁니까?”

“이 절벽을 무너뜨려야겠다고 결심하고부터는 올라온 적이 없다.”

검무극은 권마가 이제 그 결심을 완전히 버렸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변화가 권마가 강해졌다는 증거기도 했다. 그의 목표가 절벽이 아니라 마음속 무엇인가로 바뀌었다는 뜻이었으니까.

휘이이잉.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나부꼈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권마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교주님에게 무림일통은 내게 이 절벽과 같은 의미였을 거다.”

검무극이 옆에 선 권마를 바라보았다. 권마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항상 생각하며 목표로 삼았던 대상이었겠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셨을 거다. 절벽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던 내 열망만큼이나.”

권마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설득할 수 있어도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마존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권마만큼은 아버지 옆에 서 있기를 바랐으니까. 물론 애초에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을 사람이긴 했지만.

검무극은 문득 한 가지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 혈천도마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 아버지가 사부님과 함께 중원을 종횡하며 싸우러 다녔을 때, 어느 날 아버지가 교로 돌아와서 도마 어르신께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가 전해준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했다.

“이 무림 내가 가져야겠네.”

어쩌면 그날이 아버지가 처음으로 무림일통의 꿈을 세웠던 날이 아니었을까?

“왜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말없이 서 있던 권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권마는 알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네 엄마 때문이었지.”

검무극이 깜짝 놀란 얼굴로 권마를 쳐다보았다. 더 알고 싶으면 교주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듯, 권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저 멀리 천마전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침묵을 깼다.

“사부님, 다른 이유를 다 떠나서 이 절벽을 무너뜨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며 기분 좋게 말했다.

“여기 경치가 너무 좋습니다.”

* * *

팔마존의 수하들 중 가장 열렬히 검무극을 환영하는 이들은 혼자 있을 때는 멀쩡하지만 일단 모이면 이상한 그들, 바로 악인곡의 무면객들이었다.

함께 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기에 그들은 검무극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나무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무면객들도, 길을 지나는 무면객들도, 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모여 있던 무면객들도, 모두 환한 웃음으로 검무극을 맞이했다.

그렇게 무면객들의 환대를 받으며 검무극은 극악소마의 거처에 도착했다.

“소마님! 저 왔습니다!”

극악소마가 반갑게 검무극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검무극이 술병을 내려놓았다.

“취마님께 받은 술입니다. 맛이 정말 좋습니다.”

이제 극악소마의 방에는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탁자도 있었다. 물론 함께 뭔가를 마시거나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검무극뿐이었지만.

“폐관 수련은 어떠셨습니까?”

검무극은 극악소마에게 시천비술에 대해 말해주었다. 또한 무공의 성취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꽤 오랜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지냈습니다. 결국 구화마공 십이 성 대성도 이뤘고요.”

극악소마는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정중히 예를 갖추며 축하했다.

“소교주님 나이에 십이 성 대성은 천마신교 역사에 전설로 남을 겁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축하주 꼭 마셔야겠습니다.”

“물론이죠.”

두 사람이 탁자에 마주 앉았다.

“교주님과는 어떠셨습니까?”

“좋았습니다.”

다시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약해지더군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출정하자, 했을 때 저는 못 갑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극악소마에게는 다른 마존들에게 하지 않았던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솔직히 아버지를 거역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이렇게 합리화하게 되더군요. 무림일통을 이루면 마정사로 나눠져서 싸우는 것보다 무림이 더 행복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의 큰 희생이 미래의 더 많은 희생을 막는 건 아닐까? 또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이 무림이 아버지에 맞서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곳일까?”

극악소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조언을 듣고, 어떻게 해야지 계획도 세웠지만, 과연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극악소마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오랜만에 보는 극악소마의 얼굴이었다.

“가면을 벗은 제 모습이 어떻습니까?”

“말해 뭐하겠습니까? 미남 사인방에서 제가 첫 번째라고 우기는 게 부끄러워지죠.”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벗은 것이 아니라는 듯 극악소마가 다시 물었다.

“가면을 벗은 저는 여전히 극악소마입니까?”

“어색하고 낯설기는 해도, 여전히 소마님이시죠.”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이제 소교주님도 가면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좋은 아들이라는 가면을요.”

극악소마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 일이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는가 하면, 그 가면을 벗지 않고 싸우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응시하며 물었다.

“가면을 벗기가 두려우십니까?”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벗을 수 있습니다.”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마음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교주님의 가면 벗은 모습이 두려우신 거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여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아쉽지만 이 싸움은 애초에 가면을 쓰고 싸울 수 있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평소 말이 없는 극악소마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교주님의 가면도 벗게 하셔야 합니다. 만약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가면을 벗지 않고 싸운다면 한쪽이 양보한 싸움이 될 테고, 그 싸움은 평생의 후회와 한을 남기게 될 겁니다. 먼 훗날 죽는 순간에 그 일을 떠올리게 될 겁니다. 그러니 교주님의 낯선 얼굴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축하주는 진짜 싸움이 끝났을 때 마시자는 듯, 극악소마는 탁자에 벗어둔 가면을 다시 썼다.

“그리고 소교주님 뒤에 제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세상이 사기꾼들로 가득합니다

검무극이 마불을 찾아갔을 때, 그는 법당에 앉아서 낚싯대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를?”

마불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낚싯대 말입니다.”

“낚싯대가 왜? 그냥 할 일도 없고. 세월이나 낚아보려는 건데.”

“단지 그 이유뿐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나?”

검무극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마불 옆에 앉았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닙니다.”

마불이 다시 낚싯대로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요즘 마존들 만나고 다닌다고 바쁘다면서?”

“그것도 아시고.”

낚시를 하려는 게 우연일까? 그럴 리가!

극악소마가 낚싯대를 가지고 있으면 그건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마불이라면?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체 낚시대회가 열린다는 걸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검무극은 그가 사전에 대회가 있을 것을 알아냈음을 확신했다.

과연 마불은 낚시대회라는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이제 예전의 나로 돌아오라고. 과거의 내가 본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르는 게 있었던가? 심지어 낚시대회가 열리는 장소까지 알고 있네.”

“소교주인 저도 모르는 것을! 정말 멋지십니다!”

오랜만에 검무극이 그를 치켜세워주었다.

“우리의 작은 거인 마불님이 드디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야심 찬 권력의 화신! 우리 마불님이 돌아오셨습니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마불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장난기가 스쳤다.

“한데 낚시는 잘하십니까?”

“소싯적에 좀 했지.”

낚싯대를 다루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독왕이 일 등 해야 하는데. 독왕 밀어준다고 극악소마에게도 말 안 했는데.

“일 등을 목표로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자고로 부처께서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혈불은 다르시네. 가질 수 있는 건 어떻게든 뺏어서 다 가지라고 하시네.”

어디 손놀림만 빠른가? 마불은 눈치도 빨랐다.

“왜? 따로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요. 제가 또 승부욕의 화신이지 않습니까?”

독왕을 밀어주려는 걸 들켜선 안 된다. 그래야 어떻게든 우승시키지.

마불이 다시 낚싯대의 줄을 정리했다. 검무극은 그 옆에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져온 술을 그에게 주었다.

“참, 이 술 뒀다가 나중에 드십시오. 취마님이 아껴두신 술을 내주셨습니다.”

“이 귀한 술을 그냥 주지는 않을 테고. 원하는 게 뭔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제 고민이 뭔지 아시잖습니까?”

마불이 들고 있던 낚싯대를 법당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네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교주지.”

검무극이 차분한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어쩌면 좋겠습니까?”

“부지런히 돌아다니던데, 이미 답을 찾지 않았나?”

마존들이 각각 전해준 해법을 모두 합치면 하나의 답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마불의 생각은 꼭 필요했다.

마불만의 남다른 통찰력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마존분들 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분이 마불님이시잖습니까? 마불님 말씀은 꼭 들어야죠.”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임을 알아도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짙어졌다.

“내가 해줄 말은 하나네.”

마불은 이 상황을 감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단 한마디의 해결책을 내놓았다.

“명분.”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전쟁을 포기할 수 있는 명분을 드려야 한다는 뜻이군요.”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에게는 아버지지만 우리에게는 교주님이시네. 안 보는 것 같지만 교의 모든 이들이 교주님을 지켜보고 있네. 교주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리는지. 그 하나하나의 결정들이 모여서 권위가 되고 충성심으로 이어지는 거지.”

마불이 다시 강조했다.

“반드시 포기할 수 있는 명분을 드려야 하네. 지켜보는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을. 그게 가장 중요하네.”

검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권력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 왔던 마불이 해주는 값진 조언이었다.

“감사합니다, 마불님. 제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때? 술값은 했나?”

“어디 이 술 한 병값에 비하겠습니까? 당장 가서 대취림에 있는 술 전부를 훔쳐 오겠습니다.”

하지만 마불은 그 한 병의 술마저도 받지 않았다.

“이건 가져가서 다른 사람 주게.”

“왜 그러십니까? 이 술 엄청 맛있습니다.”

“이미 마셔봤네.”

“네? 마셔봤다고요?”

“어제 취마존이 와서 같이 한잔했네.”

검무극이 깜짝 놀랐다. 취마가 마불을 찾아와서 술을 마실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에 암흑궁주와 싸우는 과정에서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특히 그림 속 싸움에서 마불이 스스로 희생하려는 모습에서 취마는 크게 감동했었다.

“정말 마불님은 인복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한 사람을 잃으니 다시 한 사람이 생기는군요.”

“누굴 잃었다는 건가?”

“아, 아직 안 만나보셨죠? 본색을 드러낸 독왕님을 만나보시면 이 무림 최고의 사기꾼이 누군지 알게 되실 겁니다. 꼭 가셔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갖다 바친 독초도 다 뺏어 오십시오.”

마불은 독왕이 검무극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 속고 속아주고 하는 거지.”

득도한 노승처럼 구는 마불을 두고서 검무극이 술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럼 이 술은 도로 가져갑니다. 집에 안 들러도 되겠네요.”

“또 누구에게 가져다주려고?”

“검존님께 갑니다.”

“내 조언을 들었는데 다른 조언이 필요해?”

검무극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검존님께는 다른 걸 여쭐 겁니다.”

* * *

검무극이 일화검존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검존 역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옷에 화사한 화장까지 한 그녀였다.

“오랜만에 화장 한번 해봤네. 어떤가?”

“너무 눈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한동안 일절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았던 그녀였다. 화장은 물론이고 옷도 무복만 입고 다녔다.

그러던 그녀가 오늘은 더없이 우아하고 화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이 단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내일 행사도 있으니 오랜만에 좀 꾸미고 가려고 미리 연습해 본 거네.”

“내일 무슨 행사가 있습니까?”

“자네 아직 모르나?”

그때 마침 수하가 그녀에게 낚싯대를 가져왔다.

“엇? 검존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다니?”

“낚시대회 말입니다.”

“아까 교주님이 사람을 보내서 알리셨네. 내일 마존들과 함께 다 같이 낚시나 하러 가자고. 월척을 건진 사람에게는 상품도 준다고 하셨네.”

검무극이 눈을 껌벅였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마불이 자신에게 장난을 쳤음을. 이미 천마전에서 온 기별을 받았으면서 알아낸 척했던 것이다.

작은 거인 취소입니다! 내 칭찬 돌려내십시오! 아니, 그리고 아버지. 날짜를 정했으면 아들에게 먼저 기별을 해주셔야지요! 낚시 이야기도 제가 꺼냈다고요!

정말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러나?”

“세상이 사기꾼들로 가득합니다.”

“지금 자네 앞에도 있네.”

화장한 여인을 조심하라는 의미임을 알고 검무극이 그녀와 함께 웃었다.

“참, 이 술은 취마님이 아끼던 술입니다. 제게 한 상자 주신 것을 마존분들께 한 병씩 선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 술 알고 있네.”

“어떻게 아십니까?”

“한 병만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주던 술이었거든. 이걸 자네에게는 상자째 줬군.”

그뿐만 아니라 그 술을 마불님에게 가져가서 둘이서 마셨습니다.

차마 그렇게 일러바치지는 못했기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결국 이렇게 검존님께 갈 줄 알았을 겁니다.”

“그 주정뱅이 편들어 주지 말게.”

일화검존과 취마는 친구 사이였기에 이렇게 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소교주.”

“네, 검존님.”

“자네가 마존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네. 자네를 지지해서 교주님을 말려주기를 원하겠지. 아닌가?”

“맞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비무 친구가 그저 허울 좋은 말이 되고 말겠지만, 나는 자네를 도울 수가 없네. 나는 교주님의 뜻을 따를 거네.”

일화검존은 자신의 의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검존님의 마음 이해합니다. 그 일로 섭섭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비무 친구는 허울만 좋은 게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남을 겁니다.”

일화검존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말이라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비무 한 번 하실까요?”

일화검존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자신은 도와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소교주는 자신에게 도움을 주려 한다.

“비무야 언제나 환영하는 바네.”

그녀의 실력은 계속 향상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실력을 확인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확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다른 마존과 비무를 펼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교주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이제 생사대전을 펼칠 적들조차 사라진 상황.

그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그 역할을 검무극이 해주고 있었다. 너를 도울 수 없다는 말을 내뱉은 이 순간에도.

정말 교주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반드시 소교주를 위해 나섰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검무극도 일화검존도 마지막 비무를 펼쳤을 때와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검존님과 비무를 하면 항상 마음이 설렙니다.”

“나만큼은 아닐 거네.”

그렇게 두 사람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경지가 달라졌듯 이번 비무도 달랐다.

다른 날처럼 격렬하지 않았다. 비무는 차분하고 우아했다. 지금까지 나눴던 비무 중에서 제일 치열하지 않은 비무였다.

그들의 검은 같은 궤적을 두 번 다시 그리지 않았다. 끝없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는 화공처럼, 검은 새로운 선을 계속 그려나갔다.

오늘의 비무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끌어주었듯,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느꼈다. 소교주의 검이 자신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검이란 무엇인가?

검존이라 불리는 그녀인데 어찌 그에 대한 대답이 없겠는가?

여러 대답이 있었다. 그 대답은 그녀 인생에서 평생을 두고 변했다.

검이 힘이었을 때도 있었고 두려움일 때도 있었다. 검이 벽이었을 때도 있었으며 자유일 때도 있었다. 죽음일 때도 있었고, 삶이었을 때도 있었다. 명예일 때도 있었고, 죄책감일 때도 있었다.

그녀 인생에서 검의 의미는 끝없이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검무극의 검이 묻는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았다는 의미.

그렇게 비무가 끝이 났다.

그리 길지 않은 비무였지만 일화검존에게 가장 많은 것을 남긴 비무였다.

일화검존은 방금 펼쳤던 비무를 떠올렸다. 예전이라면 생생하게 기억이 났을 공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이런 정신으로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소교주가 봐준 것일까?

“소교주, 나는 검을 베면 벨수록 세상이 또렷해지는 줄 알았네.”

“아닙니까?”

“베면 벨수록 세상은 더 흐려지고 있네. 내가 나이를 먹는 것인가? 검이 나이를 먹는 것인가?”

일화검존이 움켜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단계로 오른 게 아니라 퇴보한 것일까?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막연하고 뿌옇게 느껴지는 거지?

검무극의 눈빛은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하고 있다는 듯 깊고도 차분했다. 모든 것이 해체되는 듯한 그 순간의 당혹감은 자신도 지나온 길이었으니까.

“저는 산에 올랐을 때 안개가 자욱이 낀 모습을 좋아합니다. 신비롭고 아름답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만의 느낌이 있지요. 그 순간만큼은 안개도 산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일화검존은 그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너무 완벽한 경지를 찾으려 애쓰지 말라고.

흐릿하면 어떻고, 안개가 끼면 어떠냐고.

흐릿해서 한 부분이 보이지 않으면 전체를 더 잘 보게 될 거라고.

젊어서는 그 부분 부분들이 너무나 또렷하기만 해서 오히려 안개처럼 깊은 세상의 흐릿함을 즐길 수 없다고.

그 생각에 이르던 순간 초조함으로 검을 움켜쥔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검을 부드럽게 쥐는 순간 일화검존은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자신의 검에 새로운 검로(劍路)가 주어졌음을.

일화검존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마존과 소교주와의 관계를 떠나, 한 사람의 무인이 앞서가는 다른 무인에게 바치는 존경이었다.

“내게 끝없이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줘서 정말 고맙네.”

검무극도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하며 대답했다.

“제가 가는 길이 외롭지 않아서 저도 행복합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화장도 하고 싶을 때는 하고 말고 싶을 때 말 거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결국은 외모에 신경 쓰는 일일 테니까.

검무극은 헤어지기 전에 그녀에게 물어볼 말이 있었다.

“한 가지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제 어머니에 대해서입니다.”

순간 일화검존의 표정이 표가 나게 굳어졌다.

“갑자기 왜 묻는 건가?”

“이번 폐관에서 아버지께 어머니에 대해 여쭸습니다.”

“뭐라고 대답하시던가?”

검무극은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전했다.

“유일하게 사랑하신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일화검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주께서 유일하게 사랑하신 분이지.”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당혹해한다는 걸.

잠시 말이 없던 일화검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마후(魔后)를 좋아하지 않았네.”

검무극에게 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미워하는 쪽에 가까웠지. 그건…….”

일화검존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여러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습니다. 죄송합니다, 검존님.”

일화검존이 아버지를 좋아해서 단지 질투로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아버지에 대한 일화검존의 충성심은 언제나 맑고 깨끗했으니까. 분명 다른 사연이 있는 것이리라.

“그럼 내일 낚시터에서 뵙겠습니다. 내일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셔서 도마 어르신을 깜짝 놀라게 해주십시오!”

검무극이 인사하고 돌아서 나가던 그때 뒤에서 일화검존의 나직한 말이 들려왔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

검무극이 일화검존을 향해 돌아섰다.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는 일화검존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후가 즐겨 입었던 그 화려한 꽃무늬 궁장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

낚시야 다 같이 모일 명분이고

“여기서 뭐 하냐?”

뒤에서 들려온 형의 말에도 검무극의 시선은 천마신교의 야경을 향하고 있었다.

“형이 밤마다 여기 올라온다고 해서.”

검무극이 걸터앉아 있던 그곳은 마화를 피워 올리는 화로를 받쳐 든 거대 악귀상의 손바닥 위였다.

“매일은 무슨. 이제 고작 세 번째인데.”

그러고 보니 벌써 세 번째였다. 검무양은 마화가 피어올랐을 때 이곳에 서서 아버지와 동생이 싸우던 마가촌 방향을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싸움이 다 끝난 지금도 자꾸 이곳에 오게 된다.

“그래서? 나 보러 왔다고?”

“서서 그러지 말고 앉아. 자주 올라올 만하네. 야경이 끝내준다.”

검무양이 천천히 걸어가 검무극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악귀상의 각기 다른 손가락 끝에 앉아서 천마신교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검무극이 들고 있던 술병을 검무양에게 건네주었다.

“자, 선물.”

취마가 준 술은 모두에게 한 병씩 주어지고 있었다.

“귀한 술이니까 특별한 날에 마셔.”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검무양은 곧장 술을 따서 마셨다.

“내 말 무시한 게 아니라, 나와의 이 순간이 특별한 거지?”

한쪽 입꼬리만 올라갔을 뿐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형제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긴 침묵을 깬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만약 내가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막으면? 형은 누구 편을 들 거야?”

“당연히…….”

아버지 편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네 편을 들어야지.”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내 편을 든다고?”

“차기 교주에게 밉보이면 평생 고생할 거 아냐? 너랑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데.”

예전의 형이 아니었다. 이런 농담도 할 줄 알고.

“과연 형이 아버지 앞에서 거역할 수 있을까?”

검무양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나야 할 수 있지. 못 한다면 네가 못 하겠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듯, 검무양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아버지를 거역 못 할 거라고 생각해?”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아버지와 너무 친해졌어.”

검무극은 형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자 검무양의 손에 들린 술병이 허공섭물로 자신의 손으로 들어왔다.

속이 탄다는 듯 검무극이 쭉 술을 마셨다.

“형은 해줄 말 없어?”

“없다.”

“동생을 위한 비법 하나 알려줘. 혹시 형만 아는 아버지의 약점 같은 거 없어?”

“아버지께 말씀드릴 네 약점은 꽤 있지.”

그 말에 검무극이 웃었다. 설령 형에게 방법이 있더라도 아버지에게 반하는 일을 알려줄 리가 없었다.

“이걸로 충분해, 형이 이렇게 내 말 들어주는 것만 해도 천지개벽할 일이지.”

검무양이 손을 내밀자 다시 술병이 그에게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검무양이 술을 마셨다.

“나 같으면 아버지 안 말린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하시면 천하를 얻게 되는데.”

“그러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말리지 말고. 나중에 천하를 물려받을까?”

절대 검무극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검무양은 말없이 야경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원래 마가촌의 불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암흑처럼 어두웠다.

그때 검무양이 불쑥 물었다.

“어머니 이야기 물었다면서?”

“누가 그래? 하도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우리 장남 챙기는 건 아버지밖에 없구나.”

검무극은 형의 표정이 살짝 경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왜 그래?”

“또 누구에게 물었는데?”

“사부님께도, 검존님께도. 검존님은 어머니의 꽃무늬 궁장을 기억하고 계시더라.”

물론 일화검존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었겠지만, 더는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진 후 형을 만나러 온 것이다.

“어머니에 대해 물어볼 거면 왜 나를 안 찾아왔어?”

검무극이 저 멀리 천마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이랑 이야기하면 분위기가 심각해질 거 같아서. 봐, 지금 형 얼굴을 보면 마화 다시 피워야 할 비상사태야.”

검무극의 농담에도 검무양은 웃지 않았다.

“어릴 때 형이 엄마에 대해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내게는 금제처럼 내려졌었어. 정말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컸으니까.”

검무양은 그 일이 기억나는지 아무 대답 없이 전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다고 형 원망할 생각은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형도 아주 어렸을 적 일이었으니까.

“이미 돌아가신 분 이야기해서 뭐 하겠어? 마음만 아팠겠지.”

어머니, 이 둘째가 너무 정 없이 말하지요?

이 정 없는 말조차 너무 늦었습니다. 어머니도 보셨다시피 회귀 전 인생은 너무 힘들었고, 회귀 후 인생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온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나도 그날 이후 어머니에 대해 말한 적 없다.”

처음으로 형이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몇 살 때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아버지께 어머니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었다. 그때 봤다. 아버지의 얼굴이 확 굳어지며 변하는 것을. 어린 내가 봐도 알 수 있었지. 그건 고통이었다.”

아마도 형 역시 그때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걸 동생에게 알려줬고. 어쩌면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검무극이 이 자리에서 다시 기억을 떠올렸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사실 난 어머니가 기억 안 나.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 세 살이면 어렴풋이 기억날 만도 한데 어떻게 이렇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가 있지? 나는 아예 안아주지도 않으셨나?”

그때 검무양에게서 툭 튀어나오는 한마디.

“너를 더 좋아하셨다.”

검무양의 마음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동생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신도 그 옆에 있었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어주며 자신에게 말했다. 양아, 앞으로 동생을 잘 지켜줘야 한다.

“형은 다 기억나지?”

검무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생각도 안 나니 그저 막연한 그리움일 뿐이지. 한데 형은 아니잖아?”

검무극은 자신보다 형이 더 어머니를 그리워할 거라 생각했다. 만약 슬픔이나 상처가 있다면 훨씬 더 깊을 것이다.

“형은 괜찮아?”

아마 형 성격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분이 어머니에 대한 부분일 텐데.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을 텐데.

검무양의 입에서 살짝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저 멀리 천마전을 향했다.

“형이야말로 어머니 이야기하고 싶으면 나 찾아와. 듣고 싶으니까.”

그때 검무양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내가 교주가 되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려고 했다.”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형은 진심이었다.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거든.”

형은 천마신교가 어머니를 병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형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워야 견딜 수 있을 만큼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너라도 꼭 밝혀내라는 뜻이었겠지만.

“그래, 어머니의 죽음에 다른 사연이 있을 수도 있지. 한데 난 신경 안 쓸 거야.”

검무양이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검무극에게는 그렇게 대답한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 아버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을 테니까. 그런데도 못 살리셨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설령 어머니의 죽음에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음모가 있었다고 해도, 이미 아버지는 복수를 끝내셨을 거야. 아버지가 유일하게 사랑하신 분이셨으니까.”

다시 형의 입에서 다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형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애써 참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형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밤하늘을 향했다.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의 별을 찾으며.

어머니, 저는 괜찮으니까 형부터 먼저 챙겨주세요.

* * *

검무극이 섭혼마존을 찾아왔을 때는 자정이 훌쩍 넘어서였다.

그 늦은 방문에 그녀는 내심 놀랐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섭혼, 너무 늦은 시간에 미안하오.”

“아닙니다. 깨어 있었습니다.”

“같이 바람 좀 쐽시다.”

검무극이 섭혼마존과 함께 서환진 내부를 걸었다. 경계를 서던 귀술사들이 정중히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다친 곳은 괜찮소?”

“네, 이미 다 나았습니다.”

검무극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거 마실 수도 있겠소. 취마님에게 받은 술이오. 섭혼이랑 같이 마시고 싶어서 가져왔소.”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걸음을 옮기던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예전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 같소?”

예전의 서환진은 사방에 함정들과 귀기가 가득했고, 사람들을 심마에 빠뜨릴 귀화들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한데 그녀와 산책하면서 본 주위는 평범하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기존의 귀화들을 뽑고 새롭게 꾸몄습니다.”

단지 보기 좋으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귀술사들은 매일 혼을 다루고 귀신들과 만나는 사람들인데, 사는 곳이라도 평범하고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해서 바꿔봤습니다.”

이래서 젊은 피가 필요한 것이다. 옛 섭혼마존이라면 이런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내일 낚시대회 준비는 하고 있소?”

“태어나서 낚시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냥 운 좋게 한 마리라도 낚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내일 일찍 나오시오. 내가 기초만이라도 가르쳐주겠소.”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은 아버지도 이긴 실력이라고 자랑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혼등(魂燈)이 일렬로 켜진 아름다운 산책로의 끝에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혼백수(魂魄樹)라 불리는 나무입니다. 이곳에 있으면 귀술사들의 귀기가 안정되고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지요.”

검무극이 혼백수를 올려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 이런 나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소.”

“귀술사들은 이 혼백수 아래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그 말에 검무극이 기회다 하는 얼굴로 섭혼마존을 바라보며 물었다.

“섭혼.”

“네, 소교주님.”

“섭혼은 누구 편이오?”

섭혼마존도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도 이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제 혼백수 아래에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되었다.

“저는 소교주님 편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이번 암흑궁주와의 싸움에서도 소교주의 첫 마존으로 이겼다고 생각해서 기뻐했던 것이고.

“그럼 이제 확실한 내 편은 소마님과 섭혼이 되겠군요.”

섭혼마존은 극악소마가 소교주의 편이라서 더 좋았다.

그녀는 팔마존들 중 극악소마가 제일 좋았다. 그가 풍기는 그 독특하면서도 고독한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내일 낚시대회에서 아버지 앞에서도 발표할 거요. 이제부터 아버지의 마존은 육마존입니다!”

생각만 해도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네, 하셔도 됩니다.”

“예전에 아버지가 설득했을 때, 섭혼을 건너편으로 보내줬지만, 이제는 안 보내줄 거요.”

“이제는 등을 떠미셔도 안 갈 겁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섭혼마존은 비로소 진정 검무극의 사람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 사람이 검무극이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우리 순간을 기념해서 한잔 마십시다.”

“네, 소교주님.”

검무극이 먼저 마신 후, 섭혼마존에게 건넸다. 섭혼마존도 술을 시원하게 마셨다.

“요 며칠 마존분들을 만나며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소.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막는 일에 대해서 조언을 구했지요.”

설마 자신에게 물어볼까 싶었는데.

“섭혼,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막을 수 있겠소?”

순간 섭혼마존은 당황했다.

“제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도움이 될 말을 드릴 수가 없을 겁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해주시오. 내 첫 번째 마존인 그대가 안 해주면 누가 해주겠소? 나는 섭혼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부담스러운 말이었지만, 자신이 젊다고 아예 묻지도 않는 것보다 훨씬 고마운 일이었다.

섭혼마존이 잠시 혼백수를 올려다보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제가 아는 게 섭혼술 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섭혼술을 익히면서 느꼈던 점을 전했다.

“처음 섭혼술을 배우면 혼을 제압하는 방법부터 배웁니다. 그 과정에서 혼이 흩어져 버리기도 하고, 역으로 혼에게 당해 무공을 펼친 이가 미쳐버리기도 하지요.”

검무극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섭혼술의 고수가 되면 이제 혼이 원하는 바를 이해하게 됩니다. 부드럽게 혼을 달래면서 원하는 길로 인도하지요. 혼마다 각기 다른 사연과 성질을 지녔기에, 얼마나 잘 달래느냐에 따라 섭혼술의 실력이 판가름 난답니다.”

그녀가 욕도 잘하고 도발도 잘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또 이렇게 차분하게 말도 잘했다.

“섭혼술의 마지막 경지에 이르면 말도 필요 없고, 달랠 필요도 없습니다. 강한 의지로 그 앞에 서면 혼은 그 강한 마음에 자연스럽게 이끌리게 됩니다. 마치 검술에서 검신합일(劍身合一)이 이뤄지듯, 섭혼술을 펼치는 이의 의지와 조종해야 하는 혼이 하나가 되는 거죠.”

섭혼마존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주님을 설득하려 하지 마시고 소교주님의 의지를 보여주십시오.”

검무극의 마음에 깊이 와닿는 말이었다. 그래, 이건 설득의 싸움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보여주려는 세상과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 그 세상과 세상과의 싸움이다.

생각에 잠긴 검무극의 모습에 섭혼마존은 괜히 무안해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말씀 마시오. 너무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이 늦었기에 검무극은 작별을 고했다.

“섭혼, 내일 월척 기대하겠소!”

“교주님도 함께하신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긴장됩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낚시야 다 같이 모일 명분이고. 아버지야 마존들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시려는 거니까.”

* * *

같은 시각 검우진의 거처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곳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검우진은 깨어 있었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천마검을 손질하듯, 손에 든 것을 다루는 검우진의 손길이 신중했다. 마치 복수를 꿈꾸는 무인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없이 차갑고 예리했다.

은신한 채 지켜보는 휘는 교주가 천살성을 상대하러 나갈 때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슥, 스윽.

잠을 자야 할 시간을 훨씬 넘긴 채 검우진은 정성껏 낚싯대를 손질하고 있었다.

천마배 낚시대회를 시작합니다

섭혼마존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검무극과 만나기로 했기에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강가에는 천마전 호위 무인들이 나와서 교주와 마존을 위한 천막을 치고 있었고, 주위에 매복한 자가 있는지 수색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교주와 마존들이 참석하는 행사라 경계에 만전을 펼쳤다. 물론 그 어떤 행사보다 경계가 전혀 필요 없는 행사이긴 했지만.

섭혼마존이 강가에 서서 낚시를 하고 있는 마존을 발견했다.

이른 시간이었기에 당연히 마존들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사람이 와 있었다.

“독왕님, 오셨습니까?”

섭혼마존이 먼저 정중히 인사하자 독왕도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섭혼마존은 내심 의외라고 여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독왕이 맨 먼저 와서 낚시 연습을 한다고? 가장 이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가?

‘독왕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무극도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섭혼마존과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에 독왕에게 먼저 다가갔다.

“그사이 연습 많이 하셨습니까?”

독왕에게 하는 말을 듣자 섭혼마존은 알 수 있었다.

‘아, 소교주님 때문이구나.’

그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이렇게 일찍 이곳으로 나오게 했듯, 소교주가 아니라면 세상에 누가 있어 독왕을 일찍 나와서 혼자 연습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뭔가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으리라.

“어떻냐? 자세가 괜찮냐?”

독왕이 낚싯줄을 던지고 다시 거둬들이는 동작을 검무극에게 보여주었다.

“누구에게 배운 겁니까?”

“상선에게.”

“역시! 자세는 훌륭합니다. 대신에 나중에 자리를 잡을 때 여기 말고.”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쪽이 자리가 좋아 보입니다. 분명 아버지나 도마 어르신도 저 자리를 차지하려 드실 테니, 하독을 하시더라도 꼭 저 자리를 차지하십시오.”

그 무서운 농담에 독왕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나직이 독왕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해약은 하나뿐입니다.”

“우승이지.”

“아뇨. 우승은 해약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강력한 독이 될 수 있죠.”

그럼 뭐냐는 표정으로 독왕이 검무극을 바라보자.

“독왕님이 아버지와 가까워지기 위해 낚시를 배웠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저런 자리를 차지할 줄 아는 안목을 배웠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평생 수많은 독을 해독했지만, 이렇게 인간관계의 해약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적은…… 아, 처음이 아니었다.

검무극과 함께 개 짖는 소리를 냈을 때도, 또 천독림을 나가서 중원으로 나갔을 때도 모두 관계의 해약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니까.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이번 노력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연습하십시오.”

검무극이 섭혼마존에게 걸어가려던 그때 독왕이 불쑥 말했다.

“네 해약은 찾았냐?”

검무극이 독왕을 돌아보았다. 독왕이 알려준 해약은 이것이었다.

너는 교주님이 꿈꾸는 무림일통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냐?

어쩌면 그 모든 일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일지 모를 질문.

“그 질문, 오늘 여쭤볼 생각입니다.”

다시 강물로 향하는 독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오늘 누가 무엇을 낚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군.”

검무극은 독왕과 함께 아침햇살이 부서지는 강물을 지켜보았다.

“천살성과의 싸움보다 더 떨립니다. 독왕님, 제 편이 되어 주십시오.”

독왕이 다시 강물에 낚싯줄을 던지며 말했다.

“시도는 좋았다.”

검무극이 웃으며 섭혼마존에게로 갔다.

“섭혼께서는 느낌이 오는 곳에 가서 던지면 되오. 첫 낚시의 즐거움을 만끽하시오.”

“네, 알겠습니다.”

말은 그러했지만 검무극은 제대로 낚시를 가르쳐주었다. 미끼다는 법부터, 어떻게 어디로 던져야 하고, 또 어떤 순간에 낚싯대를 채야 하는지.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때 혈천도마가 도착했다. 그는 멀찌감치 서서 검무극이 섭혼마존에게 낚시를 가르쳐주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오래전 한 장면이 두 사람의 모습 위에 겹쳐지듯 떠올랐다.

교주에게 낚시를 가르쳐주던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그때는 교주도 자신도 저렇게 젊었었는데.

검무극이 혈천도마가 온 것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혈천도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고로 낚시란 하루이틀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늘.”

그는 낚싯대를 하나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촤르르륵.

마치 병장기들이 펼쳐지듯 허공에 열 개도 넘는 낚싯대가 쫙 펼쳐졌다.

검무극이 허공에 떠 있는 낚싯대를 올려다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사연이 있는 낚싯대겠군요.”

그러면서 슬쩍 혈천도마의 기를 살려줄 말을 꺼냈다. 혈천도마의 낚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을 그 일을.

“어느 낚싯대입니까? 우리 아버지 처음으로 낚시 가르쳐준 낚싯대가요?”

혈천도마가 그 중 첫 번째로 떠 있는 낚싯대를 가리켰다.

“바로 이 낚싯대다.”

천금을 준다 해도 팔지 않을 낚싯대였다.

“우리 독왕님과 섭혼님, 이 두 초보 낚시꾼들을 위해서 한말씀 해주십시오.”

혈천도마가 턱을 매만지며 뭘 말해줄까 고민하더니.

“무림에서도 칼을 뽑고 싶어 안달인 적들이 있지 않소? 마찬가지요. 낚고 싶어서 안달이 나면 안 되오. 물고기들은 낚싯줄의 떨림을 귀신처럼 알아차린다오.”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다가오더니 손으로 얼굴을 받치듯 가리켰다.

“그리고 미끼는 이런 미끼로.”

“저 같은 미끼가 어떤 미끼인데요?”

하지만 독왕과 섭혼마존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소교주였다. 그랬기에 소교주의 미끼는 미끼인 줄 알면서도 안 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를 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

“오늘 이 강의 물고기들은 아무 생각이 없는 놈들일 수도 있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오늘 나만큼 아무 생각 없이 왔으려고.”

다음으로 도착한 마존은 일화검존이었다.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옷과 화장을 한 그녀였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혈천도마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일등은 검존님이 되실 겁니다.”

“어째서인가?”

“물고기들이 검존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고 몰려들 테니까요.”

검무극의 말에 일화검존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우리 소교주 때문에라도 일찍 일어나 화장한 보람이 있네.”

그녀 역시 낚시하면 떠오르는 일들이 있었다. 그녀가 혈천도마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낚싯대를 든 모습을 보니 옛날 생각나네요.”

그녀는 낚시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교주와 혈천도마가 한동안 낚시를 하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낚시는 기다림이라고 했었나요?”

“그렇지.”

“성질도 급한 분이 어찌 낚시는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녀의 물음에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물고기 잡는 그 손맛 자체도 좋지만, 가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인데, 어느 순간 물고기가 아니라 세상이 내게 끌려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그 순간을 잊지 못해 하는 거지.”

일화검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물고기도 세상도, 그 끌어당기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녀였으니까.

그때 권마가 도착했다. 그 큰 손에 들린 낚싯대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였다.

“사부님은 낚시 좋아하십니까?”

“소싯적에 교주님 따라 두어 번 해본 적은 있다.”

권마가 아버지와 함께 낚시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그 역시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나는 낚시에 소질도, 흥미도 없다.”

가만히 서서 물고기가 미끼를 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물고기를 낚는 손맛도 크게 감동적이지 않았고. 어쩌면 손을 주로 쓰는 무공을 익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초심자들이 많으면 오히려 어려운데.”

그때 누군가 도착하며 검무극의 걱정을 받았다.

“걱정 내려놓게. 내가 있는 한 초심자의 행운 따윈 끼어들 틈이 없을 테니까.”

한 자루의 낚싯대를 어깨에 걸친 채 자신만만하게 도착한 사람은 마불이었다. 마불의 약초 캐는 재능으로 볼 때, 낚시 역시 만만하게 볼 수는 없었다.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마불이 검무극에게 와서 나직이 물었다.

“독왕이 사기꾼이라고? 대체 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독왕은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 독충을 찾고 있었다. 마존들이 모이자 어느새 평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그였다.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저 모습이 연기라니까요. 명배우입니다!”

다음으로 취마가 도착했다. 그도 자신만만한 쪽이었다.

“취몽루가 호수 위에 떠 있는 걸 잊었냐? 내가 거기서 술만 마셨겠느냐?”

마지막으로 도착한 마존은 극악소마였다. 낚시에 관심이 일절 없는 그에게 검무극의 극찬이 날아들었다.

“소마님이 낚싯대를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혈천도마가 질투심에 나직이 한마디했다.

“뭔들 안 멋있겠느냐? 넌 저 사람이 손가락만 뻗어도 멋있다고 소리치지 않느냐?”

“세상에 손가락만 뻗어도 멋있는 사람이 어디 흔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멋있다고 해줘야죠.”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교주가 개최한 대회니만큼 약속 시간보다 늦게 오는 사람은 없었다. 큰 싸움이 끝난 후의 대회였기에, 분위기는 더없이 부드럽고 좋았다.

하지만 여덟 명의 마존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감출 수 없는 존재감으로 강가는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때 호위 무인 중 한 사람이 모두에게 알렸다.

“교주님 오십니다.”

마존들이 경건하게 검우진을 맞이했다. 풀어져 있던 분위기는 한순간에 팽팽해졌다.

검우진이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들어왔다.

대신 낚싯대를 들고 보좌하고 온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아버지! 차남도 아들입니다! 제게는 같이 오자고 말씀 안 하셨잖아요!”

마존들은 새삼 검무극이 해낸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행사에 교주가 소교주를 대동하고 오면 오지, 권력 싸움에서 밀린 대공자를 데리고 오는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소교주는 먼저 와서 마존들과 수다를 떨고 있고,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대공자는 교주를 모시고 당당히 들어오고.

“교주님을 뵙습니다!”

마존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버지가 도착하자 검무극이 앞으로 나섰다.

“오늘 저도 대회 참가자지만 동시에 대회의 진행을 맡기로 했습니다.”

어찌 반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칫 굳을 수 있는 분위기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안 하겠다고 해도 억지로 등을 떠밀어야지.

“자, 그럼 본격적인 낚시대회에 앞서 오늘 이 행사를 주최해 주신 교주님께서 한말씀 하시겠습니다. 아버지, 한말씀 하시죠.”

검우진이 마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 든든한 권마부터, 자신 앞에서는 항상 주눅 들어 있는 독왕까지.

“놈들과 싸우느라 다들 고생했네. 오늘 하루는 편히 쉰다, 생각하고 즐겁게 지내시게.”

짧게 한마디를 하고 나오면서 검우진이 불쑥 검무극에게 말했다.

“너도 한마디 해라.”

모두 알 수 있었다. 이번 싸움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소교주의 공이 컸다는 것을 교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순간임을.

검무극이 짐짓 감격에 찬 얼굴로 모두에게 말했다.

“이 감격스러운 자리에 서니 문득 여러분들을 처음 봤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우선 우리 혈천도마 어르신. 처음 뵈었을 때 어찌나 성격이 꼬장꼬장하시고…….”

연설이 길어지려 하자 마존들이 딴청을 피웠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 쳐다보며 대화를 나눴고, 마불은 자신의 낚싯대를 들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독왕은 다시 바닥의 벌레를 찾았고, 취마는 슬쩍 허리춤의 술을 마셨다.

“장난입니다, 장난! 다들 너무 하십니다! 어찌 본교는 변한 게 없어요!”

장난을 받아준 마존들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감사했습니다. 여러 마존분들 덕분에 적들을 모두 없앨 수 있었습니다.”

검무극은 우선 고마움을 전한 후 진짜 하고자 하는 말을 덧붙여 전했다.

“한데 그 일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결과잖아요? 우리야 적을 죽이는걸, 이 무림에서 제일 잘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마존들이 모두 미소를 짓는 가운데, 검무극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에게 했다.

“아무도 못 죽이는 절대악은 우리가 죽여야지요.”

검우진은 기억했다. 오래전 자신에게 했던 저 말은 아들이 추구하는 마도였음을. 아들은 그 마도를 지켜나가고 있었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의 위기가 오는 법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앞으로도 방심하지 않고 살아갈 작정입니다. 제게 새로운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거든요.”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 마존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마교주와 소교주의 싸움이자 무림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자신들의 싸움이기도 했다. 두 사람 중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는 싸움이었으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전에 검무극이 화제를 돌렸다.

“자, 그럼 오늘 낚시대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이 상품이 올려진 탁자로 걸어가면서 대회 규칙에 대해 밝혔다.

“당연한 말씀이 되겠지만 오늘 대회에는 어떤 무공을 발휘해선 안 됩니다. 기도를 드러내는 것도 금지입니다. 오직 순수한 낚시 실력만으로 승부를 펼쳐야 합니다. 시간은 지금부터 저 강으로 해가 질 때까지입니다.”

일부러 시간을 길게 잡았다. 다 같이 밥도 먹고, 밀린 이야기도 나누시라고.

“자, 오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품은!”

검무극이 상품 상자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오오! 우리 아버지께서 오늘 큰마음 먹으셨습니다.”

검무극이 상자를 들어서 모두에게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 가장 월척을 낚은 분에게 만년설삼을 드립니다. 낚시대회에서 만년설삼이 부상으로 걸린 적은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자, 우리 교주님을 위해서 박수!”

마존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지금까지 마존들이 다 모였을 때는 언제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승상품이 또 있습니다. 월척은 아니더라도 가장 많은 물고기를 잡은 사람에게도 만년설삼이 주어집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질문했다.

“월척도 잡고, 물고기도 가장 많이 낚았다면?”

“당연히 만년설삼 두 뿌리가 모두 주어집니다. 또한 한 마리라도 잡은 사람에게는 천년설삼 한 뿌리가 기념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면서 검무극이 슬쩍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상품이 이렇게나 풍성한 걸 보니, 우리 아버지가 다시 싹 회수해 가실 생각이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검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고, 지켜보던 마존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검무극이 자신의 낚싯대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자, 지금부터 제일회 천마배 낚시대회를 시작합니다!”

너희들에게 이 무림의 운명이

검무극은 본격적인 대결에 앞서 장소를 제약했다.

“오늘의 낚시는 저기 튀어나와 있는 바위와 저쪽 나무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모두가 시야에 보이는 곳에서, 그리고 내공을 실어 이야기하면 들릴 정도의 거리로 제한했다.

강이 굽어지는 곳이었기에 일렬로 늘어서는 게 아니라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 이 자리는 낚시보다 어디까지나 평소 못했던 대화를 위해 마련한 자리였으니까.

“자, 이제 자리를 정하겠습니다. 처음 자리를 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중에 옮겨도 되고 그대로 있으셔도 됩니다.”

사실 낚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특히 장소가 제한적이었기에 처음에 자리를 잘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 아버지부터 먼저 자리를 잡으시죠.”

검무극이 기회를 줬지만, 검우진은 사양했다.

“난 나중에 고르마.”

아버지 성격상,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았기에 우승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검무극이 기다렸다는 듯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공평하게 낚시 경험이 없는 사람들부터 먼저 자리를 잡게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늘의 대결은 낚시 대결이자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결정을 내린 이상, 자리 선정의 우선권은 초보들에게 주어졌다.

“일단 아까 큰소리쳤던 분들은 빠져주시고요.”

큰소리 삼인방은 혈천도마와 마불, 취마였다. 그들은 자리 잡기 우선순위에서 탈락.

낚시에서 좋은 자리를 잡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세 사람이었기에, 표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아쉬워했다.

“자, 남은 분 중에서 오늘 제일 먼저 도착하신 분!”

다들 주위를 돌아보던 그때 독왕이 슬쩍 손을 들었다.

“자, 그럼 독왕님부터 자리를 잡겠습니다.”

독을 뿌려서라도 저 자리를 고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검무극이 첫 번째로 그곳을 고를 기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독왕이 검우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검무극이 가라고 했던 자리로 가려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하군.”

순간 독왕이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말을 꺼낸 사람은 뜻밖에도 마불이었다.

“독왕께서 낚시에 관심이 전혀 없으신데, 오늘 맨 처음 이곳에 도착하셨다고요?”

독왕에게는 마존들 중 자신과 가장 친한 사람이 마불이었는데, 그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왜 제일 먼저 나오신 거요?”

검무극이 마불을 쳐다보았다.

낚시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독왕의 자리를 뺏으려 한다?

예전의 마불이었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소교주와 짜고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 했다고 음모론을 내세웠을 것이다. 그 사실을 밝혀냈다는 명분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마불이 그럴 리가 없다. 검무극은 마불을 믿었기에 이런 농담을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독초채집꾼으로 부려 먹은 것에 대한 작은 거인의 복수가 시작되었군요.”

그 말만으로 마불이 독왕을 위해 독초를 채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독왕이 차분히 대답했다.

“교주님이 처음으로 개최하시는 대회지 않소? 그래서 일찍 와서 연습했소. 자리를 선정하는 법은 소교주께 배웠고.”

“그러셨구려.”

마불은 순순히 그 말을 믿어주었다.

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불이 독왕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이 나오도록 유도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게끔.

검무극의 예상대로였다. 마불은 독왕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교주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소교주가 마존들을 모두 만나고 다녔으니, 검무극이 관계 개선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겠지.

그래서 독왕을 돕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검우진의 반응이었는데.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독왕을 쳐다보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낚시는 그대에게 즐거운 취미가 될 거네.”

독왕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한 후 가려던 곳에 가서 섰다. 그렇게 독왕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검무극이 마불의 귀에 속삭였다.

“속고 계신 거라니까요! 우리 마불님은 끝까지 속으시는군요.”

마불은 검무극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주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렇게 오해하지 않고 알아주는 소교주였기에 조금 전에 그런 식으로 나설 수 있었다.

독왕이 자리를 잡자 검무극이 소리쳤다.

“다음에 오신 분!”

그러자 섭혼마존이 나섰다.

첫 번째가 독왕이란 것도 놀라운데 두 번째 도착이 섭혼마존이라고? 다들 의외라는 눈빛으로 보냈다.

독왕과 섭혼마존.

무림인들이 천마신교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데 그들 두 사람이 낚시대회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이다. 심지어 낚시 초보들이면서.

섭혼마존이 내키는 대로 자리 잡자 큰소리 삼인방의 표정에 안도감이 피었다. 전문가적인 눈으로 볼 때 물고기를 한 마리도 낚기 어려운 자리를 잡은 것이다.

검무극이 그녀를 불렀다.

“섭혼마존님!”

검무극의 얼굴에 스친 장난기를 보는 순간 섭혼마존은 내심 긴장했다.

올 것이 왔구나.

이제 교주 앞에서 본교는 팔마존이 아니라 육마존입니다. 이 말을 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소교주의 마존이 되고자 마음을 굳혔지만, 그래도 막상 교주 앞에서 저 말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검무극이 꺼낸 말은 그 말이 아니었다.

“섭혼술로 물고기들 다 제게 보내주시오! 절대 아버지께 보내면 안 됩니다!”

물론 무공을 사용하면 안 되었기에 검무극의 농담이었다.

섭혼마존이 내심 안도하며 검무극에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교주님에게 보내드리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신교 역사에 길이 남을 타고난 효자지만 오늘만큼은 아닙니다! 오늘은 낚시대회가 아니라 낚시대전입니다!”

과연 검우진 역시 눈빛과 표정에서 승부욕을 감추지 않았다.

검무극 역시 절대 지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모습이 모두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자, 다음에 오신 분은 도마 어르신이죠? 고수 중의 고수시니 양보하실 테고.”

혈천도마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금 찍어둔 장소가 몇 있는데, 저걸 다 빼앗겨선 승산이 없었다.

다음 차례로 고른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어디가 좋은 자리인지 알 리 없었기에 나무 그늘이 지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단장을 곱게 한 날인데, 온종일 햇볕 아래 서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 할 때, 혈천도마가 슬쩍 더 가라고 턱짓을 했다. 조금 더 뒤로. 이 사람아, 자네라도 좋은 자리 잡아!

전음을 보내지 않은 것은 그러면 정말 부정행위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검무극이 그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우리 어르신, 검존님이 빈 바구니로 돌아가실까 봐 애가 타십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제 몫까지 많이 잡으세요.”

이 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권마는 그냥 성큼성큼 걸어가서 빈 곳에 자리를 잡았다. 겉모습만 봤을 때는 답답해서 못 기다리겠다며 낚싯대 부러뜨리고 당장에라도 강물로 뛰어들어 물고기를 잡아 올 것 같은 그였다.

극악소마는 가장 멀리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는 모습만 봐도 마존들의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형은? 대회에 참가 안 할 거야?”

“오늘은 아버지 낚시하는 것 보면서 배우련다.”

현명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날 대결을 펼치는 것보다는 아버지 보필하면서 옆에 있는 게 여러모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는 더 좋을 것이다.

이제 남은 사람은 자칭 낚시 고수들, 검우진과 혈천도마, 마불과 취마, 그리고 검무극이었다.

“그럼 나이가 어린 저부터 자리를 잡겠습니다.”

검무극이 은근슬쩍 먼저 자리를 잡으려 하자, 마불이 염주를 굴리며 물었다.

“우리 소교주께서는 낚시와 인생의 비슷한 점이 뭔지 아시는가?”

“뭡니까?”

“낚시를 마치고 빈 바구니로 돌아가도 기분 좋은 날이 있고, 물고기로 꽉 찬 바구니로 돌아가도 허한 날이 있는 법이지.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너무 그렇게 바구니를 꽉 채울 필요는 없겠지.”

“아니, 왜 하필 낚시대회에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마불이 못 들은 척 득도한 고승 흉내를 냈다.

“물고기를 몇 마리 낚았느냐보다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느냐가 자네에겐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제게 왜 이러시냐고요? 저는 물고기가 더 중요합니다! 만년설삼이 장난입니까!”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미소를 지었다. 시작부터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역시 검무극이 분위기를 이끄니 지루하고 경직될 틈이 없었다.

검무극이 마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웃겨줬으니 상을 줘야지.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낚시터에 오신 혈불이 인자한 부처가 되셨으니, 자리를 양보해야겠습니다.”

검우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욕심을 버리니 이렇게 뜻하지 않은 복이 오는구나.”

“아니잖아요! 욕심 안 버리셨잖아요?”

검무극의 외침을 뒤로 하고 마불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좋은 자리를 잡는 걸 보니, 낚시 실력을 두고 허풍을 떤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다음은 어린 제가…….”

검무극이 다시 나서려고 할 때 검우진이 취마에게 말했다.

“다음은 자네가 잡게.”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취마는 교주가 자신을 챙겨주자 크게 기뻤다. 게다가 아직 괜찮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뒤에 자리를 잡은 것이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교주와 소교주, 그리고 혈천도마보다 좋은 자리를 잡았으니까.

아버지가 다음으로는 당연히 혈천도마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다음은 내 차례다.”

양보는 충분히 했다는 듯 아버지가 나서는 것을 보고는 검무극이 궁금해서 물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도마 어르신에게는 양보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검우진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게 낚시를 가르쳐준 스승의 자존심을 지켜줘야지.”

그 말에 혈천도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렇게 모두가 있는 앞에서 언급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어르신. 아버지께 자리 빼앗겼는데 뭐가 좋으셔서 그렇게 속없이 웃고 계십니까? 아버지께서 어르신을 제일 경계하고 계십니다. 음모가 난무하는 낚시터라고요!”

혈천도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볼 때 제일 경계하는 상대는 자네 같은데?”

“네?”

혈천도마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나마 마지막 괜찮은 자리를 잡아버리자, 남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아! 자리싸움 구경하다 보니 내 자리를 못 챙겼구나!”

검무극의 너스레에 모두 미소를 지었다.

정말 예전 천마신교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런 대회조차 없었겠지만, 설령 있었다 해도 교주의 분위기에 눌리고, 마존들끼리 기싸움하고. 그야말로 살벌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검무극이 자리를 잡은 곳은 아버지와 혈천도마 사이였다. 그들 사이에 끼었기에 세 사람은 유난히 가깝게 선 꼴이 되었지만, 검우진과 혈천도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혈천도마는 검무극이 옆으로 와준 것이 반갑고 좋았다.

그렇게 자리를 잡자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검우진이 바늘에 미끼를 끼운 후 강을 향해 힘차게 낚싯줄을 날렸다.

촤르르르륵.

낚싯줄이 반짝이는 은빛 강물 위를 날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두 낚싯줄을 던졌다. 일제히 허공을 가르는 낚싯줄들.

독왕은 그간의 연습으로 초보답지 않은 모습으로 퐁당, 낚싯대가 부러질 정도로 제일 멀리 힘차게 날릴 것 같았던 권마는 오히려 가까운 곳에 부드럽게, 반대로 가장 우아하게 던질 것 같았던 일화검존은 가장 신나게 멀리, 혈천도마는 가장 능숙한 동작으로, 마불은 낚싯대를 옆으로 날리면서 특이하게, 취마는 한 손으로 한껏 멋을 부리며, 극악소마는 더없이 간결한 동작으로, 섭혼마존은 배운 대로 퐁당.

마지막으로 검무극이 낚싯줄을 날렸다. 평범하게 날렸지만, 수없이 낚시해 본 경험이 그의 손길에서 묻어났다.

그렇게 본격적인 낚시가 시작되었고, 모두 생각에 잠긴 채 강물을 바라보았다.

검무극은 만년화리를 찾던 회귀 전 삶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때는 마음이 조급했다. 하루라도 빨리 찾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결국 알게 되었다. 서두르는 인생이 기회만 쫓다 끝이 나듯, 성급한 낚시꾼은 물만 흐릴 뿐이라는 것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차분히 강물을 바라보며, 낚아채는 그 한 호흡을 위해 천 호흡, 만 호흡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딱 한 번,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기회를 놓쳤다고 실망하지 마라. 물고기 놓쳤다고 낚시를 그만두는 낚시꾼은 없는 법이니까. 그런 끈기로 끝까지 찾아다녔기에 해낸 일이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슬쩍 쳐다보았다. 지금 강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이곳에 있는 어떤 마존들보다 깊었다.

‘이놈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그때 검우진도 아들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 바람에 혈천도마와 검우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대 아들이 우릴 여기까지 데려왔소. 이런 아들과 끝까지 가볼 작정이시오?’

그런 마음을 읽은 것일까?

검우진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의 우리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네. 정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은가?’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검우진과 혈천도마가 동시에 강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검무극이 낚싯대를 고정해 두고 아버지에게 갔다. 형은 아버지 옆에 서서 강물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양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리 비켜주랴?”

“아니. 형 흉볼 일 아니면 형 앞에서 못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검무양이 어이없어했지만, 자신 앞에서 못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우리가 이렇게 나란히 강가에 서 있는 것도 처음이지?”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화공 데려와서 이 장면도 그려달라고 하면 좋겠다. 아니면 마가촌 인형 만드는 사람에게 우리 세 사람 낚시하는 인형 만들어 달라고 하자.”

그러자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여유를 부리는 걸 보니 자신 있나 보구나.”

“월척이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겠습니까? 오후 늦게 깨어나서 슬슬 움직이겠지요. 저처럼 여유가 있을 겁니다.”

거기에 잘난 척도 보탰다.

“이것도 승자의 여유라고 할까요?”

“오늘은 쉽지 않을 거다.”

“그럼 이번 대결과 별개로 저와 따로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내기라는 말에 검우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슨 내기?”

검무극은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는지.

“누가 일등 할지 맞히는 내기입니다. 물론 자신이 일등이라고 예상해도 됩니다.”

아버지의 눈빛에 강렬한 흥미로움이 피어올랐다.

“지금부터 지켜보다가 한 시진 후에 정하는 겁니다. 누가 일 등 할지.”

“내기에서 이기면?”

검무극은 만년설삼보다 더 파격적인 것을 걸었다.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떻습니까?”

“어떤 소원이라도?”

“네, 어떤 소원이라도 반드시요.”

검우진이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네가 질 텐데?”

“그건 모를 일이죠.”

잠시 아들을 응시하던 검우진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것만은 들어줄 수 없다, 이런 제한을 둬야 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제한을 두지 않았다. 정말 큰 내기가 걸린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혈천도마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니,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에게 말했다.

“이제 천살성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이 무림의 운명이 달렸다.”

누굴 고를지 결정하셨습니까?

“아버지와 누가 우승하는지 맞히는 내기를 했습니다. 소원 들어주기 내기입니다.”

검무극이 내공을 실어 말하자 모두에게 그 말이 들렸다. 마존들은 모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마존들에게 내기 사실을 공표한 후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 그럼 한 시진 후에 누가 우승할지 고르는 겁니다.”

검무극은 거기에 한 가지 조건을 제안했다.

“그리고 누굴 뽑을지 정할 때, 서로 누구를 뽑았는지 알리지 말고 종이에 적어서 낸 후에 최종 우승자가 나왔을 때 펼쳐보죠.”

“말을 바꿀까 걱정해서냐?”

“제가 감히 말을 바꾸겠습니까? 아버지가 바꾸실 리도 없고요.”

“그런데 왜?”

“가령 제가 사부님을 뽑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검무극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혹시 모를 일입니다. 사부님이 우승하실지도요.”

권마가 강물을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일도 없었다.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지루했다.

설령 물고기를 잡는다고 쳐도, 그게 뭐가 재미있다고? 손맛이 좋다고? 주먹으로 때리는 맛을 몰라서 그렇다.

교주가 개최한 대회가 아니었다면 벌써 돌아갔을 그였다.

“제가 뽑았을 경우, 아버지를 생각하면 사부님이 어떻게 최선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대로 아버지가 사부님을 선택했다는 걸 알면 어떻겠습니까?”

권마는 어떻게든 우승하려고 온갖 수를 다 쓰려고 할 것이다. 지루함과는 별개로 그건 확실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눈치를 볼 마존들이 더 많았으니까.

“좋다. 네 말대로 하자.”

아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검우진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검무극이 다시 자기 자리를 돌아가면서 검무양과 눈이 마주쳤다.

“누가 우승할지 형도 잘 살펴봐 줘. 느낌이 오는 사람 있으면 아버지 말고 내게 살짝 알려 줘야 해.”

검무양은 동생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저 똑똑한 녀석이 아무 생각 없이 내기를 하진 않았을 텐데.

‘대체 어쩔 생각이냐?’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며 물어봤을 것이다.

검무극이 고민스럽다는 듯 머리를 싸매며 자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누굴 골라야 하나?”

검무극은 자기 자리를 지나쳐서 혈천도마 쪽으로 갔다.

“이것 보십시오. 이 낚시터에서도 아버지 다음에는 어르신을 먼저 찾아오는 것, 보이십니까?”

“오늘은 안 와도 된다. 제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저리로 가라.”

혈천도마는 낚시에 진심이었다. 오늘 교주의 낚시선생에 걸맞은 실력을 모두에게 보여줄 작정이었다.

“옆에 조용히 있을게요.”

검무극이 혈천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강물에 떠 있는 찌를 바라보며 두 사람의 대화가 소곤소곤 이어졌다.

“왜? 사고 치고 나니까 이제 걱정되냐?”

“저 사고 친 거 맞죠?”

“대형 사고지. 어쩌려고 소원을 걸었냐? 교주는…….”

혈천도마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누굴 우승자로 정할 건데?”

“어르신이라면 누굴 찍을 겁니까?”

“당연히 나지.”

검무극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어르신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내려다보던 혈천도마가 일보 후퇴했다.

“나 찍지 마라. 당연히 내가 우승하겠지만 그래도 찍지 마라. 부담스럽다. 교주가 나 때문에 꿈이 꺾이면, 교주도 사람인데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거다. 교주에게 그런 존재로 남고 싶지 않다.”

혈천도마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가만히 강물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아버지는 누굴 찍을까요?”

혈천도마는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교주야 당연히 자기 자신을 찍겠지.”

아버지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컸다. 특히 이번 낚시대회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 복수전이었으니까.

“그러니 교주를 이길 사람을 찾아야지. 나는 빼고.”

검무극이 낚시하는 마존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다들 강물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있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멈춰 선 곳은 나무 그늘에 서 있는 일화검존이었다.

“어르신, 여기서 물만 쳐다보고 있지 마시고 검존님이랑 이야기도 나누시고 산책도 하십시오.”

“이 중요한 대결에서?”

“그러니까 더 감격하시겠죠. 아, 이렇게 중요한 대결에서도 나와 시간을 가지려는구나! 나중에 죽을 때 낚시대회에서 진 것이 후회될까요? 이 아름다운 곳에서 검존님과 산책 못 한 것이 후회될까요?”

“그야 당연히 낚시에서 진 일이겠지. 그리고 검존도 만년설삼이 산책보다 더 좋을걸?”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함께 웃던 바로 그때였다.

“잡았다!”

드디어 첫 물고기를 잡은 사람이 나왔다. 의외의 사람이었다.

놀란 얼굴로 낚싯줄 끝에서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섭혼마존이었다.

그녀의 자리는 다들 그다지 좋은 자리가 아니라 여겼는데, 그곳에서 첫 번째 물고기가 잡혀 올라온 것이다. 그것도 제법 큼직한 물고기였다.

“이변의 시작일까요?”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냥 눈먼 물고기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축하합니다! 섭혼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잡은 물고기네요.”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섭혼마존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물고기를 들어 보였다.

검무극은 마불을 놀리는 걸 잊지 않았다.

“이래도 초심자의 행운을 막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신이 있는 한 초심자의 행운 따윈 없을 거라 했던 그였다.

마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초심자의 행운에서 가장 큰 적이 뭔지 아나?”

“뭡니까?”

“시간이네.”

마불이 다시 득도한 고승처럼 말했다.

“느긋하게 기다리면 초심자의 행운은 끝나기 마련이지. 마침 오늘 대회는 늦게까지 열리지?”

마존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검무극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이번에는 그곳에서 가장 멀리 있는 마존을 찾아갔다. 바로 극악소마였다.

“가면을 벗으면 그 잘생긴 얼굴 보려고 물고기가 여기로 다 모여들 겁니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웃었다. 두 사람이 강에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존들은 어떻게 소교주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극악소마와 저렇게 가장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새삼 사람 관계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화루주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네, 비로소 이제 자기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 휘말리면서 천화루 일에 소홀하게 되었을 것이다.

“중원에 나가면 찾아뵙고 인사드려야겠네요.”

“소교주께서 가시면 좋아할 겁니다.”

검무극은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천화루주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무림일통과 관련해서 새로운 예언을 받은 것은 아닐까?

“오늘 가면을 벗으시려는 거군요.”

극악소마는 두 사람의 내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 낚시터에서 소교주가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을.

그래, 팔마존이 모두 모인 오늘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적절한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한데 누가 일 등 할지 어떻게 예상하신 겁니까?”

검무극이 이런 내기를 했다면 반드시 복안이 있을 거라 여겨서 물었는데.

“예상해서 내기한 게 아닙니다.”

“그럼 왜?”

“대회가 끝날 때까지 아버지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마지막 운에라도 맡기려고요.”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이었는데.

그게 농담이든 진담이든 극악소마는 자신을 믿어주었다.

“잘하셨습니다. 소교주님도 운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분 아니십니까?”

“제가 운이 좋긴 하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소마님이라면 누굴 찍으실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극악소마는 뜻밖의 사람을 골랐다.

“저라면 교주님을 찍겠습니다.”

“아버지를요?”

“네.”

극악소마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기에 검무극은 굳이 묻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놀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검무극이 다시 제자리로 오고 있는데.

“잡았다!”

그때 두 번째로 물고기를 낚아 올린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도 의외의 사람이었다.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그녀가 줄에 매달려 퍼덕거리는 물고기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참 답답하구나. 하필이면 오늘 처음 낚시하는 내 미끼를 물었느냐?”

검무극이 그녀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검존님!”

“고맙네.”

검무극은 곧장 마불에게로 갔다.

“행운을 발휘하는 초심자가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시간도 감당하지 못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검무극이 자신을 놀리러 왔다는 것을 알았기에 마불은 다시 득도한 고승이 되었다.

“초심자들이 물고기와 싸우는 한, 우릴 못 이기지. 우리는 마음과 싸우는 사람들 아닌가?”

검무극이 마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낚시는 언제 그렇게 다니신 겁니까?”

“나도 자네처럼 혼자 있는 시간 좋아하네.”

“저는 마불님처럼 엄청나게 돌아다닙니다만.”

이런 면에서 마불은 자신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그 만남을 즐기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제 선택 어떻습니까? 마불님이 보시기에 잘한 선택입니까? 아니면 망한 선택입니까?”

“그건 자네가 누구 이름을 적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마불님이시라면 누구 이름을 적으실 겁니까?”

마불이 슬쩍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미 자네 마음속에서는 적지 않았나?”

“아닌데요? 만약 그랬다면 아버지께 한 시진의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적자고 했겠지요.”

“대책 없이 이런 큰 사고를 쳤다? 자네답군.”

“자네답지 않군, 이라고 하셔야죠!”

잠시 고민하던 마불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낚시에 자신 있어 했기에 마불 역시 자신이라고 할 것 같았는데. 그의 입에서 극악소마와 같은 답이 나왔다.

“나라면 교주님을 적었겠지.”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대답했다.

“자네는 교주님만큼 간절하지 않으니까.”

마불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무림일통이라는 아버지의 염원을 가장 정확하게 읽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마불일지도 모른다.

“교주가 막연히 무림일통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큰 오산이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열망이 강하다는 것을 마불이 알려주는 것이다.

그때 다시 물고기가 낚였다. 초심자들의 행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 낚아 올린 사람은 독왕이었다. 그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독왕이 뭔가를 보고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불님, 이제 독초 캐러 산으로 갈 게 아니라 독 있는 물고기 잡으러 잠수하셔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마불이 웃었다.

“나중에 또 오겠습니다.”

검무극이 마불과 작별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네 번째 물고기가 잡혔다.

네 번째로 낚아 올린 사람은 다시 독왕이었다.

초심자들이 연속해서 물고기를 낚자 그곳에 변화가 있었다.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짙어지며 더 멀리 낚싯줄을 던졌고, 취마는 초조한 듯 술을 마셨다.

“어르신처럼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저기 안달 나는 걸 보십시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가져온 낚싯대를 펼쳐서 다른 것을 고르고 있었다. 장비 탓을 하고 있는 혈천도마였다.

변화가 있었던 것은 큰소리 삼인방만이 아니었다.

검우진이 천천히 독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연히 가장 긴장한 사람은 독왕이었다.

검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스스스슷!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독왕이 서 있던 곳 옆으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다시 손을 움직이자 강에서 그곳으로 작은 물길이 만들어졌다. 구덩이에 물을 채운 후 독왕이 잡은 물고기를 넣었다. 두 마리의 물고기가 웅덩이 속을 헤엄쳤다.

“이제부터 여기에 잡은 고기를 넣게.”

“네, 교주님.”

“잡아보니 어떤가?”

“제 적성에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독왕인데다, 평소에도 멍하게 있는 것으로는 이곳 마존들 중 제일인 그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네.”

검우진이 자신의 자리로 걸어왔다. 이미 독왕은 우승한 거나 다름없는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교주가 직접 자신을 위해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만년설삼보다 더 귀한 발걸음이었다.

“설마 독왕님을 선택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검무극의 물음에 검우진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여기 있는 이들 중 누구라도 선택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자리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보며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혼란 작전까지 펼치시는군요.”

* * *

드디어 한 시진이 지났다.

검무극이 물고기 상황을 중계하듯 알려주었다.

“독왕님이 세 마리, 섭혼마존께서 두 마리, 취마님이 한 마리, 일화검존께서 한 마리. 모두 일곱 마리가 잡혔습니다. 크기는 고만고만해서 아직 다툴 상황은 아닙니다.”

나머지 검우진과 검무극, 혈천도마와 마불, 극악소마와 권마는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상황을 보고한 후 검무극이 아버지 앞에 섰다.

“오늘 우승자가 누가 될지 결정하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마존들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해 있었다. 이제부터 적은 저 이름에 따라 무림의 운명이 갈릴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종이에 각각 이름을 적었다. 검우진은 망설임 없이 적어서 보이지 않게 접었다.

뒤늦게 이름을 적어서 내밀던 검무극이 다시 소리쳤다.

“아, 이게 아니야.”

화르르륵.

검무극의 손에서 종이가 타올랐다. 열양지기로 태운 후 검무극이 다시 이름을 적었다. 검우진과 마존들은 이 호들갑조차 검무극의 작전이라 여겼다.

대체 두 사람은 누구를 적었을까?

검무극은 아버지와 자신의 종이를 형에게 맡겼다.

“형이 맡아 줘.”

검무양이 의외라는 듯 검무극에게 물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다른 이름을 다 적은 후에 우승자 이름을 꺼내면 어쩌려고?”

“형이 잘도 그러겠다. 설령 그랬다고 치자. 형이 조작해서 쓴 이름으로 아버지가 잘도 내가 이겼다, 라고 하시겠다.”

맞는 말이다. 검무양이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검무극이 모두가 다 들리도록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렇게 다 같이 낚시나 하면서 즐기면서 살면 되지 않습니까?”

“이 즐거움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해가 지면 끝날 즐거움이다.”

“다음 날 사냥 가고, 그다음 날은 소풍 가고, 다음 날은 술 마시고, 다음 날은 나쁜 놈들 혼내주러 나가고. 할 게 얼마나 많은데요.”

검우진은 아들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검무극은 술상을 뒤엎는 대신 아버지의 술상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그 말을 드디어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꿈꾸시는 무림은 어떤 무림입니까?”

너는 방금 극악소마를 죽였다

모든 마존들이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감히 물어본 적이 없던 질문이었다.

검우진이 꿈꾸는 무림이 어떤 무림인지.

“궁금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의 시선이 아버지의 어깨너머 독왕을 향했다.

너는 교주님이 꿈꾸는 무림일통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냐?

독왕이 알려준 해약을 이제 사용한 것이다.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을 응시했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권마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하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어머니 때문이라는 것을.

아버지, 아직도 그 이유 때문입니까?

과연 아버지는 이 무림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증오하고 계시는 걸까? 그래서 다 밀어버리고 싶으신 걸까? 아니면 뜻밖에 평화로운 무림을 꿈꾸고 계신 걸까?

이윽고 검우진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 무림을 두고 꿈 같은 걸 꾸다니.”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예전에 자주 했던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죠?”

하지만 검우진은 웃지 않았다.

“이 무림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

그 말로 아버지가 무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 때문입니까?

검무극은 그 말만큼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야기는 다 할 수 있어도 어머니와 관계된 이야기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셨으니까.

“아버지께는 가치가 없을 수 있지만, 이 무림에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가치를 부여해서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의 가치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검우진의 표정이 살짝 꿈틀했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좋다.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자.”

이번에는 검우진이 아들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네 설득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감행하면 넌 어떻게 할 거냐?”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제가 막을 겁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제가 막으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검우진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아들의 도발에서 어떤 의도를 읽었다. 한 번 보여주십사 하는.

“혈천도마는 듣게.”

“네, 교주님.”

혈천도마가 정중히 포권하며 명령을 받을 준비를 했다. 곧이어 교주의 명령이 내려왔다.

“소교주의 내공을 제압해서 내 앞에 꿇리게.”

마존들은 모두 놀랐다. 조금 전까지 유쾌하고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그야말로 강물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혈천도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혈천도마가 천천히 검무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 이런 명령이 내려지면 그건 권마가 아니라 자신에게 내려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교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놈아, 이제 어쩔 거냐?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겠지? 어서 교주께 용서를 구해라.’

분명 자신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읽었을 텐데, 검무극은 혈천도마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했다.

“극악소마님.”

“네, 소교주님.”

“혈천도마님을 막으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극악소마가 반대쪽에서 걸어 나와 검무극과 혈천도마 사이를 막아섰다.

혈천도마가 차가운 기도를 드러냈다.

“비키시게.”

“그럴 수 없습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나?”

교주의 명을 받은 혈천도마를 막는 행동은 그야말로 반역이라 할 수 있었다. 참형이 내려져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

혈천도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극악소마가 나서는 걸 말려도 시원찮은 상황에서 그에게 명령을 내리다니?

극악소마가 정중히 검우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가면쟁이 죽이고 싶지 않으면 어서 물러가게 해라.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검무극은 극악소마를 물리지 않았다.

그때 검우진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일화검존은 듣게.”

“네, 교주님.”

“혈천도마를 도와 극악소마를 제압하게.”

“지엄하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일화검존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극악소마 뒤에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소교주, 대체 왜 이러는 건가?’

검무극이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녀 역시 지금의 이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주한 세 마존 사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금껏 마존들끼리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그 암묵적인 규칙이 깨어질지도 모를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무극이 취마를 바라보았다.

‘무극아, 어서 수습해라. 이러다 정말 극악소마가 죽을 수도 있다.’

아니, 극악소마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소교주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수습은커녕 문제를 키웠다.

“취마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취마는 ‘이 미친놈아! 지금 날 보고 도와달라고 할 때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취마는 정중히 대답했다.

“소교주,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의 시선이 망설이지 않고 마불을 향했다.

“마불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불은 검무극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어떤 의도인지 궁금했다. 정말 소교주와 함께 지내면 지루할 틈이 없다.

“미안하지만 거절하겠네.”

마불이 단호히 거절하자 검무극의 시선이 이번에는 독왕을 향했다.

“독왕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독왕은 말없이 자신이 잡은 세 마리의 물고기가 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소교주가 극악소마만으로는 교주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만약 자신이 돕는다면?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교주에게는 영원히 눈 밖에 나게 되겠지만.

독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교주가 직접 만들어준 이 물웅덩이가 없어도 거절했을 텐데, 오늘은 소교주와 함께 개 짖는 소리를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섭혼마존이었다.

“섭혼마존님, 도와주십시오.”

섭혼마존은 다른 마존과는 상황이 달랐다.

이제부터 육마존입니다!

아버지께 그런 농담을 해도 좋냐고 물었던 검무극이었다.

이건 농담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섭혼마존은 정말 돕겠다고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섭혼, 그냥 있으시오. 오늘은 아닙니다.

뭔가 생각이 있을 거라 여겼기에 섭혼마존은 검무극의 뜻을 따랐다.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그렇게 섭혼마존도 정중히 거절했다.

이제 검무극은 마지막 남은 마존을 쳐다보았다. 모든 마존이 다 돌아서도 절대 돌아설 리 없는 사람이었는데도 포기하지 않았다.

“도와주십시오, 사부님.”

과연 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 거절의 의사표현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거절당한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검우진이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방금 극악소마를 반역죄로 죽였다. 네가 바라는 것이 이것이냐?”

“아닙니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이 똑똑한 아들이 극악소마 외에 다른 마존이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을 리 없을 테니까.

만약 몇 사람의 마존이라도 나서서 도와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면, 오히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겠지. 적어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궁지로 몰 아들은 아니었으니까. 아들에 대한 검우진의 믿음은 이 정도로 강했다.

“하면 왜 극악소마에게 막으라고 했느냐?”

모든 마존들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모두 궁금해했다. 이렇게 나서서 막게 한 이유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소마님이 저를 위해 나서주시는 모습을요. 제가 아무리 친해져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는 다른 마존분들의 모습을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소마님이 반역자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놀라운 이유가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키시면 저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겁니다.”

아버지와 오 년의 기한을 약속했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오늘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그때는 약속대로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뜻을 저버렸다고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모략을 꾸며 아버지의 전쟁을 망칠 생각도 없습니다. 그 전쟁은 반드시 승리로 이끌 겁니다.”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물론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할 겁니다. 쉽진 않겠지만 맹주님들이나 친구들의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 애쓸 것이고요.”

검무극이 오늘 이런 상황을 만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막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막지 못했을 때의 결과가 이렇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오늘도 대회가 끝날 때까지 막을 거고, 만약 오늘 실패하면 약속한 오 년이 되는 마지막 날까지 막으려고 노력할 겁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했다.

“제가 어떤 마음인지 제대로 보여드리려고 일부러 만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소마님을 용서해 주십시오.”

소마가 스스로 나서서 막은 것이 아니라, 아들이 불러내서 막은 상황만 봐도 의도적으로 연출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극악소마가 아들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아들의 앞을 막아주지 않았을 때가 문제지, 검우진은 그가 자신의 명을 거역한 것에 어떤 악감정도 없었다.

검우진이 극악소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부탁을 잘 지켜주고 있어서 고맙네.

극악소마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교주가 자신에게 소교주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극악소마는 그걸 검무극에게 말해주기도 했었고.

교주는 허투루 한 말이 아니라는 듯 그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 일은 지켜질 겁니다.

검우진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극악소마 옆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이렇게 저와 아버지 사이를 막아주실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소마님.”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섭혼마존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섭섭했다.

검무극이 자신이 나서지 못하게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아버지 눈 밖에 나지 말라는 의미였으리라. 두 사람이나 교주님의 뜻을 거역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될 테니까.

하지만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모습을 보자, 왠지 저 자리에 자신도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검무극은 끝으로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들의 철없는 행동을 너그러이 봐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검우진은 느꼈다. 아들이 진심을 밝히는 것으로 선전포고를 했음을.

언제나 그렇듯 아들은 진심을 숨겨서 그 자리를 상상으로 메우게 하지 않는다. 그 상상은 언제나 차갑다는 걸 이 똑똑한 녀석은 아는 것이다.

그때였다.

저 옆에 세워둔 낚싯대가 넘어졌다.

“앗! 제 낚싯대입니다!”

검무극이 세워둔 낚싯대의 미끼를 물고기가 물은 것이다. 검무극이 달려가서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제가 낚은 첫 물고기입니다!”

검무극이 신난 얼굴로 물고기를 높이 들었다.

“제 실력 보셨습니까? 낚싯대 붙잡고 있지 않아도, 물고기 낚는 것? 가만히 있어도 물고기가 저를 향해 달려드는 것을…… 아니, 어디 가십니까? 제 물고기 좀 보시라니까요! 제일 커 보이지 않습니까?”

검우진이 다시 낚싯줄을 강으로 던졌다.

대치하고 있던 마존들이 자기 자리로 갔고, 나머지 마존들도 다시 낚싯대를 들었다.

검무극이 다시 낚시를 시작한 마존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 대회 속행입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잡아주십시오! 특히 제가 이름을 적은 분은 더 열심히 잡아주십시오!”

한껏 무겁고 진지했던 분위기는 다시 원래대로 밝아졌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내 이름 적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다.”

교주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한 그였다. 그는 검무극에게 자신 때문에 교주의 뜻을 꺾은 게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아직 한 마리도 낚지 못했으면서 여전히 우승할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아버지가 적으셨으면 어쩌시려고요?”

혈천도마가 슬쩍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는 없을 거다.”

“그건 모를 일이죠. 아버지가 어르신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등 못 하시면 안 됩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날 찍었지?”

“그것도 모를 일이죠.”

검무극이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낚시 안 하고 또 어딜 가?”

“저는 한 마리, 어르신은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으셨습니다.”

“난 후반에 강한 사람이고. 그리고 그 물고기, 저절로 잡힌 거잖아!”

검무극이 걸음을 옮겨서 이번에는 취마에게로 걸어갔다.

취마는 말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주었다.

검무극이 술을 마셨다. 원래도 맛있는 술을 빙궁성배에 담아 마시니 그야말로 끝내주는 맛이었다.

“술맛 좋다.”

“넌 정말 미친놈이다.”

앞서 표는 안 냈지만 정말 어찌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정말 이들 부자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릴까 걱정했다.

“술상 뒤엎지 말고 앉으라면서? 나는 형 조언대로 했어.”

“이놈아, 술자리에는 좋은 안줏거리가 있어야지. 그렇게 대놓고 독주부터 마시니 분위기가 좋을 수가 있겠냐?”

“내가 너무 성급했지?”

“그걸 말이라고! 지금이라도 안줏거리를 찾아.”

“그래, 찾아야지. 아까 그런 상황 안 만들려고 오늘 이렇게 나온 건데. 찾아내야지!”

검무극은 잠시 그렇게 취마 옆에 서서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형, 내가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 오만일까?”

취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렇다고 단호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이 지금까지 해온 일들과 노력을 알기에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취마가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거 아냐? 지금까지 술이 나를 바꾸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술은 술일 뿐이지. 한데 술을 마신 나는 자꾸 바뀌지. 기분 좋아지기도 하고, 울적해지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고독해지기도 하고.”

취마가 다시 술을 빙궁성배에 따르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교주님을 바꾸겠다는 마음이면 이 일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일 거다. 대신에 그냥 좋은 술이 되어서 교주님을 취하게 해야지 한다면? 그건 해볼 만한 일이 되겠지.”

마음에 와닿는 말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따르는 걱정이 있었다.

“깨서 후회하시면?”

“취한 다음 날은 누구나 후회한다.”

취마가 술을 쭉 마시며 덧붙여 말했다.

“대신 검무극이라는 술이라면, 기분 좋게 후회하실 거다.”

술꾼이 무슨 숙취 걱정을 하고 있어

취마 말이 옳다. 아버지의 숙취를 자신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가 후회하든 후회하지 않든, 그 감정까지 고려해서는 이번 일을 막아낼 수가 없으리라.

“전에도 말했지만 형은 보면 볼수록 똑똑하단 말이지. 마존들 중에서 형이 제일 똑똑해.”

똑똑하다는 칭찬은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기에 취마는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형은 평범한 주정뱅이가 아니야. 아주 비범한 주정뱅이야.”

취마가 기분 좋은 얼굴로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주었다. 검무극이 술을 마시며 취마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되돌려 주었다.

“취마라는 술이라면 기꺼이 밤새 취하리라!”

그렇게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누군가 물고기를 낚았다.

촤아아악!

바로 극악소마였다. 오늘 그가 잡은 첫 번째 물고기였다.

무덤덤한 그의 반응과 상반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소마님!”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향해 소리쳤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우리 소마님이 첫 번째 물고기를 낚았습니다! 아마 그 물고기가 이 강에서 제일 잘생긴 물고기일 겁니다!”

펄쩍펄쩍 뛰며 제 일처럼 기뻐하는 검무극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취마가 불만을 드러냈다.

“반응이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니냐? 내가 낚았을 때는 이렇게 안 기뻐했잖아?”

“형은 소마님이 아니니까.”

“사람 앞에 두고 차별하지 마라. 그게 제일 나쁜 거다.”

“이게 싫었으면 취마님 도와주십시오! 했을 때 나섰어야지.”

“나가려고 했었어.”

검무극이 취마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그 눈을 보며 취마는 차마 거짓말은 못 했다.

“아니. 못 나갔을 거다.”

교주의 명을 거역하고 나선다고? 취마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네 무덤에 술을 뿌려주는 정도였겠지.”

“괜찮아, 형이 주는 술이면 맛있었을 거야. 나도 형이 제일 좋아하는 술로 뿌려줄게.”

그러자 취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내 무덤에는 술 뿌리지 마라. 평생 그렇게 술을 마시고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뭔 술이냐? 황천길 걸어갈 때는 맨정신으로 가련다.”

살아 있을 때나 부지런히 마시자는 듯, 취마가 술을 마신 후 다시 성배에 술을 채워 검무극에게 주었다. 검무극이 술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 인생에서 안줏거리는 뭐야?”

취마가 잠시 생각하더니.

“너. 너 보면 즐겁고 재미있다.”

“나 말고는?”

취마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여 무인은?”

“여빈이야 내게 안줏거리가 아니라…… 독주지.”

취마의 진담 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되물었다.

“이제 그 술 마셔야 할 때가 되지 않았어?”

취마가 설마하는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둘이 혼인하라고.”

“갑자기?”

“여 무인도 생각해 줘야지.”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삼대 취객의 자리에 오른 그녀였으니 나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취마가 술을 마셨다. 눈빛에 고민이 보이는 걸 보니, 그럴 마음이 없지는 않은 듯 보였다.

“여 무인이 뭐래? 혼인하자고 안 해?”

“그런 말 꺼낼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마존인데 누군들 쉽게 꺼내겠어. 형이 먼저 꺼내야지. 혼인할 때 꺼내려고 담아둔 술, 그런 술 없어? 뭐든 달콤한 술 꺼내서 분위기 좋은 날 혼인하자고 해.”

취마는 말없이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왜? 여 무인 싫어?”

“싫긴. 그런 여자가 또 어디에 있다고.”

“그런데 왜?”

취마가 손에 든 빈 잔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취할 줄만 알지, 깨는 법을 잘 모르거든.”

술만 마시고 살아온 인생인데, 누군가를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걱정하는 모양이다.

“어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내게는 온갖 조언 잘해주면서 자기 일은 이렇게나 못해.”

검무극이 취마의 손에 들린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여 무인도 다르지 않을 거야.”

“뭐가?”

“걱정할 거라고. 삼대 취객의 자리에 올랐으면 여 무인도 평생 술 마시고 산 인생이잖아. 무공 때문이든, 아니든. 그녀라고 걱정 안 하겠어? 이런 내가 취마님과 잘 살 수 있을까?”

취마가 대답 없이 술잔을 비웠다.

“누구보다 술에 대해 잘 알고, 누구보다 형 오래 봤고, 누구보다 형 좋아하고. 그러니 평생 술벗이라 여기고 혼인해. 저녁에 둘이 마시고 아침에 깨서 같이 후회하고. 교대로 술도 끊어가면서 그렇게 살아.”

취마가 검무극을 보며 웃었다. 한 번씩 이 새파랗게 젊은 녀석은 한평생을 다 살아본 사람처럼 군다.

“혼자 사는 남자가 제일 빨리 죽는대.”

“오래 살아서 뭐 하게?”

“나랑 늙어서까지 술 마시고 놀아야지. 형은 여 무인 같은 사람이 옆에서 지켜줘야 해. 그러니 어디 도망가기 전에 붙잡아.”

이렇게 오늘 내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술을 마시면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검무극이 마지막 잔을 비운 후에 저 멀리 서 있는 권마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 관해서는 사부님이 제일 잘 아시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검무극이 그곳으로 걸어가며 덧붙여 말했다.

“술꾼이 무슨 숙취 걱정을 하고 있어.”

권마에게 걸어가던 검무극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아버지가 형에게 낚시를 가르쳐주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아버지는 장남에게 낚시를 가르쳐주면서 죽은 당신의 형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걸음을 옮긴 검무극이 권마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낚시 재미없으시죠?”

권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침묵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렇게 무섭게 인상 쓰고 계시니까 물고기가 무서워서 근처에 안 오는 겁니다.”

“이렇게 여유로운 걸 보니 적어도 네 이름을 적지는 않은 모양이다.”

“누굴 적었는지는 특급 비밀입니다.”

검무극은 권마 옆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았다.

“낚시대회에서 낚시는 안 하고 왜 이리 돌아다니는 게냐?”

“안줏거리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다가 이내 권마는 고개를 강으로 돌렸다. 검무극이 하는 일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아까 그 일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일들을 하는 소교주였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시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아, 사람은 빼고요. 사람을 넣으면 저 아니겠습니까?”

자신만만한 검무극을 보며 권마는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친해지고 나서 알게된 것들이 있습니다. 바둑도 좋아하시고, 요리하시는 것도 좋아하시고. 낚시도 좋아하시고. 한데 이런 것들은 다 취미들이잖습니까? 설마 태사의에서 일하시는 걸 좋아하시지는 않을 테고요.”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버지와 그렇게 친해지려고 노력했었는데,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디 아버지뿐이겠는가? 형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른다. 이안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금 전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극악소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알지 못한다. 방금까지도 함께 술을 마셨던 취마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였지?

권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온 거냐?”

“모르십니까?”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권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른다.”

알려주기 싫어서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정말 권마는 모르고 있었다.

“그 질문을 내게 해도 나는 한참을 고민해야 대답할 수 있을 거다. 그것도 내일 바뀔 수도 있는 대답이고.”

권마가 검무극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

검무극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 자기 자신이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강물을 쳐다보았다. 취마와 있을 때의 수다가 주는 편안함이 있다면, 권마와 있을 때의 이 침묵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권마가 불쑥 말했다.

“그 약속은 잊지 않고 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권마와 약속했다.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마음먹으면 권마에게 가장 먼저 알릴 것이다. 그때 자신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권마는 그 어려운 약속을 기꺼이 해주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길 바란다.”

권마가 처음으로 그에 대해 마음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바로 그때였다.

“월척이다!”

첫 월척을 잡아낸 사람은 큰소리 삼인방 중 한 사람, 바로 혈천도마였다. 지금까지 잡았던 물고기의 두 배는 되는 크기였다.

권마와 함께 더없이 조용하던 검무극이 돌변했다.

“현재 일 등 물고기가 나타났습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달려가며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버지의 낚시 선생이셨던 실력,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어르신이 우승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기에 이기려면 나 찍었어야 했을 거야.”

혈천도마는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찍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난관을 이겨내야 승리하지.”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에게 큰 물고기를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우승해서 만년설삼을 같이 복용하자는 모습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독왕에게 만들어준 것처럼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웅덩이를 만들어주었다.

혈천도마가 웅덩이에 물고기를 넣었다.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물고기를 쳐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아까 많이 놀라셨죠?”

낚싯바늘에 새로 지렁이를 끼던 혈천도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가 날 놀라게 한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냐?”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교주를 설득하려고?”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찾고 있습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좋아하는 거 알아서 뭐 하려고? 그걸로 알랑방귀라도 뀌려고? 교주가 잘도 좋아하겠다.”

순간 검무극의 눈빛이 반짝였다. 맞는 말이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걸 알아내서 잘 보이자, 기분을 풀어드리자, 이 접근법부터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권마 다음이라면 섭섭할 혈천도마였다.

“제일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야지.”

“좋아하는 건 쉽게 꾸며낼 수 있지만, 싫어하는 건 잘 꾸며지지 않지. 누군가를 깊이 알려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봐야지.”

검무극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역시! 어르신이 제일 똑똑하십니다! 역대 마존들까지 포함해도 제일 똑똑하실 겁니다!”

검무극은 모두가 들리게끔 소리쳤다.

그러자 즉시 반응한 한 사람이 있었다.

“조금 전에 내가 제일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검무극은 취마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커녕 다른 억울함을 더했다.

“취하셨습니다, 취마님. 책을 이렇게 많이 읽으시는 도마님이 계신 데 어찌 제일 똑똑하실 수 있겠습니까?”

취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이내 포기했다는 듯 술을 마셨다.

“아, 취한다.”

주정을 부리는 것으로 몰려도 취마의 기분은 좋았다. 이런 순간,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즐거웠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아는 바로는 독공도 싫어하고 섭혼술도 싫어하신다. 살수도 싫어하시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냥 일반적인 것들이고.

아버지가 진짜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그것에 이번 문제의 해답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쏴아아아아.

모두 천막 아래에서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가 쏟아졌을 때 마침 천마전 호위들이 점심 준비를 마쳤기에 잠시 낚시를 중단하고 천막으로 모인 것이다.

“낚시는 우중 낚시가 최고지.”

혈천도마의 말에 낚시 좀 해본 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권마나 일화검존, 극악소마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고, 새로 낚시에 재미를 들인 독왕과 섭혼마존은 비가 오나 안 오나, 어서 식사를 마치고 낚시를 하러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현재 많이 잡은 숫자로 여전히 독왕이 일등, 물고기 크기로는 혈천도마가 일 등이었다.

“처음이죠? 이렇게 다 모여서 야외에서 식사하는 것이.”

검무극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존들이 이렇게 기분 좋게 모두 모여 내리는 비를 보며 식사하는 날이 올 줄이야.

“아버지, 아들 술 한잔 받으십시오.”

검무극이 검우진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받은 검우진이 두 아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마존들은 옆에 앉은 이들과 술을 나누었다.

취마가 먼저 옆에 앉은 권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것이 오랜만입니다.”

취마가 권마와 술자리를 함께한 것은 정말 오래전의 일이었다.

권마가 그 큰 손으로 취마의 잔을 채워주었다.

“소교주를 통해 보내주신 술은 잘 마셨소.”

그 말에 취마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이 준 술을 마존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는 것을. 고맙게도 자신이 준 술이라고 밝히면서. 이러니 안 좋아할 수가 있나?

혈천도마는 일화검존과 술을 나누었다.

“우승하실 자신 있으시겠어요?”

“이 판에서 못 하는 게 이상하지.”

이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그런 감정의 교류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지난 여행이 두 사람의 관계에 큰 변화를 안겨준 것이다.

극악소마에게 술을 받는 섭혼마존은 기분이 좋았다. 이 감정은 이성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어떤 동경 같은 것이었다.

풍천교주나 검무극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극악소마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극악소마만의 분위기가.

독왕이 마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감사했소.”

독왕은 앞서 마불이 나서서 맨 먼저 나온 이유를 따지고 물었던 것이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알고 있었다.

“소교주가 걱정하고 있소. 이제 독초가 아니라 독물고기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독왕은 부정하지 않으며 옅게 웃었다. 그러다 검우진과 눈이 마주쳤는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작은 물웅덩이 하나가 만들어낸 큰 변화였다.

쏴아아아아아.

검우진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참 좋구나.”

일등이 바뀌었습니다!

마존들의 시선이 모두 검우진을 향했다.

처음이었다. 교주의 입에서 참 좋다는 말이 나온 것은.

어디 내리는 비가 좋아서 한 말이겠는가? 다 같이 함께해서 좋다는 의미이리라.

마존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가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당사자인 검무극은 아버지가 바라보고 있는 바깥 풍경을 함께 쳐다보고 있었다.

“비 오는 강가 풍경이 정말 좋습니다. 저는 이렇게 비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니었는데 검우진은 아들의 말을 받아주었다.

“나도 비 좋아한다.”

“아버지가요?”

“왜 그리 놀라느냐?”

“그냥 아버지는 비 오는 거 구질구질해서 싫다고 하실 거 같아서요.”

비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에 어떤 아련한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은 표나지 않게 사라졌다.

강물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원들, 젖은 흙에서 나는 냄새,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 저 멀리 피어오르는 물안개.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자 보고 있는 이들의 기분이 좋아졌다.

검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존들을 쳐다보았다.

일화검존과 함께 비를 바라보고 있는 혈천도마, 빗소리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취마, 이제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독왕, 확실히 젊고 생생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섭혼마존, 계산에 능숙했던 혈불과 세상 만만한 부처 사이를 오가고 있는 마불, 아들을 위한 충성심이 저 새하얀 가면과 같음을 이미 증명한 극악소마, 그리고 ‘가세’라는 말에 어딘지 묻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권마까지.

한때는 마존들을 의심하고 불신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알 수 없이 어둡고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검우진은 마존들을 그 누구보다 굳게 믿었다.

취마가 검우진의 잔이 빈 것을 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참을 수 없지.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그 잔에 마셔보세.”

예전에 검무극과 빙궁의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검우진은 빙궁성배로 술을 마셔본 적이 있었다.

취마가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 검우진에게 주었다.

“역시 맛이 좋군.”

“한 잔 더 드리겠습니다.”

“됐네. 자네가 한잔 받게.”

검우진이 성배에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대취림의 주정은 어떻게 되었나?”

생각지 못한 질문에 취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주정이 상한 걸 알고 계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교주는 교내의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천살성을 격퇴한 후에 주정은 다시 맑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취마는 교주가 주정이 상하는 것으로 본교의 안위를 점치는 것을 미신으로 여기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이렇게 물어봐 주니 정말 고마웠다.

검우진의 관심이 이번에는 섭혼마존을 향했다.

“무공수련은 잘 되고 있나?”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검우진이 품에서 작은 목곽을 꺼내서 내밀었다.

“받게.”

섭혼마존이 검우진에게 가서 공손히 그것을 받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놀랍게도 마정단이었다.

“가져가서 복용하게.”

섭혼마존이 감격한 얼굴로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처음 받을 때만 해도 마존들에게 모두 내리는 것인가? 생각했었는데, 검우진은 다른 사람에게는 영약을 내리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교주가 자신에게만 영약을 내렸다는 것을. 그것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섭혼마존의 눈동자와 얼굴이 살짝 떨렸다.

이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갈 검무극이 아니었다.

“섭혼마존에게만 내리는 영약입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존들 섭섭하게 왜 한 사람에게만 주십니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검무극이 섭혼마존을 쳐다보며 말했다.

“섭혼, 아버지가 눈치채신 것 같소. 섭혼께서 내게 넘어오려는 것을.”

섭혼마존은 마음 같아서는 이런 농담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되면 소교주님의 첫 마존이 되는 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마정단이 든 상자를 감격스럽게 내려볼 뿐이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검우진에게 말했다.

“왜 지금까지 이런 다정한 모습을 감추고 계셨습니까? 제가 왜 이렇게 정이 많나 했더니, 이게 다 아버지를 닮아서였군요.”

가만히 아들을 응시하던 검우진에게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네 엄마를 닮았다.”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마존들 앞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언급할 줄은 몰랐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마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말을 꺼낸 것은 앞서 참 좋다는 말을 꺼낸 것이나, 취마와 섭혼마존을 챙긴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면 사람 놀라게 하는 걸 아버지를 닮았나 봅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버지는 그조차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날 닮은 게 아니다.”

검무극은 어머니가 생전에 아버지를 곧잘 놀라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비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느꼈던 바를 전했다.

“비를 좋아하는 것도 어머니였겠군요. 아버지는 어머니 따라 좋아하게 되신 것이고요.”

검우진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기왕 말씀을 꺼내셨으니.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검우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이제 점차 잦아들기 시작한 비를 쳐다보았다.

대답을 대신한 사람은 권마였다.

“마후께서는 정말 멋진 분이셨다.”

검무극이 권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 어머니는 정말 멋진 분이셨으리라.

생각해 보니 섭혼마존을 제외한 다른 마존들은 모두 어머니를 봤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화검존이 어머니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술잔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깊어져 있었다.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검존이었다. 왜 검존은 어머니를 싫어할까? 그렇게 멋진 분이셨다면.

일화검존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혈천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어머니 이야기로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곧장 화제를 돌렸다.

“자자, 다시 낚시대회로 돌아와서 화제의 마존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독왕이었다.

“독왕님, 현재 많이 잡은 것으로 일 위를 달리고 계신데 소감이 어떻습니까?”

독왕은 이런 자리에서 꼭 내게 그런 걸 물어야 하냐, 눈빛으로 하독한 후에 차분히 대답했다.

“낚시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인지 처음 알았네.”

그건 진심으로 하는 대답이었다.

“한 마리도 못 잡았다면 재미없었을걸요?”

그러면서 슬그머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직 한 마리도 못 잡은 우리 아버지께서 그 심정은 제일 잘 아시겠네요. 아버지, 너무 여유 부리시다가 천년설삼도 못 타가십니다.”

한 마리만 잡아도 기념으로 주기로 한 천년설삼이었다. 거의 참가상이나 다름없었는데.

“운으로 한 마리 잡았다고 자신만만하구나.”

“전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우진은 자신만만했다.

“내기는 내가 이길 거다.”

아버지의 자신감에 검무극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누굴 적으셨습니까? 처음에는 아버지는 당연히 아버지를 선택하셨을 거다, 생각했는데 지금 너무 여유로우시잖아요? 진짜 독왕님 적으신 건 아니죠?”

그때 혈천도마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나를 적으셨어야 할 텐데.”

검무극이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재 월척 부분에서 일 위를 달리고 계신 도마님이십니다. 오늘 낚시대회 어떻게 보십니까?”

혈천도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기에 이기고 싶나? 그럼 지금이라도 교주님께 부탁드려서 내 이름으로 바꿔 적어라.”

검무극은 마불을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하신 마불님도 한 말씀 해주시죠.”

마불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제 슬슬 초심자들의 행운이 사라질 시간이 됐지.”

“그럼 확인하러 가보실까요?”

어느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마치 다 함께 운치를 즐기며 식사하라고 잠시 하늘이 내려준 선물처럼.

비 내린 후의 강가 풍경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자, 오후 낚시대회 시작합니다! 자리 옮기고 싶으신 분은 언제든 옮겨도 됩니다.”

하지만 다들 각자 자기 자리로 가서 낚싯줄을 드리웠다.

이제 오후에 들어섰기에 모두 낚시에 집중했다.

검무극도 더는 돌아다니지 않고 서서 낚시했다. 진짜 실력이 있다는 듯 오후 낚시의 첫 물고기는 검무극이 잡았다.

“이제 실력 발휘 갑니다!”

겉으로 신나하고 있었지만, 검무극의 마음은 한 가지 생각이 사로잡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번 내기나 오 년의 약속을 떠나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그냥 편하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는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이야말로 누구나의 마음에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그 시커먼 구멍에서 꺼내야 할 수도 있었기에.

나는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가?

나는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가?

검무극은 스스로에게 물으며 다시 강물을 향해 힘차게 낚싯줄을 던졌다.

물고기도 이제 진짜 승부를 펼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앞서보다 자주 낚여 올라왔는데 다음에 잡힌 물고기는 큰 의미가 있었다.

“월척입니다.”

월척을 낚은 사람은 바로 검우진이었다.

“지금까지 잡은 물고기 중에 가장 큰 놈입니다. 드디어 실력 발휘를 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혈천도마가 슬그머니 검우진이 있는 곳으로 갔다.

“큰 놈으로 잡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말은 축하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달랐다. 정말 제일 큰 놈이라고? 자신이 잡은 것보다 더 큰지 눈대중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어느 틈에 왔는지 뒤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확실히 더 크죠?”

“비슷해 보이지 않나?”

“큽니다, 커요!”

사실 혈천도마 자신이 봐도 검우진이 잡은 것이 더 컸다.

검무극이 큰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월척 부분 일 등이 바뀌었습니다.”

검무극이 순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설마 아버지 이름 적으신 건 아니시죠?”

검우진이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비상사태네요!”

검무극이 다시 자리로 달려가서 낚싯대를 들었다.

“자, 이제 놀 때가 아니다. 물고기들아, 내게로 와라!”

이제 이 등으로 내려온 혈천도마는 더 마음이 급했다.

“이놈아, 그렇게 떠들면 물고기 다 달아난다.”

그 달아난 물고기가 쪼르르 가서 문 것은 권마가 드리운 미끼였다.

제법 큼직한 물고기가 권마의 낚싯대 끝에서 퍼덕거렸다.

“사부님 손이 커서 작아 보이지, 저 물고기도 작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큽니다.”

멀리서 봐도 검무극은 귀신처럼 크기를 딱딱 맞췄다.

“마불님, 아직 초심자의 행운은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불은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에 초조한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한 마리도 못 잡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진 득도한 고승 흉내를 잊지 않았다.

“낚시는 자연과 대화하고 나아가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하네.”

“제발 오늘 이 자리가 낚시대회라는 것도 잊지 마세요!”

“마음을 비우시게, 소교주.”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낚아 올렸다. 우승하겠다는 강렬한 염원이 물고기들에게 전해진 것일까?

이후 연속해서 계속 잡아 올렸다. 월척 크기로는 여전히 이 위였지만, 낚은 숫자로도 이 위의 자리에 올랐다.

“어르신, 잘하면 만년설삼 두 뿌리를 다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혈천도마가 눈빛을 반짝이며 의지를 다졌다.

반면 내내 기다렸다가 한 번 입질이 온 물고기가 미끼만 물고 달아나자 결국 마불이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들! 씨를 말려버릴 테다!”

검무극이 마불을 보며 웃었다.

“혈불께서 다시 돌아오셨군요.”

독왕은 초심자의 행운을 끝까지 발휘했다. 혈천도마가 바짝 쫓아오면 달아나고, 또 쫓아오면 달아났다.

독왕과 혈천도마의 물고기 차이는 단 한 마리.

아버지와 혈천도마의 월척 크기 차이는 한 뼘 정도.

그렇게 잡고 놓치고 하던 사이, 처음에 정했던 시간이 다 되었다.

호위전 무인이 와서 말했다.

“이제 곧 마칠 시간입니다.”

이대로라면 아버지와 독왕의 우승이었다. 극악소마가 저 멀리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누구 이름을 적으셨습니까? 이대로 끝나도 괜찮습니까?

낚시대회의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지만 내기의 결과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만약 교주가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우승하게 된다면, 그 소원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극악소마뿐만 아니라 마존들은 확신했다. 그 소원은 반드시 무림일통과 관계있으리라고.

호위 무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열을 세고 대회를 마치겠습니다.”

권마는 이 지겨운 낚시 드디어 끝이구나 기지개를 켰다. 일화검존도 이게 내 마지막 낚시다라고 나직이 말했다.

섭혼마존은 이제 낚시는 뒷전이었고 가슴에 품고 있는 마정단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까워서 복용할 수나 있을까?

반면 숫자 열이 남았다고 해도 아직 대회가 끝나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혈천도마가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제발! 마지막 월척 한 마리만! 잔챙이라도 한 마리만!’

그는 우승해서 일화검존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독왕도 마지막까지 찌를 바라보며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애썼다.

검우진과 검무극도 마지막까지 시선을 찌에서 놓치지 않았다.

무인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바로 그때였다.

화아아악.

물속에서 환한 광채가 빛나기 시작하더니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점차 그 빛이 커지면서 선명해지더니.

푸아아아앙.

미끼를 문 물고기가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작은 용이 승천하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우아아!”

물고기를 보는 순간 모두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낚은 그 어떤 물고기보다 컸다. 단연 낚은 사람을 우승자로 만드는 크기였는데, 단지 크기만 큰 물고기가 아니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황금빛 동공과 기다란 수염, 몸에서는 불꽃 같은 붉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고 비늘 하나하나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펼쳐진 지느러미는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친 것처럼 화려했다.

물고기는 찬란한 빛을 발하며 자신이 문 낚싯대의 주인을 향해 안겨들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지게 미친놈이다

물고기를 낚아 올린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혈천도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만년화리냐?”

혈천도마는 언젠가 영물도감(靈物圖鑑)에서 만년화리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분명 검무극이 안고 있는 물고기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검우진과 다른 마존들 역시 만년화리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으로 보거나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대충 그 모양을 짐작할 뿐.

검무극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안고 있는 물고기를 내려보며 대답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검무극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가 진짜 만년화리임을 확신했다. 이미 한 번 잡아봤었으니까.

마존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그들이었는데, 눈앞에서 만년화리를 낚시로 낚아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검우진 역시 얼굴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만년화리를 어떻게 잡은 거냐?”

아버지의 물음에 검무극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부러 의도해서 잡은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 잡은 만년화리는 이곳에서 낚은 것도, 이 시기에 낚은 것도 아니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만년화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만년화리는 이런 평범한 강물에서 잡을 수 있는 영물이 아니었다. 깊고 깊은 화염 동굴 아래, 정말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장소에서 잡았다.

한데 낚시대회에서 만년화리가 낚인다고? 그것도 자신에게?

회귀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인생에서는 만년화리를 꼭 한 번은 잡게 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검무극은 자신을 회귀시켜 준 노인을 떠올렸다.

‘내게 주는 선물인 거요?’

선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이 우승해 버리면, 아버지와의 내기에서 질 수도 있었다. 검무극은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으니까.

검무극의 손에 들린 만년화리가 한차례 힘차게 요동쳤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커다란 지느러미를 촤악 펼치는 순간, 비늘에서 노을빛 광채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실제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빛이 금빛과 어우러지며 빛나기 시작했다.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던 빛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쏴아아아아앙.

빛이 사라졌을 때 만년화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검무극의 손 위에 커다란 붉은 내단이 남아 있었다.

만년화리의 내단.

공청석유와 더불어 영약계의 최고 양대 산맥.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향기.

은은하면서도 청명한 그 향기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검무극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평생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다.

검무극이 손에 들고 있던 내단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회귀 전 인생에서 이것을 얻기 위해서 했던 그 수많은 노력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 경악한 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수없이 자신들을 놀라게 한 검무극이었지만, 낚시대회에서까지 이렇게나 놀라게 한다고?

검무극이 대회를 마치겠다며 숫자를 세던 천마전 무인에게 말했다.

“숫자 더 안 세시오?”

넋 나간 얼굴로 쳐다보던 무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숫자를 마저 셌다.

“셋, 둘, 하나. 낚시대회가 끝이 났습니다.”

무인이 큰소리로 우승자를 발표했다. 크기를 재 보나 마나였다.

“제일회 천마배 낚시대회의 우승자는 소교주님이십니다!”

가장 많은 물고기를 잡은 사람에게도 만년설삼을 주기로 했지만, 역시 낚시대회의 우승은 누가 가장 큰 월척을 낚았느냐였으니까. 게다가 우승으로 이끈 물고기가 자그마치 만년화리였다.

검무극이 만년화리 내단을 번쩍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제가 우승했습니다!”

아버지와의 내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검무극은 기뻤다. 다른 물고기도 아니고, 만년화리가 안겨서 얻은 우승인데 기뻐해야지.

바로 그때 검무극에게 만년설삼보다 더 큰 우승 상품이 주어졌다.

검우진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아버지가 이렇게 크게 소리 내서 웃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의도도 담기지 않은, 그냥 순수한 웃음이었다.

아버지가 웃자 마존들도 함께 크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다. 교주와 함께 웃으면서 마존들은 생각했다.

자신들이 이 젊은 소교주와의 인연으로 변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이런 거창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인데, 어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주와 마존들이 다 함께 이렇게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가에 울려 퍼지던 웃음이 그치자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 내단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네가 낚았으니 당연히 네 것이다.”

검무극이 웃으며 한 번 더 확인했다.

“정말 아버지께 드리지 않아도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개최한 대회인데 내놔라, 이놈! 명분도 확실히 있습니다만.”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개최한 대회이니 내놔라, 이놈!”

“이제야 진짜 마교주다우십니다.”

그렇게 아들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준 후 검우진이 차분히 말했다.

“다른 영약이라면 모를까 만년화리 내단을 주지 않았다고 불효자라 욕할 무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다.”

검우진은 물론이고 마존들 역시 이런 귀한 영약과 보물에는 주인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닌 보물을 탐하면 오히려 해가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바로 복용해라. 내가 호법을 서주마.”

가장 귀한 영약에 어울리는 가장 존귀한 호법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아직 오늘의 놀람은 끝나지 않았다.

“이건 제가 복용하지 않을 겁니다. 줄 사람이 있습니다.”

만년화리의 내단을 복용하지 않을 거라고? 대체 누구에게 주려는 것일까?

모두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검무극은 그곳에 있던 한 사람에게 내단을 내밀었다.

“받아.”

검무극이 내단을 내민 사람은 바로 검무양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당사자인 검무양이 제일 놀랐다.

“그걸 내게 준다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양은 놀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왜?”

“왜긴. 형이니까 주는 거지.”

검무양이 단번에 거절했다.

“싫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왜?”

검무양의 이유는 검무극이 했던 대답과 같았다.

“네 형이니까.”

검무양은 절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네가 복용해. 이 만년화리는 네게 온 것이다.”

“형에게 주라고 내게 온 것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검무극은 형이 받지 않겠다고 할 것은 미리 예상했다. 하지만 저 고집 센 형을 꺾을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검무극이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검무극이 왜 저 귀한 내단을 검무양에게 주려는 것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검우진이 검무양에게 말했다.

“양아.”

“네.”

“복용하거라.”

“아버지!”

검무양이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했다.

“싫습니다.”

검우진은 그런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복용하거라.”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내리는 명령을 검무양은 더는 거역하지 못했다. 마존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에서 교주의 명을 끝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으니까.

“네, 아버지.”

검무극이 내민 만년화리를 검무양이 받아들었다. 형제는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주고받았다.

너, 이 자식! 정말 이럴 거냐?

그런 눈빛은 누가 형에게서 만년화리의 내단을 뺏어갈 때 지으라고.

마존들은 만년화리의 내단을 형에게 양보하는 아무도 믿지 못할 장면을 직접 보고 있었다. 검무극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재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고.

“그럼 제가 복용하겠습니다.”

검무양이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단을 복용했다.

그의 입안에서 만년화리의 내단이 녹았다. 평생 살면서 입에 넣어본 것 중에 가장 감미로운 맛이었다.

엄청난 내력이 온몸을 감돌기 시작했고 검무양은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검우진이 등에 손을 대서 한 줄기 내력을 주입했다. 만년화리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건너편에 서 있던 극악소마와 눈이 마주쳤다. 가면 속 두 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멋지십니다, 소교주님.

그 옆에 선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고, 일화검존은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취마가 빙궁성배에 술을 가득 부어서 건배하듯 들더니 술잔을 비웠다.

독왕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지 않은 채 검우진과 검무양을 쳐다보고 있었고, 마불 역시 그 검무양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권마는 그 큰 주먹을 양손 모두 꽉 쥐었고, 섭혼마존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이윽고 모든 기운이 몸속에서 녹았다. 검우진의 도움으로 검무양은 만년화리의 기운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흡수했다.

이제 그의 단전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정순한 내공이 가득 쌓였다. 내공에 있어서는 검무극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내공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검무양이 눈을 떴다. 두 눈에서는 맑고 깊은 눈빛이 그의 성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연을 얻은 순간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우진에게 먼저 고마움을 표한 후 검무양이 검무극 앞에 섰다.

서로 죽이지 않는 후계 싸움을 하자고 했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검무양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너는 무림에서 가장 귀한 영약 두 개를 모두 나에게 주었다.”

예전에 공청석유도 세 방울이나 자신의 입에 넣어줬던 검무극이었다.

“넌 정말 미친놈이다.”

오늘은 거기에 한마디가 덧붙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지게 미친놈이다.”

검무양이 동생에게 할 수 있는 극찬이었다.

“형은 공청석유도 거절했고, 만년화리도 거절했지. 형도 만만치 않게 미친놈이라는 것 잊지 마.”

검무양이 환하게 웃었고, 검무극도 함께 웃었다.

검무극이 검우진에게 말했다.

“자, 이제 시상식 하셔야죠. 독왕님, 이리 오십시오! 우리 만년설삼 받아야지요.”

검우진이 직접 만년설삼을 시상했다. 먼저 물고기를 가장 많이 낚은 독왕에게 만년설삼을 내렸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주님.”

독왕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지어준 해약이 제대로 약효를 발휘했음을. 교주와의 관계가 이전과 달라졌고 앞으로 더 달라질 것을 예감했다.

검우진이 다음으로 검무극에게 만년설삼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만년설삼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이 만년설삼은 잘 보관해 뒀다가 마존님들 중에서 가장 먼저 혼인하시는 분께 혼인선물로 드릴 겁니다! 기왕 할 것, 놓치지 마십시오!”

현재로선 혈천도마와 취마가 가장 강력한 후보들이었다.

나머지 마존들도 천년설삼을 얻었고, 딱 한 사람 마불만이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마불이 다시 득도한 고승으로 돌아와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무릇 부처께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네.”

물론 그를 놀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마불님은 욕심을 버리고 물고기는 마불님을 버리고.”

작은 거인의 몸에서 제이회 대회를 염원하는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시상식까지 끝나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검무양이 품속에서 접힌 종이 두 장을 꺼냈다.

“아버지와 무극이의 내기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과연 두 사람이 각각 누굴 적었을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검무양은 검무극이 적은 종이부터 펼쳤다. 내용을 확인한 검무양이 그것을 모두에게 들어서 보여주었다.

아버지.

놀랍게도 검무극은 아버지를 선택했다.

검우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나를 적었느냐?”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아버지가 스스로 아버지 이름을 적으시고 우승하실 거라 예상했습니다. 저도 아버지를 적었으니 결국 이 내기는 비겼겠죠.”

“왜 내가 우승하리라 생각했느냐? 앞서 나와 낚시 내기를 했을 때는 네가 이기지 않았느냐?”

차라리 네 이름을 적고 네가 우승하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다르니까요.”

마불이 말했었다. 자신은 아버지만큼 간절하지 않다고. 극악소마 역시 자신이라면 아버지를 찍었을 거라 조언했고.

“아버지가 오랫동안 염원해 온 것이잖아요? 제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아버지와 제가 모두 맞혀서 비기려 했는데 함께 틀려서 비기게 되었네요.”

그러자 검우진이 뜻 모를 표정으로 물었다.

“왜 비겼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도 아버지 찍으셨을 거 아닙니까? 설마 아닙니까?”

검무양이 검우진이 적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검무양의 표정이 흠칫하더니, 그것을 들어서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종이에 적힌 이름은.

놀랍게도 검우진은 아들의 이름을 적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내기는 내가 이겼다.”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저를 고르셨습니까?”

“네가 우승할 것 같아서.”

“왜요? 설마 아까 그 만년화리 아버지가 풀어두신 놈입니까? 천마보고에 몇 마리 몰래 키우고 계신 거죠?”

말도 안 되는 농담에 검우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들을 적은 이유는 아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것과 같았다.

“너는 반드시 목표한 바는 이뤄낼 테니까.”

“나도 네가 네 이름을 적고 반드시 이길 줄 알았다.”

검우진과 검무극이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검무극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만년화리를 보내준 것이 노인이었다면, 분명 이 결과도 예상했을 텐데.

그가 아버지가 이기기를 바랐다고?

‘무림일통을 원하시는 거였소?’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은데. 아니면 노인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파란만장한 운명이 만년화리를 보내준 것인가?

“제가 졌습니다.”

검무극이 패배를 인정했다. 마존들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검무극이라 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위로하듯 말했다.

“이건 하늘이 내린 뜻이다.”

“차라리 이렇게 질 줄 알았으면 어르신 이름 적고 생색이나 낼 걸 그랬어요.”

취마가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 내밀었다.

“패배주 한잔 마셔.”

검무극이 술을 쭉 마셨다.

“쓰다, 써!”

극악소마는 담담히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전쟁의 선봉에 서게 되면 자신이 검무극을 보필하겠다는 의지였다. 세상 어떤 말보다 든든한 말이었다.

“고맙습니다, 소마님.”

검우진이 소원을 말하기 전에 검무극에게 물었다.

“네가 이겼다면 어떤 소원을 말했을 거냐?”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아버지께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걸 여쭸을 겁니다.”

검우진이 말없이 아들을 응시했다. 그래, 내기에 이겼다고 아버지의 꿈을 버리십시오. 이런 소원을 빌 아들이 아니지.

이윽고 검우진이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

마정대전의 선봉에 서거라!

그 소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곳에 있던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소원이 흘러나왔다. 검무극이 처음 회귀한 날 신마쟁투에서 이기고 아버지에게 빌었던 바로 그 소원.

“너와 단둘이 사냥 가는 거다.”

돌려주기 위해 더 힘든 싸움을

굳이 소원이 아니라도 갈 수 있었다.

아버지가 가자, 한마디 말만 하면 내일도 갈 수 있고 모레도 갈 수 있고, 매일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 년 내내 사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걸 소원으로 빌었다.

너와 단둘이 사냥 가고 싶다.

너무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 때문일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격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 감정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검무극을 바라보고 있던 마존들은 모두 그 격정을 함께 느꼈다. 검무극이 얼마나 교주를 위해서 노력했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에 그 큰 감격을 함께 나누었다.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전 아버지가 하신 것처럼 똑같이 말했다. 그때 아들 사정은 생각도 안 하시고 마음대로 약속을 잡으셨으니.

"출발은 내일 아침입니다!"

검무극다운 대답에 마존들이 웃었다. 이 세상에 누가 있어 교주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검우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검무극은 오늘 아버지가 크게 웃으시는 모습도 봤고, 이 비웃음까지 봤으니. 됐다. 오늘 아버지의 웃음, 다 봤다.

"좋다."

검우진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낚시대회의 진행을 놓치지 않았다.

"자자, 낚시대회를 마치기 전에 교주님의 한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실 오늘 이 대회는 자신과 아버지를 위한 자리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마존들을 위한 자리기도 했다.

검우진이 마존들을 둘러보았다. 그들과 일일이 시선을 마주쳤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특히 오늘 대회에서 독왕과 취마, 섭혼마존은 교주에게 크게 감동한 상태였다. 작은 물웅덩이에, 주정이 괜찮냐는 질문에, 자신에게만 내려준 영약에 세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

특히 그것이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나오면서 그 파급력은 훨씬 컸다.

“오늘 즐거웠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이런 자리를 가지도록 하세. 고생들 했네.”

짤막한 인사에 마존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저희도 즐거웠습니다. 교주님.”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것으로 천마배 제일회 낚시대회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못한 결과를 내며 낚시대회는 끝이 났다.

검무양이 검우진의 낚싯대를 챙겼고, 마존들도 자신의 자리로 가서 낚싯대를 챙겼다. 잡았던 물고기는 다시 강에 풀어주었다.

검우진이 검무양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마존들이 낚싯대를 들거나 어깨에 걸친 채 그 뒤에 일렬로 늘어서서 걸어갔다. 천천히 돌아갈 수도 있고, 혈천도마나 일화검존은 산책을 하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교주를 따라나섰다. 검무극에게 전쟁을 강요하지 않는 모습에 마존들은 교주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낀 것이다.

물론 검무극에게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아버지기에 ‘이제 때가 되었다' 한마디에 모두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뛰어들 테니까.

검무극이 뒤에서 소리쳤다.

“자자, 오늘의 우승자에게 낚시 비법을 물어보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만년화리 낚는 비법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만년화리 낚아챌 때의 손맛,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아니,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십니까? 저랑 좀 놀다 가세요! 다들 한가하시잖아요!"

하지만 마존들은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마존들이 멀어졌다.

검무극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었다.

아버지 뒤를 여덟 명의 마존이 뒤따르는 모습을. 그 완벽하게 날개를 펼치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이 낚시대회를 아버지께 제안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모습이기도 했다.

정말 잘하셨습니다, 아버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강물을 향했다.

어느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검무극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무극은 석양이 다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다음 날 새벽 검무극은 아버지와 함께 교를 나섰다.

검무극은 처음 함께 사냥 갔을 때처럼 커다란 혁낭을 짊어지고 왔다. 아니, 그때보다 짐이 더 늘었다.

“아시잖아요? 여기에 얼마나 필요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지.”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산을 올랐고, 검무극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아버지와는 여러 번 사냥했었다. 형과 함께 셋이서 했던 사냥도 있었고.

하지만 오늘의 사냥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오늘은 휘 아저씨도 안 오셨네요."

검무극은 이제 휘의 은신까지 확실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휘마저 데려오지 않은 것이다.

“정말 아버지와 저 둘뿐이군요.”

그야말로 마음속 깊이 숨겨둔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였다. 애초에 아버지도 그러려고 휘를 두고 오신 거겠지.

“과묵한 제가 오늘 말이 좀 많아지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말만 그랬지 검무극은 조용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들어오는 햇살, 풀잎을 밟는 소리, 계곡 아래에서 물 흐르는 소리, 소나무의 진액 냄새, 바람에 실려 오는 흙냄새, 다람쥐가 바스락거리며 나무를 타는 모습.

검무극은 아버지와 산속을 걷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렇게 얼마나 산속을 헤맸을까?

"호랑이 발자국이다.”

제법 큼직한 호랑이였다.

“자, 이쪽이다.”

무공을 사용해서 뒤쫓으면 순식간에 찾아내겠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내력을 발출해서 동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순수하게 사냥 그 자체를 즐겼다. 아버지는 어제는 낚시꾼, 오늘은 사냥꾼이 되었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마음이 처음 회귀해서 아버지와 사냥 가자고 했을 때 자신의 마음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순수하게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랬기에 우린 약속이나 한 듯이 무림일통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여기서 먹이를 발견하고 달린 모양이다.”

아버지는 발자국만 보고도 호랑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아차렸다.

그렇게 얼마나 추적했을까?

저 멀리 바위 아래에서 호랑이를 발견했다.

검무극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지만 끝내 화살을 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호랑이는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왜 쏘지 않았느냐?"

검무극은 엉뚱한 이유를 댔다.

“그때 형이 살려준 그 호랑이의 새끼 같아서요."

당시 검무양은 호랑이 주변에 있던 새끼들을 보고 활시위를 놓지 못했다.

"첫째였으면 쐈을 텐데, 딱 보니 둘째 놈입니다.”

그 실없는 농담에 검우진이 어이없어하며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흐르는 시냇물로 목을 축였다.

"어차피 놓쳤는데 잠시 쉬었다 가시죠?”

두 사람은 시냇가 옆 바위에 앉았다. 물 흐르는 소리가 너무 맑고 경쾌해서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검우진은 잠시 사냥꾼에서 낚시꾼이 되었다.

"만년화리를 낚아보니 손맛이 어떻더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었다.

“끝내줬습니다. 딱 낚이는 순간 월척이구나, 알았습니다. 혈천도마 어르신이 그러셨지요. 낚시를 하다 보면 세상이 내게 끌려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요. 만년화리를 낚아 올릴 때가 딱 그랬습니다.”

검무극이 웃으며 넌지시 자랑했다.

"솔직히 부러우시죠?”

검우진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만년화리 내단보다 그걸 낚는 손맛이 더 탐났으니까.

“혈천도마 어르신과 마불님은 한 며칠 물고기가 눈앞에 어른거릴 겁니다.”

혈천도마는 물고기 마릿수로는 이 위였고, 월척은 삼 위로 마무리 지었다. 만약 월척 분야에서도 이 위였으면 정말 아쉬워했을 것이다.

마불은 어쩌면 오늘도 그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으며 '어제 이렇게 낚였어야지!' 애꿎은 물고기를 야단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실 검무극이 몰라서 그렇지, 검우진 역시 일 위를 하기 위해 절치부심했었다. 다행히 내기를 이겨서 일 위하지 못한 아쉬움이 옅어졌을 뿐, 일 위에 대한 욕망은 누구보다 강한 그였다.

“내년에 제이회 대회도 개최하시죠.”

"만년설삼이 남아나질 않겠다.”

“첫 회에 만년설삼 걸었으니 제이회 대회에서는 다른 걸 걸어야죠. 천마서각에 무공구결들 잔뜩 있잖습니까?”

검무극이 자연스럽게 마존들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마존들이 아버지를 너무 좋아한다는 걸, 이번에 새삼 또 느꼈습니다.”

“널 좋아하는 게 아니고?”

“아뇨, 아버지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마존들을 보고 있으면 그게 느껴집니다.”

그냥 듣기 아버지 좋으라고 해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이렇게 마음껏 설칠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마존들이 제가 아무리 까불어도 받아준 것도 그 때문일 테고. 아버지 덕분에 호가호위(狐假虎威) 실컷 했습니다.”

검우진이 아들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 자리를 포기하려는 거냐?”

역시 아버지는 알고 계셨다. 왜 만년화리의 내단을 형에게 주었는지.

형에게 소교주 자리를 넘겨주려는 마음에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생 태사의를 지키며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지난번 임시 교주를 하면서 절실히 느꼈다.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중원을 떠돌며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싫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자리를 싫어한다면 아버지에게 그보다 더 큰 무례는 없을 것이다.

"형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죠.”

검우진은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지만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를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진대.

“물론 저도 책임감이 강한 편이니, 교를 잘 이끌어 나갈 겁니다. 걱정도 많고 미리 대비하려는 성격이니 위기도 잘 넘길 테고요.

한데 누군가가 제게 그래서 행복하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을 못 할 것 같습니다. 대신 형에게 묻는다면 형은 행복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지금 형이 교내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은 일을 잘 처리했다.

검우진이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교주가 되고, 저는 자유롭게 살고. 형도 저도 행복할 겁니다. 둘 다 불행한 선택보다, 둘 다 행복해지는 선택을 한 것이지요.”

검우진은 검무극의 말을 부정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검무극의 말처럼 교주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은 큰아들이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었다.

“내가 허락하더라도 양이는 절대 네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만년화리는 먹일 수 있어도 네 자리에는 앉힐 수 없지.”

아버지는 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권력 싸움에 진 형이 동생이 양보한 자리에 앉는다? 형의 자존심상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어떻게 해야 형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그냥 확 도망가 버릴까요? 제가 도망가 버렸는데 어쩌겠습니까?"

물론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간 형은 교주의 자리에 올라서도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후계자 싸움으로 그 자리를 그렇게 힘들게 뺏었는데, 이제 다시 돌려주기 위해 더 힘든 싸움을 해야 하다니!”

아들의 엄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네 형을 설득할 자신이 있지?"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네, 사실 설득할 자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자신하느냐?”

"형의 약점을 알고 있거든요.”

약점이란 말에 검우진이 흠칫했다. 그리고 그 약점은 검우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형은 본교를 정말 사랑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형은 아버지를 똑 닮았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우진이 물었다.

“만약 네 뜻대로 그 자리를 넘겨줄 수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작정이냐?”

“저는 이안과 함께 중원 여행을 떠날 생각입니다. 예전에 데리고 나가기로 약속했습니다.”

명소란 명소는 다 가고, 절경이란 절경은 다 구경하자고. 유명한 요리, 다 맛보게 해주겠다고.

“이제 약속을 지켜야죠.”

거기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이안이 본연의 모습을 찾게 해줄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법도 했는데 검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을 호위 무인으로 살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매여 있는 부분이 있을 터. 아마 그걸 깨주겠다는 의미이리라.

“이안을 얽매고 있는 결계를 부수면, 이안이 저를 떠날지도 모릅니다.”

검우진이 뜻 모를 말을 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반대라니요?”

“그 아이가 너를 붙잡을 수도 있지. 남자로.”

“그럴 성격은 못 됩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에 네가 여자에 대해 알기나 하냐? 하는 표정이 더해졌다.

아버지와 하는 여자 이야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와? 이건 만년화리보다 더 귀한 것인데.

검무극은 신이 났다.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보는 것도, 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낯설면서도 너무 좋았다.

"혹시 젊으셨을 때?"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셨는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만 가자."

“이러시니까 더 수상하잖아요?"

검무극이 뒤따라 걸어가며 목청을 높였다.

“제가 미남사인방 결성해서 출교하고 싶은 것도 다 아버지 피를 물려받은 것 때문입니까?”

일찍 해가 진 산자락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본격적으로 사냥을 왔지만 두 사람은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했다. 마음먹으면 산에 있는 짐승을 남김없이 잡을 수도 있는 그들이었지만, 오늘 사냥은 허탕이었다.

검무극은 왠지 오늘만큼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 역시 아들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짐승을 잡지 않았다.

“이럴 줄 알고 제가 준비해 왔습니다. 실패한 사냥꾼들을 위한 만찬입니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음식을 꺼냈다. 마른 음식이지만 대충 챙겨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안주들에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술까지.

“한 잔 받으십시오.”

검우진이 술을 받은 후 아들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이 기분 좋게 술잔을 비웠다.

검무극은 아버지와 단둘이 함께하는 이 자리가 편하고 좋았다. 그러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를 오늘이었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셨을 때, 검우진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 가지를 물었다.

“네가 내기에서 이겼다면........."

아들은 자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었다.

“묻고 싶었던 게 무엇이냐?"

그렇게 쉽게 달아날 수 있으리라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은 두 가지였다.

아버지가 제일 싫어하시는 게 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단둘이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이 좋은 분위기에서 그 질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를 물었다.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더 알려고 하지 마라.”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모닥불에 붉게 일렁거렸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는 무거운 조언.

“죽은 사람은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더 그리워하게 된다는 뜻임을 어찌 검무극이 모르겠는가?

회귀 전 삶에서 모두를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던 그였는데. 평생 그 죽음이 자신을 지배했었다.

“지금처럼 막연한 그리움으로 남겨둬라.”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짧게 빛났던 인생이 영원히 아버지의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음을 갈 곳을 잃은

사랑이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아버지의 마음에 남아 있음을.

“혼자서만 추억하시니까 힘들지 않으십니까?"

생각지 못한 말에 검우진이 흠칫하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성격상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으리라.

휘에게도, 권마에게도, 사마명에게도.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실의 아픔을 홀로 감내하고 계셨을 것이다. 이 무뚝뚝한 남자는 분명 그랬을 것이다.

회귀 전 인생에서 자신도 홀로 그 모든 아픔을 감수했다. 지나고 봤을 때, 그건 결코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보고 싶다. 그립다. 슬프다. 화가 난다.

누군가에게 단 한마디 말이라도 뱉어내면 마음이 조금은 풀어질 텐데.

회귀 전 자신이 그러했듯, 아버지에게도 그런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저는 아버지와 같이 기뻐하고, 같이 그리워하고, 같이 슬퍼하고 싶습니다.”

검우진은 떨리는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이 그런 이유로 물어봤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 꽃무늬를 좋아하셨던 어머니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빈 잔을 내려다보던 그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무극은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아버지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윽고 한참을 침묵하던 검우진이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엄마를 만난 건 네 나이쯤이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야기였다.

“정파에 속한 여인이었지.”

왜 아버지가 자신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협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였다.

더 말씀해 주실 것도 같았는데, 아버지는 술을 마저 비운 후 자리에 돌아누웠다. 막상 하려니 울컥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만 자자."

항상 아버지의 등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바라보는 아버지의 등은 지금까지 봤던 느낌과는 또 달랐다.

검무극은 더 묻지 않았다. 굳이 물으면 몇 마디 더 해주시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정파의 여인이 마후가 되는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듣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자식에게 쉽게 꺼낼 수 없는 많은 일이 있었을 테고, 책으로 써도 몇 권은 써야 할 내용이겠지.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힘든 과정을 다 이겨내고 사랑을 이뤘고 형과 자신을 낳았다는 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낳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순간 검우진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도 자리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 언젠가 어머니 이야기 꼭 들려주세요.'

"왔나?"

법당에 앉아서 염불을 외던 마불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법당으로 들어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마불은 검무극이 하산하자마자 자신을 찾아올 걸 예상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맞이했다.

“생각보다 일찍 내려왔군.”

“마불님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혈불을 향했던 마불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앉았다.

"언제나처럼 내게 바라는 게 있어서 왔겠지.”

그는 검무극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교주가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마불은 검무극이 만년화리 내단을 검무양에게 주던 순간, 그 속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아직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계시죠.”

마불 역시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었다.

“잘 보고 계시는군.”

“그래서 마불님께 답을 구하고자 찾아뵈었습니다.”

“그렇다면 헛걸음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불은 단언했다. 자신이 아는 검무양이라면,

“자네 형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나? 절대 그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네.”

마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도망가려는 건가? 악군학, 그 사람에게 바람이라도 든 건가?”

“그 사람은 이제 정착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데 왜?"

갑자기 생긴 마음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마음은 반반이었다. 정말 끝내주는 교주가 되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고, 형에게 교주 자리를 주고 훌훌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한데 이번에 그 마음에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화무기가 죽은 후 만년화리의 내단을 얻는다?

검무극은 이것이 하늘이 내린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내공이 부족하다고 하늘이 보내준 선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대공자 때문인가?"

검무극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보게, 소교주.”

“네, 마불님.”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네.”

그랬기에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건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었다.

"자네라면 대공자를 설득할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설득에 성공할지도 모르지.”

마불은 오히려 그 성공을 걱정했다.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네.”

진심으로 하는 말임이 느껴졌기에 검무극은 신중한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되면 대공자의 인생이 불행해질 테니까.”

검무극은 흠칫 놀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형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소홀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대공자는 교주에 오른 후 끝없이 자신과 싸워야 할 거네. 과연 내가 교주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게다가 끝없이 의심하게 될 거네. 과연 마존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따르는지. 그들이 자네를 추억하고 있지는 않을지.”

“형 옆에는 마불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마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란 존재로 대공자는 더 힘들어질 거네. 후계 싸움의 패배를 함께 했던 나였으니까. 날 볼 때마다 과거의 망령을 떠올리게 될 거네. 이보게, 소교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강하지가 않네. 모두가 자네 같은 마음일 수가 없지.”

검무극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형이라면 잘할 수 있겠지, 마불이 도우면 괜찮겠지 생각했었는데, 마불은 이 일의 결과를 훨씬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모두의 인생에 이렇게 깊이 개입했으면서 그렇게 쉽게 달아날 수 있으리라 여겼나?”

마불의 말이 옳다는 생각에 검무극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검무극이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형이 받아주느냐 마느냐에만 집중하다 보니, 받아준 후 형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지 못했다. 후계 싸움을 하던 그때의 형은 지금은 없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저를 믿고 따라준 이들에게도 미안한 결정이었습니다.”

경직되어 있던 마불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이렇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검무극이기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조언을 해줄 수도 있는 것이리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검무극이 눈을 반짝이며 마불을 쳐다보았다.

"제게 알려주십시오.”

이미 그에 대해 고민을 했는지 마불이 차분하게 말했다.

"방법이 있다면 한 가지뿐이겠지.”

“뭡니까?”

마불의 입에서 다시 흘러나온 한마디.

"명분."

앞서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에도 똑같은 조언을 해줬었다.

“대공자가 교주 자리를 물려받을 명분이 필요하네.”

“그 명분을 만들 방법이 있습니까?"

기대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마불은 그에 대한 답이 있었다.

"있네. 대신 조건이 필요하네.”

그 조건은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자네가 교주가 되어야 하네.”

검무극은 놀란 표정으로 마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가 교주가 되지도 않고 그 자리를 넘기면 그건 양보하는 것이지. 하지만 자네가 교주가 되어서 본교를 이끌다가 대공자를 후계자로 삼으면, 그건 정식 승계가 되겠지.”

마불이 차분히 덧붙였다.

“자네 방식으로 본교를 이끌어보게. 그러면서 대공자에게 중임을 계속 맡기게 교주만이 맡길 수 있는 그런 일들 말일세.”

아마 형은 누구보다 그 일을 잘 해낼 것이다.

“대공자는 그 일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능력을 지녔는지 스스로 증명해 보일 거네. 그게 교주가 될 명분이 되겠지.”

형과 관련한 일이었기에 마불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조언해 주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고. 세월이 지나면 자네도, 대공자도, 그리고 나도, 우리 모두의 생각이 바뀔 거네.

지금의 고민이 그때는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있겠지. 어쩌면 자넨 그때 교주 자리를 양보했으면 정말 후회했을 겁니다. 내게 그런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지막으로 그가 전한 말은.

“도망에도 때가 있는 법이네. 운명이 살짝 뒷문을 열어줄 때, 도망은 그때 치는 거네.”

말없이 듣고 있던 검무극은 노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제게 어떻게 살 건지를 물어보셨지만 앞으로의 제 삶이 실망을 끼쳐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멋있음은 거의 다 썼거든요.

ᅳ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멋있게 만든 주위 사람들이 자네를 더 멋있게 이끌어 줄 테니까.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더니 마불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감사합니다.”

마불은 현명하고 고마운 가르침으로 잘못된 길을 가려는 자신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다.

“저와 형의 인생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오늘은 월척 두 마리나 낚으셨습니다."

거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한마디가 보태졌다.

"그날 이렇게 좀 잡으시지.”

득도한 승려의 미소를 짓던 마불이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염주가 부서질 듯 힘차게 돌렸다.

“다음 대회는 언제 여신다고 하던가?"

“자, 여기 필요한 물품들이오.”

검무양이 곽영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마가촌이었다. 그곳에는 마가촌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검무양은 이번 공사의 총책임자였다.

곽영은 그곳으로 철방 심부름을 온 것이고.

“그럼 또 뵙겠습니다.”

곽영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반가운 마음에 한마디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막상 일하는 곳에서 만나니 감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검무양의 말소리.

“약속한 보검은 언제 줄 거요?”

곽영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이 추세라면 제가 보검을 만들어 왔을 때쯤이면 대공자께선 저를 잊은 후가 될지도 몰라요.”

반농담이었지만, 어느 세월에 보검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설지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도 철방에서 철검을 만드는 일만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장인의 실력을 지녔다지만, 무림맹에서 투항한 전력은 그녀의 발목을 꽉 붙잡고 있었다.

"왜 당신을 잊을 거라 생각하시오?”

“그야 대공자께서는 귀한 분이시고 바쁜 분이시니까요."

"반대가 될 수도 있지 않소? 당신은 철방의 유명한 장인이 되어 있고, 나는 여전히 별 볼 일 없는 대공자일 테고.”

곽영이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지 않는 자학을 하시는 걸 보니 한잔할 친구가 필요해 보이네요. 이따 나중에 술 생각나면 철방에 와요.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꾸벅 인사한 후 저만치 걸어가던 곽영이 검무양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본 마인 중에 당신이 제일 똑똑해요. 그거 잊지 마세요."

후다닥 쏟아내듯 말하고는 곽영이 멀리 뛰어갔다.

그녀를 쳐다보던 검무양이 돌아서는데 어느새 등 뒤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깜짝 놀라는 검무양을 보며 검무극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형이 제일 똑똑하다니? 나를 봤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괜히 저 말을 받아주면 곽영을 두고 놀릴 게 뻔했기에, 검무양이 화제를 돌렸다.

"언제 하산했어?"

"아까.”

“아버지는?"

“사냥에서 허탕친 걸 내 책임으로 돌리셨지. 다음에는 형이랑 셋이 가자고 하시면서.”

검무양이 지어지려는 미소를 애써 감췄다.

“여긴 왜 왔냐?”

“형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만나는 사람마다 이 말 하겠지."

"과연 똑똑하긴 해. 나만큼은 아니지만.”

검무양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 그거 꿈도 꾸지 마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듯, 검무양의 두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고 꽉 다문 입술에는 굳은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내단도 끝까지 복용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버지 때문에 엉겁결에 복용했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했다.

“무슨 오해를 하는지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형이나 꿈꾸지 마.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검무양이 의심스럽다는 듯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형에게 뺏은 이 자리,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차지할 거야. 나중에 하루만 해보자, 조르지나 마. 아, 태사의에는 한 번 앉혀준다."

동생의 농담에도 여전히 검무양의 경직된 얼굴에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 내단은 왜 준 거냐?"

"실리적인 측면에서 준 거야. 나보다는 형이 가져야 효과적이니까. 만년화리 내단을 복용해서 얻는 이점이 십이라면, 냉정하게 따져서 내게는 이삼 정도의 이점이 될 거야. 한데 형이라면 그 십을 다 가질 수 있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초에 검무극의 내공은 워낙 정순하고 방대했기에 만년화리의 내단이 더해진다고 눈에 띄는 효과는 크지 않았다. 반면 검무양은 다르다.

지금의 검무양의 인생은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복용 전과 복용 후.

검무극은 그 이성적인 계산에 감정적인 부분까지 덧붙였다.

“앞으로 교주가 될 사람 형인데, 형도 강해야지. 그래야 어디 가서 저 사람이 내 형이요, 하지. 이건 내 허세 때문이니까 너무 고마워하지 마!"

"확실한 거지?"

"확실해."

그제야 검무양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런 형을 보니 새삼 마불의 조언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형."

"뭐가?"

내 생각만 하고 이기적으로 굴어서.

“형 없는 데서 또 형 욕했어.”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검무극이 따라 웃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향했다.

"정말 금방 짓는구나.”

천마신교가 막대한 인력과 물량을 총동원해서 신경 써서 짓고 있었기에 건물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풍류주점 자리에서 올라가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주인장 좋아하겠네.”

잠옷은 안 챙겨왔네

검우진은 늦게까지 천마전에 있었다.

평소라면 잠이 들었을 시간임에도 홀로 생각에 잠긴 채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때 천마전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들어섰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검무극은 큰소리로 인사한 후 피의 길을 걸어서 태사의를 향해 걸어갔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오늘따라 아버지도, 저 태사의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태사의 아래에 멈춰선 검무극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야심한 시간 천마전에 흐르는 이 알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검무극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이제 그 자리는 제 겁니다.”

검무극의 선언과도 같은 말에 검우진이 비웃으며 물었다.

“반역이냐?”

진지하던 분위기가 풀어지며 심야의 반란은 끝이 났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 삼십 년 후쯤 제 자리라는 의미지요.”

검우진은 아들이 소교주 자리를 넘겨주려던 마음을 바꿔 먹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마음을 바꿨느냐?"

“생각해 보니까 억울해서요. 뭐 예쁘다고 그 좋은 자리를 형에게 줍니까?"

농담으로 말을 꺼낸 후 검무극은 솔직히 말했다.

“마불님에게 혼났습니다.”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큰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마불임을 검우진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마불이 그러지 못하게 설득한 모양이다.

이 사실로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마불은 큰아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무양이를 소교주로 만들려 했을 것이다.

“아버지, 제가 노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죠? 제가 교주가 되면 강호에 이런 소문이 날 겁니다. 들었어? 마교주가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대. 그런 꼴 보지 않으시려면, 그 자리 오래오래 지켜주십시오. 저도 나이 들면 철이 들겠지요.”

“이 아비를 언제까지 고생시키려고?"

“제가 놀다 지쳐서 제발 내려오십시오, 조를 때까지요."

가만히 아들을 응시하던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잘 생각했다.”

뜻밖의 말이었기에 검무극은 내심 놀랐다. 아버지는 내심 형이 후계자가 되길 바란 게 아니셨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아버지는 잘한 결정이라는 듯 흡족해하고 있었다.

아버지, 정말 제가 교주가 되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버지의 꿈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제가요?

“마불님이 복수전을 꿈꾸고 계십니다.”

그때 검무극의 눈에 태사의 뒤쪽 벽에 세워둔 낚싯대가 들어왔다. 아직 치우지 않은 것으로 봐서.

“아, 여기도 한 분 더 계셨군요. 마불님 뵙게 되면 전하겠습니다. 복수전은 그리 머지않은 날에 이뤄질 것 같다고요. "그럼 쉬십시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아들이 천마전을 나가자 검우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달을 쳐다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은신한 휘에게 말했다.

“좋은 술 한 병 내오게.”

혈천도마는 자신의 거처 마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멸천대도를 바닥에 꽂아두고, 대도에 기대서 편하게 책을 읽었다.

오늘처럼 달빛이 밝을 때면 이렇게 마당에 나와서 책을 읽곤 했다.

그때 누군가 대도 뒤에 도착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자신의 기척을 드러내는 무공 수준으로 볼 때, 아니 이 시간에 자신의 거처로 찾아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이놈아, 이 밤에 잠 안 자고 왜 또 왔느냐?”

대답이 없었지만, 혈천도마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검무극에게 물었다.

“사냥 가서 교주하고 좋은 시간 보냈느냐?”

어떤 장난이라도 치려는 것인지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혈천도마는 자신이 할 말을 그냥 했다.

“네가 아무리 똑똑해도 부모 마음까지 어떻게 알겠느냐? 교주 성격에 많이 참고 있다. 넌 상상도 못 해. 진짜 교주 성격이 어떤지. 그러니 아버지께 잘해라."

여전히 대답이 없자 그제야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었다.

“이놈이 왜 말이 없어. 미리 말하지만 잠옷 안 가져왔으면 침상에 올라올 생각도 마라!"

그때 대도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목소리.

"잠옷은 안 챙겨왔네.”

순간 혈천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주님!"

찾아온 사람은 바로 검우진이었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하네. 많이 놀랐나?"

많이 놀랐냐고? 근래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이 야심한 밤에 교주가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걱정했는데, 검우진은 가져온 술병을 들어 보였다.

"자네랑 한잔하려고.”

“그러잖아도 마침 술 생각이 나던 차였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밤바람도 좋은데 여기서 마시세.”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천천히 하게."

혈천도마가 집 안으로 들어와서 술잔과 간단히 먹을 안주를 챙겼다. 밖으로 나오려던 그의 시선에 창밖 모습이 보였다.

검우진이 멸천대도에 기대앉아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 위로 젊은 시절 검우진의 모습이 겹쳐졌다. 호탕하게 웃으며 대도에 기대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예전에 술을 마시면 검우진은 자신의 대도에 기대서 마시는 걸 좋아했다. 왠지 기분이 좋다면서.

검무극 때문일까? 요즘 교주를 보면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달을 올려다보던 검우진이 이쪽을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치자 혈천도마가 씩 웃은 후 밖으로 나왔다.

"안줏거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괜찮네."

혈천도마가 먼저 술을 올렸고, 술을 받은 검우진이 도마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사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허탕만 치고 내려왔네.”

혈천도마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둘이서 마음먹고 사냥하면 대천산 짐승들 씨가 말랐으리라.

“아드님과 대화는 많이 나누셨습니까?"

“아드님은 무슨. 아들놈이지.”

검우진의 농담에 혈천도마가 웃었다.

“제 엄마에 대해서 묻더군.”

검우진의 잔에 술을 따르던 혈천도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이제 그럴 때도 되었지요.”

혈천도마가 검우진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제 놈 그리움 때문에 물은 것이 아니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놈이 건방지게 내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해서 물어본 거였네.”

혈천도마는 검무극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술을 마셨다.

술잔을 비운 혈천도마가 지금껏 한 번도 교주에게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소교주를 보면 가끔 마후가 생각납니다.”

혈천도마는 마후가 죽은 후 지금까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교주에게 꺼낸 적이 없었다. 오늘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었다.

이 밤에 자신을 찾아오고, 또 마후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는 것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여겼기 때문에

검우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반응이었지만 혈천도마는 교주가 마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교주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혈천도마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작부터 지켜봤으니까.

혈천도마는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이 무림 내가 가져야겠네.

열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에게 그 말을 하던 검우진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권력을 향한 정복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막 사랑이 시작된 한 남자의 각오였다.

그 젊은 검우진의 얼굴 위로 현재의 검우진이 겹쳐졌다.

“천하를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자신감이 있는데, 내 자식만큼은 내 뜻대로 할 자신이 없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혈천도마는 검우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싶지 않으신 거죠.”

혈천도마가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식구가 원수입니다. 그중에서도 자식놈이 제일 큰 원수죠.”

검우진이 웃으며 그 잔에 건배하며 술잔을 비웠다.

교주의 자리에 오르고서는 평생 강한 모습만 보였던 교주였는데, 오늘은 자꾸 젊은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그랬기에 지금 검우진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편이 되어 주는 것이리라.

“내일 불러서 이렇게 호통치십시오. 이놈아, 천둥벌거숭이처럼 설쳐대지 말고 이 아비 말을 따라라!”

검우진이 기분 좋게 웃었다. 검무극이 봤으면 자식들에게도 이렇게 웃어주십시오, 할만한 웃음이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라고 할 녀석이라 그러지 못하는 거지.”

혈천도마가 그 말에 수긍했다. 무작정 반발하며 제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면 오히려 꺾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검우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어려운 거다.

자식에게도 어려운 싸움이지만, 부모에겐 더 어려운 싸움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그 큰 약점을 안고 싸우는 싸움이니까.

몇 잔의 술을 더 마신 후, 혈천도마는 마음에 품고 있었던 말을 전했다.

“부모가 활이라면 자식은 화살이겠지요. 설령 그 화살이 부모가 원치 않는 방향을 겨누더라도..."

혈천도마가 술잔을 채워주며 덧붙여 말했다.

“때가 되면 바람에 맡기고 시위를 놓아줘야겠지요.”

검우진은 말없이 잔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마음속에서 시위를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달이 질 때까지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펑! 퍼엉! 펑!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마침내 마가촌의 공사가 끝나고 주민들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된 것이다.

마가촌에 모인 그들은 기뻐했다. 낡은 집은 완전히 새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무너진 흙담 대신 석벽이 세워져 있었고, 초가집 대신 기와집이 생겼다.

일층짜리 집은 이 층으로, 이 층짜리 집은 삼층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내부에는 자신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좋은 가구들이 채워져 있었고, 옷가지며 생필품에, 당분간 먹고살 식량까지 마당에 쌓여 있었다.

정말 천마신교에서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위해줄 줄은 몰랐다. 목숨을 구해준 것을 넘어 큰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다.

“엄마! 이 집이 이제 우리 집이야?”

“그래, 우리 집이다.”

아이들이 신나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튼튼한 기둥을 쓰다듬으며 아낙들은 눈물을 흘렸다. 남자들은 벅찬 마음으로 자신의 집과 가게를 둘러보았다.

"마가촌이 다시 살아났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교주님 만세!”

“천마신교 만세!”

새집을 얻은 기쁨만큼이나 그들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

기뻐하는 이들 중에는 조춘배도 있었다. 그는 감격스러운 모습으로 자신의 주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낡은 이 층 건물은 웅장한 삼층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멋지게 지어져서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멋진 주점이었다. 천마신교에서 이렇게 멋지게 지어줄 줄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주방에는 음식 재료가 가득 준비되어 있었고, 창고에는 좋은 술이 가득 쌓여 있었다. 오늘 당장 장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해 준 것이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과일상에는 과일이 가득했고, 포목점에는 옷감이 가득했다. 단지 집만 지어준 것이 아니라 그런 배려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환호성이 들렸다.

모두 그곳을 쳐다보니 환호를 받을만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바로 검무극과 검무양이었다. 그들 주위를 따르는 이들은 검무극의 호위무인이었다.

이제 그들의 기세는 교주의 호위들에 비해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그들을 이끄는 호위 책임자 적연은 수하들을 혹독하게 내몰고 있었다. 자신들이 강해지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소교주가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가촌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대공자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이 환한 얼굴로 물었다.

“기분들이 어떠시오?”

"좋습니다!"

검무극이 오늘의 이 결과를 형에게 공을 돌렸다.

“이렇게 빨리 마가촌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여기 계신 우리 형님의 노력 덕분이오. 형님께서 밤잠을 아껴가며 공사를 지휘하셨소.”

마가촌 사람들이 검무양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고맙습니다! 대공자님!"

검무극이 검무양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형, 한마디 해.”

검무양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검무극이 억지로 시켰다.

"형이 지어준 집이잖아? 한마디 해야지."

결국 검무양이 앞으로 나섰다. 무인들 앞이라면 천 명이 있어도 긴장하지 않을 텐데, 평범한 마가촌 사람들이 지켜보는 이 자리가 왠지 더 부담스러웠다.

“하루라도 빨리 지으려고 애썼소. 대신 튼튼하게 지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잘들 사시오."

짤막한 인사였지만 사방에서 박수갈채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검무양도 기분이 좋았다. 하루라도 빨리 공사를 마치려고 밤낮으로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잊었다는 듯 검무양이 뒤늦게 한마디 덧붙였다.

“참, 이번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은 소교주가 여러분들을 특별히 여긴 덕분이오. 그건 잊지 마시오.”

자신에게 온 공을 다시 동생에게 돌려주는 검무양이었다.

검무극이 뻔뻔한 얼굴로 마가촌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들으셨소? 내 덕인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주민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굳이 검무양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가촌의 노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지금이 천마신교 역사상 마가촌이 가장 복 받은 시대라고. 그게 다 소교주 덕분임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소교주님.”

인파에 묻혀 있던 조춘배가 뒤늦게 달려와서 인사했다.

"주인장, 소감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조춘배가 객잔을 올려다보았다.

입구 위에 크게 붙어 있는 현판에 風流酒店이라는 글자가 힘찬 필체로 멋지게 적혀 있었다.

“특히 저 필체가 너무 멋집니다.”

누가 썼는지 몰라도 정말 멋진 글자였다.

"어느 명필인지 모르겠지만 꼭 전해주십시오. 제가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다고.”

“그럽시다. 아버지께 전해드리겠소.”

"감사합니다."

무심코 대답한 조춘배가 흠칫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께 말씀드린다고 했소.”

“왜 교주님께?”

“저 글을 우리 아버지가 쓰셨으니까요.”

경악한 조춘배가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교주님이 저 현판을 쓰셨다고요?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부탁드렸소.”

주위에 있던 마가촌 주민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어이구, 그 귀한 분께서.”

조춘배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교주가 주점 이름을 적어주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감격을 넘어 충격에 휩싸였다.

이건 앞서 벽과 함께 사라져 버린 글자들보다 더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조춘배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야 주인장의 그 변함없는 맛으로 갚아야지요. 자자, 모두 풍류주점으로 모이시오!”

이들이 본교 앞에서 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검무극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누가 뭐래도 본인의 마도는 바로 마가촌에 있었으니까.

“새 장사 개시는 내가 하겠소. 주인장, 술상 차리시오!”

이때의 너희는 또 어떤가 기억하고 싶어서

* * *

생각지 못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소교주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검무극이 장호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장 군주, 차 한잔 얻어먹고 싶어서 왔네.”

이 아침에? 그것도 자신의 거처까지? 뭔가 일이 생겼나 내심 긴장하며 장호가 검무극을 맞았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럼 실례하겠네.”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집 내부는 장호의 성격처럼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깨끗해서 쓰나?”

“집에 거의 없어서 어지를 시간이 없습니다.”

검무극이 집을 구경하는 사이 장호가 차를 우려왔다.

“차가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딱 좋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검무극이 이른 아침에 차나 마시자고 찾아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검무극이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장 군주에게 부탁 하나 하려고 왔네.”

“말씀하십시오.”

어디 하나뿐이겠는가? 열 개, 아니 백 개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목숨을 바치라고 해도 바칠 텐데.

“내 얼굴을 그려주게.”

“네?”

“이때의 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네.”

장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본교에는 훌륭한 실력을 지닌 화공들이 있지 않습니까?”

“난 장 군주가 그려준 그림으로 남기고 싶네.”

장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뒷모습은 그려줬으니 이제 정면을 그려줘야지.”

예전에 장호가 검무극이 절벽에 서 있는 뒷모습을 그려서 선물한 적이 있었다. 실력이 늘면 앞모습도 그려준다고 했었는데, 검무극이 그 말을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장호는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그가 진심으로 부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호가 검무극을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 그 방은 장호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방이었다. 탁자 위에는 그가 그린 여러 장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취미를 넘어선 실력이었다.

그곳에는 미처 주지 못한 이안의 그림도 있었고, 서대룡 그림도 있었다.

“이건 왜 두 사람에게 안 줬나?”

“그냥 습작으로 그린 겁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훌륭한데? 여기 묵혀두기 아깝네.”

사실 장호도 기념으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데 막상 주려니까 부끄러웠다. 선물로 줄 만큼 대단한 그림도 아니라 생각했고.

“거기 앉으십시오.”

검무극이 의자에 앉았고, 장호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무극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자 자연스럽게 그날이 떠올랐다. 그림을 그릴 때면 가끔 그 순간이 떠오른다. 붓과 물감과 종이를 자신에게 내밀던 검무극의 모습이.

그날 이후 그림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위험과 임무의 연속인 마군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그에게 유일한 휴식이 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무림과는 먼 그림만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무림에서 잠시 벗어나 쉬는 것이었으니까.

한데 이제는 자유롭게 그렸다. 마군의 수하들도 그렸고, 본단의 악귀상이나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무인의 모습, 심지어 싸우다 죽은 수하의 모습도 그렸다. 취미였던 그림이 지금은 안식이 되었다.

이윽고 장호가 그림을 완성했다.

“너무 미화된 그림이잖아!”

“소교주님이 멋지셔서 그렇습니다.”

검무극이 그림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형은 절대 그려주지 말게!”

“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그림이 엄청 비싸게 팔릴 거 아닌가? 자그마치 천마신교의 마군주가 소교주를 그린 그림인데. 부르는 게 값일 거네.”

검무극의 농담에 장호가 웃었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천살성을 죽이고 이제 나의 인생을 살아가려 하네. 이때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눈빛으로 사람을 보고 있는지 남겨두고 싶어서네.”

그림에 깃든 의미가 장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웠다.

“그런 중요한 그림을 제게 맡기신 겁니까?”

“그래서 자네에게 맡긴 거지.”

검무극이 다시 그림을 바라보며 기뻐했다.

“내 마음에 꼭 드네.”

“제가 싸드리겠습니다.”

장호가 그림이 훼손되지 않게 얇은 가죽 천에 싼 후에 고이 접어서 검무극에게 주었다.

검무극이 그림을 품에 간직했다.

“가네. 나오지 말게. 그림 고맙네!”

작업방을 나서면서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중에 내가 교주 자리에 오르면 그때도 그려주게. 태사의에 딱 앉아 있는 모습으로.”

“네! 그때는 더 멋있게 그려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이 떠나고 난 후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장호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어느새 이안과 서대룡을 그린 그림이 사라지고 없었다.

* * *

“제 눈이 이렇게 처졌습니까? 아니죠?”

서대룡의 말에 검무극은 검을 뽑더니 검날에 그의 얼굴을 비췄다.

“맞을걸?”

검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서대룡이 자조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습니까?”

철컥. 검날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그림 마음에 안 들면 도로 가져가고.”

혹여 뺏길세라 서대룡이 그림을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마음에 듭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장호가 그려준 그림이었다. 게다가 술 모임 친구라는 호의가 제대로 발휘되어 실물보다 훨씬 잘 생기게 그렸다.

“장 군주 그림 실력이 대단하네요.”

“잘 보관해 뒀다가 아들에게 가보로 남겨라. 나중에 엄청 비싼 값에 팔릴 거다.”

“역시! 제 주머니 사정 챙겨주는 분은 우리 소교주님밖에 없습니다!”

검무극이 황천각 집무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보았다. 요즘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저 서류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요즘 어때?”

“일하고 무공 수련하고, 집에 가면 애랑 놀아주고. 정말 무섭도록 똑같습니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입니다. 마치 진법에 빠진 것만 같습니다.”

서대룡이 진법 속에서 손을 간절히 내밀었다.

“출교 안 하십니까? 놀러 나가시는 거면 더 좋고요.”

“왜?”

“가실 때 저 좀 데려가시라고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검무극이 흔쾌히 허락했다.

“그래, 가자.”

“정말이십니까?”

“가서 아들하고 인사하고 와. 아버지 놀러 나가니까 잘 크고 있으라고. 단 소저에게도 혼자 열심히 애 잘 키우고 있으라고 하고. 처자식 버리고 나가는데 후회 없이 놀아야지.”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전 언제 놀 수 있는 겁니까!”

“다음 생을 기대하시라.”

말만 그랬지 서대룡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사실 저 요즘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가끔 이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릴까,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생기니 그런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일이 힘들어서 힘든 게 아니었다.

혹시 모를 불행이 찾아올까 봐, 아이나 아내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원래 어두운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커지는 행복은 자신의 몸을 뜯어서 불안을 먹여 키웠다.

그런 서대룡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다.

“네가 누군지 잊었구나?”

“제가 누군데요?”

검무극이 연설을 준비하듯 목을 가다듬더니.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이면서도 동시에 평화주의자, 객잔에서 한 잔 술과 함께 인생을 바꿀 결정을 내린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 비무대회 우승자에 눈썰미까지 좋고, 임독양맥을 타통한 차기 도마, 맑은 영혼을 지닌 이제는 아들까지 있는 내 오른팔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대룡은 울컥했다.

“그걸 아직도 다 외우고 계십니까?”

“당연히.”

심지어 몇 가지 표현이 더 추가되었다. 특히 맑은 영혼을 지녔다는 말은 천화루주가 해줬던 말인데 그 역시 기억해서 추가해 준 것이다.

“내 시작에 네가 있었으니, 마지막에도 네가 있을 거다. 나와 함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테니 불안해하지 마라.”

서대룡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 들으니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불안이 말끔히 사라졌지?”

“아뇨, 행복함이 커지니 더 불안해졌어요.”

서대룡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었고, 서대룡이 따라 웃었다.

“나, 간다.”

검무극이 방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서대룡이 불쑥 물었다.

“오늘 왜 오신 겁니까?”

“그림 주러 왔지.”

“정말 그것뿐입니까?”

왠지 느낌이 그림만 전해주러 온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서대룡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이때의 너희는 또 어떤가 기억하고 싶어서.”

검무극은 뜻 모를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뭘 기억해요?”

소리쳐 부르자 저 멀리 밖에서 검무극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처진 눈!”

* * *

검무극이 황천각을 나오는데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초승달 무면객이었다.

“소교주님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가면 속 떨리는 눈빛으로 그가 큰 용기를 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말해보게.”

“귀영대 살수들이 조만간 모두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차이란이 떠나면서 수하 살수들도 모두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차이란은 수하들에게 원하는 대로 선택하게 했다. 자신을 떠나 새 삶을 살아도 좋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가도 좋다고 했다.

문제는 자신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십칠교였다.

“저는 앞으로도 무면객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만약 이 마음을 전하게 되면,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녀가 떠날까 두려운가?”

초승달 무면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주 정중히 보내줄 생각입니다.”

지금 초승달 무면객이 걱정하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승낙하는 경우였다.

“이곳에서 함께 무면객으로 살다가 나중에 그녀가 불행해지면 어쩌지요?”

벌써 그런 걱정까지 하는 걸 보니, 십칠교를 정말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걸 왜 내게 묻는 건가?”

“왠지 소교주님이시라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실 것 같아서요.”

함께 했던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작전 때 검무극이 얼마나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인지 확인했었다.

게다가 그때 소교주는 자신과 십칠교를 위해서 따로 자리도 마련해주었다.

“그날 저희를 만나게 해주지 않으셨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책임져라?”

“아닙니다!”

초승달 무면객이 당황했고 검무극은 그 반응을 즐겼다.

그래, 여기까지 용감하게 왔으니 최대한 도움이 될 말을 해줘야겠지. 한데 초승달아, 여자 문제는 너나, 나나 별반 다르지 않다.

“선택을 강요하게 될까 두렵다고 했지?”

“네.”

“이번에는 선택을 강요하게.”

초승달 무면객이 놀란 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난 둘 다 포기 못 하겠다, 그러니 네 선택만 남았다. 그렇게 강요하게. 대신 그녀에게 미리 말해두게. 지금은 내가 강요했지만, 나중에는 네가 내게 선택을 강요하라고.”

“어떤 선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초승달 무면객이 생각지 못한 선택이었다.

“같이 도망가자!”

“힘든 삶을 참고 또 참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지 말고 그 전에 꼭 말해 달라고 하게. 난 무면객 생활 너무 힘들고 지긋지긋해서 도망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네 선택만 남았다고. 예전에 내가 선택했으니 이번에는 네가 선택해라.”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잡하게 말했지만, 후회 없이 무면객 생활 한 번 해보고 같이 도망가라는 말이네.”

무면객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웃었다. 이제 왜 이 무면객이 초승달 문양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돌아서 걸어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 어디 이별을 못 견디는 것이겠는가? 말도 못 해보고, 선택도 못 해보고, 뭘 하나 제대로 못 해보고 끝나버리는 게 후회되고 마음에 남는 것이지.

* * *

이안은 자신의 방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찾아왔던 차이란을 떠올렸다.

검왕과 떠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작별 인사를 하러 왔었다.

―다음에 객잔에 놀러 갈게요.

―비싼 객잔이니 돈 많이 벌어둬요.

그렇게 나가려던 그녀가 돌아서며 말했다.

―수하가 아니라 같은 여자로서 한마디해도 돼요?

차이란이 마지막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그 심장, 이제 진짜로 뛸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이안은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말은 쉽지. 누구의 심장인지 뻔히 알면서.’

뒷말은 실제로 입에서 나왔다.

“그 심장의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이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지 알면서.”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누가 걸려 있는데?”

그녀가 깜짝 놀라 돌아서니 어느새 검무극이 뒤에 와 있었다.

“소교주님!”

“집을 다 털어가도 모르겠다.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당황한 그녀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소교주 일보다 대주가 할 일이 더 많다는 것 모르시죠? 신경 써야 할 일이 태산입니다. 참, 악 무인이랑 차 무인 곧 떠난다네요.”

“악 형에게 들었어.”

“아, 만나셨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 열면 연락한다더라. 원래라면 내가 따라가서 장소도 같이 물색하고, 객잔 짓는 것도 도와야겠지만 차 소저가 함께 가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이안은 검왕과 차이란을 생각하면 사람의 인연이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이었던 그들과 사제지간으로 만나고, 또 함께 천하제일미 대회에 참가도 하고, 친구도 되고 수하도 되고, 또 이렇게 남이 되어 떠나간다.

“가자.”

“어딜요?”

“진짜 이안을 찾으러.”

“아, 풍류주점 새로 열었다죠? 술을 한잔해야 제가 또 가면을 벗죠.”

“아니, 그보다 더 멀리.”

순간 이안의 눈동자가 설마 하며 반짝였다.

“중원에 바람 쐬러 가자.”

“우리 둘만요?”

“그래, 우리 둘이.”

이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의 기분을 두 배는 좋게 해주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었다.

“짐 챙겨라.”

이안이 달려가더니 벽장을 열었다.

스르륵.

그곳에 미리 싸둔 작은 혁낭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다 준비해 둔 거냐?”

“항상 갑자기 가자고 하셔서요. 이젠 미리 다 준비해 뒀답니다.”

“가자. 짐 이리 줘.”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안이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시간 얼마나 주실 수 있죠?”

“반 시진?”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쏜살처럼 움직이는 그녀를 두고 검무극이 밖으로 나왔다.

반 시진 후, 이안이 방에서 나왔다.

천하제일미 대회 때 샀던 화려한 옷에 화장까지 한 그녀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오랜만에 나가는 데 좀 꾸며봤어요.”

빤히 쳐다보는 검무극의 시선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해요? 옷 갈아입고 죽립 쓸까요?”

“아니. 내가 이 얼굴로 살라고 했었잖아. 지금까지 그 얼굴 너무 아꼈어. 이번에 가서 제대로 쓰고 오자.”

이안이 괜히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괜찮겠어요? 이 얼굴 천하제일미 결승전 얼굴인데, 나중에 질투하기 없기에요.”

“여협들 나 좋다고 줄 설 때 너나 질투하지 마라.”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검무극이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가며 힘차게 말했다.

“가자, 강호로.”

입부터 닦아요

* * *

“실망인데.”

검무극과 이안이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 입맛에도 안 맞아요. 우리가 또 돈 주고 산 음식 남기는 사람들이 아닌데.”

그들은 음식을 반도 먹지 않았다.

“정말 여기 맞아요? 옆 마을에 같은 이름 객잔이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여기 맞아.”

검무극과 이안이 나란히 앉아서 한 권의 책자를 내려다보았다.

중원미식탐방.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혈천도마가 안내한 서점에 가서 샀던 책자였다. 나중에 아버지 모시고 가려고 사둔 책자였는데, 지나가는 길에 확인차 이안과 먼저 와본 것이다.

“우리 기대가 너무 컸나 봐요.”

“책에 실렸다고 다 맛있는 집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기본은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지난번 그 집은 맛있었잖아요.”

검무극이 이 객잔의 이름이 적힌 곳에 줄을 쭉 그었다.

“미리 와보길 잘했지. 아버지 모시고 왔었다간 숙수들을 제물로 삼으며 여기서 곧바로 마정대전이 발발할 뻔했어.”

검무극의 농담에 이안이 웃었다.

교를 나온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즐기고 있었다. 맛있다고 이름난 객잔이나 반점을 찾았고, 절경이라 알려진 곳은 꼭 들러서 구경했다.

야영할 때면 하늘의 별을 보며 잠이 들었고, 물 맑은 곳에서 함께 수영하기도 했다.

검무극이 실력 발휘해서 요리도 해주었고, 인심 좋은 마을에서는 하룻밤 묵으며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검무극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와 느긋하게 여행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미리 걱정하지 않았다.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은 이 여행을 자신을 위한 여행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한 번도 이렇게 검무극과 느긋하게 즐겨본 적이 없었으니까.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때 점소이가 와서 요리와 술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시킨 요리가 아닌데?”

이놈아! 맛이 없다는데 뭘 또 가져오나! 차마 그 말을 못 하던 그때, 점소이가 구석 자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계신 손님께서 낭자께 특별히 드리는 요리입니다.”

그곳을 보니 중년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이 살짝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한 후 검무극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봤죠? 이게 벌써 몇 번째더라. 여덟 번째인가?”

“여섯 번째지.”

정말 이안이 가는 곳마다 시선이 모였다. 이렇게 요리를 시켜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안은 귀찮다면서 죽립을 쓰고 다니겠다고 했지만, 검무극은 그냥 벗고 다니게 했다.

“즐겨, 실컷 즐겨.”

“도련님이 더 즐기고 계신 건 아니고요?”

“표 났어?”

사실 검무극이 더 즐기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안에게 시선이 가고, 다음으론 반드시 자신에게 시선이 왔으니까. 그럴 때는 검무극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미녀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야, 하는 표정으로.

“어, 저 사람 이리로 오는데요?”

요리를 보내준 남자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는 제법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옷에 금과 옥으로 장식된 장신구를 매달고 있었다.

검무극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마치 너는 알겠어? 하고 묻는 눈빛이었는데, 이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멀리서도 알아보고 많이 발전했네.”

“척 보면 척이지요.”

그러는 사이 남자가 두 사람 앞까지 왔다.

“이 고을은 처음이시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책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보다시피 사매와 여행 중이오.”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담호(譚好)라는 사람이오.”

“난 검연이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를 쓰오.”

이안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안이에요.”

검무극은 이름이 알려져서 검연을 썼지만, 이안은 그냥 자기 이름을 그대로 썼다. 얼굴도 이름도 그대로 썼다.

“아우님들을 보니 예전 생각도 나고 해서 술과 안주를 전했소.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합석합시다. 자고로 무림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은 없지 않겠소?”

담호는 상대의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 두 사람이 앉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말과 행동이 자신만만했다.

“오늘 술과 요리는 내가 사겠소.”

“어제 꿈자리가 좋더니, 이런 기쁜 일이 있으려고 그랬나 보오.”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아서 싫어할 법도 했는데, 검무극은 무슨 생각인지 순순히 그를 맞아주었다.

담호가 이안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저는 처음 보는 것 같소.”

그는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시오?”

“내 사매이자 친구요.”

그 말에 담호가 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매와 함께 다니면 불안하지 않소?”

“뭐가 불안하오?”

“누가 와서 시비를 걸지 않느냐는 말이오. 미인에게는 온갖 잡다한 놈들이 꼬여 들기 마련이니까.”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는데도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매가 싸움을 잘해서 괜찮소. 자자, 우리 신나게 마셔봅시다! 참, 기왕 사 주시는 거, 옆 객잔에 가서 사 주실 수는 없소?”

* * *

추가검문(秋家劍門) 앞으로 일단의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사방을 포위한 채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도록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무인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무인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멸마대 무인들을 이끌고 도착한 그는 바로 소맹주 진하군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진하군의 물음에 무림맹 무인이 대답했다.

“정체불명의 인물들에게 추가검문의 둘째 아들이 인질로 붙잡혀 있습니다.”

일반 지단 무인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었기에 멸마대에 급히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다행히 멸마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작전 중이었다.

“백주에 인질극을 벌였다고? 대체 누가?”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완벽한 범죄를 꾸민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원한 관계일 가능성이 크군.”

멸마대 무인들도 진하군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인질극을 벌이고 있을 리는 없었으니까.

한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추가검문에서 맹에 연락한 것인가?”

추가검문은 이름난 명문정파였다. 자체 고수들이 많았기에 자신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듣기로 추가검문의 문주는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구출 작전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추가검문이 실패했다?”

“문주가 직접 구하러 가겠다는 것을 가신들이 간신히 말린 상황입니다.”

자신이 아는 추가검문은 이름난 고수들이 꽤 있는 문파였다. 그런데도 실패했다는 건 상대의 무공이 상당하다는 의미.

“아무래도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다 보니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놈들의 요구는?”

“맛있는 술과 음식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술과 음식을?”

진하군은 물론 멸마대 무인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로 파락호들이 인질극을 벌이면 술과 음식을 요구하곤 한다.

한데 추가검문에서 구출에 실패할 정도의 고수들인데 술과 음식을 요구했다? 뭔가 앞뒤가 살짝 맞지 않았다.

“저기 추가문주입니다.”

추가문주 추염(秋染)이 진하군에게 걸어왔다. 두 사람이 서로 정중히 포권했다.

“오랜만이오, 소맹주.”

“문주님.”

상황이 상황인지라 추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런 일로 보게 돼서 유감이오.”

“지금은 그것보다 아드님의 생사가 중요하겠지요.”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추염에게 물었다.

“혹시 원한을 살만한 자들이라도 있습니까?”

추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아들은, 특히 둘째 놈은 정말 영특하고 착한 녀석이오. 지금까지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녀석이오.”

진하군의 경험상 자식이 사고를 쳤을 때, 그 자식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부모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랬기에 부모의 증언은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후원 별채를 장악하고 있소.”

“이제부터는 우리가 맡겠습니다.”

“잘 부탁드리오.”

진하군이 멸마대를 이끌고 후원으로 진입했다. 무림맹 최고 정예들답게 그들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멸마대 무인들에게 후원을 철통처럼 방비하게 한 후, 십여 명의 멸마대만 이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스로 기척을 완전히 없앤 진하군이 소리 없이 창문으로 접근했다.

살짝 보이는 창문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저 멀리 무릎을 꿇고 있는 젊은 남자가 보였다.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얻어터진 상태. 추가검문의 둘째 아들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아직 죽진 않았다.’

사이로 무인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구출 작전을 펼친 추가검문의 고수들일 것이다. 느낌상 그들 역시 아직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선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야겠군.’

진하군이 수신호로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한 번에 진입한다.

각기 다른 창문으로 접근한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은 천장으로 숨어들었다.

진하군은 작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신호가 떨어지자.

꽈지직.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문과 창문, 그리고 천장을 통해 동시에 진입했다.

쉬이이이익.

천장에서 떨어진 무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를 감싸서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인질 확보했습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공격을 가했을 텐데.

하지만 진하군은 아무 반응 없이 멍하게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멸마대 무인들도 공격하려던 검을 허공에 멈춘 채 멍하게 서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와 인질을 구한 멸마대 무인이 뒤늦게 앞을 바라보았다.

‘헉.’

그도 석상처럼 굳었다. 다들 굳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저 앞에 두 사람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닭다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술잔을 들고 있는 젊은 남자는 자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술로 진하군에게 말했다.

“왔어?”

검무극이 천살성을 막은 후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한 번 연락이 올 법도 한데, 왜 이렇게 안 오나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한데 인질극을 벌이며 닭다리를 들고서는 저 번들거리는 입으로 뭐? 왔냐고?

오죽 놀라고 황당했으면 처음에는 닮은 사람인가 생각했다. 추가검문의 아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 검무극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 앞에 이안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 역시 다리를 야무지게 들고 뜯고 있었다.

이안이 재빨리 닭 다리를 놓고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그리고 정중히 진하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진하군이 그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뒤를 돌아보았다.

추가검문의 둘째인 추중(秋仲)이 힘겹게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얼굴이 퉁퉁 부은 것도 모자라 이도 몇 개나 부러져 있었다.

다시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자.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이안이 그랬어. 도저히 못 참겠다고. 나중에는 때릴 기회 없을 거 같다고.”

검무극이 일러바치자 이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니, 그걸 일러바쳐요? 자신이 한 말까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때리지 않았다고 부정하진 못했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뒤쪽 벽에 한 남자가 걸려 있었다. 마치 벽에 옷이 걸려 있듯 걸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객잔에서 만났던 담호였다. 그 역시 만신창이가 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이 모습만 보면 그야말로 남녀 악당 이인조의 모습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문주 추염이 들어섰다. 그 뒤로 입구를 지키던 멸마대 무인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 역시 장내의 상황에 모두 놀랐다.

추염이 아들에게 달려왔다.

“중아. 괜찮으냐?”

아들의 얼굴 상태를 본 추염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뭣하시오? 당장 저것들을 붙잡지 않으시고.”

진하군이 나직이 물었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추염이 흠칫 놀랐다.

진하군이 인질극을 벌인 상대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물은 것이다.

추염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대주야말로 지금 뭐 하시는 거요?”

앞서 인사할 때는 소맹주였는데, 이제 대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하다는 뜻.

진하군이 어찌 모르겠는가? 저 검무극과 이안이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팼다면 정말 맞을 짓을 저질렀다는 의미. 특히 저 이안이 참지 못하고 팼다면 정말 나쁜 짓을 했다는 의미이리라.

그때 뒤에서 검무극의 말이 들려왔다.

“그쪽에 물어봤자 그놈은 말 절대 못 해.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거든.”

듣고 있던 추염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은 누구기에 그딴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거냐?”

이안이 품에서 다른 손수건을 꺼내서 검무극에게 건넸다.

“입부터 닦아요.”

“고마워.”

검무극이 입의 기름기를 닦았다.

추염은 그 행동에 더욱 화가 났다.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감히 내 아들을 인질로 삼고, 추가검문의 무인들을 죽인 죄는 정파 무림 전체를 적으로 삼는 일!”

그때 추염이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추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구 쏟아져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살기나 기도를 내뿜지 않았음에도 검무극은 눈빛 하나로 상대를 압도했다.

“둘 다 틀렸소.”

“뭐?”

“우선 아까 들어온 저 사람들은 다 살아 있소.”

가까이 있던 멸마대 무인들이 쓰러져 있던 이들을 살폈다. 과연 검무극의 말처럼 모두 살아 있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마혈과 아혈만 제압당한 상태입니다.”

멸마대 무인의 보고에 추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을 죽이는 것보다 다치지 않고 제압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그도 잘 알았다.

‘대체 어떻게?’

기습으로 죽일 수는 있지만, 저 고수들의 마혈을 제압한다고? 그것도 부상 없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신 아들을 인질로 잡은 것도 아니오.”

검무극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우린 멸마대주가 오기를 기다렸을 뿐이오.”

진하군이 차분히 물었다.

“왜 나를 기다렸나?”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무극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고 싶으니까?”

이런 미친! 지금 장난칠 때냐! 진하군이 눈빛과 표정에 그 감정을 담았다. 뒤에 서 있던 멸마대 무인들은 아쉽게도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검무극이 진짜 이유를 밝혔다.

“최근에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지?”

순간 진하군의 표정이 확 굳어지며 한 조직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탐미방(耽美幇)!”

아직 안 끌려가 봐서 그래

* * *

탐미방.

최근에 진하군이 추적하고 있는 조직의 이름이었다. 미를 탐한다는 이름과는 달리 아주 추악한 조직이었다.

처음 진하군이 그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연달아 발생한 실종 사건을 조사하면서였다.

무림의 여인들이 연속해서 실종되면서 진하군과 멸마대는 그 사건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의 이름을 알아냈다.

탐미방.

공식적인 무림방파가 아닌 비밀조직이었다. 그들은 강호의 여인들을 납치해서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조직이었다.

주로 아름다운 미녀들을 납치했는데, 어른들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까지 납치하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추격 끝에 여인들을 납치하는 데 동원된 자들을 붙잡았지만, 그들은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누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지 모르는, 돈과 명령서만을 받아서 움직이는 철저한 점조직이었다.

말단 조직들이 체포되자 놈들은 여인들의 납치를 중단했다. 이대로 멸마대의 조사가 끝나길 기다리려는 것이다.

진하군은 분노했고 절망했다.

멸마대가 그들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이대로라면 이 사건을 덮고 다른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시 악행을 저지르기 전까지 놈들을 붙잡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니, 수없이 많은 피해자가 생겨야 다시 놈들을 추적할 단서가 생길 것이고.

‘어떻게든 처음에 잡았어야 했어.’

한데 검무극이 그 탐미방을 언급한 것이다.

곧이어 검무극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 방에 그 탐미방주가 있네.”

착착착착.

모든 멸마대 무인들이 기를 끌어올리며 사방으로 검을 겨누며 경계했다.

진하군을 따라다니며 검무극에 대해 겪을 만큼 겪은 그들이었다. 매번 실없는 소릴 해도 적어도 이런 일로 농담하거나 장난치는 사람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하군의 시선이 벽에 걸린 남자를 향했다.

“저자인가?”

당연히 그자일 거라 여겼는데 검무극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고?’

추가검문의 문주나 그의 아들은 아닐 테니까.

쓰러져 있는 검문의 무인 중 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던 그때.

‘아니지.’

진하군은 이안이 둘째 아들인 추중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중에 팰 기회가 없을 거라는 말까지 하면서.

“설마?”

진하군의 놀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군의 시선이 뒤에 있던 추중을 향했다. 처음에 그에게 물었던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라는 질문의 대답이 이제야 나온 것이다.

진하군은 물론이고 멸마대 무인들도 모두 경악했다. 명문세가의 자제가 탐미방의 주인이라고?

당연히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의 부친인 추염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추염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

반쯤 뽑혀 나온 검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그의 검 손잡이 끝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다.

바로 이안이었다. 번쩍하는 순간 순식간에 쇄도한 이안이 바로 옆에서 추염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 마음 이해는 하지만 당신이 검을 겨눌 분이 아닙니다.”

추염은 이 젊은 여인이 자신보다 훨씬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흥분한 상태였다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손쉽게 지척을 허용할 리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누르고 있음에도, 검이 뽑혀 나오지 않았다.

“당신들 누구지?”

떨리는 추염의 물음에 이안이 훌쩍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우리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중요한 것은 당신 아들이 누구냐는 거죠.”

그녀는 닭 다리를 뜯던 앞선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마지막에 봤을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다르다는 것을.

‘훨씬 더 강해졌구나.’

게다가 여행하는 도중 틈틈이 검무극과 무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경지는 아직도 상승 중이었다.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에게 눈짓하자, 멸마대 무인 둘이 양쪽에서 달려들어 추염의 마혈을 제압했다.

“뭐 하는 짓인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이미 마혈은 제압당한 후였다. 그를 위한 조치였다. 아들 때문에 흥분해서 날뛰면 결국 그만 손해일 테니까.

진하군이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침착하십시오. 이번 사건의 진상은 제가 알아낼 겁니다.”

추염은 흠칫하더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무림맹에서 본문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 것인가?”

오해할만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녀 고수가 아들을 납치하고, 아들을 구출하러 온 멸마대주는 그 흉수와 아는 사이처럼 보였으니까.

그를 이해했기에 그 무례한 말에도 진하군은 흥분하지 않았다.

“만약 문주께서 멸마대의 손에 사라져야 할 악행을 저질렀다면, 결과적으로 그 말이 맞을 겁니다. 한데 아니시라면 일단 더 지켜보시지요.”

추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 그 말은 분명 실언이었다. 맹과 멸마대, 소맹주까지 모두 모욕한 말이었으니까.

진하군이 다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추 문주, 당신이 어찌 알겠소? 눈앞의 저 친구가 이런 일을 행할 때는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임을.

“추 소협이 탐미방주라는 증거가 있나?”

“물론 있네.”

“그럼 팔아넘긴 여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나?”

사실 진하군에게는 이 질문이 가장 중요했다. 그녀들을 구해주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으니까.

검무극이라면 당연히 알아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팔아넘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네.”

“한 사람도 없다고?”

의아해하는 진하군에게 검무극이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탐미방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니까.”

놀라운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탐미방은 자네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만든 가상의 조직이네.”

검무극의 시선이 추중을 향했다.

“자네들이 실종 사건을 조사하며 압박해 들어오자, 놈은 탐미방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만들었네. 돈을 들여 몇 놈을 점조직의 일원처럼 만들어서 이용했지. 실제로 여인들을 납치하게 하고, 자네들에게 붙잡히게 한 거네.”

“왜 그런 건가?”

“이번 일을 저지른 놈들이 인신매매 조직이라 생각하는 한, 절대 붙잡히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명문정파의 후예가, 그것도 저렇게 착하고 똑똑하다고 알려진 젊은 후계자가 그런 조직을 운영할 거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진하군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굳이 그런 조직을 만들지 않더라도, 추중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거네.”

적절한 의문이었다는 듯 추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번 대답 역시 놀람의 연속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게 아니네. 자신의 사부를 보호하기 위해서지.”

사부라는 말에 추염이 소리쳤다.

“이제 헛소리임이 밝혀지는군. 중아의 사부는 나다.”

반면 진하군은 검무극이 말한 사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에 걸린 남자를 향했다.

“사부는 바로 저자로군.”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르륵.

검무극이 허공섭물을 발휘하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저절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는데, 그는 앞서 객잔에서 만났던 그 잘생긴 중년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나이가 든 노인의 모습이었다.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멸마대 무인 정경이 노인이 누군지를 알아보았다.

“음행마(淫行魔)입니다.”

그의 정체에 모두 깜짝 놀랐다.

그는 유명한 색마였다. 수많은 여인을 간살한 죄로 무림공적에 올라있는 그였다. 그는 여인을 죽인 후 그 정기를 빨아들여 죽이는 악독한 자로 유명했다.

무림맹에서는 어떻게든 놈을 잡으려고 추적했었는데, 작년에는 천라지망까지 펼쳐서 궁지에 몰아넣었는데 끝내 붙잡지 못했다.

한데 그 음행마가 이곳에 붙잡혀 있었던 것이다.

음행마는 객잔에서 술과 요리를 사 주며 검무극과 이안에게 접근했다.

앞서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보며 검무극이 이안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알아보겠냐고. 이안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바로 사내가 얼굴을 젊게 만든 주안술(駐顔術)을 알아보았냐고 물었던 것이다.

검무극은 주안술을 익힌 자들을 척 보면 아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안에게도 그 특유의 기운과 특징을 알아보는 법을 알려줬던 것이다.

멸마대 무인 정경이 뒤늦게 생각난 바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무림맹에서 놈을 놓친 곳이 이곳 인근이었습니다.”

진하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번 일에 음행마가 개입한 것이라면.

“그럼 납치된 여인들은 모두 죽었겠군.”

자신이 아는 음행마는 결코 희생자를 살려두지 않았으니까.

과연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기가 빨린 채 모두 죽었네.”

진하군은 물론이고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탄식을 내뱉었다. 팔려 간 여인들을 구하고 싶었는데. 자연 그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이제 진하군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저자를 어떻게 잡았나?”

“내가 잡은 게 아니네. 저놈이 제 발로 찾아왔지.”

진하군은 이안의 미모에 끌려 음행을 저지르려다 붙잡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를 골라도 정말 잘못 골랐다. 그야말로 색마들에게는 천재지변 같은 두 사람이었으니까.

“우리에게 약을 먹이려는 저자를 잡아서 음행마임을 밝혀냈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쁜 자네에게 인계할 생각이 없었지. 벌 좀 주고 죽여 버리려는데. 그때 저놈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제발 고통을 멈춰주면 요즘 무림에 시끄러운 탐미방주가 누군지 알려주겠다고.”

이제야 진하군은 이번 일의 전모를 알 수 있었다.

“나머지는 직접 듣게.”

검무극이 지풍을 날려 수혈을 눌러 재워둔 그를 깨웠다.

잠에서 깬 그가 눈을 껌벅이며 앞에 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늘어선 모습에도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반사적으로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진하군이 그에게 물었다.

“네가 추중을 위협해서 제자로 삼았나?”

음행마가 비웃으며 말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그때 옆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정중히 대답해라.”

음행마가 무심코 옆을 쳐다보다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눈을 껌벅이던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허어어억.”

여유롭던 눈빛에 공포가 가득했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제야 기억한 것이다.

“쉿.”

검무극이 조용히 하라고 하자 음행마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무림맹 소맹주님이시다. 정중히 대답하도록.”

소맹주란 말에 음행마는 눈을 크게 떴지만, 여전히 그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알겠소.”

음행마가 이렇게 고분고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순순히 다 말할 테니 약속은 꼭 지키시오.”

음행마는 약속을 다시금 되새겼고, 검무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뭐라고 물었소?”

“네가 추중을 협박해서 제자로 삼았느냐고 물었다.”

음행마의 시선이 추중을 향했다.

“천라지망 속에서 큰 부상을 당한 채 죽어가던 나를 저 아이가 구해줬소.”

충격적인 사실은 다음에 이어진 진술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았음에도 내 제자가 되길 바랐지.”

강제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였다는 사실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난 저 아이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소. 누구보다 강한 색심과 악심을 타고났다는 것을. 자비로운 감정 따위는 전혀 없는. 나를 넘어설 아이였는데. 아쉽게 되었구나.”

물론 추중은 강하게 부인했다.

“거짓말입니다. 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모함입니다.”

그때 음행마가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다, 제자야. 우린⋯⋯ 잘못 걸렸다.”

음행마의 탄식에 추염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어디서 색마 놈이 더러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소맹주, 저깟 색마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모든 게 저자의 말뿐이지 않소? 증거가 없는데 우리 아들을 죄인으로 몰아갈 수는 없소.”

그때 음행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추염에게 말했다.

“네 아들의 몸에 내게서 배운 색공의 기운이 흐르고 있다. 내공을 확인해 보면 당장에 알 수 있지. 벌써 여인을 아홉이나 빨아 먹었거든.”

아홉이란 말에 추염은 충격을 받았다.

“네가 강제로 주입한 것일 수도 있지!”

그게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떠나서 진하군이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자제분은 그 말부터 하지 않았을까요? 저기 벽에 걸려 있는 자가 자신을 강제로 제자로 삼게 했다고요.”

순간 추염이 흠칫했다. 맞는 말이었다. 죄가 없다면 강제로 제자가 되었고, 저자가 강제로 몸에 기운을 주입했다고 그 말부터 했을 것이다.

“그야 당황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검무극이 쐐기를 박았다.

“탐미방을 점조직으로 운영했기 때문에 반드시 조직에 대해 기록한 증거가 있을 거네. 저자의 거처를 뒤져보면 비밀 금고가 있을 거고, 그곳에 관련한 증거가 있겠지. 필체를 대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

“그것도 조작된 증거를 심어뒀겠지!”

어떻게든 아들을 보호하려 하는 그에게 진하군이 물었다.

“추 문주, 앞으로 아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추염이 천천히 아들을 돌아보았다.

“절대 네가 누명을 쓰게 하지⋯⋯.”

순간 추염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들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화난 얼굴로 음행마를 쳐다보는 눈빛은 누명을 쓴 자의 분노와 달랐다.

이제 더는 숨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추중이 본색을 드러냈다.

“병신 같은 새끼! 당분간 꼼짝도 하지 말고 있으라니까! 그깟 며칠을 못 참아서 일을 그르치다니!”

싸늘한 눈빛과 말투에 추염은 깜짝 놀랐다. 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은 낯설었다.

음행마가 큰소리를 내서 웃었다.

“제자야, 죽을 때 죽더라도 저런 미녀를 어찌 그냥 두고 볼 수 있었겠느냐?”

음행마가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검무극에게 말했다.

“약속은 꼭 지키시오.”

검무극이 손을 휘젓자 다시 그가 수혈을 제압당해 잠이 들었다.

“저자와 무슨 약속을 했나?”

설마 검무극이 저런 악인을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리는 없는데.

“본교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네. 내가 놈을 벌주면서 겁을 좀 줬거든. 본교로 끌고 가서 계속 치료해서 살려가며 평생 이 고통을 줄 것이라고.”

진하군은 이럴 때면 분노를 넘어 한계를 느낀다. 선이나 협은 우습게 여기는 악인이 더 큰 악이 주는 공포심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여인들의 시체가 묻힌 장소만이라도 알아내려 했는데, 장소는 저자만이 안다고 하더군.”

진하군이 걸어가서 추중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죽인 여인들의 시체를 어디에 묻었나?”

추중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고, 그 가운데 한 점의 악의(惡意)만이 박혀 있었다.

추중의 입가에 지어지는 묘한 미소를 보는 순간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놈은 절대 시체가 묻힌 곳을 밝히지 않을 것임을.

아무리 취조하고, 설령 고문을 하더라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임을. 오히려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 유희를 즐기려 할 것임을. 원래 이렇게 태어난 자라는 것을.

뒤에 있던 검무극도 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우리에게 보내게.”

진하군이 돌아서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추중이 본색을 드러냈듯, 이 순간만큼은 검무극 역시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들 아직 본교 지하로 안 끌려가 봐서 그래.”

밤에 몰래 일어나서. 알지?

추중이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마주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 악의가 느껴지는 시선.

하지만 그의 상대는 악인이라면 십이지왕부터 천살성까지 다 겪어본 검무극이었다.

그 악의 가득한 눈빛을 가소롭게 받으며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시체 묻힌 곳은 물론이고 아예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돌려보내 주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천마신교라면 놈의 입에서 잘못했습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겠지. 앞서 음행마가 공손해진 것처럼.

하지만 무림맹의 일 처리를 사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후 일은 우리에게 맡기게. 자네들처럼 화끈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도 오랫동안 악을 상대하며 쌓아온 방식이 있다네.”

그 결정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그때 진하군의 전음이 검무극에게 날아들었다.

ᅳ만약 우리가 실패하면 그때는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검무극은 저 부탁이 그에게 얼마나 어려운 부탁인지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명예와도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부탁하는 이유는 반드시 죽은 여인들의 시체를 찾겠다는 의지 때문이리라.

-왜 안 되겠나? 우리 지하의 그 무서운 사람들은 가끔 파견도 나간다네.

-고맙네.

그러면서도 마음에 걸리는지 진하군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ᅳ되네.

진하군의 망설임을 끊은 검무극은 단호했다.

ᅳ무고한 생명 아홉을 죽인 자라면 이보다 백 배 더 지독하게 처리해도 되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에게 시신은 돌려줘야지.

진하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이었다면 저들을 자신이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멸마대가 잡았어야 했는데. 저들을 붙잡지도 못했는데 시체가 묻힌 곳까지 알아내 달라고 부탁한다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감정을 소모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자신의 검에 수실은 달아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매달지 않을 작정이니까.

“이자들 데리고 가게.”

진하군의 명령에 멸마대 무인 몇 사람이 음행마와 추중을 제압해서 데리고 갔다.

추염은 충격을 받은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그곳을 걸어 나갔다.

진하군은 그에게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주겠는가? 무슨 말을 한들 귀에 들리겠는가? 이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아니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앞으로 있었을 많은 희생을 막았네.”

그러자 검무극이 인사는 이쪽에 하라고 두 손으로 떠받드는 시늉을 하며 이안을 가리켰다.

"고맙소, 이 무인.”

이안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에요.”

검무극은 여전히 두 손으로 경외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도 꽃이 고개를 숙이고 달은 구름 뒤에 숨고, 색마는 나 잡아가라고 달려들고.”

“도련님! 제발!”

두 사람의 장난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제야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둘이서만 출교한 건가?"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둘이서 유유자적 중원 구경이나 하려고.”

진하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잘도 그러겠다. 어디 운명이, 어디 무림이 자넬 그렇게 두겠는가? 벌써 제 발로 음행마가 찾아가서 탐미방 사건을 해결했는데.

“가세. 오랜만에 회포 풀어야지.”

“아쉽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네. 이번 사건 뒤처리도 해야 하고, 다른 일도 있고.”

검무극을 만난 것은 반갑고 좋았지만, 그래서 더 가는 것이 꺼려졌다. 검무극과 있다 보면 웃게 될 테니까.

진하군은 납치되었던 피해자들을 진심으로 구해주고 싶었다. 한데 그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 웃고 있을 수는 없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눈치 빠른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랬기에 더 억지로 데려가려 했다. 죽은 사람보단 친구가 더 소중했으니까.

“오직 친구가 보고 싶어서 십만 리를 밤새 걸어온 친구를 이렇게 내친다고?"

“자네 말은 다 틀렸네. 애초 목적이 날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을 거고, 밤새 걷지도 않았을 테며, 십만 리도 더더욱 아닐 거고, 내치는 것도 아니고.”

검무극이 뭐 하고 있냐며 이안에게 눈짓했다.

이안이 재빨리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소교주님, 바쁘신 분을 억지로 붙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요, 소교주님. 십만 리 길 눈물로 걸어서 다시 돌아가요."

이안까지 가세하자 진하군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결국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만....."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검무극과 이안이 진하군을 좌우에서 잡아끌었다.

"자네들 수장 빌려 가네!"

멸마대 무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림맹의 원로 고수들이야 여전히 이 관계를 걱정하겠지만, 멸마대 무인들만큼은 이 관계를 인정했다. 진하군이 유일하게 편하게 풀어지는 순간이었으니까.

못 이기는 척 끌려가면서 진하군이 수하들에게 이것저것 명령했다.

“맹에 보고부터 하고, 두 사람 정식 진술부터 받고................”

멸마대 무인인 광효가 기분 좋게 말했다.

“뒤처리는 저희에게 맡기십시오.”

검무극과 이안이 진하군의 양쪽에서 팔짱을 낀 채 장난을 쳤다.

“멸마대주, 너도 체포되었다. 너야말로 본교 지하 맛을 봐야겠다.”

“데려가더라도 죄목은 알려주고 가야지.”

"죄목은 일중독이다! 이 일벌레 같으니라고.”

"친구에게 벌레라니!"

요란스럽게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광효가 말했다.

“소교주가 출교했으니 이 무림은 또 시끄러워지겠군.”

세 사람은 저잣거리의 다루에 마주 앉았다.

진하군이 술은 끝내 사양했기에 차를 마시기로 한 것이다.

검무극은 진패천의 안부부터 물었다.

“맹주님은 잘 계시지?"

“잘 계시네.”

천살성과의 싸움 이후 할아버지는 무공 수련에 매진 중이셨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수련에 열심인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살성과의 싸움은 할아버지를 변화시켰다.

"할아버지는 정마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계시네.”

근래 진하군이 멸마대 일에 더욱 매진한 것도 그 알지 못할 긴장감 때문이기도 했다.

솔직한 진하군의 말에 검무극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덧붙여 말했다.

“나도 포기하지 않았네.”

그것이 아버지를 막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진하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흐르는 침묵.

그 무거워진 분위기를 이안이 차향을 음미하며 환기했다.

"마셔보세요, 향이 참 좋아요."

진하군은 그녀가 더 밝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인은 더 보기 좋아진 것 같소.”

“더 예뻐졌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자 진하군이 살짝 당황했다.

“이럴 때는 그렇소, 라고 대답하시는 거예요.”

“그렇소."

시키는 대로 대답하자 그제야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원래 이렇게 당돌해요. 그동안 누구 모시느라 감추고 산 거죠. 놀라지 마세요! 이제 감춰둔 꼬리 하나씩

나옵니다!"

진하군이 보기 좋아졌다고 말한 것은 더 밝아졌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밝게 대하지 않았으니까.

검무극과 둘이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행이 그녀를 더욱 밝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번 여행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지도 모르겠군.”

진하군이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뭘 그리 망설이고 있나?'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두고서.

그때 검무극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진하군에게 말했다.

“자네 피곤해 보여. 좀 쉬어가면서 일하게.”

근래 진하군은 멸마대 일에 더욱 몰두하면서 계속 긴장한 상태였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갈수록 멸마대가 필요한 사건이 늘어나고 있네.”

일반 무림맹 무인들로는 해결이 안 되는 잔혹한 사건들 말이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점점 더 미쳐가고 있는 느낌을 받네.”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진하군이 고개를 들었다. 검무극과 이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미안하네. 괜히 분위기를 무겁게 해서.”

다행히 무거워진 분위기를 한없이 가볍게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앞에 앉아 있었다.

“자네가 분위기 망쳤으니 찻값은 자네가 내게.”

미쳐가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을 픽 하고 웃게 만드는 사람 말이다.

가만히 진하군을 응시하던 검무극의 눈빛에 어떤 결심이 스쳤다.

“이봐, 친구.”

"왜?"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왔다.

"우리랑 같이 가자.”

“어딜?"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이다. 보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시간이 안 맞으면 그냥 지나가기도 하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여행이지.”

검무극과 함께하는 여행인데 어찌 싫겠는가? 비사인과 한설도 보고 싶었고, 심지어 하령이 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일이 많아서 안 돼.”

“그러니까 가야 해. 보니까 너무 일만 하고 있어.”

무엇보다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둘이 좋은 시간 보내려고 나온 거잖아?"

“누가 끝까지 같이 있자고 해? 같이 다니다가 때 되면 헤어지는 거지. 혹시 알아? 자네 좋다는 여인을 만날 수도 있잖아? 그때 우리 떼놓을 생각 꿈도 꾸지 마! 맹주전까지 쫓아가서 둘이 입맞춤하는 거 지켜본다.”

진하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검무극은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휴가 내자!"

“멸마대에 휴가가 어디 있나?"

“멸마대는 사람 아닌가?"

“그사이 일어나는 사건들은 어쩌고? 악은 쉬지 않는다. 몰라?”

“무림에 공표해. 멸마대 휴가 간다. 이 기간에 사고 치는 놈들은 지옥까지 쫓아가서 두 배로 혼내준다고. 본교에도 사고 치지 말라고 전서 보낼게. 무림 평화 주간으로 정하자고.”

무림 평화 주간이란 말에 진하군이 소리 내서 웃었다. 안 웃으려 해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웃긴다.

“그런다고 사고 안 치는 놈들이면 애초에 걱정도 안 하게.”

악인을 그렇게 처단했으면 이제 평화로울 때도 되었는데, 마치 악인의 빈자리는 자동으로 채워지는 것이 원칙처럼 악인들은 계속 생겨난다.

“악은 쉬지 않는다고 했나? 자네들은 악이 아니니까 쉬어야지.”

"뭐?"

“자네들의 일은 납치되어 죽은 선량한 여인들의 시신이 묻힌 곳을 찾아야 하고, 색마가 된 아들이 여인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야. 이런 일을 오직 협의와 충성심만으로 견뎌내고 있지.”

씁쓸한 미소를 짓던 진하군에게 결정적인 설득이 날아들었다.

“자네도 자네지만 자네 수하들은?”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들이 자네의 정신력만큼 강할까? 아닐 거라고 봐. 한계 상황에서 힘들게 따라오고 있는 거지.”

그 말에 진하군은 얼마 전에 멸마대 수하인 정혁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들이 몇살인가?

-여섯 살입니다.

─언제 보고 못 봤나?

─작년 가을에 보고 아직 못 봤습니다.

-.......

-.......

-그새 많이 컸겠군.

-그렇겠지요.

자신과 멸마대 무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하고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도 있었다. 악을 응징하고 무고한 목숨을 구해내고 있었으니까.

진하군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바깥을 쳐다보았다. 다루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 쳐다보던 검무극이 담담히 말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같이 미치면, 결국 우리가 진다.”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집합했다.

대주의 갑작스러운 집합에 그들은 모두 긴장했다.

진하군은 그들 앞에 서서 모두를 쳐다보았다. 그 진지한 표정에 다들 무슨 일이 터진 것이라 여겼다.

진하군은 가져온 것을 수하들에게 나눠주었다. 그것은 멸마대 무인 숫자만큼의 봉투였다.

멸마대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목숨을 건 작전이 내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가족에게 남길 유언을 적으라고 나눠주는 것이리라.

위험한 작전을 나가면 유언을 적고 나갔으니까. 한데 무슨 작전이기에 전원 출동일까?

그들이 봉투에 든 것을 꺼내는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안에 든 것은 꽤 큰 액수의 전표였다. 정혁이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이게 무슨 돈입니까?”

돈의 정체는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휴가비다.”

"네?"

“오늘부터 한 달간 휴가다."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마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보다 더 놀랐다.

“가족들도 챙기고, 고향에도 다녀오고, 여행도 하고. 각자 미뤄뒀던 일들 하도록.”

여러 혼란스러운 감정이 하나의 감정으로 통일되었다.

누군가 환하게 웃었고 그 웃음이 전체로 퍼져나가는가 싶더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진하군은 수하들이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몰랐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누구 한 사람쯤, 괜찮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그때 설득할 말도 준비해 왔는데,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검무극의 말이 옳았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다들 힘들게 쫓아오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도 좀 쉬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네.”

거기에 한 가지 진실이 더해졌다. 진하군은 굳이 그 이유를 내가 너희들을 생각해서라고 꾸미지 않았다.

“소교주 꾐에 넘어갔지.”

그 솔직함에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웃었다.

“이번에 다녀오면 한동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네. 그러니 푹 쉬었다 오도록.”

멸마대 무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대주님도 푹 쉬십시오.”

멸마대 무인들은 안다. 지금껏 진하군이 얼마나 열심히 해왔는지. 무림맹 소맹주이기에 피할 수 있는 일도 기꺼이 맡아서 해왔다.

그래서 자신들도 참아왔던 것이고, 그들에게 이 휴가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들이 모두 해산하자 그곳으로 검무극과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무극이 짐짓 이안과 장난을 치며 걸어왔다.

“성공이군. 드디어 무림맹의 최정예 조직을 한 달간 해산시켰다.”

“이제 다음 단계는 뭐죠?"

“소맹주가 멸마대로 돌아가기 싫다! 이런 말이 나오게 쾌락의 늪에 빠뜨리는 거지.”

"놀다 보면 처음에는 부담스러워도 또 그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법이지요.”

진하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뒤에서 짜지 않았다면 어찌 저리도 죽이 척척 맞을까?

물론 진하군의 반격도 있었다.

“셋이 되었으니 두 사람 호젓한 분위기는 이제 끝났네.”

방해꾼이 될까 봐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검무극은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말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우린 더 단합하게 되겠지. 밤에 몰래 일어나서. 알지, 이안?”

"알긴 뭘 알아요!”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그 말만은 받기가 어려웠기에 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진하군이 웃었다. 그래, 이들과 함께라면.

기왕 쉬는 것 제대로 쉬는 거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마음 편한 여행이 될 테니까.

“이제 말리지 말게. 지금부터 나, 멸마대주도 소맹주도 다 내려놓을 거야.”

진하군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가?"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이라면서? 잔말 말고 따라오게.”

이안이 그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그 힘들고 피곤해 보이던 진하군에게 벌써 활력이 느껴졌으니까.

'잘하셨어요, 도련님.'

검무극이 이안과 함께 그 뒤를 따라 걸어가며 소리쳤다.

“자, 길을 비켜라! 일탈의 소맹주님 나가신다!"

길거리 음식이 처음은 아니지?

들판 사이에 난 길을 소가 끄는 수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수레에 검무극과 이안, 그리고 진하군이 타고 있었다.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수레를 끄는 노인이 마을까지 태워주겠다고 한 것이다.

진하군은 수레 끝에 걸터앉아 뒤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안은 수레에 기대앉아 있었다. 검무극은 아예 눈을 감은 채 수레에 드러누웠다.

진하군은 소가 끄는 수레에 앉아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느릿하게 이동한 적도 처음이었다.

삐걱, 삐걱.

수레가 흔들릴 때마다 늘어뜨린 발도 흔들렸다. 발 아래로 지나온 흙길이 뒤로 멀어졌다.

지난 이틀은 너무 재미있었다.

셋이 사냥하고 모닥불에 고기 구워 먹고. 절경 구경하고, 다시 맛있다고 소문난 객잔에서 요리 먹어보고. 밤에는 별을 보며 잠이 들었고.

그 이틀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다 해도 함께하는 일행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이제 그만 놀고 무공수련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검무극의 말처럼 일중독은 일중독인 모양이다.

진하군이 슬쩍 뒤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고 그런 그를 이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깊은 눈빛에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안이 진하군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그 선한 미소에 진하군도 살짝 미소를 지어준 후 다시 뒤쪽을 쳐다보았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의 그 마지막 아름다움이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불어온 바람에 풀들이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마치 불길이 번지는 것만 같았다.

노을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처럼, 수레는 그렇게 계속 나아갔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기에 객잔부터 먼저 찾았다.

“남은 방이 두 개입니다.”

사람은 셋, 방은 둘.

"방부터 보시지요.”

주인장이 세 사람을 객방이 있는 후원으로 안내했다.

“혹 부부시라면 이 넓은 방을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경험 많은 객잔 주인은 누가 남편인지 함부로 예상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우리가 부부처럼 보이지 않소? 자, 이안. 우리가 이 방 쓰자.”

검무극이 이안을 데려가려 하기 전에, 진하군이 먼저 나섰다.

“내가 이 친구와 이 방에서 잘 테니, 편히 주무십시오.”

"방해꾼!"

검무극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진하군이 잡아끌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해요.”

방해가 아니라 진하군이 자신을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것임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검무극이라도 해도 아직 부부가 아닌 관계이니, 이안에게 딴 방을 권하는 것이 예의였으니까.

사실 이안은 검무극과 여러 번 같은 객방에서 묵은 적이 있었다. 당장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때도 상대가 살수였기에 한방에서 지냈었고.

“이안, 알지? 이따 밤이 깊으면...”

진하군이 억지로 검무극을 잡아끌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넓었고 큰 침상에 작은 침상까지 따로 있어서 두 사람이 자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진하군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워진 후원을 등불이 밝히고 있었는데,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사흘째 소감이 어때?"

검무극의 물음에 진하군은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네.”

아직은 이렇게 놀아도 되나? 그런 마음이었다.

"후회하나?"

"아니네.”

후회보다 낯설었다. 벌써 사흘째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더 놀라운 건 내일도 정해진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지만.

“할아버지께도 보고가 되었을 텐데.”

사전에 허락도 받지 않고 저지른 일이다 보니 다른 건 몰라도 할아버지는 신경이 쓰였다.

“맹주님께서는 오히려 잘했다고 하실 거다. 내 손자가 이제 여유를 찾았구나, 하시면서.”

듣기 좋으라고 해준 말이겠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안심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큰 침상을 써야겠군.”

"전혀 상관관계가 없잖아!"

하지만 이미 진하군은 큰 침상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진하군이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보니 검무극은 침상에 없었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진하군이 휘장을 걷었다. 바깥을 보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새벽이거나 이른 아침일 줄 알았는데,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늦잠을 잔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린 시절 말고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늦게까지 잤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었는데, 밤에 몇 번이나 깨곤 했는데.

이렇게 세상모르고 자다니! 만약 누가 기습을 했다면 자신은 죽었을 거다.

그때 문이 열리며 검무극이 들어왔다.

"깼어?"

“왜 안 깨웠나?"

“나도 방금 일어났네.”

검무극은 이 늦잠에 대한 농담을 잊지 않았다.

“나도 한 번을 안 깨고 잤네. 밤새 무림맹과 천마신교 후계자가 바뀔 뻔했다고! 우리 형 만세 부를 뻔했다고!”

진하군은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일을 정파인이 알게 되면 자신을 미쳤다고 할 테니까. 신교의 후계자와 함께 자면서 그렇게 곯아떨어질 수가 있느냐고.

그때 밖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으면 우리 마을 구경 가요. 제가 정찰을 가봤는데 밥은 나가서 먹어요, 우리.”

진하군은 간단히 세수만 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객잔을 나섰다.

점심시간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아침을 안 먹어서였을까?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춰 선 곳은 길거리 음식을 파는 수레였다. 고기와 채소를 구워서 꼬치에 꽂아 팔았는데 식욕을 당기는 냄새가 가히 폭력적이었다.

다른 둘과 눈빛으로 합심한 후 검무극이 세 개를 시켰다.

꼬치의 고기를 쏙 빼먹은 진하군이 그 맛에 감탄했다.

"맛있군!"

점잖게 먹을 것 같았는데, 제일 빠르게 먹어 치운 후 하나를 더 시켜 먹었다.

“설마 길거리 음식이 처음은 아니지?"

"처음이네."

이걸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엄청 험하게 자랐을 거 같은데, 보기보단 귀하게 자랐네.”

“내가 어딜 봐서?”

진하군이 소맷자락으로 입에 묻은 양념을 슥 하고 닦았다. 수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일탈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진하군은 큰 해방감을 느꼈다.

물론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더 재미있었지만.

“이안아, 우리가 상대를 착각해서 데려온 모양이다. 차기 무림맹주가 늦잠에, 식탐에, 소맷자락으로 입을 닦는다고?”

“어쩌죠? 우리가 속았나 봐요.”

진하군은 못 들은 척 먹은 것을 계산했다.

“꼬치값은 내가 내지.”

검무극이 소리쳤다.

“거기에 하나 더! 생색까지 낸다!”

진하군이 걸음을 옮겼다. 수레들이 늘어선 그곳에 먹을거리가 많았다.

이번에는 국수였다.

진하군은 길에 서서 국수를 먹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국수가 이렇게 싸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검무극이 귀하게 자랐다고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간단히 요기한 후에는 노점에 가서 파는 물건을 구경했다.

"별걸 다 파는구나.'

수없이 많은 저잣거리를 지나갔지만,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팔고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애초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길을 지날 때면 오직 목적지만 생각했다. 그곳에서 만날 사람만 생각했고, 어떻게 사건을 해결할지에만 집중했다.

길가를 신경 쓴 것은 혹시 모를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있을 때뿐이었다.

자신이 노력한 것은 결국 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정작 이 사람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진하군의 눈에 야바위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자, 맞히면 세 배! 틀리면 그냥 건 돈만 가져갑니다! 세 배!”

진하군이 관심을 보이자 검무극이 와서 말리는 척 부추겼다.

“설마 이제는 노름까지?”

“왜 아니겠나?”

진하군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야바위꾼들은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는 골목을 등지고 야바위 노름을 했다.

진하군이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야바위꾼의 손놀림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제일 오른쪽 접시에 동전을 걸었다.

“따서 저녁도 사 주겠네.”

그 자신감도 잠시.

접시를 열어보니 주사위는 가운데 들어 있었다.

진하군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분명 오른쪽이었는데.”

“눈이 좋으면 좋을수록 속는 거네. 속임수의 원리를 알아야지.”

진하군이 놀랍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저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너희 야바위 인생에서 오늘이 얼마나 역사적인 날인지 아느냐고.”

진하군은 두 번 더 걸었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

“더 하다간 파산하겠군.”

순순히 그곳을 떠나는 모습에 검무극이 물었다.

“그냥 가?”

“안 가면?"

“이놈들! 속임수로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는구나! 혼내지 않고?"

“저런 것에 속는 놈이 바보지.”

“오오! 방금은 사인이인 줄 알았네.”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안아, 이 친구 벌써 타락하기 시작했다. 굳이 우리가 안 꼬셔도....”

이안은 저 앞에서 길거리 잡화상에서 물건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녀가 작은 참빗을 들고 흔들었다.

“저, 이거 사주세요.”

“네 돈으로 사.”

"싫어요, 도련님이 사 주세요."

"싫다."

그러자 진하군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하나 사 주게. 그거 돈 얼마나 한다고?”

검무극이 이안에게 소리쳤다.

"여기 하군 오라버니께서 사 주신단다.”

진하군이 흠칫하며 당황했다.

“오라버니라니?"

“맹주, 대주 다 내려놓겠다면서? 그럼 오라버니지. 아니면 뭐라고 불러? 진 씨? 진 군? 진 소협?”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무인에게 함부로 굴지 말게. 오라버니라 부르라는 것도 그녀에게 실례네.”

“사파에서 다시 정파가 되었네?"

진하군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아무리 의도적으로 일탈한다고 해도, 본성이 쉽게 바뀌겠는가?

진하군이 이안에게 가서 빗을 계산해 주었다.

"감사해요, 이건 가보로 남겨야겠어요!”

“별것 아니오.”

이안이 빗값을 한 가지 조언으로 대신했다.

“나중에 여인 사귀실 때, 여자가 해달란다고 다 해주면 안 돼요.”

왜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이안이 대답했다.

“너무 다해주면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왠지 소맹주님께선 다 해주실 거 같아서요.”

자신을 잘 봤다. 여인을 사귀게 되면 어지간하면 다 들어줄 것 같았으니까.

“거절을 잘하는 게 오히려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해요.”

말해놓고 민망했는지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다 주워들은 거지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앗, 전 저기 구경 갈게요."

이안은 무기상으로 들어갔고 검무극은 건너편 옷 가게로 들어갔다.

“여기 혹시 꽃무늬 잠옷도 있소?”

그 모습을 보며 진하군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봐, 두 사람 바뀌었잖아!"

새로울 것 없는 저잣거리였지만, 저 두 사람과 함께 있으니 이곳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진하군이 어슬렁 걸어서 간 곳은 저잣거리 가운데 공터였다. 그곳에 약장수들이 사람들을 모아두고 약을 팔고 있었다.

“자자, 이 약을 석 달만 복용하면 아이들 키가 쑥쑥 큽니다!"

진하군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그 공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예전에 진패천이 주점에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유희를 즐겼듯, 진하군 역시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섞여 아무도 자신을 몰라보는 그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럼 어른이 먹으면 어찌 되느냐!”

근육질 남자가 배에 힘을 주었고, 약장수가 후려친 각목이 부러졌다.

“애에게는 다 키로 가고, 어른에게는 다 근육으로 갑니다.”

진하군이 웃었다.

'그건 무림맹의 영약들도 못 내는 약효라네.'

그렇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약장수로 위장한 신비 세력이라도 등장한 거야?”

돌아보니 진하령이 서 있었다.

"잘 찾아왔네?"

오라버니가 이곳에서 보자고 긴급전서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전서에 놀라 달려왔는데, 생각보다 표정은 여유로워 보였다.

“검 소교주와 함께 왔다. 이 무인도 같이."

검무극과 이안이 왔다는 말에 진하령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는 더 놀랐다.

“나 휴가 냈다. 멸마대 전체 휴가다.”

“오라버니가? 정말?”

믿기 어렵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이 고집불통 오라버니를 설득한 것이 틀림없었다.

“너도 그 사람 보고 싶어 할 거 같아서."

근육 자랑을 하다가 갑자기 접시를 돌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하령이 불쑥 말했다.

“걱정 안 돼? 나 아직 그 사람에 대한 마음 완전히 못 접었는데?"

“걱정돼.”

“한데 왜 날 불렀어?”

오라버니가 직접 전서를 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연락하면 검무극이 하지 오라버니가 하진 않았으니까.

“말리면 더 하고 싶고, 안 보면 더 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니까.”

“만나보고 접어라?”

진하군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어디 사람 관계가 못 본다고 끊어지겠는가? 봐야 끊어야지.

“하긴. 내가 그 사람과 이어지면 오라버니는 맹주 기간 내내 온갖 구설에 시달리게 되겠지.”

정파인들, 특히 노고수들이나 명숙들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하군이 마교와 내통한다고 몰아붙이는 정적(敵)들까지 생겨날 것이다.

“만약 평범한 신분으로 만났다면 그땐 반대하지 않았겠지?"

오라버니도 이렇게나 검무극을 좋아하니 적극적으로 밀어줬을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진하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대했을 거라고?”

“응.”

"왜?"

"네가 힘들 것 같아서."

진하군은 지금껏 하지 않았던 마음을 동생에게 전했다.

"너도 느끼겠지만 그 친구는 무림의 주인공이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자기 여자보다는 무림을 구하라고 태어난 운명이지. 난 내 동생이 주인공이 되어서 살았으면 한다.”

진하령은 오라버니 설득에서 허점을 찾았다.

“그럼 이안이는? 주인공 아니어도 돼?"

오라버니 성격상 당황할 거라 여겼는데.

“이 무인은 내 동생이 아니니까.”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꼈기에 진하령은 감격스러우면서 한편으로 놀랐다.

"혹시 어디 아파? 죽을병 걸렸어?”

진하령의 진담 반 장난에 진하군은 차분히 남은 마음을 전했다.

“부모님 사랑도 못 받았고, 할아버지는 맹주님이시라 바빴고, 이 오라비도 멸마대 일을 하느라 바빴고. 네 남편이라도 항상 네 옆에서 잘 챙겨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동생이라면 검무극이 아니더라도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격이라서가 아니고?”

“그런 점도 있고.”

“이런 말도 다 해주고. 오라버니 정말 많이 변했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네가 정 안 되겠으면 내가 맹주 포기하지 뭐.”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어디 있어, 두 사람?"

"저기 무기상이랑 포목점에.”

진하령이 그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기상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진하군이 나직이 말했다.

“그쪽 아니다.”

곰 인형이 아니라 늑대 인형이

이안은 무기상에서 철검 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철검은 중앙에 진열된 비싸고 화려한 검집의 검이 아니었다. 주력으로 파는 검들 뒤로 마치 배경처럼 세워져 있는 여러 검 중 한 자루였다.

주인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 검이 마음에 드십니까? 아까부터 이 검만 보고 계시네요.”

그는 오랫동안 무기상을 해오며 수많은 무인을 경험했다. 그녀가 이 무기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수라는 것을 이미 직감했다.

“이 검이 왠지 제 시선을 붙잡네요.”

화려한 검 뒤에 놓여 있는 검이 마치 자신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검무극은 말할 것도 없고, 그와 함께하다 보니 대부분 만나는 사람들이 화려한 사람들이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소맹주들, 마존들, 풍천교주에 마군주에 황천각주, 수하를 만나도 청면이나 차이란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적조차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자들이었다.

호위 무인이었던 자신은 화려한 검 뒤에 세워진 저 검과 같은 사람이었는데.

“왜 뽑아보지 않으십니까?"

“뽑지 않아도 어떤 검인지 알 것 같아서요."

주인장의 시선이 그녀가 차고 있는 검을 향했다.

“이미 훌륭한 검을 차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녀의 검은 검무극이 선물로 준 일월검.

"훌륭한 분이 선물로 주신 검이지요.”

그때 누군가 입구 쪽에서 말했다.

“혹시 그 훌륭한 분이 저 건너편에서 잠옷을 고르고 있는 저분이냐?”

입구에 선 사람은 진하령이었다. 당연히 이곳에 검무극이 있을 줄 알고 들어섰는데 이안이 있었다. 검무극은 건너편 포목점에서 잠옷을 고르고 있었고.

이안이 오랜만에 본 친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진하령이 이안 옆으로 다가왔다. 주인장은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 무슨 날인가? 이런 미녀들이 연이어 찾아오다니.

“대체 어떻게 된 여행이야? 오라버니가 휴가를 다 내고.”

“소교주님 말씀에 따르면, 자기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놀기 위한 핑계도 참 잘 가져다 붙이지.”

진하령은 이안의 기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차이가 어떤지 정확히 느껴지지 않았으니.

'그새 또 강해졌군.'

그뿐만 아니라 왠지 눈빛과 분위기도 달랐다. 어떤 심적인 변화가 느껴지는 여인의 직감.

이안이 진하령에게 물었다.

"밥은 먹었어?"

"아니."

“이 마을 꼬치 맛있더라. 나가자, 내가 사 줄게.”

진하령이 걸어 나가려는 이안의 팔을 잡았다.

“나, 소교주에게 관심 있어."

갑작스러운 말이었음에도 이안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알고 있어.”

“그 말뿐이야?”

“아니면?"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따져 물어야지. 소교주가 나를 심장이라 부르는데, 친구인 네가 관심이 있다고? 싸가지없다고 따져야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칼이 많은 곳에서 따지면 위험해서, 가자, 배고프면 신경이 더 날카롭다.”

하지만 이미 작정을 하고 말을 꺼낸 진하령이었다.

“웃으면서 할 이야기 아니니까.”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자신이 검무극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같은 여인으로서 답답하고 궁금한 점이었다.

“너는 왜 그냥 있는 거지? 그 사람은 너를 심장이라 불러주고 있는데. 혹시 장난이라 여기는 거야?”

"아니. 온갖 장난을 쳐도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분은 아니시니까.”

"그런데 왜?”

정말 대답을 들어야겠어? 하는 이안의 눈빛에 진하령은 잡은 팔을 놓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안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난 지금까지 그냥 있은 적 없었어.”

"일곱 살에 도련님을 처음 만난 후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냥 있은 적 없었다고.”

말없이 이안을 응시하던 진하령이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이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 배고프겠다.”

무기상을 나온 두 사람이 그 앞에 서서 길 건너 포목점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검무극이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인장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진하령이 피식 웃었다.

“못 살아. 저기서도 수다 떨고 있네.”

진하령의 말에 이안이 반대쪽 길을 바라보았다.

“네 오라버니도 만만치 않아.”

고개를 돌린 진하령이 깜짝 놀랐다.

진하군이 약장수들이 시범을 보이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리 부러뜨려 두었을 게 틀림없을 통나무를 약장수와 함께 붙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잡고 있는 그 통나무를 근육질 사내가 달려와서 박치기했다.

통나무가 반으로 부러지자 구경하던 이들이 환호했다.

오라버니가 약장수들과 어울린다고?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대체 이 여행 뭐야? 다들 미치기로 한 여행이야?"

"소맹주께서 저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네.”

이안의 말처럼 진하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네. 오라버니가 저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네.”

잠시 그렇게 쳐다보고 있던 진하령이 이안에게 말했다.

“나 먼저 간다고 전해줘. 바쁜데 잠시 얼굴만 보러 들른 거야.”

그녀가 가려는데 이번에는 이안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번 여행, 같이 가자.”

진하령이 그녀를 노려보듯 응시하며 말했다.

“자신 있나 보네. 나 호북제일미 진하령이야. 무림맹주 손녀이고, 차기 맹주 동생이라고. 나 감당할 자신 있어?"

"자신 있어서 같이 가자는 게 아니야.”

“그럼 왜지?"

이안에게서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나도 친구랑 여행하고 싶어서.”

“도련님도 네 오라버니도, 친구끼리 만나니 저리 좋아하잖아. 이 여행, 나도 친구와 하고 싶어.”

진하령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미치기로 한 여행 맞네.”

이안은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꼬치 파는 곳은 저쪽이야.”

“생신 축하드립니다.”

사도십삼랑 중 일랑이 비사인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저희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선물은 필요 없다니까요."

“별거 아닙니다. 작은 성의니 받아 주십시오."

상자를 열어보니 옷에 다는 장신구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늑대 모양의 사도맹 상징이었다.

“멋있습니다."

비사인이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 달았다.

“굳이 안 다셔도 됩니다.”

“오늘 하루는 달고 있겠습니다. 선물 고맙습니다.”

비사인이 뒤에 서 있는 다른 사도십삼랑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그 무섭고 험악한 얼굴에 진심 어린 고마움이 스쳤다.

“다들 고맙네.”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일랑이 비사인에게 보고했다.

“참, 그리고 화양루 귀빈석 예약해 두었습니다. 말씀하신 요리도 준비해 두라고 했고요.”

원래라면 사도맹 소맹주 생일날에는 거창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비사인은 몇 해 전부터 생일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값진 선물로 자신과 어떻게든 줄을 대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부담스러웠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이들과의 인사도 곤혹스러웠으며 연회에서 모두의 관심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오늘은 화양루에서 조용히 생일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들이 화양루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던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한 자루의 비수가 비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랑이 날아든 비수를 검으로 쳐냈다.

“암습이다!"

사도십삼랑 넷이 비수가 날아온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나머지 아홉은 비사인 주위를 감싸며 호위했다.

암습한 자를 찾으러 갔던 사도십삼랑이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비수를 쳐낸 일랑은 알 수 있었다. 비사인을 죽이려 날린 공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공격이 너무

정직했으니까.

과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수에 서찰이 묶여 있었다.

일랑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비수와 서찰에 살짝 뿌렸다.

“독은 발려있지 않습니다.”

일랑이 서찰을 풀어서 비사인에게 가져왔다.

서찰을 확인한 비사인이 깜짝 놀랐다. 그 표정만 봐도 서찰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비사인이 서찰의 내용을 일랑에게 보여주었다.

-서쪽으로 이십 리 떨어진 대추나무 장원으로 혼자 오도록. 오지 않으면 한설은 죽는다.

비사인이 장원에 도착했다.

경첩에서 떨어져 비스듬히 기울어진 대문을 보자 이곳이 오랫동안 비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흩어진 자갈과 쓰레기들이 널린 마당을 지나 중앙의 건물로 들어섰다.

대청으로 들어서자 그곳에 네 사람이 있었다.

중앙에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여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에 검은 포댓자루를 씌워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 주위를 세 사람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검은 무복에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중 가운데 있던 사내가 차갑게 말했다.

“사도맹 소맹주 비사인.”

그의 목소리는 굉장한 저음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낮은 목소리를 내기도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정말 여인을 구하러 혼자 왔군.”

죽립 사내가 야비한 웃음을 흘렸다.

“사도맹 소맹주가 북해빙궁 소궁주를 사모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비사인의 시선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을 향했다. 가만있어도 무서운 비사인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더욱 무서워졌다.

"왜 그녀의 얼굴을 가렸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 차마 얼굴을 마주 보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거든.”

죽립을 쓴 남자가 한설의 목에 검을 겨누며 물었다.

"한설, 소맹주가 그대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나?”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한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도 소맹주를 좋아하나?”

앞서보다 고민이 길었지만, 한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립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름다운 사랑이군.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라니.”

그때 비사인이 불쑥 말했다.

"난 목숨까지 바칠 생각은 없는데.”

혹시 잘못 들었나 싶은 정적이 흘렀다.

잘못 듣지 않았다. 비사인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으니까.

그의 검에 검강이 서렸다.

“감히 나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다니!”

죽립 사내가 한설의 목에 더욱 바짝 검을 겨누며 경고했다.

“허튼짓하지 마라.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한설은 죽는다.”

비사인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장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도십삼랑이 들이닥쳤다.

"한설이 죽으면 북해빙궁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비사인은 협박에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녀의 죽음은 천마신교의 소행으로 꾸밀 거다.”

죽립인이 흠칫 놀랐다. 그 말고 다른 두 죽립인도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저들을 모두 죽여라!"

"그러면 한설이 죽는다고!"

하지만 사도십삼랑은 명령대로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이 동시에 날아들자 가운데 서 있던 복면인이 여인을 죽이는 대신 소리쳤다.

"잠깐! 항복! 공격 중지!”

쇄도하던 사도십삼랑들이 사방에서 검을 겨눈 그 상태에서.

죽립 남자가 천천히 한설의 머리에 뒤집어씌운 검은 포대를 벗겼다.

안에 있던 여인은 이안이었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생일 축하드려요, 비 소맹주님.”

곧이어 남자가 자신이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그는 바로 목소리를 변조하며 연기했던 검무극이었다. 다른 두 사람도 죽립을 벗었는데 당연히 진하군과 진하령이었다.

진하령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지금 깜짝 생일 연회 열어주려다가 죽을 뻔한 거 맞죠?”

진하군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질이 있는데 확인도 안 하고 공격해 버린다고?”

이안이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했다.

"저거 쓰고 있느라 저는 더워죽는 줄 알았어요.”

검무극이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 이안이 이렇게 혼신의 연기를 펼쳤는데 미쳤냐고! 한 소저가 죽으면 어쩌려고!"

이안뿐만 아니라 자신도 철저히 기도를 감추고 목소리도 변조하고, 심지어 차고 있던 검도 일반 철검으로 바꿔 차고 있었다.

비사인이 여유롭게 웃으며 진실을 밝혔다.

"처음부터 자네들인 줄 알았네. 자네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한 소저를 납치하고, 내게 그런 서찰을 보내겠나?”

비사인은 검무극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마신교에게 다 뒤집어씌우겠다는 말도 검무극을 놀리기 위해서였다.

“어디서 나를 속이려고.”

비사인이 해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도십삼랑들도 미리 알고 왔는지 표정들이 편안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다른 세 사람도 당연히 그 말이 사실임을 믿었다.

진짜 한설이 납치되었다고 생각했으면 절대 사도십삼랑을 데려올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한설의 죽음을 천마신교에게 떠넘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을 밝혀내기 전에 검무극은 비사인을 놀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검무극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거짓말! 들키니까 알고 있었다고 변명하는 거겠지!”

이제 검무극의 장난에는 척하면 척인 그들이었다.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실망이에요!”

“비정강호를 오늘 직접 보는군요.”

이안과 진하령에 이어 진하군도 가세했다.

“그동안 우리가 속았던 건가?"

“이게 다 가짜 애정이었다는 거지. 한 소저, 그대가 속았소. 이 비정한 사파 후계자에게 연정따윈 없었소."

여유롭게 웃고 있던 비사인이 당황했다.

"알고 왔다니까! 괜한 오해 하지 말게.”

하지만 한 번 문 먹잇감을 놓칠 리 없는 그들이었다.

앞장선 사냥꾼은 진하군이었다. 그가 예전 비사인의 일을 기억해 냈다. 비사인이 몰래 한설과 저잣거리를 산책했던 그때를

“그 곰 인형!”

진하군은 비사인이 한설과 함께 백의를 입고 곰 인형을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두 사람 관계를 알아차렸었다.

그 말 잘 꺼냈다! 검무극이 예리한 눈빛을 발하며 곰 인형의 정체를 밝혔다.

"귀여운 곰 인형이 아니라 북해빙궁을 차지하기 위한 무서운 늑대 인형이 숨겨져 있었던 거지. 저길 봐! 가슴에도 차고 있어!"

이안과 진하령이 거들었다.

“앞으로 곰 인형을 볼 때마다 무서워질 것 같아요.”

“우선 집에 있는 곰 인형부터 버려야겠어요.”

두 여인이 마주 보며 눈빛으로 웃었다. 무인으로 살면서 언제 이렇게 사도맹 소맹주를 놀리고 공격할 기회가 있겠는가? 검무극과 함께 있다 보면 정말 상상도 못 할 경험을 하게 된다.

검무극이 또 다른 것을 기억해 냈다.

“아, 그날 저잣거리에서 한 소저에게 사줬던 당과에는 독이 발려있었겠구나!”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에게 사과하겠네. 늦잠 자고, 옷에 음식 묻히고, 생색내고, 노름하고, 이건 저 거대한 악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네. 우린 빙하 아래 그 거대한 진짜 덩어리를 보지 못한 것이지.”

“자네 사과를 받아주겠네.”

듣고 있던 비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아직 멀었어! 자네의 그 위선적인 가면을 싹 벗겨낼 때까지!"

비사인의 입가에 다시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반격이 시작되었다.

“차라리 자네들을 납치했다고 했으면 이 속임수가 성공했을 거네. 그땐 정말 혼자 왔을 거야.”

드디어 이유가 밝혀졌다.

처음 서찰을 받는 순간부터 이 납치극이 장난임을 알아차린 이유가 사도십삼랑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이다.

오늘 화양루에서 함께 밥을 먹기로 한 사람, 바로 새하얀 백의를 입은 한설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자 검무극과 진하군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니, 이것들이!

“저희끼리만 또 같이 있었다고?"

혹시 제가 주사 부렸습니까?

넷이 둘을 압박해 들어갔다.

그 공격 대상은 뜨겁고 무서운 쪽이 아니라 차갑고 아름다운 쪽이었다.

“우리에겐 아예 왔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

검무극이 선수를 날리자 이안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심지어 저는 하나뿐인 사촌 언니인데도 몰랐어요.”

진하군 역시 평소라면 절대 한설에게 하지 않았을 농담을 했다.

“지난번에 신교를 가고, 다음으로 사도맹을 갔으면 이번에는 본맹에 올 줄 알았는데.”

진하군의 말에 진하령이 예전 검무극이 한설에게 이상형에 대해 물었던 것을 기억했다.

“이게 다 오라버니가 듬직하지 못하고 말이 많아서야.”

진하군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듬직하고 말 없기로 유명한 자신이었는데. 심지어 말이 많다는 말을 검무극 앞에서 듣게 되다니.

“이건 못 참지!”

검무극을 선봉장으로 다른 세 사람이 뒤따르며 압박했다.

그러자 한설이 한 걸음 물러났고 그 앞을 비사인이 막아섰다. 무심코 나섰지만, 검무극의 얼굴에 스치는 장난기를 보자 내심 아차 했다.

"지금까지 내가 잘못 알았군.”

검무극이 옆에 선 진하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지금까지 자네가 무림맹의 소맹주인 줄 알았네.”

진하군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누가 봐도 우리가 악당이고, 저 친구가 여인을 지키는 정의의 협객이잖아?"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내가 사도맹이었네.”

오라버니의 실없는 농담에 진하령은 실소했다. 약장수와 공연을 하지 않나? 저런 농담을 태연하게 하질 않나? 오늘 오라버니에게서 못 봤던 모습 많이 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비장하게 소리쳤다.

"우리 시대의 첫 전쟁이 마정연합과 사빙연합의 전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비사인이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해들 말게.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네. 그냥.......”

“그냥 뭐!"

그들의 장난을 지켜보던 한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비 소맹주 생일이라 축하해주러 왔어요. 다들 오랜만에 뵙네요.”

한설이 이안에게 따로 인사했다.

"언니, 잘 지냈어?"

“앞으로 네 안부는 비 소맹주님 통해서 들을게.”

한설 역시 비사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단지 생일을 축하해주러 그 먼 길을 직접 온다?

비사인에게 관심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설은 그러한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제겐 비 소맹주가 제일 친절하세요.”

비사인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스쳤다. 그 무서운 얼굴에 봄날이 왔다.

“내가 자네 웃을 때 멋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검무극은 사랑의 방해꾼이 되어서 진법을 펼쳤다.

"어차피 악당이 되었으니 내 기꺼이 그대들의 애정에 험난한 관문이 되어 주지. 파훼법을 못 찾으면 그 애정, 이를 수 없을 거야. 끝까지 쫓아다니며 방해할 거야!"

그러자 비사인이 불쑥 물었다.

"한데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애정의 파훼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나?"

검무극이 아무 반박도 못하자 진하령이 공정한 심판이 되었다.

"소맹주께서 단번에 파훼법을 찾은 것 같은데?”

관문은 깨어졌고 검무극이 패배를 인정했다.

“어휴! 곰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야. 여우야, 여우.”

그 말에 모두 웃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과도 같은 인사가 끝났다.

비사인이 그들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며 말했다.

"하군이가 휴가를 냈네. 자네와 우리가 무림맹을 칠 기회가 온 거지.”

비사인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자네 괜찮나?'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 질문도 친해졌기에 했을 질문이었는데, 지금 비사인은 이렇게 말했다.

“부럽군.”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 하고자 하는 일을 실행에 옮긴 그 용기가.

“자네 자리도 남아 있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생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여행 가자고 찾아온 것임을

당연히 가야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가고 싶다고 막 갈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한설이 와 있는 상황이었다.

비사인이 돌아서서 일랑에게 말했다.

"멀리서 친구들이 왔으니 제일 좋은 술을 준비해 주십시오.”

일랑은 아예 화양루를 통째로 빌렸다.

원래는 귀빈실 하나만 빌렸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앞으로 이 무림의 주인이 될 사마정, 세 곳의 후계자가 모이는 자리였다.

그들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혹여 어떤 정보가 새어 나갈 수도 있었다.

사도십삼랑이 그곳 주위를 철통처럼 지키며 술과 안주도 자신들이 직접 가져다주었다.

비사인이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는 친구들이 와서 너무 반갑고 기뻤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모두 장난기를 빼고 진심으로 축하했다.

"축하하네."

“축하드려요!"

아직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비사인은 벌써 취한 느낌이었다.

사도맹 소맹주의 생일에 천마신교 소교주와 무림맹 소맹주가 함께 있다?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자 다시 없을 일일 것이다.

분명 자신들은 무림 역사의 한 획을 긋고 있었다.

"자, 사인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

다들 기분 좋게 첫 잔을 마셨다. 화양루에서 최고 좋은 술이 나왔기에 술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한잔 술을 마시고 비사인도 검무극에게 축하를 전했다.

"축하하네, 천살성 격퇴한 것.”

천살성 격퇴하고 검무극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두 분 맹주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네.”

공을 맹주들에게 돌렸지만, 결국 그를 죽이고 막아낸 사람이 마교주와 검무극이란 것을 비사인은 알고 있었다. 싸움을 마치고 돌아온 백자강이 자신을 불러서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려줬으니까.

말이 나온 김에 검무극은 솔직히 말했다.

"천살성과 싸움은 끝났지만 나는 아직 싸우고 있네.”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예상할 수가 없지.”

자연스럽게 무거워지는 분위기 속에서 검무극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취하기 전에 이 말만큼은 그들에게 하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정한 한 가지 원칙을 말해주려 하네.”

원칙이란 말에 모두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원칙은 놀라운 것이었다.

"난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자네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네.”

덧붙여지는 놀라운 한마디.

“설령 내가 죽더라도.”

모두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아, 물론 나보다 자네들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네. 내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하지."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우리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황 때문이겠지."

검무극이 그중 가장 강력한 상황을 예로 들었다.

“수백 명의 마인들 목숨이 걸렸어. 내가 자네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다 죽게 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 상황이 되면 아무리 우리가 친해도 서로를 의심하게 될 거네.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하군이가 공격하겠구나,

사인이가 공격하겠구나, 저 말 많은 마인 놈이 공격하겠구나.”

모두 말없이 검무극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이 원칙을 지금 말해주는 거네. 나는 그런 상황이 되어도 자네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네.

아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겠지. 그러니 괜히 내가 어떻게 나올지 의심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게. 그 시간에 자네들도 다른 방법을 찾게.”

이제야 검무극이 왜 이런 원칙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쓸데없는 부분에 심력 소모하지 말고 최대한 현명하게 대처하자는 의미였다.

어디 그런 마음이 검무극뿐이겠는가? 진하군이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나 역시 자네들에게 검을 빼 드는 일은 없을 거네.”

비사인 역시 마찬가지로 진심을 전했다.

“나도 맹세하네. 자네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거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술잔을 높이 들고 건배했다.

지켜보던 세 여인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무림일통이 아닐까라고.

만약 소교주, 소맹주가 아니라 교주와 맹주가 이와 똑같은 자리를 가진다면 그때는 진정 완벽한 무림일통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가장 힘이 센 세력이 다른 두 세력을 무너뜨린 무림일통보다도 더 완벽한 무림일통을.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 침범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가장 완벽한 무림일통을.

물론 검무극은 이 엄숙한 맹세 속에서도 오늘의 주인공을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친구 몰래 여인과 놀러 다니면 그때는 검을 뽑을 수도 있겠지.”

검무극의 농담을 비사인이 기분 좋게 받았다.

“나도 그 여인을 납치하는 일이 아니라면, 절대 검을 뽑을 일은 없을 거네.”

세 사람이 함께 웃으며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안이 밤바람을 맞으며 바깥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근래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던 적이 없었다. 다들 주기를 배출하지 않고 마셨다.

억지로 술을 권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많이 취했다.

특히 비사인은 오늘 기분이 최고였다. 이렇게 신나는 생일 연회는 처음이었으니까.

기분 좋아서 마시고, 술맛이 좋아서 마시고, 괜히 마시고 싶어서 마시고.

지금도 떠들썩한 소리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항상 검무극 소리만 들렸던 술자리에 비사인과 진하군의 목소리도 제대로 한몫하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 연회가 되겠지.”

비사인의 말에 검무극과 진하군이 취해서 소리쳤다.

“마지막이라니! 그럼 내 생일 연회는? 그만둬도 나까진 해야지!"

"미안하지만 돌아오는 다음 생일은 나네, 나.”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이안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한설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새하얀 그녀의 옷 여기저기 술과 음식 얼룩이 져 있는 것만 봐도, 오늘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저 사람들 날 제대로 잡았어.”

한설 역시 취기에 얼굴이 발그레했다.

“생일 연회도 연회지만, 대적을 물리친 것을 자축하는 연회기도 하니까.”

이안의 말에 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회에도 충분히 참가할 자격이 있었다. 그 대적과의 싸움에 자신과 북해빙궁도 한 자리를 차지했었으니까.

“한데 두 사람 무슨 일 있어?”

“아무 일 없어. 그냥 소교주님하고 놀러 나온 거야.”

"아니."

한설이 물은 두 사람은 검무극과 이안이 아니었다.

“진 소저하고 말이야.”

“진 소저하고 왜?”

“왠지 어색해 보여서. 내가 어색한 사람들과 밝은 척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거든.”

이안은 일부러 숨기지는 않았다.

"친구가 될지 원수가 될지, 이번 여행에서 결정하기로 했거든.”

물론 그렇다고 다 말해주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도 잠시, 한설이 불쑥 이안에게 말했다.

“그럼 원수가 돼.”

한설은 어떤 내용인지 듣지도 않고 그렇게 권했다. 술 때문일까? 한설은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그게 언니에게 이로울 거 같아서.”

가만히 한설을 바라보던 이안이 지금껏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말을 꺼냈다.

"난 항상 소교주께 꼬리가 열 개라고 말했었어. 한데 사실 내 꼬리는 열 개가 아니야.”

"그럼 몇 개인데?”

훨씬 더 많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답은 의외였다.

"한개."

이안이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꼬리가 열 개라고 속이는 단 하나의 꼬리만 있지.”

한설이 이안에게 물었다.

“왜 꼬리가 열 개라고 속였는데?”

이안은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나 보지. 내가 비록 병풍처럼 말없이 서 있는 호위 무인이지만 알고 보면 숨겨진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난 착하기만 한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내 것도 잘 챙기는 사람이다. 나도 빼앗을 줄 아는 사람이지 바보처럼 양보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이안은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무기상 뒤에 세워진 그 평범한 검이 자신처럼 느껴졌고, 물 한 모금 얻어먹고는 그 아낙의 남편을 구하러 가고, 자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한설조차 자신이 뭔가 양보할까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난 언니가 꼬리가 없는 사람이라서 더 매력적이라고 여겼는데.”

"뭐?"

“언니가 싫어하는 그런 부분들은 나는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거든. 오히려 열 개의 꼬리로 연기해야겠지.

착한 척, 양보할 줄 아는 척, 이기적이지 않은 척,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도 있는 사람인 척.

나는 언니처럼 되려면 꼬리가 필요한데, 언니는 그 반대가 되려고 꼬리가 필요하네.”

두 여인이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삼 층 창문에 진하령이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두 사람 뭐해? 어서 와! 오늘 주인공이 춤추신단다!”

소리치는 진하령도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아마 춤추겠다고 나선 비사인은 더 많이 취해 있겠지.

이안이 진하령에게 소리쳤다.

“갈게. 다른 건 다 놓쳐도 그건 놓칠 수 없지.”

이안이 말을 마쳤을 때 한설은 먼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바쁜 발걸음은 즐기러 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말리려고 가는 발걸음이 틀림없었다.

뒤따라 들어가려던 이안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설아, 오늘의 열기는 북해의 그 한기로도 식히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비사인이 잠에서 깼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이렇게 뒷일 걱정하지 않고 술을 많이 마신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검무극의 목소리가 있었다. 온몸의 솜털을 일제히 곤두서게 만드는 말이었다.

―자, 이렇게 좋은 날 춤이 빠질 수가 없지!

비사인이 눈을 번쩍 떴다.

평생 춤은 다시 추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왜 당연하지! 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는 거지?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당연히 아닌데 대체 이 불길함은 뭐지?

비사인이 침상에서 일어나 한 사람을 불렀다.

"일랑!"

“깨셨습니까?"

“잠시 저 좀 보시지요.”

밖을 지키고 있던 일랑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일랑을 보니 기억난다. 그의 손을 붙잡고 억지로 들어와서 같이 술을 마셨던 기억이.

비사인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제가 춤췄습니까?"

일랑의 얼굴에 웃음이 스쳤다.

“누구와 췄던 춤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런! 비사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아닙니다. 됐습니다."

아니, 이건 물어야 했다.

“혹시 제가 주사 부렸습니까?”

설마 한설에게 주사를 부리진 않았겠지?

다행히 일랑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즐거워하신 모습, 처음이었습니다. 보기 좋았습니다.”

“한데 다들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자 일랑이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친구분들과 떠나시면서 검 소교주께서 남기신 서찰입니다.”

비사인이 흠칫 놀랐다. 그새를 못 참고 먼저 떠난 모양이다. 아마 한설하고 시간 보내라고 자리를 비켜준 것이리라.

그래도 갈 때 가더라도 아침이나 같이 먹고 가지. 인사라도 하고 가지.

아쉬운 마음으로 서찰을 열어보던 그때.

ᅳ한 소저 구하고 싶으면 서쪽 대로를 따라와라. 단, 혼자 오도록.

잠시 멍하니 서찰을 내려다보던 비사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함께 여행을 가자는 검무극다운 제안이었다. 한설을 데려갔다는 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함께 가자는, 오직 검무극만이 할 수 있는 기분 좋은 강요이자 인질극이었다.

비사인이 서찰을 일랑에게 보여주었다. 서찰 내용을 이미 짐작한 그였다. 검무극이 한설까지 데리고 갔으니 말이다.

"일랑."

“네, 소맹주님.”

비사인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혼자 구하러 가야겠습니다.”

비사인이 서쪽을 향해 경공으로 내달렸다.

극락에서 쫓겨난 선녀 같은 분이시다

그는 친구를 만나러 뛰어가는 아이처럼 달렸다.

이렇게 신난 마음으로 달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한참을 달려가니 탁자와 의자가 밖에 있는 길가 객잔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야, 여기!”

마치 비사인이 따라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듯, 검무극이 손을 흔들며 그를 반겼다.

"아직 해장 못했지? 주인장, 여기 한 그릇 더 주시오.”

비사인이 자리에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한설이 비사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리 말하지 못하고 검무극의 제안에 동참했다는 사과였다. 이래야 비사인도 함께 놀러 갈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간 거지만, 미안한 건 미안한 것이다.

비사인은 괜찮다는 듯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넘어가 줘서 고마웠다. 덕분에 이렇게 같이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맹주님께는 따로 기별도 못 드리고 왔네.”

그런 비사인에게 진하군이란 동지가 한 명 있었다.

“나도 그랬네.”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혼날 각오 하고 놀아야 더 신나고 재미있는 법이지. 한데 일랑이 순순히 보내줬네?”

“나도 의아했네.”

절대 안 된다며 펄쩍 뛰면서 말릴 것 같았는데, 일랑은 허락했다.

검무극과 얽힌 소맹주의 운명은 도저히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나랑 같이 혼날 각오를 한 모양이네.”

비사인의 말에 진하군이 옅게 웃었다. 사도십삼랑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멸마대 수하들이 생각났다. 다들 휴가 잘 보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다, 잊자!

그때 주점 주인장이 뜨끈한 국물 요리를 비사인에게 가져왔다.

"여기 맛이 좋네. 천천히 먹게."

검무극의 말처럼 맛이 좋았다. 얼큰하고 시원하고, 속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는 건가?"

검무극이 이번 여행에 대해 비사인에게 알려주었다.

“이번 여행의 원칙은 발길 가는 대로네.”

“난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군.”

그건 진하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그렇네.”

검무극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무리하고 있는 두 소맹주에게 먼저 물었다.

“혹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나?”

비사인과 진하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행하다 보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곳은 없었다.

“그럼 내 발걸음이 가는 곳부터 먼저 가볼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어딘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벌레 좋아하나?”

검무극의 물음에 진하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벌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좋아질 거네."

멀리서 들려오는 벌레 소리에 충의가 고개를 들었다.

“아침부터 명음충(鳴音蟲)이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오겠구나.”

마당에서 검을 들고 몸을 풀고 있던 표기광이 대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돈이나 한가득 싸 들고 오시오!”

“이놈아, 젊은 놈이 무슨 돈타령이냐?”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그리고 젊다니요? 저도 늙은이 다 됐습니다.”

“늙은 사부에게 잘하는 말버릇이다.”

표기광이 검을 내려놓고 충의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일어나셨으면 물부터 한잔 드십시오.”

“목 안 말라.”

“어르신은 아니더라도 몸이 원해요.”

표기광이 억지로 물을 마시게 했다. 그리고는 충의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어, 시원하다."

"아침에 딱 일어났을 때 미지근한 물 한 잔 마시는 게 건강에 얼마나 좋은데요."

"이놈아, 건강 생각하는 놈이 몸을 그렇게 망쳐?"

“제 몸이야 큰일 하다 다친 몸이고요.”

표기광은 과거 검무극이 사도맹에서 투왕과 싸웠을 때 만난 인물로, 배후 놈들에게 이용당했던 그를 충의에게 데려가 제자로 삼게 했다.

이후 표기광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충의를 사부로 모시고 살고 있었다.

"저랑 같이 수련하자니까요.”

충의는 무공의 고수였다. 충의가 마의나 신의만큼이나 의술이 뛰어난 것은 독충에 대한 깊은 지식 이외에도 그녀 스스로 절정에 이른 고수였기에 누구보다 무인의 몸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너나 많이 해라. 늙으니까 다 귀찮다. 어깨는 이제 됐다.”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표기광이 어깨를 더 주물렀다.

“한데 이제 진법은 안 펼치실 겁니까?”

원래 극락원 주위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마을 입구의 소년에게 암어를 말하고 누구 소개로 왔는지도 밝혀야 들어올 수 있었다.

한데 충의는 그 진법을 없앴다. 든든한 제자가 생겨서 이제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표기광은 사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낀 사부가 진법을 유지하는 돈까지 아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이를 키우고 가르치려는 마음이라는 것을.

"왜? 진법이 없으니까 겁나냐?"

“겁나죠.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게 흑룡단주까지 한 흉악한 놈의 입에서 나올 말이냐?"

충의는 표기광을 제자로 맞은 후 곧잘 그녀를 괴롭혔던 외로움과 우울감을 완전히 떨쳤다. 이 제자와의 생활은 꽤 즐거웠으니까.

한참을 더 주무르고 난 후에야 표기광이 마당으로 가서 다시 검을 휘둘렀다.

과거 사도맹 흑룡단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표기광은 작전 중 크게 다쳐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한데 지금 표기광은 내공을 사용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공은 포기하고 충의를 모시는 일에만 열중하던 그였는데, 충의가 그를 독충을 이용한 치료법으로 낫게 해준 것이다.

전성기 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 상당히 무공을 회복한 그였다.

하지만 그에게 더 큰 기연은 이것이었다.

“허리가 쳐진다. 무릎 더 굽히고.”

충의는 치료뿐만 아니라 자신의 무공도 전수해 주었다. 그의 무공보다 충의가 익힌 무공이 더 강한 무공이었다. 표기광을 진정한 제자로 인정한 것이다.

“호흡을 더 깊게. 숨 참고, 그렇지.”

그렇게 표기광을 지도하던 충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기광아."

“네, 사부님.”

“내가 죽거든 여기 있는 벌레들 다 풀어주고, 너도 멀리 가서 네 인생 살아라. 괜히 내 일 이어받는답시고 고생하지 말고, 그냥 너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라.”

검을 휘두르는 표기광의 눈빛이 깊어졌다. 눈치 빠른 사부는 자신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것이다.

“애들 돌봐주는 게 왜 고생입니까?”

“고생이지.”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평생 번 돈 고아들 돌보는 데 다 써버린 거요. 돈벌레라고 불리면서 살아온 인생을요?”

충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냐고? 그럴 리가.

"그래, 후회한다.”

“그럼 다음 생에는 이렇게 살지 마시고 화려하게 사십시오. 돈 벌어서 고래 등 같은 큰 기와집도 사시고요. 저도 다음 생에는 그렇게 살 겁니다."

표기광은 충의가 죽더라도 그녀의 일을 이어서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의술을 배우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명의 무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서는 것만 봐도 좋은 마음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 명음충은 귀한 손님이 누군지 잘 구분 못 하는 놈 같습니다.”

표기광이 그녀를 데리고 마당을 바라볼 수 있게 놓인 의자에 앉혔다.

“여기 꼼짝 말고 계세요. 제가 상대할 테니.”

“나이 먹으니까 못 참겠다. 화가 막 끓어오른다.”

"나이 탓 마시고요. 그놈의 성질 때문이지요."

"이놈이!"

그러는 사이 두 무인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앞장서 걸어오는 중년 남자는 공생문(共生門)의 문주 조당(曺塘)이었다.

조당 옆에 선 남자는 조당의 수족이자 공생문 제일 검객 황춘(春)이었다.

“뉘시오?"

표기광의 차분한 물음에 황춘이 수장 대신 나섰다.

“며칠 전에 이곳에 사람을 보냈다.”

표기광이 나직이 그를 꾸짖었다.

“언제 봤다고 말을 함부로 하시오? 예의를 지키시오.”

황춘이 인상을 확 구겼다.

“이 무림에 나이 많은 게 무슨 소용이냐? 실력이 나이지.”

그러자 문주인 조당이 나섰다.

"무엄하다.”

그의 꾸짖음에 황춘이 물러났다. 형식적인 꾸짖음임을 알 수 있었다.

조당이 예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수하가 그 앞에서 저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공생문을 이끄는 조당이란 사람이오. 처음부터 직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미안하오.”

“어서 오시오, 조 문주.”

표기광이 정중히 그를 맞았다.

충의는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아 마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한 분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시오?”

“며칠 전에 이곳에 사람을 보냈소.”

“기억하오. 그들의 제안은 거절한다고 정중히 전했던 것으로 기억하오만."

조당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다른 지역에 있는 땅을 사고 싶어서였다.

그 땅의 주인이 이곳 극락원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총관에게 무인 몇을 딸려 보냈다. 적당히 가격을 흥정해서 땅을 사 오라고 했는데.

총관과 무인들은 벌레에게 물려 온몸이 시뻘게져서 돌아왔다. 물론 거래도 이뤄지지 않았고.

워낙 급하고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문주인 자신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중요한 분을 뵙는 자리인데 처음부터 내가 왔어야 했소. 미안하오.”

그렇게 사과한 후 조당이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 땅, 시세보다 좋은 가격으로 사겠소.”

표기광은 가격을 묻지 않고 거절했다.

"거절하겠소.”

“거래가 무산되는 건 언제나 금액이 맞지 않아서 아니겠소? 땅값의 두 배 드리겠소.”

그는 그 땅 인근에 큰 문파가 이전할 계획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만약 그 땅을 자신이 사서 그 지역으로 이전하는 문파에 팔 수만 있다면 수십 배의 이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팔지 않는 땅이오.”

“좋소. 세 배 드리겠소. 더는 절대 안 되오.”

“세 배가 아니라 열 배를 준대도 팔 생각 없소.”

이것들이? 혹시 이전 소문이라도 들었나?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소?"

“그 땅에 무슨 건물이 있는지 아시오?"

“고아들을 모아두고 키우는 청아원(靑兒院)이란 곳이 있다고 들었소.”

조당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곳 때문에 팔지 않겠다는 거요?"

누가 땅을 사더라도 돈이 안 되는 그곳부터 허물어 버릴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웃기는군.”

그때까지 정중했던 조당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돈벌레 주제에.”

조당이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극락원의 주인이 돈벌레라 불리는 의원이라는 것을 알고 온 것이다.

“돈에 미친 의원. 당신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더군. 그 고아들을 비싸게 팔아먹기라도 하나?"

“우리 어르신이 충의라는 걸 알면서 이리 무례한 것이냐?"

“그래, 독충을 잘 쓴다지?"

조당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손에 든 것은 피독주였다. 그냥 피독주가 아니라 최상급 피독주였다.

그뿐만 아니라 황춘도 피독주를 꺼냈다. 두 사람은 아예 작정하고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왜 둘만 왔는지 안다면 쓸데없는 고집은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계약하지 않으면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그가 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서에 수인을 찍어라 잘린 팔로도 수인을 찍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시세보다 세 배나 더 주고 정식으로 산 이상,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충분히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돈벌레가 세 배나 요구해서 시세보다 세 배나 더 주고 샀다!

“이 벌레보다 못한 놈들이!"

표기광의 분노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충의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아, 어디 귀하디귀한 벌레를 저런 놈들과 비교하느냐?"

충의가 슬쩍 고개를 돌려 조당과 황춘을 보며 물었다.

“그거 아냐? 피독주라면 환장하는 벌레들이 있는 거?”

그 말만 하고 충의가 자리에서 끙끙대며 힘겹게 일어났다.

“어이구, 허리야.”

무슨 뜻인지 몰라 하는 두 사람에게 그녀가 했던 말을 해석해 준 사람은 표기광이었다.

“피독주 따위로는 막을 수 없는 독충들이 있다는 뜻이다.”

검무극이 친구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잘 봐.”

앞장서서 설명하는 검무극은 신이 났다.

“저기 모퉁이를 돌면 평상에 소년이 한 명 앉아 있을 거야. 다음에 왔을 때 그 녀석에게 이렇게 말하면 돼. 아이야, 가서 벌레로 빚은 술을 한 병 내오너라.

그러면 아이가 누구 소개로 왔냐고 물어볼 거야. 그때 이렇게 대답하면 돼. 멋지고 잘생긴 검 소교주 소개로 왔네. 알았지?"

그렇게 모퉁이를 돌았을 때, 정말 그곳에 평상이 놓여 있었다.

소년은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안 본 사이 훌쩍 큰 소년도 검무극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저기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잘 기억해 뒀다가 다음에 오면 잘 안내해 줘라.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사람들이니 금방 알아볼 거다. 저 무섭게 생긴 형도 알고 보면 착한 형이니까 잘 안내하고, 이봐, 친구들. 나 아니면 여기 들어가지도 못해.”

검무극이 한껏 생색을 내던 그때.

"극락원은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무슨 말이냐?”

“어르신께서 진법을 없애셨습니다.”

검무극이 멀뚱하게 서 있는 옆으로 다섯 사람이 지나갔다. 무섭게 생긴 형이 지나가며 한마디했다.

“친구, 벌레로 빚은 술 한 병 가져오게.”

“이제 술 필요 없다잖아!"

혼자 남은 검무극이 소년에게 용돈을 주었다.

“이렇게나 많이 주십니까?"

“항상 책 읽고 있는 모습 대견해서 주는 거다. 책 많이 사서 읽어라. 그게 분명 네 살길이 되어 줄 거다! 이봐, 친구들 같이 가자고.”

검무극이 친구들 뒤를 따라 뛰었다.

전표를 내려다보던 소년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들이 한참을 걸어 극락원이 저 앞에 보이자 검무극이 충의를 소개했다.

“충의 어르신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모를 거야.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고결하신 분이시지. 선하면서도 기품 있으시고, 의술은 신의 급에, 학식에 교양까지 있으시지.

이곳 이름이 왜 극락원이겠나? 극락에서 쫓겨난 선녀 같은 분이시다, 이 말씀이지. 어르신, 저 왔습니다."

극락원의 대문을 활짝 열고 검무극과 친구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장내에 펼쳐진 상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침 충의는 손에 든 커다란 벌레로 상의를 벗은 조당의 몸을 물어뜯게 하려던 중이었다. 이미 다른 벌레에게 물어뜯겼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검무극의 방문에 충의가 반가운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던 그때.

그녀가 들고 있던 벌레가 사정없이 몸을 물어뜯자 조당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비명에 쓰러져 있던 황춘이 정신을 차리더니 입구 쪽으로 기어와 들어선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하필 그 사람이 비사인이었는데, 그는 지금 자신이 누구 다리를 잡았는지 알아볼 상황이 아니었다.

"....살려주십시오!"

두들겨 맞았는지 벌레에게 물렸는지. 황춘의 얼굴과 몸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비사인이 피 묻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충의를 보며 검무극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아무래도 지옥에서 쫓겨나신 분 같은데?”

당신 같은 사람들이 왜 의원 따위를

조당에게 동아줄이 내려왔다.

이름 모를 독충에게 물어뜯기고 있던 그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은 모두 여섯 줄이었다.

검무극을 보자 충의는 조당을 물어뜯고 있던 독충을 떼어냈다.

기회다 싶어 조당이 힘을 냈다. 지금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는데, 그래도 살고자 하는 욕망만큼은 대단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조당이 대문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살려주시오.”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손님이라 여겼다. 설마 저들까지 다 죽여서 살인멸구 하지는 않겠지. 과연 자신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도 충의는 말리지 않았다.

당연히 상대방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올 줄 알았다.

찰나간 대답도 생각했다. 땅을 사러 왔는데 저 돈벌레가 땅값을 시세보다 세 배나 더 요구했고, 거절하자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고.

한데 늘어선 사람 중 한 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살고 싶으면 잘 골라야 해."

물론 그 말을 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의 시선이 비사인의 발을 붙잡고 있는 황춘을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선택은 썩 좋다고 볼 수는 없거든.”

비사인이 웃었다. 이제 검무극이 놀리는 것을 은근히, 아니 제대로 즐기는 그였다.

비사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웃었지만, 조당에게 그 무서운 얼굴에서 지어지는 웃음은 지옥의 사신을 떠올리게 했다.

"자, 과연 당신은 제대로 고를 수 있을까?"

조당은 마당 가운데 서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이자들은 일행이 아닌가? 아니면 내게 장난을 치려는 건가?”

이 무림에는 온갖 기인이사들이 살고 있었으니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독충에 온몸이 뜯겨 죽게 될 처지였으니까.

그의 시선이 여섯 사람을 살폈다.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길에서 마주치면 반드시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쳐다볼 것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단연 가장 눈에 들어온 사람은 가운데 서서 말하고 있는 검무극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검무극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최고의 선택이지."

조당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 말 많고 이상한 놈을 고를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그 옆에 무서운 인상의 비사인이 있었다. 그의 발을 붙잡고 있던 황춘은 다시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골라도 어찌 저런 사람을 골랐을까? 아니지, 외모만 보면 저 사람이 제일 강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여섯이나 되는 중에서 굳이 저 얼굴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두 눈에서 느껴지는 정기와 협의. 도와달라고 하면 반드시 도와줄 것 같았다.

그랬기에 그의 본능이 거부했다.

저 사람은 안 돼.

악행을 저지른 자신이 저런 곧은 심성을 지닌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또 다른 화를 불러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여인들을 보았다. 가장 먼저 이안, 정말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른 두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진하령과 한설 역시 저마다 자신만의 미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조당은 그녀들을 모두 제외했다. 이 무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바로 저런 미인들이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나밖에 없지?"

놀랍게도 조당은 검무극을 선택했다.

“날 도와주시오.”

이 선택의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이들의 중심에서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봤어? 나 선택하는 거 봤냐고. 자네들에게는 절대 없는 이 듬직함, 이 믿음! 어떤 위기에서도 구해줄 것 같은 이 강인함!"

조당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너만 말하고 있어서 선택한 거라고.'

검무극이 실컷 자랑한 후에 친구들에게 말했다.

“나를 골랐으니 난 마지막에 인사해야겠네. 자, 다들 먼저 인사들 드려.”

먼저 움직인 사람은 발에 붙은 채 기절한 황춘을 떼어내고 싶은 비사인이었다.

황춘에게서 벗어난 비사인이 앞으로 몇 걸음 걸어 나가 충의에게 인사했다.

“사도맹 소맹주 비사인입니다. 어르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상대를 존중했기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사도맹 소맹주라는 말에도 충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물었다.

“내 명성이라곤 돈벌레가 전부인데?”

“인간보다 세상에 더 도움이 되는 벌레도 있지 않겠습니까?"

요놈, 제법이군. 이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충의가 불쑥 물었다.

“자네 돈 많나?”

"많습니다."

"그럼 갈 때 화충주(花蟲酒) 몇 병 사가게.”

“네.”

“다섯 병 사게. 비싸다고 뭐라 하면 안 되네.”

충의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돈벌레처럼 구는 그녀였다.

반면 대화를 듣고 있던 조당은 기겁했다.

'저자가 사도맹 소맹주라고?'

이런 곳에서 사도맹 소맹주를 만나게 될 줄이야? 한데 사도맹 소맹주가 수하들 없이 이렇게 나와 있다고?

설마 저 말 많던 놈이랑 다른 자들이 수하들인가? 어쩐지 미인들을 셋이나 데리고 다니더라니! 만약 그렇다면?

'망했다! 이자를 선택했어야 했구나!”

그때 진하군이 걸어 나와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무림맹에서 멸마대주를 맡고있는 진하군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멸마대주란 말에 충의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아무래도 정도를 걸어가는 그녀였기에 무림맹 소맹주에게 기본적인 호의가 있었다.

사도맹 출신 제자를 두고, 천마신교 소교주와 그렇게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도, 그녀는 뼛속까지 선한 사람이었다.

"자네의 훌륭한 인품은 여러 차례 들었다네. 앞으로도 무림의 기둥이 되어 주게.”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그녀가 왜 술을 팔려 했는지 짐작했기에.

“저도 술을 사겠습니다.”

"자넨 괜찮네. 너무 비싸.”

바가지를 씌운 가격임을 공공연히 말해주는 것이다.

“저도 돈 많습니다.”

“그럼 자넨 한 병만 사게 남은 돈은 다른 좋은 일에 쓰게.”

진하군의 돈은 어차피 좋은 일에 쓰일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 편애를 검무극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너무 사람 차별하시는 거 아닙니까? 얼굴 무섭게 생긴 것도 억울한데, 바가지까지 쓰다니요!”

“악당들의 돈을 뜯어야 제맛이지. 자넨 열 병이야.”

"너무 하십니다!"

한편 조당은 멸마대주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멸마대주가 차기 무림맹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무림맹 소맹주라고?'

어찌나 놀랐는지 벌레에게 물어뜯긴 곳들이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내 이 상황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림맹 소맹주와 사도맹 소맹주가 함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수하들도 대동하지 않고,

'뭐야, 이것들!”

한데 저 충의는 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왜 저 말을 순순히 믿는 것일까? 자신을 속이려고?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오기 전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진하령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동생인 진하령이에요.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오라비와 사이가 좋군. 이렇게 함께 다니는 걸 보니.”

"그런 편입니다."

검무극이 슬쩍 끼어들며 진하령을 놀렸다.

“후계 싸움에서 진 거죠. 패자가 힘이 있습니까? 가자면 가야지."

자신이 왜 이번 여행에 동참했는지 모르면서. 남의 속도 모르면서 저런 농담이라니!

“들고 계신 독충 좀 빌려주세요! 저 입을 콱!"

진짜 그렇게 하라고 충의가 독충을 내밀자 진하령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징그럽고 무서웠다.

다음으로 한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충의는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음에도 출신을 알아차렸다.

"추운 곳에서 왔군.”

"빙궁에서 온 한설입니다.”

“모친이 궁주신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자네도 한 병사 가게. 추위가 싹 풀릴 거야.”

“네.”

마지막으로 이안이 인사했다.

“소교주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이안입니다.”

충의는 검무극이 말한 이안을 기억했다.

"심장처럼 여기는 수하가 있다고 하더니, 너로구나.”

예전에 검무극이 충의에게 이안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다. 충의는 그때 나눴던 대화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충의가 가만히 이안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출 수 없는 선함은 충의가 가장 좋아하는 성정이었다.

"소교주 주기 아깝다."

이안은 벅찬 감격을 느꼈다.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항상 소교주에게는 너무나 부족한 자신이라 여겼으니까. 한 번도 소교주와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니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임을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말이 되었다.

이안이 감격스러운 마음을 애써 삼키며 차분히 말했다.

“소교주님을 오래 모신 덕분에 과분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저도 술 사겠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소리쳤다.

“사지 마, 그럼 본교는 열한 병이나 바가지 쓰는 거라고!”

듣고 있던 조당은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교주란 말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소교주? 대체 어디 소교주?

사도맹 소맹주가 나왔고, 무림맹 소맹주가 나왔으니, 이제 나올 곳은 한 곳이었다.

조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바로 그때였다.

“소교주님!"

검무극을 부른 사람은 뒷마당에서 독충이 든 통을 가지고 나오던 표기광이었다. 그가 통을 내려놓고 검무극에게 달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교주님.”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검무극은 표기광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통해 그가 무공까지 회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교주님 덕분에 저는 잘살고 있습니다.”

표기광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검무극이 자신을 죽였어도 전혀 원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은 다 눈앞의 저 소교주가 준 삶이다.

반가운 얼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표기광이 함께 온 사람 중에 비사인을 발견했다.

"소맹주님!"

“반갑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예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비사인이었기에 그를 향한 표기광의 눈빛에는 더없이 깊은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인사를 마쳤을 때 조당은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가 떨리는 마음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당신을 왜 소교주라고 부르는 겁니까?"

차라리 묻지 말 걸, 하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천마신교 소교주니까."

맑고 깊은 눈빛을 보는 순간 조당은 직감할 수 있었다. 정말 눈앞의 이 남자가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것을.

“대체 당신 같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의원 따위를 만나러 온 겁니까?”

아무리 이 충의라는 의원의 실력이 좋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더 훌륭한 의원들이 있을 텐데.

검무극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은 틀렸다. 고아들을 위해 돈벌레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한평생을 희생한 분이 우리 같은 애송이 따위를 만나주는 거다.”

그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 마기가 실리며 차가워졌다.

“우리도 이렇게 존경하는 분인데, 너는 무슨 짓을 했던 거냐?”

듣고 있던 충의가 눈을 감았다. 검무극이 한 말은 힘들고 고달팠던 지난 인생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말이었다.

그래,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저런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이 인생이 어찌 후회되겠는가?

검무극의 꾸짖음에 조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그는 자신의 문파 이름인 공생(共生)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함께 산다? 아니,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저 황춘과 함께 온갖 악행을 저질러왔다.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무사히 잘 빠져나왔는데.

오늘 자신은 제대로 걸렸다. 그것도 정사마 무림 전체에 걸렸다.

“나를 선택했으니 함께 신교로 가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조당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상황에서 천마신교로 끌려간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가 진하군과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도와줄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함께 오지도 않았겠지.

조당이 다시 충의에게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녀 앞에 선 조당의 시선이 충의가 들고 있던 독충을 향했다.

조당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충의의 팔목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가 손에 든 독충이 자신의 가슴에 닿자.

“으아아아아악"

천마신교에 끌려가느니 차라리 독충에게 물려 죽는 고통을 선택한 그였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선택이 최고인 것 같기도 하다.”

충의가 눈짓하자 표기광이 와서 조당과 황춘의 마혈과 수혈을 제압해서 뒷마당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제야 검무극이 충의와 정식으로 재회했다.

“어르신! 신의님!”

검무극이 반가운 얼굴로 달려가서 충의를 번쩍 안았다.

“우리 누님은 더 아름다워지셨습니다!”

예전에도 달려가서 덥석덥석 잘 안겼고, 또 누님이라고 장난을 쳤었다.

충의가 환한 웃음으로 검무극을 반겼다.

“자넬 다시는 못 보고 죽을 줄 알았는데 왔구나.”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충의였지만, 지금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던 일은 잘 끝냈나?"

"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고생했네."

“이게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충의 덕분에 만독불침이 되었고, 만독불침의 기연 덕분에 여러 위험을 쉽게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한데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굽니까?"

“일찍도 묻는구먼.”

뒷마당에서 표기광이 걸어나오며 대답했다.

“어르신이 후원하는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뺏으려 했던 놈들입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의 표정도 찌푸려졌다. 천마신교가 아니라 무림맹이나 사도맹에 끌려가도 똑같은 고난이 기다릴 죄였다.

검무극이 뒤처리를 자처했다.

“뒷마당에 두면 곧 본교에서 사람들이 와서 처리할 겁니다.”

충의와 관련한 일이니까, 놈들이 저지른 일들을 철저히 조사하고 뒤탈이 없도록 처리하게 할 것이다.

"한데 어쩐 일로 찾아왔느냐?"

"친구들 인사시키려고 데려왔습니다.”

모두가 다시 일제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검무극이 왜 자신들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어찌 모르겠는가? 이런 인생도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려는 것이다.

명성보다는 진심을 남기는 삶을, 명성은 그저 벌레의 허물에 불과한 삶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검무극에게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제가 약속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약속?"

검무극의 입에서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어르신의 병, 제가 꼭 낫게 해드리겠다고요.”

충의의 얼굴에 충격과도 같은 놀람이 가득 피어올랐다. 설마 검무극이 이런 이유로 찾아왔을 줄은 몰랐다. 자신도 잊고 있었던 약속이었다.

“이제는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삼십 년은 더 악명을

충의는 감격했다.

이제는 한 번 해볼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지금까지 내내 자신의 병을 생각해 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너무 아파서 잠 못 이루는 밤, 어디선가 눈앞의 이 소교주는 자신을 신경 써 주고 있었으리라.

검무극을 향한 충의의 눈빛에 깊은 고마움이 담겼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만 내 병은 고칠 수가 없네.”

그녀는 평생을 희귀한 독충들을 찾고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번 극독에 중독되었고, 몸이 망가졌다. 일반적인 약이 듣지 않아서 독을 이용해서 이독제독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제게 한 번 맡겨보시지요.”

검무극을 바라보는 진하군의 눈빛에는 놀람을 넘어선 존경이 담겼다. 검무극이 한 번 맺은 인연을 어떻게 여기는지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늙은 몸을 치료한다고 괜히 힘쓸 거 없네. 어차피 다 망가진 몸이기도 하고.”

그때 표기광이 달려와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사부님. 이럴 때는 오냐, 이미 망가진 몸 어디 마음껏 해 봐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놈아, 놔라.”

“늙어서 고집부리는 게 젊은이들 힘쓰게 하는 것이고요. 자, 어서 들어가세요.”

"놓으라니까.”

표기광이 억지로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가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천히 잘하고 나오게.”

비사인 역시 검무극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역시!' 하는 마음이었다. 약속 지키러 왔다. 하고 넘어가면 별일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비사인은 이렇게 받아들였다. 자신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이 말을 하고 싶어서라고.

명예보다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해서,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켜가며, 우리 앞으로 이렇게 살자고.

검무극이 충의가 들어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와서도 충의는 표기광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괜찮대도 그러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중이 제 머리 깎는 거 보셨습니까? 의원도 아프면 다른 의원을 찾아가야죠. 일단 앉으세요.”

"괜찮다는데.”

충의가 마지못해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녀를 앉힌 후 표기광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늙은 제자가 얼마나 간절한지 그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뭐든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십시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나가기 전에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마시고 소교주가 딱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가 나가자 충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자를 데려오려면 젊은 놈을 데려와야지. 나보다 잔소리가 더 많아."

“요즘 젊은 애들 독충이라면 기겁합니다. 저 늙은 애가 제일 젊은 애다, 생각하십시오.”

옅은 미소를 짓던 충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보게, 소교주.”

“네, 어르신.”

“무리할 필요 없네. 진심으로 하는 말이네.”

자신의 몸을 고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네에게도 말했다시피 독을 독으로 눌러둔 상태라네. 시간이 지나자 내성이 생겼고 더 강한 독을 써야 했지.

한데 그 독들이 서로 얽혀서 엉망이 되었네.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지.

아무리 자네라도 감당 못 해. 그러니 그냥 나가서는 시도해 봤는데 실패했다고 하고. 나와 이야기나 나누다가 나가세.”

애초에 그럴 마음으로 억지로 끌려 들어온 모양이다.

"살짝만 건드려도 터지면, 더 살짝 건들면 되겠지요.”

검무극은 그녀와 약속을 했을 때보다 무학의 경지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아졌고, 육도원기의 현기가 깃들었었던 내공은 더없이 정순해졌다.

“그래, 자네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내가 잘 알지. 한데 그래도 불가능하네."

충의가 그 이유에 대해 말해주었다.

“설령 그 치료 과정을 내 몸이 버틸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치료할 수 없네. 뭉친 독을 분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설령 분리했다 쳐도,

그 두 독을 순식간에 몸에서 배출해야 하네. 절대 혼자서는 그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없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

잠시 고민하던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조수를 한 명 불러야겠군요.”

밖에 있는 친구들 중 한 사람을 부르겠다는 소리였기에 충의는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내 몸에 깃든 독을 감당할 수 없네. 자네의 심장이 저 어린 나이에 허구한 날 어깨와 다리를 주무르는 꼴을 보고 싶나?"

검무극이야 만독불침이라서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독이었다.

그때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있습니다. 그 독을 버틸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순간 충의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제 조수에겐 독이 통하지 않습니다.”

충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자네 말고 만독불침이 또 있다고?”

평생을 모은 재료로 만독불침으로 만들어주었는데, 그런 기연이 또 있었다고?

“보시면 알 겁니다. 대신 놀라지 마십시오."

미리 경고까지 했지만 충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헉!"

충의가 두 눈을 부릅떴다. 놀람을 넘어선 충격적인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검무극 뒤에 하나의 존재가 서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크기로 강림한 천마혼이었다.

“눈에 힘 빼! 소중한 분이시다!”

검무극이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아무리 인간 크기로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천마혼이 내뿜는 존재감은 사람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 무공에서 현신한 천마혼입니다. 어떤 독도 통하지 않는 존재지요.”

이야기로만 들었던 천마혼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아주 거대한 크기라고 들었는데.”

"원래는 그렇습니다만, 제가 올려다보고 수다를 떨려니 목이 아파서요."

검무극이 천마혼을 돌아보며 말했다.

"친구, 네 도움이 필요해."

검무극을 응시하던 천마혼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충의는 더욱 놀랐다. 무공에서 태어난 존재와 서로 의사를 주고받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은 솔직히 말했다.

“사실 천마혼과 함께 이런 치료는 처음이라서 저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검무극이 자신의 천마혼을 쳐다보았다.

“한데 제 천마혼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검무극은 가끔 시천비술을 발휘해서 천마혼과 해변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만히 앉아서 파도를 보고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전부이지만, 점점 더 천마혼과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천마혼의 감정과 그 잠재력을 검무극은 확실히 느꼈다.

“어떠십니까? 제게, 아니 저희에게 한 번 맡겨봐 주시겠습니까?"

충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마혼까지 강림시키면서 치료를 해주겠다고 한다. 이 소교주와의 인연이 이렇게까지 깊이 이어진다면.

검무극을 바라보던 충의가 허락했다.

“그래, 의원도 아프면 다른 의원을 찾아야겠지."

검무극이 기뻐하며 그녀를 침상 가운데 앉혔다.

"자, 여기 편하게 앉아주세요."

충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깨어계시면 힘드실 겁니다. 잠시 주무시고 일어나십시오.”

충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무극의 뜻을 따랐다. 설령 자신이 이대로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보는 것이 자신이 염원이었던 만독불침.

그래, 이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

검무극이 수혈을 눌러 그녀를 재운 후 천마혼에게 말했다.

“자, 이제 우리 둘이 어르신의 몸에 있는 독을 남김없이 뽑아낼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천마혼이 든든한 눈빛을 보냈다. 천마혼과 함께라면 해낼 자신이 있었다.

검무극이 충의의 뒤에 앉아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천마혼은 충의의 앞에 앉아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자, 시작하자."

먼저 검무극의 한 줄기 내력이 충의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천천히 그녀의 내부를 살폈다. 과연 혈맥은 많이 손상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검무극의 내력이 혈맥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혈맥과 원기부터 보호하고 다스린 것이다. 마치 무너지려는 둑을 보완하듯이 자신의 내력을 혈맥에 덧대었다.

천천히 내부를 다독이던 검무극은 혈맥 깊숙한 곳에서 독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구나.”

독은 뭉쳐져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여러 독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은 하나의 큰 덩어리처럼 얽혀 있었다.

검무극은 신중하게 독에 접근했다. 이 독을 잘못 건드려 발작을 일으키면 그대로 끝장이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독을 살폈다.

그녀의 말처럼 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분리하는 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

크기가 커서 이대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얽힌 것을 풀어서 두 조각으로 나눠야 한다.'

검무극이 대기 중인 천마혼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네가 도와줄 차례다.

천마혼이 한줄기 내력을 주입했다. 천마혼이 내력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원래 쓸 수 있는지, 자신의 천마혼이 특별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천마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내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천마혼의 내력이 독이 있는 곳에 도착하자 검무극은 본격적으로 엉켜있는 독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검무극의 내력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손처럼 움직였다.

내력만으로 서로 얽혀있는 독을 풀어내는 것, 검무극의 무공 경지가 아니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작업을 천마혼이 보조했다. 검무극의 몸에서 탄생한 천마혼이었기에 자신의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의 천마혼은 세상 누구보다 훌륭한 조력자였다.

진짜 고수만이 기다림의 미학을 발휘할 수 있듯, 검무극은 이래서 대체 언제 치료하겠다는 거냐? 라는 말을 들어도 좋을 정도로 느리게 작업했다.

검무극이 작업하는 중 혈맥으로 튀어 나가려는 독을 천마혼의 내력이 감싸서 다시 진정시켰다.

그야말로 검무극은 의원이었고, 천마혼은 보조 의원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왜 충의가 독을 제거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온갖 알 수 없는 독이 얽혀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검무극은 침착하게 하나하나 매듭을 풀었다. 대법 재료를 찾기 위해 평생도 쓴 자신이었다. 아무리 얽혀 있어봐라, 회귀 전 내 인생만큼 풀기가 어려울까?

그렇게 한 시진이 흐르고, 두 시진이 흐르고. 계속 시간이 흘러갔지만 검무극의 집중력은 처음과 같았다.

마지막 얽혀있는 독을 풀기 시작하며 천마혼에게 전했다.

ᅳ자, 준비해.

이제 오늘의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이르렀다.

세밀한 내력의 움직임 끝에 얽혀있던 독이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지던 그 순간.

검무극과 천마혼은 순식간에 내력으로 독을 감싼 후 각기 반대 방향의 혈맥을 따라 그 독을 옮기기 시작했다.

-독이 폭주하기 전에 빼내야 해.

얽혀있던 독이 분리되자 억누르던 독도, 억눌려 있던 독도 폭주하기 시작했다. 계속 억누르려는 성질과 해방감, 그 두 성질 모두 작동한 것이다.

검무극과 천마혼의 내력은 그것을 둘러싸서 각자 손바닥이 있는 혈맥 쪽으로 최대한 빠르게 옮겼다.

"윽!"

충의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독이 팽창하며 터지려는 것을 잠이 들었음에도 느낀 모양이다.

―조금만 더 빠르게!

혈맥을 부풀리며 독이 터지기 일보 직전.

쏴아아악.

그 순간 도착한 반쪽의 독이 검무극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왔다.

손바닥에서 사방으로 독이 퍼져나가려던 그때.

화르르륵.

검무극은 삼매진화로 순식간에 그것을 태워버렸다.

불꽃은 하나가 아니었다.

화르르륵.

천마혼의 손바닥 위에서도 독이 화염과 함께 사라졌다.

천마혼 역시 몸속에서 독이 발작하기 전에 몸 밖으로 배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후우."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성공한 것이다.

검무극이 천마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거다. 고맙다, 친구."

천마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지는가 싶더니, 천마혼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검무극은 내력을 주입해 충의의 몸을 마저 살핀 후, 어떤 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충의를 깨웠다.

충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치료를 받기 전과 달라져 있었다.

"내가 살았구나.”

살아만 난 것이 아니었다. 끔찍하게 몸속을 지배하고 있던 독이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독이 사라지며 온몸이 녹아내릴 듯 아팠던 고통도 함께 사라졌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 아프지 않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자네가 해냈네.”

그녀의 목소리가 그 눈빛만큼이나 떨렸다.

“제가 아니라 신의님이 고치신 겁니다.”

"내가?"

“제게 만독불침의 기연을 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 치료는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충의는 말없이 검무극의 손을 붙잡았다. 이 마른 손은 더는 어깨와 다리를 주무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일찍 치료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검무극을 붙잡은 그녀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넘쳐흘렀다.

“이제 삼십 년은 더 악명을 더 떨치실 수 있을 겁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왔을 때,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충의를 보는 순간 표기광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충의의 걸음걸이만 봐도 치료가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

표기광이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충의를 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충의가 그런 제자를 바라보며 심술궂게 말했다.

“이놈아, 그래도 아침마다 주물러줘야 해.”

표기광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대신 약속하십시오. 물부터 꼭 한잔 마시겠다고요.”

진하군과 비사인, 이안과 진하령, 그리고 한설은 검무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건, 정말 그 치료가 어려웠다는 의미.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검무극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배고파 죽겠다. 다들 의리 없이 먼저 밥 먹은 건 아니겠지?"

언제나 그랬듯 실없는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며 모두 환하게 웃어주었다.

"배고프지?”

충의가 아파서 들지도 못하던 팔을 휙휙 돌렸다.

“아직 그렇게 움직이면 안 됩니다.”

"안되긴. 기다리게, 내가 직접 요리해 주겠네.”

그러자 검무극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냈다.

“드디어 어르신의 벌레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건가요?”

예전에 만독불침 대법을 받던 그 무렵 먹어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 놀릴 생각에 검무극은 싱글벙글 웃었다.

"징그럽지만 맛은 괜찮았지요."

과연 여인들은 물론이고 진하군과 비사인까지 깜짝 놀랐다. 농담이겠지? 정말 충의가 그걸 권한다면 예의상 안 먹을 수도 없을 텐데!

그때 충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데?"

“네?”

고통 때문에 독충 날개를 떼고 생으로 다리를 뜯어먹던 충의였는데.

“이렇게 귀한 손님이 왔는데 벌레를 왜 먹이나? 기광아, 가서 요리할 재료를 몽땅 다 사 와라. 소랑 돼지랑 닭이랑 다 사와! 오늘 산해진미를 차릴 거다!"

모두가 안도했지만 검무극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저는 먹이셨잖아요?"

“먹으란다고 정말 먹을 줄은 몰랐지.”

충의가 다른 이들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기다리게, 내 맛있는 요리 해줄 테니까.”

"네! 기대하겠습니다. 신의님!"

모두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가운데 검무극이 소리쳤다.

“독충을 먹을 줄 알아야 인생을 안다면서요!”

충의가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는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요즘 누가 벌레를 먹는다고.”

실물이 낫지 않소?

충의는 펄펄 날아다녔다.

아직 본격적으로 체력을 회복하기도 전인데도 이러니,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아팠는지 알 수 있었다.

“기광아, 돼지 다 삶아졌는지 봐라!"

“네.”

“채소도 어서 씻어 오고.”

"갑니다!"

표기광도 신이 났다. 삶고 끓이고 볶고, 맛있는 냄새가 마당에 가득 풍겼다.

이안이 가서 돕겠다고 했지만, 충의는 절대 못 오게 했다.

충의는 자신의 손으로 검무극에게 제대로 한 끼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병이 나았지만, 자신의 나이도 있고, 또 상대는 천마신교 소교주였다. 또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나게 오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며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저렇게 살 자신은.............”

이안의 말이 끝나기 전에 검무극이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충의에게 온갖 잔소리와 투정을 하던 검무극이 어느새 잠이 든 것이다.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에 그가 치료에 얼마나 심력을 소모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요, 이제 좀 쉬세요. 도련님.'

이안은 혹시라도 검무극이 깰까 봐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기를 발출해서 외부의 소리를 차단했다. 이제 막을 쳐서 소리를 차단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는 그녀였다.

마침 건물에서 나오던 한설이 검무극이 이안에게 기대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돌아서 들어갔다.

그때 진하령도 방에서 나오자 한설이 그녀에게 말했다.

“식사 시간까지 시간이 남은 것 같은데 잠시 제 방에서 차 한 잔 하실래요?"

“그래요.”

한설이 그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비사인은 뒷마당 한쪽 벽에 진열되어 있는 독충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표기광이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독충은 따로 보관하고 있으니 마음껏 구경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독충들을 보고 있는데 그곳으로 진하군이 걸어왔다.

"다행히 그 벌레들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진하군의 말에 비사인이 구경하던 벌레에게 말했다.

“너희들 운이 좋다.”

진하군이 비사인 옆에 나란히 섰다. 검무극이라는 공공의 적을 상대하며 동병상련으로 친해진 그들이었다.

잠시 독충들을 지켜보다가 비사인이 진하군에게 물었다.

“맹 걱정은 안 되나?”

"첫날은 걱정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네.”

진하군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에 비사인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나는 첫날에도 걱정 안 했네.”

이번에는 진하군이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기억나나? 내가 무극이에게 너는 어떤 마도를 꿈꾸냐고 묻던 날.”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자신도 함께 있었으니까.

진하군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무극이가 그랬었지. 자신이 꿈꾸는 무림은 정도와 사도와 마도가 잘 어울리는 무림이라고.”

진하군의 말을 비사인이 받았다.

"결국 자신이 했던 말을 끝까지 잘 지켜가고 있군.”

“어찌나 독한지.”

비사인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독하니 오늘 이 자리까지 자신들을 끌고 온 것이겠지.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한 소저?"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네."

진하군과 많이 친해졌음을 보여주는 덧붙임이 있었다.

“아직은.”

진하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와 잘 되길 바라겠네."

“고맙네.”

그때 마당에서 표기광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 검무극은 충의와 작별을 고했다.

"더 놀다가 가! 맛있는 거 더 해줄 테니까.”

“어제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주셨어도 저는 예전에 먹은 벌레가 제일 맛있었습니다! 배신의 아픔을 알게 해준 그 벌레 말입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충의가 웃었다.

이제 검무극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또 찾아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다음이 있을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다음은 있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찾아와 줄 검무극이었으니까.

“그러세. 그때까지 잘 지내시게."

진하군과 비사인, 그리고 세 여인도 충의와 표기광에게 작별을 고했다.

인사를 마친 후 표기광이 따로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소교주는 나를 두 번이나 살려주신 거요."

사부를 구해준 것이 자신을 구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의미임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제가 구한 그 두 명이 앞으로 이백, 아니 이천 명의 목숨을 더 살려내겠지요.”

표기광의 눈빛이 깊어졌다. 처음 검무극을 만났을 때는 폐인처럼 지냈었는데, 이제 너무나도 값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고맙소, 소교주.

“잘 가시오.”

대문에서 멀어진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표기광이 사부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면서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두 분도 잘사시오.’

검무극이 다시 돌아섰을 때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이안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가 보자고.”

그들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하나의 이름이었다.

“너무 용감한 이름인데요?”

이안의 말에 모두 반점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천마반점.

감히 천마라는 이름을 쓰나 싶었지만, 한자가 달랐다.

天馬飯店.

마귀 마 자가 아니라, 말 마 자를 썼다. 어쨌든 지나가는 사람의 눈길은 확실히 끌 수 있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보고도 어찌 지나치겠나? 배도 고픈데 여기서 요기하고 가세.”

검무극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맛이 괜찮은 곳이었는지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새댁처럼 보이는 젊은 여인이 와서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국수 한 그릇씩 주시오.”

거창한 이름에 비해 맛은 평범했다.

어디까지나 이 방문은 맛보다는 궁금증 때문이었기에 식사를 마치자 검무극이 여인에게 물었다.

"여기 주인장이 말을 좋아하시오?”

여러 번 질문을 받아봤는지 여인은 대번에 무슨 뜻으로 한 질문인지 알았다.

“네, 말을 아주 좋아하세요.”

바로 그때 옆자리에 있던 손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왜 거짓말을 하시오?"

그가 진짜 이유를 밝혔다.

"여기 주인장께서 직접 천마를 만나본 사람이라서 그렇소.”

그 놀라운 말에 검무극과 친구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반면 말을 꺼낸 손님과 그 일행들은 재밌다는 소리 내서 웃었다.

그때 주방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

"정말 만나봤다니까!"

"어련하시겠나?"

단골이었는지 주방에서 소리친 주인장과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다.

이런 대화가 오가는데 검무극이 그냥 넘어갈 리 있겠는가?

"주인장께서 정말 마교주를 만나 보셨소?”

그러자 주방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 들려주시오! 여기 술도 한 병 가져다주시고. 다른 분들께도 술을 돌리시오. 술은 내가 사겠소.”

그러자 손님들이 모두 환호했다. 분위기가 화끈 달아올랐다.

“요즘 한동안 뜸했잖나? 어서 나와서 이야기하게.”

보아하니 여기 있는 손님 대부분이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공짜 술을 못 얻어먹을까 봐 다른 이가 재촉했다.

"어서 해주게!"

"나오게!"

잠시 후 주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가 검무극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상대가 무인이라서 놀란 것도 아니고, 함께 있는 이들이 보통 분위기가 아니어서도 아니었다.

“혹시 우리 만난 적이 있습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젓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도통 어디서 봤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자, 천마를 만난 이야기 들어봅시다!”

검무극의 말에 숙수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제가 소싯적에 통전소에서 조사관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돈을 빌린 사람의 가족이 실제 주소에 사는지 확인하고 보증을 서게 하는 일이었지요."

놀랍게도 남자는 바로 과거 검우진에게 돈을 받으러 갔던 통전소 조사관 덕출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마교주의 아들이 통전소에서 돈을 빌렸습니다.”

진하군이 못살아,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옆에서 비사인이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없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검무극이 그랬을 거라 확신했다.

반면 듣고 있던 손님들은 벌써 웃었다. 일단 시작부터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누가 들으면 소교주가 망나니 철부지인 줄 알겠네.”

손님의 말에 또 다른 손님이 받았다.

“그랬다면 통전소를 통째로 샀겠지. 아니면 뺏거나.”

보통 사람들에게 마교 소교주가 통전소에서 돈을 빌리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여러 번 경험한 반응이었는지 덕출은 묵묵히 말을 이어갔다.

“마교 본단 앞까지 가서 마존들도 보고, 대공자도 보았지요.”

이러니 어찌 믿겠는가? 일개 통전소 조사원이 어찌 마존들을 보고 대공자를 보았겠는가?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비웃지 않았다. 진짜가 남아 있었으니까.

“천마신교 본단 앞에는 마존들의 인형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때 혈천도마와 마불의 인형을 샀었지요.”

아직 이것도 진짜가 아니라는 듯 모두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다 그곳의 한 주점에서 천마를 만났습니다."

손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들었던 사람들도 웃었고, 오늘 처음 이야기를 듣는 손님들도 웃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까? 너무 어이없는 거짓말을 뻔뻔하게 해서 그게 웃겼다.

반면 덕출의 아내는 속상했다. 이렇게 조롱당할 걸 알면서 왜 또 저 이야기를 하는 건지.

“보통 주점이 아니었소. 그 주점 벽에 마존들과 천마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으니까."

그 말에 검무극과 일행들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제가 가서 혼자 술을 드시고 계신 그분께 아들의 보증을 서라고 했었지요.”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시던가요?"

“크게 웃으셨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제 설득에 결국 서명을 해주셨지요.”

사실 검무극은 예전에 통전소의 주양을 통해 아버지가 조사관을 만난 사실을 들었다. 그때 만났다는 사람이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인 것이다.

덕출이 마교주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드러냈다.

“제가 큰 무례를 저질렀음에도 천마께서는 저를 죽이는 대신 제게 당신의 인형을 사라고 천 냥이란 돈을 내리셨습니다.”

자신의 인형을 사라고 했다는 부분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고,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이 부분은 들어도, 들어도 웃긴다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걸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요?"

검무극의 물음에 덕출이 그 이유를 밝혔다.

"그 일은 사실이니까요. 그날 교주님께 약속드렸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 사람으로 살겠다고. 전 그길로 고향에 내려와 주신 돈으로 이 반점을 차렸습니다. 제 아내와 혼인도 했고요.”

그의 시선이 아내에게 향하던 바로 그때였다.

덕출의 아내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평생을 믿고 살 수 있을 사람인데, 딱 하나. 왜 이렇게까지 이 거짓말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게 너무 싫었다.

“미안하다.”

남편의 사과에 아내는 이번에는 단호했다.

“이제 앞으로 그만한다고 약속하세요."

잠시 고민하던 덕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가 속상해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가슴 아파하는 줄은 몰랐다.

“그러지.”

덕출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제 이야기를 마지막 들으신 분이 되겠습니다. 미안해 여보. 다신 안 할게.”

"고마워요.”

이러는 아내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덕출이 터벅터벅 다시 주방으로 걸어가던 그때, 뒤에서 검무극이 물었다.

“그래서 인형은 사셨소?”

덕출이 발걸음을 멈추며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그건 왜 묻습니까?”

"나는 당신 말을 믿으니까."

순간 덕출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제 말을 믿는다고요?”

검무극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조롱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믿는다는 것을.

“왜 믿는 겁니까?”

“사실을 말했다고 생각해서요.”

덕출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껏 자신의 말을 믿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로는 믿는다고는 했지만, 아내도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 말을 하는 것이 오늘 마지막이라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덕출이 주방에서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아내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는데.

그 안에 든 것은 바로 인형들이었다. 팔마존들 인형은 물론이고 검우진과 검무극 인형도 있었다.

손님들은 처음 인형을 봤기에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 잘 만들었다.”

“이게 누굴까?"

“이 마존은 너무 멋있다!”

인형은 당시에 팔던 것들이 전부 있었다.

"왜 인형을 다 샀소?”

교주와 권마의 인형만 더 샀어도 되었는데.

한데 올려진 인형은 검우진과 검무극, 그리고 팔마존 인형 전부가 있었다.

“왜 다 샀느냐 하면......"

질문을 한 검무극이 답을 맞혔다.

"한꺼번에 사면 삼 할을 깎아준다고 했으니까.”

덕출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검무극이 알아맞힌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교주 아들이 빌린 돈이 열 냥이었소?"

“맞습니다, 열 냥이었지요. 헉!”

순간 덕출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제 손님들의 시선도 모두 검무극을 향했다.

“아들에게 빌렸는데 아버지에게 돈을 받으러 가면 되겠소?”

다들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던 그때.

검무극이 상자에 있던 인형 중 하나를 탁자에 올렸다.

"누구 인형이오?”

“소교주 인형입니다.”

검무극이 그 인형 옆에 섰다. 그리고는 인형이 취한 모습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실물이 낫지 않소?"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한 번 보고 인형을 한 번 보았다. 시선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으악!"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에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내 그곳에 침묵이 찾아왔다.

검무극이 손을 들자 그곳에 있던 모든 술병과 술잔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잔을 채워주었다. 이 한 수로 자신이 진짜 소교주임을 보여준 것이다.

검무극은 자신들이 먹은 음식값에 더해 열 냥을 옆에다 내려놓았다. 그들에게 사기로 한 술값이었는데 일부러 열 냥을 주었다.

마지막 인사는 덕출의 아내에게 했다.

“그대 남편은 거짓말쟁이도, 허풍쟁이도 아니오. 우리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켜낸 멋진 남자요."

덕출 아내의 얼굴에 미안함과 감격이 동시에 뒤섞였다.

검무극이 일행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덕출과 아내, 그리고 손님들이 밖으로 우르르 나와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감격했다. 천마신교 소교주를 직접 보다니! 그에게 술을 얻어먹다니! 그가 따라준 술을 마시다니! 그야말로 자손대대로 물려줄 일을 경험한 것이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덕출의 아내가 먼저 사과했다.

“미안해요, 여보.”

"괜찮아."

그의 아내뿐만 아니라 손님들도 사과했다. 이런 일을 겪어도 벌써 입이 근질근질한데, 그런 일을 겪었는데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미안했네.”

“나도 사과하겠네.”

“용서해주게.”

덕출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그들도 다른 사람에게 백날 자랑해봤자 믿어주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 당신들도 다 허풍쟁이가 되었소.”

그 말에 손님들이 웃었다.

그들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소교주와 그 일행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 일까지 말하면 이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

그 안타깝고도 벅찬 마음을 그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받아주었다.

"제게 해요. 평생 들어드릴게요.”

돈 많이 모아두셨죠?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진흙만이 가득했다.

어떤 집은 무너졌고, 또 다른 집은 방 안이 진흙으로 가득했다.

허리까지 진흙에 푹푹 빠지는 그곳을 사람들이 치우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낙들은 어떻게든 진흙에 묻힌 세간살이를 건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여인은 금룡세가의 금아린이었다.

“지난밤 홍수로 둑이 무너지며 마을을 덮쳤습니다. 미처 피하지 못해 죽은 사람도 여럿입니다.”

함께 서 있던 금룡세가 총관의 보고에 금아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새로 집을 지어주도록 하세요.”

그러자 총관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전부 말씀입니까?”

“네, 전부 새로 지어주세요. 당분간 지낼 곳도 장만해 주고 구호품도 보내주고.”

금룡세가의 가주 금천방은 세가의 일을 금아린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이제 세가의 모든 결정은 그녀가 결정했다.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 겁니다.”

총관이 난색을 드러냈지만 금아린은 단호했다.

“그렇다고 저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어요?”

이 마을은 금룡세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제가 무림맹에 협조를 요청해서 함께 처리하겠습니다.”

“여긴 우리 구역이에요. 저 사람들은 우리가 돌봐야지요.”

“지난번에는 다른 지역 사람들을 위해 십만 냥이나 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총관의 걱정을 이해했다.

“제가 본가의 재산을 탕진할까 걱정되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도 돈 욕심 많은 사람이에요. 한데 이건 꼭 해야 할 일이에요.”

총관은 그녀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유를 묻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서 시행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서서 복구 작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검을 찬 무인들도 와서 복구를 돕고 있었다.

남자들은 무거운 잔해를 치웠고 여인들은 집에서 세간을 꺼냈다. 아이들을 돌보는 이들도 있었다. 한쪽에 불을 지피고 음식을 해서 아이들을 먹였다. 철모르는 꼬마들은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그때 그녀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요즘 금룡세가가 돈을 많이 버나 보네.”

그녀가 깜짝 놀라 돌아서자, 저만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과 몸이 둥글둥글한 체형이었는데, 그 만만해 보이는 얼굴과 몸에 반해 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과 기도는 굉장히 날카로웠다.

금아린은 고수였다. 한때 금룡상단이 운용하는 비밀조직을 이끌기도 했고. 비록 본격적으로 세가의 일을 물려받으면서 무공 수련에 소홀한 요즘이었지만, 상대의 실력을 한눈에 알아볼 정도의 날카로움은 지니고 있었다.

‘고수다.’

자신조차 바짝 긴장해야 할 정도의 고수였다.

그리고 그녀는 상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가 좋은 마음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스르륵.

그녀 앞으로 새하얀 머리카락을 한 남자가 은신을 풀고 나타났다.

그는 금아린의 수신호위인 임혁이었다. 일부러 소란스럽지 않게 오려고 이곳에는 임혁만 데리고 나온 그녀였다.

임혁이 전음으로 금아린에게 경고했다.

―고수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아버지가 물러났다는 소문이 상계에 퍼진 후 여러 일이 있었다.

그녀가 세상 물정 모른다고 여겨 계약 조건을 후려치려 한다거나,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이익을 얻으려는 수작들이었다.

통하지 않는 수법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이닥친 적은 없었는데.

임혁이 검을 뽑아 들었지만 남자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 모습만 봐도 상대의 실력이 임혁을 능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아린이 임혁에게 옆으로 물러나게 했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 나타나지 않고 기습했을 것이다.

금아린이 정중히 남자에게 물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나를 혈전낭(血錢囊)이라고 부른다.”

혈전낭이란 말에 임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문 속 실력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합공해도 쉽게 감당할 수가 없는 상대였다.

금아린도 혈전낭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피의 돈주머니라는 이름이 붙은 그는 상계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다.

중원의 여러 상단에 거머리처럼 붙어서 돈을 착취하는 악독한 인물로 악명이 높은 자였다.

이런 짓을 하는 놈이 고수라고 해봤자 뭐 그리 고수이겠냐 싶겠지만, 무림에는 언제나 예외적인 고수들이 존재한다.

돈이라면 귀신도 부린다는데, 돈이 넘쳐나는 상계에서 돈을 뜯으면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상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좋아했고, 그들에게 돈을 뜯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이렇게 뜯어낸 돈은 술과 노름으로 탕진했다. 기루에서 하룻밤에 수만 냥을 뿌리기도 했다.

“명성이 높은 분께서 오셨군요.”

혈전낭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명성이야 그대에게 비하겠나? 요즘 금룡세가가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근래 몇 번의 선행이 이 돈 귀신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그 선행에는 이유가 있답니다.”

“무슨 이유?”

“약속을 했거든요. 착하게 살기로.”

“누구와?”

원래 그녀는 이렇게 어려운 이들을 돕고 기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금룡세가의 후계자가 된 이후, 그녀는 선행을 베푸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과오를 갚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 후계자로 만들어준 한 사람의 뜻을 따라서.

“이름에 연기 연자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 사람과의 약속이죠.”

물론 혈전낭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기처럼 사라진 사람을 왜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보통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한 번씩 검연이 떠오른다. 그가 해낸 그 놀라운 일들이.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왜 저를 찾아오신 거죠?”

사실 금아린은 그가 무슨 이유로 방문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물었다.

“자네와 거래를 하러 왔네.”

“말씀하세요.”

그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내용을 읽어보니 적으로부터 지켜주는 대가로 삼십만 냥을 지급한다는 계약서였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삼십만 냥을 요구하고 있었다.

“여기 적힌 위험한 적은 누구죠?”

금아린의 물음에 그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임혁이 막으려 했지만 금아린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계약서를 내민 이상 수인을 찍을 때까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혈전낭이 그녀 옆으로 와서 복구 작업이 한창인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 앞으로 온통 진흙투성이가 된 남자가 손수레에 진흙과 부서진 집기들을 나르며 지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혈전낭이 누군가를 언급했다.

“소문을 듣자니 상계에 아주 악랄한 놈이 있다더군. 그자는 돈 욕심이 많아서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목숨까지 빼앗아야 만족하는 미친놈이라지? 마치 이곳을 휩쓸고 간 홍수처럼, 장사치들이 막아낼 수 없는 천재지변 같은 자라고 들었네.”

혈전낭이 고개를 돌려 금아린을 보며 말했다.

“그자로부터 지켜주겠다는 거네.”

금아린은 알 수 있었다. 그 악랄한 놈이 바로 혈전낭 자신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삼십만 냥을 내놓지 않으면 가진 돈을 다 빼앗고 죽이겠다는 뻔뻔한 협박이었다.

계약서를 준비해서 가져온 것은 나중에 무림맹에서 이 일을 문제 삼았을 때 정당한 거래였다고 주장하기 위해서겠지.

금아린은 근래 상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구룡상단(九龍商團)의 단주가 한쪽 팔이 잘렸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것도 그 악랄한 자의 짓인가요?”

외부에는 사고로 팔이 잘렸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혈전낭을 보니 그 역시 놈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의 짐작이 맞다는 듯, 혈전낭이 그자의 편을 들었다.

“그 악랄한 놈이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네. 팔 하나로 끝냈으니까.”

아버지가 가주로 계실 때 혈전낭은 단 한 번도 금룡세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림맹주와 친분이 깊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세가의 일을 맡자, 보란 듯이 찾아온 것이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아버지가 생존해 계신 데 이렇게 자신을 찾아왔다는 건 이 자가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말 미친놈에 가까운 배포를 지녔음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죄송하지만 지금은 그만큼 큰돈이 없어요.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면 그때 드리죠.”

“저것들 집을 지어줄 돈은 있으면서?”

앞서 총관과 나눴던 대화를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 금룡세가가 돈 많이 버나 보네, 라는 말을 했던 것이고.

“좋아, 이렇게 하지. 우선 저자들의 집을 지어줄 돈만 먼저 받겠네. 나머지 돈은 내가 자네에게 빌려준 것으로 하지. 이자는 하루에 일 할씩만 받겠네.”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걸었다.

놈은 이런 과정을 즐기는 자였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놈에게 중요한 건 상대의 반응이다.

금아린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다른 협박이 흘러나왔다.

“참, 그 소문은 못 들었겠군. 그 악랄한 자에게 팔이 잘리기 전에 백룡상단 가주를 지키던 호위의 목이 잘렸다고 하더군. 그건 못 들었지? 그대들의 관심사야 오직 돈뿐이니까. 백룡상단의 가주가 돈을 주지 않겠다고 큰소리친 것도 그를 지키는 호위를 믿어서였네. 결과적으로 그 호위만 불쌍하게 됐지. 가족도 있다고 하던데.”

임혁까지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돈도 뺏고 조롱도 하고. 그야말로 혈전낭은 안하무인처럼 굴고 있었다.

그의 협박은 발검으로 이어졌다.

스르릉.

“내가 우리 소가주의 고민도 줄여주지. 원래 수하의 목이 잘리니까 결정을 빨리 내리더군.”

임혁을 죽이려 들자 금아린이 차갑게 말했다.

“우릴 건드리면 무림맹이 그냥 있지 않을 거다.”

하지만 혈전낭은 그녀가 세가주에게 이 일을 알리지 못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네가 세가를 이끄는 사람인데, 자신의 일을 직접 처리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이르겠다고? 어디 일러봐라.”

무림맹을 앞세웠지만 통하지 않았다.

“설령 무림맹이 조사를 나오더라도 삼십만 냥 중에 절반은 조사하러 나온 자에게 뇌물을 줄 거다. 놈이 정의를 택하는지 돈을 택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고.”

혈전낭은 실실 웃으면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을 뺏을 때의 쾌감만큼 즐거운 것은 없었다.

“이자를 죽이고 네 팔을 하나 자르겠다.”

혈전낭이 그녀를 조롱했다.

“하긴. 팔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대신 돈을 세주겠지. 밥도 먹여주고 씻겨도 주고. 부자는 그게 좋아.”

금아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둘이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면?

“수인을 찍겠다.”

삼십만 냥 때문에 임혁을 잃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을 죽이면 그 수인은 우리 아버지에게 가서 받아야 할 거다.”

자신도 여기서 죽겠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자에게서 팔 하나만 받도록 하지.”

혈전낭이 임혁의 팔을 잘라버리려고 검을 치켜들던 그때였다.

금아린이 검을 뽑아서 그 앞을 막아섰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호위해 준 그였다.

“털끝 하나도 안 돼!”

임혁이 다시 그녀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소가주님.”

그녀가 무사할 수만 있다면 팔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애틋하게 구니, 안 죽일 수가 없잖아? 어떤 반응인지 궁금해서라도.”

그가 검을 번쩍 치켜들던 그때였다.

무엇인가 혈전낭에게 날아들었다.

암기인 줄 알고 혈전낭이 놀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니 그것은 진흙이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손수레로 쓰레기를 옮기던 청년이 수레에 실려 있던 진흙을 그에게 던진 것이다.

“아니 뭐하십니까? 다들 일하고 있는데 싸움질이나 하고!”

혈전낭은 잠시 어이가 없었다. 끼어든 놈도 놈이지만, 이 진흙을 그냥 맞았다고? 살기 자체가 아예 없는 바람에 맞은 것이겠지?

혈전낭이 청년을 쳐다보았다. 검을 차고 있었지만, 무공을 익힌 흔적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전혀 긴장이 안 되는 이유는 청년의 얼굴과 온몸이 진흙투성이라는 점이었다. 진짜 고수가 이런 복구 일을 하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혈전낭이 재밌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집을 잃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지?”

그때 청년을 바라보던 금아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처음 볼 때는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온몸에 진흙투성이에 얼굴에 진흙이 묻어 있어서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한데 목소리를 듣자 알 수 있었다.

“검연!”

놀랍게도 수레를 끌고 지나가던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금아린이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반가웠다.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죠?”

“당신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돕고 있었소.”

“저를 보러 오는 길이었다고요? 왜 저를?”

“벌써 잊었소? 내가 다음에 친구 소개해 주겠다고 했잖소?”

맞다. 검무극이 그랬다. 자기 자리에 비해서 순수한 친구들이 있다고. 그런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그 말을 금아린은 이렇게 해석했다. 금룡세가 소가주라는 그 자리 그렇게 대단한 자리 아니니, 유난 떨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 여겼는데, 정말 친구를 소개해 주러 온 것이다.

혈전낭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놈이 금아린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는 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의미.

과연 검무극은 혈전낭에게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돈 많이 모아두셨죠?”

“그건 왜 묻지?”

“제 친구들이 귀가 어찌나 밝은지. 다들 들어버렸거든요. 제가 살짝 일러바친 것도 있고.”

자신과 금아린의 대화를 다 들었다는 의미였다.

“다들 팔을 자르고 싶어 해서요.”

“뭐?”

“일행이 저 빼고도 다섯이나 돼서 팔은 물론이고 다리까지 다 예약이 되었거든요. 평생 누워서 누가 먹여주는 밥만 먹고 살아야 할 것 같은데. 돈 많으셔야 할 것 같은데.”

혈전낭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미친놈의 막말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특히 한 사람이 열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게 무림맹 이야기는 왜 하셔서는. 제가 말려보겠지만, 이번 여행 중에 본성을 되찾아서 아주 거칠고 난폭해졌죠. 어쩌면 사파로 전향할지도 모릅니다.”

혈전낭은 눈앞의 이 진흙투성이 청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이 복구 작업이 한창인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제 친구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친구를 무림공적으로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번쩍 지붕을 들어 올린 진하군이 아래에 사람이 깔려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그곳에 깔린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예 진흙탕 속에 완전히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눈 빼고는 모두 진흙투성이였다.

비사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뿌리째 뽑혀 떠내려온 커다란 나무를 들어서 옆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 역시 온통 진흙투성이였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일하고 있었다.

비사인이 힐끗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진하군의 표정에서 그가 많이 속상해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처음 엉망이 된 이곳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도 바로 그였다.

한설은 커다란 독에 깨끗한 물을 가득 담아온 후 다친 사람들을 씻기고 치료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친 사람들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고 깨끗한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 옆에서는 진하령이 커다란 솥에 국을 끓이고 밥을 짓고 있었다.

집을 잃은 사람들은 밥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럴수록 챙겨 먹어야 했다. 다들 너무 지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상태였고, 또 무엇보다 아이들을 먹여야 했다.

이안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는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누구보다 이 아이들의 심정을 잘 알았다. 이제 이 세상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주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이 순간 느끼고 경험한 그 공포가 평생 그 아이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도.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이안이 아이들을 하나하나 안아주었다.

그때 저쪽에서 검무극이 소리쳤다.

“다들 잠시만 이쪽으로 오게.”

각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그곳으로 걸어갔다.

금아린은 너무 놀란 마음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정말 친구들을 데려왔어!’

더 놀라운 것은 그들과 함께 이곳에서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금아린은 처음 혈전낭을 봤을 때, 자신보다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선 다섯 사람의 무공 실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보다 고수 같기도 했고, 아예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 같기도 했다.

검연이란 사람의 존재를 몰랐다면 이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을 거다. 다섯 명의 젊은 청춘들이 모였는데, 그들 모두가 자신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고수일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연이 데려온 사람들이고, 검연의 무공 실력으로 미뤄 추측해 보자면.

‘이들 모두 나는 물론이고 혈전낭보다 훨씬 고수들이다.’

이렇게나 젊은데. 대체 누구지?

“저 화난 친구들을 제가 어떻게든 말려보겠습니다.”

검무극이 마치 같은 편인 양 혈전낭에게 가까이 붙어서 일러바쳤다.

“특히 저기 저 친구가 화가 많이 났습니다. 딱 봐도 고집 있어 보이죠?”

검무극이 바라본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혈전낭이 진하군의 실력을 가늠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진짜 고수라면 이런 일을 직접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진흙까지 뒤집어쓴 채로.

이 선입견 때문에 혈전낭은 눈앞의 이 젊은 청년들이 자신보다 고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자가 어떤 자인데?”

“옭아매던 사슬을 끊고 비로소 자유를 찾은 친구지요.”

“그럼 오히려 좋아해야 하지 않나?”

“여기가 저 친구 구역이거든요. 다시 일 중독자로 돌아온 거죠.”

이곳이 정파의 영역이라는 말임을 혈전낭이 어찌 알겠는가?

“우리 아저씨는 이곳에 집을 지어줄 돈을 빼앗으려는 중이고요. 거기다 무림맹 무인에게 뇌물을 줘서 무마한다는 말까지 했으니 열 받을 수밖에 없죠.”

진하군이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혈전낭이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검날이 향한 곳은 검무극의 목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이자는 죽는다.”

진하군이 망설이지 않고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뒤에서 지켜보는 다른 이들 역시 긴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웃기는군. 그런 속임수에 내가 넘어갈 줄 아느냐? 이자가 너희를 이끄는 자가 틀림없다.”

그러자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런 악당이 봐도 내가 수장처럼 보인다는 거잖아?”

악당이란 말에 꿈틀했는데 진하군이 거기에 불을 질렀다.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아니, 제발 죽여줘. 어떻게 해야 저 친구가 죽는지 우리도 구경 좀 해보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뒤에 있는 것들은 왜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지.

혈전낭은 상대가 자신이 못 죽인다 여기고 조롱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 핏덩이들이 감히!”

쉬익! 파악!

혈전낭의 검이 망설이지 않고 검무극의 목을 베었다.

목을 부여잡으며 검무극이 그대로 쓰러졌다.

“자, 소원대로 죽여줬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다들 경악하고 놀라야 하는데.

지켜보고 있던 이들 중 아무도 놀란 사람은 없었다. 한 사람쯤은 놀랄 법도 했는데.

‘그 말 많았던 놈은 이들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나?’

어쨌든 일행 중 하나를 손쉽게 죽이자 혈전낭은 이들이 무공이 없는 자들이라 확신했다.

누군가 진짜 고수가 있었다면 이자가 죽는 걸 두고 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음은 누굴 죽여줄까?”

어차피 검무극의 목을 벨 때, 모두를 다 죽일 작정을 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누구긴요! 저기 친구를 죽여달라고 한 저 비정한 인간부터 죽여야지요.”

혈전낭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죽은 줄 알았던 녀석이 옆으로 누워서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친 채 누워있었다.

“분명 목을 베었는데?”

목을 베는 감촉도 느꼈다. 한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만약 자신을 속인 거라면 대체 어떻게 속인 거지?

검무극이 진하군 다음으로 비사인을 골랐다.

“그다음은 친구가 친구를 죽이라고 해도 말리지 않고 구경만 한 저 흉폭한 놈으로 정하죠.”

쉬이익.

혈전낭이 누워 있던 검무극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검무극은 그의 옆에 서 있었다. 당연히 어떻게 피했는지 보지 못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왜 이래요? 나는 같은 편이라고요. 우리 아저씨, 저기 저 친구 혼자서 막을 수 있겠어요?”

진하군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혈전낭이 이번에는 진하군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쉭! 쉭!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검을 내질렀지만, 진하군은 가볍게 피하며 반격했다.

진하군이 단 한 수에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이제야 혈전낭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수라는 것을.

“자네가 어느 쪽 팔이라고 했지? 오른팔이었나? 하나만 잘라!”

검무극의 말에 혈전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맞다. 팔다리를 자른다고 했지?

양팔과 다리가 잘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끔찍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날 건들면 넌 무림맹을 감당해야 한다.”

검무극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무림맹 이야기는 하지 말라니까.”

진하군의 주먹이 그의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액!

진하군의 일격에 그의 단전이 깨지면서 박살 났다. 무인에게 단전이 박살 나는 고통은 팔이 잘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혈전낭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육체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내공이 모두 사라지고 앞으로 영원히 내공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감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빌어먹을! 젠장! 너 이 새끼, 죽여버린다! 으아아아아악!”

바닥을 뒹굴며 발광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진하군이 차갑게 말했다.

“팔다리를 왜 자르나? 사지 멀쩡하게 붙여두고 네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편히 누워서 밥이나 먹게 해주지 않을 거다.”

그는 무림맹의 여러 뇌옥 중에서도 가장 힘든 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하다 죽게 될 것이다.

혈전낭의 두 눈이 증오로 이글거렸다.

“너 이 새끼, 반드시 복수할 거다.”

단전이 박살 났음에도 그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뇌물을 줬는지 너는 모를 거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네가 아무리 고수라도 무림맹이라는 그 큰 조직을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혈전낭이 미친놈처럼 웃으며 말했다.

“널 무림공적으로 만들어주지.”

진하군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자들도 모두 뇌옥에서 만나게 될 거다. 너와 관련된 자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색출할 테니까.”

“네까짓 게 어떻게?”

진하군이 임혁에게 부탁했다.

“저자를 가까운 무림맹 지단에 데려가 주시오.”

진하군이 직접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멸마대주 진하군이 보냈다고 전하시고, 본단으로 이송하라고도 전해주시오.”

임혁은 물론이고 금아린도 깜짝 놀랐다. 멸마대주가 차기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무림인들은 없었으니까.

혈전낭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저자가 무림맹 소맹주라고?

“헛소리!”

검무극은 바닥에 쓰러진 혈전낭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얄밉게 말했다.

“그래서 아까부터 무림맹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왜 자꾸 무림맹 이야기를 해서는.”

불신 가득한 눈빛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내가 저 친구 꼭 무림공적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점점 본성을 되찾고 있거든요.”

“……너희들 대체 뭐야?”

“집 나온 청춘들이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검무극이 그의 마혈과 수혈을 동시에 눌렀다.

검무극은 진하군이 그의 팔다리를 자르지 않은 이유를 짐작했다. 저 멀리 아이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혹여라도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게 될까 봐. 이게 진하군이란 친구의 본성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혈전낭에게 남은 삶은 팔다리가 잘려 지내는 것보다 더 힘들고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 다들 인사하게.”

비사인이 금아린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사도맹의 비사인이오.”

검무극이 옆에서 덧붙였다.

“차기 사도맹주가 될 분이시고.”

금아린과 임혁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정말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말없이 서 있는 저 무서운 얼굴은 장난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무림맹 소맹주와 사도맹 소맹주가 함께 있다고?

금아린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들을 친구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그들만이 아니었다.

“빙궁의 한설이에요.”

역시 검무극이 그녀의 신분을 밝혀주었다.

“북해빙궁 소궁주시고.”

심지어 말로만 듣던 북해빙궁의 소궁주도 있었다. 그녀의 백의는 더럽혀져 있었지만, 두 눈에 서린 차가운 기도에서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진하령이 진하군의 동생이자 후기지수들의 모임을 이끄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고, 이안이 천마신교 귀영대주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금아린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고 있는 당신은? 저 대단한 사람들을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는 당신은?

“대체 당신은 누구죠?”

검무극이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나는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금아린은 너무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림맹 소맹주와 사도맹 소맹주, 그리고 천마신교 소교주라고?

미래의 무림 전체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검무극이 무림 전체를 끌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이런 대단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진흙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이런 고수들이라면 허공섭물로 슥슥 다 처리해도 되었을 것이다. 자신처럼 새집을 지어줘, 명령을 내리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

한데 이들은 모두 사람들과 함께 직접 작업을 했고,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밥을 해 먹였다.

임혁이 멍하게 서 있는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서 인사드리십시오.

금아린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히 포권하며 먼저 인사했다.

“금룡세가의 금아린입니다.”

그녀가 검무극을 바라보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저따위가 뭐라고 이런 대단한 분들을 소개해 주는 거죠?”

검무극이 그녀 앞에 마주 섰다.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진 검무극은 더없이 진지했다.

“소가주, 그대는 잘하고 있었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앞선 그녀의 선행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큰돈을 들여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도 들어서 알 수 있었고.

“그때 당신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오.”

그녀의 가슴에 격정이 치솟았다.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는 말이었다.

“자자, 인사도 나눴으니 우리 일 합시다!”

금아린도 복구 작업에 참여했다.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이었다. 시키는 대로 짐도 나르고, 아이들도 돌보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곳에서 밥도 함께 먹었다.

처음 검무극이 밥 먹고 하자고 말했을 때, 순간 금아린은 그들을 모실 가장 좋은 반점을 떠올렸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곳에서 지은 밥으로 함께 밥을 먹자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 같이.

그 순간 금아린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아직 멀었구나.’

밥을 먹는 내내 마음에 걸려서 그녀는 솔직히 고백했다. 자신이 그런 부끄러운 생각을 했었다고.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소! 일도 힘들었는데 좋은 곳에서 밥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의 부끄러움을 소교주는 농담으로 다독여주었다.

밥을 먹고 나서 진하군은 저 멀리 무너진 둑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곳에 둑이 있는지 몰랐네. 몇 차례 홍수가 났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지.”

그는 자책하고 있었다. 이곳은 엄연히 무림맹의 영역인데, 둑을 더 튼튼하게 쌓아서 대비했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들어서였다.

검무극이 그를 위로했다.

“우리가 모르는 게 어디 그것뿐이겠나? 앞으로도 수없이 같은 일을 겪어야 할 거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그 분노가 자넬 좋은 맹주로 이끌 거네.”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분노가 날 사파로 이끄는 게 아니고?”

그의 농담을 받은 것은 비사인이었다.

“자네가 사파가 되는 건, 무극이가 과묵해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세 사람이 서로를 보며 함께 미소 지었다. 여행이 계속될수록 우정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금아린과 작별했다.

검무극이 금아린에게 마지막 전한 말은 이것이었다.

“이제 나의 연 자는 연기 연 자가 아니라 인연 연 자요.”

금아린이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게 주신 가르침, 영원히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검무극은 자신에게 어떻게 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소 보여주고 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이 대단한 사람들도 자신의 길을 찾아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는데. 이 대단한 사람도 지나가듯 한 한마디 약속을 지키러 이 먼 길을 오는데.

큰 가르침을 남겨주고 검무극과 일행들이 그곳을 떠나갔다.

금아린과 임혁은 그들이 석양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 서서 지켜보았다.

“아저씨.”

“네, 소가주님.”

“이거 꿈 아니지?”

“아닙니다.”

금아린의 얼굴에 환한 미소와 함께 어떤 결의가 스쳤다.

오늘 혈전낭의 단전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금룡세가 소가주의 마음에 빛나는 여의주가 생겨났다.

“하늘이 이런 굉장한 인연을 내게 준 것은, 한번 멋지게 살아보란 뜻이겠지?”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더라도

통천각 작전실은 오늘도 바빴다.

언제나처럼 수많은 정보가 날아들었고 군사들은 그것을 분석하고 분류했다.

그리고 오늘 생각지 못한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검우진의 방문에 군사들은 일을 멈추고 일제히 인사했다.

집무실에 있던 총군사 사마명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군사들은 야간 업무를 보는 군사들로 교체되었지만, 사마명은 아직 집무실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교주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와 차 한잔하려고 왔네.”

“이리 들어오십시오.”

사마명이 자신의 집무실로 검우진을 안내했다.

“앉으십시오, 교주님.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사마명이 직접 차를 우리는 동안 검우진은 자리에 앉아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책과 서류들이 가득했다.

“심법 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나?”

“네,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고 있습니다.”

검우진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알려준 이 심법은, 아마 모르긴 해도 무인이 간절히 바라는 절세심법일 것이다.

심법을 하면 할수록 건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은 한결 가볍고 상쾌했다.

“잠을 많이 자야 하네. 자네가 무너지면 본교가 함께 무너지네. 그러니 건강 관리 각별하게 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이야 늦게 자는 것이 평생의 일상이었으니 그렇다지만, 정작 요즘은 교주가 늦게 자고 있었다. 제시간이면 꼭 잠이 드는 교주였는데.

사마명이 검우진이나 검무극이 방문하면 내놓으려고 특별히 아껴둔 차를 직접 우려서 내왔다.

“드십시오.”

“맛이 좋군.”

교주가 왜 이렇게 잠 못 이루는지 사마명이 어찌 모르겠는가? 이 늦은 시간 자신을 찾는 그 마음을, 아들을 위하는 마음과 자신의 오랜 염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주의 마음을.

차를 마시던 사마명이 문득 지난 일을 떠올렸다. 총군사를 꿈꾸던 그 젊은 시절을.

“처음 제게 해주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교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이 싸움에서 지면 그대도 함께 죽게 될 거요. 그래도 내 군사가 되어 주겠소?”

후계 싸움이 한참이었던 그 시절, 당시 분위기는 검무극의 후계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했었다.

검우진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자네가 그랬지. 제가 이 공자님을 교주님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사마명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자넨 그 약속을 지켰지.”

사마명의 두 눈에 회한이 스쳤다.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그때 더 나은 방법이 있진 않았을까?”

검무극의 후계 싸움을 보았기에 그런 생각이 더욱 났다. 분명 더 나은 조언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검우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게 우리에겐 최선이었네.”

교주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때의 자신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고.

검우진이 창밖으로 보이는 전략지형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 푸른 선은 뭔가?”

지형도에 이리저리 푸른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소교주님의 행적입니다.”

검우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행적을 모두 추적하고 있나?”

그러자 사마명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교주께서 연락하실 수 있을 때마다 통천각으로 기별해 주고 계십니다.”

검우진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서 지형도 앞에 섰다. 따라 나간 사마명이 두어 걸음 뒤에 공손히 섰다.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니고 있구나.”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기별을 하고 있다면, 아들은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아버지, 이게 바로 제가 원하는 삶입니다.

아들은 자신에게도 말해왔다. 아버지도 제발 중원을 주유하며 놀러 다니라고. 아들은 이 여행을 통해 이런 전언을 보내는 것이다.

아버지, 우리 이렇게 살아요.

“무림맹이나 사도맹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나?”

“네, 없습니다.”

검우진이 사마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마정사, 세 후계자가 함께 중원을 놀러 다니고 있는데도 조용하다니.

“이 강호가 이렇게 대책 없었던 적이 있었나?”

질문을 하는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기에 농담처럼 물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언하건대 단 한 번도 없었을 겁니다.”

검우진의 시선이 다시 그 푸른 선들을 향했다.

사마명이 수하 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게.”

작전실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 이제 그곳에는 검우진과 사마명만이 남았다. 사마명이 작전실 벽에 숨겨진 장치를 조작하자.

드르르릉.

지형도가 있는 벽이 좌우로 열리며 그 뒤에 새로운 지형도가 나왔다. 다른 벽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벽이 드러나며 다른 정보가 적힌 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빛이 가득하던 지형도는 이제 붉은 색 물결이 가득했다.

지형도에 세워진 붉은 깃발들.

원래 마존기는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색깔이던 그것은 하나의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붉은색의 깃발들.

깃발에 적힌 검은 색의 한 글자들.

拳, 刀, 劍, 毒, 惡, 佛, 酒, 魂…….

개인이나 조직의 개성을 생각지 않고 오직 하나의 목표로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마존기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의 깃발도 마찬가지였다.

깃발은 전쟁기였고, 지형도는 바로 전시지형도였다.

마치 사마명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교주님,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푸른 선처럼 자유롭게 사시겠습니까? 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사시겠습니까?

“전쟁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소교주지만, 소교주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계속 커졌습니다.”

그야말로 모순적인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마존들의 무공 수위가 계속 올랐고, 교내 부패가 척결되면서 본교 전력이 계속 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주님과 소교주 모두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까지. 단언하건대 본교 역사상 당대의 전력이 가장 강력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무림일통은 정해진 결과라는 의미였다. 결정을 내리기만 하면 무림에 다시 없을 역사를 새기게 될 것이다.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전시지형도를 쳐다보았다.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소교주가 본격적으로 활약하면서 이길 확률이 올라간 만큼 전쟁을 하고자 하는 교주의 마음은 내려갔다는 것을. 또 그만큼 아들을 위하는 마음이 올라갔을 것이고.

지금 교주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온갖 상황에서 어려운 계산은 다 해내는 사마명이었지만, 검우진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쉽지 않았다.

사마명이 다시 장치를 조작하자 벽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들 앞에 붉은 깃발 대신 푸른 선들이 가득 펼쳐졌다. 그 푸른 여정을 바라보며 검우진이 물었다.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나?”

* * *

검무극이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강가에서 흐르는 물에 진흙을 씻어내고 있다가 아예 물로 뛰어든 것이다.

참방참방.

검무극이 강물을 가르며 시원하게 수영하는 모습에 이안이 달려들었다.

“저도 갑니다!”

이안이 뛰어들자 진하령이 뛰어들었다.

“나도 간다!”

그 모습에 진하군이 소리쳤다.

“넌 안 돼!”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을까 봐 소리쳤다. 달이 휘영청 밝았기에 다른 이들이 보게 될 거다.

순간 검무극이 수영을 멈추고 물 밖에 머리를 내놓은 채 말했다.

“이안은 되고?”

이안도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채 검무극의 장난에 장단을 맞췄다.

“너무하세요, 소맹주님.”

진하군이 살짝 당황했다. 동생이 갑자기 강물로 뛰어드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검무극이 비사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듬직한 사인이를 보게. 한 소저에게 그런 말 안 하잖아?”

그때였다. 비사인이 한설에게 말했다.

“안 되오.”

그 역시 검무극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준 것이다.

한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누가 말리면 더하는 성격이라서요.”

한설이 그대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북해에서 온 한설은 생각보다 수영을 잘했다.

“추운 곳에서 와서 수영을 못 할 줄 알았는데.”

검무극의 선입견에 한설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누군지 잊으셨어요? 찬물일수록 제 세상이죠.”

한설이 비사인을 보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누구 손짓인데 그냥 있겠는가? 비사인도 풍덩 물로 뛰어들었다.

밖에 혼자 남은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동생을 못 들어가게 해놓고 자신이 들어가기가 그랬기에 그냥 강가에서 옷을 씻었다.

그때 검무극이 수면을 손바닥으로 쳤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날렸다.

물방울 하나가 암기처럼 진하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하군이 살짝 몸을 돌려 피했다.

“하지 마!”

피잉! 피잉!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방울 두 개를 날렸다.

“이 동생만 위하는 악당!”

피잉! 핑! 핑!

진하군이 몇 차례 피하더니 결국 강물로 뛰어들었다.

“이 자식! 하지 말라니까.”

“드디어 악의 본성이 깨어났다!”

진하군이 수영으로 달아나는 검무극을 뒤쫓았다.

“왜 이렇게 빨라? 수공이라도 익힌 거야?”

뒤쫓는 진하군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자신도 함께 뛰어들어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불러주는 검무극이 고마웠다.

검무극이 물 위를 걸어서 달아나며 본격적인 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이안아, 무림맹이 쳐들어왔다!”

“하령아, 합공해서 신교를 친다!”

진하령은 오라버니가 이렇게 해맑게 장난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어려서 오라버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무극과 진하군이 등평도수(登萍渡水)에 수상비(水上飛)에 일위도강(一葦渡江)에, 그러다 허공답보(虛空踏步)에 능공허도(凌空虛渡)까지. 그들이 온갖 신위를 발휘하며 강에서 놀았다.

“아니, 이게 천마비행술까지 발휘하며 도망갈 일인가?”

“이렇게 무섭게 뒤쫓으면서 할 말은 아니지. 이안아, 사도맹에게 도움을 청해.”

“하령아, 우린 빙궁을 불러라!”

순간 검무극이 멈춰 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 취소하게. 그러면 저 두 사람 비운의 연인이 되잖아.”

“아, 취소하겠네.”

검무극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순진하기는! 이안아, 무림맹이 빙궁의 도움을 취소했다. 우린 계속 합공하자!”

그곳에는 정파도 사파도 마교도 없었다. 그저 친구가 좋고 노는 게 좋은 청춘들만이 있었다.

* * *

그날 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모두 둘러앉았다.

정말 신나게 놀고, 사냥해서 잡은 고기로 늦은 저녁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진하군이 한 가지 결정을 전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네.”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 여행이 즐겁지 않아서가 아니네. 그 반대네. 더 하다가는 돌아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네.”

사실 다른 이유가 컸다.

무너진 둑에 희생된 이들 때문이었다.

직접 구조와 복구 작업을 해서였을까? 죽은 이들과 아이들이 자꾸 생각났다.

물론 본단으로 돌아가서 둑부터 쌓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사인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읽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도 세워둔 계획이 있었다.

“그럼 이참에 우리도 가겠네. 이번에 나온 김에 북해에 다녀올까 하네.”

한설을 바래다주면서 북해빙궁의 궁주에게 인사하러 가겠다는 뜻이었다.

검무극이 넌지시 물었다.

“우리도 따라갈까?”

비사인이 그러자고 하려는데 한설이 딱 잘라 말했다.

“우린 무림맹과 동맹이었어요.”

물놀이할 때의 장난을 가져와서 거절하는 그녀였다.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사인이, 저 무서운 얼굴로 벌써 붙잡혀 살고 있어! 진하군 역시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중간에 헤어질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검무극은 여행을 끝내지 않았다.

“이안,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네, 소교주님.”

이안의 얼굴에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스쳤다. 이내 그녀가 한 사람을 챙겼다.

“친구, 같이 가자.”

이안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았지만 진하령은 거절했다.

“나도 바쁜 사람이야.”

진하군이 어찌 동생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자넨 이 무인이 왜 그렇게 좋은가?”

평생 이런 질문할 성격이 아니지만, 동생을 위해 물었다. 농담처럼 물었지만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애초에 안 되는 사람을 마음에 품은 동생을 위해서. 오늘 딱 잘라내라고.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진하군이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그래, 이제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해줘야 할 순간이었다. 진하령을 위해서, 또 진하군을 위해서도.

검무극이 옆에 앉은 이안을 쳐다보았다.

왜 이안이 좋냐고?

이 모든 게 이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몸을 던져 화무기의 검기를 막아내었기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좋은 이유는 단지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이곳에서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언젠가 단둘이 있을 때 이안에게 해줄 말이었으니까.

“예쁘잖아?”

검무극은 이안이 평범한 얼굴이었다 해도, 혹은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고치지 못했다고 해도, 이안을 선택했을 것이다.

검무극의 대답에 진하령이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외모만 보고 여자를 판단하다니!”

“억울하면 호북일미가 아니라 천하제일미로 태어났어야지!”

“나쁜 놈!”

“우리가 마교라는 것을 잊지 마라!”

진하령은 오히려 검무극이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얼굴에서 밀렸어, 라고 위안할 수 있었으니까. 저 얼굴만큼은 누구도 상대가 안 되었으니까.

“오라버니, 동생이 이런 취급받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거야? 정마대전 일으킬 거라고 해줘야지.”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이 무인이 아름답긴 하잖아?”

“못 살아! 정말!”

진하군 역시 검무극이 고마웠다. 이렇게 딱 잘라줘야 동생 역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테니까.

“그럼 이 밤이 마지막인가?”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이 대답했다.

“아쉬울 때 헤어져야 다음 만남이 간절하겠지.”

“자넨 지금 전혀 아쉬워하는 얼굴이 아니잖아!”

뒤에 있던 한설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우리 약속하자. 해마다 한 번은 날을 정해서 며칠 만이라도 여행하자고. 우리가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더라도.”

진하군과 비사인은 과연 맹주가 되어서도 그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지금 이 마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세.”

“약속하지.”

두 사람이 약속하자 검무극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빠지면 벌금으로 만년설삼 한 뿌리야. 농담 아니야!”

모두 힘차게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꼭 저런 규칙 정하는 사람이 빠질 일이 생기던데.”

“불길한 소리 누구야!”

다들 칼 같은 성격들이었지만 오늘의 이별만큼은 그 칼이 잘 듣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들의 이별은 계속되었다.

소교주의 직속 수하라고?

태수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개입하지 말라고 했던 장보도 일에 개입한 사실을 알고 계셨을 텐데.

그래서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왔냐?”

“네.”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앉은 채 장비를 손질했다.

태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에게 사죄부터 드려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한데 저 고집스러워 보이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으니 또 화가 났다. 아들이 위험에 휩쓸리지는 않았는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물어는 봐야 하지 않는가?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밥은 먹었냐?”

“도둑놈이 밥 굶고 다닐까 봐요.”

원래라면 아버지에게 다 말하려고 했었다.

장보도를 얻어서 달아나는 과정에 천마신교 소교주를 만났고, 천목산 연못 아래에서 겪은 그 엄청난 일들까지 모두.

마교와 엮였음에도 이렇게 살아 돌아온 그 기적 같은 일을 모두 말씀드리려 했다.

그 말은커녕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방에서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건수가 하나 있다. 시간을 들여서 준비해야 할 일인데…….”

근래에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이인 일조로 함께 작업했다.

“아뇨. 당분간 생각할 게 있어서요.”

태수는 그 목표가 어디의 어떤 물건인지 묻지 않았다.

“알겠다.”

저렇게 알았다고 말하는 것도 화가 났다.

“밥 챙겨 먹고 다녀라.”

아버지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부모가 자식에게 남기는 상처는 흉터라도 남지만, 자식에게 입은 상처는 흉터조차 남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후 태수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냥 천마신교로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문득 소교주가 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네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면 찾아와라.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사과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어찌 인생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웠고 시간은 계속 흘렀다.

태수는 자신이 또 아버지 핑계를 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 때문에 천마신교에 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서의 삶이 두려워서 못 가고 있었다.

소교주가 헤어질 때 그랬다.

―너를 본교에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나와의 인연으로 가능하겠지만, 교로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나와는 관계없는 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울 수도 있다. 나는 계기가 되어 줄 뿐, 바뀐 인생을 살아가는 건 너다. 잊지 마라, 환경이 바뀌어도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부분이 자꾸 신경 쓰였다.

내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울 수 있다.

과연 소교주가 옆에 있어 주지 않는데 그 거친 마인들 속에서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 자신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것이라 핑계를 댔던 것이다. 화해를 미루고 있는 것이리라.

‘난 변한 게 아무것도 없구나.’

아버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을 때도 그건 핑계였으니까.

―아버지의 그 원칙은 선행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버지의 도덕심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답답했을 뿐이다. 최고의 대도가 되어 모든 것을 다 훔칠 수도 있는데, 왜 악인의 것만 훔치려는 것인고, 왜 힘들게 훔친 것들을 나눠주는지.

원래라면 저는 욕심이 납니다, 라고 말하고. 아니다, 아들. 최소한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일일진대. 반대로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혔다.

‘젠장.’

엉망진창인 시간이 흘렀다.

그래, 괜찮았다. 아버지께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인생을 바꿀 기회에서 뒷걸음질을 칠 수도 있다. 술 마시고 방황 좀 하면 어떤가? 아직 젊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그러지 않아야 했다. 그곳에 아버지를 혼자 보내서는 안 되었다.

* * *

천마신교 산양(山陽) 지부장 임주(林柱)는 눈앞의 태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그자의 아들이라고?”

“네, 제가 대도 태곤의 아들 태수입니다.”

태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었다. 오직 그의 두 눈만이 상처 입은 맹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네가 태곤의 아들이란 증거는?”

그러자 태수가 품에서 전표가 든 전낭을 하나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임주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지부 금고에 들어 있던 자신의 전낭이었다.

임주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태곤의 아들임을 증명하기에 이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왜 나를 찾아왔지?”

이유를 짐작했지만 임주가 물었다. 과연 예상한 대답이 나왔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지금 태곤 때문에 일대가 시끄러웠다.

대도 태곤이 혈영문(血影門)에 도둑질하러 잠입했다가 붙잡혔다.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던 그가 도둑질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무림이 떠들썩했다.

혈영문은 사도맹에 속해 있으면서 악명이 높은 문파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절대 문파가 손해 보는 일이 없었고, 자신들보다 약한 이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냉정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빠르게 세를 확대할 수 있었다.

혈영문은 태곤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 처형하겠다고 밝혔다.

“공개 처형일이 이틀 후였던가?”

“내일입니다.”

“왜 나를 찾아왔지?”

태수는 혈영문이 공개 처형을 발표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그들에게 붙잡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술독에 빠져 지내다가 며칠이나 늦게 알았다.

‘나 때문이다.’

아버지가 붙잡힌 것이 자신 때문에 집중하지 못해서라 여겼다.

그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혈영문으로 잠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공개 처형을 발표한 그들은 누군가 구하러 올 수도 있다고 예상했는지 그야말로 철통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그때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천마신교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저는 소교주님과 친합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감히 소교주님을 입에 담아? 단칼에 베어 버리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다행히 임주는 그런 성급한 성격이 아니었다.

“소교주님과 친하다고?”

“네.”

아버지가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최고의 도둑이 되려면 사람 마음도 훔칠 줄 알아야지.

아버지를 살리려면 눈앞의 이 지부장의 마음을 훔쳐야 한다.

“전 소교주님의 휘하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예정이다?”

임주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황당했다. 내일 처형당할 대도의 아들이 대뜸 찾아와서 소교주와 친하다?

“그것도 직속 수하로 삼겠다고 하셨지요.”

어쩌면 소교주는 이미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당당히 자신을 응시하는 태수를 보며 임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천마신교의 지부를 찾아와 소교주를 언급하며 사기를 치겠는가?

사기가 아니다. 만약 사기였다면 직속 수하라는 그럴듯한 증거까지 조작해서 왔겠지. 들어갈 예정이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분명 소교주와 안면은 있는 모양인데.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아버지를 구해주십시오.”

임주가 빤히 태수를 쳐다보았다.

“왜 소교주님께 직접 도움을 청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서 소교주님께 알릴 시간이 없습니다. 도와주신다면 나중에 소교주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주가 차갑게 말했다.

“이거 미친놈이군.”

순간 태수가 흠칫했다.

“네 말만 믿고 혈영문을 건드렸다가 나중에 소교주께서 너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시면?”

“아닙니다. 저를 정말 알고 계십니다. 만약 제 말이 거짓이면 죽음으로 벌을 받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문제는 너 하나 죽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지.”

그럼에도 당장 내치지 않고 고민하는 것은 정말 이자가 소교주와 친해서 나중에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소문 속의 한 사람 때문에.

정안지부장 강달.

천마신교 모든 지부장들의 꿈과 희망.

소교주와의 인연으로 본단으로 올라간 그의 출세담은 모든 천마신교 지부장들의 전설이었다.

‘내게 그런 행운이 찾아온 것인가? 아니면 지독한 불행의 유혹인가?’

신중한 저울질을 끝내 그가 내린 결론은 거절이었다.

“미안하지만 도울 수 없네.”

나중에 태수를 믿기 어려웠다 하면 적어도 자리는 보존하겠지만, 정말 소교주와 별다른 관계가 없는 자라면 자신은 촌구석 마구간지기로 쫓겨나게 될 테니까.

지부장계의 전설은 아직까진 강달이 독차지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혈영문 정문 앞 공터에 커다란 무대가 세워졌다.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몰려들었다. 전설적인 도둑인 태곤을 보기 위해서였다.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채 태곤이 무대 위로 끌려왔다. 고초를 당했는지 그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도둑 놈의 새끼!”

“죽여라!”

악다구니를 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안타까워하며 그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는 악인들의 돈을 훔쳐 가난한 이들을 도왔던 인물이니까.

태곤이 주위를 가득 메운 군웅들을 쳐다보았다. 욕하는 사람, 웃는 사람, 슬픈 얼굴로 바라보는 사람, 온갖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태곤이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맨 앞줄에 보란 듯이 아들 태수가 있었던 것이다.

‘수야.’

마지막 순간에 아들을 보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었고, 동시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멍청한 짓을 하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똑똑한 녀석이니까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경공이 아무리 빨라도 이곳에 깔린 수많은 혈영문 무인들을 뚫고 자신을 구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무대 위로 중년인이 올라왔다. 차갑고 매정한 인상을 지닌 그가 바로 혈영문주 거백(巨栢)이었다. 그는 잔혹하리만치 냉정한 성정으로 유명했다.

거백이 모여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주위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훔친 돈으로 산 환호는 어디에 있느냐? 악인의 재물만 훔친다고? 그럼 그 썩은 고기를 먹은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의적을 지킬 수호대는 어디에 있느냐?”

그곳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거백의 시선이 태곤을 향했다.

“네게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함께 도적질을 하고 다녔다지?”

거백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네 아들은 어디 있느냐?”

태수는 제자리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혹여 아들과 눈이 마주치는 모습을 들킬까 봐 태곤은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여기 어딘가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제 아비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겠지. 네가 진정 용기가 있는 남자라면, 당당히 나와서 아비를 구해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지? 너흰 도둑질이나 하는 쓰레기들이니까.”

그의 도발에도 태수는 나오지 않았다. 태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했다, 아들아.’

부디 복수할 생각 말고, 더는 도둑질도 하지 말고 네 뜻대로 살아라.

직접 죽이려는지 거백이 검을 뽑아 들었다.

태곤은 아들을 보지 않고 눈을 감았다. 괜히 눈이 마주쳤다간 아들의 마음만 아프게 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멈추시오.”

그곳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태수였다.

순간 태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 돼!’

하지만 이미 태수는 앞으로 걸어 나와 무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그분의 아들이오.”

사방에서 탄성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자도 있었고, 안타까운 한숨도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비록 도둑놈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효심은 깊다?”

밤새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연막탄을 터뜨려서 혼란한 틈을 타서 탈출시킬까? 저들 고수 중 하나를 돈으로 포섭해야 하나? 그들의 부하로 위장해야 하나?

하지만 단 하루 만에 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혈영문에는 고수들이 너무 많았다.

태수가 생각한 마지막 방법은 이것이었다.

“나는 천마신교 소교주의 직속 수하요.”

지부장 앞에서는 직속 수하가 될 사람이었는데 이젠 아예 직속 수하로 소개했다.

죄송합니다, 소교주님.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거백의 얼굴이 꿈틀했다.

“네가 마교의 소교주 수하라고?”

“그렇소.”

거백은 그럴 일말의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소리 내서 웃었다. 무대 위에 있던 그의 수하들도 웃었고,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면 안타까워하던 이들은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아버지를 구하려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어쨌든 한 가지는 같았다. 웃는 쪽이든 안타까워하는 쪽이든,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백이 눈짓하자 무대 위의 고수들이 달려들어 태수의 무릎을 꿇게 했다.

“자식이 먼저 죽는 걸 보는 것만큼 큰 벌은 없지.”

아혈이 제압당해 있던 태곤이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제발 말을 하게 해달라는 간청이었다. 거백이 눈짓하자 무인 하나가 그의 아혈을 풀었다.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도둑질을 한 것은 저입니다! 아들을 살려주시면 하라는 것 다 하겠습니다.”

비웃으며 그를 바라보던 거백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네 아들을 살려주면 선한 자들의 물건도 훔칠 수 있나? 착하고 좋은 사람들 재산을 송두리째 훔쳐 올 수 있나?”

태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들보다는 자존심을 선택하는군.”

바로 그때 태수가 아버지에게 못다 한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때 드린 말씀은 제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 물건이나 훔치는 분이 아니라서 아버지를 좋아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만큼은 꼭 해드려야 했다.

속상한 태곤이 소리쳤다.

“왜 왔느냐? 대체 왜! 그깟 말이 뭐가 중요하다고! 이 늙은 아비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때 태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을 보자 태수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 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순간 나서지는 않았어야 했나 보다. 아버지의 저 눈물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도도 안 해보고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거백이 태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눈물이나 질질 짜는 네까짓 게 마교 소교주의 직속 수하라고?”

태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 내가…… 소교주님의 직속 수하니…… 아버지 풀어드려라.”

일부는 꼴사납다고 웃어 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가서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군가 나서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네가 마교 소교주 수족이면, 난 마교주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반가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의 잡음과 소음을 누르며 그 말이 울려 퍼졌다. 웅혼한 내공이 담긴 한마디가 그곳에 있는 모두의 귓가에 박혔다.

“아버지!”

다시 들려온 반가운 외침에 군웅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걸어 나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거백을 보며 말했다.

“어? 우리 아버지가 아니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수하였습니다

혈영문주 거백은 등장한 청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내공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정적이 흐르던 그곳에서 태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교주님?”

태수는 정말 놀랐다. 여기서 검무극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정말 소교주님이십니까?”

소교주란 말에 모두 충격을 받았다. 앞서 그가 마교 소교주의 직속 수하라고 말했었는데, 소교주님이라고? 군웅들이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검무극이 태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태수야, 잘 지냈느냐?”

잘 지냈냐는 말에 태수의 가슴이 울컥했다. 너무 놀라서 쏙 들어갔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려 했다.

“아뇨, 못 지냈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못 지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교주란 말을 들었음에도 거백은 믿지 않았다.

“소협은 누구신가?”

“부모가 어찌 자식을 못 알아보시오?”

검무극의 농담에 거백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상 가장 기분 나쁘고 찝찝한 농담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무극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순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난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그곳에는 놀람과 경악이 만들어낸 침묵이 흘렀다.

거백이 검무극의 주변을 살폈다. 호위로 보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주위 사람들 역시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거백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사기꾼 놈들이 머리를 좀 썼구나.”

아들놈이 아비를 구하려고 꾸민 일이라 여긴 것이다. 마교 소교주를 사칭해서 이 상황을 모면하려고.

“여기서 소교주 행세를 하면 내가 어이쿠, 소교주님 하면서 저놈들을 풀어줄 줄 알았느냐?”

거백이 상대가 소교주임을 믿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마교 소교주가 혼자서 이렇게 다닐 리가 있겠는가?”

어디서 젊은 고수를 구해와서 소교주 행세를 해서 제 아비를 구해가려고 한 것이리라.

군웅들이 거백의 말에 동의하며 웅성거리자 검무극이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이 정도 사기를 칠 생각이었다면 수하들도 만들어서 데려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소교주라는 것을 어찌 믿겠는가?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 자를 미처 구하지 못했겠지.”

지켜보던 군웅 중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정말 마교 소교주라도 와서 저들 부자를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들이 봐도 마교 소교주가 도둑 부자를 구하러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저렇게 혼자 다니지도 않을 것이고. 마교 소교주 행차라면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 숫자만큼 데리고 다니지 않겠는가?

검무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대로 올라갔다.

무대에 있던 혈영문 무인들이 나서며 검을 뽑으려 했다.

“그 검 뽑으면 돌이킬 수 없으니, 수하들 물러나게 하시오.”

거백은 그 좋은 경고를 반대로 오해했다.

‘가짜가 확실하다.’

진짜 소교주였다면 실력 발휘를 했을 테니까.

그랬기에 거백이 수하들을 뒤로 물렸다.

“괜찮으니 물러서라.”

무대에 올라선 검무극은 그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태수 부자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검무극이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 내 직속 수하가 그대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소?”

거백은 기가 막혔다.

“끝까지 소교주 놀음을 하시겠다?”

좋아, 그 장단에 맞춰주지. 대신 너도 오늘 살아서 여길 내려가지 못할 거다.

어차피 이 무대는 자신의 무대였다. 아무리 상대가 고수라도 자신들의 합공을 감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

“부모를 잘못 만난 죄가 있지.”

검무극의 시선이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태곤을 향했다. 태곤은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빛을 보는 순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거기에 옆에서 검무극을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을 보았다. 존경심과 경외심 가득한 그 눈빛과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소교주다.’

연기로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태수가 정말 마교 소교주의 직속 수하가 되었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소교주가 어떻게 직접 자신들을 구해주러 온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소교주의 눈빛에 어떤 호의가 깃들어 있음을.

태수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검무극의 호의는 그로 인한 것이었다.

오랜만이오, 당신.

검무극은 회귀 전 삶에서 태곤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때는 오직 앞만 보고 달리던 때라서 그 호의를 다 갚지 못했다. 그리고 운명은 다시 그를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너는 부모를 잘못 만났느냐?”

검무극의 물음에 태수가 아버지에게 못다 한 진심을 전했다.

“아닙니다. 제 인생에 가장 큰 복은 아버지를 만난 일입니다.”

그 말에 태곤의 얼굴에 감격이 스쳤다. 아들에게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말이기도 했다.

“날 만난 게 아니고?”

긴장한 태수는 지금 검무극이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한 채 고지식하게 대답했다.

“아뇨, 소교주님은 두 번째입니다.”

“아버지라서 봐준다.”

검무극이 다시 거백을 향해 돌아섰다. 거백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내 수하가 부모를 잘못 만난 것 같지는 않소.”

“도둑질을 가르치는 부모를 뒀으니 잘 만난 것 같지도 않은데.”

“나도 자식을 낳으면 나쁜 놈들은 혼내줘라, 가르칠 거요.”

순간 거백의 눈가가 꿈틀했다. 그가 분노를 터뜨리기 전에 검무극이 먼저 그를 꾸짖었다.

“아까 내 수하를 죽이려고 하면서 그랬지? 자식이 죽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될 거라고.”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으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사파라지만 지나치다.”

지켜보던 이들 중에서 자식이 있는 이들은 모두 그 말에 공감했다.

거백의 눈에는 이제 살기가 가득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자신을 평가하고 꾸짖어?

“저 새끼 당장 내 앞에 꿇려.”

무대 위 혈영문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 모습에 군웅들은 안타까워했다. 옳은 말을 하는 청년까지 죽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군웅들 사이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번에는 더없이 맑고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감히 소교주님에게 검을 뽑다니!”

말이 끝나는 순간 군웅들 사이에서 한 여인이 허공을 가르며 무대로 몸을 날렸다.

“문주님을 지켜라!”

무대 위에 있던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번쩍하는 순간!

십여 가닥의 검선이 번쩍였다.

사방에서 달려들던 혈영문 무인들이 제자리에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군웅들은 비로소 인형처럼 멈춘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여인을 보았다.

이안이 검을 늘어뜨린 채 그들 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가 검기를 발출해서 그들의 마혈을 제압한 것이다. 조금만 힘 조절이 어긋나도 검기에 살이 뚫려 버리기에 검기로 혈도를 제압하는 것은 손이나 지풍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경지였다.

거백이 놀란 얼굴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녀가 보인 한 수는 문주인 자신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였다. 이게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무신(武神)이다!’

지켜보던 군웅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그녀의 실력에 놀랐고 미모에 감탄했다.

이안의 검이 거백의 목을 겨누었다. 거백은 이렇게 무력하게 목을 내준 적은 처음이었다. 수하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혈까지 제압하다니.

그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소교주가 아니라면 그게 더 문제겠는데? 당신 말대로라면 혈영문의 고수들이 고작 사기꾼들에게 당한 거잖아?”

거백은 이 여인의 실력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정말 마교의 소교주군.”

일개 도둑 따위가 사기를 치기 위해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수하를 데려가도 되겠지?”

원래라면 그냥 보내야 했다. 하지만 거백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수하는 데려가더라도 저자의 아비는 데려갈 수 없소. 그자는 본문의 보물을 훔치러 들어온 자요. 그냥 풀어줄 수는 없소.”

그는 믿는 바가 있었다. 사도맹 소속인 자신을 함부로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수하들의 마혈만 제압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죽였겠지.

“설마 신교의 소교주께서 강호의 법도를 저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리시겠다?”

“그래야 이 많은 이들이 신교의 소교주께서 강호의 도리를 아는 분으로 기억하지 않겠소?”

거백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오늘 이 일이 중원 곳곳에 퍼져나갈 것이고, 마교 소교주에게 당당히 맞선 혈영문주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본문이 사도맹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아, 그러잖아도 지금 사도맹에 연락하려고 했지.”

검무극이 이안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사도맹에 기별해라.”

무슨 기별이지 궁금해하는 그때.

“혈영문주가 본교에 대죄를 지어 벌을 준다고 전해라.”

거백이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오? 내가 대죄를 짓다니?”

검무극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엄하신 천마신교의 교주님을 사칭한 죄!”

더 놀라운 말이 덧붙여졌다.

“천마를 사칭한 죄를 물어 너를 참하겠다!”

죽이겠다는 말에 거백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농담으로 했던 말이지 않소?”

“농담? 감히 천마신교 교주를 두고 농담거리로 삼아?”

거백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상대가 이렇게 밀어붙이면 사도맹에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천마와 관련한 일이었으니까.

‘젠장!’

그때 이안이 살기를 드러냈다.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죽일 것만 같았다.

거백은 공포에 떨었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살고 싶나?

거백은 감히 성질대로 하지 못했다. 여기서 뻗대면 정말 죽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거백은 어느새 자신의 마혈이 풀려 전음을 쓸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들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신의 몸을 아기처럼 다루고 있었다.

―살고 싶습니다.

―이번에 저 대도가 훔치려 했던 물건을 팔아서 사람들을 도와라. 이 지역에도 홍수가 나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을 도우면 되겠지.

애초에 나설 때부터 검무극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가 선을 넘은 악행을 저질렀다면 사도맹에서 그를 벌해야 할 것이다. 그건 비사인에 대한 예의였으니까.

검무극이 이안에게 검을 거두게 했다.

“장난이었소. 사도맹에 위명이 쟁쟁한 분을 내가 어찌 죽일 수 있겠소?”

거백 역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농담을 했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소교주님 부탁이신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두 사람 모두 데려가십시오.”

“고맙소.”

마치 두 사람은 서로 장난을 쳤다는 듯 함께 웃었다.

거백이 군웅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귀한 만남이 있었으니, 대도가 훔치려 했던 물건을 내놓아서 이번에 수해를 입은 피해자들을 돕도록 하겠소.”

지켜보던 이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거백이 소교주 때문에 선행을 베푼다는 것을.

한 사람이 박수를 치자 그것을 신호로 모두가 환호했다. 거백이 선행을 베푸는 것에 환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부분의 환호는 그가 소교주에게 굴복한 사실에 대한 환호였다. 그만큼 평소 혈영문의 악행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검무극이 그와 작별을 고했다.

“자,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살펴 가십시오.”

돌아보지 않더라도 거백이 어떤 눈빛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고비를 넘겼으니 여전히 악행을 저지를 것이다. 태곤 부자에게 복수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한다. 그에게 닥친 홍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을.

이번 일은 당연히 비사인 귀에 들어갈 테고, 비사인은 자신이 나선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조사를 통해 저들에게 선을 넘은 악행이 있었다면 비사인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검연이 아니라 실제 신분을 밝혀서 개입한 이유기도 했다.

* * *

검무극과 이안이 태수와 태곤을 데리고 인근의 숲으로 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검무극에게 몇 번이나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게 감사를 전한 후 태곤은 아들을 와락 안았다. 그는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었다.

이윽고 태곤이 검무극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다들 저를 의적이라 부르고 대도라 부르지만 사실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전 훔친 재물의 일부를 아들을 위해 남겨두었습니다. 아들 이름으로 중원의 전장에 보관해 두었지요.”

태수가 깜짝 놀랐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악인들에게 훔친 재물의 전부를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고.

하지만 아버지가 그 돈을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내게 변명할 것 없소. 각자 인생이니.”

태곤이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이 태수에게 물었다.

“내 수하가 될 거냐?”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태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이 소교주님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하였습니다.”

천마신교에 투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인생을 응원했다.

“네가 아버지를 위해 목숨 걸고 나서던 그 순간을 기억하며 산다면 앞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소교주가 자신을 구해주러 온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널 위해서 네 아버지를 구한 게 아니다.”

“네?”

검무극이 이곳의 일을 알아차린 것은 통천각을 통해 태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태곤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오래전에 그대에게 빚을 졌소. 이것으로 그대에게 진 빚은 다 갚은 거로 하겠소.”

당연히 태곤은 기억나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대체 언제 빚을 졌다는 말인가?

하지만 검무극은 그 내용을 말해주지 않았다.

“직속 수하야, 잘 살아라!”

검무극이 그 말을 남기고 이안과 함께 몸을 날려 그곳에서 사라졌다.

태곤 역시 결심한 바가 있었다.

“이제 더는 도둑질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태수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전에 네가 했던 말이 옳다. 널 위해 돈을 남긴 것은 결국 날 위해 남긴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난 내 도둑질을 합리화했다.”

그랬기에 아들의 말이 더 상처가 되었던 것이리라.

“아버지.”

“왜 그러느냐?”

“우리 이제 제대로 훔쳐보죠.”

“뭐?”

아버지도 자신도 평생 배운 게 도둑질인데. 다른 인생을 산다고 뭐가 행복하겠는가?

“이제 진짜 대도가 되어 보자고요. 후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그런 대도 말입니다. 전 오늘 일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태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처음부터 이 길을 걸었어야 했다.

태곤이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함께 웃으며 검무극과 이안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은 사라졌지만, 태수가 뒤늦게 소리쳤다. 한 사람을 잊고 있었다. 그 냄새 잘 맡았던 친구를.

“지한에게 이 말을 꼭 전해주십시오!”

다음에 자신을 만나면 좋은 냄새가 날 거라고.

딴 데 가지 말고 우리에게...

검무극과 이안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옆으로 한 취객이 건물 앞 계단에 주저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안은 내심 생각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저리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는 걸까?'

그때 함께 노래를 듣던 검무극이 말했다.

“노래 겁나게 못 부른다.”

그 말에 이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노래 실력을 따지면 어떻게 해요?

기녀들이 나와서 취객을 데리고 들어갔다.

“바람 쐬러 가신다더니 여기서 뭐 하세요.”

그때 반대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여기 루주 나오라고 해! 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안이 말했다.

“여기 루주가 누군지는 알고 저러는 걸까요?"

검무극과 이안이 있는 곳은 바로 천화루 내부였다.

중원을 주유하던 그들이 천화루주를 만나러 온 것이다.

소리를 질러대던 취객이 두 사람에게도 시비를 걸었다.

"야! 너희 뭐야? 뭔데 노려봐. 너 뭐야?”

여기 이분은 또 누군지 알고 저러는 걸까?

“아뇨, 갑니다, 가요. 쳐다봐서 죄송해요!"

이안이 검무극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가요, 우리까지 저 고달픈 인생에 끼어들지 말아요.”

뒤에서 취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기녀들이 나와서 그를 달래서 데리고 들어갔다. 어지간한 난동이 아닌 이상 무인들이 동원되지 않았다.

“어휴, 나는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이 장사는 못 하겠다. 저 꼴을 매일 어찌 보나?"

“막상 하면 제일 잘 하실 거면서.”

아마 검무극이었다면 그 노래 부르던 취객과 같이 앉아서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검무극과 이안이 천화루주의 거처가 있는 내원으로 들어섰다. 내원 곳곳에 은신하고 있는 무인들이 느껴졌다.

예전에 왔을 때도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 은신한 이들이 더 고수들이었다.

천화루 역시 여러 고비를 넘겨오면서 점점 더 기반을 갖춰온 것이다.

내원의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의외의 두 사람이 검무극과 이안을 맞았다.

두 명의 무면객이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검무극은 그들이 가면을 벗지 않더라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였다. 십칠교 역시 무면객 가면을 쓰고 있는 걸 보니, 무면객이 된 모양이다. 그녀의 새하얀 가면 옆에 +七이 적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두 사람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교주를 향한 그들의 눈빛은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자신들의 사랑을 이어준 결정적인 사람이 바로 검무극이었으니까.

특히 초승달 무면객은 검무극을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검무극이 해준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에게 함께 무면객이 되기를 강요해도 되겠나를 고민했었는데.

─후회 없이 무면객 생활 한 번 해보고 같이 도망가게.

그 이후 십칠교의 무면객 생활이 시작되었다. 초승달 무면객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십칠교는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의외로 가면의 삶이 그녀와 잘 맞았다.

“두 사람이 왜 여기에? 혹시 파견 나왔나?"

천화루주를 지켜주라고 극악소마가 파견을 내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 뒤쪽 건물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파견은 제가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극악소마였다.

“아니, 소마님은 언제 와 계셨습니까?"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좀 됐습니다.”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는 극악소마를 수행하기 위해 따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들을 소교주님이 특별히 아끼시는 거 같아서. 바람이라도 쐬어주려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검무극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은 청춘이잖아요?"

그때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소교주님과 이 무인만큼 보기 좋을까요?"

뒤따라 나온 그녀는 바로 천화루주였다. 두 무면객이 청춘인 것처럼 검무극과 이안 역시 천화루주가 보기에는 정말 예쁠 때였다.

"어서 오세요, 소교주님.”

오랜만에 보는 천화루주는 화려한 화장에 잘 꾸민 옷차림이었는데, 무엇보다 표정이 밝았다.

"루주님은 더 아름다워지시고 밝아지셨습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를 슬쩍 쳐다보며 대답했다.

"좋아질 수밖에 없잖아요?"

극악소마가 와서 행복하다는 말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이안이 극악소마와 천화루주에게 인사했다.

“두 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극악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고, 천화루주는 적극적으로 이안을 챙겼다. 천화루주가 이안의 손을 잡으며 반가워했다.

“이 무인, 보고 싶었어요. 못 본 사이에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실제로 외모가 바뀐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여행하는 사이에도 이안의 무공 실력은 상승해서 그녀의 분위기나 기도가 바뀌었다.

“감사해요, 루주님. 저도 뵙고 싶었어요.”

검무극이 그 정도만이 아니라는 듯 나서서 말했다.

“루주님 뵈러 가자고 어찌나 졸랐는지 모릅니다.”

사실이었기에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항상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천화루주였다. 단지 검무극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안에게도 천화루주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안은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고치지 못했을 때였다. 그럼에도 천화루주는 이안의 진면목을 알아봐 주었다.

자신이 큰일 할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을 해준 사람도 천화루주였다.

꼭 그래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서 그녀를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천화루주는 그런 이안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으로 지켜보더니.

“이 무인, 남자들끼리 놀게 두고 우리 산책이나 할까요?"

“네, 좋아요.”

검무극이 저만치 걸어가는 천화루주에게 소리쳤다.

“남자들끼리 놀게 하고! 그 말 우리 남자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자주자주 해주십시오!”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외침에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님은 한결같으시죠?"

이안의 말에 천화루주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많이 달라 보이시는데요?”

“소교주님이요?”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디가 달라 보이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대신 여행에 관해 물었다.

"여행은 즐거우세요?”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함께하는 여행인데 즐겁지 않겠는가?

천화루주만큼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사람임을 알기에, 그녀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루주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소교주님을 졸라 여행 일정을 바꿔서 왔어요.”

이안이 천화루주를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루주님이 해주시는 집밥이 먹고 싶었나 봐요.”

예전에 안가에 갇혀 있을 때 천화루주의 요리 실력을 맛봤던 이안이었다.

그러자 천화루주가 소맷자락을 걷었다.

“제가 또 실력 발휘를 한 번 해야겠군요.”

두 여인이 마주 보며 웃었다.

이안을 바라보던 천화루주의 시선이 밤하늘의 별들을 향했다. 그녀의 눈빛에 현기가 스쳤다.

“이 무인께서는 자신의 운명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순간 이안이 흠칫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천화루주는 자신의 운명을 본 것처럼 말했다.

“저는 제 운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요.”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뇨, 이 무인은 느끼고 있을 거예요.”

이안은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행을 가자고 하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ᅳ진짜 이안을 찾으러.

이안은 안다. 그 말은 검무극과 자신의 관계에 변화를 예고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운명과 관계가 있을 것임을.

천화루주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자신을 믿으세요. 이 무인은 세상 누구보다 큰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이런 말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이런 말씀이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제가 보고 느낀 대로 말씀드릴 뿐이에요.”

과연 그녀가 자신에게서 본 것은 무엇일까?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천화루의 가장 높은 건물 지붕 위에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저 멀리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은 즐거우십니까?”

“네, 재밌습니다. 지난 인연들도 만났고, 중원미식탐방의 절반 이상이 엉터리 맛집이란 것도 확인했고요.”

검무극의 농담에 극악소마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검무극이 한 가지 사실을 덧붙였다.

“사실 저는 이번 여행에서 답을 찾기 위해 나왔습니다.”

극악소마는 그게 어떤 문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과 단둘이 하는 여행이었으니까, 그녀와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답은 찾으셨습니까?”

검무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검무극이 처음 회귀 했을 때는 이안을 떠나보내려 했다. 실제로 떠나라는 말도 했고. 최대한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이번 생 역시 혼자 살려고 했었으니까. 지난 그 어둡고 힘든 삶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회귀 후의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바뀌었다. 아버지와의 관계, 마존들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관계. 소중한 관계들이 늘어나면서 욕심이 생겨난 모양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었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처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극악소마는 답을 찾았다고 했음에도 검무극에게서 어떤 망설임을 보았다.

"뭐가 걱정되십니까?"

검무극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제가 행복을 꿈꾸어도 될까요?”

천하를 꿈꾸어도 될 사람의 대답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극악소마는 이 물음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종종 검무극에게 느꼈던 어울리지 않는 어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서 나온 질문임을 알 수 있었다.

"뭐가 불안하십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과한 욕심을 부려서 다시 천살성과 같은 거대한 불행이 찾아올까 두렵습니다. 천살성은 이미 왔으니, 그보다 더 큰 불행이 올지도 모르죠.”

극악소마는 그게 왜 과한 욕심이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우리가 그 불행과 어둠을 가장 잘 상대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딴 데 가지 말고 우리에게 오라고 하십시오."

극악소마는 소교주님에게 오라고 하십시오, 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라고 말했다.

어떤 어둠이 와도 함께 있을 거라는 의미임을 알았기에 검무극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니 소교주님이 행복해지시는 것은 다시 무림을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행복해져도 된다는 말을 이렇게 멋있게 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서일 것이다. 마음속 깊이 묻어둔 말을 이렇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그럼 소마님 믿고 행복해져 볼까요?”

“여기에요, 루주님이 말씀해 주신 곳이.”

천화루주는 인근에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둘이 가서 산책해 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수백 년은 된 수양버들이 호수로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곳에 하늘의 별이 부서져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핀 호숫가로 수백수천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다녔던 것이다.

풀 냄새와 물 냄새, 오래된 나무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서서 검무극과 이안은 그 아름다운 광경에 빠져들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이안의 감탄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그도 처음이었다.

이안이 손을 내밀자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반딧불이가 내려와 앉았다.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불쑥 물었다.

“소교주님은 저와 여행하는 게 재미있어요?"

“재미있지.”

“어떤 점에서요?”

“왜? 재미도 없는데 너와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아?”

“약속은 꼭 지키시는 분이시니까요.”

이안이 살짝 손을 들자 손가락 끝에 있던 반딧불이가 날아갔다.

“저 때문이라면 이제 돌아가셔도 돼요.”

“싫은데?"

“네?”

"나는 이 여행이 정말 즐겁다. 네가 즐겁지 않다고 해도, 내가 즐겁기 때문에 계속할 거다. 억울하면 네가 소교주로 태어나든지.”

이안은 검무극이 이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제가 소교주로 태어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억울한데, 소교주님이 소교주님으로 태어난 건 조금 억울해요.”

이안은 비로소 이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죠? 이제 마지막으로 여쭙는 거예요.”

예전에 이 질문을 딱 다섯 번까지만 묻기로 농담처럼 약속했는데, 그 사이 네 번을 다 물었다. 사실 잘해준 것이 어디 다섯 번뿐이겠냐마는, 이제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다섯 번째 묻는 것이었다.

“이제 더는 안 물을 거예요.”

검무극은 평생 부려 먹기 위해서라고 장난스럽게 대답한 적도 있었다. 형과 싸우다 돌아오는데 문득 네 생각이 나서라도 대답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제대로 대답해 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 이유가 많은데 다 기억할 수 있겠어?”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천검법 구결을 잊어버려도, 지금부터 하시는 말씀은 잊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 농담을 잘해서고.”

“농담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고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안은 그 이유를 반박했다.

“상대가 천마신교 소교주라면 목이 부러진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편을 들어줄 거예요.”

검무극이 다른 이유를 들었다.

“한 번 하고자 마음먹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지니고도 있고.”

그건 비천검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다. 갈 때마다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던 그녀였다.

"비천검법을 얻었는데 누가 포기하겠어요? 세상에서 가장 게으름뱅이도 밤잠을 설쳤을 거예요.”

계속된 반박에도 검무극은 계속 이유를 댔다.

“그 무엇보다 네 선함이 좋다.”

“제대로 속으셨네요.”

이안이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전신석화공의 부작용 때문이에요. 살아남으려면 착해져야 했거든요. 그래야 소교주님께 버림받지 않죠.

그때의 전 채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였으니까요. 부끄럽지만 그때부터 선함은 제 생존방식 중 하나였어요.”

이안의 눈동자가 떨렸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밀어내려 하고 있지만 이건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철벽 방어를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자신과 그녀 앞을 막은 철벽을 부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백 가지 이유를 대면 백 가지 반박을 하는 것.

이것이 벽을 부수기 위한 그녀의 노력.

“이제 더 없죠? 막상 이유를 대려니까 몇 개 없죠?”

이안이 다시 반딧불이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지난 세월 검무극은 수없이 자신을 놀라게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이 소저.”

만약 천살성이 오늘 쳐들어왔으면

이 소저.

잘못 들은 것일까? 아니다. 잘못 듣지 않았다.

저 말이 뜻하는 바가 어떤 의미인지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안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이제 소교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남자로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반딧불이가 일제히 자신의 주위에서 빛을 뿜어내며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이안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렇게 놀라고 긴장한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좋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의 잠재의식이 부정적인 상황을 끌어올렸다. 마음속을 환하게 밝히던 반딧불이의 불이 모두 꺼졌다.

'이안! 정신 차려! 네 착각일 수도 있어.”

언제나처럼 소교주님의 장난일 수 있잖아?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장난이었다면 이미 실없는 말로 자신을 웃겼을 상황인데.

'설마?"

이안의 놀람이 불안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낯선 모습을 보이는 것이.

"혹시 저를 떠나보내려는 건가요?"

예전부터 자신을 떠나보내려 했던 소교주였으니까. 마지막 여행이 이별을 위해서였나?

“그렇소.”

이안은 충격을 받았다. 정말 아버지의 주먹에 머리를 얻어맞아도 이렇게 멍한 느낌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남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는데, 나를 떠나보내려 한다고?

화가 나신 걸까? 자신의 장점을 그렇게 말해줬는데 사사건건 반박했으니, 화가 날 만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자신을 떠나보낼 사람은 분명 아닌데.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야 했다.

'절대 소교주님을 떠날 수는 없어.'

그녀가 애써 웃으며 농담하듯 말했다.

“왜 이러세요? 말씀드렸잖아요? 도련님 옆에 딱 붙어서 평생 편히 살 거라고요.”

이안은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바짓가랑이 붙잡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제가 또 한다면 한다는 걸.”

하지만 검무극은 단호했다.

“떠나야 하오.”

단호한 검무극의 태도에 그녀가 절망했다.

"제가 심장이라면서요? 심장 없어도 사실 수 있어요?”

그녀의 심장을 검으로 찌르는 말이 날아들었다.

“새로운 심장으로 바꿀 겁니다.”

이 순간까지도 존대하며 대하니 검무극이 딴사람처럼 낯설었다. 이렇게 갑자기, 그것도 이 아름다운 곳에서 자신을 떠나게 하다니.

“이유를 말해주세요. 제가 납득하지 못하면 안 떠날 거예요. 제가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고요? 아뇨, 이럴 때 맞서 싸우려고 그 밤늦도록 수련했던 거예요.”

검무극이 이유를 밝혔다.

“그래야 우리가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기에 이안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이 소저를 보내겠다는 말이 아니었소.”

“그게 무슨 말이죠? 조금 전까지 저를 보내려고 하셨잖아요?"

“내가 보내려는 것은 나를 도련님이라 부르는 이안을 떠나보내겠다는 것이오.”

이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를 어려워하는 이안을 떠나보내겠다는 것이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차분히 덧붙였다.

“나와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고 여기는 이안을 떠나보내는 것이오. 그 이안들이 떠난 이 소저가 내 새 심장이 될 거요."

이제야 이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자신이 처음 느꼈던 대로 남자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농담을 못 해도 되고, 소교주라서 억지 공감을 해준 것이라도 상관없소. 의지력이 없어도 되고 그대의 선함이 생존전략이었다 해도 상관없소. 나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하는 검무극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하지 마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그녀의 외침에 검무극이 잠시 말을 멈췄다.

“들어야 할 거요.”

“싫어요. 아뇨, 들을 테니 잠시만요!"

이안은 마치 아이처럼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자신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은 검무극을 좋아했다.

꼬마 때 처음 소교주 앞에 섰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검무극은 그런 자신을 심장이라 불러주며 누구보다 아껴주었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 앞에서도 자신을 심장이라 부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구와 비교하지 않았고,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검무극도 선을 지켜왔다.

이제 검무극이 그 선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이안의 팔목을 잡아서 귀를 막던 손을 떼어냈다. 이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검무극이 이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소저를 한 사람의 여인으로 좋아하오.”

이안의 몸이 떨려왔다. 기쁨과 긴장, 두려움, 설렘, 행복... 그야말로 온갖 감정이 뒤섞여서 그녀를 휘감았다.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천마의 부인이 되는 거다.

마후가 되는 거다.

이안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자신의 대답에 앞으로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자신도, 검무극도.

이 선택으로 인한 어떤 고난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검무극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저를 선택하시는 걸 후회하지 않겠어요?"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이 소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오. 난 보기보다 어두운 사람이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이오. 수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기에 평생 악운이 따라붙을 수도 있소.”

검무극이 그녀가 물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이런 나라도 괜찮겠소?”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반딧불이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이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어려서 신교에 맡겨진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어요. 그 어떤 악운도 제 행운을 이기지 못할 "거예요."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기에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그대가 나를 지켜줬으니, 남은 생은 내가 그대를 지켜주겠소.”

이안이 먼저 검무극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가만히 검무극의 얼굴을 쳐다보던 그녀가 나직하지만 힘차게 말했다.

“아뇨, 어둡고 걱정 많은 내 남자는 내가 지켜요.”

그녀의 얼굴이 검무극의 얼굴로 다가갔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검무극의 입술에 닿았다.

심장은 터질 듯 뛰었고 그녀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는지 몰랐다.

그래, 지금까지 항상 뒤에 서 있었지만, 이제는 당당히 앞으로 나가겠다는 의지였으리라.

부끄러워서 뒤로 물러나려는 그녀를 검무극이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아주 달콤하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 주위에서 반딧불이들이 일제히 빛났다.

이 밤의 반딧불이는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천화루주는 일찍 주방으로 갔다.

밤늦게까지 요리하던 천화루 숙수들이 돌아간 그곳에서 그녀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집밥을 먹고 싶다는 이안에게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려는 것이다.

물을 끓이려고 솥을 올리던 그때 그곳으로 이안이 들어섰다.

“잘 주무셨어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어제 늦게 돌아오는 것 같던데. 잘 잤어요?”

“네, 잘 잤어요.”

하지만 이안은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심란하거나 걱정되어도 잠이 안 오지만, 너무 기뻐도 잠이 안 온다는 것을 어제 확실히 경험했다.

"거기 어땠나요?"

"너무 좋았어요.”

이안에게 그곳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어찌 그곳을,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잊겠는가? 이안은 그 아름다운 장소를 알려준 천화루주가 정말 고마웠다.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다. 어제의 이안과 오늘의 이안이 달라졌다는 것을. 그건 예언을 받는 천화루주라서가 아니라, 여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저도 도울게요.”

“그래 주시겠어요?”

이안은 창고에서 천화루주가 가져오라는 식재료를 가져왔고 그것들을 깨끗한 물에 씻었다.

두 사람이 음식 준비를 하던 그곳으로 검무극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천화루주가 솥뚜껑을 열어 보이며 검무극에게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끓였는데요?"

“어디 검을 뽑아야 고수인 줄 알겠습니까?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알지.”

검무극이 한옆에 썰어둔 재료를 보고 감탄했다.

"역시! 우리 이안이 정말 일을 잘한다!"

그러자 천화루주가 말했다.

“그건 제가 한 거예요.”

검무극이 채소를 다듬는 이안 옆에 머쓱하게 웃으며 앉았다.

"나도 도울게.”

“네, 소교주님.”

평소처럼 앉았지만, 평소 같지 않았다.

검무극이 힐끗힐끗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그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못 본 척했다.

“저는 잠시 가져올 게 있어서.”

천화루주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안이 검무극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왜 자꾸 봐요. 아니, 여기 왜 왔어요?”

"왜겠소. 도와주고 싶어서지요.”

“필요 없어요. 나가서 소마님과 놀고 계세요. 그리고 제게 말 편하게 하시고요.”

“싫소."

보통 은밀한 연애의 경우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높였다가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하는 데 반해, 지금 두 사람은 반대였다.

"당신을 어려워하는 이안은 이미 멀리 떠났어요. 보세요, 지금 당신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니 편하게 대하세요."

“그럼 둘이 있을 때는 이 소저도 편하게 대하시오.”

사실 이안은 오늘 아침을 걱정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어색해지면 어떻게 하지? 지난밤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 긴장감은 아침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좋았다.

"정말 해요?"

"하시오."

확 반말하려다가 이안은 차마 못 했다.

"이것만은 못하겠어요."

“그럼 나도 못 하겠소.”

"제발 하세요."

이안이 고집부리지 말고 하라는 뜻으로 검무극의 소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그러자 검무극이 인형처럼 홱 하고 그녀에게 당겨졌다.

“그렇게 안고 싶었소?”

"살짝 당겼잖아요!"

이안이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검무극의 몸이 홱핵 이리저리 움직였다.

"장난 그만 치세요. 천살성이 잡아당겨도 꼼짝도 안 할 거면서.”

두 사람이 장난치며 웃었다.

그때 천화루주가 작은 항아리를 들고 돌아왔다.

어느새 검무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자리에서 채소를 씻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

‘빠르다.’

이안은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수 있구나, 내심 감탄했다.

천화루주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혹시 두 분 싸웠어요?"

“감히 저와 싸웠다간 바로 본교의 지하 뇌옥행이죠. 한데 왜 물으시죠?”

“왠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아서요.”

그때 밖에서 구세주의 인기척이 들렸다.

“소마님 나오셨나 봅니다. 저는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검무극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말했다.

“왠지 오늘따라 정신이 없으신 거 같은데. 맞죠?"

천화루주의 물음에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무극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천화루주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쪽도 그렇고요.”

그제야 이안이 천화루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깝다고요. 그 천살성이 오늘 쳐들어왔으면 이겼을 텐데.”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느꼈기에 이안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천화루주는 더는 그녀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자, 다듬은 채소 이리 가져오세요.”

“네.”

그녀는 천화루주에게 제대로 요리를 배웠다.

원래 국수와 몇 가지 요리는 제법 괜찮게 만들 줄 아는 이안이었지만, 천화루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예 기초부터 배웠다. 그렇게 오랫동안 칼을 잡았지만, 부엌칼 잡는 법부터 새로 배웠다. 재료를 어떻게 손질하고,

언제 어떤 순서로 재료를 넣으며, 불 조절은 어떻게 하며, 마지막 간은 어떻게 맞추느냐까지.

천화루주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고, 이안은 열심히 요리를 배웠다.

잠시 후 음식이 차려졌고 네 사람이 함께 둘러앉았다.

이안이 있었기에 당연히 가면을 쓴 극악소마는 자리만 함께했다. 식사는 하지 않더라도 함께 자리하는 데 의의를 두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검무극이 천화루주의 요리에 감탄했다.

"중원미식탐방 개정판 내야 합니다. 천화루주님을 맨 앞장에 실어야 해요.”

검무극의 말에 천화루주가 웃었다.

"거기 실을 때 보조로 이 무인을 잊지 마세요!"

“저는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제가 해서 이 맛이 나겠어요?”

"손재주가 좋아서 금방 배울 거야.”

"언제 부탁드려서 루주님께 제대로 좀 배워야겠어요.”

그때 창가에서 불어온 바람이 이안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옆에 있던 검무극이 무심코 손을 올려서 만져주려다가, 아차하며 그 손이 젓가락을 향해 갔다.

극악소마가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천화루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제가 술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극악소마가 검무극에게 먼저 술을 따라준 후 다음에는 이안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 무인께서도 한잔 받으십시오.”

이안을 대하는 극악소마의 눈빛과 태도가 달라졌다. 더 정중해지고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에서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자신과 검무극과의 관계를 알아차렸음을

이안이 정중히 말했다. 검무극과 소마와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안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봐온 이 무인이라면 멋진 마후가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직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이십니다.”

이안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후란 말이 주는 무게감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한마디였다.

극악소마가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는 것은 검무극을 향한 예의기도 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와 천화루주에게 술을 부어준 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우리 오늘부터 첫날입니다."

이번에는 부끄러워서 이안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다 같이 축하하며 건배했다.

천화루주가 기분 좋게 말했다.

"영광이네요. 이 역사적인 첫날을 함께할 수 있어서요."

이 순간이 비단 두 사람의 운명만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림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 순간이었다.

건물 밖을 지키며 서 있던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가 서로를 쳐다보며 감격스러운 눈빛을 나눴다.

이 역사의 순간에 자신들이 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의 사랑을 이어준 소교주가 사랑을 맺는 자리에 말이다.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표 났습니까?"

진지하게 묻자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함께 웃었다.

“표가 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예 얼굴에 써 붙이셨습니다.”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숨기고 싶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검무극이 솔직히 고백했다.

"솔직히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그 엄청난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자랑 한 번 안 하셨으면서요.”

네 사람이 함께 웃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검무극과 이안은 천화루를 떠났다. 극악소마와 천화루주는 더 있으라고 붙잡지 않았고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든지 오세요, 두 분께 천화루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극악소마와는 전음으로 작별을 고했다.

―저 소마님 믿고 행복해질 겁니다.

극악소마는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여 준 검무극이 너무 고마웠다.

ᅳ저만 믿고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검무극과 이안이 천화루를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나란히 서서 지켜보았다.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는 천화루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거목의 나뭇가지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지켜보았다.

천화루에서 멀어지자 검무극이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안이 조금은 수줍게, 환한 미소로 그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두 사람이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네가 잘사는 게 복수다

"심부름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이의 물음에 철방에서 망치질하던 중년 사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없다.”

웃통을 벗은 남자는 마르고 왜소했는데, 내리치는 망치질만큼은 힘이 제대로 들어갔다.

“도와드릴 일은요?”

"없다.”

아이가 마을 외곽의 이 작은 철방을 찾아오기 시작한 것은 며칠 전부터였다.

아이는 채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꼬맹이였다.

“그럼 여길 치울게요.”

정작 씻어야 할 대상은 아이였다. 밖에서 잠을 자는지 하루가 다르게 옷이 더러워지고 있었으니까.

아이가 철방 내부를 돌아다니며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시작했다.

망치와 정, 집게 등을 똑바로 세운 후 화로 옆에 떨어진 재를 치웠다. 바닥을 쓸고 닦은 후에 흩어진 집기들을 제자리에 놓았다.

몸집이 작았기에 큰 망치는 두 손과 몸을 이용해서 끌어야만 했다.

남자는 묵묵히 일할 뿐 아이를 쫓아내지 않았다.

캉! 카앙!

아이가 이렇게 일하고 자신에게 얻어먹는 음식으로 하루를 버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아니면 거지가 되거나, 아니면 정말 만나서는 안 될 자들에게 걸려 어딘가로 팔려 가게 될 것이다.

다행히 이 눈치 빠르고 영리한 아이는 여기서 얻어먹는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남자의 신경을 절대 거스르지 않았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청소한 후 아이는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검과 도, 비수를 구경했다.

이 철방에서는 호미와 낫, 쟁기 등의 농기구뿐만 아니라 무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무기도 만들었다.

이 철방 주인장 혼자서 이 많은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다.

아이가 벽에 걸려 있는 암기형 쇠뇌를 올려다보았다. 위험한 병장기였는지 자물쇠가 달린 쇠사슬로 묶어두었다.

“저것도 직접 만드신 건가요? 저것에 맞으면 무술을 익힌 사람도 죽겠죠?”

언제나처럼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도 나중에 저런 것들을 만들고 싶어요.”

남자가 망치질을 멈추고 아이에게 물었다.

“왜 만들고 싶으냐?”

며칠이나왔어도 밥만 줬을 뿐 한 번도 자신에게 질문한 적이 없었기에, 이 첫 질문에 아이는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누가?"

“아버지가요.”

남자는 아버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버지라고 대답하는 아이의 얼굴에서 볼 수 있는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그리움이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아이를 이렇게 방치할 리 없었으니, 아마 죽었겠지.

“저도 이런 기술을 배울 수 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더 쉬운 일도 있지 않으냐?"

아이는 이곳 말고도 다른 곳도 가 본 모양이었다.

“마을 객잔에서는 점소이는 필요 없다고 했어요.”

아직 너무 어려서 저잣거리에서 점소이 말고는 할만한 일이 없을 것이다.

“밥 먹어라.”

“네, 감사합니다.”

이제 아이는 알아서 구석에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소쿠리에 덮인 천을 열어보니 주먹밥과 말린 고기가 들어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주먹밥과 고기를 먹었다. 허겁지겁 먹어서 흘리지 않았다. 최대한 남자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배가 많이 고팠음에도 그곳에 있는 걸 다 먹지도 않았다.

"철방 기술을 배워보겠느냐?”

생각지 못한 말에 아이가 깜짝 놀라며 남자에게 달려왔다.

“네! 가르쳐주세요!”

남자는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밥부터 마저 먹어라.”

“네!”

남자는 다시 묵묵히 망치질하기 시작했다.

카앙!!

그날부터 아이는 철방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아직은 너무 어렸기에 힘든 일은 할 수 없었다. 청소하고 잔심부름하면서 남자가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사실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배움이었다.

아이는 나이에 비해 똑똑하고 명석했기에 남자는 때 이른 말인 줄 알았음에도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쇠를 다스리기 전에 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불을 다스리기 전에 네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결국 철방 일은 얼마나 잘 다스리냐에 달려 있다.”

아이는 아직 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철방 기술을 지녔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외진 곳에서 작은 철방이나 하고 있을 실력이 아니라는 것도.

"불을 무서워하면 이 일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불을 무시해서도 안 돼. 알았느냐?”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이는 남자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는데, 아이의 양손에는 쇠뇌가 들려 있었다. 철방에 전시되어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쇠뇌는 너무 무거웠기에 가슴에 안고 힘들게 걸어갔다.

누군가 저 앞에서 걸어오자 아이는 나무 뒤에 숨었다. 사람이 지나가자 아이는 다시 나와서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 멀리 있는 한 무관이었다.

그곳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아이 앞으로 누군가 앞을 막아섰다.

상대를 확인한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철방 주인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분명 잠이 든 것을 확인했었는데.

"......아저씨.”

남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지난 몇 달간 먹여주고 재워줬는데.

"처음부터 그것을 훔치려고 철방에 온 것이더냐?”

아이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몇 달을 일하면서 결국 쇠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냈다. 그것을 묶어둔 자물쇠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게 되었고.

남자가 쇠뇌를 내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저는 이것이 필요해요.”

아이에게는 미안함보다 절박함이 앞섰다. 아이는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놈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요. 제가 이걸로 죽일 거예요.”

아이가 울면서 자신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아이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이 근방에서 가장 큰 무관인 용백무관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원체 성실했기에 아들을 먹여 살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고통으로 끙끙 앓던 아버지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 했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를 무덤에 묻어주던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용백무관의 사범인 종추(鍾錐)에게 두들겨 맞아서 죽은 것이었다.

이유는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가져다 두라는 수련 장비를 그가 원하는 곳에 두지 않았다는 이유였고, 그조차도 자신이 착각했던 것이었다.

종추는 평소에도 성질이 더러웠지만 술에 취하면 그 정도가 심해졌다. 사람들을 때리고 괴롭히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날도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지금껏 여러 번 사고를 쳤지만, 무공 실력이 워낙 좋은데다 성질까지 포악해서 다들 그의 악행을 쉬쉬하며 넘어갔다.

-사람이 몇 대 맞았다고 죽나? 다른 지병이 있었겠지.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놈이 했다는 말이었다.

아이가 울면서 말했다. 철방에 오기 전에도 아이는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남자에게는 점소이 자리가 없어서 일을 못 했다고 했지만, 아이는 점소이로 돈을 모아서 복수할 생각을 했었다.

“손님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돈을 주면 살수가 사람을 죽여준다고 했죠. 한데 제가 그 돈을 모으려면 이십 년을 일해야 했어요."

물론 그 돈조차 살수들을 소개해 주겠다는 사기꾼들에게 당해서 날려버릴 가능성이 크지만.

“제가 복수할 유일한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이는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고, 아버지는 아이의 전부였다.

남자는 말 없이 아이를 쳐다보았다. 똑똑한 아이였고 의지력도 강한 아이였다. 어떤 아이가 아비가 죽었다고 복수를 꿈꿀 것이며, 또 어떤 아이가 쇠뇌를 훔치기 위해 몇 달을 철방에서 일하겠는가?

하늘은 아이에게 이런 특별함을 주었지만, 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도 함께 주었다.

남자는 담담하게 아이를 꾸짖었다.

“네 도둑질은 괜찮고, 그자의 죄만 죄인 거냐?"

아이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너는 그 사람을 죽일 수 없다. 그 쇠뇌는 반탄력이 강해서 네가 상대를 겨누고 쏜다고 해도 맞지 않을 테니까.”

아이는 너무 무거웠지만 끝까지 품에 안고 있던 쇠뇌를 내려다보았다. 방아쇠만 당긴다고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령 운 좋게 맞췄다 하더라도, 너 역시 사람을 죽인 죄를 짓게 되겠지. 평생 뇌옥에 갇히게 될 거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는 분명 모든 각오를 다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남자는 다른 이유를 들어 아이를 야단쳤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고초를 겪게 될 거다.”

"아저씨가요?"

“너 같은 꼬마가 이런 쇠뇌를 가져왔으니 이게 어디서 났는지를 추적하지 않겠느냐? 아이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내가 시켰다고 여기겠지. 네 복수를 위해 나는 죽어도 괜찮냐?"

어찌 이 아이가 거기까지 생각했겠는가?

“죄송해요."

저 조그만 눈에 어찌 저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네 아버지가 자신의 복수를 하다 네가 평생 뇌옥에 갇히는 것을 바라겠느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잘사는 게 복수다.”

남자가 아이의 품에서 쇠뇌를 가져오던 그때였다.

아이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아버지를 죽인 그놈은요?"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내일도 나와라."

아이가 흠칫하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설마 쇠뇌를 훔쳤는데 나오라고 할 줄은 몰랐다.

“네 아버지가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캉, 카앙!

망치질하던 남자가 잠시 고개를 돌려 구석에 있는 탁자를 보았다. 매일 아이를 위해 준비해 둔 식사가 보자기에 덮인 채 그대로 있었다.

나올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이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망치질을 하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 검 좀 손질해 주시오.”

남자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다른 곳에 가져가시오. 그렇게 귀한 검은 내가 손질할 수 없소.”

그러자 뒤에서 손님이 물었다.

“검을 보지도 않고 귀한 검인지 어찌 아시오?"

“그야............ 당신 검이니까.”

남자가 뒤로 돌아섰다.

그 앞에 웃고 있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이 철방의 주인장은 바로 살왕의 수하였던 명신이었다.

“나름 과거를 완전히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소.”

“그러려면 쌀이나 옷을 팔면서 사셨어야지.”

검무극과 헤어지면서 명신은 철방이나 하면서 살겠다고 했었다. 통천각이 그런 명신의 행방을 못 찾을 리는 없었고.

명신은 검무극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교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자신을 살려주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당신 같은 사람까지 다 휩쓸어버리고 가고 싶지 않아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억울하게 부모를 잃은 꼬마가 내민 동전 한 닢을 청부금으로 받아서 악인을 죽여주는 멋진 살수가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랬기에 명신은 검무극과의 재회가 반가웠다. 진정 자신을 알아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바깥을 보며 말했다.

“이 소저, 들어오시오.”

바깥에 있던 이안이 안으로 들어왔다.

검무극이 자랑하듯 그녀를 소개했다.

“여긴 내 정인이오.”

한껏 들뜬 목소리에 표정까지, '어떻소? 멋진 여인이지 않소?"라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이안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지 검무극은 아는 사람 만날 때마다 저렇게 자신을 소개할 기세였다.

이안이 정중히 포권하며 명신에게 인사했다.

“오다가 말씀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영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오."

명신은 명부의 두 번째 살수였던 실력이었다. 한눈에도 이안의 무공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큰 성취를 얻으신 분이시군요. 나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이오.”

이안은 검무극과 함께 다니며 여러 인생을 보고 있었다.

막연한 바람으로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마음먹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실제로 그런 인생들이 있다.

이런 대단한 살수가 이렇게 작은 철방을 운영하면서 살기도 하는구나.

이안과 인사를 나눈 후 명신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왜 나를 찾아온 거요?”

“잊으셨소? 가끔 좋은 물건 만들면 내게 보내주기로 하지 않았소? 아무리 기다려도 안 보내주시기에 이렇게 찾아왔소.”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명신이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해서였다.

"기다리기나 하셨소?"

지금도 마도에서 두 번째라 칭해지는 흑마검을 차고 다니는 소교주였다. 교주가 되면 마도제일검인 천마검을 차게 될 것이고, 세상 어떤 좋은 병장기가 그에게 필요하겠는가?

"아직 좋은 물건을 못 만들었소."

“만들면 본교로 꼭 보내주시오.”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말이었기에 명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고마운 일이지.

검무극은 명신을 찾아온 것은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앞으로 마음 편히 사시오. 이제 과거의 망령이 당신을 따라올 일은 없소.”

명신은 알 수 있었다. 과거 자신이 몸담고 있던 조직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이제 완벽하게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고맙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무극이 명신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그럽시다.”

이안이 놀란 마음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정말 이대로 간다고? 얼굴만 보고? 밥 한 끼 같이 안 하고?

이안은 이번 여행을 함께하면서 검무극이란 사람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는 점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검무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꽤 멀었다. 이 짧은 만남을 위해 그 먼 길을 오는 사람이란 걸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밥 먹고 술 마시고, 여기까지 왔으니 다 보고 가자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어떤 모습이 진짜 모습일까?

검무극이 말이 많다고? 저렇게 한 번 웃어주고 떠나는 사람인데?

명신과 작별하고 철방을 나와 걸어가는데, 한 아이가 흥분해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기뻐하며 아이가 철방에 들어서며 소리쳤다.

“아저씨! 어젯밤에 그놈이 죽었대요. 술에 취해서 발을 헛디뎌서............”

명신의 말소리도 들렸다.

“이놈아, 늦었다. 어서 청소부터 해라.”

“저 이제 정말 열심히 배우고 일할게요!"

“밥부터 먹고."

“네!”

그 작은 철방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은 그 동전 한 닢조차 받지 않으시는군요."

주인 나오라고 해!

"말한 곳이 저곳인가?”

북양문주(北洋門主)의 첫째 아들인 사주영(史株映)은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공자님.”

대답한 사람은 이객(李客)이었다. 이객은 검술 실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무림 경험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주영은 이객을 오른팔로 삼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건방지게 우리 구역에 객잔을 세운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인사 한번 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이지?"

북양문은 정사지간의 문파로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문파였다. 장사를 시작했다고 꼭 인사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대부분 새로 장사를 하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인사를 해왔다.

눈치 빠른 자들은 자발적으로 인사를 했지만, 대부분 북양문에서 사람을 보내 언질을 주었다. 이제 북양문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으니 인사를 해야 한다,

해마다 얼마 정도 성의 표시를 하셔라. 그래야 급한 일이 있으면 북양문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일 하나 처리 못 하고.”

원래 이 일은 사주영이 주로 처리하던 일이었다. 한데 지난 몇 달간 이객과 함께 다른 지역 일 처리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 했기에 동생에게 맡겨두었는데, 이 일을 처리 못 한 것이다.

도착한 다음 날 바로 나섰다. 아버지께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역시 북양문을 이어받을 사람은 장남인 자신이라고,

사주영이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 이객이 그에게 말했다.

"듣자니 저 객잔 평범한 객잔이 아닙니다.”

“뭐가?"

"저 객잔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검을 풀어놓고 들어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주영이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객잔 입구에서 검을 풀어야 한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떤 멍청한 자가 객잔 입구에서 자신의 병장기를 맡긴단 말인가? 자네라면 한낱 점소이에게 병장기를 맡기겠는가?"

“저도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 역시 사주영과 함께 자리를 비웠으니까 이 객잔에 관해 알 수는 없었다.

들은 내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 객잔에서는 절대 싸움을 벌여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답니다.”

사주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입구에서 검을 풀어놓는 것도 모자라 싸움도 하면 안 된다?

"헛소문이겠지. 대체 누가 그딴 객잔을 만들겠나?"

“요즘 장사가 안 되니까 특이한 수작으로 이목을 끌려는 짓이었겠지요. 게다가 음식값과 방값도 엄청 비싸다고 들었습니다.”

두 사람이 객잔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서 본 객잔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정말 중원의 객잔 중에 제일 큰 객잔 같았는데 입구에 거대한 현판이 붙어 있었다.

英雄客棧.

"영웅객잔이라니,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몰라도 실로 광오하군."

“저 글을 누가 적었는지 궁금합니다.”

그야말로 용이 승천하는 기세가 깃든 필체였다.

“이런 이름까지.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똑똑한 자입니다. 여러모로 시선을 끌 줄 아는 자입니다.”

"똑똑했다면 우리에게 먼저 인사하러 왔겠지.”

동생이 일 처리를 못 한 건 다행이라 볼 수 있지만, 이 객잔만 두고 보면 정말 괘씸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규모가 크니 배짱을 부린다 이거지? 그래봤자 한낱 객잔 주인 주제에.

자, 이제 진짜 영웅 맛 좀 봐라.

두 사람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서 한 남자가 정중히 그들을 맞이했다. 일반 객잔에서 보는 점소이가 아니었다. 마치 큰 문파의 총관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섰을 때 안에서는 술향이 아니라 꽃향기가 났다.

실내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는데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내부도 정말 고급스러웠다. 천장의 들보에는 금박을 두른 용들이 새겨져 있었고,

화려한 등이 사방에 달려 있었다. 벽에는 유명한 그림과 시가 걸려 있었고, 바닥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탁자는 비싼 원목을 사용했고, 의자는 더없이 안락해 보였다. 자리와 자리 사이는 넓었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놀랍게도 휘어진 곡선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 객잔 맞아?”

여러 이름난 객잔을 방문해 봤지만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곳은 보지 못했다.

안에서 일하는 점소이들 역시 다른 곳과 달랐다. 다들 옷을 맞춰 입고 술과 요리를 나르고 있었는데 아무도 뛰지 않았다. 모두 교양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돈을 엄청 들였겠군.”

사주영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는 말은 뜯어낼 돈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안에서 대기하던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간 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유분방한 느낌을 주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말총머리 남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반갑게 맞이하는 그에게 사주영이 목소리를 깔았다.

“나 북양문 사주영이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말총머리 사내가 정중히 인사한 후 물었다.

“식사하실 겁니까? 묵으실 겁니까?"

"여기 주인장을 보러 왔네.”

“찾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신이 찾아왔다는데 그 이유를 묻는다고? 입구에서 일하는 점원 주제에? 객잔 주인이 저렇게 편하게 입고 머리를 질끈 묶고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주인장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겠네.”

“돈 문제 빼곤 저와 이야기하시면 됩니다만.”

사주영이 인상을 굳히며 단호히 말했다.

"주인장 부르라고 했네.”

“지금 바빠서 잠시 기다리셔야 합니다.”

심지어 나를 기다리게까지 해? 그래,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

“기다리지.”

그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말총머리 사내가 말했다.

"들어가시기 전에 병장기는 맡기셔야 합니다.”

이객이 들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방금 뭘 들었나? 나, 자네 주인 만나러 온 사람이라고. 북양문 사주영.”

“네, 사 대협님. 그래도 무기는 맡기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사주영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자기 병장기를 남에게 맡기는 무인을 보았나?"

그러자 말총머리 사내가 벽에 새겨진 글을 가리켰다.

"본 영웅객잔의 원칙입니다.”

ᅳ본 객잔으로 병장기를 반입할 수 없다. 만약 몰래 반입하다 들키면 그 병장기는 영원히 압수된다.

-본 객잔에서는 절대 싸워선 안 된다. 만약 어길 시 이곳 주인이 정한 기간만큼 객잔에서 무보수로 일을 해야 한다.

-본 객잔에서 절대 살인을 저질러선 안 된다. 만약 어길 시 목숨으로 책임져야 한다.

ᅳ본 객잔에서는 한 달에 칠 일 이상 묵을 수 없다.

“미친놈들인가?”

사주영의 입에서 절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말총머리 사내는 이 반응이 하루이틀이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주영은 어이가 없었다. 첫 번째 병장기를 놓고 들어가야 하는 건, 두 번째 세 번째에 비하면 애교였다.

“싸우면 여기서 일해야 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주인이 열흘 일해라 하면 열흘 일하고, 평생 일해라 하면 평생 일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일한 사람이 있었나?”

“물론입니다. 지금도 일하는 분들이 계시지요.”

“설마 그들이 무인은 아니겠지?”

"일반인들이 싸울 일이 있겠습니까? 다 무인이지요.”

“그런데도 순순히 일한다고?"

말총머리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로 대답했다.

“아뇨. 일하게 만들었죠.”

사주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나 머저리 같은 놈들이면 객잔에 붙잡혀서 일을 하고 있겠는가?

어쨌든 너희들도 무공 좀 하는 놈을 고용하고 있다 이거지?

“그럼 사람을 죽여서 죽은 사람도 있나?"

말총머리 사내는 주위를 둘러본 후 속삭였다.

"그건 주인장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래, 이런 미친 말들은 다 허풍이라고 치고. 사주영은 네 번째 원칙이 궁금했다.

"하면 왜 한 달에 칠 일만 묵을 수 있나?”

“처음에는 그런 규칙이 없었는데, 이곳을 아예 도피처로 삼으려는 자들이 생겼지요. 그래서 칠 일이라는 기한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후부터는 하루에 묵는 값이 두 배씩 올라가게 됩니다. 되도록 사흘만 묵고 떠나라는 의미지요."

어쨌든 그 칠 일간은 무조건 안전하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사주영이 이객을 돌아보며 웃었다.

“누군지 몰라도 머리를 잘 썼네. 소문나면 누구라도 한 번 와보려 하지 않겠나?"

“네, 그렇습니다.”

사주영이 다시 말총머리 사내를 쳐다보았다.

“내가 검을 맡기지 않겠다면 어쩌겠나?”

도발적인 물음에도 말총머리 사내는 편안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본 객잔은 이용하실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인장도 만나볼 수 없겠지요.”

사주영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검집째 들었다.

“이 검이 어떤 검인지 아나? 우리 가문에서 대대로 장남에게 내려오는 보검이네. 이 검을 분실하기라도 하면 이 객잔을 다 팔아도 보상하지 못하네. 그래도 맡겠다는 건가?"

그러자 말총머리가 자신의 뒤쪽에 붙은 글을 가리켰다.

ᅳ맡기신 검을 분실하면 그 가치의 두 배로 보상하겠습니다.

사주영이 코웃음을 쳤다.

“대체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거지? 내 검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녔는데? 고작 배 째라고 나오시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말총머리 사내의 확신에 뒤에 있던 이객이 물었다.

“검을 어디에 보관하겠다는 건가? 혹시 만년한철 금고라도 설치해 두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신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말총머리 사내가 비켜서며 뒤를 가리켰다.

"검은 여기에 보관합니다.”

말총머리 사내 뒤쪽에 둥근 통이 있었다. 그곳에 수많은 검이 꽂혀 있었다. 정말 아무렇게나 꽂혀 있었다.

사주영과 이객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 기가 막혔다. 진짜 검을 맡겼다는 듯 검 손잡이에 맡긴 사람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사주영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런 미친것들을 봤나? 이 귀한 검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보관한다고? 통에다 막 집어넣어 둔다고?”

그때 꽂혀 있는 병장기 중 하나가 이객의 눈에 띄었다.

손잡이에 화려한 불꽃 문양이 그려진 직도였다.

제령화염도(靈火焰刀)?

그럴 리가 없다. 제령화염도를 쓰는 인물은 염화인(染火刃)으로 그야말로 성격이 잔혹하고 포악해서 절대 자신의 병장기를 저곳에 맡겼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의 제령화염도는 도 중에서는 손에 꼽는 귀한 보도였다. 사주영의 검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했다.

“혹시 이자들이 수작을 부리는 건가? 가짜 병장기를 가져다 두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염화인 같은 고수를 사칭했다간 객잔 전체가 몰살당할 것이다.

그때 한 중년 문사가 이 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말총머리 사내가 그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편안하게 잘 지내셨습니까?"

중년 문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잘 묵고 가네. 이렇게 훌륭한 객잔은 생전 처음이었네.”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가려는 손님을 본 이객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사람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중년 문사가 말총머리 사내에게 말했다.

“내 검을 주게.”

“네.”

말총머리 사내가 통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냈다.

그의 검 자루에도 이름표가 붙어 있었는데, 그것을 보는 순간 이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청의거사(淸居士)!’

생각났다! 이제야 생각났다. 그는 바로 정파의 이름난 고수 청의거사였다. 그래, 저 검은 그의 독문병기인 정명검(劍)이다.

십여 년 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청의거사는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환호를 받았는데 그 둘러싼 무인 중 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청의거사가 정명검을 맡겼다고?'

이객은 자신이 직접 보고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제령화염도를 향했다.

'설마 저것도 진짜란 말인가?'

이객에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어쨌든 이곳은 청의거사가 검을 맡기는 곳이니.

“오늘 약속이 중요하니 일단 검을 맡기시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러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곳이 보이는 자리에 앉으면 됩니다.”

이객이 사주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까 나간 손님이 청의거사였습니다.

ᅳ청의거사였다고?

-그런 고수가 묵어가는 곳이니 우선은 이곳 주인장을 만나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청의거사라는 이름이 위력을 발휘했다. 사주영도 수없이 들었을 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사주영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검을 맡겼다. 이객 역시 자신의 검을 맡겼다.

“대신 이 자리가 잘 보이는 자리로 내주게.”

“그러겠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검이 꽂혀 있는 이곳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사주영이 말총머리에게 경고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검을 잃어버리거나, 검집에 작은 상처라도 나면 네 목숨으로 보상해야 할 거다.”

"자, 보십시오.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넣었을 뿐, 결국 그 병장기 통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말총머리 사내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은 사주영은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말총머리 사내를 가리키며 자신의 검을 잘 지키라고 신호했다.

그러다 그곳에서 기다린 지 채 일각이 지나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서 주인장 나오라고 해!"

사주영이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자, 그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마야, 조용히 해라.”

고개를 돌려보니 한 노인이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 있어서 누군지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두들겨 맞아도 엄청 맞은 모양이었다.

그때 술잔을 드는 노인의 팔에 타오르는 불 모양의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염화인?'

염화인의 팔에 그런 문신이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객이 조심하라는 경고의 전음을 날리려던 순간, 사주영의 입이 먼저 열렸다.

"노인장은 누구기에 말을 함부로 하시오?"

안 돼! 이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연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듯 노인의 눈빛이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큰일났다.'

이객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지금까지 염화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상대를 극양의 도법으로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객이 어떻게 해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나 고민하던 그때.

그곳으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정말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여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사뿐사뿐 걸어와서 노인에게 말했다.

“일할 때는 술 마시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나긋한 목소리였는데 이미 노인은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손님이 남겼기에 딱 한 모금 했소.”

노인은 주섬주섬 그곳에 있던 술병과 요리를 쟁반에 올려서 치웠다.

마치 달아나듯 다급히 걸어가는 그에게 여인이 나긋하게 말했다.

"먼지 나요. 뛰지 마세요.”

노인이 흠칫하더니 살금살금 걸어서 주방이 있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여인이 두 사람 쪽으로 돌아섰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내 검만 특별대우할 필요 없어

“드디어 주인께서 나오셨군요.”

사주영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모습에서 이객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노인이 염화인인지 모르는구나.’

당연한 일이었다. 설령 전음으로 알려줬다고 해도, 믿지 않았으리라.

얼굴은 얻어터져서 알아보지도 못하고, 여인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 모습까지 봤으니 어찌 그가 염화인이라 생각하겠는가?

통에 꽂혀 있던 제령화염도를 보고, 또 노인의 팔 문신을 봤음에도 자신조차 긴가민가한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니, 이런 의심까지 들었다.

'혹시 염화인 흉내를 내려고 고용한 노인인가?”

염화인이 그런 몰골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악명 높은 염화인이?

"주인장께서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신지 몰랐소.”

사주영의 말에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 매혹적인 미소의 주인공은 바로 차이란이었다.

그녀는 악군학과 함께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이 특별한 객잔을 운영해 나가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악군학과 함께 해나가는 이 일이 아직은 재미있었다.

"칭찬 감사해요.”

그때 사주영의 눈에 그녀의 소맷자락에 묻은 붉은 자국이 들어왔다. 아마 일하다가 양념장이 묻은 모양이다.

정말 일하다 왔나보다 싶어 살짝 마음이 풀어졌다.

“사 대협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죠?"

“이 지역은 우리 북양문의 영역이란 것은 알고 계셨소?”

“아뇨, 제가 무림 정세에 대해 밝지 못해서요.”

사주영이 봤을 때 여인은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았다.

이객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그녀는 염화인이 얻어터져서 일하고 있는 객잔의 주인이었으니까.

'분명 평범한 여인이 아니다.'

사주영이 차이란에게 잘난 척을 했다.

“이 일대는 우리 북양문이 다스리는 곳이오.”

“아, 대단하신 분이 오셨는데 제가 몰라뵈었네요.”

"앞으로 영웅객잔에 변고가 생기면 우리가 도와주겠소.”

"말씀만 들어도 감사하네요."

사주영은 이 객잔이 마음에 들었다.

규모로 볼 때 이 객잔이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주인으로 있다.

자신은 이 객잔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내 말 한마디면............."

사주영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알려주려던 그때.

객잔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다급히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객잔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한 중년 남자가 다친 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팔과 옆구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는데,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걸음만 봐도 상당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객잔 내부를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객잔과는 달랐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빛들.

"입장하시려면 여기로 오십시오.”

악군학의 말에 남자가 몇 걸음 가까이 걸어가며 물었다.

“여기서는 서로 싸울 수 없는 규칙이 있다는 게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악군학이 규칙이 새겨져 있는 벽을 가리켰다.

“읽어보십시오.”

남자는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나를 뒤쫓는 이가 곧 이곳에 들이닥칠 거요. 그래도 나를 지켜주는 거요?”

그 말에 악군학이 담담히 말했다.

"우린 당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남자의 눈빛에 악군학이 담담히 말했다.

“우린 우리 객잔의 규칙을 지키는 거요.”

남자는 악군학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눈을 피해 무공 경지를 숨길 수 있는 고수가 객잔 입구를 지키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 당당한 느낌은 뭐지?'

악군학이 남자의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객잔에 묵고 싶으면 병장기부터 맡기시오.”

남자가 자신이 차고 있던 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검이 없는 상태에서 싸움이 붙게 되면 뒤쫓아 온 이에게 제대로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죽게 될 것이다.

“객잔의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 객잔에는 묵을 수 없소.”

남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곳임을 알고 왔었으니까.

남자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서 악군학에게 건넸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남자가 이름을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밝히기 싫으면 가명으로 말씀하시오. 맡기는 병장기 때문에 묻는 거니까.”

하지만 남자의 정체는 곧장 밝혀졌다.

객잔 문이 벌컥 열리며 새로운 사람이 들이닥치며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명일검(劍)! 고작 도망친 곳이 이곳이냐?"

들이닥친 남자는 온몸이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객잔에 앉아 있던 누군가 그를 알아보았다.

"흑수랑(狼)!”

흑수랑은 사파 무림에서 유명한 무인이었다. 이렇게 여러 명이 모였을 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나올 정도니까.

그에게 쫓겨온 명일검 역시 사파의 고수로 원래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다.

한데 몇 년 전에 별것 아닌 일로 두 사람은 크게 싸웠고, 갈등이 점점 깊어지면서 앙숙지간이 되었다. 이번에는 아예 생사대결이 펼쳐졌고, 결과는 보는 바와 같았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흑수랑이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다 눈 내리깔아!”

하지만 객잔에 있던 사람 중에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는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 듯 보였다.

오직 사주영만이 긴장한 표정으로 이객을 쳐다보았다. 그도 흑수랑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ᅳ저자 제압할 수 있나?

이객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음을 보냈다.

-흑수랑은 우리 둘이서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사주영은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조금 전에 영웅객잔에 변고가 생기면 자신들이 지켜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었는데.

한편 명일검은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여기 술이나 한 병 가져다주시오.”

부상당한 몸으로 검까지 맡겼으니, 흑수랑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전무했다.

내가 지금 이런 심정이다! 하는 마음으로 한 소리였는데, 점소이 하나가 진짜 술을 가져왔다.

흑수랑만큼이나 술을 시킨 명일검도 황당했다. 이 살벌한 상황에서 진짜 술을 가져온다고?

“얼마인가? 내가 술값을 못 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러자 입구 쪽에서 악군학이 말했다.

“의원을 불렀으니, 계산은 치료 다 받고 천천히 하십시오."

그리고 흑수랑에게는 벽에 새겨진 규칙을 읽게 했다.

"이것부터 읽어보십시오.”

흑수랑이 규칙을 읽은 후 비웃었다.

“나는 저 세 개의 원칙을 다 어길 작정이다. 검을 맡기지 않을 거고, 저놈과 싸울 것이고, 저놈을 죽일 거다. 내가 누군지 들었으면서도 개수작이냐?”

듣고 있던 명일검이 술을 마시며 말했다.

"술맛 좋다. 친구에게 한칼 맞아 죽기 전에 하는 한 잔의 술, 끝내주는구나.”

“빌어먹을! 친구는 무슨!"

“내가 할 소리다! 이 속 좁은 놈아!”

그때 이객의 눈에 염화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언제 나왔는지 그는 주방 앞에 서 있었다.

앞서 여인에게 쫓겨나다시피 갔었는데, 지금 얻어터져서 퉁퉁 부은 그의 얼굴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두 눈에 가득 차오른 것은 분명 기대감이었다.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이객이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흑수랑이었다. 흑수랑이 자신을 구해줄 것을 기대하는 건가? 흑수랑은 그보다 훨씬 약한 실력인데?

다음 순간 이객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설마?'

저 기대감은 바로 이것이었다.

'흑수랑이 자기 후임으로 들어오길 기대하고 있어!'

그게 확실하다는 듯, 흑수랑이 말총머리 사내를 무시하면 할수록 염화인은 좋아하고 있었다.

“오늘 여기 있는 것들 싹 다 죽여주마!”

흑수랑이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던 바로 그때였다. 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들어서며 말했다.

“저기요, 좀 지나갈게요.”

흑수랑이 돌아보자 커다란 화분을 안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휴, 무겁다, 무거워."

커다란 화분을 내려놓은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악군학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개업 축하해, 친구!"

악군학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님들은 모두 놀랐다. 이 객잔에 묵은 후 저 사람이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왔냐?"

검무극 뒤로 이안이 따라 들어왔다.

“저도 왔어요. 축하드려요!"

그녀의 손에도 선물 보따리가 가득 들려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등장에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곳 주인장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절세미녀였다.

“잊지 않았죠? 평생 무료로 이용하게 해주겠다는 약속?"

이안의 기억력에 차이란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악군학도 차이란도 개업한 후 온갖 군상들을 보다가 검무극과 이안을 보자 함박웃음이 절로 나왔다.

반면 흑수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것들이 정말!'

버젓이 자신이 있는데 이런 짓거리라니! 분노했어야 했는데 분노할 시기를 놓쳤다.

시킨다고 술을 가져다주질 않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개업 축하 화분을 가져오질 않나.

흑수랑이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흠칫했다. 살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는데, 살기가 발출되지 않은 것이다.

'뭐지?"

분명 내력은 그대로인데 살기가 생겨나지 않았다. 한평생 살기를 내뿜고 살아온 인생인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혈이 제압당한 것도 아니었고, 독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내공은 아무 이상 없이 혈맥을 돌았고, 몸 상태도 괜찮았다.

한데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 젊은 놈 때문이다.'

무슨 수법을 쓴 거지? 그는 애써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검무극이 하는 바를 주시했다.

검무극이 악군학에게 생색을 냈다.

“이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야. 만년행운목(萬年幸運木)이라고 장삿집에 두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알려진 전설의 나무라니까. 내가 이걸 구하느라 남만의 독 안개 속을 얼마나 헤맸으며, 곤륜산 굽이굽이 다 뒤졌어.”

악군학이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 금방 구했을 거면서.”

옆에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공이 더 빨라지셔서 금방 구해오셨어요.”

검무극이 화분을 악군학이 있는 곳 옆에 세웠다.

“여기 옆에 두니까 딱 좋네. 악 형, 만 년 동안 행복해야 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친구를 향한 악군학의 눈빛에 고마움이 가득했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자, 우리도 검을 맡겨야지.”

이안이 먼저 검을 건넸다. 악군학이 신중하게 검을 받아들었다.

"일월검, 지금까지 받은 검 중에서 가장 귀한 검이군요.”

그 말에 듣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랐다. 그야말로 말로만 전해 듣던 보검이었다.

사주영이 옆에 있는 이객을 쳐다보았다. 일월검이 그렇게 귀한 검이야? 눈빛으로 물었고 이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검보다도? 라는 전음에는 비교할 수도 없다고 정확하게 평가해 주었다.

사주영은 머쓱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귀한 검도 저렇게 편하게 맡기는데, 자신의 검으로 너무 난리를 쳤다.

하지만 진짜 놀람은 지금부터였다.

검무극이 허리에 차고 있던 흑마검을 풀어서 그에게 주었다.

"언젠가 자네가 올 날을 생각해서 준비해 둔 것이 있네.”

악군학이 아래에서 뭔가를 들어 올렸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검을 올려두는 거치대였다.

그 위에 흑마검을 전시하듯 올려두었다.

“내 검만 특별대우할 필요 없어. 그냥 저 통에 같이 넣어.”

"자네야 괜찮겠지만 흑마검은 안 괜찮지."

다른 검이라면 함께 두지 않겠지만 일월검은 흑마검과 함께 거치했다. 이안의 검이라면 흑마검도 이해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객이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흑마검은 천마신교의 사대보검 중 하나입니다.”

천마신교라는 말에 모두 흠칫 놀랐다. 물론 객잔에 마인이 올 수는 있지만, 그 마인이 천마신교 사대보검 중 하나를 가지고 다닌다고?

만약 훔친 검이라면 이곳에 마교의 고수들이 들이닥칠 수도 있다는 뜻.

자연스럽게 모두의 긴장한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내 검에 이름표 확실히 붙여줘. 그거 잃어버렸다간 중원이 발칵 뒤집힐 테니까. 크게 써.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천마신교 소교주라고? 너무 놀라운 신분이라 그저 침묵만이 감돌았다.

악군학과 차이란은 검무극이 일부러 신분을 밝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진짜 개업 선물은 만년행운목이 아니었다.

천마신교 소교주조차 검을 맡기고 쉬는 곳이 영웅객잔이다.

이제 강호에 이 소문이 퍼질 테고. 천마신교 소교주가 순순히 검을 맡겼는데 감히 맡기니 마니 실랑이를 하려는 자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객잔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었다.

“교주님은 잘 계시지?"

“잘 계시겠지. 나도 아버지 못 뵌 지 꽤 됐어.”

대화만 봐서는 천마신교 소교주가 확실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사주영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무시했던 저 말총머리는 천마신교 소교주와 친구처럼 보였다. 그것도 아주 친한.

검을 맡긴 검무극과 이안이 다시 흑수랑 앞을 지나갔다.

“자, 지나가요. 이분은 왜 자꾸 길을 막고 서 계시나?”

흑수랑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숨이 막히고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무런 기도도 내뿜지 않았음에도 이런 위압감을 준다는 것은!

'진짜 소교주다!'

아까 왜 살기가 솟구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토끼가 호랑이 앞에서 무슨 살기를 내뿜겠는가? 눌린다는 인식조차 못 하고 상대의 존재감에 짓눌렸던 것이다.

걸어가던 검무극이 다시 돌아와 흑수랑 앞에 섰다.

“내가 귀가 밝아서 오면서 들었소. 친구와 싸운 모양이던데 웬만하면 화해하시오. 못나게 굴고 짜증 나게 굴어도 그래도 살면서 친구 하나 있는 게 큰 힘이 되오.”

그러면서 검무극이 악군학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말 하면서 왜 날 봐!”

그렇게 악군학을 놀리고선 검무극이 다시 가버렸다.

흑수랑은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악군학에게 걸어갔다. 급히 가는 기세가 당장에라도 검을 뽑으려나 싶었는데.

"검은 여기 맡기면 되는 겁니까? 제 검은 그냥 바닥에 던져두셔도 됩니다.”

갑자기 착해진 그의 모습에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염화인의 입에서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실망한 얼굴로 설거짓거리가 쌓여 있는 곳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검을 맡긴 흑수랑이 이번에는 명일검 앞에 마주 앉았다. 그가 상처에 바를 금창약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가 오해가 좀 있었지?”

“내가 속이 좁았었네.”

누가 화해하라고 했는데 안 하겠는가? 다시 두 사람이 강제 죽마고우가 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이안과 함께 자리 하나를 차지해 앉으며 차이란에게 말했다.

“어서 볼일 보고 이리 오시오! 악 형도 이리 오시고!”

검무극은 이안과의 관계를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모습이었다.

차이란이 다시 사주영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참, 아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했죠?”

이제 사주영의 눈에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까까진 더없이 매력적인 객잔 주인장이었는데, 지금은 무서운 마녀처럼 보였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소맷자락에 묻은 것이 양념장이 아니라는 것을.

사주영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 소매에 피 묻으셨다고요.”

저 현판에 넘어간 거야?

“보시다시피 제가 귀한 손님이 와서.”

차이란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천마신교 소교주라면 사주영과 이객이 살면서 본 손님 중에 가장 귀한 손님이었다.

"우린 신경 쓰지 마시고 가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차이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무극과 이안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사주영이 이객을 쳐다보았다. 이객은 잘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사주영이 개념 없이 굴 때도 많았지만 이럴 때는 눈치를 챙겼다.

사주영이 이객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래서 우리가 돈을 받아낼 수 있을까?

조금 전 생각은 취소다. 아직 제대로 눈치 챙기려면 멀었다.

ᅳ천마신교 소교주 친구에게서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아낸다고요? 오히려 돈을 안 뜯기면 다행입니다.

사주영이 검무극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객잔 내에 있던 모든 손님이 소교주를 훔쳐보고 있었다.

태어나 천마신교 소교주를 직접,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였으니까.

흑마검도 규칙대로 맡기는 소교주니 설마 이 객잔에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겠지?

이런 마음에서 그들은 안 보는 척, 슬금슬금 소교주를 훔쳐보았다.

ᅳ정말 소교주 맞나? 내가 생각했던 소교주와는 너무 다른데?

마교 소교주라면 정말 살벌하게 무서울 거라 예상했다.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주는, 그야말로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운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한데 저렇게 밝은 사람일 줄이야.

그리고 그를 지키는 사람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호위인가? 왠지 그런 분위기 같지 않았다. 친구 같았고 연인 같았다.

─마교 소교주가 호위 없이 이렇게 돌아다닌다고?

이객은 사주영의 말에 동감했다. 앞서 염화인도 그렇고, 저 소교주도 그렇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긴가민가한 부분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가짜일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신교 소교주의 친구를 사칭했다간, 마교에서 이들을 그냥 두겠는가?

심지어 검무극은 모두에게 술까지 샀다.

"악형, 여기 있는 모두에게 술 한 병씩 돌려줘.”

그러자 진짜 점소이들이 와서 술을 돌렸다. 악군학과 차이란은 검무극이 술을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소문을 더 빨리 퍼지게 하려고.

참을 수 있겠는가?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술을 얻어 마셨다는 자랑을.

그런 다음에야 검무극은 악군학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객잔 내부를 정말 멋지게 꾸몄네.”

이안 역시 크게 감탄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객잔은 처음이에요.”

“이 소저, 우리도 여기 빌붙어 삽시다. 일자리 하나 내어주겠지.”

바로 그때 차이란이 흠칫했다.

"잠깐!"

차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취조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 소저라니요? 지금 이 소저라고 했나요?”

검무극이 짐짓 흠칫 놀랐다.

“내가 이 소저라고 했소?”

“게다가 존대까지 했죠.”

"아, 이런 실수를.”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어색한 연기라니! 짐짓 당황하는 것까지 들키기 위한 계획된 연기였다. 자신과의 관계를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차이란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안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두 분 축하해요.”

그녀의 말에 악군학 역시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축하한다."

"고마워, 악형."

검무극이 솔직한 마음을 악군학에게 전했다.

"자랑하고 싶어서 아까부터 힘들었어. 저기 문 열고 들어오면서 소리치고 싶었거든.”

"자랑할 만하다. 축하드립니다, 이 소저.”

고마운 말에 이안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악군학은 그녀를 위해 지난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원래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극이와 적이었을 때 이 소저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소. 이 소저와 어떤 사이냐고. 그러니까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사람이라고 대답했소.”

이안은 내심 감격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이 대단한 악군학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니. 자신 앞에서 으레 하는 농담 같은 게 아니었다는 의미였다.

차이란은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다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은 길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네요.”

이안이 그 말을 돌려주었다.

“차 무인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래도 이쪽이 좀 쉽죠.”

그녀들의 대화를 검무극이 부정했다.

“내가 악형보다는 여러모로 훨씬 쉬운 사람이지!”

이안과 차이란은 물론이고 악군학까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내가 저 자유로운 영혼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라고?”

차이란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몰랐다는 게 더 놀랍네요.”

그렇게 한바탕 축하하고 나서 악군학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아직 돌아가면 말씀드려야지."

이안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교주님에게 둘이 사귄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순간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또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악군학이 점소이에게 말했다.

“가서 제일 좋은 술을 내오너라.”

점소이가 영웅객잔에서 제일 비싼 술을 가져왔다.

"축하주 한잔해야지.”

네 사람이 술잔을 들어 건배하려던 그때였다.

한 남자가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매끈한 피부에 옷을 잘 차려입은 중년 남자였다.

그를 쳐다보며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별의별 것들이 다 오는구나.”

상대를 한눈에 꿰뚫어 보는 말이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안 역시 모든 것을 배웠기에, 역시 상대를 한눈에 파악했다.

"장사하시기 참 힘들겠어요."

악군학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니 일단 받아야지.”

악군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남자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우리 객잔에는 처음이십니까?”

“그렇소."

“저기 규칙을 먼저 읽어보시지요.”

남자가 규칙을 읽어보았다.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아마 이곳의 규칙에 대해서 알고 온 모양이었다.

"병장기는 안 쓰니 해당 사항 없고, 누군가와 싸우거나 죽일 생각이 없으니 괜찮고, 칠 일 이상 묵지 않을 거니 상관없소.”

“며칠이나 묵고 가실 겁니까?"

“이틀 정도 묵을 작정이오. 방을 내주기 전에 술부터 한잔하겠소.”

"편한 자리에 앉으시지요."

남자가 객잔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경험이 많은 이객은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렸다.

ᅳ저자와 눈을 마주치지 마십시오.

-누군데?

-옥면음귀(玉面陰鬼)입니다!

옥면음귀는 무림에서 유명한 색마였다. 수많은 여인을 간살한 그는 무림공적에 오르면서 행적이 묘연했었는데, 오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ᅳ색마면 이곳 주인장을 노리고 온 것이잖아?

-그럴 겁니다.

ᅳ알려줘야지.

―신중하셔야 합니다. 저자는 성격이 옹졸하고 음흉해서 반드시 원한을 갚는 자로 유명합니다. 삼십 대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일흔을 훌쩍 넘은 노인이지요.

-일흔이 넘었다고?

-그만큼 공력이 고강한 자입니다.

이객이 걱정하는 것은 괜히 나섰다가 옥면음귀의 원한을 사게 되어 사주영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옥면음귀의 악명이 높았다.

―저들에게는 소교주가 있으니 일단 두고 보시죠.

과연 저들은 이자가 색마인지 알아볼까?

과연 남자는 이객이 말한 대로 옥면음귀였다. 그는 영웅객잔의 주인이 더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무림공적이 된 이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오늘 위험을 감수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차이란의 얼굴을 보자 그는 날아갈 듯 기뻤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하루 이상 데리고 있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한동안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등을 돌리고 있던 이안이 옆을 쳐다보며 얼굴을 드러냈다.

옥면음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되겠구나.'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두 여인 모두 납치해서 가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절세미녀들이라면 호위들이 있기 마련이지.'

옥면음귀가 슬쩍 옆자리의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게 어디 명문가 자제처럼 보였다.

자신에게 규칙을 읽게 한 말총머리 역시 특별히 대단한 고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규칙을 내건 객잔이라면 분명 고수를 준비해뒀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여인들을 지키는 고수는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욕정에 불이 지펴진 이상, 누가 지키든 지키지 않든 반드시 저 여인들을 납치할 작정이니까.

어차피 무림공적에 올라버린 이상 뒤가 없는 그였다.

차이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시 후원에 다녀올게요. 아까 처리하던 일이 남아서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후원 쪽으로 걸어갔다.

주위를 살피던 옥면음귀가 뒷간을 가는 척 뒤따라 일어나더니 그녀를 따라 나갔다.

옥면음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여인을 사냥하면서 이렇게 떨린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복도를 지나서 나가니 후원이었다.

그녀가 아름답게 꾸며진 후원을 가로질러 걸었고, 옥면음귀가 은밀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곳에 차이란이 서 있었다.

“저를 쫓아온 건가요?"

주위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옥면음귀가 본색을 드러냈다.

“아름답게 태어난 네 잘못이다.”

“추악하게 태어난 당신 잘못 아니고요?”

겁먹은 반응이 아니었기에 옥면음귀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 전에 하던 일은 마저 하고요.”

그녀가 옆으로 비켜서자 뒤쪽 광경이 드러났다. 정말 생각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곳에는 깊은 구덩이가 있었고 그 옆에 시체가 한 구 놓여 있었다.

차이란이 시체로 걸어갔다.

옥면음귀가 그곳에 서서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죽은 사람은 누구지?”

“본 객잔의 세 번째 규칙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죠.”

객잔에서 규칙을 어기고 다른 사람을 죽인 인물이었다.

"바깥 객잔은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또 이런 이면이 있기 마련이죠. 당신은 잘 알겠네요? 당신의 그 매끈한 얼굴 아래에 있는 추한 것처럼.”

옥면음귀의 얼굴이 꿈틀했다.

“아까 일하는 중에 불려가서. 차라리 잘 됐어요."

차이란이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두 번 일 안 해도 될 거 같네요.”

-그 여인이 당한 게 틀림없어.

두 사람이 나가는 걸 지켜보았던 사주영이 이객에게 전음을 보냈다.

-미리 경고했어야 했어.

그러자 이객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여인은 괜찮을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저기 있는 세 사람도 놈이 뒤따라가는 걸 다 봤습니다. 한데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습니다.

―그야 그놈의 정체를 모르니까 그런 거겠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객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객잔은 자신들이 함부로 끼어들 그런 객잔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아니야, 그랬다가 우리가 누명을 쓸 수도 있잖아?

사주영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에게 변고가 생기면 저 마교 소교주가 우릴 다 죽여버릴 수도 있어. 그냥 나가는 게 맞지? 그렇지?

온갖 걱정을 다 하던 그때, 차이란이 다시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걸어가던 그녀가 사주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 대협, 술과 요리는 입맛에 맞으세요?"

“아주 훌륭합니다.”

그때 사주영은 보았다. 그녀 소매에 묻은 피가 더 많이 늘어났음을.

"........피가 더 묻었네요.”

그러자 차이란이 일상다반사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제 피 아니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그에게 차이란이 웃으며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럼 맛있게 드세요.”

그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사주영이 이객에게 말했다.

-어서 이 기분 나쁜 곳에서 나가자.

-그러시죠.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마친 그들이 나가려던 그때, 객잔 문이 열리며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두 남자가 검을 겨누며 그곳으로 들어섰다.

“물러나! 이제부터 움직이는 놈은 다 죽는다!”

사주영과 이객이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 빌어먹을 객잔!

들어선 두 무인 중 하나가 항상 악군학이 서 있던 곳으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놈이 구석에 있는 검이 꽂힌 통에서 제령화염도를 꺼내 들었다.

"제가 이곳에서 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제령화염도냐?”

남자가 제령화염도를 뽑으며 말했다.

"보십시오, 진품입니다!"

그러던 그의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여길 보십시오! 여기에!”

그는 거치대에 있는 두 자루의 검을 보며 흥분했다.

"이건 일월검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악군학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난리네.”

아직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온갖 군상들이 계속 찾아오고 있었다. 한데 하루에 이렇게 연속해서 사건 사고가 터진 적은 처음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차이란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풍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 왔잖아요?"

그녀의 말에 악군학이 검무극을 몰아붙였다.

“나 이런 꼴 당하는 거 구경하려고 이런 객잔 하라고 했지?"

“이래야 오래 하지. 평범한 객잔을 자네들이 어떻게 하나?"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돈은 많이 벌고 있어요. 아, 저기 일월검에 손댔어요. 어서 가봐요.”

악군학이 그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손님, 그 검은 놓으시고 우선 벽에 적힌 규칙부터...

검무극이 얄밉게 술을 홀짝 비우며 악군학을 구경했다.

"여긴 술안주가 필요 없다.”

그날 밤 검무극은 악군학과 함께 영웅객잔 문을 닫았다.

검무극이 현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우리 악형 좋아하시네.”

현판의 글자는 바로 교주 검우진의 필체였던 것이다.

“객잔을 열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갔었다.”

단지 교를 떠나기에 드리는 인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어 죄송하다고 사죄드리러 갔었지.”

“약속? 무슨 약속?”

악군학이 검우진과 했던 약속을 검무극에게 말했다.

"네 편이 되어 주겠다고 교주님과 약속했었다."

“우리 아버지와? 왜?”

“교주께서 원하셨다.”

검무극은 아버지가 악군학과 그런 약속을 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객잔을 하게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지.”

“떠난다니까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

"장사 잘하라면서 저 글을 직접 적어주셨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형."

악군학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담판 짓기로 약속한 날, 와서 내 편 들어줘.”

악군학이 현판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망설였다.

“왜 대답 안 해? 설마, 저 현판에 넘어간 거야?"

악군학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멋있잖아?”

글씨도, 이 글씨를 써준 교주님도.

“그러니 나 말고 더 강하게 먹힐 사람을 구해.”

“악형보다 강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악군학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은 없지만, 앞으로는 생길 것도 같은데?”

가서 허락받고 오너라

“아직 공사가 덜 끝났어요.”

다음날 차이란은 이안을 데리고 영웅객잔 후원 뒤쪽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곳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본채 건물도 웅장했지만, 거기에 별채까지 짓고 있었다.

"중원 최대 규모의 객잔으로 만드는 게 목표거든요.”

“추진력이 대단하세요.”

“물에 물 타고 술에 술 탄 느긋한 분과 같이 동업해 봐요. 제가 앞장 안 섰으면 아직 어디서 시작할지도 결정 못 했을 "거예요."

차이란의 말에 이안이 웃었다. 악군학도 차이란도,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용감하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다니.

“행복해 보이세요.”

“그대로 돌려드려야 할 말이네요.”

공사 중인 인부 중에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해온 사람은 놀랍게도 일교와 다른 살수 여인들이었다.

“다들 잘 지냈어요?”

수하였다가 이젠 귀영대를 떠났으니, 이안은 정중히 그녀들을 대했다.

차이란이 천마신교를 떠나면서 십칠교를 제외한 살수 여인들이 모두 교를 떠났다.

차이란은 수하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각자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교를 비롯해서 삼분지 일 정도의 살수들이 차이란 옆에 남았다. 차이란은 그런 이들까지 억지로 보내진 않았다.

영웅객잔에서 일하는 것도 새로운 삶이었으니까.

대신 떠나고 싶을 때 언제라도 떠나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되도록 그녀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맡기지 않았다. 직접 처리하고, 직접 파묻었다.

일교가 매번 수하들과 함께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해도 그녀에게 맡기지 않았다. 손에 피를 안 묻히는 인생도 한번 살아보라고.

차이란의 소맷자락이 핏방울로 장식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공사 중인 곳까지 둘러보고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앞 영웅객잔 정문에 검무극이 악군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객잔 차린 것 후회해?"

"후회할 시간이 있어야 후회하지. 봤잖아?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쁘다.”

"죽을 때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했던 일로 후회하는 것보다는 못 해본 걸로 후회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잘했어. 하다가 정 힘들면 때려치우면 되지.”

"말은 쉽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아, 돌아가기 싫다! 여기서 악 형이랑 같이 평생 같이 있고 싶다.”

“그럼 가지 마."

"정말 한 달만 여기에서 살까? 객잔 문 내가 열고 내가 닫을게!”

“제일 좋은 방 내준다니까.”

악군학은 검무극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왜? 겁나냐?"

“뭐가?"

“이제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니 두렵냐고?”

검무극이 흠칫 놀라며 악군학을 쳐다보았다.

“남들에게는 덥석덥석 잘도 새로운 인생을 안겨주면서, 막상 네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니 겁나지?”

검무극은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보다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때 이 소저를 잃게 될까 봐?”

검무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사랑 못 해보고 잃게 되는 건 겁 안 나고?”

“죽을 때는 못 해본 걸 후회한다면서? 방금 네가 말했다.”

검무극이 악군학을 보며 놀렸다.

"왜 이렇게 잘 알아? 사랑도 못 해본 사람이!”

“누가 그래? 내가 사랑 못 해 봤다고.”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나중에 이 소저와 싸우면 여기로 도망쳐 와라. 적어도 칠 일간은 못 싸운다.”

악군학의 농담에 검무극이 그를 걱정했다.

“악 형은 싸우면 어디에 숨으려고?”

잠시 사이를 두고 악군학도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나야 너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이다.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맨발로 다닐 수 있는 거다. 떠날 결심도 할 수 있고.”

하지만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악군학이 얼마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지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떠나고 싶은 병 도지면 내게 꼭 와.”

“가면?”

“내가 이렇게 말해줄게. 어딜 그렇게 도망가려고 그러냐? 가봤자 거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못 찾으면 거기서도 못 찾는다!"

악군학은 그게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검무극이 스스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뒤에서 차이란이 말했다.

"뭘 그리 찾아요?”

돌아보니 차이란과 이안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겠소? 내가 찾는 건 이 소저뿐이지.”

차이란이 악군학에게 말했다.

“저런 농담은 좀 보고 배워요.”

“농담이라니요! 제 진심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작별을 나눴다.

“악 형, 또 보자고.”

"잘 가."

“그럼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이안의 인사에 차이란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

“저도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이 영웅객잔을 떠나갔다.

걸어가는데 한 무인이 여인과 함께 그들을 지나쳐갔다.

“저깁니다, 아가씨. 저기까지만 가면 살 수 있습니다.”

검무극은 남자가 표를 내진 않았지만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속삭임이 검무극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정말 그런 객잔이 있을까요?"

“소문이 사실이길 바라야지요. 며칠만 버티면 우릴 구할 사람들이 올 겁니다. 가시죠, 아가씨.”

“치료부터 해야 해요.”

“아뇨, 아가씨 안전이 우선입니다. 제가 다쳤다는 걸 표 내면 안 됩니다.”

그들이 지나치자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힘겹게 걸어가는 두 사람 너머로 영웅객잔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그대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의원을 불러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검무극이 다시 함께 걸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이 소저, 이번 여행 어떠셨습니까?"

이안은 드디어 교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좋았어요.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이번에는 이안이 물었다.

"당신은 이번 여행이 어땠나요?"

이제 소교주나 도련님이란 말은 검무극이 절대 못 쓰게 했기에, 당신이라고 불렀다.

“나 역시 영원히 잊지 못할 여행이었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만 돌아갈까요?”

이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돌아가요.”

본단으로 돌아온 검무극은 곧바로 천마전으로 가지 않았다.

그가 이안을 데리고 간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검무극이 아주 오래전에 쓰던 옛 수련장이었다.

두 사람이 정말 오랜만에 수련장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곳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이곳이 이렇게 작았나?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기억에는 이보다 더 컸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랫동안 비워진 곳이었지만 소교주가 쓰던 수련장이었기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벽 한편에는 목검들이 세워져 있었다. 어린 시절 검무극이 사용했던 작은 검들이었다.

검무극이 목검을 들어보았다. 손때 묻은 목검을 보자 어린 시절 이곳에서 수련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 옆으로 수련용 목인(木人)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몸통 곳곳이 패여 있었다.

그 흔적들은 바로 더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었고 강해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두려움의 흔적이었다.

이안도 이곳에 자주 왔었다. 검무극이 수련하는 내내 밖에서 그를 지켜주었으니까.

“여기 정말 오랜만이네요."

"기억나시오?"

“그럼요. 여기서 수련 많이 하셨잖아요? 아, 그때 정말................"

귀여우셨는데.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목검을 들고 휘두르던 꼬마 검무극은 정말 귀여웠다.

그때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불쑥 꺼냈다.

“여기서 그대를 처음 봤지요."

그녀가 어찌 잊겠는가? 그날의 기억만큼은 그녀에게도 생생했다.

현재 검무극의 모습 위로 어린 시절 검무극이 겹쳐졌다.

그곳으로 어린 시절 자신이 사부와 함께 이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공자님을 호위할 아이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부터 자신은 소교주의 방패로 키워졌다. 전신석화공을 익힌 후 항상 소교주 옆에 붙어 있다가 마지막 순간 몸을 던지는 운명. 자신은 그 운명으로 키워졌던 것이다.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소교주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건 검무극도 기억나지 않는 말이었다. 그날 그녀를 봤던 기억만 났다.

“난 무극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이안의 눈앞에 어린 시절 검무극이 서 있었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그 순간이 그녀가 소교주를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검무극이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말했다.

“나는 검무극이오, 앞으로 잘 부탁하오.”

어린 시절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 두 사람도 그곳에 서서 마주 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지금껏 그녀에게 전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말로 전했다.

"그대가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겪을 때, 그 상처를 다독여주지 못한 나를 용서해 주시오.”

상처 입은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지 못했다. 밤새 울고 나와서 눈이 퉁퉁 부은 것을 보고서도, 괜찮으냐고 위로하지 못했다.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문제는 용서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땐 당신도 어렸잖아요?"

그래, 그땐 자신도 어렸다.

“그러니 어른이 된 지금의 사과를 받아주시오.”

“사과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제게 무심하고 냉담한 적 없었어요."

아버지와 형을 상대하느라 검무극은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이안만은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신은 누구보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잖아요.”

이안이 다가가서 검무극을 꼭 안아주었다.

“당신이 그 일을 사과해야 한다면 저도 사과해야 해요.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래서 제대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담아둔 미안함을 서로에게 전했다.

품에 안긴 이안은 검무극의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그녀에게서 떨어진 검무극이 자신과 그녀의 운명을 바꿀 말을 꺼냈다.

“이 소저, 나와 혼인해 주겠소?"

쿵 하고 이안의 심장이 떨어졌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며 뒤이어 온몸의 전율로 이어졌다.

그래,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 속 상상과 실제는 너무 달랐다. 눈물과 웃음이 동시에 충돌하면 어떤 기분인지 처음 알았다.

멍하게 있던 그녀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뒤이어 긴 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떨리는 눈동자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이번 여행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저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단한 사람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부터 들었을 테니까.

그래서 이 말부터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제가 어찌 소교주님과 혼인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이 순간의 이안은 이안이 아니라 이 소저였다. 그랬기에 부정적인 생각들은 저 멀리 밀어내 버리고,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네.”

단 한마디의 허락이었지만, 그 순간 검무극이 두 팔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펄쩍펄쩍 수련장을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이렇게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그는 진심으로 좋아했다.

검무극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였는데.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 기쁨을 이렇게 온몸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좋아하고 있으니 그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하지 말라고.

이안은 행복했다. 마후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검무극이라는 남자의 여인이 되는 것이 좋아서였다.

이안은 아이처럼 뛰어다니다 다시 자신 앞에 선 검무극을 보며 씩씩하게 말했다.

“네, 저도 당신과 혼인하고 싶어요.”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그 씩씩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잠깐만요, 저 아직 준비 안 됐어요.”

이안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기둥에 기댔다.

“정말 오늘 말씀드릴 건가요?"

“아시잖소? 비밀이라곤 없는 본교라는 것을.”

정말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안은 이 농담을 반드시 했을 것이다.

대부분 당신 입에서 나갔던 말이잖아요? 비밀 없는 천마신교는 당신이 만들었다고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후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미루지 말아야지.

“가요."

그들이 천마전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검무극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피의 길을 걸었다.

이안이 있어서였을까? 평소보다 반기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잘 다녀왔느냐?"

"네, 아버지."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교주님.”

원래라면 출교에서 돌아오면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다 말하는 검무극이었는데, 일단 이 자리에서는 다 생략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일생일대의 말을 꺼냈다.

“이안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이안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귀가 달아오르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교주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빙궁의 혈육임이 밝혀졌더라도, 권마의 수양딸이 되었더라도, 교주에게 자신은 소교주의 호위 무인에 불과할 텐데.

지그시 이안을 바라보던 검우진이 태사의에서 일어나 아래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이안의 심장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이윽고 검우진이 이안 앞으로 걸어왔다.

“이안."

“네, 교주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안이 고개를 들어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저 못난 놈으로 괜찮겠느냐?"

상상도 못 한 말이었기에 이안의 가슴에 격정이 휘몰아쳤다.

교주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말로 허락한 것이다.

이안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지금은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보일 때였으니까.

“그 못난 사람이 제 눈에는 제일 잘나 보입니다.”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가 아들을 향해서는 엄격해졌다.

"장인 될 분에게 가서 허락받고 오너라.”

“네, 아버지!”

검무극이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정파에 속한 어머니를 만나 혼인까지 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가 아들의 사랑을 흔쾌히 허락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안도 함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검우진의 깊은 사랑에 그녀는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안과 함께 저만치 걸어가는 아들에게 검우진이 말했다.

“그 사람이 허락 안 해줄 수도 있다.”

“그건 곤란한데요. 무림에서 가장 강한 주먹을 지니신 분이 반대하시면.”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 주먹에 얻어터지더라도 꼭 허락받고 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천마전에서 나가자 허공에서 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드립니다, 교주님.”

"고맙네.”

검우진은 살면서 생각지 못한 여러 일을 겪었지만, 이런 날이 올 줄은 또 몰랐다.

“그 사람과 사돈이 될 줄은 정말 몰랐군.”

검우진은 잠시 권마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젊은 시절이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이따가 권마가 찾아올 테니 그 사람이 좋아하는 술을 준비해 주게.”

내 사돈 될 사람이 자네라서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검무극의 말에 단호한 거절이 나왔다.

"싫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검무극이 차분히 물었다.

“왜 싫으십니까?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너는 분명 내 딸을 고생시킬 테니까.”

“절대 고생시키지 않을 겁니다.”

“믿을 수 없다. 만날 무림맹과 사도맹 소맹주들과 놀러 다닐 거고, 마존들과 놀러 다닐 게 뻔하다. 우리 딸을 매일 외롭게 만들겠지.”

그 문제라면 어렵지 않았다.

“놀러 갈 때면 항상 같이 다니겠습니다. 이번에 함께 여행 다녀온 것 보셨잖습니까? 따님이랑 함께 다니는 것 좋아합니다.”

“그래도 싫다!"

“또 왜 싫으십니까?”

이번에 나온 거절의 이유는 검무극 때문이 아니었다.

“네 아버지 때문에 싫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싫다고요?"

“천마를 시아버지로 모시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 내 딸을 그렇게 힘든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께서 따님을 정말 아끼고 좋아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번에 허락하셨다고요! 이렇게 반대 안 하셨다고요!

아니, 그리고 권마 장인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이것저것 따지는 장인이라고 불평하는 거냐?"

순간 울컥했던 검무극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수양딸인데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지? 이런 거냐?”

“제가 언제 그렇게 말씀드렸습니까?”

"싫다! 건방진 네놈에게 내 딸은 절대 안 줄 거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검무극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남자답게 우리 권법으로 한 판 붙죠! 제가 이기면 허락하시고, 아니면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그때 앞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짜 그렇게 할 거냐? 탈락이다. 이놈아!"

검무극 앞에 있는 사람은 권마가 아니라 혈천도마였다. 권마에게 가기 전에 혈천도마에게 들러서 어떻게 해야 허락을 받을지연습 중이었다.

이안이 자신이 먼저 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말했기에 그녀를 먼저 보내고 혈천도마를 만나러 온 것이다.

실전 연습은 실패였다.

혈천도마가 어찌나 실감 나게 반대하는지. 어찌나 사람 속을 뒤집는지.

“이놈아, 무슨 말을 해도 참아야지.”

“죽어도 반대하신다는데 어찌 참습니까?"

“안 참으면?"

“이안이 데리고 야반도주라도 할 겁니다.”

“주먹쟁이 네 사부는 지옥 끝까지 찾으러 갈 거다.”

검무극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요?”

혈천도마도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아! 자식도 없는 내게 물으면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래도 책을 많이 읽으셨잖아요.”

“서재가 넓다고 어찌 인생을 잘 알겠느냐? 한 권을 읽어도 읽은 대로 살아야 지혜가 되는 법이지.”

“제 주변에 제일 똑똑한 분이 어르신이라고요! 어서 답을 내려주십시오!”

그때 옆에서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소교주, 우선 권마존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게 중요할 것 같네.”

그녀는 바로 그들 옆에서 화원의 꽃과 나무를 손질하고 있던 일화검존이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곳에서 혈천도마와 함께 화원을 가꾸고 있었다.

“사부님, 많이 속상하시겠지요?"

검무극의 물음에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겠나? 딸로 삼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시커먼 날도둑놈이 와서 내 딸을 훔쳐 가겠다는 거니까. 자네 같으면 어쩌겠나?"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검무극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같으면 반쯤 죽여놨을 겁니다. 아니, 진짜 죽일 겁니다!"

“권마존의 마음은 더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을 거네.”

검무극은 권마를 떠올렸다. 그 강철 같은 사람이 한 번 마음을 준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는지는 아버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죠? 사부님 주먹이 더 강해지셔서 저, 맞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혈천도마가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마의에게 미리 기별하고 가. 혼수상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라고 하고."

"농담하실 때가 아니라고요!"

“이놈아, 설마 널 죽이기야 하겠냐. 몇 대 두들겨 패고 허락하겠지.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다고.”

“오랜만에 천마호신공을 극한까지 발휘해야 살아남겠네요.”

그때 일화검존이 넌지시 물었다.

“한데 왜 혼인하기로 마음먹은 건가?”

혈천도마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두 사람에게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은 이안이 좋아서고."

거기에 혼인 그 자체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더해졌다.

“저도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요.”

검무극과 검우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지켜봐 온 두 마존이었기에, 저 말에 담긴 뜻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일화검존은 검무극과 이안이 낳은 아이를 떠올려 보았다.

"자네들의 자식이라면 정말 잘생기고 예쁘게 태어나겠지.”

어디 그뿐인가? 친할아버지는 천마고 외할아버지는 권마다. 거기에 엄마는 천하제일미에 외가는 북해빙궁, 거기에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검무극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아이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식 있는 마존이 없으니, 마존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랄 거네.”

이안은 아버지에게 먼저 와서 검무극에게 청혼받은 일을 전했다.

그 놀라운 일에도 권마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예상하셨던 걸까?”

처음 권마의 수양딸이 되었을 때, 검무극이 그녀를 놀렸다.

저 무서운 장인 때문에 너 혼인 다 했다고. 그때 권마가 이렇게 말했었다.

너랑하면 되지 않느냐.

그 농담 같은 말이 현실이 되어 지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청혼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권마가 가장 먼저 물은 것은 이것이었다.

“네 뜻은 어떠하냐?"

이안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버지께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절대 마음 편하지 않았다. 지금 아버지가 어떤 심정이실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저는 좋습니다."

그래서 이안은 그 기쁨을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단 하나다."

잠시 사이를 두고 권마가 말했다.

"혹시라도 상대가 소교주이기에 거역하기 곤란해서 허락한 것은 아니냐? 진짜 네 마음은 다른데.”

이안은 아버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잘 알았다.

“아닙니다, 아버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전했다.

“저도 오래전부터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됐다.”

"허락하시는 건가요?"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다.”

권마는 이안을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키운 딸은 아니었지만, 부모가 되어 보고. 이제 사위를 얻는 경험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로서 서툰 사람이란 것 알고 있다.”

권마는 평소 하지 않았던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이럴 때 네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이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다.”

권마가 이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딸이다.”

친딸이 아니어도, 어려서부터 키우지 않았어도, 권마는 이안을 친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널 불행하게 만들면 소교주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 아비에게 말해라. 네 뒤에 이 아비가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딸을 위해서라면 홀로 무림 전체와도 싸울 수 있는 권마였다.

이안이 달려가 아버지 품에 안겼다.

검무극이 혼인하자 했을 때도 참았고, 검우진이 혼인을 허락했을 때도 참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 순간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꼭 아버지께 말씀드릴게요.”

권마는 그 큰 손으로 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딸아, 어떤 상황에서도 네 행복은 포기하지 마라.”

검무극이 동권문을 찾아갔다.

기분 탓일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는데 평소보다 더 무겁고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검무극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동권문의 철권들은 모두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소교주를 봤음에도 인사도 하지 않고 쳐다보는 모습이 분명 적대적이었다.

그 가운데 권마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무서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굳어져 있었다. 이안은 조금 떨어진 곳에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검무극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상되었다.

―내 딸을 그냥 줄 수는 없지. 주먹으로 나를 이기면 혼인을 허락하겠다.

과연 권법으로 사부를 이길 수 있을까? 오늘 이곳에서는 지금껏 듣지 못했던 엄청난 천둥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다.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따님과 혼인하고 싶습니다.”

검무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굳어 있던 권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사위 왔는가?"

검무극이 깜짝 놀라던 그때.

펑! 퍼엉! 펑!

건물 뒤에서 폭죽이 터져 올랐다.

사방에 서 있던 철권들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입을 맞춰 소리쳤다.

"축하드립니다, 소교주님!"

그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철권들이 동시에 달려 나와서 검무극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들과는 한때 동문으로 지냈으니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아는 친근한 관계였다.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그들 중에는 차기 권마이자 사매인 천소희도 있었다.

“사형, 축하해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검무극은 이 상황에 놀라 물었는데, 마찬가지로 천소희는 혼인 소식에 놀란 상태였다.

"그건 제가 물어야죠. 어찌 된 일입니까, 사형!"

검무극이 철권들 너머 저 멀리 권마와 이안을 바라보며 농담 섞인 대답을 했다.

“이 모든 건 심야 수련 모임 덕분이겠지?"

천소희가 인정한다며 환하게 웃었다. 적어도 자신이 권마의 후계자가 된 것은 그 모임 덕분이 틀림없었으니까.

그렇게 철권들의 축하를 받은 후 검무극이 권마에게 걸어갔다.

“사부님.”

권마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서 그 큰 손으로 검무극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큰 결심 했다.”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래, 허락한다.”

권마가 이렇게 흔쾌히 허락한다고? 반대에 대비해서 연습까지 하고 왔는데?

"우리 사위, 자유롭게 살다가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겠군.”

우리 사위라니! 권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이러다 기습 공격이라도 하려는 걸까? 이거 함정인가?

“사부님께서는 반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권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교주님과 사돈이 되는데 내가 왜? 이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다고?"

맞는 말이긴 합니다만.

"이안에게 잘못하면 혼내주겠다, 이런 말씀 안 하십니까?"

이번 역시 권마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잘못하려고?"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잘못하면 교주께서 그냥 있으시겠느냐? 내 차례까지 안 올 거다. 교주님 성격 모르냐?”

거기에 권마가 믿는 건 하나 더 있었다.

“심지어 그 순서가 교주님께도 안 갈 수도 있지.”

"무슨 말씀입니까?"

“저 아이가 착하고 순해 보여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그건 알지?"

"아뇨, 착하고 순한 것까지만 아는데요?”

검무극이 권마와 함께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말랑말랑하고 호락호락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흠칫하며 권마를 보며 말했다.

“설마 제가 모르는 집에서만 보이는 모습이 있는 겁니까?"

이안에서 이 소저로, 다시 이 부인이라는 변신 단계가 남아 있는 겁니까?

“네가 왜 이 고생길에 스스로 들어섰는지 모르겠지만, 내 딸 잘 부탁하네."

“이러시니까 왠지 무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그제야 권마가 그 큰 주먹을 검무극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이미 늦었다."

권마와 검무극이 마주 보며 웃었다. 검무극은 권마가 이렇게 흔쾌히 기분 좋게 허락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권마는 굳이 잘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평생 이안을 위해 살겠다고 약속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잘하겠다고 약속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실제로 잘하지 못한다면 진짜 잘할 사람이라면 약속하지 않아도 잘할 것이고,

못할 사람이라면 이 주먹으로 때려죽인다고 하더라도 못할 것이다.

권마가 봤을 때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할 사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최대한 환대해주고 기뻐해 주는 것이 딸을 위한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이안이 권마에게 말했다.

“앞으로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나는 괜찮으니 네 남편에게 잘하거라."

권마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너희들이 훨씬 더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것 알고 있다. 지금 이 마음 잊지 말고 잘 살아라.”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겉으로 이렇게 흔쾌히 보내도 어찌 마음이 불안하지 않겠는가?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딸과 하고 싶었던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텐데.

“이안이를 떠나보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제게 아버지가 한 분 더 생겼듯, 이제 사부님께 아들도 한 명 생겼습니다.”

권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 무서운 얼굴이 오늘만큼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우리 딸이 최고의 사윗감을 데려왔다!"

권마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철권들이 환호했다. 그들의 환호는 천마신교 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날 저녁 권마가 검우진의 처소로 찾아왔다.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검우진은 술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술 한잔 먼저 받게.”

검우진이 권마에게 술을 한잔 부어주었다.

“천방지축인 아들 녀석 잘 부탁하네.”

술을 받은 권마가 검우진의 잔을 채워주었다.

"부족한 딸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건배하며 술잔을 비웠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허락은 했지만 이래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감히 제가 교주님과 사돈지간이 되다니요.”

그야말로 검우진에 대한 충성의 화신인 그였다.

검우진이 권마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내 사돈 될 사람이 자네라서 기쁘다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느꼈기에 권마는 감격했다.

“저도 교주님이라서 너무 좋습니다.”

권마가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솔직히 사위 될 사람이 무극이가 아니었다면 이 혼인 반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검우진은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마신교 소교주의 아내라는 자리가 어찌 좋은 일만 있는 자리겠는가?

교내 정치에 휩쓸리고 온갖 음모와 위험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검무극이 보여준 모습이 있었기에 기분 좋게 허락할 수 있었다.

"옛날 생각 안 나십니까?"

권마의 물음에 검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교주님은 그 전쟁 같은 일을 겪고서 그렇게 어렵게 혼례식을 올리셨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해주십니까?”

권마의 농담에 검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들 녀석이야 골려주면 재미있겠지만 자네 딸을 어찌 속상하게 하겠나?"

“이번 혼사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지. 자네 딸인데.”

검우진은 권마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감추지 않았다.

“자, 사돈. 내 술 한잔 더 받으시오.”

"감사합니다."

“자네도 사돈이라고 해야지.”

"감사합니다.....사돈."

두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둘이서 이렇게 껄껄 웃은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고, 마음껏 감정을 드러내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웃음이었다.

검우진이 술잔을 시원하게 비우며 말했다.

“이번 혼사는 성대하게 치를 생각이네.”

그때 그 교주 신세는 면했다

검무양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본교 일은 혼자서 다 하는 거야? 왜 이렇게 늦어?”

“이 밤에 어쩐 일이냐?"

“형 보고 싶어서 왔지. 이야기할 것도 있고.”

검무양은 동생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혼인한다고?"

"어? 어떻게 알았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여튼 비밀이라곤 없는 본교지.”

벌써 교내에는 검무극의 혼인 소식이 화제가 되어 있었다.

검무양이 걸어와서 검무극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앉으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와서 앉는 것, 다른 집 형제라면 당연한 이 행동이 검무극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제 형과는 이렇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의미였으니까.

"새치기해서 미안해.”

"괜찮다. 난 혼인할 생각 없으니까.”

“나도 그랬었는데.”

검무양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었어.”

검무극의 농담에 검무양이 웃었다.

“너는 혼인 생활도 잘해 낼 거다.”

"그럴까?"

“좋은 남편에 좋은 아버지가 되겠지.”

밤하늘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검무양을 향했다.

“나는 형이야말로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 생각해. 좋은 남편은 모르겠지만.”

검무양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형은 아버지를 똑 닮았잖아?"

정말 아버지와 닮았을까? 마불은 항상 자신에게 말했다. 교주님을 닮은 건 검무극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그러고 보니 무림맹주 진패천도 그런 말을 했었고.

“너도 내가 정말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형이 나이 먹으면 딱 아버지처럼 될 거라 생각해.”

“아버지가 들으시면 싫어하실 거다.”

"좋아하실걸? 내가 만날 말하잖아. 우리 아버지 장남 사랑, 아무도 못 막는다고.”

검무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형도 혼인해서 우리가 손자, 손녀를 마구 안겨드려야 해. 양손에 손주들을 안고서는 검을 못 뽑으실 거 아니야?"

“그러면 손주들 안고 이기어검술로 싸우시겠지.”

이번에는 검무양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었다. 오랜만에 형과 함께 이렇게 대화를 나누니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말없이 앉아 있어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기에 한참을 함께 달구경을 했다.

"피곤할 텐데 쉬어. 나, 간다.”

검무극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검무양이 불렀다.

“극아.”

자신을 극아라고 부른 건 꼬마 때 말고 처음이었다.

"축하한다.”

검무극이 고개를 돌렸다. 달빛 아래 형은 그 어느 때보다 듬직해 보였다.

"고마워, 형."

검무극이 찾아갔을 때 풍천교주는 짐을 싸고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검무극이 놀라 묻자 풍천교주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혼자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네. 걱정하지 말게. 자네 혼례식 전에는 돌아올 거니까."

"혼자서요?"

“그럼 혼자지.”

풍천교주의 뒤끝이 작렬했다.

“자네가 그랬지? 나중에 나랑 고월이랑 셋이 여행 가자고.”

"기억납니다."

“고월이는 바빠서 못 가, 자넨 이제 혼례를 치러야 해서 못 가. 어쩌겠나? 나 혼자라도 가야지.”

사실 영웅객잔에 놀러 갔다 올 생각이었다. 자신이 지어준 이름인데, 당연히 가봐야지.

“한데 무슨 일로 왔나?"

"부탁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검무극에게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제 혼례에 주례를 서 주십시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내가?"

“네, 어르신이 해주십시오.”

“나 말고 자네와 친한 마존들 많잖아?"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주례를 부탁한다면 혈천도마에게 할 거라 예상했다.

“혹시 혈천도마 그 사람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한 건가?"

"아뇨. 도마 어르신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교주님께 첫 번째로 부탁드리는 겁니다.”

자신에게 가장 먼저 왔다는 사실에 풍천교주는 감격스러우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인가?"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보고 아버지께 손주를 안겨드려서 무림일통을 막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분명 검무극에게 그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저 교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교주님 때문에 혼인하는 거라고요. 나중에 제가 후회하면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리고 혼인도 안 해본 사람이 무슨 주례인가?”

"무림인은 일반적인 법도와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법이지요. 일전에 황천각주 혼례에 도마 어르신이 주례를 서지 않았습니까?"

“그야 거긴 사제지간이고.”

“어르신도 제겐 스승이지 않습니까?”

시공이환술 속에서는 사부로 대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에 가까운 말이라 여겼었는데.

“시공이환술과 시천비술 덕분에 천살성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위기를 넘기기도 했었고요.”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권마님과 마찬가지로 교주님도 제 사부님이십니다.”

시공이환술 속에서만! 이 조건이 아닌데도 사부님이란 말을 듣자 풍천교주는 크게 감격했다.

그 감동을 들키기라도 할까, 풍천교주는 괜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게. 무슨 속셈인가?"

“교주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제게로 오셨습니다.”

“그야 자네 때문이 아니라 고월 때문에 왔지.”

“제게 귀한 신물도 아낌없이 주셨고요.”

“그것도 고월이 시켜서 줬고.”

“본교를 위해 천살성과 싸워주셨고요.”

“거기가 뚫리면 고월이 죽을 테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래서입니다. 남들은 한 가지도 해주기 힘든 일을 다 해주시고도 생색을 안 내시는 멋진 분이시니까요.”

풍천교주의 얼굴에 더 큰 감격이 스쳤다. 다른 누구보다 검무극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기분이 좋았다.

“악 형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듯, 제 시작도 교주님이 해주십시오. 존경합니다, 교주님.”

존경까지 나왔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좋네, 내가 서주겠네.”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고개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 길로 풍천교주는 곧장 은월로 달려갔다.

고월을 불러내서 자랑부터 했다.

“소교주가 내게 주례를 부탁했다. 나를 존경한다고 했다고!”

날아갈 듯 기뻐하는 풍천교주를 보며 고월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냐?"

“좋지. 딴 사람 혼례도 아니고 소교주 혼례 아니냐? 분명 정파와 사파에서도 참석할 텐데, 그야말로 온 무림이 참석하는 혼례가 될 텐데. 내가 그 혼사의 주례를 맡게 되는 거라고.”

고월은 그가 진짜 기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새외에서 풍천교주가 오기 때문이 아니고?”

분명 그의 제자이자 당대 풍천교주인 소백타도 초대받아 올 것이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아니고?”

풍천교주는 아니라도 말하지 못했다.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난 사부가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사람들 사이에 앉아 혼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는가? 자신도 상하고 제자도 상할 것이다.

“그래, 이 자식아! 나 아직 안 죽었다는 것 보여주고 싶어서다.”

고월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교주야.”

“왜 그러느냐?”

“이 정도면 성공했다.”

"뭐가?"

“소교주 오른팔은 못 되었지만, 적어도 그때 그 교주 신세는 면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천마신교 본단에 이렇게 버젓이 네가 만든 조직이 들어와 있으니 그때 그 족쇄 신세는 면했다. 우리 이 정도면 성공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기분 좋게 큰소리로 웃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옷은 뭘 입지? 나, 요즘 살 좀 쪘지? 예복부터 새로 맞춰야 하나?"

드디어 혼례식 전날이 되었다.

중원 각지에서 온 하객들로 마가촌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든 객잔은 다 찼고, 미처 잘 곳을 마련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신교에서 임시 거처를 제공했다.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아예 마군이 직접 나서서 그 모든 일을 관리했다. 덕분에 모두 분노 조절을 잘했고, 아무런 불미스러운 사건도 없었다.

“사람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나 있을까 모르겠어요.”

걱정스럽게 말한 사람은 조춘배의 아내 양인이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가야지. 누구 혼인인데 안 가나.”

내일 혼례에 참석하려고 옷도 새로 산 두 사람이었다.

그때 듣고 있던 손님 중 한 사람이 불쑥 말했다.

"당신들도 참석한다고?”

주점 문을 닫을 때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마지막 손님들만 있었다. 그래서 방심하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것이다.

자리에 있던 두 사람은 멀리서 온 하객들이었는데 천마신교를 따르는 철조문(鐵爪門)의 문주 형소인(邢素寅)과 그의 아들 형대(邢大)였다.

방금 말을 건 사람은 아들인 형대였다.

“주점 주인장이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조춘배가 공손하게 그에게 설명했다.

“내일 혼례에 마가촌 주민들은 자유롭게 참석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황천각 무인들이 와서 직접 알리고 갔습니다.”

형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오란다고 간다고?"

그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함께 있던 부친 형소인이 아들을 말렸다.

“대야, 그만해라.”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주점 주인장이 거기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갑니까?"

아들을 말리긴 했지만 형소인도 내심 아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주점 주인장도 이렇게 자유롭게 가는 혼례식이라면,

자신들이 초대받은 것이 퇴색되는 느낌이었다. 초대받은 것을 주위에 얼마나 자랑했었는데.

마가촌 주민들이 걱정한 것이 이것이었다.

인파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괜히 갔다가 무인들과 시비라도 붙을까 겁이 나서였다.

가기도 전에 이렇게 시비가 붙는데.

조춘배가 머리를 조아렸다. 이럴 때는 괜히 구구절절 이야기해선 안 된다.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형대는 집요하게 대답을 강요했다.

“그래서 간다는 거야, 안 간다는 거야?”

안 간다고 했다가 그곳에서 이들을 마주치면 큰일이기에 조춘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해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주인장은 참석할 거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소교주님!”

소교주란 말에 철조문의 두 사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례 전날 검무극이 이곳을 찾아올 줄 몰랐기에 조춘배는 깜짝 놀랐다.

"이곳은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 주인장 얼굴 보고 싶어서 왔소. 줄 것도 있고.”

“혼례 준비하시느라 바쁘실 텐데요.”

"내가 바쁠 게 뭐가 있겠소? 준비하는 사람들이 바빠서 힘들지. 아, 신부는 오늘 바빠서 못 왔소. 함께 오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소.”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검무극이 조춘배의 아내에게도 인사했다.

“부인께서도 잘 계셨습니까?"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을 바라보는 양인의 눈빛에는 감격과 고마움이 가득했다. 남편과 가족을 구해줬던 소교주였다. 그리고 남편의 인생에 소교주는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한 후에 검무극은 형소인과 형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숨조차 못 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교주 혼례식에 참석했다가 소교주가 아는 사람에게 실수를 저질렀다?

심지어 딱 봐도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 입을 잘못 놀려도 제대로 잘못 놀렸다.

내일 혼례를 위한 피의 제물로 삼겠다!

이런 말이 떨어지는 순간 죽음이었다. 나아가 멸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내가 마가촌 사람들을 좋아하네. 특히 여기 주인장을 제일 좋아하고.”

형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귀한 분을 몰라뵙고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검무극은 준엄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부드럽게 말해도 되지만 그를 위해서 차가운 마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 무림은 한 번의 실수가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곳이다. 오늘 실수는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운 나쁜 날에는 이보다 사소한 실수에도 목숨을 잃는 법.

언젠가 네 경솔한 입이 근질거릴 때 꼭 오늘 이 순간을 떠올려라.”

“명심하겠습니다.”

형소인이 공손히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더 일찍,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소.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었습니다.

-이대로 키우면 언젠가 소중한 자식을 잃게 될 거요. 오늘 일을 계기로 교육 제대로 하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소교주님.

형대가 조춘배에게 사과했다.

"주인장, 내 무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갔다.

조춘배와 양인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래서 소교주를 존경하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원만하게 일을 처리해 주는 배려심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검무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풍류주점 내부를 둘러보았다.

새로 지어진 내부는 확실히 넓어지고 깨끗해졌다.

“내부는 예전 그대로 만드셨소.”

주방의 위치나 탁자들 자리까지, 예전 모습을 최대한 되살려서 꾸며놓았다.

“그게 제가 편해서 그랬습니다. 제집을 찾는 이들도 대부분 단골이고.”

그대로인 것은 또 있었다.

"저기 삼층에는 소교주님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원래는 이 층에 소교주 자리가 있었다. 교주가 왔을 때나 마존들이 왔을 때 내주던 자리, 이제 그 자리가 삼 층으로 옮겨졌다.

검무극이 삼층으로 올라갔다. 조춘배가 그 뒤를 따라 올라왔다. 양인은 혹여 그 자리에서 소교주가 술이라도 한 잔 할까 싶어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챙겨서 뒤따라 올라갔다.

삼층은 작은 자리 하나와 큰 자리 하나 단 두 개의 탁자만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은 아예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오. 주인장, 장사하셔야지요.”

조춘배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제 힘에 부쳐서 삼층까지 장사할 여력이 없습니다. 사람을 더 쓴다 해도 제가 신경을 더 써야 하고. 그래서 아예 소교주님을 위한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춘배는 처음 봤을 때보다 흰머리가 많이 늘어 있었다.

“이제 은퇴하고 편히 쉬고 싶지는 않으시오?”

"장사하는 이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생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쉬면 그때부터 아프고, 그러다 죽는다고요.

제겐 일하는 게 쉬는 겁니다. 사실 쉴 줄도 모릅니다. 참, 내일 하루는 푹 쉴 겁니다. 식 마치면 집사람이랑 나들이도 가고요."

검무극이 품에서 붉은 봉투를 꺼내 건네주었다.

"자, 받으시오. 이거 주려고 온 거요.”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조춘배가 깜짝 놀랐다. 검무극의 혼례에 초대하는 정식 청첩장이었다.

“입구에서 무인에게 이걸 보여주면 앞쪽에 식이 잘 보이는 자리로 안내해 줄 거요. 미리 말해줬으니 본교 무인들이 내일 하루 우리 주인장 내외분을 잘 모실 거요.”

“어이쿠! 미천한 저희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춘배와 양인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미천하다니요. 내게 주인장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데.”

조춘배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대체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길래 이런 복을 받는 것일까?

'그거 아십니까? 소교주님 덕분에 제 인생에서 말년이 가장 빛나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양인이 가져온 술로 술잔 셋을 가득 채웠다.

“자, 내일은 바빠서 내가 두 분과는 제대로 인사 못 할 테니.”

검무극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우리 미리 축하주 마십시다.”

맨 앞줄은 누굴 위한 자리지?

한 대의 마차가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은 은하상단의 단주 용자명과 그의 세 아들 중 장남인 용진후(龍珍厚)였다.

"정말 마교 소교주의 혼례식에 가는 겁니까?"

"그렇다."

몇 번이나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자신을 놀린다고 여겼다.

한데 아닌 모양이다. 결정적으로 호위는 마부석의 백총뿐이었다. 백총은 아버지와 함께 은하상단을 만든 주역이면서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는 무인.

아버지의 행차에 백총만 따라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설마 우리 상단이 천마신교와 손을 잡은 겁니까?"

용진후는 아버지가 그렇다고 할까 봐 두려웠다.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것, 그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으니까.

다행히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 방문은 어디까지나 이 아비의 개인적인 방문이다. 너를 데려가는 것도 상단과는 별개로 내 아들로 데려가는 거다. 소교주에게 인사시켜 주고 싶어서.”

용자명은 아들에게 지금껏 한 번도 해주지 않았던 지난 비화를 말해주었다.

“젊은 시절 상계 동료의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인이 나를 구해주었지. 그가 당대 마교주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용진후는 깜짝 놀랐다. 마교주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니?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소교주의 혼례에 참석하면 그 일은 분명 강호에 소문이 날 겁니다.”

“그렇겠지.”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와 거래하는 많은 문파와 상단이 거래를 끊을 겁니다.”

아버지가 그런 결과를 모를 리가 없으신데.

“혹시 죽립을 쓰고 정체를 감추고 참석하실 겁니까?”

무림 행사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참석하는 일은 흔했으니까.

하지만 용자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를 감추지 않고 참석할 생각이다.”

용진후는 의아했다. 상대가 생명의 은인임을 떠나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상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이런 큰 손해를 감수하겠다고? 대체 왜?

“신분을 숨겨도 저쪽에서 이해해 줄 겁니다. 아버지처럼 귀한 하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용진후는 아버지가 천하제일 상단주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나보다 귀한 사람들도 올 거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요?"

용자명은 검우진을 떠올렸다. 또 그 아들 검무극을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너무나 비범한 이들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최고의 하객일 리가 없지.”

최고 귀빈 대우만 받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용진후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번 혼례식 참석이 네 좁은 시야를 넓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세 아들 모두 상계의 일에는 자질이 없었다.

돈 버는 재주가 없으면 사람 보는 안목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나마 싹수가 보이는 큰아들 녀석을 데리고 온 이유도 녀석에게 좋은 경험이 되길 바라서였다.

이윽고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용진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다음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용진후는 깜짝 놀랐다.

그곳은 천마신교의 정문 근처였다. 천마신교의 거대한 담을 따라 수많은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화려한 대형마차들,

용진후는 한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마차를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 이제 막 도착하는 사람들, 아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주변으로 큰 덩치의 무인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 무공 실력이 일천한 자신이 봐도 보통 무인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백총이 나직이 말했다.

“저들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신교의 마군들입니다.”

용진후도 마군들에 대해 들어봤다. 저 큰 덩치로 밀고 들어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바로 그 마군들이다.

경험이 풍부한 백총은 무림에 대한 정보와 식견이 높았고, 특히 이번 신교행을 대비해 천마신교에 관해 할 수 있는 모든 공부를 하고 왔다.

그때 누군가 용자명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용 단주!"

“금 장주님.”

그는 바로 복건제일거부이자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거상 황금장주 금아수였다.

과거 검무극은 그의 딸과 손자를 구해주고 그 대가로 몸집보다 큰 보물 보따리를 얻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그들도 이번 혼례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 금아수가 용자명의 상계 선배였다.

“여기 내 딸과 손주 녀석이라네.”

금아수의 딸인 금사연과 손자인 양이도 함께 왔다. 검무극이 구해줄 때만 해도 꼬맹이였던 양이는 어느새 부쩍 커 있었다.

"자넨 어찌 온 것인가?"

금아수는 용자명의 참석이 놀라웠다. 천하제일상단 은하상단은 정사마를 모두 상대하는 상단이었다. 아무래도 천마신교의 혼례에 참석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용자명은 금아수에게 솔직히 말했다.

“젊은 시절 마교주에게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왜 그러십니까?"

“우리도 소교주에게 구명지은을 입었다네.”

“아, 그러셨군요.”

옆에서 듣고 있던 용진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마교주와 소교주에게 각각 구명지은을 입었다고?

용진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아수 뿐만 아니라 알 만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사람이 참석했다고?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상계의 거물들이었다.

물론 상계의 인물들보다 무인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지역 패권을 다투는 수장들이었다.

'마교가 대단하긴 하구나, 이 사람들을 다 오게 만들다니.

그때 그곳으로 마군이 걸어왔다.

용진후는 그가 아버지를 먼저 모셔갈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마군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전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도착하신 분들은 어서 입장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정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하는 줄이 생겨났다.

'아버지를 이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게 한다고?"

용진후는 아버지가 어딘가에 들어가는 데 줄을 서는 모습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어딜 가더라도 항상 아버지가 주인공이었는데, 지금은 수많은 하객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아버지를 이렇게 대접한다고?'

용진후가 나직이 말했다.

“마교에서 일부러 은하상단의 기를 죽이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용자명이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아직 교주와 소교주를 만나보지 않아서 그렇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요?”

“그들이 누군가를 기죽이려 든다면, 고작 이런 방법을 쓸 사람들이 아니지.”

줄을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조춘배와 그의 아내 양인도 있었다. 새로 산 옷을 차려입은 두 사람은 너무 흥분되고 기뻤지만,

신분이 어마어마한 사람들 사이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혹여라도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어제 같은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들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서 오시오, 주인장.”

그들에게 다가온 사람은 바로 마군주 장호였다.

조춘배와 양인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군주님!"

마군주라는 말에 주위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말로만 듣던 천마신교의 최정예 마군의 수장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천마신교를 따르는 문파의 무인들이 정중히 포권하며 평소 존경하고 있었음을 전했다.

장호가 포권해서 그들의 인사를 받아준 후, 다시 조춘배와 양인에게 말했다.

“소교주께서 두 분을 특별히 모시라 하셨소. 자, 이리 나와서 가시지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명령을 받은 제가 안 괜찮습니다. 가시죠.”

“어이구.”

장호가 두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의 당부에 따라 두 사람은 자신과 서대룡 사이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오늘 귀빈석 중에서 두 사람이 가장 편하게 있을 자리였다.

은하상단 단주도 받지 못하는 특별대우에 용진후는 의아했다.

“누군데 저렇게 대우를 해주는 걸까요? 대단한 고수들이겠지요?”

용자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이곳의 그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일 거다.”

“네?”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지.”

용자명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저 무공 한 가락 익히지 않았을 거 같은 두 사람에 대한 특별대우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검무극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있던 금아수와 금사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경험했던 소교주도 더없이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이윽고 그들이 정문을 지나 천마신교 안으로 들어섰다.

용진후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면으로 마차가 스무 대는 나란히 지나가도 남을 정도로 크고 너른 대로가 있었다. 그 길 양쪽에 거대한 악귀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수문장처럼 세워진 악귀상들은 무섭고 오만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너머 끝이 보이지 않는 대로와 웅장한 건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곳곳에 세워진 거대 악귀상은 너무나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움직여서 자신들을 짓밟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축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처음 천마신교를 찾은 다른 이들 역시 모두 내부의 전경에 압도되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혼례식장이 나왔다.

그곳은 천마신교에서 가장 큰 연무장이었다.

예식이 치러지는 곳 앞쪽으로 하객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초대받은 하객들 자리가 있었고 그 뒤로 마가촌 주민들을 위해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앙 바깥으로 반원을 그리며 마치 비무장의 객석처럼 수많은 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계단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군들이 초대받은 하객들을 정해진 자리로 안내했다.

용진후는 아버지가 첫 번째 자리가 아니라 세 번째 줄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두 번째도 아니고 세 번째라고?”

외부 손님들이 중앙 자리에 모두 앉자 이제 본격적인 입장이 시작되었다.

일단의 무인들이 줄을 맞춰서 그곳으로 들어섰다. 앞장선 사람은 단아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 뒤를 따르는 이들은 마검들이었다.

"일화검존입니다!”

백총의 말에 용진후는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검존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었구나!'

마치 눈 속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는 기분이었다.

마검들은 사방에 마련된 관객석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았고, 일화검존은 앞으로 나와 두 번째 줄에 앉았다.

'두 번째 줄은 마존들 자리구나.'

그러자 용진후는 의아했다.

‘그럼 맨 앞줄은 누굴 위한 자리지?”

그때 함성과 함께 반대쪽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왔다.

백총이 다시 알려주었다.

“혈천도마입니다!”

대도를 등에 찬 혈천도마가 앞장섰고, 그 뒤를 도귀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마검들이 절도가 있다면 도귀들은 거칠고 자유분방했다.

예전이라면 사이가 좋지 않은 그들이 서로에게 야유를 보냈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일화검존과 혈천도마가 친해지면서 그들의 사이도 좋아졌다.

도귀들도 관객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혈천도마는 일화검존 옆에 앉았다.

이번에는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마불이 앞장서 들어왔다. 그 뒤로 광승들은 입을 모아 오늘의 혼례를 축원하는 염불을 외며 걸음을 옮겼다.

“땡중으로 여겼다가는 산 채로 온몸이 찢겨나갈 마승들입니다.”

백총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보통 승려들이 아님은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따라 마불의 광채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섭혼마존과 귀술사들이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용진후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갑자기 어지럽습니다.”

내공이 얕은 용진후에게 백총이 그의 등을 통해 한 줄기 내력을 주입해 주었다.

“귀술사들의 귀기입니다. 숨을 깊게 마시고 천천히 내쉬십시오."

용진후가 그제야 얼굴이 편안해졌다. 일부러 귀기를 내뿜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니, 실제로 귀기를 내뿜으면 어쩔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다음으로 화려한 가면을 쓰고 들어오는 마인들이 있었다.

"악인곡의 무면객들입니다.”

악인곡이란 말에 용진후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무면객들이 평소와 달랐다. 항상 삼삼오오 모여서 쪼그리고 있던 그들이 오늘은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화려한 가면을 쓴 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그들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저 사람이 극악소마겠군요.”

“그렇습니다.”

맨 앞에 선 극악소마도 오늘은 평소의 하얀 가면이 아니라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극악소마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었기에 용진후는 절로 몸이 떨렸다. 일반 무림인들이 느끼는 극악소마에 대한 공포심은 다른 마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사실 오늘만큼은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극악소마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누가 어지간한 실수를 해도 다 용서해 줄 도량이 넘치고 있었다.

무면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무극과 유난히 가까운 그들이었기에 악인곡은 오늘 축제 중이었다.

특히 십칠교와 초승달 무면객이 가장 기뻐했다.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은 그들이었기에, 오늘 소교주의 이 혼례는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원래 저들의 가면이 저렇게 화려한가요?"

용진후의 물음에 백총이 공부해 온 것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무면객들에게는 여러 가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저 가면은 축제나 연회에 쓰는 환락귀면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미소년이 일단의 마인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저들의 허리를 보십시오.”

그들은 허리에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네 개,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각각 차고 있는 숫자가 달랐다. 맨 앞의 미소년만이 오직 열두 개의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설마?"

“네, 맞습니다. 독왕이 이끄는 독아들입니다. 저들의 손짓 한 번이면 하객들은 단번에 몰살입니다.”

용진후는 그것보다 독왕이 저렇게나 어려 보인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이번에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술 냄새가 풀풀 풍겨 왔다.

그들은 바로 취마와 주객들이었다. 취마는 오늘 주객들에게 마음껏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

“저러다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벌써 취해 있습니까?”

용진후의 궁금증을 백총이 풀어주었다.

“저들은 취하면 취할수록 더 정신이 맑아지는 이들이라 들었습니다. 취해서 실수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에는 동권문의 철권들이 근육이 드러나는 복장으로 모습을 보였다.

맨몸이 많이 드러나면 날수록 오히려 그것이 예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신부아버지인 권마는 그들과 함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맨 앞에 선 사람은 천소희였다.

그렇게 팔마존과 그들의 수하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시끌벅적,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객들은 눈호강을 하고 있었다. 평생 본 적 없던 이들을 보는 순간이었다. 마존들을 보고, 그 정예 수하들을 보고 있었다.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면 과장에 과장이 보태진 자랑을 모두에게 하게 되리라.

백총은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예상했을 때 이보다 훨씬 무겁고 어두울 줄 알았다.

이번 기회에 모두에게 알리려 들 줄 알았다.

우리가 천마신교다!

그래서 귀술사들은 귀기를 내뿜고, 철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독아들은 독연을 피워 올릴 줄 알았다.

무면객들은 차갑게 비웃고, 마검과 도귀들의 검에서는 살기가 흐르고 광승들이 죽음의 염불을 읊고 주객들이 술주정을 부릴 줄 알았다.

한데 밝았다. 그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다. 마치 축제에 온 것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마인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

그곳으로 다섯 대의 마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용진후뿐만 아니라 하객들 모두 의아해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하객이 걸어왔는데, 이곳까지 마차가 들어온다고? 대체 누구이기에?'

그곳으로 다가오는 다섯 대의 대형마차에는 모두 푸른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내 아들과 그쪽 딸 바꿉시다

마차가 예식이 치러지는 곳 옆에 멈춰 섰다.

"저 상징은!"

푸른 늑대를 상징으로 삼는 곳은 하나였다.

백총은 물론이고 하객들 모두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착착착착착

다섯 대의 마차 문이 일제히 열렸다.

첫 번째와 다섯 번째 마차에서 먼저 무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바로 사도십삼랑들이었다.

그들이 마차 주위에 절도 있게 서자 다음으로 사도맹 고수들이 내렸다. 그야말로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사도맹을 대표하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마인들이 가득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기가 죽지 않았다.

뒤이어 내린 사람은 인상 하나로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는 바로 비사인이었다.

그를 보자 백총이 나직이 말했다.

“사도맹 소맹주입니다.”

사도맹 소맹주가 직접 온 것도 놀라웠는데.

그가 내린 마차에서 한 사람이 더 내렸다.

“사도맹주입니다!"

용진후는 정말 깜짝 놀랐다.

사도맹주가 직접 왔다고? 그것도 소맹주와 고수들까지 대동하고서?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축하 사절로 사도맹 고수 한 명을 대표로 보낼 거라고 여겼는데.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대공자 검무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 오랜만이네.”

검우진과 검무극은 혼례식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검무양이 대신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검무양이 백자강을 맨 앞줄로 안내했다. 두 번째 줄에 있던 마존들이 모두 일어나서 그에게 권하며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백자강도 마존들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소.”

백자강과 비사인이 맨 앞줄에 앉았고, 함께 왔던 사도맹의 고수들은 마존들과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이미 예전에 삼자회합 때 한 번 함께 자리했기에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용진후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첫 번째 줄은 사도맹주와 그 후계자를 위한 자리였구나.'

그렇다면 아버지가 세 번째 줄인 것이 이해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또 다른 마차들의 행렬이 있었다. 이번에는 세 대의 마차가 그곳을 향해 달려왔다.

마차에 새겨진 문양은 음뢰종에 새겨져 있던 바로 그 악귀의 모습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새외 풍천교의 장로들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눈빛들, 그들에게서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에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풍천교 교주 소백타였다.

“풍천교주입니다!”

백총의 설명에 용진후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습니다.”

용자명이 아들을 데려온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언제 이런 사람들을 볼 기회가 있겠는가? 아들이 천외천의 고수들을 보며 견문을 넓히기를 바랐다.

역시 검무양이 그를 맞이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풍천교주님.”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백타는 과거 검무극과 전대 풍천교주, 마불과 함께 환왕과 싸웠을 시기에 비해 훨씬 기도가 깊어지고 강력해져 있었다.

아직 젊은 그였지만 풍천교주로서의 면모에 손색이 없었다.

먼저 와 있던 백자강과 팔마존, 그리고 사도맹 고수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역시 맨 앞줄에 자리했다.

두두두두.

이번에는 단 한 대의 마차가 그곳에 도착했다.

이번 마차에 새겨진 상징은 용이었다. 마차를 휘감듯 멋진 용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대협심(心)

모두 알 수 있었다. 그 마차가 어디에 속한 마차인지, 또 누가 타고 다니는 마차인지.

마차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진하군과 진하령이었다. 진하령은 올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렇다고 축하하러 못 올 정도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오라버니의 물음에 당연히 가야지, 라는 말이 절로 나왔으니까.

그리고 오늘 축하는 두 사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마지막으로 진패천이 내렸다.

무림맹주님이십니다."

용진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도맹이나 풍천교에서는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림맹주가 직접 온다고?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무림맹주가 맞았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그에게 인사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오래전에 한 인사라서 기억도 못 하시겠지만.

하객들 역시 웅성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림맹주가 직접 온 것에 모두 놀란 것이다.

진패천이 두 손주만 데리고 천마신교 본단을 방문한 것은 검무극과 검우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사실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현은 진패천에게 개인 자격으로 은밀히 참석하기를 권했다. 죽립을 쓰고 은밀히 찾아가면, 천마신교 측에서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무림맹주가 천마신교 소교주의 혼례에 공식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아무래도 정파 무림에 큰 파장을 일으킬 일대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패천은 공식적으로 축하하러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검무극이 손주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만 해도 당연히 참석해야 할 이유가 되었는데, 이번에 천마신교에서 천살성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놈은 무림맹과 사도맹까지 모두 휩쓸었을 것이다.

-마교주와 소교주가 아니었으면 자네들도 나도, 다 죽었을 거네.

그 말로 충분했다. 대신 다른 무림맹 고수들을 데려오지 않았다. 굳이 데려오려면 마차 열대를 꽉 채워서 올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 방문은 자신의 개인적인 방문이었다.

검무양의 안내를 받은 무림맹주 진패천이 맨 앞자리로 걸어왔다.

백자강과 풍천교주는 물론이고 팔마존과 다른 고수들도 모두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진하군과 비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감출 수 없는 반가움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오늘이네.

-그래, 오늘이지.

두 사람의 눈빛에 벌써부터 장난기가 가득했다. 건방진 검무극 같으니라고! 나이도 제일 어리면서 자신들을 두고 먼저 혼인하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오늘 제대로 정사연합의 위력을 발휘할 작정이다. 당하기만 했던 지난날은 오늘로 역전되리라.

자신들의 혼인이 아닌데도 괜히 그들의 가슴이 떨렸다.

사실 젊은 그들뿐만 아니라 진패천과 백자강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잘 오셨소."

“다른 일도 아니고, 와야지요."

이제 만나면 은근히 반갑기까지 한 두 사람이었다. 정말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모든 걸 의심하고 경계하는 관계였을 텐데.

그렇게 진패천과 진하군, 진하령도 맨 앞줄에 앉았다.

그들이 첫 번째 줄의 마지막 하객인가 했었는데.

두두두두두.

또다시 마차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들어온 마차 중에서 가장 숫자가 많았다. 자그마치 열 대의 마차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표면을 특수하게 처리한 마차는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효과를 주었다. 거기에 눈꽃 모양의 문양까지. 그야말로 겨울이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린 새하얀 무복 차림의 이들은 북해빙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도착하자 주위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에 내린 사람은 북해빙궁의 궁주 한서경이었다. 그녀와 함께 소궁주 한설도 내렸다.

한서경은 한빙쌍검을 비롯해 북해빙궁의 최고 고수들을 모두 데려왔다. 미리 기별을 했으니 망정이지 북해빙궁이 중원에 쳐들어온다고 해도 될 만큼의 인원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무리해서 많은 이들을 데려온 이유가 있었다.

홀로 중원에 있는 이안이 기죽지 말라고

우리가 네 가문이라고, 여기 네 이모가 왔다고.

두 맹주와 소백타와 인사를 나눈 한서경이 특별히 한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바로 지난번에 북해까지 와서 인사하고 간 비사인이었다.

솔직히 비사인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상처가 있는 흉측한 얼굴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화를 나눠볼수록 사람이 진국임을 알 수 있었다.

딸아이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한서경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남자 보는 눈이 있구나.'

하객들은 모두 놀라고 감탄했다. 사도맹주와 풍천교주, 무림맹주에 이어 그 신비스러운 북해빙궁의 궁주까지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정말 이 자리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뿌듯했다.

빙궁주가 맹주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용자명이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알겠느냐? 이 아비보다 귀한 사람들이 올 거라는 말을 왜 했는지.”

용진후의 입에서 절로 이 말이 흘러나왔다.

“소교주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요?"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내뱉었기에 용자명이 깜짝 놀라 제지했다.

"쉿!"

하지만 이미 주위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 말을 들었다.

아차 하는 마음으로 긴장하고 있던 그때.

맨 앞줄의 진패천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용 소협."

용진후가 벌떡 일어나 포권하며 인사했다.

“아! 저를 기억해 주시는군요, 맹주님.”

"당연히 기억하네.”

진패천이 옆자리의 용자명과도 눈인사를 나눈 후 차분히 용진후에게 말했다.

“소교주는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사람이라네. 누군가의 말을 들어서는 알 수 없을 거네.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에 동감하는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소협에게도 그런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라네.”

“네, 맹주님. 좋은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여 맹주가 큰소리를 낸 자신을 야단치려 불렀나 했는데,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호의로 말해준 것이다.

용진후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도 자신을 소교주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정말 다들 소교주 때문에 온 것일까?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윽고 그들 앞으로 한 사람이 나섰다.

이번 혼례를 진행할 사람은 총군사 사마명이었다. 이 한 가지만 봐도 천마신교에서 이번 혼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혼례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방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신랑 신부의 부모님들이 입장하십니다.”

검우진과 권마가 서로 반대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우진의 등장에 하객들이 모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끌벅적하던 관객석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검우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존재감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드라졌다. 모두가 흑백이라면 홀로 붉은 색채를 빛내는 그 존재감은 오늘 이 순간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반면 권마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무인과 싸우라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였는데, 지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인사한 후 준비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검우진이 맨 앞자리에 있는 이들과 눈빛으로 인사를 나눴다. 진패천과 백자강과는 깊게, 한서경과 소백타와는 가볍게.

그러고는 권마가 전음을 주고받았다.

-사돈, 소감이 어떠하신가?

-얼떨떨합니다. 좋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교주님은 어떠십니까?

-나는 좋기만 하다네.

-이게 딸 가진 부모와 아들 가진 부모의 차이인가 봅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사돈, 내 아들과 그쪽 딸 바꿉시다!

-싫습니다!

이렇게 권마에게만큼은 격 없는 농담을 하는 검우진이었다.

사마명이 큰 소리로 말했다.

"신랑 입장하겠습니다.”

둥! 두둥! 둥둥둥둥!

힘찬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예복을 입은 검무극이 힘차게 걸어 들어왔다.

역시 예복을 갖추고 그의 주위를 따라 나오는 이들은 적연을 비롯한 검무극의 호위들이었다. 이제 그들의 기도는 검우진을 호위하는 선배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와아아아아아아!

검무극이 등장하자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냥 박수가 아니었다. 천마신교 마인들이 소교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함성으로 알 수 있었다.

억지 함성이 아니라 진심으로 좋아해서 나오는 기쁨의 외침이었다.

어디 검무극이 일반적인 예법을 따르겠는가?

걸어 나오던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두 손을 번쩍 들며 좋아했다.

"저 혼인합니다!"

그의 말이 함성을 뚫고 날아가 모든 하객의 귓가에 똑똑히 들렸다.

검무극이 검우진과 권마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난 후 하객들 쪽을 향해 돌아섰다.

하객들 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첫 번째 줄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진패천과 백자강, 소백타와 한서경.

거기에 친구들인 비사인과 진하군, 그리고 진하령과 한설까지.

검무극이 한 사람 한 사람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얼마나 멀고 어려운 걸음을 했는지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과 처음 만났던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을 의심하고 불신했던 그 눈빛은 이제 기분 좋은 감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 검무극을 만나서 운명이 바뀌었다.

마음 같아선 달려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인사하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예식이 끝나고 나서 축하연회에서 해야 할 일.

그들 뒤로 팔마존의 모습이 보였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독왕과 섭혼마존, 취마와 마불, 그리고 극악소마까지.

마존들을 대표해서 혈천도마가 환하게 웃고 있는 검무극에게 농담을 던졌다. 공식적인 자리였으니 정중히.

“소교주, 그렇게 좋으시오?"

“좋습니다! 오늘은 취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서대룡이 나직이 말했다.

“드디어 내가 우리 소교주님보다 앞선 것이 생겼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단아와 처제들에게 농담한 것이었는데, 환골탈태한 귀를 가진 검무극이 그 나직한 말까지 들었다.

"황천각주님, 혼인 생활의 선배시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서대룡이 안고 있던 아들 영하를 번쩍 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검무극의 혼례식답게 분위기는 좋았고 자유로웠다. 그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검무극이 매처럼 예리한 눈으로.

"거기 맨 뒤에 구석에 서 계신 마가촌 분들, 모두 앞으로 나오세요. 저기서 계실 자리 있네요.”

장호가 그들을 데리고 나와 그곳에서 보게 했다.

신랑이 하객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맹주와 교주가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장사하는 이들이 있는, 정말 오직 검무극의 혼례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자, 다음으로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이번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며 반대쪽에서 신부가 입장했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신랑이 입장했을 때의 함성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려고 했다. 이안이 기가 죽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마차가 열 대나 온 것이었는데.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와아아아아!

관객석에 앉은 마인들에게서 검무극이 나왔을 때보다 더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귀영대 무인들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신부를 더 큰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한서경과 한설이 마주 보며 기뻐하던 그곳으로 화려한 예복을 입은 오늘의 신부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중원 놈들, 다 내 아래에 있다!

모두의 시선이 신부에게 집중되었다.

이안은 화려한 혼인 예복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그곳으로 들어왔다.

그녀 뒤로 역시 예복을 입은 천마전 호위대 여인들이 그녀를 호위하듯 뒤따랐다. 이제 소교주와 혼인하면서 그녀에게도 천마전 호위들이 배치된 것이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이안은 긴장하고 있었다. 태어나 이렇게 떨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 앞에 검무극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소교주도 도련님도 아닌, 한 사람의 남자로

'무극'

천천히 걸어온 이안이 검무극 앞에 섰다. 그녀와 함께 나왔던 여인 중 한 명이 이안의 면사를 벗겼다.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와아아아!

하객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부 화장을 곱게 한 이안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때 하객 중 한 여인이 소리쳤다.

“너무 아름다워요!”

소리친 사람은 진하령이었다. 맨 앞줄에 함께 앉아 있던 맹주들과 궁주와 교주가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집중된 시선에 멋쩍어하는 동생을 위해 진하군이 소리쳤다.

“신랑도 멋있다!”

검무극과 이안은 진하령과 진하군이 소리친 것을 모두 듣고 있었다.

검무극이 진하군과 진하령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였기에 '고맙다, 친구들아!'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이안은 다른 사람도 아닌 진하령이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해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녀가 저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기에.

'고마워, 하령아.'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객 중에는 악군학과 차이란도 있었다.

검무극은 그들을 초대하면서 두 번째 줄의 마존들과 함께 앉게 했지만, 그들은 극구 사양하고 뒤에 앉았다.

교를 떠났는데 마존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검무극과 이안이 영웅객잔에 와서 서로 사귄다고 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빨리 혼인할 줄은 몰랐다.

“안 부러워요?"

차이란의 질문에 악군학이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혼인하는 거요.”

“이런 질문은 보통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거 아니오?”

"남자가 안 하니 저라도 하는 거죠.”

차이란을 쳐다보던 악군학이 다시 검무극과 이안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악군학이 말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좀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도 할까요?”

기다렸다는 듯 나온 그녀의 말에 악군학이 흠칫 놀랐다.

“농담이에요. 누가 기습이라도 한 줄 알겠어요. 왜 그렇게 놀라요?”

차이란이 씁쓸하게 웃으며 시선을 혼례식 쪽으로 돌렸다. 그때 불쑥 들려오는 악군학의 대답.

"후회하지 않겠소?"

차이란이 깜짝 놀란 얼굴로 악군학을 쳐다보았다.

“혼인이라는 게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서요? 제 성격은 일단 해보는 쪽이라서요.”

그녀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악군학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차이란은 이대로 그냥 대화가 끊어지겠지 싶었는데, 악군학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우린 이렇게 성대하게 할 수 없을 거요.”

그녀가 더없이 기다렸던 말이기도 했다.

“저 두 사람만 불러서 해요. 일당백 하객이 될 텐데.”

두 사람이 다시 혼례식을 쳐다보았다. 차이란은 신부 입장 할 때의 이안만큼이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해서 이때부터 혼례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랑 신부는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겠습니다.”

검무극과 이안이 양가 부모님에게 절을 올렸다.

두 사람이 먼저 검우진에게 인사했다.

“아버지, 잘 살겠습니다.”

“아버님, 잘 살겠습니다.”

두 사람을 향한 검우진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이 스쳤다.

검무극은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감정.

그것은 바로 행복함이었다.

‘아버지도 행복이라는 감정을 지니셨던 분이셨습니까?"

검무극이 더욱 감동한 건 처음으로 보는 그 감정을 자신의 혼례식에서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 저 봤습니다. 똑똑히 봤으니까 이제 그 표정, 자주 나오도록 노력할 겁니다.’

검우진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앞으로 잘 살아라."

거기에 이안에게만 전하는 속삭임이 덧붙여졌다.

“녀석이 속 썩이면 내게 말하거라.”

이안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어찌 검우진의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는가?

“네, 그땐 아버님이 혼내주세요.”

이안의 나직한 대답에 검우진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아들에게도 그런 미소를 지어주시라고요!

검무극은 아버지 뒤쪽에 은신해 있는 휘의 기척을 느꼈다. 그가 의도적으로 기도를 드러낸 것이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휘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축하 인사를 전했다는 것을.

검무극이 그 방향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휘 아저씨'

검무극과 이안이 돌아서서 권마에게로 걸어갔다.

"아버님, 잘 살겠습니다."

“아버지, 잘 살겠습니다.”

두 사람이 예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권마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세상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였는데.

"아버님, 이안이를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검무극의 약속에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권마를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나서 화장이 다 지워져 버릴 게 뻔했기에.

“둘이 행복하게 살아라."

“네, 아버님.”

"......."

동권문 철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엄청난 박력으로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천소희가 선창하듯 소리쳤다.

"사형, 행복하세요!"

뒤이어 철권들이 다 함께 소리쳤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소교주가 아니라 한때 함께 땀 흘리며 수련했던 사형이었다.

그리고 검무극이 자신들의 사형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사형, 행복하십시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객 중에는 청면과 서진도 있었다.

“서 조장."

“네, 일 조장님.”

“앞으로 귀영대주를 맡아주시오.”

그 말에 서진이 깜짝 놀랐다.

이안이 혼인하면서 귀영대주 자리를 청면에게 맡겼다. 한데 그 자리를 다시 서진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이미 이 대주님께 말씀드리고 허락받았소.”

“왜 갑자기?”

“나는 악인곡으로 돌아가오.”

청면이 다시 극악소마 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소마님께서 받아주시기로 했소.”

일전에 배후 세력과 싸우면서 만났을 때 극악소마는 그에게 말했다. 원한다면 돌아와도 좋다고. 그 마음이 반반이었는데,

이안이 귀영대주 자리를 물러나는 것을 계기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애초에 귀영대 일 조장을 맡은 이유가 반은 검무극 때문이었고, 반은 이안 때문이었다. 이제 그 반이 사라졌기에 그도 돌아갈 결심을 했다.

“제가 이 막중한 일을 맡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소. 그리고 애초에 이 대주께서도 내가 아니면 서 조장을 대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계셨소."

서진이 귀영대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검무극의 그림자 조직이자 직속 조직으로 활약하게 될 귀영대였다. 지금은 소교주를 따르고 있지만,

검무극이 교주가 되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하게 될 조직이기도 했다.

그 자리를 결국 검무극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서진이 맡게 되었다. 운명은 어떻게든 두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 이어주고 있었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 조장님은 괜찮으세요?"

"안 괜찮소. 돌아온 탕아 신세가 될 텐데 어찌 괜찮겠소?"

하지만 가면 속 청면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서의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소."

서진은 아쉬웠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이야기를 많이 나눠둘 것을.

“오늘 연회에서 실컷 마셔요, 우리.”

“그럽시다, 서 대주.”

그러는 사이 이제 식은 다음 순서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 다음은 주례사가 있겠습니다.”

밤새 주례 연습으로 밤을 새운 풍천교주가 크게 심호흡한 후 전장에 나서는 눈빛으로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외운 거 잊어버리면 안 돼!'

최대한 의젓한 표정으로 풍천교주가 걸어 나왔다.

그가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소백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자야, 잘 지냈느냐?

사부님, 잘 지내셨습니까?

보다시피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뵙고 싶었습니다.

풍천교주는 소백타에게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잘살고 있고,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과 이안 앞에 마주 섰다.

모든 하객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풍천교주로 살아온 삶이었기에, 이런 시선에 긴장할 그가 아니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과 이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들의 부모는 아니지만, 이 순간이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때 두 사람 사이 저 멀리 하객석에 고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하객들 사이에 앉아서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지난 수많은 일이 머릿속을 가득 스쳐 지나가면서, 밤새 외웠던 주례사도 함께 데리고 가버렸다.

'헉!'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당황했다. 그렇게 외웠는데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마치 사술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뭐든 말을 해!'

임기응변이라도 발휘해야 했는데, 너무 잘하려는 마음이 커서였을까? 그의 머릿속은 이미 극악소마 방의 벽처럼 하얗게 변했다.

풍천교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시공이환술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저는 다른 누구보다도 교주님의 축하를 받고 싶습니다. 한 마디 축하의 말씀이면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교주의 허둥대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ᅳ어휴, 이런 날까지 자네 도움을 받다니!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가 검무극인데 무슨 달달 외운 주례사가 필요하겠는가? 그냥 이렇게 얼굴만 봐도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이윽고 풍천교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주례사는 혼인하는 두 사람에게 편안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하객분들께서는 양해해 주십시오.”

그렇게 양해를 구한 후 풍천교주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 인생의 첫 주례가 자네들이어서 정말 기쁘네.”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응시했다.

"난 자네는 혼인하지 않을 줄 알았네.”

분명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악한 놈을 보면 그냥 못 지나쳐, 억울한 사람을 봐도 못 지나쳐, 꽉 막힌 사람 보면 어떻게든 뚫어주려 해, 오해한 사람은 오해 풀어줘,

족쇄에 묶인 사람 족쇄 풀어줘, 대체 자네가 혼인할 여유가 어디에 있나?”

하객들 중 검무극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검무극을 몰랐던 사람들도 그 말로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용진후는 왜 아버지가 소교주를 소개해 주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무림맹주가 직접 이곳을 찾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옆에 선 이안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검무극의 외침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안은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이 분위기를 풀어주자 풍천교주는 더욱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약속 중에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 다른 사람을 평생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라고 생각하네."

풍천교주의 시선이 저 멀리 고월을 향했다. 교주직을 버리고 소교주에게 온 것은 고월을 지켜주려는 마음에서였다.

고월은 당신 마음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월을 바라보던 풍천교주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자넨 내가 아는 한 그 약속을 가장 잘 지킬 사람이지. 어떤가? 자네의 심장을 평생 지켜줄 수 있겠는가?”

“네! 제 심장은 평생 저와 함께 뛸 겁니다.”

이번에는 풍천교주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자네 남자는 세상일 다 간섭하는 남자라네. 거지가 길을 막고 울고 있으면 난 발로 차버리겠지만, 자네 남자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을 사람이라네. 알고 혼인하는 거지?"

풍천교주의 물음에 이안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 됐네.”

풍천교주가 환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부디 행복하게.”

그것으로 주례가 끝났다. 사방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단상에서 내려오는데 소백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사부님, 멋지십니다!

이놈아, 내가 누구냐? 중원 놈들, 다 내 아래에 있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은 풍천교주였다.

다음 예식이 계속되었다.

조춘배 부부는 마음 편히 예식을 구경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앞쪽에 앉은 것이 불편했겠지만, 자신들의 양옆으로 장호와 서대룡 가족이 앉아 있었다.

다시 그 옆에는 정안지부장에서 황천각 집행삼대주가 된 강달이 있었다. 똑똑한 데다 매사 성실한 그였기에 이대로라면 집행총대주 자리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다시 그들 근처에는 충의와 마의가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무극은 두 사람이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라고 나란히 자리를 배치하게 했다.

그녀가 온다는 사실을 미리 전해 들은 마의가 먼저 인사했고, 이후에 두 사람은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충의의 허리는 꼿꼿했고, 더 이상 팔다리가 아파서 주무르는 일은 없었다. 마의 역시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밝아진 모습이었다.

충의의 제자인 표기광은 사부가 이렇게 신나게 의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표기광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자신의 혼례식 날까지 충의를 배려하는 마음에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들 옆에는 천화루주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감격은 다른 사람들과는 남달랐다. 그녀가 미리 본 운명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준 상대는 검무극이 아니라 이안이었다. 그녀에게 특별하다고 말해준 것이 바로 이 운명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사파 고수 괴악이 앉아 있었다. 검무극에게 도움을 주고 떠났던 괴악이었는데, 다른 일은 몰라도 검무극의 혼례만큼은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평생 남의 혼례식에 참석한 적도 드물었지만, 심지어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뒷줄에는 철방의 곽 장인과 무림맹에서 온 철방장인 곽영도 있었다. 그녀는 검무양의 초대를 받고 왔다.

“이제 내일부터는 보검 제작에도 참석하게.”

“정말이십니까?"

무림맹에서 왔다는 이유로 철검만 만들게 하기에는 그녀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대신 더 철저히 관리할 거네.”

"감사합니다."

곽영은 너무 기뻤다. 대공자에게 제대로 된 검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기대해요.

그러는 사이 혼례식이 모두 끝났다.

“신랑 신부는 하객들에게 인사하십시오.”

검무극과 이안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큰소리로 인사한 검무극이 자신을 축하해 주러 온 하객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회귀로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그들이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도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혼인하는 게 좋아서 웃는다 생각하겠지만, 지금의 웃음은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안이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던 그 순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 이 순간 그들에게 자신들을 지켜보는 그 수많은 시선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이 세상에 자신들만이 남았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과 함께.

펑! 퍼엉! 퍼엉! 펑펑펑!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더없이 아름다운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자, 지금부터 축하 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누구 혼례식인데

혼례식장이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악사들이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신나는 가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예식이 치러졌던 단상이 치워지고 그곳에 무대가 만들어졌다. 무대 위로 무희들이 올라와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오늘을 위해 준비된 이들이었기에 그야말로 최고 실력의 무희들이었다.

천마신교의 모든 숙수들과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술과 음식이 가득 올려진 탁자를 들고 그곳으로 나왔다. 그 행렬이 끝이 없었다.

교주와 맹주, 궁주, 그리고 함께 온 고수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일반 하객들을 위한 자리도 만들어졌다.

대연무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술과 음식이 마련되었기에 참석한 모두가 연회를 즐길 수 있었다.

검우진과 권마는 비로소 진패천과 백자강, 한서경과 소백타를 맞이했다.

검우진은 여러모로 참석이 가장 부담스러웠을 진패천에게 먼저 인사했다.

“와주셔서 고맙소.”

“당연히 와야지요.”

한 대의 마차만 왔다는 것으로 그가 얼마나 힘든 행차를 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축하드리오, 검교주."

"감사하오.”

“축하드리오, 권마존.”

“감사합니다, 맹주님.”

진패천은 오늘만큼은 검우진의 무림일통에 대한 야욕을 잊기로 했다. 정말 오늘은 순수하게 축하해 주러 온 자리였으니까.

“아드님이 실로 아름다운 배필을 얻으셨소.”

“외모만큼이나 심성도 출중한 아이지요.”

"벌써부터 며느리 자랑이시오?"

진패천의 농담에 검우진이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백자강이 웃으며 말했다.

"저런 며느리면 자랑할 만하지 않소?"

그렇게 백자강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축하드리오.”

"와주셔서 감사하오."

다섯 대의 마차에 사도맹을 대표하는 고수들을 꽉 채워서 데려온 그였다.

정치적 부담을 안고서 한 대의 마차로 온 진패천만큼이나 백자강 역시 최대한의 존중을 보인 셈이었다.

소백타는 정사마의 수장이 이렇게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이 장면만 놓고 보면 한 조직의 무인들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한서경은 검우진의 며느리 자랑에 한마디 보탰다.

"다들 아시겠지만, 신부가 제 조카입니다."

검우진이 좋은 말로 북해빙궁을 높여 주었다.

"눈처럼 맑고 깨끗한 빙궁의 기품이 어디 가겠소?"

본래 검우진은 상대방이 듣기 좋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이안의 가문이기도 했고, 그 먼 길을 이 많은 고수를 이끌고 와준 북해빙궁이었으니까.

검우진의 말에 한서경이 미소를 지었다. 혹여 이안이 호위 출신이라는 이유로 박대를 받을까 걱정했는데, 와서 보니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와아아아아!

그때 저 멀리서 함성이 들렸다.

검무극과 이안이 옷을 갈아입고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혼례식 때도 느꼈지만, 그냥 형식적으로 환호하고 축하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좋아서 소리치고 있었다.

“다들 가지 말고 나 만나고 가십시오!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검무극다운 외침에 맹주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팔마존들까지 모두 웃었다. 저 수다쟁이가 저 사람들 다 만나고 이곳까지 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검무극이 가장 먼저 챙긴 사람은 조춘배를 비롯한 마가촌 주민들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하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가촌 주민들도 모두 와서 검무극을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평생 이렇게 성대한 혼례식도 처음이었고, 또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을 한 번에 본 적도 처음이었다.

원래도 검무극에 대한 존경심은 깊고도 깊었는데, 이런 자리까지 초대해 주니 그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오늘의 혼례를 이야기하고 자랑할 것이다.

"자, 다들 여기 와서 본교 숙수분들의 요리 맛 좀 보십시오."

검무극이 그들을 탁자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안 하면 마인들 눈치 보느라 그곳에 술과 음식은 손도 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예 기다란 탁자 한 줄을 마가촌 주민들이 자리하게 했다.

"자, 다 같이 한잔하시죠!"

그들 모두에게 술을 부어주고 조춘배에게 술을 받았다.

“혼인 축하드립니다!”

술잔을 비운 검무극이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여기 차려진 요리가 우리 주인장 요리보다 맛이 없더라도 절대 표 내면 안 되오. 왜인지는 아실 거요.

숙수분들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저기 맛없는 표정 지은 자를!”

검무극이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손날로 목을 슥 그었다.

그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어색하고 두려운 자리였는데, 검무극의 농담에 긴장이 풀렸다.

"자, 드시면서 공연 구경하시오. 오늘 여러 공연을 준비했다고 하니 기대하시오."

마가촌 주민들이 공연을 구경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과 공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춘배가 눈물을 훔쳤다.

“왜 우시오?”

“아닙니다, 이런 황홀한 공연은 태어나서 처음이라서요.”

어디 그래서겠는가? 이렇게 챙겨주는 검무극이 고마워서 또 눈물이 흐른 것이다.

“공연 다 보고 가시오."

검무극이 조춘배의 손을 잡아주었다. 황송해하던 평소와 달리 오늘의 조춘배는 검무극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다 뒤늦게 어이쿠! 깡마르고 따스한 손이 깜짝 놀라 달아났다.

검무극과 이안이 다음으로 챙긴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소교주님!”

"황천각주님.”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축하를 전하는 서대룡은 의젓하게 행동했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와락 안고 싶었는데.

내가 이 분야에선 선배인 줄 아시죠? 온갖 너스레를 다 떨며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축하드립니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서대룡 옆에는 그의 아내인 단아가 아들을 안고 서 있었다.

검무극이 가서 아이를 자신의 품에 안아주었다.

“영하야, 네 아버지는 본교에 없어서는 안 될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너도 씩씩하게 무럭무럭 자라거라! 외모는 엄마 닮고, 머리는 아빠 닮고! 알았지?"

안 그래도 감격에 넘치던 서대룡이었는데, 사람들 앞에서도 저렇게 말해주니 정말 감격스러웠다.

서대룡의 처제들인 단비와 단연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소교주님!"

검무극이 막내 단연에게 말했다.

“적어도 오늘은 우리 아버지보다 내가 더 멋있지 않소?"

처음 만났을 때, 단연은 검우진이 제일 멋있다고 했었다.

단연이 저 멀리에 있는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아! 하고 빨려 들어가는 그 눈빛이 이미 대답을 대신했다.

“너무하시오, 막내 처제.”

단연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만큼은 우리 소교주님이 제일 멋있으세요!"

그들 옆에 서 있던 장호가 정중히 포권하며 축하했다.

"감축드립니다."

이안이 장호에게 눈빛을 보냈다. 우리 술 모임 꼭 해요! 장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귀영대주 이안과 소교주의 아내 이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기에.

“장 군주, 오늘 우리 혼례식 꼭 그림으로 그려주게.”

“알겠습니다.”

검무극과 이안이 다음으로 악군학과 차이란을 만났다.

차이란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축하한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말했다.

눈치 빠른 이안은 그녀가 왜 고맙다고 말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자신들의 혼인이 두 사람의 관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 것이리라.

그래서 축하는 오히려 이안이 차이란에게 했다.

“축하드려요!”

“덕분이에요.”

어디 검무극이라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악군학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렇게 막 결정해도 돼?”

악군학도 검무극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용히 혼자서 객잔하겠다는 사람,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하란다고 진짜 할 줄은 몰랐지.”

이거 미친놈인가? 악군학은 아무리 신랑이라도 멱살 한 번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내 남자 그만 놀려요.”

박력 있게 말한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검무극이 다시 악군학에게 속삭였다.

“돌이키기에는 늦은 거 같아.”

“다 들려요!"

차이란의 외침에 검무극이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운영한다면.

"무림에 전설적인 객잔이 탄생하겠소."

기왕 시작한 것, 그게 차이란의 목표였다.

"네, 그렇게 키워볼 작정이에요."

악군학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기다리는 사람 많다. 어서 가봐. 자주 놀러 오고.”

“악 형, 와줘서 고마워."

차이란이 악군학의 팔짱을 끼는 모습을 보며 검무극과 이안이 돌아섰다.

그때 마침 무희의 춤 공연이 끝나고.

둥! 둥! 둥!

감미로운 음악이 멈추고 다음 공연인 검무(劍舞)를 위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악군학의 미래를 표현하는 것만 같아서.

"우리 악형 불쌍해서 어쩌냐?"

저 멀리서 들려오는 차이란의 목소리!

“다 들린다고요!”

검무극과 이안이 웃으며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그냥 이런 날은 바쁜 척 지나가 버려도 될 텐데.

검무극은 눈에 띄는 사람 하나하나 다 챙겼다.

“충의님!"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자, 마의와 대화를 나누던 충의는 깜짝 놀랐다.

충의란 말에 주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충의? 돈벌레 충의? 저 사람이 돈벌레 충의래,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검무극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모두에게 전했다.

“지금까지 그대들이 오해하고 계셨습니다. 충의 어르신은 번 돈으로 평생 고아들을 키워오셨습니다.

여기 계신 누구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시지요. 천마신교 소교주의 이름을 걸고 제가 드린 말씀이 사실임을 보증하겠습니다."

자신에 대해 검무극이 밝히자 충의가 놀라 물었다.

"왜 이러는 건가?"

원래라면 더 버럭 소리쳤을 건데,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충의는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평생 욕만 드셨잖아요? 이제 남은 생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으시며 사시라고요."

“충의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런 칭송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밝힌 겁니다. 영영 안 밝히실 것을 알기 때문에.”

검무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사고는 쳤고, 저는 몰라요!”

검무극이 이안을 데리고 달아나듯 다른 쪽으로 가며 덧붙여 말했다.

“저도 오늘부터 일일이고, 충의님도 오늘부터 일일입니다!”

충의가 어찌 검무극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주위의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마의가 그녀에게 말했다.

“고백하자면 나도 똑같았소.”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마의가 자신의 일을 말해주었다.

“나도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소. 어둡고 우울한 인생이었지요. 한데 소교주가 빛이 있는 곳으로 끌고 나와주었소."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마의의 표정은 편안했다.

"나는 그 삶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소.”

마의가 그녀를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소. 저 출중한 사람이 빛으로 이끌어줬으니 못 이기는 척 이 삶이 내 삶이다 하면서 사는 거요. 가끔 나와 만나서 의술 이야기도 하면서.”

충의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소교주로 인해 인생이 많이 바뀌었었는데. 그래, 이 밝은 세상에서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지 보자.

그 사이 검무극은 다시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천화루주에게 갔다.

천화루주는 이안을 꼭 안아주었다.

“이 무인은 누구보다 잘 살 거예요.”

"아시죠? 저 루주님 말씀은 철석처럼 믿는다는 것."

“네, 믿어도 돼요.”

"감사해요."

두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검무극의 눈에 저 멀리 걸어가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개미처럼 작은 모습이었지만 검무극은 그가 괴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괴악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멀리 떨어졌는데 자신을 알아본 것에 놀랐고, 전음을 보낸 것에 더 놀랐다.

그야말로 천리전음술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저 멀리까지 전음을 보낼 수 없었기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살게나, 소교주.”

이제 죽을 때까지 검무극을 볼 일은 없겠구나, 하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헤어지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검무극과 이안이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사이, 검우진은 맹주들과 한서경, 소백타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중원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새외와 북해의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야말로 무림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서 회합을 하는 모습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젊은 후계자들이 앉았고, 다시 그 옆자리에 팔마존과 사도맹, 그리고 북해와 새외에서 온 고수들이 각각 나눠 앉아서 술을 마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검무극이 있는 쪽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무면객들이 와서 검무극과 이안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화려한 가면을 쓴 무면객들 사이에서 검무극이 신나서 웃고 있었다. 저렇게도 좋을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환한 웃음으로.

무면객뿐만 아니라 마검들과 도귀들, 철권들까지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원래 마존들의 수하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적어도 오늘만큼은 하나의 조직인 것처럼 함께 어울렸다.

검무극이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모습을 보며 진패천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였을까? 자신이 저렇게 무림맹 무인들 사이에 서 있어 본 적이. 마가촌 주민들처럼, 무림맹 본단 인근의 주민들과 어울려본 적은 또 언제였는가?

과연 그랬던 적은 있었던가?

언젠가부터 바빠져서 특정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인 삶을 살았다. 고수들과 명숙들 사이에서,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바빴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쫓기듯 살아왔던 것일까?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백자강이 말없이 술을 따라주었다. 진패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듯이.

진하군과 비사인 역시 술을 마시면서 검무극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저 친구는 우리에게 답을 주는군.”

진하군은 저 모습이 자신이 어떤 맹주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라 여겼다.

비사인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옆자리 시험 답을 훔쳐봐도 답을 적기가 쉽지 않아서 문제겠지.”

그의 말에 모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검무극이 보여주는 모습은 흉내만 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도 있어요.”

한설이 뜻밖의 말을 했다.

“둘이서 혼인 생활을 하면서 거기서도 답을 보여줄 테니까요."

진하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말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그 답도 따라 쓰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저들 부부라면.”

그녀의 말에 모두 공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인기가 너무 많아서 우리에게까지 오려면 한참 걸리겠어요.”

비사인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하객으로 온 상단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은하상단의 용자명이 아들을 소개했고, 황금장의 금아수는 훌쩍 커버린 손자를 인사시키고 있었다.

검무극이 비싼 혼인선물을 가져온 순서대로 줄을 서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저곳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경공이 그 누구보다 빨라 빛처럼 날아가는 사람이면서.

그래, 그래서일 것이다.

저 길을 사람들로 꽉꽉 채운 그였기에, 저 한 걸음 한 걸음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기에.

교주와 맹주와 궁주와 그 후계자들이 이렇게 기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교주와 맹주와 궁주가 기다려도, 마가촌 주민들의 손부터 먼저 잡는 그였기에 이렇게 기꺼이 기다리는 것이리라.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비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누구 혼례식인데 쉽게 끝이 나겠나?”

좋은 날이잖아?

드디어 도착했다.

검무극과 이안은 두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다시 두 맹주에게 차례대로 인사했다.

백자강이 웃으며 검무극에게 말했다.

“왜 내 요리를 맛보러 오지 않나 했더니, 사랑에 빠져 있었군.”

“이제 요리를 이인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해줘야지. 언제든 놀러 오게.”

한서경은 이안을 보면서 죽은 언니를 떠올렸다.

“네 엄마가 이 모습을 봤다면 정말 기뻐했을 거다.”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고 계시나요? 그러고 보니 오늘 정신없어서 엄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요. 용서해 주세요.'

여기까지가 엄마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었다. 더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곳엔 아픔과 그리움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입구에서 멈췄다. 엄마도 그걸 바라실 거라 믿었기에.

“언제나 빙궁은 널 위해 열려 있다. 잊지 마라.”

“네, 감사해요. 이모.”

이모란 말을 처음으로 직접 듣는 순간이었기에 한서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검무극과 이안이 마존들에게 인사하러 가는 걸 보며 검우진이 뿌듯하게 말했다.

“장가는 내가 제일 먼저 보냈소.”

예전에 삼자회합 때 자식 자랑하던 그날을 떠올리며 꺼낸 자랑이었다. 오늘은 확실한 승리였다.

진패천은 패배를 인정했다.

"분하지만 졌소.”

하지만 백자강은 순순히 져 줄 생각이 없었다.

"혼인에서는 졌지만, 손주를 누가 먼저 보는가는 모를 일이지요.”

백자강이 저 앞에 앉아 있는 비사인과 한설을 쳐다보았다.

아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요즘 저 두 아이가 가깝게 지낸다는 말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급해진 진패천이었는데 그에게도 마지막 한 수가 있었다.

“그대들은 며느리만 보겠지만, 나는 손주며느리에 손주사위까지 볼 수 있소.”

그 말에 검우진과 백자강이 웃었다.

지켜보던 소백타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마교주와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저런 유치한 경쟁을 하고 있다니!

그러는 사이 검무극과 이안은 팔마존과 다른 고수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우선 외부에서 온 고수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팔마존에게 갔다.

“어르신!"

검무극은 가장 먼저 혈천도마에게 갔다. 다른 마존들이 옆에 다 있어도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그런데도 왠지 꿍한 표정의 혈천도마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일화검존이 슬쩍 말해주었다.

“주례 연습을 하셨다네.”

"내가 언제!"

주례를 봐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검무극이 그를 달래주었다.

"황천각주 때 한 번 하셔서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 넓은 어르신이야 이렇게 말씀드리면 금방 마음을 푸시겠지만, 풍천교주께서는 삼 년은 마음에 담아 두실 겁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

“삼 년? 삼십 년이 아니고?"

돌아보니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오고 있었다.

“이제 반대가 되었군. 자네가 욕하고 있을 때, 내가 나타나는군.”

검무극이 웃으며 그를 달랬다.

“교주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시는 줄 알고 농담한 거죠.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풍천교주가 검무극의 술을 받았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잘 살겠습니다.”

이안도 검무극과 함께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이 준 술을 비웠다. 그리고 앞서 주례 볼 때 하지 못했던 진심을 지금 전했다.

“지치지 말게. 난............ 앞으로도 자네가 필요하니까.”

풍천교주는 교주와 맹주들, 그리고 팔마존이 있는 자리였음에도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다.

“네. 지치지 않겠습니다.”

"그럼 됐네.”

검무극이 팔마존들에게 술을 한 잔씩 받았다.

혈천도마에게 먼저 술을 받았다.

“이제 책 보러 둘이 갈 겁니다.”

“새 책을 좀 사둬야겠군.”

혈천도마는 차마 이안이 옆에 있어서 오지 말라는 말을 못 했다. 그래도 이 말은 했다. 이제 이안이 옆에 있으니.

"잠옷은 잘 챙겨오겠군.”

일화검존에게는 이안이 술을 따라주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검우진과 검무극을 제외하면 천마신교에서 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일화검존이었으니까.

일화검존이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이제는 소교주의 부인이었으니까.

“소마후께서 목표로 하는 바는 무엇이오?”

자신을 소마후라 부르자 이안은 흠칫 놀랐다. 정말 혼인했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이안이 차분히 대답했다.

“검술의 극의를 보는 것입니다.”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이 같다면.

"함께 갈 수도 있겠지요.”

취마는 검무극에게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주었다. 공적인 자리니 정중히.

“오늘 주려고 준비해 둔 술이네.”

검무극이 이안과 함께 술을 마셨다.

"정말 맛있습니다.”

“내가 가진 술 중에 가장 맛있는 술을 꺼내 온 것이네.”

매번 제일 맛있는 술이라고 하지만, 더 맛있는 술이 자꾸만 나왔기에.

“취마님 혼례식 날 술을 마셔보고 그때 다시 평가하겠습니다.”

그 말에 듣고 있던 마존들이 웃었다.

섭혼마존은 한 걸음씩 계속 나아가는 검무극의 삶을 보며 교주의 자리에 오를 그날을 기대했다.

마불은 괜한 핀잔을 주었다.

"형도 아직 혼인 안 했는데 동생이 먼저 해도 되나?"

하지만 술을 부어주는 마불의 몸에서는 그가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밝고 맑은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왕은 이안에게 말했다.

“소마후, 한가할 때 천독림에 들러서 내 일 좀 도와주시오.”

말은 도와달라는 것이었지만 독에 관해 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네, 꼭 찾아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극악소마 앞으로 걸어갔다.

극악소마가 품에서 가면 두 개를 꺼내서 건넸다. 지금 자신과 무면객들이 쓰고 있는 환락귀면이었다.

“축제가 열릴 때 쓰는 가면입니다. 평생 이 가면처럼 사시라는 의미에서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예전에 일반 가면은 검무극과 이안이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환락귀면은 처음이었다.

“네, 평생 축제처럼 살겠습니다.”

두 사람이 가면을 쓰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가면 속에서 세 사람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존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검무극과 이안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품에 넣었다.

검우진이 취마에게 말했다.

"그것 가져왔나?"

“네, 교주님.”

취마가 뒤에서 술병을 하나 가져왔다.

"대취림의 주정입니다."

그것이 상하는 바람에 취마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한데 오늘 교주가 주정을 한 병만 퍼 오게 한 것이다.

검우진이 주정을 가져가서 수장들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본교를 대표하는 술이오.”

그 말에 듣고 있던 취마가 감격했다. 원래 대취림의 주정이 상하고 상하지 않는 것으로 신교의 안녕을 점치는 것을 미신으로 여겼던 교주였다.

한데 오늘 교주가 주정을 본교를 대표하는 술이라 표현한 것이다.

"자, 모두 술잔을 드시오."

나직한 그의 말이 대연무장에 있는 모든 하객의 귓가에 또렷이 들렸다.

누구 말이라고 거역하겠는가? 모두 술잔을 채워서 들었다.

검우진이 잔을 들자 모두 일어나서 잔을 들었다.

“아들의 혼례에 참석해 주셔서 고맙소. 건배합시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감격했다. 아버지가 직접 주정을 가져오게 하고, 이렇게 직접 건배를 청하실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오늘 얼마나 기뻐하고 계신지 다시 한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술을 비웠다. 천마와 함께 술을 마시는 순간이었다. 마인들에게는 크나큰 영광의 순간이었다.

마인이 아니더라도, 이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건배하고 난 후 검우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맹주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검무양에게 갔다.

"형, 같이 한잔하자."

“난 됐다.”

“잊었어? 형도 우리 친구 모임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것.”

검무극이 검무양을 데리고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갔다.

"오래 기다렸지?"

검무극이 형과 친구들과 술을 비웠다.

검무극은 취기를 배출하지 않았기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오늘만큼은 그냥 취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곳에 있던 친구들 역시 아무도 취기를 배출한 사람이 없었다. 다들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진하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힘들었지? 이제 좀 쉬게.”

축하한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껏 사람들에게 수없이 많이 했던 말이니 이 자리에서라도 좀 쉬라는 의미였다.

원래 비사인과 연합전선으로 검무극을 공격하려 했다. 막내가 어디서 혼인하냐며 놀리려 했다.

한데 기가 빨려서 온 두 사람을 보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들하고 있으니 편하고 좋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네가 예전에 내게 그랬지. 자식 한 일곱쯤 낳아서 줄 세우라고. 자넨 몇이나 낳을 생각인가?"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이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소저 닮은 예쁜 딸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러자 이안이 말했다.

“당신 닮은 아들도 하나 필요해요."

그러자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건 곤란하오. 저 친구 닮은 아들이면, 우리 자식들이 힘들어지오.”

비사인이 결국 그렇게 될 거라며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이 다른 경우를 말했다.

“의외로 아버지와는 달리 과묵한 아들이 태어날 수도 있죠.”

진하령이 그런 아들을 상상해 보았다.

“아버지는 계속 떠들고 있고, 어린 아들은 어른스럽게 들어주고 있고. 그거 볼만하겠는데요?”

그녀의 말에 모두 웃었다.

그들이 다 같이 술을 마셨다. 확실히 검무극이 오니 이 자리가 완전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무대에서 신나는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은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앞서 연주했던 곡이 우아한 곡이었다면 지금은 신나는 곡이었다.

비사인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식으로 축하의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모두를 놀라게 할 행동이 이어졌다.

비사인이 음악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더는 춤은 없다고 다짐했던 그였는데.

비사인이 술을 마시다 일어나서 춤을 출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 못 했기에 모두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 혼례가 진행되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검무극의 농담에도 비사인은 음악에 몸을 실었다. 그는 주위의 이목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좋은 날이잖아?"

연습한 춤도 아니고 거창한 춤도 아니었다. 그냥 기뻐서 추는 춤이었다.

이 춤은 검무극에게 전하는 자신의 축하공연이었다.

검무극은 오늘도 자신이 어떤 맹주가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저렇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은 알 수 있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속도보단 방향일 테니까.

'축하한다, 친구, 그리고 고맙다.'

비사인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래를 부르려는 거요?"

예전에 춤출 때 그녀가 노래를 불렀기에 검무극이 그렇게 물었던 것인데.

“아뇨, 저도 춤추고 싶어서요.”

한설이 비사인 옆에서 살랑살랑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저 두 사람, 요즘 같이 다니다가 광증을 일으키는 독충에 물린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 독충에 물린 사람은 또 있었다. 진하령이 일어난 것이다.

“춤이라면 내가 빠질 수 없지.”

“왜 이래, 너까지.”

“오늘 본맹 고수분들 아무도 안 왔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의미.

진하령이 두 사람 옆에서 살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이 춤추는 것을 교주와 맹주들도, 마존들과 고수들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이 아니라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네 동생도 미치기 시작했어."

그때 진하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섭게 왜 이래? 하군, 정신 차리게. 자네 이런 사람 아니잖아?"

물론 진하군은 이런 사람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소맹주가 되었을 때 자네들이 축하공연을 해주지 않았나? 오늘 자네 혼례 날인데, 내가 못 출 것도 없지.”

진하군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두 큰 동작으로 추는 춤이 아니었다. 다들 살랑살랑 기분 좋게 몸을 흔들었다.

검무극이 슬그머니 형을 쳐다보았다.

"죽을래?"

형의 한마디에 검무극이 웃었다.

“그래, 모두 다 독충에 물린 건 아니네.”

검무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우리도 갑시다! 하는 눈빛에 이안이 검우진 쪽을 쳐다보았다.

아버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뭐 어떻소? 아들과 며느리가 춤추는 것 보시는 거지.

그녀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비사인이 시키지도 않은 춤을 추고 친구들이 모두 일어난 이상, 자신들이 어찌 앉아 있겠는가?

갑시다! 정 부끄러우면 우리에게 가면이 있지 않소?

검무극과 이안도 일어나서 함께 춤추기 시작했다.

이안은 검우진과 권마 앞이었기에 정말 살짝살짝 상체만 흔들었다.

정작 놀란 사람들은 일반 하객들이었다.

그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교의 후계자고, 무림맹의 후계자고, 사도맹의 후계자고, 빙궁의 후계자인 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미래의 무림 전체가 춤을 추고 있었다.

무림 역사상 이런 연회는 처음이었다. 형식적인 연회가 아니라 신랑 신부가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는 축제였다.

용자명이 춤추는 그들을 바라보며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가업을 이어받든 다른 일을 하든 뭐든 열심히 해라. 너희에게 멋진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지켜보던 검우진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다.

춤추는 청춘들을 지켜보는 백자강의 그 작은 눈이 빛났다.

“소교주는 내 피를 끓게 만드오. 젊은 시절의 나로 돌아가 소교주와 함께 어울리고 싶게 하오.”

듣고 있던 진패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젊은 시절의 자신으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의 성격에 같이 춤이야 추겠냐마는, 적어도 피를 끓게 한다는 말에는 완전히 공감했다.

팔마존들은 술을 마시며 그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나는 음악에 젊은 그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니 가슴에 격정이 일었다.

지나간 청춘을 떠올리며 술을 마셨다. 젊은 섭혼마존은 달려 나가고 싶었다.

검무극이 하객들에게 소리쳤다.

"춤추고 싶은 사람 모두 춥시다!"

그 말에 십칠교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추고 싶어요.”

십칠교의 말에 초승달 무면객이 벌떡 일어났다.

“춥시다!"

가면이 이래서 좋다. 두 사람이 거침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주위의 무면객들이 그들 주위를 돌며 괴이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평소에 워낙 괴이한 짓을 많이 하는 그들이었기에 그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제야 무면객 같았다.

조춘배가 아내를 쳐다보다가 등짝을 맞았다.

"주책은!"

모두 이 신나는 연회를 즐겼다.

평생 한 번뿐이라는 것을 모두 직감했기에 다들 신나는 음악에 엉덩이가 들썩였다.

점차 뜨거워지는 열기 속에서 검무극이 악공들에게 소리쳤다.

“더 신나는 음악으로!”

마차 천천히 몰게

검무극이 침상에 앉아서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신과 이안의 혼례식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예복을 입고 혼례를 올리는 자신들과 그 옆으로 아버지와 사부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한 장이 아니었다. 그 아래 작은 그림들이 있었는데 친구들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다음 날 친구들과 이별하는 모습, 또 신행(行)을 떠나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다.

바로 장호가 그려서 선물로 준 그림들이었다. 그날의 일은 물론이고 이후 있었던 일까지 멋진 그림으로 그려서 선물로 준 것이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검무극의 목을 살수처럼 팔로 휘감았다.

“신교의 소교주가 이렇게 허점이 가득하다니!"

이안이 이불로 몸을 감은 채 목을 감은 것이다. 이불 위로 그녀의 새하얀 어깨가 드러났다. 이안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일어났소.”

"전 일어나시는지도 몰랐네요. 요즘 왜 이렇게 피곤한지.”

“수련을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오?”

혼인하고 나서도 이안은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림일통의 야망은 혹시 당신이?”

검무극의 농담에 이안이 다시 목을 휘감으며 악당처럼 대답했다.

“내 야심을 알았으니 살려둘 수 없지.”

“나 역시 악당은 그냥 둘 수 없지.”

검무극이 돌아서며 그녀를 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이안이 이불과 함께 반대쪽 침상 옆으로 내려섰다.

“안 돼요, 어서 씻고 외출준비 해야 해요.”

"어디 가시오?"

“아버님이 부르셨어요. 맛있는 거 사주신다고요.”

검무극이 눈을 껌벅이더니.

“내게는 아무 말씀 안 하셨는데?"

이안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저하고만 가고 싶으셨나 보지요.”

“아들을 제쳐두고 며느리만 이렇게 챙기신다고? 둘이서만 밥 먹으러 간 게 이게 몇 번째냐고!"

벌써 여러 번 검우진은 이안을 데리고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다녀왔다.

“오늘은 나도 꼭 따라갈 거요!"

한 대의 마차가 천마전 앞마당에 서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사람은 휘였다. 휘가 마차를 모는 걸 보니, 호위들은 두고 조용히 외출하려는 모양이다.

천마전에서 검우진이 걸어 나왔다. 마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정중히 인사했다.

“아버님.”

“많이 기다렸느냐?”

“아닙니다.”

“가자."

처음에는 검우진이 정말 많이 어려웠는데, 여러 번 함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다 보니 이제 예전보다 많이 편해진 그녀였다.

두 사람이 마차에 타려던 그때, 검우진이 잠시 멈춰서서 말했다.

“나와라.”

그러자 저 멀리 건물 뒤에서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 저도 맛있는 거 좋아합니다.”

“그럼 가서 먹어라.”

“아버지가 사주시는 맛있는 거 말입니다. 저 두고는 못 가십니다.”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려 마차 앞을 막아섰다.

“아저씨, 가시려거든 저를 깔아뭉개고 가셔야 합니다!”

마부석에 있던 휘가 웃었다.

마차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라.”

검무극이 잽싸게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세 사람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아무리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해도, 그렇게 며느리가 좋습니까?”

검우진은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안이 검무극을 놀렸다.

“왜 따라오세요? 아버님과 둘이 재미있게 놀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얘길 하면서 노는 거요?”

“그건 아버님과 저만의 비밀이에요.”

검무극은 이안이 고마웠다.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이 아무리 커도, 며느리가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버지 성격상 절대 같이 가자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안이 즐거워하고 아버지께 잘하니까 계속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마차가 마가촌을 지나던 그때였다.

"잠시 마차를 세우게.”

마차가 멈춰서자 검우진이 창밖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이보게.”

아버지가 부른 사람은 바로 마가촌에서 인형을 파는 염소수염 상인이었다.

“교주님!”

깜짝 놀란 그가 와서 허리가 접히도록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한 것은 다 되었나?”

“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주게.”

염소수염이 포장된 인형 두 개를 가져왔다.

검우진이 돈을 건네자 행상은 받지 않았다.

"이건 제가 교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교주님이 인형을 만드는 걸 허락해 주셔서 지금까지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고맙네. 많이 팔게.”

다시마차가 출발했다.

검무극은 아버지가 받은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게 뭡니까?"

그러자 검우진이 그중 하나를 이안에게 주었다.

포장을 풀어본 이안이 안에 든 인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형은 바로 자신의 인형이었다.

“이제 네 것도 하나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인형 파는 상인에게 이안의 인형을 만들게 했다는 것을. 이제 본격적으로 이안의 인형도 판매가 될 것이다.

이안이 감격스러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인형을 만들어줬다는 사실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은 인형을 두 개 사서 한 개는 가져가려 하신다는 점이었다.

"너무 잘 만들었는데? 당신하고 아주 똑같아!"

이안의 인형은 정말 아름답고 멋있었다.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허리에 찬 검은 일화검의 모양을 그대로 살렸을 정도였다.

검무극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판매 순위가 한 단계 밀리겠구나.”

마차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천막으로 만들어진 국숫집이었다.

"아, 여긴?"

예전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맛있는 국숫집이 있다고 했던 그곳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예전에는 만두가 맛있었다고 말했던 바로 그 집.

“어서 오십시오!”

그곳은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한적한 곳에 위치했음에도 손님이 제법 많았다.

“휘, 자네도 같이 먹지.”

“네, 교주님.”

검우진은 오늘은 휘도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주문했다.

“여기 국수 네 그릇 주시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 한 노파가 가게로 들어오더니 미처 치우지 못한 탁자의 그릇들을 치웠다.

“어머니, 왜 나오셨어요? 집에서 쉬시라니까요."

“나는 괜찮다.”

노파는 아들 부부를 도와주러 나온 것이다. 원래 자신이 장사하던 곳이었는데, 아들 내외가 물려받았다.

행주로 탁자를 닦던 노파가 검우진을 보고 흠칫 놀랐다.

"혹시?"

검우진이 노파에게 말했다.

“나를 기억하시오?”

“어이구, 맞네요. 기억하고 말고요.”

노인이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하려 했지만, 검우진이 허공섭물로 그녀를 감싸서 못 하게 했다.

“오래 살다 보니 귀한 분을 다시 뵙게 되는 날도 옵니다.”

“가끔 그대가 해주던 만두가 생각날 때가 있소.”

권마와 함께 중원에 나갔다 돌아올 때면 가끔 들려서 만두를 사 먹었다.

당시에는 자주 다니다가 교주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오지 않았다. 노파 역시 시간이 지나 아들에게 장사를 물려주었고,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한데 오늘 다시 검우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숙수들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대가 해주는 만두만큼은 흉내를 못 내더군.”

노파는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만두를 빚어서 대접하겠습니다.”

"괜찮소. 오늘은 그대 아들이 해주는 국수를 먹으러 왔소.”

노파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검우진에게 말했다.

"옛 모습 그대로십니다.”

그 말에 검무극이 슬쩍 장난을 쳤다.

“그럼 아버지가 젊었을 때 노안이셨다는 뜻인데요?”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노파가 당황하자 검우진이 검무극을 야단쳤다.

“실없는 소리!"

검무극이 노파에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입니다, 어르신 우리 아버지 여전히 멋있으시죠?”

아버지란 말에 노파가 눈을 크게 떴다. 이내 누군가를 떠올리는 표정을 짓더니.

“그러고 보니 그분을 똑 닮았습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이곳에 데려온 적이 있다는 사실을.

“네, 제가 다행히 아버지를 안 닮고 어머니를 닮았거든요.”

노파는 젊은 시절 두 사람이 앉아 만두를 먹는 모습을 떠올렸다. 완전히 잊었던 기억인데, 검무극의 얼굴을 보자 생생히 기억났다.

이윽고 국수가 나왔다.

함께 국수를 먹던 그때.

이안이 갑자기 헛구역질했다.

“죄송합니다. 우욱.”

이안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한 입 먹는데 갑자기 헛구역질이 난 것이다.

노파와 여인이 서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으실 거 같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했기에 검무극과 검우진은 깜짝 놀랐다.

검우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수는 다음에 먹으러 오겠네.”

검우진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검무극과 휘도 뒤따라 나갔다.

이안이 바깥바람을 쐬며 심호흡을 하고 있다가 검우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님.”

“아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아뇨,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미 검우진은 마차에 탄 후였다.

검우진이 마차에 올라타며 휘에게 말했다.

“바로 마의에게 가세."

“네, 교주님.”

마차가 출발하자 다시 안에서 검우진의 말이 들려왔다.

"마차 천천히 몰게.”

검무극과 이안이 해변에 누워있었다.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이 가장 좋아하는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에는 두 사람이 아니라 셋이 누워있었다. 이안의 배는 제법 표나게 불러 있었다.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좋은 아버지가 될까 걱정한다고? 이안은 너무 좋은 아버지가 될까 봐 오히려 걱정이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으세요?"

“당연히 그렇소.”

“무조건 잘해준다고 좋은 아버지가 되는 건 아닌 줄 아시죠?"

검무극이 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음.”

이안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조금 부족하게, 결핍 있게 키워야죠.”

잠시 사이를 두고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불가능하겠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천마신데, 어떻게 결핍 있게 키우겠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옅게 웃었다.

이안이 푸른 바다와 정반대의 것을 떠올렸다.

“아, 동정호의 밤 풍경이 보고 싶네요.”

그녀의 눈앞에 동정호가 펼쳐졌다. 그들은 동정호 위를 떠다니는 작은 조각배에 앉아 있었다.

"아니, 진짜 동정호요!"

“똑같소. 가도 여기랑 똑같소.”

“산모가 많이 움직여야 아기에게 좋대요. 우리 둘이 다녀와요!"

푸른 들판이 두 사람 앞에 펼쳐졌다.

"자, 둘이 걸읍시다. 저 평원 끝까지 갑시다!"

이안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연아, 네 아버지가 이런 분이시다.”

연은 태명이었다. 검연의 연이었다. 두 사람에게 가장 값진 인연으로 찾아왔기에, 인연 연 자를 써서 태명을 지은 것이다.

“무림이 얼마나 위험한데, 임신한 몸으로 돌아다니겠다는 거요?"

걱정 많은 검무극의 성격이 제대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같이 가는데 대체 뭐가 걱정이에요. 이 무림에서 당신이 제일 위험해요!"

“나중에 실컷 놀러 다닙시다. 가자는 곳 다 데려가 주겠소.”

“저 분명히 기억해 뒀어요. 연아, 들었지?"

두 사람이 푸른 평원을 손을 잡고 걸었다.

사실 이안은 진짜라도 좋고, 가짜라도 좋았다. 이렇게 함께 손을 잡고 갈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기 뭉게구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으아아아아!

방 안에서 이안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드디어 출산의 그 날이 된 것이다. 검무극은 방 앞을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힘내, 이안.'

들어가서 옆에 있어도 되냐고 물어봤지만, 산파는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산통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죠?"

“세 시진이 지났네.”

검무극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마의였다. 그는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원래 첫째는 오래 걸린다네.”

“마의께서도 들어가 계셔야 하지 않습니까?"

“안에 들어가 있는 이들은 본교 최고의 산파들이네. 난 방해만 될 거네.”

"괜찮겠지요?"

“걱정하지 말게. 순산할 거네.”

검무극은 당연히 그러리라 믿었지만, 진통이 계속되자 마음이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검무극이 안에 들리게 큰 소리로 말했다.

"힘내시오! 내가 밖에 있소!”

그때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정신없다, 그만하고 이리 오너라.”

차분한 눈빛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권마였다.

“네, 죄송합니다.”

검무극이 권마 옆에 앉았다. 이렇게 차분한 척해도, 그 역시 속이 타들어 가고 있겠지.

천마전에서 출산 소식을 기다리고 계실 아버지도 다르지 않을 것이고.

“뭐가 걱정이냐? 네 자식으로 태어나는 운명을 지닌 아이다. 아무 일 없다.”

녀석아, 엄마 그만 힘들게 하고 어서 나와라.

그때였다. 문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검무극과 권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아기 울음소리였다.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숨을 죽인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잠시 후 천천히 문이 열렸다.

검무극은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둘 다 무사하기를! 제발!'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중년의 산파였다.

“무사히 따님을 순산하셨습니다.”

검무극의 입에서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고 산파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산파가 문에서 몸을 비켜섰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검무극보다 권마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산파가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권마는 아기보다 이안에게 먼저 갔다.

"괜찮냐?"

“네.”

권마의 그 큰 등에 이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기를 안고 있던 산파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안아 보시겠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파는 포대기로 싼 아기를 조심스럽게 검무극의 팔에 안겨 주었다.

검무극이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처음으로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진짜 현실인가? 마치 시공이환술 속 환상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버지가 되었구나.'

실감이 가지 않았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라고?

자식이란 존재가 주는 이 특별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종일 보고 있으래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았다. 백날을 이대로 안고 있으래도 그럴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때 들려오는 말소리.

"우리 딸이에요.”

고개를 드니 이안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완전 진이 다 빠진 그녀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 강인한 몸이 산산이 부서진 것 같았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눈에 그녀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검무극이 아기를 안은 채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권마가 더없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검무극이 아기를 그녀 옆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아기를 보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생명의 탄생은 무공 실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진통이 계속되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 아프고 힘들고, 자신보다 아기가 힘들까 봐 너무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아기가 잘못될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아기를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다. 아가."

검무극은 혼인하고 나서도 항상 그녀에게 존대했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고생했다. 이안아.”

비로소 긴장이 풀린 이안에게 편안한 안도감과 기쁨, 행복이 함께 밀려들었다.

"당신을 닮았어요.”

갓 태어난 아기인데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검무극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아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딸아,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

쉬이이이이.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 빛의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검우진이 천마비행술을 극한으로 발휘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검우진은 빛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문 앞에 서자 심장이 떨렸다.

천살성과 싸울 때도 떨지 않았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검우진이 이안부터 챙겼다.

“몸은 괜찮으냐?"

"네, 아버님."

이안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검우진이 발출한 부드러운 기운이 그녀를 감싸서 다시 눕혔다.

"고생했다.”

그저 한마디 말이었지만 그 따스한 말에서 검우진의 마음이 느껴졌다.

검우진의 시선이 이안 옆에 누워있는 아기를 향했다.

검무극은 그간 아버지의 새로운 표정을 여럿 발견했었는데 오늘 또 하나의 새로운 표정을 보았다.

"할아버지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검우진은 이 순간만큼은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자식을 낳았을 때와는 분명 또 다른 기쁨이었다.

"손녀 한 번 안아보세요, 아버지.”

검우진이 권마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안아보았나?"

“저는 나중에 조금 더 크면 안아보겠습니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자신의 큰 몸과 손으로 안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천하의 권마도 첫 손녀 앞에서는 쩔쩔매었다.

검무극이 아이를 안아서 아버지에게 안겨주었다.

검우진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았다. 아기는 정말 오랜만에 안아보는 거라서 검우진도 긴장했다.

언젠가부터 잊고 살았다. 그 모든 생명의 시작은 이렇게 작게 시작한다는 것을.

하지만 검우진에게 아기는 무겁게 느껴졌다.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아기를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죽은 아내를 닮은 아들, 그 아들을 그대로 빚어낸 듯한 손녀였다.

아기의 가느다란 숨결은 구화마공의 구결보다 더 큰 울림으로 검우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름은 지었느냐?”

“아버지께서 지어주십시오.”

검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검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안과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네 엄마가 딸을 낳으면 짓고 싶어 했던 이름이 있었다.”

검우진이 손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연(夏), 검하연."

여름 하 자에 인연 연.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의 이름에도 인연 연 자가 들어갔다.

이안이 검무극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너무 예뻐요.”

검무극이 딸을 다시 받아 안으며 말했다.

“검하연, 이제부터 네 이름이다.”

그때 창밖 저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급한 소리가 아니라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였다.

교내에 경사가 있으면 울리는 종소리였다.

모든 마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다들 소마후가 무사히 출산했음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혈천도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책 속에 그 어떤 감동적인 글귀도 이 순간의 감격만큼은 아니었다.

연무장에서 검술을 연마하던 일화검존이 자신의 검을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취마는 마시던 술잔을 허공에 들며 건배했고 독왕은 힘들게 붙잡았던 독충을 오늘만큼은 그냥 풀어주었다.

마불은 조용히 염불을 외며 아기의 건강을 염원했다.

섭혼마존은 혼을 달래다 미친년처럼 큰소리로 웃었고, 하얀 벽을 바라보던 극악소마는 소리 없이 웃었다.

조사관들이 죄인을 취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서대룡이 번쩍 손을 치켜들며 만세를 불렀고, 이제 막 작전을 나가던 장호는 대형마차 안에서 마군들과 함께 우렁차게 소리쳤다.

“소마후님! 순산을 감축드립니다!”

“내가 재우겠소.”

검무극이 하연이를 받아 들었다. 아빠 품으로 가자 울음이 더욱 커졌다.

“젖을 많이 먹었는데도 안 자네요.”

하연이는 거의 한 시진마다 잠에서 깨었기에 이안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서대룡이 아기가 이렇게 자주 깨는지 처음 알았다더니. 정말 자주 깼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요?"

검무극이 하연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열은 없는 거 같은데.”

무공이 고수인 것과 육아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무공 경지가 끝이 없듯, 육아 역시 끝이 없었고, 일권에 절벽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우는 아이를 그치게 할 수는 없었다.

파훼법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볼 테니까 눈 좀 붙이시오."

“고마워요.”

그때 바깥에서 기척이 있었다. 검무극은 그 기척만으로 이 늦은 밤의 방문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연아, 아빠랑 마당에 산책 가자.”

검무극이 아기를 안고 마당에 나갔을 때, 아버지가 마당에 와 계셨다.

“이 밤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냥 잠이 안 와서 산책하다 우연히 들렀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요즘 이안이 육아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리라.

“한 시진만 내가 봐줄 테니, 둘이 눈 좀 붙여라.”

"아버지가요?"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고마우실 수가요!"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안고 있던 하연이를 건네주었다. 울던 하연이가 울음을 그치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낯선 품이라서 그랬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손녀를 데리고 돌아섰다.

“하연아, 이 할애비랑 놀러 가자.”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하연이는 울지 않았다.

검무극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이안도 밖에서 나눴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아버님 괜찮으실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요. 괜찮소, 걱정하지 말고 잡시다.”

검무극이 이안과 함께 침상에 누웠다.

근래 계속 잠을 설쳤던 이안이 잠이 들자, 검무극이 소리 없이 침상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아니, 안 괜찮지!'

자신들 둘도 쩔쩔매는데 아버지가 어찌 하연이를 재울 수 있겠는가?

검무극이 곧장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이안이 침상에서 눈을 떴다. 그래, 저 걱정 많은 사람이 딸을 아버님에게 맡겨두고 그냥 편히 잘 리가 없다.

'그래요, 어쨌든 오늘만큼은 검 씨들이 우리 하연이 맡아줘요.’

이안이 새근새근 잠이 들었을 때 검무극은 아버지의 거처에 도착했다.

하연이가 우는 소리가 들릴 거라 생각했는데, 집 안은 조용했다.

검무극이 방에 들어갔을 때, 안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하연이 모두 같은 모양의 꽃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연이에게 맞는 아기용 꽃무늬 잠옷을 미리 준비해 두신 모양이다.

하연이는 아버지에게 안겨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검무극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버지는 쉿 하는 시늉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하연이를 침상에 눕혔다.

ᅳ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잠을 깨울까 싶어 검무극이 전음을 보냈다.

-이래봬도 아들 둘을 키운 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열이 나는 형을 안고 마의에게 달려간 이야기를 하면서, 열이 펄펄 나는 자신은 미지근한 물로 닦아내며 열을 내렸다고. 둘째가 되니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

-대단하십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딸아이에게로 갔다. 이렇게 잘 자면서 왜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했냐?

ᅳ녀석이 벌써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눈치챈 모양입니다.

하긴 누구 딸인데 눈치가 없겠는가? 그래, 네가 잘 보여서 절대 손해 볼 게 없는 분이시다.

검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하연이를 내려다보았다.

-가끔 내가 봐주마.

검무극의 방에 새로운 그림이 붙었다.

혼례식 날 친구들과 춤추던 그림이 구석으로 밀려났고 그 자리를 하연이의 그림이 차지했다.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던 아기 때의 그림부터, 첫걸음마를 떼던 모습의 그림, 이제 두 뼘쯤 되는 작은 나무 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그림까지.

아이가 큰 만큼 장호의 그림 실력도 많이 늘었다.

“정말 시간 금방 가는구나.”

엊그제 태어난 것 같은데, 벌써 뛰어다니며 말도 곧잘 했다.

검무극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담장 너머로 누군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가 내려갔다.

검무극이 방에서 나가며 말했다.

“뭘 그렇게 훔쳐보십니까?"

그러자 마당으로 혈천도마가 들어섰다.

"훔쳐보기는 뭘 훔쳐봐? 그냥 지나가다가 슬쩍 봤지."

"경공까지 발휘하시면서요?"

혈천도마가 왜 왔는지 검무극은 짐작했다.

“하연이 보러 오신 거면 한발 늦으셨습니다.”

순간 혈천도마의 얼굴에 실망감이 확 스쳤다.

“아니, 교주는 일도 안 하신대?"

“안 하시나 봅니다.”

혈천도마가 헛웃음을 지었다.

"손녀가 그렇게 좋을까?"

아버지가 좋아해서만이 아니었다. 하연이가 워낙 할아버지를 잘 따랐다. 엄마 아빠랑 놀다가도 할아버지 보고 싶다고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 시간은 이안의 휴식 시간이었다. 조용히 차도 한잔 마시고, 어떨 때는 무공 수련도 하고.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드디어 올해군.”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약속한 오 년이 바로 올해였다. 그것도 이번 달, 며칠 남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오 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때 다시 여쭈었을 때도 아버지의 꿈이 무림일통이라면, 그땐 자신이 그 전쟁의 선봉에 서겠다고 했다.

“시간 정말 금방 갑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거 같았는데,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어느새 그날이 왔다.

“이놈아, 내 앞에서 세월 가는 이야기를 해?”

검무극이 웃었다. 그래, 누가 그랬다. 이십 대 때는 경공 이 성의 속도로 세월이 가고, 삼십 대는 삼성으로 간다고. 언젠가는 대성의 속도로 달려가겠지?

“올해가 되면 네가 작전을 펼칠 줄 알았는데?"

“무슨 작전요?"

“마존들 찾아다니면서 무림일통을 반대해 달라고 할 줄 알았지.”

“제가 부탁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못 들어줄 거다.”

검무극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 안 되는데 다른 마존들 누가 되겠습니까? 괜히 부담드리기 싫습니다.”

예전에는 온갖 부담 다 주면서 밀어붙이더니.

“아버지가 되고 나니 철이 좀 든 거냐?”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이것도 작전입니다.”

“작전이라고?”

“그날 그 자리에서 승부를 볼 생각입니다.”

정말 그런 생각이라는 듯 검무극이 찾아가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제가 미리 찾아뵙고 부탁드리면 결국 어쩔 수 없다라는 결론들이 날 겁니다. 하지만 그날 마존분들의 동정을 사는 작전을 펼칠 겁니다.

아, 소교주가 저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나서서 도와야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게 끔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검무극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게는 왜 말해주는 거냐?"

“이것도 작전입니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나를 대하는 소교주인데, 어떻게 안 도울 수가 있지? 나라도 돕자!"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제대로 보고 있었다. 미리 찾아가 봤자 결론들은 정해져 있을 거라는 것을.

“아버지의 꿈은 그대로일까요?”

“교주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 다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차분히 덧붙였다.

“교주도 노력 중일 거다.”

그 노력이란 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때 그곳에 또 다른 방문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마불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중원에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하연이 옷 좀 사 왔네.”

마불이 포장된 옷을 건네주었다. 평생 아이 옷 같은 건 안 살 것 같은 그였는데.

"감사합니다."

“하연이는?"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가려 했는데.

"한발 늦으셨습니다.”

마불 역시 하연이가 또 교주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가 마불에게 농담을 던졌다.

"번호표 받고 줄 서시오. 다음 차례는 나요."

그때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 말했다.

"순서가 어디 있습니까? 그날 먼저 오면 그 사람이 하연이랑 놀 수 있는 거지요.”

그는 바로 취마였다.

혈천도마가 이 주정뱅이가 어디서?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취마는 물러서지 않았다.

“선배, 나 술 끊은 지 열흘째요. 예민하니까 건들지 마시오.”

“뭐 때문에 술을 끊어?”

취마가 대답하지 못하자 검무극이 대신 대답했다.

“하연이가 술 냄새나서 싫다고 했거든요.”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취마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취마가 술을 끊으면 어쩌나?"

"그러니까 번호표 같은 말씀은 마시란 말씀입니다.”

마불은 번호표 싸움에는 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냥 옷만 전해주려고 왔네. 옷 안 맞으면 말하게 바꿔다 줄 테니까.”

돌아서 가려는 마불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하연이가 마불님 엄청 좋아합니다.”

"나를?"

마불이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와 취마 역시 귀를 쫑긋 세웠다.

"황금불상 할아버지 언제 볼 수 있냐고 며칠 전에도 물었지요.”

"정말 나를 좋아한다던가?"

“마불님 몸에서 나는 빛이 신기하고 좋은 모양입니다. 키가 작으셔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마불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에게 약점이라 생각했던 부분들이 하연이에게는 좋아하는 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 만나 봐야 하연이에게 도움 될 것 없을 거네.”

괜히 한발 물러나는 그의 모습에 취마가 불쑥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술주정뱅이 아닙니까?”

혈천도마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다르겠소? 별호에 피 혈 자가 들어가는 사람인데.”

“그래도 도마께선 책을 많이 읽지 않으시오? 하연이에게 도움 많이 될 거요."

하연이에게 도마의 별명은 책 할아버지였다. 혈천도마의 집에 놀러 가면 책이 많다고 좋아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하연이는 마존들 중에서 누굴 제일 좋아하나? 자넨 알 거 아닌가?”

세마존이 일제히 눈빛을 반짝였다. 책 할아버지니까, 황금불상 할아버지니까, 술 끊었으니까!

검무극이 대답한 사람은 정말 뜻밖의 인물이었다.

"독왕님이죠.”

독왕이란 말에 모두 실망하면서도 한편으로 궁금해했다.

"왜? 지난번에 독왕이 하연이 힘들게 했다면서?"

독왕은 여러 방법으로 하연이의 독에 대한 내성을 올려주었다. 그 결과 만독불침까진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독에는 중독되지 않는 체질로 바꿔주었다.

어려서 시행해야 효과가 좋았는데, 독왕에 대한 검무극과 이안의 절대적인 믿음이 없다면 결코 맡길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하연이에게는 힘든 일일 테니, 제일 싫은 마존이 독왕이 되어야 하는데.

"왜 독왕이냐고!”

세 마존들의 질투에 찬 외침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잘생겼잖아요.”

혈천도마와 마불이 탄식하며 입맛을 다셨다. 심지어 독왕은 최강의 동안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취마의 반응은 그들과는 달랐다.

“난 인정 못 해! 술 냄새만 없어지면 내가 이길 수 있어!”

하지만 이길 수 없었다.

저 멀리 독왕이 걸어오며 손에 든 것을 보여주며 인기 순위에 쐐기를 박았다.

작고 귀여운 열두 개의 주머니였는데, 주머니마다 쥐와 소, 토끼와 호랑이 등의 십이지신 동물이 귀엽게 수놓아져 있었다.

"하연이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

손녀와 승부를 보시려는 겁니까?

달랑거리는 열두 개의 주머니 뒤로 독왕이 서 있었다.

주머니에 새겨진 귀여운 동물 그림도 독왕의 외모 앞에서는 빛이 바랬다.

혈천도마와 마불은 패배를 인정했다.

'졌다. 저 얼굴은 못 이긴다.”

그럼에도 해서는 안 될 취마의 마지막 몸부림이 있었다.

독왕 옆에 나란히 선 것이다.

“우리 다 같은 미남 사인방이잖아?”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차가운 현실을 알렸다.

“사인방이라고 다 같지는 않아, 형. 지금 삼촌과 조카 같아.”

혈천도마와 마불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과 얽히면 이렇게 재미있으니 갈 수가 있나?

탄식을 내뱉은 취마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에 매달린 술로 향했다. 에잇, 그냥 마셔버릴까 하다가 끝내 참았다.

“하연이의 선택이 아직 남았어!"

독왕이 검무극 뒤쪽 집을 쳐다보며 물었다.

“하연이는 안에 있나?”

“아뇨, 천마전에 가 있습니다.”

순간 독왕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치며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연이가 없다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 독왕이 단호히 돌아섰다.

“그건 주고 가시죠?”

“직접 줄 거다.”

독왕은 돌아갔지만 다른 세 마존은 그곳에 있었다.

“세 분은 안 가십니까?"

검무극의 말에 취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하연이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나, 어젯밤에는 하연이랑 함께 노는 꿈까지 꿨다고.”

그 말에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꿈에서 놀았으면 현실에서는 안 놀아도 되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연이가 술 냄새나서 싫다고 했다면서?"

“끊었다니까요, 저 열흘째입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소리쳤다.

“왜들 이러십니까? 제 딸입니다, 제 딸이라고요!”

그때 뒤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하연이가 왜 자네 딸인가?"

돌아보니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 아예 다 모이기로 날을 잡은 모양이다.

"우리 딸이지."

마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딸이라고요!”

말만 그랬지 검무극이야 이렇게 자신의 딸을 좋아해 주니 정말 고마울 따름이었다.

풍천교주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소신단(小神丹)이네. 어린애들을 위한 영약 중에서는 최고의 영약이지.”

“알고 있습니다. 이거 구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우리 하연이를 위해서라면 못 해줄 게 없지.”

“아니, 제게 신물 주신 걸로 그렇게 구박하셨으면서요!”

“자네와 같나? 꼭 풍천 할아버지가 줬다 하고 복용시키게. 나보다 더 잘 복용시킬 것을 아니까 주는 거네.”

아니었다면 직접 생색을 내며 복용시켰을 거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주님.”

풍천교주가 마존들 앞에서 으스댔다.

“이 정도면 내가 먼저 하연이랑 놀아도 되겠지요? 자, 빈손으로 오신 분들은 저기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시고.”

“자, 그 말씀 그대로 천마전에 가서 하시죠. 참고로 우리 아버지도 빈손이실 겁니다.”

“또 천마전에 가 있어?”

풍천교주 얼굴에도 실망이 스쳤다. 마교주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권마존은 외할아버지니까 막 매일매일 하연이 보겠지?"

"지금도 천마전에 함께 계십니다.”

풍천교주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이안을 내 수양딸로 삼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저라는 사위까지 얻으셨을 테니까요.”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하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짓더니 이내 검무극을 버렸다.

이제는 끝까지 이 공자가 아니라.

“그래서 우리 하연이 언제 오냐고!"

천마전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권마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건너편 기둥에 검우진이 서 있었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적들에게 포위당한 채 무수히 쏟아지듯 날아드는 암기를 피해 기둥 뒤에 이렇게 나란히 서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그 긴장감이 그대로 흘렀다.

그곳에 울려 퍼지는 맑은 목소리.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스물. 이제 찾으러 가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검하연이 눈을 떴다.

하얀 피부에 시원한 이마, 밤하늘을 담은 것 같은 반짝이는 두 눈, 작고 오뚝한 코, 새하얀 치아가 드러나는 붉은 입술. 그 또렷한 이목구비는 검무극을 똑 닮았다.

맑게 빛나는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했고 웃을 때는 보조개가 팼다.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는 칠흑색으로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다.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마디씩 할 외모였다.

게다가 또래 아이보다 말도 잘했고, 똑똑했다. 이미 글은 다 깨우쳤고, 숫자 계산도 누구보다 빨랐다. 서대룡이 하연이를 이렇게 평가했다.

―저는 수재지만 하연이는 타고난 천재입니다.

하연이가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할아버지와 숨바꼭질 중인 것이다. 아마 역대 천마신교 역사에서 천마전에서의 숨바꼭질은 처음 있는 일이리라.

"할부지, 은신술 안 돼요.”

또랑또랑한 하연이의 목소리가 천마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하연이는 악귀들이 떠받치고 있는 천마전의 무서운 기둥 사이를 걸었지만,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본 것이 천마신교의 거대 악귀상이었으니까.

하연이가 검우진 쪽으로 다가왔다. 검우진이 서 있던 기둥을 살폈을 때, 이미 검우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건너편 기둥 뒤에 몸을 숨긴 권마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니, 경신법까지 써서 빠져나가신다고요?"

권마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을 때, 하연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권마가 손을 들며 돌아섰다. 어느새 하연이가 뒤에 와 있었다.

하연이가 쉿, 하는 시늉을 하고는 이번에는 검우진을 찾으러 나섰다. 교주처럼 작정하고 피하지 않으니, 하연이는 정말 자신을 잘 찾아냈다.

검우진이 이 기둥 저 기둥 사이를 오가며 하연이를 피했다. 손녀에게 들켜줄 법도 했는데, 검우진은 그러지 않았다.

'손녀와 진짜 승부를 보시려는 겁니까?"

권마는 미소를 지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 검우진을 찾지 못하자.

하연이는 천마전 가운데 서서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검우진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옆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에는 검우진이 하연이 예상에 맞춰서 들켜주었다.

"찾았다!"

어렵게 발견하자 하연이는 신이 나서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잘했다, 하연아.”

검우진이 하연이를 번쩍 안아주었다. 손녀를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권마가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아, 어떻게 이렇게 잘 찾냐?"

숨바꼭질 때마다 하연이가 너무 잘 찾아냈던 비밀이 밝혀졌다.

"전에 친할부지가 가르쳐줬어요.”

"뭘?"

"숨은 사람 찾기."

검우진이 사냥 갔을 때 검무극에게 가르쳐줬던 기발출을 하연이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하연이가 기발출을 해서 발견했음에도 검우진은 옆으로 피했고, 하연이가 옆으로 피하는 것까지 예상해서 달려가자 그제야 들켜준 것이다. 상대를 예상해서 움직이라는 교훈을 주려고.

권마가 옅게 웃었다. 놀아도 그냥 놀지 않는 걸 보니 정말 교주다웠고, 또 교주의 핏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연이가 기발출이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하연이는 바로 검무극처럼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완벽한 신체인 천무지체를 타고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우진이 직접 임독양맥을 타통해주고 벌모세수(伐毛洗髓)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난 후 심법과 풍신사보를 가르쳤다. 놀랍게도 하연이는 심법을 익혀 내공을 쌓았고 풍신사보의 기초를 이해했다. 심지어 실제로 펼치기도 했다.

검우진은 천재적인 무재를 타고난 하연이 무공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우리 또 해요!”

하연이가 또 하자고 하자 검우진과 권마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벌써 숨바꼭질만 일곱 번이나 했다. 더는 힘들어! 공통된 감정이었다.

검우진이 하연이에게 말했다.

"우리 의원 놀이하자.”

"좋아요!"

검우진과 권마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 싸움을 했고.

권마가 먼저 누우려는데.

스으으윽.

검우진이 날린 무형의 기운이 권마를 꼼짝 못하게 했다.

그래 놓고선 검우진이 쓰러지듯 누웠다.

“도와주세요, 의원님.”

권마가 교주를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너무 하십니다, 교주님! 아니, 사돈! 이러시기요!'

검우진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하연이가 권마에게 말했다.

"약초가 필요해요.”

“의원님, 무슨 약초가 필요하십니까?”

권마가 자연스럽게 검 의원의 조수 역할을 맡았다.

“명혈초랑 심혼초요!"

하연이가 말한 독초는 실제로 있는 것으로 독왕에게 갔을 때 들었던 독초들이었다.

“제가 캐오겠습니다.”

“명혈초는 저기.”

권마는 하연이가 가리키는 기둥으로 가서 약초 캐는 시늉을 했다.

“심혼초는 많이 캐와야 해요.”

그동안 검우진은 편안하게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천하의 마교주도 아이와 노는 건 힘들었다.

'교주께서 지치신 모습 처음입니다.’

가상의 약초를 캐오며 권마가 웃었다.

"여기 약초 준비됐습니다.”

약초가 준비되자 하연이가 검우진의 가슴에 고사리 같은 손을 대더니, 기경팔맥의 정확한 위치는 물론이고, 어디가 아프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줄줄 읊었다.

권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의원님, 의술은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마의 할아버지요.”

“설명을 몇 번이나 들으셨습니까?”

"한번요."

기억력이 워낙 뛰어나서 한 번 듣고 다 외운 것이다.

권마는 천무지체에 머리까지 좋은 이 천부적인 아이를 교주가 가르치고, 또 검무극이 가르치고, 또 마존들까지 가르침을 준다면 과연 어떤 무인으로 성장할지 궁금했다.

어쩌면 아버지와 할아버지조차 능가할 고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 치료했어요.”

이제 잽싸게 권마가 환자가 되어 교대하려는데.

‘저도 좀 누웁시다!'

그때 검우진이 슬그머니 옆으로 등을 보이며 누웠다.

“의원님, 등도 아픕니다.”

그 모습에 권마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돌아누운 검우진도 웃었다.

그렇게 검우진이 등은 물론이고 팔과 다리까지 다 치료받은 후에야 의원 놀이가 끝났다.

권마가 하연이에게 말했다.

“이제 할아버지 일하셔야 하니까 우린 나가자.”

"잠깐만요!"

하연이가 달려가서 검우진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나중에 봐요, 할부지. 놀아주셔서 감사해요."

“오냐.”

하연이를 바라보는 검우진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권마는 교주가 저렇게 밝게 웃는 모습은 그를 만난 이후 처음 보았다. 아들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웃음이었다.

“외할부지, 저 태워주세요.”

권마가 하연이를 번쩍 들어서 자신의 어깨에 앉혔다.

천마전을 걸어 나오는데 하연이가 말했다.

“외할부지 어깨는 넓어서 좋아요.”

“높아서 안 무섭냐?”

“네.”

어깨에 앉았기에 권마의 얼굴과 가까웠다. 그래서 권마는 괜히 신경이 쓰였다.

“할아버지 얼굴은 안 무섭고?"

"하나도 안 무서운데?"

하연이가 권마의 얼굴을 꼭 안아주었다.

“외할부지 좋아요.”

권마는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 역시 조금 전 교주의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 이 할애비가 권법을 가르쳐주마.”

"좋아요!"

그때 천마전 입구에서 극악소마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무극의 거처에서 소리치는 풍천교주를 먼발치에서 본 그는 이곳에 와서 기다렸다.

"가면 숙부!"

"연아!"

하연이 훌쩍 몸을 날려서 권마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날렵한 경신술이었다.

“자, 네 선물이다.”

소마가 내민 것은 하연이의 얼굴에 맞게 만든 작은 가면이었다. 하연이가 쓰고 싶다고 해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장인을 시켜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더없이 가볍고 오래 쓰고 있어도 땀이 나지 않는 가면이었다.

하연이가 가면을 썼다. 작은 가면을 쓴 하연이는 너무 귀여웠다.

“가면 숙부, 우리 같이 놀아요.”

권마가 드디어 해방이다는 표정을 지었다.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극악소마가 하연의 손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우리 무면객 아저씨들 보러 가자!”

며칠 후.

검무극은 동경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목욕을 마치고 옷까지 잘 갖춰 입었다.

“나 어떻소?”

동경 속에서 이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처음 회귀하고 돌아왔던 그날 이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안은 그날의 대답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강호에서 제일 잘 생겼어요."

원래는 검무극이 재미없다, 라고 대답하면 월봉 주는 사람의 질문은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는 법이죠라고 이안이 대답했었는데.

오늘 검무극의 대답은 달랐다.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소.”

순간 이안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그녀가 걸어와서 검무극의 등 뒤에서 감싸안았다.

“드디어 그날이네요.”

드디어 아버지와 약속한 그날이 밝은 것이다.

이 일이 검무극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남편에게는 천살성과의 싸움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떨려요?"

검무극이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겁나요?"

이번에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기게 해줄까요?"

“당신이 같이 가주려는 거요?"

데려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장난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안이 슬그머니 검무극의 손을 풀었다.

“아뇨, 전 아버님께 절대 반대하지 못할 거예요."

검우진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아버님 뵈면 전 제가 무림일통 전쟁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이 말이 먼저 나올 거예요.”

그녀의 농담 반 진담에 검무극이 웃었다.

“그럼 어떻게 이기게 해주겠다는 거요?"

“연이 깨워야죠.”

그 말에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그녀의 시도는 훌륭히 잘 통했다.

검무극은 집을 나서기 전에 하연이 방으로 갔다.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며 잠시 딸아이를 쳐다본 후 검무극이 집을 나섰다.

"다녀오겠소.”

“잘 다녀오세요, 낭군님!"

검무극이 저 멀리 멀어지자 환하게 웃고 있던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피어올랐다.

'힘내요, 여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적어도 오늘만큼은 하늘이 남편의 편이 되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검무극이 천마전에 들어섰을 때 마존들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팔마존들은 태사의 아래에 일렬로 늘어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사의에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천마전 입구에서 검무극은 평소와 다름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검무극이 천천히 피의 길을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최신화부터 →

검무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피의 길을 수없이 걸어갔지만, 오늘처럼 긴장했던 적이 있었을까?

여덟 명의 마존들.

오늘의 그들은 자신과 장난치던 이들이 아니었다. 오늘의 그들은 천마의 수하이자, 천마신교의 팔마존으로 서 있었다. 권마 역시 이 순간만큼은 교주의 사돈이 아닌 한 사람의 마존이었다.

검무극은 걸어가면서 마존들과 눈을 마주쳤다.

모두의 눈빛이 이렇게 묻고 있었다.

교주를 설득할 준비가 되었느냐?

그들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늘 이곳에서의 결과에 따라 무림의 운명이 바뀌게 될 것이다.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왔느냐?"

“네, 아버지.”

평소와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내게 할 말이 없느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설득할 기회였다. 마존들은 과연 검무극이 어떤 비책을 가져왔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흘러나온 뜻밖의 대답.

“없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마존들은 깜짝 놀랐다. 특히 혈천도마는 오늘 검무극이 마존들을 어떻게든 설득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놈아, 어쩌려고!'

정말 검무극은 아무런 설득도 하지 않았다. 지난 오 년 동안 이 일에 대해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았다. 말로 하는 설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 오 년 내내 아버지를 찾아가서 설득했을 것이다.

대신 검무극은 지난 오 년간 열심히 살았다. 소교주로서 열심히 살았고, 아버지의 아들로 열심히 살았다. 한 여인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로. 또한 마존들과의 관계도 최선을 다했다.

그 삶이 통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검무극이 드디어 그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의 꿈은 무엇입니까?"

만약 무림일통이란 대답이 나오면 그 전쟁의 선봉장이 되어 싸우러 나가기로 약속했다.

검무극은 이 공간에 오직 아버지와 자신만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만 보였다.

이윽고 검우진이 대답했다.

“내 꿈은.......”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긴장감이 극한으로 고조되었다.

"무림일통이다.”

순간 검무극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막연한 희망이 깨어지며 차가운 현실이 눈앞에 닥쳐오는 느낌이었다.

혈천도마의 얼굴이 꿈틀했고, 일화검존의 입에서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나왔다. 섭혼마존은 고개를 떨구었고,

독왕은 저 멀리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불은 소리 없이 염주알을 굴렸고, 취마는 결국 술 마개를 열어 조용히 술을 마셨다.

극악소마와 권마는 아무 반응 없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놀라지도 않았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검무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전쟁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결과를 번복하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와의 약속이었으니까.

검무극의 마음속에 핏물이 흐르는 전장이 떠올랐다. 그 전장의 시체 더미 위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눈이 마주친 극악소마의 눈동자가 이렇게 말했다. 낚시대회 때 말했던 것처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신이 이 전쟁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진하군과 비사인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까?

바로 그때 검우진이 다시 말했다.

“다만..."

어떤 말이 이어지나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그 무림일통의 방식은 네 방식대로 하겠다.”

검무극의 눈이 커졌다. 마존들 역시 놀란 얼굴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제 방식은 탁자를 부수지 않는 방식입니다. 제 방식은 마정사 낚시대회를 열어 우승하는 것이 무림일통입니다.

함께 사냥대회를 열고, 요리대회를 열어서 우승하는 것이 무림일통입니다. 그게 제 방식입니다.”

검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방식으로 일통하도록 하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아버지.”

검무극이 눈을 감았다. 아버지께 죄송해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검무극은 죄송함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물었다.

"왜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하연이 때문입니까?"

당연히 그랬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마음을 바꾼 것은 하연이 때문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검우진에게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처음으로 받은 용돈 때문이다.”

모두 무슨 뜻인가 하는 눈빛으로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무극만큼은 알고 있었다.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선물 받은 꽃무늬 잠옷 때문이다. 빚보증을 받으러 온 사람을 보고 웃었던 기억 때문이다.”

그제야 마존들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누구와 관련된 추억들인지.

“피를 보지 않고 치러진 후계싸움 때문이다.”

처음으로 전하는 검우진의 진심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나직하지만 울림 있는 그 말들이 하나하나 검무극의 마음에 날아들었다.

“선물 받은 바둑판 때문이고, 형제가 그려진 족자 때문이다.”

지난 일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검무극의 눈동자가 떨렸다.

“여행 가서 누웠던 그물침대 때문이고, 출교했다 돌아오면 온갖 일을 다 말해주는 그 수다 때문이다.”

무공을 알려줄 때를 제외하고 검우진이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환상 속에서 본 고래 때문이고, 그날 처음으로 아무 경계 없이 잠든 낮잠 때문이다.”

검우진의 시선이 앞에 늘어선 마존들을 향했다.

“저기 서 있는 마존들이 어떤 사람인지 다시 보게 해준 계기 때문이다.”

모든 마존들이 교주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오해를 풀었고, 두려움을 줄였다.

"사랑스러운 며느리 때문이고, 내 소중한 손녀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하연이는 그 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을 말하게 되어서다.”

검무극은 그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바로...."

이윽고 검우진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해준 바로 그 사람을.

“내 아들 때문이다.”

검무극은 너무나 큰 격정에 휩싸였다. 아버지가 그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해 주실 줄은 몰랐다.

회귀하던 그 날, 하늘의 노인이 했던 말이 있었다.

어찌 인간이 만든 대법으로 회귀할 수 있겠느냐고. 네 노력 때문에 회귀시켜 주는 것이라고.

회귀 전의 삶도, 회귀 후의 삶도 결국은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다.

“아들아,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아하는 탄성과 함께 검무극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눈물을 흘리자 혈천도마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이 우는 걸 보니 자신도 눈물이 나려 한 것이다.

팔마존들은 모두 감격했다. 검무극의 노력을 옆에서 직접 봐온 그들이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잘 알았다. 그 노력이 결국 교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뚝 뚝 뚝,

바닥에 검무극의 눈물이 떨어졌다.

“아버지의 꿈을 꺾은 이 불효자식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태사의에서 내려왔다.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는 아들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출교할 테니 본교를 잘 지키고 있어라.”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웠기에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렸다.

“어디 가십니까? 설마 이래놓고 무림맹으로 쳐들어가는 건 아니시죠?”

검무극의 농담에 검우진은 정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 무림일통하러 간다.”

"네?"

“네가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무림맹주와 사도맹주와 여행 가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같이 낚시하기로 했다. 낚시로 이기는 것이 너의 무림일통이라면서?"

그 말씀은 오늘 이 결과를 사전에 이미 결정 내리셨다는 의미.

검무극이 펄쩍 뛰었다. 왜 총군사 사마명이 이 자리에 없었는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럼 이미 결정하신 거잖아요? 아까 아들 숨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검우진의 입가에 그 특유의 비웃음이 지어졌다.

“네 숨 넘어가게 하려면 이 무림 전체가 움직여야 할 거다."

검우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마존들이 날개를 펼치듯 뒤따라 걸어갔다.

“아니, 아버지 가신다고 꼭 그렇게 다 따라가실 필요는 없잖아요? 저랑 남아서 이야기도 하시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위로도 해주시고. 저 소교줍니다.

나중에 제가 주는 월봉 받으셔야 한다고요!"

옆을 지나가던 혈천도마가 멸천대도 손잡이로 검무극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래전에는 이렇게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 피멍이 들게 했었는데, 오늘은 살짝 장난스럽게 찔렀다.

일화검존은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툭 건드렸다. 오랜만에 비무 한판 하자는 의미였다.

섭혼마존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며 지나갔고 취마는 술 마시는 시늉을 했다. 나중에 축하주 마시자는 의미였다.

권마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에 심야수련모임 한 번 하자.

마불은 눈부신 황금빛 광채를 뿜으며 축하해 주었고, 독왕은 생각지도 못한 전음을 보냈다.

-다음에 중원에 바람 쐬러 가자.

독왕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일을 먼저 하자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독왕의 축하이리라.

극악소마는 검무극 앞에 멈춰 섰다. 가면 속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울었을 때, 함께 눈물을 흘렸던 모양이다.

이 세상은 자신이 지켜낸 것이 아니다. 이들이 자신을 지켜줬기에 지켜낼 수 있었다. 혼자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이들이 있었기에 배우고 깨달았으니까.

'모두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았다.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의도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극악소마가 손가락으로 검을 튕기자 맑은 소리가 천마전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극악소마가 축하하는 소리였고 새 시대를 알리는 소리였다.

늦은 밤 귀령자는 종이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의 책상은 물론이고 방에는 온갖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곳으로 아내인 임향이 차와 과일을 쟁반에 담아왔다.

"오늘도 늦게까지 일할 건가요?"

“그래야 할 것 같소.”

책상 옆 다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돌아서 나가려던 임향의 발걸음이 멈췄다.

"당신, 기억나요?”

귀령자가 고개를 들어 임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부모님이 혼사를 반대했었지요. 귀문의 후계자들은 대대로 연구에만 몰두하는 이들이라 여인을 외롭게 할 거라고요.

그때 당신이 그랬죠.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저를 외롭게 하는 일 없을 거라 약속했었죠.”

귀령자는 뭐라 변명하지 못했다. 분명 약속했었으니까.

“지금 연구하는 이 부분만 끝나면 시간 낼 수 있소. 정말 다 되어 가오. 끝나면 우리 여행 갑시다.”

임향은 믿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랬죠. 그 부분만 끝나면 된다고.”

한 부분이 끝나면 또 다른 부분이 생겨나고. 그렇게 연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일해요."

임향이 밖으로 나갔다.

왠지 오늘따라 그 뒷모습이 더 쓸쓸해 보여서 따라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귀령자의 시선이 책상 위 한참 적고 있던 종이를 향했다.

연구에 느낌이 왔다. 이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지난 며칠의 연구를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오늘은 일하자. 그녀도 이해해 줄 거다.

귀령자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썼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여보, 오늘은 정말 미안하오. 내일은 꼭 같이 차 마십시다.”

하지만 임향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귀령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내 임향 대신 다른 사람이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귀령자가 소리치려다가 이내 상대가 누군지를 알아보았다.

"당신은?"

그곳에 들어와 있던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과거 검무극은 이안과 함께 그의 혼인을 막아주러 갔었다. 하지만 귀령자는 임향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결국 그 혼인은 이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무극이 천마신교의 소교주임을 몰랐지만, 이제 귀령자는 알고 있었다. 그때 봤던 그 사람이 천마신교의 소교주라는 것을.

“서진이에게 당신이 누군지는 들었습니다. 동생은 잘 있습니까?"

“내 직속 조직인 귀영대의 대주가 되었소.”

귀령자는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위험한 자리 아닙니까?"

검무극이 창가로 걸어가서 휘장을 걷고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이 갑갑한 곳에서 연구만 하고 있는 당신보다는 덜 위험할 거요. 앉은자리에서 몇 번이나 일어나시오?"

이렇게 연구에만 빠져 있다가 결국 임향과 사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지금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조금 전에 나간 임향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왜 나를 찾아온 겁니까?"

그러자 귀령자가 상상도 못 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나를 과거로 보내주시오.”

검무극의 말에 귀령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검무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령자는 이내 서진이 말해줬다고 생각했다.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검무극은 알고 있다. 그는 평생을 바쳐 회귀대법을 완성하겠지만, 그 재료를 다 모으지 못한다는 것을.

심지어 이번에는 더 어려웠다.

만년화리의 내단은 이미 복용한 후였고, 운 좋게 다른 만년화리를 찾더라도 결정적으로 천마의 보물인 비마혼은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내려올 것이고 그 누구도 뺏어갈 수도 없으리라.

그는 이룰 수 없는 꿈에 인생을 걸고 있었지만 지금의 눈빛에는 의지가 가득했다.

“꼭 완성시킬 겁니다.”

검무극이 그에게 물었다.

“완성하고 나서는 어쩔 거요?"

귀령자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다음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가업으로 이어받은 연구였다.

그에게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숙명이었으니까.

“누굴 과거로 돌려보낼 거요?"

그 역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할 거요."

실제로도 그러했으니까.

“내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검무극이 그의 아내가 두고 간 차와 과일을 내려다보았다. 손도 대지 않은 그것은 색이 변해 있었고 차도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아!”

그 순간 귀령자는 알 수 있었다. 저 소교주는 자신과 아내의 관계가 이미 저렇게 돼버린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음을.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검무극이 한 말의 뜻은 결국 이것이었다. 자신의 파탄 난 혼인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차마 남의 혼인 생활까지 참견하지는 말라는 말을 하진 못했다. 상대는 그 무서운 마교의 소교주였으니까. 아니, 동생의 직속 수장이었으니까.

검무극은 안다. 몇 마디 말을 한다고 그가, 또 그의 부부생활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도 검무극은 그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상대를 똑바로 보지 못해서 많은 것을 놓쳤었소. 그래서 항상 이 마음을 품고 있소. 사람 관계만큼은 혼자 상상하지 마라. 똑바로 보고, 제대로 들어라.”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내를 똑바로 보고 있소?”

“어쩌면 당신이 연구하는 그 어렵고 대단한 대법보다, 옆에 있는 사람 마음을 헤아리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지요. 서진이는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잘 돌봐주겠소.”

그 말만 하고는 검무극이 방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뒤에서 귀령자가 소리쳤다.

“이 연구는 가문의 숙원입니다!”

검무극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 연구 그대로 후대로 물려주시오. 어느 대에선가 당신처럼 평생을 쏟아붓지 않더라도, 척척 손쉽게 대법을 완성할 천재가 나올 거요. 그때까지 계속 물려주시오. 그 천재가 당신들의 숙원을 이룰 것이오.”

다시 검무극이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귀령자가 물었다.

“당신은 이 대법이 성공하리라 믿습니까?"

믿소, 이 세상에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나일 거요.

하지만 검무극은 귀령자의 인생을 위해서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지 않소."

검무극이 그를 남겨두고 그곳을 나왔다.

저 멀리 걸어가다 돌아보니 서재에서 나온 그가 아내가 있는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적어도 오늘 밤은 임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낼 것이다.

'잘하고 있소. 당신이 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바로 지금이니까.'

오늘 당신은 회귀에 성공했소.

촤아아악.

햇살이 부서지는 수면으로 파도가 밀려들었고 게들이 기어 다니는 해변의 모래알들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천마혼과 나란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아버지의 무림일통의 꿈을 막았다는 것을 천마혼에게 말해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듣고만 있는 천마혼이었다.

말을 끝낸 검무극이 의자에 편하게 기댄 채 푸른 바다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따스한 햇볕 아래서 쉬고 있던 그때, 나직이 울리는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어떻게 살거냐?"

검무극이 놀란 눈으로 천마혼을 쳐다보았다. 방금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천마혼이었다.

천마혼이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천마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 바다만 쳐다보고 있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검무극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검무극의 시선이 바다 너머 하늘을 향했다. 참으려 해도 웃음이 번져 나왔다.

바다를 닮고 하늘을 닮은 검무극의 환한 웃음이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나갔다.

대미(大尾).

지금까지 절대회귀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작가로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데뷔작부터 지금까지 무협만을 써온 그 우직함에 여러분들께서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로 응원해 주시고 잘못된 길을 갈 때는 엄하게 꾸짖어 주신 여러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무극이와 함께한 3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저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썼습니다.

'심야독서모임'이라는 애칭까지 만들어 사랑해 주시는데 어찌 열심히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요.

그런데도 막상 마침표를 찍으며 뒤를 돌아보니 너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아쉬움 때문에 차기작을 쓰게 되는 것이겠지요.

완결은 언제나 아쉽습니다. 벌써 열세 번이나 작품 속 인물들과 이별하고, 또 여러분들과 헤어졌지만, 이번 작품만큼 아쉬움이 큰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외전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한 말씀만 드리자면.

완결을 너무 아쉬워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미처 못한 이야기는 외전의 형식으로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채워드릴까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글밖에 없지만, 또 글만큼 제 뜻대로 안 되는 것도 없기에 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면서 깊이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연재 기간 내내 편집을 담당해 주신 윤두한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절대회귀 웹툰을 연재 중이신 박진환 작가님과 JP 작가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정말 너무 멋지게 만들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독자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장영훈 드림.

1.0x로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