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회귀 [650-699화]

맹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무림맹 나와! 마교 나와! 그와 함께 무대에 설 작정입니다 오늘은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네 비극에 초대하진 않았을 테니까 오늘 우린 아무도 안 죽는다 비겁한 것들과는 말을 섞지 않아서 아직도 내가 귀여워? 제가 본 가장 멋진 쌍년이었습니다 소교주에게 붙은 이유는 파도는 피하는 게 아니라 넘는 거다 이 무대에 난입해야겠네 내겐 다 들린다 누군지 연연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누구? 난 도망가고 싶었다 우리들의 시간은 이제부터지 하지만 이건 몰랐죠? 이제 하나 먹을 때도 됐잖아? 먼저 보내 주려 합니다 왜 잘해? 왜 잘하냐고! 동생의 다정은 무적 당과까진 참았지만 후계자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욕은 없을 때 해야죠 이 술이 형하고 친구네 먹고 마시고 뒹굴뒹굴 먼 길의 시작일 뿐 손에서 검은 내려놓아도 천마가 세상을 멸망시킨다 젊어서는 운명을 믿지 않을 겁니다 만약 하늘이 예언을 내린다면 제가 죽이는 쪽입니다 예쁜 여자들이 저리 많은데 허락 없이 죽이지 마 소속 문파는 천마신교 이 방에만 들어오면 넋이 나가는군 반품은 안 됩니다 아들 닮았다는 말이 화낼 일인가? 위험하다고 안 오실 분이 아니잖아? 당신들 딱 그만큼 어리석잖아? 인생은 짧아도 속눈썹은 길어야지요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나 죽는 자리라면서? 일 위는 누군가? 대답 못 하면 벌주 석 잔 주사 있는 줄 아셨소? 아버지가 왜 마존을 두셨겠느냐?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다들 자기 자리 알지?

맹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무림맹주 진패천은 뒷짐을 진 채 청운림의 정자에 서 있었다.

대나무 숲에 흐르는 안개를 쳐다보고 있을 때, 정자로 검무극이 걸어 올라왔다.

“맹주님.”

“어서 오게.”

검무극이 보고할 게 있다고 기별을 하여 은밀히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서서 흐르는 안개를 쳐다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그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리네.”

자신이 만났던 천애거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다만, 새롭게 느꼈던 점이 문제였다. 그가 지난 세월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기 감정을 솔직히 드러낸 적이 없었다는 점이.

그 이유를 그의 성격이라고 하기에도, 자신의 신분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함께 해온 세월이 너무 길었다.

“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 악인이라는 증거는 아니겠지.”

검무극은 차분히 그 말을 받았다.

“오래 봤다고 사람을 잘 아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보려는 노력을 했는지가 중요하겠죠. 한데 친구 사이에는 그런 노력 안 하죠. 안 해도 되니까 친구인 거고. 그래서 그자가 제일 나쁜 놈인 겁니다.”

진패천이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천애거사가 악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금마령을 어긴 고수들은 어떻게 되었나?”

진패천의 물음에 검무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금마령이라니요?”

진패천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소식을 알려준 사람이 검무극이었는데.

“본교에는 금마령을 어긴 고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씩 웃었다. 그 장난 섞인 웃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금마령을 어긴 노마들이 다 죽었음을.

물론 금마령을 어긴 사람이 없다는 건 농담처럼 한 말이었고, 검무극은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그들이 명심의원에 나타났었습니다.”

사실 진패천도 이미 그 소식을 입수한 후였다. 소정락이 두 노 고수를 만난 후 의원을 비웠다는 사실을. 그 노 고수들이 금마령을 어긴 마인들이라는 것도.

“그들은 명심의원 지하 밀실에서 죽었습니다.”

검무극은 일부러 그곳 지하에 밀실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네가 직접 손을 썼나?”

“네.”

그들을 죽이고도 긁힌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검무극이었다. 이 젊은 소교주는 만날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

“소 의원도 죽었나?”

소정락이 정말 악인이었다고? 그렇게 오랫동안 무한 사람들을 위해 노력해 온 그였는데.

“네, 그도 죽었습니다.”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 후 이유를 설명했다.

“소정락이 그들의 금제를 풀어주려 했었습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말이 덧붙여졌다.

“그의 거처 지하 밀실에서 독공을 수련했더군요. 실험에 필요한 체질의 환자들을 골라 그곳에서 독실험을 해서 죽였고요.”

진패천의 두 눈에서 차가운 노기가 흘러나왔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용서할 수 없는 자였다.

검무극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다.

진패천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 순간, 눈앞의 검무극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은 마교에서 꾸민 음모가 된다.

“맹주님의 감을 믿으십시오.”

“자네 말이 맞다면 오히려 내 감은 믿지 말아야 하지 않나? 오랜 친구가 적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젊은 시절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자입니다. 맹주님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감은 검무극을 믿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진패천은 신중했다. 이번 일은 자신은 물론이고, 정파 무림 전체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으니까.

“자네 말이 맞다고 치세. 이렇게 오랜 세월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나였다면 몇 번이나 뒤집었을 텐데.”

“그래서입니다.”

“그래서라고?”

“분명 맹주님이셨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셨을 겁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되묻듯 말했다.

“한데 저들은 맹주님이 아니지 않잖습니까?”

“이런 맹주님을 상대해야 하니, 절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수십 년을 준비해도 모자랄 만큼.”

진패천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얼마나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사실 저는 그들이 노린 사람이 하군이나 하령이가 아니라 천애거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순간 진패천이 흠칫 놀랐다. 그 말은 곧 스스로 목숨을 바쳐서 정마대전을 일으키려 했다는 말이었으니까.

“왜 그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나?”

“친구분에 대한 맹주님의 판단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말씀드렸어야 했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모든 걸 다 말씀드린다고 했으면서, 제가 독단적으로 판단을 내렸습니다.”

진패천은 사과할 일이 아니라 여겼다. 소교주는 모든 걸 다 말해주겠다고 하지만, 자신은 아직 그를 완전히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자신은 그에게 모든 걸 다 말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여전히 검무극을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 믿으면서도 경계했다. 사람을 완전하게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누굴 노렸는지 밝혀냈나?”

“네. 소정락이 직접 말했습니다.”

검무극이 나직이 덧붙였다.

“그들의 목표는 저와 하군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패천은 참으로 오랜만에 참을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앞서 손주들이 목표가 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을 때와, 실제 사실로 밝혀졌을 때의 분노의 크기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처참하게 죽이고 싶다는 짙은 살의였고, 상대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다가 갈가리 찢어발겨 버리고 싶은 원초적인 살의기도 했다.

진패천은 정말이지 이럴 때면 무림맹주 자리가 거추장스러웠다. 당장에라도 검 한 자루 들고 달려 나가고 싶었다. 이 한마디를 외치면서.

그래서 어딘데? 그래서 누군데?

원래 자신은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무림맹주가 되면서 많이 참고, 또 참으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한데 이번 일은 정말 자신의 원래 성격이 나오게 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놈들의 목표는 우리 아버지겠군요. 제가 죽으면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분석했던 모양입니다. 우리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판단이었죠.”

진패천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제대로 봤을지도 모르지.”

“네?”

그냥 검무극이 듣기 좋으라고 해준 말이 아니다. 삼자회합 때 봤던 검우진은 분명 야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명분으로 삼든, 아니면 정말 그 슬픔 때문이든, 검우진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번 목표는 소교주와 손자가 아니라, 마교주와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더 있습니다.”

오늘 맹주를 만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정보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일의 배후에 섭혼술의 고수가 있습니다.”

섭혼술이란 말에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파 무림이 가장 싫어하는 무공이 독공과 섭혼술이다.

소정락은 독을 썼고, 다른 배후는 섭혼술을 쓰는 자이니, 그야말로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투입한 것이다.

“대비책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진 대주에게는 섭혼술에 관해 따로 기별했습니다.”

분명 무림맹에서도 섭혼술이나 독공에 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본교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세워둔 대비책이 있을 테니까.

“알겠네.”

“보시다시피 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맹주님입니다.”

그렇게 한 번 더 맹주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진패천이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끝으로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 사람만큼은 사전에 맹주에게 알려야 했다.

“제가 직접 천애거사를 만나볼 생각입니다.”

순간 진패천은 흠칫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나라면 어떻게 할 텐가?”

잠시 고민하던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제가 맹주님 처지라면 저 자신에게 먼저 묻겠지요. 지금 네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냐고.”

진패천은 그 물음을 자신에게 했다.

친구가 악인으로 밝혀지는 게 두려운 걸까?

아니면 평생을 속고 산 자신의 인생을 알게 되는 것일까?

“그를 죽일 건가?”

진패천은 무겁게 물었고, 검무극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처음에는 당연히 맹주님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맹주님을 위해서였죠. 한데 지금은 제가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맹주님을 위해서입니다.”

검무극은 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정자를 내려갔다.

“우선은 그가 배후라는 증거부터 찾겠습니다.”

* * *

검무극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천애거사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군가?”

검무극은 바깥을 지키는 무인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시잖습니까?”

이내 천애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주에게 자네에 대해 들었네.”

그리고는 정말 놀랍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자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군.”

검무극은 맹주가 왜 그리 고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모습 어디에서도 정체를 숨긴 악인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소리치면 밖에 있던 이들이 모두 뛰어 들어올 거네.”

“그 사람들 다 죽이시게요? 아, 원래 그게 목적이셨죠? 내 손에 무한의 무인들이 학살당하게 하는 거.”

천애거사는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무극이 들어왔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복도에 서 있던 무인들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죽은 사람도 없었고, 마혈이나 수혈이 제압당한 사람도 없었다.

창문 밖 마당에도 수많은 무인의 모습이 보였다. 검무극은 이 모두의 눈을 피해서 방에 들어온 것이다. 중요한 건 제압하지 않고 들어왔다는 데 있었다.

“뭐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아니네.”

복도를 지키던 무인의 물음에 천애거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을 닫고 다시 들어왔다.

그 사이 검무극은 방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정말 소문대로 검소하시군요.”

대충 훑어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검무극의 눈빛은 예리하게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위급시 빠져나갈 비밀통로라거나, 상대를 공격할 기관 장치라거나.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살아왔는데 그런 게 있겠어? 싶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소정락에게도 말했듯, 처음에는 그도 완벽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빈틈이 없을까?

어딘가 분명 있을 것이다. 둑을 무너뜨릴 손가락만 한 구멍이.

“혹시 이 방 어딘가 비밀통로로 들어가면 정말 고급스러운 집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침상에는 미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집 말입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천애거사는 웃지 않았다.

“자네 거처에는 그런 비밀통로가 있나?”

너는 없으면서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지는 말이었다.

“우리 마교 놈들이야 감추지 않고 그런 집에서 살고 있지 않겠습니까?”

방 내부를 둘러본 검무극이 다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주전자를 열어보았다.

“차도 제일 싼 차를 쓰시는군요. 차는 좋은 차를 드시지.”

“내 입은 그리 고급지지 않다네.”

검무극은 태연히 행동했지만 모든 신경을 천애거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니까.

쪼르륵.

검무극이 찻잔에 차를 부어서 마셨다.

“사실 저도 아무거나 잘 마십니다.”

천애거사는 마치 제집처럼 행동하는 검무극을 말없이 응시했다.

“지금까지 숨기고 사느라 힘들지 않았습니까? 저와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시죠? 어차피 맹주님이나 정파 무림인들이 제 말은 믿지 않을 테니까요.”

그도 분명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해낸 일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을 거다. 내가 어떻게 참아가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냐?

하지만 천애거사는 전혀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네야말로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건가? 나를 음해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천애거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맹주를 노리는 건가?”

놀랍게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했다.

“네, 맹주님이 목표입니다.”

흠칫 놀라는 천애거사에게 검무극이 덧붙여 말했다.

“당신으로부터 맹주님을 지키는 게 목적이죠.”

자신을 놀렸다는 걸 알고는 천애거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교의 소교주가 무림맹주를 지키러 왔다? 웃기는군.”

“세상은 웃기는 일투성이죠. 무림맹주의 가장 오래된 친구가 가장 위협적인 적일 수도 있고.”

검무극은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왜 나를 찾아왔나?”

“솔직한 대답이 있고, 솔직하지 않은 대답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들으시겠습니까?”

“솔직한 대답을 듣지.”

검무극이 자신의 방문 목적을 솔직하게 밝혔다.

“우리 거사님이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천애거사라는 이름 속에 숨어 있는 화율청이라는 남자를 끌어내는 것. 천애거사라는 껍데기를 확 찢어버리는 그 순간을 위해서!

“자네가 너무 솔직하니 솔직하지 않은 대답도 궁금하군.”

“알려드릴까요?”

천애거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의 태도가 돌변했다. 악을 들여다보는 더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검무극이 나직이 말했다.

“당신을 죽이러 왔소.”

예상이라도 했는지 천애거사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죽인 후에 수습하기. 당신처럼 위험한 사람을 상대하는 데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천애거사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 대답이 오히려 솔직한 대답처럼 들리는데?”

그러자 검무극이 차가웠던 표정을 풀었다.

“맞습니다. 사실 이게 내 솔직한 바람이죠.”

“그럼 왜 날 죽이지 않나?”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검을 뽑으며 단칼에 목을 벨 수 있을 가까운 거리에 마주 섰다.

“당신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어서지요.”

검무극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나와 손잡읍시다.”

절대회귀 653화

무림맹 나와! 마교 나와!

떨리는 눈동자에서 천애거사의 놀람이 전해져 왔다.

그래, 놀랐을 거다.

진짜 배후가 아니었다면 마교 소교주의 미친 소리에 불과한 말이지만, 당신은 다르니까.

정말 이 소교주가 내게 손을 잡자고 제안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을 테니까.

손을 잡자고 말한 것은 그를 흔들기 위해서였다. 그를 흔들다 보면 맹주의 친구 천애거사가 아닌 음모의 배후인 화율청이 틀림없이 한 번은 튀어나오겠지.

처음이 어렵지, 한 번 본모습을 드러내면 그때부턴 감추기가 더 어려울 거다.

천애거사는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검무극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러나는 모습으로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을 감추는 데는 맹주급 실력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던 천애거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검무극을 지나쳐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는 것일까?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복도에 있던 무인들을 안으로 데려오는 대신 오히려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모두 따라 나오게.”

복도의 무인들뿐만 아니라 마당과 건물 밖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무인이 모여 있었다. 밥도 그곳에서 해결하고, 잠도 운기조식으로 대신하는 그들은 진심으로 천애거사를 존경하고 따랐다.

천애거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만 모두 돌아가시게.”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아직 안 됩니다, 거사님.”

그는 바로 정소문의 문주 혁인이었다.

앞서 천애거사는 그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 그 이후 이렇게 모두 그의 거처를 지켜주고 있었고. 특히 혁인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천애거사가 혁인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이제 괜찮네.”

“거사님!”

“내 몸이 괜찮은데 감히 누가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설마 내 실력을 무시하는 건가?”

“아닙니다, 거사님!”

천애거사는 당황하는 혁인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는 검무극의 손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자네 마음 다 아네. 이제는 내가 불편하니 이만 물러가라는 거네.”

혁인이 고개를 숙였고, 나머지 무인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맹주께서도 나를 신경 써 주고 있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들 가게.”

무림맹주가 언급되자 그들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래, 맹주가 오죽 신경을 쓰고 있겠는가?

“일이 있으면 바로 기별해 주십시오.”

천애거사가 무인들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그동안 나를 지켜줘서 정말 고마웠네. 이 일은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네. 이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시게.”

무인들은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일제히 포권하며 우렁차게 인사했다.

“거사님, 부디 보중하십시오!”

그렇게 무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후 천애거사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검무극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드디어 거사님의 본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까?”

사실 이렇게 쉽게 정체를 드러낼 거로 생각지 않았는데.

과연 검무극의 예감은 맞았다.

천애거사는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오늘 자네와 생사혈전을 펼쳐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두 돌려보냈네.”

천애거사는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자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차아아아아아.

검무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새하얀 설원이었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내공이 약한 사람이라면 이 찬바람에 숨을 쉬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이다.

그 세찬 눈보라 너머 그가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눈 속에 홀로 핀 한 송이 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천애거사의 기도였다. 그 기도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느꼈던 천애거사와 지금의 천애거사는 또 달랐다.

그를 한 꺼풀 벗겨내는 데 성공했는데, 그 한 꺼풀 아래에는 정파 무림을 지켜온 대협객이 있었다. 마교 소교주 앞에서도 당당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협객이.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 기도는 진짜다.

이런 기도를 만들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노력해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도발과 협박,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는 꼿꼿한 정파의 노고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 기도 아래, 당신의 진짜 기도는 어떤 거지?’

천애거사는 나직하지만 추상같은 어조로 꾸짖었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잡자는 것인가?”

게다가 바깥에 있던 무인들을 돌려보낸 이유도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이 다치거나 죽을까 걱정해서였다.

“말씀해 주시오. 내가 누구와 손을 잡자고 한 건지. 나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오.”

천애거사가 차갑게 말했다.

“허튼소리로 사람을 현혹하지 말고 차라리 진짜 바람을 이루도록 해라.”

검무극은 진짜 바람이 그를 죽이는 거라고 했다. 다시 말해 싸우자는 의미였다.

검무극은 내심 감탄했다.

바깥의 무인들을 방패로 삼지 않고 돌려보내는 배포가 있었고, 자신이 그와 싸우지 않을 거란 정확한 판단력도 있었다.

마염군과 백골혼마, 그리고 소정락까지. 모두 해치운 자신과 단신으로 생사혈전을 벌일 생각은 없을 테니까.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니 어찌 다들 속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검무극이 자신의 손을 들어 보이며 아쉬워했다.

“손잡기에는 이만큼 괜찮은 손도 없을 텐데요.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물론, 지금은 농담으로 풀어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천애거사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너희가 무한 땅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가만히 천애거사의 눈을 응시하던 검무극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담긴 뜻은 날카로웠다.

“우리 거사께서는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속임수의 마지막 경지에 이른 것 같습니다.”

“속이는 건 너겠지.”

천애거사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조금 전에 네가 그랬지. 나로부터 맹주를 지켜주겠다고. 한데 나와 손잡자고? 그게 너희가 사람을 지켜주는 방식인가?”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오.”

“나 때문이라고?”

“알다시피 나는 당신을 의심하고 있소. 한데 오늘 당신을 직접 보니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소. 나 역시 당신에게 전혀 의심스러운 점을 찾아내지 못했거든. 확신하고 살폈는데도 못 찾아내다니? 하긴 이런 사람이니 수십 년 세월을 맹주 옆에서 정체를 숨길 수 있었겠지.”

원래라면 이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진짜 그가 협객이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인 이상 듣고 싶은 거다. 자신이 해온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인정받고 싶은 거다.

그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인 신교의 소교주라면 더욱더 만족감이 크겠지.

“문득 당신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손을 내민 거요.”

다 듣고 나서야 천애거사가 반응했다. 그는 앞서 날카로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죽으면 죽었지 마교에 투신하는 일은 없을 거네.”

어떻게든 여기서 한 꺼풀 더 벗겨내야 한다. 저 두꺼운 협객의 가면을 벗겨내고, 진짜 그의 모습을 끌어내야 한다.

단지 맹주에게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그도 이 무대에 세워야 한다.

마정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자신들을 끌어들인 이 무한이라는 무대에.

검무극이 불쑥 그에게 말했다.

“명심의원의 소정락이 죽었소.”

당신에게 이 소식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인가? 아니면 진행하려던 일이 중단된 분노인가?

천애거사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검무극은 이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 이걸 맹주님께서 봤어야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아무도 모르는데 왜 놀라지 않소? 이곳 무한에서 가장 유명한 의원이자, 가장 좋은 일을 많이 한 의원이 죽었다는데. 당신, 놀라야 하지 않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죽였냐고 물어야 하지 않소? 그는 일개 의원에 불과한데 왜 마교에서 죽였냐고 궁금해해야 정상적인 반응 아니겠소?”

순간 천애거사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순간을 수없이 경험한 검무극이었기에 볼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당신은 소정락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지. 아! 이걸 맹주님께 못 보여드리는구나! 말로만 전해드리는 게 아쉬울 뿐이구나!”

어쩌면 직접 보는 것 보다 저 소교주가 전하는 말이라면, 더 생동감이 넘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까?

천애거사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억지를 부리려는 건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라 왜 궁금해하지 않느냐고 물은 거요.”

잠시 사이를 두고 천애거사가 대답했다.

“왜냐고? 내가 대답해 주겠네. 그건 자네들이기 때문이네.”

그는 앞서 검무극이 당신 때문이란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우리 때문이라고요?”

“좋은 사람은 다 죽이는 자네들이 아닌가?”

조롱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천애거사의 눈빛은 당당했다.

물론 그대로 넘어가 줄 검무극이 아니었다.

“소정락은 좋은 사람이 아니지 않소? 당신처럼.”

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검무극이 더욱 그를 자극했다.

“생각해 보면 소정락 그 사람 참 불쌍한 사람이오.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이라는 남 탓이 다시 천애거사를 향했다.

“수십 년간 당신 옆에서 하기 싫은 의원 노릇 하며 당신을 지켜준다고 애썼는데.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셨소? 아니겠지. 그는 지옥에서도 섭섭해하며 당신을 원망하고 있을 거요.”

이럴 때, 네가 뭘 안다고! 내가 얼마나 그를 아꼈는데! 라고 나와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천애거사는 더없이 차분했다. 정말 눈물은커녕 애도 한마디 하지 않았을 사람처럼.

“끝까지 왜 죽였는지 이유를 묻지 않으시네.”

천애거사의 입가에 지어지는 저 묘한 미소는 검무극이기에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미세했다. 그의 감정은 이렇듯 아주 조금씩 조금씩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찾다 보면 반드시 이 둑을 무너뜨릴 구멍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소정락도 죽고 금마령을 어겼던 두 늙은이도 죽었지.”

당연히 천애거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섭혼술의 고수가 경고한 것도 알고 있을 거고.

“이제 섭혼술을 쓰는 자만 남았는데, 그 수하랑 해낼 수 있겠소? 아, 혹시 당신 그 사람 명령을 받는 거요?”

검무극이 슬쩍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떻게 반응할지를 살폈는데 천애거사는 다탁으로 걸어가 차를 마셨다.

자신의 반응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검무극의 눈에는 이조차 하나의 반응이었다.

“차라리 내가 섭혼술을 쓴다고 뒤집어씌우지 그러나?”

그의 대답에 검무극도 다탁으로 걸어갔다.

“그건 확실히 아니니까. 섭혼술을 익힌 사람이 옆에 있는 걸 맹주님이 몰라볼 리 없지 않소?”

쪼르륵.

검무극이 자신의 찻잔을 채웠다.

“당신 본래 이런 사람 아니지 않소?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정파 늙은이가 아니라 화끈한 사람 아니오? 그랬으니 이 중요한 역할에 뽑혔을 테고.”

그 순간 천애거사에게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그래, 어찌 그런 순간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모든 건 다 속여도 속일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런 화끈한 사람과 이야기 나누고 싶소. 악인 대 악인으로 시원하게 이야기 나눠보고 싶소.”

천애거사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무심하게 검무극을 응시할 뿐이었다.

“속이고, 배후에서 암약하고. 숨어 지내고. 이제 지치지 않소? 다 끌고 나와서 한판 붙어보고 싶지 않소? 무림맹 나와! 마교 나와! 그게 당신 아니오?”

천애거사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차 다 마셨으면 이만 돌아가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래, 이 한 번의 만남으로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그에게서 여러 차례 미세한 감정 변화를 발견했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며 작별을 고했다.

“차 잘 마셨습니다. 다음에 또…….”

천애거사가 검무극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다음은 없네.”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이 재미없는 협객 천애거사 말고, 다음에는 복수의 화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뒤로하고 검무극은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다음에는 복수의 화신 화율청과 만납시다.”

절대회귀 654화

그와 함께 무대에 설 작정입니다

천애거사는 복수의 화신이란 말에 반응했다.

검무극이 아무리 도발해도 미세하게 반응하던 그였는데, 이 말에는 크게 반응했다.

“잠깐!”

소리쳐 불렀을 때, 검무극은 이미 문을 열고 나간 후였다.

천애거사가 달려가서 황급히 문을 열었지만 이미 검무극의 모습을 사라지고 없었다.

검무극 대신 복도 끝에서 한 중년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걸어온 사람은 무소장의 총관인 주 총관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천애거사와 무소장을 위해 살아온 그였다.

주 총관의 이름은 주소명(周召命).

“소교주 못 봤나?”

“아뇨, 못 봤습니다.”

그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는데, 그의 눈을 피해서 사라진 것이다. 복도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으니 귀신처럼 사라졌다.

들어올 때 그 수많은 무인의 눈을 피해서 들어온 검무극이었으니, 이렇게 사라진 것이 당연하다 여길 법도 했는데.

“자네 눈까지 피해 사라졌네.”

놀랍게도 앞서 이곳을 지키던 무인들 모두 보다 총관의 눈을 더 믿는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주소명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무소장을 찾는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평소의 그 친근하던 눈빛이 매섭고 차가워지면서 주소명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총관 주소명이 아니라 화율청의 오랜 수족 주소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주소명이 복도를 다시 살폈다. 닫힌 창문을 살폈고, 천장을 살폈다.

이내 주소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어디도 소교주가 빠져나간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자신을 지나쳐 빠져나갔다는 건데.

“믿기 어려운 실력입니다.”

천애거사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래, 믿기 어려운 자다.”

나직한 저음으로 바뀐 목소리처럼 그의 눈빛도 바뀌었다. 검무극과 함께 있을 때는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눈빛이었고 목소리였다.

이제 그의 기도까지 달라졌다.

원래 그의 기도는 눈 내리던 설원에 고고하게 핀 한 송이 꽃이었는데.

내리는 눈의 색이 짙은 회색빛으로 바뀌었다. 이제 주위에 흩날리는 건 눈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태우고 날리는 재였다.

사방에서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이 들렸다.

쌓인 눈이 사라진 바닥에는 시체들이 가득했고 핏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흩날리는 재는 시체를 태우고 날리는 재였다.

구슬픈 원망만이 부유하는 전장의 한가운데 그가 서 있었다.

전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펄펄 끓고 있었다. 이 열기를 대체 어떻게 감추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것이 바로 그의 진짜 기도였다.

“소교주가 나에 대해 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기에 주소명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넘겨짚었을 겁니다. 워낙 총명한 자 아닙니까?”

천애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총명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정체가 드러났을 거다.”

그는 검무극에게 흔들렸었다. 소교주에게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보면서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정말 뭔가가 확 솟구쳐 올랐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십 년 젊지 않았음에도 결국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을.

바로 지금 자신의 눈앞에 검무극이 서 있다는 사실을.

바로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이었다.

조금 전 검무극이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복도 끝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것을 느끼고는 시공이환술 속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떠난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거란 순간적인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배후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완벽한 연기를 펼치니 혹시나 하는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었는데, 이제 확실히 밝혀졌다.

시공이환술 밖 화율청이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검무극, 이 무대의 악역은 네가 될 거다. 정마대전은 결국 일어날 것이고, 그 원인은 네가 될 테니까.”

검무극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좋아, 그 악역 내가 해주지.’

이 큰 무대에 공짜로 올라설 생각은 없었으니.

‘대신에 출연료는 네 목숨이다.’

* * *

진패천은 자신의 거처 앞 정원에서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파를 지탱하는 그의 등이 오늘따라 외롭게 느껴졌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어떤 악인도 어떤 고수도, 마교도 사도맹도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왠지 모를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무공으로 졌다면 이런 상실감을 느끼진 않았을 거다. 더 수련하면 되니까. 수련해서 다시 이기면 되니까.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도 이제 늙었나?’

예전 같았으면 벌써 몇 번이나 결정을 내렸을 것 같은데, 아직도 검무극과 천애거사 사이에서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애써 변명해 보지만, 예전이라면 벌써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누구 말이 맞는지.

그 칼같은 본능으로 지금까지 정파 무림을 지탱해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본능이 무뎌졌음을 느꼈다.

그곳에 맹주전 호위들의 안내를 받으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죽립을 벗으며 정중히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당연히 맹주전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맹주는 그보다 더 깊숙한 이곳 거처까지 오게 했다.

삼자회합 전후라면 모를까, 요즘 상황에서 이곳까지 들이지 않을 거 같았는데.

그때 그곳으로 한 여인이 들어섰다.

“오랜만이야.”

그녀를 보자 왜 이곳까지 자신을 오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진하령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원래도 아름다운 그녀였는데, 지금은 경험과 수련이 더해져 강해진 모습이었다. 그 성취가 느껴진다.

“강호의 거친 풍파가 느껴지는데?”

검무극의 농담 섞인 인사에 진하령이 웃으며 물었다.

“칭찬이지?”

“당연히.”

이제 오랜만에 봐도 친구처럼 편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된 두 사람이었다.

그녀의 변화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누구 때문에 다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데 나만 뒤처질 수 없잖아?

그 마음이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였다.

“잘 지냈어?”

“누구 덕분에 잘 못 지냈어. 이곳 내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

진하군과 진하령이 목표일 수도 있다는 검무극의 예상 때문에, 그녀는 맹주전 내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원에서도 무림맹 호위대 무인들이 겹겹이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희가 쳐들어온 줄 알았어.”

정말 그랬다. 후기지수 모임을 하고 있는데, 맹주전 호위들이 들이닥쳐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아마 함께 있던 무인들은 맹에 큰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을 거다.

“우리가 쳐들어왔으면…….”

“그 모임 자리에서 다 죽었을 거라고?”

그녀가 짐짓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검무극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내가 모임을 깨는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알잖아? 내가 사람들 모이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러고 보니 우리도 슬슬 한 번 볼 때가 됐지? 사인이와 한 소궁주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고.”

검무극의 말에 진하령도 웃었다. 그녀는 근래 돌아가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할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런 상황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러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패천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문득 진하령이 혼인할 사람이라고 검무극을 데려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확 혼인을 시켜버릴 걸 그랬나?’

정말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겼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정말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의 이 고민도 달라졌을까?

그렇게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자 진패천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만나 봤나?”

“네, 맹주님.”

진하령 앞에서 묻는 걸 보니, 그녀도 어떤 상황인지 다 들은 모양이었다.

“알아낸 것은?”

그게 이렇게 쉽게 대답할 내용이 아닌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너무나 빠르고 확실하게 나왔다.

“그가 배후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이런 일로 검무극이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거사님이 배후 놈들과 손을 잡았다고?”

진하령이 정말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오히려 그녀에 비해 진패천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검무극을 응시할 뿐이었다.

“손을 잡은 게 아니라, 배후 그 자체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맹주님과의 우정을 배신하는 일은 없었겠지.”

진패천을 위한 말이기도 했다. 이건 우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번 일은 배신이 아닙니다. 그는 맹주님의 인생에 들어와서 처음부터 연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패천은 더없이 답답하고 복잡하던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검무극이 그 구멍을 더욱 크게 파내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음모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맹주님이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서 기간이 길어졌을 뿐이죠. 그러니 이번 일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마십시오. 그가 아니더라도 의미를 둘 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검무극의 시선이 진하령을 향했다. 그는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진짜 의미를 두고 마음을 둬야 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지 않냐고.

물론, 검무극은 이 일이 몇 마디 말로 치유되는 일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자신 나름대로 구멍을 더욱 크게 뚫는 일에 전념했다.

“심력 소모를 하실 가치조차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오 년 사귄 친구보다도, 십 년 사귄 친구보다도, 아니 엊그제 사귄 친구보다도 더 의미를 두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우정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기간이 길기에 더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수십 년을 버텼다? 이건 광기지 우정이 아니잖습니까?”

뻔히 자신을 위해 해주는 말임을 알지만, 이 말들은 분명 진패천에게 도움이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숨구멍이 커진다는 걸 느꼈으니까.

“이건 맹주님이 그를 알아보고 못 말아보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맹주님은 무인이시지 배우가 아니니까요. 이건 이쪽의 문제가 아니라 저쪽 문제입니다. 무림을 집어삼키려는 저들의 욕망이 문제입니다. 수십 년 동안 정체를 숨길 수 있는 집요함의 문제입니다. 다 정상은 아니죠.”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러니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놈아, 그동안 억지 협의 베푼다고 애썼다, 애썼어.”

진하령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어떻게든 할아버지의 마음에 상처가 남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그래, 그는 이런 사람이지.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따지듯 물었다.

“네가 악인이면!”

물론, 그녀는 완전히 검무극을 믿고 있었다. 이 말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대신한 말이었다.

“그럼 난리 난 거지.”

검무극의 대답에 진하령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농담처럼 한 저 말이 확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정말 난리 난 거지.

검무극이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난리를 냈다면 이런 방식은 아니었을 거야. 이렇게 마지막까지 의심받으면서 음모를 꾸미지는 않았겠지.”

항변하듯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제가 음모를 꾸몄으면 더 편하면서도 신나는 음모가 꾸몄을 겁니다!”

그 말에 공감하며 진하령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 사람 말이 진짜라는 거. 이 사람이 진짜 음모를 꾸미면 이런 상황 자체를 안 만들 거라는 것을요. 아마 음모인 줄도 모르고 당해버리겠죠. 우린 이미 당했을 거라고요!

진패천은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을 위해 저리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믿음은 서로 알고 지낸 기간의 문제가 아님을 이 소교주를 통해 내내 확인하게 된다.

“왜 이리 날 위해 애쓰는가?”

그러자 검무극은 진하령을 힐끗 쳐다본 후 생각지 못한 대답을 했다.

“친구 할아버지시잖아요? 그럼 제 할아버지나 다름없으시죠.”

진패천이 진하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없었다면 손녀도, 손자도 지금 세상에 없었을 텐데. 진하령을 직접 보고 있자, 손녀를 구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 일이 이번 일의 진실과는 무관할지라도, 지금 이 결정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검무극이 없었다면 이 아이들도 없었을 테고, 그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이 되었을 텐데. 왜 내가 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있나?

“앞으로 자네가 꾸미겠다는 그 편하고 신난 음모에 대해 말해보게. 거기에 당할 수는 없으니까.”

그 말에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진패천이 자신을 믿어준 것이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정이 늦어서 미안하네.”

“저라면 한 십 년은 더 고민했을 겁니다.”

진패천이 미소를 지었다. 이 소교주는 친구가 배신자라고 결정짓는 이 순간에 자신을 웃게 하고 있다. 그래, 믿고 가보는 거다.

진하령이 검무극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친구. 오늘 할아버지를 위해준 이 일은 내가 꼭 갚을게.’

검무극도 환한 미소로 답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자 진패천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검무극을 믿고 이번 일을 처리할 작정이었다.

“오늘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 혹시 그를 죽여도 되느냐고 허락을 받으러 온 건가?”

만나겠다고 알려주고 만났으니, 이제 죽여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한다 여겼는데.

“아닙니다. 맹주님께 확실히 보여드릴 겁니다. 그가 진짜 배후라는 것을요.”

진패천이 필요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자네 말을 믿네.”

“그렇기에 보여드리는 겁니다. 저를 믿어주시는 분이시니, 보여드려야지요.”

맹주의 숨구멍은 뻥 뚫렸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는 다른 작은 구멍이 뚫려 있을 것이다.

의심의 구멍이.

직접 확인하지 않고 처리해 버리면, 그 의심 구멍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맹주와의 관계를 그렇게 이어갈 생각은 없다.

이제 검무극은 그 구멍을 메우는 일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무대에 설 작정입니다.”

그리고 오늘 맹주를 찾아와서 하려던 부탁은 이것이었다.

“그 무대의 관객이 되어 주십시오.”

절대회귀 655화

오늘은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네

청운림에 도착한 사람은 천애거사였다.

그는 안개 낀 대나무 숲을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정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은 난간에 기댄 채 천애거사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걸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천애거사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검무극은 그와의 일전을 미루지 않았다.

‘오늘 죽인다!’

지금껏 만났던 적 중에 쉬운 적이 어디 있었겠느냐마는, 이 천애거사 역시 누구 못지않게 까다로운 적이었다.

그의 본모습이 지닌 잠재력을 알 수 없었고, 또 누가 그를 도우러 튀어나올지 몰랐으니까.

청운림.

검무극이 정한 무대는 바로 이곳이었다.

무림맹주 진패천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이니 천애거사와의 마지막 일전의 무대로 삼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시사철 청운림에 흐르는 안개.

이 안개 속에 오늘은 특별히 하나의 절진이 펼쳐져 있었다.

운무은형진(雲霧隱形陣).

본래 운무은형진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그 속에 사람이 숨을 수 있는 은신을 위한 진법이었다. 일단 진법이 발동하면 아무리 고수라도 파훼법을 모르는 한 그 속에 숨은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

또한 안개 속에서 펼쳐지면 이것이 진짜 안개인지 진법이 펼쳐진 것인지 진법 전문가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알려진 최상급의 진법으로, 무림맹이 가진 진법 중 하나였다.

지금 안개 속에 펼쳐진 운무은형진 속에 진패천이 있었다. 이 장소와 진법 덕분에 시공이환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서도 이 무대를 만들 수 있었다.

이 무대는 모두의 운명을 결정지을 가장 중요한 무대였고, 진패천은 가장 중요한 관객이었다.

천애거사가 정자로 올라왔다. 그에게 인사한 후 검무극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했다.

“맹주님께서 왜 이곳을 좋아하시는지 알 거 같습니다. 대나무 사이로 흐르는 안개가 너무 환상적입니다.”

천애거사는 바깥을 보고 있는 검무극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등을 돌린 채 서 있었지만,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천애거사가 손을 들어 허공을 만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거미줄처럼 펼쳐놓은 기운을.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소교주는 자신을, 그리고 이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천애거사의 눈가에 스친 뜨거운 열기는 검무극이 돌아보는 순간 사라졌다.

“우리 거사님, 어서 오십시오!”

천애거사는 몇 걸음 앞으로 나간 후 검무극 옆에 나란히 서서 대나무 숲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안개가 짙군.”

자주 와봤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검무극이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와보셨습니까?”

“나도 가끔 오는 곳이네. 내 친구가 좋아하는 곳이지.”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의 그 긴장감은 모두 잊었다는 듯, 차분하게 서로를 대했다.

“왜 묻지 않으십니까? 맹주님이 안 계시고 네가 있느냐고?”

오늘 이 자리는 진패천이 천애거사에게 만나자고 한 자리였다.

천애거사는 ‘묻지 않아도 뻔하지’라는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뵙게 해달라고 맹주님께 부탁드렸습니다. 지난번에 거사님께서 다음은 없다고 너무 단호히 말씀하셔서요.”

천애거사가 검무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를 죽이려 부른 건 아니고?”

마치 그럴 줄 알지만 왔다는 듯한 눈빛과 말투였다.

“그랬다면 거사님께서 오셨겠습니까? 아니라고 판단하셨으니까 오신 거 아닙니까?”

검무극은 천애거사의 반응에서 자신이 대신 기다리고 있는 이 상황을 예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초대는 이쪽에서 했지만, 이 무대는 그의 무대이기도 했다.

그와 자신의 공동무대.

‘당신은 이 무대를 위해 뭘 준비해 왔나?’

누구의 준비가 더 충실한지에 따라 누가 이 무대에서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 와야지.”

“죽는데도 온다고요? 왜죠?”

그러자 천애거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친구가 불렀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고 쓸쓸한 그의 눈빛이었다.

만약 검무극이 시공이환술 속에서 그의 본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이 순간에도 헷갈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진심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친구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네.”

진패천이 듣는다면 마음 아파할 말이었다. 실제로 지금도 착잡한 마음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대단하시네요. 저는 하군이가 죽이려 들면 순순히 죽어줄 생각이 없는데.”

천애거사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너는 우정을 나눈 게 아니라 진 대주를 이용하려 한 거니까.”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듯, 세간의 소문을 언급했다.

“마교 소교주가 멸마대주에게 접근해서 친분을 쌓아간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네 속셈을 알아차렸다. 천륜을 이용해서 진 맹주를 현혹하려는 속셈을.”

검무극은 여유롭게 그 말을 받았다.

“그건 친구분을 너무 무시하는 말씀이십니다. 맹주님은 그렇게 쉽게 계략에 빠져드실 분이 아니시지요.”

“그래서 혈육을 이용하려 든 거지.”

천애거사는 계속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멸마대주 말고도 하령이에게도 접근했다고 알고 있다. 이래도 속셈이 없다고 말할 텐가? 대체 네 목적이 뭐냐?”

정말 딱 이 말만 들으면 자신이 완전 나쁜 놈처럼 보일 것이다. 이래서 이 싸움이 까다롭고 어려운 싸움이었다. 철저히 이런 부분까지 이용하는 자였으니까.

“아시다시피 제 목적은 우리 거사님의 정체를 밝히는 거죠.”

“웃기는군. 마교 소교주가 무한에 와서 수십 년 정파인으로 살아온 나의 정체를 밝힌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지나가는 개가 없으니, 저라도 웃어 드리지요.”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그 여유 속에 칼날이 숨어 있었다.

“우리 둘만 있는데 이렇게까지 정체를 감출 필요가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는 감출 정체가 없다.”

검무극은 그가 가장 궁금해할 일을 물었다.

“왜 묻지 않습니까? 왜 내가 당신을 복수의 화신이라 불렀는지.”

이 말에는 분명 어떤 반응을 보일 법도 했는데. 그는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복수?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검무극이 난간에 걸터앉아서 마치 추리하듯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말에 평정심이 깨어졌던 거사님이신데. 단둘이 있는데도 이렇게까지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뭘까요?”

검무극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거사님은 알고 있는 겁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순간 천애거사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 무대에 관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 관객이 진패천이란 것도.

그랬기에 맹주의 마음을 흔들어 댈 이야기만 골라서 하는 것이고.

“혈육을 이용해서 온갖 말로 그 사람을 현혹했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나는 끝까지 내 친구를 지킬 거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말로는 그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더구나 진패천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더욱이.

이제 말이 아닌 다른 승부수를 던져야 할 순간이었다.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를 드러냈다.

“상관없어.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할 수 있으니까.”

그 말만큼은 천애거사도 반응을 보였다. 검무극을 향한 눈빛에 이런 감정이 담겼다. 네가? 어떻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있었지만, 한 가지 이유로 쓰지 못했지.”

그 이유는 진패천과 관련이 있었다.

“그 방법을 쓰려면 맹주님 허락을 받아야 했거든.”

“어떤 허락이지?”

검무극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당신을 죽여도 좋다는 허락.”

말이 끝나는 순간 검무극의 몸에서 기도가 발출되었다.

다음 순간 천애거사는 자신이 푸른 하늘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하늘이 아니라 그것은 바다 위였다. 너무나 맑았기에 하늘이 그대로 비쳐서 마치 하늘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검무극의 기도.

기도는 예전과 달라졌다.

바다는 더욱 맑았다. 그리고 발아래 끝도 없는 심연은 더욱 깊고 어두웠다.

천애거사가 바다로 빠져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잡아서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숨이 막혀 왔다. 일개 사람의 기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력했다.

천애거사도 자신의 기도를 발출했다.

그의 기도가 검무극의 기도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두운 심연에 있던 그의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주위로 새하얀 설원에 흩날리는 눈이 보였다.

그러다 다시 주변이 어두워졌다.

검무극의 기도에 눌려 다시 심연의 바다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애거사가 내공을 끌어올리며 기도를 더욱 강력하게 발출했다. 다시 환하게 주위가 밝아졌고, 또다시 어두워졌다.

마치 등불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것처럼, 어둠과 밝음이 교차했다.

밝아질 때마다 눈보라는 더욱 세차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곳에 홀로 핀 꽃이 더없이 위태로웠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다시 어둠으로 그리고 다시 밝음으로.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기습적으로 천애거사 눈앞으로 날아드는 한 자루의 검.

천애거사가 정자의 난간을 부수고 뒤로 날아가 검을 피했다. 기도 싸움을 하던 검무극이 기습을 가하면서 공격한 것이다.

정자 끝에 선 검무극이 검을 든 채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본래의 기도를 드러내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거다.”

검무극의 경고에도 천애거사는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과연 뒷일을 수습할 수 있을까?”

“당신들이 아는 마교 놈들이 언제 뒷일 걱정하고 일을 저지르더냐?”

쉬이이이익.

검무극이 훌쩍 정자에서 몸을 날려 천애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천애거사는 피하지 않고 검을 빼 들고 맞붙었다.

챙챙챙챙챙챙!

날과 날이 부딪치며 격타음과 불꽃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십여 수의 공방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쉬이익!

변칙적으로 날아든 마지막 한 수를 천애거사는 가까스로 피했다.

정말 피하지 못했으면 목이 잘렸을 공격이었다. 검에 실린 검무극의 살기는 진짜였다.

“내가 전에 말했지. 당신 같은 사람은 일단 죽여 놓고 뒷일을 수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검무극의 검술은 구화마공도 아니고, 비천검술도 아니었다. 그냥 찌르고 베는 공격이었는데, 그 단순한 칼질에 검무극의 무학이 담겨 있었다.

초식에서 벗어난 검무극의 공격은 더없이 빠르고 매서웠다. 자유로움이 주는 강함이 오늘 이 순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천애거사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그는 맹주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맹주만큼 강해서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진패천의 친구였기에, 또한 대협객이었기에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죽일 듯 무섭게 밀어붙이는 검무극의 기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위기에 몰렸음에도, 그는 본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한가지 확신이 있었다.

‘너는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해!’

과연 검무극의 생각대로 천애거사는 오늘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진패천에게 내 정체를 보여줘야 하니까. 정파 고수인 나를 네가 죽이려 들면 들수록 그의 의심은 더욱 커질 거다.’

피를 한 방울 흘릴 때마다 소교주를 향한 의심은 더욱 커질 거라고.

천애거사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확신은 검무극도 하고 있었다.

‘반드시 당신은 본 모습을 보이게 되어 있어.’

왜냐하면 절대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지난 수십 년간 어떻게 참아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겠어.

쉬이이익!

검무극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천애거사는 피하지 않았다.

‘결국, 멈출 거다.’

절대 자신을 죽이지 않을 테니까.

마치, 두 대의 마차가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기세였다.

상대가 반드시 말고삐를 당길 것이라 확신하고 멈추지 않고 질주하는 두 대의 마차.

두두두두두두.

그리고 마지막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말고삐를 당겨 방향을 틀었다.

카아앙!

귀를 찢는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무극이 뒤로 튕겨 나며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 천애거사가 검을 휘둘러 반격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반격은 지금까지 보였던 실력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강력했다.

검무극은 정말 미친놈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정말 죽이려 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피하리라는 믿음에서였다.

천애거사의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그를 배신할 것이 있을 것이기에.

그것은 바로 ‘생존본능’이었다.

저렇게 강한 고수의 생존본능이라면 의지를 무시하면서까지 반드시 살아남으려 할 것이라 믿었다.

검무극 자신이 아무리 죽으려 들어도, 천마호신공이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듯이.

천애거사가 서 있던 자리에 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기도를 내뿜고 있는 그는 화율청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자 그 존재감은 이전과 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날리는 눈 대신 그의 주위에는 시체 태운 재가 날리고 있었다.

그날 무소장에서 보았던 기도와 달랐다.

그때의 기도가 한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면, 지금 보이는 기도는 중원 전체에서 일어난 전쟁.

피는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화율청이 용암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데도 나서지 않는다고?”

화율청이 말한 상대는 검무극이 아니었다. 그는 안개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 말고 저 친구를 믿기로 했거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진패천이었다.

애초에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진패천이 등장했음에도 화율청은 전혀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수십 년 사귄 친구가 아니라 마교 소교주를 믿는다고?”

그의 말에는 회한과 아쉬움이 아니라 조롱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어차피 진패천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으니까.

점차 진패천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저 사람, 오늘만큼은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네.”

곧이어 안개 속에서 진패천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내 손자 친구라네.”

절대회귀 656화

비극에 초대하진 않았을 테니까

저 친구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던가?

진패천은 보고 있었다.

친구이지만 친구가 아닌 사람을.

그 오랜 친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낯선 기도를. 무림맹주로 살아오면서 이런 강력한 어둠의 기운은 처음이었다.

이 기도만 봐도 검무극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화율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십 년 사귄 친구인데 마교 소교주를 믿냐고?

그게 자신에게 할 소리인가? 장장 수십 년을 속여놓고서.

진패천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래, 우린 수십 년 동안 친구였지.”

진패천이 화율청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 세월 중 우리가 진짜 친구였던 적이 단 하루라도 있었나?”

화율청은 사과하는 대신 오히려 진패천을 비난했다.

“적어도 친구였다면 안개 속에 숨어서 훔쳐보진 않았겠지.”

진패천은 눈앞의 이 현실이 적응되지 않았다.

검무극의 말을 믿기로 한 이후,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떠올렸던 천애거사의 반응은 이것이었다.

미안하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자네와의 우정은 진짜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순진한 생각이었다.

현실 속 그는 어제 만난 남처럼 굴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안면몰수할 수 있을까?

그랬기에 가장 강하게 밀려드는 감정은 미움이나 분노가 아니라 허탈함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평생 말싸움 한번 한 적 없는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화율청의 전장에 진패천이 들어섰다. 흩날리는 재와 쌓여 있는 시체들, 바닥을 흐르는 피, 사방에서 울부짖는 비명.

‘이게 자네의 본모습인가?’

그 전장의 가운데 홀로 선 화율청의 뜨거운 눈빛이 너무나 낯설었다.

화율청을 응시하던 진패천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 본 모습을 알아내지 못했을 거다.

“소교주.”

“네, 맹주님.”

진패천은 구구절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눈빛에 자신의 감정이 다 담겨 있었기에 딱 이 한마디만 했다.

“자네에게 빚을 졌네.”

정말이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언젠가 반드시 천애거사에게 당했을 것이다. 그는 정말 확실한 순간만을 노렸을 테니까. 이 친구가 자신의 등을 찌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할 테니까.

검무극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무림맹과 정파 무림 전체를 구해주었다. 너무나 큰 빚이었는데, 검무극은 두고두고 재촉할 수 있는 그 빚문서를 곧바로 찢었다.

“빚이라니요? 아닙니다. 맹주님께서 저를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맹주님이 알아내신 겁니다.”

진패천의 마음에 숨구멍이 뻥 뚫리고 그 자리에 대신 남았던 작은 의심 구멍이 완전히 메워지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화율청에게 말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소. 이게 몇 년 만인가요? 아니, 몇십 년 만인가요?”

화율청은 이 순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는 무림맹주와 검무극이었다. 맹주의 무공은 물론이고, 검무극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을 그였는데.

이 두 사람을 상대로도 침착하다는 건 분명 나름의 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

검무극은 진패천이 긴장을 풀지 않도록 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이 자리에 맹주님이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기 전부터 그 사실을 짐작하고 이곳에 왔을지도 모릅니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상대에게 복안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화율청의 반응에 이미 심장은 차갑게 식었으니까.

이제 진패천이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접근한 건가?”

자신의 자리를 노린 걸까?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걸까? 그도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그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화율청은 그것은 말해줄 수 없다는 듯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때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암흑궁.”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화율청의 얼굴에서 지진이 나는 것을. 그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무극이 정확히 짚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진패천도 암흑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무림 역사 속에서 암흑궁의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암흑궁이라면 혹시 천의궁의 수호가문 중 하나인 그 암흑궁을 말하는가?”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바로 삼백 년 전 그 암흑궁입니다.”

삼백 년 전 무림맹과 천의궁과 싸움에 대해서는 진패천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무림정복을 꿈꾸던 신비문파 천의궁을 멸문시킨 사람은 당시 무림맹주였던 무황신검이었다. 무림맹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맹주의 가장 큰 업적이었으니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진패천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삼백 년 전 멸문한 천의궁이 지금까지 남아서 복수를 꿈꿔 왔다는 사실은 놀람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수십 년이나 정체를 숨길 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멸문의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그 원한이 내려온 것이리라.

또한 화율청의 기도가 이렇게 암흑의 기운을 품고 있는 이유도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화율청의 눈빛 역시 강렬하게 빛났다. 앞서 검무극이 자신에게 복수의 화신이란 말을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었다.

워낙 총명한 자이니 미뤄 짐작해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고. 한데 검무극은 정확히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화율청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검무극은 비궤를 통해 삼백 년 전으로 돌아가서 직접 그 싸움을 봤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본교는 알고자 하면 다 알아낼 수 있소.”

그렇게 천마신교를 앞세워 대답을 대신했다.

“그대들과는 꽤 오랫동안 싸우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강한 자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으니까. 분명 마정사와 원한 관계가 있으리라 예상했소.”

지금까지 배후 세력과의 싸움의 중심에 검무극이 있었으니, 이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진패천이 화율청에게 재차 확인했다.

“자네가 정말 암흑궁의 후예인가?”

진패천은 화율청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암흑궁에 대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러이러한 마음으로 이번 일을 맡았다.

하지만 화율청은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다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진패천을 쳐다볼 뿐이었다. 지난 세월의 우정은 이 자리에서 어떤 의미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삼백 년 전의 원한을 지금에 와서 푼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당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한 거요? 알지도 못하는 조상을 위해서?”

화율청은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대신 묘한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에게 물었다.

“너는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분명 뭔가 계획이 있는 눈빛.

“과연 내가 저 사람이 올 줄 모르고 있었을까?”

듣고 있던 진패천은 내심 씁쓸했다. 자신을 저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친구라 여겼던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진패천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며 더욱 강력한 기도를 드러냈다.

“그래, 내가 와 있는 줄 알면서도 왔다면, 나와 끝장을 보고자 왔을 터.”

진패천도 이제 더는 그와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는 친구가 아니라 복수를 위해 잠입한, 아주 인내력이 뛰어난 살수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진패천은 그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일이니, 우리가 매듭을 짓지.”

화율청의 기도 역시 대단했고 어떤 무공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기에 절대 방심해선 안 될 싸움이었다.

바로 그때 정말 상상도 못 했던 말이 화율청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검을 뽑으면 진하군은 죽는다.”

순간 진패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화율청이 두 절대 고수들 앞에서도 여유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너희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천만에! 이 자리는 내가 만든 자리다.”

이미 다 예상했다는 의미. 다시 말해 이 무대는 화율청의 무대라는 뜻이기도 했다.

“진 대주는 멸마대 무인들이 지키고 있소. 죽이고 싶어도 쉽게 죽이지 못해.”

검무극의 말에 화율청이 웃으며 말했다.

“그 멸마대 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고?”

검무극은 대번에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섭혼술을 이용할 작정이군.”

멸마대 무인들에게 섭혼술을 써서 진하군을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오늘 화율청은 계획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진짜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다.

“손자를 살리고 싶으면…….”

화율청의 시선이 진패천에게서 검무극을 향했다.

“소교주를 죽이게.”

진패천은 그가 자신에게 이런 요구를 할 줄 몰랐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진패천도 당황했다.

반면 검무극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여유에 화율청이 싸늘하게 물었다.

“왜? 우리가 진하군을 못 죽일 거 같나?”

그러자 검무극이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들이라면 죽일 수도 있을 거 같소.”

화율청은 정말 난놈은 난놈이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진하군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든 진하군은 무사할 거라고 진패천을 설득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이제야 알겠군.”

검무극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전에 섭혼술의 고수가 자신의 실력을 미리 보여준 적이 있었다. 검무극은 독왕에게 뭔가 저들의 의도가 있을 거라 말했었는데.

“왜 섭혼술을 내게 미리 보여줬는지 이제 알겠군. 이 정도로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리려 한 것 아니었소? 멸마대에도 섭혼술이 통할 것을 알리기 위해서.”

“지금 네 처지라면 그 사실을 숨겨야 하지 않나?”

당연히 숨기리라 예상했고, 그것을 숨겼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진패천과의 갈등을 유발하려 했었는데.

“하군이는 내 친구인데 그럴 수는 없지.”

화율청이 묘한 미소를 지은 후 진패천에게 말했다.

“정말 자네가 아낄만한 사람이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손자를 죽일 수는 없지 않겠나?”

진패천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본 후 화율청에게 물었다.

“소교주를 죽이고 나서는 어떻게 할 텐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되는 거지. 나는 떠날 테고, 그대는 손주들과 함께 계속 무림맹을 지켜나가면 되고.”

“그래서 자네가 얻는 건 뭐지?”

“그동안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저 소교주를 죽이는 거지.”

검무극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겨우 그 정도 이유일까? 그런 사람이 수십 년간 신분을 숨기고 살았나?”

화율청은 검무극의 말은 무시한 채 진패천을 압박했다.

“너무 고민하지 말게.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 될 거야. 내가 말하지 않는 한 아무도 자네가 손자 때문에 소교주를 죽였다는 건 알지 못할 거네. 마교에서 그렇게 주장하더라도 음모라고 일축해 버리면 그만일 테고.”

거기에 화율청은 강력한 이유를 더 했다.

“저렇게 뛰어난 소교주가 마교주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게. 오늘 소교주를 죽이지 않으면 어차피 저 소교주에게 정파는 망하게 될 거네. 그러니 어서 죽이게.”

그가 진패천을 설득하는 동안 검무극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이윽고 진패천이 결론을 내렸다. 손자의 목숨이 걸렸고, 정파의 미래가 걸렸음에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소교주를 죽이지 않을 거네.”

단호한 결정에 화율청은 맹주의 아픈 부분을 찔러 갔다.

“정말 손자보다 소교주를 더 아낀다는 뜻인가? 무림인들이 듣는다면 자넬 뭐라고 생각하겠나?”

“하군이보다 아끼다니! 그럴 리가 있겠나?”

“하면 어째서 손자를 죽이려는 거지?”

어디 진패천이 손자의 죽음을 각오해서 이런 결정을 내렸겠는가?

진패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 관객으로 왔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에게 했던 말을 맹주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맹주의 믿음.

“이 무대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믿네. 날 비극에 초대하진 않았을 테니까.”

화율청은 놀란 얼굴로 진패천을 바라보았다. 변수였다. 진패천이 이 정도로 검무극을 믿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으니까. 자신이 아는 진패천은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가 자신을 몰랐듯, 자신 역시 그를 모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율청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검무극은 차분하게 진패천에게 설명했다.

“소정락이 죽기 전에 말했습니다. 제가 죽으면 우리 아버지가 절대 참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요.”

검무극은 화율청의 계획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들은 맹주님이 저를 죽이면 마정대전이 일어날 거로 계산을 마친 상태입니다.”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수십 년 정체를 숨긴 그가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다.

오늘 이 무대를 위해 검무극이 어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겠는가?

“네가 예상했듯 나도 예상했다.”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하군이는 무사할 겁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진패천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검무극을 믿는다지만 그래도 손자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한데 검무극이 직접 말했다. 하군이는 무사할 거라고.

검무극이 화율청에게 말했다.

“당신이 내 친구를 죽이는 걸 그냥 두고 볼 것 같아?”

화율청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불이나 독왕이 막아줄 거로 생각하나 본데.”

그는 이쪽에서 누가 도우러 갔을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그들 두 사람은 섭혼술에 강한 마존들이지. 하지만 그건 자신들에게 걸리는 섭혼술에 한해서지.”

화율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들이 진하군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바로 옆에서 대주를 공격하는 수하의 공격을? 아니면 진하군 스스로 자결해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만큼 섭혼술의 고수를 믿는다는 모습이었다.

화율청의 자신감에 진패천은 다시 긴장했다. 자연스럽게 진패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 순간에도 검무극은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내 친구를 도우러…….”

화율청에게 지어졌던 의미심장한 미소가 이번에는 검무극에게 지어졌다.

“과연 그들이 갔을까?”

절대회귀 657화

오늘 우린 아무도 안 죽는다

“저곳입니다.”

수하의 말에 진하군은 멀리 떨어진 한 건물을 응시했다.

그곳은 버려진 장원이었다. 바람이 불자 반쯤 부서진 대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철방 장인 곽영의 동생 행방을 드디어 찾아내어서 구하러 온 것이다.

이번 임무는 진하군에게 특별했다.

검무양이 자신을 믿고 맡긴 일이었다.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나보다는 네가 더 잘할 거라는 믿음으로 맡긴 일이기에, 꼭 해내고 싶은 일이었다.

“장원은 거지들이 차지한 상태인데, 움직임으로 볼 때 무공을 익힌 자들입니다.”

“모두 몇 명인가?”

“외부에 있는 자들은 칠팔 명쯤 됩니다. 내부에도 그 정도 숫자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지가 북적거리는 곳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걸 노리고, 거지로 분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번을 서는 자들의 위치는?”

정찰 나갔던 무인이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장원 내부의 건물들이 대충 그려져 있었다.

“네 방향 모두 경계를 서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곳과 이곳, 여기와 여기입니다.”

정찰 무인이 경계가 있는 곳을 빠르게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작전을 워낙 많이 수행하는 멸마대 무인들이기에 알아서 조를 나눠 상대할 적을 정했다.

“인질이 있으니 조용히 해치우고 내부로 들어간다.”

멸마대 무인들이 사방에서 조심스럽게 장원으로 접근했다. 앞장서는 이들은 진하군과 함께 멸마대 중에서 경공술이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다.

바깥을 감시하던 거지가 암기에 쓰러지던 그 순간, 멸마대 무인들은 네 방향에서 빠르게 쇄도해서 동시에 담을 넘었다.

진하군이 가볍게 담 아래로 내려서던 순간, 그곳을 지키던 거지가 품에서 비수를 뽑아 공격하려고 했다.

진하군은 그가 그곳에 있다는 걸 알고 내려섰기에 그에게는 소리를 지를 기회나 공격할 기회는 없었다.

쉬이익.

진하군의 일검에 거지로 분장한 무인의 목이 베어지며 쓰러졌다.

다른 곳을 지키고 있던 거지들도 멸마대 무인들의 기습에 일제히 쓰러졌다. 제법 괜찮은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멸마대 무인들의 기습을 감당할 정도의 실력자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사방 담을 넘어 들어온 멸마대 무인들이 건물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그들은 능숙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부에 있던 이들까지 모두 소리 없이 제거했다.

이제 남은 건물은 중앙의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렇게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조용히 그곳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복도를 지키던 거지들의 목을 향해 비수가 날았다. 비수는 정확히 목에 박혔고, 그들이 쓰러지기 전에 멸마대 무인들이 미끄러지듯 쇄도해서 그들을 받아안았다. 비명 하나, 쓰러지는 소리 하나 없이 그렇게 그들이 점차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다다른 마지막 문.

조심스럽게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커다란 대청이었다. 이 건물 내부에 이렇게 큰 공간이 있다고?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큰 공간이었다.

그 대청 중앙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그는 수혈이 눌렸는지 잠이 들어 있었다.

느낌상 자신들이 구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진하군은 신중했다.

수하를 보내 확인하기 전에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함께 온 멸마대 무인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사실 그는 멸마대 복장을 입고 있지만, 멸마대 소속의 무인이 아니었다.

대정반혼술(大正反魂術)의 대가 화송(華松).

대정반혼술은 섭혼술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다. 원래 불문의 무공인 진혼광심공(鎭魂光心功)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술법으로, 특히 천마신교의 섭혼술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무림맹에서는 대정반혼술을 펼칠 수 있는 무인들을 양성했는데, 화송은 그들을 가르치는 두 명의 대사부 중 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무림맹에 속한 고수 중 섭혼술을 파훼하는데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진하군이 화송과 함께 작전을 나온 이유는 검무극 때문이었다.

검무극이 기별해서 이번 적 중에 섭혼술의 대가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상대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니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까지 전했다.

그 기별 이후 멸마대는 내내 화송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구출 작전에도 적들이 섭혼술을 쓸 수도 있다고 예상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화송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대번에 숨겨진 비술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곳에 강혼술(强魂術)이 펼쳐져 있네.”

화송이 강혼술에 대해 설명했다.

“강혼술이 펼쳐진 공간에서는 섭혼술이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네. 나조차도 쉽게 섭혼술을 파훼할 수 없게 되지.”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혼술을 펼친 사람은 당연히 섭혼술의 고수일 테고, 그 말인즉 이곳에 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멸마대 무인들이 화송을 중심으로 사방을 경계했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사람은 화송이었다.

진하군이 기를 일으켜 주위를 살폈지만, 다행히 누군가 숨어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인질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겠지만, 강혼술이 펼쳐진 공간에서는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될 일이다.

“우선 강혼술부터 파훼하겠네.”

“조심하십시오.”

화송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강혼술을 파훼하기 시작했다.

장식장에 세워진 화병을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벽에 걸린 족자를 떼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냥 아무렇게나 막 치워버리는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 일일이 조심히 움직였다.

품에서 가루를 꺼내 바닥에 뿌리기도 했고, 벽에 그려진 선을 지우기도 했다. 그 옆에 새로운 선을 긋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진하군과 멸마대는 주위를 경계한 채 긴장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화송이 강혼술을 파훼하는 데 성공했다.

“됐네.”

“고생하셨습니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강혼술이 파훼되어도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대청 가운데 있는 잠든 남자에게로 향했다.

강혼술이 펼쳐진 공간에 홀로 잠들어 있는 남자. 정말이지 이번 작전이 구출 작전이 아니었다면 일단 물러나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곽영의 동생일 가능성이 컸기에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화송이 진하군과 함께 앞장서서 잠든 남자에게 다가갔다. 멸마대 무인들이 좌우에서 그를 호위했다.

화송이 손바닥을 그의 이마 쪽에 가져다 댔다. 그의 손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이 사람에게는 섭혼술이 걸려있지 않네.”

그러자 멸마대 무인이 다가가서 남자의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확인한 무인이 진하군을 돌아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인상착의가 곽영의 동생과 일치한다는 의미였다.

“깨우게.”

진하군의 명령에 한 무인이 혈도를 눌러 남자를 깨웠다.

섭혼술에 당한 게 아니라고는 했지만, 눈을 뜬 그가 어떤 공격을 가할지 몰랐기에 모두 내력을 끌어올린 채 긴장했다.

잠에서 깨어난 남자가 놀란 얼굴로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놀람과 공포는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살려주십시오!”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에서 막 깬 그는 눈앞의 무인들이 자신을 구출하러 온 거라 여기지 않았다. 아마 납치한 이들과 같은 편이라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멸마대 무인이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요?”

그러자 남자가 눈을 살며시 뜨며 눈치를 살폈다.

“이름!”

한 번 더 재촉하자 남자가 빠르게 대답했다.

“곽주(郭柱)입니다.”

곽영의 동생이 확실했다.

그제야 진하군이 그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우린 무림맹 멸마대요. 그대 누나의 요청으로 그대를 구하러 왔소.”

일부러 곽영을 언급했다.

그 말에 곽주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 드디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서 나갑시다.”

그를 데리고 나가려고 뒤돌아서던 그때였다.

쉬이이익.

진하군이 곽주에게 날아든 검을 본능적으로 쳐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바로 뒤에 서 있던 멸마대 무인이 갑자기 곽주를 향해 검을 내질렀던 것이다.

“섭혼술에 당했다!”

그 무인이 다시 곽주를 공격을 가하려던 그때. 옆에 있던 동료 무인이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으으윽!”

수하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 혈관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다급히 소리친 진하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무극이 알려준 대로였다. 섭혼술이 걸린 상태에서 혈도를 제압하면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했었다.

다행이 자신들에게는 화송이 있었다.

그가 재빨리 무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댄 후, 구결을 읊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 광채가 흘러나오자, 고통에 힘겨워하던 무인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무인이 당황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자신이 섭혼술에 걸렸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에게 섭혼술을 건 사람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의미.

진하군이 담담히 그에게 말했다.

“자넨 방금 섭혼술에 걸렸었네.”

수하는 깜짝 놀랐다.

화송이 아니었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아니, 검무극이 미리 기별해서 조심하라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낭패를 당했을 거다.

진하군이 기를 발출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대청 어디에도 다른 누군가가 숨어 있는 기척은 없었다.

“어서 나가자!”

일단 이곳부터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서둘러 나가려던 그때.

다시 멸마대 무인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너무 갑작스러운 기습에 옆에 있던 무인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쉭쉭쉭!

챙챙챙!

그는 동료에게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다른 무인들이 그를 제압했다.

“끄아아아악!”

다친 사람보다 공격한 쪽이 더 급했다. 혈도가 제압된 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비명을 내질렀다.

화송이 다시 그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며 구결을 읊었다. 사전에 아무런 표도 나지 않는 것이 섭혼술에 걸리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화송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강혼술이 펼쳐지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강혼술이 파훼된 상태였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연속해서 섭혼술을 발휘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무공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섭혼술을 걸기가 어렵다.

멸마대 무인이라면 극상의 어려움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연속해서 섭혼술을 발휘한다고? 대체 상대가 누구이기에?

그가 섭혼술을 풀어주기도 전에 또 다른 무인이 검을 휘두르며 이번에는 진하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하군은 그를 제압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챙챙챙챙!

“모두 옆 사람과 떨어지도록.”

멸마대 무인들이 거리를 두었다. 옆에서 돌발행동을 해도 막을 수 있는 거리를 두었다.

“어서 이곳부터 빠져나간다!”

“네!”

뒤쪽에 있던 무인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순간 무인이 흠칫 놀랐다.

문이 열린 그곳에는 복도 대신 이 방과 똑같은 공간이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본능적으로 그곳에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았기에 그는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화르르륵!

이번에는 눈앞에서 불길이 확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열기에 놀란 무인이 다급히 문을 닫았다.

진하군은 수하를 상대하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들이 완전히 놈의 공간에 빠져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화 사부님! 서둘러 주십시오!”

내공이 부족한 것일까?

화송이 섭혼술을 푸는 속도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섭혼술에 당하는 속도는 반대로 더욱 빨라졌다.

챙챙챙!

멸마대 무인 사이에 다시 싸움이 벌어졌다.

“내공을 제압하지 말고 싸워!”

화송이 섭혼술을 푸는 동안 내공을 제압하지 않고 버텨야 했다. 이대로 계속 섭혼술에 당한 수하들이 늘어난다면,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왜 정파 무림에서 섭혼마존과 독왕을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지.

무인에게 어떤 싸움이든 힘든 법이지만, 섭혼술을 상대하는 일은 특히 더 힘들었다. 같은 편을 상대하는 건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싸움이었으니까.

다시 한 명의 멸마대 무인이 섭혼술에 당했다.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해!’

진하군이 자신이 상대하던 수하를 다른 수하에게 맡기고 자신이 문을 향해 달려갔다.

쇄애애애액!

그의 검에서 검기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검기가 문에 닿는 순간, 눈이 녹듯 사라져 버렸다.

‘파훼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나가지 못한다!’

그가 화송에게 소리쳤다.

“화 사부님, 이 공간을 파훼해야 합니다.”

화송은 자신의 외침을 못 들었는지 등을 돌린 채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멸마대주 진하군.”

놀라서 돌아보니 곽주였다. 아까 보았던 그 순박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차분히 말했다.

“왜 이렇게 된 줄 아나?”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섭혼술의 고수가 그의 입을 통해 자신에게 말을 전하고 있음을.

“왜지?”

차분한 물음에 상대는 놀랄만한 소식을 전했다.

“아까 강혼술을 파훼하면서 화송은 더욱 강력한 강혼술을 발동했다.”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그의 말이 맞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강력한 섭혼술이 이어진다는 게 말이 안 되었으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강혼술의 파훼법 속에 새로운 강혼술을 심어두었지. 그는 스스로 내가 안배한 혈천강혼술(血天强魂術)을 펼쳤다.”

앞서 그는 화병을 옮기고 족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루를 뿌리고 선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그가 강혼술을 파훼하기 위해 펼쳤던 과정에 다른 강혼술이 발동하도록 안배해 두었다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혈천강혼술이 펼쳐져 있었다면 화송이 이상함을 감지했을 거다. 하지만 강혼술을 파훼했다는 안도감에 그는 새로운 강혼술이 펼쳐진 것을 알지 못했지. 나는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그 말에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이 섭혼술을 펼치는 상대 역시 소정락이나 천애거사처럼 오랫동안 무림맹 주위에서 일을 꾸며 왔다는 것을.

특히 대정반혼술의 고수들 주위에서 물밑 작업을 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화송은 이와 똑같은 강혼술을 파훼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그 파훼의 기회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이란 것을.

“그래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 있게 그때 펼쳤던 파훼법을 사용하더군.”

곽주의 두 눈에 웃음기가 스쳤다.

“때론 익숙함이 인간에게 가장 큰 함정이 되기도 하지.”

곽주가 화송을 쳐다보았다.

화송은 등을 돌린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그는 섭혼술을 풀고 있지도 않았다. 내내 푸른 빛을 내며 바빴던 그의 손에서는 빛이 사라진 후였다.

화송이 천천히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달라진 눈빛의 그를 보는 순간 진하군은 물론이고 멸마대 무인들 모두 탄식을 내뱉었다.

이곳을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사람이 섭혼술에 당한 것이다. 그를 지켜주려고 주위에 서 있던 몇 사람의 멸마대 무인들 역시 검을 뽑아 들며 진하군을 향해 돌아섰다.

섭혼술에 당하지 않은 이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거기에 더해지는 충격적인 소식.

“이 시간, 무림맹주는 너를 살리기 위해 소교주를 죽이고 있을 거다.”

곽주의 눈빛에 상대의 살기가 느껴졌다.

“소교주는 무림맹주에게 죽고, 너는 여기서 죽는다.”

무림맹주가 소교주를 죽여도 진하군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검무극과 진하군을 죽이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끝까지 진행 중이었다.

최악의 소식이었음에도 오히려 진하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우리가 위험하다는 것도 저쪽에서 알겠군.”

진하군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곧 우릴 도우러 올 거다.”

곽주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헛된 희망을 품는군.”

하지만 진하군의 희망에는 할아버지와 검무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검무극을 죽일 리도 없고, 검무극이 그런 상황이 되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두 사람이 내 위기를 알고 있다?”

진하군이 수하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끝까지 버텨라. 오늘 우린 아무도 안 죽는다!”

절대회귀 658화

비겁한 것들과는 말을 섞지 않아서

“무림맹의 후계자가 될 자가 마교 소교주를 가장 믿는다니?”

곽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표정이 원래대로 바뀌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다른 곳에 서 있던 화송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전염되는 웃음. 다시 그 옆에 서 있던 이미 섭혼술에 당한 멸마대 무인들이 연속해서 웃었다.

상대는 자유자재로 사람들의 몸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진하군 옆에 서 있는 곽주의 몸으로 들어오더니 씩 웃으며 물었다.

“정말 믿어?”

정말 검무극을 믿냐고?

당연히 진하군은 검무극을 믿었다. 검무극이라면 할아버지에게 죽는 운명 따윈 가볍게 피해 갈 것이다.

궁지에 몰린 친구를 구해주고 온갖 생색을 낼 사람이었으니까. 생색내는 것도 싫어하면서.

“친구인데 믿어야지.”

진하군의 변함없는 대답에 곽주는 대놓고 비웃었다.

“정파 무림은 그냥 둬도 망하겠군.”

그리고는 질책하듯 버럭 소리쳤다.

“멸마대주란 자가 수하들 보기 부끄럽지 않나?”

하지만 정작 멸마대 무인들은 아무도 진하군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진하군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가 지금까지 검무극과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충성심을 느낀 것일까? 곽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그가 더없이 잔혹한 죽음을 꾸미고 있었다.

“수하들이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난 후, 마지막에 죽여주마.”

눈앞의 이 곽주를 벤다고 과연 상대도 죽을까?

아닐 거라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무방비로 자신 앞에 노출하진 않을 테니까.

진하군이 곽주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너머에 숨어 있는 섭혼술의 고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모습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비겁한 겁쟁이!

그를 도발하고 조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놈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자였다면 애초부터 모습을 드러냈겠지.

어설픈 자극은 오히려 수하들의 목숨만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그래,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는 게 아니라 검무극이 도와주러 올 때까지 버티는 거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도 자존심 상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자존심보단 수하들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진하군이 뒤로 물러서며 검을 겨눴다. 옆에 있던 수하들이 진하군의 양쪽 옆으로 늘어섰다.

솔직히 이 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섭혼술을 깰 수 있을까?

그때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왜 저들의 그 잔혹하고 집요한 욕망에 우리가 무너지지 않은 줄 아느냐?

진하군이 수하들에게 당당히 말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다!”

그래, 아무리 서둘러도 이놈의 악에게는 언제나 한 걸음, 두 걸음 뒤처지지만, 이 믿음은 변함이 없다.

“우린 멸마대다. 우린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착착착착!

진하군의 말에 수하들이 일제히 검을 겨눴다.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동료를 향해서였다.

쉬이이익!

진하군 바로 옆에 있던 무인이 진하군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멈췄던 싸움이 계속되었다.

진하군은 옆에서 날아든 검을 가볍게 막았다. 그는 놀라거나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하군이 생각해 낸 마음가짐은 이것이었다.

“지금부터 동료들과 실전 훈련을 개시한다!”

훈련하듯 섭혼술에 당한 동료들을 대하라는 말이었다. 당한 이들은 실전처럼, 우린 훈련처럼.

챙챙챙!

멸마대 무인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아직은 섭혼술에 당하지 않은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하군은 모든 심력을 다 쏟아부었다. 언제 누가 돌변해서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혈천강혼술이 발동해서 놈이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분명 놈도 한계가 존재할 거다.’

상대 역시 엄청난 내공을 사용하며 싸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혈천강혼술로 더욱 강력한 힘을 얻은 상대의 섭혼술은 상상초월이었다. 그야말로 지치지 않고 섭혼술을 계속 사용했다.

한 명씩, 한 명씩 계속 섭혼술에 당하는 무인들이 늘어났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실력자라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자신을 희롱하고 있었다. 수하들이 서로를 찔러 죽이는 모습에 고통받는 자신을 보려는 것이다.

“버텨! 끝까지 버텨!”

반드시 우릴 도와주러 누군가 올 것이다!

챙챙챙챙!

섭혼술에 당한 무인들은 죽일 듯 달려들었고, 이쪽에서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기에 숫자의 우세임에도 싸움은 더없이 힘들었다.

게다가 섭혼술에 당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조심해!”

바닥을 뒹구는 수하를 뛰어넘어 그를 공격하는 또 다른 수하를 막았다.

챙챙챙!

불꽃이 튀어 올랐고, 그사이 쓰러졌던 무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구해준 건데, 그 수하가 진하군의 등을 찔러왔다.

진하군이 돌아서며 검을 튕겨냈다. 진하군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수하에게 미안했다.

‘미안하다. 너희를 구해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살면서 여러 위기를 겪었지만, 이 순간만큼 수하들에게 미안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만큼 강함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적도 없었다.

‘오늘 살아남는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게끔 강해질 것이다.’

진하군이 벽으로 처박히는 수하를 위해 몸을 날렸다. 무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팔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쓰러진 수하를 공격하는 수하를 밀어붙이며 또 다른 상황을 살폈다. 공격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모두가 자신의 수하였다.

그랬기에 자신만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절대 수하들이 이곳에서 죽게 해선 안 된다. 그것도 동료의 검에 찔려서는 더욱이.

‘단 한 명도 죽이지 않는다!’

진하군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섭혼술에 당하지 않은 무인들은 진하군의 이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가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들 역시 미친 듯이 싸웠다. 그러다 이내 적이 되었다.

역부족이었다.

진하군과 남은 멸마대 무인들은 뒤쪽 문이 있는 벽까지 밀렸다.

상대는 잠시 싸움을 소강상태를 만들더니.

짝짝짝!

이번에는 화송이 박수를 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공간을 파훼해 줘야 할 그는 놈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대단해! 이렇게 싸우면서도 수하들을 한 명도 죽이지 않았군.”

진하군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 하아.”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곳에 울려 퍼졌다.

옆에 선 멸마대 무인들이 진하군의 몸을 살폈다. 이미 팔과 다리, 등에서 흘러내린 피로 온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옆에 선 수하의 물음에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괜찮냐고 물어본 수하가 진하군에게 검을 내질렀다.

날아든 검을 피하며 그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진하군이 다시 말했다.

이미 이지를 상실한 눈빛이었지만, 진하군은 수하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괜찮다.”

다시 공격하려는 수하를 홱 하고, 섭혼술에 당한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이 정파 놈들의 가식은 언제 봐도 우습군.”

화송의 조롱에도 진하군은 그를 응시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목적 아닌가?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수하들은 내보내지.”

화송이 코웃음을 쳤다.

“끝까지 가식을 떠시겠다?”

화송이 천천히 진하군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진하군의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차갑게 말했다.

“위선 떨지 마!”

진하군은 절대 감정을 폭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는 어떻게든 진하군을 자극해서 그의 본성을 보고 싶어 했다.

화송이 진하군 뒤에 있는 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열어주지 않는 한 절대 열 수 없는 문이다.”

화송이 씩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어때? 네게만 열어줄까? 위선 그만 떨고 혼자만 빠져나가겠다면 열어주지.”

옆에 있던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먼저 빠져나가라는 의미였다.

물론 그들은 알았다. 진하군은 절대 자신을 두고 혼자서 빠져나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들이 그렇듯.

“왜들 그리 솔직하지 못하냐?”

화송이 진하군 뒤에 있는 문을 똑똑 두드렸다.

“열어주세요, 나는 살고 싶습니다! 협의고 나발이고 우선은 살고 봐야지요! 나중에 좋은 일 많이 하고 살겠습니다. 자, 선착순 다섯 명은 살려준다!”

그의 조롱이 계속되던 바로 그때였다.

문을 부서지며 하나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문 앞에 있던 화송의 목을 움켜쥐었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화송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꾸엑, 하는 비명이 터져 나오던 그 순간.

푸아아앙.

그때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보았다. 화송의 몸에서 새하얀 어떤 것이 튕겨 나가는 것을. 지금까지 보지 못한 그것이 이제는 보였다.

그것이 쏜살같이 날아가 곽주의 몸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문을 부수고 튀어나온 손이 화송의 목을 놓아주었다. 화송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를 풀어줌과 동시에.

끼이이익.

열어주지 않는 한 절대 열리지 않는다는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 속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있는 손.

손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손등부터 팔까지 길게 엮인 검은 쇠사슬.

어둠 속에서 손의 주인공이 앞으로 걸어들어왔다.

들어선 사람은 젊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바로 섭혼마존 청선이었다.

진하군은 그녀의 등장에 정말 놀랐다.

지난번 삼자회합 때 그녀를 봤었는데, 이곳에 나타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으니까.

곧이어 진하군의 온몸에서 피어 나는 짜릿한 전율이 있었다.

자신의 믿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이었다. 검무극이 아니라면 그녀를 누가 보냈겠는가?

그래, 이런 사람이 검무극이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마교 후계자와 자신이 친구가 되었겠는가?

오랜만에 본 그녀의 분위기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더 없이 침착하고 깊었다. 그녀는 처음 마존이 되었을 때와는 기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얼굴과 팔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마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감고 있는 눈.

감고 있는 눈이 자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세 번째 눈처럼 보였다.

그녀의 왼쪽 얼굴에는 붉은색의 회오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오른쪽 손등에서 아까 보았던 쇠사슬이 엮인 그림이 있었다.

반대쪽 왼손 손등에는 푸른 불꽃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얼핏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 그림들은 바로 혼화(魂畵)였다.

혼화는 섭혼술을 익힌 이들의 무공을 강하게 해주는 특별한 그림으로, 이 혼화를 그리면 더욱 강력한 섭혼술을 발휘하게 된다.

지금 상대가 혈천강혼술로 더욱 강한 섭혼술을 펼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섭혼마존이 혼화를 그리고 나왔다는 건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과 동시에 제대로 싸우겠다는 의미기도 했다.

진하군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젊은 그녀였지만 마존의 지위에 있는 그녀였다.

“마존을 뵙습니다.”

섭혼마존 역시 정중히 예를 갖춰 포권했다.

“귀한 분을 뵙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귀한 분? 누굴 말하는 것일까? 검무극인가? 검무극을 만나고 왔다면 함께 왔을 텐데. 그럼 대체 누굴까?

곽주가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마교의 새 섭혼마존 소식은 들었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군. 이 미친년아, 아까는 간 떨어질 뻔했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알았음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등장에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전대 섭혼마존은 암흑마공에 손을 댔지.”

그는 섭혼마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그를 죽인 게 소교주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냐?”

섭혼마존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과묵한 성격이시다?”

그러자 섭혼마존이 무심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나는 비겁한 것들과는 말을 섞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몸에 숨는 것에 대한 조롱이었다.

진하군은 속이 후련했다. 정말 몇 번이나 저 말을 하고 싶은 걸 참았다.

곽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 어디 우리 젊은 마존님 실력 한 번 볼까?”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주위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히히히히히히.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울음이었다.

멸마대 무인들은 내공을 끌어올려서 울음에 맞섰다. 하지만 음공을 발휘하는 것처럼 그 울음은 무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섭혼마존이 천천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더니.

그 순간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귀신 울음이 딱 그쳤다.

이제 주위는 진짜 귀신이 나올 것처럼 조용해졌다.

절대회귀 659화

아직도 내가 귀여워?

무섭게 흐르는 정적.

정말이지 귀신들이 무서워서 울음을 딱 그친 것만 같았다.

단 한 수로 자신의 수를 파훼 당했지만, 오히려 곽주는 큰소리로 웃었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저 웃음은 원래 곽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섭혼술 고수의 웃음이 뒤섞였다는 의미는?

‘그의 감정이 동요하고 있다.’

진하군은 느꼈다. 그가 만든 세상에 첫 번째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소리 내서 웃던 곽주가 웃음을 뚝 그쳤다.

“우리 젊은 마존이 저기 저 정파 늙은이보다 낫군.”

그 말에 화송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은 무림맹에서 대정반혼술을 가르치는 두 명의 대사부 중 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섭혼술에 당했다는 사실에 그는 큰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상대가 그 아픔을 파고든 것이다.

“심지어 저 늙은이는 스스로 혈천강혼술을 직접 발동하기까지 했지.”

그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오르던 그때, 진하군이 나섰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 뒤에 숨지는 않으시지.”

진하군의 목소리는 맑고 힘이 있었다. 잡념을 막아주고 심마를 몰아내는 정심공(正心功)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자 화송의 얼굴에 피어오르던 열꽃이 가라앉았다.

“진 대주를 볼 면목이 없소.”

진하군은 단호한 어조로 그를 위로했다.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화 사부님 주위에서 물밑 작업을 해온 자입니다. 아마 화 사부님이 제자를 가르치던 첫날부터 시작된 음모일 겁니다. 그동안 화 사부께 뭘 몰래 먹였을지, 어떤 암시를 계속 줬을지 아무도 알 수 없지요. 혈천강혼술의 안배 역시 아주 교묘한 것이었고요.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곽주가 진하군을 비웃었다.

“우리 진 대주께서 바쁘시군. 마존에게 알랑방귀를 뀌랴 정파 늙은이 위로하랴.”

그의 조롱에도 진하군은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비록 이곳이 놈의 사술 속 세상이지만, 자신은 멸마대주였으니까.

오히려 그에게 고마웠다. 이번 일 덕분에 느낀 바가 많았으니까.

비단 더 강해져야겠다는 각오만이 아니었다.

놈의 사술에 걸린 후 계속 모욕을 당하면서 무기력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수하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 속으로 계속 이 생각을 했다.

자존심은 상해도 된다. 하지만 수하들은 상하면 안 된다.

진하군은 이런 자신의 마음에 주목했다.

이렇게 변한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성숙해졌음을 스스로 느꼈다. 그래, 검 끝은 흔들려도 마음은 흔들리면 안 되는 법.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 섭혼마존이 그에게 말했다.

“다 자라면 호랑이가 무섭지, 구렁이는 무섭지 않은 법입니다.”

아직 덜 자란 호랑이라서 저 구렁이를 상대할 수 없다는 의미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녀가 이런 말을 해 주리라 예상치 못했기에, 진하군은 내심 감격했다.

진하군은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곽주가 다시 끼어들었다.

“난리 났군. 마교의 마존이 멸마대주를 위로하다니! 이렇게 기괴할 수가?”

섭혼마존이 그를 스윽 돌아보더니.

그 모습이 마치 너는 닥쳐라! 라는 뜻처럼 느껴졌기에 곽주는 인상을 굳혔다. 그녀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의 속을 뒤집은 것이다.

물론, 그는 그냥 참고 넘어가지 않았다.

“네 소교주는 지금 네가 살리려는 자의 할아비에게 죽었다. 자, 이제 구렁이가 누굴까?”

행여 오해가 있을까 진하군은 재빨리 나섰다.

“속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자 생각지 못한 말이 섭혼마존에게서 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중 누군가 죽는다면 외람되지만, 맹주께서 죽었을 겁니다.”

순간 진하군이 흠칫 놀랐다.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정말 그녀가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하군은 그게 무례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 검무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는 다음 세대의 첫 마존이구나.’

검무극의 첫 마존이라 생각하니 그녀의 이 절대적인 믿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섭혼마존이 곽주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귀신놀음은 귀신끼리 해야지.”

곽주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 젊은 마존을 보는 그의 감정은 이것이었다.

“귀엽네.”

섭혼마존이 걸음을 멈춘 후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중에 말 바꾸지 마.”

“말하는 것도 귀엽고.”

착착착착!

곽주 앞을 섭혼술에 당한 멸마대 무인들이 막아섰다. 곽주는 이들을 어떻게 할 테냐, 어디 재롱 한번 떨어봐라, 하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멸마대 무인들이 그녀에게 검을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당연히 마음이 급해진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자신들이야 부상을 각오하고서라도 동료들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섭혼마존은 달랐다. 그녀가 그런 배려를 할 리도 없었고, 또 그걸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었다.

진하군이 옆에 있던 멸마대 수하들에게 눈짓한 후, 앞으로 나갔다. 그를 따라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앞으로 나섰다.

“저들은 우리가 맡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를 믿고 물러서라는 섭혼마존의 말에 진하군은 곧바로 수하들을 뒤로 물렸다. 그녀를 믿었다. 그녀를 보낸 검무극을 믿었다.

섭혼술에 걸린 멸마대 무인들이 그녀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쉬이이익! 쉬익! 쉬이익!

누가 죽어도 죽겠다는 생각에 지켜보던 멸마대 무인들이 달려 나가려던 그때, 진하군이 양손을 좌우로 뻗어 그들을 말렸다. 못 믿겠다면 애초에 나서고, 믿었다면 끝까지 믿어야지.

그녀의 볼에 그려진 회오리 문양이 빛나면서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전방으로 새하얀 기파가 뿜어져 나갔다.

후우우우웅!

세차게 불어닥친 기파가 모두의 옷깃과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이어지는 정적.

검을 내리치던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동작을 멈췄다. 섭혼마존을 향해 찔러가던 검도 멈춰 있었다.

“어?”

그들의 표정은 모두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들이 왜 처음 보는 여인을 공격하고 있느냐는 표정들이었다.

마치 바람으로 날려버리듯, 섭혼마존은 그들에게 걸린 섭혼술을 한 번에 풀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대단한 신위였다.

곧이어 멸마대 무인들은 섭혼마존 뒤에 선 진하군을 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들이 섭혼술에 빠져들었었다는 것을.

그들이 일제히 진하군에게로 훌쩍 몸을 날렸다.

진하군이 기뻐하며 그들을 맞았다.

“잘 돌아왔다.”

온몸이 피에 젖은 진하군의 모습에 그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인사는 마존께 드리도록.”

그러자 멸마대 무인들이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감사합니다.”

섭혼마존은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가볍게 한 번 들어 올렸다.

진하군은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검무극과의 인연이 계속되는 한, 아주 오래 보게 될 마존이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제 섭혼마존 앞에는 곽주 혼자만 서 있었다.

섭혼마존이 단번에 멸마대 무인들에게 걸린 섭혼술을 풀어냈음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예리한 눈빛을 발하는 순간.

멸마대 무인 하나가 검을 반쯤 뽑았다.

또다시 섭혼술에 걸린 그가 옆의 무인을 공격하려 했는데, 검을 채 다 뽑기 전에 섭혼마존에 의해 섭혼술이 풀린 것이다.

또 다른 이의 손에서 뽑혀 나오던 검이 멈췄다.

그야말로 처음 보는 섭혼술 대결이었다.

마치 바둑을 두듯, 선공하고 방어하고 선공하고 방어하고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그녀의 볼에 그려진 회오리 그림에서 광채가 빛났다.

상대가 혈천강혼술로 섭혼술을 강화했듯, 그녀 역시 혼화가 그녀에게 힘을 보태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빛이 날 때마다 회오리 문양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결국, 상대는 멸마대 무인에게 섭혼술을 거는 것을 포기했다.

곽주가 내가 졌다는 듯 손바닥을 살살 부딪치며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여전히 여유를 부렸지만, 그의 눈동자에 깃든 놀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섭혼마존이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이렇게 겁이 많은데 이런 일에는 왜 끼게 되었나?”

대놓고 하는 조롱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곽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짜증이 확 스쳤다.

원래 섭혼마존은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야망도 크고 성격도 앙칼지고.

다만, 근래 마존 자리에 오르고 오직 수련에만 몰두해 왔던 그녀였다. 상대적으로 다른 마존들보다 약했기에, 그 약하다는 평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렇게 수련만 하다 오랜만에 강적을 대하는데, 이제 슬슬 입이 풀리고 있었다.

“인질 뒤에 숨는 자는 처음이라서.”

하필이면 지금 들어가 있는 몸이 곽주였다.

그녀는 지금 이 작전이 곽주를 구하는 구출작전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곽주가 곧장 반격했다.

“소교주가 너를 마존 자리에 앉혔다지? 소교주에게 그 몸뚱이라도 바쳤나?”

섭혼마존은 그 도발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도발이었다.

“그럼 너는? 용기를 바치고 왔나?”

결국 상대는 참지 못했다.

곽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위조 암기 진격이었다.

상대를 향해 발출하려 꺼냈나 싶었는데.

곽주는 진격을 자신의 턱 아래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자결하려는 것이다.

“우리 마존께서 본인을 겁쟁이로 놀리니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는 수밖에.”

그가 진하군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를 구하는 게 목적이었지? 임무는 실패다.”

곽영의 동생을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었기에 진하군은 마음이 다급했다.

하지만 섭혼마존을 믿었다. 그녀는 저 사람을 꼭 살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진격이 당겨지기 전!

먼저 발출된 것이 있었다.

철그렁, 철그렁!

어느새 곽주의 몸을 무엇인가가 휘감고 있었다.

섭혼마존의 손에 새겨져 있던 검은 쇠사슬이 실제로 발출되어 그를 칭칭 감은 것이다.

“자, 죽고 싶으면 죽어!”

그의 손가락은 제압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곽주는 진격을 발사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곽주가 죽는 순간 자신은 그의 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쇄혼결(鎖魂結)!”

쇠사슬이 그의 혼을 곽주의 몸에 완전히 가둔 것이다. 결국 곽주가 자결하면 그도 함께 죽는다.

곽주는 쇠사슬을 끊어내려 했다. 하지만 검은 광채가 더욱 강렬하게 빛날 뿐, 끊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강력한 혼화를 네가 그렸다고?”

그는 불신 가득한 눈을 크게 부릅떴다.

“누가 그려준 혼화냐?”

그녀가 직접 그린 혼화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내게 몇 년의 시간만 더 있었어도 널 상대하는 데 혼화는 필요가 없었겠지.”

말을 마친 섭혼마존이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곽주가 그녀 앞까지 날아왔다.

그녀가 곽주의 목을 확 움켜쥐었다.

그는 느꼈다. 그녀의 살기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이자까지 죽일 작정이냐?”

곽주의 목숨을 두고 협박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왜? 그러면 안 돼?”

목을 움켜쥐지 않은 섭혼마존의 다른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남는 장사잖아!”

쇄애애액!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곽주의 머리통을 향해 일장을 내리쳤다.

“잠깐!”

곽주의 다급한 외침에 그녀의 손이 멈췄다. 정말 머리통 바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섭혼마존이 진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곽주의 표정에서 두려운 기색이 흘렀다.

물론, 그는 이 보잘것없는 인질과 함께 죽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가겠다.”

항복하듯 곽주의 손에 들려 있던 진격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섭혼마존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곽주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자는 대공자가 반드시 구하겠다고 약속한 자다. 죽여선 안 돼!”

정말이지 자신이 이런 애원을 하게 될 줄이야.

섭혼마존이 미친년처럼 활짝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내가 귀여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검은 쇠사슬이 사라지며 그녀의 팔로 들어갔다. 쇠사슬은 처음 색보다 훨씬 연해져 있었다.

곽주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속에 있던 그는 순식간에 그 몸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렇게 곽주를 마지막으로 이곳에 있는 모두가 섭혼술에서 벗어났다.

진하군은 그녀가 상대를 협박하는 모습에서 마치 마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젊은 마녀가 나이를 먹으면 어떻게 될지.

허공에서 분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제 그는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감히 내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그는 이곳에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목소리가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울렸다.

“나를 조롱하고 협박해?”

순식간에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휘이이이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은 절벽 위였다. 그 절벽 위에 모두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구름이 저 아래 보일 정도로 높은 절벽이었다.

절벽은 진짜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죽게 될 것이다.

“너는 그 문을 열고 들어와선 안 되었다.”

원래 섭혼술 싸움을 할 때는 다른 이의 세상으로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펼쳐내는 쪽보다 파훼하는 쪽이 훨씬 힘들기 때문이다.

“어디 구할 수 있으면 구해봐라.”

꽈드드득! 꽈드득!

그들이 서 있던 절벽이 쩍쩍 갈라지면서 모서리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경공으로는 살아남기 힘든 높이였다.

주문을 읊는 섭혼마존의 얼굴에 새겨진 회오리 문양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빛났다.

빛이 사라지던 그 순간!

구우우우우우!

구름 아래에서 깊은 굉음이 들려오더니, 거대한 절벽이 구름을 뚫고 올라왔다.

놀랍게도 그들이 서 있던 절벽과 비슷한 절벽이 아래에서 올라온 것이다.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모두 건너편으로!”

진하군의 외침에 멸마대 무인들이 건너편 절벽으로 경공을 펼쳐 건넜다. 진하군은 곽주를 옆구리에 끼고 그곳으로 날아갔다.

경공술이 떨어지는 이들은 다른 동료의 도움을 받으며 모두 무사히 무사히 건너편 절벽으로 내려섰다.

꽈르르르릉!

그 사이 그들이 있었던 원래 절벽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후였다.

섭혼마존이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여기가 네 세상이라고?”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올린 절벽에서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뺏으면 내 세상이지.”

절대회귀 660화

제가 본 가장 멋진 쌍년이었습니다

바람이 불어닥쳤다.

짐승처럼 울어대는 바람은 그의 분노를 담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그의 목소리!

“여긴 내 세상이다!”

거센 바람은 금방이라도 모두를 절벽 아래로 날려버릴 것만 같았다.

불어온 바람을 향해 섭혼마존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휘이이이이잉.

그러자 모든 바람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태풍처럼 강한 바람을 홀로 맞으며 그녀는 제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옆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진하군은 보았다. 섭혼마존이 미친 여자처럼 하얗게 웃고 있는 모습을.

그녀는 싸우고 있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휘이이이이이이이잉.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었다.

그녀의 볼에 새겨진 회오리 문양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불어닥친 바람에도 섭혼마존이 끄덕하지 않자,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완전히 그치자 섭혼마존은 절벽 위에 서 있는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못 볼 경치니 즐기십시오.”

그녀의 말에 모두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져 내리던 절벽에서는 경치를 볼 생각을 못 했는데, 저 아래 구름이 흐르는 절벽 꼭대기에서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섭혼술이란 무공이 주는 아주 잠깐의 선물.

잠시 후, 주위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스스스슷.

다시 공간은 원래 그들이 있던 대청으로 바뀌었다.

허공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엽다는 말, 취소다.”

섭혼마존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살짝 설렜어. 쌍년 소리만 듣다가 오랜만에 귀엽다는 소릴 들어서.”

진하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존이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진하군이 그녀에게 물었다.

“몸이 없어도 이렇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놈은 환체술(換體術)을 쓰고 있습니다.”

환체술은 섭혼술의 일종으로 사람의 몸을 옮겨 다닐 수 있는 극상승의 무공이었다.

“본체를 죽이지 않으면 저자를 죽일 수 없습니다.”

이 공간의 파훼법은 저자의 본체를 찾아 죽이는 것이라는 의미.

“본체에서 멀리 떨어지면 환체술을 쓸 수는 없으니, 본체는 반드시 이 공간에 있습니다.”

“여기에 있다고요?”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놀라 대청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육체가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은 없었다.

그때,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내 몸은 못 찾는다.”

“뭐 대단한 몸이라고 그렇게 꼭꼭 숨겨뒀을까?”

섭혼마존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구결을 읊자 그녀의 이마에서 자색의 광채가 흘러나왔다.

사아아아.

그리고 이어진 놀라운 모습.

스으으으윽.

그녀의 이마에 그려진 감은 눈이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귀술안(鬼術眼).

자색의 광채를 뿜어내며 귀안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눈동자가 멈춘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부우우우욱.

그녀가 마치 천을 찢어버리듯 맨손으로 공간을 찢었다.

허공이 찢어지며 그 너머의 모습이 드러났다.

칠흑처럼 어두운 그곳에 한 노인이 눈을 감고 허공에 떠 있었다.

쇄애액.

내력이 깃든 그녀의 일장이 노인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죽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일장이 박혔을 때, 노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그녀의 주먹이 박혔을 뿐.

노인이 발소리를 크게 내며 바닥에 내려섰다. 등을 돌린 채 돌아선 그가 나직이 말했다.

“정말 귀술안까지 쓰다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귀술안은 단순한 은신을 찾는 무공이 아니었다. 섭혼술 내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그야말로 극상승 무공.

이마에 감긴 눈을 봤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그려주는 것도, 설령 그려준다고 이렇게 쉽게 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섭혼마존이 노인을 향해 돌아서자 찢겨나갔던 허공이 다시 붙으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세 번째 눈은 천천히 다시 감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딱 한 번 쓸 수 있었던 혼화였다.

노인이 그녀와 멸마대 무인들이 있는 쪽을 향해 돌아섰다.

사람 좋아 보이는 호인풍의 노인. 절대 이런 섭혼술 세상 속에서는 만날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당신은?”

노인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화송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이런 곳에서 만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확실했다.

“진 사부!”

진휴(珍休).

그는 대정반혼술을 가르치는 두 대사부 중 한 사람이었다.

진하군도 알고 멸마대 무인들도 아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자신들을 죽이려 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좋다고 알려진 진 사부였던 것이다.

그제야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천애거사를 중심으로 독을 쓰는 소정락과 섭혼술을 쓰는 진휴가 무림맹에 깊숙이 잠입해 있었음을. 아니, 잠입이 아니었다. 그들은 무림맹과 함께 지금까지 살아왔다.

만약 이번에 이들의 음모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이들 셋이 결정적인 음모를 꾸몄다면? 이들만으로도 치명적인데, 또 다른 적까지 끌어들였다면?

그 결과는 서늘해진 진하군의 등줄기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진휴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자신의 몸에 들어간 그의 존재감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진하군은 의아했다. 과연 섭혼마존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는데.

“왜 진작 네 몸으로 싸우지 않았지?”

그러자 진휴가 대답했다.

“너희쯤이야 본 힘을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해서지.”

그는 여유를 부리며 웃었다. 하지만 섭혼마존이 그 여유를 산산이 부쉈다.

“지랄하네.”

순간 진휴의 눈가가 꿈틀했다.

“죽기 싫어서잖아.”

그녀의 말에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체로 싸우다 죽으면 진짜 죽는다는 것을.

앞서 섭혼마존의 쇄혼결에 당했을 때도 그렇게 빠져나가려 애원했던 이유도 죽기 싫어서였고.

“정말 끝까지 겁쟁이군.”

진하군의 말에 진휴가 차갑게 말했다.

“진 대주, 말조심해라!”

지금 누가 누굴 보고!

진하군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나갈 말이 욕밖에 없었기에, 섭혼마존이 했던 것처럼 조용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너나 닥치라는 그 모습에 진휴는 분노가 폭발했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쇄도해 사정없이 진하군의 뺨을 때리려 했는데.

그는 진하군에 닿지 못했다.

철그렁.

진휴가 내려다보니 어느새 쇠사슬이 그의 몸을 감고 있었다.

섭혼마존의 오른손에서 발휘된 쇄혼결이었다.

진휴의 시선이 스윽 그녀를 향했다.

섭혼마존이 철그렁, 쇠사슬을 한 번 손목에 감으며 말했다.

“쓰레기는 이 쌍년하고 싸워야지.”

진휴의 눈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정말 이것들이 쌍으로!”

진휴가 쇠사슬을 잡아 자신에게로 당겼다.

철그렁! 꽈아아아악!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 얼굴에 회오리 문양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주위 공간에서도 푸른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자 화송은 탄식했다.

‘혈천강혼술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섭혼술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이 혈천강혼술은 혼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효과를 지녔다. 훨씬 오래 준비해야 하고, 그 재료를 위해 막대한 돈이 들었을 거다.

그걸 자신이 직접 발동했으니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섭혼마존이 서서히 끌려가기 시작했다.

섭혼마존의 왼쪽 손등의 불꽃 문양이 빛나더니.

진짜 불길이 일어나서 쇠사슬을 타고 진휴를 향해 번져갔다.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진휴는 피하지 못했다.

화르르르륵.

진휴의 몸이 불길이 타올랐다.

지켜보던 멸마대 무인들은 한 마음이었다.

‘타죽어라!’

다음 순간!

쏴아아아아악.

진휴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무엇인가 끊어지는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그렁! 철그렁!

그를 묶었던 쇠사슬이 끊어진 것이다.

불길에 휩싸인 채로 진휴가 걸어 나왔다.

그의 몸을 둘러싼 푸른 빛이 더욱 빛나는가 싶더니 서서히 불이 꺼졌다.

진휴가 거슬린 눈썹을 매만지더니.

“이 미친년아! 뜨겁잖아!”

상황이 불리해졌음에도 섭혼마존은 기가 눌리지 않았다. 욕은 그녀가 더 잘했다.

“쓰레기 새끼가 잘 안 타네.”

진휴가 죽일 듯한 기세로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두 사람이 뒤엉킬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츄아악!

진휴의 등에서 튀어나온 칼날 같은 촉수가 그녀의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섭혼마존이 그것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촉수가 꿈틀거리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의 등에서 두 번째 촉수가 튀어나오던 그때.

쉬이이이익.

한줄기 검기가 진휴를 휩쓸었다.

퍽 하면서 뒤로 튕긴 그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길게 베인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진하군이 날린 검기였다.

“저 쓰레기는 우리 쓰레기다. 우리가 치워야지.”

진하군을 선두로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촤아아아아아.

그들의 앞을 막는 투명한 막.

뒤로 튕겨졌던 진하군이 다시 쇄도해서 그 막에 검을 찔러넣었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찢으려 했다.

다른 멸마대 무인들도 막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막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송곳처럼 튀어나와 진하군을 찔렀다. 하나가 아니었다. 고슴도치처럼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진하군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지만, 송곳처럼 찔러오는 기운은 끔찍한 고통을 안겼다.

하지만 그는 막을 찢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찌이이이익.

막이 찢어지기 시작하자 진휴의 신경이 그를 향하던 그때.

푸아아아악!

섭혼마존이 단숨에 촉수를 잡아당겨서 찢듯이 뽑아버렸다. 찰나간 힘이 빠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파아아아아악!

진휴의 등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괴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이 미친년이!”

진휴가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잡아 뜯으려 했을 때, 섭혼마존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확 달려들었다.

싸라라라락!

섭혼마존의 그림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진휴의 얼굴을 감싸면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주먹이 진휴의 배를 향해 날아들었다.

텅! 터엉!

주먹은 그를 둘러싼 푸른 빛에 튕겨 나오면서 쇳소리가 났다.

“으아아아악!”

극한의 힘으로 주휴 역시 맨손으로 그림자를 찢어발겼다. 섭혼마존은 힘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 사이 진하군과 멸마대가 막을 뚫고 들어왔다.

쉬이이익! 쉬이익! 쉭!

그를 향해 검기가 쏟아지던 그 순간.

순식간에 주위가 바뀌었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바닷속에 빠졌다. 헤엄치며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저 멀리 수평선만 보일 뿐, 작은 바위섬 하나 없는 망망대해.

“섭혼마존님은?”

진하군의 외침에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돌아보니 그녀가 뒤쪽 물 위에 서 있었다.

경공으로 떠 있는 게 아니라 이곳이 섭혼술의 세상이기에 그냥 땅에 있듯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멸마대 무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그들에게 진짜 물속이었다.

“엇!”

바로 그때 멸마대 무인 하나가 물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무인들도 함께 들어갔다.

물속에서 수인(水人)들이 병장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비늘과 아가미가 붙어 있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멸마대 무인들을 속속 아래로 끌고 들어갔다.

멸마대 무인들이 물속에서 검을 휘두르며 그들과 싸웠다.

하지만 물에서 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내공 소모는 훨씬 심했고, 위력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의 공격은 훨씬 빨랐고 더 강력했다.

진하군은 물속에서 싸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계속 잡아당겨서 물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숨을 참고 버티면서 싸웠지만, 점차 한계에 다다르던 그때.

이번에는 반대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모두 물 밖으로 날아 올라갔다.

촤아아아악.

멸마대 무인들도, 수인들도 모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때다! 다 죽여!”

진하군의 명령에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물 속이라면 모를까, 물 밖에서의 싸움인데 어찌 수인들이 멸마대를 당하겠는가?

멸마대 무인들의 검기에 수인들이 모두 잘려 나갔다.

풍덩! 풍덩!

시체가 멸마대 무인들이 다시 물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모두들 알 수 있었다.

섭혼마존이 자신들을 끌어내 주었다는 것을.

“고맙습니다.”

진하군의 감사에 섭혼마존이 웃으며 말했다.

“싸움이 지랄 같죠?”

다른 사람이라면 정말 이 빌어먹을 섭혼술이 그렇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섭혼마존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 싸움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러자 가만히 진하군을 쳐다보던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진 대주께서는 너무 점잖으십니다.”

섭혼마존에게 듣는 칭찬이라니? 정말 자신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길 보십시오.”

멸마대 무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수인들의 시체를 향했다.

뽁, 뽁, 뽁!

시체들이 마치 물방울처럼 터져 나가더니.

그 자리에 새로운 수인들이 만들어졌다.

진하군과 멸마대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상대라면 이쪽의 내공이 먼저 고갈될 것이다.

섭혼마존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촤아아아아아.

저 멀리서 큰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다. 그 높은 파도 위에 진휴가 서 있었다.

저 큰 파도에 휩쓸리면 모두 흩어지게 될 테고, 물속에서 수인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를 각개격파 하려는 의도.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진하군은 섭혼마존을 쳐다보았다.

그녀 얼굴의 문양들은 다 사라졌다. 그나마 손등의 불꽃 문양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리고 내공 소모가 극심했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마존님, 먼저 빠져나가십시오.”

섭혼마존쯤 되면 분명 자신의 몸은 구할 수 있는 비책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녀까지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야겠네요.”

그녀가 순순히 나가겠다고 하자 진하군은 다행이라 여기며 정중히 포권했다.

“지금까지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진하군을 보며 웃었다.

“혼자만 살겠다니? 역시 쌍년이죠?”

진하군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본 가장 멋진 쌍년이었습니다. 다음 생에 뵙겠습니다.”

물속에 있던 멸마대 무인들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 하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가 없었다.

당장 갈 것 같았던 섭혼마존이 마음을 바꿨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만, 그럴 수가 없네요.”

“그 친구도 이해할 겁니다.”

검무극, 마존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으니 너무 뭐라 하지 마라.

그러자 그녀는 알 수 없는 이유를 댔다.

“소교주님 때문이 아니라 제가 아직 훈련 중이라서요.”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였다.

섭혼마존과 진하군이 서 있던 곳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구름이 해를 가린 것이 아니었다.

촤아아아아아.

거대한 배가 물살을 가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태어나 이렇게 큰 배는 처음이었다. 진휴가 몰고 오는 파도는 저 배 앞에선 그냥 가벼운 물결처럼 보일 정도로 큰 배였다.

그 배의 선두에 풍천교주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절대회귀 661화

소교주에게 붙은 이유는

“사부님.”

섭혼마존의 외침에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풍천교주가 도착했음을. 저 거대한 배의 선두에 당당히 서 있는 사람이 풍천교주임을.

섭혼마존이 귀한 분을 뵙느라 늦었다고 했었는데, 그게 풍천교주였음을 알 수 있었다.

“풍천교주님까지 오신 겁니까?”

진하군의 놀란 물음에 섭혼마존이 대답했다.

“진 대주는 소교주께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셨는지 모를 겁니다.”

진하군이 검무극을 떠올렸다. 항상 그를 떠올리면 웃고 있는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실없는 농담으로 매번 자신을 놀릴 생각뿐이지만, 그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이 위기의 순간에 저 큰 배가 오게 만드는 사람이니까.

소교주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를 거라고?

“아뇨, 알고 있을 겁니다.”

추측하듯 말했지만, 오히려 확신이 가득한 말이었다.

그때, 물 위에 고개를 내밀고 있던 수인들이 배를 보자 흥분해서 괴이한 소리를 내질렀다. 정확히는 선두에 서 있는 풍천교주를 보고 지르는 괴성이었다.

진하군은 가까이서 보았기에 느낄 수 있었다. 저 흥분과 분노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임을. 섭혼술 속에서 만들어진 수인도 풍천교주의 존재감을 느낀 것이다.

풍천교주가 천천히 팔짱을 풀더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손에서 뭔가가 생겨났다.

쑤욱 하고 뻗어 나온 것은 붉은 기운을 띄는 낚싯대였다.

“자, 오랜만에 실력 발휘 한 번 해볼까?”

쇄애애애애액.

붉은 기운의 낚싯줄이 쭉 뻗어나갔다.

낚싯줄이 지나간 곳에 있던 수인들이 줄줄이 붙잡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마치 인형처럼 날아오른 그들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가 싶더니.

폭! 포록! 포로록!

허공에서 수인들이 귀여운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되어 사라졌다.

쇄애애애액.

다시 허공을 가르는 붉은 기운을 띤 낚싯줄.

이번에는 더 많은 수인이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물방울이 되어 터져나갔다.

풍천교주의 낚시에 걸려 사라진 수인들은 앞서처럼 다시 합쳐지지 않았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어린애들 장난 같은 광경이었는데, 당하는 수인들은 비명을 질러대며 물속으로 숨었다.

“이놈들아, 어딜 가느냐!”

이번에는 풍천교주가 양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낚싯대 대신 거대한 그물이 들렸다.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그물이 바다를 향해 펼쳐졌다.

촤르르르르르르.

이번에는 그물 한가득 수인들이 붙잡혀 날아올랐다. 달아나려는 그들을 그물이 빨아들이듯 잡아당겨서 붙잡은 것이다.

“만선이구나!”

포옥! 폭! 포오옥! 폭폭폭!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 무섭던 수인들이 이렇게 사라질 줄이야.

아니, 허공에서 빛을 받으며 사방으로 알갱이가 되어 터져 나가는 물방울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인들이 모두 사라지자.

풍천교주가 배 아래의 진하군을 내려다보며 유쾌하게 물었다.

“어떤가? 멋있었나?”

사실 진하군은 풍천교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검무극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멋있으십니다.”

풍천교주가 선장처럼 멋있게 다시 팔짱을 꼈다.

섭혼마존이 먼저 몸을 날리며 말했다.

“자, 모두 올라가시죠.”

섭혼마존이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 모두 배 위로 날아올랐다. 배가 높아서 경공이 약한 무인들은 한 번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선체를 박차고 날아올라야 했다.

진하군은 인질이었던 곽주를 데리고 날아올랐다. 곽주는 이 무시무시한 싸움이 진행되는 내내 진하군이 자신을 챙겨주는 것에 감격했다.

그를 데리고 날아올랐지만, 가장 먼저 배에 올라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배 위에 내려섰을 때 곽주가 뒤늦게 고마움을 표했다. 앞서 싸움이 벌어지는 내내 제대로 인사 한번 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인사에 진하군이 나직이 대답했다.

“감사는 그대 누이에게 하시오. 우릴 이곳까지 보낸 사람은 그대 누이니까.”

곽주의 얼굴에 감격이 스쳤다. 누나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꼭 구해주십시오. 누나를 꼭 만나야겠습니다.”

그는 철방 장인인 누나 때문에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누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누나가 얼마나 속상해하고, 얼마나 자책했을지를 걱정했다. 그랬기에 만나면 꼭 말해줄 것이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보다 이 말 먼저.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진하군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꼭 집으로 데려가 주겠소.”

진하군 주위로 멸마대 무인들이 모두 내려섰다.

수하들이 모두 배로 올라오자 진하군이 풍천교주에게로 걸어갔다.

“교주님,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하군이 정중히 포권해서 인사했고, 뒤에서 멸마대 무인들도 일제히 인사했다. 곽주와 대사부인 화송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야말로 지옥 문턱에서 풍천교주를 만난 것이다.

“소교주는 뭐 한다고 친구를 궁지에 빠뜨려놓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나?”

역시 만나자마자 검무극 흉부터 보는 풍천교주였다.

“하긴, 원래 그런 이기적이고 냉정한 사람이지. 사람 생고생시키면서 한 번 와보지를 않거든.”

“그 친구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겁니다.”

진하군이 친구 편을 들어주자 풍천교주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누군지 몰라도 소교주를 상대하는 자가 곤경에 빠져 있겠지.”

그러면서 풍천교주는 습관적으로 뒤를 쳐다보았다. 원래 소교주 욕을 할 때마다 뒤에서 등장하는 그인데, 오늘은 없었다. 그의 눈가에 아주 잠깐 아쉬움이 스쳤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풍천교주는 진하군 옆으로 와서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소교주에게 뭐 뭐 빼앗겼나? 보검이나 보물 같은 거 말이네. 자, 형 같은 사람이니 마음 편히 다 말해보게.”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런 걸 물을 줄 몰랐기에 진하군은 당황했다. 교주님, 저기 밀려드는 파도가 안 보이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래, 처음에는 나도 부끄러워서 감추고 다녔지. 나중에는 다 공유하게 될 거야.”

진하군은 풍천교주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자유분방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기에 검무극과 친해진 것일까? 아니면 검무극과 친해져서 이렇게 변할 것일까?

그렇게 진하군과 인사를 나눈 풍천교주의 시선이 제자를 향했다.

섭혼마존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손에서 끝을 내야 했는데.”

“아니다. 그 정도면 잘 싸웠다.”

풍천교주는 그녀의 싸움을 모두 지켜본 모양이다.

그는 다가오는 큰 파도를 바라보며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푸른 기운이 그의 손가락 끝에 붙잡히듯 피어올랐다.

“이곳에 펼쳐진 혈천강혼술이 너무 강해. 이렇게 강한 강혼술은 나도 처음이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강혼술일 거다.”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말했다.

“잘 보셨습니다. 이번 음모는 수십 년 전부터 준비된 음모였습니다.”

그 말에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은 대사부 화송이었다. 진휴와 그 오랜 세월을 동료로, 친구처럼 보내왔으니까. 그 긴 세월 동안 자신을 속였다.

그러는 사이 파도가 근처까지 닥쳐왔다.

파도에 올라선 진휴는 섭혼마존을 응시하고 있었다.

파도는 원래 밀려오는 속도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파도를 타고 오면서 새로 등장한 풍천교주를 살피고 있었으리라.

밀려들던 파도가 멈췄다. 마치 그림처럼 허공에 높이 뜬 채 멈췄는데, 진휴는 파도를 더 높여서 풍천교주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는 상대가 풍천교주임을 알아보았다.

“미친년이 사부까지 불렀군.”

섭혼마존은 괜히 싸잡혀 욕을 듣게 하는 것 같아 사부에게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풍천교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대 주둥이가 거칠다는 건 그만큼 네가 잘 싸웠다는 증거지.”

그렇게 제자를 다독이면서 한마디 따끔한 말을 진휴에게 던졌다.

“내 제자 욕은 나만 할 수 있다. 알았나, 이 비겁한 늙은이야!”

진휴의 늙은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졌다. 오늘 비겁하다는 말은 충분히 들은 그였기에 튀어 나가는 말도 곱지 않았다.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풍천교를 버리고 마교에 빌붙었다지?”

물론, 풍천교주가 어디 가서 말싸움에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소교주에게 붙었지.”

어찌 순순히 인정하는가 싶더니.

“너희들 모가지를 하나씩 착착 떼어내고 있는 그 소교주 말이야. 그러고 보니 너는 잘못 빌붙은 것 같은데?”

쿠르르르릉!

진휴의 기분을 반영하듯 주위의 파도가 높아지면서 시커먼 먹구름이 밀려들었다.

“그래,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진휴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앞서 섭혼마존과 싸울 때보다 더욱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숨겨둔 실력이 서 푼이 아니라 삼 할은 된다는 듯, 드러내는 기세가 달랐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풍천교주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가 어렸을 적 이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지. 중원에 섭혼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나타났다고.”

지금 진휴가 펼쳐 보이는 섭혼술은 극의에 다다른 경지였다. 다른 무공보다 섭혼술은 재능이 중요했다. 태생적으로 타고나지 않으면 결코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혈천강혼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신의 제자인 섭혼마존을 섭혼술로 이기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 천재 소리를 듣던 그가 틀림없으리라.

“어느 순간부터 소식이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그 재능이 판단력으로 가진 않았나 보군.”

진휴는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그가 기억에 남은 건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다. 자신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는 소릴 들으면서 자랐는데, 그런 사람이 중원에 있다는 말을 듣자, 샘나고 시기하고. 한참 동안 욕했던 기억이 난다.

“이 귀신놀음 하는 바닥이 참 좁지.”

두 사람의 시선이 출렁이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허공에서 얽혔다.

그러자 진휴도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소교주에게 포섭된 거냐?”

풍천교주에게 제일 궁금한 점이었다. 교주 자리까지 내려놓고 소교주를 따르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포섭된 게 아니야.”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납치된 거지. 소교주에게.”

진휴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듣고 있던 진하군은 옅게 웃었다.

그가 왜 납치되었다고 표현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앞에서 검무극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느낌.

너, 내게 납치됐어.

그래, 충분히 공감한다.

물론 진휴는 그 말에도, 그 감정에도 공감하지 못했다.

“감히 내 세상에 제 발로 들어오다니. 스스로 납치당하길 즐기는 모양이군.”

진휴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싸아아아아아아.

세찬 바람에 배에 탄 이들의 옷자락이 휘날렸다. 바람이 점차 세게 불기 시작했다.

곧이어 바다에 물보라가 일기 시작하더니 회오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회오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배 근처 곳곳에 회오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그 숫자는 십여 개가 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점차 물속에서 발생한 회오리는 커졌고,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회오리로 배를 박살 내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회오리에서 무엇인가 올라왔다.

푸아앙! 푸아앙! 푸앙!

그곳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촉수였다. 앞서 섭혼마존과 싸울 때도 등에서 나온 촉수를 사용하던 그였는데, 이번에는 바닷속 거대한 문어발처럼 생긴 촉수들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촉수가 무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하군과 멸마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서 몸을 날렸다.

거대한 촉수가 배를 내리치자 배가 휘청했다.

멸마대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검기를 날렸다.

날아간 검기에 촉수에 상처가 났다.

푸아아악!

촉수에서 푸른 피가 흘러내렸다.

그 피가 갑판에 떨어지자.

치이이이익!

갑판을 녹이면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연이다!”

무인들이 입과 코를 가리며 물러났다.

진하군이 장력을 날려 연기를 멀리 보내며 소리쳤다.

“함부로 베지 마라!”

함부로 벨 수 없는 촉수가 되자 멸마대 무인들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풍천교주는 여전히 뱃머리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촉수 중 하나가 풍천교주를 향해 촉수가 날아들었다.

옆에 서 있던 섭혼마존이 남아 있던 내공을 끌어올려 촉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화르르르륵!

날아들던 촉수가 불길에 타올랐다.

촉수가 울부짖으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다시 올라온 촉수는 풍천교주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배 위는 난리였다. 무인 하나가 촉수에 휘감겨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진하군이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그의 검기에 베인 촉수가 무인을 놓쳤다. 진하군이 흩뿌려지는 핏물 사이로 그를 낚아채서 구해냈다.

차분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풍천교주가 섭혼마존에게 물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파훼법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봐라.”

섭혼마존은 우선 진휴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파도 위에 눈을 감고 서서 촉수를 조종하고 있었다. 그의 몸 주위로 서너 개의 촉수가 그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죽이면 당연히 이 공간이 사라지겠지만, 지금 사부가 그 근원적인 파훼법을 물은 것은 아닐 테고.

“파훼법은 물속에 있습니다.”

촉수가 물속에서 나왔으니 파훼법 역시 저 안에 있을 것이다.

풍천교주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가랴?”

“아, 아닙니다. 제자가 다녀오겠습니다.”

섭혼마존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진하군이 뒤따라 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섭혼마존의 내공이 거의 바닥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진하군이 들어가자 그 모습을 본 멸마대 무인들 몇이 뒤따라 뛰어들었다.

“다들 젊구나!”

그들이 들어간 물속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러자 진휴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풍천교주가 배를 매만지며 말했다.

“근래 살을 많이 뺐는데. 새외의 제자 놈하고 술을 좀 마셨더니 술배가 금방 나오더라고.”

이 상황에서 배 나온 이야기를 한다고? 진휴는 이거 미친놈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두 사람 모두 상대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한순간의 허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눈빛들.

“왜 소교주에게 포섭되었냐고 물었지? 나도 너와 다를 바 없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욕망만 챙기면 그만이었지. 한데 이 가증스러운 소교주는 남부터 챙기는 척 연기를 하더란 말이지. 아직까지는 그 시커먼 속이 안 들켰지만 언젠가는 들킬 거야. 그렇지?”

풍천교주가 큰소리로 웃자 진휴가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다.

“지랄하네.”

그러자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맞아, 그래서야. 당신도 천재 소리 듣고, 나도 천재 소리 듣고 자랐지. 한데 결과는 이거야. 무학에 천재면 뭐해? 간장 종지 같은 소갈머리끼리 어울려봤자 이런 지랄만 나는데. 그래서다. 소교주에게 붙은 이유가.”

풍천교주가 비로소 자신이 처음 꺼낸 말의 대답을 했다.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절대회귀 662화

파도는 피하는 게 아니라 넘는 거다

다르게 살고 싶다고?

“이건 또 뭔 개소리냐?”

진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이었다.

“그래서? 교주 자리 버리고 소교주 심부름이나 하는 인생을 사니까 만족스럽나?”

아니라는 반응을 보고 싶었겠지만, 절대 아닐 거라 확신하고 있었겠지만.

풍천교주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만족한다. 하늘이 내게 선물을 줬다.”

진휴는 풍천교주가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날아갈 듯한 기쁨을 어찌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나도 병신처럼 살아보라고?”

이 풍천교주가 치매에 걸렸든, 뒤늦은 감상에 젖었든, 왠지 너도 그렇게 살아 봐라, 할 거 같았는데. 풍천교주의 입에서는 냉정한 말이 흘러나왔다.

“뭔 소리야? 넌 오늘 내 손에 죽을 텐데.”

“그럼 왜 했지?”

“왜긴. 자랑하려고 했지.”

진휴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 미친 뚱땡이 새끼가 진짜.”

“한 번만 더 뚱땡이라 놀리면 후회하게 될 거다. 아, 잠깐.”

뱃머리에 서 있던 풍천교주가 돌아섰다.

멸마대 무인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온 촉수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위기였다.

무인을 휘감은 촉수가 그의 다리를 생으로 뜯어내려 하고 있었는데 주위에 그를 도울 사람이 없었다.

무인의 다리를 뜯어내려던 촉수가 풍천교주의 일장에 터져나갔다. 형체도 없이 사라졌기에 핏물이 무인에게 튀지 않았다. 무인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후에 절뚝거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풍천교주는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이 말했다.

“조바심 내지 마, 늙은이. 어차피 오늘 죽어.”

등을 돌린 풍천교주에게 금방이라도 일격이 날아들 것 같은 짙은 살기가 날아들고 있었다.

“오늘 너까지 죽으면 이제 내 제자의 시대가 열리겠지.”

진휴 같은 섭혼술의 고수는 당대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했으니까.

물론, 진휴는 차갑게 조소했다. 오늘 둘을 죽이고 자신이 섭혼술의 최고수가 될 작정이었으니까.

“너희가 죽으면 내 시대가 열릴 테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섭혼술은 아주 오랫동안 실전되겠지.”

무슨 뜻이냐는 진휴의 눈빛에 풍천교주는 한 사람을 언급했다.

“넌 소교주 손에 죽을 테니까.”

“너희도 나를 못 죽였는데 소교주가 나를 죽인다고? 혹시 그의 섭혼술에 당하기라도 한 건가?”

풍천교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네가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 그래, 우리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지. 나도 그랬으니까.”

“제자를 사지로 보내고도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그러자 풍천교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죽을 거야.”

“왜 그렇게 장담하지?”

“아까 봤잖아. 젊은 애들이 줄줄이 망설이지 않고 저 물에 뛰어드는 거. 넌 그럴 수 있어? 나도 없어.”

“원래 그런 어리석은 것들부터 죽어 나가는 게 이 세상이지.”

풍천교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지만 여긴 내 세상이잖아?”

자신이 만든 세상에서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다니.

“이 정신 나간 뚱땡이야! 여긴 내 세상이라고!”

“분명 경고했는데, 또 하는군.”

진휴가 인상을 찌푸렸다. 욕은 주로 자신이 내뱉고 있지만, 이상하게 기분은 자신이 더 나빴다. 뭔가를 깨달은 듯한 저 눈빛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펑! 퍼엉! 펑펑!

사방에서 촉수들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다시 생기던 놈들이었는데, 수인들이 물방울이 되어 터져나간 것처럼, 그것들도 아름다운 빛무리를 만들어내며 터져나갔다.

배 위의 무인들이 비로소 숨을 돌리며 안도하던 그때!

푸아아.

물속에서 섭혼마존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이어 진하군이 숨을 내쉬며 나왔고, 멸마대 무인들도 나왔다. 다친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피한 상태였다.

“파훼했습니다.”

풍천교주가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해주었다.

“잘했다, 제자야.”

섭혼마존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사부에게 인정받을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옆에 떠 있는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진 대주 도움이 컸습니다.”

풍천교주가 진하군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자분께서 다 하셨습니다. 저희는 보조 역할만 했습니다.”

말은 그러했지만 진하군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어렵게 파훼했을 것이다.

그들이 배 위로 몸을 날려 올라섰다.

풍천교주가 진휴에게 말했다.

“봐, 내 세상에서는 안 죽는다고.”

진휴는 더 이상 내 세상이라 말하지 않았다. 저것들이 죽었어야 저 얄미운 입을 닥치게 했을 텐데.

진휴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은 물론이고 이제 두 눈에서도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아아악!

파도가 확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 위에 올라선 진휴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풍천교주가 그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 사람아, 나이 먹고 그렇게 무리하다간 쓰러져!”

성난 파도는 더욱 높아졌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그 높은 파도를 쳐다보았다.

저 파도가 덮치면 이 큰 배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물에 빠지면 또 어떤 것들이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

“제자야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피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섭혼마존의 대답에 풍천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도는 피하는 게 아니라 넘는 거다.”

풍천교주가 선 채로 발을 굴렀다.

그의 발을 중심으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콰아악! 와지끈!

사방에서 배의 갑판이 부서지며 튀어 올랐다.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사람이 한 명 올라타면 딱 맞을 거 같은 나무판자들이었다.

“자, 이만 하선들 하게!”

말이 끝나는 순간.

파아앗!

자신들이 타고 있던 그 큰 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출렁이는 바다 위, 모두 풍천교주가 만든 나뭇조각에 올라탔다. 진하군은 무공을 모르는 곽주를 자신이 챙겼다.

“자, 파도가 오면 파도를 타야지.”

휘이이잉!

풍천교주가 만들어낸 바람과 파도가 판자에 올라선 모두를 파도 속으로 밀어붙였다.

풍천교주가 앞장서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나아갔다. 풍천교주의 신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촤아아아아악.

뒤따르던 모든 이들은 보았다. 풍천교주가 그 큰 파도를 사선으로 가르며 오르고 있는 모습을.

섭혼마존과 진하군, 멸마대 무인들이 판자에 올라타고 함께 파도를 탔다. 풍천교주가 일으킨 바람이 뒤에서 그들을 힘차게 밀어주었다.

섭혼술의 세상 속에서 파도를 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진하군은 두렵다는 생각 대신 가슴이 뛰었다. 그를 꼭 붙잡은 곽주 역시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거라 확신했다. 물론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푸아아아아.

그리고 모두 보았다. 풍천교주가 큰 파도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을.

그 꼭대기를 박차며 진휴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풍천교주의 붉은 기운과 진휴의 푸른 기운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마치 두 신선이 하늘에서 맞붙는 것처럼 보였다.

콰아앙!

맑은 하늘을 종이 삼아 번져나가는 두 가지 색채, 그 붉은빛과 푸른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첫 번째 격돌하는 순간, 진휴가 떠올린 생각은 이것이었다.

‘강하다!’

그의 실없던 말들이 그를 약하게 여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딱 한 수만으로 알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두 사람이 허공에서 격돌하자 파도는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모두는 나무판자 위에 서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특히 섭혼마존은 사부의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촤와아아아아악!

진휴의 몸이 순식간에 분열하며 분신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순식간에 풍천교주 주위를 둥글게 둘러쌌다.

진혼분신술(眞魂分身術).

그냥 모양만 똑같은 분신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진휴의 삼분지 일의 위력으로 공격하는 분신들이었는데. 그야말로 진휴의 비기 중 하나.

한데 그것들이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분열한 진휴의 몸이 수십 가닥으로 잘려 나갔다.

어느새 허공에 펼쳐져 있는 수십 가닥의 선.

풍천교주가 만들어낸 무형의 강기들이 거미줄처럼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그 선들에 분신들이 잘리면서 흘린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중에는 진짜 피도 있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놀란 얼굴로 풍천교주를 쳐다보고 있는 진휴의 어깨는 핏물이 흥건했다. 호신강기를 조금만 늦게 끌어올렸어도, 조금만 고개를 늦게 젖혔어도 어깨가 아니라 목이 잘려 나갈 뻔했다.

“무형기?”

보이지 않는 기를 이용해서 병장기로 이용하는 풍천교주의 무공이었다.

예전 환왕과 싸울 때 선보였던 무형기가 다시 발휘된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서늘한 눈빛.

아래에서 말할 때의 풍천교주와 지금의 풍천교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다음 순간.

후우우웅.

주위 공간이 빙글빙글 돌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바다에 서 있던 이들이 현기증을 느끼며 판자에서 떨어졌다. 정신력으로 막을 수 없는 현기증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에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은 새로운 공간에 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에 거울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 거울 속에 풍천교주의 모습이 비쳤다.

풍천교주 앞에 거울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사이한 기운을 내뿜는 그 거울을 풍천교주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진휴의 독문무공인 혼마경(魂魔鏡)이 발휘된 것이다.

상대를 지배하는 궁극의 무공.

혼마경에 빠져드는 순간, 무조건 상대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긴 섭혼마존이 당장 사부를 찾으려 했지만, 사방은 거울만이 가득했다. 거울에 멸마대 무인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사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거울의 미로였다.

‘……사부님!’

거울 속에 이제 진휴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속 깊은 어둠이 너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지니, 이제 나의 명령을 들어라!”

진휴의 구결이 그곳에 울려 퍼졌다. 진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자결해라!”

그 명령에 섭혼마존도,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도 모두 놀랐다. 풍천교주가 그의 말을 따른다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명령을 받은 풍천교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라면 진휴를 보면서 말해야 하는데, 풍천교주의 시선은 여전히 거울을 향해 있었다.

“흰머리가 언제 이리 많이 났지? 이게 다 소교주 때문이다.”

그 순간 진휴는 경악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혼마경을 봤는데도 통하지 않다니?’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거울 너머에 있던 풍천교주가 슥 진휴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진휴는 자신이 거대한 절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풍천교주와 해볼 만한 싸움이라 여겼는데, 실제 풍천교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대로는 못 이긴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의 방법뿐.

다음 순간!

스스스스스.

사방의 거울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주위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처음의 그 대청에 서 있었다.

이제 진휴의 눈빛이 바뀌었다. 살기가 가득하던 자리에는 알 수 없는 비장미가 자리 잡았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진휴가 주문을 읊자, 주위 사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기울어졌고, 화병에 피어있던 꽃이 시들었다. 창문이 저절로 열렸고, 향이 피어올랐다.

“광혼술(狂魂術)이 발동되었다.”

광혼술은 앞서 발동했던 멸천강혼술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광혼술을 쓰면 자신 역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참혹한 고통을 겪다가 죽게 되었다.

“젠장! 내가 이렇게 끝내려고 지금까지 버텨온 게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진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혼마경이 통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소교주놈!”

이게 다 검무극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곳에 저들을 보낸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때 풍천교주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너 따위가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에 섭혼마존도 진하군도 내심 놀랐다. 만날 소교주 흉만 보던 풍천교주였는데.

진휴는 광혼술로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한방에 모든 힘을 폭사해서 동귀어진하려고 했었는데.

진휴의 표정이 굳어졌다. 광혼술이 발휘되지 않았다.

그는 놀라고 당황했다. 다시 광혼의 기운을 일으켰지만, 광혼술은 아예 발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의미는?

“광혼술을 파훼했다고? 대체 어떻게?”

그는 광혼술을 발휘할 때 아무 방해도 하지 않았었는데?

풍천교주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왔다.

“예전의 나였다면 나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설령 참혹한 고통 속에서 죽더라도, 절대 혼자 죽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게 우리지. 오직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것들.”

“닥쳐라!”

진휴가 다시 한번 광혼술을 일으키려던 그때.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진휴가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뻥 뚫린 가슴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박혀 있었다.

“무형창?”

광혼술이 파훼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흥분했다. 숨 한 번 잘못 쉬어도 목숨을 빼앗기는 그런 고수를 앞에 두고서 이렇게 방심하다니?

“……어떻게 된 거냐?”

진휴의 물음에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위가 바뀌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곳은 거울이 있던 공간이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죽어가던 진휴였다. 이 공간은 아까 자신이 열었던 그곳이었다. 다시 열지 않았는데.

“왜 이곳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생각.

“설마!”

진휴는 알 수 있었다. 아까 돌아갔던 대청이 원래 자신의 공간이 아니었음을.

“그래, 아까 그곳은 내가 연 곳이었다.”

풍천교주가 시공이환술로 바깥의 대청과 똑같은 장소를 열었던 것이다.

겉모양은 똑같지만, 전혀 다른 공간.

그랬으니 그곳에 있던 기물들을 아무리 움직여도 광혼술이 발휘되지 않았던 것이고.

광혼술이 발휘되지 않았기에 그 놀람과 혼란으로 마지막 싸움에서 그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정신만 바짝 차렸다면 하다못해 내공이 바닥난 섭혼마존이나 저 멸마대 놈들이라도 죽여버렸을 텐데.

진휴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져나왔다. 직접 당했음에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광혼술이 준비된 것도 알아차리고, 이런 상황까지 다 계산했다고?”

“여긴 내 세상이라고 미리 알려줬잖아?”

설마 그때부터 이 순간을 계획했다고?

진휴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음을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죽어가는 그의 두 눈에 분노와 아쉬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다른 삶 좋아하시네. 평생을 허상 속에서 살아온 주제에!”

풍천교주를 모욕하고 싶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허상이 내 세상이었다. 여전히 내 세상이고.”

그러면서 뜻밖의 말을 해주었다.

“내가 왜 이렇게 강해졌는지 알려줄까?”

풍천교주의 시선이 진휴가 아니라 섭혼마존을 향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에게 전했다.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니까, 섭혼술 속 내 세상이 더 강해졌다.”

섭혼마존의 두 눈이 떨렸다.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 사부가 하나의 이정표를 세워주는 순간이었다.

반면 진휴의 눈빛이 분노로 떨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느꼈기에 더 화가 났다.

마지막까지 다른 인생 타령이라니. 죽는 순간에 그딴 말 듣고 싶지 않았다. 정말 싫었다.

“……끝까지 지랄이네.”

아니, 지랄은 이런 거지.

풍천교주는 서서히 감기는 진휴의 눈꺼풀을 강제로 열었다. 진휴가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풍천교주가 자신의 뱃살을 어루만지며 유쾌하게 물었다.

“나 뱃살은 좀 빼야겠지?”

절대회귀 663화

이 무대에 난입해야겠네

진휴의 숨이 끊어지자, 그가 만든 세상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슷.

모습을 드러낸 곳은 맨 처음 도착했던 대청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진휴의 시체가 비로소 이번 일이 모두 끝났음을 알려주었다.

‘드디어 우리 세상으로 돌아왔구나.’

진하군은 안도하며 다친 동료들부터 살폈다.

부상이 심한 수하에게는 내상약을 먹이고 금창약을 직접 발라주었다.

다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수하 중에서 경공이 가장 뛰어난 이를 할아버지께 보냈다.

“우리가 무사하다고 전하도록!”

할아버지를 도우러 가진 않을 작정이다. 지치고 상처 입은 몸으로 가봤자 오히려 방해만 될 테니까. 검무극과 할아버지가 함께 있으니, 자신이 무사하다는 소식만 전하면 된다.

대사부 화송이 진하군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자네 볼 면목이 없네.”

아무리 동료였던 진휴가 악인이었기에 당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무기력하게 당했다.

진하군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였으니까. 넘어졌으니 일어나야지.

“이번 일을 계기로 대정반혼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화 사부께서 그 일을 맡아주십시오.”

화송이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을 떠나기 전, 진하군은 풍천교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멸마대 무인들도 일제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섭혼마존과 풍천교주가 아니었다면, 이곳 대청에서 멸마대 무인들 모두 죽었을 거다.

자신은 할아버지를 협박할 인질이 되었을 테고.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이었으리라.

“오늘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섭혼마존이 공을 검무극에게 돌렸다.

“그 은혜는 소교주님께 갚으세요.”

진하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함께 사지를 돌파한 친구이자 전우였다.

특히 진하군은 그녀가 해준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섭혼술 세상 속에서 한없는 무기력을 느꼈던 그때 그녀가 해준 그 말을.

―다 자라면 호랑이가 무섭지, 구렁이는 무섭지 않은 법입니다.

이 말은 자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각오를 하게 했다.

진짜 호랑이가 되었을 때 봅시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풍천교주의 우렁찬 목소리.

“은혜를 왜 소교주에게 갚나? 우리에게 갚아야지. 내게 갚아!”

진하군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이번 일로 풍천교주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유쾌한 사람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소교주에게 빼앗긴 목록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진하군의 농담에 풍천교주가 큰소리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진하군에게 자네는 뭐 뭐 빼앗겼냐고 장난쳤던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피해자 모임을 크게 열어보자고! 그리고 당연히 그 모임 수장은 나라네!”

듣고 있던 섭혼마존도 미소를 지었다. 저 모임에 들어갈 사람이 꽤 있을 거다.

그녀는 이번 일로 진심으로 사부에게 감탄했다.

누군가의 일을 보면서 너무 쉽게 한다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고수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알 수 있다. 사부가 진휴를 쉽게 해치운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대의 심리를 이용하고 주변 상황과 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기에 그를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을.

섭혼술은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무공, 오늘 사부는 그 섭혼술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쪽 세상에서는 피해자 모임의 수장, 저쪽 세상에서는 절대자, 그게 바로 자신의 사부였다.

“자,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두 사람과 작별하고 대청을 나선 진하군이 곽주에게 말했다.

“자, 이제 누님 만나러 갑시다.”

곽영은 지금 천마신교의 안가에 있었다. 우선 검무양을 만나 곽주를 그에게 인계할 생각이다.

곽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멸마대 무인들은 자신을 챙겼다.

자신이 뭐라고. 자신은 고작 철방 장인의 동생에 불과한데. 무공 한 줌 모르는 일반인에 불과한데. 한데 그들은 목숨보다 더 자신을 챙겼다.

진하군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주위 멸마대 무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오늘 우리 임무는 바로 그대를 구하는 것이었소.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죽고 한 사람이 남았더라도, 그 한 사람이 당신을 구했을 거요.”

곽주가 주위에 서 있는 멸마대를 쳐다보았다.

아, 이런 사람들이 정파 무인들이구나.

그 현란하고 혼란스럽던 세상에서 묵묵히 자신을 지켜서 이곳 현실로 데려오는 사람들. 반드시 약속을 지켜내는 사람들.

곽주는 그들 모두에게 깊이 허리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그곳에는 풍천교주와 섭혼마존만이 남았다.

풍천교주는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섭혼마존도 한 걸음 뒤에서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앞서 사부가 해줬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르게 살려는 노력이 나의 세상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때, 풍천교주가 입을 열었다. 하늘을 바라볼 때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는데,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우릴 이렇게 고생시키고 코빼기도 안 비치는 사람 만나러 가야지. 잊고 살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만 부르는 사람 만나서 그때 그 교주 여기 왔다, 해야지.”

말은 그러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검무극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으니까.

“소교주님도 쉽지 않은 싸움을 하고 계실 겁니다.”

처음에 도착해서 풍천교주가 소교주 흉을 봤을 때 진하군도 똑같이 말했다. 물론, 풍천교주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도 곤란하겠다. 네 소교주는 연이다, 연.”

풍천교주가 먼저 걸음을 옮기며 덧붙여 말했다.

“바람이 거셀수록 더 높이 나는 연.”

* * *

정체가 드러난 천애거사 화율청은 무림맹주 진패천에게 검무극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손자를 살리고 싶으면 죽이라고.

하지만 진패천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오늘 이곳에 관객으로 왔다면서. 적어도 검무극이 이 무대를 비극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그리고 독왕과 마불이 그들을 구할 거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란 화율청의 자신감에 검무극은 더 큰 자신감을 보였다.

“내 친구를 도우러 과연 그들이 갔을까?”

검무극의 그 말에는 진하군이 무사할 거라는 자신감과 확신이 있었다.

“허풍 떨지 마라, 소교주.”

화율청의 여유에 검무극도 여유로 대응했다.

“허풍은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떠는 거지. 아마 지금쯤 남은 날개 하나도 떨어지고 있을 거야.”

소정락은 이미 죽었고, 섭혼술의 고수 역시 처리되고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화율청이 진패천을 응시했다. 오늘 어디까지나 그의 목표는 진패천이었다.

“판단은 자네가 하게. 다만 나중에 후회하지는 말게.”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혈육을 잃은 진패천에게 손주들의 안위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약점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검무극에 대한 진패천의 믿음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진패천이 단호히 대답했다.

“내 판단은 이미 끝났네.”

이미 검무극을 믿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진패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검무극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보낸 사람이 하군이를 못 살린다면, 그곳에 맹주님과 제가 있어도 못 살릴 겁니다.”

그 말에 진패천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혹시 섭혼마존을 보냈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감과 동시에 드는 불안함.

화율청이 그 불안을 찔러왔다.

“새 섭혼마존이 아직 애송이라는 건 온 무림이 다 아는 사실인데. 소교주는 생색만 내려는 거네. 하군이를 구하려 했다고.”

진패천이라고 어찌 젊은 섭혼마존에 대해 모르겠는가? 아무래도 전대 마존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을 터.

그럼에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것은 그 젊은 섭혼마존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단호한 검무극의 대답에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율청이 조롱하듯 탄식했다.

“어리석도다! 정말 어리석도다!”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어리석은 건 당신이야.”

화율청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난데없는 말이 나왔다.

“내가 불안증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잖아?”

“불안증?”

마교의 소교주가 불안증이 있다고? 소교주와 불안증, 절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 불안증이야말로 나를 괴롭히는 고통이자 동시에 나의 가장 큰 힘이지. 그게 이런 거야. 아, 한 사람만 보냈다가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상대가 더 강할 수도 있잖아? 또 다른 놈이 도우러 오면? 변수가 생기면? 이런 온갖 걱정을 다 하는 사람이 나거든. 그리고 그 걱정의 결과가 이거다.”

검무극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그래서 풍천교주님도 함께 보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패천의 표정이 풀어졌다.

섭혼마존 한 사람이라면, 그래, 솔직히 불안했다. 한데 풍천교주까지 갔다면?

검무극의 말이 옳다. 섭혼술을 쓰는 상대라면 자신과 검무극보다 그들 두 사람이 더 낫다.

“그럼 됐네.”

정말 됐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반면 화율청의 표정이 굳어졌다.

“또 허풍을 떠는군.”

화율청이 진패천을 설득했다.

“소교주는 지금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네.”

진패천이 가만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죽을까 봐, 겁을 내고 있군.”

화율청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다. 그 역시 이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상태였기에, 예전처럼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진패천이 화율청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지금껏 한 번도 자네 감정을 읽으려 한 적이 없었네. 생각해 보니 그게 오만이었지.”

맹주이기에 바빠서?

아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모두가 자신의 눈치를 살폈으니까.

천애거사가 자신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기분을 맞춰줬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삶을 살아왔었으니까.

“이건 모두 내가 자초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저 가면을 쓰고 살아온 그를 용서할 생각은 없다.

“내 손자의 목숨을 두고 일을 꾸민 순간, 이미 자네와의 모든 인연은 끝이 났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마는, 이 한 가지만은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물어보세. 평생 자네가 해온 협의, 그건 어떤 마음이었나? 그 역시 모두 가식이었나?”

진패천의 물음에 화율청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왜? 자네의 협은 진짜고, 내 협은 가짜인 것 같나? 솔직히 말해봐, 자넨 나를 의식했던 적이 있었을 거야. 맹주인 자네보다 더 존경받는 협객으로 추앙받는 내가 싫었던 적도 있었을 거야. 아닌가?”

진패천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정말 그런 적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감정이었다. 이내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마음으로 친구를 대했으니까.

화율청이 더욱 집요하게 진패천을 파고들었다.

“자네가 나를 죽이면 내 도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정말 내가 수십 년간 정체를 감춘 악인이라 여길까? 아니면 자네가 나를 질투해서 죽였다고 여길까? 과연 이전처럼 자네를 존경하고 따를까?”

화율청은 진패천을 흔들어댔다. 오랫동안 진패천을 옆에서 봐온 그였기에, 어떤 말이 비수가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진패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마음으로 나를 볼지도 모르지.”

진패천은 어딘지 모르게 초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화율청이 흔들어대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괜찮네. 내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진패천이 드디어 진하군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어쩌면 진하군은 마정사 세 사람 중 가장 늦게 후계자가 되지만 가장 먼저 무림맹주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 자네의 협을 인정하네. 훌륭한 삶을 살았어.”

그때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같잖은 세 치 혀로 맹주님을 흔들어대는 거냐? 세 치 혀에는 세 치 혀로!

“당신은 그 협을 진짜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가짜잖아? 당신에게는 협행을 쌓을수록 맹주님에게 신뢰를 쌓는 일종의 임무였을 테니까. 차라리 암흑궁에 대한 충성심이 깊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주장해. 그건 인정해 줄 테니까.”

정곡을 찔린 화율청의 눈가가 꿈틀했다. 정확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만약 그 협이 진짜였다면, 당신을 지켜주던 소정락이 독공 실험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게 했어야지. 섭혼술로 사람들을 해치고 마지막에는 자결하게 하지 않았어야지. 적어도 그 협만은 진짜였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런 수하들 없이 혼자서 맹주님만을 노렸어야지.”

화율청은 계속되는 검무극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이 말들은 검무극이 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진패천에게 하는 말이었다. 협의라 새겨진 칼집에서 나온 독비수에 찔려 아파하실 필요 없다고.

“뭐? 가짜 협이라도 해냈다고? 없는 것보단 낫지 않냐고? 네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협을 행하는 더 훌륭한 사람이 있었을 거다. 독과 섭혼술을 쓰는 수하를 두지 않은 진짜 협객이. 그러니 그 가증스러운 입으로 맹주님께 협을 논하지 마라.”

진패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찌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 한 말임을.

반면 화율청은 무서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저렇게 말을 많이 했는데 한 마디 반박도 못 했다.

눈빛에 담긴 감정은 살기보다 더 짙은 암흑의 기운이었다.

“그래, 지금 이 모습이 당신이잖아?”

화율청이 자신을 드러냈다.

본연의 기도를 드러낸 화율청의 기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지난 삼백 년 어둠 속에서 힘을 키워온 암흑궁의 절대고수.

그때 진패천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 비록 관객으로 왔지만, 이 무대에 난입해야겠네. 그래도 되겠나?”

그러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이 무대는 맹주님의 무대였습니다.”

검무극이 한 걸음 물러났고, 진패천이 앞으로 나섰다.

“아, 그리고 이 무대의 막은 내가 내리지.”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무림맹주가 되고선 내 본연의 검술을 발휘하지 못했지. 맹주가 체통 없이 그리 거칠고 난폭한 검술을 발휘할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가 드러내는 기도 역시 더 난폭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고요했다.

평소 그의 기도처럼 눈을 뜰 수조차 없는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다가 아니었다.

어둠 속의 바다는 더없이 고요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제부터 저 바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에.

화율청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암흑 기운이 더욱 강력해졌다. 그 기운에 주위에 있던 대나무들이 시들기 시작했다.

“너희 같은 것들을 하군이 시대로 보낼 생각은 없다.”

이제 화율청을 ‘너희 같은 것들’이라 칭하면서 제대로 무대에 오른 진패천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너희들은 내 시대의 막을 내리면서 함께 퇴장시키겠다.”

절대회귀 664화

내겐 다 들린다

진패천의 몸에서 거칠고 패도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바다 저 멀리에서 고요한 울음이 들려왔다.

무림맹주 진패천은 그 어둠 속에서 오래된 그리움을 찾았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미친 듯이 싸우던 그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체면을 위해 선수를 양보하지 않고, 죽이고 싶은 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던 그 시절의 자신을.

그래, 자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남들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그런 때가, 아주 짧게나마 있었다.

지켜보던 검무극은 오늘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느꼈다.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십시오. 맹주님이 어떤 분인지.’

사실 검무극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는 진패천의 무공을 견식 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검을 뽑는 화율청의 몸 주위로 어둠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 기운은 뱀처럼 그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암흑궁의 정수를 보여주듯 그 기운은 요사스러웠고 얼어붙은 손으로 심장을 꽉 쥐는 느낌을 주었다.

화율청이 앞서 진패천이 했던 말을 정정했다.

“이 시대의 막을 내릴 사람은 네가 아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암흑의 기운이 주위를 잠식하며 더욱 짙게 퍼져나갔다.

이 불길한 기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강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서운 기세를 보면서도 진패천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진패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은 강자와의 싸움을 앞둔, 맹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의 기쁨이었다.

지켜보던 검무극은 궁금했다.

과연 화율청은 암흑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저 정도 고수라면 화무기의 존재를 알고 있으리라.

조금 전에 그가 말한 이 시대의 막을 내릴 사람은 바로 화무기를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검무극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화무기는 없는 사람처럼 생각했다. 자신이 회귀하고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가 등장하는 시기만큼은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이 모든 준비가 끝냈을 때, 그가 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아버지와 바둑을 두다가, 혈천도마와 책을 읽다가, 그러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화무기를 죽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어딜 다녀왔느냐고 물어보면, 잠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왔습니다, 제가 둘 차례죠?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그때 검무극의 머리 위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안개 낀 대나무 숲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를 시작으로 무대의 막이 올랐다.

비가 바닥에 떨어지던 그 순간!

진패천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떤 소리도 없었고, 도약하는 모습도 없었다.

화율청이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어느새 진패천은 그의 머리 위에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마치 저 앞에 있던 사람을 자신의 머리 위로 떼어다 붙여둔 것만 같았다. 그만큼 진패천의 경공은 빨랐다.

빛처럼 빠르게 내리치는 검.

쇄애애애액!

빛과 빛이 교차했다. 진패천이 빛이라면 화율청도 빛이었다. 화율청이 검으로 진패천의 검을 쳐냈다.

“맹주가 기습을…….”

기습한다고 조롱해서 마음을 흔들려고 했지만, 화율청에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카앙! 카아앙!

진패천의 매서운 공격이 이어진 것이다.

선공을 양보하지 않은 무림맹주였다. 이제 겉치레 따윈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흙을 상대의 눈에 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그였다.

다시 말해 그의 족쇄가 풀어졌다는 의미.

쉭! 쉭!

요혈을 찔러오는 진패천의 공격은 강하고 빨랐다. 자고로 강하면 느리고, 쾌를 위해 강을 포기해야 하는 법인데, 진패천은 두 가지를 다 가졌다. 그는 빠르고 강했다.

그리고 화율청은 그 강한 공격을 모두 받아냈다.

보통 고수의 검이라면, 부러져도 벌써 부러졌을 텐데. 화율청의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강력한 암흑기운이 검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화무기가 사용했던 검술이 아니다.’

자신은 화무기와 제대로 붙어보기도 전에 죽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했다.

그는 분명 이런 암흑의 기운을 내뿜는 검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화무기는 다른 무공을 썼다.’

그래, 아무리 강해 보여도 저 무공으로 아버지의 구화마공을 이길 수는 없었을 거다.

이 싸움을 보면서 검무극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낸 것이다.

서로를 향해 거칠게 날아드는 두 사람의 검, 그들 모두 수십 년을 쌓아둔 울분이 검에 담겨 있었다.

채앵! 챙! 채앵! 챙챙!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두 검이 마주치며 만들어내는 격타음은 마치 악공들의 합주처럼 들렸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지 않았다. 악기는 계속 빨라지며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허공을 수놓았다 사라지는 검선들.

선들은 화공이 그리는 그림처럼 보였다.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선들이 수없이 그려졌다 사라졌지만,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

검무극에게는 아름다운 선들이었다. 두 고수의 평생의 무학이 담긴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이런 고수들의 대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연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행운이었다.

검무극은 경외심을 가지고 진패천의 무공을 지켜보았다.

맹주는 무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자신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랬다면 멀리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진패천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다 보여주고 있었다. 나중에 적이 될 수도 있는 자신에게.

이것이 바로 무림맹주 진패천의 그릇이었다. 마교 소교주는 머리까지 푹 담글 수 있는 아주 큰 그릇이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 마음에 보답하는 건, 일부러 지켜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싸움보다 열심히 두 사람의 싸움을 마음에 각인했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는 검무극은 이 싸움에 난입할 생각이 있었다.

만약 진패천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 작정이었다. 나중에 진패천의 원망을 듣는 건 나중 문제였다. 절대 이 싸움에서 그를 죽게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자 그 생각이 바뀌었다.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저 싸움에 끼어들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두 사람의 싸움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았다. 틈이 보이는 순간 끼어들 틈도 없이 이 싸움은 끝나버릴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실력은 대단했다.

검이 부딪치는 연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파파파팍!

화율청의 팔과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이럴 때 유리한 상황을 즐기며 한마디 대화를 던질 법도 했는데.

진패천은 사냥에 몰두한 맹수처럼 상대를 더욱 거세게 몰아붙였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대단한 초식이 아니라도 좋다. 상대를 죽일 수만 있다면.

검무극은 그런 진패천의 모습을 보자 할 수만 있다면 이 싸움을 이안이나 서대룡, 다른 수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봐라, 저기 무림맹주도 단 한 순간 방심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너희가 뭐라고!

물론 그 너희에는 자신도 포함했다.

화율청이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건 진패천이 의도적으로 허용한 것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팍!

수십 개의 검기가 바닥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검무극도 처음 보았다. 검기가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무공은!

진패천의 독문무공 제왕검식(帝王劍式)이 발휘된 것이다.

제왕검식 제사식 천지개벽(天地開闢).

수십 개의 검기가 땅을 뚫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무림맹주가 되고 그는 제 삼식 이상을 발휘한 적이 없었다.

제 사식부터 오직 살상을 위한 초식이었기에, 굳이 이 패도적인 무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화율청이 검기를 피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할 곳은 공중뿐이었다.

바로 그때 제 사식과 연계된 오식이 발휘되었다.

제왕검식 제오식 비검난무(飛劍亂舞).

허공에 노출된 그를 향해 수십 발의 검기가 쏟아져 날아갔다. 마치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드는 것과 같았는데, 속도가 달랐다.

그야말로 기관에서 쏟아져 나가는 것처럼, 그야말로 빛처럼 빨랐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쉭!

아래와 정면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화율청은 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최대한 검을 휘둘렀다.

퍼퍼퍼펑!

미처 검으로 막아내지 못한 검기가 그의 몸에 적중되었다.

화율청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진패천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쉬이이이이익.

한 줄기 검기가 바닥을 스치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반토막 내버릴 공격이었다.

화율청이 있던 자리를 검기가 쓸고 지나가는 그 순간,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암흑 기운을 이용해서 어딘가로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진패천의 등 뒤였다.

파아앗!

진패천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하지 못했다면 팔이 잘렸을 공격이었다.

지켜보던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진패천이 검에 베여서도 아니고 화율청의 움직임이 전광석화처럼 빨라서도 아니었다. 진패천의 어깨를 벤 공격이 정말 빠른 쾌검이어서도 아니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그가 진패천을 공격하던 그 순간, 검무극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화율청이 움직이는 소리도, 검이 허공을 가르는 그 소리도.

아무리 쾌검이라도 찰나간에 소리가 나는 법인데.

마치 그의 세상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진패천이 공격을 허용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소리 없는 검.

바로 화율청의 독문무공인 암천무성검법(暗天無聲劍法)이 발휘된 것이다.

검무극은 지금 이 공격이 얼마나 막기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청각에 의지할 수 없었다.

상대가 쾌검을 사용하는데 오직 눈으로 봐야 한다.

진패천과 화율청쯤 되는 고수라면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다 써서 싸운다. 당연히 청각은 시각 다음으로 중요한 감각이었고.

특히 상대가 쾌검을 쓴다면 특히 청각이 중요하다.

한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그리고 이 공격이 까다로운 가장 결정적인 한 가지는 바로 이것이다.

소리가 없으니 날아드는 공격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가늠할 수도 없다는 점.

그러면 결국 언제나 가장 강한 공격으로 날아든다고 가정하고 막아야 한다. 자연 내공 소모가 극심할 수밖에 없고.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맹주님의 싸울 날을 위해 준비한 무공이 바로 이것이구나!’

화율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시대의 막은 내가 내려주지.”

말이 끝나는 순간!

카아앙!

두 번째 공격이 막혔다. 그래, 맹주쯤 되면 한 번은 본능적으로 막을 수 있겠지만.

한데 세 번째 공격도 막혔다.

순간 화율청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그때 진패천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내겐 다 들린다.”

화율청은 물론이고 검무극도 놀랐다.

검무극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화율청은 믿지 않았다.

“몇 번 운이 좋았다고 허풍을 치는군.”

화율청이 번쩍하는 순간, 다른 곳에서 다른 곳을 찔러 갔다. 절대 막을 수 없었다. 소리뿐만 아니라 그 어떤 기운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이는 무공이었으니까. 오직 이날을 위해 갈고 닦았던 무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패천은 다음 공격까지 막아냈다.

바로 그때!

거대한 검기가 소리 없이 진패천의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혔다.

꽈아아앙!

검을 휘두르는 공격뿐만 아니라 이 검기 공격 역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피어오른 연기가 가라앉자 진패천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그의 옆으로 깊은 구멍이 파여 있었다.

만약 정통으로 맞았다면 큰 부상을 당했을 위력이었다.

하지만 진패천은 그 공격마저 피했다.

“정말 들린다고?”

놀란 그가 어둠 속으로 숨었다.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졌다. 마치 빛이 없는 곳에서 유일한 등불을 훅하고 꺼버린 것만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화율청이 암흑의 기운을 이용한 무공을 발휘했음을.

진패천도 검무극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화율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군.”

놀람과 허탈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적어도 이 어둠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는 듯 보였다.

“진패천.”

그가 처음으로 진패천의 이름을 불렀다.

진패천은 자신의 이름이 불린 이 순간이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맹주가 된 이후 누가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불렀겠는가?

그러고 보니 친구로 지낸 그 오랜 세월 동안 화율청 역시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네가 싫었다.”

그는 처음으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 드러낸 감정은 미움이었다.

“정파 무인들을 위한답시고 가식 떠는 모습이 정말 싫었지. 네가 한 일 중 대부분은 무림맹주가 아니었다면 하지도 않았을 일이었잖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진패천의 마음을 뒤흔들려 한다는 것을. 이 어둠 속이 심마를 불러오는 효과를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천마호신공이 자신을 지켜주며 발동하기 시작했으니까.

과연 맹주는 이 어둠의 기운을 막아낼 수 있을까?

진패천은 그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진패천의 검이었다.

쏴아아아아아.

환한 빛을 머금으며 검이 빛났고, 그 빛 때문에 진패천의 얼굴이 비쳤다. 굳건한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진패천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촤아아아악!

어둠의 장막이 그의 검에 잘려 나갔다. 마치 시커먼 천이 찢어지듯 어둠이 갈라지면서 빛이 들어왔다. 어둠을 찢고 빛으로 걸어 나가며 진패천이 말했다.

“이제는 나를 더 싫어하게 될 거다.”

절대회귀 665화

누군지 연연하지 마십시오

이건 진패천을 더 싫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화율청의 눈앞에서 찢어지는 저 어둠의 장막은 절대 찢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암천파심술(暗天破心術).

그곳에 갇히면 출구가 없는 어둠 속을 헤매다 결국 심마에 빠져들어 허점을 드러내게 되는 비기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진패천이 그것을 파훼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렇게 쉽게 찢고 나와서는 안 되었다.

촤아아아아악.

어둠을 찢고 나온 진패천이 물었다.

“왜 네가 밝은 곳에 있나?”

나를 어둠에 가둘 게 아니라 네가 어둠에 숨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

상대를 죽이기로 마음먹자 진패천은 오직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원래 자신은 이런 성격이었다. 죽인다면 반드시 죽이고, 살린다면 반드시 살리는. 이랬던 사람이었기에 맹주 자리에 올랐던 것이고.

이 순간 진패천은 홀가분했다. 잊었던 자신을 찾은 기분이었고, 이 오랜만의 일탈과 자유가 주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스스스스스스.

그가 찢고 나온 곳이 점차 빛으로 번져나가면서 내렸던 어둠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어둠 속에 있던 검무극도 모습을 드러냈다.

화율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나온 거지?”

그러자 진패천에게서 하나의 무공 이름이 나왔다.

“일심광검(一心光劍).”

그 말에 화율청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했다.

“정심결(正心訣)의 대성을 이뤘단 말인가?”

정심결은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무림맹의 호신 심법으로 천마신교에 천마호신공이 있다면 무림맹에는 정심결이 있었다.

정심결은 오직 무림맹주에게만 전수되는 구결로 대성을 이루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고 알려졌는데 역대 맹주 중에서도 대성을 이룬 이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일심광검은 그 정심결의 대성을 이뤘을 때 발휘할 수 있었다. 진패천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한 번도 내게 정심결의 대성을 이뤘다고 말하지 않았잖아?”

대번에 화율청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실력을 숨겼군.”

지난 세월 진패천과 친구로 지내면서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실력을 숨겨도 너무 많이 숨겼다.

진패천이 담담히 대답했다.

“너만큼은 아니겠지.”

생각해 보면 일부러 실력을 숨긴 것은 아니었다. 무인이 자신의 무공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무공을 드러내고 자랑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성취를 그가 알지 못했을 뿐.

어쩌면 너무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것이 오히려 그가 자신을 아는 데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직 숨겨둔 것이 더 있지 않나?”

진패천의 물음은 단지 추측만이 아니었다.

암천무성검법도 안 통하고, 암천파심술도 안 통했음에도, 화율청은 달아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분명 숨겨둔 한 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후우, 답답하군.”

정말 답답했는지 화율청이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높은 대나무 꼭대기의 작은 잎에 올라섰다.

진패천도 훌쩍 몸을 날려서 그와 조금 떨어진 곳의 잎에 올라섰다.

검무극이 두 사람과 멀찌감치 떨어진 대나무에 올라섰다.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대나무 숲, 그리고 내리는 비.

정말 끝내주는 무대였다.

검무극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는 곧 그칠 것 같았다. 아마 비가 그쳤을 때쯤에는 이 싸움도 끝이 나 있으리라.

“우리의 복수는 네가 막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지.”

화율청은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이 있었다.

“넌 이해할 수 있잖아? 이 감정이 어떤 건지.”

화율청이 또다시 진패천의 아픔을 파헤치고 들어오자 검무극이 나섰다.

“너와는 다르지.”

화율청의 차가운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너희 복수는 잘못된 복수니까. 아, 네 잘못이 아니겠지. 너희들을 복수의 화신으로 키워낸 사람 잘못이겠지.”

화율청의 표정이 굳어졌다. 더 기분 나쁜 말이었다. 자신이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네 복수를 이해하지 않느냐고 맹주께 물었나? 맹주님께서 어떻게 이해하지? 맹주님은 검을 손자에게 쥐여주며 대를 이어 복수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닌데. 거기서부터 너희들은 틀렸다.”

화율청이 버럭 소리쳤다.

“네까짓 게 복수에 대해 뭘 안다고!”

복수에 대해 뭘 아느냐고? 내가 화무기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

오직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이번 생에서의 복수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누군가를 향한 가장 멋진 복수는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했던가?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나는 잘 모르지.”

그때 진패천은 보았다. 검무극의 두 눈이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음을. 왠지 그 누구보다 복수란 감정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깊은 눈빛을.

그 빛나는 눈이 화율청의 의도를 꿰뚫기 시작했다.

“이제 복수 타령은 그만하시지. 그 또한 진짜가 아니잖아?”

검무극의 추궁 같은 물음에 화율청은 흠칫 놀랐다.

“이번 일, 복수 때문이 아니지?”

검무극은 회귀 전 인생에서 이들 배후 세력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십이지왕이 되어 무림을 지배했다. 복수를 위해 마정사 세 수장을 죽였다는 단 한 마디의 발표도 없었다.

“처음에는 복수 때문에 시작한 일이겠지만, 언젠가부터 달라졌을 거다. 삼백 년이란 긴 세월을 내려왔음에도 그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겠지.”

검무극이 화율청의 두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당히 말해. 이 무림을 차지하고 싶다고. 그런 꿈이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맹주님 옆에 숨어 있을 수 있었다고.”

진패천은 화율청의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그들의 목표가 무림일통이었음을.

진패천이 엄중한 목소리로 화율청에게 말했다.

“이제 너를 이해해 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

진패천이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챙! 챙! 채앵!

두 사람이 대나무 위를 함께 달리며 격돌했다.

진패천의 싸움이 바뀌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더없이 거칠고 패도적이었는데, 이제는 차분하고 품격 있는 평소의 검으로 돌아와 있었다.

“왜 싸움 방식이 바뀌었지?”

화율청의 물음에 진패천이 담담히 말했다.

“아까는 사적인 감정으로 너를 대했다.”

자신을 배신한 오랜 친구로, 손자의 목숨을 이용해서 복수하려는 자로.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너희가 무림일통을 꿈꾸는 자들이라면 응당 무림맹주로서 너희를 상대해야겠지.”

이젠 거칠지 않은 완벽하게 정리된 검선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화풍이 바뀌었다.

몰아치기만 하는 게 아닌 물러날 때는 확실히 물러났다. 빨라졌다 느려졌다 연주의 가락도 변화가 있었다.

그래서 진패천이 더 약해졌느냐고?

아니었다. 오히려 거칠게 몰아칠 때보다 진패천의 검술은 더욱 상대하기 어려웠다. 더 견고했으며 빈틈이 없었다.

화율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음을 확신했다.

공격을 거칠게 쳐낸 화율청이 달아나듯 땅바닥으로 내려섰다. 진패천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경공으로 그의 앞에 내려섰다.

화율청이 감춰둔 비장의 한 수는 무공이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나?”

정말이지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자네 아들을 누가 죽였는지.”

순간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를 만난 이후 가장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검무극은 지난번 목왕을 죽일 때, 그 일에 대해 맹주에게 들었었다.

진패천의 아들 내외는 목천가에 의해 죽었다.

그 복수를 위해 진패천이 목천가로 달려갔을 때, 그곳은 이미 멸문이 되어 있었다. 그때 진패천은 정말 다행이라 여겼다고 했다. 아니었다면 자신이 그들을 멸문시켰을 지도 모른다고.

이후 목천가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가주의 동생인 백천경이 진하군의 사부가 되어 복수를 꿈꾸었고.

그때, 검무극은 의심했었다. 놈들이 백천경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어쩌면 맹주 아들 내외의 죽음도 그들과 관련이 있으리라고.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화율청은 이 진실만큼은 진패천이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적어도 진패천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강한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정말 목천가의 짓이라 생각하나?”

이 물음에는 이미 목천가는 흉수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직 나만이 누군지 알고 있다.”

화율청은 이 순간을 즐겼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상상했었다. 진패천이 얼마나 놀랄까? 그 놀란 얼굴을 보며 그를 농락할 이 순간을.

그는 절대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

“나를 보내주지 않으면 그 일은 영원히 비밀에 묻히겠지.”

진패천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거세게 뛰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들의 죽음과 관련된 일만큼은 쉽게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때 검무극이 나섰다.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검무극은 이 순간 진패천의 심장박동을 느려지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실일지 아닐지도 모를 말에 넘어가면 맹주님께서는 복수라는 이름의 족쇄에 발이 묶여 남은 생을 살아가게 될 겁니다. 이자가 바라는 바겠지요.”

단지 대의를 위해 참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에게는 해결책이 있었다.

화율청을 향하는 검무극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누가 죽였는지 몰라도 상관없다.”

그런 말을 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우린 너흴 다 죽일 거니까. 만약 있다면 그들 중에 누군가겠지.”

화율청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자는 지금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진패천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화율청은 검무극이 아니라 진패천을 흔들었다.

“저자는 남일 뿐이네. 자네의 그 비통한 심정을 어찌 알겠나? 그 피 끓는 부정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검무극에게는 그보다 더 강력한 한방이 있었다.

“누군지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의미를 두시면, 족쇄를 이어서 차는 사람은 하군이가 될 겁니다.”

자신이 흉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결국 하군이가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찾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말.

결국 암흑궁의 복수와 다를 바 없이 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검무극의 말이 옳다. 아들 내외를 죽인 흉수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남긴 손주들이 더 중요했으니까.

자신의 무대가 막이 내리면 영원히 이들과의 공연은 없을 것이다. 하군이가 이 무대에 올라올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 너희는 모두 나와 함께 간다.’

너희는 내 무대에서 다 죽어라.

“지난 일은 연연하지 않겠네.”

한번 결정을 내린 진패천은 결코 돌아보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화율청은 정말 화가 났다.

이 망할 소교주 때문에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계획이 틀어져 버렸으니까. 저 빌어먹을 목을 잘라도 저 얄미운 주둥이는 살아서 계속 말을 할 것이다.

진패천이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몰라도 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진패천의 두 눈을 보면서 화율청이 소리쳤다.

“암흑궁의 무공이 오직 어둠만을 위한 무공이라 여겼다면, 큰 오산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화아아악!

온 세상이 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너무나 강력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광천멸안(光天滅眼).

그가 숨겨둔 마지막 비기였다.

그 환한 빛 속에서 화율청의 마지막 공격이 날아들었다.

시야까지 차단된 그곳에서 소리 없는 검이 진패천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검은 진패천의 심장에 닿지 못했다.

진패천이 날아든 검을 쳐낸 것이다.

화율청은 경악했다. 그가 놀란 것은 진패천이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서가 아니었다.

진패천은 이 광천멸안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다음 순간!

쉬이이이잉!

귀를 시원하게 하는 경쾌한 바람 소리와 동시에, 눈앞에서 번쩍이는 검선들.

멍하게 진패천이 검을 회수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화율청은 자신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옷깃을 풀어 헤치니 가슴에 붉은 선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正).

바를 정자였다.

제왕검식 제일식 무인지로(武人之路).

제왕검식의 가장 기본이자 첫 번째 검식이 발휘된 것이다.

화율청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진패천이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진패천을 지켜온 평생의 믿음.

“우리가 옳아서 이긴 것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푸아아아아아!

화율청의 가슴에 새겨진 글자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이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절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자신에게서 돌아선 진패천 앞으로 검무극이 환하게 웃고 서 있는 모습이었다.

검무극은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곳 무림맹에서 실패한 게 다 저놈 때문인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고? 이 자식아! 나를 봐! 뭐라고 한마디는 해야지!

그 원망을 끝으로 화율청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무림맹에 오랜 세월 잠입해 있던 세 사람, 화율청과 소정락, 진휴가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과 진패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맙네.”

진패천의 인사에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맹주님께서는 오늘 제게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제 무공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맹주의 싸움은 기품이 있었고, 정파 무림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그러자 진패천은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자꾸 강해지면 안 될 일인데.”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고, 진패천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곳으로 맹주전 호위무인이 와서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진 대주와 멸마대, 모두 무사하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진패천은 정말 기뻤다. 섭혼마존에 풍천교주까지 갔다는 검무극의 말에 믿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무사했다.

이윽고 진패천은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내가 왜 하군이에게 제왕검식을 전수하지 않았는지 아나?”

진패천은 이 강력한 제왕검식을 진하군에게 미리 전수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하군이 과거 목왕을 사부로 두고 무공을 배웠던 것이었고.

할아비의 무공 없이 정정당당하게 네 힘으로 후계자가 되라고 말했지만, 사실 제왕검식을 전수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녀석이 이 강력한 무공에 도취해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까 봐 그랬네. 더 나이 먹고 성숙해졌을 때 전수하려 했었지.”

진패천 자신이 그러했다. 젊은 시절, 무공의 강함만을 믿고 몇 번이나 큰 사고를 칠 뻔했다. 다행히 천운이 따라 오늘에 이를 수 있었지만.

“이제 전수할 때가 된 것 같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진하군이 정식으로 무림맹의 후계자가 될 것임을.

“하군이가 정말 좋아하겠군요. 우리 친구들끼리 축하연을 열어야겠습니다.”

검무극은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 환한 얼굴을 쳐다보던 진패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다.

“교로 돌아가기 전에 내게 들렀다 가게.”

저 사람은 누구?

무소장의 총관 주소명은 빠르게 산길을 달려 무한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흑주(黑珠)가 깨어지면 내가 죽은 거다.

화율청이 운명을 바꿀 큰 싸움을 하러 나간 후, 신물인 흑주가 깨어졌다.

수장인 화율청이 당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의 정체가 밝혀졌다면 결국 자신이 수족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것이다.

‘빌어먹을 소교주!’

이 모든 게 다 마교 소교주 때문이다.

거처 복도에서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화율청이 소교주가 자신에 대해 안다고 했을 때, 그때가 기회였다.

화율청에게 일단 무한을 떠났다가 소교주가 떠난 후에 다시 돌아오자고, 그렇게 권했어야 했다. 하지만 화율청의 실력을 너무 믿은 것이 문제였다.

‘반드시 죽인다!’

주소명은 화율청의 복수를 다짐했다. 조직에 소교주부터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보고할 작정이었다.

인적이 드문 숲길을 달리면서도 그는 주위를 살폈다.

근래 상황으로 볼 때,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감시망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을 것이다.

만약 양쪽이 정보를 주고받기라도 하면, 그 누구도 무한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발 그런 상황이 아니길 바랄 뿐.

그렇게 달려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저 앞쪽에 약초를 캐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시선을 확 잡아끄는 외모를 지녔다.

나이 든 쪽은 아주 키가 작았고 젊은 쪽은 정말 잘생긴 미소년이었는데 허리에 약초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두 사람의 외모가 너무 튀어서 흠칫했는데, 그들은 약초꾼이 확실했다.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약초만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으니까.

“명혈초(冥血草)를 이런 곳에서 발견하다니요! 대단하시오.”

“정말 무한은 독초의 보고 같소.”

“아무에게나 열리는 보고는 아니지요.”

“운이 좋았을 뿐이오. 자, 캐시오.”

“그래도 되겠소?”

약초 캐는 손맛이라도 있는 걸까? 키 작은 사람이 캐는 걸 양보하자 젊은 남자는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소명은 옆으로 빠져 숲으로 몸을 날렸다. 외모는 특이했지만 진짜 약초꾼처럼 보이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굳이 마주칠 필요는 없겠지. 만약 그들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봤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다. 자신이 이쪽 길로 빠져나간 것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알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약초 캐는 데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게 너희 목숨을 구한 줄 알아라.’

그렇게 길을 우회해서 울창한 숲을 빠져나오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또 있소!”

“이번에는 무상화(無常花)구려!”

무상화는 명혈초만큼이나 귀한 독초였다.

두 사람은 기뻐했지만, 주소명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분명 저들과 방향을 다르게 왔다. 능숙한 약초꾼들이라서 숲을 헤치고 오는 동안 이곳에 왔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소명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완전히 다른 길로 빠져서 달려가던 그때, 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앞에 그들이 또 있었다.

이쯤 되었는데 주소명이 어찌 상황을 모르겠는가?

‘고수다!’

그냥 봐선 무인인 줄조차 알아볼 수 없는 진짜 고수들.

물론 그들은 독왕과 마불이었다.

“이럴 필요가 있겠소?”

독왕의 물음에 마불이 주소명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래도 기회는 한 번 줘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소?”

“고집 있게 생겼는데.”

주소명은 알 수 있었다. 저 말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무공은 겨뤄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소명이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꺼내서 자신의 머리에 겨눈 것은 위조 암기 진격이었다. 화율청이 기습당한 척했을 때 사용되었던 바로 그 진격.

“내게서 알아낼 것은 없을 것이다.”

진격을 겨눈 그의 손이 떨렸다. 막상 죽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겁이 났다.

반면 독왕과 마불은 멀뚱히 그런 모습을 쳐다보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마불이었다.

“그거 아플 텐데.”

마불이 조금 더 아래를 겨누라고 시늉했다.

“거기 뼈가 제일 단단해. 한 번에 관통하지 않고 박히면, 머리통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끼다가 죽게 된다.”

듣고 있던 독왕이 한마디 덧붙였다.

“독도 후져서 더 아플 거다.”

두 사람의 말에 주소명은 알 수 있었다. 상대가 마교쪽 고수라는 것을.

“이 빌어먹을 마교 놈들아! 그런 개 같은 협박을 한다고 내가 겁을 먹고 순순히 불 것 같으냐? 한 걸음만 다가와도 당긴다!”

잠시 흐르는 침묵.

마불과 독왕은 더는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려갈 때는 저쪽 능선으로 갑시다.”

마불이 말한 방향은 안 가본 곳이라 독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좋지요.”

그렇게 두 사람이 그곳을 떠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주소명은 어리둥절했다.

‘살려주겠다고? 정말?’

하지만 이내 상대의 의도를 파악했다.

‘이것들이! 나를 미행해서 우리 위치를 알아내려는 것이구나.’

그건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수법이었다.

‘멍청이 같은 것들! 이깟 얕은수에 넘어가서 내가 순순히 돌아갈 줄 알고?’

또한 조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자신 역시 조직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보고를 위해 기별을 남길 뿐이다.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게 있었다.

그는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그의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왜?’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그게 살아 있던 주소명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주르르륵.

순식간에 그의 몸이 녹아내렸다.

고통도 없었지만 남은 흔적도 없었다.

* * *

마차가 도착한 곳은 검무양이 기거하던 거처였다.

곽주가 상기된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드디어 누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하군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수하를 보내 자신이 온 것을 기별했다.

잠시 후, 검무양이 밖으로 나왔다.

“왜 들어오지 않으시고?”

“제 역할은 여기까지니까요.”

진하군은 곽주를 구한 것이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풍천교주와 섭혼마존이 도와줬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은 대공자께서 구했소.”

진하군은 알고 있었다. 검무양이 자신에게 곽주를 구하는 일을 맡긴 것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저 자존심 강한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했다. 멸마대가 나서는 것이 이 사람을 구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유로.

바로 그때 이 사람은 구해진 것이리라.

예전이라면 생각지 않았을 부분인데. 검무극을 만난 이후 달라졌다. 사람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검무양이란 사람도 조금은 더 깊이 알게 된 것이다.

때론 앞장서 싸우는 것보다 조용히 참는 것이 더 힘든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검무양은 진하군과 다른 멸마대 무인들의 행색을 살폈다. 온통 피에 젖은 무복으로 이들이 얼마나 힘들게 싸웠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고맙소. 나중에 이 신세는 꼭 갚겠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진하군은 곧장 그곳을 떠났다.

어서 할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곽주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누나 곽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천마신교의 무한 안가에 있었는데, 동생을 구했다는 진하군의 기별을 받고 곧장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누나!”

정말 살면서 누나가 이렇게 반가울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곽주가 곽영에게 달려갔다.

“징그럽게, 왜 이래!”

곽영이 포옹을 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곽주는 누나를 만나면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말부터 전했다.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 누나도 괜찮아도 돼.

그 말에 곽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고 있었지만, 얼마나 동생을 걱정했는지 모를 것이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무림맹의 최연소 철방 장인이라는 명예까지 내버린 그녀였다.

“다친 데는?”

“괜찮아.”

“피잖아!”

“내 피 아냐. 멸마대주님이 나를 구해주셨어.”

마지막까지 자신을 챙겨준 그의 고마움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주님은?”

“먼저 가셨어.”

곽영은 아쉬워했다. 멸마대주에게 감사의 말이라도 전해야 했는데.

진하군이 들어오지 않고 떠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기도 했다.

이 감사를 검무양에게 다 하라고. 그녀를 구하기 위한 검무양의 노력이 퇴색하지 않게 하려고.

곽영이 검무양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알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자신과 이 대공자의 만남에서 비롯했음을.

자신이 만든 위조 암기를 그가 추적해 와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곽영이 검무양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검무양은 그 공을 이 자리에 없는 진하군에게 돌렸다.

“멸마대주가 동생을 구했으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곽영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검무양이 아니었다면 동생은 결코 구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 역시 그들의 손아귀에서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했을 거다.

“이제 동생과 함께 무림맹으로 돌아가도록.”

검무양의 말에 곽영이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저도 신교로 따라가겠어요.”

난데없는 누나의 말에 곽주는 깜짝 놀랐다. 반면 검무양은 놀라지 않았다.

“약속했잖아요? 당신을 위해 무기를 만들어주기로.”

그러자 검무양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다 지난 일이다.”

“약속을 지키게 해주세요.”

그녀는 이미 각오가 선 상태였다.

곽영이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곽주에게 말했다.

“넌 왜 안 말려?”

적어도 여기가 마인들 소굴이란 것은 알고 있을 텐데. 동생은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나는 항상 옳은 선택을 했었잖아.”

“너도 따라가야 하는데?”

마교에 투신하게 된다는 말이었음에도 곽주는 놀라지 않았다.

“누나가 가면 나도 가야지.”

그 위험한 곳에 누나 혼자 보낼 수는 없잖아.

동생을 바라보는 곽영의 눈동자가 떨렸다.

“야, 너!”

“그래, 고맙지. 이런 동생이 어디에 있겠어? 누나 때문에 납치당했다고 원망도 안 해, 나와서는 씩씩해. 그렇지?”

곽주는 곽영의 밝은 성격을 닮았다.

곽영이 다시 검무양에게 말했다.

“우리 남매 데려가 주세요. 먹고 사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게요. 폐 안 끼쳐요.”

검무양이 그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전쟁이 나면 당신이 만든 무기가 당신이 알던 사람을 죽일 거야.”

곽영은 이미 마음을 굳힌 후였다.

“그럼 마교에 가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겠네요.”

그녀의 말에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제 살길을 찾고 있어요.”

그녀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저는 철방 장인의 명예를 저버리고 위조 무기를 만들었어요.”

“동생이 납치된 상황이었으니 무림맹에서는 이해해 줄 거다.”

“그래도 다시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아마 그럴 것이다. 아무리 동생 때문이라지만, 위조 암기를 만들었던 사람을 무림맹 철방의 장인으로 들이진 않을 테니까.

“무림맹의 정예들이 쓰는 무기를 만들다가 저잣거리에서 호미나 만들면서 살 수는 없어요. 저는 저 살려고 붙잡는 거예요. 이기적인 년이라 욕하시면 공자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어요.”

검무양은 그녀의 각오가 확고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기에는 제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그러면서 그녀가 싱긋 웃었다. 옆에서 곽주가 누나의 뻔뻔함을 대신 사과합니다, 그런 표정으로 두 손을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본교 철방은 여인의 몸으로 버티기 더 힘들 거다.”

“거기서 일 안 해보셨죠? 거긴 남자도 여자도, 장인도 신입도 다 힘들어요. 사람 괴롭힐 힘 남은 사람 없어요.”

검무양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깊은 인연이었기에.

“엉터리 무기 만들면 내게 혼날 거다.”

그 말을 하고는 검무양이 돌아섰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검무양은 돌아보지 않은 채 건물로 들어갔다.

그제야 곽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을 받아냈다는 안도와 새로운 인생에 대한 불안감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둘만 있게 되자 곽주가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결정이니까 따르기는 하는데.”

곽주의 시선이 검무양을 향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따라가겠다는 거야?”

풍기는 느낌으로 볼 때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동생이 놀라지 않을까?

“저분이 누군가 하면…….”

그녀가 조심스럽게 설명하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 형이야.”

곽영과 곽주가 놀라 돌아보았을 때, 검무극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곽영은 잠시 눈을 껌벅였다.

‘대공자의 동생이라면?’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공자가 천마신교 후계자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경악한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검무극이 곽주의 어깨를 감싸며 고자질하는 친구처럼 굴었다.

“우리 형 겉보기엔 점잖아 보이지? 한데 성질 더럽고, 못된 야망이 가득해. 특히 동생에게 엄청 가혹하지. 그러니 본교에 가면 우리 형에게서 누나를 잘 지켜! 알았어?”

제 말만 하고는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곽영은 제대로 인사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곽주가 다시 누나에게 물었다.

“뭐야, 저 사람? 자기 말만 하고…….”

“쉿! 조용! 닥쳐!”

필사적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누나의 손이 떨렸다. 대체 누구기에 이렇게 긴장하는 걸까?

“누군데?”

그때 또다른 이가 등장했다.

“누구긴. 뒤에서 형 흉이나 보는 몹쓸 동생이지.”

등장한 사람은 적어도 뒤에서 남 흉보는 걸로는 누군가를 야단쳐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풍천교주였다.

“어디 그뿐인가? 귀한 물건 있으면 다 뺏어가지, 수하는 생고생시키고 저는 팔짱 끼고 구경이나 하는 악독한 수장이지. 그러니 자네 누나는 저 사람으로부터 지켜! 저 사람이 더 위험해!”

풍천교주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직접 봤던 곽주였다. 아직도 그가 파도를 타고 올라가 그 꼭대기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생생했다.

곽주가 바짝 얼어붙은 채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풍천교주의 뒤를 따라 섭혼마존이 함께 들어갔다.

곽주는 허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그들이 건물로 들어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자, 곽영이 같이 허리를 숙인 채로 동생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군데 그래?”

곽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분은 바로…….”

그때 또 다른 누군가 등장했다.

“멍청이다.”

고개 숙인 그들의 시선에 딱 맞는 사람이 지나갔다. 그는 바로 마불이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멍청이지. 사람 좋다고 간도 쓸개도 다 빼주고, 부귀영화까지 다 버리고 온 멍청이.”

풍천교주와 친구였던 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마불이 건물로 들어갔다.

곽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람은 또 누구지?”

그 질문에 대답을 한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독왕이 그들 앞을 지나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 미친 사람들이다.”

놀란 곽주를 보며 독왕이 덧붙였다.

“그러니 네 누나는 네가 지켜라.”

그렇게 독왕까지 건물로 들어갔다.

곽주가 눈을 껌벅이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누나가 따라가려는 분에게는 뒤에서 형의 흉을 보는 동생이 있어. 맞지? 그런데 다시 그 동생을 흉보는 무서운 고수가 계셔. 날 구해준 분이시지. 한데 그 무시무시한 분을 멍청이라고 하는 분도 있어.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다 미친 사람들이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

곽영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다시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누나,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난 도망가고 싶었다

“형! 나 살아서 돌아왔어!”

검무극이 반갑게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을 때 검무양은 창가에 서 있었다.

검무양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다 들었다.”

“뭘?”

“네가 나 욕하는 거.”

“그 말을 안 했네. 우리 형은 귀까지 밝아서 자기 흉보는 소리까지 다 듣는다고. 그러니 욕하려면 멀리서 하라고.”

등을 돌리고 있는 검무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의자에 널린 빨래처럼 축 늘어졌다.

“아, 드디어 끝났다! 자, 당분간 좀 쉬자! 나 놀 거니까 말리지 마! 친구들하고 놀고, 마존들하고도 놀고, 아버지랑도 놀고. 진심이야! 음모, 배후, 모략, 말도 꺼내지 마! 형, 나랑 놀자!”

검무양이 뒤를 돌아보며 검무극의 몸을 살폈다.

“대단한 싸움을 끝낸 것치고는 옷에 피 한 방울 안 묻었네.”

“우리 같은 고상한 사람들이야 싸움도 고고하게 하지.”

그러자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과연 그래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 싸움시켜두고 뒤에서 팔짱 끼고 구경만 하셔서 그럴까?”

검무극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였다.

“물론 남들 싸울 때 그 입은 안 놀았을 테고.”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 돌아보니 풍천교주와 섭혼마존이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교주님.”

검무극이 풍천교주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달려갔다. 풍천교주가 보법을 펼치며 슬쩍 피했다.

“반가운 척은. 나 새까맣게 다 잊은 것 안다. 금방 내 얼굴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지. 누구지? 아! 그때 그 교주다!”

검무극이 소리쳤다.

“그때 그 이 공자가 접니다!”

다시 달려드는 검무극을 풍천교주가 다시 보법으로 피했다.

“그만! 징그럽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풍천교주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농담하고 장난치니, 가슴에 막혔던 뭔가가 확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새외 풍천교에서 제자 놈 가르치고 있으면서 이렇게 편하게 대할 상대가 있었겠는가? 이 순간이 그리웠다.

그래 이 맛이지. 이 맛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온 것이지.

편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설령 그 과정에서 오해와 실수가 있더라도 다 받아주고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한 사람만 있어도 정말 행운일 텐데, 자신은 그런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그때 방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서며 혀를 차며 말했다.

“저 재롱에 홀딱 넘어간 거지.”

들어선 사람은 마불이었다.

풍천교주와 마불이 눈빛으로 서로 인사했다. 사이가 좋았다 나빴다 다시 어느 정도 회복된 두 사람이었다.

“요런 재롱이면 넘어갈 만하지 않나?”

마불은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가 검무양과 섭혼마존과도 인사를 마치자 검무극이 물었다.

“독왕님은요?”

“자기 방에 갔다.”

방에 가서 캐온 독초부터 펼치고 있을 독왕이었다.

“총관 놈을 살려서 데려오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아는 바가 없었을 겁니다.”

검무극이 정식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이번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때문에 온 거 아니다.”

그러면서 마불은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마불의 이 변함없는 형에 대한 충성심이 어떤 마음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누구보다 외로운 삶을 살아왔던 마불이었다. 그래서 아는 것이다. 사람에게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작은 동굴 속에 틀어박혀 봤기에 후계 싸움에서 밀린 형의 외로움이 어떤 것이지도 아는 것이리라.

“괜찮습니다. 여기 절 위해 오신 분들도 두 분이나 계시거든요.”

검무극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고 군사 보려고 온 건데?”

“너무하십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마지막 남은 섭혼마존을 향했다.

섭혼마존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검무극 때문에 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저는 오랜만에 사부님을 뵙고 싶어서.”

섭혼, 너마저! 하는 검무극의 눈빛에 비로소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농담입니다.”

풍천교주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농담이라고?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사부님 뵈러 왔습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놀렸다.

“인생은 원래 혼자 가는 법이라네.”

검무극이 창가로 걸어갔다.

“형, 잠깐 창문 좀 빌리자.”

그러면서 고독한 척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섭혼마존은 느꼈다.

검무극의 등은 정말 외로워 보였다.

마치 홀로 지붕 위에 서 있던 극악소마를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어쩌면 그래서 두 사람이 제일 친하게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고 군사는?”

“모릅니다. 저는 인생을 혼자 걷는 사람 아닙니까?”

“고 군사는 내어놓고 걷게.”

그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돌아섰다.

“본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할 일 처리하고 오겠다고요.”

이번 일을 순탄하게 끝낼 수 있는 숨은 공신이 바로 고월이었다. 그는 은월의 모든 정보를 통천각과 공유하며 검무극에게 정보를 전했다.

“비정한 수장 때문에 여전히 혹사당하고 있었군.”

검무극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주님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무리 농땡이 치면서 일하라고 해도 제 말은 안 듣습니다.”

“그 고집불통이 어디 내 말은 듣나?”

“그래도 저보다는 교주님 말씀은 잘 듣지요.”

그렇게 풍천교주와 인사를 나눈 후 섭혼마존을 쳐다보았다. 섭혼마존의 기도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이전의 그녀가 아니다.

“덕분에 이번 일을 잘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섭혼마존은 검무극이 참 꼼꼼하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 한 사람 볼 때마다 인사를 잊지 않았다. 일이 다 끝난 상황에서,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는 부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소교주님이 계셔서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을 총지휘해서 결국 모든 음모를 막아낸 사람이 바로 검무극이란 사실을.

애초에 자신은 이곳 무한에 와 있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어디 자신뿐인가? 독왕과 마불, 풍천교주와 대공자, 거기에 천마신교 후계자까지 와 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저 소교주다. 자신이 평생 모셔야 할 미래의 교주.

그 말에 검무극이 기뻐했다.

“역시! 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은 섭혼마존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소동 같은 재회가 끝나자 풍천교주가 넌지시 물었다.

“그쪽은 어땠어?”

그가 궁금해한 것은 무림맹주의 실력이었다.

“맹주 실력이 보통이 아니지?”

다들 궁금했기에 검무극의 대답에 주목했다.

“아버지께 무림일통은 미루자고 해야겠습니다.”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었는데.

풍천교주는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아버지는 더 무서워.”

“아버지와도, 무림맹주와도 안 싸워보셨잖아요?”

“어디 싸워봐야 아나? 맹주하고 붙어야 하면 어떻게 싸워야 할까 고민되고 걱정부터 되는데, 네 아버지와 붙어야 하면…… 아, 생각하기도 싫다. 딱 그 차이지.”

풍천교주는 무림맹주보다 마교주를 더 두려워했다.

“자, 이만 돌아가자. 혹사당하는 불쌍한 군사도 만나고.”

마교 고수들이 무한에 오래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와 마존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먼저들 돌아가십시오. 형과 저는 남아서 할 일이 있습니다.”

검무양이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냐는 표정을 짓자.

“곧 무림맹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올 거야.”

“무슨 소식인데?”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축하해 주고 가자고.”

* * *

진하군은 무림맹으로 돌아왔다.

피에 젖은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의 모습을 보자, 무림맹 무인들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저 피가 누군가 무고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흘린 피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근래 진하군은 스스로 변하려고 노력해왔다. 그 결과 멸마대 무인들과의 관계도 깊어졌고, 그 변화는 멸마대를 더욱 강한 조직으로 거듭나게 했다.

자연 무림맹 내에서 멸마대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내전에 들어선 후 수하들을 해산시켰다.

“가서 상처 치료하고, 푹 쉬도록! 정말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주님!”

그렇게 진하군이 혼자 맹주전으로 향했다.

오는 내내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화율청과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들 쪽의 싸움을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싸움 역시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거다.

특히 진휴가 말하기를 자신을 인질로 삼아서 할아버지를 협박하겠다고 했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가 다치기라도 하셨으면?

그랬기에 이번만큼은 검무극을 더 믿었다. 그가 할아버지가 흔들리지 않게 지켜줬으리라고.

진하군이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내부의 공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진하군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맹주전 내부의 모습에 진하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어있는 태사의.

만약 이 모습이 전부였다면, 잠시 자리를 비우셨겠거니 생각했을 거다.

한데 태사의 아래 수십 명의 무인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평범한 무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무림맹의 여러 조직의 수장들이었다.

우선 무림맹을 대표하는 네 정예 조직.

청룡단과 백룡단, 백호단(白虎團)과 주작단(朱雀團)의 단주들이 서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정예 조직인 천풍각(天風閣)과 비각(秘閣)의 각주들도 서 있었다.

거기에 철기대(鐵騎隊)와 비영대(秘影隊)의 대주를 비롯한 다른 조직들의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앞에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현(諸葛賢)까지.

진하군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동생인 진하령까지 서 있어서 더 놀랐다.

‘설마?’

할아버지께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양쪽에 늘어서 있던 무림맹의 수장들은 말없이 진하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하군이 태사의 아래에 도착했을 때.

맹주가 드나드는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진패천이 걸어 나왔다.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진하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구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던 짧은 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떨렸던 순간이었다.

“맹주님!”

진하군이 떨리는 눈동자로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건재한 그의 모습을 보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맙네, 무극.’

이번만큼은 마음껏 생색내게. 다 받아주겠네.

진하군은 정중히 예를 갖춰서 인사했다.

“멸마대주 진하군,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손자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른 눈빛,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진하군은 긴장했다. 할아버지가 무사하신데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다 모인 것일까?

이윽고 진패천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진패천은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이 순간부터 멸마대주 진하군을 차기 무림맹주로 정하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진하군은 두 눈을 크게 치떴다.

방금 할아버지의 말씀은 자신을 맹주의 정식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고대하는 순간이 이렇게 예고도 없이 닥치니 그는 놀라고 당황했다.

진하령이 오라버니에게 전음을 보냈다.

―뭐해, 오라버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하군이 예를 갖추며 소리쳤다.

“멸마대주 진하군,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맹을 수호하고 의와 협을 받들며 정의를 지켜나가겠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수장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쳤다.

“의협지도(義俠之道) 정도천하(正道天下)!”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기개에 가득 차 있었다.

진하군은 기뻤다. 너무 기뻤다. 이 순간을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림맹주가 되는 것이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으니까.

원래 무림맹주의 자리는 세속 되거나 전대 무림맹주가 독단적으로 정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해진 맹의 법규에 따라 추대된 이는 총군사를 비롯해서 무림맹의 수장들 팔 할 이상이 찬성해야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는 철저히 비밀이 보장되었기에 매우 엄정하게 선정되었다.

진패천이 후계자 선정을 미룬 것은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동안 진하군은 멸마대주로 활약하면서 착실하게 명성과 평판을 쌓아왔다.

또한 협의를 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품까지 인정받았다.

그랬기에 이미 모두들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진 대주께서는 위로 올라가십시오.”

총군사 제갈현의 말에 진하군이 계단을 올라가 진패천과 나란히 섰다.

늘어선 수장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차기 맹주님을 뵙습니다!”

진하군도 그들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부족한 저를 높이 봐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하령도 축하를 건넸다. 원래라면 그녀도 예를 갖춰야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생으로서 축하해 주고 싶었다. 오라버니가 얼마나 이 순간을 고대해왔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축하해, 오라버니!”

진하군이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장들이 저마다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진하군은 아래로 내려가 그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로써 정사마 세 후계자가 확정되었다. 이제 곧 공식 발표가 날 것이고, 모든 무림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큰 축제가 열릴 것이다.

* * *

모두가 물러간 맹주전에는 진패천과 진하군 둘만 남았다.

“하군아, 네게 해줄 말이 있다.”

“마음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할아버지가 맹주가 지녀야 할 사명감과 태도에 대해, 그리고 검무극과 무림의 평화에 대해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이 자리에 앉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반반의 마음이었지.”

진패천은 처음으로 맹주 자리에 대해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이 자리는 너무나도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욕망을 극도로 절제해야 하고,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고 가야 하는 자리지. 네 잘못이 아니더라도 책임은 네게 날아들고, 온갖 원망도 네가 다 받아야 한다.”

진패천은 손자에게 애정을 다해 마음을 전했다.

“신나고 좋을 거 같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 남들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밥 먹을 때도 신경 써야 하고, 욕 한번 시원하게 못 하지. 얽히고설킨 관계들 때문에 미운 놈 미운 표도 못 낸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

“난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다.”

진하군은 할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까 널 축하해 주던 그 사람들, 이 자리 준다면 도망가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다. 이 자리에 대해 잘 알면 알수록 도망가면 도망가지, 욕심내는 자리가 아니지.”

진하군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멸마대주의 자리도 힘들 때는 너무나 힘든데, 맹주 자리는 오죽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이겨낸 줄 아느냐?”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진패천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강함으로.”

진패천은 손자에게 이 어렵고 힘든 자리만 주려는 게 아니었다. 그것을 지켜낼 힘까지 함께 주었다.

“네게 제왕검식을 전수하겠다!”

우리들의 시간은 이제부터지

마당에는 떠날 준비가 한창이었다.

검무극과 검무양만 남고 모두 천마신교 본단으로 돌아가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이 많은 신교의 고수들이 일이 마무리되었음에도 무한에 머무르는 건 무림맹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곽영과 곽주 남매였다.

“저분들과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마교에 투신한 용감한 남매였지만, 그보다 저들과 함께 돌아가는 게 더 두려운 그들이었다.

“심지어 누나를 데려가는 그분도 없이?”

그건 곽영이 더 아쉬웠다. 검무양이 함께 가면 좋으련만, 일이 있어 나중에 온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천마신교 대공자가 저 마존들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사람인데, 그를 의지하고 있다.

그녀는 검무양이 고마웠다. 그런 무서운 사람이 자신들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있었으니.

곽영과 곽주는 저 미친 사람들이 누군지 다 알아냈다. 미친 사람들이라고 말한 사람이 독왕이라는 것도.

독왕이라고?

절세 고수들도 덜덜 떠는 그 독왕이 자신들에게 농담을 던지며 지나갔던 것이다.

다들 너무 귀한 신분이라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평생 살면서 전대 풍천교주와 마존들을 만날 일이 한 번이라도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지금 눈앞에 네 명이나 있었다.

“설마 우릴 잡아먹기야 하겠어?”

곽주의 말에 뒤에서 누군가 불쑥 말했다.

“잡아먹진 않아도 독을 만드는 재료로는 쓸 수 있지.”

곽주가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검무극이 와 있었다.

“독이 가득한 통에 담겨본 적 없지? 막 몸이 흐물흐물해지면서, 저기 떠 있는 게 내 손가락인지 귀인지 모르겠고.”

곽주는 놀란 숨을 삼킨 채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독통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신분 때문이었다.

마교 소교주!

어제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저 무서운 네 사람보다 더 귀한 신분의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꿈인가? 그래, 이거 다 꿈이다. 무림맹 철방 장인이었던 누나가 마교로 전향하겠다는 것부터 꿈같은 이야기였으니까.

“어느 마차에 탈 거야?”

검무극의 물음에 멍하게 있던 곽주가 정신을 차렸다.

“아, 아. 저희는…….”

곽주가 누나를 쳐다보았다. 곽영이라고 어디에 탈지를 정해두었겠는가?

지금 마당에는 두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첫 번째 마차에는 마불과 독왕이 타고 갈 마차였다. 두 번째 마차는 풍천교주와 섭혼마존이 탈 마차였다.

“저기서 누구 인상이 제일 좋아 보여?”

그러자 마차에 타려던 네 사람이 귀를 쫑긋했다.

검무극이 이들 남매에게 속삭이듯 말했지만, 네 고수들의 청각이 보통 청각이겠는가?

게다가 검무극이 자신들을 보며 작당하듯 소곤거리고 있는데.

곽주가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속삭였다.

“인상만 보면 저기 잘생긴 분이 제일 좋아 보이십니다.”

안 들릴 거라 여겼지만, 다 들렸다.

풍천교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제일 잘 생겼냐에서 뽑히길 바랄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상 좋은 사람이라면! 나잖아? 이 후덕한 인상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먹겠는가?

“인상 좋다고 덥석 첫 번째 마차를 탔다가 실수라도 하면? 알지? 독통!”

곽주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 마차에 타겠습니다.”

“그래, 거긴 그런 일은 없지.”

그렇게 안심시키는가 싶더니.

“다만 여기서 실수하면 네가 누나를 찔러 죽이고 자결하게 될 거야. 저기 인상 나쁘고 배 나온 분 보이지. 저분을 특히 조심해야 해.”

풍천교주가 이쪽을 홱 쳐다보았다. 다 들린다, 이놈아! 소리치기 전에 먼저 말린 사람이 있었다.

“장난 그만해라.”

뒤를 돌아보니 검무양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저 마차 타고 돌아가도록.”

세 번째 마차가 그곳에 도착했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람들은 처음 검무양과 함께 왔던 지단 무인들이었다. 그들에게 두 사람을 본단까지 호위한 후 돌아가라고 명령한 것이다.

마존들과 따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곽영과 곽주가 안도했다.

“미리 기별해 놨으니 도착하면 철방에 가서 곽 장인을 만나도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검무양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많은 감정이 담겼다. 신분을 모르고 막 함부로 말할 때가 좋았는데. 그럼 이 뜨겁게 끓는 고마움을 더 확실히 전할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렇게 곽영과 곽주가 세 번째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이 옆을 지나가자 풍천교주가 섭혼마존에게 말했다.

“보통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일등으로 뽑기 마련인데.”

곽주가 흠칫하던 그때.

섭혼마존이 사부의 뒤끝 장단을 맞춰주었다.

“대법 재료로 젊은 남자의 피가 필요하긴 합니다.”

어이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곽주가 후다닥 세 번째 마차로 달려갔다. 장난인지 알지만, 알고도 무서웠다.

곽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따랐다.

검무극과 검무양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잘 챙겨줘라.”

“형이 데려가는데 내가 왜 챙겨?”

“사람 챙기는 건 네가 잘하잖아.”

“이번에 보니 형도 소질 있던데?”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곽영 남매를 구한 건, 예전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기도 했고.

“난 요즘의 형이 좋아. 점점 더 좋아. 그러니 또 말하는데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

그때 마차들이 출발했다.

검무극이 달려가서 마불과 독왕에게 인사했다.

“본단에서 뵙겠습니다. 그리고 총군사님 뵈면 저희는 걱정 안 해도 되니, 제발 좀 쉬시라고 전해주십시오!”

둘이서 독초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불님! 이용만 당하시는 거라고요!”

그렇게 첫 번째 마차가 떠나고.

풍천교주에게는 다른 사람을 맡겼다.

“교주님께서는 우리 고 군사 챙겨주시고요!”

풍천교주가 창문을 탁하고 닫았다.

“걱정하는 척은!”

곧이어 살짝 문이 열리며 섭혼마존이 눈인사를 보냈다.

그렇게 두 번째 마차도 떠나고.

세 번째 마차가 지나갈 때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는 사라져 있었다.

“본교에 오신 걸 환영하오.”

앞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맑고 깊은 눈빛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

곽영과 곽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세 대의 마차가 본단을 향해 출발했다.

검무극은 그대로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잠시 무림맹에 다녀올게.”

검무양이 고개를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무림맹이 네 안방이냐, 그렇게 막 드나들게.”

담장 밖에서 검무극의 대답이 들려왔다.

“오라고 하셨다고!”

* * *

무한 거리는 두 가지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우선 첫 번째 소식은 천애거사 화율청의 죽음이었다.

그가 무림맹에 잠입한 악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무한 무인들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무림맹은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천애거사를 직접 처단한 사람은 무림맹주고 그의 악행에 대해 맹주전 호위무인들은 물론이고, 멸마대 무인들까지 모두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화율청은 진패천에게 과연 무림인들이 네 말을 믿을까? 라고 조롱했었지만, 그가 예상한 만큼의 파장이 있지는 않았다.

그를 신봉하듯 따르던 이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무림맹주와 무림맹을 믿었다.

화율청이 제대로 알지 못한 건 진패천의 무공실력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부끄러움 없는 맹주로 살아온 진패천의 저력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이 사태가 일단락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문제가 될 만큼의 혼란은 없었다.

그 일을 덮어버린 두 번째 소식도 있었다. 진하군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정파 무인들은 그 소식에 환호했다. 많은 이들이 차기 맹주는 진하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멸마대는 자신들의 생사를 도외시한 채 무림의 정의와 협의를 위해 헌신해 왔다.

온통 진하군이 후계자가 된 이야기로 시끄러운 저잣거리를 죽립을 눌러쓴 검무극이 지나갔다.

그렇게 그가 도착한 곳은 무림맹 본단이었다. 그 입구에 진하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검무극이 자신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 당신이 우릴 구했네.’

그를 보면 자꾸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검무극이란 사람의 의미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이.

검무극이 그녀 앞에 도착했다.

“이제 다 끝났네?”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리들의 시간은 이제부터지!”

이제 같이 놀자는 뜻임을 알았기에 진하령은 기분 좋게 웃었다.

“가자,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셔.”

두 사람이 무림맹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맹주전 쪽이 아니었다.

미리 명령이 내려왔는지 만나는 경계 무인들은 검무극의 신분을 묻지 않고 통과시켰다.

두 사람은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안 섭섭해?”

“뭐가?”

“너도 후계자가 될 수 있었잖아?”

“그것도 야망이 있는 사람이나 욕심내는 거지. 난 그런 야망 없어. 맹주 손녀, 미래에는 맹주 동생. 그 두 역할 감당하는 것도 벅찬 사람이야.”

검무극은 그녀에게 그보다 큰 야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림맹주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하군이는?”

“오라버니는 지금 수련장에 있어.”

진패천에게 제왕검식을 전수받은 진하군은 홀로 수련 중이었다. 처음 전수받았을 때 그 배움을 잘 갈무리하는 게 중요했기에 한동안은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잘됐다. 그동안 우린 축하연 준비하면 되겠다.”

“정말 하려고?”

“해야지. 친구가 꿈을 이뤘는데. 친구들만 불러서 조촐하게 하자고.”

조촐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었지만.

“이미 부를 사람 싹 다 불렀어.”

“부지런도 하셔라.”

이번 모임이야말로 정사마의 공식 후계자들이 모이는 자리가 될 것이다.

진하령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러는 거 귀찮지 않아?”

심지어 모이는 친구 중에서 신분이면 신분, 무공이면 무공, 성격이면 성격,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그였다.

굳이 내가 나서서 불러야 해? 이런 생각이 들 법도 했는데.

“내가 조금만 귀찮으면 네 오라버니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축하연을 열어줄 수 있어. 그런데 귀찮다고 안 한다고?”

순간 진하령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도 이리 열심히 사는데 내가 뭐라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구나!

물론 또 이렇게 사람을 당황하게도 만들지만.

“춤 연습은 언제부터 할까?”

“뭐?”

진하령이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축하공연 해야지.”

“싫어! 안 돼! 난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야! 절대 안 돼!”

물론 이미 먹잇감이 된 그녀의 거절이 검무극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이 사람이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고?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 별일 아닌 날에는 그렇게 열심히 췄으면서. 이번은 네 오라버니 인생에서 가장 값진 날인데. 부끄러워서 못 한다고? 심지어 그때는 마정사의 고수들이 가득 있었어. 이번에는 우리끼리만 모이는 자리고. 네 오라버니야 워낙 도량이 넓은 사람이니 이해할 거다. 너도 언젠가 나이 먹고 오늘을 떠올리면 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오라버니의 마음에 상처를 줬을까? 하군이 무덤가에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겠지? 괜찮아, 그래도 하군이는 이해할 거다.”

결국 진하령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휴, 정말 내가! 춘다, 춰! 그래, 추다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춘다!”

대신 나만 죽을 수는 없는 법.

“조건이 있어. 너도 추고 비 소맹주도 춰야 해!”

검무극이야 냅다 나서서 추겠지만, 비사인은 절대 추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안 추면 자신도 안 춰도 된다는 기대감이 솟구치던 그때.

검무극은 다 방법이 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사인이가 중심에 설 텐데.”

* * *

진패천은 내원 깊숙한 곳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진하령은 먼저 돌아갔다. 자신은 더는 들어갈 수 없다면서. 맹주만이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분명했다.

진패천은 등을 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맹주님께서 또 제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검무극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음먹었으면 곧장 실행해라.”

후계자로 삼기로 마음먹은 일을 곧바로 해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진패천은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담담히 말했다.

“해야 할 일의 적기는 지금이다! 평생을 그렇게 믿고 살아왔다네.”

검무극이 진패천 옆에 나란히 섰다.

“저도 꼭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그 말에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던 진패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자넨 좀 미루면서 살게.”

더 강해지지 말라는 진패천의 농담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을 향한 진패천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본맹은 물론이고 나와 하군이까지 큰 곤경에 빠졌을 거네.”

“앞일은 모를 일이죠. 결정적인 순간에 맹주님께서 다 알아차렸을 겁니다.”

“과연 그랬을까?”

부정적인 의미로 말했지만, 검무극은 그랬을 거라 믿었다.

“네, 분명 그러셨을 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나?”

“맹주님의 위기 본능이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진짜 위기가 왔을 때는 반드시 작동했을 겁니다.”

이래서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유가. 상대가 이런 사람이니까. 위기 본능은 넘어가도 이건 못 넘어가지.

“나는 은원이 확실한 사람이네. 빚을 졌으니 그 빚을 갚아야지.”

진패천이 걸음을 옮겼고 검무극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안개가 자욱한 곳이 나왔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진법이 펼쳐져 있음을.

귀한 장소를 지키는 진법이라면 파훼법을 자신에게 알려줄 수는 없을 텐데.

눈이라도 감고 따라가야 하나 싶던 그때.

스스슷.

안개가 스스로 길을 만들었다.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안개가 구불구불 길을 만들었다. 앞으로 갔다, 다시 옆으로 갔다, 또 앞으로 갔다. 아마 오직 진패천에게만 길을 열어주는 안개이리라.

어디를 밟고, 어디를 건너뛰고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안개가 안내하는 대로 걸어가면 되었다.

그렇게 기나긴 안갯길을 헤치고 나왔을 때, 눈앞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그 위에 힘찬 필체로 이곳이 어디인지가 적혀 있었다.

무림보고(武林寶庫).

하지만 이건 몰랐죠?

무림보고.

무림의 온갖 보물들이 보관된 곳으로 오직 무림맹주와 맹주가 허가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알려진 절대금역(絶對禁域).

그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신비스러운 기운이 문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법을 통과할 때, 검무극은 솔직히 기대했다. 무공 비급이나 신병이기가 욕심나서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비궤가 흡수할 구슬이 이곳 무림맹 보고에도 보관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한데 정말 무림맹주가 이곳에 자신을 데려올 줄은 몰랐다.

“신교 사람이 이곳까지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 아마 역대 처음이겠지.”

“영광입니다, 맹주님.”

어디 신교 사람뿐이겠는가? 이 앞에 서 본 정파인도 손에 꼽을 것이다.

“난 맹주가 된 이래 단 한 번도 이곳에 있는 물건을 사적으로 쓴 적이 없다네.”

진패천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이 검도 내가 젊은 시절부터 쓰던 검이었지.”

이곳에 있는 영약도, 신병이기도 손을 대지 않은 그였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무림맹의 것이고, 정파 무림을 지키기 위해 선조들이 남겨주신 유산이라 여겼으니까.”

검무극이 존경을 담아 진패천에게 말했다.

“그런 분이셨기에 지금까지 정파 무림을 지켜오실 수 있었을 겁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탐욕이 가득한 맹주였다면, 아버지는 그 허점을 지금까지 두고 보지 않았을 테니까.

비록 손주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할아버지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기에 더욱 강한 무인임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네에게 어떤 보답을 할지 고민했었네.”

검무극은 자신이 돕지 않아도 잘 해결했을 거라고 말해주었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 수십 년을 함께한 친구에게 정말 위기 본능이 발동했을까? 아니리라 생각한다.

검무극은 자신과 손주들의 생명을, 나아가 무림맹의 운명을 구했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이나.

솔직히 그 보상으로 자네를 내 손녀사위로 삼겠네, 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없는 관계였고, 설령 그게 가능한 관계라 할지라도 그게 선물이 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오히려 손녀사위가 된다면 자신이 선물을 받는 셈이 될 테니까.

“자네가 평범한 고수였다면 그 실력과 재능을 살펴 내가 알아서 무공 비급과 보검을 내렸을 거네. 한데 자네에겐 그럴 수가 없지.”

진패천의 시선이 무림보고를 향했다.

“그러니 자네가 직접 선택하게.”

그에게서 놀라운 말이 덧붙여졌다.

“이곳에서 자네가 원하는 것을 세 개만 가져 나오게.”

생각지 못한 선물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한 개도 아니고 세 개씩이나?

진패천은 놀란 검무극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맹주님, 저는 욕심이 많아서 이런 제안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이놈이 알아서 거절하겠지, 생각하셨다면 제 욕심을 과소평가하신 겁니다. 세 개를 한 개로 줄이겠지? 아닙니다, 세 개를 다섯으로 늘일 궁리를 하는 욕심쟁이입니다.”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네. 세 개를 가지게.”

그렇게 확인하고 나서야 검무극은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냥 기뻐한 게 아니라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맹주 앞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 좋은가?”

“그럼요, 제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와 볼 일 없는 곳 아닙니까? 그곳을 구경만 해도 굉장한 일일 텐데, 기물을 세 개나 가질 수 있는데 어찌 안 좋겠습니까? 정말 좋습니다! 보물아, 딱 기다려라! 물욕의 화신님이 가신다! 다섯 개 가지러 간다!”

“셋!”

“네! 세 개 가지러 간다!”

검무극이 너무 좋아하니 진패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뭔가를 준다 했을 때 괜히 사양하다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 주는 사람 기분까지 좋아질 만큼, 마음껏 기뻐하는 거다.

“한데 왜 세 개입니까?”

검무극은 자신이 묻고는 자신이 대답을 추측했다.

“혹시 무림맹에 깊이 잠입해 있던 세 사람을 색출해 냈기 때문입니까?”

진패천은 어떤 의미가 있어서 세 개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만 가지고 나오라기 매정해 보여서 셋이라 했을 뿐.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자신과 손자, 손녀를 구해줬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하리라. 한 사람 당 한 개씩.

“저,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일 좋은 것만 가지고 나올 겁니다.”

“그러게.”

진패천이 커다란 열쇠를 꺼내 입구에 있는 구멍에 넣고 돌렸다.

쿠르르르릉.

그러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둘러보고 오게나.”

“정말 감사합니다.”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춘 후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 뒤쪽은 복도였는데 복도 끝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벽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서 어둡지 않았다. 보통 등불을 대신하기 위해서 깨어지거나 저급의 야명주를 박아 두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아주 밝고 고급스러운 야명주를 사용했다.

시작부터 아주 사람을 설레게 한다.

오늘 이곳에서의 첫 번째 목표는 비궤가 흡수할 구슬을 얻는 것이다.

천마신교에서는 비궤를 얻었고, 황룡무관 지하에서는 삼백 년 전과 이어지면서 이 기운들을 다스리는 심법 구결을 얻었다.

현재 자신이 흡수한 기운은 셋.

풍천교에서 얻은 흑정, 사도맹에서 얻은 청정, 북해빙궁에서 얻은 백정.

지난번 황룡무관 지하에서 벽에 그려진 비궤와 구슬을 보았었다. 비궤가 흡수할 기운은 모두 여섯 개. 흑색과 백색, 청색과 적색, 그리고 황색과 자색.

과연 무림맹에서도 얻을 수 있는 기운이 있을까?

복도 끝에 다다른 검무극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림비고의 첫 번째 공간은 보물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보통 보물들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황금으로 만들어진 갖가지 보물들이다. 여러 상단이나 문파들이 보낸 선물들, 가령 황금으로 만들어진 용이나 호랑이, 거북이나 두꺼비 같은 것들이 보고에 가득하기 마련인데.

한데 무림보고에는 그런 황금이나 보석은 없었다.

이곳에는 딱 한 종류의 보물만 있었다.

피독주.

값비싼 최상급 피독주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그 아래 쌓여 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역시 피독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각각의 상자마다 등급별로 피독주가 가득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모든 보물을 피독주로 바꿔서 보관하고 있음을.

‘아, 전쟁을 대비하고 있구나.’

동시에 독왕을 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이곳에 있는 피독주는 즉시 맹의 모든 고수에게 지급될 것이다.

‘당대만큼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아버지는 독왕을 선두에 세우진 않으실 테니까요.’

그렇게 피독주만의 방을 지나 다음 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독주가 있던 장소보다 수십 배는 더 큰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정파의 기운들로 가득했다. 그냥 평범한 마교나 사파의 고수라면 이곳에 들어서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기와 협기가 가득했다.

검무극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신병이기들을 보관한 장소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는데, 사방 벽에는 병장기들이 걸려있었고 내부 공간에는 병장기를 올려둔 장식대가 수없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것들을 구경했다. 주로 정파의 고수들이 사용했던 무기들. 그래서 정파의 기운이 넘쳐났던 것이다.

장식대 아래에는 무기의 이름과 그것을 사용했던 고수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고수들이 이것으로 어디서 누구와 싸웠는지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이곳은 그냥 창고가 아니다.

무림의 역사까지 알 수 있는 전시장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보고에 들어가 봤지만 이렇게 잘 정리해둔 곳은 무림맹이 처음이었다.

무기들은 언제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유명한 것들이었다.

당장 검무극의 눈에 띈 이 검만 해도 그렇다.

장식대 아래에 적혀 있는 이름.

무명검(無名劍).

이름이 없다고 무명검이지만, 이름이 있는 어떤 검보다도 유명한 검이었다.

이백여 년 전 무명객(無名客)이라 불리며 무림을 휩쓸었던 절대 고수의 독문병기.

‘무명검은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조심스럽게 장식대 위에 놓인 무명검을 들어서 뽑아보았다.

스르릉.

검이 내뿜는 예기가 주위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좋구나!”

절로 감탄이 나왔다.

검을 쓰는 무인이라면 이 검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옆에 올려진 하나의 비파.

음공을 사용하는 무인을 위한 무기였다.

천음비(天音琵).

과거 음공의 절대고수 화명선자(花明仙子)의 독문병기였다.

천음비가 울려 퍼지면 내공이 약한 이들은 고막이 터지고 기혈이 역류하면서 즉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명검과 천음비가 이렇게 가까이 배치된 이유도 있었다. 화명선자가 무명객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장식대 아래에는 두 사람의 마지막 싸움에 대해서도 설명이 되어 있었다.

다시 몇 걸음을 옮기니 이번에는 검은 용이 도신을 휘감듯 새겨진 도가 있었다.

묵룡신도(墨龍神刀).

“아! 방에 들어와서 이제 채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무명검이 나오고 천음비가 나오고 묵룡신도가 있다고? 이곳에서 고작 세 개만 고를 수 있다고? 나 세 개 빼고 다 가져갈래!”

진패천이 들었다면 크게 웃었겠지만, 정말이지 바닥에 드러누워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 들게 하는 신병이기들이 그곳에 가득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림을 놀라게 했던 역사가 모습을 보였다.

금마쇄(禁魔鎖).

이 쇠사슬 병기도 한때 무림을 종횡하던 정파 고수의 독문병기였고, 그 옆에 놓인 백기선(白氣扇)이라 이름 붙은 이 부채 역시 부채질 한 번에 생사가 오가는 절대병기였다. 이들 두 무인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검무극은 무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견식이 넓고 풍부했기에 알아보는 병장기가 많았다. 한데 설명을 읽어보면 자신도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구경하다 보니 의외로 평범한 병장기도 있었다.

그 무기를 사용한 사람이 훌륭한 협객이었거나, 무기가 정말 의미 있게 사용되었다면 전시한 것이다.

무공이 경지에 이른다면, 한 자루의 낡은 철검이 자신이 존경했던 무인이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어떤 보검보다 의미 있겠지.

그렇게 검무극은 병장기들을 구경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갑자기 천마호신공이 발휘되었다. 어떤 즉각적인 위험이 감지되어서가 아니었다. 저 앞에서 유난한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바람에 천마호신공이 반응한 것이다.

‘대체 뭐가 있기에?’

검무극이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점차 다가갈수록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너른 공간이 있었다. 앞서는 바둑판처럼 병장기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곳에는 너른 공간에 장식대가 하나만 있었고 그곳에 한 자루의 검이 올려져 있었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한 것은 바로 이 검 때문이었다. 일개 검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천마호신공이 발휘되었다고?

그러고 보니 이곳이 이 두 번째 장소의 정중앙이었다. 이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병장기들이 전시된 배치.

그곳에 올려진 한 자루의 검.

검무극이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검에서 강렬한 정기와 협기가 느껴졌다.

그 아래 적혀 있는 이름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군자검(君子劍).

터져 나오는 검무극의 외침.

“고금제일군자검(古今第一君子劍)!”

바로 군자검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군자검은 정파 무림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었다.

천마신교에 천마검이 있다면 정파무림에는 군자검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 이 검이 군자검이구나.”

검무극도 말로만 듣던 검이었다.

군자검의 검집이나 손잡이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그 어떤 무기도 압도했다.

검무극은 가만히 군자검을 쳐다보았다.

우선 진패천에게 놀랐다. 무림맹주라면 이 군자검을 가져다 쓸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는 군자검을 쓰지 않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담긴 정파 무림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군자검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설마 군자검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군자검을 가져가도 된다고 여겼던 것일까?

어쨌든 약속했으니 이 검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진패천은 가져가게 할 것이다. 그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제가 물욕의 화신이라고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뭘 믿고 저보고 마음껏 가져가라고 하신 겁니까?”

진패천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까지 군자검에게 다가갔다.

“너도 이곳에만 갇혀 지내니 외롭지?”

군자검과 같은 보검이라면 좋은 주인을 만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을 것이다.

검무극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 나와 같이 나가자!”

검무극은 군자검을 가지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귀한 검이 보고에만 있는 것은 무림을 위해서도, 또한 이 검을 위해서도 옳지 않은 일이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군자검을 손에 들었다. 검을 뽑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군자검을 손에 들자 허리에 차고 있던 흑마검이 나직이 울었다.

구우우웅.

군자검의 존재를 느낀 것이다. 보검이 보검을 알아보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다독였다.

“긴장하지 마라, 괜찮다.”

검무극은 군자검을 뽑지 않았다. 자신이 쓸 검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뭐든 가져가라 약속했고, 아무리 그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더라도, 욕심을 내선 안 될 것이 있었으니까.

“내 친구에게 축하해줄 일이 생겼다.”

군자검을 진하군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는 검의 이름에 딱 맞는 성품을 지녔으니까.

진패천의 성격상 나중에 진하군이 맹주가 되더라도, 이 검을 손자에게 내어줄 리는 없다. 평생 이곳에 손도 대지 않은 청렴한 성격인데, 자신의 혈육에게 군자검을 내어주진 못할 터.

‘그러니 제가 줍니다!’

언젠가 진하군이 군자검으로 펼쳐내는 제왕검식을 보게 될 날도 오겠지?

검무극이 군자검을 흑마검의 반대쪽 허리에 찼다.

이렇게 검무극은 가질 수 있는 세 개 중 첫 번째를 골랐다. 진패천에게 농담처럼 말했는데 정말 제일 좋은 것을 골랐다.

진패천은 자신이 이걸 가져 나오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건 몰랐죠?

“아마 너도 그 친구가 마음에 들 거다.”

이제 하나 먹을 때도 됐잖아?

군자검을 허리에 찬 검무극은 그곳을 마저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비궤가 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구슬이 병장기 사이에, 혹은 장식장 서랍 속에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병기를 다 둘러보았지만 비궤는 울지 않았다.

검무극은 다음 방으로 향하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잘 보고 갑니다.”

병장기를 사용했던 무인들의 영혼에게 하는 인사였다.

이곳 전시장은 병장기 그 자체보다 그걸 사용한 무인들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병장기가 있던 방보다는 좁았지만, 그래도 첫 번째 방에 비하면 굉장히 넓었다.

이곳에는 호신갑이 진열되어 있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호신갑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사용했던 이들에 대해 적혀 있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그곳을 둘러보았다.

“오, 풍류의(風流衣)를 실제로 보는구나!”

과거 여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바람둥이 검객 연객(戀客)의 호신갑이었다. 등에 아름다운 미녀가 그려진 이 옷은 그를 상징하는 장삼이었는데, 어지간한 검기로도 이 미녀를 자를 수는 없었다.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그렇게 진담 반, 농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호신갑을 구경했다.

정말 온갖 종류의 호신갑들이 있었다.

“은린갑(銀鱗鉀)이 이렇게 생겼구나!”

은색 비늘이 반짝여 눈이 부실 정도였다. 물론, 실용성은 많이 떨어져 보였지만.

“패룡갑(覇龍鉀)! 멋지다, 멋져.”

용이 울부짖는 모습이 가슴에 그려져 있었는데, 정말 이걸 입고 적들 앞에 나서면 이 기세만으로도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단연 이곳에서 가장 좋은 호신갑은 이것이었다.

“천신갑(天神鉀)!”

가볍고 신축성이 좋아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알려진 호신갑이었다.

하지만 얇다고 무시해선 안 되었다. 검기나 검강으로도 자를 수 없는, 그야말로 최고를 다투는 호신갑이었으니까.

“이놈들아, 이제부터 날 속일 생각은 마라!”

진품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으니, 혹시라도 시중에 이곳에 있던 병장기나 호신갑이 거래된다면 그건 전부 가짜일 것이다.

그나저나 무인이 이걸 두고 그냥 간다고? 천신갑인데?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호신갑은 고르지 않을 작정이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그래, 수련이 가장 좋은 호신갑이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남은 호신갑을 구경하던 검무극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 있었다.

빙룡신갑.

그것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삼백 년 전 그때를 떠올렸다.

이 빙룡신갑은 암흑궁주가 천의궁주에게 천음단과 함께 선물했던 것이다. 그날 검무극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시 천의궁주가 싸워야 할 상대인 무황신검이 극양의 내공을 지녔기에 그에 대비하라고 준 것이었는데, 검무극은 그것이 함정이었다고 판단했다.

암흑궁주는 천의궁주가 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날의 싸움을 직접 보지 못해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극양의 공격에 대비한 천의궁주에게 극음의 공격이 펼쳐졌으리라 예상했다.

그날 싸움에 무황신검만 있지 않았으리라. 그때 분명 천마신교도 개입해 있었으니까.

혹시 그때의 일과 관련된 것이 주변에 또 있을까 둘러보았다. 그러자 또다시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물건.

‘아! 이건?’

그것은 호신갑이 아니었다.

그냥 기다란 하나의 천이었다.

신녀지몽(神女之夢).

아래에 적힌 이름을 보지 않더라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신녀가 눈을 가렸던 그 천이다.’

삼백 년 전 세상에서 만난 신녀는 이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가 했던 예언이 떠올랐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녀의 예언을 암흑궁을 통해 큰 비궤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들의 후예가 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 예언이 다르게 느껴졌다.

이 배후 세력과의 싸움이 나의 천의임을.

검무극이 천천히 신녀지몽이라 이름붙은 천을 집어 들었다.

천을 손에 잡는 순간 검무극은 어떤 기운을 느꼈다.

사람의 기도나 무공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이 기운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상서롭고 신비한 기운이었다.

신녀에게 예언을 받았기 때문일까? 검무극은 삼백 년의 세월을 넘어서까지 남아 있는 이 기운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기운은 자신을 위한 기운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님을.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순간 검무극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것을 전해줘야 할 거 같은 한 사람의 얼굴을.

‘여기서 신녀가 남긴 신물을 만난 것도 운명이라면?’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신녀지몽을 챙겼다. 이것이 검무극의 두 번째 선택이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남을 위한 선택이었으니.

‘마지막 하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후, 검무극은 다음 방으로 향했다.

세 번째 방문을 여는 순간, 확 풍기는 냄새로 이곳이 어떤 방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 맡아도 향기로운 이 약향, 이곳은 바로 영약이 보관된 장소였다.

“와! 끝내준다.”

수많은 영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만년설삼이었다.

만년설삼이 각각 상자에 담겨 진열되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만년설삼이 한자리에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정말이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년설삼이 있으니 옆에 따로 진열된 천년설삼은 도라지처럼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는 극양의 내공을 전해주는 구양신단(九陽神丹)이 진열되어 있었고, 건너편에는 극음의 내공은 이쪽이라는 듯 구음신단(九陰神丹)이 진열되어 있었다.

다시 그 앞으로 적심단(赤心丹)이 있었다. 평생 하나 먹어보기도 힘든 영약이 서너 개씩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대양단(大陽丹)과 소양단(小陽丹), 태극정심환(太極正心丸)과 적운단(積雲丹), 소명단(昭明丹)…… 그야말로 온갖 영약이 다 있었다. 그것도 정말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모습을 보니 진패천이 자신을 이곳에 넣어준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영약을 다 먹어버리면? 미친놈처럼 다 먹고 도망가 버리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가정하면 절대 자신을 넣어줄 수 없었다.

한데도 넣어줬다는 건, 정말 자신을 믿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다음 방은 비급이 있는 방일 것이다. 어차피 내게 무공은 필요 없으니, 여기서 영약을 골라야겠구나.’

내공이 더 필요해? 싶을 정도로 막대한 내공을 지녔지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또 내공이기도 하니까.

어떤 영약을 고를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영약들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니 그 중앙에서 이 방의 대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공청석유!”

모든 영약의 최고봉!

정말 공청석유가 담긴 새하얀 병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안을 살펴보니 새하얀 우윳빛의 공청석유가 몇 방울은 되는 듯 보였다. 한 방울만 해도 이곳의 영약 중 어떤 것보다 뛰어난 효능인데.

“혼자만 먹으려고 했는데, 참 복도 많지!”

형에게 하는 말이었다. 형과 반씩 나눠 먹으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뭐 좋다고 이걸 다 주겠는가? 아, 요즘은 좀 좋긴 하지만. 그래도 반이라도 주는 걸 고마워해야지.

“맹주님, 제가 들어올 때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제일 좋은 것만 가져 나온다고요.”

그렇게 검무극은 군자검과 신녀지몽, 그리고 공청석유까지. 이곳에서 골라야 할 세 개를 모두 골랐다.

이제 남은 것은 비궤가 흡수할 구슬을 찾는 일이었다. 검무극에게는 이 공청석유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영약이 있는 방을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비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이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마지막 방은 무공비급이 가득 보관된 곳이었다.

수십 개의 커다란 책장들에는 무림맹이 그 긴 세월 동안 모아온 귀한 비급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아, 냄새 좋다.”

약향과는 또 다른 의미로 좋은 냄새, 바로 책에서 나는 책향이었다.

임시 교주가 되고 천마서각에서 독서에 푹 빠졌던 검무극이었다. 이제 책 읽는 즐거움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그였다.

“여긴 무슨 책들이 있을까?”

검무극이 천천히 책장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주로 정파의 무공 위주로 모아두었다. 마공이나 사공과 관련해서는 그 파훼법인 무공 위주로 모아두었다.

정파 무공으로 반드시 마공과 사공을 제압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정파 무인들이 본다면 기절할 절세신공들이 그야말로 한 권 건너 한 권이었다. 검무극은 꺼내 보지 않았다. 이제 자신에게 무공은 오직 구화마공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검무극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책장과 책장 사이를 지나쳤다.

‘비궤야, 울어라! 제발 울어라! 너도 배고프잖아? 이제 하나 먹을 때도 됐잖아!’

하지만 비궤는 책장을 다 돌았음에도 울지 않았다.

검무극이 애써 아쉬움을 털어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검무극은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구슬의 힘을 다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 아니었으니까. 운명의 흐름대로 충실히 따르다 보니 세 개나 모았을 뿐.

“아니! 그럴 수 없지! 찾아내야지!”

검무극이 다시 첫 번째 방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살피며 안으로 들어왔다.

피독주 방에서 병장기 방으로, 다시 호신갑 방에서 영약 방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급 방까지.

모든 곳을 샅샅이 살폈지만 비궤는 반응하지 않았다.

‘아! 무림맹 보고에는 구슬이 없었구나.’

왠지 있을 거 같았는데.

아쉽지만 그래도 인사는 하고 나가야지.

“잘 보고 갑니다.”

그냥 밖으로 나가려다가 검무극이 서고를 돌아보았다.

인사처럼 다른 곳은 잘 봤는데, 여긴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나가고 있었다.

“내가 이래 봬도 근래 책 좀 읽어본 사람이야.”

검무극이 가까이 있는 책장에서 제일 얇은 책을 한 권 골랐다.

“이곳에 들어온 것도 기념인데, 한 권은 읽고 나가야지.”

이 서고 공간의 구석에는 책을 읽을 때 앉으라는 듯, 벽에 작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다가갔을 때였다.

가슴에서 비궤가 울었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온갖 곳을 다 찾아다녀도 울지 않던 비궤가 여기서 울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책장들 사이만 돌아봤지 이 구석까지는 와보지 않았구나!

여긴 그냥 의자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의자도 아주 작아서 구슬이 숨겨져 있을 수도 없었고.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그 순간 검무극이 흠칫했다.

“아니, 있구나!”

검무극의 시선이 의자 뒤쪽 벽에 붙은 야명주를 향했다.

책 읽으라고 박혀 있는 야명주였다.

‘저거다!’

과연 야명주에 다가가자 비궤는 더욱 강하게 진동했다.

검무극이 아주 조심스럽게 야명주를 뽑았다.

그러자 야명주가 빠져나온 뒤쪽에서 무엇인가 또르르 굴러 나왔다.

굴러나온 것은 하나의 구슬이었다.

황색 구슬, 바로 황정(黃睛)이었다.

검무극은 환호했다.

“찾았다!”

처음부터 찾았다면 이렇게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고 포기한 상태에서 찾으니 너무 기뻤다.

이 구석 자리 의자와 그 위의 야명주를 보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방마다 야명주는 곳곳에 박혀 있었다. 처음 들어오는 입구의 복도에서부터 고급 야명주가 박혀 있었으니까.

그것들이 방마다 너무 흔하게 박혀 있어서 마지막 서고의 맨 구석에 있는 이 야명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다.

검무극이 품에 있던 비궤를 꺼내 그 위에 황정을 올렸다.

스스스슥.

언제나 마찬가지로 비궤가 황정을 흡수했다.

곧이어 비궤가 크게 진동하더니, 그곳에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궤에서 흘러나온 황정의 기운이 검무극의 손을 통해 온몸으로 번져나가며 흡수되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기운은 빛처럼 일렁이며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그 과정이 너무 기분 좋았다. 갈증이 극에 달했을 때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 같은 이 느낌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청량감을 주었다.

검무극은 자연스럽게 일전에 배웠던 구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속에 잠들어 있던 흑정, 청정, 백정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이 세 개의 기운은 기존 내공심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새로 합류하는 황정의 기운을 반겼다.

네 개의 기운이 함께 온몸의 혈맥을 내달릴 때, 검무극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저 하늘 위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구결의 마지막 순간, 네 개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 순간 그 기운에 담긴 엄청난 힘을 느꼈다. 이 힘은 기존의 내공이 주는 강력함과는 다른 강력함이었다.

하지만 기운들은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다시 흩어져 혈맥 곳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하아.”

이제 황정의 기운까지 완벽하게 흡수했다.

남은 색은 두 가지.

적색과 자색의 구슬만이 남았다.

과연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만약 모든 기운을 다 모으면 어떻게 될까?

잠시 그렇게 이 신비로운 기운의 감흥에 빠져 있을 때.

비궤가 기운을 흡수한 구슬을 뱉어냈다. 굴러나온 황정은 이제 평범한 돌멩이가 되어 있었다.

“잘 먹었냐?”

검무극의 물음에 비궤는 언제나처럼 그저 웃을 뿐이었다.

검무극은 기운을 잃은 황정을 원래 구멍에 넣고, 다시 야명주를 꽂았다.

그리고 가져온 책을 그 자리에 앉아서 읽었다. 옛 고수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긴 글이었다. 글을 읽고 있으니 아버지가, 그리고 본교에 있는 이들이 그리웠다.

잠시 후 검무극은 다 읽은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두었다.

만약 이곳에서 책 한 권 읽고 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황정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이곳에 들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천마서각 만세! 독서광 검무극 만세다!

검무극은 세 개의 신물을 챙겨 들고 진패천이 기다리고 있는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잘 읽고 갑니다!”

먼저 보내 주려 합니다

검무극이 무림보고를 나왔다.

진패천은 입구에 등을 돌린 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맹주님, 저 나왔습니다.”

뭘 가지고 나왔을까? 진패천은 그 선택이 궁금했다.

검무극을 돌아보는 순간, 진패천은 아주 잠깐 멍해졌다. 실전에서 이랬다면 목숨이 위험했을 만큼, 순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군자검?’

곧이어 밀려드는 놀람.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았을 뿐, 정말 놀랐다. 하마터면 헛, 하고 탄성을 내지를 뻔했으니까.

“제가 고른 것은 이렇게 세 개입니다.”

검무극이 내민 두 팔 위에 군자검이 가로로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군자검 위에 공천석유가 든 병이 올려져 있었고, 옆에는 신녀지몽이 걸려 있었다.

충격을 받은 진패천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군자검을 가지고 나왔다고?’

애초에 군자검을 가지고 나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예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군자검은 정파의 상징과도 같은 검이었으니까.

자신도 보기만 했을 뿐, 뽑아보지 않았던 검이었다.

‘내 앞에 있는 게 정말 군자검인가?’

다시 쳐다봐도 군자검이었다.

“그 검이 어떤 검인지 알고 있나?”

혹시라도 모르고 가져왔나 싶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물론입니다.”

검무극이 군자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금제일 군자검이죠.”

검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 진패천을 향했다.

“검 중에서 제일 좋은 검을 가져 나왔습니다.”

아무리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고 했다지만, 그렇다고 군자검을 가져 나와?

진패천은 황당하고 당혹스러웠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왜 검무극이 이걸 선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을까?

진패천의 시선이 다시 공청석유를 향했다.

영약 중에서 가장 귀한 영약.

군자검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그건 오히려 덜 충격적이었다.

그래, 공청석유는 줄 수 있다. 손주들을 살려주고, 나아가 무림맹의 운명을 구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군자검은 정파의 상징이 되는 검이다. 그 검이 천마신교의 손에 들어간다?

정파 무림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어쩌면 천애거사가 악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보다 더 큰 파장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진패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좋기도 하겠지.

“그 천은 무엇인가?”

“신녀지몽이라 이름 붙은 신물입니다.”

검무극이 검에 걸려있던 신녀지몽을 진패천에게 건네주었다.

“삼백 년 전, 천의궁을 수호하던 세 조직 중 신녀궁의 유물이지요.”

신녀지몽을 살펴보는 진패천은 아무런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역사적 의미가 있을 뿐, 별다른 효능이 없는 천에 불과한데.’

검무극은 진패천의 표정과 반응에서 알 수 있었다. 그 신성한 기운은 자신만이 느끼는 것임을.

“왜 이걸 골랐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진패천이 다시 신녀지몽을 돌려주었다.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으니까. 이곳을 나간 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진패천은 군자검만은 안 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니까.

그냥 약속도 아니었다. 무림맹주가 천마신교의 임시교주에게 한 약속.

“훌륭한 선택이었네.”

그래, 검을 쓰는 무인이 군자검을 고른 것이 어찌 잘못된 결정이겠는가?

진패천은 미련과 후회를 털어내고 진심으로 검무극을 축하해주었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군자검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모든 보물과 신물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손자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까.

군자검을 내준 것이 문제가 되면 그 책임은 기꺼이 자신이 질 것이다. 이 문제는 자신의 문제지 검무극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해야 할 때.

“이번 일 고마웠네.”

검무극은 감격한 얼굴로 진패천을 쳐다보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에끼, 이 사람아. 그게 마교 소교주가 무림맹주에게 할 소리인가?”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이만 돌아가세.”

“네, 맹주님.”

검무극이 신녀지몽과 공청석유를 품에 넣고, 군자검은 허리에 찼다.

확실히 주기로 마음먹은 진패천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군자검을 향했다. 미련이 남은 것이다. 다시 마음이 들끓는 것을 느끼자.

‘아! 나는 군자는 못 되는구나!’

걸음을 옮기며 진패천은 실소했다.

스스스-

들어올 때처럼 진법 속 안개는 스스로 걷히며 길을 만들었다.

“이제 돌아갈 건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친구들 불러서 하군이 축하연을 열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하는 말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축하연을 하려는 모양이다.

“누군가 모여라, 하고 깃발을 들지 않으면 영영 못 볼 사이라서. 그 깃발 주로 제가 들고 있습니다.”

그게 참 어려운 일임을 진패천은 안다. 당장 자신만 해도 그랬다.

내가 진패천인데, 굳이? 보고 싶으면 네가 먼저 연락해야지.

솔직히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왜 그리 모이려 드는가?”

“좋아서죠. 저는 친구들이 좋습니다. 하군이도 좋고, 사도맹 비 소맹주도 좋고. 다른 친구들도 좋고. 보면 재밌고 즐겁습니다. 그래서 깃발 드는 거죠. 물론 맹주님께서는 그 깃발을 전쟁터의 돌격기(突擊旗)라 의심하시겠지만, 그냥 여기로 다 모여라, 하는 하하호호 집결기(集結旗)입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진패천이 옅게 웃었다.

“맹주님은 그런 친구 없으십니까?”

천애거사 일을 뻔히 알면서도 검무극은 물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시체는 묻어도 마음의 상처는 묻게 하지 않으려는 검무극의 노력이었다. 친구 하나 보냈으면 새 친구 사귀어야지.

“지금이라도 깃발 한 번 들어보시죠?”

진패천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깃발을 자신에게 직접 들라고?

“맹주님이 깃발을 드시면 온 무림이 깜짝 놀랄 테니, 대신에 깃발에 크게 쓰셔야겠지요. 절대 다른 뜻 없다, 놀기 위한 깃발이다!”

진패천이 큰소리로 웃었다. 정말이지 자신을 이렇게 웃게 하는 사람은 이 검무극이 유일할 것이다. 저 군자검까지 차고서 말이다.

“내가 깃발을 세우면 누가 올까?”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언급했다.

“우리 아버지 있잖습니까? 사도맹주님도 계시고.”

검무극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듯 덧붙여 말했다.

“누군가 깃발 들어주길 은근히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르죠.”

진패천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문득 삼자회합 때가 떠올랐다.

생각보다 즐겁기는 했다. 다시 한 번 모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 진패천은 흠칫했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렇게 두 사람이 진법에서 나와 내원을 함께 걷는데, 앞서 진하령과 헤어졌던 자리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맹주님.”

진패천에게 정중히 인사한 사람은 바로 진하군이었다.

수련장에 들어갈 때 수하에게 명령했다. 검무극이 맹주님을 찾아오면 자신을 꼭 부르라고.

검무극이 천마신교로 돌아가기 전에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좋은 선물 골랐나?”

진하령에게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검무극을 무림보고에 데리고 가셨다고.

“끝내주는 것들만 가지고 나왔지.”

진하군이 흑마검 반대쪽에 차고 있는 군자검을 쳐다보았다. 실제로 본 적이 없기에 그것이 군자검이란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검무극이 어떤 보물을 가져가도 아깝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고마웠네.”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검무극 덕분임을 알고 있었다.

“곧바로 돌아갈 건가?”

당연히 이제는 천마신교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나, 안 갈 건데?”

“뭐?”

“자네 축하연하고 갈 거야. 후계자가 되었는데 축하연 열어야지. 이미 친구들 다 불렀네.”

“친구 누구?”

“친구 몇 명 되지도 않으면서 뭘 묻나?”

당황한 진하군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진패천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왜?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 좋았다. 이 축하연이야말로 가장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이들이 모이는 자리일 테니까.

“자, 그리고 이건.”

검무극이 허리에 차고 있던 군자검을 풀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후계자가 된 기념으로 주는 내 선물.”

이 순간 정말 놀란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놀람을 넘어선 충격이었다. 설마 군자검을 손자에게 선물로 줄지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으니까.

진하군이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다.

“됐네, 선물은 무슨!”

순간 진패천이 ‘끙!’하는 표정을 지었다.

검무극이 슬쩍 장난을 쳤다.

“나중에 후회할 텐데.”

“후회 안 해. 자네 선물이니 가져가게.”

검무극이 다시 군자검을 허리에 차려 했다. 진패천이 한가득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허리에 차려다가 다시 군자검을 진하군에게 내밀었다.

“받게, 자네 주려고 고른 거야. 친구 성의 무시하지 말고.”

검무극을 바라보던 진하군이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선물을 준 사람이 할아버지였으니, 이걸 받아도 되나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검만 쳐다보았다. 왠지 평소와 달리 긴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수천 명의 적 앞에서도 긴장하실 분이 아니실 텐데.

검무극이 진하군 앞으로 검을 내밀었다.

“다른 좋은 선물, 맹주님께 받았네.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받게. 별거 아닌데 괜히 시간 끌면 나만 부끄러워져. 어서!”

“고맙네, 그럼 감사히 받겠네.”

결국 진하군이 군자검을 받아들었다.

검을 받아드는 순간.

진하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딱 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보통 검이 아니다.’

진하군이 천천히 군자검을 뽑았다.

스르릉.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군자검.

긴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모습을 보인 군자검이었다.

“아!”

진하군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검날에 흐르는 예기는 평생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베어버릴 것 같았다.

검의 숨결이 느껴졌다.

깊고도 단아한 검의 숨결이.

검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검을 다 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이 검이 최고의 검이라는 것을.

진하군이 천천히 검에 내공을 주입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인사했다.

마치 그 인사에 답하기라도 하듯.

검이 짤막하게 울었다.

그렇게 첫 교감을 마치고 다시 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진하군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별거 아니라면서?”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겐 안 맞거든. 내가 군자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순간 진하군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그가 소리쳤다.

“군자검!”

놀란 외침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자검이다.”

진하군은 경악했다. 고금제일 군자검을 어찌 그가 모르겠는가?

그 전설적인 검이 자신에게 선물이란 이름으로 들려 있었다.

“맹주님께서 무림보고에서 세 가지 기물을 선물로 주셨어.”

지금부터 하는 검무극의 말은 진패천과 진하군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평생 맹주로 계시면서 보고의 물건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신 맹주님이시다. 강직하신 성품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군자검은 계속 그곳에 보관되겠지?”

맞는 말이었다. 진패천은 군자검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자네라고 다르겠나? 군자검은 다음 세대에도 보고에 보관되어 있겠지. 그래서 내가 사고 쳤어. 내가 사고를 쳐야 그 검이 세상 구경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어때? 군자검하고 인사하니까. 그 답답한 곳 벗어났다고 좋아하지?”

진하군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이지 자넨!”

그의 말이 옳다. 그가 아니라면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검이었다.

게다가 그가 가질 세 가지 중 하나를 포기하고 주는 선물이었다.

진하군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정말 이 검을 받아도 되느냐는 눈빛에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패천은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더없이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보고로 돌아간 것보다 훨씬 기뻤다. 군자검은 그 어떤 존재보다 든든하게 손자를 지켜줄 것이다.

물론 가장 기쁜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무인이 좋은 무기를 얻는 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데 그 무기가 군자검이라면?

“좋지? 정말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좋지?”

이 함정에 빠질 뻔할 정도로 좋았다. 하마터면 그렇다고 대답할 뻔했으니까.

“군자검이 정파의 역사라고 들었어. 이제부터 내 친구가 그 역사를 이어 쓰는 거지.”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검무극을 진하군은 떨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로도 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진패천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왜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런 마음인 줄도 모르고 군자검이 천마신교로 넘어가는 것을 괜히 걱정했다.

“놀라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맹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서라고?”

“네, 절대 가져가면 안 될 것을 가지고 나왔음에도 맹주님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으셨죠. 저는 맹주님이 그러시리라 믿었고 맹주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제 마음속에 맹주님은 더 큰 존재로 자리하셨습니다.”

진패천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사마를 떠나, 신분을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아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정말 놀랍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예를 갖춰 맹주에게 작별을 고한 후, 진하군에게 말했다.

“다들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나중에 장소와 시간 보내줄게.”

신나서 뛰어가는 뒷모습을 진패천과 진하군은 한참을 서서 지켜보았다.

검무극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자 진하군이 담담히 말했다.

“포기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저 친구에게는 안 되겠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못 이기겠구나.”

진패천은 그게 끝이 아님을 느꼈기에 차분하게 물었다.

“지금은 어떠하냐?”

“포기가 아니라 먼저 보내주려 합니다.”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진하군이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뛰어난 친구인데 먼저 보내줘야지요. 대신 묵묵히 쫓아갈 겁니다.”

결코 포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기겠다는 마음도 아니었다.

검무극과 함께 걸어가겠다는 의지였다. 조금 늦더라도 묵묵히 같은 시대를 걷겠다는.

“언젠가 먼 훗날에 백발이 된 채 바위에 걸터앉아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저 친구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말해줄 겁니다.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잘 왔다고.”

진패천은 어리게만 느껴졌던 손자가 그새 참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걱정만 했었다. 진하군이 이끌어갈 무림을, 저 검무극을 상대해야 할 손자를.

하지만 오늘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아이들을 걱정할 게 아니라 응원을 해줘야겠구나.

진패천이 맹주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때 만나면 꼭 말해주거라. 군자검 가져갈까 봐 내가 노심초사했었다고.”

왜 잘해? 왜 잘하냐고!

검무양은 거처에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동생이 자신을 위해 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전수해 준 무공이었다. 그러니 어찌 소홀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날 때마다 오직 천마호신공 연마에 몰두했다.

수련에 매진하던 검무양이 감았던 눈을 뜨며 천마호신공을 중단했다.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선 것을 느낀 것이다. 예전이라면 이보다 늦게 알아차렸을 텐데, 익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벌써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 검무양은 창가에 서 있었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왜 자꾸 창밖을 봐.”

“그럼 창밖은 나이 많은 사람만 보는 거냐?”

“젊은 사람은 안 보지. 못 참고 뛰쳐나가니까.”

“선입견이다.”

검무극이 걸어와서 검무양 옆에 나란히 섰다.

“갔던 일은?”

“맹주님 잘 만나고 왔지.”

무림이 생긴 이래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이렇게 쉽게 무림맹주를 만났던 시대가 있었을까? 아마 동생이 처음일 것이다.

“혹시 지금 배고파?”

검무양이 고개를 가로젓자 검무극이 재차 확인했다.

“이거 중요해. 혹시라도 허기져서 못 참고 꿀꺽할 수도 있어서.”

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냐? 이런 눈빛으로 동생을 쳐다보는데.

“자, 태어나 이건 처음 볼걸?”

검무극이 품에서 하얀 병을 꺼냈다. 신나게 달려온 이유가 이 병 안에 들어 있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마개를 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병을 들여다보던 검무양이 깜짝 놀랐다.

“설마 공청석유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드려! 영약 계의 교주님이고 맹주님이시다. 우리 못난 형입니다, 교주님, 맹주님.”

일단 향으로 압도했다. 정말이지 이런 감미로운 향은 난생처음이었다.

“어디서 났어?”

무뚝뚝한 검무양조차 목소리를 떨게 할 만큼 대단한 영약이었다.

“이번 일 도와줘서 고맙다고 맹주님이 주시더라. 형하고 반씩 나눠 먹으래. 형에게도 고맙다는 말 꼭 전하라고 했어.”

검무양이 피식 웃었다.

그랬을 리가 없다. 이 귀한 것을 자신과 나눠 마시라고 했을 리는 더더욱 없고.

“난 됐다. 너나 마셔.”

“그럴 수는 없지. 나눠 먹으라고 준 것을.”

“맹주께 확인해 본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

물론 확인할 수는 없었다. 검무양 성격상 맹주에게 찾아가서 정말 나눠 먹으라고 한 것입니까? 라고 물어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됐어. 그랬다 하더라도 네가 다 마셔.”

“형 안 먹으면 버릴 거야.”

“그러든지.”

“내가 못 할 줄 알고?”

검무극이 바닥에 확 버리려고 했다.

물론 못했다.

“어휴, 쏟아질까 불안해서 기울이는 시늉도 못 하겠네.”

검무극은 두 손으로 병을 떠받쳐 들었다.

검무양이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섰다.

공청석유를 나눠 먹자는 동생이라니?

언제 이런 관계까지 된 것일까? 정말 죽이니 살리니 미워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사실 아직도 그 당시 감정이 생생하다. 그래서 가끔 이런 순간들이 낯설기도 했고.

그때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나직한 말소리.

“난 두려워.”

검무양이 돌아보았을 때 검무극의 얼굴에서는 장난기가 사라져 있었다.

“이 배후 놈들을 막아내지 못할까 봐. 이번에 봤다시피 수십 년을 참고 준비하는 집요한 놈들이잖아? 더 독한 놈이 나와서 내가 감당하지 못하면 어쩌지?”

잠시 동생을 응시하던 검무양이 불쑥 말했다.

“너 혼자 싸우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은 공청석유가 든 병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같이 마시고 같이 싸우자고. 형 위해서 주는 거 아냐, 날 위해서 주는 거지. 형이 나 지켜주라고. 자꾸 이러면 임시 교주 자격으로 명령 내린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녀석을 어찌 막겠는가?

검무양이 차분히 말했다.

“그럼 딱 한 방울만! 더는 안 돼.”

“알았어. 주고 싶어도 몇 방울 없어.”

“마시고 남겨줘.”

“난 나중에 먹을 거야.”

검무양이 손을 내밀자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입 벌려.”

“뭐?”

“형을 어떻게 믿고 이걸 맡겨? 한 방울만 마신다고 해놓고 홀랑 다 마시고 실수라고 하면 어쩌려고?”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 먹고 말지.”

“그럼 내 추측이 맞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이걸 홀라당 다 마시려다 실패한 거지.”

검무양은 이거 정말 미친놈인가!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검무극은 뻔뻔하게 맞섰다.

“결백하다면 입 벌리든가.”

결국 검무양이 입을 살짝 벌렸다.

“입 함부로 다물지 마! 흘리면 우리 망하는 거야.”

그렇게 강조한 후에 검무극은 망설임 없이 병을 기울였다.

똑똑똑!

세 방울이 연속해서 들어갔다. 한 방울 들어왔을 때 입을 다물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당황한 검무양에게 검무극이 소리쳤다.

“말은 나중에 하고 어서 운기부터 해!”

고집부릴 상황이 아니었기에 검무양은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남은 공청석유를 입에 다 털어 넣었다.

똑! 똑!

남은 공청석유는 두 방울이었다.

그렇게 두 형제는 나란히 앉아서 공청석유의 기운을 몸속에 녹였다.

호법은 필요 없었다. 이제 검무극의 경지는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약효를 녹이는 일을 잠시 멈추고 그에 대응한 후, 다시 녹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검무양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한 방울만 해도 엄청난 기운인데 무려 세 방울이다! 평생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기운에 혈맥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

진기의 흐름에 따라 공청석유의 기운이 혈맥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사아아악, 사아아악!

한 번 녹일 때마다 강력한 기운이 혈맥으로 전해졌다. 그 순간의 짜릿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무양은 신중하게, 하지만 과감하게 기운을 녹여나갔다.

그렇게 세 방울의 공청석유가 모두 흡수되자, 그 기운은 그의 혈맥을 타고 맹렬하게 내달렸다.

그것은 질주였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거대한 힘의 질주.

거칠게 내달리던 기운이 단전으로 모여들면서 기존의 내공과 합쳐졌다.

다음 순간!

마치 폭발하듯 단전을 꽉 채우는 그 웅혼한 내공에 검무양의 얼굴에 희열이 번져나갔다. 무공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느꼈던 그 어떤 쾌감보다 지금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차분하게 내공을 갈무리한 후에 검무양이 눈을 떴다.

단전에서는 웅혼한 내공이 넘실거리고 있었고, 두 눈은 더욱 맑고 깊어져 있었다. 몸은 가벼웠고 피부에서 광채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강해진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공청석유의 효능은 단지 내공을 증진하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혈맥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내공을 더욱 정순하게 해주었다.

먼저 운기를 끝낸 검무극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운기를 끝낼 때까지 숨도 크게 쉬지 않고 기다린 모양이다.

“끝내주지?”

이 말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 끝내줬다.

검무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왜 세 방울이나 줬냐?”

“젠장! 주고 싶어서 줬겠어? 손이 미끄러졌어.”

검무극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적과 싸우다 검을 떨어뜨리고 말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검무극이 그 조절을 못 할 리가 없었으니, 애초에 세 방울을 줄 작정이었던 거다. 또 녀석에게 당한 것이다.

“그나마 두 방울 남겨서 다행이었지. 다 부었으면 형 배 갈랐을 거야.”

검무극은 생색 대신 악역을 자처했다.

“후계자 싸움에서 내가 그냥 살려줬을까 봐? 동생 뒷바라지한다고 평생 힘들 거야. 각오해.”

검무양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녀석 뒷바라지라면 공청석유 세 방울로는 모자랐으니까.

검무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어딜?”

“무한에 왔는데 저잣거리 구경은 해야지.”

검무양이 싫다고 말하려던 순간, 검무극이 한발 빨랐다.

“무한까지 왔는데 아버지께 드릴 선물 사 가야지. 형은 안 살 거야? 어휴, 장남만 좋아하시는 불쌍한 우리 아버지, 언제 장남에게 선물 한 번…….”

말이 더 길어지기 전에 검무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무림맹 본단 앞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거리 양옆으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고, 좌판을 맨 행상들이 목쉰 소리로 호객하고 있었다.

그곳을 오가는 수많은 행인들.

그 복잡한 거리에 검무극과 검무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무극은 얼굴을 드러내고 활보했지만, 검무양은 죽립을 눌러쓰고 있었다.

“형, 누가 안 봐. 아니, 좀 보면 어때.”

하지만 검무양은 죽립을 벗지 않았다. 무한에서 마인이 얼굴을 드러내고 활보하는 건, 동생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저잣거리를 걸은 적이 있었나? 처음이지?”

아버지와 여행 갔을 때, 아버지와 저잣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었다. 오늘은 형과 걷는다. 언젠가 셋이 함께 걸을 날도 오겠지?

그냥 앞만 보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형은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걸었다.

정말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고르는 모양이다.

그때 만두 파는 수레에서 상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만두 맛보고 가십시오!”

그 말에 검무극이 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죽이기가 어려워서, 그런 맛은 느끼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래도 한 번 먹어볼까?”

검무극이 형을 끌고 그쪽으로 갔다.

만두 한 접시를 시켜 맛보는데, 길거리 음식치고 제법 맛있었다.

“길에 서서 음식 사 먹어 본 적 있어?”

그러자 검무양이 고개를 내저었다.

“소감이 어때?”

“하나 죽이고 조용히 먹고 싶다?”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형의 귀한 농담인데 크게 웃어줘야지.

만두를 먹으며 두 사람은 주변을 구경했다.

흥정하다 싸우는 사람들, 그릇에 음식을 담아 뛰어가는 여인, 엿장수를 따라 달려가는 아이들, 등짐 진 사내들을 피해 걸음을 옮기는 행인들.

검무양은 그때 보았다. 그들을 보면서 검무극이 웃고 있는 모습을.

자신은 평생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는 삶을 보면서, 동생은 뭐가 좋아서 저리 웃고 있나?

검무극이 마지막 남은 만두를 입에 넣었다.

“공청석유를 빼앗겼으니, 이거라도 내가 먹어야지.”

검무양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저잣거리를 걸어가다가 검무양이 한 상점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형이 그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른 곳을 볼 때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곳은 바로 악기를 파는 상점이었다.

“들어가서 구경해보자.”

검무극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검무양이 뒤따라 들어왔다.

“형, 다룰 줄 아는 악기 있어?”

“없다.”

그런 사람치고는 이곳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랐는데.

“하긴. 형이 무슨 악기를 다루겠어? 내가 음감이 없는 걸 보면 형도 마찬가지일 테고. 아버지가 연주하는 모습도 본 적이 없으니, 이게 다 핏줄이야, 핏줄! 우리가 사람이나 죽일 줄 알지!”

바로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검무양이 단소를 불기 시작했다.

단소에 숨을 불어넣자,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선율이 주위의 소음을 뚫고 퍼져나갔다.

검무극이 눈을 크게 떴다.

그냥 불어보는 게 아니었다. 형은 제대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형이 악기를 다룰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정말 놀랐다.

아무리 잘 보려고 노력해도, 누군가를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또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음률에 형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듣고 있으니 너무 좋았다.

연주가 끝나자 뒤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길 가다 걸음을 멈춘 사람들이 상점 입구에 모여 있었다.

검무극이 형에게 소리쳤다.

“뭐야? 왜 잘해? 왜 잘하냐고!”

악기점 주인장도 놀람을 전했다.

“연주가 아주 훌륭하십니다.”

바깥에 모여 있는 사람과 주인장의 칭찬이 부담스러웠는지 검무양이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이 재빨리 단소를 사서 형 뒤를 쫓아갔다.

“그건 왜 사 왔냐?”

“형이 불었다는 이유로 이미 이 단소 천 배는 가격이 뛰었어. 그리고 어쩌면 조만간 다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검무양이 무슨 소리냐며 쳐다보자 검무극이 화제를 돌렸다.

“사람이 달라 보인다. 적들 시체로 쫙 깔아두고 피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며 단소 한 번 불어주면! 멋지다, 멋져! 여인들 다 쓰러질 거야!”

“무서워서 쓰러지겠지.”

바로 그때였다.

짐수레가 지나가며 형 바지에 흙탕물이 튀었다.

하지만 검무양은 전혀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정말 피바람이 불고 무한 저잣거리가 몰살당할 줄 알았는데.”

실없는 소리에 앞서 걷던 검무양이 소리 없이 웃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형도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을.

그래, 그렇게 좀 웃고 다녀라. 얼마나 보기 좋냐?

검무극은 형과의 이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두 사람은 이것저것 구경했다. 아버지 선물 이야기는 검무극이 꺼냈지만, 지금 더 진지하게 찾는 건 검무양이었다.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선물이 없었다.

검무극이 잠옷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무한표 꽃무늬 잠옷 어때?”

제정신이냐 하는 검무양의 눈빛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형은 못 봤구나.”

검무극이 조용히 잠옷을 내려놓았다.

“아니다, 됐어. 형은 충격이 클 거야.”

그렇게 다시 저잣거리를 걸어가던 그때, 검무양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나이 지긋한 화공이 자리에 앉아서 지나가던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검무양이 그곳으로 걸어가더니 화공 앞에 앉았다.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쫓아와 물었다.

“왜 이래? 사람 무섭게.”

평생 이런 데 앉을 일 없는 형이었는데.

“너도 앉아라.”

“나도?”

검무극이 더 놀라서 형 옆에 앉았다.

설마 자신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자고?

정말 그렇다는 듯 검무양은 저잣거리에 온 후 처음으로 죽립을 벗었다.

그렇게 얼굴을 드러낸 후 화공에게 말했다.

“함께 그려주시오. 돈은 더 드릴 테니 최대한 잘 그려주시오.”

화공이 정성껏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놀란 얼굴로 형을 쳐다보았다.

함께 그림 그리는 것도 놀라운데 잘 그려 달라고?

“너 누구야? 우리 형 어디 가고 형 행세냐!”

검무극의 장난에도 검무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이 그림, 족자로 만들거다.”

“뭐?”

검무양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만들어서 아버지께 드릴 거다.”

그제야 검무극은 형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아버지께 드릴 선물이라는 것을.

형제가 함께 나란히 있는 그림만큼 아버지에게 큰 선물은 없을 테니까.

“형만 한 아우 없다더니. 원래 이렇게 똑똑했어?”

“앞이나 봐.”

검무양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그 못생긴 얼굴 이상하게 그려질라.”

동생의 다정은 무적

그림은 훌륭했다.

유명한 화공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저잣거리까지 흘러와 그림을 그려주며 살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해도 좋을 만큼 화공의 실력은 좋았다.

그림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검무극과 검무양이었다.

검무극이 그림을 똑바로 봤다가, 또 옆으로도 봤다가 하더니.

“아무리 봐도 형을 더 잘 생기게 그렸는데.”

검무극이 완성된 그림을 보며 음모론을 펼쳤다.

“여기 화공분에게 전음으로 협박했지? 형을 더 잘 그려주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붓을 잡지 못 하게 하겠다!”

나이 든 화공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주며 수많은 사람을 봐온 그였다.

하도 많은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아서인지 이제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인생이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그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동생의 얼굴을 그릴 때였다. 가볍다 싶을 정도로 실없는 말을 내뱉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를 그리면서 초상화를 그리는 게 아니라 풍경화를 그리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카락을 그리는데 바람 부는 갈대숲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눈을 그리는데 드넓은 바다를 그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발이 휘몰아치는 설산을 그리기도 했고,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도 그렸다. 사계절을 느꼈고, 흐르는 세월도 느꼈다.

평생 사람 얼굴을 그려왔지만, 누군가를 그리면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검무양은 그 결과물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무표정한 자신과는 달리 그림 속 동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잘조잘 온갖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계속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그림, 마음에 든다.

“자, 돈 여기 있소.”

검무양이 열 장 값을 주었지만, 늙은 화공은 돈을 돌려주었다.

“오랜만에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이 그림은 제가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그림에는 값을 매기고 싶지 않았다. 만약 돈을 받아야 한다면 이 돈의 몇백, 몇천 배는 받아야 할 거 같았으니까.

화공이 진심으로 하는 부탁이라는 듯 다시 한번 고개 숙여 부탁하자 검무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족자를 만들어주는 곳을 아시오?”

화공이 저잣거리에 있는 표구상(表具商) 위치를 알려주었다.

화공과 작별한 두 사람은 곧장 표구상으로 향했다.

평생 표구 일을 해왔다는 주인장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는데, 그런 그에게 검무양이 그림을 내밀었다.

“벽에 걸어둘 수 있게 만들어주시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고로 만들어주시오.”

“최고라. 그럼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칠 일 후에 오십시오.”

검무양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는 무한에 있을 거야.”

검무극의 대답에 검무양이 주인장에게 짤막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칠 일 후에 오겠소.”

그렇게 표구상을 나선 두 사람이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단소는 언제 배웠어?”

“예전에.”

“아버지도 아셔?”

검무양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검무극의 생각은 달랐다.

“아실걸?”

검무양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형이 악기를 다룰 줄 안다는 거 아실 거라고.”

형은 믿지 않는 듯 보였지만, 아버지는 알고 계실 거로 생각했다. 처음 회귀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산공독에 당한 것도 알고 계셨다.

모른 척 하실 뿐 아버지는 자식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시다는 걸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한번 연주해 봐라, 할 성격도 아니고. 한번 연주해 보겠습니다, 할 성격도 아니었으니.

언제 판 한 번 깔아야겠구나 싶었다. 아버지께도 형의 연주를 꼭 한번 들려드리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쏴아아아아.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상점의 처마 밑에 서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들의 무공실력이라면 빗속에서도 비를 맞지 않고 갈 수도 있었지만, 그냥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구경을 하던 검무양이 힐끗 동생을 쳐다보았다.

내리는 비가 말 많은 동생의 입을 막았다. 검무양은 이 순간의 모습이 동생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없이 비를 바라보는 저 깊은 눈빛이 동생의 진짜 눈빛임을.

검무양이 나직이 물었다.

“너는 뭘 좋아하냐?”

생각지 못한 질문에 검무극이 놀라 형을 쳐다보았다.

검무양은 내리는 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다시 물었다.

“너 뭐 좋아하냐고.”

형, 그거 알아? 형이 처음으로 내게 사적인 일을 물었다는 거. 그것도 먼저.

“나야 좋아하는 거 많지. 사람들하고 술 마시고 노는 것도 좋아하고.”

“너무…….”

검무양은 너무 정에 이끌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를 해주려다가.

생각해 보니 그 정에 적들이 다 죽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의 다정(多情)은 무적(無敵).

“넌 혼자 있는 거 더 좋아하잖아?”

형은 계속 자신을 놀라게 했다.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걸 표현해 주는 것은 더 놀라웠다.

“우리 형, 귀신이네, 귀신. 오늘 왜 이래?”

“진짜 네가 좋아하는 게 뭐야? 사람 타령, 술타령 그만하고.”

형이 진지하게 묻는다는 걸 알았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편안히 누워서 바다를 보는 것도 좋고, 설경 속 온천에 몸 담그는 것도 좋고.”

뜬금없이 바다와 온천이 나오니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좋아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좋아. 이렇게 처마 밑에 서서 비 구경하는 거.”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회귀 전 인생에서 그 순간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다.

눈보라 속에서, 흘러가는 뗏목 위에서, 절벽에 매달려서…….

그 징글징글하게 외로웠던 순간에서도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아졌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어도 기분이 나아졌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아직도 이런 순간이 좋은 것은.

가만히 동생을 쳐다보던 검무양이 다시 비를 바라보았다.

“바깥 구경하는 건 나이 든 사람이나 하는 거라면서.”

“적어도 난 바깥에서 구경하잖아.”

자신이 말해놓고도 유치했는지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검무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쏴아아아아아.

“형, 아버지 폐관수련 마치시면 우리 셋이 사냥 한 번 가자.”

잠시 말없이 내리던 비를 쳐다보던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항상 네 것부터 챙겨.”

검무극이 떨리는 눈빛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오늘 형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었고, 처음으로 걱정을 해주었다.

“역시! 네 놈은 형이 아니었어! 그림 그리자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 어서 우리 형 내놔! 언제 바꿔치기한 거냐!”

“…….”

농담이 끝나자 검무극이 진지하게 말했다.

“형, 나 보기보다 이기적이고 매정한 사람이야.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잘못하는 것 같으면 망설이지 말고 쌍욕을 해줘야 해.”

검무양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늘도 몇 번이나 참았다.”

쏴아아아아아.

* * *

족자가 완성될 때까지 두 사람은 거처에서 무공수련을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검무양은 천마호신술 연마에 열중했다. 공청석유 세 방울의 위력은 이 수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정순해진 내공 덕분인지 이전보다 더욱 무공수련이 원활했고, 얻어지는 성취 역시 더 빨라졌다.

검무극은 형이 수련에 집중하라고 식사 담당을 자처했다.

끼니때마다 객잔에서 요리를 사 와서 차렸다. 형이 밖에 나가서 밥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바람 쐬고 싶다는 이유로 나가서 요리를 사온 것이다.

경공으로 휙휙 다녀와서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끼니마다 다른 요리를 차렸다. 뭐 먹고 싶냐는 물음에 검무양은 아무거나 라고 대답했지만, 매번 아무거나가 될 수는 없었다.

덕분에 검무극은 형의 식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어떤 요리를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밥을 먹으면서도 한마디라도 더 대화하려고 애썼다.

언제 또 형과 한집에서 칠 일이나 함께 있을 기회가 있겠는가?

때를 놓치면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칠 일째가 되는 날은 검무양이 직접가서 요리를 사 왔다.

놀랍게도 검무양은 묻지 않았음에도 검무극이 좋아하는 요리로만 사 왔다.

“대체 내가 이 요리들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

“편식쟁이 식성이야 뻔하지.”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검무양은 지난 칠일간 밥을 먹을 때 동생의 젓가락이 어떤 요리에 더 갔는지 유심히 봐뒀던 것이다.

그렇게 칠 일의 시간이 흐르고.

검무극과 검무양은 족자를 찾으러 저잣거리에 모습을 보였다.

무한 거리는 한 가지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바로 오늘 진하군이 후계자가 된 걸 축하하는 무림맹의 대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맹 내의 수장들은 물론이고, 중원의 여러 무림 명숙들도 모두 참석했다.

저잣거리도 축제 분위기였다. 각 지역에서 무인들이 몰려와 그야말로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놈들아, 기분 좋다고 우리 형 어깨라도 치면 난리 난다! 몰살이야!”

말만 그랬지 검무극과 검무양이 먼저 알아서 피해 다녔다.

“비 소맹주도 내일 도착한다고 했나?”

“응.”

비사인이 그 소식을 통천각을 통해 기별을 해왔다.

“아, 궁금해. 어서 만나서 빙궁 한 소저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어.”

예전에 다 모였다가 헤어질 때, 비사인이 한설에게 돌아가기 전에 사도맹에 들렀다 가라고 불쑥 제안했다.

말하고도 아차, 했었는데 의외로 한설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었고.

그때 비사인이 행복을 만끽하라고 전음으로 놀리지 않고 그냥 보내줬는데.

“이번에 만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탈탈 털어야지. 그 곰 같은 친구가 말이나 제대로 했겠어? 이번에 내가 여인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 확실히 전수해줘야겠어.”

그렇게 인파를 헤치고 두 사람은 표구상에 도착했다.

족자는 주인장의 자신감만큼이나 멋지게 완성되어 있었다.

“멋지다!”

검무극이 감탄했다. 그림은 아주 고급스럽고 근사한 족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냥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 때와 멋진 족자가 되어 있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검무양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 선물로 드려도 될 만큼 괜찮았다.

검무양은 조심스럽게 족자를 말아서 품에 잘 간직했다. 누가 보면 보검이라도 보관하는 듯 보일 정도였다.

“고생하셨소.”

족자값을 치르고 두 사람은 표구상을 나왔다.

다시 거처로 돌아가려는데.

“피해!”

검무극의 외침에 두 사람은 함께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검무양이 긴장한 얼굴로 나직이 물었다.

“놈들이냐?”

검무양의 물음에 검무극이 골목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예리한 눈빛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응, 아주 사납고 무섭게 생긴 놈이야. 그 무서운 놈이 앙증맞은 짓을 하는군.”

앙증맞다니?

무슨 말인가 싶어 검무양도 고개를 살짝 내밀어 동생이 쳐다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분명 있었다.

저 멀리 저잣거리 끝에 사납고 무섭게 생긴 남자가. 지나가던 사람들도 그와 눈이 마주치면 길이 열렸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비사인이었다. 내일 도착한다고 알고 있었으니.

“일정이 당겨진 모양이군. 한데 왜 숨은 거냐?”

검무양의 말에 검무극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천만에! 저 거짓말쟁이의 옆을 봐.”

비사인 옆에 새하얀 무복을 입은 여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빙궁의 한설이었다. 놀랍게도 그녀가 함께 있었다.

“왜 두 사람이 함께 있지?”

“그녀 뒤쪽을 봐.”

한설 뒤쪽으로 그녀를 호위하는 한빙쌍검의 모습도 보였다.

“한빙쌍검이 호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저잣거리를 구경하고 있어. 사인이를 믿는다는 의미지. 다시 말해 이렇게 넷이 다닌 게 익숙하다는 뜻. 그 말인즉 사도맹에 갔던 한 소저가 그쪽 구경을 하며 북해로 안 돌아가고 있었던 거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마 비사인이 그녀를 이곳저곳 여러 곳을 구경시켜 준 모양이다. 그러다 자신의 연락을 받고 함께 온 것이고.

“나를 속이다니!”

“어쩌다 보니 하루 일찍 도착한 거겠지.”

하지만 검무극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 옷을 봐.”

그러고 보니 비사인은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와 맞춰 입었어. 똑같이 맞춘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문양이 있는 옷을 골랐고.”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했다.

어디 검무양이 이렇게 훔쳐보는 일을 좋아할 사람이겠는가?

하지만 검무극과 함께 있으니 이런 일도 재미있었다.

검무극의 추리는 계속되었다.

“왜 죽립을 쓰지 않았는지 알아?”

“왜지?”

“머리 헝클어질까 봐.”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저 비사인이? 생긴 것만 보면 당장 무림정복도 할 수 있을 얼굴이었다.

검무양은 믿지 못했지만 검무극은 확신했다.

“아니면 이 무림맹 앞마당에서 저 얼굴을 드러내고 다닐 이유가 없지.”

그때 저 멀리 있던 비사인이 이쪽을 홱 쳐다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두 사람은 골목 안으로 고개를 감춘 후였다.

“왜 그러시죠?”

한설의 물음에 비사인이 그녀에게 돌아섰다. 무섭고 예리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비사인이 옆에 있던 행상 수레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당과 드시겠소?”

당과까진 참았지만

“맙소사! 사인이가 당과를 사고 있어!”

검무극과 검무양은 골목에서 고개를 내민 채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사인이 얼굴을 본 주인장이 두려워서 손을 덜덜 떨면서 당과를 건네고 있어.”

검무양이 소리 없이 웃었다. 물론 웃기려고 한 과장된 말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비사인과 당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혹시 두 사람…….”

검무양은 말을 잇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형이 궁금해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야.”

“어떻게 알았어?”

“그랬으면 하나를 사서 나눠 먹었겠지.”

비사인이 산 당과는 꼬챙이에 십여 개나 꽂혀 있었다. 둘이서 나눠 먹어도 충분한 양이었는데, 비사인은 두 개를 사서 그중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고 있었다. 주고받는 태도도 아주 정중했고.

“자, 여기 있소.”

“고마워요.”

한설이 꼬챙이에 꽂힌 당과를 받아 들었다.

“중원에 나와서는 처음 먹어봐요.”

사실 비사인도 당과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꼬맹이 때 먹고 먹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가 마지막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한설이 당과를 한 입 맛보고는.

“맛있네요.”

두 사람이 당과를 먹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햇살 아래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너무 풋풋해 보이고 보기 좋았다.

물론, 쉽지 않은 관계였다.

북해빙궁은 정파와 더 가까운 문파.

천마신교 후계자와 무림맹 후계자만큼은 아니겠지만, 북해빙궁과 사도맹 후계자 역시 서로 이어지기 쉽지 않은 관계였다.

‘잘해봐, 친구.’

물론, 입에서 나가는 말은 정반대였다.

“내가 목숨 걸고 피 흘려가며 싸울 때, 춘풍 속에서 연정을 즐기셨다 이거지?”

“목숨 안 걸었잖아? 피 한 방울도 안 흘렸고.”

검무극이 못 들은 척하며 빠르게 움직였다.

“형, 이쪽으로.”

검무극은 사도맹 맹주전에 잠입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겠어!”

검무양은 검무극을 따라 재빨리 움직였다. 동생과 있으면 정말 심심할 틈이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른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겼다.

예전에는 진하군과 함께 두 사람이 산책하는 것을 훔쳐보았는데, 오늘은 형과 함께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저기 좀 봐. 사람들이 한 소저에게 부딪칠까 봐 은근슬쩍 몸으로 막아주고 있어. 이봐, 친구! 그러면 안 돼! 무심하게 굴어야지! 여자는 나쁜 남자 좋아해!”

반면 검무양은 반응이 달랐다.

“왜 그래? 보기만 좋은데.”

검무극이 슬쩍 형을 쳐다보았다.

검무양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만 봐선 옛사랑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형이 좋아했던 여인이 있었던가?

성격상 그런 걸 말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 이야기를 들으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친해져야 할 거다.

하긴 그건 저기 있는 비사인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이렇게 딱 걸렸으니 확실히 알게 된 거지,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연정이 아니라 빙궁 소궁주니까 잘 대우하는 것일 수도 있지.”

“두 사람 시선이나 보고 말해. 지금 저 곰 같은 녀석, 푹 빠졌어.”

동생의 말에 검무양은 두 사람의 시선을 살폈다. 이곳저곳 신기해서 구경하는 한설에 비해 비사인은 그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한설이 그를 쳐다보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 돌리는 속도가 전광석화야. 내 검도 피하겠다.”

두 사람이 훔쳐보는지도 모르고, 비사인은 온 신경을 한설에게 쓰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갈 때까진, 그녀의 안전은 자신 책임이라 여기고 있었다.

한설이 자신을 찾아 사도맹 본단으로 왔을 때 정말 반가웠다. 그녀가 오겠다고 말은 했지만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사도맹까지 자신을 찾아올까? 하지만 그녀는 약속한 대로 자신을 찾아왔다.

비사인은 그녀를 귀빈 대접했다.

사도맹 본단은 물론이고 사도맹 영역의 여러 지역을 구경시켜 주었다.

그러다 비사인이 급한 일 때문에 사도맹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생겼다.

그때, 자연스럽게 헤어져야 할 상황이었는데.

―기다려주신다면 일을 처리하고 다시 오겠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소.

마지막에 보여주려고 아껴두었던,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보여주지 못하고 보내는 것이 아쉬웠다. 그녀가 언제 또 사도맹 본단에 올지 모를 일이었는데. 아니, 마지막이 될 텐데.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곳을 구경했고, 그보다 자신이 일을 마치고 오려면 이십여 일 이상 기다려야 했다.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그녀는 흔쾌히 허락했다.

―네, 그러죠.

한설은 비사인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려주었다.

비사인은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보다 기다려 준 것에 더 크게 감동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왜, 무슨 마음에서 기다려줬는지.

그렇게 두 사람은 그 아름다운 폭포 앞에 나란히 설 수 있었다.

마지막 절경까지 보고 이제 진짜 헤어지려 할 때, 검무극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덕분에 그녀와의 인연은 이곳 무한에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 불편하시면 다루든 주점이든 들어가셔도 되오.”

거기도 사람이 너무 많으면 그냥 통째로 빌려버릴 작정이었다.

비사인의 말에 한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무한 저잣거리는 진하군의 축하연 때문에 중원 각지에서 온 온갖 행상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보지 못한 구경거리가 많았다.

“정말 이번에 와서 중원 구경은 실컷 하는군요.”

그녀는 중원행이 이런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천마신교를 구경하고 사도맹까지 구경했던 그녀였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여정이었는데, 이제 무림맹 본단 앞까지 오게 되었다.

만약 이번에 기회가 되어 무림맹 본단까지 구경하게 되면, 역대 빙궁 무인 중에 정사마의 본단을 모두 방문한 유일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다음에 북해에 오시면 제가 안내하죠.”

뜻밖의 제안에 비사인이 놀랐다.

“정말 가도 됩니까?”

“물론이에요.”

비사인은 눈 덮인 설산에 그녀와 함께 올라가 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외모가 이상형이라서 끌렸다.

한데 이번에 함께 있으면서 성격도 마음에 들었다.

너무 친근하게 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리를 두지도 않고.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이 적당한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 보면 한 소저와의 만남도 그 친구 때문이군.’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중원에 나오지 않았을 그녀였으니까. 검무극이 이 인연의 시작을 만들어준 셈이다.

처음에는 검무극이 함께 있어서 그녀가 자신과 교류한다고 여겼다.

한데 한설은 검무극과는 별개로 움직였다.

사도맹을 찾아와주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고, 또 무한에도 이렇게 함께 오고.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사인이 한설에게 말했다.

“혹시 시장하시면 저 길 끝에 무한제일반점(武漢第一飯店)이라고 있소. 그곳 요리가 별미니, 그곳에서 식사합시다.”

“무한에 자주 오셨나 봐요.”

사실 비사인이 무한에 와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그것도 아주 어렸을 때.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에 사도맹 후계자가 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사도십삼랑조차 현재 무한 외곽에서 대기 중이었다.

친구들 모임에 초대를 받았기에 온 것이지, 무한은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오. 대신에 공부를 좀 했소.”

공부를 했다는 말에 한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마침 이곳 출신인 수하가 있어서.”

사도십삼랑 중 무한이 고향이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떠난 지 오래돼서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비사인은 사도맹의 정보조직인 사영각(邪影閣)에 자료를 요청했다.

무한에서 가장 맛있는 맛집과 구경할 만한 곳을 알려달라고.

사영각이 생긴 이래 이런 정보 요청은 아마 처음이었으리라.

어쨌든 차마 그렇게까지 해서 알아봤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수하에게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한설이 뒤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는 괜찮은데, 두 분은 시장할 거 같아요.”

그녀가 뒤따르던 한빙쌍검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온 무한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곳도 바뀌고, 저곳도 바뀌고.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분은 저 아래 무한제일반점에 가셔서 먼저 식사하고 계세요. 저희는 조금만 더 둘러보고 그곳으로 갈게요.”

한빙쌍검 중 남편인 사한은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부인인 소빙에게 끌려 객잔으로 갔다. 눈치 좀 챙기라는 핀잔을 들으면서.

그때 비사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느낌이 왔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왜 그러시죠?”

“아무것도 아니오. 자, 갑시다”

조금 전 비사인의 시선이 머물렀던 수레 뒤에서 검무극과 검무양의 고개가 쏙쏙 나왔다.

“엉큼한 녀석! 둘만 있으려고 방해자들까지 처리했군.”

“방금은 한 소저가 보낸 거 같은데?”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한설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니 이렇게 함께 다니는 것임을. 싫은 사람이었다면 하루도, 아니 한 시진도 같이 있지 않았을 거다.

“사인이 또 전낭 꺼낸다. 내게는 밥 한 끼 안 사면서 돈을 막 쓴다.”

이번에는 그녀를 위해 다른 것을 사주고 있었다. 검집을 장식하는 수실을 사주고 있었다.

“기왕 살 거면 쌍으로 두 개를 사! 어휴, 또 그런 주변머리는 없지.”

그러다 검무극이 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아! 못 살겠다.”

“왜?”

“지금 막 검집에 실 달아주려다가 손이 스쳤어.”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그 일에 사인이 얼굴이 붉어졌어.”

검무극은 신안술로 두 사람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다 읽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순진한 척, 안 통해!”

“숙맥 취급을 하든지, 바람둥이 취급을 하든지. 하나만 해.”

그러는 사이 비사인과 한설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자자, 비수를 던져서 중앙에 적중하면 상품을 드립니다!”

옆에 쌓여 있는 상품은 인형이었다. 도검을 든 무인 인형도 있었고, 용과 호랑이 같은 동물 인형들도 있었다. 천으로 만든 인형도 있었고, 나무로 깎아 만든 것들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인형들에 머무르는 걸 보자.

비사인은 두말하지 않고 출전했다.

“참가비가 얼마요?”

비사인이 참가비를 내고 앞으로 나섰다. 무림맹 앞에서 이런 장사를 한다고? 그것도 무인들이 득실대는 무림맹 앞에서.

비사인은 재고 말고 할 게 뭐 있냐는 듯 비수를 받아들자마자 가볍게 던졌다.

첫 번째 비수를 던지는 순간, 비사인은 세상의 쓴맛을 맛보았다.

비수는 가운데 적중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비사인이 다시 참가비를 내고 비수를 받았다.

이번에는 차분히 비수를 살피자, 균형이 안 맞는 불량품이었다.

불량품이라고 어디 못 맞출까? 내가 비사인인데.

못 맞췄다.

“아니, 이게…….”

당황한 비사인이 다시 참가비를 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비수는 제대로 던지면 절대 맞지 않게 만든 비수처럼 보였다. 무공이 높으면 높을수록 더 맞히기 어려운 비수.

한 번 더 시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검무극은 탄식했다.

“아! 지금까지 모아둔 점수 다 잃겠구나.”

계속해도 문제, 사기를 쳤다고 저 주인장을 두들겨 패도 문제, 그냥 포기하고 가도 문제.

검무극의 탄식에 검무양도 동의했다.

한데 비사인의 마음도 이해했다.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그만둘 수 있겠는가?

비사인이 다섯 번째 실패했을 그때였다.

한설이 인형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다. 구석에 있던 작은 곰 인형이었다.

“저거 가지고 싶어요.”

비사인의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던지고, 또 던져서.

열 번 만에 드디어!

비수가 정확히 과녁을 맞췄다. 비수 중에서 제대로 날아가는 비수가 섞여 있었다. 완전 사기꾼은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장이 곰 인형을 가져다주며 씩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무인님!”

비사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농담반 진담으로 주인장에게 말했다.

“이 장사 사도맹 앞에서는 하지 마시오. 열 번까지 오기도 전에 칼 맞아 죽소.”

주인장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무림맹 앞에서만 한답니다!”

어느새 검무극과 검무양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와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검무극이 검무양에게 속삭였다.

“저 얼굴 보고도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우리가 싸웠던 배후 놈들보다 저 주인장 배짱이 더 좋다.”

검무양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인은 곰 인형의 먼지를 깨끗이 털어낸 후 한설에게 주었다.

“너무 귀엽네요. 고마워요.”

한설이 인형을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한 손에는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당과를 들고 비사인과 한설이 검무극 형제가 숨어 있는 곳 앞으로 지나갔다.

수레 뒤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숨긴 채 그들이 지나가도록 놔두는 걸 보며 검무양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냥 보내? 확 놀라게 할 줄 알았는데.”

이때만을 노리고 가까이 접근한 줄 알았는데.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검무극의 시선이 한설을 향했다.

조금 전 그녀가 할 수 있는 여러 반응이 있었을 거다. 그만하고 가자고 말할 수도 있었고, 기다려 줄 수도 있었고, 어디서 사기를 치냐면서 주인장에게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한데 그녀는 인형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검무극은 그 선택이 비사인과 그녀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찬물을 끼얹지 않고, 오히려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그래서 모두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고 그 순간을 끝낸 현명한 선택.

“한 소저 봐서 오늘은 봐준다.”

물론 단서가 붙었다.

“딱 오늘만!”

“그럼 내일은?”

이번에는 비사인을 향한 검무극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몰래 와서는! 내가 당과까진 참았지만 곰 인형이라고? 이건 못 참지.”

뭔가 일을 꾸미려는 눈빛이 틀림없었기에.

검무양은 내심 비사인을 애도했다.

‘지켜주진 못할 거 같으니, 미리 사과하겠네.’

절대회귀 675화

후계자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그날 저녁 검무극의 거처로 비사인과 한설이 찾아왔다.

한설은 한빙쌍검에게 모처럼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했다. 검무극까지 만나는 데 더는 호위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네.”

검무극이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내일 도착한다더니?”

원래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막상 검무극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 일찍 도착해서 한 소저와 무한 구경을 하고 왔네.”

무한제일반점에서 맛있는 요리도 먹고, 향 좋기로 소문난 다루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산책까지 즐기고 이곳에 온 그들이었다. 비사인은 솔직히 검무극에게 미안했다.

검무양도 나와서 두 사람과 인사했다.

“잘들 오셨소.”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오히려 검무양이 그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던 순간이 떠올라서 민망했기 때문이다.

“자, 일단 들어가자고. 의논할 것도 있고, 준비할 것도 많아.”

검무극이 그들을 대청으로 데려갔다.

“우리만의 축하연은 이틀 후에 열 작정이야.”

진하군이 오늘 무림맹 연회에 참여하느라 많이 피곤할 테니, 하루 쉬게 하고 모레 열려는 것이다.

“그리고 축하연에는 축하 무대도 있어야겠지?”

축하 무대라는 말에 모두가 흠칫 놀라며 긴장했다. 모두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비슷했다.

또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냐?

검무극이 말도 꺼내기 전에 비사인이 단호히 말했다.

“절대 안 돼.”

“뭐가?”

“지금 자네가 생각하는 거 절대 안 된다고!”

그러자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데?”

비사인은 절대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꺼내면 당장 현실로 만들 것이 틀림없었기에.

하지만 검무극의 공략 상대는 비사인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한설에게 넌지시 물었다.

“춤 좀 추시오? 모름지기 축하연에서는 춤과 음악이 빠져서는 안 되지 않겠소?”

한설이 얼마나 검무극을 엉뚱한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었으면, 축하연에서 춤을 추자는 이 미친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그냥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 되지 않나요?”

“물론 그래도 되겠지요. 오늘 하군이를 만나 축하해 준 그 수많은 축하객처럼요. 지금도 연회가 안 끝났다면 받고 있겠네요. 십 년쯤 지나서는 하군이는 그런 생각이 들 겁니다. 그때 그 사람이 내게 뭐라고 축하해줬더라? 오기는 왔었나?”

그 말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걸 해주자는 건가요?”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우릴 위해서 하는 거죠. 친구를 위해 그런 축하공연까지 준비한 우리 추억을 위해서요. 생각해 보세요. 살면서 받은 거보다 해준 게 더 기억나지 않습니까?”

지켜보던 비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설이 살짝 설득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안 되오! 넘어가면 안 돼!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한데 저는 춤을 추지 못해요.”

그녀의 말에 비사인이 안도했다.

‘잘했소. 정말 잘했소.’

하지만 날벼락처럼 덧붙여지는 한설의 한마디.

“……대신 노래라면?”

비사인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검무극과 검무양도 놀랐다.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요.”

“상관없소! 다 음치들만 모여 있었는데 정말 잘 됐소.”

검무극은 환호했지만 비사인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나서면 자신이 안 나설 수가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또 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검무극이 이번에는 형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우리 중에는 소저의 노래에 맞춰 멋진 연주를 해줄 사람이 있거든요.”

검무극이 슬쩍 품에 있던 단소를 꺼내려던 그때, 형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거 꺼내면 죽을 줄 알아!

―연주도 없이 노래를 부르게 할 수는 없잖아.

그녀를 방패 삼아 단소를 꺼내든 검무극이었다.

“놀랍지 않소? 우리 형이 악기를 다룰 줄 안다는 게.”

그러면서 슬쩍 형을 띄워주었다.

“아마 이 세상에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중에 제일 강한 사람일 겁니다.”

검무양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동생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형, 지금껏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잖아?

그래, 지금 거절할 거였다면 그날 악기상에서 연주하지 말았어야 했겠지.

“연주는 내가 하지.”

그래, 어차피 하게 될 거라면 시원하게 결정내리는 게 낫다.

더 솔직히 말하면.

춤이나 노래보다는 단소 연주가 백 배 낫지.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춤을 춰야 하면? 차라리 금분세수하고 은거할 거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사람, 비사인이었다.

그는 절벽 끝으로 몰린 상태였다. 떨어지면 춰야 하는 거다! 안 돼! 절대 안 돼!

검무양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비사인을 두고 꾸미려 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이건 진짜 못 도와주겠네. 미안하네.

까닥했다간 단소를 뺏기고 춤판에 끌려 들어갈 수도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비사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에겐 하루라는 긴 시간이 있어.”

“고작 하루지.”

“노래 좀 못 부르고, 춤 좀 못 추고, 연주 좀 못 하면 어때? 우리끼리 듣고 우리끼리 볼 텐데.”

검무극이 ‘우리끼리’를 강조했다.

“우리 다섯이 함께 저지르는 일이야. 무덤까지 우리만 가져간다.”

“왜 다섯이야?”

“이미 진 소저도 함께하기로 했어.”

진 소저까지!

후드득!

발 뒤에서 돌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전생이 무희였나? 왜 이렇게 춤에 집착하나?”

검무극의 이유는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다.

“우리가 죽을 고비에 이르렀을 때, 자네가 그랬지. 살아남으면 춤을 추겠다고.”

그 약속 때문에 삼자 회합 때 결국 춤을 추게 되었다.

“자네 무의식에서 고른 선택이었어. 살아남으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어쩌면 살아나면 평소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냥 한 말을 잘도 가져다 붙인다!

하지만 적어도 검무극 때문에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를 얻고 있었다. 지금 한설과의 관계도 그렇고.

휘이익.

그렇게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던 그때.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한설이었다.

“우리 잘해봐요.”

그녀의 한마디에 비사인의 마음이 바뀌었다. 그녀가 보는 앞이라 못 할 일에서 그녀가 보는 앞이니 용감하게 해보는 것으로.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선언했다.

“춤은 이번이 마지막이야.”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래, 원 없이 추고 앞으론 안 해본 다른 것을 찾아보자고.”

* * *

이틀 후.

진하군이 청운림으로 들어섰다.

오늘 축하연 자리는 이곳으로 정해졌다. 마지막 싸움이 있었던 곳.

정자는 부서지고 없었지만, 대나무 숲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 대나무 숲 가운데 연회상이 차려져 있었다.

상에는 좋은 술과 훌륭한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진하령이 맹의 숙수들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음식들이었다.

“어서 와, 친구.”

검무극과 비사인, 한설과 진하령, 그리고 검무양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진하군의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 한마디 하지 않고 보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자, 이리 와서 술부터 받게.”

성큼성큼 걸어온 진하군에게 검무극은 술부터 부어주었다.

또르릉.

술잔이 채워지는 맑은소리.

진하군은 검무극을 응시했다. 자신이 후계자 자리에 오른 것은.

‘누가 뭐래도 네 덕분이다.’

잔이 다 차자 이번에는 진하군이 검무극의 잔을 채워주었다.

‘난 천천히 따라간다, 친구.’

검무극의 잔을 채워준 후, 다른 사람들의 잔도 모두 채워주었다.

검무극이 잔을 높이 들었다.

“차기 무림맹주를 위하여!”

그곳에 있던 모두가 검무극의 말을 따라 외치며 술잔을 비웠다.

술잔을 비운 진하군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꿈을 이루었고, 그 꿈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자신이 무림맹주이기 때문에 잘 보이려는 사람은 없다.

“자, 이번에는 내가 한 잔 주겠네.”

이번에는 비사인이 진하군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먼 길 와줘서 고맙네.”

“어디에 있더라도 와야지.”

두 사람이 술을 비울 때 검무극이 슬쩍 말했다.

“길이 더 멀길 바랐을지도 모르지.”

무슨 뜻이냐는 진하군의 표정에 검무극은 슬쩍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비사인이 딴 곳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눈치챘구나.’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을 속인다는 불편한 마음보단 차라리 그에게 놀림 받는 게 마음이 편할 테니까.

다음에는 진하령이 나섰다.

“오라버니 축하해.”

“고맙다.”

서로를 향한 따스한 눈빛에.

“형, 저게 형제들이 서로를 보는 눈빛이야.”

검무양은 들은 척도 않고 진하군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내 잔도 받으시오.”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하군은 검무양에게 곽영 남매를 따로 부탁하지 않았다. 부탁하지 않아도 잘해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 이제 진하군에게 마교 대공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한설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축하드려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하오.”

그렇게 진하군은 그곳에 있던 이들과 돌아가며 술을 마셨다.

이제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주거니 받거니 모두 취기가 올랐을 때.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 오늘 우리 친구 하군이가 후계자가 된 것을 축하하는 축하 무대가 있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일이기에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어 나가는 모습에 더욱 놀랐다.

‘다섯 명이 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 쳐도 검무양까지? 그게 제일 놀라웠다.

다섯 사람이 약속된 자리에 섰다.

검무양과 한설이 맨 끝 양옆에 서고, 그 사이에 검무극, 비사인, 진하령이 섰다.

다섯 명이 나란히 서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이런 분위기가 연출될 줄 몰랐기에 오히려 진하군이 당황했다.

‘대체 뭘 하려고?’

악공들이 없으니 검술 시범이라도 보이려는 건가? 싶던 바로 그때!

검무양이 단소를 꺼냈다. 거기서 일차로 경악했다. 천마신교 대공자가 암기 대신 단소를 꺼내는 순간이었으니까.

자세를 잡은 검무양이 숨을 불어넣자 단소가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정말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곧이어 단소 가락을 타고 울려 퍼지는 청아한 노랫소리.

한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진하군은 두 번째로 놀랐다.

북해빙궁 소궁주가 자신을 축하한다고 노래를 불러준다고?

마지막으로 그 가락과 노래에 맞춰 가운데 있던 세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하군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이 세상에서 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한 사람이었다.

‘사인, 미안하네.’

이 춤을 추기 위해 얼마나 검무극에게 시달렸을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비사인은 세 사람 중에 제일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죽어도 안 한다고 했지만, 하기로 한 춤을 대충 추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정말 연습을 많이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춤은 단소와 노랫소리에 딱 맞았다.

비사인의 무아지경 춤.

평소에 춤 연습이라도 했던 것일까? 어제 하루 연습 덕분으로 보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춤이 멋졌다.

비사인은 중심에 설만 했다.

좌우에서 검무극과 진하령도 열심히 췄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춤동작을 줄여서 비사인이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연주는 더욱 신나게 빨라졌고, 한설의 노래는 더욱 경쾌해졌다. 주위를 흐르는 안개는 이 무대를 더욱 멋있게 만들었다.

진하군의 인생에서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언젠가 나이를 먹어 누군가에게 오늘 일을 이야기해 주면 어떻게 될까?

―오래전 내가 후계자가 된 것을 축하해주기 위해 축하 무대가 열렸었네. 신교의 대공자는 단소를 불었고 북해빙궁 소궁주는 노래를 불렀지. 그리고 천마신교 후계자와 사도맹 후계자, 그리고 내 동생이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아마 다 듣고 난 후 그는 무림맹 신의를 만나러 갈지도 모르겠다.

―……맹주님이 편찮으신 것 같습니다.

단소와 노래가 그쳤고, 춤도 끝났다. 마치는 동작까지 딱 맞췄다. 하루 연습한 것치고는 너무 훌륭한 무대였다.

잠시 흐르는 침묵.

진하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는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겁니다.”

진심으로 이들이 고마웠다. 이 사람들이 어디 단소 불고 노래하고, 춤이나 출 사람들인가? 그들이 자신을 위해 연습했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웠다.

하얗게 불태운 비사인이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술을 쭉 마셨다.

“어때? 하고 나니까 후련하지?”

검무극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방금 마신 술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으니까.

그때 비사인이 한설과 눈이 마주쳤다.

“멋있었어요.”

그녀의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비사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 인생에서 더는 춤은 없다!’

* * *

그날 밤.

달빛 아래 세 사람이 대나무 꼭대기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갈 세 후계자, 검무극과 진하군, 그리고 비사인이었다.

“난 내일 떠날 거네.”

검무극은 이 자리를 마치는 대로 곧장 본교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가야 할 곳이 있었지만, 너무 오래 교를 비웠기에 일단은 형과 함께 본단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진하군은 아쉬웠다. 이렇게 헤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이 순간, 비사인은 다른 이별을 더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 자리를 마치면 한설 역시 한빙쌍검과 함께 북해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비사인의 시선이 저 아래 한설을 향했다.

저 아래 자리에서는 검무양과 진하령, 그리고 한설이 술에 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계자에서 밀려난 사람끼리 한잔해요!

진하령이 내민 그 술잔에 검무양과 진하령이 하나가 되기도 했고, 한설이 이 자리까지 가져온 곰 인형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의외로 어색할 것만 같은 세 사람이었는데 대화가 끊어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 안 할 거 같은 검무양도 몇 마디씩 하고 있었고.

비사인의 시선이 한설을 향했다가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이미 들킨 것을 알았기에.

“왜 안 놀리나?”

검무극이 그녀를 좋아하는 걸로 골리고 놀리고, 당황하게 할 줄 알았는데.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인데. 천천히 놀려도 될 거 같아서.”

그만큼 두 사람이 잘 되기가 쉽지 않다는 걱정이 담긴 말이었다.

진하군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인이 진하군에게 물었다.

“자네는 언제 알아차렸나?”

“처음에 봤을 때부터.”

“어떻게?”

“함께 백의를 입고, 곰 인형까지 들고 왔으면서 모르길 바랐나?”

비사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검무극에게는 하도 당해서 부끄러울 게 없는데. 아무래도 아직 진하군에게는 좀 부끄러웠다.

죽으면 죽었지, 여자 문제를 누군가에게 말할 성격이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빙궁주가 반대하면 북해로 쳐들어가게! 본교는 모른 척하겠네.”

검무극의 농담을 진하군이 받았다.

“그러지 말게. 우린 빙궁을 도우러 가야 하니까.”

“친구를 도와야지! 사인, 춤 뱉어내라고 하게!”

그 말에 비사인이 웃었다. 그가 환하게 웃는 모습, 오랜만이었다.

“오! 매력 있는 웃음! 이 웃음을 한 소저에게 보여줘!”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날이 올까?

그때 저 아래에서 진하령이 소리쳐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해요?”

젊은 남자 셋이 모였는데, 당연히 여자 이야기지.

검무극이 그녀에게 소리쳤다.

“후계자들이 모였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당연히 무림평화에 관해 이야기지!”

절대회귀 676화

욕은 없을 때 해야죠

축하연 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모두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사람들처럼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있으면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매정한 시간은 쾌속보를 구사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밤이 지나고 이제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먼저 한설이 작별을 고했다.

“저는 맹주님께 인사드리고 며칠 더 있다가 북해로 돌아갈게요.”

밤새 진하령과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그녀였다.

진하령과 함께 맹주전에 들러 무림맹주께 인사드리고, 며칠 더 묵고 떠나기로 한 것이다.

정말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정사마 세 수장을 모두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사인은 그녀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뵙겠소.”

최대한 담담하고 차분한 작별. 그래서 그의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설이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중원 구경 잘했어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고. 그런 비사인이 자신을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다음에 꼭 북해 구경 시켜드릴게요.”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북해 구경을 언급하자 비사인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을 고대하겠소.”

듣고 있던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우리는요? 우리도 북해 구경 하고 싶소! 설산에서 빙주도 마시고!”

당연히 한설이 여러분들도 초대할게요,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소교주께서는 전에 왔었잖아요? 빙주도 드셨고.”

그러면서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섰다. 비사인만 초대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비사인의 입가에 도저히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건 못 참지,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은 진하군을 끌어들였다.

“이래도 빙궁을 도우러 가겠다고?”

진하군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와야지. 나는 따로 초대한다고 했거든.”

“뭐? 언제?”

“동생이랑 같이.”

검무극이 짐짓 부르르 떨며 나직이 말했다.

“빙궁은 본교가 친다!”

“우리가 도우러 간다니까?”

무림맹의 의지에 사도맹도 합류했다.

“우리도 도우러 갈 거네.”

“다들 너무해!”

진하군과 비사인이 함께 웃었다.

검무양은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 셋이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된 무림은 이전 세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가 열릴지도 모르겠구나.’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무림.

그리고 놀랍게도 검무양은 자신도 그 무림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음을 느꼈다. 궁금했다, 그 강호가.

진하령이 검무극과 작별했다.

“조심히 돌아가고.”

그녀는 어느 때보다 깔끔하게 돌아섰다.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비사인과 한설 사이에 묘하게 오가는 기류를 느껴서였을까? 다른 때보다 검무극과 헤어지는 것이 더 아쉬웠다.

물론, 검무극은 그녀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오라버니에게 네 숨겨진 야망 드러내지 마! 혹시라도 들키면 우리에게 도망쳐!”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말에 진하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붙잡아서 오라버니에게 넘기려고?”

“어? 어떻게 알았어?”

“셋이 맨날 그렇게 작당모의 하는데, 어찌 모르겠어?”

그렇게 진하령과 한설이 먼저 그곳을 떠났다. 저만치 걸어가던 한설이 비사인을 돌아보며 살짝 곰 인형을 들어 보였다.

비사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한동안 사도십삼랑의 수장인 일랑에게 ‘기분 좋은 일 있으십니까?’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 같았다.

이제 세 후계자가 서로 작별했다.

마지막에는 무림 평화도 잊지 않았다.

“아직 놈들의 수뇌부는 건재해. 그러니 언제라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거, 잊지 말고.”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과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이 어떻다는 건 이미 충분히 경험했으니까.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하고. 알지? 혼자 처리하려 들면 절대 안 돼!”

예전이라면 흘려들었을 말이었는데, 이 역시 진하군과 비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에 보세!”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나눈 후, 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걸어가던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벌써 또 만나고 싶어! 우리 언제 또 볼까?”

진하군과 비사인은 소리 없이 웃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걸어갔다.

검무양은 보았다.

마지막까지 너스레를 떨고 다시 돌아서는 검무극의 얼굴을.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은 차분하고 진지했다. 원래 이런 사람인데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어도 너처럼은 못 산다.’

두 사람이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형.”

한참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자 검무양이 물었다.

“불러놓고 왜 말이 없어?”

“그냥 불러 봤어.”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검무극이 다시 말했다.

“형, 약속 하나 해줘. 나중에 내 부탁 하나 꼭 들어준다고.”

“싫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보나 마나 말도 안 되는 부탁일 테니까.”

“그러니까 형한테 하지.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누가 들어주겠어?”

“…….”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무양은 이번 출교를 통해 삶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가짜 암기를 만든 자를 잡아내기 위해 출교했던 것일 뿐인데. 동생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열받아서.

원래 자신의 삶은 정해져 있었다.

놈을 잡아서 죽인다.

이런 외길의 정해진 삶을 살아왔고, 또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에 삶의 다른 면을 만났다.

위조 암기를 만든 사람의 동생을 구하고, 비 내리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구경하고, 누군가를 훔쳐보았고, 사람들 앞에서 단소를 불었다.

검무양이 옆에 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세상을 깨우며 날아든 빛이 동생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은 계속 말해오고 있었다.

다른 삶을 살자고.

서로 죽이는 후계자 싸움을 하지 말자고. 우린 다른 후계자 싸움을 하자고.

검무극이 그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검무양이 말했다.

“뛸까?”

검무극의 입가에 번져가는 햇살보다 더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형이 처음으로 함께 뛰자는 말을 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좋지.”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며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형과 함께 달리며 검무극이 소리쳤다.

“가자. 집으로!”

* * *

본교에서는 너무나도 기다렸던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주님께서 폐관수련을 마치셨습니다.”

그 소식에 검무극은 형과 함께 곧장 교주전으로 향했다.

사실 이보다 더 오래 폐관수련을 하실 줄 알았다.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의 다음 단계를 위한 수련이었으니까.

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나오셨다. 하긴, 아버지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기간은 아무 의미가 없겠지.

과연 구화마공에 성과가 있으셨을까?

“드디어 임시 교주도 이제 끝이구나!”

“섭섭하냐?”

“섭섭하긴! 어휴, 형이 몰라서 그래. 그 자리에 일이 얼마나 많은지. 어쩌면 아버지도 일하기 싫어서 폐관 핑계로 도망가신 것일지도 몰라.”

“아버지가 너냐?”

“어떻게 알았어? 나, 일하기 싫어서 출교한 거.”

검무양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버지 뵙고 나서, 만날 사람이 너무 많다! 자자, 다들 줄을 서시오!”

검무양은 곽영 남매부터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신경을 써야지.

그렇게 두 사람이 교주전으로 들어섰다.

검무극과 검무양은 천천히 피의 길을 나란히 걸었다.

아버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는 안다. 누군가 옆에서 변함없이 있어 주는 게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일인지.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홀로 이 피의 길을 걸어서 비어 있는 태사의에 앉아야 할 날이.

태사의 아래까지 걸어와서 검무극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아버지, 일 잘 마치고 귀교했습니다!”

검무양도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교주님.”

검우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본 후 차분히 말했다.

“잘 다녀왔느냐?”

“네!”

두 사람의 우렁찬 대답이 교주전 내에 울려 퍼졌다.

“폐관 수련을 끝내신 것, 감축드립니다.”

인사를 하면서 검무극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리 보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습니다. 폐관 수련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수련했으면 됐지, 결과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오랜만에 드신 폐관이었는데요.”

검무극은 아버지의 눈빛에서 어떤 자신감을 느꼈다.

예전이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변화다. 아버지의 얼굴을 이렇게 쳐다본 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꾸 보고 또 봤기에, 이제 그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저 자신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버지께서 성과를 얻으셨다!’

십일성? 아니다. 이미 폐관 수련 전에 아버지는 계속된 수련으로 무공이 상승하셨다. 그렇다면?

십이성 대성이다!

근래 아버지의 삶이 변하면서 아버지의 무공도 변한 것이 틀림없다.

검무극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십이성의 구화마공! 대체 어떤 위력일까? 악귀들도 바뀌었습니까? 또 천마혼은요?

회귀한 후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강력한 변화를 맞는 순간이었다.

‘감축드립니다, 아버지!’

그런 감정이 검무극의 눈빛과 표정에 담긴 모양이다.

검우진은 ‘설마 알아차렸느냐?’라는 눈빛을 보냈고, 검무극은 ‘자랑하고 싶지 않으십니까?’라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 아들들에게 마음껏 자랑하십시오.’

물론, 검우진은 그런 자랑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질책이 내려졌다.

“내가 없는 사이 사고를 쳤더구나! 둘이 같이 교를 비우면 안 되는 줄 알았을 텐데?”

“알죠. 그래서 마존분들과 함께 갔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함께 나가서 내내 노심초사했을 총군사께 모든 보고를 다 받으셨을 것이다.

독왕과 마불이 함께했고, 풍천교주와 섭혼마존까지 합류했다는 보고를.

하지만 그 보고는 보고고.

검무극은 나가서 있었던 일을 아버지께 보고했다.

출교했다 돌아오면 언제나 해왔던 일이었다. 보고만으로 알 수 없는 부분들까지 세세히 말씀드리는 것. 아버지와 자신과의 또 다른 대화. 이 모습을 형이 있는 앞에서 보였다.

형, 어쩌면 이런 대화는 형이 더 잘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잘 봐둬.

물론, 이 상황에서 형을 놀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보고 말미에 형을 끌고 들어왔다.

“형이 곽 장인의 동생을 구해줬습니다. 예전이라면 ‘귀찮으니까 다 없애 버려!’ 이런 명령을 내렸을 사람인데요.”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버지는 보고를 말리지 않았다.

“이번에 배후를 죽인 것만큼이나 그 남매를 살려 온 것도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력 좋은 젊은 장인을 우리 사람으로 만든 것도 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검무극이 옆에 선 형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형이 변했다는 걸 알게 해준 일이었으니까요.”

검무양의 두 눈에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지만, 아버지 앞이라 뭐라 말을 하진 않았다.

“요즘 형이 점점 멋있어지고 있습니다.”

“어쩐 일로 네가 형 칭찬을 하는 게냐?”

“옆에 있잖아요? 욕은 없을 때 해야죠.”

검우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변함없는 그 비웃음에 검무극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가 그 웃음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일 때 선물을 줘야 하는 법.

“참, 그리고 우리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형이 선택한 선물입니다.”

검우진의 시선이 검무양을 향했다.

검무양이 품에서 족자를 꺼내서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검우진이 손을 뻗자.

스르륵.

족자가 허공을 날아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천천히 족자를 열어본 검우진이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족자를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뭔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족자에 가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왠지 그 표정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그림을 다 본 검우진이 족자를 말아서 옆에 내려놓았다.

“아니, 그렇게 막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 화공 뭔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잘 보관해 두시면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검무양을 내려다보았다.

장남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검무극은 그 눈빛에서 오래된 아버지의 회한을 느꼈다. 이 순간 아버지는 후회하고 계셨다.

형을 죽이지 않고 후계자에 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지, 그 못다 이룬 소망 저희가 꼭 이루겠습니다. 평생 우애를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검무극이 품속에서 두툼하게 포장된 뭔가를 꺼냈다.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검무양은 아버지가 폐관에서 나오셨다는 말에 동생이 마차에서 그걸 챙기는 걸 보았다. 대체 뭘 저리 챙기나 했는데.

스르륵.

그것도 검우진의 손으로 날아갔다.

“잠옷입니다, 무한표 꽃무늬 잠옷이죠. 제가 안 봤으면 모를까, 봤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검무양은 황당했다. 기어코 다시 가서 그 꽃무늬 잠옷을 사 온 모양이다.

‘이놈아, 그걸 아버지가 입으시겠느냐?’

아버지의 호통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말없이 그 선물도 옆에 내려놓았다.

이 두 선물이 흡족했는지 아버지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가서 쉬어라.”

검무극과 검무양이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가 검무극이 생각났다는 듯 돌아섰다.

“참, 아버지. 언제 형이랑 셋이 사냥 한 번 가시죠.”

옆에 선 형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내키지 않아 하실까 봐, 걱정한 것이었을 텐데.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버지의 결정은 빨라도 너무 빨랐으니까.

“출발은 내일 새벽이다.”

암, 자식들 일정 따윈 절대 고려하지 않는 분이 우리 아버지시지.

이 술이 형하고 친구네

이른 새벽, 만나기로 한 대천산 입구에서 검무양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떨리는 마음에 밤새 잠을 설쳤다.

아버지와 사냥이라.

예전에 검무극이 아버지와 사냥 갔을 때, 그때 궁금했다.

아버지와 산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때는 동생을 미워하던 시기였으니 아버지께 무슨 이간질을 부렸을지 걱정했었다.

이제 그 사냥을 자신도 간다.

그때 검무양의 눈이 점차 커졌다.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검무극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정확히는 검무극이 메고 있는 등짐 때문이었다.

“이사 가냐?”

정말 산더미 같은 짐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형이 몰라서 그래. 다 필요한 거야.”

커다란 혁낭 위에 짐을 묶어서 올리고, 또 올렸다. 거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식기들, 호로병, 동물 손질용 비수에 도끼까지.

사람이 셋이니까 짐은 더 많아졌다.

그에 비해 검무양은 작은 혁낭 하나 달랑 짊어지고 있었다. 그조차도 채 반도 차지 않았다. 뭘 가져가야 하나 고민해 봐도 별로 챙길 것이 없었는데.

“난 신경 쓰지 마, 그냥 짐꾼이라 생각해!”

“짐 나눠 들자.”

“괜찮아. 형은 아버지 보필해야지.”

둘이 만났을 때는 이렇게 말해놓고서는 그곳에 검우진이 등장하자 엄살을 부렸다.

“에구 무거워라, 동생이 이렇게 짐을 많이 들고 있으면 형이 좀 나눠 들자고 할 만도 한데.”

물론, 검우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분명 첫째가 나눠 들자고 했을 거다. 했으니까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이고. 이제 검무극에 대해 이 정도는 훤히 꿰뚫어 보았다.

“무양아, 가자.”

“네.”

검우진이 장남만 챙겨서 앞장서 산을 올랐다.

“혁낭은 절 주십시오.”

“괜찮다.”

오늘은 아버지도 작은 혁낭을 하나 차고 오셨다. 처음 사냥을 왔을 때는 빈 몸으로 오셨었는데.

뭘 가져오셨을까?

검우진이 선두에서 섰고, 검무양이 두세 걸음 뒤에, 검무극은 맨 뒤에 섰다.

검무극은 일부러 멀찌감치 뒤처져서 걸었다.

아버지와 형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아버지와 형은 묵묵히 산길을 오르다가 가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굳이 들으려고 하면 들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산새 소리를 들었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었다.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 소리를 들었다.

길은 흙길이 되었다가 돌길도 되었다가,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에 보석길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쉿.”

아버지의 신호에 모두 숨을 죽였다.

아버지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형에게 물었다.

“보이느냐?”

검무양은 눈을 크게 뜨고 전방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눈을 감고 느껴라.”

“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예전 사냥에서 자신에게 가르쳐 준 기 발출을 형에게도 가르쳐 주려 한다는 것을.

“한 줄기 기운만 내보내라. 천천히 끊지 말고. 누에가 실을 뽑듯이 천천히.”

고수들은 모두 기를 다루고, 그 기로 주변을 느낀다.

하지만 이렇게 실처럼 뽑아서 저 멀리 십 장, 이십 장 밖으로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람에 기운을 싣는다는 그 핵심 구결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자신이 그랬듯 지금 형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을 것이다.

“끊어졌다. 집중해서 다시!”

“네!”

검무양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랐다.

아버지와 이렇게 가까이서 무공과 관련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을까? 정말 오랜만이었다.

“천천히 감긴 실을 푸는 느낌으로 기를 내보내는 거다.”

어렵고 긴장된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이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다. 무공을 가르쳐줄 때의 아버지는 태사의에 앉아 계실 때의 느낌과 달랐다.

‘원래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셨나?’

알아서 해! 한마디하고 돌아서실 것 같은 아버지셨는데. 무공을 가르치는 일만큼은 꼼꼼하셨다.

‘동생도 아버지께 이런 느낌을 받았겠구나.’

어쩌면 이 느낌을 자신에게도 전해주려고 사냥을 오자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다고.

“자, 이제 바람에 기를 실어라.”

처음에는 한 줄이지만, 나중에는 수십 가닥의 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 거미줄처럼 펼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검무극은 그 경지에 올라 있었다.

“다시!”

아무래도 척척 해냈던 자신과는 달리 형은 쉽게 해내지 못했다. 그래도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특히 기를 다루는 일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니까.

아버지는 조급해하지 않고 형을 기다려주었다.

그래, 원래 이게 정상일 것이다. 자신이 너무 빨리 배운 것이었고.

검무극은 바위에 걸터앉아 형을 지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벅차올라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의 격정을 느낀 것일까?

저 멀리 겹겹이 하늘과 맞닿은 산들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아버지의 시선을 느꼈다.

검무극이 천천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 자리 잘 만들었다, 하는 아버지의 시선에.

“저 가르치다가 형 가르치려니 속 터지시죠?”

밉살스러운 말에 검우진이 검무극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속을 터뜨리는 사람은 항상 따로 있지.”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버지가 차갑게 물었다.

“내게 할 말 없느냐?”

다 알고 묻는 거다, 하는 눈빛에 검무극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셨습니까?”

“당연하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형에게 천마호신공을 전수한 것을 알아차리셨다는 것을.

“원래는 몰라야 하는 거잖아요?”

형이 천마호신공을 발동했다면 또 모를까, 지금까지 천마호신공이 발동할 일은 없었다. 그냥 봐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게 천마호신공인데.

‘아! 십이성 대성을 이루셨기에 아셨구나!’

검무극이 소리쳤다.

“형이 가르쳐 달라고 강요했습니다. 안 가르쳐주면 죽이겠다고요!”

“…….”

“아, 그 정도로 막 나갔다면 구화마공을 가르쳐달라고 했겠군요.”

일단 잘못은 잘못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버지, 한 번만 봐주십시오! 형도 어서 와서 빌어!”

“네 형은 왜 끌어들이는 거냐?”

이렇게 형은 빠져나가게 해주고.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섭혼술을 쓰는 강적이 형을 위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안 그래도 성격 나쁜 형인데, 섭혼술까지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휴, 두 눈 뜨고 못 봐줬을 겁니다.”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여야 할 검무양이었지만, 그는 조용히 걸어와 검무극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괜히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이 상황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사안이라면 모를까 천마호신공에 관한 일이었다. 동생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검우진이 검무양에게 물었다.

“배울 때 천마호신공인 것을 알았더냐?”

“아닙니다.”

검우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검무양은 동생을 옹호했다.

“동생이 저를 위해서 벌인 일입니다.”

검무극이 감격스럽게 형을 쳐다보다가,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에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두 아들을 내려다보던 검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그냥은 안 되지.”

용서는 해주되, 그냥 해주진 않겠다는 뜻.

검무극이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좋습니다, 뭐든 분부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무림일통 빼고 다 받습니다!”

옆에서 고개를 들며 검무양이 말했다.

“저는 무림일통도 받겠습니다.”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순간에 농담이라니? 형, 정말 많이 변했다.”

“농담 아니다.”

그래, 농담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아버지가 원한다면 형은 기꺼이 마정대전의 선봉에 설 사람이었으니까.

형의 대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중에 시킬 일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다시 수련 시작해라.”

“네!”

검무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기 발출 수련이 계속되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드디어 검무양은 기를 발출해서 멀리 숨어 있는 동물을 찾아냈다.

“멧돼지 같습니다.”

검우진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혁낭에 매달려 있던 활과 화살을 형에게 건네주었다.

“아버지 시장하시겠다.”

* * *

“형은 모닥불만 피워줘.”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한다더니 정말 그랬다.

멧돼지를 손질하는 검무극의 손길은 사냥꾼, 숙수, 저리가라였다.

정말 빠르고 능숙하게 손질한 후, 가장 맛있는 부위를 떼어내서 나무 꼬챙이에 꽂았다.

그리고는 혁낭에서 요리에 필요한 양념들을 꺼냈다.

소금을 치고, 만들어온 비법 양념들을 겹겹이 발라 풍미를 더 했다. 고기는 맛있는 냄새를 내며 구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검무양은 내심 놀랐다. 교로 돌아오는 길에 몇 번 숲에서 야영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실력이 좋은지는 몰랐다. 정말이지 무공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의 손놀림이었다.

그렇게 고기부터 굽기 시작한 후에 본격적으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우선 따로 잘 싸둔 짐부터 풀었다.

촤아아악.

아버지를 위한 호랑이 가죽이 펼쳐졌다. 앉아서 쉬실 수도 있고, 누워도 될 크기의 가죽이었다.

“아버지, 여기 편하게 앉으십시오.”

검우진이 그 위에 앉았다.

“역시! 잘 어울리십니다! 멋있으십니다!”

검우진이 손을 내밀자 모닥불 위의 멧돼지가 저절로 돌아갔다.

“그럼요. 지금은 멋보다는 고기 안 태우는 게 더 중요하죠!”

검무극이 다음 짐을 풀었다.

“이건 형과 내 것.”

아버지 것과 확실히 구분되는 일반짐승의 털가죽을 두 개 깔았다. 형 자리를 조금 더 아버지 옆으로 배치했다.

“자, 이번에는 이것도 준비했습니다.”

혁낭에서 접었다 펼 수 있는 작은 나무 다탁이 나왔다. 그걸 아버지 앞에 놓았다. 다음으로는 혁낭에서 깨끗하게 씻어 온 젓가락과 식기를 꺼내 아버지 앞에 올렸다.

검우진은 고기 굽는 게 재미있는지 허공섭물로 돌려가며 타지 않게 고기를 구웠다.

그렇게 고기가 노릇하게 잘 익자 검무극은 가장 부드럽고 맛있는 부위를 잘라서 아버지께 가져다드렸다.

“드십시오, 아버지.”

그리고 형과 자신의 식기에도 고기를 잘라 왔다.

“맛이 어떠십니까?”

“괜찮다.”

아버지의 괜찮다는 끝내준다와 같은 극찬.

그걸 형이 증명했다.

눈을 크게 뜨고 형이 표정으로 말했다.

맛있는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천마신교의 대공자가 잡고, 후계자가 손질하고, 교주님께서 구운 고기야!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겠어? 맛없어요, 했다간 멸문이야!”

그 말에 검무양이 웃었다.

긴장해서 밤잠을 설칠 때만 해도 오늘의 사냥이 이렇게 좋은 분위기일 줄은 몰랐다.

즐거웠다. 이렇게 산에서 모닥불을 피워두고 먹는 고기는 또 다른 맛이 있었고.

“내가 더 맛있게 해줄게!”

검무극이 다시 혁낭을 뒤적거렸다. 또 뭐가 나오나 검무양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고기에 술이 빠질 수가 없지요.”

이번에는 술이 나왔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술이었다. 역시 깨끗이 씻어서 준비해 온 술잔에, 안주로 먹을만한 씹을 거리까지. 준비는 착실했다.

바로 그때 검우진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 놓아둔 아버지의 혁낭이 허공을 날아가 손에 들렸다.

대체 뭘 꺼내시려는 걸까?

형제가 궁금하게 지켜보는데.

“술은 나도 한 병 가져왔다.”

아버지가 꺼낸 것도 술이었다.

검무극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에도 챙겨왔으니 이번에도 자신이 챙겨올 거로 여기셨을 텐데.

“무슨 술입니까?”

그러자 아버지의 입에서 상상도 못 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양이가 태어났을 때 직접 담근 술이다.”

검무극과 검무양은 깜짝 놀랐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해에 직접 담근 술이라는 말에 검무양은 충격을 받았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아버지의 한마디 말씀.

양이가.

아버지가 자신을 양이라고 불렀던 때가 언제였을까? 정말 어렸을 때 들어보고 오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담그신 술이라고?’

검무양의 마음에 격정이 스쳤다. 그것도 그냥 술이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그리고 그 술을 오늘 가져오셨다.

“……교주님.”

검무양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무극은 형이 이렇게 떠는 모습은 오늘 처음 보았다.

아버지가 술병을 들며 말했다.

“오늘은 아비로 왔다.”

“이리 와서 내 술 한잔 받아라.”

“……네, 아버지.”

검무양이 아버지에게 다가가 공손히 술을 받았다.

“너도 오너라.”

검무극도 가서 술을 받았다. 형이 너무 떨고 있어 한마디 농담도 할 수 없었다.

검무양이 아버지의 잔을 공손히 채웠고, 그렇게 세 사람이 술을 마셨다.

“맛이 정말 끝내줍니다!”

검무극이 감탄했다.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이 술이 형하고 친구네, 친구.”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세 사람은 술을 다 비웠다. 아끼지 않고 시원하게 다 마셨다.

검무양은 자신이 태어나 마신 술 중에 가장 맛있었다. 아마, 앞으로 죽을 때까지 이렇게 맛있는 술은 마시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제가 태어난 해에 담근 술은 언제 마실까요? 다음 사냥 때 마실까요?”

신나는 검무극의 물음에 검우진이 흠칫했다.

“당연히 제 것도 담그셨잖아요? 아무리 장남만 좋아하시는 아버지시지만, 둘째도 자식인데. 그렇죠?”

알쏭달쏭한 아버지의 표정에 검무극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직접 안 담그시고 휘 아저씨 시키신 겁니까? 휘야, 가서 술 한 병 담가라. 그래도 자식인데 기념해야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는 아버지를 보며 검무극의 목청이 높아졌다.

“설마 그조차 잊으신 건 아니죠? 그래서 그렇게 멋쩍게 웃고 계신 거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사 와서라도 담근 거라고 해주세요!”

그렇게 사냥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뒹굴뒹굴

“요즘 너 변했어.”

뒤에서 들려온 말에 고월이 돌아보니 풍천교주가 서 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주님?”

정중한 고월의 태도에 풍천교주가 못마땅함을 가득 풍겼다.

“정 없게 존대하는 것부터 변했지.”

“보는 눈이 많은 곳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천마신교의 내원이었다.

“보는 눈이 많기는!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쓴다!”

물론 모두가 신경 썼다. 전 풍천교주에 현 섭혼마존의 사부인 그를 누가 감히 무시할 수 있겠는가?

검무극보다 먼저 교로 돌아온 풍천교주는 고월부터 찾았다.

하지만 고월은 교로 돌아와서도 무슨 일이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풍천교주의 불만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고월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오늘만큼은 바쁘다는 핑계는 그만.

“교주야.”

고월의 반말에 오히려 풍천교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나는 내 일이 너무 즐겁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따지듯 물었다.

“정말 즐겁냐?”

풍천교주는 작정한 눈빛으로 고월에게 말했다.

“너 변했다고. 예전에는 네게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었는데, 지금은 머리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 예전에는 뜨거웠는데, 지금은 차가워졌다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책임을 한 사람에게 돌렸다.

“이게 다 소교주 때문이다. 너처럼 완벽주의자에게 일을 맡기면 결과가 뻔히 이렇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아니지, 알고 있겠지. 그 똑똑한 사람이 이걸 몰랐을 리가 없지.”

물론, 풍천교주도 검무극을 좋아했다.

하지만 고월이 이렇게 고생하는 거 보면 화가 났다.

기껏 풀어줬더니 스스로 또 족쇄를 찼다는 생각에. 누가 뭐래도 소교주보단 고월이었으니까.

“소교주를 욕하기 위해서 나를 차가운 냉혈한으로 만든 거야?”

고월의 농담에도 풍천교주는 기분을 풀지 않았다.

“소교주가 뭐라고 했어? 뻔하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우리 조금만 더 참자. 앞으로 잘 부탁한다! 내 말 맞지?”

“아직 못 만났어.”

“뭐?”

“교주님과 대공자와 사냥 갔거든.”

풍천교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냉혈한은 따로 있었네. 봐라, 내가 소교주 욕을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네가 아무리 충성해 봐라. 소교주는 가족이 먼저야. 언제나 가족이 먼저라고.”

“당연하잖아?”

그러면서 풍천교주를 빤히 쳐다보며 덧붙여 물었다.

“교주는 내가 우선 아냐? 나는 그 무엇보다 교주가 우선인데.”

그 말은 곧 자신과 가족이라는 의미였다.

풍천교주의 화가 한방에 풀리는 파훼법이기도 했고.

“서로 그런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소교주는 나를 쓰고, 나는 소교주께 충성하는 거야. 지켜야 할 것들이 있는 사람이 주는 신뢰가 있거든.”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말했다.

“그렇게 속 편한 소리나 하니까 매번 이렇게 고생만 하는 거다.”

고월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통천각 건물을 향했다.

“고생해야지. 저곳의 주인이 되려고 가는 길인데.”

천마신교 총군사가 되겠다는, 처음으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순간이었다.

“교주야, 나 안 차갑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좋겠다, 뜨거워서.”

괜한 심술에 고월이 미소를 지었다.

“교주야, 소교주는 우리가 인생을 통째로 걸어도 될 만큼 큰 사람이다. 우리가 소교주 이용하는 거다.”

풍천교주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대천산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소교주는 좋겠다, 이렇게 다 이해해 주는 뜨거운 군사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형도 있고. 젠장! 가족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그러자 고월이 걸음을 옮겨 풍천교주 옆에 나란히 섰다.

“왜 가족이 없어? 듣는 가족 기분 나쁘게.”

* * *

둘째 날에도 사냥은 계속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냥감의 발견이었다. 형은 계속 기 발출 수련을 했고, 온갖 종류의 동물을 찾아냈다. 피는 못 속인다고, 기 발출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거의 천무지체인 자신만큼 빨랐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르치는 아버지의 무공 경지가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저보다 형을 더 잘 가르쳐 주고 계시잖아요! 저 가르쳐 주실 때는 그런 설명 안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시고 장남 가르치는데 몰두하셨다. 그동안 못 해준 애정을 마음껏 쏟고 계셨다.

그렇게 기 발출을 수련하다가, 드디어 큰게 걸렸다.

“호랑이 같습니다!”

검무양의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을 왔는데 호랑이 한 마리는 잡고 가야지.”

검무양이 먼저 몸을 날렸고, 검우진과 검무극이 그 뒤를 따랐다.

사뿐하게 바위에 내려선 검무양이 조용히 활시위를 당겼다.

검우진과 검무극이 그 뒤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호랑이가 아니라 내단을 품은 거대 영물이라도 이 사냥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 멀리 호랑이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몸집이 큰 대호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

금방이라도 날아가 호랑이를 꿰뚫을 것 같았던 화살은 날아가지 않았다.

검무양이 아버지에게 정중히 말했다.

“몸집이 큰 것이 대천산을 지키는 영험한 호랑이 같아서 살려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미련 없이 돌아서려 할 때.

“저기 쟤들 때문은 아니고?”

검무극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호랑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끼로 보이는 호랑이가 두 마리 있었다. 자신이 봤으니 아버지와 형도 보았을 거다.

“아버지, 형에게도 말씀하셔야지요.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고요. 제가 이랬으면 그러셨을 거잖아요! 당장 잡아서 깔고 자는 가죽을 저놈으로 바꿔 달라고 하셨을 거잖아요!”

검무극은 보았다. 아버지의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것을.

그래, 너였다면 그랬겠지

검우진이 단호히 말하며 돌아서 걸었다.

“영물은 함부로 죽이는 게 아니다.”

형이 그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검무극이 저 멀리 어미를 따라가는 호랑이 새끼들을 보며 소리쳤다.

“둘째야, 우리 힘내자!”

앞장서 걸어가는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드물고도 귀한 미소였지만, 아쉽게도 두 아들은 볼 수 없었다.

* * *

그날 밤에도 모닥불이 타올랐다.

검무극은 낮보다 이 시간이 더 좋았다.

아버지와 형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고, 같이 술도 마시고. 술기운을 빌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그리고 오늘처럼 밤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리는 운치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아버지, 자세 좀 편하게 풀어도 됩니까?”

“언제는 어려워했더냐?”

검무극이 웃으며 자세를 편하게 풀었다. 다리를 쭉 뻗고 팔로 지탱한 채 뒤로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그러면서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았다. 시원하게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아, 좋다! 는 말이 절로 나왔다.

“형도 자세 좀 풀어. 야영의 참맛은 먹고 마시고 뒹굴뒹굴하는 데 있잖아.”

형 성격상 아버지 앞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처음 사냥을 나서던 그 새벽을 생각하면 형도 제법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아버지, 저는 책 좀 읽겠습니다.”

온갖 것이 다 들어있는 혁낭에서 이번에는 책이 나왔다.

설마 사냥을 와서 책을 읽을 줄은 몰랐기에 검무양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무슨 책이냐?”

그러자 검무극이 책 표지를 들어 보였다. 시집이었다.

“너, 시도 읽냐?”

“어휴, 우리 형. 사람이나 죽일 줄 알지, 형이 시를 알아? 문학을 알아?”

애초에 책을 꺼내고 이 말을 꺼낸 건 의도가 있었다.

“아, 음악은 좀 알긴 하지만.”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검무양이 흠칫 놀랐다.

설마 너?

미안해, 형.

검무양이 전음을 보내 말리기 전에 검무극이 먼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형이 단소 불 줄 안다는 것 아셨습니까?”

당황한 형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어찌 아버지가 아시겠느냐 싶었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내가 말했지? 아버지께서 알고 계셨을 거라고.”

정말 아버지는 두 아들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계셨다.

그것을 이렇게나 표를 내지 않으셨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형, 아버지의 이 숨은 애정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한잔 더 해야겠다.”

검무극이 혁낭에서 술을 꺼내려했다.

하지만 술병 대신 다른 게 나왔다.

보는 순간 검무양의 탄식을 자아낸 그것은 단소였다.

“어? 이게 왜 들어 있지? 정신없이 짐을 챙기다 보니 딸려 들어왔나 보네.”

그럴 리가! 검무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버지는 동생의 장난을 말리지 않으셨다. 그렇다는 의미는?

어차피 동생이 작정했다면 결국 연주하게 될 터.

검무양이 먼저 나섰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제가 한 곡 연주해도 되겠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뚝뚝한 끄덕임에 담긴 마음을 검무극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 오셨음을.

그러는 사이 자세를 갖춘 검무양이 단소에 떨리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수천, 수만 명을 앞에 둔 것보다 지금 더 긴장하고 있겠지.

맑고 깊은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검무극은 보았다.

아버지가 눈을 지그시 감으시는 모습을.

다 하지 못했던 말이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울려 퍼졌다. 가락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같았고, 흔들리는 모닥불 같기도 했다. 쏟아지는 별들이 음률에 취해 더욱 반짝였다.

그렇게 마음을 파고드는 맑고 깊은 소리가 대천산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연주가 끝나자 검우진이 눈을 떴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정말 좋구나.”

좋구나만 해도 극찬이었는데, 그 앞에 ‘정말’이란 말까지 붙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은 이렇게 홀가분해 보이는 형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형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해 온 어떤 것이, 이번 사냥으로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검무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검무극이 소리쳤다.

“믿어줘! 단소를 챙기려 한 게 아니었어. 고기 굽는 꼬챙이로 착각하고 넣어온 거야.”

동생에게 이 말을 한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맙다.”

까불던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고마워, 형.”

서로 고맙다는 말을 주고받는 아들들을 아버지는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멋질까요? 보셨다시피 아버지 아들들은 시도 읽고, 악기도 연주하는 그런 아들들입니다.”

자랑처럼 말하던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에 어떤 아련한 그리움이 스치는 것을. 아버지에게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버지가 호랑이 가죽에 등을 돌리며 누웠다.

“이만 자자.”

* * *

다음 날, 세 사람은 대천산 정상에 올랐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진 이곳.

주위에 치솟아 오른 산봉우리들이 마치 무림 고수들이 우뚝 서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세 사람은 정상에 서서 그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아버지와 이곳에 올라왔을 때 말씀하셨다. 무공수련이 힘들면 이곳에 올라오곤 하셨다고.

아버지의 뒷모습에 젊은 시절 아버지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때는 무슨 생각을 하셨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때 아버지가 등을 돌린 채 물었다.

“구화마공이 구성에 이르렀지?”

아버지가 꿰뚫어 보신 건 형이 익힌 천마호신공만이 아니었다.

“네, 구성에 올랐습니다.”

과연 아버지는 어떠하셨을까?

“구성에서 대성을 이루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셨습니까?”

아버지가 걸린 기간은.

“칠 년.”

그것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아버지였기에 가능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너라면 오 년 안에도 이룰 수 있겠지.”

검우진은 그만큼 아들의 무재를 인정했다.

자신도 지금 검무극의 나이에 구성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만약 오 년 내로 대성을 이룬다면, 역대 교주 중에서 가장 빨리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는, 아니 심지어 교주에 오르기 전 소교주 때 대성을 이루는 전설을 이루게 되는 될 것이다.

“수련하다가 가슴이 답답하거나 벽이 느껴지면 이곳 대천산에 올라라. 대천산의 기운이 분명 네게 도움을 줄 거다.”

“네, 그러겠습니다.”

검무극이 의기양양하게 검무양에게 말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아버지가 이 큰 대천산을 통째로 빌려주시는 후계자라고!”

이렇게 말하면, 그게 어찌 빌려주는 거냐, 후계자에서 밀려난 형에게 할 자랑이냐? 이렇게 따지고 들어줘야 하는데.

“부럽다.”

순간 검무극이 움찔했다. 이 강력한 한방에 뭐라 대응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 무시한 거지? 아, 형이 뭘 몰라서 하는 소린데, 내가 태어난 해에도 아버지 술 담그셨어. 그냥 나 놀리려고 그러시는 거야. 자, 아버지. 이제 털어놓으시죠! 아들아, 네가 태어나던 날!”

검우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해 떨어진다. 이만 하산하자.”

검무양이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오해라니까!”

“짐 줘.”

등에 짊어진 짐을 달라는 것이었다.

“괜찮아. 오늘은 끝까지 아버지 모셔.”

잠시 말이 없던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저만치 걸어가다가 돌아보며 물었다.

“안 힘드냐?”

비단 등에 진 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안 힘들긴. 힘들어 죽겠다.”

그 말에 형은 씩 웃은 후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올라올 때보다 형은 아버지와 한 걸음 더 가까이서 걷고 있었다.

한 걸음 가까워졌으니 이제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실망과 서운함은 오직 친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니까.

저 멀리 어디선가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왔다.

어쩌면 형이 살려준 그 호랑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려갈 때는 당연히 짐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아버지! 형이 사람이나 죽이고 단소나 불 줄 알지 이렇게 비정한 사람입니다. 안 들리세요? 아버지?”

먼 길의 시작일 뿐

사냥에서 돌아온 검무극이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고월이었다.

“소교주님!”

고월은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검무극에게 황송한 마음이었다.

“기별하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자네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달려왔네.”

“무사히 귀교하셔서 다행입니다.”

검무극은 고월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 무한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지 못했을 거네. 고맙네.”

이번 무한 작전은 은월의 도움이 정말 컸으니까.

“안 본 사이에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어디 아픈 데는 없나?”

“괜찮습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말소리.

“일을 그렇게 혹사하는데, 살이 안 빠지는 게 이상하지.”

검무극이 돌아보자 풍천교주가 서 있었다.

“그리고 수장이 아픈 데 없냐고 물으면 없다고 하지, 나 아픕니다! 할 수하가 어디에 있나? 자네 같으면야 있는 병, 없는 병 다 읊었겠지만.”

“그럼요, 저라면 엄살 부렸죠. 저도 제 몸 아픈 데를 잘 모르는데, 남이 어찌 알겠습니까? 말 안 하면 절대 모르죠. 한데 교주님은 제가 올 줄 어떻게 알고 딱 맞춰 오셨습니까?”

그러자 풍천교주는 검무극에게 다가와서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사냥에서 돌아오면 자네가 고 군사부터 만나러 오나 안 오나 지켜보고 있었지.”

“어쩐지. 제 생존본능이 발걸음을 이쪽으로 향하게 하더라고요.”

풍천교주는 뭐라 더 잔소리하고 싶었지만, 고월이 눈빛으로 말했다. 거기까지만 해!

고월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사냥은 어떠셨습니까?”

검무극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평생 해본 사냥 중에 가장 멋진 사냥이었네.”

고월은 이 사냥이 얼마나 어렵게 이뤄진 일임을 잘 알았다.

피를 흘리지 않는 후계자 싸움을 해내야 하고, 그 다툼에서 밀려난 대공자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 거기에 마교주의 마음도 움직여야 했고.

만약 자신에게 해내라고 했다면?

차라리 무림맹을 쳐서 이기는 게 더 쉽게 느껴진다. 그 어려운 일을 검무극이 해낸 것이다.

“소교주님, 바쁘실 텐데 이만 볼일 보십시오.”

봐야 할 사람이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여덟 마존들 모두 검무극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거기에 이안과 서대룡, 장호까지.

이렇게 가장 먼저 찾아와준 것만 해도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교주님. 앞으로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풍천교주가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나서려 했지만, 고월이 그를 눈빛으로 제압했다. 교주, 나서지 마!

“저는 소교주님이 신경 써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교주님이 신경 쓸 일을 해결하는 역할이 제 일입니다. 그게 군사의 일이죠.”

결국, 풍천교주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노예냐? 신경 안 써줘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게.”

검무극이 있는 앞이라 고월은 정중히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저는 충분히 대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슨 대가?”

“월봉 받지 않습니까?”

그 말에 풍천교주가 코웃음을 쳤다.

“그깟 돈 몇 푼이나 된다고!”

“저 많이 받습니다. 제가 알기로 총군사님 바로 아래입니다.”

순간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정말?”

“그럼요. 저 공짜로 일하는 사람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 최고 대우를 받아내려는 사람이죠.”

풍천교주가 재차 확인하는 눈빛으로 묻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제일 많이 주고 싶지만, 총군사님이 계신 데 그럴 수는 없지요.”

잠시 눈을 껌벅이던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따지듯 물었다.

“나는 왜 안 주나? 내가 고 군사 옆에서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알죠, 우리 교주님 고생하신 거.”

“그런데 왜 주냐고?”

“월봉을 받으면 공식적으로 제 밑으로 들어오는 게 되는데요? 감히 어찌 그러겠습니까?”

풍천교주가 입맛을 다시며 잠시 고민하더니.

“들어갈 테니까 나도 주게.”

물론, 반농담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깟 푼돈쯤이야 할 정도로 재산이 많았으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왜? 자존심 굽히고 들어간다는데 왜!”

“섭혼마존의 사부님이신데 제 밑에서 월봉을 받으실 수는 없죠. 오히려 제가 용돈을 받아야지요. 소교주, 수고하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쓰게. 말 나온 김에 용돈 좀 주시지요.”

“그만! 됐네!”

혹 떼려다가 더 붙일 뻔한 풍천교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월에게 말했다.

“똑똑히 봤지? 들었지? 내게서 한 푼이라도 더 뜯어가려는 것. 소교주가 이런 무자비한 사람이다.”

검무극과 고월이 마주 보며 웃었다.

“자, 고 군사. 나와 같이 갈 곳이 있네. 교주님도 같이 가시죠.”

검무극이 두 사람을 데리고 내원 안으로 들어갔다.

소교주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건물 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근래 새로 완성된 건물이었는데 정문 현판에 검은 천이 씌워져 있었다.

“여긴 어딥니까?”

고월의 물음에 검무극이 손을 들어서 살짝 까닥했다.

스르륵.

그러자 현판에 씌워진 검은 천이 걷어졌다.

현판에 새겨진 두 글자.

그것을 보는 순간 고월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은월 본단이네.”

그 말에 풍천교주도 깜짝 놀랐다. 천마신교 내부에 은월이란 현판이 붙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가장 중요한 문제 역시 이미 해결한 후였다.

“이미 아버지께서 허가를 내리셨으니, 은월은 본교의 공식적인 조직이 되었네. 내 직속 조직이지.”

고월과 풍천교주가 중원을 돌며 은월 조직을 구축할 때부터 검무극이 준비해 온 일이었다.

고월은 감격했다.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 안도 구경해봐야지?”

검무극을 따라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통천각에 비할 규모는 아니지만, 갖춰야 할 건 모두 갖춰져 있네.”

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가는데, 풍천교주가 양쪽 벽을 살피며 말했다.

“이 벽, 보통 벽이 아니군.”

“네, 잘 보셨습니다. 기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아직 작동하지는 않습니다만, 정식으로 작동하면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을 겁니다. 정보를 다루는 곳이니 보안이 철저해야겠지요.”

그냥 평범한 기관이 아니었다. 최고 수준의 경계를 위한 기관이었다. 이것 하나만 봐도 검무극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기관이 설치된 긴 복도를 지나자 커다란 공간이 나왔다.

“여기가 작전실이네.”

그냥 새로 건물만 지어 둔 것이 아니었다. 내부 시설도 완벽했다.

한쪽 벽은 기관 장치를 통해 중원 곳곳에서 날아드는 정보를 처리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가 자네 집무실이네.”

좋은 책상과 편한 의자, 책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작전실 상황을 모두 살필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검무극이 집무실 내부에 나 있는 문을 열었다.

“여긴 자네 방이네.”

제법 너른 공간 가운데 딱 하나, 침상만 있었다.

“여기서는 책도 읽지 말고, 앉아서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잠만 자게.”

고월의 건강을 생각하는 검무극의 마음이 담긴 방이었다.

고월은 그런 세세한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월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무인들을 위한 휴식 공간도 마련해 뒀네. 전용 숙수들이 상주하며 요리를 해줄 거네.”

일하는 공간뿐만 아니라 밥을 먹는 곳과 잠을 자는 곳, 쉬는 곳과 씻는 곳까지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자네와 군사들이 숨을 수 있는 비밀공간도 만들어져 있네. 물론 건물을 빠져나갈 수 있는 비상탈출로도 있지.”

내원에 있는 은월이 공격받는다면 이미 천마신교가 뚫렸다는 의미지만, 검무극은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했다. 고월은 무공을 익혔지만, 군사들은 무공을 모르는 이들일 테니까.

“앞으로 은월에서 무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안이 이끄는 귀영대에 연락하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네.”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고월은 진정 감격했다. 이제 천마신교 내에 자신의 자리가 생긴 것이다. 그 고생을 하며 중원에 은월의 조직을 만들어온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고월이 말없이 정중히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검무극도 잘 부탁한다는 듯 포권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고 군사, 먼 길의 시작일 뿐이야.’

검무극은 자신이 교주가 되면 고월에게 총군사를 맡길 생각이다.

평생 본교를 위해 헌신한 사마명은 명예롭게 총군사 자리에서 물러나 편히 쉬면서 여생을 보내게 해줄 생각이다. 물론 평생 일만 해온 그는 그 편한 생활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겠지만, 놀다 보면 또 노는 즐거움을 느끼게도 되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검무극 흉을 봤던 풍천교주는 괜히 멋쩍은 얼굴로 물었다.

“내 방은 없나?”

* * *

고월과 풍천교주를 만난 후, 검무극이 향한 곳은 악인곡이었다.

악인곡에 들어섰을 때, 지나가던 무면객들이 정중히 인사를 해왔다.

단지 후계자이기에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가면 속 눈들이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있었다.

지난번 암왕과의 싸움에서 무면객들과 친해진 덕분이었다. 검무극도 이제 이들이 반갑기까지 했고.

그렇게 무면객들의 환대를 받으며 검무극은 극악소마의 거처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선 순간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극악소마를 지켜보았다.

극악소마는 방 중앙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 떠 있는 한 자루의 비수. 그것은 앞서 검무극이 그에게 줬던 만년한철 비수였다.

극악소마가 비수를 낚아채는 순간.

착! 착착착착착! 착착! 차아아악!

극악소마가 연속해서 비수를 휘둘렀다. 찌르고 베고 막고, 다시 찌르고.

허공에 비수가 만들어낸 짧은 검선들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그 연속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모습은 실로 독특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궤적이다.’

만약 저런 궤적을 그리며 비수가 날아든다면? 과연 쉽게 피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한바탕 비수를 내지른 극악소마가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검무극 쪽을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정중한 인사에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다녀왔습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조금 전 그 무공은 혹시?”

“네, 맞습니다. 소향비술입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일부러 소향비술을 보여주었음을.

“정말 환상적입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점차 손에 익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향비술이 이 정도라면, 완성된 소향비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소교주님께서 소향비술의 비급을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면서 극악소마가 가면을 머리 위로 올렸다.

예전에 자신이 가면을 쓰면 저렇게 가면이 하늘을 향하게 머리 위로 올려 쓸 때가 많았다.

지금 극악소마가 그렇게 가면을 올린 채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잘생긴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춰두는 건, 천마검을 보고에 넣어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과분한 비유에 극악소마가 살짝 부끄러워했다. 지금껏 저런 표정들이 가면 속에 다 숨겨져 있었으리라.

“혼자 있을 때도 가끔 이렇게 벗고 있습니다. 되도록 편하게 있으려고 합니다.”

극악소마는 점점 바뀌고 있었다. 검무극 앞에서만 가면을 벗던 그가 혼자 있을 때도 가면을 벗기 시작했으니까.

특히 그냥 가면을 완전히 벗는 것과, 이렇게 머리 위에 올리면서 가면을 벗는 것은 분명 다르게 느껴졌다.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소마님. 마지막에 뵈었을 때와 뭔가 달라지셨습니다.”

비단 가면을 벗는 방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극악소마에게서 느껴지는 기도가 달랐다.

자신과 이틀간의 비무와 적과의 실전으로 무공이 상승했던 극악소마였다.

한데 지금 보이는 기도는 그때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소교주님께서는 알아보시는군요.”

극악소마는 검무극이 출교한 후에도 무공수련에 전념했다.

강해지라는 검무극의 당부를, 극악소마는 그 말을 충실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소향비술이 새롭게 마극광폭장과 혈앙지와 어우러지면서 그의 무공 경지가 다시 새로운 경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이 세 개의 무공이 조화롭게 이뤄지면 그야말로 정말 강력한 신위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소교주님 덕분입니다.”

“그럼요, 우리 소마님께서 매번 살려주신 저 때문이죠!”

“저를 더 많이 살려주신 거 같은데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참, 형수님은 잘 지내십니까?”

이미 천화루주를 형수라 불렀던 검무극이었다. 형수님이란 말에, 여정은 크게 감격하기도 했었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조만간에 한 번 만나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아, 잘 됐습니다.”

검무극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가시면 이걸 형수님께 전해주십시오.”

검무극이 꺼낸 것은 무림 보고에서 선택한 세 가지 중의 하나, 바로 신녀지몽이었다.

신녀지몽을 보는 순간, 천화루주 여정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본능에 충실히 따르려 하는 것이다.

원래 천화루주를 직접 만나서 전해주려고 했는데, 교를 너무 오래 비워서 천화루에 들르지 못하고 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맡길 수 없겠지만, 극악소마가 직접 간다면 믿고 맡겨도 될 것이다.

극악소마의 시선이 신녀지몽을 향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천. 그랬기에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녀에게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검무극이 자신에게 전해주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그냥 가져다주기만 하면 됩니까?”

“네. 제 예감이 맞다면.”

검무극이 신녀지몽을 건네며 말했다.

“어떤 물건인지 분명 아실 겁니다.”

손에서 검은 내려놓아도

검무양이 철방으로 들어섰을 때, 저 멀리 곽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손수레에 철 덩어리를 실어서 옮기고 있었다.

검무양은 그녀에게 가지 않고 곧장 곽 장인이 일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제작된 병장기를 확인하던 곽 장인이 검무양을 보고 인사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검무양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러자 곽 장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대공자님 덕분에 고민을 좀 했습니다.”

검무양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곽영을 두고 한 말이리라.

검무양은 곽 장인에게 보낸 전서에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곽영이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었다는 사실과 동생을 살리기 위해 위조 암기를 만들었다는 사실까지.

그녀를 본교 철방에 받아들일지 말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했다. 그녀의 실력이 아까워서 보내는 것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알아서 판단하라는 말도 함께 전했다.

그녀를 철방에 소개해줄 뿐 더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서의 모든 권한은 곽 장인이 가지고 있었고, 검무양은 그걸 존중했다.

“저 여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찌 모르겠는가? 최연소로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 된 사람을.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곽 장인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곽씨 혈통이 철을 다루는 데 능통합니다.”

“혹시?”

“네, 맞습니다. 확인해 보니 그녀도 곽가철문의 후예더군요.”

곽가철문(郭家鐵門).

한때 병장기를 만드는 일만큼은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가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대에서 철문의 형제들이 서로 다퉈 칼부림을 일으키고는 뿔뿔이 흩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 위대한 가문이 몰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나절이었다.

곽영이 젊은 나이에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곽가철문의 뛰어난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곽 장인의 이름은 곽인(郭刃).

그 역시 곽가철문의 후예로 굳이 따지자면 곽영과는 친척뻘이 되는 관계였다.

“그래서 고민이 더 되었습니다. 원래는 바로 받아들였을 텐데, 같은 집안사람이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까 고민이 되더군요.”

원래 강직한 성품을 지닌 곽 장인이었다.

“한데 받아들이셨군요.”

곽 장인은 위조 진격을 처음 봤을 때, 정말 감탄했었다. 자신들이 만들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 게다가 정식 철방이 아닌 창고를 개조한 곳에서 제대로 된 철방 기술자들이 아닌 이들을 데리고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중책을 맡길 수도 없는 일.

“처음 철방에 들어온 사람처럼 밑에서부터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적응하려면 실력으로 증명해야 할 테니까요.”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곽 장인의 시선이 저 멀리 철을 옮기고 있는 곽영을 향했다.

“저 아이는 스스로 이미 완성된 검이라 생각하고 살아왔을 겁니다. 한데 다시 자신을 녹여 쇳물부터 시작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검이 되어 나올지는 저도 궁금하군요.”

검무양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뻘뻘 흘리며 허드렛일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검무양이 곽 장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곽 장인과 인사를 나눈 후 검무양은 철방을 걸어 나갔다.

일부러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는 척하는 것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곽영 역시 검무양이 왔다는 걸 알았지만,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이렇게 철방에 들어올 수 있게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친해져야 할 상대는 검무양도 아니고 곽 장인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다.

그 유일한 상대는 지금 눈앞에 있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과 얼마나 친해지느냐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도 결정될 것이다.

‘당신에게 한 약속은 이 철과 혼인한 후에 지킬게요. 아, 재혼이겠네요.’

* * *

“어르신!”

악인곡을 나온 검무극은 곧장 혈천도마의 거처로 달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혈천도마는 마당에서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유행처럼 번졌던 마존들의 수련.

사실 혈천도마는 그 유행의 선두에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다시 무공수련을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근래 검우진의 폐관수련을 계기로 마존들은 저마다 사명감을 느꼈다. 반드시 자신의 앞을 막아선 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지금 혈천도마가 펼치고 있는 무공은 멸천마도식이었다.

제삼식 멸도혈풍.

후아아아아앙!

도에서 뻗어나간 거친 도기가 회오리치며 날아갔다. 이 위험천만한 무공을 마당에서 펼쳤으니 주변이 초토화될 것이 분명했는데.

도기들이 담벼락을 날려버리려던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스슷.

바로 담 앞에서 거짓말처럼 도기들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자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가 멸천마도식을 딱 정해진 구역 내에서만 발휘하고 있음을.

빠르게 날아오르는 것보다 천천히 걸어서 허공으로 올라가는 게 힘들 듯이, 이렇게 제한을 두고 무공을 펼치는 것이 담을 가루로 만들고, 그 뒤쪽 건물까지 다 부수는 것보다 훨씬 높은 경지였다.

‘어르신도 새로운 경지로 올라섰구나!’

혈천도마가 다시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 목표가 검무극이었다.

쇄애애애애액!

문 앞에 서 있던 검무극을 향해 엄청난 기세의 도기가 물결처럼 뻗어왔다.

멸천마도식 제이식 멸도파랑.

검무극은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스스슷.

앞서와 마찬가지로 날아든 도기의 물결이 검무극의 얼굴 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에게 버럭 소리쳤다.

“죽고 싶은 게냐? 호신강기도 끌어 올리지 않다니!”

방금 검무극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어르신을 믿었죠.”

“그러다 내가 실수라도 하면?”

“매일 어르신 꿈에 원혼이 돼서 나타나겠죠. 제 잘생긴 얼굴 돌려주세요! 하면서.”

혈천도마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참을 수 있어도 교주에게 미안한 마음은 못 참을 것이다.

“뵙고 싶었습니다!”

검무극이 달려가서 안기려 하자,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로 앞을 막았다.

“땀 냄새난다. 저리 가라!”

“어르신 땀 냄새는 영약 냄새보다 더 좋습니다.”

“찌푸린 인상이나 펴고 말해라.”

그 말에 검무극이 웃음을 터뜨렸다. 혈천도마를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직 그만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씻고 오마.”

“괜찮다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

팔마존 중에 누가 제일 깔끔하냐고 묻는다면, 검무극은 단호히 혈천도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건 언제나 깨끗한 그의 침상만 봐도 알 수 있다. 깔끔함과는 거리가 멀 거 같은 사람인데.

그때 검무극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마당 구석 화원에 심어진 못 보던 꽃과 식물들, 일화검존과 잘 지내고 있다는 증거가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쪼그리고 앉아서 풀과 꽃을 보고 있었을까?

뒤에서 혈천도마의 말이 들려왔다.

“교주께서 좋아하시지?”

아버지와 형과 사냥 간 일을 두고 묻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이 혈천도마일 것이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혈천도마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어휴, 장남만 어찌나 편애하시던지. 매일 울면서 잠들었습니다.”

혈천도마는 행여나 네가 그랬겠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입은 거기서도 안 쉬었겠구나.”

“쉴 수가 없죠. 이 대 일이었다니까요.”

혈천도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했다.”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혈천도마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검무극 자신을 위한 말도 아니었고 형을 위한 말도 아니었다. 아버지를 두고 말이었다. 교주를 위해 잘 다녀왔다고.

“다음에는 어르신도 함께 가시죠.”

“내가 거긴 왜 가나?”

“가셔서 장남만 편애하시는 아버지에 맞서 저를 챙겨주시는 거죠.”

“그런 목적이라면 주정쟁이나 가면쟁이를 데려가야지.”

“주정뱅이는 아버지한테 아부한다고 형 편만 들 테고요. 가면쟁이는 아버지가 안 데려가려 하실 겁니다.”

“그럼 주먹쟁이 네 사부를 데려가.”

“아시잖아요? 사부님은 아버지 편만 들 겁니다. 제 눈물을 닦아주실 분은 우리 어르신뿐입니다!”

재미있다는 듯 혈천도마가 웃었다.

검무극은 이 좋은 분위기를 더 좋은 이야기로 이어갔다.

“그거 아십니까? 이번에 무한에서도 어르신이 저를 구하셨다는 걸요.”

“내가? 무한 근처도 안 갔는데?”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거냐? 라는 눈빛으로 혈천도마가 쳐다보자.

“어르신 덕분에 제가 책 좋아하게 되었잖아요?”

무림 보고에서 비궤가 흡수할 구슬을 찾는 걸 포기하고 그냥 나가려고 했을 때.

마지막 순간에 책이나 한 권 읽고 가자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절대 황정을 얻지는 못했을 거다.

“책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제 운명을 바꿨습니다.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혈천도마는 그 모습을 말없이 응시하다가 차분히 말했다.

“남을 이기려면 절대 그 검을 놓지 않아야겠지. 한데 너 자신을 이기려면…….”

혈천도마가 차기 천마에게 하는 조언이란 걸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 이어졌다.

“손에서 검은 내려놓아도 책은 내려놓지 마라.”

* * *

취몽루에 오른 취마의 시선이 호수를 향했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에 시체 한 구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거처에 시체가?

놀랄 법도 했건만 취마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가 호수 위를 걸어서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몸을 엎드린 채 둥둥 떠 있는 시체를 내려다보던 취마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미안함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체가 몸을 뒤집었다.

호수에 떠 있던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오랜만이야, 형.”

“여기서 뭐 하냐?”

“형을 놀라게 해주려 했지. 이렇게까지 동심을 잃은 줄도 모르고.”

“동심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겠지.”

취마는 이런 말을 할만했다.

지난번 검무극이 출교했다 돌아와서 임시 교주가 되었을 때도 취마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마존들보다 더 늦게 찾아와서 섭섭해하던 그였는데.

“형, 우리 얼마 만이지?”

가만히 검무극을 내려다보던 취마가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망부석이 되어 돌아가실 때도 소교주님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마존들 중에서 가장 박대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소교주님을 제일 좋아하셨다고요.”

취마의 농담을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너, 아버지 닮아서 정말 분위기 있게 잘 생겼구나. 성격 빼고 주사 빼고 나머지는 다 닮아도 돼!”

취마가 고개를 한 번 내저은 후 다시 취몽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물 위를 걷는 그의 경신법은 너무나 부드럽고 우아했다. 검무극이 그를 보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그 정도로 못 본건 아니다!”

검무극은 다시 호수에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좋다. 역시 여기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제일 멋지다.”

오랜만에 취몽루의 호수에 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돌아온 감격을 충분히 만끽한 후에 검무극이 취몽루에 올랐다.

취마가 빙궁성배에 술을 따라주었다.

“갔던 일은?”

“잘 됐어.”

취마에게도 무한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해주었다. 헤어지기 전에 극악소마에게도 해줬고, 혈천도마에게도 해준 말이었다.

예전부터 그랬다. 배후 세력과 관련해서는 마존들에게 모두 다 말해주었다.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취마가 검무극의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고생했다.”

취마의 담담한 반응에 검무극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뭔가 달라 보여, 형.”

“내가?”

“왠지 차분해졌다고 할까?”

이런저런 장난을 더 칠 법도 했는데. 그렇다고 정말 삐쳐서 이럴 사람도 아니고. 속 좁다고 그를 놀리지만, 누구보다 큰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오늘의 이 변화가 근심이 느껴지는 차분함이라는데 있었다.

“혹시 여 소저 때문이야?”

취마와 삼대 취객 여빈이 애정으로 서로를 대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안 본 사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아까 안내하던 그녀에게서 아무런 문제도 못 느꼈는데?

취마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비운 후 일어났다.

“따라와라.”

취마가 검무극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두 사람은 경공으로 몸을 날려서 입구와 반대쪽 호숫가에 내려섰다.

취마가 검무극을 데리고 대취림으로 들어갔다.

숲속 깊숙한 곳에 안개처럼 주기가 펼쳐져 있었다.

대취림의 절대금지.

내력으로 배출할 수 없는 주기였기에 아무리 고수라도 쉽사리 통과할 수 없는 곳이었다.

취마가 걸어가자 주기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길을 만들었다. 오직 취마만이 갈 수 있는 그곳에 양조장이 있었다. 예전에 취마를 따라 와본 적이 있던 바로 그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취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갔던 일은 잘되었고, 교주님은 폐관에서 나오시고, 마존들은 점점 강해지고. 모든 게 잘 풀리고 있는데.”

취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그곳 가운데 놓인 커다란 잔을 향했다. 그곳에 취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있었다.

“왜 새로 담은 주정이 또 상한 거지?”

천마가 세상을 멸망시킨다

“너는 미신이라 여기겠지만.”

처음 주정이 상했을 때, 검무극은 불안해하는 그에게 무슨 마존이 미신을 믿느냐고 놀렸었다.

주정을 내려다보는 취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내겐 미신이 아니야.”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목소리.

“형이 아니라면…….”

취마가 돌아보자 검무극이 나머지 말을 이었다.

“내게도 아니야.”

검무극이 취마 옆으로 걸어와서 상한 주정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부족한가 보다.”

취마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우린 더 강해져야 하고, 일은 더 잘 풀려야 하나 보다.”

우리의 운명이 바뀐 만큼 저들의 운명도 바뀌었을 테니까.

그래, 우리가 강해졌으니 상대가 약해졌다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기존과 다른 길을 가서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될 것이다.

“더 열심히 살라네, 이 상한 주정이.”

검무극의 말에 취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지금보다 어떻게 더 열심히 살아?”

“형이 잘 모르나 본데, 나 농땡이 많이 쳐. 아버지와 형이랑 사냥도 가고, 아까 술도 마셨잖아?”

“아까 나랑 마신 술은 백 년 만에 마신 거였고. 셋이 사냥도 평생 처음 간 거고. 입만 시끄럽지, 한 번도 제대로 논 적 없잖아.”

자주 본다고 잘 아는 게 아니라는 듯, 취마는 누구보다 검무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하고의 광란의 술 모임, 형이 못 봐서 그래.”

“후계자끼리 모여서 행여나 광란이었겠다.”

“우리 춤도 췄어. 왜 이래?”

검무극이 대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한 후, 구석에 놓여 있는 나무통을 들고 와서 주정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냥 둬. 나중에 내가 치울 거야.”

“혼자 치우면서 오만 걱정 다 하려고.”

두 사람이 함께 주정을 치우고 잔도 깨끗이 씻었다. 기왕 치우는 김에 다 치우자며 검무극은 소매를 걷어붙였고, 결국 두 사람은 양조장 내부를 깨끗이 청소했다.

“당분간 술 안 담글 거지?”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담글 거다.”

그리고 이유는 바로 검무극 때문이었다.

“너, 이 미신 믿을 거라면서? 그러면 계속 담가야지. 더 지독하게 상하는지, 아니면 덜 상하는지. 술은 우리에게 계속 신호를 주고 있으니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신호를 바탕으로 더 조심해서 싸우라는 취마의 마음을. 불안하고 속상하지만 그래도 알려주겠다는 형의 마음을.

“나, 다음에 출교했다 돌아오면 무조건 맨 먼저 형에게 간다. 어르신! 미리 사과드립니다!”

“마지막에 와. 바쁘면 안 와도 되고. 나는 괜찮으니까.”

취마가 먼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나가며 말했다.

“지켜야 할 여인이 생기니, 형도 철드나 보다.”

“그럴 리가?”

취마가 허리에 찬 혈루에서 술을 쭉 마신 후에 안개처럼 자욱한 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상에 철든 주정뱅이가 어디에 있냐?”

* * *

취마와 헤어진 후 검무극이 찾은 곳은 아버지의 거처였다.

거처 앞에서 휘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소교주님, 오셨습니까?”

휘는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검무극을 맞이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아저씨?”

“네, 잘 지냈습니다.”

검무극을 향한 휘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평소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휘가 유일하게 부드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교주님은 아직 취침 전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휘가 사라졌다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들어오시랍니다.”

검무극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들어와 본 적이 있는 아버지의 침소였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아!”

인사를 하려던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꽃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바로 무한에서 선물로 사 온 그 잠옷이었다.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형 선물보다 제 선물이 훨씬 실용적이고 좋죠? 그 족자는 어디에 처박아 두셨습니까? 이미 버리셨죠? 형에게는 제가 비밀로 하겠습니다.”

방 내부를 둘러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멈춘 곳에 형과 자신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족자.

검무극이 감격한 것은 단지 벽에 걸어두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이 걸린 위치 때문이었다.

족자는 아버지가 침상에 누웠을 때,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걸려있었다. 침상에 누워서 주무시기 전에 아들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검무극이 잠시 말없이 족자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방에 이렇게 걸려있으니 또 새롭게 보인다.

“형이 보면 정말 좋아할 겁니다.”

“무양이는 이미 봤다.”

“네? 언제요?”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저기 걸어주고 간 것도 무양이다.”

형이 먼저 찾아왔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불렀을까? 어떤 경우든 두 사람이 많이 변했음을 보여주는 일이리라.

“아버지, 다음에는 셋이 있는 모습을 그리죠. 지금 당장 마군들 무한으로 보내서 화공 붙잡아 올까요?”

예전이었다면 싫다는 말부터 나왔을 텐데. 싫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야심한 밤에 어쩐 일이냐?”

“일단 대부분 사람에겐 초저녁입니다만.”

아버지의 눈빛이 가늘어지자 검무극이 재빨리 말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냐?”

“구화마공을 배우러 왔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제가 올 줄 아셨습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번 폐관 수련에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았느냐? 한 번은 올 줄 알았다.”

“와야죠. 이럴 때 안 배우면 언제 배웁니까?”

그리고 무공수련에 구체적인 목표도 있었다.

지금까지 익힌 건 구화마공 제오식까지.

“이제 제육식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칠, 팔, 구식은 천마혼이 펼치는 무공이었으니, 실질적으로 구화마공의 마지막 초식은 제육식이었다.

제육식 천마멸세(天魔滅世).

천마가 세상을 멸망시킨다.

구화마공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마지막 한 수.

하지만 마지막 육식은 펼치기가 매우 어려운 데다가, 거의 모든 내공을 한꺼번에 쏟아붓는 초식이기에 까딱 잘못했다간 큰 내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가만히 아들을 응시하던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너라.”

검우진은 잠옷을 입은 채 천마검만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잠옷에 검 한 자루만 달랑 든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떤 자유로움을 느꼈다.

아버지에게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내원 깊숙한 곳에 있는 수련장이었다.

예전에 검무극이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수련장과는 다른 곳이었다.

이곳은 사방이 철벽으로 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벽을 두드려 보았다.

“벽이 엄청 두꺼운데요?”

“그런 벽이 뒤쪽으로 열 개가 더 세워져 있다. 열 걸음 간격으로.”

“탈출 못 하게 죄인이라도 가둬두는 곳입니까?”

그때 검무극의 눈에 띄는 벽 하나.

뒤쪽으로 어른 하나가 몸을 숨길 수 있을 크기의 벽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철벽이 아니었다.

“설마 만년한철입니까?”

놀랍게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귀한 만년한철을 왜 여기다?”

게다가 두께가 엄청나게 두꺼웠다.

“대체 이 방은 뭐 하는 곳입니까?”

아버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라는 듯 알려주지 않았다.

“자, 제육식을 펼쳐보아라.”

구결은 이미 알고 있으니 시도해 볼 수는 있었다.

아직 한 번도 펼쳐본 적도, 그렇다고 아버지가 펼치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검무극이 제육식을 펼치려 하자, 아버지는 만년한철 벽 뒤로 들어갔다.

“뭐 하시는 겁니까?”

“네게 아비를 다치게 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정면의 이 만년한철 벽은 천마멸세의 위력을 막아내기 위해 세워둔 것임을.

천마멸세가 아버지를 다치게 할 수도 있을 정도로 그만큼 강력하다는 의미.

그럼 이 철벽으로 이뤄진 방과 그 뒤의 철벽들은? 천마멸세의 위력을 확인하고, 또 그 위력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원래 제육식을 발휘하려면 본격적으로 육식을 수련해서 몇 달,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수련해야 펼쳐낼 수 있다.”

“한데 왜 벌써부터 벽 뒤로 가십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너니까.”

한 번에 발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아들의 재능을 그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아버지는 얼마 만에 펼치셨는데요?”

“열흘.”

“그럼 저는 하루면 되겠군요. 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버지시니까요.”

아버지의 입가에 그 비웃음이 지어졌다.

“자, 그럼 시작해보겠습니다.”

검무극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여 제육식을 펼쳤다.

하지만 초식은 발출되지 않았다.

“진기를 움직이는 것이 느리다.”

벽 뒤에서 나온 아버지가 자세히 구결을 설명해주었다. 십성일 때보다 또 다른 경지의 설명이었다.

“다시 펼쳐라.”

이번에도 아버지는 만년한철 뒤로 가셨다.

아버지라면 왠지 이런 벽 따윈 필요 없다, 하실 법도 했는데. 아버지는 벽 뒤에 몸을 숨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화마공이니까. 바로 아버지의 무공이었으니까.

다른 무공이었다면 이러지 않으셨겠지.

이번에도 발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진기의 움직임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뭔가 느낌이 다릅니다.”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데 똑같겠는가? 한 번 가르침이 있을 때마다 달라졌다.

“이번에는 검에 내공이 깃들었습니다! 아주 살짝이지만.”

펼치고 실패하고 또 펼치고, 실패하고.

검무극이 묻고 아버지가 설명해 주시고.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났다.

밤이 깊어지고 시간은 새벽을 향했지만, 아버지는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매번 느끼지만, 무공을 가르칠 때의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노력의 결실을 보는 순간이 왔다.

검무극의 흑마검에 어마어마한 내력이 모여드는가 싶더니.

화아아아아아아앙!

앞을 향해 겨눠진 흑마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마치 눈앞에서 태양이 폭발하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폭발이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철벽이 사라졌다. 그냥 녹듯이 사라졌다. 그 뒤에 서 있던 벽이 사라졌고, 다시 저 멀리 그 뒤의 벽도 사라졌다. 사방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빛이 사라졌을 때, 주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더 이상 이곳은 철벽으로 이뤄진 방이 아니었다.

사라진 천장에서 햇볕이 비쳤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곳에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정면에 세워진 만년한철 벽.

“아버지!”

검무극이 놀라 소리치자 벽 뒤에서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하아.”

검무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초식 이름이 천마멸세인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소멸하는 무공이었다.

‘미친 무공이다.’

검무극이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성공입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만에 펼쳐낼 것을 예상했다는 듯, 아버지는 놀라지 않으셨다.

검무극이 기뻐하며 껑충껑충 뛰었다. 드디어 구화마공의 마지막 초식까지 모두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해냈다!”

그러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전에 있던 내공이 모두 사라져 버린 후였다. 모든 내공을 다 써야만 발휘할 수 있는 한 수.

검우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철벽이 몇 개 남았는지로 위력을 평가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측정 불가의 위력.

검무극의 그 막대하고 정순한 내공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벽 역시 깊게 깎여 나가 있었다.

검우진은 놀라고 감탄한 눈빛으로 아들을 쳐다보다가 차분히 말했다.

“네가 제육식을 펼쳤을 때 담장 너머에 누군가 지나가고 있어도 죽을 거고, 저 멀리 건물에 있던 사람도 죽을 거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가 죽는다. 엎드린 사람도 죽고, 날아서 달아나던 사람도 모두 죽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검우진은 이 무공을 함부로 썼을 때의 결과를 경고했다.

아들에 대해 이제는 잘 알았기에 해주는 말이었다. 누군가 무고한 희생자가 생기면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가 될 아들임을 알기에.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버지의 천마멸세를 보고 싶습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천마멸세를.

십성 대성이나 이루고 요구해라, 할 법도 했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검우진이 그대로 천마검을 뽑았다.

“잠깐만요! 저도 만년한철 벽 뒤로 가야지요! 아버지, 아들 죽습니다!”

하지만 이미 천마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죽었구나 싶었던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온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 같았던 빛이 아버지 주변에서만 빛나고 있는 모습을.

‘아버지가 천마멸세의 강기를 조종하고 계신다!’

사방으로 날아가야 할 빛이 점차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하나의 검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새하얀 빛의 검이 완성되던 그 순간!

샤아아아아아앙!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시원한 바람 소리를 내며 빛의 검이 만년한철을 향해 날아갔다.

아버지가 겨냥한 곳은 귀퉁이였다.

푸아아아아아앙!

빛의 검이 만년한철을 그대로 관통하며 지나갔다. 그 두꺼운 만년한철이 두부처럼 뚫렸다.

“아!”

검무극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렇게 두꺼운 만년한철이 단 한 수에 꿰뚫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검우진이 차분히 물었다.

“봤느냐?”

아버지는 자신이 펼쳤던 것처럼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천마멸세를 펼칠 수도 있을 거다.

그리고 십이성 대성을 이루며 그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하신 것이리라.

아버지는 멸망을 조정했다. 아버지의 멸망에는 질서가 있었다.

“네, 똑똑히 봤습니다.”

아버지는 다시금 아들에게 새로운 이정표 하나를 무심하게 툭 세워주셨다.

그리고는 하품을 크게 하시며 그곳을 걸어 나갔다.

“난 자러 간다.”

젊어서는 운명을 믿지 않을 겁니다

천마멸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구화마공 최강의 초식.

하지만 수련조차 쉽지 않은 무공이었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 순간 누군가 천마멸세가 영향을 미치는 구역에 들어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검무극에게는 제약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은 곧장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사방이 확 트인 평야에 서 있었다.

휘이이잉.

불어온 바람이 검무극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이곳에서는 마음껏 천마멸세를 펼쳐도 된다.’

이 무공의 위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정확히 파악할 작정으로 들판 곳곳에 일정 거리를 두고 바위를 만들었다.

바위는 과연 저기까지 영향을 미칠까 싶을 만큼 먼 곳까지 만들었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것도 한 방향이 아니라 사방에 모두 만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검무극이 천천히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아버지께 배운 천마멸세를 펼쳤다.

사아아아아앙!

눈 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밝혔던 빛이 사라지던 그때.

그 마지막 순간 검무극은 신안술을 펼쳐 저 멀리 마지막에 세워둔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만들어둔 바위도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이지 신안술을 발휘해야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 세워둔 바위마저 소멸한 것이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지닌 내공이 워낙 막대하고 정순했기에 이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스스슷.

다음 순간 내공을 모두 소진한 시공이환술이 깨어졌다.

검무극은 운기조식해서 내공을 채운 후 다시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시공이환술을 쓴 상태에서도 펼칠 수 있었으니, 단전에 내공이 완전히 다 찬 상태에서만 펼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단전에 내공이 얼마나 차 있을 때 펼칠 수 있을까?

시험하고 또 시험한 결과.

구 할.

구 할 이상의 내공이 차 있어야만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공이 펼쳐지면 그 구 할의 내공은 모두 소진된다. 초식의 가공할만한 위력을 생각하면 내공이 남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

‘구 할, 이걸 줄일 수 있을까?’

만약 팔 할의 내공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칠 할, 육 할, 오 할. 이렇게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요구치를 떨어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평소처럼 싸우다가 마지막 순간의 선택으로 천마멸세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뤄야 이 요구치를 줄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궁극적으로 천마멸세는 십이 성 대성을 이루었을 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두를 다 죽여서 상황을 해결할 일은 없을 테니까. 반드시 아버지처럼 십이 성 대성을 이루어야 한다.

검무극은 며칠 동안 천마멸세를 반복해서 수련했다.

다른 무공을 펼쳐내듯 자연스럽게 천마멸세가 펼쳐지는 것이 목표였다.

이 수련은 다른 의미도 있었다. 내공을 모두 쏟아냈다가 다시 채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심법 수련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이나 수련에 빠져 있었을까?

이제 다른 초식을 펼치듯 천마멸세를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천마멸세의 위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도 정확히 알아냈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위력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도 정확히 알아냈다.

정말이지 이렇게 공부하듯 무공 수련을 한 적이 언제였을까?

자유자재로 천마멸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검무극은 거처를 나섰다.

대성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공 수련에만 집중하다가 보니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 * *

권마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부우웅!

빠르게 날아간 주먹은 한 여인의 배에 그대로 적중했다.

퍼어억!

권마의 일장에 뒤로 주르륵 밀려난 사람은 바로 권마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천소희였다.

그냥 딱 이 모습만 보면 세상의 협객들이 다 달려들어 천소희를 구하려 들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큰 덩치의 남자가 여인을 주먹으로 패서 죽이려 들었으니까.

퍼어억!

이번에는 사정없이 옆구리를 강타당한 그녀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퍽! 퍼억!

다시 팔과 어깨에 연이어 주먹이 적중했다. 천소희는 휘청거렸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크게 내상을 입을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잘 버텼다.

하지만 아팠다. 마차에 치이고, 거대한 기둥에 깔리고, 쇳덩이가 날아와 부딪쳤을 때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은 채 버티고 또 버텼다.

이윽고 쉴 새 없이 날아들던 주먹이 멈췄다.

“하아, 하아, 하아.”

이제 그곳에는 그녀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주먹이 더 날아들었으면 그녀는 버티지 못하고 내상을 입고 쓰러졌을 것이다. 권마는 정확히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잘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권마가 언제 그렇게 때렸느냐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그녀의 몸을 지켜준 호신강기는 바로 천강신이었다. 바로 오늘의 수련은 천강신 수련.

천강신.

검무극이 검왕과 함께 내려간 지하에서 가져온 호신공. 당시 검무극은 그곳에서 딱 하나의 무공, 바로 이 천강신을 챙겼다.

검무극이 천강신을 챙긴 이유는 다른 호신공과 중복해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마호신공과 벽력수라권의 금강수라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이기에. 결론적으로 세 가지 호신공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

막대한 내공이 드는 천강신을 검무극이 일차로 개량했고, 다시 권마와 일화검존이 이야기를 나눠서 더욱 완성도를 높였다.

그 당시 검무극은 권마와 일화검존, 이안과 서진에게 무공을 전수해줬었는데, 권마는 차기 권마인 천소희에게도 천강신을 전수해준 것이다.

사실 천강신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맨손으로 싸우는 권마와 천소희였다.

“정말 너무 훌륭한 호신공입니다.”

천소희의 감탄에 권마는 그 공을 검무극에게 돌렸다.

“네 사형이 전수한 무공이니, 감사는 네 사형에게 해라.”

바로 그때 권마의 뒤에서 누군가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너무하십니다, 사부님! 연약한 우리 사매 팰 곳이 어디 있다고요?”

등장한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던 권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고, 천소희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 피어올랐다.

“사형!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연약하지는 않아서요.”

그녀의 몸은 이전보다 더 탄탄한 근육질이 되어 있었다. 그간 얼마나 열심히 권법 수련을 했는지, 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보기 좋다.”

검무극의 칭찬에 천소희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검무극은 오랜만에 보는 권마의 그 커다란 등에 시비부터 걸었다.

“설마 사부님의 몸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사매야. 이 잘 빠진 사형의 몸을 목표로 해!”

그제야 권마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저 아기 손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오랜만에 듣는 아기 손이 너무나 반가웠기에,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사부님, 제자 출교했다가 돌아왔습니다.”

권마는 때마침 잘 왔다는 듯, 인사 대신 천소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직접 보는 게 제일 배움이 빠르겠지.”

검무극은 권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천강신 시범을 직접 보여주라는 말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매, 권마가 되려면 비리비리한 내 몸보다는 당연히 사부님 몸처럼 만들어야지! 지금 네 등짝보다 두 배는 더 커져야 해!”

권마가 이미 늦었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쥐며 앞으로 걸어오자 검무극이 목소리를 깔았다.

“난 소교주 자격으로 권마님을 뵈러 왔소.”

물론 권마에게 통하지 않았다.

권마가 훌쩍 몸을 날리더니 벼락처럼 빠르게 주먹을 날렸다.

후우웅!

검무극은 날아든 주먹을 피하지 않았다. 천강신 시범이었으니까.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 검무극의 가슴에 적중했다.

퍼어억!

천강신을 발휘해서 충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내상을 입지 않았을 뿐, 고통은 고스란히 몸으로 전해졌다.

휘잉! 휭! 후웅!

다시 권마의 주먹이 연이어 검무극의 몸통을 강타했다. 앞서 천소희를 공격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강한 주먹이었다.

콰앙! 쾅! 콰앙!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 연속해서 날아들었음에도 검무극은 쓰러지지 않았다. 맞는 것도 실력이라는 듯, 검무극은 정말 잘 맞았다.

사실 하기 싫은 척 굴었지만, 검무극에게 정말 유용한 수련이었다. 언제 권마의 주먹을 상대로 천강신을 시험해 볼 수 있겠는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주먹 한 방, 한 방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주먹을 날리고서는, 권마가 천소희에게 물었다.

“너와 뭐가 다르냐?”

놀란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천소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핏 봐서는 그냥 천강신으로 버티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형은 날아든 주먹을 흘려보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을 미세하게 틀면서요.”

권마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천소희가 제대로 잘 본 것이다.

“잘 봤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 신체 부위마다 호신강기의 강도를 다르게 조종했다. 맞는 부분을 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충격을 흘리기 쉽도록 조절했다.”

그 말에 검무극이 놀라 물었다.

“제가 그랬나요?”

검무극의 놀람에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펼친 거지. 의도해선 할 수 없는 일이지.”

권마가 천소희를 돌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권마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네가 갈 길을 알겠느냐?

천소희가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사부님. 크나큰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소희가 검무극에게도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해요, 사형.”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다. 으아, 온몸이 부서질 거 같아.”

검무극의 엄살에 천소희도 귓속말로 엄살을 부린 후 떠나갔다.

“저만큼 아프실까요? 전 진짜 아프다고요!”

천소희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곳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날이 기대됩니다. 저 주먹이 무림에 한 방 꽂히는 그 날이.”

그녀는 섭혼마존과 함께 다음 세대를 이어갈 마존이었으니까. 자신은 분명 그녀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좀 걷자.”

“네, 사부님.”

검무극과 권마는 단둘이 동권문 내를 함께 걸었다.

지나가던 철권들이 검무극의 방문에 정중히 인사했다. 그들과도 인연이 깊었기에 철권들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권마가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그 절벽이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검무극은 이번에 나가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권마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과거 교주님과 중원을 활보할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을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돈과 권력을 탐하는 신비 조직이겠거니 하고 넘어갔는데. 어쩌면 그자들 중에서도 암흑궁의 후예가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마 그랬을 겁니다. 아뇨, 틀림없이 놈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중원 곳곳에서 돈을 벌고 힘을 키우며 은밀히 조직을 키워왔을 테니까.

권마가 의아한 마음으로 물었다.

“한데 왜 지금이냐?”

삼백 년의 세월 동안 기회는 분명 여러 차례 있었을 텐데.

“그자들은 신녀궁의 예언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예언이 당대에 이루어진다?”

“네, 그렇습니다.”

권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하필이면 이런 소교주가 있는 시대에? 삼백 년을 기다렸으면 백 년을 더 기다렸어야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이렇게 단언할 수 있었다.

“잘못된 예언이겠구나.”

검무극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이유를 권마에게 돌렸다.

“사부님이 계시는데 어림없죠.”

물론 권마는 자신이 예언을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두의 운명을 바꿀, 가장 큰 운명 앞에 선 사람이 검무극이라는 것도.

“너는 운명을 믿느냐?”

회귀한 자신이 어찌 운명을 믿지 않겠는가?

다만 그렇다고 무작정 믿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젊어서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권마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정해진 운명이 있다고 믿으면 핑계만 늘어날 거 같아서요.”

앞을 바라보며 걷던 검무극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우리가 운명은 못 정해도 운명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는 정할 수 있겠지요. 젊었을 때는 세상만사는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 겁니다. 악착같이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닦아서 나중에 운명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내가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네가 어쩔 건데?”

회귀한 후 일관된 검무극의 마음이기도 했다.

네가 어쩔 건데? 라고 말했지만,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나 노력해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그땐 어쩔 수 없는 거지.

“운명은 사부님 연세쯤 되었을 때, 제 인생을 돌아보며 그때 믿을까 합니다.”

권마는 궁금했다. 검무극이 자신의 나이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을 느낄지. 그때 뭐라고 말할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이 절벽 앞에 도착했다.

잠시 절벽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이제 이 절벽, 무너뜨리지 않으시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제는 이 절벽을 확실히 무너뜨릴 자신이 있으실 테니까요.”

검무극은 권마가 더 강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지난번 싸움에서도 권마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고, 유연하게 싸웠다.

절대 부러지지 않던 권마가 유연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더 강해졌다는 의미.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더 강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임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며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축하한다, 너 살아남은 거 같다.”

권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철권 하나가 달려와서 전서를 전했다.

“소교주님께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극악소마가 보낸 전서였는데 안에 적힌 내용은 짤막했다.

―천화루로 와주십시오. 소마.

만약 하늘이 예언을 내린다면

“누구에게 온 연락이냐?”

권마의 물음에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소마님에게 온 기별입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시느라 지금 출교한 상태거든요.”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특별한 관계는 권마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참 의외라고 여겼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검무극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게서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고, 그 외로움은 극악소마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나가봐야 하느냐?”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잘 다녀와라.”

무뚝뚝한 인사에 권마의 걱정이 담겼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 말씀 좀 전해주십시오. 일이 있어 조용히 출교했다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께 말씀은 전하고 가야 했으니까.

“왜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저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권마가 꾸짖듯 말했다.

“교주님을 뵙고, 그 사람에게 말을 전해야 하는 거 아니더냐?”

“만날 사람이 사부님 따님인데요.”

“…….”

“알겠습니다. 이안에게는 제가 못 만나고 간다고 전해…….”

말이 끝나기 전에 권마가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교주님께는 내가 말씀 잘 전하마.”

* * *

이안은 자신의 거처에 있었다.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그녀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때!

후우웅!

뒤에서 기습이 날아들었다.

‘늦었다!’

피하기에 늦었음을 알고는 그녀는 천강신을 끌어올리며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앞을 향해 몸을 던졌다.

빠르게 날아든 일장에 등을 허용했지만 다행히 천강신이 몸을 보호했다.

앞으로 튕겨 나간 그녀가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서며 일월검을 뽑았다.

쉬이이이익!

차디찬 기운을 뿜어내며 날아간 일월검은 상대의 목을 베기 직전에 멈췄다.

“도련님!”

피하지 않고 웃고 서 있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합격!”

천강신을 발휘해서 몸을 지킨 것도, 상대를 무작정 베지 않고 검을 멈춘 것도 아주 훌륭했다.

“제가 실수로라도 도련님을 베면 어쩌려고요!”

천만다행이란 마음에 들고 있던 그녀의 검이 덜덜 떨렸다.

“그런 경지에 오르면 기습 같은 장난은 안 쳐야지.”

지금 실력으로는 실수로라도 죽일 수 없다는 의미.

검을 회수하는 이안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나 돌아왔다는 소식 들었지?”

“네.”

“그런데도 와보지도 않고. 너무해, 이안. 이제 날 버린 거냐?”

“그 버린 사람 얼굴 한 번 보려고 세 번이나 갔었죠. 사냥 갔을 때도 갔고, 출타하셨는지 안 계실 때도 두 번이나 더 갔고요. 대체 뭐가 그리 바쁘셨어요!”

예전이라면 검무극이 찾아보러 와줄 때까지 기다렸을 거다. 괜히 바쁜데 찾아뵈어서 방해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왔었다고 서찰이라도 남겨두지.”

“뭐하게요? 또 찾아뵈면 되고.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될 건데요.”

“뭐야? 안 본 사이에 득도라도 한 거야?”

그러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으면 고민도 안 하죠.”

“무슨 일 있어?”

근래 귀영대 일로 고민이 많은 그녀였다.

막상 조직을 본격적으로 운영하자 생각지 못한 여러 가지 일이 발생했다.

특히 최근에 큰 문제가 생겼다. 청면이 이끄는 일조와 서진이 이끄는 이조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처음에는 일반 조원 두 사람의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는데, 점차 크게 번지면서 지금은 조와 조 사이의 갈등이 되었다.

“직접 개입해서 처리할까 하다가, 일단 모른 척하고 있는데. 그냥 놔둬선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이것들이 대주인 나를 뭐로 보고 이러나, 괜히 기분도 나쁘고요.”

이안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정말 검무극이 아니라면 말하지 않을 내용이었다.

그 불난 집에 검무극이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널 맹물로 보는 거지. 장 군주가 수장이라 생각해 봐라. 감히 패를 나눠 싸울까? 착하다고 만만하게 보는 거지.”

“그렇죠? 어휴, 이것들 확 다 패버릴까 보다.”

“패버리지. 왜 안 팼어?”

“그야…… 조장들도 있고. 제가 나설 일은 아니란 생각도 들고. 패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답도 다 알고 있으면서 뭘 고민 해?”

이안도 함께 웃었다.

‘왜 고민하겠습니까? 잘하고 싶어서죠. 소교주님 직속 조직인데, 제게 대주를 맡긴 조직인데 어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어요?’

청면과 서진도 생각이 있을 테니, 알아서 잘 해결하겠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데, 괜히 일이 더 번져서 두 사람마저 사이가 나빠질까 걱정되었다.

항상 최악부터 생각하는 버릇은 호위 무인 때 생긴 직업적인 병이었다.

이안이 결정을 내렸다.

“네, 이번 일은 그냥 모른 척하겠습니다. 자, 고민 끝!”

“그러면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잖아? 무관심하고 무능력한 수장이 되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해요?”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지만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야지. 그래야 수하들이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주는 수장이 되는 거고. 알면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가볍지 않은 수장이 되는 거고.”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렵네요, 어려워. 대주가 되면 멋지게 잘 해낼 줄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도련님 따라다닐 때가 좋았어요.”

가만히 이안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놀라운 제안을 했다.

“그럼 좋았던 일 하자.”

“네?”

“나 지금 바로 출교할 건데 같이 나가자고.”

이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 얼마나 있죠?”

“반 각.”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안이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만날 연무장에서 검이나 휘두르는 모습 보여서 그렇지, 저도 여자라고요! 출발 반 각 전에 오시면 어떻게 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며 혁낭에 옷가지와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가면? 조원들은 어쩌고?”

“무슨 조원요? 제게 조원이 있었나요?”

심지어 그녀는 채 반 각도 걸리지 않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함부로 움직이는 가벼운 수장, 출발 준비 완료입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같이 가자고 안 했으면 어쨌을까 싶다.

“그렇게 좋냐?

“그럼요.”

“너 위험한 거 싫어하잖아? 무시무시한 위험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 무시무시한 놈에게 알려주세요. 일에 치이고 사람에게 지친 신경질적인 여자도 함께 간다고. 이번에는 네가 피해야 할 거다, 꼭 전해주세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한데 우리 어디로 가요?”

“천화루로 간다.”

목적지가 천화루란 사실에 이안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줘서였을까? 아니면 천화루주의 그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만나면 괜히 기분이 좋은 그녀였다.

그렇게 교를 나선 두 사람이 천화루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두 사람은 계속 달리고 달렸다.

달리다 쉬어야 할 때가 되면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했다.

이안이 내공을 회복하고 있을 때 검무극은 동물을 잡아 요리해 주었고, 모닥불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버지나 형, 그리고 마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하지만 가장 잘 해줘야 할 사람은 이안이었다.

“고맙다.”

“갑자기요?”

“응, 갑자기 고맙네.”

“그런 말씀 안 하셔도 설거지랑 뒷정리 제가 하려고 했어요.”

검무극이 이안을 보며 웃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이렇게 편하고 좋다.

“천화루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죠?”

“그곳에 소마님이 가 계신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마 이번 용무는 신녀지몽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과연 예상대로 그녀는 신녀궁의 후예일까?

내공을 회복하고 휴식을 마친 두 사람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경치 구경 한 번 못 하는 바쁜 여정이지만, 이안은 그래도 좋았다. 검무극과 함께라면 바쁘면 바빠서 좋았으니까.

* * *

드디어 검무극과 이안이 천화루에 도착했다.

천화루 내원에는 기별을 받고 나온 극악소마와 천화루주 여정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극악소마의 인사에 천화루주 여정도 인사했다.

“제가 찾아뵈어야 했는데, 이렇게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역시 예상한 대로 자신을 보자고 한 이유는 천화루주 때문이 확실했다.

“형수님이 오라고 하면 당장 달려와야죠.”

검무극은 변함없이 그녀를 형수로 대했다. 이 작은 호칭 하나가 여정에게 얼마나 큰 감격을 주는지 모를 것이다.

“여기 이 대주도 함께 왔습니다.”

극악소마에게 먼저 인사한 후, 이안이 여정에게 인사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데려온 것이 검무극에게 난처한 일이 될까 싶어서.

“루주님을 뵙고 싶어서 데려가 달라고 졸랐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주님.”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인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이 무인께서는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그러자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셨죠? 오랜만에 보면 이런 말을 해주는 거라고요. 냅다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했기에 극악소마와 여정이 미소를 지었다.

“자, 들어가시죠.”

그렇게 네 사람이 천화루주의 거처에 마주 앉았다.

“예상하셨겠지만 오라버니께 소교주님을 이곳으로 모셔달라고 부탁드린 건,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천화루주가 옥으로 된 상자를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신녀지몽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아주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보내주신 것을 받아서 지금까지 그대로 넣어두었습니다.”

신녀지몽을 내려다보는 천화루주의 눈빛에서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이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다는 것을.

‘내 예감이 맞았구나.’

그녀는 신녀궁의 후예가 틀림없었다.

“소교주께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녀지몽입니다.”

“과연 알고 보내셨군요.”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통해 신녀지몽을 보내왔을 때, 그녀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검무극이 신녀지몽에 관해 덧붙여 설명했다.

“삼백 년 전 천의궁과 함께 멸문했다고 알려진 신녀궁의 신물이란 것만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쓰이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시 천화루주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하면 소교주께서는 왜 이것을 제게 보내셨죠?”

극악소마는 옆에 앉아서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과 검무극과의 인연이 너무나 깊어서 이제 여정에게까지 이어지는구나 싶었다.

“우연히 이 신물을 무림맹의 보고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형수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문득 형수님이 사람의 운명을 보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옆에 있는 이안을 향했다.

“그때 이 대주의 운명을 보셨지요. 그래서 어쩌면 형수님이 신녀궁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미 천화루주의 표정에서 대답을 들었다. 아니었다면 아니라는 말부터 나왔을 텐데. 여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흘러나오는 놀라운 비밀.

“잘 보셨습니다. 저는 신녀궁의 후예입니다.”

검무극에게 말한 후 여정이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 사실을 극악소마에게도 처음 밝힌다는 것을.

“일부러 속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영원히 제가 신녀궁의 후예임을 잊고 살려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이번 일의 배후가 암흑궁이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고요.”

극악소마는 그녀의 신분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눈빛으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천화루주의 시선이 신녀지몽을 향했다.

“이 신녀지몽은 예언을 할 수 있는 신녀에게 전해지는 신물이지요.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무림맹에 있었군요.”

그리고 이어진 놀라운 한마디.

“이것으로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천화루주가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응시했다.

“제가 예언을 할 수 있는 신녀라면요. 신녀의 혈통이라도, 예언을 받지 못하는 신녀가 훨씬 더 많다고 알고 있어요.”

검무극은 삼백 년 전 신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녀지몽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미래를 안다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라고 결코 행복한 모습은 아니었다.

“저는 형수님이 예언을 받으라고 드린 것이 아닙니다. 단지 형수님의 것이기에 돌려 드린 겁니다. 그 상자에 영영 보관해 두셔도 좋고, 이 자리에서 태워버리고 영원히 신녀궁에 대해 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천화루주는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는 네가 알아서 결정을 내리라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천화루주가 천천히 신녀지몽을 꺼냈다.

“솔직히 궁금했어요, 제가 예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사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자신에게 신녀지몽을 보낸 게 운명이라면? 이 운명을 피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극악소마를 위해서라도.

“만약 하늘이 제게 예언을 내린다면 과연 어떤 예언을 내릴지도요.”

신녀지몽이 그녀의 손에 들어가자 느껴지는 신비스러운 현기가 더욱 강해졌다.

천화루주가 조심스럽게 신녀지몽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녀의 몸 주위로 가득 피어오르는 현기를 검무극은 느꼈다.

숨 막히는 정적. 검무극과 이안, 극악소마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화루주가 신녀지몽을 풀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에 놀람이 깃들어 있었다.

“어떤 장면을 봤습니다.”

예언이 내렸다는 의미. 놀랍게도 그녀는 예언을 내리는 신녀였다.

천화루주의 떨리는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거기서 소교주님을 봤습니다.”

제가 죽이는 쪽입니다

천화루주의 두 눈에서 현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서 검무극은 여러 감정을 느꼈다.

놀람, 두려움, 공포.

그 부정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마지막 감정은 망설임이었다.

“제 어떤 모습을 보셨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천화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무극의 시선마저 피했다.

그녀의 반응에 이안은 불길함을 느꼈다. 이 상황에서 말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극악소마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소교주께 말씀드리게, 한마디 할 법도 했건만.

그는 말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기다릴 뿐이었다.

검무극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제가 예언을 알아맞혀 보겠습니다. 혹시 제가 마정대전의 선봉에 선 모습을 보셨습니까? 무림맹 치고, 사도맹도 치고. 여기 치고, 저기 치고. 혹시 저 무림일통을 해버린 겁니까? 수천, 수만의 군웅이 부복한 채 저를 숭배하고 있었습니까?”

그러자 천화루주가 그게 아니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그녀는 검무극을 마주 보지 못했다.

“다행이네요. 그걸 보셨을까 봐, 솔직히 걱정했었습니다.”

검무극이 다시 추측했다.

“그럼 이런 걸 보셨겠군요. 제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꼭대기에 태사의가 놓여 있었겠지요. 제가 그 권좌에 딱 앉았을 때, 비로소 주위 풍경이 보이는 거죠. 사방에 시체가 쌓여 있고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모습이. 마지막에 제가 그 시체를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겠죠. 맞죠? 이런 장면 보신 거죠? 그래서 말씀 못 하시는 거죠?”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듯, 천화루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라리 그걸 봤으면 좋았겠네요.”

순간 검무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안과 극악소마도 긴장했다. 그녀의 말은 그보다 더 끔찍한 장면이라는 의미였으니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천화루주가 나직이 말했다.

“소교주께서 누군가를 죽이고 있었어요.”

농담 한마디 끼어들 수 없는 말이었다. 대체 누굴 죽였기에 수많은 시체가 널린 장면이 낫다고 한 것일까?

“제가 누구를 죽이고 있었습니까?”

지나가던 악인을 죽이고 있었다면 천화루주가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을 터.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한 곳을 향했다. 떨리는 눈빛으로 쳐다본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오라버니를 죽이고 있었어요.”

그 순간 모두가 깜짝 놀랐다. 놀람과 충격이 가져온 무거운 침묵.

‘내가 소마를 죽인다고? 그럴 리가!’

검무극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예언이었다.

그때 문득 드는 한 가지 생각.

‘혹시! 그 모습을 보았나?’

회귀 전 삶에서 소마를 죽이던 그 순간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극악소마를 죽일 일은 결코 없을 테니까. 극악소마가 그런 일을 당할 짓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고.

하지만 신녀궁의 예언은 분명 미래를 보여주는 것일 텐데. 과거를, 그것도 회귀 전 과거를 보여줬다고? 그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침묵을 깼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신 겁니까? 아니, 저지르실 예정이십니까?”

검무극의 농담을 극악소마도 가볍게 받았다.

“죽이실 때 부디 고통 없이 보내주십시오.”

서로를 바라보며 두 사람은 웃고 있었다.

그들은 여유로웠지만, 이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이 말이 큰 무례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꺼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예언이 틀릴 수도 있나요?”

그러자 천화루주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언이 내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틀리지는 않아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말이 이어졌다.

“제가 본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예요.”

정말 그렇다면? 이안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 순간 그녀는 극악소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극악소마보다 검무극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죽인 일을 그냥 넘길 수 있을까? 평생의 상처로 남을 것이다. 아니, 그 일로 검무극이 변할 수도 있었다. 아주 어둡고 우울하게.

“운명은 바꿀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꿀 수 있지.”

검무극이 천화루주에게도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화루주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는지 그녀는 여전히 검무극을 마주 보지 않았다.

“예언을 받으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쉬십시오. 우린 바람 좀 쐬겠습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고, 이안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극악소마가 천화루주에게 물었다.

“한잔할 텐가?”

“네.”

극악소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벽장에 있던 술을 가져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술이 있고, 천화루주가 좋아하는 술이 있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술로 가져왔다.

또로롱.

천화루주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극악소마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연거푸 술을 비웠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러다 한참을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천화루주의 두 눈에 어떤 결심이 섰다.

“오라버니.”

천화루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살면서 이렇게 두려운 마음이 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라버니, 저 거짓말 했어요. 예언을…… 다르게 말했어요.”

충격적인 고백에도 하얀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알고 계셨어요?”

놀랍게도 극악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자넬 아는데 어떻게 모르겠나?”

사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죽는 모습을 봤는데 여정은 너무 침착했다. 자신이 아는 여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 예언이 반드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죽음 역시 피할 수 없다고 여겼을 테니까.

거기에 소교주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죽이는 사람이라서 안 본 것이 아니라, 분명 미안해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어쩌면 소교주께서도 눈치채셨을 수도 있지. 워낙 총명하고 눈치가 빠르신 분이시니까.”

“죄송해요, 오라버니.”

“괜찮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극악소마가 다시 천화루주의 빈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예언에서 무엇을 봤나?”

이제 진짜 그녀가 받은 예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소교주가 아니었어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오라버니가 소교주를 죽였어요.”

하얀 가면의 눈구멍 속에서 놀란 극악소마의 두 눈이 보였다.

자신이 죽는다고 했을 때도 웃었고,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말에도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웃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비수로 소교주의 심장을 찔렀어요.”

* * *

검무극과 이안은 천화루의 내원을 산책했다.

너무 아름답게 잘 꾸며진 곳이지만 이안의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는 오지 말 걸 그랬어요. 고민을 피해서 달아났더니, 이런 고민이 기다리고 있을 줄 어찌 알았겠어요?”

일조와 이조가 싸우는 일로 고민하던 그녀였는데,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죽이는 일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돌아봐야 하는 거다. 나오니까 그 고민 별것 아니지?”

“별것 아니라니요! 천마신교 후계자 직속 부대의 갈등인데! 이곳 고민이 너무 엄청난 거죠!”

검무극은 재밌다는 듯 웃었지만, 이안은 웃지 않았다.

“왜? 정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두려우냐?”

“그럼 안 무서워요?”

“걱정하지 마라,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

“당연히 그렇겠지만요.”

그녀의 마음이 걸리는 것은 예언을 한 사람이 천화루주라는 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슨 헛소리냐! 하고 믿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엉터리 예언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아! 다시 들어가서 여쭤봐요.”

“뭐를?”

“도련님이 소마님을 죽이는 장소가 어딘지. 그러면 그 장소에 절대 안 가면 되잖아요? 그러면 운명이 바뀌겠죠.”

“오! 똑똑한데?”

“똑똑했으면 아까 물어봤겠죠. 우리야 항상 지나서 그때 그럴 걸이죠. 가요, 어서 가서 물어봐요.”

하지만 검무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데 그렇게 운명을 거스르다 운명이 바뀌면 어쩌려고?”

이안이 흠칫 놀라자 검무극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소마님에게 내가 죽는다거나. 그럼 어쩔래?”

순간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무극이 죽는다고? 동시에 자신의 세상도 끝이 나는 순간이리라.

“뭘 어째요? 이제 해방이다, 하고 만세 불러야죠.”

“그럼 됐다.”

검무극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고 이안이 그 뒤를 따랐다.

‘되기는 뭐가 돼요? 도련님 죽으면 저도 죽는다고요! 그러니 절 위해서라도 절대 죽으면 안 돼요!’

그렇게 두 사람이 내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돌아왔을 때, 거처 앞에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을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극악소마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이 소교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화루주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검무극과 이안은 깜짝 놀랐다.

“제가 소교주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제가 본 예언은 다른 장면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검무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실을 전했다.

“제가 본 예언은 오라버니가 소교주님을 죽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이 충격을 받으며 얼어붙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순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검무극은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이만 일어나십시오.”

검무극이 서둘러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천화루주는 검무극의 차분한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소교주님도 알고 계셨구나.’

이 거짓말은 소교주가 자신을 죽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거짓말이었다.

천마신교 소교주의 목숨을 두고 한 거짓말이었으니까.

한데 그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고, 또 모른 척해 주고 있었다. 만약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면 검무극은 끝까지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극악소마도 마찬가지였겠지. 하여튼, 이 남자들.

“제가 소마님을 죽이는 거나, 소마님이 저를 죽이는 거나, 어차피 같은 일입니다. 구분할 필요가 없는 일이죠.”

극악소마의 눈이 웃고 있었다. 같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네 사람 모두의 운명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 죽는다면 그 여파는 남은 세 사람 모두를 뒤흔들 테니까.

“진실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검무극에게 천화루주는 고개를 숙였다.

극악소마가 걸어가서 천화루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만약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면 안아주었을 거다.

조금 전, 방에서 소교주에게 알려야 하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극악소마에는 이 말을 해주었다.

―내가 소교주에게 배운 건 오해 없는 관계를 만드는 법이었네.

그래서 검무극은 뭐든 자신에게 다 말해주었다. 이번에도 출교했다 돌아왔을 때, 무림맹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알아야 이깁니다.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건 모를 때 생기죠.

극악소마는 그런 검무극의 지론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자고 마음먹는 순간, 일은 꼬이게 되겠지.

그 말에 천화루주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에 나와 검무극을 기다린 것이다.

검무극은 이 빠른 고백의 배후에 극악소마가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소마님.”

“제가 죽이는 쪽입니다. 감사 인사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극악소마의 농담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두 남자는 여유가 있었지만, 여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천화루주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서 있었다. 지금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천화루주였다. 극악소마를 위해 거짓말까지 했던 자신이었으니까.

천화루주가 이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미안해요.”

“아뇨, 제가 죄송해요.”

이안은 두 사람에게 정말 미안했다. 극악소마가 죽는다고 했을 때,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들 앞에서 이렇게 이기적인 모습은 표 내지 말아야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화루주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때 극악소마가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검무극에게 받은 만년한철 비수였다.

“소교주님을 죽인 비수가 이것이었나?”

천화루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극악소마가 자신의 비수를 내려다보았다.

하필이면 만년한철 비수를 선물 받고, 소향비술의 무공비급까지 받은 이 시점에, 자신이 비수로 검무극을 죽이는 장면이 예언으로 나왔다.

극악소마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에 비수를 검무극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맡아주십시오.”

검무극이 비수를 받아들자 이안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 비수가 도련님께 있으면 절대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겠네요.”

하지만 검무극의 생각은 달랐다.

“그러면 더 나쁜 결과를 보게 되지 않을까?”

운명이란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으니까.

검무극이 비수를 극악소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소마님과 제가 하나의 운명으로 얽혀 있다면, 정면으로 부딪쳐서 풀죠. 설령 그 비수에 찔리더라도 제가 살아남겠습니다.”

극악소마가 비수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직접 새겨준 웃음 소(笑)자가 보였다.

그래, 지금까지 그래왔듯.

극악소마가 웃으며 비수를 받아들었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이안은 두 사람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명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저도 준비됐어요, 라고.

검무극이 천화루주에게 물었다.

“혹시 예언에서 보셨던 장소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천화루주는 잠시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떠올리더니.

“높은 단상에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자리였어요.”

“비무대였습니까?”

“그런 것 같은데 정확하진 않아요. 제가 본 것은 그곳에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다행히 외로운 죽음은 아니었겠군요.”

검무극의 실없는 농담에 이안이 눈을 흘기던 그때였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천화루의 총관이었다.

그가 다가오더니 천화루주에게 서찰을 건넸다.

“이게 뭔가?”

“루주님을 심사자로 모시는 초대장입니다.”

“나를? 심사자로?”

심사가 필요한 일이라면 대회라는 뜻인데.

천화루주가 초대장을 펼쳤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디에서 온 초대장입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천화루주가 초대장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야 모두 알 수 있었다. 왜 천화루주를 심사자로 초대했는지. 서찰 맨 위에 대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서자, 운명이 초대장을 보내왔다.

예쁜 여자들이 저리 많은데

정말 생각지 못한 초대였다.

“심사자로 초대받기는 처음이에요.”

천화루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자 이안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최고의 심사자를 부른 거죠. 그 누구보다 미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니까요.”

천화루는 이곳 본단을 제외하고도 중원에 수십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고 겪어 본 그녀였기에, 이런 초대를 받은 것이리라.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선택했다.

“이전에도 천하제일미 선발대회가 있었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천화루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알기로 이번에 처음 열리는 대회에요.”

회귀 전 인생에서 이 대회가 열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심이 없는 일이었으니 열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회귀 후의 여러 변화로 인해 열렸을 수도 있었다.

“대회를 개최하는 쪽은 누굽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왔다.

“신화방(神化幫)이라네요.”

신화방은 사파에 속한 문파로 무림에서 아주 유명한 대문파였다.

이안도 신화방을 알고 있었다. 정파도 아니고 사파에서 이런 대회를 개최한다?

“갑자기 왜 신화방에서 이런 대회를 개최한 걸까요?”

이안의 물음에 검무극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너 때문이지.”

“네? 저 때문이라고요?”

바짝 긴장한 그녀에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공식적으로 이 무림에 너의 이름을 알려주려고.”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이안의 표정이 흠칫했다.

“설마, 저보고 이 대회에 나가라는 말씀은 아니시죠?”

“왜 아니겠어? 천하제일 미남대회였다면 내가 나갔을 텐데. 아니지, 우리 소마님 내보냈겠지.”

극악소마가 가면 속에서 안도했다. 검무극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정말 내보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왜 참석해야 하는데요?”

“대회 참가자 중에서 적이 있을 수 있어. 그들 속에 있으면서 찾아내.”

예전이라면 참가자 중에 무슨 적이 있겠어요?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이안은 원래라면 이랬을 거다.

싫어요! 절대 싫어요!

손사래에 뒷걸음질에 시키기만 해봐라, 소교주도 용서 없다! 하는 눈빛까지. 모든 거부를 한꺼번에 다 했을 거다.

검무극도 이런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위험한 곳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려고.

마존이 소교주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었으니까.

“참가하겠습니다.”

“정말?”

검무극이 놀라 묻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왜?”

그러자 이안이 천화루주에게 넌지시 물었다.

“상금이 얼마나 될까요?”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천화루주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돈을 보고 이런 대회에 참석할 사람이 아님을 잘 알았으니까.

그리고 이내 이안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묻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명색이 천하제일미를 뽑는 대회인데, 못해도 오만 냥은 주지 않을까요?”

이안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오만 냥이나 준다고요?”

“부상이 따로 있을 수도 있고요.”

“오만 냥! 그야말로 은퇴하고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네요! 무위도식(無爲徒食)! 모든 월봉인들의 꿈!”

이안이 흥분한 얼굴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저도 출진합니다! 운명이 제게 인생 한 방의 기회를 줬어요.”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위험하다고 본교로 돌려보낼까 봐 이런다는 것을.

천화루주가 한마디 더 그녀를 거들어주었다.

“어디 상금뿐이겠어요? 중원의 거대 상단에서 상단 행사가 열리면 초대할 거고, 그때마다 몇백 냥씩 줄 거예요.”

“가서 얼굴만 비춰도 몇백 냥!”

검무극이 그녀를 붙잡아 흔들었다.

“정신 차려! 너 지금 돈에 홀렸어!”

“중원에 상단이 모두 몇 개죠?”

“귀영대는 어쩌고?”

“계속 편 나눠서 싸우라고 하세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한바탕 장난을 치고 난 후에야 검무극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안아, 너도 데려가마. 그리고 대회는 참가 안 해도 돼.”

수많은 군웅 앞에서 미를 뽐낸다? 이안이 정말 내켜 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다.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뇨, 저는 대회에 참가할 거예요.”

아무리 싫고 아무리 부끄러워도, 대회에 참가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예언에서 보신 단상, 이 대회장 무대겠죠?”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그곳에서 검무극이 심장을 찔린다는데.

“저도 그 무대에 함께 서 있을 거예요.”

검무극은 그녀가 확고한 결심이 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죽을 만큼 싫은 일도 이렇게 자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이안이었다.

이렇게도 너는 나를 지키려 하고 있지만, 너를 지키는 건 나다.

“나는 네 호위 무인으로 함께 갈 거다.”

이안은 내심 안도했다. 그래, 옆에 검무극이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도 역할을 맡겼다.

“소마님은 루주님의 호위를 맡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검무극이 천화루주에게 물었다.

“대회는 어디서 열립니까?”

“안휘성(安徽省) 청양(靑陽)이에요.”

청양은 신화방이 있는 지역, 그들은 자신들 앞마당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언제 출발하실 수 있습니까?”

“언제든지 가능해요.”

“그럼 내일 일찍 출발하시죠.”

천화루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들고 있던 초대장을 내려다보았다.

“심사하러 가는 거지만, 왠지 심사를 받으러 가는 기분이 드네요.”

맞는 말이었다. 그게 운명이든, 배후 세력이든. 우릴 끌어들이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마지막에 이안에게 한 표 부탁드립니다!”

이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건 부정 심사잖아요!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어? 마지막까지 갈 자신이 있나 보네.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둔 것 아니었어?”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어휴!”

살짝 얼굴이 상기된 이안이 건물로 뛰어 들어갔고 검무극이 뒤따라 들어갔다.

천화루주와 극악소마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천화루주가 불쑥 말했다.

“감사해요.”

극악소마의 말을 듣고 소교주에게 솔직히 다 말했다. 만약 극악소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면, 지금 마음이 어떨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극악소마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더 말이 필요 없는 웃음으로.

햇살에 비친 하얀 가면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한 젊은 남자가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단상은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천하제일미 선발대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남자 주위로 차가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고수들이 사방에 서 있었다. 지나가던 이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리 돌아갔다.

호위하는 이들만 봐도 이 남자의 신분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는데.

이 젊은 남자가 바로 이번에 천하제일미 선발대회를 개최한 신화방의 후계자 안후평(安厚平)이었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그의 옆으로 중년 무인이 걸어오며 정중히 인사했다.

중년 남자는 이번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준비를 맡은 신화방의 외총관 조만(曹挽)이었다.

“저잣거리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새통입니다.”

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중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중원 곳곳에서 비무대회는 열려도 이렇게 공식적인 천하제일미 선발대회는 처음이었기에, 중원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안후평이 여전히 시선을 단상에 둔 채 물었다.

“조 총관.”

“네, 공자님.”

“내 꿈이 뭔지 아나?”

“천하제일미와 혼인하시는 것이지요.”

어려서부터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다. 아직도 그 꿈이 변하지 않았으니, 이 꿈은 진심이었다.

만약 남이 그랬다면, 그 평범한 얼굴로 꿈도 크다! 라고 비웃어줬겠지만.

“꿈을 이루게 되셨습니다. 감축드립니다, 공자님.”

“축배는 아직 이르네. 천하제일미가 된 여인이 내 선택을 받아줘야 하니.”

“어느 여인이 공자를 마다하겠습니까?”

안후평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지어졌다.

조 총관은 알고 있었다. 설령 그 여인이 선택을 마다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이 안후평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 인간인지 어려서부터 봐온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봤지만 아직도 이 안후평 앞에서 말실수할까 긴장했으니까.

게다가 그는 호색한 난봉꾼이었다.

어려서부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썼다. 어떤 여인이 천하제일미가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수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시작인가?”

“예선은 사흘 후부터 열립니다. 중원 각지의 미녀들이 대회를 위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안후평이 단상 앞에 놓인 세 개의 의자를 쳐다보았다. 바로 심사자를 위한 자리였다. 그 양쪽으로 귀빈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심사자들은?”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이미 도착했고, 마지막 천화루주만 도착하면 됩니다.”

순간 안후평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천화루주? 천화루는 기루 아닌가?”

“맞습니다. 이번에 천화루주를 심사자로 초대했습니다.”

그러자 안후평의 인상이 대번에 굳어졌다.

“고작 기루 주인을 심사자로 정했단 말인가?”

“천화루는 평범한 기루가 아닙니다. 중원에 수십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유명한 기루입니다.”

많이 가보셨잖습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어쩌면 자주 가본 곳이라서 더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봤자 기루가 기루지.”

그 기루 주인이 심사한 천하제일미와 혼인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확 상한 것이다.

“대체 이 여인을 심사자로 누가 정한 건가?”

조 총관은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말했다.

“방주님이십니다.”

순간 안후평이 흠칫 놀랐다.

“원래 다른 사람이었는데, 마지막에 바꾸셨지요.”

그 말에 안후평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평생 칼질만 하고 살아온 아버지였는데.

“천화루주가 도착하면 내게 기별하게.”

* * *

검무극 일행이 탄 마차가 청양의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검무극이 이안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만 좀 쳐다봐!”

이안은 앞에 앉은 극악소마를 쳐다보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안 볼 수가 없었다. 극악소마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오늘 아침부터 가면을 벗고 면사를 착용하고 있었다.

가면을 벗은 극악소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면사로 눈 아래를 가렸지만.

“너무 잘 생기셨어요!”

이안이 홀린 듯 내뱉었다. 그러다 면전에서 그 말을 했음을 깨닫고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눈과 이마를 드러낸 극악소마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게다가 특별한 면사도 한몫했다.

한 송이 꽃이 그려진 세련되고 멋있는 면사였는데, 아래에 천화(天花)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제가 직접 수놓아서 만들어 드린 거예요.”

옆에 앉은 천화루주의 작품이었다.

“한데 왜 똑같은 걸 열 개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신 거죠?”

극악소마가 열 개를 더 만들어달라고 해서 만들어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저 면사 벗는 순간 난리 날 겁니다. 중원의 미녀들이 다 따라올 테니, 열 개로 부족하죠!”

검무극의 농담에 천화루주는 기분 좋게 웃었다.

“면사를 더 만들어야겠군요!”

그때 마부석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차 문을 열고 극악소마가 먼저 내렸다.

바깥을 보는 순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왜 면사가 열 개 더 필요했는지.

마차 앞에 열 명의 무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먼저와 기다리고 있는 무면객들이었다.

무면객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은 열 명.

언제 전해줬는지, 그들도 가면을 벗고 극악소마처럼 면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이 같은 무복에 같은 면사를 쓰고 있으니, 영락없이 천화루에서 나온 호위무인처럼 보였다.

극악소마는 자신이 검무극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야 하는 이유는 천화루주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인질이 되고, 그 목숨을 담보로 협박을 받았을 경우. 자신이 그 가능성을 인지한 이상,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열 명이었지 가능했다면 무면객 전원을 데려왔을 것이다.

열 명의 무면객 앞에 선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천화루 호위 책임자가 된 그였다.

“자, 가시지요. 루주님.”

천화루주는 감격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는 극악소마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천화루주가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결승 무대에서 봐요.”

“결승이라니요! 저 못 갈 거예요.”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마차에서 내렸다.

착착착착착.

열 명의 무면객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사방을 둘러쌌다. 선두에 선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그렇게 그들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검무극과 이안은 같이 내리지 않고 잠시 마차에 있었다. 이목이 있으니 함께 내리는 것보다 사이를 두고 내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다.

마차 창밖을 쳐다보는 이안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막상 저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려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차라리 비무대회가 낫겠지?”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이안은 틈만 나면 무공수련을 했다. 원래도 수련에 미쳐 있던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더 열심히 수련했다. 천하제일미보단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게 꿈인 그녀였으니까.

당연히 비무대회가 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뇨, 비무대회는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나갈 수 있지만, 천하제일미는 지금밖에 도전 못 하잖아요?”

이안이 챙겨온 면사를 쓰고는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기왕 나가는 거 잘해볼 작정이다. 정말 천하제일미가 되려 나온 사람처럼. 이 대회에 집중하고 푹 빠져야 누군가 수상한 사람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검무극은 내리지 않고 잠시 창으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과연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모두 운명이라 생각했다.

무림맹 보고에서 신녀지몽을 발견하고, 천화루주가 예언을 받고. 또 이곳에 초대를 받은 일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맞서 싸울 것이다.

“안 내리고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마차 밖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쁜 여자들이 저리 많은데, 우리 이안이 어쩌나? 하는 걱정?”

“제가 볼 땐 저보다 예쁜 여자 안 보이는데요?”

새하얀 면사 위 이안의 아름다운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걱정은 대회 신청부터 하고 하자고요.”

허락 없이 죽이지 마

천화루주가 신화방에 도착했다.

소식을 듣고 나온 조 총관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조 총관의 시선이 그녀 뒤에 서 있는 극악소마와 무면객을 향했다. 한 송이 꽃이 그려진 면사가 눈길을 끌었다.

‘사파에서 개최한 대회라 호위들을 많이 데려왔구나.’

하지만 그래 봤자다. 기루를 지키는 무인들이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많은 숫자가 오히려 안후평의 눈에 거슬리기만 할 텐데.

조 총관이 그녀를 대청으로 안내했다.

천화루주가 자리에 앉자 극악소마가 그녀 뒤에 바로 서고, 무면객들이 그 좌우로 늘어섰다.

원래라면 방 구석구석에 흩어져서 쪼그려 앉고, 창틀에 걸터앉고,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고 있을 그들이었는데, 오늘은 잘 훈련된 무인들처럼 행동했다.

천화루주가 슬쩍 뒤를 쳐다보았다. 자신 바로 뒤에 서 있는 극악소마의 면사가 보였다.

그가 고마운 건 비단 자신을 지켜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데 서 있을 사람이 아닌데, 서 있어 주는 것이 더 고마웠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래, 뒤에 그가 있는데 누구와 마주한들 두려울까?

조 총관이 그녀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로 숙소로 안내해 드려야 하지만, 루주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곧 오실 겁니다. 잠시 차 한잔하시면서 기다려주시지요.”

조 총관이 정중히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느낌이 안 좋네요.”

멀리서 온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짐도 풀기 전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분명 결례였다.

아주 다급한 일이거나, 아니면 상대가 무례한 사람이라는 뜻.

이번 경우에는 둘 다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무례라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안후평이 들어왔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아버지가 심사자를 천화루주로 바꿨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버지가 말년에 어디 기루의 약아빠진 요녀에게 빠진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안후평은 기루를 다녀봐서 누구보다 잘 안다. 기녀들이 얼마나 남자를 잘 다루는지.

사파에서 일가를 이루고 무공이 그렇게 고강한 아버지인데 고작 그런 것에 넘어갈까 싶겠지만, 원래 강한 사람일수록 잘 넘어가는 법이다.

그녀들은 정상에 오른 사람의 그 허영심과 고독감 사이를 귀신처럼 파고들 줄 아니까.

천화루주를 보는 순간 안후평은 확신했다.

‘예감이 맞았군.’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함이 있다. 기루 주인이라고 볼 수 없는 기품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이 여인에게 빠졌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안후평의 뒤를 따라 그를 호위하는 무인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뒤에 늘어섰다.

안후평은 천화루주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에게 손짓을 까닥하며 축객령부터 내렸다.

이 첫 행동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안후평은 자신이 지닌 권력을 마음껏 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 눈치 보면서 자란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나가라면 상대방은 다 나가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하지만 상대 무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후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천화루주로 향했다. 그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물었다.

“누구시죠?”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신화방 소방주 안후평이오.”

그러자 천화루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했다.

“귀한 분이셨군요. 저는 천화루를 이끄는 여정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초대는 내가 안 했으니, 내게 인사할 필요는 없고.”

그리고 다시 뒤에 서 있는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을 쳐다보았다.

자, 이제 내 신분을 알았으니 나가야지!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전에 천화루주가 재빨리 나섰다.

“제가 겁이 많아서 어떤 상황이라도 제 곁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두었습니다. 그러니 소방주께서 이해해 주세요.”

“만약 그대가 겁을 먹어야 할 상황이 펼쳐진다면, 저들이 있다고 무사하겠소?”

“마음의 위안이라도 받겠지요.”

“끝까지 내보내지 않겠다?”

“사도를 처음 겪는 이 겁많은 여인의 심정을 이해해 주세요.”

안후평이 코웃음을 친 후에 뒤에 있던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다 내보내.”

안후평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화루와 같은 큰 기루를 운영하는 여인이라면 보통 배짱이 아닐 터, 우선 기부터 확실히 죽여놓고 시작하려는 것이다. 지켜주는 칼이 사라졌을 때, 저 여유로운 얼굴이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뒤에서 걸어 나온 사내는 안후평이 데리고 다니는 무인들의 수장 사추(謝秋)였다.

신화방 후계자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였으니, 당연히 뛰어난 무공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극악소마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사추는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뭐지? 이 새끼들.’

처음 들어와서 딱 봤을 때부터 느낌이 묘한 자들이었다.

지금껏 사파의 온갖 거칠고 사나운 놈들을 많이 만나 봤는데, 이런 느낌을 주는 자들은 또 처음이었다.

거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만만한 것도 아니고. 광기라기에는 멀쩡하고, 멀쩡하다고 보기에는 괴이하고.

그가 어찌 알겠는가? 팔마존이 이끄는 마인들 중 가장 특이한 이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특히 시선을 잡아끄는 저놈!

가운데 서 있는 걸 보면 수장이 분명한데. 그저 묵묵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을 뿐인데.

껄끄러웠다.

그래, 그 표현이 딱 정확했다.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렇다고 뭔가 진짜 고수다, 하는 느낌까진 안 들고. 분명 싸워보면 별것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싸우고 싶지는 않은.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상대의 눈에 살짝 웃음이 지어졌다.

‘웃어?’

이 상황에서 웃는다고? 원래라면 벌써 심장을 찌르고 목을 날렸을 것이다. 한데 내키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을 깬 사람은 안후평이었다.

“뭐야? 네가 긴장해야 할 상대야?”

안후평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물론 사추를 긴장시킨 고수라 하더라도, 자신이 겁을 먹을 이유는 없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을 해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신화방 소방주라는 강력한 호신갑을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으니까.

“내가 명색이 신화방 소방주인데 여태 기루 주인이 데리고 다니는 칼잡이보다 약한 놈을 데리고 다녔던 거야?”

사추의 눈가가 꿈틀했지만, 그렇다고 검을 뽑지는 않았다.

그때 천화루주가 부드럽게 안후평을 달랬다.

“술 파느라 정신을 팔다 보니 제가 강호의 법도에 무지합니다. 그러니 소방주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그러자 안후평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떤 관계지?”

천화루주는 그가 왜 이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 지역의 천화루 정보망을 통해 신화방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봤다. 그 정보는 통천각이나 은월조차 알기 힘든 정보였다. 당장 이 안후평이 천화루에 와서 술에 취해 어떤 말들을 했는지는 오직 그녀만이 알 수 있었으니까.

“저는 방주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안후평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자리에 부른다고? 일면식도 없는데?

당연히 천화루주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기를 누르려 한 거다. 하여튼 이 하찮은 것들은 말로 해선 거짓말만 처하는 것들이니까.

그때 밖에서 조 총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주님께서 소방주님을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말리신다? 역시 자신의 예상이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안후평이 돌아서며 문을 향해 걸었다.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병신처럼 뭘 그리 노려보고 있나? 가자.”

사추는 극악소마에게서 돌아섰다. 이 짧은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었는데,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안 싸워서 다행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겠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후평이 문 앞에서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너 내게 찍혔어. 다음에 봤을 때도 웃으면 내 손에 죽는다.”

차갑게 경고한 후 안후평이 방을 나섰다.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천화루주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못 웃으시면 어쩌죠? 별호를 바꾸셔야 할 거 같은데.”

그녀의 농담에 극악소마는 물론이고 옆에 서 있던 무면객들도 소리 없이 웃었다.

안후평이 진정 신경 써야 할 웃음은 바로 이 무면객들의 웃음이었다.

극악소마를 모욕한 순간, 신화방 소방주라는 호신갑은 천 쪼가리가 되었다.

그딴 거 신경 안 쓰고 난도질부터 하고 보는 이들이 바로 이 무면객들이었으니까.

그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극악소마는 그들에게 딱 한 마디만 했다.

“웃지 마.”

이들에게 웃음이란 곧!

그래서 그 말은 이 뜻이기도 했다.

허락 없이 죽이지 마.

* * *

대청을 나온 안후평이 차갑게 사추를 노려보았다.

“뭐 하자는 거야?”

“보통 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그럼 너는 보통 놈이네. 지금까지 비범한 놈인 척 날 속였고?”

사추는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후평 역시 더는 모욕하지 않았다. 사추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잘 안다. 루주가 대단한 고수를 데려온 게 틀림없었다.

그래, 신화방 안자리를 차지하려면, 그 정도 투자는 해야겠지.

“용 선생을 불러.”

만능 해결사처럼 나온 그의 이름에 사추가 흠칫 놀랐다.

“천화루주는 이번 대회에 손님으로 온 사람입니다.”

“누가 그 여자 죽이겠대?”

“용 선생이 나서면 일이 커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뭐?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용 선생도 못 이긴다고?”

“아닙니다.”

사추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막상 용 선생이 와서 놈과 싸웠는데 분위기만 요상했지 실력이 별거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어떤 결과가 나와도 문제였다.

그래서 부르면 안 되는 게 맞는데.

안후평은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용 선생이 와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면, 지금 나 모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잖아? 당장 불러.”

* * *

검무극과 이안도 신화방에 도착했다.

대회신청은 대연무장에서 받고 있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여인들도 많았고, 그 여인들과 함께 온 이들도 많았다.

이안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면사로는 막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시선을 빨아들였다.

“저기 줄을 서 있네요.”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기에 십여 개의 줄에서 신청을 받고 있었다.

“여기 보세요.”

줄을 서려고 그쪽으로 가려던 이안이 벽에 붙은 대회와 관련한 벽보를 발견했다.

“아, 천하제일미가 되면 상금이 오만 냥이 아니라 삼만 냥이네요. 부상으로는 사도맹주와 함께하는 만찬에 참석하는 기회를 준다네요.”

검무극이 사도맹주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사도맹주를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그 작은 눈이 그리울 줄이야.

“너 오만 냥이 아니라서 아쉬워하고 있지?”

이안이 움찔하면서 시치미를 뗐다.

“그럴 리가요!”

“이만 냥 잃어버린 것 같지? 솔직히 말해봐.”

“……살짝 아쉽기는 하네요. 전 중원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인데.”

검무극이 소리 내어 웃었고, 이안도 따라 웃었다.

이안은 검무극과 보내는 이 시간이 행복했다.

지금도 주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꼈지만, 오직 검무극에만 집중했다.

언제 또 이렇게 함께 웃고 떠들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

“자, 둘러보시고 저보다 예쁜 사람 있으면 죽여주세요.”

이안의 속삭임에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무림공적이 탄생하겠는데?”

“친구분이 멸마대주인데 무슨 걱정이세요!”

검무극도 그녀와의 이 시간이 즐거웠다. 오직 이안만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그리고 그 배려는 그녀의 총명함에서 나오는 것임을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저쪽에 가서 줄 서죠.”

두 사람은 십여 개의 줄 중에서 그나마 제일 짧은 줄에 섰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오!’ 하는 탄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사람들이 쫙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한 여인이 이곳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궁장을 입은 여인은 모두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가 입은 화려한 옷도 그녀의 외모에 눌려 무엇을 입었는지 신경이 가지 않았다.

이곳에 미인들이 많았지만, 그 모두를 압도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겨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안뿐이었다.

이안이 순백의 아름다움이라면, 이 여인의 아름다움은 화려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안이 지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면 그녀는 관능적이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여인은 검무극과 이안이 줄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 앞에 선 여인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나마 이 줄이 제일 짧네요.”

소속 문파는 천마신교

“자고로 줄을 잘 서야 인생이 편한 법이죠.”

생긴 것만 봐서는 남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을 것처럼 생겼는데, 여인은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안은 가만히 여인을 응시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단점이 보일 법도 한데, 이 여인은 완벽했다.

심지어 옷도 잘 입었고, 화장도 너무 잘했다. 정말이지 옷 입고 화장하는 법을 배워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안은 과연 이 만남이 우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줄을 서다 만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특별한 느낌을 주는 여인이었으니까.

이안이 주위의 다른 줄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자신들이 서 있는 줄이 가장 짧았다.

“줄을 잘 섰는지는 아직 모르죠.”

이안이 서 있던 줄의 앞쪽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줄 앞쪽에서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잖아요? 운이 나쁘면 내 순서 앞에서 딱 끊어지기도 하고.”

이안의 말에 여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치 두 절대 고수가 마주 선 것처럼 상반된 아름다움이 팽팽하게 맞섰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검무극은 그런 그녀들을 가장 가까이서 쳐다보고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은 여자를 바라볼 때와 남자를 볼 때가 달랐는데, 본능적으로 남자를 유혹할 줄 아는 여자였다.

이안이 검무극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뭘 그리 넋 놓고 쳐다봐요?”

그러자 검무극이 그제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제가 실례했습니다.”

그 말이 싫지 않은지 여인은 미소를 지었고 이안은 마차에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그러면서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죽여주세요, 이 여인.

자신보다 예쁜 여자 보면 죽여달라던 농담의 연장선이었다. 이 여인이 자신보다 더 아름답다는 의미였는데.

―죽일 정도까진 아니지 않나?

―그런 말씀은 저 여인 말고 저를 쳐다보시면서 하셔야죠.

―마차에서 누군가 이렇게 소마님을 쳐다봤었지.

―이제 아시겠죠? 그때 제 심정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이 극악소마를 쳐다본 것과 검무극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극악소마야 아는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이 확실히 있는 사람이고.

한데 이 여인은? 누군지도 모르는 여인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셨나?’

이안은 검무극이 누군가 다른 여인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내심 놀라고 있었다.

‘하긴. 도련님도 남자인데.’

저렇게 아름다운데 어찌 쳐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자인 자신이 봐도 감탄이 나오는데. 그래, 충분히 이해된다.

이안이 느꼈는데 당사자인 여인이 어찌 못 느꼈겠는가? 검무극의 시선에 여인의 눈빛에 자신감이 스쳤다.

이안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이곳에는 혼자 오셨나요?”

“네.”

분명 무공을 익힌 여인인데, 이안은 정확히 여인의 실력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실력이 뛰어나서인지, 익힌 무공이 특별한 것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는 자신을 감추는 데 아주 능숙했다.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혼자 다니시다니, 놀랍네요.”

“제가 겁이 없어서요.”

여인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차이란(車利蘭)에요.”

“저는 이안이에요.”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소개했다.

“검연입니다.”

차이란이 검무극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름이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차 소저 이름도 예쁩니다.”

차이란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시죠?”

차이란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뚫어질 듯 빤히 검무극을 쳐다보던 차이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굴 모실 것 같은 분이 아니신데.”

그러면서 슬쩍 이안을 쳐다보았다.

“어디 가면 이런 멋진 무인을 구할 수 있나요?”

이 여자 봐라?

검무극을 바라보는 눈빛도 그렇고, 지금 하는 이 말도 그렇고. 대놓고 검무극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안이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헤벌쭉 좋아하지 마라고요!

이안이 그녀에게 딱 부러지게 말했다.

“못 구할 거예요.”

“그건 모를 일이죠.”

차이란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평생 한 사람만 지키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이 여자 말고 나를 지켜줘.

그렇게 할 말 다 해놓고 나서야 이안에게 활짝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안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건 화내면 지는 싸움이다.

“맞는 말씀이에요. 새로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언제라도 보내줘야죠.”

누군가 본격적으로 소교주와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려 하니까, 자신이 검무극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교주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복해 드리고, 내 일처럼 좋아할 거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런 마음이었는데.

아무리 소교주가 자신을 심장이라 불러도.

교주께서 비천검법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셨어도.

권마의 수양딸이 되었어도.

귀영대주가 되었어도.

자신의 마음은 항상 검무극을 호위하던 시절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이 여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간다면 정말 보내주실 건가요?”

차이란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런 사람을 어떻게 놓아주겠어요? 간다고 하면…….”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죽일 거예요.”

검무극이 놀란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내 이안이 차이란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저도 농담이에요.”

서로 농담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두 여인 사이에는 알 수 없는 팽팽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차 줄이 줄어들었고, 이윽고 이안이 신청할 차례가 되었다.

신청은 검무극이 대신했다.

신청받는 무인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참가하시는 분 성함부터 알려주시오.”

“이안.”

무인이 이름을 서류에 적었다.

“이안, 무인이시고?”

“그렇소.”

“무인이시고, 그럼 소속 문파나 가문은?”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할 말이 흘러나왔다.

“천마신교.”

무인이 그대로 서류에 받아적었다.

“천마신교시고, 다음은…….”

다 적고 난 후에 무인이 흠칫 놀랐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그러자 또박또박 들려오는 네 글자.

“천마신교.”

무인이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장난을 치면 처벌을 받습니다!

따끔하게 야단을 치려 했는데.

무인은 그러지 못했다. 우선 면사를 착용한 이안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옆에 서 있는 검무극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지원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소?”

“맞습니다. 정말 천마신교 출신이시오?”

“그렇소.”

천마신교에서 이번 대회에 참가할 줄 몰랐기에, 그것도 이렇게 당당히 신분을 밝힐 줄은 더욱 몰랐다.

무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신교에서의 직위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거기까진 알려드릴 수 없소.”

“네, 알겠습니다.”

사실 놀라기는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신청을 받는 무인보다 이안이 더 놀랐다.

당연히 정체를 숨겨서 위장 신분을 말할 줄 알았는데.

심지어 그 여인까지 뒤에서 듣고 있는데.

‘혹시 저 여인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건 아니겠지요?’

검무극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여인이 워낙 아름다워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접수대 무인이 참가표를 내어주었다.

“예선은 사흘 후에 열릴 겁니다.”

그러고는 그 줄에 선 사람들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자리를 비우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이안이 뒤로 돌아섰다. 분명 천마신교라는 말을 들었을 텐데, 차이란은 크게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제가 겁이 없다고 했잖아요.”

두 여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래도 오늘 줄은 잘못 고르셨네요.”

그 말을 하고는 이안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차이란은 이안에게 들으라는 듯 뒤따라 나가는 검무극에게 말했다.

“나중에 식사 한번 해요.”

검무극은 옅은 미소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이안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대연무장을 나와 신화방을 완전히 나왔을 때, 비로소 이안이 말했다.

“절세미녀가 밥 먹자는데 약속 잡지 그러셨어요?”

“어차피 나중에 먹게 될 거야.”

무슨 뜻이냐는 이안의 눈빛에.

“저 여인이 다시 우리에게 접근해 올 거라고.”

그 말에 이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굳었던 그녀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맞죠? 그렇죠? 저 여인 우리 정체를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죠? 알고 계셨던 거죠? 그래서 신분도 밝히신 거고.”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의 마음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아, 저 긴장했어요. 도련님이 저 수상한 여자에게 넘어간 건 아닌가 하고요.”

솔직하지 못한 말이었다. 수상한 여자가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했어야지.

“한데 우리 정체를 밝힌 건 다른 이유도 있다.”

“무슨 이유인데요?”

“너 때문에.”

“네?”

이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이던 그때.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가 흘러나왔다.

“네가 천하제일미가 되어도 가짜 신분이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으냐?”

“천마신교의 이안이 천하제일미다. 이렇게 세상에 알려져야지.”

이안은 검무극의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래야 살면서 귀찮은 일도 없을 거고.”

천하제일미가 마교 출신임을 안다면 감히 누가 그녀를 귀찮게 하겠는가? 하다못해 무림의 색마가 천하제일미를 한 번 보러 가자, 마음이 들었다가도 천마신교 출신이라면 감히 보러 갈 마음이 들겠는가?

‘아! 저 때문에 밝히신 거군요.’

이안은 감격했다.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소교주인데, 오해나 하고 말이다.

“한데 저 여인이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이유야 간단했다.

바로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는 바로 십이지왕 중 일인이었다.

십이지왕 제 칠왕(七王) 화왕(花王).

그녀는 십이지왕이 세상을 지배하던 당시 천하제일미였다.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온갖 말들이 나돌았다. 미모로 십이지왕 자리에 올랐을 거란 말까지 나왔다. 십이지왕 중 누군가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 자리에 앉혀 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 대해 몰라서 하는 헛소리다.

“그녀는 살수다.”

이안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살수일 거라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검무극이 말해주는 게 아니라면 쉽게 믿지 못했을 거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진짜 살수.

십이지왕이 무림을 지배하던 시절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유명한 살수는 제 사왕이었던 살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비밀리에 활약했다.

십이지왕의 꽃이라는 불명예로 살았던 그녀는, 그녀가 죽고 난 후에야 그녀가 진정 뛰어난 살수였음을 무림인들은 알게 되었다. 왜 그녀가 그런 인생을 살았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무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살수였고,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살수였다.

살왕이 살수로서의 명성을 모두 가졌어도, 그녀는 그 명성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녀야말로 진정한 어둠 속의 칼이었다.

검무극이 아까 그녀를 빤히 쳐다본 것은 처음에는 놀라서였고, 나중에는 그녀가 접근한 것이 자신에게 미인계를 쓰기 위함이라 생각해서였다.

“소교주님을 노리고 접근한 것이군요.”

이안이 바짝 긴장했다.

살수와 호위 무인.

자신과는 운명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상대.

다행히 목표는 검무극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내가 아니야.”

만약 무림보고에서 신녀지몽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천화루주에게 주지 않았다면? 그래서 천화루주를 만나러 출교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자신은 없을 것이다. 이곳에 온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과 의지.

하지만 이 대회는 그보다 훨씬 전에 개최가 결정되었다.

다시 말해 지금 자신에게 접근한 것과 별개로, 이 대회를 개최하고 참가한 목적은 다른 데 있다는 의미였다.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담벼락에 붙은 천하제일미 대회 벽보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이안은 알 수 있었다.

“목표는 바로 사도맹주였군요.”

천하제일미가 되면 부상으로 사도맹주가 참석한 연회에 함께 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라면 분명 천하제일미가 될 수 있을 거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직접 나서야 할 살행이라면, 그 목표는 사도맹주일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랬었는데 자신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

검무극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처할 작정이었다.

“막는 방법은 간단해.”

“소교주님이 그 여인을 죽이면 되죠.”

“아직 아무것도 확실히 밝혀진 게 없는데?”

“아, 그렇죠. 그럼 어떻게 막죠?”

그러자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천하제일미가 되면 되지. 그래서 저 여인을 연회에 참석 못 하게 하면 되잖아. 천하제일미가 된 이안, 사도맹주를 구하다!”

“그만 좀 놀리세요!”

과연 그녀를 이기고 천하제일미에 뽑힐 수 있을까?

이안은 앞서 그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모습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그녀가 살수란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우리와 얽히는 것도 운명이었나 보네요. 하필이면 우리 줄이 제일 짧을 때 그녀가 들어 왔으니까요.”

그래서 한 줄에 서게 된 것이 운명이란 생각이 들겠지만, 검무극은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화왕이 이끄는 비밀살수조직, 가인교(佳人橋).

가인교의 살수들은 모두 여인이었다. 그것도 아름다운 여인들로만 이뤄져 있다고 했다.

“난 그녀가 들어올 때 우리 줄이 제일 짧은 게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그래, 그녀가 이끄는 살수들이 다른 줄에 서면서 줄의 길이를 조종한 거지. 그녀가 자연스럽게 우리 뒤에 설 수 있게끔.”

검무극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왜 비무대회가 아니라 천하제일미를 뽑는 대회를 개최한 것인지.

중원에서 모여든 수많은 여인이 북적대는 이곳에서,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가인교의 살수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일 수 있었으니까.

대체 몇 명이나 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 거리에는 아름다운 살수들이 가득하다.”

이 방에만 들어오면 넋이 나가는군

“아버지, 부르셨습니까?”

안후평이 신화방주가 업무를 보는 대청으로 들어섰다.

신화방주 안청광(安淸狂).

그는 지역의 평범한 문파였던 신화방을 사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문파로 키워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무공은 고강했고,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누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면 반드시 복수했고 목에 칼이 겨눠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배짱이 있었다. 거기에 성공에 대한 누구보다 강한 열망이 있었다.

대청에는 두 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그들이 누군지 확인한 안후평이 흠칫 놀랐다.

아버지의 신화를 말하면 꼭 언급되는 두 고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오늘의 신화방을 있게 한 두 주역.

염사검(蚦蛇劍)과 철한도(鐵寒刀).

그들이 자기 일처럼 아버지를 돕지 않았다면, 신화방을 이렇게 키워낼 수는 없었으리라. 그랬기에 아버지는 그들을 가족보다 더 귀하게 대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야망이 진행 중인 한 토사구팽은 없을 것이다.

평소 얼굴 보기 힘든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안후평이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두 고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눈빛만으로 인사를 받았다. 물론, 안후평은 그런 태도에 불만이 있었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명색이 소방주인데.’

오랜만에 봤으니 잘 지냈냐고 안부라도 한 번 물어볼 수 있지 않은가?

저들이 미운 게 아니라, 아버지가 미웠다. 저 두 고수야 원래 무정하고 사악한 성정을 지닌 이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아끼고 신임했다면,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저렇게 무심하게 자신을 대하진 않을 것이다.

평소에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면 저들이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겠는가?

안청광이 대뜸 물었다.

“천화루주를 만났다고?”

“네,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심사자로 부른 사람을 네가 왜 만났느냐?”

“천화루주는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분명 비범한 사람일 테니, 뭔가 배울 점이 있을 거 같아서 찾아갔습니다.”

안후평은 철저히 속마음을 감추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 여인에게 빠졌습니까? 그래서 일개 기루 주인을 심사자로 부른 겁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아버지 성격상 불호령이 떨어질 거다. 게다가 염사검과 철한도까지 있는 자리에서 그랬다간, 맞아 죽을 수도 있을 거다.

“아버지께서 마지막에 천화루주로 심사자를 바꾸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러이러해서 바꿨다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이러니 의심되고 걱정할 수밖에.

‘제가 나설 일이 아니라니요? 본 방의 재산이 달린 문제인데요. 그게 어디 아버지 겁니까?’

그때 수하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이번 대회 참가자 중에 천마신교 출신이 있다고 합니다.”

안청광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함께 있던 염사검과 철한도 역시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확실한가?”

“지금 사도맹을 통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알아내는 대로 보고하도록.”

“네.”

수하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염사검과 철한도를 향해 돌아서려던 안청광이 아들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가보거라.”

안후평은 정중히 인사하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두 고수와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저리 심각하지?’

비무대회라면 모를까, 미녀선발대회가 아닌가?

참가자가 천마신교면 어떻고 정파 협객의 딸이면 어떤가? 그냥 전 무림이 즐기자고 개최한 대회인데.

처음 대회 개최가 결정되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회로 중원에서 본방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마교까지 참가한 대회가 되면 그 목적에 더욱 부합하는 거 아닙니까?

한데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런 축제가 아니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대청 밖으로 나왔을 때 대기하고 있던 사추가 소식을 전했다.

“용 선생 도착해서 천화루주에게 갔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안후평은 깜짝 놀랐다.

“벌써? 어떻게?”

“방주님이 불러서 용 선생이 본방에 와 있었습니다.”

평소에 용 선생은 외부에 있었다. 한데 아버지가 용 선생까지 본방에 불러둔 상태라고? 이렇게 되니 무슨 일인지 더 궁금했다.

“그렇다고 나를 만나지도 않고 갔어?”

“용 선생 성격 알지 않습니까?”

물론, 잘 알았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통제 불능이었는데 적어도 실력 하나만은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선생이라 불리는 이유는 스스로 선생이라 불러주길 원해서였다.

아버지는 그가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거라 여기고 중히 쓰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자신이 그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용 선생은 제어가 힘든 사람이란 것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래서 그를 부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이었는데.

안후평이 인상을 쓰며 사추를 노려보았다.

“네가 제대로만 했어도 부를 일이 없었지.”

사추는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안후평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그는 상대의 변명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럴 때는 그냥 입 다무는 게 상책이었다.

안후평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사추를 닦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 얄미운 놈 족치는 걸 직접 봐야지.’

특히 그 기생오래비처럼 잘 생겼던 그놈! 오늘의 목표는 그놈이었다.

안후평이 천화루주가 기거하고 있는 객청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용 선생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아무리 사파라도 너무하지 않소?

그 말에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사파의 어지간한 악인도 혀를 내두르는 일을 서슴없이 저질러왔다.

그런 용 선생이 오늘은 화가 나 있었다.

방주가 불러서 신화방으로 날 듯이 달려왔다. 어쩐 일로 자신을 불렀나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아직 방주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 도착한 염사검과 철한도를 먼저 만나고 있다는 소식에 분통이 터졌다.

“옛 명성이나 빨아먹고 사는 거머리들!”

안후평이 방주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그때는 그 두 사람부터 처리할 작정이다. 그러려면 미래의 방주가 맡긴 일은 해줘야겠지.

용 선생이 천화루주가 머무르는 객청에 도착했다.

사추가 말하기를 호위 중 제일 잘생긴 놈을 적당히 손봐주라고 했다.

‘오늘 운이 나쁜 줄 알아라.’

그 적당히의 기준이 오늘은 좀 과격할 것 같았으니까.

용 선생이 천천히 객청 문을 밀었다.

그러자 내부 광경이 그에게 펼쳐졌다.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무면객들은 객청 곳곳에 흩어져 쉬고 있었다.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용 선생을 향했다.

왜 그랬을까? 정말 왜 그랬을까?

스르륵, 탁.

용 선생이 문을 다시 닫았다. 마치 방을 잘못 찾아온 사람처럼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용 선생은 문 앞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왜 문을 닫았지?’

누군가 병장기를 꺼내든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살기를 드러낸 사람도 없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자신을 쳐다봤을 뿐인데.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손이 저절로 문을 닫았다.

‘설마 내가 겁을 먹은 건가? 그럴 리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그는 당혹스러웠다.

바로 그때였다.

한 자루의 비수가 문을 뚫고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비수가 문 앞에 서 있던 그의 왼쪽 눈동자 앞에서 멈췄다. 정말 조금만 더 튀어나왔어도 눈이 찔린 뻔했다.

눈앞에 튀어나와 있는 비수의 날을 보면서도 용 선생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공격이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옆에서 다른 비수가 뚫고 나왔다. 과연 이번에도 정확히 다른 쪽 눈동자 앞에 멈췄다.

여전히 용 선생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뚫고 나온 비수는 목 앞에 멈췄지만, 용 선생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튀어나온 비수는 그의 심장 앞에 멈췄다.

네 자루의 비수 모두 그의 급소를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죽이려는 것이 아니었다. 딱 정확하게 급소를 겨눈 것을 보여준 것이다.

무인이 비수로 문을 뚫는 거야 별것 아니라 생각할 수 있지만, 지금 보여준 수법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비수들은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그것도 문밖에 있는 자신의 눈의 위치와 목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해서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닿을까 말까, 정확한 거리 조절을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문제는 한 사람이 여러 비수를 찔러 넣은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비수가 각기 달랐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른 비수들을 가지고 다닐 리는 없었으니까, 여러 명이 돌아가면서 한 수씩 발휘했다는 의미.

그럴 리가?

마치 한 사람이 찔러넣은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는, 그만큼 이들의 실력이 뛰어나면서도 고르다는 의미.

스으윽.

튀어나와 있던 비수들이 일제히 안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사라지는 비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살고 싶으면 돌아가라.

원래라면 당장 문을 박살 내고 들어갔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이딴 짓을 해? 비수를 찌른 놈들의 손목을 비틀어서 부러뜨렸을 것이다. 그냥 적당히 손만 봐주라고 했지만, 다 박살을 냈을 것이다.

자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한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도 없었다.

굴욕을 당했는데도 참는다? 살면서 그런 적은 없었으니까.

그냥 가면 소방주에게는 뭐라고 말을 하지? 겁을 먹고 돌아섰다는 소문이 방 내에 돌게 된다면?

애초에 그의 본능이 말렸을 때 가버렸어야 했는데.

그의 생존본능은 습관처럼 이어온 그의 삶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사내새끼들이 계집애들처럼 면사를 쳐 쓰고 있나?”

하지만 장내의 모습에 용 선생이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면사를 쓰고 있지 않았다. 면사 대신 새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끼이이익.

뒤에서 문을 닫는 하얀 가면이 웃고 있었다.

* * *

안후평이 객청에 도착했을 때, 곡소리가 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안후평의 걱정에 사추가 대답했다.

“혹시라도 그럴까 봐, 방주님 손님이라고 말해뒀습니다.”

그 말에 안후평이 안도했다. 용 선생이 제멋대로긴 하지만 아버지라면 무서워했으니까.

안후평은 기대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앞니가 다 부러진 채 바닥에 꼬꾸라져 있는 호위 놈의 모습을.

‘건방지게 웃었지? 오늘도 웃나 보자.’

그리고 놈의 그 빌어먹을 면사는 직접 벗겨서 찢어버릴 작정이다. 이미 용 선생이 찢어버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안후평이 객청 문을 열며 들어섰다.

“오셨으면 저부터 보시지 않고…….”

순간 안후평이 말문을 닫았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용 선생은 방에 없었다.

천화루주는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극악소마는 창밖을 쳐다보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머지 무면객들은 객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병장기를 손질하는 이도 있었고, 의자에 앉은 쉬는 사람도 있었고, 옷을 개고 있는 이도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는 그들의 모습에 안후평이 사추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용 선생 먼저 여기로 갔다면서?’

사추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후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천화루주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누구 오지 않았소?”

그러자 천화루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왔으면 이놈들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지.

안후평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창가에 서 있던 그는 어느새 천화루주 뒤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무면객들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웃는 사람은 없었다.

‘일개 호위들 주제에!’

신화방 소방주인 자신을 이렇게 빤히 쳐다보는 게 너무 기분 나빴다.

게다가 눈빛에 담긴 건 존경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마치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 나쁜 눈빛들이었다.

‘이것들 박살 안 내고 대체 어딜 간 거야?’

한편 사추는 문을 살피고 있었다.

방금 들어설 때 문에 상처가 남은 것을 보았다. 그래서 안쪽도 살폈는데 안에도 똑같은 자리에 흔적이 있었다.

‘검날이 관통한 흔적이다!’

아까 처음 왔을 때는 없었던 흔적임을 깨닫자, 그의 팔에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설마? 왔었어?’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어진 집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와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렇게 방이 멀쩡하다고?

결정적으로 이 방에 있는 사람 중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긁힌 자국도 없었다.

용 선생이 어떤 고수인데.

하지만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도 같은 이유였다.

그 성질 더럽고 급한 사람이 간다고 해놓고서 안 왔을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들이 용 선생을 죽였다면? 시체는?’

여긴 신화방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그를 죽이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그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다는 것인가?

그때 사추는 자신과 가까이 있던 무면객을 쳐다보았다.

무면객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에 서 있던 무면객도 비슷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묘한 눈빛을 보는 순간, 기분이 섬뜩해지면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용 선생을 죽였다!’

그때 안후평이 그에게로 걸어가며 말했다.

“뭐해? 자넨 이 방에만 들어오면 넋이 나가는군.”

안후평이 천화루주에게 인사도 없이 방을 나갔고, 사추가 뒤따라 나가려던 그때!

극악소마가 천천히 손을 들어서 쉿 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사추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 순간 나머지 무면객들이 일제히 한 동작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보며 쉿 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너무나 무섭고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때 뒤에서 안후평이 버럭 소리쳤다.

“이기지도 못한다면서 안 가고 뭘 그리 보고 있냐고!”

사추는 반사적으로 안후평을 돌아봤다가 다시 객청 안을 쳐다보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내는 차를 마시고, 옷을 개고, 하품하고, 각자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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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오늘 왜 이래?”

사추는 객청을 나와서도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안후평의 못마땅한 눈빛에 사추가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당장 용 선생부터 찾아.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자빠졌는지, 당장 찾아오라고!”

있어야 찾지. 화골산으로 녹여서 흘려버렸는지, 아니면 이 후원 어딘가에 파묻어 버렸는지.

사추는 망설였다. 원래라면 솔직히 말해야 했다. 아무래도 용 선생은 저들에게 죽은 것 같다고. 자신에게 입 다물라는 경고까지 했다고.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될까?

안후평은 당장 달려가서 방주에게 말하겠지? 과연 그러면 방주는 어떻게 나올까?

안하무인 제멋대로 굴어도 무공 하나 믿고 살려둔 용 선생인데. 쓸데없는 일을 시켜 죽게 했다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그다음에는? 모든 무인을 동원해서 저들을 죽이러 갈까?

일단 대회가 끝날 때까지 그냥 둔다는 결론이 나지는 않을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미 무림에 널리 알려진 만큼 이번 대회는 너무나 중요했으니까.

게다가 왜 천화루주를 심사자로 불렀는지 아직 이유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서 결국 용 선생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 미뤄진다면?

사추는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을 떠올렸다. 용 선생을 그렇게 흔적도 없이 죽인 자들이라면, 자신을 죽이는 건 손쉬운 일일 것이다. 결국, 입을 다물라는 경고를 어긴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설령 당장 그들을 붙잡아 오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해도, 과연 그들을 다 붙잡을 수 있을까?

고수 몇이 가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렇다고 이 큰 대회를 앞두고 전쟁을 벌이지도 않을 것이고.

말을 했을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나는 죽는다.’

안후평이 평소 자신을 아껴주었던 수장이었다면, 지금처럼 나라도 살고 봐야지, 라는 결론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용 선생은 못 찾을 거 같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가 죽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아마 방주님께서 손을 쓰셔서 돌려보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용 선생 성격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 온다던 그가 안 왔을 리 없고. 한데 없는 걸로 봐선…… 그를 중간에 말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럴듯한 추측이었기에 안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아버지가 용 선생을 미리 불러둔 것부터가 이상했다. 자신이 그를 이런 일에 못 쓰게 하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용 선생은 됐고. 저 면사 쓴 놈들이 누군지나 알아봐. 분명 평범한 놈들은 아니야.”

안후평이 먼저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참, 그리고 이번 대회에 천마신교에서 참석한 여인이 있다는데,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아봐.”

마교에서 온 미녀라고? 지금껏 마교의 여인과는 즐겨본 적이 없었기에, 이건 기회였다.

이 와중에도 여인에 대한 색정과 욕망은 여전한 그였다.

“네, 알겠습니다.”

사추가 한숨을 내쉰 후 저 멀리 뒤쪽에 있는 객청을 돌아보았다.

순간 사추는 화들짝 놀랐다. 입에서 절로 헉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객청 창문에 무면객들이 달라붙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창에 저렇게 많은 얼굴이 보일 수나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가.

그 모습은 앞서 쉿 하는 시늉만큼이나 기괴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사추가 홱 돌아서서 발걸음을 빨리해서 그곳을 빠져나갔다.

저들이 누군지 알아내라고?

아!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 * *

검무극과 이안은 저잣거리에 있는 객잔에 방을 잡았다.

“침상이 두 개인 큰 방으로 주시오.”

이안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방을 두 개 잡을 줄 알았는데, 검무극이 하나만 잡은 것이다.

“이번 대회 마칠 때까진 같은 방에서 자.”

상대가 살수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녀를 혼자 재울 생각은 없었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이안이 말했다.

“여전히 제 실력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그래서가 아니야. 네가 날 좀 지켜달라고.”

객잔 주인장은 ‘자네 마음 내 다 아네’ 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우선 밥이나 먹자. 여기 안휘성 요리는 안 먹어봤지?”

“네. 도련님은 드셔보셨어요?”

“나야 먹어봤지.”

검무극이 점소이를 불러 능숙하게 요리를 주문했다. 이 지역에 유명한 요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중에서 이안 입맛에 맞을만한 요리를 척척 시켰다.

“아니, 여긴 또 언제 오셔서 드셔보셨대요?”

네 덕분에 먹어봤다. 네가 살려주는 바람에.

객잔에는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앞서 검무극이 말했다. 이 거리에 아름다운 살수들이 가득하다고.

그렇다면 옆에서 밥 먹는 이들 중에도 그녀가 이끄는 살수가 있을지 모른다.

“도련님께서는 저보고 지켜달라고 하셨지만, 전 그 여인이 살수였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호위무인은 본래 살수를 잘 감지했다. 잘 감지해야 했고.

하지만 그녀가 살수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질투심까지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두고두고 부끄러울 거다.

“그녀들이 특별한 살수라서 그렇다.”

“그래도 소교주님은 알아보셨잖아요?”

그야 미리 알아서 그랬던 거고.

“나야 특별한 사람이니까.”

오랜만에 듣는 검무극의 잘난 척에 이안이 웃었다.

“그녀들은 살수들이 익히는 일반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살수들 특유의 버릇이나 고유의 기도가 느껴지지 않는 거고.”

그녀와 그녀가 이끄는 가인교는 일반적인 살수가 아니었으니까.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수 훈련은 필요 없었겠죠. 그녀들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 매혹적인 웃음의 대가는 목숨일 테니까.

* * *

사흘 후.

예선이 펼쳐졌던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이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제가 천하제일미요? 시작도 하기 전에 유난 떨 때부터 알아봤어요! 그래서 제가 안 한다고 했잖아요!”

위로의 말을 기다렸지만 검무극의 반응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검무극은 연무장을 가로질러서 먼저 나가고 있었다.

“어?”

이안이 다급히 검무극에게 뛰어갔다.

“어디 가세요?”

“어디 가긴? 어서 본선 준비해야지.”

“저 떨어졌다니까요.”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고, 검왕이 검을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네가 미인을 뽑는 대회에서 떨어질 리는 없지. 그것도 예선에서.”

이안의 얼굴에 살짝 기쁨이 스쳤다. 예선 통과한 기쁨보다 검무극의 저 말에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저, 정말 기대해요.”

“그래야 나중에 더 크게 놀려 먹지.”

예선은 그녀가 면사를 벗는 순간 끝났다.

천화루주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예선 심사에는 없었다. 아마 그녀는 본선 심사부터 보는 모양이다.

“한데 지금 우리 어디 가나요?”

“본선 준비하러 간다고 했잖아?”

“어딜요?”

검무극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저잣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건물이었다.

밖에서 보면 뭘 파는 곳인지도 모를 건물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옷을 파는 상점이었다.

그곳은 저잣거리에 있는 여느 상점들과는 달랐다. 아주 귀한 옷들을 취급하고 있었다. 각지에 이름난 장인들이 만든 옷들이었는데, 당연히 가격도 비쌌다.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천화루주께서 알려주셨지. 나중에 여기 데려와서 옷을 사주라고 하셨다.”

“아, 그랬군요.”

천화루주가 직접 챙겨주지 못하니 검무극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검무극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인이 나와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녀도 천화루주에게 기별을 받았는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공손했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보세요.”

이안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너무 화려하고 예쁜 옷들이 많아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저,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어디 이안만 처음이겠는가? 검무극도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고르세요.”

중년 여인은 일단 나서지 않고 그녀가 무슨 옷을 고르는지 지켜보았다.

이안이 옷을 둘러보았다. 장인들이 만든 옷이니 옷이야 얼마나 품질이 좋겠는가?

하지만 매번 무복만 입던 그녀였으니, 어느 옷이 좋은지, 또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던 이안이 눈길을 끄는 새하얀 궁장 앞에 섰다. 화려한 문양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입은 옷보다는 몸매를 부각하는 옷이었다.

“제가 저런 옷을 입을 수 있을까요?”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지 벌써 얼굴이 붉어진 그녀였다.

“인생에 딱 한 번이라면, 한 번쯤 입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결정을 내렸다. 검무극의 말이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저것으로 주세요.”

그러자 중년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잘 고르셨어요. 장인이 한 땀 한 땀 직접 만든 옷이랍니다.”

이안은 이렇게 비싼 옷은 처음이었다. 저거 입고는 혹시 어디 찢어질까 봐 검도 못 뽑겠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 옷은 제가 사죠.”

돌아보니 한 여인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녀는 차이란이었다.

이제 상대가 살수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안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우연이 계속되면 우연이 아니라던데. 우리 또 만났네요.”

그러자 차이란이 이 만남에 대해 솔직히 밝혔다.

“이번에는 우연이 아니에요.”

저번에도 아니었겠지만.

“이 소저가 여기로 들어가는 거 보고 따라 들어왔어요.”

“왜죠?”

“경쟁자가 무슨 옷을 사나 탐색도 하고.”

차이란은 검무극을 보며 매혹적으로 눈인사를 했다.

“못했던 식사도 할 겸 해서요.”

그녀는 솔직했다.

대놓고 하는 그녀의 호감 표시에 이안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하세요.”

제발 제 호위에게서 물러나 주세요! 대신에.

“제 옷 좀 골라주세요.”

뜻밖의 부탁에 차이란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쟁자에게 할 부탁은 아닌데요?”

“함께 식사하자는 말도 경쟁자의 수신호위에게 할 말은 아니지요.”

차이란이 인정한다는 듯 싱긋 웃었다.

“맞는 말이에요.”

웃음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어떻게 웃어도 매력적이었다.

“좋아요, 제가 한 벌 골라드리죠.”

그녀가 내부에 걸려있는 옷을 쭉 둘러보더니.

우선 이안이 처음 고른 옷부터 제외시켰다.

“장인이 아무리 한땀 한땀 지었어도, 이 소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옷이에요.”

그 이유도 알려주었다.

“이 소저는 순수한 얼굴인데, 옷까지 순수하면 식상하고 질리죠. 차라리 저 옷이 더 어울려요.”

그녀가 반대쪽에 걸려있는 화려한 붉은색 궁장을 골랐다. 앞의 백의궁장보다 노출도 심했고, 훨씬 화려한 옷이었다.

잠시 두 옷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안이 중년 여인에게 말했다.

“둘 다 주세요.”

둘 다 사는 이유도 밝혔다.

“차 소저 말을 믿어도 둘 다 사야 하고, 믿지 않아도 사야겠죠.”

“무슨 뜻이죠?”

“차 소저 말이 맞다면 이 백의 궁장은 당신에게 어울릴 테니까 내가 사야 하고, 당신 말이 거짓말이었으면 내게 어울릴 테니까 사야 하고.”

차이란이 환하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여인을 보며 어찌 살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기세상 어쩔 수 없었어요.

―한 벌은 네 월봉에서 깐다.

―안 돼요! 일 년 치 벌이를 몸에 걸치고 다닐 수는 없다고요!

중년 여인이 이안의 치수에 맞는 옷을 포장해 주었고, 검무극이 옷값을 지불했다.

그렇게 옷을 사고 세 사람이 그곳을 나왔다.

차이란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우리 식사해요.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검무극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저는 그런 약속 드린 적 없습니다.”

“잠깐이면 돼요.”

그녀가 이안을 쳐다보자.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된다고 허락하셔도 제가 안 됩니다.”

단호한 검무극의 말에 차이란이 웃으며 말했다.

“이러니 더 함께하고 싶잖아요?”

이안이 미소를 지은 후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흰옷을 양보해 드렸어야 했나 보네요.”

더 예뻐져야 우리 호위를 유혹할 수 있겠다는 말을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이 옷을 양손에 들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이란이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차이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해지자 다른 여인처럼 보였다. 맑고 차가운 눈빛, 밝았던 매혹은 어두운 마성으로 바뀌었다.

“네가 어떤 옷을 입더라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

* * *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은 후회의 길이었다.

“망했어요! 제가 밥 한 끼를 사 먹어도 아껴서 먹는 사람인데. 아! 멋은 잠깐이고, 빚은 영원한데.”

“심지어 멋도 없었어.”

“안 되겠어요. 지금이라도 가서 반품할래요.”

“그 우아하고 인상 좋은 주인장이 아까 돈 낼 때 그러더라. 죄송하지만 반품은 안 됩니다!”

“심지어 그녀는 백의를 탐내지도 않았어요!”

괴로워하던 이안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그래, 삼만 냥!”

그렇게 인생 한 방을 외치며 두 사람이 객잔으로 돌아왔다.

객잔에는 생각지 못한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소방주 안후평과 사추였다.

“왔습니다.”

사추의 말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안후평이 돌아보지 않은 채 점잖게 목소리를 깔았다.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한 여인은 그대가 처음이오.”

아들 닮았다는 말이 화낼 일인가?

안후평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최대한 멋있고 여유롭게.

“난 신화방…….”

이안을 쳐다보던 순간 안후평은 말문이 막혔다.

면사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

영혼을 빨아들이는 눈빛, 그런 눈이 세상에 어디 있어?

여기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을 받으며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 심장의 요동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심.

‘이 여자를 반드시 내 여자로 만든다.’

마주 보는 검무극과 이안도 그 결심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요란스러운 결심이었다.

“누구신지?”

이안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안후평이 자신을 마저 소개했다.

“나는 신화방 소방주 안후평이오.”

자신 있게 말했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이안은 여전히 빤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 소개는 했소만.”

네 소개도 하라는 말이었기에 이안은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찾아오신 거 같은데.”

“물론 그렇소.”

안후평은 상대가 마인이었음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직 마인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는 그에게 마교는 온실 밖 저 먼 세상 속 존재였다.

“날 찾아온 용건이 뭐죠?”

안후평은 낯선 경험을 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도 자신의 신분을 알고서 이렇게 쌀쌀맞게 굴었던 사람은 없었다.

‘이것이 마교 여인인가?’

안후평은 이 여인에게 한눈에 반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경험도 정말 오랜만이었고.

“잠시 앉으시오.”

이안은 검무극의 전음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의미.

―이번 일 신화방과도 관계가 있겠죠?

그래도 이안의 전음에 대답은 해주었다.

―관계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깊이 개입해 있겠지.

이런 싸움은 결국 정보가 많은 쪽이 유리한 법.

―이자를 이용해서 신화방 내부 사정을 알아내죠.

이안이 안후평 앞에 마주 앉았다.

검무극이 그런 이안 뒤에 서자 안후평은 그제야 그의 존재를 인식했다.

정말 놀랍게도 그는 이안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마음이니 이 젊고 잘생긴 호위가 탐탁할 리 없었다. 안후평이 검무극을 차갑게 노려보았고, 검무극은 못 본 척 담담했다.

그 반응을 지켜보던 사추는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저 여유, 어디서 느꼈더라?

일개 호위인 주제에 저렇게 여유로운……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사추는 흠칫 놀랐다.

면사를 쓰고 있던 그 잘생긴 놈!

사추는 극악소마를 떠올렸다. 그놈도 천화루주 뒤에 서서 저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었지.

반면 안후평은 이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중원을 종횡하며 여러 신교 무인을 만났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뵙는 거 같소.”

“본교의 누굴 만났나요?”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올 줄 몰랐기에 안후평은 내심 당황했다. 그가 아는 마인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귀동냥 바가지에서 끄집어낸 사람은.

“마존을 만나본 적이 있소.”

이 허풍은 결과적으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존을 만나봤으니까. 그것도 다음에 또 웃으면 죽는다고 경고까지 하면서.

앞에 앉은 여인이 어떤 마존을 만났냐고 물어보기 전에 안후평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 지난번에는 마군주도 잠깐 뵈었소. 본방의 일 때문에 협조할 일이 있었거든.”

마교에서 들어본 이름이라곤 마존과 마군주 뿐이었다. 그래도 마존보다는 마군주가 말하기에 만만했다.

이안이 옅게 웃었다. 이 명백한 비웃음을 그는 이렇게 오해했다.

‘그래, 마존도 알고 마군주도 알고 있다는데 네가 어찌 건방을 떨겠느냐? 이제 내가 달리 보이지?’

안후평은 심지어 이런 질문까지 했다.

“마군주를 본 적 있으시오?”

이안이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자, 그는 더욱 신나게 말했다.

“없으실 거요, 워낙 바쁜 분이라서. 하긴 나조차도 아주 잠깐 뵈었을 뿐이오. 다음에 안휘로 오면 내가 좋은 곳에 모시기로 했으니, 그때 함께 보러 갑시다.”

안후평은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면서 이안에게 술을 권했다.

“자, 내 술 한잔 받으시오.”

“됐어요.”

이안이 사양했지만, 그는 이안 앞에 놓인 술잔을 제멋대로 채웠다.

“자고로 처음 만난 사이에는 술이 한잔 들어가야 편해지는 거 아니겠소? 자, 한잔합시다.”

“나는 아무나 주는 술을 마시진 않아요.”

“아무나?”

“당신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심지어 진짜 신화방 소방주인지조차.”

그러자 안후평이 기회다 싶어 말했다.

“본방 구경 가보시겠소?”

“저는 오늘 그곳에서 예선을 치르고 왔어요.”

“거기 말고. 본선이 열리는 무대를 보고 싶지 않소? 운 좋으면 심사하는 분을 만나서 인사할 기회가 있을 수도 있을 거요.”

듣고 있던 사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사람이 천화루주를 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인에게 잘 보이려고 거길 데려간다고? 자신의 수장은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거긴 안 됩니다!’

정말 그 객청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갑시다, 소저께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요.”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잠시 고민했다.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어떤 대답이 나올지만 기다렸다.

“옷 갈아입고 내려오죠.”

그 말을 하고는 이안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안후평이 흐뭇하게 웃었다.

‘됐다! 넘어왔다!’

그래, 제까짓 게 도도한 척 굴어봤자지. 신화방 소방주가 가자는데 거절하겠냐고?

그때 이안을 뒤따라 올라가는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무섭게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검무극도 이 층으로 올라갔다.

“천화루주 옆의 그놈도 그렇고. 왜 이렇게 기분 나쁜 놈들이 붙어 있지?”

그걸 느꼈으면 가까이 가지 말아야지!

사추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천화루주를 지키던 놈을 떠올리게 해서인지, 사추는 방금 두 남녀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 여인이 마교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여인인지도 모르잖습니까?”

“왜? 대단한 실력이라도 숨긴 거 같아?”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였다. 실력이 별것 아니라서 못 알아봤거나, 자신보다 훨씬 강하거나.

저렇게 젊은 여인이 자신보다 훨씬 강할 리는 없긴 한데. 더구나 뒤에 서 있는 젊은 호위 놈도 실력은 보잘것없어 보였고.

한데도 왜 이렇게 찝찝하지?

안후평이 이안이 고수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저 얼굴에 어찌 실력이 좋겠냐? 자네 같으면 저 얼굴로 무공수련이나 하고 있겠냐고?”

대단한 여자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만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단한 신분의 여자가 이런 대회에 출전했겠어? 쓸데없는 걱정 말고 시비들에게 내 방 깨끗이 치워두라고 해. 술과 요리도 준비하라고 하고.”

그렇게 그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꿈에 부풀어 있던 그때, 이안은 검무극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가도 되는 거 맞죠?”

“이미 결정했잖아?”

“잘못된 결정일까 봐 그러죠. 아! 세상에서 결정이 제일 어렵다고요! 앞으로 결정은 도련님이 내려줘요, 두들겨 패라면 패고, 죽여서 묻고 와! 하면 묻어 버릴게요!”

“아가씨, 저는 일개 호위일 뿐입니다.”

“그게 제 인생이라고요! 돌려줘요, 제 인생!”

괜히 엄살을 떨고 있었지만, 사실 이안은 확고한 결심을 한 후였다.

장난을 치는 건 상대가 검무극이니까 치는 거고. 그녀는 이번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살수가 사도맹주를 죽이려는 음모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의 비수에 가슴이 찔리는 예언이 나온 일이다.

이안이 검무극이 가져온 두벌의 옷 중에서 하얀 궁장을 침상에 올렸다.

그 일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깟 궁장이 아니라 벌거벗고 무대에 올라갈 수도 있다.

“정말 그 옷으로 갈아입고 가게?”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동안 검무극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이안이 나왔다.

새하얀 궁장을 입은 이안이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검을 차면 안 되는 옷인데, 검을 차고 있으니까 색다른 멋까지 있었다.

검무극이 뭐라 반응할까, 이안은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그 여자가 거짓말했군.”

“네?”

“순수한 얼굴인데, 옷까지 순수하면 식상하고 질린다고? 이안아, 너 두 배로 순수해 보인다.”

이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수천 명이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것보다 검무극 한 사람에게 듣는 말이 훨씬 기뻤으니까.

“나 부자 되겠다.”

“네?”

“이런 대회라면 누가 천하제일미가 될지 맞히는 도박판이 열릴 거 아냐? 네게 내 전 재산을 걸 거야.”

“그러다 다 날리면요?”

“평생 내 밑에서 일하면서 갚아야지. 옷값도 갚고.”

“소교주님이 날렸는데 제가 왜 갚아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사실 다 걸만했다. 아직 세 발이나 남았으니까.

붉은 궁장 입고, 면사 벗고, 거기에 화장까지 하면.

“어느 분 덕분에 큰 꿈을 꾸네요.”

“내가 널 예쁘게 만들어준 게 아냐. 단지 원래대로 돌려줬을 뿐이지.”

계단을 내려가며 이안은 아주 잠깐 그런 모습을 떠올렸다.

검무극과 함께 평화로운 무림을 주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배후 세력도, 음모도 없는 그런 평화로운 강호를. 웃고 떠들고 실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둘이 손잡고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고 싶었다.

‘그래, 그러려면 이 일들을 지난 일들로 만들어내야겠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지난 일로.’

백의 궁장을 입은 모습에 안후평은 입까지 벌린 채 이안을 쳐다보았다.

객잔을 나와 걸어가는 동안 안후평은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런 미녀와 나란히 걸어가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걸어가면서 이안이 물었다.

“한데 궁금한 점이 있어요.”

“말씀하시오.”

“신화방에서는 왜 이번 대회를 개최했나요?”

“그야 이 소저 같은 미인을 발굴하고 본방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지요.”

이안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궁금해요. 당신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죠?”

그렇게 물어오니 모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줄 수 없었다. 자신도 이유를 몰랐으니까.

“저는 그 진짜 이유가 궁금해요.”

듣고 있던 검무극은 이안이 참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안후평의 얼굴에 벌써 조바심이 보였으니까. 어떻게든 알아내서 자랑하듯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본선이 펼쳐지는 무대였다.

“여기가 본선이 치러지는 무대요.”

무대는 완성되어 있었는데 귀빈들이 앉는 자리 뒤쪽으로 수많은 이들이 구경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다 같이 그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이안을 쳐다보고 있던 안후평이 갑자기 소리쳤다.

“제가 소저를 천하제일미로 만들어드리겠소!”

이안이 그를 쳐다보았다. 웃음을 참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검무극이 이렇게 전음을 날렸기 때문이다.

―삼만 냥 해결이다!

듣고 있던 사추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언제 봤다고. 게다가 아직 면사를 벗은 모습은 보지도 않았다.

여자를 그렇게 밝혔으면 더 냉정하게 판단할 법도 한데. 하긴,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젊다. 그래, 이래야 안후평이지.

이안이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요?”

안후평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나는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남자요.”

* * *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지붕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신화방주 안청광이었다.

아들의 말도 안 되는 약속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던 그때.

사아악.

피부가 갈라지는, 적어도 자신의 목에서는 결코 들려선 안 될 소리가 들려왔다.

주르륵.

목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안청광이 자신의 목을 만지자 손에 피가 묻었다.

그제야 목을 휘감은 손에 들린 비수가 보였다.

그 비수를 쥔 손은 곱고 하얬다.

원래라면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었어야 했는데.

상처는 얕았다.

죽이려고 벤 것이 아니었다.

그때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식이라 죽이지도 못하고. 참, 쉽지 않지?”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비수로 안청광의 목을 그은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내가 대신 죽여줄까?”

안청광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불같은 성질에도 목을 베는 장난을 그냥 넘겼다.

“그대는 약속이나 제대로 지키시오.”

차이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약속을 참 좋아하는 부자지간이라니까.”

안청광의 시선이 다시 아들 쪽을 향했다.

“애초에 이번 일에 마교가 개입한다는 말은 없지 않았소?”

“생각지 못한 일은 항상 벌어지는 법이지. 당신이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이나 했어?”

그래, 그건 자신조차 몰랐다. 이런 인생을 맞닥뜨릴 줄은.

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이 결정을 내리는 데 불과 반 각이 걸린 것을 봤을 때 말이다. 밥을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보다 조금 더 걸렸다.

“저 마교 여인은 누구요?”

“피는 못 속이는군.”

아들과 닮았다는 말임을 알고 안청광이 차갑게 인상을 굳혔다.

“아들 닮았다는 말이 이렇게 화낼 일인가? 당신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었어.”

안청광은 이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확실히 그는 아들과는 달랐다.

“저 남자는 누구요?”

제대로 된 질문에 차이란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당신이 평생 충성을 바쳤던 사도맹에서조차 당신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악귀와 손을 잡으면서 마귀가 안 올 줄 알았어?”

위험하다고 안 오실 분이 아니잖아?

“그런 대단한 마귀라면 왜 죽이지 않소?”

안청광은 궁금했다. 이 여인이 죽이기로 마음먹으면 못 죽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에 자신이 죽을 뻔했던 것처럼.

“마귀도 여러 종류가 있지. 무서운 마귀도 있고, 잔인한 마귀도 있고, 사람을 가지고 놀다 망가뜨리는 마귀도 있지. 저 마귀는 어떤 마귀일 거 같나?”

그녀가 언급한 마귀보다 더 무서운 마귀일 줄 알았는데.

“착한 마귀.”

안청광은 그녀가 농담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마귀와 악귀가 뒤섞여 싸우다 보면 동질감도 느끼고 대충 봐주기도 하고, 서로 나눠 먹기도 하고.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당신도 그렇게 살아왔을 테니까. 한데 저 착한 마귀는 그런 게 없어. 그냥 뎅강 잘라버리지. 그저 착하기만 한 놈이면 이용해 먹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마귀거든. 착한 것도 문제, 마귀인 것도 문제.”

안청광은 이 여인이 저 젊은 남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 여인을 두렵게 하는 마교의 젊은 고수.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가?

바로 그 순간 안청광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곳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해서 애초에 배제한 한 사람을.

“마교 소교주?”

설마하는 그의 물음에 나와서는 안 될 대답이 나왔다.

“아들 닮았다는 말 취소할게. 당신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사도맹이 왜 정보를 주지 않았는지. 착한 마귀라고? 그래, 그가 마협이라 불린다는 소문을 들은 적도 있다.

“이런 미친년이!”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친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 당신도 미쳐야 해.”

차이란이 천천히 안청광의 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목에 그어진 붉은 선을 따라 움직이다가 마지막에 멈췄다.

“저 소교주는 나처럼 봐주지 않거든.”

* * *

“소저에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소.”

기어코 안후평은 이안을 데리고 객청으로 갔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참가자를 심사 보는 사람과 만나게 했다간 나중에 문제가 될 겁니다.

사추는 전음으로 만류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무슨 문제?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할 건데.

사추는 객청에는 절대 가기 싫었다. 그 무섭고 괴이한 자들을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고, 더 얽히기도 싫었다.

―방주님이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하지만 이 만류도 이 여인이라면 모든 걸 감수할 수 있다,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 자네가 일러바치면 아시겠지.

결국, 그 고집을 못 꺾고 천화루주가 있는 객청에 도착했다.

객청 안으로 들어가자 천화루주 일행은 지난번처럼 편한 모습으로 있지 않았다.

창문으로 자신들이 오는 것을 본 것일까?

천화루주는 자리에 서 있었고, 나머지 호위들도 모두가 일렬로 서 있었다.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예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서 오세요.”

천화루주의 인사에 뒤에 서 있던 극악소마와 무면객들도 일제히 인사했다.

그 극진한 환대에 안후평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 이렇게까지 정중하지 않았던 자들인데.

‘그래, 진작 이랬어야지. 이것들이 이제 정신을 차렸군.’

이안이 보는 앞에서 위신이 살아나자 안후평이 가슴을 쫙 펴며 호탕하게 말했다.

“잘들 있으셨소?”

그가 어찌 알겠는가? 그 정중한 인사가 뒤에 서 있는 검무극을 향한 것임을.

그때 사추는 왠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두 호위 놈들이 만나면 서로 어떻게 대할까 싶어 살피고 있었는데.

‘웃어?’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미친놈들끼리 서로 알아보는 건가?’

설마, 이들이 아는 사이일 거라는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그때 사추가 무면객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예전에 자신의 옆에서 빤히 보던 놈이었나? 면사를 쓰고 있으니 다들 비슷비슷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사추는 그를 못 본 척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다른 쪽을 향했다. 고개를 돌린 쪽에도 무면객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왜 자꾸 나를 쳐다보냐고!’

사추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보지 마라! 제발 보지 마라!’

그러다 슬쩍 고개를 들었는데 여전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용 선생 죽은 거 말 안 했다고. 앞으로도 안 할 거라고!’

이렇게 사추가 시선 둘 곳을 찾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안후평은 신이 났다.

“이쪽은 내 귀한 손님인 이 소저요. 본방 구경을 시켜드리다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렀소. 여긴 이번 대회에 심사를 맡으신 천화루주시오.”

나 대회 심사를 맡은 사람까지 이렇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야!

안후평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다.

대회 심사를 맡은 사람이라 했음에도 이안은 그다지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안이에요.”

안후평은 그런 점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역시 마인이라 성격이 시원시원하군.’

왜 심사하는 사람을 만나게 했느냐, 나는 정정당당하게 천하제일미가 되고 싶다, 이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았으면 정말 짜증 났을 것이다.

당연히 이안과 천화루주는 서로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었다.

“혹시 이번 대회에 나오신 분인가요?”

안후평이 이안 대신 대답했다.

“맞소. 이 소저는 예선을 통과하셨지요. 아, 두 분은 본선에서 보게 되겠군요.”

천화루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물론 안후평 앞에서 펼치는 연기였다. 이런 상황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했으니까.

천화루주가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듯 주변을 물렸다.

“조용히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호위분들은 모두 나가 있으세요.”

그러자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이 곧장 밖으로 나갔다.

이안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가 있으세요.”

이안은 천화루주가 극악소마를 내보낸 이유가 검무극과 잠시 함께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내보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검무극도 군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때 안후평이 사추를 쳐다보았다.

“자넨 안 나가고 뭐 하나?”

설마 자신도 나가게 할 줄 몰랐기에 사추는 내심 당황했다.

‘저 밖에서 저들과 함께 있으라고? 제발!’

하지만 여인들이 다 호위를 내보내는데 겁쟁이처럼 자신만 호위를 남길 안후평이 아니었다.

결국 전음으로 한 소리 듣고서야 사추도 밖으로 쫓겨나왔다.

마당에 검무극과 극악소마, 그리고 무면객들이 서서 자신을 쳐다보았다.

사파 무인 체면이 있지!

아니, 없었다. 사추는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극악소마가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왜? 왜 오냐고!’

극악소마는 기겁한 사추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웃었다.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는 뜻임을 알고 사추가 긴장을 풀던 그때.

스르륵.

어느새 수혈을 제압당한 그가 잠이 들며 뒤로 쓰러졌다.

사방에 무면객들이 주위를 감시했고, 그 가운데서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대화를 나눴다.

그러잖아도 밤에 극악소마를 은밀히 만나러 오려 했는데, 당당히 소방주의 안내를 받으며 올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없었기에 검무극은 곧장 해야 할 말부터 전했다.

“이번 배후는 차이란이란 살수 여인입니다.”

검무극은 그녀가 이끄는 여인으로 이뤄진 살수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무면객들도 모두 함께 들었다.

“살수 특유의 기도가 없는 이들이니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극악소마는 물론이고 무면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에 대해 듣자 자연스럽게 극악소마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적이 누군지를 알았다면 왜 없애버리지 않으십니까? 루주의 예언은 무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본선이 열리기 전에 다 없애버리자는 말씀이시지요?”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표를 내고 있진 않지만, 극악소마는 예언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무극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

“왜 그러지 않으십니까?”

검무극 역시 그런 생각을 이미 했었다는 듯, 그 이유를 밝혔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다른 배후가 있다면 그자까지 함께 해치우기 위해서죠.”

사도맹주를 죽이는 일은 평범한 음모가 아니었다. 숨어 있던 다른 배후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무림맹에서도 천애거사 뿐만 아니라 명심의원의 소정락이 있었듯이.

죽일 수 있을 때 한꺼번에 처리하지 못하면 언젠가 또 다른 위험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실 두 번째 이유가 더 마음에 걸립니다.”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지며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왜 저들은 사도맹주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물론, 예전부터 준비된 계획일 수는 있다. 무림맹에서 수십 년을 준비한 것처럼, 신화방을 끌어들여서 사도맹주를 죽이는 계획을 세웠을 수는 있다.

한데 무림맹이 실패한 지금 이 상황에서 사도맹주를 죽인다? 심지어 자신이 개입한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설령 이 계획을 성공하더라도 비 소맹주가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겁니다. 과연 놈들에게 어떤 이득이 있어서 이 계획을 밀어붙이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들이 있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놈들에게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극악소마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교주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검무극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루주님이 내리신 예언인데, 틀리면 안 되겠죠? 저와 함께 무대에 오르시죠?”

그렇다고 순순히 비수에 찔리겠다는 의미가 아님을 어찌 모르겠는가?

당당히 운명에 맞서자는 말임을 알기에 극악소마의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제가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주위 무면객들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깃든 웃음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극악소마의 웃음을 닮아 있었다.

그때 건물 안에서 이제 들어오라는 안후평의 말이 들려왔다.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무면객들이 혈도를 눌러 잠든 사추를 깨웠다.

바닥에 누워있던 사추가 눈을 떴을 때, 무면객들이 쪼그리고 앉아 둘러싼 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추는 다시 눈을 감았다.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건물 안에서는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안후평의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 * *

비사인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사도맹주 백자강의 개인연무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백자강은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철인형을 정성껏 닦고 있었다.

사도맹주를 위해 만들어진 이것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검상이 있었는데.

“나는 이것들이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고 있다.”

그 말만으로도 백자강의 경지와 그가 한 수, 한 수, 어떤 마음으로 검을 휘두르는지 알 수 있었다.

“넘어서고 싶을 때마다 이 철인형 위에 여러 사람이 겹쳐졌었다.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은 마교주였지.”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사부는 검우진을 진정 뛰어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을 편하게 하는 사부의 모습에서, 사부가 어떤 경지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인생에선 누가 될지 궁금하구나.”

백자강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이제 이걸 네게 물려주려 한다.”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맹주님!”

“애초에 네게 물려주려 했던 거다. 가져가서 잘 수련하거라.”

비사인은 이 철인형이 백자강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철인형을 물려준다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을 아끼고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비사인은 사양하지 않고 정중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반드시 패왕진천검법의 대성을 이루겠습니다. 반드시 강해지겠습니다.”

힘찬 각오에 그의 감격이 묻어나고 있었다.

백자강은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교의 소교주가 전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소식에 백자강과 비사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수련장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기에 비사인이 나가서 전서를 받아왔다.

비사인이 전서를 읽었다.

“무슨 일로 보냈느냐?”

“천하제일미 선발대회와 관련한 일입니다.”

안휘에서 열리는 천하제일미 선발대회에 대해서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신화방주가 직접 찾아와서 이런 대회를 개최할 작정이며 그 부상으로 사도맹주와 함께하는 연회 자리를 만들어도 되겠느냐는 허락을 구했었다.

신화방은 예전부터 사도맹을 위해 힘써온 문파로, 최근 그 위세를 크게 떨치며 성장한 후에도 그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허락했던 일이었는데, 그에 관해서 검무극이 전서를 보내온 것이다.

전서를 확인한 비사인의 표정이 굳어지며 눈빛이 심각해졌다.

“그 연회에서 맹주님을 암살할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검무극이 보낸 전서이니 잘못된 내용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적이 누군지까지 언급했다.

“최고 실력을 지닌 여자 살수이고 여인으로 이뤄진 살수 조직을 이끌고 있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 계획이었음에도 오히려 백자강은 반가워했다.

일전에 무림맹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 받으며 왠지 소외감을 느꼈던 그였다.

이것들이 무림맹주만 노려? 나를 무시해?

비사인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중대한 내용을 소교주를 통해 듣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역시 비사인 책임이 아니었다. 굳이 책임을 묻자면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 징계를 내려야 하겠지만.

백자강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노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소교주가 뛰어나서 앞서간다 생각했다. 한데 겪어보니 운명이 소교주를 대하는 방식이 따로 있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배후 세력과 검무극 사이에 얽힌 인연이 깊어서라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더냐?”

“이번 연회에는 참석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전해왔습니다.”

하지만 백자강은 불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를 죽이겠다는 음모에 주인공인 내가 안 가면 되겠느냐?”

비사인은 사부가 절대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검무극이 그 일을 대신 막고 있는 상황이라면? 사부는 자기 일을 남에게 맡기는 사람이 아니다.

“한데 소교주가 보낸 전서는 두 장이었습니다.”

“두 장이라고?”

“한 장은 방금 말씀드린 공식 전서고, 다른 한 장은 제게 왔습니다.”

비사인이 그 자리에서 전서를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비사인이 전서를 백자강에게 내밀었다. 개인적인 전서를 왜 보여주나 했는데.

내용을 확인한 백자강의 작은 눈이 큰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맹주님이 위험하다고 안 오실 분이 아니잖아? 어차피 올 거 차라리 일찍 모시고 와!

당신들 딱 그만큼 어리석잖아?

천화루주와 작별을 고하고 밖으로 나온 안후평은 아껴두었던 말을 꺼냈다.

“자, 내 거처에 가서 한잔합시다.”

오직 이안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천화루주와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미리 기별해 놓았으니 좋은 술과 요리가 준비되어 있을 거다. 거기에 악공을 불러 분위기 좋은 연주까지 한다면? 안 넘어올 수가 없지!

안후평은 당연히 이안이 그러자고 할 줄 알았다. 심사 보는 사람을 소개해 줬으니,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할 거로 생각했는데.

“다음에 하죠.”

이안은 딱 잘라 거절했다.

“술이 싫으시면 차라도 한잔.”

“다음에요.”

지금까지 이렇게 대놓고 거절한 여인이 없었기에 안후평은 당황스러웠다.

다른 여인 같았으면 분노를 터뜨렸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마인이기도 했고, 또 정말 마음에 들었기에 여전히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서 있던 그에게 이안이 다가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좋은 냄새가 났다.

자신에게만 들으라고 속삭여주는 것도 너무 좋았다.

“다음에 만나면 대회를 개최한 진짜 이유를 알려주세요. 저는 궁금한 건 못 참거든요.”

그 말을 하고는 이안이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따라 검무극이 걸어갔다.

‘저 새끼! 확 패버리고 싶은 저놈!’

괜한 불똥이 애꿎은 검무극에게 옮겨붙었지만, 불은 타오르기도 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그에게 남은 사람은 사추였다.

사추는 멍하게 서서 객청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뭘 그리 쳐다보나 안후평도 쳐다보았다. 창가에 무면객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저자들에게 돈이라도 빌려줬어?”

멍하게 있던 사추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닙니다.”

“한데 왜 그렇게 봐?”

사실 사추는 아까 마당에서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누워있던 자신에게 무면객 중 하나가 손을 내밀었다. 안 잡으면 죽을 거 같아서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이제 저들과 진짜 손을 잡았다.’

이전까지는 겁이 나서 입을 열지 않았다면, 이제는 저들과 한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더욱더 비밀을 지켜야 할 것 같은 느낌은 덤이었고.

“요즘 왜 이래? 오랜만에 예쁜 여자를 보니까 흥분돼?”

“아닙니다.”

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지금 사추의 눈에는 여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용 선생이 저들에게 죽었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는 사느냐 죽느냐 소리 없는 혈투 중이었다.

“한데 어디 가십니까?”

“아버지께.”

분위기로 볼 때 지금 안후평은 방주에게 가서 따져 물을 기세였다. 대체 무슨 일로 대회를 개최한 거냐고.

그 이유를 이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정말 여자에게 미친놈처럼 굴고 있었다.

“안 됩니다. 방주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

사추가 앞을 막아서자 안후평이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

사추가 다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확실히 평소와 다른 행동이었다.

“왜 이래? 언제부터 날 걱정했다고?”

그래, 항상 안후평을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주기만 했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개소리를 하든, 그냥 호위만 했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안후평의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이 삶에 주역이었던 적이 없었는데, 왠지 자꾸 나서야 할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안후평은 아버지가 계시는 대청으로 갔다.

사추의 걱정과는 달리, 안청광은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더냐?”

차분하게 되묻는 아버지의 모습에 안후평은 내심 당황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면서 버럭 화를 내실 거로 예상했는데. 그래서 불호령을 맞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네, 마지막에 심사자를 바꿨다고 들었습니다.”

안청광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럴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안청광은 아들이 왜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니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아라.”

자신이 아는 아버지는 절대 저런 말을 해주는 분이 아니었다. 아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했는데 또 그걸 묻느냐며 이미 고함을 내질렀을 것이다. 손찌검을 당할 각오까지 하고 왔는데.

그러면 오히려 그녀에게 가서 할 말이 있을 거 같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했소, 하면서.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가지는 이 순수한 마음을 그는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차분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나중에 못다 한 이야기 다 해주마.”

아버지의 부드러운 눈빛에 안후평은 감격했다.

한 번도 아버지가 이렇게 좋은 말로 자신을 대한 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한심하게 여겼으니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이안을 잊었다. 그녀에게 해줄 말을 듣지 못했더라도, 그래도 괜찮았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후평이 정중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물러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안청광의 얼굴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다고 이렇게 쉽게 물러나다니? 저리 쉽게 감동하다니?

이렇게 속을 훤히 내보이고 다니는 아들놈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

“사랑에 빠진 남자는 속마음을 감추지를 못하는 법이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안청광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마찬가지요.”

소교주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미친년이라고 욕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였다.

“당신도 내게 감추는 게 있다는 걸 감추지 못하고 있소. 당신은 뭐에 빠져 있소?”

차이란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와 손잡은 걸 후회해?”

그렇지는 않았다.

어느 날 밤, 잠에서 눈을 떴는데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했으면 이미 죽은 목숨.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제안을 거절하면 흑천문(黑天門)으로 갈 거야.

흑천문은 안휘에서 가장 크고 강한 문파였다.

안청광은 신화방을 크게 키워냈지만, 흑천문만큼은 이기지 못했다.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흑천문주만큼 해낼 수는 없었다. 타고난 능력과 그릇의 차이를 느꼈다. 흑천문주는 벽이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벽.

그녀의 말에 안청광은 말했다.

―가지 마시오.

여인의 제안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신화방에서 천하제일미 대회를 개최하고 그 자리에 사도맹주를 초대해 주면, 사도맹주를 제거하고 그 죄를 흑천문주에게 뒤집어씌우자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을 그리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애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인생이었고, 흑천문을 무너뜨리고 안휘 제일의 사도방파가, 나아가 언젠가는 사도제일방이 되는 게 자신의 꿈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거절하면 이 여인은 흑천문으로 가서 똑같은 제안을 할 것이다. 아니, 흑천문으로 가지 않았을 거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걸 알고 왔을 테니까. 자신이 오랫동안 키워온 욕망의 냄새를 맡고 찾아왔을 테니까.

“소교주는 건들지 마시오.”

“사도맹주를 죽이는 일을 받아들였으면서, 뭐가 무섭나?”

얼핏 생각했을 때 마교 소교주가 개입한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도맹주의 죽음에 마교가 개입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 혼란 속에 자신이 도왔다는 사실은 영영 묻힐 테니까.

이 한 가지의 경우만 뺀다면.

만약 소교주가 죽는다면?

과연 천마신교에서 관련된 자들을 그냥 둘까? 죄가 있든 없든 관련된 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오지는 않을까? 자신이 아는 천마신교라면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대회를 열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신화방을 멸문시키려 들 것이다.

“소교주를 죽이는 건 절대 안 되오.”

“안 죽여.”

“절대 안 되오!”

거듭된 만류에 차이란은 짐짓 심술궂은 말을 남기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자꾸 그러니까 진짜 죽이고 싶잖아?”

* * *

달이 휘영청 뜬 들판에 차이란이 홀로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은 마치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그 숨결을 헤치며 저 멀리서 한 남자가 걸어왔다.

그는 한껏 멋을 부린 남자였다. 비싼 옷과 장신구에 미인도가 그려진 쥘부채까지.

게다가 얼굴에는 짙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는데 새하얀 화장이 너무 지나쳤다. 개성이 지나쳐 자학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랬기에 남자의 얼굴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그녀 앞으로 걸어오면서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랜만이야, 친구.”

남자의 인사에 차이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직접 가져올 줄은 몰랐군.”

“내가 가져다준다고 했어. 당신 얼굴이나 볼까 해서.”

남자의 이름은 화도명(華道名).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관계였다. 의외로 말도 잘 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차이란은 다른 때보다 편안한 표정이었다.

“내가 아니라 소교주를 보러 온 거겠지.”

화도명이 순순히 인정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은 평생 겪기 어려우니까. 정말 소교주까지 죽일 거야?”

과연 안청광의 예감은 정확했다. 소교주를 안 죽이겠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도맹주에 소교주까지. 혼자서 해내기 벅찰 텐데?”

“그걸 알면서도 내린 명령이잖아?”

“꼭 내가 내린 명령이라는 말처럼 들리네.”

“적어도 말릴 수는 있었겠지.”

화도명이 딴청을 부리듯 빠르게 부채질을 했다.

“알다시피 이쪽도 사정이 복잡해서.”

차이란은 별로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교주 만나 봤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화도명이 빠르게 물었다.

“어땠어? 정말 소문대로 굉장해?”

“궁금하면 직접 만나 봐.”

“목숨을 걸 만큼 궁금하진 않고. 여긴 어디까지나 심부름꾼이자 구경꾼으로 왔다.”

“당신이 겁을 내는 사람도 있었군.”

그러자 화도명이 생각지 못한 사람을 언급했다.

“그 이야기 못 들었지? 악군학이 돌아왔을 때…….”

일왕이자 검왕인 그가 언급되자 차이란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차이란이 같은 편을 통틀어 유일하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악군학이었다.

그녀는 남녀의 감정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또 인간으로서의 호감이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화도명이었다.

“상부에서 추궁했었지. 왜 소교주를 죽이지 않고 돌아왔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지?”

“이렇게 말했어.”

그가 목청을 가다듬고는 악군학의 말을 흉내 냈다.

“내가 살려준 게 아니오. 소교주가 나를 살려줬지.”

그 말에 차이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리가?”

그녀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악군학이 누군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그래, 그 실력에 소교주에게 졌을 리 없지. 한데 진짜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 자리에 있었거든.”

차이란은 소교주를 떠올렸다. 아직 검무극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강한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악군학을 살려준 거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야.”

적어도 차이란에게는 다음에 나온 말이 더 놀라운 소식이었다.

“악군학이 그 자리에서 조직을 떠나겠다고 선언했지. 정말 끝내주더군. 비궤를 가져왔으니, 당신에게 진 빚은 다 갚았다면서.”

차이란의 표정이 여러 감정으로 바뀌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 사람답네.”

이렇게 그의 결심을 이해했다가.

“그 사람마저 떠나면 우리 같은 쓰레기만 남겠군.”

자책도 했다가.

“상부에서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의구심도 가졌다.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감정이 빠르고 복잡하게 바뀌는 것을 화도명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유일하게 그녀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이 악군학임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가 악군학을 적으로 삼을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나?”

그러자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 딱 그만큼 어리석잖아?”

그녀의 말에 화도명이 소리 내서 웃었다.

하지만 차이란은 웃지 않았다. 악군학이 무사히 떠나면 아쉬워서 문제고, 조직이 그를 붙잡아도 문제였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올지도 모른다.

화도명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래도 우리가 완전히 바보는 아니야. 이걸 드디어 만들어냈으니까.”

그가 꺼낸 것은 작은 상자였다.

“이것으로 전세 역전인가?”

그 상자를 차이란에게 내밀며 물었다.

“자신 있어?”

“없으면?”

“내가 대신해주고.”

짙은 화장 위에 화도명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 때의 모습과 지금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차이란이 조용히 상자를 가져갔다.

“구경하러 왔으면 구경이나 해. 소교주는 내 손에 죽을 거야.”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되겠지.”

화도명이 돌아서며 말했다.

“구경 잘하겠습니다!”

화도명이 웃으며 부채질하면서 살랑살랑 걸어갔다.

저 멀리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차이란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하나의 붉은 구슬이 들어 있었다.

인생은 짧아도 속눈썹은 길어야지요

차이란이 상자를 들어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구슬의 표면은 매끄러웠고 감도는 붉은빛은 투명하면서도 깊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구슬 내부에는 마치 사람의 혈맥 같은 것들이 그물처럼 뻗어 있었고, 그 주위를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아른거리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자신이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니라 구슬이 자신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차이란이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닫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장한 사람은 검은 무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차이란의 수족이자 살수 조직 가인교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일교(一橋)였다.

그녀 역시 아름다웠는데 과연 이번 대회의 예선을 통과한 상태였다.

일교가 정중히 인사한 후 보고했다.

“사도맹주가 사도맹을 출발했습니다. 아마 예상하건대 본선이 열리는 날이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차이란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예상했던 일정보다 빠르군.”

본선에서 최종전에 진출할 여덟 명을 뽑고, 그로부터 사흘 후에 결승 무대를 가지게 된다.

사도맹주가 참석하는 연회가 열리는 것은 결승 다음 날 저녁.

한데 결승도 아니고, 본선이 열리는 날에 도착한다?

“이번 대회의 본선을 보려는 것 같습니다.”

마교 소교주가 개입한 이후, 여러 변화가 생겨나고 있었다. 계획을 실행하려는 쪽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호위는?”

“예상대로 맹주전 호위대와 소맹주가 사도십삼랑을 거느리고 따라나섰습니다.”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화루주 쪽은?”

“여전히 객청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극악소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차이란이 일교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그들은 괴이하고 이상해서 방심하기 쉽다. 하지만 잊지 마라. 그들 이름 앞에 극악이 붙어 있다는 것을.”

일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일교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의 수장을 바라보았다.

차이란이 얼마나 뛰어난 살수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였지만, 이번에 상대하는 적은 무지막지했다. 지금 그녀가 입고 있는 저 화려한 옷보다 더 화려했다.

소교주와 극악소마, 그리고 사도맹주와 소맹주.

일교의 눈빛에 담긴 걱정을 읽은 차이란이 들고 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걱정하지 마라, 여기 우리가 이기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

상자는 굳게 닫혀 있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상자 주위를 일렁이고 있었다.

* * *

드디어 천하제일미 선발대회 본선의 날이 밝았다.

새벽부터 일어난 이안은 뒷산에 올라서 무공을 수련했다.

땀을 흘리며 수련하는 그녀를 검무극이 따라와서 지켜보았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할 때도 있지만, 되도록 이안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너무 떨려서요.”

그녀는 무공수련을 할 때가 제일 마음이 편했다.

한바탕 수련을 마친 그녀에게 검무극이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

“좀 살 것 같아요.”

말은 그랬지만 여전히 떨렸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무공을 펼치는 것도 떨리는 일인데, 하물며 미모 자랑을 해야 했으니.

검무극은 그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읽고 있었다.

“미안하다.”

검무극의 말에 이안이 웃었다.

“제가 오히려 고맙죠. 도련님이 아니었다면 언제 이런 흥미로운 인생을 살아보겠어요?”

“맞지? 그렇지?”

맞장구 대신 이안은 고개를 푹 숙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럴 리가요.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어요.”

검무극이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객잔으로 돌아왔을 때, 한 여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검무극이 부른 사람이었다.

“내가 여기 이분을 보내달라고 했다.”

여인은 천마신교 안휘 지단에서 수소문해서 찾아낸 여인이었다. 그녀는 화장에 능통한 여인으로, 이안에게 화장을 해주려고 온 것이다.

“맨얼굴로 본선에 나갈 수는 없잖아?”

이안은 검무극이 이런 데까지 신경을 써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그러잖아도 화장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깨끗이 씻고 동경 앞에 앉은 이안에게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생은 짧아도 속눈썹은 길어야지요.”

이 여인에게 화장은 인생 그 자체였다. 무인에게 검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녔다.

그녀는 이안이 산 두벌의 옷 중 오늘은 하얀 궁장을 입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그 옷에 맞는 화장을 해주면서 화장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실력을 지닌 여인이 전수해 주는 화장술이었다.

그녀가 화장하는 동안 검무극은 눈을 감은 채 운기조식하며 내공과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본선 무대가 시작되었다.

천화루주가 본 장면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당장 오늘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사흘 후 결승 무대가 될 수도 있었다.

천화루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화장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짜 장인은 자기 일에 시간을 오래 끌지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었다. 아니, 이안의 얼굴로 보여주었다.

가볍게 툭툭, 이렇게 착착.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손놀림이 가벼웠다. 이 여인의 화장술은 무인으로 따지면 쾌검술이었다.

“자, 다 됐습니다.”

화장을 마친 이안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긴장한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동경 속 모습은 자신조차 적응이 되지 않았다. 원래보다 더 예쁜지 자신은 판단이 되지 않았기에, 검무극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다.

운기조식하며 눈을 감고 있던 검무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말없이 이안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앞으로 이 얼굴로 살아라.”

“만날 화장하라고요?”

본얼굴보다 화장한 얼굴이 더 예쁘다! 이렇게 들리는 말이기에 이안은 화장해 준 여인을 돌아보며 농담을 던졌다.

“실력이 너무 좋으셔서 제 인질이 되셨어요.”

물론, 검무극의 그 말에 다른 뜻이 있음을 예감했다. 무공에 빠져 사는 자신에게 매일 화장하고 살라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과연 검무극의 말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화장한 이 얼굴이 주는 느낌으로 살라고.”

화장하지 않았을 때의 그녀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면, 화장한 그녀는 강렬해 보였다. 뭐라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는데 그러면서도 아름다웠다. 확실히 여인의 화장에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마음 약하게 살지 말라고. 너무 착하게만 살지 말라고. 말 먼저 걸어주지 말고, 누가 다가오면 꺼져! 하면서 살라고.”

도련님도 그렇게 못 사시면서!

검무극이 어떤 마음으로 해주는 말임을 잘 알았기에 이안은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이 약해질 거 같으면 화장부터 하겠습니다.”

“그럼 가볼까?”

가기 전에 이안이 여인에게 정중히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 감사했어요.”

“이미 큰돈을 받았으니 제가 감사할 일이지요. 결승에 오르시면 그때 뵙겠습니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이안의 겸손은 여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흘 후에는 붉은 궁장에 어울리는 화장술을 전수해 드리죠. 기대하세요!”

여인은 당연히 이안이 결승에 진출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수많은 여인에게 화장을 해줬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었고, 또 이렇게나 화장한 보람이 나는 여인 역시 처음이었으니까. 정말 인질로 끌려가 매일 화장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검무극과 이안이 신화방으로 향했다.

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안은 면사 달린 죽립을 쓰고 얇은 피풍의로 옷을 가린 채 이동했다.

본선에 진출한 여인은 백 명이 넘었기에 오늘 본선 무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본선 무대 뒤쪽으로 신화방에서 가장 큰 대청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참가자들이 기다리는 대기실이었다.

그곳 대기실에 호위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안.”

“네, 도련님.”

“알지?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이번 적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뤄진 살수 조직이라 했다. 차이란 뿐만 아니라 다른 살수들도 여럿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 아니,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제 믿을 건 너 자신뿐이다.”

이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그는 바로 안후평이었다. 사추와 무인들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늘어섰다.

“이 소저. 좋은 결과 있길 바라겠소.”

“감사해요.”

“본선은 반드시 통과할 거요. 내가 보장하겠소.”

보장하겠다는 말이 꼭 자신이 힘을 써서 통과시켜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런 말이 상대에게 실례가 되는 말이고, 오히려 점수를 잃는 말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상대의 감정을 살피는 훈련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부친 안청광은 신화방을 크고 강력하게 키워냈지만, 그 전념의 대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러야 했다.

이안이 더는 그와 말을 나누지 않고 대청으로 들어갔다.

몇 마디 해주면 좋으련만. 괜한 아쉬움에 심술이 난 안후평은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볼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

정말 이유 없이 미운 녀석.

데려가서 두들겨 패고, 잔뜩 겁을 주고 싶은 녀석.

그랬기에 나가는 말이 고울 수 없었다.

“이 소저 호위 똑바로 해! 알았나?”

그는 평생을 호위받는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었기에, 호위하는 이들은 언제나 무시하고 살아왔다.

“네.”

공연한 심술이 질문으로 이어졌다.

“언제부터 이 소저 호위를 했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냐고!”

이안이 언제부터 자신을 호위했더라.

“꼬맹이 때부터 했습니다.”

“꼬맹이?”

순간 안후평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호위를 받는다? 그건 귀한 신분이라는 뜻인데?

“이 소저가…… 신교에서 뭐 하는 분이지?”

검무극은 안후평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이제야 묻느냐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안후평의 인상이 굳어졌다.

‘이 새끼가 웃어?’

이걸 어떻게 확 조져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그곳으로 한 여인이 걸어왔다.

그녀를 보자 안후평은 깜짝 놀랐다. 이안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들을 향해 걸어온 것이다.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미녀는 바로 차이란이었다.

“이 소저는 먼저 들어갔나 보군요.”

“방금 들어갔습니다.”

“그럼 제게 기회가 왔네요.”

차이란이 검무극을 보며 매혹적으로 웃는 모습을 보자 안후평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보아하니 이안과 아는 여인 같은데, 단지 호위 무인이라는 이유로 저런 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때요? 몰래 식사하러 갈까요?”

평소처럼 농담 같은 유혹을 하고 있었지만, 검무극을 보는 차이란의 마음은 분명 이전과 차이가 있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살려줬다고? 믿을 수 없어.’

악군학이 그를 살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무작정 시킨다고 다 듣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좋아했던 것이고.

그래서 검무극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그가 떠나려고 하는지. 혹시라도 어디로 떠나려 하는지.

어제 화도명에게 그에 대해 듣고 난 후 자꾸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악군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이 소교주가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저녁에 결승 진출 축하할 겸, 같이 한잔해요.”

자신은 당연히 통과할 거라는 말이었고, 검무극은 평소처럼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시죠.”

검무극의 대답에 차이란은 의외란 눈빛을 보냈다.

“이 소저 떨어져도 약속은 지켜야 해요.”

“소저야말로 떨어져도 부끄러워 말고 오시오. 술 한잔 사주겠소.”

차이란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끼어들 기회만 보던 안후평은 끝내 말을 걸지 못했다.

평소의 안후평이었다면 분명 대화 중에 끼어들었을 거다. 소저는 누구시냐, 나는 누구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다.

한데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안에 대한 일편단심 때문이 아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분명 그녀가 주는 느낌이 그러했다. 지금은 방해하지 마!

“저 여인은 누구지?”

“차이란 소저입니다.”

“네가 뭔데 이 소저 허락도 없이 저녁 약속을 마음대로 잡아? 네가 뭔데 떨어져도 부끄러워 말고 오라 마라야?”

자신이 한마디도 건네지 못한 여인과 농담까지 해가며 대화를 나누자 그는 질투심이 폭발했다.

정말 이안만 아니라면, 사추와 수하들을 시켜서 어디 한적한 곳에 끌고 가서 반쯤 죽여놨을 것이다.

“너 이 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마! 입 여는 거 내 눈에 띄는 순간, 그 입 찢어버릴 거다!”

그렇게 협박한 후 사추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침 수하에게 보고를 받고 있던 사추가 다급히 말했다.

“사도맹주과 소맹주님이 도착하셨답니다.”

“뭐? 사도맹주님이 벌써?”

안후평이 크게 놀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도맹주와 소맹주에게는 정말 잘 보여야 했다.

“어디에 계시나?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아마 방주님을 만나고 계실 겁니다.”

“어서 애들 보내서 알아봐. 특히 소맹주님 어디로 이동하시면 당장 연락하라고 하고!”

자신에게 더 중요한 사람은 사도맹주가 아니라 사도맹 소맹주였다. 그에게 잘 보여 놔야, 앞으로의 인생이 편해질 테니까.

“내가 제일 먼저 꼭 만나야 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허둥대고 있는데, 그의 눈에 저 멀리 검무극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대는 젊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등을 돌리고 있어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한마디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안후평이 사추와 수하들을 데리고 성큼성큼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입 열면 찢는다고 했지?”

“저는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검무극이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일러바쳤다.

“이 사람이 억지로 말을 시켰습니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딴 심장을 만드는 중인가?”

뒤에서 들려온 비사인의 목소리에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차이란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아쉽게도 자네가 본 새 심장은 내 몸에선 뛰지 않는 심장이라네.”

검무극이 뒤로 돌아섰다.

원래 비사인의 저 무서운 얼굴에는 옅은 미소 하나 끼어들 틈도 없었지만, 이제는 제법 큰 반가움이 끼어들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부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있는 곳이었기에 바짝 긴장하고 왔지만, 검무극을 만나자 드는 이 반가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언제 도착했나?”

“이제 막.”

“역시 자네군.”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이제 곧 천하제일미 대회의 본선이 시작되려 하고 있거든. 미녀들을 보기 위한 자네의 집념에 말들은 얼마나 혹사당했을까?”

비사인을 놀리기 위해 끌려 나온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북해빙궁으로 돌아간 한설까지 끌려왔다.

“자네가 본선 시간에 딱 맞춰 온 걸 알면 한 소저가 뭐라 생각할까?”

비사인은 어이가 없었다.

전서까지 보내서 어차피 올 거 일찍 오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만나자마자 놀리기 시작하는 검무극을 보자, 비로소 그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걸어오며 말했다.

“내가 입 열면 찢는다고 했지?”

그 순간 비사인은 보았다. 검무극의 얼굴에 스치는 장난기를. 아니나 다를까.

“저는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억지로 시켰습니다.”

정말 못 말리는 검무극이었다.

그나저나 눈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을 찢겠다고? 검무극의 저 입을? 맹주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저 입을!

대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광오한 말을 하는 불쌍한 희생양은 누구일까?

등 뒤에서 안후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봐, 저 말이 사실인가?”

반가워서 친구에게 말을 건 것이 억지로 말을 시킨 거라면.

비사인은 마음을 비운 사람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의 장단에 맞춰주려는 것이다.

그 모습에 안후평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물었는데 대답을 안 하고 고개만 끄덕여? 그래, 이 얄미운 호위 놈과 어울리는 놈이 다 그렇지. 일단 시작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봐, 뒤로 돌아서.”

비사인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상대의 얼굴을 보자 안후평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어이쿠, 썅!”

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놀라서 튀어나온 욕설이었다.

정말 이렇게 인상이 무서운 사람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비사인의 얼굴에 흉터가 가득했다.

베이고 일그러진, 그래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졌다.

하필이면 그때 대기실로 들어가던 미인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안하무인 안후평 인생에서 여자들 보는 앞에서 기죽는 모습 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세상 싸움은 너 혼자 다 한 거냐?”

불행히도 그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옳거니, 못 알아보는구나! 검무극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무서운 분이 말을 거니 어찌 말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비사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젠 자신의 얼굴로 장난치는 검무극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이게 그의 배려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남이 자신의 얼굴을 흉보면 같이 흉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경 쓰지 마, 친구. 그냥 너도 즐겨!

“소방주님이라면 저 무서운 얼굴이 말을 거는데 대답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오히려 검무극이 이런 장난을 쳐주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들 것이다.

검무극의 말에 안후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위 놈이 싫은 건 싫은 거고, 방금 한 말만은 인정했다. 자신이라도 대답했을 거다.

“너, 저놈 알아?”

안후평의 물음에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에게 너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모른 척해야 할 상황이었다.

비사인이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말로 대답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저 얼굴을 보면서 화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인데 왜 말을 걸었지?”

그러자 비사인 대신 검무극이 나섰다.

“제게 다가오더니 아름다운 미녀들이 많이 왔느냐고 묻더군요. 이 대회 때문에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고 하더라고요.”

안후평은 참지 못하고 비웃었다.

“그 얼굴에 여자를 밝혀?”

안후평의 말에 비사인의 눈가가 꿈틀했다.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낀 안후평이 방패를 꺼내들었다.

“나 신화방 소방주다. 이 대회 개최한 주인이야.”

그리고는 다시 검무극에게 물었다.

“대화하면서 웃던데?”

안후평의 추궁에 검무극이 억울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저 얼굴 보고 웃어야지, 인상을 어떻게 씁니까?”

안후평이 소리 내서 웃었다. 그래, 저 말도 맞았다. 그래, 이 얼굴 보면서 인상 쓰기 쉽지 않지.

“이봐, 무자비한 얼굴.”

불러서는 안 될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모자라 고용까지 제안했다.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 몰라도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참가자 대기실 앞에서 검무극과 대화하는 인상 사나운 무인. 당연히 대회 참가자를 따라온 호위 무인이라 생각했다.

“돈도 두 배로 주지.”

그를 고용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 무서운 놈 하나 데리고 다니면 정말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거 같았고.

거기에 하나 더.

안후평이 고개를 돌려 뒤에 있던 사추를 돌아보았다.

“요즘 내 호위가 영 시원찮아서 말이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말을 했으면 뭔가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또 멍하게 딴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사추는 아무래도 비사인이 낯이 익어서 계속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기억 못 할 리 없는데.

자신이 봤던 가장 무서운 얼굴은 사도맹 후계자였다. 먼발치에서 봤었는데, 그 강렬한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도맹 후계자가 대기실 앞에서 이 호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애초에 머릿속에 없었기에, 상대가 비사인일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오늘 소맹주가 왔다는 소식을 조금 전에 들었음에도 말이다.

아, 그래서 더 소맹주일 리가 없다. 지금 한창 방주와 인사를 나누고 있겠지, 이런 곳에서 저 호위와 먼저 대화를 나눌 리는 없었으니까.

“지금 뭐 하냐고!”

사추는 안후평의 질책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이게 몇 번째야! 자네 요즘 문제 많아!”

안후평이 화난 얼굴로 노려보자 사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요즘 왜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그때 무인 하나가 그곳으로 달려왔다.

“방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떠나기 전에 안후평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말하기 곤란하면 네가 모시는 사람에게는 내가 직접 말해주지.”

안후평이 돌아서 걸어가자 사추도 그 뒤를 따라갔다.

“넌 남아서 저놈 입 찢고 와!”

안후평이 다른 수하들을 모두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짜 찢으라는 말이 아님은 알았다.

상대가 마인인 데다가 좋아하는 이안의 호위인데, 진짜 찢었다간 난리 나는 거다.

만약 곧이곧대로 그랬다간 자신이 그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할 게 뻔했다.

사추가 검무극을 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앞으로 그 입, 조심해라! 진짜 찢어진다!”

검무극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손으로 입을 가렸고, 비사인은 정말 누가 저 입 한 번 못 찢나, 아쉬워했다.

사추가 저 멀리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입을 찢으려 하다니!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

비사인이 웃었다. 도착하자마자 벌써 몇 번이나 웃게 되는지 모른다. 검무극을 보면 이래서 즐겁다.

그때 일랑이 걸어와서 검무극에게 인사한 후 비사인에게 보고했다.

“맹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오자마자 검무극부터 만나러 온 그였는데, 이제 신화방주에게 인사하러 갈 시간이 된 것이다.

“나중에 보세.”

“맹주님께 인사는 나중에 드려야겠네.”

지금은 최대한 이안과 가까이 있겠다는 의미. 그만큼 돌아가는 상황이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잘 말씀드리겠네.”

“고맙네.”

몇 걸음 걸어가던 비사인이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일 알려줘서 고맙네.”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알려주기로.

검무극과 비사인이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힘없이 걸어가던 사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이 익은데?’

그때 사추의 눈에 띄는 새로운 사람.

두 사람과 함께 한 사람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사람은 사추도 아는 사람이었다.

‘일랑?’

사추가 일랑을 알아보았다. 한때 꿈이 사도십삼랑이 되는 것이었을 때가 있었다. 실력이 안 돼서 결국 포기했지만.

그렇게 존경하던 이들이었기에 그들 얼굴이라도 보려고 사도맹 정문을 지키던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찌 일랑을 못 알아보겠는가? 한데 일랑이 왜?

“으악!”

사추가 소리 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저 멀리 걸어가던 안후평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혼자 서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

“저거 요즘 정말 미쳤군, 미쳤어.”

안후평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사인과 일랑이 사추가 서 있는 쪽을 향해 걸어왔다.

사추는 보았다.

어딘가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무인들이 하나둘씩 비사인 뒤쪽으로 합류하며 뒤따르는 모습을.

하나, 둘, 셋…….

그렇게 늘어난 숫자가 모두 열셋. 자신이 꿈에서라도 되고 싶었던 그들이었다.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그의 옆으로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 지나갔다.

비사인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가버렸다.

일랑의 모습에서 설마 했는데 이제 확실했다.

‘정말 사도맹 소맹주다!’

사추는 제자리에 선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만날 사고만 치던 자신의 주인이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다. 저 자리에서 살아남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 살아남은 이유가 있다.

비사인은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대신 말을 다 했던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저 멀리 검무극을 향했다. 그는 여전히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너 뭐야?’

뭔데 사도맹 소맹주와 대화를 나눈 거냐? 정말 모르고 만난 거냐? 아니면 뭘 알고 만난 거냐?

‘대체 너 뭐냐고!’

그때 검무극과 시선이 마주쳤다.

검무극이 그를 보며 씩 웃더니, 양손으로 입을 쭉 찢는 시늉을 했다.

그 순간 사추는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조용히 있으라는 경고임을.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면 입을 찢겠다는 경고임을.

사추가 홱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저 멀리 대회장으로 나가는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천화루주와 그녀의 뒤를 따르는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이었다.

사추가 다시 홱 방향을 바꿔서 걸었다.

‘다들 내게 왜 이러는 건데?’

* * *

십여 대의 마차가 신화방 내원으로 들어섰다.

일반적인 도검에 잘리지 않고 불에 타지도 않게 만들어진 사도맹주 전용 마차였다.

착착착착착착!

일렬로 멈춰 선 마차의 문이 동시에 열리며 맹주전 호위들이 내렸다. 사도맹 최고 호위들답게 눈빛이 깊고 매서웠다.

그들이 내려서 마차 앞에 도열 하자, 비로소 열리지 않았던 마차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사도맹주 백자강이었다.

화려한 옷이 아니라 평범한 무복을 입었기에, 더욱 돋보이는 그였다. 그의 존재감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앞으로 신화방주 안청광이 달려와서 허리를 숙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그는 정말 오늘 백자강이 도착할 줄 모르고 있었다. 차이란은 그에게 백자강이 미리 도착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놀라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그런 내막을 알 리 없었기에 안청광은 허리를 숙인 채 긴장하고 있었다.

‘왜 일찍 온 거지? 혹시 뭔가 알아차린 걸까?’

바쁜 사도맹주가 며칠이나 일찍 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백자강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청광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라도 사도맹주가 뭔가를 알고 왔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긴장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백자강이 허리를 숙인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가만히 안청광을 응시하다가 불쑥 물었다.

“자네, 이 대회로 날 죽일 작정인가?”

직접적인 질문에 너무 놀란 안청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청광이 억울하다는 듯 다시 항변했다.

“절대 아닙니다!”

그 순간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안청광이 거짓말하는 걸 알아차렸지만 오히려 백자강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절세 미녀들이 너무 많아 심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이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안청광은 그제야 백자강이 농담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제 심장이 먼저 터질 뻔했습니다.”

안청광이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었는지 뭘 알고 물었는지 여전히 두려웠지만, 백자강의 표정에서 그 진의를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마침 오늘 본선 대회가 열리는 날이니 천천히 즐기십시오. 자, 우선 들어가시지요.”

그들은 함께 대청을 향해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보다는 사인이 녀석이 좋아하겠지.”

“소맹주께서도 함께 오셨습니까?”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청광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맹주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잠깐만 보고 오겠다고 대회 구경부터 하러 갔네. 녀석이 인사도 안 하고.”

사실 따지고 보면 무례가 아니었다. 비사인은 물론이고 그가 만나러 간 검무극도 방주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직 한창때 아닙니까? 제 아들 녀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청광이 뒤따르던 수하에게 아들을 찾아오게 했다.

“당장 가서 맹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리고 소방주를 찾아오너라.”

그리고는 백자강에게 말했다.

“아들 녀석이 평소 소맹주님을 흠모했습니다. 입만 열면 소맹주님처럼 되겠다고 했었지요.”

그러자 백자강도 호위무인에게 말했다.

“가서 사인이를 찾아오게. 젊은 애들끼리 인사시켜 줘야지.”

안청광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제 아들 녀석이 정말 좋아하겠군요.”

나 죽는 자리라면서?

안후평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청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낯선 무인들은 사도맹 맹주전 호위들이었다. 신화방 무인들을 애송이처럼 보이게 하는 그 위압감에 감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와야 하나?’

세상 사람 다 무시하고 다녀도 사도맹주와 소맹주에게는 잘 보여야 했다. 사파에 속해 있으면서 이들에게 잘못 보였다간 멸문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안후평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안으로 들어섰다.

항상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상석에 사도맹주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는데, 누군가 앞에서 저렇게 두 손까지 모으고 공손히 서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 사람이 사도맹주구나.’

감히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었기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고개 숙인 채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 평소 인상만 쓰고 다니다가 미소를 지으려니 너무 어색했다.

‘잘 보여야 한다.’

안후평이 떨리는 마음으로 걸어가서 정중히 인사했다.

“평소 존경하는 맹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만나서 반갑네.”

백자강은 안후평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신화방을 방문하는데 방주 일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당연히 보고 받았으니까.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망나니 후계자. 이 안후평만 보면 신화방의 앞날은 어두웠다.

물론, 안청광이 배후 세력과 손을 잡는 순간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칠흑 같은 암흑이 되어 버렸지만.

안청광이 아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실수하지 말고 잘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본 안후평이 깜짝 놀랐다.

‘저놈이 왜 여길?’

들어선 사람은 바로 비사인이었다.

안후평이 백자강과 아버지에게 빠르게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후평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비사인에게 달려갔다.

안후평이 비사인을 그 자리에 세운 후, 인상을 쓰며 속삭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온 거냐?”

아마 입구에서 소방주가 불러서 왔다고 하고 들어온 모양이다.

자신을 찾아왔다고 하면 맹주전 호위들이 맹주가 있는 자리에 아무나 막 넣어준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안후평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생각이 없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서 나가. 꺼지라고.”

더없이 신경질적인 속삭임이었다. 안후평은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 이 자리를 망쳤다간 정말 끝장이었다.

“죽고 싶냐?”

사도맹주에게 잘 보이겠다는 일념에 지금 비사인의 얼굴도 무섭지 않았다.

앞서 사추가 그랬듯 안후평의 머릿속에도 비사인이 소맹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사도맹 소맹주가 이안의 호위에게 미녀들 많이 왔냐고 물었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안후평은 이 무섭게 생긴 녀석을 이해했다. 그래, 신화방 소방주가 밑으로 들어오라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돈을 두 배나 준다는데.

그러자 비사인이 앞서 안후평이 했던 말을 꺼냈다.

“내가 모시는 사람에게 직접 말해주겠다고 했소?”

처음으로 비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큼이나 듣기에 좋은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걸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모시는 분이 저기 계시니, 직접 말해보시오.”

안후평의 시선이 비사인을 따라갔다. 그곳에 백자강이 있었다.

이놈이 사도맹주를 모욕해? 이건 기회야. 사도맹주에게 잘 보일 절호의 기회.

천지 분간 못 하는 놈을 좋게 내보내려는데 맹주님을 모욕하는 바람에 참지 못했습니다.

이 짧은 순간에 그는 머리를 굴렸다.

“이 미친놈이!”

안후평이 문 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사추! 이 새끼, 당장 끌어내!”

지켜보고 있던 안청광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당연히 안청광은 비사인을 만나본 적이 있었다. 비사인이 들어서는데 아들이 달려가는 걸 보고, 비무장에서 만나 벌써 인사를 나눴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제 잇속 차리는 것만은 누구보다 빠른 녀석이었다.

그래, 그런 재주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소맹주에게 이 새끼 끌어내라고?

안후평은 아버지가 사색이 된 채 달려 나오는 이유가 이 무자비한 얼굴 때문이라 여겼다. 맹주가 보고 계신데 빨리 안 쫓아내고 뭐 하냐고.

아버지가 와서 해결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안후평이 손을 번쩍 들어서 비사인의 뺨을 때리려던 그 순간.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안청광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물론 붙잡지 않았어도 때릴 수도 없었겠지만.

너무 놀란 안청광은 하얗게 질린 채 아들을 쳐다보았다.

안후평이 큰 소리로 말했다.

“주제 파악 못 하는 놈이 제 수하에 들겠다고 쫓아온 모양입니다. 한데 맹주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러자 저 멀리 있던 백자강이 물었다.

“뭐라고 모욕했나?”

“자신을 고용하려면 맹주님 허락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백자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군.”

무슨 뜻인지 몰라 안후평이 눈을 껌벅이던 그때였다.

안청광이 사정없이 아들의 뺨을 때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안후평은 너무 놀랐다.

“아버지?”

“소맹주님께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당장 무릎 꿇고 사죄드리지 않고.”

안후평이 눈을 껌벅였다.

‘소맹주? 무슨 소맹주?’

그가 여전히 멍하게 서 있자 다시 귀싸대기가 날아갔다.

짝! 짝! 짝!

아들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는 안청광의 손길에 감정이 실렸다. 온갖 한심한 짓을 다 하더니 이제 이런 미친 짓까지 저지르는 아들이었다.

진작 이렇게 두들겨 패서 키웠어야 했는데.

만약 이 일이 문제가 돼서 사도맹주가 돌아가 버린다면? 정말 아들놈을 패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그때 백자강의 전음이 비사인에게 날아들었다.

―소교주 작품이구나.

자신의 제자는 굳이 신분을 굳이 숨겨서 이런 일을 만들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패야 할 일이 있었다면 이미 직접 반 죽여놨을 거다.

―자식 교육이나 제대로 하라는 거지?

물론 검무극이 이런 상황을 예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저 혼자 있었다면 저놈은 시체로 왔을 겁니다.

비사인의 전음에, 백자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보지 않아도 그 상황이 대충 상상되었다.

지난 세월 쌓였던 감정이 모두 쏟아졌고.

짝! 짝! 짜악! 짝!

충분히 맞았다는 생각이 들자 비사인이 나섰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그러자 안청광이 매질을 멈췄다.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오른 안후평이 울먹이며 말했다.

“……아버지.”

“감히 소맹주님께 욕을 하고 때리려고 손을 쳐들어? 넌 죽어도 싸다. 그 손부터 잘라야겠다.”

“살려주세요! 아버지!”

“당장 사죄드리지 못할까?”

안후평이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귀한 분을 몰라뵙고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비사인은 그를 꾸짖지 않았다.

여기서 안후평을 더 박살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안후평이 망나니에 안하무인이란 것은 이미 알고 왔고, 여기서 더 혼내고 꾸짖는다고 그의 성품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속으로 앙심만 더 품겠지.

게다가 지금은 사부님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막으러 온 것이니, 굳이 안후평과 원한을 살 필요는 없었다.

비사인이 안후평을 일으켜 세우며 좋은 어조로 말했다.

“미안하네. 내가 미처 신분을 밝히지 못했네.”

“아닙니다, 소맹주님!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비사인의 예상처럼 한순간에 사람이 바뀌지 않았다. 그는 반성은커녕 한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

원망의 대상이 아버지나 비사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는 엉뚱한 사람을 원망했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이안의 호위 놈! 소맹주님이 그놈과 대화하는 걸 보고 오해했으니까.

‘소맹주님께는 어떻게든 만회하고, 그놈은 내가!’

항상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보복했던 지난 삶이 이 순간이라고 어디 다르겠는가?

안청광이 맹주 앞에 가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못난 꼴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백자강이 좋은 어조로 말했다.

“오해로 일어난 일이니 개의치 말게.”

그때 바깥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본선대회가 개최되려는 모양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안청광이 나섰다.

“곧 본선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제가 귀빈석으로 모시겠습니다.”

백자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여인들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 * *

대기실에는 여인들로 가득했다.

이안은 대기실 구석에서 조용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참가자 중에서 가인교의 살수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살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살수를 찾기 위해서는 살수를 찾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핵심이었다.

몇 사람 느낌이 온 여인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느낌이었다.

호위 이안이 아닌 무인 이안이 찾아낸 여인들.

그때 대기실로 차이란이 들어섰다.

내부를 한차례 둘러보던 그녀가 이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이안은 그녀를 보지 않고 자신이 찾아낸 여인들을 보았다. 그녀의 등장에 누가 반응하는지. 혹은, 누가 반응하지 않는지를.

차이란이 이안 앞까지 걸어왔다.

“이걸 어쩌죠? 이 소저 호위, 벌써 내게 넘어온 것 같은데.”

“무슨 말이죠?”

“결승 진출을 축하하는 술자리를 하기로 했어요. 둘이서 오붓하게.”

이안까지 함께 먹자는 말이었는데, 그녀는 둘이라고 말했다.

이안은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검무극이 그랬을 리 없고, 설령 그랬다면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내 허락 없이는 못 먹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이안에게 차이란이 도발하듯 물었다.

“자신감인가요? 아니면 오만인가요?”

“잘 아는 거죠. 그 사람을.”

“수장을 잘 아는 호위는 흔해도, 호위를 잘 아는 수장이라? 귀한 관계군요.”

차이란이 이안 옆에 나란히 앉았다.

이안은 그 와중에도 주위 여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폈다.

원래 이안이 대회에 참가한 목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알아내는 바람에 우리 쪽 누군가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으니까.

차이란이 불쑥 말했다.

“당신, 드디어 보검까지 들었네요.”

실제로도 이안은 보검을 차고 있지만, 지금 이 말은 화장이 예쁘다는 뜻이었다.

하긴 화장해 준 여인의 실력은 자신보다 차이란이 훨씬 더 잘 알아보겠지.

“상대가 상대니까요. 조심하세요, 제가 화장하면 사람이 달라지거든요?”

“이 소저는 화장 안 했을 때가 더 무섭죠. 순수한 아름다움.”

“어떻게든 저를 떨어뜨리려고 하시는군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래, 당신은 무서워해야 할 거야. 화장 한 번 못 한 채 땀 흘렸던 그 수련의 시간을.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무인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본선 시작입니다!”

바깥에서 군웅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 * *

드디어 이안의 차례가 되었다.

새하얀 궁장에 아름다운 화장을 한 그녀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무대에 오르자 수많은 군웅의 모습이 보였다.

터질듯한 함성.

여기에 오르면 너무 부끄러워 심장이 터질 거처럼 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새벽부터 산에 올라서 검을 휘둘러 댔는데.

막상 무대에 오르니 생각 보다 떨리지 않았다.

‘의외로 나 실전파일지도.’

이안이 정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검무극의 모습을. 정말 거짓말처럼 딱 보였다.

검무극은 아무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검무극을 찾아냈다.

이 수많은 사람 중에서 검무극의 모습만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흑백이 되고, 오직 검무극만이 색깔이 그대로였다.

검무극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이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정은 소교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구나! 처음으로 질투라는 감정도 느껴보았고. 소교주를 꼬맹이 때부터 좋아했지만, 이번에 알게 된 감정은 이전보다 깊었다.

이안이 자신 있게 걸음을 옮겼다.

무대 가운데 서자 정면에 따로 만들어진 심사석이 보였다.

세 명의 심사자 중 천화루주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은 여기에서, 천화루주는 저기에서 각자 일을 해내고 있다.

‘제가 선 이 자리에서 소마님의 비수에 소교주님이 찔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남자를 지키려는 두 여인이 눈빛으로 교감했다.

그녀가 무대에 올라서 내려올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대에서 내려오기 전 때 마지막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입이 뭐라고 벙긋거리는 것만 같았다.

못난이가 제법인걸?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혼자 웃으며 무대를 내려갔다.

무대에서 내려가는 이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검무극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놀랍게도 그는 사도맹주 백자강이었다. 죽립을 쓰고 있어서 아무도 그가 사도맹주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안청광이 귀빈석으로 모시겠다는 것을 오늘은 조용히 보고 싶다고 하고선, 군웅들 속에 섞인 것이다.

두 사람이 정면 무대를 쳐다보며 대화를 나눴다. 검무극은 기를 발출해 주위에 무형의 막을 만들어서 말소리가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오셨습니까?”

“자네 보러 왔지.”

“미인들 보러 온 건 아니시고요?”

“왜 아니겠나? 자네도 보고 미녀들도 보러 왔지.”

검무극이 백자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 안 오셨으면 섭섭했을 겁니다.”

“나 죽는 자리라면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사실 검무극은 백자강이 보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눈에 저 작은 눈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마침 나오네요. 저기 저 여인이 맹주님을 죽이려는 살수입니다.”

무대에 올라선 여인은 바로 차이란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군웅들은 뜨거운 열기로 타올랐지만, 반대로 백자강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해보게. 내가 지금 저 무대에 뛰어올라 저 여인을 죽여선 안 되는 이유를. 나는 나를 죽이려는 사람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네.”

그는 적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이라면 최선을 다해 죽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무복을 입고 있는 맹주니까.

“내가 납득할 이유가 없다면…….”

백자강의 작은 눈이 더욱 작아졌다. 그 점은 세상 모든 살기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이겠네.”

일 위는 누군가?

검무극은 사도맹주가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저 무대로 날아가서 차이란을 죽이고 싶어 했다.

그녀는 군웅들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무대를 활보하고 있었다. 가장 은밀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세상을 향해 활짝 웃고 있었다.

오직 이 사도맹주를 죽이기 위해서, 천하제일미가 되기 위해서.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온 놀라운 한마디.

“죽이십시오.”

검무극이 죽이라고 말하자 백자강의 눈이 조금 커졌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죽이라고?”

“네! 죽이십시오.”

백자강 역시 알 수 있었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백자강의 시선이 무대 위 차이란을 향했다. 그녀는 무대 중앙에서 심사석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곧 무대에서 내려갈 것이다.

옆에서 느껴지는 백자강의 강렬한 살기는 금방이라도 무대를 향해 쏘아질 듯 팽팽했다.

세상에 노출된 살수가 사도맹주에게 몇 수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의 시체를 밟고 백자강은 이렇게 말하겠지.

나, 사도맹주네. 천하제일미 대회의 개최를 축하하네.

사도맹주의 깜짝 등장에 사도인들은 모두 열광할 것이다. 왜 죽였는지 이유를 묻지 않고 환호하리라. 사파인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얻고 있는 그였으니까.

살기가 집중되었던 두 눈의 점이 커지면서 그 강렬한 살기가 사라졌다.

백자강이 차분한 목소리로 포기한 이유를 밝혔다.

“죽여야 할 여인이었다면 내가 오기 전에 자네가 이미 죽였겠지.”

자신에 대한 깊은 신뢰에 검무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검무극이 그 신뢰에 답을 할 차례였다.

“네, 죽이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무대를 향했다. 차이란은 환호 속에서 무대를 내려가고 있었다.

“과연 그녀 혼자에게 이 엄청난 일을 맡겼을까요? 아마 다른 배후가 있을 겁니다.”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배후를 끌어내서 함께 해치우려는 의도임을. 이 군웅들 속 어딘가에 또 다른 누군가 있을 수도 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왜 맹주님을 목표로 한 것일까요? 설령 암습에 성공하더라도 사인이가 맹주 자리를 물려받을 상황에서요.”

사실 백자강이 그녀를 죽이지 않은 이유기도 했다. 죽여도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서.

“천하제일미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먼저 죽이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뜻이 담긴 농담이었다.

그렇게 그곳을 떠나려던 백자강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진짜 그 여인을 죽였으면 어쩌려고 했나?”

검무극이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죽이면 죽인대로 또 방법이 있었겠지요.”

백자강을 보며 덧붙여 말했다.

“맹주님이 계신 데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이 말에도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다. 검무극이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 귓가에 소름 돋는 일은 정말 손에 꼽을 검무극이었다.

죽립을 눌러쓴 백자강이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본선 무대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회가 끝나고 사흘 후에 펼쳐질 결승 무대에 오를 여덟 명의 미인이 발표되었다.

차이란을 포함한 일곱 미녀와 더불어.

이안 결승 진출.

이변은 없었다.

* * *

퉁퉁 부은 얼굴로 안후평은 무대 앞쪽에 앉아 있었다.

이 와중에도 대회를 보려고 나온 것이다. 이안에게 봤다고 생색도 내야 했고, 다른 예쁜 미녀들은 또 누가 있나 궁금도 했고.

그는 주위 시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신화방 소방주다. 내가 무슨 꼴이든 너희보단 낫잖아? 너희가 날 무시할 수 있어? 못하잖아? 이런 마음으로 살아온 그였으니까.

물론, 지금 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아까는 놀라고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너무 아프고 억울했다.

미녀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풀릴까 싶었는데, 뜨거운 열기와 환호를 들으니 오히려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그래, 기분이 나쁠 때는 행복한 것을 볼 게 아니라 자신보다 더 불행한 것을 봐야 하는데.

그때 누군가 뭔가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추가 얼음을 천에 싸서 내밀었다.

“얼굴에 대십시오.”

“됐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사추는 계속 주머니를 내밀었다.

“됐다니까! 누구 놀리냐고!”

안후평이 주머니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얼굴이 아팠다.

“젠장, 아프다.”

사추는 말없이 안후평을 쳐다보았다.

자업자득이다 싶다가도, 또 이런 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전장에 내 돈 얼마나 있지?”

“천이백 냥 정도 됩니다.”

“그것밖에 안 돼?”

평소 그가 흥청망청 쓴 걸 생각하면, 그 돈이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걸로 살 수 있는 선물이 뭐가 있을까?”

“무슨 선물 말씀입니까?”

“뭐긴! 소맹주 사줄 거지. 기분을 풀어줘야 할 거 아니야?”

뭐라도 해야 했다. 소맹주에게 욕을 하고 때리려 했으니, 찍혀도 제대로 찍힌 셈.

“그 돈으로 소맹주가 좋아할 만한걸 사긴 어려울 겁니다.”

“젠장!”

그때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어 무대를 쳐다보니 차이란이 무대에 올라오고 있었다.

“저 여자는?”

이안의 호위와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이었다. 이상하게도 말 한마디 걸기 어려웠던 그녀였었는데.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 순간 안후평의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

“그래, 그거지! 그놈을 찾아야 해!”

안후평이 벌떡 일어나서 군웅들 속으로 뛰어갔다.

사추는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나 싶어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따랐다.

* * *

안후평이 헤매고 헤매서 결국 찾아낸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얼굴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셨습니까?”

물론 검무극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두들겨 맞고 정신을 차렸으면 좋으련만.

“넌 알 것 없고! 아까 네게 말 걸었던 사람 있지?”

“그 무섭게 생긴 사람 말입니까?”

“그 사람이 정말 미녀가 많이 왔냐고 물었나?”

“네. 늦지 않게 달려오느라 힘들었다고요.”

안후평이 눈빛을 반짝였다.

“오늘 저녁에 술 마신다고 했지? 소저들 모시고 어디로 갈 거냐?”

“아직 안 정했습니다. 간다면 인근 주점에 방을 하나 빌릴 생각입니다.”

“화명관(花明館)으로 와! 거기 통째로 빌려놓을 테니까.”

화명관은 저잣거리에서 제일 크고 비싼 주점이었다.

안후평은 비사인에게 차이란을 소개해 주는 걸로 이번 실수를 만회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 그가 여색을 밝힌다면 이 자리는 분명 통할 것이다.

검무극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안후평이 인상을 썼다.

“중요한 손님도 함께 갈 거야.”

“누구 말씀입니까?”

꼴에 호위라고 누군지 말 안 해주면 절대 이안과 차이란을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안후평이 손가락을 두 개 폈다.

“무림 후기지수 중에서 두 번째인 분.”

“누구죠?”

“사도맹 소맹주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과 함께하는 사람인지 이안에게 보여줄 기회기도 했다. 소맹주에게 잘 보이고, 이안에게도 잘 보이고.

혹시라도 비사인이 이안을 마음에 들어 할까 걱정도 되었지만.

뭐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지. 그땐 차이란으로 갈아타는 거다. 지금은 소맹주에게 잘 보이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그냥 넌 데려오기만 하면 돼. 평생 못 먹어본 비싼 술과 요리 마음껏 먹게 해주마.”

안후평이 나직이 협박했다.

“안 오면 그 입 진짜 찢어버릴 거다!”

입을 찢는다는 말에 안후평 뒤에 있던 사추가 흠칫 놀랐다.

그가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사추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자신은 절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표시였다.

돌아서는 안후평에게 검무극이 물었다.

“하면 후기지수 중 첫 번째는 누굽니까?”

그걸 몰라서 묻냐는 듯, 성큼성큼 걸어가며 안후평이 대답했다.

“마인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냐?”

* * *

화명관 가운데 자리가 마련되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졌고, 좋은 술이 준비되었다.

“실수하면 오늘 다 죽을 줄 알아!”

안후평의 고함에 화명관에서 일하는 숙수와 점소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때 안후평의 눈에 멍하게 서 있는 사추가 들어왔다.

안후평이 뒤에서 사추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또 왜? 무슨 일인데?”

“아, 아닙니다.”

“소맹주 온다니까 겁나? 자넨 그냥 조용히 서 있기만 해.”

사실 사추는 소맹주가 아니라 사도십삼랑을 가까이서 만날 생각에 마음이 떨렸다. 요즘 왜 이렇게 놀랄 일이 많이 생기는지.

그때 비사인이 그곳으로 들어왔다. 안후평이 달려가서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비사인 뒤를 따라 사도십삼랑이 들어왔다. 사도십삼랑이 사방에 흩어져 자리를 잡고 섰다. 비사인에게 문제가 생기면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위치였다.

사추는 비사인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다시 사도십삼랑들에게도 포권하며 인사했다. 사방으로 한 번씩. 보통 이렇게까지 인사하지는 않았기에 일랑이 그를 주목해서 바라보았다.

“오실 분은 아직이오?”

자리에 앉은 비사인의 물음에 안후평이 재빨리 대답했다.

“지금 오고 있을 겁니다.”

안후평이 사추를 쳐다보며 어서 가보라고 눈짓을 하려 했다.

하지만 사추는 사도십삼랑을 쳐다보느라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어휴, 저거 또 정신 안 차리지?’

사추는 감격과 슬픔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정말 좋아하고 동경하던 그들이었다.

사도십삼랑 이 다섯 글자는 자신에게도 다섯 글자로 남았다.

못다 이룬 꿈.

그때 더 노력했으면 나도 저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뻐하던 안후평이 흠칫 놀랐다. 검무극과 이안만 그곳에 온 것이다.

안후평이 달려가서 검무극에게 물었다.

“차 소저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꼭 오라고 전했지?”

“올 겁니다.”

먼저 인사부터 나누고 해도 될 말인데. 비사인에게 차이란을 소개해 주려는 마음이 앞섰다.

다음으로 앞서는 마음은 이 소개였다.

“여기 이분은 사도맹 소맹주님이시오.”

안후평이 가슴을 쫙 폈다. 이 소저, 나, 사도맹 소맹주와 어울리는 사람이오.

“이번에 결승에 진출하신 이안 소저입니다.”

이번에는 비사인을 보며 목에 힘을 주었다. 나, 이런 미인들과 교류하는 사람이오!

“자, 앉으시지요.”

모두 자리에 앉는데 검무극도 냉큼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 줄 알고! 호위 따위가 어딜 끼어드나?”

검무극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평생 못 먹어본 술과 요리를 먹여주겠다면서요? 후기지수 이 위인 분이 오신다면서요?”

“이놈이 미쳤나!”

비사인이 나직하게 물었다.

“일 위는 누군가?”

안후평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자가 헛소리하는 겁니다!”

그 소동을 보고 있던 사추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실수보다 이 말만 귀에 들어왔다.

사도십삼랑이 버젓이 옆에 서 있는 곳인데, 호위 따위란 말을 저렇게 생각 없이 하고 있다.

사추는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일랑에게 대신 사죄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일랑의 전음이 사추에게 날아들었다.

―동생들은 잘 있나?

사추는 깜짝 놀라며 일랑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순간 사추가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사도십삼랑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사도맹 입구에서 진을 치며 기다리던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

그리고 드디어 그들을 만났던 그날, 사추는 평생을 통틀어서 가장 큰 용기를 냈다.

사도십삼랑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리고 주위의 누구도 알려주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도십삼랑이 될 수 있습니까?”

그때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저 일랑이었다.

“사도맹 최고의 무인이 사도십삼랑이라고 들었습니다. 최고의 무인이 되어서 동생들을 배불리 먹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지만, 놀랍게도 일랑은 그날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절 기억하십니까?

―넌 우리 앞을 막아서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사추는 자신을 기억해 주는 것이 정말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는 일랑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원대한 꿈을 꾸었던 자신인데.

이젠 저 망나니 안후평을 따라다니며 사고나 수습하며 살아가고 있는 신세였으니까.

그때 일랑이 주위를 경계하듯 천천히 걸어와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사추를 지나쳐 가며 어깨를 툭 두드려주었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힘이 되는 행동이었다.

사추는 결심했다.

일랑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 옷, 빨지 말고 평생 잘 보관해 둬야겠다고.

바로 그때였다.

그때 뒤에서 안후평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주방에 가서 자네가 직접 신경 써. 실수 없게끔.”

하필이면 일랑이 잡았던 그 자리를 잡았다.

“말로 하지 왜 잡습니까!”

사추가 버럭 소리쳤다. 안후평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대체 왜 이러시냐고요!”

처음으로 안후평에게 소리치는 사추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당황도 잠시, 안후평이 차갑게 물었다.

“너는 왜 이러는데?”

그때 사추의 눈에 안후평의 어깨 너머로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검무극은 앞서 자신이 그에게 했던 그대로 손바닥을 들어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사추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임을.

지금까지 모두 자신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쉿! 쉿, 하지 않으면 입을 찢는다고 했고.

한데 지금 저 입을 가리는 모습은 달랐다.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 해주는 행동이었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라고.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고. 그 마음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사추가 고개를 숙인 채 주방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그를 닦달할 때가 아니었으니 안후평은 돌아서서 모두에게 말했다.

“요즘 수하 다루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다들 이해하시죠?”

그러면서 소리 내서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서 웃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사도십삼랑들은 각자 정면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고 이안과 비사인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은 주방으로 걸어가는 사추를 보고 있었다.

‘다들 어딜 보는 거야?’

이 짧은 순간 그는 홀로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께 두들겨 맞았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바로 그때 그의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좀 비켜주세요.”

안후평이 돌아보니 차이란이 서 있었다. 드디어 자신을 구원할 여인이 등장한 것이다.

“오! 드디어 우리 차 소저가 오셨군요.”

반갑게 인사하자 차이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시죠?”

“난 신화방 소방주 안후평이오.”

차이란은 자신을 소개하는 대신 싱긋 웃었다.

“귀한 분의 얼굴이 많이 부으셨네요.”

차이란이 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비사인과 이안이 함께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검무극만을 향했다.

“손님들이 많네요? 둘만 오붓하게 보자니까요.”

그녀가 모두가 앉아 있던 자리까지 걸어온 바로 그때.

검무극의 품 안에 있던 비궤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차이란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혹시 알아요? 둘만 있을 때 좋은 일이 생길지?”

대답 못 하면 벌주 석 잔

차이란이 도착했는데 비궤가 반응했다?

‘설마 그녀에게 구슬이 있는 건가?’

검무극은 내심 놀랐다. 지금까지 그녀를 만났을 때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반응했다.

검무극이 품속의 비궤에게 물었다.

‘너 혹시 구슬 말고 다른 것도 흡수하는 거냐? 배고프면 아무거나 막 주워 먹는 그런 녀석이냐?’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벽화에 그려져 있던 비궤와 구슬 상징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결국 그녀가 구슬을 가져왔다는 의미인데.

여섯 개의 구슬 중 남은 구슬은 이제 두 개. 붉은 구슬인 적정(赤睛)과 자색 구슬인 자정(紫睛)만이 남아 있었다.

‘그 두 구슬 중 하나가 차이란에게 있다고?’

검무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비궤가 흡수하는 구슬을 누군가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두듯 비궤가 보관되어 있었으니까.

비궤가 반응을 했기 때문일까?

혹시 알아요? 둘만 있을 때 좋은 일이 생길지?

조금 전에 걸어오면서 그녀가 했던 말조차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설마 자신이 구슬의 기운을 흡수한 것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상태에서 우연히 다른 목적으로 구슬을 지닌 것일까?

만약 알면서도 가져온 것이라면?

할 수 있으면 나를 죽이고 가져가 봐? 이런 마음인 거냐?

정말 내가 그러면 어쩌려고?

차이란이 자연스럽게 검무극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라면 반응이 더 강해졌을 텐데, 평소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녀가 가까이 오자 반응이 딱 그친 것이다.

“축하 안 해줘요? 저 결승 진출했어요.”

“축하드립니다.”

“옆구리 찔러서라도 축하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안후평이 그 자리로 와서 재빨리 비사인을 소개했다.

“차 소저, 여기 이분은 사도맹 소맹주이십니다.”

차이란이 비사인을 쳐다보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안후평이 내심 기뻐하며 은근슬쩍 비사인과 자신을 동급으로 놓았다.

‘놀랐지? 신화방 소방주를 만나고, 또 사도맹 소맹주까지 만나니까?’

그런 마음은 비사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때? 이런 아름다운 여인 처음이지?’

차이란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비사인에게 인사했다.

“차이란이에요.”

기본적으로 남자를 대하는 그녀만의 방식이 있었다. 일부러 유혹하지 않더라도, 인사할 때의 눈빛과 미소가 상대를 안달 나게 하고 푹 빠져들게 했다.

비사인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앞서 검무극이 보낸 전서를 통해 이 여인이 사부를 죽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적의도 드러내지 않았다.

검무극이 자연스럽게 이런 자리를 연출하는 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의미. 장차 사도맹을 이끌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 감정 조절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당장 사부를 죽이려는 저 여인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대하고 있지 않은가?

“비사인이오.”

뒤늦은 비사인의 대답에 안후평은 내심 기뻐했다. 그녀에게 푹 빠져서 인사가 늦었다고 여긴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생색이 이어졌다.

“오늘 이 특별한 자리를 위해 제가 이곳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주인공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소맹주님께 차 소저를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내게?”

이유를 묻는 비사인의 눈빛에 안후평이 웃으며 아부했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았거든요.”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었지만 비사인의 반응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오늘 이 자린 부적절한 자리인 것 같소.”

안후평이 놀라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대가 있는 자리에 이 소저들이 있어서 되겠소?”

대회 주최 측이 사적으로 결승에 진출한 여인들과 만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사파 지존이 될 사람이 뭔 답답한 소리냐!’

정말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소맹주님이 계시는 특별한 자리니 모두 이해해 줄 겁니다.”

“내 핑계를 대는 거요?”

“아닙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비사인은 굳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듯, 평소처럼 행동했다. 차이란에게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고 검무극이 있는 이 자리에 홀로 나와 있다. 자신들이 정체를 모른다고 생각해서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차이란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귀한 분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일편단심이랍니다.”

그녀가 검무극을 볼 때만 보이는 표정이 있었다.

안후평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저 호위 놈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 거지?

“저 호위에게 내가 모르는 매력이라도 있나 봅니다.”

그게 뭐든 어떻게든 까 내릴 생각이었는데.

“안 보이세요? 제 눈에는 많이 보이는데.”

차이란은 검무극을 향해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검무극은 물러나지 않은 채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사람 눈에는 죽음이 가득한데, 어찌 이리도 맑을 수가 있죠?”

마치 자신의 눈에는 그 죽음의 기운이 보인다는 듯 말했는데,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을 대신해서 말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저는 저 눈에서 한 번도 죽음을 느낀 적이 없어요.”

차이란이 천천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자 이안이 덧붙여 말했다.

“남의 눈동자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기 마련이죠.”

그 죽음은 결국 차이란 네게서 비롯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차이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 소저는 이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군요.”

“제가 호위를 싫어할 만큼 멍청하진 않거든요.”

목숨을 지켜주는 사람을 싫어해서 되겠느냐는 말이었는데.

듣고 있던 안후평의 인상이 굳어졌다. 마치 조금 전에 사추와 갈등을 빚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던 것이다.

게다가 시작부터 두 여인의 관심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자 안후평은 기분이 나빴다. 어디에서나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자꾸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안후평이 술병을 들어 비사인의 잔을 채워주려 했다.

“자, 소맹주님. 제 술 한잔 받으시지요.”

비사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두 여인만 쳐다보았다. 손에 든 술병이 괜히 무안해졌고 그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정말이지 이것들이!

그래도 명색이 신화방 소방주인데, 이렇게 대한다고?

‘더럽게 여색을 밝히는군.’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자신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되니까.

사실 비사인은 차이란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검무극보다 자신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여인이었다. 사부를 죽이면 결국 자신이 사도맹주가 오르게 된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을 사도맹주 자리에 오르게 하려는 여인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아직 준비되지 않은 자신을 맹주 자리에 앉혀서 뭔가 얻어낼 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을까?

안후평은 애써 분노를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이번 결승에서 저는 누굴 지지할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했다.

안후평은 응원이 아니라 지지라는 표현을 썼다. 마치 자신이 천하제일미를 정하는 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우리 소맹주님께서는 어느 분을 지지하십니까? 사실 소맹주님 지지가 제일 중요하지요.”

이번에는 비사인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내 뜻이 뭐가 중요하겠나? 심사자와 군웅들의 뜻이 중요하겠지.”

“그 모든 결정을 뒤바꿀 수도 있는 위치에 계시지 않으십니까?”

딴에는 비사인에게 아부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비사인의 반응은 차가웠다.

“지금 내게 공정하지 않은 일을 하라는 건가?”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인가?”

“제 말씀은 그만큼 대단한 분이시다,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에 안후평은 술을 들이켰다. 뭔가 뜻대로 일이 잘 안 풀리고 있었다.

“요리가 왜 이리 안 나오는 거야?”

안후평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도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뭐해? 빨리 음식 안 내오고!”

주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괜한 숙수들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그때.

“이만 돌아가시죠.”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돌아보니 사추였다. 아까 자신에게 소리를 질러대던 그는 주방 구석에 서 있었다.

“뭐라고?”

“돌아가자고요.”

안후평이 화난 얼굴로 그에게 걸어갔다. 다른 때라면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고 할 그였는데, 오늘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하는 소리냐?”

“어떤 자리입니까?”

“뭐?”

명백한 목적이 있는 자리였다. 소맹주에게 잘 보이려는 자리! 이안에게 잘 보이려는 자리. 이 사추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너도 나 무시하냐?”

“무시했으면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모른 척하면서 그냥 있었겠지요.”

본능적으로는 느낄 수 있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을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무례하게 굴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 유일하게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저긴 공자께서 계실 곳이 아닙니다.”

네 사람 모두 안후평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그 자신만 그 사실을 모를 뿐.

“땅굴 속에 숨어 계시다가 저 태풍이 지나가면 나오십시오. 지금 소방주님이 무사하신 건 태풍의 눈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태풍들은 자신에게 쉿, 하라고 했지만 그 경고를 어겼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에게 하는 마지막 조언이었으니까.

물론 안후평은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방진 새끼.”

분명 자신을 위하는 말임을 알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그는 진실을 말해주면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

“나중에 넌 각오해야 할 거다.”

안후평이 돌아서던 그 순간.

사추가 기습적으로 등 뒤에서 안후평의 수혈을 눌렀다. 설마 이럴 줄은 몰랐기에 안후평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놀란 숙수들을 다독인 후 사추는 주방 뒷문을 열고 나가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수하를 불러왔다.

“소방주께서 과음하셨다. 거처에 모시고 가서 침상에 눕혀드리고 와라.”

수하들이 그를 업고 거처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이렇게 화난 상태로 이곳에 있어봤자 결국 사도맹 소맹주가 있는 자리임에도 큰 사고를 칠 것이다. 지금까지 겪어온 안후평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어차피 자신을 곱게 보내주지도 않을 테고, 이렇게 떠나려는 거다.

사추 역시 뒷문을 통해 그곳을 떠나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동생들 때문이었나?”

돌아보니 일랑이 서 있었다.

그의 질문은 동생들 때문에 꿈을 포기하고 안후평 밑에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사추는 솔직히 고백했다.

“아닙니다. 저는 동생들을 핑계로 편한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만약 동생들 때문이었다면, 동생들의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서 다시 도전했을 테니까.

돈도 잘 벌었고, 안후평을 따라다니는 일은 편했다. 적어도 이곳 안휘에서 신화방 소방주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오늘 깨달았습니다. 불가능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는 것을요. 막연히 안 될 거야 해서 불가능한 것과, 죽도록 했는데도 안 돼서 불가능한 것. 쉬운 건 경험했으니 어려운 불가능을 도전하러 가려 합니다.”

사추는 사도맹에 새롭게 입맹할 작정이었다.

지금과는 월봉이 비교할 수 없이 적을 테고. 나이 먹고 새로 시작하는 건 몇 배나 더 어렵겠지만. 그리고 지금 입맹해서 사도십삼랑이 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한 번 해볼 작정이다. 이렇게 사도십삼랑을 다시 만나게 해준 것이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서.

“다시 뵙게 되면 그때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평생 못 뵙겠지만요.”

사추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한 후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어려서는 사도십삼랑 앞을 막아서며 질문을 던졌다. 그게 열정이고 진심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진짜 열정은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으니까. 묻기 전에 시작해 버린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일랑은 멀어져가는 사추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 소방주께서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에 아무도 왜 먼저 돌아갔는지를 캐묻지 않았다.

검무극이 이걸 아쉬워했을 뿐이다.

“아! 술값 낼 사람이 먼저 돌아갔군요.”

그의 농담에 차이란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리 술값 내기 어때요?”

그녀가 제안한 내기는 정말 생각지 못한 내용이었다.

“그냥 술 마시지 말고 서로 질문을 하나씩 하면서 마시죠. 대답 못 하면 벌주 석 잔 마시기! 오늘 벌주 제일 많이 마신 사람이 술값 내기로 하죠. 아, 그리고 취하지 않기 위해서 주기를 외부로 발출하기 없기에요!”

물론 검무극은 이런 흥미로운 제안을 거절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서로 묻고 싶은 것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벌주를 마시면 마셨지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 역시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좋소, 해봅시다.”

검무극이 받아들였으니, 당연히 이안과 비사인도 흥미로운 눈빛을 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제안했으니, 첫 질문은 제가 하죠.”

차이란의 말에 모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같이 건배한 후 술을 비운 후에.

“검 호위께 묻겠어요.”

그녀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여기 이 소저 여인으로 좋아하죠?”

첫 질문부터 강력했다. 검무극보다 이안이 놀랐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대답하기 싫으면 벌주 석 잔 마시면 돼요.”

“그럴 필요 없소. 대답하겠소.”

검무극이 슬쩍 이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좋아하오.”

차이란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벌주 석 잔 마실 줄 알았는데.”

이안은 검무극의 대답에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내기 때문에 빈말로 해준 것이라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의 질문에는 기분이 나빴다.

‘첫 질문으로 나와 소교주님에 관해 묻는다 이거지?’

당장 자신이 그녀에게 질문하고 싶었지만 검무극이 먼저 나섰다.

“질문에 대답했으니 다음 질문은 내가 하겠소.”

“하세요.”

“차 소저에게 묻겠소.”

이번 역시 다 같이 건배한 후 술잔을 비운 후에 검무극이 차이란에게 물었다.

“당신이 가장 믿는 사람이 누구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질문이었다. 가족을 대답할 수도 있고 수장을 대답할 수도 있었다. 이번 일을 위해 함께 이곳에 온 사람을 대답할 수도 있었다.

차이란이 묘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다가.

“나는 좋아하는 사람을 물었는데, 당신은 믿는 사람을 묻는군요. 좋아하는 사람을 물으면 당신이라고 대답할까 봐요?”

그렇게 활짝 웃던 그녀가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은…….”

그녀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검무극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궁금해 죽으라고 누군지 대답은 하지 않겠어요. 당신 첫 대답에 대한 응징이죠.”

그녀는 벌주 석 잔을 연이어 마신 후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 다음 질문할 사람은 누구죠?”

주사 있는 줄 아셨소?

‘내가 아는 사람을 가장 믿는다고?’

배후 세력 중에 이미 죽은 사람을 포함한다면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사람을 가장 믿고 있다고 대답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

검왕 악군학.

그녀 대답의 주인이 될 사람 중에 자신에게 살아남은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으니까.

악군학과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머리를 질끈 묶고 허리에 철검과 신발을 매달고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맨발로 걸어가다가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돌아보던 그의 모습이.

―내 이름은 악군학이다.

그의 외침과 외로워 보이던 두 눈으로 환하게 웃어주던 그 모습까지도. 항상 이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면 그가 보고 싶은 모양이다.

‘당신이 가장 믿는 사람이 악군학이라고?’

이 대답으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고.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표를 내지 않았는데.

비궤가 반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거다.

날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검무극이 차이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적 앞에 마주 선 무인처럼,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자, 덤벼요! 어떤 질문도 다 받겠어요!”

그러자 이안이 나섰다.

“다음 질문은 제가 하겠어요.”

질문하기 전에 술을 마시기로 했기에 네 사람은 모두 술잔을 비웠다.

“차 소저에게 묻죠.”

자신에 대한 검무극의 마음을 물은 그녀의 첫 질문에 기분이 나빴던 이안이었다. 둘만 있을 때도 아니고 당사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좋아하냐는 질문이라니?

검무극과의 관계를, 그 감정을 장난처럼 여긴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너무 귀하다고 여기는 관계이기에 이렇게 과민반응 하게 되지만, 그조차 상대가 원하는 결과일 테니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그 가장 믿었다는 분에 관해 묻고 싶어요. 그분은 차 소저의 믿음을 알고 있나요?”

차이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왜 그 사람에 대해 묻는 거죠?”

검무극 때문이었다. 검무극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중요한 사람일 터. 조금이라도 검무극에게 도움이 되려는 거였다.

자신은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검무극은 그녀의 미세한 감정을 느낄 테니까.

“궁금해서요. 제가 느낀 차 소저는 사람을 잘 안 믿으실 것 같은 분인데, 대체 어떤 분이기에 가장 믿는다고 할까 궁금해졌어요. 그분도 알고 계실까요?”

그도 알 거다, 아니 모를 거다. 간단한 대답이었는데 그녀는 고민하지 않고 다시 벌주 석 잔을 마셨다. 아예 그 사람과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안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을게요.”

“상관없어요. 술은 많으니까요. 자, 또 덤벼요!”

이안의 질문은 유용했다. 검무극은 차이란의 반응에서 악군학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꽤 깊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까.

‘지하에서 그렇게 땅을 파면서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빼앗으셨소?’

다음 차례는 비사인이었다.

“차 소저에게 묻겠소.”

차이란이 웃으며 말했다.

“저만 인기 폭발이네요. 이 소저 섭섭하겠어요.”

“난 덤비라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성격이 아니라서.”

사실 비사인은 왜 사부를 죽이려 하느냐를 제외하고는 솔직히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다만 차이란에 대해서 뭐라도 하나 더 알면 이번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를 지목했다.

“왜 천하제일미가 되려는 거요?”

그저 형식적인 질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자신이 궁금해하는 질문과 닿아있었다. 그녀는 천하제일미가 되어 사부께 접근해서 암습을 가하려 계획을 세웠으니까. 그러니까 솔직히 이 질문에 답한다면 이렇게 해야 할 거다.

사도맹주를 죽이기 위해서라고.

차이란이 대답을 망설이자 이안이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저는 상금 보고 달려들었죠.”

하지만 끝내 차이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 저도 그런 간단한 이유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서 다시 석 잔의 벌주를 마셨다.

여인이라면 한 번쯤 꿔볼 만한 꿈이잖아요? 정도로 대답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적어도 그녀가 이 내기에 더없이 솔직하고 진지하다는 걸 이 벌주로 알 수 있었다.

연거푸 술을 마신 그녀의 얼굴에 술기운이 올랐다. 주량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겠소?”

검무극의 걱정에 그녀는 호기롭게 말했다.

“설마 날 걱정하는 건가요? 전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한 바퀴 질문 순서가 돌았고 다시 차이란 차례가 되었다. 검무극에게 질문을 할 줄 알았는데, 대상은 비사인이었다.

“소맹주께 묻겠어요.”

그리고 그 질문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도맹주께서는 무엇을 가장 좋아하시죠?”

순간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이안 역시 애써 긴장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묻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비사인의 물음에 차이란이 대답했다.

“궁금하잖아요? 과연 사파지존께서는 어떤 걸 좋아하나?”

그녀는 이안을 보며 도발했다.

“이번에 제가 천하제일미가 되면 축하연 자리에서 직접 뵙게 될 텐데. 뭘 좋아하시는지 알아두면 도움이 되겠지요?”

비사인이 대답 대신 벌주를 마셨다.

“감히 어찌 내가 맹주님에 대해 술자리에서 말할 수 있겠소? 벌주를 마시는 걸 이해해 주시오.”

사부에 대해 묻는 그녀의 뻔뻔함에 화가 났지만 비사인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죄송해요, 제가 무례한 질문을 했나 보네요.”

“괜찮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사도맹주를 노리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그녀의 질문도 유용했다.

다시 검무극이 질문할 차례가 되었다.

이번에도 차이란을 지목했다.

“차륜전이 되는 거 같아 죄송하지만, 소저께 궁금한 게 또 있소.”

“검 호위 질문은 언제든 환영이에요.”

하지만 결코 환영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소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누구요?”

순간 차이란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는 가장 믿는 사람을 묻더니 이제는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을 묻는군요.”

질문한 검무극이 자신의 답을 말해주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요.”

앞서 그녀에게 물었던 두 질문 이외에도 아버지가 대답을 차지할 질문은 많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차이란은 결국 또 벌주를 들었다.

“덤벼요! 덤벼!”

이안이 그 질문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럼 조금 쉬운 질문을 드릴게요. 차 소저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뭐죠?”

하지만 이 질문에도 차이란은 난감해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처음에 내기하자 할 때만 해도 이런 질문이 날아들 줄은 몰랐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내게 소중한 건…….”

그녀의 시선이 술잔을 향했다.

“이 술이죠!”

대답은 했지만 그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대답이 아니라는 듯, 그녀는 다시 벌주를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커졌다. 술에 취한 그녀의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조금 쉬어가면서 술을 마시자고 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소저께서 너무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셨나 봅니다. 남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이었는데.”

검무극과 차이란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내 그녀의 눈빛에 서글픔이 스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진심인지, 아니면 취한 척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 다시 가자고요!”

“좀 쉬어가면서 하시오.”

“덤벼요!”

이제부터는 꼭 차이란에게만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이안이 비사인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을 묻기도 했고, 검무극은 이안에게 근래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도 물었다. 그러다 질문하는 순서가 바뀌기도 했고, 두 번 연속으로 질문하기도 했다. 그들은 점차 취해갔다.

여전히 서로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술자리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런 날 아니면 또 언제 이런 걸 묻나,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대답했다.

그렇게 질문이 돌고 돌다가 알아들을 수 있는 차이란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녀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당신의 가장 큰 비밀은 뭐죠?”

만취한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뭔데 우리 조직이 박살이 나고 있는 거지? 당신이 뭐기에 그 사람이 당신을 살려준 거지? 당신이 뭐기에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당신이 뭐기에…….

검무극이 술잔을 들며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김에 하마터면 내 비밀을 말할 뻔했습니다.”

검무극이 벌주를 마시자 차이란이 기뻐했다.

“당신도 슬슬 무너지는군요! 자, 달려요!”

그날 술자리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것이었다.

다 덤벼!

* * *

차이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화명관에 따로 마련된 객방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침상 옆에 놓인 의자에 검무극이 앉아 있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순진하게 생겼는데 음흉하군요.”

검무극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억이 안 나는 척하는 거요, 아니면 정말 안 나는 거요?”

“당연히!”

차이란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안 나는 척하는 거죠.”

“토하고, 주사 부리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하고. 기억은 나시오?”

“띄엄띄엄.”

주기를 배출하지 않고 술을 마시자!

대체 뭘 믿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어디서 어디까지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의 주사만큼은 연기가 아니었다.

배후 세력과 싸움에서 정말 여러 일을 경험했지만, 아니 회귀 전 인생을 통틀어서 적의 주사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앞으로도 없을 테니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주사 있는 줄 아셨소?”

차이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과음한 적은 어제가 처음이었으니까요.”

평생 가장 심한 과음을 적 앞에서, 그것도 마교 소교주와 사도맹 소맹주가 있는 앞에서 하다니. 인사불성이 돼서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정말 그 배짱 하나만큼은 알아줘야 했다.

그리고 이제 그녀와 어제 나누지 못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할 때다.

“왜 정체를 드러낸 거요?”

과연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잡아떼지 않았다.

“당신,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잖아요?”

그녀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까?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회귀 전 인생에서 그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어떻게 알았소?”

“여자의 육감이에요.”

이번에는 그녀가 물었다. 자신을 그저 대회에 출전한 아름다운 여인 중 한 명으로 여겼어야 했는데.

“당신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죠?”

“남자의 육감이오.”

차이란이 매혹적으로 웃었다.

“차라리 속이 후련하네요. 지금까지 편하게 말을 못 해서 정말 답답했거든요. 오죽하면 그런 내기까지 하자고 했겠어요?”

“하지만 벌주를 가장 많이 마신 사람은 당신이었소.”

“마인들이 그런 질문을 해댈 줄은 몰랐으니까요. 아마 어릴 적 꿈이 뭐냐고도 물었죠? 대체 누가 물었죠?”

“다 기억하시네.”

차이란이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은 다 구겨졌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부터 진흙까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마 나가서 바닥까지 뒹군 모양이다.

“전쟁터에서 막 돌아온 무복이라 해도 믿겠네요.”

“무인들의 청결을 너무 무시하시는군요.”

그녀가 웃으며 침상 옆 탁자에 올려진 물 주전자를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독이라도 타뒀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마시오?”

“어차피 죽이려 들었으면 자고 있을 때 죽였겠죠.”

검무극은 안다. 그녀는 단지 술에 취했다고 이렇게 무방비로 잠이 들 사람이 아니다. 한데 왜 이런 허점을 보인 것일까?

“죽이지 왜 안 죽였어요?”

“쉽게 죽어줄 사람이 아닌데, 쉽게 죽일 기회가 왔다면 그건 함정이지 않겠소?”

검무극의 말에 차이란이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역시 들었던 대로 똑똑하시네요.”

그녀가 기지개를 켜더니 창가로 걸어가서 바깥을 쳐다보았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적어도 나를 죽이진 않더라도…….”

검무극을 돌아보는 그녀의 몸매는 더없이 육감적이었다. 아무리 옷이 더러워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훼손하진 못했다.

“술기운에 넘어올 줄 알았는데. 옷 갈아입혀 준다는 핑계도 있고.”

솔직한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내게 토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랬을지도 모르지.”

차이란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에게 정식으로 인사했다.

“소교주, 반가워요.”

정체를 드러낸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나는 적을 살려둬서 후환을 만들지 않는 성격인데. 어쩌려고 이러셨소?”

너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처럼 들렸지만 그녀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럼 죽는 거죠.”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용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검무극이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당신과 싸우고 돌아온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악군학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살려서 보냈다고.”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이 나를 살려주고 갔지.”

그녀의 입가에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보였던 미소와는 다른 느낌의 미소였다. 항상 반사적으로 나왔던 매혹적인 미소에 비하면 약간은 경직되고 어색한 미소.

하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미소가 진짜 그녀의 미소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그녀는 악군학을 가장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좋아하고 있다.

“그 사람은 떠났소?”

차이란은 내심 놀랐다.

검무극은 그가 떠날 줄 알고 있었다. 악군학은 자신이 떠난다는 말을 남에게 할 사람이 아닌데.

‘그 사람은 당신에게서 뭘 봤길래, 그런 말까지 해준 거지?’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아직 못 떠났어요.”

검무극은 더는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왜 묻지 않죠? 그 사람이 왜 못 떠났는지.”

쉽게 떠날 수 있는 조직이었다면 그곳 지하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 거다. 그가 떠날 거란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이런 징글징글한 조직을 떠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검무극이 그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해장 잘 하시오.”

검무극이 그곳을 나가려 할 때 그녀가 물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고 가는 거죠?”

검무극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직 당신이 사도맹주를 죽이려는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알아내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으니까.

“결승은 치르게 해주고 죽이겠다는 자비인가요?”

그녀의 괜한 약한 모습에 검무극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험한 꼴을 보고 내기에서 이겼는데.”

검무극이 방을 나서며 덧붙여 말했다.

“술값 낼 사람을 죽일 순 없지 않소?”

아버지가 왜 마존을 두셨겠느냐?

차이란은 창가에 서서 검무극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저만치 걸어가던 검무극이 돌아서더니 손을 흔들어주었다.

차이란은 손을 흔들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환하게 웃은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이 새벽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에 밤새 빛났던 별들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곧 죽일 상대에게 그렇게 웃지 말라고.”

그녀의 말에 건너편 건물의 지붕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싼 옷에 한껏 멋을 부리고 새하얀 화장까지 한 그는 화도명이었다.

“오지 마. 구경꾼은 원래 길 건너에서 구경하는 거야.”

이번에 자신은 구경꾼으로 왔다는 화도명의 말을 두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화도명은 훌쩍 몸을 날려서 그녀가 내다보고 있던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취해서 땅바닥을 기어다니는데, 이걸 어찌 참아?”

“이러다 소교주 눈에 띄면 그 모가지 뎅강이야.”

“그 주사를 보고도 살려준 자애로운 사람인데?”

화도명의 농담에 차이란은 웃고 말았다. 정말 굉장한 밤이었던 모양이다.

“구경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차이란이 화도명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었지?”

화도명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지 마. 당신까지 죽으면 더 엉망이 될 거야. 알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이기면 되지.”

“그들은 사도맹주가 목표인 것도 이미 알고 있었어. 심지어 사도맹주가 오는 것을 막지 않았지.”

“왜 사도맹주를 노리는지 알고 싶어서 우릴 살려두고 있다?”

차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차이란이 화도명의 말을 끊었다.

“방심 안 해.”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더욱 강조했다.

“소교주는 방심 안 한다고.”

화도명은 그녀가 검무극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야 무서워? 지금껏 죽어 나간 이들 소식을 들었으면서.”

“직접 본 건 아니었으니까.”

호위 역할을 할 때와 소교주인 검무극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정체를 드러낸 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마음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잖아?”

“이 얼굴과 몸이 항상 통했으니까.”

그녀의 자조적인 말에 화도명이 알 듯 말 듯 한 말을 꺼냈다.

“안 통할 때의 당신이 더 무섭지 않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짙은 화장이었지만, 화도명의 눈빛만큼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자 차이란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화도명이 전해줬던 바로 그 상자였다.

그녀가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붉은 구슬이 들어 있었다.

“분명 내게 이것이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랬기에 이 상자를 열었을 때 구슬은 없어졌어야 했다. 기운이 사라진 돌덩이를 넣어두고 시치미를 뗐어야 했다. 한데 검무극은.

“참았어.”

구슬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한 번 열어볼 생각조차 안 했지.”

상대를 죽이는 건 참아도 이 구슬을 얻고 싶은 욕망은 참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은 참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가까이서 얼쩡거리지 마. 소교주 손에 죽을 때 나 혼자 죽기 싫어서 당신 숨어 있는 곳 가리킬지도 모르니까.”

부채 너머에서 웃음이 번져 나왔다.

“여기 술값이나 대신 내줘. 구경값은 받아야지.”

“당신은 어디 가는데?”

“씻고 옷도 새로 사고.”

차이란이 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해장도 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도명이 부채를 살랑살랑 부쳤다. 부채에 그려진 미인도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움직였다.

* * *

거처로 돌아왔을 때 이안은 자지 않고 검무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무극이 무사히 돌아왔을 때 느끼는 안도감이 있는데, 오늘 유난히도 그 안도감이 컸다.

“차 소저는요?”

“좀 전에 깨는 거 보고 왔다.”

죽이지 않고 왔다는 의미. 검무극이 그녀와 남겠다고 했을 때 이안은 걱정했다. 만취한 차이란이 또 어떤 유혹을 할까 하는 걱정보다.

“주사를 너무 부리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웠어요. 이게 다 어떤 함정이 아닐까 싶어서.”

“함정이었겠지.”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함정이었다고요?”

“일을 꾸몄는데 뜻대로 안 된 거겠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정작 죽이려 했어도 쉽지 않았을 거고.”

정말이지 어제의 차이란은 그 어떤 암기보다 무서웠다.

검무극이 자신의 침상에 누워 손으로 팔베개를 한 채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심각한 표정에.

“혹시 마음에 걸리는 거 있으세요?”

“그래 보이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침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아니, 누가 봐도 고민이 있어 보이셨다고요!

이렇게 표를 냈다는 건 그 일에 관해 자신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는 의미.

그리고 검무극의 고민은 정말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가 가장 믿는다고 한 사람이 바로 악 사범이다.”

이안은 깜짝 놀랐다. 악군학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룡무관에서 서진과 함께 그의 수업도 들었으니까. 이후 검무극과 그와의 관계가 깊어졌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차이란이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짝사랑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악 사범이 그 여인을 좋아할까 봐 걱정되시는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악군학이 그녀를 좋아한다면? 자신은 차이란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죽이지 않고 이번 일을 해결할 작정이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이안이 조심스럽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악 사범께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이 친구와 생사혈전을 펼치는 걸 그냥 두고 보는 사람인가요?”

만약 좋아하는 여인이라면 어떻게든 찾아올 거란 뜻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이안도 경험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고수였는지.

“만약 그가 이 상황을 모르고 있다면?”

검무극의 걱정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차 소저를 통해 알아내야죠.”

“어떻게?”

“차 소저에게 가셔서 소교주님이 그 사람과 친구라고 말씀하세요. 정말 친한 사이라고. 그녀만의 짝사랑일 때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일 때, 분명 반응이 다를 거예요.”

이안이 확신하며 말했다.

“소교주님이시라면 분명 그 차이를 알아내실 거라 믿어요.”

“똑똑하다! 이안!”

“소교주님도 생각하셨잖아요? 괜히 제 입으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물어보신 거 아니었어요?”

“안 했어. 못했어. 내 일이 되니까 머리가 안 돌아가더라.”

“숨겨둔 제 꼬리가 드디어 한 건 하는 순간인가요?”

“가자, 그 꼬리 아직 접지 마라.”

“어딜요?”

검무극이 방을 나가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천하제일미 되러 간다.”

* * *

안후평이 잠에서 깼다.

‘어?’

눈을 떠보니 자신의 거처 침상이었다. 분명 화명관에서 소맹주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꿈인가?’

지금이 꿈인지 술을 마셨던 일이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사추! 사추!”

안후평이 사추를 소리쳐 불렀다.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는데. 사추는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수하가 들어왔다.

“사 무인께서는 안 계십니다.”

“어딜 갔는데?”

“어제 화명관에서 헤어지고 저희도 보지 못했습니다.”

“화명관?”

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주방에서 사추를 만났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술에 취하셨다고 거처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이 자식이!”

안후평은 수하들을 데리고 화명관으로 달려왔다. 어제 있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없고, 화명관은 장사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곳 숙수와 점소이를 닦달하니 사추가 자신의 수혈을 제압하고 떠나버린 것과 남은 네 사람이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젠장!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안후평은 사추가 떠나버린 것보다 그 술자리에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그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소외감을 느꼈는지는 이미 잊은 그였다.

“이 새끼 찾아! 당장!”

수하를 풀어 사추를 찾게 했지만 이미 멀리 떠나간 후였다.

그는 곧장 비사인의 거처부터 찾아갔다. 비사인을 만나서 어제 말도 없이 가버린 것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비사인은 거처에 없었다. 그렇다고 감히 사도맹주를 찾아가서 소맹주 어디에 있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안후평은 곧장 이안이 머무르고 있는 객잔으로 향했다. 비사인이 없으면 이안에게라도 점수를 만회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하지만 그녀도, 그 밉살스러운 호위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사추! 이것들이 다 어디 간 거야?”

습관적으로 사추를 찾으며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왜 말이 없어?”

순간 안후평이 흠칫 놀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 중에 사추는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수하 놈들은 낯만 익을 뿐 이름도 몰랐다. 이들 관리는 사추가 알아서 했었으니까. 사납게 생긴 놈 중에서 누구도 믿음직한 느낌을 주는 자가 없었다.

그때 문득 사추가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땅굴 속에 숨어 계시다가 저 태풍이 지나가면 나오십시오. 지금 소방주님이 무사하신 건 태풍의 눈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이놈들 중에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새끼 꼭 찾아! 찾아서 꼭 살려서 데려와!”

* * *

안후평이 애타게 찾던 사람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검무극이 이안과 비사인을 데리고 천화루주가 머무르고 있는 객청을 찾아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소교주님.”

극악소마는 알 수 있었다. 결승 무대를 이틀 앞둔 지금 이안과 천화루주는 서로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한데도 찾아왔다는 건 결전의 순간이 되었다는 의미리라. 게다가 비사인까지 함께였다.

천화루주와도 인사를 마친 후 검무극이 어제 있었던 일부터 전했다.

“차이란이 스스로 정체를 밝혔습니다.”

순간 극악소마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상대가 기존에 세운 계획을 바꾼 것이다.

원래 놈들의 계획은 차이란이 천하제일미가 되어 축하연회에서 사도맹주를 암살하는 것.

한데 차이란이 스스로 정체를 밝히면서 예측 불가의 상황이 되었다.

“목표를 소교주님으로 바꾼 겁니까?”

복면 위 극악소마의 두 눈에 걱정이 스쳤다.

“어쩌면요. 대신 바뀐 게 아니라 포함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여전히 그들의 목표는 사도맹주라는 말이었다.

앞서 차이란이 비사인에게 사도맹주가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우리가 목표를 알고 있는지 그 반응을 보려는 질문이었다. 사도맹주가 목표가 아니었다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정체를 밝혔다는 건 저들은 싸울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겠지요. 그래서…….”

검무극은 이미 오기 전에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우리가 먼저 칩니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언제 칠 건가?”

그 시기는 모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오늘, 지금 당장!”

질문한 비사인은 물론이고 이안과 천화루주도 깜짝 놀랐다.

오직 극악소마만이 예상했다는 듯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그래, 이래야 한다. 움직이려면 같은 편까지도 예상치 못하게 움직여야지.

차이란은 절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설마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마시고 헤어진 후, 오늘 곧바로 움직일 거라고는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안은 아까 방에서 나올 때 검무극이 했던 말뜻을 이제야 이해했다.

결승 무대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천하제일미가 될 수 없을 테니.

그래서 그 전에 이번 일을 처리하고 이틀 후 결승에 나가서 진짜 천하제일미가 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각자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신화방은 사도맹에서 맡아주게.”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방주와 그가 끌어들인 고수들, 그리고 신화방 무인들까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이쪽에는 사도맹주가 있었다.

다음으로 이안에게 일을 맡겼다.

“일이 진행되는 동안 이안은 천화루주님을 지켜드린다.”

다시 말해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에게 내릴 명령이 따로 있다는 의미.

“네, 제게 맡겨주세요.”

이안이 씩씩하게 대답한 후 천화루주와 눈인사를 나눴다.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저는 차이란을 맡겠습니다. 소마님께서는 그녀가 데려온 살수 조직을 처리해 주십시오.”

“맡겨주십시오.”

극악소마가 순순히 명령을 받자 이안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한데 그녀들이 누군지를 모르잖아요?”

차이란의 수하들이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완벽히 감출 줄 아는 최고 실력의 살수들.

그들이 몇 명이 동원되었으며 어디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번 대회에 참가한 여인 중에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그런데 오늘 내로 그들을 찾아서 처리한다고요? 불가능해요!”

신화방을 다 때려 부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검무극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불가능한 일이지.”

“한데 왜?”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왜 마존을 두셨겠느냐? 불가능한 일이 생기면 이렇게 말씀하시려고 두셨겠지.”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보며 아버지 흉내를 냈다.

“소마, 처리하고 오시게.”

극악소마가 교주를 대하듯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착착착착착착!

뒤에 서 있던 무면객들도 일제히 포권했다.

이안은 검무극의 저 농담에 극악소마에 대한 더없이 깊은 신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도울 건 도와야지.

“제가 대기실에서 살수일 지도 모르겠다고 찍어둔 여인들이 몇 사람 있어요. 그녀들을 미행하다 보면 분명 다른 살수들과 접선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물론 오늘 내로 접선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 방법으론 오늘 내로 그녀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마음은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네.”

극악소마는 생각해 둔 방법이 있다는 듯, 늘어선 무면객들 앞에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방식대로 처리하겠네.”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극악소마의 방식이었기에 더없이 잔혹하고 극악할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그 반대였다.

극악소마가 검무극에게 이렇게 물은 것이다.

“그녀들을 살려서 제압해 오길 원하십니까?”

모두가 놀랄만한 말이었다. 살수를 찾아 내기도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었는데, 찾아서 제거하는 게 아니라 살려서 제압한다고?

기왕 불가능한 일, 그 어려움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려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원한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왠지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차이란과 악군학과의 관계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되도록 그녀의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게 혹시 있을지 모를 후회를 막을 선택이리라.

그래서 따로 부탁하려 했는데, 극악소마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 먼저 말해준 것이다. 역시 소마님은 소마님이십니다.

“그래 주십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역시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이런 극악소마의 마음을 대변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수하들을 위험에 빠뜨리다니! 너무하세요!”

분위기를 풀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검무극이 농담으로 잘 받아줄 것을 알았기에.

“억울하면 소교주 하든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극악소마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뻔뻔함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이 정도는 해내 줄 거라는 믿음. 이 명령으로 그와 수하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

거기에 무면객들에게 던지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성질 건드려도 죽이지는 말게. 여인들이니까 얼굴은 때리지 말고.”

무면객들의 눈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지켜보던 비사인은 내심 감탄했다.

어차피 명령은 내려졌고.

그렇다면 조심하란 말보다는 차라리 저런 말이 무면객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이안이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면 저도 돕겠습니다.”

극악소마가 거절했기에 또 말을 꺼낼 수는 없었지만, 대기실에서 알아본 살수들을 알려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말고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아 보여서였다. 게다가 그녀들을 생포하라는 추가 명령까지 내려왔는데.

정말 괜찮으세요, 소마님?

극악소마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을 느꼈다.

“자네 제안을 왜 거절했는지 아나?”

정말이지 그 이유가 이런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미 살수들이 누군지 알고 있네.”

“지금까지 열여섯 명을 찾아냈지.”

확실한 살수들을 찾아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열여섯 명이나.

놀란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소교주님은 아셨어요? 그녀의 눈빛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검무극도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어떻게 찾아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안의 물음에 천화루주가 나서서 설명을 대신했다.

“마존께서는 저를 제외한 다른 두 명의 심사자부터 조사하셨어요.”

신화방에 온 이후 극악소마는 그저 객청에서 시간만 보내지 않았다.

천화루주 옆에 앉을 사람들이니, 심사자로 온 이들부터 조사했다.

“예상대로 두 사람 모두 신화방주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자들이더군요. 큰 신세를 진 사람들로 신화방주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이들이었지요.”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왜 저를 심사자로 불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녀가 극악소마와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소마님 때문이거나 소교주님 때문일 거라 막연히 짐작할 뿐이지요.”

그러자 검무극이 담담히 말했다.

“루주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천화루주는 검무극의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신녀궁의 후예이기에 불렀을 수도 있다는 의미.

천화루주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왜 자신을 불렀는지는 몰라도 다른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명확했다.

“예선전부터 그들이 점수를 주는 걸 유심히 봤어요. 명백히 더 아름다운 여인이 있음에도 다른 여인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줄 때가 있었지요. 물론 사람마다 보는 눈이 다를 수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의 선택은 같았어요.”

그녀는 무대의 심사뿐만 아니라 심사석의 심사도 함께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뽑은 여인들은 찾아냈지만, 문제는 놓치고 지나간 여인이에요.”

정말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본선에 진출한 살수들도 있었을 것이다. 차이란처럼 말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생기는 의문.

“하면 왜 그렇게 많은 숫자를 대회에 참석시킨 거죠? 어차피 그들이 뽑는다면 일곱 명만 있어도 되었잖아요?”

사실 결승 무대조차 필요 없었다.

“아니, 한 명만 뽑아도 되겠지요.”

사도맹주와 함께하는 축하연에는 천하제일미만 참석할 테니까.

“저도 그게 궁금했어요. 한데 이걸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천화루주가 접혀 있는 종이를 내밀었다.

“결승 무대가 있는 날 자리 배치도에요.”

본선에 진출했던 여인들을 위한 특별석이 무대 뒤쪽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결승 무대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날 그 무대에서 어떤 일을 벌이려는 거죠. 소교주님이 개입하면서 그들의 계획도 바뀐 거죠.”

이안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화루주가 본 예언도 무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분명 무대에서 뭔가 음모를 꾸밀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음모는 자신도 관계가 있었다. 결승 무대에 서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만약 차이란과 살수들이 동시에 자신을 공격한다면? 차이란 한 사람을 막기도 쉽지 않을 것인데, 살수들까지 함께 돕는다면?

결국 검무극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무대 위로 뛰어들 것이다.

바깥에서는 절대 준비할 수 없는 살행이 그 무대에서는 일어날 수 있었다. 차이란과 가인교의 정예 살수들이 모두 무대에 있는 순간이니까.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깬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그들은 계획을 또 바꿔야겠지.”

자신은 검무극이 내린 임무를 반드시 수행할 것이다.

“그날 무대 위의 살수는 단 한 사람뿐일 테니까.”

* * *

조 총관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 대회의 책임을 맡은 그는 요즘 밤낮없이 바빴다. 이틀 후에 있을 결승 준비에 이후 사도맹주를 모시는 축하연회까지. 그야말로 실수하면 큰일 나는 행사들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을 때, 조 총관은 흠칫 놀랐다. 순간 방을 잘못 찾아들어 온 줄 알았다.

누군가 자신의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누구시오?”

놀란 조 총관의 물음에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조 총관이 한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이 자는?’

천화루주의 호위를 맡은 무인이었다. 꽃 한 송이만 그려진 저 면사도 특이했고, 면사를 착용했음에도 워낙 잘생긴 외모여서 잊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는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까.

조 총관이 달아나려고 홱 돌아서던 그 순간!

그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어느새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넘어지지 않게 자신의 손을 붙잡아주는 바람에 당연히 신화방 무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기에도 한 송이 꽃이 그려진 면사가 보였다.

면사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심한 눈빛.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준 행동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차가움이었기에 더욱 무서운 눈빛이었다.

조 총관은 다시 돌아서자 극악소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조 총관은 느낄 수 있었다.

‘다르다.’

앞서 호위로 봤던 그 눈빛과도 달랐고, 지금까지 봤던 그 수많은 눈빛과도 달랐다.

신화방 총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온갖 무인들을, 그것도 수많은 사파 무인을 만났던 그였다.

하지만 심장을 파고드는 이런 서늘함은 처음이었다. 난폭하고 거친 그 익숙한 두려움과는 전혀 다르다.

“할 말이 있으니 이리 오시오.”

차분했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조 총관이 휘청거리며 극악소마 앞으로 걸어갔다. 예의를 갖춰 말했기에 더 무서운 상대였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그러자 극악소마가 보고 있던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연락해서 다 모이라고 하시오.”

조 총관이 서류를 보니 이번 천하제일미 선발대회에 참석해서 본선에 진출했던 여인들의 신상정보였다.

“이 사람들을 왜?”

“알 것 없소.”

부를 수는 있었다. 대회에 참석한 이들과는 언제든 연락할 수 있게끔 그들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은 모두 신화방 근처의 객잔이나 장원을 빌려 머무르고 있었다.

시킨다고 무작정 할 수는 없었기에.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방주께서 이 일을 조사할 겁니다.”

그때는 신화방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말을 돌려 말했다. 아무리 네가 무서워도 신화방주는 두려워하겠지 싶어서 한 말이었는데.

극악소마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의 두 눈에 지어지는 한 줄기 웃음.

검무극에게 짓는 그 환한 웃음이 아니었다.

죽음을 부르는 소마의 웃음.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조 총관을 옥죄어왔다. 어둡고 깊은 곳에서 영혼이 찢기는 울부짖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소?”

앞뒤 다 자른 물음이었는데, 조 총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올 게 왔구나.’

신화방주가 갑자기 이런 대회를 개최하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이런 대회를 개최해서 신화방의 명성을 올릴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건 분명 신화방주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대회를 개최한 후 염사검과 철한도를 불러들인 것도 이상했다. 뭔가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면 그들을 불러들이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뜬금없이 축하연회에 사도맹주를 초대했다.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조 총관은 모른 척 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극악소마가 탁자 위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럼 증명하시오.”

더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상대의 웃음에서 죽음을 느꼈기에.

“뭐라 하면서 부를까요?”

“결승 무대에 앉을 자리 배정이 있다고 하시오.”

조 총관이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한데 이런 일은 방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당신 방주는 그럴 여유가 없을 거요.”

조 총관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당신이 준비한 대회인데 마지막까지 마쳐야 하지 않겠소?”

말만 잘 들으면 살 수 있다는 의미였다.

“네, 알겠습니다.”

서류를 챙겨 들던 조 총관의 시선에 책상 옆에 따로 빼둔 신상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열댓 장 되어 보였는데, 그녀들 역시 본선에 진출한 여인들이었다.

“이 여인들은 왜 빼는 겁니까?”

창밖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사람들은 이미 불렀소.”

* * *

저잣거리 수레에서 온갖 잡동사니 잡화를 파는 노총각 노씨는 요즘 기분이 좋았다.

대회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연일 거리를 메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들인가?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싫었는데, 요즘은 장사하러 가고 싶어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앞에서 물건을 고르는 여인 역시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여인과 혼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 업고 살라고 해도 살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안 드시면 이걸로 보십시오.”

노씨가 수레에 진열된 다른 장신구를 찾아서 그녀에게 건넸다.

“어?”

노씨가 놀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금방 수레 앞에서 물건을 구경하던 여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두두두두.

그 여인은 방금 수레 앞을 지나갔던 마차에 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실려 있었다. 마혈과 아혈을 제압당해서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뜬 채 눈앞에 마주 앉아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새하얀 가면을 쓴 채 마차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면객!’

여인은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십칠교(十七橋).

가인교의 열일곱 번째 다리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방심했다. 설마 지나가던 마차가 자신을 납치하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방심도 방심이지만 상대의 실력이 너무 능숙했다.

마차가 자신의 뒤를 지나가는 순간, 마차 문이 열리면서 순식간에 자신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마차에 실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무면객은 자신에게 시선 한 번 줄 법도 했는데 창밖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정말 촌놈이 도시 구경 온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마부석 쪽에서 툭툭 뒤쪽 벽을 쳤다. 그것을 신호로 객실에 타고 있던 무면객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석에 있던 사내도 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릴 때 창문의 휘장을 가리고 내렸기에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십칠교는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잠시 후 바깥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그녀는 직감했다. 무면객이 자신의 동료와 싸움을 벌이고 있음을.

‘제발! 제발!’

곧이어 싸우는 소리가 멈추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긴장된 순간.

마차 문이 덜컥 열렸다.

상대를 확인한 십칠교의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마차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오교(五橋)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이자 실력 하나만큼은 알아주는 그녀였다.

스물네 번의 살행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마친 그녀.

‘역시! 놈들을 해치우고 저를 구하러 오셨군요!’

바로 그때였다.

그녀가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왔다. 이미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한 오교가 십칠교 옆에 나란히 앉혀졌다.

“…….”

“…….”

오교를 밀고 들어온 무면객이 자리에 앉으며 마부석 쪽 벽을 탁탁 쳤다.

그것을 신호로 마차가 출발했다.

무면객은 그녀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바깥 풍경만을 바라보았고, 마차는 다시 다음 다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자기 자리 알지?

십칠교는 두려웠다.

자신들을 붙잡은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무면객, 극악소마를 추종하는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에게 끌려가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보통 살수들은 붙잡혔을 때를 대비해 어금니에 독단을 숨겨두는데 가인교 살수들은 독단을 숨겨두지 않았다.

수장인 차이란의 뜻이었다.

독단 깨물 힘 있으면 어금니 꽉 깨물고 끝까지 살려고 노력해라!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다. 이건 방심의 문제가 아니다. 방심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테니까. 외부에 노출된 살수는 일반 무인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기습까지 당했으니.

‘대체 우릴 어떻게 알아낸 거지?’

배신자라도 있나? 배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서로 기거하는 곳까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정확히 자신들을 알아보고 찾아왔다.

바로 그때였다.

피이이이, 퍼퍼퍼펑!

멀지 않은 곳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특이한 소리를 내는 폭죽이었다.

십칠교와 오교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방금의 폭죽은 가인교의 살수들끼리 위급을 알릴 때 쓰는 신호였다.

그렇다는 것은 다른 쪽에서도 이 무면객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

무면객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폭죽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우릴 한 번 쳐다볼 생각을 안 하지?’

남자라면 한 번쯤 볼 법도 한데. 정말 마교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키워낸 자들인가?

물론, 그녀는 알지 못했다. 무면객들이 쳐다보면 또 얼마나 집요하게 쳐다보는지.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번에 누굴 노리는지 몰라도 두 살수의 바람은 하나였다.

‘제발 신호를 들었기를!’

마차가 인적이 드문 변두리 거리에 들어서던 바로 그때였다.

마부석 무면객이 강하게 뒤쪽 벽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마차가 속도를 높였다.

퍽! 퍼억! 퍽!

마차에 연속해서 무엇인가 날아와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무면객이 반대쪽 창문의 휘장을 열어 밖을 보려던 그 순간.

쇄애액!

날아든 암기가 창문으로 날아와 반대쪽 창문으로 날아갔다.

퍽! 퍽! 퍽!

다시 마차에 암기가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마차를 꺾으면서 마차가 휘청했다. 한쪽 바퀴가 들리면서 옆으로 기울어졌다.

무면객이 반대쪽으로 자리를 옮기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바퀴가 들렸던 마차가 간신히 균형을 잡던 그 순간.

푸아아앙!

마차 벽을 뚫고 짧은 화살처럼 생긴 암기가 날아들었다. 일반 암기가 아니었다. 마차 벽을 관통할 정도로 강력한 암기였다. 그리고 그 암기가 날아든 곳은 십칠교와 오교가 앉아 있던 그곳이었다.

무면객이 그녀들을 향해 날아드는 암기를 비수를 내리쳐서 쳐냈다.

날아든 암기의 기세가 너무 강력해서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그 덕분에 암기가 방향을 틀었다.

암기는 앉아 있던 두 여인의 머리 뒤쪽을 관통해 날아갔다.

무면객이 쳐내지 않았으면 그녀들 모두 목숨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그와 동시에.

날아든 암기가 그녀들을 막아주려고 창문에 몸을 노출한 무면객의 팔을 찢고 지나갔다.

팔에서 피가 튀었지만, 상처를 돌볼 틈이 없었다.

또 다른 암기가 날아들었다.

쇄애애액!

아까보다 더 긴 암기가 여인들이 앉은 곳으로 날아들었다. 앞서 암기보다 더 빠르고 강했다.

무면객이 두 여인을 잡아 자신이 있던 자리로 잡아당겼다.

푸아아앙!

암기가 그녀들이 앉아 있던 곳을 관통해 날아갔다.

밖에서는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십칠교와 오교는 공격하는 여인이 누군지 알았다.

팔교(八橋), 그녀는 가인교에서 가장 암기술에 능통했다.

하필이면 그녀였다.

팔교의 성격은 이기적이면서도 무자비했다. 마차에 같은 편이 탔다는 것을 알아도 무차별 공격을 가하는 그녀였다.

채앵! 챙!

다시 마차를 뚫고 날아든 암기를 무면객이 쳐냈다. 그중 하나는 두 여인이 적중당했을 암기였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막았다.

‘왜 이렇게까지 우릴 살리려 하지?’

십칠교는 내심 의아했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걸로 따지면 이들 무면객이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을 텐데.

암기가 쏟아졌지만 마차는 잘 달렸다. 마부석에 탄 무면객은 날아든 암기가 자신과 말에 맞지 않도록 지풍으로 쳐내면서 달렸다.

말을 모는 실력이나 지풍을 날리는 실력 모두 더없이 훌륭했다.

그가 뒤쪽 벽을 탕탕 두드려 신호를 준 후, 엄폐할 나무가 있는 곳 옆에 마차를 세웠다.

마차가 멈추는 순간!

무면객은 마차 문을 열고 여인들을 밖으로 집어 던진 후 자신도 몸을 날렸다.

파파파팍!

마차가 멈추었기에 더욱 정확히 암기가 날아들었다.

마차에서 내린 무면객은 마부석부터 살폈다. 어디로 몸을 날렸는지 말을 몰던 동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티잉! 쉬익!

벽을 맞고 튕겨 나온 암기가 십칠교의 얼굴로 날아들던 그 순간.

무면객이 지풍을 날려 암기를 튕겨냈다. 얼굴은 때리지 말라는 검무극의 농담을 철석같이 지켜내고 있는 그였다.

두 여인을 나무 뒤로 숨기려던 그때.

슈아아아아아아아!

암기가 그들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챙챙챙챙챙챙!

무면객은 혼자 몸을 날려 피할 수 있었지만, 십칠교와 오교 앞을 막고 암기를 쳐냈다.

하얀 가면에 피가 튀었지만 무면객은 피하지 않았다.

십칠교와 오교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지키려는 그의 등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정말 누굴 응원해야 할지 모를 상황.

‘못 막아! 무리야!’

팔교가 지금 발출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암기가 아니었다. 무림맹 금용암기이자 그녀가 가장 급할 때 사용한다는 멸살폭우(滅殺暴雨)였다.

무면객의 어깨와 허리에서 피가 튀었다. 팔다리가 다치더라도 어떻게든 급소를 피하면서 막아냈다.

마지막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무면객이 팔을 늘어뜨렸다.

그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너무 지쳐서 더는 암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비수 한 자루만 날아와도 끝장이었는데.

그런데 더는 암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무면객이 고개를 들자 저 멀리 건너편 지붕 위에 마부석의 무면객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여인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자신이 암기를 막아내는 사이 그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잠시 후, 너덜너덜해진 마차에는 세 명의 살수가 나란히 앉았다.

십칠교와 오교, 그리고 팔교까지.

무면객은 그제야 다친 상처를 제대로 치료했다.

위급한 상처까지 아니더라도 꽤 깊게 찢어진 상처들이었는데,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혈도를 눌러 지혈하고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으윽.”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는 무면객의 눈을 보자 십칠교는 이자도 고통을 느끼는구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가면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 대부분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서 흘린 피였다.

십칠교는 이번만큼은 저 무면객이 참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금용암기를 번갈아 써가며 그를 거의 죽일 뻔한 팔교였다. 죽이진 않더라도 반죽도록 패버릴 줄 알았는데.

무면객은 그 흔한 욕 한마디 던지지 않고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십칠교도 부서진 마차 구멍으로 흘러가는 바깥 풍경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 * *

여인들이 객청에 도착했다.

오늘 자리 배정을 받기 위해 모인 여인들은 본선에는 진출했지만, 최종 일곱 명에는 떨어진 여인들이었다.

서로 아는 얼굴끼리 인사도 하고 대화도 나눴다.

“여길 또 와 보네요.”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여기는 본선 대회 때 대기하던 바로 그 객청이었다.

“우리 여기 앉아 있었잖아요.”

“그때만 해도 제가 결승에 진출할 줄 알았죠.”

여기저기 웃음이 나왔다. 분위기는 좋았다. 같이 떨어졌기에 느끼는 묘한 동지애가 있었다.

여인들이 모두 객청에 들어오자 죽립을 눌러쓴 무인이 뒤따라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객청에는 조 총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결승 무대의 자리 배치 때문입니다.”

객청 한쪽을 아예 무대처럼 꾸며두고 뒤쪽에 그녀들이 앉을 의자를 배치해 두었다.

“오늘 자기 자리가 어딘지 잘 확인하셔서 그날 실수가 있으면 안 됩니다. 자, 지금부터 자리를 배정하겠습니다.”

조 총관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며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왠지 평소보다 긴장하고 경직된 그였는데, 다들 자기 자리를 확인하느라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다.

“자, 나와서 숫자가 적힌 곳에 앉으십시오. 그날은 의자에 숫자가 적혀 있지 않을 테니, 헷갈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 앉게 했다.

모든 여인의 자리가 정해졌고, 그녀들은 자리에 앉아 무대를 쳐다보았다.

무대는 자리 배정을 위해 가짜로 만든 것이었지만, 그녀들의 아쉬움은 진짜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어쩌면 저 무대가 자신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담긴 한숨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다들 마음속으로 같은 한숨을 내쉬었으니까.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듣고서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멍청한 년, 한숨은 왜 쉬어? 못 생겨서 떨어진 건데.”

모두의 시선이 비난을 가한 여인을 향했다. 심지어 그녀는 한숨을 내쉰 여인 옆자리 여인이었다. 그녀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던 여자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귀까지 먹었어? 예선전부터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한숨을 내쉬었던 여자가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이년이 날 때려?”

두 여인이 머리채를 잡고 싸움을 시작했다.

당연히 말려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 여인이 소리쳤다.

“콱 죽여버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여인들의 시선이 죽여버리라고 한 여인을 향했다.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었는지 그녀는 앙칼진 어조로 죽이라고 또 소리쳤다.

비난한 여인도, 그렇다고 단번에 뺨을 때린 여인도, 그 모습을 보며 죽이라고 소리치는 여인도,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비정상이 셋이 나온 것만 해도 많았는데, 또 나왔다.

“수준 떨어지게. 이런 한심한 년들이니 떨어지지. 같이 못 있겠네.”

또 다른 여인의 말에 뒷줄에 있던 여인이 사정없이 그녀의 머리통을 때렸다.

“이년아, 네가 제일 한심해!”

이번에는 두 여인이 달라붙어서 싸움을 벌였다.

조 총관이 놀라서 달려갔다.

“그만! 왜들 이러시오!”

그녀들을 말리려 했지만, 흥분한 그녀들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싸움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누가 선동해서 싸움을 일으키는 게 아니었다. 양쪽으로 편을 나눠서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옆 사람과 싸웠고, 앞서 대회를 하면서 감정이 쌓였던 이들과 싸웠다. 심지어 대화 한 번 안 나눠본 사람과도 싸웠다.

사방에서 소리치고 욕설을 퍼붓고 난리였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 다들 악다구니를 쳤고, 상대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할퀴고 옷을 찢고. 머리채를 잡아끌고.

물어뜯는 여인도 있었고, 앉아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인도 있었다.

부모 욕을 하며 신세 한탄하는 여인도 있었고, 내가 천하제일미라면서 괴성을 지르는 여인도 있었다. 그야말로 평소에 하지 못하고 숨겨두었던 말을 모두 꺼내서 하고 있었다.

조 총관은 순식간에 벌어진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정말 이런 모습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무리 결승에서 떨어진 한이 있다고 사람이 이럴 수가 있나?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그 고상하고 아름답던 여인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광증(狂症)이 돌아서 단체로 미쳐버린 것만 같았다.

물론, 멀쩡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러니 전염되는 병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아수라장을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그만! 그만하시오!”

조 총관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거짓말처럼 그 시끄럽던 공간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소리친 조 총관마저 놀랐다.

모두 갑자기 싸움을 딱 그친 것이다.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고, 머리채를 당기던 손도 풀었다.

어리둥절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여인들. 그녀들이 찢어진 옷을 바로 하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으며 코피를 닦았다.

조금 전까지 미친년처럼 싸우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의 표정은 이러했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그게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었나?

다들 민망한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오?”

조 총관의 호통에 그제야 싸웠던 여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는 여인도 있었고 부끄러운지 사람들 뒤로 숨는 여인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침을 뱉으며 욕을 했던 상대에게 사과하는 여인도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 서 있던 죽립 무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여인들은 덜컥 겁이 났다.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소란을 피우고 싸움까지 벌였으니. 신화방에서 자신들에게 벌을 줄 수도 있었고 소문을 낼 수도 있었다.

죽립 무인이 손을 들어서 여인들을 가리켰다. 지목한 여인을 한쪽으로 몰았다. 그녀들은 모두 조금 전에 흥분해서 싸웠던 여인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싸우지 않고 구경하고 있던 여인 중에서도 몇 사람을 지목했다.

그렇게 여인들을 구분한 후 죽립 무인이 조 총관에게 말했다.

“데리고 나가시오.”

나가면서도 여인들은 의아했다. 원래 안 싸운 여인들을 돌아가게 하고, 싸운 이들을 남겨서 야단을 쳐야 정상이 아닌가?

한데 싸운 이들을 모두 내보낸 것이다.

아, 물론 안 싸운 여인들도 몇 사람 있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내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조 총관은 군말 없이 그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곳에는 이십 명의 여인만 남았다.

남아 있던 여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자리에 한 묶음으로 있어선 안 될 사람들이 남은 것이다.

그녀들은 바로 가인교 살수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높은 사람이 삼교(三橋)였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많은 여인 중에서, 그 아수라장 속에서.

‘대체 어떻게 우리만 남긴 거지?’

삼교와 다른 살수들의 시선이 죽립 무인을 향했다.

죽립 무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싸움으로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세운 후 그곳에 앉았다.

천천히 죽립을 벗자 면사를 착용한 극악소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자기 자리 알지?”

극악소마의 나직한 목소리가 살수들이 가득한 대청에 울려 퍼졌다.

“우선 좀 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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