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회귀 [700-799화]

죽이러 온 거 아니니까 두 번이나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으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소 그 인생 너무 시시하잖아요? 잘생긴 소교주에게 죽으면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나? 당신이 그때 그 살수냐? 도망은 당신이 가야 하오 지옥에서 꺼내 줄 사람은 정말 형편없는 살수네요 제 심장을 찌르십시오! 지금이라고 승산이 있을까? 어두워서 잘 못 봤다. 눈 뜨자마자 우리 걱정인가요? 나를 감당할 수 있겠소? 그 손 꽉 잡으세요 궁지에 몰리면 가면을 벗으십시오 내 요리를 안 먹어봐서 그렇겠지 이제 안 와도 된다 대성으로부터 더 멀리 내 편한 날로 잡을 거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사부는 사부가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원한다면 누구보다 간절히 너의 주인이자 친구다 이제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 소교주가 그를 깨웠습니다 우리 여기서 할까? 하늘은 검존께 모든 걸 주고 짐꾼 주제에 감히? 이쪽 길이 예감이 좋습니다 혼자만 못 먹는 건 못 참지 전생에 와 본 게 틀림없어 사람 마음도 훔칠 줄 알아야지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한 분 누구의 무덤인지 아십니까?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면 그 이름 석 자가 그의 전부거든 내 마음을 훔친 거 같아 대체 어떤 인생을 사신 겁니까? 이 맛에 줄 서는 거죠 정사대전 중재도 저렇게 열심히는 우린 앞으로 간다 보물 찾으러 가볼까? 그대의 죽음이 우릴 새로운 길로 오랜만이다, 친구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 천지군 그래, 너도 한 성질 하지? 그래, 너도 들어와 그 혁낭 잘 가져왔군 너희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싫은 건 당신의 그 말총머리! 이번 싸움에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가 믿듯 우리도 믿는다 부서진 틈으로 빛도 들어오고 인연은 짧고 인생은 길고 날개가 왜 거기서 펼쳐집니까?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다 막내야, 어디 있냐? 무인이 인사하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야, 너 오랜만이다 더 크게 울어라 피 냄새 대신 향기로운 냄새로 너는 소교주가 아니다 너 같은 아들을 낳은 사람을 보려니까 그걸 왜 아버지께 묻습니까? 무관 선생이라고 무시하시오? 찾아갔었소, 오늘도 제 별명은 악인곡 걔 자네를 낳아 나와 인연을 맺게 해줬으니 내가 달아날 일은 없다 어휴, 징글징글한 검씨들! 좋은 무공을 배웠으니 불순물이 섞이기 전에 두드리는 거다 함정이라도 다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나도 만만한 사람 한 명쯤 있어야지 한마디씩만 해도 해가 지겠지? 황금마차를 어떻게 참아? 바꿀 기회 드립니다! 이래서 선물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닌데 마교는 마교다! 내게는 이미 수없이 많은 별이 있으니 내 아들을 위해서 아무리 바빠도 한마디의 여유는 잘도 혼자 왔겠소 그럼 빛 아래에서는? 평생을 어지럽게 산 몸이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예요 그래서 소마님을 남겨둔 거야 눈 뜨기만 해! 소교주를 부탁하네 친구 아버지를 도와주십시오 지금이라도 귀찮은 일을 그쪽이 들어야 할 예언이라면 첫 번째 마존이 되고 싶었는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내가 혈불이다 역대 가장 큰 별이 오길 바라네 천살성이 오더라도 밥은 먹어야지요

죽이러 온 거 아니니까

여인들이 싸운 건 그간 쌓였던 화가 폭발해서가 아니었다. 하나의 기운이 그녀들의 본성을 뒤흔든 것이다.

소악심.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을 깨우는 극악소마의 고유 마기.

소악심에 노출되면 심장이 뛰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 실제로 내공이 약한 사람이 소악심에 강하게 노출되면 옆 사람을 찔러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살수는 자기감정을 누구보다 잘 다스리는 이들이다. 같은 내공과 실력이라도 일반 무인보다 훨씬 영향을 덜 받는다. 또한 분노와 폭력성을 참고 드러내는 방식 또한 미세하게 달랐다.

소악심에 노출된 그녀들은 악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깊은 극악소마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삼교는 죽립을 벗은 상대를 알아보았다. 그래, 상대는 이십 명이나 되는 자신들 앞에서 충분히 여유를 부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극악소마.”

천화루주의 호위를 맡은 그가 극악소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몰랐던 것은 결승 무대의 자리를 배정하는 오늘, 그가 이렇게 선수를 쳐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소악심에 관해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어떤 특별한 수법을 발휘해서 여인들 속에서 자신들을 가려냈음을.

극악소마가 조금 떨어진 곳의 의자를 바라보았다. 와서 앉으라는 의미.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들어는 봐야 할 상황, 삼교가 걸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나머지 살수들이 삼교를 중심으로 좌우로 거리를 벌리며 늘어섰다. 싸움이 벌어지면 바로 합공할 위치를 잡았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면사를 착용한 극악소마의 두 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본선 대회가 있을 때 얼핏 그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 극악소마를 접하기 전에는 이렇게 오해했다.

극악소마는 얼굴을 마주보기 힘들 정도로 사악하게 생겼거나 흉측한 흉터나 화상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이겠지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준수하게 생긴 자였을 줄이야.’

두 눈과 이마만 봐도 예상이 되었다. 정말 잘생긴 미남이라는 것이.

‘어쩌면 코나 입이 흉측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

어쨌든 본 얼굴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첫인상이었다.

극악소마가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에게 결정권이 있나?”

극악소마는 그녀에게 조직에서 정해준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있다면?”

“수하들에게 자결하지 말라고 해.”

이어지는 말은 ‘내가 직접 잔인하게 죽여 줄 테니까!’ 이렇게 상대의 기세를 죽이는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극악소마의 다음 말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죽이러 온 거 아니니까.”

삼교는 말없이 극악소마를 응시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기에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을 모두 찾아냈는데 죽이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극악소마가?

삼교가 나직이 대답했다.

“우린 자결 따윈 안 해.”

그럼 됐다는 듯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이러 온 게 아니라는 말로 혼란을 줘서 자신들의 투지를 떨어뜨리려는 거겠지.

찌이이익.

그녀가 궁장 아랫부분을 길게 찢자 허벅지가 드러났다. 허벅지를 감은 가죽띠에 비수가 꽂혀 있었다. 비수를 뽑아 들며 삼교가 다른 살수들에게 말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극악소마가 우릴 살려줄 리가 없다.”

살수들이 일제히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들었다.

어떤 여인은 삼교처럼 숨겨둔 비수를 꺼냈고, 또 어떤 여인은 날카로운 낚싯줄을 양손에 감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어떤 여인은 허리띠로 위장했던 연검을 뽑아 들었다.

노리개를 분리하자 작은 암기가 뽑혀 나왔고, 비녀를 뽑아 드는 여인도 있었다. 팔찌 안에서 날이 시퍼런 암기가 나오기도 했다.

아름다운 이십 명의 여인이 저마다 숨겨둔 암기를 꺼냈다. 그 모습은 무인으로 평생을 살아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극악소마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곳에서 뭐가 나올지 몰라 살수들이 모두 긴장했는데.

극악소마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그의 가면이었다.

가면이 그의 얼굴을 가렸고, 쓰고 있던 면사가 한 송이 꽃이 떨어지듯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극악소마의 얼굴을 가린 것은 면사가 아닌 하얀 가면이었다.

삼교와 살수들은 긴장했다. 말로만 듣던 극악소마의 백색 가면을 처음으로 직접 보는 순간이었다.

면사를 썼을 때와 가면을 썼을 때의 느낌이 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잘생긴 눈이야? 했었는데, 그 눈이 가면 아래로 들어가자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낯설고 서늘한 두 눈이 가면 속에서 웃었다. 독문병기를 빼든 이십 명의 살수를 보며 그는 웃었다.

거기에 더해지는 또 다른 압박이 있었다.

극악소마가 만년한철 비수를 꺼내 든 것이다.

삼교가 알고 있기로는.

‘극악소마는 지풍과 장법을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이번 싸움에서는 지법과 장법을 조심하면서 싸우려고 했는데. 비수를 꺼내 든다고?

그 비수가 다른 사람 손에 들렸을 때와 극악소마 손에 들렸을 때 주는 압박감의 차이가 완전히 달랐다.

원래라면 삼교는 싸움을 앞두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우리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극악소마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삼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여자들 머리채를 흔들고 함께 나갔어야 했어.’

그녀는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로 위압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숫자가 많다고 무작정 유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

기본적으로 살수는 혼자 움직이거나 혹은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었다. 지금은 아무 계획도 없었고, 이십 명이나 되는 이들이 합공한 적 역시 당연히 없었다.

그래도 기대하는 것 하나는.

“한 사람이 상처 하나씩만 입히면, 스무 번째 사람은 걸어서 나갈 거다.”

기세가 눌린 상황에서 막연히 이길 수 있다는 말보다 더 도움이 될 말일 것이다. 죽도록 싸우면 누군가는 살 수 있다. 그게 네가 될 수 있다.

삼교는 수장답게 가장 먼저 극악소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쉭! 쉬이익! 쉬익!

삼교의 비수가 허공을 연속해서 갈랐다. 모두 극악소마의 급소만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많은 걸 예상한 공격이었다. 그가 막거나 피하면 어떻게 대처할지도, 다음 수는 또 어떻게 펼칠지. 반격을 당해 비수를 떨어뜨리면 어떻게 대응할지.

하지만 극악소마의 움직임이 이렇게 빠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극악소마가 자신의 공격을 어떻게 피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번쩍하는 순간, 극악소마가 자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가 너무 빨라서 호신강기를 끌어올릴 여유도 없었다.

뭔가가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젠장! 베였다!’

목이 갈라지면서 피를 뿜어낼 것이라 절망하던 그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왜?’

그녀가 자신의 목을 살폈다. 손에 살짝 묻어나는 피. 목에 맺혀 있던 피가 묻어나는 정도였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비수에 목을 비춰보았다.

목에 그어진 한 줄기 혈선. 깊이 베지 않고 아주 살짝만 베고 지나간 것이다.

‘실수인가?’

하지만 실수가 아니었다.

다음으로 극악소마와 일수를 겨룬 십일교와 이십교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각자의 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깊이 베었으면 죽었을 공격인데 그녀들 역시 살짝 혈선만 그어진 채 서 있었다.

‘죽이려 했으면 우린 죽었다.’

삼교는 그제야 극악소마가 싸우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단지 빨라서 당했다고 느꼈던 공격이었는데.

아니었다. 극악소마의 공격은 전혀 생각지 못한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저 속도를 감당했다 하더라도, 저 특이한 공격은 절대 막지 못했을 것이다.

십구교가 던진 암기가 극악소마의 비수에 모두 튕겨 나갔고, 튀어나온 암기를 피하느라 주춤하던 십육교과 십삼교의 목이 연이어 그어졌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놀라운 것은 상대의 실력 고하에 상관없이 상처의 위치와 깊이가 같다는 점이었다.

그냥 목을 베서 다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경지.

스무 개의 상처를 남기면 우린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을 듣고 극악소마가 얼마나 가소로워했을지. 극악소마에게는 단 한 개의 상처도 남길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살수가 이 압도적인 실력 차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목이 베어진 십구교가 다시 덤비려 몸을 날렸다. 살려줬음을 알았음에도 그녀는 다시 기습을 가한 것이다.

휘이이익.

물론, 통하지 않았다. 십구교의 기습을 가볍게 피한 극악소마가 그녀의 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바닥에 처박힌 십구교가 다시 달려들려던 그때.

십구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가면 속의 눈을 보았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이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두려웠다. 이 사람에게 잘못했다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극악소마의 눈빛은 근원적인 공포심을 자극했다.

극악소마는 그녀를 그냥 두고 삼교를 쳐다보며 물었다.

“자결은 안 한다면서?”

이렇게 나오면 다 죽인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기도 했다.

삼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번에는 칠교가 극악소마를 기습하고 있었다.

쉬이익!

하지만 그녀의 비수가 허공을 갈랐을 때, 돌아온 건 목에 그어진 혈선이었다.

앞선 극악소마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녀 역시 다시 달려들려고 할 때.

삼교가 몸을 날려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삼교가 칠교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칠교의 성격이 보통이 아님을 알았지만, 말리지 않으면 개죽음을 당할 게 뻔했다. 극악소마의 성질을 잘못 건드렸다가 모두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게 극악소마라는 한 줄기 바람이 가인교에 불었다.

바람이 남긴 것은 한 줄기 혈선이었다.

장내에 흐르는 침묵.

그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로의 목에 그어진 혈선을 쳐다보았다.

삼교는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극악소마가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면, 이건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 되었을 것임을.

‘이렇게나 강하다고?’

마존이 무섭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실력일 줄은 몰랐다.

검무극이 회귀하기 전의 극악소마였다면, 이런 압도적인 결과를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러 여인이 죽었을 거고, 이곳은 피바다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그때보다 내공도, 무공 경지도 모두 상승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죽음 직전까지 가는 처절한 생사대전의 경험까지 합쳐졌다. 거기에 새로 익힌 소향비술까지.

극악소마가 천천히 걸어가서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제 다 앉지.”

삼교는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수하들도 앉게 했다.

“모두 앉아라.”

이제 나머지 살수들도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가면을 착용한 무면객이 들어왔다.

무면객은 한 명씩 돌아가며 자리에 앉은 여인들의 아혈과 마혈을 모두 제압했다.

그때 살수 하나가 무면객을 인질로 잡으려고 기습을 감행했다. 앞서 극악소마에게 달려들려다가 삼교의 제지를 받았던 칠교였다.

다음 순간.

가슴에 일격을 얻어맞은 칠교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무면객이 그녀의 기습을 피하면서 그대로 팔꿈치로 그녀를 강타한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는 울컥 피를 토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혼자 남아서 극악소마를 보필하고 있던 이 무면객은 이번에 온 열 명의 무면객 중에서도 가장 강한 무공을 지닌 이였다. 그랬기에 기습은 통하지 않았다.

무면객은 쓰러진 그녀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한 후 다시 일으켜 앉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신을 잃은 그녀를 끝으로 이제 더는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이십 명의 살수가 완벽하게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했다.

‘아직 모두가 잡힌 것은 아니다.’

남은 살수들이 차이란을 도와 원래 계획을 완수할 수 있으리라.

삼교가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떠올리던 그때, 밖에서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면객이 객청의 문을 열자 밖에 도착한 마차가 보였다. 암기가 고슴도치처럼 박혔고, 곳곳이 구멍 나고 부서져서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게 놀라울 정도로 공격을 받은 마차였다.

마차를 바라보는 삼교의 눈빛이 떨렸다.

‘설마?’

마차 문이 열리고 십칠교와 오교, 그리고 팔교가 내렸다. 그녀들까지 붙잡혀 온 모습에 삼교는 크게 놀랐다.

‘어떻게 저들까지 찾아낸 거지?’

반면 객청으로 들어오던 십칠교의 눈에 동료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가에 서 있는 극악소마나 문 뒤에 서 있는 무면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쩡히 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들의 모습에 그녀는 내심 환호했다. 삼교도 있었고 칠교의 모습도 보였다. 그 숫자가 이십 명이나 되었다.

‘살았다!’

그와 동시에 십칠교의 마음에 뒤따라 들어오고 있는 무면객에 대한 걱정이 스쳤다.

‘당신은 나를 살려줬지만…….’

자신은 그를 구해주지 못할 것이다. 십칠이란 숫자는 이런 큰일을 결정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으니까.

‘당신은 죽게 될 거야.’

두 번이나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으면

십칠교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무면객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뒤따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무면객만큼은 살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혈이 제압당해 알려줄 수도 없었고, 진짜 그랬다간 자신이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누군가를 어떻게 죽일까만을 고민해 왔던 인생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살려주고 싶다는 감정을 가진다는 게 참 낯설었다. 아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때 뒤에서 무면객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고민이 깊어지니 발걸음이 너무 느려진 것이다.

십칠교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함께 있었지만, 이렇게 눈이 마주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는 계속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십칠교가 다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들이 객청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십칠교가 흠칫 놀랐다. 열린 문 뒤쪽에 무면객이 한 명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가에 또 다른 무면객이 있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객청 안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십칠교는 단번에 그가 평범한 무면객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른 무면객들과는 느껴지는 존재감 자체가 달랐다. 그 존재감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름을 떠오르게 했다.

‘극악소마!’

새하얀 가면 때문이었을까?

극악소마를 보는 순간 거대하고 새하얀 늑대가 떠올랐다. 눈발이 날리는 설원에 홀로 서 있는 한 마리의 늑대가.

비로소 동료들이 제대로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경직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삼교를 비롯한 이십 명의 가인교 살수들은 모두 제압당해 있었다는 것을.

그녀들이 제압당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생각지 못한 것일까?

그때 극악소마가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나?”

십칠교가 설마 자신에게 물었나 잠시 착각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십칠교가 깜짝 놀라 돌아섰다.

자신을 구해준 무면객이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여러 곳을 다쳐 무복이 피에 젖은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십칠교는 한 번 더 놀랐다.

‘말을 못 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껏 무면객들은 말을 못 하는 이들인 줄 알았다. 혀를 뽑고 감정조차 없애버린 자들인 줄 알았는데.

심지어 원래 객청에 있던 무면객과 눈인사도 했다. 놀랍게도 서로 웃었다.

‘뭐야, 웃을 줄도 알아?’

무면객은 십칠교를 데려가 의자에 앉혔다. 그곳에 앉자 십칠교는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다. 마교의 그 무서운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에게 붙잡힌 자신들의 처지를.

그녀의 시선이 선배와 후배 살수들을 향했다.

어차피 입을 열 수가 없었기에 서로 조용히 눈빛만 나눴다. 그때 그녀는 보았다. 모두의 목에 그어진 한 줄의 혈선을.

‘설마?’

십칠교는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에게 모두 당한 상처라는 것을.

‘극악소마에게 당했다.’

자신이 아는 극악소마는 사람을 살리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마존들 중에서도 제일 잔혹하다고 소문난 사람인데.

‘대체 왜 우릴 죽이지 않는 걸까?’

그러는 사이 또 다른 마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곳에도 제압당한 살수들이 내렸다. 이번에 동원된 모든 가인교의 살수들이 붙잡혀 오고 있었다.

무면객들이 붙잡혀 온 살수들을 빈자리에 앉혔다. 뒤에 붙잡혀 온 살수들일수록 더 많은 동료의 숫자에 놀람은 더욱 커졌다.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한 조직이었나?

마음만 먹으면 세상 어떤 남자도 다 죽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그녀들이었는데.

하지만 저 가면을 쓴 자들에게는 그녀들의 아름다움이 통하지 않았다. 저 가면에 막혔다. 마치 상극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나갔던 무면객이 모두 살수들을 제압해서 돌아왔다.

붙잡힌 이들을 보자 삼교는 알 수 있었다.

‘일교와 이교를 빼고 모두 붙잡혔다.’

당장 자신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마교가 순순히 자신들을 살려줄 거란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노렸으니 차이란과 일교, 이교 역시 위험에 처해 있을 수도 있었다.

자신들을 인질로 삼아 차이란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바깥에 세워진 마차를 향했다.

이제 믿을 건 하나였다.

부서진 마차가 신화방 객청에 도착했다는 것을 보고 받든, 객청에서 여인끼리 싸움이 났다는 보고를 받았든, 신화방주가 직접 고수들을 이끌고 이곳에 와주는 것.

아무리 극악소마라고 해도 대회를 이틀 앞둔 상황에서 신화방주를 건들 수는 없을 터.

그가 와서 변수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화방주는 오지 않았다.

* * *

신화방의 방주전에는 세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사람은 신화방주 안청광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바로 염사검과 철한도였다.

안청광을 도와 지금의 신화방을 이룬 두 고수들.

“이제 이틀 남았소.”

차이란은 결승 무대에서 사도맹주를 죽일 거라고 계획을 전해왔다. 원래는 더 며칠 뒤 축하연회에서 죽일 계획이었는데, 사도맹주가 일찍 도착하면서 계획을 당긴 것이다.

“우리에게 한 약속 잊지 마시오.”

염사검의 말에 안청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자네들에게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있나?”

여러 번 있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니면 기억 못 하는 척 할 수도 있었고.

그리고 약속을 확답받는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안청광의 야망이 이루면 이룰수록 또 다른 불길로 타오르는 야망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겐 받아낼 때 확실히 받아내야 한다. 그는 또다시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안청광이 두 사람에게 약속한 것은 막대한 부와 권력이었다.

사도맹주를 죽인 후 그 암살을 흑천문에 뒤집어씌우려는 계획이 성공하면, 흑천문은 차기 사도맹주가 될 비사인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화방은 안휘에서 제일가는 방파로 부상할 것이고, 흑천문이 차지했던 세력을 전부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사도제일방이 되는 것도 막연한 꿈은 아니었다.

“자, 한잔하세.”

세 사람이 건배했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잔이 부딪치던 바로 그때.

끼이익.

그곳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한 세 사람은 깜짝 놀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들어온 사람은 사도맹주 백자강이었다.

사도맹주가 왔으면 밖을 지키는 무인의 기별이 있었을 텐데,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기별이 없다는 건 그가 은밀히 왔다는 의미.

뭔가 불길했지만 안청광이 환한 표정으로 반기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안청광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기별도 하지 않으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백자강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불쑥 물었다.

“왜 그랬나?”

순간 안청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맹주가 다 알고 찾아온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던 염사검과 철한도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안청광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자신은 결백하다는 눈빛으로 백자강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백자강의 작은 눈이 웃음을 지었다.

“술자리가 있으면 나도 불렀어야지.”

그제야 안청광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처 귀하신 분께 폐가 될까 청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뒤에 서 있던 염사검과 철한도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백자강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앞서 안청광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자네들은 왜 그랬나?”

같은 질문을 또 하자 염사검과 철한도는 내심 당황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괜히 마음에 찔렸지만, 염사검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장난이었다는 듯, 백자강이 웃으며 말했다.

“왔으면 내게 먼저 인사했어야지.”

“바쁘신 것 같아, 연회 때 뵙고 인사드리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네 사람이 다시 원형 탁자에 둘러앉았다.

안청광이 백자강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맹주님, 술부터 한잔 받으시지요?”

백자강이 술을 받은 후 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철한도에게 첫 잔을 따르면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랬냐고 묻지 않았나?”

다시 세 사람이 흠칫했다. 저 질문은 아까 다 대답하고 농담처럼 지나갔다고 여겼었는데, 다시 대답을 요구해 온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한 줄기 바람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익!

그의 대답을 영원히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간 바람 소리이기도 했다.

철한도의 머리통이 탁자 위로 떨어지더니 데구르르 굴러서 술병 옆에 멈춰 섰다.

“썅!”

외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염사검이 의자를 넘어뜨리며 뒤로 물러났고, 안청광은 제자리에 앉은 채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맹주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철한도를 베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단칼에.

허공에 내뻗었던 검을 백자강이 다시 검집으로 회수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요즘 화가 많아졌는지 두 번이 한계가 됐네. 두 번이나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더군.”

백자강이 뒤로 저만치 물러나 있는 염사검을 보며 술병을 들었다. 와서 술을 받으라는 의미였다.

염사검은 알 수 있었다. 백자강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찾아왔음을. 그렇지 않은데 이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

‘저 술을 받으면 죽는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안휘 무림을 종횡하며 살아온 인생, 평생 무서울 게 없었는데. 막상 곧 죽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이 떨려왔다.

염사검이 안청광을 쳐다보았다. 안청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라고 이 상황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으리라.

염사검이 천천히 걸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어도 저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피가 흥건히 흐르는 탁자 위에서 사도맹주의 술을 받았다.

마지막 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까까지 달콤하던 술이 쓰디썼다.

“……술맛이 좋습니다.”

백자강이 다시 물었다.

“왜 그랬나?”

그에게 묻는 두 번째 물음, 대답해야 했다.

그는 솔직히 대답했다.

“돈에 권력에, 안 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거기까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 줄 알았지?”

“아닙니다, 그건 몰랐습니다.”

대답하는 순간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백자강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술 한 잔 주고 이만 가게.”

염사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를 살려준다고? 믿기 어려웠지만, 일단은 여길 벗어나고 봐야 한다. 지옥 바깥에 뭐가 있든, 지옥보다야 더하겠는가?

염사검이 백자강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또르릉.

바로 그 순간!

쉬이익!

순식간에 허공을 가른 백자강의 검이 염사검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검날을 타고 그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여전히 술병의 술은 백자강의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또르릉.

백자강은 죽은 자가 따르는 술을 다 마신 후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았다.

시체가 된 염사검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안청광은 알 수 있었다.

술 한 잔 주고 이만 가라는 소리가 여기서 나가라는 소리가 아니었음을.

이 세상에서 그만 나가라는 말이었다.

백자강은 시간 낭비하지 않았다. 상대를 떠보려 하지도 않았다. 딱 물어야 할 것만 물었다.

“왜 그랬나?”

그에게 묻는 두 번째 질문이었다. 그 역시 더는 미루거나 눈치를 볼 수 없었다.

“안휘 무림도 먹고, 사파 무림 전부를 다 먹고 싶었습니다. 맹주님이 꿨던 꿈, 저도 꿨습니다.”

안청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태사의로 걸어가며 차이란이 찾아왔던 그날을 말해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지만 백자강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흑천문을 찾아갔을 겁니다. 누명을 쓴 쪽은 우리 신화방이었겠지요.”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백자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없었을 거네. 흑천문주는 내게 충성스러운 사람이니까. 애초에 그쪽은 찾아가지도 않았을 거네.”

흑천문주에 대한 믿음과 안청광에 대한 멸시가 동시에 흘러나왔다.

“유혹은 언제나 쉬운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니까.”

태사의에 앉은 안청광의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발악하듯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너무 오만해.”

안청광이 태사의 팔걸이를 조작하는 순간.

스르릉.

백자강이 앉아 있던 곳 주위의 벽이 돌아가며 수백 개의 작은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이 열리면서 그곳에서도 수백 개의 구멍이 보였다.

이런 위급한 순간을 위해 그가 만들어둔 기관장치였다. 아주 오랫동안, 막대한 돈을 들여 은밀히 만든 기관이었다.

백자강은 이 기관을 알아보았다.

“사멸만침관(死滅萬針關), 아주 좋은 기관이지. 그거 아나? 이거 본맹의 기술자가 만든 거라네.”

그 여유에 기분이 나빴지만, 안청광은 이 기관을 믿었다. 이 기관에 들어간 돈과 시간을 믿었다.

“여유 있는 척 마시오! 당신이라도 무사하지 못해.”

원래 이 기관을 백자강에게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차이란이 자신을 배신하면 그때 쓰려고 했었는데.

“젠장!”

이곳에서 사도맹주가 죽고 자신이 태사의 뒤쪽 비밀통로로 달아난다고 하더라도, 평생 신분과 얼굴을 숨긴 채 쫓겨 다녀야 할 것이다.

“당신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되었는데.”

그를 죽인 것은 흑천문이 되어야 했는데.

“어찌 이틀을 못 참고 내 꿈을 이렇게 깨버린단 말인가!”

수백 개의 암기 구멍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지만 백자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런 기관을 만들 돈으로 신화방을 키웠으면 꿈을 이뤘겠지. 자넨 그저 쉬운 길을 택했을 뿐이야.”

그 순간 안청광은 참지 못하고 기관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기관은 발동하지 않았다.

철컥, 철컥!

아무리 장치를 눌러도 쇳소리만 날 뿐 기관은 공격하지 않았다.

백자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느긋하게 말했다.

“자네가 어떤 마음인지 뻔히 알고 있는데, 우리 호위들이 나를 이곳에 그냥 보냈겠는가?”

이미 호위들이 사전에 벽과 지붕으로 침투해서 기관 장치를 파훼한 것이다.

“젠장!”

안청광이 벌떡 일어났다. 비밀통로로 달아나야 할까? 아니면 공격을 날려야 할까?

무엇을 선택할지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찰나의 틈을 가르는 빛이 있었다.

슈우우웅!

푸아아악!

빛처럼 날아간 푸른 검기가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는 날아오르지 못하고 그대로 태사의에 주저앉았다.

그는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면서 왈칵 피를 쏟아냈다.

너무 허망했다.

처음 차이란의 손을 잡는 선택을 하는 데에 채 일각이 걸리지 않았다. 그 결정이 모든 것을 뒤바꿨다.

인생은 길지만, 언제나 결정은 한순간.

만약 그때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자강이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자네 꿈은 다음 생에 꾸게.”

그때 뒤에서 안청광이 말이 들려왔다.

“……그 여자가 이런 말을 했었소.”

발걸음을 멈춘 백자강이 그 마지막 순간을 돌아보았다.

안청광의 입에서 정말 생각지 못한 말이 피와 함께 쏟아져나왔다.

“……당신이 죽어야 무림이 멸망하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을 끝으로 안청광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이 방에 들어온 이후 백자강의 작은 두 눈이 처음으로 작은 점이 되면서 예리하게 빛났다.

그 말을 듣는 동안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그런 말을 했다는 의미인데.

내가 살아 있으면 무림이 멸망한다고?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소

십칠교는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열 명의 무면객은 얼핏 봐선 구분이 안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각자만의 개성이 있었다. 키도 다르고 체형도 다르고.

무엇보다 가면에 표시가 있었다. 가면 가장자리에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여우 그림이 작게 그려진 가면도 있었고, 구름이나 불꽃, 독사와 거미가 그려진 가면도 있었다.

만약 저것이 각자의 상징이라면, 짐작하건대 저 그림이 가면 전체에 그려진 각자의 가면도 있지 않을까? 가령 여우 가면이라거나 가면 전체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불꽃 가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준 무면객의 가면에는 작은 초승달이 그려져 있었다.

무면객을 쳐다보던 십칠교가 오교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과 함께 잡혀 왔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였다.

오교가 그녀를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칠교는 저 고갯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괜히 사적인 감정을 주지 말라는 의미였다.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면서도, 또 이곳에서도 자신의 속마음이 들킬 정도로 그를 쳐다봤다는 의미.

십칠교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 죽을지 모를 상황에서 이 무슨 미친 생각인가? 오교니까 그냥 넘어가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적과 내통했다고 중징계를 받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제 보지 말자, 마음먹던 그때.

마치 운명이라는 게 있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던 그 초승달 무면객이 벽을 탁탁 두 번 치면서 주위를 환기했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과연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조 총관 계시오?”

그는 신화방 소방주 안후평이었다. 오늘 본선에 진출했던 여인들이 결승 무대 때문에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온 것이다.

순간 안후평이 흠칫 놀랐다.

여인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십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이 짜릿함이란!

한데 문제는 주위에 서 있는 남자들이었다. 객청 곳곳에 가면을 착용한 이들이 서 있었다.

벽에 기댄 이도 있었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이도 있었다. 여인들 옆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이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모습.

이쯤 되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려야 하는데.

“조 총관이 재미있는 걸 준비 중이네.”

그는 결승 무대를 위한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악당들과 미인들! 괜찮은 생각인데? 누구야? 누가 두목 역할이야?”

장내에 흐르는 어이없는 침묵.

그때 삼교가 고개를 돌려 극악소마를 쳐다보았고, 다른 살수들도 따라서 쳐다보았다. 삼교는 그의 등장으로 뭔가 상황에 변수가 생겨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안후평이 겁도 없이 극악소마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극악소마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가면 참 잘 만들었다.”

가면 속 두 눈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어떤 웃음인지 알아차리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사추가 떠날 일도 없었으리라.

안후평은 그 웃음을 보며 경고까지 날렸다.

“귀한 분들이니 허튼수작 부릴 생각은 마라.”

그가 깜박했다는 듯 여인들에게 돌아서며 신분을 밝혔다.

“참, 내 소개를 안 했소. 나는 신화방 소방주 안후평이오. 혹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서 말씀하시오.”

여인들은 그를 바라만 볼 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아혈이 제압당하지 않았어도 저 눈치 없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계속된 정적에 안후평은 살짝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이내 이 묘한 분위기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다.

그래, 감히 소방주에게 함부로 말을 걸기는 쉽지 않겠지.

마지막으로 여인들을 한 번 더 쭉 훑어본 후 안후평이 작별을 고했다.

“자, 그럼 연습들 잘하시오.”

안후평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이안이나 차이란 같은 미인은 없었다.

‘생각난 김에 찾아가 볼까?’

그가 이안을 찾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 그의 눈에 띄는 하나의 모습.

낯선 무인이 앞장서 걸어가고 있었고, 신화방 무인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따라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자인데?”

사실 처음 본 이가 아니었다. 예전에 비사인을 만났을 때 봤던 사도십삼랑 중 한 사람이었다.

그날 비사인과 여인들에게만 신경을 쓴 탓에 그들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 반대쪽 건물에서 무인 하나가 경공을 발휘해서 튀어나왔다. 그가 안후평을 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아버님께 가십시오!”

그 순간 건물에서 더 빠르게 튀어나온 사도십삼랑이 순식간에 그를 제압했다.

뒤이어 건물에서 줄줄이 신화방 무인들이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나왔고 마지막에 또 다른 사도십삼랑이 걸어 나왔다.

놀란 안후평은 방주전으로 달렸다.

고함을 지른 남자를 제압한 사도십삼랑 무인은 힐끗 한 번 쳐다만 봤을 뿐 안후평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안후평이 방주전까지 달려왔을 때, 입구에 비사인이 서 있었다. 비사인 뒤로 맹주 호위들이 늘어서 있었다.

“소 맹주! 도와주십시오!”

그가 비사인에게 달려갔다.

“본 방에 수상한 자들이 침입했습니다!”

안후평이 비사인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그 수상한 자들에게 아혈과 마혈을 제압당해서 끌려갔다.

그때 문이 열리고 방주전 안에서 백자강이 나왔다.

뒷짐을 진 채 마실 다녀오듯 걸어 나왔지만 그와 함께 진한 피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비사인의 눈에 보이는 안쪽의 풍경.

태사의에 신화방주가 앉은 채 죽어 있었고, 술을 마시던 탁자에 철한도의 머리통이 놓여 있었다. 그 탁자 뒤에 시체로 누워있는 염사검의 모습도 보였다.

그 시체들을 등지고 백자강이 물었다.

“이번 일을 꾸민 살수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비사인은 맹주가 그녀와 관련된 중요한 말을 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소교주가 만나고 있을 겁니다.”

* * *

검무극이 차이란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새 옷을 사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 이안과 함께 옷을 샀던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죠?”

“벌써 잊었소? 당신이 취해서 땅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을 때 나도 옆에 있었던 거.”

지금 그녀는 앞서 입었던 화려한 옷 대신 평범한 흑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무복 입은 모습을 처음 봐서였을까? 오히려 이 모습이 더 신선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좋아요, 기왕 왔으니 골라줘요.”

차이란이 상점에서 자신이 골랐던 두 벌의 옷을 보여주었다.

“어느 쪽이 더 어울릴 것 같나요?”

두 옷 모두 화려한 옷이었다.

“지금 입고 있는 무복도 괜찮소만?”

“내 무복은 이 옷이에요. 어서 골라요.”

검무극이 왼쪽 옷을 가리키자 그녀는 반대쪽 옷을 선택했다.

“당신은 이 소저가 우승하길 바랄 테니까.”

검무극은 그녀가 상점 주인에게 옷값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옷을 입고 대회에 나갈 일은 없을 거요.’

값을 치른 그녀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요. 갈아입고 나올게요.”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맡아줘요.”

그리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은 그녀가 두고 간 작은 상자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비궤가 다시 반응했다. 놀랍게도 구슬이 든 상자를 두고 간 것이다.

과연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일까? 진짜 자신이 가져가길 바라서?

지난밤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녀는 구슬로 노골적인 유혹을 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손을 살짝 휘젓자 허공섭물로 상자 뚜껑이 열렸다.

안에 든 것은 붉은 구슬, 적정이었다.

우우웅.

비궤가 더욱 강하게 반응했다.

구슬을 보고 있으니 당장 기운을 빨아들이고 싶다는 강력한 유혹이 들었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기존의 기운들이 깨어나려 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다시 손을 내저었고 뚜껑이 닫혔다.

그녀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지난 구슬들을 자신이 얼마나 어렵게 구했는지. 이 구슬은 결코 이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비궤야, 참자.’

검무극이 마음을 다스리자 깨어나려던 기운이 다시 잠들었고, 비궤도 진정했다.

잠시 후,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그녀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갈아입은 옷 대신, 상자에 관해 물었다.

“열어봤어요?”

“열어봤소.”

“어땠어요?”

“가지고 싶었소.”

“가지고 싶었다, 참 감미로운 말이군요.”

차이란이 상자를 들고는 구석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드러난 허벅지가 너무나 관능적이었다.

“왜 가지지 않았죠?”

“이미 가졌소. 그거 빈 상자요.”

차이란이 안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챙겨 넣었다.

“내 양심을 믿는 거요?”

“아뇨, 열면 폭발하는 상자거든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들의 눈빛은 너무나 깊어서 이렇게 봐서는 결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어제 밤새 술을 마시고 그렇게 취해서 헤어졌는데. 적어도 내일은 되어야 볼 거로 생각했다.

“당신이 정체를 밝히니 왠지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오.”

물론 그래서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작전이 개시되었기에. 지금 이 시각 극악소마와 사도맹 모두 각자 맡은 일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은 우선 악군학도 그녀를 좋아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검무극이 그녀의 속부터 챙겼다.

“해장은 했소?”

“했어요.”

“잘했소. 속은 젊었을 때부터 지켜야지.”

그러자 차이란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이나 나나 늙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살 거요, 늙을 때까지.”

“욕심이 많군요.”

“맞소, 무공 욕심, 사람 욕심, 돈 욕심, 건강 욕심, 수명 욕심. 내가 탐욕의 화신이라 불리는 사람이오.”

그러자 차이란이 웃으며 말했다.

“소문에는 말 욕심이 많다던데.”

그러자 검무극이 턱을 좌우로 움직이며 입을 풀었다.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해서 혼났소.”

차이란은 검무극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왜 악군학이 그를 죽이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무와 별개로 검무극과 자신을 이어주는 하나의 선, 악군학.

그 선이 뚝 끊어지는 순간, 그와 나눌 공통의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죽느냐 죽이느냐, 임무를 완수하느냐 마느냐의 일만이 남게 되리라.

“그 사람은 왜 못 떠난 거요?”

검무극은 지난밤에 묻지 않았던 질문을 지금 했다.

“이유가 달리 뭐가 있겠어요? 조직에서 보내주지 않으니까.”

“그런 조직에 충성할 필요가 있소?”

그러자 차이란은 양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충성? 나는 그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아요. 대가를 받고 일하는 것이지.”

그녀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살수로 죽었으니까. 그녀의 삶이 죽은 후에야 밝혀진 것 역시, 이런 그녀의 생각 때문이었을 거다.

조직은 결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대가를 치르면 당신을 고용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오만.”

“그럴 만한 능력만 있다면요.”

“지금 당장 고용하겠소. 조건을 말해보시오.”

물론 그녀가 받아들일 리 없다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과연 그녀는 단번에 거절했다.

“내가 맡은 일을 포기하고 중간에 일을 그만두는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고용할 가치도 없겠지요.”

그렇기에 그녀는 반드시 맡은 임무를 수행하려 들 것이다. 사도맹주를 반드시 죽이려 들 것이며, 어쩌면 자신까지도.

“그 사람이 어디로 떠나려는지 알고 있소?”

차이란은 대답 대신 오히려 되물었다.

“그건 당신이 알고 있겠지요.”

그녀의 눈빛과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 어디로 떠나는지 모른다는 것을. 오히려 그녀가 궁금해하고 있음을.

“그 사람은 당신이 좋아하는 걸 모르고 있었군.”

정말 좋아하는 사이라면 분명 이야기를 나눴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함께 떠날 계획이 아니라면 말이다.

“맞아요. 그 사람은 모르죠.”

차이란은 그 사실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걸 방패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들지 않았다.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소?”

이런 이야기를 검무극에게 하게 될 줄이야.

“서로 바빴고. 또 조직에서 좋아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오히려 죽여야 할 적이기에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조직에서는 왜 싫어했소?”

“그럼 지금 떠나겠다는 사람이 둘이 되었을 테니까.”

검무극은 솔직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진짜 매력은 저 매끈한 허벅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차이란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그 사람을 신경 쓰는 거죠? 이미 당신에게서 떠난 사람인데.”

검무극에게서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가 나왔다.

“그 사람, 멋진 사람이었소.”

“그건 인정해요.”

“나는 멋있는 사람 좋아하오. 그런 사람 보면 닮고 싶고, 배우고 싶고.”

검무극이 그녀 정면에 있는 장식대에 걸터앉았다.

“그런 점에서 당신도 멋있었소.”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검무극이 솔직히 대답했다.

“나는 적 앞에서 그렇게 만취할 용기가 없거든.”

농담이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왜 솔직하지 못하죠?”

“무슨 뜻이오?”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멋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처럼 강한 고수를 곁에 두기 위해서잖아요? 심지어 적이니까 그 효과는 두 배, 세 배가 될 테고. 아닌가요?”

잠시 차이란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을 곁에 둘 수 있겠소?”

차이란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악군학의 그 바람 같았던 모습이 좋아서 좋아했던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 사람 처음 볼 때부터 신발을 벗고 있었소.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을 어찌 곁에 두겠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지려는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럼 왜?”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떠나게 해주고 싶어서.”

그 말이 진심이라는 듯 놀라운 제안이 덧붙여졌다.

“우리가 그 사람 떠날 수 있게 해줍시다.”

그 인생 너무 시시하잖아요?

차이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검무극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여겼다. 악군학을 떠나게 해주려면 그들과 싸워야 한다.

“단지 그 사람을 떠나게 해주려고 그들과 싸우겠다고요?”

그녀의 불신에 검무극은 오히려 되묻듯 말했다.

“싸울 이유로 충분한 것 같소만.”

“부족해요.”

앉아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누군가를 떠나게 해주려고 목숨을 걸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사람을 앞에 두고 바보라니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눈앞의 소교주는 분명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게 느껴졌기에 차이란은 혼란스러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는 천마신교 소교주였다. 권력과 무공과 부와 명예 모두를 가진 사람, 원하면 이 무림 전부도 가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떠날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건다고? 그 말을 내게 믿으라고?

바로 그때 일교가 다급히 그곳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차이란이 검무극과 함께 있는 모습에 흠칫 놀랐다. 보고를 망설이는 그녀에게 차이란이 말했다.

“괜찮다, 네가 이렇게 급하게 연락할 일이라면 이 사람이 꾸민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 일이 이렇게 심각한 것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이었기에 일교는 검무극이 듣는 앞에서 보고했다.

“저와 이교를 제외하고 모두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에게 당했습니다.”

순간 흐르는 정적.

차이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분노가 폭발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도 살기를 내뿜지도 않았다.

때론 침묵이 가장 강력한 감정표현임을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의 분노가 벼려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더없이 투명하고 맑은 눈빛.

“그러니까 지금 내 수하들을 다 죽이고 와서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검무극은 변함없이 차분한 그녀의 말에서 거대한 분노를 느꼈다.

살수로서의 차이란, 그 한 단면을 처음으로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검무극은 곧장 오해를 풀어주었다.

“그들은 살아 있소.”

직접 확인한 내용이 아니었지만 검무극은 극악소마와 무면객을 믿었다.

하지만 차이란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일교를 쳐다보자 남은 보고가 이어졌다.

“위급을 알리는 신호가 여러 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볼 때 동시에 공격받고 붙잡혀 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검무극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들은 죽지 않았소.”

“지금 어디에 있죠?”

“소마님이 데리고 있소.”

차이란은 지금까지 봐온 모습으로 판단할 때, 검무극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차이란은 일단 일교를 내보냈다.

“나가 있어라.”

“네.”

둘만 남자 차이란이 물었다.

“다 죽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살려줬죠?”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당신 때문에.”

뜻밖의 대답이었지만 차이란은 동요하지 않고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검무극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을까 봐.”

이제야 검무극이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확실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악군학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알아내려고 온 거였군요. 만약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면 내 수하들을 죽여선 안 되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이란은 수하들이 무사할 수도 있으리란 안도감과 함께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악군학을 떠나보내기 위해 싸우자는 말 역시 진심으로 한 말일지도 모른다는.

‘정말 그 사람을 위해 소교주 당신의 목숨까지 건다고?’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적으로 만났다 헤어진 상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리고 이 순간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다 죽이겠군요.”

“당신을 막으려면 그래야 하지 않겠소?”

두 사람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지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신은 사도맹주님을 죽이려고 이곳까지 오지 않았소? 결승 무대가 열리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죽이려 들겠지.”

차이란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게 내 임무니까요.”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했다.

“나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소.”

검무극이 천천히 흑마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당장에라도 검이 뽑혀 나올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는 게 두렵지 않소?”

검무극의 물음에 그녀의 투명한 두 눈이 더욱 빛이 났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하면서 자기 죽는 걸 두려워하면, 그 인생 너무 시시하잖아요?”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랬기에 자신 앞에서 그렇게 만취해서 주사를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뭐해요? 베지 않고.”

검무극이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차갑기만 하던 차이란의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순식간에 감정을 바꾸었기에 다른 여인이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예뻐서 못 베겠죠?”

다시 유혹하는 차이란으로 돌아간 그녀.

“새 옷에 피가 묻으면 안 되지 않겠소.”

검무극은 애초에 검을 뽑을 생각이 없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여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때 잘 살렸지, 하고 나중에 안도할 수도 있지 않겠소?

검무극이 돌아서며 등을 보였다.

“나가서 좀 걸읍시다.”

차이란은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등을 허용하는 검무극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뒤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저잣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긴장감을 저 앞에서 풍겨온 만두 냄새가 덮었다.

“배고프지 않소?”

“당신 수하가 인질로 잡혀 있으면 그런 소릴 못 할 거예요.”

검무극이 만두를 파는 수레 앞에 멈춰 섰지만, 그녀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이 그녀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만두는 안 먹더라도 그 사람은 떠나게 해줍시다.”

만두 먹는 일과 그 일을 비교하다니.

“그러세요.”

“함께합시다.”

“왜 자꾸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죠?”

“당신이 그 사람 좋아하니까.”

차이란이 발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검무극도 따라 멈춰 섰다.

“그 사람은요?”

그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데.

“그를 도와주면 이러겠죠. 어? 이 여자가 왜 날 돕지?”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일 테니, 그 놀람은 더욱 클 것이다.

“그땐 우선 웃으시오. 내게 웃는 웃음 말고 당신 진짜 웃음으로.”

진짜 내 웃음? 무슨 말인가 싶어 차이란은 의아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 사람을 살려서 보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살려주고 갔다고 했을 때, 당신이 미소를 지었소. 어색하고 경직된 미소였지. 한데 그 미소가 당신에게 너무 잘 어울렸소. 이 옷보다 아까 그 무복이 더 어울리듯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어색한 미소가 있었다고? 아까 그 평범한 무복이 이 옷보다 더 어울린다고?

“당신은 어떻게든 나를 결승 무대에서 떨어뜨리려는군요.”

검무극이 웃으며 하던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미소를 지어야 하오. 그 사람은 당신이 내게 짓는 그 매혹적인 웃음이 가짜라는 거, 단번에 알아차릴 테니까. 진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시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차나 한잔하죠.”

차이란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진지하게 할 말을 했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당신도 신발 벗고 쫓아가시오.”

결국, 그녀는 내뱉고 말았다.

“미친놈인가?”

소교주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악군학이 자신에게 할 것 같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 말 자주 듣소.”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차이란은 지난밤에 헤어질 때 검무극이 골목길에 서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 사람 그동안 입만 근질거렸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잘 웃었다.

“이 무림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당신처럼 잘 웃는 사람인데.”

“그럼 당신들 큰일 났소. 이번에 정말 잘 웃는 사람과 함께 왔으니까.”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그 웃음은 또 얼마나 헤픈지 봐야겠군요.”

수하들이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말이었다.

* * *

십칠교는 오교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또 초승달 무면객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자의가 아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벽을 두드려 주위를 환기시킨 것이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두드리는 소리가 특이했다.

그 소리에 모든 무면객이 일제히 반응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던 무면객이 벌떡 일어났고, 저쪽 구석 벽에 기대 있던 무면객도 몸을 날려 이쪽으로 왔다. 병장기를 손질하던 무면객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움직였다.

그렇게 각자 자기 일을 하던 모든 무면객이 극악소마 뒤로 늘어섰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들어섰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극악소마의 인사에 무면객들도 일제히 동작을 맞춰 포권했다.

착착착착착착!

창밖이나 멍하게 바라보고 쪼그려 앉아 졸고 있던 무면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검무극도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소마님을 뵙습니다.”

곧이어 차이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살수 여인들은 깜짝 놀랐다. 드디어 구해주러 오신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에 검무극은 너무 태연하게 들어와 인사를 나눴으니까.

그녀마저 붙잡혀 왔다는 생각에 모두 충격을 받으며 절망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 대단한 차이란이 붙잡혀 왔다니.

그때 검무극이 그녀들에게 말했다.

“오해들 마시오. 내가 이 사람에게 붙잡혀 왔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모두 의아해할 때.

차이란이 그녀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시선이 수하들의 목을 향했다.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길이로 그어진 혈선들.

그 선이 그것을 그은 이의 실력을 단 한 줄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실력을 잘 알기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선이었다.

차이란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봐라, 자결 같은 거 안 하고 어금니 꽉 깨물고 있으니까 날 다시 보잖아?”

그 말에 살수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차이란이 붙잡혀 온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검무극이 재빨리 생색을 냈다.

“정말 아무도 다치지 않게 데려오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물론, 끝까지 반항하다 다친 살수도 서너 명 있었지만, 전체 숫자를 생각했을 때 고이 모셔 왔다 해도 좋을 정도였다.

차이란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소교주의 명령을 받아서겠지만, 이렇게 다치지 않고 제압해서 데려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극악소마가.

그녀는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말로는 극악소마의 헤픈 웃음을 보자며 왔지만, 그의 웃음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가 언제 웃는지는 그녀도 잘 알았으니까.

결정을 내려야 한다.

검무극을 돕지 않는다면 이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소교주가 살려주려 해도, 저 극악소마가 그냥 있지 않겠지.

이들을 살리려면 조직과 싸워야 했고.

고민하던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수하들 데려가시오.

놀란 차이란이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검무극은 진지한 눈빛이었다.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준다고?

―진심인가요?

그 이유 역시 검무극다웠다.

―그렇소. 수장이 직접 왔는데 체면 안 서게 수하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소?

그녀의 권위를 지켜주겠다는 의미였다.

―풀려난 수하들과 함께 사도맹주를 암살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여기 수하들 대부분이 죽을 거요. 성공 여부를 떠나서.

―이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내가 성공시키겠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럴지도.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은 그런 일은 없을 거로 확신하고 있음을.

―왜 내가 못 할 거로 생각하죠?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수하들의 생사를 확인하러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원래 있었을 사도맹주의 암습만 봐도 그렇다. 사도맹주가 참석하는 그 축하연에는 천하제일미가 된 자신만이 참석할 수 있었으니까.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또 물어야 했다.

―내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죠?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요.

―잘 보이고 나서는요?

―그 사람 떠나게 해줘야지요.

―정말 집요하군요.

―미친놈들이 원래 집요하지 않소?

차이란은 검무극의 두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기에, 다들 숨도 크게 쉬지 않은 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무면객에게 말했다.

“혈도를 풀어주게.”

그러자 무면객들이 나서서 그녀들의 아혈과 마혈을 풀어주었다.

차이란은 그녀들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가자.”

살수들 역시 조용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몰라도 차이란이 자신들을 구해준 것이다. 아마 큰 대가를 치렀을 거란 생각에 모두 기쁨을 드러내지 못했다.

차이란이 입구에서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이번 일은 당신이 손해 봤어요. 나는 수하들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떤 요구라도 들어줬을 거라는 의미. 분명 저 눈치 빠른 소교주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가진 게 많아서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할 수 있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상대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걸 인질로 잡고 싸운다면, 너무 시시한 인생이지 않겠소?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차이란은 말없이 돌아서 그곳을 나갔다.

그렇게 그녀들이 모두 떠나자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 사과했다.

“힘들게 잡아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극악소마는 왜 풀어줬는지 묻지 않았다. 말없이 검무극을 향해 웃은 후 뒤에 선 무면객들을 돌아보았다.

마존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무면객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했다.

그들 앞에서 극악소마도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백 번이고 또 잡아 오겠습니다.”

잘생긴 소교주에게 죽으면

“이 무인.”

천화루주의 부름에 문 옆에 서서 바깥 동태를 살피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좀 쉬세요.”

자신을 지켜주라는 임무를 받은 후 이안은 단 한 순간도 다른 것에 정신을 팔지 않았다. 창문을 막고 천장과 벽을 살피고. 문밖 복도의 기척을 살피고. 그것을 반복했다.

이안은 다시 문에 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호위 무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어요. 사고는 항상 네가 딱 한 번 고개를 돌렸을 때 난다.”

그렇게 밖을 살핀 후에야 천화루주에게 돌아섰다.

“전 괜찮아요, 루주님.”

“호위란 참 쉽지 않은 일이네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이안은 천화루주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몸에 부작용이 있을 때였다. 그때부터 너무 좋은 느낌으로 자신을 봐준 천화루주였기에, 그녀를 보면 언니 같고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더 신경 써서 호위했다. 그 한 번 고개 돌리는 걸 못 참아서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명색이 천마신교 소교주 호위 출신인데…….”

다음 순간!

이안이 빠르게 돌아서며 검을 뽑았다.

쉬이이이익!

그녀의 검이 섬전처럼 번쩍이며 허공을 갈랐다.

스르륵, 쿵! 쿵쿵!

문이 기울어진 십(十)자 모양으로 잘리며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와.”

이안의 한마디에 문 옆쪽 벽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촤라라락.

펼쳐지며 나온 그것은 미인이 그려진 부채였다. 마치 항복 깃발을 흔들 듯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더니.

얼굴을 쏙 들이민 사람은 바로 화도명이었다. 그는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이안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이 무인, 결승 진출을 축하해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짙은 화장이었기에 그가 어떤 얼굴인지, 또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문을 벨 때, 분명 그는 문 뒤에 서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상대의 실력이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결코 자신보다 하수가 아니었다.

“물론 당신들이 다 뒤집어엎으면서 대회도 뒤집혔지만요.”

화도명은 바닥에 잘린 채 떨어져 있던 문의 단면을 살폈다.

“그 나이에 이런 경지라니.”

그리고 나서야 살랑살랑 부채질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은 모든 신경을 자신의 검과 상대에게 집중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 외모에 이런 실력까지. 건방을 떨 법도 한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가 펼쳐진 부채를 접더니 손뼉을 치듯 부채로 손바닥을 연속해서 쳤다.

이안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피독주였다. 부채를 쓰는 이들이 접었다 폈다 하면서 하독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그에 대비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지켜야 할 사람부터 챙기는 게 아니다. 자신이 당하면 천화루주는 무조건 당하기 때문에 일단 자신부터 피독주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뒤로 해서 천화루주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순간을 노려 상대가 기습할 수도 있기에 말보다는 수신호로.

그러자 천화루주가 이안이 미리 챙겨준 피독주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에 화도명이 부채를 좌우로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걱정 마세요. 독은 안 씁니다. 제가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서요. 덜렁대다 제 독에 제가 중독될 겁니다.”

듣고 있던 이안이 짤막하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상대가 예를 갖추고 있으니 이안도 기본적인 예를 갖춰 물었다.

“오늘은 심부름꾼 정도로 해둡시다. 축하객도 좋고.”

“축하는 이미 했으니, 용건을 말해요.”

“그 전에 검은 내려놓읍시다. 내가 검 날만 봐도 속이 울렁거려서.”

하지만 이안은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상대처럼 여유를 부리면 좋겠지만 방심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뒤에서 천화루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이곳에 불렀나요?”

대회 심사자로 불렀느냐는 물음이었다. 왠지 이 괴상한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과연 그녀의 짐작은 맞았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요.”

그를 바라보던 천화루주가 가운데 있는 탁자로 걸어가서 먼저 앉았다.

“앉으세요.”

천화루주가 이안을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 무인.”

원래라면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천화루주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아야 했겠지만, 천화루주가 뭔가 생각한 바가 있기에 과감하게 행동한다고 여겼다.

이안은 뒤로 물러나 화도명을 앉게 했다.

자리에 앉은 화도명이 천화루주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걸 본다지요?”

천화루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내게도 뭐가 보입니까?”

빤히 그를 응시하던 천화루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천화루주가 물었다.

“뭐 때문에 나를 찾았나요?”

“전할 말이 있어서지요.”

“하세요.”

짙은 화장 속 그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빛 하나가 달라졌을 뿐인데 조금 전까지 가볍게만 보이던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촤아아악.

화도명이 부채를 펼쳐서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그 뒤에서 원래 목소리가 아닌 차갑고도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흉내가 아니라 이것이 자신의 본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사도맹주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 운명을 거스르면 무림이 멸망하게 될 거다.”

순간 천화루주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그들 사이에 서서 듣고 있던 이안도 크게 놀랐다.

그렇게 놀라운 전언이 끝나는 순간.

부채가 가볍게 흔들리더니.

스르르륵.

그의 신형이 마치 유령이 사라지듯 홀연히 사라졌다.

이안이 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화도명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괜찮으세요?”

이안의 물음에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소교주님을 뵈어야겠어요.”

* * *

“사도맹주가 죽어야 한다고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검무극이 옆에 선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 역시 놀란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이어지는 더 놀라운 이야기.

“그 운명을 거스르면 무림이 멸망한다고 했어요.”

말을 전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천화루주는 잠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자는 어떤 사람이었냐?”

검무극의 물음에 이안이 그를 설명했다. 너무 특징이 강했기에 설명하기는 쉬웠다.

“남자인데 화장이 짙었고 장신구가 많이 달린 화려한 옷을 입은 자였어요. 미인도가 그려진 부채를 들고 있었고, 은신술과 신법이 대단했어요. 얼마나 고수인지 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혹시 아는 사람이냐는 눈빛에 극악소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검무극 역시 회귀 전 삶에서는 알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적어도 또 다른 십이지왕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런 실력과 특징을 가진 자인데 모른다는 것은 무림의 전면에서 활약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의미다. 아니면 십이지왕 시대까지 가지 못하고 죽었거나.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이 사도맹주님을 노린 이유는 그자가 전하고 간 말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감한다는 듯 극악소마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있던 천화루주가 입을 열었다.

“그가 했던 말은 예언이에요.”

그녀에게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듣는 순간 알 수 있었어요. 이 말이 예언이라는 것을.”

아마도 그녀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

“당대에 루주님 말고 예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주님께서 예언을 내리실 수 있으셨지요. 저는 일찍이 궁을 떠났기에 지금은 누가 예언을 할 수 있는지 몰라요.”

검무극은 그녀의 말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차기 궁주가 될 사람이었음을.

그녀는 자신에게 내린 운명을 거부하고 궁을 떠난 것이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더 있었다.

이번에 천화루주를 이 대회의 심사자로 초대한 이유가 바로 남자가 전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천화루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검무극과 사도맹주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자신의 느낌처럼 남자의 말이 예언이라면, 그 예언 역시 지켜질 것이기에.

그런 그녀의 불안을 읽었지만 검무극은 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루주님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만, 전 반드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 소마님의 비수에 가슴이 찔리는 운명이잖아요?”

검무극은 천화루주가 애써 짓는 미소에서 여전한 걱정을 느꼈다.

그래, 지금까지 그 예언은 이뤄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렇게나 걱정하는 것일 테고.

하지만 검무극이 믿는 바도 있었다.

예언이 길을 보여준다면 그 길을 걷는 건 인간이다.

‘반드시 다른 길을 찾아낸다!’

검무극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사도맹주님을 뵈어야겠습니다.”

* * *

신화방에서 멀지 않은 한 장원.

가인교 살수들이 사방을 지키고 서 있었다.

차이란은 방에 혼자 있었다.

그녀는 앉아서 탁자 위에 놓인 구슬이 든 상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장이 직접 왔는데 체면 안 서게 수하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소?

수하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체면은 확실히 섰다. 그게 뭐 큰 의미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분명 의미가 있었다. 극악소마의 소굴에서 자신들을 데리고 나온 수장이 된 것이니까.

―상대가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걸 인질로 잡고 싸운다면, 너무 시시한 인생이지 않겠소?

그녀가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살수무정(殺手無情) 아니었어?”

어느새 들어온 것인지 화도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자고로 살수는 무정해야지. 다정살수(多情殺手)들이 일찍 죽는 법이거든.”

화도명이 걸어와서 그녀 앞에 마주 앉았다.

“소교주가 수하들을 내주는 대신 무슨 요구를 했지?”

차이란은 여전히 상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방에 막 들어오는 무례한 자가 있으면 꼭 죽여 달라더군.”

화도명이 부채를 펼치며 얼굴을 가렸다.

“나는 적이 아니라 구경꾼이라는 걸 잊지 마.”

천화루주 앞에 나타나는 순간 구경꾼에서 무대에 오른 배우가 된 그였는데. 여전히 그녀 앞에서는 구경꾼을 자처했다.

“수하들을 풀어주면서 무슨 요구를 했냐고?”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화도명이 추측했다.

“구슬을 달라고 했겠지? 아니면? 사도맹주 죽이는 걸 포기하라고? 그것도 아니면 위에 누가 있는지 알려달래?”

여전히 상자에 시선을 둔 채 차이란이 대답했다.

“아무 요구도 안 했어.”

화도명은 그녀의 표정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느꼈다. 놀람보다 조소가 앞섰다.

“널 갖고 노는 거야. 소교주는 오만한 자다.”

“놀아줘서 고마운 거 아닌가?”

“뭐?”

“아니었으면 다 죽었어. 거기서.”

잠시 침묵이 흘렀고, 화도명이 아부하듯 그녀에게 부채질해주었다.

“당신은 쉽게 죽는 사람 아니잖아?”

“실없는 소리나 하던 소교주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그 생각이 들더군. 아, 죽을 수도 있겠구나.”

“무서웠어?”

그녀는 여전히 상자만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잘생긴 소교주에게 죽으면 지옥에 가서도 잘생긴 악귀가 불구덩이에 떠밀려나?”

그녀의 말에 화도명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당신이 죽여줘.”

그러자 차이란이 고개를 들어 화도명을 쳐다보았다.

“지금 말고.”

화도명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옆으로 몸을 돌려 앉으며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그러다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언제 할 거야?”

차이란의 입에서 모두의 운명을 바꿀 시간이 흘러나왔다.

“내일.”

화도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좋은 구경하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겠구나.”

그때 차이란이 물었다.

“악군학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어?”

화도명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왜 묻는데?”

“죽기 전에 고백이나 한 번 해볼까 하고.”

“누가 죽기 전에? 너? 아니면 악군학?”

“네가 볼 땐 누가 더 빨리 죽을 거 같은데?”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화도명이 돌아서며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고백은. 살수가 사랑에 빠지면 불행해져.”

차이란이 살짝 그녀의 붉은 입술을 깨물던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쪽 벽을 향했다.

벽 너머 저 멀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존재감.

다음 순간.

촤아아악

부채를 펼치며 화도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이란은 탁자에 올려진 구슬 상자를 회수했다. 그리고 벽에서 등을 돌리며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한쪽 벽이 통째로 날아갔다. 거대한 강기가 그곳에 휘몰아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강기에 모든 것이 휩쓸려 날아갔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녀가 있던 방이 통째로 날아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차이란만이 그곳에 홀로 서 있었다.

“새 옷인데, 또 다 버렸네.”

등을 돌리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저 멀리 흑의 무복을 입은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사도맹주 백자강이었다.

기습이 아니었다. 미리 왔다는 걸 기세로 알렸기에 이건 그의 인사였다.

일교가 살수들을 이끌고 날아와서 그 앞을 막아섰다.

백자강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기껏 그 아이가 살려줬는데, 내 손으로 죽이게 하지 마라.”

차이란은 느낄 수 있었다. 백자강은 막아서는 모두를 다 죽여버릴 작정임을.

차이란이 일교에게 명령했다.

“물러나라.”

일교는 찰나간 망설였지만 이내 명령을 받았다. 사도맹주는 자신과 수하들이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백자강이 그녀가 있는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지금부터 묻겠다.”

백자강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꿰뚫듯 날아들었다.

“네겐 두 번 묻지 않겠다.”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나?

“어서 오세요, 맹주님.”

정중히 인사한 후, 차이란은 폐허가 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앉으시라고 하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자리가 없네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침착했다. 인생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알리는 푯말을 없애버린 그녀는 두려움이 없었다.

오직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걷다 걸음이 멈추는 날이 마지막 날이 되리라.

“너는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

사신처럼 물어온 백자강의 질문에 차이란은 정중히 대답했다.

“두렵습니다.”

그때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거짓말을 알아내는 감각이 통하는 상대였다. 두렵다는 말에 반응이 왔다는 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래라면 이 여인이 비장의 한 수를 숨겼거나, 누군가 구해줄 사람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자강은 보았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빛에 스친 초연함을.

만났던 적 중에서 이런 눈빛을 한 자들이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들에게서 보았던 그런 눈빛.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의외였다. 이렇게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를 지녔는데 삶에 미련이 없다고?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백자강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이 여인을 죽이지 않고 일을 해결하려는 이유가 어쩌면 지금 자신이 본 것을 그 역시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소교주가 너를 특별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소교주와 너와의 일일 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검무극과의 관계 때문에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음을 알린 후, 백자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나를 죽이려는 거냐?”

앞서 두 번 묻지 않겠다는 경고는 한 번 물었을 때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의미.

“알고 오셨겠지만 저는 살수입니다. 그래서 청부를 받았지요.”

배후 조직에 속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명령을 받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조직은 자신에게 청부금을 주고 일을 맡겼으니까. 그들과는 한 걸음이라도 더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그래서 조직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가 청부대상임을 알고서도 청부를 받아들였군.”

가장 큰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예민한 부분이었는데, 차이란은 정면돌파했다.

“어떻게 거절하나요? 살수에게는 단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생일대의 청부인데.”

그녀의 솔직함에 질문은 거침없이 계속 이어졌다.

“네가 신화방주에게 한 말은 어떤 의미였나?”

사실 백자강이 오늘 그녀를 찾아온 이유는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화방주는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죽지 않으면 무림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던데?”

그녀가 그 말을 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는 검무극이 끼어들 거라고 예상 못 했던 시기였으니까.

사실 이 말을 그녀에게 했던 사람은 화도명이었다.

그는 얄밉게도 멀리 숨어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과연 백자강이 자신을 죽이려 들 때도 그는 그냥 지켜보기만 할까? 아니면 자신을 구해주러 나설까?

“그건 제가 여쭤야 할 말 같은데요?”

백자강의 눈빛이 예리해졌지만, 그녀는 차분히 할 말을 했다.

“무림을 멸망시킬 생각이 있으십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백자강은 이 질문을 이 여인에게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였을까? 백자강은 그녀의 도발을 받아주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그 질문을 던진 것은 백자강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런 분이시라면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묻지 않으셨겠지요.”

차이란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마 저들은 저를 설득하기 위해 그런 말을 했나 봅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명분으로 그만큼 좋은 이유도 없을 테니까요.”

끝으로 백자강이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나를 죽일 작정인가?”

이 대답만큼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대답했다.

“네. 이미 청부를 받았으니까요.”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기에 그녀가 진심을 말했음을 알 수 있었다. 용기는 가상했지만 그게 용서의 이유가 되진 못했다.

“내가 너를 죽여선 안 되는 이유를 말해라.”

차이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없는 것 같네요.”

내내 질문만을 던졌던 사신이 드디어 판결을 내렸다.

“그럼 죽어라!”

그의 손이 검 손잡이를 잡았다.

차이란은 그 모습을 보며 검무극이 검을 뽑으려 하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때보다 더 큰 긴장감이 들었다. 검무극은 뽑지 않았지만, 이 백자강은 반드시 뽑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죽일 것이다.

차이란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과연 정면 대결로 사도맹주를 이길 수 있을까? 어림없으리라.

‘화도명, 지켜보고만 있을 거냐? 내가 죽으면 이번 일도 실패다.’

하지만 화도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넌 구경꾼이었지.

그녀는 최후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사실 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언젠가부터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사도맹주, 마지막 청부대상.

자신에게 최후를 선사할 사람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으리라.

다만 아쉬운 건 수하들까지 다 죽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수하들은…….”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백자강이 말을 끊었다.

“나는 후환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다. 한데 후환으로 살수들을 남기겠느냐?”

백자강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강맹한 기도는 처음이었다. 마치 묶여 있던 거대한 괴수가 풀려나며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것만 같았다.

그 기도에 맞서며 차이란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삶을 포기하는 그녀도 아니었다.

그녀가 비수를 꺼내 들었다. 예리하게 빛나는 비수는 그녀의 눈빛을 닮아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일교와 다른 살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려 두 사람 주위에 내려섰다. 그녀들이 모두 자신들의 암기를 꺼내 들었다.

백자강의 강력한 기도에 모두 죽음을 예감했지만 두려워서 달아나는 여인은 없었다.

스르릉.

백자강의 검이 뽑혀 나오던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이이익.

빛처럼 빠르게 날아온 누군가가 두 사람 사이에 내려섰다.

쾌속보로 달려온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그의 등장에 차이란은 깜짝 놀랐다. 이 순간에 검무극이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살수들도 놀랐다.

아직 백자강의 검은 다 뽑히지 않은 상태였다.

“다행히 검을 다 뽑으시기 전이네요!”

검무극의 안도에 백자강이 물었다.

“내가 이 여인을 죽일까 봐, 이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건가?”

검무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

단 한마디 대답이었지만, 차이란의 얼굴에 살짝 격정이 스쳤다. 친구라던 화도명도 나서지 않고 있었는데, 적인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 나선 것이다.

검무극은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백자강의 그 작은 눈 속에서 어떤 의도를 읽어냈다.

―설마? 제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검무극의 전음에 백자강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의미심장한 표정이 이렇게 말했다.

역시, 자네는 내 뜻을 알아주는군.

검무극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백자강은 자신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검을 뽑아 들었다는 것을.

애초에 백자강은 그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원래는 궁금한 것을 묻고 그냥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검을 뽑아 들려 한 이유는.

그녀가 자신에게 목숨 빚을 지도록 해주기 위해서.

심지어 수하들까지 모두 나서게 해서 그녀들의 목숨까지 모두 구해주게 해주려고.

그래, 그는 자신이 차이란을 맡기로 한 상황에서 함부로 끼어들어 그녀를 죽여버릴 만큼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죽이더라도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죽일 사람이었으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러자 백자강도 전음으로 답했다. 과연 검무극의 예상은 정확했다.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나?

―네, 판도를 바꿀 만큼요.

―그럼 됐네.

이제 전음이 아니라 모두가 들으라고 큰소리로 백자강에게 부탁했다.

“저를 봐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죽이겠다는 여인을?”

“제 얼굴을 봐서 한 번만 참아주십시오.”

백자강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자네에게 진 지난 빚은 이걸로 갚는 걸로 하지.”

사실 이렇게 말해주는 게 더욱 확실히 그녀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었다.

“네,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은 고개 숙여 인사하며 백자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말 멋지십니다!

―자네 아버지보다 더?

―…….

―멋지다는 말은 그때나 하게.

마음속 경쟁자가 누군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후 백자강은 성큼성큼 걸어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는 이제 네 차지라는 듯, 차이란과 살수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흑의 무복이 더욱 멋있어 보였다. 여기 차이란은 그를 죽이려는 살수다. 후환을 남기기 싫어하는 그가 이렇게까지 양보해준 것이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백자강이 완전히 떠나자 살수들 사이에 팽팽하게 감돌았던 긴장감이 풀어졌다. 아까 잡혀 있을 때만 해도 극악소마에게 죽는다 생각했다가 이번에는 사도맹주에게 죽을 뻔한 것이다.

차이란이 눈짓으로 명령을 내리자 일교가 살수들을 데리고 멀리 물러났다. 물러나기 전에 그녀들은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도맹주 덕분에 그녀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되었다.

차이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왜 나를 살렸죠? 내가 죽으면 모든 게 깔끔해질 텐데. 심지어 자기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이요.”

그제야 검무극은 차이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결국, 내가 골라준 옷을 입게 되었소.”

그녀는 상점에서 검무극이 골라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골랐었는데, 이제 옷을 버렸으니 자신이 골라준 옷을 다시 사 입어야 한다는 농담이었다.

차이란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어휴, 이 먼지.”

검무극이 기도와 살기들이 충돌하면서 주위에 피어오른 먼지를 손으로 휘저었다.

“우리 좀 걸읍시다.”

폐허가 된 그곳은 대화를 나누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후원을 향했다. 후원에 작은 화원이 있었다.

“많이 긴장했을 텐데, 좀 앉으시오.”

검무극이 먼저 화원 앞에 놓인 널따란 바위에 앉았다. 차이란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꽃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의 긴박함이 무색하게도, 꽃은 세상사 무심하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참, 물어볼 사람이 있소.”

“누구 말이죠?”

“얼굴에 화장한 남자가 천화루주 앞에 나타났었소.”

순간 차이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사실은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사도맹주를 죽이지 않으면 무림이 멸망할 거란 말을 전하고 갔소.”

화도명은 그래놓고선 자신을 만나서는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뭔가 속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백자강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에게는 그에 대해 말했다. 매번 구경꾼이라고 스스로를 격하하지만.

“그는 조직에서 중요한 사람이에요.”

그랬기에 덧붙여지는 한마디.

“그 사람은 안 건드는 것이 좋아요.”

검무극이 스윽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나는 건드려도 될 거 같소?”

검무극의 그 심연처럼 깊은 눈빛에 차이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검무극이 농담이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오, 농담. 그대 충고는 잘 받아들이겠소. 무서운 놈은 미리미리 피해 다녀야지. 난 뱀이 숨어 있는 풀숲을 작대기로 뒤적이는 사람이 아니오. 괜히 들쑤시고 다니면서 사고 치는 사람도 싫어하고.”

차이란이 다시 물었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요. 왜 날 구해줬죠?”

“말했잖소? 내가 멋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차이란은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어야 그 사람을 떠나게 해줄 가능성이 커지니까.”

차이란이 기회다 싶었는지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기분이 좋진 않아요. 내가 꼭 그 사람을 위한 도구나 희생양이 되는 것만 같아서.”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도구나 희생양으로 사는 건 지금 아니오?”

정곡을 찔린 차이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검무극은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말을 이었다.

“어차피 되어야 한다면, 좋아하는 사람의 도구가 되고 희생양이 되는 게 낫지 않소?”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죠?”

“알만큼은 알지. 주사 있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이 뭔지도 잘 모르고.”

차이란은 결국 웃고 말았다. 너는 도구와 희생양이라는 기분 나쁜 말을 하면서 이렇게 사람을 웃게 하는 사람은 세상에 이 소교주밖에 없으리라.

“수하들도 엄청나게 아끼고.”

“왜 수하들을 아낀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생각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당신 수하들은 살행에 실패해 붙잡혀도 자결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니까.”

정말이지 소교주는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대는 정말 놓치는 것이 없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자결하지 않는 원칙, 당신이 실패해도 마찬가지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찔러온다.

“그렇다면요?”

“우리 약속 하나 합시다.”

검무극이 하려는 약속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약속이었다.

“내가 당신 살행을 막으면 내 청부를 받아주시오.”

그들을 떠나 자신과 손을 잡자는 말이었다. 같이 그를 떠나게 해주자는 제안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살행에 실패하고 나서도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으니까.

이렇게 검무극은 한 걸음 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 당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살려주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소.”

“당신 바보예요? 아니면 그 말을 믿을 정도로 날 바보로 여기는 건가요?”

하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정말 저 검무극은 살행에 실패한 자신에게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자, 이제 약속대로 나와 손잡읍시다!

아무런 뒤끝도 없이.

“내가 살행에 성공하면요?”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은 흩어질 듯 이어지며 서서히 바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역시 진심이라는 듯 검무극이 담담히 대답했다.

“먼저 지옥에 가서 기다리겠소.”

당신이 그때 그 살수냐?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나요?”

차이란은 사도맹주가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을 검무극에게 똑같이 던졌다.

먼저 지옥에서 기다리겠다는 그 말이 진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렵소.”

천마신교 소교주쯤 되면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대답할 것 같았는데.

하지만 검무극은 진심이었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나는 불안증이 있는 사람이오. 온갖 일들을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인데 죽음이 어찌 안 두렵겠소? 내 죽음도 두렵고 주위 사람들 죽는 건 더 두렵소. 아까 나보고 바보냐고 물었소? 바보 맞소. 인연을 늘여갈수록 걱정도 늘어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죽으면 안 될 사람들을 자꾸 늘려가고 있으니까.”

그러면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검무극에게 차이란이 물었다.

“그 죽으면 안 될 사람에 저도 포함되었나요?”

놀랍게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그 사람이 날 보고 이러면? 야, 너는 명색이 마교 소교주이면서 나 좋아한다는 여자 하나 못 살렸냐? 대체 뭐 했냐? 그럼 난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 거요. 앞으로 그 사람에게 잘난 척도 못 할 테고.”

너무나 단순한 이유였기에 오히려 와닿는 이유기도 했다.

“남자들 사이에 그런 의리가 있소. 친구 여자는 지켜줘야지 하는. 비록 당신은 반쪽 여자긴 하지만.”

반쪽 여자란 말에 차이란은 실소했다. 자신만 악군학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고 반쪽 여자라니?

“이 무림에서 남자들이 일찍 죽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이란은 느끼고 있었다. 옆에 앉은 이 소교주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화원의 꽃들을 바라보며 차이란이 대답했다.

“당신이 바보인지 미친놈인지 생각 중이에요.”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목숨을 구해줬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확실히 그녀가 마음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있소?”

“어떤 시간요?”

“살행이 있기까지 시간 말이오.”

살행은 내일로 정해져 있었다. 자정까지 불과 몇 시진도 남지 않았다.

“그건 왜 묻죠?”

“시간이 남았다면 마지막으로 저녁이나 같이 먹읍시다.”

“일단 미친놈은 확실하네요.”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과,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화원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이 싣고 온 노을이 화원에 번져나갔다. 꽃들은 지켜보는 두 사람에게 새로운 빛깔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그 모습에 감탄하는 검무극을 보며 차이란은 내심 생각했다.

원래는 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꽃이 아니라 자신의 얼굴을 보며 넋을 놓고,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에 빠져들어야 하는데.

계속 끌려다니는 건 자신이다.

“밥 먹으러 갑시다, 내 부탁이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주시오? 그리고 내가 어디 그냥 사람이오? 자그마치 생명의 은인 아니오? 나라고 사도맹주님이 안 무서웠겠소? 어디 그뿐이오? 당신이 취해서 토하고 기어 다닐 때…….”

그녀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올 동안 기다려요.”

* * *

옷장에는 화려한 옷들이 여러 벌 걸려있었다.

무엇을 입을까 고르던 차이란의 시선이 옷장 구석을 향했다. 그곳에 흑의 무복이 개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차이란이 무복을 손에 들며 말했다.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야?”

그러자 뒤쪽에서 화도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왼쪽에 걸려있는 붉은 궁장이 괜찮지 않나?”

하지만 차이란이 탁 소리 내며 옷장을 닫았다.

“화났어?”

“화는 무슨. 당신 겁쟁이인 거야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는데.”

“화났군.”

“옷 갈아입을 거야. 돌아서.”

화도명이 뒤를 돌아섰고, 차이란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사도맹주는 당신을 안 죽였을 거야. 사도맹이 소교주에게 진 빚이 많거든. 은원이 확실한 그가 함부로 당신을 죽였을 리 없지.”

차이란은 말없이 옷만 갈아입었다.

“이번 계획은 다 계산된 거야. 그러니 널 버렸다는 오해는 하지 마.”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지금 화났잖아!”

그래,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 화가 난 이유가 화도명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도우러 나서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이 화가 난 이유는…….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가 구슬이 든 상자까지 품에 챙겨 넣었다.

“다녀올게.”

그때 화도명이 말했다.

“가지 마.”

화도명은 돌아보지 않은 채 그녀에게 말했다.

“넌 소교주에게 설득될 거야. 악군학이 설득된 것처럼.”

차이란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도명이 돌아보았을 때, 차이란은 이미 방을 나간 후였다.

그는 곧장 방을 나가지 않았다.

짙은 화장 때문에 그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쉬움이나 분노는 아니었다.

촤아악.

그는 탁자에 발을 올리고 앉은 채 살랑살랑 부채질하며 창밖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았다.

* * *

차이란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검무극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올까 말까 백 번쯤 고민하다가 다가온 사람은 바로 십칠교였다.

“소교주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아까 사도맹주와 대치했을 때, 십칠교는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딱 한 가지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을 구해준 그 초승달 무면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쉬웠다. 정말 놀랍게도 그때는 그가 생각났다.

그래서 이렇게 용기를 낸 것이다.

“무면객 분 중에서 초승달 그림이 그려진 분께 이 비수와 함께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말씀 못 전해드릴 거 같아서요.”

십칠교가 공손히 비수 한 자루를 건넸다. 고마움의 표시로 무면객에게 주려는 것이다.

검무극은 비수를 곧장 그녀에게 되돌려주었다.

아차하는 마음에 십칠교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가 귀한 분께 무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소교주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거였다.

‘내가 미쳤지.’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소교주가 가기 전에 말을 전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심지어 차이란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소교주에게 바로 부탁을 했으니. 자신을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중에 직접 전해주게.”

십칠교가 놀라 고개를 들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이 다 끝나고 나면 직접 만날 기회를 줄 테니, 그때 직접 주면서 말하게.”

십칠교가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그녀가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뛰어서 돌아갔다. 가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더 제대로 했어야지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당황한 상태였다.

곧이어 그곳으로 차이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정말 만나게 해줄 건가요?”

“만나게 해줄 거요.”

이해할 수 없다는 그녀의 표정에 검무극이 이유를 밝혔다.

“살면서 언제 소교주 주선으로 무면객을 따로 만나볼 일이 있겠소? 무면객은 또 언제 살수에게 감사 인사를 받아볼 일이 있겠소? 내가 입 한 번만 놀리면 남들은 평생 하지 못하는 그런 경험을 하게 해줄 수 있지 않소? 그런데 안 만나게 할 이유가 있소?”

차이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없는 마음이고 생각이었으니까. 자신이 검무극이었다면,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결과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건방지게 내게 말을 전하게 해? 라고 화를 냈거나. 전해주겠다고 말하고서 잊어버렸거나. 그래, 어쩌면 기분 좋게 전해줬을 수도 있고.

한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고? 그래, 자신의 세상에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 일 어찌 알겠소? 저 두 사람이 눈이 맞아 야반도주해서 달아나고, 그리고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지. 나와 당신의 사람들이니까, 손을 흔들어주었을 때 그들은 자결하지 않고 웃을 것이오.”

그건 자신의 세상 속 꿈에서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검무극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은 거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요.”

“살아 있을 거요. 우리도, 저들도. 그러려고 계속 애쓰고 있는 거니까.”

말만 하는 게 아니었다. 극악소마가 가인교 살수들을 모두 살려준 것도 방금 말한 애쓰고 있다는 것에 포함될 테니까.

“오늘 밥은 제가 사죠. 목숨도 구해줬으니.”

“비싼 밥으로 사주시오. 긴장해서 그런지 고기가 먹고 싶소!”

그녀가 먼저 걸어 나갔고 검무극이 뒤따라 나갔다.

“옷이 잘 어울리오.”

차이란이 더욱 걸음을 빨리하며 대답했다.

“지금 입을 만한 옷이 없었을 뿐이에요.”

* * *

두 사람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을 때만큼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날씨 이야기를 했고, 좋아하는 계절 이야기를 나눴다. 나온 요리를 두고 이 요리를 정말 잘하는 곳이 어디에 있다, 아니 다른 곳이 더 맛있다, 논쟁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식사를 마쳤다.

“덕분에 맛있게 먹었소.”

“다행이네요.”

그녀도 정말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긴장하지 않고 밥 먹고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으니까.

“자, 이제 마음이 바뀌었소?”

차이란이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며 되물었다.

“밥에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약이라도 탔나요?”

“탔소. 이제 슬슬 효과가 나타날 때가 되었는데.”

검무극의 농담에 차이란이 옅게 웃었다.

이미 약효는 충분히 나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는 갈등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조직을 배신한다고? 적에게 회유당해서?

검무극의 말에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말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으니까.

문제는 검무극이란 사람에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저 맑고 깊은 눈빛에. 다른 세상 속 그의 진심에.

거기에 하나 더.

악군학이 컸다. 그 멋진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뭔가 굉장한 사람이겠지. 이런 마음이 영향을 미쳤으니까.

그러고 보니 악군학과 관계에서는 자신이 검무극을 보는 것과 검무극이 자신을 보는 것은 딱 한 글자만 달랐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차이란이 차분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은 살수가 청부를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요?”

적어도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수로 죽었던 그녀였으니까.

“어떤 의미요?”

“우선 살수로서의 평판을 잃게 되겠죠. 사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평판이랄 것도 없지만.”

“당신 마음에 세운 평판은 있겠지요.”

검무극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어요. 청부를 포기하면 청부금액을 두 배로 돌려줘야 해요. 이번 청부금이 워낙 막대하니, 평생 벌었던 돈을 다 써야 돌려줄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죽이려 들 거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은 순순히 그녀를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악군학을 보내주지 않듯.

“반대로 제가 얻는 건…….”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악군학 흉내를 냈다.

“어? 당신이 왜 나를 구하는 거지?”

말하고도 우스웠는지 그녀가 웃었다.

그 허탈한 웃음에 검무극이 한 가지를 채워주었다.

“대신 얻게 되는 게 있소.”

“뭐죠?”

“나요. 당신이 얼마나 애썼는지 그 사람에게 말해줄 나. 설령 그가 떠나더라도, 나는 남아 있을 거요.”

순간 차이란은 아무 말 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래, 어떤 의미이든 천마신교 소교주를 얻는 것은 분명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마음이 언제까지 갈까?

“처음에는 나를 보고 웃겠지만,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그렇게 나를 볼 때마다 배신자라는 생각이 들 거예요. 저 여자, 한 번 배신했는데 또 배신할 거야.”

검무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우린 그렇게 자주 볼 기회도 없을 거요. 내가 워낙 바빠서. 그냥 오랜만에 봐서 좋은 관계가 유지될 거요. 아마 어떤 분이 와서 당신에게 이런 말도 할 거요. 당신이 그때 그 살수냐? 꿈 깨라, 소교주는 널 버렸다.”

왠지 진짜 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청부 포기할 필요 없소.”

검무극은 그녀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었다.

“나와 약속만 잊지 마시오.”

살행에 실패하면 자신의 청부를 받아달라는 약속이었다.

차이란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그렇게 염치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면, 나를 잘못 봤어요.”

차이란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언젠가 그들과 결별할 날이 올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항상 그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었죠. 그게 이번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결정을 내렸다.

“이번 청부는 포기하겠어요.”

배신이 아니라 포기였다. 그들에게 특별한 충성심이나 고마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살수로 그들을 상대했으니 그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고맙소. 당신이 이 선택을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소.”

이제 그녀는 검무극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밝혔다.

“원래 제 임무는 축하연회에서 사도맹주를 죽이는 것이었죠.”

앞서 사도맹주의 기도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노출된 살수일 때고, 이제 막 천하제일미가 된 여인으로 그의 앞에 섰을 때는 상황이 또 달랐을 것이다.

“한데 당신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임무가 내려왔어요.”

그녀가 품에서 구슬이 든 상자를 꺼냈다.

“이걸 당신이 가져가게 하라고 했죠. 단, 조건이 있었어요. 이쪽에서 의도해서 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당신 손에 들어가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죠. 두 번이나 당신에게 가져갈 기회를 줬지만, 당신은 손도 대지 않았지만요.”

만취한 그 날도, 옷을 갈아입던 그 날도 검무극은 구슬을 욕심내지 않았다.

“이것도 그들에게 돌려줘야겠죠.”

그녀가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구슬의 붉은빛은 투명하면서도 깊었다.

그 내부에 혈맥처럼 뻗어있는 것들 주위로 뭔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비궤가 앞서보다 더 강력하게 반응했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륵.

상자에 들어 있던 구슬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망은 당신이 가야 하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슬이 혼자서 움직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비궤는 구슬에 반응하고 있었다.

우우웅.

‘진짜 기운이다.’

지금까지 비궤가 흡수했던 그 기운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들이 가져온 구슬에 호의가 담겨 있을 리는 없다.

“다시 넣어야 하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구슬을 넣으려던 그 순간.

구슬이 홱 하고 차이란에게 날아갔다.

고민하고 말고 할 사이도 없이 차이란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구슬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깨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지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받아들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내내 품에 가지고 다녔던 구슬이었고, 돌려줘야 할 구슬이었기에 본능은 그걸 피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깜짝 놀라 검을 뽑으려 했지만, 차이란이 손을 들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구슬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상자 속에 있는 것만 봤지, 이렇게 구슬과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섬뜩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그건 적정의 기운이었다.

검무극이 다시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구슬을 재빨리 상자에 다시 넣으려 할 때 이번에도 구슬이 먼저 반응했다.

차라라라라락.

구슬에서 한 줄기 붉은 기운이 실처럼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휘감은 것이다.

“괜찮아요.”

아직까진 기운은 우호적이었다. 전혀 자신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손목을 휘감은 붉은 실은 마치 자신을 탐색하듯 천천히 손목에서 팔을 휘감으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차이란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천천히 비수를 꺼내 들었다.

검무극도 언제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손에 올려진 구슬을 낚아챌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구슬과 그녀를 이어준 기운을 단번에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팔을 타고 올라간 기운이 그녀의 어깨를 지나 목을 한 차례 휘감으려 할 때, 그녀가 다른 손으로 그 기운을 살짝 밀어냈다.

팔을 감는 건 좋지만 목을 감는 건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였다.

바로 그 순간.

마치 화난 것처럼 구슬에서 흘러나왔던 실 같은 기운이 부풀어 올랐다.

쑤우우우욱!

팔을 휘감았던 기운이 더욱 뻗어 나와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뱀처럼 휘감았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구슬과 연결되어있었다. 마치 뿌리를 구슬에 둬야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도 괜찮았다. 여전히 기운은 우호적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기운 속에 뭔가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검무극과 차이란은 보았다.

그 붉은 기운 속을 뭔가가 빠르게 헤엄치며 지나가는 것을.

휘리리릭.

다시 붉은 기운을 한 바퀴 돌아온 그것을 이번에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뱀이었다. 뱀처럼 온몸을 휘감은 붉은 기운 속을 진짜 뱀이 다니고 있었다.

손가락 길이의 아주 작은 뱀이었는데, 색깔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뱀은 붉은 기운 속을 물처럼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붉은 뱀이 나오자 몸을 휘감은 붉은 기운의 성질이 바뀌기 시작했다. 더없이 부드럽던 붉은 기운이 한 차례 크게 요동치는가 싶더니.

꽈아아아악.

그녀를 옥죄기 시작했다.

차이란이 비수로 그 기운을 베었다.

하지만 기운은 잘리지 않았다. 검날은 연기를 지나가듯 그저 지나가 버렸다.

‘저 뱀을 잡아야 해!’

그녀가 빠르게 지나가는 뱀을 노렸다. 너무 빨라서 베기가 쉽지 않았지만.

‘다음 차례에 벤다!’

쉬이익! 서걱!

허리 앞쪽을 감고 있는 기운을 지나가는 뱀을 비수가 정확히 잘라냈다.

스스스스.

하지만 잘렸던 뱀은 순식간에 다시 합쳐지며 원래의 모양이 되어 붉은 기운을 헤엄쳤다.

검무극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소용없소. 저건 진짜이면서 가짜인 뱀이오.”

검무극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암흑궁임을 알고는 미리 공부하고 조사했던 것에 이 무공이 있었으니까.

“저 뱀은 비혈사(飛血蛇)요.”

저 뱀을 지칭하는 말이자 하나의 비술을 뜻하는 말이었다.

암흑궁의 비혈사.

사람의 몸에 침투해서 정신을 지배하는 그들만의 독문비술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방식에는 크게 섭혼술과 고독술(蠱毒術)이 있다.

하지만 비혈사는 그 두 가지를 합친 비술이었다.

한 마디로 살아 있는 비술.

고독이 사람의 뇌로 침투해서 사람을 지배한다면, 비혈사는 심장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지배했다.

고독은 만독불침에게 통하지 않았고, 또한 그 고독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면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비혈사는 아니었다. 만독불침도 막을 수 없었고 해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단지 사술만이 아니었기에 사술에 강한 상대에게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야말로 검무극에게 최고의 효과를 지닌 비술이 발휘된 것이다.

물론, 비혈사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평생 노력해도 한 마리의 비혈사를 만들기가 어렵다고 알려진 그것이었다. 만드는 과정이 너무 어렵고 막대한 돈이 드는 데다, 설령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살려서 보관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암흑무공의 천재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비술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그 무공이 등장한 것이다.

차이란은 비혈사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게 가까이 오지 마세요! 함정이에요!”

놈들이 자신을 죽이려 할 리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임을.

저들은 애초에 그녀에게 구슬을 맡길 때부터 이 상황을 예측했으리라.

그러는 사이에도 붉은 기운은 자신의 몸을 더욱 강하게 칭칭 감았다.

“내가 당신을 죽일 거예요. 어서 달아나세요!”

이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에게 흡수되면 자신이 검무극을 죽일 거로 생각했다. 광기에 휩싸여 엄청난 내공을 발휘할 것이다. 소교주를 상대하기 위한 암계이니 엄청난 위력일 테고.

그녀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졌다. 붉은 기운은 그녀의 몸이 바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압박해왔다.

그때 검무극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도망은 당신이 가야 하오.”

차이란은 검무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이 다시 그녀에게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아까 화도명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소교주에게 설득될 거야. 악군학이 설득된 것처럼.

그는 자신이 소교주와 손을 잡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 계획은 다 계산된 거야.

그래,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이것까지 계산한 것이다.

‘소교주가 나를 구할 거라는 것도!’

화도명은 검무극이 자신을 구할 것을 알고 구슬을 맡긴 것이 틀림없었다.

검무극이 순순히 이 구슬을 흡수하지 않을 것을 알고서는. 어쩔 수 없이 흡수하게 하려고.

검무극에게 농담 반 진담으로 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정말 내가 놈들의 도구였어.’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진 것은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다.

점차 강해지는 압박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자신의 호신강기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온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차이란은 검무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먼저 지옥에 가서 기다릴게요.”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비수를 자신의 목에 찔러넣었다.

쉬이익.

절대 자결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원칙을 깬 것이다.

죽으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임에 감사했다. 사도맹주에게 죽음을 예감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이 죽음도 그렇고. 그래, 이런 죽음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을 두고 볼 검무극이 아니었지만.

비수는 그녀의 목 앞에서 멈췄다.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그녀의 비수를 멈춘 것이다.

“…… 나를 위해서 죽게 해줘요.”

물론 검무극에게 통하지 않는 부탁이었다.

“잊었소?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야, 너는 명색이 마교 소교주이면서 나 좋아한다는 여자 하나 못 살렸냐? 대체 뭐 했냐? 이보시오, 반쪽 여인.”

검무극이 그녀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를 믿으시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무극이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구슬을 자신이 움켜쥐었다.

그러자 구슬에서 나간 붉은 기운이 더욱 진동하며 그녀를 옥죄었다.

검무극이 구슬을 자신의 품 안에 넣었다.

차이란에게는 그 모습이 마차 구슬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마치 희생은 내가 하겠다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녀는 애타게 소리쳤다.

“안 돼! 제발…… 안돼.”

하지만 구슬은 심장이 아니라 품에 넣어둔 비궤에 닿았다.

바로 그 순간.

길게 기운을 뻗어낸 구슬이 한차례 크게 진동했다.

스스스스스슷.

차이란을 감싸고 있던 기운이 풀어지면서 다시 구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구슬이 내뻗은 기운들을 모두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회수되는 기운에 붉은 뱀도 함께였다.

품 안의 비궤가 한바탕 진동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무극의 몸도 함께 올랐다.

비궤가 언제나 마찬가지로 구슬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원래도 구슬 밖을 넘나들던 기운이었는데, 새롭게 정제하듯이 하나도 남김없이 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궤에서 다시 흘러나온 기운이 검무극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그 기운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비궤를 거친 기운은 검무극의 몸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기운 속에 녹아 있던 비혈사가 다시 뱀의 모습으로 합쳐지면서 검무극의 몸속으로 함께 흡수되었다.

모든 기운을 흡수하자 비궤에서 툭 하고 구슬이 튀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놈들이 비혈사를 자신에게 심기 위해서 적정을 이용했다는 것을.

아마도 놈들이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면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몸속에 있는 기운들을 모두 회수해 가려 할 것이다. 그들이 이 기운을 포기할 리는 없었으니까.

어쨌든 덕분에 검무극은 적정의 기운까지 얻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하나, 몸에 들어와 있는 비혈사!

몸속에 있던 기운이 일제히 깨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비혈사에 대한 거부반응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혈맥을 휘도는 다섯 갈래의 기운 속에 비혈사도 함께 있었다.

비혈사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어떻게든 검무극의 심장으로 파고들려고 기회를 노렸다.

검무극은 내력을 운영하며 그것을 막아내려고 애썼다.

정신을 잃었을 큰 고통을 받았지만, 차이란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검무극을 도우려다가 멈춰 섰다.

“소교주!”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은 몸속에서 지금 그 붉은 뱀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남이 함부로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이겨내요!”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뒤에서 마혈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소교주는 절대 못 이겨.”

등 뒤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그는 바로 화도명이었다.

이제 막 옥죄던 기운에게서 풀려난데다가 검무극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녀는 화도명의 기습을 막지 못했다.

“정말 소교주는 기운을 흡수할 줄 아는군.”

마치 그 사실을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도명의 시선이 다시 차이란을 향했다.

“고생했어, 친구.”

차이란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화도명은 무섭다는 듯 부채를 펴서 그 뒤에 얼굴을 숨겼다. 부채 뒤에서 그의 말이 흘러나왔다.

“천마호신공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비혈사를 소교주의 몸에 심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우리도 큰 미끼를 던지기로 결정했고.”

그 미끼는 차이란이기도 했고, 적정이 담긴 구슬이기도 했다.

“아무리 소교주라도 비혈사는 막지 못해.”

화도명이 빼꼼히 부채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화도명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반면 그를 바라보는 차이란의 감정은 명확했다.

경멸과 분노.

“악군학 이야기도 일부러 꺼냈지?”

처음 자신에게 악군학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화도명이었다.

악군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더 소교주와 가까워지게 하려고.

화도명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긍정의 미소였다.

“소교주는 자신의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청부를 포기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사람이 아니거든.”

차이란은 분노했고 절망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봐, 친구.”

“미안하게 아직도 나를 친구라 부르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내게 이러면 안 되지 않아?”

“내가 아까 소교주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고작 생각한 변명이 그거냐?

차이란은 그 말을 내뱉고 싶을 것을 애써 참았다.

“왜 나를 믿지 못한 거지? 청부를 거절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는데. 내게 기회를 줬어야지.”

화도명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 소교주가 대단하긴 하네. 당신이 이런 거짓말까지 하게 하는 걸 보니.”

그동안 친구라면서 내 옆에서 살랑살랑 부채질해줬던 이유가 이날을 위해서였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또 참았다.

“이대로면 죽어도 눈을 못 감아. 내 마지막 청부는 내 손으로 하게 해줘.”

어떻게든 검무극을 살릴 생각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하지만 화도명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날 보지 말고 저길 봐. 무림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니까.”

검무극은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격렬하게 움직였다. 몸속에서 비혈사와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비혈사가 소교주를 완전히 지배하면…….”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흘러나왔다.

“소교주가 사도맹주를 죽일 것이다.”

촤아악.

화도명이 부채를 펼치며 살랑살랑 그녀를 부쳐주었다.

“네 청부는 성공이야.”

차이란은 눈을 감은 채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를 믿으시오.

당신 때문에 청부까지 포기했는데 믿어야지. 그래, 청부는 포기해도 당신은 포기 안 해.

“청부 성공이라고?”

차이란은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물었다.

“돈은 안 돌려줘도 되지?”

지옥에서 꺼내 줄 사람은

“아직도 소교주를 포기하지 않았군.”

화도명은 차이란의 농담을 그렇게 해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은 안 돌려줘도 되겠네, 라는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자신에게 저렇게 매혹적으로 웃는다?

“솔직히 당신이 안 넘어가길 바라기도 했어.”

화도명이 천천히 걸어가서 검무극 앞에 섰다. 눈을 감고 있는 검무극은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오래 버티는군. 지금쯤이면 비혈사가 소교주의 심장에 자리 잡았을 시간인데.”

촤아악.

화도명이 부채를 펼쳐서 검무극의 얼굴을 부쳐주었다.

그때 뒤에서 차이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남은 술, 마저 마시고 싶은데.”

그녀는 마혈이 제압당해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도명이 지풍을 날려 움직일 수 있도록 혈도를 풀어주었다. 물론 내공은 여전히 제압한 상태였다.

차이란이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검무극과 식사하면서 함께 주문했던 술이었다. 두 사람은 반점의 특실을 빌려서 식사했고, 식사를 마친 직후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화도명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근사한 식사는 했네.”

이 일이 끝나면 두 사람을 모두 죽이겠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이 없자 화도명이 슬쩍 차이란을 돌아보았다. 빠른 포기를 했는지 그녀는 살려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싸울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말없이 술을 마시며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앞서 장원 화원에서 검무극과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청부를 포기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신화방주가 채 일각도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모습에 내심 웃었는데,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해?”

화도명의 물음에 차이란이 다시 술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해.”

차이란은 그를 무덤덤하게 대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잘 알 듯, 자신도 화도명에 관해 잘 안다.

언제나 부끄러운 척 부채 뒤에 숨는 그였지만, 그는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이 성공의 순간 자신이 보내는 인정과 갈채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주지 않을 거다.

그녀가 죽음을 각오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화도명은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악군학이 비궤를 회수해 왔을 때…….”

입술로 가져가던 차이란의 술잔이 허공에서 멈췄다.

“노인네는 정말 기뻐했지. 그것만으로도 검무극을 죽이지 못하고 돌아온 것을 만회하고도 남았지. 하지만 그가 가져온 비궤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이었다.”

비궤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검무극에게 도움이 될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 기울여 들었다.

“저 소교주에게 또 당한 거지.”

차이란이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구슬에 담긴 그 붉은 기운은 뭐였어?”

처음 느꼈던 기운은 정말 느낌이 좋았다. 붉은 뱀이 나오면서 성질이 바뀌었지만.

“멸망을 막을 힘이지.”

또 화도명의 입에서 멸망이란 말이 흘러나왔다.

“누구로부터? 사도맹주로부터?”

화도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오늘로 다 끝이다.”

* * *

비혈사는 검무극의 전신 혈맥을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놈은 좁은 동굴을 빠르게 헤엄치는 물뱀처럼 유연했다.

비혈사에게서 느껴지는 힘과 생동감은 눈으로 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놈에게는 온갖 무림의 영약과 기화이초, 온갖 기물의 신비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이것을 죽여 녹여낼 수만 있다면 지금껏 복용했던 그 어떤 영약보다 강력한 기운을 얻게 되리란 것을 느꼈다. 잡을 수 있다면 말이다.

놈은 빨랐다.

샤샤샤샥.

빠르게 혈맥을 누비며 오직 심장만을 노렸다.

검무극은 심장으로 향하는 주요 혈맥을 내력으로 막았다. 웅혼하고 정순한 검무극의 내공은 심장을 수호하듯 감쌌다.

혈맥을 타고 빠르게 헤엄쳐 달려온 비혈사가 심장을 지키던 내력과 충동했다.

혈맥에 충격이 오면서 검무극이 이를 악물었다. 되돌아가는 놈을 내력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놈은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사사사사삭.

마치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꾸라지처럼 검무극의 내력을 빠져나가 다시 혈맥을 헤엄쳤다.

문제는 이놈만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었다.

몸속에서는 비궤로 흡수한 다섯 개의 기운이 혈맥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온몸을 휘젓고 다니는 비혈사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달래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비혈사를 완전히 녹여버려야만 이 다섯 기운이 다시 가라앉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야말로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심장을 지키는 수성전을 펼쳐야 하고, 또 체포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콰아악!

두 번째 충돌은 앞서보다 더욱 강력했다. 검무극이 다시 이를 악물었다.

만약 천맥강화술로 혈맥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그동안 여러 기연으로 더욱 웅혼하고 정순한 내공을 쌓아두지 않았다면, 이 충돌 한 방으로 뚫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붙잡으려고 했지만 비혈사는 다시 빠르게 빠져나갔다. 이번에는 내력을 보내서 비혈사를 추격했다.

놈의 똑똑했고 생존 욕구도 강했다. 내력의 추격을 피해 몸속의 수많은 혈맥 사이를 오가며 살길을 찾았다.

놈은 주로 내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혈맥으로 달아났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달아날 수 있는지를.

세 번째 공격에는 검무극이 포위 작전을 펼쳤다.

내력을 일제히 보내서 사방에서 놈을 죄어갔지만, 이번에는 몸속을 휘젓는 다섯 기운을 이용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비혈사가 달아나는 길은 대부분 진기를 역행하는 길이었는데, 그중에는 갈 수 있었는데 미처 가볼 생각을 못 했던 혈로(穴路)도 있었다.

‘아! 이런 길도 있었구나.’

비혈사가 살기 위해서 알려주는 길들은 그 절박함만큼이나 검무극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길이기도 했다.

다시 한 바퀴 돌고 온 비혈사가 다시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 번,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위험천만한 상황도 펼쳐졌지만, 검무극은 잘 막아냈다. 계속 반복될수록 검무극이 새롭게 알게 되는 혈로들이 생겼다.

비혈사는 지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수십 년에 걸쳐 어렵게 만들어졌다고?

미안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얼마든지 와 봐!’

* * *

드디어 검무극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화도명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뒤쪽에 선 차이란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운명이 결정되던 그 순간!

화도명의 입에선 기쁨의 탄성이, 차이란에게서는 절망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검무극의 두 눈은 완전히 붉은 기운으로 물들어 있었다.

“됐다! 비혈사가 완전히 소교주를 지배했다.”

차이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 검무극이 이겨내리라 믿고 있었는데.

‘당신 믿으라면서!’

그녀는 절망했고 화도명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검무극의 두 눈에 피어오르던 붉은 기운은 이내 사라졌다.

곧이어 원래대로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차분한 눈빛으로 화도명을 응시했다.

화도명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감격이 벅차올랐다. 소교주를 제거하는 일에 모두가 실패했는데, 자신은 소교주를 손아귀에 넣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린 이 한 번의 기회만을 기다렸다. 넌 결국 우리 일을 대신 해 준 종놈에 불과해.”

검무극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화도명이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사도맹주를…….”

그때 차이란이 그의 말을 끊었다.

“소교주가 사도맹주를 죽이면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렇겠지.”

차이란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 입이나 부채로 막고 다녀.”

화도명은 부채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검무극에게 명령을 마저 내렸다.

“사도맹주를 죽이고 내게 돌아오도록.”

검무극이 천천히 돌아섰다.

화도명은 차이란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이제 마지막 잔 하지?”

계획이 성공하게 된다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그녀는 배신할 거고, 배신자는 제거하고.

차이란은 말없이 화도명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무극의 등을 쳐다보았다.

마지막까지 열받게 하는 그녀였다.

화도명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마지막까지 소교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를 죽이려던 그때.

화도명은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모습을. 무엇인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번쩍임을.

쉬이이이익.

화도명이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푸우우욱!

그의 어깨를 흑마검이 꿰뚫었다.

마지막 순간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심장이 꿰뚫렸을 한 수였다.

문을 향해 걸어가던 검무극이 소리 없이 돌아서서 그를 공격했다.

사용한 한 수는 풍신사보 중 명왕보.

어깨를 관통당한 화도명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사도맹주를 죽이라니까.”

검무극이 명령을 잘못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곧장 반격도 하지 못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보고 다시 그를 보내야 했으니까.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든 비혈사는 당대에는 두 번 다시 만들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네 주인…….”

검무극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화도명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전율했다.

눈동자에 담긴 저 여유는 열 마리의 비혈사라도 결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설마…… 비혈사가 안 통한 거냐?”

검무극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적정에 비혈사까지. 둘 다 잘 먹었다.”

말을 끝낸 검무극이 검을 뽑았다.

파아아악!

그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검무극은 그가 상처를 지혈하는 데에도 그냥 두었다.

“살려줄 때 꺼져라.”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인데도 자신을 살려주겠다는 말이었기에 화도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방심하게 해서 기습하려는 거라 여겼다.

검무극이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감사는 차 소저에게 해. 그녀가 널 죽이지 말라고 했으니까.”

실제로 그녀는 화도명을 건들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정말 이 순간에 그를 살려줄 줄은 차이란도 몰랐다.

화도명이 차이란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지 못했기에 말없이 화도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아악.

부채가 펼쳐지면서 화도명이 사라졌다.

차이란에게 목숨 빚을 지게 해주는 것 같았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다.

화도명이 방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자.

쨍그랑.

바닥에 흑마검을 떨어뜨리며 검무극이 왈칵 피를 토했다.

“소교주!”

그녀가 검무극을 부축하던 그 순간.

검무극의 두 눈이 다시 붉어지려 하고 있었다.

차이란이 검무극의 팔을 꽉 잡았다.

“정신 차려요!”

간신히 검무극이 붉은 기운을 밀어냈다. 비혈사는 아직 완전히 제어하지 못한 상태였다.

“심장 반쪽만 내어준 상태요.”

내어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심장 반을 감옥으로 삼아 유인한 것이었다. 놈을 잡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장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기에 앞서 화도명을 죽일 다음 수를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비혈사에게 완전히 심장을 내어줬을 것이다. 첫 명왕보도 그녀를 구해 무리하게 펼쳤던 한 수.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조용히 그냥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사도맹주를 죽이러 가는 것처럼 나간 후에 극악소마나 사도맹주의 도움을 받아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무리하게 내공을 사용한 것이다.

“대체 왜 이랬어요?”

검무극이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내공을 풀어주었다.

“감격할 필요 없소. 이제 당신이 날 살려야 하니까.”

말을 하는 와중에도 검무극의 눈은 붉은 기운이 침범했다 다시 밀려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검무극이 눈을 감으며 마지막 말을 했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모습이 마치 지옥문이 닫히는 것만 같았다. 그 지옥에서 자신을 꺼내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내 앞에 꼭 소마님이 계셔야 하오.”

검무극은 예언이 이끄는 대로 가려는 것이다. 마지막 말을 전한 검무극이 눈을 완전히 감았다.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차이란이 흑마검을 검집에 넣어준 후 검무극을 등에 업었다. 상대가 검무극이었기에 이런 농담도 할 수 있었다.

“청부금도 안 주고 청부를 하다니요?”

그녀가 그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그녀는 보았다. 건너편 건물 지붕에서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그는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화도명이었다.

차이란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화도명은 업혀 있는 검무극의 모습에서 자신이 속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임을.

휙휙휙휙휙휙휙!

그의 뒤로 은신을 풀고 무인들이 하늘에서 천신이 떨어져 내리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은신술과 경신술이 보통이 아니었고, 그 기도 또한 대단했다.

“막아! 절대 소교주를 극악소마에게 넘겨주면 안 돼!”

무인들이 일제히 그녀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화도명도 따라 몸을 날리려 하자 남아 있던 수족이 그를 제지했다.

“상처가 깊습니다.”

검에 찔린 어깨의 상처가 깊었지만, 혈도를 눌러 지혈만 해둔 상태였다.

자칫 함부로 움직였다간 더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는 상태였지만,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소교주 상태는 더 나쁘다.”

사도맹주를 죽이는 것은 포기하더라도 검무극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에 깃든 기운들은 반드시 회수해야 했으니까.

“봉인을 푼다.”

* * *

피이이이, 퍼퍼퍼펑!

창가에 앉아서 밖을 쳐다보고 있던 초승달 무면객이 멀리서 들려온 폭죽 소리를 들었다.

특이한 폭죽 소리.

일전에 가인교 살수들을 생포하는 작전을 펼칠 때 들었던 바로 그 폭죽 소리였다.

초승달 무면객이 극악소마를 돌아보았다. 극악소마는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살수들의 구조요청입니다.”

가면 속에서 극악소마가 눈이 번쩍 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에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무면객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악소마가 이안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천화루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운명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예언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가자!”

극악소마가 창문으로 몸을 날려 하늘로 날아오르자, 모든 창문이 열리며 무면객들도 일제히 몸을 날렸다.

날아오른 그들 너머 저 멀리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살수네요

어둠이 내려앉았다.

차이란은 신중한 눈빛으로 어두워진 골목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숨죽인 살기가 느껴졌고 주변을 흐르는 공기는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주위에 적들이 쫙 깔려 있었다.

차이란은 조심스럽게 검무극을 내려놓았다.

담에 기대 앉힌 그의 몸을 검은 천으로 살짝 덮었다.

이런 어두운 곳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살수들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은신용 암막(暗幕)이었다. 얇고 가벼워서 접으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다행히 그녀가 오늘 입은 옷은 검무극이 어울린다고 해서 입은 흑의 무복이었다. 싸우기 편하고 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당신, 이런 일이 있을 걸 꼭 예감한 것 같잖아요?’

그녀가 조용히 어둠 속으로 이동했다.

골목 안에 무인 하나가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검날이 반사되어 비칠까 봐 검을 뽑지 않고 담벼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사아아악.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목이 베어졌다.

그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벤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지금 그녀는 완벽한 살수가 되어 있었다.

차이란이 조용히 무인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둔 뒤 다시 검무극이 있던 곳으로 가려던 그때.

쉬이익!

어둠 속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숨어 있던 무인이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애초에 노출된 무인을 미끼 삼아 그녀를 죽이기 위한 함정이었다.

차이란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날아든 검이 그녀의 팔을 스쳤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비수는 무인의 목에 박혔다.

다시 시체를 조용히 눕힌 후, 차이란은 검무극이 있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상대를 해치우긴 했지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부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의미.

‘화도명의 직속 수하들이다.’

무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화도명의 수하들답게 은신술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가 검무극을 덮고 있던 암막을 거두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검무극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마 그의 몸 내부에서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으리라.

“당신이라면 내 말 듣고 있을 거라 믿어요. 조금만 더 버텨요.”

그녀가 검무극을 업었다. 그를 업고도 두 손을 쓸 수 있게 옷을 찢어서 그를 자신의 몸에 단단히 고정했다.

신화방으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며 경공으로 가는 것인데, 너무 눈에 띄는 방법이었기에 자신에게 공격이 집중될 것이다. 검무극을 업고 그런 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다시 그녀가 어둠 속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최고의 살수답게 호흡이나 발소리는 물론이고 어떤 기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하게 주위가 밝아지던 그때.

그녀와 조금 떨어진 담벼락 그림자에 숨어 있던 무인의 윤곽이 드러났다. 상대도 이쪽을 보았다.

무인이 검을 뽑아 검기를 날리려 했지만, 차이란이 더 빨랐다.

쉬이이이익!

차이란의 비수가 빛처럼 곧고 빠르게 날아가 그의 목에 박혔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그녀에게 검기가 날아들었다.

쇄애애액!

골목을 꽉 채운 검기에 그녀는 검무극을 업은 채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가 달을 등지고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양쪽 지붕에서 은신하고 있던 두 명의 무인이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왼쪽에서 날아든 무인이 더 빨랐다.

쇄애액.

차이란은 몸을 쭉 뻗어 허공에 몸을 누였다. 검이 그녀의 얼굴을 스치며 빗나갔다. 검날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다.

상대의 손목을 잡아 꺾으면서 그녀의 신형이 상대와 함께 회전했다.

푸우욱!

오른쪽에서 쇄도한 무인의 검이 왼쪽 무인의 가슴을 찔렀다. 차이란은 왼쪽 무인을 방패 삼아 막으면서 동시에 오른 손바닥을 내질렀다.

푸아앙!

비처럼 쏟아져 나간 강기가 오른쪽 무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푸푸푸푸!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무인이 저 멀리 날아갔다. 밤비처럼 내리는 그녀의 특별한 장법.

천녀야우장(天女夜雨掌).

그녀의 숨겨둔 독문무공이 발휘된 것이다.

평소에는 암기술만을 사용할 뿐, 절대 독문무공을 발휘하지 않았는데, 오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다시 구름이 달을 가리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녀가 자신의 비수를 시체에서 회수한 후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성이 들렸다. 자신이 몸을 격렬하게 움직일수록 검무극은 더욱 힘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전하게 가면 더 위험했다. 위험하더라도 속도를 더 내서 돌파해야 한다.

그녀가 다음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

매복하고 있던 네 명의 무인이 동시에 그녀를 덮쳤다.

그녀가 왼쪽 무인에게 천녀야우장을 발출했고, 오른손에 있던 비수를 오른쪽 무인에게 날렸다. 그리고 정면에서 날아드는 검을 손등으로 쳐내며 몸을 틀어 뒤쪽의 공격을 피했다.

천녀야우장을 적중당한 무인이 뒤로 날아갔고, 비수도 정확히 상대의 목에 박혔다. 정면 무인의 공격도 쳐냈지만, 문제는 뒤쪽 무인이었다.

쉬이이익.

검무극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자신이 한쪽 팔을 내주어야 하는 상황.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차이란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쇄도한 누군가가 그를 낚아채듯 밀어붙이며 옆구리를 비수로 연속해서 찔렀다.

푹! 푸욱!

그렇게 상대를 제압한 그녀는 바로 일교였다.

정면에서 공격했던 무인은 또 다른 두 사람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챙! 챙!

왼쪽에서 공격한 오교의 공격은 막아냈지만.

등 뒤에서 십칠교가 찔러넣는 비수는 막지 못했다.

그가 이를 악물고 돌아서며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푹! 푹!

이번에는 오교가 다시 등을 연속해서 찔렀다.

무인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상대의 무공 실력은 낮지 않았다. 방심하면 이쪽이 당할 수도 있는 실력.

그녀들은 시선만 교환했다.

차이란이 달려가며 보낸 고맙다는 눈빛에 그녀들은 자신들에게 뒤를 맡기라는 든든한 눈빛을 보냈다.

일교는 오교와 십칠교에게 오른쪽 길로 가라고 지시한 후 자신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 싸움은 떼로 몰려다닌다고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노리는 싸움이었다.

오교와 십칠교는 이인 일조로 움직였다. 그녀들의 움직임은 신중했다. 어디서 은신한 매복이 있을지 몰랐다. 차이란은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지만, 그녀들은 쉽지 않았다.

일교가 갔던 방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여인이 내는 비명이 아니었다.

그 소리에 찰나간 정신이 팔린 그때!

오교에게 기습적으로 검이 날아들었다.

쇄애애액!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날아든 검을 쳐내는 순간.

은신을 풀고 나타난 또 다른 검이 오교의 배를 찔렀다.

챙! 챙!

다시 오교에게 이어지는 공격을 십칠교가 몸을 날려 막았다.

모습을 드러낸 두 무인은 빠르고 강했다.

같은 소속이라고 해도 더 실력이 좋은 이가 있기 마련, 지금 마주친 이들은 앞서 상대한 이들보다 훨씬 강하고 빨랐다.

챙! 챙챙!

십칠교는 필사적으로 오교를 지켰다. 오교를 지키겠다는 일념이 아니었다면, 이 두 명의 합공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오교가 배의 상처를 지혈하고 싸움에 합류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전 경험이 많은 오교는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둘 다 죽는다는 것을.

오교는 한 무인에게 거칠게 몸을 날렸다. 함께 죽자는 양패구상의 수를 날린 것이다.

“이런 미친!”

이런 다급한 말이 터져 나올 정도로 위협적인 공격이었고, 자신의 생명을 도외시한 공격이었다.

그 필사적인 시도에서 십칠교는 허점을 찾아냈다.

바로 그 순간 두 여인은 싸우던 상대를 교차했다.

쉬이익!

오교가 죽이려던 무인을 십칠교가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무리한 수를 던졌던 오교는 다른 무인의 공격에 이번에는 어깨를 찔렸다.

결국 오교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의 상처도 위중했지만, 어깨의 상처 역시 심각했다.

십칠교는 오교의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상대가 계속 몰아붙인 것이다.

계획을 세워 그를 죽이라면 분명 십칠교는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달랐다.

살수는 누군가를 은밀히 죽이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대놓고 싸우는 싸움에 능한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십칠교가 밀리는 모습에 뒤에서 들려온 힘겨운 한마디.

“……가.”

자신을 포기하고 달아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십칠교는 끝까지 싸웠다. 팔이 베이고 허벅지 역시 베였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들고 있던 비수가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무인은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익.

십칠교의 손에 암기가 들렸다. 검이 가슴을 관통하면 한 손으로 검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암기를 던질 작정이었다.

그게 잘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오교가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있을 것이다. 오교가 양패구상을 노렸듯, 자신도 희생할 작정이었다.

푸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십칠교의 몸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십칠교가 들고 있던 암기가 만들어낸 소리도 아니었다.

무인의 목 옆에 비수가 박혀 있었다.

파파팍!

비수가 뽑혀 나오자 피를 뿜어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뒤에 무면객이 서 있었다. 십칠교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초승달 무면객임을.

하필이면 그가 또다시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자신이 그를 구해주고 싶었는데.

무면객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비수를 주워서 건네주었다. 자신이 그에게 주고 싶었던 비수였는데, 그걸 그가 자신에게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둘러 오교의 상처를 살폈다.

혈도를 눌러 지혈하고 금창약을 발랐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오교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때 무면객이 그녀에게 작은 알약을 하나 건넸다. 그것은 무면객들이 비상시에 사용하는 응급약이었다.

십칠교가 단약을 오교의 입에 넣어주자, 창백했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무면객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이미 자신들이 적을 정리한 방향이었다.

“동료를 데리고 저쪽으로 빠져나가시오.”

처음으로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다.

십칠교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아쉽지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십칠교가 오교를 업고 그가 말해준 방향으로 달렸다.

골목을 돌아나가기 전 그녀가 뒤를 돌아봤을 때, 무면객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 *

시체들 사이에서 차이란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구경꾼을 많이도 데려왔군.”

화도명은 이번 일에 구경이나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번 일에 그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벽에 기대앉아 있던 검무극을 보았다.

놈들이 이곳에 앉혀둔 그를 데려가려는 바람에 그것을 무리하게 막으려다 두 군데나 베였다. 다행히 중상은 아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려 몸 상태가 좋지 못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제 미로처럼 복잡했던 골목은 빠져나왔고, 저 숲만 가로질러 가면 멀지 않은 곳에 신화방이 있었다.

“소교주, 조금만 참아요! 내가 꼭 데려다줄게요!”

골목을 빠져나오던 그때, 차이란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숲으로 들어가기 전 공터에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검을 들고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앞서 싸웠던 자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더 예리한 눈빛과 날카로운 기도를 지녔다. 아마 조직 내에서 가장 실력 좋은 자들인 것 같았다.

지금 몸 상태로 이들을 뚫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들 가운데 화도명이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도명 뒤에 이남일녀의 세 무인이 죽립을 쓰고 서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런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신경을 거스르는 이들이었다. 살수의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위험한 자들이다.’

화도명이 그녀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무겁겠다. 이만 내려놔라.”

차이란이 묶었던 천을 풀고 검무극을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녀가 검무극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환하게 웃어줄 것만 같았는데. 여전히 검무극은 두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한데 청부는 실패한 것 같네요.”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청부 포기에 청부 실패에, 정말 형편없는 살수네요.”

여전히 검무극은 말이 없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서 돌아섰다. 그녀의 손에 비수가 들려 있었다.

“나와 함께 갈 사람은 내가 골라도 될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이란은 자신이 든 비수를 화도명에게 겨눴다.

“너.”

촤아악.

화도명은 부채를 펼쳐 들고 살랑살랑 부쳤다. 둘이 있었을 때라면 저 부채로 얼굴을 가렸을 텐데.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의 그는 또 다른 사람이 된다.

“그래, 이럴 때만 구경꾼이지?”

한마디 조롱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화도명이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죽이고 소교주를 데려와.”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앞으로 걸어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날아왔다.

달려와서 차이란 앞을 막아선 사람은 일교였다. 그녀 뒤로 몇 사람의 살수들이 더 도착했다. 여전히 골목 안에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고, 일교가 몇 명의 살수들만 데리고 먼저 도착한 것이다.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그녀들만으로는 대세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화도명도 화도명이지만, 저 의문의 세 사람은 더욱 불길했다.

그랬기에 일교에게 명령을 내렸다.

“싸우고 있는 애들 데리고 이곳을 떠나도록.”

“안 됩니다.”

일교는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차이란의 명령을 어겼다.

화도명의 입에서 변함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 죽여라.”

그때 다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위가 밝아졌다.

다가서는 적들에 비해 이쪽의 전력이 너무 약했다.

바로 그때였다.

일교가 차이란에게 말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태도 변화에 차이란은 의아했고 화도명은 비웃었다.

“그래, 살 사람은 살아야지.”

일교는 그래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위를 쳐다보았다.

일교가 바라본 곳은 한 그루의 거목이었다. 그 나무 위에 누군가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것일까?

거목의 높은 나뭇가지 위에 무면객들이 있었다.

누구는 서 있었고 또 누구는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또 누구는 걸터앉아 있었다. 가면을 쓴 채 말없이 장내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무서우리만치 기괴했다.

휙휙휙휙휙휙휙!

나무에 있던 그들이 일제히 아래로 뛰어내렸다.

착착착착착착착착!

그 높은 곳에서도 가볍게 내려서는 무면객들.

마치 방패처럼 그들은 차이란과 살수들 사이를 일렬로 막아섰다.

화도명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앞서 살수들은 무시했지만 무면객들은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저자들이 왔다면?’

그때 차이란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교주님.”

차이란과 살수들이 놀라 돌아보자 어느새 극악소마가 뒤쪽에 있던 검무극 앞에 앉아 있었다.

차가운 달빛을 받은 극악소마의 하얀 가면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그 차가움 속에서 뜨거운 눈빛이 흘러나왔다.

“제가 왔으니 눈을 뜨십시오!”

제 심장을 찌르십시오!

놈은 지능적이었다.

심장을 계속 공격하던 비혈사는 작전을 바꿨다.

검무극의 혈맥을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은 혈맥을 물어뜯어서 검무극의 반응을 살폈다. 검무극이 신경 쓰지 않자 점점 더 중요한 혈맥을 물어뜯었다.

혈맥을 지키느라 내공을 분산하면 결국 심장을 지키는 힘이 약해진다는 점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검무극이 죽을 정도로 공격하진 않았다. 검무극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놈은 그야말로 지능을 지닌 영물에 가까웠다.

워낙 빠르게 도망 다녀서 잡을 수도 없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심장을 내어주는 척하면서 가둘 수밖에 없었다.

심장의 반을 내어주고 나머지 반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모든 내력을 동원해서 막았다.

한 번 심장에 들어온 비혈사는 다시 나가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똬리를 틀고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놈은 심장을 통해 힘을 흡수했고, 혈맥을 돌 때보다 더 강력해졌다. 반대로 그만큼 검무극은 더 약해졌고.

힘을 채운 비혈사는 남은 절반의 심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검무극은 모든 내력을 비혈사를 막는 데 쏟아부었다.

버티고 또 버티고.

처음에는 혈맥이 다치지 않게, 지금은 심장이 다치지 않게. 그 심력 소모가 엄청났다.

온 신경과 힘을 다 써서 버티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 차이란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까.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되면 그녀는 급한 마음에 실수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검무극은 참고 또 참았다.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검무극은 환상을 보았다.

자신은 밀려오는 거대한 벽을 혼자서 막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려갔다. 온몸의 근육과 뼈가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팔에 힘을 빼고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은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옆에서 난 인기척에 검무극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누군가 함께 벽을 밀고 있었는데, 그는 구화마공의 동서남북 중 잘생긴 악귀였다.

‘네가 어떻게 여길?’

그때 반대쪽에서도 악귀가 나타났다. 이번에 나타난 악귀는 무섭게 생긴 악귀였다. 무서운 얼굴로 검무극을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벽을 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잘생긴 악귀 옆에 신비감을 주는 놈이 나타났고 끝으로 무서운 녀석 옆에 영리해 보이는 녀석까지 합류했다.

넷이 함께 벽을 밀자 더는 뒤로 밀리지 않았다.

검무극은 너무 기뻤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무엇인가가 빛을 가리며 검무극의 주위에 거대한 그림자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을 때, 거대한 무엇인가가 벽을 밀기 시작했다.

천마혼?

그래, 그것은 천마혼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천마혼이었다.

악귀와 천마혼이 함께하자 벽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아! 천마혼까지 왔으니 나는 이제 손을 놓아도 되겠구나.’

검무극의 팔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 환상은 너무 힘들어서 검무극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심마였다. 오히려 벽은 뒤로 밀리는 중이었다.

심마는 이렇게 대상이 가장 신뢰하는 이를 이용해서 마음을 흔들곤 한다.

그래, 이제 좀 쉬어도 되겠지?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지려던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교주님.

이 목소리는? 멀리서 소곤거리듯 들려 온 귀에 익은 목소리.

처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아득하게 들렸는데 다음 말은 그 어둠을 뚫고 빛을 머금은 검기가 날아오듯 크게 들려왔다.

“제가 왔으니 눈을 뜨십시오!”

극악소마의 목소리임을 확실히 자각하던 그 순간.

주위에 있던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악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천마혼이 사라졌다. 천마혼이 만든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주위가 밝아졌다. 심마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소교주님!”

극악소마의 부름에 검무극이 눈을 번쩍 떴다.

정말 눈앞에서 극악소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환상에서 보았던 것들은 모두 심마였음을.

“괜찮으십니까?”

검무극을 향한 가면 속 두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지금 검무극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검무극이 마지막 힘을 짜냈다.

“제 심장을 찌르십시오!”

그 말에 극악소마가 두 눈을 부릅떴다.

예언의 순간이 자신들을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도 예언에 관해 여러 생각을 했었다.

소교주를 죽이는 척만 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소교주로 꾸민 가짜를 죽이는 것일까?

하지만 진짜 검무극의 심장을 찔러야 한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검무극의 손이 극악소마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심장 쪽으로 잡아당겼다.

‘스스로를 믿고 찌르십시오.’

그 행동을 끝으로 검무극이 눈을 감았다. 심마에 빠졌을 때 이미 비혈사는 나머지 반쪽 심장마저 침입한 후였다. 차지하는 심장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놈은 점점 더 강해졌다.

심장을 찌르라는 검무극의 말을 듣는 순간 화도명이 소리쳤다.

“안 돼! 막아!”

그는 검무극이 자결하려 한다고 착각했다. 비혈사에 완전히 지배당하기 전에 차라리 죽으려 한다고.

만약 검무극이 죽으면 사도맹주를 죽이는 일을 실패하는 건 둘째 치고 그의 몸에 들어 있는 기운들을 회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화도명의 수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무면객들도 일제히 비수를 뽑아 들며 그들을 상대했다.

가장 먼저 달려든 무인의 검을 피하며 무면객이 그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넣었다.

공격을 막아낸 무인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확실히 골목에서 상대했던 이들보다 더 실력이 좋았다.

하지만 악인곡의 가장 강한 열 명의 무면객은 그들이 지금까지 상대해 보지 못한 유형의 적이었다.

다시 검을 내지르던 그때.

슉! 슈육!

무면객의 지풍이 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설마 지풍을 쏠 줄은 몰랐기에 첫 번째 지풍은 간신히 피했지만 두 번째 지풍은 그의 귀를 날렸다.

분노한 무인의 동작이 커지던 그 순간.

무면객의 비수가 흥분한 그의 심장에 박혔다.

곧바로 비수를 뽑아 든 무면객이 옆으로 몸을 쇄도했다.

적 하나가 싸우고 있던 살수 여인의 등을 기습하려던 그때.

쉬이이익.

앞서의 무면객이 상대를 낚아채며 목에 비수를 박아 넣었다.

살수를 구해준 무면객을 공격하려던 무인은 일교의 손에 쓰러졌다.

무면객과 살수들의 호흡이 잘 맞았다.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동료처럼 함께 싸웠다.

생각보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확인한 화도명이 뒤에 선 세 명의 죽립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 죽여!”

그러자 이남일녀의 죽립인들 중 남녀 두 명이 먼저 몸을 날렸다.

여인은 검을, 남자는 도를 사용했는데 그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쉬이이익!

쇄애애액!

빠르고 강력한 위력의 검기와 도기가 기습적으로 초승달 무면객과 그 옆에 거미 문양의 무면객을 향해 날아들었다.

피하기에 늦은 상황!

바로 그 순간!

푸아앙!

또 다른 강기가 휘몰아쳐 날아가더니.

날아든 검기와 도기와 충돌했다.

초승달 무면객과 거미 무면객 앞에 내려선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그녀가 쌍장을 내지르며 천녀야우장을 발출해서 두 사람을 구한 것이다.

“너희들 상대는 나다.”

두 무면객은 차이란을 한 번 쳐다본 후 다시 몸을 날렸다.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차이란의 시선이 죽립 무인들 너머에 서 있던 화도명을 향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 너머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보고 있었다.

그의 다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렇게 자주 자신 앞에서 부채 뒤로 숨은 이유는 저 급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화도명이 직접 몸을 날려서 차이란 앞에 내려섰다. 그러자 뒤에 있던 마지막 죽립인도 함께 날아왔다. 그 움직임으로 볼 때 아마 그는 화도명을 무사히 데려가는 역할을 맡은 무인이 틀림없었다.

화도명은 그녀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또한 그녀에게 비키라고 한다고 비킬 사람이 아닌 줄도 알았다.

촤아아아악.

부채에서 한 줄기 강력한 강기가 휘몰아쳐 날아갔다.

차이란이 몸을 솟구치며 강기를 피하던 그때.

다시 나머지 남녀 죽립인이 날아들며 합공했다.

날아드는 검을 비수로 쳐내며 장법을 연속해서 발출했다.

차이란은 절대 한 사람도 뒤로 넘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막았다.

하지만 화도명까지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계속된 공격 중 죽립 사내의 한 줄기 도기를 피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 도기가 적중했다. 순간 호신강기를 일으켰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녀는 비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도법을 날렸던 죽립 사내에게 장법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날아온 죽립 여인이 그녀 앞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해 온 것 같은 대단한 경신법이었다.

쉬이이익!

이미 차이란의 얼굴을 향해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엉망이었다.

죽지는 않겠지만 얼굴에 큰 부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익!

죽립 여인을 향해 한 자루의 비수가 빠르게 날았다.

허공에서 비수를 쳐낸 검이 그대로 차이란을 베었다.

하지만 이미 차이란은 그녀의 공격에서 벗어난 후였다. 비수를 날려준 사람은 앞서 그녀가 구해줬던 거미 문양 무면객이었다.

쇄애액! 쇄액!

쉴 틈을 주지 않고 차이란에게 강기가 쏟아졌다.

하필이면 뒤에 살수들이 싸우고 있었기에 차이란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장법을 발출했다.

쾅! 콰아앙! 꽈앙!

좌우에서는 죽립인들이, 정면에서는 화도명이, 그렇게 세 사람의 공격이 차이란에게 집중되었다. 쏟아진 공격에 결국 내상을 입은 그녀의 신형이 휘청하던 그때.

누군가 몸을 던져서 그녀를 구했다. 이번에는 초승달 무인이었다.

초승달 무면객은 내상을 입은 차이란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살수 여인들이 달려와서 그녀를 보호했다.

무면객들은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사이에 두고 빙 둘러쌌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은 한 발짝도 비키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다 쓸어버려!”

화도명의 명령에 두 죽립인들이 앞장서 나서던 그때.

검이 살갗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무면객들이 둘러싸고 있는 곳이었다.

무면객들이 뒤를 돌아보자 화도명은 그들 사이로 보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극악소마의 비수가 검무극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순간 화도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소교주를 찔렀어?’

검무극과 가장 가까운 마존이 극악소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마존이라면 모를까 극악소마는 절대 검무극을 죽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무면객들도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정면을 쳐다보았다.

살수 여인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심장을 찔렀다.

차이란과 무면객, 그리고 살수들이 한창 적들과 싸우고 있을 그때.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심장에 손바닥을 댄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극악소마에게는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고 오직 검무극의 심장 뛰는 것만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극악소마는 신의였고, 마의였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비혈사가 심장을 장악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혈사를 죽이려면 저 머리를, 아니 저 대가리를 정확히 찔러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극악소마는 망설였다. 잘못 찔렀다간 검무극이 죽게 될 테니까.

문제는 비혈사가 워낙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다른 쪽 심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

놈이 검무극의 심장 마지막 부분까지 차지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마지막 공백을 차지하는 그 순간!

극악소마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바깥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극악소마는 오직 비혈사에게만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비혈사가 검무극의 심장을 완전히 차지하던 그 순간!

극악소마의 비수가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다. 비수에 새겨진 웃음 소(笑)자가 허공을 갈랐다.

검무극이 준 비수로, 검무극이 전수해 준 무공으로, 검무극의 심장을 찔렀다.

찌르는 척이 아니라 심장에 닿을 정도로 푹 찔렀다.

순간 그곳에 흐르는 침묵.

모두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극악소마가 비수를 뽑자, 검무극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검무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말 죽은 것만 같았다.

뒤늦게 소리친 사람은 화도명이었다.

“안 돼!”

그는 검무극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은 건 비혈사였다.

극악소마의 비수가 정확히 비혈사의 급소를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파아아아악.

대가리를 찔린 비혈사가 한 차례 요동치는가 싶더니.

파아아아아아.

비혈사의 몸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영약과 기화이초, 여러 신물의 기운이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 신비스러운 기운이 비수에 찢긴 심장의 상처를 이어 붙였다.

검무극의 몸이 그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최초였다. 지금까지 어떤 영약도 심장에서부터 그것을 녹인 적은 없었다.

심장이 쭉쭉 짜낸 그 기운이 혈맥을 타고 온몸으로 흘러 나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엄청난 기운.

검무극은 온 혈맥을 가득 채운 비혈사의 기운을 내공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극악소마는 검무극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기운은 가까이 있는 자신만이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표정이 편안해졌음을. 좋은 꿈을 꾸듯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지어졌다.

‘됐다.’

자신이 제대로 찌른 것이다. 살면서 이렇게 긴장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의 심장이었다 해도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언은 이뤄졌다.

자신이 검무극을 찌른다는 그 믿지 못할 예언은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 장소가 무대가 아닌 것으로 바뀐 것은 저 살수 여인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마음을 바꾸면서 천하제일미를 뽑는 무대는 사라진 것이다.

그때 화도명의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미친놈이! 아무리 그래도 소교주를 죽여?”

극악소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화도명을 쳐다보았다.

가면 속 두 눈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알았겠군.”

극악소마의 손에 들린 비수에서는 검무극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내가 못 죽일 사람이 없다는 걸.”

지금이라고 승산이 있을까?

검무극 앞에 앉아 있던 극악소마가 일어났다.

극악소마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원을 그리며 둘러서 있던 무면객들이 간격을 좁혀 입구를 닫았다. 마치 소교주의 시체라도 지키겠다는 의지처럼 보였지만, 검무극을 외부로 노출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처음에는 무면객들도 놀랐다.

뒤를 돌아봤을 때 극악소마가 검무극의 심장을 비수로 찌르는 모습을 봤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검무극이 살아 있다는 것을. 소교주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극악소마가 살수들 사이에 서 있던 차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여기까지 검무극을 데려오지 않았다면 때를 놓쳤을 수도 있었다.

차이란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이 부드럽다는 것을. 그 눈빛에 담긴 고마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기에 차이란은 비로소 안도했다.

‘소교주는 살아 있구나.’

그래, 자신을 죽일 사람 같았으면 애초에 극악소마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겠지.

차이란의 시선이 무면객들을 향했다. 촘촘히 서 있어서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청부는 무사히 마쳤어.’

처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청부에 성공했다.

게다가 무면객들의 활약으로 일교를 비롯한 살수들도 모두 무사했다.

그때 저 멀리 골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그 쪽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극악소마가 차이란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검무극을 살려준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여긴 이제 우리에게 맡겨주십시오.”

수하들을 구하러 가라는 의미였다.

차이란은 고민하지 않았다. 내상을 입은 상태로 이곳에 남으면 오히려 극악소마에게 짐이 될 것이다.

저 화도명은 분명 믿고 있는 바가 있었다. 극악소마가 눈앞에 있음에도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정중히 극악소마에게 포권하며 작별을 고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한 후 그녀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자.”

살수 여인들이 무면객들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그들이 활약해 주는 바람에 이곳에 온 살수 중 아무도 죽지 않았다.

오교를 안전하게 동료들에게 맡겨둔 후 뒤늦게 합류해서 싸웠던 십칠교는 초승달 무면객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에게 두 번이나 목숨빚을 졌다.

‘신세 갚아야 하니까 죽지 말아요.’

이 마음이 담긴 눈빛을 그가 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차이란이 수하들을 데리고 골목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떠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화도명의 새로운 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는데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친구처럼 지냈다가 죽이려 했고.

그리고 이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임무에 실패했다는 충격과 분노에 빠져 있어서였을까? 평소의 그 여유롭고 능글맞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앞서 보였던 여유는 말 그대로 여유로울 때의 여유였다. 그래, 역경은 언제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법이지.

‘과연 부채 뒤에 숨긴 네 급한 욕망이 과연 저 웃고 있는 가면 뒤 충성심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었기에 걱정하지 않고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이 순간 화도명은 분노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소교주가 죽었다는 사실에 차이란은 안중에도 없었다.

“돌아가면 너희 교주가 뭐라고 할까? 아, 역시 이름값 하셨소! 이럴까?”

극악소마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여겼다. 검무극이 죽었다고 오해하면 상대적으로 검무극의 안위는 덜 신경 써도 될 테니까.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다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극악소마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었으니까. 상대는 분명 믿는 바가 있으니 달아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이다.”

바로 그때 냉정한 극악소마의 말을 반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거짓말입니다.”

그는 바로 죽립을 쓰고 있던 세 사람 중에서 나서지 않았던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아주 젊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소교주는 살아 있습니다.”

남자는 검무극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미약한 생기를 느낀 것이다. 게다가 무면객들이 둘러싸서 그 기운을 읽기가 더욱 어려웠을 텐데.

화도명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사실인가?”

남자는 확신했다.

“확실합니다. 지금 극악소마에게 어떤 분노나 슬픔도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소교주는 살아 있습니다.”

그는 멀리 있는 기척뿐만 아니라 상대의 감정까지 읽어냈다. 그가 아주 특별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찔리고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화도명의 물음에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소교주의 몸에서 비혈사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화도명의 놀란 눈이 더욱 커졌다.

“소교주가 죽어서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고?”

“소교주는 분명 살아 있습니다.”

화도명의 표정이 밝아졌다. 살아 있다면 기운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의미.

남자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가면 속 두 눈을 응시하던 그가 말했다.

“극악소마는 비수를 찔러넣어서 심장에 있던 비혈사를 죽였을 겁니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화도명은 남자의 말을 믿었다.

이 남자는 바로 비혈사를 제작한 사람의 제자였으니까. 실제로 그는 사부를 도와 함께 비혈사를 만들었다.

이번에 비혈사를 이용해서 일을 꾸몄기에 그가 돕기 위해 함께 나온 것이다.

그의 입에서 더욱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소교주는 비혈사의 기운을 녹이고 있을 겁니다.”

화도명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비혈사의 기운은 너무 막대해서 인간은 녹일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말은 그렇다고 했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확신이 없는 말투였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소교주가 깨어나면 우린 승산이 없습니다. 깨어나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극악소마와 무면객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려는 그때.

극악소마가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지금이라고 승산이 있을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극악소마가 먼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다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 열 명의 무면객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저쪽에서도 살아남은 십여 명의 무인이 달려 나왔다.

극악소마가 지켜보고 있는 싸움이었다. 무면객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비록 살수들이 함께였긴 했지만 이십여 명의 적을 상대해서 아무도 죽지 않고 열 명을 죽인 무면객들이었다.

무면객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악인들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오직 이기는 것에 주력했다. 바닥을 뒹굴면서 지풍을 날렸고, 불리하면 흙을 뿌리기도 했다.

등을 찌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자신이 상대하던 이를 동료가 등을 찔러 죽여도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상대를 죽여야지 하는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간에 두 죽립 무인이 싸움에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극악소마가 한마디로 제지했다. 너희가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가 아니라.

“너희가 움직이면 저자는 죽는다.”

자신은 화도명을 죽이겠다는 경고였다.

그 협박은 제대로 통했다. 그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적들을 모두 쓰러뜨린 무면객들은 훌쩍 뒤로 몸을 날렸다.

착착착착착착!

그들이 다시 검무극 주위를 둘러쌌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검무극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무면객들은 그를 지켜주며 다시 원을 그리며 감쌌다. 무면객들의 가면에 피가 계속 덧칠해지고 있었다.

앞에 늘어선 무인들이 모두 정리되자 극악소마가 성큼성큼 화도명을 향해 걸어갔다.

하얀 가면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가오는 모습에 화도명은 두려움을 느끼며 부채를 펼쳤다.

촤아악.

부채 뒤에서 그의 명령이 내려졌다.

“서둘러라. 소교주가 살아 계시다지 않냐?”

앞에 나란히 선 두 죽립 무인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들의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화도명이 극악소마를 겁내지 않은 이유는 이들 두 무인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로 암흑궁의 암흑신공(暗黑神功)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암흑신공.

암흑궁의 무인들에게 전수되는 무공으로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위력에는 반드시 제약과 부작용이 따랐기에 무작정 사용할 수 없었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쓸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 강함의 유혹에 빠지는 순간 돌아오는 건 파멸뿐이었다.

스으윽.

마치 문신이 새겨지듯 죽립 아래 두 사람의 볼에 검은 줄이 길게 새겨지듯 그어졌다.

움직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 해주는 암흑신공.

암흑귀행술(暗黑鬼行術).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원이 하나 그려졌다.

피부와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호신강기의 위력까지 강화되는 암흑신공.

암흑철신공(暗黑鐵身功).

길게 그어진 선 위로 둥근 원 모양이 겹쳐 새겨지자 마치 그 모양이 보름달 위에 바람이 스치는 모양처럼 보였다.

두 개의 암흑신공이 중첩된 그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강해졌다.

쉬이익!

쇄도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이 빨랐다. 앞서 차이란과 싸울 때와는 그 속도 자체가 달랐다.

특히 원래도 빨랐던 여인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번쩍하는 순간, 두 죽립 무인이 좌우에서 극악소마를 공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합격술을 연마한 사람처럼 그들은 합이 맞았다.

쇄애애애액! 쉬이이익!

왼쪽에서는 도가, 오른쪽에서는 검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빠져나갈 틈이 없는 완벽한 공격이었다.

지켜보던 화도명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완벽한 합격술을 어떻게 막을 거냐?’

어떻게? 극악소마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막았다.

캉! 카앙!

왼쪽에서 날아든 도를 튕겨낸 후 오른쪽 검까지 쳐냈다.

두 무인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이 합공은 첫수에 빠져나가지 않으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 부상을 감수하고서라도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검과 도가 서로 연계하며 엄청난 속도의 공격이 극악소마에게 쏟아졌다. 절대 이 속도와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챙챙챙챙챙챙!

수십 가닥의 검선과 도선, 그리고 그 공격을 막아내는 비수가 만들어낸 선까지.

그야말로 주위는 순식간에 검광과 도광으로 휩싸였다.

처음 공격을 가할 때만 해도 극악소마가 이렇게 잘 버틸 줄은 몰랐다.

여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암흑귀행술을 발휘한,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합공을 막아내다니?

극악소마는 지금 귀신 둘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들이 귀신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두 사람의 결단은 빨랐다. 암흑신공은 장기전으로 싸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으니까.

스으으으.

여인의 얼굴에 선이 한 줄 더 생겨났다. 암흑신공이 강화된 것이다. 그녀는 내상을 각오하고 속도를 올리는 암흑귀행술을 중첩했다.

남자의 얼굴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는 암흑귀행술이 아니라 암흑철신공을 강화했다. 그것도 두 단계나 더.

그의 얼굴에 세 개의 원이 겹쳤다. 이렇게 무리하면 암흑공이 풀린 후 큰 내상을 입게 될 것을 알았지만,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여인은 그것이 어떤 의도인지 알아차렸다.

세 사람의 검과 도, 비수가 환상적인 그림을 만들어내던 그때.

그림에 붓을 내던진 이가 있었다.

죽립 남자가 극악소마에게 도를 내던지며 동시에 몸을 날린 것이다. 생각지 못한 기습이었고, 도를 내던져 상대의 당황을 이끌어내는 그야말로 예상 밖의 한 수였다.

몸을 베이겠지만, 그 순간 극악소마를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럼 끝이다. 그녀가 일검에 극악소마의 목을 벨 테니까.

그는 자신했다. 삼 단계의 암흑철신공이라면 절대 죽지 않을 것을. 이 순간 자신은 무적이었다.

쇄도한 그를 향해 비수가 그어졌다.

비수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선.

도가 없는 남자는 당연히 이 한 수를 막아내지 못했다.

카아아아앙.

몸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해냈음을 직감했다.

‘됐다!’

자신이 이 한 수에 죽지 않았다면.

‘네가 죽는다!’

남자가 극악소마의 몸을 양팔로 꽉 잡았다.

그의 눈에 여인이 날아와 극악소마의 목을 베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도 여자도 웃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극악소마의 팔이 앞을 향했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터질 듯 꽉 잡고 있었는데, 어떻게 팔을 빼낸 거지?

다음 순간 귀를 찢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뒤에 선 남자는 보았다.

극악소마의 손바닥에서 날아가는 강기를.

여인의 얼굴로 마극광폭장이 폭사되는 모습을.

퍼어어엉!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맞은 마극광폭장에 여인의 얼굴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머리통을 잃은 여인의 몸이 피를 내뿜으며 뒤로 쓰러졌다.

남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지?’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야 죽립 남자는 자신의 가슴으로 뜨거운 것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주르륵.

강철같은 피부가 쩍 갈라져 있었다.

그 갈라진 사이에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렸어?’

삼 단계의 암흑철신공이 단 한 수에 잘려 나갔다는 사실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평범해 보였던 그 한 수가 어찌 그냥 평범한 공격이겠는가?

극악소마가 만년한철 비수로 발휘한 소향비술이었다.

소향일극(笑香一極).

뒤이어 고통이 밀려들었다.

그냥 상처가 아니라 암흑공이 깨어지면서 생긴 상처였기에, 그냥 검에 베인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으아아아아!”

죽립 남자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차라리 빨리 죽여주기를 바랐다.

그때 누군가 그의 입을 막았다. 어느새 극악소마가 그의 등 뒤에 있었다.

“쉿!”

그의 입을 틀어막은 극악소마가 망설임 없이 남자의 목에 비수를 그었다.

사아아아악.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목에서 피를 내뿜는 남자 뒤에 서서 극악소마는 나직이 말했다.

“소교주님 깨실라.”

어두워서 잘 못 봤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밖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싸워도 검무극은 듣지 못했다.

지금 검무극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비혈사의 기운을 내공으로 녹여내면서 오직 내공과 무공에 관련된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보통 무아지경은 무공수련을 할 때나 어떤 무학적인 깨달음을 얻을 때 찾아오는 기연이었다.

한데 지금은 비혈사의 기운을 내공으로 녹이면서 무아지경에 빠져든 것이다.

아마도 녹여내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극적이었고, 또한 그 기운이 너무 막대했기 때문이리라.

지금까지 복용했던 그 어떤 영약보다 막대한 내공이 단전에 쌓이기 시작했다. 녹여도 녹여도 끝이 없었다.

무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검무극은 운명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단 한 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심지어 극악소마가 자신의 심장을 찔러서 이뤄진 기연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얻은 것은 내공만이 아니었다.

우선 비혈사를 잡는 과정에서 새로운 혈로를 많이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기를 움직일 수 있었고, 덕분에 더 효율적으로 초식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강한 초식.

검무극의 경지에서 ‘조금 더’란 승패를 몇 번이나 좌우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심장을 지키면서 마지막까지 버텼던 과정은 검무극에게 정말 큰 경험이었다.

최악이었기에 도움이 되는, 오죽하면 고통을 참는 데 누구보다 익숙한 검무극이 심마에 빠질 정도였겠는가?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검무극은 더 성숙해졌고 강해졌다.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막연하기만 했던 구화마공의 대성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섰음을.

심마에서 천마혼을 본 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기분을 느끼신 거구나. 아버지가 폐관에 드셨던 이유가.’

손을 내밀면 대성을 이룰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지막 수련이 필요했다.

우우우웅.

그렇게 검무극은 오직 자신만의 세상에 푹 빠져 남은 비혈사의 기운을 남김없이 내공으로 흡수하고 있었다.

* * *

촤아아악.

극악소마가 비수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죽립 무인들을 해치운 모습을 지켜보던 무면객들의 두 눈에 존경심이 가득 찼다.

반면 화도명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암흑신공을 익힌 두 사람의 합공이었다. 그들이 진다는 건 생각도 못 했고, 설령 지더라도 극악소마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후에 죽을 거로 생각했다. 하다못해 내공이라도 다 소모 시킬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극악소마의 새하얀 가면에는 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다.

이제 극악소마의 웃는 가면은 사신의 웃음.

성큼 다가선 죽음의 한기에 화도명의 마음이 차분해졌다. 죽음에 맞서려면 이쪽도 그만큼 무서워야겠지.

그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나는 함부로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이야.”

극악소마의 눈에 가소로움이 스쳤다.

“그럼 우리 소교주님은 함부로 건드려도 되는 사람이냐?”

화도명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극악소마가 천천히 화도명을 향해 걸어갔다.

“나를 건들면 본가에서 널 반드시 죽일 거다.”

어떤 협박도 저 하얗게 웃고 있는 죽음을 물러서게 하지 못했다.

“그럼 반드시 내가 죽여야겠군. 소교주님이 깨어나시기 전에.”

검무극을 복수의 대상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극악소마의 의지였다.

화도명은 느낄 수 있었다. 극악소마가 반드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화도명이 품에서 약병을 하나 꺼냈다.

마개를 연 다음에 그것을 들어서 얼굴에 부었다.

솨아아.

흘러내린 액체가 새하얀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바로 이 화장이 그를 제어한 봉인이었다.

앞서 다쳤을 때 봉인을 푸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을 해결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정말 풀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 극악소마의 무위는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화장이 지워지면서 그의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 수많은 희미한 선이 그려져 있었다. 앞서 죽립 무인들이 암흑신공을 발휘할 때 얼굴에 생겼던 선과 원은 물론이고 다른 선들도 많았다.

마치 얼굴을 조각조각 이어 붙인 것처럼 보였다.

수직으로 그어지고, 사선으로 그어지고, 이리저리 여러 문양을 만들며 그어진 선들. 회오리처럼 알아볼 수 있는 문양도 있었고, 아예 무엇인지 모르는 것들도 있었다.

오히려 선이 희미했기에 더 이상했다. 그 선들은 주름살 같기도 했고, 또 상처 같기도 했다.

욕심이 만들어낸 낙인이었다.

화도명은 암흑신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너무 강해지려고 욕심을 부리다 이런 부작용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 흔적을 감추기 위해 짙은 화장을 하고 다녔다.

사아아악.

이제 그 희미한 선들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볼을 가로지르는 선이 진해졌고, 그 위에 겹쳐 있는 원도 진해졌으며, 그 옆의 사선까지 진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죽립인이 전음을 보냈다.

―그렇게 중첩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화도명이 나직이 전음을 보냈다.

―안 하면? 저 극악소마에게 죽자고?

그 사이 얼굴에 있던 모든 선이 진해졌다.

촤아악.

부채를 펼치자 어느새 부채도 바뀌어 있었다.

흑선(黑扇).

부채의 색도 시커멓게 바뀌었다. 미인이 그려져 있던 자리에는 무서운 악령이 그려져 있었다.

변화는 외적인 변화만이 아니었다. 화도명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강렬하게 빛나는 그의 두 눈에서는 암흑의 힘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 이제 내 소교주를 내놓아라!”

촤아악!

부채를 펼치는 순간!

파파파파팍!

극악소마가 서 있던 자리에 강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몸을 날려 피한 극악소마 앞으로 화도명이 나타났다. 정말 귀신이 나타나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앞서 죽립 여인이 펼쳤던 암흑귀행술이 이 단계였다면 지금 그의 것은 삼 단계였다.

쇄애액.

부채에 가격당한 극악소마가 뒤로 주르륵 밀렸다.

화도명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쇄액! 쇄애액!

화도명은 접힌 흑선으로 빠르게 극악소마의 요혈을 찔러왔다. 날아드는 흑선은 보검처럼 예리하고 강력했다.

화도명이 더욱 빠르게 부채를 내지를수록 암흑귀행술을 펼칠 때 사용되는 세 가닥 선이 붉어지고 있었다.

선이 붉어진다는 건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을 사용할 때 보내는 위험 신호였다.

하지만 화도명은 공격 속도를 더욱 빨리했다. 삼 단계의 암흑귀행술은 극악소마의 속도를 능가하고 있었다.

극악소마가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했다.

호신강기가 아니었다면 어깨뼈가 부러졌을 위력이었다.

극악소마가 휘청하며 뒤로 물러나자 화도명이 기회다 싶어 달려들던 그 순간.

기습적으로 날아든 지풍이 화도명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화도명이 내지르던 부채를 틀어서 간신히 막아냈다. 조금만 늦었어도 하마터면 이마가 뚫릴 뻔했다.

분노한 화도명의 반격이 날아갔다.

후우우우우웅!

바람이 휘몰아쳤다.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바람 속에 보이지 않는 강기가 섞인 바람 암흑난류(暗黑亂流)였다.

극악소마는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몸을 날렸다.

스르륵.

뒤쪽에 있던 나무들이 박살 나는 게 아니라 소리 없이 베어지며 쓰러졌다. 바람은 소리 없는 암살자였다.

스르륵, 스르륵!

극악소마가 피해 다니는 곳으로 계속 바람이 불었고, 나무와 바위가 스르륵 잘려 나갔다.

이번에는 암흑난류를 의미하는 문양이 붉어졌다.

무리하면 할수록 몸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화도명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상대가 극악소마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렇게 무리하지는 않았을 거다.

휘류류류류류!

화도명이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암흑귀행술의 선들이 더욱 붉어짐과 동시에 그의 얼굴에 그어진 회오리 문양이 더욱 진해지기 시작했다.

휘류류! 휘류류류류!

본체인 회오리에서 십여 개의 회오리가 가지처럼 뻗어 나왔다.

그냥 회오리가 아니었다. 스치기만 해도 살과 뼈가 부서지는 강력한 강기의 회오리였다.

암흑신공의 하나인 암흑회륜(暗黑回輪)이 발휘된 것이다.

회오리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극악소마를 따라붙었다.

극악소마가 그것들을 피해 빠르게 달아나며 본체 회오리에 혈앙지를 날렸다.

회전하는 기세를 뚫지 못하고 혈앙지가 튕겨서 날아갔다.

뒤이어 날린 마극광폭장도 튕겨냈다. 아무 방향으로 튕겨냈기에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었다.

휘류류류류류류!

점차 회오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검무극이 앉아 있는 곳까지 피해를 입힐 것이다. 화도명이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당황한 극악소마는 반드시 허점을 드러낼 것이기에.

작은 회오리들이 사방에서 극악소마를 압박하던 그 순간.

극악소마의 신형이 날아올랐다.

작은 회오리들이 일제히 검무극을 향해 뻗어갔다.

극악소마의 목표는 중심이 되는 회오리였다.

그중에서도 맨 꼭대기!

과연 그곳에는 회오리가 없었다.

저 아래 회오리의 중심에서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화도명을 향해.

콰콰콰콰쾅!

그 속으로 마극광폭장을 발출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회오리가 폭발했다.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화도명의 모습이 보였다.

피를 내뿜는 그의 얼굴은 온통 붉은 선들이 가득했다. 암흑회륜을 발휘하며 또 무리한 것이다. 얼굴이 고통으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을 만큼 무리해도 극악소마는 죽지 않고 저렇게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화도명이 마지막 힘을 다했다.

쉭쉭쉭쉭쉭!

부채와 비수가 상대를 찌르기 위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화도명의 얼굴에 다시 붉은 선들이 늘어났다.

부채가 펼쳐졌다 접혔다, 찌르고 쳐내고.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분명 속도가 앞섰음에도 극악소마를 잡아내지 못했다. 위력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극악소마를 잡아내지 못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극악소마의 실전 경험이었다.

자신이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암흑신공에 빠져들었을 때, 극악소마는 검무극과 함께 생사를 오가는 싸움을 해오고 있었으니까.

극악소마는 이미 화도명의 공격방식과 습관을 읽어낸 것이다.

극악소마의 비수에 화도명의 팔이 베어지면서 피가 뿜어졌다.

그때 화도명은 보았다.

허공에 날리는 피를 뚫고 들어오며 자신의 심장에 비수를 박아 넣으려는 하얀 가면을. 그 가면 속 눈이 웃고 있었다.

끝장이라 생각하던 바로 그때!

후아아악!

갑자기 나타난 어둠의 장막이 극악소마를 삼켰다.

장막을 펼쳐낸 사람은 바로 마지막 죽립인이었다. 그의 이마에는 검은색 선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 붉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암흑결계(暗黑結界).

그의 비장의 한 수가 펼쳐진 것이다.

“오래는 못 버팁니다.”

그 역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오래 못 버티는 건 화도명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화도명의 얼굴은 완전히 붉은 선으로 가득했다.

그가 검무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무면객들을 모두 죽이고 검무극의 내공을 제압한 후 이대로 달아날 작정이었다. 마지막 역전의 기회였다.

무면객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앞서 화도명이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 잘 알았기에.

다섯 명의 무면객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를 향해 내달렸다.

나머지 다섯 명의 무면객들이 검무극 앞에 일렬로 줄지어 섰다. 뒤쪽에서부터 앞쪽으로 내공을 주입했다. 맨 앞 사람에게 내공을 몰아준 것이다.

화도명이 세차게 부채를 부쳤다.

“귀찮은 놈들! 다 꺼져라!”

부채에서 발출된 강기가 엄청난 기세로 무면객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애애액!

맨 앞에 선 무면객이 일장을 내지르며 강기를 막았다.

콰아앙!

지축이 흔들리는 공격이었지만 다섯 명의 내공이 모였기에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첫 번째 무면객이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자, 뒤에 있던 무면객이 그 자리에 서고 다친 무면객을 맨 뒤로 보냈다.

그사이 앞서 내달린 다섯 명의 무면객들, 초승달과 거미, 구름과 늑대, 그리고 불꽃이 그를 사방에서 공격했다.

앞서 극악소마와의 싸움에서 무리하지 않았다면, 암흑신공을 발휘한 그가 어렵지 않게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고, 게다가 마음이 다급했다.

공격에 적중당한 불꽃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어지는 공격에 초승달이 날아가 그를 안고 함께 굴렀다.

화도명은 한 놈이라도 확실히 죽이려 했지만, 나머지 무면객들이 그냥 있지 않았다.

슉! 슉! 슉! 슉! 슉! 슉! 슉!

무면객들이 일제히 지풍을 날렸다.

쏟아지는 지풍을 다 막지 못했기에 그의 호신강기에 박혔다.

싸움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화도명은 더욱 흥분했다. 그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그는 거의 한계에 도달했다.

화도명이 마지막 한 수를 발휘했다.

그는 무면객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그냥 밀어붙였다.

죽립 사내가 펼쳤던 바로 암흑철신공을 극한으로 펼치며 밀어붙인 것이다. 붉은 원 세 개가 피처럼 시뻘겋게 붉어져 있었다.

캉! 카앙! 카아앙! 캉!

지풍도 비수도 박히지 않았다.

화도명은 막아서는 무면객들을 몸으로 쳐내면서 그대로 밀어붙였다.

‘됐다!’

화도명이 몸을 날려 검무극을 낚아채려던 그 순간.

푸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그곳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내며 화도명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에 비수가 박혀 있었다.

허공에 검은 원이 있었고 그곳에서 팔만 나와서 자신을 찌른 것이다.

스스스스스스.

팔이 나와 있는 검은 원이 점점 커지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극악소마였다. 비수를 들지 않은 다른 손에 죽립 남자의 머리통이 들려 있었다.

극악소마가 암흑결계를 파훼하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주위의 어둠이 사라졌다.

화도명이 온통 붉은 선이 그어진 얼굴로 힘겹게 말했다. 여전히 그는 살고 싶었다.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이 복수는 할 수 있으리라.

“나를 살려주면…….”

그의 입에서 조건이 나오기 전, 극악소마가 그의 말을 끊었다.

“어두워서 잘 못 봤다.”

알 수 없는 말을 하고서는.

극악소마는 그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빠르게 뽑더니 심장에 제대로 찔러넣었다.

화도명이 즉사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극악소마가 들고 있던 머리통을 쓰러진 화도명의 시체 옆에 던졌다. 이곳에 있던 모든 적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극악소마가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고생들 했다.

그러고는 검무극 앞에 앉았다. 눈을 감을 때 자신이 있었으니, 눈을 뜰 때도 자신이 앞에 있으려는 것이다. 검무극이 얼마나 열심히 지금까지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푹 주무십시오.”

무면객들이 주위로 흩어졌다.

어떤 무면객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했고, 또 어떤 무면객은 동료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어떤 무면객은 나무에 기대 잠이 들었고, 또 다른 무면객은 그 나무의 가지에 서서 저 멀리 숲을 바라보았다. 또 어떤 무면객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시체가 가득하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곳에서 모두 조용히 쉬면서 검무극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눈 뜨자마자 우리 걱정인가요?

달빛이 흐르는 골목길에 피가 뿌려졌다.

목을 움켜쥔 채 쓰러지는 무인 뒤에 차이란이 서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주위의 기를 느꼈다. 살수 특유의 감각으로 살폈지만, 주위에 느껴지는 적은 없었다.

잠시 후, 일교가 그녀에게 와서 보고했다.

“다 정리되었습니다.”

그녀 뒤로 가인교 살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이란과 일교, 그리고 남은 살수들이 늦지 않게 골목으로 돌아왔기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으로 가인교 살수 여럿이 죽고 다쳤다.

그리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린 다시 돌아간다.”

차이란은 부상이 심한 이들은 치료를 받게 보냈고, 나머지 싸울 수 있는 살수들을 전부 데리고 다시 화도명과 싸우던 곳으로 돌아왔다.

마교와 이런 운명이 될 줄은 몰랐지만.

다 같이 죽거나, 다 같이 살거나. 오늘의 싸움은 그런 싸움이었다.

극악소마를 믿고 자신은 이곳으로 수하들을 구하러 왔다.

하지만 상대는 화도명이었다. 이번에 그는 새로운 면모를 보이며 자신의 본성을 실망스럽게 드러냈지만,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함께 있던 죽립 무인들도 심상치 않았고.

무엇보다 화도명은 극악소마를 보고서도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분명 믿는 바가 있다는 의미.

“서둘러라.”

그녀가 경공을 발휘해서 앞장서 달렸다.

검무극을 위해서였고,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서기도 했다.

이미 조직에는 배신자가 되었기에 이 상황에서 검무극이 잘못되면 이번 선택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질 테니까.

차이란이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다면 뒤따르던 십칠교는 다른 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초승달 무면객이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자꾸 나쁜 예감이 들었다. 누군지도 모르게 뒤얽힌 시체 사이에서 초승달이 그려진 가면을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곳이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피 냄새에 그녀의 심장은 더욱 두근거렸다.

그렇게 차이란과 살수들이 골목을 벗어나 앞서 싸웠던 곳에 도착하던 그 순간.

그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장내에 펼쳐진 상황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우선 검무극은 여전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차이란은 일단 안도했다.

‘소교주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극악소마도 살아 있었다. 그는 검무극 앞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운기하며 내공을 회복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주변의 무면객들.

그들은 시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구덩이에 이미 시체들이 가득 들어 있었고, 그녀들이 도착한 이 순간에도 무면객들은 시체를 나르고 있었다.

소교주가 눈을 떴을 때, 시체가 널린 광경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십칠교는 초승달 무면객부터 찾았다. 항상 한 번에 딱딱 찾아냈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무면객들의 숫자부터 셌다.

하나, 둘, 셋…… 여덟, 아홉, 열!

다행히 무면객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그때 가장 가까이에서 시체를 옮기고 있던 무면객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그가 초승달 무면객임을 알 수 있었다.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초승달 무면객에게 십칠교는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초승달 무면객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옆에 있던 다른 이와 함께 시체를 나르던 무면객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모른 척 더는 서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한편 차이란은 내심 놀란 상태였다.

‘이들이 다 죽였구나!’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화도명이었다.

처음에는 화도명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죽립이 세 개인 걸로 봐서 죽립인들은 다 죽은 것 같은데.

화도명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달아났나?’

그때 그녀 눈에 들어온 하나의 물건.

그것은 바로 부채였다.

시체 구덩이 속에 툭 튀어나와 있는 낯익은 부채.

그 부채를 움켜쥔 채 죽은 사람은 얼굴에 수많은 선이 그어진 남자였다. 화장이 지워졌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화도명이었다. 얼굴에 붉게 가로질렀던 선들은 모두 회색빛이 되어 있었다.

그가 죽은 것보다 그를 수하들과 함께 이렇게 시체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무면객들이 더 놀라웠다.

무면객들.

그들의 수장인 극악소마.

차이란은 방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검무극이라는 사람이 웃으면서 마인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고, 이들도 그런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이들은 천마신교의 마인들이다. 그것도 악인곡의 마인들.

무면객들이 시체 구덩이를 덮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차이란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의 혈육인 화도명이 죽었으니 배후 조직은 반드시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어느새 달은 기울었고 총총한 별들이 밤하늘의 새 주인이 되어 있었다.

* * *

비혈사의 기운은 남김없이 내공이 되어 단전에 갈무리되었다.

검무극은 장담할 수 있었다.

이제 내공만 따져서는 자신이 무림에서 제일이라고.

물론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니…… 아니다. 이 정도면 자신이 제일이다.

몸속을 휘달리던 다섯 기운도 어느새 조용히 몸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제 남은 기운은 하나.

과연 마지막 구슬은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또 여섯 기운을 다 모으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검무극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극악소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을 때도 그가 있었는데, 깰 때도 그가 있었다.

“깨셨습니까?”

극악소마의 두 눈이 반갑게 웃고 있었다.

가만히 그 눈을 응시하던 검무극은 고맙다는 말 대신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덕분에 잘 잤습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극악소마도 따라 일어났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개운했다. 물론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자서 개운한 것이 아니었다. 단전에 가득한 정순한 내공은 바다처럼 넓고 깊었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 장대한 내공이 주는 안정감과 자신감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만약 이 내공으로 구화마공 제 육식 천마멸세를 펼친다면?

지닌 내공의 대부분을 요구하는 천마멸세가 이 막대한 내공으로 펼쳐진다면? 그전에도 보이는 모든 것이 소멸했었는데.

지금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결과가 나올 것이다.

거기에 아버지처럼 천마멸세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이 내공으로 빛의 검을 만들어낸다면?

검무극의 가슴이 뛰었다.

검무극이 깨어나자 무면객들이 일렬로 늘어서더니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검무극이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자신의 몸은 이렇게 가뿐했는데 무면객들의 무복에는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다친 사람도 많이 있었고.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키느라 고생했지?”

그 말에 무면객들이 환하게 웃었다. 소교주의 이 말이면 충분했다. 소교주가 알아만 준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까.

무면객들과 반대쪽에는 살수들이 있었다. 늘어선 살수들 가운데 차이란이 있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걸어갔다.

“나 안 무거웠소?”

“무거워서 혼났어요.”

그녀는 자신이 부탁한 것을 해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소마님이 계셔야 한다는 그 약속, 지키셨소.”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라서요.”

“그럼 약속 하나만 더 합시다.”

“그 사람을 떠나게 해주자고요?”

이제 함께 가서 악군학을 구하자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약속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저들을 모두 해치울 때까지 본교의 그늘에서 쉬시오.”

좋게 돌려 말했지만 지금 검무극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을 지켜주겠다고.

그래, 자신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는 천마신교 뿐이리라.

“눈 뜨자마자 우리 걱정인가요?”

검무극이 깊어진 눈빛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내가 눈을 뜰 수 있게 해줬으니까.”

검무극은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하고 있었다.

천마신교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는 것은 신중히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제안하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완곡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일에 자존심도, 조직의 명예도 개입하지 않았다.

오직 수하들의 목숨만 생각하자, 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 잠시 몸을 맡기겠습니다.”

차이란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뒤에 있던 살수 여인들도 일제히 인사했다. 그 여인 중에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이도 한 명 있었다.

검무극도 그녀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놈들을 모두 제거하면 언제든 자유롭게 떠나셔도 되오. 소교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렇게 가인교 살수들은 잠시 천마신교에 의탁하기로 결정되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얼굴에 화장한 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를 짚었다.

“말하는 걸로 봤을 때 주요 인물의 혈육 같았습니다.”

검무극은 차이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안 건드는 것이 좋다고.

분명 그는 화씨 가문의 혈육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저만큼 주요 인물의 혈육이겠습니까?”

검무극의 농담에 극악소마가 웃었고, 차이란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느꼈다. 검무극이 있으니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표정들이 밝아졌고, 생기가 넘쳤다. 극악소마도 무면객도, 심지어 자신과 살수들도 영향을 받는 느낌이었다.

해가 환하게 떠오르며 세상도 밝아졌다.

드디어 긴 밤이 지났다.

* * *

이안은 창가에 서서 해가 뜨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검무극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극악소마가 함께 갔으니 괜찮겠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뒤에서 천화루주가 말했다.

“괜히 저 때문에 미안해요.”

“네?”

이안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천화루주가 이유를 밝혔다.

“소교주님과 함께 가고 싶으셨잖아요?”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신에 소마님께서 마음 편히 싸우고 계시겠지요. 제가 있고 불안한 소마님보다, 제가 없지만 편안한 소마님이 계시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극악소마를 높이 사는 말이었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말이었다. 또 극악소마와 천화루주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천화루주가 물었다.

“예언이 이뤄질까 걱정되나요?”

그러자 이안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뇨, 저는 예언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천화루주가 이유를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이안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이미 소교주님이 어떤 예언인지 알고 계시니까요. 알아서 잘 대비하셨을 거예요. 차라리 변수가 안 생겼으면 해요.”

그 말로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다.

“이 무인께서는 예언보다 소교주님을 더 믿고 있군요.”

이안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이안이 다시 창밖을 쳐다보던 그때, 그녀의 입에서 반가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당으로 사람들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검무극을 중심으로 극악소마와 차이란이 좌우에 있었고, 차이란 뒤쪽에는 살수들이, 극악소마 뒤쪽에는 무면객들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검무극이 창가의 이안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이안은 왈칵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무사히 객청으로 들어온 그들을 보며 천화루주는 하늘에 감사했다.

자신이 예언했기에 정말 정말 그 일이 벌어질까 봐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모른다.

그런 자신을 보며 극악소마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정말 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의 품에 달려가 안겼을 것이다.

이안은 검무극의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치셨어요?”

놀란 이안의 물음에 검무극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나 심장 찔렸어.”

그 말에 이안은 물론이고 천화루주도 깜짝 놀랐다.

“정말 소마님이 날 찌르셨지.”

천화루주는 예언이 이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틀린 예언인 줄 알았는데. 한데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괜찮으세요?”

이안의 걱정에 검무극의 엄살이 시작되었다.

“괜찮긴. 소마님이 어찌나 아프게 찌르셨는데. 어휴, 말도 마. 세상에서 제일 강하고 멋진 심장을 가진 나니까 살았지.”

이안이 극악소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더 아프게 찌르셨어야죠. 아니면 심장이 아니라 저 입을…….”

물론 모두에게 다 들리는 그녀의 장난이었다.

“입은 안 돼. 차라리 심장을 찔러!”

검무극이 장단을 맞춰주자 모두 웃었다.

“그나저나 이안아, 네 우승 상금이 날아갔다.”

신화방주가 죽었고 화도명까지 죽은 상황이니 천하제일미 대회를 속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안이 차이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차 소저께서 아쉽겠지요.”

“진심이세요?”

차이란의 물음에 이안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절반 정도는요.”

차이란도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정말 결승 무대가 펼쳐졌다면 과연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당분간 차 소저는 우리와 함께 할 거다. 이안, 네가 책임지도록.”

“네!”

이안이 차이란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반가움이었고 기분 좋은 환영이었다.

차이란이 그 호의에 답했다.

“그동안 제가 알려드려야겠네요.”

차이란이 피 묻은 자신의 무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복은 오늘 같은 날에나 가끔 입는 옷이라는 것을요.”

옷을 고르고 화장하고. 여인이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를 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살짝 무대에 입고 갔던 옷이 그립긴 해요.”

그렇게 그녀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자, 비로소 이번 싸움이 끝났음을 모두가 실감했다.

하지만 검무극에게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았다.

돌아왔으니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

“저는 잠시 사도맹주님을 뵙고 오겠습니다.”

나를 감당할 수 있겠소?

사도맹주 백자강은 신화방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에 서 있었다.

그의 뒤에서 비사인이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조사 결과 소방주 안후평은 물론이고 다른 신화방 무인들도 이번 일을 모르고 있었던 거 같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도맹주 암살이라는 이 엄청난 계획을 함부로 누설하진 않았을 테니까. 신화방주 안청광과 함께 죽었던 염사검과 철한도만이 알고 있었던 비밀이었으리라.

“안후평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이번 일을 꾸민 신화방주의 직계 혈육이니 죄를 물을 수도 있었다. 죄가 없더라도 만들 수도 있었고.

하지만 백자강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냥 놔두거라. 모르고 있었다면 굳이 벌할 필요는 없겠지.”

비사인은 현명한 판단이라 여겼다.

안후평은 이 일로 복수할 만큼 독심이 있거나 배포가 큰 자가 아니었다.

큰 죄라고 해서 혈육까지 단죄하는 비정한 모습보다는 사도맹주의 너른 아량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모로 나은 선택이리라.

사실 안후평은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그가 이대로 신화방을 물려받게 된다면?

파락호처럼 살아온 이 철부지가 과연 이 거친 사파 무림에서 신화방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때 허공에서 호위대주 인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 소교주가 찾아왔습니다.”

“오라 하게.”

비사인이 백자강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비사인은 사부가 이번 일로 검무극과 단둘이 할 말이 있을 거란 생각에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후, 백자강이 혼자 기다리는 그곳에 검무극이 올라섰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한 후, 고마움을 전했다.

“이번 일을 제게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이기에 백자강이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나설 수도 있었던 일이다. 게다가 이곳은 사도맹의 영역.

“내가 왜 이번 일을 자네에게 맡겨두었는지 아나?”

“무엇 때문입니까?”

귀찮아서도 아니고, 검무극이 암살 계획을 알려줘서도 아니었다.

신화방을 내려다보고 있던 백자강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넬 존중해서라네.”

그가 진심으로 말했음을 느꼈기에 검무극도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족한 저를 높이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맹주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자연 검무극을 향한 눈빛은 부드러웠다.

“고생했네.”

“이번 일은 소마님이 다하셨습니다. 저는 푹 자다 왔습니다.”

백자강이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더니.

“잠을 잘 잤나 보군.”

놀랍게도 백자강은 검무극의 변화를 읽어낸 것이다. 검무극은 그야말로 만날 때마다 강해지고 있었다.

눈앞의 이 소교주는 이제 물러나야지 하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무림맹주도 비슷한 심정일 거라 확신했다. 어쩌면 마교주도 다르지 않겠지.

“놈들이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아냈나?”

“죄송하지만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백자강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예언 같은 말을 듣는 순간 이건 단순한 암살 계획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자넨 그 헛소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사도맹주가 죽지 않으면 무림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헛소리란 표현으로 백자강은 자신이 무림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음을 드러냈다.

헛소리입니다.

백자강의 기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해줄 법도 했는데.

“헛소리가 아닐 겁니다.”

백자강의 작은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분명 어떤 의미가 담긴 말이라 생각합니다.”

천화루주는 그것이 예언 같다고 했다. 그 말은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의 일에 이 사도맹주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

“그럼, 그 말을 믿는다는 뜻인가?”

“맹주님이 무림을 멸망시킨다고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랬다간 정말 무림이 멸망하라고요?”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임을 알지만, 소교주의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전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한데 왜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했나?”

“저들은 잘못된 신념을 지닌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의 뜻을 실행하는 자들이라 믿는 천의궁의 후예들이죠. 천의궁의 삼 궁 중에서도 가장 악하다고 알려진 암흑궁의 후예들이고요. 삼백 년 전에는 실제로 무림을 정복하려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검무극은 이번 예언을 저들의 입장에서 해석했다.

“맹주님이 살아계시면 저들이 꿈꾸는 뭔가를 이루지 못할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맹주님이 무림을 구하는 것을 반대로 멸망한다고 해석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백자강이 옅게 웃었다. 결국 그냥 헛소리가 아니라, 제 딴에 진지하게 하는 헛소리란 의미였다.

“난 무림을 멸망시킬 일도 없지만, 무림을 구할 일도 없네.”

“그건 모를 일이죠.”

이 말에도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정말 검무극은 자신이 무림을 구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는 거다.

“그 예언에 불쾌해하지 마십시오. 그만큼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서 계신다는 뜻이니까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맹주님을 암살해서 얻으려는 것이 있습니다. 확실한 후계자가 있는 상황이니 사도맹의 권력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요.”

검무극이 백자강을 응시하며 물었다.

“저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맹주님.”

백자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답은 분명 맹주님께 있습니다.”

* * *

비사인은 이번 대회의 결승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경공으로 날아와 빈 무대에 내려섰다.

“아쉽네. 이 무대에서 이안이가 천하제일미가 되는 걸 보고 싶었는데.”

비사인은 그가 자신을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 사부를 만나러 왔으면 자신을 보러 올 것이기에. 과연 어디서 보자 약속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찾아왔다.

“아쉬우면 자네가 다시 개최하게.”

비사인의 말에 검무극이 무대 끝에 걸터앉았다.

“천마신교에서 개최하는 천하제일미 대회라. 다들 무서워서 참가나 할까? 참가자가 없어 자네가 화장하고 참가해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 거야.”

비사인이 실소했다. 대부분 이런 어이없는 웃음이었지만, 그래도 검무극 앞에서만큼은 곧잘 웃는 그였다.

“이제 교로 돌아갈 건가?”

“가야지. 맹주님을 뵈어서 그런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네.”

차이란에게는 악군학을 구해서 떠나게 해주자고 했지만, 무작정 그럴 수는 없었다.

그가 있는 곳을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이번 일은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악군학을 믿는다면 기다려줘야 한다. 그와 인연이 계속된다면 분명 운명의 부름이 있을 것이다.

“참, 이곳에서 제일 분위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이 어딘지 아나?”

“거긴 왜 묻나?”

이곳이 비록 사도맹 영역이라도 해도, 중원 곳곳 안 가본 곳이 없는 검무극이 알아도 더 잘 알 것이다. 한데 왜 자신에게 묻나 싶었는데, 거기에는 자신을 놀리려는 속셈이 있었다.

“자네가 잘하는 거 해주려고.”

“내가 잘하는 거? 그게 뭐지?”

비사인의 불안감이 슬슬 고조되었다. 차라리 사람 죽이는 것! 이런 대답이 나왔으면 했는데.

“있잖아? 친구들 몰래 잘하는 거.”

비사인의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던 그때, 검무극이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의 그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연정 말이야. 몰래 사랑!”

순간 비사인은 당황했다. 빙궁의 소궁주 한설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지만, 비사인이 딱 잡아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두고두고 놀릴 거라더니, 이제 시작된 것이다.

“바빠서 오늘은 그냥 가지만.”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리며 말했다. 가면서도 놀리면서 갔다.

“아! 자네가 가야 그 비법을 전수해 줄 텐데.”

* * *

십칠교가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다리는 물을 가로질러 호수 가운데 있는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주위 경치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는 호숫가에서 살랑거리던 들꽃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청록의 호수도 즐기지 못했다.

이곳 정자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차이란이었다. 그녀는 아무 설명도 없이 자신을 지목해서 이곳으로 보냈다. 아, 한마디는 했다. 잘 차려입고 가라고 했다. 왠지 살행을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십칠교가 정자에 도착했다.

정자에 오른 십칠교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대를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바로 초승달 무면객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올지 몰랐는지 놀란 눈치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과 분위기가 흘렀다.

십칠교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무면객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차이란이 알아차렸음을. 오교가 말했을까? 아니면 시체 치울 때 서로 인사하는 걸 봤던 누군가가 보고한 것일까?

어쨌든 이건 차이란의 경고이리라. 사내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는.

십칠교가 크게 심호흡한 후에 침묵을 깼다.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저를 두 번이나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아까 살아 계신 걸 봤을 때 정말 기뻤어요.”

차이란이 천마신교의 그늘에서 쉬겠다고 결정했을 때 정말 기뻐했던 그녀였는데. 이제 같은 곳에 있어도 절대 그를 아는 척할 수 없으리라.

그녀가 품에서 비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이건 제게 의미가 있는 비수에요. 감사의 뜻으로 드리고 싶어요.”

당당히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얼굴도 못 본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그리고 제가 앞으로 모른 척해도 이해해 주세요.”

초승달 무면객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던 그때였다.

누군가 바람처럼 호수를 가로지르며 정자로 날아왔다.

손에 술병을 든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두 사람을 위해 술을 사 왔네. 자넨 술을 못 마실 테니, 향 좋은 술로 샀네. 처음 만나 어색한 데 이거라도 가운데 있으면 분위기 살잖아? 내가 이거 사러 어디까지 달려갔다 왔는지 모를 거네.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벌써 싸웠어?”

검무극의 등장에 십칠교와 초승달 무면객 모두 깜짝 놀랐다.

십칠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소교주님이 여긴 왜 오신 거죠?”

“왜라니? 내가 자네들 불렀으니까. 차 소저에게 부탁했네. 자네를 여기 불러달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벌써 잊었나? 고마움 전하는 자리를 내가 만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직접 만나서 비수 전해주라고.”

십칠교가 어찌 잊었겠는가? 하지만 진짜 소교주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애초에 검무극이 만든 자리라곤 생각 못 한 것이다.

‘정말 나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고?’

십칠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도 모르고 상대에게 너무 솔직한 마음을 다 말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제가 오해했어요. 죄송합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대로 호수에 뛰어들고 싶었다.

그때 초승달 무면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소교주님이 술도 사 오셨는데.”

십칠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대라도 한잔 마시고 가시오.”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격정이 퍼져나갔다.

무면객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이 순간의 무면객은 너무 멀쩡해서 십칠교는 저 가면 아래 어떤 얼굴이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럼 이야기들 나누게.”

두 사람을 남겨두고 검무극이 조용히 빠져주었다.

검무극이 순식간에 호수를 지나서 호숫가에 내려섰다. 그곳에 차이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두 사람 앞에서는 아주 점잖은 소교주였었는데.

“차 소저, 혹시 살수들 무공 중에 물에서 숨 쉬고, 사람 말 엿들을 수 있는 비기가 있소? 아! 저 둘이 무슨 이야기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서 미치겠소! 우리 훔쳐 들으러 갑시다!”

십칠교를 불러달라고 했을 때 차이란은 놀랐다. 두 사람을 정말로 만나게 해준 것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이 일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일개 수하들의 일을 마교 소교주가 잊지 않았다고?

차이란이 정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정말 저 두 사람 야반도주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면 좋겠지만, 현실은 마음에 담아두고 평생 그리워할 거요.”

“그게 더 불행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불쑥 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어서, 더 불행하오?”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되지 않는 행복의 영역에서 제법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비록 혼자만의 감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본교에 투신하면 저 두 사람은 야반도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저들 때문에 마인이 되라는 말인가요?”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니, 날 위해 마인이 되라는 거요.”

순간 차이란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소교주 직속 살수단이 되는 거요. 무림에 소문이 쫙 나겠지. 천마신교 소교주가 무림제일의 살수단을 거느리고 있다더라! 그것도 정말 아름다운 미인들로 이뤄진 살수단이라더라!”

차이란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농담이라며 손사래를 칠 거로 생각했는데, 검무극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차이란은 아주 잠깐 그런 삶을 살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

이 소교주는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놈들을 없애면 마음대로 떠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으면서요.”

“당신 같은 인재를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넘겨야 했는데. 차이란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떠나기 위해서 싸웠어요.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오. 무림일통이나 무림멸망을 위해서는 아니오.”

검무극이 솔직한 마음을 그녀에게 밝혔다.

“아버지랑 낚시도 하고, 마존들하고 어울려 놀고, 술도 마시고, 책도 보고, 여행도 다니고. 그렇게 살고 싶어서요.”

검무극이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 너머 정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둘을 야반도주도 시켜주고. 또…….”

끝으로 차이란을 보며 덧붙여 말했다.

“당신 사랑도 찾아주고.”

차이란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오게 되리란 것을.

검무극이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는 무림일통보다 이런 삶을 사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지오.”

그녀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신은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소?”

그 손 꽉 잡으세요

당신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차이란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아버지와 낚시하며 사는 삶이 무림일통보다 더 어렵다는 사람이었다.

수하가, 그것도 자신의 수하가 아닌 일개 살수를 위해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다.

둘이 야반도주하길 바라며 멀리 달려가서 술을 사 오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신분은 천마신교 소교주다.

무림인으로 살면서 이런 사람을 처음 봤는데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살수단이 필요한 게 아니죠?”

눈앞의 이 소교주가 정말 그런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살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은 순순히 그녀의 추측을 인정했다.

“맞소. 나는 살수단이 아니라 당신이 필요하오.”

“왜 나죠? 당신에게는 당신의 명령을 수행할 수많은 고수가 있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악군학 그 사람을 좋아해서 신경이 쓰였소. 다음에는 과감히 청부를 포기하는 당신의 용기에 감탄했고. 그리고 이제 내 목숨을 구해줬지.”

사실 이것만으로도 다른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었는데. 이유는 더 있었다.

“천하제일미를 다툴 정도로 아름다운 데다 무공실력까지 좋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당신이 좋은 이유가 하나 있소.”

차이란은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올 말은 다 나온 것 같은데. 아니, 너무 많이 나와 민망할 정도인데.

검무극이 말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신은 독단 깨물 힘 있으면 어금니 꽉 깨물고 끝까지 살려고 노력하라고 말하는 수장이니까.”

“난 그런 사람을 내 사람으로 삼고 싶소.”

차이란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악군학이 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지.

아니, 어쩌면 악군학의 말처럼 이 사람이 그를 죽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당신이 추구하는 그 평범한 삶에 과연 내가 필요할까요?”

“아까 말하지 않았소? 그 삶이 무림일통 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배후 세력을 모두 없애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아버지와의 약속.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면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여전히 검무극은 그 일을 막는 것이 배후 놈들을 없애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살수로 살아온 당신의 삶을 부정하려는 거 아니오. 나와 함께 가다가 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는 진짜 보내주겠소.”

그녀가 필요해서 하는 제안이었지만, 그녀를 위해서기도 했다. 기왕 자신과 인연이 되었으니 살수가 아닌 삶을 살아보기를 바라서.

회귀 전 인생에서 그녀는 평생 이름 없는 살수로 살았다. 그런 삶을 묵묵히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삶도 잘 살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에.

“만약 수하들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시오.”

천마신교에 투신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자유롭게 보내주라는 의미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어차피 일단은 함께 본교로 돌아가야 하니까.”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호수 위 정자를 향했다.

십칠교와 초승달 무면객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어색해서 금방 자리를 파할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는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검무극이 신안술을 발휘해서 보니 십칠교가 웃고 있었다. 저 무뚝뚝한 무면객이 대체 무슨 말로 살수를 웃긴단 말인가!

“아! 궁금해 미치겠소. 두 사람이 무슨 말 하는지 들어야 하는데! 정말 살수 비기 중에 멀리서 엿듣는 무공 없소?”

* * *

그날 밤, 이런저런 생각에 차이란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바람을 쐬러 거처를 나섰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이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내원 마당에서 이안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차이란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이안이 먼저 인사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차이란을 향한 이안의 눈빛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깐 몰랐어요. 차 소저께서 소교주님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셨다는 것을요.”

이안이 차이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교주님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정중한 인사에 차이란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소교주를 생각한다는 것을.

소교주, 당신은 욕심도 많네요. 이런 사람을 두고 나까지 수하로 거두려고 하니.

“저도 저를 위해서 한 일이니,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럼에도 이안의 눈빛에는 고마움이 가득했기에 차이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뭘 그리 보고 계셨어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씩은 하늘을 올려다봐라! 소교주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죠. 만날 잊어버려서 이렇게 뒤늦게 별들 보는 날이 많답니다.”

잠시 그렇게 별을 쳐다보던 차이란이 불쑥 물었다.

“소교주는 어떤 분인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였을까? 이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너무 불쑥 물었죠? 말하기 싫으면 안 하셔도 돼요.”

이안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아뇨.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뭐라 딱 표현하기 힘든 분이라서.”

차이란은 이안의 말을 이해했다. 그래, 검무극은 오래 봤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소교주께서 제안을 했어요. 저를 수하로 삼고 싶다고.”

이안은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소교주가 이 소저에게 말했나요?”

“아뇨.”

“한데 놀라지 않네요.”

“제가 소교주님이라도 그랬을 거 같아서요.”

잠시 이안을 쳐다보던 차이란이 말했다.

“소교주에게 나쁜 걸 배웠네요. 상대가 듣기 좋은 말, 해주는 거.”

“그게 나쁜 건가요?”

이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노력하는 거잖아요? 적어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미리 고민했다는 거고. 그 말로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면 나쁜 거겠죠. 한데 소교주님 수하가 되는 건,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차이란은 지금까지 봤던 이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소교주와 관계된 이야기를 할 때의 이안은 눈에서 빛이 났다.

“혹시 지난 삶이 바뀌는 게 두려우신가요?”

이안의 물음에 차이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망설인다면 그 이유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살수의 삶을 살다가 마교 소교주의 칼이 된다고?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검무극이 특별한 느낌을 주더라도 말이다.

“저는 평생 소교주님의 호위로 살아왔었지요. 제가 좋아한 일이었고, 그것 말고는 다른 삶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죠.”

오늘 작정을 했는지 이안은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처음에는 검무극이 그녀를 원한다면, 이렇게라도 도와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진심이 나왔다.

“한데 소교주님이 그 인생을 바꿔 줬어요. 지금은 소교주님 호위가 아니라 귀영대주가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제가 뭘 느꼈는지 아세요?”

“뭘 느꼈죠?”

다시 밤하늘의 별을 향한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삶은 즐겁기보다는 참 고된 삶이구나.”

이 감정이 바로 호위 임무를 그만두고 귀영대주가 되고 느낀 바였다.

“좋아하는 일이니 잘하고 싶고, 잘하려고 하니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싫은 것도 꾹 참아야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 무조건 즐겁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게 참 힘든 일이구나. 좋아하는 일이기에 힘들구나.”

별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요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아! 누군가를 지켜주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 하나만 잘 챙겨서 살면 되는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모를 거예요. 정작 호위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절대 몰랐던 감정이에요. 어떤 감정은 그 일을 그만뒀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됐죠.”

천화루주를 그렇게 열심히 지켜주던 그녀의 모습과는 상반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도, 또한 지금 하는 말도 모두 진심이었다.

이안의 솔직한 말에 차이란은 내심 생각했다. 자신에게 청부가 없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과연 이안처럼 저런 안도감을 느끼게 될까?

“한 번은 그게 어떤 마음인지 느껴보세요. 설령 다시 살수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분명 차 소저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차이란은 이안이 진심으로 자신이 검무극의 수하가 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런 말을 해주죠? 제가 소교주의 수하가 되면 이 소저에게 유리할 거 없잖아요?”

“혹시 소교주님의 애정이 분산되지 않겠냐는 말씀이라면.”

이안이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소교주님 마음의 크기를 아직 모르시는 거죠. 그분의 마음은 세상을 다 담으시고도 남을 거예요.”

“이 소저 마음이 큰 건 아니고요?”

“저는 큰 척하는 것이고요.”

이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그곳을 걸어갔다.

저만치 걸어가던 이안이 돌아서며 말했다.

“참, 떠날 수 없게 되진 않을까는 걱정하지 마세요. 소교주님은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을 떠나보내려고 애쓰는 분이시니까요.”

처음에 이안에게도 네 삶의 행복을 위해 떠나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건 차이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악군학을 떠나보내 주기 위해 애쓰는 그였으니까.

오늘 이안의 말은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잡아줄 때, 그 손 꽉 잡으세요.”

* * *

다음 날 아침 신화방에서는 출발 준비가 한창이었다.

검무극 일행이 교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마차들이 여러 대 준비되었다. 수장들을 위한 마차를 제외하고 나머지 마차에는 부상 당한 이들을 태웠다.

다치지 않은 무면객들과 가인교 살수들은 모두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했다. 그들 모두 죽립과 면사를 착용했다.

검무극이 떠나기 전에 비사인이 찾아왔다. 작별인사도 할 겸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가인교 살수들은 천마신교 후계자와 사도맹 후계자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비사인이 고마움을 전했다.

“이번에도 고마웠네.”

이번 일 역시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도맹주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감사는 내가 해야 하네. 맹주님이 이번 일을 맡겨주신 덕분에 내가 얻어가는 게 많네.”

비사인은 검무극의 이런 솔직함을 참 좋아한다. 무림을 살다 보면 느낀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생색내려 하고, 어떻게든 상대에게 신세를 지게 하고 빚을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검무극은 달랐다. 그의 은원에는 왜곡이 없다.

“여전히 맹주님을 목표로 한 음모는 진행 중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자네가 신경 많이 쓰게.”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의 전말이 밝혀질 때까진 사도십삼랑과 함께 백자강을 호위할 작정이었다.

“통천각에서도 맹주님과 관계된 정보가 있으면 바로 보낼 거네.”

“고맙네. 우리도 함께 호응하겠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든든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검무극의 눈빛에 떠오르는 장난기에, 비사인이 미리 말했다.

“하지 말고 그냥 가게!”

물론, 그냥 갈 검무극이 아니었다.

“눈치가 이렇게 빨라야 몰래 사랑도 할 수 있는 거지.”

기어코 비사인을 놀린 후 검무극이 마차에 올라탔다. 검무극이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 * *

천장은 높았다.

큰 돌기둥들이 둥근 천장을 떠받들고 있었다.

벽과 천장에 그려진 것들은 별자리들이었다.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수많은 별이 그려져 있었는데, 별 중에서도 무학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들 위주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검무극이 왔다면 당장에 알아볼 수 있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공간 구석에 큰 비궤가 놓여 있었다. 악군학이 가지고 돌아갔던 그것이 바로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공간의 한쪽 벽에 그려진 문양이었다.

그것은 바로 검무극이 황룡무관의 지하에서 봤던 그 문양이었다.

가운데 비궤를 둘러싼 여섯 개의 둥근 원.

그중 네 개의 원에서 은은하게 빛이 나오고 있었다.

검은색, 푸른색, 흰색, 황색.

놀랍게도 그 색들은 검무극이 흡수했던 구슬의 색깔이었다.

그 앞에 중년 여인이 앉아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그녀는 바로 신녀궁의 후예이자 당대 신녀궁주인 가예(賈藝)였다.

그녀 앞에 큰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피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가예 앞 어둠 속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등은 곧게 펴져 있었으며 두 손은 단전 앞에 차분하게 모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두 눈은 빛나고 있었는데, 그의 검은 눈동자는 어둠을 누르는 어둠이었다.

바로 그때 가예 뒤쪽 벽화에 그려진 비궤에 빛이 나는가 싶더니.

화아아악.

다섯 번째 원이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가예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도(赤道)의 기운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벽화는 구슬 속 기운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자 어둠 속 노인이 나직이 말했다.

“이제 소교주가 적도의 기운까지 흡수하겠군.”

그의 목소리는 오래된 종소리처럼 깊은 울림이 있었다.

“비혈사가 적도의 기운을 타고 소교주의 몸에 들어갔을 겁니다.”

가예의 말에 어둠 속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위해 당대 단 한 번 쓸 수 있는 비혈사를 사용했다. 이번 일이 성공하기만 하면 지난 실패와 희생은 모두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스스스스.

가예 앞에 놓여 있던 피 그릇이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가예가 두 눈을 부릅뜨며 충격에 빠졌다.

“비혈사가 죽었습니다.”

그녀의 보고에 어둠 속 노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쏘아져 나오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예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비혈사가 죽었다는 건, 이번 일도 실패했다는 뜻이겠군.”

노인의 말에 가예는 떨리는 눈으로 검게 변한 물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어둠 속 노인에게서 흘러나온 나직한 고민.

“결국, 그를 깨워야 하나?”

그러자 가예가 노인 앞에 부복하며 엎드렸다.

“안 됩니다. 육도원기(六道元氣)가 없으면 그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를 그냥 내보내시면…….”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기에 가예는 단호히 덧붙였다.

“이 무림은 피바다가 될 겁니다.”

궁지에 몰리면 가면을 벗으십시오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을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선두 마차에 검무극과 극악소마, 천화루주와 이안, 그리고 차이란이 탔다. 원래라면 세 대에 나눠 탔을 건데, 다친 이들의 숫자가 많아서 한 마차에 탄 것이다.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나란히 앉았고, 그 건너편에 이안과 검무극, 그리고 차이란이 앉았다.

차이란은 이번 마차 여행에서 검무극의 뜻밖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일하는 모습이었다.

은월에서 계속 그에게 전서가 날아들었다.

적과 싸울 때는 멈췄던 전서였는데, 이렇게 그가 한가해지자 밀려있던 정보가 그에게 보고되었다. 어느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또 어떤 고수가 누구에게 죽고. 상단에서는 어떤 거래가 이뤄지고. 고월이 엄선한 정보를 챙겨 보내고 있었다.

화르륵.

전서를 읽으면 그때마다 열양지기를 일으켜 전서를 태웠다. 답이 필요한 내용에는 곧바로 답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때론 극악소마와 정보와 관련해서 전음을 나누기도 했다. 그가 진지하게 일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적응이 잘 안 됐다.

거기에 검무극의 견문이 정말 넓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 마을에 관호반점이라고 있소. 형제가 하는 반점인데 저곳에 생선 요리가 정말 끝내주게 맛있소. 다음에 기회 되면 꼭 가보시오. 다음 마을에는 구 의원이라고 아주 용한 의원이 있소. 이 근처에서 다치면 그 마을로 뛰시오.”

어디 그뿐인가? 구석구석 길도 잘 알았다.

“그쪽 길 말고 좌측 길로 빠져서 아랫길로 내려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네.”

이렇게 마차를 모는 무면객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길눈 밝은 건 정말 부러워요. 제가 길눈이 너무 어두워서.”

천화루주가 부러워하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루주님은 저보다 더 중요한 길을 보시지 않습니까?”

천화루주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한 마디를 나눠도 이렇게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해가 저물기 전에 검무극이 마차를 세우게 했다.

“자,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세.”

그들은 되도록 마을에 들르지 않고 이동 중이었다. 숫자가 많아 눈에 띄기에 십상이었기에, 불편하더라도 야영을 하면서 돌아가려는 것이다.

중앙에 공간을 두고 마차를 둘러 세운 후 말을 들판에 풀어서 쉬게 했다.

가운데 큰 모닥불을 피우고 잠잘 자리를 마련했다. 무면객과 살수들 모두 뭐든 능숙한 이들이라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움직였다.

“자, 오늘 저녁은 내가 실력 발휘를 하겠네.”

검무극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차이란은 설마 소교주가 요리를 잘하겠냐는 표정으로 이안에게 속삭였다.

“충성심으로 먹어야 하는 요리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요?”

차이란의 걱정에 이안은 검무극의 요리 실력을 높이 샀다.

“드셔보시면 없던 충성심도 절로 생길 거예요.”

차이란은 허풍이라 여겼다. 검무극이 다재다능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설마 요리까지 잘하겠느냐는 마음.

먹을거리를 찾으러 갔던 무면객들과 살수 여인들이 멧돼지를 사냥해왔고 채소와 과일을 구해왔다.

검무극이 요리를 도울 사람을 찾았다.

“자, 사람 말고 고기와 채소도 좀 썰어본 사람!”

다들 서로를 쳐다볼 뿐 나서지 않았다. 감히 천마신교 소교주의 보조 역할을 자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할 수 없네. 내가 보조할 사람 두 사람만 고르겠네.”

검무극이 무면객에서 한 명, 그리고 살수 중에서 한 명을 골랐다. 물론 그 두 사람은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였다.

“자, 두 사람은 저기 채소 좀 씻어서 다듬어 주게.”

정자에서 셋이 만났기에 검무극이 일부러 자신들을 뽑았음을 알 수 있었다.

정자에선 웃으며 대화를 나눴으면서 지금은 서로 얼굴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그때 차이란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당신 너무 집요해요.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꼭 들어야겠소!

차이란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말로만 집착했을 뿐, 요리에 집중했다. 먹여야 할 입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잡아 온 멧돼지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슥슥슥!

정말 손놀림이 빨랐다. 순식간에 털을 손질하고 배를 갈라 내장을 제거하고 피를 뺐다. 검무극은 오랜만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고 있었다.

고기를 손질한 후에는 비법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차이란은 소교주의 혁낭에는 없는 양념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만든 양념을 고기에 여러 번 반복해서 발랐다.

“원래 숙성을 좀 시켜야 맛이 좋은데, 시간이 없으니.”

검무극이 손을 내밀었다. 손에서 발출된 기운이 고기를 감쌌다.

“아! 그 귀한 무공이 고기에 양념 배이게 하는 데 쓰이는군요.”

이안의 탄식 같은 농담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너희들 입에 들어갈 거니 제일 귀하게 쓰이는 거지.”

검무극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통나무를 줍더니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말했다.

“자자, 모두 박수칠 준비하게!”

그렇게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시킨 후에 통나무를 위로 던졌다.

빛처럼 빠르게 흑마검이 뽑혀 나왔다.

순식간에 수십 가닥의 검광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나무를 감쌌다. 곧이어 무엇인가 쏟아져 내렸다.

착착착착착착착!

검무극의 손위로 떨어진 것은 놀랍게도 수십 개의 젓가락이었다.

너무 손쉽게 해내서 나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한 수였다.

하지만 그걸 직접 지켜본 이들은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이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는 한 수라는 것을 알만한 그들이었으니까.

방금 자신들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한 경지로 젓가락 만드는 것을 보았다.

검무극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젓가락을 사방으로 뿌렸다.

촤아아아악.

마치 뿌려지는 암기처럼 날아간 젓가락이 모두에게 정확히 날아갔다.

차이란은 자신의 손에 들린 젓가락을 놀란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젓가락은 크기도 굵기도 일정했다. 정말 검광으로 눈을 현혹한 후 파는 물건으로 바꿔치기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젓가락이었다.

무면객들이 일제히 박수쳤다. 살수들도 함께 박수쳤다.

그 진심 어린 감탄에 검무극은 별거 아니라는 듯 으스대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렇게 온갖 비기가 난무했던 검무극의 요리가 끝났다.

“부담가지고 먹게.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무면객도 무면객이지만, 가인교 살수들은 정말 그 말에 동의했다. 자신들이 살면서 언제 천마신교 소교주의 요리를 먹어보겠는가?

놀랍게도 요리는 정말 맛있다. 차이란은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객잔에서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 놀란 것은 이 고기가 너무나 맛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가 손수 만들었던 젓가락 때문도 아니었다.

검무극은 만든 요리를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나눠주었다. 깨끗이 씻은 큰 잎사귀에 고기와 밥, 채소를 얹어서 나눠주었다. 싸움터에 지원 나온 숙수처럼 모두에게 배식하며 말했다. 차이란은 이 말에 놀랐다.

“다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따로 준비했네.”

각자 식사 들고 어디든 가서 조용히 식사하라는 그의 배려였다.

차이란은 상상해보았다. 만약 자신이 수하들과 야영하며 밥을 먹었다면?

아마도 수하들이 챙겨주는 밥을 먹었을 거다. 일교나 이교와 같이 먹었겠지. 다른 수하들은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알아서 챙겨 먹겠지 하고.

한데 검무극은 무면객들과 살수들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한 자신도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인데.

“젓가락 잘 보관해둬. 나중에 내가 교주가 되면 그 젓가락이 엄청 비싸게 팔릴 거네.”

무면객과 살수들을 챙겨주고, 다음으로 차이란과 천화루주, 그리고 이안이 먹을 요리를 챙겨준 후, 마지막에 자신과 극악소마가 먹을 음식을 챙겼다.

“세 분 식사하세요. 저는 소마님과 따로 먹겠습니다.”

그렇게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저 멀리 있는 언덕으로 날아가 자리를 잡았다.

둘만 있게 되자 극악소마가 천천히 가면을 벗더니 머리 위에 올렸다. 검무극이 가면을 쓸 때 주로 했던 것을 극악소마도 따라 한 것이다.

검무극이 어찌 또 소마의 얼굴 칭찬을 잊겠는가?

“혹시라도 적이 여자인데 궁지에 몰리시게 되면, 마지막 일장을 날릴 힘으로 가면을 딱 벗으십시오. 그럼 역전의 기회가 생길 겁니다.”

소교주의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았기에 극악소마는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었다. 검무극은 극악소마가 자신 앞에서 가면을 벗어서 너무 좋았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술 마시는 이 즐거움을 그와 함께해서 너무 좋았다.

밥을 다 먹었을 때, 극악소마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했다.

“소교주님의 심장을 찌를 때…….”

이어지는 솔직한 심정.

“겁이 났습니다.”

검무극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죄송하네요. 저는 걱정 하나도 안 했었는데.”

“만약 제가 실수라도 했으면요?”

말을 하고 난 극악소마가 머리에 올려둔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적어도 이 가정을 하는 순간만큼은 표정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찌를 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계속 그 순간이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극악소마의 마음을 느꼈기에 검무극도 차분히 자신의 심정을 전했다.

“그냥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제가 언제든 죽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소마님의 비수에 찔려 죽지는 않을 거다. 누구에게 죽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소마님은 아닐 거다. 당연하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지요.”

이제 주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작은 모닥불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과 침묵을 즐겼다. 사람들 앞에서는 기분 좋게 웃고 떠들고 하던 검무극이 극악소마와 단둘이 있자 더없이 차분하고 조용했다.

극악소마는 알고 있었다. 이게 검무극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과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과 있을 때만이라도 조용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극악소마는 자리가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 * *

이제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을 하루 남겨두었다.

오늘 검무극은 마지막 요리를 해주었다.

“자, 아쉽겠지만 나의 이 환상적인 요리는 오늘까지네.”

다들 아쉬워했는데 가장 실망한 한 사람이 있었다. 첫날 이후 초승달 무면객과 함께 계속 요리 보조 역할을 했던 십칠교였다.

검무극 덕분에 초승달 무면객과 같이 채소 씻고 다듬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감사해요, 소교주님.’

그녀는 소교주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때 차이란이 검무극에게 와서 물었다.

“당신, 안 지쳐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발적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오는 내내 검무극은 활기차게 모두를 대했다. 직접 요리를 해서 먹였고, 농담과 너스레로 분위기를 풀었다.

무면객들이야 원래도 소교주를 좋아했는데, 이제 살수들도 호감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대들에게 점수 따는 재미에 지칠 새도 없었소.”

그게 점수 따려고 한 연기였다면 중원 제일의 배우를 지금 보고 있는 것이리라. 아무도 그걸 연기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공이 넘쳐나는 데 뭐가 지치겠소?”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물었다.

“사람들에게 안 지치냐고요.”

이번 일만을 두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하들을 아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해 밥을 먹인다고 뭐가 달라질까? 배신할 상황이 되면 미안해하며 배신하겠지.

“나는 반칙 중이지 않소?”

“무슨 뜻이죠?”

“천마신교 소교주. 이 일곱 글자 방패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말이오. 내게 힘들고 짜증 날 상황은 없소.”

자신은 사람에게 치일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차이란은 안다. 그 일곱 글자에는 방패만 있는 것이 아님을.

지배하고 싶고 과시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망의 칼날도 함께 있음을. 그것은 공포로 군림하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의 칼날이기도 했다.

그는 그걸 휘두르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자신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도, 이 자리에 서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그 칼날을 단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그 칼날로 젓가락을 만들었다.

검무극이 깊은 눈빛으로 질문을 되돌려주었다.

“당신은 안 지쳤소?”

차이란의 입에서 살짝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내 그녀는 허리를 쭉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지금까지 우리가 건넜던 다리는 죽음의 다리였어요. 이제부터 건널 다리는 새로 짓겠습니다.”

차이란이 정중히 검무극에게 절을 올렸다.

“차이란, 이 한 몸 바쳐 소교주님을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뒤에 늘어선 살수 여인들이 일제히 절을 올렸다.

“소교주님을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들은 차이란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차이란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차이란은 저 앞에서 서 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잡아줄 때, 그 손 꽉 잡으라고.”

* * *

다음 날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에 도착했다.

차이란과 살수들은 본단의 그 압도적인 규모에 놀랐다.

본단으로 들어선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차이란과 살수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랐다.

그곳에 악인곡의 무면객들이 모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 열 명의 무면객만 보다가 눈앞을 가득 채운 수많은 가면을 보자 그녀들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압도되었다.

안 돼! 사실 십칠교가 제일 놀랐다. 저 속에 섞이면 초승달 무면객을 영영 못 찾을 것만 같았다.

그때 차이란은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주위에 세워진 거대한 악귀상들 중에서 한 악귀상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악귀상 하나가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거대한 악귀의 손을 올려다보며 차이란은 새삼 자신이 잡은 손이 어떤 손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에 검무극이 나란히 서서 악귀상을 올려다보았다.

“차이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내 요리를 안 먹어봐서 그렇겠지

검무극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차이란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처럼 격을 차려서 그녀를 대했다.

“이제부터 저 악귀상들과 친해지셔야 할 거요.”

차이란은 조금 전 검무극이 한 말을 떠올렸다.

차이란, 집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보호를 받은 적이 없었다.

철이 든 그때부터 혼자 힘으로 살아온 인생.

한데 조금 전 검무극의 저 말을 듣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어른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 왔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기분이.

“이제 소교주님 수하가 됐으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러지 말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합시다.”

“왜죠?”

“때론 안 편한 수하도 있어야 수장이란 작자들이 방심을 안 하지 않겠소?”

검무극이 이안을 보며 말했다.

“무조건 내 편인 수하가 있으면, 당신 같은 수하도 있어야지.”

사실 악군학 때문이었다. 사람 일 모르는 거라고 나중에 그녀가 악군학과 잘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그를 생각해서도 함부로 말을 놓을 순 없었다.

그녀를 수하로 삼은 것도 가장 확실하게 보호해주기 위함도 있었으니까.

“편한 대로 하세요.”

차이란이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은 평소와 달리 긴장하고 주눅 든 모습이었다. 당연했다. 아무리 경험 많은 살수들이라 해도 천마신교가 주는 이 위압감에 어찌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끝없이 세워진 거대한 건물들, 그 사이사이 세워진 무서운 악귀상들, 사방을 오가는 험악한 모습의 마인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수많은 무면객들까지.

“소교주님 말씀 들었지? 이제 이곳이 우리 집이다.”

“네!”

살수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자신은 검무극을 믿고 왔지만, 수하들은 자신을 믿고 왔다. 그녀들을 지켜줄 사람은 자신이다.

그때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집에 왔으니 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려야지. 차 소저도 같이 갑시다.”

그 말에 차이란이 흠칫 놀랐다. 마교주를 만나러 가자고? 천마를?

“저는 왜요?”

“원래 출교했다 돌아오면 인사부터 드리오. 차 소저도 이제부터 내 수하가 되었는데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소?”

맞는 말이었기에 차이란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수하들을 그곳에 대기시켜 두고 검무극과 극악소마, 이안을 따라 천마전으로 향했다.

천마전에 가까워질수록 차이란은 더욱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려운 살행을 나갈 때도 이렇게까지 떨리진 않았는데.

걸어가면서 차이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주님께서는 살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싫어하시오.”

너무 단호하게 대답해서 정말이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얼마나요?”

“아주 많이 싫어하시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차라리 묻지 말 걸 생각이 들게 하는 대답이 나왔다.

“모르긴 해도 아마 세상에서 두 번째쯤?”

천마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자신을 싫어하는데, 그에게 가고 있다고? 이 와중에도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 첫 번째는 누구죠?”

“독 쓰는 무인들이오. 불쌍한 우리 독왕님.”

이렇게 구체적으로 첫 번째가 나오니, 정말 살수를 두 번째로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검무극은 한술 더 떴다.

“오히려 마음 편하지 않소?”

이렇게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한데 도리어 마음이 편하다고?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어차피 싫어하실 테니까, 그냥 편하게 포기하는 거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지 않소?”

차이란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으로 묘하게 설득되는 말이기도 했다.

“오히려 이안이 마음이 더 불편할 거요. 요즘 아버지가 이안이를 아껴주시니까.”

권마의 수양딸이 되고 난 후부터 이안을 대하는 것이 훨씬 부드러워진 아버지였다.

그러자 듣고 있던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 말씀 들으니까 마음이 불편해졌어요.”

차이란과 이안에 이어 이제 검무극은 극악소마까지 끌어들였다.

“소마님은 편하시잖아요? 아버지께 확실히 찍히셨으니까.”

아버지 앞에서 홀로 검무극 편에 섰던 그였으니까.

그러자 극악소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도 안 편합니다.”

극악소마가 진심이라는 듯 덧붙였다.

“찍힌 것과는 별개로 저는 항상 교주님께 잘 보이려 애쓰고 있습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눈으로 웃었다.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극악소마 같이 충성심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 충성심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미워할 분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찍혔다는 말을 편하게 꺼낼 수 있었던 것이고.

그걸 알기에 극악소마 역시 노력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는 사이 그들이 천마전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높은 천장을 악귀가 떠받치는 형태를 한 기둥들만이 늘어서 있었고 그 끝에 거대한 문이 있었다.

하지만 차이란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은 결코 비어있지 않음을. 허락되지 않은 이가 들어왔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는 극도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과연 네 사람이 도착하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누군가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의미.

천마전 안으로 들어선 차이란의 눈에 가장 먼저 붉은 융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피의 길 끝에 태사의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저 사람이 마교주구나.’

멀리서도 그 존재감이 느껴졌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보통 무공이 극의에 달하면 존재감 자체를 숨기는데, 지금 마교주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왜 숨겨야 하지?

네 사람이 피의 길을 걸어서 태사의 아래에 도착했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아버지께 검무극이 큰소리로 인사했다.

“아버지,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저는 잘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우진은 단번에 아들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성과가 있었구나.”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마님 덕분에 큰 기연을 얻었습니다.”

아직 비혈사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보고는 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라도 아들의 심장이 찔렸다는 보고는 놀라실 거 같아서 직접 뵙고 말씀드리려 한 것이다.

기연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자 극악소마가 차분히 말했다.

“저는 시키는 대로 잠깐 도왔을 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말한 후 극악소마가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교주님.”

“고생했네.”

과연 극악소마를 향한 검우진의 눈빛에 담긴 것은 신뢰였다. 그를 믿지 않았다면 소교주와 둘만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은 이안이 인사했다.

“이안, 출교했다 돌아왔습니다.”

과연 검무극의 말처럼 이안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잘 다녀왔느냐?”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끝으로 검무극이 차이란을 소개했다.

“이번 출교에서 제 수하가 된 사람입니다.”

차이란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차이란이라고 합니다. 귀한 분을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물론 검우진은 그녀에 대해 이미 통천각의 보고를 받은 후였다.

차이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살수 출신이었지만, 이제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검우진의 표정에는 그 어떤 환영도 담기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감추지도 않았다.

그 차가운 눈빛에 검무극이 차이란에게 말했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싫어하는 순위가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일 수도 있겠소.”

차이란을 바라보던 검우진의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아버지의 차가움에는 이유가 확실했다.

“만약 본교에 잠입하는 것이 저 여인의 목적이었다면 어쩔 것이냐?”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고, 반대쪽에서는 이안이 쳐다보았다.

검우진의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검우진이 한 말은 여전히 살행이 진행 중일 수도 있다는 의미. 이안은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죽기 좋은 네 싸구려 감성을 저 여인이 파고들었다면 어쩔 것이냐?”

근래 자신의 감성을 이야기할 때 싸구려라는 말을 뺐던 아버지였다.

다시 아버지는 싸구려 감성이라 표현하면서 묻고 있었다. 질책하고 계시는 거다.

차이란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오히려 그녀는 검우진의 말에 동의했다. 살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죽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진짜 검우진을 죽이라는 청부를 받았다면, 이렇게 검무극의 신임을 얻어서 접근해 왔을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설명할지 모두가 궁금한 가운데 검무극에게서 무책임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는 휘 아저씨가 지켜주시겠지요.”

사실 생각했었다. 살수를 본교에 들이는 일인데 어찌 안 했겠는가?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목표가 사도맹주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예언이 있었으니까.

이 모든 과정을 아버지께도 다 보고했음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비단 이번 일이 아니라, 앞으로도 조심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냉정하지 못해 일을 그르칠까 걱정하고 계신 거다. 마침 상대가 살수였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원래라면 차이란이 못마땅하더라도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말았을 테니까. 그게 싫은 사람을 대하는 아버지의 방식이었으니까.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런 질문도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소교주를 선택했느냐?”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생각지 못한 답을 내놨다.

“젓가락 때문입니다.”

무슨 뜻이냐는 검우진의 눈빛에 차이란이 설명했다.

“소교주가 야영을 하는 데 통나무를 잘라 젓가락을 만들어 줬습니다. 그 젓가락을 보는데 이 사람이면 믿고 따라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마음까지 꿰뚫을 것 같은 검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젓가락으로 먹은 소교주님의 요리가 너무 맛있었습니다.”

차이란은 그 이유가 전부라는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내내 차가웠던 아버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 요리를 안 먹어봐서 그렇겠지.”

그 말에 차이란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검무극이 웃으며 아버지의 심정을 대변했다.

“당신이 진짜 살수로 왔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지는 않았겠지.”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아버지 요리는 절대 먹으면 안 되오. 그럼 내가 아니라 아버지께 충성을 바치게 될 테니까.”

오랜만에 듣는 아들의 아부에 검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차이란에게 긴말하지 않았다.

“잘 왔다.”

* * *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천마전으로 가자, 무면객들이 뒤섞였다.

마중 나온 무면객들이 와서 복귀한 무면객들에게 인사했다. 출교했다 돌아온 이 열 명의 무면객들은 일 위부터 십 위까지의 실력자들이었기에 그들을 따르는 무면객들이 많았다.

십칠교는 슬쩍 초승달 무면객을 보았다. 초승달 무면객에게도 여러 무면객들이 와서 인사했다. 어떨 때 보면 괴이할 정도로 이상한 그들인데, 또 이럴 때 보면 선배와 후배 관계가 제대로인 멀쩡한 무인들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십칠교의 마음은 어두웠다.

이곳까지 오기 전까지는 어떤 희망이 있었다. 소교주의 보조로 채소를 함께 씻으면서 그에 대한 마음이 더욱 커졌다.

한데 막상 천마신교로 와서 그가 다른 무면객들 사이에 있는 걸 보니 그와의 관계가 끝일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그녀 옆에서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그냥 우연이야.”

돌아보니 그녀는 바로 오교였다.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그녀는 이제 혼자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그냥 한때의 감정이고.”

그녀는 십칠교가 초승달 무면객과 보조로 뽑히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잖아도 멀리해야 하는 상대인데, 함께 얽힌 것이다.

그녀는 검무극이 두 사람을 의도적으로 붙여준 것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설령 알았다 해도 같은 말을 해줬을 것이다.

“저런 남자와 얽히면 네가 불행해진다.”

“우리는 뭐 대단한 팔자라고요?”

“너는 달라.”

오교는 진심으로 십칠교를 걱정했다. 살수를 보고 순수하다고 표현하면 이상한 말이 될 거다. 한데 자신이 볼 때 그 이상한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십칠교였다.

그런 그녀가 마인을, 그것도 악인곡의 마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과 극악소마, 차이란과 이안이 돌아왔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던 무면객들이 순식간에 정렬했다.

“그럼 쉬십시오, 소교주님.”

“네, 감사했습니다. 소마님.”

두 사람이 작별을 고했다.

소마가 걸어가자 무면객들이 모두 그 뒤를 따랐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네가 차 소저에게 거처를 안내해주도록.”

“네, 그럴게요.”

오면서 기별을 해두었기에 그녀들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가 편히 쉴 수 있게 각자 방을 따로 내주라고 했다.

검무극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훌쩍 몸을 날려 어디론가 날아갔다.

“누가 보고 싶어 저리 바쁘실까?”

이안의 말에 차이란은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빠서 자신을 자주 보지도 못할 거라는 그 말이. 그 버림받는 일이 벌써 시작된 모양이다.

이안은 차이란과 살수들을 데리고 거처로 향했다.

십칠교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저 멀리 걸어가는 무면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시야에서 놓치자 초승달 무인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십칠교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있던 오교가 말했다.

“가자, 우리도. 여긴 너무 넓어서 까닥하면 길을 잃겠다.”

마인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 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십칠교가 오교를 따라 돌아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무면객들 사이에서 무면객 하나가 동료들을 헤집고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초승달 무면객이었다.

그가 십칠교가 선물로 준 비수를 꺼냈다. 십칠교는 절망했다. 교로 돌아왔으니 이제 관계를 끝내자며 비수를 돌려주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초승달 무면객은 비수로 자신의 손가락을 베더니 그 피로 가면에 사선으로 길게 그었다.

십칠교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초승달 무면객이 자신을 알아보기 쉽게 하려고 가면에 선을 그었다는 것을.

이 선이 그어진 가면이 바로 나라고.

선을 그은 후 초승달 무면객이 다시 돌아서 무면객들을 향해 뛰어갔다.

떨리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십칠교의 뒤에서 오교가 말했다.

“십칠아, 안 돼. 진짜 미친놈이야!”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안 와도 된다

“누가 뭐래도 전 어르신부터 뵈러 옵니다. 심장이 찔려도 어르신부터 뵈러 오고, 아버지께 혼나도 전 어르신께 먼저 옵니다. 또 도마님이냐? 지겹지도 않냐? 다른 마존들은 그럼 뭐냐? 아무리 섭섭하다 해도 전 어르신이 먼저입니다!”

창밖에 서서 목청을 높이는 검무극 앞에 혈천도마가 책을 읽고 있었다.

검무극은 극악소마와 헤어지고 곧장 혈천도마의 거처로 달려왔다.

“지금 책 읽는 척하시지만, 눈에 내용이 안 들어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안아주고 싶지만 쑥스러워서 참고 계신 것도 알고요. 그냥 참지 말고 표현하십시오!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 인생 아닙니까?”

책을 보던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었다.

“다 했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혈천도마가 귀를 막고 있던 솜을 뺐다.

“너무하십니다! 저 심장까지 찔렸다가 살아 돌아온 거라고요.”

혈천도마가 믿지 않자 검무극이 가슴을 깠다.

“이것보시라고요!”

힐끗 쳐다보던 혈천도마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조금 전까지 장난기가 스쳤던 그곳에 놀람이 가득했다.

“그 상처, 뭐냐?”

혈천도마가 너무 놀라자 검무극이 얼른 옷으로 상처를 가렸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그냥 살짝 긁힌 겁니다.”

순간 혈천도마의 기도가 폭발했다.

“이 가면쟁이 놈이!”

혈천도마가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라도 극악소마를 찾아가려 했다. 검무극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며 그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다.

지금 극악소마가 찔렀다고 하면 사정 설명을 듣기도 전에 날아갈 것이 뻔했기에.

“소마님이 아니었으면 전 죽었습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이렇게 화내는 혈천도마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 원래 이런 분이었지. 그동안 너무 부드럽게 자신을 대해서 잊고 있었을 뿐.

“이번에는 적들을 소마님이 싹 다 처리했습니다! 진짜입니다!”

그렇게 혈천도마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혈천도마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변변찮기는! 그쯤 됐으면 이제 검에 안 찔릴 때도 되지 않았느냐?”

“미인이 너무 많아 한눈을 팔았습니다.”

혈천도마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상처를 봐서였을까? 이번에는 먼저 말을 걸었다.

“독서는 벌써 흥미를 잃었느냐?”

“바빠서 읽을 틈이 없었습니다.”

“핑계는. 읽으려고 마음먹으면 싸우면서도 읽지.”

잠시 책을 읽던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이 없어 뭐하나 싶었는데, 검무극은 창 옆의 벽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내일부터 폐관 수련에 들어갈 겁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자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았다.

“꽤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검무극은 십성 대성이 성큼 다가선 것을 느꼈다.

대성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께 인사만 드리고 곧장 폐관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들어가면 대성을 이루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을 작정이다.

마음 같아선 채 며칠 만에도 대성을 이루고 나올 것만 같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 한 달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시천비술이 있어서 무지막지하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란 희망은 있었다.

혈천도마는 검무극의 지금 상황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대성을 앞두었느냐?”

“네.”

자신이 묻고도 그렇다는 대답에 혈천도마는 내심 놀랐다.

이 젊은 나이에 벌써 구화마공의 대성을 앞두고 있다니? 역대 교주들 중 이렇게 빨리 대성을 이룬 사람이 있었을까? 정말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말이었다.

“멀지 않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혈천도마는 축하한다는 말도, 열심히 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할 뿐이었다.

바로 그때 그곳으로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소교주님!”

반갑게 달려온 사람은 일과 후에 수련하러 온 서대룡이었다.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조금 전에.”

“보고 싶었어요!”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안기려고 달려왔다.

검무극이 가볍게 그를 피하며 그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술과 음식이 들어 있었다.

“뭐냐? 맛있겠다!”

“이건 안 됩니다!”

서대룡이 다급히 몸을 돌려 바구니를 사수하더니, 그것을 혈천도마에게 가져다주었다.

“단 소저가 사부님께 드리는 요리입니다.”

바로 단아가 만든 요리였다. 그녀는 서대룡의 사부인 혈천도마를 위해 자주 요리를 해주었다.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객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성 가득한 요리였다.

“안 보내도 된다니까.”

“저희 먹을 거 만들면서 조금 더 만든 겁니다. 편하게 드십시오.”

혈천도마는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 가져오는 요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잘 먹겠다고 전해라.”

“네, 사부님.”

혈천도마가 음식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단아의 요리는 언제나 만족시켰기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마당에 둘만 남자 검무극이 넌지시 물었다.

“단 소저와 동생들은 잘 있냐?”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단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두 동생 단비와 단연도 천마신교에 잘 적응했다. 단비는 집행 무인으로, 단연은 귀영대 무인으로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다.

단아는 무공수련에 열중하며 서대룡을 챙기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어떤 일이라도, 심지어 말똥을 치우는 일도 기꺼이 할 그녀였지만, 당분간은 서대룡과 동생들을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서대룡은 황천각 일에 무공수련까지. 너무 고된 일정을 해나가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의 건강을 챙겨주고 있었다. 덕분에 요즘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는 서대룡이었다.

“단 소저가 그렇게 좋냐? 그냥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냐?”

서대룡은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그 웃음에 대답이 담겨 있었다.

“혼인은 안 해?”

“소교주님이 가셔야 저도 가죠. 길 좀 열어주세요! 뒤에 마차 좀 지나갑시다!”

“길도 많은데 굳이 막힌 길로 와서 비키라고 소리치는 건 무슨 이유냐?”

“제가 가는 길은 오직 소교주님이 가시는 길뿐입니다. 저는 평생 그 길을 따를 겁니다.”

“핑계도 좋다.”

검무극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너 자신 없지?”

“어휴, 저를 뭐로 보시고. 저 소교주님 오른팔 서대룡입니다. 서대룡이라고요!”

“그래, 여자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보지 못한 내 오른팔.”

서대룡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혼인을 해도 되는지. 그 여인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천마신교 황천각주가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혼인 못 하는 거지. 그리고 네가 왜 먹여 살릴 걱정을 해? 단 소저와 혼인하면 단 소저가 널 먹여 살릴 텐데.”

시원시원하고 딱 부러진 단아의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러지 말고 망설이는 진짜 이유를 말해봐.”

검무극 눈을 어찌 속이겠는가? 결국 서대룡이 진짜 이유를 밝혔다.

“제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겁이 납니다.”

서대룡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리 사람이 가깝다 해도 그 한 길 속이 이렇게나 깊은 법이다.

“혼인도 하기 전에 그런 걱정이라니?”

하지만 참 너답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검무극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저는 좋은 아버지를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되는지 모릅니다.”

서대룡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우리 아버지 반대로 하면 될까요?”

“그런다고 되겠냐?”

“그렇겠죠?”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극은 실컷 한숨을 내쉬게 두었다. 오랫동안 묵혔던 감정이 나왔으니, 땅이 좀 꺼져도 좋으리라.

“네가 좋은 아버지를 만났다 하더라도, 네가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과는 별개라 생각한다.”

“왜죠?”

“너와 아버지와 다르듯, 태어나는 아이도 너와 다를 테니까. 좋은 아버지가 해줬던 그 방식이 똑같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이건 보고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네가 자식을 보면서, 그 자식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냥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비무대에 오르는 일이지. 상대가 누구든 죽도록 힘들겠구나, 하면서 오르는 거지.”

서대룡의 표정이 풀어졌다.

“결국 다 힘들다는 거죠?”

“널 보고, 날 봐라. 이런 자식 키우는 게 어디 쉽겠느냐?”

그 말에 풀이 죽었던 서대룡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던 혈천도마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가족이 원수인데 자식이라고 다를까?”

검무극과 서대룡이 함께 웃었다.

검무극이 한 가지 사실을 짚어주었다.

“그리고 넌 그 걱정은 애초에 안 해도 된다.”

“어째서요?”

“단 소저가 널 좋은 아버지가 되게 해줄 거다.”

그 말에 서대룡이 환하게 웃었다.

“소교주님은 경험해 보지도 않으셨으면서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나다, 나. 네 소교주.”

“그럼요, 세상만사 모르는 게 없는 우리 소교주님이시죠!”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제가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는 것도 다 소교주님 덕분입니다.”

“알면 됐다. 나중에 돈으로 갚아라.”

“앞으로도 쭉 마음으로만 갚겠습니다.”

검무극이 돌아섰다.

“벌써 가시게요? 모처럼 뵈었는데 더 놀다 가세요!”

아쉬워하는 서대룡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당분간 못 볼 거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가에서 술잔을 비우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내일 나오너라.”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분명 폐관수련에 들 거라고 말했는데도 나오라고 말한 것이다.

검무극은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되면 알게 되겠지.

* * *

하지만 내일이 되었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음날 혈천도마는 왜 불렀는지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그 자리에 앉아 책만 읽었다.

“제게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없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라도?”

“없다.”

“요즘 외로우십니까?”

“이 방에 친구가 가득하다.”

책이 친구라는 의미였다.

“혹시 요즘 괜히 짜증이 나고, 누굴 괴롭히고 싶고 막 그런 마음이 드시죠?”

혈천도마가 코웃음을 쳤다.

“아니시면 왜 절 부르셨냐고요!”

아무리 옆에서 물어봐도 혈천도마는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볼 일 없으시면 저 갑니다, 하고 갈 수는 없었다. 상대는 혈천도마였으니까.

그날 오후에는 서대룡의 폭탄 발언이 있었다.

“단 소저에게 말했습니다.”

“뭐를?”

“혼인하고 싶다고요.”

검무극은 물론이고 혈천도마까지 깜짝 놀랐다.

“정말?”

“하라면서요?”

“하라고는 안 했는데. 아니 설사 했다 쳐도 다음날 가서 해?”

“고민하면 뭐 하겠습니까? 저보다 똑똑한 소교주님 말씀이 맞겠지요. 그리고 저 그 비무대에 오르고 싶어졌습니다.”

“평생 내 길만 따르겠다면서? 마차 아직 안 빠졌는데?”

서대룡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지만 할 말은 했다.

“나이는 제가 훨씬 많잖아요? 길 막은 마차는 접니다. 거름 가득 실은 수레라고요.”

“그랬더니 단 소저가 뭐래?”

“밥 먹다가 그런 말 들으니까 당황스럽다고.”

검무극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밥 먹다가 그 말을 했어?”

“충분히 후회 중이니까 그 부분은 야단치지 마십시오. 갑자기 밥 먹는데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 버렸습니다. 당신하고 평생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싶다고요.”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시를 읊어주면서 말했어야 했는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차라리 잘했어.”

“정말 잘한 거 맞죠? 맞다고 해주세요.”

자신이 사고 쳤나 걱정하는 서대룡에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잘했다. 그리고 그 수레 거름이 아니라 보석이 가득한 수레다. 넌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거다.”

서대룡이 눈물을 글썽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혼인 같은 건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기왕 하는 혼인 최고의 혼인이 되도록 해야지. 아버지께 주례도 부탁드리고.”

“교주님께요?”

놀란 서대룡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마의 주례를 받고 혼인하는 무인, 네가 최초일 거다.”

원래라면 기겁하며 너스레를 떨었을 서대룡이었는데, 지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제가 혼인하게 되면 주례는…….”

서대룡이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부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순간 혈천도마가 흠칫 놀랐다. 설마 교주의 주례를 마다하고 자신에게 부탁할 줄은 몰랐다.

“사부님, 부탁드립니다.”

혈천도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혼인도 안 한 사부에게 잘하는 짓이다.”

혈천도마가 홱 돌아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서대룡이 창백해졌다.

“제가 실수한 걸까요?”

사부와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부가 어렵고 조심스러운 서대룡이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표정을 떠올려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지 않을까?

“아니, 지금 기분 좋으실 거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들어갔으리라.

그때 안에서 혈천도마의 난데없는 말이 들려왔다.

“너무 간절히 원하면 오히려 멀어지는 법이다.”

순간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더 놀란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서대룡이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제가 너무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어요. 너무 성급했어요! 어쩌죠?”

당연히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했는데. 검무극이 깊어진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내게 하신 말씀이다.”

혈천도마의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깨달았다.

왜 그가 자신의 거처로 오라고 했는지.

자신의 마음이 너무 급했다. 혈천도마가 그것을 걱정할 정도로.

그래, 칠성에서 팔성, 팔성에서 구성이었다면 이렇게 간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화마공 대성.

그야말로 꿈에서라도 그리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기에 검무극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뭔가 느낌이 왔을 때, 잡아야지! 그래서 당장 폐관에 들어서 대성을 이뤄야지 하는 바람이 마음에 가득했다.

원래라면 마존들도 보고, 장호도 보고, 조춘배도 봤을 것인데. 한데 지금은 대성에 마음이 팔려 수련장으로만 달려가려 했다.

구성에 이른 것도 폐관 수련으로 이룬 것이 아닌데. 그런 조급함으로 이뤄낸 결과가 아닌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낸 것인데.

혈천도마가 그 급한 마음을 붙잡아 주며 가르침을 준 것이다.

욕심이 클수록 허상이 진짜처럼 보이는 법이라고.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도 나오겠습니다.”

그러자 창가에 혈천도마가 모습을 보였다. 과연 검무극의 생각이 정확했다는 듯, 혈천도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안 와도 된다.”

그 따스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절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

정말 혈천도마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마존들 중 첫 번째 단추가 그였기에, 무사히 지금까지 올 수 있지 않았을까?

검무극이 옆에 서서 눈을 껌벅이고 있는 서대룡을 보며 말했다.

“아뇨, 올 겁니다. 와서 제 오른팔 혼인 대작전을 세워야지요.”

서대룡이 흠칫하며 물었다.

“이게 대작전까지 필요한 일인가요?”

검무극이 장난기를 숨긴 무섭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널 그 치열하고도 끝이 없는 전장으로 내보내는 데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겠느냐?”

대성으로부터 더 멀리

검무극과 서대룡이 남도종을 나왔을 때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서대룡은 뭔가 고민이 있는 눈치였다.

“막상 혼인하려니까 온갖 고민이 다 생기지?”

“예전에 막내 처제가 슬쩍 그런 말을 해줬습니다.”

서대룡은 형부라며 따랐던 단연을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편하게 막내 처제라고 부르고 있었다.

“언니가 혼례식 올리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있다고 그러더군요.”

검무극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가족이라곤 두 동생뿐이었으니까.

“그녀 자신은 하객이 없는 게 부끄럽지 않은데, 혹시라도 제게 누가 될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했죠. 그땐 나도 친구 없고 가족도 없다며 웃어넘겼었는데.”

하지만 그래도 서대룡은 이안과 장호도 있었고, 조사관들과 집행 무인들도 있었다. 그들만 해도 신랑 하객들은 가득 찰 것이다.

“단 소저 하객 문제는 내가 해결하마.”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대룡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혼인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상할 수 있다. 무조건 말조심하고.”

“네!”

“그럼, 내일 보자.”

“내일 뵙겠습니다!”

신나서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혼인은 이렇게 좋을 때 멋모르고 해야지.

검무극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거처가 아니라 마가촌이었다.

* * *

풍류주점의 불이 꺼졌다.

점소이까지 돌아간 빈 주점을 조춘배가 홀로 뒷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

“주인장.”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춘배가 소리치며 뛰어나갔다.

“소교주님!”

하지만 그는 너무 급히 나오다가 문턱에 발이 걸렸다.

“어이쿠!”

앞으로 붕 날아서 바닥에 꼬꾸라지려던 찰나 그는 허공에서 멈췄다.

부드러운 기운이 그를 떠받친 것이다.

그는 부드러운 구름을 타고 이동하는 기분으로 허공을 날아서 검무극 앞에 내려섰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만!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우리 주인장께서는 이제 날아드는 검보다 넘어지는 걸 더 조심하셔야 하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조춘배가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안 왔으면 어찌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 출교했다 돌아왔을 때는 바빠서 조춘배를 보지 못했기에 꽤 오랜만의 재회였다.

“잘 지내셨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우리 소교주님은 더 훤칠하고 멋있어지셨습니다.”

“세상 여인들 눈이 우리 주인장 같아야 하는데.”

그렇게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장사를 마쳤지만, 조춘배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몇 분이나 오십니까? 미리 요리 준비하겠습니다.”

“만날 사람 없소. 그냥 주인장하고 한잔하고 싶어서 왔소.”

순간 조춘배의 마음이 울컥했다. 자신이 뭐라고, 고작 주점 주인장에 불과한 늙은이인데.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검무극이 정말 고마웠다.

“안주는 필요 없소. 그냥 술이나 한잔합시다.”

검무극이 이 층에 올라갔다. 항상 앉는 자리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님을 받지 않더라도 조춘배가 그 자리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조춘배가 술과 간단한 안줏거리를 챙겨왔다.

“자, 주인장. 내 술부터 한잔 받으시오.”

언제나처럼 조춘배는 황송해하며 술을 받았고, 공손히 술을 따랐다.

“자, 한잔합시다.”

두 사람이 건배한 후 술잔을 비웠다. 조춘배는 몸을 돌려 쭉 들이켰다.

“나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조춘배의 물음에 검무극이 벽에 적힌 글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글을 남긴 분 중 한 분을 구하고 왔지요.”

“어이구!”

조춘배가 놀란 얼굴로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마가촌에는 별일 없었소?”

“북적북적 모여 사니 항상 일이 있지요.”

“이야기 좀 해주시오.”

조춘배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인 누구네 집에 아이가 태어났고, 또 누구는 다리를 다쳤고, 또 누구는 이사 갔고.

사도맹주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는 중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 또 다른 음모가 펼쳐지더라도, 설사 마정대전이 벌어지더라도 조춘배는 아침에 풍류주점의 문을 열겠지.

검무극은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눈을 가렸던 대성에 대한 욕심을 걷어내자, 조춘배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저 앞에서 인형 파는 사람 아시지요?”

“당연히 알지요.”

“대공자 인형이 새로 나왔답니다.”

“아! 드디어 나왔군요.”

조춘배가 계산대 쪽으로 달려가더니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혹시라도 소교주님 오시면 드리려고 사두었습니다.”

검무극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무뚝뚝한 얼굴이 영락없는 형이었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방에 진열되어 있던 인형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버지의 장식장에는 이미 이 인형이 세워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주인장, 내 인형은 안 사고 형 것만 사셨소.”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소교주님 것은 이미 세 개나 샀지요. 집에도 있고 고향에도 보냈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조춘배는 혼자 편히 마시라면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런 날 마시면 실수한다며 술을 사양했기에, 억지로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는 첫 잔, 딱 한 잔만 마셨다.

그렇게 검무극은 홀로 술을 마시다가 일 층을 내려다보았다.

조춘배는 달빛 드는 계산대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모습 위로 혈천도마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겹쳤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가 말한 것이 지금 조춘배의 저 모습이라는 것을.

아무리 반가워도, 아무리 함께 술을 마시고 싶어도.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변함없이 자신의 원칙대로 삶을 지켜나가는 조춘배였다.

지금 저 모습이 혈천도마의 가르침 그 자체였다. 주인장은 이미 대성을 이루셨소.

“주인장.”

검무극이 부르자 조춘배가 이 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더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좋은 술 좀 챙겨주시오.”

“어디 좋은 분 만나러 가시나 봅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뜻 모를 말을 전했다.

“대성으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려고요.”

* * *

횃불을 밝힌 연무장에서 밤늦도록 무인들이 수련하고 있었다.

열두 명의 무인.

하나의 검진을 펼쳐내며 일제히 검을 내지르는 그들은 바로 검무극의 호위 무인들이었다.

그들은 주간조, 야간조 할 거 없이 모두 함께 수련하고 있었다.

둥근 원을 그린 채 사방을 향해 일제히 검을 내질렀다.

이들이 펼치는 검진은 한 사람을 지키는 수호검진이었다.

검진의 생명은 화합과 연계.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주며 하나의 몸처럼 움직였다.

그들의 검에 실린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 검무극에게 왔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날카로운 기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의 수련이 끝나고.

하아, 하아, 하아.

그곳에는 참았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

“이제 제법이구나.

순간 호위 무인들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지켰던 검진의 가운데 공간에 검무극이 앉아 있었다.

“소교주님!”

호위책임자인 적연의 외침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 그대로 앉아라.”

호위들이 원 안쪽을 바라보는 상태로 자리에 앉았다.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열둘이나 있었는데 소교주가 가운데 들어와 앉을 때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들 힘들지?”

“아닙니다!”

우렁찬 대답에 검무극이 적연부터 챙겼다.

“적 호위, 자네가 제일 고생한다는 거 알고 있다.”

그 말에 적연은 기뻤다. 알아달라고 이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아준다고 말해주니 정말 고마웠다.

“내 호위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소교주 호위라고 임무를 명받았을 때만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기대했을 거다. 소교주를 따라 중원을 누비며 온갖 경험을 하는 상상을.

하지만 한 번의 출교와 임시 교주 때 교내에서의 호위를 제외하면 대부분 무공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적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더 강해져야 소교주님을 호위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수련했습니다. 한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하는 표정으로 적연이 말했다.

“더 강해지셔서 돌아오셨군요.”

검무극이 적연을 보며 웃었다.

“내가 호락호락 아무의 호위를 받아줄 사람이 아니지 않나?”

검무극이 옆에 가져온 보따리를 열었다. 그곳에 들어 있던 것이 모두에게 날아갔다.

스륵! 스륵! 스르륵!

동시에 날아간 것은 술잔이었다.

이들과 술을 마시겠다고 마음먹고 열두 개의 잔을 챙겨온 것이다.

술잔은 끝까지 날아가지 않고 그들 앞에 떠 있었다.

호위들은 자신들 앞에 떠 있는 술잔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모두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

이게 가능한 일인가?

검무극은 지금 열두 개의 물건을 허공섭물로 동시에 움직이는 신위를 내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자기 잔까지 열셋, 그것은 곧 열넷이 되었다.

천천히 술병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적연 앞에 떠 있는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또르릉.

술을 다 따른 술병이 다른 무인의 술잔을 향해 갔다. 술병은 바로 옆의 무인에게 가지 않았다. 술병이 찾아간 술잔은 이호의 술잔이었다.

예전에 외부로 나갔을 때 일호부터 십이호까지 작전명으로 불린다고 검무극에게 밝힌 바가 있었다.

이호의 잔을 채운 술병이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삼호의 잔으로, 다시 사호의 잔으로.

검무극은 그때 들었던 이호부터 막내 십이호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교주가 자신들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호위들은 내심 감격했다.

“저희를 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적연의 감격에 검무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자신이 무심했으면 이런 것에 감동할까?

“더 강해져라. 그래야 나 지킨다!”

검무극은 그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다. 나 편하게 다니자고 너희들 수련만 시켰다. 이런 사과는 오히려 그들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할 것이기에.

자신은 오늘 절대 조급하지 말아야지 큰 결심을 했지만.

“조급해라. 남들보다 더 조급해라. 우리 소교주 언제 교주 될지 모른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검을 휘둘러라! 알겠나?”

“네!”

검무극이 앞에 떠 있던 잔을 잡자, 열두 명의 호위 역시 잔을 잡았다.

자신들이 지킬 소교주는 저렇게 말하면서, 잔 열세 개를 허공에 띄워두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지켜야 하고, 그런 사람이 강해지라는데 어찌 자극되지 않겠는가?

“내가 허락한다. 계속 강해져라.”

말을 마친 검무극이 술을 마셨고, 호위들도 일제히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내일은 무게 좀 잡아야 하니 옷 제대로 다려두도록!”

* * *

차이란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마신교에 와서의 첫날이 밝았다. 검무극이 마련해준 숙소는 정말 훌륭했다.

자신의 방만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수하들에게 제공된 방도 깨끗하고 깔끔했다. 특히 침상과 침구류는 새것으로 신경 써 주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때 일교가 와서 보고했다.

“준비되었습니다.”

“가자.”

검무극이 그녀들을 모두 소집한 것이다. 그녀들은 화려한 옷 대신 무복을 입었다.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녀들이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안이 이끄는 귀영대였다.

청면이 이끄는 귀영 일조와 서진이 이끄는 귀영 이조가 범상치 않은 기도로 서 있었다. 그야말로 기강이 잡힌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앞에 이안이 서 있었다.

차이란은 수하들 앞에 선 이안의 모습이 안휘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진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구나.’

이안이 차이란에게 청면과 서진을 소개했다.

청면은 원래 차기 극악소마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그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고, 서진 역시 황룡무관에서 돌아온 이후 피나는 무공수련과 귀술수련으로 기도가 달라져 있었다.

담담히 그들을 바라보는 차이란과는 달리 살수 여인들은 알지 못할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살수가 아니라 무인으로 살아야 한다. 누구든 암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누구든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꿔야 할 때였다.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이 등장했다.

검무극 뒤로 열두 명의 호위가 뒤따랐는데 그들은 호위대 정식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천마전 호위대의 상징.

방패 속에 그려진 악귀.

또한 그들이 착용한 검은 복면에는 마(魔)라는 한 글자가 힘찬 필체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만만치 않았는데, 호위 무인들 역시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에서 차이란과 살수 여인들은 비로소 검무극이 천마신교 소교주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도착하자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정중히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도 오늘은 가볍게 포권하며 정식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때가 때인 만큼 귀영대의 막내 단연에게도 눈인사를 해주었다.

그리고 난 후에 차이란에게 물었다.

“잠은 잘 주무셨소?”

“네, 배려해 주신 덕분에 푹 잘 잤습니다.”

뒤에 서 있던 여인들도 일제히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특별히 신경 써 줬음을.

“그대에게 대주 자리를 줄 생각이오. 한데 교주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하니 좀 기다려야 할 거요. 그동안 이름도 짓고.”

그러자 차이란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가능하다면 저희는 귀영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알고 있습니다.”

이안 밑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다.

차이란의 시선이 청면과 서진을 향했다.

“저 두 분도 일개 조장으로 있을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두 사람을 제대로 소개했다.

“일조장은 차기 극악소마를 포기하신 분이고, 이조장은 귀문의 후예시오.”

역시! 하는 표정으로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로 살아온 우리가 무인으로 살아가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이 소저, 아니 이 대주님 밑에서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소교주님을 모시기로 마음먹은 이상, 직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검무극은 그녀의 선택이 참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결정을 내릴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안. 저들을 삼조로 받아들이겠느냐?”

이안이 차이란을 쳐다보았다. 들일 이유도 있었고 막을 이유도 있었다.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검무극을 위해서도, 청면과 서진을 위해서도 들여야 했으니까. 이 부담스러운 조장들이라니!

“그대를 귀영대 삼조장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차이란이 이안에게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차이란의 합류로 드디어 귀영대가 제대로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은 내심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세 여인을 쳐다보았다.

이안과 서진과 차이란.

회귀 전의 삶에서, 또 지금의 삶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세 여인이 귀영대라는 이름으로 모인 것이다.

검무극이 차이란에게 말했다.

“귀영 삼조에게 내가 직접 내리는 첫 번째 임무가 있소.”

“말씀하세요.”

검무극의 임무는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혼례식의 하객이 되어줘야겠소.”

흠칫 놀란 차이란이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죽여야 할 사람이 신랑입니까? 신부입니까?”

내 편한 날로 잡을 거다

“농담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차이란이 웃으며 말했다.

자신들의 첫 임무가 하객으로 가서 누굴 죽일 임무는 아닐 테고.

그렇다고 진짜 하객으로 보내려는 건 말도 안 되었으니까.

하객이란 말이 천마신교에서 쓰는 어떤 암어라고 생각했다.

“나는 농담이 아니었소만.”

잠시 검무극을 쳐다보던 차이란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진짜 하객으로 가라는 건가요?”

“그렇소.”

“가서는요?”

“축하해 주고 오면 되오.”

그때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서 각주 혼인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서대룡이 단아와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혼인할 줄은 몰랐는데.

검무극이 차이란에게 말했다.

“임무라고 했던 건 농담이었고. 낭인으로 살다가 본교로 오게 된 소저가 있소. 이번에 혼인하게 되었는데, 이곳에 친구가 아무도 없어서 그대들이 하객이 되어 줬으면 해서.”

검무극이란 사람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다. 어떤 뜻이 있으리라 여겼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소교주는 수하 혼례식의 하객까지 챙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차이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도 신부 하객으로 혼례에 참석한 적 없으시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인생에서 몇 번의 혼례식이 있었지만, 한 번도 그 혼례를 신경 쓴 적은 없었다.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거나, 참석에 의의를 뒀을 뿐.

“혼례식의 주인공은 신부가 되어야지요.”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우리 애들이 신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 같나요?”

그제야 검무극은 차이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소.”

정말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이 여인들이 친구로 가면 충분할 거란 생각만 했다.

검무극이 귀영 이조와 함께 있는 단연에게 걸어갔다.

“막내 소저.”

검무극이 지목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네, 소교주님.”

예전에는 편하게 농담도 주고받았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축하하네.”

“소교주님, 우리 언니 혼례식을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형부가 될 서대룡에게 하객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이야기를 검무극에게 한 모양이다.

“당연히 챙겨야지. 단 소저 덕분에 본교가 큰 도움을 받았는데.”

검무극은 이 일이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한 일이 아님을 확실히 언급했다.

본교에 공로가 있어 이렇게 신경 써 준다! 조직 생활을 해나가는 단씨 자매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때 조장 서진이 나서서 단연에게 물었다.

“막내야, 왜 말 안 했어?”

“어제 정해졌습니다.”

서진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왜 하객이 없을까 걱정하십니까? 우리가 있는데.”

이어진 놀라운 한마디.

“막내 가족이면 우리 가족입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귀영대를, 특히 자신이 이끄는 이조의 무인들을 가족처럼 여겼다. 조장이 되면서 자신의 삶을 이 일에 바쳤으니까.

반면 단연은 아직 아니었다. 막내라고 귀여움을 받고 있지만,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직이었다. 그녀에게 가족은 아직 두 언니뿐이었다.

그랬기에 서진의 말은 놀랍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물론, 소교주 앞이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싶었지만.

“조장님, 감사합니다.”

서진이 검무극을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검무극은 문득 회귀 전 서진이 떠올랐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에 서진은 항상 저 말을 했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그래, 네 덕분에 잘되었다. 고맙다, 친구야.

“서 조장이 있는데…….”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애초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일이었네.”

* * *

“이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단아 앞 탁자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조금 전에 서대룡이 와서 꽃을 주면서 정식으로 청혼했다. 어제 밥 먹다가 불쑥 말했을 때는 너무 당황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 했는데, 오늘은 그러자고 대답했다.

“축하해, 언니.”

“축하는 무슨.”

단아는 동생들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동생들을 두고 자신이 먼저 혼인하는 것이 괜히 미안했다. 이 당연한 일이 그녀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원래 그녀는 혼인할 생각도 없었고, 설령 하더라도 동생들 먼저 다 혼인시키고 마지막에 하려고 했었다. 실제로 동생들에게 그런 말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좋은 남자 생겼다고 이렇게 홀랑 먼저 혼인한다고 하고 있으니 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다.

“너희에게 미안하다.”

그러자 무뚝뚝한 성격의 둘째 단비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언니가 가줘서 고마운데.”

“뭐?”

“언니가 혼자 있는 게…….”

막내 단연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언니가 혼인 안 하고 있으면 우리야 좋지.”

분명 둘째 언니는 혼자 있으면 우리에게 짐이라는 말을 하려 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언니가 가야 우리도 배우지. 혼례는 어떻게 하고, 신혼은 어떻게 보내고, 아이는 어떻게 낳아 키우고. 언니가 경험해 보고 우릴 가르쳐줘야지.”

그 말에 단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기특한 말을 할까?

“우리 쪽 손님이 너무 없을 텐데.”

그녀의 현실적인 고민에 단연은 언니를 안심시켰다.

“귀영대 동료들이 좀 올 거야.”

지금 말한 것보다는 더 많이 올 분위기였지만, 괜히 나중에 실망할 수도 있었기에 장담하지 않았다.

반면, 단비는 한 명도 자신하지 못했다.

“황천각 쪽은 서 각주님 하객이라서.”

단아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다. 정말 자신은 상관없었다. 남의 눈치를 보는 성격도 아니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도 없었다.

낭인으로 살아온 인생이 절대 후회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그 일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구했고, 그 일로 두 동생과 자신이 지금까지 먹고살았으니까.

신경 쓰이는 건 오직 서대룡이었다.

자신은 부모도 없는데, 하객들조차 없으면 분명 눈에 띌 것이다. 왜 저런 여자와 혼인한대? 그런 말을 서대룡이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서 각주님께 폐가 될까 걱정 돼.”

“무슨 소리야! 각주님이 아니라 소교주님이라도 언니가 과분해. 교주님이라면 모를까.”

너무 나간 말에 단아가 동생 입을 틀어막았다. 하긴 처음 객잔에서 만났을 때 제일 괜찮은 사람으로 마교주를 뽑은 단아였다.

그때 단비가 준비해 온 봉투를 꺼냈다.

“이거 받아.”

단아가 받아서 열어보니 꽤 큰 액수의 전표가 들어 있었다.

“돈 쓸 일 많을 텐데 보태. 막내랑 둘이 똑같이 보탠 거야.”

“괜찮아! 나 돈 많아!”

지금까지 청부로 벌어들인 돈은 셋이 똑같이 나눴다.

하지만 두 동생은 알고 있었다. 아무리 똑같이 돈을 나누고 공동 비용을 거둬서 사용했다 해도, 언니가 훨씬 더 많은 돈을 써왔다는 것을.

그 알게 모르게 나가는 돈이 쌓이면 얼마나 큰지 이제는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나 돈 많다. 그러니 도로 가져가. 잘 모아두었다가 너희 혼인할 때 써.”

물론, 두 동생은 돌려받지 않았다.

“우린 아직 멀었어. 그리고 우리 혼인하게 되면 그때 언니도 도와줄 거잖아?”

단비의 말을 단연이 받았다.

“언니가 잘 혼인해서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줘야 우리도 혼인할 마음이 들지 않겠어?”

지금껏 자신의 모든 걸 다 바쳐서 보살핀 동생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니, 이 돈으로 주눅 들지 말고 준비해!”

* * *

“이제 안 와도 된다니까?”

검무극이 다시 혈천도마의 거처를 찾았을 때, 이제 막 서대룡이 수련을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수련 끝나면 대룡이랑 작전 세워야죠.”

검무극은 서대룡이 수련하는 동안 괜히 왔다 갔다, 앉았다 일어났다, 방에 들어가서 책장에서 책을 뺐다 넣었다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이 정신 사나웠는지 혈천도마가 구석에서 연습용 대도를 하나 가져와서 검무극에게 던졌다.

“놀고만 있지 말고 이거라도 휘둘러.”

“뭐가 이렇게 무겁습니까?”

대도를 받아든 검무극이 팔 떨어진다며 엄살을 떨다가.

“근데 수련을 해도 검술을 해야지요.”

“툭 치면 부러질 그 가벼운 검을 우리 남도종에서 수련한다고? 어림없다.”

“저희 아버지도 검을 쓰십니다만.”

“교주 검은 무겁지.”

검무극은 대도를 내려다보았다. 혈천도마가 굳이 도를 손에 쥐여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멀어지라고. 구화마공 대성에서 멀어지라고.

검무극은 서대룡의 수련이 끝날 때까지 구석에서 도를 휘둘렀다. 대부분의 시간을 도를 쳐다만 봤을 뿐, 정작 휘두른 건 몇 번 되지 않았다.

수련이 끝났을 때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어떠냐?”

“무겁습니다. 왜 이렇게 무거운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검무극의 대답을 듣는 순간, 혈천도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서대룡은 저 미소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수련 첫날 혈천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가 무겁다고 하자.

―그 무거움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전수하려는 도법의 처음이자 끝이다.

검무극은 단번에 도법의 핵심을 이해한 것이다.

역시! 하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자, 검무극이 더 놀라운 면을 선보였다.

“여기 오기 전에 단 소저 만나고 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꽃도 가져다줬지?”

서대룡이 헉! 하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또 어찌 아셨습니까?”

“나, 소교주다. 네 소교주!”

그때 혈천도마가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주웠다. 앞서 수련하기 전에 서대룡의 옷에 붙어 있던 것들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꽃이랑 싸움이라도 한 거냐?”

혈천도마의 물음에 서대룡은 그제야 검무극이 알아차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검무극의 항의가 따랐다.

“아니, 제 신비와 존경의 비결을 밝히시면 어찌합니까!”

혈천도마가 못 들은 척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검무극이 서둘러 붙잡았다.

“자, 어르신 잠시 여기 앉으십시오. 제자 놈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아셔야지요.”

그렇게 세 사람이 연무장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수련하러 오기 전에 꽃을 한 다발 꺾어서 갔습니다. 단 소저에게 정식으로 혼인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청혼을 받아줬습니다.”

서대룡의 얼굴에 감격이 가득했다.

“축하한다. 우리 셋 중에 네가 제일 먼저 혼인하는구나.”

우리 셋이란 말에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그래, 자신도 한때는 혼인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혼자 살아오게 될 줄 그때는 몰랐지만.

“제가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죄송은. 내가 미안해야지.”

“네?”

“오른팔이 지옥문을 열겠다는데 안 말리고 있지 않냐?”

아무리 그래봤자 서대룡에게는 행복의 문이었다.

“단 소저와 함께라면 그 지옥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때 왜 안 말리셨어요! 이런 원망 하면 안 돼! 소교주님은 이렇게 될 줄 다 아셨죠! 세상만사 다 아시는 분이시잖아요! 이러면 안 돼!”

“절대 안 합니다.”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저 혼인해도 계속 소교주님 오른팔이죠? 우리 사이 변함없죠?”

검무극이 그를 응시하더니.

“변함 있지. 오른팔에서 물러나야지.”

“에이, 또 장난치려 하신다.”

“내 오른팔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면서.”

서대룡이 아는 건 그 오른팔이 위험에서 누구보다 잘 보호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른팔이 몸통을 보호해야 하는데, 항상 자신이 보호받고 있다.

“행복과 오른팔, 다 가질 수는 없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해.”

서대룡이 울상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말하고 오겠습니다. 우리 사랑은 다음 생에서 이루자고.”

“뭐해? 안 가고.”

“저 갑니다. 정말 갑니다.”

우물쭈물 가는 서대룡의 모습에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보법이 대도만큼이나 무겁습니다. 아직도 제자리네요.”

“두 걸음 갔다.”

“다시 한 걸음 뒷걸음질 쳤고요.”

그러자 저만치 걸어갔던 서대룡이 다시 돌아왔다.

“아니! 너무 하십니다! 저 둘 다 포기 못 합니다!”

그 모습에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오른팔 자리가 뭐 그리 대단해서? 누가 보면 월봉이라도 주는 자리인 줄 알겠다.”

그러자 검무극이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오른쪽 날개냐 왼쪽 날개냐로 고민하시던 분이 계셨었는데.”

혈천도마가 못 들은 척 저 멀리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 오른팔 자리는 서대룡에게는 그 어떤 자리보다 중요했다.

“저,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혼인해서도 오른팔 계속 시켜주십시오.”

농담이 아니었다.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니까.

황천각주를 하고 있으니 함께 중원을 다닐 수도 없었고, 아니라고 해도 아직 검무극을 보필할 실력이 되지 않았다.

정작 오른팔 역할도 못 하면서 오른팔이라 우기는 이 자리마저 없어지면, 검무극과의 관계가 뚝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혈천도마는 제자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차분한 눈빛으로 서대룡에게 말했다.

“처자식이 생기면 거기 힘을 써야지. 자기 식구도 못 챙기는 오른팔은 내가 사양한다. 가족들 먼저 다 챙기고 나 챙겨. 잘할 수 있겠냐?”

잠시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던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오른팔이잖아요?”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네?”

“가족을 책임지는 팔은 혼자인 팔보다 훨씬 강하거든. 넌 이제 진짜 강해질 거다. 네가 휘두르는 그 도에는 다른 힘까지 실릴 테니까. 이제 그 도는 절대 부러지지 않을 거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 오른팔 잘라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몸통이 이기적인 거겠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던 서대룡이 나직이 말했다.

“잘 됐습니다. 이기적인 몸통에 이기적인 오른팔. 전 끝까지 붙어 있을 겁니다.”

잘려도 제대로 오른팔 역할하고 잘릴 겁니다.

“한 번 오른팔은 영원한 오른팔입니다.”

언젠가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해줄 이야기가 너무 많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주례는 내가 봐주마.”

깜짝 놀란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서 혈천도마 앞에 섰다. 그리고 정중히 예를 갖춰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 성격상 누군가의 주례를 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얼마나 큰마음을 먹은 것인지 서대룡은 잘 알고 있었다.

“날은 잡았느냐?”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길일을 잡아 주십시오.”

“나야 그쪽으론 잘 모른다. 총군사나 풍천교주가 잘 알지도 모르지.”

그때 검무극이 손을 내밀자 창가 책상에 혈천도마가 보던 책이 허공에 떠올랐다.

모두에게 드러나는 책 제목.

하늘의 뜻을 묻다

그 아래 부제가 있었다.

길일 잡는 법

혈천도마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까 수련하기 전에 들락날락하더니 그때 훔쳐본 모양이다.

“우연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서대룡은 정말 감동했다.

“사부님이 꼭 날을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만으로도 저희는 잘살 겁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로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내 편한 날로 잡을 거다.”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서대룡의 혼례 날짜가 정해졌다.

자기 마음대로 정하겠다고 했지만 혈천도마는 고심해서 날을 잡았고, 혹 자신이 잘못 정했을까 싶어 풍천교주와 총군사를 찾아가 확인까지 받았다.

그렇게 정해진 날짜가 촉박했기에 서대룡과 단아는 급하게 혼례 준비에 들어갔다.

그사이 검무극은 권마를 찾아갔다.

다른 마존이야 만남을 좀 미룰 수도 있지만, 권마는 마존이기 이전에 사부였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혈천도마가 아니라 내게 맨 처음 찾아와야지!’ 이렇게 꾸짖어도 할 말이 없지만, 권마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매번 마지막에 찾아온다고 해도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지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가 부수고자 했던 그 높고 단단한 절벽 같은 사람.

그리고 이제는 그 절벽조차 넘어선 사람.

권마는 그 절벽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검무극은 조용히 그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심법 수련을 하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언젠가부터 평범한 명상을 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앉으면 심법 수련이나 천마호신공 수련을 했다. 단 한 순간의 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래, 당분간은 여유를 가지자.

그랬기에 그냥 눈을 감고만 있었다. 호흡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멍하게 있었다.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형 생각도 났고, 풍천교주와 고월 생각도 났다. 다른 마존들 생각도 났다.

어서 만나러 가야지, 늦게 가면 섭섭해할 텐데.

그렇게 조바심을 내다가도 혈천도마가 하지 말라는 게 그 조바심이다! 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극아.”

옆에서 들려온 권마의 부름에 검무극이 눈을 떴다.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기에 검무극은 내심 긴장했다.

“네, 사부님.”

검무극이 옆에 앉은 권마를 쳐다보았다.

절벽을 바라보던 권마도 자신을 돌아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도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일까?

이윽고 권마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두 번 다시 그런 모험은 하지 마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안에게 심장 찔린 일을 들은 것이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검무극은 꺼내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무림을 종횡해 온 그가 어디 그런 사정을 몰라서 저 말을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권마는 성격상 모험을 하지 마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절대 물러나지 말라는 말을 하면 하는 사람이지.

“알겠습니다, 사부님.”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예언을 회피할 수도 있었으니까. 천화루주가 예언을 말했을 때, 그대로 본교로 돌아와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예언을 피하지 않고 운명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었기에 예언은 이뤄졌던 것이다.

“이제 네 모든 일은 너만의 일이 아니다.”

권마의 말에 담긴 무거운 뜻을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관계를 맺은 수많은 사람.

자신의 죽음이 만들어낼 그 숫자만큼의 슬픔.

하지만 지금 권마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단 하나의 슬픔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슬픔.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아는 그였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권마의 말은 이 말과 같았다.

네가 죽으면 마정대전이 일어난다.

심지어 회귀 전과는 다르게 구화마공을 십이성 대성한 아버지였다. 마존들 역시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

나의 죽음으로 인한 통곡은 곧 전쟁의 북소리가 될 것이다.

검무극이 권마의 두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제 목숨의 무게를 잊지 않겠습니다.”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무극도 따라 일어나며 농담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었다.

“그나저나 천하제일미 아버지가 될 뻔하셨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물론, 권마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아쉽긴. 이미 천하제일미 아비인데.”

권마는 이안을 친딸 이상으로 아끼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안을 수양딸로 안 삼았으면 어쨌을까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는데, 검무극은 이것이 권마라는 사람의 성격이라 여겼다.

한 번 마음을 주면, 끝까지 주는 사람.

권마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사부님.”

“왜 그러느냐?”

“벽력수라권을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가 아니라 다시 가르쳐달라는 말에 권마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게 가르칠 것은 이미 다 가르쳤는데?”

“그 사이 사부님도 달라지셨고, 저도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의 무공 실력은 검무극이 처음 권법을 배울 때보다 더 강해졌다.

“분명 새로 배울 게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혈천도마의 가르침은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려는 욕심에서 멀어지라는 의미지, 그렇다고 무공수련에서 멀어지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특히 벽력수라권은 그 욕심 때문에 미뤄진 무공이었다. 구화마공 때문에, 또 시천비술 때문에. 그렇게 미뤄지고 또 미뤄졌던 무공이었다. 사실 그런 대접 받을 무공이 아니었음에도.

권마는 검무극이 무학에 있어 어떤 분기점에 서 있음을 느꼈다. 이럴 때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면?

“자, 지금부터 벽력수라권의 구결을 전수하겠다.”

권마는 마치 처음 가르쳐주는 것처럼 구결을 전수했다.

같은 구결이었지만 처음 배웠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구결을 모두 전수받은 후에는 권마와 구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뿐만 아니라 그사이 자신들이 깨달은 무학의 극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 과정은 비단 권법 전수에만 그치지 않았다.

깊은 무학의 나눔.

검무극도 배웠고, 권마도 배웠다. 배우면서 가르쳤고, 가르치면서 배웠다.

그렇게 말로 나누는 배움이 끝나자 권마는 곧장 웃통을 벗었다.

보통 무복을 벗으면 아무렇게나 던졌는데, 오늘은 무복을 곱게 개어선 옆에다 올려두었다. 그러고 보니 새 무복이었다. 이안이 가져온 것은 심장 찔린 소식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검무극도 웃통을 벗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권마의 시선이 슬쩍 검무극의 심장에 난 상처로 향했지만, 더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벽력수라권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지난 마지막 싸움에서 권마는 보여주었다. 자신의 주먹에서 더는 천둥소리가 나지 않음을.

꽈르릉! 콰쾅!

그렇기에 천둥소리를 내는 주먹은 검무극의 주먹이었다.

그 소리가 이전보다 더 우렁차고 강했다. 이 소리가 절정에 이른 후, 다시 점차 소리는 줄어들다가 권마의 주먹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수련을 마쳤을 때, 권마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그 아기 주먹에 힘이 좀 들어가는구나.”

이번 수련으로 검무극의 경지가 확실하게 다음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이제 소년 주먹쯤은 되었죠?”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어른 주먹이 될 때까지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권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검무극은 수련했다.

아예 권마의 거처에 머물면서 수련했다. 정말 푹 빠져서 벽력수라권에 몰두했다.

평생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었지만, 지금만큼 아무 생각 없이 푹 빠져서 수련한 적도 처음이었다.

어느새 검무극은 구화마공의 대성에서 멀어지자! 그런 생각조차 잊었다.

* * *

서대룡과 단아가 마주 앉았다.

오늘은 조금 민감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날이었다.

“이게 내가 모아둔 돈이오.”

“제가 지금껏 모은 돈이에요.”

두 사람이 모아둔 돈을 공개했다. 살 집도 장만해야 했고 혼례 준비도 하려면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단아의 돈이 서대룡이 모아둔 돈보다 훨씬 많았다.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돈 차이가 났다.

“미안하긴요. 각주 되신지 얼마 안 되셨잖아요? 이제부터 모으면 되죠. 작은 집에서 시작해서 살림살이 늘려가는 재미가 있잖아요?”

서대룡이 그녀의 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왜 그러세요?”

“단 소저가 목숨을 걸고 번 돈이라 생각하니 이 돈을 쓸 수 있을까 싶어서요.”

단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써야죠. 제 인생에서 제일 가치 있는 일에 쓰는 건데요.”

“이것밖에 못 모았냐고 혼날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혼날 거예요. 총각 때처럼 막 쓸 수 없어요. 자, 우리 집 보러 가요.”

본단을 나선 두 사람은 가까운 마을부터 둘러보았다.

본단과 마가촌에서 가까운 곳은 집값이 아주 비쌌고, 또 집의 크기에 따라서도 값이 달라졌다.

두 사람이 합친 돈이라면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서대룡은 미련이 남는지 인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좋은 위치에 있는 집 앞에 멈춰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집은 어떻소?”

“조용하고 깨끗하고. 본단에서 멀지도 않고. 저쪽에 큰 학관도 있고, 그 뒤쪽에는 무관도 있고. 마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고. 애 키우기 정말 좋을 거 같아요.”

“우리 여기서 잘 키워봅시다.”

“네, 열심히 모아서 이 집 꼭 사요.”

그때 서대룡이 뜻밖의 말을 했다.

“살 필요 없소. 이미 우리 집이니까.”

“네?”

“몇 년 전에 내가 이 집을 샀었소.”

단아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라는 듯 서대룡이 열쇠를 꺼내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천각주가 되고 나서는 내원 거처에서 주로 지내는 바람에 가끔 와서 청소만 하고 있소.”

집은 생각보다 넓고 좋았다. 자주 오지 못하는 집 치고 청소도 잘 되어 있었고.

“이 집을 살 때만 해도 지금처럼 안 비쌀 때였소. 저기 아까 봤던 학관과 무관이 들어오면서 여기 이 동네가 좋아졌소.”

“아무리 그래도 비쌌을 거 같은데.”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반응에 서대룡이 어깨에 힘을 주었다.

“황천각주 되기 전에도 나, 특별조사관이었소. 나름 돈 잘 벌었소. 물론 전장에서 돈을 빌려서 보태서 산 거긴 하지만.”

서대룡은 돈을 착실히 모았다.

검무극을 만나기 전의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기에 몇몇 동료들처럼 유흥에 돈을 탕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런 집을 장만할 수도 있었고.

“전장에서 빌린 돈은 지난해에 다 갚았소.”

“이걸 미리 말 안 했다 이거죠?”

“미안하오! 데려와서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소.”

“저 성격 있는 거 알죠?”

“물론이오.”

서대룡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아까 이렇게 말할 뻔했어요. 도적들에게 돈을 다 털렸냐고요! 어느 기녀에게 다 가져다 바쳤냐고요!”

“주먹이 날아와도 맞아주려 했소.”

그녀는 기뻤다. 기뻐하는 이유는 단지 집 때문이 아니었다.

“좋은 집이 생겨서 너무 기뻐요. 한데 그보단 각주님이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하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좋아요. 이 대책 없는 사람, 앞으로 어떻게 교육하나 걱정했었거든요.”

“나 막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 아니오!”

서대룡은 매번 검무극에게만 했던 자랑을 드디어 그녀에게 했다. 역대 그가 했던 자랑 중 제일 기분 좋은 자랑이었다.

“나 이래 봬도 황천각 수석 입학한 사람이오.”

* * *

드디어 혼례식 날이 밝았다.

단아는 너무 긴장되어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깐 잠이 들었지만 그마저도 악몽을 꾸었다. 하객이 몇 사람밖에 없는 썰렁한 혼례가 진행되는 꿈이었다.

거기에 비까지 쏟아져서 그나마 있던 하객도 모두 떠나버리는 최악의 혼례였다.

반면 서대룡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오늘이오!”

혼례 준비를 하면서 큰 고비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준비 과정에서 다투다 혼례가 취소되기도 한다지만, 서대룡은 단아의 뜻에 잘 따랐다.

단아가 서대룡을 보며 말했다.

“저와 약속 하나만 해요.”

“뭐든 말씀하시오.”

가만히 서대룡을 응시하던 단아가 서대룡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살면서 무슨 일이 생기든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 마세요. 부부는 언제나 함께 가는 거예요.”

서대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중에 봬요.”

“나중에 봅시다.”

서대룡이 거처를 떠나자 단아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자신의 인생에서 혼인이라는 청부를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실패하지 않고 꼭 완수할 거예요.’

잠시 후, 그녀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이안과 차이란이었다.

“아! 대주님이 직접 오셨군요.”

서대룡은 이안과 장호에게는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지며 정식으로 단아를 소개했다.

그날 이안이 혼인 당일 화장과 예복은 자신이 맡을 테니 준비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서 각주는 제 친구예요. 제가 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오늘 저는 보조 역할이고, 진짜 전문가를 모셔 왔습니다.”

이안이 차이란을 쳐다보자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귀영대 삼조장 차이란이에요.”

“단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차이란에 대해서는 동생 단연을 통해 여러 번 들었다. 실제로 보니 들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단아는 감격했다. 그냥 사람을 보낼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주와 조장이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차이란은 실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꽤 긴 시간의 화장을 끝마쳤을 때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화려한 붉은 예복까지 입자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삼조가 모두 와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요?”

이안의 그 말은 화장이 훌륭하다는 극찬이기에 차이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단비와 단연이 와서 언니를 보고 좋아했다.

“정말 예쁘다.”

“우리 언니, 이렇게 예쁜데 평생 낭인으로 살 뻔했네.”

그녀들의 칭찬에 단아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단아에게 말했다.

“준비되셨나요?”

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놀라운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식이 치러지는 곳까지 그녀를 데려갈 꽃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가마였는데, 단아가 놀란 것은 그 가마를 들고 갈 사람들 때문이었다.

가마꾼들은 정말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덩치만 큰 이들이 아니었다.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기도를 지닌 그들은 바로 마군들이었다.

“예식이 열리는 곳까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마군주 장호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준비한 꽃가마였다.

놀라고 감격한 단아에게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마군들이 모시는 꽃가마는 세상 누구도 타보지 못했을 거예요.”

시작부터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오늘의 혼례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사부는 사부가 아니었다.

혈천도마가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항상 입고 다니던 무복을 벗고 예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혼례의 주례를 위해서였다.

혈천도마가 잠시 목청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오늘 이 자리에서 신랑 서대룡과 신부 단아가 하늘이 내린 인연으로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혈천도마가 말투를 이리저리 바꿨다.

“맺게 되었소. 맺게 되었소이다.”

뭔가 다 입에 붙지 않았기에 혈천도마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피어올랐다.

성질대로라면 그냥 이렇게 하고 싶었다.

“오늘 두 사람이 피의 맹약을 맺는 날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 그가 다시 주례사를 연습했다.

“신랑 서대룡은 일찍이 본교에 투신해서 험난한 마도의 길을 걸었고…….”

뒷부분이 생각나지 않자 혈천도마는 품에서 종이를 꺼내 읽었다. 적어둔 내용을 잠시 중얼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황천각 특별조사관을 거쳐 젊은 나이에 황천각주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신부 단아는 중원을 종횡하며…….”

그가 다시 종이를 펼쳐보며 뒷 내용을 외웠다. 긴장한 그의 목소리가 떨리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니! 주례하시는 분이 신랑보다 더 떨고 계시면 어찌합니까?”

혈천도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무극이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떨긴 누가 떤다는 거냐?”

“긴장해서 못 외우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이깟 것도 못 외우겠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달달 외워서 하려다간 분명 잊어버리실 겁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도 안 나시겠죠.”

혈천도마의 미간이 꿈틀했지만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검무극 말이 옳다. 어젯밤부터 외웠는데도 이렇게 안 외워지는데,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라면 더 생각이 안 날 것이다.

“차라리 무림맹주와 생사혈투를 벌이고 말지.”

그런 일이라면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싸우러 나갈 텐데. 이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건지.

검무극이 해결책을 내주었다.

“그냥 대룡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해주십시오. 짧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요즘 하객들은 짧게 하는 걸 더 좋아할 겁니다.”

혈천도마가 솔직히 인정했다.

“소싯적에는 무공 비급도 통째로 그 자리에서 외웠는데. 왜 이렇게 안 외워지는지.”

“제자 혼례식인데 잘해주고 싶으셔서 그런 거죠.”

“늙어서 그렇다고 왜 말을 안 해!”

그렇게 심통을 부린 후에.

화르르륵.

혈천도마가 열양지기로 주례사가 적힌 종이를 태워버렸다.

“그냥 잘 먹고 잘살아라! 이 한마디 하고 말란다.”

“어르신하고 딱 어울리십니다. 다들 좋아할 겁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니면 주례사를 네가 하든지.”

“제가요?”

검무극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룡이 놈 인간 만들고 혼인까지 하게 한 건 너 아니냐? 말도 네가 훨씬 잘하고.”

“서 각주 인간 만든 건 어르신이죠. 제자로 삼지 않았다면 지금의 서 각주가 있겠습니까?”

“그건 네 꿍꿍이수작에 넘어간 거고.”

“취해서 어르신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것도, 그런 대룡이를 침상에서 재워준 사람도 제가 아니었죠.”

그런 점에서 혈천도마와 서대룡은 분명 인연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 각주, 사람 만들어서 혼인시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혈천도마는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런 날 자신이 초조해할 걸 알고 이렇게 챙겨주러 온 것을 보면서 참 한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쟁이 네 사부와 주먹질은 어떻게 되었느냐?”

검무극이 권마의 처소에 틀어박혀서 수련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꽉 쥔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아기 주먹에서 소년 주먹이 되었다가, 드디어 어제 인정받았습니다. 이 주먹 이제 어른 주먹입니다.”

벽력수라권이 또 한 단계 올라선 것이다. 무공이 극의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이 허심탄회하게 무학의 성취를 나누며 수련하니, 그 효과는 믿지 못할 정도였다.

검무극 뿐만 아니라 권마 역시 느낀 바가 큰 수련이었다. 권마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주먹에서 다시 소리가 날지 모르겠구나.

천둥소리가 났다가 나지 않았다가, 이제 다시 난다면 과연 어떤 소리가 날까? 아니, 그 주먹의 위력은 과연 어떨까?

“이게 다 어르신 덕분입니다.”

“그게 왜 내 덕분이냐? 네 사부가 잘 가르치고 네가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지.”

“어르신이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셨으니까요. 아니었다면 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을 겁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노력은 그 노력만큼 좌절이 되어 돌아왔을 테고요. 나아갈 방향을 모르겠다면 차라리 쉬어라! 다 어르신 가르침 덕분입니다.”

혈천도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이 지어지는 걸 보면서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자, 이제 대룡이에게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셔야죠. 가시죠.”

* * *

그 시간 서대룡도 동경 앞에 서 있었다.

구름과 학이 수놓아진 붉은 예복에 비단신, 화관을 쓰고 옥대를 차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 보였다.

서대룡이 동경 속 자신에게 물었다.

“대룡아, 네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냐?”

그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됩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문 앞에 마군주 장호가 서 있었다.

“혼인 축하합니다.”

서대룡이 감격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군주님.”

단아를 소개한다고 식사 자리는 한 번 가졌지만, 그 뒤로 바빠서 따로 보지는 못했다.

“소감이 어떠십니까?”

장호의 물음에 서대룡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들으셨잖습니까?”

장호도 함께 웃었다.

“자, 가시죠.”

밖으로 나가자 네 명의 마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신랑 신부는 우리가 모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이 일은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마군이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마군주가 서대룡과의 친분을 인정한다는 의미였으니까. 매사 엄격한 장호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일은 정말 서대룡에게 큰 호의를 보이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군주님.”

“별말씀을요.”

검무극을 만나 인생이 바뀌지 않았다면 평생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을 사람인데. 이제는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들이 혼례식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큰 연무장은 온통 붉은색과 황금색 천, 그리고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큰 병풍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으로 혼례를 위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좌우에는 신랑과 신부가 손님을 맞이할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랑 자리에 앉으며 서대룡은 놀랐다. 하객들을 위한 자리가 정말 많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먼저 든 생각은 저 많은 자리를 과연 다 채울 수 있을까였다.

곧이어 신부가 탄 꽃가마가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렸을 때 단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준비된 수많은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제 곧 혼례가 시작될 시간이었음에도.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신부가 대기하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으로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도착했다.

서대룡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사부님! 소교주님!”

하객이 너무 없자 내심 당황한 서대룡이었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혼례 시작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안 왔네.”

많이 안 온 정도가 아니라, 함께 온 마군들을 제외하면 정말 몇 사람 없었다.

“황천각 조사관들하고 집행 무인들은 아직이야?”

검무극의 물음에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평소에 행실을 잘못한 모양입니다.”

서대룡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신은 괜찮았다. 어차피 외롭게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아를 위해서라도 이런 썰렁한 혼인이 되면 안 되는데. 아, 이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딱 스무 명만, 아니 열 명만 더 와라!

“진짜 축하해 줄 사람들이 축하하면 되지. 여기 다 있네. 사부님 계시고, 장 군주도 있고, 이안이 있고. 둘째 소저, 막내 소저 있고. 제일 중요한 나도 있고!”

서대룡이 검무극의 옷깃을 잡아끌고 옆으로 갔다. 그러고는 간절히 속삭였다.

“소교주님, 호위들이라도 좀 불러주십시오. 단 소저 보기에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렇게까지 안 올 줄은 몰랐다. 평소에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그게 자신만의 노력이었던 모양이다.

“내 호위들로 되겠어?”

“네?”

검무극이 손을 번쩍 들었다.

피이이잉! 펑! 퍼엉!

그것을 신호로 사방에서 폭죽이 터져 올랐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폭죽이 푸른 하늘에서 터졌다.

펑! 퍼엉! 퍼엉!

비로소 하객들이 그곳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놀리려고 잠시 그들을 대기시켜 두었던 것이다.

“소교주님!”

장내로 들어서는 이들을 보자 서대룡의 얼굴에 눈물이 글썽였다.

“신부도 안 우는데 신랑이 울려고?”

“저, 정말 놀랐다고요!”

“그럼, 나보다 먼저 혼인하면서 이 정도도 안 당하려고 했어?”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황천각 조사관들과 집행 무인들이었다.

“각주님! 축하드립니다!”

최고참 조사관 곡명을 필두로 조사관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축하해 주었다. 그 뒤로 집행 무인들이 들어왔다.

“말 안 해도 내 호위들도 왔어.”

정말 소교주 호위들도 와서 축하해 주었다.

서대룡은 쏟아지는 축하객들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단아는 크게 안도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는 서대룡보다 더 긴장하고 당황했던 그녀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조금 전에 아무도 없던 상황을 생각하니, 자신의 하객이 없는 상황은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문제도 금방 풀렸다.

그녀를 축하해 주러 우르르 하객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바로 서진이 이끄는 귀영이조였다.

“혼인 축하드려요, 단 소저!”

서진이 대표로 인사하자 단연이 나서서 언니에게 소개했다.

“내가 속한 귀영 이조 조장님이셔.”

단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동생입니다. 앞으로 잘 지도해 주세요.”

“연이는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조원들이 나서서 그녀를 축하했다.

“혼인 축하드립니다.”

“단연과 같은 조에 있는 사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조원이 거의 모두 와서 축하했기에 단아는 너무 감격했다.

단아는 안도했다. 지난밤 내내 잠을 설쳤던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 축하면 충분했다. 아니, 넘치고도 남았다.

오늘의 하객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여러 단주와 대주들이 서대룡을 축하해 주러 왔다. 황천각의 성격상 다른 조직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축하해 주러 왔다.

평소 서대룡의 공정한 일 처리 덕분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 일처리를 높이 사는 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때 무인들이 우르르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가장 먼저 도착한 마존이 있었다. 가장 늦게 올 것 같은데, 뜻밖에도 가장 먼저 온 그는 바로 극악소마였다.

하얀 가면을 쓴 그가 몇 사람의 무면객을 거느리고 서대룡에게 걸어갔다.

극악소마가 서대룡을 축하해 주었다.

“축하하네.”

“정말 감사합니다. 소마님께서 이렇게 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황천각주의 자리에 있다지만, 감히 마존들은 초대하지 못했다.

“도마님께서 초대하셨네.”

사실 혈천도마의 초대가 아니었더라도 극악소마는 참석했을 것이다. 검무극의 오른팔인 그였으니까.

그때 차이란의 뒤쪽에 서 있던 십칠교는 극악소마 뒤쪽에 있는 무면객 중에서 초승달 무면객이 있는지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는 있었다.

자신이 그랬듯 그 역시 이번 수행에 나서도록 애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혼례식에서 만나니 정말 뜻깊은 만남이었다.

참석한 마존은 그만이 아니었다.

취마와 일화검존이 함께 그곳에 모습을 보였다.

생각지 못한 그들의 방문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취마가 서대룡에게 술을 선물로 건네며 축하했다.

“달콤한 과일주네. 나중에 독주가 필요해지면 나를 찾아오게.”

취마가 검무극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 축하연 때 마실 좋은 술을 가져왔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보니 삼대취객 여빈이 아예 술을 상자째 쌓아둔 채 서 있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안 본 사이 취마는 더 자유로워졌음을.

검무극이 주위 마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밤새워 마시는 겁니다! 오늘 아무도 집에 갈 생각 마십시오!”

일화검존도 선물을 가져왔다. 한데 그것을 가져다 준 사람은 서대룡이 아니라 단연이었다.

“혼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검존님.”

천마신교로 온 이후에 일화검존에게 한 차례 검술을 배웠던 단아였다. 정식으로 그녀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화검존을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를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감히 마존을 초대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준 것이다.

일화검존이 꽃 화분을 선물로 주었다. 그녀가 키우는 꽃 중에서도 아끼는 꽃이었다.

“꽃이 저절로 피는 것 같지만 손이 많이 간다네. 햇살도 받아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고, 분갈이도 해줘야지. 아마 혼인 생활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의미로 이 선물을 줬는지 알 수 있었다.

“둘 다 잘 키워보겠습니다, 검존님.”

옆에서 지켜보던 서대룡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집무실에서 키우는 꽃 화분, 아직도 죽이지 않고 잘 키우고 있습니다!

이런 농담이나 떠올리던 그에게 일화검존이 말했다.

“자네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군.”

처음에는 단아를 두고 한 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일화검존이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서대룡도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보았다.

그곳에 혈천도마가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서대룡의 심장에 쩡하는 격정이 있었다.

일화검존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나도 저런 얼굴은 처음이네.”

평소 전혀 웃지 않는 사부가 활짝 웃으며 하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존에게도, 단주와 대주들에게도. 심지어 일반 무인들에게도 웃었다.

그들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있었다. 저쪽으로 앉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상대들이었는데, 나중에 식사도 꼭 하고 가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사부는 사부가 아니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서대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혈천도마를 쳐다볼 뿐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혈천도마의 모습이 마음 깊이 각인되던 그때.

“서 각주.”

일화검존의 부름에 서대룡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검존님.”

“하객들 인사받아야지.”

혈천도마를 쳐다보고 있던 사이 몇 사람의 무인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네.”

일화검존이 돌아서 걸어갈 때 서대룡이 그녀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검존님.”

그녀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정신없이 하객의 축하를 받느라 사부님의 저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일화검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걸어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검무극이 있는 곳이었다. 검무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취마와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이 안 섭섭해하니까 오히려 내가 섭섭한데?”

귀교한 검무극이 찾아오지 않아도 취마는 이제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투덜대고 불평해 줘야 하는데.

“바빴겠지.”

“안 바빴거든. 형 찾아갈 시간은 있었거든.”

“마음이 바빴겠지.”

검무극이 취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어디 아파? 불치병이래?”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내가 죽을 때 너 안 찾아온 걸 후회하면서 죽을까?”

그때, 일화검존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섭섭해하는 방식을 바꾼 거네. 작전 변경이니 속지 말게.”

흠칫한 취마는 허허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뒤로한 채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귀교한 후 곧장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권법 수련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네.”

가만히 검무극을 살피던 일화검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가 이러니 내가 쉴 틈이 없네.”

볼 때마다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었고, 그녀 역시 여전히 노력 중이라는 뜻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조만간 비무 친구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오게.”

그때 새로운 마존이 도착했다.

그녀는 바로 섭혼마존이었다. 하객으로 왔기에 귀기를 최소로 줄였는데, 그럼에도 검무극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성장했음을. 그녀 역시 볼 때마다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섭혼마존이 서대룡에게 축하를 전했다. 그녀도 서대룡과의 친분 때문이라기 보단 혈천도마와의 관계 때문에 왔다.

축하를 전한 후에 그녀는 검무극부터 찾아와 인사했다. 누가 뭐래도 그녀가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자신이 성장하고 있는 것을 가장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소교주였으니까.

“이 기다림은 너무나 흥미롭고 기분 좋은 기다림이오.”

그녀가 성장해서 자신의 마존이 되는 그날을 기다린다는 의미.

섭혼마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 말은 지난 노력의 보상이었고, 앞으로의 노력에 원동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마존은 오늘 온 하객 중 가장 무서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권마의 등장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큰 등이 하객들 사이를 가르며 걸어갔다.

권마는 서대룡이 아닌 혈천도마에게 먼저 가서 축하를 전했다.

“축하드립니다.”

“와줘서 고맙소.”

검무극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사이에 둔 그들만이 가지는 유대감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사이에 둔 유대감도 있었다.

두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며 뭔가 이야기를 나누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저 흉보시는 건 아니시죠?”

두 사람은 대꾸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나눴다.

“너무하십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차이란은 저들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들 대화만 나누는 모습에서 이 소교주와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란 사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방금 저 행동에서 온갖 추측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누군가를 보고 반갑게 달려갔다.

“주인장.”

잘 차려입은 조춘배가 저 멀리 구석에 서 있었다. 당연히 이 혼례에 그도 초대받았다.

“소교주님.”

“잘 오셨소. 자, 갑시다.”

검무극이 그의 손을 잡아 서대룡에게 데려갔다.

“사실 우리 주인장, 여기 마존들 다 구면이시지 않소? 쫙 돌아가며 인사하시겠소?”

“어이쿠, 제발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차이란은 검무극이 조춘배를 데려가 서대룡에게 인사시키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소교주는 그를 마존들보다 더 반갑게 대했다. 이 역시 미리 검무극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저 주점 주인장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으리라.

“의심할 필요 없어요.”

그녀 옆으로 와서 말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의심 안 해요.”

이제는 저 검무극이 뭔가를 속인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볼 때마다 새롭고 놀라울 뿐이었다.

“그냥…… 저 소교주의 그림자가 되려면 참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자 이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뇨, 안 힘들어서 우린 힘들 거예요.”

차이란은 이안이 말한 그 뜻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때 검무극이 조춘배를 데리고 그녀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이안이 반갑게 조춘배를 맞았다.

“여기 오셔서 저희와 함께 계세요.”

“아닙니다. 저는 저기 뒤에 가 있어도 됩니다.”

“저와 함께 있으세요.”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신부 단아가 앉아 있었다.

단아는 이 엄청난 하객에 놀란 상태였다.

천마신교의 대주들이 오고, 단주들이 오고, 마존들이 하객으로 왔다. 평생 이런 거창한 혼례식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런 거창한 혼례식이 썰렁할까 봐 걱정했다니. 대체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새삼 드는 하나의 생각.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이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춘배는 찾았는데, 아직 찾아야 할 사람들이 남았다.

“그나저나 왜 안 보이실까? 저 잠깐만 다녀오겠습니다.”

검무극이 수많은 하객으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찾던 사람은 연무장 구석 나무 아래에서 쪼그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독왕이었다. 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여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검무극이 그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이 녀석은 이름이 뭡니까?”

“홍두의(紅頭蟻)다.”

과연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들의 머리통은 붉은색이었다.

“작다고 무시했다간 고생하지.”

독성이 강한 개미인 모양이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대답은 독왕 대신 뒤에서 들려왔다.

“우린 아까 왔네.”

돌아보니 마불이 서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형 검무양도 있었다.

“뭐죠? 이 수상한 만남은?”

사실 수상할 것은 없었다. 형은 마불과 친했고, 마불은 독왕과 친했으니까.

“이 모임 이름 알겠네요. 반란의 불꽃!”

검무극의 너스레에 검무양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불꽃 꺼진 지 오래다. 누가 어찌나 야무지게 껐는지.”

검무양의 말에 마불이 옅게 웃었다. 이제 검무양은 저런 농담을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다들 오셨으면 축하부터 해주셔야죠.”

“나중에 하지.”

물론, 독왕이 개미에 열중하는 바람에 다들 붙잡혀 있었던 것 같았지만.

“오랜만의 행차라 황금빛 광채를 번쩍이며 입장하실 줄 알았는데요?”

오늘 마불의 몸에서는 평소보다 광채가 옅었다. 하객으로 왔기에 강도를 조절한 듯 보였다.

“제 혼례 때는 하객들 눈이 멀게끔 빛을 내시면서 들어오셔야 합니다.”

“자네도 혼인하려고?”

마불이 놀라 묻자 검무극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요, 해야죠.”

너무 흔쾌히 대답해서 오히려 믿지 않는 마불이었다.

“설령 하더라도 자네 혼례에는 빛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 광채로는 어림도 없을 거네.”

정말이지 누가 올지 상상도 못 할 혼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풀어져 있던 자세들이 모두 반듯하게 세워졌다.

옆에서 혈투가 벌어져도 쪼그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았던 독왕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우진이 그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모두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설마 교주님까지야 오겠어, 하던 이들은 더욱 놀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서대룡과 단아였다. 설마 자신들의 혼례식에 교주가 참석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척척척척!

검우진이 지나가는 길에 서 있던 모두가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아무런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했다.

천천히 걸어온 검우진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신부 쪽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단아에게 말했다.

“혼인 축하하네.”

마교주가 온 것도 놀라웠는데, 자신에게 먼저 축하해 주러 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단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교주님께서?”

그녀의 놀람에 검우진이 담담히 말했다.

“우린 중원에서 인연이 있지 않나?”

옆자리에서 그녀들이 보낸 요리가 검우진에게 왔던 그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물론 검우진이 그래서 온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혈천도마 때문에 참석한 것이었지만, 두 동생만 데리고 교로 투신한 그녀를 먼저 챙겨준 것이다.

“정말 감사합니다, 교주님.”

자신도 모르게 예복을 입은 채 엎드려 절을 하려는 그녀였지만, 검우진이 내보낸 부드러운 기운이 그녀를 막았다.

돌아서 걸어가는 교주의 뒷모습을 단비와 단연도 감격해서 지켜보았다.

그날 검우진에게 요리를 보낸 단연은 정말이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기고 멋진 분은 교주님이십니다!’

그렇게 신부를 챙겨준 후 검우진이 서대룡에게 다가갔다.

“서 각주, 혼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교주님.”

서대룡은 감격했다. 자신이 아니라 그녀를 먼저 챙겨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검우진이 가운데 자리에 앉자 그 양옆으로 검무극과 검무양이 앉았고, 다시 좌우로 마존들이 늘어서 앉았다. 당연히 연무장 구석에 있던 독왕과 마불도 함께 앉았다.

예식에 따라 혼례가 진행되었고 이윽고 혈천도마의 주례사 차례가 되었다.

그 어떤 이들 앞에서도 긴장한 적 없던 혈천도마였는데, 지금은 긴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목청을 가다듬던 혈천도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지엄하신 교주님을 모시고 본인의 제자인 황천각주 서대룡과 아름다운 신부 단아가 하늘이 내린 인연으로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놈들아,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한다고 했던 혈천도마였는데. 정말 이렇게 해버리고 싶었을 텐데. 그는 애써 외웠던 것을 그대로 기억하며 주례사를 하고 있었다.

“신랑 서대룡은 일찍이 본교에 투신해서 험난한 마도의 길을 걸었고…….”

이 자리는 자신의 혈기대로 해버릴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이 자리는 자신의 성격을 드러낼 자리가 아니라 서대룡과 단아를 위한 귀한 자리였으니까.

모두가 혈천도마의 주례사를 들었다. 중간에 더듬거리기도 했고, 말이 끊어지기도 했다.

“……삶이란 본디 외로운 길, 그 길을 함께 걸어가는 반려를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천도마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다음 말을 잊어버린 것이다.

당황해하던 혈천도마가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자존심으로 볼 때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묵묵히 말을 이어 나갔다.

“……서로의 강함만 보지 말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십시오. 서로 등을 기댄 채 쉬십시오. 어떤 순간에도 둘이 함께하십시오. 부부란…….”

다시 다음 말을 잊어버렸고 혈천도마는 다시 기억을 떠올리며 주례를 계속했다. 수치심에 짧게 마무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한 글자, 한 글자 준비한 말을 해나갔다.

검우진은 깊은 눈빛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권마와 일화검존, 취마와 다른 마존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그들은 수십 년 만에 혈천도마의 새로운 면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강호를 떠돌다 멈춘 그곳 들판에서 별을 보면서 마지막을 함께 하십시오.”

그것이 주례사의 마지막이었다.

주례를 마친 후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바라보았다. 서대룡은 붉어진 눈시울로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이제 혈천도마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앞서 미리 준비해서 한 주례사가 아니라, 이 순간 제자 부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평생 혼인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좋은 혼인 생활인지 모른다.”

서대룡은 떨리는 눈빛으로 사부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좋은 사람으로 산 적도 없었지. 내 인생은 불운만이 가득했고.”

하마터면 서대룡은 아닙니다, 사부님. 하고 소리칠 뻔했다.

“그래서 너희 부부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할지 사실 모르겠다.”

잠시 혈천도마가 두 사람 너머에 있는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교주와 시선을 나눈 후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취마를 보았고, 다시 일화검존을 보았다.

“나이를 먹으니 자꾸 지난날을 후회하게 된다.”

잠시 밖으로 나갔던 혈천도마의 시선이 서대룡과 단아에게로 돌아왔다.

“너희는 똑똑한 아이들이니 이 사부처럼 후회하는 삶을 살지 마라.”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대룡의 눈물에 단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대룡이 사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자 당황한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고로 혼례가 이렇게 숙연할 일이 아니었기에, 검무극이 웃으며 구조대로 나섰다.

“우리 어르신, 이렇게 말씀하고 싶었던 것을 어찌 참으셨을까?”

검무극이 혈천도마 흉내를 내며 말했다.

“어둠 속에서 나고 자란 신교의 마인들이여! 배신은 곧 죽음이니 영원한 피의 혈맹을 맺어라! 검을 버리고 도를 들어라!”

마존들이 웃었고, 검우진의 한쪽 입가도 말려 올라갔다. 이제 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혈천도마의 얼굴에 긴장이 풀렸다.

두 사람 모두 부모를 여의었기에 부모에게 절을 올리는 절차는 생략했는데.

서대룡과 단아가 혈천도마에게 절을 올리려 했다. 그러자 혈천도마는 손사래를 치며 저 멀리 걸어가 버렸다.

서대룡과 단아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절을 올렸다.

그 절을 끝으로 두 사람의 혼례식이 끝이 났다.

절을 올린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그러자 단아가 들고 있던 꽃에서 꽃잎이 하나 떨어져 나갔다.

꽃잎이 나풀나풀 사람들 사이를 날아가더니 일화검존의 손에 내려앉았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걸어갔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표정을 보며 서대룡은 생각했다. 이렇게 기뻐하는 소교주의 얼굴을 본 적 있었던가?

펑! 퍼엉! 펑!

터지는 폭죽 아래에서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대신해 주었다.

“내 오른팔, 잘 먹고 잘 살아라!”

원한다면 누구보다 간절히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

이곳은 바로 대천산 꼭대기였다. 혈천도마는 그 정상에 서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서대룡이 사부께서 머리를 식힐 때면 대천산에 올라간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저야 어르신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너도 답답해서 올라왔겠지.”

검무극이 부정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축하 연회는?”

“잘 마쳤습니다.”

아버지와 혈천도마는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마존들도 잠시 자리를 지키다 떠나갔다. 자신들이 가줘야 서대룡이 동료들과 어울려 편하게 놀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끌벅적한 그곳에서 서대룡과 단아가 즐겁게 있는 모습을 보다 조용히 빠져나왔다. 어쩌면 그들은 술 취한 황천각주가 시를 읊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주례사 정말 좋았습니다.”

“그렇게 여러 번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늙어서 그렇습니다.”

혈천도마가 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오른팔 장가도 보냈고. 이제 뭘 할 거냐?”

지금껏 구화마공의 대성에서 멀어지겠다는 말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대답은 달랐다.

“이제 구화마공의 대성을 향해 달려갈 겁니다.”

구화마공의 대성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폐관 수련에 들어가려 할 때 혈천도마가 자신을 말렸다.

너무 간절히 원하면 오히려 멀어지는 법이다.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구성에 이르는 과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낸 결과였는데, 그 모든 과정을 버리고 대성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대성은 그때와 달랐다.

그게 대룡이 혼례까지 시키고 하는 말이었으니까.

검무극의 두 눈에는 달라진 열망이 담겨 있었다. 이제 혈천도마는 말리지 않았다.

“원하기로 했다면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해라.”

* * *

그날 아침 검무극은 짐을 챙겼다.

갈아입을 옷가지와 요리할 때 필요한 양념들, 잘 때 바닥에 까는 가죽과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말린 음식들, 그리고 혹시 몰라 챙긴 몇 가지 물건들까지.

그렇게 한 짐 가득 준비한 후 다시 대천산에 올랐다.

대천산의 여러 곳 중 적합한 곳을 찾았다. 그러다가 지형이 험해서 아무도 오지 않으면서 넓은 공터가 있는 장소를 찾아냈다. 뒤쪽으로 치솟은 절벽에는 동굴까지 있었고 근처에는 시냇물이 흘렀다.

뒤쪽은 절벽, 앞쪽은 뻥 뚫린 공간. 수련하기에 제격이었다.

검무극은 동굴에 짐을 풀었다.

이번 수련에서 시공이환술의 시천비술은 쓰지 않을 작정이다. 손에 잡힐 듯 다가온 대성이었기에, 대천산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수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수련하다가 가슴이 답답하거나 벽이 느껴지면 이곳에 오르라고. 대천산의 기운이 도움을 줄 거라고.

다음 날 아침부터 수련에 돌입했다.

우선 대천산의 정기를 느끼며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그리고 든든히 식사한 후에 본격적으로 구화마공을 수련했다.

일초식부터 오초식까지는 공터에서 펼쳤고, 육초식 천마멸세만 시공이환술을 열어서 펼쳤다.

비혈사의 기운마저 흡수한 후 펼치는 천마멸세를 이곳에서 그냥 펼쳤다간 주위가 모두 소멸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천마멸세까지 펼쳐서 모든 내공을 다 소모한 후에야, 시공이환술에서 나왔다.

천마멸세로 내공을 완전히 소진한 검무극이 자리에 앉아 내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 번!”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할 생각이었다. 온 정성을 다해서 초식을 펼쳤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다섯 번이 목표.

과연 몇 번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

백 번? 천 번? 아니라면 만 번?

* * *

먹고 수련하고 산책하고 자고.

그 일이 매일 반복되었다.

눈앞에 잡힐 듯 말 듯 했던 대성은 그리 가깝게 있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 멀리 있는 것 같은 어떤 것, 너무 거대했기에 가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혈천도마의 가르침은 본격적인 수련을 했을 때 그 힘을 발휘했다. 그가 전해준 두 가지 가르침.

너무 간절하지도 말고.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간절한.

검무극은 이 상반된 조언 모두를 실천했다.

이 수련방법이 잘못되었나 조바심이 나는 날에는 첫 조언을 떠올렸고.

일단 내려가서 다른 방법을 찾을까? 하는 마음이 자신을 유혹할 때는 두 번째 조언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잘 맺는다고 여기지만, 자신의 진짜 장점은 혼자 무엇인가를 해내는 것이다. 한 가지 목표를 위해 혼자서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자신이다.

그리고 오늘, 이백스물다섯 번째 구화마공을 펼쳤을 때 뜻밖의 방문자가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산책하듯 그곳에 올라선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아버지!”

검우진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몰골이 거지꼴이구나.”

그러고 보니 근래 수염도 깎지 않고 수련에만 몰두한다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 꼴로 만날 테냐?”

“누굴요?”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검무극은 그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천마혼이 현신하는 순간, 그런 몰골로 만날 거냐는 의미였다.

얼마나 바라던 일인데 그럴 수는 없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아버지.”

검무극이 재빨리 혁낭에 말아두었던 호랑이 가죽을 펼쳤다. 이미 바닥에 펼쳐진 것은 일반가죽이었다.

“내가 올 줄 알았더냐?”

“혹시 몰라 챙겨왔습니다.”

다른 장소였다면 챙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아버지가 추천해 주신 곳이다. 어쩌면 한 번쯤 아버지가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우진이 호랑이 가죽에 앉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안 했다.”

저 안 했다는 말을 듣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같이 밥 한 끼 하려고 온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멧돼지라도 잡아 오겠습니다.”

검무극이 사냥을 하러 가려 하자, 검우진이 말렸다.

“너 먹던 것으로 먹자.”

“다 식은 것들입니다.”

“괜찮다.”

검무극이 남겨둔 고기와 음식을 가져왔다.

열양지기를 일으켜 음식을 데운 후 아버지께 드렸다. 물론 혁낭에는 아버지가 올 것을 대비해 준비해 온 깨끗한 식기가 있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말없이 식사만 했지만 이젠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검무극이 차를 우려냈다. 혁낭에는 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차도 있었다.

“술을 마시면 내려가고 싶어질 거 같아 술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차 맛이 좋으니 됐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검무극이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다 된 거 같은데, 딱 이번 수련을 마치면 이룰 것 같은데. 원래 대성이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겁니까?”

검우진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원래라면 그 사막에 들어서지도 못했겠지.”

그만큼 검무극의 진도가 빠르다는 의미.

대성을 이뤄 더 강해지는 것도 중요했지만, 사실 더 큰 열망은 자신의 천마혼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과연 천마혼은 영혼이 존재할까?

자신과는 어떻게 교감하는 것일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아버지께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여쭤봐야 했다.

“대성을 이루고 나면 천마혼은 어떻게 불러내는 겁니까?”

“네 의지로 불러낼 수 있게 된다.”

“내공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천마혼이 강림하는 데에는 내공은 필요 없다. 다만 천마혼이 무공을 쓰려면 네 내공이 필요하지.”

결국 천마혼은 무공을 펼친 당사자와 깊이 연결되어있다는 의미.

천마혼의 강림.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렸다.

남은 차를 마신 후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에서 내려오면 바둑이나 한판 두자.”

아버지는 잘해라, 어떻게 해라, 한마디도 안 하시고 정말 밥만 드시고 가셨다.

하지만 이 방문으로 변화가 하나 찾아왔다.

* * *

아버지가 다녀가신 다음 날, 언제나처럼 수련을 마치고 산책했다.

전력을 다한 수련이었기에 심력 소모가 엄청났고, 수련이 끝나면 진이 다 빠졌다. 하지만 산책만큼은 빠뜨리지 않았다.

걸으면서 사색했다. 회귀 전 일들을 생각하기도 했고, 죽였던 적들을 생각하기도 했다. 무공 구결을 떠올리기도 했고, 새로운 수련방식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때 검무극의 눈에 계곡 한쪽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거목이 들어왔다.

“아깝게 되었구나.”

천년은 되었을 거목이 부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던 검무극이 다시 나무로 돌아갔다.

사아악! 사악!

검무극이 흑마검으로 나무를 잘라냈다.

그리고는 제법 큼직한 상자 크기로 잘라낸 나무를 거처로 가져왔다.

검무극은 그것으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아악, 사악.

검에 깎여 나가면서 점차 형체를 드러낸 그것은 다리가 달린 두꺼운 바둑판이었다.

검무극이 거목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이 부러진 나무가 바둑판 재료로 최상급이라는 비자나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년 먹은 비자나무였다.

내려오면 바둑이나 한 판 두자.

아버지께 바둑판을 직접 만들어서 선물로 드리고 싶어진 것이다. 바둑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다.

검무극은 정성껏 바둑판을 만들었다.

수련은 계속되었고, 남는 시간에는 바둑판을 만드는 데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열흘 후 드디어 바둑판이 완성되었다.

정말 장인이 만든 것을 사 왔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근사한 바둑판이 만들어졌다.

이제 남은 과정은 하나,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잠시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마음을 다스리던 검무극이 흑마검으로 바둑판 위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삭! 삭! 삭!

무심하게 그어지는 선들.

열아홉 줄의 가로선이 그어졌고, 곧이어 세로줄이 다시 그어졌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전체를 망쳐버리는 일이었음에도 검무극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선과 선 사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어져 있었다.

검무극은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만들어진 것이다.

막상 바둑판을 만들자 바둑돌까지 자신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자나무를 더 잘라 와서 바둑통을 만들었다. 오히려 바둑판보다 통을 만드는 게 더 어려웠다. 보기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몇 번의 실패를 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바둑통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둑돌을 만들었다.

산책하면서 수정처럼 빛나는 흰 바위를 찾아냈고, 그 며칠 후에는 칠흑 같은 빛을 내는 검은 돌들도 찾아냈다.

검무극은 흑마검에서 검기를 발출해서 바둑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금 더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비수가 아니라 흑마검으로 만들었다. 미세한 검기를 조절해서 바둑돌을 깎았다. 마지막에는 강기로 바둑돌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무공을 이용해서 바둑알을 만들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 못했다.

첫 번째 바둑돌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점차 그 시간은 줄어들었다.

이렇게 검기로 미세한 조절을 해본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사아악! 사악!

만들면 만들수록 검기와 강기의 미세한 조절이 점차 더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수련하고 바둑알을 만들고, 또 수련하고 바둑알을 만들고.

한 개에서 두 개, 많으면 서너 개, 그렇게 매일 정성껏 바둑알을 만들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수련과 바둑알을 만드는 일은 쉬지 않았다.

그렇게 매일이 반복되었고, 검무극은 그 지루함을 이겨냈다.

결국 오늘 총 삼백스물한 개, 그 마지막 바둑알을 만들었다.

“드디어 끝이다!”

검무극이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만든 돌을 바둑통에 넣었다. 똑같은 크기의 바둑돌들이 통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검무극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만져본 후에 동굴 구석에 잘 넣어두고는 호랑이 가죽으로 위를 덮었다. 이 감격을 즐기는 것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검무극은 동굴에서 나와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오늘 수련은 다 끝난 밤이었는데, 다시 구화마공을 펼치려는 것이다.

마지막 바둑돌을 완성하던 그 순간, 구화마공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제 일식 인멸식이 발휘되는 순간.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동서남북 사방에서 나타난 네 악귀가 하나의 공간을 베었다.

그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제 이식 대멸식을 발휘했다.

이제 검무극은 이 다섯 초식을 연계식으로 발휘했다.

스스스스스스스스스!

무섭게 생긴 악귀들이 눈앞에서 분열했다. 그 숫자는 스물여섯!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들이 공간을 찢어발기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 결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검무극의 검은 다음 초식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검무극 앞에 강기의 벽이 생겨났다.

제삼식 대마벽의 투명한 광채가 미처 다 사라지기도 전에, 제 사식 암흑일섬이 발휘되었다.

깊은 암흑이 내려앉는가 싶더니.

쉬이이잉.

한 줄기 빛이 어둠을 가로질렀다.

다시 주위가 밝아졌을 때 하늘에서 검기가 벼락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제 오식 절혼마격이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팍팍팍팍팍팍팍팍팍팍!

튀어 오른 돌조각들.

땅에 남은 검기의 흔적은 그 간격이 일정했다. 그리고 구멍의 깊이도 똑같았다.

제 일식부터 제 오식까지 연속해서 발휘했음에도 검무극은 전혀 몸에 부담이 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구화마공이 자유자재로 펼쳐내고 있었다.

제 육식 천마멸세는 이곳에서는 펼치지 못했다.

이곳 대천산을 파괴해 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을 열어서 그곳에서 천마멸세를 펼쳤다.

흑마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세상을 하얗게 뒤덮던 그 순간.

시공이환술 속 세상이 소멸했다.

대천산에 올라 수백 번을 반복했던 천마멸세였다.

원래라면 시공이환술 속 세상을 완전히 소멸시킨 후, 자신이 시공이환술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오늘의 천마멸세는 달랐다. 끝도 없이 날아가서 모든 것을 소멸한 후.

콰지지지지직!

시공이환술 속 세상의 사방에 금이 가며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바라보는 시공이환술 세상에 금이 가고 있었다. 자신이 풀지 않았음에도.

‘시공이환술이 깨어지고 있다!’

천마멸세가 시공이환술을 박살 내며 파훼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기에 검무극은 당황했다.

콰아아아앙!

시공이환술이 박살 나면서 검무극이 바깥세상으로 튕겨 나왔다.

엄청난 충격으로 검무극이 절벽에 부딪혔다. 내공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이었다.

콰콰콰콰쾅!

시공이환술을 파훼하고서도 남은 천마멸세의 충격 여파가 주변을 박살 냈다.

콰앙! 콰르르릉!

그 여파에 뒤쪽 동굴이 있던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르르!

검무극이 눈을 부릅떴다. 몸을 굴러서 피했지만 또 다른 거대한 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 돼!’

쿠우웅!

굉음과 함께 찾아온 어둠.

‘죽은 건가?’

앞서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온몸이 터질 듯 아픈 걸로 볼 때 죽지는 않았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바로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너의 주인이자 친구다

어둠이 눈을 뜨는 모습은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그 두 눈이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는데, 그것은 검무극의 기도와 닮아 있었다.

검무극은 이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꿈으로, 또 환상으로, 여러 번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유일하게 제대로 본 것은 이 눈이었다. 그래, 바로 이 눈이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린 검무극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이 전율했다.

‘천마혼이다!’

자신의 천마혼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면서.

천마혼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짝 다가와 있던 두 눈이 멀어졌다.

천마혼의 등에 있던 큰 바위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천마혼이 강림했고, 몸으로 바위를 막아 주었음을.

‘천마혼이 나를 살려주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것이었다.

‘내가 부른 것이 아니었음에도 강림했다!’

바위가 자신에게 떨어지던 그 순간, 검무극은 남은 이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 그들을.

그 마음을 읽고 주인을 구해낸 것일까? 아니면 탄생하자마자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사라질 그 자신의 운명을 구하기 위함이었을까?

천마혼이 달빛 아래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세상의 모든 마귀와 악귀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

구화마공의 정점이자 모든 마공의 극의.

달빛 아래 드러난 천마혼의 얼굴은 정말 무섭게 생겼다. 이제 막 세상에 모습을 보인 모습이 이 정도인데? 만약 무공까지 갖추고 성장한다면?

‘본교의 석상은 새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아버지.’

천마전 가까이에 천마혼을 본떠 세운 거대 악귀상이 있었다. 실제로 보니 석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서웠다. 특히 저 눈빛이 주는 차가운 위압감은 석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천마혼이었기 때문일까?

검무극은 이 무서운 얼굴이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섭게 생겼으면서도 잘 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 도도한 두 눈을 보고 있으면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살인병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수십, 수백 번 상상했던 그 모습보다 훨씬 멋있었다.

‘너! 마음에 든다!’

뭐라고 첫마디를 해야 할까?

하지만 그때였다. 천마혼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하는가 싶더니, 이내 소리 없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안 돼!’

검무극의 내공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서 스스로 현신했기에 오래 있지 못하고 되돌아간 것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천마혼을 불러내는 데에는 의지만 필요할 뿐 내공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천마혼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무공을 발휘하게 하려면 내공이 필요했다.

아쉬움도 잠시, 검무극의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드디어 대성을 이뤘다.”

주마등은 죽는 순간에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지금까지 오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이 스쳐 지나갔다.

화무기를 막고 모두를 살리는 것이 목적인 인생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은 큰소리로 웃었다. 마치 미친놈처럼 웃었다. 그의 웃음이 산속에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정말 기뻤다. 여러 무학의 성취를 얻었지만 이렇게 기쁜 적이 있었을까?

세상 어떤 무공 비급을 얻는다고 해도, 아무리 귀한 영약을 얻어도 이보다 더 기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정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못 출 게 뭐 있나? 예전에 비사인과 함께 췄던 춤을 추면 되지. 달밤에 홀로 춤을 출 거다.

절벽에 기대앉아 있던 검무극이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으윽!”

검무극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앞서 시공이환술이 파훼 되며 튕겨 나와 절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내공 없이 맨몸으로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천마혼을 볼 때만 해도 하나도 안 아팠는데. 막상 긴장이 풀리자 아픔이 밀려들었다.

검무극이 몸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 타박상이 심할 뿐, 뼈가 부러지거나 내상은 입지 않았다.

밀려드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미친놈처럼 실실 웃었다. 아파도 좋았다. 아프면 어떤가? 꿈에 그리던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뤘는데.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왜 마지막 수련 때 시공이환술이 파훼 되었는지.

구화마공이 대성을 이루면서 천마멸세가 시공이환술을 찢어버린 것이다. 대성을 이룬 천마멸세로 시공이환술을 파훼할 수 있다는 의미.

원래라면 시공이환술이 파훼 된 나쁜 결과였지만, 이건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구화마공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였으니까.

“내가 해냈다!”

검무극의 외침이 산속에 메아리쳤다.

검무극이 잠시 절벽에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찌 이런 큰일을 이루는 것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했겠는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늘에 감사를 전한 후 검무극은 내공부터 회복했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운기했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이주천하고, 삼주천하고.

단전에 내공이 가득 쌓였을 때 몸의 고통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내공을 회복한 검무극의 시선이 동굴을 향했다. 큰 바위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아파도 좋고, 춤을 춰도 안 부끄러운데. 단 하나!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

‘부디 바둑판만은!’

동굴 내부가 무너졌다면 바둑판과 알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 정말 생각도 하기 싫었다.

검무극이 동굴 입구로 가서 그 앞을 막고 있는 바위를 옆으로 밀었다. 그 큰 바위가 공이 굴러가듯 가볍게 치워졌다.

다행히 동굴은 무너지지 않았다.

검무극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바둑판과 바둑알은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두었기에 우수수 쏟아진 파편으로 인한 흠집도 생기지도 않았다.

비로소 검무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극이 바둑판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것이 소중한 이유는 비단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이 바둑판과 바둑알을 만드는 과정이 분명 대성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만약 그렇다면 진정 고마움을 전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바둑판을 만들 생각조차 안 했을 테니까.

‘정말 이런 결과를 예상하시고 바둑 두자고 하신 건 아니시겠지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당장에라도 짐을 싸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침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검무극은 대천산에서의 마지막 잠을 동굴에서 잤다.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깨고 나면 이 모든 일이 꿈이었을까 두려웠다.

* * *

다음 날 아침 검무극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꿈이 아니었다. 동굴 앞은 무너져 내린 바위와 돌들이 가득했으니까.

검무극이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자신의 무학 경지가 한 단계 더 올라섰다는 것이 느껴졌다. 비천검법을 펼쳐도, 벽력수라권을 펼쳐도 더 잘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강해졌다는 것이 이렇게 확실하게 느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폭포 아래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혁낭 속에 깊이 넣어두었던 새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이 옷은 대성을 이뤘을 때 입고 가려고 가져온 옷이었다. 바둑통은 혁낭에 넣었고 바둑판은 호랑이 가죽으로 싼 후에 혁낭 위에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하산 준비를 마친 후 검무극이 검을 뽑아 들었다.

구화마공 제일식 인멸식.

사람 크기의 바위 하나를 가운데 두고 동서남북 네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뤘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것이 천마혼이었다면, 다음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이 녀석들이었다.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네 악귀의 검이 번쩍하더니!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그들의 공격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했다.

구성일 때의 위력과 대성일 때의 위력은 완전히 달랐다. 팔성에서 구성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저 가운데서 악귀들에게 난도질당한다면 그 누구도 버틸 수가 없으리라.

달라진 것은 위력만이 아니었다.

바위를 박살 낸 네 악귀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생김새도 달라졌다. 이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듯, 자신들의 얼굴을 보였다.

더 무서워졌고, 더 잘생겨졌고, 더 똑똑해 보였고 더 신비로워 보였다. 그들의 얼굴과 몸에 독특한 문양들이 생겨나 있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악귀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자신의 악귀들과는 분명 생김새나 풍기는 느낌이 달랐으니, 이들의 생김새나 기도는 분명 무공을 발휘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갑다, 동귀, 서귀, 남귀, 북귀야.”

검무극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물론 대성을 이뤘다고 악귀들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들의 눈빛에 담긴 것은 분명 어떤 감정이었다.

동서남북 네 악귀는 더욱 깊어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을 뿐인데, 검무극이 그 눈빛을 멋대로 해석했다.

―우리들 이름, 그게 최선이었습니까?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니 어쩔 수 없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을 물을 리는 없었으니 검무극의 마음이 만든 질문과 대답이었다.

대성을 이루고 또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인멸식의 네 악귀를 계속 남아 있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귀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내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두 배, 세 배, 네 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마혼 역시 현신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막대한 내공이 소모된다는 것을. 하긴, 그 무서운 존재가 계속 강림해 있을 수는 없는 일이겠지.

아쉽지만 검무극이 네 악귀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또 보자.”

네 악귀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대멸식을 발휘했다.

스스스스스.

무서운 얼굴의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봤듯이 이전보다 더 무서워졌고, 흘러나오는 마기 역시 훨씬 강력해졌다.

그리고 스물여섯까지 분열했던 악귀들의 숫자는 이제 마흔넷까지 분열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대멸식이 발휘되자 그들은 눈앞의 모든 것을 휩쓸며 앞으로 전진했다.

떨어져 내린 바위와 잔해로 엉망이었던 공터가 깨끗해졌다. 대멸식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다 쓸고 지나갔다. 당연히 위력은 더 강력했고, 더 정교하게 그들을 다룰 수 있었다.

검무극이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처럼 그곳은 깨끗한 공터가 되었다.

그렇게 그곳을 정리한 후 혁낭을 짊어지고 매일 산책하던 길을 걸었다.

이곳 대천산에 올라와 두 번의 계절이 지나고 세 번째 계절을 맞았다. 그동안 수련을 마치면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다.

매일의 고된 수련과 바둑알을 만드는 과정만큼이나 이 산책도 구화마공의 대성에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생각은 언제나 움직일 때 떠오르는 법이었으니까.

거기에 하나 더.

검무극은 산책하면서 꽉 짜인 자신의 삶을 느슨하게 풀려고 노력했다. 단 일각의 시간도 아껴 쓰며 살았던 인생을 이 산책을 하는 동안만큼은 여유를 가지려 애썼던 것이다.

사실 검무극은 그게 더 어려웠다. 피나는 노력은 자신의 의지로 가능했지만, 삶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지혜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마지막 산책을 마친 후 검무극은 대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불어온 바람이 검무극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그때 멀리서 호랑이 울음이 들렸다. 어쩌면 아버지와 형과 함께 왔을 때 살려줬던 그 호랑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로움이 가득한 대천산의 기운을 검무극은 한껏 만끽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옳았다. 이곳 대천산이 대성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잠시 그렇게 서서 정상의 정경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천마혼을 다시 불러냈다.

어제는 내공도 없이 다친 몰골로 만났으니, 제대로 인사하려는 것이다.

이제 막 대성을 이뤘기에 불러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어제는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라 스스로 강림한 것이었고.

하지만 기우였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천마혼이 눈앞에 서 있었다.

달빛 아래서 봤던 천마혼과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는 천마혼의 느낌은 달렸다.

이렇게 순수한 칠흑의 존재가 밝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로워 보였다.

스르륵.

검무극의 신형이 허공으로 떠올라 천마혼 얼굴 앞까지 올라갔다.

천마혼의 얼굴 앞에서 눈을 마주쳤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니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지, 어떤 고수도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마기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무극이 천마혼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다.”

천마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너의 주인이자 친구다.”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만 따르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믿었다. 천마혼은 분명 이성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전에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났을 때도, 또 어제 자신을 구했을 때도, 분명 천마혼의 저 눈빛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으니까.

“어제 나를 구해줘서 고맙다.”

아직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신을 진정한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일지도 모를 일. 이제 이 천마혼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검무극은 진정한 주인이 되어 이 천마혼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고 싶었다. 천마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시공이환술 속 해변에서 함께 누워서 천마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그러려면 더 큰 섬과 엄청나게 크고 단단한 의자가 필요하겠지만.

검무극은 더는 천마혼을 보지 않고 뒤로 돌아섰다.

함께 정상에서 대천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공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천마혼이 사라지기 직전 검무극은 이 말만은 그에게 전했다.

회귀 전 인생에서부터 회귀 후 인생에서도.

“정말 오래전부터 널 보고 싶었다.”

이제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

검무극이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대천산을 내려온 후 곧장 짐도 풀지 않고 천마전부터 찾았다.

회귀한 후 가장 오랜 시간 본단을 비웠지만 검무극은 걱정하지 않았다. 예전의 본교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도, 마존들도 모두 달라졌으니까.

그 믿음이 없었다면 세상과 단절된 대천산 깊숙한 곳에서 기약 없는 수련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과연 변한 것은 없었다.

신교의 정문을 지키던 무인들의 우렁찬 인사도 그대로였고 외원을 오가는 무인들의 모습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바짝 날이 선 내원의 경계도 여전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융단 너머 저 앞으로 태사의가 보였다.

아버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검무극은 신안술로 아버지의 표정을 자세히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기쁨과 반가움이었다. 오래 자리를 비워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까? 정말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계셨다.

가까이 가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표정이기에 검무극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표정을 만끽했다.

“아버지!”

입구에서 큰소리로 아버지를 부른 후 검무극은 피의 길을 걸어갔다.

이 특유의 천마전 냄새, 발밑에서 느껴지는 융단의 푹신한 감촉, 곳곳에 자리한 악귀상들, 모두 그리웠다.

‘돌아왔구나!’

검무극은 피의 길을 걸으며 더없이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아니, 금의환향하는 것 같았다. 구화마공 대성을 이루고 처음으로 들어오는 천마전이었기에 이 순간은 아주 값진 순간이었다.

태사의 아래에 가서 아버지 밑에 섰다. 검무극은 인사 대신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언제나처럼 이렇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주셔서요.

왜 감사하다고 하느냐는 아버지의 눈빛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없는 동안 무림맹으로 안 쳐들어가셔서요.”

아버지의 입술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검무극은 진짜 인사를 했다.

“무사히 하산했습니다, 아버지.”

산에서 홀로 말없이 보낸 시간이 너무나 길었기에 검무극은 너스레를 참을 수 없었다.

“저 없는데도 본교가 너무 잘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들어오는데 다들 이런 표정이었습니다. 아, 맞다. 우리 소교주님 나가 계셨지?”

가만히 아들을 내려다보던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와 검무극 앞에 섰다. 그는 아들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대성을 이뤘구나.”

“아! 역시 아버지는 한눈에 알아보시는군요. 최대한 기도를 감추고 있다가 아버지를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검우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알아봐서 한 말이 아니었다.”

“모르셨다고요?”

검우진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을 그 누가 꿰뚫어 볼 수 있겠느냐?”

검무극은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

“아버지는 십이성 대성을 이루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같은 대성이지 않으냐?”

그 말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구화마공의 대성이 특별하다는 것을. 대성을 이루는 순간 아예 다른 경지에 들어선다는 것을.

이제야 제대로 실감했다. 자신이 진정 구화마공 대성을 이루었음을.

“그럼 어떻게 아신 겁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우진이 대답했다.

“너는 대성을 이루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검무극은 말없이 아버지를 응시했다.

누군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줄 때의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바로 지금과 같은.

“하마터면 영영 못 내려올 뻔했습니다. 우리 형만 좋은 일 시킬 뻔했지요.”

그래, 아버지는 정확히 보고 계셨다. 대성을 이루지 못하면 내려오지 않을 작정이었으니까.

“내가 칠 년이 걸린 일을 너는 일 년 남짓한 시간에 해내는구나.”

칠 년은 검우진이 구성에서 대성까지 걸린 시간. 아무리 뛰어난 아들이라 해도 오 년은 걸릴 거라 여겼는데. 이번에도 또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너는 역대 교주 중에 가장 빨리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다.”

심지어 교주도 아니고 소교주의 자리에서 이뤄낸 일이었다.

그때 검무극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역대 교주 중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내 덕이라고?”

아버지가 이유를 묻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검무극은 메고 있던 혁낭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대성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같거든요.”

검무극은 혁낭 위에 고정해 둔 호랑이 가죽으로 둘러싼 바둑판을 내려놓았다. 혁낭에서 바둑돌이 든 통도 꺼냈다.

“아버지께 드리려고 제가 만든 바둑판입니다. 여기 바둑돌도 있습니다.”

검우진이 손을 내밀자 그 무거운 바둑판이 휘익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우진이 유심히 본 것은 바둑판 위에 그어진 선이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어진 선들.

“한 번에 그은 것이냐?”

“네.”

검우진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은 선만 봐도 어떤 경지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었는지 알 수 있다는 듯이.

이번에는 바둑통이 저절로 열리더니 안에 든 바둑돌들이 일제히 허공에 떠올랐다.

촤르르르륵.

모든 바둑돌이 따로 놀았다. 검우진은 그것들을 각각 허공섭물로 움직이는 신위를 발휘한 것이다.

“아, 이번 선물은 망했습니다. 아버지는 바둑판이 필요 없으시잖아요!”

이렇게 허공섭물로 허공을 바둑판 삼아 둘 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그건 아니라는 듯 검우진이 말했다.

“바둑은 손맛이지.”

그리고는 허공에 떠 있는 바둑돌을 살펴보았다. 모두 똑같은 크기와 두께였다. 정말 바둑돌 만드는 장인이 만들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직접 만들었느냐?”

“흑마검으로 일일이 다 깎았습니다. 앞으로 저를 대천산의 바둑돌 깎는 효자라고 불러주십시오!”

검우진의 한쪽 입술이 올라갔지만 만들어진 결과물은 자랑할 만했다.

“잘 만들었구나.”

정말 일부러 흠을 잡고 싶어도 잡기 어려울 만큼 정성이 들어간 바둑돌이었다.

촤르르륵.

허공에 떠 있던 바둑알들이 통으로 전부 들어갔다.

“한데 왜 내 덕이라는 거냐?”

“공교롭게도 마지막 바둑돌을 완성한 날 구화마공 대성을 이뤘거든요. 아마도 검기와 강기를 미세하게 조절하는 연습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그런 수련을 한 적은 없었거든요.”

검우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아버지가 내려오면 바둑 한판 두자는 말씀을 안 하셨다면 바둑판과 알을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어쩌면 아직도 전 대천산에서 수련하고 있겠지요. 이렇게 될 줄 알고 혹시 그 비자나무 부러뜨려 두신 것 아닙니까?”

“그게 어찌 내 덕이냐? 바둑돌을 깎겠다는 네 결정과 노력 덕분이지.”

아버지의 표정과 말에서 정말 그랬는지 그 사실 여부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뤘으니 이 점만은 지켜야 한다.”

그 큰 힘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랐다. 거기에 아버지와 역대 천마들의 자존심까지 더해졌다.

“이제 넌 누구에게도 지면 안 된다.”

검무극은 아버지께 약속했다.

“절대 지지 않겠습니다.”

검우진이 돌아섰다.

바둑통이 올려진 바둑판이 허공에 둥둥 떠서 아버지를 따라갔다.

“따라오너라.”

검무극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당연히 거처로 가서 바둑을 두려는 것이라 여겼는데. 아버지는 교주 전용 연무장으로 자신을 데려갔다.

검우진은 연무장 한가운데 바둑판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둡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무장에 있는 여러 병장기를 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분위기로 제 기를 죽이시겠다는 거죠? 저 예전의 그 호락호락한 아들 아닙니다. 이젠 바둑 잘 두는 군사를 둔 아들이라고요.”

물론 그런 이유로 여기 데려오진 않으셨을 것이다. 분명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겠지.

두 사람이 바둑판을 두고 마주 앉았다.

흑을 쥔 검무극이 첫수를 두었다.

경쾌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바둑돌을 놓는 느낌도 좋았고 그 소리도 정말 좋았다.

“맞습니다, 바둑은 손맛이지요!”

다음으로 아버지가 수를 두었다.

깨끗하게 울려 퍼지는 맑은 울림. 그 기분 좋은 소리를 듣는 순간, 돌을 깎던 지난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한 수, 한 수가 오갔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두는 바둑이었기에 너무 기분이 좋았지만, 오늘 검무극의 정신은 딴 데 팔려있었다.

초반 포석이 끝날 때쯤 검무극이 넌지시 물었다.

“천마혼에 대해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검우진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혼과 대화를 나눠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검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아버지 성격상 천마혼과 대화를 나눌 분이 아니시지.

이번에는 검우진이 불쑥 물었다.

“그 수다를 천마혼과도 떨고 싶으냐?”

검무극이 웃으며 시인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 녀석인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잠시 바둑돌을 놓으려던 검우진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다.

“넌 그게 궁금하냐?”

“아버지는 아니십니까?”

“전혀.”

다시 몇 수가 지나고.

검우진은 바둑돌을 내려놓으며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천마혼과 대화를 나눈 천마도 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

역시! 천마혼은 분명 자신만의 의지를 지닌 존재였다.

아들의 얼굴에 기쁨이 스치자 검우진이 경고했다.

“천마혼은 위험한 존재다. 자칫 폭주라도 하면 막을 수가 없지. 그래도 수다를 떨고 싶으냐?”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네, 그런 존재라면 더욱 친해져야겠네요.”

검우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응시하며 물었다.

“제 천마혼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어쩌면 그래서 이곳 연무장으로 자신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내 앞에선 강림하지 않을 거다.”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천마혼을 불러냈다. 놀랍게도 아버지 말씀처럼 천마혼은 강림하지 않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느낌이 그랬다.”

천마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검우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마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는 존재지.”

“아! 그렇다면 아버지를 이길 수 없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씀이군요.”

아니라는 듯 검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마혼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럼 아버지의 천마혼을 두려워해서겠죠.”

당연히 그럴 거라 여겼는데.

“그건 모를 일이지.”

다른 천마혼이었다면 분명 그래서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아들이라면, 이 짧은 시간에 대성을 이룬 아들이었기에.

“네 천마혼이니까.”

쉽게 이유를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

그 말을 하고는 검우진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내가 이겼다.”

“앗! 언제 대마가 잡혔죠?”

“내게 잡힌 게 아니라 네 천마혼에게 잡혔지.”

모든 신경을 바둑에 쏟지 않고 천마혼에 쏟았다는 의미인 줄 알았기에.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다. 나도 그랬으니까.”

검우진이 자신만이 들어올 수 있는 연무장으로 데려온 이유는 바둑을 두기 위함도 아니고, 검무극의 천마혼을 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구화마공 제칠식을 전수하겠다.”

구화마공 제칠식 마혼창세(魔魂創世)

칠식부터 구식까지는 천마혼이 사용하는 무공이었다. 그 삼 초식까지 다 익혀야 완벽하게 구화마공을 익히는 것이 되는 셈이다.

“천마혼이 현신하지 않는데도 칠식을 익힐 수가 있습니까?”

“칠식을 익히는 건 너다.”

검우진은 천마혼의 무공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천마혼은 너와 연결되어있다. 네가 구결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천마혼이 발휘하는 무공의 위력이 결정된다.”

“제가 강해질수록 천마혼도 강해지는 것이군요.”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검우진이 구결을 전수해 주기 시작했다.

“마혼이 강림하여 혼돈을 삼키니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 진기의 시작은 석문혈에서 시작한다. 대맥으로 돌아서 나가는 진기는 벼락처럼 빨라야 하며…….”

검무극은 우선 아버지가 불러주는 구결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웠다. 지금까지 익혔던 모든 무공 구결을 통틀어 가장 어려웠다.

검무극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마혼이 사용하는 무공체계는 사람이 사용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기에 구결을 이해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때그때 아버지께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성심껏 그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사실 이 순간에도 검무극은 기연을 얻고 있었다.

원래라면 십성 대성인 아버지가 전수해 주셨을 구결이었는데, 지금은 십이성 대성을 이룬 아버지가 가르쳐주고 계셨다.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니 가르침도 달랐다. 너무 수준이 높아서 오히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배우는 사람이 누구인가?

검무극은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곧바로 아버지께 물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고, 아버지가 다시 해석했고, 검무극은 거기서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앞서 몇 번이나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두 사람의 무학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깨닫는 것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한 것이 되고 있었다.

좋은 스승은 좋은 제자가 만드는 법이라고, 결국 오늘의 이 가르침은 후반 삼 초식의 전수에 있어서 역대 가장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 되었다.

그렇게 몇 시진에 걸친 칠 초식의 전수가 끝이 났다.

눈을 감고 초식을 정리한 검무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해했느냐?”

“네,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검무극은 감사 인사와 함께 아버지께 절을 올렸다. 정말 큰절을 올려야 할 만큼 큰 가르침이었다.

“천마혼이 좋아하겠습니다.”

검무극은 궁금했다. 칠식을 익히기 전과 익힌 후, 천마혼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과연 천마혼은 제 칠식을 익힌 것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마워할까? 아니면 여전히 무뚝뚝한 모습 그대로일까?

“칠식을 완전히 익히면 팔식을 전수해 주마.”

연무장을 먼저 걸어 나가던 검우진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앞서 하지 않았던 말을 해주었다.

“대성을 이룬 것, 축하한다.”

잊지 않고 해주신 아버지의 축하였다.

소교주가 그를 깨웠습니다

“조심, 조심. 거기 돌멩이 있소. 발 조심하시오.”

단아 옆에서 함께 걸어가던 서대룡은 땅바닥을 무섭게 살피고 있었다.

“저 괜찮아요! 누가 보면 진법이라도 통과하는 줄 알겠어요.”

단아의 배는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아이를 가진 그녀는 출산을 두세 달 앞두고 있었다.

“힘들 텐데 내가 업어 주겠소.”

남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서대룡이었다. 정말 업으려고 앞에 앉자 단아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운동 삼아 일부러라도 자꾸 걷고 움직여야 저도, 애도 건강하지요. 저는 돌아갈 테니, 어서 가세요.”

“집까지 같이 갑시다. 내가 바래다주고 가겠소.”

“저는 됐으니 어서 가세요. 사부님 기다리겠어요.”

단아는 서대룡이 수련하러 가는 걸 배웅하러 나온 것이다.

“혼자 돌아갈 수 있겠소?”

“왜요? 집에 가는 길에 적들이 매복하고 있을까 봐요?”

온갖 유난을 다 떨고 있는 서대룡이었지만 요즘만큼 행복할 때가 없었다. 혼인했을 때도 기뻤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는 정말 기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넋이 나갔었다.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

정말 이 기분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황천각에 수석 입학한다거나, 혈천도마의 제자가 된다거나, 이런 기쁨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기쁨이었다. 너무 큰 기쁨이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물론 기쁨만큼 걱정도 태산이었다. 건강히 잘 태어나야 할 텐데. 단아도 무사해야 할 텐데. 아이가 건강히 잘 자라야 할 텐데. 벌써부터 미래의 걱정까지 다 가져와서 하고 있는 그였다.

“잠시만.”

서대룡이 돌아가려는 단아의 배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녀석이 오늘은 조용하오.”

단아는 미소를 지은 채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렇게도 좋을까?

“저 갈게요.”

“조심히 가시오. 넘어지지 않게.”

“저도 무림인이라고요. 아이 가졌다고 내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요!”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서대룡은 혈천도마의 거처에 도착했다.

“늦었습니다, 사부님.”

서대룡은 앞서 단아와 있을 때와 분위기와는 달라졌다. 수련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 그였다.

혈천도마에게 인사하고 마당으로 나가려는데.

“갈 때 이거 가져가라.”

“이게 뭡니까?”

혈천도마가 건넨 것은 약재였다.

“마의가 사람을 시켜 보냈더라.”

“마의님이요?”

“아기에게도 좋고 산모에게도 좋은 거라고 꼭 복용하라고 전하고 갔다.”

“마의님께서 이걸 왜 제게?”

“그야 나는 모르지.”

자신에게 이런 걸 보낼 만큼 친분이 없었는데.

그때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말소리.

“왜겠어? 친구 부탁 들어준 거지.”

서대룡이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서 있었다.

“소교주님!”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달려갔다.

창가에 서 있던 혈천도마는 서대룡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기 계신 분이 마의님과 친구분이시다.”

“아!”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사부를 돌아보았다. 제자이면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다시 말해 사부가 약을 지어준 것이다.

서대룡이 고맙다는 말을 하기 전에 창에 서 있던 혈천도마가 안으로 사라졌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대신해서 말했다.

“제자야, 내가 특별히 마의에게 부탁해서 지어왔다. 어르신, 이런 생색 좀 내셔도 됩니다!”

서대룡은 감격한 얼굴로 큰 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축하를 전했다.

“네가 드디어 아버지가 되는구나.”

“제일 혼인을 못 할 거 같았던 제가, 제일 못생긴 제가, 제일 한심한 제가, 제가…… 아버지가 되네요.”

생각만 해도 울컥하는지 서대룡의 목이 멨다.

“이게 다 소교주님과 사부님 덕분입니다.”

“축하 선물은 나중에 해주마.”

“필요 없습니다. 소교주님 존재 자체가 선물입니다.”

“그래? 엄청 비싸고 좋은 걸로 해주려고 했는데.”

“…….”

“…….”

“제 아이는 아직 소교주님의 존재를 모르니까…… 선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고 서대룡도 따라 웃었다.

그때 안에서 혈천도마의 말이 들려왔다.

“왔으면 그만 떠들고 들어오너라.”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서대룡에게 말했다.

“나중에는 비기를 전수해줘야 해.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제발 낳기나 하십시오!”

그렇게 검무극이 혈천도마의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켜며 냄새를 맡았다.

“아, 이 책 냄새! 정말 그리웠습니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대성을 이룬 거냐?”

“아뇨, 힘들어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혈천도마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검무극을 향한 눈빛에 확신이 가득했다.

“정말 이뤘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을 보는 아버지와 혈천도마의 생각은 같았다.

“넌 대성을 이루지 않았다면 내려오지 않았을 테니까.”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가 정중히 포권하며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어르신이 올바른 길을 알려주신 덕분에 대성을 이루고 돌아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검무극을 바라보는 혈천도마의 눈빛도 더없이 정중해졌다.

혈천도마도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감축드립니다.”

이 인사는 검무극이 아니라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였다. 그냥 구화마공도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 예를 갖추는데, 하물며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혈천도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검무극이 여러 번 자신을 놀라게 했지만, 지금처럼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 검무극이라면 당연히 대성을 이룰 거라 믿었지만, 정말 이렇게 빨리 이룰 줄은 몰랐다.

대성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최소 수년은 걸릴 일이라 여겼다.

천부적인 재능이란 소릴 들었던 검우진도 대성을 이룬 것은 이 나이에서 먼 훗날의 일이었으니까.

“이제 뭘 할 생각이냐?”

혈천도마의 물음에 검무극이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빼더니 침상에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망하는 이유가 그거라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삶에 큰 변화를 주려고 해서라고요. 변해도 아주 조금만 변해야 하는데 갑자기 크게 변하려 해서요.”

책을 내려보며 말하던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바뀐 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출교했다 돌아오면 전 여전히 어르신을 맨 먼저 찾아뵐 거고, 여기 앉아서 책을 읽을 겁니다. 사부님께 권법을 배울 거고, 검존님과는 비무를 나눌 거고, 독왕님의 독 연구를 도울 겁니다.”

그래서 이 변함 없는 삶의 힘으로 십이성 대성을 이뤄낼 겁니다.

* * *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광활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서 천마혼을 불러냈다.

앞서 아버지 앞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천마혼인데, 지금은 곧바로 현신했다.

‘왜 아버지 앞에서는 나오지 않은 거냐?’

천마혼의 두 눈을 보고 있으니 적어도 그 이유가 겁이 나서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천마혼을 보지 않고서도 그 사실을 짐작하셨다.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천마혼에게 이곳 장소를 설명했다.

“여긴 내가 시공이환술로 만든 공간이다. 우리가 보게 되면 여기서 주로 보게 되겠지.”

바깥세상에서 편하게 천마혼을 강림하게 할 장소는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부수지는 마.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공간이니까.”

천마혼은 묵직한 눈빛으로 시공이환술 속 세상을 바라볼 뿐이었다.

“괜찮아. 내가 과묵한 사람 앞에서 혼자 떠드는 것에는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거든. 만약 네가 내게서 만들어진 거라면, 너 역시 과묵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본색을 드러내도 괜찮아. 나는 말 많은 사람, 아니 말 많은 천마혼 좋아한다.”

미소라도 지어주면 좋겠지만 천마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검무극이 천마혼의 허리를 보았다.

“너! 달라졌구나?”

검무극은 천마혼의 외형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천마혼이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검은 흑마검과 모양이 비슷했다.

구화마공 제 칠식을 익히자 생긴 변화였다.

그리고 한 가지 변화가 더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천마혼의 가슴에 없던 옅은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그의 몸이었기에 자세히 봐야 그 옅은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확히 어떤 모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구 식까지 다 익혀야 천마혼의 최종 모습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검무극이 천마혼의 얼굴 앞으로 날아 올라갔다. 그렇게 천마혼과 눈을 마주 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검무극의 눈빛과 기도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의 밝고 말 많은 모습이 아니라, 차분하고 과묵한 회귀 전 자신의 모습이었다. 더없이 깊은 외로움이 담긴 그 눈빛이 진심을 전했다.

“오늘 널 부른 건 첫 무공 배운 것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서 불렀다. 축하받는다는 게 꽤 기분이 좋았거든.”

검무극이 천마혼에게 담담히 말했다.

“축하한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천마혼의 그 어둡고 깊은 눈동자에 반짝임이 있는 것을. 말을 알아듣는 건 물론이고.

‘분명 감정도 느낀다!’

* * *

어둠 속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는 꼿꼿했고 그의 두 손은 단전 앞에 모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동자는 어둠을 지배하고 있었다.

스르르륵.

그때 노인의 앞으로 바닥에서 검은 원이 생겨나더니 흑의를 입은 사람이 쑥 올라왔다.

흑의인이 노인에게 부복하며 보고했다.

“소교주가 귀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노인의 두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드디어 돌아왔군!”

마치 검무극이 대천산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말이었다.

“일을 진행하라고 전해라.”

“네.”

노인의 명령이 떨어지던 그 순간.

“그 명령 잠깐만 거두어주십시오.”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신녀궁주 가예였다. 앞서 노인에게 붉은 기운을 담은 구슬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렸던 바로 그녀였다. 모든 것이 검은색인 그곳에 그녀는 새하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잠시 저와 함께 가주시지요.”

급한 일이 아니면 자신을 찾지 않는 그녀였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하던 흑의인은 다시 땅바닥 속으로 사라졌다.

노인이 움직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를 둘러싼 어둠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그를 따라 함께 움직였던 것이다.

이 어둠은 단순히 어둠의 기운을 몸에서 내뿜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어둠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스스스스.

어둠은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구름처럼 노인의 몸을 덮은 채 둥실둥실 따라다니기도 했고, 모양을 바꿔 노인을 악귀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러다 마치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것처럼, 천장에서 내려온 한 줄기 어둠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덮기도 했다.

그 어둠은 생명이 있는 것처럼 살아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복도 끝 문 위에 비궤와 여섯 구슬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들어가 보니 그곳은 예전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눴던 곳이었다.

구석에는 큰 비궤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 별자리들이 가득 그려져 있던 바로 그곳.

“무슨 일인가?”

가예가 떨리는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길 보십시오.”

노인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천장에 그려진 별들 중 가운데 가장 큰 별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저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그가 깨어났습니다.”

충격과 놀람의 침묵이 흘렀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 깨어났다고?”

“그렇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성난 노인의 기세에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도망치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온전히 드러나는 노인의 모습.

그의 얼굴에 나 있는 세월의 흔적들. 오래된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인 주름은 그의 나이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주름에 덮여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를 보는 모두가 이렇게 느낄 것이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꼿꼿이 앉아 있고, 어떻게 이렇게 강렬한 눈빛을 뿜어낼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런 깊은 울림을 지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일까?

그가 바로 당대 암흑궁주였다.

암흑궁주 화무경(華武鏡).

어떤 일에도 마음을 다스리던 화무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능했단 말인가?”

그러자 가예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소교주가 하산하던 날 그가 깨어났습니다.”

화무경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그게 무슨 뜻인가? 소교주의 하산이 그를 깨웠다는 뜻인가?”

놀랍게도 가예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전 두 사람이 하나의 운명으로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랬기에 그녀는 확신하듯 말했다.

“분명 소교주가 그를 깨웠습니다.”

비혈사를 이용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 화무경은 이런 고민을 했다.

그를 깨워야 하나?

그때 가예는 무림이 피바다가 될 거라고 말렸다. 그를 깨우는 선택은 정말 마지막 선택임을 화무경도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깨우는 것과 스스로 깬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일이라는 것도.

“설령 깨어나더라도 그가 갇혀 있는 곳의 봉인을 풀 수는 없다.”

바로 그때였다.

천장의 수많은 별 중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

놀란 눈빛으로 두 사람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근처의 또 다른 별에 불이 들어왔다.

팟, 팟!

이번에는 별에 불이 들어왔다가 곧장 다시 꺼졌다. 그리고 또 다른 별에 불이 들어왔다.

이 별이 밝아졌다 다시 꺼지고, 저 별이 밝아졌다 다시 꺼지고. 그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가 싶더니.

팟팟팟팟팟팟.

별자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수없이 많은 별자리 중 하나가 완성되며 빛나기 시작했다.

화무경도 가예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봉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여기서 할까?

“봉인을 푸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화무경의 물음에 가예는 천장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하나의 별자리가 완성된 후 더는 별자리가 밝아지지 않았다.

“알 수 없습니다. 칠십이성금혼진(七十二星禁魂陣)의 봉인을 자력으로 풀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만약 갇혀 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풀 수 없을 거라 대답했을 거다. 하지만 이 봉인에서 스스로 깨어난 그라면?

“빠르면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고, 늦으면 수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서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가 깨어나면 모두가 죽게 될 거란 두려움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지배하던 것이었다.

반면 화무경은 차분했다. 앞서는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놀라고 불신했지만, 깨어난 것이 확실하다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군.”

그리고 그 주어진 시간에 해야할 일은 이것이었다.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가 있습니다. 봉인을 풀기 전에 육도원기를 회수할 수만 있다면, 그를 제어할 수 있을 겁니다.”

화무경이 곧장 누군가를 불렀다.

“회(回)!”

그러자 바닥에서 검은 원이 생겨나더니 앞서 흑의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가서 전해라. 반드시 기운을 회수해 오라고.”

“명을 받듭니다!”

흑의인이 바닥으로 사라졌다.

가예가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마음에 저 천장의 별자리 모두에 불이 들어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두렵습니다.”

솔직한 그녀의 말에 화무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구석에 놓인 비궤로 걸어갔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비궤를 어루만졌다. 마른 손등에도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비궤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깊은 회한이 담겼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그였는데, 지금까지 그래왔듯 그 회한은 입으로 나오지 않고 짙은 주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난 자네의 그 솔직함을 좋아하네. 놀랄 땐 깜짝 놀라고, 겁이 나면 겁이 난다고 하고. 자네 윗대들의 그 가식이 없거든.”

겁을 먹고 흩어졌던 어둠이 화무경 주위로 다시 모여들었다.

어둠은 주인의 기분을 안다는 듯, 앞서와 같이 장난치지 않고 아주 깊고 차가운 어둠이 되어 그의 주위로 가라앉았다.

“그래, 덜덜 떨면서 해야지. 이 무림을 차지하는 일인데.”

* * *

검무극은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현판을 보면 단 한 가지의 감정만이 든다.

미안함.

천마신교 본단에 이 현판을 단 건물이 서기까지 고월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래서 고월과 관련한 풍천교주의 잔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 고마웠다. 고월의 공을 잊지 말라고 항상 상기시켜 주었으니까.

검무극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는 무인은 없었다.

대신 복도 양쪽 벽에는 최고 수준의 기관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에 고월에게 이곳을 소개해 줄 때만 해도 아직 작동하지 않던 것들인데, 지금은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관이 설치된 긴 복도를 지나자 비로소 작전실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고월이 정중히 검무극을 맞이했다.

“전에 봤을 때보다 좋아 보이는군.”

“제 건강을 저보다 더 열심히 챙겨주시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풍천교주가 잘 챙겨주고 있다는 말이다.

“풍천교주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요즘 뱃살 뺀다고 바쁘십니다. 뱃살 빼는 무공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바로 알려달라고 매일 저를 괴롭히시죠. 마공이라도 좋다고요.”

진짜 그랬을 것을 알기에 검무극이 웃었다.

“자, 둘러보시죠.”

작전실 내부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벽에 난 수십 개의 구멍으로 중원 곳곳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도착하고 있었고, 한쪽에선 다시 그것들이 분류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통천각을 축소한 느낌이었다.

“검사할 곳이 있네.”

검무극이 고월의 집무실 내부에 있는 문을 열었다. 고월이 쉬라고 딱 침상 하나만 만들어둔 공간이었는데.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침상 옆에 책과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당황한 고월이 변명했다.

“잠이 안 올 때 보는 것들입니다.”

“그럴 땐 그냥 눈만 감고 있게.”

검무극이 그곳에 있던 자료들을 모두 밖으로 내왔다.

“이젠 명령이네.”

“네! 꼭 지키겠습니다.”

누구 명령이라고 거역하겠는가?

그렇게 은월을 둘러보고 나자, 고월은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보여주었다.

“대천산에 계실 때 있었던 무림에서 발생했던 주요 사건들입니다.”

검무극은 고월이 정리해둔 자료를 천천히 읽어보았다.

배후들은 적정의 기운까지 써서 자신을 잡으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분명 그들은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있을 테니 이 사건 중에서 그들과 연관된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요즘 눈여겨 볼만한 사건이 있나?”

“네, 근래 주목할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혹시 검총(劍塚)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대 무림에서 의미있는 검총은 하나였다.

“전대 고수들이 모여서 싸우다 결국 모두 죽었다고 알려진 곳 아닌가?”

“맞습니다. 고수들이 싸운 이유가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값진 보물과 기물들 때문이라고 알려지면서 유명해졌지요.”

검무극은 회귀 전 인생에서 그곳에 들어가 보기도 했었다. 물론 검총의 보물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들어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최근 검총의 위치가 적힌 장보도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무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미 쟁탈전을 벌이다 죽은 자들까지 속출했습니다.”

검무극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검총이 등장하는 시기가 맞지 않았다. 검총은 지금보다 훨씬 뒤에 모습을 드러내 무림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검총이 지금 열린다?’

고월이 검무극의 표정에서 심각함을 읽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렇게 중대한 사건의 시간이 훨씬 앞으로 당겨졌다.

배후세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고, 설령 아니더라도 주목해야 할 사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번 일이 놈들과 관련 있다는 가정하에서 조사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고월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보를 다루면서 그도 경험했다. 놈들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음모를 꾸며왔는지를.

“자, 이건 군사들에게 나눠주게.”

검무극이 품에서 봉투들을 가득 꺼냈다. 안에 든 것은 제법 큰 액수가 든 전표였다.

“자고로 사기를 올리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지.”

검무극이 큰소리로 모두에게 들리게 말한 후 봉투를 번쩍 들어 보이자 일하고 있던 군사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앉아 있는 시간만큼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네. 다들 자주 일어나고 잠도 잘 자게.”

검무극은 그렇게 은월 군사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그곳을 나왔다.

고월이 은월 입구까지 따라 나왔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은 그곳을 떠나기 전에 전에 고월에게 따로 당부했다. 매번 일에 너무 열심인 그였기에.

“자네 건강이 제일 중요해. 자네 건강이 나빠지면 이곳에 모아둔 수만 가지 정보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이 한 가지 정보보다 못하게 될 거네.”

검무극은 그 한 가지를 힘주어 말했다.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 * *

은월을 나온 검무극이 들어선 곳은 일화검존의 거처였다.

“검존님.”

모옥의 문을 열고 일화검존이 나왔다.

“소교주, 어서 오시게.”

일화검존이 반갑게 검무극을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우리 검존님의 미모는 여전하시군요.”

“오랜만에 자네 아부를 들으니 기분이 참 좋네.”

이제는 아예 외모에 의미를 두지 않는 그녀였기에 오히려 편하게 말했다.

“자주 와서 빈말이라도 좀 해주게.”

“그럼요, 매일 와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빈말 아닙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내려왔는지 확인해 보셔야죠?”

그러자 일화검존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우리 여기서 할까?”

비무를 연무장이 아닌 이곳 마당에서 하자는 뜻.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들이 피어 있는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고, 음식을 담은 항아리들도 여러 개 있었다. 마당 가운데로 길게 늘어진 빨랫줄에는 검존의 새하얀 옷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 비무를 펼치자는 의미. 지금까지의 비무가 아니라 더욱 수준 높은 비무를 하자는 뜻이었다.

“좋습니다.”

당연히 검무극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든 자세만으로도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이번 대천산 수련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검을 뽑아든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를 사이에 두고 걸음을 옮기던 그때, 불어온 바람에 옷이 휘날렸다.

검무극의 검이 펄럭이는 옷 사이로 날아들었다.

일화검존이 빠르게 일화검을 휘둘러 검을 쳐냈다.

분명 내공 없이 그냥 날아온 검이었는데, 묵직했다. 정말 묵직했다.

‘검에 실린 기세가 달라졌다.’

쉬이익!

이번에는 일화검존의 검이 빨랫줄을 스치며 날아들었다.

검무극 역시 일화검존의 검에 실린 기세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챙! 채앵!

흑마검과 일화검이 빨래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위험천만한 기세로 검과 검이 격돌했지만, 빨래나 빨랫줄은 찢기거나 끊어지지 않았다. 그저 검풍에 하얀 옷이 흩날릴 뿐이었다.

다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기며 검을 나눴다.

예전처럼 쏟아붓고 밀어붙이는 비무가 아니었음에도 더 긴장되고 위험한 비무였다.

구석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 앞에서 검이 오고 갔다.

미처 패지 않았던 통나무가 날아올랐다.

두 사람의 검이 통나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후두두둑.

통나무는 장작이 되어 떨어졌다. 같이 공격하면서 장작을 만들자는 유희가 아니었다.

장작을 만드는 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아는 당연한 조건이었고, 그 조건 위에서 정말 위험천만한 수가 오갔다. 그야말로 절제된 움직임 속에서 펼쳐지는 검술의 향연이었다.

화분의 꽃을 박차고 날아올랐지만, 꽃잎 하나 떨어지지 않았고 지붕에 내려설 때는 발소리가 아예 나지 않았다.

독문 검술을 쓰지 않고 기본적인 검술만으로 비무를 나눴지만 검기와 검강이 난무하는 싸움보다 이 비무가 훨씬 위험천만했다.

휘이이익.

그렇게 마당 한 바퀴를 도는 격돌을 마치고 두 사람은 원래 자리에 섰다.

주위의 물건들은 비무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검에 스친 자국조차 없었다.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검무극의 정중한 인사에 일화검존도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감축드립니다.”

그녀 역시 검무극이 아닌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부터 갖췄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녀가 대성을 이룬 것을 알아낸 것은 검우진이나 혈천도마와는 달랐다.

“예전의 자네 검에서는 실력을 숨기는 것이 느껴졌네. 나를 보호하려는 느낌이 있었지.”

일화검존은 이런 말을 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느끼며 스스로 놀라울 뿐이었다.

“한데 조금 전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지. 최선을 다하는 느낌이었네.”

“그럼 오히려 실력이 줄어든 것 아닙니까?”

“아니. 이제 자넨 최선을 다해 싸워도 날 해치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거지.”

일화검존이 이번에는 검을 든 채 포권했다.

“내게 너무 감사한 비무였네.”

그녀는 이 비무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녀는 놀라웠다.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을 당대에 두 번이나 보게 되다니. 대성을 이룬 교주가 미소 짓던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저 역시 큰 배움이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검존님.”

그렇게 비무를 마친 두 사람은 마당에 놓인 작은 평상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참, 나는 내일 출교할 생각이네.”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자 오늘 한 번 들었던 이름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검총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다더군.”

검무극이 일화검존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찻잔을 쳐다보고 있었다.

“명색이 검을 쓰는 사람인데 한 번 구경하러 가봐야 하지 않겠나?”

그곳에 있다고 알려진 보물이나 기물을 탐내서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에 개입할 거 같지 않은 그녀였는데.

검무극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저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일화검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검존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저도 검을 쓰는 사람 아닙니까?”

일화검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좋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지. 한데 대천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자네 괜찮나?”

“이번에 제가 확인하지 않았겠습니까? 분하게도 저 없이도 본교가 너무 잘 돌아간다는 것을요.”

그 말에 일화검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내일 새벽에 보세.”

* * *

다음 날 새벽, 천마신교의 정문에서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만났다. 검무극은 혁낭에 짐을 한가득 메고 있었다.

세상에 누가 믿겠는가? 천마신교 소교주가 이렇게 짐을 많이 짊어지고 출교한다는 사실을. 검 한 자루 들고 나가면 세상에 있는 것들 못 가질 게 없는 사람인데.

“가세.”

“잠시만요.”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미리 사죄부터 드리겠습니다.”

“왜? 함께 못 가게 되었는가?”

일화검존은 검무극이 어디 다른 곳에 가야 한다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렇게 짐이 많았던 거고.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번에는 사고 먼저 쳤고, 지금 사죄드리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던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이 말한 사고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퉁명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리며 걸어오는 그는 커다란 대도를 등에 멘 혈천도마였다.

“이 새벽부터 대체 어딜 가자는 거냐?”

하늘은 검존께 모든 걸 주고

“저 사람은 왜 여기 와 있나?”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을 보며 놀라자 그 반응이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건 제가 물어야 할 질문 같네요.”

그녀 역시 혈천도마와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는 말이었기에 자연 혈천도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존님과 출교하려는데 어르신도 함께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혈천도마는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부른 것일 줄은 몰랐다.

“그럼, 미리 말을 했어야지.”

“안 오실까 봐 그랬죠. 그리고 우리 둘만 나갔다간 위험할 수도 있잖습니까?”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누가 위험해? 강호가? 이 무림이?”

그러면서 혈천도마가 슬쩍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일화검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그런 반응인데 어찌 같이 가자고 하겠는가?

“싫다!”

혈천도마가 거절하고 돌아섰다.

“아, 그럼 할 수 없이 우리끼리 가야겠군요.”

아쉬워하는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의 뒷모습이 움찔했다.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못 이기는 척 따라갈 테니 어서 잡아라, 하는 그 마음을.

정말 이 상황이 싫었다면 혈천도마는 훌쩍 날아서 이미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그가 함께 가고 싶어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일화검존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이렇게 사고를 친 것이다.

검무극이 그를 부르려던 그때였다.

“같이 가요.”

말을 꺼낸 사람은 놀랍게도 일화검존이었다.

혈천도마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검무극 역시 놀라서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혈천도마를 불렀다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싫어요?”

일화검존의 물음에 혈천도마가 흠칫하며 대답했다.

“싫은 건 아닌데.”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일화검존이 돌아서서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은 두 사람이 최근에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혈천도마의 화원이 여전히 잘 가꿔지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래서 함께 가자고 한 것이었고.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데?”

“검총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요즘 시끄럽던데. 거긴 왜?”

역시 혈천도마는 책만 읽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림의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때 먼저 마차에 올라탄 일화검존이 두 사람을 불렀다.

“안 가요?”

두 사람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검무극은 마차에 짐을 싣고 자신은 마부석에 앉았다. 어색하든 말든, 그들이 최대한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게 해주려고 직접 마차를 몰려는 것이다.

“자, 출발합니다!”

처음으로 세 사람이 함께 출교하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저녁, 말을 쉬게 한 후 검무극이 야영 준비를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두 마존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거대한 검무극의 혁낭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제일 부피를 차지한 건 두 마존이 편히 누워 잘 수 있는 털가죽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 여정을 위해 특별히 검무극이 구해온 부드럽고 푹신한 고급 가죽이었다.

첫날은 검무극이 미리 준비해 온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검무극이 멸천대도를 보며 말했다.

“어르신의 그 도는 너무 눈에 띄어서.”

검무극이 혁낭에서 천을 꺼냈다.

“이걸로 좀 감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름하게 보이게 하려고 엄청나게 낡은 천을 준비했다.

“내 도에 그딴 천을 감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제가 감겠습니다.”

혈천도마는 끝까지 고집부릴 수 없었다. 검무극의 말처럼 워낙 대단한 보도였기에 멸천대도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일로 폐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못 이기는 척 도를 내놓았다.

검무극이 멸천대도에 천을 감기 시작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검무극의 말에 일화검존이 끼어들며 말했다.

“도는 잘 참네, 성질 급한 누가 못 참아서 그렇지.”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성정이 불같으시긴 하죠.”

“성질 못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어찌 저리 변하질 않는지.”

일화검존이 흉을 보자 혈천도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가? 성질이라면…….”

혈천도마는 그녀도 한 성격 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이미 눈빛으로 검을 뽑은 그녀였다.

“결국, 성질 못 참고 자네가 먼저 검을 뽑을 거야.”

“제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기해도 좋네.”

“해요, 그 내기.”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다가 다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네, 제가 이번 내기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검무극이야 조용히 일 처리하는 걸 선호했으니, 최대한 두 사람이 참아주면 좋은 일이었다.

“자고로 내기에는 뭔가를 걸어야죠. 뭘 거시겠습니까?”

갑자기 두 사람이 그런 걸 생각해 낼 수는 없었기에 검무극이 정해주었다.

“서로 원하는 것 들어주기! 어떻습니까?”

뭘 원할 줄 알고 그런 걸 거냐는 말이 나올 법도 했는데.

두 마존은 따져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기를 걸고 난 후에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번 검총 일에 놈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일화검존 역시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렸다.

검무극이 함께 가자고 한 이유가 그 때문일 거라는 예상했다. 대천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렇게 출교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과연 예상대로였다.

“한 번 살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 눈빛을 나눴다. 소교주가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일은 일화검존 개인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어르신께 우릴 지켜주십사 모신 것도 사실이고요.”

“늙은이가 뭔 힘이 있다고.”

“늙기는요. 마존분들 중에 어르신이 제일 팔팔하신데요. 저는 어르신이 마존들 중에서 제일 젊다고 생각합니다. 생각도 제일 젊으시고요.”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었다. 이번 여정 내내 이 말을 계속해 줄 생각이다. 그러려고 함께 가는 거다. 혈천도마가 자신감 넘쳐서 돌아오게 하는 게 목표다.

“자, 다 됐습니다.”

검무극이 천을 다 감은 도를 돌려주었다. 천을 감자 멸천대도는 평범한 대도가 되었다.

“그 천을 풀 일이 없어야 할 텐데요.”

도를 받아 든 혈천도마가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누가 피바람을 이렇게나 몰고 다니는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겠느냐?”

* * *

다음 날에도 마차는 계속 달렸다.

목적지는 계속 바뀌었다.

지금도 계속 장보도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기에, 그 장보도의 주인이 계속 바뀌고 있었다.

검무극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은월과 통천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따라 계속 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 주인과 만나게 될 것이라 믿었다. 놈들이 배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만든 음모일 테니까.

그리고 오늘, 일화검존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하겠네.”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검존님께서 해주신다고요?”

“왜? 안 미덥나?”

“아닙니다.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할 겁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뭐라 한마디 할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화검존은 사냥도 직접 해왔다. 훌쩍 몸을 날렸던 그녀가 직접 토끼 두 마리 잡아 왔다.

“내가 토끼 죽을 해주겠네.”

“오, 기대됩니다! 저는 처음 먹어봅니다.”

일화검존이 토끼를 손질하는 사이 검무극은 일화검존이 구해오라는 채소와 버섯을 씻어 와서 다듬었다.

요리를 위한 비수라도 검은 검, 일화검존은 그야말로 능숙한 솜씨로 재료를 손질했다.

“솥이랑 양념 있나?”

“물론입니다. 여기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양념을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착착착착!

양념을 뿌리는 모습이 마치 무공을 펼치는 것만 같았다. 너무 우아한 모습에 기대치는 극에 달했다.

그렇게 일화검존이 만든 저녁이 완성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검무극이 한 입 떠먹는 순간.

검무극의 눈이 커졌다.

맛이 없었다. 이 오묘한 맛은 대체 뭐지? 기대가 커서였을까? 아니다. 이건 객관적으로 맛이 없었다.

“맛이 어떤가?”

일화검존의 기대에 찬 물음에 검무극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맛있습니다! 지금까지 먹어본 요리 중에서 제일 특이합니다!”

차마 제일 맛있다고는 못했다.

일화검존이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우리 마검들에게 해준 적이 있네. 다들 맛있다고 잘 먹더군.”

그건 수하들이니까요! 검존님께 맛없습니다! 할 정도로 미친 수하들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소교주도 못 하는 일이니까요.

일화검존도 자신이 만든 죽을 먹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먹었다.

아! 하늘은 검존께 모든 걸 주고 미각을 뺏었구나!

검무극이 슬쩍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가 아예 죽그릇을 들고 마셨다.

“맛이 좋군.”

하지만 검무극은 보았다. 혈천도마의 그릇에 담긴 죽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음을.

‘저 죽을 몰래 진기로 없애버릴 작정이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요리하겠다고 했을 때 지었던 그 미묘한 표정의 정체를.

‘어르신은 알고 있었어! 어떤 요리가 나올지!’

과연 그러했다.

혈천도마가 지난 일을 떠올렸다.

“솜씨가 정말 그대로군.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 말에 일화검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녀 역시 혈천도마에게 요리해 준 그날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젊디젊었던 그 시절의 그날을.

“그 맛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아주 오래전 그녀가 직접 해준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그때 요리가 제 인생의 첫 요리였죠.”

그 사실은 처음 알았는지 혈천도마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때가 처음이었었나?”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밤에 요리책을 보고 외웠었지요.”

그 말에 혈천도마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두 사람이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다시 각자 시선을 돌렸다.

검무극이 넌지시 부러움을 드러냈다.

“좋으시겠습니다. 어르신은 검존님의 첫 요리를 드셔보셨네요?”

혈천도마가 들고 있던 죽을 후루룩 마셨다. 물론, 독왕의 독을 마시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건 옆에 있던 검무극만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혈천도마는 씩씩하게 다 먹었다.

진기로 이 남은 죽을 없애야 할 사람은 이제 검무극 자신이었다.

물론 차마 그럴 수는 없었고, 검무극도 남은 죽을 다 비웠다. 그 모습을 혈천도마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검무극이 죽을 다 먹자 청천벽력같은 일화검존의 한마디.

“내일도 내가 요리하겠네. 내일은 오리를 잡아다가 오리탕을 해주지!”

검무극과 혈천도마의 눈동자에 동시에 지진이 났다.

검무극이 재빨리 나섰다.

“아뇨, 내일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귀한 요리는 가끔 먹어야 가치가 있는 법이죠.”

“그러겠나?”

“자, 식사하셨으니 차 한잔하셔야죠.”

검무극이 차를 우리는 동안 혈천도마가 식기를 씻어 왔다. 위기를 넘긴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일화검존은 검무극이 우려온 차 맛에 감격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차인지 어찌 알고서?”

“아, 그러셨습니까? 그건 몰랐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르신 댁에서 이 차를 마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알아두었던 차입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이 차 생각나세요?”

그러자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물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일화검존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혈천도마가 그녀에게 선물로 줬던 차였다는 것을.

한때 그렇게 서로를 미워한 그들이었지만, 몇 가지 추억만은 두 사람의 인생에 꽉 들어차 있었다.

“차 맛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나오길 잘했습니다.”

그렇게 차를 다 마시고 난 후 잠잘 준비를 했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두꺼운 책을 한 권 꺼내서 혈천도마에게 주었다.

“이렇게 멀리 나오실 줄 모르고 아무것도 준비 안 하셨죠?”

“이건 뭐냐?”

“심심하시면 읽으시라고 준비해 왔습니다.”

그 책은 혈천도마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책이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읽는 책이었다. 도를 감기 위해 미리 준비한 천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검무극은 자신을 꼭 데려갈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내가 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군.”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했었지요.”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던 혈천도마가 멸천대도 위에 책을 올려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몸을 뒤로 기대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다.”

일화검존은 앉은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은 부드러웠다.

새벽녘에 검무극은 자다가 눈을 떴다.

꺼진 모닥불 너머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나란히 앉아 새벽녘 하늘을 올려다보는 뒷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냥 말없이 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대화가 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무극도 누운 채 잠시 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감고 깊이 잠이 들었다.

* * *

검무극 일행은 호남 천자산(天子山) 인근에 도착했다.

장보도를 지닌 인물이 천자산으로 쫓겨 숨어들었다는 소문에 군웅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천자산에 가까워질수록 그곳으로 향하는 무인이 많아졌다.

홀로 가는 사람부터 떼를 지어 가는 이들까지. 그야말로 온갖 무인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검무극은 산 아래 민가에 마차를 맡겨두고 짐만 챙겨서 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지금 먼저 달려가봤자 난리통에 휩쓸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통천각과 은월에서 모든 상황을 전해주고 있기에 급할 건 없었다.

세 사람이 천천히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비켜!”

“걸리적거리지 마라!”

돌아보니 험악한 기세를 풀풀 드러내며 두 명의 무인이 경공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빠르게 달려오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걸리적거리면 그냥 치고 지나갈 기세였다.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원래 성질이 더러운 자들이거나, 아니면 일행인 검무극이 한가득 짐을 지고 있었기에 고수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혈천도마가 그들이 지나갈 길 쪽으로 위치를 옮겨 일화검존을 안쪽으로 서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화검존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모습에 검무극이 웃었다. 아니, 저런 놈들 백 명이 달려온다 한들 검존님이 다치시겠냐고요!

일화검존도 괜히 무안해서 검무극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지나가던 두 무인 중 하나가 혈천도마에게 소리치며 지나갔다.

“길 막지 마, 늙은이! 안 바빴으면 콱 뒈졌어!”

혈천도마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일화검존이 옆에서 속삭였다.

“아니, 저런 놈들을 봐준다고요?”

그녀의 도발에 혈천도마가 표정을 풀었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절대 내기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 흘러나왔다.

“바쁘다잖아?”

짐꾼 주제에 감히?

“어르신께 욕하고도 살아남은 운 좋은 녀석이네요.”

검무극의 말을 일화검존이 받았다.

“유일한 녀석이지.”

두 사람의 놀림에도 혈천도마는 꿋꿋했다. 오히려 인자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욕도 할 수 있는 거지.”

그 말에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말해놓고서 자신도 우스웠는지 혈천도마가 고개를 저쪽으로 돌렸다. 아마 그도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을 거다.

“이 내기의 결과가 궁금해서라도 저 역시 손을 쓰지 않을 작정입니다.”

이제부터 셋 다 참는다면?

“그럼 내기 결과는 금방 나오겠네.”

자신은 혈천도마보다 더 잘 참을 수 있다는 그녀의 자신감이었다.

그때였다.

“비켜라! 죽기 싫으면!”

또 한 무리의 무인들이 거칠게 경공을 발휘하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혈천도마가 손부채를 하며 먼지를 휘휘 저었다.

검무극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원래라면 그 손바닥에서 장력이 발출되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이 안 참다가 갑자기 너무 참으시면 병나십니다.”

“무인이 경공을 펼치다 보면 먼지도 나고 하는 거지.”

마음을 다스리는 고승 같은 모습에 검무극은 짐짓 탄식하며 말했다.

“아! 이런 마음 수행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으면 마불님을 모시고 왔어야 했네요.”

“그쪽이 더 못 참는다. 그 사람 부처는 일단 죽여놓고 극락왕생을 빌어주는 부처 아니냐?”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함께 웃었다.

주위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니 산 아래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그곳을 무인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어떤 거대한 열기가 느껴졌다.

“놈이 동굴에 숨어 있다고 들었소!”

“어서 비키시오!”

“죽여버리기 전에 비켜!”

고함치고 항의하는 그들 앞으로 보이는 동굴이 있었다.

만혈동(萬穴洞).

이곳 천자산의 만혈동은 내부가 워낙 넓은 데다가 미로처럼 복잡하기로 유명한 동굴이었다.

이곳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죽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죽음의 동굴이라 불리기도 했다.

동굴 앞을 막은 이들은 바로 호남에서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비룡방(飛龍幫)의 무인들이었다.

“만혈동은 봉쇄되었소. 모두 물러가시오.”

내공을 실어 말한 사람은 송벽찬(宋碧讚)이었다. 그는 비룡방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군웅들이 따지고 물었다.

“왜 우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오? 장보도를 비룡방에서 독차지하려는 것 아니오?”

그러자 송벽찬이 말했다.

“본방의 영역에서 혈사가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오. 괜한 싸움으로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함이니 오해하지 마시오.”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비룡방은 고수들을 풀어서 만혈동 내부를 수색하고 있었다. 이미 봉쇄 전에 안으로 들어간 외부 고수가 많은 데다가, 동굴 내부가 너무 복잡해서 장보도를 가지고 숨어든 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항의했던 무인이 군웅을 선동했다.

“우리가 힘으로 뚫고 들어갑시다. 우리가 모두 힘을 합치면…….”

쉭! 푹!

송벽찬의 검이 남자의 뒤쪽 목에 박혔다.

뒤에서 기습적으로 날린 공격에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송벽찬은 피를 뿜고 쓰러지는 남자를 차갑게 내려다보더니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래도 본방을 무시하는 자가 또 있으시오?”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이곳 호남에서 비룡방의 위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동굴이냐? 난 답답한 것은 딱 질색인데.”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제가 더 유리하겠네요.”

답답한 곳에 있으면 혈천도마가 신경질을 더 낼 거라는 의미였다.

“자, 모두 돌아가시오.”

송벽찬이 앞으로 나서자 뒤에 늘어서 있던 비룡방 무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으며 위협적으로 걸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웅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장보도를 얻기만 하면 절세고수가 되고 막대한 부를 얻게 될 거라는 열망과 욕심이 모두를 그곳에서 못 떠나게 했다. 이 순간에도 계속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쉭쉭쉭쉭쉭쉭쉭!

뒤쪽에서 비룡방 무인들에게 암기가 쏟아졌다.

“기습이다!”

송벽찬이 다급히 외쳤지만 날아든 암기에 이미 비룡방 무인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있었다. 공격을 가한 이들은 놀랍게도 동굴 안에서 나온 이들이었다.

챙챙챙챙챙!

송벽찬은 다급히 검을 휘둘러 암기를 쳐냈지만 쏟아지는 암기가 너무 많았다.

그때 다시 그의 등 뒤에 일장이 날아들었다.

그의 신형이 붕 날아가더니 바닥을 뒹굴었다. 조금 전까지 큰소리치던 그는 어느새 시체가 되어 있었다.

군웅 사이에 숨어 있다가 그에게 기습을 가한 인물은 야비한 인상을 지닌 근육질의 남자였다. 비룡방 무인들이 입구를 봉쇄하기 전에 이미 수하들을 동굴 안에 숨겨두었던 그였다.

“여기가 왜 너희 영역이냐? 우리 영역이지.”

그를 알아본 누군가 소리쳤다.

“녹림천자(綠林天子)!”

그는 이곳 천자산에 산채를 두고 있으면서 호남에서도 유명한 녹림이었다. 녹림왕처럼 대단해서 붙은 이름이 아니라 천자산의 주인이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는 성정이 야비하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는 악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근래 비룡방과 충돌이 있었고, 그들과 몇 차례의 싸움에서 연패하면서 위세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돈과 여인에 빠져 지내다 보니 그의 고강했던 무공도 예전만 못했다.

“파렴치한 새끼들. 장보도만 얻을 수 있으면 천고의 보물을 얻을 수 있는데 그걸 혼자서 꿀꺽하시겠다고?”

그가 송벽찬의 시체에 침을 뱉자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자, 들어갑시다!”

군웅들이 우르르 만혈동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다시 그곳으로 암기가 쏟아졌다.

쉭쉭쉭쉭쉭쉭!

앞장섰던 이들이 암기에 맞고 쓰러졌다. 암기를 날린 녹림도들 앞으로 녹림천자가 동굴 입구를 막아섰다.

“누가 마음대로 들어가라고 했소?”

쩌렁쩌렁한 그의 외침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녹림천자가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통행료를 내야 하오.”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감히 이 분위기에서 그 일을 항의하진 못했다.

군웅 중 누군가 물었다.

“통행료가 얼마요?”

“한 사람당 천 냥이오. 돈이 없다면 그에 상응하는 병장기나 기물로도 받겠소.”

군웅들이 웅성거렸다. 고작 동굴로 들어가는데 천 냥은 너무 큰 돈이었다.

“너무 비싸지 않소?”

군웅들의 항의에 녹림천자가 그들을 유혹했다.

“고작 천 냥을 아끼려다 천고의 보물을 얻을 기회를 놓치겠다? 마음대로 하시오.”

정작 녹림천자는 동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서 열 명에게만 받아도 만 냥이고, 백 명에게 받으면 자그마치 십만 냥이었다. 계속 군웅이 몰려들고 있었으니, 백 명에게 통행료를 받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수십 냥, 수백 냥 털기 위해 며칠씩 매복하고 기다리는 것이 녹림의 삶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비룡방 때문에 조만간 망할 것이 틀림없었기에 이번에 크게 한탕하고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녹림은 원래 통행료를 받는 사람이지 않소? 이번에 가는 길은 절대 고수로 가는 길이니 그 통행료가 비쌀 뿐이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 비싼 값을 치른 만큼 큰 대가를 얻을 수 있을 거요.”

그 말을 듣고 있던 혈천도마가 불쑥 내뱉었다.

“도적놈이 머리를 잘 굴렸군.”

하필이면 시끄럽던 장내가 잠시 조용해지던 순간에 한 말이었기에, 그 말이 녹림천자의 귀에 들어갔다.

녹림천자가 말소리가 난 쪽을 홱 돌아보았다.

“누구냐!”

앞에 사람들이 비켜서자 뒤에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그쯤에서 난 소리였다.

“너냐? 방금 헛소리를 내뱉은 놈이?”

“아닌데요?”

검무극이 몸을 비켜서며 뒤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분이신데요?”

검무극이 일러바치자 혈천도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소교주는 내 편이지, 하는 표정으로 일화검존이 활짝 웃었다.

녹림천자가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늙은이, 죽고 싶으냐?”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가운데, 혈천도마가 차분히 말했다.

“머리가 좋다는 말이었으니 너무 개의치 마시오.”

상대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오히려 녹림천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가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본보기로 제대로 손봐 줄 생각이었다.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혈천도마는 별것 아닌 노인네처럼 느껴졌었는데.

한데 다가갈수록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왜지? 저 눈빛 때문인가?

하지만 내친걸음이었다. 지금 물러나면 지켜보고 있는 이 승냥이 같은 놈들이 일제히 자신을 물어뜯으려 달려들 것이다.

일화검존은 내기는 자신이 이겼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내기라고 해도 혈천도마가 저런 놈이 몸에 손을 대는 걸 그냥 두고 볼 리 없었으니까.

“잠깐.”

잠시 그를 제지한 후 혈천도마가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녹림천자가 흠칫 멈춰 서며 내공을 끌어올리며 기습에 대비했다.

혈천도마가 품에서 꺼낸 것은 작은 주머니였다.

녹림천자가 한 걸음 뒤로 더 물러났다.

‘독?’

혈천도마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천 냥 여기 있소.”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설마 혈천도마가 천 냥을 내놓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가져가시오.”

녹림천자가 엉겁결에 전표를 받았다. 진짜 전표였다.

“통행료를 낸 첫 손님인데 아까 잘못은 넘어가 주시오.”

돈을 낸 이상 그를 몰아세우거나 두들겨 팰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이 돈을 내게 하려면 좋게 넣어줘야 했다.

“좋소, 들어가시오.”

혈천도마가 검무극과 일화검존을 재촉했다.

“뭐하나? 돈 안 내고.”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속삭였다.

“장보도 검존님이 가지고 계시죠? 내기에 이겨서 그거 내놔 하려고 저러시는 거죠?”

혈천도마를 바라보는 일화검존의 눈빛이 깊어졌다. 당신, 바라는 게 뭐죠?

혈천도마가 녹림천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한데 궁금한 게 있소.”

“뭔가?”

“당신은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요?”

녹림천자가 움찔하며 되물었다.

“그건 왜 묻지?”

“됐소. 그냥 물어봤소.”

그러니까 괜히 기분이 나빠진 녹림천자였다.

그때 일화검존이 말했다.

“나는 지금 천 냥 없는데.”

그러자 녹림천자가 일화검존의 위아래를 훑었다.

순순히 돈을 낸 상대의 일행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특별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그 옆에 짐까지 가득 메고 있는 젊은 녀석까지 보니, 절대 고수들은 아니었다.

그 잘못된 확신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게 했다.

“돈이 없으면 다른 것도 받아줄 수 있다.”

지금까지 여유로운 표정이었던 일화검존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대번에 원래 성격이 나왔다. 내기고 나발이고 일단 모가지부터 잘라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던 그때.

그녀는 보았다. 혈천도마의 손이 멸천대도를 묶은 천의 매듭으로 가는 것을. 그는 자신이 당하는 건 참아도 일화검존이 당하는 건 참지 못했다.

그 모습에 일화검존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분노가 가라앉았다. 혈천도마가 매듭을 풀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이목이 많으니 나중에 여기서 다시 만나요. 내가 아주 좋은 걸 선물로 주죠.”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네가 살아나온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자 일화검존이 녹림천자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난 꼭 나와야 할 이유가 있어서.”

녹림천자는 알지 못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얼마나 간절히 자신을 다시 만나려 하는지를.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여인의 목소리.

“저 호색한 놈을 죽여라.”

녹림천자가 놀라 돌아보았을 때 젊은 여인이 무인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에 늘어서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녹림천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무인들의 합공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들의 실력은 앞서 상대했던 비룡방 무인들보다 훨씬 강했다.

그는 난도질당해 죽었고, 앞서 암기를 날리던 수하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여인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비룡방주의 외동딸

냉월검(冷月劍) 추연(秋燕).

비룡방 무인 중에서 적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그녀였다.

녹림천자의 수하들이 모두 달아나자 입구 쪽에 있던 군웅들 몇이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말릴 사이도 없이 우르르 그들이 모두 동굴로 몸을 날렸다.

추연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한심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가지 않은 세 사람이 들어왔다.

검무극이 녹림천자의 시체를 뒤져서 혈천도마가 준 전표를 찾았다. 전표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검무극이 그 전표를 수중에 넣고, 새 천 냥짜리 전표를 혈천도마에게 주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피 묻은 전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새것으로 가지시죠.”

“괜찮다.”

검무극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혈천도마는 이 전표도 일화검존과 함께 한 추억 중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검무극이 피 묻은 전표를 혈천도마에게 건네던 그때.

“부끄러운 줄 아세요.”

차갑게 말한 사람은 추연이었다.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장보도가 좋다지만 명색이 무인인데 녹림의 겁박에 못 이겨 돈을 내다니.”

게다가 시체까지 뒤져 돈을 회수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경멸 섞인 그녀의 눈빛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소저 말씀은 틀렸소.”

순간 추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짐꾼 주제에 감히 자신의 말이 틀렸다고 나선 것이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선 어르신은 저들 모두를 살리려고 한 선택이었소.”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내심 움찔했다. 모두를 살리려 했다고? 내가 언제?

“저들이 이곳에 들어가면 결국 서로 싸우다 죽게 될 거요. 한데 우리 어르신이 돈을 내는 바람에 다들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소. 다들 천 냥이란 거금이 없을 테니, 들어가지 못할 테고. 결국 어르신이 모두의 목숨을 구한 셈이지요. 이건 모두 어르신의 자비로움에서 비롯한 일입니다.”

꿈보다 좋은 해몽에 혈천도마가 헛기침을 했다.

추연이 어디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느냐고 한마디 하려던 그때, 검무극이 정곡을 찔렀다.

“한데 기껏 살려줬는데 저들은 그냥 다 들어가 버렸소. 소저라면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다 들어가서 죽어버려라,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니오?”

순간 추연의 얼굴이 꿈틀했다. 정말 놀랍게도 조금 전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 짐이나 나르는 자에게 정곡이 찔리니 그녀는 화가 났다.

그때 동굴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저기다! 장보도다!”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나왔다. 다시 그 소리가 멀어졌다.

“어서 들어가셔야 합니다.”

수하의 말에 추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동굴로 들어가기 직전 검무극을 차갑게 돌아보았다.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안 했을 뿐이지, 눈빛은 거의 다시 보면 죽을 줄 알아, 경고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가고 이제 세 사람이 동굴로 들어갔다. 내내 놀림 받았던 혈천도마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째 검은 네가 먼저 뽑겠는데?”

이쪽 길이 예감이 좋습니다

동굴 속은 어두웠다.

물론 신안술을 익힌 검무극의 눈에는 훤하게 밝아 보였고, 두 마존 역시 움직이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횃불이 있는 자들은 그나마 낫겠지만, 횃불이 없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둠 속을 본능에만 의지해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작은 횃불을 꺼내 불을 붙이는 사이 두 마존이 대화를 나눴다.

“이 동굴이 미로 동굴이라고?”

“설마 셋이서 길을 잃겠어요?”

“오히려 셋이니까 잃지 않을까?”

서로 믿기 때문에 오히려 길을 잃을 거란 뜻.

혈천도마의 그 말에 일화검존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볼 때 혈천도마는 길을 잃으면 다 부숴버리면 되지, 이런 말을 할 거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섬세한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은 길을 잃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앞장서 걸어가는 천하태평 검무극 때문이었다.

“언제 두 분과 길을 잃어보겠습니까? 그리고 길 좀 잃었다고 가야 할 길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세 사람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미 동굴 내부에는 짙은 피 냄새가 가득했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욕설, 비명이 뒤섞여 메아리쳤다. 그야말로 그곳은 죽고 죽이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우선 우측 길로 가겠습니다.”

검무극이 세 갈림 중에 우측을 선택했다.

“소교주와 함께 움직이니 편하네요. 알아서 다 하겠지, 하는 믿음이 들잖아요?”

일화검존의 맹목적 믿음에 혈천도마는 괜히 검무극의 등을 쳐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라고 별생각이 있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막 가는 거지.”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우리 어르신이 정확히 보고 계십니다! 대체 장보도를 가진 놈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거죠?”

“한데 그놈은 어쩌다 여기로 쫓겨 왔지? 이리로 몰이사냥을 당했나?”

“아니면 일부러 들어왔거나요.”

“일부러?”

분명 검무극이 뭔가 예감하는 바가 있는 듯 보였는데, 그 내용을 말해주진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았다. 나중에 말하지 말라고 해도 귀 아프게 설명해 줄 그였으니까.

그렇게 동굴 속을 걸어가던 혈천도마가 지풍을 날려 천장에 튀어나온 돌을 없애버렸다. 일화검존이 걷다가 머리에 부딪힐 위치에 튀어나온 돌이었다.

“저도 봤어요.”

“그랬겠지.”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내기는 안 봐줘요.”

“누가 봐달라고 했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검무극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래, 두 사람의 저 대화를 듣고 싶어서 함께 출교한 거다.

동굴은 복잡했다. 조금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왔고, 어떨 때는 세 개, 네 개의 길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가야 할 곳을 아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잘도 걸어갔다.

쉬이익.

그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검이 검무극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살짝 몸을 틀어서 공격을 피한 후, 검무극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기습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기습한 무인이 당황했다. 상대가 자신은 본체만체 지나간 데다 뒤따르던 두 사람 역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간 것이다.

쉬이익.

뒤늦게 휘두른 검도 빗나갔다. 이미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대체 이게…….”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남자의 가슴을 뚫고 검이 튀어나왔다.

또 다른 누군가가 그를 뒤에서 기습해서 죽인 것이다.

기습한 인물은 쓰러진 시체를 뒤졌다. 장보도가 나오지 않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곳에 합리적인 선택이나 판단은 없었다. 다들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사람을 기습해 죽이고 몸을 뒤져 장보도를 찾고 있었다. 그야말로 운 좋은 놈이 장보도를 차지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챙챙챙챙챙!

이번에는 여럿이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냥 가시죠.”

분명 저들 중에 장보도를 가진 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한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검무극은 그냥 지나쳤다.

놀란 검이 싸움판을 가로지르는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머리카락 한 올 스치지 못했다.

검무극이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가볍게 싸움이 벌어진 곳을 빠져나왔다.

어디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라고 다르겠는가?

“왜 저들을 안 말리느냐?”

혈천도마가 묻자 검무극이 뒤쪽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 눈을 보십시오.”

그들 모두 욕심 어린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차라리 노름꾼 도박을 끊게 하죠.”

검무극이 더 깊이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숨었는지는 알고 가는 거냐?”

“운이 좋으면 만나겠죠.”

운으로 찾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검무극은 만혈동에 와 본 적이 있었다.

회귀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온 중원을 돌아다녔는데 천자산의 이 유명한 동굴을 그냥 지나쳤을 리가 있었겠는가?

이 신비스러운 미로 동굴은 자신을 쉽게 떠날 수 없게 했다. 분명 자신이 가보지 못한 어딘가에 뭔가가 숨겨져 있을 거 같았으니까.

지금은 많이 잊었지만, 그때 당시는 정말 지도를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대해 잘 알았다.

‘지금 이 시점에도 그것들이 있을까?’

이곳에서 대법 재료를 찾는 일에는 허탕을 쳤지만, 대신 찾은 것들도 있었다. 다만 시기가 달라서 지금도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을 뿐.

또한 누군가 숨는다면 어디에 숨었을지 예상되는 곳도 있었다.

뒤따르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 번쯤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맬 법도 한데, 검무극은 단 한 번도 같은 장소를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동굴 내부를 돌다가 조금 넓은 공간이 나왔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죽통 두 개를 꺼내 각각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게 주었다.

“물 좀 드십시오.”

두 사람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검무극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혈천도마에게 물었다.

“답답하시죠?”

“괜찮다.”

괜찮지 않았다. 혈천도마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말했듯이 그는 답답한 곳을 정말 싫어하는 것이다.

“이쪽 굴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쉬고 계십시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횃불을 맡겼다.

“자네는?”

“제가 밤눈이 밝아서요.”

사실 검무극은 횃불 없이 다니는 게 더 편했다.

쇄애애액.

쾌속보를 발휘해서 검무극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평평한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소교주에게 하도 놀라니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네요.”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땀을 닦았다.

“젊어서도 답답하고 좁은 곳 싫어하시더니. 여전하시네요.”

“사람이 어디 쉽게 변하나?”

그 말에 일화검존이 웃었다.

“왜 웃나?”

“아니에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혈천도마는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었으니까. 검무극을 만나서 정말 많이 변했으니까.

“생각나세요? 교주님 수련동에 우리 찾아갔었잖아요?”

아직 검우진이 소교주 시절의 일이었다. 그때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검우진에게 수련동에서 백일 간 수련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었다.

“술 사 들고서 몰래 갔잖아요.”

혈천도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지난 일을 떠올렸을 때, 자신을 웃게 하는 몇 안 되는 추억인데 어찌 잊었겠는가?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으면서 금방 길을 잃었죠.”

“내가 그랬나?”

사실 그날 길을 잃지 않았다. 그녀와 조금 더 같이 걷고 싶어서 길을 잃은 척했을 뿐.

생각해 보니 그날의 동굴은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한 번도 답답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때 우린 참 젊었었는데.”

술병을 흔들며 찾아갔을 때 교주가 자신들을 보며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잠시 지난날의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

쉭쉭쉭쉭쉭!

어둠 속에서 암기가 일화검존을 향해 날아왔다.

따다당당당!

암기를 튕겨낸 것은 천을 감은 멸천대도였다.

혈천도마가 일화검존 앞을 막은 멸천대도를 다시 내려놓았다.

기습이 실패하자 암기를 날린 자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두 마존은 쫓아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요? 그것도 못 막을까 봐요?”

일화검존의 물음에 혈천도마가 자신 쪽에 세워진 횃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은 어두운 것 같아서.”

그러면서 괜히 안 붙여도 될 말을 덧붙였다.

“나이 들면 밤눈이 어두워지잖아?”

“나이 든 여자에게 나이 들었다는 말은 실례에요.”

“나이 드는 게 어때서? 젊어 보이려 애쓰지 않아도 되고. 아침보단 저녁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싫다는데 끝까지!”

일화검존이 노려보자 혈천도마가 슬쩍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그곳에서 일단의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검에 피를 뚝뚝 흘리며 들어온 이들은 비룡방주의 딸 추연과 그를 따르던 무인들이었다.

열 명이었던 무인들의 숫자가 여덟 명으로 줄어 있었다.

추연은 느긋하게 이곳 동굴을 휩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데려온 이들은 비룡방의 정예인 비룡십걸(飛龍十傑)이었으니까.

한데 수색 중 두 번의 기습이 있었고, 두 명의 비룡십걸이 목숨을 잃었다. 좁고 복잡한 동굴 속, 그것도 캄캄한 동굴에서 횃불을 들고 하는 싸움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비룡십걸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 존재란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랬기에 신경이 예민해진 그녀였다.

“두 사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눈에 띈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짐꾼은?”

앞서 놈이 했던 건방진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짐꾼 주제에 어찌나 당당하던지. 다시 만나면 확실하게 혼을 내줘야지 마음먹었는데.

“벌써 죽었나? 왜 말이 없어?”

앙칼진 그녀의 물음에 딴 곳을 쳐다보고 있던 혈천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혈천도마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추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상대가 기도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살기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한데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눈빛 때문이었다. 혈천도마의 눈동자에는 횃불이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었는데, 마치 혈천도마의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자신의 온몸이 활활 타는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추연의 반응에 비룡십걸들이 일제히 검을 겨눴다.

혈천도마의 손이 멸천대도를 감은 천의 매듭을 향했다. 그것을 당기는 순간, 내기는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싸워야 할 상황이라면 일화검존을 나서게 해서 내기에 이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혈천도마의 시선이 매듭을 향했다. 일화검존이 손을 뻗어 매듭을 움켜쥐고 있었다. 매듭을 풀지 말라는 의미.

“소저.”

차분한 일화검존의 부름에 혈천도마에게만 집중하던 추연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일화검존의 차분한 눈빛을 보는 순간, 비로소 추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진짜 고수들이었구나!’

기도를 드러내지 않고도 이런 느낌을 준다면 자신들은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추연이 비룡십걸에게 검을 거두게 했다.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고수들까지 들어와 있구나. 과연 내가 지도를 구할 수 있을까?’

이곳에 들어올 때의 마음과 지금 마음은 정말 큰 차이가 있었다.

때마침 그곳으로 검무극이 돌아왔다.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검무극이 너무 반갑게 인사하자 오히려 추연이 당황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어서 걱정했소. 무사하니 다행이오.”

이 짐꾼 놈이 왜 이렇게 건방졌는지 이제 알 수가 있었다. 저런 고수들을 모시고 있는데 뭐가 무섭겠는가?

“왜 나를 걱정했지?”

“밖에서 이야기도 나누고. 우리 인연이잖소?”

추연에게는 놀리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반쯤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번 일이 배후 세력이 개입된 일이라면, 분명 놈들이 안배한 것들이 존재할 터.

‘혹시 당신도 그중 하나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냥 오늘 보고 영원히 못 볼 인연일 수도 있었고, 그녀와 이어진 줄을 따라가다 보면 놈들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언제나 그래왔듯 검무극은 그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모르는 척 다 받아들이며 저들의 계획을 역이용할 작정이었다.

“지금 저쪽엔 시체가 즐비하오. 모쪼록 조심하시오.”

이렇게 반가워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정색하며 욕을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보단 저 두 고수들 때문이겠지만. 그래, 언젠가 혼을 내줄 기회도 오겠지.

“너나 조심해라, 짐꾼.”

추연이 발길을 돌려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에 슬쩍 고개를 돌려 두 마존을 쳐다보았지만, 두 사람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와 비룡방 무인들이 떠나자 검무극이 지고 있던 혁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저쪽 굴에서는 장보도를 가진 자는 발견 못 했지만 이걸 찾았습니다.”

종이에 잘 싸둔 그것은 짙은 청록색의 이끼였다.

“이건?”

그게 무엇인지를 확인한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깜짝 놀랐다.

“종유선태(鐘乳仙苔)?”

종유선태는 동굴 천장에서 늘어진 종유석에서 자라는 이끼로 된 영약이었다. 수많은 조건이 딱 맞아떨어질 때만 자라는 그야말로 희귀한 영약이었다.

“저는 실제로는 처음 봐요.”

일화검존뿐만 아니라 혈천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처음이네.”

두 마존이 놀라운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어두운 난장판에서 종유선태를 발견해서 가지고 나온다고? 정말이지 직접 경험하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왜들 그렇게 놀라십니까? 동굴에 들어가면 다들 이 정도는 영약은 발견하잖아요? 이따 나가면 우리 셋이 사이좋게 나눠 드시죠. 제가 맛있게 드실 수 있게 요리하겠습니다. 단, 요리는 제가 합니다!”

종유선태는 그 효능이 일반 영약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비단 내공을 늘려주는 효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선이 먹는 이끼라는 이름처럼, 복용하면 생기를 회복하고 무병장수한다고 알려진 건강에 아주 좋은 영약이었다. 그래서 특히 혈천도마에게 많이 먹일 작정이다.

검무극의 말을 들으면서 두 마존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소교주에게 이렇게나 큰 운이 따라준다면.

소교주라면 정말 이곳에서 장보도를 가진 자를 찾아낼 수 있겠구나.

혁낭을 둘러멘 검무극이 다시 안 가본 길로 앞장서 걸었다.

“이쪽 길이 예감이 좋습니다. 자, 가시죠!”

혼자만 못 먹는 건 못 참지

일화검존은 길을 외우는 것을 포기했다.

동굴에 들어와서 얼마까지는 대충이라도 길을 외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깨끗이 포기했다.

그녀가 혈천도마를 돌아보았다. 그는 진작에 포기했다는 듯 편안한 얼굴로 검무극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일화검존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넨 어떻게 이렇게 길을 잘 아나?”

“길 찾는 본능은 아마 타고난 것 같습니다.”

“교주님도 이렇게 길을 잘 찾지는 못하실 거네.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감이죠, 감!”

사실은 훈련과 경험의 결과였다. 이곳 만혈동이야 속속들이 잘 아는 곳이라 그런 거고, 길눈이 밝은 것은 회귀 전 인생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훈련된 결과였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또 같은 곳을 헤매야 했으니까. 헤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던 그 시절이었으니까.

잠시 후, 혈천도마가 놀리며 말했다.

“막다른 감이군!”

한참을 걸어온 길이 막다른 곳이었던 것이다.

“이쪽 길이 분명 예감이 좋았었는데.”

검무극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듯 막다른 길을 끝까지 가더니 벽면을 살폈다.

“여기 아래에 뭔가가 있습니다.”

검무극이 왼쪽 벽 맨 아래에서 좁은 통로를 발견했다. 그냥 봐서는 툭 튀어나온 돌 때문에 아래에 통로가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엎드려야 볼 수 있었다.

그랬기에 일반 사람들은 절대 발견할 수 없는 통로였다. 복잡한 미로를 헤매다가 뻔히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아는 데 끝까지 가서 바닥에 엎드려 그 좌우를 확인할 리가 없었으니까.

당시에 자신은 어떻게 찾았냐고? 이쪽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저 반대쪽을 발견했다.

“역시 소교주가 눈썰미가 좋군.”

일화검존이 칭찬하자 혈천도마가 괜히 심술을 부렸다.

“얻어걸린 거지. 저걸 어떻게 알겠나?”

“반은 어르신 덕분에 얻어걸렸죠.”

“나 때문에?”

“놀리시니까 뭐라도 찾자 해서 이 끝까지 와봤으니까요.”

“나머지 반은?”

그러자 검무극이 구멍이 있는 아래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에서 새로운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거든요.”

그 대답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깜짝 놀랐다. 검무극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무리 심술부려도 검무극을 제일 걱정하는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조심해.”

검무극이 바닥을 기어서 통로로 들어갔다.

곧이어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들어와 보십시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그곳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혈천도마는 내켜 하지 않았다.

“대체 몇십 년 만에 기어 보는 건지 모르겠군.”

안으로 들어간 두 마존의 눈빛에 감탄이 스쳤다. 그곳은 동굴 밖이었는데 절벽으로 둘러싸인 독립된 공간이었다.

그곳은 물도 흐르고 꽃과 풀,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정말이지 집 한 채 짓고 살면 딱 좋을 거 같았다.

독특한 지형이었기에 끝도 보이지 않는 저 만장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외부에서 이 공간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회귀 전, 검무극은 저 절벽을 타고 내려왔었다. 그때의 자신은 과장을 보태 절벽이란 절벽은 모두 다 타던 시절이었으니까.

이곳까지 내려와서 저 구멍을 발견했다. 그 통로가 만혈동과 이어진다는 것도 들어가 보고 알았고.

‘여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회귀 전에 왔을 때는 이곳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 있는지만 살폈다. 이 공간이 이렇게 운치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저는 저기 위쪽을 한 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검무극이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일화검존이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먼저 눈이 가는 곳은 구석에 핀 꽃들이었다. 처음 보는 꽃들도 있었다.

“나중에 이런데 집 짓고 조용히 살면 좋겠어요.”

“손님 초대가 쉽지 않겠군.”

혈천도마의 말에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처럼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저 절벽을 오르내릴 수 있는 절세고수만이 손님으로 올 수 있는 집이 될 것이다.

잠시 후, 검무극이 다시 그곳으로 내려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가져왔다.

“절벽 중턱의 나무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검무극이 가져온 것은 복숭아 세 개였다.

“출출하실 텐데, 하나씩 드시죠.”

복숭아에서는 영롱한 광채와 함께 현기가 흘렀고, 향기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혈천도마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이것! 선도영과(仙桃靈果)는 아니겠지?”

떨리는 그의 목소리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복숭아는 선도영과라는 영약이었다. 앞서 발견했던 종유선태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었다.

“특히 여인에게 정말 좋다고 알려진 영과지요. 안 그래도 피부가 좋으신데 검존님 이제 아기 피부가 되시겠네요. 자, 어서 드시죠.”

앞서 종유선태가 혈천도마에게 더 좋은 효능이라면, 이 선도영과는 일화검존에게 좋은 영약이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게 선도영과를 주었다.

종유선태를 구했는데, 이번에는 선도영과를 발견했다고? 그리고 그걸 어디 저잣거리에서 산 복숭아처럼 나눠주고 있다고?

혈천도마는 그것을 먹지 않았다.

“본래 영약은 저마다 주인이 있는 법이다. 네게 온 기연이니 네가 다 복용해라.”

일화검존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두 마존을 바라보았다. 그래, 회귀 전에는 혼자서 다 먹었다.

“제 기연은 두 분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어떻게 해왔는지 보셨으니 아시지 않습니까?”

혈천도마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결코 혼자 먹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지만.

“그래도 네가 먹어라.”

가만히 혈천도마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두 개 먹죠.”

“왜 두 개인가? 세 개지!”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선도영과의 향긋한 냄새를 맡고 있었다.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먹겠다는 그 말에 혈천도마가 움찔했다.

검무극이 웃으며 혈천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 어르신 것만 먹겠습니다.”

검무극이 선도영과를 가져가려 하자 혈천도마가 손을 슥 뒤로 뺐다. 같이 못 먹는 건 괜찮지만, 혼자만 못 먹는 건 못 참지!

“그러고 보니 배가 좀 출출한 것 같기도 하고.”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고, 두 마존도 미소를 지었다. 이런 영과를 아낌없이 나눠주는데 어찌 그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서 드시지요. 선도영과는 나무에서 딴 후 반 각 내로 복용해야 효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검무극이 들고 있던 선도영과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 있다면 이런 맛이겠구나, 싶은 처음 맛보는 달콤한 과즙이 흘러나오며 순식간에 목으로 넘어갔다.

내공이라면 더는 필요 없는 검무극이었지만, 이 선도영과를 복용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선도영과 역시 단지 내공 증진의 효능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로장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질병에 강한 몸을 만들어 주고 오감을 강화했다. 거기에 빠진 머리를 나게 하고 피부를 젊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 맛있습니다!”

검무극의 감탄에 일화검존도 선도영과를 크게 베어 먹었다. 평소 음식을 품위 있게 먹는 그녀였는데, 이번만큼은 과즙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먹었다.

그녀의 표정이 맛을 말해주었다.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이 좋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뒤이어 혈천도마도 선도영과를 먹었다.

“달다, 달아.”

출교할 때만 해도 자신이 말로만 듣던 선도영과를 먹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검무극과 출교하니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계속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각자만의 고유한 심법으로 선도영과의 영험한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녹이기 시작했다. 몸 안팎으로 좋은 향기가 나서였을까? 그 어떤 영약을 흡수하는 것보다 상쾌하고 기분 좋았다.

그렇게 선도영과에 담긴 막대한 기운을 내공으로 녹인 후에 혈천도마가 눈을 떴다. 내공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몸이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먼저 운기를 마친 검무극은 둘러싼 절벽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만혈동에 있던 두 개의 기연을 모두 얻었다. 선도영과가 세 개 열려 있었던 것도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천도마에 이어 일화검존도 운기를 마쳤다.

“고맙네, 소교주.”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 중인 일화검존에게 선도영과의 효능은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거기에 덤으로 건강한 몸과 팽팽한 피부까지!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이 그녀를 바라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죠. 이번에 출교하시지 않았으면 제가 어찌 이런 기연을 얻었겠습니까? 이게 다 검존님 덕분입니다.”

일화검존이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조차도 자신에게 공을 돌리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녀가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들었죠? 제게 고마워하셔야 해요.”

혈천도마가 자신의 볼을 만지며 대답했다.

“정말 피부가 더 좋아진 거 같군.”

그러자 검무극이 자신의 검을 뽑아서 혈천도마의 얼굴을 비췄다.

“그뿐이겠습니까? 여기 보십시오. 주름살도 많이 펴졌습니다.”

“그런가? 기분 문제 아니고?”

“이따가 종유선태까지 드시면 독왕님 피부 저리 가라 하실 겁니다. 나이가 뭐가 중요합니까? 마음 젊고, 몸 건강하면 되는 거지.”

검무극은 그를 일화검존 앞에서 한껏 띄워주었다.

젊어 보인다는 말만큼 기분 좋은 말도 없었기에 혈천도마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부디 젊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검무극이 다시 들어왔던 구멍 쪽으로 걸어갔다.

“자, 나가시죠.”

검무극이 먼저 기어나갔다.

“어떻습니까? 바닥을 기어갈 가치가 있었죠?”

뒤에서 혈천도마가 괜히 툴툴거렸다.

“그래도 기는 건 딱 질색이다!”

원래 그였다면 벽을 부수고 걸어 나가자고 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얌전히 기어서 그곳을 나왔다.

그곳을 나온 검무극이 다시 앞장서서 왔던 길을 돌아나갔다.

“이번에는 이쪽이 예감이 좋습니다!”

혈천도마가 뒤따르며 말했다.

“그 예감에 선도영과를 먹었는데, 따라가야지.”

그렇게 다시 두 마존은 검무극을 따라 걸었다.

여전히 바깥은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이제 현실로 돌아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앞에 두 무인이 검을 겨누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과연 그럴만한 인물들이었다.

한 사람은 호남 일대에서 도끼 한 자루로 명성을 날리는 벽천대부(碧天大斧)였고 다른 사람은 장보도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온 강서의 고수 괴혈도(怪血刀)였다. 하필 비슷한 실력의 고수들끼리 딱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이 내뿜은 기세가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았기에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자네와는 마지막에 싸워야 할 사람인데.”

벽천대부는 그만큼 자신과 상대를 높이 샀다.

그는 이 싸움을 피하고 싶었다. 반면 괴혈도는 여기서 승부를 보려 했다.

“어차피 한 번은 싸워야 한다면 미룰 필요 있겠나?”

벽천대부와 마주친 이곳이 좁은 곳이었기에 싸움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큰 도끼를 쓰는 그보다 자신이 유리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장에라도 일격이 날아들 것만 같은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안 싸우실 거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이어졌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어딜 지나가? 여길?

벽천대부와 괴혈도가 서로 죽이기 위해 칼날을 겨누고 있는 여길? 심지어 이 좁은 통로를?

설마 아니겠지 하는데 누군가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정말이지 두 사람은 이거 미친놈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그 미친놈은 진짜 자신들 사이를 지나갔다.

검날과 도끼날이 번쩍이고 있는 그 사이를 지나가며 인사까지 했다.

“어이구, 고생 많으십니다.”

정말이지 두 무인은 어이가 없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친놈은 하나가 아니었다. 눈길을 확 끄는 여인이 뒤따라 지나갔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뭔가를 등에 찬 노인이 연신 자신의 볼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이 미친놈들은 자신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들이 연이어 지나가는 동안 두 사람은 움직이지 못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 상대의 공격을 허용할 것이다. 게다가 저 미친놈들이 합공까지 하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방금 뭐지?”

“무서워서 미쳐버린 거겠지.”

물론, 말과는 달리 그들이 보통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미친놈이었든, 진짜 고수였든, 왠지 이 일생일대의 싸움이 맥이 탁 풀려버린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천천히 병장기를 거두고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검무극은 계속 나아갔다.

뒤따르는 두 마존이 횃불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으로 보이는 동굴들, 지금까지도 복잡했지만 이곳은 정말 복잡했다. 한 공간에 구멍이 열 개까지 나 있었다.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가니 다시 대여섯 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길이 다 그런 식이었다.

왜 이곳이 죽음의 동굴이라 불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구역은 길들이 빙글빙글 돌게 만들어져 있어서 정확한 길을 모르면 같은 길을 맴돌아야 했다.

“여긴 길을 아는 사람도 길을 잃겠네요.”

일화검존의 말에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연신 땀을 흘렸다. 영약으로도 이 좁은 곳에 있는 답답함은 없애지 못했다.

그때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누군가 숨었다면 이쪽에 숨지 않았을까요?”

두 마존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나눴다.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이곳에서 장보도를 가진 자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앞서 검무극은 자신들에게 장보도를 가진 자가 의도적으로 만혈동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분명 뭔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이 확실했었는데.

그렇게 검무극을 따라 도착한 곳에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답답하던 혈천도마의 가슴을 뻥 뚫렸다.

눈 앞에 펼쳐진 세월이 만들어낸 장관.

광장처럼 큰 그곳은 거대한 종유석과 석순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맹수의 송곳니처럼 길게 자란 종유석들이 천장에서 늘어져 있었고, 석순들은 천장을 향해 우뚝 솟아있었다.

그중에서는 종유석과 석순이 거의 마주치려 하는 것도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과 땅이 만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똑, 똑, 똑.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깨며 울려 퍼졌다.

가만히 그곳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그 신비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곳인데요?”

전생에 와 본 게 틀림없어

“이런 곳도 있었군.”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대자연이 만들어낸 신비로움에 감탄했다.

앞서 그 복잡했던 미로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이런 장관을 보려면 당연히 그 정도는 힘들게 찾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두 마존과 함께 그곳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만약 제가 만혈동 어딘가에 숨어야 한다면, 여기에 숨을 것 같습니다. 그 복잡한 미로를 지나서 이곳에 도착한 이들이 어찌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이곳에 사람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 장엄한 광경에 잠시 취했다가 다시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어디 숨을 곳이 있다고?”

아무리 봐도 사람이 숨을만한 곳은 없어 보였는데.

“숨을 곳이 많지 않습니까?”

“많다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던 혈천도마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땅에서 솟아오른 커다란 석순들이었다.

‘설마? 저 속에?’

과연 정확히 봤다는 듯 검무극은 천천히 석순들 사이를 걸었다.

“장보도를 가로채서 쟁탈전을 벌일 정도가 되는 자라면, 이곳 만혈동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길을 모르면 미로를 헤매다 죽게 될 곳으로 섣불리 들어오지 않았겠죠. 아마 그는 이곳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우리가 있는 이 장소에 대해서도 잘 아는 자일 겁니다.”

“그렇다면 보통 놈이 아니겠군.”

검무극은 상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이상입니다. 그는 자신을 추격하는 이들을 이 아수라장 속에서 서로 싸우다 죽게 만들려고 한 자니까요.”

검무극이 하나의 석순 앞에 멈춰 섰다.

그 석순에는 함몰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 안쪽으로 휘어진 부분에 제법 큰 구멍이 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이는 구멍이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미 두 마존도 그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저는 예전부터 궁금했습니다. 이 석순 안은 어떻게 생겼는지요.”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잘라보면 되지 않느냐?”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서는 석순을 툭툭 쳤다.

“이쯤 잘라볼까요?”

“대각선으로 잘라라. 그래야 더 잘 볼 수 있지.”

“이렇게요?”

그러면서 검으로 석순을 툭툭 쳤다.

“자, 그럼 자릅니다!”

바로 그때였다. 그 구멍에서 다급한 말이 흘러나왔다.

“잠깐! 사람 있어요! 안에 사람 있습니다!”

구멍에서 한 남자가 머리를 내밀었다. 저 작은 구멍으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치 문어가 빠져나오는 것처럼 매끄럽게 나왔다.

“죽이지 마십시오! 제발!”

그는 왜소한 체구의 남자였다. 얼굴은 어른인데 몸집은 소년이었다.

“대체 이 좁은 곳에 어떻게 들어가 있었대?”

검무극이 구멍 속을 들여다보았다. 신안술을 발휘한 그의 두 눈이 어두운 석순 속을 살폈다.

밖으로 나온 남자는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로 볼 때, 무인이긴 하지만 어디 가서 내세울 무공이나 내공을 지닌 이는 아니었다.

“살려주십시오.”

눈치를 보던 남자는 상대가 셋인 데다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장보도를 구하러 들어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나가기가 너무 무서워서 여기 숨어 있었습니다.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좋은 사람도 아니겠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묻지도 않은 자신의 개인사를 밝혔다.

작은 무가의 가주인 부친이 뒤늦게 노름에 빠지게 돼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고 했다. 결국 어린 여동생이 부잣집에 팔려 갈 상황까지 몰렸는데, 그때 장보도를 가진 이가 천자산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올라왔다고 했다.

“장보도를 구하지 못하면 동생이 팔려 갈 겁니다. 그냥 못 본 척 지나가 주십시오!”

동생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었는지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만히 남자를 쳐다보던 검무극이 냉정하게 말했다.

“무공 실력도 안 되는데 어떻게 장보도를 구하려고? 여기 숨어 있다 나가면 밖에 사람들이 양패구상으로 다 죽어버리고, 그 가운데 장보도라도 떨어져 있을 거 같아서? 너는 아버지 욕하면 안 되겠다. 너도 말도 안 되는 도박을 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자. 밖으로 데려다주마.”

검무극이 두 마존에게 말했다.

“대충 동굴도 다 돌아본 것 같은데 이만 나가시죠?”

장보도를 구하지 않았는데 나가자고?

마존들은 검무극을 잘 안다. 애초에 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장보도를 구하러 들어왔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지.”

두 마존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알 것 같았다.

‘저자로군.’

자신들은 보지 못하는 뭔가를 검무극이 발견한 것이 틀림없었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더니, 장보도를 가진 자를 찾아낸 것이다.

―당장 저놈 내공부터 제압하고 몸수색을 하지 않고!

자신이라면 그랬을 터인데. 반면 일화검존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소교주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요.

그녀는 나가기 전에 그곳을 돌아보았다. 미련이 남는 눈빛이었다.

혈천도마가 그녀 옆에 나란히 섰다.

“왜?”

“이런 곳에 또 올 기회가 있겠어요? 눈에 잘 담아서 가려고요.”

“또 오면 되지.”

“어떻게요?”

이곳까지 오는 길을 몰라서도 못 온다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다. 검무극이 없으면 만혈동에서 나가기조차 쉽지 않았으니까.

“중원에 이런 동굴 천지다. 다음에…….”

혈천도마는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들을 기다려주었다.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새벽별을 보며 나란히 앉아 있던 그 모습처럼,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저렇게 둘만이 함께하는 시간일 테니까.

그러다 검무극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잔뜩 겁먹은 그는 검무극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정말 저 살려주시는 겁니까?”

“네 평생의 도박 운은 이번에 다 썼다. 날 만났으니까.”

남자는 안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동생 걱정 때문인지 표정에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두 사람에게로 걸어왔다.

“자, 이만 나가자.”

그렇게 그들은 종유석과 석순이 있는 공간에서 나왔다.

동굴 내부의 분위기는 더욱 과열되어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살아남은 이들의 광기는 더욱 강해졌다.

사람을 죽이고 남의 품을 뒤질 때의 그 손맛은 지금껏 경험했던 그 어떤 쾌감보다 짜릿했다. 어쩌면 이번에 장보도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 강렬한 기대감은 그들을 살육과 광기로 몰아갔다.

비룡방의 추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쉬이익! 푸아악!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상대의 목을 벤 그녀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그녀는 직접 쓰러진 자의 몸을 뒤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보도는 없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추연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열 명의 비룡십걸은 이제 여섯 명으로 줄어들었다.

포기하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를 보고 그녀가 흠칫 놀랐다.

“너는?”

앞장선 이는 바로 그 짐꾼이었다. 또 그들을 만난 것이다.

검무극이 반갑게 그녀에게 말을 건네왔다.

“하루에 세 번이나 만나는 걸 보니 우리가 인연이 있나 봅니다.”

추연은 검무극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 자만 보면 기분이 나빴다. 짐꾼 주제에 자신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것부터가 언짢았다. 마치 저 고수들의 수제자처럼 굴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저들의 제자였다면 호칭을 사부라고 했겠지.

그는 노인을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짐꾼이거나 하급 무인이 틀림없었다. 그는 무공을 익힌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저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자신의 손에 죽어가면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습니다를 유언으로 남기고 있겠지. 아니, 그전에 만났을 때 이미 죽었을 거다.

그녀의 시선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향했다. 앞서도 그랬지만 그들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하는구나.’

다시 추연의 시선이 그들과 함께 있는 남자를 향했다.

“저 남자는 누구지?”

“우연히 만나서 함께 하는 중이오.”

“그런데 왜 그를 데려가나?”

“여동생이 팔려 갈 상황이라네요. 다른 사정이라면 모를까, 이런 절박한 사정인데 구해줘야 하지 않겠소?”

추연이 의심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말을 믿나?”

“설마 저 사람이 장보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시오? 저 비실비실한 몸으로?”

“설마 저자 몸수색을 아직 안 한 건 아니겠지?”

“안 했소.”

당당한 대답에 추연은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대신 수색해도 되겠나?”

그녀는 눈앞의 이 짐꾼에게 묻는 게 아니었다. 짐꾼 뒤에 있는 두 고수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못 믿으시다니. 좋소, 해보시오.”

검무극이 허락하자 혈천도마는 내심 흠칫했다. 검무극은 자신들을 앞세워서라도 남자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할 줄 알았는데.

‘저자 몸에서 분명 장보도가 나올 텐데.’

혈천도마는 결국 여기서 멸천대도를 감은 천의 매듭을 풀게 되겠구나 싶었다.

비룡십걸의 무인 중 하나가 남자의 몸을 수색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샅샅이 뒤졌지만 장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추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수색한 것이었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두 마존들이었다.

―저자에게 장보도가 없다고?

―하면 소교주는 왜 그냥 나가려는 걸까요? 저자는 왜 데려가고?

―저놈의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나?

검무극은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자, 그럼 네 번째 만났을 때도 살아서 봅시다!”

사실 추연은 검무극이 들고 있는 혁낭을 뒤져보고 싶었다. 정말이지 저 두 고수의 몸을 수색하고 싶었다.

그냥 보내기에 너무 찝찝했기에 그녀는 용기를 냈다. 오늘 자신이 죽인 이들이 흘린 피에 취한 용기였다.

“당신 그 짐, 볼 수 있을까?”

검무극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웬만하면 보여주고 싶은데, 당신이 봐선 안 될 물건들이 많소.”

그렇게 말하니 더 궁금했다. 정말 마음 같아선 저 혁낭을 뺏어와라! 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은데.

‘혹시 내가 착각한 거는 아니겠지?’

저 두 사람이 고수가 아닌데 고수로 착각한 거라면?

바로 그때였다.

“그만 가자.”

혈천도마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길을 막고 있던 추연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섰다. 아무런 기도나 살기 없이 자신을 물러나게 한다면? 그래, 착각일 리 없다.

그때 저 멀리 동굴 안에서 외침이 들렸다.

“장보도다!”

추연이 수하들과 함께 소리가 난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짐꾼의 말이 들려왔다.

“소저, 조심하시오!”

추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라도 또 보게 된다면 제발 저 두 고수가 없을 때 걸려라! 정말 딱 한 번 걸리기만 해라.

검무극이 다시 걸음을 옮겼고 남자와 두 마존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길 보세요.

일화검존의 전음에 혈천도마가 벽에 새겨진 은밀한 표시를 보았다.

―제가 들어오면서 은밀히 남겨둔 흔적이에요.

처음 들어올 때 나름 길을 기억하려고 남겼던 것이었다. 남기다 너무 길이 복잡해지면서 포기했던 표시였는데.

―소교주는 정확히 우리가 들어왔던 길로 돌아나가고 있어요.

―녀석, 전생에 여길 와본 게 틀림없어.

혈천도마의 말에 일화검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혈천도마의 이 농담이 정말 정확한 말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검무극이 그들을 데리고 동굴을 나왔다.

마침, 그들이 나왔을 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깥 공기를 마신 혈천도마가 이제야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숨을 크게 쉬었다.

“혹시 나 때문에 나온 거냐?”

자신이 너무 답답해하니까 다 포기하고 나온 게 아닌가,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난 참을만했다. 정 내가 신경이 쓰이면 날 두고 들어갔다 와라.”

“어르신을 두고 제가 어딜 갑니까?”

“나 두고 잘만 돌아다니면서.”

그러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아주 허탕은 아니었잖습니까?”

검무극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혹시 세 사람이 마음이 변할까 싶었는지 다급히 작별을 고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의 풀 죽은 모습에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그가 다시 동굴로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

검무극이 그에게 다가갔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당연한 수순이라 여겼다. 그래, 소교주가 그냥 보내지 않겠지. 소교주라면 분명 동생이 팔려 가지 않게 해주겠지.

과연 돈이라도 주려는 듯 검무극이 품에 손을 넣었다.

“이게 뭔지 아나?”

하지만 나온 것은 돈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꺼낸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종이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 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바로 은월에서 보내온 정보였다.

“장보도를 가지고 만혈동으로 쫓겨간 자의 용모파기와 인적 사항이야. 어때? 우리 정보망 끝내주지?”

생각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도 검무극이 저 정보를 받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오는 내내 통천각과 은월로부터 뭔가를 계속 받는다 싶었는데.

“장보도를 가로챈 자의 이름은 태수(太手), 당대 최고의 도둑이라 불리는 대도(大盜) 태곤(太鯤)의 아들이지.”

태곤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그만큼 유명한 도둑이었다.

검무극이 용모파기 아래에 적힌 정보를 남자에게 읽어주었다.

“태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대도 수업을 받아 여러 기술을 전수받았다. 암호해독과 지형분석에 능통하고 기관해체에도 일가견이 있고. 기억력이 아주 뛰어나서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뿐만이 아니야. 축골공(縮骨功)을 익혀 좁은 곳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네. 정말 대단한 놈이지. 안 그래? 그런데 생긴 게 꼭…….”

검무극이 남자 얼굴 옆으로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나란히 보이도록 들었다.

두 얼굴을 비교하자 두 마존은 왜 검무극이 중간에 이 남자만 데리고 나오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처음 볼 때부터 알았던 거다.

“너잖아?”

사람 마음도 훔칠 줄 알아야지

“저 아닙니다!”

남자는 펄쩍 뛰며 딱 잡아뗐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림 속 인물은 그와 똑같이 생겼다.

검무극이 다시 그림을 쳐다보았다.

“아까 널 처음 봤을 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이거 그린 사람에게 특별 보상과 휴가까지 줘야겠다.”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그는 억울해서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쳤다.

“저 아닙니다. 세상에 닮은 사람도 있기 마련 아닙니까? 저는 어서 돌아가서 동생부터 구해야 합니다. 제발 보내주십시오!”

남자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 모습만 봤을 때는 정말 오해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검무극이 그림 아래 적혀 있는 글 중에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여기 봐. 아까 네 정보를 읽다 빠뜨린 게 있거든. 연기도 잘해서 남을 감쪽같이 잘 속인다고 되어 있지?”

정말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까 몸수색할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게 장보도는 없습니다.”

“알지. 이미 태워버리고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아까 내가 보여준 거기에 적혀 있었잖아? 기억력이 탁월하다고. 아마 지형을 외우는 데는 더 뛰어난 능력이 있겠지.”

“아닙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왜긴, 너니까 그러지.”

검무극이 씩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연속해서 쿡쿡 찔렀다.

팍! 팍!

다음 순간!

푸우우.

몸에 공기가 들어가는 것처럼 그의 몸이 커지기 시작했다. 소년처럼 왜소했던 그의 몸이 평범한 남자의 몸이 되었다.

검무극은 장난처럼 쿡쿡 찔렀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축골공이 파훼되면서 원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반갑다, 태수야.”

그는 대도 태곤의 아들 태수였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도 놀랐지만 단숨에 자신의 축골공을 파훼한 것에 더욱 놀랐다.

놀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젊은 놈과 함께 있던 노인과 여인은 자신의 축골공이 파훼되면서 본모습을 보여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나 물 좀 줘.”

혈천도마의 말에 검무극이 혁낭을 내려놓고 안에서 죽통을 꺼냈다.

“물 많이 드셔야 피부가 더 좋아지십니다. 기왕 좋아진 피부, 이제 관리하셔야지요.”

바로 그 순간 태수가 몸을 날렸다. 무공 실력은 평범했지만, 경공술만큼은 누구보다 빠르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순식간에 그곳을 벗어난 그가 다시 도약했다. 이미 거리는 이십 장 이상 벌어졌을 것이고, 두 번째 도약에서 오십 장, 세 번째 도약에서 내려섰을 때는 이미 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대체 저자들은 누구지?’

자신의 정체를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다니.

그가 세 번째 도약에서 내려서던 그때.

“헉!”

태수가 신음성을 내뱉으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눈앞에 서 있었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꺼낸 죽통을 혈천도마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다시 죽통의 마개를 열고 물을 마셨다.

‘대체 어떻게?’

순간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아니면 환상을 보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다시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내려섰을 때는 또 눈앞에 세 사람이 있었다.

“나도 물 좀 주게.”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도 죽통을 꺼내 주었다. 달려오기 전 장소에서의 행동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태수는 멍한 상태로 서 있었다. 자신들은 원래의 동굴 앞에 서 있고, 주위 배경만 계속 바뀐 게 아닌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분명 자신은 경공술을 발휘해서 달아났고, 여긴 다른 장소였으니까.

저들은 빠르게 뒤쫓아 온 게 아니었다. 먼저 도착해서 앞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빠르면?’

심지어 검무극은 저 큰 혁낭까지 지닌 상태가 아닌가?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내가 이 방향으로 달아날 것을 어떻게 알고?’

검무극이 혁낭에 죽통을 다시 넣은 후 혁낭을 등에 짊어졌다.

“당신들…… 뭐야?”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태수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제일 젊은 귀신이 웃으며 자신에게 걸어왔다.

“배고프면 사람이 괜히 예민해지잖아?”

검무극이 가볍게 손을 휘저어 태수의 내공을 제압했다.

“그만 뛰고 우선 밥부터 먹자.”

* * *

만혈동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검무극이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태수는 내공을 제압당한 채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문 준비를 하려는 거구나.’

이런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두고 밥이나 먹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 저 음식에 자백제를 섞겠지. 아니면 독을 타서 협박하거나.

억지로 먹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자신이 자결을 시도하거나 감정이 상해 죽어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먹이려는 것이리라.

‘이 자들은 대체 누굴까?’

무림에 이런 세 고수가 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독특한 조합이었기에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데.

검무극이 채소와 버섯을 볶기 시작했다. 거기에 소금도 치고 비법 양념도 넣었다.

능숙하고 빠르게 요리를 마친 검무극이 네 그릇에 버섯볶음을 나눠 담았다.

그중 하나를 태수에게 가져왔다.

“자, 먹어라.”

검무극이 한쪽 손을 움직일 수 있게 풀어주었다.

“생각 없소.”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지 말고 먹어.”

음식이 담긴 그릇을 그의 앞에 내려놓고 혁낭으로 걸어갔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종이로 싼 것을 꺼냈다. 종이를 펼치자 안에 이끼가 들어 있었다.

특유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태수는 깜짝 놀랐다.

‘이 냄새는 설마? 종유선태?’

검무극이 자신과 두 마존의 그릇 위에만 종유선태를 나눠서 올렸다.

“그냥 먹기에는 너무 맛이 없어서요. 그래도 이렇게 함께 드시면 괜찮을 겁니다.”

태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저 말도 맞았다. 종유선태는 그냥 먹기에 너무 맛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설마? 진짜인가?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종유선태를 버섯요리에 넣어 먹지는 않겠지?’

하지만 생김새나 냄새가 딱 종유선태였다. 도둑인데 영약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겠는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종유선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영약인데? 그래, 아닐 것이다. 일단 저 귀한 것을 셋이 나눠 먹는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아! 나를 낚으려는 거구나.’

저것이 미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종유선태인 척하면서 셋이 먹으면 자신도 먹고 싶어질 거 아니겠는가?

‘독이거나 자백제가 들어간 가짜 종유선태겠지.’

저들은 이미 해약을 복용한 후일 테고.

검무극이 그를 보며 자신의 그릇에 올려진 종유선태를 들며 물었다.

“너도 이거 좀 줄까?”

태수가 내심 비웃었다.

‘역시! 내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태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소.”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거절하다니, 대단한데?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할 텐데.”

태수는 코웃음을 쳤다. 진짜일 리가 없다. 진짜라면 종유선태를 나눠줄 리가 없었으니까.

혈천도마가 자신의 그릇에 담긴 종유선태와 다른 두 사람의 것을 비교한 후 말했다.

“내 것이 제일 많아 보이는데?”

그의 그릇에 종유선태가 제일 많이 올려져 있었다.

“착각이십니다.”

물론 혈천도마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에게 제일 많이 챙겨줬다는 것을. 맞은편에 앉은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에게 그냥 모른 척 먹으라고 눈짓했다.

“자, 어서 드시죠.”

“이 귀한 걸 버섯과 함께 먹게 될 줄은 정말 몰랐군.”

“자고로 입에 들어가는 건 맛있게 먹어야 몸에 좋지 않겠습니까?”

세 사람이 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맛있네.”

일화검존이 맛에 만족했고, 혈천도마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사람이 종유선태를 모두 먹었다.

다 복용하고 나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 앉아 운기했다.

운기조식을 마치자 세 사람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종유선태의 효능은 복용자의 생기를 회복하고 무병장수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먹기 전보다 더 젊어 보이십니다.”

“정말?”

검무극이 검을 뽑아서 다시 얼굴을 비춰주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확실히 차이는 있었다.

오늘 복용한 두 영약은 검무극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가만히 검날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살면서 이 말을 언제 해봤었던가? 아니, 해본 적은 있었던가?

“재밌다.”

일화검존이 놀란 표정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평생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았기에, 저 말이 얼마나 큰 의미가 담긴 말인지 그녀는 잘 알았다.

과연 검무극은 뭐라 대답할까?

검무극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도 재미있습니다.”

일화검존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이 즐거웠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즐거움이었다.

세 사람을 지켜보던 태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뭐야, 이것들!’

그들은 정말 종유선태를 먹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자신은 신경조차 쓰지 않으면서 말이다.

태수가 검무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거요?”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거침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함께 검총을 찾아가야지.”

누구 마음대로! 태수는 내심 기가 막혔지만 하던 연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정말 오해시오. 나는 우연히 거기 있었소.”

태수는 끝까지 잡아뗐다.

“수련 중이었소. 그 복잡한 동굴에서 길 찾기 수련도 하고 축골공 수련도 하고.”

검무극이 웃으며 품에서 앞서 보여줬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다시 꺼내 보였다.

“이 종이 한 장이 내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력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 평생 한 가지 일만 해온 수십 명의 노고가 깃든 정보야. 나나 너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한 사람들이 말이야.”

듣고 있던 두 마존은 내심 생각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너보다는 안 똑똑하지.’

그랬기에 두 마존은 검무극이 어떻게 장보도의 위치를 알아낼지 내심 궁금했다.

“지금 상황에서 잡아떼는 방법은 하책 중에서도 하책이야. 아, 이놈은 정말 보잘것없는 방법이나 쓰는 놈이구나. 상대에게 우습게 보일 뿐이지.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여기 그런 놈 아니라고 적혀 있잖아.”

태수는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더니 결국 작전을 바꿨다. 상대를 보니 무작정 우긴다고 될 일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당신 말이 맞소. 그 위치는 내가 외우고 있소. 그곳의 위치뿐만 아니라 가짜 입구가 아닌 진짜 입구로 들어갈 방법과 내부의 기관을 피하는 방법까지. 이 세상에 오직 나만이 알고 있지.”

절반만 맞는 말이었다.

회귀 전 삶에서 검무극은 검총에 들어가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보물쟁탈전 때문에 갔던 것이 아니었기에 검총 내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곳에 간 것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검무극이 말없이 태수를 응시했다.

태수는 배와 눈에 힘을 주고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빛에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냥 확 패버리면 다 불 텐데.

거기에 일화검존은 한술 더 떴다.

―손가락을 하나씩 하나씩 자르거나요.

혈천도마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런 말 하는 사람인 거, 소교주는 모르지?

―이렇게 둘이서나 하는 거죠.

혈천도마는 그녀의 말에 살짝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은 패지도 않았고 손가락을 자르지도 않았다.

스르릉.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그래, 검총 같은 곳은 영원히 무림의 비밀로 남는 게 나을 수도 있지.”

검무극이 번쩍 검을 들었다.

쉬이이익.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태수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잠깐!”

태수의 외침에 검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목을 자르기 직전에 멈췄다.

주르륵.

살짝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 미친놈이 정말 날 죽이려고 했어.’

태수는 두려움과 놀람이 섞인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나를 죽이면 당신도 죽소.”

“내가 왜?”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잖소?”

태곤, 당대 최고의 도둑.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반드시 복수하실 거요. 아버지는 평생 찾지 못한 사람이 없고 뚫지 못한 곳이 없으시오. 당신이 잠든 사이 당신의 처소로 소리 없이 들어갈 거요. 아무리 깊숙한 곳에 숨더라도 소용없을 거요.”

듣고 있던 마존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깊숙한 곳이 어딘지를 알면 저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검무극은 협박에는 협박으로 맞섰다.

“그럼 네 아버지부터 처리해야겠군.”

순간 태수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여유를 부렸다.

“우리 아버지 행방은 절대 찾지 못할 거요.”

“그래, 쉽진 않겠지.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야. 일단 소문부터 퍼뜨릴 거다. 검총의 장보도를 가진 사람은 태곤이라고. 그럼 그 수많은 이들이 네 아버지를 찾으려고 달려들겠지.”

검무극이 앞서 보여줬던 용모파기 그림을 들었다.

“내가 지닌 정보망으로 네 아버지에 대해 샅샅이 알아낼 거다. 이렇게 얼굴까지 알아내서 중원에 싹 돌릴 거다.”

“이번 일로 열받은 네 아버지가 너를 찾아오면 그때 처리해도 되겠지.”

검무극은 협박을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했고, 그 협박은 태수에게 먹혔다.

태수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자 검무극이 목을 겨눴던 검을 거두었다.

“내가 밥 먹으라고 했지? 배가 고프니 머리가 안 돌아가서 이렇게 어쭙잖은 협박이나 하는 거다. 이럴 때는 협박할 게 아니라, 거래를 해야지. 장소를 알려주면 뭘 주겠냐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태수가 물었다.

“내게 뭘 줄 거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곳에 도착해서 당신이 날 살려줄 거라고 어떻게 믿소?”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대 최고의 도둑을 꿈꾸는 자라면 비단 물건만 훔칠 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태수는 내심 흠칫했다. 금방 그 말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주 해줬던 말이었다.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그대로 나왔다.

“최고의 도둑이 되려면 사람 마음도 훔칠 줄 알아야지.”

태수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우연이겠지?’

하지만 검무극이 우연히 똑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 삶에서 검무극이 그의 부친인 태곤에게 직접 들었던 말이었으니까.

그때 검총에서 만났던 사람이 바로 태곤이었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동안 내 마음을 훔쳐봐.”

가능한 사람은 오직 한 분

“혹시 우리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으시오?”

아버지가 해준 말과 똑같은 말을 하다니! 과연 우연일까? 아니면 혹시라도 이 사람이 아버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적어도 이 삶에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원칙이 확실한 사람이란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원칙이란 말이 나왔을 때 태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불의한 사람의 물건만 훔친다고 들었다. 훔친 물건의 일부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던데?”

태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들인 태수에게도 그 원칙을 어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태수는 그 가르침이 불만이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협객으로 살든지. 도둑놈이 무슨 양심을 따진단 말인가? 기왕 도둑놈 소리 듣는 것, 가리지 말고 다 훔쳐야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 폭발한 날이 있었다.

―아버지의 그 원칙은 선행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아버지의 표정에 드러났던 분노와 실망감을, 그리고 당혹감을.

그날 이후 아직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오, 라고 말하려고 꺼낸 말이었다. 조금 전 검무극이 검을 겨눴을 때, 방패로 삼은 사람도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목이 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망설이는 말을 이은 것은 검무극이었다.

“아버지는 어렵지. 우리 아들들에게는.”

태수의 굳은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살짝 풀어졌다. 그때 태수는 검무극에게서 앞서 봤던 묘한 눈빛을 다시 보았다.

‘또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구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자, 밥도 먹었으니 이만 떠나볼까?”

검무극이 앞장서 걸었고 두 마존이 그 뒤를 따랐다.

저만치 걸어가다가 돌아섰을 때 태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해? 안 가고?”

“마혈을 풀어주셔야 움직이죠.”

“아까부터 풀려 있었다.”

자신을 제압했던 마혈은 풀려 있었다. 내공을 쓸 수 없을 뿐, 몸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느새?’

지풍이 날아온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 수인지는 당사자보다 오히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검무극 일행은 민가에 맡겨둔 마차를 찾아 길을 떠났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마차 안에 탔고, 검무극과 태수는 마부석에 탔다.

검무극이 멋대로 마차를 출발시키자 태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가시오?”

자신에게 물어볼 줄 알았다. 하다못해 대충 이 방향이 맞냐고라도 물어야지.

“네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내 마음 내키는 대로 간다. 혹시 너무 반대 방향으로만 가면 슬그머니 말고삐 당겨줘.”

금방이라도 또 옆구리를 쿡쿡 찌를 거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태수는 눈앞의 이 젊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당신 이름도 모르고 있소.”

검무극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잠시 마차가 달려가는 뻥 뚫린 대로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검무극이다.”

마차에 타고 있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보통 검무극이 출교해서는 검연이란 이름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본명을 밝혔다는 것은 신분도 밝힐 의사가 있다는 의미.

물론 태수는 천마신교 소교주 이름이 검무극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동명이인이라 여겼을 것이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저리 짐을 지고 다니고 버섯 요리를 직접 해서 자신에게 줬을 리는 없을 테니까.

태수가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이 어떤 문파에 속해 있는지 말해줄 수 있소?”

“말해줄 수는 있는데, 모르는 게 나을 거다.”

“왜 그렇소?”

“알게 되면 내 마음을 훔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질 테니까. 그냥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태수는 검무극이 사문을 알려주지 않는 걸 이렇게 오해했다.

‘정파인이구나.’

만약 마교나 사파 놈들 같았으면 묻지 않아도 이미 정체를 밝혔을 거다.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라도.

‘명문세가 출신이군.’

그렇다면 알아내야 할 것은 누가 이 세 사람의 수장이냐는 것이었다.

얼핏 봐선 노인이었는데, 이들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꼭 그렇지도 않았다. 짐도 들고 요리도 했지만, 이 젊은 남자가 주도권을 가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저 두 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되오?”

집안 어르신? 사부? 하지만 검무극의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내 양쪽 날개다.”

그 말에 마차에 타고 있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함께 웃었다. 왼쪽 날개냐 오른쪽 날개냐를 겨뤘던 두 당사자가 타고 있었으니까.

“저 두 분만 있으면 나는 이 중원을 씹어먹을 수도 있지.”

“셋이서 말이오?”

“너도 이제 같은 편이 될 거잖아. 넷이서지.”

태수는 마차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라고?’

지금껏 해왔던 어떤 도둑질보다 어려운 일이 이제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선 곳은 호숫가 옆이었다.

“내려서 저기 좀 보십시오.”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마차에서 내렸다.

길옆 커다란 호수에 석양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로 뻗쳐가는 빛과 호수로 스며드는 빛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뤄냈다.

검무극은 훌쩍 마차 지붕으로 올라가 걸터앉았다.

“정말 끝내주네요.”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함께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을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이 마차를 멈춘 것도 두 사람을 위해서였다.

‘이 순간도 실컷 담아가십시오!’

그렇게 세 사람이 그 장관을 쳐다보고 있을 때, 태수는 마부석에 앉아 길 반대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에 있던 두 고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무슨 석양에 아름답다고 저리 빠져들까?

그게 다 위선이고 가식처럼 느껴졌다. 마차에 있던 두 고수에게 잘 보이려는 아부겠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이대로는 이들의 손에 죽게 될 거다. 일단 검총으로 데려가서 그곳의 기관 장치를 이용해서 달아나거나 이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때였다.

그의 신형이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날아오르더니 마차 지붕에 앉아 있는 검무극 옆으로 떨어졌다.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그를 자신의 옆에 앉힌 것이다.

“너 방금 못된 생각했지? 우릴 어떻게 죽여서 떨쳐낼까 연구했지? 검총에서 기관으로 죽이려고 했나?”

“아닙니다!”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태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 정확하게 찔러 대비는 불가능했다!

“못된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되지만 이건 나중에는 못 보는 장면이다. 볼 수 있을 때 무조건 봐둬. 나중은 없다.”

나중이 왜 없나? 그 나중을 위해 이렇게 목숨까지 걸며 살아가고 있는데.

태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키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호수를 낮게 날던 새들이 수면을 스치자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붉은빛을 터뜨렸다. 아름답기는 했다.

문득 태수는 이런 광경을 보는 게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노을이 지는 호수에 서 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쫓기거나 쫓거나, 그렇게 바쁘게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내가 당신 옆에서 저 경치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척하면 당신 마음을 뺏을 수 있는 거요?”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놈이 적어도 노력은 하고 있구나, 싶을 테니까.”

태수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게 당신을 기만하는 거라도 말이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기만 아닌가?”

태수가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결의를 다졌다.

“좋소. 당신이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위선을 떨어줄 수 있소.”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어디 해봐.”

검무극은 석양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하지만 막상 멍석을 까니까 입이 떨어 지지가 않았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웃으면서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 한마디면 되잖아. 이렇게 옆에 앉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더 좋고.”

하지만 검무극이 시범까지 보였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눈물까지 그렁그렁해가면서 그를 속이려 들었는데. 연기라면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자존심 때문인가? 아니면?

“나중에 하겠소.”

“그래라, 그럼.”

검무극은 전혀 강요하지 않았다.

마차 아래에 나란히 서서 호수를 바라보던 혈천도마가 일화검존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도둑놈도 쉽지 않겠군. 세상에서 제일 훔치기 어려운 것을 훔치라고 했으니.

혈천도마는 안다. 검무극이 아무에게나 막 정을 주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 마음을 진심으로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신은 잘 안다.

―딱 한 사람만 훔치는 데 성공했죠.

―누구?

일화검존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니지. 차라리 가면쟁이라면 모를까?

―그런가요? 나는 오라버니 같은데.

오라버니라는 말에 혈천도마가 흠칫했다.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일화검존이 기분이 좋을 때 들을 수 있는 말이었는데.

‘너도 나만큼이나 기분이 좋구나.’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그곳으로 일단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숫자가 수십여 명에 달했다. 순식간에 달려온 무인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포위했다. 그 하나하나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

“이봐, 짐꾼.”

앞으로 걸어 나온 여인은 바로 비룡방주의 딸 추연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비룡십걸은 이제 넷이었다. 그 동굴에서 여섯의 비룡십걸을 잃은 것이다.

“당신들의 시체는 아무리 찾아도 없더군.”

시체뿐만 아니라 장보도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태수를 향했다.

“저자를 데려가는군.”

“여동생을 구해주려고 함께 가고 있소.”

추연이 코웃음을 쳤다.

“날 바보로 여기는군. 당신들 같은 고수들이 고작 저런 자를 위해서 움직인다고?”

그녀는 믿지 않았다.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향했다. 그들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굴에서 봤을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를 어디까지 무시할 수 있을지 보자.’

그러자 추연의 뒤에서 머리가 허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비룡방의 장로인 종백(宗伯)이었다.

그는 방주인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고강한 무공은 물론이고, 무림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비룡방의 고수였다.

성격이 불같이 무서워서 추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물이었다.

“저들이 틀림없느냐?”

“네, 분명 장보도를 가졌을 겁니다.”

종백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서 물었다.

“본인은 비룡방에서 장로직을 맡은 종백이라는 사람이오. 귀하들께서는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정중하게 묻고 있었지만 종백은 마음속에 칼을 세우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반드시 장보도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비룡방에서는 장보도를 구하는 일에 방의 사활을 걸었다. 이미 만혈동에서 너무 큰 피해를 봤기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종백의 시선이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는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향했다.

‘과연 심상치 않은 자들이군.’

겉으로 봐선 전혀 실력을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쪽 전력은 누구와 싸워도 절대 밀리지 않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그럼 자네가 대답해보게.”

“비룡방처럼 대단한 방파가 아닌데, 어찌 장보도 쟁탈전이 벌어진 상황에서 스스로를 밝히겠습니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종백이 검무극을 살폈다. 그러자 추연이 나서서 정중히 말했다.

“저자는 짐꾼에 불과한 자입니다. 크게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종백은 추연이 상대를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청년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었는데,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존재감이 느껴졌다.

“좋네. 그럼 자네가 장보도를 가졌다는데 그건 사실인가?”

“소저께서 오해하신 겁니다.”

추연이 나서서 말했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당신들의 짐을 수색하게 해주면 되겠네.”

“제 몸이나 짐이야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데, 저기 두 분의 몸은 수색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죠.”

검무극이 거절하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그곳에 울려 퍼지는 차분하면서도 단아한 목소리.

“오랜만이에요, 종 장로.”

일화검존이 천천히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 종백이었다.

분명 어디서 봤던 얼굴인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분명 들어본 목소리였고.

‘누구지?’

그의 위기 본능이 재촉했다. 빨리 기억해 내야 한다고.

일화검존이 천천히 종백에게 걸어갔다.

“제가 많이 달라져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때 종백의 눈에 일화검존의 검집이 눈에 들어왔다.

피처럼 강렬하게 새겨진 붉은 동백꽃.

종백의 시선이 다시 일화검존을 향했다. 상대를 알아본 종백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대는!”

그제야 상대가 일화검존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녀 말처럼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화장도 진하게 하고 옷도 화려하게 입었었는데.

설마 이런 곳에서 일화검존을 만나게 될 줄 몰랐기에 그녀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가 뭐라 말을 꺼내기 전에 일화검존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귀한 분을 모시고 여행하는 중이에요.”

종백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마존의 입에서 귀한 분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은?

그가 일화검존을 바라보더니 차분히 말했다.

“본방이 큰 실수를 저질렀소. 이 늙은이가 팔 하나를 잘라 용서를 구하고자 하니 받아주시오.”

그 말에 추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무섭고도 강한 종 장로가 싸워보지도 않고 팔을 자른다고? 그녀뿐만 아니라 함께 무인들도 모두 당황했다.

종백이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검을 뽑았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라겠소.”

쉬이익!

말릴 사이도 없이 그가 검으로 자신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

추연이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종백은 자신의 팔이 잘린 것보다 더 놀랐다.

어느새 검무극이 자신에게 와서 팔목을 붙잡은 것이다.

상대가 자신의 팔목을 붙잡는 순간까지 그의 움직임을 단 한 순간도 인식하지 못했다.

번쩍하는 순간 붙잡혀 있었다. 팔을 붙잡지 않고 자신의 목을 찔렀으면 그대로 죽었으리라.

‘……난 그에게 일초지적에 불과하다.’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마교주도 아니고 소교주인데.

충격으로 얼어붙은 그에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종 장로께서는 이 귀한 팔로 해주실 일이 있으시오.”

누구의 무덤인지 아십니까?

종백은 천마신교 소교주에 대한 온갖 소문을 들었다.

대단하고 뛰어나고 엉뚱하고.

지금 직접 소교주를 대하면서 느끼는 소감을 딱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것이었다.

압도적이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하아.”

종백의 입에서 참았던 숨소리가 새어 나왔을 때 검무극은 잡고 있던 팔목을 놓아주었다.

빠르게 내리치는 팔을 순식간에 낚아챘으니 손목에 자국이 남을 법도 했건만.

자신의 손목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아무에게도 잡힌 적이 없었던 것처럼.

바로 이 차이다!

오르고 또 올라 거의 마지막 경지에 이른 고수를 구분하는 것은 누가 얼마나 더 강하게 때려 부수느냐의 차이가 아니다. 얼마나 높이 날고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냐가 아니다.

바로 이런 사소하면서도 미세한 차이에서 진짜 실력 차이를 알 수 있음을 종백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던 종백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 사람이 당대 천마신교 소교주.’

종백은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부드러운 눈빛에서 어떤 악의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였으니까.

과연 그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자신의 팔보다도 중요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원하시는 게 무엇이오?”

반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연과 다른 무인들은 검무극의 한 수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지 못했다. 모두 종백이 팔을 자르는 데에만 정신이 팔렸기에 그 와중에 왔었나보다 싶었다.

원래라면 추연은 나서서 한마디를 했을 것이다.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느냐고!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분위기도 분위기였고, 그가 말리는 바람에 종백의 팔이 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종백은 무적의 고수였다. 그가 나서서 해결 안 된 일이 없었고, 비룡방에 위기가 찾아오면 항상 그가 선두에 나섰다.

‘한데 왜? 저 짐꾼이 대체 누구기에?’

팔목을 내어주고 부탁을 들어주려는 것일까?

이윽고 검무극이 입을 열었다.

“팔이 두 개니 두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종백은 내심 흠칫했다.

‘팔은 하나만 자르려고 했는데.’

물론 검무극의 농담이었다. 부탁할 것이 두 개였기에.

하지만 다들 긴장하고 놀란 상태라서 그 말에 옅게라도 웃은 사람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뿐이었다.

“첫 번째 부탁은…….”

검무극이 추연을 바라보았다. 종백은 대번에 검무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천마신교 소교주를 짐꾼 취급하며 무시했으니, 그녀를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동굴에서 만났다고 했으니, 그 무례는 한 번만이 아니었을 거다.

“무엇 하느냐? 어서 사죄드리지 않고!”

종백의 천둥 같은 호통에 추연은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귀한 분을 몰라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추연은 종백을 어려서부터 봐왔다. 그는 자신을 보면 누구보다 귀여워해 주고 아껴주었다. 그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종백은 검무극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철없는 아이가 저지른 실수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신의 팔이 아니라 추연의 팔을 원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만약 소교주가 그녀를 응징하길 원하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내주더라도 그것만은 막을 작정이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비룡방주를 볼 면목이 없으리라.

검무극이 추연에게 걸어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알려주지 않았으니 몰라본 건 당연한 일이오.”

검무극이 부드럽게 대하자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자신을 몰라봤다고 호통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기억나시오? 우리가 네 번째에도 살아서 만나자고 말한 것.”

“물론입니다.”

검무극은 잔뜩 겁먹은 그녀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했다.

“하지만 그 네 번째의 넷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넷이 중요한 거요.”

검무극의 시선이 뒤에 선 비룡십걸을 향했다. 열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넷.

눈앞에 있는 자신을 네 번째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하들이 넷만 남은 것이 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수하들이 다 죽어 나갈 때까지 장보도에 대한 욕심을 부려선 안 되었다는 의미였다.

아마 지금도 그녀의 마음에는 수하들의 죽음보다는 장보도가 더 큰 비중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차이가 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섯 번째는 살아서 만나지 못할 거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잘했지만, 추연은 검무극이 한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뭐가 넷이 중요하다는 거지?

검무극이 종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 팔로 뭘 하셔야 할지 아시겠습니까?”

팔을 자를 게 아니라 그 손으로 회초리를 들고 이 천방지축 안하무인을 제대로 가르치라는 의미였다.

검무극의 뜻을 알아차린 종백이 긴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껏 제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본 방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바쁜 방주 대신 자신이라도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너무 오냐오냐 귀엽게만 본 게 문제였다. 자신을 대하는 예의 바른 모습에 나가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줄 알았으니까.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추연의 인생은 앞으로 많이 고달파질 것이다.

‘네 인생을 위해서라도 잘 참고 열심히 노력해라, 철부지 소저야.’

다시 검무극이 종백을 향해 돌아섰다. 종백은 내심 긴장했다.

이번이 진짜 요구사항일 것이다. 오히려 종백은 더 긴장했다. 추연을 용서해 준 구실로 더 큰 것을 요구할 거라 예상했는데.

두 번째 부탁 역시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비룡방주를 설득해서 더는 이번 일에 개입하지 마시오. 적어도 장보도 일로 나를 다시 만나면 안 됩니다.”

검무극은 일부러 강하게 말했다. 비룡방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에는 개입해선 안 되었다.

종백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책임지고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종 장로님.”

종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실 말씀은 이것뿐입니까?”

“네, 팔은 두 개뿐이지 않습니까?”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비룡방이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교 소교주와 이렇게 얽혔는데 어찌 계속 장보도를 얻으려 나서겠는가?

정중히 인사하는 검무극의 모습에 종백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두 가지 부탁 모두 비룡방을 위해서 한 것임을.

굳이 이럴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소교주 혼자가 와도 본 방은 전멸이다.’

추연을 반 죽도록 패고 자신에게 앞으로 끼어들면 죽는다고 협박을 해도 될 사람인데.

종백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일화검존을 향했다.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정말 많이 변한 검존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외모만이 아니었다.

‘강해졌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예전에도 대적할 수 없었는데, 이젠 감히 마주 서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끝으로 종백의 시선이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등에 차고 있는 대도에 천이 감싸져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

소문 속 혈천도마였다면 벌써 나서서 다 휩쓸어 버렸을 텐데.

‘천마신교가 달라졌구나!’

종백이 혈천도마에게도 말없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마교라고 겁먹고 무조건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과 두 마존이 베풀어 준 자비에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제 뜻을 흔쾌히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도 그에게 정중히 포권하면서 수하들 앞에서 그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종백이 추연과 수하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추연은 검무극을 슬쩍 한 번 쳐다본 후 고개를 푹 숙이고 그곳을 떠났다.

그녀가 나이를 먹고 오늘을 떠올리는 순간도 올 것이다. 부디 오늘이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는 사이 석양이 지던 호수는 어두워졌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어가죠.”

검무극이 마차를 호숫가 근처 들판으로 몰고 갔다.

말을 풀어 쉬게 한 후, 모닥불을 피웠다.

두 마존이 함께 가서 저녁거리가 될 것을 잡아 왔다. 검무극은 능숙한 솜씨로 손질한 후 훌륭한 요리를 내놓았다.

태수는 앞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묵묵히 검무극이 내준 음식을 다 먹었다. 음식에 독을 타거나 자백제를 섞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후 두 마존이 호숫가로 산책하러 나가고 그곳에는 둘만 남았다.

“지난번에 네가 안 먹겠다고 거절한 그거, 진짜 종유선태였는데.”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 밥을 먹으면서 그 생각이 났었다. 이 사람들이라면 그것도 진짜였겠구나.

“먹겠다고 했으면 정말 주셨을 겁니까?”

“내 것을 조금 줬겠지.”

절대 주지 않았겠지라는 생각 대신 정말 줬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내 태수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주긴 뭘 줘? 그렇게 귀한 것을. 헷갈리지 마! 저 사람에게.

“왜 안 물어? 당신들 정체가 뭐냐고?”

검무극의 물음에 태수는 타오르는 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안 궁금합니다.”

사실 궁금했다. 비룡방의 장로가 저렇게 겁을 먹는 모습에 자신도 너무 놀랐다.

사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비룡방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의심했다. 같은 편인데 짜고,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확 고문해 버리면 될 일인데, 일을 그렇게나 어렵게 할 리가 없었으니까.

“누군지 물어보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아니.”

태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말해줄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알아?”

“뭡니까?”

“너 말투 바뀌었어.”

듣고 보니 그랬다.

비룡방 종 장로를 만나기 전까진 이랬소, 저랬소, 하다가 지금은 아주 정중한 말투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저는…… 못 느꼈습니다.”

“그건 못 느껴도 되는데 이건 알아야지. 넌 내가 힘 있고 유명한 가문에 속해 있다는 걸 알면 내 마음을 훔치는 일을 포기할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내 옆에서 저 경치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한마디 말을 못 하는 성격이니까. 너, 자존심이 엄청 강해.”

태수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존심 중요하지. 대신에 이건 잊지 마. 자존심이 너무 높으면 결국 낮은 곳에서 굴복하게 된다는 것을.”

그 말이 가슴을 쿡 찌르는 건 자신이 그 알량한 자존심이라도 끝까지 지켜낼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가만히 일렁이는 모닥불을 응시하던 태수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당신이라면 협박을 하건 고문을 하건 내게서 원하는 것을 다 알아낼 수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겁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예전에 도둑에게 신세 진 것이 있다.”

이 사람이? 대체 누구에게 무슨 신세를 졌을까? 그럴 일은 없어 보이는데.

“그게 누굽니까?”

중원의 어지간한 도둑들 계보는 다 꿰고 있는 그였다. 이름만 말하면 누군지 알 수 있는데, 검무극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이건 대답해 주십시오. 당사자도 아닌데 왜 내게 갚으려는 겁니까?”

검무극이 자리에 훌러덩 누우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이렇게 깊은 인연으로 도둑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 같아서. 그냥 네가 받아라! 내가 말했잖아? 네 평생의 도박운 날 만나면서 다 썼다고. 그럼 얻는 것도 있어야지.”

태수는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다시 모닥불을, 그러다 작은 불씨가 날아오르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태수가 불쑥 옛일을 꺼냈다.

“사십 년 전에 한 장의 장보도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검무극이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태수는 모닥불 너머에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대대손손 거부로 살 수 있는 보물이 가득 있는 무덤의 위치가 적힌 장보도라는 소문에 무림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단, 누구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요.”

“지금처럼?”

“네, 지금처럼요.”

언제나 그렇듯 무림의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그 무덤이 바로 지금 이 검총입니다. 당시 절세고수들이 들어가서 단 한 명도 살아나오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보물들을 다 제쳐두고서 그 고수들의 병장기들을 얻을 수만 있다면? 혹시라도 무공비급이라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꺼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겠지요.”

그리고 태수의 입에서 검무극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아십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젓자 태수가 한 사람을 언급했다.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사도일검(邪道一劍) 주가신(朱佳神)입니다.”

사도일검 주가신.

그는 삼백 년 전 사도맹주이자 사파제일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었다.

“검총은 바로 그의 무덤입니다.”

누워있던 검무극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왜 이런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거냐?”

“왜 도둑에게 빚졌다는 것을 말해주신 겁니까?”

정적이 흐르며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태수가 비밀을 말해준 것은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검총까지 가는 동안 당신 마음을 훔쳐서 살아남을 겁니다. 목숨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제가 원하는 보물도 얻을 겁니다. 당신에게 승부를 걸어보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보여줄 것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의 마음을 훔쳐서 살아남았다고.

“검총은 절강성에 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그의 말을 들었다.

“자세한 위치는 도착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태수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기에 검무극이 두 마존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우린 절강성으로 갑니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혈천도마는 내심 아쉬워했다.

‘뭐가 저리 급해서!’

조금은 천천히 말해도 되었을 텐데. 조금은 더 발 닿는 곳을 따라 헤매어도 될 텐데.

하긴 누구에게 걸렸는데 말을 안 하고 배기겠는가?

그래, 누구인데 혈천도마의 이 아쉬운 마음을 모르겠는가?

“여기 이 친구에게 기회를 줘야 하니, 천천히 가겠습니다!”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면

마차가 좁은 길을 지나갔다.

길가에 무성한 풀잎들이 마차를 스칠 때마다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태수는 옆에서 마차를 모는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러다 막다른 길이면 어쩌려고?’

마차를 돌릴 수 없을 텐데?

하다못해 다른 마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 생각해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거 같다. 이렇게 좁은 숲길로 마차를 몰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마치 아는 길인 양 자신 있게 마차를 몰았다.

마차에 탄 혈천도마는 창문을 스치는 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나?’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좁은 길을 선택했을 리가 없으니까.

‘천천히 가겠다더니 뭐가 바빠 이리 서두르는 게냐?’

혈천도마의 시선이 일화검존을 향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운기하고 있었다. 원래도 젊어 보이는 그녀였는데, 선도영과와 종유선태를 복용한 후에는 피부에서 광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때 일화검존이 눈을 뜨며 말했다.

“물소리가 나네요.”

과연 마차 밖 멀리 물소리가 들렸다. 마차로 강을 건널 작정인가?

그렇게 물소리가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마차가 숲속 오솔길을 벗어나는 순간, 장관이 펼쳐졌다.

콰아아아아!

계곡을 울리는 힘찬 물소리.

마차를 세운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두 분 잠시 내리십시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마차에서 내렸다.

보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오는 장대한 폭포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새하얀 물줄기가 바위와 부딪치며 튀어 올랐다. 그 물보라가 햇살과 만나서 만들어낸 무지개는 그야말로 신선이 사는 선경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네 사람은 말없이 폭포를 바라보았다.

웅장함이 주는 평온함이 있었다. 이곳에 서 있으면 온종일이라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느냐?”

혈천도마의 감탄에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이 생색을 냈다.

“어르신께 보여드리려고 미리 공부했죠.”

그럴 리가 있겠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절강을 향해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게다가 이 폭포는 정말 외진 곳에 있었다. 따라서 검무극이 이 구석까지 마차를 몰고 들어왔다는 건 이미 와 본 적이 있다는 의미.

“나중에 저쪽 길로 돌아나가면 길가에 우육면(牛肉麵) 끝내주게 하는 반점이 있습니다. 거기서 식사하고 가시지요.”

그러면서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우육면 좋아하시잖아요?”

일화검존이 그 입맛에 슬쩍 끼어들었다.

“아직도 그 식성 그대로시네요.”

“젊으셨을 때도 우육면 좋아하셨습니까?”

“어찌나 좋아하는지. 매일 그걸 먹었지.”

혈천도마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별걸 다 기억하고 있군.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었네.”

그래도 일화검존이 그때를 기억해 주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혈천도마였다.

“이만 가시죠?”

혈천도마는 검무극에게 고마웠다. 어디 이 폭포가 그가 보고 싶어서 온 곳이겠는가? 자신과 일화검존에게 보여주려고 그 좁은 길을 내달려 온 것이다.

“눈 호강 제대로 하고 간다.”

혈천도마는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전했다.

다시 마차가 출발했다.

검무극은 마차를 왔던 길로 돌려 나가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찾아서 나갔다. 좁은 길을 한참을 달리자 대로가 나왔다.

“길을 어찌 이렇게 잘 아십니까?”

“그야 많이 다녀봐서 알지.”

검무극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면 태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 사람 가문이 표국인가? 그래서 어려서부터 중원 곳곳을 돌아다녀 본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수가 자신이 아는 표국을 떠올리며 헛다리를 짚고 있던 그때.

검무극이 갑자기 태수의 몸을 옆으로 잡아당겼다.

쉬이이익.

태수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태수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고삐 잡아!”

검무극이 태수에게 고삐를 건네주던 그 순간.

쉭쉭쉭쉭쉭쉭!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말을 노리고 날아들었기에 검무극이 몸을 날렸다.

챙챙챙챙챙!

태수는 전광석화 같은 검무극의 움직임에 다시 놀랐다. 왼쪽에서 날아든 암기를 쳐낸 검무극이 어느새 오른쪽 암기를 쳐내고 있었다.

튕겨 나간 암기가 던진 이에게 정확히 되돌아가며 좌우 숲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어찌나 그 움직임이 빨랐는지 태수의 눈에는 쌍둥이가 양쪽에서 동시에 암기를 쳐내는 것만 같았다.

아니, 세쌍둥이였다. 어느새 검무극이 자신의 옆에 앉아서 고삐를 받아 들고 있었으니까.

“꽉 잡아!”

검무극이 고삐를 옆으로 틀자 마차가 방향을 틀었다.

팍팍팍팍팍!

원래라면 마차에 박혔을 암기가 빗나가며 바닥에 박혔다. 다시 날아든 공격을 이번에는 속도를 줄이며 피했다.

마차를 이렇게나 잘 몰다니!

태수는 확신했다.

‘표국 출신이 확실해!’

아마 어려서부터 따라다니며 마차 모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때 태수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기! 저길 보십시오!”

저 앞쪽 길 가운데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마차를 세우려고 쓰러뜨려 둔 것이다. 그냥 통나무 정도가 아니었다. 큰 거목을 쓰러뜨렸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꽉 잡아!”

당연히 마차를 세워야 할 상황이었는데, 검무극은 더욱 속도를 올렸다.

달린다고? 설마 저걸 뛰어넘겠다고?

“멈춰요! 안 돼! 이건 말이 아니라 마차라고요!”

태수의 외침에도 검무극은 미친놈처럼 더욱 내달렸다.

“간다!”

“으아아아아아!”

태수가 비명을 내지르던 그 순간.

말들이 나무와 충돌했다. 아니, 충돌하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말들이 나무를 훌쩍 뛰어넘으며 날아올랐다.

‘이걸 넘는다고? 말도 아니고 마차인데?’

마치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그 모든 일이 느리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쓰러진 나무를 뛰어넘은 마차가 다시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태수가 돌아보니 저 뒤로 양쪽 숲에서 나온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마차가 저걸 뛰어넘었죠?”

어떻게 넘긴.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말과 마차를 허공에 띄워 통째로 넘겨 버린 것이다.

“이 마차에는 날개가 타고 계시잖아!”

앞서 태수가 검무극에게 마차에 탄 두 고수가 누군지를 물었다. 그때 검무극은 두 사람을 자신의 날개라고 했었다.

그럼 그들이 해낸 건가? 아무리 고수라도 이게 가능한 일인가?

조금 전 마차가 날아올랐을 때 마차 안에서 좌측 날개가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날아가는군.”

그러자 우측 날개가 웃으며 말했다.

“소교주가 아니면 이런 생각 그 누가 하겠어요?”

달리는 마차를 허공섭물로 띄워서 장애물을 피한다? 자신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되더라도 뛰어넘을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차를 멈추고 추격자들을 다 죽일 생각을 하겠지.

“덕분에 마차를 타고 하늘도 날아도 보네요.”

신난 표정을 짓는 일화검존을 보며 혈천도마도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이 여정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평온한 두 사람과는 달리 태수는 목숨을 오가는 모험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태수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기! 저기 놈들이 쫓아옵니다.”

저 뒤에서 이십여 명쯤 되는 복면인들이 경공으로 마차를 뒤쫓고 있었다.

“자, 다시 고삐 잡아.”

마부석에서 일어난 검무극이 달리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두 마존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중원에 나오면 마차 추격전쯤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잖아요?”

검무극이 혁낭을 열어서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혁낭 속을 들여다본 혈천도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 사납게 뭔 잡동사니가 이렇게나 많냐?”

“이게 그래 보여도 막상 없으면 엄청 불편합니다. 아, 여기 있구나.”

검무극이 찾아낸 것은 이십여 개의 비수가 꽂혀 있는 가죽띠였다.

“저도 검 안 뽑기로 했으니, 아쉬운 대로 이것으로 상대하겠습니다.”

“그게 그거지.”

혈천도마의 말처럼 검무극이 던지는 비수가 어디 그냥 비수겠는가?

검무극이 가죽띠를 몸에 차고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사이 복면인들이 마차를 거의 다 따라붙고 있었다.

검무극이 비수 한 자루를 뽑아서 가장 가까이 쇄도하는 복면인을 향해 던졌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비수에 복면인은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비수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는 피하지 못했다.

한 명이 쓰러졌지만, 놈들은 계속 쫓아왔다.

쉭! 쉭!

이번에는 두 자루의 비수가 날았다.

앞서처럼 빛처럼 빠른 공격이 아니었다. 이쯤은 피할 수 있겠다 싶은 속도였는데 이번에도 피하지 못했다.

평범하게 날아온 비수가 마지막 순간에 속도와 방향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으로 쳐내려는 이도 막지 못했고 몸을 틀어 피하려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두 명이 쓰러졌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달려왔다.

검무극이 보란 듯이 이번에는 세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일부러 그들에게 보라고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에는 세 자루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복면인 중 한 명이 손을 들어서 다른 이들을 멈추게 했다. 추격하던 이들이 일제히 멈췄다.

검무극은 그가 그들의 수장임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수하 셋이 죽는다는 걸 알아차렸을 뿐만 아니라, 비수를 던지는 실력만 봐도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검무극과 그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복면 위의 눈빛이 차분했다. 상대는 포기해야 할 때 확실히 포기할 줄 아는 자였다.

그가 복면인들과 함께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검무극도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괜찮으냐?”

“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수는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처음 비수가 날아왔을 때 검무극이 자신을 당겨주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추격자가 생겼으니 뭔가 대책을 세우겠지 싶었다. 마차를 버리고 경공으로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말고삐를 쥔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우육면 먹으러 가야지.”

* * *

반 시진 후, 정말 네 사람은 우육면을 먹고 있었다.

“맛이 좋구나.”

혈천도마는 그 맛에 만족했다. 정말 일부러 찾아와서 먹어볼 만한 맛이었다. 함께 시킨 만두도 기가 막혔다.

평소 우육면을 즐겨 먹지 않던 일화검존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맛있었네.”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음을 기대해 주십시오.”

다음 맛집은 일화검존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고 있나?”

“중원에 나오시면 오향장육(五香醬肉)을 즐겨 드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끝내주게 잘하는 곳을 압니다.”

검무극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 귀한 영약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이제 좋아하는 음식까지 대접하려는 그였다.

“저를 데리고 나와주신 덕분에 눈과 입이 호강 중입니다.”

보통 사람은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들을 베풀면서도 오히려 고맙다는 말까지 한다.

그야말로 검무극은 받은 건 돌에 새기고, 주는 건 물에 새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날개가 되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기꺼이 자네 날개가 되어 주겠네.’

그때 혈천도마가 끼어들며 말했다.

“왜 이 사람에겐 오향장육을 사주고 난 우육면이냐? 나도 비싼 요리 좋아하는 거 많다.”

그 말에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함께 웃었다.

이들의 관계를 몰랐기에 태수는 어색하게 함께 웃었다.

그는 내심 마음이 급했다. 이들이 고수라는 것은 잘 알지만.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나?’

그 복면인들이 다른 고수들을 데려오면 어쩌려고?

다행히 검무극이 앞서 습격에 대해 언급했다.

“아까 습격한 자들의 움직임으로 볼 때 잘 훈련된 자들이었습니다.”

청부 무인이나 낭인들이 아니라 하나의 조직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러자 혈천도마는 비룡방을 의심했다.

“비룡방에서 우리 정보를 흘린 거 아니냐? 아니면 그들이거나.”

충분히 해볼 만한 의심이었다. 마지막 만난 이들이 그들인 데다, 종백의 만류에도 비룡방주가 욕심을 냈을 수도 있으니까.

검무극이 종백을 떠올렸다. 떠날 때 그가 보였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비룡방은 아닐 겁니다.”

그는 어떻게든 약속을 지켰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룡방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두 가지 경우겠죠. 우릴 노렸거나.”

검무극의 시선이 태수를 향했다.

“태수를 노렸거나.”

당연히 장보도를 가졌던 태수를 노렸을 가능성이 컸다. 자신들의 정체를 안다면 아까와 같은 공격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태수는 바짝 긴장했다.

“우리 말고 네가 장보도를 가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태수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장보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원한으로 널 죽이려는 걸 수도 있겠지.”

“아시다시피 아버지와 저는 악인들에게서만 물건을 훔쳐 왔습니다. 그래서 이름만 알려졌을 뿐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검무극이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사실 지금 검무극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우릴 찾아낸 거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검무극은 미행에 신경을 썼다.

대로와 소로를 오가며 중간중간 신안술까지 발휘하며 뒤따르는 이가 있는지를 신경 썼다. 게다가 이번에는 폭포를 보기 위해 샛길로 빠졌다. 그때 확인했을 때도 뒤쫓는 이가 분명 없었는데.

가만히 태수를 바라보던 검무극의 얼굴에 혹시? 하는 기색이 스쳤다.

“우리도 아니고 너도 아니면 남은 건 하나지.”

검무극이 곧바로 혁낭을 뒤져서 작은 약병을 하나 꺼냈다.

“태수야, 이리 와봐.”

태수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곳으로 왔다.

“손 내밀어!”

“이게 뭡니까?”

“답을 알려주는 약이다.”

“혹시 자백제인가요? 제 손에 입이 달린 것도 아닌데요?”

주르륵.

검무극은 그의 손바닥에 약병에 든 액체를 부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파랗게 변했다.

“네 손이 대답하잖아?”

“이게 뭡니까?”

“네 손에 추혼향(追魂香)이 발려 있다.”

태수가 당황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전 추혼향에 당한 적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가 당했다고 생각해서 확인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도 아니고 그도 아니라면.

“장보도에 발려 있었겠지.”

누군가 장보도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서 발라둔 것이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놀랍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경험이 많은 마존이라도, 이 순간에 저걸 확인할 생각은 하지 못했으니까.

“추혼향을 없앨 수는 없습니까?”

“있지.”

“없애주십시오!”

검무극이 검을 뽑으려 하자, 태수가 어이쿠 놀라며 손을 뒤로 빼냈다. 손을 자르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건 추종향(追蹤香)보다 효과가 훨씬 좋은 추혼향이다. 일정 시간이 지나 저절로 향이 없어지기 전까지 절대 떨쳐낼 수가 없지. 값이 워낙 비싸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것인데?”

게다가 뒤쫓던 자들 역시 보통 무인들이 아니었다. 저런 무인들이 추혼향까지 사용하면서 쫓아온다는 것은?

“너, 장보도 누구에게서 훔친 거냐?”

그 이름 석 자가 그의 전부거든

“모릅니다.”

태수의 대답에 검무극이 다시 물었다.

“누군지 모르는 이의 물건을 훔쳤다? 악인들의 물건만 훔친다면서?”

태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에 원칙을 어겼습니다.”

장보도가 무림에 출현했다는 소문에 아버지는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는 장보도 쟁탈전에 뛰어들고 말았다.

“제가 장보도를 노렸을 때는 이미 몇 차례 주인이 바뀐 후였습니다. 죽고 죽이고, 난리였지요. 그 난장판 속에서 줍다시피 얻은 것이어서 이 장보도가 애초에 누구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가 발랐는지는 알게 될 거야. 그들은 너를 끝까지 쫓아올 테니까.”

태수는 왠지 그 말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절 고문해서 검총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고 죽여버리면 저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겠군요.”

슬쩍 떠보는 말에 검무극이 기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그래, 절대 너를 죽이지 않겠다 하고선 뒤통수 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겠지.

“그래서 절대 검총의 상세한 위치는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저를 지켜주셔야 할 겁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상전 하나 모시고 가야겠습니다.”

혈천도마는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상전이 하나나 둘이나.”

사실 검무극을 두고 한 말이었지만, 태수는 일화검존을 두고 한 말이라 오해했다.

“나는 자네가 데려갈 그곳의 오향장육이 기대될 뿐이네.”

일화검존의 말에 태수의 마음에 엉터리 서열이 정해졌다.

‘여인이 맨 위고, 다음이 노인, 그리고 이 사람 순서겠구나.’

* * *

마차를 타고 달리면서도 태수의 착각은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어떤 가문 사람인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어디 출신인데?”

“표국이지요?”

검무극이 헉, 하고 놀란 반응을 보이자 태수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마차를 이렇게 잘 모는 것도 그렇고, 마차로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길을 잘 아는 것도 그렇고.”

그냥 일반 문파의 고수였다면 분명 이 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거다.

하지만 표국의 고수라면? 일반적으로 표국이나 상계의 고수들은 무림 문파의 고수에 비해 덜 알려져 있었으니까.

“표국 이름이 뭡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천마표국이라고 들어봤나?”

“처음 듣습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표국이다. 이제 최고의 표국이 되겠지.”

“왜 이름이 천마표국입니까?”

애초에 이 대답을 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었다.

“말이 천 마리가 있거든.”

“천 마리씩이나!”

태수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천 마리나 있을 리가! 허풍이라 여겼지만, 놀란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기회 되면 우리 표국주님께 인사드릴 기회를 주마.”

“천마국주님이시군요.”

“그렇지.”

마차에 타고 있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동시에 웃었다.

―졸지에 표사가 되었네요.

일화검존의 전음에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뭘 저리 장난치는 걸 좋아하는지.

―젊어서 그렇지요.

―젊긴. 애늙은이지.

그건 그렇다는 듯 일화검존이 웃었다. 그녀가 지난날을 떠올렸다.

―우리 젊었을 때 생각해 보세요. 우리끼리 모였을 때 얼마나 놀고 싶어 했는지.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정말 지금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전대 교주나 마존들도 지금보다 더없이 무서웠고.

하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정말 뒷일 생각 안 하고 저지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람들 보는 게 참 흥미롭고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없이 피곤한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 때 생각하면 요즘 녀석들은 정말 편한 거지.

―행여나 제자들에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고루하다는 소리 들어요.

―하라지.

원래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텐데. 일화검존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제 그러지 마세요. 소교주가 기회도 줬는데.

검무극이 더 생기 있고 더 건강하게 살 기회를 줬다는 의미였다.

―젊게 살아요. 젊은 애들보다 더 젊게.

마차 창밖을 쳐다보는 혈천도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두두두두.

얼마나 달렸을까?

마부석의 태수가 검무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력을 봤으니 더 강한 고수를 데려오겠네요.”

“그렇겠지?”

“저들이 누굴 불러올지 모르는데 겁나지 않으십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 복잡한 만혈동에서 너를 찾아냈고, 마차를 습격한 자들을 쫓아냈어. 장보도를 태웠던 너는 우리에게 위치를 알려주겠다고 했고. 그 과정에서 네가 잊고 있는 게 있어.”

“그게 뭐죠?”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태수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린 아직 검조차 뽑지 않았다고.”

* * *

검무극 일행이 떠나간 반점에서 한 노인이 우육면을 먹고 있었다.

그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바로 검무극을 추적하던 복면인들의 수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지한(支寒)이었다.

지한은 노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마음이 급했지만, 노인은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네도 먹지 그러나.”

“괜찮습니다.”

“복면 때문이라면 잠시 벗어도 되네. 우리가 얼굴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지한은 임무가 떨어지면 항상 복면을 착용했다. 복면을 쓰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서였다. 복면은 자신을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노인이 식사를 마쳤을 때, 비로소 지한이 품에서 전표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에 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노인은 액수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모르네.”

순간 지한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대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군요.”

노인은 송노(宋老)라 불렸다.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 상인이었다. 몇 대를 이어 내려온 정보상인 가문이었기에,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특히 이번 장보도 쟁탈전이 그의 영역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관계된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 정보로 큰돈을 버는 중일 테고.

지한은 송노와 꽤 오랫동안 거래를 해왔다. 송노는 언제나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할 때는 딱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정보를 살 돈이 모자라는 경우.

지한이 또 다른 봉투를 꺼냈다.

탁자에 올려진 두 개의 봉투.

송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네.”

그러자 봉투 하나가 더 나왔다.

정보 상인답게 송노는 이 봉투의 성격까지도 정확히 알았다.

“자네들 체계를 내가 알지. 봉투 두 개까지는 조직의 돈이지만, 세 번째 봉투는 자네 개인 돈이지?”

지한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그들의 정보를 사려는 건가?”

지한은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마차 위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던 젊은 남자의 모습을.

“예감이 좋지 않아서입니다.”

송노는 잠시 말없이 지한을 응시했다. 항상 일로 만나서 일로 헤어지던 사이였는데, 오늘 지한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몇 년이나 알고 지냈지?”

“구 년쯤 됩니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

그러더니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전했다.

“솔직히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네. 자네 자리를 거쳐 간 그 숱한 전임들보다 자넨 예의가 있고 점잖았거든.”

지한을 바라보는 송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번 일에서 손을 떼게.”

지한은 알 수 있었다. 송노가 상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그의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송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 없네. 그 이름 석 자가 그의 전부거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보를 알면서도 팔지 않은 경우는.

대체 그 남자가 누구이기에?

“제가 손을 뗄 수 없다는 것 알지 않습니까?”

“목숨이 걸린 일에 못 할 일이 어디에 있겠나? 이대로 자네 조직을 떠나게. 한 십 년쯤 숨어지내다가 나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자네라면 누구보다 잘 숨을 수 있겠지?”

그래, 누구도 찾지 못하게 숨을 수 있을 것이다.

지한이 조직에서 맡은 역할이 바로 누군가를 추적하는 일이었다. 추혼향을 사용하고 그것을 추적하는 일이 바로 그가 이끄는 조직의 일이었다.

추혼대주(追魂隊主) 지한.

이것이 바로 조직 내 그의 신분이었다.

지한은 송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분명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의미. 송노는 자신을 살려주려 하고 있다.

지한이 대답이 없자 송노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오늘 만남이 마지막이 되겠군. 밥값은 내가 내겠네. 그동안 고마웠네.”

떠나려는 송노에게 지한의 떨리는 물음이 날아들었다.

“떠나는 선택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까?”

“떠날 수 없다면…….”

송노가 뜻 모를 말을 전했다.

“죽음을 향해 달려들게.”

* * *

절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그는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기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화룡단주(火龍團主) 천대웅(千大雄).

성질이 괄괄하기로 유명한 그가 이번 장보도 회수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뒤로 지한이 도착했다.

“장보도를 회수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천대웅이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추격하다가 포기했던데? 고작 희생자가 셋뿐인데도.”

“그렇습니다.”

“겁쟁이처럼 달아난 이유는?”

이렇게 대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정확한 대답은 없었으니까.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과연 그 말을 따라 하는 천대웅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언제부터 내 명령이 네 예감보다 못한 것이 되었지?”

지한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천대웅이 기도를 내뿜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답해!”

휘몰아치는 그의 기도는 세찬 돌풍이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고, 호랑이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지한이 고개를 숙였다.

천대웅은 금방이라도 머리통을 박살 낼 것만 같은 기세였지만 다행히 손을 쓰진 않았다.

“추혼향이 널 살렸다.”

추혼향을 추격할 수 있는 이들은 추혼대뿐이었으니까.

천대웅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혈풍사검(血風四劍)!”

그러자 네 명의 무인들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대웅이 지한에게 명령을 내렸다.

“혈풍사검을 그들에게 안내하도록!”

천대웅이 절벽으로 돌아서며 덧붙여 말했다.

“너의 그 불쾌한 예감에 대해서는 장보도를 찾고 난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 * *

태수는 잠을 뒤척였다.

자신의 손에 추혼향이 묻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자려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반면 천하태평 삼인조는 다들 잘만 잤다. 이러다 누가 공격이라도 해오면 어쩌려고? 그래, 자신이라도 지켜야지.

하지만 깨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누군가 다가설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어느새 차가운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순간 태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어느 순간에?’

태수가 슬쩍 눈을 돌려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누워있는 그들에게도 무인들이 검을 겨눈 채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혈풍사검이었다.

검이 겨눠졌음에도 여전히 세 사람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저들보다 더 고수들이다!’

자신이 걱정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다른 고수들을 데려오면 어쩌냐고? 천하태평으로 잘난 척하더니!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리를 질러야 했다. 셋 중의 한 사람이라도 겨누고 있는 검을 피해서 반격할 수 있다면? 적어도 개죽음은 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목에 검이 겨눠진 상태에서 고함은 나오지 않았다.

‘제발! 제발 일어나십시오!’

검무극의 목에 검을 겨눈 혈풍사검이 나직이 말했다.

“이런 한심한 놈들을 죽이지 못해 달아나다니.”

원래 적을 상대할 때 방심하지 않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목에 검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왔음에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방심해도 될 상대였다.

지금도 손에 힘을 줘서 쿡 찌르면 이놈은 죽은 목숨이었다.

그러자 일화검존 옆에 있던 또 다른 혈풍사검이 입을 열었다.

“그자들이야 향이나 쫓아다니는 개 같은 놈들 아닌가?”

“약에 당하기라도 했나? 이래도 일어나지 않는군.”

돌아가면서 대화를 나눴지만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무슨 무기인데 이렇게 꽁꽁 싸매고 다니나?”

그들 중 한 사람이 세워진 멸천대도의 매듭을 풀려고 손을 내밀던 바로 그 순간!

“그거 풀면 죽어.”

그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누군가 자신의 귓가에서 말할 때까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놀란 사람은 검무극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이였다. 누워있던 검무극이 어느새 사라져 매듭을 풀려던 동료 옆에 서 있었다.

“다 죽여라!”

태수를 붙잡고 있던 혈풍사검이 명령을 내렸다.

태수는 다시 쌍둥이를 보았다. 이번에는 네쌍둥이였다.

동시에 세 혈풍사검의 목이 꺾였다.

꽈드득.

동시에 꺾였기에 소리도 하나였다. 정말 태수의 눈에는 세 명의 검무극이 동시에 나타났고, 동시에 꺾었다.

검무극의 무공 경지가 더욱 상승하면서 바야흐로 극한의 경지에 이른 풍신사보의 위력이었다.

왜 네쌍둥이냐?

태수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혈풍사검의 옆에도 검무극이 나타났으니까. 앞서 죽여라, 하는 명령을 자신이 수행했다는 듯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네, 명령대로 죽였습니다.”

혈풍사검의 떨리는 눈동자가 옆에 서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그는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자신들 셋을 죽이는 고수가 있을 줄은. 그리고 그 숫자는 셋이 아니라 넷이 되었다.

“참, 다 죽이라고 하셨죠?”

쇄애액.

꽈드득.

바로 옆에서 봤지만, 태수의 눈에는 검무극이 그의 목을 어떻게 꺾는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혈풍사검마저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으아아아아!”

태수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가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혈천도마가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부스스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언제까지 떠들 거냐? 자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무십시오. 시체만 치우고 우리도 자겠습니다.”

혈천도마가 다시 누웠다.

태수가 살금살금 검무극 옆으로 와서 나직이 말했다.

“가끔 그런 보물이 있습니다. 너무 귀해서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요.”

태수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너무 순식간에 해치우는 바람에 적들을 죽인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였다. 저 적들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날이 밝으면 알게 되겠지.

그때 검무극이 저 멀리 어둠 속을 바라보다가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릴 뒤쫓던 그 복면인이 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떠났다.”

태수가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가 보고 있었다면 실력을 감춰야 했던 거 아닙니까? 이걸 봤으니 다음에는 정말 무서운 놈이 올 거 아닙니까?”

태수의 걱정에 검무극은 이걸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이게 최대한 감춘 실력인데?”

내 마음을 훔친 거 같아

지한은 어둠 속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무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뭘 본 거지?’

순식간에 혈풍사검이 놈에게 당해 쓰러졌다. 멀리서 지켜봤기에 어떻게 그들을 해치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독인가? 암기인가?’

어떻게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지한의 심장을 이렇게 뛰게 만든 것은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틀림없이 나를 봤어.’

그는 어둠 속에 있는 자신을 쳐다보았다. 착각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손까지 흔들었으니까.

이렇게나 멀리 있었는데. 이렇게나 짙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는데.

얼마나 달렸을까?

지한은 멈춰서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너무 놀란 상태로 경공을 펼치면서 제대로 호흡을 펼치지 못했다. 기혈이 얽혀 하마터면 내상을 입을 뻔했다. 정말이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하아, 하아.”

마차 위에서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젊은 남자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은 정확했다.

‘건드려선 안 될 상대다.’

송노가 왜 정보를 팔지 않았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거물이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손을 떼고 떠나라고 한 것은 정말 자신을 위한 충고였음을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단으로 조직을 이탈하면 조직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추적한다.

몇 년쯤 지나면 그만두겠지 생각하겠지만, 그 추적은 영원히 계속된다. 악하고 야비한 조직일수록 배신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추종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었으니 붙잡히지는 않겠지만 평생 쫓기며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할 것이다.

떠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떠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날 수는 없다. 철저한 준비를 한 후에 떠나야 한다.

그렇기에 지금은 돌아가서 보고를 해야 할 때.

과연 혈풍사검의 죽음을 화룡단주 천대웅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혈풍사검이 죽었습니다. 저들은 건드려선 안 될 상대입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그는 수족을 잃은 분노를 터뜨리며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성격이었으니까.

적보다 아군이 더 까다롭게 느껴지는 이 순간, 지한은 송노가 한 말을 떠올렸다.

―떠날 수 없다면…… 죽음을 향해 달려들게.

죽으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해준 말이었으니.

과연 그 죽음이 관대할까?

새벽 별빛 아래 홀로 선 지한의 고민이 깊어졌다.

* * *

천대웅은 휘장 뒤에서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정중히 술을 따르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지금 함께 술을 마시는 인물이 귀한 인물이라는 의미.

그렇게 술을 따른 후에야 조금 전 보고를 되물었다.

“혈풍사검이 죽었다고?”

흥분하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지한은 더욱 큰 두려움을 느꼈다.

“네, 모두 죽었습니다.”

휘장 뒤에서 천대웅이 정중히 상대에게 말했다.

“잠시 드시고 계십시오.”

한쪽 휘장이 걷히며 천대웅이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점잖았던 그가 휘장 밖으로 나오자 사람이 달라졌다.

천대웅이 다짜고짜 지한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쇄애애액!

지한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장력이 문을 박살 냈다. 문밖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누가 죽었다고?”

쇄애애애액! 콰앙!

천대웅이 눈에 보이는 대로 다 박살을 냈다. 휘장 안에서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지만 휘장 안에서 점잖게 군 것은 당신에 대한 예의다.

오히려 밖에서 성질을 부리는 것이 휘장 안에 있던 사람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꽝! 콰앙!

지한이 서 있는 곳 주위가 장력에 박살 나면서 땅거죽이 뒤집혔다. 지한의 몸에 파편이 튀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이 천대웅은 지한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분노를 폭력으로 드러내는 자.

강하기에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 분노가 지한에게 직접 날아들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나서야 천대웅의 화가 가라앉았다.

“누구 소행이냐? 그놈들과 함께 있다던 노인이냐? 아니면 그 의문의 여인이 죽인 거냐?”

지한은 적어도 한 가지는 정확히 보았다. 그 젊은 청년의 소행이라는 것을. 다른 두 사람이 누워서 무공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지한은 솔직히 대답했다.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천대웅은 그것이 정상이라 여겼다.

“그래, 당연하겠지.”

그는 자신을 혈풍사검보다 훨씬 약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실 그뿐만 아니라 조직의 많은 이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무시했다. 냄새나 쫓는 사냥개 취급을 했으니까.

그들이 지한을 싫어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그 추적의 대상 대부분이 조직 내에서 이탈한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지한은 자신들이 조직을 탈출하면 뒤쫓아 올 사람인 것이다.

“겁쟁이처럼 멀리 숨어 있었겠지?”

“혈풍사검께서 싸움에 방해가 된다고 물러나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괜히 적에게 기척을 드러낸다고요.”

거짓말이었다. 위치를 알려준 후 자신이 알아서 멀리 물러났다.

야심한 밤의 기습이었기에 혈풍사검은 자신만만했다. 그냥 대낮에 싸워도 넷이 모이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그들이었으니까.

“그래도 뭐라도 봤을 거 아니냐?”

“순식간에 승부가 나버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천대웅이 지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런 고자질조차 제대로 못 한다면 너는 냄새 맡는 것 빼고 할 줄 아는 게 뭐냐? 이 코를 베어줄까?”

그 경멸의 눈빛을 피해 지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천대웅이 그를 집어던졌다. 지한이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경신술로 내려설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살수를 쓸 수도 있었다.

천대웅이 뒤쪽 휘장으로 돌아서며 그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 정중히 말했다.

“이번 일은 어르신께서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휘장 속의 그림자가 술을 마시더니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지.”

그때 휘장이 걷어지며 어르신이라 불렸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를 확인한 지한은 저 성질 더러운 천대웅이 왜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안내해라.”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마차는 출발했다.

검무극은 지난밤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기에, 태수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제 기습한 자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안다고요? 누군데요?”

“인제 와서 그게 왜 궁금해?”

“제가 누굴 묻어줬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가 아니었다. 대체 어느 정도 되는 고수를 죽인 건지 궁금해서였다. 어제는 너무 놀라고 경황이 없어서 묻지 못했다.

“혈풍사검.”

순간 태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장난치지 마시고요.”

죽인 사람이 넷이라고 네 명으로 활동하는 고수들 아무 이름이나 댄 것이 틀림없었다.

장난을 쳐도 적당히 갖다 붙여야지, 혈풍사검이라니?

혈풍사검은 사파의 이름난 고수들이었다.

일단 그들이 죽인 무인만 해도 셀 수가 없다. 그들이 죽인 사람들 역시 이름만 들어도 아는 고수들이 많았다.

어디 그뿐인가? 사파의 고수들답게 악행도 수없이 저지른 자들이었다.

그야말로 객잔에서 밥을 먹다 누가 혈풍사검이란 이름을 꺼내면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지는 그런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그렇게 순진한 놈 아닙니다. 강호에서 구를 만큼 구른 놈입니다. 그러니 그만 놀리시고 누군지 말해주십시오.”

검무극은 말없이 마차만 몰았다. 혈풍사검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졌다.

태수는 어제 검무극의 그 벼락처럼 빠른 움직임을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정말 혈풍사검입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수는 사색이 되었다. 앞서 장보도 쟁탈전이 벌어질 때만 해도, 자신을 쫓는 이들은 그냥 탐욕에 찬 이름 모를 무인들에 불과했다.

자신의 경공술로, 자신의 축골공으로 피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 이름이 누군지 알 필요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혈풍사검.

말로만 들었던 그 무시무시한 혈풍사검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고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다.

어쩌면 놀라운 이름을 듣게 되는 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추스른 태수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 사람이 혈풍사검을 죽였다고?

“그들인지 알고 죽였습니까?”

“죽일 때는 몰랐지.”

“그럼 지금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침에 보고가 날아들었으니까.”

“누구에게요?”

“천마표국은 중원 곳곳에 정보망이 있거든. 말이 천 마리나 있는데 얼마나 빨리 연락을 주고받겠어?”

태수는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 내용을 읽던 태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종이에 적혀 있는 또 다른 이름 때문이었다.

―혈풍사검은 사왕문(邪王門) 화룡단주 천대웅의 수족으로 활약 중.

“그들이 사왕문에 속해 있었다고요?”

사왕문.

사파에서 난폭하고 악명높기로 유명한 문파였다.

원래 이렇게까지 악명이 높진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 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문파의 위세가 달라졌다.

이제는 무림에서 사고를 치면 사왕문으로 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악인이 모여 있는 문파였다.

“우리 숨어야 합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태수는 정말 겁에 질려 있었다. 사왕문에 대한 모든 소문은 사람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를 기겁하게 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죽였느냐였다. 너무나 잔혹하게 사람을 죽였다.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었고, 그 공포를 이용해서 문파를 더욱 강하게 키워나갔다.

사왕문을 건드려놓고 이렇게 태연하다고?

“말고삐를 주십시오. 제가 숨을 곳을 찾겠습니다.”

언제나 도망가고 숨는 것에 익숙한 태수였기에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차에 탄 두 사람도 그렇고, 이 검무극도 그렇고. 사왕문이란 이름이 나왔는데 왜 이렇게 태평인가?

“제가 축골공을 알려드릴 테니, 만혈동으로 돌아가서 그 구멍에 숨어 있죠.”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른 문파라면 모를까, 사왕문은 정말 악인들이 득실대는 문파였다.

“나야 들어간다지만 우리 어르신들을 그 좁은 곳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상대는 사왕문입니다. 일개 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니까요! 한 몇 년 어딘가에 숨어 지내다 보면 장보도에 대해 잊을 겁니다.”

검무극이 태수를 보며 웃었다. 자신이나 마존들은 몇 년은 고사하고 며칠도 그럴 시간이 없다. 이놈아, 우리 바쁜 사람들이다.

“네 냄새는?”

“아!”

태수는 깜박 잊고 있었다. 저들이 무엇을 추격해 오고 있는지. 손을 자르지 않는 한 사왕문의 추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한 곳을 언급했다.

“사도맹에 도움을 청해볼까?”

태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늑대를 쫓자고 호랑이를 불러들이자고요?”

“이독제독 하는 거지.”

“아무리 사왕문이 악랄한 자들이라고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아니겠습니까? 사왕문이 무너지면 사파의 세력이 약해지는데, 사도맹은 그들을 치지 않을 겁니다.”

“천마신교나 정파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과연 사왕문이 앞장서서 싸울까? 천만에! 그자들은 그 난리통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자신들만의 이득을 얻으려 할 자들이야. 지금의 사도맹은 그들을 없애 버리고 싶어 할 거다. 악에도 최소한의 격은 있어야지.”

그 부분은 검무극이 정확히 보고 있다 하더라도.

“사도맹이 그들을 막아주더라도, 장보도를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안 두고 보면?”

“당연히 뺏겠지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우린 다 죽일 거고요.”

“안 그럴걸?”

천하태평한 대답에 태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사왕문이 장보도를 노리는데 정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태평함이 정말 여유와 실력에서 오는 것일까?

“만약 감당할 수 없는 고수들이 등장하면 저를 내어주십시오.”

물론 진심이 아니라 검무극을 떠보는 말이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당연한 말이었지만 괜히 섭섭했다.

“한데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네?”

“우리가 감당 못 할 상대는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듣자, 태수는 문득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보도는 욕심내지 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다.

자신은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이 순간 검무극의 저 허풍만은 믿고 싶었다.

부디 당신들은 감당할 수 있기를!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한 명의 노인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낸 그는 앞서 천대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그는 백의장삼에 새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 겉으로 봐선 속세를 벗어난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는 다른 식으로 속세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상대가 사왕문임을 알았기에 가슴에 만자가 적힌 옷을 입고 있는 이 노인이 누구인지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악산인(萬惡山人)!”

태수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만악산인은 사파의 절대 고수로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른 자였다.

그에 대한 소문은 정말 많았다. 만 명의 고수를 죽여서 만악산인이라는 말도 있었고, 만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고 붙은 이름이란 말도 있었다. 또 누군가는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이 사람들이 아무리 고수라도 만악산인을 상대할 수는 없어!’

만악산인은 혈풍사검을 죽인 자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장보도는 누가 가졌나?”

그러자 검무극이 망설이지 않고 태수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무리 사실이라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본다고요?

태수는 드디어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음을 느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왔지만.

검무극이 자신을 버리는 게 이해가 갔다. 만악산인을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의 허풍은 여기까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태수가 비장한 눈빛으로 만악산인에게 말했다. 왜 이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내가 장보도를 외우고 있습니다. 나를 데려가시고 이 사람들을 그냥 보내주십시오. 만약 이들을 죽이면 절대 장보도 위치는 알지 못할 겁니다. 이 사람들, 살려주십시오!”

자신에게 조건을 내건 태수에게 만악산인은 살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반면 태수의 옆에선 그 차가움을 모두 상쇄할 수 있는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너 방금 내 마음을 훔친 것 같아.”

대체 어떤 인생을 사신 겁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옵니까?”

태수는 그것이 검무극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자신을 내어주는 미안함을 농담으로 대신하려는 것이겠지.

그런데도 이 남자가 밉지 않다. 말이 천 마리나 있다고 허풍떠는 이 남자가.

“그 마음은 말 한마디로 훔쳐지는 거였습니까?”

태수의 물음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주겠다는 한마디였잖아.”

태수는 이대로 끌려가면 결국 자신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왜 당신을 살리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우리 아버지를 뵙게 되면 제가 죄송했다고 꼭 전해주십시오.”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이 제일 아쉬웠다. 아버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상처 주는 말이 되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바로 그때였다.

“지랄한다.”

입을 연 사람은 만악산인이었다. 그의 눈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가 살려주라고 하면 내가 살려줄 거 같으냐?”

“이들을 죽이면 나는 절대 검총의 위치를 말하지 않을 겁니다.”

만악산인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내가 저지른 일 중에 사람을 고문하는 것이 없었을까? 다들 처음에는 너처럼 기세 좋게 말하지.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너는 다를 거라 자신하나 보군.”

만악산인은 왜 자신이 만악이라 불리는지 증명했다.

“그 전에 네가 보는 앞에서 하나씩 하나씩 모두 죽여주마.”

태수는 당황했다. 자신이 원한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마차에 있는 것들 다 기어 나와라! 통째로 날려버리기 전에.”

만악산인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처럼 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만만했다. 저 마차에서 누가 나오든 죽일 자신이 있었으니까.

마차 문이 열리며 일화검존이 마차에서 내렸다.

화려한 화장도 아름다운 옷도 입지 않았지만, 그녀를 보는 순간 만악산인의 눈에 색심이 스쳤다. 그가 저지른 온갖 악행 중에 음행(淫行)이 어찌 없었겠는가?

“정말 오랜만에 색심이 동하는구나. 넌 마지막에 죽여주마.”

일화검이 살짝 뽑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검을 멈췄다. 그래, 이런 놈 때문에 내기에 질 수는 없지.

뽑으려던 검을 다시 집어넣은 후 일화검존은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에게 말했다.

“자네가 준 두 약이 효과가 있었나 보네. 저런 추한 늙은이의 색심까지 동하게 하는 걸 보니.”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드셨다고 결과가 달랐겠습니까?”

검무극의 말에 일화검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반대쪽 마차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혈천도마의 짜증스러운 목소리.

“넌 손도 대기 싫으니.”

검무극과 일화검존은 혈천도마가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이유도 알았다.

비로소 혈천도마가 마차에서 나왔다.

“그냥 자결해라.”

혈천도마의 차가운 눈빛이 만악산인을 향해 쏘아져 갔다.

욕이 터져 나오든, 살기가 쏟아지든, 무슨 반응이 있어야 했는데.

혈천도마를 바라보던 만악산인의 두 눈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당신은!”

만악산인이 혈천도마를 알아보았다.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왜 여기에?”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혈천도마는 대답 대신 차갑게 물었다.

“싫어? 그럼 내가 죽여주지.”

혈천도마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만악산인을 향해 무시무시한 마기가 휘몰아치던 그 순간.

만악산인이 스스로 자신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머리통이 깨어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정말 자결해 버린 것이다.

“으악!”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태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이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만악산인이, 그 사악한 자가 자결했다고? 대체 왜?

자신이 들었던 만악산인은 그냥 싸우다가 안 되면 온갖 비열한 방식으로 싸웠고, 그래도 안 되면 자멸공이라도 펼칠 인간이었다.

한데 대체 저 노인이 누구기에 만악산인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한단 말인가?

“어이쿠, 저리로 가십시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서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면서.

“대체 어떤 인생을 사신 겁니까?”

혈천도마가 입맛을 다셨고, 일화검존이 웃으며 말했다.

“한때 혈기가 대단했었지.”

만악산인조차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웠던 그였다.

“그 성질 다 죽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혈천도마의 말을 받았다.

“저는 지금이 백 배 더 좋습니다. 그러니 살리지 마십시오.”

그 사이 태수는 만악산인의 시체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죽은 걸 확인하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시체를 흔들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왜 자결했죠?”

넋을 놓은 듯 멍한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무서우니까?”

태수는 결국 또 음모론을 떠올렸다.

“다들 짜고 연기하는 거죠? 제 장보도를 노리고 연기하는 거죠?”

그래서 검총에 들어가는 순간, 지금까지 죽었던 모든 이들이 등장해서 일렬로 서서 자신을 조롱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저기 배우가 한 명 더 있네.”

검무극이 한쪽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 숨어 있던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수만큼이나 놀란 눈빛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지한이었다. 그대로 경공을 펼쳐 달아날 줄 알았는데.

지한이 이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지한이 검무극 앞에 내려섰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검무극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왼쪽 옆에는 팔짱을 끼고 있는 혈천도마가, 오른쪽에는 차분한 눈빛의 일화검존이 서 있었다.

상대는 검조차 뽑지 않고 만악산인을 자결하게 하는 이들이다.

지한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사왕문 추혼대 대주 지한입니다.”

그러면서 착용하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차분한 눈빛과 어울리는 외모였다.

검무극이 그에게 물었다.

“추혼대주라면? 추혼향을 바른 사람이 그대인가?”

“네, 그게 제 일입니다.”

“왜 달아나지 않고 내게 온 건가?”

지한이 만악산인의 시체를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장보도 입수의 책임자인 화룡단주 천대웅은 만악산인이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했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을 겁니다. 평소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제가 적과 결탁해서 그를 죽였다고 누명을 씌우겠죠.”

어떻게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것이다. 누군가는 혈풍사검과 만악산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거기에 또 다른 이유까지 밝혔다.

“십여 년간 누군가에게 예의를 갖추는 바람에 정보를 하나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보상인 송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는 당신의 정보를 절대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떠나라고 조언했죠. 떠날 수 없으면 죽음을 향해 달려들라고 했습니다.”

지한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분의 조언대로 제 목숨과 인생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지한은 간절히 바랐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죽음이 관대한 죽음이기를. 포용력이 있는 죽음이기를.

말을 하는 내내 이건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몸을 맡기려 들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가만히 지한을 응시했다. 차분한 눈빛이 사왕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 사왕문에 들어갔나?”

“저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에 민감하게 태어났습니다. 온갖 냄새가 뒤섞여 있어도 그 냄새를 하나하나 구분할 수 있었고, 어떤 냄새가 멀어져도 쫓아갈 수 있었죠. 저는 세상의 여러 냄새가 좋았습니다. 그러다 스승님을 만나 향을 연구하고 추적하는 추향술(追香術)을 배웠습니다. 스승님은 사왕문에 속해 계셨지요. 어렸기 때문에 사왕문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고, 또 그때만 해도 이렇게 악명 높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검무극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나?”

“제 임무는 대부분 본문에서 달아난 이들을 추격해서 잡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덤비는 자들을 어쩔 수 없이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추혼향을 다루는 인재는 분명 귀영대에 필요한 인재였다.

“원하는 게 뭔가?”

“저를 수하로 거둬주십시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태수도 그렇고, 이 지한이란 남자도 그렇고.

―왜들 이렇게 소교주를 좋아해?

혈천도마의 전음에 일화검존이 대답했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혈천도마는 흥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무극은 그의 부탁을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십 년간 저를 좋게 봐온 사람이 몸을 던져보라고 한 사람이죠. 그분의 안목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사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향을 연구하고 추적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가끔 사람에게서 어떤 냄새를 맡곤 한다. 진짜 냄새가 아닌 어떤 가상의 냄새를.

천대웅에게서 악취가 난다면, 이 사람에게선 좋은 냄새가 난다.

이윽고 검무극이 결정을 내렸다.

“좋아. 받아들이지.”

흔쾌한 검무극의 대답에 오히려 지한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 쉽게 자신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온갖 조건을 걸 줄 알았다. 이것을 해와라, 혹은 충성심을 증명해라.

“이제부터 넌 내 사람이다.”

수하가 아니라 내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누군지 모르는데 아직은 믿을 수 없지.”

“그런데 왜 저를?”

“처음 나를 뒤쫓았을 때, 왜 추격을 멈췄지?”

세 명이 죽었을 때 그는 추격을 포기했었다.

“더 가면 수하들이 모두 죽게 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 현명한 판단력을 믿어서다. 수하들을 아끼는 마음을 믿어서다.”

천대웅은 셋만 죽고 돌아왔다는 사실에 자신을 조롱하고 겁쟁이라고 멸시했다.

검무극은 똑같은 사실을 두고 그 판단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한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지한, 새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자네의 능력은 그 어떤 능력보다 중요한 능력이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조직 내에서 사냥개 취급을 당했던 지난 설움이 밀려들면서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너무나 듣고 싶은 말이었다.

지켜보던 태수는 문득 지한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태수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일을 하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매사 화가 나고 불만이었던 것이 악인의 재물만 훔치라는 아버지의 규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떳떳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지금 눈앞에서 누군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바꾸려 들면 이렇게 바꿀 수도 있는 게 운명이라고 보여주고 있었다.

지한이 태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손에 발린 추혼향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도 옅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럼 추적을 따돌릴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없더라도 추혼대의 수하들이 추적해 올 것이다.

“그렇게 하게.”

지한이 품에서 몇 가지 약병을 꺼내 순서대로 태수의 양손에 부었다.

“이제 네 손 안 잘라도 되겠다.”

검무극의 농담에 태수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간 자신의 손이 모두에게 족쇄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었다.

검무극이 지한에게 말했다.

“안내하게.”

“어디로 말씀입니까?”

검무극이 가고자 한 곳은 생각지도 못한 장소였다.

“화룡단주가 있는 곳으로.”

그 이유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내 사람을 못살게 굴고 죽이려 한 자니, 내가 죽여주겠다.”

지한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또한 진짜 천대웅을 죽일 수도 있음을.

반면 듣고 있던 태수가 펄쩍 뛰었다.

“이쪽에서 먼저 사왕문 무인을 치자고요? 안 됩니다!”

“정보상인 말 못 들었냐? 살고 싶으면 죽음에 몸을 던져라!”

태수는 무서워서 말렸고 지한은 다른 이유로 말렸다.

“그를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이유는?”

“이번 장보도를 회수에 실패하면 그는 어차피 큰 곤경에 빠지게 될 겁니다. 대신 지금 그를 죽이면 사왕문에서 본격적으로 이번 일에 개입하게 될 겁니다. 적진의 바보는 살려두는 게 옳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지한의 올바른 판단에 검무극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 뜻을 따르겠네. 대신, 자네가 죽어야겠네.”

지한은 물론이고 태수도 깜짝 놀랐다.

물론 진짜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장보도에 발랐던 추혼향, 혹시 아직도 남아 있나?”

“네, 있습니다.”

검무극이 만악산인의 시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자의 손에 바르게.”

지한이 시키는 대로 추혼향을 시체의 손에 발랐다.

“저놈은 이곳에서 모두를 죽이고 장보도를 탈취했네.”

그제야 검무극의 계획을 알 수 있었다. 만악산인이 장보도를 가로챈 것으로 꾸미려는 것이다.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검무극이 휘파람 소리를 길게 냈다.

그러자 그곳에 무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검무극과 통천각을 오가며 정보를 전한 무인이었다. 경공술과 은신술만큼은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실력자였다.

“이 시체를 가지고 섬서 방향으로 가게.”

섬서는 지금 가려는 절강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자넬 뒤쫓는 자들이 있을 거야. 최대한 멀리 가서 시체를 버려두고 빠지도록. 시체의 손에 추혼향이 발려 있으니 절대 만져선 안 돼.”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시체의 손을 뒤로 묶어 고정한 후 시체를 업고 그곳을 떠났다. 경공의 고수가 먼저 출발했으니, 나중에 추적하는 이에게 따라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손에 추혼향이 묻은 상태로 시체로 발견되면? 섬서까지 달아나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장보도를 빼앗기고 죽은 것으로 여기겠지.”

지한은 감탄했다. 아주 훌륭한 계획이었다.

우선 장보도에 적힌 위치가 섬서에 있다는 혼란을 줄 것이다.

다음으로 자신은 죽은 사람이 되니까 조직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테고.

결국, 천대웅은 이번 일을 만악산인에게 맡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체를 가져간 저 사람은 누굽니까? 표사입니까? 아니면 쟁자수입니까?”

표사란 말에 지한이 의아한 표정으로 태수를 쳐다보았다.

태수는 ‘이 검무극에 대해서는 너보다 내가 많이 알고 있다’는 쓸데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괜한 경쟁심이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한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무극과 두 고수는 결코 표국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자, 우리도 가자.”

검무극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좌우에 앉았다.

“한 사람은 도망의 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추격의 달인이고. 이거 균형이 딱 맞는데?”

태수와 지한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쫓고 쫓기던 관계에서 이렇게 같은 마차에 나란히 앉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 사왕문 놈들은 엉뚱한 곳에서 실컷 고생하라고 하고.”

마차는 다시 절강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린 오향장육 먹으러 가자!”

이 맛에 줄 서는 거죠

마차는 절강을 향해 달려갔다.

“마차는 제가 몰겠습니다. 뒤로 가셔서 좀 쉬시지요.”

지한은 계속 검무극이 말고삐를 잡고 있자 마음이 불편했다.

“괜찮네.”

검무극이 사양하자 태수가 아는 척을 했다.

“여기 계신 분으로 말씀드리자면 표국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중원을 안 다녀본 곳이 없는 분이라 마차를 정말 끝내주게 모시오.”

검무극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태수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한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시 보고 또 봐도 표국 출신이 아니었다. 아니, 세상에 어떤 표사나 표두가 만악산인을 자결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도둑치곤 눈치가 없군.’

지한에게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태수는 또 아는 척을 했다.

“길은 또 얼마나 잘 아시는 줄 모를 거요.”

검무극 자랑을 하면서 태수는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검무극의 수하는 자신이 아니라 지한이었으니까.

“요리는 또 얼마나 잘하시는지. 해 주신 요리를 먹어보면 깜짝 놀랄 거요.”

지한은 검무극의 내력이 궁금했다. 지금껏 자신이 봐온 수장들은 마차를 직접 모는 것은 고사하고 길을 잘 알지도 못했다. 수하들이 다 해주는 부분이었으니까.

한데 요리까지 잘한다고? 그것도 직접 해서 수하에게 준다고?

지한은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무인으로 살면서 이런 수장을 만날 볼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아니다, 너무 기대하지 말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아직 이 수장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검무극이 불쑥 지한에게 물었다.

“처음에 장보도에 추혼향을 바른 것이 자네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사왕문이 장보도를 어떻게 구했는지 알고 있나?”

“아뇨. 모릅니다. 당시 상부에서 한 사람이 장보도를 가지고 제게 왔었습니다. 절대 잃어서는 안 될 물건이니 가장 효과가 좋은 추혼향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군지 알고 있나?”

지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죽립을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자신을 감춘 자군.”

지한은 그 사람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왕문은 온갖 비밀스러운 인물들로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자의 냄새를 기억하는군.”

“네, 아주 독특한 냄새가 났습니다.”

이번에는 지한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한데 왜 그걸 물어보신 겁니까?”

“이상해서. 사왕문 정도 되는 곳에서 장보도를 구했는데, 다시 잃어버렸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잖아?”

지한은 흠칫 놀라며 물었다.

“설마 사왕문에서 일부러 장보도를 중원에 흘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마부석에서 함께 듣고 있던 태수도 긴장한 표정으로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그런 거라면? 자신은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셈이 되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검무극이 깊어진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장보도 쟁탈전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시선까지 끌었으니까.”

검무극의 말을 들으며 지한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씀하신 우리가 대체 누굽니까?’

이제 자신도 그 우리에 속하게 되었는데.

* * *

들판에 마차를 멈춰 섰다.

말이 풀을 뜯으며 쉬는 사이 다들 각자 쉬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나란히 산책을 갔고, 태수는 들판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검무극은 언덕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할 말이 있었기에 지한이 검무극 옆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언제인가?”

검무극의 물음에 지한이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보려고 노력하게. 내가 이끄는 사람들은 하루에 한 번 하늘 보는 것이 의무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묻고 싶은 말 있으면 해.”

태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물어볼 말이었다. 아무래도 그에게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 같았기에.

“주군의 성함을 알고 싶습니다.”

송노가 말했다. 그 이름 석 자가 그의 전부라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물음에 반해 검무극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나, 검무극이야. 이름 좋지?”

“아주 좋습니다.”

무심코 대답하던 지한이 흠칫했다.

검무극?

분명 언젠가 들어본 이름인데.

기억보다 먼저 몸이 반응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어떤 어두운 기운이 자신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고, 온몸의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검무극, 검무극. 어디서 들어봤더라.

순간 지한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너무 유명한 이름이라서 오히려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그 이름을 자신의 수장이 된 사람의 입에서, 그곳도 이런 들판에 단둘이 서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아니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동명이인이라 여기며 부정하면 할수록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한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맞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그 대답에, 자신을 바라보는 저 여유로운 표정에, 지한은 알 수 있었다.

그 검무극이 이 검무극임을.

“내 수하가 되기로 한 거 후회되나?”

이 질문이 쐐기를 박았다.

‘진짜 천마신교 소교주다!’

지한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닙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만…… 놀랐을 뿐입니다.”

지한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자신의 새 수장이 누구일지 온갖 상상을 다 했다. 명문정파의 후예? 사파의 이름난 고수? 은거를 깨고 나온 반로환동의 고수? 정말 별의별 생각까지 다 했다.

하지만 그 온갖 생각 중에 천마신교 소교주는 없었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사람을 보고 이렇게 환한 웃음을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그런 소교주는 자신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문득 송노가 떠올랐다. 자신이 천마신교 소교주의 이름을 알려달라 했을 때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한편으론 이 망할 늙은이! 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뭐가 어째? 달려들라고?

그나저나 몰랐을 때야 몰라서 그렇다지만, 정체를 알았는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어도 되나? 눈을 마주 봐도 되는 건가? 천마신교에서는 소교주 앞에선 모두 부복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럼 저기 두 분은 누구십니까?”

상념을 떨치며 지한이 용기를 내서 물었다.

“팔마존이신 혈천도마님과 일화검존님이시다.”

“아!”

정말이지 말로만 듣던 팔마존이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만악산인이 자결했는지. 일화검존에게 그런 색심을 드러냈으니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용서를 구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스스로 죽은 것이다. 아니었다면 갈기갈기 찢겨서 죽게 되었을 테니까.

소교주와 두 마존이 다른 수하들을 거느리지 않고 중원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수백,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다닐 줄 알았는데.

직접 봐도 믿기지 않는데, 누가 믿겠는가?

“제가 이렇게까지 대단한 분을 모시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앞으로 지극히 존경하고 하늘처럼 떠받들어 모시도록!”

검무극이 농담처럼 말했음을 알았지만, 지한이 어찌 농담으로 받겠는가?

“이 한 몸 다 바쳐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이 순간 검무극이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건 이것이었다.

“그 한 몸 다 바치다 보면 어느 날 너무 힘든 날도 올 거다. 그럴 때는 땅도 보지 말고, 수하도 보지 말고, 네 마음도 들여다보지 말고, 저길 봐. 나도 보지 말고 저길 보라니까.”

지한이 검무극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활한 하늘에 조각구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하늘을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가로질러 지나갔다.

“한숨을 쉬어도 저길 보고 쉬고, 분통을 터뜨려도 저길 보고 터뜨려. 그러다 보면 내가 작아지는 기분도 들고, 그러다 보면 고민도 작아질 거다.”

힘들 때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천마신교 소교주.

이 사람이 자신의 수장이다.

그리고 지한은 드디어 답을 얻었다.

‘우리는 천마신교다.’

그 무서운 이름이 이제 자신의 이름이 되었다.

그때 그곳으로 태수가 걸어왔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나누고 계십니까?”

“주군께서 사람이 작아지는 법에 대해 알려주셨소.”

태수는 무슨 말인가 눈을 껌벅였지만, 지한은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태수는 괜한 소외감을 느꼈다.

검무극을 대하는 지한의 태도가 더 극진해졌음을 느끼자 그 소외감은 더욱 커졌다.

‘충성심이란 게 저런 건가?’

이전까지는 누군가의 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 지한에게만큼은 괜히 질투 아닌 질투가 났다. 검무극의 마음은 자신이 뺏었는데, 왜 뺏긴 기분이 들지?

“이번 일이 끝나고 돌아가면 당신은 천마표국의 이름으로 온 중원을 돌아다니겠소.”

태수의 부러움에 지한이 움찔했다. 천마란 이름을 저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그러다 당신 죽어!

그런 걱정도 모르고 태수는 넌지시 자랑도 했다.

“나중에 제게 천마표국주님에게 인사도 시켜준다고 했소.”

그럼 정말 죽는다고!

* * *

“저깁니다. 오향장육 맛있는 집이!”

객잔 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들어가려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입구에서는 점소이가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자리가 날 겁니다!”

마차에서 내린 검무극이 먼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걸어갔다.

뒤따르던 지한은 내심 긴장했다.

검무극이 어떻게 할까? 줄을 선 사람들을 겁줘서 내쫓으려나? 아니면 다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려나?

두 경우 모두 검무극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 같았는데.

다음 순간 지한이 눈을 크게 떴다.

검무극이 늘어선 줄의 끝에 가서 선 것이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밥을 먹으려고 줄을 선다고?’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좋다, 저 소교주가 특별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치자.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검무극을 따라가서 줄을 선 것이다. 두 사람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고 신기해했다.

“줄 서서 드시는 거 처음이죠?”

검무극의 물음에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도마가 짐짓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밥 한 끼 먹는데 무슨 줄까지!”

“저기 마차에 가서 쉬고 계십시오. 차례가 되면 부르겠습니다.”

“됐다. 귀찮다.”

말만 그렇게 했지, 이렇게 일화검존과 함께 줄을 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혈천도마는 즐거웠다. 그는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 주는 낯선 즐거움을 이번 출교에서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일화검존이 손을 들어 얼굴에 비치는 햇살을 가렸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슬쩍 매고 있던 대도를 어깨에 걸치듯 들었다. 대도가 해를 가리면서 일화검존의 얼굴을 비추던 햇살이 가려졌다.

그녀가 슬쩍 뒤로 움직이니 혈천도마도 모른 척 따라 움직였다.

일화검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혈천도마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천으로 감은 매듭을 보며 말했다.

“이 매듭이 꽤 오래 버티네요.”

그녀의 말에 혈천도마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내기가 걸렸는데 그게 풀리겠나?”

여전히 승부욕에 불타는 두 사람이었다.

사람 구경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줄은 생각보다 금방 줄어들었다.

“보세요, 드디어 앞의 사람들보다 뒷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맛에 줄 서는 거죠.”

검무극의 말을 들으며 지한은 내심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이 천마신교 소교주 앞에 서 있고, 또 뒤에 서 있다는 것을. 오늘 그들의 식사는 천마신교 소교주와 함께한다는 것을.’

줄이 점점 줄어 이제 다음 차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객잔 앞에 멈춰 섰다.

마차 주위로 말을 탄 무인들이 호위하고 있는 걸로 봐서 돈 많은 집안의 마차가 틀림없었다.

마차에서 일남일녀가 내렸다.

남자가 먼저 내려 여인이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여인은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목과 손목에 번쩍이는 보석을 차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몸에 달고 있는 장신구들 역시 아주 값비싼 것들이었다.

남자 역시 돈 많은 집안의 자제처럼 보였는데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이 여자에게 푹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오향장육이 정말 추천할 만한 하오.”

남자의 말에 여인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객잔을 쳐다보았다.

“실망이네요. 혼례를 앞두고 이렇게 낡아빠진 곳에 저를 데려오다니.”

무시하는 눈빛과 짜증이 섞인 말투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말 한마디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래도 맛은 정말 좋소.”

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향했다. 그녀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는 줄까지 서가며 먹지는 않을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남자가 호위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들이 검무극 앞을 위압적으로 막아섰다.

남녀는 당연하다는 듯 새치기해서 안으로 들어갔고, 무인들이 뒤따라 들어갔다.

점소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미안해하는 그에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능숙한 점소이라면 이럴 때 나서지 않고 눈을 감아야지.”

점소이도 참고 검무극도 참고 마존도 참았지만, 수하된 처지에 지한은 그럴 수 없었다.

“제가 들어가서 따끔하게 교육하고 오겠습니다.”

수행하는 무인들 수준을 보니 자신의 선에서 충분히 처리가 가능했다. 어디서 감히! 제대로 손을 봐줄 생각이었는데.

그러자 검무극이 이상한 말을 했다.

“왜? 저들을 용서해 주려고?”

“네?”

검무극이 자신의 말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가서 따끔하게 혼내주겠다고 말했는데.

하지만 검무극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놔둬. 괜히 나서서 혼냈다가 저 두 사람 관계가 깨지면 안 되지 않겠나?”

그제야 지한은 알 수 있었다. 그냥 놔두는 것이 저들을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서로 비슷한 사람 만나서 평생 고생하라는 의미였다.

그 말에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서운 녀석! 이놈이 나보다 더해.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혈천도마의 눈빛에 일화검존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곧이어 그들 차례가 되었다.

객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의 열기와 음식 냄새가 확 풍겨왔다. 내부는 정말 넓었고 수많은 이들이 가득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고, 탁자 사이를 점소이들이 쟁반에 요리를 담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내부를 둘러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여기 다시 와서 못 먹습니다. 그러니 누가 발을 밟아도 넘어가고 음식을 쏟아도 넘어가고 시비를 걸어도 다 넘어갈 겁니다. 부모 욕 빼곤 다 참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어르신들 오향장육 드시는 겁니다!”

정사대전 중재도 저렇게 열심히는

점소이가 검무극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그 뒤를 따라 걸으며 검무극이 물었다.

“이렇게 사람 많은 객잔 처음이시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검무극과 함께니까 들어온 거지, 줄까지 서서 이런 사람 많은 객잔에 들어올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말을 해주었다.

“오라버니야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줄이라 해도 서지 않을 분이시지.”

혈천도마는 오라버니란 말에 기분이 좋았고, 자신을 정확히 보는 말에 또 기분이 좋았다.

물론 검무극은 그냥 넘어갈 줄이 아니었다.

“그런 줄 있으면 저 부르십시오! 저는 밤새워 섭니다! 사흘 전부터 와서 돗자리 깝니다.”

일화검존이 웃었다. 혈천도마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나갑니다!”

점소이가 쟁반을 양손에 받쳐 들고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야말로 경공을 펼치듯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여기저기서 술 가져와라, 요리 가져와라, 사방에서 소리쳤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점소이들은 민첩하게 반응하고 움직였다.

“저 사람들이야말로 이 전장의 영웅들입니다.”

뒤따라가던 지한은 검무극을 관찰 중이었다.

온갖 것을 다 보고, 온갖 것을 다 참견하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자신의 주인이었다. 지나가는 점소이마저 눈여겨보는 사람이다.

그때 저 앞으로 앞서 새치기로 들어왔던 남녀도 보였다.

그들이 앉아 있는 주위에 네 명의 호위무인들이 서서 지켰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는데 남자는 저렇게 과시하고 싶어 했고, 여인은 그것을 즐겼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검무극 일행이 안내받았다.

“자, 주문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검무극이 오향장육을 큰 것으로 시켰다.

“그리고 가장 좋은 술로 두 병만.”

“보시다시피 손님이 많아 요리가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맛있게만 해달라고 전해주게! 귀한 손님 오셨으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검무극이 쥐여준 은자에 기분 좋게 달려가는 점소이를 보며 지한은 내심 생각했다.

얼마나 귀한 손님인지 어찌 알겠는가? 알면 주인장은 현판 옆에 써 붙일 것이다. 천마신교 소교주와 마존들이 다녀간 집. 아마 대기 줄은 몇 배로 늘어나겠지?

“드디어 먹어보는군요!”

“오향장육이 맛있어 봤자지.”

“드셔 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십니다. 나중에 또 오자고 하실지 모릅니다.”

두 마존이 나중에 또 오라는 바람을 담은 검무극의 말이었다.

그러는 사이 간단한 안줏거리와 함께 술이 먼저 나왔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게 차례대로 술을 따라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인사였다. 이 여정에서 두 사람은 자신이 이끄는 대로 따라주고 있었다. 때론 내키지 않을 때도 있고 불편한 부분도 있을 텐데. 진짜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술을 받은 일화검존도 진심을 전했다.

“오히려 내가 고맙네.”

자신이 좋아하는 오향장육을 위해 검무극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와 줬다.

그녀는 살면서 여러 감정을 겪고 살았다. 기뻐한 적도 있었고, 슬퍼한 적도 있었다. 감동도 있었고, 허무도 있었고 분노와 후회도 있다.

그 온갖 감정들 속에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

과연 이렇게 순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살면서 있었을까?

“이 여정이 참 재미있네.”

“즐거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받아라.”

또로롱.

언제나 그렇듯 술잔에 떨어지는 그 맑은 소리에 혈천도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고맙다.

술을 받은 검무극이 이번에는 지한과 태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내 수하에게도 한 잔. 또 내 마음을 뺏은 양상군자에게도 한잔.”

검무극의 표현에 씩 웃던 태수는 어느새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음을 깨달았다.

검총의 위치를 알려주고 기관을 통과하는 순간 자신을 없애버릴 거라고 걱정했는데, 근래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죽으려고 뭐가 씐 건가?’

어쩔 수가 없다. 상대는 잔을 높이 들면서 저런 말을 외치는 사람이었으니까.

“자, 우리의 오향장육을 위해서!”

지한과 태수가 큰소리로 따라 소리쳤다.

“오향장육을 위해서!”

그들이 너무 큰 소리로 말하는 바람에 저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누가 이렇게 시끄럽나?”

한눈에 봐도 불량기 가득한 무인들이 앉은 자리였다.

검무극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큰 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마시겠습니다!”

검무극의 빠른 사과에 그들은 더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검무극이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오향장육 먹을 때까지 무조건 참습니다! 절대 피 보는 일 없는 겁니다! 자, 건배!”

그렇게 속삭이는 건배를 한 후에 모두 첫 잔을 비웠다.

“캬, 술맛이 끝내줍니다! 어서 나와라, 오향장육아!”

하지만 오향장육 대신 다른 것이 튀어나왔다.

객잔 입구에서 짜증 가득한 소리가 들린 것이다.

“비켜, 새끼들아!”

검무극의 시선이 입구를 향했다.

사나운 눈빛의 한 남자가 입구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저쪽 보지 않습니다! 절대 눈 마주치지 않습니다!”

보라고 한들 가소로워서 보겠는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이곳으로 걸어오는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가 향한 곳은 검무극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그가 앞서 새치기로 들어왔던 남녀에게 걸어갔다.

다가선 남자를 본 여인이 깜짝 놀랐다. 이내 여인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남자의 사나운 눈빛만큼이나 독한 눈빛이었다.

“여긴 왜 왔어?”

“날 버리고 고작 이 병신이랑 혼인한다고?”

남자의 말에 여인과 함께 있던 남자의 표정도 확 굳어졌다.

자존심이 상한만큼 호위에게 내려지는 명령도 무서운 것이었다.

“뭐 하냐? 팔다리를 잘라서 쫓아버리지 않고.”

호위 무인들이 일제히 앞을 막아섰다.

“겁쟁이 새끼답네. 수하들 뒤에 숨어서 짖어대려고?”

“개똥 같은 놈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겠지.”

그들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주위에 있던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밥도 좋지만 목숨이 더 중요한 법.

그 모습에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구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키더니 결국 안에서도 사고를 치려는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이래야 하냐?”

혈천도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무극을 놀렸다.

“네가 움직이는데 어디 밥 한 끼 먹기가 쉽겠느냐?”

검무극이 언제나 피바람을 몰고 다닌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말려야 했다. 칼부림이 나서 다 때려 부수고 시체가 나오는 순간, 오늘 장사는 끝이었다.

다들 긴장해서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잠깐만요!”

검무극이 나서자 들이닥쳤던 사내가 차갑게 반응했다.

“넌 뭐냐?”

“보시다시피 옆자리 손님입니다.”

“그럼 밥이나 처먹지 왜 참견이냐?”

눈이 뒤집힌 남자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큰 대도만큼이나 강렬한 혈천도마의 존재감도, 일화검존의 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도, 지금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조용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검무극이 다가가자 그가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검무극은 그의 옆에 붙어 서서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는 중간 행동이 갑자기 생략된 것처럼 보였다.

검무극과 남자가 동시에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검무극이 혈천도마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남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혈천도마는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나 싶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귓속말이 다 끝났을 때 판을 다 엎을 기세였던 남자가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여자는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검무극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혈천도마가 물었다.

“내 이야기 했지?”

“했죠.”

“뭐라고?”

“저기 저분이 과거에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대마두이신데, 정말 오랜만에 은거를 깨고 세상에 나오셨다고요. 사람을 산 채로 팔다리를 뜯는 분이라고도 했죠.”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을 믿더냐?”

“어르신 인상을 보더니 그냥 믿던데요?”

이걸 웃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혈천도마가 술을 홀짝 마시며 말했다.

“딴말로 쫓아냈으면서 내 핑계는!”

“이 말도 했습니다. 특히 독신으로 오래 사셔서 사랑싸움하는 것들은 하물부터 뜯어버리신다! 딱 그 말 듣더니 바로 나갔습니다.”

대화를 들으며 일화검존이 웃었다.

검무극은 혈천도마의 변화를, 아니 노력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 혈천도마를 찾아가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한데 오늘 이렇게 일일이 다 받아주는 것은 일화검존 때문이리라. 한 번이라도 더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네, 그렇게 많이 웃으십시오.’

그때 새치기 했던 남자가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나?”

쫓아내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시비조로 물어왔다.

남자 뒤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여인이 궁금하다고 했고, 자신이 알아보겠다고 나선 게 틀림없었다.

지한은 이런 상황에서도 소교주가 과연 좋은 얼굴로 그를 상대할까 싶었다. 자신이라면 욕부터 날아갔다. 위험에서 구해줬는데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검무극은 이번에는 팔다리 뜯긴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했다.

“저기 계신 우리 숙부님과 숙모님께서는 혼인하신 지 삼십 년이 되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거짓말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저 자리가 숙부님이 청혼하신 장소지요.”

청혼이란 말에 혈천도마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 이곳에서 드신 오향장육을 드시려고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부모님 생각이 난다고 오늘만은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놈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사람마다 남들은 모르는 사연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검무극이 화제를 돌렸다.

“입구에서 들었습니다. 두 분 혼인하신다고요? 감축드립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혼인 축하보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남자의 표정이 풀어졌다.

“언젠가 두 분도 세월이 지나 이렇게 다시 이곳을 찾으시겠지요? 아, 부럽습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무슨 시비를 더 걸겠는가? 게다가 앞서 그놈을 쫓아내 주기도 했는데.

남자가 제자리로 돌아갔고, 검무극이 자리에 다시 앉았다.

혈천도마가 따지듯 물었다.

“내가 청혼을 이런 시끄러운 곳에서 할 사람처럼 보이냐?”

대답은 일화검존이 대신했다.

“팔다리 뜯는 마두처럼도 보이셨는데요.”

검무극이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도 잠시, 또 객잔에서 우당탕 싸움이 벌어졌다.

앞서 소리쳤던 그 불량한 무인들이 옆자리 손님들과 싸움을 벌인 것이다.

검무극이 돌아보지 않은 채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종유선태도 먹고 선도영과도 먹었는데. 오향장육 먹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검무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싸움이 벌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검무극이 말리러 갔으니 싸움이 제대로 벌어질 리가 없었다.

검을 뽑으려던 자들이 인상을 썼다. 아무리 뽑으려고 해도 검이 검집에 꽉 끼인 것처럼 뽑히지 않았다. 이미 검을 뽑았던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검을 검집에 넣었다.

“뭐야, 이거!”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그 난리통 속에서 검무극이 이 사람에게는 이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하고.

이리저리 오가며 열심히 뭐라 말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일화검존이 말했다.

“마치 무림맹과 사도맹을 오가며 정사대전의 휴전을 위해 중재하는 모습 같네요.”

“정사대전 중재도 저렇게 열심히는 안 하겠다. 훅 불면 먼지가 되어 사라질 자들에게 저게 무슨 짓인가?”

“우리에게 오향장육을 먹이겠다는 무서운 집념이죠.”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과장 조금 보태 평생 웃은 것보다 이번 여정에서 웃은 게 더 많았다.

정사대전은 다행히 발발 직전에 멈췄다. 검무극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은 화해하고 껄껄 웃으며 술을 나눴다.

검무극이 점소이와 함께 탁자 아래에 쏟아진 음식과 깨진 술병을 같이 치워주고 돌아왔다.

“점소이에게 물어봤습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싸움이 벌어지냐고요.”

“그러니까 뭐라더냐?”

“점소이 된 지 칠 년 차인데, 오늘처럼 사고 많은 날은 처음이랍니다.”

“너 때문이라니까!”

“과연 저 때문일까요? 무서운 마두 때문일까요?”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서로의 책임이라 우겼다.

그러는 사이 옆자리에 다른 손님들이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소문 들었나? 검총의 장보도를 가진 사람이 이곳 강서를 지나 절강성을 향해 가고 있다더군.”

“그 장보도 때문에 호남 지역은 난리가 났다던데.”

“전 중원에서 다 몰려들고 있다네. 이제 이곳 강서도 난리가 날 판이야.”

그들의 대화를 들은 지한은 깜짝 놀랐다. 분명 자신이 만악산인의 시체에 추혼향을 제대로 발랐는데. 그 시체는 섬서로 이동되고 있을 텐데.

소문은 섬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따라붙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지한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누군가 이 장보도로 전 무림이 움직이길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지한은 자신을 찾아온 죽립 사내를 떠올렸다. 장보도에 추혼향을 바르게 했던 그 남자, 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수도 놀랐다. 자신은 그저 장보도를 가로챘을 뿐인데 그 이후로 점점 일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점소이가 음식을 가져왔다.

“드디어 왔다! 당장 전쟁이 발발해도 이건 먹어야 해!”

드디어 오향장육이 탁자에 차려졌다.

이제 막 삶은 고기가 잘 잘려져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고 그 위에 쏭쏭 썰린 파가 올려져 있었다. 팔각, 계피, 회향, 정향, 산초의 다섯 향이 고기의 기름진 향과 어울려 식욕을 자극했다.

“자, 두 분 먼저 드시죠.”

혈천도마가 첫 젓가락질을 일화검존에게 양보했다.

“자네 먼저 먹게.”

일화검존이 젓가락을 들던 그 순간!

주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객잔 입구에서부터 퍼져나간 싸늘한 기운이 객잔 내부로 퍼져나간 것이다.

그 기운만으로도 그가 대단한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들려온 묵직한 내공이 실린 차가운 한마디. 모두를 다 죽이겠다는 말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 흘러나왔다.

“모두 젓가락 내려놔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오향장육의 김을 보며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식기 전에 드셔야 하는데.”

우린 앞으로 간다

커다란 덩치로 위협적인 기세를 드러낸 그는 화룡단주 천대웅이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움직이는 놈은 죽는다. 숨도 쉬지 마라.”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천대웅 뒤로 일곱 명의 화룡단 정예들이 늘어섰다.

칠화(七火)라 불리는 그들은 일찍부터 천대웅의 수족으로 활약했던 이들로 거칠고 잔악한 성격이었다.

천대웅이 사왕문의 화룡단주가 되기까지 칠화가 죽인 이들의 숫자는 화룡단 전체 숫자보다 많았다.

정보를 받은 천대웅이 급하게 추적하느라 화룡단 전체가 아니라 그들만 거느리고 달려온 것이다.

천대웅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객잔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보는 순간 지한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여기 있었군.”

천대웅의 말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지한이 이곳에 있다는 정보를 알려줬음을. 원래라면 천대웅은 만악산인의 시체를 쫓아 섬서로 갔어야 했는데.

“냄새나 맡고 다니는 사냥개 따위가 감히 이딴 짓을 저질러?”

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습관처럼 당해왔던 멸시와 괴롭힘이 떠오르며 순간 몸이 굳었다. 동시에 온갖 불쾌한 감정이 그를 뒤흔들었다.

“네까짓 게 감히!”

천대웅은 다른 사람도 아닌 지한에게 속을 뻔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폭발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참고 있었던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네 애비가 이렇게 널 키워준 조직을 배신하라고 가르쳤냐? 그래, 네 애비도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똥 냄새를 맡았겠지? 이 괴물 같은 새끼가 나를 기만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적반하장으로 천대웅이 아버지를 욕보이자 지한의 눈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비록 어려서 자신을 사부에게 딸려 보냈지만, 가난한 집안에서 고생하지 말고 잘 살라고 보낸 것이었다.

그때였다.

“앉아라.”

놀랍게도 차분히 말을 꺼낸 사람은 검무극이 아니라 일화검존이었다.

지한이 놀란 표정으로 마주 앉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만난 이후 그녀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순간이었다.

“먹을 때 같이 먹자.”

“네.”

놀라고 얼떨떨한 마음으로 지한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한마디는 분노와 살기에 휩싸일뻔한 그의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객잔 안은 정적에 휩싸인 채 모두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던 천대웅과는 완전히 상반된 우아한 기품을 드러냈다.

일화검존이 먼저 오향장육을 먹었다.

모두 숨조차 죽였기에 그녀가 음식을 씹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일화검존이 잠시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맛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대웅은 어이가 없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보란 듯이 음식을 먹는다고?

당장에 욕설이 터져나갔어야 했는데, 묘한 매력을 풍기는 일화검존의 미모에 잠시 어떻게 나오나 지켜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검무극이 기뻐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그 고생을 해서 지킨 오향장육인데, 맛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정말이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온갖 싸움을 다 말리며 지켜낸 이 순간이었다.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에게 권했다.

“오라버니도 드셔 보세요.”

혈천도마도 젓가락을 들어서 오향장육을 먹었다.

“나쁘지 않네.”

이 정도 반응이면 극찬이었다.

“나이 먹고 면 요리만 좋아하면 건강 해쳐요. 골고루 이런 것도 자주 드세요.”

일화검존의 시선이 다시 지한을 향했다.

“왜 먹지 않느냐?”

지금 음식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지한은 젓가락을 들었다.

“먹겠습니다.”

“원래 맛있는 음식이 기분을 좋게 해주는 법이다.”

그녀가 자신의 기분을 챙겨주려 한다는 것을 깨닫자 지한은 내심 놀라고 감격했다.

지한이 오향장육을 먹었다.

“맛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지금 정신이 없어 사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문득 지한의 시선이 검무극과 마주쳤다. 그를 보자 자신이 누구의 수하가 되었고, 또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잠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천대웅을 보자 얼어붙은 것은 검무극에 대한 무례다.

“죄송합니다.”

지한이 고개를 숙이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잘 봤군.”

“네?”

“바보는 확실히 바보군.”

앞서 검무극이 천대웅을 죽여주겠다는 것을 그러지 말라고 말렸던 지한이었다. 적진에 바보가 있는 게 낫다고. 한데 그 바보가 지금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거다.

자신을 바보라 칭했음을 느끼고 천대웅이 살기를 쏟아냈다.

“이제 다 처먹었으면 뒈질 준비나 해라.”

쏴아아아아아!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다치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살기는 멀리 뻗어 나가지 못하고 어딘가에 막혔다. 푸웅, 푸웅, 부드럽게 튕겨 나온 살기.

천대웅이 흠칫 놀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자신의 주위를 감싼 것만 같았다. 무공을 배운 이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걸어왔다.

“내 수하 전임 상관이시구려.”

“전임 상관?”

“지한은 이제 내 수하가 되었소.”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라고 할 거 같았는데, 검무극이 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의지대로.”

자신이 수하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수하로 삼아달라고 왔었으니까.

천대웅은 쏟아냈던 살기가 막히자 다소 신중해졌다. 우선 등에 업은 힘부터 내세웠다.

“너는 사왕문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사왕문이란 말에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이 사색이 되었다. 천대웅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그의 언행으로 짐작했지만, 사왕문이라니? 어찌나 악행이 심한지 다들 사왕문이라면 치를 떨었다.

“나야 감당하겠지만 다른 손님들은 체하겠소.”

어느새 검무극은 천대웅과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자자,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잠시 나갑시다.”

분명 두 사람은 조금 떨어져서 마주 보고 서 있었는데 갑자기 나란히 붙어 있었기에 모두의 눈에는 그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가장 놀란 사람은 당사자인 천대웅이었고 다음으로 놀란 이들은 옆에 서 있던 칠화였다.

“오, 근육이 끝내줍니다! 제가 또 근육 있는 분들을 좋아해서.”

검무극이 손가락으로 그의 팔뚝을 쿡쿡 찔렀다. 그러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천대웅은 뿌리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칠화는 천대웅이 그에게 당했음을 직감했다. 그는 남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두 사람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당황한 칠화가 두 사람 뒤를 따라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한이 벌떡 일어났다.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수장이 자신 때문에 싸우러 나갔는데 이렇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달려 나가자 태수도 벌떡 일어나더니 달려 나갔다.

“다들 젊네요.”

일화검존의 말에 혈천도마가 묵묵히 술을 마셨다. 일화검존이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립나?”

당연히 그립죠, 할 줄 알았는데.

일화검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교주를 만나기 전에는 그랬어요. 지난날을 후회하고 그리워하고. 그때는 제 삶에 화가 많이 나 있었죠.”

“지금은?”

일화검존이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외적인 모습부터 내적인 변화까지 모두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후회하세요?”

잠시 말이 없던 혈천도마가 이윽고 지난 삼십 년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꺼냈다.

“후회한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깬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우리 여기 또 와요. 줄도 같이 서고.”

혈천도마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둘이 와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혈천도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대웅은 저항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느새 내공이 제압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상반신의 마혈도 제압당해 걸음만 걸을 수 있을 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신이 그의 눈을 가린 탓일까?

‘고수였구나!’ 대신 그는 다른 후회를 하고 있었다.

‘방심했구나!’

고수는 그 노인과 여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고수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었다. 행동도 너무 가벼웠고, 말이 너무 많았다.

천대웅이 뒤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행히 수하들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그래, 기회를 봐서 놈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검무극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다들 줄까지 서서 맛있는 거 먹으러 왔는데, 당신과 내가 뭐라고 거기서 난장을 피우겠소?”

이 미친놈이 대체 뭐라는 거야? 사냥개에게 당한 것도 모자라 이런 놈에게까지 당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났다.

“근데 아까 내 수하에게 부모 욕은 왜 그리하셨소? 듣기에 영 언짢았소. 내가 어지간하면 잘 참는데, 부모 욕은 참지를 못해서.”

“네게 한 욕이 아니지 않나?”

“내게 했으면 지금 당신 머리통은 바쁘게 오가는 점소이들 발에 차여 굴러다니고 있겠지. 그 전에 몸은 반 토막 났을 거고. 아, 내가 그랬을 것이라는 건 아니오. 나는 주점이나 객잔에서 부수고 죽이고 하는 거 딱 질색인 사람이거든. 아까 함께 있던 두 분이 우리 아버지를 워낙 좋아하셔서. 니 애비, 나오는 순간 목도 뎅강, 몸도 뎅강 하셨을 거란 말씀이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객잔 뒤쪽에 사람이 없는 공터에 도착했다.

그들이 멈춰 서자 칠화가 검을 겨눈 채 두 사람을 둘러쌌다. 천대웅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기에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수하들의 기세를 믿고 천대웅이 물었다.

“장보도, 너희가 가지고 있지?”

“맞소. 우리가 가지고 있소. 그럼 나도 질문 하나 합시다. 우리가 이 객잔에 있다는 거 누가 알려줬소?”

천대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꽈지직.

“으아아아악!”

천대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무극이 가볍게 비틀자 그의 한쪽 어깨가 으스러지며 부러진 것이다.

“어이구, 미안하오. 내가 너무 꽉 잡았나 봅니다. 당신 대답 기다리다가 긴장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이쪽 팔 잡고 기다리겠소.”

검무극이 다른 팔을 잡으려 하자 천대웅이 소리쳤다.

“나도 모른다! 문주가 직접 보낸 사람이라는 것만 안다.”

“모르면 인상착의라도 말해주셔야지.”

“죽립을 쓰고 있어서 못 봤다!”

검무극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추혼향을 바르라고 장보도를 가져온 남자와 동일인이라는 것을.

어쨌든 그가 사왕문주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팔도 부러뜨리고, 이거 미안해서 정보 하나 알려주겠소. 사실 당신이 찾으려는 장보도는 당신을 보낸 사람이 일부러 흘린 거요.”

“무슨 헛소리냐?”

“당신이 내 수하보고 사냥개라 부르던데, 당신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개요. 당신에 비하면 내 수하는 세상 사람 아무도 못 가진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지.”

검무극이 뒤쪽 나무를 쳐다보았다.

“지한.”

그러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 이자들하고 붙으면 몇 명이나 자신 있냐?”

“셋입니다.”

칠화가 인상을 험악하게 굳혔다. 감히 사냥개 따위가 자신들 셋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다니?

“네 재능이라면 조금만 수련하면 일곱 명 모두를 상대할 수 있다.”

검무극은 지한과 이들 칠화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길을 알려주마.”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지한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교주가 자신을 위해 가르침을 베풀어 주겠다는 말이었다.

“너무 감동할 필요 없다. 다들 수련 지옥에 빠져 날 원망하고 있으니까.”

“그런 지옥이라면 얼마든지 가겠습니다.”

천대웅은 검무극이 지한과 대화를 나누며 방심하던 이 순간을 노렸다.

“지금이다!”

동시에 칠화가 검무극을 향해 겨누고 있던 검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들려온 살이 찢기는 소리. 단 하나의 검도 빗나가지 않았다.

푹! 푸욱! 푹! 푹! 푹푹푹!

다음 순간 칠화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자리에서 검에 찔린 사람은 바로 천대웅이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천대웅을 겨누고 있었던 것처럼.

전부 요혈만 노렸기에 천대웅은 왈칵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꽈드득! 꽈득! 꽈득!

검을 찌른 채 천대웅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칠화의 목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돌며 그들의 뒤에서 목을 꺾은 것이다.

그 움직임이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았기에 칠화는 천대웅의 몸을 찌른 검을 채 뽑기도 전에 모두 목이 꺾였다. 번쩍하는 순간 끝이었고, 소리가 행동을 따라가지 못했다.

꽈득! 꽈득! 꽈득! 꽈드드득!

가운데 천대웅이 검에 찔려 죽은 가운데 빙 둘러선 칠화가 선 채로 목이 꺾여 모두 죽었다. 누군가 발견한다면 그야말로 기괴한 모습이라 생각할 광경이었다.

지한은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검무극이 강한 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한 줄은 몰랐다. 자신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실력.

그 소교주가 자신을 바라보며 장난기가 사라진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뒤돌아보지 마라. 우린 앞으로 간다.”

지한이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절대 과거에 갇히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뒤에서 소리쳤다.

“저도!”

모습을 드러낸 태수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검무극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사람처럼 담담히 말했다.

“결정은 아버지를 뵙고 난 후에 내려라.”

태수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급했음을 깨달으며 크게 심호흡하듯 숨을 내쉬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자 손님들과 점소이들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몇몇 사람들은 박수까지 쳤다.

지한과 태수는 마음 편히 오향장육을 먹고 술도 마셨다. 주방에서 특별 요리가 추가로 나왔다.

“너무 맛있습니다.”

이제야 지한은 진짜 오향장육의 맛을 느꼈다.

검무극은 주방 앞으로 달려가 음식이 나오는 구멍으로 소리쳤다.

“너무 맛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맛, 변하지 않고 잘 지켜주십시오! 언젠가 또 찾아올 분들이 계십니다!”

그 모습을 보며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만 있을 때 또 오자고 했는데.

귀신이 따로 없지.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으며 잔을 내밀었고 일화검존이 건배했다.

그들의 잔에 담긴 것은 술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 * *

마차는 달리고 또 달려서 드디어 절강성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절강성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무인을 보았다. 고수도 있었고 하수도 있었다. 떼를 지어온 자들도 있었고, 홀로 온 자도 있었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마차가 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태수는 비로소 검총의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었다.

“검총은 이곳 천목산(天目山)에 있습니다.”

하늘의 눈이라 불리는 천목산이었다.

“산의 동쪽 봉우리와 서쪽 봉우리에 각각 연못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그것이 눈처럼 보인다고 해서 천목산입니다.”

태수가 검총의 정확한 입구를 밝혔다.

“그 왼쪽 눈 아래에 검총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습니다.”

보물 찾으러 가볼까?

새로운 별이 빛나며 또 하나의 별자리가 완성되었다.

“하아.”

천장을 올려다보던 신녀궁주 가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가운데 가장 큰 별을 중심으로 주위의 여러 별자리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파훼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떨리는 눈빛으로 보고하는 그녀의 뒤에 암흑궁주 화무경이 서 있었다.

“이대로라면 예상보다도 더 빨리 칠십이성금혼진의 봉인을 파훼하고 나올 겁니다.”

화무경은 동요하지 않은 채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겹겹이 쌓이고 쌓인 그의 주름살은 그의 감정을 철저히 감춰주고 있었다.

거기에 암흑의 기운마저 은은하게 그를 감싸니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가예는 직접 물어야 했다.

“궁주께선 두렵지 않으십니까?”

“두렵네.”

오래된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가예는 안다. 이 암흑궁주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봉인 속의 그라는 사실을.

그랬기에 이번 검총 계획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이번이 우리에겐 마지막 기회인데, 그가 혼자서 소교주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까지 함께 있지 않습니까?”

가예의 걱정에 화무경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는 혼자가 아니네.”

그 말에 가예의 눈빛이 빛났다.

“누굴 보내신 겁니까?”

“충분히 믿을만한 사람을.”

거기에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가 곡을 완성했네.”

가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요? 대성을 이루려면 아직 한참 남았잖아요?”

그러자 화무경에게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천의신단(天意神丹)을 그에게 주었거든.”

가예는 알고 있었다. 천의신단은 가장 중요한 순간 암흑궁주가 사용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천의궁 최고의 영약이라는 것을.

그는 그 순간이 지금이라 판단한 것이다.

“우린 육도원기를 모두 회수할 것이고 소교주는 이번에 죽을 거네.”

* * *

“검총의 입구는 연못 아래 숨겨진 수중 동굴로 들어가면 있습니다.”

입구를 말하는 태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내심 긴장했다. 이제 자신의 마지막 패를 다 깠으니 자연스럽게 목숨은 위태로워졌다.

두려운 마음에 감히 검무극을 떠보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물론, 검무극은 잔뜩 긴장한 그를 놀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이제 넌 필요 없어졌군.”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태수는 흠칫 놀라다가 배짱을 부렸다.

“과연 제가 진짜 위치를 말했을까요?”

“왼쪽 호수가 아니면 오른쪽 호수로 가보면 되겠지.”

“이 산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 산이 아니다?”

그렇게 대놓고 물어오자, 태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오면서 검무극을 봐왔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한다고 그게 어디 통하겠는가?

태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연못가에 볕 잘 드는 곳에 묻어주마.”

“아뇨, 다른 데 묻어주십시오. 거기 누워서 연못을 볼 때마다 후회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때 도망갈 걸 하고요.”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후회하지 않게 지금 기회를 주지.”

검무극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태수도 내심 긴장했다.

“지금부터는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죽을 위험이 크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떠나도 된다. 떠나고 싶다면 보내주마.”

검무극의 제안에 태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떠난다면 확실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건들지 말았어야 할 장보도를 건드리고도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욕심만 버리면 살 수 있었다. 살려준다고 할 때 떠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만.

“저는… 끝까지 함께하고 싶습니다.”

이번만큼은 끝까지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선택권은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지한에게 물었다.

“자네는?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산 아랫마을에서 나를 기다리면 된다.”

지한은 이 부분에 대해 이미 생각을 해봤는지 곧장 대답했다.

“주군께서 위험한 곳에 계신 데 어찌 저만 안전한 곳에 있겠습니까? 저도 끝까지 모시고 싶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어떤 약속?”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제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구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제 쪽으로는 눈길 한번 안 주셔도 됩니다.”

무공이 떨어지는 자신이 검무극에게 짐이 될까 걱정해서 한 말이었다.

나름 어디 가서 빠지는 무공실력이 아니었는데, 검무극의 실력이 워낙 대단하니 이런 걱정이 절로 들었다.

“원래 신경 안 썼을 텐데. 자네가 그 말 하는 바람에 이제 신경이 쓰이겠네.”

“아! 저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지한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즐긴 후에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내 도움을 바라지 마라. 여력이 되면 도와주겠지만, 상황이 급할 때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절대 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눈빛에 검무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안도의 말을 전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자네를 지켜주지 못할 적이라면, 어차피 나 혼자 싸워도 못 이기는 적이다.”

지한은 검무극이 자신을 데려가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앞으로 자신이 천마신교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천마신교 소교주와 함께하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로 생각했다. 어디 소교주뿐인가? 마존 둘과도 함께 하는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지상최대의 순간.

평생 한 번 있을 이 일을 두렵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검무극은 태수와 지한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지금 당장 저기 보이는 마을에 가서 객방을 얻고 마차를 맡기고 와라. 잠깐, 이 짐은 내리고.”

검무극이 마차에 실려 있던 자신의 혁낭을 챙겼다.

그 모습에 혈천도마가 물었다.

“설마 그 짐을 가져가려는 건 아니겠지?”

“가져가야죠. 그곳에서 두 분 주무실 일이 생길 수도 있잖습니까?”

“우린 괜찮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객지에 나오면 잠자리를 더 가려야 하는 법입니다.”

혁낭을 내리자 지한과 태수가 마차를 끌고 마을로 갔다.

이제 그곳에는 검무극과 두 마존만 남았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작은 가죽을 꺼내 바위에 펼쳤다.

“여기 앉으십시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어쩌니 해도 부드러운 가죽에 엉덩이가 편했다.

그때 산 위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오는 동안에도 이곳 절강으로 모여드는 무인들을 보았다. 한데 그들은 이 넓은 절강성에서도 정확히 이 천목산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이쪽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의미.

“이거 함정이지?”

혈천도마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보입니다.”

“이렇게 대놓고 함정을 파서 효과가 있나?”

그러자 검무극이 산 위를 쳐다보았다.

“효과가 있잖습니까? 다들 이렇게 모여들었으니까요.”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일화검존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번 일에도 그 배후 놈들이 개입한 건가?”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검무극은 추측했지만 혈천도마는 단정을 내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놈들 짓이겠지.”

그만큼 검무극의 판단을 믿고 있는 혈천도마였다.

“너, 혹시 처음부터 알고 나온 거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까지 모신 거고요. 만약 제 예상이 맞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눈빛을 마주쳤다.

“영약값은 해야겠지?”

혈천도마의 말에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톡톡히 해야겠어요. 저도 그렇고 오라버니도 그렇고 얼굴에서 표가 나니까요.”

혈천도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막대한 내공이 늘어난 거? 중요하지 않다. 그 어떤 말보다 젊어 보인다는 말이 제일 기분 좋은 요즘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한과 태수가 다시 돌아왔다.

“오늘 길에 보니 이곳으로 무인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소문을 퍼뜨려도 제대로 퍼뜨린 모양이었다.

“자, 우리도 보물 찾으러 가볼까?”

그렇게 검무극을 선두로 그들이 천목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에 태수가 나직이 말했다.

“장보도에 이곳 천목산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 입구가 서쪽 봉우리 연못을 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암어를 풀어야만 알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야 아버지께 암어를 해독하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아서 풀었지만, 다른 이들은 쉽게 풀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산 중턱에 커다란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충 싸우는 게 아니라 검에 찔려 죽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장보도를 내놔!”

놀랍게도 이곳에서조차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장보도 때문이었다.

“없다니까!”

“저놈이 장보도를 가졌다!”

“거짓말이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죽여서 품을 뒤져 장보도를 찾고, 또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이 상황으로 볼 때 이곳에 검총의 입구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소문에 휩쓸려 온 이들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고수들은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검무극 일행 역시 멀찌감치 떨어져서 어느 정도 싸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계속되던 그때.

누군가 내공을 실어서 말했다.

“모두 싸움을 멈추시오! 내가 여러분 모두를 검총으로 안내하겠소!”

그 말에 싸우던 이들이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검총으로 안내한다고?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나올 줄이야.

모두의 놀란 시선이 말을 꺼낸 사람에게 향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지한과 태수도 깜짝 놀라 함께 쳐다보았다.

안내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얼굴에 철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다. 철면(鐵面)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특이하게 들렸다. 그랬기에 그의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그곳으로 안내하겠다는 거지? 혹시 장보도를 당신이 가졌나?”

과연 그렇다는 듯 철면 사내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맞소, 검총의 장보도요.”

그를 둘러싼 이들의 눈빛에서 욕심 가득한 살기가 솟구쳤다.

다음 순간 철면 사내가 사람들 앞에 장보도를 펼쳤다.

“자, 싸우지 말고 모두 보시오.”

무인들이 다가가서 장보도를 보았다. 마음 같아선 그것을 뺏어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가까이서 느껴지는 철면 사내의 독특한 분위기와 여유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장보도에 적힌 위치는 이곳 천목산이 맞았는데, 정확한 위치는 나와 있지 않았고 알 수 없는 글자와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보다시피 정확한 입구는 암어로 되어 있소. 그렇기에 그대들이 이걸 구하더라도 당장 그곳에 갈 수 없소.”

그러자 누군가 소리쳤다.

“당신의 그 장보도가 진짜라는 것을 어찌 믿소?”

“장보도는 진짜요. 나는 이 암어를 풀어서 검총의 입구를 발견했으니까.”

그 말에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런데 우릴 검총으로 데려가 주겠다고?”

“그렇소.”

당연히 무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웃기는군. 그 말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있는 사람을 다 죽여도 모자랄 판국에 우릴 다 데려가겠다고?”

그곳에는 함께 간 동료까지 죽이겠다는 독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다. 그랬으니 어찌 그 말을 믿겠는가?

철면 사내가 이유를 밝혔다.

“혼자서는 그곳을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오.”

그 말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여럿이서 힘을 합쳐야만 들어갈 수 있소. 혼자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곳이었소.”

군웅 중 누군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중에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이 날 텐데. 자신이 누군지 밝히고 싶은 사람 여기 있소? 그럼 당신부터 신분을 밝혀 보시오. 나도 밝힐 테니까.”

그 말에 더는 그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누군가 나섰다.

“이건 함정이오.”

이번에 나선 남자는 이마에서 턱까지 길게 검상이 있는 중년 무인이었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왜 함정이오?”

그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군웅들 앞에 펼쳤다.

“장보도가 여기도 있으니까.”

가까이 있던 이들이 내용을 확인했다.

“똑같은 장보도다!”

과연 철면 사내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장보도였다. 글자 한 자 안 틀리고 완전히 똑같았다.

검상 사내가 모두에게 말했다.

“똑같은 장보도를 여러 개 만든 이유가 무엇이겠소? 누군가 이곳에서 우릴 다 죽이려는 음모 아니겠소?”

무인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장보도가 두 개나 나온 이상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철면 사내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안 들어가실 거요?”

철면 사내는 이들의 욕망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장보도가 두 개든 세 개든, 설령 열 개가 돌아다닌다 해도, 그곳을 확인 안 하고 그냥 가실 거요? 그렇다면 지금 당장 떠나시오. 함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떠나시오.”

분명 정황상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는 이는 없었다. 그러다 진짜면? 장보도야 여러 개를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나? 자신이 떠나고 남은 이들이 검총의 보물을 차지한다면? 그건 못 참을 일이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누군가 함정으로 생각하게 해서 검총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고 장보도를 두 장이나 만든 게 틀림없소!”

그러자 다른 무인들이 소리쳤다.

“나는 떠나지 않을 거요. 나를 데려가시오!”

“나도 가겠소!”

“우린 떠나지 않겠소.”

“당신을 따라가겠소!”

저 철면 속의 인물이 누군지 알고?

하지만 모두 검총의 보물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철면 사내가 검상을 입은 무인에게 말했다.

“함정이라 생각한다면서 왜 떠나지 않으시오?”

검상 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끝내 그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혈천도마는 당장 철면 사내부터 의심했다.

“저자가 수상하군.”

그의 나직한 말에 검무극은 함정이라고 말렸던 검상 무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저자도 수상합니다.”

“왜?”

“굳이 함께 데려가려는 자도 수상하지만, 저자는 왜 굳이 말리려고 나섰을까요?”

듣고 보니 그럴듯했기에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주위의 수많은 이들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들 중에 분명 우리의 적이 있을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지한이 놀란 표정으로 코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냄새가 납니다.”

그대의 죽음이 우릴 새로운 길로

“그때 그 냄새입니다.”

지한이 말한 냄새는 바로 추혼향을 바르라고 했던 그 죽립인의 냄새였다.

“그자가 여기 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지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다른 냄새가 많이 섞여서 가까이 가야만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 미약한 냄새를 맡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지한이 제대로 냄새를 맡으려 앞으로 나가려고 했을 때, 검무극이 그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한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무턱대고 다가갔다간 이쪽에서 그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들키게 될 테니까.

철면 사내가 앞장서서 정상으로 올라갔다.

“자,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그 뒤를 무인들이 뒤따랐는데 아직은 반신반의했다.

검무극 일행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그야말로 철면 사내의 등장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철면 사내는 정말 암어를 해석했는지 서쪽 봉우리로 올라갔다.

그곳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말이 연못이지 호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컸다.

“이 연못 아래에 검총으로 통하는 수중동굴이 있소.”

그는 정확히 검총의 입구를 알고 있었다.

“숨을 한참 동안 참아야만 통과할 수 있소. 헤엄을 못 치거나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러자 무인 중에서 물을 겁내는 사람이 물었다.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오?”

“천천히 백을 셀 때까지 참아야 하오.”

백 정도는 다들 셀 수 있을 거로 여겼다.

그때 검무극이 헤엄에는 자신 있다는 태수와 지한에게 경고했다.

“저 말만 듣고 방심했다간 죽게 될 거다. 헤엄도 쳐야 하고, 더 큰 문제는 저 아래에서는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거다.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 숨이 막혀 네 몸을 붙잡고 늘어질 수도 있지. 저 백을 물 밖에서의 백이라 생각하지 마라.”

“네!”

태수와 지한이 마음을 다잡았다.

검무극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걱정하지 않았다. 마존쯤 되는 고수라면 물속에서 수인들과 일전도 벌일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내 뒤를 잘 따라오셔야 하오.”

철면 사내가 망설이지 않고 물로 뛰어들자 혹여나 그를 놓칠까 연달아 무인들이 뛰어들었다. 바로 그의 뒤에 붙어 가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반면 검무극은 느긋했다.

혁낭에서 피풍의의 재료가 되는 천을 꺼내더니 혁낭을 둘러쌌다.

“정말 별걸 다 가지고 다니는구나!”

정말 없는 게 없는 검무극의 혁낭이었다.

“두 분 헤엄은 좀 치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혈천도마가 코웃음을 쳤다. 일화검존이 그 자신감을 대신 설명했다.

“물개시네.”

검무극이 피풍의로 둘러싼 혁낭을 혈천도마에게 맡겼다.

“물개님께 이 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두 녀석을 챙겨야 할 것 같아서 짐을 맡기는 것이다.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할 테니까.

“잘하는 짓이다, 늙은이에게.”

“이젠 그렇게 안 늙어 보이십니다.”

그때 일화검존이 손을 내밀었다.

“나 주게. 내가 가져가겠네.”

그녀에게 주려고 하자 혈천도마가 먼저 혁낭을 가져갔다.

태수가 먼저 물에 뛰어들었고 그 뒤를 지한이, 그리고 검무극과 두 마존이 뛰어들었다.

태수가 맨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정말 혈천도마는 그 큰 짐과 대도를 가지고서도 물개처럼 헤엄을 잘 쳤고, 일화검존도 우아한 몸놀림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변이 어두워졌다. 물고기들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갑자기 확 나타난 것은 사람의 시체였다. 벌써 익사한 사람이 나온 것이다.

당황한 태수가 순간 방향을 잃었다. 시체를 보면서 마음이 흐트러진 데다, 바닥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두웠다. 잠깐 이리저리 헤매던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들려왔다.

―오른쪽이다.

과연 검무극이 알려준 쪽에 바위들 사이에 구멍이 있었다. 원래는 수초로 가려져 있었던 곳이었는데, 먼저 들어간 이들이 다 잡아 뜯어서 입구가 드러나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며 태수는 문득 이런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한데 물속에서도 전음이 되는 건가?’

자신이 알기로는 안 된다고 들었는데. 혹시 환청을 들었나?

동굴은 어른 두어 명이 나란히 헤엄칠 수 있을 크기였는데,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끝에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절대 들어갈 일이 없는 동굴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다시 태수가 당황했다. 익사한 시체가 통로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옆으로 밀고 가려는데, 둥둥 떠 있는 시체가 마음대로 움직였다.

마음이 급하니 쉽게 치워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촤아아악.

뒤따르던 혈천도마가 손을 내뻗자 거품이 일어나며 순식간에 시체가 저 앞으로 밀려 날아갔다.

이제 혈천도마가 선두에서 헤엄치며 떠 있는 시체들을 치우며 나갔다. 가다가 죽은 이들의 시체가 한두 구가 아니었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었다. 벌써 백은 다 센 거 같은데.

‘이거 이러다가…….’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태수의 숨이 막혀 왔다.

질식의 공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검총 입구도 못 가보고 죽다니! 아니 그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안내하는 사람이 익사해서 죽는다?

이건 죽어서도 부끄러울 일이었다.

‘한다! 해낸다!’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정신이 점점 흐려졌다.

바로 그때였다.

그에게 검무극의 전음이 들려왔다.

―눈 감아!

이번에도 환청인가? 감지 말라고 해도 태수의 눈이 스르르 감기던 그 순간.

촤아아아아악.

그의 몸이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에서 헤엄치던 지한도 검무극의 손에 이끌려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 떠.”

눈을 떴을 때 어느새 두 사람은 물 밖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먼저 밀고 온 시체들이 그곳에 둥둥 떠올랐다.

검무극이 두 사람을 물 밖으로 내던진 후 자신도 나왔다.

태수가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한이야 혼자서도 왔겠지만, 태수는 정말 죽을뻔했다. 검무극이 도착해서 자신을 죽이면 어쩌나, 이런 고민을 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곧이어 마지막으로 일화검존도 물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십여 명이 서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고 다시 지하동굴로 연결되어 있었다. 먼저 나온 사람들은 다 동굴로 들어갔는지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화검존의 젖은 옷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혈천도마가 뒤돌아서며 대도로 그녀의 몸을 슬쩍 가려주었다.

화아아악.

일화검존이 몸에 열양지기를 일으켜서 선 채로 옷을 말렸다.

“이런 수중동굴을 헤엄친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오라버니는요?”

혈천도마도 열양지기로 옷을 말리며 대답했다.

“나라고 있었겠나?”

검무극은 옷을 말리지 않았다. 뽀송뽀송하게 등장하는 건 두 사람이면 충분했으니까.

동굴을 걸어 들어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고, 먼저 들어갔던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물에 뛰어든 숫자가 많았는데 다 죽고 이곳에는 이십여 명의 무인들만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다섯 사람을 향했다. 한 사람이라도 숫자가 줄어야 하는데, 다섯 명이나 합류하니 자연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어서 문을 여시오!”

저 앞쪽 철면이 서 있는 곳 뒤쪽에 석문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검총의 입구였다.

이 문 너머 자신들의 운명을 바꿔 줄 것이 있다는 생각에 문을 향한 무인들의 얼굴에는 욕심과 열망이 가득했다.

철면 사내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모두의 시선을 압도한 것은 수백, 수천 개의 검이었다. 검들이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박혀 있었다. 그야말로 검의 무덤이란 말에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은 그냥 평지가 아니었다.

어딘가의 대청을 재현한 곳이었다. 기둥과 의자, 벽에 둘러선 석상들, 보이는 모든 곳에 검이 박혀 있었다.

각자 저마다 사연이 있을 법한 수많은 검.

무인들이 주위에 있는 검부터 살폈다. 혹시라도 낡은 철검 사이에 보검이라도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눈에 불을 켰다.

“보기만 하고 절대 뽑지 마시오!”

하지만 사람이 여럿 모이면 꼭 이런 경고를 무시하는 이가 있기 마련.

누군가 화려한 검집의 검을 뽑는 그 순간!

쉭! 푸욱!

바닥에서 튀어 올라온 검날이 그의 사타구니를 꿰뚫었다. 튀어 오른 속도가 빛처럼 빨라서 피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철면 사내가 저 멀리 정면 태사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태사의 뒤쪽 문까지 가야 하오. 그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기관이 작동했소.”

그가 선 곳에서 태사의까지는 애매한 거리였다.

경공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보고 싶은 거리.

이 애매한 거리와 혼자 먼저 통과하겠다는 욕심이 합쳐지자, 한 사람이 몸을 날렸다.

그가 중간쯤 건넜을 때.

쉬이익! 푸욱!

그는 앞서 죽은 이와 반대로 천장에서 떨어진 검날에 머리가 꿰뚫리며 죽었다.

동시에 한 사람이 더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기회는 기관이 발동한 바로 이 순간이다!’

앞선 사람이 채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는 그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쉭! 채챙!

그는 머리로 떨어진 암기를 쳐냈다.

‘됐다!’

그가 다시 한번 허공을 힘차게 박차며 문을 향해 쇄도하려던 그 순간!

쉬이이익!

다시 빛처럼 빠르게 날아든 검날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천장에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날아든 공격이었는데, 쳐내기 힘든 각도도 각도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바닥이 열리며 시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

또 한 고수가 그곳을 쇄도했다.

시체를 처리하는 순간이 기회다!

그의 희망과는 달리 현실은 이러했다.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함정이었다!

세 구의 시체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이어진 침묵.

그들의 욕심은 과했지만 그렇다고 실력이 모자라진 않았다.

그때 누군가 버럭 소리쳤다.

“차라리 다 때려 부수고 들어갑시다!”

그러자 철면 사내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되오. 장보도에 적혀 있었소. 기관을 억지로 부수고 들어가려면 이곳이 무너져 수장된다고.”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이곳의 보물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왜 여러분들을 데리고 들어왔는지 이제 아시겠소?”

검무극이 태수를 쳐다보았다. 이전에 그는 자신했었다. 검총의 위치는 물론이고 자신만이 기관 장치를 파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태수는 당황한 얼굴로 속삭였다.

“장보도에 적혀 있던 기관 설명과 전혀 다릅니다.”

검무극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장보도를 여러 장 풀면서 순순히 이곳의 기관 장치를 미리 알려줬을 리가 없으니까.

철면 사내가 모두에게 물었다.

“이곳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아시는 분 있으시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자 철면 사내가 검무극을 지목했다.

“거기 짐 든 소협.”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향했다.

“혹 방법이 없겠소?”

“왜 내게 물으시는 겁니까?”

“그 짐 때문이오. 이곳까지 그 큰 짐을 가지고 헤엄쳐 들어왔다는 건, 분명 그만큼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젊은 나이에 그런 실력이 있다면 똑똑한 머리를 지녔을 테고. 이런 문제는 젊고 똑똑한 사람이 풀 수 있겠지.”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음을. 그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너냐?’

하지만 배후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놓고 자신 앞에 등장했는데.

검무극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며 그곳에 서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죽으면서 진짜 고수들과 신중한 자들만이 남고 있었다. 배후는 이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

“이곳에서 이상한 점 하나 못 찾았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답을 찾지 못한 눈빛들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그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무극이 찾은 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난 이곳에서 검들이 제일 이상했습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철면 사내가 모두의 마음을 대표해서 말했다.

“검의 무덤에서 검이 이상하다니?”

오히려 다들 검무극을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가장 이상하지 않은 것이 꽂혀 있는 검들이었으니까.

검무극이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처음부터 검총이었습니까?”

순간 모두가 흠칫했다.

“수십 년 전, 수많은 고수가 이곳에 들어왔다가 죽는 바람에 검총이라 이름 붙은 곳이 아닙니까? 그들이 죽고 나서 검총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검총처럼 꾸며진 이 관문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관문은 검총이 생기고 난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의미.

이곳이 함정일 가능성이 더욱 커졌지만, 아무도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여러 개의 검이 꽂혀 있는 석상 앞이었다.

비파를 들고 있는 여인 석상. 여인은 참으로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검무극은 회귀 전의 삶에서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이 석상은 없었다. 있었다면 반드시 기억할 그런 느낌의 석상이었으니까.

“이 여인은 악공이었을까요? 아니면 음공의 고수였을까요?”

검무극이 그녀의 배에 박혀 있는 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쇳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검무극이 이번에는 옆구리에 박힌 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번에는 어깨, 다음에는 허벅지. 쇠가 달라서인지, 아니면 박혀 있는 깊이가 달라서인지 몸에 박힌 검에서는 다 다른 소리가 났다.

그때 태수가 검무극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전 그 소리가 비파의 음과 똑같았습니다.”

“비파 음과 같았다고?”

“네.”

“악기도 다룰 줄 알아?”

“어려서 이것저것 조금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제대로 된 도둑이 되려면 악기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 연주까지 가르쳤었다.

검무극이 다시 석상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검무극이 태수에게 물어서 제일 낮은음을 냈던 검부터 차례대로 석상에 푹 꽂아 넣었다. 가장 높은 음을 낸 검이 마지막으로 그녀의 심장에 박혔다.

그렇게 모든 검이 석상에 모두 꽂히는 순간.

쿠르르르릉.

갑자기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르륵.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이 여기저기 뒤섞이는가 싶더니.

마치 밟고 지나가라는 듯 같은 색 검 손잡이가 일렬로 문이 있는 곳까지 쭉 이어졌다.

그 모습에 태수가 기뻐하면 소리쳤다.

“기관이 파훼되었습니다!”

모두가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감탄하는 이도 있었고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알고 나면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답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평생 이곳에 있어도 알아낼 수 없는 파훼법이기도 했다.

철면 사내가 여러 감정을 담은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하시오!”

“운이 좋았습니다. 마침 제가 데려온 사람이 악기를 배운 사람이라서.”

물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만은 검무극이기에 가능했음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고 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검무극은 떠나기 전에 석상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대의 죽음이 우릴 새로운 길로 인도했소. 고맙소.”

모두가 검의 손잡이를 밟고 그곳을 통과했다. 과연 아무런 공격도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고, 두 번째 문을 열었다.

이곳에도 검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와 다른 점이 있었다. 앞의 방에 수많은 검이 있었다면 이곳에는 단 한 자루만 있었다.

방 가운데 백골이 된 시체가 앉아 있었고 그의 몸에 한 자루의 검이 기대져 있었다.

오랜만이다, 친구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백골에 기대져 있는 검이었다.

앞서 그 많았던 검보다 이 한 자루의 검이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철면 사내가 굳이 경고하지 않더라도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앞서 이곳의 기관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 검을 차지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합공을 받게 될 가능성이 컸다.

모두 검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눈치를 살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철면 사내가 다시 검무극을 지목했다.

“짐 든 소협.”

“제 이름이 아예 짐 든 소협이라 굳어졌군요.”

“내 정체를 밝히기를 거부했는데, 어찌 남의 신분을 물어볼 수 있겠소?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철면 사내가 한차례 조심스럽게 방을 둘러본 후 다시 물었다.

“이곳에는 어떤 기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소?”

“그걸 왜 제게 묻습니까?”

“앞의 기관을 해체한 사람이 소협이니까. 소협은 운이라고 했지만, 운도 준비된 자가 기회를 만났을 때 오는 법이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다들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여러 개의 장보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이 기관들이 검총이라 이름이 붙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이들은 포기할 줄 몰랐다.

그들의 욕심과 야망이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치고.

검무극이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배후 놈들의 음모라면?

굳이 왜 이들까지 끌어들였을까?

자신을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들이 아니더라도 자신은 이곳에 들어왔을 것이다. 한데 왜 여러 장의 장보도를 퍼뜨리면서까지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일까? 온 중원을 발칵 뒤집으면서까지.

검무극의 시선이 백골에 걸쳐진 검을 향했다.

“사실 저 검을 얻는 건 쉽습니다.”

쉽다는 말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저 검을 얻은 다음이겠지요.”

뜻 모를 말을 하고 난 후 검무극이 천천히 방의 중앙에 있는 백골을 향해 걸어갔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바짝 긴장한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상황이 위급해진다 싶으면 언제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앞서 방에서 경험했던 기관은 그야말로 막대한 돈이 들어간 극상승의 기관 장치였다. 이 방에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전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기관 공격은 없을 겁니다.”

금방이라도 천장과 바닥에서 칼날이 날아들 것만 같았지만, 검무극의 예상대로 백골 앞까지 갈 때까지 공격은 날아들지 않았다.

검무극은 당장 검을 주워들지 않고 백골 앞에서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선배가 누군지는 모르겠소. 선인인지 악인인지, 그대 역시 오늘 이곳에 든 우리처럼 보물을 얻기 위해 들어왔다 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들어왔는지, 아는 것이 없소. 다만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이미 백골이 된 그대를 음모에 이용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 생각하오. 분명 그들은 죗값을 치르게 될 거요. 그러니 원망을 버리고 부디 편히 쉬시길 바라오.”

그 말이 끝나던 순간!

와르르륵.

백골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이 짤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마치 검무극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허리를 숙여 검을 들려던 그때.

후우욱.

백골에서 피어난 한 호흡의 독연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색도 냄새도 없어 만독불침인 자신이 아니었다면 중독되었다는 것도 모를 그런 독이었다.

‘자운진기독(紫雲眞氣毒)이다!’

독왕을 도우며 여러 독에 대해 공부했을 때 알게 된 독이었다.

자운진기독은 중독자를 즉사시키는 독이 아니었다.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극렬한 내공을 쓸 때 비로소 발동하는 독이었다. 독이 발동하면 온몸이 자색으로 변하며 움직임이 둔해지고 기혈이 얽히게 된다.

그야말로 오랜 세월과 막대한 돈이 들어야 만들 수 있는 극상의 독이었지만, 만독불침의 검무극에게는 아무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만약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면 무형지독을 사용했을 텐데?

바로 그때였다. 검무극에게 한 줄기 전음을 날아들었다.

-당신, 지금 극독에 중독되었소.

검무극이 천천히 백골에 놓인 검을 들고서 뒤로 돌아섰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음의 목소리는 철면 사내의 목소리도 아니었고, 검상 무인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검무극이 그곳의 무인 중 한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중독된 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평범한 외모와 체구의 중년 무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냥 보물에 미쳐서 함께 어울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더니.

-내가 전음을 보낸 걸 어떻게 아셨소?

-당신만이 검이 아니라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정말 놀랐다. 그런 이유로 이 사람들 속에 있는 자신을 찾아낼 줄은 몰랐으니까.

사실 검무극이 알아차린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전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정확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검무극의 무공실력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중독된 것을 알려준 것으로 볼 때, 적으로 보이지는 않은데.

남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내가 해약을 지니고 있으니 기회가 되면 주겠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천마신교 소교주임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이곳 기관을 만든 자들과도 깊은 연관이 있음을. 적어도 저 백골에 독을 안배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때 애타던 무인 중 누군가 소리쳤다.

“어서 그 검을 뽑아보시오!”

“뽑아보시오!”

검무극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모습을 드러낸 검날이 차가운 한기를 뿜어냈다. 한눈에 봐도 보검이 틀림없었다.

검날에 힘찬 필체로 새겨진 글씨.

단혼(斷魂).

과거 검총에 들었다고 알려진 절세고수 단혼객의 독문검이었다. 검에 적힌 글자를 보고 검무극과 전음을 나눴던 사내가 소리쳤다.

“단혼검이다!”

그는 소리치고 욕심을 내어야 오히려 더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검이 단혼검임이 밝혀지자 많은 이들이 동요했다. 무인들의 눈에 담긴 뜨거운 열망.

그래, 이곳이 함정이면 어떤가? 저런 보검을 얻어서 나갈 수만 있다면!

검무극이 그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방에는 앞의 기관보다 더 무서운 기관이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다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을 살폈고 바닥을 살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기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기관이 어디에 있다는 거요?”

철면 사내의 질문에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이번 기관은 여러분들입니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던 그때, 검무극이 무슨 뜻인지를 밝혀주었다.

“이 검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의 욕심이 이 방의 기관입니다.”

검을 뺏기 위한 혈투가 바로 이 방의 기관 장치라는 의미였다.

장보도를 뺏기 위해 그 살육전을 펼쳤던 이들이었으니, 그 말은 틀린 추측이 아니었다.

“이 검을 누가 가질 겁니까?”

전부 나라고 대답하고 싶었겠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철면 사내에게 물었다.

“이곳 검총의 입구까지 안내했으니 당신이 가져야 합니까? 아니면 이전 관문을 파훼한 내가 가져야 할까요? 아니면 서로 비무라도 펼쳐서 가장 강한 사람이 가져야 합니까?”

모두가 침묵했다. 맨 처음에 검을 가진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벌써 쟁탈전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철면 사내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래서? 짐 든 소협의 생각은 어떠시오?”

검무극이 철면의 눈구멍 속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두고 가시죠. 이런 비열한 계략을 꾸민 자들에게 보란 듯이, 이 검은 이대로 두고 지나가죠. 너희들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 번 보여주죠. 그게 이 방의 파훼법입니다.”

어쩌면 앞서 지나쳐온 방보다 훨씬 어려운 곳일지도 모르겠다. 탐욕이 가득한 이들의 욕심을 파훼해야 했으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모두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지한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냄새가 누구에게서 나는 것인지 알아냈습니다. 바로 저 철면을 쓴 남자에게서 나는 냄새였습니다.

철면 사내와 검상을 입은 무인, 두 사람을 의심했는데 배후가 철면으로 확실히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독에 중독되도록 유도한 것도 철면 사내였으니까.

-잘했다.

검무극의 칭찬에 지한은 기분이 좋았다. 수하가 된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낸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다시 앞서 전음을 보냈던 남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누군지 알려주기 싫다면 우리 이름만이라도 압시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가 이름을 밝혔다.

-단소진(單素眞)이오.

-난 검무극이오.

-알고 있소.

과연 그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럼 이것 하나만 알려주시오. 저 얼굴에 검상을 입은 남자는 누구요?

이 단소진이라면 철면 사내의 정체는 물론이고 검상 무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과연 그는 검상을 입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사도맹에서 나온 사람이오.

검무극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이 어딘가를 생각해 보면 사도맹의 고수가 온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곳은 삼백 년 전 사도맹주이자 사파제일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 사도일검 주가신의 무덤이었으니까.

철면 사내는 배후 세력이고, 검상 무인은 사도맹 무인.

이제 남은 건 이 단소진이 어디에 속한 인물이냐는 것이었다.

그때 철면 무인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짐 든 소협의 뜻을 따르겠소. 여기서 저 검 하나 때문에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다른 무인들도 결국 그 뜻에 따랐다. 혼자 욕심낸다고 가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 이만 갑시다.”

그렇게 그들이 뒤쪽에 있는 문으로 걸어가던 그때, 결국 누군가 단혼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단혼검을 낚아챈 그가 앞서 들어왔던 첫 번째 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검을 들고 저 문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혼을 자르는 단혼검은 그의 혼 중에서 절제를 잘라버린 것이다.

“어림없다!”

다른 무인들이 그에게 쇄도했다.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도 분통이 터지는 그들이었는데 남이 가지게 할 그들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이 그를 합공해서 공격했다. 미처 방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가 단혼검을 뽑아서 휘둘렀다.

단혼검은 상대의 검을 단번에 부러뜨리며 그대로 몸통까지 갈랐다.

파앗! 파아앗!

다른 두 무인의 검이 그의 허벅지와 옆구리를 베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다시 단혼검을 휘둘러 허벅지를 벤 무인을 베어 넘겼다. 일반 검들 사이에 있으니 단혼검은 그야말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 검에 미치지 못했다. 검의 힘으로 세 명을 베어 넘긴 것이 한계였다.

푸욱, 하고 등 뒤에서 튀어나온 검에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단혼검을 바라보는 눈빛에 후회는 없었다.

“……한 번 휘둘러 보고 죽으니 됐다.”

그 말을 하고는 그대로 절명해서 쓰러졌다.

“망할 놈!”

그를 죽인 무인이 단혼검을 주워들어서 검집에 검을 회수하는가 싶더니.

그 역시 지나왔던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부딪치는 검마다 부러져나가는 모습을 보자, 그 역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검을 휘둘러볼 기회조차 없었다.

쉬이익.

빛처럼 날아간 비수가 그의 등을 꿰뚫었다.

얼굴에 검상을 입은 무인이 던진 비수였다.

달아나던 무인이 휘청거리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절명했다.

검을 안은 채 죽은 모습이 공교롭게도 처음 이곳에 있던 백골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누군가 이곳에서 이 사람을 본다면, 앞서 봤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더는 아무도 검을 차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철면 사내가 다음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안에서 무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진짜 사람들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만든 인형들이었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진짜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봤을 때는 당연히 검총에서 벌어진 싸움을 재현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합공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검무극이었다.

그를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는 인형들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십이지왕들이었다.

무림맹에서 죽었던 목왕부터 천마신교에서 죽은 환왕과 환여, 사도맹에서 죽었던 투왕, 북해빙궁에서 죽었던 혈왕, 금룡세가에 죽었던 살왕, 황룡무관에서 죽었던 권왕과 천화루에서 죽었던 암왕까지.

그들이 사방에서 검무극을 공격하고 있었다. 목왕의 몸에서 나무줄기들을 뻗어 나왔고, 환왕과 환여가 허공에 연 문에서 악귀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투왕은 미친 소처럼 달려들고 있었고, 혈왕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권왕의 주먹이 무섭게 날아들 때 암왕이 탄 가마 주위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 어둠을 살왕이 뛰어넘으며 검무극을 공격하고 있었다.

작은 부분 하나하나 정말 섬세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말 눈앞에서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이들이었기에 이 인형들은 마치 죽은 십이지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검무극이 놀란 이유는 자신의 인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싼 인형들이 십이지왕이라서도 아니었다.

그 인형들 앞에 살아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인형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처음에는 그도 인형처럼 보였다.

그는 허름한 무복에 머리를 질끈 묶고 허리에 낡은 철검을 찬 채 맨발로 서 있었다.

이 무림에서 검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인형을 쳐다보고 있던 검왕 악군학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그의 허리에는 검무극이 선물로 준 신발이 매달려 있었다.

“오랜만이다, 친구.”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 천지군

근래 이렇게 놀랐던 적이 있었던가?

검무극은 이 방에서 악군학을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검무극이 그곳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악 형!”

검무극이 그를 편하게 악형이라 불렀다. 다시 만났을 때는 친구로 지내자고 했으니, 이제 그는 검왕이 아니라 악 형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동자가 떨렸다. 검무극은 자신의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를 와락 안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제가 했던 말 기억 나십니까?

보고 싶을 때 보고, 도와야 할 때 돕고. 때론 신발도 서로에게 던지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정말이지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볼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들판에서 고기 구워 먹고 있다가 마주칠 줄 알았습니다. 주점에서 취해 어깨 부딪치면서 다시 만날 줄 알았습니다. 아니, 영영 만나지 못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검무극이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데 왜 이런 칙칙한 지하에 있습니까? 아무리 지하를 좋아해도 여긴 아니잖아요?”

황룡무관 지하 관문을 뚫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함께 올라와서 별을 올려다보던 순간이, 함께 영약을 배 터지게 먹던 그 순간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미안하다.”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뭔가 사정이 있어서 떠나지 못했음을.

“빚을 다 갚지 못한 겁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대답했다.

“빚은 다 갚았다.”

“그런데 왜 떠나지 못한 겁니까?”

검왕은 말해주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를 붙잡은 것일까? 무엇이 이토록 강한 사람을, 이토록 자유를 꿈꾸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은 것일까?

“남자가 떠난다고 했으면 떠났어야죠. 가로막는 것들 그 신발로 머리통을 때려주며 떠났어야죠.”

검무극의 눈에 검왕의 신발이 들어왔다. 그동안 한 번도 신지 않았는지 새것이었다.

“신으라고 사줬는데 신지도 않고. 친구 모임 열었는데 오지도 않고. 제가 모임 개최한 것 알았죠?”

놀랍게도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의미.

“춤추라고 할까 봐 겁나서 못 갔다.”

“춤도 못 춰, 떠나지도 못해. 이게 뭡니까!”

하지만 말과는 달리 검무극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이 반가움을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그래도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갑네요.”

앞에 했던 말들은 이 말을 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서로의 입장이 어떻든 반가운 건 반가운 거다.

반대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천도마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했다.

―저자군.

출교했다 돌아오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해주는 검무극이었으니, 상대가 황룡무관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검술의 고수임을 알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저 맨발의 고수가 얼마나 강한지를. 지금까지 만났던 적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일화검존은 그 당시 싸움에서 권마와 함께 검왕을 만났었다.

악군학이 지하에서 먼저 나오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검무극이 뒤따라 나오면서 다행히 싸움이 벌어지진 않았다.

혈천도마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진하군이나 비사인과 친구로 지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위험해 보이는군.

―강한 자예요.

사실 강해 보여서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너무 무방비로 적에게 마음을 열고 있음을 느껴서였다.

―저 맨발이 위험해.

일화검존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는 보고 있었다.

검무극과 검왕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그 사이에 우리 악 형, 좋아하는 여인도 생겼는데.”

“나를?”

“우리가 얼마나 악 형 이야기를 했었는데. 악 형 때문에 한 여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이 자리에 차이란이 있어야 하는데. 정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할까? 당황할까? 아니면 의외로 능숙하게 분위기를 넘길까?

“예쁘냐?”

“누구냐고 물어야지요!”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당연히 검왕은 자신이 말한 여인이 차이란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과 싸우다가 조직을 떠난 그녀였으니까.

“이번 일 끝나고 같이 가서 만나 봅시다.”

검왕은 그러자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무언의 대답이 그녀가 싫어서가 아님을 알기에, 검무극은 끝까지 고집했다.

“여자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이렇게 뻔뻔하게 군다고요? 안 됩니다, 안 돼요! 제가 꼭 데려갈 겁니다.”

여전히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이 싸움의 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당신 데리고 본교로 갈 겁니다. 떠나더라도 거기서 떠나십시오.

그렇게 검무극과 재회한 검왕의 시선이 두 마존을 향했다.

검왕이 먼저 포권하며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

혈천도마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고, 일화검존은 가볍게 포권하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검무극이 검왕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검왕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너를 죽이려는 사람을 지켜주려고.”

그 말에 검무극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럼 큰일 났네요, 악 형이 지키면 아무도 못 죽일 텐데.”

그때 뒤에서 들려온 혈천도마의 차가운 한마디.

“내가 죽여주마.”

검무극은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제가 여기 이 사람 꽉 붙잡고 있는 사이, 잽싸게 죽여주십시오.”

혈천도마가 툭 내뱉었다.

“제발 정상적인 놈들을 사귀어!”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제가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요.”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을 알고는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지켜보던 태수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검무극이 이런 곳에서 알 수 없는 사람을 만나서가 아니었다.

합공 당하는 인형을 보고 있으니까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도 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는데, 그때는 이런 두근거림이 없었다. 너무 순식간에 해치워서 그랬을까?

한데 무시무시해 보이는 고수들 사이에 외롭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자신은 범접할 수 없는 천외천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래는 이번 일이 끝나면 아버지를 만나 도둑을 그만둘 거란 말을 할 작정이었다.

한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에게 수하가 되고 싶다고 해도 되나?’

정말 닿지도 못할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서 뜬구름을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수가 지한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안 그래?’

지한은 오히려 차분한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검무극의 신분을 알고 있었기에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합공당하는 인형? 당연히 저 인형들 속에서 주인공이어야지. 자신이 모시는 사람은 천마신교 소교주였으니까.

다만 이 상황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몰라서 그는 내심 긴장했다.

소교주를 모시고 하는 첫 싸움이 이런 거창한 싸움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

두 사람이 이런 마음이니 다른 무인들은 얼마나 동요했겠는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무인들은 크게 당황했다. 이 방을 열면 기관이 있고, 또 보물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백골이 한 구가 아니라 수십 구가 있고, 그 백골들 옆에 온갖 보물들이 가득 널려 있는 장면을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꿈꾸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가 속았구나!’

검무극이 자신들을 속여서 여기까지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저 인형도 그렇고, 이곳에 있던 이와 저렇게 반갑게 인사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이내 자신들을 이끈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철면 사내가 검왕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자신의 신분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 가면 쓰고 다니면 안 덥냐?”

“괜찮습니다.”

허물없이 오가는 대화로 볼 때, 철면 사내의 위치가 그리 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찾는 사람은?”

“저들 중에 있을 겁니다.”

철면 무인이 무인들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품에서 향초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시혼향(視魂香)입니다. 우리가 찾는 사람에게 반응할 겁니다.”

향초에서 흘러나간 연기가 서서히 주위로 퍼져나갔다.

무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연기를 보며 다들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철면 사내가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에게 전음을 보냈던 바로 단소진임을.

스르르륵.

천천히 주변을 감돌던 연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한 사람 주변을 감돌았다.

연기가 선택한 사람은 검무극의 예상대로 단소진이었다.

검무극은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했다.

철면 사내가 그를 죽이려 들면 일단 구해줄 작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단소진이 적이 아니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이름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본능적으로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철면 사내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리로 나오시오.”

단소진은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기를 곧잘 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이미 때늦은 연기였다.

“그만하고 나오시오. 거기서 나와야 살 수 있으니까.”

그 말에 남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방금 그 말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이겠다는 뜻이 아닌가?

철면 사내가 한 사람을 더 지목했다.

“당신도 나오시오.”

그는 바로 얼굴에 검상을 입은 남자였다. 단소진의 말로는 사도맹에서 나온 무인이라고 했었는데.

철면 무인도 정확히 그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이자는 사도맹주가 보내서 온 자입니다. 이자도 살려두라 명하셨습니다.”

지목당한 검상 사내도 앞으로 걸어 나와 단소진 옆에 섰다. 지금은 반항할 상황이나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을 골라낸 후 철면 사내가 나머지 무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머지는 다 죽일 작정이었다.

그때 검왕이 담담히 말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난 날이다. 피 냄새 풍기지 마라.”

그들을 죽이지 말라는 뜻임을 알고 철면 사내가 당황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검왕이 철면 사내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노려본 것도 아니고 살기를 드러낸 것도 아니었지만, 곧장 철면 사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검왕이 엉거주춤 서 있는 무인들에게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

무인들이 왔던 길을 우르르 달려나갔다.

“이렇게라도 공덕을 쌓아두면 나중에 지옥에서 좀 덜 뜨거운 불구덩이에 담그지 않겠어?”

스스로를 위해 살려둔 것처럼 말했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그들을 보내줬음을. 자신이 그런 무분별한 살육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애애액!

그들이 나간 곳에서 강기가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이 들려왔고 그곳에서 피 냄새가 확 풍겨왔다.

곧이어 네 명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복장은 특이했다. 두 명은 검은 무복에 검은 피풍의를 둘렀고 검은 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다른 두 명은 붉은 무복에 붉은 피풍의, 붉은 도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둘씩 나눠진 그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들어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존재감을 지닌 남자였다.

장대한 키에 탄탄한 체구를 지닌 그는 허리에 쌍도를 차고 있었다.

그가 차고 있는 좌도와 우도가 각기 달랐다.

좌도는 칠흑처럼 검은 흑도(黑刀)였고 우도는 피처럼 붉은 혈도(血刀)였다. 검은 흑도에는 새하얀 선으로 달이 그려져 있었고, 혈도에는 태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칼로 깎은 듯 각이 져 있었고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는 도강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바라보는 것으로도 칼날을 상대의 목에 겨눈 것 같은, 그런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검무극은 그를 보는 순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십이지왕 제 이왕 도왕 냉무상(冷武相).

그는 저 쌍도로 십이지왕 시절 도법의 최고수 자리에 올랐다. 검왕에 버금갈 만큼 강한 도법을 지녔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그의 무공은 고강했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했는데, 가공할 도법도 도법이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잔혹하고, 때론 광기에 가까웠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앞서 들어온 네 무인은 도왕의 수족으로 암혈사도(暗血四刀)라 불린 절대 고수들.

이제 이곳에 검왕에 이어 도왕까지 등장한 것이다. 그야말로 십이지왕 중 일왕과 이왕이 한자리에 있는 순간이었다.

검왕이 도왕을 보며 말했다.

“방금 자네의 지옥불이 더 뜨거워졌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왕을 바라보는 도왕의 눈빛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그렇다고 검왕을 무시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이윽고 도왕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한겨울 바람처럼 날카로우면서도 건조했다.

“당신을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애써봤지만, 이해할 수 없더군.”

그러면서 마치 그 이유가 이 사람 때문이라는 듯, 도왕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쏴아아아아아.

한 줄기 살기가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살기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불쾌하면서도 적의가 가득한 살기였다.

그 살기가 검무극에게 닿기 직전.

검무극 앞에 멸천대도가 박혔다.

여전히 천에 감긴 멸천대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단 한 줄기의 살기도 허용하지 않고 튕겨냈다.

어느새 검무극 앞을 막아선 혈천도마의 기도는 더없이 차가웠다. 평소 책을 읽고 차를 마시던 부드러운 그가 아니었다.

“여긴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천지군.”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묶고 있던 매듭을 풀었다.

사라라라라락.

감겨 있던 천이 풀어지면서 멸천대도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번 내기는 내가 진 것으로 하지.”

그래, 너도 한 성질 하지?

일화검존이 새하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르륵.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천이 그녀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멸천대도를 감았던 천을 잘 감아서 정리한 후 자신의 품에 넣었다.

“내기에 지셨으니, 제가 원하는 것 들어 주세요.”

혈천도마가 양보한 것을 사양하지 않았다. 사양하지 않는 것이 혈천도마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 여겼으니까.

“그러지.”

혈천도마가 앞에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뽑아 들며 마기를 개방했다.

지금까지 여정에서 내내 마기를 감춰왔던 그였다.

쩌어어어어억!

마기는 전방의 공기를 찢으며 앞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바닥의 얼음이 천천히 금이 가며 분열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점차 그 붕괴가 빨라졌다.

곧이어 깊이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 깨어나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쇄애애애애액!

마기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간을 찢어발기며 도왕이 서 있는 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싸움의 서막을 알리는 마기였다.

위협적으로 날아드는 마기에 암혈사도가 몸에 걸친 피풍의로 몸을 가리며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푸아아악!

닥쳐온 마기에 그들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그만큼 날아든 마기는 강력했다.

촤아아아악.

도왕은 선 채로 마기를 맞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옷자락이 펄럭였다.

이 강력한 마기에도 여전히 적의 가득한 그의 시선은 혈천도마를 지나 검무극을 향하고 있었다.

“겁쟁이군.”

혈천도마 뒤에 숨었다는 조롱이었다.

얼핏 보면 검무극을 도발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혈천도마를 도발한 셈이었다.

마기를 발출한 혈천도마를 무시하고 검무극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반응해도 좋을 도발이었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혈천도마 등 뒤에서 검무극이 물었다.

“당신은 있어?”

검무극이 뭘 묻는 것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당신을 겁쟁이로 만들어 주는 사람 있냐고. 없지?”

순간 도왕의 얼굴이 꿈틀했다. 상대를 도발하려던 그가 역으로 도발 당한 것이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우리 좌사님만 믿습니다.”

혈천도마에게 그 말은 지금 이렇게 들렸다.

열 받지 마십시오.

도발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가 아니었다. 이런 정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 믿을 테니까.

원래 도발이란 게 그렇다. 도발인지 뻔히 알지만, 그래서 넘어가지도 않지만, 그래도 열은 받는다.

검무극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소교주인데, 이 정도의 여유는 보여줘야겠지.

“좌사가 더 높은 거 확실하지?”

매번 확인하는 그의 물음에 검무극이 웃으며 힘차게 말했다.

“그럼요, 교주 다음이 좌사입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도왕이 옆에 서 있는 애꿎은 검왕을 쳐다보았다. 도왕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명백했다. 저 소교주와 얽힌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검왕은 팔짱을 끼고 선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과의 관계는 이쪽의 도왕도, 저쪽의 마존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혈천도마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검무극은 이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다. 저들의 목적이 무엇이든, 이후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든, 혈천도마가 직접 나선 이상 이 싸움은 말릴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 자신이나 혈천도마와 같은 고수들이 가장 크게 성장할 때는 강적과의 실전을 펼쳤을 때니까.

상대가 강적이지만 혈천도마도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자신이 회귀한 후 혈천도마는 꾸준한 수련으로 실력이 향상했고, 이번 출교에서는 희대의 영약인 종유선태와 선도영과를 복용한 상태였다.

그리고 검무극이 가장 믿는 건 혈천도마가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무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평온한 일상이지만, 그 일상에서 얻은 것들이 혈천도마를 지켜줄 것임을 믿었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풀어선 안 될 싸움이었다.

상대는 검왕의 실력을 넘봤던 도왕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도왕을 도발했다.

“걱정하지 마. 저기 인형들 사이 빈자리에 당신이 들어갈 빈자리도 있으니까.”

도왕의 각진 얼굴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의 얼굴에서 좋은 표정은 도저히 상상되지 않는다.

검왕은 그런 검무극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자신의 자유로운 모습이 좋다고 말했지만,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말로는 온갖 걱정에 온갖 인간관계에 매여 있다고 엄살을 떨지만, 자신보다 훨씬 자유로운 사람은 검무극이라고.

진정한 자유로움은 홀로 떨어질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제대로 잘 엮였을 때 얻는 것임을 검무극을 볼 때면 느끼게 된다. 양쪽에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는 것처럼.

도왕이 천천히 도를 뽑아 들었다.

“언젠가 한 번은 붙어보고 싶었지.”

하지만 도왕은 자신의 두 자루의 도 중에서 붉은 적도만 뽑아 들었다. 그의 눈에서 도 하나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우월감이 흘러나왔다.

그 자만심을 혈천도마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젓가락은 두 개가 필요하지 않나?”

요즘 평온해서 그렇지 그의 성격 역시 어디 보통이었겠나?

쇄애애애액!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멸천대도와 적도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단지 도와 도가 부딪쳤을 뿐인데,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늙은 마존이여, 이제 그 도가 무겁지 않은가?”

“너무 무거워서 힘들면 쌍도를 쓰면 되지.”

쇄애애애액!

멸천대도가 그를 밀어내며 허공을 갈랐다.

카아앙!

엄청난 위력의 대도를 적도가 막았다. 이 큰 대도를 그 작은 도가 버텼다.

카카카캉!

도와 도가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검과 검이 싸우는 것과 확실히 달랐다. 그야말로 부딪치면 무엇이든 박살 낼 위력으로 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드는 한 가지 의구심.

어떻게 저 위력에도 도가 부서지지 않지?

수를 나눌 때마다 그런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었다.

쇄애액! 쇄액!

적도가 혈천도마를 향해 연이어 날아들었다.

그 공격은 빨랐고 적도가 찾아낸 궤적은 언제나 죽음과 닿아있었다.

반드시 상대의 몸통을 갈라낼 그런 공격.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과 이어진 궤적을 뚝 끊어내는.

멸천대도가 있었다.

절대 저 무거운 대도로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멸천대도는 날아든 도를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카앙! 캉! 카아앙!

혈천도마는 도를 방패처럼 쓰고 있었다. 대도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최소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도를 휘두르는 도왕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도와 도가 만들어낸 수십 개의 도선이 허공을 수놓았다.

격돌할 때마다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고 불꽃이 폭죽처럼 튀었다.

강기를 일으키는 독문 무공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힘과 속도를 겨루는 기세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너를 죽일 수 있다.

도를 쓰는 남자들의 자존심 대결.

도가 서로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들은 얼굴을 통째로 날려버릴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서로 이렇게 피해야 다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단 한 치의 불필요한 동작도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방.

일반 고수는 상대와 싸운다. 하지만 극한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공포심과 싸운다.

싸움을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옆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열기에 고개를 돌렸다.

검무극이 싸움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그는 이미 저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오면 검무극은 개입할 것임을.

나중에 혈천도마에게 혼나고 또 혼나게 될지라도 반드시 개입할 것임을.

절대 혈천도마를 죽이지 않겠다는 그 뜨거운 마음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혈천도마가 이 싸움으로 더욱 성장하기를.

다시 그녀의 시선이 혈천도마를 향했다. 싸우고 있는 혈천도마는 웃고 있었다.

‘이 싸움을 기뻐하고 있어.’

진짜 강적과의 싸움이 주는 희열이 그녀에게 전해져왔다. 자신도 달려들어 싸우고 싶은 열망이 들었다.

‘오라버니, 우린 더는 젊은 시절을 그리워할 필요가 없겠어요. 지금 그때보다 더 뜨거운 시절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격전이 계속되던 그때!

혈천도마의 생각지 못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도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도로 찌르기를 한다고?’

무리한 수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는 법.

도를 흘리듯 쳐내면서 그 도의 옆면을 타고 들어가서 단숨에 베어버릴 기회! 도왕이 본능에 따라 움직이려던 그때.

휘류류류류류류!

날아들던 멸천대도가 회전했다. 저 큰 대도를 이렇게 순식간에, 그것도 이렇게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속도였다.

주위 공기를 찢어발기며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못 피한다!’

그 찰나의 순간, 도왕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냥 피하면 저 회전에 반드시 부상을 당할 것이고, 비스듬히 쳐내려 했다간 자신의 도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뒤로 피하는 것도 늦었다. 어설프게 피했다간 더 크게 당한다!

폭음과도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멸천대도가 허공에 멈춰 있었다. 회전도 멈춰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공격이 막혔음에도 혈천도마는 웃고 있었다.

멸천대도를 막은 것은 적도만이 아니었다. 도왕의 다른 손에는 흑도가 들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흑도를 뽑았고, 쌍도를 교차해 막으면서 회전을 멈춘 것이다.

혈천도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두 자루네?”

도왕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그의 기도가 더욱 강렬해졌다.

이제 어떤 수가 나올지 모를 상황이었기에 검무극이 모두에게 말했다.

“자자, 다들 뒤로 더 물러납시다.”

검무극이 지한과 태수, 그리고 단소진과 사도맹 무인을 뒤로 물렸다. 그러면서 단소진과 사도맹 무인을 자신 쪽 가까이 오게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두 사람은 순순히 검무극 쪽으로 왔다.

모두의 시선이 혈천도마와 도왕에게 집중된 사이, 단소진이 슬쩍 검무극에게 뭔가를 건넸다.

받아보니 그것은 한 알의 단약이었다.

―아까 당한 독의 해약이오.

―그걸 어떻게 믿소?

―내가 아는 당신은 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니까. 현명하게 판단할 거라 믿소.

검무극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가 준 이 약이 독이라도 상관없었기에.

―당신을 믿겠소.

검무극은 그가 보는 앞에서 단약을 먹었다. 먹어보니 독은 아니었다. 아마 진짜 해약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당신을 믿는데, 당신은 나를 믿소?

당신이 정말 우리 편이냐는 검무극의 물음에.

―당신을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거요.

그는 그 전음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놈들은 왜 이 사람을 찾은 것일까? 이 사람은 왜 자신을 돕는 걸까?

거기에 또 하나의 의문.

저 사도맹 무인은 왜 살려두라고 한 것일까?

앞서 철면 무인이 그렇게 말했다. 살려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그 말의 느낌상 명령을 내린 사람은 검왕도 아니었고, 저 도왕도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아직 오지 않은 적이 있다.’

검무극은 그렇게 확신했다. 검왕을 부르고 도왕을 불렀다는 건, 저들도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의미. 아직 적들이 남아 있다.

검무극은 내심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우선은 단소진과 사도맹주가 보낸 사도맹 무인은 최대한 지켜줄 생각이었다.

도왕이 차갑게 말했다.

“늙은 마존이여, 그대는 내 쌍도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래, 잘난 척도 한창때 하는 거지. 늙으면 귀찮아서도 못한다.”

혈천도마는 절대 말싸움에 밀리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게 다 책을 많이 읽어서라 생각했다.

혈천도마와 도왕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카아앙!

멸천대도를 쌍도로 막았다.

도왕이 빠르게 쌍도를 내리쳤다. 두 개의 도가 무서운 속도로 교차하며 날아들었다.

두 개의 도가 하나의 도를 이긴다.

이 믿음이 없다면 애초에 쌍도를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쌍도라면 반드시 제압할 수 있을 거로 믿었는데.

멸천대도는 그 두 개의 도에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팽팽한 공방이 극에 달하던 그 순간

전력을 다한 두 힘이 부딪치자, 폭음이 아니라 침묵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소리를 잡아먹는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콰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뒤를 이었다.

주르르륵.

몇 걸음 더 뒤로 밀려난 사람은 도왕이었다. 혈천도마가 내공으로 그를 누른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나 강했다고?”

도왕의 건조한 목소리에 놀람이 담겼다.

혈천도마는 확실히 더 강해졌다.

그는 몸속에서 넘치는 생기를 느꼈다. 비단 내공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에서 흐르는 기운이 젊었다. 생생한 젊음에서 나오는 힘이 노련한 혈천도마와 합쳐지자, 그야말로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머리도 더 잘 굴러가고 진기도 더 잘 움직였다. 이건 내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그때는 이런 기분이었지.’

온종일 싸워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기분이었지.

후우우우우우.

도왕의 손에 들린 적도에 그려진 달과 흑도에 그려진 태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가 더욱 강력한 기도를 발출하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기운에 주위의 공간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악.

태수와 지한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온몸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이렇게 무서운 기도는 그야말로 처음이었다.

검무극이 내력을 발출해서 뒤에 서 있던 네 사람을 보호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만으로도 내상을 당할 그런 기도였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그의 기도 속에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 기도로 도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차갑고 비정하고 매정하고 잔인하고. 따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기도였다.

“그래, 너도 한 성질 하지?”

혈천도마의 몸에서 마기가 발출되었다. 앞서 처음에 발출했던 마기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 강력한 마기였다.

쏴아아아아아.

검무극이나 일화검존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혈천도마의 거칠고 난폭한 마기였다. 오랫동안 모두에게 숨겨왔던 마기이기도 했다.

혈천도마의 마기가 도왕의 기도와 뒤엉키면서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의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혈천도마가 그 큰 멸천대도를 어깨에 턱 걸쳐 올리며 말했다.

“그 더러운 성질 다 거쳐서 여기까지 온 게 나다.”

그래, 너도 들어와

도왕이 혈천도마의 흉포한 본성을 깨웠다.

특히 검무극을 만난 후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본성이었다.

만악산인을 자결하게 만든 그 시절의 그 난폭함을, 인간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던 시절의 그 성질을 깨운 것이다.

혈천도마는 그런 모습과 차분히 책을 읽는 것을 즐기는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지닌 사람이었다.

“가끔은 뭐가 내 진짜 모습인지 나도 헷갈릴 때가 있다. 뭐, 상관없겠지.”

후우웅!

혈천도마가 몸을 풀 듯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이미 두 사람이 뿜어낸 기도는 싸움을 시작한 상태였다. 파락호가 보면 패싸움이 벌어진 뒷골목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고, 진짜 고수가 보면 지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 드는 두 사람의 기싸움.

도왕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그 차갑고도 무서운 기도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적의 기운을 마주한 것이.

“늙은 마존이여, 우린 같은 부류라네.”

도왕은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지만, 혈천도마는 그 말을 부정했다.

“늙었다는 말보다 같은 부류라는 말이 더 불쾌한 걸 보니,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는 알 것 같군.”

도왕이 아니라 자신에게 한 말이었고, 동시에 검무극과 일화검존에게 한 말이었다.

검무극은 그 말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어르신께서는 책 읽으실 때의 모습이 제일 멋지십니다.”

혈천도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긴 세월 마존으로 살아오면서, 또 책을 그렇게 읽으면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검무극을 만난 후에도 자신보다는 검무극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도왕과의 싸움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역시 저 비정하고 차가운 기도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은 자신의 숨겨진 본성을 말이다.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태수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맨 처음 도왕이 혈천도마에게 늙은 마존이라 칭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마로 시작하는 어떤 별호였겠지.

한데 조금 전에 똑똑히 들었다.

‘마존이라고? 정말 마교의 마존이라고?’

과연 이 무림에 마인이 아님에도 마존이란 이름을 별호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태수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는 곧장 지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당신은 저분이 마교의 마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전음을 보내면서도 내심 이런 답이 올 것을 기대했다.

마존이라니? 무슨 헛소리요? 이렇게 또 잘못 들은 것이거나.

말을 천 마리나 키우는 곳이니 마존이라 불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이런 망상과도 같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지한에게서 돌아온 충격적인 전음.

―두 분이 마존이란 것을 알고 있었소.

정말이지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태수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왜 나는 이들이 마인일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그건 쉽게 답이 나왔다. 검무극 때문이다. 저 사람을 보면서 어찌 마인을 연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야 태수는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래, 표국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저들이 표사고 표두일 리가 없지 않은가?

적으로 등장한 검왕과 도왕의 기세나 무공실력을 볼 때, 저런 사람들이 적이라면 대체 이 표국은 무엇을 운반하는 곳이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걸 운반하더라도 저런 대단한 적은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았다.

마존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오고, 마존과 함께 헤엄을 쳤다고?

마존들이 오향장육을 먹기 위해 줄을 섰다고?

줄 선 사람이고 손님이고 다 죽인 후에 시체가 널려 있는 곳에 앉아서 숙수에게 ‘오향장육을 내와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마존이 아니었나?

―두 분은 팔마존이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시오.

혈천도마의 정체가 밝혀진 상황이었다. 지한은 굳이 태수에게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태수는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했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말로만 듣던 이들이었다. 그 말조차 실제로 본 사람에게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저 젊은 분은 누구시오?

검무극은 두 마존에게 편하게 농담을 하고, 스스럼없이 지냈다. 대체 누구이기에?

지한이 검무극의 신분까지 알려주었다.

―천마신교 소교주님이시오.

소스라치게 놀란 태수가 소리쳤다.

“거짓말 마시오!”

이내 그가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전음으로 대화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물론 그 시선 중에는 검무극도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리쳤는지 다 안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이 말했다.

“이제 알겠나? 아버지를 만나보고 결정을 내리라고 한 이유를?”

경악한 태수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그 옆에 서 있던 단소진과 사도맹 무인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이미 단소진이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한데 사도맹에서 나온 검상을 입은 남자도 이 상황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과 두 마존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분명 배후 놈들에게 있어서 이 사람들의 존재가 중요했다. 특히 저 단소진이.

그러는 사이 혈천도마와 도왕이 다시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내뿜는 기도들이 더욱 강렬해진 만큼 그들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고수일수록 공격에 감정을 싣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두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고수들의 공방.

너, 마음에 안 든다! 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깃든 공격에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심이 깃들어 있었다.

캉! 카앙! 캉캉캉캉!

격돌하는 세 개의 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쌍도가 교차하며 날아갈 때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강력한 도풍이 회오리치며 휘몰아쳤다. 내공을 올려 버티지 않는다면 그 도풍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 위력이었다.

그 싸움이 벌어지는 너머에서 검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왕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가 혹시라도 위험하면 개입하려 한다는 것을.

그랬기에 검무극은 검왕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싸움에 빠져들어 있었다. 한 호흡도 놓치지 않아야만 개입할 수 있기에.

‘그래, 자넨 이런 사람이지.’

아끼는 사람을 절대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자신보다도 남을 더 아끼는 사람, 그럼에도 더없이 자유로운 사람.

날아든 공격을 멸천대도가 땅에 박히며 막아냈다.

도왕이 연계 공격으로 멸천대도 뒤에 선 혈천도마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그의 몸이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며 빠르게 도를 날렸다.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멸천대도의 뒤에 혈천도마가 없었다. 찰나의 순간 도왕의 머릿속을 스친 하나의 생각.

그가 도를 손에서 떼어놓았을 리가 없는데?

그 생각이 위기감으로 이어지던 그 순간, 도왕이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후아아앙!

콰아아앙!

도왕이 있던 자리를 위에서 떨어진 장력이 휩쓸었다. 바닥이 박살 나며 땅에 박혀 있던 멸천대도가 기울어졌고, 그 손잡이 쪽에 앉아 있던 혈천도마가 바닥에 내려서며 도를 들었다.

도왕의 공격이 날아들던 그 순간 혈천도마는 땅에 박힌 멸천대도 손잡이 쪽으로 날아올랐다. 도왕이 곧장 멸천대도 뒤를 기습할 것을 예상한 한 수였다.

“당신 제법이야.”

도왕은 방금 전 한 수를 인정했다.

혈천도마가 이런 변칙적인 수를 쓸 줄은 몰랐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였고 앞선 싸움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한 수는 정말 위협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늙은이란 말이 이번에는 빠져 있었다.

쇄애애앵! 쇄애앵! 쇄애앵!

다시 격돌했을 때 혈천도마의 싸움 방식이 바뀌었다. 도를 쓰는 것이 빨라졌다.

상대가 빠른 쌍도를 쓰면 오히려 힘으로 밀어붙일 것 같았는데, 혈천도마는 이 큰 대도의 속도를 올렸다.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저렇게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오늘 처음 보았다. 아마 오늘 이 싸움에서 혈천도마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을 것이다.

카카카카캉!

코앞을 스쳐 지나간 멸천대도가 다시 도왕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적도와 흑도는 혈천도마의 목과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친 싸움 속에서도 그들은 싸움의 영역을 확실히 지키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옆에 있던 인형 하나 쓰러지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영역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검무극 일행이 서 있는 쪽으로 서서히 옮겨진 것이다. 도왕이 의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들 주위에서 싸우면 혈천도마가 신경을 더 써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도왕의 오산이었다.

혈천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검무극과 일화검존을 믿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도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바로 검무극 때문이었다.

혈천도마를 노렸던 적도가 빗나가면서 검무극의 얼굴 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후아아아아앙!

엄청난 기세로 도가 지나가는데도 검무극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도왕은 보았다. 검무극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자신을 보며 웃는 모습을.

‘건방진!’

하지만 혈천도마와의 싸움에서 그 한순간의 울컥한 감정은 큰 위험을 초래했다.

푸아악!

날아든 대도를 간신히 쌍도로 막아냈지만 도왕의 허리에서 피가 튀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멸천대도에 허리가 잘릴 뻔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 후 처음으로 피를 보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피를 보자 도왕의 눈에서 살기가 폭사했다.

우우웅.

적도와 흑도에 붉고 검은 색의 도강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멸천대도에도 도강이 서렸다. 새하얀 색의 도강은 마치 눈이 내린 것만 같았다.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혈천도마의 도강 색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는 저렇게 새하얀 색이 아니었다.

‘확실히 변했구나, 오라버니의 무공 경지가.’

결국 도왕이 먼저 자신의 독문무공을 발휘했다.

두 사람 모두 신중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더 급한 쪽은 상대적으로 젊은 도왕이었다.

사실 검왕이 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그가 보고 있는데 늙은이 하나를 못 죽이고 있었으니까.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검왕은 그 존재만으로도 검무극 편이었다.

일월암혈도법(日月暗血刀法)

제 일결 혈룡파천(血龍破天)

도왕의 오른발을 내밀어 진각을 내리치며 도를 내질렀다.

바닥이 쩍 갈라면서 도왕의 적도에서 붉은 강기가 용 모양으로 휘몰아치며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아!

입을 쩍 벌린 채 날아드는 강기는 그냥 일반적인 도강으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혈천도마도 독문무공을 발휘했다.

멸천마도식 제 일식 멸도일격.

출교 전보다 더욱 강해진 혈천도마의 손에서 발휘된 멸천마도식이었다.

쉬이이이이익!

멸천대도에서 쏟아져 빠르고 강력한 한 줄기 강기.

푸아아아악!

날아드는 용의 머리가 잘려 나가며 뒤따르던 강기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이렇게 쉽게 파훼하다니? 도왕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상대는 이미 충분한 실력을 보여줬으니까. 파훼를 못 하면 오히려 함정이겠지.

도왕은 곧장 두 번째 초식을 발휘했다.

일월암혈도법 제 이결 일륜극참(日輪極斬).

이번에는 흑도가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더니.

촤아아아아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도강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수십 가닥의 강기가 혈천도마를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일륜극참을 상대한 것은 멸천마도식 제 이식 멸도파랑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멸천대도에서 뻗어나간 도기가 물결처럼 흘렀다.

이전에 혈천도마가 보여줬던 물결이 아니었다. 물결은 더욱 깊고 장대했다.

콰콰콰콰콰콰쾅!

수십 가닥의 도기가 물결에 잠겨 들며 쓸려나갔다. 도기가 뻗어 나가지 못하고 물결에 휩쓸려 뒤로 밀려나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이 충돌의 여파로 벽과 지축이 흔들렸다.

이대로라면 더 큰 초식을 쓰다간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왕은 곧장 다음 수를 발휘했다. 동굴이 무너지더라도 저 눈앞의 혈천도마는 반드시 죽일 작정이었다.

도왕이 더욱 극한의 내력을 끌어올렸다.

제 삼결 혈도연환(血刀連環)

고리를 이룬 강기가 날아들었다.

마치 그 모습이 불에 달궈진 쇠사슬이 정해진 경로가 없이 날아드는 것과 같았다.

이리저리 휘어지면서 아무렇게나 날아드는 공격, 그래서 어디서 어떻게 바뀌어 어딜 공격하게 될지 모를 그런 공격이었다.

멸천마도식 제 삼식 멸도혈풍.

멸천대도에서 뻗어나간 여러 개의 도기가 회전하면서 날아갔다.

다음 순간.

지켜보던 도왕은 두 눈을 부릅떴다. 앞의 두 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는데.

파악! 파아악! 파아악! 파악!

날아든 도기가 이어진 강기의 고리를 정확히 잘라냈다. 고리가 잘려 나간 강기는 그 불규칙성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날아갔다.

콰콰콰콰콰쾅!

뒤로 날아간 강기는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검을 휘둘러서 모두 파훼했다. 그것들이 그대로 날아갔다면 뒤쪽 벽을 박살 내면서 이곳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늙은 마존이여, 끝장을 보자!”

도왕이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검에 그려진 해와 달에서 강렬한 광채가 뿜어졌다. 해와 달이 동시에 뜨던 바로 그때였다.

검왕이 스윽 앞으로 움직이며 도왕의 앞을 막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공격당할 수 있음에도 검왕이 겁 없이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이다.

아무리 흥분했어도 검왕을 향해 초식을 날릴 수는 없었기에, 적도와 흑도에서 빛나던 광채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감히 내 싸움에 끼어들어?”

도왕은 산 채로 찢어발길 것 같은 무서운 눈빛으로 검왕을 노려보았다.

화가 난 사람은 도왕만이 아니었다.

혈천도마가 검왕에게 대도를 겨눴다. 그의 몸에서 아직 지치지 않은 마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래, 너도 들어와!”

혈천도마는 검왕까지 같이 상대해 주겠다는 기세였다.

물론 기세상 그렇게 말했을 뿐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도왕보다 저 검왕의 무공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때 검무극이 나섰다.

“참으십시오. 어르신보다 더 늙어 보이는 저자는 어차피 어르신 몫입니다.”

매번 늙었다는 말을 붙이는 도왕에게 한마디 해준 후, 검무극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왜 왔느냐는 물음에 검왕이 말했었다. 검무극을 죽이려 하는 사람을 지켜주려고 왔다고.

“악 형이 지켜야 할 사람이 저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적어도 그 대상이 도왕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검무극이 정확히 봤다. 검왕이 나선 이유는 도왕을 지켜주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었다.

검왕의 시선이 뒤쪽을 향했다.

스르륵.

그러자 그들이 있던 공간 뒤쪽에 있던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안에서 굉음 가득했던 혈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혁낭 잘 가져왔군

실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이 선율이 감미로울수록 죽음과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이건 지옥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짧은 연주가 끝나고 한 남자가 열린 문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작대기처럼 길쭉한 체형을 지닌 그는 뼈와 가죽만 남았다 해도 될 만큼 마른 몸이었다.

광대뼈는 툭 튀어나왔고 볼은 깊이 팼는데, 두 눈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하얗게 죽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맹인이었다.

수척한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의 움직임에서 묘한 장단이 느껴졌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음악 소리라도 듣는 것일까? 앞으로 내딛는 두 다리는 쿵쿵 북을 치는 것 같았고, 기다란 팔을 휘젓는 모습은 마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맹인이 이렇게 걷는다고?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걸음, 아니 보법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그가 들고 있는 비파였다.

오래되고 낡은 그 비파는 특이하게도 줄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조금 전 아름다운 선율은 그가 연주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만은 이 남자가 연주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검무극이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십이지왕 제십왕 음왕(音王) 신류(申流).

그는 음공에 있어선 가히 역대 무인 중에서도 겨룰 자가 없다고 알려진 그야말로 음공의 천재라 불렸다.

줄이 없는 저 비파는 그의 독문무기인 귀곡무현비(鬼曲無絃琵)이다.

하지만 그는 십이지왕 중에서도 그리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누굴 죽였는지, 혹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십이지왕 자리를 지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저 병약한 몸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저 몸으로.

죽기 전에 그는 무시무시한 음공을 완성했다고 알려졌다. 너무 강력해서 어떤 고수도 상대할 수 없는 음공이란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게 어떤 무공인지 강호에 알려지진 않았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음왕이 오늘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검무극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검왕이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저 음왕을 지켜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과연 그 예상이 정확하다는 듯 검왕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에게도 얽매일 것 같지 않은 검왕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음왕의 옆에 나란히 섰다.

싸움이 중단된 도왕은 여전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음왕에게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우진 못했다. 명령 때문이든 실력 때문이든, 지금 이 음왕이 주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있었다.

도왕은 혈천도마를 차갑게 쳐다본 후 성큼성큼 걸어가서 음왕의 옆에 섰다.

검무극이 배후 세력과 싸운 이후 처음이었다.

세 명의 십이지왕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은.

그만큼 배후 세력이 이번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리라.

음왕은 검왕과 도왕 사이에 서 있으면서도 전혀 존재감이 밀리지 않았다. 음왕이 원래 이런 인물이었던가? 검무극조차 그가 드러내는 존재감에 내심 놀랐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은 분명 그였다.

일왕과 이왕이 있는 자리에 십왕이 주역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대체 오늘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겁니까? 당신은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검왕은 묵묵히 검무극의 시선을 받아들일 뿐 한마디의 전음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검무극은 차라리 좋은 신호라 여겼다. 검왕이 이렇고 저렇고 변명을 늘어놓는다면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일 테니까.

그들의 모습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검무극의 좌우에 보란 듯이 섰다. 그래, 어디 삼 대 삼으로 한번 붙어 보자는 두 사람의 기세였다.

특히 혈천도마와 도왕은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직 앞서 싸움의 열기가 식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도왕이 허리를 베이긴 했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백중지세였다.

음왕은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검무극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공허한 그의 두 눈에서는 어떤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기에 신비로우면서도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소교주.”

외모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속삭이듯 나직이 말했음에도 또렷하게 귀에 날아와 박혔다. 내공이 지극히 심후하다는 것을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고생보다는 즐거운 여정이었소.”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나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한 여정이라서.”

음왕이 곧바로 혈천도마에게 인사했다. 검무극에게 한 것처럼 그는 아주 정중했다.

“혈천도마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혈천도마가 그의 회색빛 눈동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눈은 보이는 건가?”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면 어찌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았는가?”

“이곳에서 가장 뜨거운 기도를 가진 분이 그곳에 서 계셔서 알아차렸습니다.”

음왕의 시선이 이번에는 일화검존을 향했다.

“우아하고 고상한 기도를 지니셨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화검존님.”

칭찬해주었음에도 일화검존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혈천도마보다 더 차갑게 반응했다.

“잘못 보았네. 나는 그대들을 죽일 생각뿐인데 어찌 우아하고 고상할 수 있겠나?”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음왕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혈천도마가 이었다.

“자, 이제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고 우릴 왜 이곳까지 불렀는지나 말해보게.”

이런 고수가 셋이나 등장했다는 건, 자신들을 기다렸다는 의미가 틀림없었으니까. 앞서 검무극을 합공하던 인형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자리는 명백히 준비된 자리다.

그러자 음왕이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 저도 이유는 있습니다. 여러분들처럼요.”

음왕의 죽은 눈동자가 일화검존을 향해 물었다.

“이곳에는 왜 오셨습니까?”

마치 그녀가 이유가 있어서 왔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음왕은 그 질문을 똑같이 혈천도마에게도 했고, 단소진과 사도맹 무인에게도 했다.

다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이쪽에도 모두 이유가 있었다. 심지어 수하가 된 지한도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가 있었고, 태수 역시 이유가 있었으니까.

음왕이 마지막으로 검무극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이곳에 왜 오셨습니까?”

검무극은 그 이유를 음왕에게 돌렸다.

“너무나 아름다운 선율에 이끌려서 오게 되었소. 죽을 때 죽더라도 아름다운 곡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요.”

“소교주님은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군요.”

“나야 사람 죽일 줄이나 아는 사람이니, 이번 기회에 내게 음악에 대해 알려주시오.”

음왕의 회색빛 눈동자가 말없이 검무극을 향하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잠시 모두 이 방으로 들어와 주십시오.”

그가 자신이 나왔던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검왕과 도왕, 암혈사도와 철면 사내가 따라 들어갔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일단 주도권이 저쪽에 있었기에 절대 방심해선 안 될 상황이었다.

두 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무슨 뜻으로 쳐다봤는지 그들도 알고 있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의미.

검무극 일행과 단소진, 그리고 사도맹 무인까지 음왕의 뒤를 따라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광장과도 같은 거대한 공간에는 부러진 칼날과 병장기들이 널려 있었고, 십여 구의 백골들이 흩어져 있었다.

격전의 흔적들.

바닥에 쓰러진 백골부터 서로의 몸에 검을 박아넣은 채 얽혀 있는 백골도 있었고, 벽에 홀로 기대 있는 백골도 있었다.

그 가운데 관이 놓여 있었다.

태수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여기다!’

드디어 검총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장보도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정말이지 천마신교 소교주와 마존들까지 만나서야 오게 된 이곳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도둑인 자신은 이곳에 있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 왔다. 당장이라도 저 시체들이 들고 있는 검을 확인하고 싶었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저 관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보고 싶었다.

물론 저자들이 열어봤을 거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열어보고 싶었다.

음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곳이 장보도에 적힌 검총입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다르군요. 이보다 훨씬 화려하고 거창한 곳일 거로 생각했는데.”

“우린 이 방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과연 믿을 수 있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저 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하지 않소?”

“그렇다고 고인을 욕보일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음왕은 정말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때 검무극의 눈에 일화검존이 그중 한 백골을 유심히 응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릎을 꿇은 채 한 손으로 검을 짚고 있는 백골이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일화검존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와서 물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일화검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는 저 검이 단묵(單黙)이네. 저분은 내 외숙되는 분이시네. 어린 시절 가끔 오셔서 나와 놀아주셨지. 실종되기 전 마지막 뵈었을 때 장보도 이야기를 하셨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일화검존이 검총에 오려고 한 이유를. 혹시나 외숙이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는데, 정말 여기 계셨군.”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배후 세력이 결국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검총을 이용했다는 것을.

만약 일화검존과 함께 출교하지 않았다면, 홀로 이곳에 온 그녀를 붙잡아둔 후 자신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자리에 자신이 오도록 말이다.

그때 단소진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시신에 독충이 숨겨져 있소.

일화검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시신에도 독을 안배해둔 것이다.

앞서 관문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자운진기독으로 중독시키고, 이 백골에서는 일화검존을 중독시킬 계략을 세워둔 것이다.

아마 혈천도마는 앞서 싸움으로 도왕이 죽일 작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혈천도마가 이렇게 강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기에 실패한 것이고.

검무극이 곧장 지한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지한이 시키는 대로 대답했다.

“저 시신에서 뭔가 냄새가 납니다.”

“어떤 냄새?”

“벌레 냄새 같습니다.”

단소진이 알려준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지한의 후각을 이용한 것이다.

검무극이 혁낭을 뒤지더니 작은 통과 젓가락을 꺼내왔다.

“제가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허락을 구했다. 이미 오가는 대화나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기에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백골이 된 시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입니다. 선배님의 혈육인 일화검존님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백골이 된 시신에게 정중히 절을 올렸다.

“검존님의 안전을 위해 제가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시체를 살피던 그때.

휘이익.

무엇인가 검무극을 향해 튀어 올랐다.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다.

물론 미리 대비하고 있던 검무극은 단숨에 그것을 낚아챘다.

젓가락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은 지네처럼 생긴 발이 많이 달린 독충이었다. 검무극은 영물에 가까운 그 독충을 알아보았다.

“시혈독오(屍血毒蜈)네요. 이렇게 귀한 독충을 어디서 잡아 왔을까요?”

시혈독오는 주로 송장에서 기생하는 독충으로 어지간한 고수는 그대로 즉사시키는 극독을 지닌 독충이었다.

일화검존 같은 고수라면 즉사는 면할 것이다. 대신 독성을 몸속 한곳에 몰아넣고 싸워야 해서 자신의 전력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만독불침이 아니었다면 자운진기독은 중독되었는지 모를 테고, 이 시혈독오는 사고처럼 보일 테니, 저들은 표나지 않게 상황을 장악했을 것이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꺼내왔던 통에 시혈독오를 넣고 단단히 마개를 닫았다.

“우리 독왕님 가져다드리면 정말 좋아하겠소.”

정말 독왕에게 주려고 일부러 젓가락과 통을 준비한 검무극이었다. 일화검존을 노린 독충이라면 정말 귀한 것을 준비했을 테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한 독충을 얻었다.

혈천도마가 음왕을 비웃었다.

“이 방은 건들지 않았다고?”

일화검존은 차가운 눈빛으로 음왕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다. 자신을 노린 것이고, 외숙의 시신을 모욕한 것이었으니까.

음왕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그의 시선이 철면 사내를 향했다.

철면 사내가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제가 맡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적어도 음왕이 시켜서 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더욱 좋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저 음왕은 독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일화검존이 천천히 걸어가서 절을 한 후 잠시 백골을 쳐다보았다. 출교할 때만 해도 큰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그 옛날 숙부의 유골을 찾으니 마음이 아련했다.

“숙부님, 이제 제가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유골을 담을 가죽 주머니를 꺼내서 가져왔다. 정말 별의별 게 다 있는 혁낭이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검무극이 그녀와 함께 유골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도왕이 이 중요한 때 지금 뭐 하는 짓이냐며 나서려고 했다.

그때 도왕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본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가 이 일에는 나서지 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는데, 도왕의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앞서 싸우는 동안 받았던 그 어떤 눈빛보다 차가웠다.

앞서 음왕이 가장 뜨거운 기도를 지녔기에 찾아냈다고? 그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이 순간 도왕은 느꼈다.

‘이자의 어둠은 나보다도 깊구나.’

음왕은 두 사람이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옆에서 검왕은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시체를 수습한 검무극이 가죽 주머니를 혁낭 옆에 걸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아주십시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에 미리 백골을 수습한 것이다. 큰 싸움이 나서 동굴이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지켜보던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그 혁낭 잘 가져왔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인정하시는군요!”

두 사람이 시체를 수습할 때까지 기다려준 음왕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십니까?”

검무극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태수에게 들었다.

“삼백 년 전 사파제일고수이자 사도맹주였던 주가신의 무덤이지 않소?”

그러자 음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서 실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역대 사도맹주들은 모두 한곳에 묻혀 있습니다.”

듣고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마존들도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무림의 누구도 그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도맹주조차도 자신이 어디에 묻히게 될지 모르고 있지요. 오직 대대로 무덤을 지키고 관리하는 백총가(百塚家)라 불리는 가문만이 그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습니다.”

음왕의 죽은 눈동자가 단소진을 향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백총가주 단소진.”

너희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백총가의 가주 단소진.

드디어 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그는 생각지도 못한 신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문이 있었다?

검무극도 알지 못했던 사실. 이건 사도맹주 백자강에게 직접 물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다만 지금 단소진의 표정으로 볼 때 음왕의 말은 사실처럼 보였다.

능청스럽게 사람들 사이에서 연기를 잘하던 단소진이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음왕이 단소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정중했다.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기도에서 강철같은 기백과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제 단소진은 더는 정체를 감추려 들지 않았기에 이미 그의 기도는 달라져 있었다. 무공이 강해서 눈에 띄는 기도가 아니었다. 눈빛에 깃든 정기는 그의 꼿꼿한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검무극이 음왕에게 물었다.

“왜 저 사람을 찾은 거요?”

음왕은 숨기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그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거기 뭐가 있어서?”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인데 온갖 신병이기와 무공비급들이 보관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음왕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음악을 사랑하는 당신이 그런 욕심을 부리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음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앞서 백골에 독을 안배했다는 오해를 받았을 때의 그 표정과 비슷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숨기는 사람이 못 되었다.

그래, 그런 이유로 이 난리를 칠 너희들이 아니지. 신병이기도 무공비급도, 모두 세상에 있는 것이니까. 그 무덤에는 세상에 없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의 머릿속을 스치는 말이 있었다.

―사도맹주가 죽지 않으면 무림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만약 사도맹주가 죽으면?

백총가에서 그를 무덤에 안장할 것이고,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 하더라도 작정한 저들의 감시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저 검왕이 미행하면, 그들은 반드시 그 무덤의 위치를 들킬 것이다.

‘그래서 사도맹주님을 죽이려고 했었구나!’

천하제일 미인대회를 이용해서 사도맹주를 죽이려 한 것은 결국 그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생각의 끝에 자연스럽게 내려지는 한 가지 결론.

‘마지막 구슬이 거기 숨겨져 있구나!’

앞서 음모에서 자신의 몸속에 있던 기운을 뺏어가려 했던 그들이었다. 이제 그 마지막 구슬로 또다시 자신의 기운을 노리려는 것이다.

이 사실로 알게 되는 확실한 것은 그냥은 이 기운을 뺏어갈 수 없다는 거였다. 다른 기운이 있어야만 흡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기회!

그들이 이 기운을 이렇게나 중요하게 여겼기에 검무극이 해야 할 일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저들은 반드시 그 기운을 얻으려 할 것이기에 자신이 먼저 그 마지막 구슬의 기운을 얻어야 한다.

검무극이 천천히 단소진에게 걸어가서 그 앞을 막아섰다.

“정체가 발각되었으면 잽싸게 내 뒤로 와서 숨어야지, 왜 사람을 오게 만드시오?”

뒤에서 단소진의 대답이 들려왔다.

“멀리서도 막아주실 거라 믿었소.”

“저기 앞에 세 사람을 보시오. 대체 누가 만만해서 저 멀리서 당신을 지켜준다는 말이오? 심지어 내가 당신 앞을 이렇게 막아도 아무 반응도 없지 않소? 이러나저러나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지. 특히 저기 맨발에 검 차고 있는 사람 보이시오? 싱겁게 생긴 저 사람, 내가 한 번 싸워봐서 아는데 쉽지 않소.”

여전히 검왕은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반응 안 하나 봅시다, 악형.

검무극은 검왕을 믿고 있었다. 누군가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건 언제나 배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하지만 검왕이라면 그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허리에 찬 저 신발이 자신이 선물로 준 그것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저 낡은 철검이 휘황찬란한 보검으로 바뀌어 있어도 괜찮다.

‘악 형,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검왕은 그저 묵묵히 검무극의 시선을 받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왕이 음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악군학을 믿어선 안 되오.

이간질이나 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지만, 반드시 음왕에게 언급해야 할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소.

도왕은 암흑궁주에게 이번 일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검왕은 소교주를 죽이지 않고 돌아온 사람이니 믿을 수 없고, 음왕은 이번 일을 이끌 성격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암흑궁주는 이번 일의 책임자로 음왕을 지목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텐데, 암흑궁주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음왕을 믿으라고만 했다.

‘궁주의 판단이 옳았기를 바라오.’

검무극이 단소진을 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한데 당신 내 편 맞소?”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할 이유라도 있냐는 말이오?”

단소진이 황당함을 애써 감췄다.

―내 해약을 복용하고도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아, 해약이 있었지.

―나는 당신에게 우리 가문의 운명을 걸었소.

―우리가 언제 봤다고. 초면에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거 아니오?

―그건…… 인정하오.

단소진은 분명 검무극에게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검무극이 이 난데없는 믿음에 어떻게 답하느냐만 남았다.

검무극이 전음 이전의 대화를 이어갔다.

“왜 말이 없으시오? 내가 당신을 도와주면 당신은 뭘 해줄 거요?”

“원하는 게 있으시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단소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검무극이 무슨 부탁을 할지 예상했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자신에게 부탁할 것이라곤 하나뿐일 테니까.

‘소교주, 당신이라도 그곳에는 들어갈 수 없소.’

그랬기에 확실하게 단서를 달았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겠소.”

똑똑한 사람이니 자신이 내건 조건을 바꿀 법도 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검무극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약속하신 겁니다.”

검무극이 다시 음왕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하면 나는 왜 끌어들인 거요?”

물론 검무극은 자신의 몸속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떻게 대답하나 떠보기 위해서 물어본 것이다.

음왕이 생각지 못한 대답을 했다.

“당신이 저 사람을 설득해서 그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길 원해서입니다.”

검무극은 느꼈다. 놀랍게도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자신을 이용해서 무덤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들어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기운을 뺏으려는 거다.

“당신이 데려가서 고문하든, 섭혼술을 쓰든 하면 되지 않소?”

저들이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 사람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검무극을 바라보던 회색빛 시선이 단소진을 향했다.

“백총가의 혈육들은 고문이나 섭혼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섭혼술에 걸리거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 이상을 느끼게 되면 그들에게 심어진 제약이 발동하면서 혈맥이 끊어져 죽게 됩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온 그들이었다.

이제야 검무극은 양쪽이 왜 자신을 이용하려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벗어나기 힘든 상대였고, 밝혀내기 힘든 상대였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단소진을 통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눈앞의 저들을 상대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저 단호한 눈빛으로 볼 때 그는 절대 무덤에 외부인을 들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나보고 설득하라는 거요?”

음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 당신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신을 부른 겁니다.”

“나를 너무 과대평가했소.”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보면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바깥의 인형들을 보십시오. 당신이 누굴 상대해 왔는지.”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칭찬에 약한 줄 어찌 알고 이러시오?”

“무덤에 있는 보물들 반씩 나눕시다.”

“물욕에 약한 것까지 아시다니! 정말 조사를 철저히 하셨소.”

뒤에 서 있던 단소진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검무극을 믿는 마음으로 승부수를 던졌지만, 만약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이라면? 정말 소교주가 저들과 손이라도 잡는다면? 저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검무극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생각지 못한 인물에 대해 물었다.

“한데 저 사도맹 무인은 왜 남겨둔 거요?”

음왕이 대답하지 못하자 검무극이 철면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이 남겼으니 당신은 이유를 알겠지?”

하지만 철면 사내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답할 수 없는 불순한 의도를 검무극이 꿰뚫어 보았다.

“혹시 이번 일을 저지른 것이 천마신교 소교주였다고 증언할 사람이 필요해서는 아니겠지요?”

농담처럼 물었지만 정곡을 찔린 침묵이 흘렀다. 그 찰나의 반응만으로도 검무극의 추측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사람을 살려둘 이유가 없다.

“원하는 걸 얻어낸 다음 우릴 다 죽이고 저 무인에게 고도의 사술을 써서 무덤을 턴 사람이 천마신교 소교주였다고 보고하게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설마 그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시는 분이 그런 비열한 수법을 준비하지는 않았겠지요?”

또 음악을 언급하자 음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는 자신이 어떤 말에 기분이 가장 나빠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 제안을 거절하면 어찌 되오?”

그랬기에 검무극의 저 물음에 대한 답은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당신들 모두가 죽게 될 겁니다. 오늘 팔마존이 육마존이 되겠지요.”

이 노골적인 협박에 두 마존의 반응은 상반되었다. 혈천도마는 더없이 차갑게 음왕을 노려보았고, 일화검존은 오히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반응에 담긴 뜻은 같았다.

“그건 안 되겠소. 여기 우리 아버지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어서. 한날한시에 다 죽으면 아버지가 너무 슬퍼하실 거요.”

음왕은 검무극의 말을 오해했다.

“천마를 언급한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마치 천마의 위세로 이 상황을 해결하려는 것처럼 본 모양이다.

“이 자리에 천마가 있다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그야말로 광오한 자신감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말에 자신들이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검무극이 가장 화가 날 말이었으니까.

검무극은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이번 일을 맡으면서 나에 대해서 알아봤을 거요. 그래서 나보다도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검무극이 천천히 걸어가서 사도맹 무인 앞에 섰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그냥 풍(風)이라고 불러주시오.”

“맹주님의 직속 명령을 받고 오신 거요?”

풍이 대답을 살짝 망설였다.

“아마 직속 명령을 받을 정도면 사도맹주님과 나와의 관계도 알고 있으리라 믿소. 내가 비 소맹주와 어떤 관계인지도 대충 알 테고. 그러니 이 정도는 대답해도 될 거요.”

“이번 장보도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출맹했습니다.”

“지금부터 풍 무인은 확실한 내 편이오.”

풍이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자.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내가 맹주님과 사인이 볼 면목이 없지 않겠소? 일단 내 편 합시다.”

검무극이 다시 음왕을 돌아보았다.

“이게 나란 사람이오. 오늘 처음 본 이 사람도 여기서 죽으면 안 되오.”

검무극이 다시 걸음을 옮겨 지한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 여정에서 적이었다가 내 수하가 된 사람이오. 아직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오. 그냥 느낌이 너무 좋아서 수하로 삼았지.”

지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능력이 좋아서. 무공이 뛰어나서. 이런 이유보다 느낌이 좋아서라는 말이 더 기분 좋게 들렸다.

가만히 지한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단언하듯 말했다.

“이 사람도 절대 죽이지 않을 작정이오.”

이번에는 검무극이 태수 앞에 섰다.

“이 사람은 장보도를 가졌던 도둑이오. 좋은 아버지를 둔 사람이지. 아마 이런 여정이 될 줄 몰랐을 테니, 지금 많이 놀란 상태일 거요.”

검무극을 바라보는 태수의 눈동자가 떨렸다. 검무극의 정체를 알았기에 이젠 감히 농담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아직 나와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이 사람도 살려갈 거요. 내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했거든.”

태수는 감격했다. 마교 소교주가 봤을 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 그 일을 이렇게까지 의미 있는 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지켜보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저런 사람이었기에 저렇게 강해졌음을. 인질을 주렁주렁 데리고도 살아남는 싸움을 해왔기에, 훨씬 더 강해졌음을.

반면 음왕은 도저히 검무극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다 살리려는 겁니까?”

아무리 공손하게 물어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말의 어조에서 알 수 있었다.

이런 하찮은 사람들까지.

“아름다운 선율로도 감출 수 없는 성품이 있는 법이겠지요.”

또 음악을 끌고 들어오자 결국 음왕이 폭발하듯 소리쳤다.

“닥치십시오!”

그러자 검무극이 버럭 소리쳤다.

“너나 닥쳐라!”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감히 내 앞에서 아버지도 죽일 수 있다는 헛소리를 지껄여? 감히 내 마존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해?”

본격적으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검무극의 박력은 엄청났다.

“그래, 너는 확실히 앞을 보지 못하는 자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자다.”

검무극이 차가운 시선이 천천히 음왕과 도왕, 암혈사도와 철면 무인을 쳐다보았다.

“너희는 아무도 그 무덤에 못 들어간다. 지금 여기서 다 뒈질 테니까.”

검무극이 날개를 펼쳤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좌우에서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동시에 멸천대도와 일화검을 뽑아 든 것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검왕이었다.

“악 형은 나가 있어.”

싫은 건 당신의 그 말총머리!

검무극이 마기를 드러냈다.

쏴아아아아아아.

엄청난 마기가 전방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냥은 감당할 수 없어 암혈사도가 피풍의로 몸을 둘러싸며 뒤로 물러났고, 철면 사내 역시 내공을 끌어올리며 마기에 맞섰다.

거칠고 강력한 마기였다. 평소 하늘이 비친 바다처럼 부드러운 기도부터 보이는 검무극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오한이 들게 하는 마기였다. 모두의 마음에 떠오르는 공통된 생각.

이것이 마기구나.

공포심에 몸이 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기.

검무극은 구화마공 대멸식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 다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어느 한쪽이 다 죽어야 끝나는 일.

과연 너희가 대성에 이른 내 구화마공을 막을 수 있을까? 너희들도 여기 무덤에서 잠들어라!

그럼 다음 장보도는 더욱 요란한 소문으로 강호에 떠돌아다니겠지.

그러니까, 어서 나가시오. 악 형.

모두의 시선이 악군학을 향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눈을 껌벅이던 악군학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 나가려는 듯 검무극 쪽을 향해 걸어왔다.

도왕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나가라지 않소?”

도왕의 인상이 확 굳어졌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는 것부터 짜증이 났다.

“당신, 애초에 소교주 편이었지? 이런 상황도 다 사전에 짠 거고.”

“소교주 진짜 화난 거 안 보이시오? 저런 사람이 화나면 정말 무섭다고.”

검왕이 다시 검무극 일행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검무극 앞에 멈춰 섰다.

“왜 이렇게 화가 났나?”

“제가 또 부모 욕은 못 참아서요. 뒤에 두 분도 제 부모님이나 다를 바 없는 분들이시고요.”

그 말에 듣고 있던 두 마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안다.

그대로 나가려나 싶었는데, 검왕은 다시 돌아서더니 음왕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화 풀고, 지금은 음악이나 즐겨라.”

사실 검무극은 예감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갈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나가란다고 나갈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오지도 않았을 거다.

“악 형, 비켜요. 나 진짜 화났습니다.”

“안다.”

알고 있다면서 검왕은 음왕 앞을 보란 듯이 막고 섰다.

뒤에 서서 검무극을 바라보는 음왕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검무극이 왜 화를 내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정작 화가 난 사람은 자신인데.

자신의 음악을 조롱하고 자신을 무시한 게 누군데?

음왕이 비파를 연주하듯 올려 들었다.

“소교주께서 순순히 제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음왕이 비파를 튕기는 순간!

낮고 깊은 파동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허공에 내질러진 흑마검이 파르르 떨렸다.

가볍게 장난스럽게 튕긴 한 수였는데, 그 위력은 강력했다. 게다가 일반 강기가 아니었다. 소리가 보이지 않듯 날아오는 공격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감으로 막아야 했다. 그야말로 극상승의 음공임을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다 지켜준다고 했습니까? 어디 한 번 지켜보십시오.”

음왕이 다시 줄이 없는 비파를 튕겼다. 순간 공기가 터져나가는가 싶더니.

투아앙!

이번에는 검무극이 지한 앞에서 검을 막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동해서 그에게 날아든 공격을 막은 것이다.

이번 공격은 앞서보다 더욱 강력했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음을.

“비파 줄을 튕기는 힘치고는 너무 세지 않나? 차라리 나무꾼을 해.”

따아아아!

이번에는 사도맹 무인을 노렸다. 사도맹 무인은 지한이나 태수보다 훨씬 고수였지만, 그렇다고 음왕의 이 공격을 막을 정도로 고수는 아니었다.

지이잉.

흑마검이 허공에서 진동했다. 음공이 남긴 진동이 검을 타고 흘렀다. 손목이 짜릿했다.

“역시 소교주님이십니다. 그럼 이것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범상치 않은 공격이 나올 것 같았기에 혈천도마가 나서려 했다.

하지만 일화검존이 그를 말렸다. 검무극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는 맡겨두자는 뜻이었다.

따라라랑!

이번 음공은 동시에 세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쾅! 꽝!

검무극은 세 사람 앞에 동시에 나타나서 막았다. 그야말로 검무극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였다.

그 대단한 신위에 음왕은 오히려 기뻐했다.

“우리 소교주님을 위해서는 아주 신나는 곡을 연주해야겠군요.”

검무극이 검왕에게 소리쳤다.

“악 형! 이러다 동생 죽겠습니다! 비키십시오!”

엄살인 줄이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속수무책 공격을 당하는 이 상황에서도 앞을 막고 있다고?

“혹시 숨겨둔 자식입니까?”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검왕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모습을. 그래, 검왕은 예전의 그 검왕이다. 백 마디 말보다 저런 모습으로 알 수 있다.

사실 죽이려 작정하면 검왕이 막고 있어도 뒤쪽의 음왕을 죽일 수 있었다.

음왕에게 구화마공 인멸식을 쓰면 되니까. 대성을 이룬 동서남북 네 악귀의 공격을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인멸식이 아니라도 다른 수도 있었다.

절혼마격을 저들 모두의 정수리에 내리꽂으면?

그럼에도 그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오직 검왕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믿음 때문에.

과연 검왕이 고지식한 사람이었던가? 과연 검왕이 답답한 사람이었던가?

아니다. 그 누구보다 영민하고 누구보다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답답하게 나올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그는 자신에게 한마디 전음도 보내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음왕을 죽여선 안 된다고.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 또한 그 나름의 사정이 있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지켜보고만 있던 일화검존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소교주님, 제게 맡겨주십시오.”

검무극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스스로 나선 이상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과 검왕과의 관계를 몰라서 나선 게 아니었으니까.

이제 이 싸움은 그들의 싸움이었다.

“네, 검존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이 검왕을 쳐다보았다.

“악 형, 이제 큰일 났소. 비키랄 때 비키시지. 우리 검존님이 나서셨소.”

검왕은 일화검존이 나섰음에도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다.

검무극이 검왕 뒤에 있는 음왕에게 차갑게 경고했다.

“이 싸움에 끼어들어 검존님을 공격하려 들면 넌 진짜 죽는다. 그건 악 형도 못 막아줘. 내가 쓸데없는 말이 많아 뭐가 진심인지 헷갈리겠지만, 사람 죽고 사는 일로는 농담 안 해.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순간, 넌 죽어.”

음왕이 묘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끼어들 생각 없습니다.”

음왕이 아예 비파에서 손을 떼고 허리춤에 찼다.

일화검존이 검왕 앞에 마주 섰다. 검무극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정중하게 대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비켜라.”

처음 만났을 때는 그래도 포권으로 가볍게 인사는 나눴었는데, 이제 일화검존은 차갑게 굴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그래, 성질 죽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검왕 역시 똑같이 대응했다.

“싫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건 이런 거지. 당신이 소교주님과 이런 인연을 맺고 있는 것, 당신의 그 맨발, 당신의 그 말총머리!”

누구에게서도 보기 힘든 저 특별한 매력에 소교주가 빠졌을 테니까.

검왕이 자신의 질끈 묶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툭 쳤다.

“이건 포기할 수 없는데?”

검무극이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나는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일화검존은 마음을 다스렸다. 이 싸움을 소교주가 아는 사람과의 싸움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싸움은 배후세력을 지키려는 적과의 싸움이다.

“보면 볼수록 당신은 너무 위험해.”

당장 이런 상황에서 앞을 막아서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소교주와의 관계는 그들끼리의 관계고.

지금은 마존 일화검존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나서고 싶었는데.

하지만 자신이 저 쌍도를 든 고수와 도법 대결을 펼쳤듯, 이 싸움은 그녀의 몫이다.

문제는 저 맨발의 남자가 앞서 도를 겨눴던 자보다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 맨발 사내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소교주였으니까.

두 사람, 이렇게 싸우게 해도 괜찮냐?

하지만 검무극은 무슨 생각인지 말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네가 믿는다면 나도 믿어야겠지.

하지만 일화검존의 일이니 혈천도마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일화검존과 검왕 사이에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앞서 혈천도마와 도왕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일화검존은 이미 검무극에게 눈앞의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런 강자와의 생사대전은 인생에서 단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카아앙!

일화검존은 검과 검이 마주치는 순간, 상대의 검에 담긴 무한한 힘을 느꼈다.

바람처럼 가벼워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검이 무겁다.’

마치 태산이 덮쳐오는 것처럼 검이 무거웠다. 이건 내공이 얼마나 많이 실렸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상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검무극과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느낌.

쉬이익.

일화검존의 검을 흘리며 검왕이 반격했다.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날. 조금만 늦게 피했어도 두 눈이 멀었을 한 수.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한 수였다.

챙챙챙챙챙!

두 사람의 검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응수타진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의 검은 처음부터 최고 속도로 내달리며 검광을 허공에서 번쩍였다.

검무극과 마존, 음왕과 도왕이 아닌 다른 이들은 그 속도를 눈으로는 쫓을 수 없었다.

번쩍번쩍 사방에 터져나가는 섬광. 마치 폭죽놀이를 보는 것만 같았다.

검의 궤적과 잔상이 쌓이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그림.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만 같았고, 한겨울에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는 사람은 검무극과 혈천도마, 음왕과 도왕이었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각자의 실력과 내면에 따라 각기 다른 감상을 느꼈다.

검선은 때론 가늘었고, 때론 굵은 붓으로 먹을 확 그리는 것처럼 굵었다.

그리고 여백.

그들이 만들어내는 여백에 반격과 기습의 기회가 있었다.

여백은 기회임과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었다. 여백을 잘못 이용하면 곧바로 패배였고 죽음이었다.

새로운 검선이 여백을 채울 때마다 두 사람은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맞이했다.

‘이 사람 검은 진짜다.’

보검인 일화검이 저 낡은 철검을 부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순간, 일화검존은 느꼈다. 자신의 심장에서 뭔가가 깨어나는 것을.

‘반드시 이긴다!’

그들의 싸움은 우아하면서도 격렬했다.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향하는 수가 오갔지만, 그들은 그 수를 겁내지 않았다.

독문 무공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큰 무공을 펼치려는 순간, 그대로 팔이든 목이든 잘려 나갈 것이다.

지켜보는 이들은 숨을 죽였다.

이런 경지에 이른 고수들의 검술 대결을 볼 기회는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했다. 그랬기에 모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았다. 눈을 깜짝하면 어느새 다른 수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검왕은 놀랐다. 일화검존이 이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다.

처음에 검무극이 이 싸움을 허락하는 모습에서 그녀에게 한 수 가르쳐 주라는 의미라 여겼다.

‘그녀를 위한 허락만이 아니었구나.’

이 싸움을 통해 자신도 배우고 성장하라는 검무극의 호의였다.

‘하여튼 너는!’

이런 무서운 싸움이 될 걸 알았으면서, 그 소중한 마존을 밀어 넣는구나.

넌 대체 나를 어디까지 믿는 거냐?

그랬기에 검왕에게 이 싸움은 검무극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상대는 이렇게 봐줄 수 없는 실력으로 밀어붙이는데, 봐줘야 하는.

검왕이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검을 든 이래 이렇게 혼신을 다해 싸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쇄애애애액.

싸움의 영역이 점차 커져갔다.

두 사람이 검을 나누며 검무극 앞을 지나갔고, 혈천도마를 지나갔다.

혈천도마는 무섭게 검왕을 노려봤지만, 그의 시선을 받아줄 여유는 없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눈을 꼭 감고 인형처럼 서 있었다. 옆에서 검광이 번뜩이는데 섣불리 움직였다간 죽음이었다.

놀랍게도 이 엄청난 싸움을 하면서도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곳은 아니었다.

촤아아아아악!

이미 벽에는 수백 가닥의 검선이 생겼고, 한쪽 천장이 무너졌다.

아직 본격적인 검기나 검강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다.

검과 검이 싸웠고, 기세와 기세가 싸웠고, 평생 살아온 두 사람의 인생이 싸웠다.

일화검존은 이 싸움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검무극과 비무할 때와는 달랐다.

이 싸움은 진짜였다. 상대의 팔을 자를 생각으로 공격했고, 내 팔이 잘려도 좋다는 각오가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점차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주위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 한 방울이 허공에 떠올랐다. 누구 몸에서 튄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일화검존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경험을 했다.

공중에 떠 있는 한 방울의 피.

일화검존은 그 피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환각인가? 아니면 정말 보이는 건가? 아니면 이미 베인 건가?

푸아아악!

피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반으로 갈라졌다.

다음 순간 원래대로 시간이 흘렀고, 소리가 들렸다.

촤아아아악!

쇄애애애액

한순간에 찾아온 정적.

일화검존의 몸이 옆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녀의 한쪽 어깨가 피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피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핏방울 속 자신처럼 몸이 절단되었을지도 모를 공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스르륵.

검왕의 앞머리가 잘려나가며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이마에 옅은 검선이 생겨있었다. 다행히 피부만 베인 상처였다.

일화검존과 검왕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감격을 숨길 수 없었다. 살면서 이런 대단한 상대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중히 포권하며 잘 싸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최고의 싸움이었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일화검존에게서 부상 때문에 더는 싸움이 안 되겠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성질나서 안 되겠다는 말이었다. 아쉬워서 안 되겠다는 말이었다.

“저 말총머리 오늘 꼭 잘라버려야겠어요.”

이번 싸움에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일화검존의 몸에서 투기가 솟구쳤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잠깐.”

혈천도마가 그녀에게 걸어와서 금창약을 내밀었다.

“나이 들면 상처도 잘 안 아물지.”

일화검존의 이글거리던 투기가 가라앉았다.

“힘 빠지게 왜 이러세요?”

“힘 좀 빼. 지금 너무 힘들어 갔네.”

혈천도마 뒤에서 검무극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인데요?”

검왕에 대한 극찬에 혈천도마가 담담히 말했다.

“그래도 빼게.”

자신에 대한 걱정임을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일화검존이 금창약을 열어서 손가락에 찍어 어깨에 발랐다. 그냥 손을 옷 사이에 넣어서 바른 것임에도 혈천도마는 뒤로 돌아서 주었다.

그러는 사이 검무극이 검왕을 놀렸다.

“어쩌죠? 악 형의 가장 멋진 매력이 그 질끈 묶은 머리인데?”

검왕이 머리카락 뒤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머리카락만 잘리면 다행이겠지.”

그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는 말이었다.

“엄살도 떠실 줄 아는군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이겠느냐?”

이런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는 예전 검왕의 모습 그대로였다.

검무극이 그의 뒤에 서 있는 음왕을 쳐다보았다.

음왕은 여유로웠다. 마치 자신에게만 들리는 음악이라도 있는지 슬슬 상체를 좌우로 움직였다. 기다란 팔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예쁩니다.”

“누가? 저 사람이?”

“아뇨. 악 형 좋아하는 그 여자, 엄청 예쁘다고요.”

“그래?”

악군학은 누굴 말하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네.”

검무극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왜 지금 그녀 이야기를 꺼냈는지 검왕은 잘 알 테니까.

악 형, 난 당신 데리고 본교로 돌아갈 겁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그 어색한 자리를 꼭 볼 겁니다.

일화검존이 다시 앞으로 걸어 나왔고, 검무극은 뒤로 들어갔다.

검무극이 일화검존에게 말했다.

“저 말총머리 싹둑 잘라주십시오.”

그래서 더는 자유 타령 못 하게 하죠. 저 신발도 신겨 버릴 겁니다.

“알겠네. 내게 맡기게.”

도왕은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악군학이었다.

예전부터 암흑궁주는 저 악군학을 높이 샀다. 항상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에게 맡겼으니까.

‘저런 배신자에게.’

그러잖아도 내내 검왕이 못마땅했었는데, 오늘 검무극과의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니 진짜 살의가 일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반드시 죽인다.’

그 살의를 감추지 않았기에 검왕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잊지 마라.”

이전까지는 그래도 기본적인 예는 갖췄는데, 이제 그 격식을 버렸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에 검왕은 웃으며 다시 돌아섰다. 그 모습에 도왕의 인상이 더욱 굳어졌다.

일화검존과 검왕이 다시 마주 섰다.

그녀가 나선 이유는 소교주의 뜻을 따라 그를 비키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검왕과 한 번 더 붙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이 남자와 붙을 일은 평생 다시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이렇게 진심으로 싸우면서는.

일화검존이 자신의 기도를 완전히 드러냈다.

그녀의 기도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검왕의 얼굴을 겨누고 있는 한 자루의 검. 언제 날아들어 얼굴을 꿰뚫을지 모를 극심한 공포심을 안겨주는 기도였다.

검은 상대에게 여러 감정이 들게 했다. 두려움, 우아함, 공포, 열정, 외로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달라질 그녀의 기도.

검왕이 느끼는 감정은 열정이었다.

검 너머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담긴 검에 대한 열의. 더 강해지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

검왕은 안다. 이 마존들의 얼굴에서 저런 감정을 깃들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이 말도 안 되는 선물을 허리에 차고 다니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스스스스스스.

검왕도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는 그의 기도였다.

다음 순간 사방이 반짝였고 일화검존의 두 눈에 놀람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을 둘러싼 수백, 수천 개의 검날. 조금만 움직여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검날이 그녀 주위에 빼곡했다.

일화검존은 느낄 수 있었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진짜 베인다는 것을. 이 기도 속의 칼날들은 진짜보다 더 날카로웠다.

‘진짜 검총이 여기 있었구나.’

그런 느낌마저 들게 하는 검왕의 기도였다.

정말이지 이런 살벌한 기도는 처음이었다.

하나의 검과 수천 개의 검.

그 두 기도가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우우웅.

일화검존이 일화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새하얀 검강이 그녀의 검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검왕은 검강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 철검으로 내 검강을 막겠다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감히!’라고 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화검존은 오히려 긴장했다. 정말 저 검이 검강마저 버틸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결과는 과연 놀라웠다.

카아앙!

일화검과 검왕의 철검이 정통으로 맞부딪쳤을 때, 철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정말 검강에도 부러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충격도 잠시, 자세히 보니 검왕의 검에도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또 다른 충격이 그녀에게 밀려들었다.

“무형검강(無形劍罡)!”

검왕의 검강은 아무런 표가 나지 않는 검강이었다. 무형검기를 쓰는 검왕은 검강 역시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상대가 무형검강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덤볐다간, 한순간에 검이 잘리며 몸통까지 잘려 나갈 것이다.

카카카카캉!

무형의 강기와 새하얀 강기가 충돌했다.

강기가 충돌할 때마다 엄청난 진동이 퍼져나갔다. 검강을 머금었다고는 하나 저 철검이 내부와 외부의 충격을 모두 버텨내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건 검이 특별해서 아니다.

상대는 선선한 가을바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싸울 때는 매서운 겨울바람이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강하다니?’

검왕은 복수를 위해 삼백 년을 준비해 온 조직에서 키워낸 열두 명의 고수 중 가장 강한 남자였으니까.

일화검존은 어쩌면 이번 싸움이 일화검법이 십일 성에서 십이 성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만큼 검왕과의 싸움은 그녀에게 큰 영감과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일화검존의 손에서 독문무공이 발휘되었다.

그녀의 독문무공은 일화검법.

더는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 나가면서 여덟 개이던 초식은 이제 세 개의 초식만이 남았다.

이 초식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 검술의 극의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녀가 새롭게 이름 붙인 첫 번째 초식은 개화(開花)!

그녀의 검 끝이 가볍게 흔들리던 그때 십여 개의 검기가 꽃이 피듯 생겨났다.

슉슉슉슉슉슉슉!

검왕을 향해 날아드는 검기는 그냥 시시한 검기가 아니었다. 하나하나에 경지에 이른 검술의 깊은 조예가 담겨 있었다.

검왕은 독문무공이 아니면 결코 막을 수 없음을 느꼈다.

검왕의 독문무공은 무형신검(無形神劍).

제일검 무형귀허(無形歸虛).

주위 공기가 바뀌더니 검왕의 검도 흔들렸다.

휘류류류류류!

순식간에 검 끝에서 회오리가 생겨나는가 싶더니.

날아든 그녀의 검기가 회오리에 휩쓸리며 사라졌다.

일화검존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의 저 한 수 역시 자신만큼이나 갈고닦은 초식일 테니까.

그녀의 두 번째 독문무공이 발휘되었다.

일화검법 제이초식 낙화(落花).

마치 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듯 검기들이 사선으로 휘몰아쳐서 내려왔다. 가장 막기 힘든 각도로!

쏴아아아아아아악!

검왕 역시 이번에도 무형신검으로 대응했다.

무형신검 제삼검 무형반천(無形反天)

검왕의 앞 공간에 시커먼 공간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날아든 검기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더니 사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작은 점에서 어둠이 확 터져 나오며 빨아들였던 검기를 내뱉었다.

쉭쉭쉭쉭쉭쉭쉭!

날아갔던 검이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설마 자신의 공격이 자신에게 되돌아올 줄 몰랐다.

파파파파파팍!

챙챙챙챙챙챙!

그녀의 일화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을 그녀의 검이 쳐냈다.

미처 막지 못한 검기가 그녀의 옆구리를 스치며 다시 피가 튀었다. 자신의 초식을 자신이 막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검왕이 먼저 다음 초식을 발휘했다.

무형신검 제이검 무형일섬(無形一閃)

번쩍하는 순간 한 줄기 빛이 검왕과 일화검존의 사이에 쭉 그어졌다. 아니, 애초에 그 선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마지막 초식도 발휘되었다.

일화검법 제삼초식 일화(一花).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지막 세 번째 초식이었다.

번쩍하는 순간, 두 사람의 초식이 교차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스르륵.

몸을 틀어 피한 그녀의 앞머리가 잘려 나가며.

그녀의 이마에 한 줄기 혈선이 그어졌다.

의도한 것이었을까? 앞서 검왕의 이마를 그은 그 상처가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생겼다.

쩌어어어억!

검왕 뒤쪽 벽에 사선으로 기다란 선이 생겼다.

검왕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뒤쪽 벽에 잘렸다면 그의 몸도 잘려 나간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앞으로 내민 그의 철검이 진동하고 있었다. 세 번째 초식마저 막아낸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검왕의 머리를 질끈 묶은 끈이 잘리며 그의 머리카락이 풀어졌다.

일화검존이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대신 묶은 줄을 잘라낸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도 정중한 인사는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눈빛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일화검존이 긴장을 풀던 바로 그때.

도왕이 움직였다.

‘네가 또 살려줄 줄 알았다!’

그랬기에 그녀를 기습할 기회만을 기다렸던 그였다. 절대 악군학이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지금이 그녀를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쇄애애애액!

적도가 일화검존의 등에 작렬하려던 그 순간.

날아든 적도를 막은 것은 혈천도마의 멸천대도였다. 일화검존은 긴장을 풀었지만 혈천도마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도왕이 움직이는 순간 그도 동시에 움직였다.

혈천도마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이 개 같은 놈이 감히 누굴!”

혈천도마의 몸에서 엄청난 마기와 살기가 폭발했다.

강기를 머금은 멸천대도가 허공을 갈랐다.

쇄애애애애애액!

도왕이 쌍도를 들어서 막았다. 앞서 여러 차례 격돌했기에 그 공격의 위력은 알고 있었다.

도와 도가 충돌하는 순간 도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강력한 한 수는 앞서 싸움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공격이었다.

혈천도마의 분노가 깃든 한 수였다.

꽝! 꽈앙! 꽝!

멸천대도가 그에게 쏟아졌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강력한 공격에도 도왕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흥분해라! 흥분하면 할수록 내게 기회가 올 것이다!’

꽝! 꽈앙! 꽈아앙!

도왕의 신형이 점점 뒤로 밀렸다. 혈천도마는 그야말로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야말로 광기에 휩싸여 미친 듯이 도를 내리쳤다.

‘이 늙은이 힘이!’

꽝! 꽈앙! 꽝!

도왕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암혈사도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도왕이 일화검존의 등을 노렸듯 그들의 목표는 싸우고 있던 혈천도마였다.

그 순간, 검무극이 움직였다. 번쩍하는 순간 빛처럼 쏘아진 검무극의 신형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쉬이이익! 서걱!

네 사람을 베었는데 소리는 하나만 났다.

그들이 베이는 모습은 마치 거울이 마주 선 장소에서 같은 장면이 무한히 연출되는 것만 같았다. 각기 다른 네 명이 한 사람처럼 동시에 베이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말라고 했지?”

검무극의 경고는 이미 죽은 암혈사도를 향한 게 아니었다.

검무극은 철면 사내와 음왕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

앞서 도왕을 막지 않은 건, 혈천도마가 몸을 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의 개입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음왕이 비웃듯 말했다.

“우린 못 들어가게 하고선 설마 소교주 당신은 개입하는 건 아니겠지요?”

“이번 싸움에 그럴 일을 없을 거다.”

그건 혈천도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혈천도마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광기 어린 공격이었다.

쾅! 콰앙! 쾅! 쾅!

하지만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도왕은 내심 웃었다. 상대가 다른 고수였다면 이미 이 기세에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흥분한 상대에게 죽을 만큼 약하지 않다.

고수가 이렇게 흥분한다는 것은 이미 패배를 작정했다는 의미.

과연 기회가 찾아왔다. 너무나 흥분한 채 내리쳤기에 도가 뒤쪽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도왕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적도가 혈천도마의 손가락을 노렸고, 그 공격을 피하느라 멸천대도를 붙잡은 힘이 약해진 그때.

쇄애애애액!

흑도에 의해 혈천도마의 손에서 멸천대도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끝이다!’

자신들 같은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병장기를 놓친다는 건, 싸움이 끝났다는 의미. 그걸 다시 집어 들 기회 같은 건 없다.

쐐액! 쇄애액!

뒤이어 쏟아지는 쌍도의 공격에 혈천도마는 몸을 날려 뒤로 피하는 선택 대신 그에게 파고들며 양 손목을 잡았다.

악수의 연속에 도왕이 웃었다. 맨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잡아?

우우우웅.

적도와 흑도에 도강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 도강이 깃든 도를 살짝 움직여 베기만 해도, 늙은이의 손목은 잘릴 것이다.

“늙은 마존이여, 저 여인을 좋아했더냐?”

그의 조롱은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대를 죽이고 저 여인을 산 채로 찢어 죽여주마.”

상대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기대했는데.

혈천도마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멸천마도식 제오식 멸도직격(滅刀直擊)”

“뭐?”

섬뜩한 기분에 도왕이 고개를 들던 그 순간,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저 멀리 날려버렸다고 생각한 멸천대도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자신을 겨눈 채 시퍼런 도강을 품고서.

상대는 미친놈처럼 흥분한 것이 아니었다. 무식한 늙은이가 아니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는 이 한순간을 노리고 계획했다. 그의 가짜 흥분에 진짜로 흥분한 것은 정작 자신이었다.

쇄애애애애액!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혈천도마가 극한의 내력을 끌어올려 그의 양손을 꽉 붙잡았기 때문이다.

빛처럼 내리꽂힌 멸천대도가 호신강기를 찢으며 그의 어깨에 박혔다.

콰드드득! 푸우욱!

“으아아악!”

도왕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큰 멸천대도가 자신의 어깨에 박히자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쨍그랑.

적도가 먼저 땅에 떨어졌다. 싸우다가 도를 떨어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손목을 잡고 있던 혈천도마가 그의 팔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도왕의 두 눈이 길게 찢어졌다.

‘나를 찢어 죽이려 하고 있다.’

이제 늙은 마존이여, 라는 고상한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미친 늙은이가! 그만!”

흑도에 도강을 다시 일으켜 손목을 자르려고 했지만.

푸우우욱!

어깨에 박힌 멸천대도가 살과 뼈를 가르며 더 깊이 들어왔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흑도도 땅에 떨어뜨렸다.

이 와중에도 혈천도마는 더욱 강하게 팔을 좌우로 당기기 시작했다.

“이 새끼야! 그만하라고!”

도왕이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버티려 했지만 이미 멸천대도는 몸을 반이나 자르고 들어오고 있었다.

도왕은 보았다. 혈천도마의 두 눈에서 시뻘건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을. 앞서 흥분해서 보였던 광기는 광기가 아니었다. 지금 눈앞의 이 모습이 진짜 숨겨둔 본성이었다.

“……제발!”

푸우욱.

멸천대도가 더욱 깊이 들어왔다. 멸천대도에 자비는 없었다.

“으아아아악!”

멸천대도가 어깨에서부터 그의 몸을 완전히 반 토막 내며 땅에 박혔다.

푸아아아악!

피를 뒤집어쓴 혈천도마가 머리가 붙어 있는 쪽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넌 지옥에서도 내 눈에 띄면 또 죽는다.”

네가 믿듯 우리도 믿는다

피비린내가 확 번져가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검무극 뒤에 선 이들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태수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사람 죽는 거야 많이 봤지만, 이렇게 참혹하게 죽는 건 처음이었다.

‘저렇게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마교의 마존이 무서운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그 무서움을 경험한 적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제야 그가 단지 고수가 아니라 마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한 역시 자신이 어디에 입교했는지 실감했다. 실수하면 자신도 저렇게 되는 거다. 앞서 상대를 죽일 때 혈천도마가 내뿜은 마기는 그야말로 극심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도맹에서 나온 풍도 두려움을 느꼈고, 백총가주 단소진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과연 내 선택이 옳았을까?’

자신이 도움을 청한 이들이 바로 저 사람들이니까.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불러들인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비로소 들었다.

철면 사내는 질린 눈빛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검왕은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혈천도마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침묵을 깬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무극아, 물 좀 다오.”

검무극이 손을 내밀자 혁낭이 저절로 열리며 안에서 죽통이 나왔다. 혹시라도 혁낭에 신경을 쓸 때 음왕이 움직일까 긴장을 늦추지 않은 것이다.

음왕은 도왕의 죽음에도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몸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는 점차 가락을 타며 자신만의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혈천도마는 돌아서지 않은 채 뒤로 손만 내밀었다. 자신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검무극은 그의 손에 죽통을 내려놓았다.

혈천도마는 물을 마시려고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촤아아악.

혈천도마는 돌아선 채 얼굴에 물을 부어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 나서야 혈천도마가 뒤로 돌아섰다. 그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창가에 앉아 책 읽던 그때의 혈천도마로 돌아가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무서운 마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혈천도마는 조금 전 자신과 도왕의 싸움은 없었던 일처럼, 일화검존에게 앞서 전하지 못한 그녀의 싸움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멋진 싸움이었네. 이마는 괜찮은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얼굴에 피를 가득 묻힌 채로 자신과 일화검존을 보고 싶지 않았음을.

일화검존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괜찮아요, 살짝 긁힌 거예요.”

“흉지지 않게 약 미리 잘 바르게.”

“네, 그럴게요.”

혈천도마가 검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심정을 검무극이 대신해서 말했다.

“어디 귀한 얼굴에 상처를 내십니까?”

검왕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앞머리를 열어서 이마를 보여주고 싶다는 눈빛. 이 얼굴은 안 귀하고?

둘만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혈천도마가 함께 있는 자리였기에 괜히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혈천도마가 점잖게 검왕에게 말했다.

“이제 비키시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검왕의 대답에 혈천도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그러잖아도 마음에 안 드는데, 끝까지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긴, 소교주 말도 안 듣는데 자신의 말을 들을 리가 없지.

“그래, 자네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러니 우리 사정도 이해하겠지?”

혈천도마가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혈천도마는 검왕도 자신이 죽이겠다는 기세였다.

검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 누구도 음왕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싸움만큼은 말려야 했다. 앞서 일화검존과의 싸움 역시 목숨을 건 혈투였지만, 그래도 선이 있는 싸움이었다.

검왕이 그은 선이었고, 검왕과 일화검존은 끝까지 그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혈천도마와의 싸움은 다르다. 혈천도마 성격에 진짜 그를 죽이려 달려들면, 정말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 될 테니까.

“어르신!”

“말리지 마라.”

혈천도마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안 말립니다.”

혈천도마가 정말? 하는 표정으로 힐끗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기왕 싸우는 거 꼭 이기십시오! 툭 치면 부러질 저 가벼운 검, 댕강 부러뜨려 버리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혈천도마가 어찌 검무극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지금 가장 난감한 사람이 검무극이란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검무극이 저 말총머리 편을 들며 못 싸우게 말렸으면 확 싸워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편을 들며 꼭 이기라고 하니, 오히려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영악스러운 녀석, 어찌나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지.

앞으로 나서던 혈천도마가 다시 돌아섰다. 일화검존이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넨 약부터 바르라니까.”

그렇게 혈천도마가 들어오자 검무극이 음왕을 쳐다보았다.

음왕은 여전히 몸을 흔들고 있을 뿐, 도왕의 시체는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굳이 없는 눈동자를 보지 않더라도 그가 슬퍼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왕처럼 강력한 자가 죽었는데도 걱정하지 않는다? 너, 대체 무슨 자신감이냐? 저 검왕을 이렇게나 믿는 거냐?

“죽은 사람하고 사이가 안 좋았나? 그렇다고 해도 음악하는 사람 정서가 너무 메말랐는데?”

검무극은 또 음악으로 그를 자극했다. 가장 잘 먹히는 도발이 이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검왕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이 음왕을 자극해서 뭐라도 알아내려는 것이다.

몸을 흔들던 음왕이 검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교주, 당신은 나를 너무 무시하십니다.”

“무시하는 게 아니야. 겁내는 거지.”

검무극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지켜주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겁이 안 나겠어? 당신에게 뭔가 대단한 것이 없다면 저렇게 지켜주겠어?”

음왕이 검왕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든든한 분이시지요.”

진심으로 신뢰하는 말과 표정이었지만 검무극은 느꼈다.

‘이자, 검왕을 믿지 않고 있다.’

그래,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히 믿지 못하겠지.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느냐?

검왕을 믿는 게 아니라면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는 의미인데.

지금도 그는 고개를 까닥거리며 선율을 느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마구 몸을 흔들고 싶은 그런 열기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뭔가 달라졌다.’

도왕이 죽자 오히려 그는 자신감이 더 넘쳤다. 마치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즐거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음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여긴 피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군요. 자리를 옮기시죠.”

음왕은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 베어도 열 번은 더 벨 수 있었다.

검무극이 검왕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 있다는 거 아시죠?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내 앞을 지나가게 해주고 있다는 걸요.

검왕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여전히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람 잘못 봤지! 저 맨발과 말총머리에 속아서 원래 이런 악당인 줄 잠시 잊은 거지.”

그러자 저 앞에서 검왕이 말했다.

“무림에선 네가 더 악당일걸?”

그들이 앞서 인형들이 있던 이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면 사내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계속 저놈 뜻대로 따라줄 테냐? 혈천도마가 분통을 터뜨릴 법도 했는데.

두 사람은 묵묵히 검무극의 좌우에 말없이 섰다. 그들의 눈빛에서 한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네가 저 사람을 믿듯이, 우린 너를 믿는다.

검무극은 두 사람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 일행도 그들을 따라 이전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방을 옮기자 확실히 피비린내가 덜 나서 견딜만했다.

그때 태수가 소리쳤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앞서 세워져 있던 인형이었다.

앞서 이 방에서 그를 가장 매혹하게 했던 건 바로 인형들이었다. 그래서 유심히 봤었고, 다시 이 방에 돌아와서도 가장 먼저 인형부터 봤다.

한데 달라져 있었다.

그 변화에 검무극은 물론이고 두 마존들도 깜짝 놀랐다.

검무극을 합공하던 십이지왕 인형이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어느새 그곳에는 죽은 도왕의 인형도 세워져 있었다.

투왕과 혈왕 사이에 도왕이 거칠게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인형 앞으로 걸어갔다. 도왕 인형 역시 앞서 인형들처럼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어찌나 표정이 생생한지 조금 전 혈천도마와 싸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신, 이 사람이 죽을 걸 예상하고 있었군.”

음왕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당신 인형도 만들어뒀나? 당신은 어디에 서고 싶지?”

그러자 뒤에서 들려오는 음왕의 목소리.

“소교주, 내 인형은 없습니다.”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인형, 당신이 만들었나?”

왠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음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눈을 봤으면서도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시겠지요?”

“당신, 보기보다 음흉해서 그 눈으로 다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물었다.”

“반대로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법이지요.”

마치 당신이 그렇고, 마존들이 그렇다는 듯 음왕이 모두를 쭉 둘러보았다. 눈을 감은 자신감이 눈 뜬 이들을 압도했다.

“소교주, 아직도 안 늦었습니다. 굳이 여기서 저 사람들을 모두 희생시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를 죽일 자신이 있다는 의미.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당신, 근래 기연이 있었지?”

그렇지 않다면 일왕과 이왕을 좌우로 거느리고 왔을 리가 없다.

‘어쩌면?’

회귀 전 인생에서 그는 죽기 전에 무시무시한 음공을 완성했었다. 너무 강력해서 어떤 고수도 상대할 수 없는 음공이라고 했다.

‘그걸 완성했구나!’

저 인형 속 인물들의 운명이 모두 바뀌었듯, 그의 운명도 바뀐 것이리라.

검무극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확신했다.

“네 음공을 완성했지?”

과연 음왕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자신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제 확실해졌다.

“어디 한 번 연주를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좋지. 우린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추는 사람이라서. 음악에 맞춰 시원하게 검무 한 번 춰주지.”

검무극이 앞으로 나서자 검왕이 나서서 앞을 막았다.

“같이 추자.”

어디 그 검무가 진짜 검무를 뜻하겠는가? 음왕을 죽이려는 것임을 알고 검왕이 나선 것이다.

이 정도면 버럭 할 법도 했는데, 검무극은 부드럽게 그를 대했다.

“아니, 춤추게 할까 봐 무서워서 모임도 안 오신 분이 무슨 춤입니까?”

그때 뒤에서 비파음이 흘러나왔다.

띠리링.

“파음(破音)!”

음왕의 외침에 뒤에 서 있던 태수와 지한, 그리고 사도맹 무인과 단소진까지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음파가 날아든 것이다.

“으윽!”

밀려드는 음파를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내력을 발출해서 막았다.

그제야 뒤에 선 네 사람의 표정이 고통에서 풀어졌다.

검무극이 앞으로 쇄도하며 두 마존에게 소리쳤다.

“제가 이 답답한 말총머리를 붙잡고 있는 동안 저자의 팔과 비파를 잘라버리십시오.”

그래, 검왕이 그렇게 살리겠다면 꼭 목숨을 노릴 필요는 없으리라.

검무극은 벼락처럼 빠르게 검왕에게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악 형이 어디 한 번 막아 보십시오!”

검무극과 검왕과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검광이 그야말로 화려하게 번쩍였다. 그야말로 검의 마지막 경지에 다다른 이들이 만들어내는 검술의 극의.

챙챙챙챙챙챙챙!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나누면서도 검무극은 검왕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막는 겁니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그의 팔이 잘려 나가더라도 검왕은 자신만은 막으려 한다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오가는 검과 검. 뒤쪽의 네 사람이 봤을 땐 앞서 일화검존의 싸움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싸움의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구화마공 대성을 이루면서 이제 검무극의 검은 검왕의 검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기려면 이길 수도 있었다.

‘그걸 당신도 느낄 텐데? 결국 막지 못한다는 것을 알 텐데, 왜 이렇게까지 막는 겁니까?’

그러는 사이 일화검존과 혈천도마는 검과 대도를 휘두르며 음왕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익! 쇄애애액!

파앙! 퍼어어엉!

두 사람의 검과 대도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검왕이 날아와 막은 게 아니었다.

음왕 앞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막처럼 막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소리의 막이었다.

“방음진(防音陣)이다!”

혈천도마의 외침처럼 음공의 최고 경지에 이르러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바로 그 방음진이었다.

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음왕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음왕이 본격적으로 비파를 연주했다.

띠리링.

“혈뢰음(血雷音)!”

동시에 사방에서 벼락치는 것처럼 음공이 연속해서 내리꽂혔다.

콰콰콰콰콰콰콰!

벼락처럼 강력한 공격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물론이고 뒤에 서 있던 네 사람에게도 휘몰아쳐 날아왔다

“뒤는 내가 맡겠네.”

혈천도마가 뒤로 몸을 날리며 대도를 휘둘렀다.

꽝! 꽈앙! 쾅!

일화검존은 자신에게 날아든 음공을 피한 후 방음진을 향해 돌진했다. 둘 다 방어를 하면 놈에게 휘둘리게 될 터, 혈천도마를 믿고 자신은 공격을 감행했다.

퍼어어엉!

방음진의 위력이 강력했기에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일화검법을 발휘했다.

일화검법 제일초식 개화!

슉슉슉슉슉슉슉!

그녀의 초식이 방음진을 찢기 시작했다.

음왕은 방음진 안에서 계속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쇄애애액.

뒤를 지키던 혈천도마도 순식간에 쇄도했다. 멸천대도가 개화로 살짝 찢어졌던 손상된 방음진을 뚫고 들어갔다.

콰아앙!

찌이이이이익.

거칠게 방음진을 찢으며 두 마존이 음왕의 영역으로 들어가던 그 순간!

음왕의 연주가 극에 달했다.

쉬이익.

일화검존의 검이 그의 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정말 그의 팔을 잘라버리려던 그때.

극에 달한 연주가 뚝 끊어지더니.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부서진 틈으로 빛도 들어오고

검왕과 검을 나누던 검무극이 검을 내렸다.

쉬이익.

날아들던 검왕의 검이 검무극의 목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검왕을 믿지 않는다면 이렇게 무방비로 방어를 멈추지 않았으리라.

검무극의 시선은 음왕을 향해 있었다. 그를 공격하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검무극이 검왕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악형, 나 점점 더 열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묵묵히 들려온 대답.

“알고 있다.”

“그럼 됐습니다.”

검무극이 천천히 음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검왕이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마치 같은 편인 양 걸었지만, 음왕을 지켜주기 위해 뒤따라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이제 검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풍경이라 여겼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바위기도 했고, 쓰러진 통나무기도 했다. 말이 안 통하는 녹림이기도 했고, 사연 가득한 얼굴로 울고 있는 소녀이기도 했다.

그리고 검무극에게 그는 여전히 좋은 풍경이었다.

검무극이 음왕 앞까지 걸어왔다. 앞서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찢은 방음진은 어느새 새로 펼쳐져 있었다.

퉁, 퉁.

검무극이 방음진을 손으로 쳤다. 보이지 않는 막이 느껴졌다.

“두 분은 어디에 계시나?”

음왕이 검무극의 두 눈을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지옥입니다.”

버럭 할 법했지만 검무극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분들이시니 괜찮다.”

“이번 지옥은 다를 겁니다.”

음왕이 앞서 두 사람을 어딘가로 보낸 곡을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곡이 극에 달했을 때 두 사람이 사라졌다.

“이 곡은 절망곡(絶望曲)이라 불립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지요.”

보이지 않는 현을 튕기던 음왕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아마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가 발휘한 음공은 일반 음공이 아니었다. 음공을 발휘해서 환술 속에 가둔 수법, 바로 환음공(幻音功)이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사라지게 만든 음공이니, 그의 말처럼 파훼가 쉽지 않은 공격일 것이다.

“어떤 사술도 파훼법은 있기 마련이지.”

그러자 방음진 안에서 음왕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 연주가 한낱 사술 따위로 보입니까?”

“아니라는 것 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음공을 믿는 만큼 검무극은 두 마존을 믿었다.

“하지만 갇힌 사람도 한낱 고수 따위는 아니잖아?”

검무극이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혹시 두 분이 같은 곳에 갇혔나?”

“그렇습니다.”

음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그럼 무사히 나오시겠군.”

“왜 그렇게 장담하십니까?”

왜냐고? 지옥에 검존 님과 함께 떨어진 어르신이 어떻게 변할지 너는 몰라서겠지.

“너는 네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지켜주려 애써본 적 있나?”

음왕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없지? 그래서 네 음악이 별로인 거야.”

순간 음왕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정말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소교주는 사람 속을 계속 뒤집어 놓았다.

“마존들이 갈기갈기 찢겨서 나오는 꼴을 보기 싫으면 단 가주에게 무덤 위치를 알아내십시오.”

검무극이 단소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존의 목숨을 두고 협박한다면 검무극은 틀림없이 그 말을 따를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저 사람이 위치를 말하겠나?”

“그건 소교주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마존을 살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검무극이 다시 쳐다보자 단소진은 확실히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사정이 급박하다는 것은 알지만 말씀드릴 수 없소.”

검무극이 다시 음왕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는데?”

검무극의 장난치는 듯한 반응에 음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이 부모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과연 소교주 당신은 비정한 사람이었군요.”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비정한 놈이라고 치고. 당신은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지?”

“무슨 뜻이오?”

“당신도 알잖아? 이 상황에서는 내가 아니라 사도맹주님이 직접 와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안 되는 일인 줄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냐고?”

“소교주 당신이라면…….”

검무극이 그 말을 잘랐다.

“그래, 이렇게 추켜세워주는 바람에 처음에는 나도 헷갈렸어. 이자들이 나를 정말 과대평가하는구나. 그래, 과대평가 받을 만큼 내가 잘났지. 이자들도 어지간히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그래, 급할 만도 하지.”

검무극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한데 그럴 리가 없지.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이런 허점을 보인다? 그래, 당신은 그럴 수 있어. 온종일 비파나 뜯던 사람이 뭘 그리 철저한 계획을 세우겠어? 한데 당신을 보낸 사람은 그리 허술하지 않잖아?”

검무극이 죽어버린 그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뭘 꾸민 거야? 네게 무슨 명령을 내린 거지?”

이 역시도 엄밀히 따지면 음왕을 무시하는 말이었다. 검무극은 끝없이 그를 자극했고, 음왕은 애써 평정심을 지켜내고 있었다.

“시간 낭비 그만하십시오. 이 시간에도 당신 마존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던 바로 그때였다.

푸아아아악!

음왕 앞쪽 허공이 찢기면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피가 가득 묻은 검이었다. 하마터면 음왕은 그 검에 얼굴이 찔릴 뻔했다.

찌이이이이익.

검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던 천막이 찢어지며 모습을 드러내듯, 허공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검이 다시 사라졌다. 찢긴 그 사이에서 후끈한 열기와 피 냄새, 그리고 무엇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푸우욱!

그곳으로 다시 검이 튀어나왔다.

찌이이이이익.

이번에는 검이 아래로 쭉 내려가며 공간을 더 길게 찢었다.

그 순간 음왕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음왕이 다시 빠르게 비파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열렸던 공간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울부짖는 괴성들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때.

푸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커다란 것이 그곳을 뚫고 나왔다.

혈천도마의 멸천대도였다.

음왕이 피를 뿜어냈다. 그가 더는 연주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찌이이이이이익.

무형의 막이 완전히 찢어졌고, 그 사이로 안쪽의 광경이 보였다.

정말 지옥인 것처럼 온통 붉은 대지였다. 시체가 널려 있었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크아아아앙!”

그곳에 날뛰듯 달려드는 것은 맹수처럼 생긴 괴수들이었다.

일화검존의 검기가 그곳을 휩쓸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파아아아아악!

멸천대도가 강기를 내뿜었다. 강기의 물결이 그곳으로 밀려드는 괴수들을 산산조각 내며 밀려 나갔다.

쾅! 콰아앙! 쾅! 쾅!

폭음과 함께 괴수들의 시체가 박살 나며 나뒹굴었다.

비명과 폭음이 잦아들었다.

곧이어 찾아온 침묵.

찌이이이익.

공간이 더욱 찢어졌다.

곧이어 그곳으로 일화검존이 걸어 나왔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제 그만 가요.”

혈천도마를 억지로 끌고 나왔다.

“있어 보게! 내 저것들을 그냥!”

피를 뒤집어쓴 혈천도마는 나오는 그 순간까지 멸천대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괴수들이 피떡이 되어 나뒹굴었다. 그 너머 겁에 질린 괴수들이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혈천도마까지 나오자, 그 공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스스스슷.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놀렸다.

“혼자 다 싸우셨습니까?”

일화검존의 깨끗한 무복과는 달리 혈천도마는 피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젠장! 물 어딨느냐? 닦을 거는?”

혈천도마가 얼굴에 묻은 피를 소맷자락으로 닦아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별호에도 피가 들어가시는 분이 피를 왜 그리 싫어하십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저자의 팔을 자르라고 했지? 팔로는 안 돼. 사지를 다 잘라버릴 테다.”

혈천도마가 당장에라도 다시 달려들려는 것을 검무극이 말렸다.

“우선 피나 닦으시죠. 혁낭에 닦을 거 있습니다.”

혈천도마를 뒤로 물러가게 한 후,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갔다.

새로운 방음진이 앞을 가로막았다.

“또 내 음악을 조롱하실 겁니까?”

지옥이 아니라 두 분 산책로였다고 할 법도 했는데,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했잖아. 당신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라고.”

음왕이 말없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더니,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음악의 힘은 대단합니다.”

한 줄기 선율이 그곳에 흐르자.

갑자기 태수가 미친놈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곧이어 옆에 서 있던 지한도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들이 감정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 표정과 눈빛에 드러났지만, 그들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검무극은 그의 장난에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맞장구를 쳤다.

“오랜만에 두 분 웃는 모습 한번 보자. 내공을 더 끌어올려서 연주해라!”

하지만 음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두 마존을 웃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일이지만, 저 두 사람을 웃게 하려면 엄청난 내공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웃게 할 수도 있지요.”

“울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군.”

음왕의 연주가 바뀌었다. 그러자 웃던 태수와 지한이 순식간에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냥 우는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눈물을 펑펑 흘렸다.

지한은 철들고 처음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시 음왕의 연주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태수와 지한이 화난 얼굴로 서로를 향해 주먹질을 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 분노는 자신들의 것이었다.

그는 비파 연주로 사람의 감정을 조정했다. 여러 음공의 고수를 봤지만,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나약한지 모르시지요? 인간은 다들 어딘가 부서진 존재입니다. 소교주, 당신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서 좋잖아? 그 부서진 틈으로 빛도 들어오고. 그 빛이 마음속에 있는 시커먼 구멍도 비춰주고. 아, 여기에 내 구멍이 있었구나, 구멍이 한 개가 아니었구나, 또 알게 되고.”

검왕과 혈천도마, 그리고 일화검존은 검무극의 말이 어떤 말인지를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을 만났기에 그 구멍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음왕은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여전히 검무극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겼다.

“소교주, 당신 구멍이나 보십시오!”

그가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앞서 연주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따라라라랑.

가늘게 떨리며 공간을 수놓은 선율이 모두의 마음에 하나의 환상을 깃들게 했다. 정말 거짓말처럼 훅하고 장면이 바뀌었다.

태수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내뱉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그 원칙은 선행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도둑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버지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때는 막연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생각 정도였는데, 지금 아버지의 얼굴에서 너무나 깊은 상처를 보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지한은 사왕문의 화룡단주 천대웅의 모습을 보았다.

―배신자 놈!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직을 배신한 놈!

그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고, 또 함부로 대했는지를 떠나, 자신은 누군가를 배신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그것은 큰 상처가 되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도맹 무인 풍도, 백총가주 단소진도 순간 각자만의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찰나 간 행동을 멈췄다.

검무극도 보았다. 정말 이 순간 자신의 앞에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그였다.

그날의 화무기였다.

그는 이안과 함께 관통당한 채 쓰러져 있는 자신을 가소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죽고 넌 살았군.

물론 실제로는 이런 순간은 없었다.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낸 장면.

분노가 터져 나올 순간이었는데, 오히려 미소가 지어졌다. 널 보기 위해 정말 먼 길을 왔다.

―반갑다, 화무기.

다음 순간, 검무극이 눈을 번쩍 뜨며 환상에서 벗어났다. 더는 검무극에게 화무기는 상처가 아니었다. 증오나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다.

널 반드시 죽일 거다, 가 아니라 그냥 화무기는 자신의 삶의 일부였다.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하고, 사고가 나지 않아야 하고, 화무기에게 져서는 안 되고.

그래서였을까? 그 환상은 정말 찰나 간에 지나갔다. 그에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기에.

검무극이 눈을 떴을 때 음왕은 비파를 튕기며 소리치고 있었다.

“살음(殺音)!”

촤아아아아아악!

음파가 만들어낸 강력한 기운이 모두를 향해 날아갔다.

혈천도마가 검무극 다음으로 정신을 차렸다.

콰앙! 쾅!

그가 자신과 일화검존에게 날아든 음공을 연속해서 쳐냈다.

일화검존은 한발 늦게 눈을 떴다. 어두운 그녀의 안색을 보며 혈천도마는 내심 궁금했다.

‘자넨 뭘 본 건가?’

혈천도마는 묻지 않았다. 앞으로도 묻지 않을 것이다. 한 걸음 떨어져 봐야 힘든 것도, 좋은 점도 더 잘 보일 테니까. 냉정함이 아니라 존중이 되는 딱 그 거리만큼만.

퍼퍼퍼펑!

뒤쪽에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음왕의 얼굴에 더욱 놀람이 깊어졌다.

“상혼곡(傷魂曲)에서 이렇게 빨리 깨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내 놀람은 흥분으로 바뀌었다. 그는 지금껏 검무극에게 내내 했던 예의를 버렸다.

“소교주, 너는 정말 대단한 자다, 인정하지. 너는 내 곡을 들을 자격이 있다!”

생기를 잃은 그의 희미한 눈동자에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최근에 만든 곡이다! 네게 처음으로 들려주는 게 되겠군.”

그의 손이 비파를 스치자 맑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왕의 기도가 깊어진 만큼 비파 음도 깊어졌다.

그의 선율에 비파에서 흘러나온 음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금색과 은색이 찬란히 빛나면서 그의 주위에 악보가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만 같았다.

주위에서 수십 명이 합주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연주 소리가 들렸다. 그 선율이 듣는 이의 심장을 뛰게 했다.

검무극은 직감했다. 이번에 그가 승부를 펼치려 한다는 것을. 검무극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음왕의 얼굴에 차가운 조소가 지어졌다.

“다 지켜준다고 했나? 어디 한 번 지켜봐라. 네가 뭐라고? 네가 신이라도 되느냐!”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 떠 있던 것들에게서 빛이 쏟아져나왔다.

바로 그 순간!

쉬이이이이이이익

그 환한 빛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빛을 가르는 빛.

빛이 사라졌을 때,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검왕이 등을 돌린 채 음왕을 마주 보고 앞에 서 있었다.

옆으로 쭉 내뻗은 그의 검에서 피가 한 방울 똑 떨어졌다.

다음 순간.

툭, 데구르르.

음왕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옆으로 굴러갔다.

무형신검 제칠검 무형일생(無形一生).

그 일검에 빛이 잘렸고, 방음진이 잘렸고, 그의 음악과 목이 잘렸다.

촤아아아아악!

음왕의 잘린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허공으로 뿜어졌다. 검왕의 몸으로 혈우처럼 피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인연은 짧고 인생은 길고

악 형, 장난해? 이럴 거면 처음부터 죽였어야지!

검무극이 이렇게 소리치지 않은 이유는 쏟아지는 핏물을 맞으며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서 깊은 사연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음왕을 지켜주었던 것일까?

그랬기에 또 한 명의 십이지왕을 죽였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피에 젖은 모습으로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무극.”

검왕의 말과 표정에서 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그가 마지막 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곡은 앞서 펼치려던 음공이 아니다.”

그때 어디선가 조용히 연주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들리는가 싶다가 다시 오른쪽에서 들렸다. 점차 그 소리가 커졌다.

경쾌하고 신나는 선율은 음왕의 죽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아니, 싸움은 이제부터다! 라는 느낌을 주는 선율이었다.

검왕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다.

“암흑궁주가 그에게 천의신단을 내려주었다. 천의신단은 단순한 영약이 아니다. 천지만물의 기운이 깃든 그야말로 단 하나 존재하는 천의궁 최고의 영약이지. 궁주가 아끼고 아꼈던 것을 이번에 썼다.”

검왕의 시선이 쓰러진 음왕을 향했다.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죽은 그였는데, 쏟아졌던 피가 그의 비파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천의신단을 복용한 그가 마지막 곡을 완성했지. 그 곡이 완성된 후 항상 그의 주변에는 그 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들리지 않았을 뿐이지.”

검무극은 음왕이 내내 가락을 탔던 음이 바로 그 마지막 곡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역혼곡(易魂曲)이다.”

밝혀지는 역혼곡의 놀라운 비밀.

“역혼곡이 연주되는 동안 그를 죽이면 그는 자신을 죽인 사람과 영혼이 바뀌게 된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검왕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그를 못 죽이게 막은 것인지.

“그는 처음부터 네 손에 죽을 작정이었다. 그게 그의 목표였지.”

그래서 검무극의 몸을 차지하려고 했던 거였다.

“그렇다는 말은? 이제 악 형의 몸을 그가 차지한다는 의미잖습니까? 대비책이 있어서 죽인 거겠죠?”

검왕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대비책은 없었으니까.

“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전음으로라도 알려줬다면?”

“알려줬으면?”

검무극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넌 반드시 네가 그를 죽이려 들었겠지.”

이곳에 그를 죽일 실력을 지닌 사람은 검무극과 두 마존, 그리고 자신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무극은 절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네가 이겨낼 생각으로 네가 죽였겠지. 아마 넌 망설이지 않고 베었을 거다.”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보았다. 자신을 믿고, 구화마공을 믿고 그를 죽였을 거다.

“다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제가 왜 벱니까? 그렇게 무서운 결과인 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말했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음왕을 죽였을 것임을. 검왕뿐만 아니라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알았다. 소교주가 틀림없이 베었을 거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역혼곡을 이겨낼 수는 없다.”

“그럼 악형은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는 듯 검왕의 표정은 차분했다.

“놈이 날 차지하기 전에 네가 날 죽여라.”

검왕은 검무극을 구하고 스스로 희생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전에 그를 죽여버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인 척 검무극에게 접근해서 무슨 짓을 저지 몰랐으니까.

검무극이 있는 앞에서 그를 베고, 이렇게 진실을 알리는 게 최선이었다.

검왕의 시선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향했다.

“두 분이 고초를 겪기 전에 베어버렸으면 좋았겠지만, 제가 망설였습니다. 이 방법 말고 다른 수가 없을까, 내내 고민하고 찾았습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정말 마지막까지 안 베고 싶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혈천도마의 표정은 이제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이해하네.”

혈천도마는 물론이고 일화검존도 내심 놀란 상태였다. 검무극과 있다 보면 온갖 일을 다 겪지만, 오늘 이 일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저렇게 강한 고수가 검무극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다니.

그가 음공을 쓰는 자를 지켜주는 이유가 있겠거니 했지만, 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저런 마음으로 대결을 펼쳤고, 저런 마음으로 답답하게 군다는 오해를 감수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검무극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를 죽이게 유도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았다. 목숨이 걸렸음에도.

검무극이 검왕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정말 검무극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고민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검무극과의 인연은 짧았고, 자신의 남은 인생은 더없이 길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검무극을 구하려는 선택을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첫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검왕은 두 번째 이유를 댔다.

“그자가 네 몸을 차지하면 이 무림은 전멸할 테니까.”

검무극의 신분과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그들이 차지한다면,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아니, 무림 걱정을 왜 하십니까? 악 형이 그런 사람이었냐고요! 무림을 떠나는 게 목표였던 사람이잖아요!”

검왕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진작 떠나버렸어야 했는데.”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암흑궁주가 검무극을 상대하기 위해 천의신단까지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고, 결국 떠나는 것을 포기했다.

검무극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했지만, 검왕은 알고 있었다.

“네가 날 죽이지 못한다는 것, 알고 있다.”

검왕이 검을 빼 들었다. 스스로 자결하려는 것이다.

“잠깐! 멈추세요!”

검무극이 벼락처럼 달려들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금까지 펼쳤던 풍신사보 중에 지금이 제일 빨랐다.

“내가 음공까지 발휘한다고 생각해 봐라. 너조차도 감당 못 해”

검왕과 음왕이 합쳐진다? 정말 막강한 적이 될 것이다. 게다가 차마 검왕의 목을 베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함께 있던 이들이 희생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확신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안 돼!”

검무극이 버럭 소리쳤다.

“된다니까, 이 자식아!”

검무극이 뜨거운 눈빛으로 검왕을 응시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어! 그러니 서두르지 마!”

이내 검무극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다시 예를 갖췄다.

“이 선택이 악 형의 선택이라면, 내게도 선택의 기회를 줘야지요. 내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건 제게 평생의 한을 남기는 겁니다.”

검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놈이 악 형을 차지해도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놓겠습니다. 악 형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진다면, 내가 지옥까지 찾아가서 되찾아 올 겁니다.”

그래, 검무극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자신이 이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저를 믿으세요. 만약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는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그때 제 손에 죽으세요.”

검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의 시선은 검무극 어깨 너머 일화검존을 향했다.

나중에 나를 죽여야 할 상황이 되면 그대가 나를 꼭 죽여주시오.

일화검존은 그 눈빛에 담긴 간절한 부탁을 읽을 수 있었다.

일화검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검무극이 그 진지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의심으로 바꾸었다.

“한데 아무래도 수상해.”

검무극이 검왕을 빤히 쳐다보며 불쑥 물었다.

“당신, 우리 악 형 아니지?”

이 상황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냐? 그런 마음으로 검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미 당신이 우리 악 형 차지했지?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그대로일 리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검왕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면서 제법 시간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오히려 검왕이 당황했다.

“아니. 나 그대로다.”

놈이 영혼으로 침입하고 그 침입을 막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러다 갑자기 확 그자로 변하는 걸까?

여전히 들리는 이 음악이 끝나는 순간에 바뀌는 것일까?

“악 형, 우리가 맨 처음 만난 곳은?”

검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악 형 맞군요. 다들 내 말을 무시하고 못 들은 척하거든요.”

검왕이 다시 음왕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정말 뭔가가 잘못된 걸까?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마 악 형의 몸에 그자는 안 들어올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내 의지력이 천의신단으로 완성한 그의 음공을 막을 정도는 아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검무극이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놈들의 음모가 이게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검왕뿐만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검무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도 내내 생각했습니다. 악 형이 왜 이러는 걸까?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혹시 저자를 죽이면 죽인 사람도 함께 죽게 되는 건가? 그런 저주의 곡이 연주되고 있나? 이런 추측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들의 목적은 자신을 죽이는 게 아니라 몸에 깃든 기운을 빼앗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이 경우도 생각했었습니다. 설마 영혼이 바뀌기라도 하는 건가? 한데 그 추측도 금방 버렸습니다.”

“왜?”

“바로 악 형 때문입니다.”

검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악형을 함께 보냈을까요? 지난번에 우리가 서로를 죽이지 않고 헤어졌다는 것을 그쪽 궁주도 알고 있잖아요?”

“비궤 회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를 못 죽였다고 했다.”

“과연 궁주가 그 말을 믿었을까요?”

검무극이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들은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제가 암흑궁주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일은 선택하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검무극은 뭔가를 알아낸 것처럼 보였다.

“그럼 네 생각은 뭐냐?”

쉬이익!

검무극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네가 말해봐라.”

번쩍하는 검기가 향한 곳은 바로 철면 사내였다.

찌이이익.

철면의 이마에서 턱까지 그어진 하나의 선.

놀랍게도 검무극의 검기에도 표면에 선만 그어졌을 뿐 철면은 잘리지 않았다.

철면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제야 내게 관심을 보이다니. 실망이군, 소교주.”

앞서 군웅들을 이끌던 힘차고 밝은 목소리와는 다른 느낌의 목소리였다. 느껴지는 묵직한 기도 역시 앞서 펼쳐졌던 싸움에 죽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했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철면을 벗었다.

그러자 평범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평범했기에 어떤 모습도 다 어울릴 것 같은 인상의 사내.

검무극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놀랍게도 이 자리에는 또 다른 십이지왕이 있었다.

십이지왕 제십일왕 철왕(鐵王) 기사후(奇思厚).

그는 온갖 기물을 이용해서 싸웠던 인물이었다. 주로 철로 된 것들을 다뤘는데 철과 다른 금속들을 섞어 만년한철만큼 강한 금속을 만들어냈다.

그는 천재적 기관 장치 제작자였고, 온갖 암기류는 물론이고 무림에서 처음 보는 괴이한 장치들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죽였다. 무림인들은 그를 철의 지배자라 불렀다.

마지막 십이지왕이 모습을 드러내며 이제 드디어 십이지왕 모두와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소교주 당신이라면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릴 줄 알았지.”

철왕은 웃고 있었다. 그는 정체가 들켰음에도 전혀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앞서 그의 존재를 알아냈어야 했는데, 사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는 워낙 자신의 기도를 감추는데 능한 인물이었고, 순수 무인이라기보다는 장인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물론 고수를 손쉽게 죽이는 무서운 장인이지만.

게다가 이후에는 검왕과 음왕에게 정신이 팔려있었고 설마 십이지왕이 넷이나 한자리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한데 조금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들이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면 나머지 한 명을 그냥 뒀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이군. 이 난장판을 마무리할 사람이.”

철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나오는 연주를 들었다.

“이 곡, 듣기에 참 좋지 않나?”

그러면서 그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궁주께선 당신이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

검무극이 검왕에게 말했다.

“신발을 벗고 다녀서 그래요. 훌쩍 떠날 사람처럼 해 다니는데, 누가 믿겠어요.”

검왕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살아난 것은 기쁜 일이나, 뭔가 더 큰 음모가 펼쳐지는 중이었다.

철왕을 통해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

“이 곡은 역혼곡이 아니라 귀혼곡(歸魂曲)이다.”

귀혼곡이라면 혼을 되돌린다는 의미인데?

“완성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곡이지.”

알 수 없는 묘한 말을 시작으로 철왕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귀혼곡은 연주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니까 딱 한 번 완주할 수 있는 곡이지. 그러니 잘 들어.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곡이니까.”

주위를 흐르는 음악 소리는 신나면서도 몽환적이고, 경쾌하면서도 섬뜩함이 느껴졌다.

“영혼을 불러오려면 산 자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겠나? 연주자의 희생도 필요하고, 그 연주자를 죽이는 사람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그 간절한 마음을 바쳐서 저세상의 영혼을 불러오는 거다.”

음왕의 죽음과 검왕의 희생,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곡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였다.

“희생하는 자의 자질이 높을수록, 희생하는 그 마음이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 많은 영혼을 불러오게 된다.”

검무극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왕을 쳐다보았다. 자질이 높아도 너무 높은 사람인데.

“대체 누굴 불러오려 한 거냐?”

마침 들려오던 음악 소리가 극에 달했고 잠깐 연주가 멈췄다.

철그렁.

뒤에서 들린 소리에 검무극이 천천히 돌아섰다. 검무극이 바라본 곳은 저 멀리 서 있던 인형이었다. 인형이 움직이면서 쇳소리가 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본 인형은 투왕이었다.

그 눈동자가 한 차례 빛나는가 싶더니 진짜 살아 있는 눈동자처럼 변했다. 그가 검무극을 발견하더니 살기를 내뿜었다.

“소교주!”

그 이글거리는 눈빛에 검무극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진짜 투왕의 영혼이 저 인형에 들어왔음을.

“악 형이 날 너무 좋아하셨나 봅니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투왕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떠 있던 피가 아래로 떨어지며 혈왕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목왕의 몸에서 흘러나온 나무줄기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환왕이 허공에 연 문에서 귀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권왕의 말아진 주먹에서 뼈 소리가 났고 암왕이 탄 마차의 문이 조금 열리며 안에서 어두운 눈빛이 반짝였다.

허공에 떠 있던 살왕이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지막에 세워졌던 도왕의 흑도와 적도에서 해와 달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다시 웅장하고 경쾌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곳의 모든 십이지왕 인형들이 검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날개가 왜 거기서 펼쳐집니까?

아홉 명의 십이지왕과 환왕의 쌍둥이 환여까지.

그렇게 열 명의 십이지왕이 되살아났다. 인형이 너무 생생하게 만들어졌기에 그들이 정말 살아서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신까지 완벽하게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죽기 직전 싸우던 기억과 본능부터 되돌아온 그들은 지금 이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눈앞에 선 검무극을 발견하자 증오가 폭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상반된 감정도 느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떠오르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검무극에게 직접 당하지 않았더라도, 모든 그들의 죽음에는 검무극이 함께했으니까.

공포가 전염병처럼 부유하며 서로에게 번져가던 그 순간, 울려 퍼지던 음악 소리가 작아지며 나직이 깔리더니.

둥! 둥! 둥둥!

들리던 연주에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였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음악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음악에는 힘이 있었다.

마치 전장의 북소리가 되어 십이지왕이 느꼈던 두려움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들 본연의 기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혈왕의 눈에 흐르는 붉은 기운은 그가 살아 있을 때의 그 기운 그대로였다. 암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차를 둘러싼 검은 기운은 그야말로 음산했으며 환왕의 기도는 괴이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예전의 그들이 지녔던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둥둥둥!

경쾌한 음악이 그들의 기세를 북돋고 있었다.

그 북소리를 뚫으며 소리친 사람은 투왕이었다.

“검무극!”

투왕이 유난히 더 강한 적개심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두 번이나 죽었으니까.

한 번은 사도맹주 백자강과 싸우다 위기의 순간 탈출했지만, 독왕의 독에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그는 수차례의 대법으로 독을 치료하고 암왕과 함께 다시 왔었다.

그리고 검무극과 극악소마에게 다시 죽었다.

“이번에 죽으면 세 번째겠구나!”

검무극의 도발에 투왕은 참지 못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쇄애애액.

날아든 투왕이 주먹을 내질렀다. 정말 되살아난 것처럼 그때의 무공을 그대로 발휘했다. 심지어 내공까지 제대로 실린 일격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와 싸울 때와는 또 다른 수준에 올라 있었다. 더 빨라지고 강력해졌다.

후웅! 후우웅! 훙!

빠르게 날아드는 투왕의 주먹을 피한 검무극의 주먹이 투왕의 가슴에 적중했다.

투왕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제대로 적중당했지만, 그는 멀쩡했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겉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뼈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철이 아니었다.

“당신이 만든 인형이군.”

철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형? 그대 눈에는 저것이 고작 인형으로 보이나?”

그래, 그는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내가 만든 걸작이다.”

영혼을 불러온 귀혼곡도 대단했지만, 그 영혼을 전혀 부작용이나 위화감 없이 담아낸 그릇을 만든 것이니까.

십이지왕들이 일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들이 기도에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 열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그 기세가 너무 대단했기에 태수는 뒷걸음질을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한은 끝까지 참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어 뒤쪽 벽으로 물러났다. 두 마존이 내력을 일으켜서 막아줬음에도 그 정도였다.

그 끔찍한 기도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사도맹 무인 풍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자신이 살아남아 사도맹으로 돌아갔을 때, 정말 사도맹주가 자신의 보고를 믿을까?

죽었던 고수들이 되살아났다는 보고를.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앞서 죽은 쌍도를 쓰는 고수와 동급의 인물 같은데. 그런 고수 열 명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위험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사방의 벽과 천장이 열렸다. 그 안에 수백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강력한 암기를 발출하는 기관이었다. 그 구멍이 워낙 촘촘해서 만약 동시에 발출된다면 피할 곳은 없었다.

철왕이 만든 기관이었으니, 그 강력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철왕이 자신의 가슴을 풀어헤쳤다. 그의 심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쇳덩이가 붙어 있었다.

“내 심장이 멎는 순간 모든 기관이 작동한다. 그럼 이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검무극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구화마공을 익힌 소교주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는 다 죽는다.”

그 말은 마치 함부로 구화마공을 쓰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검무극이 천천히 걸어가 벽에 나 있는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곳을 겁도 없이 들여다보았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

검무극의 여유에 철왕도 지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

그도 겁 없이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어디 자신 있으면 죽여봐, 자신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호신강기로는 막을 수 없는 것들이 들어 있지. 어디 시험해 볼 텐가?”

검무극이 검을 휘두르면 목이 베이는 거리까지 다가왔음에도 겁을 내지 않았다.

철왕이 지한과 태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들 지켜줄 거라면서?”

“당연히 지켜줘야지.”

철왕이 웃었다. 아무리 검무극이라도 저들을 지키면서는 절대 이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저런 약골들을 버리지 않는다니. 이건 네가 스스로 만든 지옥이다.”

철왕의 말에 검무극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지옥과 내가 생각하는 지옥이 다르군.”

검무극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서 있던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저희 때문에.”

지한은 자신이 약한 것이 너무 화가 났다. 이럴 때 검무극을 도와 함께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약점은 되지 말아야 하는데.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자존심도 상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이 지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자 검무극은 그 무서운 기관에 아예 등을 기댄 채 뜻밖의 말을 전했다.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네가 서 있지 않으면 여긴 정말 지옥일 거다.”

지한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검무극이 꽉 막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도 수없이 많은 기관 장치의 구멍들이 가득했다.

“지금 바깥 하늘은 창창하고 맑을 텐데.”

마치 그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것 같은 깊은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이 호수 속 지하에서 한 번 죽였던 자들을 또 죽여야 한다. 네가 없었다면 여기가 내 지옥이겠지.”

잔잔히 흐르는 선율이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일까? 검무극이 등을 돌린 채 지한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십이지왕은 달려들지 않았다. 분명 음악은 그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지한에게 전하는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자신만을 위해 싸우고, 또 혼자 싸우고. 그런 나날을 계속 걷다 보면 결국 어느 날 살검(殺劍)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외로움에게 잡아먹혀서.”

그 말은 검왕의 마음에 가장 깊게 닿았다. 인생의 대부분을 혼자서 싸워왔던 그였으니까.

“널 지킨다고 해서 감격할 필요는 없다. 이건 날 위한 선택이다. 날 위해 싸우면 너무 힘든데, 널 위해 싸우면 덜 힘들거든. 수련할 때도 그렇고. 그러니 이 이기심에 감동할 필요도 없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지한은 이 순간 검무극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인간의 호신강기로는 막지 못한다는 기관에 기댄 채, 저 무서운 십이지왕을 뒤에 두고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던 순간을.

“제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너 역시 오랫동안 혼자 싸워온 검 아니냐?”

냄새를 맡는 재능으로 잘 먹고 살라고 사부에게 맡겨지던 그 순간부터. 그래, 혼자서 살아온 인생이었고, 자신을 위해서만 싸워온 검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데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지한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교주님에게는 너무 좋은 향기가 납니다.”

“당연하지. 원래 수장에게는 좋은 향기만 난다고 말해야 하는 법이다.”

검무극이 돌아서려고 할 때, 미안해한 사람이 또 있었다.

“미안하다.”

바로 검왕이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정말 화나 있음을.

“이번 일은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야말로 철저히 이용당했다.

암흑궁주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에 검왕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죠.”

“뭐를?”

“덕분에 악 형이 얼마나 저를 위해주는지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검무극이 정식으로 그에게 인사했다.

“저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 구해줬잖아?”

“이미 구해주셨습니다.”

이미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음왕을 죽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었으니까.

“악 형을 좋아하는 그 여인 만나면 오늘 이야기도 꼭 해줄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사람이 이렇게나 멋진 남자라고.”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알면서 들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수하 위로하랴, 나 위로하랴 바쁘구나.”

검무극이 십이지왕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위로할 사람이, 아니 위로할 영혼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목왕을 향했다.

“당신에게는 조금 전의 작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참 오랜만에 뵙소.”

예전의 싸움에서 검무극은 어떻게든 그를 죽이지 않고 일을 해결하려 했다. 무림맹주가 자신의 가문을 몰살했다고 오해했기에 복수를 꿈꾸었던 그였다.

그도 죄가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이 말만은 꼭 전해주고 싶었다.

“무림맹주께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전에 화율청과의 싸움에서 목천가의 멸문에 이들 배후가 관여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었으니까.

그 말에 목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이 죽기 직전 검무극이 자신을 살리려 애쓰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무극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을 꾸민 자는 결국 제 손에 죽게 될 테니, 이제 기나긴 원망과 오해를 푸십시오.”

목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그의 눈빛이 편해진 것을 느꼈다.

스르륵.

목왕의 두 눈이 감겼다.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영혼이 이곳을 떠나려 했다.

바로 그때.

주위에 울려 퍼지던 음악이 더욱 커졌다. 마치 귀곡성처럼 음이 찢어지며 높아졌다. 그의 영혼이 떠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그만!”

검무극이 나직이 경고하듯 말했다. 마기가 실린 그 말이 울려 퍼지자 순간 음악이 멈췄다가 오히려 더욱 커졌다.

“그만하라고 했다!”

검무극의 마기가 십이지왕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후우우우웅.

거친 돌풍이 휘몰아치듯 십이지왕의 몸이 마기로 세차게 펄럭였다.

그리고 불어닥친 마기가 그쳤을 때, 목왕의 영혼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눈을 감은 목왕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지은 표정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다음 인생에서는 죽이는 인생도, 죽임을 당하는 인생도 살지 마시기를.”

그 말을 듣고 있던 혈천도마는 검무극이 진심으로 저 말을 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검무극 자신이 바라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고 떠들고 너스레 떨며 살고 싶어 하는 녀석인데. 그래, 이 자리가 가장 불편한 사람은 가장 강한 그일 것이다.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철왕을 바라보았다. 차갑고 준엄한 눈빛이었다.

“너희는 지금까지 온갖 계략과 음모를 꾸며왔지. 한데 이미 죽은 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일만큼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현실에서 아무리 해도 못 이기겠으면 무인답게 포기했어야지. 철방하면서 살고, 악공으로 살고.”

마치 검무극의 대답을 듣고 있다는 듯 음악 소리가 기괴하게 들렸다.

그때 뒤에서 검왕이 걸어 나왔다.

“백날 말해 봤자 알아들을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잘 알지.”

찌이익.

그가 옷자락을 쭉 찢었다. 그리고 풀어 헤쳐졌던 머리를 다시 질끈 묶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신었다.

그리고는 홀로 나서서 앞에 늘어선 이들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을 만나기 전까진 자신도 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저들 중에서도 최상위를 차지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암흑궁주는 자신을 그렇게 대했다.

“그동안 내게 불만 많았지?”

특히 도왕의 눈빛에 차가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너, 다시 만나면 또 죽인다고 했지.”

혈천도마가 천천히 걸어 나와 검왕 옆에 섰다. 도왕 때문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검왕이었는데, 검무극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껴서였다. 그가 혼자 싸우게 할 수는 없었기에.

“검 나부랭이를 쓰는 자 치곤 기백이 있더군.”

일화검존도 나섰다. 그녀가 나선 이유는 검을 쓰는 무인으로서 검왕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자꾸 그러다가 언젠가 교주님 앞에서 실수해요.”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말게.”

검왕이 좌우에 선 두 사람을 쳐다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줄 몰랐다.

세 사람이 동시에 검과 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뒤에서 불평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제 날개가 왜 거기서 펼쳐집니까?”

세 사람의 얼굴에 못 말린다는 표정이 스쳤다. 정말이지 이런 순간에도 사람을 웃기려 들다니.

“왜 셋이서만 비장한 척, 멋있는 척하십니까? 왜 저 빼고 셋이서만 친한 척하냐고요? 저도 싸울 겁니다. 악 형, 비켜요. 거기 제 자립니다.”

물론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고 대꾸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철왕은 검무극의 여유를 모욕으로 느꼈다.

“소교주, 너의 오만이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갈 거다.”

검무극이 철왕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는 사라진 후였다.

“우리가 지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지? 네 지옥은 충분히 본 거 같으니…….”

대체 이런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농담이 나왔을까 싶을 만큼 차가워진 눈빛으로.

“이제 내 지옥을 봐라.”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철왕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진심으로 놀라고 당황했다. 자신과 십이지왕이 한순간에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었고, 어딘가로 들어가거나 옮겨진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는데.

‘뭐지?’

바람에 실려 오는 풀냄새는 진짜였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이런 환술을 사용한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놀란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검왕도 그곳에 와 있었다.

“세 분은 제가 이런 공간을 열 수 있다는 것을 아셔도 될 것 같아서 함께 모셨습니다.”

일화검존이 바닥을 살펴보았다. 진짜 풀이고 돌이었다. 흙도 진짜였다.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진짜다.’

이번 여정에서 소교주가 보여주는 놀라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 철왕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곳이 네가 말한 지옥인가?”

검무극이 창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앞서 지한에게 말할 때 하늘을 보고 싶어 했던 그였는데.

“그래, 여기가 지옥이다.”

“지옥이라 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지 않나?”

“그럼 혹시 이런 지옥을 기대했나?”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다시 그곳이 바뀌었다.

푸른 공간이 붉게 바뀌었다. 그곳은 진짜 지옥이라 해도 좋을 모습이었다.

피의 강이 흘렀고 곳곳에서 불길이 화산처럼 튀어 올랐다.

영혼들이 고통받는 소리가 악귀의 괴성과 함께 들려왔다. 불어온 바람은 불타버린 영혼들의 고통이 가득 담겨 있어서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때 입에서 불을 내뿜는 지옥견 한 마리가 검무극을 향해 달려왔다.

확 덮치듯 달려온 지옥견이 검무극 앞에 와서 꼬리를 흔들었다. 검무극이 지옥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입에서 불을 뿜었다.

화르륵.

검왕과 두 마존은 그 모습을 놀랍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곳 지옥도, 저 지옥을 지키는 개도 너무나 생생했다.

“이런 지옥도 지옥이고.”

다시 그들이 서 있던 곳이 원래의 들판으로 바뀌었다.

“이곳도 지옥이다.”

장소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까.

“내가 있는 곳이 너희들의 지옥이다.”

쏴아아아아.

명백한 살의를 실은 검무극의 차가운 마기가 다시 그들을 덮쳤다.

철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곳으로 끌려오면서 가장 강력한 한 수였던 인질들을 잃었다.

검무극이 조금 전 발출한 마기와는 대조적인 부드러운 얼굴로 혈천도마를 돌아보았다.

“눈 건강에는 이런 푸른색을 많이 보는 게 좋답니다.”

“또 늙은이 취급이냐?”

“아뇨, 책을 워낙 많이 읽으셔서 그렇죠.”

검무극이 이들을 시공이환술로 끌고 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은 철왕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철왕은 기관의 작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했다.

그가 죽으면 작동할 거라는 가슴의 장치도 적어도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은 같은 장소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

이제 그의 기관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구화마공을 자유롭게 쓰려면 이곳으로 와야 했다. 아까 그곳에서 구화마공을 썼다간 동굴이 무너져 수장당할 수도 있었다.

그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십이지왕의 영혼이 저 몸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음왕의 영혼은 끊이지 않는 선율에 깃들어 있었다.

검무극이 음악이 들리는 방향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불멸의 악공이 되고 싶은 모양이야.”

그러자 음악 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뀌며 반응했다.

혈천도마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잘 데려왔다. 이제 마음껏 싸울 수 있겠군.”

그의 들뜬 모습에 검무극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러실 수 없습니다.”

“뭐?”

“제가 싸울 겁니다. 저 혼자서.”

“그럼 우린 왜 데려왔는데?”

“제가 싸우는 것 보시라고요. 누가 봐야 신이 나서 싸우죠. 혼자 무슨 재미로 싸웁니까?”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마존보다 실망한 사람은 단연 검왕이었다.

“이 싸움은 내 싸움이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이 싸움은 제 싸움입니다.”

자신이 회귀하면서 비롯한 변화였다. 이들과 이곳에서 싸우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었다.

“세 분께는 가치 없는 일입니다. 그 귀한 도와 검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상대에게 쓰시고, 저들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

“내 검은 그렇게 귀한 검이 아니다.”

검왕의 말에 검무극이 지난 일을 떠올렸다.

“무인의 검이 어떤 검인지 결정하는 건 당사자가 아니라 남이 해야죠. 악 형의 검은 귀한 검입니다. 지하에 있던 그 사람들에게 별을 보여주고, 그들을 무사히 보내줬을 때부터요.”

검무극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검왕은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난 오늘 온종일 실속 없이 나서기만 했네.”

검왕이 멋쩍은 표정으로 신발을 벗으려고 했다.

“벗지 마세요. 닳으면 제가 더 좋은 신발 사 드릴 겁니다.”

검왕은 기어코 신발을 벗어 허리에 찼다.

“싫다. 난 이 신발이 좋다. 자, 그럼 친구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구경해 볼까?”

검왕이 뒤로 물러나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도 뒤로 물러났다. 애초에 맨 먼저 나선 사람이 검왕이었고, 자신들은 그를 돕기 위해서 나선 것이었으니까.

굳이 직접 싸우지 않더라도 검무극이 싸우는 모습만 봐도 분명 무학의 경지에 도움을 줄 것이다. 아마 그래서 검무극이 데려온 것이겠지?

스르릉.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고서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철왕은 옆에 빠져 있었기에.

구 대 일의 싸움.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구도였다.

비록 완전한 이성이 깃든 것은 아니지만, 더욱 강해진 무공과 복수심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이 아홉 명의 십이지왕은 지금 당장 무림정복을 나서도 될 전력이었다.

검무극은 지금 그들을 혼자서 상대하려는 것이다.

검무극에게도 이런 싸움은 평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싸움.

철왕이 십이지왕에게 소리쳤다.

“자, 복수의 시간이다!”

그 격려와 흥을 냉큼 받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신나는 음악으로! 소리는 최대로!”

말이 끝나자마자 검무극이 십이지왕을 향해 먼저 쇄도했다.

무공실력이 극에 다다른 아홉 명의 고수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십이지왕이 투왕을 중심으로 좌우로 흩어지며 검무극을 맞이했다.

후우웅!

강철도 부술 것같은 위력의 투왕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주먹을 피한 검무극의 얼굴 옆으로 도왕의 적도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혈왕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열 개의 붉은 선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혈선을 피하자 뒤에서 공격하던 권왕이 대신 적중당했지만, 그는 인상을 한 번 찌푸렸을 뿐, 계속 검무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과 검이 오가는 사이로 살왕의 암기가 허공을 갈랐다.

검무극은 반격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마치 아홉 명의 합공을 피해 보겠다는 기세였다.

그야말로 그곳에는 온갖 다른 성질의 검광과 강기와 살기가 휘몰아쳤다. 소용돌이치던 강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기도 했고, 검기가 그물이 되어 상대를 덮치기도 했다. 하지만 용은 여의주를 물지 못했고, 그물은 고기를 잡지 못했다.

환왕과 환여는 환술을 발휘해서 문을 열었다. 문에서 악귀들이 튀어나왔다.

투왕이 앞장서 달려들고 있었고, 혈왕이 뿜어낸 피가 검무극을 향해 흩뿌려졌다. 권왕의 주먹이 날아들었고 살왕이 기습을 날렸다.

그 순간 일화검존은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은 공교롭게도 앞서 검무극을 합공하는 인형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마치 운명을 예고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검무극은 그 운명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극한에 이른 풍신사보를 발휘해서 그 합공을 빠져나온 것이다.

콰콰콰콰쾅!

빈 곳을 강타하는 공격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무극이 강해진 줄은 알았지만.

‘정말 강해졌다!’

마지막 헤어졌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다.

고수일수록 성장은 더뎌진다. 한데 검무극은 또 괄목상대의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검왕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고 싸움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검무극이 피하는 모습만 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극한의 실력에 다다른 이 싸움은 점의 싸움이었고 선의 싸움이었다.

점에 적중하면 죽는 것이고, 선이 그어져도 죽는다.

그 한 점 한 점이 모여서 선이 되었고, 다시 선이 흩어지면서 점이 되었다.

죽어도 몇 번은 죽었어야 할 공격이 검무극에게 쏟아졌지만, 검무극은 죽지 않았다.

검무극의 움직임은 아름다웠다. 그야말로 음악에 맞춰 검무를 추는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십이지왕을 상대하면서 음왕의 영혼과도 싸우고 있었다.

지켜보던 검왕과 혈천도마, 일화검존은 이 싸움에서 큰 영감을 얻고 있었다. 그들 모두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피어난 단 하나의 가정.

나였다면?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공격했을까? 그 비교에서 오는 깨달음은 직접 싸울 때의 배움만큼이나 컸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무극이 보여주는 싸움이었으니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들은 이렇게 싸울 수 없다.

촤악! 촤아아악.

검무극 주위를 붉은 선들이 생겨나며 거미줄처럼 포위했다.

혈왕의 비장의 한 수인 분체혈망이 발휘된 것이다.

파파파파팍!

검무극의 흑마검이 순식간에 혈망을 찢고 밖으로 나왔다. 이전에 싸웠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검무극의 모습에 혈왕의 몸에 더욱 짙은 혈기가 솟구쳤다.

들리던 음악 소리가 더욱 커지며 십이지왕의 힘을 끌어올리던 그때.

쇄애애애애액!

투왕이 날린 거대한 강기가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암왕의 힘까지 보태진 연환풍운권이 이제 막 혈망을 찢고 나온 검무극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쾅!

검무극이 있던 곳의 땅과 풀이 다 쓸려가면서 일직선의 긴 구덩이가 생겼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검무극이 구덩이 맨 앞에서 두 팔을 교차한 채 서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검무극은 날아온 공격을 세 가지 무공으로 막았다. 황룡무관 지하에서 얻은 천강신과 벽력수라권의 금강수라, 그리고 천마호신공까지.

마치 일부러 피하지 않고 호신공을 시험했다는 듯 검무극이 투왕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투지가 예전만 못한데? 둘이 싸웠나?”

검무극의 도발에 투왕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암왕과 합세한, 분명 마지막 싸웠을 때보다 더욱 강한 위력의 공격이었는데 그걸 맨몸으로 막아낸 것이다.

화아악!

다음 순간 보자기처럼 검무극을 확 둘러싼 것이 있었다. 바로 분노한 암왕이 펼친 암흑장막이었다.

푸우우욱.

하지만 이전에 당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빨리 흑마검이 튀어나와 암흑장막을 찢었다.

“그때 네가 그랬지, 어둠 속에 있는 한 이 초식으론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지금도 그런지 보자.”

순간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한 줄기 선이 그어졌다.

구화마공 제 사식 암흑일섬.

암왕이 여유롭게 말했다.

“소교주,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게 암흑 계열의 마공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고…….”

스르르륵.

그녀의 목이 잘리며 머리통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대성을 이룬 암흑일섬이 암왕의 목을 잘라낸 것이다.

하지만 목이 잘렸지만, 그녀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통은 불신과 경악의 표정을 지은 채 검무극에게 욕설을 해댔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목을 자르는 정도로는 소멸하지 않는구나.’

암왕이 목이 잘린 모습에 십이지왕이 일제히 강기를 날렸다.

쾅! 쾅! 콰아앙! 콰앙!

지켜보던 검왕의 가슴이 철렁했다. 도우러 나갔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먼지가 가라앉자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검무극 앞에 세워진 새하얀 강기의 벽.

구화마공 제 삼식 대마벽.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며 이제 대마벽의 크기를 자신만을 지켜줄 정도로 작게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공격조차 막아내자 연주는 귀를 찢을 듯 크게 들렸다. 선율이 아우성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힘을 북돋우는데도 왜 못 이기냐고.

십이지왕의 눈에서는 더욱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한계를 넘어서는 공격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그들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차분했다.

“더 싸우고 싶지만, 내공을 더 낭비할 수가 없다. 이만하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충분히 확인도 했고.”

내공이 벌써 떨어진 것일까? 검무극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아는 두 마존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대마벽이 그렇게나 많은 내공을 요구한 것일까?

그래서가 아니었다.

검무극이 십이지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너희는 죄가 없다. 오지 말았어야 할 곳에 끌려왔을 뿐. 자, 이제 너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라. 앞으로 두 번 다시 너희들이 돌아오게 될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는 뒤쪽의 세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제 뒤에 딱 서 계십시오. 아직 아버지처럼 정교하게 조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앞으로만 발출할 실력은 됩니다. 왠지 이곳을 파괴하지 않고 발휘할 수 있을 거 같은 예감도 들고요.”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며 덧붙여 말했다.

“제가 힘 조정에 실패하면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혈천도마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보며 씩 웃더니, 흑마검을 앞을 향해 내질렀다.

구화마검 제 육식 천마멸세.

흑마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태양이 폭발했고, 그 폭발은 소리 없는 폭발이었다.

그 빛 속에서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보였다.

날아드는 빛을 막으려고 두 팔을 교차한 권왕의 팔이 사라지고 있었다. 팔과 함께 그의 몸도 빛 속에서 소멸했다.

도왕이 내지른 흑도에 새겨진 해는 진짜 태양을 만나서 사라지고 있었다.

살왕이 은신하려고 몸을 날렸지만 숨을 곳은 없었다.

잘린 암왕의 목과 몸통도, 여전히 그녀의 주변에 가라앉아 있던 어둠도 빛에 녹아버리듯 사라졌다.

환왕도 환여도 환술 속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투왕의 복수심도 녹았고 혈왕의 피도 녹았다. 철왕의 가슴에 달려 모두의 목숨을 위협했던 장치도 흔적도 없이 녹았다.

그들의 영혼까지 모두 소멸했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풀 한 포기, 돌조각 하나 없었다. 십이지왕의 그들의 뼈가 되었던 철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내내 울려 퍼지던 연주도 이제 그쳤다. 음왕의 영혼도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 그 마지막 초식.

천마멸세.

천마가 세상을 멸하는 이 순간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무극의 편이 된 검왕과 화왕을 제외한 모든 십이지왕이 궤멸하는 순간이었다.

이 압도적인 무위에 뒤에 세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두 마존은 구화마공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검무극은 텅 빈 공간을 감격스럽게 쳐다보았다.

‘해냈다!’

시공이환술을 파괴하지 않고 대성을 이룬 천마멸세를 펼쳐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뒤쪽에 있던 세 사람은 감탄과 존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검무극의 등을 쳐다보았다. 구화마공에 대한 존경이었고, 검무극이라는 무인에 대한 존경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세상으로 돌아갔으니.”

검무극이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내공을 끌어올리며.

“우리도 우리 세상으로 돌아가시죠.”

막내야, 어디 있냐?

“진법이 발동된 거 같습니다!”

소리친 사람은 지한이었다.

검무극과 두 마존, 그리고 악 형이라 불렸던 고수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들만 사라졌다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겠지만, 다행히 마주 서 있던 적들도 모두 함께 사라졌다.

사실 놀랍지 않았다. 죽은 영혼까지 소환되는 이 믿을 수 없는 싸움에서, 그들이 진법 안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모두 이 상황을 누군가 진법을 펼쳤다고 여겼다.

지한이 태수에게 말했다.

“이 방을 빠져나가려면 지금이 기회네.”

만약 다시 나타나는 사람이 검무극 일행이 아니라 철면 사내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자네는?”

태수의 물음에 지한이 대답했다.

“나는 소교주님을 기다릴 거네.”

수하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소교주와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각오가 깃든 결정이었다.

―너 역시 오랫동안 혼자 싸워 온 검 아니냐?

살면서 그 누구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다. 검무극이 해준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빠져나가라는 지한의 말이 좋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았지만 태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기다릴 거네.”

자기는 안 나갈 거면서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날 대체 뭐로 보고!

하지만 이 말을 내뱉지 못한 이유는 그가 주눅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장보도를 가지고 있던 자신이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배역쯤은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짐을 지고 있던 청년은 마교 소교주였고, 함께 있던 노인과 여인은 마존들이었다.

저기 자신을 풍이라 밝힌 무인은 사도맹주가 보낸 무인이었고, 또 다른 남자는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문의 가주라고 했다.

그나마 만만한 사람이 이 지한이었는데, 그는 이미 검무극의 신임을 받았다.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중요한 신분일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자존심이 엄청 강해.

왜 아버지에게 상처가 될 말을 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은 거다. 자신이 주인공인 삶. 도망갈 기회는 지금이니 가려면 어서 가라는 말을 듣지 않는 삶.

그리고 그 삶은 도둑으로 살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삶이었다.

탈출을 권한 사람은 지한만이 아니었다. 사도맹 무인 풍이 백총가주 단소진에게 권했다.

“가주께서는 이만 빠져나가시지요.”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을 관리하는 가문의 가주라면, 그는 자신이 지켜줘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괜찮소.”

단소진은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을 모면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법에서 빠져나오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면, 어차피 지금 피해 봤자 자신은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자신을 노출하면서까지 던진 주사위에서 자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데구루루 굴러가던 주사위가 멈춰 섰다.

그들은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나타났다.

“아아!”

지한의 입에서 기쁨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무극과 검왕, 그리고 두 마존이 무사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누구 하나 다친 사람 없이 말이다.

그들을 보며 모두 안도했다.

“오셨습니까?”

지한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검무극을 반겼다. 태수는 물론이고 풍과 단소진도 크게 기뻐했다.

그중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단소진이었다. 이번 일에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생사도 함께 달려 있었으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우선 내공부터 회복해라.”

“네, 어르신.”

검무극이 그 자리에서 가부좌하고 운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혈천도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검왕이 검무극을 둘러싼 채 호법을 섰다.

검무극이 진정 천마신교 소교주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장면이었다.

검왕과 혈천도마, 그리고 일화검존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찌 그 싸움을 쉽게 잊겠는가?

검무극이 십이지왕 전부를 상대로 공격을 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태수나 지한이 그 싸움을 봤다면 검무극이 너무 쉽게 피해서 상대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을 거다.

하지만 자신들은 안다. 그 한 수, 한 수를 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검무극은 그런 위협적인 공격을 펼치는 이들 전부와 싸웠다.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수.

모든 걸 소멸해 버리는 그 마지막 한 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장면이 될 것이다.

운기를 마친 검무극이 눈을 떴다. 세 사람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모습에 검무극이 호들갑을 떨었다.

“무림에서 이보다 더 대단한 분들에게 호법을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다를 떨려하자 혈천도마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이 기분 나쁜 곳에서 나가자.”

철왕이 죽었지만, 여전히 사방의 기관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굳이 이런 곳에 머무르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방을 나온 후 아예 장보도 무덤에서 빠져나왔다. 들어왔던 통로를 통해 호수처럼 큰 연못을 헤엄쳐 나왔다.

갑갑한 지하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상쾌했다.

검무극이 기분 좋게 소리쳤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살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다들 살아서 나왔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안도한 모습을 보자 검무극은 비로소 이번 싸움이 끝났음을 느꼈다.

검무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왕과 두 마존도, 그리고 나머지 네 사람도 검무극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후 검무극은 태수부터 먼저 챙겼다.

“괜찮냐?”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불필요한 존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검무극이 자신을 먼저 챙겨주니 그 한마디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네, 괜찮습니다.”

“네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짐작하고 있다. 아직도 그 마음 그대로냐?”

검무극의 수하가 되어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태수가 솔직히 대답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만나 뵙고, 생각도 깊이 해보고 천천히 결정해라.”

검무극은 회귀 전 인생에서 태수의 부친인 태곤과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신세를 졌다. 그랬기에 태수에게는 기회를 줄 생각이다.

“일 년 후에 와도 되고, 십 년 후에 와도 된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떨리는 그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건 알아야 한다. 너를 본교에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나와의 인연으로 가능하겠지만, 교로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나와는 관계없는 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내 얼굴 한 번 보기도 어려울 수도 있다. 그건 저기 지한도 마찬가지지. 나는 계기가 되어줄 뿐, 바뀐 인생을 살아가는 건 너다. 잊지 마라, 환경이 바뀌어도 네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태수는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스스로 네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면 찾아오너라.”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우선은 아버지부터 뵈어야겠습니다.”

그날 아버지에게 상처를 줬던 말부터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수가 검무극과 다른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났다.

그가 천마신교로 찾아올지, 아니면 이날을 한때의 추억으로 여기며 살아갈지는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은 그가 오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악인들에게만 물건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도둑도 한 명쯤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검무극이 단소진과 사도맹 풍에게 갔다.

“풍 무인께서는 이대로 곧장 맹으로 돌아가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시오.”

그의 임무는 이번 장보도 사태에 대한 보고이니, 이제 돌아가서 보고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검총에 설치된 기관은 사도맹에서 알아서 뒤처리해 주시오.”

진짜 무덤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사도일검 주가신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니 그들이 처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저만치 걸어가던 풍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했습니다. 소교주께서 안 계셨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직접 활약한 것은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지켜본 것이 그의 활약이었다.

“내가 없었으면 저들도 없었소. 그러니 오히려 풍 무인께는 제가 사죄드려야겠지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풍이 정중히 포권하고 사라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소진이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더없이 정중하게 검무극을 대했다. 단지 목숨을 구해줘서가 아니었다. 지한과 태수를 대하는 모습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무덤에서 찾으려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혹 소교주께서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오. 오직 그들과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물건이오.”

단소진은 이번에 동원된 적들의 면면으로 볼 때, 그 물건이 정말 중요한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검무극을 데려가서 찾아가라고 하고 싶었다. 검무극이 구한 것은 자신의 목숨뿐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였으니까.

“내가 단 가주를 도와주면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한 것 기억하시오?”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겠다고 했었지요.”

단소진은 검무극의 부탁을 예상했다. 당연히 무덤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부탁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천마신교 소교주가 달리 자신에게 할 부탁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건 검무극이란 사람을 아직도 잘 모르는 그의 판단이었다.

검무극의 부탁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중에 사도맹주님이 돌아가시면 잘 모셔 주시오.”

단소진은 내심 매우 놀랐다.

“그게 소교주께서 하려는 부탁이었습니까?”

“그렇소. 특별히 더 잘 모셔주시오.”

천마신교 소교주가 사도맹주의 사후를 걱정한다고?

“역대 사도맹주들의 무덤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들어가고 싶소.”

“그런데 왜 그걸 요구하지 않소?”

검무극은 그의 결심을 이미 읽은 상태였다.

“그대는 목숨을 내놓더라도 무덤의 위치는 말하지 않을 작정 아니시오?”

단소진은 그럴 작정이었다. 다른 부탁은 다 들어줘도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려고 했다.

“그렇습니다, 오랜 가법으로 내려온 일이라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럴 거로 생각했소. 그런 사람에게 굳이 이 귀한 부탁을 날려버릴 수는 없지 않겠소?”

구슬을 얻는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이 단소진을 압박해서 그곳의 위치를 알아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신 나는 나대로 무덤 위치를 찾아볼 생각이오. 내게 정말 중요한 물건이기도 하고, 그대 백총가를 위한 일이기도 할 거요. 내가 그걸 차지하지 않으면, 놈들은 끝까지 그것을 노릴 테니까.”

앞선 다섯 개의 구슬을 얻는 과정도 모두 인연이 닿아서 얻은 것이지, 욕심을 내거나 억지로 무리해서 얻지 않았다.

“나와 운명이 닿아있다면 얻게 되겠지.”

단소진은 차라리 검무극이 무덤을 발견해 내길 바랐다.

‘하지만 쉽게 찾지는 못할 겁니다, 소교주.’

찾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속 편한 말을 하고 있었다.

“참, 나중에 내 친구 사인이도 잘 부탁하오. 사인이는 아마 다음 세대 가주가 맡겠지요? 자리 물려줄 때 꼭 좀 부탁한다고 전해주시오.”

단소진은 저 말이 진심으로 하는 부탁임을 알 수 있었다.

소교주는 자신이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자신이 던진 주사위에는 생각지도 못한 숫자들이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소교주님을 뵈니 바람 같은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바람에 몸을 맡긴 멋진 삶을 살아가시기를.”

단소진이 정중히 고개 숙여 작별을 고한 후 그곳을 떠나갔다.

검무극이 검왕과 마존들을 향해 돌아섰다.

검왕과 눈이 마주치자 검무극이 선수를 쳤다.

“꿈도 꾸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저와 함께 본교로 가셔야 합니다. 우리 악 형, 오매불망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고요!”

검왕이 잠시 대답을 아끼던 그때.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같이 가세.”

검왕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혈천도마를 응시하던 검왕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흔쾌히 대답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당연히 검무극이 불평을 드러냈다.

“아니! 제가 가자고 할 때는 대답도 안 하시더니요!”

“너랑은 다르지.”

“안 돼요, 못 가요! 맨발, 말총머리, 검 나부랭이, 다 천마신교 출입 금지입니다.”

검왕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려 한 것으로 혈천도마에게 정말 큰 점수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유분방한 검왕과 책 읽기 좋아하는 혈천도마, 의외로 둘이 잘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검존님.”

“왜 그러나?”

“이곳 천목산에 검존님의 외숙분을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검무극의 혁낭에 걸린 긴 주머니에 그의 유해가 들어 있었다.

일화검존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평생 강호를 떠돌던 외숙이었으니, 마지막 생사의 모험을 펼쳤던 이곳 천목산에 모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세. 좋은 생각이네.”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너는 뭐하나 잊고 지나치는 법이 없구나.”

혈천도마는 검총에서 일화검존 외숙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나중에 저도 매번 잊고 놓치는 순간이 올 겁니다.”

검무극이 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는 네가 날 챙겨줘야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힘차게 했지만 내심 걱정했다. 제가 소교주님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그땐 제가 더 정신없지 않겠습니까?

검무극을 위해서라도 더 젊게,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게 천목산 볕 좋은 언덕에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을 만들었다.

“먼저 내려가십시오, 저는 잠시 이곳을 둘러보고 내려가겠습니다.”

검왕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이곳에 사도맹주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분명 이 산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며칠 걸릴 수도 있으니, 편히 쉬고 계십시오.”

단소진이 직접 나선 이유도, 그래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도 저들의 압박이 턱 밑까지 차올랐기 때문일 테니까.

“먼저 내려가마.”

혈천도마가 돌아섰고 일화검존과 검왕이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세 사람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검무극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검무극이 지한에게 말했다.

“세 분 잘 모셔라.”

“네!”

그렇게 검무극이 천목산에 홀로 남았다.

그가 여러 봉우리를 둘러보았다. 그래,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배후 놈들에게 없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비궤가 있고, 몸속에는 다섯 기운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향한 검무극의 외침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막내야, 어디 있냐? 형들 왔다.”

무인이 인사하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검무극이 예리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이내 눈을 비볐다.

“어이구, 눈 아파.”

신안술을 발휘해서 건너편 절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였다.

혹시 절벽에 구멍이나 어떤 장치가 있을까 해서 살펴본 것인데, 아무리 봐도 그곳에는 특별한 건 없었다.

검무극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막내야,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

검무극이 가장 먼저 살폈던 곳은 앞서 검총이 있던 연못의 건너편 봉우리의 연못이었다. 한 쌍의 눈처럼 이곳 천목산을 대표하는 연못이었으니까.

이쪽에 가짜 검총이 있었으니, 혹시 반대쪽 봉우리 연못에 진짜 무덤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지 않을까?

아쉽지만 없었다. 연못 아래를 샅샅이 뒤졌지만,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후, 가까운 봉우리부터 하나씩 찾기 시작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디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이라고 현판을 달아두었겠는가? 눈앞에 있어도 못 보고 지나치게끔 만들어 두었을 거다.

과연 이 넓은 천목산에서 그 은밀하게 감춰진 무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마음이 급해 여기저기 경공으로 내달리며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몸의 변화나 비궤의 진동을 느껴야 했으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그 마지막 구슬이 그 무덤 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면 과연 몸의 기운이나 비궤가 반응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비궤는 구슬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만 반응했는데.

그나마 유일한 희망은 이 구슬이 마지막 기운이란 점이었다.

검무극은 온정신을 집중해서 주위를 살피며 산을 올랐다.

걸어가면서 기를 발출했다. 사방에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기운이 주변을 살폈다. 썩은 잎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곤충들까지 느꼈지만 다른 특별한 기운은 없었다.

그래, 당연한 일이리라. 쉽게 찾아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한참을 가다 보니 물소리가 들렸다. 검무극이 계곡으로 내려가서 얼굴을 씻었다.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 얼굴 위로 회귀 전 나이 들었을 때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때의 고생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자, 막내 찾으러 가자!”

하지만 늦게까지 그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무덤 입구는 찾을 수가 없었다.

수색에 익숙하지 않은 이라면 혹시라도 자신이 놓친 곳은 없는지 불안할 것이다. 여기서 놓쳤는데 딴 곳에서 헛고생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래도 미련 없이 넘어가야 한다.

검무극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 번 놓친 곳은 아무리 다시 봐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니 뒤돌아보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밀어붙여야 지치지 않고 수색할 수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사람 죽이는 일보다 더 잘하는 게 뭔가를 찾는 일이다.”

* * *

그날 밤, 검무극은 혼자 야영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야영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만을 위한 야영이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자신만을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푹신한 가죽에 앉아 혼자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다.

타닥타닥.

한잔하면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즐거웠다. 원래 자신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회귀 전 인생에서 힘들었던 혼자만의 시간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외로움이 힘들었던 게 아니었다.

‘대법 재료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지? 이대로 재료만 구하다 인생이 끝나면 어쩌지?’

이런 불안감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끝내 잘 이겨냈다. 잘 이겨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이 말 들을 자격이 있다. 특히 십이지왕을 모두 해치운 이번 여정의 끝에서라면.

“잘하고 있다, 무극.”

검무극은 자신을 칭찬해 주었다.

회귀한 후 침이 마를 정도로 남 칭찬을 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칭찬은 잊고 살았다.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칭찬해 준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그런 적이 있었던가?

“무극아, 너 정말 잘하고 있다.”

오직 하늘에 가득한 별들만이 이 값진 칭찬에 반짝이는 박수를 보내주고 있었다.

* * *

일화검존이 홀로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안 오나?”

그녀가 돌아보자 혈천도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검무극과 헤어져 산을 내려온 그들은 마을의 객잔에 묵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객잔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어귀였다. 그녀는 산책하러 잠시 나온 길이었다.

“오늘따라 잠이 안 오네요.”

단지 잠자리가 바뀌어서만은 아니었다.

“계속 소교주가 싸우던 모습이 떠올라요.”

혈천도마는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한동안 자신들을 자극하고 괴롭힐 테지.

“오라버니는 어떠세요?”

“뭐가?”

소교주의 무공에 대해 묻는 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물음은 다른 것이었다.

“이번 출교 말이에요. 저는 살면서 이번 여정만큼 재미있었던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검무극과 일화검존, 이들과 함께 한 여정인데 어찌 즐겁지 않았겠는가?

“무극이가 신경을 많이 써줘서 그렇지.”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여 동감했다.

“소교주가 오라버니를 너무 좋아하더군요.”

“녀석이? 그럴 리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혈천도마라고 어찌 검무극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말 한마디를 해도 일화검존 앞에서 기를 세워주려는 녀석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 젊어지는 영약을 수북이 쌓아주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 모르겠는가?

그래, 이런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건 함께 출교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여행이 주는 선물 같은 거겠지.

“오라버니도 많이 바뀌셨어요. 예전이라면 그 사람에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을 텐데.”

검왕에게 천마신교로 같이 가자는 말을 했을 때 그녀는 내심 놀랐다. 혈천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소교주를 위해서 권한 것이라 여겼는데.

“소교주 때문이 아니네. 자네 때문이지.”

“저 때문이라고요?”

혈천도마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네가 한 번 더 싸워보고 싶어 할 거 같아서.”

일화검존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이런 기분 처음이었어요. 검을 쓰는 사람이 셋이 모였는데, 내 실력이 꼴찌라고?”

소교주가 자신보다 강한 것은 넘어갈 수 있다. 구화마공을 익힌 데다가, 검무극은 그 누구보다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검왕은 다른 경우다. 적으로 만났고 같이 검을 쓰는 사람이다.

한데 그를 이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동수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안다. 그가 한 수 양보했음을.

“저 고백 하나 할까요?”

그녀의 말에 혈천도마가 흠칫 놀랐다. 이런 말 평생 안 하던 그녀였는데.

“한때 검이 싫어졌던 때가 있었어요.”

어쩌면 혈천도마가 이번 여정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그녀와의 관계였다. 그녀가 이렇게 속마음을 밝히게 되었으니까. 그전에도 꽤 편해지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에끼, 검존이 검이 싫어지다니?”

혈천도마의 농담 섞인 질책에 일화검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리 수련해도 검술의 발전이 없었어요. 어딘가에 꽉 끼어서 막혀 버린 느낌이었죠.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죠.”

혈천도마는 알고 있었다. 젊어서부터 그녀는 호승심도 강했고,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그때 짜증도 많이 났고, 사람들도 보기 싫었죠.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았지만, 제 내면이 엉망진창이던 시기였지요.”

그녀는 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당시 얼굴이 겹치며 떠올랐다. 점점 화장이 짙어지던 그때가.

“그때 소교주가 꽉 막힌 그것을 단숨에 뚫어주며 제 무공의 천장을 높여주었지요. 천장이 높아지자 그 순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더군요. 그때 알았죠. 제 모든 문제는 검술 때문이었다는 것을.”

혈천도마는 그때 자신이 그녀를 돕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고 속마음을 나누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먼저 가서 사과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었으면 되었는데.

그때는 왜 그게 그렇게 힘들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한데 이번 여정에서 소교주는 그 높였던 천장을 아예 날려버렸네요. 그러니 그 사람과 다시 붙지 않아도 돼요.”

그녀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제 머리 위는 하늘이거든요.”

혈천도마는 그녀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검으로 정말 끝까지 한 번 가보겠다는 의미.

“축복인가? 저주인가?”

그녀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는데, 아마도 축복이었던 모양이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교주가 우리 천장을 날려버렸지만, 대신 젊은 생기도 같이 불어넣어 줬잖아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

혈천도마는 그녀가 다시 시작하자는 말이 무공과 관련한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 그 뜻이 다른 의미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장은 뚫렸어도, 여전히 그녀는 자신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막을 쳐두고 있었으니까.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는 그녀였다.

“그 검 나부랭이에겐 지지 말게!”

그렇게 두 마존은 밤이 깊어져 가는 줄도 모른 채 이야기를 나눴다.

* * *

다음 날에도 검무극은 산속을 헤매다녔다.

몸에서 거미줄 같은 기운을 발출해서 뭔가 다른 기운이 있는 걸 찾았고, 시야가 뚫린 곳에 서면 건너편 절벽을 신안술로 살폈다.

막막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검무극은 묵묵히 입구를 찾았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거기 경치는 좋습니까?”

검무극이 바라본 건너편 산 중턱 양지바른 언덕에 일화검존 외숙의 무덤이 보였다.

“아시죠? 거기도 꽤 명당 자리입니다. 자고로 명당 자리는 뒤쪽은 산이고 앞으로는 물이 흘러야 하고…….”

혈천도마의 집에서 읽었던 책 중에는 풍수지리에 관한 책도 있었다. 그 책에서 읽었던 부분을 떠올리던 그때.

뭔가에 생각이 미친 검무극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지!”

검무극이 곧장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좌우 산줄기가 명당을 감싸는 듯한 모습이어야 하며, 바람은 감추고 물은 굽이쳐야 한다. 흙은 단단하며 습하지 않아야 하며 붉거나 황금빛을 띠어야 한다.”

그때 읽었던 명당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명당 자리를 찾아야 해!”

아무리 비밀이 중요하다지만 어쨌든 역대 사도맹주들의 무덤이었다. 처음 장소를 물색했을 때 분명 풍수지리에 맞춰서 자리를 찾았을 거다.

당연한 일인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가 일화검존 외숙의 무덤을 보면서 그 점을 떠올린 것이다.

검무극이 천목산의 여러 봉우리 사이를 날며 가장 명당이 될만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그럴만한 곳을 찾아냈다.

“여기다!”

바로 선인봉(仙人峰)이었다. 그곳은 천목산에서 가장 명당이라 할만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검무극은 곧장 선인봉 아래로 왔다. 이곳에 무덤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큰 곳부터 살펴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리라.

검무극이 더욱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며 산을 올랐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데 하산하던 노인을 만났다. 그는 약초 가방을 멘 약초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검무극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노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혹시 무인이시오?”

“그렇습니다.”

“무인이 먼저 인사하는 경우는 처음이라서 놀랐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포권했다.

“그동안 무례했던 무인 놈들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립니다.”

예상치 못한 검무극의 반응에 노인은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실 필요는 없소. 그저 말씀만이라도 송구하고 감사하오.”

인사를 나눈 김에 두 사람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긴 정말 경치가 좋습니다.”

옆으로 비스듬히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뻥 뚫려 있었고 어른의 허리까지 자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여긴 바람과 놀 수 있는 곳이라 풍원(風園)이라 불리는 곳이라오.”

“바람과 논다고요?”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아온 기다란 풀잎이 바람을 따라 휘날렸다.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바람이 여러 방향에서 불었다.

“참 재밌지 않소?”

노인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이름이었고 장소였다.

“그럼 조심히 가시오.”

인사를 하고서 노인은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풍원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의 그 풀잎은 여전히 그곳에서 아이들처럼 놀고 있었다.

검무극이 다시 산을 향해 올라가려던 그때, 문득 앞서 헤어졌던 단소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교주님을 뵈니 바람 같은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바람에 몸을 맡긴 멋진 삶을 살아가시기를.

‘혹시?’

그가 자신에게 뭔가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아니겠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바람 부는 들판을 향했다. 경사진 들판, 이런 곳에 무덤 입구가 있을 리는 없었다.

만약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곳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거다. 은밀한 무엇인가가 있기에는 너무나 확 트인 개방된 공간이었으니까.

단소진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마음이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긴 풀잎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검무극도 그곳으로 걸어갔다. 풀들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그곳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단소진이 말해준 대로 바람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휘이이잉.

뒤에서 불어온 바람에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바람이 바뀌어 왼쪽에서 불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몸도 발걸음도 더없이 가벼웠다.

그러다 바람이 멈추면 검무극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람에 몸을 맡기기! 말이 쉽지,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바람을 완벽히 느껴야 정확히 움직일 수 있었다. 멈춰야 할 때 정확히 멈추고, 다른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에 곧바로 반응해야 했다.

검무극은 정확히 바람이 부는 대로만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검무극은 바람과 하나가 되었다. 마치 바람과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검무극은 계속 움직였다. 미친 짓도 이만하면 됐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계속 바람에 몸을 맡겼다.

얼마나 그렇게 바람을 따라 움직였을까?

마지막 바람을 따라 멈춰 섰을 때.

슥, 하는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검무극의 모습이 사라졌다. 누가 봤다면 풀숲에 쓰러졌나 싶었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검무극은 없었다.

검무극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리저리 움직였던 그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누운 풀들이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냈음을.

그것은 바로 다섯 꼭짓점을 가진 별 모양, 바로 오각풍성진(五角風星陣)의 상징이었다.

휘이이이잉.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누워있던 풀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비함이 사라진 그곳에는 앞서 그 풀잎만이 바람에 휘날릴 뿐이었다.

야, 너 오랜만이다

검무극은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어둠 속.

신안술을 발휘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 있었다.

바람에 몸을 맡기자 신묘한 진법이 자신을 이곳으로 옮겨준 것이다.

‘이곳이다!’

검무극은 이곳이 역대 맹주들의 무덤으로 가는 입구임을 알 수 있었다.

‘고맙소, 단 가주.’

단소진은 정말 작별 인사에 실마리를 남겨두었다. 가법을 어길 수는 없었지만, 그는 바라고 있었으리라. 그 위험한 물건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리기를.

물론 그렇다고 진짜 자신이 이곳을 찾아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겠지만.

그야말로 이곳의 위치는 허허실실 전략이었다.

비밀 묘지라면 당연히 산세가 험한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입구가 숨겨져 있을 거라 여길 것이다.

그렇게 뻥 뚫린 곳에 입구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리고 검무극은 진법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바람에 온전히 몸을 실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진법이라니?

정말이지 이런 풍류가 느껴지는 진법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과거에 이 진법을 만든 사람은 그야말로 진법의 대가라 불렸던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지금 진법을 배우고 사용하는 이들도 모두 알고 존경하는 그런 인물이리라.

그러자 검무극은 내심 긴장되었다. 저 아래에는 이런 사람이 만든 진법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공간 자체가 주는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십이지왕과 싸웠던 가짜 검총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기운이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주위가 밝아졌다. 그리고 계단 아래에는 기다란 복도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끝에 다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일 차 관문이다!’

검무극이 복도 양쪽 벽을 살폈다. 바닥과 벽, 천장에는 수많은 구멍이 나 있었다. 저 복도에 발을 딛는 순간 기관이 작동해서 암기나 검날이 튀어나올 것이다. 다행히 진법이 아니라 기관 장치였다.

조심스럽게 기관을 살피던 검무극이 결정을 내렸다.

‘쾌속보로 돌파한다.’

괜한 실력 자랑으로 기관을 훼손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이곳에 자신은 조용한 손님으로 왔다. 다녀간 것도 모르게 돌아갈 생각이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후, 검무극이 몸을 날렸다. 근래 극한으로 빨라진 그가 작정하고 속도를 냈다.

쉬이이이익!

동시에 기관이 일제히 반응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은 복도 끝에 내려섰다. 그의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 호흡도 하기 전에 이곳까지 왔기 때문에.

그가 지나쳐 온 복도는 수백 자루의 창날이 사방에서 거미줄처럼 튀어나와 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쇄도하는 검무극 뒤로 창날이 물결처럼, 또 불길처럼 뒤따라왔었다. 하지만 벼락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스릉, 스르르릉, 스르릉.

검무극의 돌파는 기관을 만든 사람이 상상한 침입자의 최고 속도를 넘어선 것이다. 아무리 고수라도 이보다 더 빠를 수는 없겠지. 하지만 검무극은 그보다 더 빨랐다.

그야말로 검무극의 경신법은 기관 제작자의 상상력조차 넘어선 것이다.

기관 장치에 흠집 하나 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한 검무극이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이 층.

그곳에 두 번째 관문이 있었다.

두 번째로 검무극을 맞이한 관문은 이전 관문보다 훨씬 위험했다. 물론 그 대상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숨결로 들어오는 한 줄기 독을.

‘무형지독이다!’

모두 저 앞에 있는 통로에는 또 뭐가 기다릴까 신경 쓰게 한 후, 계단 끝에서 하독한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독되었는지도 모르게 은밀히.

정말 비싼 무형지독을 사용한 이 관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냥 여기서 죽어라!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고수라도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다.

검무극은 가볍게 첫 번째 두 번째 관문을 돌파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삼 층.

세 번째 관문에서는 진법이 발동했다.

스스스슷.

검무극이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주위가 황량한 들판으로 바뀌었고, 그 주위로 시커먼 그림자와 같은 환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갖 병장기를 든 환영들이 검무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슨 생각인지 검무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쇄애애액.

검무극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환영들을 베어 넘겼다. 엄청난 숫자가 달려들었지만, 검무극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흑마검에서 날아간 검기가 그들이 휩쓸었다. 같은 내공을 쓰더라도 죽이는 숫자가 달랐다.

환영들이 시체를 넘어 계속 달려들었다. 보통 고수라면 절대 내공이 감당하지 못할 숫자였는데, 이 진법을 만든 사람 역시 숫자 계산을 잘못했다. 설마 이 정도 숫자의 적을 버틸 사람은 없겠지? 여기 있었다.

푸아아악!

검무극이 마지막 환영을 베자 진법이 파훼되었다.

스스스스슷.

그야말로 검무극의 실력이 관문을 압도했다. 세 관문은 각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속도와 독, 그리고 내공을 요구했고 검무극은 마치 이 관문의 천적 같은 존재였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 들어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을 테니까.

세 번째 관문을 깨자 눈앞에 거대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무덤에 다다른 것이다.

검무극이 석문을 열고 들어가자 웅장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더없이 높은 천장은 들어선 이를 압도했고, 사방에 석상들이 서 있었다.

검을 찬 무인을 형상화한 석상도 있었고, 도를 든 석상도 있었다. 어떤 석상은 주먹을 앞으로 내지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석상은 태사의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위엄 가득한 모습에서 그들이 역대 사도맹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방 벽에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정사대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고 사방에 시체들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우뚝 선 무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역대 사도맹주 중 한 사람이리라.

그리고 중앙에 장식장이 있었고, 사도맹주들이 남긴 유산이 놓여 있었다. 무공비급도 있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신병이기들도 있었다.

각 시대의 맹주들이 익혔던 무공이고 사용했던 병장기니 얼마나 귀한 것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것이 있었다.

새하얀 천 위에 올려진 그것은 분명 마지막 자색 구슬, 자정이었다.

“우리 막내가 저기 있구나!”

검무극이 성큼성큼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자정을 들고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섯 번째 마지막 구슬.

이 구슬의 기운을 얻기 위해 배후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들고 있던 자정을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자정은 산산조각 나서 박살 났다.

스스스스스.

자색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에도 검무극은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왜 이러십니까?”

벽에서 비밀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달려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이곳 무덤을 관리하는 백총가주 단소진이었다. 아마 그곳에 숨어서 몰래 내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구슬, 찾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맞소. 이것 때문에 놈들과 싸웠지.”

“한데 왜 깨버린 겁니까?”

검무극이 깨진 자정을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가짜니까.”

단소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가짜였습니까?”

검무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인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앞에 다른 구슬들을 구했소. 그 구슬은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겨져 있었지. 한데 이곳에 있는 구슬은 보란 듯이 드러나 있었소.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었지.”

“단지 그 이유만으로 깨버렸단 말이오? 어떤 다른 이유로 드러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소?”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오.”

마지막 구슬을 받아들었을 때 비궤도, 몸속의 기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마지막 기운인데 아무 반응이 없을 리가.

검무극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여기 이 무덤도 가짜요.”

단소진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짜라니요? 내가 여기 있는데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검무극이 단소진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있어서 가짜요.”

단소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당신을 보는 순간 확실해졌지.”

단소진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당신에게 베푼 은혜를 고작 이렇게 갚는단 말이오?”

황당하다 못해 분노하고 있는 그였다.

검무극의 차분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입구에 만들어진 바람 진법은 너무나 대단한 진법이었소.”

정말 그렇게 대단한 진법은 처음 경험했다.

“한데 그에 비해 내부의 진법은 너무 일반적이었지. 입구로 들어오는 진법이 그렇게 대단한데 내부를 지키는 관문이 고작 그런 이런 것이라고? 창날을 발사하고 독을 뿜고 진법 속에서 환영이 공격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한 기관이었고 진법이었소.”

검무극은 단정하듯 말했다.

“입구의 진법을 만든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일반적인 진법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소.”

마지막 세 번째 관문의 진법을 파훼하면서 검무극이 고개를 갸웃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했소. 과연 그가 이곳에 진법을 만들었다면 무슨 진법을 만들었을까? 만약 누군가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곳에 있는 역대 맹주들의 유산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이 틀림없을 거요. 그러자 한 가지 전설적인 진법이 생각났소.”

검무극의 입에서 하나의 진법이 흘러나왔다.

“여원환상진(如願幻想陣)!”

진법에 빠진 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을 얻게 해주는 천고의 진법이었다.

보물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보물을, 무공비급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비급을.

하지만 그것을 차지하는 순간, 영원히 진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것을 얻고 기뻐하며 진법 속에서 헤매는 동안 결국 현실의 당사자는 진기가 고갈되어 죽고 마는 것이다.

파훼법은 단 하나.

그것을 얻는 순간 거부해야만 한다. 앞서 검무극이 자정을 깨버린 것처럼.

이 파훼법은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파훼법이었다.

“첫 번째 관문부터 이미 진법 안이었지.”

처음에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릴 때부터 이미 진법이 발동했던 것이다.

“연계진법(連啟陣法).”

바람 진법을 만든 사람에게 걸맞은 실력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야말로 진법의 신이라 불려도 좋을 사람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원하는 것을 거부했음에도 진법이 파훼되지 않았다는 점이오.”

그때 단소진이 지금까지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정말 소교주는 대단한 분이시오!”

마치 이 모든 것을 시험한 것이라는 듯, 크게 감탄했다.

그가 품에서 또 다른 상자를 꺼내서 검무극에게 주었다.

“여기 진짜 구슬이오. 소교주를 시험해서 미안하오. 당신이 여원환상진을 파훼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소.”

검무극이 상자를 받아서 열었다. 안에는 아까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내는 자색의 구슬이 들어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검무극의 감탄에 단소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구슬이오? 대체 어떤 역할을 하기에?”

“구슬 보고 한 말이 아니었소.”

검무극이 구슬을 집어 들더니.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깨뜨려버렸다.

단소진이 깜짝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연계진법뿐만 아니라 이중 파훼를 해야만 하는 진법까지 만들었소.”

“이중 파훼? 그게 무슨 말이오?”

그러자 검무극이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진법의 일부이자 진법이 파훼되는 걸 막기 위해서 안배된 두 번째 파훼법이오.”

“심지어 당신은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단소진은 버럭 소리쳤다.

“대체 무슨 미친 소리요?”

그러자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뭐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려보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다시 물었다.

“당신은 충성스러운 사람이오. 이 무덤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사람이지. 내게 해준 그 마지막 말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최대한의 배려였소. 그것도 정말 큰마음을 먹고 해줬을 거요. 한데 당신이 여기서 나를 기다린다고? 그 찾기 힘든 구슬을 찾아서 품에 넣어둔 채 나를 시험했다고? 당신이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이 신성한 무덤에서? 당신은 그런 사람이오?”

그 물음에 단소진이 혼란스러워하더니.

“나는……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그가 인정하는 순간.

스스스슷!

단소진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그가 두 번째 파훼법이었던 것이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이곳까지 돌파했다면, 단소진이 아니라 그가 인연을 맺은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으로 파훼법은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진법 속의 세 개의 관문을 넘어서야 하는 건 물론이고 자신이 간절히 원한 것을 거부해야 한다.

설령 그것을 거부하더라도 두 번째로 유혹까지 거부해야 한다.

결국 애초에 어떤 욕심을 가지고 침입한 사람이라면 절대 파훼할 수 없는 진법이었다.

그때 단소진이 사라진 자리에 책자 하나가 떨어졌다.

―천기절진통해(天氣絶陣通解).

검무극이 책장을 열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말년의 깨달음을 나의 연계진법을 깬 후인에게 남긴다. 귀허자(鬼虛子).

검무극은 귀허자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두 진법을 만든 사람이라면 그가 남긴 이 비급은 진법계의 구화마공이 아닐까?

검무극이 책자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이런 시기에 이런 기연을 얻는 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 여겼다.

“세상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겠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진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스르륵.

검무극의 주위가 바뀌었다. 무덤 내부였던 그곳이 사라지자 처음 검무극이 떨어져 내렸던 그 어둠 속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거대한 석문의 모습이 보였다.

진짜 무덤의 입구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사도맹 맹주전으로 가는 곳에 서 있는 수호 석상인 늑대의 얼굴이 석문 중앙에 새겨져 있었다.

전대 맹주들의 영혼을 지켜주려는 듯 더없이 용맹스러운 모습이었다.

“야, 너 오랜만이다.”

검무극이 양손으로 문을 밀었다.

크르릉.

겹겹이 쌓아온 사도 무림의 역사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아까와는 그 세월의 냄새부터 달랐다.

더 크게 울어라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압도적인 규모는 앞서 진법 속에서 봤던 가짜 무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역대 맹주들이 죽어서 영원히 머무르는 곳.

검무극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그 경계에 서서 큰 소리로 인사했다.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입니다. 비록 걷는 길은 다르지만 한 자루의 검으로 지켜낸 선배님들의 위대한 삶을 존경합니다. 당대 무림에 이르러 사마정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무림을 차지하려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 찾아뵌 것이니, 부디 오늘 이 후배의 허락되지 않은 발걸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 숙여 예를 갖춘 후 안으로 들어섰다. 거기에 검무극다운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당대 사도맹주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차기 맹주와는 친구 사이고요! 그러니 잘 봐주십시오!”

검무극은 잠시 입구에 서서 유구한 세월의 힘에 압도당한 채 장내를 둘러보았다. 건조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 향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내부는 넓었지만, 둘러볼 시간은 충분할 거라 여겼다. 단소진도 자유롭게 이곳에 드나들지 못할 테니까. 그도 정해진 날짜에만 들어올 수 있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다. 인연이 된다면 반 시진 만에도 찾을 것이고, 인연이 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십 년을 있어도 찾지 못할 것이다.

부디 마지막 구슬이 자신과 인연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내부는 거대한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뒤쪽 중앙에 한 무인이 태사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석상이 있었다.

석상임에도 느껴지는 강력한 권위, 아마도 사도맹의 시초가 되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 두 눈에는 혈옥(血玉)이 박혀 있어서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보였다.

그 앞으로 제를 올릴 수 있는 제단이 있었고, 다시 그 주위로 수십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각 기둥에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역대 맹주들의 기록이었다.

기둥 하나에 한 사람의 인생.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떤 무공을 익혔으며 어떻게 사도맹주가 되었는지, 또 맹주 즉위 후에 어떤 일들을 해냈으며, 그리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기둥 하나하나가 사도맹의 역사였다.

검무극은 천천히 그 내용을 읽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그것도 기록처럼 남겨진 글을 읽는다는 것은 몹시 지루한 일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남의 선택에서 분명 배울 게 있다는 것을. 그 모든 선택을 직접 할 수 있을 만큼 인생은 길지 않으니까.

그렇게 검무극은 맹주들이 일생동안 한 가장 중요한 선택들과 그 결과들을 읽어 나갔다.

한 사람을 다 읽으면 옆 기둥의 인생을 읽었고, 또 다른 맹주의 인생도 읽었다.

웃기도 했고,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맹주가 있는가 하면, 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은 맹주도 있었다.

그렇게 기둥들을 읽어 나가던 검무극에게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주가신.

삼백 년 전 사도제일고수이자 사도맹주였던 바로 그였다.

앞서 십이지왕과 싸웠던 호수 아래 검총 역시 그의 무덤이었다고 알려지면서 과거 그곳으로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진짜 그의 시신은 이곳에 안장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주가신의 인생을 읽어보았다. 그가 어떻게 무공을 익혔고, 사도제일검이 되었으며 또 사도맹주가 되었는지.

―그는 맹주가 된 후에 적랑(赤狼)이라는 늑대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사도맹주라? 왠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의 행적 중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었다.

―무황신검과 함께 천의궁을 격파하다.

‘아, 주가신도 그곳에 있었구나!’

삼백 년 전 그날, 무림맹과 천의궁의 그 마지막 혈전에 천마신교만 왔던 것이 아니었다. 사도맹도 그 싸움에 개입했다. 그것도 당시 사도맹주였던 주가신이 직접.

이곳에 마지막 구슬이 보관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 삼백 년 전의 운명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 기둥의 내용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내용이었다.

검무극은 나머지 기둥도 모두 읽었다. 아직 백자강의 기둥은 없었다. 사후에 그의 기둥도 여기 어딘가에 세워지리라.

‘맹주님의 역사에 제 이름도 한 줄 들어갈 수 있을까요?’

―천마신교 소교주와 함께 천의궁 일맥 격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맹주님.

기둥의 역사를 모두 읽은 검무극이 역대 맹주들의 유산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사용했던 독문 비급들이 장식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한 권이라도 유출되면 무림을 발칵 뒤집을 신공절학들이었다.

물론 검무극은 펼쳐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그 앞에 전시된 기물들이었다. 혹시라도 그사이에 구슬이 섞여 있을까 싶어서.

온갖 종류의 병장기와 호신갑, 투갑과 암기, 맹주들이 즐겨 입었던 옷과 신발까지. 그야말로 온갖 기물들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이 어떤 것이고 또 누구 것인지 적혀 있지 않았기에 누가 남긴 기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은 기물들도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최대한 지켜야 할 예의는 갖추었다. 다만 혹시나 그것들 사이에 구슬이 섞여 있을까 가까이서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기물을 다 둘러보았지만 비궤는 울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쉽게 숨겨두지 않았을 거다.’

지금까지 얻은 것을 떠올리면 찾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흑정은 풍천교에서 차기 교주가 된 소백타에게 이것으로 고르겠소, 하고 얻었다.

그냥 봐선 너무나 쉽게 얻었지만,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얻은 게 아니었다.

검무극이 이번에는 둘러싼 벽을 향해 걸어갔다.

검을 바닥에 짚고, 무엇인가를 지키듯 서 있는 무인 석상들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그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전대 사도맹주로 보이는 이들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혈전을 벌이는 모습부터 시체가 쌓인 전장에서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모습도 있었고, 검으로 절벽을 가르는 모습도 있었다.

아이를 안고 달려가는 모습도 있었고, 누군가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까지. 그야말로 온갖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넓은 벽의 상당 부분을 수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에,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석상은 그 벽화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둘러서 있었다.

단지 이곳 무덤을 지키는 상징물로 세워두었다고 하기에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석상과 석상 사이의 거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너희는 누굴 지키려고 그렇게 서 있는 거냐?’

검무극이 석상과 석상 사이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리 고수라도 그 너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벽이 두꺼웠지만, 무공이 극의에 다다른 검무극은 그 두꺼운 벽 너머를 느낄 수 있었다.

‘벽 뒤에 공간이 있다.’

검무극이 원형의 벽에 빙 둘러선 석상들을 쳐다보았다.

‘과연 이 석상 사이사이마다 맹주들의 관이 보관되어 있구나!’

이 석상들은 그 각 맹주의 관을 지키는 일종의 수호 석상인 것이다.

열어보려 해도 벽에 문은 없었다. 문이라고 할만한 흔적조차 없었다. 분명 여닫게 해두긴 했을 테니, 어떤 알 수 없는 정교한 장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구슬이 누군가의 관 안에 있다면?’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 될 것이다.

마지막 구슬을 찾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벽을 부수고 관을 열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단소진 때문이 아니라 백자강이나 비사인 때문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부디 저 안에 숨겨두지 않았기를.’

검무극은 원형을 따라 돌며 수호 석상들부터 살폈다.

‘제발 울어라, 비궤야! 석상의 눈이 자색의 광채를 내며 튀어나오고, 검의 손잡이에 매달린 저 장식이 톡 떨어져라!’

하지만 그건 검무극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수호 석상을 모두 둘러볼 때까지 비궤는 울지 않았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석상도 살폈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천장까지 다 살폈지만, 구슬은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 이 무덤에 없나?’

아니다, 그럴 리는 없었다.

―사도맹주가 죽지 않으면 무림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예언까지 내려온 일이었다.

놈들은 분명 당대 사도맹주를 죽이고 이곳의 위치를 알아내어서 구슬을 차지하려 했었다.

‘분명 이 안에 있다.’

다시 검무극의 시선이 석상 사이의 벽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저곳들뿐인데.’

문을 여는 장치가 어딘가에 있을 거다. 만약 아니면 표나지 않게 벽을 자르고서라도…….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검무극은 깨달았다. 자신답지 않게 너무 초조해하고 있음을. 지금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구슬이라 마음이 급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구슬은 억지로 얻으려고 해서 얻은 게 아니었는데.’

검무극이 주먹을 폈다. 주먹을 펴야 이 손으로 구슬을 쥐지.

검무극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구, 맹주님들. 말학 후배 잠시 좀 쉬겠습니다. 원래 마교 놈들이 성질이 이렇게 급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검무극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문득 백자강이 떠올랐다.

그 작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가 보고 싶었다. 맹주님, 맹주님이 와서 좀 찾아주십시오!

“세월이 지나면 맹주님도 이곳에서 쉬시겠네요.”

백자강의 모습도 벽화로 그려질 것이다.

더 나중에는 비사인도 그려지겠지? 이곳을 나가면 다시는 오지 못할 테니, 영원히 보지 못할 그림이다.

“정말 자네가 너무 그리우면 여기 몰래 들어올지도 몰라.”

비사인이 왜 자신이 먼저 죽는 경우만 떠올리냐고 따지는 모습이 떠올라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여유를 되찾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무극이 벽화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구슬을 찾느라 그림보다는 비궤의 진동에만 신경을 썼다.

‘아, 주가신도 이 그림 어딘가에 있겠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주가신은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데. 이곳에 구슬을 숨겼어도 그의 유언을 따랐을 텐데.

하지만 그림 속 맹주들은 누군지 알 수 없었기에 주가신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물도 그렇고, 비급도 그렇고. 이름 하나 적어두지 않았으니 참 불친절한 사도맹이다.

그렇게 앉아서 벽화 감상을 하던 검무극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붉은 깃털이 너무나 멋진 늑대 그림이었다.

“야, 너는 정말 잘 생겼다!”

그렇게 지나가려던 그때,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늑대를 향했다.

동시에 떠오르는 하나의 글귀.

―맹주가 된 후에도 적랑(赤狼)이라는 늑대를 데리고 다녔다.

적랑이라면 붉은 깃털의 늑대!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 속 늑대를 자세히 본 검무극의 두 눈이 커졌다.

늑대는 목과 몸에 멋진 갑주를 차고 있었는데, 목을 두른 갑주 가운데 구슬이 박혀 있었다.

‘푸른색 구슬이다!’

예전 사도맹 강철 늑대상에게서 구한 구슬이 바로 청정이었다.

검무극이 늑대 옆에 서 있는 맹주를 쳐다보았다.

한 중년 남자가 보의를 제대로 갖춰 입고 마치 전쟁에 나서는 모습처럼 늠름하게 그려져 있었다. 늑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무인.

순간 검무극의 두 눈이 더욱 커졌다. 그가 허리에 찬 허리띠에 구슬이 박혀 있었는데, 그 색이 자색이었다.

‘이 사람이 주가신이다!’

늑대 갑주의 구슬이 푸른색인 건 우연일 수 있어도, 이 허리 장식의 구슬까지 우연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날 주가신은 두 개의 구슬을 얻었구나.’

그래서 하나는 강철 늑대상에 숨겨두었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하나는 어디에 두셨습니까?

검무극이 다시 몸을 날려 아까 신물을 쌓아두었던 곳에 가서 주가신이 두르고 있던 허리띠를 찾았다.

“있었구나!”

그 허리띠에는 구슬이 박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느꼈다. 이 허리띠에서 왠지 모를 현기가 느껴지는 것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맹주님.”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허리띠를 집어 들었다.

“어쩌면 우린 그날 뵈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비궤는 삼백 년 전 그 싸움이 있기 전에 자신을 현실로 돌려보냈다. 만약 그곳에 있었다면 정말 그를 만났을 수도 있었다.

말없이 허리띠를 내려다보던 검무극이 그걸 자신의 허리에 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그림을 향했다.

‘혹시?’

검무극이 천천히 걸어가서 강철 늑대상 옆에 섰다. 그림 속의 주가신처럼 똑같이 섰다.

스으윽.

허리띠의 쇠장식이 강철 늑대상에 자력으로 이끌린다는 느낌이 들던 바로 그때였다.

철컥하는 소리가 늑대상 내부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스르릉!

저 건너편 수호 석상 사이의 벽 하나가 활짝 열렸다. 그 열린 문에서 주르륵 밀려 나오는 것은 관이었다. 문도 그렇고 앞으로 나오는 관도 그렇고 정말 정교한 장치로 만들어져 있었다.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주가신의 관이다!’

차르릉.

관을 덮고 있던 문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활짝 열렸다.

검무극이 떨리는 눈빛으로 그곳으로 걸어갔다.

관 안쪽을 보는 순간 검무극의 가슴이 격정에 휩싸였다.

주가신의 백골이 관에 누워있었다. 백골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었는데, 그 두 손 사이에 구슬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토록 찾던 마지막 구슬, 자정이었다.

삼백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구슬은 자색의 광채를 마음껏 내뿜고 있었다.

우우웅.

품속에 있던 비궤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진동보다 강력했다.

“더 크게 울어라, 비궤야!”

그와 동시에 검무극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다섯 개의 기운이 일제히 깨어났다.

“드디어 막내 찾았다!”

피 냄새 대신 향기로운 냄새로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삼백 년 전 사도맹주였던 주가신의 백골에 예를 갖췄다.

“맹주님께서 활약하던 시대에서 삼백 년이 지났습니다.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구슬들을 나눠서 보관한 것은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 생각합니다.”

물론 무림 평화를 위해서 이 구슬을 나눴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견제하며 얽히고설킨 일이 있었겠지.

“이 구슬로 여러 선배님께서 지키려 했던 평화를 꼭 지켜내겠습니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백골의 손에 올려진 자색 구슬을 들었다. 검무극이 자정을 손에 들자 품속에서 계속 진동하던 비궤가 더욱 강력하게 진동했다.

검무극이 백골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관의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촤르릉.

그리고 다시 원래 관이 보관되었던 곳으로 들어간 후 비밀 문이 닫혔다. 수호 석상 사이의 벽에는 문이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검무극이 품에서 비궤를 꺼냈다. 지금까지 구슬의 기운을 흡수했던 그 어느 때보다 검무극은 긴장했다.

비궤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얼굴에 웃는 모습을 그려주던 그때가 정말 엊그제 일처럼 느껴졌다.

“비궤야, 막내다!”

우우우웅.

진동하는 비궤 위에 자색의 구슬을 올렸다.

스르르륵.

자정은 마치 부드러운 액체가 흡수되듯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차례 강하게 진동한 비궤가 허공에 떠올랐다. 원래는 허공에서 회전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쏴아아아아아!

비궤에서 자색의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몸속에서 깨어난 다섯 기운도 일제히 저마다의 색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섯 기운은 빛이 되어 검무극의 몸을 뚫고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여섯 색의 빛이 허공을 휘저었다.

마치 여섯 마리의 용이 검무극 주위를 휘감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봤다면 꿈이라 여길 그야말로 환상적인 장면이었다.

검무극 주위를 휘돌던 여섯 기운이 비궤로 모여들었다.

슈우우우욱!

여섯 기운을 흡수한 비궤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쏴아아아아아.

비궤가 실타래처럼 얽힌 여섯 기운을 검무극을 향해 뿜어냈다.

마치 검기를 발출하듯, 빛들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왔다.

그 기운을 다 받아들였을 때 검무극은 보았다.

스스스스스.

자신의 모든 임무를 끝낸 비궤가 허공에서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안 돼, 비궤야!’

비궤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녀석과 함께 대화를 나눴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검무극의 가슴이 울컥했다. 이렇게 헤어지기는 싫었지만 이게 자신과 녀석과의 운명이라면.

‘비궤야,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다.’

환하게 웃으며 비궤가 소멸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온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비궤는 소멸했지만, 비궤가 내뱉은 여섯 개의 기운은 검무극의 몸속을 휘달리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이제 드디어 모두 모인 여섯 개의 기운.

검무극은 이 힘이 가진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기존의 영약과는 애초에 성격부터 달랐다. 아니, 애초에 영약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이었다.

검무극은 큰 비궤에서 얻었던 심법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삼백 년 전으로 돌아갔을 때 얻었던 바로 그 심법을.

―진기를 움직임에 있어 바람처럼 자유롭되 대지처럼 무거워야 한다. 불처럼 뜨겁게 몰아치다가도 얼음처럼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어둠처럼 깊고 벼락처럼 강력해야 한다. 이 여섯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대는 능히 고금제일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로 꼬여서 들어왔던 여섯 기운이 일제히 각기 다른 혈맥을 타고 흩어졌다.

진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길로 움직였다. 반대로 흐르기도 했고, 일반적인 상식에선 내상을 입을 것 같은 길로 움직였다. 기존에 알았던 무학의 상식을 단숨에 허물어뜨리는 심법.

그렇게 온몸의 혈맥을 새로운 길로 휘돌던 여섯 개의 신비가 마지막 순간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심법이 끝나고 기운이 하나로 합쳐지던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의 전신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 강렬한 빛이었기에 신안술로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검무극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청량한 기운을 느꼈다.

이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꼽자면 이것이었다.

신비로움.

하나로 합쳐진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단전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내공에 신비스러운 기운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내공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변화를 단지 더욱 정순해졌다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표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면서 현기증이 났다. 이 단전의 새로운 기운 때문이리라.

검무극이 제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마음을 다스리며 몸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저 멀리 거대한 해일이 밀려드는 모습을 제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달아나야 하는데 멍하게 지켜만 보고 있는. 움직이고 싶지만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장박동이 서서히 느려지는 게 느껴졌지만,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천마호신공도 그대로였고, 위기 본능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이러지?’

이런 몸 상태는 정말 처음이었다. 혹시 독이나 섭혼술에 당한 걸까? 그럴 리가. 받아들인 기운의 부작용이 확실했다.

마음속 거대한 해일이 검무극을 덮치던 그 순간.

“윽!”

검무극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웬만한 고통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였는데, 이미 한껏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꽈드드득.

검무극의 몸에서 다시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윽!”

검무극이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뼈가 차례대로 꺾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력을 일으켜서 막아 보려고 했지만, 몸속의 기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단전을 둘러싼 기운!

‘사실은 이 기운이 함정이었나?’

자신을 해치기 위해 안배된 함정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함정을 그렇게 발견하기 어렵게 파놓았을 리가.

한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꽈드드득.

“으아아악!”

몸속의 뼈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꽈드드득! 우드드득!

뼈에 달린 근육과 힘줄이 늘어났다가 다시 수축했다.

“으아아아아아!”

인간이 버틸 수 없는 고통이었다.

* * *

검무극은 꿈을 꾸고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가득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천마전 앞이었다.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이들은 천마전 호위들이었다.

그들 중에 휘도 있었다. 문 앞을 막아선 휘가 벽에 기대앉은 채 죽어 있었다. 눈도 감지 못한 그였다.

‘아저씨.’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이구나.’

하지만 회귀 전 그날 자신은 이곳까지 와 보지 못했다. 그 전에 화무기에게 당해서 죽음 직전의 상태였으니까.

그랬기에 지금 이 모습은 자신이 만든 상상이다.

검무극이 휘의 눈을 감겨준 후 천마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피의 길은 진짜 피의 길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태사의가 보였다. 항상 앉아 계시던 아버지 대신 다른 사람이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 앞 바닥에 아버지가 이쪽을 보고 앉아 계셨다. 아버지께서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무의식이 만든 장면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검무극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태사의에서 화무기가 앉아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만하고 도도한 그 눈빛은 자신을 죽이던 그날의 눈빛 그대로였다.

검무극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날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아버지.”

그때 화무기가 손을 내밀었다.

휘이익.

그의 손아귀로 검무극의 몸이 무기력하게 날아갔다. 엄청난 위력의 허공섭물이었다.

화무기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뭐가 다르다는 거냐?”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될 거다.”

화무기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지는가 싶더니.

망설이지 않고 검무극의 목을 부러뜨렸다.

꽈드득.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검무극이 눈을 번쩍 떴다.

꽈드드득! 꽈득!

무덤 속,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 몸속의 뼈는 여전히 새로운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뜬 검무극은 온몸에서 열이 펄펄 나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이렇게 아팠던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몸속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앞서 뼈를 완전히 재구성했다면, 이번에는 살이었다.

쩌어어억.

근육이 찢어졌고, 새로운 근육이 재생했다.

쩌어억! 쩍!

정말 실제로 뼈가 깎이는 고통을 이겨낸 검무극이었지만, 근육이 찢기는 고통 역시 인간이 참아내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정신을 잃고.

그러는 사이에도 낡은 집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집은 지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단전에서 폭발한 진기가 전신의 혈맥을 내달렸다. 막혀 있던 모든 경맥이 뚫렸다. 진기가 흐른 모든 혈맥이 더욱 넓어졌고, 튼튼해졌다. 천맥강화술과는 또 다른 혈맥의 변화였다.

살과 몸속의 혈맥이 모두 재구성되었을 때,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피부의 모든 땀구멍이 열리면서 몸에 쌓여 있던 탁기와 불순물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풍겨 나왔다. 자신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악취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에 있는 털이 빠졌고, 새롭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피부가 벗겨졌고, 새로운 피부가 생겨났다. 탈피였다.

검무극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계속 꿈을 꿨다.

다시 검무극이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역시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태사의를 바라보는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화무기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화무기가 앉아 있었다.

앞서 꿈에서 아버지가 앉아 있던 자리에 화무기가 앉은 채 죽어 있었다.

검무극이 기쁜 얼굴로 올려다보았을 때 태사의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무림일통만이 남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이 잠에서 깨며 눈을 번쩍 떴다.

여전히 자신은 무덤 바닥에 누워있었다.

검무극은 들었다. 혈관 속으로 자신의 피가 흘러가는 소리를. 그건 그야말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고, 몸을 스치는 공기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무덤 속에서 느끼지 못했던 냄새들이 코를 찔러 왔다.

그 정신없는 감각의 홍수 속에서 검무극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에는 검무극은 수많은 별 사이에 서 있었다. 깊은 어둠 속, 반짝이는 수많은 별이 자신을 지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가장 큰 별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별이 검무극과 충돌하는 그 순간, 검무극이 눈을 떴다.

검무극은 이제 자신이 완전히 깨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며칠이나 지난 것일까?

검무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미칠 것 같았던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후였다. 정신 사납게 하던 오감도 진정된 상태였다.

‘날아갈 것만 같다.’

정말 몸이 가벼웠다. 깃털처럼 가볍다는 말,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하지만 이내 몸에서 나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렸다.

몸에는 더러운 오물이 가득 묻어 있었다.

검무극은 곧바로 시공이환술을 열었다.

설원 속 따뜻한 온천이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검무극이 옷을 훌훌 던져버리고 온천으로 몸을 던졌다.

검무극은 따뜻한 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었다.

한 번으로 안 되어서 다시 새로운 온천을 만들어서 다시 씻었다.

그렇게 깨끗하게 목욕을 마친 후 온천에서 나와서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검무극 앞에 전신을 비출 수 있는 큰 동경이 생겨났다.

자신의 얼굴과 몸을 바라본 검무극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몸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골격이 달라져 있었다. 어깨와 팔, 다리, 그 너비와 굵기, 길이가 달라졌다.

피부는 깨끗했다. 이전에 입었던 상처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만져보니 옥처럼 매끄러웠고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 피부 속에 들어 있는 근육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는 것을. 이 피부 역시 보통 피부가 아님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좋은 시각은 더욱 좋아졌고 청각과 후각, 촉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과장을 좀 보태서 집중하면 저 멀리 기어가는 개미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이 순간 검무극은 확신했다.

‘정말 환골탈태(換骨奪胎)를 했구나!’

뼈가 뒤틀리는 순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환골탈태는 무인이 겪는 기연 중에서 최고의 기연.

설마 그런 기연이 자신을 찾아왔을까 생각했었는데.

자신이 겪은 일은 오래된 육신이 죽고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였고, 완벽함을 위한 고통이었다.

검무극이 떨리는 마음으로 바닥에 놓인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쉬이익, 쉬익!

검무극이 시공이환술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 확 달라졌다. 이전까지 자신의 몸이 무공에 최적화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산이었고 오만이었다.

‘느낌이 더 좋다!’

무공을 펼치는데 완벽한 몸으로 바뀐 것이다.

검무극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그의 웃음소리가 시공이환술 속 세상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의 기쁨은 비단 화무기를 더 잘 상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완벽한 몸과 새로운 감각, 더욱 맑아진 정신까지.

무인으로서 더 완벽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검무극 역시 무인이니까. 천무지체까지 타고 난 그야말로 무인 중의 무인이니까.

화무기를 죽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까. 아무리 정복하기 힘든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곳에서 계속 살 것은 아니었으니까.

비궤의 기운이 준 선물은 환골탈태만이 아니었다. 여전히 하나로 합쳐진 비궤의 기운은 단전을 감싸고 있었고, 내공에는 신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검무극이 구화마공을 펼쳤다. 내공에 실려 있는 신비한 기운 때문일까?

기존보다 더 적은 내공으로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운기해서 내공을 채우니 새로 만들어지는 내공에도 계속 신비로운 힘이 담겨 있었다.

그야말로 새 단전을 얻은 것이다.

이 힘이 단지 내공을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위력을 낼 수 있게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작용을 할지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화무기와의 싸움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

검무극은 옷까지 깨끗이 빨아서 열양지기로 말린 후 시공이환술을 나왔다.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 고통을 참았는데 좋은 냄새 나야지.’

검무극이 앞서 주가신의 관이 들어간 벽 앞에 섰다. 그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언젠가 다시 뵙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자신이 들어왔던 무덤 입구로 걸어간 검무극이 그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역대 사도맹주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저는 피 냄새 대신 이 향기로운 냄새로 살아갈 겁니다. 꼭 그렇게 살 겁니다!”

너는 소교주가 아니다

혈천도마는 객잔의 객방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검날을 비출 때는 더없이 차가운 달빛이지만, 책을 비추는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부드럽고 은은했다.

“걱정 안 되세요?”

깊은 사색을 깬 사람은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일화검존이었다.

검무극이 돌아오지 않은 지, 칠 일이나 지났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에 적합한 검무극이지만, 칠 일이나 소식이 없자 내심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걱정에 혈천도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며 되물었다.

“누가?”

마치 그 말이 ‘누가 누굴 걱정해?’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걱정이죠. 이렇게 늦을 사람이 아니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 길에는 행인 하나 없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혈천도마도 내심 걱정 중이었다.

차라리 누군가를 죽이러 갔다면 이렇게 걱정되진 않았을 거다. 역대 사도맹주의 무덤을 찾는다고 남았는데, 그 명석한 검무극이 지금까지 그걸 찾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며칠 만에 찾아버렸거나, 아니면 벌써 포기하고 왔을 시간이었다.

혈천도마가 책을 덮었다.

“걱정한다고 안 올 사람이 오겠나? 우리 바람이나 쐬지.”

일화검존도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답답하던 차였어요.”

두 사람이 객방을 나섰다. 그때 옆방에서 지한이 나왔다.

“뭐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객잔을 잡은 첫날부터 마존들과 검왕 뒷바라지하느라 정신이 없는 그였다. 식사를 신경 써서 챙겼고, 취객이 소리라도 지를라치면 얼른 가서 쫓아냈다.

혈천도마가 그를 지나쳐가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객잔을 나왔을 때 일화검존이 넌지시 말했다.

“참 많이 변하셨어요.”

이번에는 뭐 때문이냐는 혈천도마의 눈빛에.

“수하에게 신경도 써주시고.”

“신경은 무슨. 그냥 귀찮아서 그렇지.”

혈천도마는 무심하게 걸음을 옮겼다.

변화는 그의 걸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걸음을 맞춰주고 있었으니까. 예전에는 그 급한 성질만큼이나 걸음이 빨랐는데.

“어디 변한 게 나뿐인가?”

그 말에는 할 말 없는 일화검존이었다. 심경의 변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외모까지 변한 그녀였으니까.

“소교주가 술법을 부렸죠. 우리의 황혼을 일출로 만들었으니까요.”

혈천도마는 일화검존의 비유가 더없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번 출교를 계기로 뭐든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까. 그래, 늙어서 멈추는 게 아니라, 멈추면 늙는 거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그때, 저 앞에 검왕이 홀로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두 사람도 가볍게 인사했다.

천목산에서 내려온 지난 칠 일간 서로 어색하게 지냈다. 천목산 지하 무덤에서는 그래도 공동의 적이라도 있었지, 이제 검무극도 없는데 함께 식사하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불편했기에 거의 남처럼 지내고 있었다.

오늘도 어색하게 그냥 지나가려나 싶었는데.

“술 남았나?”

무슨 생각에서인지 혈천도마가 합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검왕은 자신이 먼저 술을 마신 후 혈천도마에게 술병을 내밀었다. 술에 독이 들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행동이었다.

혈천도마가 술병을 받아서 술을 꿀꺽 마셨다.

“난 자넬 의심하지 않네.”

물론, 이유는 검무극 때문이었다.

“그 아이가 믿는 사람이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검왕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검무극이 없었다면 아무리 그들이 자신을 위해 나서주었다 해도, 두 마존과 교류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함께 있을 일도 없었다.

“잠시 앉아도 되겠나?”

혈천도마의 물음에 검왕이 흔쾌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그가 앉아 있던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혈천도마는 술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다시 술병을 돌려주었다.

사실 혈천도마가 멈춰 선 것은 일화검존 때문이었다. 그녀가 악군학과의 대결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음을 알기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텐데, 괜히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내외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화검존이 검왕에게 말했다.

“밤마다 수련하시는 걸 봤어요.”

검왕은 밤마다 수련에 매진했다. 그의 외모나 분위기만 보면 수련은 절대 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는 새벽까지 검을 휘둘렀다.

“검존님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네.”

검왕은 일화검존의 검술을 인정했고 존중했다.

이대로라면 결국 따라 잡힌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이런 느낌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검무극은 예외로 두고.

검왕은 따라잡힌다는 표현 대신 이렇게 말했다.

“다음에 싸우면 질 것 같아서요.”

일화검존은 안다. 앞서 싸움에서 그가 한 수 양보해 줬음을.

“말씀하신 그 결과를 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매일 수련을 하시면 어렵겠는걸요?”

“어차피 검존께서도 수련하러 나오셨다가 보신 거 아닙니까?”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기에 상대를 향한 눈빛이 부드러웠다.

혈천도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예전이라면 일화검존이 다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것도 검왕과 같은 절대 고수라면 더욱이.

집착하고 질투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소유하려 애쓰기보단 그가 편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진심은 통할 것이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자기 사람이 아닌 거겠지.

혈천도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늑대 소리도 들려왔고 부엉이 소리도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지난 싸움을 복기하며 검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듣기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저 멀리 길 끝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저 없이 너무 분위기 좋은 거 아닙니까?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났어야지요. 그래서 저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셨어야지요!”

세 사람의 입가에 동시에 미소가 지어졌다.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맞아요, 누가 누굴 걱정하겠어요?”

검무극이 가까이 다가서던 그때.

혈천도마가 흠칫하며 도를 검무극을 향해 겨눴다.

“잠깐!”

혈천도마의 경고에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왜 이러십니까? 저 없는 사이 벌써 포섭이라도 당하신 겁니까?”

그러자 혈천도마가 차갑게 물었다.

“너 누구냐?”

검무극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아무래도 검왕과 일화검존보다 검무극을 더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혈천도마의 경고에 검왕과 일화검존도 검무극이 뭔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르신, 접니다.”

달빛 아래 검무극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너는 소교주가 아니다.”

분명 검무극이었지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평소에 보던 그와 느낌이 달랐다.

“접니다, 저. 출교했다 돌아오면 가면쟁이 주정뱅이 독쟁이 다 팽개치고 어르신께 제일 먼저 달려가는 바로 접니다. 검존님의 하나 있는 비무친구이자 우리 악 형의 저 맨발을 진심으로 동경하는 저라고요!”

세 사람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말하는 건 그대로였지만 분명 달라졌다. 키가 더 커진 걸까? 아니면 어깨가 더 넓어진 걸까?

가장 눈에 띄는 세 가지 변화는 피부와 눈빛, 그리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였다.

피부는 옥처럼 맑고 매끄러워 보였고, 몸에서 더없이 좋은 냄새가 났다.

원래도 맑고 깊은 눈빛이었는데, 이제 검무극의 눈빛은 저 깊은 심연조차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몸에서 나는 향은 계속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혈천도마가 서너 걸음 검무극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검무극을 살피던 혈천도마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너, 설마 환골탈태한 거냐?”

떨리는 그의 물음에 검왕과 일화검존도 깜짝 놀랐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검무극은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숨길 수 없었다.

“역시! 우리 어르신께서 먼저 알아보시는군요.”

검무극이 엄살을 떨었다.

“뼈가 막 갈려 나가고, 살이 찢어지고. 정말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혈천도마가 일화검존과 검왕을 돌아보았다. 일화검존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우린 무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녀의 전음에 혈천도마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검왕 역시 놀란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궤가 흡수하는 운명을 지닌 사람임을 직접 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환골탈태라니?

정말이지 너무 대단한 기연을 얻은 것이었기에, 혈천도마가 세 사람의 심정을 대변했다.

“무림이 네게 무슨 일을 맡기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구나.”

오직 검무극만이 아는 하늘의 뜻이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그 뜻을 이룬 이후의 삶을 말했다.

“무림 역사상 놀고먹는 게 인생 목표인 마교 소교주가 없지 않았습니까? 이제 한 명쯤 나올 때도 됐죠.”

“얼마나 거창하게 놀려고?”

“나중에 같이 노실 텐데. 그때 보십시오.”

일화검존이 끼어들며 말했다.

“소교주, 그때 나도 끼워줄 건가?”

“당연하지요.”

“약속했네. 나이 들었다고 외면하면 안 되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무공수련이 바빠 못 논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검존님은 우리와 어울려도 친구처럼 보이십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 그녀에 이어 혈천도마에게도 전해졌다.

“우리 어르신 주름살 없어진 거 보십시오. 앞으로 형이라 불러야겠습니다. 도마형!”

쓸데없는 소리 한다,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갔던 일은?”

“잘 끝났습니다.”

묻지 않아도 검무극의 반짝이는 피부가 그 결과를 말해주고 있었다.

“내일 일찍 교로 돌아가시죠.”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셋이 함께 마차를 타고 나오며 시작한 이번 여정이 드디어 끝이 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조르륵 달려와서 얼굴을 내밀었다.

“자자,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볼살 좀 만져보십시오! 말랑말랑 아기 피부입니다. 한 번 당겨 보시라니까요.”

혈천도마가 질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린 산책 마저 하지.”

“네.”

일화검존이 따라 일어났다.

“아니, 어디들 가세요! 정말 매끈매끈하다니까요! 소교주 볼살 땅겨볼 유일한 기회라고요! 아니, 가실 때 가시더라도 축하는 해주셔야지요. 축하한다. 참아내느라 고생했다! 너는 무림의 전설이 될 거다!”

하지만 두 마존은 못 들은 척 걸음을 더욱 빨리 옮겼다.

검무극과 멀어지자 일화검존이 그제야 놀람과 감탄을 드러냈다.

“이번 여행에서 더는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환골탈태라니? 그게 가능한 일이었군요.”

정말 무림의 긴 역사 속에서 불과 몇 사람만이 가졌다고 알려진 절대기연이었다.

정말 눈으로 봤음에도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떤 의도로 속임수를 쓴 거라 여겼을 거다.

“미친놈이다. 아니면 하늘이 미쳤거나.”

“둘 다 미친 거죠.”

지금까지 검무극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 표현 이외에는 달리할 표현이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마존은 크게 기뻐했다. 검무극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할 사람이다. 그런 검무극이 강해지는 것은 그 누구보다 바라는 바였으니까.

“배후 놈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어요.”

젊은 나이에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뤘고, 이제 환골탈태까지 했다. 과연 누가 있어 검무극의 상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녀의 말에 혈천도마는 다른 관점을 밝혔다.

“어쩌면 하늘이 녀석에게 이런 운명을 내리는 것이…….”

저 검무극이 누군가에게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그렇다면 이런 기연을 내리는 이유는 따로 있지 않을까?

“정말 교주가 무림일통을 진짜 밀어붙일지도 모르겠군.”

검무극이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존재.

그래서 교주의 야망을 말리는 운명에 선 검무극에게 이런 기연을 내려주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화검존 역시 교주가 쉽게 꿈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소교주에게는 그 싸움이 훨씬 더 힘든 싸움이 되겠네요.”

일화검존이 걱정스럽게 덧붙여 물었다.

“그때 우린 누구 편에 서야 하죠?”

* * *

검무극은 저 멀리 사라지는 두 마존을 쳐다보았다.

마존들의 걱정과는 달리 검무극은 이 순간 아버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십이지왕이 모두 죽었으니.

“이제 진짜가 나올 거야.”

화무기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검왕은 그 진짜를 암흑궁주라 여겼다. 수하들을 모두 잃은 암흑궁주가 과연 이 검무극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악 형.”

검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본교에서 실컷 놀다 가십시오.”

“왜 내가 떠난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묻는 사람은 다 떠나니까요. 괜한 희망 주지 마십시오. 나, 괴로워요.”

어떻게든 검왕을 주위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감정보다 앞서는 것은 그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떠나는 거 안 말립니다. 대신에 나중에, 아주 나중에 떠나십시오. 나랑 실컷 즐겁게 지내다가, 아 더는 이 녀석과 함께 있는 게 재미없구나. 이 마교 놈들 지긋지긋하다. 이런 생각이 들 때 떠나십시오.”

검왕이 대답 대신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너랑 있는 게 재미없을 때 떠나려면 평생 못 떠난다.’

사실 검왕의 마음은 반반이었다. 멀리 떠나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이 놀라운 운명을 부여받은 검무극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떠나든 눌러앉든, 우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누군지 뻔히 알면서 검왕이 모른 척 덧붙였다.

“네가 말한 여인이 얼마나 예쁜지부터 보러 가자.”

너 같은 아들을 낳은 사람을 보려니까

다음 날 아침, 객잔 앞에 마차가 준비되었다.

지한은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말들을 배불리 먹이고 마차를 깨끗이 청소하고. 이제 타고 출발하면 되었는데.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마차에 타지 않았다.

“먼저 돌아가라. 우린 조금 더 바람 쐬고 돌아가마.”

어젯밤 산책에서 일화검존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오랜만에 태호(太湖)에 갔다가 돌아가요.

태호는 이곳 절강성의 북쪽 강소성에 있었다. 과거 검우진과 권마가 강호를 주유할 때, 태호에서 혈천도마와 일화검존까지 넷이서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꽤 즐거웠었다는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혈천도마와 함께했던 몇 되지 않는 젊은 시절 추억 중 하나.

―얼마나 변했나 궁금해요.

―가세.

혈천도마의 결정에 고민은 없었다. 검무극과 함께하는 여행이 아무리 즐겁다 해도, 일화검존과 단둘이 하는 여행만큼은 아닐 것이다.

원래라면 둘이서만 어딜 가냐, 우리도 데려가시라, 한바탕 너스레를 떨 텐데. 검무극은 순순히 두 사람을 보내주었다.

“오랜만에 나오셨으니, 볼일 다 보고 오십시오. 아니, 한 일 년 안 돌아오셔도 됩니다. 제가 장기간 출교했다 돌아가 보니 알겠더라고요. 분하게도 우리 없어도 교는 잘만 굴러갑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검왕과 가벼운 눈인사로 작별했다.

그렇게 돌아서던 혈천도마가 검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교주가 자넬 많이 좋아하네. 최대한 옆에 있어 주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혈천도마가 걸음을 옮겼고 일화검존이 그 뒤를 따랐다.

검무극은 잠시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디 많은 추억 쌓으시고 돌아오십시오.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합시다.”

검무극과 검왕이 마차에 올라탔고, 지한이 마부석에 올랐다. 셋은 셋인데 출교했을 때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돌아가게 되었다.

검무극이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가자! 본교로!”

기세 좋게 소리쳤지만,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지한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마신교 본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요.”

검무극이 웃으며 소리쳤다.

“잘 모르겠다 싶을 땐 일단 달려!”

마차 안에서 함께 듣고 있던 검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방금 저 말은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천마신교로 가도 되나? 고민하는 자신에게.

뭘 고민해? 일단 가는 거지!

그렇게 새로운 삶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마차는 속도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 * *

암흑궁주 화무경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일까? 연기처럼 그의 몸 주위를 휘감고 있는 어둠 사이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둘러싼 어둠이 요동치듯 꿈틀거렸다.

“으윽!”

조금 떨어진 곳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던 신녀궁주 가예가 눈을 떴다.

“나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스스스스.

화무경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열리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껏 찌푸려진 얼굴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떤 꿈인지는 그의 표정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화무경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수많은 별자리가 빛을 내고 있었는데, 다행히 잠이 들기 전과 비교해서 새로 불이 들어온 별은 없었다.

마지막 명령을 내린 후 화무경은 아예 이 방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큰 비궤가 있고, 뒤쪽 벽에 여섯 구슬의 벽화가 있으며, 천장의 별자리로 봉인이 얼마나 해제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이 방에서.

“꿈은 자네가 꿔야지.”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화무경이 말했다.

가예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언은 네가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이리라.

그래, 지금 같은 때에는 예언이 간절했다. 대체 이 상황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으니까.

스스스스.

그때 바닥에서 시커먼 구멍이 생기더니 화무경의 수족인 회가 쑥 올라왔다.

보고를 올리기 전, 그 짧은 순간의 침묵과 눈빛에서 이미 결과를 읽을 수 있었다.

“실패했습니다.”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가예였다. 뒤쪽에 앉아 있던 그녀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마지막 구슬인 자정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이다. 당연히 검무극의 몸속에 있는 기운을 빼내는 일도 실패했을 테고.

기대했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화무경의 분노가 폭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담담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제 그가 무슨 일을 벌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죽은 이들의 영혼을 모두 소환했느냐?”

“네.”

“그런데도 실패했다?”

회가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영혼은 모두 소멸했습니다. 그리고 악군학은 살아남아서 마교 소교주와 합류했습니다.”

화무경은 그 일을 두고 화를 내지 않았다. 이번 일이 실패했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의 배신은 예상한 바였고, 그는 영혼을 소환하는 목적으로 보내진 것이었으니까.

회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봉인이 다 풀리기 전에 어떻게든 자정의 기운을 찾아내겠습니다.”

죽은 영혼까지 불러와서도 이루지 못한 일인데, 어떻게? 충성심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화아아악.

가예의 뒤쪽 벽화에 그려진 비궤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난 곳은 놀랍게도 마지막 남은 원이었다.

“자도(紫道)의 기운이 세상에 출현했습니다.”

방을 가득 채운 자색의 빛이 놀람을 넘어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물들였다.

“설마? 소교주가 마지막 기운까지 찾아냈단 말인가?”

화무경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뒤쪽의 벽화였다.

화아아아아악!

여섯 개의 원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하더니, 가운데 있는 네모 모양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가운데 네모에서 빛이 나자 그것을 둘러싼 나머지 여섯 개의 원이 빛을 잃었다.

“육도원기가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다섯 개의 기운이 소교주에게 있었는데, 여섯 개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의미는.

“소교주가 육도원기의 힘을 흡수했습니다.”

외치듯 소리쳤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육도원기의 힘은 소교주의 것입니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화무경이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며 그 너머에 있을 하늘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이게 고작 그대의 뜻인가? 고작 이딴 현실을 삼백 년 후에 남겨두었단 말인가?”

삼백 년 전부터 대대로 내려온 예언은 틀렸다. 그 힘은 자신들이 아니라 소교주가 차지했으니까.

지금까지 소교주가 구슬의 힘을 가로채 가더라도, 오히려 그걸 운명이라 여겼다. 그가 힘들게 모으면 마지막에 자신이 차지하게 되는 운명이라고.

천의궁이 무림을 지배할 거라는 예언이 있었으니까.

“이게 그대의 천의인가! 이 빌어먹을 하늘아!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아는가? 웃기지 마라! 이건 네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이자 삼백 년을 노력해 온 우리들의 의지다!”

마치 그의 외침에 화답이라도 하듯.

또 하나의 별에 불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무경의 두 눈동자가 떨렸다.

그가 뭔가를 결심하는가 싶더니.

스르르르르.

화무경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완전히 몸을 드러낸 화무경.

그 몸에 겹겹이 쌓인 자글자글한 세월의 흔적들.

가예는 이렇게 어둠이 완전히 사라진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떻게든 어둠은 그의 주변을 맴돌았었는데.

그리고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왜 어둠의 기운을 벗어던졌는지.

이제 곧 어둠 그 자체가 세상에 나올 테니까.

그를 제어하지 못하면 그에게 굴복해서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려는 그의 의지를, 어둠을 지배하던 그가 어둠에게 지배당할 각오를 했음을.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 * *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을 향해 계속 달렸다.

검무극은 검왕과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 직접 요리해서 그에게 먹였고, 밤이면 경치 좋은 들판에 모닥불을 피웠다.

마차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직접 펼쳐볼 수도 있었다.

“악 형, 오랜만에 저와 비무 한 번 하시죠?”

검무극은 환골탈태한 몸으로 싸웠을 때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걸 시험할 대상으로 너무나도 훌륭한 사람이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대결 장면을 지한에게는 못 보게 했다.

“대단한 무공이라서 숨기려는 게 아니라, 네가 봐서는 오히려 앞으로의 네 수련에 방해가 될 거기 때문이다.”

실력도 어지간히 차이가 나야 도움이 되지, 자신과 검왕의 대결을 보는 것은 지한의 수련에 방해만 될 것이다.

바람 부는 들판에 검무극과 검왕이 마주 섰다.

이 순간이 얼마나 값진 자리인지 두 사람은 잘 알았다. 이 무림 어딜 뒤져도 이런 상대와 이런 비무를 할 기회는 없을 테니까.

검왕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아직 검을 뽑지 않았음에도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중압감이 다르다.’

마지막에 검을 겨눴을 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마주 선 상대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 진짜로 싸워볼까?”

검무극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검무극이 가볍게 흑마검을 뽑았다.

그냥 서 있던 검무극과 검을 뽑은 검무극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네가 더 무섭다.’

저 장난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검왕도 천천히 철검을 뽑았다.

깊은 눈빛으로 기회를 살피던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검무극은 다음 수를 날리지 않았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검무극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쩔 수 없이 검왕은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이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나를 넘어섰구나.’

자신이 진심을 담아 날린 한 수에 검무극은 어떤 깨달음을 얻은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 한 수를 통해 검무극은 수백 수의 싸움을 머릿속으로 그려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검무극이 감았던 눈을 떴다. 여전히 두 사람의 검은 교차한 상태였다.

“왜 이렇게 강하십니까?”

과연 방금 그 한 수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

“이 철검, 보검으로 바꾸시죠!”

한 번도 검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낡은 철검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악 형이 보검 든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검무극은 말하고 있었다. 더 강한 검으로 더 강한 검술을 발휘하라고.

낡은 철검을 드는 건 분명 멋있는 모습이지만, 그 멋조차 틀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그 틀을 깨야 더 강해질 수 있다고. 이제는 신발을 신을 때라고.

검왕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신은 신발을 벗게 될 때는 철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임을.

“보검은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나 돈 많다.”

“돈으로 못사는 걸 구해드릴 겁니다.”

“신발 사줘, 검 사줘, 여인도 소개해 줘. 내게 왜 이러는 거냐?”

검을 거둔 검무극이 마차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악 형을 제 옆에 꽁꽁 묶어두려면 정성을 다해야지요. 그 정성,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 * *

마차는 달리고 또 달려서 드디어 천마신교 본단에 도착했다.

높은 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건물들을 보는 순간, 지한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드디어 왔구나.’

정문을 지키고 서 있는 마인들은 그야말로 무서운 마기를 풍기고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했다.

‘소교주님이 타고 계신 마차입니다. 아니지. 소교주님이 타신 마차다, 비켜라! 이렇게 강하게 말해야 하나?’

이런 걸 검무극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 지한의 심장만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본단에 처음이니까 내리라고 해서 이것저것 조사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온갖 걱정과 상상을 다 했는데, 정작 결과는 싱거웠다.

문이 열리고 마인들이 정중히 말했다.

“이 길로 쭉 가시면 됩니다.”

그들은 이미 검무극이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천마신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지한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확 트인 거대한 공간.

그 공간 곳곳에 끝도 없이 세워진 건물들, 그 사이사이 우뚝 선 무시무시한 악귀상들.

그곳을 셀 수 없이 많은 마인이 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앞으로 진행하던 마차를 검무극이 멈춰 세웠다.

“본교 구경도 할 겸 내려서 걸으시죠.”

검무극과 검왕, 그리고 지한이 마차에서 내렸다.

지나가던 마인들이 검무극을 보자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잘 있었나?”

“네!”

저 멀리서 알아보고 인사하는 마인들에게 검무극은 일일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리 악 형 이곳에 정 붙이라고 좋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그런 생각 안 했었는데?”

천마신교에서의 검무극은 검왕이 딱 예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고수라고 잘 대하고, 수하라고 막 대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을 향한 저 밝은 표정들도 가식이 아님을 느꼈다.

검무극이 지한에게 물었다.

“소감이 어때?”

“아직 얼떨떨합니다.”

“이제부터 이곳이 네 집이다.”

자신이 이 엄청난 곳의 주인이 될 사람을 공격했고, 또 그 사람의 수하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신교의 웅장함에 압도당한 채 드디어 천마전에 도착했다.

“자넨 여기서 기다리게. 나중에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네, 소교주님.”

지한을 기다리게 한 후 검무극이 검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악 형, 가시지요.”

검왕이 천마전 입구에 우뚝 선 악귀상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천마를 만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긴장되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검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역시! 우리 악 형의 배짱이 최고입니다.”

그래서가 아니었다. 검무극은 전혀 잘못 짚었다.

“긴장되는 정도가 아니라 겁난다. 여기 손 떨리는 거 보이냐?”

“왜요?”

“너 같은 아들을 낳은 사람을 보려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청출어람에 호부호자에 장강의 뒷물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의외로 평범하고 다정하신 분이십니다.”

두 사람이 천마전 안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피의 길 너머 태사의에 검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부터 숨이 막혀 오는 그의 존재감에 검왕이 나직이 말했다.

“이 거짓말쟁이 같으니라고.”

그걸 왜 아버지께 묻습니까?

상대가 천마임을 알기에 느껴지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길을 가다 마주쳤더라도 똑같이 느꼈을 거다. 수백 명의 군중 속에 있더라도 단번에 알아봤을 거다.

감출 수 없는 존재감. 아니, 굳이 감추지 않는 존재감.

“아버지, 아들 출교했다 돌아왔습니다!”

검무극이 큰소리로 인사하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검왕이 허리에 매달고 있던 신발을 신었다.

“자, 악형. 가시죠.”

언제나처럼 밝은 모습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우선 자신의 환골탈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실까?

다음으로는 검왕을 받아들이실까?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제 말총머리 친구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기에는 검왕의 실력이나 존재가 너무 컸다.

검무극과 검왕이 나란히 피의 길을 걸어 태사의 아래에 도착했다.

검왕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악군학입니다. 아드님 덕분에 무림의 존귀한 분을 만나 뵙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우진의 시선에는 호의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의 무덤덤한 시선이 검왕의 발을 향했다.

“주로 맨발로 다닌다고 들었는데?”

검무극이 자신에 대해 말했던 모양이다.

“귀한 분을 뵙는데 맨발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신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기에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벗고 들어오려고 했었는데, 아버지를 부르는 검무극의 외침에 마음을 바꿨다.

천마라서가 아니라 검무극의 아버지이기에 차리는 예의였다. 신을 신는 행동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

검우진과 검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왕이 아무리 강해도 아버지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실력.

그랬기에 옆에서 지켜보던 검무극의 마음이 더 떨렸다.

사귀는 친구들이 비사인에 진하군에, 어찌 하나같이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아버지, 이 사람도 제 친구입니다. 부디 잘 봐주십시오.’

검왕을 바라보던 검우진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가만히 아들을 내려다보던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는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발소리는 일절 나지 않았다.

검무극이야 매번 보는 아버지였지만, 검왕은 달랐다.

검우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검왕의 심장은 요동쳤다. 한 걸음마다 천마의 존재감이 그의 심장을 주먹으로 쿵, 치는 것만 같았다. 본능대로 움직인다면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한 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검우진이 검무극 앞까지 다가왔다.

환골탈태한 것을 혈천도마도 알아보았는데 아버지가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과연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검무극이 좋아하는 그 비웃음.

오늘 그 비웃음에 담긴 감정은 이것이었다.

이제 하다 하다 환골탈태까지 하고 나타난다고?

그래, 비웃으면 비웃지 질투 같은 것 하실 아버지가 아니시지.

검무극이 손을 번쩍 들며 자백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 아버지 아들 맞습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환골탈태한 불효자지만 아들은 확실합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스윽. 꽉.

검우진이 양손으로 검무극의 양쪽 팔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기에 검무극은 흠칫 놀랐다.

“환골탈태한 몸이 찢어지나 안 찢어지나 시험하고 싶으신 거면 제발 멈추십시오! 아버지가 찢으면 찢어집니다!”

다행히 환골탈태한 몸이 찢기느냐 마느냐의 시험은 없었다.

검우진의 손이 검무극의 어깨를 만졌다. 그걸 시작으로 아들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팔과 어깨, 그리고 허리와 등, 다리까지 모두 일일이 만져보며 살폈다. 그냥 대충이 아니라 아주 꼼꼼하게 살폈다.

뼈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피부와 근육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몸의 균형은 또 어떠한지.

검무극은 아버지의 손길이 낯설었다. 생각해 보니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아버지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손길은 마치 마의가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것처럼, 애정이 담겨 있었다. 혹여라도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직접 확인하고 계시는 거였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검무극은 내심 긴장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환골탈태했는데 이 정도는 피할 줄 알았지.

그러고도 남을 아버지시다. 예전에 비천검법을 대성했다고 말씀드렸을 때, 얼굴로 지풍이 날아왔었던 일을 생각하면 오늘은 열 배는 더 긴장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 날아든 것은 그 지풍보다 백 배는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들의 몸을 살피고 난 검우진의 시선이 검왕을 향하더니.

“이 사람을…….”

다시 검무극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죽여라.”

검왕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검왕도 깜짝 놀랐다. 천마가 자신을 반기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설마 죽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아버지. 우리가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요. 이제 막 도착해서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을 죽일 정도까진 아니잖아요?”

잘못 내린 명령이 아니라는 듯 검우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버지보다 못생겼으니 여자를 가로챘을 리는 없고. 혹시 젊은 시절 아버지 돈 떼먹고 달아난 사람입니까?”

물론 아부도 농담도 안 통했다.

검왕은 검무극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했는데. 아버지만큼이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 아들이었다.

검무극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악 형, 다른 사람이 내린 명령이라면 모를까 아버지 명령은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뭐야, 그래서 나를 죽이겠다고?

검무극이 정말 그 명령을 수행하겠다는 듯,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검왕은 황당한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소교주, 신발까지 신었는데 이럴 셈이시오?”

검왕은 교주 앞이었기에 평소와는 다르게 검무극에게 정중히 말했다. 자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교주였지만 말이다.

“어쩌겠습니까? 아버지 명령이신데.”

검왕은 앞에선 검무극이 더없이 진지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이내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검왕이 검우진과 천마전을 한 번 둘러본 후 다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천마전에서 천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검무극의 손에 죽는다?

“그래, 이만하면 마지막으로 훌륭하지.”

검왕도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천목산 지하에서 그를 위해 죽으려 했었는데. 그 죽음이 조금 미뤄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검을 겨눴다.

“소교주, 절대 방심하면 안 되시오. 나는 내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할 작정이니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검왕은 기꺼이 자신과 싸우다 죽으려 한다는 것을.

그래, 자신이 검왕을 좋아하는 이유가 비단 머리를 질끈 묶고 맨발로 다녀서겠는가? 저 대단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이런 모습 때문이지. 나 같으면 그 실력 아까워서도 그렇게 못 죽습니다.

잠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왕을 응시하던 검무극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이제 말씀하셔야죠. 아들아, 이만하면 됐다. 우정보다도 내 명령을 중시하는 네 마음 충분히 알았다.”

검우진은 여전히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볼 뿐이었다. 정말 죽이라는 명령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럼 죽이려는 이유는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검우진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제가 못 죽인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거역하면 소교주에서 물러나게 할 거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진심인 눈빛이었다. 검왕이 긴장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설마 포기하겠나 싶었는데.

“소교주 자리 포기하겠습니다.”

그러자 검왕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소교주, 나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오.”

“당연하지요.”

“뭐?”

“제가 소교주 자리를 포기하는 건 악 형이 소교주 자리만큼 가치 있어서가 아닙니다. 본교의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자리는 그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제 목숨도 이 자리만큼의 가치는 없습니다.”

이 말이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면 다음 말은 검왕을 위한 말이었다.

“죽이고 싶지만 악 형을 죽일 자신이 없습니다.”

검무극은 이 자리에서 검왕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았다.

친구를 어찌 죽이겠느냐? 이런 감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아버지에게 오히려 역효과만 날 테니까.

또한 이 선택은 검왕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었다.

친해서 못 죽이는 게 아니라, 강해서 못 죽인다.

무인 검왕을 위한 배려였다.

“아버지, 여기 이 사람 지금까지 싸웠던 적 중에서 제일 강한 사람입니다. 마지막 한 수는 아직 보지도 못했고요.”

아무리 아버지 앞이지만 검왕은 십이지왕의 일왕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무인으로서의 격이 떨어지고 자존심이 상하면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자신 앞에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 그런 일이 생기면 그는 떠나버릴 테니까.

“아버지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이렇게까지 했음에도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 형이 있으니 됐다. 복수는 내가 해주마.”

“싫습니다. 형이 교주 되는 건 배가 아파서 못 봅니다.”

“저자를 죽이지 않으면 어차피 교주는 못 된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제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왜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시험?”

“네. 아버지께서는 이런 명령을 내리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정말 이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면 직접 죽이셨겠지요.”

놀랍게도 정말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네가 그대로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네?”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검무극조차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환골탈태에 있어서 몸의 변화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검무극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이 매끄러운 피부를 보시고 이 향기를 맡으셨으면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골격도 바뀌고 온몸이 날아갈 듯 가볍습니다. 이거 말고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검우진이 아들의 두 눈을 뚫어지듯 응시하며 대답했다.

“네 정신.”

“환골탈태는 머릿속 혈맥까지 완전히 바꾼다. 왜 이 강호에 환골탈태한 사람이 드문지 아느냐? 설사 육체의 고통을 겪어내더라도 머릿속이 변하는 과정에서 미치광이가 되거나 죽었기 때문이다.”

평소 말이 없으신 아버지시지만, 무공과 관련해서는 아낌없이 말을 해주시는 아버지셨다.

“너는 달라진 것이 없느냐?”

“머릿속이 예전보다 맑아진 기분이 듭니다. 머리도 더 잘 돌아가고 기억력도 더 좋아진 거 같고요.”

검왕과 비무하다 첫수에, 생각에 잠겨 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변했느냐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 별개로 이상한 성격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한데 네 한심한 대응을 보니…….”

설명을 마친 검우진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다행히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완벽한 환골탈태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사실 검무극은 아버지의 시험이 그 이유만이 아님을 짐작했다. 자신의 정신이 온전한지를 확인하려면 다른 방법도 많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굳이 검왕을 죽이라고 한 것은? 검왕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하려 하신 거다.

과연 검왕의 반응은 아버지에게 합격이었을까?

그리고 기왕 관계가 얽힌 것, 그 관계를 더 깊게 해주신 것은 아닐까?

아버지 명령에 검왕은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려 했고, 자신은 소교주 자리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절대 검왕을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을 테니까.

검우진이 돌아서서 태사의로 올라가며 말했다.

“축하한다, 아들.”

검무극은 멍한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축하한다, 아들.

단 여섯 글자의 그 말이 검무극의 마음을 흔들었다. 진심이 담긴 축하임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이번 생도 혼인할 생각은 없었는데, 자꾸 아버지께서 제 결심을 뒤흔드십니다.’

검무극은 이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환골탈태 기념으로 아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검우진이 물었다.

“무슨 부탁이냐?”

정말이지 뻔뻔하면서도 과감한 부탁이었다.

“백화검을 내려주십시오.”

순간 흐르는 정적.

“본교 사대보검 중 하나인 백화검 말이냐?”

“네.”

백화검은 천마검, 흑마검, 사령검과 함께 천마신교 사대보검 중 서열 사 위의 검이었다.

흑마검이 거칠고 파괴적이라면 사령검은 어둡고 악한 기운을 품었고, 백화검은 부드럽고 고결한 기운을 지닌 검이었다.

“여기 악 형에게 백화검을 선물로 주고 싶습니다.”

검왕은 깜짝 놀랐다. 보검을 구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 보검이 천마신교 사대보검일 줄은 몰랐다. 백화검에 대해서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소교주, 내게 너무 과한 검이오.”

검왕이 정중히 사양했다.

“대신에 악 형과 잘 어울리는 검이기도 하죠.”

“나는 그런 고귀한 사람이 아니오. 소교주의 마음만 받겠소.”

그때 아버지가 허공에 명령을 내렸다.

“백화검을 가져오게.”

그 말에 검왕이 깜짝 놀랐고 검무극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저도 큰일입니다. 그날이 왔을 때 어떻게 아버지 앞을 막아설지 벌써 걱정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단 검왕이 우선이었다.

“설마 그 검으로 이 사람 죽여라, 이런 새로운 명령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검무극의 농담을 들으면서도 검왕은 당황스러웠다.

정말 암흑궁주 앞에서도 당황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신이었는데, 정말 오늘 이들 부자 때문에 몇 번을 놀라고 당황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정말 그 귀한 백화검을 내게 내준다고? 천마신교의 사대보검 중 한 자루를?’

그래, 백번 양보해서 검무극은 자신에게 줄 수 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한데 천마가 백화검을 내준다고? 심지어 천마신교와는 적으로 만났던 자신이었는데.

그러는 사이 휘가 검 상자 하나를 들고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검무극이 휘와 눈인사를 나눴다.

‘아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복면을 쓴 휘의 눈이 살짝 웃었다. 그 눈이 이렇게 말했다.

‘환골탈태 축하드립니다, 소교주님.’

휘가 검 상자를 건네준 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검무극이 백화검 상자를 받아들자 검우진이 말했다.

“축하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후 검 상자를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검왕에게 주었다. 물론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조심해서 여십시오. 혹시 폭발할 수도 있습니다.”

검왕은 받아든 검 상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얼떨떨했다. 이렇게 귀한 검을 이렇게 손쉽게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왜 제게 이런 선물을 내리시는 겁니까?”

검왕이 검우진에게 묻자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아니, 제가 드리는 거라고요. 그걸 왜 아버지께 묻습니까? 저를 보십시오!”

하지만 검왕은 여전히 검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우진은 여전히 호의도, 적의도 아닌 눈빛으로 대답했다.

“신발 신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라고 하지.”

“아니, 그 신발도 제가 선물한 거라고요!”

당신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오.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까.

검왕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 말을 순화해서 전했다.

“왜 소교주 같은 사람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이제 잘 알겠습니다.”

무관 선생이라고 무시하시오?

왜 소교주 같은 사람이 태어날 수 있었는지 알겠다는 말에.

“검을 줬는데 나를 욕하는 건가?”

아버지의 말에 검왕은 살짝 당황했다. 당신들 모두 미친 사람들이오! 그 말을 순화해서 말했는데도 속마음을 들킨 건가?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는지 교주님을 뵙고 이해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 앞이라 검왕은 진지하게 변명했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그에게 농담을 했다는 건.

합격했구나.

아버지에게 검왕은 합격이었다. 그래, 어떤 부모가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사람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극찬이죠, 극찬.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들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신다고요.”

아버지는 잘도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검왕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말로 하셨을 거다.

검왕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검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백화검이 천마신교에 얼마나 큰 가치인가를 봐야 한다. 네 개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를 내려준 것이다.

검무극도 아버지께 작별을 고했다.

“아버지, 저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번에는 드릴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출교했다 돌아오면 아버지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으니까. 특히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 대한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저녁이나 함께하자.”

이제 저 말이 쉽게 나온다는 사실이 이 아들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아버지는 잘 모르실 거다.

검무극이 검왕과 함께 천마전을 나왔다.

천마전 앞의 긴 복도를 걸어가다가 검왕이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렇게 서서 복도에 늘어선 기둥을 받쳐 든 악귀상을 쳐다보더니.

“네가 진짜 내게 바라는 게 뭐냐? 내가 너를 위해 싸워주길 바라는 거냐? 아니면 네 수하가 되기를 바라는 거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내 수하가 되어 나를 위해 싸워주길 바라면 들어주실 겁니까?”

검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고, 또 어쩌면 쉽게 대답할 수도 있는 물음이기도 했다.

“솔직히 저는 그렇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싶습니다. 한 번 주종관계로 엮이면 악 형은 평생 저와 함께 있어 주실 테니까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한데 전 악 형과 친구가 되는 게 더 좋습니다. 이러다 악 형이 훌쩍 떠나고, 이 사람 어디서 뭘 하고 사나 매해 궁금해하며 살게 되더라도, 악 형하고 친구로 지내는 게 좋습니다. 악 형이 누군가의 밑에 있는 모습 보기 싫습니다.”

검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래서다. 이래서 쉽게 대답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을 모실 수 있는 것도 천운이 따르지 않으면 오지 않을 기회일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검은 너무 과한 선물이다.”

검무극은 그 부담감을 이렇게 해소시켰다.

“그거 악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주는 선물입니다.”

“너를 위해서라고?”

“네. 날 위해서죠. 나는 멋지고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거든요.”

“그게 이 검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검이 악 형을 더 강하고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요.”

검왕은 보검을 버릴 때 진짜 멋있어지고, 자유로워진다고 여겼다.

그리고 지금 검무극은 반대로 말하고 있다.

보검을 차야 더 강해진다고. 더 자유로워지고 멋있어질 거라고.

“그런 멋진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다면, 나도 악 형과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있었겠죠.”

검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꿈은…… 그리 좋은 꿈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 악 형은 왜 그렇게 떠나려고 하신 겁니까? 그 꿈에서 깨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십시오!

하지만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는 충분히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

검무극의 시선이 검왕이 들고 있던 검 상자를 향했다.

“검 한 번 뽑아보시죠? 생색낼 기회는 주셔야지요.”

검왕이 검 상자를 열어 백화검을 꺼냈다. 모습을 드러낸 백화검의 검집은 단아했고 고급스러웠다.

스르릉.

검을 뽑자 주위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기분이 들었다.

찬란하지만 눈이 부시지 않는 예기, 단아하고 부드러운 품격이 느껴지는 검이었다.

검왕이 저 검으로 공격을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두려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본교의 네 보검 중 유일하게 마기나 귀기를 머금지 않은 검입니다.”

검왕이 내력을 주입하자 검이 나직이 울었다.

검날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 기운이 검왕의 숨결과 교류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검을 느끼던 검왕이 기쁜 얼굴로 눈을 떴다.

“정말 좋은 검이다.”

그래, 어찌 좋지 않겠는가? 특히 검의 성격은 검왕의 성격과도 잘 어울렸기에 더욱 좋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검왕이 원래 차고 있던 철검을 뽑아 들더니.

손가락으로 튕기자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아니 이게 이렇게 쉽게 부러지는 검입니까?”

“저잣거리에서 한 냥 주고 산 검이니까.”

검무극이 어이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렇다고 이렇게 매정하게 버리다니. 온갖 추억이 깃들었을 텐데. 친구야, 이 사람이 널 버렸다.”

“그런 게 어디 있나? 부러지거나 잃어버리면 또 사는 거지.”

검왕이 백화검을 철검을 차고 있던 허리에 찼다.

“이제 내 검이다. 돌려달라고 하면 안 돼.”

검무극은 잠시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검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오랜 철검에 어찌 추억이 없겠는가? 검을 부러뜨린 건 백화검을 선물로 준 것에 대한 검왕의 대답이다.

이 검을 진짜로 차겠다고.

자신의 호의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자, 평범하고 친근한 우리 아버지도 만나 뵈었으니, 이제 오매불망 악 형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 만나러 가야죠! 지한아, 너는 좀 기다려라. 급한 사람들부터 처리하자.”

* * *

연무장에서 일제히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곳에서 수련하는 이들은 귀영삼조, 바로 가인교의 살수들이었다.

“허리를 더 꼿꼿이 펴!”

그녀들을 지도하는 여인은 차이란이었다.

쉬이이이익!

베고 찌르고 막고.

검술의 기본동작이었지만 그녀들의 검에는 힘이 있었고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은 채 체력을 키우고 검술의 기본을 익히는 중이었다.

귀영대로 들어온 그녀들은 더는 살수가 아니었다.

암살 위주의 작전만을 수행한다면 모를까, 전면전을 펼치게 되면 그녀들의 암살술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래서 전면전에 사용할 검술을 익혀야 했다. 문제는 익힐만한 검술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젊은 시절 잠시 익힌 검술이 있었지만, 수하들에게 전수할 정도의 무공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선은 기초 검술 수련만 반복해서 시키는 중이었다.

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직한 감탄들.

그녀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십 명의 마인이 있었다.

지나가던 마인도 있었고 일부러 찾아온 이도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수련은 그야말로 교내의 화제였다.

반대로 그들을 훔쳐보는 여인도 있었다.

그녀는 바로 무공을 펼치고 있는 십칠교였다. 그녀는 혹시 지켜보는 이들 중에 초승달 무면객이 있는 건 아닐까 계속 살폈다.

함께 천마신교에 있으니 초승달 무면객을 훨씬 자주 보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볼 기회가 없었다. 자신들은 귀영대의 일원이 되었고, 그는 자신들의 거처인 악인곡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각자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도통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괜히 교내를 산책해 보기도 하고, 악인곡 근처까지 가보기도 했지만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만나려고 악인곡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그만 봐, 그 사람 없어.”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한 사람은 옆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오교였다. 십칠교와 가장 친한 그녀는 십칠교가 무면객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면객들은 평소에 악인곡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더라.”

그래서일까? 오다가다 봐도 무면객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가면 벗고 절 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저 사람들 중에 초승달 무면객이 있지 않을까?

“꿈 깨!”

오교가 자신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고, 그 소리를 차이란이 들었다.

차이란과 눈이 마주친 오교가 고개를 숙여 사죄한 후 수련에 몰두했다.

그렇게 고된 수련이 끝났다.

지켜보던 이들 중 몇몇이 박수를 쳤고,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감히 그럴 수 있는 건 아직 이들에 대해 알지 못해서였다. 게다가 검술의 기초 수련만을 했으니 만만해 보이기도 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과 반응을 즐겼다. 살수인 자신들이 마음먹으면 다 죽일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럼 박수 소리가 큰 사람부터 먼저 죽겠지.

그렇게 숨을 고른 그녀들이 흩어지려는데, 차이란이 십칠교를 불렀다.

“이야기 좀 할까?”

“네!”

두 사람이 연무장에서 걸어 나오며 대화를 나눴다.

“그 사람 다시 만나봤냐?”

이곳 천마신교에 오기 전에, 천하제일미 대회 때 차이란은 자신을 보내 무면객을 만나게 해주었다. 물론 검무극이 둘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었고, 차이란은 그저 보내준 것이지만.

그때 차이란은 자신과 초승달 무면객과의 관계를 알았다.

“아뇨, 아직 못 만났습니다.”

십칠교가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지금은 남자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십칠교의 저 말이 진심이 아님을 차이란이 어찌 모르겠는가?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마음이 식게 되고, 그저 추억 속으로 흘러가 버릴 것이다. 자신이 악군학을 생각하는 것처럼.

“찾아가 봐.”

“네?”

“악인곡으로 그 사람 찾아가 보라고. 넌 소교주 직속 조직이야. 그쪽은 마존 직속이고. 우리가 꿇릴 거 없어.”

십칠교가 놀란 얼굴로 차이란을 쳐다보았다. 자리가 바뀌니 사람도 바뀐 걸까? 차이란이 이런 조언을 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

“같이 가줘?”

“아닙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십칠교는 없던 용기가 생겼다. 차이란이 직접 이런 조언을 해줬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당장 가겠습니다.”

서두르는 그녀를 차이란이 말렸다.

“내 방에 가서 옷장 열어보면 청색 궁장이 있다. 그거 입고 가. 네게 잘 어울릴 거야.”

“제가 감히 어떻게?”

“왜? 같이 가서 입혀줘?”

“아닙니다!”

“가 봐.”

“네.”

정중히 인사하고 뛰어가던 십칠교가 저만치에서 다시 돌아섰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 숙여 인사한 십칠교가 다시 뛰어갔다.

이렇게 그냥 봐서도 그녀의 흥분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저런 거다. 누군가를 진짜로 좋아하면 저렇게 표가 난다.

차이란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나중에 일교와 술이라도 한잔할까?

그때 그녀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원래 다른 연인 밀어주는 사람들이 혼자 술 먹는 법이지.”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웃으며 서 있었다.

정말이지 이 사람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건 정말 아무도 못 따라올 거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검무극의 도발에 차이란은 인사 대신 지난 일을 떠올렸다.

“생각나요? 그날 그 아이와 무면객이 만나던 호숫가에서 소교주께서 그랬죠. 그 아이 야반도주도 시켜주고 제 사랑도 찾아주신다고. 왜 안 찾아주세요? 제 사랑 찾아주세요.”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농담을 할 만큼 그녀의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천마신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찾아주면? 좋아했다고 고백도 못 할 거면서.”

“왜 못 한다고 생각하죠? 우리 소교주께선 아직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큰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검무극은 장난스럽고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차이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피부가?”

화장의 귀재인 그녀다 보니, 대번에 검무극의 피부가 더 투명하고 깨끗해졌음을 느꼈다.

“뭘 발랐어요? 몸에서 좋은 냄새도 나는데? 그러고 보니 어깨도 좀 넓어진 것도 같고.”

“우리 차 조장께선 조직에서 잘 살아남겠소.”

검무극은 단지 아부로 치부했지만, 차이란은 그게 아님을 느꼈다.

‘이 사람, 뭔가 바뀌었어.’

검무극이 화제를 돌렸다.

“요즘 수하들에게 검술 가르친다고 들었소.”

“우선 기초만 가르치고 있어요. 한데 제 주 무공이 검술이 아니다 보니 앞으로가 걱정이네요.”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마침 잘 됐소. 내가 좋은 검술 선생을 아는데.”

검무극의 말에 차이란이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무관에서 검술을 가르쳤던 선생이오. 아주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하셨지.”

당연히 차이란의 얼굴에서 실망감이 스쳤다.

“아무리 제 주력 무공이 검술이 아니라도 무관 선생보다는 제가 낫지 않겠어요?”

“무관 선생이라고 무시하시오?”

차이란이 웃으며 말했다.

“저 정도 되면 좀 무시해도 됩니다.”

“너무하시오. 듣고 있는 무관 선생 섭섭하게.”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더니 마치 건물 뒤쪽에 사람이 있다는 듯 말했다.

“마음 넓은 선생이 참으시오.”

차이란은 당연히 검무극이 장난친다고 여겼다. 자신과 수하들의 실력을 아는 사람인데 무관 선생을 데려다 가르칠 리가 없었으니까.

차이란이 검무극이 바라본 쪽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세요! 선생께선 감당 못 하는 여인들입니다. 보다시피 무례하고 싹수도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얼마나 어렵게 모신 선생인데.”

검무극이 그쪽으로 걸어가서 건물 뒤쪽을 보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요즘 제자들이 선생 무시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입니까?”

차이란도 그쪽으로 걸어갔다. 검무극이 아니라면 이런 장난 절대 안 받아줬겠지만.

“대체 어느 무관에서 누굴 배출한 분이신데…….”

그녀가 모퉁이를 돌며 검무극이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던 순간!

차이란의 입에서 외마디 놀람이 터져 나왔다. 정말 악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곳에 머리를 질끈 묶고 맨발로 악군학이 서 있었다. 정말 악군학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바로 그였다.

“황룡무관에서 가르치신 분이시오. 나도 배우고 당신 대주도 배우고, 이 조장도 배우고. 이만하면 훌륭한 제자들 아니겠소?”

차이란의 귀에 검무극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볼과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이게, 어떻게, 왜?”

찾아갔었소, 오늘도

살면서 이렇게 당황한 적이 있었을까?

차이란은 단언할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 열기를 스스로 느낄 정도로 당황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라고.

그녀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자 검왕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검무극이 뻔히 그녀를 놀릴 줄 알면서도 그의 장단에 맞춰줬으니까.

―여기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중간에 나오면 안 됩니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못 이기는 척 끌려왔지만 내심 궁금했다. 정말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검무극이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하고 저렇게 유난을 떠는 걸 보니 괜한 헛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한데 지금 그녀의 반응을 보니 정말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오가며 가끔 인사와 가벼운 잡담을 나눈 게 전부였는데. 그녀가 자신을 좋아했다고?

“오랜만이오.”

검왕의 인사에 차이란은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진정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감출 수 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인사하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아까 한 말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설마 다 들은 건 아니겠지?’

내 사랑 찾아달라는 말을 그렇게 큰소리로 했으니. 제발 안 들었다고 해줘! 이 모든 건 소교주의 음모였다. 정말 검왕만 아니었으면 그의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을 거다.

“당신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나도 마찬가지요.”

“어떻게 된 일이죠?”

차이란의 물음에 검왕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천마신교 본단까지 오게 된 일을 어찌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대답을 망설이는 검왕 대신 검무극이 대신 대답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 한다니까 본교로 왔소.”

악군학이 아니라 자신을 놀린다는 생각에.

“이제 좀 그만 놀리세요!”

악군학을 데려와 놓고도 그렇게 시치미를 뗐으면서. 또 끝까지 장난을 치려 하다니.

한데 그게 장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검왕이 끼어들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을 보러 온 것도 신교에 온 이유 중 하나였소.”

그 말에 진정되었던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역시 그를 좋아하고 있었음을 심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검왕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다.

“당신과 나만 살아남았으니, 한 번은 봐야 할 거 같아서.”

그 말에 차이란은 암흑궁주의 열두 수하 중 악군학과 자신만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국, 다 죽었군요.”

그녀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암흑궁에서 여러 일을 진행할 때만 해도, 마교의 소교주는 안중에 없었다.

한데 점차 그는 사건의 중심이 되었고, 결국 자신과 검왕을 제외하곤 모두 그의 손에 다 쓸려나갔다. 교주도 아닌 소교주에게 모두 당하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정말 당신은 불가능을 모르는 사람이군요.’

게다가 그는 약속도 지켰다. 자신의 사랑을 구해주겠다는. 그 무서운 암흑궁주의 손아귀에서 그를 데려와 자신 앞에 세웠다.

“다친 데는 없나요?”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소. 당신은 괜찮소?”

“네. 저는 멀쩡해요.”

검왕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니 오히려 떨렸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아까 제가 했던 말 들었나요?”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계속 부끄러워하며 얼굴만 붉힐 수는 없었다.

“여기 소교주와 자주 했던 장난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자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후회하지 않겠소?”

검무극은 안다. 오늘 이 설레는 자리가 그냥 끝나버리면, 다시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이렇게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테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이오. 그때 내 마음을 전해 볼걸. 어차피 이렇게 끝날 관계인데, 왜 그렇게 마음을 숨겼을까? 한 번 부끄럽고 말 일인데. 아니, 사실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게 부끄러운 일인데.”

차이란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틀림없이 저런 후회를 할 것도 같았으니까.

“당신은 왜 이렇게 우릴 이어주려고 하는 거죠?”

“그야 두 사람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그때 검왕이 끼어들며 말했다.

“거짓말이오. 우리가 당황하는 걸 즐기려고 저러는 거요. 계속 놀려 먹으려고.”

“악 형! 오해이시오.”

“오해는 무슨!”

차이란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죠? 좋은 점 세 가지만 말해보세요.”

“…….”

“그럴 줄 알았어요.”

차이란이 검왕 옆에 나란히 서며 연합전선을 펼쳤다.

“우린 소교주의 한순간 재미와 쾌락을 위해 이곳까지 끌려왔군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또 소교주의 농간에 놀아나게 될 거요.”

검무극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둘을 붙여주려고는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세 사람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나니 분위기가 풀어졌고 어색하고 부끄러웠던 마음도 사라졌다.

차이란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사실 저는 당신 때문에 살아남았어요. 당신이 제 목숨을 구했죠.”

그녀의 말에 검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차이란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소교주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는 나를 죽이지 않았거든요.”

검왕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악 형이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적이지만 악 형이 좋아하는 사람을 제가 어떻게 죽입니까?”

그 말에 검왕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었을 텐데.

“그 와중에도 소교주는 당신을 어떻게든 자유롭게 떠나보내 주고 싶어 했었어요. 솔직히 저는 이해가 안 되었죠. 그렇게 좋으면 붙잡아야지, 왜 보내주려는 걸까? 사실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거요. 작전이 바뀌었으니까. 그때는 이 사람의 자유를 찾아주자는 작전이었지만 이제는 우리 곁에 꽁꽁 묶어두는 작전을 펼칠 거요.”

그 말에 차이란의 마음이 살짝 떨렸다. 그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것은 없을 것이다.

“상대가 다 듣고 있는데 작전 회의를 펼치는 건가요?”

“속인다고 어디 속을 사람이겠소? 이제부터 우리 작전은 저 사람 날개를 꺾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기입니다. 제가 왼쪽 다리 붙잡을 테니, 오른쪽 다리 잡으세요. 우정과 애정, 다 쏟아붓는 겁니다. 그래도 안 되면 도마님과 검존님 돌아오는 대로 저 말총머리까지 잡아당길 겁니다.”

저 검왕 앞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하다니? 자신에게 남자 다리를 붙잡으라니? 하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검왕 역시 웃고 있었고. 정말이지 이 무림에 유일하게 검무극만이 가능한 일이리라.

“다행히 우리 악 형께서는 당분간 본교에 머무르실 거요. 그래서 아까 무공을 가르쳐주라는 말도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독문 무공을 가르쳐주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인 검술만 알려줘도 어지간한 무공 비급을 익힌 것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정말 저와 제 수하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시겠어요?”

차이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악군학이 웃으며 대답했다.

“무관 선생도 괜찮다면요.”

* * *

이안은 홀로 무공 수련 중이었다.

그녀의 검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이어졌다가 용암처럼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의 시선은 검 끝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그녀는 가상의 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후 가상의 적과 싸우는 상상 수련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녀가 성장할수록 상상 속의 적도 강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랬기에 지금의 이 싸움도 그렇게 멋있는 싸움이 될 수 없었다.

적의 공격을 피하고, 또 피하고, 바닥을 구르면서까지 공격을 피하는 모습은 얼핏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안은 진지했다. 그녀는 어설픈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상상 수련을 잘못했다간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편히 막을 수 있는 공격에 몸이 익숙해졌다간, 오히려 실전에서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연무장을 휘저은 그녀가 심호흡하며 검날을 앞으로 세웠다. 상상 속의 적은 아직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수련까지 열심히 하면, 너무 완벽하잖아?”

“도련님!”

그녀가 돌아서니 검무극이 서 있었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 환골탈태하신 거 축하드려요!”

검무극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아버지 만나고 왔어?”

“아뇨, 그냥 척 보니까 알겠는데요?”

이안은 검무극의 변화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어려서부터 검무극의 호위를 맡았던 그녀였다. 검무극보다 더 정확히 몸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렇게 많이 변하셨는데 어떻게 몰라봐요?”

그 변화가 환골탈태했음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컸던 것이다.

“별로 안 놀라네?”

“그러게요. 저 왜 안 놀라죠?”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냥 도련님이라면 당연히 환골탈태도 하겠거니 싶었나 봐요. 도련님이라면 금방 나갔다 들어오시면서 방금 무림이 멸망하는 걸 구하고 왔어, 이러실 거 같은 분이시잖아요?”

이안이 배시시 웃던 그때 검무극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 예전에는 업어도 주고, 달려가서 안기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 좀 뜸했다.

“보고 싶었다, 이안아.”

평소보다 꼭 껴안았기에 이안도 힘껏 검무극을 안아주었다. 많이 힘드시죠, 도련님.

“아, 이 품이 너무 낯선데요? 가슴도 넓어지고 키도 더 커지셨어요. 바람피우는 기분이에요.”

이안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었다. 그래, 오직 이안만이 주는 설렘이 있고 또 편안함이 있다.

“이제 내 몸에서 좋은 향이 난다던데?”

“이 향도 너무 좋은데요, 저는 원래 도련님 몸에서 나던 향이 더 좋은 거 같아요.”

“아마 환골탈태한 몸에서 나는 향보다 원래 향이 더 좋다고 하는 사람은 네가 유일할 거다.”

“사실인걸요?”

그러다 흠칫 놀라며 이안이 재빨리 검무극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 저, 땀 냄새나요.”

무공 수련을 막 마쳤음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말 나온 김에 묻자. 너는 내가 올 때마다 무공 수련만 하고 있냐? 열심히 익힌 무공으로 마음에 안 드는 놈 두들겨 패고 있거나,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거나, 아니면 어디 훌쩍 여행을 갔거나. 네 욕망에 충실하게 살라니까!”

“누구보다 강해지고 싶은 거. 이게 저의 제일 큰 욕망이에요.”

“그럼 두 번째 욕망은? 세 번째 욕망은!”

“제 다음 욕망들은 첫 번째가 이뤄져야 이룰 수 있는 욕망들이에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하지만 이안은 끝내 검무극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자, 소교주님 돌아오셨으니 귀영대 소집하겠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마침 소개해 줄 사람도 있다.”

* * *

십칠교는 차이란의 푸른 궁장을 입고 있었다.

그녀에게 어떤 색이 잘 어울리는지 차이란의 눈은 정확했다. 그녀는 무복을 입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십칠교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악인곡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 근처까지 온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이 안으로 들어간 적은 없었다.

입구를 지키는 무인은 없었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입구 양옆의 나뭇가지에 무면객들이 앉아 있었다. 쪼그리고 있는 이도 있었고, 편하게 앉아 있는 이도 있었다.

입구를 감시하는 그들을 지나 그녀는 계속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말 암살 임무를 수행할 때보다 더 떨렸다.

혹시 이렇게 걸어가다 초승달 무면객을 만나게 될까 기대했는데, 어림없는 일이었다.

일전에 함께 작전을 펼쳤을 때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무면객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는 정예들만 왔었고, 지금은 전부 다 있었다. 가면 쓴 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결국, 직접 찾는 걸 포기하고 지나가던 무면객에게 말을 걸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면객이 빤히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가면에 초승달이 그려진 분을 뵙고 싶습니다.”

그러자 무면객이 대답했다.

“기다리시오.”

그가 훌쩍 몸을 날렸다. 어떨 때 보면 정말 기괴한 느낌인데, 또 이럴 때 보면 더없이 정상적인 이들이 바로 무면객들이었다.

잠시 후, 그곳으로 한 무면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초승달 무면객이었다.

그녀가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가면 속 두 눈은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십칠교는 정말 떨렸지만, 기왕 여기까지 찾아올 용기를 냈으니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무례인 줄 알지만…… 보고 싶었어요. 당신이 찾아오지 않으니 나라도 찾아왔어요.”

주위에서 지켜보는 눈빛들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때 초승달 무면객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찾아갔었소, 오늘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십칠교는 깜짝 놀랐다. 이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까 구경하던 이들 중에 이 남자가 있었다는 것을. 정말 가면을 벗고 자신을 보러 왔었던 것이다.

십칠교는 너무 감격스러웠다. ‘오늘도’라는 말은 다른 날에도 왔었다는 의미. 이 감격은 또 다른 용기로 이어졌다.

“집구경 시켜주세요.”

초승달 무면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악인곡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시에 그들을 지켜보던 무면객 한 사람이 쏜살같이 경공을 발휘해서 안으로 날아갔다. 바로 초승달 무면객의 전음을 들은 이였다.

―어서 가서 집부터 치워!

제 별명은 악인곡 걔

지한은 귀영대 건물 앞에 서서 검무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게. 곧 자네가 들어갈 조직의 대주를 만나게 될 거네.

―네, 알겠습니다.

―자네가 비록 대주 출신이었지만, 수장의 평가에 따라 평무인으로 시작해야 할 수도 있어.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를 기다리게 한 후에 검무극은 귀영대 뒤쪽 연무장으로 가 버렸다.

지한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수장이 될 사람을 기다렸다.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신이 과연 그 조직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름 사왕문 추혼대주까지 지냈는데. 평무인으로 시작하면 씁쓸하긴 하겠구나.’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바닥에서부터 다시 올라가는 거다.

잠시 후, 그곳으로 푸른 가면을 쓴 남자가 무인들을 이끌고 걸어왔다. 그는 청면이었고 뒤따르는 이들은 귀영 일조 무인들이었다.

일조 무인들은 주로 도검을 사용하는 이들로 구성되었는데, 계속된 훈련으로 이제 정예 무인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실력과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한은 순간 움찔했다. 청면에게서 나는 냄새를 맡은 것이다. 진짜 냄새가 아니라 기도에서 풍기는 냄새를.

자신을 괴롭히던 화룡단주에게서는 악취가 났었다. 그렇듯 지한은 사람의 기도에서 냄새를 맡았다.

청면에게서 맡은 냄새는 바로.

‘피 냄새!’

냄새로 그가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느꼈다. 보통 성격이 아닌 사람이다.

‘이 사람이 대주구나.’

지한은 당연히 그가 대주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기도를 드러내는 사람이 수장이 아닐 리는 없었으니까.

건물 앞에 귀영대 일 조원들이 줄을 맞춰 섰고, 청면은 그 앞에 섰다.

청면이 지한을 쳐다보았다. 가면 속 차가운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지한은 갈등했다.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하지만 검무극도 없는데 먼저 인사하기도 좀 애매했다. 뭐라고 하겠는가?

그때 그곳으로 이 조장 서진이 수하들을 이끌고 들어섰다.

그녀의 기도에선 상가에서 피우는 향냄새가 났다. 죽은 이들과 가깝다는 의미.

과연 그녀 주위에 머금은 귀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황룡무관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는 귀술 수련에 전념했고, 이제 표가 나게 강해졌다.

뒤따르던 이 조의 무인들은 귀술을 익힌 상태였다. 물론, 귀문의 독문 귀술을 전수하진 않았다. 그녀가 전수한 귀술은 귀술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반적인 귀술이었다.

연기를 만들어내서 숨는다든지, 사람을 놀라게 할 귀물을 만들어 낸다든지.

그렇게 서진은 이 조원들을 다른 조와 차별화했다.

‘혹시 이 여인이 대주인가?’

서진의 기도도 그렇고, 수하들 역시 특별한 분위기를 내는 것으로 볼 때 그녀가 대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한의 시선이 청면을 향했다.

‘그렇다면 저 가면 사내는?’

누구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때 청면과 서진이 서로 포권하며 인사했다. 서로 동등한 직위처럼 느껴졌기에 지한은 내심 헷갈렸다.

그때 그곳으로 차이란이 살수들을 데리고 등장했다. 일 조와 이 조에 이어 귀영대 삼 조가 등장한 것이다.

그녀를 보는 순간, 지한은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이다!’

아무리 청면이 강하고 서진이 특별하다 해도 차이란만큼의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녀를 따르는 여인들 역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그들 역시 보통 실력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한이 황급히 시선을 돌려 앞을 보았다. 하마터면 넋을 놓고 차이란을 쳐다볼 뻔했다. 차이란에게선 남자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냄새가 났다.

“오셨습니까?”

“제가 좀 늦었습니다.”

차이란은 청면과 인사를 나눈 후 서진과도 인사를 나눴다. 서진이 그녀의 기분을 감지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제가요?”

“네,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별로 그런 일 없는데. 날이 좋아서인가?”

시치미를 뗐지만, 차이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악군학이 왔고, 그에게 기본적인 검술 수련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앞으로 자주 그를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발걸음은 가벼웠고,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이 동등한 직위처럼 인사하는 모습에 지한은 더욱 헷갈렸다.

‘이 여인도 대주가 아닌가?’

저런 사람이 대주가 아니라니? 아니, 사실 대주가 아니라 단주, 아니 각주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존재감이었다.

‘아, 그렇구나. 대주들이 모이는 자리구나!’

지한은 그렇다고 확신했다. 청면과 서진만 해도 대주를 하고도 남을 기도였으니까.

그때 건물 뒤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검무극의 모습에 안도하던 지한의 시선이 함께 나온 이안에게 박히듯 고정되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지한은 넋이 나갔다. 정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다. 차이란을 볼 때도 그랬는데, 아니다. 이 여인이 처음이다.

그녀에게선 너무나 좋은 냄새가 났다. 정말 성품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바로 그 냄새가. 그것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했다.

검무극이 귀영대 무인들 앞에 섰다.

“오랜만이다. 잘들 지냈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교주님!”

귀영대 무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무극이 청면 앞으로 걸어갔다.

“그 사이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검무극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늘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대주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습니다.”

비천검법 대성을 이룬 후 이안은 청면을 많이 신경 썼다. 그가 귀영대에 들어온 것은 검무극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자신도 그 이유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그랬듯, 그와 비무 친구가 되어 무공을 겨뤘다. 이안이 그를 챙기는 방식이었다.

“제가 일 조장께 더 많이 배우고 있어요.”

그제야 지한은 검무극과 함께 나온 여인이 귀영대의 대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이 내 수장이 될 사람이구나.’

정말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 놀라운 건 나머지 세 사람이었다.

‘저들이 조장이라니!’

정말 놀랐다. 이런 조직일 줄은 몰랐다. 평무인이 될까 씁쓸하다고? 이런 사람들도 고작 조장으로 있는 조직인데?

검무극이 정식으로 지한을 이안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나갔다가 알게 된 친구다. 귀영대에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네 결정에 달렸다.”

지한이 이안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자신의 운명은 이제 이 여인에게 달렸다.

“지한입니다.”

“귀영대주 이안이에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기에 지한은 더욱 긴장했다.

“출신이 어떻게 되시죠?”

“저는 사왕문 추혼대주 출신입니다. 적을 뒤쫓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습니다.”

“귀영대가 뭐 하는 조직인지는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여기 계신 소교주님을 위한 직속조직이에요.”

그 말에 지한의 가슴에 격정이 차올랐다.

검무극 하나만 믿고 따라온 천마신교였다. 도착하면 신경 못 써준다는 말도 이미 들었다. 소교주와 거리가 먼 조직에 들어가면 제대로 얼굴 한 번 볼 수 없을 텐데, 소교주 직속 조직이라니!

이안이 이런 상황에서 주로 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나 묻죠. 만약 소교주님이 내린 명령과 본교 교주님이 내린 명령이 상충하면, 어느 쪽 명령을 따를 건가요?”

지한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교주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교주 명령이라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었다.

“이유는요?”

이유는 간단했다.

“교주님께 잘 보여야 소교주님이 교주가 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조직은 몰라도 직속 조직은 교주님의 심기를 벗어나는 짓을 하면 안 되겠죠. 대신 소교주님이 교주님이 되시면 그 어떤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시더라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답한 후 머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저는 신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소교주님을 뵙기 전까진 입교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오직 소교주님과의 인연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저 소교주님을 모실 수 있다면, 다른 건 바라지 않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검무극이 지한에게 말했다.

“뭔가 멋있게 말한 거 같지만 결국 내 말 안 듣겠다는 거잖아?”

지한이 당황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때 이안이 나섰다.

“그래서 저는 좋은데요? 나중에 소교주님 명령을 거역할 일 있으면 희생양으로 삼기 딱 좋잖아요? 지한이 우겨서 어쩔 수 없었다.”

지한은 더욱 당황했다. 사람 면전에서 저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충분히 즐긴 후 이안이 결정을 내렸다.

“지한이라고 했나?”

“네.”

“그대를 귀영대 사 조장으로 임명한다.”

사 조장이란 말에 지한은 깜짝 놀랐다.

“제가 그런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서, 세 조장을 보면 정말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도 되나 싶었다.

“그래, 그건 나도 모르지.”

“한데 왜 조장으로 뽑으신 겁니까?”

“소교주님의 추천을 받았으니까. 조장 정도는 맡겨도 될 사람이니 이곳까지 데려온 거겠지?”

지한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소교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그렇다고 너무 감동할 거 없다. 조장이라 해봤자, 아직 사 조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지한은 오히려 그걸 이점으로 여겼다.

“제가 원하는 수하들을 뽑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래, 이렇게 똑똑하고 당찬 사람이니 자신에게 추천해 준 것이겠지.

“앞으로 사 조는 그대의 특기를 살려 추격술에 특화된 조직으로 키워내도록.”

지한은 기뻤다. 천마신교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소교주 직속 조직에 자신의 특기까지 살릴 수 있는 조직이라면?

“충성을 다 바치겠습니다.”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앞에 선 이안과 네 조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귀영대가 완성되었구나.”

전면에서 싸우는 일조, 귀술을 쓰는 이조, 암살에 능한 삼조, 추격술에 능한 사조.

모든 면에서 균형 잡힌 귀영대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조만간 실전에 투입할 거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 * *

“방이 엄청 깨끗하네요.”

십칠교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녀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전음을 받고 달려온 무면객의 가면에는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일이 되려고 했는지 가장 보법이 빠른 후배인 그가 주변에 있었다. 무면객이라고 모두 가면에 자신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력과 연차가 쌓인 고참들만 그릴 수 있었다.

달려온 토끼 무면객이 창문을 열고 환기부터 시켰고, 침상과 탁자에 올려진 옷가지를 모두 침상 아래로 던져 넣었다.

그가 달려가서 옆집에 사는 무면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서! 차와 다기, 향초가 필요해! 음식과 맛 좋은 술도!”

“대체 무슨 일입니까?”

“초승달 선배가 여자와 같이 오고 있다.”

그 말로 충분했다. 옆집에 사는 무면객이 후다닥 가져오란 걸 챙겨왔다.

그가 방에 향초를 피웠다. 먹다 남은 음식 그릇은 모두 옆집으로 옮겼다. 바닥을 쓸고 먼지를 닦고. 두 사람 모두 최고의 보법과 경공을 발휘했다.

두 사람이 방을 치우고 나왔을 때 저 멀리 초승달 무면객과 십칠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무면객 하나가 집 앞을 지나가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말했다.

“뭐야? 여기 웬 여자?”

사사삭.

그의 말소리에 십칠교가 그쪽을 쳐다보았을 때, 분위기를 망칠뻔한 그는 이미 두 무면객에 의해 납치되다시피 사라진 후였다.

두 사람이 계속 이쪽으로 걸어오는데 이번에는 웃통을 벗은 채 가면만 쓴 무면객이 엉덩이를 긁으며 나타났다.

그가 하품을 하며 걸어가는데.

사사삭.

그 역시 납치되듯 사라졌다.

그런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차분한 대화를 나누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이런 말도 들을 수 있었고.

“왠지 방이 깨끗하실 거 같았어요.”

초승달 침상에 튀어나온 옷가지를 발로 슥 밀어 넣었다. 침상에 널려 있던 옷가지들이 그 아래 가득 있었다.

정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 치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요.”

“그렇소? 나는 모르겠는데.”

“목말라요. 식은 차라도 있으면 주세요.”

“잠시 기다리시오.”

집에 차가 있었던가? 집에서 술이나 마시지 차는 마시지 않았는데. 어디 받아둔 거라도 있어야 할 텐데.

초승달 무면객이 벽장을 열자, 차통이 있었다.

낯선 차통과 다기들. 그 옆에 술병도 하나 있었고, 간식거리도 있었다. 녀석, 그새 여기까지 신경 썼구나.

무면객이 차를 우려서 간식과 함께 내왔다.

“차도 맛있고, 과자도 맛있어요.”

“다행이오.”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초승달 무인도 기분이 좋았다.

“저는 이제 천마신교에서 남자는 다 사귀었어요.”

“무슨 뜻이오?”

“사람들이 저를 보면 그럴 거 아니에요? 그때 악인곡 그 여자잖아? 이제부터 제 별명은 ‘악인곡 걔’가 될 거예요.”

무면객이 좋다고 악인곡을 찾아온 여인은 자신이 처음일 테니까. 십칠교는 그 용기를 더욱 발휘했다.

“당신 가면 벗은 얼굴이 보고 싶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도 누가 들으면 미친년이라 할 일이었다. 가면 속에서 누가 나올 줄 알고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당신이 실망하실까 두렵소.”

“미루면 미룰수록 그 실망이 더 커지겠죠.”

맞는 말이었다. 언제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초승달 무면객이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가면 속에 젊은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가면에 피로 표시를 하는 것만 봤을 때는 상남자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곱상한 인상이었다.

그리고 초승달 무면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수련 중에 그녀가 봤던 얼굴이었다. 지켜보는 험악한 마인들 사이에서 이 얼굴이 눈에 띄었으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저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십칠교가 그에게 말했다.

“실망했어요.”

초승달 무면객이 당황하던 그때.

“저 정말 긴장했었다고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못생겼으면 어쩌지? 나이가 너무 많은 아저씨가 나오면 어쩌지?”

이 얼굴로 나와 사귀려고 했어요?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서 더욱 걱정했다.

“제가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아세요? 그래도 간다. 끝까지 당신과 간다. 못생겨도 가고, 나이가 두 배로 많아도 간다. 이렇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요?”

“당신 너무 잘 생겼잖아요?”

긴장했던 초승달 무면객의 눈빛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가만히 십칠교를 응시하던 그가 불쑥 말했다.

“내가 책임지겠소. 악인곡 걔는 내가 책임지겠소.”

초승달 무면객의 말에 십칠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자신을 구해줄 때의 이 남자다움에 반했다. 비록 소년처럼 생겼지만, 눈빛은 진짜 남자의 눈빛이었다.

“거기 계신 분들도 들었죠?”

그녀가 창가로 걸어가 고개를 내밀었다.

창 아래 네 명의 무면객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전음을 받고 달려왔던 토끼 무면객과 차와 간식을 가져왔던 옆집 무면객, 그리고 여자가 왜 왔냐고 했던 무면객과 웃통 벗은 무면객이었다. 옆집 무면객의 손에는 향초가 들려 있었다.

사실 십칠교는 아까부터 창밖에 네 사람이 숨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살수 출신인 그녀가 어찌 대충 숨어 있는 그들의 기척을 모르겠는가?

“저 사람이 저 책임지겠다는 거. 네 분이 증인이에요.”

그녀는 머쓱한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가면들 속에서 그림 하나를 발견했다.

“토끼님, 분명히 들었죠?”

자네를 낳아 나와 인연을 맺게 해줬으니

귀영대와 헤어진 검무극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호위 책임자 적연을 비롯한 열두 명의 호위가 정복을 입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집 앞에 도열해 있던 그들이 일제히 인사했다. 우렁찬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는데, 지난번에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며 함께 술을 마신 이후 소교주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진 그들이었다.

“수련들 열심히 하고 있었나?”

적연이 모두를 대표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소교주님을 모실 그날을 위해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호위 중 몇몇은 무공이 다음 단계로 넘어섰고. 또 몇몇은 그 변화의 과정에 있었다.

검무극은 그들의 단계를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력이 더욱 향상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전보다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들의 수준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호위무인 중 검무극의 변화를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적연이었다.

“한데 소교주님, 뭔가 바뀌신 거 같습니다.”

은신한 이를 찾아내는 귀안술의 대성을 이룬 적연이었다. 아무래도 누구보다 빠르게 검무극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아직도 나의 성장기는 안 끝났나 보다. 계속 키가 큰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적연은 그 변화를 확실히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환골탈태를 했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봐야지?”

검무극이 그들에게 무공을 펼쳐보게 했다. 일일이 그들에게 잘못된 동작을 지도했다.

수하 한 명당 딱 한 가지씩만 짚어주었는데, 그 한 가지가 어디 보통 한 가지겠는가?

그 가르침에 호위 무인들은 다시금 감동했다. 소교주는 그들이 모셔야 할 사람이자 동시에 그들의 사부였다.

개별 가르침이 끝나고 검무극이 그들에게 말했다.

“호위도 좋고, 수련도 좋지만 이건 잊지 마라. 지금이 너희 인생에서 제일 빛나는 시간이다. 나중에 지겹도록 호위를 해야 할 테니, 지금은 취미도 찾고, 여자도 만나고, 휴가 내서 여행도 다녀오고. 그렇게 살아라. 난 너희가 평생 호위만 서다 죽는 걸 바라지 않는다.”

매번 듣는 말이지만 그렇더라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소교주를 당당히 모시고 싶었으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빨리 모시고 싶었으니까.

검무극이 자신의 혁낭에서 대나무 통을 하나 꺼냈다.

“나 지금 천독림으로 갈 거다. 외출 준비하도록.”

일부러 호위들을 데리고 갔다. 정복까지 입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외부에 함께 다니지는 못하더라도 이럴 때라도 함께 다녀야지.

검무극이 호위들을 거느리고 함께 교내를 걸었다. 지나가던 무인들이 정중히 인사하며 지나갔다. 호위들의 가슴이 절로 활짝 펴졌다.

천독림 안까지도 호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천독림은 처음이지?”

“네.”

“여기서 길을 잃으면 거의 죽는다고 봐야 한다. 워낙 넓고 곳곳에 치명적인 독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서.”

호위들은 긴장한 채 검무극과 바짝 붙어 걸었다.

다행히 검무극은 천독림의 그 복잡한 길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가다가 자신이 알아보는 독물이 나오면 호위들에게 설명했다.

“저기 나뭇가지 감고 있는 뱀 보이지? 화류사(花柳蛇)라는 독사다. 화독(花毒)을 만드는 데 꼭 들어가는 재료지. 적연! 네 어깨에 독충 붙었다!”

“장난치지 마십…… 으악!”

검무극이 그의 어깨에 올라탄 독충을 손가락으로 쳐내 주었다. 다들 더욱 바짝 검무극 주위로 붙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독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수하들을 기다리게 한 후 거처로 들어섰다.

마침 독왕은 연구소 앞마당에서 독을 배합하고 있었다.

“독왕님! 저 왔습니다!”

하지만 독왕은 자신의 일에 집중하느라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이러실 줄 알고 제가 이걸 준비했죠. 이놈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적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오직 독왕님을 생각하면서 이 독통을 지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독왕님, 제 말씀 듣고 계십니까?”

물론, 독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다.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일에 푹 빠져 있었다.

검무극이 대나무 통의 마개를 살짝 열었다.

바스락, 바스락.

통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흘러나오자, 독왕이 반응했다. 비로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 냄새는? 설마?”

독왕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검무극에게 달려와 독통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 지네처럼 생긴 독충이 들어 있었다. 천목산 지하에서 이것을 잡았을 때 독왕에게 가져다주겠다고 넣어둔 것인데, 잊지 않고 가져온 것이다.

“시혈독오구나!”

독왕은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검무극은 그 모습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독밖에 모르는 우리 독왕님!’

독왕이 젓가락으로 시혈독오를 꺼냈다. 젓가락 사이에서 시혈독오가 몸을 비틀었다.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럽고 무서웠는데, 독왕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여기 배에 반점 보이지? 둥근 반점이 있는 놈이 암놈이다. 수놈보다 구하기가 몇 배는 더 어렵다.”

과연 배에 둥근 반점이 보였다. 독왕이 말해주니 알았지, 이 무섭고 징그러운 녀석 배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마불님이 독초 다 캐오셔서 저를 홀대하셨지요? 자, 이제 마불님 시대는 가고, 제 시대가 왔습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어디로 보내는 건가?”

검무극이 돌아보니 마불이 창고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독통을 들고나오고 있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아니, 그 독통은 또 뭡니까? 이제 독초 캐오는 것도 모자라 독통 옮기는 것도 시킨 겁니까? 또 독왕님께 속아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마불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독공 배우고 있네.”

“네?”

마불이 다시 말했다.

“독왕께 독공을 배우고 있다고.”

“마불님이요?”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초를 캐다 보니 독공에 관심이 생겼지. 그래서 기초부터 배우고 있다네.”

마불이 독공을 배운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불님이 독공까지 펼치면 누가 막으라고요?”

“남에게 펼치려고 배우는 게 아니네. 그냥 공부하는 거지.”

마불이 가져왔던 독통을 독왕 옆에 내려놓고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이 조르르 따라 들어갔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내 주업일 때나 힘든 거지.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뭐가 힘들겠나?”

마치 불도를 깨우친 사람처럼 마불의 표정은 편안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호수처럼 잔잔한 평온함 속에 숨겨진 격류를 느꼈다. 석상을 깎고 독공을 배우고. 이렇게 애를 써서 안식을 찾아야 할 만큼 뭔가가 끓어오르는 게 있는 건 아닐까?

“이런 마불님 모습, 낯선데요?”

마불이 잠시 손길을 멈추고 통 위로 훌쩍 걸터앉았다. 검무극도 그 옆의 통에 걸터앉았다.

“그래, 예전이면 안 했을 일이지.”

“한데 왜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예전에 검무극이 했던 말을 꺼냈다.

“자네가 그랬지. 석상이나 깎고 있지 말라고.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마음을 헤아리고, 열정으로 설득하고,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라고.”

“네, 그랬죠.”

“…… 한데 잘 안되더군. 마음의 불씨가 꺼진 느낌이라고 할까? 꿈이 사라진 삶은 그저 습관적인 일상만 남을 뿐이었지.”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물었다.

“꺼진 불씨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나?”

그래, 사람이 어찌 쉽게 변하겠는가? 저 짧은 다리로 보통 사람들 몇 배는 더 열심히 뛰어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꺼진 불씨를 어떻게 살립니까? 그 재 속에 남은 온기에 미련을 버리십시오.”

순간 마불은 가슴이 철렁했다. 검무극에게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다. 그래, 자신은 아직 그 재를 뒤지며 불씨를 찾고 있었다.

“지금은 불을 피울 때가 아니라 장작을 캘 때입니다. 새로 나무부터 하십시오.”

마불의 눈동자에 격정이 스쳤다. 지나간 야망을 되살릴 생각만 했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때의 야망이 있었다면, 지금은 지금에 맞는 야망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야망, 활활 다 태워야 멋진 건 아닐 겁니다. 장작은 가득 쌓아두고서 불을 붙이지 않는 멋도 있는 법이겠지요.”

마불은 검무극의 말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대공자를 위한 마음이 계속되는 한 현실적으로 자신이 야망을 다시 활활 불태울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지나간 그 야망을 계속 그리워하겠지.

그런데 지금 검무극은 말하고 있었다. 불씨가 꺼져버린 것이라 여기지 말고 불을 붙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라고. 수동적인 생각에서 능동적인 생각으로 바꾸라고.

마불은 이 작은 생각의 차이가 자신의 삶을 크게 바꿀 것임을 예감했다.

마불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이 물었다.

“저 바뀐 거 없습니까?”

“머리 깎았나?”

“아니, 자세히 좀 봐주십시오.”

“모르겠는데?”

장난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독초는 그렇게 귀신처럼 찾아내시는 분이 왜 제 변화는 모르십니까? 제 피부 좀 보시라고요. 냄새도 맡아보시고요.”

“징그럽게 사내놈 피부는 봐서 뭐 하나?”

마불이 다시 내려서더니 독통을 들고 나갔다.

“아니, 한 번만 봐주시라니까요!”

검무극이 이번에는 독왕에게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독왕은 자신이 준 독 시혈독오에게서 독을 짜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지 않는 한 그의 집중력을 흩트릴 수는 없어 보였다.

결국, 환골탈태 자랑 한 번 못 해보고 검무극이 물러났다.

“오늘은 바빠서 인사만 드리고 갑니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후에 검무극이 수하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마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환골탈태라니? 소교주는 정말 하늘이 내린 사람일지도 모르겠소.”

마불은 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했던 것이다.

그제야 독왕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교주가 환골탈태를 했소?”

시혈독오에 신경 쓴다고 그 사실을 몰라본 독왕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에게 관심이 없는 그이기도 했지만.

마불이 독통을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무슨 뜻이냐는 독왕의 눈빛에 마불이 차분히 대답했다.

“당대 천마신교는 역대 그 어느 시대보다 최고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소. 과연 교주께서 이 기회를 놓치겠소?”

십이성 대성을 이룬 천마와 대성을 이룬 소교주. 각자 자신의 한계를 돌파한 팔마존들까지.

교주는 장작을 가득 쌓아두고 불을 붙이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교주님의 꿈이 점점 더 현실로 가까워지고 있소. 소교주가 말리면 말릴수록 운명은 더 그쪽으로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오.”

* * *

천독림을 나선 후 검무극이 찾아간 곳은 풍천교주의 처소였다.

호위들까지 모두 데려온 걸 보고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뭐야? 나 잡아가려고 왔나?”

“그러려면 이 애들로 되겠습니까? 본교 정예들이 다 동원되어야지요.”

풍천교주가 기분 좋게 웃다가 인상을 굳혔다. 항상 이렇게 좋은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뭔가를 빼앗겼다.

“빈털터리인 내게 또 뭘 뺏어가려고 온 건가?”

“뺏어가다니요? 교주님 뵙고 싶어서 왔죠.”

“그새 뭐라도 생겼나 확인하러 왔겠지.”

풍천교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자네?”

환골탈태를 알아보았나 싶었는데.

“살이 쪘군!”

그러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나처럼 관리 안 하면 금방 찐다니까.”

그러고 보니 풍천교주의 살이 조금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살이 많이 빠지셨습니다. 인물이 훤하십니다.”

“정말 그래 보이나?”

살 빠졌다는 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검무극의 아부 신공이 발휘되었다.

“지금도 교내를 걸어가면 시선을 못 느끼십니까?”

“시선? 어떤 시선?”

“여인들 시선 말입니다. 교내니까 눈치를 보는 거지, 만약 중원에 나가시면 여인들이 줄줄 따라다닐 겁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하려고.”

“저와 중원에 한 번 나가시죠. 제가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만날 말로만.”

“아뇨, 고 군사랑 셋이 바람 쐬러 가시죠.”

“약속한 거네.”

“그럼요.”

검무극이 넌지시 본색을 드러냈다.

“그런 의미에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풍천교주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 아니라 흑심이라 하게. 그래, 원하는 게 뭔가?”

검무극이 괜히 말을 못 하고 망설였다.

“자네처럼 뻔뻔한 사람이 이렇게 망설인다는 건, 내가 절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겠군.”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부탁할 내용을 밝혔다.

“시공이환술을 가르쳐주고 싶은 분이 계십니다.”

놀랍게도 풍천교주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었다.

“교주께?”

검무극이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꽤 오래 참았군. 벌써 와서 부탁할 것 같았는데.”

그는 미리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말했다.

“맞습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는 알려드리고 싶었지요.”

“한데 왜 부탁하지 않았나?”

“교주님께 폐가 될 부탁이니까요.”

“그럼,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놈들의 수장이 나올 차례입니다. 아시다시피 보통 놈이 아니지요.”

물론 풍천교주 역시 그 상대가 암흑궁주라 여기겠지만.

“그래서 아버지께 비장의 한 수를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할 것 같았는데.

어쩐 일인지 풍천교주는 흔쾌히 허락했다.

“좋아, 그러게.”

“네? 허락해 주신다고요?”

“그렇네.”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자네 아버지를 위해서네.”

아버지에 대한 호의나 존경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네를 낳아 나와 인연을 맺게 해줬으니, 이 정도 선물은 해도 되겠지.”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이보다 더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겠는가?

“시공이환술에 있어선 제가 교주님의 제자잖습니까? 그런 제게 아버지가 배우는 거니, 교주님은 대사부님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대사부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시공대사부님!”

풍천교주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과연 자네 아버지가 순순히 배우실까?”

검우진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절대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가르치기도 쉽지 않을 거다.

“생각해 둔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뭔가?”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역효과만 날 것이다. 아버지와 시공이환술 속에서 산책하고 싶다고 하면 비웃음부터 나올 것이다.

복잡한 계획을 세워봤자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자극할 수 있을 단 하나의 방법,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인 방법은.

“시공이환술 익히시는 데 얼마나 걸리셨다고 하셨죠?”

내가 달아날 일은 없다

“그렇게 좋아요?”

단아는 침상에 누워있었고, 서대룡은 안고 있는 아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천각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그였다.

“좋소. 너무 좋소.”

닷새 전에 단아가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를 낳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서대룡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임신하면 그냥 낳나보다 쉽게 생각했었는데 정말 쉬운 일이 아님을 옆에서 지켜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만 좀 봐요.”

아내의 만류에도 서대룡은 품에 안은 아기를 내려놓을 생각을 안 했다. 첫날에는 아기 떨어뜨릴까 벌벌 떨던 그였는데.

“어서 식사하시고 무공 수련하러 가셔야죠.”

“조금만 더 있다 가겠소. 아, 녀석이 방금 웃었소. 그래, 내가 네 아빠다.”

아들을 안고 있음에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내가 진짜 아버지가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당신 닮은 게 천만다행이오.”

아들은 엄마를 꼭 빼다 닮았다. 자신을 닮아서 우울하게 생겼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저는 당신 닮기를 원했었는데.”

“무슨 말이오! 그랬다가 나중에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당신이 어때서요?”

“나는 지금이 좋소. 당신 닮아서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라 정말 좋소.”

“입매는 당신을 똑 닮았어요.”

서대룡이 아기 입 모양을 흉내 냈다. 아이가 배 속에 있을 때와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아들! 잘생긴 우리 아들!”

그때 뒤에서 들려온 한마디.

“벌써부터 아들 자랑이냐?”

서대룡이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서 있었다.

“소교주님!”

“축하한다, 대룡아.”

“소교주님! 저 아빠가 되었어요!”

무사히 잘 돌아오셨냐고 인사부터 해야 했지만, 서대룡은 검무극의 얼굴을 보자 울컥 치미는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서대룡은 여인들이 친정엄마를 보고 울컥하는 감정을 검무극을 보고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이 다가와서 아기를 보았다.

“자랑할만했네.”

“이만하면 성공했죠?”

“대성공이지. 이름은?”

“영하(瑛夏)라고 지었습니다.”

“서영하. 좋은 이름이구나.”

검무극이 단아에게도 축하를 전했다.

“단 부인, 축하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모두 소교주님 덕분이에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남편이 입만 열면 하는 말이기도 했다.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자기 인생에서 이런 행복은 없었을 거라고.

검무극이 지어온 약을 서대룡에게 주었다.

“마의께 부탁해서 특별히 지어온 약이다. 부인이 산후 조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서대룡과 단아가 함께 정중히 인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한 번 안아보시겠어요?”

“그래, 네 아들인데 안아봐야지.”

아기를 건네며 서대룡이 빠르게 말했다.

“목이랑 머리를 잘 받쳐야 해요. 팔로 이렇게 받치고 다른 손으로 아기 허리랑 엉덩이를 받치세요. 그렇죠, 그렇게. 힘 빼시고요.”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는 듯 검무극은 능숙하게 아기를 안았다.

“아니, 아기까지 잘 안으시면 어찌하십니까? 이런 건 못 하셔도 되잖아요?”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지금 내력을 엄청 쓰고 있다.”

혹시 몰라 아기 주위에 구름처럼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서대룡이 아기에게 말했다.

“아가, 인사드려라. 소교주님이시다.”

정말 그 말을 들은 거처럼 아이가 방긋 웃었다.

검무극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영하야,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걸 축하한다.”

검무극이 안고 있던 아기를 단아에게 건네준 후 서대룡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된 소감이 어떠냐?”

“아직 얼떨떨합니다.”

검무극은 서대룡에게 가장 큰 선물을 약속했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임독양맥은 내가 타통해주마.”

서대룡과 단아가 깜짝 놀랐다. 임독양맥 타통은 내력을 소모해야 하는 데다가 그 과정이 매우 위험해서 가족이 아니면 절대 해주지 않았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진짜 조카로 여긴다는 의미였다. 그랬기에 서대룡은 혈천도마가 자신의 임독양맥을 타통해 주었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아니, 그때보다 더 기뻤다.

서대룡은 그 와중에 한마디 너스레를 잊지 않았다.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도 모자랄 판에 대를 이어 사랑을 받는군요.”

정말이지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은혜였다.

“제 자식이 커나가는 걸 보면서,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잘 키우겠습니다.”

그 말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해줬던 조언이었다면, 이제 검무극은 새로운 조언을 해주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식을 손님이라 여기고 키우라고. 우리가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듯 자식을 친절히 대하고 존중하면서 키우라는 거다. 그리고 손님이 떠나듯 자식 역시 언젠가는 떠날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더라. 잘 대해주되 얽매이지 말라는 의미겠지.”

서대룡은 검무극이 해준 말을 마음속에 되뇄다.

“명심해서 잘 키우겠습니다. 한데 이 손님, 제가 떠나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래, 그래서 다들 나이 오십 먹은 자식에게 마차 조심하라는 말을 하게 되는 거겠지.

“나중에는 네가 내게 이러겠지. 소교주님, 현실과 이론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모르시죠? 자식은 말이죠!”

듣고 있던 서대룡과 단아가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식 챙기느라 사부님 안부도 여쭙지 않았네요. 이번에 함께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검존님과 잠시 더 강호를 둘러보시고 오시기로 했다.”

“천천히 오시라고 하시지요.”

“왜? 무공 수련 농땡이 치고 아기랑 놀게?”

서대룡은 오히려 각오를 다졌다.

“아뇨, 이제 두 배로 더 열심히 수련할 겁니다. 열 배로 더할 겁니다.”

검무극은 믿었다. 서대룡은 정말 좋은 부모가 될 것임을.

“난 이만 가마. 부인, 몸조리 잘하십시오.”

서대룡이 아쉬워하며 검무극을 붙잡았다.

“소교주님, 오랜만에 뵈었는데 저녁 드시고 가십시오.”

“아버지와 저녁 약속 있다. 오늘은 이만 가마.”

마지막으로 검무극은 단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에게 인사했다.

“우리 조카님, 세상에 태어난 걸 환영한다. 건강히 잘 커라.”

검무극이 그곳을 나가자 서대룡이 아기에게 말했다.

“아빠처럼 말고, 저 소교주님처럼 자라거라.”

그러자 단아가 단호히 말했다.

“아니, 아빠처럼 자라거라. 엄마는 그게 훨씬 더 좋단다.”

* * *

검무극은 아버지의 침소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옷을 갈아입고 오실 동안 잠시 방에서 기다렸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바로 한쪽 벽에 걸려있는 형과 자신이 그려진 족자였다. 그 옆에는 자신이 선물로 준 꽃무늬 잠옷이 개어져 있었다.

그 옆에 장식대 위에는 인형들이 올려져 있었다. 아버지 인형부터 마존 인형, 검무극과 검무양의 인형까지.

아버지와 친해지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일이다. 아버지가 이런 걸 방에 걸어 두시고, 꽃무늬 잠옷을 입으시고 또 이런 인형을 사서 세워놓는 분이시라는 것을.

그때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셨다.

“뭔가 음모가 있습니다. 그림도 그렇고, 이 인형도 그렇고. 형을 더 잘 생기게 그리고 만든 것 같습니다.”

“우연이 중복되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검무극이 웃으며 아버지를 향해 돌아섰다. 어찌나 장남을 사랑하시는지.

“배고파요, 아버지.”

“가서 밥 먹자.”

미리 약속을 했었기에 저녁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천마전 숙수분들의 요리를 먹어보는 게.”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 먹는 저녁이었다.

식사하면서 검무극은 이번 출교에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말해주었다. 중요한 일들은 이미 통천각을 통해 전해 들으셨지만, 그 뼈대에 검무극만이 더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살을 붙였다.

“그런데 도마님과 검존님 두 분이 서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도마 어르신이 어찌나 검존님을 챙기시는지, 저는 천덕꾸러기 신세였습니다.”

“네가 잘도 그랬겠다. 마존들 놀리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

“오해십니다, 아버지!”

“그래서 둘은 어디로 간다더냐?”

“두 분은 태호로 가셨습니다.”

태호라는 말에 검우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과거 권마와 함께 네 사람이 그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음을 기억한 것이다.

그 표정에서 어떤 사연이 있음을 짐작한 검무극이 물었다.

“태호에 가 보셨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음에 형이랑 다 함께 한 번 가시죠. 호수에 배 띄워 놓고 아들들이랑 술 한잔하시죠.”

다시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적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놈들은 귀혼곡으로 지금껏 상대했던 자들의 영혼들을 불러왔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이 천의신단이라는 희대의 영약을 음공을 쓰는 자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후에 있었던 싸움을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 설명보다 싸움과 무공을 발휘한 이야기에 아버지는 가장 큰 흥미를 보이셨다.

“……그렇게 놈들을 완전히 처리했습니다.”

“천마멸세로 없앴다고?”

“네, 목이 잘려도 영혼이 사라지지 않았거든요.”

“천마멸세를 제어할 수 있었느냐?”

“네,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여기셨는지 다시 확인했다.

“그래도 실내에서는 사용이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제 시공이환술에 관해 말할 순간이 되었다.

“그래서 한 가지 비술을 사용했습니다.”

“비술을?”

검무극이 넌지시 구결부터 흘렸다.

“이게 어떤 구결인지 한 번 맞춰보시겠습니까?”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결을 끝까지 읊고 나서는.

“아시겠습니까?”

“혈교의 마공 같은데?”

“얼추 비슷하게 맞추셨습니다. 한 번 더 읊어보겠습니다.”

“됐다. 이미 다 외웠다.”

검무극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한 번 만에 다 외우셨다고요?”

“그래.”

“그럴 리가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구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외웠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누구 무공인지 정확히 추측했다.

“풍천교주의 무공이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구결로 볼 때 극상승의 마공이 확실하고, 당대에 그 수준의 혈교 마공을 익힌 사람은 그 사람뿐이니까.”

“맞습니다. 풍천교의 무공입니다.”

역시 무공과 관련해서는 아버지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셨다.

“이게 무슨 무공의 구결이냐?”

“앞서 천마멸세를 마음껏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무공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구결의 정체를 밝혔다.

“바로 시공이환술입니다.”

시공이환술은 검우진도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풍천교주의 독문무공, 설마 아들이 시공이환술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지 못했다.

“나도 시공이환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이걸 그 사람이 전수해 줬다고?”

“네, 처음 풍천교주가 본교에 왔을 때 전수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네가 굳이 이 구결까지 읊은 이유가 있겠지?”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네, 저는 이 비술을 아버지께도 꼭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풍천교주의 허락은 받았습니다.”

순식간에 시공이환술을 열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진다면 위기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싫다.”

역시 예상대로 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했다.

“아버지와 새로운 공간에서 산책하고 싶습니다.”

“환술 속이 좋아 봤자지. 거긴 답답해.”

“아닙니다. 현실과 똑같습니다! 아니,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니까요. 그리고 이게 얼마나 유용한 무공인데요?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을 발휘했다.

주위에 펼쳐진 푸른 들판. 이곳에 혼자 들어왔기에 아버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래도 유용하지 않다고 하실 겁니까?’

바로 그때였다.

푸아아악!

눈앞의 공간이 찢어지면서 무엇인가 뚫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그것은 천마검이었다.

찌이이이익.

시공이환술의 세상이 쭉 찢어지면서 그 찢어진 사이로 아버지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시공이환술을 파훼한 것이다.

“파훼법이 보였습니까?”

검무극이 놀란 반응에 검우진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구화마공 앞에서는 어떤 마공이나 사공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십이성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의 위력이었다. 십이성 대성의 구화마공은 시공이환술도 찢는다.

아버지가 들어온 곳 뒤쪽 찢어진 곳으로 바깥세상이 보였다. 지금껏 수없이 시공이환술을 열었지만 이런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아버지는 들어오실 수 있지만 남은 못 들어오지 않습니까? 위기가 찾아왔을 때 순간 유용한 도피처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왜 숨어야 하냐는 듯 의아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달아날 일은 없다.”

단호한 아버지의 태도에 검무극은 드디어 작전을 펼쳤다. 그건 바로 아버지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풍천교주가 이 무공을 사흘 만에 익혔다면서 제게 그랬습니다. 누구도 자기 기록을 깨지 못할 거라고요.”

검우진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비웃음이 지어졌다. 뻔히 자신을 자극하는 것임을 알았음에도.

“너는 얼마 만에 익혔느냐?”

“저야 천무지체 아닙니까?”

“얼마나 걸렸느냐니까.”

검무극은 애초에 풍천교주가 익힌 시간에는 도발이 안 걸릴 줄 알고 있었다. 당연히 당신께서 풍천교주보다는 더 빨리 익힐 거라 여기실 테니까. 아버지가 의식하는 건 아들의 기록.

원래는 딱 두 시진 걸렸다. 하지만 두 시진 만에 익히는 건 아버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도전조차 안 하실 수도 있었기에.

“여섯 시진 걸렸습니다.”

아버지가 도전해볼 만한 시간을 제시했다.

선의의 거짓말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 익혀도 안 쓸 거다, 하셔도 좋습니다. 일단 익히기라도 하십시오!

“아버지, 저와 비교할 수는 없으십니다. 풍천교주님의 기록을 깨시는 것만 해도 대단…….”

아버지가 말을 끊으며 시간을 정했다.

“다섯 시진 후에 다시 보자.”

어휴, 징글징글한 검씨들!

늦은 밤, 곽영은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으로 철방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젖은 천으로 작업대를 닦고 바닥의 재와 쇠 부스러기를 한데 쓸어 담았다.

무림맹 최연소 장인이었던 그녀는 천마신교 철방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묵묵히 맡은 일에만 열중했다.

처음에는 많은 이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림맹에서 온 것도 그랬고, 여인인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무시와 멸시를 묵묵히 견뎌내며 그녀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요즘 그녀를 보는 눈빛은 많이 달라졌다.

쇠를 다루는 이들의 속성은 불과 같다. 싫은 건 불같이 싫어하지만, 또 인정할 건 확실히 인정하는 성격들. 분명 그녀는 모두에게 인정받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녀에게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 처음 철방 일을 배울 때 이런 마음이었지.’

언제부터였을까? 장인이 되고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면서 이런 독기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을 납치했던 그놈들의 목표가 된 것도, 어쩌면 그 허술해진 마음을 파고든 것은 아닐까?

오늘도 고단한 일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으로 철방을 나가려던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에 남아 있었던 그는 바로 철방의 곽 장인이었다.

“내일부터 불을 쓰거라.”

불을 쓰라는 말은 병장기를 만들라는 의미. 기다렸던 허락이 떨어지자 곽영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곽 장인은 그녀를 무심하게 대했지만, 그동안 쭉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너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만든 검으로 너를 증명해라.”

“네!”

철방을 나가는 곽 장인에게 곽영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곽영이 불이 꺼진 화로로 걸어갔다.

드디어 검을 만들 수 있다! 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그녀는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약해져선 안 된다.

하급 무인으로 지원한 동생이 마인 생활을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녀석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동생도 꾹 참고 견뎌내고 있었다.

‘우린 잘해 낼 수 있을 거야.’

텅 빈 철방을 둘러본 후 그녀가 그곳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축하하오.”

깜짝 놀란 그녀가 돌아보니 검무양이 서 있었다.

반가운 기색이 스치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혹시 내가 곽 장인에게 당신이 검을 만들게 해달라고 부탁했느냐고 묻는 거면, 아니오. 만약 그랬다간 당신은 영원히 여기서 일하지 못할 거요.”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곽 장인은 제아무리 천마신교의 대공자라 하더라도, 그런 외압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부탁을 했다간 평생 검을 만드는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싶었소.”

어제 곽 장인이 자신을 찾아와 말했다. 곽영에게 검을 만들게 해줄 때가 되었다고.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늘 찾아온 것이다.

검무양이 그녀를 신경 쓰는 건, 그녀가 자신 때문에 이 멀고 먼 천마신교에 왔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고 검무양이 돌아서려는데 곽영이 말했다.

“술 한잔 사 주세요.”

검무양이 그녀에게 돌아서자 오랜만에 옛날 모습이 나왔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 원래 이렇게 당돌한 성격인 거 아시잖아요? 여기 와서 꾹 참고 지냈던 거죠. 대공자께서 오늘 하루만 제 성질 좀 받아주세요. 화병 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거든요.”

그녀가 너무 당당히 말해서 검무양은 피식 웃고 말았다. 검무양의 호의적인 반응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만큼은 누군가에게 축하받고 싶어요. 사 달라는 건 아시다시피 제가 아직 제대로 월봉을 받는 처지가 아니라서요. 한 달 후에는 제가 사죠.”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잖아도 축하주 하자고 말할까 말까 고민했었다. 괜히 부담 줄까 돌아섰는데 그녀가 먼저 말한 것이다.

그래,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곽 장인에게 소개해 준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함께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형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갔더니 수하가 철방에 갔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형은 곽영을 잊지 않고 챙겨주고 있었다.

원래의 형이었다면 신경조차 안 쓸 일이었는데. 이렇게 바뀐 형의 모습에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앞으로도 더 멋있어져야 해, 형.”

* * *

검무극은 그길로 곧장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약속한 시간 동안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펼쳐 무공 수련을 했다. 이 시간 아버지도 시공이환술을 익히고 계실 거다. 자신은 구화마공을 펼치고 또 펼쳤다.

시천비술을 발휘했기에 다섯 시진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일곱 배의 시간을 더 주었던 시천비술은 이제 아홉 배의 시간을 더 주었다. 현실에서의 다섯 시진은 검무극에게는 마흔다섯 시진, 거의 나흘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안에서 시간을 느리게 가게 하는 시천비술만큼은 아버지께 알려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라면 반드시 시천비술도 대성을 이루실 거고, 진짜 무의 극의를 얻으려 들 수도 있다.

그러다 마선(魔仙)이 되어 등선하시거나, 평생 무공 수련에 빠져서 시공이환술에서 나오지 않으실 수도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아버지를 잃을 수도 있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가 잘 조절하실 거라 믿지만, 이 아들이 원체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요.’

검무극은 구화마공 수련에 열중했다.

‘구화마공 십성 대성을 깨고 십이성 대성을 이룬다!’

십이지왕을 잃은 그들이었기에 이제 화무기가 언제 등장할지 모를 상황.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할 작정이다. 이렇게까지 노력했음에도 화무기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땐 무인답게 인정해야지. 그래, 네가 이겼다.

수련하다 지치면 온천을 열고 몸을 담갔고, 또 수련하다 지치면 섬을 열어서 바닷바람을 쐬며 쉬었다.

수련하는 내내 궁금했다.

과연 아버지는 시간 내에 성공하실 수 있으실까?

그렇게 현실에서 다섯 시진이 흘렀다.

검무극은 아버지를 다시 찾아뵈었다. 아버지는 개인 연무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선 아버지의 눈치부터 살폈다.

시간 내에 익히셨을까? 아니면 실패하셨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에서 실패인지 성공인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한 가지 생각만 든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도박사를 하셨어야 했습니다!’

일단 실패하셨을 수도 있었기에.

“실패하셨어도 너무 부끄러워 마십시오. 다섯 시진은 절대 불가능한 시간입니다. 그런 비인간적인 아버지, 이 아들은 싫습니다.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말씀하십시오. 아들아, 다섯 시진은 무리다. 시간을 조금 더 다오.”

아버지의 회심에 찬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검무극과 검우진은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아버지의 시공이환술이었다.

“해내셨군요!”

검무극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검무극은 자신이 해냈을 때보다 더 기뻐했다. 일단 아버지가 펼칠 수만 있다면, 이걸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다음 문제였으니까.

그건 아버지가 선택하실 문제고, 검무극은 아버지를 지켜줄 비장의 한 수가 생긴 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풍천교주에게 분명히 전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다섯 시진 걸리셨다고요.”

“네 시진이다.”

“네?”

“네 시진 만에 끝났다.”

“아마 풍천교주께서는 놀라 까무러칠 겁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두 시진 만에 익힌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아마 이러겠지. 어휴, 징글징글한 검씨들!

“정말 멋지십니다! 존경합니다, 아버지.”

이렇게 순식간에 공간을 열 수 있다는 사실에 검무극은 감탄을 넘어 경악했다. 자신이 시공이환술을 익힌 것은 아버지의 절반인 두 시진만에 익혔다.

하지만 그 후에 이렇게 순식간에 공간을 열기 위해 오랫동안 수련하고 연마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순식간에 이 공간을 열었다.

구화마공을 십이 성 대성을 이루면서 얻은 어떤 특별한 깨달음 때문일까? 아니면 이 시공이환술 자체가 아버지와 태생적으로 딱 맞는 무공일까? 어떤 이유든 정말 대단한 결과임은 확실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들을 보며 검우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시공이환술을 익히는 동안 혼신을 다한 집중과 노력이 충분히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들은 그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검무극의 기쁨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아버지가 이 내기 아닌 내기를 한 것이 꼭 호승심 때문만은 아님을 안다.

아들이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받아들여 주신 것이다.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물론 여전히 시공이환술을 열어 당신께서 피할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지 않으시겠지만.

“처음 성공하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간만 만들 수 있습니다. 한데 점점 시공이환술의 경지가 올라가면 다양한 것들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기억 속의 장소를 완전히 재현할 수도 있고요. 제가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안에서 제 시공이환술이 펼쳐질지 모르겠는데.”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공이환술 펼치기, 처음으로 하는 시도였다.

검무극이 시공이환술 안에서 다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놀랍게도 안에서도 펼쳐졌다.

휘이잉.

두 사람은 눈이 쌓인 설원의 꼭대기에 함께 서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옷과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검우진이 바닥의 눈을 만져보았다. 정말 차가운 눈이었다. 건너편 얼음 절벽이 햇살에 반사되어 빛났다.

“대단하죠?”

검무극이 손가락을 또 튕겼다.

그러자 그들 옆에 매화나무가 생겨났고 설중매가 눈바람에 속에 피어났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그 옆에 작은 바위도 생겨났다.

“원하는 건 이렇게 다 만들 수 있습니다. 참, 그리고 손가락은 안 튕겨도 됩니다. 그냥 멋으로 튕기는 겁니다.”

그때 아버지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말이냐?”

다시 주변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만든 시공이환술 속에서 아버지의 시공이환술 공간이 생겼다.

그리고 그곳을 둘러본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백색의 공간이 아니었다. 너무나 낯이 익은 것들이 눈에 보였다.

“아니, 어떻게?”

천마전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재현하진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있었다. 피의 길과 계단, 그리고 태사의가 있었다.

아버지는 가장 익숙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이미 성공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승자의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서 태사의에 앉았다.

태사의에서 흐뭇해하는 아버지 앞에서 검무극이 펄쩍 뛰었다.

“제가 못 삽니다, 못 살아! 아버지, 시공이환술에서도 태사의에 앉으시면 어찌합니까? 제발 그 태사의에서 벗어나시라고 시공이환술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고요!”

그러냐? 하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손가락을 딱!

그러자 태사의를 비롯해 새로 만들어진 것들이 사라졌다.

아직 제한적이긴 하지만 자유자재로 사물을 다루는 아버지를 보고 검무극이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천무지체가 아니신데도 이 정도인데, 만약 아버지가 천무지체이셨다면 정말 난리가 났을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천무지체로 태어난 것은 아버지의 저 천부적인 무재에서 비롯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버지의 저 감각은 천무지체와는 다른 느낌이 있다.

“만드시려면 이런 곳을 만들어야죠.”

다음 순간 검무극과 검우진은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에 서 있었다. 공간 두 개를 동시에 유지할 수는 없었기에 앞서 만들었던 설원은 사라졌으리라.

푸른 하늘과 뜨거운 태양.

해변에는 잎이 큰 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아래 그늘에 편안해 보이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곳이었는데. 아버지에게는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제가 가장 아끼는 저만의 공간입니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잎 넓은 나무 아래 편안한 의자가 하나 더 생겼다.

“여기 누워 보시죠.”

검우진은 아들과 나란히 백사장에 누웠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아름다운 곳에 누워있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살면서 이런 해변에서 이런 의자에 누워본 적이 있었겠는가?

“여기 누워서 저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만사 시름이 다 사라집니다.”

“젊은 녀석이 무슨 시름이 그리 많아서?”

“저야 온갖 사람들 간섭이란 간섭은 다 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모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세상 제일 실속 없는 짓까지 하고 있잖습니까?”

“알긴 아는구나.”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던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외롭냐?”

아버지도 알고 계신 거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때 느끼는 감정임을.

“가끔요.”

그러자 검우진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도 아버지를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여기 와서 쉬었다 나가면 금방 괜찮아집니다. 아버지도 가끔 혼자 있고 싶으실 때가 있으시잖아요? 휘 아저씨도 없고, 호위도 없이 오직 혼자서만요.”

“지금도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혼자 있을 수 있다.”

“그거와는 다르죠. 이 공간은 정말 철저히 나만의 공간이니까요. 여기선 온갖 욕 다하셔도 됩니다! 벌거벗고 뛰어다녀도 됩니다!”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하늘을 향했다. 아무리 이 푸르고 맑은 하늘이 실감이 나더라도 아버지에게는 진짜가 아니었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이곳이 편하게 느껴져도, 환상에 너무 빠져들지 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아버지는 외로움 느끼실 때가 없으십니까?”

“없다.”

“고민 같은 건 있으실 수 있잖아요? 아버지의 제일 큰 고민이 뭡니까?”

그러자 검우진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저 빼고요.”

그렇겠네요. 아버지의 꿈을 막아서는 아들이라니! 아버지께는 제가 최악의 진상 손님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너무 말썽꾸러기 같잖습니까?”

과연 아버지에게 고민이 없을까? 그럴 리가.

언제쯤 되어야 아버지가 속에 있는 말씀을 편하게 다 하는 그날이 올까?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루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도 저, 그날까지 노력할 겁니다, 아버지.

그래도 생각보다는 시공이환술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저는 아버지가 만드실 아버지만의 공간이 기대됩니다. 어디에 계실 때 아버지가 가장 편하게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저도 구경시켜 주십시오. 아, 천마전은 절대 안 됩니다! 태사의도 안 되고요!”

검우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만들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공간을 가장 아끼시게 될까? 과연 그것을 구경하게 될 날은 올까?

검무극이 슬쩍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편하게 누워계신 모습이 이렇게 낯설어서 되겠습니까? 좀 쉬어가면서 하십시오, 아버지.

그래도 이곳이 마음에 드셨는지.

“바닷바람이 참 좋구나.”

의자 아래에서 검무극의 손가락이 빠르게 부딪쳤다.

더위를 가르는 시원한 바람이 더 불었고, 갈매기가 떼를 지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아버지 의자 옆으로 게들이 일렬로 쪼르르 기어갔다.

‘이곳에서라도 편히 쉬세요, 아버지.’

좋은 무공을 배웠으니

검우진은 참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고 편안한 휴식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휴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휴식보다 이 순간이 더 값지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검우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자리 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들은 지금도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의자 아래에서 부지런히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갈매기와 기어 다니는 게에서 끝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저 앞쪽 바다에서 새하얀 물줄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오더니.

푸우우우웅.

커다란 고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보였다. 검우진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고래가 등장할 줄은 몰랐으니까.

“네가 고래를 본 적이 있었더냐?”

“책에서 그림으로 본 게 다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실감 나게 만들어냈구나.”

중원에서 무인으로 살면서 실제 고래를 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우진이야 젊은 시절 워낙 권마와 중원을 떠돌았으니 몇 차례 보았던 것이고. 그마저도 교주가 된 후로는 고래를 직접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

검무극 역시 회귀 전 삶에서 여러 차례 고래를 보았는데, 대부분 스치듯 본 것이었고.

딱 한 번 정말 인상적인 고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강렬했던 기억을 지금 그대로 재현하는 중이었다.

우우우우.

고래가 낮고 깊은 소리를 냈다.

검우진이 다시 아들을 쳐다보았다. 직접 들어보지 못했지만 정말 고래가 이런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마치 바다가 하늘을 그리워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게 요령이 있습니다.”

검무극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떠올린 심상을 시공이환술 속에서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지를 아버지께 알려주었다.

구결은 어떻게 펼쳐야 하고, 또 머릿속이나 마음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검무극은 어떻게든 아버지가 이 시공이환술에 관심을 더 가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급할 때 아버지가 시공이환술을 사용하실 테니까.

검우진은 아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바다를 헤엄쳐가는 고래를 쳐다보았다.

“고래가 외로워 보이는구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푸우웅!

다시 물줄기가 뿜어지더니, 다른 고래 한 마리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두 마리의 고래가 헤엄을 쳤고, 그 주위로 작은 돌고래들이 뛰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검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이런 광경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행복을 느끼는 건 검우진만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이 공간에서 혼자 있을 때 가장 행복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있을 때보다 더 기쁘고 행복했다. 다른 장소도 아닌 이곳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변하는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고래들이 어디론가 떠나갔고 다시 수면이 잔잔해졌다.

검우진은 말없이 바다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벌써 ‘이제 그만 나가자’라는 말이 나왔을 거다. 하지만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지, 그런 마음으로 앉아 있다가 검우진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젊은 시절의 꿈이었다. 아직 소교주도 되기 전의 그 시절.

그리고 마치 자각몽을 꾸는 것처럼 검우진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았다. 내가 저렇게 환하게 웃을 때도 있었나? 내가 저렇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었나? 내가 저렇게 감정 표현을 잘했었나?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때 검무극도 옆에서 자고 있었다.

검우진은 내심 놀랐다. 아무리 시공이환술 속이고, 아무리 아들과 함께였다지만.

이렇게 잠드는 줄도 모르게 낮잠을 잔 적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여전히 불고 있었다.

‘이렇게 자고 있어도 시공이환술을 유지하는구나.’

검우진은 아들이 펼치는 시공이환술의 경지가 정말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이 환술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혈교의 환술이었으니까.

상대를 끌어들이고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어서 손쉽게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졌을 거다.

한데 아들은 그 무서운 무공을 쉬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래를 만들고 있다.

“언제 깨셨습니까?”

뒤늦게 검무극이 하품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검우진은 짐짓 따끔하게 말했다. 자신도 함께 잤기에 할 말은 아니었지만.

“무인이 이렇게 방심해도 되느냐?”

“적이 오면 아버지가 막아주시겠지요.”

분명 아들은 자신이 먼저 잠든 걸 보고 뒤이어 잠이 들었을 텐데, 먼저 잠이 든 척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만 일어나자.”

“네, 아버지.”

시공이환술을 나가기 전에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오늘 너무 좋았습니다.”

원래라면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거나 그마저도 반응하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에서의 감상을 전했다.

“나도 좋았다.”

아버지의 말에 검무극은 감동했다. 정말 좋지 않았다면 저런 말을 하지 않을 분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검우진은 자신의 말에 아들이 정말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꿈속에서 보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이런 말쯤은 얼마든지 하던 그때 그 시절을.

아들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아들에게 배운 건 바로 이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

손가락을 튕기려고 할 때, 아버지가 제지했다.

“잠깐.”

오늘의 이 자리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만 일어나자는 말이 이곳을 나가자는 의미가 아니었다.

“좋은 무공을 배웠으니 나도 한 수 가르쳐줘야겠지?”

결코 뭔가를 그냥 받는 법이 없는 아버지였다.

검무극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는데.

“구화마공 제 팔식을 전수해주겠다.”

검무극의 눈동자가 떨렸다. 구화마공의 전수만큼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 말은 없었으니까.

“한데 시기가 이르지 않습니까?”

구화마공 제 칠식부터 구식까지는 천마혼이 사용하는 무공이었다.

출교 전에 아버지는 제 칠식 마혼창세를 전수하셨는데, 벌써 다음 초식을 전수해 주시려는 것이다.

“네 운명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으냐?”

그 말에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환골탈태했기에 더 빨리 전수해주신다는 것임을. 과연 검무극의 예상은 정확했다.

“환골탈태를 이뤘으니 구결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검우진이 아들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지금부터 구화마공의 제 팔식을 전수하겠다.”

검무극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했다.

“일어나거라.”

검우진은 아들을 일으켜 세운 후 한 가지 뜻밖의 일을 지시했다.

“산책로를 만들어봐라. 중간중간 변화가 많은 길로.”

검무극이 잠시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두 사람 앞에 작은 오솔길이 생겨났다. 오솔길을 빠져나가면 개울도 있었고, 그 건너 작은 들판을 지나면 대나무 숲도 있었다. 대나무 숲 너머에는 폭포도 있었다.

“같이 걷자.”

놀랍게도 아버지는 산책하면서 구결을 전수했다.

구화마공 제 팔식 마혼질주(魔魂疾走)

천마혼이 사용하는 두 번째 마공.

“마혼이 새로운 세상을 질주하니 모두 경배하고 추앙한다. 진기의 시작은 천추혈에서 시작한다. 첫 진기의 출발은 경쾌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중완혈을 거쳐서는 무겁고 진중해야 하며, 대추혈에 이르러서는…….”

원래 구결이란 정신을 집중해서 외워야 했다. 그러잖아도 어려운 구결을 이렇게 걸어가면서 외우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제 팔식은 제 칠식보다 구결이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원래 제 칠식도 그때까지 익혔던 그 어떤 구결보다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팔식은 그보다도 더 어려웠다.

그랬기에 가만히 앉아서 전수하면 그 자체를 통째로 외워야 한다. 기존 무공과는 그 체계나 진행이 완전히 달랐고 상식을 벗어나는 부분이 많았기에 외우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버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구결을 전수했다.

“진기가 백해혈에 당도하면 눈앞이 푸른 기운이 감돌 것이고…….”

이 부분을 전수할 때는 나무의 푸른 잎을 떼서 검무극에게 암기를 날리듯 날렸고.

“다시 진기를 역으로 돌리되 부드러운 기운을 유지해야 한다.”

역으로 진기를 돌려야 할 때는 아버지가 뒤쪽으로 돌아서며 뒤쪽 길에 피어 있는 꽃잎의 잎사귀를 매만졌다.

혈맥을 건너뛰어야 하는 부분을 전수할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구결을 말해주었다.

“……진기가 명문혈을 지날 때는 그 기운을 회오리치듯 끌어당겨야 하며.”

그때는 손을 빙글빙글 돌리며 아버지의 손에서 장력이 회오리치며 검무극의 명문혈을 향해 발출되었다.

쇄애애애액.

검무극이 몸을 날리며 피하는 와중에도 그 구결을 정확히 외웠다. 오히려 더 잘 외워졌다.

“……가을 서리처럼 차갑게 움직여야 한다.”

이 구결을 읊을 때는 아버지는 시냇물에 손을 담갔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진기를 이어가는 부분은 대나무를 크게 휘었다가 놓으셨고, 강하고 단단한 기운을 뻗쳐야 할 때는 바위에 걸터앉으셔서 전수했다.

구결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그걸 활용하셨다.

그 어려운 구결이 아버지의 행동과 주변 환경과 어울리니 암기가 쉬웠다. 아니 쉬운 정도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잊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 특별한 암기에는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의 마음까지 함께 각인되었다.

그 귀한 가르침은 긴 산책이 끝나고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왔을 때 끝이 났다.

“구결을 다 외운 것 같습니다.”

검우진이 확인하기 위해 구결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외우기 힘든 부분들을 잘 외웠는지 세심하게 물어본 검우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암기는 완벽했다.

“아니, 아버지. 이 산책을 하면서 구결을 전수하는 비법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훨씬 더 잘 외워졌습니다.”

“젊어서부터 암기하기 어려운 것을 외울 때면 난 그렇게 외웠다. 주위의 다른 사물을 이용해서 외웠지.”

“그 방법 덕분에 다 외웠습니다.”

“그 방법을 쓰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 어려운 구결을 모두 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산책을 세 번은 해야겠다 예상했었는데.”

물론 구결을 암기하는 것과 그것을 몸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워낙 새로운 방식으로 내력을 움직여야 했기에 검무극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아버지께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성심껏 질문에 답변을 주셨다.

근래 아버지와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면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무학의 깊은 성취가 있었다.

그랬기에 두 사람이 나누는 내용은 더욱 심오했고, 설령 지난번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해도 또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문답이 끝나자 검무극은 구결을 막힘 없이 이해했다. 확실히 기억력이 좋아졌고 이해력도 높아졌다.

환골탈태의 효과는 분명 있었다. 원래라면 몇 배는 더 걸렸을 텐데, 오히려 칠식을 익힌 것보다 빨리 익혔다.

아버지께서는 팔식을 익히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묻지 않았다. 괜히 호승심 강한 우리 아버지, 자존심을 긁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아버지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역대 마교주 중에서 제 팔식을 가장 빨리 익힌 게 너일 거다. 여기까지 온 것도, 이 팔식을 익히는 데 걸린 시간도.”

분명 아버지의 얼굴에 묻어나는 감정은 놀람보다는 뿌듯함에 가까웠다.

검무극은 그 공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역대 마교주 중에서 제 팔식을 가장 쉽게 암기하게 해주시고 이해하게 해준 분이 아버지실 겁니다.”

검무극은 정말 기뻤다. 구화마공이 완성되어 간다는 건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도, 천마신교의 소교주로서도 완성되어 간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전에도 말했듯 네가 구결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천마혼의 위력이 결정된다. 그러니 시간이 날 때마다 구결을 이해하고 수련하는 데 결코 소홀하면 안 된다.”

적어도 마지막 세 초식만큼은 따로 천마혼을 불러내 수련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모든 건 자신이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자, 이제 나가자.”

검무극이 먼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아버지가 만든 시공이환술 속 세상이 나왔다. 시공이환술 속에 또 만들고 또 만들었으니까.

이번에는 검우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처음 검무극이 찾아왔던 아버지의 개인 연무장이었다.

두 사람이 연무장을 나와 내전을 걸었다.

“아버지, 천마혼과 관련해서 제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무엇이냐?”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천마혼과 대화하는 겁니다.”

지난번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역대 천마혼 중에는 말을 했던 천마혼도 있었다고.

“두 번째 목표는 천마혼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겁니다. 사람 크기만큼요.”

“만들어서는?”

“함께 친구처럼 다니는 거죠.”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검우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어쩌면 너라면.”

예전이라면 미친 소리라고 했겠지만, 이제는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데 이제 어디 가십니까?”

“밀린 일 하러 가야지.”

“오늘 하루는 그냥 농땡이 치십시오. 그래도 본교는 잘 굴러갈 겁니다.”

아버지가 저 앞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게 왜 잘 굴러가겠느냐?”

평소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렇다는 말은 생략한 채 아버지는 천마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은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그러잖아도 머리가 좋은 이 아들이 이런 귀한 암기법까지 배웠으니까 앞으로 더 승승장구할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고래를 보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 두자.”

그래, 오늘 잊지 못할 여러 가지 것 중에 아버지와 함께 고래를 보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그놈들 딱 대기시켜 두겠습니다.”

아버지는 천마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웃고 계시지 않으실까?

검무극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드디어 구화마공 제 팔식까지 익혔다.

이제 마지막 제 구식만이 남았다.

불순물이 섞이기 전에 두드리는 거다

아버지와 헤어진 후 검무극은 천마혼을 소환해서 구화마공 제팔식을 익힌 후 무엇이 변했는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외모만 봤을 때 천마혼과 가장 비슷한 사람에게 인사하는 게 우선이었다.

“사부님! 잘 계셨습니까?”

권마는 대번에 검무극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옷 벗어봐라.”

“보자마자 제자의 옷을 벗기시다니요!”

“장난치지 말고!”

검무극이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가만히 검무극을 바라보던 권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환골탈태했냐?”

권마는 검무극의 신체 변화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함께 웃통을 벗고 수련을 자주 했기에 더욱 확실히 알아보았다.

“네, 이번 출교에서 천운이 닿아 환골탈태했습니다.”

순간 권마의 표정에 놀람이 스쳤다. 그 누구에게도 환골탈태는 평생 단 한 번 들어볼까 말까 한 기연이었으니까.

아버지가 그랬듯 권마도 검무극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아버지가 혹시라도 환골탈태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 부모의 마음으로 살폈다면, 권마는 다른 의미로 몸을 살폈다.

“권법을 익힌 사람에게 환골탈태는 다른 무공을 익힌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온몸을 사용해서 싸우는 권법은 몸 자체가 무기였으니까. 그 무기가 바뀐 셈이었다.

권마에게 환골탈태는 이런 표현을 할 정도로 의미가 컸다.

“인(人)의 무공을 펼치던 네가 이제 천(天)의 무공을 펼치게 되었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지.”

생각해 보면 그 누구보다 사부가 원했던 것이 환골탈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진지하게 사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몸으로 벽력수라권의 대성을 이루지 못하는 건, 무공에게도 그 몸에게도 너무 미안한 일이겠지?”

이미 한차례 권마를 찾아가 처음부터 벽력수라권을 다시 가르쳐달라고 했었던 검무극이었다. 그때의 수련으로 검무극은 다음 단계로 올라설 수 있었고.

무학을 바라보는 수준이 워낙 높아져서 이제 벽력수라권의 대성도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꼭 대성을 이루겠습니다.”

구화마공 제팔식을 익히자마자, 권마는 벽력수라권의 대성을 이루라고 한다.

검무극은 이 연속된 일이 환골탈태가 가져온 기연이라 여겼다.

이렇게 환골탈태는 생각지 못한 일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쳤다. 그냥 정신과 신체의 기연만이 아니었다.

“환골탈태한 후에 싸운 적이 있느냐?”

“아뇨, 없습니다.”

갑자기 그걸 왜 묻나 싶었는데.

권마는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인생에 고민 따윈 없을 거 같은 외모지만, 권마는 보기보단 신중한 사람이었다.

“지금 바쁘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사부가 바쁘냐고 묻는다. 아무리 바빠도 대답은 하나였다. 아버지가 불러도 지금은 못 갑니다, 해야 할 상황.

“아뇨. 남는 게 시간입니다!”

“잠깐 기다려라.”

권마가 자신의 거처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나왔다.

그는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월이 느껴지는 흔적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임은 알 수 있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권마가 검무극을 데리고 천마신교를 나섰다.

두 사람이 경공으로 내달려 도착한 곳은 대천산이었다. 권마는 대천산에서 가장 큰 폭포가 있는 근처의 작은 공터로 검무극을 데려갔다.

그곳의 바위에 상자를 내려놓더니 권마가 검무극 앞에 마주 섰다.

“너는 나를 믿느냐?”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답해라.”

“믿죠. 저 자신보다 사부님을 더 믿습니다.”

빈말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권마라는 사람이 주는 그만의 신뢰가 있다. 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묵묵히 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을 거 같은 사람이 그였으니까.

“나를 얼마나 존경하느냐?”

검무극이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대답해라.”

“사부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존경할 겁니다.”

“그럼 적어도 내가 이유 없이 널 팬다고 화를 내진 않겠지?”

“네?”

말이 떨어지는 순간 권마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검무극이 배를 부여잡고 나가떨어졌다. 살기가 깃들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내력이 실린 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천마호신공은 발동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공격에도 절대 내공을 쓰지 말고 그 어떤 호신공도 쓰지 마라.”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주먹도 아니고 사부님이 주먹을 날리는데 그러시면 죽으라는 말씀인데…….”

검무극이 다시 권마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그의 주먹에 내공이 실렸으면 당연히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권마의 주먹에는 벽력의 기운만 담겨 있었다. 그는 주먹에 내공을 쓰지 않고도 벽력의 기운을 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 아프겠는가? 권마의 주먹에 얻어터지는 건데.

퍽! 퍼억!

권마의 주먹이 연속해서 박혔다. 맞은 부위에서 짜릿짜릿 뇌전의 기운이 흘렀다.

“아니, 제자가 먼저 환골탈태했다고 두들겨 패시는 겁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를 질투하셔서 때렸다고 소문낼…….”

퍽퍽퍽퍽!

본격적으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권마는 특정 부분만 때리지 않았다. 온몸을 골고루 때렸다. 몸통은 물론이고 팔다리에 얼굴까지 때렸다.

점차 주먹의 세기가 강해졌고, 흐르는 뇌전의 기운도 강해졌다.

정신없이 얻어터지면서도 검무극은 당연히 알았다. 권마가 자신의 신체를 단련시켜 주고 있음을.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제자를 두들겨 팰 리가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검무극은 최대한 호신공을 발휘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내공이 실리지 않았다고 해도, 몸에서 계속 고통을 느끼는데 천마호신공이 그냥 있을 리 있겠는가? 검무극은 온 힘을 다해 그것이 발동하지 않도록 애썼다.

‘이렇게 아픈데 너를 발동하지 않게 하려고 애써야 하다니!’

퍽! 퍼억! 퍽!

“아니, 비겁하게 뒤에서 때리시기 있습니까!”

날아드는 주먹은 더더욱 강해졌다.

“아파요! 사부님! 제자 죽습니다!”

엄살이 아니었다. 정말 아팠다. 게다가 맞은 곳에 뇌전의 기운이 흐를 때는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맞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권마가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때리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나보다 사부가 더 힘들다.’

권마의 심력 소모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칫 잘못 때렸다간 자신이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아니,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퍽! 퍼억! 퍽퍽퍽!

검무극이 더는 주먹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려 할 때, 권마가 크게 소리쳤다.

“참아라!”

검무극이 감기려던 눈을 번쩍 떴다.

“이 과정은 마치 쇠를 두드려서 강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지금 재료는 만년한철이다. 이 재료에 불순물이 섞이기 전에 두드리는 거다.”

만년한철은 자신의 몸이었고, 그걸 두드리는 망치는 권마의 주먹이었다.

무림에서 가장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이 온 신경을 다한 주먹이었고, 거기에 뇌전까지 깃든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망치였다.

꽝! 꽈앙! 꽝!

만약 권마와 사제지간이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기연은 없을 것이다. 소교주에게 이런 가혹한 주먹질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권마는 지금 제자라 여기고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두들겨 맞다 보니, 드디어 권마의 주먹질이 멈췄다.

검무극은 그대로 꼬꾸라졌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 바로 폭포 아래로 들어가라.”

“지금 이 몸으로요?”

시간 끌어선 안 된다는 듯 권마가 검무극을 폭포 아래로 내던졌다.

“절대 내공을 쓰면 안 돼!”

“그럼 저 죽어요! 으악!”

하지만 말과는 달리 검무극은 내공을 쓰지 않고 맨몸으로 폭포를 맞았다. 아파 죽을 거 같았지만, 온몸에 골고루 폭포를 맞으려 했다.

그걸 바라고 이곳에 던져 넣으셨을 테니까. 애초에 이곳에서 시작한 것만 봐도 이 과정은 얻어맞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리라.

콰콰콰콰콰콰콰콰.

떨어지는 폭포가 다친 몸을 두드리자 정말 온몸이 녹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환골탈태할 때의 고통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권마를 얼마나 믿냐고?

이러다 잘못되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만큼 믿는다.

견디고 또 견디다 결국 검무극은 폭포에서 기절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검무극이 눈을 뜨자 권마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심력 소모를 했는지 그 무서운 권마가 초췌해 보였다.

“……사부님.”

“깨어났느냐?”

자신은 폭포 옆 바위 위에 누워있었는데 몸에서 알 수 없는 약 냄새가 났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앞서 권마가 가져 나왔던 상자에 지금 자신의 몸에 바른 약이 들어 있었음을.

“잘 참았다. 너라면 버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뚝뚝한 그 표정에 지어지는 미소에 일이 잘되었음을 느꼈다.

“환골탈태한 몸은 그 자체로도 정말 훌륭하다. 보통 완벽하다는 표현을 하지. 하지만 그 훌륭한 몸을 잘 길들이면 더욱 완벽한 몸이 된다.”

권마는 앞서의 그것이 단순한 주먹질이 아님을 밝혔다.

“네게 사용한 수법은 뇌격단근법(雷擊鍛筋法)이었다. 피부와 근육을 뇌전의 기운으로 파괴한 후 새롭게 회복시키는 방법으로 벽력수라권과 함께 전해져 오는 독문비술이다. 오직 환골탈태한 몸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비술이지. 이걸 내 대에서 쓰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검무극이 몸을 일으켰다.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거짓말처럼 몸은 가뿐했다.

“가서 시원하게 폭포에서 씻고 오너라.”

검무극이 폭포 아래로 가서 몸을 씻었다.

씻고 나와서 몸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는데 몸에는 멍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부는 더 맑고 깨끗해졌고 근육의 질도 달라졌다. 자신이 더 강해진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만년한철은 이제 만년한철로 된 보검이 되었다.

“뇌격단근법을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해줬으면 더 좋았겠지만,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사부님 주먹보다 더 나은 주먹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서 권마에게 큰절을 올렸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제 기연을 더 큰 기연으로 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권마가 흐뭇한 미소로 자신의 노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기뻐했다.

“벽력수라권도 꼭 대성을 이루도록 해라.”

환골탈태의 기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부님, 다시 저를 가르쳐주십시오.”

검무극은 벽력수라권의 수련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권마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했는데, 대성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이건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였다.

그리고 검무극은 안다. 언제나 기회의 문은 오래 열려 있지 않음을.

“제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매일 찾아뵙겠습니다.”

검무극은 대성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대성을 이루면서 천둥소리까지 사라지게 하는, 더 깊은 경지를 목표로 했다. 무학에는 상식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기세라는 게 있다. 이 기세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 번에 다 뚫는다!’

검무극이 앞으로 주먹을 내질렀고 권마가 그 주먹 앞에 자신의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 크기는 여전히 어른과 아기였지만.

“그래, 이제 그 주먹을 어른 주먹으로 만들어보자!”

검무극은 그날부터 벽력수라권을 연마했다.

당장 시작했던 그날의 수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시공이환술을 열어 시천비술을 발휘한 후 주먹을 휘둘렀다.

다음 날 권마를 찾아가서 함께 수련했을 때 권마는 내심 놀랐다.

‘하루 만에 이렇게 달라졌다고?’

환골탈태와 자신이 펼쳐준 비술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 여겼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무극의 수련 시간은 하루가 아니었으니까.

환골탈태한 검무극과의 수련은 권마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환골탈태한 사람이 검무극이고, 거기에 뇌격단근법까지 받았다.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수련이었다.

잠시 쉴 때마다 한 번씩 나오는 검무극의 질문은 권법의 핵심에 닿아 있는 것들이었고, 권법의 극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권마에게 권법과 자신의 수련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무학의 깊은 무의를 아낌없이 나눴다.

권마는 가르친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다.

함께 수련한다.

이 마음으로 검무극과 수련에 몰두했다. 환골탈태의 기연은 계속 이어져 권마의 마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검무극은 무공수련만큼은 권마와의 수련이 가장 잘 맞았다.

권마는 포기를 모르는 사내였다.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하면 팔이 떨어질 때까지 내지르는 사내였으니까.

그건 검무극 역시 마찬가지였다.

권마의 주먹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검무극의 주먹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

예전에 검무극과 수련할 때, 권마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 주먹에서 다시 소리가 날지 모르겠구나.

그의 주먹에서 더는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는데, 다시 그 단계를 돌파하면 소리가 들릴 거란 말이었다.

한 사람은 다시 천둥소리를 내기 위해서 주먹을 내질렀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주먹에서 천둥소리를 나지 않게 하려고 주먹을 내질렀다.

동권문 권마의 수련장에서는 매일 검무극이 내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동권문의 철권들은 천둥소리를 들으면서 수련했다.

차기 권마인 천소희는 천둥소리가 들리는 쪽을 깊어진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형이 정말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시는구나.’

이렇게 계속 천둥소리가 난다는 건 끝없이 주먹을 내지른다는 의미. 그 끝없는 천둥소리에 그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사부와 대사형이 저렇게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데 어찌 수련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철권들도 모두 죽을힘을 다해 함께 수련했다. 그들이 모두 지쳐 쓰러져도 천소희는 홀로 계속 주먹을 내질렀다.

천소희마저 쓰러져도 천둥소리는 계속 들렸다.

그렇게 권마와의 피나는 수련이 계속되던 어느 날.

검무극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순간 검무극의 신형이 멈췄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날아가 꽂힌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나지 않았다.

‘해냈다!’

검무극이 환희에 찬 얼굴로 권마를 쳐다보던 그때, 함께 시작한 노력의 결실은 운명처럼 함께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권마의 주먹에서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천지개벽할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축까지 뒤흔든 그 소리는, 그 넓은 천마신교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천둥소리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함정이라도 다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천둥소리에 천마신교의 마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술을 마시던 사람은 술을 흘렸고, 잠자던 이들은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짐을 옮기던 사람은 짐을 떨어뜨렸고, 간담이 약한 이는 비명을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천둥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평생 이렇게 큰 천둥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다들 뭔가 폭발했다고 여겼다.

뎅! 데에엥!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고,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연무장을 바쁘게 뛰었다.

천둥소리는 천마전까지 들렸는데, 천마에게 통천각의 여러 정보를 보고하고 있던 총군사 사마명은 흠칫 놀랐다.

정말 교내에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싶었는데.

반면 검우진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검우진은 그 소리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권마의 주먹이 하늘에 닿았네.”

그 말에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방금 저 천둥소리는 권마의 주먹에서 난 소리임을.

권마의 무공이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경지에까지 올라섰음을.

마침 좀 전에 검우진에게 보고하던 것도 검무극이 오늘도 권마와 권법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소교주가 권마의 경지에도 영향을 미쳤구나.’

근래 마존들이 끝없이 강해지고 있는 이유가 검무극 때문임을 사마명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권마의 천둥소리 때문이었을까?

검우진이 평소 잘 드러내지 않던 속마음을 툭 내뱉듯 전했다.

“그 사람과 중원을 종횡하던 시절이 그립군.”

사마명이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두 분, 정말 굉장하셨지요.”

그들이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그때, 차기 권마 천소희는 사부의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며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사부님!”

검우진이 알았듯 그녀도 알았다. 그 소리가 사부의 주먹에서 난 소리임을.

사람의 주먹에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그 소리가 자신의 주먹에서도 날 수 있다는 희망에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언젠가는 나도!’

소권마 천소희의 인생 목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작 그 엄청난 소리를 만들어 낸 당사자는 차분했다.

권마가 앞으로 내민 주먹을 거둬들였다.

“축하한다, 제자야.”

자신이 주먹을 내지르기 직전 검무극의 주먹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축하는 제가 드려야죠. 정말 축하드립니다, 사부님.”

권마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의외로 마음은 차분했다. 너무 기쁘니까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천둥소리 다시 듣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진짜 전쟁이 난 줄 알겠죠?”

지금도 멀리서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부님, 소감이 어떻습니까?”

권마의 그 우직하고 무서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기분 좋다.”

이렇게 자신의 기쁨을 솔직하게 드러낸 적이 언제였던가? 옛날에 교주에게는 드러냈었는데.

권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건 확실했다. 검무극과 함께 한 수련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 경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네 덕분이다.”

“그럼요, 제 덕분이죠.”

권마가 다시 주먹을 말아쥐며 물었다.

“그 소리 다시 듣고 싶다고 했느냐?”

“아닙니다! 다 사부님 덕분입니다!”

그 무뚝뚝한 사부가 이런 장난을 다 치다니! 검무극은 그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며 이번에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사부님 덕분에 해냈습니다.”

검무극은 벽력수라권의 대성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사라졌다. 그야말로 권법으로도 무시무시한 경지에 오른 검무극이었다.

“본교 사람들 다 모아서 연회라도 열어야겠습니다. 아, 이안이부터 부르겠습니다. 이안아, 아버지 더 강해지셨다! 주먹으론 역대 무림 최강이시다!”

물론 권마에게 이런 호들갑이 통할 리 없었다.

권마가 걸음을 옮기며 연무장을 먼저 나섰다.

“가서 쉬어라. 고생했다.”

몇 걸음 걸어가던 권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축하한다.”

그의 입에서 검무극이 너무나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네 주먹은 어른 주먹이 되었다.”

* * *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은 곧장 시공이환술을 열었다.

오늘 만든 장소는 설원의 온천이었다.

“아, 좋다.”

검무극이 옷을 훌러덩 벗고는 온천에 몸을 담갔다. 권법 수련을 시작하고 잠까지 아껴가며 수련에 몰두했다.

그 피나는 노력의 성과를 얻고 이렇게 잠시 쉬는 순간의 기쁨이야말로 그 어떤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라.

설원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설원 속 온천에 몸을 담근 채 검무극은 내리는 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몸이 회복하는 속도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환골탈태의 효과뿐만 아니라 단전의 신비한 기운까지 있었으니까.

온천에서 나온 검무극이 열양지기를 일으켜 몸을 말린 후 옷을 입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

휘이이잉.

바람 부는 황무지에서 천마혼을 소환했다.

원래는 구화마공 제 팔식 마혼질주를 익혔을 때 곧바로 소환해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권법수련에 들어가면서 이 재회를 뒤로 미뤘다.

과연 천마혼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검무극의 의지가 전해지자 어느새 눈앞에 천마혼이 서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천마혼이 현신하는데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는 것이 소환할 때마다 신기했다.

검무극은 천마혼을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다.

“지난번에 말했지? 이곳은 시공이환술 속 세상이다. 변화를 주자는 의미로 지난번과 다른 장소로 열었어. 네가 어떤 공간을 좋아할지 몰라서.”

저번에는 들판을 열었었는데 오늘은 황무지를 열었다. 새외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그곳.

왠지 외로움 가득한 이 공간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래바람 싫으면 다른 곳으로 바꿔 줄게.”

물론 천마혼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검무극은 천마혼의 감정을 느꼈다. 좋고, 싫고 정도의 감정은 교감할 수 있었다.

주위가 바뀌면서 검무극과 천마혼은 다시 평원에 서 있었다.

쏴아아아아악.

검무극이 비를 내렸다. 빗줄기가 천마혼에 묻은 흙먼지를 깨끗하게 씻어내렸다.

곧이어 비가 그치고 해가 떴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햇볕과 바람이 천마혼의 몸에 묻은 비를 말려주었다.

그러자 천마혼의 기분이 아까보다 나아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감정이 있구나.’

그리고 그 감정을 느끼는 건 제 팔식을 익혔기 때문이리라. 초식들을 익혀갈수록 천마혼과 더 가까워진다!

“너, 또 변했구나!”

천마혼의 외형에 변화가 있었다.

제 칠식을 익혔을 때는 천마혼에게 검이 생겨났었고 가슴에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문양이 생겨났었다.

팔 식을 익힌 지금 이제 가슴의 희미했던 문양이 또렷이 보였다.

심장처럼 가슴에 박힌 그 문양은 푸른색 빛이 감도는 불꽃 모양이었다. 이것이 천마혼의 가슴에 박혀 있어서였을까? 마치 지옥의 불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단순한 불꽃 모양이 아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악귀의 얼굴, 바로 천마혼의 얼굴을 불꽃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 불꽃도 무서웠다. 활활 타오르며 무섭게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마지막 제 구식을 익히고 나면 그때는 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아쉬움을 전하던 바로 그 순간.

스으윽.

천마혼이 천천히 몸을 굽히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놀란 마음으로 천마혼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천마혼이 허리를 굽히더니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내민 손바닥.

그 위에 올라타라는 의미였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그 손바닥에 올라섰다.

스으윽.

천마혼이 허리를 펴고 섰다. 천마혼의 손은 가슴 앞에 내밀어져 있었다.

검무극과 천마혼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맙다, 친구.”

검무극은 감격했다. 천마혼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순간이었으니까.

이렇게 손에 올려주는 걸 보면 분명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

하지만 천마혼은 더는 어떤 행동이나 감정도 표현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검무극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우리 많이 친해진 거다. 그렇지?”

가까이서 본 천마혼의 얼굴은 더없이 무서웠다.

“그리고 네 얼굴 너무 무서워할까 봐 걱정하지 마라. 너만큼이나 무서운 분과 내내 함께 있다 오는 길이니까.”

검무극이 손바닥 위에서 뒤로 돌아섰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붉은 기운이 사방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앞으로 해를 등진 나무들이 수묵화처럼 늘어서 있었다.

번져온 석양빛이 검무극과 천마혼을 물들었다. 그러자 그들도 이 풍경의 한 장면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천마혼과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안했다.

“나중에 대화도 나누고, 네 몸을 작아지게 해서 이 가짜 세상 말고 진짜 세상에 함께 나가자.”

그때 시공이환술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검무극이 천마혼에게 돌아서며 작별을 고했다.

“나중에 또 보자, 친구!”

작별을 고하자 천마혼은 사라졌다. 오늘의 이 기분 탓일까? 원래는 순식간에 사라졌는데, 오늘은 조금 천천히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천마혼이 사라지자 손바닥 위에 있던 검무극이 허공답보로 천천히 땅으로 내려오면서 시공이환술을 해제했다. 바닥에 내려섰을 때는 자신의 방이었다.

“소교주님, 계십니까?”

너무나도 반가운 목소리에 검무극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새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가 마당에 서 있었다. 생각지 못한 그의 방문이었다.

“소마님!”

“소교주님!”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이 반갑게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극악소마의 저 가면 속 웃고 있는 눈을 봤을 때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 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도 특별한 감정이.

그리고 오늘 극악소마는 혼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함께 온 천화루주가 인사했다.

“잘 지내셨나요? 소교주님.”

“루주님도 본교에 계셨군요.”

“소교주님, 못 뵌 사이에 더 멋있어지셨어요.”

그 변화가 천화루주에게는 느낌 정도였다면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했다.

“권마님과 수련하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혹 그 천둥소리 때문입니까?”

지금 이 변화가 그 수련 때문이냐는 물음이었다.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번에 출교해서 환골탈태했습니다.”

이렇게 다들 변화를 알아차리니 환골탈태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사부님께서 더 큰 기연을 보태주셨습니다.”

극악소마의 눈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자신이 환골탈태한 것보다 더 기뻐하는 저 눈을 보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천화루주도 놀란 얼굴로 축하해주었다. 그녀라고 어찌 환골탈태가 엄청난 기연임을 모르겠는가?

“정말 감축드립니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죠.”

검무극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루주님, 차 드시겠습니까?”

“소교주님이 우려주시는 차라면 거절할 수가 없겠죠?”

검무극이 차를 우려서 내왔다. 가지고 있는 여러 차 중에서 가장 좋은 차였다.

“소교주님이 우려주셔서 그런지 제가 마셔본 차 중에서 제일 맛이 좋네요.”

“그럼요. 제 존경과 애정까지 담뿍 들어간 차니까요.”

그렇게 잠시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검무극이 물었다.

“한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함께 자신을 찾아왔을 리는 없었으니까.

과연 찾아올만한 큰일이 천화루주에게 있었다.

“제게 은밀히 연락이 왔어요.”

문제는 그 연락을 보낸 사람의 신분이었다.

“신녀궁주가 저를 만나자고 기별을 해왔어요.”

처음 기별 받은 천화루주도,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극악소마도 이 일은 단독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용건을 말했습니까?”

“아뇨, 만나서 이야기하겠다고 했어요.”

“어디서 만나자고 했습니까?”

“호남성 동정호(洞庭湖)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호남성이라면 천마신교의 위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상대가 그런 방심까지 노렸을 수도 있었으니까.

“혼자서 나오라고 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아서 오라버니께 알렸어요.”

“잘하셨습니다.”

검왕과 화왕을 빼앗기고 남은 십이지왕이 모두 죽은 상황에서 전해진 기별이었다.

물론 진짜 신녀궁주가 천화루주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겠지.

암흑궁주가 신녀궁주와 손잡고 어떤 발악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천화루주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이럴 때 예언이 내리면 좋겠지만.”

예언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신녀궁주에게 예언이 내려왔을까? 그래서 자신을 보자고 하는 걸까?

검무극은 삼백 년 전 자신에게 예언을 전했던 신녀궁주를 떠올렸다. 그 신녀궁주의 후예들이 만나는 자리.

그렇다면 이쪽의 결정은 정해져 있었다.

“신녀궁주가 만나자면 만나야겠지요. 대신!”

검무극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움직일까 합니다. 만약 이번 일이 음모라면 저들은 저와 소마님이 루주님과 함께 올 거로 예상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요.”

지금까지는 화무기를 염두에 두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이제는 회귀 전과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대처와는 다르게 대응할 작정이다. 더는 저들의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다. 설령 함정이라도 다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이번에는 제대로 갖춰서 나갈 겁니다.”

나도 만만한 사람 한 명쯤 있어야지

검무극은 곧장 아버지부터 찾아뵈었다.

마존들과 함께 출교하려면 아버지의 허가가 떨어져야 하니까. 특히 이번 경우에는 제대로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 아들 주먹이 이제 어른 주먹이 되었습니다. 매번 사부님께 아기 주먹이라 놀림 받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검무극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피의 길을 걸었다.

“제가 드디어 벽력수라권의 대성을 이뤘습니다. 말 안 듣는 놈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너!”

“아, 그렇죠. 저 말고는 없겠죠?”

검무극이 태사의 아래에 멈춰 섰다.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을 응시하더니.

“그 사람이 귀한 비술을 펼쳐주었구나.”

놀랍게도 검우진은 아들이 뇌격단근법으로 더욱 강해진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래, 아버지라면 환골탈태는 단숨에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뇌격단근법으로 인한 변화는 내적인 부분이 크지, 외적인 변화는 그렇게까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보신다고?

“맞습니다. 사부님께서 독문 비술을 써서 제 몸을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검우진이 그 사실을 단숨에 알아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미 그 비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떤 비술인지 아느냐?”

“어떤 비술입니까?”

“그 사람이 꿈꾸던 비술이다. 환골탈태를 이루고 뇌격단근법까지 받는 것, 벽력수라권을 익힌 이들의 오랜 꿈이지.”

그냥 단순히 내려오는 비술을 펼쳐준 것이 아니었던 거다. 권마는 자신의 꿈을 기꺼이 제자에게 전해준 것이다.

환골탈태를 이룰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평생의 숙원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권마는 그 선택을 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셨으면 생색이나 좀 내시면서 펼쳐주시지.”

그 말에 검우진의 입가에 이 자리에 없는 이를 향한 미소가 지어졌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나 자신이나, 평생 생색이라곤 모르고 살아왔으니까.

“참, 사부님께서도 새로운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알고 있다.”

역시. 아버지는 천둥소리만으로도 권마가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체 아버지께서 모르시는 게 뭐가 있습니까?”

“자랑 다 했으면 가 봐라.”

“아뇨, 오늘 찾아뵌 건 자랑하러 온 것이 아니었고요.”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천화루주가 전한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그래서 내일 곧바로 출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진형을 갖춰서 나갈까 합니다. 마존분들은 두 분만 남기고 다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외부에 나가 있기에 교내에 있는 마존은 모두 여섯. 그중 넷을 데리고 나가겠다는 말이었다.

둘을 남기겠다는 말에 검우진이 말했다.

“기왕 데리고 나가는 거 다 데리고 나가라.”

아들을 위한 마음이었는데.

“그럼 아버지 혼자 본교를 지키셔야 하는데요?”

검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내가 혼자서는 못 지킬 거 같으냐?”

“당연히 지키시겠죠.”

“그런데 왜?”

“아버지가 저 없는 사이에 무림일통이라도 하러 나가시면 누군가 말려야 할 거 아닙니까?”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렇게 과장은 아닌 말이기도 했다.

십이성 대성의 구화마공.

그 위력이 어떨지는 검무극조차 상상이 안 되었으니까.

천마전을 홀로 걸어 나가는 아버지께 어디 가십니까 물었을 때.

무림일통하러 나간다.

누가 감히 비웃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사마 군사님도 생각해 드려야죠. 마존들이 모두 출교하면 군사께서 엄청 신경 쓰실 겁니다. 휘 아저씨와 호위대 분들도 몇 배는 더 신경 쓰실 거고요. 그러니 두 분은 남기고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앞세우자 아버지는 더는 데려가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누굴 데려가고, 누굴 남기고 가는지는 궁금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누굴 남길 거냐?”

* * *

취마는 만취해 있었다.

그는 검무극을 보자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동생! 어서 와서 이 형 술부터 받아라.”

술을 어찌나 마셨는지 취몽루 주위에는 주기가 안개처럼 가득했다.

“대낮부터 왜 이렇게 취했어?”

취마가 술병을 흔들었다.

“이 고독한 인생에 이놈이 유일한 친구다!”

고독한 인생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 삐쳤구나!

그래, 삐칠만하다. 이번에도 또 마지막에 찾아왔으니까.

“듣는 친구 기분 나쁘게, 유일한 친구라니!”

“이게 누구십니까? 어이구, 우리 바쁜 소교주님 아니십니까? 귀하신 분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형, 지난번 내게 보여줬던 그 대범한 모습 다 어디 갔어?”

검무극이 취마 흉내를 냈다.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다. 내가 죽을 때 너 안 찾아온 걸 후회하면서 죽을까?”

그 말 할 때 취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허허 웃기까지 했다.

“그 대인 같은 우리 형 어디에 갔냐고?”

취마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대인 형은 외로워서 말라 죽었다. 지금은 속 좁은 소인배 형만 남았지. 아무리 내가 늦게 와도 괜찮다고 했다고, 정말 마지막에 온다고?”

“형, 이건 진심이야. 만만해서 늦게 오는 게 아니라, 제일 잘 이해해 줄 거 같아서야.”

“그걸 만만하다고 하는 거다!”

취마가 버럭 소리치자 검무극은 적반하장 전략을 펼쳤다.

“좀 만만하면 어때!”

“뭐?”

“나도 만만한 사람 한 명쯤 있어야지!”

“뭐지? 이 뻔뻔함은? 술이 확 깬다.”

검무극이 앞에 놓인 술병으로 술잔을 가득 채운 후 단숨에 마셨다.

“도마 어르신은 어르신이라 어렵고, 권마님은 사부님이라 어렵고, 검존님은 너무 우아하고 고상하셔서 어렵고, 섭혼마존은 너무 젊어서 어렵고, 마불님은 형만 좋아해서 어렵고, 독왕님은 독에만 빠져 있으니 어렵고. 소마님은 너무 좋아서 어렵고. 이런 내게 세상 만만한 취마 형이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평생 만만한 형이 되어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던 취마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맞아. 살면서 한 사람쯤은 만만한 사람이 있어야지. 그래야 숨 쉬며 살지. 좋다! 내가 그 만만한 사람이 되어주마.”

“소인배 형은 가고 다시 대인 형으로 돌아왔구나!”

“이게 바로 술꾼들의 호탕함이란 거다! 자, 마시자!”

두 사람이 힘차게 건배하며 술잔을 비웠다.

“앞으로도 항상 마지막에 와!”

“좋은 점도 있다니까! 마지막에 오면 다른 마존들 흉볼 거리가 가득하잖아? 안주가 필요 없어!”

“좋았어! 나랑 그 인간들 흉보며 술이나 진탕 마시자!”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술잔을 비웠다.

물론 검무극은 안다. 취마가 취한 게 자신이 늦게 와서가 아님을. 괜히 말만 섭섭하다 하지, 취마 역시 예전 그 취마가 아니었다.

검무극이 주위에 가득한 주기를 느끼며 넌지시 물었다.

“수련 중이었어?”

과연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만취한 것도 무공 수련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취마가 되어서 좋은 게, 술이나 마시며 흥청망청 살 수 있어서였는데.”

한데 어느 순간부터 다른 마존들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서 노력했던 사람은 친구인 일화검존이었고. 다른 마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른하늘에 천둥을 쳐대니, 마음 편히 술을 마실 수가 있나?”

그러다 취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내가 취해서 그런가? 너,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취마가 취한 눈을 껌벅거리며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취마에게도 환골탈태한 것을 알려주었다.

“동생이 환골탈태했는데 그냥 못 넘어가지. 축하주 제대로 마셔야겠다. 여빈아, 내가 아껴둔 제일 좋은 술로 가져와라.”

여빈이 정말 술을 가져왔다. 취마가 아끼고 아껴둔 술이었다.

“이 술은 또 언제 숨겨뒀어.”

“이런 날이 오면 마시려고 꼭꼭 숨겨뒀지.”

“이거 말고 형이 환골탈태하면 마시려고 숨겨둔 술을 내와!”

두 사람이 술을 마셨다. 술맛이 정말 끝내줬다.

“술 정말 맛있다.”

“이런 날 좋은 술 마셔야지! 더 마셔라!”

정말 지금까지 받은 축하 중에 제일 요란한 축하를 받는 순간이었다. 그래, 환골탈태 축하인데 이 정도는 돼야지. 술에 취해 춤이라도 춰야지.

“환골탈태하면 장기도 바꿔 주나? 깨끗한 속으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술 마시고 싶다!”

“걱정하지 마. 원래 형 같은 사람들 속이 의외로 깨끗해. 형이 내 속보다 더 깨끗할 거야.”

취마가 그럴 거라며 큰소리로 웃었다. 검무극은 오랜만에 취마와 마음 편히 술을 마셨다.

“어제 천둥소리는 뭐였냐?”

“사부님이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소리였어.”

“그럼 너는?”

“나도 벽력수라권의 대성을 이뤘고.”

“벌써?”

제자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대성이라니?

“너, 이렇게까지 강해져서 뭘 하려고 그러냐? 혹시 네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는 거 아냐? 이 자식! 맞지?”

무림일통이라.

취마야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무림맹과 사도맹이 겉으로 표는 내지 않고 있지만, 어쩌면 긴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취림의 주정, 아직도 상하지?”

취마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수련 안 할 수가 없지.”

“다행히 예전보다는 덜 상해.”

“그래?”

취마의 얼굴에 취기도 장난기도 잠시 사라졌다.

“그러니까 내겐 늦게 와도 돼. 지금 네가 정말 잘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취마가 홀로 술잔을 비웠다. 불어온 바람이 헝클어진 취마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떠들썩하고 시끄럽고. 자신 때문에 요즘 마존들이 많이 변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들은 모두 외로운 이들이었다.

평생 불운과 함께 살아왔다고 믿었던 혈천도마도, 절벽 앞에 홀로 서 있던 권마도, 짙은 화장으로 자신의 마음을 감췄던 일화검존도, 홀로 빈방에 서서 하얀 벽을 보고 있던 극악소마도, 독충에 빠진 채 천독림을 나오지 않던 독왕도, 형을 소교주로 삼기 위해 그 짧은 다리로 뛰어다녔던 마불도, 항상 혼자 술에 취해 있던 이 취마도. 그래, 다들 외로운 이들이었다.

“내일 출교할 거야. 형도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

“어디로?”

“호남, 동정호.”

“누구누구 가는데?”

“이번에는 좀 많이 갈 거야.”

취마는 그게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가 뒤쪽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며 술을 마셨다.

“같이 가서 술은 마셔주마.”

* * *

검무극이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섭혼마존이었다.

섭혼마존은 자신의 개인 연무장에서 무공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검무극의 방문은 너무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소교주님?”

“잘 지냈습니까?”

검무극은 정중히 그녀를 대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귀교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리러 왔지요.”

섭혼마존은 소교주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단지 인사차 온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이번에 출교해서 있었던 일을 그녀에게도 말해주었다.

섭혼마존은 알고 있었다. 소교주가 출교했다 돌아오면 마존들을 찾아가 있었던 일을 말해준다는 것을.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막연히 그런 날을 기대했었는데.

검무극은 이제 자신에게도 그 일을 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자신을 한 사람의 마존으로 제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천화루주의 일도 전했다.

“그래서 내일 출교하려 합니다. 혹 괜찮으시면 함께 나가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나가야지요.”

섭혼마존은 자신을 찾아와서 이렇게 도움을 청해준 검무극이 너무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만약 그녀가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짐이 될 것 같았으면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을 거다. 실력을 더 쌓으십시오, 라고 말했을 거다.

다행히 섭혼마존은 볼 때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점점 한때 무림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그 섭혼마존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은 떠나기 전에 그녀가 제일 듣기를 바라는 말을 해주었다.

“제 마존이 함께 가주시니 든든합니다.”

* * *

“나도 가자고?”

마불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함께 갈 네 마존이 정해졌다.

자연스럽게 남길 마존도 정해졌다.

권마와 독왕.

이 두 사람이 아버지를 지키고 있다면 본교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불의 눈치는 누구보다 빨랐다.

“자네 혹시 교주님을 걱정하고 있나?”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정치를 해왔던 마불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하필 그들 두 사람을 남기냐는 말일세.”

마불도 그들 두 사람을 현재 마존들 중 가장 강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부님 모시고 나가면 불편해서 그렇죠. 내가 천마신교 소교주다! 거들먹거릴 수가 없잖아요.”

“자네가 잘도 그러고 싶겠다. 그럼 독왕은?”

“독왕님은 중원에 나가는 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하지만 마불은 검무극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필 두 사람을 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적들을 그렇게나 죽였으면서 대체 누굴 두려워하는 건가?”

예전부터 마불은 느꼈다. 검무극은 무림맹이나 사도맹과 싸우는 것보다 이번 적들을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물론 삼백 년을 내려온 암흑궁의 적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하지만 이미 부서질 대로 부서진 그들인데.

“아시다시피 제가 불안증이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온갖 일을 미리 걱정하죠. 알고 보면 아무 일도 없는데. 어쨌든 마불님, 함께 가 주실 거죠?”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 싸움에서 밀린 내가 힘이 있나? 가자면 가야지.”

“이제야 마불님 같습니다.”

“비꼬니까 나 같다니?”

마불은 마음을 비운 부처처럼 굴지 말라는 자신의 조언을 들어주고 있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 취마와 섭혼마존. 그리고 마불.

자신이 생각하기에 너무 과했기에 마불은 이런 농담을 던졌다.

“무림맹을 칠 텐가? 사도맹을 칠 텐가?”

검무극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양쪽을 동시에 칠 겁니다.”

이 실없는 농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거든요. 더 데리고 나갈 겁니다.”

한마디씩만 해도 해가 지겠지?

“귀영대에게 첫 임무를 내리려 한다.”

검무극의 말에 이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 귀영대주 직위를 맡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복식은 이렇게 꾸밀 거라며 까불던 그때가 엊그제처럼 느껴졌다.

“귀영대 모든 조가 다 나간다.”

조원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귀영대가 된 이후 첫 정식 임무였다. 그동안 실전 같은 훈련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훈련이었다.

그들 앞에 서 있던 네 조장들.

일 조장 청면의 가면 속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고, 이 조장 서진의 귀기가 더욱 짙어졌다. 삼 조장 차이란은 평온했고, 사 조장 지한은 굳은 표정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반응은 달랐지만, 다들 마음은 하나였다. 이번 임무를 잘해 내야겠다.

“임무가 뭡니까?”

이안의 물음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모른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검무극이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임무는 가서 정해질 거다. 거창하게 나가서 아무 일 없이 바람 쐬고 돌아올 수도 있고, 여기 있는 사람 중 대부분이 죽어서 돌아올 수도 있다.”

이안은 검무극이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희가 죽어서 돌아올 거란 표현은 좀처럼 쓰지 않는 그였는데.

검무극은 마음 같아선 이들을 두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에서는 숙련된 뱃사람이 나오지 않는 법, 이제 파도를 넘어야 할 때다.

“너희들이 잘해 낼 거라 믿는다.”

“맡겨주십시오!”

귀영대 무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첫 임무의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 모두 준비하도록. 각 조장은 남고 모두 해산.”

귀영대 무인들이 해산했고 이안과 네 조장이 남았다.

검무극이 네 조장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청면과 서진, 차이란과 지한.

각각의 인연으로 깊게 맺어진 그들. 눈빛만으로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검무극은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조장들로 있는 조직인데 걱정이 된다면, 애초에 조직을 이끌면 안 되겠지. 가서 출발 준비하게. 이 대주는 남고.”

조장들도 돌아가고 이제 이안만 남았다.

검무극이 진지했던 표정을 풀었다. 마치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했다는 듯.

“인상 쓰고 있느라 혼났네.”

하지만 이안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방금 저 무슨 생각 들었는지 아세요?”

“무슨 생각 했는데?”

“임무 앞두고 김빠지는 말이 될 텐데 괜찮아요?”

“얼마든지.”

이안이 솔직히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아, 이 일은 내 적성에 안 맞는 일이구나!”

그녀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대부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하얘졌어요.”

누군가를 지키는 인생을 살아온 그녀에게 수하들이 죽는다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무사히 돌아와도 다음은? 한 명씩 한 명씩 수하들을 잃어가는 삶, 과연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임무를 앞두고 그 말을 듣자, 두려움의 차원이 달랐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 말 하면서 나는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무슨 생각하셨는데요?”

“아, 이 일은 내 적성에 안 맞는 일이구나!”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자 이안이 웃었다.

알죠, 제가 왜 모르겠어요. 도련님은 자유롭게 중원을 주유하시면서 악당들 혼내주고 좋은 사람들과 껄껄 즐겁게 지내실 때 가장 행복해하실 거라는 것을요.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찌 이안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안아.”

“네, 소교주님.”

“이 삶, 끝까지 살라고 안 한다. 대신 이런 삶도 살아봐야 네가 원하는 삶을 살 때 그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 알겠지.”

지금도 이안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삶이었다.

수하를 숨 막히게 하는 수장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런 숨구멍을 열어 주는 소교주를 모시는 삶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가슴이 터질 때까지 숨을 참을 수도 있겠지.

“하는 데까진 최선을 다할게요.”

“준비하고 내일 보자. 참, 우리 말고도 같이 갈 사람들이 있어.”

“누군데요?”

“내일 보면 알아.”

검무극은 그게 누군지는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이게 필요할까? 싶은 것도 무조건 다 챙겨! 나가면 뭐든 다 아쉽다.”

그렇게 이안마저 떠나고 검무극 혼자 남았다. 아니,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었다.

“왜 나와는 같이 가자고 안 하나?”

검왕이 소리 없이 검무극 옆에 내려섰다.

“거기가 어디라고 악 형을 데려갑니까?”

“왜?”

“혹시 암흑궁주라도 나오면 어쩌려고요? 그 사람 죽일 수 있어요?”

“있다.”

검왕이 조직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를 밝혔다.

“내가 조직을 떠나지 않았던 건 암흑궁주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다시 불러올 계획을 알고는 검무극을 지켜주기 위해 남았다. 물론, 그 계획은 암흑궁주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의도적으로 알려준 것이었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악 형의 마음 증명할 필요 없다고요.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악 형은 존재만으로도 제게 분에 넘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할 소리를! 검무극이 이런 사람이니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암흑궁주는 강하다. 아니,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으니, 더 무서운 사람이지.”

검왕조차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실력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껏 네가 죽인 사람들 말고도, 암흑궁주가 직속으로 이끄는 고수들이 많다.”

당연히 그럴 거로 생각한다. 암흑궁은 장장 삼백 년을 작정하고 준비한 조직이었으니까.

“걱정 안 되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왜?”

검무극의 시선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래전, 아버지께 했던 말을 이제 검왕에게 했다.

“제 마도는 이 순간을 위한 마도니까요.”

검무극이 죽을 만큼 노력한 것은 바로 이런 순간, 이런 말을 당당히 하기 위함이었다.

“악 형조차 긴장하는 상대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얼마나 살았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그런 괴물 같은 상대. 그래서 아무도 죽일 엄두를 못 내는 그런 적이겠지요.”

하늘을 향했던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검왕을 향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악랄하고 지독한 악, 그 절대악을 때려잡아야겠다는 신념이 바로 나의 마도입니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검왕을 보며 검무극이 담담히 덧붙였다.

“우리가 못 죽이면 누가 죽입니까? 악귀는 더 큰 악귀가 잡아먹어야죠.”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출발 장소에 가장 먼저 귀영대 무인들이 집결했다. 그들은 흑의 무복과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검은 복면에는 귀영이란 글자가 하얀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귀영대의 정복을 입고 복면을 하고 모두 집합하니 두려울 게 없었다.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어디 동경이라도 없나, 비춰보고 싶었다.

그때 호송단 단주가 직접 그곳으로 나왔다.

호송단 무인들이 귀영대 숫자에 맞춰 말을 가져와서 지급했다.

“중원 곳곳에 호송단의 지부들이 위장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지친 말을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단주님.”

이안이 호송단주에게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이런 대규모 작전을 처음 펼치니 호송단에서 이런 지원을 나온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귀영대 무인들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신들이 출교하니 호송단주가 직접 나오지 않는가? 물론 그건 짧게나마 느낀 행복이었고 착각이었다.

또 다른 호송단 무인들이 마차들을 끌고 도착했다.

엄청난 크기의 대형 수송 마차였다. 한 대가 아니라 십여 대가 넘는 숫자였다. 호송단 마인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차를 줄지어 세웠다.

귀영대 무인들은 의아해했다.

자신들은 말을 타고 가는데 왜 이런 대형 마차들을 가져온 것일까? 짐이라도 싣고 가나? 그렇더라도 저렇게 큰 마차를, 그것도 저렇게 여러 대를?

그때 일단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봐도 한눈에 그들이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그들은 바로 천마신교 최정예 조직인 마군들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주는 그들이 그곳에 등장했다.

마군들의 등장에 귀영대 무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떤 마차인지 알 수 있었다. 마군들이 타고 갈 마차였다.

‘설마 마군들과 함께하는 작전이었나?’

찌이이익.

마차 벽에 붙어 있던 위장용 종이를 찢어내자, 그 안에 마군들의 상징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 비밀리에 움직이는 마군들이었는데 이번 작전은 공식 작전이었다. 이 대형 마차들이 줄지어 달릴 것을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웅장했다.

마군들 사이에서 마군주 장호가 걸어 나왔다.

“이 대주님.”

“장 군주님!”

이안과 장호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처음이군요. 대주님과 함께 작전을 나가는 건.”

“영광입니다, 군주님.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잘 부탁드립니다.”

“귀영대가 훌륭하게 훈련되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장호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마군과의 합동 작전이란 사실에 크게 놀란 귀영대였는데, 그들의 놀람은 지금부터였다.

그곳으로 섭혼마존이 도착한 것이다.

그녀가 도도한 표정으로 걸어들어오자, 주위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도를 드러내지 않아도 소름 끼치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였다.

모두 섭혼마존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설마 이번 작전이 섭혼마존과 함께하는 작전인 줄 몰랐기에 귀영대 무인들은 더욱 긴장했다. 호송단주가 직접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호송단 무인이 마차를 한 대 가져왔다. 마존 전용 마차였는데, 섭혼마존의 마차였다. 마차 벽은 빙글빙글 복잡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신 그 문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잘못 건들면 인생 복잡해질 거라는 것을.

그때 또 다른 마존이 하품을 하며 걸어왔다.

“이렇게 아침 일찍 출발할 필요가 있나?”

술이 덜 깬 얼굴로 등장한 사람은 취마였다.

취마가 등장하자 귀영대 무인들은 더욱 놀랐다. 마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나가는 작전이었다.

마군도 모자라 마존이 둘이나 나간다고? 대체 무슨 작전이기에?

호송단 무인이 취마의 마차를 가져왔다. 마차는 다른 마차보다 훨씬 길게 개조된 마차였다.

“숙취 때문에 저는 좀 쉬겠습니다.”

마차를 열고 들어가자 아예 침상이 있었고, 벽에 술병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 마차는 처음 보았기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다시 그곳에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마불이 걸어들어왔다.

그를 보는 순간 귀영대 무인들이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불까지 간다고?

마존이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등장하는 마존들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하면서도 귀영대 무인들은 당황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천마신교에 있으면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마존들이 셋이나 나온 것이다.

호송단이 끌고 온 마불의 마차는 황금색으로 도금된 마차였다. 세상 모든 도적을 다 불러 모을 마차였다.

그때, 네 번째 마존이 등장했다.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도착한 것이다. 그 새하얀 가면을 보자 귀영대 무인들은 몸이 얼어붙었다.

극악소마까지 간다고!

정말이지 당황과 놀람을 넘어 혼란 그 자체였다.

호송단 무인이 극악소마의 마차를 가져왔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새하얀 벽으로 만들어진 마차였다.

귀영대 무인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천마신교 소교주와 네 마존, 최정예 마군들까지 간다고? 그들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하나였다.

‘혹시 전쟁이라도 났나?’

귀영대 무인들이 놀란 것과 다른 측면으로 천화루주도 놀라고 있었다. 검무극이 제대로 갖춰서 나갈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갖추고 나갈 생각인지는 몰랐다.

사실 신녀궁주를 혼자 만나러 갈까도 생각했었다.

한데 검무극이 판단한 이번 일은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가야 할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교주님 나오십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호위책임자 적연이었다.

착착착착착착착.

정복에 복면을 착용한 소교주의 호위대가 걸어 나와 길을 만들었다. 수련에 매진했던 호위들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무인들에게도 전혀 기세에서 밀리지 않았다. 정말 소교주 호위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그들 사이로 검무극이 걸어들어왔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지요.”

취마의 마차 창문이 열리며 취마의 모습이 보였다.

“멋있다! 우리…….”

취마가 주사를 부리기 전에 검무극이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허공섭물로 마차 창문을 닫았다.

“숙취가 심하실 테니 더 주무십시오.”

아직 술이 안 깬 걸 보니 아침까지 무공 수련을 하다 온 모양이다.

검무극이 마존들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후 그곳에 있던 다른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장호를 보고 특별히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했다. 그 모습에 마군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

“사람이 많아서 한마디씩만 해도 해가 지겠지?”

원래라면 그러니까 말을 아껴! 라는 말이 나와야 하겠지만. 검무극은 달랐다.

“해져도 좋으니까 하고 싶은 말 다 하도록.”

모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이 상황에서 눈치 없이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아, 외부 사람 중에는 있었다.

“나는 왜 빼고 가느냐!”

어떻게 알았는지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나도 간다.”

“안 됩니다.”

“왜 안 돼?”

“저도 불편해서 사부님은 안 모시고 갑니다.”

함께 가면 그의 제자인 섭혼마존이 불편할 거란 뜻이었다. 섭혼마존이 있는데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검무극과 풍천교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네가 몰라서 그런데 우리 사제지간 굉장히 친해. 나 있어도 편할 거야.”

“친한 건 사부님 쪽 생각이죠. 원래 위쪽은 다 편합니다. 우린 안 편하다고요!”

“자네 사부는 아닐걸?”

반박할 수 없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검무극은 풍천교주를 추켜세웠다.

“교주님이 본교를 지켜주시니까 제가 편하게 출교하는 거죠. 마군들 데려나갈 수 있는 것도 다 교주님 덕분입니다.”

“그런가?”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였기에 풍천교주가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저는요!”

돌아보니 황천각주 서대룡도 나와 있었다.

귀영대 무인들은 그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그 엄격한 조직의 수장까지 와서 데려가 달라고 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소교주였다.

“제가 따라가면 진짜 해가 질까 겁나십니까? 입 꾹 닫고 있겠습니다.”

이런 작전에 검무극을 따라 나가고 싶었다. 황천각주 때려치우고서라도 나가고 싶었다.

“아니, 갓난쟁이 눈에 밟혀서 안 돼.”

“참겠습니다.”

“자네 말고 나 말이야. 자넬 보면 자꾸 아기가 생각날 거야. 너무 예뻐서 안 돼.”

그렇게 기분 좋게 거절하고서는 검무극이 함께 갈 이들을 쳐다보았다.

“자, 이번에는 제대로 으스댈 작정이니, 잘 부탁합니다.”

호송단 무인들이 소교주 전용 마차를 가져왔다.

도검불침의 튼튼한 마차 벽에는 천마혼의 상징이 무섭게 그려져 있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서대룡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

마군들의 마차가 선두에 섰고, 다음으로 검무극의 마차가, 그 주위를 호위 무인들이 말을 타고 둘러쌌다.

그 뒤로 네 마존들의 마차가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귀영대가 말을 타고 뒤따랐다.

마부들에게 수신호 하며 마차를 질서 있게 빼내던 호송단 무인들이 검무극의 마차가 지나가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 앞으로 마차들과 말들이 줄지어 달려 나갔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소교주의 첫 출교였다.

황금마차를 어떻게 참아?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겠습니다.”

검무극의 명령을 받은 적연이 모두에게 알렸다.

그의 외침에 앞장서 달리던 대형 수송 마차들이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길을 잘 아는 건 물론이고 야영 경험이 많은 검무극은 이 많은 인원이 어디서 쉬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차들이 길을 빠져나가 너른 들판에 멈춰 섰다. 인원이 너무 많았기에 마을에 들를 수는 없었다.

마군들의 대형 마차가 외부에 벽을 쌓듯 진형을 갖추었고 그 가운데 검무극의 마차와 마존들의 마차가 역시 원을 그리며 세워졌다.

마군들의 숫자가 제일 많았지만, 그들은 조용하고 신속했다. 마군들은 그야말로 온갖 야전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이 자리 잡는 모습을 지켜본 이안이 귀영대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린 이쪽에 자리 잡는다.”

안 보는 척하면서 장호가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런 대규모 병력의 이동과 운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녀가 다소 헤맬 거로 예상했다.

그래서 전음으로 그녀에게 알려주려 했는데, 뜻밖에 그녀는 수하들 배치를 훌륭하게 해냈다.

더 훌륭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 조장.”

그녀가 지한을 찾았다.

“네, 대주님.”

“솔직히 경험보다는 책으로 배운 부분이 많아서. 사 조장은 추혼대주로 활약했으니 이런 일은 나보다 더 능숙하리라 생각해. 이 배치가 맞나?”

그녀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우는 자세를 보였고 이런 일로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다.

“네, 저보다 나으십니다. 다만 조와 조 사이의 간격을 조금 더 띄워도 될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기습이 들어왔을 때…….”

이안은 열심히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호는 그녀가 잘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잘하고 계십니다, 대주님.’

그렇게 외부에 마군과 귀영대가 자리를 잡고 가운데는 검무극과 마존들이 자리했다.

곳곳에 모닥불이 피어올랐고, 검무극과 마존들도 가운데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검무극 뒤쪽으로 호위대 무인들이 자리했다. 그들은 훈련했던 것을 실전에 적용하면서 검무극의 호위를 빈틈없이 했다.

검무극이 호위 책임자 적연을 불렀다.

“적연.”

“네, 소교주님.”

“솔직히 누가 쳐들어왔으면 좋겠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적연이 당황했다.

“아닙니다.”

“맞잖아? 오늘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수련했는데, 누가 쳐들어와야 실력 발휘를 할 거 아니야?”

“물론, 저희가 있는 한 소교주님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할 겁니다.”

검무극이 바깥에 있는 마군과 귀영대를 쳐다보았다.

“저 사람들을 뚫고 들어온 적인데? 너희가 더 강하다고? 마군들에게 분발하라고 해줘야겠군.”

“그게 아니라…….”

당황해하는 적연을 구해준 사람은 취마였다. 그가 마차에서 술병을 꺼내서 그곳으로 왔다.

“소교주, 왜 애꿎은 사람 괴롭히시오?”

취마는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호형호제하지 않았다. 정중히 소교주로 대했다.

“말투를 그렇게 정중히 하니까 제가 진짜 괴롭히는 거 같잖아요?”

취마가 모닥불 앞에 앉은 다른 세 마존을 보며 말했다.

“자기 전에 한 잔씩만 하시죠.”

취마는 검무극에게 먼저 술을 따라준 후 마불과 극악소마, 그리고 섭혼마존에게도 술을 부어주었다. 이렇게 들판에서 네 사람이 술자리를 가지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출교한 이후 취마는 내내 취해 있었다.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취마가 무공 수련 중임을. 이렇게 이동할 때조차 계속 수련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수련이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

“이 술도 너무 맛있습니다, 취마님.”

검무극의 감탄에 취마가 술병을 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껴둔 출전주(出戰酒)입니다.”

“그렇게 거창한 의미를 붙일 출교는 아닙니다만.”

취마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그 행동은 전쟁을 벌여도 좋을 병력을 데리고 나왔음에도 아니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마불이 귀영대 무인들을 보며 말했다.

“언제 저렇게 훌륭한 조직을 키웠나?”

“제가 아니라 이안이 키웠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수하들과 함께 있는 그녀는 제법 대주다운 모습이었다. 적성에 안 맞는다고 엄살을 떨지만, 그녀는 잘하고 있었다.

“우리가 은퇴하면 앞으로 본교를 이끌어 갈 녀석들이죠.”

그 말에 마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은퇴를 생각하나?”

“저야 아버지처럼 못 살죠.”

“못 살면?”

마불이 예리한 눈빛으로 추궁했지만 검무극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저는 즐기면서 살 겁니다. 자, 술 한잔 더하시죠?”

이번에는 검무극이 모두에게 잔을 채워주었다. 마지막으로 섭혼마존에게 술을 부어주는데, 먼저 술을 받은 마불이 불쑥 물었다.

“자넨 무림일통하고 싶은 욕심 없나?”

마불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앞서 취마를 찾아갔을 때, 취마가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근래 천마신교의 힘이 넘쳐나다 보니 자꾸 무림일통이 언급되고 있었다.

기회다 싶은 취마가 가세해서 검무극을 떠보았다.

“우리 소교주님이 이끄는 무림이 궁금하긴 합니다.”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친구들을 죽여서 세운 무림이 뭐가 기대된다고요.”

비사인과 진하군, 이 둘과의 관계는 모두가 잘 아는 바였기에, 그 말을 마불이 받았다.

“자네 형과 후계자 싸움에서 해냈듯, 피를 보지 않고 무림일통도 이뤄낼 수 있지 않겠나?”

정말 이 말을 듣고 있는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을 거다. 하지만 검무극이라면? 다들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건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그 불가능이 이뤄졌다고 쳐도, 그 평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암흑궁이 무림을 차지하려고 삼백 년을 암흑 속에서 힘을 키워왔듯, 정파와 사파도 그러할 것이다. 아니, 더 지독하리라.

“무너진 정파를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사도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시도가 있을 것이고, 결국 전쟁이 난 것만큼 많은 피를 흘리게 되겠죠.”

검무극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 무림은 너무 오랫동안 마정사로 나뉘어 내려왔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건, 이상일 뿐입니다.”

마불이 검무극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게 누구의 이상이냐에 따라 현실이 될 수도 있겠지.”

마불이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임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이 문제로 제가 여러분들을 설득해야 할 순간이 오겠지요.”

검무극이 잔을 들며 말했다.

“그때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잔을 든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이 건배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해서라도 검무극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지금까지는 극악소마가 유일한 거역이었는데.

섭혼마존이 잔을 들었다.

비록 지난번에는 검우진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건너편으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소교주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었다. 소교주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마불은 끝까지 잔을 들지 않았고, 취마는 건배하지 않고 홀로 술을 마셨다.

“언젠가 두 분과도 건배할 날이 올 겁니다!”

마불은 앞으로 펼쳐질 상황이 생각만 해도 재밌다는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그건 자네의 이상이겠지.”

* * *

대호채(大虎寨)의 채주 막충(幕充)은 간밤에 꿈을 꾸었다.

거대한 황금 고래가 자신을 향해 헤엄쳐 오는 꿈이었다. 깨고 나서도 그 장면이 또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황금 고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말 황금마차로군.”

막충은 협곡 위에 서서 저 멀리서 달려오는 황금마차에 넋을 잃었다.

정찰 나간 수하의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누런색으로 칠한 마차라 생각했다. 어떤 미친놈이 마차에 황금을 칠하고 다니겠는가?

하지만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으로 볼 때 진짜 금으로 도금한 마차가 틀림없었다.

막충은 꿈이 떠오르면서 녹림 인생에서 평생 한 번은 온다는 대박 기회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느꼈다.

“돈이 얼마나 많으면 황금으로 된 마차를 탄단 말인가?”

목숨 걸어야 할 때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 마교 쪽은 아니지?”

수하들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던 수하는 오른팔 공배(公培)였다.

“채주님, 지금까지 마인들이 황금마차를 탔다는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무가일 가능성은?”

“저 앞에 선두의 마차들을 보십시오. 저런 마차는 무가에서 쓰지 않는 대형 수송 마차들입니다. 아마 상단에서 값비싼 물건을 옮기거나, 거부가 이사 가는 게 틀림없습니다.”

“호위들 숫자는?”

“아주 많습니다.”

그 말에 막충은 오히려 안도했다. 진짜 고수들이 있는 무림 조직이라면 저렇게 떼를 지어서 다니지 않았다.

거부나 상단에서 위세를 보이려고 낭인들을 잔뜩 고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대열이 형편없습니다. 저길 보십시오. 대형 마차 주위에는 호위하는 무인들이 없고, 말을 탄 자들은 뒤따르고 있습니다. 겁을 먹고 대충 머릿수만 채우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진짜 고수들이 한두 명은 있을 텐데.”

막충이 고민하자 공배가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협곡에서 매복하면 놈들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평생 녹림으로 살아온 자신들인데.

“아무리 위험해도 황금마차를 어떻게 참아?”

* * *

좁은 협곡을 줄지어 달려가던 마차가 속도를 줄이더니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장호가 뒤쪽 검무극의 마차로 걸어왔다.

“녹림입니다.”

그러자 마존들과 마차를 따로 타고 가서 너무 재미없다는 말을 백 번쯤 했던 검무극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드디어!”

검무극이 기다렸다는 듯 후다닥 마차에서 내렸다. 저 앞으로 녹림이 길을 막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양쪽 협곡 위에 녹림 수십 명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이 문제가 아니었다. 십여 개의 거대한 바위를 언제라도 굴릴 수 있도록 지렛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저게 떨어지면 사람은 피하겠지만 마차들이 문제였다.

“드디어 만났어! 그렇게 교를 들락거려도 저놈들 한 번을 못 만났거든. 심심해서 제발 한 번만 만나라, 만나라 해도 한 번을 안 만났는데. 이렇게 다 이끌고 나오니까 등장한다고? 눈이 먼 녹림인가?”

검무극이 어이없어하자 장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형 수송 마차를 보고 상단이 짐을 싣고 이동 중이라 여긴 것 같습니다.”

게다가 뒤따르는 이의 숫자가 많으니 오히려 얕보였으리라.

“이게 다 마불님 때문이다. 저렇게 번쩍이는 황금마차가 달리는데 녹림이 어찌 참겠어? 나라도 못 참지.”

마불을 놀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아니, 불문에 계신 분이 황금마차가 웬 말입니까!”

마차 안에서 마불의 멋쩍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실 겁니까? 저 많은 자를 다 성불시킬 겁니까? 책임지십시오.”

그러자 마불의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못 할 것도 없지.”

진짜 다 죽이겠다는 듯 마불이 마차 문을 열고 나오려고 했다.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그 문을 닫았다.

“우리 혈불님께서는 잠시 대기하시고요. 장 군주, 저놈들이 자넬 보면 숨도 안 쉬고 달아날 거야. 어서 숨고. 호위들, 너희도 저 뒤로 물러나! 다들 튀지 마! 절대!”

장호가 웃으면서 대형 마차에 올라탔고, 호위들이 정말 숨어요? 하는 표정으로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녹림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선두에 선 사람은 막충이었고 그 옆에 공배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리고 대호채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이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막충은 우선 상대가 어떤 자들이고, 얼마나 실력이 대단한지부터 살폈다.

‘마부들은 별것 없고.’

호송단에서 나온 무인들은 누가 봐도 마부들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이 대형 마차를 자유자재로 몰아 좁은 곳도 들어가고 하는 이들.

‘진짜 거부의 행차구나.’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황금 고래 꿈 때문이었을까? 그런 섣부른 단정이 지어졌다.

십여 대의 대형 마차를 지나자 검무극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검무극의 마차까지 가지 못해 마차에 그려진 그림을 보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녹림 여러분! 저, 여러분들 처음 봅니다!”

이렇게 해맑은 인사라니? 이런 철부지는 막충도 처음이었다.

“대호채의 채주인 막충이라고 하오.”

“오! 막 영웅님이셨군요!”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냐? 이쪽은 녹림이다, 이놈아!

막충이 점잖게 목소리를 깔았다.

“이 협곡은 워낙 위험하고 험해서 공격을 받기 쉽소이다. 빠져나갈 때까지 우리가 보호해 드리겠소.”

“압니다, 알아요. 그럼 우리가 보호비를 주는 거죠? 그렇죠?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 이런 철부지라니! 막충은 정말 인생에서 가장 큰 한몫을 잡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무공 실력은 형편없어 보였고.

“우리 소협께서 잘 알고 계시는군요.”

보통 녹림들은 물건을 뺏고 상대를 죽이지 않았다. 그랬다간 상단 연합이나 표국 연합의 공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통행료를 받고 서로 좋게 좋게 통과시켜 주는 게 강호의 통례였다.

물론, 오늘은 모두 다 뺏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드는 번쩍이는 행차였지만.

지금도 막충의 시선은 저 뒤쪽에 반짝이는 황금마차를 향해 있었다.

너무 거기에 몰두하는 바람에 대형 마차 옆에 魔軍이라 적혀 있는 것도 그냥 지나쳤다. 하긴, 봤다고 해서 설마 이 마군이 그 마군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만.

“통행료로 얼마나 드리면 됩니까?”

“보통 물건값의 일 할을 받소.”

물론, 원래는 그렇게 많이 받지 않았다. 깎아줄 때 깎아주더라도 일단 던져본 것이다.

“오, 일 할! 비싼 감이 없잖아 있지만, 처음으로 드리는 건데, 드려야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삼 할쯤 부르는 건데.

아쉬워하는 막충에게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어쩌지요? 그만큼 돈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러자 막충이 선심 쓰듯 말했다.

“원래 돈으로만 받는데 오늘은 특별히 예외를 두겠소. 물건을 실은 마차가 십여 대가 넘으니 저 중에 한 대를 넘겨주시면 되지 않겠소?”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검무극이 흔쾌히 주려고 하자 막충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거기에 욕심이 더해졌다.

“생각해 보니 두 대 골라야겠소. 마차를 세어보니 열 대가 훨씬 넘지 않소? 게다가 특별히 양보해서 물건으로 받으니까 소협이 양보해 주시오.”

이번에도 검무극은 흔쾌히 허락했다.

“좋소. 두 대 고르시오. 저기 앞에 큰 마차들도 있고, 여기 뒤에는 다른 마차들도 여러 대 있소. 천천히 둘러보고 두 대만 고르시오.”

뭐가 그리 좋은지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신 고른 마차들은 꼭 가져가셔야 하오!”

바꿀 기회 드립니다!

“어떤 마차를 고를까?”

막충과 공배의 작전 회의가 있었다. 공배는 자신의 수장이 황금마차에 마음을 빼앗겼음을 알고 있었다.

“의외로 저 황금마차 속에는 별것이 안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위장이다?”

“저 마차에 주목하게 해놓고서 귀한 보물을 다른 곳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그 생생한 황금 고래 꿈을 잊을 수는 없었다.

검무극이 막충 옆으로 와서 말했다.

“자, 천천히 둘러보시고 느낌이 딱 오는 것으로 고르십시오.”

이놈은 제 물건 빼앗기는데 왜 이렇게 신이 났나?

막충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했다. 아, 너무 무서워서 이러는 거구나.

원래 사람이 너무 무서우면 이렇게 태연한 척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녀석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차는 물론이고 안에 있는 물건과 사람까지 모두 우리 막 영웅님 차지입니다.”

막충이 검무극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첫 마차는 검무극의 마차였다.

무심코 검무극의 마차를 쳐다본 막충이 깜짝 놀랐다.

“어이쿠!”

생각지 못한 그림에 막충이 비명을 내질렀다.

“젠장! 이게 뭐야!”

너무 놀라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마차에 그려진 천마혼의 얼굴.

너무 생생하게 그려진 그 모습에 막충이 기겁했다.

“멋지지 않습니까?”

막충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넨 이 그림이 뭔지 알고나 있나?”

“마교의 상징이잖습니까? 이 그림을 그리고 다니니까 나쁜 놈들이 감히 덤벼들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검무극의 말에 막충은 어이가 없었다. 이거 미친놈인가? 아니면 모자란 놈인가?

“내가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 좋은 꿈도 꿨으니.

“이런 그림 함부로 그리고 다녔다간 큰일 나네.”

그러자 검무극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그림 그린 분이 정말 유명한 화공이라 들었습니다. 이 마차 만든 분도 엄청 유명한 장인이시고요. 그래서 마차 자체만 따져도 엄청난 예술품이지요. 살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을 겁니다.”

앞서 검무극이 내리는 바람에 마차 문이 열려 있었는데, 마차 좌석 옆에 커다란 혁낭이 놓여 있었다.

“이 마차를 선택하면 저 혁낭까지 가지게 되겠군요. 없는 게 없는 혁낭입니다. 귀한 게 정말 많이 들었지요. 이 마차 고르시면 인생 역전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막충의 발걸음은 다음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마교를 사칭하게 해서 날 죽일 셈인가 본데.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내가 그렇게 바보가 아니라네.”

“아, 제 진심을 몰라주시다니 안타깝네요.”

막충은 다음 마차에서도 흠칫했다.

그야말로 온통 새하얀색으로 칠해진 마차였다. 심지어 창문에 내려진 휘장마저 하얀색이었다.

미친놈이 여기 또 있었군. 마차를 이렇게 하얀색으로 만들다니.

“이 마차 주인께서 하얀색을 너무나 좋아하시는 분이죠.”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웃는 눈웃음이 기가 막히게 멋진 분의 마차입니다. 선택하셨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참고로 그분의 눈웃음 본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막충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본 사람이 없나?”

본 사람은 다 죽었으니까.

“자, 그 이유는 마차 문을 열고 직접 확인해 보시죠!”

막충이 새하얀 마차를 잠시 쳐다보더니.

“어디 눈웃음이 밥 먹여 주나?”

그렇게 사신의 유혹을 뿌리친 막충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차 안에서 천화루주의 웃음소리가 살짝 새어 나왔다.

다음 마차에서도 막충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 있었다. 미친놈이. 아니, 미친 마차가.

온갖 낙서와 같은 문양들. 마차에 그려진 빙글빙글 현란하고 복잡한 문양은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났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그림을 그린 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막충은 더욱 현기증이 났다. 정말 마차에 그려진 소용돌이가 회오리치면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이 복잡한 그림에도 질서가 있고, 인생이 들어 있지요. 저도 예전에는 이 그림이 딱 질색이었는데, 이제는 좋아한답니다.”

그 말에 소용돌이가 멈추며 마차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마차에 타면 우리 막 영웅께서 살아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가령 지옥 같은 곳 말이죠. 언제 그런 곳 구경해보겠습니까?”

막충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뭔 헛소리를 자꾸 하는 걸까? 귀한 게 들어 있는 마차를 못 고르게 하려고 혼란을 주는 거겠지. 안 통해, 이놈아!

드디어 황금마차 차례였다.

마차를 자세히 살펴본 막충이 소리를 질렀다.

“이거지!”

정말 황금으로 도금된 마차였다. 대충 도금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도금되어 있었다. 이 마차의 값만 해도 상당한 돈이 될 거란 생각에 막충의 얼굴이 절로 환해졌다.

“내가 금을 좋아한다네.”

“아, 이 마차 주인분과 잘 어울리시겠네요. 금이라면 아주 환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자 황금 마차 창문의 휘장이 펄럭였다.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온 것이다.

검무극이 은밀히 기운을 발출해서 그 기운을 다시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이 욕망과 탐욕이 가득한 마차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쑤우우우우욱!

꾸우우우우욱!

“그래도 마지막 마차까지는 보세.”

막충이 마지막 마차로 다가갔다. 다른 마차보다 길이가 긴 마차에서는 술 냄새가 자욱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건 술마차군!”

사칭마차에, 백마차에, 낙서마차에, 황금마차에 술마차까지! 정말이지 이렇게 다양한 마차를 한 번에 보다니?

“맞습니다! 귀한 술이 많아서, 선택하셔도 후회가 없을 겁니다. 정말 돈 주고도 못 구할 술이 가득 있을 겁니다.”

“술이 비싸 봤자지.”

그러자 술마차 창문의 휘장 사이로 불쑥 손이 나왔다.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다. 한 번 먹어보란 뜻이었다.

“드셔 보시고 결정하시죠.”

물론 막충은 먹지 않았다.

“됐네. 저 술에 뭐가 들었을지 알고 마시겠나?”

“우리 막 영웅께서는 계속 아쉬운 선택을 하시는군요. 천하의 명주를 마실 기회인데.”

검무극이 가서 대신 술잔을 받아서 마셨다.

“캬, 술맛이 끝내줍니다.”

술 좋아하는 막충이 살짝 구미가 당겼지만, 이런 수작에 넘어갈 자신이 아니었다.

그때 막충의 시선이 마지막 마차에서 조금 떨어진 채 서 있는 귀영대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삼조의 살수 여인들은 일부러 맨 뒤쪽으로 빠졌기에 막충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았다.

절대 튀면 안 돼!

검무극의 명령을 지켜내기 위해 귀영대 무인들과 호위 무인들은 애써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은 채 기도를 드러내지 않고 서 있었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영락없이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막충은 그들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이 기분 나쁜 느낌은?

그때 공배가 와서 막충에게 넌지시 말했다.

“지금 보신 마차들은 누가 봐도 사람이 타는 마차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기 큰 마차를 두 대 고르시지요. 비단이나 보물이 가득 실린 걸 고르기만 하면!”

하지만 막충은 황금마차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가 망설이자 공배가 말했다.

“두 개를 고를 수 있으니 일단 저 큰 마차부터 열어보시죠. 그리고 이 황금마차를 결정할지 말지를 정하시죠.”

“좋은 생각이네.”

막충과 공배가 대형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제일 뒤에 있는 마차에 제일 귀한 물건이 실려 있을 겁니다.”

“왜지?”

“아무래도 자신과 제일 가까운 곳에 제일 귀한 물건을 두지 않았겠습니까?”

“좋은 생각이다!”

막충은 공배의 조언대로 검무극의 마차 바로 앞에 있는 대형마차로 걸어갔다.

뭐가 들었을까? 제발 금과 보석, 도자기와 그림이 가득한 마차여라!

막충이 마차 문을 열었다.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마차 안을 보던 그때!

마차 안에는 이십여 명의 마군이 좌우로 나뉘어 앉아 있었다. 그 마차에는 황급히 올라탄 장호도 함께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막충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막충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정말 자신의 얼굴로 검이 날아왔어도 이렇게 빨리 반응하진 않았을 거다.

너무 빨리 열었다가 닫는 바람에 뒤에 서 있던 공배는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뭐가 들었습니까?”

공배의 물음에 막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묻고 싶었다.

‘그게 다 뭐였지?’

이런 수송 마차에 무인들이 가득 타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것도 그렇게 덩치가 큰 사람들은 처음이었다.

‘아! 혹시 무인들 석상이었나?’

공배가 문을 열려고 하자.

“열지 마!”

막충의 고함에 공배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석상은 무슨!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그들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정말 무서웠다. 그 덩치들의 눈빛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막충은 안을 못 본 척했다. 봤다고 하면 저 마차 문이 열리고 그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안을 못 봤으니 아직 안 고른 것으로 해야지.”

막충이 검무극에게 우기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간 마음이 변했다네. 자네가 사내대장부라면 이 정도는 인정해 줘야 하지 않나?”

이렇게 우기는데도 뭐가 좋은지 검무극은 싱글벙글이었다.

“맞습니다. 저였더라도 고민이 될 겁니다. 어휴, 이걸 어찌 단박에 고릅니까? 자, 다시 고르십시오.”

“고맙네.”

막충은 감히 대형마차를 다시 고를 생각을 못 하고 다시 황금 마차 앞으로 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 후딱 하나 골라서 어서 떠나자.’

대형마차 속 광경을 봤음에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당장 떠나야 하는데, 저 황금 마차를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 그냥 석상이라 생각하자. 그건 다 석상이었다!

‘애초에 이걸 두고 딴 걸 고른 것부터 잘못되었지.’

막충이 황금 마차 앞에 서서 당당히 말했다.

“이걸 고르겠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황금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는 마불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막충이 소리쳤다.

“황금 불상이다!”

막충은 정말 날아갈 듯 기뻐했다. 오늘 헛것이 계속 보이는 그였다.

“봐라, 내 선택이 맞지 않았느냐?”

공배가 놀란 얼굴로 막충의 뒤를 쳐다보았다.

“채, 채주님. 불상이 눈을 떴습니다!”

“뭐?”

막충이 놀라 돌아보니 마불이 눈을 뜬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혈불이 현신한 것처럼 그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으악!”

너무 놀란 막충이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불이 손을 까닥하자 마차 문이 닫혔다. 검무극에게 자꾸 귀찮게 할 건가? 이런 눈빛을 보냈는데.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자, 선택받으셨습니다!”

마불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우리 막 영웅님은 마차를 타고 가십시오.”

마불의 몸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황금빛 살기를 느끼며 막충은 손사래를 쳤다.

“안 고른 걸로 하겠네.”

“안 됩니다. 고른 마차는 반드시 가져가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황금을 좋아하는 분이라서 함께 대화를 나누시면 잘 통할 겁니다.”

하지만 막충의 생존본능이 말했다. 저 황금빛이 뿜어지는 사람이 있는 마차에 탔다간 큰일 난다고.

“자꾸 강요하면 저 바위가 자네 머리 위로 떨어질 거네.”

막충의 협박을 검무극이 나직한 어조로 되돌려주었다.

“그럼 제가 한 손으로 받아서 우리 막 영웅께 건네줄 겁니다.”

순간 막충이 움찔했다. 그 장면이 떠올랐다. 눈앞의 이 남자가 저 큰 바위를 한 손으로 받아서 자신에게 받으십시오, 하면서 던지는 모습을. 그 바위 아래서 찍, 하고 피떡이 되는 자신의 모습을.

검무극이 웃으며 그의 옆으로 왔다.

“농담입니다, 농담. 저 큰 바위를 어떻게 한 손으로 받습니까? 두 손이면 모를까? 참, 마차 한 대 더 고르셔야지요?”

검무극이 막충을 잡아끌었다.

“아니, 나는 됐네. 안 골라도 돼. 제발 그냥 보내주게!”

“안 됩니다. 두 개 고르시기로 했으니까 골라야지요.”

“보호비는 내가 주겠네. 제발 보내주게!”

하지만 검무극이 거부할 수 없는 손길로 그를 잡아끌었다.

“어서요.”

앞서 그 어수룩한 눈빛이 아니었다.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취마의 마차에서 다시 휘장 사이로 술잔이 나왔다. 자신을 고르라는 신호였는데. 저러니까 고르기가 무서웠다.

막충의 시선이 새하얀 마차를 향했다.

그걸 고르려다가 마지막에 선택을 바꿨다. 바로 섭혼마존의 마차를 고른 것이다.

“저걸 고르겠네.”

겉은 정신없지만, 마차 속에 의외로 차분한 무엇인가가 있을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제발! 그리고 운 좋게도 예감은 적중했다.

문이 열리자 마차 안에는 묘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이 이쪽을 쳐다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막충은 자신을 보고 웃었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그 미소가 향한 상대는 막충 옆에 있던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바꿀 기회 드립니다!”

바꾸게 한다고? 이거다! 내가 살 길은 이 마차다!

“싫네.”

막충이 달려가서 섭혼마존의 마차에 제멋대로 올라탔다.

“이 마차로 결정했네! 그러니 저 황금마차에 타게 하지 말게!”

“아니, 거기가 더 무서운…….”

그때 섭혼마존의 마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곧바로 마차 문이 열렸다. 섭혼마존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어느새 막충은 사라지고 없었다.

“채주님!”

공배가 소리쳤지만 막충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신들 뭐야? 우릴 건들면 중원의 모든 녹림이 다 들고 일어날 거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누군지 알면 다들 다시 앉을 거네.”

공배가 계곡 위를 쳐다보았다. 신호를 보내면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화살비가 내리고 저 바위들이 일제히 굴러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공배는 감히 그런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공배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멀리 뒤쪽에 떨어져 눈치를 보고 있던 녹림들도 일제히 엎드렸다.

다시 섭혼마존의 마차 문이 열렸다.

사라졌던 막충은 원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던 막충이 비명을 내지르며 마차에서 뛰어나왔다.

“으아아아악!”

겁에 질린 그가 바닥을 굴렀다. 정말이지 지옥이라도 보고 온 것인지 막충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섭혼마존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소교주가 이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 판단해서였다. 소교주는 죽일 사람을 두고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두 사람 앞에 선 검무극의 기도는 달라져 있었다.

“막 영웅.”

“네! 아뇨,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막충은 겁에 질려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다 가지고 놀았으니 일장을 내리쳐서 죽일 것만 같았는데 검무극은 변함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바빠서 그러니, 마차는 돌아올 때 고릅시다. 여기서 꼭 기다리고 계시오!”

막충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말은 돌아올 때도 녹림으로 살고 있으면 다 죽게 될 거란 뜻임을. 황금 고래 꿈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꿈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방향이었지만.

“자, 우린 다시 출발!”

다시 마차와 말들이 출발했다.

앞서 주눅 들어 있던 귀영대 무인들이 자신의 기도를 드러내며 두 사람 앞을 지나갔다. 말을 타고 뒤따르는 이들 중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황금 마차는 황금 고래가 헤엄쳐가듯 점점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공배가 때늦은 원망을 했다.

“그래서 제가 큰 마차를 고르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막충이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가 그 안을 못 봐서 그래.”

이래서 선물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닌데

사마명은 통천각 작전실에서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언제나 소교주가 출교하면 통천각은 비상이 걸린다.

한데 이번은 더 특별했다. 마존 넷과 마군까지 거느리고 출교한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거기에 귀영대와 호위 무인들까지 모두 나간 가장 큰 행차였다.

군사 하나가 와서 소교주의 이동 사항을 보고했다.

“드디어 소교주께서 호남으로 들어섰습니다.”

이번 소교주의 목적지는 호남 북쪽에 있는 동정호.

중원 지형도에 검무극의 깃발이 귀주에서 호남으로 옮겨졌다.

소마(小魔).

검무극을 의미하는 소교주 깃발 옆으로 마존기들이 함께 놓였다.

황금색 깃발에는 불(佛)자가 적혀 있었고, 새하얀 깃발에는 소(笑)자가 적혀 있었다. 자색의 깃발에는 혼(魂)자가, 그리고 하늘색 깃발에는 주(酒)자가 적혀 있었다.

네 마존을 상징하는 마존기들이 검무극의 깃발 중심으로 뭉쳐 있었고, 그 옆에 마군을 상징하는 마군기가 놓였다. 마군기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그림자 영(影)자가 적힌 귀영대 깃발도 놓였다.

그때 또 다른 군사가 와서 보고했다.

“무림맹에서 이번 출교의 목적에 대해 알려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사도맹보다 무림맹이 먼저 반응한 것은 무림맹이 있는 호북과 호남이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천화루주가 신녀궁주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지만.

“응답하지 마라.”

“네.”

사마명은 이번 일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마존들과 워낙 친하니 마존 넷과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마군들까지 데려갔다는 건, 이번에 큰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

다른 사람도 아닌 검무극의 판단이니, 위험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만에 하나라도 무림맹이나 사도맹쪽에서 이번 일에 대한 정보가 샌다면, 이번 검무극의 일에 큰 지장을 끼칠 수 있었다.

이쪽의 무응답에 무림맹과의 관계가 경직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 다른 군사가 와서 보고했다.

“은월의 고 군사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모셔라.”

이런 상황에서 고월의 방문이라? 심상찮은 일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그곳으로 통천각 군사의 안내를 받으며 고월이 들어왔다.

통천각 작전실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천마신교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데, 사마명은 특별히 고월의 출입을 허가했다.

당연히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 있으면 서로 경쟁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은월은 철저히 통천각을 지원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정보를 통해 얻은 모든 공도 통천각으로 넘겼다. 마치 교주의 통천각을 소교주의 은월이 지원하겠다는 듯.

그랬기에 지금까지 두 조직 간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었다.

“총군사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게, 고 군사.”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당대 교주의 총군사와 차기 교주의 총군사가 될 사람의 만남이었다.

고월은 잠시 내부를 둘러보면서 통천각 군사들의 바쁜 열기를 느꼈다.

“자, 들어가서 차 한잔하세.”

사마명이 자신의 집무실로 고월을 데리고 들어갔다. 사마명이 직접 차를 우려주며 물었다.

“요즘 어떤가? 바쁘지?”

소교주의 출교로 아무래도 심적인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교주님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보통 사람을 대하듯 했다간, 제가 버티지 못하겠더군요.”

고월의 말에 사마명이 미소를 지었다. 어찌 저 심정을 모르겠는가? 자신만 해도 검무극이 아니라 검우진을 모시는 게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셨다. 차를 한 모금 음미한 후 고월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바쁘신 분이시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월의 시선이 집무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중원 지형도를 향했다. 그곳에 꽂혀 있는 수많은 깃발.

당연히 그의 시선이 검무극이 있는 곳을 향할 줄 알았는데.

고월의 시선이 향한 곳은 천마신교 본단이었다.

가장 크고 화려한 교주의 깃발.

마(魔).

그 옆에 두 마존기.

녹색의 깃발에 독(毒)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고, 검은 깃발에는 흰 글씨로 권(拳)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풍천교주를 상징하는 회색 깃발에는 풍(風)자가 적혀 있었고, 그 옆에 새로운 깃발 하나.

군학(群鶴).

“저 깃발들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마명은 고월이 무슨 뜻으로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듯, 고월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저 깃발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월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균형이 잘 잡혀 있구나.”

사마명은 그 말을 듣고서 다시 깃발을 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다.

교내에 마존이 둘만 남아 있는 대신, 풍천교주와 악군학이 있었다. 마존급 이상의 실력을 지닌 두 사람인 데다가 남아 있는 두 마존이 가장 강한 권마와 독왕이었다.

고월이 사마명을 쳐다보며 물었다.

“소교주님은 왜 이렇게 균형을 맞추셨을까요?”

“자네 말은 소교주가 이렇게 의도했다는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한 가지는?

사마명이 흠칫 놀라며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본교가 공격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가?”

그러자 고월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마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교주님이 본단을 안배하신 걸 보고 나서 든 결과론적인 추측입니다. 원래 저들의 계획은 소교주님과 마존들을 끌어내고 비어 있는 본교를 치려고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걸 소교주님은 먼저 생각하셔서 이렇게 균형을 맞추셨을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마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것까지는 자신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천마신교 본단이 공격받을 거란 일말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딱 그만큼, 자신이 방심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총군사님께 만큼은 말씀드려야겠다고 여겼습니다.”

원래라면 말해줘서 고맙네. 정도로 끝냈을 일이다.

하지만 고월이 얼마나 훌륭하게 은월이란 조직을 키워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고월이 차분히 대답했다.

“만약 저라면 마화(魔火)를 피웠을 겁니다.”

마화가 언급되자 사마명은 깜짝 놀랐다.

마화를 피운다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본단에 총비상령을 내린다는 의미였다.

마화가 피면 천마신교는 전시 상태로 돌입하게 된다. 모든 마인이 비상 태세에 들어가고, 모든 기관과 진법이 최고 수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천마신교 본단이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하게 된다. 그 일은 엄청난 인력과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이유가 뭔가? 단지 저 균형 때문은 아닐 것 같은데.”

과연 그러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이유는 검무극에게 있었다.

“예전부터 소교주님을 뵈면 큰 위험이 다가올 것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조심하고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건 사마명도 느꼈던 바였다. 대체 이렇게 뛰어난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강해지려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했었으니까. 더구나 권력욕이나 과시욕이 있는 사람도 아니면서 말이다.

“저는 소교주께서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주군의 마음을 읽고 군사로서 움직여야 한다면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 고월이 이렇게까지 찾아와서 말한다면 분명 흘려들어선 안 될 조언이었다.

“마화를 피우려면 교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네. 교주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네.”

오히려 마존들이 다 있으면 피울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마존들이 자리를 비웠는데 마화를 피우자고 한다면?

그 자존심 강한 교주가 받아들일 리가 없다.

고월도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까 군사님과 제가 설득해야겠지요. 그게 저희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함께 돕겠습니다.”

통천각 군사가 아닌 그가 이런 일로 교주 앞에 나선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이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

사마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용기는 아껴뒀다가 나중에 자네의 교주님에게 발휘하게.”

사마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교주님은 내가 설득하지.”

* * *

검왕은 말없이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벽에 적힌 놀라운 사람들의 글귀들.

그곳은 바로 풍류주점의 이 층이었다. 검무극과 친구라고 하니 조춘배가 이 층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자리에는 아직 먹지 않은 술과 안주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검무극의 단골 주점이란 사실을 몰랐다면, 누군가 장난으로 적었거나 위조한 글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 그곳으로 걸어 올라왔다. 놀랍게도 그는 검우진이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검왕이 정중히 검우진에게 인사했다.

검우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마친 검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신발을 신었다.

“벗고 있는 게 편하면 벗고 있게.”

“아닙니다.”

검왕이 신발을 신었다.

검우진이 천천히 걸어와 검왕 옆에 나란히 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림맹주와 사도맹주의 글이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거 자네도 알지 않나?”

검왕이 살짝 미소 짓더니 다시 말했다.

“대단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마교주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그 대단한 아들 때문이다. 교주에게 귀한 선물을 받은 것도 그 아들 때문이고.

“내려주신 검이 너무 훌륭합니다.”

검왕은 이제 철검 대신 백화검을 차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이 귀한 검을 왜 내려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대단한 검을 내려줬다는 건, 분명 원하는 바가 있어서일 것이다.

아들과 갈등 상황이 벌어졌을 때, 아들을 설득해 달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교주조차도 그 대단한 아들을 상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하지만 검왕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나중에 그 아이 편이 되어주게.”

검왕이 놀란 표정으로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분명 힘들어할 거네.”

그 말로 검왕은 알 수 있었다.

교주가 진심으로 아들을 위한다는 것과 언젠가 아들과 대립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교주는 정말 무림일통을 할 생각이구나.’

검왕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무림일통을 하든 말든 자신은 알 바 아니었다. 문제는 검무극이었다.

그러겠다고 대답한다는 건 교주와 약속하는 것과 같다.

과연 그때까지 떠나지 않고 검무극 곁에 남아 있을까? 약속을 하게 되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검우진은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중한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얼마나 고민했을까? 검왕이 담담히 대답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짤막한 대답이었지만 검우진의 얼굴에는 흡족한 기색이 스쳤다.

“내 술 한잔 받게.”

또르릉.

검왕이 정중히 그 술을 받은 후 시원하게 마셨다.

검우진 역시 검왕이 따라준 술을 마셨다. 약속의 술이었다.

그렇게 술을 나눠마신 후 검우진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검왕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찬 검과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이래서 선물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닌데.”

이놈의 부자들에게 모두!

* * *

검우진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사마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그러자 사마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교주님과 수담을 나누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좋지, 어서 들어가세.”

그렇게 두 사람이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검무극이 선물로 준 직접 만든 바로 그 바둑판이었다.

탁, 탁.

바둑판과 알이 너무 좋다는 몇 마디 말이 오가고는 이제 그곳에는 바둑돌 놓는 소리만 들렸다. 정말 바둑만 두러 온 것처럼 사마명은 말없이 바둑에만 열중했다.

그렇게 수가 오가던 중, 사마명이 검우진의 세력에 깊이 침입했다.

“자네답지 않게 과감한 수를 쓰는군.”

너무 깊이 침입해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은 수였다.

“이렇게 내 세력이 두터운 곳에 들어와서 살아나갈 자신이 있나?”

“이 수가 교주님의 허를 찔렀다면 어떻게든 수가 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국면을 내려다보던 검우진이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자네도 걱정하고 있군.”

사마명이 고개를 들어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교주는 방금 그 한 수에서 자신이 왜 방문했는지를 짐작한 것이다.

“나이가 드니 걱정이 많아지나 봅니다.”

검우진은 여전히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녀석이 출교하기 전에 나를 찾아왔었다네. 마존들을 거느리고 나간대서 다 데리고 나가라고 했지. 한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독왕과 권마를 두고 가더군.”

검우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 웃음에는 ‘건방지게 이 아비를 걱정해?’ 이런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검우진이 바둑돌을 들었다.

사마명은 당연히 그의 세력 속으로 뛰어든 자신의 수에 응수하리라 여겼는데.

“자네의 이 수에는 응수하지 않고 손을 뺄 거네.”

말로 하지 않았지만, 이건 마치 마화를 피우지 않겠다는 뜻과 같았다.

“이 무리수를 받으시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시겠지요.”

당연히 자존심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가 아니네.”

검우진이 중앙 싸움에 한 수를 보탰다.

“거길 받아주다가 패라도 나면 이쪽 싸움이 불리해지지 않겠나?”

사마명은 그 한 수에 담긴 뜻을 알 수 있었다.

천마신교 본단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버리면 결국 상대는 소교주에게 모든 힘을 기울일 것이라는 뜻.

검우진은 아들을 위해 적들을 이쪽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교주는 지금 바둑으로 자신의 마음을 밝히고 있었다.

내 아들 건들지 말고 내게 와라.

말없이 검우진을 응시하던 사마명이 다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손을 빼서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중앙 싸움이 어려워졌군요.”

사마명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래, 교주님은 싸움을 피하는 분이 아니시지.

중요한 건 교주가 방심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그리고 누구보다 잘 안다. 방심하지 않은 교주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사마명이 앞서 둔 돌을 살리려고 한 수를 더 보태자, 이제 검우진은 두 돌 사이를 사정없이 끊으며 싸움을 시작했다.

“우리 손님은 우리가 맞아야지.”

마교는 마교다!

“쳐 죽일 정파 놈들! 쓰레기보다 못한 놈들!”

남자의 눈에는 원한과 살기가 가득했고, 몸에서는 괴이한 기운이 뻗쳐 나오고 있었다. 흡사 마공을 익혔다가 미쳐버린 것만 같았다.

그 앞에 마주 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그의 뒤로 멸마대 무인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정식으로 소맹주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멸마대를 이끌며 협행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소맹주가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피할 생각은 없었다. 맹주 자리에 오르기 전날까지 계속할 생각이었다.

“진정해라. 어차피 달아날 곳은 없다.”

진하군은 상대를 진정시키려 했다. 눈앞의 남자는 정파 문파를 공격해서 학살극을 벌였다. 지금까지 밝혀낸 바로는 그 문파와는 아무런 원한 관계가 없는 자였는데.

“너희들은 곧 멸망하게 될 거다.”

그리고 흘러나온 놀라운 외침.

“신교불멸(神敎不滅) 천마무적(天魔無敵)!”

그와 동시에 남자의 두 눈에서 검은 기운이 가득 피어오르자, 진하군이 뒤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모두 피해!”

콰아아아앙!

강력한 폭발이 주위를 휩쓸었다. 남자가 자멸공을 사용한 것이다.

후두두둑.

사방으로 떨어지는 파편들과 흙먼지 사이에서 진하군이 수하들을 챙겼다.

“다친 사람 있나?”

“없습니다!”

다행히 진하군이 빨리 경고한 덕분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호북 지역에서 마인들의 살육이 연이어 발생했다. 정파 문파를 공격해 학살극을 벌이는가 하면, 무공을 모르는 일반 상인들을 습격해 죽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여인과 아이들까지 희생되자 마인에 대한 정파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진하군은 당연히 이번 일이 배후 놈들의 짓이라 여겼다.

‘놈들이 또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진하군은 분노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놈들에게 너무 화가 났다.

조금 전 그놈처럼 실컷 살육을 저지르고 자결해 버리면 죽은 이들의 억울함은 어찌 풀 수 있겠는가?

자신이 맹주가 되면 이런 억울한 죽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평생을 바칠 것이다.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평생 고통과 후회 속에서 살다 비참하게 죽게 할 것이다.

그때 전서를 담당하는 멸마대 무인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맹주님께서 급히 돌아오라 기별하셨습니다.”

진하군이 주위에 둘러싼 멸마대 무인들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그가 몸을 날리자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라 날았다.

* * *

진하군이 돌아왔을 때, 무림맹에는 비상이 걸려있었다.

백호령(白虎令).

무림맹의 비상은 모두 네 단계가 있었다.

가장 낮은 단계인 현무령(玄武令)에서부터 주작령(朱雀令), 백호령(白虎令), 청룡령(靑龍令)까지.

전시에 발동하는 청룡령 바로 아래 단계의 비상이 백호령. 다시 말해 전쟁 직전 상황일 때 내리는 비상이 걸린 것이다.

진하군이 멸마대주가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래 여러 사건이 연속해서 발생했다고는 하나 백호령까지 내릴 상황은 아니라 여겼는데.

‘혹시 다른 사건이 발생했나?’

진하군이 긴장한 마음으로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맹주전에는 무림맹주 진패천과 총군사 제갈현이 함께 있었다.

“멸마대주, 귀환을 명 받고 돌아왔습니다.”

진하군이 진패천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제갈현과도 인사를 나눴다.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진패천의 물음에 진하군이 면목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생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놈이 자멸공으로 죽기 직전 스스로 신교임을 자처했지만, 이번 일은 천마신교에서 명령한 일이 아니라 판단됩니다.”

진패천 역시 그렇게 여겼다. 자신이 아는 검우진은 적어도 이런 방식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정파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지.”

진하군은 이럴 때면 한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불과 몇 놈이 휘저었는데, 정파 여론이 출렁거린다.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왜 백호령을 내리신 겁니까?”

그러자 제갈현이 대답을 대신했다.

“소교주가 마존 넷과 마군들을 이끌고 출교했습니다.”

근래 일어난 사건을 처리하느라 외부에 나가 있던 진하군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소교주는 호남에 들어선 후 계속 북진하고 있습니다.”

북진이란 말에서 제갈현이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호남은 천마신교의 영역이지만 계속 북으로 올라오면 이곳 무림맹 본단이 있는 호북으로 진입하게 된다.

게다가 이 일을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출교 이유를 묻자 신교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비상이 걸린 이유와 맹주전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무거웠는지 알 수 있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마존 넷에 마군까지 끌고 나왔는데, 그 이유조차 밝히지 않는다?

충분히 백호령이 걸리고 남을 일이었다.

이번에는 진패천이 손자에게 물었다.

“혹시 네게 연락이 따로 왔었느냐?”

“아뇨, 오지 않았습니다.”

진패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검무극이 손자에게는 따로 기별했을 줄 알았는데.

반면, 진하군은 검무극이 자신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래 일어난 사건들이 왜 일어났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놈들은 우리가 소교주를 돕지 못하게 수를 쓴 겁니다. 천마신교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면, 본 맹이 그들을 도울 수 없을 테니까요.”

진하군은 불안했다. 놈들이 자신과 검무극 사이를 끊으려 한다는 건, 검무극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진패천이나 제갈현 역시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렇게만 믿을 수는 없었다. 상대는 마교였으니까.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든 호의가 이 한순간을 위해서였나?

이런 말이 나올 경우를 언제나 염두에 둬야 했으니까.

특히나 진하군이 이렇게나 검무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욱이.

“제게 기별하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기별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뜻이냐?”

“만약 저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면 기별했을 겁니다. 이렇고 저렇고 구구절절 다 설명했을 겁니다. 연락하지 않은 건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여긴 거겠지요. 소교주는 저를 진짜 친구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단지 무작정 믿기만 하는 단계를 지난 그였다.

“소교주가 전서를 보내지 않은 것에 섭섭해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제가 먼저 소교주에게 전서를 보낼 겁니다.”

“뭐라고 보낼 거냐?”

진하군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 뜻은 잘 알겠네, 친구.”

진하군의 반응에 진패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걱정했다. 검무극을 너무 믿는 손자를. 그 걱정은 이 순간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무슨 걱정을 하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걱정하셔도 좋고, 비상을 거셔도 좋습니다. 다만 그 비상의 상대를 소교주로 한정 짓지는 마십시오. 소교주가 이렇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급하게 나와야 했을 그 상대도 함께 염두에 두십시오.”

진패천은 여전히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저렇게까지 믿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소교주를 도우러 갈 생각이냐?”

부디 허락해 달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진하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뇨, 가지 않을 겁니다.”

“왜?”

진하군은 자신의 소맹주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만났던 그날,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하고. 알지? 혼자 처리하려 들면 절대 안 돼!

이렇게 말했던 그였으니까.

“만약 제 도움이 필요했으면 도와달라고 기별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달려갔을 거다. 소맹주 자리를 걸고서라도,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를 도왔을 거다.

이 말만 했으면 진패천은 여전히 손자를 걱정했을 거다.

하지만 진하군이 도우러 가지 않겠다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검무극을 돕는 일만큼이나 진하군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처리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배후 놈들은 우리와 신교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또 다른 살육을 벌일지도 모릅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놈들의 음모에 희생될 수도 있었다.

“그 일을 막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설령 그게 놈들의 의도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요.”

진패천이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 등급을 청룡령(靑龍令)으로 올려주십시오. 그래서 더 확실히 놈들이 또 다른 살육을 저지르는 것을 막겠습니다. 그리고 천마신교에 이러이러해서 우리가 청룡령을 내렸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들이 연락하지 않았으니 우리도 하지 않겠다, 그런 신경전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하군이 굳건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우린 우리 원칙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게 할아버지께서 제게 가르쳐주신 정파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진패천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졌다. 검무극에게 푹 빠져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줄만 알았더니.

손자가 이런 마음이라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진패천이 제갈현에게 명령을 내렸다.

“비상을 청룡령(靑龍令)으로 올리고, 그 사실을 신교에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진패천이 손자에게 말했다.

“가서 네 할 일을 해라.”

“네, 맹주님.”

진하군이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갔다.

힘차게 걸어 나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검무극에 대한 믿음이 실려 있었다.

‘자네 믿고 나는 내 일한다, 친구.’

* * *

천마신교와 무림맹의 고조되는 긴장감은 사도맹에도 전해졌다.

“진 맹주는 고심할 수밖에 없다. 소교주를 겁내는 게 아니라 마교주를 겁내고 있겠지.”

사도맹주 백자강은 비사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비사인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히 배후 놈들의 수작일 거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그러자 비사인이 지난 일을 꺼냈다.

“그날 장보도 일을 보고받던 날이 생각나십니까?”

비사인의 말에 사도맹주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을 떠올렸다.

수하의 보고는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놈들이 죽은 영혼까지 불러왔습니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그 믿기 어려운 보고를 들으면서도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그때 확실히 알았다.

“이번 적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자들입니다. 평범한 운명을 지닌 사람들은 절대 막을 수 없는 자들이죠. 그래서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의 입에서 다소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무림의 생존본능이 소교주를 탄생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무림이 멸망에서 살아남고자 만들어낸 존재가 소교주라는 의미냐?”

“네.”

백자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아서 웃었다. 제자 놈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를 신격화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지요.”

“불쌍하다고?”

“매사 완벽하듯이 잘해왔으니까, 조금만 실수해도 모두가 실망하고 손가락질할 겁니다.”

자신의 사부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검무극 덕분이다. 사부를 똑바로 보고, 자세히 보려고 애쓰고 애쓴 덕분이다.

전에는 너무나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는데, 막상 해내고 나니 가끔은 사부와 이야기할 때가 제일 편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백자강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소교주가 실수를 저지르면 어찌할 거냐?”

비사인의 무서운 얼굴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놀림 받은 게 있어서 맨 앞에서 손가락질할 겁니다.”

귓가에 소름이 돋는 걸 보니, 제자 놈은 아무리 검무극이 큰 실수를 해도 그를 지켜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가서 소교주를 돕고 싶습니다.”

비사인은 당장 달려가서 검무극을 돕고 싶었다. 다른 의미 다 제쳐두고서, 그냥 친구로서.

그 말에 백자강이 허락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너도 알다시피 당대의 천마신교는 역대 가장 강한 힘을 지녔다. 검우진은 결코 그 힘을 썩히지 않을 거다. 이번에 적들을 상대하면서 그 힘이 줄어든다면 우린 환영할 일이지.”

백자강은 마교의 힘이 쇠퇴하길 바라고 있었고, 그런 마음을 제자에게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지금 상대하는 그 배후들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적 앞에 서야 하겠지.”

백자강이 맹주전의 입구를 쳐다보며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마교주는 반드시 저 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오려 할 거다. 너는 그 순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비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까.

“세월이 흘러 네가 그렇게 믿는 소교주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다고 너는 확신할 수 있느냐?”

비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절대 돕지 말라고 할 거 같았는데. 백자강은 흔쾌히 허락했다.

“뭐,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당장 친구는 도우러 가야지. 다녀오너라.”

생각지 못한 허락에 비사인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전 가지 않겠습니다.”

그 사이 마음을 바꾼 것이다. 백자강이 가만히 제자를 응시하며 물었다.

“이유는?”

“제가 돕지 않아도 그 친구는 살아남을 겁니다.”

“무림의 생존본능이 탄생시킨 사람이라서?”

“아뇨. 이번에 호위들과 귀영대 무인들도 데리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검무극에 대해 모든 걸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그들을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면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럼 아까는 왜 도우러 간다고 했느냐?”

잠깐 대답을 망설이던 비사인이 이내 솔직히 말했다.

“그 친구를 위해서라기보단 저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너를 구하러 왔다. 그 생색을 내고 싶었습니다. 지금껏 신세 진 것이 너무 많아서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습니다.”

비사인의 시선이 앞서 백자강이 쳐다봤던 맹주전의 입구를 향했다.

“맹주님 말씀을 듣고 나니 지금은 그런 생색이나 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저 문을 튼튼히 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사인이 투지를 뿜어냈다. 한 시라도 아껴서 더 수련하고 사도맹을 위해 투자해서.

“마교주가 맹주님 자리에 앉는 일은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비사인의 의지에 백자강은 예전부터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전했다.

“잊지 마라, 사인아. 우리의 몸에 사파의 피가 흐르는 걸 감출 수 없듯이 어디까지나…….”

백자강의 그 작은 눈에서 예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교는 마교다!”

내게는 이미 수없이 많은 별이 있으니

늦은 시간에도 은월의 작전실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기에 군사들은 날아드는 작은 보고에도 촉각을 기울였다.

그들은 무림맹과 사도맹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중원 각 문파의 움직임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특히 검무극의 이동 경로에 있는 모든 움직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렸던 보고가 날아들었다.

“소교주님께서 약속 장소에 무사히 도착하셨습니다.”

소교주와 마존들의 깃발이 동정호에 놓였다.

소천(小天).

통천각은 검무극의 깃발에 소마라고 적었지만, 은월에서는 소천이었다. 고월이 정한 이름이었다. 그에게 검무극은 하늘과 다름없었으니까.

‘드디어 도착하셨구나.’

지금껏 소교주가 수없이 출교했지만, 이번만큼 고월이 긴장한 적은 없었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거 같은 불안감이 끝없이 그를 자극했다. 그래서 사마명을 찾아갔던 것이고.

그때 그곳에 뜻밖의 사람이 방문했다.

“총군사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그곳으로 사마명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군사님.”

그가 이곳에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진작 찾아온다는 게 늦었네.”

사마명의 손에는 군사들을 위한 음식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참으로 뜻밖이었고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은월의 군사들은 더욱 감격했다.

천마신교의 총군사가 직접 자신들을 위해 음식을 가져온 것이니까.

“감사합니다, 군사님.”

고월이 군사들을 대신해서 인사하자 사마명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 구경 좀 시켜주게.”

“아마 구경하실만한 게 별로 없으실 겁니다. 여긴 철저히 통천각을 본떠서 만든 곳입니다. 소교주님께서 이 무림에서 가장 완벽한 정보 작전실을 옮겨오셨지요.”

고월의 칭찬에 사마명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말로만 하는 칭찬이 아니었다. 정말 내부는 통천각을 옮겨온 것처럼 닮아 있었다.

내부를 둘러보던 사마명의 시선이 중원 지형도의 깃발을 향했다. 동정호에 다다른 깃발들. 통천각에서도 그 깃발들은 같은 자리에 옮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부를 안내한 후 고월은 사마명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하려 했다.

“들어가시죠.”

“오다 보니 바깥 밤공기가 좋더군. 우리 나가서 이야기하세.”

“네, 그러시지요.”

두 사람이 은월 건물을 나왔다.

시원한 밤공기를 쐬며 천마신교 내원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마명이었다.

“마화는 피우지 않을 거네.”

그렇게 예상했는지 고월은 놀라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교주님 자존심 때문이 아니네.”

사마명은 검우진이 왜 마화를 피우지 않으려 하는지 그에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고월이 물었다.

“이걸 알려주려고 오신 겁니까?”

“그렇네.”

고월이 의아한 눈빛으로 사마명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보내도 되는 일이었고, 아니 그냥 있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마명이 그 이유를 밝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만큼은 교주님이 소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난 총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게 이것이라 생각하네. 내가 모시는 수장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아는 것. 똑똑한 머리? 냉철한 판단력? 그건 다 나중 일이지.”

고월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귀한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총군사라고 표현해 준 것도 고마웠다. 자신을 차기 총군사로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개인적으로 너무나 값진 순간이었다.

“너무 작전실에만 있지 말고 이렇게 바람도 쐬러 나오게. 나와서 하늘도 올려다보고.”

하늘을 보란 말을 들으니 고월은 검무극이 생각났다. 소교주님도 지금 저 밤하늘을 보고 계십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던 그때였다.

총총한 별들 사이로 유난히 밝은 별이 있었다.

그 별을 보던 사마명이 깜짝 놀라며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헛!”

그의 놀람에 고월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마명의 표정에 점점 불신이 강해졌다. 혹시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그 별빛은 그대로였다.

사마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천살성(天殺星)이 출현했네.”

고월도 깜짝 놀랐다.

천살성.

무림에 대살성이 등장할 때 빛난다고 알려진 대흉성(大凶星)이었다. 그냥 불길한 정도가 아니라 천살성이 출현하면 무림이 피바다가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저 별이 천살성입니까?”

고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마명은 자신이 보고도 믿기지 않았기에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했다. 천문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닌 그가 다른 것도 아니고 천살성을 몰라볼 리 없었다.

“맞네. 분명 천살성이네.”

“천살성을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놀랍게도 사마명 역시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네.”

책으로 배우고 전해 듣기만 했던 천살성이었다.

사마명은 문득 지난번 고월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소교주가 감지하고 있는 그 위험이 설마?

“소교주가 걱정했던 것이 이것이었을까?”

고월은 지금까지 흐릿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대체 소교주는 어떻게 천살성이 출현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이건 단순히 천문에 밝은 정도가 아니다. 소교주는 천기를 읽은 거다.

“난 교주님께 알릴 테니, 이 사실을 즉시 소교주께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문득 사마명은 고월이 어느새 안정을 되찾았음을 느꼈다.

“자넨 걱정되지 않나?”

“오히려 안심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검무극 때문이었다.

“소교주님이 정확히 예상하신 거잖습니까?”

검무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 소교주님이시라면 천살성을 타고난 자를 막아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사마명은 긍정적인 군사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부정적인 결과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 군사였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월의 저 긍정적인 마음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고.

지금껏 천마신교를 지켜온 것은 최악을 먼저 생각하는 자신의 대비책이었으니까. 마화는 피우지 않더라도.

“당장 마가촌부터 비워야겠네.”

* * *

“동정호에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밤이었기에 호수에 떠 있는 배들의 등불이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하얀 깃발을 매단 배를 찾아오라고 했어요.”

천화루주가 신녀궁주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동정호에 떠 있는 배들 중 한 척이었다.

검무극이 천화루주와 마존들, 이안과 장호, 그리고 귀영대 조장들을 옆으로 불렀다.

“오늘 만남은 두 가지 경우가 될 겁니다. 진짜 신녀궁주가 은밀히 전할 말이 있어서 루주님을 부른 경우, 아니면 암흑궁주와 함께 함정을 만들어 둔 경우. 신녀궁주가 독자적으로 만나자고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동정호에서 뱃놀이 하고 돌아가면 되겠죠.”

하지만 천화루주는 한 가지를 걱정했다.

“신녀궁주는 저 혼자 오라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함께 오면 만나지 않겠다고.”

그녀의 걱정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이 제게는 제발 다 데려와 달라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검무극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설령 신녀궁주가 루주님께 뭔가를 알려주려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해도, 암흑궁주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암흑궁주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는 인물이라는 걸 지하 무덤에서 확인했다. 그는 검왕의 마음을 이용해서 십이지왕의 영혼을 불러왔으니까.

만약 처음부터 신녀궁주와 손을 잡고 왔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을 터, 그녀의 일탈을 놓칠 리가 없다.

“지난 여러 싸움을 통해 암흑궁주는 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저와 소마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지요.”

어찌 암흑궁주가 모르겠는가? 극악소마와 함께했던 그 뜨거운 싸움들을. 어쩌면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마존이 극악소마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절대 이 자리에 천화루주님만 혼자 보내지 않는다는 걸, 암흑궁주도 알고 신녀궁주도 알고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이 자리가 함정이든 아니든 상대는 루주님이 혼자 올 거란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겁니다.”

듣고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신녀궁주가 독자적으로 만나자고 한 것이고, 암흑궁주가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혼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쉬운 쪽은 먼저 연락해 온 신녀궁주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가더라도 그녀는 만남을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 검무극은 상대를 꿰뚫어 보고 있었고 결론은 명쾌했다.

천화루주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럼 그 자리에는 소교주님과 저만 가나요? 아니면?”

“아뇨, 마존분들 중에서 한 분과 함께 갈 겁니다.”

당연히 극악소마를 데려갈 줄 알았는데.

“섭혼마존께서 저와 함께 가시죠.”

검무극이 함께 가자고 한 사람은 섭혼마존이었다. 그냥 감정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상대는 암흑마공을 쓰는 자입니다. 그 암흑마공에 가장 강한 사람이 저와 섭혼마존님이시죠.”

물론 마불도 암흑마공에는 강했지만, 그는 외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섭혼마존은 기뻤다. 그냥 함께 데려온 정도가 아니라 중책을 맡기고 있었다.

“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검무극의 지시가 계속 이어졌다.

“장 군주님.”

“네, 소교주님.”

“장 군주께서는 마군들과 함께 호숫가 근처에서 대기해 주세요. 적들이 이미 마군이 왔다는 걸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움직이십시오.”

장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네, 알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든든한 그들이었기에 장호와 마군들은 걱정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다음으로 이안과 네 조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귀영대와 호위대는 남녀 짝을 이루거나 삼삼오오 짝을 이뤄서 밤 나들이를 온 사람들로 위장한다. 그대들은 놈들이 매복한 흔적을 찾도록. 만약 이곳이 함정이라면 분명 어딘가에는 놈들의 흔적이 있을 거다. 발견하면 곧장 마군에게 전하고 함께 움직이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세 마존에게도 역할을 맡겼다.

“마불님과 취마님은 오랜만에 뱃놀이 어떠십니까?”

배를 타고 나와서 오늘의 만남이 이뤄지는 배 근처를 지켜달라는 부탁이었다.

취마는 호수에 배 띄워 놓고 술 마실 생각에 신이 났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뱃놀이에 딱 좋은 술을 준비해 왔지.”

검무극이 끝으로 극악소마에게 역할을 맡겼다.

“소마님이 이번 작전을 지휘해 주십시오.”

외부에서 전체 상황을 아우르며 변수에 대응하는 작전 지휘관의 역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알겠습니다.”

극악소마는 이 명령을 천화루주는 자신이 지킬 테니, 귀영대와 마군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가 담긴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검무극이 특별히 귀영대와 호위들에게 말했다.

“잘 들어라. 내 마도에서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을 우선시해라. 적을 놓쳐도 상관없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건 다치거나 죽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날 걱정하지 마.”

수하들을 위하는 검무극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자 취마가 슬쩍 끼어들었다.

“우리도 그래도 되지?”

검무극이 마존들을 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우리 마존분들은 개인의 안전보다 임무를 우선시해 주십시오. 절대 적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두고두고 놀릴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 걱정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안전보다 소교주가 우선입니다!”

극악소마의 눈구멍 속의 두 눈이 환하게 웃었을 뿐, 다른 세 마존들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검무극이 모두를 둘러보며 힘차게 말했다.

“자, 그럼 이번 일 무사히 끝내고 뱃놀이나 하죠!”

그렇게 본격적으로 작전을 개시하려던 그때.

하늘을 올려다보고 오늘의 작전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원하던 천화루주가 놀라서 소리쳤다.

“저 별은!”

너무 놀란 그녀가 두 눈을 부릅떴다. 평소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모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긴장했다.

“천살성이 출현했어요!”

천살성이란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다들 천살성이 출현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강호를 피로 물들이는 대살성이 등장한다는 의미인데.

문제는 천살성이 뜻하는 인물이 암흑궁주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미 이 시대를 계속 살아오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악인의 출현.

마존들이 심각한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았고, 귀영대 조장들도 이안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검무극 덕분에 작전 직전에도 더없이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일순간 차갑게 식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말없이 천살성을 바라보았다. 오직 검무극만이 저 천살성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그가 최대한 늦게 나오기를 기대했다.

아직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루지 못했고, 마지막 구 초식도 익히지 않았기에.

하지만 검무극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달려왔으니까. 온 힘을 다해 산다는 건 이래서 좋다. 그 엄청난 적을 두고서도 떨리지 않았으니까.

천살성을 향했던 검무극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했다.

“별은 하늘에만 있는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에도 별이 있습니다. 웃는 별도 있고, 취한 별도 있고, 빛나는 별도 있고, 괴이한 별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별도 있고 든든한 별도 있습니다. 저 별은 하나지만, 우린 여러 개입니다.”

그 말에 취마가 취한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 가운데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있지.”

그때 듣고 있던 극악소마가 불쑥 말했다.

“소교주님은 별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그 별들을 빛나게 해준 저 하늘 그 자체이시지요.”

검무극이 아니었으면 자신들이 별이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 극악소마였다.

천살성도 술 취한 취마의 장난은 막지 못했다.

“하늘이 아니라 어둠이겠지요, 어둠. 어둠이 별을 밝히는 법이니까요. 만날 늦게 오는 시커먼 어둠.”

하늘이든 어둠이든, 그 누구도 검무극이 모두를 빛나게 해줬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들 검무극 때문에 많이 변했고, 별처럼 빛나고 있는 요즘이니까.

검무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난 척을 했다.

“역시! 우리 소마님만이 제 진가를 알아주시는군요. 자, 그런 의미에서 하늘인 제가 저 천살성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천살성을 향했다.

“내게는 이미 수없이 많은 별이 있으니…….”

맑고 깊은 검무극의 두 눈이 천살성보다 더 강렬하게 빛났다.

“너는 내 세상에서 빛을 잃어도 좋다.”

내 아들을 위해서

서대룡이 황천각 조사관들과 집행 무인 전원을 이끌고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백여 명이 넘는 그들이 마가촌으로 들어서자, 저잣거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당연히 어딘가로 떠나는 행차인 줄 알았는데.

집행 무인들이 집마다 들어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지금부터 집을 비웁니다. 모두 필요한 짐만 간단히 챙겨서 나오시오!”

집행 무인들이 마가촌의 집들을 돌며 사람들을 모두 나오게 했다.

그들은 저잣거리의 상가들은 물론이고 외부에 있는 거주지까지 모두 비우기 시작했다. 마가촌은 보기보다 규모가 큰 곳이어서 이곳에 사는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미리 철수 계획을 세워온 황천각 무인들이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흩어져서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서대룡은 풍류주점을 직접 맡았다.

조춘배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식사하던 이들도 모두 놀랐다.

“한동안 본교에서 마련한 거처에서 지내야 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겁니까?”

놀란 조춘배의 물음에 서대룡이 차분히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세부 사정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서 짐 챙기시죠.”

손님들이 저마다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나마 마가촌 사람들이 덜 놀란 것은 이 일을 집행하러 나온 이들이 황천각 무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검무극이 마가촌에 황천각 지부를 세운 후 마가촌 사람들은 그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황천각 덕분에 주민들을 무시하거나 행패 부리는 무인들이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조춘배는 놀라고 당황한 와중에도 한 사람을 챙겼다. 마교에 변고가 생겼다는 생각에.

“소교주님은 무사하시죠?”

서대룡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무사하십니다.”

대답과는 달리 서대룡은 내심 검무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급히 내려온 명령이라 정확한 사정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본단이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마가촌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리라.

본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밖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교주님! 부디 조심하십시오.’

처음에는 검무극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었다.

하지만 지금은 따라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겼다. 이곳에서 자신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들과 아내, 처제들.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가족만은 지킬 것이다.

조춘배가 간단히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겨서 나왔다. 입구를 나오기 전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걱정스럽게 바라본 곳은 이 층의 벽이었다. 부디 자신이 돌아왔을 때 저 벽이 무사히 남아 있기를.

조춘배가 나왔을 때, 먼저 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대피한 적이 처음이기에 모두 긴장하고 겁을 먹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며 수군거렸다.

조춘배는 한 가지만은 다행이라 여겼다. 마침, 아내 양인이 멀리 출가한 자식네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자신이야 살 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지만,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건 평생 고생만 한 아내고 또 자식들이다.

“외지에서 오신 분도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마가촌 식솔 중에 외부로 나간 사람이 있으면 본 각의 무인들에게 어디에 갔는지 알려주시오. 우리가 따로 기별해서 당분간 돌아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천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데려가는 일이었음에도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무도 집행 무인들에게 따지거나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당연히 마인들이 무서워서 그렇다고 여기겠지만, 그래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들을 위해 준 황천각 무인들이나, 소교주와의 깊은 유대감이 없었다면 마교에서 자신들을 해치려고 데려가는 것이라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었다.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이러는 것임을.

“자, 모두 본단으로 가시지요.”

황천각 조사관들이 각 집을 돌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들이 모두 집행 무인들을 따라서 천마신교로 들어섰다.

마가촌 주민들은 천마신교의 웅장한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놀랐다. 이곳 안까지는 처음 들어와 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인들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임시 천막으로 지어진 숙소 수백 개가 세워져 있었다.

“잠자리가 불편하더라도 참으시오.”

숙소 안에는 그들이 당분간 버틸 수 있는 물과 식량, 그리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용품들이 제공되어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쪽 푸른색 천막으로 가서 이야기하면 조치해 줄 거요.”

그들이 교로 들어서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검우진과 사마명이었다.

고월과 헤어진 사마명은 그길로 교주에게 가서 천살성이 출현했다고 보고했다.

검우진은 반응은 사마명이 딱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가?

사마명은 안다. 교주는 천문이나 천기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인간의 의지와 무공의 힘을 믿었다.

그래, 교주는 그러한 대살성이 등장한다면 오히려 반가워할 사람이지.

―이런 시기에 천살성이라니. 참으로 공교로운 일입니다.

그 말에 검우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화를 피우자는 말을 엊그제 들었는데, 이제는 천살성이 등장했다.

―그래서 마가촌을 비웠으면 합니다. 만약 그자가 본단으로 오게 된다면 반드시 마가촌을 지날 터, 천살성을 타고난 자라면 그들을 몰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마명은 조심스러웠다. 그깟 일로 이 무슨 소란이냐고 할 법도 했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하늘에 천살성이 출현했다고 그 대살성이 당장에 나타날 리는 없었으니까. 내일 올지, 한 달 후에 올지, 내년에 올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검우진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게.

그 흔쾌한 허락도 예상 밖이었는데, 교주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을 모두 본교로 데려와서 보호하게.

사마명이 놀란 얼굴로 쳐다봤을 때, 교주는 이렇게 말했다.

―마가촌에 있는 이들을 다른 곳으로 떠나게 하면 우리가 대비하고 있다고 소문이 나지 않겠나? 조용히 처리하게.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이곳에 올 적이 혹시라도 소교주에게 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임을.

―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그들이 교내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오!”

“저길 봐!”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서 한 무리의 마인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집행 무인이나 교내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마인들보다 훨씬 강렬한 기도를 드러내는 마인들이었다.

그 선두에 있는 사람을 보자 근처에 있던 집행 무인들이 공손히 인사했다. 그 모습에 마가촌 주민들도 고개를 숙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사람이 선두에 있었다.

그는 바로 커다란 주먹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근육을 지닌 권마였다. 권마는 그 무서운 얼굴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감만으로도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했다.

권마 뒤로 동권문의 철권들이 따라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철권 중에서도 가장 강한 흑권들이었다. 흑권을 지휘하는 사람은 바로 차기 권마 천소희였다.

흑권 하나만 해도 어지간한 무인들은 상대가 안 되는 고수인데, 그들이 한꺼번에 다 나오자 그 위압감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들의 눈빛과 기세는 마치 전쟁에 나서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흑권들은 연무장에 도열했고 권마는 검우진 앞까지 계속 걸어 나왔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왔는가?”

검우진은 권마가 새로운 경지에 들어선 것을 축하했다.

“축하하네.”

권마는 그 큰 주먹으로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검우진이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것을 권마는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었다.

지켜보던 마가촌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먼발치에 서 있던 사람이 교주였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사마명은 검우진과 권마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그들의 모습이 지금 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그때 다시 그곳으로 다른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가촌 주민들은 이번에는 또 다른 느낌으로 기가 눌렸다.

앞서 권마나 철권을 보면서는 입이 쩍 벌어져서 감탄했다면, 이번에는 두려운 마음에 벌어진 입을 꾹 다물고 침만 삼켰다.

이번 역시 선두에 선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더없이 앳된 얼굴의 미소년이었지만 이 무림의 가장 강력한 전쟁 억제력, 그는 바로 독왕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열두 개의 독주머니는 평소에 차는 귀여운 십이지신이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귀여워서 오히려 두려움은 주는 그림이었다면, 이번에는 대놓고 무서운 그림이었다.

열두 개의 주머니에는 무서운 모습의 십이지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눈의 쥐는 보는 것만으로도 징그러웠고, 호랑이는 금방이라도 주머니에서 튀어나와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것처럼 보였다.

이 독주머니는 바로 독왕이 전쟁에 나설 때 차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지금 독왕이 어떤 마음으로 나섰는지를 독주머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독왕 뒤로 아홉 개의 독주머니를 찬 상선이 뒤따랐고, 그 뒤로 천독림의 독아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허리에는 제각각 다른 숫자의 독주머니를 차고 있었는데 최소 다섯 개 이상의 독주머니를 찬 독아들만 나섰다.

독아들이 철권들처럼 도열했고, 독왕이 검우진에게 걸어갔다. 교주를 대하는 독왕은 평소 딴 데 정신이 팔려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게.”

너무 앳된 외모였기에 검우진과 권마 옆에 서자 자식이나 조카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권마 못지않았다.

그들 두 사람만으로도 긴장감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그곳에 또 다른 이가 등장했다.

압도적인 기도를 드러내며 등장한 이는 바로 풍천교주였다.

평소 실없는 소리를 하던 풍천교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그는 새외의 절대자 풍천교주의 모습이었다.

검우진 앞까지 걸어온 그가 정중히 인사한 후 물었다.

“그동안 얻어먹은 밥값을 하려 하는데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풍천교주의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사마명은 내심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검우진의 성격이라면 좋은 말로 사양했을 것이다. 이번 일은 본교의 일이니 편히 쉬라고.

한데 무슨 생각인지 그가 돕겠다는 걸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번에 또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등장한 세 고수 중 누구에게도 기세나 존재감에서 밀리지 않는 사내.

질끈 머리를 묶은 채 한 자루의 검을 차고 등장한 사람은 바로 검왕이었다.

말없이 걸어 나온 그는 신을 신고 있었다.

교주를 볼 때면 벗고 있던 신을 다시 신는 그였는데, 이번에는 아예 신고 나온 것으로 볼 때 교주와 함께 싸우겠다는 의지를 신발로 내보이고 있었다.

검왕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추자 검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나중에 검무극이 힘들어할 때 도와주겠다고 교주와 약속한 이상, 그때까지 천마신교에서 검무극과 함께 지내야 한다. 이제 천마신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자기 일이었다.

그렇게 네 고수들이 등장하자 검우진이 사마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화를 피우게.”

사마명은 깜짝 놀랐다. 두 마존을 부르고 풍천교주와 검왕의 도움을 받아들인 것까지는 이해했다.

한데 마화를 피운다고? 본교가 난공불락이 되어 버리면 저들이 소교주에게 갈 것이라 피우지 않겠다고 한 교주였는데.

그 순간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아! 교주께서는 이들 네 고수를 이끌고 본단을 나가서 마가촌에서 적을 막으려 하시는구나!’

마가촌을 비우라고 허락했을 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거다.

이 사실은 적이 알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알기를 바라는 일일 것이다.

천마가 본단에서 나와 소수의 인원과 함께 마가촌에 있다.

적에게 그쪽으로 오라는 것이다.

사마명은 검우진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본단으로 쳐들어올 정도의 고수라면, 그리고 그가 천살성을 타고난 인물이라면, 수하들이 나서봐야 괜한 희생만 나올 것이다. 상대는 수하들을 죽여가며 싸움에 이용할 거다.

검우진이 수하들을 모두 희생시켜 적의 힘을 빼는 사람이라면 교에서 놈들을 막는 것이 나은 선택이겠지만, 교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이 선두에 서는 남자, 그런 사람이 바로 교주다.

누구보다 교주를 잘 알기에 사마명은 차분히 그의 뜻을 따랐다.

“네, 뒤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검우진과 사마명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교주님.’

검우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걸음을 옮겼다.

검우진이 걸어 나갔고 권마와 독왕이 좌우에서 뒤따라 나갔다. 그 뒤를 풍천교주와 검왕이 뒤따랐다.

그들이 걸어 나가자 마인들과 마가촌 주민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사마명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 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화를 피워라.”

수행 군사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둥! 둥! 둥!

천마신교 곳곳에서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악귀상이 높게 든 화로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 준비된 진법과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가촌 주민들의 천막이 있는 곳에도 진법을 펼쳐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둥! 두둥! 둥!

그렇게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뀌기 시작한 천마신교에서 다섯 사람이 걸어 나왔다.

단 한 사람만 나가도 중원을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원래라면 검우진은 혼자 나와서 상대를 맞이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옛날을 떠올리며 권마와 둘이 나왔거나.

그런데도 다 데리고 나온 것은 검무극 때문이었다.

“아들 녀석이 내내 두려워했던 존재가 있었네.”

검우진 역시 이번 기회에 확인했다. 아들이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노력했는지, 왜 그렇게 강해지려고 애썼는지 이번 천살성의 출현으로 알 수 있었다.

아들은 이 존재가 출현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뒤에 선 네 사람 역시 검무극과 너무나도 깊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검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녀석이 그렇게나 두려워했던 존재라면, 소홀히 생각해선 안 되겠지.”

아들을 위한 배려이자 믿음이었다.

네가 그렇게 두려워한 적이라면, 나도 신중히 상대하마.

검우진이 뒤에 선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싸움이라면 어디 가서 절대 빠지지 않는 이들. 이 자리에서 네가 두 번째가 아니고 세 번째라고 하면 발끈할 이들.

“이 싸움은 본교를 위한 싸움도 아니고, 무림을 위한 싸움도 아니네.”

검우진은 차분한 눈빛으로 담담히 덧붙였다.

“내 아들을 위해서 그자를 지워버릴 생각이네.”

아무리 바빠도 한마디의 여유는

둥! 둥! 두웅!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천마신교에 마화가 피어올랐다.

서대룡이 와서 마가촌 사람들에게 알렸다.

“지금부터 천막 외부에 진법이 펼쳐질 겁니다.”

무인들의 외침에 마가촌 주민들은 모두 긴장했다. 진법이 눈앞에서 발동하는 모습을 보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스스스스.

다들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천막 주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슈우우욱!

안개로 이뤄진 기둥이 곳곳에서 솟아올랐고, 바닥에서는 안개가 거미줄 같은 길을 만들며 흘렀다.

안개 속에서 뭔가가 일렁거렸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말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곳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아!”

신비로우면서도 오묘한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오는 장관이었다. 서대룡 역시 진법이 펼쳐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스스스스.

그렇게 진법이 완전히 펼쳐지자 주위는 이제 평범하고도 옅은 안개만이 흘렀다.

“환무미로진(幻霧迷路陣)이 펼쳐졌습니다. 외부에 침입자들이 있어도 이곳까진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서대룡의 말에 마가촌 사람들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진법까지 펼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려는 모습에 감동했고, 진법까지 펼쳐야 하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펼쳐진 것은 환무미로진만이 아니었다.

천마신교 곳곳에 다른 성격의 진법들이 펼쳐졌다. 환무미로진이 그 안에 든 사람을 지키는 데 최적화된 진법이라면 다른 진법들은 그야말로 살상을 위한 진법들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쿠르르릉.

철컹, 철컹.

바닥이 열리면서 천마신교 본단 곳곳에 새로운 장치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떤 건 석등이었고, 또 어떤 것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게 만든 돌의자였으며, 또 어떤 것은 난간이었고, 또 어떤 것은 동물 모양의 석상이었다.

그야말로 평범해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 하나하나는 모두 치명적인 살상력을 지닌 기관 장치들이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곳.

높이 치켜든 악귀상의 손바닥 위에 거대한 화로가 있었고 마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옆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검우진과 네 고수가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검무양이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믿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마화를 피워야 할 정도의 상황이 펼쳐진 게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나가지 못하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일수록 더 꿋꿋이 자기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동생 녀석이 있어야 하는데.

녀석이라면 대체 누가 누굴 걱정하냐며 실없는 소리를 하겠지. 아니면 이렇게 정곡을 찔러 버리거나.

형이 지금 우울한 게 아버지를 걱정해서야? 아니면 형과 함께 나가자는 말을 안 해줘서 섭섭해서야? 아니면 함께 나갈 실력이 안 돼서 화가 나는 거야?

녀석은 틀림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발끈할 말인데, 동생에게 저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가져서는 안 될 이 한심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셨습니까?”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기척 없이 어느새 악귀상의 손바닥 위로 올라선 사람은 바로 휘였다.

그가 자신을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검무양은 내심 놀랐다.

“아버지께서 보내셨습니까?”

자신을 데려오라고 한 것일까? 그런 기대를 했지만.

“아닙니다.”

“그런데 왜?”

평소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도 아니고. 또 무엇보다 휘가 아버지 곁을 떠나 있었다.

의아해하는 검무양에게 휘가 뜻밖의 말을 전했다.

“지금 제 심정과 가장 비슷한 분이 대공자님이실 거 같아서요.”

교를 나서기 전에 검우진은 따로 휘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넨 교에 머무르게. 오랜만에 옛날 생각하며 싸워볼까 하네.

옛날이란 권마와 함께 중원을 돌아다니던 그때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 휘를 비롯해서 호위들은 따라오지 말라는 의미.

―교주님!

이름을 부르는 그 한마디에 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에 깃든 검우진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 싸움은 권마와 독왕, 풍천교주와 악군학이 함께 나가는 싸움이었다.

만약 호위인 자신까지 나서야 할 상황이라면? 이미 패한 싸움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검우진이 자신을 남기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교에 남아 있는 검무양을 부탁한다는 심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휘가 정중히 대답했다.

―교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고집을 부렸을 거다. 하긴 다른 싸움이었다면 교주가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겠지.

휘가 검무양에게 말했다.

“교주님께서 저를 남겨두고 나가셨습니다.”

그건 놀랍지 않은데, 휘가 순순히 그 명령을 들은 것은 놀라웠다. 아버지가 남으라고 해도 절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인데.

“아버지와 떨어지신 게 이번이 처음 아니십니까?”

“네, 처음입니다.”

생각보다 담담한 휘의 모습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됩니다.”

어찌 걱정이 안 되겠는가?

“평생 이보다 더 걱정한 적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요.”

“그런데 왜 따라가지 않으셨습니까? 휘 무인이시라면?”

명령을 어기고 몰래라도 따라갈 사람이었는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아마 이래서였을 거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교주님의 뜻에 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할 거 같았습니다.”

휘의 솔직한 대답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만큼 이 싸움이 크게 다가온 것이리라. 지금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순간만큼은 솔직히 동생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동생이 아니라 제가 후계자였다면, 구화마공을 익혔을 테고 아버지와 함께 나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 아쉬움을 휘가 단호히 잘라냈다.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네?”

“구화마공을 익히셨다 해도 교주님은 두고 나가셨을 겁니다.”

“어설프게 익혔다면 그랬겠지요. 하지만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뤘다면 데리고 나가셨을 겁니다.”

하지만 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성이 아니라 십이성 대성을 이뤘어도 데리고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검무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휘를 쳐다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네 사람도 데리고 나가지 않았어야지.

휘가 차분한 눈빛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밝혔다.

“싸움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과 싸우러 가는데 자식을 데려가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제가 자식을 키워보진 않았지만, 교주님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대공자님을 두고 나가신 것은 무공 실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섭섭해 마십시오. 그건 출교하신 소교주님이 계셨더라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휘의 이런 말이 참 놀랍다. 사적인 일로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건 것도 놀라운데, 이런 위로를 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동생은 평생을 은신 속에서 살아온 이 고독한 사람마저도 바꿔놓은 것이다. 원래라면 이 말만 하고 말았을 사람을.

“교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저와 천마전 호위대가 대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교주는 아들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진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는 법이다.

“휘 무인, 감사합니다.”

앞으로 지켜주겠다고 해서 고맙다는 말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위로가 큰 힘이 되어서였다.

“별말씀을요.”

휘가 정중히 인사하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다. 주변 어디에서도 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주위에 있을 텐데.

휘가 사라지고 잠시 후 악귀상 저 아래에서 누군가 말했다.

“목 아파요. 언제 내려오나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철방의 곽영이었다.

“저는 거길 올라가질 못해서.”

검무양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려 가볍게 그녀 앞에 내려섰다.

“심란하실 거 같아서 왔는데, 먼저 챙겨주러 오신 분이 계셨네요.”

그녀가 철방에서 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을 때, 축하주를 함께 마셨다.

취한 그녀는 신이 나서 앞으로 친구 하자며 고래고래 소리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목숨을 건 주사였다. 다행히 검무양은 별일 없이 넘어가 주었다.

“지금 바쁘지 않소?”

마화가 피어오르면 철방도 비상이 걸린다. 철방은 천마신교의 모든 마인들의 무기뿐만 아니라 기관 장치에 들어가는 무기들까지 제공하는 곳이었기에.

“오히려 저는 평소보다 한가하네요.”

아직은 무림맹에서 온 자신을 믿지 못했기에 이런 비상 상황에서는 오히려 아무 일도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자기 인생을 바꿔 준 고마운 사람에게 말 한마디 할 정도의 여유는 있게 살아야죠. 그런 의미로 주제넘은 말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하시오.”

곽영이 검무양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주님은 무사하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대공자님께서 제일 많이 걱정하고 계실 거 같아서요. 적이 감히 오기나 하겠어요? 오다가 방향 틀고 다른 곳에 갔을 거예요.”

검무양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약속 꼭 지키시오.”

“무슨 약속요? 아! 월봉날 술 꼭 삽니다.”

“그건 당연하고.”

“네? 제가 또 무슨 약속을 했죠?”

곽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마검만큼 멋진 보검, 직접 만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소?”

“제가요?”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해서 별말을 다 했던 모양이다.

“지켜요, 지킵니다!”

검무양이 그녀를 보며 옅게 미소 짓더니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멀어지자 곽영이 나직이 말했다.

“힘내요, 친구. 나도 힘내서 언젠가 그 약속 진짜로 지킬 테니까요.”

* * *

동정호에 수많은 배가 떠 있었다.

검무극과 천화루주, 그리고 섭혼마존이 탄 작은 조각배도 물에 비친 달빛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는 퉁소 소리도 들려왔고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다들 심야의 뱃놀이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운데 앉아 노를 젓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 양쪽으로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주위에 하얀 깃발을 매단 배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저 멀리 반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취마와 마불이 탄 배가 있었다. 어둠 속에 멀리 있었지만 검무극에게는 또렷이 보였다.

마불은 최대한 몸에서 나는 빛을 약하게 줄인 상태였다. 거기에 그의 주변에 등불을 여러 개 달아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감췄다.

취마는 술을 마시고 있었고 마불은 아주 작은 연꽃을 호수에 던져 넣고 있었다.

마불이 사용하는 혈련(血蓮)이었다.

마불과 연결된 혈련은 동정호 곳곳을 떠다니면서 물 아래서 어떤 내력이나 특이한 기운을 감지했다. 수인이 숨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알 수 없는 것이 숨겨져 있으면 혈련이 그것을 감지해 내는 것이다.

반면 취마는 계속 술을 마셨다. 멀리서 지켜보던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취마가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주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을. 술을 마시지 않는 취마도 무섭지만, 만취한 취마는 정말 무서웠다.

검무극의 시선이 이번에는 호숫가를 향했다. 멀리 나왔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게다가 어두웠기에 아무리 고수라도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검무극은 보았다.

이안이 사 조장인 지한과 함께 연인인 척 걸어가며 주위에 수상한 것들이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반대쪽에서는 차이란이 몇 명의 삼 조원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들의 모습에 주위 남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차라리 대놓고 시선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조원들은 호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이 있으면 그 뒤쪽 숲에 숨어 있는 마군들에게 곧장 보고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화루주가 소리쳤다.

“저길 보세요.”

검무극이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배가 모습을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백 명을 태울 수도 있는 대형 선박이었는데, 검무극은 한눈에 그 배가 어떤 배인지 알아차렸다.

“부귀선(富貴船)입니다.”

천화루주와 섭혼마존도 들어본 적이 있는 배였다.

“저 배에 올라타면 내릴 때 부자로 내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요. 요즘은 부유한 사람만이 탈 수 있어서 부귀선이 되었지만요. 바로 수룡방(水龍幇)이 운영하는 도박선(賭博船)입니다.”

수룡방은 이곳 동정호 인근을 지배하고 있는 호남에서도 알아주는 방파였다.

수룡방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정호 인근의 이권에 개입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익을 주는 일이 바로 부귀선이었다.

그들은 중원의 여러 부자를 부귀선에 초대해 온갖 향락과 도박에 빠뜨려서 돈을 벌었다.

그때였다. 섭혼마존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기 위를 보세요!”

놀랍게도 부귀선의 돛대 꼭대기에 하얀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검무극은 물론이고 다른 두 여인도 놀랐다.

“부귀선에서 만나자고 했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배에 하얀 깃발이 걸려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이지 예상을 뒤집는 만남 장소였다.

드디어 신녀궁주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천화루주에 비해 검무극은 여유로웠다.

“이번에 제가 제대로 갖춰 나온 이유가 으스대기 위해서 아닙니까?”

검무극이 부귀선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저으며 말했다.

“도박장만큼 으스대기 좋은 곳도 없죠.”

잘도 혼자 왔겠소

검무극이 탄 조각배가 부귀선으로 다가가자, 갑판 위에서 무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대장이 있으시오?”

검무극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 여기 초대장.”

검무극이 날린 종이가 배 위에 서 있는 무인에게 날아갔다. 무인이 받아든 것을 확인하자 그것은 백 냥짜리 전표였다.

전표를 확인하는 사이에 어느새 검무극과 두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순식간에 소리 없이 날아오른 경공술만 봐도 상대의 실력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선주(船主)에게 안내하게.”

이 정도 실력이면 자신을 제압한 후 목숨을 위협해서 안내하게 해도 충분한데 돈을 주며 안내를 부탁한다?

“미리 선주님께 기별은 해야 합니다.”

“상관없네.”

“따라오시지요.”

세 사람은 무인의 안내를 받으며 배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던 섭혼마존과 천화루주는 의외라 생각했다. 검무극이 배에 타자마자 이 배를 운영하는 수장을 만나려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대청같이 큰 공간은 도박장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곳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 있었다.

배에 만든 도박장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오히려 육지의 어지간한 도박장보다 훨씬 시설이 좋았다.

여인들이 쟁반에 술잔을 들고 날랐고, 곳곳에 무인들이 서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지를 감시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려는 후회의 탄식, 기쁨의 외침, 분노의 욕설.

직접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상황이고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 일행이 그곳을 가로질러 걸어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자신의 패와 상대의 표정, 그리고 굴러가는 주사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무인은 백 냥의 위력을 발휘했다.

“이 배에는 이런 도박장이 일곱 개가 더 있습니다. 이곳은 가장 아래 등급인데 오백 냥을 가진 이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말이 오백 냥이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말도 못 하게 큰돈이었다.

좁은 복도를 걸어가던 무인이 철문을 두드렸다. 정해진 약속대로 문을 두드리자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그곳 역시 도박장이었다.

무인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아까 지나온 도박장이 오백 냥이 있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지금 이곳은 이천 냥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돈을 따서 오천 냥을 만들면 다시 윗방으로 올라갈 수 있지요. 아니면 애초에 오천 냥을 가지고 오거나.”

그런 식으로 계속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위 등급의 도박장으로 갈수록 판돈이 커졌다. 큰판에서 큰돈을 벌고자 하는 노름꾼들의 욕망을 이용한 구조였다.

내가 어디까지 가 봤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확실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천화루주는 다시금 의아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녀인데.

‘왜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힐끗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분명 검무극은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그나마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몇 개의 방을 지났다. 지금 지나는 방은 삼만 냥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는 방이었다.

부자들이 많으면 분위기가 여유로울 것 같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첫 방처럼 왁자지껄하진 않았지만, 액수가 높아지니 그 열기는 더욱 강렬했다.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액수와 관계없이 노름꾼은 노름꾼들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무인의 안내를 받으며 선주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부귀선을 책임지는 선주는 양동(楊洞)이었다.

다부진 몸을 가진 그는 수룡방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로 수룡방주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양동이 검무극과 천화루주, 그리고 섭혼마존을 살폈다. 그냥 딱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도박장에 오면서 출신이 뭐가 중요하겠소? 돈이 얼마나 있는지가 중요하지.”

“우린 출신이 더 중요하오. 잃은 돈을 다른 방식으로 되찾으려는 자들이 많아서. 확실한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배에서 내리셔야 하오.”

이미 신분을 밝힐 생각을 하고 왔다는 듯, 검무극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신교에서 나왔소.”

순간 양동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꾸밈없는 반응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암흑궁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걸 어떻게 믿소?”

어느새 검무극의 검이 양동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마기.

양동은 상대가 검을 뽑는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명색이 수룡방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고수인데!

‘절세고수!’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고수였다.

검이 뽑히는 것을 못 봤으니 다시 회수되는 모습 또한 볼 수 없었다.

양동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귀한 분들께서 이곳은 어쩐 일이신지요?”

“그대의 사업을 망치려고 온 건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시오. 오히려 그대의 사업을 망치려는 자를 잡으러 왔다고 봐야겠지.”

양동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눈치도 빠른 자였다. 그렇기에 가장 돈이 되는 부귀선 운영을 맡은 것이고. 적어도 눈앞의 마교 고수가 자신을 해치려고 온 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아차렸다.

“말씀만 하십시오.”

“귀빈실로 안내하게.”

순간 양동이 흠칫 놀랐다.

“귀빈실이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고? 우리가 누구인지 벌써 잊었나?”

섭혼마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부귀선에 오르기 전, 검무극이 으스대겠다고 했을 때 당연히 노름꾼들 사이에서 실력 발휘를 하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검무극이 으스대려는 상대는 바로 이 배의 주인이었다. 검무극의 행보는 그녀의 예상을 계속 벗어났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분명 조용히 잠입해서 제일 아랫방에서부터 분위기를 살피며 도박을 시작했을 거다.

아마 아직도 첫 번째 방에 있으면서 다른 노름꾼에게 두 번째 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있었을 거다.

한데 검무극은 이미 최고의 부자들만이 있는 방으로 가려는 중이다.

생각해 보니 소교주의 선택이 옳다. 어차피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면 사람이 없는 구석에서 보자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어디 조용한 배에서 만났겠지.

조용하게 보는 게 아니라면 가장 핵심이 되는 장소로 가야지. 설령 거기에 없더라도 거기서부터 아래로 훑고 내려오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섭혼마존은 이렇게 검무극의 일 처리를 배우고 있었다.

“그곳으로 안내하게.”

“그곳엔 왜 가려는 겁니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내어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는 거부들이었다.

그랬기에 양동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리 당신들이라도 그곳으로 데려갈…….”

검무극이 그의 말을 끊으며 신분을 밝혔다.

“나 천마신교 소교주다.”

양동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인이 감히 천마신교 소교주를 사칭할 리는 없을 테니.

무서운 상대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마교의 소교주일 줄이야!

“나는 도박을 싫어한다. 도박하는 사람도 싫어하고, 이런 도박장을 차린 자들은 더 싫어하지. 차라리 살인마는 당사자 하나만 죽이지만, 너희는 그 가족들이며 지인들까지 다 불행으로 몰아넣거든.”

이것이 평소 도박에 대한 검무극의 지론.

“그러니 날 그만 열받게 해. 조용히 내 일만 처리하고 떠날 거다.”

상대가 천마신교 소교주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디 조용히 처리해 주십시오.”

만약 문제를 일으키면 우리도 못 참습니다.

차마 이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래도 참아야 하니까.

양동이 직접 검무극과 두 여인을 데리고 귀빈실로 안내했다.

복잡한 선실을 돌고 돌아 비밀 문까지 통과하자 그곳에 귀빈실이 있었다.

“자, 새로운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검무극 일행을 향했다.

그곳에 하나의 큰 원탁이 있었는데 모두 일곱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노인도 있었고 중년인도 있었고 젊은이도 있었다. 모두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부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을 보는 순간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신녀궁주라는 것을. 어려서 궁을 떠난 그녀는 신녀궁주를 처음 보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화루주가 나직이 검무극과 섭혼마존에게 알렸다.

“저 사람이에요.”

과연 그녀는 신녀궁주 가예였다.

암흑궁주 앞에서 별자리를 보던 그녀가 이 도박판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다.

가예가 천화루주를 보며 말했다.

“왔나요?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뜻밖에 차분하고 밝은 어조였다.

“이거 해본 적 있나요?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이리 와서 한판 해요.”

천화루주는 그녀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도박판에 앉아 있을 줄 몰랐다.

천화루주 대신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검을 뽑았다.

“이 여자와 관계없는 사람은 지금 당장 나가도록. 남아 있으면 같은 편으로 간주한다.”

검에서 차가운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노름에 미쳤어도 이 정도 분위기 파악은 하겠지?”

검무극이 뿜어낸 마기는 평범한 이들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탁에 앉아 있던 이들이 벌벌 떨며 일어났고, 양동이 그들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양동은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했다. 이 귀한 사람들이 거기 함께 있다가 싸움에 휘말려 죽기라도 하면, 그래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부귀선은 그날로 끝이었다.

‘이들만 살리면 된다.’

양동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귀빈들이 그제야 화를 냈다.

“손님 관리 이렇게 할 거야?”

“죄송합니다. 그럴 사정이 있으니, 오늘만 특별히 이해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방 있지?”

이런 분위기에서도 집에 가려는 생각보단 도박을 이어 나가려는 그들이었다.

양동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자, 가시죠.”

양동이 그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지금 방 안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부호들이 계속 도박에 미쳐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방에 남은 사람은 가예 한 사람뿐이었다. 정말 그녀는 혼자 왔다는 듯,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검무극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혼자 있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믿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신녀궁주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제가 예상한 것보다 더 잘 생기셨네요.”

반면 검무극의 평가는 박했다.

“당신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뻔뻔하시오.”

“뻔뻔하다니요?”

“우리 루주님께 혼자 오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랬었죠.”

“지금까지 당신들이 저질러 온 짓들을 생각해 보시오. 그런데 혼자 오라는 말씀이시오? 그대를 본교에 혼자 오라고 초대했으면 잘도 혼자 왔겠소.”

가예는 그에 대해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천화루주가 천천히 걸어가서 신녀궁주 앞에 마주 앉았다. 두 여인이 서로를 응시했다. 예언을 받는 신녀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

이윽고 천화루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왜 나를 보자고 했나요?”

“그대는 소교주 만큼이나 성격이 급하네요.”

“당신들 때문에 몇 차례 풍파를 겪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당신들이란 말은 좀 이상하네요. 루주와 저는 우리라는 말로 엮여야 하는 사람 아닌가요?”

“그게 싫어서 어려서 떠난 겁니다.”

두 여인은 정중히 말을 주고받았지만, 보이지 않는 기세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천살성이 출현한 것은 알고 있겠지요?”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예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제가 새로운 예언을 받았어요.”

신녀궁주의 입에서 놀라운 예언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은 천살성을 타고난 사람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게 새롭게 내려온 예언이에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단연 가장 놀란 사람은 천화루주였다. 예언이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그녀였기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저 예언은 결국 소교주와 극악소마가 죽는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걸 왜 제게 알려주려는 거죠?”

“본궁의 예언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만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 검무극이 천천히 걸어가서 천화루주 옆에 나란히 앉으며 말했다.

“저 예언은 거짓말이오.”

천화루주가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신녀가 예언을 두고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그럼 신녀를 포기한 모양이지요.”

검무극이 단호히 말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예언이 내렸다면 루주님께 내렸을 겁니다.”

그러자 가예가 진정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검무극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 인생은 잘못되었으니까.”

내내 여유로웠던 가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난 당신이 암흑궁주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 생각하오. 암흑궁주는 원래 목적이 뚜렷한 자라지만, 당신은 뭐요? 애초에 신녀궁의 역할이 암흑궁을 도와서 이 세상을 정복하는 거였소?”

“암흑궁은 천의궁의 뜻을 계승했어요.”

암흑궁이 아니라 자신은 천의궁을 따른다는 의미였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검무극이 그녀의 두 눈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천의궁주를 모시던 시절의 신녀궁주가 당신을 보면, 뭐라고 할 거 같소? 잘하고 있다고 할 것 같소?”

신녀궁주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검무극은 그녀를 더욱 자극했다.

“암흑궁주가 여기 루주님을 이용해서 나를 끌어들여 죽이려 한다면, 당신은 반대 아니오? 나보다는 루주님을 더 죽이고 싶은 거 아니오?”

“내가 왜 저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겠어요?”

“당신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소? 당신은 예언을 받지 못하는데, 여기 루주님은 예언을 받으니 화가 나서일지.”

“닥치세요!”

가예의 평정심이 깨어지며 표정이 차가워졌다.

스르릉.

검무극이 검을 들어 그녀 얼굴 앞에서 반쯤 뽑았다.

“난 하늘이 이런 사람에게 예언을 내리지 않을 거라 믿소.”

검날에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그 검 너머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당신은 루주님을 만나서 엉터리 예언을 말할 게 아니라 사과를 해야 했소. 이런 함정에 그대를 불러서 미안하다고.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검무극이 검을 다시 회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나갑시다.”

천화루주가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신녀궁주를 한 번 쳐다본 후 검무극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그냥 두고 가나요?”

“그녀는 이미 떠났소.”

“네?”

쉬이익.

흑마검이 허공을 갈랐다. 한줄기 검기가 그녀의 목을 베었다.

그녀의 잘린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았다. 검무극이 갑자기 신녀궁주의 목을 베어버릴 줄 몰랐기에 천화루주도 섭혼마존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목에서 피가 나지 않았다.

펑! 퍼엉!

신녀궁주의 머리통과 몸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앞서 반쯤 뽑았던 검을 검집에 회수하는 순간 그녀의 기운이 바뀐 걸 알았다. 누군지 몰라도 기가 막힌 실력으로 그녀를 빼내 간 것이다.

“방금 우리 주위에 뭔가가 펼쳐졌습니다!”

뭔가를 감지한 검무극이 뒤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정말 문밖 복도가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검은 연기가 안개처럼 가득 차 있었다.

“왜 이 배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검무극은 눈 앞에 펼쳐진 암흑마공을 알아보았다.

“이 배에 탐심대멸공(貪心大滅功)이 펼쳐졌습니다.”

탐심대멸공은 암흑궁에서 내려오는 대표적인 암흑마공이었다.

섭혼마존도 그것이 어떤 마공인지 알고 있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빨아먹으면서 발휘되는 암흑마공이지요. 식욕이나 색욕 같은 원색적인 욕망일수록, 또 그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힘을 낸다고…… 아!”

그 순간 그녀도 왜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배에는 식욕이나 색욕까지도 씹어먹는…….”

검무극은 공포와 불길함으로 가득 찬 복도를 바라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더 질긴 욕망으로 가득 차 있지요.”

그럼 빛 아래에서는?

시커먼 구멍에서 신녀궁주 가예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숨을 헐떡였다. 몸이 옮겨질 때의 이 느낌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는 그녀 앞에 암흑궁주가 있었다.

공간의 정중앙에 앉은 암흑궁주 주위로 암흑궁의 오대학사(五大學士)가 둘러앉아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사사사삭.

내뻗은 그들의 손이 여러 수인을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 손끝에서 실처럼 얇은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그것들이 허공에서 괴이한 문양과 알 수 없는 글자를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그 문자와 글자들이 만들어질 때마다 암흑궁주가 앉아 있는 바닥에 글자가 하나씩 빛났다.

그들이 빚어내는 구결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완성되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쪽 공간에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마치 쌍둥이인 양 똑 닮은 외모의 두 사람.

암흑궁의 절대고수, 암흑쌍절(暗黑雙絶)

바로 암노(暗老)와 흑노(黑老)였다.

두 노인 모두 백 세가 넘었는데 암흑궁주가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아끼고 아꼈던 이들이었다.

오랫동안 암흑궁주를 모셔 온 가예도 그들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더 살필 것 같았는데, 그녀의 시선은 반대쪽 벽을 향해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한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가예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된 것은 이쪽이 더 신기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자 벽에 있던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생생했는지 그럴 거라 예상했음에도 그녀의 가슴이 철렁했다.

암흑화령(暗黑畵靈).

말로만 듣던 암흑궁의 비밀병기를 직접 보는 순간이었다.

그림의 남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벽 속의 세상이 자신의 세상인 양 그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벽 속을 걸었다.

그러다 암흑궁주가 있는 곳을 지날 때는 살금살금 조심해서 걸었다.

그렇게 건너편 벽까지 가더니 암흑쌍절의 뒤로 가서 손을 흔들며 장난을 쳤다.

암흑쌍절 중 흑노가 뒤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렀다.

그의 장력이 벽을 강타했지만, 어느새 벽 속의 남자는 사라진 후였다.

가예는 순식간에 사라진 그를 시야에서 놓쳤다.

어디로 갔을까?

바로 그때 벽과 벽 사이의 모서리 선에서 그가 쑤욱 하고 튀어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 가득한 모습이지만 가예는 알고 있었다.

암흑쌍절과 더불어 암흑궁주가 가장 아끼는 존재가 바로 암흑화령이라는 것을. 그만큼 무섭고 강하다는 의미이리라.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이 배와 동정호 주변에 암흑궁의 모든 고수가 동원되었다. 암흑궁주는 마치 이 싸움에 사활을 걸겠다는 듯 삼백 년을 쌓아온 힘을 모두 내놓았다.

죽느냐 사느냐 이 마교와의 생사대전에.

이윽고 눈을 감고 있던 암흑궁주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예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신호를 주지 않았는데 왜 불러들이셨습니까?”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였지만 강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일방적으로 검무극의 말에 당하기만 했다. 그에게 뭐라 반박 한마디 못했는데, 암흑궁주가 자신을 그곳에서 빼내온 것이다.

암흑궁주는 가예가 귀빈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모두 보고들은 상태였다.

그는 더 남아서 소교주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감정을 짚었다.

“왜 그리 화가 났었나?”

검무극의 심리전에 말려들어 분노하는 순간 이미 그녀는 졌다.

“그곳에 더 있었다간, 못 돌아올 수도 있었을 거네. 소교주가 자네를 찾아내는 속도를 보지 않았나? 오자마자 자네 마음을 뒤집는 것을 겪지 않았나?”

시간을 더 끌었다가 검무극의 손에 진짜 죽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가예는 검무극에게 그랬듯 암흑궁주에게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는 정말 화가 났었으니까.

천화루주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제대로 정곡이 찔렸다. 그 이유가 예언을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 때문이 아니냐는 말에 그녀는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자네가 아쉬운 점이 뭔지 아나?”

“무엇입니까?”

“차라리 자네가 신녀가 아니었다면 좋았을 거야.”

암흑궁주가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 신녀라는 허울이 자네를 자네답지 않게 하고 있어.”

이 순간 울컥 치미는 감정은 앞서 검무극에게 느꼈던 감정과 닿아 있었다. 사람을 발끈하게 만들면서도 쉽게 반박할 수 없게 하는.

“그 허울이 저란 사람의 전부입니다.”

“과연 그럴까?”

암흑궁주는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신녀가 아니라면 제대로 나쁜 년이 되었을 거란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죄송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녀로서 궁주님을 돕고 있는 겁니다. 궁주님의 뜻이 아닌 천의를 따라서지요.”

솔직히 이 말까지 덧붙이고 싶었다.

나는 하늘과 닿아 있는 사람입니다.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하지 못했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이르러서도 하늘은 자신에게 뜻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흑의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경솔했네. 개의치 말고 마음 다스리게.”

존재를 부정당한 마음을 어찌 쉽게 추스를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스스스스.

바닥에서 암흑궁주의 수족인 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러자 암흑궁주의 주위로 어둠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짙은 암흑이었다.

“오늘 이 싸움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마교놈들은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피어오른 어둠의 기운이 암흑궁주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지금부터 암흑성전(暗黑聖戰)을 개시한다!”

* * *

무공에 있어서 검무극의 경지쯤 되면 딱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앞서 신녀궁주를 감쪽같이 빼내 가는 실력이나, 지금 펼쳐지는 마공의 수준으로 볼 때.

“암흑궁주가 이곳에 와 있는 거 같습니다.”

암흑궁주란 말에 섭혼마존과 천화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정말 이번 일의 최종 배후가 나타난 것이다. 천화루주는 이런 곳에 자신이 혼자 올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후우우.

복도 바닥에 깔려 있던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방 안으로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암흑궁주가 직접 펼쳐낸 탐심대멸공은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저 기운에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요?”

천화루주의 물음에 검무극이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하나, 이 마공이 인간의 욕망을 이용하는 암흑마공임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함정인 걸 알았으니 여기서 탈출하시죠?”

천화루주는 자신 때문에 소교주가 위험에 빠지는 걸 원치 않았다. 애초에 이 약속은 자신 때문에 생겼으니까.

“이미 배 전체로 이 암흑의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을 겁니다.”

검무극의 대답에 섭혼마존이 제안했다.

“선실의 벽을 박살 내고 밖으로 빠져나가시지요?”

싸우더라도 이 배를 나가서 싸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는데.

아쉽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탐심대멸공을 파훼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듯.

검무극이 선실 벽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 주먹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콰콰콰콰쾅!

벽에 구멍이 생기며 그 너머까지 계속 뚫렸다.

마지막에 들려온 이질적인 타격음.

천화루주와 섭혼마존이 뻥 뚫린 구멍을 쳐다보았다. 구멍 끝에 검은 연기가 뭉클거리고 있었다. 이 엄청난 주먹으로도 뚫지 못한 것이다.

배를 탐심대멸공의 암연(暗煙)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설령 저걸 더 강력한 힘으로 뚫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이라면 반드시 파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없는 벽을 향해 천마멸세를 발출하면?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탐심대멸공도 파훼될 것이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강제로 탐심대멸공을 파괴해버리면 이 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즉사할 겁니다.”

이미 탐심대멸공은 이 배에 타고 있던 이들과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이 마공 자체가 그들의 욕망을 바탕으로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녀궁주가 마지막 방에서 기다렸던 것도 우리 때문일 겁니다.”

검무극의 말을 섭혼마존이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 암흑마공을 우리와도 연결하기 위해서였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벌기 위해 제일 찾기 어려운 곳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었던 거죠. 원래는 우리가 도착하고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거로 예상했을 텐데.”

검무극이 곧장 선주를 찾아서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또 이곳에 와서도 곧바로 도박꾼들을 쫓아내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다행히 우리는 탐심대멸공과 깊이 엮이지는 않았습니다.”

섭혼마존은 내심 크게 감탄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아직 아래 단계의 도박장에서 신녀궁주를 찾고 있었을 테니, 결국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결과가 되었을 거다.

“그래서 강제로 뚫고 나가면 우리는 살 수 있겠지만, 이 배에 탄 나머지는 모두 죽습니다.”

아무리 도박에 빠진 이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모두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또한 이곳에는 수룡방 무인들과 무공을 모르는 뱃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수룡방은 사파에 속한 문파. 사도맹과의 관계를 생각해서도 그들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빨리 마공을 파훼하지 않으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욕망이 마공의 재료가 되어 소진될 겁니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 진기가 말라 죽게 되겠지요.”

탐심대멸공의 무서운 점이었다. 모든 인간의 욕망을 다 빨아들인다는 점에서.

“게다가 시간을 끌면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 우리의 욕망까지 끌어내려 들겠죠.”

천화루주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야 있지만, 그게 욕망이란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을 텐데.

반면 섭혼마존은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최고 실력을 갖춘 마존이 되는 것. 그래서 소교주의 마존 중에서 최고의 마존이 되는 것. 그가 가장 아끼는 마존이 되는 것.

그것이 그녀의 욕망이었다.

“자, 우선 이 방에서 나가시죠.”

어느새 검은 기운은 방의 절반까지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검무극은 뒤쪽 벽을 살피더니.

콰콰콰콰쾅!

공간이 있는 방향에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큰 구멍을 뚫었다. 그 벽 너머는 다른 쪽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섭혼마존에게 당부했다.

“탐심대멸공을 파훼하려면 암흑궁주를 찾아야 합니다. 제가 찾을 테니, 그동안 루주님을 지켜주십시오. 되도록 저 검은 안개를 피하시고요.”

섭혼마존이 든든한 눈빛으로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교주님.”

검무극은 검은 안개가 밀려오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천화루주의 걱정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놈을 찾으려면 저 어둠의 근원으로 가야겠지요.”

저 검은 기운의 근원에 암흑궁주가 있을 테니까.

천마호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후 검무극은 검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어둠이 검무극을 삼켰다.

* * *

마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취마를 보고 있었다.

술을 퍼마시던 취마는 비스듬히 자세가 기울어지더니 결국 잠이 들고 말았다. 코까지 골면서 말이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취해서 잔다고?

이거 미친놈이지?

마불이 그런 눈빛으로 취마를 쳐다보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이 모든 게 소교주 작품이다.

소교주와 함께 지내다 보니 취마가 이렇게 변했고, 그런 취마를 이렇게 웃으며 보게 되었고, 또 저기 저 배에 있는 사람이 소교주니까 걱정이 안 되는 거고…….

무심코 부귀선을 바라보던 순간 마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이보게, 일어나게!”

마불의 다급한 외침에 취마가 눈을 떴다.

“저길 보게!”

잠결에 마불이 바라보던 곳을 쳐다보던 취마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부귀선에서 거대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고 뭉클뭉클 검은 연기가 배를 감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치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익.

그들의 신형이 부귀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무극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사악한 기운이었다.

두 사람이 수면을 밟으며 수상비로 부귀선을 향해 달려가던 그때.

무엇인가에 막혀 두 사람이 뒤로 튕겨 나왔다. 앞에 보이지 않는 막이 있었다. 배에 닿으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결계입니다!”

취마의 외침에 마불이 눈 앞에 펼쳐진 막을 살폈다.

“천야마역(天夜魔域)이네!”

암흑궁의 결계마공.

특히 밤에 펼쳐지면 그 강도가 훨씬 강해져서 절대 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알려진 결계였다.

취마가 아래로 헤엄쳐 들어갔다.

하지만 결계는 수면 아래에도 펼쳐져 있었다. 거대하고 투명한 구체 모양의 결계 안에 부귀선이 들어가 있었다.

앞서 배에서 느꼈던 어둠의 기운도 그렇고. 이 결계도 그렇고. 그야말로 극상승의 암흑마공이었다.

혈련까지 띄운 채 주위에 있었음에도 결계가 펼쳐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으로 볼 때, 오늘의 이 만남은 철저히 준비된 함정이었다.

“어떻게든 결계를 뚫고 저 배로 들어가야 하네.”

마불의 말에 취마가 먼저 일장을 날렸다.

쇄애애앵!

퍼어엉.

강력한 일장이 결계에 적중했다.

결계의 막이 움푹 들어가는가 싶더니 다시 튕겨 나왔다.

“함께 해보세.”

이번에는 마불과 취마가 동시에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격에도 결계는 뚫리지 않았다.

“파훼법을 찾아야 뚫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귀선을 중심으로 두고 결계가 워낙 넓고 큰 구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기에 파훼법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파훼법이 수면 아래에 있다면? 이 캄캄한 물속에서 그것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취마가 비수를 꺼내 내공을 주입했다.

쉬이이익.

하지만 취마의 비수는 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정말 엄청난 힘으로 결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마불이 한 가지 다른 파훼법을 떠올렸다.

“천야마역은 어둠에서 더 강해지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빛 아래에서는?”

마불의 눈빛이 예리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몸에서 황금빛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주위에 있던 다른 배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호숫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 빛을 보았다.

마불이 몸에서 뿜어지는 빛을 손바닥으로 모았다. 마불의 손에서 뻗어져 나간 빛이 결계의 한곳에 집중되었다.

취마의 비수가 빛이 비친 부분을 향해 날아들었다.

쉬이익!

푸우욱!

이번에는 비수가 결계에 박혔다.

하지만 박히기만 했을 뿐 찢어지지 않았기에 취마는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악!

마불이 내뿜는 빛도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밝아졌다.

“지금이네!”

찌이이이이익.

취마의 비수가 결계를 찢기 시작했다.

평생을 어지럽게 산 몸이시다

찌이이이이익.

결계가 길게 찢어지며 갈라졌다.

두 사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결계 속으로 몸을 날렸다.

휘이이익.

두 사람이 들어가자 찢어졌던 결계는 순식간에 다시 이어졌다. 결계를 유지하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취마가 마불에게 감탄했다.

“정말 눈부신 한 수이셨습니다.”

똑똑한 대처법이었고 실제로도 눈이 많이 부셨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몸에서 빛났다고 날 놀리는 거냐? 삐딱하게 받아들였을 텐데.

지금의 마불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급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슬쩍 한마디 자랑까지 했을지도 모르겠다. 소교주가 날 보면 ‘작은 거인’이라 부른다네.

그렇게 두 사람이 부귀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배에서는 강렬한 암흑의 기운이 펼쳐지고 있었다.

“평범한 연기가 아닙니다.”

취마는 알지 못했지만 마불은 이 어두운 연기가 무엇을 지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배에 탐심대멸공이 펼쳐졌네.”

마불 역시 암흑궁의 무공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배의 표면에서 일렁거리는 연기에 손을 내밀었다.

파아악.

연기가 부드럽게 마불의 손을 밀어냈지만, 그 속에 담긴 거대한 힘을 느꼈다.

“이렇게 강력한 암흑마기는 평생 처음이네.”

“암흑궁주가 직접 펼친 마공인 듯합니다.”

취마의 말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다는 말은 이 배에 탄 검무극이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다는 의미. 오히려 혼자가 아니라서 더 걱정되었다.

“어떻게든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겠습니다.”

동생, 좀만 참아라. 이 형이 반드시 들어갈 방법을 찾으마.

두 사람이 배를 살피던 그때였다.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취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취마가 흠칫 놀랐다.

물방울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던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액.

물방울이 암기가 발출된 것처럼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취마가 허공에서 몸을 틀어 그것을 피했다.

순식간에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분명 물방울이었다.

그냥 물방울이 아니었다. 적중당했으면 살이 찢기고 뼈를 다쳤을 위력적인 물방울이었다.

마불도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도 물방울이 떠 있었다. 이번에는 두 개였다.

푸웅! 풍!

이번에는 두 줄기 물방울이 마불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불이 손을 내밀어 날아드는 물방울을 막았다.

퍼억! 퍽!

손바닥 앞에 펼쳐진 내력과 부딪힌 물방울이 터져나갔다. 정말이지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취마와 마불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이 두 번의 공격은 탐색에 불과했다는 듯.

촤아아아악.

잔잔한 수면에서 수십 개의 물방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두 마존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는 그때.

푸푸푸푸푸푸푸풍!

수면에서 튀어 오른 물방울이 취마와 마불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불의 염주가 허공을 날았다.

슉슉슉슉슉슉슉슉!

퍽퍽퍽퍽퍽퍽퍽퍽!

날아간 염주알들이 물방울들을 허공에서 모두 터뜨렸다.

다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위는 조용했다.

“누군가 수공(水功)을 펼치는 자가 있네.”

마불의 말에 취마가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불어 터진 물귀신아, 장난질 그만하고 썩 나와라.”

그러자 그들과 멀리 떨어진 물속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아아악.

노인은 꼿꼿하게 선 채로 물속에서 수면 위로 쭉 올라왔다. 노인의 장삼에는 파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물이 땅이라도 되는 듯 그는 물 위에 섰다. 무공으로 서는 게 아니었다. 정말 물에 섰다.

마불은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저런 복장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노인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벽해신군(碧海神君)이네.”

벽해신군은 취마도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공의 절대고수로 한때 수왕(水王)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물 위에서 싸우면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자신했던 수공의 절대고수.

언젠가부터 그가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여러 소문이 돌았다.

절대고수와 싸우다 죽었다는 말도 있었고, 무리하게 수공을 익히다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또 누구는 어디 바다 가운데 있는 무인도에 홀로 은거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암흑궁에 포섭되어 있었다.

“저 물비린내 나는 늙은이가 아직 살아 있었다니!”

마불의 조롱에 벽해신군이 차갑게 웃었다.

“나도 들었지. 꼴불견 같은 광대 놈이 마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마불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땅에서 만났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놈인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소리를 칠만했다. 여긴 물뿐이었고, 심지어 결계까지 있어서 달아날 곳도 없었다.

취마가 마불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자는 제가 맡겠습니다. 마불님은 저 배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십시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문지기 따위가 자그마치 벽해신군이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는 훨씬 강한 적이 소교주를 노리고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

“아니, 그걸 왜 내게 맡기나? 내가 싸울 테니 자네가 찾게.”

“그건 안 되죠.”

“왜?”

“주정뱅이에게 머리 쓰는 일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요.”

취마의 목소리는 취해있었지만, 눈빛은 맑았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마불은 정확히 읽었다.

익힌 무공의 상성상 마불이 암흑마공에 대해서는 더 잘 알았다. 조금 전에 탐심대멸공을 알아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알겠네, 내가 최대한 빨리 찾아보겠네.’

마불이 고개를 끄덕인 후 벽해신군에게 말했다.

“내가 방법 찾을 때까지 죽지 마라!”

자신의 손으로 죽이겠다는 말을 남긴 후 마불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는 이쪽 싸움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부귀선의 반대 방향으로 넘어갔다.

저 암연이 피어오른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둘러 찾아보면 어딘가에 암연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곳을 찾을 수도 있었다.

혼자 남은 취마가 취한 눈으로 실실 웃으며 벽해신군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만 광대냐? 늙어서 암흑궁 뒤치다꺼리나 하는 늙은이도 광대지. 그래, 광대들끼리 어디 놀아보자!”

쇄애애액.

취마가 벽해신군을 향해 쇄도했다.

다시 취마의 앞을 막아서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이번에는 벽해신군 앞에 물로 이뤄진 막이 있었다.

분명 물로 된 막이었는데 손이 들어가지 않았다.

“또야?”

쇄애애액.

일장을 날렸지만, 물로 이뤄진 막을 뚫지는 못했다.

“너희들은 이렇게 겁쟁이들이면서 싸움은 어떻게 하러 나왔지?”

일렁이는 물 너머로 벽해신군이 웃는 모습이 일그러져 보였다.

취마가 물속으로 풍덩 들어갔다.

하지만 그 아래도 막이 있었다.

경공으로 뛰어넘어 보려 했지만, 천장도 있었다.

물로 이뤄진 보호벽은 벽해신군의 독문 무공이 발휘된 것이었다.

벽해신군의 독문 무공 벽해신공(碧海神功)

제삼식 만해수벽(滿海水壁).

취마가 취객이 주점 문 두드리듯 물벽을 두드렸다.

퍼억, 퍼억.

“이대일도 아니고 일대일에, 여긴 네 안방이나 다름없는 물 위인데 그런데도 이렇게 겁쟁이처럼 군다고? 심지어 나는 내공으로 떠 있느라 내력도 부족해! 그러니 나와! 여기도 물 많다!”

취마의 도발에도 벽해신군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인 주제에 비겁함을 논하다니 실로 후안무치하구나.”

벽해신군이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오늘 동정호의 물고기 밥이 될 거다.”

벽해신군이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똑. 또옥. 똑. 똑똑.

벽해신군 주위로 수면 위에 수십 개의 동그란 파장이 생겼다. 마치 빗물이 떨어질 때 생기는 둥근 파장이 곳곳에 생겨나는가 싶더니.

벽해신공 제사식 격류진폭(激流振爆).

그 둥근 파장이 터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력의 폭발이었다. 사방에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펑! 퍼엉! 퍼엉! 퍼엉!

취마의 신형이 터져 올라오는 폭발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으악! 나 죽는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마치 술 취해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쾅! 콰아앙!

폭발에 당했겠지 싶으면 취마는 그 폭발 뒤에서 손발을 휘저으며 튀어나왔다. 분명 폭발에 휘말렸는데 어느 틈에 다른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만 보면 술 취한 사람이 개에게 쫓겨 허우적거리며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주정뱅이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취마의 신법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그야말로 신법의 정수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취마는 여정 내내 술을 마시며 고민했던 무의를 실제로 펼쳐보고 있었다.

격류진폭이 모두 터지자 취마가 버럭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지금 당신 때문에 물고기가 얼마나 죽었는지 알아?”

정말 취해서 미친 소리를 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걸 피했단 말이지?’

피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피할 줄은 몰랐다. 너무 취한 모습이라 진짜 실력인지, 운이 좋았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벽해신군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벽해신공 제오식 만파회륜(萬派回輪).

취마의 발아래서 물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콰콰콰콰콰콰!

취마의 발밑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겼다.

“이건 또 뭐야?”

그가 허공으로 뛰어오르자 소용돌이가 회오리치며 물기둥처럼 솟구쳐 올랐다.

휘류류류류류류류!

소용돌이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취마를 잡아먹을 듯 뒤쫓았다.

“뱀이다, 물뱀이다!”

취마가 허공에서 아래를 향해 장력을 내질렀다.

퍼어엉!

회오리가 박살 나듯 갈라졌지만, 이내 다시 물이 합쳐지면서 더욱 큰 회오리가 되었다.

달아나던 취마가 벽해신군이 펼쳐둔 만해수벽에 부딪히면서 앞으로 튕겨 나갔고, 그 바람에 덮쳐온 회오리에 휩쓸려 들어갔다.

사람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강력한 물회오리에 속에서 취마가 허우적거리며 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기력한 그 모습이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됐다!”

만파회륜에 휩쓸리면 그 누구도 살아나올 수 없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였기에 벽해신군은 만파회륜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휘류류류류류류류류류.

너무나 빠른 회전에 취마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서 형체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자, 한 놈은 처리됐고.”

벽해신군이 마불을 불렀다.

“난쟁이 똥자루! 이제 네 차례다!”

그러자 부귀선 건너편에서 마불이 쑥 날아올랐다.

그는 미친 듯이 돌고 있는 회오리를 슥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벽해신군이 코웃음을 쳤다.

“어디 가냐? 이 난쟁이 똥자루야! 겁먹고 숨어봤자 달아날 곳은 없다.”

그때 미친 듯이 휘돌던 회오리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벽해신군이 흠칫 놀랐다. 자신이 속도를 줄인 것이 아닌데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윽고 회오리가 완전히 멈췄을 때, 벽해신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취마가 수면에 멀쩡히 내려섰다.

“더럽게 어지럽네.”

취마가 비틀거렸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벽해신군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만파회륜을 맨몸으로 파훼했다고?”

믿을 수 없는 그의 눈빛에 취마가 허리에 차고 있던 술을 다시 마셨다.

“평생을 취기에 어지럽게 산 몸이시다. 그리고 그게 아무리 어지러워도 내 인생만큼 어지럽겠느냐?”

그러면서 취마가 취한 눈을 들어 씩 웃었다.

“술 한잔하면서 내 인생 이야기나 들어볼래?”

취마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벽해신군은 느끼지 못했다. 취마의 보법이 달라졌음을. 어느새 그도 물 위를 땅 위처럼 걸었다. 마치 벽해신군이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회오리 속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고 나온 것이다.

“이 미친 주정뱅이 놈!”

그의 취한 눈을 보자 섬뜩했다. 절대 살아나와서는 안 될 곳을 살아나온 상대였다.

벽해신군이 강력한 한 수를 발휘했다.

벽해신공 제육식 수화극열(水火極熱)

부글부글 부글부글.

주위의 수면이 순식간에 끓기 시작했다.

“익은 채로 뒈져라!”

촤아아아악.

용암처럼 뜨거워진 물이 파도가 되어 취마를 덮쳤다. 이 특별한 열기는 호신강기로 막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고수의 목숨을 뺏은 한 수였었는데.

푸아아악.

끓는 물이 자신을 덮쳤지만 취마는 피하지 않았다.

“으아아악! 뜨거워!”

아프다고 난리를 치면서 점점 걸어와서 만해수벽 앞까지 다가왔다.

취마를 지켜주고 있는 것은 호신강기가 아니라, 몸 주위에 가득한 주기였다.

치이이이익.

열기에 주기가 타는 소리를 냈다.

취마의 온몸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고 얼굴은 벌겋게 익은 채로 만해수벽을 맨손으로 찢기 시작했다.

찌이이이익.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찢어졌다.

“우린 취하면 아픈 것도 몰라!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찢긴 막 사이로 고개를 쑥 들이미는 취마의 충혈된 눈을 보자 벽해신군은 소름이 돋았다. 평생 수많은 적과 싸웠지만 이런 놈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독문 무공을 펼쳐서 막았다면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맨몸으로 자신의 무공을 버티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을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만큼 두려움이 느껴졌다.

‘마존이 이렇게나 강하다고?’

자신이 알고 있던 마존의 실력이 아니었다.

벽해신군이 훌쩍 반대쪽으로 몸을 날려 만해수벽 밖으로 나갔다.

취마가 다시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가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당신 덕분에 성취가 있었다니까. 자, 내 술 한잔 받고 회오리 한 번 더 태워줘!”

“이 미친 새끼가!”

그 기세에 질린 벽해신군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던 그때!

등 뒤에 뭔가와 부딪쳤다.

놀란 벽해신군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불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서 있었다.

마불이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쟁이 똥자루 여기 있네?”

그의 손에는 이미 수인이 체결되어 있었다.

“이런…….”

한마디 욕설이 나올 틈도 없었다.

벼락이 치듯 떨어져 내린 황금빛 강기가 벽해신군의 머리통에 내리쳤다.

벽해신군의 머리통이 박살 나며 그대로 절명해 쓰러졌다.

취마가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이해해. 돌아서면 잊어먹고 또 돌아서면 까먹고. 늙어도 잊어먹고, 취해도 까먹고.”

마불이 취마에게 말했다.

“가세, 들어갈 곳을 찾았네.”

“보십시오, 주정뱅이보다 백배 낫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 호숫가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귀영대의 수하들이 있는 호숫가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왔다. 저 멀리 사방에서 적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인제 보니 애초에 우릴 잡아먹으려고 그물을 치고 기다렸습니다.”

취마의 말에 마불이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받아 들더니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에 취마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우리 마불님 옛날 성질 나오게 하네요.”

마불이 몸을 날렸다.

취마가 그 뒤를 따라 부귀선의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바깥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이곳이 황금빛으로 빛나듯 저곳에는 새하얀 웃음이 지어질 테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할 거예요

이안은 지한과 함께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호숫가 주변에는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사람이 많았다.

호수를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천천히 그 주변을 걸었고, 그들에게 물건을 팔러 나온 행상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술을 파는 상인, 군것질거리를 파는 상인, 폭죽을 파는 상인, 온갖 상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광경이었기에 오히려 이안은 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지한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불길한 냄새가 납니다.”

지한이 심호흡하듯 코로 깊이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는 아까부터 냄새에 집중하고 있었다. 눈보다 더 정확한 것이 그의 코였으니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쇳내도 많이 섞여 있고요.”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는 전혀 이상한 변화가 없었다.

시각으로 위기를 감지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미.

“느낌일 뿐입니다만.”

“그 느낌, 나는 믿어.”

이안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귀영대 무인이 새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다시 노랫소리를 거쳐 다시 휘파람 소리로 이어졌다. 위험에 대비하라는 약속된 경고였다.

저 멀리서 차이란이 삼(三) 조원들과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 이외에도 곳곳에 있던 귀영대 무인들이 이안의 경고에 내심 긴장했다.

그때 저 멀리 호수 가운데에서 환한 빛이 퍼져 나왔다.

황금빛 광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마불님이시다!”

사방으로 뻗어가던 빛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모습이 보였다. 마불과 취마가 결계를 뚫고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너무 멀어서 정확히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느꼈다.

이안이 빛이 비치는 그 너머 부귀선을 바라보았다.

‘소교주님!’

마불이 몸을 빛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부귀선 안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베이시면 안 돼요!’

그녀는 부디 검무극이 무사히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위기 본능이 꿈틀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지한에게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안과 지한이 있던 자리로 강침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속도와 위력으로 볼 때 사람이 던진 암기가 아니었다.

벌떡 일어나는 이안의 입에는 어느새 호각이 물려 있었다.

비상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

놈들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누가 공격했는지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구슬이 날아와 그녀 앞에서 터졌다.

구슬에서 연막이 확 피어올랐다.

시야가 가려진 그때, 연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느껴지는 강렬한 살기.

쉭쉭쉭쉭쉭쉭쉭쉭쉭쉭!

연막 너머에서 이쪽으로 암기가 무차별 난사되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이안이 검을 뽑아 들어 날아드는 암기를 쳐냈다. 그냥도 너무 빨라 막기가 쉽지 않았는데, 시야까지 가려진 상태였다. 원래라면 몸을 날려서 피해야 했다.

아니면 그냥 날아올라 연막 밖에서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뒤쪽에 있는 귀영대 무인이나 일반 주민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상대는 다른 이들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걸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피어올랐던 연막이 가라앉았을 때 이안 뒤쪽을 산책하던 남녀가 엉덩방아를 찧은 채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 이안은 없었다.

“끄으윽.”

연막 너머에 있던 한 남자의 가슴에 검이 박혀 있었다.

이안은 암기를 쳐낸 손목이 아직까지 욱신거렸다. 그리고 왜 그리 공격이 강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찔린 남자의 오른팔에는 원통 모양의 강철 암기통이 달려 있었다. 얼핏 봐도 강력한 위력을 지닌 암기였다.

남자는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절명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연막이 없어도 막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안은 연막 속에서도 그 모든 암기를 다 쳐낸 것이다.

‘격사탄(擊死彈)을 연막 속에서 막아내다니?’

그는 몰랐지만 이안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암기 외에도 다른 곳으로 가는 것까지도 모두 쳐냈다.

이것이 바로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루고도 끝없이 노력하고 있는 그녀의 실력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지한이 소리쳤을 때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남자가 이안을 향해 암기를 겨누고 있었다.

그가 발출하려던 격사탄이 발사되기 직전.

쉬이익.

남자의 목이 먼저 그어지며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그 뒤에 차이란이 서 있었다.

고맙다는 이안의 눈인사에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란은 이 암기가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격사탄이에요. 휴대와 사용이 간편한 것에 비해 끔찍한 위력을 지닌 암기죠.”

살수인 그녀는 암기에 있어선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신기철문(神機鐵門)의 암기에요.”

신기철문.

오십여 년 전 기관 장치와 암기로 유명한 문파가 있었다.

그들이 만든 암기와 기관 장치는 너무나 훌륭해서 강호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무림맹에서는 그들이 만든 기관 장치를 사들여서 무림맹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이 갑자기 멸문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림맹에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지만 끝내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 당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배후들이 신기철문을 멸문시키고 그 기술을 훔쳤군요.”

이안의 말에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차이란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정말 저들이 신기철문을 이용한다면, 격사탄은 시작에 불과할 거예요.”

* * *

마군은 가까운 숲에 마차를 숨겨둔 채 대기 중이었다.

장호는 지금껏 수많은 작전을 펼쳤지만, 오늘만큼 긴장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소교주가 함께하고, 또 이안과 여러 마존들까지 함께 하는 작전이기 때문이리라.

그때 숲 바깥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비상을 알리는 호각 소리에 마군은 즉시 반응했다.

“바로 나간다.”

장호의 명령에 대기하던 마군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선두에 선 사람은 장호였다.

숲을 빠져나오려던 순간, 장호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멈춰!”

장호가 멈추자 뒤따르던 마군들도 일제히 멈췄다.

곧이어 장호는 그 기분 나쁜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 장사하던 행상 수레들이 자신들을 향해 방향을 틀어 있었다. 장사하려면 당연히 사람이 많은 호수 쪽을 바라보는 게 정상인데.

찰나의 긴장과 침묵이 흐르던 그 순간.

수레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소리 없이 올라와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가운데로 쑥 올라온 것은 쇠기둥이었다. 그 위에 쇠로 만든 커다란 원통이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그 원통에 뚫려 있는 수십 개의 구멍!

옆에 있던 다른 수레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대의 마차에서 모두 발사형 암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피해!”

장호의 외침이 들리는 순간!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모든 수레에서 일제히 암기가 발출되었다.

암기를 발출한 이들은 무인들이 아니었다. 위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단 한 줌의 내공조차 없는 암흑궁의 수하들을 이용했고, 그들은 꽤 오랜 시간 실제 행상을 하면서 위장을 훈련받았다.

앞서 휴대용으로 사용했던 격사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른 속도와 위력이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장호가 검으로 암기를 쳐내며 뒤로 물러났다. 검에 내공을 가득 주입했음에도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다행히 장호가 빨리 알아차리고 대응하는 바람에 뒤따르던 마군들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장호는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쉬이이익.

뒤로 물러나면서 장호가 한줄기 매서운 검기를 날렸다.

카아아아앙!

하지만 암기를 발출하고 있는 적 앞에는 어느새 검기에 잘리지 않는 철판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적이 밖을 보는 작은 구멍으로 정확히 검기를 날리지 않으면 적을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암기가 비 오듯 쏟아지는데 그렇게 정확히 검기를 날릴 수가 없었다.

마군 중 암기와 기관진식에 능통한 수하가 수레에서 발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신기철문의 광풍연사포(狂風連射砲)입니다!”

장호가 인상을 굳혔다. 신기철문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뛰어난 기술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었다.

그사이 새로운 수레 하나가 그곳에 도착했다. 다른 수레보다 두 배는 더 큰 수레였다. 저 앞에서 국수를 팔던 대형 수레였다. 그 수레를 조종하는 노인 역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암흑궁의 수하였다.

그 수레에 실린 암기는 앞서 것보다 훨씬 컸다.

“천궁벽살포(天弓霹殺砲)입니다!”

다급한 수하의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푸아아앙!

속도는 느리지만 앞서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강한 위력의 강침이 발사되었다.

꽝! 꽈직!

날아든 엄청난 위력에 몸을 숨긴 나무가 박살 났다.

“뒤로! 뒤로!”

다시 장호와 마군들이 뒤로 물러났다.

푸아앙! 콰아아앙!

땅바닥이 뒤집히며 파편이 튀었지만, 그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침착하게 후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흥분하면 다 죽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전방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뒤쪽에 있던 마군들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를 이동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먼저 탄 마군이 마차 안에서 장치를 조작하자.

철컹, 철컹, 철컹, 철컹.

마차 벽면에서 선이 생기며 쇳소리가 났다.

마차에 탄 마군들이 벽 곳곳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마차 벽면이 여러 개로 분리되었다.

분리된 그것은 놀랍게도 커다란 방패였다.

평소에는 마차 벽면으로 사용하다가 위급 시에 이렇게 방패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마차 외벽에 그려진 글자와 그림 역시 방패가 되었을 때 제각각의 모양을 갖추도록 그려져 있었다.

위급 시 싸움에 쓰는 마군의 전술 방패.

세워둔 마차 벽이 모두 분해되며 마군들이 방패를 가지고 뛰어나왔다. 그들의 큰 몸이 둘이 나란히 서도 될 만큼 큰 대형 방패였다.

상대의 무기 역시 무조건 계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교대로 암기를 채워 넣어야 했다.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던 천궁벽살포가 강침을 채워 넣으려고 잠시 멈춘 그 순간.

“지금이다!”

장호의 명령에 후방에 있던 마군들이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했다.

그 첫 번째 목표는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천궁벽살포였다.

광풍연사포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쏟아졌다.

쾅쾅쾅쾅쾅쾅쾅쾅!

쏟아지는 암기가 방패를 두들겼다. 하지만 두 명의 마군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앞으로 밀고 나갔다. 다른 마군들이 그 뒤를 바짝 따라 달렸다. 하나의 방패에 십여 명이 달라붙었다.

방패는 평범한 금속이 아니었다. 철방에서 마군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해 준 철방 기술의 극치였다.

밀고 나갈수록 그 강력한 위력에 선두에 방패를 든 마군들이 휘청했다. 뒤따르던 다른 마군이 자리를 바꿔 밀어붙였다.

설마 마군들이 방패를 사용할 줄 몰랐기에 암기를 발출하던 이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무식하게 밀고 들어왔다.

“어서! 교체해!”

천궁벽살포의 암기가 다시 채워졌다.

푸우우웅! 콰아앙!

천궁벽살포가 선두의 방패에 적중하면서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마군들이 뒤로 밀렸다. 방패를 들고 있던 두 마군이 왈칵 피를 토했다.

뒤에 있던 마군들이 방패를 대신 들었고, 부상당한 이들을 뒤로 옮겼다.

마군의 방패는 부서지지 않았고, 그들의 투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두 번째가 발사되기 전, 장호가 방패를 뛰어넘으며 허공으로 쇄도했다.

빠르게 쏠 수 있는 광풍연사포가 일제히 장호를 겨누며 하늘을 겨눴고, 천궁벽살포도 본능적으로 장호를 겨눴다.

슉슉슉슉슉슉슉!

날아드는 공격을 장호가 허공에서 검을 휘둘러 튕겨냈다. 허공에서 막는 게 두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고 목숨을 걸어야 할 위험한 일이었지만, 장호는 용감하게 미끼가 되었다. 다행히 천궁격살포는 그 위력에 비해 속도가 느려 피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군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방패가 열리며 안에서 마군들이 돌진했다.

쇄애애애애액.

그 큰 덩치들이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밀고 들어왔다. 놀란 이들이 다시 그들을 겨눴을 때는 이미 다 도착한 후였다.

마군들이 그대로 몸통으로 수레와 충돌했다.

장호 역시 허공에서 아래로 그대로 쇄도하며 철판의 구멍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푸우욱!

뒤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아직 공격을 받지 않았던 수레가 그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뒤이어 도착한 방패를 든 마군이 그대로 돌진했다.

수레가 박살 나며 뒤집혔다. 수레에서 암기를 쏘던 무인이 벌떡 일어나던 그 순간, 거대한 방패가 그를 강타했다.

온몸이 박살 난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가 마지막에 본 것은 방패에 그려진 魔軍이라는 커다란 글자였다.

그야말로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듯 그곳을 마군이 휩쓸었다. 그렇게 한숨 돌리던 그때였다.

퉁, 퉁, 퉁, 퉁 퉁.

멀리서 뭔가 쏘아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가 싶더니.

마군들이 있는 곳으로 무엇인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쇠구슬 수십 개가 날아들었다.

장호가 소리쳤다.

“귀갑철벽진(龜甲鐵壁陣)을 펼쳐라!”

다음 순간 방패를 든 마군들이 일제히 장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착착착착착착착착착!

마치 거북이 등껍질이 만들어지듯 방패로 사방과 천장까지 막았다.

쾅! 콰앙! 쾅! 쾅쾅쾅!

허공에서 쇠구슬이 폭발했다.

팍팍팍팍팍팍팍팍팍팍팍!

엄청난 속도로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것은 수백 개의 쇠구슬이었다.

강력하게 날아든 쇠구슬들이 방패를 두드렸다. 너무 작은 구슬이 강력하게 날아들었기에 방패 없이 막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쇠구슬은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마군들은 방패에 내력을 주입해서 막았다. 방패는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진동했다.

쾅! 쾅! 콰앙! 콰앙!

장호도 마군들과 함께 천장의 방패에 내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곳에 신기철문의 암기와 기관으로 무장한 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 가지 생각에 장호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만약 이 공격이 귀영대에게 펼쳐진다면?’

전술 방패가 있는 마군도 이렇게 막기가 쉽지 않은 공격인데. 귀영대는 막대한 희생이 날 것이다.

이안의 성격상 어떻게든 수하를 지키려 할 것이고. 이안조차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이안이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앞으로 소교주를 어찌 보겠는가?

“귀영대는 우리가 지킨다. 이대로 돌진!”

마군이 귀갑철벽진을 이룬 채로 폭발을 버티며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빠른 거북이었다.

그래서 소마님을 남겨둔 거야

검무극이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안개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히는 갑갑함이 밀려들었다. 옷이 물에 젖은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졌다.

천마호신공이 그 기운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평소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상성이 되는 무공이 없다면 분명 영향을 크게 받을 기운이었다.

검무극이 온 신경을 곤두세운 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쉬이이익. 푸욱!

얼핏 인간 형태를 지닌 것이었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흑마검에 목이 베인 그것이 퍽, 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사람이면 어쩌려고 함부로 검을 휘두르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이군, 암흑궁주.”

“맞다, 바로 나다.”

실제 말도 아니었고 전음으로 전해지는 말도 아니었다. 이 어둠의 안개를 통해 그의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나?”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데 어찌 모르겠어?”

그러자 안개 속에서 뭔가가 일렁이더니.

스르륵.

검무극 앞에 암흑궁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내가 상상한 대로 생겼군.”

“어떻게 상상했지?”

“늙고 추하고 욕심 많고…….”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몸에 손을 댔다. 손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실제처럼 생생했는데 그는 허상이었다.

“겁쟁이고. 수하들을 다 쏟아붓지 않으면 절대 안 나올 거잖아?”

암흑궁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첫 만남부터 이렇게 막말할 줄이야. 딱 보고로 듣던 소교주 그대로다. 상대의 허를 찔러 오는 것이.

“오랜 세월의 친분을 배신하고,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고. 그게 당신 수법이잖아? 한 번이라도 정정당당하게 찾아가서 한 번 붙자! 라고 말해 본 적 있어?”

암흑궁주는 도발에 걸려드는 대신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소교주, 정정당당하지 못한 겁쟁이가 저지른 일을 한 번 볼 텐가?”

암흑궁주가 손을 펼치자 옆에 하나의 장면이 환상처럼 펼쳐졌다.

“바깥 모습이다.”

바위에 기대앉은 이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가슴에서 피를 철철 흘러내렸다. 아무도 죽어가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의 모습이 멀어지면서 주위 모습이 보였다. 귀영대 조장들과 조원들도 모두 시체가 되어 죽어 있었다.

차이란은 몸이 양단된 채 쓰러져 있었고, 반쯤 부서진 푸른 가면 아래 청면이 죽어 있었다. 서진은 고슴도치처럼 암기가 꽂힌 채 죽어 있었고, 지한은 흐르는 핏물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 있었다.

이안이 그 모습을 둘러보던 괴로워하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녀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이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죽여버린다!”

검무극이 흥분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가 허상의 목을 조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서 나와, 안 나와? 이 새끼야, 나오라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암흑궁주가 말했다.

“전혀 흥분하지 않는군.”

그러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검무극의 눈빛이 대번에 차분해졌다.

“미쳐 날뛰는 모습을 바랐을 텐데, 미안해. 보다시피 흥분하는 연기가 쉽지 않아.”

검무극은 보여준 사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왜 가짜라고 단정하지?”

“저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고. 또 저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보호자도 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안이 죽어가면서 나를 찾지 않았잖아? 소교주님,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했으면 나도 살짝 긴장했을 거야.”

암흑궁주의 눈빛에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때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기왕 보여준 김에 진짜 바깥 풍경 좀 보여줘. 나 없이 다들 어쩌고 있나 궁금해서. 어차피 오늘 당신이나 나 둘 중 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삼백 년을 기다려서 이제야 만났는데, 바쁠 거 없잖아? 솔직히 당신도 궁금하잖아? 혹시 알아? 정말 이안이 죽는 걸 보고 내가 주화입마에라도 빠지게 될지.”

가만히 검무극을 쳐다보던 암흑궁주가 다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처음 시체가 널린 장면이 사라지고, 진짜 호숫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 * *

공격은 이안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수장부터 죽여서 사기를 떨어뜨릴 작정이라고 하기에는 그 공격이 너무 집요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안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간과했다. 그녀는 자신들이 예상한 실력을 초월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안에게 공격이 집중된 틈을 타서 차이란과 삼 조원들이 암습자들을 잡아냈다.

원래였다면 절대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적은 오직 암기를 발출하기 위해 내공 없이 키워진 자들이었다. 게다가 살기를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았기에 색출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던 일반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암기를 발출했다.

누가 흉수고, 누가 흉수가 아닌지 알 수 없는 싸움에서 차이란과 살수들은 그야말로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녀들 역시 살의를 숨기는데 능통한 이들이었으니까.

그사이 일 조와 이 조는 일반인들을 구했다.

또다시 튀어나온 암습자가 이안을 향해 암기를 발출했다.

쉭쉭쉭쉭쉭!

챙챙챙챙챙!

기습적으로 날아든 암기였지만 이안은 모두 쳐냈다. 뒤로 날아간 암기가 다른 이에게 맞을까 봐 피하지 않고 전부 다 검으로 쳐냈다. 그야말로 놀라운 신위였다.

암기를 날린 이를 처리한 사람은 이번에도 차이란이었다. 천하제일미를 다퉜던 그녀들은 한 사람은 암기를 막았고, 다른 사람은 적을 죽였다.

이안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수레 옆에서 떨고 있는 상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쪽 무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세요!”

그들에게 경고하던 순간, 이안은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상인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에는 어떤 공포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스르르.

그의 수레에서 암기를 발출하는 장치가 올라왔다.

앞서 마군을 상대했던 광풍연사포였다.

쉬이이익.

이안이 본능적으로 검기를 날렸지만, 그 앞을 막은 철벽에 막혔다.

밖을 보기 위해 뚫어둔 작은 구멍, 그 눈구멍을 정확히 공격해야 적을 해치울 수 있었다.

순간 이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앞서 적들이 팔에 착용한 암기를 쳐내는 것도 정말 힘들었는데.

한데 수레에 장착된 기관 장치는 그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그리고 수레는 한 대가 아니라 세 대였다. 좌우에 있던 다른 수레까지 총 세 기의 광풍연사포가 일제히 그녀에게 겨눠졌다. 혼란 속에서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그들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이안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자신이 죽으면 저 뒤에 일반인들과 그들을 지키고 있는 수하들까지 다 죽게 될 거다. 대주로서 그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

‘막자. 이안아, 막을 수 있다.’

그녀는 마음을 다스리며 모든 집중력을 발휘했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광풍연사포가 발사되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더는 할 수 없을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했기 때문일까?

주위의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관 너머 구멍 사이로 적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기관에서 암기가 쏟아져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암기들이 하나, 둘, 셋…… 연속해서 계속 나오는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좌우에서도 암기가 발출되어 자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암기들을 어떻게 피하고 어떤 것들을 쳐내야 할지 본능이 답을 내리던 순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챙챙챙챙챙챙챙챙챙챙!

날아드는 암기를 쳐내며 쇄도한 그녀는 어느새 수레 앞에 있었다.

쉬이익!

그녀가 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앞서 검기로도 잘리지 않았던 철판이 잘리며 그 뒤에 있던 남자의 얼굴도 반으로 갈라졌다.

“하아.”

그녀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던 그 순간.

왼쪽에 있던 기관도 발사를 멈춘 상태였다.

이안을 공격하느라 방향을 튼 그곳으로 차이란이 철벽을 뛰어넘어 들어가서 그의 목에 비수를 박아넣은 것이다.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슉슉슉슉슉슉!

오른쪽의 기관은 아직도 허공을 향해 쏘고 있었다.

시커먼 구렁이 같은 것이 수레 아래에서 솟아오르며 그 방향을 완전히 하늘로 향하게 했다. 바로 서진의 귀술이 발휘된 것이다.

균형을 잃고 허공을 난사하던 그의 심장에 비수를 박아넣은 사람은 청면이었다.

이안은 잠시 멍한 상태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경험도 경험이지만, 검기로도 잘리지 않았던 철판이 무 베어지듯 베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나중에 검무극에게 물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리라.

잠시 후, 그곳으로 마군들이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계속 날아들던 폭발형 암기 공격이 일순간에 멈추는 바람에 그들은 진형을 풀고 달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장호는 물론이고 마군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상황은 정리된 후였다.

세 대의 기관 장치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휴대용 암기를 찬 이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귀영대 삼 조 무인들이 그들의 팔에서 암기를 회수하고 있었다. 전량 회수해서 철방에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한쪽에는 일반 백성들을 귀영대 일 조와 이 조 무인들이 둘러서서 지켜주고 있었다.

장호는 자신이 귀영대의 실력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이안은 장호와 마군들이 얼마나 다급히 달려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장 군주님.”

“이 대주님.”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장호는 느낄 수 있었다. 예전 주점에서 술 모임 할 때의 이안과 지금 전장에서의 이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해도 될 정도로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신 덕분이에요.”

장호는 훌륭하게 싸움을 치룬 이안에게 한마디 힘을 주고 싶었다.

“첫 실전을 축하드립니다. 다음에 마군이 위험하면 꼭 도와주러 와주십시오.”

그야말로 더할 수 없을 장호의 극찬이었다.

“감사합니다, 군주님. 우리가 도우러 갈 일은 없겠지만,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모든 게 다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쇄애애애애액!

무엇인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옆에 있던 방패를 든 마군이 장호와 이안을 지켜주러 몸을 날렸다.

장호와 이안이 함께 몸을 돌려 방패에 내력을 주입했다.

세 사람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날아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 두 사람이 함께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지켜주려던 마군이 죽었을 위력이었다.

쩌어억.

들고 있던 방패가 금이 가더니 이내 부서져 내렸다. 싸움 내내 절대 깨어지지 않았던 전술방패가 깨어진 것이다.

누군가 그곳에 내려섰다.

그를 보는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거대한 덩치에 온몸에 철갑을 두른 남자였다. 갑옷에 여러 쇳덩이까지 붙어 있어서 그의 덩치는 더욱 커 보였다.

차이란이 그를 알아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입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신기철갑(神機鐵鉀)!”

앞서 그 철문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바로 이 신기철갑이었다. 그들의 모든 기술과 역량이 총 집합된 갑옷이었다.

“검기와 검강으로는 절대 벨 수 없어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온몸에 무기를 두르고 있었는데, 어깨와 팔, 허리까지 금용 무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앞서 경험했던 것들보다 훨씬 강력한 것들이었다.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유일한 약점은 얼굴을 보호하는 저 철가면의 눈을 노려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상대의 기도로 볼 때, 보통 무공실력이 아니었다. 절대 쉽게 눈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만한 마교놈들, 너희가 개떼처럼 몰려오면 우리가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느냐?”

철갑 사내가 천천히 양팔을 들었다. 그의 팔에 달린 암기에서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났다.

“과연 여기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방패를 든 마군들이 우르르 앞장서서 귀영대 앞을 막았다. 그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는 눈빛이었다.

“마교 놈들아, 여기가 너희들의 무덤…….”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 날아왔다.

흔들림도 없고, 망설임도 없이 그냥 직선으로 쭉 뻗어온 그것이 정확하게 철가면의 눈에 적중했다.

그것은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보다 빨랐다.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는지 소리가 뒤이어 도착했으니까.

쉬이이이이이이익!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철갑 사내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장에 모두를 몰살시킬 것 같았던 그가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이안은 물론이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지풍이 어디서 날아왔는지를 확인한 그들은 경악했다.

‘설마? 이 거리에서?’

저 멀리 작은 언덕 위 바위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바로 새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였다.

이 먼 거리에서 혈앙지를 정확히 적중시킨 것이다.

예전의 혈앙지가 아니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해진 혈앙지였다.

모두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는 처음부터 이 싸움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음을. 이렇게 모두 무사히 싸움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가 조용히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임을.

혼전 속에서 분명 조원들이 놓친 적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놓치지 않았으리라. 소리 없이 날아든 혈앙지가 사신을 되돌려 보냈으리라.

어쩌면 그 싸움은 그가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심력 소모가 큰 싸움이지 않았을까?

장호는 마지막에 자신들을 공격했던 이들을 해치운 사람이 극악소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전장을 종횡하며 내내 함께 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힘차게 그를 불렀다.

* * *

“소마님!”

이안과 동시에 검무극도 소리쳤다.

검무극의 얼굴에 감격이 가득했다. 근래 이렇게 감격스러웠던 적이 있었을까? 훌륭한 싸움을 벌인 이안과 조원들 모두 대견스러웠다. 다들 잘 싸웠다!

반대로 암흑궁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환상처럼 펼쳐졌던 장면이 퍽, 하고 꺼지듯 사라졌다.

“이게 끝이라 생각하지 마라.”

암흑궁주의 허상이 일렁거렸다. 그의 분노가 허상을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다.

“네 극악소마는 오늘 영원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될 거다.”

검무극이 아무 반응이 없자 암흑궁주가 물었다.

“이것도 믿지 않느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믿어. 소마님이 계신 걸 아는데 저들만 보내지 않았겠지. 아주아주 무서운 놈을 보냈겠지.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을 죽이거나 인질로 삼아서 어떻게든 내 마음을 흔들어야 하니까. 이 일,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잖아?”

자글자글한 주름에 담긴 세월의 힘도,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협박도, 이 마음만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아닌 소마님을 남겨둔 거야.”

극악소마를 향한 그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짓이 절대 안 통하게 하려고.”

눈 뜨기만 해!

먼 거리를 훌쩍 날아온 극악소마가 이안 앞으로 내려섰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안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무인들도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만약 신기철갑을 두른 이가 암기를 발출했다면,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극악소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뒷짐을 지고 저 멀리 강에 떠 있는 부귀선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암흑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마불과 취마가 급히 결계를 뚫고 들어간 것도 저 암흑의 기운 때문이리라.

극악소마는 당장에라도 결계를 뚫고 배로 올라가고 싶었다. 누구보다 소교주를 믿지만, 암흑궁주는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당장 이곳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암습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극악소마가 장호와 이안에게 말했다.

“남길 사람만 남기고 수하들은 안가로 가서 대기하도록 하게.”

“네, 그러겠습니다.”

이번 출교에서 수하들의 실전 경험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안은 차이란과 청면을 남겼다. 차이란이라면 이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남게 했고, 청면은 극악소마 때문에 남겼다. 청면이 남고 싶어 할 거 같았기에.

“이 조장과 사 조장은 수하들 데리고 안가로 가서 기다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암기들 빠짐없이 잘 챙겨가. 특히 저 신기철갑은 확실히 챙기고.”

서진과 지한이 수하들과 함께 시체들이 남긴 암기를 모두 챙겼다. 다행히 극악소마가 단 한 수에 눈을 꿰뚫어 죽였기에, 신기철갑을 온전히 얻을 수 있었다.

철문의 이 암기들은 천마신교 철방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장호는 마군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전술 방패는 다시 마차 벽으로 조립했는데, 부서진 방패 때문에 뻥 뚫린 구멍이 이 싸움이 잘못 풀렸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수하들이 모두 안가로 떠나고 그곳에는 이안과 장호, 차이란과 청면만이 남았다.

이안은 극악소마의 배려를 느꼈다.

그는 모두를 다 안가로 보낼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그럼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극악소마는 자신에게 기회를 더 주고 있었다. 전장에 남아서 더 많은 경험을 해보라고.

직접 싸우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서서 저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부귀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얻을 것은 있었으니까.

진짜 강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배려였고, 검무극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소마님.’

그때 청면이 극악소마에게 다가갔다.

출교해서 이곳까지 오는 여정 중에 따로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있었다 해도 감히 다가가기 어려웠고.

한데 이렇게 귀영대 무인들을 뒤에서 살펴줬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에 극악소마는 여전히 부귀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함께 이곳까지 오면서도 묻지 않았던 한마디.

“잘 지냈느냐?”

극악소마가 안부를 물어봐 주자 청면은 가슴이 울컥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났지만, 어찌 악인곡에 대한 그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그때 극악소마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툭 흘러나왔다.

“오고 싶으면 돌아와도 된다.”

가면 속 청면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앞서 싸움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암습자가 얼굴에 암기를 들이밀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극악소마가 청면을 돌아보았다. 마치 그 눈빛이 이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삶이 마냥 좋을 거 같아도, 또 막상 그게 현실이 되니 다를 바 없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청면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삶에 만족하는 만큼, 무면객 시절이 그리웠으니까.

그때 극악소마가 불쑥 말했다.

“나와.”

청면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귀영대를 나오라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극악소마의 시선은 청면의 어깨 너머 저 뒤쪽을 향하고 있었다.

스르륵.

저 멀리 바닥에 검은 원이 생겨나더니, 한 사람이 쑥 올라왔다.

그는 바로 암흑궁주의 수족이었던 회였다.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적대감도, 분노도, 살의도 없었다. 그 무심한 눈빛이 더 위험해 보였다.

회의 등장에 극악소마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소교주와 여러 마존이 들어간 저 부귀선에 병력을 집중해야 할 때인데, 이렇게 자신에게 왔다는 것은?

“이 대주를 노리는 것이군.”

회가 아무 대답이 없자 차이란이 이안을 바라보며 대신 말했다.

“적이라면 상대의 심장을 노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심장 이야기로 자신을 놀리다니? 분명 차이란은 자신보다 더 여유가 있었다.

“소교주님은 괜히 심장이라 부르셔서.”

입은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조금은 튼튼한 심장이 되었지요.”

앞서 무아지경의 싸움을 경험하면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긴 그녀였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더 싸우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회가 차이란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당신이 노려야 할 심장 아니었소?”

배신을 질책하는 그의 물음에 차이란은 순순히 인정했다.

“살수에게 의리를 찾다니?”

차이란은 암흑궁주의 직속 수하들은 잘 알지 못했다. 훗날 십이지왕이 될 열두 명은 따로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무인은 몰라도 회만큼은 잘 알았다. 암흑궁주와 자신들 사이를 오가며 명령을 전한 이가 그였으니까.

암흑궁주가 가장 신임하는 수하.

그가 직접 나선 것이다.

“당신이 직접 나서야 할 만큼 상황이 절박한 모양이군.”

회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아까 했던 당신 말은 틀렸소.”

그가 찾아온 것은 이안 때문이 아니었다.

“난 당신 때문에 왔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어느새 극악소마의 발밑에는 검은 원이 생겼다.

쑤우우욱.

극악소마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신법이나 내공으로 막을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남들이 봤을 때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극악소마에겐 바깥세상이 홱 뒤집히며 순식간에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빛 한 줌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극악소마의 하얀 가면도 어둠에 잠식되어 전혀 비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평생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할 거요.”

암흑궁의 독문마공 중 강력한 한 수인 영세암옥(永世暗獄)이 펼쳐진 것이다.

영세암옥은 희생과 위험이 따르는 마공이었다.

누군가를 가두는 대신 자신도 그곳에 함께 갇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둔 자가 죽어야만 이 마공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

물론 상대는 자신을 찾아서 죽이려 들겠지만, 이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아낼 수는 없다. 어둠은 자신의 편이었고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결국은 어둠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서 죽더군요.”

그 무서운 말에도 극악소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면 속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오직 하얀 벽만 바라보며 평생을 수련해온 극악소마였다.

그 삶이 닿아 있었던 것은 공허(空虛)와 무(無).

그랬기에 회가 상상도 못 한 말이 극악소마에게서 흘러나왔다.

“여기 편안하다.”

* * *

취마와 마불은 복도 끝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검은 기운을 보고 있었다.

“탐심대멸공이 펼쳐내는 기운이네. 저 기운에 노출되면 자신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없지. 저리로 돌아가세.”

돌아서 가자는 마불의 말에 취마는 정면돌파를 제안했다.

“그냥 뚫고 가시죠.”

취마가 이런 선택을 하자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교주는 저 기운을 피하지 않았을 겁니다.”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무극이라면 저 어둠의 기운을 뚫고 암흑궁주를 찾으러 갔을 것이다.

“그래, 뚫고 가세.”

사실 마불이 돌아가자고 한 데에는 취마를 위한 배려도 있었다.

“나는 저 기운을 견딜 수 있는데, 자넨 괜찮겠나?”

“취기로 버텨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검은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나쁜 기운이 그들을 엄습했다.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면서 몸을 보호했다.

취마는 냄새만 맡아도 취해서 쓰러질 강력한 주기가 그의 몸 주위를 감싸며 보호했다.

두 사람의 무공 특성상 암흑마공에 강한 상성을 지녔음에도 몸을 완벽히 보호하지 못했다.

“정말 지독합니다.”

주기를 뚫고 암흑 기운이 침투했다. 취마는 지독한 몸살을 앓을 때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나도 이렇게 강한 암흑마기는 난생처음이네. 교주님의 천마호신공이 아니라면 이 기운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

마불의 몸에서 나는 황금빛이 더욱 강렬해졌고, 취마의 주기 역시 더욱 짙어졌다.

“반대로 놈들이 펼치는 암흑마공은 평소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할 거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어느 쪽이겠는가?”

“소교주는 분명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쪽으로 향했을 겁니다.”

취마는 확신했다. 어디 검무극과 술만 마셨겠는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마불이 잠시 안개 속에서 기운을 느끼더니.

“그럼, 이쪽이네.”

두 사람이 더 기운이 강력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가다 보니 막다른 곳이 나왔고 거기에 커다란 문이 있었다.

취마와 마불이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라는 눈빛을 주고받은 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엄청나게 넓은 곳이었다. 좁은 선실의 복도로만 다니다 갑자기 이런 공간은 정말 의외였다. 천장도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았다.

배에 창고로 쓰는 곳처럼 보였는데 큰 상자 몇 개와 그물 따위가 놓여 있었다. 저 앞에 반대쪽으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다행히 이 창고에는 안개가 침입하기 전이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잠시 쉬었다 가시죠.”

내내 긴장했던 마불 역시 한숨을 돌렸다.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던 취마가 한쪽 벽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저길 보십시오,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한 남자가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그림이었다. 당연히 기괴해 보였다. 그 넓은 벽에 사람 하나만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기분 나쁘군.”

마불은 이런 공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지만, 취마는 더 구체적으로 기분 나빴다.

“이놈, 생긴 것부터 아주 기분 나쁘게 생겼습니다. 눈을 감은 것도 건방져 보이고요.”

취마가 내력을 끌어올리며 그림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마불의 말이 들려왔다.

“누가 그렸는지 몰라도 그리긴 잘 그렸군.”

그래, 너무 잘 그려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이리라. 그림 속 인물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처럼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뱃사람이 이렇게 잘 그렸을 리는 없을 텐데요.”

“화공이 노름에라도 빠졌나 보지.”

“왠지 이 자, 꼭 눈을 뜰 것 같습니다.”

취마가 취객처럼 그림에 시비를 걸었다.

“너, 눈 뜨기만 해. 확 찔러 버린다.”

마불이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취마가 홱 뒤로 돌아섰다.

순간 취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술이 확 깨는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마불이 벽 속의 그림이 되어 어리둥절 자신의 몸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제가 술을 너무 마셨나 봅니다. 마불님이 벽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취마가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서며 앞서 눈을 감고 있던 그림을 향해 비수를 내질렀다.

쉬이익.

취마의 비수가 그림에 박혔다.

비수가 박힌 위치는 눈을 감은 남자의 가슴이었다. 비수가 박혔지만, 그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수에 묻은 것은 피가 아니라 물감이었다.

‘이놈이 아닌가?’

아니긴! 그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푹! 푹! 푸욱!

취마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수를 연속해서 찔러넣었다.

하지만 그림 속 사내는 그렇게 백날 찔러도 소용없다는 듯, 취마를 보며 웃었다.

“너 이 새끼!”

남자가 벽 속에서 움직였다. 비수가 박혔던 남자의 가슴 부분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슥슥슥.

그때 보이지 않는 붓으로 붓질을 하는 것처럼 그곳에 색이 채워졌다.

그는 앞서 암흑궁주와 함께 있었던 비밀병기 암흑화령이었다

“밖에선 못 죽인다 이거지?”

암흑화령은 벽을 타고 빠르게 건너편 마불이 있는 쪽으로 갔다. 정말 빠른 움직임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마불님!”

마불도 취마를 바라보며 뭐라 말을 했다. 하지만 입만 벙긋거렸을 뿐 마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암흑화령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날아가는 장력도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그러자 암흑화령도 장력을 발출했다.

그림이 되어 날아간 두 개의 장력이 중간에서 만나 폭발했다.

폭발하는 모습도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너무 우스꽝스러웠지만, 취마는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마불을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의 암흑사술이라면?

‘저기서 죽으면 마불님도 죽는다!’

문제는 저 공간이 저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라는 점이었다.

취마가 자신도 그림 안으로 들어가려고 벽을 두드렸지만 들어가지지 않았다. 벽은 그냥 벽일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벽을 다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마불이 들어가 있는데 함부로 부술 수는 없었다.

“저놈 죽이고 나오십시오! 마불님만 믿습니다!”

지금 믿을 건 마불의 실력뿐.

그리고 마불은 훌륭하게 기대에 부응했다. 놈에게 달려들어 근접전을 펼치던 마불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인을 완성한 것이다.

황금대라마공!

살법회인!

마불의 양손에서 황금빛 강기가 휘몰아쳐 날아갔다.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황금빛 강기는 그림으로 봐도 멋있었다.

“됐다!”

지켜보던 취마가 환호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순식간에 수인을 완성했기에 놈이 피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마불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마불이 날린 황금빛 강기도 허공에서 멈췄다. 피하려던 암흑화령도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 모두가 그림이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일이 이어졌다.

슥슥슥.

마불과 암흑화령 사이에 뭔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이건 반칙이잖아!”

날아가는 강기 바로 앞에 시커먼 구멍이 그려졌다. 마치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보였다.

취마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불길함이 확 치밀어 올랐다. 그림처럼 멈추었던 암흑화령의 입꼬리가 싹 올라가던 그 순간!

“너 설마?”

다음 순간 그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불이 날린 강기가 바로 앞에 그려진 어둠의 통로로 들어갔다.

동시에 취마 앞에 시커먼 어둠이 생겨나더니.

쇄애애애애애애액!

살법회인이 취마에게 쏟아졌다.

소교주를 부탁하네

마불은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황당했다.

벽 속으로 들어온 것도 놀라웠지만, 자신이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림을 이용해서 사술을 펼치는 암흑화술(暗黑畵術)이 있다는 말을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공의 화폭처럼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온통 하얀색이라서 거리 감각까지 무뎌지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바깥이 보였다. 자신이 있는 곳과 바깥세상 사이에 투명한 막이 있었는데 손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수고 나가려고 일장을 날렸지만, 그 힘은 그대로 투명한 막 속으로 사라졌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파훼법을 찾지 못하면 힘으로는 절대 이 막을 뚫고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바깥에서 취마가 눈을 감고 있던 남자를 비수로 찌르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고, 벽 속에서 눈을 뜬 남자의 그림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깥세상의 취마가 뭐라고 말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눈으로 볼 수만 있을 뿐, 이곳과는 철저히 분리된 공간.

놈과 한차례 격돌한 후 수인을 완성했다.

마불은 이 한 수로 놈을 처치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발휘된 살법회인을 절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마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이 멈췄다. 자신이 날린 살법회인도 허공에 멈췄다. 정말 이 순간에 모두 그림이 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상대도 함께 멈췄다는 점이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있었는지, 남자의 눈빛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슥슥슥.

자신의 강기 앞에 시커먼 구멍이 그려졌다.

그림이 완성되자 자신의 강기가 어둠의 통로로 사라졌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그 살법회인이 바깥에 있는 취마를 덮친 것이다.

“안 돼!”

취마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강기에 휩싸여 저 멀리 벽까지 날아가 처박히는 모습이 보였다.

마불이 놀란 얼굴로 그림 밖을 쳐다보았다. 반면 암흑화령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다행히 취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호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대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불과 취마의 시선이 마주쳤다.

취마가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불은 안도했다.

‘좋지 않군.’

자신의 공격이 취마에게 날아간다면?

이렇게 되면 결정적일 때 큰 초식을 쓸 수가 없다. 이 싸움은 너무나 불리한 싸움.

마불은 황금대라마공을 쓰는 대신 일반적인 공격으로 그를 상대하려 마음먹었다.

‘기본 실력으로 죽인다!’

마불은 실력으로 그를 압도했다. 그림 속에서의 불리한 싸움이 아니었다면 이미 시체가 되어 쓰러졌을 놈이었다.

하지만 놈은 단지 바깥세상으로 공격을 내뱉게 하는 암흑 통로만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싸움 방식은 더없이 독특했다.

사아악!

붓이 그어지듯 검은색 선이 그어졌다.

마불이 몸을 틀며 피했다. 자신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검은색 검기였다.

사악, 사아아악.

마치 화공이 화폭에 난초를 치듯, 검기가 시원하게 공간을 가로질렀다.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난 마불의 손에서 염주가 날아갔다.

쉭쉭쉭쉭쉭쉭쉭!

그가 피할 것까지 예상한 폭넓은 공격이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먹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것처럼 찍히더니, 이내 그 점을 중심으로 먹물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날아가던 염주알들은 모두 먹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상대는 그림을 이용한 공격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공간은 그의 화폭이었다.

‘게다가 이 배 전체에 탐심대멸공이 펼쳐져 있어서, 이자의 사술이 몇 배나 더 강력해졌다!’

도박꾼들의 강렬한 탐욕을 빨아먹으며 어둠의 기운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그때 마불이 섬뜩한 느낌에 위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붉은 강기가 이상한 모양으로 얽혀서 허공에 떠 있었다.

휘이이이잉.

붉은 강기가 그대로 내리 찍혔다.

몸을 던져 피한 마불은 그 붉은 강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강기는 바로 그림에 찍는 낙관(落款)이었다.

쾅! 꽈앙!

낙관이 연속해서 떨어졌고 마불이 화려한 보법을 발휘해서 공격을 빠져나갔다.

그림으로 펼쳐졌기에 장난스러우면서도 괴이해 보였지만 실제로 적중당하면 심각한 부상을 당할 강력한 공격이었다.

마불이 상대의 공격을 피하며 쇄도해 날아갔다. 바로 코앞까지 달려들어 그의 목을 뜯어내려던 순간.

다시 마불은 그림처럼 멈췄다. 상대 역시 멈춘 채로 마불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웃고 있었다.

슥슥슥.

그림이 그려지자 갑자기 불어닥친 엄청난 바람에 마불이 날아갔다.

휘이이잉.

다시 놈과 거리가 멀어졌다.

“젠장!”

이 싸움은 지금껏 해왔던 그 어떤 싸움보다 까다로웠다.

“팔마존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별거 아니네?”

암흑화령의 조롱에 마불이 차분히 응수했다.

“내가 그림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조각 대신 그림을 그릴 걸 그랬네.”

초조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마불은 여유가 있었다. 이럴 때 흥분하면 진짜 지는 것이다.

“마불, 당신은 내게 영원히 남게 될 거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암흑화령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여러 개의 족자가 나왔다.

그중 하나를 펼치니 한 무인의 모습이 보였다. 먹으로만 그려져 있었는데, 얼굴색도, 옷 색도 칠해져 있지 않았다.

손을 내뻗고 있는 그의 표정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족자에 들어가 있는 무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암흑화령이 빈 족자를 꺼냈다. 테두리부터 다른 족자보다 화려했는데, 바로 황금색 족자였다.

“당신은 특별히 여기에 담아주지.”

“실물보다 더 잘 생기게 그려서 남겨주게.”

마불이 여전히 여유를 부리자, 암흑화령이 입가에 조소를 지었다.

“저기 저 주정뱅이를 믿고 있군.”

암흑화령이 그림 밖의 취마를 쳐다보았다. 마불도 함께 그곳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막 너머 취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곳에 있던 상자를 부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파훼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암흑화령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볼 때, 파훼법은 저곳에 없었다.

“파훼법이 뭔지 궁금하지?”

마불은 취마를 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찾아내겠지. 생각보다 똑똑한 친구라서.”

다시 싸우기 전에 마불이 한 가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왜 저 사람이 아니라 나를 선택했나?”

뭐든 다 대답해 줄 거 같은 여유를 보인 그였는데, 그 질문만큼은 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족자 속에서 실컷 듣게 될 거야.”

* * *

“분명 파훼법은 있다.”

취마가 그곳에 있던 상자들을 모두 박살 냈다. 그 안에 혹시라도 파훼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까 해서였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취마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강력한 사술일수록 파훼법은 간단하고 가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 주정뱅이야, 머리를 써!’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파훼법이 될만한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달려가서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에 뭐가 있는지 살피기도 했고, 내력을 주입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싸움의 무대가 되는 이 벽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

취마가 건너편 벽에서 싸우고 있는 마불을 쳐다보았다.

이 순간에도 마불은 날아드는 장력을 피하려다가 온몸이 가시넝쿨로 옥죄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취마의 가슴이 철렁했다.

가시넝쿨 때문에 일장을 허용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몸 색깔이 처음보다 옅어져 있었다. 황금빛 광채가 빛을 잃는 것은 물론이었고, 그의 옷 색깔도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느낌상 그가 색을 모두 잃으면 죽게 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진짜 그림이 되어 가고 있어.’

취마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천장으로 날아올라서 그곳을 살폈다. 숨겨둔 뭔가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천장에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결국 취마는 할까 말까 고민했던 것을 실행했다.

더는 방법을 찾지 못한 취마가 벽의 일부분을 부쉈다.

벽에 구멍이 생기던 그 순간.

마불이 서 있던 땅에 지진이 나며 발밑이 흔들렸다. 머리 위에서 거대한 바윗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을 피하며 몸을 날리던 마불에게 불덩이가 쏟아졌다.

마불이 간신히 벗어나는 모습에 취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억지로 벽을 부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마불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공격이 제대로 먹히려고만 하면, 그림이 되어 멈췄다.

마불의 주먹 앞에 벽이 세워졌고 그 벽에는 강철 침까지 박혔다. 그 침은 마불의 주먹 바로 앞에 뾰족하게 그려졌다.

취마가 달려가서 함께 멈추고 있는 암흑화령에게 소리쳤다.

“이 비겁한 새끼야! 적당히 해!”

취마가 주먹을 번쩍 들었다. 놈이 그려진 부분을 통째로 날려버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멀리 있는 벽에 구멍을 냈는데도 그 난리가 났는데, 이놈을 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함정이다.’

그랬다간 마불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림이 그려지자 다시 두 사람이 움직였다.

날아들던 기세를 멈추지 못했기에 마불의 주먹이 강철 침을 부수고 뒤에 있던 벽을 부쉈다. 내공이 깃든 일격이었지만 마불의 피부가 찢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저자 역시 그림을 그릴 때마다 막대한 내공을 소모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버티는 것은?

‘탐심대멸공이 놈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마불의 다리 색이 완전히 빠지며 먹빛으로 변했다.

그러자 마불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취마가 마불 앞으로 달려왔다. 취마의 울분과 분노가 막 너머까지 전해졌다.

반면 마불은 담담한 눈빛으로 무엇인가를 말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취마는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만 봐도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을 나가게.”

그리고 덧붙여지는 한마디.

“소교주를 부탁하네.”

마불의 표정은 득도한 고승처럼 편안해 보였다. 마불을 만난 이래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마불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마지막 모습은 편안하게 합장하는 모습으로 끝내려는 것이다.

‘대공자, 끝까지 모시지 못해 미안합니다.’

취마는 이렇게 큰 절망감은 처음이었다.

마불을 이렇게 잃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이 순간, 취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미안하다, 무극아.’

이곳에 검무극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극이라면 반드시 파훼법을 찾아냈을 텐데. 그리고 저놈을 박살 내놓고 이렇게 말했겠지. 내가 발로 그려도 너보다는 잘 그릴 거다.

‘왜 내가 아니고 마불님입니까? 차라리 저였다면!’

다음 순간 취마가 흠칫했다.

‘그러게. 왜 마불님이었지? 그림을 보고 욕도 내가 했는데.’

다음 순간!

취마의 머릿속을 벼락처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설마?’

취마가 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마지막으로 공격하십시오! 마불님이 가진 가장 강한 공격으로요!”

말이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취마가 마불 앞에서 수인을 잡는 시늉을 했다.

마불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공격하라고?

취마가 손바닥을 높이 들었다가 바닥에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마불은 그가 어떤 초식을 쓰라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한 수는 자네에게 떨어지게 될 텐데?’

취마가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고 하십시오.’

취마의 눈빛에 담긴 것은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반신은 움직이지 못했고, 먹빛이 점차 상반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합장했던 손이 풀리며 마불이 양손으로 수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서 한 수를 발휘했다.

황금대라마공

마장멸인!

황금대라마공의 가장 강력한 한 수를.

암흑화령은 어디 한 번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후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불상의 손바닥이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암흑화령을 내리쳤다.

다음 순간, 그 거대한 손바닥은 암흑화령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슥슥슥.

그 사이에 다시 암흑의 통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암흑화령은 동작이 멈추기 전부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취마는 결코 이 강력한 초식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취마가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손바닥과 머리 사이에 그려지는 시커먼 구멍에 술을 뿜었다.

촤아아아아아악.

그냥 술이 아니었다. 취마의 내력이 깃든 강력한 주기였다.

“그림 지우는데 술보다 좋은 게 없지!”

주기가 그림에 가득 스며들었고, 취마가 좌우로 내달리면서 소맷자락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취마의 술에 시커먼 구멍이 닦여나갔다.

암흑화령의 두 눈에 경악이 가득 차오르던 그 순간.

‘안 돼!’

그림 속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거대한 손바닥이 암흑화령을 내리쳤다.

쿠아아아아아앙!

마장멸인에 눌린 암흑화령이 버텨보려 했지만,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서는 것에 불과했다.

꽈드드드드득.

거대한 손바닥 모양의 강기에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쿠우우웅!

잠시 후, 바닥을 내리친 마장멸인이 사라지자 거대한 손바닥 자국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납작하게 짓눌려서 사방으로 퍼져나간 온갖 색깔의 물감 자국만이.

다음 순간.

스스스스스.

묵빛으로 바뀌었던 마불의 하반신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색을 되찾았고, 그림에서 사람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벽이 마불을 뱉어냈다.

마불이 무사히 벽에서 나오자, 긴장이 풀린 취마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불도 한숨을 내쉬며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생했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보았으니까.

먼저 가라고 하던 마불의 마음도.

끝까지 남아서 마불을 지키려던 취마의 마음도.

취마가 허리에 차고 있던 술병을 마불에게 건넸다.

마불은 받아 든 술병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다시 취마에게 돌려주었다.

“이 귀한 술은 아껴뒀다 자네가 마시게.”

마불은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취마가 아니라 자신을 선택했는지.

이 무지막지한 암흑화술의 파훼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바로 물이었다.

상대가 그림이니 지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 자체가 파훼법, 아마 한 방울의 물이라도 저자의 몸에 닿으면 이 사술은 파훼되었으리라. 물이 없다면 자신의 피를 이용해야겠지.

취마는 술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를 지키는 주기도 결국 물로 이뤄진 성분이었다.

놈은 애초에 취마와는 싸울 수도 없었다. 놈은 상성상 취마에게는 너무나 약한 자였다. 아마 자신을 죽인 후 그는 취마를 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운기를 해서 내공을 회복한 후 그 공간의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더욱 짙은 어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불이 황금빛 광채를 드러내며 먼저 들어섰다.

“돌아가면 내가 좋은 술로 한잔 사겠네.”

뒤따라 들어가며 취마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마불에게 얻어 마시는 첫술이 될 것이다.

친구 아버지를 도와주십시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

영세암옥.

보통의 경우 이곳에 갇히면 이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또 이곳에 누군가 있지는 않은지. 어떻게든 파훼법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맨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마치 앞에 뭔가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어둠을 응시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기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었다.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결국 무너질 거다.’

이곳의 어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인간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가 지닌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파헤쳐낸다.

공포와 불안, 무력감, 증오, 슬픔, 죄책감, 나약함…….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빨리 무너질 수 있는지 회는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이제 곧 분노할 것이고, 미친놈처럼 웃어댈 것이다. 평생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철벽같은 무인도 대성통곡을 하는 곳이 이곳 영세암옥이었으니까.

‘자, 무너져라, 극악소마!’

회가 내공을 더욱 끌어올리자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럼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자 결국 회는 직접 극악소마를 자극했다.

“왜 이안이 아니라 당신을 가둔지 아시오?”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기에 그가 어디에서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의 죽음보다 당신의 죽음이 소교주에게 더 큰 충격을 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오.”

회는 극악소마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 수 있는 건 소교주의 안위라 확신했다.

과연 침묵하던 극악소마가 검무극이 언급되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희는 아직도 소교주에 대해서 모르는구나.”

“무슨 말이오?”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말했다.

“우리가 다 죽더라도 소교주님은 흔들리지 않을 거다.”

“아마 더 냉정해지시겠지.”

회는 극악소마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앞서 싸움에서 이 대주를 지켜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였다. 저 여인이 다치거나 죽으면 우린 진짜 다 죽는다, 그런 마음으로.”

어둠 속에서 전해진 극악소마의 말이 회의 마음을 가라앉게 했다.

“그럼 당신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죽음이 되겠군.”

“죽음에 의미를 왜 따지나? 삶에서도 따지지 않았던 의미를.”

회의 도발이나 자극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극악소마가 물었다.

“대체 저 배에는 무엇을 준비했나?”

회는 알 수 있었다. 이 말이 없는 남자가 자신과 대화를 나눈 이유가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임을. 자신에게 뭐라도 알아내서 검무극에게 알리기 위해서.

“당신은 소교주에게 미쳤군.”

이런 사람을 수하로 두었다면….

“당신이 한 말은 틀렸소. 당신 같은 사람을 잃으면 소교주는 미쳐서 폭주할 거요.”

암흑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강해지고, 더 강해지고. 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내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이런 곳에 데려와 줘서 고맙다.”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극악소마가 비수를 뽑아 들었다.

비수의 날도 이 어둠에는 반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극악소마가 비수를 허공에 긋자.

어둠을 가르는 새하얀 검선.

당연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검선이었는데, 검선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둠이 밀려와서 그 검선을 없애려고 했지만, 극악소마의 비수가 남긴 검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회는 깜짝 놀랐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더 놀라운 일이 이어졌다.

극악소마가 어둠 속에서 소향비술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공에서 만들어지는 선들은 그야말로 극상승의 무학만이 남길 수 있는 독창적이고 특별한 궤적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수가 남긴 궤적들이 새하얀 빛을 내며 어둠에 남았다.

스르르르르.

아무리 어둠이 몰려들어 그 선을 어둠으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회는 이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새하얀 방에서의 극악소마의 수련은 마음의 평정 속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키우는 수련이었다. 선과 악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나아가 무학의 이치를 깨닫는 수련이었다.

영세암옥에 들어섰을 때 극악소마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그 새하얀 방과 이 암흑의 방은 결국 같은 방이라는 것을.

극악소마가 자신의 하얀 방에서 보고 있었던 건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으니까.

그는 그곳에 외롭게 서서 극악의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곳이 편안했던 것이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암흑화령이 취마를 상대할 수 없듯, 영세암옥은 극악소마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는 이 암흑마공을 압도했고, 이 방은 자신의 방이 된 것이다.

극악소마는 소향비술로 어둠 속에 빛을 각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초식을 펼친 후 그 궤적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자신이 펼친 무공초식의 모든 궤적을 이렇게 생생히 눈으로 다시 볼 기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오직 극악소마와 영세암옥이 만났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극악소마가 다시 옆으로 걸음을 옮겨서 다시 소향비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어둠은 그가 남긴 초식의 흔적을 없애려고 했지만, 새하얀 검선은 없어지지 않았다.

극악소마는 자신이 펼친 소향비술을 앞서 펼쳤던 것과 비교해서 다시 살펴보았다.

“이런 미친! 지금 나의 영세암옥에서 무공 수련을 한다고?”

흥분한 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자신의 독문마공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마터면 기혈이 역류해서 내상을 입을 뻔했다. 이건 암흑의 기운이 통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만해! 이 미친놈아!”

하지만 극악소마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평생에 단 한 번 자신을 찾아온 기연인 것처럼, 다시 소향비술을 펼쳤다. 오늘 이곳에서 소향비술을 완성하고 나가겠다는 것처럼.

흥분한 회가 소리쳤다.

“소교주가 걱정되지 않느냐? 여기서 한가롭게 무공 수련이나 하고 있었다면 그가 뭐라고 하겠느냐?”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소교주께서 제일 좋아하실 거다.”

회는 자신이 지닌 마지막 내력을 쏟아 넣으며 어둠의 기운을 강화했지만, 어두운 밤일수록 달이 더욱 밝듯이 소향비술이 남긴 궤적만 더욱 선명해졌다.

흥분한 회는 깨달았다. 이 어둠의 기운에 영향을 받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애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구나.’

수많은 빛나는 검선들이 생겨나면서 점차 공간이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 홀로 펼치는 이 수련은 무공 수련임과 동시에 극악소마가 빛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그 공간이 빛으로 가득 채워졌을 때.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는가 싶더니, 두 사람은 원래 서 있던 자리에 있었다.

회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영세암옥이 파훼 되면서 그도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온몸의 혈맥이 끊어진 회가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죽여주시오.”

고통스러워하는 회의 두 눈을 극악소마가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면 속 두 눈에는 자신을 죽이려 한 자에 대한 증오나 미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네 어둠은 내게 편안했다.”

쉬이익.

극악소마의 비수가 허공을 가르며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회가 마지막 본 것은 비수에 검무극이 새겨준 웃음 소자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과 차이란, 청면과 장호가 정중히 그에게 예를 갖췄다. 갑자기 극악소마가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모두 긴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원래도 알았지만, 이제 또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마존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극악소마는 호숫가에 서서 말없이 부귀선을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뭐가 또 튀어나올까 긴장해야 할 상황이었는데. 극악소마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검무극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곁에 저런 사람 한 명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차이란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너무 부러워 말아요.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안 부러워요. 굳이 따지자면 저는 소교주님보다는 소마님에 가까운 사람이라서.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전 저런 분을 담을만한 그릇이 못 된다는 거죠. 차라리 제가 따르고, 좋아하고. 그러다 버림받더라도 그게 더 마음 편한 사람이거든요.

그 전음에 차이란이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이런 관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래, 마음 그릇이 간장 종지면 어때? 간장 담아서 사는 거지. 안 흘리고 사는 게 중요하지!

다시 이안의 시선이 저 멀리 부귀선을 향했다.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큰 그릇님, 어서 나오셔서 이 작은 그릇들 다 담아주세요!’

* * *

무림맹 맹주전으로 급보가 날아들었다.

“천마신교에서 마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무림맹 총군사 제갈현의 보고에 무림맹주 진패천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진하군도 깜짝 놀랐다.

검우진이 천마신교 교주 자리에 오른 이후 단 한 번도 마화는 피어오르지 않았다.

“마화가 피어오름에 따라 천마신교의 모든 지단과 지부가 비상 체계로 들어섰습니다.”

진패천은 지금까지 불안해했던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검무극은 믿지만 검우진은 믿지 않았으니까.

제갈현은 맹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행히 전쟁 발발 징후는 없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천마신교가 위험에 빠졌다는 의미인데.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습니다.”

더해진 소식은 마화가 피어올랐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었다.

“천마신교 본단을 봉쇄한 후, 마교주와 마존들이 마가촌으로 나왔습니다.”

진패천도 무림맹을 이끄는 수장인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마교주를 긴장하게 할 정도로, 심지어 마존들까지 데리고 나와야 할 정도의 강적이 그들에게 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아마 이번 천살성의 출현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무림맹에서도 천살성의 출현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고, 주의 깊게 무림을 살피고 있었다.

“천살성을 타고난 자가 자신들에게로 온다고 판단했다고 생각됩니다.”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앞서 마존들을 이끌고 출교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걱정되진 않았다.

한데 이후에 천살성이 출현하면서 가슴을 철렁하게 했는데, 이제 마화까지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천마신교와 또 검무극과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그들이 걱정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극, 괜찮나?’

정말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 일에 관해서 신교의 기별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진패천이 인상을 굳혔다.

이러이러해서 마화를 피웠다, 천살성을 타고난 자가 오는 것 같다.

대충 언질이라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천마신교는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하긴, 검무극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자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중요한 일을 그들이 알까 걱정했으니까.

이미 무림맹 본단에는 검무극의 출교로 최고 등급의 비상 단계인 천룡령이 내려진 상황.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만약 신교가 믿는 바대로 그 천살성을 타고난 자가 실재한다면, 그자가 본맹으로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진패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자는 지금까지 정사마가 함께 싸워온 그 배후 세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외부로 나가 있는 고수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맹 내의 모든 진법과 기관의 가동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무림맹 역시 철통같은 요새가 되고 완전한 전시체제로 돌아선다.

“그렇게 하게.”

“네, 곧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제갈현이 그곳을 나가자 이제 그곳에는 진패천과 진하군만 남았다.

진패천은 태사의 옆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가로 걸어가 밖을 쳐다보았다.

진하군은 할아버지의 등에서 한 가지 마음을 읽어냈다.

“마교주를 도와주러 가고 싶으십니까?”

진패천이 손자를 돌아보았다.

“왠지 그러신 것 같아서 드린 말씀입니다.”

놀랍게도 진패천은 검우진을 도와주러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삼자회담을 통해 함께 적을 상대하자고 약속했는데, 그가 위험에 빠졌음을 알면서 오히려 문을 걸어 잠갔다. 진패천의 성격상 마음이 불편했다.

얼굴만 봐도 불편한 마교주지만, 그를 돕고 싶었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단 감정적인 마음.

“만약 이번 일로 마교주가 죽는다면, 마교를 무너뜨린 검이 어딜 향하겠느냐?”

무림맹을 위해서라도 가야 할 일이었다.

“한데 왜 망설이십니까?”

단 한 가지의 가능성 때문에.

천살성이 겁나서도 아니었고, 마교를 도왔다는 강호의 오명이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 천살성이 본맹으로 오면 어찌하겠느냐?”

자신이 자리를 비운 이곳에 천살성이 들이닥친다면? 그래서 손주들이 죽고 무림맹 무인들이 죽게 된다면? 그야말로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 진하군이 생각지 못한 말을 전했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 맹을 지키셨잖습니까?”

“한 번쯤은 할아버지 마음이 가는 대로 하셔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기에 진패천은 부드럽게 손자를 질책했다.

“경솔한 생각이다.”

사실 진하군은 한 가지 확신이 있어서 꺼낸 말이었다.

“천살성이 본맹으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이유를 묻는 눈빛에 진하군이 차분히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판단을 내렸으면 신교에서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기별했을 테니까요.”

검무극과 천마신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소교주가 왜 기별도 없이 마존들을 이끌고 나왔는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이 나쁜 놈이 마지막 싸움을 우리 도움 없이 하려는 겁니다. 우리에겐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별하라고 해놓고서는. 저 혼자 멋진 척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달려가서 버럭 소리치고 싶었다. 다음 모임에서는 벌주 세 병은 마시고 시작해라!

“전 천살성의 출현도 그 친구에게서 비롯한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천살성은 분명 신교로 향했을 겁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진법이 펼쳐지고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무림맹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더는 아무 말이 없자 진하군은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손자가 물러나고도 진패천은 한참을 더 창밖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돌아섰을 때, 태사의 옆에 한 자루의 검이 세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검은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선물로 받은 군자검이었다.

고검제일 군자검.

진패천이 천천히 걸어가서 군자검을 들었다.

손자는 자신이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혹시라도 가게 되면 이 검을 가져가라고 남겨둔 것이리라. 할아버지 손에 군자검이 들리면 천하무적일 거란 믿음으로.

어쩌면 이 속 깊은 손자가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제 친구 아버지를 도와주십시오.

진패천이 깊어진 눈빛으로 군자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러니까 정말 그 사람에게 손주 자랑하러 가고 싶지 않으냐.”

지금이라도 귀찮은 일을

검무극은 어둠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는 쪽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환골탈태한 후에 오감은 물론 육감, 생존본능까지 이전보다 훨씬 더 깨어났다.

그랬기에 아무리 짙은 어둠의 안개일지라도 검무극의 발걸음을 늦추진 못했다.

그때 갑자기 바닥에서 검이 튀어나와 검무극의 발바닥을 찌르려 했다.

검무극이 본능적으로 피하며 훌쩍 뛰어넘자 양쪽 벽에서도 검이 튀어나왔다.

쉬이익, 쉭!

이번 역시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냥 검날만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검을 쥔 팔도 함께 튀어나왔다.

검을 쥔 팔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팔. 양쪽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까지도 팔이 튀어나왔다. 그야말로 검을 쥔 팔이 가득한 기괴한 복도.

후우웅!

어떻게 반응하나 보려고 검무극이 가볍게 일장을 날리자.

마치, 게 눈 감추듯 검을 쥔 팔은 순식간에 벽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장력이 지나가자 검을 쥔 팔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살아 있는 팔처럼 보였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기관 장치가 아니었다.

‘암흑마공 중에서도 암흑소환술의 고수가 펼친 수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고 공포감을 느끼게 했지만, 검무극은 오히려 좋아했다.

“이렇게 못 가게 막는 걸 보니, 이 길이 맞나 보네.”

검무극이 앞을 향해 달려나갔다. 대체 저 수많은 팔을 어떻게 처리하려고 이렇게 무작정 달려드는 것일까, 싶은 질주였지만.

검무극은 실력으로 답을 보여주었다.

쉭! 쉬익! 쉬익! 쉭!

파악! 팍! 파팍! 팍!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팔이 잘려나갔다. 검을 쥔 팔들도 보통이 아니었다.

검들은 그야말로 기묘한 각도로 검무극을 찌르며 날아들었다.

사람과의 싸움에서는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한 방향과 각도로 날아드는 공격이었기에 까다로운 공격.

정말이지 똑똑한 고수의 머리가 몇 개는 달린 듯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상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팍!

검무극이 그대로 정면 돌파했다. 흑마검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야말로 안개 속에서 검광만이 번쩍였고 잘린 팔이 사방으로 날았다.

검무극이 순식간에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후두두두두두둑.

복도 바닥에 잘린 팔들이 가득 떨어져 내렸다.

펑! 펑펑! 펑펑펑펑펑!

검은 연기가 되어 팔들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그 과정에서 검무극의 옷자락 하나 찢어놓지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였다.

그때 복도 끝 정면에 있던 문이 열렸다.

그곳은 도박이 한창 중인 방이었다.

검무극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밖에서 이 난리가 났음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도박에 열중하는 노름꾼들이 가득했다. 그 열기는 검무극이 처음 이 배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뜨거웠다.

‘탐심대멸공이 저들의 기운을 다 빨아들이고 있다.’

그들은 검무극이 지켜보는지도 모른 채 도박에 빠져 있었다.

노름꾼 중에는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박고 있거나 아예 드러누운 채 정신을 잃은 이도 있었다. 몸이 약한 사람부터 생기를 빼앗긴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검무극의 눈에 한 사람이 띄었다.

그들이 도박하는 걸 지켜보는 노인은 놀랍게도 암흑궁주였다. 이번에도 앞서 나타났었던 것처럼 허상임을 알 수 있었다.

반면 노름꾼들은 옆에서 구경하는 이가 허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암흑궁주가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떤가? 자네의 운을 시험해 보지 않겠나?”

“내가 도박에는 도통 관심이 없지만, 한 가지 비법은 알고 있어.”

“무슨 비법이지?”

“도박에서 무조건 이기는 필승의 비법.”

암흑궁주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박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이 도박장 문 너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지.”

검무극이 문을 꽝 닫고 갈 길을 걸어갔다.

문밖에서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겼다.”

그 행동에 암흑궁주의 허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문은 닫혀 버린 후였다. 정말이지 검무극은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검무극이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는데 이번에는 정면에서 암흑궁주의 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화나서 그들을 다 죽여버리면 어쩌려고 그냥 가 버리는 거지?”

“그래서 다 죽였어?”

암흑궁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그 사람들 욕망에 대롱을 박아서 이 대법을 유지하고 있는데, 함부로 죽일 수 없겠지. 한 명, 한 명이 아깝잖아?”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방에 있던 자들을 다 죽여버릴 수 있다.”

“그럼 죽여.”

검무극이 배짱을 부리자 암흑궁주는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뚫어질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까지 닿지 못했다.

“왜? 내가 마가촌 사람들을 내 사람처럼 지켜주니, 여기 노름꾼들 살리려고 쩔쩔맬 줄 알았어?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암흑궁주의 허상 앞까지 다가갔다.

오히려 허상 너머의 진실을 파고드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당신이 왜 내게 다시 나타났는지 맞혀볼까?”

검무극이 암흑궁주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배 바깥의 일이 잘 안 풀렸지? 이안을 인질로 잡거나 죽이려고 했는데 실패했지?”

순간 암흑궁주의 얼굴이 꿈틀했다.

“그래서 저 노름꾼들이라도 인질로 삼을 수 있을까, 그게 내게 먹힐까 떠보러 온 거지?”

암흑궁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이렇게 자꾸 나타나서 시간을 끌려고? 혹시 예상한 것보다 내가 너무 빠르게 당신에게 가고 있나? 왜? 당신이 준비한 것을 펼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처음에 이 부귀선에 탔을 때부터 예상을 벗어난 행보를 보였던 검무극이었다.

“난 지금부터 달려서 갈 거야.”

검무극이 그의 허상을 뚫고 지나가더니 정말 달려가기 시작했다.

허상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검무극은 복도 끝에서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후였다.

검무극은 달렸다. 만약 자신이 추측한 것처럼 암흑궁주가 자신이 오는 것을 늦추려 하는 것이었다면, 한 시라도 일찍 도착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안개 속을 내달리던 검무극의 신형이 멈췄다.

저 앞 복도에 무엇인가 가득 차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암흑마공으로 소환한 괴수들이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복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암흑기운만으로도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앞서 그 암흑소환술의 고수가 불러낸 괴수들이다.’

상대의 기세로 볼 때 앞서 검을 쥔 팔들보다 더 강한 소환물임을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선두에 있던 괴수가 괴성을 지르며 검무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이이익! 서걱!

벼락처럼 빠르게 사선으로 그어지는 흑마검의 검선을 따라 괴수의 몸도 갈라졌다.

그리고 괴수의 공격은 이때부터였다.

치이이이이익.

흩뿌려지는 검은 피가 바닥과 벽을 녹였다.

강호에서 시체를 녹이는 데 사용하는 화골산이 놈의 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이 길게 잘렸음에도 놈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려들었다.

쉭쉭쉭쉭쉭쉭!

흑마검이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여 그를 산산조각냈다. 그제야 괴수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치이이이이익.

곳곳에 흩뿌려진 화골산에서 독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화골산을 뿌려대는 괴수들이 좁은 복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한 마리가 죽자 더는 달려들지 않고 기다렸다.

이걸 어떻게 뚫지, 하는 걱정부터 드는 상황이지만 검무극은 무공을 아끼지 않았다.

“너희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검무극의 눈앞에 나타나는 믿음직한 등.

구화마공 제이식 대멸식.

단 두 개로만 분열한 작은 대멸식이었다.

하지만 위력은 그대로였다. 복도를 꽉 채운 두 악귀가 그대로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괴수들이 버텨보려고 달려들었지만,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온몸이 터져나갔다.

퍼퍼퍼퍼퍼퍼퍼퍽.

치이이이이익.

화골산이 흩뿌려졌지만 대멸식의 악귀들에게는 비에 젖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두 개의 악귀가 복도 끝까지 밀고 갔을 때.

복도 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이까지 휩쓸어 버리기 직전 악귀들이 멈췄다.

기절할 듯 놀란 사람은 바로 선주인 양동이었다. 도박에 빠진 귀빈들 비위를 맞추고 있던 그가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나오다가 악귀들과 마주친 것이다.

양동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시무시한 악귀가 차갑게 내려보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스스슷.

천천히 사라지는 악귀 너머에서 검무극의 말이 덧붙여졌다.

“무서워 마시오. 오늘만큼은 그들이 당신들을 지켜줄 수호신들이니까.”

* * *

비사인은 내원에서 가장 큰 거대 늑대상 위로 몸을 날렸다.

사도맹주 백자강이 그 위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도맹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천마신교에 마화가 피어올랐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비사인은 외부에서 작전을 펼치다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 그 소식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백자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화를 피웠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백자강이 주목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그걸 검우진이 허락했다는 게 중요하지.”

백자강이 생각하는 검우진은 결코 마화를 피울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런 그가 마교 본단을 봉쇄했다면?

“우릴 다 죽이려는 속임수가 아니라면.”

백자강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정말 위험한 게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거지.”

비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정파와 사파를 죽이려는 속임수는 아닐 것이다. 이번 일은 검무극이 다수의 마존들을 이끌고 나온 후의 일,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면 검무극도 관계되었다는 말인데,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 우릴 노렸다면 마화는 피우지 않았겠지요.”

그랬기에 비사인은 검무극이 걱정되었다.

“천살성 때문입니까?”

천마신교가 알고 무림맹이 아는 바를 어찌 사도맹이라고 모르겠는가? 사도맹에서도 천살성의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중이었다.

“그렇겠지. 이번 일로 무림맹이 전시체제로 들어섰다.”

“어떻게 대응하실 겁니까?”

“우리야 양쪽 눈치를 보고 움직여야지.”

자존심이 상할 법한 말이었음에도 백자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사인은 사부의 이런 점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사도의 길을 걷는 것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겼고 사도맹주로서 자부심이 높은 사부인데, 그렇다고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사도맹을 과대포장하지 않는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일단 본맹도 최소 수준으로 경계를 강화해야겠지요.”

“아니, 그런 것 말고. 네가 맹주였다면 어떻게 했을 거냐?”

“마교주가 검무극일 때를 가정해서 말씀이십니까?”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사인은 솔직히 대답했다.

“만약 무극이가 마화를 피웠다면, 저는 도우러 갔을 겁니다.”

“본맹에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네 우정 때문에 본맹이 다 박살 나도 괜찮고?”

그 말에 비사인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자가 사적인 감정이 앞서 대의를 생각지 못한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백자강은 그를 질책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두 눈에 회한이 스쳤다.

“나는 평생 살아오면서 그런 친구가 없다.”

비사인이 놀란 얼굴로 사부를 쳐다보았다. 한 번도 한 적 없는 말이었다.

“평생 맹을 위해 헌신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니,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 수 있는 능력은 적어도 친구를 만드는 일에는 저주와 같은 능력이었다.

인간에 대한 불신에 더해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귀찮아서다.”

“네?”

“당장 너만 해도 고민되지 않느냐? 친구인데 구하러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 생각만 해도 싫었다.”

백자강이 이 말을 꺼낸 건, 제자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이 제자를 향했다.

“문을 닫아두면 편하지만, 자신도 갇히는 법이지.”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너는 검무극과의 우정을 잘 지켜나가라는 의미임을. 사부가 자신의 우정을 인정해 주는 순간이었다.

“저는…… 귀찮아하지 않겠습니다.”

백자강은 제자의 그 무서운 얼굴에 깃든 순수함을 읽었다.

다시 백자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결정.

“평생을 피했으니 지금이라도 귀찮은 일을 한 번 해볼까?”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방금 그 말이 마교주를 도우러 가겠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친구도 아닌데 도와주러 간다니까 놀랐냐?”

백자강은 감정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감정적으로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사부의 이 결정이 너무 궁금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마교주가 죽으면 마교주에게 복수를 못 하지 않느냐?”

천살성이 아니라 마교주에게 복수를 하지 못한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는데 그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삼자회담 때 마교주와 무림맹 늙은이가 자기들 자식이 둘이라며 자랑 엄청나게 하지 않았느냐? 잘 키운 자식 하나가 둘을 이긴다는 걸 보여줘야지.”

‘자식’이란 말에 비사인의 가슴에 격정이 스쳤다. 사부가 자신을 제자가 아닌 자식으로 대할 때만큼 감격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마화를 피웠다면, 이건 가야 하는 일이다. 오라고 불을 피운 거나 다름없다.”

또한 사도맹을 지키지 않고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 천살성 놈이 마교주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놈이라면?”

백자강은 수많은 사파의 악인을 봐오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런 절대적인 악인이라면?

“내가 맹에 없으면 쳐들어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우린 문 활짝 열어놓고 있어.”

사부를 향한 마음에 절로 존경심이 들었다. 그 울컥한 마음을 비사인은 감출 수가 없었다.

“사부님이 제일 멋지십니다. 저도 꼭 사부님과 같은 사도맹주가 되고 싶습니다.”

백자강은 오늘 제자와 대화하는 내내 단 한 번도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다. 젊어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어쩌면 친구 하나쯤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녀오마.”

“네, 사부님.”

비사인은 사부에게 조심하라는 말 대신 이 말을 전했다.

“마교주나 무림맹주에게 하는 그 복수전은…….”

자식 농사에 관한 복수전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오직 사부를 위해서.

“큰소리치고 오십시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쪽이 들어야 할 예언이라면

섭혼마존과 천화루주가 암흑의 기운이 아직 미치지 못한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주방이었는데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었는지 비어 있었다.

“여기서 잠시 쉬죠.”

“네.”

섭혼마존은 천화루주를 정중히 잘 챙겼다. 천화루주는 그런 섭혼마존의 친절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젊어도 상대는 천마신교의 마존이었으니까.

“시장하시면 이것 좀 드세요.”

섭혼마존이 주방에서 오리 다리를 두 개 찾아왔다.

“저는 괜찮아요.”

천화루주가 사양하자 섭혼마존이 탁자에 기대선 채 오리 다리를 뜯었다.

그녀는 맛있게 잘 먹었다. 천화루주는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여유와 강함을 느꼈다.

“조용하네요.”

어디선가 멀리 싸우는 소리가 날 법도 했는데,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소교주님은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고 계실 겁니다.”

비록 검무극과 함께 싸우지 못하고 있지만 섭혼마존은 이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신이 천화루주를 잘 지켜주고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검무극은 마음 놓고 싸우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천화루주는 극악소마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여인. 그녀를 지키는 일은 중요했다.

오리를 뜯던 섭혼마존이 다리를 내려놓으며 옆에 있던 행주에 손을 대충 닦았다.

“뒤로 물러나세요.”

천화루주가 뒤로 물러나자 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이는 노인이었는데 그는 암흑궁주와 함께 있었던 두 노인 중 한 명인 흑노였다. 마치 상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는 듯,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섭혼마존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소맷자락으로 닦으며 천화루주 앞을 막아섰다.

흑노는 섭혼마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것은 상대를 가소롭게 여기는 자신감이었다. 젊어도 너무 젊었다.

“새로운 섭혼마존이 뒤를 이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애송이일 줄은 몰랐군.”

섭혼마존은 여유롭게 응수했다.

“애송이와 여자 한 명 잡으려고 탐심대멸공까지 펼쳤군. 노름꾼들 기운을 받으니 그 늙은 몸에 힘이 넘치나?”

섭혼마존은 기세 싸움에 밀리지 않았다. 원래 그녀는 싸울 때 욕도 잘하고 상대 심기도 잘 건드렸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이 먹을수록 잘 씻고 다녀야지. 네게서 시체 썩은 내가 난다.”

그녀는 한방에 흑노의 심기를 뒤집어 놓았다.

“이런 망할 년이!”

흑노의 몸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암흑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아.

섭혼마존이 내력을 발출해서 날아드는 기운을 막았다.

두 사람의 기세가 팽팽하게 맞섰다.

흑노의 등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소교주가 자기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천화루주를 인질로 삼아야 할 만큼 저들의 상황이 다급하다는 의미.

‘그래, 너희 뜻대로 잘 안 되지?’

그때 흑노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 들어섰다.

“싸움은 잠시 미루시지요.”

정중한 말에 흑노가 발출하던 기세를 거둬들였다.

들어선 이는 신녀궁주 가예였다. 달아나듯 사라졌던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예가 천천히 천화루주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흑노를 믿어서인지 옆에 서 있는 섭혼마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천화루주와 가예가 마주 보며 섰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천화루주였다.

“이번에는 어떤 거짓말을 하려고 왔나요?”

혼자 오라고 했지만, 결국 이곳은 함정임이 밝혀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에서 가예가 다시 자신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가예는 그 부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소교주 말이 맞아요.”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는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그대를 죽이고 싶었어요.”

그녀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천화루주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궁주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속으로 기대했어요. 드디어 당신이 죽겠구나.”

천화루주는 그녀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쩌면 그녀로부터 자신을 살려둔 사람은 암흑궁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당신에게 예언이 내려온 걸 알아요. 어떤 예언이었죠?”

“그건 어떻게 알았죠?”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때 극악소마가 검무극의 심장을 찌른다는 예언을 받았다.

“그냥 알 수 있었어요. 어서 어떤 예언인지 말해요.”

가예는 예언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천화루주는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화루주는 대답 대신 물었다.

“예언을 받은 지 얼마나 오래됐죠?”

순간 가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 신녀궁주의 예언을 입에 담지?”

“맞아요, 나는 신녀궁 사람이 아니죠.”

그래서다. 그래서 이렇게 화가 나는 거였다. 자신은 신녀궁에 모든 걸 걸었는데, 예언은 신녀궁이 싫어서 달아난 사람에게 내려갔다.

“이 세상은 천살성을 타고난 사람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예언, 가짜로 지어낸 거죠?”

“닥쳐라!”

그녀의 격한 반응에서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신녀궁주는 길을 잃었음을. 어쩌면 그랬기에 신녀궁을 떠난 자신에게 예언이 내려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녀를 이해했다. 그 폐쇄된 곳에서 신녀궁주로 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예언을 받지 못하는 신녀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도.

가예가 무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어떤 예언을 받았든, 변하는 건 없어. 어차피 넌 죽게 될 테니까.”

그녀는 협박하고 있었지만 천화루주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대체 뭐가 두려운 거죠? 그 천살성인가요?”

가예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숨길 수 없는 원초적 공포였다.

“그 힘은 우리가 가졌어야 했어.”

천화루주는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힘이 누구에게 갔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뇨, 그 힘은 소교주님이 가지시는 게 옳아요. 그게 어떤 힘이든 올바르게 쓰실 분이시니까요.”

천화루주가 그녀를 설득했다.

“아직 기회는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진정 하늘의 뜻을 믿는다면, 마지막 예언은 당신에게 내릴 거예요. 소교주 편도, 암흑궁주 편도 아니고, 하늘의 편을 들어요. 그 옛날 신녀궁이 그래왔듯이.”

가예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던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스.

천화루주 주위에 흐르던 암흑의 기운이 저절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흑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던 선천적인 기운이었다.

한데 섭혼마존이 일부러 밀어낸 것도 아닌데, 그 기운이 천화루주에게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때 천화루주가 짤막한 탄성을 내뱉더니, 곧이어 놀라운 말을 했다.

“예언이 내려오려 하고 있어요.”

예언이 내릴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예상 못 한 상황이었지만 섭혼마존은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켜드릴 테니 예언을 받으세요.”

천화루주는 곧바로 제자리에 앉아 품에서 하얀 천을 꺼냈다. 바로 신녀지몽이었다.

눈을 가리기 전에 절망하는 가예의 얼굴을 보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솔직히 예언은 받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 예언이 극악소마와 관계가 없다면, 또 검무극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예언을 받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받아야 했다. 하늘이 이 순간에 예언을 내린다면 그 또한 의미가 있을 터.

가예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이 순간에 예언이 내린다고?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예언을 받지 못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이 순간에?

이건 하늘이 자신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이런 하늘이라면 앞으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눈앞의 천화루주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일지도.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가예가 할 수 있는 반응은 하나였다. 그녀의 눈빛에 살의가 흘러났다.

“죽여버려요.”

가예가 돌아서자 흑노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럴 수는 없네. 저 여인을 궁주께 데려가는 게 내 일이니까.”

암흑궁주가 그녀를 데려가려는 건 단지 인질로 삼기 위함만이 아니었다.

“그 예언의 내용은 궁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거다.”

섭혼마존이 천화루주 앞을 막아섰다.

“그쪽이 들어야 할 예언이라면 당신 신녀에게 내렸겠지.”

섭혼마존은 천화루주를 지켜주는 일에 이 한 가지를 추가했다. 듣고 있던 내내 짜증이 났다.

“이 봐, 가짜 신녀.”

섭혼마존의 말에 뒤돌아서 있던 가예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가짜라는 말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제부터는 하늘 말고 나를 원망해. 넌 내가 죽여줄 테니까.”

싸늘했다. 죽음을 예고한 사람이 섭혼마존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선 가예는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저 애송이도 살려서 데려오라던가요?”

“물론 아니지.”

흑노가 차갑게 웃었다. 죽여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일 작정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강력한 한 수를 발휘했다.

쇄애애애애액.

흑노의 손바닥에서 발출된 강력한 장력이 섭혼마존을 향해 날아들었다.

순간 섭혼마존 앞 허공에 뭔가 생겨났다.

섭혼마존의 마차에 그려진 괴이한 문양 중 하나였다.

날아들던 장력이 그 문양에 부딪히는 순간 방향을 바꿔 벽으로 날아갔다.

콰아앙!

선실 벽이 박살 났지만, 그 너머에 꿈틀거리는 암연이 있었다. 탐심대멸공의 기운이 배 주위를 막고 있어서 아무리 싸워도 배가 침몰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요상한 잔재주를 부리는군.”

쐐애애애애애액!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일장을 내질렀다.

슈르르륵.

허공에 또 다른 문양이 생기며 이번에는 날아든 장력을 가예가 서 있는 방향으로 되돌렸다.

가예로 날아들던 장력을 흑노가 손을 내밀어서 막았다.

스스스스.

손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자신이 날린 장력이 해소되었다.

“제법이군.”

흑노의 표정에서 무시하던 기색이 사라졌다. 방금 일장에 실린 내력을 생각하면 결코 쉽게 막을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걸 그냥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가예에게 되돌리는 한 수는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섭혼마존의 독문마공 중 하나인 혼원역전술(魂元易傳術)이 발휘된 것이다.

섭혼마존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다른 마존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수련했다는 것을.

또한 그 노력의 중심에 풍천교주라는 걸출한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도.

흑노가 주문을 읊었다.

구르르르르릉.

지진이 나는 것처럼 바닥이 흔들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 곳곳이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알에서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해골들이었다.

흑노의 암흑마공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구천강림술(九泉降臨術)이 발휘된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그 해골들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들의 두 눈에서는 죽은 자들이 뿜어내는 시퍼런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화루주가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이 광경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섭혼마존은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왜 그리 났는지 이제 알겠군.”

그녀가 조용히 구결을 읊었다.

스르르륵.

바닥에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히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화루주와 그 앞에 서 있는 섭혼마존을 중심으로 둥근 원 모양으로 바닥에 글자가 새겨졌다. 새겨진 글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해골들이 글자를 넘어서려는 순간.

그들 앞을 막아서는 보이지 않는 막이 있었다.

섭혼마존이 발휘한 무공은 귀문결계술(鬼文結界術)이었다.

해골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들고 있던 병장기로 보이지 않는 막을 내리쳤다.

퍽! 퍼억! 퍽!

하지만 귀신들의 글자가 만들어낸 결계는 깨어지지 않았다.

섭혼마존은 최대한 시간을 벌고 있었다. 혼전이 벌어지면 예언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제법이군.”

지켜보던 흑노가 바닥에 장력을 날렸다. 그는 귀문결계를 파괴하느라 괜한 공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의 장력이 날아든 곳은 바닥이었다.

콰아아앙!

거대한 그의 장력에 바닥이 부서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르르르르르!

가부좌하고 앉아 있던 천화루주는 부드럽게 아래층으로 내려앉았다. 섭혼마존이 내력을 발출해 그녀를 안전하게 내려앉게 한 것이다. 가예 역시 마찬가지로 흑노가 다치지 않고 내려오게 했다.

바닥을 무너뜨리면 바닥의 글자들이 훼손되면서 귀문결계가 파훼될 줄 알았을까?

하지만 아래층으로 떨어져 내려도 글자도, 결계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쾅! 콰앙!

다시 흑노가 장력을 발출해서 바닥을 부쉈다.

이번에도 모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흑노는 귀문결계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로 떨어져 내릴수록 어둠의 기운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내려가니 그곳에는 짙은 어둠의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일부러 어둠의 기운이 짙은 곳을 피해 올라왔었는데, 이렇게 수직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퍼억! 퍼억!

과연 결계를 부수는 해골들의 힘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럼에도 섭혼마존의 결계는 부서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흑노가 다시 구결을 읊었다.

그러자 결계를 두드리던 해골들이 두렵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분명 해골들이 느끼는 것은 공포였다.

구르르르르르릉!

구결을 다 읊자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진동이 발생하더니.

앞서 소환된 것보다 훨씬 크고 거대한 해골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이번에 소환된 해골은 뼈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의 눈구멍은 더욱 깊었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마치 보석이 박혀 있는 것만 같았다.

손가락뼈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뼈와 뼈 사이에는 상대를 짓누르는 죽음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해골들의 왕인 구천시왕(九泉屍王)이었다.

구천시왕의 한 손에는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는데 사신이 지옥에서 올라온 것만 같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섭혼마존의 눈빛이 깊어졌다.

“혼이 깃들었군.”

구천시왕은 그냥 해골들과 달랐다. 그것에게서 혼이 느껴졌다. 분노와 원망, 살의만이 가득한 악혼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흑노가 큰소리로 웃었다.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구천시왕의 거대한 검이 결계를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액! 쾅!

첫 공격에 결계가 크게 흔들렸고 더욱 강력한 두 번째 공격으로 결계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이었다.

찌이익.

섭혼마존이 천화루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신녀지몽으로 눈을 가린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언을 다 받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녀를 지켜내야 했다.

“뭐 해? 어서 구멍을 메워야지.”

흑노의 조롱에 정말 그러기라도 하겠다는 듯 섭혼마존이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콰앙! 콰아앙! 쾅!

마구잡이로 내리치는 연속된 공격에 결계는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어어어어어억!

이제 마지막 한 방이면 결계가 완전히 박살 날 상황이었다. 작은 해골들은 보호막이 깨어지면 우르르 몰려들 기세로 사방을 포위했다.

“섭혼마존은 또 새로 뽑아야겠군. 거긴 터가 안 좋아.”

구천시왕이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쇄애애애액.

흑노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구천시왕이 내리친 검을 붙잡고 있었다. 검을 막은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 일렁이고 있었고, 그의 팔은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너 뭐야?”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구천시왕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자신에게 일격을 날린 것이다.

흑노의 놀란 시선이 구천시왕 뒤에 서 있는 섭혼마존을 향했다.

‘설마?’

그녀의 두 눈에서도 구천시왕의 두 눈에 흐르는 푸른 기운이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결계를 강화하려고 구결을 읊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소환된 구천시왕을 섭혼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네가 만든 것일지라도 그것에 혼이 깃드는 순간!

“이 해골은 이제 내 거야.”

첫 번째 마존이 되고 싶었는데

흑노의 당황은 분노로 이어졌다.

자신이 소환한 마물이, 그것도 다른 것도 아닌 구천시왕이 적에게 넘어가는 일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이 망할 년이!”

분노에 찬 욕설과 함께 흑노가 일장을 날렸다.

퍼어엉!

구천시왕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하지만 그 강력한 일장에도 구천시왕은 끄덕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강한 놈이었으니까.

“이 멍청한 놈아! 사라져라!”

흑노가 주문을 읊자, 다시 주위가 진동했다.

두두두두두두둑.

이번에는 소환했을 때와 반대로 바닥이 움푹 파이더니 늪처럼 구천시왕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소환을 강제로 해제하려는 것이다.

다음 순간 흑노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천시왕이 끌려 들어가지 않고 버텼다.

‘이럴 수는 없는데.’

자신과 영적으로 이어진 선을 끊었는데도 구천시왕은 사라지지 않았다.

흑노가 다시 주문을 읊었다.

상대의 사술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암흑궁의 비술.

백령혼안(百靈魂眼).

구천시왕과 같은 강력한 존재를 그냥 섭혼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섭혼술을 발휘한 쪽과 당한 쪽 사이에 혼의 사슬인 혼쇄(魂鎖)가 이어지게 된다.

그 연결선을 잘라내면 섭혼술을 파훼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선을 발견하는 것도, 또한 발견했다 해도 쉽게 잘리지 않기에 큰 내공을 소모해서 잘라내야 한다.

백령혼안이 발휘되자 흑노의 시야가 일순간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희미한 쇠사슬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됐다. 저것만 잘라내면!’

다음 순간! 기쁨은 곧 놀람과 절망으로 변했다.

혼쇄는 하나가 아니었다. 머리와 목, 양팔과 손, 허리와 다리, 발, 온몸 곳곳에 수십 개의 선이 섭혼마존과 구천시왕 사이에 이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상대를 장악하는 극상의 섭혼술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그때 들려오는 섭혼마존의 한마디. 마치 백령혼안으로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남의 것을 왜 훔쳐보나?”

그 말에 흑노는 더욱 분노했지만 이내 그는 마음을 다스렸다. 상대의 실력은 비단 섭혼술에만 있지 않았다. 어린 것이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놀려 들고 있었다.

“그 젊은 나이에 이런 경지라니,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흑노 뒤에 서 있던 가예 역시 놀랐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마존들이 훨씬 강하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 경험했다.

하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강함이 젊은 섭혼마존까지 해당할 줄은 몰랐다.

가예의 시선이 섭혼마존 뒤에 있는 천화루주를 향했다. 신녀지몽으로 눈을 가린 채 그녀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쩌면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기만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도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뻥 뚫리고 뻥 뚫리고 뻥 뚫린 천장 너머, 저 멀리 있을 하늘은 정말 자신을 버린 걸까?

‘이럴 거면 처음부터 예언을 내리지 말았어야지!’

그녀의 원망이 하늘을 향해 있을 때 구천시왕의 검은 흑노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쾅! 꽈드드드드득!

작은 해골이 달려와서 대신 박살 났다.

사방에서 해골들이 몰려와서 자신들의 왕을 둘러쌌다. 해골들은 공포를 느꼈지만 흑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쇄애애액!

꽈지지직.

구천시왕의 검 한 방에 해골은 박살이 나서 흩어졌다. 애초에 상대가 되었다면 어찌 해골들의 왕이라 불리는 이름이었겠는가?

해골들이 달려들었다. 팔을 붙잡고 등에 매달리고, 그야말로 숫자로 이겨보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구천시왕은 너무 강했다.

사방으로 부서진 해골들이 날아갔다.

탐심대멸공의 기운으로 해골들이 강해졌지만, 강해진 것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구천시왕 역시 원래 위력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흑노는 해골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섭혼마존과 천화루주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앞서 구천시왕의 공격으로 귀문결계는 거의 다 부서진 상태였다.

쾅! 꽈앙!

내력이 깃든 흑노의 주먹이 연속해서 결계를 강타했다.

쩌어어어억.

콰아아앙!

결계가 파괴되자 바닥에서 빛을 발하던 글자들이 빛을 잃으며 사라졌다.

섭혼술을 펼치던 섭혼마존이 차분히 말했다.

“뒤를 봐.”

섭혼마존의 말에 흑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해골을 모두 때려 부순 구천시왕의 커다란 검이 가예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너희들 신녀는 죽어.”

“마존이 인질을 사용한다? 부끄럽지도 않나?”

“전혀.”

섭혼마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흑노를 도발했다.

“네게 지면 그건 좀 부끄러울 거 같긴 하지만.”

도발도 인질극도 서로에게 통하지 않았다.

“죽여.”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섭혼마존은 놀라지 않았다.

“안 놀라는군?”

“누굴 지켜주는 작자들이 아닌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암흑궁주가 자신을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다면, 감히 흑노가 이런 결정을 내리진 못했을 것이다.

하늘에게 버림받았다는 충격에 빠져 있던 그녀였는데, 암흑궁주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마음은 더없이 착잡했다.

흑노를 통해 밝혀지는 하나의 진실.

“궁주께선 알고 계시네. 그대가 거짓 예언을 내렸다는 것을.”

예언을 받을 수 없는 신녀는 더는 이용 가치가 없는 폐물이 되는 것이다.

가예는 심란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한 눈빛으로 꾸짖듯 말했다.

“감히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습니까?”

비록 근래 예언이 내려오고 있지 않은 그녀였지만, 엄연히 예언을 받아 신녀궁주에 오른 그녀였다.

“그저 궁주의 명령이었다는 변명으로 이 큰 죄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준엄한 꾸짖음이 깃든 말에 흑노는 한차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함부로 말하진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기 전까진, 그녀는 암흑궁주 다음으로 귀한 사람이었으니까.

가예의 시선이 이번에는 섭혼마존을 향했다. 칼자루를 쥔 사람은 그녀였으니까.

“나를 죽이면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하늘이 언급되었지만 섭혼마존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내 하늘은 따로 있다.”

그녀는 그 하늘의 명을 따라 이 자리에 있었다.

구천시왕이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단칼에 그녀의 목을 베려고 했지만, 흑노는 그녀를 구하려 들지 않았다.

가예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내 예언은 반드시 현실이 될 것이다.”

그녀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천살성을 타고난 그였다. 스스로 깨어나 홀로 봉인을 풀고 나온 그를.

그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리라.

구천시왕이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누군가 나서서 말렸다.

“죽이지 말아주세요.”

날아들던 구천시왕의 검이 그녀의 목 옆에서 멈췄다.

죽이지 말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천화루주였다. 그녀는 눈을 가렸던 신녀지몽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뜬 그녀의 두 눈에서는 신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고, 주위를 흐르는 어둠은 감히 그녀 주위로 범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예언을 받았다는 것을.

과연 어떤 예언을 받았을까?

하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신묘한 기운에 감히 그것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천화루주 역시 예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흑노가 천화루주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확실해졌군.”

가예 역시 천화루주에게 할 말이 있었다.

“왜 나를 살려주려는 거지?”

천화루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섭혼마존은 천화루주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잠시 뒤에 계십시오.”

예언에 대해 묻는 건 소교주가 해야 할 일. 자신이 할 일은 적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일이다.

섭혼마존의 기도가 더욱 강렬해졌다. 지금까지는 예언을 받는 일에 지장이 갈까 봐 방어적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구천시왕은 가예를 겨눴던 검을 거두고 본격적으로 흑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천시왕과 흑노가 충돌하자 지축이 진동했다.

이제 구천시왕의 공격은 거침이 없었다. 온몸이 박살 나도 상관없었기에 구천시왕이 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공격이 이어졌다.

그랬기에 흑노는 더욱 화가 났다.

정말 마음 같아선 섭혼마존의 뼈까지 갈아서 마셔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구천시왕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최강의 소환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천시왕을 섭혼술로 조정하느라 섭혼마존이 다른 공격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구천시왕의 갑옷이 박살 났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흑노 역시 막대한 내공을 소모했고,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위험한 상황도 맞았다.

부러진 뼈를 덜컥거리면서도 구천시왕은 잘 싸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섭혼마존은 더욱 능숙하게 그것을 조종하고 있었다.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이대로는 안 돼!’

흑노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단번에 구천시왕을 제압하려 했다. 내상을 입더라도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은 섭혼마존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흑노가 무리하게 파고들던 그때.

쇄애애애액!

구천시왕이 벼락처럼 빠르게 검을 던졌다. 지금껏 손에서 검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검을 던진 것이다.

흑노가 벼락처럼 빠르게 몸을 틀어 피하자 큰 검이 그의 얼굴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흑노가 다시 몸을 틀었을 때, 이미 구천시왕은 그를 덮치고 있었다.

같이 죽자는 듯 온몸을 허용했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이 그의 양쪽 어깨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젠장! 늦었다!’

구천시왕의 가슴을 박살 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어깨도 큰 부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꽈아악.

시커먼 무엇인가가 구천시왕을 붙잡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구천시왕의 그림자였다.

허공에 뜬 구천시왕이 몸부림쳤지만, 자신의 그림자에 파묻히듯 붙잡힌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림자가 엄청난 힘으로 구천시왕을 옥죄기 시작했다.

흑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콰아아앙!

극한의 내력이 담긴 장력이 구천시왕을 연속해서 강타했다.

꽝! 꽈앙! 콰앙! 쾅!

거기에 그림자는 엄청난 힘으로 구천시왕을 옥죄었다.

결국 그 두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구천시왕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며 소멸했다.

스스스스슷.

다음 순간.

섭혼마존이 핏물을 내뱉었다.

그림자가 옥죄는 바람에 혼쇄를 끊어내지 못했고, 그 상태에서 섭혼 대상이 사라지면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장력이 쏟아졌다.

쇄애액! 쇄액! 쇄애액! 쇄액!

뒤에 천화루주가 있었기에 그녀는 피하지 않고 쌍장을 휘둘러 그대로 장력을 막아냈다. 워낙 빠르게 날아든 공격이었기에 섭혼술을 발휘해서 공격을 흘릴 여유가 없었다.

퍽, 퍼억, 퍼억, 퍽!

그녀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장법으로 막고 호신강기로 막았지만, 앞서 내상에 더욱 큰 충격이 갔다.

“크엑.”

그녀가 이번에는 더욱 많은 피를 토했다.

“마존님!”

천화루주가 다급히 그녀를 부르자, 섭혼마존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곳으로 누군가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 섭혼마존에게 구천시왕을 소환했나?”

그곳에 새롭게 등장한 사람은 암흑궁주와 함께 있던 두 노인 중 남은 한 사람인 암노였다.

조금 전 그림자로 구천시왕을 옥죄고 연속해서 장력을 날린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의 독문마공인 암영포식(暗影捕食)을 발휘한 것이다.

흑노는 그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상대를 얕잡아본 명백한 실수였다.

“설마 저 어린 것이 구천시왕을 섭혼해 낼 줄은 몰랐네.”

“확실히 놀랍기는 하군.”

암노가 차가운 눈빛으로 섭혼마존을 쳐다보았다.

흑노와 암노.

암흑궁주의 수족이자 암흑마공의 대가들.

“소교주가 궁주에게 들이닥치기 일보 직전이네. 어서 해치우고 돌아가야 하네.”

섭혼마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 사람을 간신히 상대했는데,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게다가 내상까지 입은 상태.

게다가 이곳은 탐심대멸공의 기운이 짙은 곳이었다. 앞서는 그 암흑의 기운을 받은 구천시왕을 이용해서 싸웠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불리한 싸움을 해야 했다.

“마존님!”

천화루주가 섭혼마존 앞을 막아섰다. 어떻게든 섭혼마존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대의 궁주는 내 예언을 알고 싶어 해요. 만약 섭혼마존님을 죽인다면 나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천화루주가 단호한 의지를 보였지만, 흑노와 암노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건 그대와 궁주님과의 문제겠지.”

자신들은 어떻게든 섭혼마존을 죽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때 뒤에 있던 섭혼마존이 앞으로 나섰다.

“전 괜찮으니 뒤로 물러서세요.”

섭혼마존을 바라보는 천화루주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마존님.”

자신을 지켜주려다 맞는 죽음이다. 만약 그녀가 달아나려 했다면 아까 첫 번째 노인과의 싸움에서 달아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섭혼마존은 담담했다.

“예언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소교주님이 곧 구하러 오실 겁니다.”

소교주가 구하러 올 때까지 절대 예언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게 목숨을 지켜줄 것이라고.

섭혼마존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소교주님, 임무를 다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 마음을 소교주에게 전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만 울적해질 테니까.

‘제가 소교주님의 첫 번째 마존이 되고 싶었었는데…….’

섭혼마존이 당당히 두 사람 앞에 섰다.

“이 시체 썩는 냄새 나는 것들아, 내가 곱게 죽어주진 않을 거다. 팔 하나, 눈깔 하나는 가져간다.”

섭혼마존의 눈에서 강렬한 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녀가 마지막 기도를 드러내자 주위가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흑노와 암노가 내력을 일으켜 그 기도에 저항했다. 정말 곱게 죽을 것 같지 않은 강력한 투기였다.

“네년 몸에는 눈깔 하나, 팔 하나도 남겨놓지 않겠다.”

흑노와 암노도 자신들의 기도를 아낌없이 발출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죽음의 기운이 주위를 흐르는 암흑의 기운과 뒤섞이며 섭혼마존의 기도를 짓눌렀다.

이 대 일의 싸움이었기에 그녀의 기운이 밀렸다.

흑노와 암노가 양쪽으로 나눠서며 합공하려던 그때였다.

뒤에 서 있던 천화루주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디선가…….”

천화루주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술 냄새가 납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정말 술 냄새였다.

흑노와 암노가 서로를 쳐다본 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장력을 발출했다.

쇄애애애액.

두 줄기의 엄청난 장력이 섭혼마존을 향해 날아들었다. 섭혼마존이 피하면 천화루주가 죽게 될 공격이었음에도, 그들은 거침없이 공격을 날렸다.

그들의 예상대로 섭혼마존은 끝까지 천화루주 앞을 지켰다.

“안 돼!”

천화루주가 소리치는 순간.

쾅! 콰앙!

묵직한 굉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을 때 천화루주 앞에 섭혼마존은 멀쩡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든 두 줄기의 장력이 날아든 공격을 해소한 것이다.

누가 도움을 줬는지는 눈과 코가 알 수 있었다.

어둠의 안개가 가득한 그곳에 황금빛 물결이 흘렀고 술 냄새는 더욱 짙어져 있었다.

그곳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을 바라보는 섭혼마존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격정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각오했던 그녀였다.

아무리 소교주의 명령을 수행하다 죽는다지만, 젊은 나이에 죽음이 어찌 두렵지 않았겠는가?

먼저 들어선 마불이 그녀에게 말했다.

“섭혼, 고생하셨네.”

정말이지 마불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섭혼마존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혼자서도 잘 막으셨겠지.”

마불이 뻥 뚫린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우리도 이렇게 내려 올 걸 그랬네.”

앞서 흑노가 더욱 강한 어둠의 기운을 찾아 바닥을 부수며 마구 떨어져 내리는 바람에 취마와 마불이 있던 층까지 내려온 것이다.

“그러면 운치가 없지 않습니까?”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취마가 뒤따라 들어섰다.

취마가 구석에 서 있는 가예를 힐끗 쳐다본 후 성큼성큼 걸어서 섭혼마존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등장에 흑노와 암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마불과 취마가 벌써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암흑화령이 당했다는 의미. 그야말로 이 빌어먹을 마존들의 실력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취마가 섭혼마존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입가에 핏물이 묻어 있는 걸 보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건넸다.

“한잔하시오.”

취마가 건넨 것은 작은 술병이었다.

섭혼마존이 쳐다보자 취한 눈빛으로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섭혼마존은 두말없이 술병 마개를 열었다.

주위로 퍼져나가는 독주의 향을 맡으며 섭혼마존이 쭉 술을 마셨다.

평범한 술이 아니었다. 내상 치료에 가장 효과가 좋은 취마표 약술이었다.

딱 마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귀한 술이다.’

과연 그러했다. 술이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 뒤틀리고 상처 난 기혈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귀한 술을 아끼지 않고 내어줄 줄은 정말 몰랐다.

“나중에 제가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술 한잔으로 갚을 수 없는 귀한 술이었지만, 일단 그렇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의 말에 취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요즘 내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술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으니. 소교주, 나 이런 사람이오!”

그는 어서 검무극을 만나서 자랑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노인은 취마가 못마땅했다. 자신들이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저런 여유를 부리는 건 명백히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으니까.

반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화루주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말 섭혼마존이 죽는 줄만 알았다. 두 마존이 제때 등장해 줘서 얼마나 고맙고 든든한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녀가 정중히 두 마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자신을 구해준 감사가 아니라 섭혼마존을 구해준 감사 인사였다.

‘두 분, 정말 고맙습니다.’

취마와 마불은 천화루주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를 구한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섭혼마존이었으니까. 그 공은 온전히 섭혼마존의 것이 되어야 한다.

취마는 섭혼마존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저들이 날린 공격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위험한 공격이었음에도 그녀는 피하지 않고 천화루주를 지켰다. 그랬기에 기꺼이 자신이 아끼는 내상약을 건네준 것이다.

그렇게 섭혼마존을 챙긴 후 비로소 취마가 흑노와 암노를 향해 돌아섰다.

“이 대 일로 싸웠으니 삼 대 이, 괜찮지?”

흑노와 암노는 그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암노가 차가운 기세를 드러냈다.

“셋이 아니라 넷도 가능하다. 아니, 너희 여덟이 다 와도 상관없다.”

취마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한 명도 겁나서 합공하려던 주제에 여덟이라? 정말 너희 앞에 마존들 모두 줄을 쫙 세우고 싶네. 그 큰 주먹에 머리통이 깨지고, 눈알이 지풍에 구멍이 나고, 극독에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어져 봐야, 어이구, 늙어서 헛소리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눈물, 콧물 줄줄 흐르지.”

취마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절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배 전체에 펼쳐진 탐심대멸공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상대의 암흑마공은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지만 지켜야 할 천화루주도 있고. 이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취마가 마불에게 물었다.

“어느 쪽을 상대하시겠습니까?”

“난 아무나 좋네.”

“역시! 강자의 여유란!”

취마가 두 노인에게 대놓고 물었다.

“둘 중 누가 더 강해? 약한 쪽이 나랑 붙자.”

사실 생각나는 대로 막 던지는 경박한 질문 같았지만 두 사람의 화합을 깨뜨리려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었다. 서로 속으로 자신이 더 강하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우릴 분열시키려는 수작이네.”

암노는 대번에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러자 취마가 마불에게 말했다.

“저자를 상대해 주십시오. 더 신중하니 실력 또한 더 뛰어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누가 더 신중한 인물인지 알아낼 수 있었고, 흑노를 하수 취급해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섭혼께서는 나를 좀 지원해 주시고.”

취마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무공 상성에서 밀린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흑노가 차가운 눈빛으로 취마에게 말했다.

“굳이 그렇게 짝을 맞출 필요가 없다.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니까.”

흑노는 새로운 암흑소환술을 발휘했다.

야수강림술(野獸降臨術).

짐승 모양의 괴수들이 소환되면서 거대한 이를 드러냈다. 영혼이 없는 소환물이기에 섭혼마존이 섭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취마가 비수를 뽑아 들었다. 그 무시무시한 소환물들을 보아도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기왕이면 같이 한잔할 수 있는 것들로 불러내 주지.”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야수를 향해 돌진했다.

흑노는 오랜 세월 소환마공을 익혀오면서 수많은 적을 상대했지만, 이렇게 아무 대책 없이 달려드는 상대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마존이 말이다.

야수들이 취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자 암노가 마불을 향해 걸어 나왔다.

“당신 몸에서 나는 그 빛이 정말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까?”

마불이 조용히 합장하며 말했다.

“나를 지켜온 건 이 빛이 아니었다. 내가 이 빛을 지켜왔지.”

휘이이잉.

암노의 몸에서 흘러나온 어둠의 기운이 돌풍처럼 두 사람 주위를 휘감자 그들은 순식간에 그곳에서 사라졌다.

푹! 푸욱! 푹푹!

취마의 비수가 야수를 연속해서 찔렀다. 호신강기만 믿고 덤벼드는 마구잡이 싸움 같았지만, 그의 신법은 그야말로 대단한 신위를 발휘하고 있었다.

앞서 배 밖에서 싸웠던 벽해신군이 발휘했던 회오리 무공 만파회륜을 파훼하면서, 그는 근래 고민했던 무학의 경지를 한 단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과가 지금 드러나고 있었다.

야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온몸을 물어뜯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슬아슬하게 그것들의 공격을 흘려내고 있었다. 취마가 뜯기는 것은 옷자락이었고, 반대로 야수들은 취마의 공격에 온몸이 터져나갔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야수들을 비수로 찌르고 발로 찼다. 쓰러진 야수를 발로 밟았고, 목을 조르기도 했다.

흑노는 야수들을 계속 소환하려 했다.

하지만 섭혼마존이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쇄애애액! 쇄애액! 쇄액!

날아든 장력에 흑노가 소환을 멈추고 뒤로 몸을 날렸다.

‘언제 내상을 회복했지?’

어느새 야수들을 뚫고 취마가 달려들고 있었다. 야수들 사이에 있으니 그도 한 마리 야수 같았다. 실제로도 암흑 야수의 목을 물어뜯어 터뜨리기도 했다.

섭혼마존은 취마가 왜 저렇게 돌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자신과 함께 싸우니까 둘 중 더 강한 상대인 암노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상대적으로 약한 흑노를 골랐다.

빨리 해치우고 마불을 돕자는 의도였다.

그랬기에 섭혼마존도 적극적으로 취마를 지원했다.

취마의 돌진에 흑노가 암흑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암영잠행술(暗影潛行術)을 펼친 것이다.

시간을 끌수록 유리했다. 반드시 암노가 마불을 죽이고 돌아올 테니.

“비겁하게 이러기냐?”

취마가 기를 끌어올려 찾아보려 했지만, 어둠의 기운이 워낙 강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스슥슥.

그때 취마의 비수 위 허공에 하나의 문양이 그려졌다. 둥근 원 안에 사람 눈 모양이 그려진 문양이었다.

암야개안(暗夜開眼).

어둠 속에 숨은 자를 찾는 섭혼마존의 독문마공이었다.

샤르르르르.

그 문양이 일시적으로 취마의 비수에 깃드는가 싶더니.

문양이 눈을 번쩍 떴다.

* * *

아무도 없는 공간에 마불이 서 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을 꽉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앞서 어둠의 기운이 돌풍처럼 휘감았을 때 어떤 암흑마공이 자신에게 펼쳐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해 암노가 천천히 걸어왔다.

“주정뱅이처럼 다 때려 부수는 그런 하수들의 싸움을 할 필요가 있겠나?”

마불이 차분히 대답했다.

“나는 다 때려 부수는 싸움을 기대했는데.”

“그럼 상대를 잘못 골랐군.”

암노가 천천히 마불의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뒤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림자는 사람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지.”

마불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그림자를 이용하는 암흑마공을 사용하는 자.

마불이 차분하게 암노의 그림자를 찾았다.

“네 그림자는 어디에 있나?”

암노의 그림자는 없었다.

“이곳에는 그림자가 있어선 안 되는 곳이다. 그림자가 주인을 잡아먹는 곳이거든. 지금 네가 잡아먹혔듯.”

마불에게 펼쳐진 암흑마공은 암노가 가장 자신하는 마공이었다.

상혼붕괴술(傷魂崩壞術)

“네 마음의 상처가 너를 무너뜨릴 거다.”

“흔해 빠진 시시한 마공이군.”

암노의 얼굴에 과연 그럴까, 하는 비웃음이 지어졌다.

“일(一)의 상처가 백(百)으로 증폭될 거다. 인간은 절대 그 고통을 버틸 수 없지.”

한마디로 파훼법이 정해진 마공이었다. 그걸 버티고 나오면 파훼, 버티지 못하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마불, 넌 이곳에서 죽는다.”

원래는 상혼붕괴술을 마불에게 쓸 생각이 없었다.

“소교주에게 사용할 마공이었는데, 네게 먼저 쓰게 되겠군.”

상대가 고수면 고수일수록 잘 통했다. 강한 사람일수록 깊은 어둠을 간직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럼 아껴뒀다 소교주에게 쓰지 그래?”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스스스스슷.

순간 마불은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어린 시절 그 작은 동굴이었다. 주위의 놀림을 피해 항상 숨어들던 그곳.

상처가 떠올라야 할 순간 마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만약 처음 이 마공에 당했다면 깊은 심마에 빠질만한 곳이었다. 놈의 말처럼 이때의 상처가 백 배로 증폭된다면, 정신이 버틸 수 있을까?

예전이었다면 말이다.

“여긴 누가 먼저 데려와 줘서 말이야.”

마불이 스스로 동굴을 나갔다. 이곳에는 백 배로 증폭할 작은 상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스슷.

동굴이 사라지면서 이번에는 풍천교주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섭섭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우리가 친구인 줄 알았는데. 너는 고작 권력을 위해서 우리 우정을 버렸다. 그게 너란 인간이다.”

발끈할 말을 내뱉었지만 마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이미 화해했네.”

순간 풍천교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스스슷.

마불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이제 대공자께서도 나타나겠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말 검무양도 그곳에 나타났다.

“난 당신 때문에 후계자가 되지 못했어! 그런데 당신은 그 와중에도 무극이에게 붙을까 고민했었지. 지금도 가증스럽게 그 마음을 숨긴 채…….”

마불이 성큼성큼 검무양에게 다가갔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불이 힘차게 그를 안아주었다.

“죄송합니다, 대공자. 다 제 잘못입니다.”

마불은 검무양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이 순간 마불은 검무양을 이끄는 어른이었고, 또 작은 거인이었다.

스스스슷.

검무양이 그의 품에서 사라졌다.

이미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인데도 이렇게 시험으로 나타나는 걸 보니, 한 번 입은 마음의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불은 그 상처들을 확실히 극복했음을 확인했다.

아니, 오히려 이 상처들이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온 흔적이니까. 소중한 상처들이니까.

그래서 이제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상처야, 지워지지 마라.

다음 순간, 눈앞에 암노가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왈칵왈칵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공이 순식간에 파훼 되면서 큰 내상을 입은 것이다.

“상혼붕괴술이 이렇게 쉽게 깨어지다니?”

암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 상혼(傷魂)들은 이미 희미한 상흔(傷痕)이 되어서겠지.”

“네 말이 맞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하필이면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만큼은 마존들 중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그에게 상혼붕괴술을 펼쳤으니 말이다.

마불이 조용히 손가락을 합쳐 수인을 지었다.

“이곳이 그림자가 주인을 잡아먹는 곳이라고 했나?”

마불의 몸에서 환한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뿜어진 빛은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어둠의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네 그림자를 찾아볼까?”

내가 혈불이다

마불이 내뿜은 빛에 어둠이 밀려났다.

쏴아아아아아.

어둠이 마불의 황금 광채에 밀려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빛이 암노를 비추자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안 돼!”

그의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스르르륵.

그림자가 사람처럼 몸을 일으키더니 암노의 몸을 뒤에서 끌어 안 듯 붙잡았다.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암노는 저항하지 않았다.

마불은 앞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곳에는 그림자가 있어선 안 되는 곳이다. 그림자가 주인을 잡아먹는 곳이거든.

“정말 너도 잡아먹히는구나.”

암노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불을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너도 마음의 상처가 많아 보이는군. 네 상처가 백 배가 되면 넌 어떻게 되지?”

“설마 내가 상혼붕괴술에 걸릴 거로 생각했나?”

그는 상혼붕괴술에 자신이 걸릴까 걱정한 것이 아니었다.

“악영(惡影)이 나오면 그때부턴 나도 감당이 안 돼!”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악영이라 불렀다.

“악영을 불러내는 바람에 이제 우리 둘 중 누군가 죽지 않으면 이곳을 나갈 수가 없게 됐다.”

자신의 의지로 이 공간을 없앨 수 없다는 의미.

촤아아아아악.

암노를 꼼짝 못 하게 하던 그림자가 집어삼키듯 그의 몸을 덮쳤다.

“으아아아아악!”

암노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둠이 그의 몸속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그는 생살이 찢기고 자신의 몸에 낯선 것이 들어서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악영이 그와 합쳐지는 순간 마불은 곧장 공격을 날리려 했다. 이 심상찮은 상황을 그냥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

하지만 수인이 채 만들어지기 전에, 어둠의 기운이 돌풍처럼 암노의 몸 주변을 회오리쳤다.

휘이이이이잉.

마불이 수인을 풀었다. 지금은 공격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잠시 후, 돌풍이 사라지자 안에서 암노가 달라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그의 온몸을 덮고 있었다. 마치 그림자 갑옷을 입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얼굴의 절반도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그림자는 절반의 경계선을 넘어 남은 얼굴을 침범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불, 너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마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마음의 상처도 좀 보게 하려고 했지.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악영에게 잡아먹힌 암노는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암흑과 암흑이 합쳐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마지막엔 그 모습으로 변할 생각 아니었나? 어차피 봐야 할 거면 힘이 팔팔할 때 보는 게 낫겠지.”

맞는 말이다. 정 안 되면 악영을 불러내서라도 싸웠을 테니까. 문제는 이것이었다.

‘서둘러야 한다.’

악영과 합쳐지면 훨씬 더 강력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짜 잡아먹히게 된다. 그렇게 완전히 잡아먹히면 자신은 이성을 잃은 광인이 되고 만다.

이후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 순간이 죽는 순간이다.

마불이 차가운 눈빛으로 합장했다.

“죄 많은 인생, 내가 성불(成佛)시켜주마.”

암노가 마불을 향해 쇄도했다.

“닥쳐라! 땡중!”

허공으로 날아오른 암노가 주먹을 연달아 내뻗었다. 그는 단지 그림자를 이용한 마공만 익힌 것이 아니었다.

암연격(暗連擊)!

위력적인 주먹이 마불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불 역시 피하지 않고 장법을 내질러 맞상대했다.

쿠콰쾅쾅!

주먹과 손바닥이 맞부딪히며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불은 상대의 내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긴장했다.

동시에 마불의 마음에 투지가 솟구쳐 올랐다. 마음을 다스리던 노력과는 별개로, 그 역시 싸움을 즐기고 이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마불이 암노에게 쇄도하며 장법을 내질렀다. 마치 권갑을 끼듯 그의 손바닥에는 염주가 칭칭 감겨 있었다. 염주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강맹한 장법의 위력에 암노가 주르륵 뒤로 밀렸다.

“다 때려 부수는 싸움이 더 재미있잖아?”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마불의 수인이 맺어졌다.

황금대라마공!

살법회인!

마불의 쌍장에서 황금빛 강기가 휘몰아쳐 날아갔다.

쇄애애애애액.

물결처럼 밀려드는 강기에 맞서 암노도 자신의 독문마공을 펼쳤다.

암영파랑(暗影波浪).

파도가 치듯 땅바닥에서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쾅쾅쾅쾅!

두 사람의 강기가 충돌하면서 지축을 흔들었다.

앞서 상혼붕괴술이 파훼되면서 큰 내상을 입었지만 암노는 마불에게 밀리지 않았다. 탐심대멸공의 효과에 악영까지 합쳐지자 그는 미쳐 날뛰었다.

이번에는 암노의 독문마공 암천살우(暗天殺雨)가 펼쳐졌다.

쇄애애액.

마불의 정수리를 노리고 한 자루의 시커먼 창이 내리꽂혔다.

마불이 몸을 틀어 피하자 강기로 만들어진 창은 마불 앞 바닥을 뚫었다.

“이 정도로 나를 죽이려고?”

“비가 한 방울만 올 리가 있겠나?”

다음 순간!

마불의 머리 위로 수많은 점이 생겨났다.

앞서 떨어진 창 하나는 툭 하고 먼저 떨어진 빗방울에 불과했다는 듯, 수십 개의 어둠의 창이 마불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그냥 몸을 날려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기에 마불의 수인이 빠르게 만들어졌다.

황금대라마공

연화만개(蓮花滿開)

황금빛 광채가 뿜어지더니 마불의 몸 주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파파파파파팍!

날아든 강기가 연꽃을 뚫지 못하고 사라졌다.

“비 오는 날 피는 연꽃이 더 운치 있는 법이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불은 암노의 눈빛에서 다급함을 읽었다. 이 순간에도 그림자는 점점 그의 남은 얼굴을 조금씩 차지하고 있었다.

“너, 완전히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지?”

“내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되는지를 물어야지.”

결과는 끔찍할 것이다. 자신에게도, 마불에게도.

그러는 사이에도 악영의 기운은 더욱 빠르게 그를 차지했다.

‘어떻게든 마불을 죽여야 한다.’

마불이 죽는 순간, 악영은 마불의 시신에 남은 악의 기운을 흡수할 것이고, 그때 배부른 악영을 달래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불이 쉽게 죽어줄 사람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암노의 공격이 다급해지면 질수록 더욱 마불은 죽음과 멀어졌다.

‘젠장! 내상만 안 입었어도!’

암노는 점점 더 악영에게 잡아먹히면서 더 난폭해졌다.

“안 돼! 제발!”

악영이 그의 얼굴 마지막 부분을 덮었을 때, 그 눈이 마불을 바라보았다. 증오와 애원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머저리 땡중아, 너도 죽는다고.”

그 말을 끝으로 악영이 그를 완전히 지배했다.

이제 암노에게서 이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광기와 살심만이 그를 지배했다.

주인이 바뀌는 이 순간을 마불은 놓치지 않았다.

황금대라마공

천공서인.

암노를 향해 한 줄기 강기가 벼락처럼 내리쳤다.

정확히 적중당한 암노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중당한 자리에 다시 검은 그림자가 채워졌다.

악영에게 완전히 잡아먹히면서 더욱 강해진 데다 탐심대멸공의 기운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한 방에 끝내야 한다.’

놈을 죽이기 위해서는 마장멸인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이 공간이 너무 좁았기에 마장멸인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장멸인의 유일한 약점이 적용되는 장소였다.

우우우우우우.

사방에서 악영이 불러낸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병장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어둡고 차가운 기운은 마치 어디선가 몰살한 무인들처럼 느껴졌다.

악영천군(惡影千軍)

암노의 최후 절기.

아니, 악영의 최후 절기.

마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림자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퍼어억!

한 방에 그림자가 터져나갔지만, 또 다른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그림자들을 상대하면서 마불은 궁지에 몰렸다.

그는 벽을 등지고 몰려드는 그림자들을 상대했다. 그것들은 끝없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대로라면 내공이 고갈되어 죽는다.’

마불은 수를 써야 했다. 그리고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생각.

‘그게 될까?’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하나의 수가 있었다. 황금대라마공의 가장 큰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던 오랜 고민.

석상을 깎다가도 고민했고, 독초를 찾다가도 떠올렸던 그 생각.

하지만 머릿속으로만 정리했을 뿐, 본격적으로 수련하거나 펼쳐본 적이 없는 초식이었다.

그게 가능할지 안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에게 남은 선택은 그게 최선이었다.

마불은 연화만개를 펼쳐서 그림자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강기의 연꽃 속에서 마불은 진기를 새로운 혈맥으로 인도했다.

‘부디 혈불의 자비가 있기를.’

그의 손에서 새로운 수인이 맺어졌다. 그 순간 떠오른 마지막 생각은 이것이었다.

‘혈불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혈불이다.’

화아아악.

마불의 손이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더니 손바닥 모양의 강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커졌을 때.

후우우우우아아아앙!

황금빛 물결과 함께 손바닥이 정면으로 날아갔다.

거대한 불상이 내리치는 마장멸인이 아니라 새로운 마장멸인이었다. 황금불상의 손바닥이 아니라 마불의 손바닥이었다.

콰콰콰콰콰콰.

앞을 가득 막고 있던 그림자들이 그 손바닥에 쓸려 날아갔다.

손바닥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 뒤에 서 있던 암노까지 밀어붙였다.

쿠아아아아아아앙!

이어서 터져 나온 엄청난 굉음.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암노는 벽에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그의 몸 주위에는 손바닥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위력은 마장멸인 못지않았다.

‘해냈다.’

성공해 놓고서도 놀란 마불이었다. 이 초식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도, 이렇게 성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까?

마불은 이 새로운 초식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마장소인(魔掌小人).”

그는 스스로 작은 사람이라 인정했다.

초식을 성공시킨 것은 혈불의 자비 때문이 아니었다.

상혼붕괴술을 파훼한 그의 마음 때문이다.

상처를 이겨낸 것은 물론이고 키가 작은 것도, 마음이 작은 것까지도 인정하는 그의 마음공부 때문이다.

작음(小)이 작음(小)을 만들어냈다.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하고 강한 작음이었다.

“으으으.”

손바닥 가운데 깊이 박힌 암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몸을 지배했던 악영은 사라진 후였다.

그의 불신 가득한 눈빛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마불이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정중히 말했다.

“인간으로 죽게 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기시고 좋은 마음으로 가시오.”

이 순간만큼은 득도한 고승의 모습이었다.

가만히 마불을 바라보던 암노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스스스.

그의 숨이 끊어지자 싸웠던 공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신녀궁주 가예는 복도를 내달렸다.

싸움이 한창일 때 그녀는 그곳을 뛰쳐나왔다.

방을 나서는 순간 천화루주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그녀는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이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자, 오히려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운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앞섰다.

‘재수 없어.’

동정인가? 아니면 예언을 받은 사람이라서 자비를 베푸는 건가?

아무리 싸움 중이라지만 섭혼마존이 자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 살려주라는 천화루주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리라.

‘안 믿어.’

하필이면 자신이 함께 있는 이 순간에, 그것도 암흑의 기운이 가득한 이 탐욕스러운 부귀선 안에서 예언을 받는다고?

‘웃기지 마.’

하늘의 뜻이 이런 순간에 내려올 리 없었다.

암흑궁주가 자신을 포기했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흑노, 그 늙은이가 자신을 지켜줄 자신이 없으니까 헛소리를 한 것이리라.

가서 그에게 직접 확인할 것이다.

그녀는 암흑궁주가 있는 방을 향해 계속 내달렸다. 가는 길에 부서져서 널려 있는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누군가의 등과 부딪혔다.

“어이구, 깜짝이야!”

호들갑을 떨며 돌아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이게 누구시오? 우리 신녀님 아니시오?”

가예는 깜짝 놀랐다. 설마 암흑궁주의 방 앞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 암흑궁주께서 어찌나 겁이 많으신지, 저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 주질 않으시오.”

탐심대멸공의 암연이 문은 물론이고 저 방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암흑궁주가 열어 주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었다.

천마멸세로 통째로 날려버릴 수는 있어도 저 문을 여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저 문은 나도 열지 못해요.”

검무극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불쑥 물었다.

“천화루주님이 당신을 살려줬소?”

순간 가예가 흠칫했다. 이미 그 반응으로 대답을 한 그녀였지만, 살짝 화난 얼굴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당신이 이렇게 다급히 달려왔다면 당신네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고, 우리 마존들은 당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마치 검무극은 그곳에 있던 사람처럼 정확히 상황을 파악했다.

“당신 마존들은 다 죽었어요.”

그 말에 검무극이 웃었다.

“다 잘 있다는 소리군. 아, 우리 마존들 보고 싶다!”

이 상황에서도 이런 여유를 부리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하긴, 그런 사람이니 암흑궁주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겠지.

가예의 시선이 검무극 너머 문을 향했다. 문 너머에 있는 암흑궁주는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며 대화까지 다 듣고 있을 것이다.

“암흑궁주는 우리 마존들보다도 당신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 것 같소.”

검무극도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적어도 내 사람이 적과 함께 밖에 있다면, 나는 저 문을 열었을 거요.”

“괜한 말로 우릴 이간질하려 들지 마세요.”

더는 듣기 싫다는 듯 가예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아버렸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검무극이 문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문 안 열면 신녀궁주를 죽일 거다!”

검무극이 손을 번쩍 들고 가예의 천령개를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들고 있던 손을 내리며 가예에게 말했다.

“이간질할 만한 관계가 남아 있기는 한 거요?”

여전히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무극의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려왔다.

“이봐, 못생긴 늙은이. 당신이 수하들을 도구로 사용하고 버리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녀궁주에게는 이러면 안 되잖아? 신녀궁은 당신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잖아? 당신의 명분이잖아? 당신이 명분을 잃으면 뒷골목 파락호보다 못한 놈이 되는 거다.”

감은 눈꺼풀 아래 가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는 신녀를 무시할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그러면 안 되지.”

그녀가 한 번쯤은 암흑궁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나왔다.

“신녀가 예언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건 신녀의 책임이 아니라 당신에게 문제가 생긴 거잖아? 당신이 해온 일이 하늘의 뜻과 너무 멀어졌기에 예언을 받지 못한 것이잖아? 왜 그 책임을 신녀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지? 윗사람이 되어서 참 못났다, 못났어.”

여전히 문 너머 암흑궁주는 침묵했다.

입을 연 사람은 가예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아까보단 한풀 꺾인 목소리였다.

검무극이 그녀 옆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속이 좀 후련하시오? 원하시면 욕 좀 더해 드리고.”

역대 가장 큰 별이 오길 바라네

흑노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것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이 대 일의 싸움, 굳이 이 불리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암노가 마불을 해치우고 돌아오기만 하면 이 싸움은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다.

암노와 함께 섭혼마존을 집중 공격해서 먼저 제거한 후 구천강림술로 구천시왕을 소환한다면? 그땐 삼 대 일이 된다.

저 얄미운 주정뱅이를 갈가리 찢어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문제는 암노의 싸움이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땡중 하나 못 죽이고 뭐 하는 거냐? 어서 와라!’

그나마 다행은 암영잠행술을 발휘한 자신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흑노는 그렇게 자신했는데.

섭혼마존의 암야개안이 발휘되었다.

취마의 비수에 새겨진 눈 모양의 문양이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는 어둠 속에 은신한 상대를 찾아 이리저리 눈동자를 움직였다. 이리저리 홱홱 움직이는 눈동자의 모습은 너무 기괴했다.

그러다 눈동자가 한 곳을 바라보았다.

취마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해 몸을 날리며 비수를 그었다.

쉬이이익.

흩어지는 검은 안개 사이로 핏물이 튀었고, 찰나간 놀란 흑노의 얼굴도 보였다.

흑노는 다시 암영잠행술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눈동자는 다시 빠르게 좌우를 살폈다. 다시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으로 취마가 다시 쇄도했다.

쉭! 쉬익! 쉭!

이번에는 비수를 긋지 않고 빠르게 찔러넣었다. 앞서보다 더 정확하고 빠른 공격이었다.

다시 허공에서 핏물이 튀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피였다. 암영잠행술을 펼치면서 호신강기까지 발휘할 수 없었기에, 결국 흑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암영잠행술은 섭혼마존의 암야개안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흑노가 베인 상처와 찔린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몸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이 기분 나쁜 느낌에 그는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이 개 같은 놈이!”

취마가 술 취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비틀비틀 다가섰다.

“술 취하면 개지, 개.”

그 비틀거리는 모습에 흑노가 기습적으로 장력을 날렸다.

쇄애액! 쇄액!

취마가 휘청거리며 장력을 피했다. 취해서 이 빠른 기습은 절대 못 피할 것 같았는데, 맞을 듯 맞을 듯하면서 맞지 않았다.

그러다 취마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해골들을 소환해서 막았다.

“크엑.”

흑노가 피를 토했다. 너무 급하게 구천강림술을 펼치면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뽑은 해골들을 취마가 때려 부수며 돌진했다.

꽈직, 꽈지직!

주먹으로 치고 몸통으로 들이박고.

해골이 그를 붙잡아도, 검을 휘둘러도 다 뿌리치고 피하면서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놈이!”

실전 경험이 적지 않은 흑노였지만,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무식하게 밀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취마는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마불과 암노와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빨리 이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랬기에 상대에게는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돌진처럼 보였다.

쇄애애액.

흑노가 해골들 사이에 끼어 있는 취마의 얼굴로 장력을 발출했다.

날아간 장력이 허공에서 해소되었다.

뒤쪽에 서 있던 섭혼마존이 장력을 날려 그것을 해소한 것이다.

좋은 기회를 놓치자 흑노는 분노했다.

“이 망할 연놈들!”

기어코 취마가 해골들을 뚫어내고 달려들었다. 정말 미친놈처럼 취마는 웃고 있었다.

쉬이익.

비수를 찌르려는 취마의 팔을 붙잡았다.

마치 힘 싸움이라도 겨루듯 두 사람이 서로의 팔을 붙잡았다.

퍽! 퍼억!

남은 해골들이 취마의 등을 가격했지만 취마는 아픈 줄도 모르고 계속 밀어붙였다.

취마의 벌건 눈을 가까이서 보자 흑노는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탐심대멸공이 아니었다면 벌써 밀렸을 것이다.

바로 그때!

퍼어억!

날아든 섭혼마존의 장력이 흑노의 얼굴을 강타했다. 호신강기를 한순간만 늦게 끌어올렸어도 얼굴이 통째로 날아갈 뻔했다.

“이 비겁한…….”

이번에는 취마가 사정없이 박치기했다.

흑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둘이서 합공에 박치기까지?

퍽! 퍼억!

코뼈가 부러졌고 핏물이 목구멍으로 넘어왔지만 흑노는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들의 거친 싸움 방식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여유를 부리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이렇게 나와야 어떤 허점이라도 찾을 텐데.

잘난 척이라도 좀 해야 생각을 하고 기회를 엿볼 텐데.

퍽! 퍼억! 퍽!

비수를 든 취마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순식간에 팔을 빼낸 취마의 비수가 허공을 갈랐다.

푹푹푹!

취마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비수로 흑노의 심장을 연속해서 찔렀다.

축 늘어진 흑노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지던 그 순간, 취마가 벼락처럼 빠르게 뒤로 돌아섰다.

“조심!”

심장이 찔린 흑노의 몸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 몸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진짜 흑노는 천화루주 뒤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앞서 심장이 찔리기 직전, 남은 내공을 쥐어 짜내 발휘한 마지막 한 수.

암영탈각술(暗影脫殼術).

흑노가 천화루주의 뒤에서 그녀의 목을 부여잡았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 년 목은 부러진다.”

이대로 암노가 돌아올 때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이 대 일의 싸움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천화루주를 인질로 잡는 데 성공하니 후회가 되었다. 몸이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다음 순간, 흑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 앞에 천화루주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흑노는 멍해졌다. 자신이 인질로 잡은 사람이 천화루주인데, 왜 저기 있는 거지? 그럼 내가 잡고 있는 사람은?

무엇인가 뻥 뚫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 쪽이 허전해지며 무엇인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흑노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는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배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자신이 붙잡고 있던 여인이 뒤로 장력을 발출한 것이다. 너무 가까운 데다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기에 호신강기를 일으킬 사이도 없었다.

여인이 손에서 벗어나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는 천화루주가 아니라 섭혼마존이었다. 분명 천화루주의 뒤를 잡았는데.

“……어떻게?”

흑노는 알 수 있었다. 취마와 정신없이 싸우던 그때, 섭혼마존이 자신에게 섭혼술을 걸었다는 것을.

평소라면 안 걸렸을 섭혼술이었는데, 내상이 심한 데다가 박치기까지 당하며 반쯤 정신이 나가면서 당한 것이다.

흑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지막 힘을 다해 섭혼마존에게 욕설과 저주를 날리려던 그때, 이 야속한 마존들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콰지지직.

평소 홀로 술을 마시던 취마의 모습을 닮은 한 줄기 강기가 떨어져 내렸다.

취마의 독문무공 주신공

그 두 번째 잔, 주신독주.

강기가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순간, 흑노는 온몸이 박살 나며 절명했다.

섭혼마존에게 눈깔 하나 팔다리 하나 남기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였는데, 정작 자신의 시체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섭혼마존이 돌아서며 천화루주를 챙겼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섭혼마존님 덕분에요.”

천화루주는 정중히 섭혼마존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구명지은이 아니었다. 섭혼마존은 자신이 죽을 상황이었음에도 피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주었다.

섭혼마존은 끝까지 그 공을 검무극에게 돌렸다.

“저는 소교주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에요.”

바로 그때였다.

화아아아악.

그들은 보았다. 마불과 암노가 사라졌던 자리에 거대한 황금빛 손바닥 모양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는 것을.

“마불님의 마장이네.”

취마의 말에 섭혼마존과 천화루주는 긴장한 마음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곳에 마불과 암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노의 시체는 온몸이 박살 난 상태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취마의 인사에 마불이 흑노로 여겨지는 흔적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들을 많이 화나게 했나 보군.”

“그 반대입니다. 열은 우리가 받게 했죠.”

취마의 대답에 마불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네.”

이제 암흑궁주의 두 수족인 암노와 흑노마저 죽음을 맞았다.

마불이 손을 내밀어 안개처럼 흐르는 암흑의 기운을 살폈다.

“여전히 탐심대멸공의 기운은 줄어들지 않고 있네.”

탐심대멸공의 영향을 받은 암노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암흑궁주가 이 기운 때문에 더 강해진다면, 그 싸움은 흑노나 암노와의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승리에 취해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서 소교주님께 가세.”

마불이 앞장서서 어둠의 기운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두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취마가 맨 뒤를 따라 걸었다.

‘아우야, 네가 마실 마지막 한잔은 남겨두었다!’

* * *

다섯 사람이 천마신교 본단을 나섰다.

검우진이 앞장섰고 그 양옆을 권마와 독왕이, 다시 그 양쪽 끝으로 풍천교주와 검왕이 자리했다.

검무극이 이 모습을 봤다면 절대 그냥 넘어갈 광경이 아니었다.

―아버지, 지금 세상에서 제일 강한 날개를 다셨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말을 했을 모습이었다.

천마를 뒤따르는 네 사람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이 마가촌에 들어섰다.

항상 북적대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검우진은 길 가운데 서서 거리를 쳐다보았다. 깊어진 눈빛으로 텅 빈 거리를 바라보는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었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검우진이나 권마, 독왕은 원래부터 말수가 적었고, 검왕 역시 이런 자리에서 묻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본단을 나설 때부터 입이 근질근질하던 풍천교주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저 주점 때문에 그런지, 마가촌에 나오면 항상 소교주 생각이 납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언급하자 검우진이 그의 말을 받았다.

“아들 녀석 때문에 고생 많으셨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주 앞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소교주가 나이는 젊지만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풍천교주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아드님이 어찌나 제 복장을 터지게 했는지. 그때는 전생에 제가 무슨 큰 죄를 지었나 싶었습니다.”

다들 검무극을 겪어본 이들이었기에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에게 검무극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풍천교주가 그 말을 꺼낸 건 검무극 흉을 보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소교주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때 복장이 터지지 않고, 펄쩍펄쩍 뛰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불행하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매일 신물을 쳐다보며 기쁨을 느끼며, 고월을 족쇄로 묶어둔 채.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소교주 덕분에 요즘 행복합니다.”

풍천교주가 검우진을 바라보았다. 항상 어렵고 껄끄러운 마교주지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아드님, 잘 키우셨습니다.”

검우진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좋게 봐주신 덕분이오.”

다시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다시 말을 꺼낸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어찌나 다들 과묵한지.

자신이 아니면 온종일, 아니 한 달을 서 있어도 아무도 입도 열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너무 갑갑하고 지겨워 보여서 오던 천살성도 돌아갈 거요! 차마 검우진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정말 그자가 이곳으로 온다면 이번 천살성은 참 운이 나쁜 천살성일 겁니다.”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검왕만은 아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다른 내용이었다면 절대 나서지 않았을 그였는데, 이번에 나선 이유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풍천교주의 물음에 검왕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소교주 때문입니다.”

천살성이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검무극을 먼저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번에 등장하는 천살성을 막기 위해 소교주와 같은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면요?”

검왕의 말은 그만큼 검무극을 높이 사는 말이었고.

“하늘이 소교주와 균형을 맞추었다면요? 만약 그렇다면 이번 천살성은 역대 가장 큰 별이 될 겁니다.”

동시에 섬뜩한 말이기도 했다.

검무극은 역대 처음 보는 소교주였으니까. 만약 그의 말처럼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숙적이라면, 정말 무서운 적이 올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이윽고 검우진이 말했다.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나는 반드시 그 천살성을 내 손으로 없앨 거네.”

검우진의 단호한 의지에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만은 천마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었음을.

“만약 자네 말대로라면, 역대 가장 큰 별이 오길 바라네.”

정말 운명이 균형을 맞추었다면, 천살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아들은 더욱 큰 사람이 될 테니까.

아들을 위하는 마음을 이렇게 드러내는 교주를 보면서, 권마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 때문에 많은 이들이 변했지만,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교주라고. 겉으로는 가장 적게 변한 것 같지만, 그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오히려 자신보다 교주가 더 많이 변했다.

“흉성(凶星)이 지면 신성(新星)은 더욱 빛날 겁니다.”

권마의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눈빛이 오갔다.

―무극이에게 짐을 지우지 말고 우리가 죽이세.

―네, 교주님.

교주와 마존이 아니라 아버지와 사부의 눈빛이었다.

풍천교주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유쾌하게 말했다.

“소교주, 아버지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으신가?”

풍천교주의 말을 받은 사람은 검왕이었다.

“소교주는…….”

풍천교주에게 그랬고, 자신에게 그랬듯.

“또 어디선가 누군가의 복장을 터뜨리고 있겠지요.”

천살성이 오더라도 밥은 먹어야지요

가예는 속이 후련했다.

자신이 암흑궁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검무극이 대신해주었으니까.

원하면 욕을 더 해줄 수 있다고?

마음 같아선 암흑궁주가 저 문을 열고 나와서 고개 숙여 미안하다고 할 때까지 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신녀라고 너무 참고 살지 마시오.”

문제는 이렇게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검무극의 의도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난 당신 편이 되지 않아요.”

그녀가 짐짓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봤잖아요? 궁주님은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해도 문을 열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에게 아무 이용 가치가 없어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는 아직 암흑궁주를 믿고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문을 열지 않은 건, 진짜로 죽이지는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잘 사람을 현혹하는지 알고 있으니, 괜한 말로 헛수고하지 말아요.”

검무극이 웃으며 인정했다.

“맞소, 그 현혹술로 당신들 사람 중 제일 멋진 두 사람을 내 사람을 만들었지. 아, 우리 악 형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나 없다고 교내에서 구박이나 받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 악 형, 꿋꿋이 버텨야 하오!”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한다고? 듣고 있던 가예는 정말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 소교주를 판단하거나 파악할 수 없음을 느꼈다.

검무극이 그들을 언급한 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악 형이나 차 소저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나는 문을 열고 나왔을 거요.”

가예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간질해봤자 소용없어요. 그런 도발을 한다고 저 문은 열리지 않아요.”

하지만 검무극의 이간질은 강력했다.

“앞서 암흑궁주가 두 번 내 앞에 모습을 보였소. 두 번 다 허상으로 나타나더군. 한데 당신은 그냥 내보냈소. 나나 마존들에게 죽을 수도 있는데.”

가예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뻔히 이간질하는 줄 알면서도 화가 났다. 흑노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던 일을 겪었기에 더욱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그랬죠. 나 같은 사람에겐 예언이 내리지 않을 거라고.”

“그건 당신이 너무 뻔뻔하게 굴어서 그랬소. 적어도 천화루주님께 사과 한마디는 할 줄 알았거든. 어쩔 수 없이 당신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그깟 말 한마디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 한마디가 모든 걸 다 바꿀 수도 있으니까. 그 한마디를 할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평생 후회하며 살아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가예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미 불렀는데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사과하지 않은 게 아니지 않소?”

검무극이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당신 마음에는 애초에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지 않았소? 지금 내 말을 들으니 아, 그랬어야 했나? 생각하지 않았소? 만약 그랬다면 당신은 암흑궁주에게 그렇게 키워진 거요. 내가 현혹을 잘한다고 했소? 그 말은 암흑궁주에게 먼저 할 말이오.”

그녀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검무극은 냉정하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당신은 신녀궁의 신녀가 아니라 암흑궁의 시녀가 되었소. 궁을 떠난 천화루주에게 예언이 내려지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발끈한 가예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요!”

진실은 언제나 칼날 같아서 자신을 지킬 수도 있고, 그것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가예의 경우는 후자였고 아주 큰 상처였다.

“그래, 난 지금도 사과할 생각 없어. 그리고 죽어도 당신 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난 당신을 내 편으로 만들려고 이러는 게 아니오.”

“그럼 내게 왜 이러는 거지? 왜 친한 척 굴었던 거냐고!”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문을 향했다.

“당신을 이용해서 저 문을 열려는 것일 뿐이오. 당신이 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거든.”

대놓고 이렇게 말하니 가예는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 궁금했다. 어떻게 열겠다는 것인지.

“내가 당신에게 질문 하나만 하면 저 문은 열리게 될 거요.”

대체 무슨 질문이기에? 그녀에게 검무극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 구슬에 담긴 여섯 개의 힘, 어떻게 사용하는 거요?”

순간 가예가 흠칫했다. 그녀의 표정과 반응으로 볼 때, 그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른 질문을 해도 될 거요. 천살성의 고수는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사연이 있으며 또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알려주시오. 지금 어디에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도. 이 질문에 대답해주면 당신을 살려주겠소.”

가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을 버린 암흑궁주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륵.

문을 지키고 있던 암연이 사라지면서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열쇠라고.”

가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암흑궁주는 자신이 비밀을 말할까 봐 문을 연 것이다. 어떤 모진 고문을 당하더라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는데.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렸을 때, 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내 의지를 고작 이 정도로 판단한다고?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암흑궁주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흥분한 그녀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문이 열렸으니 이제 나는 이용 가치가 없잖아. 어서 날 죽여! 죽이라고! 그리고 잘난 너희 둘은 싸우다 양패구상으로 꼭 뒈져버려! 누가 먼저 지옥으로 오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늘에 버림받고, 암흑궁주에게 버림받고, 이 검무극에게조차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

검무극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렵게 연 저 문으로 검무극은 달려가지 않았다. 다시 닫혀버리면 어쩌려고?

자신이라면 얼른 베어버리고 달려갔을 텐데.

하지만 검무극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악을 쓰니 이제 화가 좀 풀렸소?”

그 말을 듣는 순간 맥이 풀렸다. 사람을 그렇게 열받게 해놓고서 그게 할 소리냐고?

“당신 얼굴 보고 있으니 복장이 터져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그럼 그만 보고 가시오.”

순간 가예는 흠칫 놀랐다.

“날 살려준다고?”

“신녀의 목숨은 사람에게 달린 게 아니라 저 하늘에 달려 있지 않소?”

정말 살려주겠다는 듯 검무극이 돌아섰다. 뒤에서 가예가 소리쳤다.

“날 살려주는 진짜 이유를 말해요.”

검무극은 삼백 년 전 신녀궁주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예언을 전해주던 그녀를. 당신은 당신의 신녀궁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소?

“조상이 도왔다고 생각하시오.”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문을 향해 걸어가는 검무극을 바라보던 가예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달려가서 검무극과 나란히 함께 걸었다.

“아직 화가 다 안 풀렸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신녀궁은 진작 이랬어야 했소.”

그렇게 두 사람은 암흑궁주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 * *

석양이 질 때까지 그들은 마가촌의 거리에 서 있었다.

“천살성이 언제 올지 모르니, 놈이 올 때까진 주점 안에서 편히 기다리시지요. 싸우기도 전에 길에서 힘 뺄 필요가 있겠습니까?”

풍천교주의 제안에 검우진은 흔쾌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의 말처럼 천살성이 오늘 올지, 내일 올지, 한 달 후에 올지, 아니면 영영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검우진이 마화를 피우고 이들을 데리고 나온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다. 아들의 출교와 함께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느꼈기에.

그들이 풍류주점으로 들어섰다.

조춘배가 급히 주점을 비웠기에 내부는 미처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마교주가 있을 공간인데 이렇게 어지럽혀진 곳에 모실 수는 없었다.

“여길 좀 치워야 할 거 같은데.”

풍천교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여기 막내가 누군가? 막내가 치워야지.”

이 자리에서 막내를 찾는 그의 농담에 모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풍천교주가 있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풍천교주가 슬쩍 독왕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독왕이 막내일 거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막내임을 밝혔다.

“제가 막내입니다.”

그는 바로 검왕이었다.

“자네가 막내라고?”

“독왕님보다 두 살 어립니다.”

풍천교주가 놀라 소리쳤다.

“아들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그렇게 따지면…….”

검왕은 차마 그럼 당신에게는 손자처럼 보일 거라는 말을 꺼내진 못했다.

“한데 나이는 어떻게 아나?”

“여기 계신 분들 나이는 다 알고 있습니다.”

새삼 그가 한때 적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말이었다.

“여긴 제가 치울 테니, 이 층으로 올라가 계십시오. 천살성이 오더라도 밥은 먹어야지요.”

교주를 세워둘 수는 없었기에 일단 권마와 독왕은 검우진을 모시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풍천교주는 그나마 제일 만만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 검왕이었기에 일 층에 함께 있었다. 괜히 자신이 막내 이야기를 꺼내 검왕이 일을 하게 돼서 미안하기도 했고.

다행히 이 층은 깨끗했다.

검우진이 검무극이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았고, 권마가 마주 앉았다.

독왕은 옆 탁자에 따로 앉았다. 교주가 독공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권마가 검우진에게 물었다.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괜찮네.”

권마는 교주가 이 결전전야의 긴장감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 오랜만이군.”

“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마는 안다. 이 교주가 얼마나 적과 싸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지.

강적과 싸울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몇 날 며칠 밤을 새웠고, 중원의 끝에서 끝까지 쉬지 않고 횡단했던 사람이니까.

권위를 벗어던진 자유로움 속의 교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아마 모두 깜짝 놀랄 것이다. 교주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다고? 모두 이런 생각을 하게 되겠지.

그때 일 층에서 풍천교주의 말이 들려왔다.

“자넨 점소이를 했어도 잘했겠군.”

그새를 못 참고 풍천교주는 검왕이 일하는 걸 평가하고 있었다.

“행주질이 범상치 않아.”

사실 허름한 옷에 말총머리, 거기에 맨발. 검만 차고 있지 않았어도 나이 든 점소이라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얼핏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었는데, 검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객잔이나 하나 차릴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울리네, 잘 어울려. 객잔 내에서 싸움을 벌였다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그런 객잔 어떤가?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객잔으로 소문내는 거지. 객잔 이름은 뭐로 지으면 좋을까?”

신이 나 떠들던 풍천교주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벌써 배가 고프군. 대체 소교주는 하루에 몇 끼를 먹을까?”

“제가 간단히 먹을거리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그때 권마가 일 층으로 내려오며 말했다.

“교주님께 드릴 식사를 준비할 겸 내가 하겠네.”

자신을 믿지 못해서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나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이 층에서 검우진이 뜻밖의 말을 했다.

“저 사람이 소싯적에 요리 꽤 했지.”

검우진과 권마가 젊은 시절 중원을 돌아다닐 때 직접 해먹은 적이 많았다. 검우진이 요리를 잘하는 것도 그때 배운 실력이었다.

검왕과 풍천교주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권마를 쳐다보았다.

저 큰 손으로 요리를 한다고?

권마의 손에 들린 커다란 부엌칼이 과일 깎는 과도처럼 보였다.

귀한 장면이었다.

권마가 주방에서 당근을 썰 때 검왕이 행주를 들고 탁자를 닦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의자에 앉은 풍천교주가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그림의 제목은 이렇게 붙을 것이다.

천살성을 기다리면서.

물론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그림이 되겠지만.

그렇게 세 사람이 일 층에 내려가자, 이 층에는 검우진과 독왕만이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래도 예전에 천독림을 찾아가 독왕의 독 배합을 도와준 적도 있는 검우진이었다.

독왕에게 검우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독주머니가 평소와 다르군.”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며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독왕이 순식간에 진짜 세상으로 돌아왔다.

“전쟁에 쓰는 주머니입니다.”

검우진이 차분한 어조로 독왕에게 말했다.

“이 전쟁은 자네의 전쟁이 아니네.”

독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독공을 싫어해서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네는 무극이를 지키는 전쟁을 해야지.”

놀란 얼굴로 독왕이 고개를 들었다. 교주의 말은 이 싸움에서 졌을 때를 대비한 말이었다.

권마의 칼질이 멈췄고, 검왕의 행주질이 멈췄다.

풍천교주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이 층을 향했다.

“내 무공이 통하지 않는 적에게서 무극이를 어떻게 지킬 건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교주가 천마신교 최종병기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죽었을 때 너는 어떻게 무극이를 지킬 거냐?

잠시 고민하던 독왕이 차분히 대답했다.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협박을 해서 지켜내겠습니다.”

“어떤 협박으로? 나를 죽일 정도의 실력이라면 만독불침에 이른 자일 수도 있을 텐데.”

그러자 독왕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를 독살하겠다는 협박이 아닙니다.”

“그럼?”

“몸을 숨긴 후에 이런 서찰을 놈에게 보낼 겁니다.”

독왕이 가상의 협박을 읽었다.

“만약 네가 소교주를 죽이면, 난 세상 사람을 모두 독살해서 네가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겠다. 네가 차지한 무림은 황량한 무림이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하고 무서운 협박이었고, 오직 독왕만이 할 수 있는 협박이기도 했다.

세상의 멸망.

듣고 있던 모두는 침묵했다. 독왕이 정말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독왕이 다시 차분히 말했다. 평소 검우진과 나누는 대화의 양을 생각하면 십 년 치 대화를 지금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교주께서는 절대 천살성에게 절대 지지 않을 것이기에.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소교주가 천살성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소교주는 너무나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독왕은 앞서 검왕이 했던 말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면 무극이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나?”

검우진의 물음에 독왕은 솔직히 대답했다.

“소교주는 교주님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검우진은 물론이고 일 층에 있던 세 사람도 놀랐다. 독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저는 천살성보다 교주님이 더 무섭습니다.”

그런 무서운 교주를 막으려고 태어난 존재라 여겼기에.

“그래서 전 소교주가 제일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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