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회귀" [500-599화]

미끼는 뜯어먹힐지언정. 과연 구출작전일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백을 이기는 팔 이번 적은 다릅니다. 적이 똑똑하면 우리가 유리하지. 다른 수명이 늘 수만 있다면. 그쪽도 대도를 쓰시는군요. 가짜도 죽이고 구경꾼도 죽이고 오지 않은 게 문제지 그래서 네 무공이 강할 거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기강 한 번 잡아야겠군요. 우리가 마존인데 누구 도움을 바랄까. 그들을 불러낸 이유는. 더 보고 싶습니다. 마교주를 건들 생각이었다면 내 사제관계는 하나뿐이다. 아버지의 마음에 자리한 사람은. 불운을 안고 살아온 남자. 마지막 점을 쳐봐도 되겠소? 내기는 이겨야지요. 제일 교양 있는 마존을. 여협들께서 요리를 보내셨습니다. 이번 인연 아직 모른다. 그런 부탁이라면 무림맹에 가서. 그녀가 널 찾고 있다. 소교주의 신임을 받는 남자 이건 꿈이다, 꿈. 보통의 하루들로. 전 무림이 길을 막아도.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가면 무공보다 말을 잘하게 생긴. 소교주를 거치면 일상이 된다. 우릴 건드렸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원한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죽음이 기다리는 곳에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싸움 기루에서 술 날라 본 적 있나? 그때도 내가 있을까? 사파라 몰인정하고 파렴치할 것 같지만 오늘 살아나가는 사람은 없다. 이 연약하고 어린 나를 난 불안증을 안고 사는 사람이오. 나와 살면 헛손질도 하게 될 거다. 그 가마는 이제 내 거요.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도. 우리 마존께서 감상적인 면이. 그 친구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지금 오고 있소. 목숨 좀 걸면 어떻습니까? 제 마음에도 시커먼 구멍이. 지각하면 막내 되는 거지. 함께 싸웠으니 함께 마셔야지. 나와 바람 좀 쐬시겠소? 태양처럼, 바람같은. 마인은 헤어지지 않는다. 전부 다 사면 삼 할을 깎아드려요! 인형보다 더 잘 생기셨어! 이미 바람은 불었으니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 진심보다 강력한 가식 악착같이 챙겨온 건데 받아야지 널 위해서 준 것이다 내 딸 잘 데려갔다 돌아오너라 당신과 함께여서 나쁘지 않았어. 인간의 욕심은 귀신도 못 막지 너, 사실 욕 잘 못 하지? 방패는 모집 중. 그 상상력 덕분에 살았습니다 우리 집안도 물려받을 게 좀 있어서요 지옥을 가더라도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귀신보다 무서운 마귀가 붙어왔소 요즘 무관 수준이 이 정도인 줄 가슴에 멍 좀 들어도 괜찮잖아? 악인은 욕먹으면서 가는 거요. 너무 낡아 보여서요 누가 보면 무관이 아니라 마교를 흰 뱀이 올 리는 없을 겁니다 당신은 두 번 등을 보였지 내 부탁 잊지 않았지? 신발이나 벗고 말씀하시죠? 한 명이지만 일당백 고기 안 주면 일 안 합니다 강하면 강해서 어렵고 이런 악당 처음입니다 단칼에 자르면 더 생각나서 혼자가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면 이제야 마교 소교주 같군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 아닙니까? 뒤집혔다고 잘못되는 거라면 비궤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신입이 간도 크군 자식을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주먹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이제 관중석에는 죽음이 너,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내 제자가 선물로 준 거다 차라리 검 좀 빌려달라고 해 연기 연자가 아니라 인연 연자로

미끼는 뜯어먹힐지언정.

주궐이 다급히 중경지단의 후문에 도착했다.

날아든 보고대로 그곳에는 마차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후문을 지키던 지단 무인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그들이 문을 열어준 것은 멸마대 무인 정혁(鄭革) 때문이었다.

다른 멸마대 무인들은 진하군과 함께 유명장주를 구하러 떠났고, 정혁이 혼자 남아 마차들을 지단에 들인 것이다.

“지금 이게 다 뭔가?”

주궐의 물음에 정혁이 대답했다.

“본대가 지원을 요청한 외부 병력입니다.”

정혁은 진하군이 명령한 대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병력을 보충했다고?”

주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지단 병력뿐만 아니라 외부 지원 무인들까지 착착 모여들고 있는 상황. 한데 여기서 또 지원을 요청했다고?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주궐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대들이 멸마대라지만, 이곳은 엄연히 내가 수장으로 있는 곳이네. 내 허락도 없이 지원 병력을 들이다니?”

정혁이 정중히 대답했다.

“이 일은 본 멸마대의 고유 작전입니다. 비상이 내려진 현 상황에서는 멸마대의 결정이 지단의 결정에 우선한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기에 주궐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지만, 진하군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섭섭한 건 섭섭한 거고. 대체 누굴 부른 거지?’

주궐의 시선이 다시 마차로 향했다.

“병력이 아니라 짐을 실어 온 것 같은데?”

사람을 실어 나르는 마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으니까.

주궐이 걸어가서 운송 마차의 뒤쪽 문을 활짝 열었다.

순간 주궐은 깜짝 놀랐다.

안에 십여 명의 무인이 타고 있었는데, 이렇게 덩치가 큰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걸 처음 보았다. 그런 이들이 문을 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무림맹 지단주 주궐이 상대의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밀릴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은 밀렸다.

원래라면 당장 마차에서 내려 소속을 밝히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특히 그들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단주로 살아가는 지금까지 온갖 무인을 다 만나본 그였는데, 이렇게 강한 인상은 처음이었다.

특히 얼굴을 가로지른 상처는 그가 수라의 길을 걸어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바로 마군주 장호였다.

장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고 다른 마군들이 뒤이어 내렸다. 다른 마차에서도 일제히 마군들이 내렸다.

인상파에 덩치만 큰 것이 아니다. 원래도 정예였던 그들은 장호가 마군주가 되고 최정예 조직이 되었다.

게다가 이백여 명에 달하는 마군이 전부 올 수 없기에, 그중에서도 경험 많고 무공이 고강한 이들로 뽑아왔다. 최정예 중에서도 최정예가 온 것이다.

이미 언질을 받았던 멸마대의 정혁은 마군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조직임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지금 그들은 마기를 감추고 있는 중. 그렇다면 더욱 그 기세와 존재감이 강력할 것이다.

주궐이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물었다.

“그대들은 누군가?”

주궐의 물음에 장호가 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린 멸마대를 지원 나온 사람들이오.”

자신의 입으로 멸마란 말을 입에 담아야 했기에 장호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소속은?”

“없소.”

설마 멸마대가 마인을 불러들였으리라 생각지는 않았기에, 주궐은 마군들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진 대주, 정말 놈들이 우릴 치러 올 거로 생각하는 거요?’

바로 그때였다.

건물 가까이 서 있던 마군 하나가 갑자기 지붕으로 날아올랐다.

그 큰 덩치가 가볍게 지붕에 내려섰다. 지붕에 올라선 그가 주위를 살피다가 날렵하게 내려왔다.

“빠른 놈입니다.”

누군가 그곳에 있다가 달아났다는 보고에 장호가 주궐에게 확인했다.

“저곳에 수하를 매복해 두셨소?”

주궐은 이게 무슨 수작이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네.”

장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는 뜻.

바로 그때 또 다른 마군들이 움직였다.

담벼락 쪽에 있던 마군 셋이 일제히 담을 향해 쇄도했다.

파악! 팍! 파아악!

그들이 내지른 검이 담을 뚫고 들어갔다.

세 번째 마군의 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앞서 지붕에 올라갔던 마군이 어느새 담에 올라서서 뒤쪽을 살피고 있었다.

바닥에 피를 흘린 흔적은 있지만, 시체는 없었다.

그가 장호에게 보고했다.

“또 놓쳤습니다.”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자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장호가 다급히 말했다.

“이미 놈들이 들어와 있다.”

주궐이 뭐라 말하려 하자 장호가 쉿하고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위험을 감지한 장호가 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였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앙!

그곳으로 시커멓게 암기비가 쏟아져 내렸다.

“철벽(鐵壁)!”

장호의 외침에 마군들이 일제히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등을 기댄 채 진형을 갖춰서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암기가 그들에게 쏟아지던 그때, 일제히 검을 회전했다.

파파파파파파팍!

날아들던 암기들을 마군들이 모두 쳐냈다.

주궐과 정혁은 지단 무인들과 함께 암기를 쳐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무공이 떨어지는 지단 무인들은 미처 그 암기를 다 쳐내지 못했다.

파파파파파팍!

그들에게 몸을 날려 암기를 대신 쳐내 준 사람은 장호였다.

“고맙네.”

주궐이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인사를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그 암기 공격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습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장호가 서둘러 멸마대 정혁에게 물었다.

“뇌옥이 어느 쪽이오?”

“저쪽이오.”

정혁이 가리킨 쪽으로 달리며 장호가 명령을 내렸다.

“반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무림맹 무인들을 도와라!”

무림맹 무인들이 희생당하는 것도 저들이 원하는 바였기에, 검무극은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지켜주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장호의 명령대로 마군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

반은 장호를 따랐고, 나머지는 주궐, 정혁과 함께 본단 건물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렸다.

장호는 선두에 서서 달렸다.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통천각을 통해서 이미 기별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작전은 그 어떤 임무보다 특별했다. 사실 장호는 무림맹 무인들이나 정파 무림은 관심 없었다.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서대룡.

이 음모의 한가운데 서 있는 서대룡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저 멀리 복면을 쓴 무인들이 건물 입구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뇌옥 앞을 지키던 무인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이미 안으로 들어간 복면인들이 있다는 것을 느낀 장호의 마음이 급해졌다.

쉬이이이이익.

그 큰 덩치들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 * *

복도에 난 창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서대룡은 낡고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아서 창살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뇌옥에 갇힌 건 처음이었다. 항상 저 뇌옥 밖에서 안을 들여다봤었는데.

나중에 술 모임을 재개하게 되면 겪은 일을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두고 자랑해야지. 생각만 해도 이 무궁무진 짜릿한 허풍이 기대되었다.

내가 무림맹 뇌옥에 갇혔을 때 말이지, 옆에 칸에 누가 있었는지 아나?

그때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나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 순간 서대룡의 코를 찔러오는 피 냄새.

물방울 소리가 아니라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음을 직감하던 그 순간!

슈우우우.

다음 순간 창살 앞으로 한 복면인이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쉭! 쉭! 쉭!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는지, 일언반구없이 뇌옥 안으로 암기를 날렸다.

팍! 팍! 팍!

창살 사이로 날아간 암기가 박힌 것은 침상이었다. 어느새 서대룡이 침상을 뒤집어 창살 앞을 막은 것이다.

‘이렇게 다짜고짜 죽인다고?’

서대룡은 기가 막혔다. 사람을 죽이려면 적어도 얼굴 보면서 이러이러해서 죽는 거다,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

암기를 막은 침상을 향해 검기가 날아들었다.

쉬이익!

쇠창살과 함께 침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침상 사이에서.

쇄애애액!

한 줄기 도기가 휘몰아쳐 날아갔다.

서대룡이 내공을 제압당한 채, 무기도 없을 거라 방심했기에 그는 이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푸아악!

날아든 도기에 복면인의 몸이 갈라지며 허물어졌다.

서대룡이 한 번 더 도를 휘둘러 창살을 완전히 잘라냈다.

그가 뇌옥 밖으로 나오는 순간.

쇄애애애! 쇄애애액!

검기들이 복도를 가득 채우며 휘몰아쳐 날아들었다.

대도가 땅에 박혔고.

콰콰콰콱!

검기 일부는 대도에 충돌했고, 나머지는 대도를 스쳐 지나갔다.

서대룡은 내력을 주입한 도를 방패 삼아 검기를 막아낸 것이다. 사부인 혈천도마가 주로 사용하는 수비식이었다.

‘이 미친 것들이!’

앞서 제압당한 내공을 풀어주고, 병장기를 돌려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설마 무림맹 지단까지 쳐들어올까, 생각했는데 정말 쳐들어왔다. 이번 적은 상식을 넘어서는 자들이었다.

검기를 날린 복면인들이 서대룡을 향해 돌진해 왔다. 검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그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서대룡이 다시 뇌옥 안으로 몸을 던졌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피한 것이 아니었다. 좁은 복도보다는 차라리 뇌옥 안에서 싸우는 게 유리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좁은 곳에서는 검보다는 도가 불리했으니까.

달려든 세 복면인은 합격술에 능통했다.

챙! 챙! 챙! 챙!

서대룡은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들의 공격을 도를 휘둘러 쳐냈다.

놈들은 반격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지만, 쏟아지는 공격을 서대룡은 잘 막아냈다.

최정예 무인들에 비해 실전 경험이 많다고 볼 수 없지만, 서대룡에게는 그를 대신할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피나는 노력이었다.

서대룡은 수련하면서 이런 다짐을 하곤 했었다. 죽기 전에 어떤 후회도 좋지만, 이 후회만큼은 하지 말자고.

‘아, 더 열심히 수련할걸.’

그 노력의 결과가 지금 펼쳐지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수련하고 수련했던 동작이 저절로 나왔다.

거센 공격에 서대룡이 휘청하는 순간, 왼쪽에 있던 복면인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서대룡이 민첩한 보법을 발휘하며 균형을 잡더니.

쉬이이익!

파아악!

서대룡의 도가 복면인의 목을 쳐냈다.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서대룡의 허초였던 것이다.

서대룡은 합격술이 무너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거세게 밀어붙여서 두 번째 복면인을 베었다. 그 과정에서 팔에서 피가 튀었지만, 애초에 살을 주고 뼈를 취하려고 작정한 수였다. 합격술이 무너지자 싸움은 서대룡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파아악!

서대룡이 세 번째 복면인의 몸통을 베어냈다.

이 순간의 서대룡은 소심하고 조심성 많은 조사관이 아니었다. 똑똑하고 과감한 무인 서대룡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을 처리하고 난 서대룡이 뇌옥 밖으로 나왔다.

순간 서대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쪽 끝 복도에서 우르르 복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많았다.

이곳 뇌옥이 이렇게 무방비로 뚫렸다면? 바깥도 온통 싸움이 벌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복면인들은 죽음을 불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서대룡은 피하지 않았다. 서대룡이 끌어올린 내력을 도에 흘려 넣었다.

서대룡의 도가 한 차례 크게 진동하더니, 혈천도마의 독문무공이 펼쳐졌다.

멸천마도식 제삼식.

멸도혈풍(滅刀血風).

도에서 뻗어나간 도기가 회오리치며 날아갔다.

복면인들은 보았다. 분리된 여러 개의 도기가 회전하면서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후아아아아앙!

좁은 복도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휘몰아치는 공격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팍!

달려들던 그들의 온몸이 갈려 나가며 흩어졌다.

그 위력에 무공을 펼친 서대룡도 놀랐다. 처음으로 실전에서 펼쳐낸 멸도혈풍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하지만 강한 위력만큼이나 내공 소모도 극심했다.

앞서 검기를 막느라 큰 내공을 소모했고, 또 멸도혈풍까지 펼치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후우.”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며 가까이 있던 시체를 살폈다.

‘대체 누구냐, 너희는?’

스스로 미끼가 되어 붙잡혀 있었던 것도, 이들을 통해 실마리를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살수들이냐? 청부 낭인들이냐? 아니면?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애액!

서대룡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든 한 자루의 비수.

채애앵!

비수를 쳐낸 서대룡의 도가 파르르 떨렸다. 날아든 암기에 실린 상대의 내공이 엄청났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복면인의 여유로운 눈빛을 보며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이자가 수장이구나.’

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장으로 보이는 이 복면인도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그저 맡은 일을 할 뿐이라는 듯, 서대룡을 향해 쇄도해 왔다.

채애앵!

묵직한 충격이 서대룡의 팔에 전해졌다. 상대의 내공은 자신을 압도하고 있었다.

챙챙챙챙!

그나마 서대룡이 버틸 수 있는 것은 무공 때문이었다. 상대보다 더 정교하고 강한 멸천마도식이 부족한 내공을 보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내공만 압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검술은 정교했고 싸움 경험도 풍부해서 쉽게 허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복도가 좁아서 도를 쓰는 서대룡에게 더 불리했다.

서대룡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복면인은 쉴 새 없이 서대룡의 요혈을 노리며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서대룡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파아아악!

서대룡의 도에 상대 복면인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다.

‘이 자식아! 미끼는 뜯어먹힐지언정 쉽게 죽지 않는다!’

서대룡은 싸우면서도 겁이 났지만, 한편으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이래서 무인들이 싸우다 죽고 싶어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챙챙챙챙!

서대룡이 조금씩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그렇게 막다른 벽까지 밀렸다. 반대쪽 팔과 옆구리에도 피가 튀었다.

‘죽어도 사부님은 뵙고 죽어야 하는데.’

그리고 마지막 순간 떠오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소교주님 덕분에 멋지게 살다 갑니다!’

쉬이이이익!

날아드는 검이 서대룡의 목을 꿰뚫으려던 그 순간.

꽈아아아앙!

한쪽 벽이 터져나가며 복면인은 반대쪽 벽에 처박혔다.

서대룡은 보았다.

누군가 벽을 뚫고 들어와서 복면인을 날려 버리는 것을.

찰나의 순간 복면인은 몸을 틀어서 그 공격을 막아보려 했지만, 벽을 부수고 들어온 사람은 그보다 훨씬 강하고 빨랐다.

그렇게 복면인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큰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서대룡이 결코 몰라볼 수 없는 그 사람.

“군주님!”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바로 장호였다.

“다행히 늦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대룡은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온다고 한 사람이 장호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부서진 벽 뒤로 거대한 덩치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늠름하고 든든했다.

저 큰 덩치들이 이렇게나 반가울 줄이야!

서대룡이 떨리는 눈빛으로 장호에게 말했다.

“방금 오른팔이 되실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그러자 장호가 씩 웃었다. 서대룡에게 오늘만큼 그 웃음과 저 상처가 멋져 보인 적은 없었다.

“오른팔도 좋지만, 그렇다고 내 귀한 술친구를 잃을 순 없겠지요.”

과연 구출작전일까?

그냥 술친구라 했어도 감격했을 텐데, 장호는 ‘귀한’이란 말을 붙였다.

서대룡은 감격했다. 무뚝뚝한 사람이 가끔 주는 뜻하지 않은 감동은 원래보다 몇 배의 힘을 지닌 법.

죽은 복면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장호와 자신의 다리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돌아가면 제가 술 사겠습니다.”

장호와 같이 풍류주점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싶었다.

예전부터 서대룡은 장호를 좋아했다. 말없이 묵묵히 앉아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멋있었다. 얼굴의 상처까지도 그를 더 멋있게 느껴지게 했다.

생각해 보면 장호는 조사관에서 무인이 되고 싶어 하는 자신에게 어떤 이정표 같은 존재였다.

‘나도 이런 무인이 되고 싶다.’

오히려 소교주는 이 점에 있어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검무극은 감히 자신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들을 해나가고 있었으니까. 그가 걸어가는 길은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

그래서 오히려 서대룡에게는 장호가 더 현실적인 목표가 될 수 있었다.

“이 무인도 함께면 좋을 텐데요.”

장호가 이안을 언급하자 서대룡도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리라.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이 무인 돌아오면 그날은 밤새 할 이야기가 많을 겁니다. 우리도, 이 무인도.”

펼쳤던 상상의 나래도 잠시, 다시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왔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연이어 들려온 것이다.

서대룡이 흠칫 놀라 소리쳤다.

“빨리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가시죠.”

“수하분들이 다치셨을까 걱정됩니다.”

마음이 급해져 당장 달려서라도 가고 싶은 서대룡과는 달리 장호는 차분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오늘 마군의 제일 목표는 서대룡을 지키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장호는 믿었다.

들려오는 저 비명의 주인은 모두 적들일 거라고.

자신들의 이 큰 덩치는 비단 음식을 많이 먹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피나는 수련이 뭉쳐지고 전장을 누비며 쌓은 실전 경험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우린 마군들이니까요.”

마군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수하들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서대룡은 황천각 조사관이나 집행무인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마음이 어때야 하는지, 지금 직접 보고 있었다.

“우리 황천각의 비실비실한 녀석들, 돌아가면 전부 다 지옥수련 시작입니다.”

물론, 자신부터 그 수련에 앞장설 것이다.

오늘 복면인들과 싸우면서 큰 배움이 있었다.

막대한 내공이 들어가는 멸도혈풍을 쓸 때는 좋았지만, 마지막 싸움에서는 내공이 부족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내공 조절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걸 제대로 경험한 것이다.

‘정말 죽을 만큼 열심히 수련한다! 잠은 죽어서 잔다!’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와 걸어가는데 서대룡 주위로 마군들이 둘러쌌다.

커다란 덩치 사이에서 서대룡이 까치발을 들며 장호에게 말했다.

“어제는 멸마대 무인들에게 둘러싸였다가 오늘은 마군들에게 둘러싸이고. 이런 인생 보신 적 있으십니까?”

* * *

주궐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복면인들을 상대로 앞장서서 싸웠다. 비록 진하군에게 불만도 있었고, 잘못된 상황판단을 하고도 있었지만, 적어도 맹에 대한 충성심이나 수하들을 아끼는 마음은 그 누구 못지않았다.

푸아악!

주궐의 검이 복면인의 목을 꿰뚫었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낼 틈도 없이 그는 날아든 암기를 검으로 쳐냈다.

그는 무림맹 지단주 자리를 뇌물이나 아부로 따지 않은 사람이다.

“뒤쪽 조심! 왼쪽을 막아!”

악을 써서 수하들을 지휘하며 앞장서서 적들과 싸웠다.

주궐은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지키는 무인이 많은데 공격을 해오다니?

‘미친 마교놈들!’

주궐은 적들을 마인들이라 확신했다. 마교가 아니라면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를만한 곳은 없었으니까.

또한 마교가 무림맹 지단을 쳤다는 건 그야말로 전쟁을 일으킨 거나 다름없다.

주궐이 저 앞에서 복면인과 싸우던 지단 무인에게 소리쳤다.

“조심해!”

그의 뒤쪽에서 누군가 그를 찔러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복면인이 아니라 같은 무림맹 복장을 한 무인이었다.

피하기에 늦은 상황이었는데.

쇄애애액! 콰앙!

뒤에서 공격하던 무인의 늑골이 박살 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덩치 무인이 순식간에 쇄도해서 복면인을 그 큰 몸통으로 쳐서 날려버린 것이다.

저 큰 덩치가 이렇게 빠르다니?

마군들은 마른 사람이 빠르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저 멀리 또 다른 마군이 날렵하게 허공으로 날아올라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나무 위에서 암기를 날리던 복면인이 잘린 나뭇가지와 함께 추락했다.

오늘 중경지단을 암습한 자들은 두 부류였다. 복면을 착용한 자들과 무림맹 무복을 입고 위장한 자들.

‘이 비겁한 놈들!’

무림맹 복장으로 뒤에서 기습해서 무림맹 무인들을 죽였던 것이다.

이렇게 위장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 지금 여러 지단과 지부에서 지원을 나온 무인들이 함께 머무르던 상태였기에 누가 누군지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다.

처음에는 이 비겁한 공격에 계속 당했는데, 마군들이 싸움에 합류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군들은 우선 빠르게 복면 무인들부터 제거하기 시작했다. 아군으로 위장한 자들은 색출할 생각도 하지 않고 복면인들부터 잡아 죽였다.

마군들의 무공 실력은 일반 지단 무인들과 수준이 달랐다.

함께 싸우던 멸마대의 정혁은 이들의 무공이 멸마대의 정예 무인들에 비해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니 오히려 한 수 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온 마군들은 마군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마군들이기 때문이었다.

주궐이 마군들의 싸움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그때.

쉬이이익.

그때,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그가 몸을 틀었다. 그는 절망했다.

‘늦었다!’

무림맹 복장을 한 적의 검 끝이 자신의 얼굴 앞에 멈춰 있었다. 검을 내지른 무인이 쓰러지자 그 뒤에 장호가 서 있었다.

“고맙소.”

앞서 암기비가 쏟아질 때도 그가 수하들을 구해줬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감격한 그의 인사에 장호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장호와 함께 왔던 마군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그들까지 합류하자 장내는 더욱 빠르게 정리되었다.

곳곳에서 날뛰던 복면인이 모두 제거되자 그때부터 숨은 적들을 색출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단별로! 지부별로 모두 모여!”

그렇게 무림맹 무인들이 뭉치자 위장했던 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림맹 무인들과 마군이 합세해서 그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생포는 어려웠다. 탈출에 실패한 자들은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그 결정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으로 볼 때, 정말 잘 훈련된 자들이었다.

그렇게 모든 적이 죽거나 그곳을 빠져나갔다.

무림맹 무인들이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들은 의원으로 데려갔고, 죽은 이들은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주궐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덩치 큰 무인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피해가 막심했을 상황이었는데 그야말로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냈다.

주궐이 장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마교 놈들의 공격을 막아냈소.”

그때 서대룡이 나섰다.

“오늘 기습한 자들은 마인이 아니오. 나를 죽이려 한 걸 보면 모르겠소?”

주궐이 장호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냐는 눈빛에 장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말 이 사람을 죽이려 했소.”

자작극일 수도 있지 않나?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여전히 그는 마교의 짓이라 여겼다. 아니라고 하기에 너무 야비하고 대담한 공격이었으니까.

마교가 아니라면 세상에 누가 있어 무림맹 무인들로 꽉 찬 지단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그럼 대체 이자들은 누군가?”

주궐의 물음에 서대룡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들과 우릴 이간질하려는 자들이겠지요.”

주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수하에게 명령했다.

“죽은 자들의 신원부터 철저히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주궐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오늘 일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까지 자네는 떠날 수 없네.”

“떠나라고 해도 떠날 생각 없소.”

어차피 검무극이 돌아올 때까진 이곳에 있어야 했으니까.

장호가 그에게 말했다.

“멸마대주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남아서 지키겠소.”

“그래 주시면 고맙겠소.”

목숨 빚을 졌으니 장호에 대한 주궐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주궐이 멸마대의 정혁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주님이 괜찮으실지 걱정이오.”

무림맹 지단까지 공격하는 자들이니, 진하군이 걱정된 것이다.

그러자 서대룡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주궐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오른팔까지 버리고 따라가신 분이 계시니 괜찮으실 거요.”

* * *

“저곳이네.”

진하군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장원이 있었다.

지금 검무극과 진하군은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 나란히 있었다.

신안술을 발휘해야만 대문에 걸린 현판의 글자가 보일 정도로 먼 거리였다.

향수산장(鄕愁山莊).

저자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산장이었다.

“현재 저 산장에 대해 은밀히 조사 중이네. 곧 조사 결과를 가져올 거네.”

진하군의 설명에 검무극이 물었다.

“이곳에 유명장주가 붙잡혀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

“자네도 알다시피 현재 실종된 유명장주와 그 식솔들을 찾으려 중경을 샅샅이 수색 중이라네.”

유명장에서는 단 한 구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지. 그래서 중경 내 모든 의원을 감시하라고 했었네.”

혹시라도 그들이 부상을 당했으면, 치료를 위한 대량의 약을 구매할 수도 있겠다 생각해서였다.

“그러던 중에 이 지역 의원에서 부상을 치료할 약초를 대량으로 사간 이가 있다는 걸 알아냈지.”

수색하던 이들이 너무나 기다렸던 소식이었다.

“약초의 종류나 양으로 볼 때, 유명장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네. 그래서 인근 지역을 모두 뒤졌고, 이곳 산장을 발견했지. 그리고 저곳에 유명장에 속해 있던 무인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네.”

그럼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유명장 무인이 모습을 드러낸 이상, 저곳을 조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유명장주와 그 식솔들이 살아있기를 바라야지. 자, 한시라도 빨리 구출 작전을 펼치세.”

“과연 이 작전이 구출 작전일까?”

검무극이 이 상황을 의심하는 이유는 확실했다.

“하필이면 서 각주가 자네들에게 붙잡혀 간 공교로운 시기에 유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진하군도 이 공교로움에 의심이 들었지만, 유명장주와 이어진 유일한 단서였다. 함정이라도 들어가야 했다.

그때 멸마대 수하가 와서 한 가지 사실을 빠르게 보고했다.

“중경지단이 습격받았다고 합니다.”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정말 지단이 공격받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됐나?”

“우리 쪽에서는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합니다.”

진하군이 인상을 굳혔다. 그는 분노했다. 자신과 멸마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터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속임수라면? 저 산장에 아무것도 없다면?

“뇌옥에 붙잡혀 있던 사람은?”

“무사하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검무극이 안도했다. 장호와 마군을 보냈지만, 무림의 일이란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몰랐으니까.

“적들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기습에도 서대룡이 죽지 않은 점이나, 적들을 모두 해치웠다는 보고로 볼 때, 마군들이 큰 활약을 펼쳤음을 짐작했다.

“자네 판단이 옳았군. 고맙네.”

만약 마군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 소교주의 통찰력은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곳은 우릴 유인하기 위한 곳이었겠군.”

살려둔 유명장 무인을 이용해서 자신을 이쪽으로 유인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검무극의 생각은 달랐다.

“아닐 수도 있네.”

진하군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만약 이쪽이 진짜 음모라면?”

검무극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지단이 습격당했다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네. 그 정도로 본교와 무림맹이 허술한 곳은 아니니까. 한데 이건 어떤가? 유명장과 대정문의 멸문을 조사하던…….”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멸마대주의 죽음.”

그냥 지단이 공격받는 문제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차기 무림맹주로 유력한 그였다.

“앞서 일어난 일들이 자네의 죽음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면?”

혈천도마의 제자가 유명장과 대정문을 멸문시키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멸마대주가 결국 마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만든 것이라면?

진하군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게다가 천마신교 역시 분노할 것이다. 혈천도마의 제자가 조사를 받으러 무림맹 지단에 끌려가서 죽은 셈이니까.

양쪽의 대화에는 날이 설 것이고, 거기에 놈들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린다면?

“만약 내 예상이 맞다면…….”

검무극의 깊어진 시선이 침묵하고 있는 장원을 향했다.

“저곳에는 자네와 멸마대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만약 검무극의 예상이 맞다면?

자신은 오늘 죽는다는 의미다. 무림맹의 정예 멸마대와 함께.

이 말을 한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면 믿었겠는가? 자신과 멸마대를 한자리에서 죽일 함정을 파놓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 믿지 않았겠지.’

하지만 이젠 믿는다.

지금껏 검무극과 만나면서 그가 틀렸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언제나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으니까.

중경지단을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예상도 적중했다. 마군이 와서 돕지 않았다면 앞선 보고는 훨씬 더 참혹한 것이었으리라.

그랬기에 진하군의 표정이 절로 굳어졌다.

‘지난번에 겪었던 적보다 더 지독한 자들이다.’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다행이군. 놈들은 자네라는 변수까진 계산하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건 모를 일이지.”

혈천도마가 개입되었고, 서대룡도 끌어들였다. 자신이라고 어찌 예외라고 확신하겠는가?

“이제 어떻게 할 텐가?”

그 물음에 검무극은 그 결정을 진하군에게 맡겼다.

“자네가 결정하게. 유명장 일은 자네 일이니까.”

진하군이 주도적으로 이번 일을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진하군의 시선이 장원을 향했다.

저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선은 물러났다가 지단 무인들을 총동원해서 다시 오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일반 무인들의 희생이 커질 수 있다. 멸마대를 죽이려고 기다리는 자들인데, 일반 무인들의 희생은 정말 클 것이다.

아니면 맹에서 고수들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과연 이번 일을 그렇게 미뤄도 될까?

두 가지 방법 모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지금 정면돌파 하고 싶네.”

유명장주와 그의 식솔들을 제시간에 구해내고 싶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구해내야지.

그게 무림맹 멸마대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그의 마음을 짐작한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뒤는 내가 봐줄 테니, 앞장서시게.”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말에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들을 모두 모았다.

“저 산장에 우릴 노리는 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라!”

몰랐으면 당할 수도 있겠지만, 미리 대비한다면 절대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자신들을 압도할 절대 고수가 있더라도.

진하군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절대 고수는 우리도 있다.’

그렇게 검무극과 진하군이 앞장섰고 그 뒤를 멸마대 무인들이 뒤따랐다.

진하군은 이런 상황에서 마교 소교주와 함정일 수도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자신이 낯설고 새로웠다.

검무극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 겪었던 심란한 마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아홉의 믿음만 해도 넘치는 믿음이라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그래서였을 거다. 이런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도.

“부탁 하나 하세.”

그 부탁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내 동생 좀 잘 부탁하네.”

진하군은 자신이 검무극에게 이런 부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 꼭 말해두고 싶었다. 친구 동생이든, 무인 대 무인이든, 남녀 사이든. 믿고 동생을 부탁할 사람은 검무극 뿐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네.”

“어째서?”

“여기서 자네가 죽고 나만 살아남으면, 내가 자넬 죽인 게 될 거네. 설령 내가 죽였다고 생각지는 않더라도, 자네 동생이나 맹주님은 자넬 살리지 못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자넨 절대 죽어선 안 되네.”

진하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자신의 죽음은 정마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테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장원 앞까지 도착했다.

“이렇게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가?”

“오히려 이렇게 문을 두드리며 들어올 줄은 예상 못 했을걸? 허를 찌르는 거지.”

말을 마친 검무극이 문을 쾅쾅 두드렸다.

곧바로 문을 연 사람은 중년 무인이었다. 산장에 속한 무인처럼 보였는데, 그의 뒤로 같은 복장을 한 무인들이 서너 명 서 있었다.

중년 무인은 진하군 뒤에 늘어선 멸마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수십 자루의 날 선 보검이 자신을 향해 겨눠진 것처럼 느껴졌다.

멸마대 무인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장주님을 뵈러 왔소. 지금 계시오?”

중년 무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시오?”

“무림맹 멸마대주님이 오셨다고 전해주시오.”

그 말에 중년 무인이 깜짝 놀랐다. 그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진짜 멸마대주님이시오?”

진하군이 그에게 되물었다.

“멸마대주를 사칭하면 아주 오랜 세월을 뇌옥에 갇혀 지내야 하지.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나?”

진하군이 기도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뒤에 늘어선 멸마대 무인들의 기도만으로도 신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아닙니다.”

중년 무인이 뒤에 서 있던 무인에게 멸마대주가 왔음을 알리라고 명령하자, 그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기에 이 방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반응에 진하군이 전음을 보냈다.

-함정처럼 보이진 않는데?

그들은 갑작스러운 멸마대주의 방문에 분명 당황하고 놀라고 있었다.

-훌륭한 함정일수록 그렇겠지?

여전히 검무극은 이곳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자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네. 아마 이곳 산장에서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일 거야. 한데 그가 직접 우릴 맞았네. 이상한 일이지 않나?

진하군은 검무극이 보낸 전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의미지?

-그렇지.

잠시 후, 뛰어 들어갔던 무인이 달려왔다.

“어서 모시라고 하십니다.”

중년 무인이 진하군에게 정중히 말했다.

“가시지요.”

진하군이 그를 따라 걸었고 멸마대 무인들이 사방으로 늘어서서 주위를 경계하며 따라 걸었다.

내원으로 들어가는 동안 곳곳에서 무인들을 보았다.

진하군이 중년 무인을 떠보듯 물었다.

“일반 장원이라 하기에는 방비가 삼엄하오.”

그러자 중년 무인은 담담히 대답했다.

“요즘 중경에 흉흉한 사건들이 발생해서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렇게 검무극과 진하군이 대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향수산장의 장주 유범(柳帆)이 진하군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귀한 분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검무극은 진하군의 몇 걸음 뒤, 멸마대 사이에 서서 산장주의 반응을 살폈다. 유범은 산전수전 다 겪은 지긋한 나이였지만, 이 방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장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소.”

“말씀하시지요.”

유범은 깍듯했다. 상대는 유력한 차기 맹주 후보에, 무림맹 최정예 멸마대의 수장이었다.

“장주께서는 유명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시오?”

“물론입니다.”

“그 유명장에 있던 무인이 이곳 산장에서 목격되었소.”

“본장에서요? 그럴 리가요? 닮은 사람이겠지요.”

깜짝 놀라는 반응과 표정만으로는 정말 모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딱 잡아떼는 것이든, 진짜 모르는 일이든, 지금은 말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었다.

“장원을 좀 둘러봐도 되겠소?”

그는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물론이외다. 제가 안내해 드리지요.”

유범이 앞장서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가 산장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경계가 삼엄하다는 점을 빼고는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기습을 위해 은신한 무인이나 함정의 흔적은 없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의방을 보자고 하게.

진하군은 검무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산장에 의방도 있소?”

순간 검무극은 유범의 얼굴에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작은 규모로 있습니다만.”

“그곳도 보고 싶소.”

그렇게 그들을 의방으로 안내했다.

몇 개의 침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장에 속한 의원이 있소?”

“네, 한 사람 있습니다.”

“지금 어디에 있소?”

“출타한 모양입니다.”

그때 멸마대 무인이 뭔가를 발견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의방 건물 뒤에 풀들이 쌓여 있었는데, 약초에서 필요한 부분을 빼고 남은 자투리들이었다. 미처 버리지 못했는지 그 양이 상당했다.

진하군이 유범에게 말했다.

“근래 인근 의원에서 많은 양의 약초를 사들였다는 걸 알고 있소. 대부분 외상과 내상 치료를 위한 약초였는데, 누굴 치료할 거요?”

이번엔도 유범은 딱 잡아뗐다.

“수하들이 수련하다 다쳤습니다.”

“다친 수하들은 어디에 있소?”

“한동안 편히 쉬라고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진하군의 표정이 차가워지며 날카로운 기도를 드러내자 유범이 움찔했다.

앞서 안내를 맡았던 중년 무인이 수장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섰지만 멸마대 무인들도 일제히 기도를 드러냈다.

그 기세에 눌려 중년 무인이 뒤로 물러났다.

“유 장주님.”

“말씀하시오.”

“나는 유명장주와 그 식솔들을 구하려는 사람이오. 왜 내게 숨기려는 거요?”

유범은 끝까지 잡아뗐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명령을 내리면 내 수하들이 이곳 산장을 샅샅이 뒤질 거요. 사안이 사안인 만큼 만약 장주께서 숨기는 게 있다면,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거요.”

유범의 동요가 느껴지자 진하군이 부드럽게 그를 설득했다.

“우린 멸마대요.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릴 믿으시오.”

결국 유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유범이 자신의 수하들은 그곳에 두고 진하군과 멸마대만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지하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본 산장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비밀 도피처가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자 지하통로가 나왔고, 그 통로 끝에 커다란 방이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알 수 없는 약향이 훅 풍겼다.

그곳에는 수십 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모두 사람이 누워있었다.

유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유명장에서 살아남은 무인들입니다. 유명장주가 생존한 이들을 데리고 우리 산장을 찾아왔었지요.”

이들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진하군은 기뻤다.

“유명장주는 어디에 있소?”

그러자 유범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비보를 전했다.

“유명장주는 이곳에 숨어든 다음 날 죽었습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어쩔 수가 없었지요.”

진하군도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진작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소?”

“유명장주가 죽기 전에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식솔들이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요.”

“무엇 때문인지도 이야기했소?”

그러자 유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또 죽이러 올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대정문이 멸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지요. 그래서 이번 일이 유명장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진하군은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겁이 났을 것이다. 자신들도 이번 일에 휘말려서 멸문을 당하게 될까 봐.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으니까.

“누구 짓인지 말했소?”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유범이 나직이 대답했다.

“커다란 대도를 쓰는 젊은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흉수는 서대룡이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오, 유 장주 심정을 이해하오. 일단, 이 사람들은 우리가 데려가겠소.”

“그러시지요. 대신 이곳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그러겠소.”

오히려 그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들에게 말했다.

“유명장 무인들을 조심해서 지단으로 옮겨라.”

멸마대 무인들은 다들 무공이 고강했으니, 환자들을 부작용 없이 무사히 잘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일은 일반 무인들보다 이들이 적격이었다.

멸마대 무인들이 나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듣고만 있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공교롭게도 다친 사람 숫자가 멸마대 무인들 숫자와 비슷하군.”

순간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제야 알겠군.”

“뭘 알았다는 건가?”

유범은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수하인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친구처럼 말하고 있었다.

검무극에게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자네와 멸마대를 죽이려 했는지 이제 알겠다고.”

갑작스러운 말에 진하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멸마대 무인들 역시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네와 멸마대는 이곳을 나가기 전에 모두 죽었을 거라고.”

진하군이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온갖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검무극이지만,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사람도 아니었고.

“무슨 뜻인가?”

검무극의 시선이 침상의 환자들을 향했다.

“저들을 안고 나가다가 기습을 당했을 거네.”

그 말은 곧 저들이 모두 적이라는 의미!

모두 깜짝 놀랐다. 진하군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던 멸마대 무인 누구도 저 환자들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아무도 의심하지 않지. 이 사람들은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아니니까.”

유명장과 대정문 사건이 터지고, 그들을 수색하고, 증거를 찾고, 그래서 겨우 찾아낸 사람들이었으니까. 드디어 그들을 구해내는 순간이었으니까.

“저들은 유명장 무인들이 아니라네. 그들은 그날 다 죽었겠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실종된 것으로 처리한 거지.”

진하군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과 멸마대를 죽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였다.

유범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검무극은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진하군에게 말했다.

“지금 이곳에 들어섰을 때 나던 약향은 바로 서령초(西靈草)를 태운 향이라네.”

검무극이 침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쪽에는 비명초(非命草) 향이 나는군. 각각의 향은 사람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지만, 그 두 개의 향이 합쳐지면 순간적으로 산공독을 복용한 것 같은 효과를 발휘하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독초와 약초에 관해서는 그 누구 못지않은 깊은 식견과 배움을 지닌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이렇게 모두가 다쳤는데, 무림맹 감시망에 걸린 그 사람은 멀쩡했지? 이상하지 않나? 의방 뒤쪽에 보란 듯이 약초를 사용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이곳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였군.”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침상에 누워있던 이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정말 잘 훈련된 정예 무인들이라는 것을.

시종일관 당황하고 겁을 먹었던 유범의 눈빛과 목소리가 달라지며 그의 기도 역시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가 뒤를 쳐다보았다.

드르륵.

그러자 뒤쪽에 감춰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멸천대도를 등에 찬 혈천도마였다.

백을 이기는 팔

회귀한 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일들을 겪으면서 여러 번 놀랐지만 정말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을까?

‘아니, 어르신이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원래라면 이런 너스레부터 떨었을 텐데.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고. 일단 어떤 상황인지 파악부터 해야 했으니까.

‘침착하자.’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검무극과 혈천도마의 시선이었다.

평소와 다른 차가운 눈빛이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진짜 어르신이다.’

면구로 분장한 가짜도 아니고 사술에 걸린 것도 아니다. 다른 것은 다 속여도 저 꼬장꼬장한 눈빛만큼은 속일 수 없다. 눈빛이 아니더라도 검무극의 본능이 말했다. 혈천도마가 틀림없다고.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과 마존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아는 그였다.

여기서 혈천도마가 나와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안다.

‘자네가 말한 우릴 다 죽일 고수가 혈천도마였나?’

떠오른 생각을 전음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검무극이 자신보다 더 놀랐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혈천도마의 등장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설마, 대정문을 멸문시킨 게 혈천도마일까?’

게다가 그 의심을 더욱 강화하는 일이 이어졌다. 유범이 자신을 지목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마치 우리가 죽여야 할 상대가 저자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저자가 멸마대주 진하군입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혈천도마와는 만난 적이 있기에 서로 알고 있었다.

진하군이 침착하게 혈천도마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혈천도마는 무뚝뚝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 진하군에게 한마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멸마대 무인들은 긴장했다. 자신들의 숫자가 더 많지만 상대는 마존이었다.

게다가 본색을 드러낸 유범의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고 침상에 환자로 위장해 있던 무인들 역시 무시할 자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검무극이 혈천도마의 편에 서는 일이다. 진하군과의 관계만큼이나 혈천도마와의 관계가 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팔은 반드시 안으로 굽을 것이다.

만약 검무극이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오늘 진하군은 이곳에서 죽는다.

멸마대 무인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자신들은 다 죽더라도 진하군만은 살려야 한다는 의지가 그들 사이로 오갔다.

유범이 이번에는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검무극이 멸마대의 무인이 아니라 소교주임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소교주가 함께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우리 계획을 꿰뚫어 봤습니다.”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이미 멸마대와 진하군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을 것이다.

“소교주.”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향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언젠가 내가 말했을 거요. 이 늙은이는 평생 불운과 함께 살아왔으니 자주 안 보는 것이 좋다고.”

검무극은 말없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진하군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긴장한 채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스으윽.

멸천대도가 검무극의 목에 겨눠졌다. 손만 까닥하면 목이 댕강할 것 같은 예기가 날카로운 날을 타고 흘렀다.

멸천대도에 얼굴이 비쳤다.

검무극은 잠시 도의 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회귀한 후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던 그날, 그날도 이렇게 멸천대도를 자신의 목에 겨눴었는데.

검무극의 시선이 도의 날을 따라서 천천히 움직였다. 도를 쥔 손을 지나 다다른 혈천도마의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혈천도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여전히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두 사람 사이에 금방이라도 도를 휘둘러 목을 베어버릴 것 같은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검무극은 평소 그를 대하는 모습과 다름없었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혈천도마를 걱정했다. 만에 하나라도 누구에게 당한 건 아닐까? 어딘가 붙잡혀 있는 건 아닐까?

“그래도 어르신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아버지시네요. 어디 가서 당할 사람이 아니니 그 사람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혈천도마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일부러 아버지를 언급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르신,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기 있습니까? 저 문 열고 들어오시는 모습에 저, 간 떨어질 뻔했다고요!”

이런 순간에도 검무극은 평소처럼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반면 혈천도마는 더없이 차갑게 반응했다.

“내가 이곳에 너를 죽이러 왔다고는 생각지 않느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또 한 사람은 변함없이, 그렇게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당연히 안 합니다.”

“왜지?”

“어르신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요.”

“지금까지 너를 속였다면?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어찌 그리 장담하느냐?”

“이것 때문입니다.”

검무극이 천천히 품에 손을 넣어서 뭔가를 꺼냈다. 그건 서대룡에게 받은 시화집이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척, 너를 속였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책을 너무 좋아하셨고요.”

혈천도마가 노골적인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사람을 함부로 믿었다간 결국 배신당해서 죽게 되는 법이지. 그게 세상이고 그게 무림이다.”

혈천도마의 몸에서 차가운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진하군과 멸마대는 물론이고, 유범과 그의 수하들까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직 검무극만이 아무런 동요 없이 차분하게 혈천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르신께 배신당해도.”

“그 결과가 죽음인데도?”

“죽어도 좋을 만큼 많은 걸 주셨습니다. 그 정도 애정이면 이 목숨도 드릴 수 있죠.”

쉬이익.

멸천대도가 목을 베려 했고, 검무극이 몸을 틀어서 살짝 피했다. 진짜 죽이려 한 것까진 아니고, 목에서 피가 튈 정도로만 베려고 했다.

“왜 피하느냐?”

“제가 피했나요? 도의 날이 차가워서 살짝 떨어진 겁니다.”

혈천도마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유범이 혈천도마에게 부탁했다.

“하던 일을 마쳐야겠습니다. 잠시만 소교주를 붙잡아 주십시오.”

그는 당연히 혈천도마가 자신의 말에 따라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말이 끝나자 양쪽이 일제히 움직였다. 멸마대가 일제히 진하군 앞과 옆을 막아섰다. 우려했던 일이 드디어 발생한 것이다.

침상에 있던 무인들도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유범은 소교주만 나서지 않으면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실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유범이 자신의 바로 옆 침상에 튀어나온 장치를 건드리자.

진하군과 멸마대 뒤쪽에 몇 개의 작은 문이 열렸다. 그 안에 있던 구멍에서.

쉬이이익.

그곳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바로 비명초 향이었다. 침상 쪽으로 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서 뒤쪽에도 비명초 향이 나올 수 있게 장치해둔 것이다.

두 개의 향이 합쳐지면서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이 순간적으로 내공의 흐름이 끊어졌다.

유범의 명령이 떨어졌다.

“다 죽여라!”

그들이 일제히 멸마대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이 검을 뽑아 양쪽 사이 허공을 겨눴다. 멸마대 쪽으로 가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대로 가!”

유범의 명령에 앞장선 무인들은 그대로 진하군과 멸마대를 향해 날아갔다. 혈천도마가 소교주를 막아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쉬이이이익!

검무극의 검에서 한줄기 검기가 발출되었다.

앞장선 무인들이 검기에 몸이 잘리며 쏟아져 내렸다. 뒤따르던 이들이 모두 멈춰 섰다.

피 냄새가 장내에 확 피어오르고 바닥에는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유범이 놀란 표정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왜 소교주를 막지 않으셨습니까?”

혈천도마가 검무극의 목에 겨눠진 도를 거두더니 유범에게 다가갔다.

짜아악!

뺨을 얻어맞은 유범의 몸이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다행히 내공을 주입하지는 않았기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범이 혈천도마를 노려보았다. 분명 혈천도마에 훨씬 미치지 않는 무공실력이지만, 자신의 분노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혈천도마가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본교 소교주시다. 그 뜻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아무리 특별한 상황이라 해도, 소교주는 소교주란 의미.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 고독으로 어르신을 조종하는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고쳐드리겠습니다. 만약 어르신이 숨겨둔 자식이 있는데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거라면 제가 반드시 구해오겠습니다. 그냥 갑자기 인생이 지루해져서 이러셔도 상관없습니다. 앞으로 제가 매일 찾아뵙고 재미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이 만남이 시작된 이래 검무극이 그토록 바라던 일이 벌어졌다.

혈천도마의 전음이 날아든 것이다. 그것도 평소 그의 말투로 말이다.

―귀 아프다, 이놈아!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어쩔 수 없이 저쪽 편에 서 있다고. 자신은 변함없는 그 혈천도마라고.

―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르신께서는 아버지와 저를 믿으실 테니까요. 어떤 피치 못할 상황이 어르신을 이곳까지 보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제가 해결해낼 거라 믿으실 테니까요. 누군가를 믿는 것도 지능이라고, 어르신은 그 누구보다 판단력이 좋고 똑똑하신 분이시니까요. 이 세상 유일한 책 읽는 마존이시잖아요?

등을 돌리고 있기에 검무극은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혈천도마의 눈빛이 부드러워졌음을.

―그래도 처음 내 모습에 놀랐을 텐데?

―차가운 척하시며 저와 선을 긋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말씀하시겠지만 저는 알죠. 저 놀리시려고 그러셨잖아요? 제가 당황하고 놀라는 모습 보고 즐기시려고요. 제게 물드신 거죠. 기회가 왔을 때는 어떻게든 놀려야지! 제겐 안 통합니다. 제자분이나 놀리십시오!

혈천도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원래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찰나 간의 미소도 잠시, 그가 유범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는 더없이 표정은 차가웠다.

“돌아간다!”

유범이 흠칫 놀랐다.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그럼 너는 여기 남아서 죽어라.”

혈천도마는 유범과 무인들을 남겨두고 자신이 나왔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검무극이 마지막 전음을 보냈다.

―저는 제 식대로 움직이겠습니다. 곧 다시 뵐 겁니다, 어르신!

그렇게 혈천도마가 나가버리자 유범은 진하군을 쳐다보며 갈등했다.

아직 이 공간에 함정은 남아 있었다. 이곳은 진하군과 멸마대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이란 변수가 있었다. 그가 이들과 함께 오면서 모든 계획이 다 틀어졌다. 혈천도마가 가버린 것도 결국 이 소교주 때문이었으니까.

유범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갈 거면 혈천도마가 멀리 가기 전에 함께 빠져나가야 했다.

“우리도 간다!”

유범과 무인들이 검을 뽑아 든 채 혈천도마가 나간 문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일시적인 산공독 효과는 이미 사라졌기에, 멸마대 무인들은 진하군의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혈천도마가 먼저 떠나버렸기에 지금 공격한다면 저들을 섬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하군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들을 지금 죽여선 안 된다는 것을.

만약 죽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검무극이 먼저 죽였을 거다. 검무극이 그들을 그냥 보내주는 이유는 혈천도마 때문이리라.

이런 상황임에도 검무극은 자신에게 결정을 맡기고 있었다. 저들이 너와 멸마대를 죽이려 했으니까, 네 결정을 따르겠다고. 싸움이 벌어지면 검무극은 분명 자신들을 도울 것이다.

그런 배려를 느꼈기에 진하군은 검무극을 위한 결정을 내렸다.

“그냥 보내줘라.”

진하군의 명령에 멸마대가 살기를 거뒀다. 그러는 사이 유범과 무인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고맙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긴.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이미 다 죽었을 텐데.”

앞서 적인지도 모르고 환자들을 안고 나가려고 했었으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이렇게 위기를 겪게 된다. 무인의 명예 대신 지독한 살의와 악의만을 지닌 자들을 상대하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

뒤에 서 있던 멸마대가 일제히 포권하며 검무극에게 예를 갖췄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들은 오늘 단 한 명도 싸우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멸마대의 진면목을 보았다.

지금 그들 누구도 얼굴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죽이려 한 자들을 그냥 보낸 것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또한 상대가 마교 소교주라 해도 은원은 확실히 했다. 정예는 이래서 정예인 거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도마님이 자네를 죽게 내버려 뒀을 리 없네.”

진하군은 믿기 어렵겠지만, 검무극은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도마님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네들을 구했을 거네.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도마님이 계신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 거네.”

“도마께서 왜 우리를?”

그럴 리가 있을까?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차기 맹주가 될 사람이기 때문에?

하지만 검무극이 생각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자네가 내 친구라는 걸 알고 계시니까.”

진하군은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알았다.

믿음의 끝을 보는 순간이다.

검무극은 지금 보여주고 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부담 없이 팔 만큼만 믿자고? 자넨 거짓말쟁이야.’

혈천도마에 대한 검무극의 믿음은 십, 아니 백이라 해도 부족해 보였다. 그 팔은 백을 이기는 팔이었다.

“자, 우리도 나가세.”

검무극이 먼저 앞장서서 밖으로 나왔다.

이 세상에 아버지를 제외하고 혈천도마를 옭아맬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뭔가에 얽혔다? 분명 내키지 않은데도 적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있다.

회귀 전 그의 인생으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존들 중 그가 제일 먼저 죽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는 그 운명 제가 바꿉니다.’

이번 적은 다릅니다.

마군들이 중경지단 내 건물 하나를 지키고 있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물 주위를 둘러쌌고, 그 지붕은 물론이고 인접한 건물의 지붕 위에도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일반 무인들이 동원되었어도 철통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그 하나하나가 최정예 마군이었다. 그야말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는 경계였다.

그때, 그곳으로 중경지단 무인 하나가 와서 마군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죽을 고비에서 마군의 도움으로 살아난 무인이었다.

이번 암습으로 무림맹 무인이 여럿 다치고 죽었지만, 마군들이 아니었다면 그 숫자가 얼마로 늘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마군들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인사를 받았을 뿐, 일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대룡은 이층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방에도 인사 올려야 할 사람이 있다. 책상에 앉아 보고서를 읽고 있는 장호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죽은 몸이었으니까.

‘정말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앞선 감정이 있었다.

미친 듯이 싸울 때의 그 짜릿함. 서대룡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서 하는 수련은 달라질 것 같다. 무엇을 위해 수련해야 하는지, 그 수련이 언제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저승 문턱 앞까지 가서 확인했으니까.

잠시 그렇게 창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서대룡이 장호를 향해 돌아섰다.

“대체 저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장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더라도 자신은 명령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했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서대룡이기에 그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마존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무뚝뚝한 한마디였지만 지금 서대룡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이었다.

“저도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서대룡이 애써 밝게 웃었고, 장호 역시 미소를 지었다.

“참, 그림 그리는 일은 잘 되어 가십니까?”

수백 명의 적이 달려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장호였는데, 지금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느 입이 무거운 분께서 장 군주께 그림 선물 받았다고 어찌나 자랑하셨는지. 저뿐만 아니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참지 못하고 장호가 웃었다. 일전에 검무극에게 그를 그린 그림을 선물해 주었다. 첫 그림 선물은 꼭 그에게 주고 싶었으니까.

그 이후, 지금까지 여러 그림을 그렸다. 이것저것 다 그렸다. 수하들도 그렸다가 건물도 그리고, 교내의 거대 석상도 그렸다. 과일도 그렸고 검이나 도도 그렸다. 사실 서대룡과 이안을 그린 그림도 있었다. 차마 선물이라고 주지 못했을 뿐.

처음에는 그림 그리는 행위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은 취미라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을 다 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생각지 못한 면이 있다는 것을.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잘 그린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칭찬받고 싶었다.

자신에게 이런 열망이 있을 줄이야. 남에게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닌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그림 그리는 일이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리기는 남을 그렸지만, 발견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서 각주께서도 취미를 찾아보십시오.”

“그럴 시간이 안 나서요.”

없는 시간 쪼개서라도 찾아보라는 말을 하려다 장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젊으시니.”

계기가 오기 전에는 어차피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안다. 자신도 미루고 또 미루기만 했으니까.

자신의 계기는 이것이었다.

언젠가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말에 검무극이 그 길로 달려가서 물감과 붓 등을 사 왔다.

자신의 계기는 마교 소교주와 친해지는 것.

그림 한 번 그리려면 마교 소교주와 친해져야 한다.

서대룡은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미소 짓는 장호의 얼굴을.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한 모습이다.

‘저도 그렇지만 장 군주께서도 정말 많이 변하셨습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이 모든 변화를 이끌어 낸 계기가 들어왔다.

들어선 사람을 확인한 서대룡이 깜짝 놀라더니 이내 그를 향해 달려갔다.

“소교주님!”

서대룡이 와락 안겼다. 원래라면 살짝 피하면서 그를 놀렸을 텐데, 오늘 검무극은 피하지 않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힘껏 안아준 후, 검무극이 서대룡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하마터면 이 귀한 오른팔 잘릴 뻔했다고요. 저, 죽을 뻔했다고요.”

“별로 걱정은 안 했다.”

“군주님이 계셔서요?”

“아니.”

검무극이 장호를 쳐다보며 이유를 밝혔다.

“오른팔을 대신할 든든한 사람이 있어서.”

그러자 서대룡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어쩌죠? 그 대신할 사람이 오른팔을 살렸는데요? 오른팔 후보에서 사퇴하신 모양입니다!”

검무극이 장호에게 걸어갔다.

“고생했네.”

“서 각주 구하는 것보다 우릴 이곳 중경 지단에 들어오게 해주신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만.”

장호는 서대룡을 구한 공을 검무극과 나눴다. 검무극이 자신을 이곳에 올 수 있게 해줘서 구할 수 있었다는 의미.

“말도 말게. 내가 진 대주에게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앞으로 자네 부탁 다 들어주겠네, 춤추라고 강요도 안 하겠네, 재미없다고 놀리지도 않겠네. 그렇게 온갖 약속을 다 하고서야 자네들을 지단에 들일 수 있었지.”

검무극의 너스레에 서대룡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은 그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소식을 전했다.

“어르신은 무사하시다.”

서대룡이 깜짝 놀라 물었다.

“사부님을 만나셨습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은 물론이고 장호도 안도했다.

“왜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왜 함께 올 수 없었는지.”

* * *

반 시진 후, 지단 후문에서 조용한 작별이 있었다.

먼저 마군들이 탄 마차가 출발했다.

지단주 주궐이 장호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웠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수하들을 구해준 것은 물론이고 장호는 직접 자신의 생명까지 구해주었다.

“나중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나를 찾아와 주시오.”

격정적인 그에 비해 장호는 담담했다.

“덕분에 잘 지내다 가오. 또 봅시다.”

그렇게 마군들을 태운 대형 마차들이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마군들이 본단으로 돌아갈지, 또 다른 곳에서 대기할지는 통천각의 지시대로 움직일 것이다.

그곳에는 검무극과 서대룡, 진하군도 나와 있었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두고 진하군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내가 데려가겠네.”

원래라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향수산장 지하에서 혈천도마가 등장하면서 이번 일이 정말 혈천도마와 관련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는 아직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나눈 전음을 알지 못했다. 검무극은 그 일을 비밀로 했다. 혈천도마는 분명 저쪽 편에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럼에도 진하군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게.”

듣고 있던 주궐이 나섰다.

“안 됩니다. 저자가 흉수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이번 일이 마인들의 짓일 거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그였다.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만약 흉수가 이 사람으로 밝혀지면 내가 책임지고 그대 앞에 데려오겠소. 소교주로서 약속하오.”

진하군이 이미 허락했고 검무극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고집을 피우겠는가?

“그 약속, 잊지 말아 주시오.”

주궐이 그곳을 물러나자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도움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자네라네.”

“내가?”

“놈들이 노리는 건 자네잖나?”

검무극의 말처럼 놈들이 계속 자신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무림맹의 안가에 있으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는 건 어떻겠나?”

진하군은 안가에 가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곳 지단에서 배후 놈들을 상대하려 했는데.

“숨는 게 아니라 매복한다고 생각하게. 이쪽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적들도 힘들어질 테니까. 놈들의 한 수를 없앤다고 생각하게.”

과연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어내고 있었다. 이젠 이런 순간 검무극에게 질투는 없다. 빠른 수용만 있을 뿐.

“그러겠네.”

생각해 보면 자신과 함께 있으면 지단 무인들만 더 위험할 터, 멸마대와 안가에 가 있는 게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떠나가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놈들 박살 내면, 사인이 불러서 한잔하세.”

진하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반대로 돌아서 걸어갔다. 평소 생각도 안 했던 비사인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이번 일을 꾸민 놈들을 정말 박살 내고 싶은 모양이다.

* * *

한쪽이 성공이라면 실패한 쪽도 있는 법.

중경 저잣거리 구석의 점쟁이 노인 앞에 앉은 사람은 유범이었다.

“몰골을 보아하니 일진이 좋지 않구먼.”

유범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는데, 시뻘건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혈천도마에게 맞은 자국이었다.

유범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보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점쟁이 노인이 천천히 나무통을 흔드는 동안, 두 사람의 전음 대화가 이뤄졌다.

―멸마대주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임무에 실패했다는 보고에 통을 흔들던 노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유범이 빠르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댔다.

―그곳에 마교의 소교주가 함께 왔습니다. 혈천도마는 소교주를 막아달라는 명령을 거부했고요.

노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 차가움만이 가득했다.

서대룡을 죽이려 한 계획과 진하군을 죽이려 한 계획 모두가 실패한 것이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행히 노인의 분노는 책임을 묻는 신경질적인 살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소교주가 왔다면 그랬겠지.

그는 검무극과 혈천도마와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전음 대화를 끝내고 노인은 더욱 힘차게 나무통을 흔들었다.

“한 번 해서 안 풀리면 두 번 하면 되고, 두 번 해서도 안 되면…… 점을 봐야지. 자, 뽑게.”

노인이 대나무 막대기가 든 점통을 내밀었다.

마치 모든 일에 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이번에도 살짝 삐져나온 막대기가 있었다.

유범이 그것을 뽑았다.

―모자란 분노는 피로 채우리라.

내용을 확인한 유범이 긴장한 얼굴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게 어떤 내용인지 알았다. 세 번째 멸문을 진행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번 작전이 실패했기에 이 세 번째 멸문은 무림을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될 것이다.

“가서 점괘를 전하게.”

* * *

서대룡과 함께 안가로 돌아왔다.

곧장 아버지를 찾아뵙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분노한 순간은 혈천도마 이야기가 나왔을 때였다.

앞서 피로 글자를 남겨 마도를 건드렸다면, 지금은 마존을 건든 것이 확실해졌으니까.

누군지 몰라도 아버지가 아니라 내게 걸리기를 바라야 할 거다. 아버지는 화가 많이 나셨으니까.

“혹 도마 어르신과 관련해서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십니까?”

아버지라면 뭔가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젊은 시절부터 도마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모르는 것인지, 아시는 데 말해주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적은 뭔가 다릅니다.”

나는 지금껏 느낀 바를 그대로 전했다.

“처음에는 그 배후 놈들이라 생각했습니다. 한데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우리가 섬서에서 놈들의 자금줄을 끊고 있을 때, 이곳 중경에서는 도마 어르신을 끌어들여서 일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별개로 진행된 일이었죠.”

적어도 섬서 일에 대한 복수는 아니었다는 의미.

그리고 아버지가 마차를 돌리지 않았다면, 이번 일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놈들의 방식도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은밀히 숨어서 힘을 키우고 앞날을 도모했습니다.”

본교에서는 환여가 화원의 주인으로 숨어 있었고, 무림맹에서는 진하군의 사부로, 사도맹에서는 교관으로. 풍천교와 북해빙궁, 금룡상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힘을 키우는 중이었다. 당연히 십이지왕은 미래의 그 완성된 이들이 아니었고.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놈들은 과감하게 무림맹 중경지단을 공격해서 서 각주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멸마대주와 멸마대 전원을 없애려고 했지요. 그 결과가 어떨지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그들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본교와 무림맹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무림일통을 꿈꾸시는 아버지지만, 남의 손에 놀아나는 전쟁을 바랄 리가 있겠는가?

“지금까지 당한 게 많으니 전략을 바꾼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본능에 따른 느낌이라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지만.

“저는 그 답을 아버지께서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적이 똑똑하면 우리가 유리하지.

“내가 너를 속이고 있다는 말이냐?”

아버지께서 답을 알고 계신다는 말은 확실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다. 내막을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렸으니까.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과거 속 어딘가에 이번 일의 단서가 있을 거 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 있었다.

“놈들은 분명 도마 어르신과 은원이나 사연이 있는 자입니다. 도마 어르신이 순순히 그들을 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아버지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것뿐일까요?”

“무슨 뜻이냐?”

“도마 어르신에게 원한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마 어르신을 죽였겠죠. 독을 쓰거나 함정을 파거나, 다른 수를 써서라도요. 한데 놈들은 정파 문파를 잔혹하게 멸문시키고 그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본교에 이보다 더 큰 오명은 없을 겁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단순히 도마의 일이 번져 나왔으리라 생각하고 계셨는데, 그 범위가 확대되는 순간이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놈들은 서 각주를 죽이려 했고 멸마대주를 죽여서 본교와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단지 도마 어르신과의 은원을 풀기 위해서라기에는 일을 너무 크게 벌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도마 어르신을 향한 은원만이 아니라…….”

내 본능이 감지한 감정은 바로 이것이었다.

“본교를 향한 원한이 느껴집니다.”

“도마 어르신뿐만 아니라 본교까지 망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깊은 원한이요.”

아버지의 놀람이 느껴졌다. 이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으셨다는 것을.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도마 어르신의 과거 속 어딘가에, 아버지의 과거 속 어딘가에 이번 일을 꾸민 자가 있을 겁니다. 지금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시지만요.”

침묵이 흘렀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너무 확신해서 말씀드렸나 해서 덧붙여 말했다.

“그냥 참고만 하십시오. 느낌이고 감일 뿐입니다.”

“그 감, 얼마나 잘 맞느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의 다 맞죠.”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바깥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나쁜 상황이군.”

원래 우리가 상대했던 배후 세력 말고 새로운 적이 생겼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봤다.

“아뇨, 오히려 좋을 수도 있습니다.”

창밖을 향하던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건 왜냐고 묻는 아버지의 눈빛에.

“배후들이 한풀 꺾인 지금이 새로운 적을 처리할 기회일 테니까요.”

사적인 원한이라 느낀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배후들이라면 조금 더 조심하고, 기회를 노렸을 거다. 아버지와 내가 중경을 지나가고 있는 이때, 중경이 봉쇄되는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다. 우릴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자들은 다르다. 저지르는 짓들에서 감정이 느껴진다.

“놈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느낌입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느낌을 그대로 전했다.

“우리가 돌아왔다!”

이 순간 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는 하나의 감정을. 그건 분명 차가운 조롱이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면 천마전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했어야지.”

아버지라면 분명 그랬을 테니까. 누명을 씌우고 약점을 잡고. 이런 비겁한 짓은 아버지가 정말 싫어하는 짓이었으니까.

아버지, 그게 누구인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와 함께 되돌려 보내시죠.”

* * *

아버지의 거처에서 나왔을 때, 안가 마당에 서대룡이 서성대고 있었다.

“피곤할 텐데. 왜 안 쉬고?”

“눈을 좀 붙여 보려고 누웠는데 잠이 안 오네요.”

혈천도마가 걱정되어서 그럴 것이다. 무공을 배우면서 그와 얼마나 정이 많이 들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멸천마도식을 배울 때, 따로 들은 말은 없었어?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거나.”

“아뇨, 멸천마도식은 오직 도마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된다고 하셨지요. 절대 외부에 유출될 무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멸천마도식을 사용했던 걸까?

전대 도마인가? 그는 이미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면 도마 어르신에게 다른 사형제가 있었을까? 그랬다면 아버지가 모르실 리가 없는데.

“소교주님.”

서대룡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위험한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배운다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선배를 위해 신교의 변화를 바라던 서대룡이기에, 원래도 그의 눈빛은 뜨거웠던 거다.

“네 말을 도마 어르신이 들으셨으면 좋아하실 거다.”

“나중에 소교주님께서 저 대신 꼭 생색내 주십시오.”

그렇게 마주 보며 미소를 짓던 그때, 안가 무인이 와서 두툼한 자료를 내게 건네주고 갔다. 통천각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안가로 정보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중경의 정파 문파들에 관한 자료다. 통천각에 요청했다. 놈들의 다음 목표가 어딘지 알아내려고.”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놈들이 또 멸문지화를 저지를 거로 생각하십니까?”

“너와 멸마대주를 죽이는 일에 실패했으니까. 그래, 난 놈들이 또 저지를 거로 생각한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자신들의 뜻을 이룰 때까지 저지를 거로 생각한다. 아니더라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지.”

서대룡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자신이 살았기에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자책하는 중이리라. 이런 사람이기에 그를 좋아하는 것이고.

“저쪽에서는 제법 똑똑한 자가 이번 일을 꾸미고 있다. 그 점은 우리에게 유리하지.”

“적이 똑똑한데 왜 우리가 유리합니까?”

“무슨 생각을 할지 알아낼 똑똑한 사람이 우리에게도 있거든.”

“누군데요?”

“너.”

나는 자료를 서대룡에게 건넸다.

“똑똑한 사람들끼리 통하는 바가 있을 거다. 다음 목표가 어딜지 찾아내라.”

“그러면 소교주님이 보셔야죠.”

난 사마군사나 고월, 서대룡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나를 똑똑하게 여긴다면 그건 회귀의 경험에서 오는 통찰일 뿐, 나는 황천각에 수석 입학할 수 없었으니까.

“제가 잘못 고르면요?”

“네가 잘못 고르면 나도 잘못 고를 거다. 대룡아, 네 똑똑함을 믿어라.”

서대룡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 일은 사부의 생사도 걸려 있고, 또 무고한 이들의 생명도 걸려 있었다. 예전이라면 그 부담감에 달아났겠지만.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서대룡이 자료를 바닥에 펼쳐 놓기 시작했다. 방이나 책상 위보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이 안가 마당이 한꺼번에 자료를 살피기에 더 좋았다.

그렇게 안가 마당에 중경의 수십 개 문파 자료가 펼쳐졌다.

서대룡은 무섭게 몰입했다. 빠르게 읽었고 필요 없는 것은 옆으로 옮겼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이걸 읽다가 또 달려가서 저걸 읽고.

나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서대룡에게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지켜본다는 생각에 그는 더 집중할 테니까.

다행히 서대룡은 몰랐다. 아버지가 창가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니었으면 지금 보여주는 이 무시무시한 집중력 대신, 긴장하고 당황해서 몇 번은 자빠졌을 테니까.

힘내라, 대룡아! 그래서 어르신하고 본교로 돌아가자.

* * *

점쟁이 노인 앞에 한 사람이 앉았다.

거대한 대도를 무릎에 올린 채 말없이 노인을 쳐다보는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노인은 혈천도마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꼬장꼬장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혈천도마는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음에도 상대에게 크나큰 압박감을 주었다.

“어디요?”

“내가 아무리 점쟁이라도 다짜고짜 그렇게 물으면 어찌 알겠소?”

“두 번 묻지 않겠소.”

명백한 협박에도 노인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혈천도마가 무엇을 물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원래 이런 분이셨소? 내가 아는 혈천도마는 정파인들이 죽거나 말거나 털끝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혈천도마가 무릎에 놓인 멸천대도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여전히 살의는커녕 작은 기도조차 드러내지 않았지만, 칼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은 몇 배로 커졌다.

“나를 벨 수 있겠소?”

노인의 호기에 혈천도마가 나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오.”

노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지더니 이내 점통을 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점이나 한번 봅시다. 우리 마존께서 왜 이렇게 정파인들을 살리려 하시는지.”

멸천대도가 날아들어 단칼에 목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노인은 침착하게 통에서 대나무 막대기를 하나 골랐다.

―새 인연이 옛 인연을 이긴다.

노인이 점괘에 적힌 글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역시 소교주 때문이셨구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정말 자신을 베려 한다는 것을.

노인이 이번에는 혈천도마에게 통을 내밀었다.

“하나 뽑아보시오.”

노인을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통을 바라보자 그중에 하나가 허공섭물로 뽑혀 올라왔다.

―결자해지(結者解之).

“좋은 점괘를 고르셨소. 맞소, 매듭은 묶은 사람들이 풀어야 하는 법이겠지.”

노인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사흘 후, 봉산검문(鳳山劍門)으로 가보시오.”

혈천도마는 알 수 있었다. 점괘가 이렇게 나왔기에 알려주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 점괘 역시 노인이 의도한 점괘였을 거라고.

어쩌면 그의 뜻일지도.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노인이 점통을 흔들었다.

“어디 내 점괘도 봐볼까?”

노인이 막대기를 하나 뽑았다.

―살 자는 반드시 살고 죽을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 점괘를 힐끗 쳐다본 후 혈천도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묻지 않으시오? 내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는지.”

혈천도마가 저만치 걸어가며 대답했다.

“난 어느 쪽인지 알고 있소.”

* * *

“두 곳으로 추려졌습니다.”

바닥에 남은 문파는 두 곳이었다.

운강파(雲江派).

봉산검문.

서대룡이 온갖 고민을 다 해서 내놓은 결과였다. 하나씩 하나씩 배제된 문파 자료들이 옆쪽에 쌓여 있었다.

“중경을 대표하는 정파 중에서도 문주들의 평판이 좋은 곳으로 두 곳 모두 목표가 될만한 문파입니다. 그들까지 본교에 당했다고 알려진다면 정파인들은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검무극이 그 두 문파의 서류를 살폈다.

“분명 둘 중 한 곳일 거 같은데, 도저히 고르지를 못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한 번의 선택에 수많은 이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가 제 한계입니다. 사마 군사님이나 고 군사가 필요합니다.”

그때 검무극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어딘지 알 것 같다.”

서대룡이 놀란 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아시겠다고요? 어떻게요?”

서대룡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알고 보면 이 모든 흑막의 수장은 바로!”

검무극이 서대룡을 야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야 내 비밀을 알아차렸나?”

가만히 검무극을 쳐다보던 서대룡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장난은 장난으로도 치기 싫어요. 소교주님이 적이다? 무림멸망이잖아요?”

“내 기준에서는 무림일통이지.”

“어휴, 그만하시라니까요!”

서대룡이 검무극 옆으로 와서 물었다.

“어느 문파입니까?”

검무극이 바닥에 놓여 있던 두 곳의 서류 중 하나를 주워들었다.

봉산검문.

“대체 어떻게 아신 거죠?”

검무극이 봉산검문을 고른 이유는 서대룡이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앞서 멸문당한 유명장이나 대정문과 사이가 나쁜 곳을 골랐다.”

마지막 후보였던 운강파는 대정문주와 아주 친한 사이였다. 유명장과도 친분이 있었고. 반면 봉산검문은 같은 정파 중에서도 오히려 그들과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였다.

“왜요?”

서대룡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래야 최대한 많은 정파가 열을 받을 테니까.”

같은 정파라도 친분이 있고 계파가 있다. 아무래도 친분이 깊을수록 분노도 커질 터. 다른 쪽 계파의 분노를 끌어올리겠다는 의도.

“아! 일리 있으신 말씀입니다!”

서대룡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때마침 통천각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안가 무인이 가져온 전서를 검무극이 확인했다.

“그곳임이 확실해졌다.”

전서의 내용은 사흘 후, 봉산검문에 중경의 여러 문파의 수장이 모여서 회합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날이다.”

검무극의 확신에 서대룡이 의문을 제기했다.

“오히려 반대 아닙니까? 요즘 분위기에서 문파의 수장들이 움직이면 휘하의 고수도 많이 데려올 텐데…… 아!”

그 순간, 서대룡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놈들이 자신을 죽이려 무림맹 중경지단을 공격했을 때도 인근 지단과 지부에서 지원 나온 무인들로 지단은 북적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멸마대주와 멸마대 전원을 죽이려 드는 자였다. 이자들은 선이 없는 자들이다.

“그래, 놈들은 여러 문파가 모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다.”

검무극이 서대룡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했다, 네가 찾아낸 거다.”

서대룡은 기쁨보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날 그곳에 사부님도 오실까요?”

“그건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멸천마도식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올 거라는 점이다.”

서대룡은 느낄 수 있었다. 멸천마도식을 배웠기에 자신도 이 운명의 연장선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술에 취해 사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그날, 처음으로 선 위에 섰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내내 그 위를 걷고 있었다.

사부가 자신을 후계자로 삼을 때 한 걸음, 젊어서 쓰던 대도까지 선물로 줄 때도 한 걸음, 무공을 가르쳐주실 때도 한 걸음, 야단칠 때도 한 걸음, 그리고 웃어주실 때도 한 걸음.

그러니 이번에도 걸어야겠지.

“사부님까지 오신다면 쓸 수 있는 사람이 셋이 모이겠군요.”

다른 수명이 늘 수만 있다면.

“저도 돕고 싶습니다!”

바로 이 마음이 서대룡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망이었다.

“물론, 제가 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부님을 위해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사부님이 위험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안가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차라리 너는 적들의 훌륭한 인질이 될 거라고 장난이라도 쳐주면 좋았겠지만, 검무극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괜한 말을 했구나.’

임시 뇌옥에서도 장호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는데. 아직은 그런 실력인데.

사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이 중요한 일에 짐이 될 수는 없는 일.

서대룡은 웃으며 태세를 전환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언제 위험한 곳 가는 것 봤습니까? 저는 안가에서 소교주님이 사부님 모시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 자존심도 상하고 미련도 남아 멋쩍게 덧붙였다.

“어디 사흘 만에 실력이 확 오르는 방법 좀 없습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불쑥 손가락 셋을 앞으로 내밀더니 곧장 몸을 날렸다.

“어디 가십니까? 소교주님!”

하지만 이미 검무극은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서대룡은 의아했다.

‘손가락 셋은 왜 내미신 거지?’

사흘 만에 강해지는 방법 없냐고 말해서? 아니면 봉산검문 회합이 사흘 후라고?

그게 어느 쪽이든 굳이 저렇게 손가락을 내밀 필요가 있었나?

‘갑자기 어딜 가신 거지?’

그렇게 사라진 검무극은 한 시진이 지나고, 두 시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대룡이 이런 장난 섞인 탄식을 내뱉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저 잊으셨죠? 이제야 알겠습니다. 사흘 후에 돌아오신다는 뜻이죠?”

바로 그때였다. 그의 등 뒤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려섰다.

“그러기에는 내 경공이 너무 빨라서.”

서대룡이 놀라 돌아섰다.

“어딜 다녀오신…… 어?”

서대룡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검무극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무공실력에 이렇게 땀을 흘렸다면? 정말이지 무림일통까진 아니더라도.

“중경일통이라도 하고 오신 겁니까?”

“그랬다면 땀이 아니라 피에 젖었겠지.”

그러면서 검무극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네 질문에 대한 대답.”

“네? 제가 뭐라고 물었었는데요?”

“열어봐.”

서대룡이 받아서 열어보니 푸른빛이 영롱한 단약이 하나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는 단약이었다.

“안 됩니다, 싫습니다! 저, 안 먹습니다. 죽어도 안 먹어요!”

“이게 뭔 줄 알고 싫대?”

“영약이잖아요? 더는 소교주님께 신세 안 질 겁니다. 이 무인 주세요, 장 군주님을 주시든지요.”

“영약 아닌데?”

“……아니라고요?”

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서대룡에게 검무극이 약의 정체를 밝혔다.

“폭공단(爆功丹)이란 거다. 마공을 더욱 강력하게 펼쳐낼 수 있지만, 대신 네 수명이 줄어들 거다. 네가 물었지? 사흘 만에 강해질 방법 없냐고? 자, 여기 있다.”

서대룡이 떨리는 눈빛으로 단약을 내려다보았다.

“수 명이 얼마나 줄죠?”

“사람마다 다르다. 일 년이 줄 수도 있고, 십 년이 줄 수도 있고.”

찬란한 푸른 빛이 사람의 생명을 빨아먹기 위해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그때, 단약 위로 혈천도마의 얼굴이 겹쳐졌다.

‘사부님.’

그 강한 사부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건, 위험에 빠졌다는 의미.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냥 있어선 안 되지.’

사람 사이에 자물쇠가 채워지는 건 오히려 거창한 일 때문이 아닐 때가 많다. 지나서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었던 일들, 혈천도마와도 그랬다.

그 깔끔한 사부가 술 취한 자신을 침상에서 재웠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 순간에 자물쇠가 채워졌다.

주정 부리는 자신을 아무 방, 아니 마구간에 던져놨어도 됐을 상황이었는데, 사부는 자신의 침상에 재워주었다.

그때 채워졌다. 앞으로 난 이 사람을 좋아하겠구나.

사부와 자신을 이은 운명의 선 위에서 오늘 서대룡은 다시 한 걸음을 걸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정말 사부님이 위험할 때, 제가 이 단약을 복용했기에 구할 수 있을지도.”

“수명이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줄지도 몰라.”

“대신 다른 수명이 늘 수만 있다면 괜찮습니다.”

서대룡은 망설이지 않고 단약을 꿀꺽 삼켰다. 이 끔찍한 약은 왜 이렇게 달콤한 걸까?

어쨌든 약을 복용했으니, 검무극은 서둘러 그를 운기 시켰다.

“심법으로 약을 녹여라.”

서대룡이 자리에 앉아 운기를 시작했다.

검무극이 등 뒤로 한 줄기 내력을 주입해서 약을 녹이는 걸 도왔다.

서대룡이 진기를 일주천하고 이주천하고 삼주천했다. 검무극의 도움으로 약효는 완전히 서대룡의 몸에 흡수되었다.

운기를 마친 서대룡이 눈을 떴다. 단약을 흡수하기 전보다 훨씬 맑고 깊은 눈빛이었다.

단전에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웅혼한 내공이 느껴졌다.

몸 상태를 살피고 난 그의 첫 마디.

“아니죠? 그런 이상한 약.”

검무극의 여유로운 미소가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약입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왔다.

“청옥신단(靑玉神丹).”

청옥신단이란 말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앞서 자신이 복용했던 마정단보다 내공 증진에 더욱 효과가 있는 영약이었다. 수명을 줄이고 강해지는 그런 약이 아니었다.

“이 귀한 것을!”

“그냥 주면 안 먹을 것 같아서.”

“당연히 안 먹죠. 내공 다시 가져가세요!”

“아쉽게도 흡성마공(吸星魔功)은 익히지 않아서.”

“소교주님!”

서대룡이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네가 운이 좋았다. 다행히 딱 한 곳에 남아 있었다.”

돈이 있어도 영약 구하기가 어려운 시대였지만, 검무극에게는 회귀 전의 많은 경험이 있었다. 어디에서 누가 무엇을 파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이번 여정에서 벌어들인 돈도 있었고.

“네가 수명을 줄이면서까지 도우려 했다는 걸 들으면 어르신이 기뻐하실 거다. 겉으로야 멍청이라고 혼내시겠지만, 정말 감격하시겠지. 그것도 내가 대신 생색내 주마.”

서대룡은 부끄럽고 부담스러웠다.

“사실 영약인 줄 알았어요. 소교주님께서 제게 그런 약을 먹일 리 없잖아요. 그리고 약 이름도 오다가 지어낸 거죠? 촌스럽게 폭공단이 뭡니까? 앞으로 저 속일 생각 마세요! 저 황천각 수석 입학자입니다! 어디 가서 속고 다니는 그런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라고요!”

물론, 그는 검무극에게 세상에서 제일 호락호락한 사람이었다.

“그 수석 입학자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뭔지도 모르고 입에 막 넣는다!”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서대룡은 기뻤다. 멸천마도식이라는 대단한 무공에 비해 내공이 부족한 게 가장 큰 약점이었는데 검무극이 그걸 보완해준 것이다.

‘대체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으라고 이러시는 겁니까?’

그때 검무극이 손가락을 두 개 내밀었다.

“참, 그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번에는 두 개네요.”

“사흘 만에 강해질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을 보여주겠다는 거다.”

검무극이 거처로 들어가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왔다.

그건 호신갑이었다. 은한상단주가 아버지에게 선물로 준 보고에서 네 겹이나 껴입으면서 얻어낸 호신갑 중 하나였다.

백린갑(白鱗甲).

그 이름처럼 새하얀 색의 호신갑이었다.

“너와 어울릴 것 같아서. 원래도 너 주려고 했던 거다.”

오늘은 더 어울렸다. 사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수명을 거는 사람에게, 이 순백의 호신갑은 더없이 어울렸으니까.

“아뇨,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서대룡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저를 이렇게 염치없는 놈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빌려주는 거다.”

물론, 서대룡은 믿지 않았다. 그래 놓고 줄 거면서.

“얼마나요?”

“한 오십 년?”

서대룡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검무극에게서 그의 뒷걸음을 멈추게 할 말이 나왔다.

“어르신을 돕고 싶다면서?”

검무극이 다가가 백린갑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옷깃을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안에 흑룡비갑을 입고 있었다.

“나도 입고 있는데 건방지게 네가 왜 거절을 해?”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부 돕고 싶다는 그 말, 진심이면 입어.”

검무극이 이렇게 나오는데 어찌 거절하겠는가?

서대룡이 옷을 벗고 백린갑을 입었다. 그래, 안 죽는 게 검무극을 돕는 일이겠지.

부담은 부담이고. 백린갑은 정말 끝내줬다.

“아, 정말 좋습니다! 입었는데도 안 입은 것처럼 편합니다.”

“그렇게 얇고 편한데, 어지간한 검기까지 막아준다.”

서대룡이 대도를 땅에 박고 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참 낯설었다. 보의도, 그 보의를 입고 있는 혈천도마의 제자도, 이 모습을 비추는 저 대도까지도.

“잘 어울린다.”

“아무래도 제가 전생에 소교주님을 구한 모양입니다.”

검무극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날 구한 건 이안이다. 너는 전전생 쯤에 구한 모양이다.’

검무극은 먼 미래까지 내다보았다.

“오십 년 후에 네가 잊지 않고 이걸 돌려주면서 잘 썼습니다 하면, 그날 우린 오십 년 전 오늘을 떠올리며 웃을 거 아니냐? 그날 하루 우린 옛이야기 하면서 정말 즐거울 거다.”

서대룡은 그 순간을 떠올리자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그때까지 제가 살아 있을까요?”

“그러니까 항상 입고 다녀.”

그리고 아직 하나가 남았다는 듯, 검무극이 다시 손가락 하나를 내보였다.

“이번에는 뭡니까?”

“사흘 만에 강해질 수 있는 세 방법 중 마지막 하나.”

오늘의 마지막 선물이 남아 있었다.

“내공도 늘였고, 보의도 입었으니, 자 이제 싸워봐야지.”

서대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에게 실전 수련을 해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르신이 계시니 무공은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실전 비무는 해도 괜찮겠지.”

천마신교 소교주에게 실전비무를 받는다. 이건 천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기연이었다.

검무극이 실없는 소리로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내가 명색이 물욕의 화신인데, 귀한 걸 너무 줬어. 널 좀 패고 나면 속이 풀리지 않겠어?”

서대룡은 거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실전 비무를 마쳤을 때,

서대룡은 울고 있었다. 정말 검무극 부담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절대 안 울려고 했는데,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이렇게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그렇게 많이 아팠냐?”

서대룡이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너무 아팠습니다. 이제 속이 풀리셨습니까?”

고개 숙인 그에게 들려오는 검무극의 목소리.

“아니, 이제 시작이다. 일어나라.”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 * *

창가에 선 검우진이 아들과 서대룡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휘도 한 걸음 뒤에서 함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교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저라면 자랑스러울 겁니다, 교주님.’

저런 아들이 있다면 말이다.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인생이었기에.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던 검우진이 천천히 다탁으로 걸어가서 차를 부어 마셨다.

“내 과거 속에 이번 일을 일으킨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자네도 들었지?”

“네, 교주님.”

그 말을 들은 후, 아들의 말이 자꾸 마음에 맴돌았다.

“자넨 누구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나?”

“아뇨, 없었습니다.”

그때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나는 한 사람 있네.”

휘가 놀란 얼굴로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아예 잊고 지냈는데, 지난 세월을 떠올리다 보니 생각났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지.”

검우진이 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네.”

“한데 어찌 그 사람을 떠올리시는 겁니까?”

검우진이 잔에 차를 부으며 대답했다.

“당시에 시체를 찾지 못했거든.”

만약 정말 그가 맞다면?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검우진은 그 세월을 뚫고 되돌아왔을 사람을 떠올리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 * *

실전 비무 수련은 사흘째 되는 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비무를 나눴다.

이 실전 수련은 지금까지의 수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대룡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순간들의 연속.

하지만 죽지 않았다. 비무 상대는 검무극이었으니까.

오직 서대룡을 위한 비무였다. 그를 다음 경지로, 또 그다음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련이자 가르침이었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잘못된 자세와 습관을 교정했다. 한마디 말도 없었지만 이럴 땐 어떻게 움직이고 저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검과 도가 부딪치면서, 몸으로 배웠다.

그랬기에 서대룡은 한 수, 한 수 펼칠 때마다 실력이 느는 기분을 받았다. 자신은 몰랐지만, 실제로도 실력이 늘고 있었다.

정말 농담처럼 말했던 거였는데. 사흘 만에 실력이 확 느는 방법이 없느냐고.

서대룡의 등에 찬 대도가 아침햇살에 반짝였다. 사흘 전의 서대룡과 지금의 서대룡은 다른 사람이었다.

“대룡아.”

“네, 소교주님.”

“이제 우리 뭐 할까?”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어떤 마음으로 이 질문을 하는지. 지난 사흘 내내 왜 그렇게 자신에게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이 되는 느낌을 받지 말라고.

그래서 이 말을 네가 하라고.

“지금 사부님을 구하러 갈 건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쪽도 대도를 쓰시는군요.

검무극과 서대룡이 나란히 서 있는 곳은 멀리 봉산검문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지붕이었다.

봉산검문은 외진 곳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에 지어져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규모가 상당했는데, 이 큰 곳이 저자에 인접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봉산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봉산검문으로 회합에 참석하는 문파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은 남았지만, 일찍 도착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서대룡은 자료를 넘겨보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자료는 봉산검문에 대한 자료와 오늘 초대받은 문파들의 자료였다. 물론, 통천각에서 보내준 자료였다.

“봉산검문의 문주 방청문(房淸紋)은 본교를 아주 미워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회합의 목적도 본교에 맞서 단합하자는 것이고요. 아, 저길 보십시오.”

이제 막 도착하는 문파가 있었다.

“지금 도착한 문파는 남중문(南中門)입니다. 참석 예상 인원은 열두 명이었는데…… 맞네요, 열둘. 문주 원홍(元泓)은 본교에 호의적인 인물입니다. 본교와 중경의 정파무림과의 가교 구실을 하는 인물인데 오늘 회합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겉으로의 기치는 본교에 맞서서 단합하자는 목적이지만, 결국 정치적인 회합인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서대룡이 다시 말을 이었다.

“놈들의 멸문 목적이 정파인들을 화나게 하기 위해서니 저 남중문주는 놈들의 목표에서 가장 먼 사람이죠.”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나라면 저 남중문을 목표로 했을 거야.”

“네? 왜요?”

서대룡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평소 우릴 적대하는 이곳 봉산검문을 치면 정파인들은 분노하면서도 당연한 결과라 여길 거야. 평소에도 대놓고 우릴 적대하는 곳이니까.”

“그렇겠지요.”

“남중문을 쳤다면? 과연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곳이 멸문했다고 좋아할까?”

“그래도 같은 정파인데 좋아하진 않겠지요.”

검무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노의 속성이었다.

“그렇지. 그럼 우리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자신들에게 호의를 가진 곳을 멸문시킨다? 정말 미친놈들이라 생각하지 않겠어? 그런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짓을 저지르는 우릴 바라보는 마음이 어떨까? 난 우리에 대한 증오가 더 크면 컸지, 적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서대룡이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듣고 보니 남중문을 쳤을 때의 파장이 훨씬 더 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래도 제가 소교주님보다 머리가 더 좋다고요?”

서대룡은 확신했다. 검무극이 적이 된다면 지금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상대하기 어려울 거라고.

“나보다 머리가 더 좋지. 넌 그 자료 다 외웠잖아?”

“외우긴 했죠.”

이번에는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외웠다고? 정말? 농담으로 물어본 건데.”

“…….”

“너도 농담이지? 맞지?”

“……농담이죠.”

“그런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농담이라 하지 말라고!”

분명 서대룡에게는 다 외운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 짧은 시간에 이걸 다 외웠을 리는 없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서대룡은 마군들 신상정보를 다 외워서 왔었다. 설마? 아니겠지?

“가시죠.”

출발하기 전, 검무극은 보았던 자료를 손바닥에서 열양지기로 모두 태웠다. 자료들은 모두 재가 되어서 날아갔다.

화르르륵.

“저는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서대룡이 제일 부러운 게 이것이었다. 나중에 할 수 있게 되면 수하들 앞에서 꼭 해볼 것이다. 비밀문서를 읽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바닥 위에서 태우는 거다. 무심하게 화르르륵. 생각만 해도 멋있다.

그때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전했다.

“너도 내공은 이제 충분해.”

“정말요?”

“머지않았다.”

가슴 뛰는 그 말에 서대룡은 새삼 이번에 얻은 기연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자, 가자!”

검무극이 훌쩍 경공으로 몸을 날렸고, 서대룡이 그 뒤를 따랐다.

서대룡은 단전에 내공이 넘쳐나니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생겼다.

봉산검문의 정문으로 속속 회합에 참여할 문파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과연 각파의 수장은 수하들을 적게는 십여 명, 많게는 수십 명을 데리고 왔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검무극과 서대룡은 담을 넘었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침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이렇게 돌아다녀도 됩니까?”

담을 넘은 후에 검무극은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걸었다.

“어깨 펴. 초대받은 손님처럼 굴어.”

“도가 눈에 띄지 않을까요?”

“네가 그걸 걱정하는 순간에만 눈에 띌 거다.”

과연 걷다가 만난 봉산검문 무인들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했을 뿐, 신원을 묻지 않았다. 설마 흉수가 대낮에 대도를 차고 돌아다닐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잘 살펴. 정찰대 놈들이 이미 들어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중경지단을 공격했던 것처럼, 다수의 인원이 기습을 감행할까요?”

“모르지. 한 명이 올지, 백 명이 올지.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장들을 멸천마도식으로 죽이려 들 거라는 점이다.”

서대룡은 누군가 멸천마도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을 떠올리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우리가 막지 못하면 오늘 여기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다.’

여기 있는 이들에게 그 말을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이렇게 고수들이 북적대는데, 감히 누가 자신들을 죽이러 올 것인가? 그것도 이런 환한 대낮에. 게다가 이곳 봉산검문은 외진 곳에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런 암습은 더욱 상상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올 것이다.

뇌옥에 있던 자신에게도 왔듯이.

“이제 어떻게 하죠?”

검무극은 오면서 이미 어떻게 대처할지를 생각해 둔 상태였다.

“봉산검문의 문주를 만나야지.”

생각지 못한 방법이기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몰래 숨어 있다가 놈들이 등장하면 나타나서 막을 줄 알았는데.

“놈들이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를 상황에서 그냥 대처하려 했다가 피해가 클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봉산문주와는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야 해.”

“과연 그가 우리가 돕겠다는 말을 믿어줄까요?”

소교주인 것부터 믿지 않을 텐데.

“믿게 해야지.”

서대룡은 이 계획이 검무극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라면 어떻게든 봉산검문의 문주를 설득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갔으니까.

“가시죠, 문주전은 저쪽입니다.”

“문주를 만나러 나 혼자 간다.”

검무극이 서대룡의 대도를 가리켰다.

“마인임을 밝히는 자리에서 대도를 찬 네가 있으면, 문주는 흉수가 수작을 부린다고 의심할 거다.”

“그렇겠네요. 그럼 그동안 저는 어디에 있습니까?”

“수상한 자들이 있는지 찾아내.”

“혼자서요?”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손바닥 위에서 종이를 불태우는 것보다, 위험한 곳에서 적을 찾아내는 모습이 더 멋있잖아?”

서대룡을 두고 검무극은 가주전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본격적으로 회합이 진행되었을 때 놈들이 움직일 테니까.

* * *

봉산검문 문주 방청문은 문주전에 있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검문으로 도착하는 각파의 무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초대받은 문파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불참을 알려온 이들은 없나?”

“한 곳도 없습니다.”

“가서 회합 준비를 철저히 점검하게.”

“네!”

수하를 내보내고 방청문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회합은 도약의 기회였다.

남의 비극을 기회로 삼아선 안 될 일이지만, 대정문의 멸문은 분명 봉산검문에게는 기회였다. 그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경쟁해 왔으니까. 그들이 차지했던 여러 이권을 자연스럽게 자신들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회합은 자신과 가까운 문파들과 단합하면서 봉산검문의 세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중경제일문파로 도약하는 거다.’

이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때, 그곳으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하라면 들어온다고 말을 하고 들어왔을 텐데.

그가 돌아보자 들어선 사람은 처음 보는 청년이었다.

방청문은 은밀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차분하게 물었다.

“누군가?”

수하들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는 곳인데. 게다가 비상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호위마저 소식이 없었다. 이미 다 제압되었다는 의미.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지만, 오늘 당신에겐 가장 필요한 손님일 거요.”

물론, 청년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내 수하들은 어떻게 됐나?”

“마혈을 제압했을 뿐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다행히 그 어디서도 피 냄새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자넨 누군가?”

검무극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 않았다.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방청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근래 중경에서 일어난 혈사가 아니었다면, 오늘 회합의 대외적인 목적이 마교에 대항해서 힘을 합치자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 뜬금없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믿기 어려운 말이군.”

방청문은 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뽑아야 할 검이었다. 마교 소교주라면 그가 좋은 마음으로 왔을 리 없으니 뽑아야 했고, 소교주가 아니라면 더욱이 뽑아야 했다. 마교 소교주를 사칭하는 위험한 자였으니까.

검무극은 대화로 그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말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

쇄애액.

검무극이 방청문을 향해 순식간에 쇄도했다.

번쩍하는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검무극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내질러진 검 끝은 비어 있었다.

흑마검이 그의 뒤에서 목을 겨누고 있었다.

봉산검문이라는 큰 문파를 이끄는 수장이지만, 검무극의 명왕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오.”

“그렇다면 왜 몰래 잠입한 건가? 왜 내게 검을 겨누고 있는 건가?”

“본교에 맞서자는 회합을 하는 곳에 정문으로 들어올 수는 없지 않겠소? 검을 겨눈 이유는 내 신분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였소.”

검무극이 검을 거두었다.

그 순간, 방청문이 벼락처럼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뒤쪽은 또 비어 있었다.

다시 뒤에서 그의 목에 검이 겨눠졌다.

“두 번까지는 이해하지만 세 번은 없소.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자와 상대할 마음은 없으니까.”

방청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검을 거두었다.

방청문은 더는 공격할 마음이 없었다. 첫 번째는 엉겁결에 선공에 당했다고 쳐도, 두 번째는 확실히 먼저 기습을 날렸으니까.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확인했다.

“당신을 죽이러 온 거였으면 이미 당신은 죽었고, 지금 저 벽에 당신 피로 글자를 적고 있겠지.”

검무극의 말을 들으며 방청문이 뒤로 돌아섰다.

“오늘 실제로 그 일을 하려는 자가 올 거요.”

방청문의 가슴이 철렁했다.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빛은 거짓말을 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게 누군가?”

“나도 모르오. 우리와 정파를 이간질해서 전쟁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소.”

방청문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간질? 대정문주를 죽인 무공이 마존의 무공이라고 알고 있네.”

무림맹에서 의도적으로 소문을 냈을 리는 없으니, 이 소문 역시 놈들이 퍼뜨린 것이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퍼질 수밖에 없는 소문이기도 했고.

“그래서 오늘 내가 직접 왔소. 어떻게 된 일인지 밝히려고.”

방청문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무인들 사이에선 백 마디 말보다 실력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른 결과를 낳았으니까.

“솔직히 믿기지 않네. 마교 소교주가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는 게.”

“이해하오.”

검무극이 창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생길 거요.”

밖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 방청문을 향했다.

“날 못 믿겠으면 두 번이나 당신을 살려준 이 검을 믿으시오. 세 번째까지 당신을 살려줄 검이오.”

방청문은 상대가 소교주일 것 같다는 확실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인데 단 일수에 자신을 제압한다?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선은 물어야 했다.

“원하는 게 뭔가?”

* * *

서대룡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당당하게.’

어깨를 쫙 펴고 다니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다니며 혹시 수상한 자가 있을까 살펴보고 있었는데.

“못 보던 얼굴이네?”

허리에 쌍검을 찬 백발 무인이 물어온 건 서대룡이 등에 차고 있던 대도가 눈에 띄어서였을 거다. 모인 이들 중에 도를 찬 무인도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렇게 큰 대도를 찬 사람은 서대룡뿐이었다.

그렇게 옆에 있던 이들의 시선까지 집중되었을 때.

“섭섭합니다, 양 무인. 그때 뵙고 인사도 드렸었는데. 다음에 술도 한잔하자고 하셨는데.”

“아, 그랬었나? 미안하네. 나이를 먹으니 자꾸 잊어버린다네.”

자신을 알아보자 양 무인이라 불린 사람이 더는 캐묻지 않았다.

서대룡은 이 늙은 무인의 신상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 백발에 쌍검을 쓰는 무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정말 자료 속 인물들의 특징을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서대룡이 내심 안도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그쪽도 대도를 쓰시는군요.”

서대룡이 돌아보니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키도 크고 미남인 무인이었는데 등에 자신의 대도만큼이나 큰 도를 매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대도를 쓰는 무인이 누가 있었지?’

누군지 떠올려 볼 필요가 없었다. 자료에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남자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서대룡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짜도 죽이고 구경꾼도 죽이고

서대룡의 본능이 말했다.

‘이자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의구심.

‘이렇게 젊다고?’

아니, 젊어서가 아니다. 밝아서다. 이렇게 잘생기고 서글서글한 웃음이 잘 어울리는데. 이자가 흉수라고?

지나가던 열 명에게 물었을 때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대정문을 멸문시킨 흉수나 마공을 익힌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그 질문을 받았어도 마찬가지리라.

‘아닌가?’

그렇게 여러 생각이 스치는 사이 남자는 서대룡의 앞까지 다가왔다. 서대룡은 은밀히 내력을 끌어올리며 언제라도 상대의 공격에 반격할 준비를 했다.

큰 키의 남자는 여전히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서대룡을 내려다보았다.

“배짱 있으시오. 요즘 같을 때 대도를 차고 다니면 오해받기에 십상일 텐데.”

심지어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워서 선하고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서대룡의 시선이 남자의 등에 차고 있는 대도를 향했다.

“당신도 알면서 차지 않으셨소?”

그는 서대룡을 바라보며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저 눈빛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나야 차고 다녀도 될 만큼 강하니까? 나야 여길 다 죽이러 온 사람이니까?

만약 이자가 흉수라면?

젊은 남자라고 소문낸 것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함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젊었던 거냐?

서대룡은 긴장했다. 어떻게든 검무극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해결하자? 그런 자신감, 서대룡은 키우지 않았다.

늘어난 내공과 검무극과의 실전 비무로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서대룡은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는 자신에게 웃으며 걸어온 상대를 두고 방심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어느 문파에서 나오셨소?”

서대룡은 상대가 오늘 초대받은 문파에 속하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모른 척 물었다.

“무쌍.”

“무쌍파에서 나오셨다는 말씀이시오?”

중경에 그런 문파는 없는데.

“아니, 당신 도에 적힌 글자 말이오.”

혈천도마가 젊은 시절 썼던 도에는 무쌍이란 글자가 도신에 적혀 있었다. 뒤쪽에서 걸어왔던 남자는 그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멋진 도요.”

“우리 사부께서 주신 거요.”

사부란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 서대룡은 유심히 그의 반응을 살폈다.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처음에 보였던 그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사부에 대해 물었다.

“사부는 어떤 분이시오?”

그가 사부에 대해 묻고 있다. 서대룡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도신에 적힌 글자를 읽고, 또 사부에 관해 묻고.

‘내 사부가 누군지 알면서 묻고 있다.’

그리고 굳이 알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감추려 들지도 않는다. 점점 더 이 남자가 적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도에 적힌 글자 그대로인 분이시오. 이 무림에 적수가 없으신 분이시지요.”

그러자 남자는 서대룡의 말을 부정했다.

“세상에 적수가 없는 사람은 없소. 누구라도 대적자(對敵者)는 존재하지. 다만 살면서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고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대적자란 말이 서대룡에게 의미심장하게 와닿았다.

‘누굴 염두에 두고 말한 거냐? 나냐? 사부님이냐? 아니면 소교주님이냐?’

이번에는 서대룡이 대적자에 관해 물었다.

“대적자끼리는 서로 싸우는 운명인 거요?”

“당연히 그렇소. 그들은 서로를 죽이는 운명에 처해 있소.”

“대적자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소?”

“보면 알 수 있소.”

그러면서 서대룡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자, 나를 대적자로 여기고 있다!’

역시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와 어떤 운명의 얽힘을 느꼈으니까.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뿌듯함도 들었다.

아직도 서대룡은 그 우울하던 조사관 시절을 떠올린다.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은 항상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오만을 떨지 않을 테니까.

그런 자신을 누군가 운명적인 적으로 여긴다? 두려우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 차라리 사부님이나 소교주님이 아니라 나를 노려라! 내가 상대해 주마.

남자의 시선이 저 멀리 오늘 회합이 있는 대청을 향했다. 대청 앞에는 각파의 수장들을 따라온 무인들이 서 있었는데, 그 숫자로 볼 때 초대받은 이들이 거의 다 모인 듯 보였다.

남자가 서대룡에게 물었다.

“오늘 회합이 어떤 목적인지 아시오?”

“나는 잘 모르오.”

“우릴 상대로 단합하겠다는 목적이오.”

“우리?”

서대룡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

“당신과 내가 우리라고 할만한 공통점이 있소? 설마 도를 쓰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회합이란 말씀이시오?”

그러자 남자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린 마인이잖소?”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너무 태연하게 말해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짐작대로 이자는 이번 일을 꾸민 자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 정체를 밝힌다고? 그럼 왜 내게 접근한 거지?

“우릴 적대하는 회합이오.”

그러면서 더욱 놀랄만한 말을 꺼냈다.

“어떻소? 우리 둘이 들어가서 확 쓸어버립시다.”

남자는 진심이라는 듯 눈빛도 말투도 모두 진지했다.

서대룡이 웃었다.

“왜 웃소?”

“너무 긴장하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소.”

서대룡의 솔직한 대답에 남자도 웃었다. 확실히 그는 서대룡보단 여유로웠다. 분명 지금 이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 남자였다.

“무섭소?”

“그럼 안 무섭겠소? 처음 만난 사람이 함께 자결하자고 하는데.”

“왜 우리가 진다고 생각하시오? 당신과 내 무공이라면 저깟 정파 놈들 다 쓸어버릴 수 있지 않겠소?”

서대룡은 싸우겠다, 말겠다를 답하는 대신 슬쩍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이 남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검무극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몇 마디를 할 시간이라도, 지금은 시간을 최대한 끌어야 한다.

“우울했던 시절에 나도 확 세상을 쓸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검무극을 만나기 전, 자신을 아껴주던 황천각 선배가 억울하게 죽었었을 때 그 우울감은 극에 달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다 쓸어버리고 싶었다.

“왜 우울했소?”

분명 자신이 시간을 끌고 있음을 눈치챘을 텐데. 이자는 자신의 말을 다 받아 주고 있었다. 서대룡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보다시피 내가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하고.”

“대도를 쓰는 무공을 배운 것이 혹시 그 자격지심 때문이오?”

서대룡은 느낄 수 있었다. 상대가 자격지심이란 말을 쓰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도발했음을.

정말 예전이었다면 발끈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 옆에 누가 있는데. 내가 누구에게 배웠는데.’

검무극이 천마와 마존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며 성장한 서대룡이었다. 이런 도발쯤에 넘어갈 그가 아니었다.

“대도를 쓰는 무공을 배운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듯이 좋았었소. 생각해 보니 당신 말대로 그런 자격지심이 있었나 보오.”

오히려 서대룡이 상대에게 물었다.

“당신은 살면서 그런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낀 적 없소?”

어이가 없다는 듯 남자는 다시 웃었다.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며 그의 웃음을 보니 서대룡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잘 웃는 사람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서글서글한 웃음은 성격 때문이 아니라 이 남자의 생김새 때문이란 것을.

잘생긴 외모가 그를 서글서글하게 보였을 뿐, 그의 눈빛에서는 어떤 오만함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보인다.

“당신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소.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오. 내 인생을 바꿔주신 분이시지.”

그러자 남자는 또 서대룡을 자극했다.

“남이 내 인생을 바꾸게 하고 싶지 않소. 그건 참 하찮은 인생 아니겠소?”

서대룡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사람은 남 때문에 바뀌는 거 아니겠소? 책도 읽고, 다른 사람 말도 듣고, 남들 사는 모습도 보고. 그런 걸 하찮게 여기는 걸 보니, 당신은 정말 대단한 것 같소.”

비꼬는 말로 들었는지 남자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반응에 오히려 서대룡은 안도했다.

‘그래, 악인이라면 이런 눈빛이어야지. 악당 놈이 그런 사람 좋은 눈빛이면 어떻게 알고 상대하겠어?’

이렇게 표를 내주는 악인은 오히려 덜 무섭다. 진짜 무서운 악인은 전혀 표가 나지 않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내 남자는 다시 그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하지 않았소. 난 서대룡이오. 인사가 늦었소.”

그러자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자경(自敬)이라 하오.”

자경, 당신이 나의 대적자인가?

“아까 마인이라고 하셨는데, 소속이 어떻게 되시오?”

대체 무슨 신분으로 자신을 밝힐까?

서대룡의 궁금증에 자경은 놀라움으로 답했다.

“나는 천마신교 도마의 제자요.”

그러면서 뻔뻔하게 서대룡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느 소속이오?”

서대룡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멸천마도식을 익혔다는 건 알았지만, 도마의 제자라고? 어떤 도마? 설마 사부님의 제자는 아니겠지? 혹 예전에 받아들였던 제자일까? 서대룡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도 도마님의 제자요.”

서대룡은 솔직히 대답했다. 어차피 알고 찾아온 자에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자경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제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요.”

스르륵.

자경의 등에 메고 있던 대도가 저절로 움직이더니 그의 손에 들어갔다.

“그럼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가짜겠군.”

서대룡은 도를 뽑는 동작에 상대에게 기가 눌렸다. 자신은 저렇게 허공섭물로 멋지게 뽑을 수가 없었으니까.

서대룡은 도를 드는 대신 빠르게 말했다.

“사부님을 뵈면 진짜 가짜를 가릴 수 있지 않겠소?”

적어도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랬다면 처음부터 공격을 가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라는 듯.

쇄애애애액!

한 줄기 세찬 도기가 서대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대룡이 몸을 던져 도기를 피했다.

‘못 피했으면 죽었다.’

바닥을 굴러 일어난 서대룡의 손에는 어느새 대도가 들려 있었다.

‘미친놈인가?’

웃으며 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그 살기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싸우자고? 싸움이 벌어지면 모두 몰려나올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대였다.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애초에 몰래 기습을 해서 죽이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여기서 둘이서 싸우면 다들 모여들 텐데?”

“가짜도 죽이고, 구경꾼들도 죽이고.”

쇄애애애액!

또다시 자경의 도기가 휘몰아쳐 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서대룡도 도기를 발출했다. 상대가 멸천마도식을 쓰지 않았기에 서대룡도 그냥 도기를 발출해서 상대의 공격에 맞섰다.

두 줄기의 도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서대룡은 적어도 내력으로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자 그곳으로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에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각파 수장들까지 모두 달려왔다.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시게!”

그들이 등장하자 자경은 공격하지 않았다. 아까 기세로는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본격적으로 도기를 날리며 공격할 것 같았는데.

자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가짜도 죽이고 구경꾼도 죽인다면서?’

그때 서대룡이 상상도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자경이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대정문의 혈사를 저지른 자가 바로 이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자경이 쳐다보고 있는 서대룡을 향했다.

“이자가 바로 혈천도마의 제자인 서대룡이오.”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자경을 쳐다보았다. 설마 정파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누명을 씌울 줄은 정말 몰랐다.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냐?’

이게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결국 시시비비를 따지면 그 역시도 마공을 익힌 것이 밝혀질 텐데?

그러는 와중에도 자경의 폭로는 계속되었다.

“저자의 도는 젊은 시절 혈천도마가 사용한 애병입니다. 도신에 무쌍이란 글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주위에 있던 고수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며 서대룡 주위를 에워쌌다.

“오늘 여기 계신 고수분들을 모두 다 죽이러 왔다고 했습니다!”

서대룡은 황당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서대룡이 모두에게 말했다.

“거짓말이오! 이자가 흉수요! 대정문의 참극을 저지른 자도 바로 이자요.”

그러자 둘러싼 이들 중에 나이 든 고수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오늘 회합에 참석한 비검장(飛劍莊)의 장주였다.

“그대가 혈천도마의 제자가 맞나?”

이미 중경지단에 갇혀 있다 풀려난 그였다.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맞소. 하지만 내가 대정문을 멸문시켰다는 말은 거짓말이오. 그 일을 저지른 자는 바로 저 사람이오. 오늘 당신들을 모두 없애겠다는 말도 했소.”

그러자 주위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조소를 지었다. 고개를 내젓는 이도 있었고, 서대룡을 향해 직접적인 살기를 내뿜는 이도 있었다.

‘뭐지? 왜 이러는 거지?’

비검장주가 모두를 대신해서 서대룡을 쳐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이어진 비검장주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여기 소협은 청운신협(靑雲新俠)이시다.”

서대룡은 놀란 얼굴로 자경을 쳐다보았다.

청운신협.

그에 대해서는 자신도 들어봤다.

근래 정파 무림에서 떠오른 젊은 영웅이었다.

많은 악인을 죽이고, 여러 협행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한 신진 협객. 아, 그러고 보니 그도 도법의 고수라 들었다.

‘이자가 협객 행세를 하고 있었구나!’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사부와 관련된 이번 일은 아주 오랫동안 준비된 음모였음을.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명백히 자신을 옭아맬 함정이었다.

‘시간을 끈 사람은 내가 아니었어!’

자경은 회합에 참석한 고수가 최대한 많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며 시간을 끌었던 거였다.

게다가 앞서 자신에게 이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말을 한 것도, 그것을 이 자리에서 밝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청운신협이 정파 고수들을 몰살시키려 했다? 청운신협이 마공을 익힌 마인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을 말을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의 신용은 무너졌으니까.

자경이 군웅들에게 소리쳤다.

“다 같이 합공해서 마인을 없앱시다!”

동시에 그가 서대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가 이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멸천마도식을 써야 할 거다!

오지 않은 게 문제지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중에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쉬이이익!

젊은 무인 하나가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가 움직이자 이에 질세라 또 다른 무인도 뒤따라 몸을 날렸다.

서대룡은 침착하게 대도를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지켜보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그 큰 대도를 검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공격을 쳐낸 것이다.

첫 번째는 그냥 쳐냈고, 두 번째 방어에는 웅혼한 내공을 도에 실었다.

카앙! 캉!

두 사람은 손아귀가 찢어지며 검을 놓쳤다.

상대의 검을 날려버린 서대룡은 들고 있던 대도를 다시 등에 차며 소리쳤다.

“진정하시고 내 말부터 들으시오!”

검을 놓친 무인들이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뒤로 물러났다. 치욕이라 여겼는지 두 사람은 무서운 눈빛으로 서대룡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향해 겨눠진 수십 자루의 검날이 번뜩였지만, 서대룡은 침착했다.

무공실력이 크게 향상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오늘 이곳에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깊은 함정에 파묻히더라도, 흙더미를 파헤치고 자신을 꺼내줄 사람이…… 아니,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검무극이 없다면 이 상황은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한다.

‘절대 멸천마도식을 펼쳐선 안 돼!’

멸천마도식이 펼쳐지면 누군가는 반드시 죽거나 크게 다치게 될 거다. 그럼 이 자리에는 죽고 죽이는 지옥이 펼쳐진다. 저자가 원하는 대로.

‘절대 네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진 않을 거다.’

자경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놈이 직접 달려들면 걷잡을 수 없는 싸움이 될 텐데.

‘왜 덤비지 않는 거지?’

앞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수법으로 볼 때, 이 상황을 즐기느라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닌데.

‘대체 무슨 수작인 거냐?’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흥분하고 분노한 무인들부터 진정시켜야 한다.

‘만약 이 상황에 소교주가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검무극처럼 말하고 검무극처럼 행동해야 한다. 오른팔답게 지금까지 보고 배운 바를 아낌없이 펼쳐내야 한다.

서대룡은 차분한 어조로 주위를 둘러싼 무인들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청운신협이란 건 지나서 알았소.”

그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을 밝힌 후, 자신을 다시 드러냈다.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혈천도마의 수제자로 차기 도마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오.”

정말 차기 도마가 될 수 있을지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일부러 차기 도마를 언급했다. 조금이라도 상대가 경거망동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겨눠진 검 끝에서의 살기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청운신협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오해한 순간, 그들에게 자신은 흉수가 되었으니까.

서대룡이 자경에게 전음을 보내 도발했다.

―네 사부가 알고 있을까? 제자가 정파의 협객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사부는 오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고 계신다.

적어도 그 말은 사실처럼 들렸다.

‘정말 사부님이십니까?’

만약 사부가 검무극이었다면 자경의 말을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사부라면?

사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직 사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다. 정말 예전에 이런 제자를 두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자경이 군웅들을 다시 자극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마존의 제자라는 건 중요하지 않소. 지금 중요한 것은 대정문을 멸문시킨 흉수라는 점이오. 아무리 마교를 등에 업고 우릴 겁주려 해도, 우리 정파인들의 대협심을 무너뜨리진 못할 것이오.”

무인들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설전이 펼쳐졌다.

“당신이야말로 정파를 등에 업고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군. 내가 대정문을 멸문시켰다는 증거! 그 증거부터 내놓으시오.”

서대룡은 지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말싸움에서 지는 순간 진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그땐 돌이킬 수 없다.

“내가 증거요. 당신에게 그 말을 직접 들었으니까.”

청운신협이 직접 들었다는 말은 그 어떤 말보다 신뢰를 주는 말이었다. 그가 자신들에게 거짓말할 리는 없었으니까.

다시 이어진 서대룡의 반박.

“내가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시오? 심지어 난 저 사람이 청운신협인지도 몰랐소.”

하지만 그 말을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 끌지 말고 당장 죽입시다!”

“합공합시다!”

“더러운 마교놈들!”

한 사람이 소리치자 잇달아 소리쳤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는 오늘 초대받은 문파의 수장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중했다. 공격을 명하기보다 오히려 먼저 나서지 말라고 전음을 보냈다.

서대룡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런 싸움에서는 경험상 처음 나서는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굳이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었으니까.

다시 자경이 서대룡을 몰아붙이기 시작되었다.

“마인인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요?”

“누군가 오늘 이곳을 노릴 거라 판단했소.”

“그 판단을 뒷받침할 증거가 있소?”

“자료를 모두 태웠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소.”

자경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물론 그렇겠지.”

둘러싼 군웅들 역시 마찬가지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

“대신에 말해줄 수는 있소.”

서대룡은 왜 이곳 봉산검문이 목표가 되었을지 빠르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자료로 받았던 여러 문파가 언급되었고, 왜 이곳인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마지막에 검무극이 분석한 내용까지 덧붙였다. 앞서 멸문한 대정문과 사이가 좋지 못해 이곳을 노릴 거라는 분석까지.

이런 상황에서 뭘 그리 주절대느냐며 설명을 끊고 공격을 유도할 법도 했는데, 자경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가 가만히 있자, 다른 무인들도 함께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을 끌고 가고 있는 이가 그였으니까.

그렇게 서대룡이 이유를 밝혔다. 무인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그럴듯한 분석이었다.

분위기가 반전되자 이번에는 서대룡이 자경을 몰아붙였다.

“당신은 오늘 회합에 초대받았소?”

“받지 않았소.”

“그대는 왜 온 거요?”

정파 무인들의 시선이 자경을 향했다. 그들도 궁금했다. 왜 오늘 회합에 청운신협이 찾아왔는지.

“나 역시 마교에서 오늘 회합을 노린다는 증거를 입수했소.”

“그 증거를 보여줄 수 있소?”

“내게 정보를 준 사람을 밝히면 당신들에게 보복을 당하겠지.”

자경이 딱 잘라 거절하자 서대룡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니면 애초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거나.”

몇몇 무인들은 자경에게 이런 눈빛을 보냈다. 시원하게 밝히시오. 어차피 저자는 오늘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지 않소?

하지만 자경은 다른 방식으로 서대룡을 몰아붙였다.

“대정문주를 죽인 무공은 당신이 익힌 멸천마도식이었소. 자,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거요?”

이번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었다.

“설마 멸천마도식이 아무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자경은 퇴로까지 차단했다.

서대룡은 이 질문만큼은 말문이 막혔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기세를 잡은 자경은 다시 군웅들을 선동했다.

“앞서 이자가 내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 기억나십니까? 그것만 봐도 이자가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대룡은 난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저자가 진짜 흉수라고 말해봤자, 오히려 역효과가 날 뿐임을 알고 있었다.

“대정문주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모두 대정문주의 원한을 갚읍시다.”

자경이 대도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무인들이 일제히 기도를 발출하며 살기를 드러냈다.

자경이 눈빛에 웃음을 담은 채 서대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정파 놈들 다 죽여버려! 내가 그러라고 도와주고 있잖아? 멸천마도식으로 싹 다 죽여버려!

무인들이 천천히 검을 겨눈 채 다가섰다. 비검장주를 비롯한 수장들 역시 이 싸움에 빠질 수는 없었다. 앞장서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것만큼이나, 비겁자의 오명은 치명적이었으니까.

서대룡은 뒷걸음질을 쳤다.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정말 놈의 말처럼 살려면 멸천마도식을 발휘해야 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그럼 대정문주는 그 감지 못한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거요.”

모두의 시선이 군웅들 사이에서 새로 등장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바로 서대룡이 그토록 기다렸던 검무극이었다.

‘소교주님!’

서대룡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구덩이 속에서 흙이 쏟아지는데 그 사이로 손을 내미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들만 아니었다면 검무극을 향해 달려갔을 것이다.

‘저 떨려서 죽을 뻔했다고요! 일부러 보고 계셨죠? 저 고생하라고! 위기의 순간에 딱 등장하시려고!’

물론 덕분에 소중한 경험을 했다. 언제 정파 무인들의 검이 겨눠진 상황에서 누명을 벗기 위해 설득할 기회가 있겠는가?

검무극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대정문주는 평생 협의를 지키며 살았던 사람인데, 자신을 죽였다는 누명을 엉뚱한 사람에게 씌워 죽이면 그가 좋아하겠소? 그거야말로 대정문주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 할 일이 될 거요.”

검무극의 말은 나직하고 차분했지만, 모두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렸다.

비검장주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검무극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지 않았다.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모두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 마교 소교주가 등장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누군가 본교와 그대들을 이간질하고 있기에 내가 직접 중경에 와서 이번 일을 해결하고 있소.”

상대가 소교주라는 말에도 자경은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직접 나와서 이번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니시고?”

검무극은 자경이나 이곳의 무인들과 불필요한 기 싸움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기도를 발출해서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눌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어설프게 상대를 도발하면 싸움이 되지만, 압도적인 기도는 상대의 전의마저 상실하게 할 테니까.

확실히 잘 통하는 방법이지만, 검무극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바로 자경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자경의 눈빛에는 전혀 놀람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내가 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군.’

그렇다면 서대룡에게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등장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 그렇다면 서대룡이 정파 무인들을 죽일 일이 없다는 것도 알았을 텐데.

‘설마? 서대룡이 아니라 내가 이들을 죽이기를 유도하려는 거냐?’

그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놈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흥분한 무인들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시선을 둔 채 군웅들에게 말했다.

“저기 계신 분은 혈천도마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본교 황천각의 각주이시기도 하오.”

검무극은 서대룡의 신분을 바꾸는 것에서부터 설득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 천마신교의 교주가 임명한 사람이란 의미요.”

상대를 마존의 제자라고만 생각했던 차에 마교주가 언급되자 모두 긴장했다.

“황천각이 어떤 곳인지 알고들 있소? 본교의 규율을 담당하는 곳이오. 본교의 수많은 조직 중 가장 엄격한 곳이지. 저분께서 바로 그런 곳의 책임자이시오.”

검무극이 천천히 자경에게 걸어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그곳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작 검무극과 자경은 모두 여유로웠다.

‘너는 이곳에 왜 온 거냐?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을 텐데.’

검무극의 눈빛에 담긴 경고를 읽었을 텐데도, 자경은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경과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선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저분이 당신에게 대정문을 멸문시켰다고 말했다고 했소? 황천각의 최연소 각주가 된 비범한 사람이 오늘 처음 본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대체 당신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멍청이로 생각하면 그딴 수작을 부리는 거요?”

일부러 멍청이란 말을 썼다. 저 말에 휘둘리면 멍청이란 의미로.

“멸문 현장에 멸천마도식을 남긴 것도 그렇소. 당신들과 전쟁을 일으킬 것도 아닌데, 황천각주가 자신의 무공을 멸문 현장에 남겼다? 그랬다간 교주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실 텐데. 저 똑똑한 분이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시오?”

듣고 있던 무인 중 몇몇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누군가 이간질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존의 무공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마교에서 꾸민 일이겠거니 생각하던 차에 검무극에게 직접 이런 말을 들으니, 누군가 이간질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한 황천각주께서는 이 문제로 얼마 전에 무림맹 중경지단에서 조사를 마치고 풀려났소. 만약 황천각주께서 죄가 있었다면, 무림맹에서 풀어주었겠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곳이 아니라 무림맹에 가서 따지셔야지.”

한 마디 한 마디 틀린 말이 없었기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듣고 있던 서대룡은 감탄과 자책을 동시에 했다.

‘아, 나도 저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때 군웅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봉산검문의 문주 방청문이었다.

“검들을 거두시오.”

그의 명령에 모두 군말 없이 검을 거두었다. 어차피 마교의 소교주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소교주의 말씀은 잘 들었소. 소교주나 신협 모두 본문에 혈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와주셨다고 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방청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대했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앞서 자신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지만, 그게 음모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쨌든 문주전에서 검무극과 약속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천마신교와 충돌하지 않겠다고.

그때 자경이 앞으로 나서더니 방청문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급한 상황이란 판단에 미처 사전에 연락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그대가 와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서대룡과 정파인들 사이에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지금 저자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고 있었다.

―너를 정파인들과 싸우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검무극의 전음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아니라고요? 그런데 왜 그렇게 노력한 거죠?

정파인들 사이에 서서 자경은 처음 서대룡을 보았던 그 서글서글한 미소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파인들 사이에 있으니 나를 죽이지는 못하겠지? 이런 마음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었다. 저 미소는?

―그나저나 정말 간이 큰 놈입니다. 저를 노렸다면 소교주님도 오실 걸 예상했을 텐데, 혼자 이곳에 오다니요?

그 전음을 듣는 순간 검무극이 뭔가를 깨달았다.

―저놈이 이곳에 온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오지 않은 게 문제지.

―어르신은 왜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이곳에서 사건이 벌어진다는 걸 분명 알고 계셨을 텐데. 그렇다면 분명 오셔서 어떻게든 막으려 하셨을 텐데.

순간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경의 미소가 어떤 미소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싸움을 붙여도 좋고, 못 붙여도 상관없다. 놈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으니까.

―저자의 목적은 우릴 이곳에 붙잡고 있는 거다.

―대체 왜요?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음모가 벌어지는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

그래서 네 무공이 강할 거다

―어르신은 그곳에 가셨다.

검무극은 혈천도마를 떠올렸다. 대도를 등에 메고 홀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자경은 자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쪽을 해결하러 간 것이다.

―사부님이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서대룡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알아내죠?

서대룡의 물음에 검무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자경을 향했다.

자경 역시 봉산검문주 방청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자경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서 검무극은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성공이라 여기고 있었다.

검무극도 그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지옥문을 열기 시작했음을.

검무극이 자경에게 물었다.

“우리 신협께 물어볼 말이 있소.”

“말씀하시오.”

주위에 있던 정파 무인들이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검무극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디요?”

자경의 입가에 스치는 미세한 웃음. 그는 지금 검무극이 무엇을 물은 건지 알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였기에 자경은 딱 잡아뗐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다.”

자경을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가 바뀌자 주위에 있던 정파 무인들 모두 긴장했다.

검무극은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경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살아 있는 건 여기 있는 정파인들 때문이 아니다. 네 배후 때문도 아니고.”

검무극의 한마디, 한마디는 나직하면서도 더없이 차가웠다.

“네가 살아 있는 건 혈천도마님 때문이다. 그분께서 너희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정확히 몰라서지. 그러니 묻는다. 지금 도마 어르신 어디에 계시나?”

자경은 검무극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소.”

그는 정파인이 가득한 이 상황에서 검무극이 절대 자신을 공격하지 못 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정파 고수가 있는데, 여기서 나를 공격하려고? 그럼 이번 일은 너희가 저지른 짓으로 확정되겠지.

“대체 왜 이러시는 거요?”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묻는다고 순순히 말할 상대가 아닐뿐더러 자신을 감추는 연기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을. 하긴, 그런 자가 아니라면 어찌 마인이란 신분을 속이고 감쪽같이 협객의 삶을 살아왔겠는가?

검무극이 방청문에게 말했다.

“잠시 계신 분들과 함께 물러나 주시오.”

검무극의 돌발행동에 방청문은 당황했다. 조금 전 그가 자경에게 한 말로 봤을 때, 정말 소교주와 저 황천각주는 청운신협을 흉수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뭘 어쩌시려는 거요?”

“누가 흉수인지 그대들이 보는 앞에서 가리겠소.”

자경이 방청문에게 소리쳤다.

“마교의 간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

청운신협이 도와달라 하지 않더라도, 그냥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방청문은 흠칫 놀랐다. 어느새 자신은 하늘에 떠 있었다.

‘이게 대체?’

하지만 다시 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물 위에 서 있었는데, 물이 너무 맑아서 하늘이 그대로 반사되어 하늘에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걸 자각하는 순간,

방청문이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수면.

점점 숨이 막혀 왔다. 질식의 공포에 심연의 칠흑이 더해지자 방청문은 버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

바로 그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검무극은 자신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방청문은 알 수 있었다. 방금 느낀 것이 바로 검무극의 기도였음을.

주위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마 모두 같은 기도를 느낀 모양이다.

하지만 각자 느끼는 바가 달랐다. 무공이 강할수록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 아름다웠던 하늘과 물과 심연.

사람이 그런 기도를 지닐 수 있다고? 그리고 오직 기도만으도 자신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방청문은 믿을 수 없었다. 마교 소교주가 강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그가 마음먹으면 우린…… 몰살당한다.’

방청문은 두려운 마음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변함없이 맑고 깊은 눈빛.

어쩌면 그는 조금 전에 보여준 기도와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맑은 눈빛 속에 깊은 심연이 감춰져 있는.

무시무시했던 기도와 달리 검무극은 담담하게 말했다.

“천마신교 소교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만약 내가 잘못 짚은 것이라면 내가 책임지겠소.”

만약 이것이 마교의 간교라면? 저 청운신협을 죽이기 위해…….

그 순간 방청문은 깨달았다. 이렇게 강한 사람이 무림맹주도 아니고, 멸마대주도 아닌, 일개 협객을 해치려고 이렇게까지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자신의 이름까지 걸면서 이럴 리가 없다.

방청문이 주위의 수장들에게 말했다.

“신교의 소교주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잠시 물러납시다.”

초대받은 문파의 수장들이 서로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몇몇 이는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 보여준 검무극의 압도적인 기도에 그들은 감히 나설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이 결정을 내린 방청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뒤로 물린 후, 검무극이 자경에게 돌아섰다.

“넌 황천각주를 몰아붙여서 멸천마도식을 쓰게 하려고 했지?”

자경은 끝까지 잡아뗐다.

“이게 당신들 방식이오? 당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은 누명을 씌워 없애는 것?”

“그래, 이게 우리 방식이지. 너와 나, 우리의 방식.”

“나 청운신협은 마교의 위협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다! 덤벼라, 소교주!”

그 말은 검무극을 자극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정파인들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널 상대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황천각주.”

“네, 소교주님.”

“이자를 상대하시오.”

설마 자신에게 싸우게 할 줄은 몰랐기에 서대룡은 내심 놀랐다.

하지만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다음 전음이었다.

―저자를 멸천마도식으로 죽여라! 처음부터 멸천마도식을 써.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정말 죽이라고요?’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이것이었다.

‘죽이면 사부님 계신 곳을 어떻게 알려고요?’

하지만 서대룡은 걱정을 곧바로 떨쳐버렸다. 검무극이 죽이라면 죽이는 거다. 분명 이유가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서대룡이 앞으로 나섰다.

“내 내공을 소모시킨 후에 마지막에 소교주가 나서려는 거겠지.”

그는 검무극이 나서는 것을 차단했고, 검무극은 그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황천각주가 지더라도 나는 나서지 않을 거다. 이 또한 소교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검무극이 이렇게 나오자 자경은 더는 정파인들을 자극하지 않았다.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그들을 자극해서 나서게 했을 것이다. 정파인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자극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황천각주라면? 자신이 죽일 수 있다. 그의 무공실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 손으로 죽여주지.’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는 대적자가 존재한다고.

자경의 전음에 서대룡이 답했다. 검무극이 직접 죽이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는 걸 보니.

―그 대적자가 정말 나인가 보다.

그 전음을 끝으로 두 사람이 격돌했다.

서대룡은 첫수부터 곧바로 멸천마도식을 펼쳤다.

쇄애애애애액!

엄청난 위력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멸천마도식 제일식

멸도일격(滅刀一擊).

며칠 전의 서대룡이라면, 자경은 청운신협이 펼쳤던 정파무공으로 공격을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대룡은 청옥신단을 복용하면서 내공이 크게 향상된 데다가, 검무극의 실전비무 가르침까지 받은 상태였다.

여유롭게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꽈아앙!

두 개의 강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자경은 놀라고 당황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이렇게나 강하다고?’

문제는 그 공격이 너무 빠르고 강력해서 어쩔 수 없이 멸천마도식을 발휘해서 막았다는 점이다. 아니었다면 팔이 날아갔을 것이다.

예상 밖의 위력에 지켜보던 정파인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에 공방이 오가면서 아직까지 청운신협이 같은 무공을 사용했음을 확실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방청문만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을 뿐이다.

멸천마도식 제이식.

멸도파랑(滅刀波浪).

도기가 물결처럼 뻗어나왔다. 제일식도 혼신을 다하여 막았는데 제이식을 어찌 막겠는가?

이번 역시 자경은 멸도파랑으로 맞섰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거친 도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지켜보던 이들이 뒤로 밀려 나갔다.

두 번째 격돌에서 방청문이 두 눈을 부릅떴고, 다른 수장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멸천마도식 제삼식 멸도혈풍이 서로 충돌하자 모두 알 수 있었다.

“같은 무공이다!”

“신협이 멸천마도식을 익혔다!”

자경이 멸천마도식을 익혔다는 사실에 모두 경악했다.

서대룡은 이제야 검무극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멸천마도식을 펼쳐 보여야 자경이 펼친 무공이 멸천마도식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검무극이 자신과 자경의 실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자경이 하려던 것을 자신이 해낸 셈이었다.

살려면 멸천마도식을 펼쳐야 할 거다!

멸천마도식을 익혔다는 것을 들킨 자경은 노골적으로 마기를 뿜어내며 서대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서대룡도 도를 휘두르며 맞섰다.

두 개의 대도가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그 충격이 서로의 손으로 전해졌다.

놀랍게도 서대룡이 느낀 건 이것이었다.

‘견딜만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를 놓쳤을 테니까.

본격적인 무공은 늦게 배우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련했던 그였다.

―수련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그의 불만에 언젠가 검무극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네 무공이 더 강할 거다.

―낮에 열심히 네 인생을 살았던 그 경험이 때론 온종일 도만 휘둘러댄 수련을 이길 수도 있으니까. 널 믿어라! 네 경험을 믿고, 똑똑한 너를 믿어라!

원래라면 분명 자경이 앞서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생각지 못한 약점이 있었다.

마공 대신 정파의 무공을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반대로 서대룡은 바짝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그랬기에 두 사람은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촤아아아악! 때앵! 때애앵!

치명적인 공격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하늘을 가르듯 서로를 향해 내리치는 도가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땅바닥이 깊게 잘려 나갔고, 화원을 장식했던 바위들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서대룡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지금 지켜보던 정파인들의 입이 쩍 벌어지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여서 했던 수련이 그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검무극에게 배운 방식대로 몸이 움직였다.

보법을 발휘하며 몸을 틀면서 도를 던지듯 가볍게 내리쳤다.

쇄애애애액!

푸아아악!

순간 두 사람의 동작이 멈췄다.

입에서 한 사발의 피를 뿜어낸 사람은 자경이었다.

서대룡의 도가 그의 어깨를 지나 몸통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서대룡의 손이 떨렸다. 박빙의 고수와 싸워 처음으로 상대를 죽이는 순간이었다.

배울 때는 이런 수법도 있나 보다, 했는데 실전에서의 그 한 수는 그야말로 승패를 가를 절초였다.

‘이렇게 대단한 수법을 그렇게 막 가르쳐 주셨다고요?’

자경이 서대룡을 올려다보며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너…… 이 새끼.”

그는 자신이 서대룡에게 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소교주도 아니고, 이 왜소한 놈에게 지다니?

화를 내는 것조차 수치스럽다는 생각에 그는 애써 서대룡에게 웃었다.

“……나를 죽이면 혈천도마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을 거다.”

그가 혈천도마라고 표현하는 걸 듣는 순간 서대룡은 안도했다.

‘이자, 사부님의 제자가 아니구나!’

자경은 혈천도마를 내세워서라도 살아남으려 했지만, 서대룡에겐 통하지 않았다.

“죽이라고 하셨으니, 알아서 하시겠지.”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서대룡이 대도를 그대로 내리쳤다.

촤아아아악!

자경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양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피 냄새가 가득 피어올랐고, 정파 무인들 모두 놀란 얼굴로 지켜보았다.

서대룡 눈에는 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찾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장하다, 오른팔.

그 한마디 말에 서대룡은 가슴이 울컥했다. 너무 감격해서 이 싸움을 밤새, 아니 평생 술만 마시면 자랑할 거 같았다. 자랑거리가 자꾸 늘어나는 서대룡은 오늘도 또 성장했다.

방청문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소교주가 말씀하신 것이 맞았소. 흉수는 저자였구려.”

그는 흉수가 자경이라고 확신했다.

정파의 협객으로 이름난 자가 멸천마도식을 익히고 있었다? 큰 음모를 꾸미는 자가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늘 일로 정파 무림에 진실이 알려질 것이다. 이번 일은 천마신교와 정파를 이간질하기 위해 계획된 음모라는 것이.

검무극이 방청문과 정파 무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믿어줘서 고맙소.”

사실 그의 압도적인 실력 때문에 반 억지로 믿은 것이지만,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우리도 돕겠소.”

“그러겠소.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소.”

검무극과 서대룡이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사부님이 어디 계신지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신 거죠?”

“아니.”

검무극의 대답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그럼, 왜 죽이라고 하신 겁니까?”

“어차피 말해줄 놈이 아니었다. 시간만 끌었겠지.”

그 점은 서대룡도 동의했다.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니. 소교주님은 하나도 걱정 안 되시죠?”

혈천도마를 믿어서 이렇게 느긋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르신을 말하는 거면, 걱정된다. 남에게 폐 안 끼치려 하는 그 꼬장꼬장한 성격, 왜 걱정이 안 되겠냐?”

그러자 서대룡도 본심을 드러냈다.

“그렇죠? 저도 걱정돼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긋하세요?”

믿는 바가 있었으니까.

“네 사부는 안 믿어도 우리 아버지는 믿으니까.”

검무극은 아버지를 믿었고, 아버지와 혈천도마와의 관계를 믿었다.

회귀하고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 혈천도마는 소교주를 죽여도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믿었다.

“이번 일이 두 분의 과거사와 관련된 이상, 아버지는 그냥 두고 보시지 않을 거다. 당신 일을 절대 남에게 맡기는 분이 아니시니까.”

* * *

혈천도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평소라면 사람들로 북적댔을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혈천도마는 휑한 연무장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들어섰다.

태사의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혈천도마는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태사의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왜 묻지 않느냐? 이곳에 있던 이들을 다 죽인 게 아니냐고?”

대청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가래가 끓었고 변방의 마른 땅처럼 깊고 황량하게 갈라졌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갈고리로 할퀴는 것같이 강렬했다.

“아직 죽이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요.”

혈천도마의 어조는 차분하면서도 정중했다.

“어째서?”

“이번 일은 이들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잖습니까? 애초에 저와 교주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었죠.”

태사의 아래에 도착한 혈천도마가 위를 쳐다보았다.

계단 위 태사의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은 그의 나이를 짐작조차 못 하게 했다. 하지만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안광은 태양을 마주 보는 것처럼 강력했다.

노인을 바라보는 혈천도마의 두 눈이 떨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부님.”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노인은 바로 혈천도마의 사부이자 전대 도마였던 교천(喬天)이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사부였다. 정말이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옥에 가서나 보게 될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꿈에서조차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중경으로 오라는 사부의 전갈을 받았을 때, 혈천도마는 정말 놀랐다.

만약 사부와 자신만이 아는 내용을 적어 보내지 않았다면, 사부가 살아 있다는 것을 결코 믿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 계신 줄 몰랐습니다.”

혈천도마의 말에 교천이 나직이 대답했다.

“알았다면 나를 죽이러 왔겠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노쇠함과는 별개로 그의 목소리는 귀에 팍팍 박히면서 사람의 마음을 긁었다.

혈천도마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매며 턱이며 옛 얼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의 외모를 집어삼켜 버려서, 만약 길에서 마주쳤으면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천 역시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창 젊을 때의 혈천도마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까요.”

사부 앞에 서니 혈천도마는 오래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자글자글한 주름 속 두 눈에서 묘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혈천도마는 사부의 무공 경지가 과거 마존일 때보다 훨씬 더 높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육체는 늙어서 노쇠했지만, 내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후해졌음을 당장 저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교주를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걸까?’

기존의 실력에 세월의 힘까지 쌓았더라도 과연 교주의 구화마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지존마공인 구화마공을?

“아프면? 와서 주물러 주기라도 할 테냐?”

퉁명스러움이 깃든 반응이지만, 혈천도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시작도 안 했음을. 그 오랜 세월 쌓아둔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도 없음을.

“원하신다면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대답에 교천은 이리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네가 감히 올 수 있겠느냐는 의도가 담긴 손짓이었는데.

놀랍게도 혈천도마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교천은 멈추라고 하지 않았고, 혈천도마 역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팽팽한 긴장감이 커졌다.

삼십 보, 이십 보, 십 보…….

그렇게 열 걸음 앞까지 다가갔을 때, 혈천도마가 멈춰 섰다.

분명 사부는 혼자가 아닐 텐데, 이렇게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 주위에 다른 이의 기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있다면 그만큼 고수라는 의미고, 사부가 혼자 왔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왜 더 다가서지 않느냐? 내가 겁이 나느냐?”

“겁납니다.”

혈천도마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저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요. 십 년도 버티지 못하고 복수하러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사부는 삼십여 년이 넘는 세월을 참고 또 참았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왜 돌아오셨습니까?”

그러자 들려오는 나직한 사부의 한마디.

“살아 있으니까.”

혈천도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으셨으면 그냥 사시지.”

조롱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노후를 즐기시지요. 그게 심심하면 본교와 관계없는 흑막이 되어서 권력과 재물을 탐하시든지요.”

그러자 사부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해 봤다. 둘 다.”

순간 혈천도마는 흠칫했다.

“잊으려고. 다 잊으려고 산에도 들어가 보고, 온갖 일을 다 해봤다. 한데 그날 일이 잊히지 않았다.”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복수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의미임을 깨달았지.”

사부의 마음에서 타오르는 저 불길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음을 알았기에 혈천도마의 입에서는 무거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정파의 힘을 빌리려는 겁니까? 전쟁을 일으켜서 교주를 죽이겠다고요? 그런다고 교주가 죽겠습니까?”

“정파 놈들이 마교주라면 어떻게든 목을 베려 하지 않느냐?”

과연 진심일까? 혈천도마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파와의 이간계를 위해 그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분명 사부가 믿는 무엇인가가 있다. 교주와 자신을 죽이기 위한 어떤 것이. 그의 오랜 복수의 끝을 장식할 무엇인가가.

‘대체 뭘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깬 사람은 교천이었다.

“그 일이 미안하냐?”

그 일을 떠올리니 감정이 격해진 것일까? 그의 쉬고 갈라진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 일을 후회하느냐?”

혈천도마는 두 질문 모두 대답하지 않았지만 교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지난 일이 미안하고 후회된다면, 이제는 날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

이윽고 혈천도마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교천이 혈천도마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그 손으로 교주를 죽여다오.”

덧붙여지는 놀라운 한마디.

“나를 죽였던 그 손으로.”

혈천도마는 말없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그의 손에도 한 겹, 한 겹 새겨진 깊은 세월의 흔적이 있었다.

그 손의 주름이 점점 옅어지고 젊어지면서 혈천도마의 마음속에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 오래전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거처로 달려 들어온 사람은 젊은 시절의 혈천도마였다. 도마의 정식 후계자가 된 그는 멸천마도식을 전수받고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그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법 잘생긴 얼굴에 귀여움마저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의 생기가 넘쳤다.

사부는 오늘처럼 태사의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게 전할 말이 있어서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그에게 교천이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남도종은 공식적으로 대공자를 지지한다.”

순간 혈천도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너는 가서 모든 도귀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하지만 혈천도마는 명을 받드는 대신 사부에게 물었다.

“왜 대공자입니까?”

이번에는 교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결정이니까.”

혈천도마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단 한 번도 사부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던 그였는데.

호통을 각오하고서라도 그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만큼 이 일은 혈천도마에게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과연 교천은 버럭 노기를 드러냈다.

“지금 사부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유를 묻고 있느냐?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느냐는 말이다.”

교천의 거친 마기가 혈천도마를 향해 폭사되었다. 강력한 마기에 혈천도마가 내공을 끌어올리며 저항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혈천도마는 온몸이 찢길 것 같은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대답을 들어야 했으니까.

교천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혈천도마 앞에 섰다. 이미 이유는 알고 있었다.

“네가 이공자와 각별한 사이란 걸 안다. 교활한 이공자가 너를 끌어들여 이용하려 한다는 것도.”

고통 속에서도 혈천도마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공자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을 부정하자 더욱 굳어진 교천의 인상만큼이나 마기도 더욱 강력해졌다.

“으으윽.”

혈천도마는 온몸이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버텨도 큰 내상을 입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교천은 마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뒤를 이를 제자의 반항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으으으으으윽”

마기가 더욱 강력해지며 비명이 커졌다.

계속 불복하면 이대로 제자를 죽일 작정이었다. 그럴 수 있었다. 차기 도마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줄을 섰으니까.

‘이렇게 죽는 건 개죽음이다.’

결국 혈천도마는 의지를 굽혔다. 더 버텼다간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을 입거나 죽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사부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제야 짓누르던 마기가 사그라들었다.

교천이 화난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라.”

힘없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교천이 말했다.

“납득할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느냐?”

혈천도마가 교천에게 돌아섰다.

“이 후계 싸움에서 이공자는 반드시 죽을 거다.”

그 순간 혈천도마는 느꼈다. 사부의 눈빛에 스친 각오를.

‘사부께서는 이 후계 싸움에 직접 뛰어들 작정이구나.’

직접 이공자를 죽일 각오가 섰다는 것을 느꼈다. 대공자를 위해서 그는 못 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는 이공자와 가까이 지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함께 죽게 될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혈천도마는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다시 걸음을 걸었다.

거처를 나왔을 때 그의 주먹은 꽉 쥐어져 있었다.

그 젊은 주먹에 주름이 생겨나면서 현재로 돌아왔다. 현재의 혈천도마도 그때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날 이후 자신은 사부에게 더 잘했다. 더욱 큰 신뢰를 얻으려 노력했다. 오직 그때가 언제인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저는 압니다. 사부님이 왜 이공자가 아니라 대공자를 선택했는지.”

혈천도마는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 했다.

“이공자가 교활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사부님의 교활함을 이공자에게 들켰던 겁니다.”

교천이 손아귀에서 태사의의 손받침대가 부서졌다. 부서진 조각이 교천의 손에서 모래가루가 되어 날렸다.

교천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교주는 그 젊은 시절부터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싫은 건 싫고, 좋은 건 좋은 사람이었지요. 사부님은 알았습니다. 교주에게 자신이 불호라는 것을.”

교천의 목에서 으르릉거리는 맹수의 소리가 났다.

“이공자가 교주가 되면 사부께서는 팔마존의 말석으로 밀려날 걸 아셨던 겁니다. 그건 절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만약 그때 젊은 혈기에 이 말을 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사부에게 죽었을 테니까.

“버릇없고 겁이 없기는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구나.”

“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기억이 왜곡되셨나 봅니다. 젊었을 때, 저는 그 누구보다 사부님께 깍듯했습니다.”

교천이 웃었다. 어이없음과 진한 증오가 모두 담긴 웃음이었다.

“너는 나를 배신했다. 무공을 전수해 준 나를 배신했다!”

혈천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교활하다고? 너만큼 교활할까? 너야말로 알았던 거다. 대공자가 교주가 되면, 너는 차기 도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공자와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너를 대공자가 그냥 둘리 없었으니까.”

그래, 어쩌면 사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교주를 위한 마음이라 생각했었는데, 마음속 깊은 곳 잠재의식 속에서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을 지도.

하지만 적어도 사부만큼은 그 말을 해선 안 된다.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으니까.

혈천도마의 눈빛이 깊어지며 다시 과거의 한순간으로 돌아갔다.

젊은 시절의 교주가 눈앞에 서 있다.

그와 호형호제하던 이공자 시절의 교주가.

그 역시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의 교주 눈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면, 젊은 시절 그의 눈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혈천도마는 그를 좋아했다. 적어도 그가 차기 천마가 될 사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가 좋았다. 그의 행동도, 그의 말도. 자신보다 동생이지만 배울 점이 많았다.

도도하고 오만함으로 모두를 대하지만, 사실은 뜨거운 어떤 것을 가슴 속에 품고 있음을 혈천도마는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런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두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이 말을 그에게 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으니까.

“대공자와 내 사부가 손을 잡고 너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때의 검우진은 지금과 달랐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우진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까.

혈천도마는 안다. 검우진이 형을 죽이지 않고 후계 싸움을 마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두 사람은 이번 사냥에서 움직일 거다.”

그때 들려온 교천의 외침이 혈천도마를 다시 현실로 데려왔다.

“넌 사부를 배신했고, 동생이 형을 죽이게 했지. 그게 너란 인간이다.”

아니었다면 교주가 죽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을 사부에게 하진 않았다. 그에게 자신과 교주와의 관계는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그는 이 관계를 믿지 않으니까.

그래,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배신했다고 말하면 오히려 사부에게는 상처가 될 거다. 그에게는 도마 자리를 위해 배신한 것이 되는 게 낫다.

그랬기에 혈천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맞습니다. 나는 그런 인간입니다. 이기적이고 못된, 그래서…….”

혈천도마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직이 덧붙였다.

“저와 함께하면 큰 불운을 겪게 되지요.”

기강 한 번 잡아야겠군요.

“대공자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

혈천도마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 말을 했을 때 검우진의 대답을, 그리고 그의 표정도.

“형을 죽이고 싶지 않아.”

지금의 교주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누군가를 죽이는데 망설이는 교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 교주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알고 있다.”

혈천도마는 검우진의 마음에 깃든 그 뜨거움을 느낀 사람이었으니까.

교내에서의 인기는 검우진이 앞서고 있었다. 차갑고 냉정했으며 도도한 그를 마인들은 모두 좋아했다. 그는 잘 생겼고, 똑똑했으며 무엇보다 무공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마인들이 좋아할 모든 요소를 다 갖춘, 그야말로 역대 천마 핏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대공자가 사부와 손을 잡고 검우진을 죽이려는 것도 이대로 가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어떻게든 대공자를 죽이지 않고 해결하도록 해보자.”

그러자 검우진이 단호히 말했다.

“형은 빠져. 이 싸움은 내 싸움이야.”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혈천도마가 어찌 모르겠는가?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일에 사부가 개입한 이상.

“네게 대공자와 사부의 계획을 말해준 순간부터 이 싸움은 내 싸움이기도 해.”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젊은 열기가 담긴 눈빛들.

“나는 네가 이끄는 천마신교의 마존으로 살고 싶다.”

그 말을 했던 순간의 떨림을 혈천도마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한여름 밤처럼 뜨겁고, 가을바람처럼 상쾌했던 그때의 청춘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목숨을 걸었고, 교주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던 그 시절로.

그를 과거에서 다시 끌어낸 사람은 교천이었다.

“너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불운이다.”

들려온 사부의 말에 젊은 시절 검우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화난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사부가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검무극에게 했던 자신은 평생을 불운과 함께했다는 그 말도 사부 때문에 나온 말이었으니까.

교주를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사부를 배신했다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사부님의 전갈에 제가 왜 왔는지 아십니까?”

“나를 죽이려고 왔겠지.”

조롱 섞인 대답에도 혈천도마는 차분했다.

“그러려고 했다면 교주님께 연락했을 겁니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조용히 혼자 이곳 중경으로 왔다.

교천은 이유를 묻는 눈빛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교천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사부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교천의 깊은 주름들이 꿈틀거렸다.

혈천도마의 진심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그리움 때문은 아니었다.

이 보고 싶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인생의 황혼기에 선 자신에게 젊은 자신이 손을 내민 기분이었을까?

그래, 이건 눈앞의 사부가 부른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 자신이 부른 것이다.

교천이 웃었다. 그의 입가는 유독 더 주름이 많아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웃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웃음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내가 왜 왔는지 알면서 그따위 말을 한다고?”

비웃음은 이내 노골적인 웃음으로 바뀌었다. 노쇠함 때문일까? 아니면 어떤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갈라진 목소리에서 쇠를 긁는 소리가 났고 웃음은 이내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이어졌다.

혈천도마는 그가 기침을 그치기를 기다렸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교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자락을 풀어 헤쳤다.

쭈글쭈글한 그의 몸, 과연 이 몸으로 무공을 펼칠 수나 있을까 걱정이 드는 몸이었다. 그랬기에 더 두려운 몸이기도 했다. 이 보잘것없는 몸뚱이에 담겨 있을 그 엄청난 힘을 생각하면.

혈천도마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의 가슴 정중앙이었다.

그곳에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검에 찔린 것보다 훨씬 크고 깊은 흉터였다.

“자, 봐라.”

혈천도마는 말없이 그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뱉지 않았던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자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다른 제자를 수제자로 삼을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계속 불복했다면 자신을 죽였을 거란 것도 알았지만, 무엇보다 검우진을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그래도 그에게 미안했다.

혈천도마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직 검우진에게만 숙이는 고개가 숙여졌다.

그를 바라보는 교천의 눈빛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자글자글한 주름이 깊어졌다.

“너는… 젊을 때부터 가식적이었지.”

혈천도마는 사부를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검우진이란 사람을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말을 믿지 않을 사람이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믿지 않을 사람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결국 이 말을 전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으니까.

혈천도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옥에 가서나 전하려 했던 말을 이렇게 하게 해줘서 고맙소.’

교천은 혈천도마의 사죄를 진심이라 여기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으랴.

“교주를 죽이는 데 도움을 주면 너는 살려주마.”

“이 늙은 목숨에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교천은 서대룡으로 협박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네 제자를 죽이겠다.”

“그래서 그 아이까지 불러들이신 겁니까?”

물론, 이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럼 녀석도 사부 복 없는 인생이 되겠지요.”

사부를 향한 혈천도마의 눈빛에는 애증이 깃들어 있었다.

“너는 예전에도 그런 눈으로 나를 봤었지.”

“이 역시 오해십니다. 지금의 제가 미우니 과거도 전부 왜곡되는 거겠지만요.”

혈천도마는 예감했다. 이 일의 끝은 자신이 죽거나 사부가 죽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고. 그래서 못 할 말이 없었다. 앞서 애(愛)를 말했다면 이제부터 하려는 말은 증(憎)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지혜로워질 거 같지만, 그렇지 않더군요. 판단력은 흐려지고, 고집만 세지고. 그걸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열심히 책도 읽지만, 머릿속이 멍해지는 걸 막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아마 사부님은 훨씬 더 심하실 겁니다. 모르는 이가 사부님을 보면 저 노고수는 얼마나 대단할까, 엄청난 지혜를 지녔겠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겠지? 통찰력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압니다. 사부님 머릿속은 흐릿한 안개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꿈틀한 교천의 얼굴에 노기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 속에 오직 증오만이 빛나고 있겠지요. 그조차 없다면 사부님은 길을 잃어버렸을 겁니다.”

“또 잘난 척이구나.”

“또 왜곡하십니다. 한 번도 사부님께 잘난 척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교주님과 저, 그리고 그날의 일.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셨습니까? 무림사든 인생사든, 하다못해 여름이 갔구나, 가을이 오는구나. 그런 관심조차 있으셨습니까?”

교천의 안광이 더욱 차가워졌지만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혈천도마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예전이라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한데 근래 소교주를 통해 느낀 바가 있습니다. 난 그동안 안갯속을 습관적으로 걸어가고 있었구나. 워낙 익숙한 길이라서, 워낙 익숙한 안개라서 넘어지지 않고 걸었을 뿐이구나. 안개는 해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었는데.”

검무극을 만난 후에 고여 있던 마음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공을 더욱 열심히 수련했고, 더 많은 책을 읽었으며 제자를 거뒀고 다른 마존과의 관계가 바뀌었다. 심지어 화원까지 가꿨다.

그 모든 것이 안개를 걷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노력해도 쉽사리 걷어지지 않았지만.

“그래서 전 사부님이 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부가 두렵다는 또 다른 본심은 말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일찍 검무극이 사부를 만났다면, 그랬다면 사부의 마음이 바뀔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라면? 어쩌면 그 총명한 녀석이라면 이 깊은 원한을 풀어줄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안타까운 모양이다.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아 있던 사부였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서 중간 과정 하나 없이 마지막 장을 열어야 하는 이 운명이, 너무 안타까운 모양이다.

“건방진 놈!”

반면 교천은 화가 났다. 어찌 자신의 인생을 저런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에 할 말이 수없이 맴돌았는데.

정말 안개가 가득 피어 있는 것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 증오의 감정만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잘난 소교주를 죽이겠다면?”

혈천도마가 웃었다. 어디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십시오, 아마 그 전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실 겁니다.

“그건 교주에게 해야 할 협박 같으니 아껴두십시오.”

혈천도마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한데 도대체 교주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겁니까? 죽이고 싶다고 죽일 수 있는 분이 아니잖습니까?”

어떤 한 수를 준비했는지 혈천도마는 궁금했다.

“교주도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

그러면서 교천이 무엇인가를 품에서 꺼냈다.

그것은 작은 상자였다. 그것이 허공섭물로 날아서 혈천도마에게 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하나의 작은 약병이었다.

“그걸 교주의 술에 타라.”

혈천도마가 병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뭡니까, 이게?”

“알 것 없다. 넌 그걸 교주의 술에 타기만 하면 된다.”

혈천도마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수법이 통하리라 생각했을까? 정말 사부는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

“맞습니다. 이런 수법을 쓰지 않으면 죽일 수 없는 분이시죠. 정파와 이간질도 하고, 제자를 죽이겠다고 협박도 하고, 이렇게 독도 타고. 한데 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혈천도마는 더는 말할 가치가 없다는 듯, 약병에 든 것을 바닥에 부어버리려 했다. 마개를 열려던 순간 흠칫 동작을 멈췄다.

혈천도마의 시선이 다시 교천을 향했다.

“내가 부어버릴 것을 예상하셨을 텐데.”

혈천도마의 머릿속을 스치는 불길한 생각.

“설마?”

혈천도마가 약병을 멀리 던졌다.

노출된 액체에서 독연이 확 솟구쳐 올랐다. 만약 바닥에 부었다면 저 연기가 순식간에 자신을 덮쳤을 것이다.

“이건 날 죽이기 위한 것이었군요.”

교천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널 곱게 죽일 수는 없지.”

말하는 걸로 볼 때 독도 그냥 독이 아니었다. 극한의 고통을 안기는 독.

사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거침없이 독을 쓰는 모습을 보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지독한 독을.

서로 죽고 죽일 상황에서도 섭섭함이 느껴지는 게 사람 관계임을 새삼 느꼈다.

“그렇게나 제가 밉습니까?”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내 머릿속에는 증오밖에 남지 않았다고.”

사부를 보고 있으니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꽉 막힌 벽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풀어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그건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사부를 위한 마음이었다.

물론 사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으니 수작을 부리는 거로 생각하겠지.

‘사부님은 또 제게 선택의 기회는 주지 않으시는군요.’

교천이 천천히 손뼉을 쳤다.

그러자 좌측 벽에 있던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삼을 입은 그는 혈천도마와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었는데, 그도 대도를 차고 있었다. 걸음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랜 세월 멸천마도식을 익혀왔다는 것을.

아마 사부가 새로 제자로 거둬들여 무공을 전수한 자인 듯 보였다.

등장한 이는 그만이 아니었다. 반대쪽 문이 열리며 그곳에서도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이번에는 푸른색 장삼을 입은 노인이었는데 느껴지는 실력은 앞서 나온 노인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반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앞선 노인이 불이라면 이 노인은 물과 같은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혈천도마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멸천마도식의 대성을 이룬 자들이다.’

그야말로 마존급 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사부가 복수심으로 키워낸 자들이니, 그 실력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혈천도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절대 쉽지 않은 싸움임을 예감했다.

교천이 혈천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자에게 당한 배신은 제자가 갚아줘야지.”

혈천도마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사제들 기강 한 번 잡아야겠군요.”

교천이 비웃으며 말했다.

“누가 네 사제란 말이냐? 너는 파문된 지 오래인데.”

혈천도마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부님을 파문하지 않았으니까요.”

다시 교천의 얼굴이 꿈틀했다. 사부는 오해하고 분노하겠지만 그건 사부를 위한 혈천도마의 애틋함이었다.

“다시 뵙고 싶었던 것도 진심이었고, 죄송하다는 말도 진심이었습니다. 그냥 지금이라도 물러가서 조용히 사셨으면 하는 마음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진심입니다.”

혈천도마가 천천히 멸천대도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또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존인데 누구 도움을 바랄까.

“닥쳐라!”

교천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촤아아아아.

혈천도마의 옷자락이 거칠게 펄럭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내공이 실린 사부의 일갈은 마치 불어온 돌풍처럼 혈천도마를 덮쳤다.

내력을 끌어올려 저항하지 않았다면 뒤로 날아가 볼썽사납게 처박혔을 것이다.

사부의 저 늙은 몸속에 얼마나 중후한 내공이 숨겨져 있는지 이 외침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차례 거친 바람이 지나가고.

그 강력한 내공에 기가 죽을 법도 했는데, 오히려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버럭 소리쳤다.

“사부님이나 닥치십시오!”

지금껏 너무나 정중히 사부를 대했던 그였기에 교천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 장내를 쩌렁쩌렁 울린 것은 혈천도마였다.

“왜 복수가 이따위입니까!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을 멸문시키고, 이간질로 전쟁이나 일으키려 하고. 독이나 쓰고, 그 오랜 세월의 복수가 고작 이따위입니까?”

의자 손 받침대의 반대쪽이 부서졌다. 앞서 그것을 부쉈을 때는 모래처럼 가루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우수수 조각들이 떨어졌다. 그걸 부순 것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계속 목청을 높였다.

“멋있게 돌아왔어야지요. 준비가 안 됐으면 돌아오지 말았어야지요!”

그렇게 한바탕 내지른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나지막하면서도 애석한 어조로.

“……그래야 저도 기꺼이 죽어줬을 것 아닙니까?”

혈천도마와 교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비통함과 서글픔 때문이었을까?

교천은 제자의 사과마저 가식이고 연기라 생각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날 찾아온 거라고?’

하지만 진심이 끌어낸 그 생각은 그의 꽉 막힌 벽을 넘지는 못했다. 잠시 제자를 바라보던 교천이 두 노인에게 말했다.

“죽여라. 처참하고 비참하게 죽여라!”

혈천도마의 입가에 오히려 후련하다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어떤 말을 주고받든 사부와 자신의 오늘 만남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차라리 이렇게 나와줘서 고맙기도 했다. 아무런 미련 없이 싸울 수 있을 테니까.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부님.”

큰소리로 대답한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죽이라는 명령을 자신이 받았다는 일종의 장난이자 조롱이었다.

그에 비해 두 노인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사부가 이렇게 키웠을 거다. 아무런 감정 없이, 오직 이 순간을 위해서.

그리고 사부의 수하는 저 둘만이 아닐 거다. 오늘 사부의 수십 년 된 원한 주머니에서는 뭐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우우웅!

내력이 주입된 멸천대도가 크게 한 차례 울었다. 두려움의 울음이 아니었다. 주인의 결의를 느낀 애병의 신뢰에 찬 울음이었다.

‘그래, 부탁한다! 멸천.’

붉은 장삼 노인은 우측에서, 푸른 장삼 노인은 좌측에서 다가섰다.

세 사람 모두 멸천마도식의 대성을 이룬 상태.

이런 수준이라면 오히려 순식간에 승부가 날 것이다. 게다가 서로의 무공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혈천도마는 사부가 이들을 어떻게 수련시켰을지 상상해 보았다.

가혹하게 수련시켰을 것이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 다른 무공이 아닌 멸천마도식으로 자신을 비참하게 죽이려고.

네게 전수한 무공을 같은 무공으로 거둬 가겠다, 틀림없이 그런 마음으로.

‘그렇다면?’

먼저 움직인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땅을 박차는 순간, 어느새 혈천도마는 붉은 장삼 앞에서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멸천대도는 그 크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상대 역시 피하지 않고 대도를 휘두르며 막았다.

도와 도가 부딪치기 직전, 혈천도마가 도를 틀었다. 각도가 바뀐 도가 불꽃을 일으키며 상대의 도를 타고 미끄러졌다.

후아아아앙!

상대가 반응하는 수까지 계산한 멸천대도는 노인의 얼굴을 스쳤다.

노인은 내심 크게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변초였다. 그것도 첫수에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변초를 발휘할 줄 몰랐기에 그대로 얼굴이 날아갈 뻔한 것이다.

보통 도법 고수들의 첫수는 응수타진하며 한 차례 힘으로 격돌할 때가 많다는 걸 역으로 이용한 혈천도마의 기습적인 한 수였다.

그리고 혈천도마는 이 기세로 놓치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첫수에 당할 뻔했다고 손발이 어지러워질 실력이 아니었지만, 분명 선수를 빼앗긴 노인이었다.

텅! 터덩! 텅텅텅텅!

혈천도마의 공격이 더욱 빠르고 거칠어졌다. 도와 도가 부딪치는 울림이 수가 진행될수록 더욱 깊어졌다.

푸른 장삼을 입은 노인은 끼어들어 돕지 못했다.

이미 마차가 출발해 버렸다고 비유해야 할까?

이미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해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바짝 붙어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기에, 멸천마도식을 발출했다간 붉은 장삼 노인까지 강기에 휩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함께 뛰어들어 싸울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공방이 너무 치열했고, 검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대도와 대도의 싸움이었다. 또 다른 대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혈천도마는 기본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그 오랜 세월 멸천마도식만을 갈고 닦았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이 멸천마도식으로 그들을 상대할 거로 예상했을 테니까.

분명 멸천마도식에 비해 기본기 싸움이 불리할 터.

과연 싸움을 주도하는 건 혈천도마였다.

실력이 는 것은 비단 수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 중요한 것 하나.

그의 삶이 바뀌었다.

삶이 바뀌어야 무공도 바뀐다. 이 큰 무학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교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혈천도마는 더 잘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마존이던 시절보다 더 강하다는 걸 느끼는 순간, 질투와 분노가 치밀었다.

그때 문득 혈천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부님의 머릿속은 안개로 가득 차 있을 겁니다.

그래서 튀어나오는 건 이런 본능밖에 없는 것일까? 미워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하지만 순간 떠오른 이 생각을 현명하게 풀 수는 없었다. 그 오랜 세월 쌓아온 그 큰 벽을 혼자서 넘어설 수는 없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런 소리를 듣지도 않았으리라.

결국 그 질투심은 다른 비난으로 이어졌다.

‘교활한 놈!’

앞서 혈천도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 중에 여러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중에서도 특히 검우진이 교활한 게 아니라, 사부의 교활함을 검우진에게 들켰다는 말이 깊은 앙금으로 남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교활한 놈! 제가 더 교활한 놈이면서!’

그는 마음속으로 교활하다는 말을 계속 퍼부었다. 혈천도마의 현명한 싸움은 그에게는 교활함이 되었다.

혈천도마에게 밀리던 붉은 장삼이 몸을 솟구치며 멸천마도식을 발휘했다. 초식 중 가장 빠르게 발휘할 수 있는 멸도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혈천도마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큰 초식을 발휘할 때의 그 찰나의 허점을, 무리하게 내력이 운영되는 이 짧은 순간을.

쇄애애애앵!

기다렸다는 듯 벼락처럼 쇄도한 혈천도마의 대도가 붉은 장삼의 노인을 양단하려던 그 순간!

샤아아아아앙!

독특한 바람 소리를 내며 강기가 날아들었다. 소리만 들어도 느낄 수 있었다. 위험하다고.

혈천도마가 몸을 틀어서 멸천대도를 세우며 날아든 공격을 막았다.

콰아아앙!

강기가 날아와 박히면서 혈천도마는 방패로 세운 대도와 함께 뒤로 주르륵 밀렸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내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으면 손목이 부러졌을 공격이었다.

일장을 날려 붉은 장삼을 구한 사람은 교천이었다.

“이러실 겁니까?”

혈천도마의 말에 교천은 기분 좋게 웃었다.

“너나 교활한 짓 그만해라!”

기어코 제자에게 교활하다는 말을 되돌려준 그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될 수 없었다.

교천의 개입으로 여유를 찾은 붉은 장삼 노인이 곧장 멸천마도식을 발휘한 것이다.

쇄애애애애액!

원래라면 전열을 가다듬어 합공을 펼쳤어야 했는데, 그는 교천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칼날 모양의 강기가 혈천도마를 향해 휘몰아쳐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이것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면, 이 무공에게 멸천마도식 제사식 멸도혈풍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을 테니까.

멸도혈풍의 해소는 멸도혈풍으로.

멸천대도에서 뻗어나간 도기가 회오리치며 날아갔다. 두 멸도혈풍 모두 회오리 속에서는 작은 칼날 모양의 강기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두 개의 혈풍이 맞부딪쳤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강기들이 서로 해소되던 그 순간.

푸우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에 침묵이 흘렀다.

붉은 장삼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물을 빠져나온 새처럼 날아와 거짓말처럼 자신을 꿰뚫은 강기.

분명 똑같은 무공이 비슷한 위력으로 충돌했지만, 한 가지 점이 달랐다.

혈천도마의 멸도혈풍의 칼날 숫자가 더 많았다. 최근 무공 경지가 오르면서 멸천마도식의 조예가 더욱 깊어진 것이다.

“……그게 더 늘어날 수도 있소?”

혈천도마가 그에게 대답했다.

“이 사형의 것이 어찌 사제들의 것과 같겠나?”

붉은 장삼 노인이 꺼져가는 눈빛으로 물었다.

“한데 왜 처음부터 안 썼소?”

혈천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부를 쳐다보았다.

“사부에게 쓰려고 했지.”

교천의 볼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혈천도마는 비단 자신이 무공만 늘어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부를 다루는 방식도 검무극에게 많이 배웠음을 깨달았다. 검무극에게 당했던 것을 그대로 사부에게 쓰고 있었으니까.

혈천도마는 이제 푸른 장삼을 입은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혈천도마는 멸천마도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교천은 더욱 분노했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멸천마도식을 보여주지 않고 자신에게 쓰려했다고? 한데 지금도 안 쓰고 있었다.

‘네가 기어코 나를 직접 죽이겠다고?’

둘의 싸움에 개입한 건 결국 이 분노 때문이었고, 이건 혈천도마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교천은 푸른 장삼 노인이 위험할 때마다 지풍을 날려 그를 도왔다.

둘이 뒤섞인 싸움에서 돕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교천의 공격은 예리하면서도 정확했다.

피잇! 핏!

사부가 날린 지풍이 팔과 다리를 스쳤고, 앞에서는 멸천마도식의 대성을 이룬 고수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흥분해서 최대한 빨리 상대를 죽이려 했을 텐데, 혈천도마는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내공 관리까지 하며 싸웠다.

내공 한 줌과 피 한 방울은 바꿀 가치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사부와 싸울 작정이었으니까.

이 계획적이고 철저한 혈천도마의 싸움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푸우욱!

멸천대도가 푸른 장삼의 심장을 꿰뚫었다.

노인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향한 곳은 혈천도마가 아니라 교천이었다.

교천이 이 싸움을 도운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해가 되었다. 도우려면 제대로 나서서 돕든지.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집중을 방해했고, 결국 그는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감정이 개입된 도움은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교천은 온몸이 피에 젖은 혈천도마를 바라보았다. 죽은 제자에 대한 한마디 애도도 없었고 그들의 죽음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제법이구나.”

혈천도마가 얼굴에 묻은 피를 스윽 닦아내며 말했다.

“마존들 별호 중에 왜 저만 피가 들어갔겠습니까?”

혈천도마의 두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교천은 그 눈을 마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도 널 도우러 오지 않을 거다. 네 오만함으로 여기서 쓸쓸히 죽게 될 거다.”

혈천도마는 다 받아들이겠다는 듯, 쓸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우리가 마존인데 누구 도움을 바라겠습니까?”

그 말이 다시 가시가 되어 교천의 마음을 찔렀다. 제자가 마존이라면, 자신도 마존이었던 사람이었다.

마존은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싸움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바라지 않고 홀로 우뚝 서는 존재가 바로 마존이었으니까.

“더 많이 준비하셨다는 것 압니다. 자, 다음은 누굽니까?”

당당한 혈천도마의 모습에 교천은 버럭 소리쳤다. 애송이 제자 놈이라 여겼었는데, 이제는 한마디 한마디 가슴을 찌르지 않는 말이 없다.

“이놈이 끝까지!”

교천은 참지 못하고 장력을 발출했다.

사아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장력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었기에 혈천도마는 멸천대도를 방패로 삼아 몸을 숨기며 내력을 극한으로 주입했다.

콰아아앙!

충격에 멸천대도가 크게 흔들렸다. 하마터면 손목이 부러질 뻔했고 내상을 입을 뻔했다.

사아아아아앙!

두 번째 장력이 연속해서 날아들었고, 세 번째 장력도 날아들었다.

쾅! 콰앙!

멸천대도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날아드는 충격에 도가 점점 기울어졌다.

멸천대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사부의 목소리.

“그 건방진 도를 부러뜨려 주마!”

솨아아아아아아!

앞서와 소리가 달랐다. 어마어마한 내공이 실린 장력이 날아들고 있었다.

‘도가 부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멸천대도는 자신의 상징이었으니까.

혈천도마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대신, 멸천대도에 내공을 극한으로 주입했다. 내상을 입게 되더라도, 도를 지킬 생각이었다.

꽈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상을 입지도 않았고, 뒤로 내팽개쳐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멸천대도는 부러지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혈천도마는 보았다.

자신의 뒤에서 나온 손이 멸천대도에 손바닥을 대고 있는 모습을.

놀란 혈천도마가 뒤로 돌아섰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혈천도마는 격정에 찬 얼굴로 그를 불렀다.

“교주님!”

자신의 뒤에 검우진이 서 있었다.

어쩌면 교주가 와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내심 올 것이라 믿었을지도.

하지만 그 바람만큼이나 그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자신이 사부를 죽인 날, 그는 형을 죽였으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교주가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날 이후 그 일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으니까. 우린 서로 묻지 않았다.

교주가 그 과거를 다시 떠올리지 않게 하고 싶어서, 이번 일을 혼자서 처리하려 마음먹었던 것인데. 이렇게 교주가 왔다.

그리고 오늘 교주의 눈빛은 오래전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젊은 눈빛을 닮아 있었다.

“그날도 함께했으니, 오늘도 함께해야지.”

그들을 불러낸 이유는.

그날 이후, 오히려 교주와 소홀해졌다.

그 일을 함께 겪었으니 더 자주 보고 더 친해질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런 이유였을 거다.

서로 얼굴을 보면 그날의 일이 떠올랐으니까. 자신도 검우진도,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현실적인 이유가 더해졌다.

이후, 검우진은 바빠졌다. 정식으로 천마신교의 후계자가 되었고, 구화마공을 익히느라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정말 이렇게 멀어지고 마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던 어느 날, 검우진이 혈천도마를 찾아왔다.

그를 보는 순간 혈천도마는 느낄 수 있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고. 그때까지도 검우진의 얼굴에선 감정이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서로를 대하는 형식은 달라졌다. 검우진은 소교주가 되었고 자신은 마존의 자리에 올랐다.

“잘 지내셨습니까? 소교주님.”

“마존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지냈소.”

이제 더는 형, 동생이라 부를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에 분기점이 되었다.

검우진이 가져온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소교주님.”

“마존께 드리는 선물이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푸른빛이 도는 한 알의 단약이었다. 놀랍게도 그건 천외신단이었다.

“마존께 드리는 내 선물이오.”

젊은 나이에 마존이 되었기에 천외신단 같은 영약은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소교주께서 복용하십시오.”

그때, 혈천도마는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을. 착각이었을지 몰라도, 그때 검우진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형, 받아.

형과 동생으로. 그런 눈빛은 아마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혈천도마는 끝내 천외신단을 복용하지 않았다. 그냥 그걸 복용해 버리면 그날 검우진과의 일은 이제 끝!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너무나 잊고 싶었던 그날이지만, 어쩌면 자신에게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그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공자를 도와 소교주로 만들어준 그날을.

그렇게 천외신단은 내내 보관하고 있다가 결국 검무극에게 주었다. 마치 운명처럼 검무극에게로 갔다.

이후 검우진이 권마와 중원을 종횡하며 싸우러 다닐 때, 혈천도마는 자신도 그들과 함께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마음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 마음을 검우진에게 표현하진 않았다.

그래도 언제나 교주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없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이 순간.

혈천도마는 후회했다. 이 후회는 검무극과 깊은 관계를 맺어가면서 느끼고 깨달은 후회였다.

검우진과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다.

검무극이 자신을 찾아와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서부터 온갖 말을 다 하듯, 자신도 검우진에게 다 말했어야 했다.

그날 일을 일부러 나누고 또 나누고. 그렇게 큰 상처를 가슴에 묻지 말고, 적어도 두 사람만큼은 이야기를 나눴어야 했다.

검우진이 그런 생각을 못 했다면 형인 자신이 그렇게 유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검우진과의 관계는 또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음의 상처 또한 더 옅어졌을 것이다.

이제 다시 현실에 선 두 사람, 검우진과 혈천도마가 서로를 응시했다.

혈천도마는 조금 전에 떠올린 이 후회에 대해 검우진에게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못한 후회는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을 작정이니까.

“괜찮나?”

“죄송합니다, 교주님. 미리 기별을 드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공식적인 상황이 아니지 않았나? 나도 지나가는 길이었으니까.”

그 말도 사실이었다. 본단으로 돌아가다가 마차를 돌린 것이었으니까.

“사부가 살아 있을 줄 몰랐습니다.”

“우린 그날 시체를 보지 못했으니까.”

교천은 가슴을 꿰뚫린 채 만장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나중에 시체를 찾으려 했지만,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다. 워낙 치명상을 입어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교천의 심기가 또 불편해졌다.

혈천도마는 아예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검우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시 받는 기분이 들었다.

제자를 만난 이후 내내 기분이 상했는데, 마지막까지 자신의 속을 긁어대고 있었다. 놈은 원래 그랬다지만 그를 더욱 화나게 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자신을 봤으면 먼저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나? 욕을 하는 것보다 저렇게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더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또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검우진!”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

그제야 검우진의 시선이 교천을 향했다.

검우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교천은 혈천도마를 봤을 때보다 더욱 큰 격정에 휩싸였다.

자신이 죽은 건 결국 저 교주 때문이었다.

그를 선택하지 않고 대공자를 선택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내 분노는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오늘만 기다려왔던 그였다. 막상 이렇게 보니 교천은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신이 났다. 혼자서 괴이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보였지만, 검우진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보자 교천이 더욱 크게 웃었다.

혈천도마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 사람이 다시 만났구나.’

그래, 맞다. 자신도 교주도, 그리고 저 미친놈처럼 웃고 있는 사부도. 우린 모두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대공자의 죽음도, 그렇게 맞부딪친 우리들의 운명도.

혈천도마가 사부에게 말했다.

“교주님이 오셨으니 이제 아래로 내려오십시오.”

감히 내려다보지 말란 말이었다.

당연히 교천의 눈가가 꿈틀했다. 사부보다 교주더냐?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파문했다고 당당히 말했었으니까.

그러자 검우진이 말했다.

“괜찮네.”

어차피 죽일 사람이니까. 이런 이유가 아니었다. 검우진이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여행은 태사의에서 내려오는 여행이라네. 자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네.”

예전이라면 대체 무슨 말이지? 했을 말이었는데 이젠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교주에게 저렇게 말했다는 것을. 정말 검무극다운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우진이 다시 한 번 교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올려다보는 기분이 이랬군.”

검우진의 말에 혈천도마가 웃었다. 이런 농담, 교주에게서는 평생 들을 일 없을 것 같았는데.

혈천도마가 교천에게 물었다.

“계획에 교주님까지 끌어들이려 했던 것 아니었습니까? 자, 이제 준비한 것 보여주시지요.”

교천이 조롱하듯 비웃었다.

“아까만 해도 그 보잘것없는 칼 뒤에 겁쟁이처럼 숨어서 고개도 내놓지 못하더니, 이젠 아주 당당하구나.”

혈천도마가 웃으며 도발을 받았다.

“마존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분이 오셨으니까요.”

검우진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교주의 등장으로 분위기는 편안해졌지만 혈천도마는 내심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사부에게 반드시 숨겨진 한 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교주에게 조심하라는 전음은 보내지 않았다.

교주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 실수도 하고, 잘못된 판단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총군사가 있고 마존들이 보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교주가 완벽해지는 순간이 있다. 이때는 어떤 누구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다. 교주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바로 죽고 죽이는 순간이다.

혈천도마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교주는 완벽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은 전장이다.

교천은 검우진의 실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래라면 전대 교주처럼 그 압도적인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검우진의 기도가 잘 읽어지지 않았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강하구나.’

마교주와 혈천도마에 관해서는 많은 조사를 했다. 특히 그들의 무공 수위를 알아내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다.

한데 직접 본 그들은 자신의 조사를 벗어나 있었다. 혈천도마도 생각했던 것보다 강했고, 검우진도 그랬다.

‘다들 왜 이렇게 강해진 거지?’

소교주가 천마신교에 새바람을 일으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이들을 강하게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었으니까.

이윽고 검우진이 교천에게 첫마디를 뗐다.

“직접 나서시겠소?”

안부를 묻지도 않고,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교천의 인상이 확 굳어졌다. 자신에게 하는 첫마디가 고작, 직접 싸울 거냐고?

“나를 무시하는군.”

교천이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검우진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혈천도마는 교주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 대공자를 도와 검우진을 죽이려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멸문을 일으키며 본교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렸다.

교주는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교주 성격에 당장에 죽이지 않는 건, 자신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사부였으니까. 아직 못다 한 앙금을 풀라고.

“젊어서나 지금이나 여전히 건방지군.”

혈천도마는 또 사부의 기억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젊어서 그를 바라보던 교주의 눈빛과 지금 저 눈빛은 달라도 너무 달랐으니까. 세월이 사부를 잡아먹었다.

“그래, 뜻대로 해주지.”

교천이 손바닥을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노인이 한 명 들어왔다. 분명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탄탄한 몸에 허리는 꼿꼿했다. 잘 빠진 근육질의 몸. 얼굴을 가리고 몸만 보면 이삼십 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검우진과 혈천도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흑제(黑帝).

그도 그럴 것이 전대 고수도 아니었다. 그는 사파의 전전대 고수로 잔혹한 성격과 뛰어난 무공으로 무림에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다. 한창때는 사파제일고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공이 뛰어났다.

수많은 살육을 저질러 무림공적에 올랐지만, 끝내 그를 죽이지 못했다.

백 세가 훌쩍 넘은 나이기에 당연히 죽은 줄 알았는데, 오늘 이렇게 등장한 것이다.

그가 나왔던 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화장이 짙은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누구라도 유혹할 수 있을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기련요사(祁連妖邪).

젊은 모습과 달리 그녀 역시 흑제와 동시대를 살았던 전전대 고수다.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요녀 계의 왕.

백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그녀는 수많은 남자의 내공을 빨아먹었는데, 이제 요녀를 넘어 요괴라 부를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가 다른 요녀들과 다른 점은 그 정기와 내공의 목적이었다. 그녀는 단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해지기 위해서 내공을 빨아들였고, 그 결과가 흑제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이었다.

흑제도 함부로 그녀에게 요녀라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무공실력은 대단했다.

교천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게도 선배가 되시는 분들이시다.”

두 노고수는 상대가 마교주임을 알고 나왔음에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깊고도 신중한 눈빛으로 검우진을 응시했다.

무림에서 천마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그들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혈천도마가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살피듯 바라보았는데, 교주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 덤비라고 하시겠지?’

교주 성격이면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했지만, 정확히 알아맞히지는 못했다.

검우진이 한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

아무런 장력도 나가지 않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벽에서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렸다.

푸우웅!

곧이어 두 사람이 등장했던 문이 있던 벽이 가루가 되면서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부서져서 파편이 터져나간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벽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확 피어오르며 벽 뒤에 있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치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기괴하면서도 신선했다.

흙먼지 속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흘러나왔다. 그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서 앞서 나온 흑제와 기련요사 못지않은 기세가 느껴졌다.

당장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광천살(狂千殺).

천 명의 고수를 죽였다고 알려진 미친 고수, 살육의 신, 전대의 미치광이 도살자 광천살이었다.

광천살이 이쪽을 쳐다보며 차가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광천살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들은 이 미친 광천살에 전혀 밀리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 숫자가 무려 십여 명에 달했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혈천도마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사부가 지난 수십 년간 복수의 일념으로 모아온 결실임을.

그들이 내뿜는 압박감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전대와 전전대 고수들.

교천은 대체 이 무슨 미친 짓이냐는 표정으로 검우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온 둘도 제발 한 사람은 다시 들어가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검우진이 그들 모두를 싸움터로 불러낸 것이다. 분명 문 뒤에서 느껴지는 기도를 읽었을진대. 그가 벽을 무너뜨린 이유는 명백했다.

검우진의 몸에서 마기가 피어오르며 그의 주위를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희까지 한 번에 다 와라.”

더 보고 싶습니다.

실로 광오한 말이다.

이런 고수들을 앞에 두고 그 누가 다 같이 오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곳에 있던 그 누구도 대놓고 비웃지 못했다.

상대는 당대 마교주였으니까.

그의 몸 주위에 일렁이는 마기는 태어나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닿는 것은 모두 불태워 버릴 것 같은 강력한 마기.

물론, 그렇다고 모인 고수들이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모인 이들이 너무 쟁쟁했으니까. 그 숫자가 무려 열둘이나 되었다.

교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쇠 긁는 노인 웃음이 아니라 내공이 실린 크고 힘찬 웃음이었다. 검우진의 기세를 꺾으려고 의도적으로 이렇게 웃었다.

“저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알고 그딴 오만을 떠는 건가?”

검우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혈천도마를 생각해서 그에게 예를 갖추고 있었다. 이 예를 거둘 사람은 오직 혈천도마 뿐이라 생각했으니까.

“당신이 불러 모은 사람들 아니오?”

교천의 눈가 주름이 꿈틀거렸다. 그 말은 교천의 귀에는 ‘그래봤자 고작 네가 불러서 모인 자들 아닌가?’라고 들렸다.

“그래, 넌 젊어서부터 오만했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혈천도마는 모습을 보인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우선 겉모습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있는 자들이 있었다.

맨 먼저 벽이 무너졌을 때, 모습을 드러낸 광천살 뒤에 선 한 남자.

그의 얼굴은 온통 붉었다. 그냥 붉은 정도가 아니라 피 칠갑한 것처럼 붉었는데, 이곳에 함께할 정도인 실력자면서 얼굴이 저리 붉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적안공자(赤顔公子).

자신이 죽인 적의 피가 너무 많이 튀어 얼굴이 붉어졌다는 미친 소릴 하고 다니는 인물로, 공자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칠십이 넘은 노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또 다른 인물.

그는 차고 있는 검으로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검집과 손잡이에 현란한 색채로 그려진 귀신 그림.

귀검자(鬼劍子).

귀검이 울면 반드시 상대는 죽는다고 알려진 살귀였다.

이들 두 사람 모두 앞서 등장했던 흑제나 기련요사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사부가 전직 마존이란 신분을 이용했고, 오랜 세월 준비했다 하더라도 저들을 모두 수하로 거두는 건 절대 쉽지 않았을 일이다. 누군가의 밑에 쉽사리 들어갈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에게 무엇을 약속했습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이 고수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을 거다.

혈천도마가 이번에는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교주에게서는 그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 즐거워하고 있다. 저들을 바라보는 두 눈에 평소에 보지 못한 뜨거움이 가득했으니까.

이 모습이 바로 전장에 선 교주의 모습.

단지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 벽을 무너뜨린 게 아닐 거다. 교주의 싸움에, 아니 그의 삶에는 허세란 없었으니까.

혈천도마는 교주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을 각각 상대하면 편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은 차륜전 양상이 된다.

내공을 써도 상대하는 숫자만큼은 써야 한다는 의미.

대신 이렇게 한꺼번에 싸우면 한 번에 둘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겠지만.

검우진이 천천히 천마검을 뽑아 들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검.

내뻗은 천마검으로 한줄기 예기가 검날을 따라 흐르더니 검 끝에서 빛났다. 그러자 천마검이 울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오.

마치 지옥의 무저갱 깊은 곳에서 나는 울림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천마검의 울음에 혈천도마의 가슴이 뛰었다. 교주와 함께 싸우고 싶었다. 젊은 시절 권마와 교주가 그랬듯, 그도 교주와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교주의 싸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천마검이 울자 광천살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생을 미친 도살자 소리를 듣고 살아온 그는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다 같이 오라는 마교주의 말을 들었을 때도 보란 듯이 제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한데 천마검의 울음은 그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을 건드렸다.

그는 이 낯선 감정에 놀라고 당황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고작 검이 운다고 내 손이 떨려?’

지금 느끼는 공포는 머리나 마음이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차피 죽는 인생, 무서울 것 없다.’ 이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었으니까.

지금 이 떨림은 마음의 떨림이 아니라 몸이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정해진 순서고 나발이고, 그는 앞으로 달려 나가고 싶었다.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둘이었으니까. 달아나서 공포에서 멀어지거나, 공포를 주는 존재를 없애거나.

무조건 후자의 삶을 살아온 그였는데.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광천살이 주먹을 터질 듯 움켜쥐며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과 검우진 모두를 향한 욕설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귀검자의 검이 귀신 소리를 내며 울었다.

히이이이이이이.

순간 귀검자는 느꼈다. 그 울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귀검이 겁을 먹었다!’

평생 상대를 겁주던 귀검이 처음으로 겁을 먹는 순간이었다.

‘저 검의 울음에.’

귀검자는 내력을 주입하며 귀검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이도 있었다.

천천히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기가 눌린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는 누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오라면 나와야지.”

그는 마군처럼 몸이 큰 남자였는데, 웃통을 벗은 근육질은 마치 금강역사처럼 보였다.

색혼금강(色魂金剛).

검기와 검강으로도 잘리지 않는 육체를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보검을 부러뜨린다고 알려진 괴력을 지닌 고수였다.

그는 맨주먹으로 수많은 무인의 머리통을 부수고 다녔다. 그의 악명이 높은 이유는 그 이유가 단지 재미였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악행의 결정체는 그의 몸에 난 문신이었다.

그의 커다란 몸에 작은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여인들의 특징을 그린 그림들.

그는 겁탈하고 죽인 여인의 모습을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다른 여인을 겁탈할 때, 여인의 문신을 보여주며 이 여인은 이랬고, 저 여인은 저랬고. 그런 미친놈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 것이리라.

“여교주셨으면 참 매력적이었을 텐데.”

그때, 뒤에서 한 사람이 더 움직였다.

“하여튼 예의 없는 마교 놈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보통이 아닌 노인이었다.

“네 아비가 있어도 나 성라염군(星羅殮君)에게 함부로 굴지 못할 텐데. 어디서 나오라 마냐 주둥이를 놀리는 거냐?”

그 역시 전대 고수로 무림에서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무공도 고강했지만, 그만큼 교활하고 머리도 잘 쓰는 인물이었다.

큰소리를 치는 지금도 그는 색혼금강 뒤에 반쯤 걸쳐져서 교묘하게 몸을 감추고 있었다.

만약 검우진이 기습 공격을 날리면 색혼금강 뒤로 숨을 것이다. 색혼금강이 방패가 되어 주는 이상, 자신이 죽을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나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천천히 움직여서 그들 옆으로 늘어섰다. 그들이 나서면서 기세는 살아났지만, 교천은 그들을 만류했다.

“잠깐! 계획대로 움직여주시오.”

그 말에 혈천도마가 사부에게 물었다.

“출전하는 순서라도 정해두신 겁니까?”

교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답을 한 사람은 색혼금강이었다.

“다들 맨 처음과 끝은 안 하려고 했지. 네가 팔팔할 때 싸우면 죽이기가 어렵고, 마지막은 마교주를 죽였다는 영광을 차지하지 못할 테니까.”

그 말인즉 자신들도 많이 죽겠지만 결국 여기 있는 누군가가 마교주를 죽일 거로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너도 사람인데, 이 많은 내공을 상대할 수 있겠나? 결국 내공이 마르겠지.’

이것이 검우진을 상대하는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니 마교주야, 건방 그만 떨고 조용히 네 죽을 차례나 찾아라. 기왕이면 내 손에 죽어주면 더 좋겠지만, 내가 재수 없게 뽑은 숫자가 팔이다. 내 순서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

색혼금강의 외침에 검우진이 그에게 말했다.

“아니, 넌 이 번이다.”

이 번? 일 번도 아니고 이 번?

색혼금강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발에 화가 났으면 일 번이라 해야 할 텐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누군가 등잔불을 훅 불어 끈 것처럼 세상이 어두워졌다. 그들 같은 고수들의 안광에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교천이 재빨리 야명주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기습에 대비하시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야명주의 빛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던 그 순간, 어둠이 다시 빛을 삼키기 시작했다.

‘야명주가 안 통한다고?’

다른 어떤 빛도 통하지 않는 어둠, 그야말로 처음 경험하는 어둠이었다.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주위가 밝아졌다. 너무 순간의 일이라 순간 착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천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다치거나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그때 성라염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성라염군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졌을 때, 그는 분명히 들었다. 쩡하고 빙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울렸었다.

‘무슨 소리였지?’

그때 성라염군이 흠칫 놀랐다.

‘왜 그런 눈으로?’

다들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신의 몸을 향하고 있었다.

성라염군이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자신의 몸이 어긋나 있었다.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허리로 이어지는 한줄기 선.

어긋난 상체가 그 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스르르륵.

‘내가 잘렸어?’

아프지도 않았고, 검에 베였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색혼금강 뒤에 서 있었는데.

그가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시야가 낮아졌다. 찰나의 어둠이 이젠 그에게 영원한 어둠을 안겨주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방을 적셨다.

놀라기는 색혼금강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앞에 서 있었는데.’

설마, 마교주의 이 한 수는 장애물 너머를 공격할 수도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번 한 수는 그런 수가 아니었다.

그의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붉은 사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스르르륵.

그의 몸도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둘 다 잘렸는데 몸이 튼튼한 그가 더 늦게 반응이 온 것이다.

검기와 검강이 통하지 않는 몸이었는데.

그리고 그의 선은 하나가 아니었다.

찍, 찌이익, 찌이이익.

팔에, 허리에, 어깨에. 그야말로 온몸에 거미줄처럼 붉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악!”

한줄기 괴성과 함께 그가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모습에 교천은 물론이고 다른 고수들도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 듯 싸운 것도 아니고. 그냥 어두워졌다가 밝아졌을 뿐인데.

그때 시체를 바라보던 그들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모두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놀란 이유가 검기와 검강이 통하지 않는 그를 죽여서가 아니었다.

뒤에 있던 성라염군이 먼저 죽을 걸 알고, 그에게 이 번이라 했던 것 때문도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조각난 그의 몸에 여인들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교주는 그를 그냥 아무렇게나 조각낸 것이 아니었다. 문신의 여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그의 몸을 갈가리 조각낸 것이다. 여인들의 얼굴은 그대로 다 남아 있었다.

핏물에 떠 있는 그녀들은 마치 이제야 원한을 갚아서 평온해진 모습처럼 보였다.

혈천도마는 알 수 있었다. 교주만의 방식으로 그녀들을 애도했음을.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어둠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여인들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이다.

구화마공 제사식 암흑일섬.

이것이 바로 대성을 이룬 검우진의 암흑일섬이었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을 깬 사람은 교천이었다.

“놈이 강할 줄은 예상하지 않았소? 구화마공을 쓸 때마다 엄청난 내공 소모를 하게 되오. 그러니 겁내지 마시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내야 할걸?”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내려선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서대룡과 함께 안가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곳으로 오라고 기별을 남겨두셨다.

검무극은 쾌속보로 바람처럼 달려와서 조용히 몸을 숨긴 채 아버지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와 혈천도마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검무극이 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가 왜 벽을 부쉈을까? 단지 차륜전을 피하려고?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아버지를 너무 무시한 거야.”

그러자 혈천도마가 움찔했다. 검무극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어르신은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당황한 혈천도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고 거짓말도 못 하시는 고지식한 우리 어르신!”

혈천도마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아,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 나오느냐?’

이내 혈천도마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쳐야 검무극이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적들을 향했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산을 하려 하신 거야. 너희를 파악해서 내공 배분을 하시려고. 이놈은 어떻게 죽이고, 저놈은 어떻게 죽이고. 이미 오늘 싸움의 그림을 다 세우셨을 거다.”

장난기 없는 얼굴로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펼치시는 동작 하나,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아버지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 무림 어떤 기연보다 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보여주십시오. 아버지의 싸움, 더 보고 싶습니다.”

마교주를 건들 생각이었다면

검무극과 검우진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것 같은 그 눈빛 사이에서 혈천도마는 교주가 부러웠다.

교주를 떠나 부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아버지’라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으로서 아들이 아버지의 싸움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기꺼이 보여주고 싶지 않을까?

검우진의 시선이 다시 적들을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검우진의 차가운 눈빛은 이미 대답을 대신했다.

검무극도 함께 적들을 쳐다보았다.

둘이 죽었지만, 아직 남은 적은 모두 열 명. 거기에 교천까지.

절대 만만하게 볼 이들이 아니었다. 당대 고수보다 전대 고수가 더 많은 적이다. 게다가 저들은 온갖 살육과 악행을 저지른 자들로 싸움 경험이 누구보다 많았다. 거기에 평생 원한을 쌓아온 교천.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걱정을 하진 않았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위험하지 않을까?

역대 천마 중 가장 무재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가 근래 또 무공경지가 상승하셨다. 구화마공의 위력 역시 회귀 전과는 다를 거라는 의미. 앞서 봤던 암흑일섬만 봐도 알 수 있었고.

‘네놈들, 쉽지 않을 거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참, 정파와의 문제는 잘 해결했습니다. 오해를 풀었으니 중경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우리가 벌인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겁니다.”

일부러 교천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이 싸움이 불리해진다고 쓸데없는 수를 또 쓰려할까 봐.

교천의 표정은 굳어졌고, 반대로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보다 더 좋아한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잘했다.”

이번 일의 시작은 자신의 사부 때문에 벌어진 일. 마정대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검무극이 잘 해결한 것이다.

검무극이 전한 소식에 교천뿐만 아니라 다른 고수들의 분위기도 더욱 가라앉았다.

이제 감히 색혼금강이나 성라염군처럼 함부로 입을 놀리는 이는 없었다.

교천이 기를 살려주기 위해 그들을 격려했다.

“앞서 두 분이 당한 건 기습에 의한 거니, 동요하지 마시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알고 있었다. 소리친 교천조차 알고 있었다.

기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한 수였음을.

마교주가 지금 공격하겠소, 라고 미리 말해 줬다 한들 과연 그 공격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성라염군과 색혼금강의 몸이 잘려 나간 걸 본 이상, 누구도 막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들이 죽었을 때 교천이 했던 말처럼 저 엄청난 한 수를 쓸 때마다 내공 소모가 무지막지할 터.

‘내공을 소모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에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마교 소교주의 등장.

과연 득인가, 해인가?

부정적으로 보면 죽여야 할 고수가 하나 더 생긴 셈이고, 긍정적으로 봐도 인질로 삼을 수 있는 이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마교주의 혈육이라는 확실한 인질이.

소교주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 검우진을 상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원래 처음 나서려 했던 기련요사와 흑제를 향했다. 원래 일 번, 이 번이 이제 삼 번과 사 번이 되었다.

“다 같이 합공합시다!”

기련요사의 말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권유는 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이라도 나서지 않았을 테니까.

흑제와 기련요사가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굳이 전음을 주고받지 않더라도 두 사람은 이 싸움을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 쏟아붓는다.

검우진이 구화마공을 다시 펼친다면, 자신들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게 될 거다. 그 전에 합공하자는 의미.

기련요사는 조공(爪功)을 사용했고, 흑제는 검술을 사용했다.

먼저 움직인 쪽은 흑제였다. 그가 허공을 박차고 오르며 곧장 검우진을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그가 펼친 건 독문무공인 흑천검법(黑天劍法) 중 그가 가장 자신하는 초식 중 하나인 흑천격(黑天擊)이었다.

쇄애액!

그야말로 벼락이 내리치는듯한 검기.

검우진은 내리 찍히듯 날아드는 검기를 몸을 틀어서 피했다.

내리친 검기가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의 발 바로 옆이었다.

쇄애액! 꽝! 쇄애애액! 콰앙!

흑천격이 연속해서 떨어졌고, 검우진은 검으로 막지 않고 보법을 발휘해서 피했다. 내공 소모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

기련요사도 그와 동시에 공격했다.

그녀의 손톱은 어느새 몇 년은 손질하지 않은 것처럼 길게 튀어나와 있었고 그 날카롭고 흉측한 것에서는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양 손톱에서 뻗어나간 것은 붉은 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쇠도 싹둑 잘라버리는 혈사(血絲)라고 불리는 강기였다.

그녀의 독문무공인 혈사신공(血絲神功) 중 가장 강한 초식인 지주혈사(蜘蛛血絲)가 발휘된 것이다.

그녀의 혈사는 특별했다. 창처럼 쭉 뻗어나가다가 또 천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그랬기에 강했고 동시에 예측 불가였다.

붉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며 검우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흑제의 검기와 기련요사의 혈사.

호신강기를 일으켜 막거나 검기를 발출해서 상대의 공격을 해소해야 할 순간!

하지만 검우진은 여전히 보법을 발휘해서 피했다. 맹수가 오직 한순간만을 노리듯, 그는 내공을 아끼며 기회를 노렸다.

검무극은 아버지의 싸움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남을 의식하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보고 있으니 멋있게 처치해 볼까? 그런 생각이 드실 법도 한데.

어떻게 하면 주어진 내공으로 적들을 다 죽일 것인가?

아버지는 철저히 계산된 싸움을 하셨다. 오히려 온갖 멋이나 허세를 다 부려도 되는 분인데.

이런 아버지가 적이라면?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파파파파파파팍!

바닥과 벽에 혈사와 검기가 남긴 흔적이 깊이 남았다.

처음에는 승기를 잡았다고 기뻐했던 두 사람이다. 둘이서 미친 듯이 쏟아부으면 결국 한 번은 제대로 적중당할 테니까.

하지만 공격이 계속될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검우진은 절대 피할 수 없을 공격들 사이에서 빠져나갈 빈틈을 찾아냈다. 공격은 현란했고 피하는 발걸음은 차분했다.

흑제와 기련요사, 그리고 지켜보던 이들이 몇 번이나 이 말을 외치거나 마음속으로 했는지 모른다.

됐다! 적중했다! 해냈다!

하지만 착시였고 아슬아슬하게 빗나가는 공격들이었다.

그 어떤 공격도 검우진의 몸에 닿지 못했다.

싸움을 지켜보면서 검무극은 상상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피할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랬기에 그의 눈에는 두 명이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모습 위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똑같이 움직이기도 했고, 미세하게 다르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반대로 움직였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도 했다.

‘이건 못 피한다!’

아버지와 겹쳐진 상상 속 자신이 검을 뽑아 날아든 강기를 쳐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움직임은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보법을 펼치며 공격을 피한 것이다.

‘아!’

자신이 찾아내지 못한 길을 아버지가 찾아낼 때마다 검무극의 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차이가 주는 배움은 단지 모르는 걸 알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몰랐던 방식을 보면서 또 다른 방식을 떠올렸으니까.

정말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이런 방식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와 깊이 있는 무학을 나눴으리라.

검우진의 내공을 소모하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의 내공 소모가 극심했다.

그 초조함의 끝에서 흑제는 아꼈던 한 수를 발휘했다.

흑천무간(黑天無間).

흑제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검기가 여덟 줄기로 나눠지더니 검우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애애액.

검기는 기련요사의 혈사까지 자르며 쏟아졌다.

그리고 이때가 바로 검우진이 기다렸던 그 한순간이었다.

흑제의 큰 공격에 혈사가 잘려 나가는 그 순간!

검우진이 폭발하듯 몸을 날렸다.

끊어진 혈사 사이로 검우진이 쇄도했다. 목표는 바로 기련요사였다. 흑천무간이 검우진을 적중시켰어야 했는데, 오히려 가장 크게 빗나갔다.

쉬이익!

순식간에 쇄도한 검우진이 기련요사를 베었다.

‘빠르다!’

기련요사가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필사적으로 양 손톱을 휘둘렀다.

파아아악!

하지만 그녀의 손톱이 잘려 나갔다.

이어 검우진은 미처 피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많은 피가 튈 정도로 어깨를 크게 베었다.

위기의 순간, 흑제는 자신을 돕지 않았다.

‘왜 돕지 않는 거지?’

자신이 죽으면 다음 차례는 본인이란 걸 잘 알 텐데. 설마? 겁을 먹고 달아났나?

‘비겁한!’

세 번째 공격은 막지 못했다.

푸아악!

허리의 반이나 베인 그녀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흑제는 달아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도우러 올 수 없었다는 것을.

사아아악.

흑제는 누군가에게 사방으로 포위된 채, 도륙당하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것은 악귀들이었다.

구화마공 제일식 인멸식.

바로 검우진의 인멸식이 펼쳐진 후였다.

처음 악귀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흑제는 정말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그냥 무서운 모습의 강기 덩어리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마기가 사방에서 자신을 옥죄는 바람에 진기가 원활하지 않았다.

호신강기를 펼치고, 지닌 절초를 모두 발휘했지만 소용없었다.

검무극은 보았다.

확실히 자신의 악귀보다 더 크고 단단한 느낌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얼굴의 네 악귀가 흑제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한 번 내리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계속 내리치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첫 번째 공격을 버틴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난도질을 할 수도 있다는 뜻. 자신이 펼치는 인멸식과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정작 달라진 건 그게 아니었다.

원래 검우진의 악귀들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생김새가 다르고 감정을 지닌 것은 검무극의 악귀들이 특별했던 것인데.

하지만 오늘의 악귀는 달랐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악귀의 시선에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그때와 다르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도 깊어져 있었다.

실전에서의 인멸식.

아버지 역시 처음으로 느끼는 변화이자 교감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곧이어 네 악귀가 완전히 사라졌다.

정적이 내린 그곳에는 더욱 진한 혈향만이 가득했다.

주위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바닥과 벽에 셀 수 없이 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혈사가 남긴 흔적들, 흑제의 검기가 남긴 흔적들.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아니 바둑판보다 더 촘촘히 남겨진 흔적들.

‘대체 어떻게 피한 거지?’

그들에게는 실패의 흔적이었고, 검우진에게는 성공의 흔적이었다.

심지어 검우진은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순간 적들의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검우진이 검무극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보고 싶다는 싸움, 잘 보고 있느냐?’

검무극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똑똑히 보았습니다.’

검무극이 적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둘이 더 죽어서 남은 이들은 여덟.

그때 검무극은 깨달았다. 여덟이어야 하는 적이 일곱이라는 것을.

하나가 어디로 갔지?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코앞에서 갑자기 나타나며 검을 내질렀다.

쇄애애애액!

그는 바로 온통 얼굴이 붉었던 바로 적안공자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해 온 이 수법은 그의 비장의 한 수인 회랑극보(回廊極步)였다.

쾌검술을 쓰는 그는 경이로운 경신법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했다. 자신이 먼저 공격한 이상, 상대는 절대 막지 못할 거라고.

‘마교주를 죽이려면 자식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그의 검은 검무극의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소교주가 대단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에게는 그래봤자 소교주였다.

채애앵!

하지만 그의 검이 막혔다.

놀랍게도 날아든 검을 쳐낸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회랑극보보다 더 빠르게, 번쩍하는 순간 날아온 경공은 바로 천마비행술이었다.

“역시! 아버지가 절 구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검무극의 여유로운 반응에 적안공자는 순간 이런 의문이 들었다.

‘설마? 구해줄 걸 알고 일부러 안 피했나?’

그건 피하는 것보다도 더 놀라운 경지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적안공자가 빠르게 검을 날리며 검우진을 기습했다.

쇄애애애액!

이번에도 선공을 날렸다.

하지만 또 막혔다. 그의 쾌검만큼이나 검우진의 검도 빨랐다.

“덕분에 아버지의 싸움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됐네.”

검무극의 말이 끝나는 순간, 검우진과 적안공자의 검이 격돌했다.

검무극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기둥처럼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눈먼 검이 날아들 걱정은 하지 않았다. 저렇게 빠르게 검이 오가는데, 딴 데 신경을 썼다간 상대의 검에 목이 꿰뚫리게 될 테니까.

두 사람의 검이 너무 빨라서 수십 개의 검을 동시에 휘두르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하나였다.

천마검 위로 흑마검이 겹쳐 보였다. 두 개의 검은 똑같이 움직이다가 달라졌고, 다시 같이 움직였다.

정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쾌검이 오가는 순간에서도 검무극의 마음에는 아버지의 검과 자신의 검이 모두 보였다.

두 검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배웠다. 머리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으니까.

‘아버지, 언제 날 잡고 오늘 싸움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싸움에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그날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 아버지도 분명 성취를 얻으시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깨달음은 그런 깨달음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검이 빠른 만큼 싸움의 결과도 빨리 나왔다.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싸움은 끝이 났다.

이변 없는 결과.

적안공자가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안공자가 옆에 있던 검무극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괜히 그를 인질로 잡으려다가 죽게 되었기에,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그가 검무극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검무극은 그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이 새끼! 널 죽였어야 했는데.”

그가 무릎을 끓었지만 움켜쥔 옷자락을 놓지 않았다.

검무극은 생기가 사라져가는 그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더니.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서 자신의 얼굴에 슥슥 붉게 칠했다.

“이제부터 내가 적안공자다. 다 늙어서 무슨 공자냐?”

분노한 얼굴로 노려보며 적안공자는 그대로 절명했다.

검무극이 교천을 쳐다보며 피 묻은 얼굴로 씩 웃었다.

“난 당신의 적안공자니 인질로 잡을 생각 마시오.”

교천의 얼굴에 분노와 황당함이 동시에 스쳤다.

“미친놈.”

그러자 그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교주를 건들 생각이었다면, 당신은 나보다 더 미쳐서 왔어야지.”

내 사제관계는 하나뿐이다.

검무극의 차가운 눈빛에 교천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에게는 가소로워야 할 소교주인데. 아마 그가 한 말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리라.

‘더 미쳐서 왔어야 했다고?’

시체가 되어 버린 이들과 생생하게 서 있는 검우진을 보자니, 어쩌면 그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했던 검우진이 실제와 다르듯 저 소교주도 자신이 조사한 소교주와 느낌이 달랐다.

장난치듯 묻혔다는 걸 알지만, 얼굴에 피를 가득 묻힌 채 자신을 바라보는 저 모습은 가슴에 찬 바람이 불게 했으니까.

교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검우진을 향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지?’

반면 검우진은 얼굴에 피를 묻힌 아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근엄한 검우진만 보다가, 지금 이 모습을 보니 약간 낯설게 느껴졌다.

교천은 알지 못했다. 이 변화야말로 검우진이 강해진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그 과정을 알지 못했기에 오직 결과만이 그를 놀라게 했다.

‘전대 교주보다 훨씬 강하다.’

대체 어떻게? 교주쯤 되는 실력자들이 무공을 끌어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으니까.

교천이 애써 그런 의구심을 감춘 채 남은 고수들을 쳐다보았다.

열두 고수 중에 다섯이 죽고 이제 남은 사람은 일곱.

“다음 차례는?”

어떻게든 내공을 소모 시켜서 죽이겠다는 기존 계획을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였다.

그 모습에 혈천도마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사부는 굳어 있었다. 상황이 바뀌면 계획도 바뀌어야 하는데. 굳어버린 머리는 그저 밀어붙일 생각뿐이었다.

‘앞서 다섯이 못해낸 일을 이들이 해내겠습니까?’

누구라도 망설였을 순간인데, 한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광천살이었다. 앞서 천마검의 울음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던 바로 그였다.

지금의 그는 오히려 눈빛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평생 피에 굶주린 미친놈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녔던 그였다. 이 순간 자신을 구하는 건 오직 그 광기뿐임을 깨달은 것이다.

‘두려움은 너희 몫이지, 내 것이 아니다.’

광천살 옆으로 한 사람이 더 나섰다. 앞서 귀검이 겁을 먹고 울어서 당황했던 귀검자였다.

광천살과 귀검자.

각자의 영역에서 공포의 상징이었던 그들.

아들이 왔으니 한 명은 네가 맡으라 하실 법도 했는데.

검우진은 저들 모두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듯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이 싸움은 아버지에게도 중요한 싸움임을. 아버지도 그날을 청산하고 계시는 거다.

혈천도마의 마음을 신경 써 주면서.

오히려 검무극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이 싸움의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담아둘 작정이었다. 그래서 바둑을 복기하듯, 두고두고 되씹으며 자신의 무공실력에 보탤 것이다.

광천살이 양 주먹에 강철로 만들어진 장갑을 꼈다.

그의 애병인 랑아철권(狼牙鐵拳).

그 이름처럼 주먹의 마디마다 이리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흐르는 예기로 볼 때, 평범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주먹으로 내 눈에 거슬리는 자들을 다 때려죽였다!”

그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낭아철권을 끼면 그는 달라졌다. 주먹이 기억했으니까. 자신이 죽였던 그 수많은 이를.

‘이길 수 있다! 마교주를 죽이고 생으로 씹어 삼켜 버릴 거다!’

그의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검우진이 천마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그러고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맨주먹으로 싸워보자는 의미.

광천살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랑아철권과 맨손이라면, 상대가 마교주라도 해볼 만하다고 자신했으니까.

후아아아아앙!

그의 강철 주먹이 엄청난 위력으로 검우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광인살격(狂人殺擊).

그가 가장 자신하는 한 수였다.

검우진 역시 주먹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주먹 대 주먹.

광천살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이 주먹에 다 실었다.

‘박살 나는 건 네 주먹이다!’

교천은 기대했다. 저 한 수에 검우진을 죽이진 못하더라도, 내상이라도 입혀주기를. 그의 내공을 최대한 소모해 주기를.

하지만 검우진은 절대 상대가 예측하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치기 직전. 그 마지막 순간에 검우진이 몸을 틀었다.

엄청난 위력이 실린 주먹이 얼굴을 스치는 순간, 검우진은 어느새 광천살의 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젠장!’

설마 천마가 정면 대결을 피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데다, 회피하고 파고드는 검우진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절묘했다.

광천살은 온몸의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검우진의 일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강력한 일격은 날아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던 그 찰나!

검우진이 광천살의 머리를 가볍게 때렸다. ‘정신 차려라, 이놈아!’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광천살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날 무시해?’

머리를 강하게 쳤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았을 거다. 자신의 호신강기는 머리까지 완벽하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끄으으윽!”

두 번째 공격을 날리려던 광철살이 괴이한 비명을 한차례 내지르더니 뒤로 넘어갔다.

하얗게 눈을 뒤집은 그는 이미 절명한 후였다. 겉모습은 멀쩡했다. 다친 곳도, 피가 나는 곳도 없었다.

그는 죽어서도 알지 못했다.

검우진은 싸우는 상대의 머리를 툭 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만약 쳤다면 이유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가볍게 툭 친 그 한 수는 상대의 호신강기를 부드럽게 파고든 후에 뒤늦게 큰 파동이 되어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뒤집었다.

외부를 쳐서 내부를 상하게 하는 무공, 그 극의에 다다른 검우진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다.

함께 나섰던 귀검자는 물론이고 교천과 다른 고수들의 표정에 놀람이 가득했다.

차라리 검우진의 주먹이 철권을 박살 냈으면 이보다 덜 놀랐을 거다.

앞서 다섯 명을 죽일 때도 그랬지만, 검우진은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죽일 것인지에 집중했다. 방심하지 않는 절대자였고, 머리를 쓰는 절대자였다.

구화마공을 써야 할 때는 과감하게 쓰고, 이렇게 적은 내공으로 죽이기도 하고. 자신의 싸움에 푹 빠져 있으면서 한편으론 아들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아들아, 차륜전을 펼치는 절대고수 열둘과 싸워야 한다면 이렇게 싸워라.

귀검자의 손에 들린 귀검이 귀신 울음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 처연하고 스산한 울음이었다.

그는 광천살이 죽는 동안 구경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자신의 최고 절기를 발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수에 하지 못하면 영원히 펼치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추아아아아아앙!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간 시커먼 귀기가 검우진을 향해 쏟아졌다.

귀검혼원참(鬼劍混元斬)!

귀기가 검우진 주위를 회오리치듯 휘감았다.

마치 거대한 검은 뱀이 검우진의 몸을 감아서 터뜨려 버릴 것처럼 보였다.

‘됐다!’

첫수가 먹히자 귀검자는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마교주야! 이대로 터져 죽어라!’

회오리치는 검은 기운이 검우진을 더욱 옥죄었고 검우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교천을 비롯한 고수들의 두 눈에 기대감이 스쳤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큰 내상을 입게 될 거다!’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으윽!

시커먼 회오리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바닷물이 갈라지듯, 검은 기운이 갈라지며 무엇인가 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새하얀 마기가 일렁이는 천마검이었다.

그 모습에 귀검이 더욱 크게 울었다. 주인의 마음을 반영한 경악과 충격의 울음이었다.

다음 순간 하늘에서 검기의 비가 쏟아졌다.

구화마공 제오식 절혼마격.

마치 널 공격하겠다고 예고하듯 공격했기에 귀검자는 몸을 날려 정수리에서 떨어지는 검기를 본능적으로 피했다.

‘피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떨어지는 검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또 다른 검기가 그의 어깨를 뚫었고.

푸아아악!

이어진 검기가 그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즉사해서 쓰러진 그의 몸 위로, 시차를 두고 계속 검기가 떨어졌다.

푸욱! 푸욱!

원래 절혼마격은 여러 명의 정수리에 동시에 검기를 내리치는 공격이었다. 검무극과는 인질을 구하는 수련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공격이 귀검자 주위에만 집중되었다. 절대 피할 수 없도록, 시차를 두고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절혼마격과 결정적인 차이는 내리치는 검기의 숫자도, 위력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절혼마격은 상대가 피했을 상황을 예측해서 시차를 두고 떨어졌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경지인지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과연 나는 아버지의 절혼마격을 피할 수 있을까?’

검무극은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못했다.

‘내가 반드시 이뤄야 할 경지다. 아니, 이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야 한다.’

자신이 오르면 아버지도 오를 테니까.

귀검자가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지자 검우진의 주위를 휘돌던 시커먼 회오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교천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아무리 강해도 이건 아니지. 광천살과 귀검자가 일 수에 죽는다고? 대체 이런 상대를 두고 어떤 계획을 세우라고? 지금 그의 마음에 떠오른 말은 천하제일이 아니라 고금제일이었다.

검우진이 그에게 물었다.

“이제 직접 나서시겠소?”

여전히 검우진은 예를 갖춰 그를 대하고 있었다. 혈천도마는 아직 그를 사부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말없이 검우진을 노려보는 사부에게 혈천도마가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교천이 시체가 된 이들을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저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요. 지금이라도 교주님께 잘못을 비십시오.”

교천은 느꼈다. 교주나 소교주와는 달리 제자만은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걸 느꼈음에도 좋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배신자 주제에 교주 앞이라고 날 위하는 척하는구나.”

혈천도마는 그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검우진은 그를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혈천도마를 대신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교천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혈천도마에게 그만하라고. 한데 그 말은 교천이 아니라 혈천도마에게 한 것이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어르신.”

교주가 있는 자리였기에 혈천도마는 예를 갖춰 대답했다.

“소교주는 나서지 마시게.”

“아뇨, 이건 당사자들이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검무극은 안다. 오늘 교천이 다시 죽게 된다면, 또다시 혈천도마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눈앞에서 사부가 두 번이나 죽는 셈이니까.

“어르신의 사부는 마지막까지 어르신의 마음을 모른 척할 겁니다. 그래야 자신이 벌인 이 짓이 명분을 가질 테니까요.”

그러자 교천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네가 뭘 안다고!”

흥분한 교천에 비해 검무극은 차분했다.

“자꾸 배신, 배신하시는데, 그렇게 따지면 당신도 본교를 배신한 거 아니오? 제자가 배신했으면 제자만 불러서 복수해야지, 왜 우리 아버지까지 끌어들였소? 왜 본교의 명예를 실추하고 정파와 전쟁을 일으키려 했소? 왜 어르신의 제자까지 끌어들였소?”

쏟아지는 질책에 교천은 곧장 반박하지 못했고, 검무극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솔직히 당신에게 제자의 배신은 중요한 게 아니잖소? 차라리 잘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이 무림을 다 차지하자. 그런 마음으로 세력을 키워온 것 아니오?”

검무극의 시선이 남은 고수들을 향했다.

“저들에게 뭘 약속했소? 이간질로 정파와 사파까지 다 집어삼키고 무엇을 주겠다고 했소?”

그 말을 듣는 순간 혈천도마는 느꼈다. 정말 사부는 그런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고. 정파와의 이간책은 단지 복수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이 늙은 악인들의 야욕을 모아서, 정말 못 이룬 꿈을 이루려고 한 것일지도.

“그러니 이제 배신 핑계는 그만 대시오.”

검무극은 사실 그가 어떤 마음인지 잘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럼에도 그를 몰아붙이는 건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혈천도마를 위해서였다.

지난 일에 의미를 두지 말라고. 사부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부에게 미안하십니까? 아뇨, 어르신이 미안해야 할 사람은 사부가 아니라 어르신의 제자입니다.”

“이 무가치한 사제지간 때문에 홀로 위험을 감수했으니까요. 그런 사부를 위해 어르신의 제자는 홀로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 겁 많고 소심한 어르신의 제자가요.”

혈천도마의 눈동자가 떨렸다. 사부에 교주에, 그러고 보니 서대룡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의미를 두셔야 할 사제지간이라 아직도 여기십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돌려 교천을 쳐다보았다.

교천은 차갑게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그를 바라보는 혈천도마의 눈빛은 뜨거웠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지막 마음을 전했다.

“맞습니다. 사부님 때문이 아니라 제 죄책감을 줄이려고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살려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더 죄송합니다.”

교천의 눈빛이 꿈틀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은 제가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죄책감은 남은 생 동안에 안고 살겠습니다. 안고 가야 할 걸 버리려 해서 문제가 생겼던 거였지요.”

그렇게 사부라는 존재로는 마지막 인사라는 듯,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야 검무극의 물음에 대답했다.

“의미를 두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앞서 말은 목소리가 떨렸지만, 이어지는 말은 단호했다.

“이제부터 내 사제관계는 하나뿐이다.”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르신!’

이렇게 밀어붙인 이유가 있었다.

교천이 죽기 전에 이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 교천이 죽고 나면 혈천도마는 결코 조금 전에 했던 말을 하지 못했을 거다. 죽은 사람과의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으니까.

이렇게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도 과거의 상처에 얽히자 그곳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똑똑함과는 전혀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똑똑할수록 더 벗어나기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혈천도마도 검무극을 보며 옅게 웃었다.

‘고맙다.’

‘어르신, 어서 돌아가서 그 볕 잘 드는 창가에서 나란히 앉아 책 읽으시죠.’

검우진이 검무극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음을. 아버지도 혈천도마에게 마음의 상처가 남지 않기를 바라셨던 거다.

이제 홀가분한 표정으로 검우진이 적을 향했다.

남은 다섯 고수 중 한 백발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오.”

그러자 노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를 기억하는가?”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기억력이군. 자네가 아주 어렸을 때 봤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천마신교의 마인이었다.

혼마(混魔).

노인은 은퇴한 천마신교의 마인이었다. 대단한 실력을 지녔던 그는 교내의 여러 요직을 맡았다. 그리고 당시 교천과 친분이 깊은 인물이었다.

“긴히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네.”

검우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를 노린 일이란 걸 아셨소?”

잠시 사이를 두고 혼마가 대답했다.

“알고 있었네.”

검우진은 더는 그와 대화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이 배신은 교천의 것보다도 훨씬 질이 나빴으니까.

“그럼 굳이 나오실 필요 없소.”

혈천도마가 마음을 정리하자 검우진도 본격적인 정리를 시작했다.

검우진 앞으로 하나의 악귀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펼쳤던 인멸식의 악귀보다 더 무섭고, 더 강렬한 인상의 악귀였다.

스스스스스스슷.

악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굳이 나올 필요 없다고 말한 이유였다.

“거기서 같이 죽으시오.”

아버지의 마음에 자리한 사람은.

검우진의 대멸식이었다.

순식간에 분열을 마친 아버지의 악귀들.

그것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달라졌다.’

예전에 아버지가 대멸식을 보여주셨던 적이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대멸식과 자신의 대멸식이 격돌했었다.

사십사 대 사의 격돌.

그날 아버지의 악귀들에게 자신의 악귀들이 소멸했었다. 자신은 호신강기까지 끌어올리며 끝까지 맞섰고.

그때보다 지금 자신의 악귀들이 훨씬 강해졌지만,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악귀들은 그때보다 몸집이 더 커졌고, 훨씬 더 강력해 보였다. 그들이 뿜어내는 마기만 봐도 이전보다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구화마공이 십성 대성을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로 가고 있구나!’

검무극이 자신의 악귀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더 많이 먹고 더 커야겠다.’

그랬으니 혼마를 비롯한 남은 고수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어떠했겠는가?

우우우우우우.

나직한 울림과 함께 늘어선 악귀들이 뿜어내는 마기에 그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혼마는 지금 펼쳐진 무공을 자신들이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구화마공이다! 소교주 쪽으로!”

혼마가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남은 네 고수도 함께 움직였다.

벽이나 천장을 뚫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대멸식이 발휘되면 출현한 악귀들이 내뿜은 강력한 마기가 공간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힌 것처럼 악귀들이 늘어선 그 영역을 빠져나갈 수 없다.

혼마와 네 고수가 자리를 옮겼기에 검무극은 아버지가 대멸식을 중단하고 다시 방향을 바꿔 펼칠 거로 예상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펼쳐졌다.

스으으으윽.

늘어선 악귀들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 모습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펼치는 대멸식은 분열하고 곧장 밀어붙이는 것까지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멸식은 악귀들이 방향을 바꿨다.

검무극은 아버지가 처음에 그들이 피하기 전에 바로 밀어버리지 않은 이유가 이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이런 변화인데 정말이지 십이성 대성을 이룬다면 구화마공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엄청난 내공이 소모되고 있을 테지만.

자신을 향해 내민 악귀들의 검을 바라보며 혼마는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교천을 향했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요? 당신이 준비한 것을 발휘하시오.

날아든 전음에도 교천은 아무런 대답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반응에 혼마는 알 수 있었다. 교천은 애초에 자신들을 모두 소모품으로 쓰려고 했음을. 최대한 많은 내공을 소모하게 한 후, 자신이 마무리 지으려 했음을.

은퇴하고 홀로 살아가던 자신을 교천이 찾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자신을 보고 했던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나와 함께 이 무림을 가집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미친 말이냐고 일언지하 거절했어야 했다. 그대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교에 알리지는 않을 테니 그만 떠나라고 해야 했다.

―왜 우린 그런 꿈을 꾸면 안 되는 거요? 왜 그런 원대한 꿈은 그들만의 것이오?

그 말에 가슴이 설렜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복수심을 잘 이용하면,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보낼 수 있겠구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어차피 살 만큼 산 인생인데.

이 강력한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은퇴한 당시의 자신은 너무나 무료하고 따분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욕망은 물처럼 흘려보내야 할 나이에 불처럼 자신의 몸을 태웠다.

그리고 지금 혼마는 자신을 향해 늘어선 악귀들을 보며 꿈에서 깼다.

‘그를 이용한다 여겼지만 결국 이용당한 건 나였구나.’

교천은 그저 복수만이 전부였다. 모두를 다 희생시키더라도 교주의 내공을 소모하게 하고, 마지막에 자신이 나서서 복수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리라.

설마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 고작 복수로 끝낼까? 이들을 얼마나 어렵게 모았는데.

한데 그랬던 모양이다. 그는 늙은 욕망들을 긁어모은 복수의 화신이었을 뿐이다.

그걸 이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은 혼마였다.

이제 그가 믿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교주, 노기를 거두시오. 아들이 있는데 구화마공을 발휘할 생각은 아니시지 않소?”

검우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혼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그건 우리 아버지의 비정함을 모르시는 말씀인데.”

검무극의 말을 무시하며 혼마가 모두에게 말했다.

“소교주가 있는 한 절대 발출하지 못할 거네.”

네 명의 고수 중 반은 뒤를 경계하며 검무극과 혈천도마가 자신들을 공격할 것에 대비했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검무극 앞에 세웠다.

“이걸로도 못 막겠지만,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역시 어르신은 우리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아시는군요.”

아들이 있어도 발출할 거로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혈천도마의 반응에 혼마는 더욱 다급해졌다.

“교주, 구화마공을 회수하시게. 우리가 동시에 합공하면 소교주는 살아남지 못할 거네. 아들 생각을 해야지!”

하지만 상대는 협박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우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던 그 순간, 대멸식이 발휘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악귀들이 일제히 밀고 나왔다.

혼마는 물론이고 남은 고수들이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강기를 발출했다.

쇄애액! 쇄액! 쇄애애액!

퍼어억! 콰앙! 쾅! 꽝!

쏟아져 나간 강기가 악귀들과 충돌했다. 이들의 공격은 바위를 가루로 만들 위력이 담긴 공격이었다.

하지만 악귀들은 한차례 휘청거렸을 뿐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안 돼!”

혼마에게 악귀가 강타했다. 구화마공이 만들어낸 이 강력한 강기 덩어리를 그는 결코 막지 못했다.

퍼퍼퍼퍽!

혼마의 뼈와 살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른 네 고수도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었을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을 휘둘렀지만 부러졌고, 호신강기로 버텼지만 갈가리 찢겼다. 달아나려고 몸을 날렸지만, 마기에 끌려오며 산산조각이 났다.

콰콰콰콰콰콰콰!

그들 모두를 쓸어버린 악귀들이 그 뒤에 있는 검무극과 혈천도마를 향해 밀려들었다.

검무극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대멸식의 악귀들을 그대로 선 채 지켜보았다.

무서운 악귀들이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마기에 마공을 익힌 자신조차 숨이 막힐 정도였다.

‘대멸식에 당하는 기분이 이런 느낌이구나.’

콰아아아아아아!

밀려든 악귀들이 두 사람이 서 있던 뒤쪽 벽을 모두 뚫고 지나갔다.

멈춰선 하나의 악귀.

검무극과 혈천도마 앞에 악귀가 멈춰 있었다.

앞에 세운 멸천대도보다 더 큰 악귀였다. 아버지는 아들과 혈천도마가 있는 자리의 악귀만을 멈춰 세운 것이다.

혈천도마는 악귀를 보며 정중히 포권하며 구화마공에 예를 갖췄다.

검무극은 말없이 앞에 선 악귀를 쳐다보았다.

악귀는 무섭고도 차가운 눈빛으로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악귀는 이제 막 지옥에서 나온 것처럼 생생했다.

원래는 대마벽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마음을 바꿔 먹었다. 설마 아들을 죽이기야 하시겠어? 아버지를 믿었다.

스스스.

도도하게 서 있던 악귀가 서서히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악귀가 눈을 내리깔면서 쓱 쳐다본다는 착각이 들었다.

악귀가 사라지자 비로소 눈앞에 장내의 모습이 펼쳐졌다.

죽음이 남긴 고요함 속에 아직 식지 않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있던 열두 명의 고수는 검우진에게 모두 죽었다. 이젠 애초에 몇 명이었는지 알아볼 수도 없다.

이제 남은 사람은 교천뿐이었다.

“크하하하하하!”

교천이 웃었다. 피웅덩이에 비친 그의 모습은 미친놈처럼 보였다. 모든 걸 다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검우진의 시선이 교천을 향했다. 뒤에 있던 검무극과 혈천도마 역시 그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가 교천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정녕 모르셨습니까?”

웃음을 뚝 그친 교천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빛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우진이 혈천도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끝까지 내게 맡기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비단 교천이 마지막 한 수로 뭘 준비했느냐, 그 위험성을 떠나서 혈천도마가 또 사부를 죽여야 하는 운명을 겪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임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아버지는 혈천도마를 위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검우진은 검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교천에게 걸어갔다.

마지막까지 혈천도마를 생각했다. 고이 시체를 남겨서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제자에게 남길 말씀은 없소?”

교천이 혈천도마를 힐끗 쳐다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아들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

말이 끝나는 그 순간.

교천의 신형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벽도 탁자도, 의자도, 바닥의 시체들도.

퍽! 퍽! 퍽! 퍽!

검무극과 혈천도마까지도. 모두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는 듯.

검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환영술!”

모든 게 사라지자 그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이곳은 바로 천마신교가 있는 대천산이었다.

검우진은 알 수 있었다. 그날 사냥을 하던 그곳임을.

주변뿐만 아니라 자신도 바뀌었다. 차고 있는 검은 천마검이 아니었다. 검을 뽑아 검날에 얼굴을 비춰보니 젊은 시절의 자신이었다. 아직 구화마공을 익히기 전의 자신.

바로 그때였다.

“우진아.”

깜짝 놀란 검우진이 돌아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 젊은 시절의 형이 서 있었다.

그를 보는 검우진의 눈빛이 떨렸다. 정말 그날의 모습으로 형이 서 있었다. 그때는 그토록 미웠는데. 세월이 지나도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 형이었다. 오히려 형의 흔적은 더욱 깊어만 졌다.

형은 그날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너도 알고 있지 않았냐?”

형에게서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날은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자신을 죽이려는 형을 보자 화가 났었는데, 오늘 형을 보는 마음은 달랐다.

“그때는 그런 줄 알았지.”

그리고 처음으로 검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을 잘 드러냈던 그 시절의 자신처럼, 검우진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방법이 있었을 거야, 형.”

쉽지 않은 길이겠지만, 분명 방법이 있었으리라. 아들이 직접 그 어려운 일을 해내며 보여줬으니까.

“다른 길은 없다. 너도, 나도 절대 양보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때의 젊은 자신은 찾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아들이 해낸 것을 다 지켜본 지금이라면.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등장했다.

“이공자,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오.”

대도를 든 교천이었다. 폭삭 늙어버린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한창 야망에 불타오르던 도마 시절의 그였다.

하지만 그날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는 듯, 교천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날은 제자 놈의 배신으로 당신을 죽이지 못했지만, 오늘은 다를 거요.”

교천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날도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 했었다.

그도 기억하고 자신도 기억하는 그날이었기에, 이 환영술은 이렇게 생생하게 구현된 것이리라.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

“확실히 오늘은 다르군요.”

그곳으로 또 다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자 대신 이렇게 아들이 왔으니까요.”

놀랍게도 등장한 이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구화마공 때문인지 저도 이 환영 속에 들어왔습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마주 보며 섰다.

두 사람이 뜨거운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뵙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말없이 아들을 쳐다보는 검우진의 눈빛은 더없이 깊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검우진의 형을 향했다.

“큰아버지께서는 저렇게 생기셨군요.”

검무극이 그를 보며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무극입니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실제 사람인 것처럼 반응은 생생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린 어떤 환영술에 빠진 겁니까?”

검우진은 자신이 어떤 환영술에 빠졌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환영심마술(幻影心魔術)이란 환영술이다. 대상의 마음에 가장 크고 깊게 자리 잡은 이를 이용해서 걸려든 이를 죽이는 무공이다.”

다시 말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한 사람은 형이었군요.”

환영술은 사파 계열이 대부분이지만, 이 환영심마술은 정파에서 전해오는 무공이었다. 지존마공인 구화마공 앞에서는 모든 마공이 무력하기에, 정파의 무공을 펼친 것이다. 복수의 마지막을 환영심마술로 마무리 지으려고 평생을 수련했을 거다.

“한데 저라는 변수를 미처 몰랐군요.”

검무극이 검을 뽑아 들며 검우진 옆으로 걸어갔다.

“아버지, 아쉬우시겠지만 과거는 이만 잊으시죠.”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저벅.

그가 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환영 속에서는 오직 그의 걸음 소리만 들렸다.

형도 그날처럼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옆에서 교천도 함께 걸어 나왔다.

검우진이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던 그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검우진이 빛처럼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쉬이이이익.

푸우욱!

가슴을 관통당하며 울컥 피를 토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검우진이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서며 뒤에 있던 아들을 찌른 것이다.

“……아버지?”

불운을 안고 살아온 남자.

검무극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아들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왜 저를?”

푸우욱.

하지만 검은 더욱 깊이 검무극에게 박혔다. 등 뒤로 튀어나온 검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당신이 내 아들에 대해 잘 알았다면, 당했을 수도 있는 한 수였소.”

그러자 검날이 박힌 상처에서 푸른색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작된 분열.

찌이이이익.

검무극의 얼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점점 더 금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더니 거미줄처럼 얼굴과 목, 팔과 몸까지 번져 나갔다.

쏴아아아아!

금이 간 곳에서 푸른빛이 일제히 쏟아져나오던 그 순간,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이 간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교천이었다.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던 금 뒤로 자글자글한 주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스스스스.

뒤이어, 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검우진이었다. 젊은 검우진의 모습은 사라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교천을 관통한 검도 천마검으로 모습이 바뀌었다.

교천의 기침과 함께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사라졌다.

쿨럭, 쿨럭.

이어지는 기침에 이번에는 바위와 새, 하늘이 사라졌다. 뒤에서 공격하려다 멈춰선 그 시절의 교천이 사라졌다.

그리고 검우진의 형이 사라지려고 했다.

그때 검우진은 교천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한 줄기 내력을 주입했다.

교천의 얼굴이 살짝 편안해지면서 사라지려던 형이 그대로 서 있었다.

검우진은 말없이 형을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과 교천의 기억, 그리고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술 속의 형이었지만.

이미 젊은 시절의 모습에서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검우진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 그때처럼 아쉬운 표정이 깃들었다.

“크에에에엑.”

교천이 참았던 피를 토해내면서 형이 사라졌다.

검우진은 형이 사라지는 모습을 깊은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환영술이 깨지며 주위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검우진과 교천은 원래 있던 곳에 서 있었다.

원래 있던 자리에 검무극과 혈천도마, 그리고 휘가 서 있었다.

조금 전, 갑자기 검우진이 사라졌을 때, 교천의 사술에 빠져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휘가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검우진은 사라진 후였다. 아무리 교주의 실력을 믿어도 호위였기에 걱정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검무극은 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아버지는 누구도 해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교천의 마지막 한 수였음을 알았기에 세 사람은 긴장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다렸다.

물론 검무극은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비장의 한 수라지만 아버지와 단둘이 가고 싶을까요?”

그 말에 혈천도마와 휘는 옅게 웃었다.

그리고 지금 교주는 그 기대에 부응하며 당당히 모습을 보인 것이다.

교천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왈칵 흘러내렸다.

“……나인지 어떻게 알았나?”

그 상황에서 검무극으로 위장하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거로 여겼다.

이 환영심마술의 파훼법은 바로 검무극.

더구나 그 관계는 아들. 절대 찾지 못할 거로 여겼는데. 등 뒤에서 암습하려던 순간, 그가 먼저 자신을 찌른 것이다.

검우진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아까 환영심마술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마음에 가장 크고 깊게 자리한 사람을 이용해서 죽이는 것이라고.

“난 그게… 자네 형인 줄 알았는데.”

검우진이 형을 가장 크게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교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교주 마음에 가장 크고 깊게 자리한 사람은 아들이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검우진은 스스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확신하며 아들의 가슴에 검을 찌를 수 있었을 것이고.

교천의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의 눈빛이 떨렸다. 감격보다 먼저 놀라고 당황했다.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크게 자리한 사람이 나라고?’

분명 자신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의 마음에 자신이 가장 클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아버지!’

회귀하고 나서 아버지에게 여러 감정을 느꼈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다.

반면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교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진지하면 어색해진다는 생각에 검무극이 너스레를 떨었다.

“당연히 저죠! 아버지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면 절반보다 조금 더 큰 크기로 이 둘째 아들이 있을 것이고요, 나머지 절반에서 다시 본교가 절반, 그 나머지에서 형 조금, 마존들 조금, 구화마공 조금, 아버지 꿈 조금, 그리고 낚시 조금. 이렇게 있을 겁니다.”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에게 등을 돌린 상태라서 그 미소를 볼 수는 없었다.

검우진이 교천에게 덧붙여 말했다.

“진짜 저 녀석이었다면, 아까 당신이 했던 말보다 열 배는 더 했을 거요. 그리고 검을 뽑아 들어 상대를 죽여서 과거를 어서 잊자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테고. 아마 내 형에게도…… 할 이야기가 있었겠지.”

혈천도마는 교주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본심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교주는 아들이 형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말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보다 더 자신의 심정을 잘 설명해 줄 수 있었을 거라고.

또한 자신이 어떻게 형을 잊어야 하는지까지, 아들이 말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신이었다면 검무극에게 그런 기대를 했을 테니까.

혈천도마가 천천히 교천 옆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그는 검에 관통당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검을 뽑으면 그대로 절명할 것이기에, 검우진은 검을 뽑지 않고 혈천도마와 작별 시간을 주었다.

“사부.”

교천이 생기를 잃어가는 눈빛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사부를 바라보는 혈천도마의 눈빛에 아쉬움과 서글픔이 가득했다.

혈천도마는 앞서 대화를 통해 어떤 환영술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 교주와 자신의 깊은 상처를 이용한 한 수.

“사부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환영술이었으니 무서운 것이었을 겁니다. 한데도 실패한 건 사부나 저나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겠지요.”

교천의 깊은 주름이 힘없이 꿈틀거렸다.

“사부, 다음 생에서는 좋은 관계로 다시 만납시다.”

혈천도마의 진심이었다. 이번에 그가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다음 생에 사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이번 생에서는 오늘 이후로 사부를 잊을 겁니다. 그러니 다음 생에 우리 만납시다. 후계자 싸움 같은 일 없는 어디 시골 마을 작은 무관의 사제지간으로 만납시다. 그땐 정말 잘 모시겠습니다. 그땐 우리도 자식도 낳고 잘 키워봅시다.”

교천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번에 혈천도마를 만난 후 내내 느꼈던 감정처럼, 이 제자는 진정으로 자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교천이 피를 토해내는 기침 끝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끝까지 가식은.”

그 말을 끝으로 교천은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졌다.

최후의 순간 사부의 진심이 어땠는지 모를 일이지만,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혈천도마는 마음이 편해졌다.

“지나고 보니 한순간이지 않습니까?”

혈천도마는 떨리는 손으로 사부의 눈을 감겨주었다.

“지난 원한은 내려놓으시고, 부디 영면(永眠)하시기를.”

검우진이 천천히 검을 뽑았고, 교천은 피를 흩뿌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혈천도마가 그의 몸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눕혔다.

혈천도마는 마지막까지 도리를 다했다. 장작을 가져와 쌓고 사부를 태웠다.

“아무도 찾지 않을 무덤이 될 테니, 차라리 훨훨 하늘로 날아가십시오.”

검무극과 검우진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를 위해서였지만, 혈천도마에겐 평생을 두고 사부를 배신한 일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순순히 그 상처를 가슴에 새긴 남자, 스스로 불운을 안고 살아온 이 남자가 바로 혈천도마다.

이번 일을 통해 아버지도 아셨을 것이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이 남았는지. 이번 일로 두 분의 관계는 또 달라지리라.

혈천도마는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되었음이 느껴졌다.

그럼 아버지는?

검무극은 이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시체는 묻어도 마음의 상처는 묻지 마라.

이런 신념을 지닌 그였으니까.

“아버지, 그 환영 속에서 큰아버지를 보셨습니까?”

검우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셨습니까?”

처음 회귀했을 때 이 질문을 했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았을 거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돌아서 버리셨겠지. 더구나 형과 관련된 물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말.

“오랜만에 보니 좋았다.”

이 순간 검무극은 느꼈다. 아버지가 느끼는 깊은 아쉬움을.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피를 흘리지 않는 후계 싸움을 원하신 것도 바로 이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도 형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리라.

“아마 큰아버지께서도 아버지를 봐서 좋았을 겁니다.”

검우진이 아들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겁니다. 동생, 너무 잘하고 있다. 네가 교를 이끌어서 다행이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형 보면 알잖아요? 아버지 장남요. 이 멋진 장남들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아, 저도 함께 환영술 속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큰아버지 뵙고 드릴 말씀이 정말 많았는데.”

그래, 녀석이라면 그곳에서도 이렇게 말이 많았겠지. 이 수다를 어찌 흉내 낼 수 있었으랴.

“참, 그럼 아버지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 겁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더욱 안타까워했다.

“아! 젊은 시절 아버지를 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저의 이 잘생긴 얼굴로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정면 승부를 냈어야죠. 구화마공은 안 붙어도 그건 붙었어야 했는데!”

이 부분에서도 알아차렸다. 진짜 아들이었다면 자신의 젊은 시절 외모를 두고 얼마나 말을 많이 했을지 상상이 되었으니까.

혈천도마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부러움을 느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검무극이었다.

“부럽죠? 이런 아들 있으면 좋겠죠?”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아니었다. 앞서 사부에게 우리도 자식 낳고 살자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해버렸으니까.

검무극과 둘만 있었다면 하나도 안 부럽다, 가족이 원수다, 그렇게 대응했을 텐데. 차마 교주가 있는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부러워 마십시오. 어르신께는 다른 자식이 있잖습니까?”

“다른 자식?”

검무극이 내공을 실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 이쪽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왔다.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은 바로 서대룡이었다. 멀리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그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서대룡은 검우진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난 후,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오늘만큼은 교주보다 사부를 보는 것이 더 떨리는 그였다.

이미 표정에 서대룡의 마음이 다 담겨 있었다.

“……사부님.”

혈천도마를 부르는 떨리는 목소리로도 사부를 얼마나 걱정했는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에 끌어들인 내가 원망스럽지 않느냐?”

사부와의 일에 휘말리면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불러야 했지만, 어떻게든 지켜줄 생각이었다. 이후에는 다행히 검무극과 교주가 왔기에 서대룡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혈천도마의 물음에 서대룡이 대답했다.

“이 일이 어찌 사부님이 끌어들인 것이겠습니까? 저들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부님은 아쉽지 않으십니까? 제자가 와서 척척 알아서 해결하고. 사부님, 다 끝났습니다. 그런 유능한 제자가 아니라 저처럼 소심하고 겁많은 제자라서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무극은 느꼈다. 전혀 다른 저 둘이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서 각주, 그거 못 들으셨겠소.”

아버지 앞이기에 서대룡을 각주로 대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마 어르신께서 이렇게 선언하셨소. 이제 내 사제관계는 하나뿐이다.”

순간 서대룡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반대로 서대룡의 일도 혈천도마에게 전해주었다.

“앞서 만났을 때 서 각주가 그랬습니다. 사부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기꺼이 위험한 미끼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래서 검무극이 좋다. 꼭 전해줬으면 하는 건, 어김없이 이렇게 전해줬으니까.

무뚝뚝한 사부가 뭐라 말해주진 않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한 것으로 충분했다.

그때 혈천도마가 말했다.

“앞으로 위험한 일이 있으면 소교주 시키거라.”

놀란 서대룡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농담에 담긴 사부의 애정을 느꼈기에 서대룡은 날아갈 듯 기뻤다.

“들으셨죠? 분명 들으셨죠? 사부님의 공식 명령입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듯 말했다.

“아버지도 들으셨죠? 그럼 말씀해 주셔야죠. 내 자식에게 그게 무슨 말인가? 앞으로 위험한 일은 자네와 자네 제자가 다 맡게!”

검우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언제나 여러 뜻을 지닌 그 비웃음이 오늘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도 고생많았다.

그랬기에 오늘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가장 멋진 비웃음이었다.

아버지가 그곳을 걸어 나갔다. 그 뒤로 혈천도마가 뒤따라 걸었다.

아버지도, 혈천도마도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검무극은 잠시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원래 한걸음 차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뒤따라 걸었는데, 아버지가 발걸음을 늦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며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지난 세월 내내 하지 않았던 그날의 일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회귀한 후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 그가 그었던 선이 생각났다.

교주님이 아끼는 정도라며 그었던 그 구 대 일의 선이. 이런 과거를 지녔던 두 사람이었으니.

‘그때 어르신의 그 선은 정확했습니다.’

마지막 점을 쳐봐도 되겠소?

아버지와 혈천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통천각 무인이 와서 보고했다.

“운강파 사람들의 행방을 찾아냈고, 통천각주의 명으로 구출 작전에 마군들이 투입되었습니다.”

교천과 싸웠던 이곳이 바로 운강파다. 다행히 그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다.

검무극이 통천각 무인에게 말했다.

“멸마대주에게 기별해서 그곳에서 보자고 전하게.”

“네! 알겠습니다.”

떠나기 전에 친구 얼굴은 보고 가야지.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진하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통천각 무인이 경쾌한 경신술로 사라지자 옆에서 보고를 듣고 있던 서대룡이 기뻐했다.

“다행입니다.”

“이 사람들은 네가 찾아낸 거다.”

마지막에 서대룡이 뽑은 두 문파가 봉산검문과 운강파였다. 둘 중 도저히 못 고르겠다고 했는데, 검무극이 봉산검문을 골랐다. 한데 그쪽은 시간을 끌기 위한 함정이었고, 이곳 운강파에서 일이 벌어졌다.

“역시! 황천각 수석 입학의 위력이란!”

내 칭찬에 가슴을 펴고 으스댈 법도 했는데, 서대룡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전했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뭐가?”

“그냥 전부 다요.”

사부와 단둘이 만났다면 오늘 같은 멋진 재회가 이뤄졌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색하고 서먹한, 그래서 속마음은 전혀 전하지 못했을 거다.

“그 고마움, 전부 적어둬! 나중 돼봐라. 그 좋은 머리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머리로 바뀔 테니까. 아, 그때 소교주님이 그 말씀을 해주셨다고요? 제가 직접 한 것 같은데. 왜곡된 기억으로 날 펄쩍 뛰게 할 테지. 아니다, 아니다. 어차피 나도 기억 못 할 거다. 그러니 꼼꼼하게 빠짐없이 다 적어둬.”

“아예 책으로 만들어서 대대손손 남기겠습니다.”

서대룡의 마음에 미래의 모습이 그려졌다.

손주들을 무릎에 앉히고 오늘 일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쩌면 그 손주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또 교주님 이야기인가요?

그럴 수밖에 없다. 그 고마움이 산처럼 쌓여 있으니.

당장 오늘 일도 그렇다. 안가에서 기다리라고 했어도 되었는데 검무극은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왔다.

“사부님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게 해주려고 데려와 주신 것도 고맙고.”

“그래서 데려온 거 아닌데?”

“네? 그럼 왜 데려오신 겁니까?”

“기왕이면 모든 은원이 해결되는 곳에서 만나야지. 안가에서 기다렸다 뵙는 거와 여기서 뵙는 건 느낌이 많이 달랐을 거다. 무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니까.”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핏물이 흥건한 이곳에서 사부를 뵈었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함께 못 싸웠어도요?”

무인으로서의 이런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넌 함께 싸운 거다. 괜히 사부를 돕겠다고 나서서 인질이 되어 민폐가 되지 않는 것만 해도, 함께 잘 싸운 거지. 네가 똑똑해서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 게 좋다.”

서대룡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 소교주는 전생에 대체 자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 걸까?

물론, 얼굴에서부터 표가 나는 이 서대룡의 감동을 그냥 두고 볼 검무극이 아니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네가 뛰어들 거잖아? 그 먼 저승길 너 없이 심심해서 어떻게 가냐?”

말만 생색쟁이지, 참 생색내는 것 싫어하는 소교주님이시지.

그런 마음을 감추며 서대룡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속셈이 있으셨군요. 저는요, 저기 멀리서 숨어 있으라고 해주신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래, 길게 살아남는 게 지상과제인 사람이라고요! 다행히 오늘 꿈을 이뤘네요. 이제 그냥 오른팔 아닙니다. 위험한 일 안 해도 되는 오른팔입니다.”

혈천도마가 위험한 일은 소교주에게 맡기라는 말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냐? 그 위험한 일 내게 맡기라고 했으니, 오른팔인 너도 몸통 따라서 와야 할 텐데.”

“아아, 또 그렇게 되나요?”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자, 여전히 위험한 오른팔아. 가자.”

서대룡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검무극이 아버지와 혈천도마의 뒷모습을 쳐다보듯, 서대룡은 말없이 검무극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만날 너스레 떨고, 말 많은 소교주지만,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를 알면 알수록 더 그렇다.

‘오늘 소교주님이 돌아가셨으면 아직 실력이 부족해 복수는 못 해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가시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으셨겠지요. 우리 저승길 건네주는 뱃사공이 시끄럽다며 귀를 막았겠지요.’

* * *

운강파의 문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사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참담했다.

운강파에 고수들이 난입해서 자신과 혈육들, 그리고 제자들을 모두 제압해서 이곳 외진 창고에 가뒀다.

자신은 중경에서 이름난 고수였지만, 습격한 고수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습격한 이들 중에 알아본 사람이 둘 있었다. 그를 절망하게 만든 둘이었다.

얼굴이 시뻘건 적안공자.

몸에 여인의 모습을 문신한 사람은 색혼금강.

특히 색혼금강을 보자 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놈이 얼마나 많은 여인을 간살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내와 딸은 물론이고, 가문에 여인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런 악독한 자들이 무더기로 몰려온 것이다.

‘결국 비참하게 다 죽게 될 거다.’

그렇게 참담한 심정이었을 때.

밖에서 무엇인가 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는 비명.

꽈드드드득.

거대한 철문이 뜯겨 나가며 누군가 문을 가득 채웠다.

그 얼굴을 봤을 때, 문주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덩치가 큰 무인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얼굴이 무서운 무인도 처음이었다.

그 덩치 무인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구해드리러 왔소. 모두 나오시오.”

생긴 건 자신들을 붙잡아온 악당들보다 더 악당처럼 생겼는데.

그들이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정말 감사하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은공들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해도, 이 덩치 큰 무인들은 조금만 기다리라고 할 뿐, 자신들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있을 때, 중경지단주 주궐이 무림맹 무인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운강문주는 아는 얼굴을 보자 완전히 안도했다.

운강문주와 인사를 나눈 후 주궐이 장호에게 다가왔다.

“또 그대들의 도움을 받았소.”

장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 건 비단 도움을 받아서만이 아니었다.

이제 주궐은 이번 일의 배후가 천마신교가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봉산검문에서 청운신협이 멸천마도식을 익히고 있었고, 또한 그가 이번 일을 계획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천마신교에 대한 오해를 푼 것이다.

“그대들을 오해해서 미안했소.”

그리고 앞서 지단이 공격받았을 때, 자신을 구해준 이 덩치 무인들이 천마신교의 마군들임을 진하군에게 들었다.

마교를 정말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였지만, 장호를 향한 눈빛만큼은 부드러웠다. 자신과 수하들의 목숨을 구해준 건 물론이고, 운강파의 멸문까지 막아주었으니까.

“나야 명령에 따르는 사람에 불과하오.”

장호는 전혀 생색내지 않았기에 주궐은 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을 오해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놀랍게도 이런 사람과 교분을 나눠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인과 정파 무인 사이에 우정이 가능할까?

진하군이 마교 소교주와 우정을 나누는 걸 정말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마치 그 못마땅함에 벌이라도 내리려는 듯, 이런 마음이 든 것이다.

“언젠가 보답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소.”

주궐은 진심으로 말했고, 장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연스럽게 주궐의 시선이 저 멀리 건물 지붕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향했다.

그곳에 검무극과 진하군이 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무극은 그에게 이번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있는 그대로 다 말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진하군은 이번 일이 오랜 은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새삼 사람의 원한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실감했다.

“이번 일로 멸문한 가문에 대해서는 본교를 대신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겠네.”

“자네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그래도 자네 덕분에 저들은 살 수 있었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운강파는 멸문했을 것이고, 만약 이 일로 양쪽의 갈등이 깊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랬기에 비단 구한 것은 운강파만이 아니었다.

“역시 자네가 해냈군.”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안가에서 소식을 기다리면서 검무극이라면 해결해 내리라 믿었다.

“자네가 배려해 준 덕분이네. 원칙을 앞세워 꽉 막힌 사람처럼 굴었다면 이번 일은 몇 배는 더 어려웠겠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원칙을 앞세웠을 거다. 그랬다면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의 계획대로 놀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네와 지내려면 꽉 막혀선 쉽지 않겠지.”

“그럼. 내가 어떻게든 다 뚫어버릴 테니까.”

진하군은 느낀다. 만남이 계속될 때마다 검무극과의 관계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음을. 그를 믿었기에 마인들을 중경지단에 들였고, 순순히 안가로 들어가기도 했고.

“이제 다 끝난 건가?”

“도마께서 마지막 일을 처리하고 계시네. 그 일만 끝나면 바로 떠날 거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조만간에 후기지수들끼리 모여서 얼굴 보자고.”

훌쩍 몸을 날린 검무극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이별이 아쉽지 않았다.

진하군은 검무극이 날아간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마군들을 보내고 돌아선 주궐과 눈이 마주쳤다.

검무극과 함께 있는 모습에 매번 인상을 쓰던 그의 표정이 오늘따라 온화했다.

‘이유가 뭐든 그렇게 변하시오.’

마군들의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천마신교의 힘도 점점 커지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지지 않으려면 우리도 계속 변해야 합니다.’

* * *

점쟁이 노인 앞으로 혈천도마가 앉았다.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오지 말아야 할 사람이 온 것이다.

“알려준 곳이 잘못되었던데.”

점쟁이 노인은 혈천도마에게 봉산검문으로 가보라고 했다. 하지만 교천은 운강파에서 일을 벌이고 있었다.

“혹시 사부를 만나셨소?”

점쟁이 노인의 물음에 혈천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를 만나고도 무사히 자신 앞에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는 이번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

“결자해지했소.”

매듭을 푼 사람이 교천이었어야 했는데.

아무리 천마가 강해도 그들 열둘을 상대하고, 또 교천의 마지막 한 수까지 피할 수는 없었을 거라 믿었는데.

점쟁이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점괘를 잘못 해석했군.”

일전에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 자신의 점괘를 보았다.

그때 뽑은 점괘는 살자는 살고 죽을 자는 죽는다였다. 자신이 사는 쪽이라 여겼는데.

노인은 최후를 예감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 일을 꾸미며 수없이 많은 점을 봤는데 하나가 딱 걸렸소. 아마 이번 일이 실패한 것도 크게 봐선 그 때문일 거요.”

“뭐요?”

잠시 사이를 두고 노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당신네 소교주.”

점쟁이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점괘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었지. 어떨 때는 무림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처럼도 나왔다가, 무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도 나왔다가, 혈사를 일으키는 대살성이 되기도 했다가, 무림을 구하는 대종사의 점괘가 나오기도 하고. 점을 칠 때마다 그의 미래는 너무나 달랐소. 점을 친 이래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

그가 혈천도마에게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소교주의 미래에 대해 점을 쳐봐도 되겠소?”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쟁이 노인이 대나무 막대기가 든 점통을 흔들었다. 마지막임을 알았기에 노인의 손놀림이 신중했다.

그렇게 하나의 점괘가 튀어나왔다.

대나무에 적힌 글자를 본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천하일통(天下一統).

잠시 멍하게 있던 점쟁이 노인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은 천명일지니.”

점쟁이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점통을 혈천도마에게 기울였다.

푸아아아아앙!

통에서 암기가 발출되며 쏘아졌다. 그건 점통이자 동시에 암기였던 것이다. 이 거리에서는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인의 독문암기였다.

챙챙챙챙!

하지만 암기는 무엇인가에 막혀 모두 튀어 나갔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세워 막은 것이다.

쉬이이익!

날아든 대도가 점쟁이 노인의 가슴을 크게 베었다.

뼈와 살이 갈라지며 점쟁이 노인이 허물어졌다. 작정하고 기습했다면 이보다 막기가 훨씬 어려웠을 텐데, 이번 공격은 죽여달라는 공격이었다.

“천명을 받은 사람 때문에 실패한 거니…… 나는 후회하지 않소.”

점쟁이 노인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뒀다.

혈천도마는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막대기를 주워들었다. 혈천도마는 말없이 그걸 내려다보다가 열양진기로 태워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내 진기를 거두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것을 품에 넣었다.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이 도착했다.

“아, 끝났습니까? 점이라도 한 번 보려고 달려왔는데.”

“엉터리 점쟁이에게 무슨 점이냐?”

혈천도마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르신, 같이 가요!”

검무극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점쟁이 노인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검무극은 혈천도마에게서 평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참, 그리고 본교에 혼자 가실 생각 마세요. 돌아갈 때는 다 함께 가는 겁니다.”

아버지가 불편하다고 혼자 훌쩍 가버릴까 봐 하는 말이었다. 혈천도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함께 갈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때 함께 가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아, 좋습니다. 돌아갈 때는 더욱 즐거운 일이 많을 겁니다.”

본교로 돌아가는 여정에 혈천도마와 서대룡이 함께 하게 되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듯, 두 사람 역시 그런 기회가 되기를 바랐다.

“아, 그리고 기대하십시오. 진짜 대결이 남아 있거든요.”

“무슨 대결?”

혈천도마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나중에 보면 안다는 듯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해주신 생선 요리 안 드셔보셨죠?”

내기는 이겨야지요.

아침 일찍 휘는 말을 살피고 마차를 점검한 후 짐을 실었다. 오늘 드디어 본교로 돌아가는 날이다.

타고 온 마차에 혈천도마와 서대룡도 함께 타고 가기로 했다. 큰 마차였기에 자리는 충분했는데, 문제는 서대룡이었다.

“저는 마부석에 타고 가면 되죠?”

“황천각주인데, 안에 함께 타야지.”

검무극의 대답에 서대룡은 흠칫했다. 교주님, 그리고 사부님과 함께 그 먼 길을 간다?

“가는 동안 십 년은 늙을 거예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눈 한 번 못 붙이고. 제발 마부석에서 가게 해주세요. 제발요!”

함께 데리고 타야 녀석을 놀릴 수 있겠지만, 서대룡은 너무 간절했다.

“사실 허락은 내게 받을 게 아니지.”

검무극이 서대룡을 데리고 휘를 찾았다.

“우리 황천각주님을 구해주실 분은 아저씨밖에 없습니다.”

그렇게만 말했음에도 휘는 무슨 부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휘가 서대룡에게 말했다.

“마부석이 생각보다 더 불편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교대로 몰 테니, 그때는 편히 쉬십시오.”

서대룡이 모는 마차라? 검무극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네가 몰다가 마차가 덜컹하면? 마침 그때 아버지가 차를 마시다가 확 얼굴에 쏟아지면? 덜컹하면 네 목은 댕강이야! 감당할 수 있겠어?”

농담인 줄 알면서도 서대룡은 심각해졌다.

휘가 서대룡을 안심시켰다.

“아무리 덜컹해도 차가 교주님 얼굴에 쏟아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차 안에 독액을 한가득 쏟아부어도, 한 방울도 젖지 않고 걸어 나올 교주였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서대룡이 몰 일도 없다. 교주가 탄 마차의 고삐를 남에게 맡길 일은 없었으니까.

“좋습니다. 함께 가시죠.”

휘가 허락하자 서대룡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는 사이 검우진과 혈천도마가 밖으로 나왔다.

먼저 검우진이 마차에 올라탔고, 혈천도마가 뒤따랐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고, 검무극은 혈천도마 옆에 앉았다.

마부석에서 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차가 안가를 떠나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셨고, 혈천도마는 책을 읽었다.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반대쪽 창문으로 몸을 빼냈다. 불어온 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렸다.

“아저씨, 아시죠? 우리 천천히 돌아가는 겁니다!”

* * *

강가에 마차가 멈춰 섰을 때 검무극은 아껴두었던 말을 혈천도마에게 전했다.

“그 대결은 바로 낚시 대결입니다.”

“낚시라고?”

교주가 해준 생선 요리 먹어봤냐는 말에 설마 했는데, 정말 낚시 대결일 줄이야?

“진 사람이 요리해 주는 내기입니다. 이번이 세 번째 대결이죠.”

“앞에는 누가 이겼나?”

“전 아버지의 세 번째 생선 요리가 너무 궁금합니다.”

혈천도마가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아니, 아들에게 두 번이나 지셨소?’ 하는 눈빛이었다.

검우진이 의기양양한 아들과 그런 걸 지고 있소, 하는 혈천도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없이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검우진이 마차에서 낚싯대를 가지고 나왔다. 거처에서 내내 만들었던 바로 그 낚싯대다.

“아버지 정성이 담긴 낚싯대죠. 동해어옹의 독문병기보다 더 가치 있는 놈입니다.”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가 슬쩍 아버지를 도발했다.

“낚시는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게 많은 법인데.”

과연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한쪽으로 올라갔다.

“어르신도 낚시를 해보셨습니까?”

혈천도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소싯적에 고기 좀 낚았던 몸이지.”

이 도발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어떻습니까? 어르신도 대결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일등이라 상관없습니다만.”

아버지 자존심에 그냥 있을 리가 있겠는가?

“나도 상관없다.”

검무극이 서대룡까지 끼워 넣었다.

“기왕 하는 거, 넷이서 대결하죠. 부자지간, 사제지간, 과연 누가 꼴등을 할 것인가?”

아버지와 대결하면서 여러 개를 만들었기에 낚싯대는 충분했다.

검무극과 검우진이 먼저 낚싯대를 들고 강가로 걸어갔다.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강을 따라 피어 있었고, 햇살 조각들을 반짝이며 강물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아버지와 낚시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검무극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새 요리법은 준비해 두셨습니까?”

검무극의 도발로 대결이 시작되었다.

휘이이익.

낚싯줄을 던지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더없이 부드럽고 유연했다.

낚싯줄이 물 위를 곧게 날아가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정말이지 낚싯줄을 던지는 모습만 봐도 극상승의 무공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낚시는 무공이 아니지요, 아버지. 제 평생 낚았던 고기들을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검무극도 본격적으로 낚시를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낚시하는 모습을 보자 혈천도마도 마음이 끓어올랐다. 승부욕이라면 누구 못지않은 그였다.

‘교주, 다른 것도 아니고, 뭔 애에게 낚시를 지고 있소? 내가 실력을 보여주겠소.’

낚시만큼은 자신감이 넘치는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데리고 강가로 걸어갔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자리가 있다.”

“교주님과 소교주님 자리는 어떻습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 죽일 줄이나 알지 저 둘이 낚시에 대해 뭘 알겠느냐? 가만 보자.”

혈천도마가 전문가의 눈빛으로 강가를 살폈다.

“저기다. 물살이 느리고, 돌이나 바위, 수초가 있고 나무 아래 그늘진 곳. 이런 곳이 잘 잡히지.”

혈천도마가 커다란 버드나무가 휘어진 아래에 자리 잡고 섰다.

그는 제자에게도 자리를 찾아주었다.

“너는 저쪽에서 하거라. 내 자리만큼이나 좋은 자리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서대룡의 자리는 혈천도마와 검무극 사이였다.

서대룡이 어설픈 동작으로 낚싯줄을 던지며 말했다.

“저는 낚시가 태어나 처음입니다. 제가 아는 건, 낚시의 진정한 묘미는 기다림이다! 세월을 낚는 인내심이다!”

“누가 그래? 낚시의 묘미는 낚아 올릴 때의 손맛이다! 그 손맛 하나 보고 종일 기다릴 수 있는 거다! 알겠느냐?”

“네, 사부님!”

그렇게 강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그곳에 네 사람이 낚시를 시작했다.

멀찌감치 세워진 마차 앞에서 휘가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번 여행에서 예상 못 했던 수많은 일을 겪었는데, 거기에 또 하나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교주와 소교주, 혈천도마와 그 수제자가 함께 낚시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의 낚싯대가 크게 휘어졌다.

“왔습니다, 첫 입질이!”

검무극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놓치지 않고 낚아 올렸다.

“큽니다, 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잡은 물고기를 들며 모두에게 자랑했다.

검우진의 얼굴에 첫 물고기를 놓친 아쉬움이 스쳤다.

오직 휘만이 찰나 간 스치는 그 표정을 보았다. 교주의 얼굴에서 저런 아쉬워하는 표정을 본 적이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순간의 표정은 휘에게 아주 값진 것이었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음으로 낚아 올린 사람은 뜻밖에도 서대룡이었다.

“앗! 제가 잡았습니다!”

정말 서대룡이 고기를 낚아 올렸다.

“처음입니다, 제 인생 처음 잡는 고기입니다!”

서대룡이 펄쩍 뛰며 기뻐했다.

혈천도마가 와서 잡힌 물고기를 어떻게 빼내는지 알려주었다. 혈천도마가 망에 넣으며 물고기에게 말했다.

“이런 초짜에게 잡힌 걸 보니 너도 어지간히 정신없는 놈이구나.”

그리고 이 강에는 눈먼 물고기, 정신없는 물고기가 많이 살고 있었다.

“또 잡았습니다.”

서대룡이 기뻐서 소리쳤다.

“원래 초심자들이 운이 좋은 법이지.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다.”

약간 초조해진 혈천도마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교주의 눈빛에 혈천도마도 투지를 불태웠다.

그 불길을 끄는 외침.

“또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오! 소교주님! 대어입니다!”

함께 좋아해 주던 서대룡이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왜 추워진 것 같죠?”

서대룡의 말에 검무극이 웃었다. 왼쪽에선 아버지가, 오른쪽에선 혈천도마에게서 서늘한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기운을 느낀 그제야 서대룡은 아차 했다. 첫 낚시에 들떠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책했다.

‘이놈아, 대룡아! 눈치 하나로 살아온 네가 지금 뭐 하는 거냐? 이젠 잡히지 마라, 잡히지 마!’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 검무극이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서대룡도 물고기를 잡아 올렸다.

그렇다고 일부러 안 낚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사부 성격상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검무극이 낚아 올리고, 또 서대룡이 낚고. 거짓말처럼 물고기들은 젊은 둘의 미끼만 물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검우진이 물고기를 낚아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지금껏 잡은 것 중에 최고 대어입니다.”

검우진의 표정이 풀어졌고, 혈천도마는 초조해졌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났을 때의 성적은 이러했다.

검무극 여덟 마리, 서대룡 여섯 마리, 검우진 세 마리, 혈천도마 세 마리.

한 시진 대결을 펼치기로 했기에 이제 남은 시간은 반 시진이었다.

검우진이 낚싯대를 거두더니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서대룡과 혈천도마 사이였다. 이대론 지겠다 싶어 자리를 옮긴 것이다.

교주가 옆에 서자 서대룡은 아주 천천히 슬금슬금 검무극 쪽으로 움직였다.

―소교주님, 옆으로 더 가주세요!

―너 살수에 소질 있다!

서대룡은 정말 표나지 않게 검우진의 옆에서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또 서대룡의 찌가 내려갔다.

‘으악!’

제발 잡히지 마라! 애원했지만 물고기가 서대룡을 너무 좋아했다.

그렇게 서대룡이 검무극 쪽으로 가고, 그곳에는 검우진과 혈천도마가 나란히 서서 낚시했다.

혈천도마는 보았다. 검우진의 눈에서 지지 않겠다고 피어오른 열기를. 자신과 대화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정말 고기를 낚으러 온 거다.

‘그래, 이런 승부욕을 지닌 사람이 교주였지.’

그러다 문득 가슴에 넣어둔 점괘가 생각났다.

‘소교주의 점괘가 천하일통이 나왔습니다.’

이걸 보면 교주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교주의 꿈이 무림일통인데, 아들의 점괘가 천하일통이라면?

두 사람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강 너머 산 능선 사이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을 쳐다보고 있던 검우진이 혈천도마에게 불쑥 말했다.

“낚시는 정말 오랜만이군.”

그 말에 혈천도마가 놀라 물었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절 함께 낚시를 갔던 적이 있었다. 딱 한 번이었다. 그때 혈천도마가 검우진에게 낚시를 가르쳐주었다. 미끼는 뭐가 좋고, 고기가 잘 잡히는 자리는 어디고. 서대룡에게 했던 것처럼 이것저것 다 가르쳐주었다. 그때가 검우진의 첫 낚시였다.

“엉터리로 가르쳐 줬나 보네.”

검우진의 말에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그날이 엊그제처럼 생생한데.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이렇게 나란히 서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내기는 이겨야지요. 제가 새 자리 찾겠습니다.”

혈천도마가 눈빛을 반짝이며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 * *

반 시진 후.

검우진이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혈천도마가 채소를 다듬고 있었다.

마지막 꼴등은 검우진, 삼등은 혈천도마였다.

그 모습을 검무극과 서대룡, 그리고 휘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제게도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게 드디어 생겼습니다!”

신난 검무극과는 달리 서대룡은 하늘이 무너진 표정이었다.

두 번째로 많이 잡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세상에서 절대 이겨선 안 될 두 사람을 한꺼번에 이긴 것이다.

“사부님이 잡아주신 자리가 좋아서. 운이 좋았습니다.”

물론, 그 말이 삼등 혈천도마를 위로해 주진 못했다.

“운도 실력이다.”

혈천도마의 말에 서대룡이 반쯤 넋 나간 얼굴로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설마 이런 일로 두 분께 찍히거나 하진 않겠죠?

―아버지가 저 낚싯대를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하지.

―그럼 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뭐가 어떻게 돼? 황천각주 자리에서 내려와서 다시 조사관이 되겠지. 어르신께서는 새로운 수제자를 뽑으실 테고. 기존 제자 중에 정말 착한 애도 있다면서? 넌 괜찮잖아? 출세욕이나 명예욕 없잖아?

―……저, 많은데요.

그러는 사이에도 검우진의 요리는 계속되었다.

혈천도마가 채소를 허공에 던진 후 멸천대도를 휘둘렀다.

삭삭삭삭삭삭삭삭!

그 큰 대도에 채소들이 얇게 썰려서 그릇으로 떨어졌다. 그야말로 평생 처음 보는 신기였다.

아버지도 혈천도마의 흥을 맞춰주었다. 손을 내밀자 허공섭물로 혁낭에서 날아온 양념 통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고춧가루가 피처럼 흩뿌려졌고 소금은 눈이 되어 흩날렸다.

두 사람 모두 신난 모습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기분이 나쁘실 법도 했는데, 오히려 세 번의 요리 중에 제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휘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난번과는 다르죠?”

“그런 것 같습니다.”

승부의 화신인 아버지가 삼세판을 내리 지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으실 리가 없는데.

검무극이 한 가지 이유를 찾아냈다.

“혹시 도마 어르신에게 요리해 주고 싶으신 마음 때문일까요? 아니면 함께 요리하는 이 순간이 즐거우셔서 그럴까요?”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도마에게 직접 요리해 줄 일도, 함께 요리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으니까.

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십니까, 소교주님. 교주님께서 이렇게 기분 좋은 모습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검우진은 손수 그릇에 자신이 요리한 생선을 담아서 서대룡에게 주었다.

“어이쿠! 저부터 주시다니요!”

서대룡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릇을 받았다.

검무극이 그를 놀렸다.

“이등은 먹을 자격이 충분해!”

서대룡이 사색이 되며 눈빛으로 소리쳤다. 제발 그만요! 이등이란 말 그만요!

혈천도마가 검무극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그럼 삼등은 먹을 자격이 없겠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걸 서대룡이 필사적으로 말렸다.

“사부님! 제발 식사하십시오!”

못 이기는 척 앉으면서 혈천도마는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녀석아, 아버지께 좀 져주지 그랬냐?

―이겨야 또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낚시 연습해서 오실 겁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으냐?

뭐라고 대답할까?

―네, 좋습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리라.

혈천도마가 교주를 쳐다보았다.

‘이러니 어찌 안 부럽겠소.’

요리가 담긴 그릇이 모두의 앞에 놓였다.

서대룡은 과연 이 황송한 생선 요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갈지 벌써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교주가 해준 생선 요리는 너무 맛있었다.

“맛있습니다! 과장이나 아부가 아니라 정말 맛있습니다!”

혈천도마도 검우진의 요리를 먹었다. 그러고 보니 교주가 해준 요리를 처음 먹어보는 순간이었다.

혈천도마는 묵묵히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맛이 좋았다는 건, 말 대신 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오늘이 제일 맛있습니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검우진은 아들과 혈천도마, 그리고 휘와 서대룡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다섯 사람이 둘러앉아서 식사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평범한 여행객들의 한때 식사 자리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검무극이 간절히 바라는 일상.

검무극은 이 광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들어 마음에 담았다.

‘아버지가 적들과 싸워서 이긴 순간보다, 저는 이 순간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자리, 계속 만들려고 노력할 겁니다.’

식사를 마치고 검무극이 서대룡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눈빛에 담긴 장난기에 서대룡이 무언의 고갯짓을 했다. 뭔지 모르지만 제발 하지 마세요!

“꼴등과 삼등이 요리했으니 뒷정리는 우리 일등하고 이등이 하자.”

제일 교양 있는 마존을.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와 함께 강가를 걸었다.

아버지 홀로 산책하러 가시는 걸 따라붙은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 멈춰서서 저 멀리 작은 배가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노을빛에 반사되어 강과 하늘의 구분이 없었다. 배 위에 선 어부가 젓는 노에 노을과 하늘이 함께 갈라졌다.

“무공과 관련해서 아버지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뭐냐?”

“지난번 열두 고수와 싸우셨을 때 말입니다.”

검무극의 머릿속에는 그날 싸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싸움을 본 것만으로도 큰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궁금했던 몇 가지를 해소할 수 있다면, 몇 년을 혼자 수련한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거다.

물론, 아버지께도 큰 자극이 되리라 확신한다. 아버지와 같은 절대자의 무공 수위가 움직이려면 내가 끝없이 여쭤야 한다. 이게 맞냐, 저게 맞냐?

가르치면서 얻어지는 배움이 아버지의 무학을 움직이는데 가장 큰 효과가 있을 테니까.

“기련요사와 싸우실 때 보법을 이렇게 펼치셨는데.”

검무극이 그 자리에서 그날 아버지가 펼쳤던 보법을 그대로 펼쳤다.

그날의 보법을 정확하게 재현하자 검우진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다 외웠더냐?”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웠습니다.”

물론, 농담도 한마디 덧붙였다.

“제 기억력의 한계를 넘어섰기에 어서 아버지께 여쭙고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검무극이 준비해 두었던 질문을 하나씩 던졌다.

“이때 왜 우측이 아니라 좌측으로 피하셨습니까?”

“또 다른 적이었던 흑제가 좌측을 공격할 것 같아서였다.”

“그럼 더욱 우측으로 피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가 검기를 날리면 그 검기를 기련요사에게 튕겨내며 기회를 잡으려 했으니까.”

검무극은 날아오는 검기를 기련요사에게 쳐내며 그녀를 향해 쇄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게 더 효율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최소한의 내공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는 싸움을 하고 계셨으니까. 게다가 아들에게 가르침까지 주려 하셨고.

“그럼 만약 그때 다른 자가 난입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남은 자들이 여기에 둘, 저기에도…….”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두 사람의 대화는 새로운 싸움을 만들어냈고, 두 절대 고수의 상상 속 싸움은 다시 드높은 무학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되었다.

검무극은 말을 할 때 아버지의 손짓과 눈빛,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내용만큼이나 그 반응도 중요했다.

아버지는 확신하지 않는 부분을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 모르는 부분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 앞이라고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않았다. 진짜 강한 사람만이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래, 우린 어설플 때 우기게 된다. 아버지는 진짜들의 자존감은 이러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계셨다.

그런 두 사람을 강둑에서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혈천도마와 서대룡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소교주님은 마정대전이 발생하는 걸 걱정하지만, 정작 교주님과 소교주님은 계속 강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서대룡은 사부에게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이번에 사부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으니까.

“너무 강해져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커지기 마련임을 소교주님도 잘 아실 텐데. 왜 저렇게 강해지려고 애쓰실까요?”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무림일통의 꿈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부가 농담했다고 생각하고 서대룡이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 속을 네가 어찌 안다고? 게다가 저 녀석처럼 비범한 사람 속을 어찌 알겠느냐?”

하지만 서대룡은 확신하듯 말했다.

“소교주님 속은 모르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압니다. 저 알 수 없는 마음에 절대 전쟁은 없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돌려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무섭고 어려운 사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당당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셨다면 저 같은 사람을 오른팔로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혈천도마의 입에서 ‘네가 뭐 어때서?’라는 말이 나오려다 말았다.

그래, 자신이라고 어찌 서대룡과 생각이 다르겠는가? 다만 운명이란 놈이 밀어붙이면 속절없이 밀리는 것이 또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무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서대룡에게 물었다.

“수련은 잘하고 있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대룡이 당황했다.

“어디 한 번 펼쳐보아라.”

서대룡은 설마 사부가 이곳에서 무공을 펼쳐보라 할 줄은 몰랐다. 괜한 고집을 부려 혼내시려는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렇게 무섭게 달려가는데, 이쪽도 죽을 만큼 해야 반이라도 따라가겠지.”

혈천도마가 제자의 자세를 고쳐주며 다시 멸천마도식의 정수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강 옆에서는 검무극과 검우진이, 강둑에서는 혈천도마와 서대룡이.

그리고 마차에 기대선 휘는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련은 노을이 여명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여행은 계속되었다.

나왔던 여정보다 돌아가는 여정이 훨씬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정말 마교주를 모시고 돌아가는데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까? 휘는 몇 번이나 이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서두르지 않았다.

모두 알기 때문이리라. 이번 여행이 쉽게 다시 오지 않을 여행임을.

특히 검무극은 온갖 일에 다 끼어들었다. 가는 길에 다른 마차가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 당연히 내려서 도와줬고, 아이들을 데리고 짐을 가득 들고 가는 가족이 있으면 마차에 태워줬다.

경치 좋은 곳에서는 마차를 세우게 해서 다 함께 내려서 구경했다.

오늘도 검무극에게 뭔가가 눈에 띄었다.

“휘 아저씨, 잠깐만요.”

마차가 멈춰서자 검무극이 마차에서 내려 밭일하는 노부부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일을 도울 테니, 새참으로 국수 한 그릇만 말아 주시겠습니까?”

국수 한 그릇에 일을 해주면 너무나 고맙고 반가운 일이지만, 상대는 검을 찬 무인이었다.

노부부가 경계하는 표정을 짓자, 검무극이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나쁜 사람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행 중에 출출해서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그냥 국수를 대접하겠습니다.”

이것이 일반 백성이 무인들을 대하는 평소 모습이었다.

“아뇨, 그럴 수는 없지요. 저희가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노부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자신을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에서 예의와 기품을 느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일하러 나서자 서대룡도 따라나섰다.

노부부가 어떤 일을 도우면 되는지 두 사람에게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이 가르쳐준 대로 일을 시작했다.

무공으로 하면 순식간에 해버리겠지만,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그냥 보통 사람이 일하듯 땀을 흘리며 일했다.

검우진과 혈천도마는 마차에 탄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교주가 교주님과 같이 밭일하는 추억을 만들고 싶은 모양입니다.”

차마 아버지에게 밭일을 권하지 못할 뿐.

“저런 아들에게 오 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농담처럼 건네진 말에 검우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혈천도마에게 물었다.

“왜 녀석에게는 묻지 않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게 버틸 수 있는지?”

검우진이 마차에서 내리며 소맷자락을 걷었다.

그리고 검무극과 서대룡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어설퍼서 언제 끝내려고.”

그 모습에 비로소 혈천도마는 교주가 한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서로 가까워지면 검무극 역시 자신을 뜻을 거절하기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이렇게까지 자식의 뜻을 따라준 아버지인데. 과연 아들이 그 뜻을 거스를 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교주는 질 생각이 없구나.’

혈천도마는 그날이 궁금했다. 과연 오 년 후, 그날 누가 뜻을 꺾을지.

혈천도마가 서대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대룡아, 너는 조용히 빠지거라.

서대룡이 낚시할 때 그 살수의 움직임처럼, 정말 표나지 않게 그곳을 벗어났다.

검무극과 검우진이 호미를 들고 본격적으로 밭일을 시작했다.

다른 세 사람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마가 밭일하는 건 평생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천마에게 밭일을 시킨 소교주도 천마신교가 생긴 이래 최초일 테니까.

교주가 일하는데 이렇게 지켜만 봐선 안 될 일이지만, 세 사람이 어찌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나선 이유는 노부부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아버지와 함께 밭일하는 추억을 가져보고 싶어서임을.

예전의 혈천도마라면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이렇게 억지로 일을 만든다고 그게 추억이 되겠느냐? 헛짓거리하지 마라!

하지만 이제는 안다. 추억은 그런 것이라고. 검무극이 자신에게 했던, 또 다른 마존에게 했던 그 속 보이는 일들이 모두 추억이 되어 남았다고.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추억을 기다리다 세월이 다 흘러가 버리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움직이지 않으면 추억은 없다는 것을.

“대룡아.”

“네, 사부님.”

“너는 꼭 혼인하거라.”

사부의 아쉬움이 전해지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제자가 된 이후에 혼인하란 말은 처음 들었다.

“네, 사부님!”

힘차게 대답했지만, 솔직하게 덧붙였다.

“제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홱 돌려서 쳐다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네가 어때서!”

그 한마디 말에 서대룡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말해준 사부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러는 사이에도 검무극과 검우진의 밭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을 분담했다.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내며 흙을 파 모종을 심었다. 호미가 흙을 가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어찌 밭일까지 이렇게 잘하십니까? 정녕 제가 이길 수 있는 건…….”

검우진이 골라내던 돌멩이가 검무극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이 미끄러졌다. 여기 돌이 많구나.”

낚시 이야기가 나오려 하자 실수인 척 돌멩이를 날린 것이다.

“이 잘생긴 얼굴 또 구멍이 날 뻔했습니다.”

“이 아비를 밭으로 끌어냈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검무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파 후계자와 사파 후계자들 만나면 이 말부터 할 겁니다. 야, 너희들. 할아버지하고, 사부하고. 같이 밭 갈아 봤어?”

검무극이라면 정말 그럴 사람임을 알기에 듣고 있던 서대룡이 웃었다. 그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어서 풍류주점에 장호와 이안을 앞에 두고 있었던 일들을 다 말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일하자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었다.

잠시 후, 노부부가 국수를 말아왔다. 술도 한 병 가져왔다. 그들은 벌써 일을 끝낸 모습에 깜짝 놀랐다.

“벌써 다 끝내셨소?”

두 부부가 며칠은 고생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배고파 죽겠습니다. 어서 새참 주십시오!”

검무극이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 안 한 사람은 새참 없습니다!”

물론, 노부부는 지켜보던 세 사람의 국수도 말아왔다.

“자, 이리들 오시오. 드십시다.”

그렇게 다 같이 둘러앉아 노부부와 함께 국수를 먹었다.

마음이 편해진 노부부가 몇 달 후면 첫 손주가 혼인한다고 자랑삼아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평생을 일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고 했다.

그리고 검무극 일행이 탄 마차가 떠났을 때, 검우진의 국수 그릇 아래에는 전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손주의 혼인을 성대하게 치르고도 남을 돈이었다. 손주의 혼사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노부부는 마차가 떠난 곳을 향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갑자기 하늘에서 축의금이, 아니 국숫값이 뚝 떨어진 것 같았다.

다시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을 향해 달렸다.

이렇듯 대부분 새로운 일을 만드는 건 검무극이지만, 오늘처럼 혈천도마가 나설 때도 있었다.

“지나는 김에 저기 잠시 들러도 괜찮겠습니까?”

마차를 세운 곳은 오래된 서점이었다.

혈천도마가 가끔 들렀는지 주인장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주인장이 편하게 대하는 걸 보니, 정파의 책 좋아하는 무인인 줄만 알았지 마존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모두 작은 책방에 흩어져서 책을 둘러보았다. 무공비급이나 무공이론서보다는 일반 서적들을 취급하는 책방이었다.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서점을 둘러보았다.

“이런 서점 처음이지 않으세요?”

검무극의 물음에 검우진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덕분에 책 냄새가 좋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여기서도 안 읽은 책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책장 건너편에서 혈천도마의 대답이 들렸다.

“그건 네가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역대 마존분들 중에 제일 교양 있는 마존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건너편 책장으로 소리쳤다.

“아버지도 인정하신답니다!”

“이놈아, 서점에서 너무 시끄럽다!”

혈천도마가 부끄럽다는 듯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온갖 참견 다 하며 서점을 둘러보다가 검무극도 책을 한 권 샀다.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책이었다.

중원미식탐방(中原美食探訪).

“여기 백 곳이 소개되어 있답니다. 아버지 시간 나실 때마다 제가 한 집씩 모시겠습니다. 아버지와 여길 다 가보는 게 제 새로운 목표입니다.”

정말 죽기 전에 아버지와 백 곳의 맛집을 다 가볼 수 있을까? 어쩌면 무림일통보다 더 어려운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혈천도마는 서너 권의 책을 샀고, 서대룡에게도 책을 한 권 사주었다. 시화집이었다.

이번에 서대룡은 자신의 시화집을 보고 중경으로 찾으러 왔었다.

그래서였다. 자신의 서명까지 남겨서 시화집을 선물로 사준 것은.

다음에 네가 위험에 빠졌을 때, 이걸 자신에게 보내라고. 그땐 내가 꼭 구해주러 가마.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대룡이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 시들을 여자들 앞에서 멋지게 외워보겠습니다.”

그래서 혼인에 성공하겠습니다! 이 말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아시겠죠? 왜 제자가, 여자가 아직 없는지.”

그 말에 혈천도마가 움찔했다.

눈치 빠른 검무극이 그 반응을 놓칠 리 없었다. 설마 어르신도 여자들 앞에서 시를 외우셨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왜! 그게 어때서? 하는 사제간의 눈빛에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 교로 돌아가기 전에 여자는 어떻게 유혹해야 하는지를 아버지와 제가 시범을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책장을 향해 돌아서 있던 검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 웃음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그가, 요즘 종종 이렇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한 미소를 보는 건, 오직 휘 뿐이었다.

아직 돌아가는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여협들께서 요리를 보내셨습니다.

마차를 몰던 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은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오늘은 마을에 들르겠습니다.”

휘는 원래 가려던 방향이 아닌, 길을 틀어 인근 마을로 향했다.

검무극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이 마을에 우리 황천각주께서 마음에 드실만한 아름다운 소저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 말에 마부석에 있던 서대룡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여인에게 시를 읊어줄 겁니다!”

바로 그때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릉!

서대룡이 움찔했다.

‘천둥이 쳐도 하필!’

시무룩해 있는 그때 혈천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전부가 아니지. 남자는 마음이다!”

제자에게 힘을 주는 말에 서대룡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네! 사부님! 남자는 마음이죠!”

정말이지 휘와 조금만 더 친했어도 물어봤을 것이다. 휘 무인께서는 어느 쪽이십니까? 마음이죠? 그렇죠?

그의 신남을 바람결에 느끼며 몸을 내밀고 있던 검무극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너란 사람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떤 여인이 너를 좋아하지 않겠느냐?

마차가 저잣거리로 들어갈수록 길이 넓어졌다.

과일을 파는 상인이 손님과 사과 하나를 더 주냐 마냐로 실랑이하는 옆으로 약초상 노인은 비가 올 것을 대비해서 천막을 치고 있었다.

만두를 파는 노점상이 휘와 서대룡에게 와서 먹어보라고 손짓했고, 포목상 점원은 밖에 진열된 비단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 시끌벅적한 소리와 맛있는 냄새들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검우진은 말없이 창밖으로 펼쳐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버지와 추억을 쌓는 것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중원 구석구석을 직접 눈으로 살펴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버지, 전쟁이 벌어지면 우린 본교의 무인들이 어디서 어떻게 몇 명이나 죽고 죽이는지에만 집중할 겁니다. 한데 그러는 사이 저기 저 상인이 죽고, 저 아이들도 죽을 겁니다. 그 숫자는 우리 통계에는 잡히지 않겠지요.

그래서다. 함께 밭을 매는 추억도 좋지만, 아버지가 그들 노부부의 손주 혼인을 위해 전표를 남기는 것이 소중한 이유가.

그래서 이 모든 순간은 노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와 대결 중인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이었다.

휘는 이층에 있는 여섯 개의 방을 전부 다 잡은 후, 주인장에게 다른 손님이나 점소이가 올라오지 못하게 당부했다.

일단, 짐 풀고 푹 쉰 후에 식사하자고 정한 후 모두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은 혼자만의 시간이 나면 무조건 시공이환술의 공간으로 들어간 후, 시천비술을 발휘해서 수련했다.

하지만 오늘은 침상에 대자로 누웠다.

가끔 수련에 몰두하다 보면 무공에 잡아먹힌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 수련하면 딱 그런 생각이 들 거다. 쉬자, 오늘은 푹 쉬자.

침상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먹구름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는 것, 의외로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회귀 전에는 비를 싫어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홀로 대법 재료를 구하러 다니다가 비가 쏟아지면, 외로움과 우울감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좋다.

빗소리를 들으며 침상을 뒹굴뒹굴하는 이 여유.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매번 뛰고 달리는 인생만 살아서였는지 몸이 근질거려 더는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건너편 서대룡 방문 앞에서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혹시나 자는가 했는데, 깨어 있었다.

“뭐해? 들어가도 돼?”

“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대룡은 책을 읽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사준 그 시화집이었다.

“재밌어?”

“사실 재미있지는 않는데……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상념에 잠기게 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머리도 똑똑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사람이란 걸 알아서였을까? 서대룡이 시화집을 읽는 모습은 꽤 어울렸다.

“비도 오는데 술 한잔할까?”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이 기다렸다는 듯 책을 덮었다.

“좋죠.”

방에서 나와 아버지와 혈천도마, 휘의 방을 지났다.

검무극이 장난으로 발걸음을 멈추려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서대룡이 뒤에서 속삭였다.

“안 됩니다!”

아버지, 그리고 도마님과 함께하는 술자리? 녀석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눈에 훤하다.

일 층에 내려오자 십여 명의 손님이 여기저기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과 서대룡은 밖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술과 안주를 시켰다.

비는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객잔 앞 건물 옆에 심어진 작은 대나무들이 빗물에 흔들렸고 물웅덩이에는 쉴 새 없이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 앞으로 도롱이와 삿갓을 쓴 행인들이 뛰어가고 있었고, 저 멀리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

그러는 사이 술과 요리가 나왔다.

“한잔하세요, 소교주님.”

서대룡이 정중히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받은 검무극도 서대룡의 잔을 채워주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렇게 둘이서 한잔하는 거.”

“고대했던 자리입니다.”

누가 뭐래도 검무극이 보고 싶고, 또 검무극과 함께하고 싶은 그였으니까.

두 사람이 첫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그러고는 잔을 채운 후 말없이 비 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안주가 필요 없었다.

“비 냄새가 좋다.”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이 코를 벌름거렸다.

“비에도 냄새가 있습니까?”

“있지.”

“그러고 보니 저는 비 냄새를 의식해서 맡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의식하지 않으면 절대 맡을 수 없는 냄새가 있다.

“좋다, 오늘 이 비 냄새는.”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은 코로 호흡을 들이마시며 냄새를 맡았다.

빗소리 듣다 한 잔 마시고, 지난 이야기 하다 한 잔 마시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낚시는 언제 배우신 겁니까?”

교주님을 세 번이나 이겼다니 이건 실력이 분명했다. 소교주님, 대체 못 하는 게 뭡니까?

“너야말로 낚시 잘하던데?”

“저는 운이고요.”

하지만 이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서대룡이 눈을 반짝였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손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손을 쥐었다 풀었다, 팔을 당겼다 밀었다, 그는 낚시하는 시늉을 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낚시로 교주님과 사부님을 이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건 소교주님께만 드리는 말씀입니다. 절대 어디 가셔서 말하면 안 돼요. 다음에 또 붙어도 교주님과 사부님께 낚시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하셨지만, 또 누가 압니까? 제가 낚시꾼의 재능을 타고났는지.”

검무극이 웃으며 물었다.

“그 손맛, 멸천마도식을 처음 펼쳤을 때와 비교하면 어때?”

서대룡은 잠시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멸천마도식에 비할 수야 없지요.”

바로 그때 서대룡은 보았다. 검무극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향해 있음을.

흠칫 놀란 서대룡의 목소리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처럼 작아졌다.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손맛을 고르는데 고민을 꽤 깊게 하던데?”

혈천도마의 목소리에 서대룡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쿠, 아닙니다, 사부님.”

돌아보니 사부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검우진도 혈천도마와 나란히 서 있었다. 설마 교주님을 낚시로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말, 못 들으셨겠지?

“손맛이 그리 좋으면 도를 내려놓고 낚싯대를 잡아야지.”

“아닙니다, 사부님. 오해십니다.”

사색이 된 서대룡을 위해 검무극이 나서주었다.

“두 분 내려오시는 걸 보고 슬쩍 미끼를 던지니 우리 황천각주님께서 이렇게 낚여주십니다. 물고기를 낚는 것보단 사람 낚시가 더 재밌죠. 자, 이리로 앉으십시오.”

그렇게 뒤에 있던 휘까지,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 앉았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라주었다.

비가 사람에게 주는 운치는 천마도, 소교주도, 마존도, 호위대주도, 황천각주도, 모두에게 마찬가지였기에, 다들 분위기에 젖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던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았다.

비 때문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아버지의 눈빛은 눈앞의 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 추억의 조각들이었다.

‘누굴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버지와 친해진 것과는 별개로 아직 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순간 느낄 수 있다.

검무극은 아버지 대신 혈천도마에게 물었다.

“어르신은 비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사람 있습니까?”

혈천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 그러는 너는?”

“저도 마찬가지죠. 비 오면 경공 펼칠 때 미끄러워서 싫다. 제가 이런 건조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젊은 녀석이 인생 타령은!”

혼내면서도 혈천도마는 웃고 있었다.

“한데 이젠 생겼습니다.”

“이제 생기다니? 무슨 말이냐?”

“여기 있는 사람들요. 오늘 이렇게 모여 앉아서 비 구경한 것, 비 오는 날이면 오늘이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는 사부를 떠올렸다.

‘사부, 진짜 가식쟁이를 못 만나보셨소. 그러니 날 더러 가식을 부린다고 했지.’

애초에 사부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도 이 진짜 가식쟁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부도 진작 이 가식을 맛봤어야 했는데.’

그러면 사부의 인생은 바뀌었을까? 이제 사부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비가 오니 이렇게 사부 생각이 났다.

쏴아아아아아.

그렇게 모두 저마다의 상념에 빠져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그때 객잔으로 새 손님들이 들어섰다.

들어선 이들은 검을 찬 여협들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들이 피풍의와 삿갓을 벗자 서대룡의 눈이 커졌다.

들어올 때부터 안 보는 척 의식하고 있었는데, 세 여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잠시 멍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그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내심 당황하던 그때, 여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서대룡도 가볍게 포권하며 인사에 답했다.

무인들 사이에 흔한 인사에 불과했는데, 서대룡의 심장은 망치질하듯 세차게 뛰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이었다.

―방금 보셨습니까? 저 여인이 제게 인사했습니다. 미소까지 지으면서요.

흥분된 서대룡의 전음에 검무극이 말했다.

―미소는 날 보고 지었지.

―무슨 말씀을요! 접니다, 분명 저라고요.

서대룡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술을 마셨지만,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아, 한데 아쉽게도 정파 여인들 같은데요?

―저쪽에선 다행일 테고.

―소교주님!

―장난이야, 미안해.

검무극이 웃으며 술잔을 따라주었다.

서대룡이 또 술을 마시며 힐끗 여인들 쪽을 바라보았다.

―앗, 또 눈이 마주쳤어요. 저 여인도 이쪽을 의식하고 있어요.

―세 여인 중 누군데?

―쳐다보지 마세요!

서대룡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흥분을 느꼈다. 살아 있는 기분, 난 남자다! 하는 이 기분.

그 순간, 흥취에 겨운 서대룡의 입에서 시가 흘러나왔다.

검무극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취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서대룡은 비 내리는 밤, 외로운 검객이 되어 밤길을 나서고야 말았다.

“……외로운 그림자는 바람 속에 숨고, 강호에 품은 꿈은 빗소리가 대답하네.”

지금껏 검무극과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기에, 지금은 서대룡이 갑자기 시를 읊은 게 되었다.

검우진과 혈천도마, 그리고 휘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서대룡은 아차 했다.

정말 그 순간에는 교주도 사부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여인들 앞에서 멋지게 시 한 수 읊어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시를 읊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여인들끼리 이쪽을 힐끗 보며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 분명 자신이 읊은 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주인장이 요리를 하나 가져왔다.

“저쪽에 계신 여협들께서 요리를 보내셨습니다.”

검무극이 물었다.

“우리 중에 누구에게 보냈습니까?”

서대룡은 당연히 이 말을 기대했다.

―여협들께서 시를 잘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 주인장이 가져온 요리를 한 곳에 내려놓았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주인장이 요리를 내려놓은 사람은 바로 검우진이었다.

검우진은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르는 정적.

서대룡은 애절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전음을 보냈다.

―제 그녀가 보낸 건 아닐 겁니다.

검무극은 그 전음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질투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버지와 요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은데요?”

검무극이 요리를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얼핏 보면 아버지와 제가 닮아서 주인장이 착각했나 봅니다. 이게 맞겠죠?”

그러자 지금까지도 바깥을 보며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검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감출 수 없는 승자의 도도한 미소로 요리를 자신의 앞으로 다시 가져왔다.

“내 것 맞다.”

이번 인연 아직 모른다.

검우진이 여인들이 앉은 쪽을 돌아보았다.

미소 지은 것도 아니고, 고맙다고 인사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바라본 것에 불과했지만 휘는 내심 놀랐다.

그것만 해도 정말 놀랄 일이었으니까. 교주는 이 흥겨운 분위기를 받아주고 있었다.

그녀들은 절대 알지 못 하리라. 지금 누구의 시선을 받고 있는지.

검우진과 눈이 마주치자 여인들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렇게 보니 서로 닮은 게 자매지간처럼 보였다.

다들 성격이 밝고 유쾌해 보였는데, 격식에 메이지 않는 이들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검무극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중에서 제일 어려 보이는 여인은 말이라도 걸면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준비가 된 얼굴이었다.

“주인장이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검무극을 따라 서대룡은 전음으로 한탄했다.

―잘생긴 사람만 살아남는 비정강호네요.

―난 심지어 잘생겼는데도 졌다고! 더 기분이 안 좋다고!

―시까지 읊고 져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시죠.

패배자 동지가 된 두 사람이 울상을 지으며 건배했다.

그 궁상을 보며 혈천도마가 웃었다. 어떤 전음을 주고받고 있을지 상상이 되어서였다.

검우진이 객잔 주인장을 불러 보답으로 여협들에게 좋은 술을 한 병 시켜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하지.”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며 마지막 너스레를 떨었다.

“승자의 퇴장이시군요.”

아버지는 앞에 놓여 있던 요리를 검무극 앞으로 밀었다. 그렇게 마무리 일격까지 가한 후 이 층으로 올라갔다.

“너무하십니다!”

휘가 검무극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뒤따라 올라갔고, 혈천도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서대룡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그래도 열심히 읽어라.”

“네, 사부님. 쉬십시오.”

검무극은 이 층으로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의 아름다움을 믿고, 독서의 힘을 믿고 있는 그다. 그게 얼마나 멋진 모습인지 어르신은 잘 모르실 겁니다.

그렇게 혈천도마까지 올라가고 그곳에는 검무극과 서대룡만 남았다.

“자, 패배자들끼리 한잔하시죠.”

괜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서대룡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 한 편이 아니라 시집을 통째로 외운들, 이 두 교주님에게 상대가 되겠는가?

오히려 나중에 술자리에서 말할 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진짜 말할 거리는 지금부터였다.

식사를 마친 여협들이 나가려다 그녀들 중 한 여인이 서대룡에게 와서 정중히 말했다.

“아까 시는 잘 들었어요. 멋있었어요.”

생각지 못한 말에 서대룡이 당황했다. 너무 당황해서 앉은 채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 네.”

여인은 정중히 포권한 후 작별을 고했다.

“언젠가 운이 좋아 또 다른 시를 듣는 날이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객잔을 걸어 나갔다.

서대룡이 반쯤 넋이 나갔다. 원래라면 패배자는 소교주님이셨다면서 놀려야 했는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저 여인은 제게서 뭘 뜯어내려는 걸까요? 제 시화집이 장보도라는 소문이라도 난 걸까요?”

예전 비무대회 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살면서 여인이 먼저 순수하게 호감을 표한 적이 없었다. 최대한 가까운 관계는 좋은 선배까지였다.

황천각주 자리에 오르고는 그런 선후배 관계까지 다 끊었다. 상대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아예 교내 여인들에게는 관심을 끊었다. 일이 바쁘기도 했고.

“헛소리 말고 어서 가서 이름을 물어보고 와! 다음에 만날 약속도 하고. 어서!”

검무극이 떠밀자 서대룡이 정신없는 얼굴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길에 서서 여인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서대룡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단 소저였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단아(段阿)였다.

“저 여인이 처음에 마음에 든 그 여인이야?”

“지금까지 제 인생에서는 아니었죠. 설령 오더라도 다른 여인이 왔겠죠. 한데 오늘은 맞습니다.”

마음에 들었던 그녀가 와서 말해준 것이다.

“축하한다, 오른팔!”

기뻐하는 검무극과는 달리 서대룡은 차분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 했지?”

“아뇨.”

“어디 소속인지는 물어봤고?”

“아뇨.”

“왜 안 했어?”

서대룡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 천마신교에 속해 있다고. 그랬더니 놀라더군요.”

“왜 그랬어? 보통 이럴 때는 서도파로 위장했잖아?”

서대룡이 솔직히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 이 여인에게는 솔직히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본 여인인데, 제가 그녀에 대해 뭘 안다고 좋아하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는 인연인 거죠.”

나 마인이야, 우리 안 되겠지?

그렇게 자포자기한 것처럼 말했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정말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거기에 시를 읊어준 것이 좋았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너무 크게 와닿으니까, 오히려 밀쳐낸 거다. 겁이 나서.

“너와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될 거다.”

“또 만날 일도 없지만, 만난다 해도 어차피 안 될 겁니다.”

“정 그게 둘 사이에 걸림돌이 된다면 황천각주 그만두면 되지.”

이제 서대룡은 안다. 이런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교를 떠나도 된다. 이게 검무극이란 사람이었으니까. 흔쾌히 보내줄 사람이었으니까. 살림살이에 보태라고 돈까지 쥐여 줘서 보낼 거다.

“이러시려고요? 미안하다, 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네가 키우던 화분의 꽃은 무덤가에 심어 주마, 서걱!”

검무극이 흠칫하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니 저, 그만 안 둡니다.”

혼자 살면 혼자 살지. 소교주를, 교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 *

그렇게 각오했지만, 서대룡은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시를 읊는 꿈이었다.

듣고 있던 군중들이 어떨 때는 환호를 지르며 박수 치기도 했고. 또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도 그들 속에 있었다. 그녀는 야유를 보내기만 했다.

그렇게 꿈에 시달리다 눈을 떴을 때 아침이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못났다, 못났어. 그걸 또 꿈으로 꾸냐?”

서대룡이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언제 비가 그렇게 내렸냐는 듯, 해가 환하게 떠올라 있었다.

객잔 입구에 마차가 대어져 있었고 휘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도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서대룡의 말에 휘가 차분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준비 다 끝났으니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서대룡이 빠르게 채비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교주님과 사부님은 아직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휘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오늘은 고삐 한 번 잡아보시겠습니까?”

한 번도 내주지 않았던 고삐였는데.

“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마부석에 앉은 서대룡이 고삐를 잡았다. 실수할까 봐 마음이 떨렸다.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시, 저도 듣기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휘는 이곳까지 오면서도 한 번도 사적인 말을 걸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감, 감사합니다.”

당황한 서대룡이 말까지 더듬으며 휘를 쳐다보았지만, 휘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차 밖으로 몸을 내민 검무극이 말했다.

“천천히 가시지요, 각주님.”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검우진과 혈천도마가 내려와 마차에 탔다.

“출발하겠습니다.”

서대룡이 마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객잔을 돌아보았다.

그 진한 아쉬움을 느끼고 검무극이 전음을 보냈다.

―휘 아저씨까지 움직인 시다. 이번 인연 아직 모른다.

더는 헛된 희망은 품지 않겠다는 듯, 서대룡이 힘차게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 끝난 인연입니다.

* * *

끝난 인연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앞서 객잔에서 검무극 일행과 만났던 세 여인이었다. 강호에서 그녀들을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단씨삼매(段氏三妹).

세 자매로 이뤄진 그녀들은 낭인들이었다. 주로 호위 임무를 맡는 보표낭인(保鏢浪人)이었는데, 실력도 좋고 책임감도 있어서 낭인들 세계에서는 평판이 매우 좋았다.

게다가 일거리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인 혼자 떠나는 길에 남자 호위들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기 마련, 그럴 때면 중개인들은 어김없이 단씨삼매를 소개했다.

앞서 객잔에서 보인 유쾌한 느낌은 그 때문이었다. 문파에 속해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여인들이 아니라, 자유롭게 강호를 돌아다니는 낭인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셋이 사이가 너무 좋아, 머리를 맞대고 쑥덕대는 것이 일상인 그녀들이었다.

“언니도 참 남자 보는 취향 특이해.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하고. 어디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셋째 단연(段煙)은 언니의 취향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원래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임을 알았기에 단아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거기 옆에 잘생긴 공자도 있었잖아.”

“그러는 너는 왜 그분에게 요리를 주라고 했어? 우리 중에 나이는 제일 어리면서.”

검우진에게 요리가 간 것은 어디까지나 셋째인 단연의 고집 때문이었다.

“멋있잖아?”

원래 단연은 그런 강렬한 느낌을 주는 남자가 이상형이었다.

“나도 멋있어서 그랬어.”

“비교할 걸 비교해라.”

단아는 객잔에 들어서면서 서대룡의 시선을 느꼈다.

자신의 마음을 잡아끈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눈빛에 담긴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보통 무인들을 만나면 어떻게든 강해 보이려 애쓴다. 그 강해 보이려는 눈빛이 지겹고 또 지겨운데. 부끄러워하는 눈빛은 참으로 오랜만이었고 신선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칼 든 사람 중에 시 외우는 사람 본 적 있어?”

시도 자신 때문에 외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순수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원래 언니가 원래 착한 사람 좋아하잖아.”

둘째 단비(段秘)의 말에 막내 단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착하긴. 마인이라면서?”

그 말에 세 자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인과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는 건, 청부 무인들 사이에 대대로 내려오는 말이다.

“왜들 호들갑이야? 난 그냥 그 사람에게 시가 좋았다고 말했을 뿐이야.”

“굳이 일부러 가서?”

“다 왔어. 이제 일하자.”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산속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중개인들이 정해준 장소였기에 별문제는 없겠지만, 세 사람이 흩어지며 주위를 살폈다.

막상 일에 돌입하니 그녀들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앞서 나눴던 대화의 주인공들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그녀들에게서 느껴졌다.

막내가 열네 살 때부터 이 일을 해왔으니 이 일도 벌써 십 년째.

그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녀들은 안다. 아무리 조심해도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순간의 소중함을 아는 그녀들은 최대한 유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삶을 사는데 오늘 싸울 수는 없지 않나? 그 사람과 한 마지막이 싸움이 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부자는 여인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차분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단아는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

오랜 경험으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단씨삼매예요.”

세 여인이 가볍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여인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가야 할 곳이 귀주라고 들었어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말을 아끼는 그녀였다.

“무슨 일로 가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용건까지 밝혀야 하나요?”

“정확한 목적지가 어디죠?”

“귀주에 들어서면 알려드리죠.”

여인의 신중함에 단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단 그녀를 뒤쫓는 이들을 두려워하기에 이렇게 신중하다는 것을.

단아는 왠지 모를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일하다 보면 이 일은 위험하다, 이 일은 편하겠다. 딱 답이 나오는데, 이번 일은 위험한 쪽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대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밝히지 않으면 이번 청부는 거절하겠어요. 다른 사람을 구하세요.”

보통의 경우는 묻지 않고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과연 여인은 크게 동요했다. 그 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위험에 빠져 있음을.

그렇다면 더욱 이번 일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 동생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두 동생은 모든 결정을 언니에게 맡긴 채 조용히 검을 뽑아 든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제가 중개인에게 다시 연락드려서 새로운 사람 보내라고 하죠. 그때까진 저희가 지켜드리죠.”

그러자 여인이 한발 물러났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좋아요, 제가 누군지 말씀드리죠. 저는 호남성 봉황(鳳凰)에 있는 천화루의 기녀예요.”

호남에만 천화루는 일곱 개가 있었다. 그녀는 그중 한 곳인 봉황 천화루의 기녀였다.

단아는 알 수 있었다. 여인의 미모로 볼 때, 기녀 중에서도 아주 상급의 기녀임을.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것일까?

한데 여인이 가려는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저를 귀주에 있는 천화루 본단으로 데려다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빗속에서 끊어진 한 인연을 다시 잇는 말이 흘러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천화루주를 뵈어야 해요.”

천화루주는 바로 극악소마를 좋아하는 여인 여정이었으니까.

그런 부탁이라면 무림맹에 가서.

단아는 거절하고 싶었다.

이번 청부만큼은 어떻게든 빠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물론, 청부 거절은 중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당연히 청부 거절이 잦은 낭인들에게는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지난 십 년간 착실히 쌓아온 평판이 있어 이번 청부는 거절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한 가지는.

단아의 시선이 겁먹은 채 자신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여인을 향했다.

‘우리가 포기하면 이 여인은 죽는다.’

그런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 짙게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때문에 빠지고 싶은 거고.

단아가 동생들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그녀들은 지금의 이 망설임만으로도 언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순간의 결정만큼은 온전히 언니의 뜻을 따랐다.

이윽고 단아가 결정을 내렸다.

“저희가 귀주 천화루까지 모셔다드리죠.”

결정을 기다리던 여인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감사해요.”

“바로 출발하죠.”

돌아서 걸어가는데 뒤에서 초희가 말했다.

“제 이름은 초희(草熙)이에요.”

단아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예쁜 이름이네요.”

그렇게 네 사람이 암자를 내려오던 그때였다.

초희를 향해 빠르게 암기가 날아들었다.

단아가 검을 휘둘러 암기를 쳐내면서 소리쳤다.

“왼쪽 나무 위!”

하지만 그녀의 외침이 나오기 전에 이미 막내 단연이 던진 비수가 나뭇가지 사이로 박혀 들고 있었다.

비수에 적중당한 복면인이 나무에서 떨어져 내렸다.

반대쪽 나무에서도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암기가 날아들었다.

“뛰어!”

단아가 초희를 안으며 계단을 훌쩍 뛰었다.

팍팍팍!

날아든 암기가 초희가 있던 자리에 박혔다.

양옆에서 함께 뛰어내린 단비와 단연이 날아드는 암기를 검으로 쳐냈다. 이미 암자 주변은 적들이 매복한 상태였다. 사태는 심각했다. 접선 장소가 노출되었다는 건 중개인이 당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암기를 쳐내면서 세 여인은 비수를 날렸다. 특히 막내 단연의 비도술은 수준급이어서 그녀의 비수에 복면인들이 연속해서 쓰러졌다.

“저 바위 뒤로!”

네 사람이 바위 뒤로 몸을 날렸다.

파파파파팍!

아슬아슬한 엄폐와 동시에 날아든 암기들이 바위에 튕겨 나갔다.

빠른 판단이었음에도 단비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스쳤어. 괜찮아.”

하지만 상처를 살핀 단연은 깜짝 놀랐다. 상처 부위가 시퍼렇게 부어오른 것이다.

“독이야.”

단연의 외침에 단아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런 쌍놈들이!”

세 자매 중 욕을 제일 잘하는 그녀였다.

단연이 재빨리 품에서 약병을 꺼내 그녀의 상처에 발랐다. 임시로 독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약이었다.

“오래 못 버텨! 어서 빠져…….”

바로 그때 바위를 뛰어넘은 복면인들이 공격을 해왔다.

쉬이익! 푸욱!

단아의 검이 초희를 덮치는 복면인의 옆구리를 찌른 후, 그의 살을 찢었다.

푸아아아아악!

옆구리를 찢고 나온 검이 뒤이어 쇄도한 복면인의 목을 찔렀다. 피가 얼굴 가득 튀었지만 닦을 여유도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켰고, 암기와 암기가 교차하며 두 개의 선을 그었다.

단연의 비수가 날아가 언니의 뒤에서 덮쳐온 복면인의 목에 박혔다. 내리치던 검이 힘을 잃고 허공을 갈랐다.

쓰러지는 복면인 뒤로 또 다른 복면인들이 쇄도했다. 햇살에 반사되어 빛나는 검날들을 향해 몸을 날리며 단아가 소리쳤다.

“피해!”

* * *

길이 파헤쳐진 곳을 지나며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다급한 외침은 서대룡의 것이었다.

마차 안에서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차를 드시다가 얼굴에 쏟았습니다.”

물론, 검무극의 장난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 서대룡이 마차를 몰겠다는 말에, 그러다 마차가 덜컹하면 모가지도 뎅강이라고 했던 농담을 잊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든 서대룡이 휘에게 물었다.

“직접 모시겠습니까?”

실수했으니 고삐를 가져갈 법도 했는데. 휘는 고개를 내저으며 계속 서대룡이 마차를 몰게 했다.

“길이 험하니 집중하십시오.”

처음에는 초집중해서 마차를 몰았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간사하여 조금 익숙해지니 딴생각을 했다. 자신도 모르게 객잔에서 만났던 여인을 떠올렸었다.

‘교주님이 타신 마차를 몰면서. 내가 미쳤구나.’

서대룡이 애써 잡념을 털어내며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검무극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차가 사방이 뚫린 곳을 달리다 좁은 오솔길로 들어서자, 마치 중검을 쓰다가 쾌검을 쓰는 것처럼 느렸던 풍경이 빨라졌다.

“돌아가는 길은 왜 출발했을 때보다 더 빨리 가는 기분일까요?”

그러자 혈천도마가 여전히 시선을 읽던 책에 둔 채 말했다.

“소교주는 뭐가 그리 아쉽나?”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러게요. 뭐가 이리 아쉬울까요?”

검무극의 시선이 마부석의 서대룡을 향했다.

적어도 어제오늘의 아쉬움은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만은 아님이 확실했다.

“서 각주님, 저기 구덩이 조심!”

* * *

헛간 문을 닫는 단아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다행히 피는 적들의 것이었지만, 문제는 둘째 단비였다.

앞서 독에 당한 상처가 계속 부어오르고 있었다.

단아가 초희의 멱살을 잡았다.

“당신! 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거야?”

뛰라면 뛰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정신없이 이곳까지 온 초희가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요.”

그녀는 자신이 큰 위험에 처했음을 알면서도 호위를 부탁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그녀들이 큰 위험에 빠졌다.

“우릴 공격한 자들이 누군지 알기나 아냐고!”

단아는 상대하는 이들이 누군지 알았을 때 절망했다.

칠로추살대(七路追殺隊).

칠로추살대 역시 낭인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추격, 살인을 맡는 자들로 추살대 중에서도 지독하고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자신들이 밝은 쪽에 있는 낭인이라면 추살대는 어둠에 속한 이들. 그중에서도 칠로추살대는 짙은 암흑이었다.

칠로추살대 일개 조를 뚫고 나온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들 십여 명을 죽인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개미 떼처럼 끝없이 몰려와 결국 목표를 해치웠다.

칠로추살대를 동원했다는 건 거금을 들여서 초희를 쫓고 있다는 의미.

대체 일개 기녀를 무엇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그녀와 그런 이유로 실랑이할 틈이 없었다.

이곳으로 곧 놈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비아는 어때?”

단아의 물음에 단연이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간신히 독이 퍼지는 걸 막고는 있지만, 더 무리하게 움직였다간 온몸으로 퍼질 거야.”

그때 단아의 시선이 단연의 옆구리를 향했다. 피에 흥건한 옷자락을 헤치자 검에 베인 상처가 드러났다.

“넌 언제 찔렸어?”

“아까. 지혈했었는데 뛰었더니 또 터졌네.”

정신없이 싸운다고 동생이 찔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너!”

“괜찮아. 안 죽어, 괜찮아!”

하지만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이 막내의 상태도 좋지 못했다.

단아가 다시 동생의 상처 부위 혈도를 눌러 지혈한 후 금창약을 꺼내 동생의 상처에 발랐다.

“일단 누워서 쉬어.”

“그래, 나 좀 누울게.”

두 동생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며 단아는 후회했다. 이 청부 맡지 말았어야 했다. 예감이 그렇게 안 좋았는데.

“미안해요.”

초희의 말에 단아는 그녀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 그녀는 청부자고 고객일 뿐이다. 맡겠다고 결정한 건 자신이었다.

“아니에요.”

“동생분 의원부터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원에 데려갈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놈들은 의원부터 뒤진다. 그건 추격술의 기본.

“칠로추살대가 붙었다면 절대 귀주까지 갈 수 없어요. 우선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해요.”

그녀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위급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지도였다. 지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파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작은 인연이라도 있는 문파들.

하지만 칠로추살대가 쫓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문파에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칠로추살대는 목표를 죽이기 위해 일반 문파까지 쳐들어와서 학살할 놈들이었으니까.

“무림맹에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하지만 너무 멀었다. 이 마을을 빠져나가 삼십 리를 더 가야 무림맹 지부가 나온다. 지금 다친 동생들을 데리고, 더구나 초희까지 지켜가며 그곳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무림맹에 도움을 청하리라 예상하고 그 길목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때 단아의 눈에 들어오는 한 곳.

천마신교 정안(正安)지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교의 지부가 있다.

하지만 마교에 무턱대고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다간, 칠로추살대 놈들에게 당하는 것보다 더 큰 화를 입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문득 어제 봤던 남자가 생각났다.

―나는 신교에 속해 있소.

그 말을 하고 돌아서던 그의 대도에 새겨진 글자.

자신을 수줍게 바라보던 그 순수한 눈빛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던 내용이었다.

그때 누워 있던 단연이 나직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단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미친 생각.”

* * *

천마신교 정안지부는 상주 인원이 이십여 명에 불과한 소지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마교지부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매일이 평화로운 그곳의 책임자는 지부장 강달(姜達)이었다.

“지부장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나와보니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안 지부 입구에서 네 명의 여인이 문을 등진 채 다수의 복면인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여인들은 단아 일행들이었고, 이곳까지 칠로추살대가 뒤쫓아 온 것이다.

“문 좀 열어주세요! 지부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입구를 지키는 마인들 때문에 칠로추살대는 포위만 했을 뿐,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강달이 나왔다.

그와 함께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십여 명의 지부 마인이 뒤따라 나왔다.

강달이 단아 일행을 먼저 쳐다보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은 단아 뿐이었다.

초희는 정신을 잃은 단비의 머리를 무릎에 눕힌 채 보살피고 있었고, 단연은 그 옆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정말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은 몰골들이었다.

그 네 여인 앞에 십여 명의 복면인이 반원을 그린 채 둘러서 있었다.

강달이 입구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현판이 떨어져서 이 지랄인가 싶었는데, 천마신교 정안지부 현판은 잘 붙어 있었다.

그때 수하가 나직이 말했다.

“복면 쓴 자들은 칠로추살대 놈들입니다.”

칠로추살대란 말에 강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익히 알고 있다. 돈이라면 친구도, 가족도 죽이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저것들은 원래 미친놈들이라 그렇다 치고, 너희는 뭐냐?”

강달의 물음에 단아가 대답했다.

“우린 단씨삼매라는 낭인들입니다. 부디 도와주세요.”

“그런 부탁이라면 무림맹 지부 앞에 가서 해야지.”

강달이 복면인들을 보며 말했다.

“깨끗이 치우고 가라. 핏자국 하나라도 남기면 죽을 줄 알아.”

알아서 죽이고 꺼지라는 말이었다.

강달이 돌아서 들어가 버리려는데.

“신교의 고수께서 우릴 이리로 보내셨어요.”

순간 강달이 흠칫 멈췄다. 그녀를 향해 돌아서는 눈빛이 차가웠다.

“고수 누가?”

당연히 강달은 여인이 살려고 거짓말한다고 여겼다. 그런 기별은 받지 않았으니까.

“어제 유영객잔을 떠났고, 작은 키에 커다란 대도를 쓰는 분이에요. 그 대도에는 무쌍이란 글자가 적혀 있어요.”

순간 흐르는 정적.

다시 강달이 물었다.

“그게 누군데?”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대답했다.

“저도 누군지 몰라요.”

그러자 강달의 입에서 차가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이 미친년이.”

그래, 이건 그녀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이미 선택했고, 이제 빠져나갈 길은 없다. 앞은 칠로추살대고 뒤는 마교였으니까.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분이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서 도움을 받으라 했어요.”

마교 지부장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설령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객잔에서 본 남자가 마인이 아니거나, 혹은 일개 말단 무인에 불과하다면, 자신들은 이 마인들에게 죽게 될 것이다.

“당신보다 높은 사람이라 확신해요. 우릴 살리면 당신도 살고, 여기서 우리가 죽으면 당신도 죽을 거예요.”

바로 그때였다. 그곳으로 또 다른 칠로추살대들이 도착했다. 십여 명이 더 추가되면서 이제 그들의 숫자는 이십여 명이 되었다. 보아하니 이쪽으로 모두 집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놈들은 자신과 지부 마인들을 봐도 전혀 겁을 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기를 드러내며 우리가 다 모이기만 해봐라, 그런 기세였다.

‘이 새끼들이, 죽으려고!’

하지만 강달은 돌아서며 말했다.

“문 닫아라.”

그때 들려온 간절한 부탁.

“여기 세 사람만이라도 넣어주세요.”

강달이 단아에게 돌아섰다.

“저는 괜찮으니 여기 세 사람만이라도 넣어주세요. 나중에 그분이 왔을 때, 할 말은 있어야 하잖아요?”

단아는 혼자 싸우다 죽을 각오였다.

강달이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너희 자매가 낭인이라면 칠로추살대가 쫓아온 건 저 여자겠군.”

강달이 초희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저놈들 목적은 저 여자일 테니. 저 여자는 남기고 너희 셋은 받아주겠다.”

단아가 초희를 바라보았다. 단비를 안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세 사람만이라도 목숨을 구하라는 눈빛이었다.

단아가 강달에게 말했다.

“동생들만 받아주세요. 저와 저 여인은 남겠어요.”

동생들만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초희는 그러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단아는 이런 상황에서 목숨을 버리면 버렸지 청부자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강달이 단아를 쳐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너희만 들어오려 했으면 아무도 못 들어왔을 거다.”

그 말인즉.

“다 들어와라.”

정안지부가 그녀들을 받아들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단아와 초희가 안도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초희가 고개 숙여 단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동생들이 안으로 옮겨지고 단아와 초희도 들어왔다.

강달은 단아의 내공을 제압하고 검을 뺏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의 의심은 당연했으니까.

강달이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바깥의 저 미친놈들이 뭔 짓을 할지 모른다. 비상 걸고 자는 애들 다 깨워.”

“알겠습니다.”

“그리고 통천각에 긴급 전서 날려! 지금 상황 전하고.”

그때 단아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신이 말한 것도 전해달라는 의미였다.

“아까 저 여자가 말한 것도 추가해. 작은 키에 무쌍이란 글자가 적힌 대도를 쓰고. 무슨 객잔이라고?”

그의 물음에 단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유영객잔이에요.”

“어제 유영객잔을 떠난 사람을 긴급히 찾는다고.”

“네!”

마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장기를 착용한 무인들이 건물에서 나왔고 암기 상자에서 암기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 피하려고 헛소리를 한 거면, 각오해야 할 거다.”

강달의 협박에도 단아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이미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으니까.

“검 돌려주시고 제 내공 풀어주세요. 싸움이 벌어지면 제가 꼭 필요할 거예요.”

그녀는 천마신교 지부장 앞에서도 당당했다. 사실 강달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이 당당함이었다. 홀로 남아서 청부자를 지키겠다는 용기.

그리고 강달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저도 살아서 시를 다시 듣고 싶으니까요.”

그녀가 널 찾고 있다.

전서가 도착한 건 마차를 세우고 말들을 쉬게 해주고 있을 때였다.

“통천각에서 긴급 전서가 왔습니다.”

휘가 검우진에게 전서를 건넸다.

내용을 확인한 검우진이 전서를 아들에게 주었다.

전서를 읽은 검무극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혈천도마에게 보여주니 그 역시 같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은 저 멀리 들판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 옆을 거닐고 있었다.

검무극이 검우진과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저희가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훌쩍 서대룡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가자, 오른팔!”

무작정 내달리자 서대룡이 엉겁결에 따라 달렸다.

“무슨 일입니까?”

“긴급전서가 날아왔다.”

곧이어 검무극의 입에서 서대룡 인생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널 찾고 있다.”

그 말에 서대룡이 검무극을 제치고 앞장서서 달렸다. 순간 속도는 쾌속보보다 더 빨랐다.

하나, 저 멀리 달려가던 서대룡이 멈춰 섰다.

“어딥니까?”

“녀석아, 그러다 심장 터진다.”

서대룡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어디냐고요!”

* * *

“괜찮아?”

눈을 뜬 둘째 단비 앞에 언니 단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암기에 발린 독 때문에 한동안 정신을 잃었어.”

다행히 단비는 이곳 지부에서 치료를 받으며 열이 내렸다.

“여긴 어디야?”

“천마신교 정안지부.”

“뭐?”

놀란 그녀에게 단아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렇게 됐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연이는?”

“아까 깨서 밥 먹고 있다. 너도 뭐 좀 먹을래?”

“목말라.”

단아가 물을 가져다줬다. 그제야 정신이 든 단비가 언니를 걱정했다.

“언니는 괜찮아?”

정신을 잃었다 깼다 하면서 쉴 새 없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가 어떻게 자신을 지켰을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난 괜찮아.”

“만날 괜찮다지?”

동생들을 위해 청춘을 다 바친 그녀였다.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그때 단비 눈에 언니 옷에 온통 묻은 피가 들어왔다. 걱정스러운 그 시선에 단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내 피 아니니까 걱정 그만하고. 뭐 좀 먹을래?”

“배 안 고파.”

“그럼 조금만 더 자.”

“일어날 거야.”

일어나려던 그녀가 휘청했다. 아직 움직일 몸 상태가 아니었다.

단아가 동생을 다시 침상에 눕혔다.

“싸워야 하면 나도 깨워줘.”

“그래.”

“꼭!”

그렇게 당부한 후 단비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단아는 말없이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걱정과 애정이 가득한 그녀의 눈빛으로 볼 때, 싸움은 꿈속에서나 해야 할 것이다.

그곳으로 초희가 들어왔다.

“제가 있을게요.”

“그럼 부탁드려요.”

그렇게 돌아서 나오려는데 초희가 말했다.

“감사해요.”

그녀의 진심 어린 감사에 단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지부의 마인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오늘 일이 누구 때문에 벌어졌는지 대충 알고 있을 텐데, 담장에 걸터앉아 밖을 보고 있는 지부장 강달 때문인지 자신에게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강달이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이미 저 앞으로 모여든 칠로추살대는 백여 명에 달했다. 이쪽은 고작 이십여 명. 저들이 죽자고 달려들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우릴 쳤다간 뒷수습을 할 수 없을 텐데.”

강달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지만, 단아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마교를 상대하면서까지 이렇게 무리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초희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대체 돈을 얼마나 받았기에?

그때 막내 단연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강달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부탁했다.

“저 비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단아가 그녀를 말렸다.

“그 몸으로 안 돼. 쉬어.”

“우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나도 싸워야지.”

강달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이 소저에게 비수 한 상자 내줘.”

“네.”

마인이 비수를 가져와서 단연에게 주었다. 비수를 챙긴 후 강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싸우다 나 대신 죽으라고 주는 건데.”

단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달이 그럼 무슨 이유겠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놈들이 지부장님과 대면을 요청했습니다.”

“그냥 다 꺼지라고 해.”

“칠로추살대 대주가 직접 왔답니다.”

“뭐?”

강달이 담 위로 뛰어올랐다. 단아도 함께 올라갔다.

진을 치고 있던 칠로추살대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칠로추살대의 대주 요굉(姚宏)이었다.

낭인임에도 대단한 무공실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평소 외부에 잘 등장하지 않는 그였는데 오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만큼 오늘 일이 이들에게 중요한 일임을 그의 등장으로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요굉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그를 따르는 사인방이라 불리는 정예들도 함께 왔다. 그들 넷도 일반 칠로추살대의 실력보다 훨씬 위였다.

요굉과 사인방이 등장하자 칠로추살대의 사기가 극에 달했다. 모두 함성을 질렀고, 살기를 마구 뿜어냈다.

강달이 인상을 굳혔다.

“이것들이 죽으려고!”

하지만 그의 눈빛은 심각했다.

요굉이 왔다면 정말 이 담을 넘을 수도 있다는 의미, 놈들이 제대로 작정한 것이다.

“그 여자가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이 난리냐?”

단아가 악의에 가득한 칠로추살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적어도 나쁜 짓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때 들려오는 말소리.

“지부장, 나 좀 봅시다.”

우렁찬 목소리에 담긴 내공으로 자신의 무위를 자랑한 사람은 요굉이었다.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던 강달이 훌쩍 밖으로 뛰어내렸다. 문을 열고 마인들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단아는 말없이 이 만남을 지켜보았다. 요굉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급속히 나빠졌다. 과연 요굉과 사인방까지 등장했는데 자신들을 안 내어줄 수 있을까? 모든 건 강달의 결정에 달렸다.

요굉과 강달이 삼십여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소란을 떨어 미안하오.”

강달은 저 정중한 사과에 어떤 진심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요굉이 얼마나 사악한 놈인지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을 산 채로 태워죽이는 걸 즐기는 놈이다.

“우리가 뒤쫓는 사람이 그쪽으로 피신했다고 들었소. 그 사람들을 내어주면 바로 돌아가겠소.”

강달은 부드러운 어조로 담담히 답했다.

“피신해 온 게 아니라 우리 손님으로 온 이들이오.”

말조차 섞기 싫은 상대였지만, 수하들 앞에서 굳이 자존심을 긁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객은 객이지만 불청객들이겠지요. 그만 내어주시오.”

요굉 뒤에 늘어선 칠로추살대의 살기만큼이나, 강달에겐 우린 마인이라는 자부심, 아니 깡다구가 있었다.

“거절하겠다면?”

서로를 향한 눈빛에 팽팽한 긴장감이 들었다.

“저들이 떠나도 여전히 지부장님과 수하분들은 이곳에 남지 않겠소?”

그때 사적으로 보복할 수도 있다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물론, 강달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야 모를 일이지. 본교를 우습게 여긴 것들 때려잡고 승진해서 본단으로 갈지도.”

정말 상대가 마교 지부장만 아니면, 검을 뽑아도 몇 번은 뽑았을 거다. 요굉 인생에서 좀처럼 발휘되지 않았던 인내심이 오늘 제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강달이 뒤에 붙은 지부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이 현판을 넘으면 그땐 돌이킬 수 없소. 우리가 누군지 잊지 말고 행동하시오.”

뒤에서 들려오는 요굉의 제안.

“오죽하면 그대들의 담을 넘으려 하겠소? 지부장께서 이번 한 번만 양보해 주시오. 그 은혜는 내가 확실하게 갚겠소.”

그 말이 뭐겠는가? 나중에 확실하게 돈으로 보상하겠다는 의미였다.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드리지. 기다리겠소.”

강달은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그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곧 치고 들어올 거다. 맞을 준비해.”

“네!”

상대가 자신이 여인들을 내놓지 않을 것을 눈치챘음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런 놈들이 약속을 지키는 걸 본 적이 없다.

마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당 양쪽으로 쇠기둥이 세워지고 그 앞으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낚싯줄 같은 것이 설치되었다. 전쟁에서 사용되는 단혈사(斷血絲)였다.

다른 마인들이 일시에 암기를 발출하는 이동식 기관을 끌고 나왔다. 조직은 결국 수장 따라간다고, 이곳 정안지부 마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단아는 내심 놀랐다.

‘왜 무림이 마교를 두려워하는지 알겠구나. 일개 소지부가 이러할진대.’

진짜 마교가 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

강달이 단아와 단연을 힐끗 돌아보았다.

두 여인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은 단비와 초희가 있는 건물 앞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단아가 강달에게 말했다.

“우리가 죽어서 말씀 못 드릴 수도 있으니 미리 말씀드릴게요. 우릴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옆에 있던 단연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강달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너희를 위해서 받아준 거 아니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 이건 나대로 승부수를 던진 거니까. 그러니 네가 말한 그 고수가 꼭 나보다 신분이 높아야 할 거야.”

단아가 서대룡을 떠올렸다. 그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 이 거친 이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죄송해요. 결국 속인 게 되겠네요.’

그 사람을 객잔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 청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우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굳이 변명하자면 운명이 우릴 떠밀었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담 밖을 감시하던 마인이 소리쳤다.

“옵니다!”

마인들이 자기 자리에서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놈들이 일제히 담을 넘었다. 그야말로 기습을 감행했는데, 이쪽은 대비가 되어 있었다.

푸악! 파아악! 푸아아아악!

설치해 둔 단혈사에 몸을 날렸던 복면인들의 사지가 잘려 나갔다.

하지만 놈들은 계속 넘어왔다. 두 번째로 넘은 이들이 피에 젖어 모습을 드러낸 단혈사를 검으로 잘랐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기관의 암기가 발출되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단혈사를 잘랐던 놈들이 모두 암기에 맞고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놈들은 다시 기관을 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담을 넘었다.

장내에 난전이 벌어졌다. 놈들이 명령을 받은 모양이다. 마인들을 숫자로 몰아붙이며 그들은 재빨리 여인들을 찾았다.

마인들과의 충돌은 최소화하고, 여인들만 재빠르게 죽이고 빠지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십여 명의 복면인이 단아와 단연을 향해 몰려들었다.

단아는 동생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싸웠다.

실력이 그들보다 위였지만, 놈들은 숫자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단아는 이를 악물고 미친년처럼 싸웠다. 자신이 죽으면 동생들이 죽는다는 마음으로 싸우자, 놈들은 쉽게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단연 역시 비수를 날리며 적들을 쓰러뜨렸다.

그때였다.

요굉과 사인방이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칠로추살대 무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강달도 그 상황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돕기 위해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놈들이 워낙 악착같이 밀어붙이고 있어 자신이 자리를 뜨면 수하들이 죽을 상황이었다. 그는 수하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단연이 요굉을 향해 연속해서 비수를 날렸다.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막는지를 통해 상대의 실력을 보려는 것이다.

챙! 챙!

요굉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함께 걸어오던 양쪽의 사인방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비수를 쳐냈다.

‘언니만큼 고수다!’

그런 실력자가 넷. 거기에 그들의 수장인 요굉까지 있었다.

단아와 단연이 용감하게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요굉이 훌쩍 몸을 날려서 그녀들을 상대했다.

그녀들의 한 수 한 수에는 서로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지만, 요굉과의 명백한 실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채 다섯 수를 버티지 못하고 단연이 먼저 일장을 얻어맞고 뒤로 튕겨 나갔다. 피를 토해내는 소리에 단아가 소리쳤다.

“연아!”

동생이 크게 다쳤을까 봐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순간, 단아도 일격을 얻어맞고 바닥을 뒹굴었다. 검을 뽑지도 않은 요굉에게 두 여인 모두 당한 것이다.

피를 울컥 토한 단아가 바닥에 떨어진 아무 검이나 주워 들고는 동생 앞을 막아섰다.

“괜찮아?”

“……난 괜찮아.”

목소리로 알 수 있었다. 동생도 자신도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동생도 다시 일어났다. 자신들이 뚫리면 그 뒤에는 단비와 초희가 있었으니까.

그녀들을 바라보는 요굉의 눈빛은 뱀처럼 차갑기만 했다.

“너희 빌어먹을 년들 때문에 일이 골치 아파졌다. 어서 없애고 그년 모가지 잘라 와!”

명령을 받은 사인방이 앞으로 나섰다.

“인물이 반반한 년들인데 그냥 죽이기 아깝습니다.”

제압해서 데려가면 안 되겠냐는 눈빛으로 사인방들이 요굉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색심을 드러내는 미친 말종들이었다.

요굉이 차갑게 명령했다.

“헛소리 말고 갈기갈기 찢어버려!”

사인방이 두 여인을 향해 일제히 검을 겨눴다.

단아는 단연의 손을 꼭 잡았다.

동생의 떨리는 손이 자신의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동생을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다.’

사인방이 일제히 검기를 발출하던 그 순간!

쇄애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다른 쪽에서 도강이 회오리치며 날아들었다. 그 목표는 사인방이었다.

콰콰콰콰콰콰콰!

회오리치는 강기의 칼날들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면서 그들을 쓸고 지나갔다.

퍽! 퍼퍽! 퍼퍼퍼퍼퍼퍽!

피하고 말고 할 사이도 없이 사인방이 온몸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그들이 날린 검기가 그녀들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쇄애애애애액!

무섭게 날아드는 검기들을 보며 단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상 때문에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동생을 등 뒤로 당겼다.

콰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들렸다. 검기가 무엇인가에 부딪쳐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이어진 적막.

온몸이 박살 났어야 했는데.

‘살았어?’

단아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장내는 고요했다.

모두가 싸움을 멈춘 채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굉은 피떡이 되어 흩어진 사인방의 시체를 경악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강달 역시 팔에서 피를 흘리며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인들도, 칠로추살대도 모두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앞으로 누군가의 등이 보였다.

“하아, 하아, 하아.”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는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세워진 대도.

왜소한 남자의 등 너머로 글자 하나가 보였다.

소교주의 신임을 받는 남자

“……정말 오셨군요.”

단아의 놀란 목소리가 떨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을까?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등은 더는 왜소한 등이 아니었다. 쏟아져 날아오던 사인방의 그 무서운 검기를 막아낸 등이었으니까. 자신과 동생들 앞에 활짝 열렸던 지옥문을 다시 닫아준 등이었으니까.

서대룡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떨리는 그의 눈빛에 다행히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그녀를 아슬아슬하게 살렸다는 사실에 서대룡은 감정이 북받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여길?”

단아의 물음에 서대룡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아는 가슴이 울컥했다. 감격해서가 아니라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가 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를 믿지 않았으니까.

이 남자는 이렇게 숨이 넘어갈 정도로 달려와 주었는데.

그 말에 단아만큼이나 놀란 사람은 강달이었다.

‘정말 있었구나!’

왜소한 체구에 대도를 든 고수가.

그 역시 반신반의했다. 아니,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를 받아준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동생들을 지키려는, 청부자를 지키려는 그녀의 멋진 모습 때문이었다.

한데 그녀가 말한 사람이 정말 있다니?

만약 그녀 말대로 저 남자가 본단의 고수라면 나서서 인사부터 해야 했는데, 자신들은 여전히 칠로추살대 놈들에게 둘러싸여 검과 검을 겨눈 채 대치 중이었다.

물론 자신들의 수하들은 물론, 추살대 놈들까지 새로 등장한 남자에게 온정신이 다 가 있는 상태였지만.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요굉이었다.

‘뭐지? 이놈은?’

그는 헷갈렸다. 여인을 바라보는 얼굴에 담긴 것은 순진함이었고 부끄러움이었다.

사인방을 일격에 날려 보낸 자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오죽 혼란스러웠으면 사인방의 시체를 다시 쳐다보았을까?

요굉이 은밀히 양손 가득 내공을 끌어올렸다. 여차하면 자신의 독문무공인 혈수장(血手掌)으로 기습할 생각이었다.

“어디에서 오셨는가?”

그는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누구의 팔다리인지 구분할 수 없게 흩어져 있는 수십 조각의 사인방이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서대룡이 그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그때 단아는 보았다. 자신을 바라볼 때의 그 부끄러워하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워지는 것을. 순간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구시오?”

차분한 서대룡의 물음에 요굉이 대답했다.

“나는 칠로추살대를 책임지고 있는 요굉이라 하네.”

그는 자신을 완전히 낮추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오만을 부리지도 않았다. 다시 난전이 벌어질 테니 수하들의 사기를 생각해야 했고, 상대의 실력도 생각해야 했다.

“그대는 누군가?”

서대룡은 대답 대신 앞에 세워진 대도를 뽑아 들었다. 그는 몸집만큼이나 큰 대도를 가볍게 다뤘다. 체구가 작은 그였기에 더욱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검무극 앞에서나 너스레 떠는 서대룡이지, 요굉 앞에 선 서대룡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칠로추살대, 들어본 적이 있소.”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서대룡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그녀가 죽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알아주시니 감격스럽네.”

“내가 알고 있다는 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거요.”

자신들에게 걸린 악인의 끝은 뇌옥 아니면 참형이었으니까.

“당신들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었소.”

요굉은 서대룡이 무슨 말을 할지 긴장했다. 기왕이면 좋은 말이 나와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길 바랐는데.

“내 손에 한 번만 걸려라.”

요굉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대신 이 질문에 답해주면 용서해 줄 수도 있지.”

용서란 말에 요굉의 눈가가 살기로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일장을 발출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무슨 질문인가?”

“이번 일을 청부한 자가 누구지?”

요굉이 차갑게 대답했다.

“말해줄 수 있는 청부자라면, 우리가 이 담을 넘어 들어왔겠나?”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오히려 서대룡의 입가에 다행이란 미소가 지어졌다.

그 미소로 요굉은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고 싶구나.’

오히려 요굉은 부드럽게 표정을 풀었다.

“충분히 피를 봤으니, 이쯤하고 물러나겠네. 어떤가? 우릴 그냥 보내준다면…….”

기회를 엿보던 요굉의 쌍수에서 장법이 발출되었다.

푸아아아앙!

요굉의 손에서 발출된 붉은 기운의 장법이 서대룡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한 수였다.

쇄애애애애액!

동시에 서대룡의 대도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두 개의 기운이 충돌했다. 요굉은 자신의 혈수장이 상대의 공격에 막힐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다음 수를 연이어 발출하려 마음먹고 있었고.

하지만 상대의 강기가 자신의 장법을 가르며 그대로 자신을 향해 날아들 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안 돼!’

그의 앞에 선 젊은 고수는 임독양맥을 타통하고 두 개의 영약까지 복용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발휘하는 무공은 바로 마존의 마공.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다.

아무리 요굉이 잘나가는 낭인 고수라지만, 그런 서대룡이 펼쳐내는 멸천마도식을 막아낼 수는 없다.

멸천마도식 제일식 멸도일격.

붉은 장법을 가르고 그대로 날아간 강기가 요굉의 몸에 적중했다.

퍼어어엉!

요굉의 몸이 눈앞에서 산산조각 나서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시체를 보며 그곳에 있던 칠십여 명의 칠로추살대는 경악했다. 자신들에게는 그야말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무서운 요굉이었는데.

단 일격에 이렇게 죽어버릴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숨 막히게 흐르는 정적.

정적을 깬 사람은 강달이었다.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이들에게 말했다.

“너희 대주 죽었다. 검들 내려라.”

그의 말에 칠로추살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쉭! 푸욱! 쉬익! 푸우욱!

강달이 검을 내질러서 앞에 있던 칠로추살대 놈들 둘을 연속해서 찔렀다.

집중하지 못하고 있던 두 놈이 연이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검을 안 버리면 뒈진다!”

강달의 사나운 기세에 근처에 있던 십여 명이 검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흥분해서 날뛰는 자들도 더 많았다.

“저 새끼는 죽여!”

“반드시 죽여!”

이십여 명의 추살대 놈이 강달을 향해 달려들었다. 왜 이놈들을 미친놈들이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검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자들이었다.

“지부장님을 지켜!”

마인들이 앞을 막아서려던 바로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앙!

또다시 허공을 가른 서대룡의 대도.

멸천마도식 제이식 멸도파랑

퍼퍼퍼퍼퍼퍽!

달려들던 추살대가 도기의 물결에 휩쓸려 터져나갔다. 그 한 수에 달려가던 모두 피떡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악인을 다루는 일은 평소 서대룡의 일이었다. 누구보다 그들의 생리에 대해 잘 알았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조금만 허점을 보이면 물어뜯으려는 것이 그들이었다. 오늘 그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었다.

서대룡이 아직도 검을 버리지 않은 자들에게 도를 겨눴다.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한계는 있는 법, 나머지 추살대 놈들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검을 내던졌다.

지부의 마인들이 그들의 내공을 제압하고 모두 무릎을 꿇렸다. 목숨을 구했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천마신교의 뇌옥에 갇히게 되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강달이 서대룡에게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천마신교 정안지부장 강달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서대룡에게 집중되었다.

비로소 서대룡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천마신교 황천각 각주 서대룡이네.”

순간 강달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직위였다. 놀라기는 강달뿐만 아니라 다른 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부장과 각주는 그야말로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그냥 각주가 아니었다.

‘황천각주라고?’

황천각은 천마신교의 반역과 비리, 부패를 조사하는 감찰기관이었다. 조직의 성격상 모든 교내 조직에 우선하는 가장 힘 있는 조직.

마인들을 붙잡아가는 귀신들, 마인들을 벌벌 떨게 하는 황천각은 그야말로 천마신교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멍하게 있던 강달이 재빨리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천각주님을 뵙습니다.”

착착착.

그러자 지부의 마인들도 일제히 자세를 똑바로 하며 절도있게 일제히 예를 갖췄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강달은 기뻤다. 정말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 고수가 황천각주라니?

‘내게도 이런 일이?’

어쩌면 이번 일로 자신의 인생에 환한 볕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본단으로 가게 될지도!’

정말 그렇게 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서대룡이 신분을 밝히자 단아와 단연도 깜짝 놀랐다. 사실 그녀들은 황천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 무서운 지부 마인들의 반응으로 볼 때, 높은 사람이 확실했다.

신분을 밝힌 서대룡이 다시 단아를 향해 돌아섰다.

적들을 단칼에 터뜨려버리던 무서운 그가, 마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그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날처럼 눈빛은 순수했다.

서대룡이 그녀에게 물었다.

“다치신 것 같은데 몸은 어떠십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때 건물에서 단비와 초희가 나왔다. 뒤늦게 깬 단비가 바깥에서 들리는 싸움 소리에 초희의 만류에도 언니를 돕기 위해 나온 것이다.

한데 장내에 펼쳐진 상황에 그녀들은 깜짝 놀랐다.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칠로추살대는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놀란 그녀의 시선이 모두의 가운데 서 있는 서대룡을 향했다.

‘저 사람은?’

그녀는 당연히 서대룡을 알아보았다. 언니를 쫓아 나와 마인이라 밝힌 그 남자를 어찌 모르겠는가?

단아는 동생이 말실수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천마신교의 황천각주님이시다. 우리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어서 인사드려라.”

황천각주란 말에 단비는 깜짝 놀랐다. 정말 마인이었고, 게다가 높은 분이라고?

단비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때, 막내 단연이 단아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언니 남자 보는 눈 낮다고 놀린 거, 취소할게.”

단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억누르고 있던 내상이 도진 것이다.

“괜찮소? 괜찮으시오?”

놀란 서대룡이 달려와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그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오히려 단아가 더 당황했다.

“괜찮아요.”

“괜찮긴! 어서 나와서 도와주십시오.”

강달이 다급히 말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그대에게 한 말이 아니오.”

서대룡이 허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서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지붕에서 누군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검무극이었다.

그는 서대룡이 이 일을 혼자 마무리하도록 일부러 나서지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서대룡이 되기를 바랐으니까.

피를 토한 와중에도 단아는 동생부터 챙겼다.

“제 동생도 다쳤어요. 제 동생부터 봐주세요.”

“언니, 무슨 소리야! 언니부터 봐주세요.”

검무극은 단아부터 등에 한줄기 내력을 주입해서 몸 상태를 살폈다. 무인의 내상에 관해선 어지간한 의원보다 뛰어난 그였다.

“피가 내부에서 터지지 않고 밖으로 토해내면서 오히려 중상을 피했습니다.”

다행히 두 여인 모두 치명적인 내상은 피한 상태였다. 한동안 정양하면 나을 부상이었다.

“감사합니다, 치료해 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단아가 고마움을 표하자 검무극이 그 공을 서대룡에게 돌렸다.

“감사는 서 각주님께 하시오. 그대들을 구하겠다고 쉬지 않고 달려오셨으니까.”

단아가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앞서 그의 거친 숨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과 동생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녀의 시선에 서대룡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그 부끄러워하는 시선만큼이나 지금의 표정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을 보며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면 막내 단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소협께서는 누구시죠? 성함을 알고 싶어요.”

다들 당연히 이 젊은 무인을 황천각주의 수하라고 생각했다.

순간 서대룡은 아차, 했다.

‘제가 여자에 빠져서 소교주님 소개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서대룡이 강달을 비롯한 지부의 마인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본교의 소교주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춰라!”

소교주?

강달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천각주야 자신이 전서로 찾아서 왔다지만, 소교주라니?

“뭣들 하는가?”

서대룡의 외침에 강달을 비롯한 마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소문이 무성한 그 소교주까지 나타나자 모두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놀라기는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덩달아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저 사람이 마교 소교주였다니!’

검무극이 그들을 모두 일어나게 했다.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마음이 급해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검무극을 먼저 소개한 후에 치료하게 해야 했다. 친할수록 더 예를 갖춰야 하는데. 검무극이 매번 말하는 게 그건데.

미안함 가득한 서대룡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서대룡이 어떤 마음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그는 서대룡과 단아의 인연이 이어져서 기쁠 뿐이다.

“이해합니다, 각주님.”

단아가 보는 앞이기에 검무극도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각주님은 제가 가장 신임하고 아끼는 분이십니다. 각주님이 지키려는 사람은 곧 제가 지켜야 할 분입니다.”

검무극은 서대룡을 만난 이래 가장 예의 바르게 그를 대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여인 앞이라고 자신을 극진히 대해주는 그 마음을 어찌 서대룡이 모르겠는가?

‘……정말 감사합니다.’

단아는 더욱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이 남자, 마교 소교주의 신임을 받고 있구나.

강달은 강달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황천각주가 온 것도 놀라웠지만 소교주가 자신의 지부에 와 있다는 게 도통 믿기지 않았다.

마인으로 살면서 평생 한 번 겪어보기 힘든 경험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설령 본단에 가지 못하더라도 이 추억 하나만으로도 두고두고 자랑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

그때 수하들이 경계하며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강달의 시선이 바깥을 향했다.

저 멀리 한 대의 마차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 꿈이다, 꿈.

강달이 훌쩍 몸을 날려서 담 위로 올라섰다.

“다가오는 마차는 한 대뿐입니다. 마부석에 한 명이 앉아 있고…….”

순간 그의 시선이 담 아래를 향했다.

그곳을 내려다본 강달은 깜짝 놀랐다. 아무도 없어야 할 담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한 명이 아니었다. 서너 걸음에 한 명씩 거대한 덩치의 무인이 담장을 등진 채 둘러싸고 있었다.

강달이 뒤로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담장에서 물러나!”

담 근처에 서 있던 지부 무인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담 밖에 누군가 있습니다!”

강달은 요굉과 칠로추살대를 도우러 온 자들이라고 여겼다.

‘대체 어느새? 담을 둘러쌀 때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무리 소교주와 황천각주에게 신경을 빼앗겼다지만 이렇게나 모르고 있었다니.

그러자 드는 자연스러운 의구심.

자신은 못 알아챘더라도, 소교주나 황천각주는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설마 저들이 두 분보다 더 고수란 뜻인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강달이 검무극과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두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아! 소교주님의 수하들이구나!’

당연한 일이다. 소교주가 움직이는데 혼자 움직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들은 담장을 등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노렸다면 담장을 향해 서 있었겠지.

‘저들이 기습했다면 우린 다 죽었겠구나.’

새삼 강달은 본단 마인들의 실력에 감탄했다.

‘하긴, 소교주님을 지키는 이들인데 강하겠지. 한 번 사는 인생, 이렇게 멋지게 살아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 마차가 입구에 도착했다.

‘누군지 몰라도 날 잘못 잡았네.’

강달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소교주와 황천각주가 와 있더라도 이곳 지부의 주인은 자신이다.

강달이 마차를 몰고 온 마부석의 남자에게 말했다.

“오늘 본 지부에 귀한 분들이 와 계십니다. 오늘은 그 어떤 방문객도 받지 않으니 돌아가시고 다음에 방문하시오.”

하지만 마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달은 마부석에 앉은 남자를 살폈다. 별다른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보통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마차에 탄 이도 대단한 신분일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놈들아, 여긴 지금 천마신교 소교주님께서 와 계신다. 죽기 싫으면 썩 꺼져라!’

이렇게 소리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겠지?

“좋게 말할 때 물러가시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마차.

움직인 사람은 담 아래 서 있던 덩치 무인이었다.

‘결국 소교주의 호위들이 움직이는구나.’

강달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인은 마차 쪽으로 가지 않고 지부로 들어섰다.

문을 꽉 채우며 들어선 무인을 보는 순간, 강달과 지부 마인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얼굴을 가르는 상처와 주위를 둘러보는 강렬한 눈빛. 그와 눈을 마주치자 온몸이 떨려왔다.

그는 바로 마군주 장호였다.

마군은 검우진이 탄 마차와 조금 거리를 둔 채 그 뒤를 따라서 교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통천각의 기별을 받고 이곳에 천마를 보필하러 온 것이다.

교주가 천마신교의 지부를 방문하는데 어찌 격식을 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군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그때 강달은 보았다. 장호의 가슴에 새겨진 글자를.

강달은 깜짝 놀랐다.

‘설마?’

그때 서대룡이 말했다.

“인사드리게. 본교의 마군을 이끄는 마군주시네.”

마군주란 말에 강달은 너무 놀라서 잠시 넋이 나갔다. 정말이지 오늘은 더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여겼었는데.

장호를 향한 지부 마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일반 마인들에게 마군의 의미는 남달랐다.

본교 최정예 조직 마군.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고 전쟁이 벌어지면 선두에 서는 마군은 일반 마인들의 꿈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강달과 지부 마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군주님을 뵙습니다.”

여전히 강달은 마군들이 소교주를 호위하기 위해 나섰다고 여겼다. 오늘 지부 방문과 관련해서 그의 머릿속 한계는 소교주까지였으니까.

장호를 선두로 마군들이 뒤이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기를 감추지 않은 그들의 압도적인 기세에 마인들은 물론이고 무릎을 꿇고 있던 칠로추살대들까지 몸을 움츠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경이로운 눈빛을 받으며 마군들이 안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한 명만 있어도 섬뜩한 이들인데, 끝도 없이 들어왔다.

네 여인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마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덩치와 강렬한 기세에 공포감을 느꼈다.

검무극과 서대룡을 보다가 그들을 보니, 진짜 마인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마군들이 입구에서부터 양쪽으로 도열해서 길을 만들었다.

‘마차를 막으려는 게 아니다?’

강달의 시선이 마차를 향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던 그 순간, 마차 문이 열렸다.

마차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장호가 마인들에게 말했다.

“본교의 마존이신 혈천도마님이시다.”

그 말에 마인들은 또다시 경악했다. 이런 시골 소지부에서 마존 볼 일이 있었겠는가?

강달도, 지부 마인들도 마존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존을 뵙습니다!”

그들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인사했다. 강달의 심장이 떨렸다.

‘살다 보니 마존을 직접 뵙는 날도 오는구나!’

마존에 대한 온갖 무서운 소문을 들었다. 이제부터 숨 한 번 잘못 쉬면 죽는다. 그가 눈빛으로 수하들을 단속했다.

‘조심해! 언행 조심해! 쳐다도 보지 마!’

잘 훈련된 수하들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이제부터였다.

마차에서 내린 혈천도마가 마차 옆에 공손하게 서더니 누군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마차에서 검우진이 내렸다.

검우진을 보는 순간 강달은 얼어붙었다. 살면서 많은 무인을 봐왔지만 이런 존재감은 처음이었다. 앞서 먼저 내렸던 혈천도마도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지금 이 남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검우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도열한 마군들 사이로 걸어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강달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마존이 이런 지극한 예를 갖추는 사람은? 이 무림에서 마군이 만든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장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교주님께 예를 갖춰라!”

마인 중 하나가 으악하고 비명을 내질렀다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강달과 마인들이 일제히 부복해 엎드리며 소리쳤다.

“신교불패(神敎不敗)! 천마영존(天魔永存)! 지엄하신 교주님을 뵙습니다.”

강달은 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자신의 지부에 교주님이 방문했다고?

‘꿈인가?’

황천각주가 오고, 소교주가 오고, 마군이 오고, 마존이 오고. 여기까지도 꿈인데 교주님까지 오신다고?

‘그래, 이건 꿈이다, 꿈.’

그는 꿈이 아닌 줄 알면서도 순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오히려 그들만큼 놀라지 않았다.

천마신교 교주는 저기 다른 세상 사람 이야기 같은 존재였으니까.

무림에는 천마가 있고 무림맹주가 있고, 사도맹주가 있다? 그건 마치 하늘에는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다. 이런 느낌과 비슷했으니까.

그들이 놀란 건 마교주가 왔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마교주가 자신들이 아는 사람이란 데 있었다.

막내 단연이 헉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분이야!”

검우진의 얼굴을 본 세 여인은 정말 놀랐다. 그날 객잔에서 봤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리가 요리를 대접한 분이 천마이시라고?’

세 여인이 서로를 쳐다보며 놀랐다.

막내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나야, 나! 내가 저분에게 요리를 보내자고 했어.’

막내의 남자 취향이 천마라고?

초희는 그들 뒤에 서 있었다.

얼떨떨한 그녀들과는 달리 초희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놀랍고 말이 안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화루의 기녀다. 술 취한 무인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사람이 저기 저 사람이다.

내가 천마를 만났을 때 말이야, 그 온갖 허풍에서부터 천마강림 무림멸망의 그 끝없는 공포까지.

그 온갖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평생 한 번도 볼 수 없는 사람이겠구나.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비현실적인 순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사람이 마군들 사이를 걸었다. 지옥문 앞을 지키면 딱 어울릴 거 같은 거친 마군들이 그 어느 때보다 공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게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검우진이 도열의 끝에 도착한 후 돌아섰다.

혈천도마는 검우진 옆으로 호위하듯 섰다.

착착착.

도열했던 마군들이 절도있게 이동해서 사방을 경계하며 섰다.

몇 명의 마군들이 내공이 제압당한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칠로추살대 앞에 섰다. 그들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추잡스러운 놈들을 교주의 시야에서 가리려는 목적이었다.

무섭게 내려다보는 마군들의 눈빛에 놈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장호가 무릎 꿇고 엎드려 있던 지부의 마인들과 여인들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그들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이 아버지 앞으로 가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되었느냐는 눈빛.

서대룡이 검우진에게 정중히 보고했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단아 소저와 동생들을 구했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단아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교주와 황천각주의 대화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녀는 실감이 가지 않았다. 강달처럼 그녀도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때 꿈이 아니라는 듯 들려온 검우진의 차분한 물음.

“단아라는 분이 어느 여협이신가?”

단아는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마교주가 자신을 찾고 있다!

서대룡은 더 당황했다. 설마 교주께서 그녀가 누군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

서대룡의 시선이 단아를 향했다.

‘괜찮겠소?’

하지만 그녀는 서대룡이 생각한 것보다 용감하고 담대한 성격이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말할 때는 또박또박 긴장하지 않았다.

“단아라고 합니다. 존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신교의 보호하에, 황천각주님의 도움을 받아 저와 동생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검우진의 깊은 눈빛은 흡사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만, 그녀를 보자고 한 것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단아가 눈을 크게 뜨며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마가 자신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라 말하고 있는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리는 그녀의 말에 검우진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서대룡에 대한 아버지의 배려였음을. 자신이 그녀 앞에서 극진한 태도를 보였던 것처럼, 아버지는 그녀의 안위를 묻는 걸로 서대룡에 대한 신임을 보여준 것이다.

서대룡이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 은혜는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구화마공의 대마벽과 같은 충성심의 벽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교주와 소교주라면, 남은 평생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더라도,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 있다.

서대룡이 검우진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술친구 장호의 배려도 있었다.

장호가 먼저 서대룡에게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단아는 저 무서운 마군주가 서대룡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오늘 서대룡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의 마음에 제대로 각인되고 있었다.

오히려 너무 부담스러웠다. 저런 대단한 사람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고개를 돌리는 서대룡의 눈빛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검우진 앞으로 강달과 지부 마인들이 줄을 지어 섰다. 교주가 방문했으니 정식으로 인사했다.

교주 앞에 서자 강달의 가슴이 벅찼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교주님을 지부에서 맞이한 지부장은 나뿐이다!’

이건 정말 인근의 모든 지부장을 모두 불러 모아서 자랑할 일이었다.

그때 생각지 못한 칭찬이 교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훈련이 잘되어 있군.”

검우진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마인들의 실력과 기세를 파악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눈빛에는 교와 교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미 전서를 통해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온 검우진이었다. 지부 운영이나 상황판단, 교에 대한 자부심과 적을 대하는 배짱까지. 강달은 이런 소지부에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강달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수련했고, 수하들 훈련도 열심히 시켰다.

소지부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이 소지부에 넘치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그 결과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지부장이 되었고, 그 자신감은 감히 추살대 따위가 우릴 넘봐? 라는 자부심으로, 그 자부심이 있기에 여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 모든 건 다 이어져 있었다.

강달은 기회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걸 이번 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달은 이렇게 교주님을 직접 뵌 것만으로 자신의 인생에 볕이 들었다고 여겼다.

바로 그때 눈 부신 태양이 그의 인생을 찬란하게 비췄다.

“본단에서 보세.”

보통의 하루들로.

강달은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본단에서 보세.’

단 여섯 글자에 불과했는데, 그가 평생 들은 그 어떤 말보다 감동적이었다.

천하제일의 갑부가 와서 ‘전 재산을 주지’라고 해도, 절대고수가 와서 ‘내 제자가 돼라’라고 해도. 그 어떤 여섯 글자도 이 여섯 글자와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강달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마라!’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평생 얼굴 한 번 볼 수 없을 거로 여겼던 교주님이 저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니까. 저런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은 꿈속에서도 만들 수 없을 테니까.

검우진이 돌아서 걸어갔다.

“감사… 합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져야 할 인사였는데 중얼거리듯 나왔다. 말을 꺼내는 순간,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어 버린 것이다.

“교주님!”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렸다는 당황에 자신도 모르게 버럭 튀어나온 외침.

검우진이 천천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강달이 상기된 얼굴로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생각난 말은 이것뿐이었다.

“본단에서 뵙겠습니다.”

요굉 앞에서도 당당했던 강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검우진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준 후 다시 돌아섰다.

지부의 마인들이 모여들어 강달을 축하했다.

“감축드립니다, 지부장님!”

“축하합니다.”

수하들은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워했다. 강달은 정말 좋은 수장이었으니까.

“이제 본단으로 가시면 못 뵙겠네요.”

수하들과 이별하는 건 아쉽지만, 본단 진출은 그의 오랜 바람이었다.

어떤 직위라도 상관없다. 말똥을 치우면 어떠하랴? 교주님이 직접 불러서 시킨 일인데.

단아가 강달에게 다가가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지부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강달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황천각주가 직접 구하러 온 여인이었으니, 이제는 예의를 갖춰 말했다.

“내가 드릴 말씀이오. 나를 찾아와줘서 고맙소.”

그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죽었을 테고,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승진의 기회는 없었을 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애썼고,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인사를 하고 돌아온 단아에게 단연이 말했다.

“비켜줘, 안 보여.”

단아가 돌아보자 저 앞으로 검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멋있으시다.”

단연은 상대가 천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저런 남자 있으면 당장 달려갈 거야!”

흥분해서였을까? 언니에게만 속달거리며 말한다는 것이 검무극의 귀에도 들렸다.

물론, 검무극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막내 소저.”

“네, 소교주님.”

아무리 편한 얼굴로 다가와도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였다.

“우리 잘못된 선택부터 바로잡읍시다.”

다들 무슨 말인가 궁금해하자, 검무극이 미련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요리를 보냈는데, 누구 생각이었소? 세 분 모두의 의견이었소?”

그 말에 괜히 서대룡까지 긴장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닙니다. 제 생각이었어요.”

단연의 대답에 서대룡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요리를 그녀가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교주님을 이상형으로 여기는 여인, 아! 생각만 해도 쉽지 않았으니까.

검무극이 단연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날 먼발치에서 봐서 잘못 봤을 거요. 자, 가까이서 내 얼굴 똑똑히 보시오. 자, 우리 막내 소저. 이제 다시 요리를 보낸다면 누구에게 보내겠소?”

하지만 단연은 대답을 망설였다. 망설인다는 것 자체가 ‘당신은 아니야’였다.

검무극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막내 소저, 너무 하시오.”

검무극이 건물 앞에서 혈천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막내 소저는 끝까지 아버지께 요리를 보내겠답니다! 본단에 데려갈 사람 여기 한 명 더 있습니다!”

아버지 기분 좋아지라고 괜히 떤 너스레였다. 아버지가 고마웠다. 이곳까지 친히 와서 서대룡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그건 곧 자신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기도 했으니까.

네 오른팔이니 내가 챙겨주마, 아니겠는가.

아들의 너스레에 검우진이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언제 철이 들는지.”

“그래도 좋으시죠?”

“좋긴. 정신없지.”

그래, 검무극과 어울리면 정신없다는 표현이 딱일 것이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안다. 자신이 그렇듯, 교주도 이 정신없음을 즐기고 좋아하고 있을 것임을.

아들과 나오지 않았다면 언제 이런 일을 겪어보겠는가?

“우리 좀 걷지.”

“그러시지요.”

두 사람이 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교주, 이젠 표 내도 되오.’

다른 이의 자식 자랑은 못 봐주겠지만, 교주 자식 자랑은 내가 봐주겠소.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후원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담장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불어온 바람에 담장 옆에 서 있던 거목의 나뭇잎이 사사사삭 소리를 냈고 그 바람에 가지에 앉아 있던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 너머로 시간을 잊은 듯 흰 구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정말 이기실 작정이십니까?”

앞뒤 자른 물음이지만 교주는 알아들었을 거다. 일전에 교주에게 물었다. 저런 아들에게 오 년을 버틸 수 있겠냐고. 그때 검우진은 이렇게 되물었다.

‘왜 녀석에게는 묻지 않나? 내게 버틸 수 있는지?’

“자넨 내가 져줬으면 좋겠나?”

혈천도마는 어디까지나 교주 편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명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번에 사부 일을 함께 겪으면서 더욱 교주에 대한 마음이 깊어졌다.

그래서다. 자신은 진정으로 교주의 편이었기에. 그래서 이 말을 하는 것이겠지. 교주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기에.

“소교주에게 져줄 수 있는 사람은 이 무림에 오직 교주님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눈빛에 혈천도마는 담담히 대답했다.

“져준다는 건 더 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 * *

“한데 그대들은 무슨 일로 칠로추살대에게 목표가 된 거요?”

검무극이 여인들에게 물었다.

단아가 서대룡과 인연을 맺었으니 그녀들의 안위를 신경 써야 했다.

그러자 초희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들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세 분은 저를 지켜주려 하신 거였고요.”

초희가 정중히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천화루의 기녀입니다. 호남성 봉황에 있는 천화루에서 일했었죠.”

이미 세 여인에게는 신분을 밝혔던 그녀였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흠칫 놀랐다.

천화루.

극악소마를 좋아하는 여정이 주인으로 있는 곳.

“저는 귀주에 있는 천화루 본단까지 가야 합니다. 가서 천화루주님을 만나 봬야 합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소?”

검무극의 물음에 초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존엄하신 분이 묻는 것이니 응당 대답을 드려야 하겠지만, 이번 일은 루주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부디 너른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초희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은 그녀를 압박하지 않았다.

“각자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법, 전혀 미안해하실 것 없소.”

검무극은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는 천화루주와 극악소마의 관계를 알지 못할 테니까. 또한 극악소마와 자신과의 관계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그런 비밀을 그녀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단연이 나서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희가 목적지까지 끝까지 호위하겠습니다.”

맡은 일은 끝까지 책임지는 그녀였으니까.

서대룡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초희가 어떤 일로 쫓기는지는 몰라도 이번 일을 저지른 자는 칠로추살대를 동원할 정도로 돈과 힘이 있는 자였다.

이대로 보내면 그녀들은 또 다른 위험에 처할 게 틀림없었다.

서대룡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다.

어떤 의미로 자신을 보는지 알기에 전음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이 단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 소저께서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세 분 모두 다치셨으니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를 향한 서대룡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단아는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모르겠는가? 저 순수한 눈빛으로 이렇게나 표나게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래도 제 일을 귀한 분께 맡길 수는 없어요.”

이번 일이 위험하다면 서대룡도 위험에 빠질 수 있지 않겠는가? 괜히 자신의 문제에 말려들어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몸으론 무리입니다. 쉬셔야 합니다.”

“이래 봬도 꽤 강골이에요. 걱정마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검무극이 나섰다.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이야 단아와의 관계 때문에 나서는 걸 이해할 수 있지만, 소교주가 이번 일을 맡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화루가 관계되었기에 검무극은 자신이 나서야 했다.

“제가 천화루주님과 친분이 있습니다.”

그 말에 초희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감히 마교 소교주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지 못했다.

검무극이 단아에게 말했다.

“저를 믿고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검무극이 천화루주를 알고 있다고 하고, 직접 맡겠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실 직접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동생들이 내심 걱정되었다.

한데 소교주라면 안심이다.

‘소교주인데 마교의 고수들이 지켜주겠지?’

그 무시무시한 마군들만 떠올려도 안심이 된다.

단아가 초희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디까지나 청부자는 그녀였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교가 돕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녀는 이 운명의 흐름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검무극이 막내를 보며 말했다.

“막내 소저, 내상을 치료하고 다시 날 보면 생각이 바뀔 거요.”

단연이 미소를 지었다. 막내답게 그녀는 세 자매중 장난을 제일 좋아했다. 지금도 검무극이 장난을 걸어오는 걸 알았지만 감히 농담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편해지면 너스레를 떨고 싶었다. 정말 잘 통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각주님께서는 세 분을 모시고 가까운 본교의 안가에서 세 분을 치료해 주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아버지를 뵈러 후원으로 걸어가는 검무극에게 서대룡의 애타는 전음이 날아들었다.

―저 가서는 어떻게 하죠? 이 좋은 관계를 망쳐버릴까 걱정된다고요! 시 또 읊어요? 아니면 말아요? 제발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검무극은 대답하지 않고 후원으로 가버렸다. 물론, 서대룡은 걱정되었다.

‘애정사에 있어서 너는 안 믿는다만.’

하지만 애정사는 어디까지나 쌍방향의 문제. 검무극은 담대한 성격의 단아를 믿었다.

* * *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초희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천화루의 일이니 아무래도 제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알고 계셨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와 깊은 관계임을. 예전에 극악소마를 보러 본교에도 다녀갔던 그녀였으니까.

검무극은 아쉬웠다. 진심으로 아쉬웠다. 그토록 천천히 돌아오고자 했던, 아버지와의 여행이 끝나는 순간이었으니까.

“먼저 돌아가십시오. 이번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아무리 아버지와의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고 초희를 호위하는 일까지 아버지와 함께할 수는 없다. 그간 교를 너무 오랫동안 비우시기도 했고.

“이번 여행은 제가 태어나서 했던 그 어떤 여행보다 값진 여행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내 인생의 여행이라 여기시겠지만.

회귀 전 모든 여행을 포함한 말이었다.

“아버지와 보냈던 보통의 하루들이 너무 좋았습니다. 밥 먹고 차 마시고 함께 걷고 낚시하고. 영약을 먹고 적들을 죽이고, 무공이 늘고. 그런 순간들보다도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더 좋았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버지.”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숙연함도 잠시, 고개를 든 검무극이 말을 쏟아냈다.

“함께 가보기로 한 국숫집도 아직 안 가봤잖아요? 예전에는 만둣집이었다던 거기 말입니다. 그러니까 끝 아닙니다, 아버지! 이번은 첫 번째 여행일 뿐입니다, 두 번째 여행, 세 번째 여행, 백 번째 여행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검우진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아버지의 비웃음으로 끝났다. 그 비웃음이 오늘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다음 여행도 기대하마.’

네, 꼭 기대해 주십시오! 더 평범하고, 더 일상적인 보통의 하루들로 꽉 채우겠습니다.

검무극은 함께 있던 혈천도마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교에서 뵙겠습니다, 어르신.”

그는 이번 여정으로 제자였던 과거는 떠나보내고, 이제 사부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거다.

‘어르신, 대룡이라면 그 삶, 의미 있을 겁니다.’

검무극의 뜨거운 시선에 혈천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마자 잠옷 챙겨서 어르신부터 뵈러 갈 거니까, 꼭 재워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휘에게 작별했다.

“휘 아저씨! 다음에 또 아버지 설득해서 놀러 가시죠! 마차 모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검우진과 혈천도마는 뜻밖이란 표정으로 휘를 보았다. 작별 인사한다고 모습을 드러내는 그가 아니었는데.

휘는 직접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고마웠습니다, 소교주님.”

이번 여행은 그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다. 덕분에 검우진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은신하지 않은 휘와의 값진 시간이었으니까.

지금 모습을 보인 이 순간도, 그의 값진 인생임을 알게 된 여행이었으니까.

“아저씨와 함께 걸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전 무림이 길을 막아도.

지부 입구에서 세 갈래로 헤어졌다.

아버지와 혈천도마가 탄 마차는 본교로, 서대룡과 세 여인은 안가로, 검무극과 초희는 천화루로.

아버지의 마차가 출발하고 조금 있다가 장호와 마군들이 출발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아버지의 마차를 뒤따르며 교로 돌아갈 것이다.

출발에 앞서 검무극은 장호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번에 장호와 마군의 활약이 컸다. 서대룡의 목숨을 구한 것도 그였으니까.

“장 군주.”

“네, 소교주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얼마나 자신을 아끼는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검무극은 장호가 주는 이 충성심 가득한 안정감에 언제나 기분이 좋아진다. 이 사람이 있으니 뭐든 맡길 수 있겠구나.

장호야 이 눈빛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 테니.

검무극의 시선이 장호 뒤에 서 있는 마군들을 향했다. 오늘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자네들은 벽이네. 나와 아버지, 그리고 본교의 교도들을 지켜내는 철벽이지. 이번에도 그 무너지지 않는 벽이 있어서 무사히 여정을 마칠 수 있었네. 모두 고맙네.”

검무극이 그들에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게 정식으로 고마움을 표한 건 처음이었다.

마군들이 늠름한 눈빛으로 일제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장호가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럼 교에서 뵙겠습니다!”

장호는 마지막까지 서대룡을 챙겼다. 단아 자매들이 보고 있었기에 더욱 정중히 서대룡에게 인사했다.

“본교에 오시면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돌아가면 기별 드리겠습니다. 꼭!”

서대룡은 정말 할 말 많다는 표정으로 ‘꼭’이란 말을 힘주어 강조했다. 이렇게 고마운데 술을 사도 자신이 사야지. 밤새 장호와 술을 마실 거다.

그렇게 마군이 떠나고, 다음으로 서대룡이 떠났고 끝으로 검무극이 떠났다.

이제 남은 이들은 강달과 수하들이었다. 정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앞서 일들을 겪으면서 꿈만 같았는데, 오히려 모두가 떠난 지금이 꿈만 같았다.

수하 중 한 명이 저 멀리 떠나가는 마차를 보면서 말했다.

“지부장님께서 본단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몸소 보여주셨는데, 필요한 게 너무 많습니다.”

쫓기는 여인들이 있어야 하고 황천각주와 마교 소교주, 마군들과 마군주, 그리고 마존과 마교주가 있어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준비된 지부장까지.

“우린 못 갑니다. 그러니 잊지 마시고 꼭 놀러 오셔야 합니다.”

강달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고생들 했으니 오늘은 회식이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 * *

“마차는 제가 몰게요.”

낭인으로 오랜 생활을 해온 그녀였기에 당연히 마차도 잘 몰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서대룡이 극구 사양하자 결국 단아는 마부석에 함께 앉았다. 마교의 높은 분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뒤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였다.

“부상도 다 낫지 않으셨는데 안에서 편히 가십시오.”

“전 괜찮아요. 제가 말동무라도 되어 드릴게요.”

서대룡은 그녀가 옆에 앉아줘서 고맙고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떨린다는 점이다.

서대룡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앞만 보고 마차를 몰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낭인 일에 대해 물어볼까? 아니면 동생들에 대해서? 말 걸면 귀찮아할까?

온갖 생각이 서대룡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 좋은 머리가 지금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잡념만 더 많이 만들어냈다.

단아가 먼저 서대룡에게 말을 걸었다.

“마차를 잘 모시네요.”

“네.”

서대룡이 쑥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앞만 보고 있었다.

이래 봬도 교주님의 마차를 몰아본 몸 아닌가? 휘에게 배운 실력을 발휘하며 그는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아마 검무극이 봤다면 아버지가 탄 마차보다 더 신경 써서 몬다고 자신을 놀렸을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이 마차만 잘 몰면 뭐 하겠는가?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감시자들이 있었다.

외부에 있었다면 위기겠지만 감시자들은 내부에 있었다. 마부석과 객실 사이에 난 작은 창으로 단비와 단연이 두 사람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속삭이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냥 앞만 보고 마차만 몰고 있어.”

“여자 마음을 저리도 모르다니. 옆에 앉았으면 뭐라 말이라도 걸어줘야지.”

“제발 옆을 좀 봐요!”

이번에도 단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소교주님과 친하신 것 같았어요.”

다른 화제라면 모를까? 검무극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그였다.

“저를 우울과 비관에서 건져내 주신 분이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할 겁니다.”

단아가 손으로 마부석 뒤쪽에 난 구멍을 손으로 막았다.

동생들이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살짝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듣지 않아도 뭐라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여자에게 딴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고. 저런 남자가 뭐가 좋다고. 이런 말들을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혹, 단 소저께서도 그런 분이 계신가요?”

서대룡의 물음에 단아가 대답했다.

“아직은요. 앞으로 만들어야겠죠?”

그러면서 단아가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서대룡은 앞만 보고 마차를 몰고 있었다.

눈치 없는 서대룡은 몰라도, 동생들은 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서대룡에게 호감이 있다. 그녀들도 눈치는 없지만 저런 순수한 사람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마인인데 괜찮을까?”

그것도 그냥 마인이 아니라 수뇌부급 마인.

언제나 그렇듯 막내는 고민하지 않았다.

“언니가 행복하다면 난 괜찮아.”

셋 중에 제일 신중한 성격의 단비였지만,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이라면 절대 마교와 얽히지 말자고 말했을 거다. 마인과 얽히면 끝이 나쁘다고 믿는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언니의 행복이라면.

어려서 부모를 잃은 후, 평생 동생들을 위해 희생해 온 언니였다.

자신들 때문에 남자와 제대로 사귀어보지도 않은 그녀였다. 좋다는 남자가 생겨도 언니가 피했으니까.

“언니를 위해서라면 보내줄 수도 있어.”

과연 언니를 보지 못하는 삶을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었다. 아마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언니가 행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힘듦을 선택할 거다.

그러자 막내 단연이 말했다.

“보내긴 왜 보내?”

무슨 뜻이냐는 단비의 눈빛에 단연이 말했다.

“우리도 마교에 투신하면 되지.”

단비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 동생 말이 옳다. 우리도 마인이 되면 되지.

그녀들이 다시 구멍으로 앞을 살폈다.

‘제발 옆을 봐요!’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서대룡이 불쑥 말했다.

“제가 보기보단 낯도 가리고 사람 대하는 요령이 없습니다.”

그걸 증명하듯 여전히 서대룡의 시선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나마 소교주님 영향으로 많이 좋아져서 이 정도입니다. 그날 읊었던 시도, 마침 그 전날에 외웠던 것이고요.”

그냥 솔직히 다 말했다.

단아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괜히 말했나?’

서대룡에게 후회의 감정이 밀려들던 그때, 단아가 차분히 말했다.

“요령은 제가 많답니다.”

놀란 서대룡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낭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저는 요령을 너무 많이 피울 줄 압니다. 각주님이 보시면 제게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무조건 좋습니다!”

흥분한 서대룡을 보며 단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는… 또 외워서 읊어주세요.”

그녀를 바라보는 서대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로 그때!

그녀만 바라보다 마차가 바닥의 돌멩이를 피하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뒤에서 두 동생이 소리쳤다.

“앞을 봐요!”

* * *

검무극과 초희가 탄 마차가 빠르게 관도를 내달렸다.

검무극이 고른 마차는 짐은 실을 수 없고 마부석에 두 사람만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소형 마차였는데, 그만큼 속도가 빨랐다.

출발한 지 한나절이 지나고 초희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소교주 특별하다.’

지금껏 많은 남자를 손님으로 겪어본 그녀였기에, 남자를 보는 눈만큼은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하는 그녀였는데.

그런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첫 번째.

마차를 너무 잘 몰았다. 그냥 잘 모는 게 아니라 너무 잘 몰았다.

오직 빨리 가는 게 목적이라는 듯, 검무극은 마차를 모는 데에만 집중했다.

두두두두두.

큰길을 벗어난 마차가 좁은 길로 들어섰다. 그야말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가면 꽉 차는 길이었다. 조금만 잘못 몰아도 고랑에 빠져버릴 그럴 길도 검무극은 능숙하게 마차를 몰았다.

마교 소교주쯤 되면 수하들이 모는 고급 마차만 타고 다닐 것 같았는데.

초희가 마차 옆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종잇장 한 장 차이로 길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두 번째 특별한 점.

그리고 마차 모는 실력보다 더 놀라운 점은 그의 길눈이었다.

검무극은 길을 너무 잘 알았다. 요리조리 빠졌다가 다시 합류하고. 지름길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으로 빠져서 시간을 단축했다.

‘매일 다니던 길인가?’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마교 소교주가 이 길을 매일 마차를 몰고 다녔을 리가 없지 않겠나?

‘정말 소교주가 맞나?’

이런 의심이 드는 이유이자, 동시에 세 번째 특별한 점.

“지금 우리 둘만 가는 거죠?”

이렇게 내달리는 동안, 호위 무인들이 뒤따르는 걸 보지 못했다. 온갖 샛길을 다 누벼서 쫓아오고 싶어도 못 쫓아올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우리만 갑니다.”

예상한 대답이 나왔지만 초희는 놀란 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정말 우리 둘만 간다고?

“평소에도 혼자 다니는 거 좋아합니다.”

“그래도 호위 몇 사람은 데리고 다닐 줄 알았어요. 귀하신 분이신데.”

“우리 아버지 지론입니다. 귀할수록 오냐오냐, 하지 마라. 부족함을 느끼게 키워라.”

물론, 어떤 부모는 자식을 그렇게 키울 수도 있겠지. 한데 당신은 마교 소교주잖아요?

네 번째 특별한 점.

바로 자신을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였다.

자신이 기녀라는 걸 알았다면 말투나 눈빛에서 무시하는 기색을 들킬 법도 한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교주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소교주에게 특별함을 느낄수록 그녀의 의심도 커졌다. 지부에서 천마도 보고 마존도 봤으면서.

정말 당신 소교주 맞나요? 소교주가 혼자서 호위한다? 그걸 마교주가 허락한다?

의심은 또 다른 의심을 낳았다.

‘혹시 내가 가진 정보를 빼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걸까?’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자신이 지닌 정보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초희는 애써 그런 부정적인 마음을 감추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호위가 필요 없겠네요. 이렇게 복잡한 길을 달리시는데 어찌 우릴 공격하겠어요?”

“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우린 지금 둘만이 아니거든요.”

초희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우릴 미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지단에서 나왔을 때부터 쭉 우릴 쫓아오고 있죠.”

초희는 깜짝 놀랐다.

“추격술에 능통한 자입니다.”

상대는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미행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실력이었다.

“그렇다면 저를 소교주님이 데려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놈은 지부의 외곽을 감시하고 있다가 미행에 나섰다. 앞서 아버지와 혈천도마, 그리고 마군들이 진을 치고 있던 지부는 누군가 침입해서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외부에서 감시하다 초희가 나오자 그녀가 탄 마차를 미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희는 아직 위험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상대는 칠로추살대보다 더 강한 이들을 보낼 수도 있었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녀는 신경이 곤두섰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알고 있는 게 뭔지?”

상황이 이러하니 어서 아는 바를 다 밝히라고 할 법도 한데.

“궁금합니다.”

“왜 묻지 않으시죠?”

“밝힐 수 있었다면 벌써 말했겠죠.”

검무극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맑고 깊은 눈이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초 소저가 평범한 기녀가 아니란 것, 압니다.”

순간 초희가 흠칫 놀랐다.

“어떤 일반 기녀가 낭인을 고용해서 스스로 지키려 하겠습니까? 어떤 기녀가 마인들이 득실대는 상황에서 비밀을 지키려 하겠습니까? 분명 천화루주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분이시겠죠. 그분의 명령을 받은 분이거나.”

초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담담한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천화루주와 친분이 있다고 말한 것 기억하십니까?”

초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제게 물어보실 때가 되었군요. 천화루주와 얼마나 친한지를.”

그녀는 검무극의 한 말을 그대로 물었다.

“루주님과 얼마나 친하시죠?”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전 무림이 이 길을 막아도 그대를 루주께 데려갈 겁니다. 딱 그만큼 친합니다.”

자신은 극악소마와 함께 싸우다 다칠 수도 있고 죽을 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천화루주는 그래선 안 된다.

그녀는 소마의 여인이었으니까.

그제야 초희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을 데려가는 이유가 천화루주 때문이라는 것을.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의문이 이것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제가 전할 말은 루주님께 꼭 필요한 정보니까요.”

초희가 신중한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그러니 전 무림이 막아도 저를 꼭 데려다주세요.”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가면

마차는 계속 달렸다.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와 꽃들이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고 먼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여전히 미행이 붙어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초희의 마음이 편했다.

전 무림이 막아도 천화루주에게 데려가겠다는 그 말, 그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자의 거짓말은 누구보다 잘 알아차리는 자신이었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힐끗 마차를 몰고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보면 볼수록 특별함이 더해가는 사람.

‘대체 루주님과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 사람과 루주님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놈들이 급하긴 한가 봅니다.”

“네?”

그 순간 초희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검무극이 그녀의 허리를 안으며 날아오른 것이다.

갑자기 검무극에 의해 날아오른 초희는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귓가로 들려오는 암기가 날아가는 소리.

쉭쉭쉭쉭쉭!

뭔가가 박히는 소리들.

팍팍팍팍팍!

순간 시야에 스쳐 보이는 복면인들과 하늘과 나무와 땅.

쇄애애애애액!

검에서 검기가 발출되는 소리를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어느새 멈춰 선 마차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위에 쓰러진 복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냥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끝났으니까.

검무극은 쪼그리고 앉아서 그들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검무극이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내릴 때 조심하세요. 독이 발려 있으니까.”

방금 그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듯, 마차 옆에 시퍼런 날이 번뜩이는 암기가 여러 개 꽂혀 있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수십 개가 허공을 날았고, 자신과 소교주가 그사이를 날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뒤늦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리려다 발이 미끄러져 암기를 베일 것만 같은 괜한 두려움에,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놈들이 이번에는 살수들을 고용했습니다.”

검무극은 이미 자신을 공격하던 움직임만으로 그들이 살수임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시체를 살핀 건 어디 출신인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저를 죽이려는 자는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 하고 있소.”

앞서 낭인을 고용했다가 또 이번에는 살수를 고용하고. 칠로추살대도 그러했지만 이 살수들의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이런 실력자들을 고용할 재력이라면, 자신에게도 믿을만한 고수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칼을 빌려서 일을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추적이 거의 불가능한 이들을 이용해서.

그렇게 시체를 다 살피고 난 후 검무극이 마차로 돌아왔다.

초희는 검무극이 미행하는 자를 그냥 두는 이유가 상대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미행하는 자를 죽이고, 공격을 피해 조금이라도 일찍 가는 게 낫지 않나요?’

그 말이 떠올랐지만, 묻지는 않았다. 검무극에게 모든 걸 맡겼으니 믿어야지.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마차에 타기 전에 검무극이 손을 내밀자 마차에 박힌 암기들이 저절로 빠져나왔다. 검무극은 독이 발린 암기들을 땅속 깊이 묻었다.

초희가 검무극의 특별함을 또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그냥 빼서 아무렇게나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길에다 버렸다가 모르고 주운 누군가 죽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게 가식이 아니라는 느낌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상대는 마교 소교주였으니까.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초희가 고개를 숙여 정중히 고마움을 전했다.

“별말씀을.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한마디 농담 섞인 생색을 낼 법도 했건만, 검무극은 다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초희는 가만히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 또 갑자기 하늘을 날아오를지 몰랐으니까.

두 번째 암습은 그로부터 이틀 후 밤에 벌어졌다.

초희는 모닥불 옆에서 자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왜 깼는지 모르게 그녀는 잠에서 깼다. 눈을 뜬 그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 위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복면인의 모습. 그의 비수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한발 먼저 검무극의 검이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검무극이 그의 몸을 밀어서 그녀 옆으로 쓰러지게 했다.

“은신술과 잠입술이 대단한 살수였소.”

검무극이 시체를 살폈다. 어느 조직에서 보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몸에 문신이나 흉터가 하나도 없는 살수였다.

그녀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또 저를 구해주셨군요.”

그녀를 구한 건 천마호신공 덕분이었다. 아무리 미세한 기척이라도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을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잠이 깼겠지만, 더 주무시오.”

검무극이 살수의 시체를 묻었다.

초희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적들의 시체를 묻어주지 않았는데, 오늘 묻는 건 자신을 위해서임을. 시체 옆에서 자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잠시 모닥불을 쳐다보며 앉아 있던 그녀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루주님은 천화루 내에 정보조직을 만드셨어요. 기루이자 동시에 정보조직인 셈이죠.”

술에 취하면 온갖 말들이 나오기 마련, 그런 점에서 기루만큼 무림의 정보를 빼내기 쉬운 곳이 없다.

“물론 모든 기녀가 정보를 다루진 않아요. 정보를 다루는 기녀들을 비화(祕花)라고 불러요. 저도 비화랍니다.”

이제 소교주 당신을 믿는다는 의미로 밝힌 비밀이었다. 크게 마음먹고 밝힌 것이었는데 의외로 검무극의 반응은 담담했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를 위해 무림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이름이 비화라 불린다는 구체적인 부분을 몰랐을 뿐.

그녀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이 소교주는 천화루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어서 주무세요. 내일 일찍 출발할 테니까.”

“네.”

잠시 후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그녀가 물었다.

“루주님은 괜찮으시겠죠?”

이렇게 자신을 집요하게 죽이려 하니, 문득 천화루주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물론 천화루주를 지켜주는 고수들이 있지만, 아까처럼 실력 좋은 살수가 간다면?

괜찮다는 말을 기대했지만, 날벼락 같은 검무극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마 놈들은 루주님도 죽이려 들 거요. 이미 시도했을지도 모르고.”

초희가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를 전하려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면, 정보를 받는 사람을 죽이면 되지 않겠소?”

초희는 잠시 사색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서 루주님을 구해주세요!”

원래 침착한 성격이었는데, 루주의 안위가 걸리자 그녀는 흥분했다. 검무극이 짐작하건대 그녀 자신의 목숨보다 루주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제발! 제발 가서 루주님을 구해주세요! 전 무림이 막아도 저를 데려갈 만큼 친하다고 하셨잖아요!”

그에 비해 검무극은 담담했다.

“맞습니다, 그랬지요.”

“그럼 어서 가주세요! 저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어디든 숨어서 기다릴게요. 어서 가서 구해주세요.”

이제 검무극이 이토록 담담했던 이유를 밝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대비책을 세워뒀으니까요.”

“대비책이라고요?”

놀란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게 그렇게 소중한 사람인데, 그냥 놔뒀겠습니까? 저는 그런 낙관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대비책이 없었다면 그녀를 업고 쾌속보로 달렸을 거다.

“소저가 천화루주를 만나려 한다는 말을 들은 그날, 곧바로 긴급 전서를 보냈습니다. 그러니 우린 우리 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누구에게요?”

검무극이 그녀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있습니다. 어디에서 뭘하든 항상 보고 싶은 사람이.”

* * *

한 무리의 무인들이 귀주 천화루 본단에 도착했다.

움직임이 날렵했다. 경공만 봐도 무공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의 잔혹한 성정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낭인 중에서 가장 비정하다고 알려진 이들이었다.

이들은 바로 전직 살수들로 이뤄진 청부 낭인 귀살대(鬼殺隊)였다.

살수 출신답게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이가 막아서면 아이를 베고, 부모가 막아서면 부모를 베는 냉혈한들이었다. 돈만 주면 귀신도 죽여준다고 해서 그들을 귀살이라 불렀다.

칠로추살대가 사람을 뒤쫓는 낭인 중에서 암흑이라면, 사람을 죽여주는 낭인 중에서는 귀살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 앞에 선 남자가 바로 귀살을 이끄는 귀살대주였다. 살수 시절 오십 번에 걸친 살행을 모두 성공시켰다고 알려진 그는 실력과 잔혹성 모두 최고인 인물이었다.

“기녀고 손님이고 다 죽여라!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마라!”

대주의 명령에도 귀살들은 은은한 살기조차 내뿜지 않았다. 이제부터 벌어질 살육을 기대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사람 죽이는 일에 이골이 난 그들에게 지금부터 펼쳐질 일은 그냥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짐을 나르고, 물건을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귀살 중 하나가 화려한 불이 밝혀진 건물을 보며 말했다.

“저승 가는 곡으로 딱 좋구나!”

잔혹한 이들의 침입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화루 건물에서는 흥겨운 연주 소리가 들려왔다.

귀살들이 일제히 담을 넘었다.

손님 맞는 얼굴 기녀나 노복이라도 하나 있을 것 같았는데, 마침 마당은 비어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빠르게 내달려 건물로 들어갔다.

천화루의 일 층은 광장처럼 가운데 공간을 중심으로 사방에 손님들을 위한 방이 있었다.

“일 층부터 쓸면서 올라간다!”

귀살대주의 명령에 귀살들이 첫 번째 방문을 열어젖혔다.

뛰어들어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도살해 버리려던 그때, 문을 열었던 귀살이 흠칫 놀랐다.

문이 열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기괴한 광경.

그곳에는 백색 가면을 쓴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뭐야? 이 미친 새끼들은!’

백색의 가면에 오직 눈구멍만 뚫린 가면이었다. 초승달을 눕혀 둔 것 같은 웃는 모습. 저마다 그 초승달의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귀살이 놀란 이유는 그 웃는 눈구멍 속의 눈들이 웃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부조화가 주는 섬뜩함.

“뭐야? 저것들?”

뒤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귀살의 말에 선두에 있던 귀살이 말했다.

“저 가면 무면객이 쓰는 가면입니다.”

무면객이란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웃었다.

“미친!”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가면이 무면객의 가면이었다. 저잣거리에 파는 가면, 꼬마들이 칼싸움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무면객 가면이었으니까.

“오늘 무면객 회식이라도 하는 날이냐?”

웃음이 모두에게 전파되었다. 당연히 무면객이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무면객들은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벗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기루에 무면객들이 올 리가 없었다.

“여길 오려면 눈구멍이 아니라 입구멍을 뚫어야지!”

“너희는 기녀들도 받아주지도 않지?”

그때 뒤에서 귀살대주가 차갑게 제지했다.

“그만!”

그 한마디에 귀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바로 뛰어들어 난도질하려던 그때.

스르륵.

바로 옆에 있던 방문이 열렸다.

취객이 기녀의 부축을 받고 나와야 정상이었는데.

귀살들이 다시 놀랐다.

그곳에도 백색의 가면을 쓴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말이 함부로 나가지 않았다.

검을 빼 들고 있는 자신들을 보고서도 그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는 말없이 앉아서 자신들을 압도하는 기세를 보였다. 뻥 뚫린 눈구멍 속의 눈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뭐야? 이 별종 새끼들은!’

섬찟하고 찝찝했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었는데.

스륵, 스륵, 스르륵.

연속해서 방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방문이 연속해서 열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방마다 가면을 쓴 이들이 앉아 있었다.

울려 퍼졌던 음악 소리가 뚝 끊어졌다.

정적 속에서 가면을 쓴 무면객들이 일제히 귀살을 쳐다보았다. 아무 표정이 없는 가면이 눈구멍만 뚫려 있었기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모습은 더없이 기괴하고 섬뜩했다.

귀살들이 가운데로 모였다. 상대의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것이다. 귀살대란 이름으로 활동한 이래, 이런 공포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귀살대주가 검을 뽑아 들었다. 싸움은 어디까지나 기세.

“진짜 무면객일 리가 없다. 마인 흉내 내는 새끼들 다 죽여버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귓가에 들려온 한 줄기 시원한 바람 소리.

동시에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귀살들이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순간 귀살들이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시선이 집중된 곳은 귀살대주였다.

귀살대주가 왜 나를 보느냐는 표정으로 귀살들을 쳐다보는데.

주르륵.

뜨거운 액체가 그의 이마에서 얼굴로 흘러내렸다.

귀살대주가 이마를 만졌다. 그의 이마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씨앙!”

그 한마디만 남기고는 귀살대주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절명했다.

귀살들은 경악했다. 귀살대주의 실력으로 미처 피할 시도조차 못 할 공격이 날아왔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대체 누가? 경악한 귀살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향한 하얀 가면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그때 귀살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 멀리 유일하게 문이 열리지 않은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닫힌 문에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무공보다 말을 잘하게 생긴.

귀살 중 누군가에게서 흘러나온 한 마디.

“……극악소마!”

귀살들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진짜 무면객들이고, 저 방에 있는 사람은 극악소마라는 사실을.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것도 문이 닫혀 있는데 단 일수에 귀살대주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극악소마 뿐일 테니까.

무림인들은 마존을 두려워했지만 유독 더 무서워하는 사람은 독왕과 섭혼마존, 그리고 극악소마였다.

각각 두려워하는 이유가 달랐다.

독왕은 아무리 많은 숫자가 달려들어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대량 학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섭혼마존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상태로 동료들에게 칼질하다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두 마존은 사파인들보다 정파인들이 더 두려워했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너무나 무기력하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반면 극악소마는 사파의 악인들이 더 두려워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스스로 잘 안다. 그런데 극악소마는 그 악의 정점, 극악이란 이름이 붙은 존재였으니까.

약속이나 한 듯 세 명의 귀살이 입구를 향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려 했다.

또 다른 지풍이 날아들었다.

그들을 뒤따르는 한 줄기 지풍, 달아나는 이는 셋이기에 그들 중 한 사람만 죽이려는가 싶었는데.

촤아아아악!

마지막 순간 지풍이 세 가닥으로 분열했다.

퍽! 퍼억! 퍽!

목과 머리통, 그리고 심장이 꿰뚫린 채 세 명의 귀살이 그대로 바닥을 뒹굴었다.

귀살 중 한 사람이 다시 문을 가리켰다.

“……저기!”

모두의 시선이 여전히 닫혀 있는 문을 향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적중시킨 것도 놀라웠고, 한 줄기 지풍이 마지막 순간 분열한 것도 놀라웠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사실은!

구멍은 여전히 하나였다.

앞서 귀살대주를 죽인 구멍으로 다시 지풍을 발출해서 세 사람을 죽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뒤쫓으며 휘어져 날아갔다는 의미.

그들은 무기력함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 한 수에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고 싶은 욕망이 훅 꺼진 기분이었다.

원래라면 상대가 자신들에게 느껴야 할 감정이었는데. 이곳에서 죽어야 했을 기녀들과 손님들이 느꼈어야 했을 공포심이었는데.

스으윽.

그때, 방에 있던 무면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포에 질린 귀살들은 새로운 공포를 느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무면객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겨눈 것이다.

“이런 썅!”

누군가의 절망적인 욕설을 신호로.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사방에서 지풍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거미줄처럼 엮어지는 선들.

이 쏟아지는 지풍은 무면객들이 익히는 지풍인 악영지(惡影指)였다.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면 극악소마의 혈앙지를 익히게 된다.

오늘 이곳에 온 무면객들은 악인곡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전의를 상실한 귀살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

퍽퍽퍽퍽퍽퍽퍽퍽!

남은 귀살 모두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구멍이 나며 쓰러졌다.

전직 살수로 이뤄진 악명 높은 청부 낭인 귀살대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닫혀 있던 마지막 방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오늘 귀살들의 목표였던 천화루주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오직 그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현기가 그녀의 차분한 두 눈에 흐르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상반되면서 그럼에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옆에 앉아 있었다.

하얗게 웃고 있는 극악소마.

이 공간에 많은 가면이 있지만, 천화루주 옆에 있는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전보다 눈빛이 더욱 깊어진 그는 무공경지가 한층 올라가 있었다.

좀 전에 보여준 혈앙지 역시 예전의 혈앙지가 아니다.

원래 한 줄기 지풍이었는데, 이제는 여러 갈래로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검무극이 줬던 만년설삼으로 내공이 크게 증진되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근래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하얀 벽에 아무것도 없던 그의 방에 침상이 놓이고, 책상과 의자가 놓였다.

삶이 바뀌어야 무공이 바뀐다.

그 역시 무학의 이 큰 원칙의 적용을 받는 중이었다.

혈앙지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독문무공인 마극광폭장 역시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런 자리에서 가면을 벗고 술을 마시지는 않겠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더 의미 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극악소마에게 술을 부어주는 유일한 여인이었으니까.

“피 냄새가 배겠군.”

극악소마의 말에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인들의 분내에 피 냄새는 금방 지워지기 마련이지요.”

극악소마가 어찌 모르겠는가?

무림에서 더 위험한 냄새는 피 냄새가 아니라 여인들의 분내임을.

천화루주가 위층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려오게 했다.

기녀들과 기루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시체를 치우기에 앞서 천화루주는 감사 인사부터 했다.

천화루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극악소마 정면에 서서 정중히 절을 올렸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기에, 지금은 매우 공적인 상황이었다.

“마존께서 살려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내려온 기녀들이 둥글게 선 채 극악소마와 사방에 있는 무면객들에게 절을 올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극악소마가 오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던 모두가 죽었을 것이다.

극악소마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줬을 뿐이었다.

“시체를 치우게.”

천화루주의 명령에 기루에서 일하는 남정네들이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기녀들은 물통과 걸레를 가져와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무서워할 법도 했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본단의 기녀들은 씩씩했다.

극악소마가 그녀에게 술을 한 잔 부어주었다.

천화루주가 술을 마신 후 극악소마에게만 들리게끔 나직이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소교주께서 기별을 주셔서 올 수 있었네. 감사 인사는 소교주님 오시면 드리게.”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달려와서 절 구해주신 분은 소교주님이 아니라 오라버니시죠.”

눈구멍 속 두 눈이 웃었다.

물론 검무극도 고마웠다. 목숨을 구해준 기별인데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극악소마에게 더 큰 고마움을 전하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어디 검무극이 고마운 이유가 그뿐이겠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이 달라졌다. 자신을 더 애정하는 눈빛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극악소마란 사람 자체가 변했음을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변화가 극악소마의 운명을 바꾸고 있음을 그녀는 느낀다. 그 변화는 결코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살대를 동원할 정도면 아주 돈 많은 놈들을 건드렸다는 의미네.”

극악소마의 말에 천화루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천화루를 전 중원으로 계속 확장해 나갔던 그녀였다. 그러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은 기녀들을 비화로 키워냈다.

이번 일이 천화루의 확장 때문에 생긴 일인지, 비화가 얻어낸 정보 때문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초희가 도착해야 알 수 있으리라.

“소교주님은 괜찮으시겠죠?”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네.”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끝까지 자기 남자의 자존심과 사기를 챙겼다.

“이쪽이야말로 전혀 걱정이 안 되는데요?”

그러는 사이 시체가 모두 치워졌고 핏물도 모두 닦아냈다.

기녀들과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위층으로 올라갔다.

스륵! 스르륵! 스르륵!

모든 기방의 문이 연속해서 닫히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열렸던 극악소마의 방문이 마지막에 닫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곳에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 *

천화루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대의 마차가 서 있었다.

마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서단명(徐旦明)이었다.

그가 바로 이번 추격과 암습의 설계자였다.

그때 마차로 수족인 재인(才人)이 올라타며 말했다.

“천화루에 들어갔던 귀살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단명의 시선이 재인을 향했다가 다시 저 멀리 보이는 천화루의 건물을 향했다.

아무리 천화루가 전 중원에 지부를 넓혀가는 당대 최고의 기루라고 하더라도, 귀살대를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가 어디 무적의 기녀들이라도 상대하고 있는 건가?”

평소라면 서단명의 농담에 안 웃겨도 웃어줬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상황이 매우 나빴기 때문이었다.

“알아보러 들어간 이들의 소식도 끊어졌습니다.”

물론, 서단명은 이번 일이 왜 이렇게 순조롭게 풀리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교에서 지원을 나왔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대비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텐데?”

“우리보다 더 발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그 말인즉, 상대가 제대로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였다.

“기녀를 죽여달란 청부를 들었을 때, 딱 재수 없었는데.”

서단명의 후회에 재인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왜 맡으셨습니까? 대체 왜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이번 일을 진행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서단명이 초희 쪽 상황을 물었다.

“하여튼 마교 놈들과 얽히면 좋은 꼴을 볼 수가 없군. 그래서? 언제 도착인가?”

“빠르면 내일 밤, 늦으면 모레 도착할 겁니다.”

“시간이 없군.”

살수들이 연이어 암습에 실패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녀를 호위하는 사람은 젊은 남자 한 명이라고 했는데.

물론 그 사람이 마교의 고수일 거로 여겼지, 마교 소교주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마교 소교주가 단신으로 기녀를 호위할 리는 없었으니까.

“네 생각은?”

“지금이라도 이번 일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간 내 평판은 바닥으로 추락하겠지. 앞으로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거다.”

그는 일반적인 청부 낭인이 아니었다.

서단명은 스스로 결망자(結網者)라고 불렀다.

그물을 짜는 사람.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일을 꾸미는 자.

그는 단지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하지 않았다. 사람을 설득하거나, 서로 싸우는 두 문파를 중재해 주거나, 사건이나 사고를 해결하고 수습해 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이번 임무처럼 누군가를 죽여주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일을 예술이라 했다.

그는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을 추격할 때는 추격을 전문으로 하는 무인을 고용해서 일을 맡기고, 죽여야 할 때는 살수 조직과 낭인들을 이용해서 일을 처리했다.

그에게 일을 맡긴 의뢰자는 이런 점이 편했다.

거칠고 잔인한 살수들이나 낭인들을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일단 청부 금액이 책정되면, 이후에는 몇 번이나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그 일을 처리해 주었다. 물론 애초에 값이 매우 비쌌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목적한 바를 이뤄냈다. 오직 필요한 것은 합당한 돈이었다.

수족인 재인은 서단명이 일개 기녀를 추적해서 죽이는 일을 맡을 사람이 아님을 안다. 분명 거절하지 못할 사람에게 일을 받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거액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누구 부탁을 받은 겁니까?”

평소 서단명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하는 재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궁금했다.

서단명은 그런 재인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화를 내는 대신 이 말로 대신했다.

“절대 신분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재인은 의뢰자가 궁금했지만, 서단명은 더는 말해주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한 사람을 모셨다. 결국 이번 일은 큰 적자를 보겠군.”

그 말인즉 그 사람이 정말 비싼 몸값의 무인을 준비해 두었다는 의미다. 대체 누구이기에? 그 궁금증은 다행히 풀 수 있었다.

“이번은 틀림없으니 함께 다녀와라.”

* * *

“이제 내일이면 천화루에 도착할 겁니다.”

드디어 루주님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초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교주님 덕분이에요.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은혜는 갚았소.”

“네?”

물론 소지부에 찾아온 선택은 단아의 결정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들이 본교를 찾아와 주는 바람에 자신과 만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극악소마에게 기별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길을 막아서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검무극이 마차 속도를 줄였다.

그들은 두 남자였는데 젊은 쪽이 바로 재인이었다.

재인이 검무극을 바라보더니 옆의 남자에게 차분히 말했다.

“남자만 죽여주시면 됩니다. 여인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무리 살수들을 처리한 마교 고수라지만, 토끼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기분이었다. 설마 이 사람을 준비해 뒀을 줄은 몰랐으니까.

“무공실력보다 말을 더 잘하게 생긴 저자 말이냐?”

재인은 내심 의아했다.

‘말을 잘하게 생겼다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 정도 고수가 되면 그런 내면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사람의 선악을 파악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많다는 건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소교주를 거치면 일상이 된다.

재인은 검무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얼굴이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라고?’

재인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가 너무 젊고 잘생겨서 놀랐는데, 남자는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었다.

“저 눈을 보게.”

재인이 남자의 말대로 검무극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인답지 않은 맑고 깊은 눈빛인데.

“무림의 온갖 일에 끼어들 것 같은 참견꾼의 눈 아닌가?”

“……그런가요?”

“가령 멀쩡한 사도맹의 후계자를 춤판으로 이끈다거나 하는 아주 고약한 눈빛이지.”

갑자기 사도맹 후계자가 왜 나와? 춤? 무슨 춤?

재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이런 괴팍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선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죽여주시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듣고 보니 생긴 게 아주 말도 많고 고약해 보입니다.”

재인이 비위를 맞추자 남자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검무극이 옆자리의 초희에게 물었다.

“어떻소? 지금까지 나와 함께 오면서 내가 말이 많았습니까?”

“아니요, 과묵하셨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초희는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상대가 이렇게 대놓고 길을 막았다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한데 두 사람은 왠지 모를 대화만을 나누고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제가 원래 과묵한 사람입니다. 한데 다들 어찌나 말들을 못 하는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는데, 속으로 삭이고. 나중으로 미루고. 답답해서 제가 말을 안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침묵이 오해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지만, 다들 말을 제대로 안 해서 오해를 사고 있지 않습니까? 소맹주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 안 할 때 보면 누굴 죽이려고 저리 고민 중일까, 그런 인상 아닙니까? 한데 정작 말하는 걸 들어보면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리고…….”

“그만!”

남자의 외침에 검무극이 입을 다물었다.

재인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이 남자와 함께 이놈을 죽이러 와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자꾸 언급하는 소맹주는 또 누굴 말하는 거지?

어쨌든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말 말이 많은 자였구나!’

재인이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말했다.

“어서 저 말 많은 자를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해주시지요.”

그러자 남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안 돼.”

안 된다는 말에 재인이 놀랐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말에 대답을 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우린 아는 사이거든. 심지어 친하기도 하지.”

“친하긴!”

남자는 바로 사도칠대고수 괴악이었다.

삼자회담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오히려 부정하는 괴악의 태도에 재인은 느낄 수 있었다.

‘둘이 친하다!’

재인은 낭패감에 휩싸였다. 대체 저 젊은 남자가 누구기에?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뭐하긴? 자넬 죽이려고 왔지.”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죽이십시오.”

괴악은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더니.

“이젠 죽이기가 더 어려워졌군.”

검무극의 눈빛과 기도에서 실력이 더욱 상승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마인 한 명만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평생 펑펑 써도 남을 만큼의 돈을 받기로 했지. 아쉽군. 부자가 될 기회였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번 일에 나선 건 검무극 때문이었다. 자신이 나서야 할 정도의 마인이라면, 검무극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사람이라 생각해서. 대체 이자들이 누굴 죽이려나 해서. 미리 막아주려고 한 것이다.

한데 그 마인이 검무극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기녀를 홀로 호위한다? 정말 자네답군.”

괴악이 재인에게 물었다.

“자네는 저 말 많게 생긴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나?”

“누굽니까?”

“저 사람은 신교의 소교주라네.”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녀를 호송하는 젊은 고수가 마교 소교주라고? 저 말 많은 남자가? 그럴 리가!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괴악의 표정에는 그 어떤 거짓도 담겨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설마 나더러 마교 소교주를 죽이라는 건 아니겠지?”

재인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이 왜 이렇게 잘 안 풀렸는지. 훨씬 더 어려운 일도 예술로 해내는 결망자의 그물에 왜 이렇게 허술하게 구멍이 숭숭 나 있었는지.

재인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그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애써 침착하려 애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소교주가 정말 젊다는 점이다.

‘나는 결망자에게 음모를 설계하는 일을 배우는 사람이다. 침착하자.’

젊음은 언제나 미숙하고 실수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분명 틈이 있을 거다.

괴악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기에 내심 가엽게 여겼다.

‘너희가 치는 그물의 열 배, 백 배 큰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 그 그물에 누가 들었는지 안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지.’

검무극이 재인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번 일을 꾸민 게 자네인가?”

아무리 봐도 마인 같지 않은 태도였기에 재인은 여전히 상대가 마교 소교주임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배우는 중이오.”

“누구에게?”

재인이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바로 그때였다.

괴악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결망자라는 인물이 있네.”

괴악이 이렇게 순순히 배후를 밝힐지 몰랐다.

재인은 괴악을 자극해서 살아날 방도를 찾으려 했다.

“어르신을 봐서라도 이러시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그 점이 미안해서라도 자신을 살려주는 쪽으로 유도하려 꺼낸 말이었는데.

괴악이 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내 이름에는 괴자도 들어가고 악자도 들어간다. 그런 내게 도리를 따지려는 거냐? 그리고 결망자와는 돈을 따지는 사이지 도리를 따지는 사이가 아니다.”

이 말에서 재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괴악이 마교 소교주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천화루에는 누굴 보냈지?”

검무극의 물음에 순간 재인은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소?”

“누굴 보냈느냐고 물었네.”

눈빛도 어조도 차분했지만 재인은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들은 마교 소교주가 기녀를 데려가려는 천화루의 본단을 몰살시키려 했으니까.

“귀살대를 보냈소.”

귀살대란 말에 듣고 있던 초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님들을 통해 여러 번 들은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저지른 일을 들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 귀살대가 루주에게 갔다는 말이었다.

심장이 요동치는 그녀에 비해 검무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더는 묻지 않았다.

“왜 결과를 묻지 않소?”

재인이 천화루를 인질로 삼아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야겠다 마음먹는 순간.

“그들이 실패했으니 여기 괴 선배님까지 동원하려 한 거 아닌가?”

재인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부드럽게 묻고 있지만 상대는 자신과 상황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살고 싶은가?”

“살고 싶소. 아니, 살고 싶습니다.”

재인은 최대한 공손하게 굴었다.

“이번 일을 청부한 배후는?”

“내게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결망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망자를 배신했다간 정말 극심한 고통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게 될 거다. 자신이 아는 결망자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배신자를 옭아맬 촘촘한 그물부터 짜는 사람이었다.

“결망자는 무섭고 나는 안 무섭나?”

“그게 아닙니다.”

“하긴, 이럴 때 우리 소맹주 얼굴이 필요한데. 그 친구 앞이었다면 이렇게 날 만만하게 여기지 못했을 텐데.”

자리에 없는 비사인이 계속 불려 나오고 있었다.

“한데 다행히 천화루에는 소맹주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와 있다네.”

재인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던 그 순간.

검무극이 지풍을 날려 그의 내공을 제압하고 수혈을 눌렀다.

검무극은 잠이 든 재인을 마차 뒤쪽에 실었다. 짐을 싣는 공간이 거의 없는 소형마차였지만, 재인을 눕혀 둘 공간은 있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거기 누가 있나?”

검무극이 손으로 이마에서 턱까지 스윽 쓸어내린 후 웃는 모습을 그렸다.

괴악은 그곳에 극악소마가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괴악은 마존들은 질색이라며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내저었다.

“다음에 보세.”

그렇게 떠나려는데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일부러 저 때문에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 알고 있습니다.”

괴악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돈 때문이었다니까. 생각하면 배 아프니까 그 얘긴 그만하게.”

괴악이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그를 바라보며 검무극은 옅게 웃었다.

‘왜 말이 그렇게나 많냐고요? 오늘 이런 자리에서 뵈려고 그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 진심을 알게 되었기에, 괴악은 오늘 자신을 도우려 나선 것이다. 만약 과묵하게 그를 대했다면, 어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관계를 끊는 게 점점 더 쉬워지는 요즘, 여전히 검무극이 말이 많은 이유였다.

“자, 우리도 가시죠.”

“네!”

초희는 마차를 모는 검무극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괴악도 그렇고, 귀살대도 그렇고. 그 무서운 이름들이 이 소교주에게 오면 일상의 이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또 한 가지 결론.

마교 소교주는 말이 많은 남자가 아니다. 지금 묵묵히 앞만 보며 마차를 모는 이 모습이 앞서 보였던 말 많았던 모습보다 훨씬 더 어울렸으니까.

* * *

드디어 두 사람이 천화루에 도착했다.

저 앞으로 천화루주 여정의 모습이 보였다.

걱정했던 루주가 잘 있는 모습에 초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주님!”

여정을 본 초희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리려 했다. 하지만 여정이 먼저 와서 그녀 손을 잡아끌었다.

여정은 그녀를 데리고 가서 자신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물을 가져와서 마시게 했다.

“우선 물부터 마셔. 천천히.”

“네, 루주님.”

여정은 흥분한 그녀를 안정시킨 후 몸부터 살폈다.

“어디 다친 곳은?”

“괜찮습니다.”

그녀의 대답에도 여정은 차분하게 그녀의 몸을 살폈다.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 뻔했기에, 자신이 꼼꼼히 살펴봐 주는 것이다.

대체 어떤 정보냐고 먼저 물어볼 법도 했는데, 그녀는 초희의 몸부터 챙겼다.

자연 루주를 바라보는 초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날도 이렇게 해주셨었죠.”

“그날?”

“제 목숨을 구해주시던 날요.”

여정은 아비의 도박 빚에 새외로 팔려 가는 그녀를 구해주었다. 정말 길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때 여정은 사내들의 팔을 뿌리치며 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반항하던 그녀를 자리에 앉히고 오늘처럼 물을 마시게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한 후 자초지종을 물었다.

여정은 그 자리에서 초희의 빚을 갚아준 후, 그대로 갈 길을 떠났다.

만약 자신을 구해준 후 천화루에서 일하게 했다면 여정을 이렇게 존경하지 않았으리라.

“떠나시면서 제게 그러셨죠. 부모가 너를 버렸으니 너도 더는 가족에 얽매이지 말라고요. 집을 떠나서 너 자신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셨죠.”

그날 초희는 여정을 뒤따라갔다. 따라오면 기녀가 된다는 말에도,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여정에게 걸었던 것이다.

“내가 그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정은 그날의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구한 게 아니라 인연이 널 구한 거다.”

그 인연이 이렇게 오늘 이 자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느라 고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초희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말 살아서 이곳까지 온 것은 기적이라 해도 될 것이다.

“루주님은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다. 우릴 지켜주는 분들이 저기 계시지 않느냐?”

그제야 초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무면객들이 서서 기루를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방에 있던 그들이 나와서 그곳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임무가 바뀐 것이다.

“설마 저분들은?”

초희도 알았다. 저 가면이 누가 쓰는 가면인지.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향했다.

‘그럼 저 사람이 그 무서운 극악소마이겠구나.’

초희는 극악소마를 처음 보았다. 극악소마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유난히 더 저 웃고 있는 흰 가면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 극악소마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검무극의 모습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모든 위험은 소교주를 거치면 일상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끼는 그녀였다.

“저기 계신 소교주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여정이 옅게 웃었다.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단다.’

초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소교주님이 그러셨습니다. 루주님과는 전 무림이 막아도 뚫고 찾아갈 정도로 친하다고요.”

그러자 여정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내가 아니라 저분 때문이다.”

초희는 그를 바라보는 여정의 눈빛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육감이었다.

‘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여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악소마 때문에 왔다는 말이 무엇인지. 여정이 극악소마와 깊은 관계니 소교주가 루주를 위해 달려온 것이구나!

두 사람을 바라보던 초희가 천화루주를 돌아보았다. 이제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온 이유를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루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녀는 천화루주에게만 들리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화루에서 무림을 발칵 뒤집을 큰 사건이 벌어질 거예요!”

그녀는 더욱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벌이는 사람은…… 루주님이십니다.”

우릴 건드렸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이번 일이 천화루, 그리고 천화루주와 깊은 관계가 있었기에. 혹시 잘못 말했다가 더 큰 화가 천화루주에게 미칠까 봐.

많이 놀랄 줄 알았는데 천화루주는 뜻밖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 극악소마를 사랑하는 운명을 살아가는 여인쯤 되면, 이 정도 풍파는 정면으로 맞서리라.

“이제부터 저 두 분에게 말씀드리고 함께 상의할 거야. 괜찮겠어?”

사실 굳이 받지 않아도 될 허락이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이 정보를 가져온 초희에게 허락을 구했다.

초희는 루주가 이런 마음으로 수하들을 대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이런 한 마디가 아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여정과 초희가 검무극과 극악소마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소마님도 아버지 생선 요리를 맛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극악소마는 내기에 연속해서 지고 생선 요리를 하는 교주를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했던 그 어떤 여행보다 즐거웠습니다.”

검무극의 말을 극악소마가 농담으로 받았다.

“섭섭합니다. 저와 했던 여행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기록은 깨라고 있는 거죠. 다시 저와 여행 가시죠.”

그때 여정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 생선 요리만큼은 안 되겠지만, 저도 한 요리 한답니다.”

그 여행에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말이었다.

자신이 무림을 발칵 뒤집는 사건의 주인공이 될 거란 말에도 이런 농담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눈앞의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 인생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지 새삼 또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럼요, 당연히 함께 가셔야죠.”

극악소마가 둘만 가겠다고 고개를 가로젓자 검무극이 그녀에게 제가 모시고 갑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정이 극악소마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바로 이런 때다. 이런 상황에서 장난치듯 고개를 내젓는 일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여정을 보며 정식으로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루주님.”

앞서 초희와 먼저 재회하도록 하고 자신은 극악소마와 먼저 인사를 나눴다. 이제야 정식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잘 지내다 뿐이겠습니까? 소교주께서 미리 기별 주셔서 목숨을 구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본루의 모두를 살려주셨습니다.”

“그건 소마님이 오셔서 지켜주신 덕분이겠지요.”

“오라버니는 소교주님께 공을 돌리고, 소교주님은 오라버니께 공을 돌리는군요. 그럼 이번에는 제가 두 분의 도움을 다 받아볼까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조금 전에 초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검무극의 표정이 굳어졌다.

적들이 노리는 것이 천화루와 천화루주로 밝혀진 이상, 그 어떤 일보다 신중하고 확실하게 이번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 사건을 벌이는 사람이 루주님이라는 말은, 그 죄를 루주님께 누명 씌우겠다는 뜻일 겁니다.”

검무극의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는 어떻게 얻었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초희가 대답했다.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고 고문조차 이겨내는 무거운 비밀도, 가끔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얻어낸 정보가 사실이라는 것은 그녀를 추적해 온 자들이 이미 증명했다.

“부디 두 분께서 루주님을 지켜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초희가 정중히 검무극과 극악소마에게 허리를 숙였다. 처음 도망쳐 올 때만 해도 마음이 너무나 불안했었다. 이 정보를 루주에게 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놈들에게 루주님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무면객들이 곳곳을 지키고 서 있다.

다시 그녀의 시선이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향했다.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는 오면서 충분히 겪었고.

거기에 극악소마의 저 새하얀 가면의 차가운 웃음을 보고 있으면 절로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젠 너희가 더 무서워해야 하지 않을까?’

검무극이 초희에게 말했다.

“이제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십시오.”

“네! 그럴게요.”

그녀가 경쾌하게 두 사람에게 인사한 후 마지막으로 여정을 바라보았다.

여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살게 되면 네 덕분이다.”

그러자 초희가 여정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아뇨, 루주님을 구한 건 인연일 겁니다. 팔려 가는 어린 여자애를 구해주시던 그 따뜻한 인연 말이죠.”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저만치 걸어가던 그녀가 돌아서며 물었다.

“저 술 마셔도 될까요? 너무 오래 참았어요.”

“다 마셔도 된다.”

여정의 말에 그녀의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여정에게 말했다.

“좋은 인연이군요.”

“보시다시피 제가 인복이 꽤 있죠.”

그러면서 그녀는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서 있었다. 괜히 자신만 너무 애정을 과시했다는 생각에 여정이 한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예쁜 심장은 잘 있나요?”

“잘 있을 겁니다.”

“심장을 멀리 떼어두셨나 보네요.”

“예쁘면서도 튼튼한 심장이 되기를 바라서요.”

그러고 보니 여정은 이안에게 귀한 사람이 될 거라는 말을 해주었는데.

이안아, 잘 있지?

그렇게 오랜만에 재회의 인사를 나눈 후, 검무극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번 일과 관련해서 혹 짐작 가는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여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조용히 천화루를 키우며 어떤 무림사에도 얽히지 않았던 그녀다.

검무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향했다. 수혈을 제압당한 채 쓰러져 있는 재인이었다.

“저자는 누굽니까?”

극악소마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초 소저의 추격을 맡은 자의 수하입니다. 입을 열기 위해 아주 무서운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죠.”

극악소마의 뻥 뚫린 눈구멍에서 차가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겁니다.”

* * *

재인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아! 소교주에게 붙잡혔었지?’

검무극에 의해 혈도가 제압당했던 게 기억났다.

‘이상한 소맹주 타령을 했었는데.’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재인이 흠칫 놀랐다. 그제야 자신이 깨어난 방에 누군가 등을 돌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어디로 데려온 겁니까?”

재인은 그 남자가 검무극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나를 압박해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습니다. 내가 모시는 그분은 의뢰자의 비밀을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찾아가봤자 의뢰인이 누군지 알 수는…….”

그때 문이 열리며 검무극이 들어왔다. 검무극을 보자 재인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어? 벌써 친해졌어?”

그러자 창에 등을 돌리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를 보는 순간 재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소교주와 함께 있는 저 가면이라면? 한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극악소마!”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내뱉은 후, 화들짝 놀라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을 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오싹했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무림인에게 극악소마라는 존재가 주는 근원적인 공포가 있다. 극악소마라면 죽여도 그냥 죽이지 않을 거란 극악의 공포심.

잠들기 직전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화루에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 와 있다고. 그 사람이 극악소마였구나!

극악소마가 천천히 다가와 재인을 응시하더니 차갑게 물었다.

“천화루에 귀살대를 보낸 게 너냐?”

재인은 맞다고 했다간 당장 온몸이 찢겨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재인은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극악소마와 눈이 마주쳤다. 눈구멍 속의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재인은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공포를 느꼈다. 상대가 극악소마라서 무서운 게 아니라, 지금 보이는 저 눈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의지는 한순간에 무너졌고 생존본능만이 그를 휘감았다.

“제가 모시는 분이 보냈습니다!”

손가락을 펴서 눈을 겨눈 것도 아니고, 고통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 재인은 극악소마라는 존재가 주는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극악소마는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가 그분께 모시겠습니다!”

그제야 극악소마는 다시 창가로 걸어가서 등을 돌리고 섰다.

검무극이 재인에게 왔다.

“이해해. 소교주인 나도 무서운데 오죽하겠어?”

재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은 절대 의뢰인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원칙을 지키는 데 병적으로 집착하는 분이시라서.”

그때 창밖을 바라보던 극악소마가 불쑥 말했다.

“그자가 어떤 놈이든 결국 말할 거다.”

잠시 사이를 두고 절대적인 믿음이 덧붙여졌다.

“이번 설계는 소교주님이 하실 테니까.”

* * *

서단명은 한자리에 있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계속 옮겨 다녔고, 만나는 장소는 항상 그가 정했다.

오늘은 어제와 반대 방향에서 천화루가 보이는 골목길에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재인이 마차에 올라타며 나직이 보고했다.

“실패했습니다.”

순간 서단명의 얼굴이 꿈틀했다.

“괴악이 그를 죽이지 못했단 말이냐?”

“아뇨, 애초에 싸우려 들지 않았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다.”

재인이 진실을 전했다.

“기녀를 호위하던 남자는 바로 마교의 소교주였습니다.”

서단명에게 먼저 떠오른 감정은 놀람보다 후련함이었다.

‘그럼 그렇지!’

이번 일을 진행하는 내내 그를 짓누르던 의문들이 일시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괴악까지 실패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정말 눈앞이 캄캄했었다.

한데 마교 소교주란 말을 듣자 그 어둠에 빛이 내렸다.

‘난 실패자가 아니야! 단지 운이 더럽게 없었을 뿐이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심.

‘소교주가 그냥 보냈을 리가 없는데?’

자신을 향한 서단명의 눈빛에 차가움이 스치자 재인은 솔직히 말했다.

“네, 제가 사신을 끌고 왔습니다. 지금 이 마차도 감시받고 있습니다.”

“이런 미친!”

서단명의 눈에서 살기가 스쳤다. 의심 많은 서단명이 자신이 혼자 왔다는 말을 믿을 리 없다는 판단에 그것까지 솔직히 말한 것이다.

“내 손에 죽고 싶은 거냐?”

“아뇨, 어르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서라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시리라 믿어서입니다.”

서단명이 사정없이 재인의 뺨을 후려쳤다.

“거기서 죽었어야지!”

고개를 푹 숙인 재인의 목에 당장에라도 비수를 꽂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녀석을 죽였다간, 당장 마교 놈들이 몰려와서 자신을 붙잡아가거나 죽일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검무극이 마차에 올라탔다.

“감정이 격해지시는 것 같기에 일찍 왔소. 아, 주위에 숨어 있던 수하들은 모두 재웠으니, 괜한 기대는 마시고.”

서단명은 대번에 등장한 이가 소교주임을 알 수 있었다.

“소교주.”

“결망자라고 불리신다고요?”

“그렇소.”

“그물을 짜는 사람이라, 멋진 이름이오.”

검무극은 정중히 그를 대했다. 속 보이는 친절함이라도 어디까지나 무례보단 나은 법이다. 특히 결망자란 이름에 자부심을 지닌 그였다.

“왜 오셨는지 짐작은 가오만, 의뢰인이 누군지는 밝힐 수 없소. 당신 손에 죽게 되겠지만 내 죽음은 명예로운 죽음으로 남을 거요.”

기세가 꺾이지 않겠다는 마음 반, 진심 반이었다. 그는 죽기 싫었다. 하지만 딱 그만큼 의뢰자를 밝히기 싫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의뢰인 손에 죽을 거요. 그다지 명예로운 죽음은 되지 못할 테고.”

서단명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비밀을 지키려 하는 한, 의뢰인은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 거요. 애초에 그 약속만큼은 확실히 했으니까.”

“그래서가 아니오.”

검무극은 그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지적했다.

“당신이 그들 일을 망칠 뻔했소.”

그게 무슨 말인가 서단명뿐만 아니라 재인도 궁금했다.

“저들은 천화루주를 이용해서 일을 꾸미려 하고 있소. 그래서 그 기녀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천화루주에게 오려 한 것이었지. 한데 당신은 천화루를 공격해서 그곳 사람들을 다 죽이려 했지.”

“그건!”

기녀의 연락을 못 받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천화루주와 천화루 그 자체였음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건 몰랐던 일이오!”

“과연 그들이 알아줄까? 아니, 안들 뭐하겠소? 이미 다 망쳐버렸는데. 난 이대로 나가서 천화루주가 죽었다고 발표할 거요. 열받은 의뢰자는 반드시 당신을 죽이려 들겠지.”

거기에 검무극의 결정적인 패가 이어졌다.

“나는 기다렸다가 당신을 죽이러 온 자들을 통해 누가 의뢰했는지 알아낼 거요. 일을 다 망쳐서 끝났다고 생각할 테니, 자신들의 사람을 써서 모든 흔적을 지우려 들겠지.”

“당신이 평생 쌓은 인생은 의뢰자에게 죽는 걸로 마무리될 거요. 우릴 건드렸으니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순간 서단명은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검무극이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재인이 소리쳤다.

“잠깐! 의뢰자를 알려주면…… 우릴 살려줄 겁니까?”

물론 약속된 제지였고 약속된 설득이었다.

“어르신, 이렇게 끝내실 수는 없습니다. 살아서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서단명의 입에서 선뜻 의뢰자를 밝히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무극이 준비된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당신이 밝혔다는 건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할 거요.”

차갑게 덧붙여지는 검무극의, 아니 천마신교의 해결책이 강력하게 그를 유혹했다.

“그 의뢰자는 우리가 싹 쓸어버릴 작정이니까.”

원한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그 강력한 유혹은 통하지 않았다.

서단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그들을 쓸어버릴 수 없소.”

검무극은 궁금했다. 대체 누가 의뢰자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어쨌든 그를 힘껏 밀어붙였으니 이제 다시 살갑게 잡아당길 때다.

“맞소,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

검무극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설득했다.

“명분도 좋고, 원칙도 좋지만 우선 살고 봐야 하지 않겠소? 결망자. 나는 이 이름이 참 마음에 드오. 앞으로도 당신이 멋진 그물을 만들어가길 바라오. 시간이 되면 우리 일도 좀 도와주시고.”

이 반대쪽 선택은 죽음인데 어찌 서단명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듣고 있던 재인이 나서서 검무극을 지원했다.

“우릴 살려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이 물음이야말로 서단명이 가장 묻고 싶은 말일 테니까.

“소교주의 약속이니까.”

서단명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마인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마교 소교주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국 마교의 손에 먼저 죽게 될 거다.

재인도 간절한 눈빛으로 서단명을 쳐다보았다. 우선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단명이 여전히 아무 말도 없자.

“그냥들 죽어라.”

나직한 한마디를 남기고 검무극이 그대로 마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결국 서단명의 입에서 한 곳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백계상단.”

그 말을 듣는 순간 재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훨씬 더 거창한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일개 상단이라고? 그렇다면 왜 마교가 쓸어버릴 수 없다고 한 거지?

“그들이 누구기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그의 궁금증은 검무극이 대신 풀어주었다.

“그들 뒤에 사도맹이 있으니까.”

백계상단은 검무극도 알고 있는 곳이었다. 예전 극악소마와 처음 출교했을 때 그들을 알게 되었다. 사도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이곳 귀주에 진출했던 그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사인과 처음 만난 곳도 백계상단이었고.

이후 비사인이 원하던 것을 알려주면서 극악소마의 구역에서 돈을 벌던 그들이 귀주에서 물러났었는데.

그 백계상단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맞소. 사도맹이 백계상단의 배후에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지.”

서단명의 말에 재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번 일을 사도맹이 꾸몄다는 의미입니까?”

서단명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긍정의 침묵이었다.

왜 서단명이 무리하면서까지 이번 일을 해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끝까지 의뢰자를 밝히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마지막에 사도칠대고수인 괴악을 동원한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백계상단에서는 누가 왔소? 단주 서정태가 직접 왔소?”

검무극의 물음에 서단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단주가 왔었소. 나와는 아는 사이지.”

서단명이 긴장한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오. 살려준다는 약속은 지킬 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서단명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어지던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의 물음이 들렸다.

“다 됐습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서단명의 두 눈이 커졌다. 재인은 들어본 목소리였기에 몸을 움츠렸다.

“됐습니다.”

검무극의 대답이 끝나는 순간.

슉하고 들려온 날카로운 바람 소리.

마차 벽을 뚫고 날아든 혈앙지에 서단명의 얼굴에 구멍이 뚫렸다.

슉! 슉! 슉!

계속 날아든 지풍이 그의 몸에 연이어 적중했다.

퍽! 퍽! 퍽! 퍽!

이미 절명한 몸에도 계속 날아와 박힌 혈앙지는 극악소마의 분노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풍이 멈췄을 때 마차에는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저 앞에 극악소마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란 생각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던 재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두려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살려주기로 약속했잖습니까?”

“나는 했지만.”

천화루에 귀살대를 보내는 순간, 이미 결정된 운명이었다. 천화루주를 죽이려 한 그를 극악소마가 절대 살려줄 리 없었으니까.

재인이 겁에 질린 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도 죽일 겁니까?”

구멍 속 극악소마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죽고 싶나?”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살고 싶습니다.”

“그럼 살아라.”

검무극이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재인이었다.

“왜 살려주는 겁니까?”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죽을 목숨인데.

검무극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날 도우면 살려주겠다고 했잖아?”

극악소마가 그까지 죽여야 직성이 풀린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극악소마는 서단명을 죽이는 것으로 응징을 끝냈다.

“그리고 아직 배우는 중이라면서?”

검무극의 시선이 서단명의 시체를 향했다.

“저 사람처럼 살면, 너도 언젠가 저렇게 될 거다. 그물 짜는 법은 세상에서 직접 배워라. 그래야 네 그물을 짜지.”

재인은 느낄 수 있었다. 마교 소교주가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걸.

그때 저만치 서 있던 극악소마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극악소마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재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재인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두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살았구나 싶은 안도감에 재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로소 상대의 그물에서 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가 이내 그는 생각했다.

소교주가 다시 준 기회 자체가 어쩌면 더 큰 그물 속일지도 모른다고.

* * *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돌아왔을 때, 천화루는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면객들은 주위를 감시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후원에 있는 객청에서 쉬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계상단이 의뢰했다고요?”

여정도 뜻밖이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

비화를 운영하는 그는 여러 정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극악소마와 관련되었던 백계상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네요.”

돌아오면서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검무극은 여정이 총명한 사람이라 분명 상황을 꿰뚫어 볼 거라고 극악소마에게 말했었다.

“얼핏 들으면 백계상단이 귀주에서 물러나면서 입었던 손해에 대한 앙갚음처럼 보이지만, 뭔가 이상해요.”

그녀는 주목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일반 무가였다면 그럴 수 있어요. 무인들이 얼마나 헛된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지 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한데 백계상단은 상인이에요. 당시 그들이 입은 손해는 금전적인 손해인데, 그 손해 때문에 더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 복수를 하려 한다고요?”

그러자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보며 말했다.

“역시! 누구보다 총명하신 형수님이십니다.”

형수란 말에 여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극악소마와 인연이 된 후에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누구에게 들어보겠는가? 이 관계 자체가 비밀이었는데. 솔직히 그녀는 기분 좋았다.

극악소마도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소교주가 어떤 마음으로 저 말을 했는지 잘 알았다. 소교주는 계속 그녀를 배려하고 생각해주고 있었다. 결국 누굴 위한 마음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잠시 흐른 침묵을 깨며 여정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총명해서가 아니라 백계상단에 대해 아는 바가 있어서 그래요. 백계상단의 단주는 돈을 버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에요. 사도맹과 손을 잡은 것도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죠. 그런 사람들이 이런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지난 은원을 갚으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여정이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군요.”

극악소마가 그녀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잊지 말게.”

소교주와 함께 있는데 그런 걸 놓치겠느냐는 의미였다.

사실 극악소마는 처음 백계상단이란 말을 들었을 때 미안한 감정과 분노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무극과 대화를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고, 이번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검무극이 단적인 이유를 들어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무림이 발칵 뒤집어지면 상인들은 손해를 보게 되죠.”

한데 천화루에서 무림을 발칵 뒤집을 일을 꾸민다고 했으니.

“이번 일에는 다른 내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정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사실은 누가 제게 이토록 깊은 원한을 품은 걸까, 마음이 많이 쓰였거든요.”

그러자 극악소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원한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지.”

극악소마는 이번 원한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이기를 바랐다. 천화루나 여정은 큰 음모 속에서 잠시 스쳐 가는, 말 그대로 잠깐의 여정이기를.

“우선 그 백계상단의 부단주부터 찾아야겠습니다. 통천각에 기별해서 행방을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밖에서 여정의 수하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손님이 찾아와 루주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필 이럴 때 손님이 찾아왔다고? 여정이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한 번 쳐다본 후 수하에게 물었다.

“누구라고 하더냐?”

“백계상단 부단주라고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여정이 눈빛으로 어떻게 할지를 두 사람에게 물었다.

검무극은 결정을 극악소마에게 맡겼다.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그가 자신의 여인을 지키는 일이었으니까.

극악소마가 여정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찾으려는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피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대청으로 모셔라.”

* * *

백계상단 부단주 평위(平委)가 천화루주가 기다리고 있는 대청으로 들어섰다.

저 앞에 천화루주가 앉아 있었고, 그녀로부터 이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자신이 앉을 자리가 놓여 있었다. 아마 그사이에 그녀를 지킬 무인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조심성이 많으시오.”

어딘지 모르게 퉁명스러운 첫마디에 여정은 미소로 환대했다.

“여인의 몸으로 취객들을 상대하다 보니 겁이 많아졌답니다. 이해해 주시기를.”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이 오갔다.

여정은 백계상단 부단주에 대해 기본적인 부분은 알고 있었다.

백계상단 상단주 서정태가 가장 믿는 사람으로 상당한 무공 실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무공 실력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인물로 알고 있다.

과연 그는 날카로운 눈빛과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귀한 분께서 어쩐 일이신지요?”

이제는 결망자에게 청부해서 초희를 죽이려 한 사람이 눈앞의 평위임을 알았지만, 여정은 전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화루에 제안할 게 있어 찾아뵈었소.”

“말씀하시지요.”

“내달 초에 귀한 손님이 올 거요. 우린 천화루를 통째로 빌려 그분을 대접하려 하오.”

무림 문파들이 기루에서 무인을 대접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천화루처럼 큰 기루를 통째로 빌리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본루를 통째로 빌리시려면 큰돈이 들 텐데요.”

평위의 눈빛이 강렬해지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여정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제야 평위가 눈빛을 풀었다.

“돈 걱정은 하지 마시오.”

“어떤 손님을 대접하시려는 거죠?”

“말씀드릴 수 없소.”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무림을 발칵 뒤집을 사건이 바로 이 일이라는 것을.

여정이 정중히 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원칙상 누군지 모르는 손님을 위해 본루를 통째로 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정 비밀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특실로 모시겠습니다.”

순간 평위의 표정이 꿈틀했다. 살기를 내뿜어 겁을 줄 법도 했는데, 그는 살기보다 더 강력한 것을 내놓았다.

“천화루 하루 수입의 열 배를 주겠소.”

우리가 얼마를 버는지 알고 열 배를 부를까?

어쨌든 여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는 법이지요.”

평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여정은 그 눈빛에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기루나 운영하는 주제에 돈보다 중요한 것을 따진다고?

“비밀이 새어 나가면 그대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소. 그래도 듣겠소?”

평위의 협박에도 여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칙은 원칙이니까요.”

여정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느끼자 결국 평위가 물러났다.

“좋소.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소. 대신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 하오.”

“걱정 마십시오. 애초에 본루의 신용을 믿고 찾아오신 것 아니십니까?”

잠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던 그의 입에서 놀라운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사도맹의 소맹주님을 모실 거요.”

여정은 놀랐다. 그녀는 그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평위가 보기에는 사도맹 소맹주가 온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여정의 놀람은 달랐다.

‘그날 사도맹 소맹주를 죽일 작정이구나!’

무림은 발칵 뒤집어질 것이고, 그 죄는 자신이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제 만족하시오?”

“아뇨, 후회해요. 이름을 여쭙지 않고 끝까지 거절했어야 했어요.”

평위가 옅게 웃었다. 부담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이름을 듣는 순간 거절은 불가능했으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에게 연락 주시오.”

“그러죠.”

평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청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떠나가자 이윽고 뒤쪽 비밀 문을 열고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걸어 나왔다.

“어째 요즘 그 무서운 얼굴이 자꾸 생각이 나더니만.”

검무극은 편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극악소마와 여정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음을.

“그러잖아도 한 번 다 모이려고 했었는데.”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여정에게 말했다.

“자, 무림을 발칵 뒤집어 놓을 준비 되셨습니까?”

죽음이 기다리는 곳에

외출에서 돌아온 검무극이 천화루의 내원으로 들어섰을 때, 극악소마는 팔짱을 낀 채 지붕에 서 있었다.

“무면객들이 보이지 않네요?”

“모두 인근 안가로 보냈습니다.”

놈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상, 굳이 이곳을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섰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긴급 전서로 여기저기 연락 좀 하고 왔습니다.”

“그중에 사도맹 소맹주도 있었겠군요.”

“소맹주는 직접 가서 만날 겁니다.”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일 처리 방식을 알고 있다. 그는 혼자서 뭔가를 해내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리 알려야 할 것은 알리고 의논하고 대비하고.

그에게 중요한 건 모두의 안전이다. 이번 같으면 비사인의 안전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거다. 홀로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에, 오히려 영웅이 되곤 한다는 것을.

“놈들은 초 소저를 죽이는 데 실패했음에도 이번 일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뭔가 놈들이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표를 소교주님으로 바꿨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요.”

그럼 정말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극악소마는 알고 있다. 근래 교주와 검무극과의 관계가 어떤지. 소교주가 잘못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저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극악소마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검무극의 판단을 믿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임을 알고 있었다.

“놈들은 항상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이간질하고, 암살하려 들죠. 우리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강해지는 수밖에요. 그 온갖 수작이 우리에겐 발전의 계기가 되고 경험이 되게끔 만들어야죠.”

검무극이 강렬한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요즘 강해지셨다는 것, 압니다. 더 강해지십시오.”

극악소마의 두 눈도 강렬하게 빛났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다녀오면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근래 자신의 무공경지가 올라섰다 하더라도 여전히 검무극의 무공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그 비무는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비무가 되리라.

“좋습니다.”

극악소마는 감사히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무공 경지에 변화가 있는 요즘이라면, 검무극과 수련하면 자신의 무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검무극 역시 그것을 알기에 제안하는 것이고.

그때 저 멀리 천화루주가 기녀들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날을 대비하고 있었다.

극악소마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 사람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형수란 말에 여정이 크게 감동했음을 극악소마는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챙겨야죠. 제 첫 형수님이신데.”

극악소마가 눈빛으로 물었다.

제 첫 제수씨는 언제 볼 수 있습니까?

검무극의 눈빛이 대답했다.

글쎄요. 과연 이번 생에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바람 부는 지붕에 서서 천화루를 내려다보았다.

* * *

한 남자가 화려하게 꾸며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복도 양쪽에 방들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안을 볼 수 있게 작은 창문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는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중년의 여인들부터 꼬마라고 불러도 좋을 아이까지, 모두 주눅 들고 겁에 질려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방을 들여다보자 그녀들은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 벽에 화려하고 비싼 비단옷을 입은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어린 여자아이를 방패로 삼은 채 목에 비수를 겨누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노인의 절박함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멈춰! 더 다가서면 이 아이는 죽는다!”

노인의 협박에 다가서던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검을 버려!”

노인의 비수가 당장에라도 아이의 목을 찌를 기세였다.

“어서!”

남자가 바닥에 검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말했다.

“진정해. 아이가 다치면 너도 죽는다.”

다급한 상황에도 남자는 여유가 있었다.

노인이 다급히 물었다.

“이 애가 죽으면 너도 끝장이야. 평생 승진에서 제외될 거다.”

“그건 곤란하겠군. 아직 올라가야 할 곳이 남아서.”

등불에서 떨어진 곳에 서 있었기에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 소속이지? 청룡단? 백룡단?”

“어디라면?”

“날 풀어주면 널 출세시켜 주겠다.”

노인은 어떻게든 남자를 구워삶으려 했다.

“여인들을 납치해서 남자들에게 팔았지? 어린 애들까지. 그런 죄인을 어찌 풀어주나?”

중죄 중에서도 중죄였기에 무조건 참형이었다. 그랬기에 노인은 절대 끌려갈 수 없었다.

“어린 여자애들을 산 사람 중에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래, 고맙게도 장부에 모두 남겨뒀더군.”

“그럼 알겠군. 일개 무인 주제에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 거 같나? 하루가 지나지 않아 너는 암살당하고, 그 증거가 되는 장부는 사라질 거다.”

협박에 이어 회유가 이어졌다.

“날 보내주면 네 출세는 보장할 수 있다. 원하는 직위가 뭐야? 조장? 대주? 단주? 말만 해.”

그러자 어둠 속에서 남자가 말했다.

“맹주.”

노인의 얼굴이 꿈틀했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 회유해야 할 때.

“그래, 언젠가는 맹주도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날 풀어…….”

순간 노인이 하던 말을 멈췄다.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가슴에 적힌 글자.

그는 멸마대주 진하군이었다.

“왼쪽으로 이 보 치우쳤고, 바닥에 돌을 밟고 있으니 한 뼘 위로!”

노인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던 그 순간.

뒤쪽 벽을 뚫고 튀어나온 검이 산발 남자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벽 뒤로 접근한 멸마대 수하의 검이었다. 진하군은 수하들이 뒤쪽 벽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지 말고 이리로 와라.”

아이가 진하군에게 걸어왔다. 진하군이 몸을 낮추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겁에 질린 아이에게 진하군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저씨는 무림맹에서 높은 사람이란다. 아저씨를 어쩔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분 계신데, 맹주님이시지.”

조금 전 노인이 했던 협박을 함께 들었기에 아이를 안심시켜 주려고 한 말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좋은 아저씨들이란다. 그리고 이번에 이 아저씨가 그 나쁜 놈들을 모두 뇌옥에 가둘 거란다.”

그제야 아이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진하군은 지금 보이는 저 안도감이 무림맹의 정체성이라 생각한다.

겁나고 힘들 때 엄마 다음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 그것이 바로 무림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진하군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랑 나갈까?”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하군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안심시키려 다독였음에도 아이는 손을 떨고 있었다. 진하군이 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제 집에 가자.”

그곳으로 멸마대 무인들이 들어와서 갇혀 있던 여인 모두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진하군이 입수했던 장부를 수하에게 건네주며 명령했다.

“여기 있는 놈들, 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잡아들여!”

“네!”

진하군이 여인들을 안심시켰다.

“저는 멸마대주 진하군입니다. 여러분을 붙잡아 온 이들은 물론이고 관계된 자들 모두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들의 보복은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이 늙어서 죽기 전까지 뇌옥에서 못 나올 테니까요.”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여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멸마대 무인들이 그녀들을 다독이며 마차에 태웠다.

그때 멸마대 수하가 다가와 진하군에게 전서를 전했다.

“긴급 전서입니다.”

멸마대 수하들의 시선이 진하군에게 집중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진하군이 전서를 가슴에 접어 넣으며 대답했다.

“친구가 위험하다는군.”

* * *

변두리 창고에 마련된 원탁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무섭게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은 각각 흑주파(黑蛛派)와 동호파(東虎派)의 수장이었다.

이권 다툼이 심해지면서 수십 명이 죽거나 다쳤다. 두 문파 모두 사도맹에 속해 있기에 결국 사도맹이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들 사이에 앉은 사람은 비사인이었다.

“이번 싸움이 이권으로 발생한 일이니, 이번 분쟁의 해결은 숫자만 보겠소.”

근래 사파 내에서 소맹주가 여러 활약을 보인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번 일을 해결하러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앞으로는 두 분이서 이렇게 나눕시다.”

두 수장은 비사인이 중재한 비율이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누더라도 두 분 모두를 만족시켜 드릴 수는 없을 걸 아오. 다 가지려는 싸움을 하셨으니까.”

예전이라면 살기로 두 사람을 눌렀을 거다. 따르든지, 죽든지. 그게 사파를 유지하는 힘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검무극의 친구가 된 비사인이었다. 그래, 검무극 친구라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

“그 잘려 나간 욕심은 나로 채웁시다.”

두 수장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내가 그대들을 기억할 거요. 나중에 맹주가 되어서도 기억하겠지. 적어도 지금 손해 본다고 생각되는 돈보다는 그게 더 큰 이득 같은데? 혹시 내 착각이오?”

마지막 차가운 물음에 더없이 차가운 살기가 실렸다.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포권하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좋은 말로.

“두 분을 꼭 기억하겠소.”

그렇게 두 사람이 물러가고 비사인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만 훔쳐보고 나오시오.”

그러자 쌓여 있던 상자 위에서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에게 이런 지적인 면이 있을 줄 몰랐소.”

검무극이 상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미 그가 온 걸 알았기에 비사인은 일랑에게 전음을 보내 다들 나가 있게 했다.

“서로 싸워서 이긴 사람이 다 차지해라! 그럴 줄 알았거든.”

“그건 당신들 방식 아니오?”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 시절 방식이라 해둡시다.”

검무극은 쾌속보로 바람처럼 달려왔다. 쾌속보의 속도는 아직 한계가 오지 않았다. 갈수록 더 빨라졌다. 이처럼, 검무극의 중원은 더 좁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창고 밖으로 나갔다.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도십삼랑은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따랐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오?”

검무극이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말했다.

“희대의 악녀에게 사도맹 소맹주가 살해당하다! 앞으로 저잣거리에 떠돌 당신에 대한 소문이오.”

비사인이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을 전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검무극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로 농담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은 비사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전했다.

“천화루에서 당신을 죽이려는 거 같소.”

비사인의 그 무서운 얼굴이 꿈틀했다.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분노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사실 우리도 백계상단을 주시하던 참이었소.”

“무슨 일로요?”

“아직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단주와 부단주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소.”

“한데도 부단주의 초대에 응하셨소?”

“단주와 싸우고 있으니, 이자가 내게 요구하는 게 있겠구나, 중재를 바라서 초대했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소.”

그러자 검무극은 백계상단의 더 깊은 의중을 짐작했다.

“어쩌면 그대에게 의심받지 않고 초대하려고 일부러 분열한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겠소.”

비사인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작정했다는 의미인데.

“한데 나를 어떻게 죽이겠다는 거요? 독살하려는 거요?”

자신을 지키는 사도십삼랑은 독살에 대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모든 술과 음식을 확인하기에 독살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도십삼랑을 속이는 독을 만들어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거요.”

그 말에 비사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말은 독이 아님에도 자신과 사도십삼랑을 죽일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의미였으니까.

검무극을 바라보는 비사인의 눈빛이 뜨거웠다. 검무극은 또다시 위험을 알려주러 이렇게 달려와 준 것이다.

“고맙소.”

“나중에 나 구하러 올 때는 두 배 더 빨리 뛰어와 주시오.”

“그러겠소.”

“참, 그리고 진 대주도 불렀소. 진 소저도 함께 오라고 했고.”

비사인이 뜻밖이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왜 불렀소?”

아직 적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오히려 진하군이나 진하령까지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만 위험할 수 없잖소?”

“…….”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비사인이 목청을 높였다.

“장난치지 마시고!”

그래, 이래야 검무극을 만난 거지.

검무극이 다른 이유를 댔다.

“우릴 건들면 누가 나서는지 봐라! 우린 너희가 감히 함부로 건들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려고 불렀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진짜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유를 말하시오!”

비로소 검무극이 진짜 이유를 밝혔다.

“친구가 위험하면 당연히 알려야 하는 것 아니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생각지 못하는.

“친구라면 오히려 위험한 자리에 못 오게 해야 하는 거 아니오?”

비사인은 그게 친구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검무극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나 없는 곳에서 죽어버리면? 남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오? 친구가 내 도움을 안 바라고 죽어버렸네요. 하하하. 위험한 일이라고 부르지 않은 모양입니다. 나는 그 꼴 못 보오. 난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사람이오. 낮에 당한 일로 밤새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오. 두고두고 그 생각 날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같이 죽는 게 낫소!”

비사인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도 두고두고 화가 날 거다. 자신에게 도움도 바라지 않고 검무극이 죽어버린다면.

“난 앞으로도 다 알릴 거요. 진 대주가 위험해도 다 알릴 거고, 내가 위험해도 다 알릴 거요. 나 좀 구해주러 오라고. 안 오면 겁쟁이라고 소문낼 거라고 협박까지 할 거요.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내가 혼자 구했어! 하고 자랑할 문제는 아니니까.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미리 말하지만 이런 핑계는 사양하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이게 검무극의 진심이란 것을. 이게 검무극이 바라는 친구 사이란 것을.

“참, 그리고 새 얼굴도 불렀으니까 기대하시오.”

“대체 누구를 또 부른 거요?”

물론, 쉽게 대답해 줄 검무극이 아니었다. 훌쩍 몸을 날리며 저 멀리 날아가며 말했다.

“그러니 그 칙칙한 무복 말고 여자들이 좋아할 세련된 옷을 입고 오시오. 백의와 잘 어울리는 색으로! 그럼 그날 봅시다!”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검무극은 저 하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가버리자 주위가 조용했다. 정말이지 폭풍이 왔다 간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그에게 일랑이 다가왔다.

비사인이 검무극의 말을 요약해서 그에게 전했다.

“희대의 악녀가 나를 죽이려 하니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세련된 옷을 입고 오라고 합니다.”

“네?”

어리둥절해하는 일랑에게서 비사인의 시선이 검무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죽음이 기다리는 곳에 친구들도 함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니 그의 거친 얼굴에 굵직한 미소가 지어졌다.

“흰색과 잘 어울리는 색으로요.”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싸움

여정은 극악소마와 함께 천화루의 후원을 거닐었다.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들 사이를 걷다 연못에 다다랐을 때 발걸음을 멈췄다. 고요히 떠 있는 수련 옆으로 잉어들이 물방울을 튕겼다.

오랜만에 극악소마와 같이 나누는 이 시간이 여정에게는 너무나 즐겁고 소중했다.

백계상단의 음모에 대해서는 일절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왜 자신을 이용하려 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교주님은 어딜 갔나요? 요 며칠 보이지 않으시네요.”

“사도맹 소맹주 만나러 갔네.”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마교 소교주와 사도맹 소맹주가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관계인가요?”

그녀의 농담에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를 본교 주점으로 불러들인 분이신데. 이 정도쯤이야.”

사실 여정이 보고 느끼는 검무극의 모습이 있다.

“소교주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극악소마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특별한 운명이 느껴진다, 그런 거창한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뭔가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요.”

남이 말했다면 그저 똑똑한 사람이거나 정보에 밝은 사람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안다.

여정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사람의 운명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자신이 읽어낸 걸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많이 안다는 것과도, 깊이 안다는 것과도 좀 달라요.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소교주님만의 속속들이가 있어요. 말이 좀 이상하죠?”

극악소마는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두 사람과 관련된 일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전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극악소마였다.

“그래서 나는 소교주님을 이해하려 들지 않네. 그냥 느낄 뿐이지.”

바로 그때 뭔가가 빠르게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저 멀리 점이었던 그것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쇄도해 왔다. 화살이 쏘아진 것 같기도 했고, 새가 정말 빠르게 활강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극악소마가 여정을 등 뒤로 오게 한 후 기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다가왔을 때야 극악소마는 긴장을 풀었다. 날아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마당에 내려섰다. 극악소마가 놀란 건 검무극의 경공 속도가 더 빨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바닥에 내려서는 모습 때문이었다.

검무극은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린 것처럼 가뿐하게 멈춰 섰다. 날아온 속도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부드럽고 가벼운 착지였다.

극악소마는 안다. 경공이 극상승에 이르면 그때부턴 달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멈추는 것임을. 경공의 수준은 어떻게 멈춰야 하느냐에 달렸음을.

극악소마는 방금 그 답을 보았다.

“경공이 더 빨라지셨습니다.”

“두 분 뵙고 싶어서 쉬지 않고 달려왔지요.”

검무극은 새보다 빠른 쾌속보로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면서 자신의 한계 속도를 뚫는 건, 무공으로 강해지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사도맹 소맹주는 만나셨습니까?”

“네, 만났습니다. 이미 백계상단의 초대에 응한 상태더군요.”

“정말 놈들이 소맹주를 노리고 있었군요.”

“가면서 은월과 통천각에도 기별해 두었습니다. 백계상단에 대해 모든 걸 조사하라고요. 분명 뭔가 알아낼 겁니다.”

정보조직이 언급되자 여정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달려오시느라 배고프시죠? 제가 실력 발휘하겠습니다. 오랜만에 제가 차린 집밥 한 번 드시죠!”

그녀는 언제 끼고, 언제 빠져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인이었다. 이번 음모의 배경은 자신의 천화루지만 이 싸움의 주인공들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달려와 준 이 두 남자였으니까.

여정이 후원을 떠나자 극악소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배후 놈들일까요?”

“어쩌면요. 아니더라도 그들이 배후에 있다고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대처해야겠지요.”

사도맹 소맹주를 죽이는 음모는 아무나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 우린 우리가 해야 할 일부터 해야겠죠?”

극악소마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소맹주에게 떠나기 전, 돌아오면 한판 붙자고 하고 갔었다.

“어디서 붙을까요?”

이미 검무극은 생각을 해둔 듯 보였다.

“제가 최고의 장소를 압니다. 아, 그 전에 오랜만에 집밥부터 먹고요.”

* * *

나무들이 울창한 숲속에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 있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극악소마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등에 햇살이 비쳤다.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 햇살은 마치 검기가 날아든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따스했다.

극악소마가 손으로 나무를 매만졌다. 거친 표면이 느껴졌고 공기는 차고 신선했다.

“시공이환술이 이렇게 생생한 줄 몰랐습니다.”

이곳은 바로 검무극이 연 시공이환술 속이었다.

극악소마는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을 펼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 괴마, 그리고 철쇄자와 싸울 때, 위기에 빠진 극악소마를 시공이환술을 펼쳐서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시공이환술을 익혔다고 말해주었고.

“그땐 경황이 없어 자세히 못 봤었는데, 이렇게 생생한 곳이었군요.”

검무극의 방에서 이렇게 넓은 곳을 만들어내다니?

주위를 둘러봐도 신비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냥 뒷산에 온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 놀랍고 대단했다.

검무극은 마음 같아선 아버지나 마존들에게 시공이환술을 전수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 무공은 풍천교주의 독문무공이었으니까. 그래서 시공이환술 속에서만큼은 그를 사부로 대하는 것이고.

“일부러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지풍과 장법을 독문무공으로 사용하는 극악소마였다. 들판에서 싸우면 그가 사용한 무공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지만, 이런 나무가 가득한 곳은 그가 발출한 무공의 흔적이 남게 된다.

이 대결은 혈전이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수련이었으니까.

또한 이 싸움은 극악소마를 위한 수련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시작해 볼까요?”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응시했다. 오늘의 이 싸움은 이 한 가지 대전제를 믿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귀결될 것이다.

‘나는 무슨 수를 써도 소교주를 죽일 수 없다.’

이 전제를 믿는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소교주가 실수한다면?

검무극은 극악소마의 고민을 짐작한다는 듯 말했다.

“제 경공술 보셨으니 아실 겁니다. 잘 피할 겁니다.”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믿겠습니다, 소교주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

먼저 극악소마의 손에서 혈앙지가 발출되었다.

쭉하고 뻗어간 혈앙지는 순식간에 저 멀리 있던 나무를 꿰뚫었다. 원래 그 경로에 서 있던 검무극은 어느새 허공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쉬이익!

극악소마가 몸을 틀어 피하며 다시 혈앙지를 발출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발출된 혈앙지를 과연 소교주는 피할 수 있을까?

분명 걱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악소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한 수를 발휘했다.

슈우우우욱!

빛처럼 쏘아진 혈앙지가 세 갈래로 갈라지며 검무극의 머리와 가슴, 다리를 노렸다.

검무극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이더니 절묘하게 빠져나갔다. 풍신사보가 발휘된 것이다.

그 한 수를 보는 순간, 극악소마는 마음속에 있는 마지막 잠금을 해제했다.

‘소교주를 걱정하는 건 오만이다.’

그건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검무극의 한 수는 극악소마를 죽이려는 사람처럼 매서웠다.

쉬이이익!

검무극이 벼락처럼 빠르게 쇄도하며 휘두르는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극악소마는 나무 위로 다람쥐처럼 빠르게 올라갔다.

서걱! 서걱! 서걱!

순식간에 나무가 밑동부터 위로 연속해서 잘려 나갔다.

극악소마가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날아오르던 그 순간.

슉슉슉슉슉!

하늘 위에서 혈앙지가 쏟아져 내렸다. 극악소마가 방금 뚫고 올라간 나뭇가지 사이에서 검무극을 향해 지풍이 비처럼 쏟아졌다.

슉슉슉슉슉슉슉!

혈앙지는 마치 기관에서 연속해서 발출되는 암기처럼 빨랐다. 이전의 혈앙지도 빠르고 강력했지만 지금에 비할 수는 없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팍!

이십여 군데 바닥에 구멍을 만들어내며 혈앙지는 간발의 차로 검무극을 놓쳤다.

두 사람 모두 아슬아슬하면 할수록 더욱 무공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잘 알기에, 정말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이 계속 이어졌다.

콰콰콰콰콰쾅!

마극광폭장에 주위가 뒤집혔다.

엄청난 위력의 장법이 주위를 휩쓸며 날아들었다. 장법이 지나간 곳은 땅과 나무, 바위까지 가루로 만들며 저 멀리까지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극악소마의 물음에 흙먼지 속에서 검무극의 목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괜찮겠습니까? 엄살 아닙니다.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엄살이었다.

쉬이이익.

흙먼지를 뚫고 날아든 검기가 이번에는 극악소마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가 잘려 나갔을 공격이었다. 위기의 순간을 넘겼지만, 극악소마의 눈은 하얗게 웃고 있었다.

비무는 치열했다. 두 사람은 정말 진짜 적과 싸우는 것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이 싸움은 서로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싸움이었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 진정으로 없다면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또한 이 싸움은 난폭하고 거칠지만, 더없이 현명한 싸움이었다.

중간중간 싸움을 멈췄다. 이야기를 나눠야 할 순간에는 검무극이 어김없이 싸움을 멈췄다. 천 번의 칼질보다 한마디 말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할 그 순간을 정확히 파악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가르친 방법대로, 검무극은 극악소마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물론 아버지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배우는 처지였고, 지금은 가르치는 입장. 그 차이에서 오는 깨달음까지 검무극은 놓치지 않았다.

“조금 전 한 수 다시 펼쳐봐 주십시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가 바뀌며 훼손된 나무와 바위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펼쳐지는 공방.

앞서 펼친 혈앙지와 달랐다. 그건 주변에 남은 흔적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앞서와 다른 위치에 남겨진 혈앙지 구멍 앞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만약 처음에 이곳으로 발출하셨으면 이 구멍은 제 몸에 났을 겁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어도 소교주님은 피할 방법을 찾아내셨을 겁니다.”

시공이환술에서의 싸움의 이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밤입니다.”

더욱 위험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싸움이 끝나자 구름 속에서 환한 보름달이 모습을 보였다. 환한 달빛 아래 두 사람은 또 싸움을 복기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비무를 할 때만 해도 극악소마는 이런 싸움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싸움은 소교주가 자신에게 모든 걸 쏟아붓는 싸움이었다. 그것도 목숨까지 걸고서. 그랬기에 극악소마 역시 온 힘을 다했다. 소교주의 호의를 헛되게 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비가 옵니다.”

쏴아아아아아.

두 사람은 빗속에서 싸웠다. 빗속에서는 혈앙지를 더욱 피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혈앙지에 맞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피하고 반격했다. 자신이 다치는 순간, 이 수련은 끝이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극악소마를 위해서도 절대 다쳐선 안 되었다.

극악소마의 내공이 완전히 소진되면 다시 운기한 후 싸웠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이틀 밤낮을 싸웠다. 그야말로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싸웠다.

그리고 그 처절하면서도 찬란했던 싸움이 끝난 이 순간.

극악소마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검무극은 그 옆에 나란히 앉아 그가 무아지경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렸다.

검무극은 아버지 역시 자신을 가르치면서 많은 것을 깨달으셨다고 확신했다. 자신도 이 싸움에서 여러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지난 이틀간의 혈투는 자신도 쉽게 얻기 어려운 기연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극악소마가 눈을 떴다. 그는 이 한 번의 싸움으로 근래 상승했던 무학의 경지를 확실히 굳혔다. 원래 경지가 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평생 그 경지를 다지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이틀 동안의 혈투를 통해 극악소마는 그 과정을 넘어섰다.

“덕분에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틀간의 싸움은 자신이 평생 싸웠던 싸움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을 그에게 주었다. 두 사람의 수준이 워낙 높아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감축드립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그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극악소마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의 팔을 쳐다보았다.

“팔은 괜찮습니까?”

팔에는 피를 흘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인상을 쓰며 엄살을 부렸다.

“괜찮을 리가 있습니까? 팔이 거의 떨어져 나갈 뻔했는데.”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살짝 스친 것보다 조금 깊은 정도의 상처였다.

사실 피가 튀는 순간 떨어져 나갈 뻔한 것은 검무극의 팔이 아니라 극악소마의 간이었다. 퍽,하는 순간 너무 놀라서 외마디 비명까지 내질렀으니까.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래, 차라리 극악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이 큰 고마움을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마지막 싸움터였던 그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극악소마는 새삼 놀라웠다. 검무극은 이틀 내내 이곳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미친 싸움을 하면서도.

“한데 내공이 더 버틸 수 있습니까? 이 공간을 아직도 유지하다니요?”

“이제 간당간당합니다.”

구화마공처럼 막대한 내공을 쓰는 무공을 쓰지 않았기에, 오직 순수한 검술과 검기로만 싸웠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곳에 쓸 마지막 내공은 남겨두었습니다.”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이 새로운 장소로 변했다.

“아!”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커졌다.

“이틀 내내 푸른 녹음만 보셔서 그리우셨지요?”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건 새하얀 설경이었다.

극악소마의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

요즘 그의 생각이나 마음이 바뀌어 방에 가구까지 놓았다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에겐 이 새하얀 풍경이 그의 마음을 가장 편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이 마음 씀씀이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극악소마는 말없이 드넓게 펼쳐진 설원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마님.”

“네, 소교주님.”

“다음에 꼭 저와 여행 가시는 겁니다.”

“그때는…….”

극악소마가 잠시 말을 망설였다. 그 답지 않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망설이는 걸까?

바로 그때, 시공이환술 밖, 그러니까 거처 밖에서 여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교주님 계세요? 소교주님을 찾아온 분이 계십니다.”

기루에서 술 날라 본 적 있나?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시공이환술에서 나왔다.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고 두 사람 모두 절대 잊을 수 없는 이틀이었다.

검무극이 문을 열자 여정이 서 있었다.

“누가 찾아왔습니까?”

살짝 상기된 얼굴로 여정이 대답했다.

“멸마대주와 진하령 소저입니다.”

당연히 여정은 알았다. 멸마대주가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가장 강력한 후계자 후보라는 것을.

그 진하군이 천화루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제 사도맹 소맹주가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마정사 세 곳의 후계자가 한 곳에 모이게 된다.

여정은 이번 일이 자신의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될 기회임을 느꼈다.

“친구가 위기에 빠져서 제가 불렀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여정이 아쉬움을 표했다.

“부럽네요. 저는 살면서 그런 친구를 얻지 못했답니다.”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섭섭하다는 듯 말했다.

“친구가 없으시다니요? 그럼 저는요?”

감당할 수 없는 말이라는 듯 여정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두 분 이리로 모셔 오겠습니다.”

여정이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소교주가 섭섭함을 표할만했다. 자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초희를 데리고 쉬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는가? 이는 멸마대주가 달려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저도 친구가 있었네요.’

하늘 같은 극악소마가 있고, 위기 때 달려와 주는 또 다른 하늘 친구도 있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여정이 물러나자 검무극은 곧장 자리에 앉아 운기했다. 내공이 아예 없었기에 잠시 틈을 내어 일주천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검무극이 운기할 동안 극악소마는 옆에 서서 호법을 서주었다. 그는 시공이환술 속에서 보았던 설경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운기하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운기 중에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그였다.

“소마님, 지금보다도 더 무공 경지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극악소마는 일찍이 혈앙지와 마극광폭장의 대성을 이뤘다. 최근 삶의 변화와 내공의 증가로 무공이 더 올랐고, 이틀간의 수련으로 그 경지가 공고해졌다.

그리고 지금 검무극은 이 상태에서 더 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십일성에 이르렀으니 십이성 대성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

“혈앙지와 마극광폭장이 더 완성되면 완전히 다른 무공으로 거듭날 겁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모르겠지만, 검무극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자신과 함께 생사를 오간 경험이 가장 많았으니까. 자신의 무공을 가장 가까이서 수없이 경험했었으니까.

“더 강해지십시오, 소마님.”

극악소마는 항상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이 끝없이 강해지려는 데에는 명백한 이유와 대상이 있음을.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그렇게 강합니까?”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강합니다.”

극악소마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더 강해지겠습니다.”

소교주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강해지는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근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들 역시 제각기 저만의 방식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예감했다. 당대 팔마존이 역대 최강의 팔마존이 될 것임을.

그때 여정과 함께 진하군과 진하령이 도착했다.

방으로 들어선 그들은 운기하고 있는 검무극에게 한 번 놀라고, 그 옆에 극악소마가 서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이곳에서 극악소마를 보게 될 줄 몰랐던 탓이다.

“마존을 뵙습니다.”

“진 대주, 어서 오시게.”

어색하게 인사한 진하군에 비해 진하령은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 소저, 반갑네.”

진하군은 자신과 동생이 얼마나 변했는지 이 인사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먼저 인사한 것도 그렇고, 진하령이 저렇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하군의 시선이 운기하고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그래, 이 표현이 맞겠지.

모든 건 검무극 만남 이전과 검무극 만남 이후로 나눈다.

검무극을 알게 된 후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지금 극악소마에게 검무극이 다친 것은 아니냐고 손짓으로 묻고 있는 동생까지도.

진하령은 오랜만에 보는 검무극이 반가웠다. 이렇게 재회하는 순간에 운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농담이 튀어나왔다.

“멸마대주를 불러놓고 운기 중이라니? 너무 대범하시다!”

진하군이 그녀에게 마존 앞에서 소교주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진기를 일주천한 검무극이 눈을 떴다.

“그만큼 우리 멸마대주님을 믿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

검무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극악소마는 내심 놀랐다.

‘진기를 일주천하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구나.’

물론 이 일주천만으로 검무극의 막대한 내공을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이 속도라면 정말 빨리 내공을 완벽하게 회복할 것 같았다.

검무극과 진하군이 먼저 인사를 나눴다.

“일찍 도착했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었네.”

검무극이 진하령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인사 대신 이 상황을 정리했다.

“누가 믿겠어? 사도맹 소맹주가 위험하다는 기별을 마교 소교주에게 받자마자 무림맹 후계자가 될 사람이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걸.”

검무극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전보다 더 여유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더 성장했다는 의미.

“어쩌다 보니 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원래 귀주에는 잘 안 오는데.”

당신을 꼭 보란 운명인가 봐. 그녀는 그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검무극이 여정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이 이곳 천화루의 주인이시자,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시다.”

진하군과 진하령이 정중히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검무극이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말을 강조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란 의미.

여정이 가만히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궁금했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어떤 운명을 읽고 있을까?

“두 분을 뵈니 정파 무림의 앞날이 더없이 밝다는 걸 알겠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자 극악소마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있으면 두 사람이 불편할 테니까.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극악소마가 여정과 함께 거처를 나서려고 할 때, 검무극이 여정에게 부탁했다.

“루주님, 죄송하지만 실력 발휘 한 번만 더해주십시오. 외지에서 고생한다고 제대로 밥도 못 먹고 다녔을 친구들이라.”

그녀가 대답하기에 앞서 진하군이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저희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러자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살면서 멸마대주님께 식사를 대접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제게 주어진 큰 영광을 부디 뿌리치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말하자 진하군은 사양하지 못했다.

여정은 검무극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하군과의 인연을 조금이라도 더 깊게 이어주려는 마음임을.

천화루는 정파, 사파 할 것 없이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으니까. 멸마대주와의 인연은 무조건 그녀에게 이득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베푸는 인연이라면 더욱이.

여정이 나가면서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인사했다.

‘감사해요, 소교주님.’

그렇게 극악소마와 여정이 나가고 그곳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게.”

“우리 춤꾼 친구에게 적이 많네.”

검무극이 천화루와 관련한 지난 일을 모두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두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면서 검무극이 자신들이 보고 싶어서 과장해서 기별했을 수도 있다는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다 듣고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일개 상단이 계획할 만한 일이 아니니 그 배후에 누군가 있겠군.”

진하군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당신을 노릴 수도 있다는 의미야.”

그러자 검무극이 두 사람까지 끌어들였다.

“아니면 자네들일 수도 있지. 내가 자네들을 부를 것을 예상한 자라면?”

“친구 잘못 만나서 위험에 빠지는 건가?”

“친구 잘 만나서 각개격파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는 거지.”

이제 진하군은 저 말이 괜한 생색이 아님을 안다. 적들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노렸으니까.

“지금 본교에서 백계상단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 중이네. 곧 결과가 나올 거네. 그럼 놈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도 있을 거네.”

진하군은 검무극이 자신을 불러줘서 고마웠다. 만약 이번 일을 비사인과 검무극 둘이 해결하고, 나중에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면 왠지 섭섭했을 것 같았으니까.

“불러줘서 고맙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들으면 안 고마울걸?”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진하군은 물론이고 진하령도 검무극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 질문은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루에서 술 날라 본 적 있나?”

* * *

“잘 어울리는데?”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이 동경에 비친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 천화루에서 일하는 이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정말 자신이 살면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지금부터 일을 배우면 내달 초가 되면 능숙해질 거네.”

그뿐만 아니라 멸마대 무인들도 천화루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꾸미기로 결정을 내렸다.

진하군이 이런 복장으로 동경 앞에 선 이유는 검무극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네들이 이곳에서 일하는 기녀들을 지켜주게.”

검무극은 진지하게 그를 설득했다.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린 몰라. 시시하게 끝날 수도 있고, 우리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지. 자네들이 아는지 모르겠네만, 나는 언제나 최악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네.”

검무극이 걱정하는 것은 기녀들의 안위였다.

“일이 크게 벌어졌을 때, 아무도 그녀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무면객들에게 이 일을 맡길 수도 없어.”

검무극이 진하군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와 멸마대가 그날 그녀들을 지켜주게.”

멸마대주와 멸마대를 이곳까지 불러와서 기녀들을 지켜달라는 했으니 진하군의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었다. 중요한 일에서 밀려난 기분이 들 수도 있었고.

하지만 진하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지켜주겠네.”

그 대답에 진하령은 내심 놀랐다. 언짢지만, 그래도 검무극의 부탁이니 들어주겠다, 하는 섭섭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기꺼이 부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너무 흔쾌한 대답에 검무극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싫다고 안 하네? 차라리 내가 사인이를 구할 테니, 술은 자네가 나르게. 나라면 이랬을 텐데.”

그러자 진하군이 검무극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 일이 더 중요해서 내게 맡긴 것 아닌가?”

검무극의 맑고 깊은 두 눈이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었다.

“내 마음을 알아주니 고맙네.”

그러자 진하령이 끼어들며 소리쳤다.

“속지 마! 술 취한 진상들 상대하기 싫어서 오라버니에게 맡긴 거잖아!”

검무극이 짐짓 ‘헉’하며 놀라는 시늉으로 그녀의 농담을 받아주었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그녀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그녀가 의외인 건 오라버니의 태도였는데 진하군이 순순히 검무극의 부탁을 받아들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의 작전에서 아이와 여인들을 구했었다네.”

그때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그 안도감이 자꾸 생각났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악을 처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구나.”

누군가 들으면 너무 뒤늦은 깨달음 아니냐고 할 말이었다.

실제로 진하군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구했고, 수많은 협의를 펼쳤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협의는 당연해졌네.”

당연히 구하고, 당연히 죽이고. 멸마대주니까 당연한 일이잖아? 장차 맹주가 될 사람인데 쉬어선 안 되지.

“놀랍게도 협의에도 피로가 쌓이더군.”

그걸 느꼈지만 진하군은 애써 부정하며 앞만 보고 달렸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려오던 중 그 아이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안도감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자신의 손을 꼭 잡는 아이의 손을 느꼈다.

의협이 실체가 되어 진하군의 마음에 박힌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의식적으로 그 순간을 마음에 각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 깊은 피로감을 버텨내려고.

“백 명의 악인을 죽일 기회와 아이를 구할 기회가 동시에 생겼을 때, 나는 아이를 구하러 갈 거네. 한데 어쩌지? 그 백 명의 악인이 앞으로 죽일 무고한 생명은?”

검무극에게 묻고 싶었다. 자네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내 생각이 맞냐고.

자신을 바라보는 저 변함없는 검무극의 눈빛. 그래,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봐줄지 알았기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복잡한 답이 아닌 이렇게 명쾌한 답을 내놓는 사람임을 알기에.

“걱정하지 말고 아이 구하러 가게. 악인들은 내가 죽이러 갈 테니까. 악역은 내가 맡지.”

진하군이 옅게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 역시 아이를 구하러 갈 사람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자넨 정말 멋진 맹주가 될 거네. 꼭 지켜줘야 할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맹주 말이야. 그 길은 정말 힘들고 사람 지치는 길이겠지. 살려준 백 명 때문에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못 견딜 만큼 힘들 땐 날 찾아오게. 내가 신나게 놀아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때 돼서 나 박대하면 안 돼! 자네가 멋진 맹주가 되었다고 저놈, 젊어서는 괜찮았는데 지금 보니 말만 번지르르한 말 많은 마인 놈이었네! 이러면 안 돼!”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진하군이 불쑥 말했다.

“할 거네. 말만 번지르르한 마인 놈이라고!”

“너무 하십니다, 맹주님!”

진하군은 믿는다. 여전히 그때도 검무극의 말은 지금처럼 빛날 것이라고. 빛나지 않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와닿을 거라고.

그렇기에 머리가 허연 맹주가 되어도 남에게 물어보기 곤란한 고민을 들고 그를 찾아갈 거다.

―아, 나는 잘 모르겠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진하군의 시선이 다시 동경 속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 누군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사람 중에 이곳의 기녀는 없을 거네.”

그 굳은 각오에 진하군의 뒤에 선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날 우린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을 거네. 내 번지르르한 마도는 자네의 정도보다 너무나 이기적이라서, 절대 그런 꼴은 못 보거든.”

그때도 내가 있을까?

동경 속으로 진하령도 합류했다.

“우리 모두 당신에게 목숨 빚을 지고 있는데, 당신은 또 모두를 살리려 하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오라버니도 지금까지 살아있지 못했을 거다. 천화루주도 검무극 덕분에 살았다고 했고. 비사인도 검무극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걸 알고 있다.

거울 속 두 사람의 시선이 남은 한 사람을 향했다.

“당신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그래서 누군가 정당하게 당신들을 죽였다 해도, 난 화가 많은 인생을 살게 될 거야. 매일은 아니겠지만 당신들이 생각나는 날이면 버럭버럭 화를 내겠지. 한 번 상상해 봐. 내가 남에게 신경질 부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검무극이 지금과 반대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한다? 진하령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그런데 뒤에서 음모나 꾸미는 것들에게 당신들을 잃는다? 그것도 내가 부른 이곳에서? 당신들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야. 평생 괴로워할 나 때문이지. 그러니 다치거나 죽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검무극이 먼저 방을 나갔다.

진하군이 동생을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이게 기별을 받자마자 우리가 달려왔어야 할 이유다.”

그런 오라버니에게 진하령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교주에게 너무 마음 주지 마.”

“왜?”

“저 사람보다 오라버니가 훨씬 더 괴로워할 거니까.”

서로를 잃었을 경우를 두고 한 말이었다. 소교주가 아무리 저런 말을 해도 그는 걱정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검무극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라버니는 걱정된다.

진하군이 다시 동경을 보며 옷매무새를 갖추었다.

“나도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니…… 그런 고민을 했겠지.”

검무극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것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후련해진 그였다. 그래, 애초에 이 길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어려운 길 가고 있다는 것, 진심으로 알아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됐다.

진하령은 진하군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내심 놀랐다. 정말 좋아서 멸마대주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만약 고민을 털어놓은 대상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질투했을 거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고민이었으니까.

“너나 마음 주지 마라.”

“안 줘. 그리고 마음 준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러자 진하군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네가 어때서?”

멸마대주의 버럭이 아니라 오라버니의 버럭이었다.

물론, 다음이 없는 외침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마교 소교주와 잘해보란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진하군이 홱 돌아서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진하령이 검무극의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마음을 어떻게 주냐?”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나직이 덧붙였다.

“이미 주고 없는데.”

* * *

진하군과 멸마대가 천화루에 투입되었다.

“술은 이 창고에 보관되어 있어요. 주문이 내려오면 여기서 가져다주시면 됩니다. 술 목록은 여기 있고요.”

여정이 그들을 이곳저곳 데려가며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녀에게 일을 배우며 진하군은 멸마대 무인들을 방마다 배치했다. 검은 어디에 어떻게 숨길 것이며 비상시에 어떻게 기녀들을 대피시킬지에 대해서도 미리 계획을 세우게 했다.

멸마대 무인들은 이번 작전에 불만이 없었다. 이미 지난 일들을 겪으면서 검무극에게 신세를 졌던 그들이었다.

오히려 기루에서의 이런 일들이 신선했다. 무복이 아닌 옷을 얼마 만에 입어보는 것인가?

본단의 기녀들은 여정이 손수 가려 뽑은 이들이기에, 근래의 이 일련의 변화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에게 새로 온 멸마대 무인들이 화제였다.

어느 무인이 잘생겼더라, 누가 친절하더라, 누가 누굴 닮았다더라.

그렇게 서로 적응하는 며칠이 지났다.

* * *

“나만 이렇게 불안해?”

진하령이 막아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그는 양손에 술병을 가득 들고 동생을 쳐다보다가.

“나 바빠, 손님 기다려!”

진하군이 그녀를 지나가 후다닥 뛰어갔다.

그뿐만 아니었다. 멸마대 무인들도 금방 일에 적응했다. 그들 중에는 정말 몇 년은 이곳에서 일한 것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기녀에게 연정의 서찰을 받은 무인까지 있었다.

천화루주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기녀들을 챙기며 루주 역할에 충실했다.

결국 진하령이 찾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는 뭘 하는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당신은 걱정 안 돼?”

“뭐가?”

“지금 멸마대와 멸마대주가 천화루에서 술병을 나르고 있다고. 벌써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아무리 천화루 본단이라지만, 비밀이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나갔을 것이다.

“그래, 저들도 알겠지.”

“안다고? 그럼 그날 상단에서 나온 자들은 저 술을 나르는 놈들은 멸마대 무인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태평스럽게 술이나 나르게 한다고?

“다 알겠지. 여기 내가 있고, 멸마대가 온 것도. 심지어 네가 따라온 것도 알 거야.”

“그럼 우리가 먼저 백계상단을 쳐서 배후를 알아내야 하지 않아?”

“어떻게?”

이렇게 물으니 오히려 진하령이 당황했다.

“그야 당신들에게는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이 있을 거잖아?”

“입을 열게 하는 신비한 대법이라도 기대하는 모양인데. 우리도 당신들하고 같아. 손톱 뽑고, 불로 지지고.”

“우린 그런 짓 안 해!”

“당신들도 해.”

진하령은 강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무림맹 지하 고문실 어디선가 꼬챙이가 시뻘겋게 달궈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왜 안 해? 친구 목숨이 걸려 있잖아?”

그러자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동시에 친구의 명예도 걸려 있으니까.”

진하령은 흠칫했다.

백계상단은 사도맹에 속한 상단이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치는 것은 사도맹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쳐도 사인이가 쳐야지.”

진하령은 살짝 얼굴이 상기되며 그 말에 수긍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게다가 지금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비사인을 초대한 상황.

그때 검무극이 담담히 말했다.

“이래서야.”

“뭐가?”

“꼭 우릴 끌어들이는 것 같아서.”

순간 진하령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내가 백계상단과 접촉하거나 그들에게서 뭔가를 알아내야 하는 상황이잖아? 당신이 와서 내게 왜 안 치냐고 재촉할 만큼. 과연 그들은 그런 생각을 안 할까?”

거기까진 생각지 못한 그녀였다. 만약 검무극의 예상대로라면? 상대가 백계상단에 함정을 파고 기다릴 정도의 적이라면?

“그럼 지금 정말 위험한 상황이잖아?”

그러자 검무극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위험하다고? 누가? 천화루의 내부는 멸마대가, 외부는 무면객이 지키고 있어. 그리고 내가 있고 소마님이 계시지. 그리고 당신과 진 대주가 있고, 그리고 비 소맹주가 사도십삼랑을 이끌고 올 거야.”

정말 이래도 위험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전력이었다.

“당신이 적이라면 이 상황에서 뭔가 수를 쓸 수 있겠어?”

검무극의 물음에 진하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겠지.”

그래, 이쪽을 이기려면 전쟁이라도 일으켜야 할 상황이었다.

“한데 놈들은 그대로 있어. 초대도 취소하지 않고. 그만큼 위험한 한 수가 있다는 뜻이겠지.”

검무극의 말에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기를 바라잖아? 그러면 왜 피하지 않는 거야? 초대를 거절하고, 비 소맹주와 함께 백계상단을 치면 되잖아?”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면 놈들이 준비한 한 수는 쓸 수 없겠지.”

그럼 된 것 아닌가 생각하던 그녀가 흠칫 놀랐다.

“당신 설마?”

그 설마가 맞았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난 그 수가 뭔지 알아내야겠어.”

진하령은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검무극이 상대를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왜?”

“지금 안 쓰여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일 테니까.”

진하령의 의문을 풀어주는 말이 덧붙여졌다.

“그때도 내가 있을까?”

검무극은 그 한 수가 자신이 없는 곳에 발휘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없을 때 진하군에게, 자신이 없을 때 비사인에게, 자신이 없을 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렇게 강력한 한 수라면, 자신이 있을 때 나서서 막아내려는 것이다.

진하령은 이내 며칠 전 그가 거울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린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을 거네. 내 번지르르한 마도는 자네의 정도보다 너무나 이기적이라서, 절대 그런 꼴은 못 보거든.

정말 잘도 이기적이다.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지금 눈앞의 상황만이 아닌 언제 발생할지도 모를 앞날까지도 걱정하면서.

“당신, 이렇게 살면 안 힘들어?”

검무극에게는 변함없는 삶의 믿음이 있었다.

“이렇게 살지 않아서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그땐 힘들겠지.”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번 삶의 소명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죽으면 놈들도 무사하진 못할 거야. 자식과 제자를 잃은 마정사의 교주와 맹주들의 복수가 시작될 테니까.”

“웃지 마! 하나도 안 재밌어.”

오라버니는 자신보다 더 검무극을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검무극이 이렇게 다 대비하고 있을 테니, 그냥 믿고 마음 편히 술을 나르고 있는 거겠지.

“난 뭘 하면 돼? 주방에서 설거지라도 할까?”

“아니. 당신은 천화루주님을 지켜줘.”

진하군이 그랬듯, 진하령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럴게. 대신 난 오라버니처럼 약속 못 해. 내가 죽으면서까지 그분을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내가 죽기 직전까지는 꼭 지켜줄게.”

검무극이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죽기 직전까지만 지키다 빠지는 게 지키다 죽는 것보다 더 힘들걸?”

* * *

비사인 도착 사흘 전.

검무극은 자신의 거처로 모두 불러 모았다. 극악소마와 진하군, 진하령과 여정까지.

검무극의 책상에는 서류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지금까지 통천각과 은월이 조사해서 보내준 정보들이었다.

백계상단에 속한 인물들과 그들의 경제 사정, 서로 간의 관계. 다른 상단과의 관계. 그야말로 백계상단을 샅샅이 알아낸 정보였다.

검무극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모두에게 전했다.

“얼마 전에 백계상단이 증축 공사를 마쳤습니다. 연무장을 넓히고 낡은 건물도 허물고 새로 지었지요. 그리고 통천각에서 그 공사에 들어간 자재에 특별한 것들이 있었다는 걸 밝혀냈습니다.”

통천각은 공사에 들어간 자재까지 놓치지 않고 조사한 것이다.

“위장 공사였군요.”

극악소마의 추측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자재와 재료를 분석해 봤을 때 공격형 기관진식과 진법을 설치한 것 같답니다. 그것도 최상급으로. 아주 치명적일 거라고 합니다.”

치명적인 기관진식과 진법이란 말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건 쉽게 지을 수도 없었고, 만들 수 있는 명인을 구하더라도 그야말로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진하령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당신 예상이 맞았네. 백계상단은 함정이었어.”

검무극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진하군이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검무극은 이들을 부르기 전에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거길 박살 내는 건 나중에 사도맹이 결정할 일이고 우린 친구를 위해 잔치나 잘 준비하자고. 최고로 좋은 술과 끝내주는 요리를 준비해 주십시오.”

검무극이 모두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잔치가 잘 끝나야 진짜 잔치가 열릴 테니까.”

* * *

공동묘지의 깊은 밤, 멀리서 늑대 울음이 들려왔다.

툭 치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오래된 묘비들이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고조했다.

그곳에 백계상단 부단주 평위가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내내 그는 긴장해 있었다. 그럴 만했다.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것이 나타났다.

허공에 둥둥 뜬 채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그것은 가마였다.

가마의 분위기는 독특했다. 온통 시커멓게 칠해져서 마치 어둠에서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마 주위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면사를 착용한 네 사람이 있었다. 그들 역시 가마의 네 모서리에 뜬 채 함께 날아왔는데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등롱(燈籠)에서는 귀신의 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기괴한 푸른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가마처럼 느껴졌다.

툭, 투투툭.

가마가 지나는 곳에 있던 모든 생명이 죽었다.

새들과 벌레들이 후드득 아래로 떨어졌고 꽃들은 순식간에 시들며 죽었다. 나무마저 말라서 비틀어졌다.

가마가 평위 앞 허공에 멈춰 섰다.

평위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드디어 내일입니다.”

비사인을 초대한 날이 내일이었다. 내일 밤, 천화루에서 자신이 직접 비사인을 만날 것이다.

허공에 떠 있는 가마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에게서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듣는 이의 심혼을 뒤흔드는 매혹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목소리였다.

평위의 눈동자가 떨렸다.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마교 소교주가 있고, 극악소마가 있고, 사도맹 소맹주가 있고, 멸마대주가 있는 곳으로 제 발로 들어가야 하는데.

다시 가마에서 감미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처연한 바람이 불어오며 구름이 달을 가렸다.

“밤은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사파라 몰인정하고 파렴치할 것 같지만

평위가 백계상단으로 들어섰다.

가마를 만나고 온 날이면 온몸이 죽을 듯 아팠다.

그는 차가운 달빛이 내린 텅 빈 연무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하면 아픈 정도가 아니라 진짜 죽을 테니까.

그는 정해진 곳을 정확히 밟으며 걸었다. 단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딛는 순간, 온몸이 산산조각 나서 죽게 되는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었다.

연무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섰다.

으스스한 기운이 가득한 복도에서 벽을 두 번 두드렸다.

잠시 후,

스스스스스.

안에서 진법을 해제하자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놀랍게도 이 좁은 복도에 진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좁은 실내에 진법을 설치하는 것은 외부에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만 봐도 이 진법을 만든 사람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 그곳의 끝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방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남자는 상단주 서정태였다.

그 앞에 그의 부인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드디어 내일입니다.”

각오가 깃든 평위의 말이었다.

반면 부인의 목소리는 지치고 힘든 목소리였다.

“부단주님만 믿겠습니다.”

“네, 부인.”

평위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왔다.

문 앞에서 평위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운명이란 놈에게 정신없이 떠밀리다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검은 가마가 떠 있었으니까.

* * *

검무극은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밤늦도록 시천비술을 이용해서 잠도 아껴가며 무공수련을 했다.

극악소마와의 혈전을 다시 되새기며 수련을 반복했다. 지겹도록 반복했다.

깨달음은 언제나 더는 지겨워서 못 해 먹겠다, 소리치고 뛰쳐나간 바로 다음 날 찾아오는 법이니까.

실컷 잤기에 머리는 맑았고 기분은 상쾌했다.

침상에서 일어난 검무극이 창문을 활짝 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 좋다!”

더없이 화창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려는데, 마당에 누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생각지 못한 사람의 등이었다.

검무극이 창문에 기댄 채 그에게 말했다.

“얼마나 놀고 싶으면 아침부터 왔나? 아침에는 기루 안 여네.”

그러자 남자가 검무극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는 험상궂은 얼굴, 가끔은 남자답게 잘생겼다는 생각마저 드는 얼굴, 그는 바로 비사인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침은 무슨! 무인이 이렇게 세상 모르게 자도 되는 건가? 살수가 백 명은 다녀갔겠네.”

물론 비사인이 방으로 들어오려 했거나, 미세한 살기라도 드러냈다면 천마호신공이 발동해서 검무극을 깨웠을 거다.

“나야 자네와는 달리 평화주의자 아닌가? 살수가 올 일이 없지.”

비사인의 그 사나운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직접 달려와서 위기를 알려주고. 또 이렇게 미리 천화루에서 자신을 위해 오늘을 준비하고 있던 검무극이다.

“날 살릴 준비는 끝났나?”

차갑고 서늘한 비사인의 눈빛과 맑고 깊은 검무극의 눈빛이 허공에 얽혔다.

“같이 죽어줄 준비는 끝났네.”

비사인은 안다. 저 말이 결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님을.

“자네와 한날한시에 죽고 싶지는 않네. 그러니 꼭 살려주게.”

“우리에겐 든든한 협객 친구가 있지 않나? 거기 부탁하세.”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려 창밖으로 나왔다.

“참, 흰색에 어울리는 세련된 옷, 가져왔지?”

“대체 누굴 만나기에 이러는 건가? 설마 여자인가?”

그냥 옷도 아니고 세련된 옷이라는 걸 보면 여자는 여자인데.

“여자면?”

“난 여인에게 관심 없네.”

“여자면 예쁘냐고부터 물어야지!”

검무극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옷 안 가져온 건 아니겠지?”

“……가져왔네.”

검무극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자, 비사인이 화제를 돌렸다.

“진 대주는?”

“새로운 직업을 찾으셨지.”

검무극은 비사인을 데리고 천화루 뒤채로 갔다.

그곳 창고 앞에 진하군이 있었다.

“뭐 하고 있나?”

비사인의 물음에 진하군이 들고 있던 술 상자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술을 정리하고 있네.”

“또 소교주의 함정에 빠진 건가?”

비사인의 말에 진하군이 웃었다. 유일하게 비사인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순간이 이때였다.

공동의 적, 검무극.

“평생 입어보지 않은 옷을 입고, 평생 해보지 못한 일을 하는 걸 보니. 어쩌면 또 함정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네.”

진하군의 자책에 비사인이 동조했다.

“옷 문제만큼은 나도 같은 함정에 빠진 것 같네만.”

진하군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자 비사인이 대답했다.

“그럴 일이 있네. 이거 옮기면 되는 건가?”

비사인이 가서 함께 술 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목청을 높였다.

“갑자기 둘이 왜 친한 척을 해? 둘이 안 친하잖아? 나 없으면 어색해서 한마디도 못 하는 사이잖아?”

비사인이 못 들은 척 진하군에게 말했다.

“와줘서 고맙네. 다음에 내가 필요하면 꼭 불러주게.”

“그러지.”

“고마워도 내게 고맙다고 해야지!”

검무극이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못 들은 척했다.

검무극은 낡은 의자에 앉아 두 사람이 술 상자를 나르는 걸 지켜보았다.

“그렇게 구경만 하지 말고 자네도 좀 돕지?”

“그럼 자네를 향한 우리 소맹주의 우정이 훼손되지 않겠나?”

“핑계는.”

검무극은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백계상단에 위험한 기관진식과 진법이 펼쳐져 있다네. 함정을 파뒀으니, 그쪽은 함부로 들어가지 말게. 그것도 아주 높은 수준의 기관진식과 진법으로 확인됐네. 나중에 조심해서 처리하라고 미리 알려주는 거네.”

비사인이 상자를 내려놓고 그곳에 걸터앉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백계상단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도, 그런 기관과 진법을 펼쳐두었다는 것도. 누구보다 사도맹과 가까운 그들이었는데.

“혹시 그자들인가?”

비사인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백계상단의 단독소행이라 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무엇보다 너무 무모했으니까.

“지금까지 놈들이 그래왔듯, 백계상단의 약점이 될 곳을 파고들었을 거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에 놈들의 암계가 숨겨져 있겠지.”

진하군과 비사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들은 놈들이 얼마나 은밀하고 지독하게 사람을 파고드는지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한데 이번 경우는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야. 뭔지 모르게 거칠어.”

검무극의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사인과 진하군은 잘 알았다. 저 느낌의 실체가 위험이라는 것을.

특히 이번 경우는 교주나 맹주가 개입하지 않고, 순전히 셋이서 해결해야 한다.

“우리도 이제 다 컸다는 걸 보여드려야지.”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과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사도십삼랑은?”

검무극의 물음에 비사인이 대답했다.

“천화루 안팎을 돌아보고 있네. 자네들 수하들과 기싸움 중이겠지.”

* * *

천화루에 도착한 사도십삼랑은 두 번 놀랐다.

밖에서 한 번, 안에서 또 한 번.

우선 밖에서는 무면객들 때문이었다.

사도십삼랑은 주위부터 수색했다. 소맹주가 기루에서 술자리를 가지면, 당연히 주위를 완벽하게 살피고 조사했다.

가장 가까운 집의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열 명의 무면객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걸 이미 듣고 왔지만, 그래도 수색은 해야 했다.

수색하는 사도십삼랑과 지켜보는 무면객들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협조해 줘서 고맙소.”

수색을 마친 일랑의 인사에 무면객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만이 아니었다. 천화루와 인접한 집은 모두 무면객이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살던 사람들을 다 쫓아내 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충분한 돈을 지불하고 하루 동안 빌렸다.

감시도 감시였지만,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의 목숨이 위험했기에 검무극은 아예 다 비워버리라고 극악소마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무면객들은 인근 집에, 마차에, 임시로 지은 가건물에, 나무 위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외부는 철통처럼 방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부에서 놀랐고, 내부에서 또 한 번 놀랐다.

“멸마대입니다.”

이랑이 옆에서 말해주지 않아도 일랑은 알 수 있었다. 저기 마당을 쓸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으니까.

특히 사도십삼랑과 멸마대는 후계자 직속 조직이었기에, 알게 모르게 경쟁하는 사이였다. 그래서 서로 상대에 관해 알 만큼 알았다.

그 멸마대 무인들이 기루에서 일하는 이들로 분장해서 곳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장작을 패고, 짐을 옮기고, 술을 나르고.

사도십삼랑이 이번 일의 심각함을 피부로 느꼈다. 비사인을 호위하며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철통같은 경계가 펼쳐져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이다.”

일랑의 말에 이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사마정이 합동작전을 펼치는 게. 이는 내가 입맹한 후에 처음이다.”

그랬기에 이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멸마대가 이미 살폈겠지만, 그래도 샅샅이 살펴라. 우린 우리 일을 한다.”

“네!”

그렇게 사도십삼랑이 천화루의 내부도 샅샅이 조사했다.

매복은 없는지, 또한 음식 재료들은 괜찮은지. 그야말로 소맹주의 안전에 만전을 기했다. 멸마대 무인들과는 눈인사만 나눴다.

다행히 아무 충돌 없이 수색을 끝냈다.

일랑은 이것만으로도 사마정의 분위기가 예전과는 정말 달라졌음을 느꼈다. 사도십삼랑과 무면객과 멸마대가 한곳에 있을 수도 있다니. 그것도 이렇게 평화롭게.

일랑은 새로운 강호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마당 쓰는 멸마대 무인의 머리 위, 담장 밖 나뭇가지 속에서 하얀 가면이 웃고 있었으니까.

* * *

세 후계자들은 검무극의 거처에 있었다.

검무극은 통천각에서 받은 정보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백계상단에 대한 자료네. 읽어보게.”

“기밀을 이렇게 우리에게 막 보여줘도 되나?”

진하군이 보니 통천각에서 온 자료들이었다.

“안 되지.”

“한데?”

“자네들이 비밀을 지켜줘야지.”

“두 사람의 비밀은 있어도 세 사람의 비밀은 없다고 들었는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난 자네들은 걱정 안 해. 어차피 비밀을 누설해도 내가 먼저 하게 될 테니까. 내가 친구들하고 이 정도로 비밀이 없는 사이다! 자랑하고 싶어서.”

비사인과 진하군이 정말 그러고도 남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적을 상대하는 두 사람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다들 아는 내용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도 빠뜨리지 말아야지 싶어서 보여주는 거네.”

이게 검무극의 방식이었다. 외부에 나갔다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하는 것도 그렇고, 마존들에게도, 여기 두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는 절대 없게 하려는 것이 검무극의 삶의 철칙이었으니까.

그때 자료를 보던 비사인이 뭔가를 찾아냈다.

“이 정보들은 언제 얻은 건가?”

“최근이네.”

사건이 터지고 제대로 그들을 들여다보았으니까.

“이 내용들 다 사실인가?”

“통천각의 정보를 의심한다면, 자넨 앞으로 절대 우리와 전쟁은 일으키면 안 되네.”

그만큼 통천각의 정보는 정확하다는 의미였는데.

“틀린 곳이 있네.”

비사인이 종이를 내밀었다.

그것은 백계상단이 비사인에게 왜 앙심을 품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사도맹이 극악소마가 사도맹 무인들을 학살했다고 오해하고 그가 관리하는 영역에 백계상단을 밀어 넣고 지원했다.

이후 양쪽의 오해가 풀리고 사도맹은 백계상단을 물리면서 극악소마가 이 년간 입은 손해를 보상해 주었다.

“그때 백계상단이 이 년간 벌었던 돈을 모두 토해내면서 이후에 가세가 기울었고. 부단주와의 관계도 나빠졌지. 상단주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결국 이번 원한은 그 복수에서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뭐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그러자 비사인이 차분히 말했다.

“우리가 사파라 몰인정하고 파렴치할 것 같지만 말이네.”

비사인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당시 우리가 보상한 그 돈은 백계상단이 아니라 본맹이 내놓았었네.”

그 말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원한의 이유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비사인이 거짓말할 리는 없었으니까, 그들이 손해를 입지 않았다면? 그럼에도 자신들이 그 돈을 낸 것처럼 피해자 행세를 했다?

“그럼 왜 자넬 노린 거지?”

앞서 비사인이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을 이제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돈을 토해냈다고 소맹주를 죽이려 든다고?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검무극이 순간 흠칫했다. 설마, 하며 흘러나오는 추측.

“오늘 이 일이 자넬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면?”

비사인과 진하군의 눈빛도 예리해졌다.

“그럼 뭐가 목적인가?”

비사인의 물음에 검무극이 한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천화루를 망하게 하는 것. 애초에 순수하게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검무극은 저들이 왜 비사인을 죽이려 하는지에 집중했다.

한데 그게 아니라 천화루를 망하게 하는 거라면?

“일전에 나와 만났을 때 자네는 궁금해했지. 대체 날 어떻게 죽이려는 걸까? 사도십삼랑조차 속이는 독을 쓸지도 모른다고 우린 생각했고. 한데 그럴 필요가 없지.”

검무극의 말을 비사인이 받았다.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천화루주는 참형당하고, 천화루는 망하게 되었을 테니까.”

왜 대상이 비사인인가?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천화루를 망하게 할 수 있으니까.

소맹주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리고 그 일을 천화루주가 시켰다는 조작된 증거와 증인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백계상단 또한 원래라면 음모의 주체로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사인을 천화루로 초대한 잘못 밖에 없도록 만들었을 거다.

한데 이 일에 천마신교가 끼어들고, 자신이 개입하게 되면서 일이 커져 버린 것이다.

비사인이 차분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 짓인지 짐작 가는 곳이 있나?”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천화루가 사라진 그 공백을 차지하려는 자겠지.”

밤의 여제가 되려는 천화루주의 꿈을 뺏으려는 자일 것이다.

새로운 밤의 지배자가 되려는 자.

그때 밖에서 일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계상단 부단주가 도착했습니다.”

검무극이 어두워져 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잔치는 시작되었고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갈 때가 되었다.

“자, 옷 갈아입으시게.”

오늘 살아나가는 사람은 없다.

극악소마는 천화루의 후원에 홀로 서 있었다.

검무극이 그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오늘 밤에는 구름이 많겠습니다.”

과연 극악소마의 말처럼 지금도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제가 밤눈이 밝아서 괜찮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극악소마의 시선이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밝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을 향했다.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극악소마는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배후가 궁극적으로 노린 대상은 소맹주가 아니라 천화루였던 것 같습니다.”

의외로 극악소마는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천화루주를 제외하고 천화루의 가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을 테니까.

“루주님이 사도맹 소맹주 암살 시도라는 죄를 뒤집어쓰면 중원 곳곳에 있는 수십 개의 천화루가 모두 문을 닫게 될 겁니다. 아마 그때 배후는 막대한 자금으로 천화루를 인수하거나 새로운 기루를 열어 그 지역을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 극악소마가 그랬다. 천화루가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루를 확장했으니 현재 천화루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극악소마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분노하고 있음을. 자신의 여자를 죽이고 천화루를 뺏으려 한 자들이니까.

“섬서에서 자금줄이 끊기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한 모양입니다.”

“한데 하필이면 소교주님에게 걸렸군요.”

“단씨 자매들이 본교의 소지부에 도움을 청한 덕분이죠.”

만약 그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단씨 자매들과의 인연도 깊었다. 여정을 구할 수 있었을뿐더러, 서대룡과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어쩌면 서 각주가 가져다준 인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은 공을 서대룡에게 돌렸다.

“서 각주가 가보처럼 방에 걸어둔 것이 있습니다. 뭔지 아십니까?”

당연히 극악소마는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예전에 소마님이 서 각주에게 선물로 주신 가면입니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우리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때 담장 저 너머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백계상단의 부단주가 들어왔나 보군요.”

검무극이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겨 있던 극품천잠사를 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본교가 개입한 줄 알면서도 부단주를 보냈다는 겁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지요.”

극품천잠사의 반을 극악소마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극악소마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웃옷을 벗고 심장과 배, 몸의 중요 부위에 감았다.

“소마님, 조심하십시오.”

“소교주님도 조심하십시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누굴 건드리려 했는지 보여주죠.”

가면 눈구멍 속 소마의 두 눈이 차갑게 웃었다.

* * *

백계상단 부단주 평위가 천화루로 들어섰다.

그의 뒤로 십여 명의 수하들이 뒤따랐다. 더 많이 데려올 수도 있었지만, 호랑이와 늑대가 우글거리는 곳에 개들의 숫자가 많아 봤자였다.

“어서 오세요, 평 단주님.”

여정이 대문까지 나와 그를 직접 맞이했다. 여정 뒤로 진하령이 바짝 붙어 죽기 직전까지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손님께서는 먼저 도착해 계십니다.”

“귀한 분이시네. 준비는 차질 없이 잘했겠지?”

“염려하지 마세요.”

여정이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화루 본 건물 앞에 사도십삼랑들이 서 있었다. 일랑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평위와 그 수하들을 살폈다.

상단 무인들은 사도십삼랑의 눈치를 보며 건물 입구와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일랑은 그들이 하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애초에 그들을 안으로 들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차라리 눈앞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게다가 이곳 내부에는 곳곳에 멸마대 무인들이 일하는 사람처럼 오가며 철통같은 방비를 하고 있었다.

천화루 일 층에 귀빈을 모실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방이 원형으로 둘러싼 가운데 너른 공간에 오늘 연회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화려한 병풍, 고급탁자와 의자, 그리고 천화루 숙수들이 준비한 산해진미가 상이 부러질 정도로 차려졌다.

그 상석에 비사인이 앉아 있었다.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소.”

평위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 포권하며 인사했다. 비사인도 가볍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모시러 가려 했는데, 거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번거로운 것이 싫어서 그랬소.”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내 술부터 받으시오.”

비사인이 먼저 술을 부어준 후, 자기 잔도 자신이 채웠다. 평위가 아예 술병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독을 쓰는 것뿐이었으니까.

“이렇게 초대해 줘서 고맙소.”

“예전부터 꼭 모시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이 건배한 후 술잔을 비웠다.

“천화루는 아름다운 기녀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오늘 이곳을 통째로 빌렸으니, 기녀들을 모두 들여서 회포를 푸시지요!”

평위가 이 넓은 공간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했던 것도, 모든 기녀를 사방에 둘러 세울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평위가 천화루주를 부르려는데, 비사인이 그를 제지했다.

“잠깐. 그 전에 부단주에게 드릴 말씀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오면서 이상한 말을 들었소.”

비사인이 평위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봐도 무서운 얼굴이 노려보듯 보자, 평위는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천화루에서 나를 암습하려는 계획이 있다는 정보였소.”

“누가 감히 그런 짓을 꾸미겠습니까?”

평위의 놀란 표정이 제법 그럴듯했다.

“당신이라던데.”

평위는 당당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누가요?”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나요.”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본론을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큰 연회를 열 거요. 내 친구들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참석하는 축제일 거요. 하지만 당신을 위한 연회는 아니오.”

평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는 겁을 내지 않았다.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했으니까.

“오늘 연회는 본 상단을 위한 연회가 될 거요.”

확신에 찬 그의 말에 비사인이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세. 예전에 귀주에서 물러날 때, 왜 그대들이 돈을 지불했다는 소문을 낸 건가?”

순간 평위의 표정이 꿈틀했다.

“소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정중했지만 분명 따지듯 묻는 말이었다.

“그 돈은 우리 백계상단에서 냈습니다.”

말을 하고 화가 났는지 언성을 높이며 덧붙였다.

“우리가 내지 않았습니까?”

그는 정말 그렇게 믿는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우린 그 일 때문에 상단의 가세가 기울고, 상단주께서는 화병까지 얻었는데. 소맹주의 신분으로 뻔뻔하게 거짓말하다니.”

그가 죽을 각오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사인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변명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평위에게는 자신의 말을 시인하는 모습처럼 보였겠지만, 검무극에게는 변명 같은 건 하지 않는 무뚝뚝한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내 친구가 사파라 몰인정하고 파렴치할 것 같지만 적어도 안 준 걸 줬다 하는 쩨쩨한 친구는 아니오.”

물론 평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검무극이 비사인을 보며 말했다.

“그들이 어딜 파고들었는지 알 것 같네.”

비사인은 검무극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백계상단 내에 누군가 돈을 가로채버린 자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이 부단주조차 속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그리고 이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누군가가.

“당신까지 속일 수 있는 자가 누구요?”

검무극의 물음에 ‘무슨 개소리냐!’라는 말을 울컥 삼키던 그 순간, 평위는 흠칫 놀랐다. 현재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부단주님만 믿습니다.

병석을 지키고 있던 상단주 부인의 뒷모습이.

상단주가 아프고 난 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가 있던 그녀의 표정도 떠올랐다. 복수를 애원하는 평소 같지 않은 독기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이내 평위는 차갑게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 파렴치한 자들! 끝까지 더럽게 구는구나!”

흥분한 그에 반해 검무극은 차분했다.

“좋소. 당신 말처럼 이런 악인들이 득실대는 곳에 뭘 믿고 왔소?”

“적어도 당신들의 양심은 아니지.”

“당신을 보낸 사람이 뭐라고 했소. 이렇게 소맹주를 취하게 하면 당신을 구해주러 올 거라 했소?”

“나를 구해주진 않을 거다.”

평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으니까.”

검무극과 비사인의 시선이 마주치던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으으으으으!

저 멀리서 처연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 한 대의 검은 가마가 허공을 가르며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비단길 위를 미끄러지듯 가마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날아왔다.

사아아악.

가마가 지나는 곳에 꽃과 나무가 시들었고 벌레와 새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은 마치 주위의 생명이 모두 사라지며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가마 사방에 선 채 함께 날아오는 네 흑의인들 손에 들린 등롱에서는 귀신불처럼 시퍼런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화루 주위에 은신해 있던 무면객들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천화루 지붕 위에서 극악소마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극악소마는 막으라는 명령도 공격하란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무면객들은 차가운 눈빛으로 가마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이 막히는 지독한 기운이 가마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면객들의 시선이 다시 가마가 날아온 곳을 향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가마만이 아니었다.

길 끝 어둠 속에 뭔가가 가득 있었다.

음산한 기운이 점차 커져 가는가 싶더니.

그것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눈동자였다.

모든 눈동자에 하얀 테두리가 보였다. 그것은 정말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극악소마는 알 수 있었다. 어떤 무공을 익혔을 때 저런 눈빛을 내는지.

암천야신공(暗天夜神功).

오직 밤에만 발휘할 수 있는 무공으로 원래 가진 무공보다 비약적인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대신 이 무공을 익히면 두 번 다시 햇빛을 볼 수 없었다.

가마는 보냈지만, 그들은 통과시키지 않았다.

무면객들이 모두 내려서서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늘어서서 막았다.

몇몇 무면객들은 나뭇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담장 위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가면 속 웃고 있는 눈들은 전혀 겁을 내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중요하지 않았다. 눈동자에 흰 테두리가 있든 노란 테두리가 있든 겁은 상대가 내야 한다.

자신들이 온 곳은 악인곡이었으니까.

가마가 천화루의 앞마당으로 내려왔다.

네 흑의인들의 손에 들린 등롱의 불빛이 보는 이의 마음을 현혹했다.

“크악!”

가마 가까이 있던 상단의 무인이 불빛을 보며 홀린 듯 다가가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들 중 내공이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이 가마에서 뒤로 물러났다.

오히려 그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술병을 나르던 진하군이었다.

진하군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마를 쳐다보았다. 멸마대 수하들이 가마를 포위하며 포진했다. 가마의 모서리에 서 있는 네 명의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휘이이이이잉.

세찬 바람이 불어와 천화루 일 층의 문을 일제히 열었다.

가마를 보는 순간 검무극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십이지왕 중 제 육왕.

암왕(暗王) 흑사린(黑司燐).

십이지왕 중 낮에는 가장 약하고 밤에는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인물.

여인이었지만 어둠의 힘을 이용해서 밤이 되면 그 누구도 감히 덤비지 못한다고 알려진 진정한 밤의 지배자였다.

그녀의 무공은 마치 어둠 속에 깊이 묻힌 보물처럼,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윽고 가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래의 무림을 지배할 분들이 모두 모였군요.”

사람의 혼을 흔드는 아주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물러났던 상단 무인 중 한 사람이 가마 쪽으로 걸어갔다.

진하군이 자신의 옆을 지나는 그의 혈도를 제압해 뒤로 휙 하고 내던져두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을 제어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네. 모두 정심한 마음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하게.

검무극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미래의 무림은 당신들이 지배하려는 거 아니오? 우리보다 더 애쓰시는 것 같은데.”

가마 안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온화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해주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말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역시 소교주께서는 저를 한눈에 알아봐 주시는군요.”

“당신은 누구요?”

검무극은 모른 척 그녀에게 물었다.

“밝은 곳에서는 살 수 없는 죄 많은 인생이랍니다.”

“그럼 나를 잘 만나셨소. 내가 황천각주를 지낸 사람 아니겠소? 내가 죄인들은 잘 다루오. 상담 한 번 받아보겠소? 한 달이면 개과천선할 수도 있을 텐데.”

“역시 소교주께서는 소문대로 유쾌하신 분이시군요.”

“그대들만 없었으면 더 유쾌하게 살 수 있었겠지.”

여인이 나직하게 웃었다.

“소교주께서 우리 일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여러 계획이 변경되었지요.”

회귀한 후 정말 많은 게 바뀌었다. 우린 강해졌고, 저들은 약해졌다.

이 변화가 과연 화무기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왜 침묵하고 있는지. 원래 운명대로 미래의 그 시기에 나타날지, 아니면 더 일찍 등장할지. 아니면 더 늦게 나타날지.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신들 계획은 계속 변경될 거요. 보다시피 당신들보다 우리가 젊어서 팔팔하지 않소? 막고 또 막다 보면 당신들이 먼저 늙어 죽겠지.”

옆에서는 비사인이, 저 멀리서 마당에서는 진하군이,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여인은 여전히 부드럽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나요? 이 멋진 우정을 더는 볼 수 없어서.”

그리고 이 자신감은 그녀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 우리 소교주님을 꼭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검무극은 순간 흠칫 놀랐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가마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주렴이 내려진 가마 속은 어두웠다. 어떤 주렴도 꿰뚫을 수 있는 신안술로도 그 안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내부에서 특별한 암흑술이 발휘되고 있다는 의미.

숨조차 쉬지 않는 듯한 정적 속에서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철그렁.

쇳소리를 내며 남자의 손이 나와 주렴을 갈랐다.

시커멓게 죽은 손등의 피부에서는 독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기운을 억누르려는 듯 푸른빛이 흐르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벌어진 주렴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나왔다.

얼굴은 더 끔찍했다. 시커멓게 타고 뒤틀린 얼굴, 오직 강렬한 두 눈만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 연약하고 어린 나를

“당신, 살아 있었군.”

검무극은 상대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투왕이었다.

검무극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이 있는 줄 알면서 오늘의 연회를 감행했는지.

이번 배후의 움직임이 왜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는지. 왜 그리 거칠었는지.

바로 이 남자, 투왕의 복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화루주의 함정에 이용된 사람이 왜 비사인인지 확실해졌다. 그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간 건 사도맹주였으니까.

투왕이 천천히 가마에서 내렸다.

철그렁, 철그렁.

그의 가슴에도 푸른빛이 흐르는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시퍼런 빛이 감도는 쇠사슬은 평범한 금속이 아니었다. 전에 입었던 보의나 권갑보다 이 쇠사슬이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 같은 예감을 주었다.

가마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로귀환술(暗路歸還術)로 이 사람을 구했을 때는 극독이 전신에 퍼져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당신네 독왕의 독은 정말 지독하더군요.”

과연 아직까지도 투왕의 숨결에는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독왕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엄청나게 열받을 것이다. 놀릴 거리 하나 생겼다.

“하지만 우린 살리기로 결정했답니다. 정말 큰 노력과 막대한 투자를 해야만 했지요. 두 번의 큰 대법과 여섯 번의 시술을 받아야 했지요.”

그때가 생각난다는 듯 투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모든 고통을 참아낸 건 오늘 이 순간 때문이었다.

“보시다시피 투자할 가치가 있었지요.”

투왕의 기도는 엄청났다.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적보다 강력한 느낌을 주었다. 예전에 만났던 투왕이 싸움꾼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투왕은 그 단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느껴졌다.

승패는 물론이고 생사마저 넘어선 투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의 두 눈에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 눈동자에 하얀 테두리가 있었다. 검무극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암천야신공까지 익혔구나!’

원래도 강한 투왕이 온갖 대법을 받고, 거기에 암청야신공까지 익혔으니, 원래 실력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거기에 독왕의 독기까지 내뿜고 있었다.

자신이야 만독불침이니 독기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만약 비사인이나 진하군이 그와 싸운다면 저 독기 때문에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투왕과 독왕이 함께 덤비는 형국이었다.

그야말로 투왕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혼자서 박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신, 얼마나 강해진 거야?”

“내 인생을 바친 만큼.”

암천야신공을 익혔으니 이제 더는 해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직 이 복수를 위해.

투왕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지금 투왕이 풍겨내는 투기는 이곳에 있는 모두를 다 상대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렬했다.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그였는데.

쇄애애애액!

퍼퍼퍼퍽!

그가 손을 휘두르자 모여 서 있던 백계상단의 무인들이 모두 몸통이 터져서 죽었다.

어떻게 막아주고 말고 할 겨를도 없는 한 수였다. 이 한 수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빠르고 강력했다.

그 모습에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부단주 평위였다. 자신이 데려온 이들이 일수에 모두 죽자 그는 경악했다.

검무극이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될 줄 모르셨소?”

물론 평위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 하지만 저들이 자신의 수하들을 가장 먼저 죽일지는 몰랐다. 죽여도 마지막에 죽여야지. 복수하는 걸 보게 한 후에 죽여야지!

“당신은 저들에게 속았소. 사도맹이 아니라 저들이 당신을 이용했지.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웃기지 마라!”

수하들이 죽자 오히려 평위는 더 믿지 않았다. 그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훌쩍 몸을 날려서 가마 앞에 엎드렸다.

“약속대로 저들을 죽여주시오!”

이렇게 자신의 품으로 달려온 그에게 암왕은 가혹했다.

“소교주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이용당했습니다.”

순간 평위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놀라고 당황한 그에게 진실을 전했다.

“정확히는 단주의 부인이 당신을 이용한 것이지요.”

순간 평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던 그 순간.

“으아아아아악!”

그가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새 투왕이 그의 뒤에 와서 그의 목을 움켜쥔 것이다.

목을 부러뜨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그에게는 더 나았을 텐데.

투왕의 손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그의 몸에 침입하는 순간,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그대로 절명했다.

투왕이 그의 시체를 검무극 앞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죽음의 책임을 검무극에게 돌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물론 순순히 받아줄 검무극이 아니었다.

“지금 보는 눈이 몇 개인데 억지를 부리나?”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 없었겠지. 네가 아니었다면 내 몸에 이런 독기도 없었겠지.”

검무극이 사도맹에 숨어 있던 자신의 존재를 밝혀내면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했다. 검무극이 사도맹주를 끌어들이고 독왕을 끌어들였으니까.

“왜 나 때문인가? 애초에 숨어들지 말아야 할 곳에 숨어든 당신 때문이지. 왜 나 때문인가? 이용했으면 그동안 고생했다, 하고 놓아주지 못하는 옹졸한 당신 마음 때문이지.”

검무극에게 죄책감을 안기려 했지만,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 왜 이러는 거냐? 복수는 사도맹주님이나 독왕님을 찾아가서 해야지. 왜? 그 두 분은 겁나? 그래서 이 연약하고 어린 나를 괴롭히는 거지?”

연약하고 어린이란 말에 비사인과 진하군은 실소했다. 정말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에서도 실소하게 만드는 검무극이었다.

물론 투왕에게 그 말은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닥쳐라!”

철그렁.

주먹을 움켜쥔 투왕의 손에서 쇳소리가 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투왕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사도맹주도 곧 내 손에 죽는다.”

투왕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사도맹주도 죽일 작정이었다. 그는 느꼈다. 대법으로 억지로 유지하는 이 몸이 오래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죽기 전에 모두 다 죽일 것이다. 조직에서도 그걸 바랐기에 자신을 살려준 것일 테고.

그때 가마에서 암왕이 말했다.

“역시 소교주는 검보다 입이 더 매섭다는 소문이 사실이네요.”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암왕이 흥분한 투왕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섰음을.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쪽은 암왕이었다.

“사실은 무슨! 헛소문이오.”

검무극이 비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 입보다 검이 더 매섭지 않나?”

그러자 비사인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무극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심각한 자리에서 왜 웃기려 드나?”

비사인의 눈빛이 말했다. 그건 자네지 않나?

이번에는 검무극이 진하군을 보았다.

“자넨 진실을 말하리라 믿네.”

“나는 자네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네.”

너무 담담하게 말해서 진실처럼 들렸다.

가마 안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검무극도 암왕도 여유가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매서운지 직접 확인해 보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다시 가마 문이 열렸다.

촤르르륵.

주렴을 가르는 손. 주름이 가득한 마른 손이었다.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노인이었다. 가마 속에 암왕과 투왕, 또 이 노인까지 다 있었을 리 없으니, 저 안 공간이 평범한 공간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노인의 눈매는 더없이 날카로웠다.

오래된 도포에는 괴이한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고, 펼쳐 든 부채에도 알 수 없는 문양이 가득했다.

그의 몸에서 괴이한 사기가 가득 풍겨 나왔다.

먼저 그를 알아본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천괴(天怪)!”

그는 온갖 사술과 진법에 능통해서 무림을 어지럽히던 무림공적이었다. 그의 사술은 그야말로 사이하고 악랄해서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백계상단에 설치된 진법을 누가 만들었는지.

천괴가 진하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잡으려 애썼으니 어디 잡아봐라.”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진하군 앞에 막아서며 검을 겨눴다.

하지만 천괴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또 다른 이가 가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가 훌쩍 뛰어나왔는데.

크르르르.

놀랍게도 가마에서 나온 것은 어른 덩치만큼 큰 검은 개였다. 그냥 평범한 개가 아니었다. 늑대보다 더 큰 몸집에 커다란 송곳니까지.

그 큰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옥문을 지키고 있을 만한 지옥견이었다.

개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수십 마리의 지옥견들이 연이어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은 실로 괴이했는데 마치 이 가마가 지옥과 연결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지막에 나온 사람은 비사인이 알아보았다.

“견인(犬人)!”

사술 중에서도 암흑사술을 부리는 인물로 스스로를 개장수라 부르는 사파의 절대고수였다.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오늘 이곳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가 소환해낸 지옥견들은 고수도 물어뜯어 죽인다고 알려진 무서운 것들이었다.

지옥견들이 한 곳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으르릉거렸다.

그곳은 바로 극악소마가 서 있는 지붕 위였다.

극악소마는 수십 마리의 지옥견이 자신을 향해 으르릉대는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가마와 함께 날아왔던 네 흑의인이 등롱을 든 채 비사인 앞에 나섰다.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그들을 겨눴다. 네 흑의인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을 전력이 검을 겨눴음에도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때 비사인은 보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가마에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마치 가마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지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천괴는 진하군을, 개장수는 극악소마를, 가마를 호위해온 네 흑의인은 비사인을.

그리고 투왕은 검무극을.

문제는 가마 속 암왕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어떻게 싸움에 개입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진하령은 여정을 데리고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이 싸움은 자신이 앞에 나설 싸움이 아니었다. 도망가야 한다면 그녀를 업고 달려야 할 싸움임을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조심해!’

마지막 순간 그녀가 바라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또 부탁했다.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해! 루주님은 내가 죽기 직전까지…… 아니, 죽어도 지킬 테니까.’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검무극의 시선이 그 위를 향했다.

지붕 위에 극악소마가 서 있었다. 여전히 극악소마는 팔짱을 낀 채 아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싸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눈이 마주쳤다.

가면 속 그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심연처럼 깊은 웃음에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진짜 극악소마가 되어 있음을.

그럼 됐다. 뒤를 걱정하지 말고, 눈앞의 저 투왕에 집중하는 거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투왕이었다.

“내 주먹 한 번 맛보겠나?”

투왕이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먹에 감긴 쇠사슬을 따라 푸른 기운이 차갑게 흘렀다. 그는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했다.

‘내가 구화마공을 익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대성을 이루지 못한 구화마공은 버틸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럼 살짝 맛만 봅시다.”

검무극은 검을 뽑지 않고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 대 주먹.

힘 싸움을 한 번 하자는 의미.

후아아아아앙.

투왕이 검무극을 향해 쇄도하며 주먹을 날렸다.

검무극이 피하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투왕의 연환풍운권이 실린 주먹에 맞선 것은 권마에게 배운 벽력수라권이었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순간, 귀를 찢는 폭음이 들렸다.

콰아앙!

검무극의 주먹이 투왕의 주먹에 감긴 쇠사슬에 적중했다.

강기를 실은 공격이었지만 투왕은 끄덕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을 맞댄 채 검무극과 투왕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물론 전력을 다한 공격이 아니었지만, 그건 투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투왕이 몸을 틀며 다시 주먹을 날렸다.

두 번째 공격은 앞서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두 번째 주먹과 주먹이 충돌했다. 앞서보다 더 큰 굉음이 터져 나왔지만 투왕의 주먹과 쇠사슬은 부서지지 않았다.

다시 두 사람의 주먹이 허공에 맞대어 있었다. 차가운 쇠사슬의 감촉이 검무극의 주먹 끝에서 느껴졌다. 그 감촉이 이렇게 말했다. 난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투왕의 세 번째 주먹이 날아들었다. 더욱 빠르고 강했다.

채애앵!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었다.

뒤로 훌쩍 물러난 검무극의 손에는 어느새 흑마검이 뽑혀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벽력수라권으로 투왕의 권법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주먹을 나눠보니 몸으로 체감했다. 예전 투왕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졌음을.

“당신, 괴물이 되었소.”

검무극이 비사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친구, 내가 혹시 나만 믿으라고 했으면 그 말은 취소네.”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에게 힘내라는 말을 이렇게 했다.

“오늘은 각자 살아남아야겠네.”

난 불안증을 안고 사는 사람이오.

괴물이 되었다는 말에 투왕은 처음에는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 표현이 제격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원래라면 사도맹주가 되었을 몸이다. 한데 지금은 온몸에서 독기를 뿜어내며 괴물 소리나 듣고 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의 몸에서 투기와 살기가 뒤섞인 기운이 압도적인 힘으로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

몸과 마음을 뚫어버릴 기세로 날아든 기운에 무림맹과 사도맹 무인 모두 내력을 끌어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아직 자신의 기량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는 듯, 투왕은 점점 더 강한 모습을 보였다.

일단 투왕과 검무극의 싸움을 지켜보겠다는 듯 아직 다른 적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암왕이 언제 그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은 투왕에게만 집중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구화마공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 천화루 내부에는 적보다 우리 쪽 무인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담장 바깥에는 무면객들이 있었고. 자칫 잘못 썼다간 우리 쪽 사람이 휩쓸리게 될 것이다.

쓴다면 한 사람을 노리는 인멸식이나 암흑일섬을 써야 하는데.

검무극의 시선이 투왕 뒤에 있는 가마를 향했다.

저 신중한 암왕은 분명 자신이 구화마공을 쓸 걸 예상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이들이 무슨 대비를 했을지 알 수 없기에.

검무극이 그런 속마음을 숨긴 채 여유를 보였다.

“그 주먹에 쇠붙이를 달고 있으면 더 느려지지 않나?”

“대신 더 아프겠지. 이 쇠사슬을 볼 때마다 네가 기억날 거다. 이 주먹에 한 줌 핏덩이가 된 네놈이.”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당신 죽이고 나면 그 쇠사슬 전리품으로 가져갈까 해.”

나를 기억하려고? 당연히 투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검무극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다.

“우리가 또 만년한철이 들어간 쇠사슬을 보면 못 참거든.”

예전에 고월의 쇠사슬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거 녹여서 이번에는 이 친구들하고 기념으로 비수를 만들 거야. 아, 과일 깎아 먹을 때 가끔 당신 생각나겠군.”

투왕의 눈에 더욱 짙은 살기가 흘렀다.

“이 쇠사슬은 지옥불에다 녹여야 할 거다!”

쇄애애액!

투왕의 주먹이 허공을 격타하자 한줄기 권강이 발출되었다.

콰아앙!

빛처럼 쭉 뻗어나간 강기가 그대로 검무극을 강타했다.

후와아아아아앙!

검무극을 중심으로 돌풍이 휘몰아치며 먼지가 확 피어올랐다.

와르르륵.

검무극이 서 있던 뒤쪽 저 멀리 담벼락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다시 저 멀리 그 뒤쪽 건물의 담장이 무너졌고, 다시 안쪽 건물을 뚫고 뒷마당 담장까지 무너졌다. 만약 뒤에 건물이 더 있었다면 끝없이 뚫렸을 것 같은 가공할 위력이었다.

주위로 권풍이 휘몰아치며 지켜보던 이들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비사인도 진하군도 진하령도 여정도 모두 너무나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조금 전 한 수는 강력했다.

오직 극악소마만이 변함없는 눈빛으로 검무극이 서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았다.

검무극은 두 팔을 교차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막아낸 것이다.

투왕은 이런 장면을 기대했다. 검무극이 왈칵 피를 토하는 모습을.

검무극은 피 대신 얄미운 말을 내뱉었다.

“그 쇠사슬, 뭐 대단하다고 지옥까지 가서 녹이나? 본교 철방의 곽 장인이 잘 녹여주실 텐데.”

투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내공이 나를 압도해?’

이번에 살아나면서 그 치료 과정에서 내공 역시 크게 향상된 그였다. 거기에 암천야신공까지 발휘되고 있었으니, 방금 그 한 수를 제자리에서 막아내는 건 마교주나 맹주급이 되어야 가능했을 텐데.

투왕의 두 눈에 검무극을 이기고 싶은 욕망이 광기가 되어 차올랐다.

“나만 괴물이 아닌 것 같은데?”

투왕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처럼 못생긴 괴물만 있으면 재미없지 않겠나? 난 괴물 계의 절세미남, 절세미괴다.”

그걸 말이라고? 투왕은 정말이지 이렇게 강한 고수가 이렇게 말로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이 명왕보로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렀다. 강적과의 싸움에서 검무극이 상대를 자극하는 농담을 할 때는 어디까지나 상대의 심기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순식간에 쇄도한 검무극의 검이 기습적으로 그의 얼굴을 찔렀다.

쉬이이익!

투왕이 몸을 틀어 검을 피하며 주먹을 날렸다. 확실히 투왕은 강했다.

후아아앙!

검무극의 검은 투왕의 귓가를 스쳤고 투왕의 주먹은 검무극의 턱을 스쳤다.

스가가각!

흑마검이 곧장 방향을 틀어 투왕의 목을 치려 했고, 투왕의 주먹이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검무극은 피하지 않고 검을 그대로 날렸다. 공격을 포기하고 피한 쪽은 투왕이었다.

훌쩍 뒤로 물러난 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양패구상을 각오한 건가?”

비록 옆구리였지만 그 위력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뜻이었다.

“아니, 당신이 피할 줄 알았어.”

“왜 확신했지?”

“오죽 삶에 미련이 많았으면 그 꼴로 다시 돌아왔겠나?”

검무극의 도발에 투왕이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챙챙챙챙!

투왕은 흑마검을 주먹으로 막았다. 주먹에 두른 쇠사슬은 흑마검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검과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싸움에 있어서 그 경험이 극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화산이었고, 바다였다.

투왕의 주먹이 폭발하는 용암이라면, 검무극의 검은 해일이 되어 그를 덮쳤다.

한 자리에서 검과 주먹을 주고받던 그들이 함께 내달리며 싸웠다.

천화루 안으로 들어가서 싸웠다. 일 층에서 이 층으로, 이 층에서 삼 층으로. 그들이 싸우는 소리만 들렸다.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가 너무 강렬해서 마치 눈앞에서 싸우는 것처럼 생생했다. 층을 올라갈수록 검과 주먹이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졌다.

두 사람이 지붕을 뚫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챙챙챙챙챙챙챙챙!

하늘을 수놓은 검과 주먹.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보는 사람의 눈에는 밤하늘에 수십 개의 검과 수십 개의 주먹이 동시에 보였으니까.

검과 주먹이 만들어내는 선들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감탄을 넘어선 경이.

무면객들의 시선도 하늘을 향해 있었고, 어둠 속 눈동자들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적과 아군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하령의 마음에 떠오른 감정은 이것이었다.

‘아름답다.’

진하군은 아쉬워했다. 이 장면을 모든 무림맹 무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라면 너희 적이 이런 자들이다, 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가 나아갈 길이 이런 것이라고. 이런 무공을 펼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라고. 그만큼 진하군의 눈에 비친 두 사람의 싸움은 완벽했다.

챙챙챙챙챙챙챙챙!

검과 주먹이 부딪치며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불꽃.

그렇게 밤하늘에는 새로운 별들이 생겼다 사라졌다.

비사인은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을 느꼈다.

우선 기뻤다. 저렇게 강한 검무극이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이.

동시에 두려웠다. 미래의 마교주를 보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저렇게 강한데, 마교주가 된 그는 얼마나 강할까? 이 교주에게 맞추려면 자신은 또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

진심으로 기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쇄애애애애액.

다시 두 사람이 땅으로 떨어져 내려 싸웠다.

담장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바깥에서 대치하고 있는 무면객들과 어둠 속의 눈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점차 어둠 속 무인의 숫자가 늘어나서 눈동자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아졌지만 무면객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대치가 길어지자, 몇 사람만 앞에 두고 다들 담장에 걸터앉거나 나뭇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검과 주먹을 주고받으며 무면객들과 어둠 속 눈동자들이 대치한 그사이를 지나갔다가.

검무극이 뒤로 주르륵 밀려 천화루 안까지 밀려갔다.

무면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화루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 검무극이 가슴을 문지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면객들이 이번에는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일격을 가슴에 박아 넣었음에도 투왕은 기뻐하지 않았다. 깊게 베인 그의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니까.

투왕이 다시 성큼성큼 그들 사이를 지나 천화루 안으로 걸어갔다.

무면객들은 묘한 눈빛으로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마주 보며 섰다.

“너! 대체 뭐야?”

아무리 마교 소교주라도, 아무리 무공에 천재라고 해도.

투왕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검무극은 여전히 아프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매만지며 말했다.

“죽어가던 당신을 이 정도로 강하게 만들었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겠군.”

갑자기 그 말을 왜 하나 싶었는데.

“당신을 또 살려 보내고 싶어.”

“무슨 헛소리지?”

아직도 투왕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반쯤 죽여서 보내면, 당신을 또 살리느라 당신네 조직 아무 일도 못 할 것 아니야?”

“이 미친놈이! 처맞고도 헛소리를!”

투왕의 눈에 이글거리는 분노가 폭발하던 그때.

가마에서 암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왕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선 것이다.

“이 말을 여러 번 들었지요. 소교주가 우리 예상보다 훨씬 강했나 봅니다. 실패에 대한 변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사실이었군요.”

그녀의 말에 비사인도, 진하군도 동의했다. 검무극은 만날 때마다 더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암왕은 이 박빙의 싸움에 변화를 주었다.

“슬슬 사냥 시작하시죠.”

개장수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사방에서 난전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쪽은 검무극일 것이다. 투왕은 동료의 목숨 따윈 신경조차 안 쓰겠지만, 검무극은 누구보다 신경 쓸 테니까.

과연 검무극이 모두를 쳐다보았다. 내가 구하러 갈 때까지 버텨! 하는 눈빛이었지만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나왔다.

“어서 죽이고 나 좀 살려줘.”

비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 긴박한 순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저 모습을 배워야 한다.

비사인이 앞에 늘어선 사도십삼랑에게 말했다.

“들었나? 어서 처치하고 소교주를 도우러 가세.”

“네!”

사도십삼랑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들 앞에 선 네 명의 흑의복면인들이 좌우로 거리를 벌리며 흩어졌다. 그들은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특이한 경공술을 발휘했다.

진하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들었나?”

힘찬 물음에 멸마대가 사도십삼랑에 질세라 우렁차게 대답했다.

천괴는 홀로 그들을 상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분명 뭔가 준비된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옥견들이 극악소마를 올려다보며 그르렁거렸다. 그것들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혈앙지가 발출되었다.

지풍이 향한 곳은 지옥견들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빛처럼 빠르게 뻗어나간 혈앙지가 적중한 곳은 바로 개장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개장수의 이마에 구멍이 뚫렸다.

서서히 넘어가는 개장수의 몸이 퍽, 하면서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극악소마는 이 상황을 예상한 눈빛이었다.

“역시.”

이런 야수를 소환하는 사술의 약점은 상대가 그것을 조종하는 이를 노린다는 점이다.

개장수 역시 극악소마가 자신을 노린다는 것을 예상했고, 허상을 내세웠던 것이다.

극악소마는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상대하는데 멀리서 이것들을 섬세하게 조종할 수는 없을 터.

극악소마의 시선이 지옥견을 향했다.

그는 저 지옥견 중 한 마리가 되어 숨은 것이다.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에서 새하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위 공기가 무겁고 텁텁해지기 시작했다.

극악소마만의 특별한 마기, 소악심(笑惡心)이 발휘된 것이다.

크아앙!

가까이 있던 지옥견이 흥분해서 극악소마가 서 있는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혈앙지가 그의 몸을 꿰뚫었지만 계속 달려들었다.

목을 물어뜯으려고 달려들던 지옥견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연속해서 내리쳤다.

꽝! 꽝! 꽝!

스스스스.

지옥견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역시 진짜 살아 있는 개가 아니라, 개장수가 만들어낸 사술이었다.

그때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시선이 마주쳤다.

극악소마가 훌쩍 지옥견 한가운데로 뛰어내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개싸움은 끝내주게 합니다!”

사방에서 지옥견들이 일제히 극악소마에게 달려들었다.

극악소마의 싸움이 시작되자 등롱을 든 네 명의 흑의인들이 가마와 연결된 기다란 그림자를 매달고 비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하군과 멸마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천괴를 공격하려던 그 순간.

그들 모두가 그곳에서 사라진 것이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천괴가 만든 진법속으로 모두 들어가 버렸음을.

그렇게 모두가 싸움에 돌입하자 가마에서 암왕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들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소교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자신을 흔들려는 것임을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잘 보셨소. 난 이런 자리에서 친구가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증을 안고 사는 사람이오.”

“그럼 친구를 인질로 삼으면 소교주를 간단히 죽일 수 있겠군요.”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또 그렇지 않소.”

“왜 그렇죠?”

“내가 이기적이거든. 정말 이기적이니까 친구들을 다 살리고 싶어 하지. 나를 위해서. 모두를 다 살린 내가 되고 싶어서.”

“…….”

“그래서 안 통하오. 그게 내 약점임을 너무나 잘 아니까.”

암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차분히 말했다.

“소교주란 사람을 알기가 쉽지 않군요.”

“그럼 이거 하나 가르쳐 주겠소.”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잃지 않아야 할 사람을 잃을까, 그 불안증 때문에 나도 대법을 받았소. 그것도 매일.”

투왕도, 가마 속 암왕도 깜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들 대법만큼이나 내 대법도 만만치 않을 거요.”

“어떤 대법이죠?”

앞서 보여준 실력 때문에라도, 그리고 천마신교 소교주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정말 어떤 대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검무극을 흔들려고 시작한 대화였는데, 오히려 두 사람이 혼란스러워진 상황.

검무극은 말해주지 않고 다시 흑마검을 뽑았다. 회귀 전 삶부터 지금까지 매일 해왔던.

“내 대법 맛은 직접 보시오.”

대법의 이름은 노력이었다.

나와 살면 헛손질도 하게 될 거다.

검무극에게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가지 신념.

네가 나만큼 노력했으면, 그래, 이 승리를 가져가라!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 역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패배해 죽으면 안 될 일이지만, 이런 마음은 검무극에게 여러 의미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아무리 힘든 싸움일지라도 홀가분한 마음과 넘치는 자신감으로 임할 수 있었으니까.

검무극과 다시 격돌하면서 투왕은 검무극의 눈빛이 더욱 맑고 생기가 넘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미친놈이! 이 징글징글한 마교 놈들! 그 온갖 생각 속에 마지막 결론은 이것이었다.

‘오늘 반드시 죽여야 한다!’

지금도 이렇게 강한데, 만약 이 검무극을 내년에 다시 만난다면? 내후년에 만난다면? 삼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고, 오십대가 된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은 마차 속 암왕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스스스스.

마차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투왕의 몸을 따라 막을 이루는가 싶더니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암왕이 그에게 어떤 힘을 불어넣어 줬음을 알 수 있었다.

“소교주, 어디 네 대법을 보여봐라.”

과연 투왕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마치 처음 싸우는 것처럼 그는 생생했다.

그는 기세를 살려 자신의 독문무공을 발휘했다. 사도맹주와 싸울 때 선보였던 바로 연환풍운권이었다.

연환풍운권 제삼식 섬전난무.

슈슈슈슈슈슈슈슈슉!

빛처럼 빠른 수십 개의 주먹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사사사사.

암영보와 명왕보, 그리고 점멸보가 연이어 사용되자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거 같은 공간에 활로가 생겼다.

빗나간 주먹에 땅거죽이 뒤집히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마지막 활로 끝에 투왕이 있었다.

“기다렸다!”

검무극이 반드시 피할 것이라 믿고 예측한 한 수였다. 정확히 검무극이 자신이 예상한 곳으로 빠져나왔고, 그곳에 비장의 한 수를 날렸다.

연환풍운권 제사식 적쇄금령.

투왕의 손바닥에서 쇠사슬 모양의 붉은 강기가 발출되었다.

촤르르르르륵!

쇠사슬을 두르고 있어서였을까? 적쇄금령은 더욱 강력하게 검무극을 휘감았다.

투왕이 망설이지 않고 연환풍운권 제오식 풍운개벽을 날리려던 그 순간!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넌 준비 됐나?”

전방에 투왕과 마차만이 있는 이 각도, 밀어버려도 우리 쪽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을 바로 이 위치.

투왕과의 난전 속에서 검무극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적쇄금령으로 묶이기 전에 이미 발휘된 한 수.

스스스스스스스.

검무극 앞에 나타난 악귀가 빠르게 분열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악귀들.

저들이 어떤 대비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구화마공을 써야 할 때였다.

앞서 장내에서는 우리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멸식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하군과 멸마대가 사라지면서 기회가 생겼다.

지금 서 있는 이 각도에선 비사인이나 무면객들이 없었다. 개 짖는 소리는 반대쪽 저 멀리서 들리고 있었고.

‘투왕은 물론이고 가마까지 다 밀어버린다!’

과연 너희들은 무슨 대비책을 세웠느냐?

콰콰콰콰콰콰콰콰콰!

모든 것을 쓸어버리며 대멸식이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슈우욱!

투왕과 가마 아래에 검은 구멍이 동시에 생기더니, 그대로 구멍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대멸식이 그대로 그 위를 지나갔다. 저 멀리 뒤쪽 벽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다 휩쓸린 그곳에 검은 원이 생기더니 가마가 올라왔다.

다행히 적쇄금령은 풀어졌지만 검무극은 놀란 얼굴로 가마를 응시했다.

스르륵.

가마 문이 열리더니 주렴 사이로 쇠사슬을 감은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마 안에서 투왕이 걸어 나왔다.

검무극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이 사람을 구해간 것도 당신이었군.”

그러자 가마에서 암왕의 대답이 들려왔다.

“맞아요, 암로귀환술은 제 독문절기랍니다.”

앞서 처음에 투왕이 마차에서 내렸을 때, 그녀가 암로귀환술을 언급했다. 그때는 그게 그녀의 무공일 거란 생각은 미처 못했다.

대멸식이 발휘되면 대상은 마기에 짓눌려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하지만 칠 성의 구화마공으로는 암로귀환술이 대상을 구출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예전에는 몸에 걸쳤던 것을 다 두고 사라졌는데, 오늘의 투왕은 주먹과 몸에 쇠사슬은 물론이고 옷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암왕이 가까이에서 암로귀환술을 발휘하니 그때와는 달랐다.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

“자존심이 있지, 비겁하게 싸우다 도망을 가시오?”

검무극이 투왕을 자극했다.

투왕은 이 부분만큼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네 구화마공이야말로 비겁하다.”

조금 전, 대멸식을 직접 마주했던 그였다. 자신을 향해 밀려들던 그 악귀들의 기세가 아직도 생생했다. 과연 그것을 맨몸으로 막아낼 수 있었을까?

“고작 칠 성의 경지요. 한 번 버텨볼 만하지 않겠소?”

“사양하겠다.”

싸움에 미치고 승리에 미치고, 복수에 미친 그였지만, 구화마공만은 사양했다.

바로 그때 검무극이 기습적으로 인멸식을 발휘했다.

사아아악.

순식간에 투왕의 사방에 악귀들이 나타나며 검을 휘둘렀다.

동서남북 네 악귀의 검이 그를 향해 내리쳤다.

쉬이익! 쉬익! 쉬이익! 쉬익!

하지만 상대도 빨랐다. 이번에도 바닥에 검은 구멍이 생기며 그를 빨아들였다.

때문에 네 악귀의 검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검무극은 보았다. 자신을 향한 악귀의 표정이 굳어진 채 사라지는 것을. 자존심이 상했음을 느꼈다.

사라지는 악귀에게 미안함 대신 다른 마음을 눈빛에 담았다.

‘앞으로 나와 살면 헛손질도 많이 하게 될 거다. 그럴 수도 있지. 부끄러워 마라. 네 주인은 이런 데 자존심 걸지 않는다.’

다시 투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가마에서 걸어 나왔다.

“사양하겠다니까.”

“난 계속할 거다. 그 마차에서 자꾸 내리다 보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맞붙겠지. 당신, 싸움만큼은 피하지 않는 승부사잖아? 고작 칠 성이라고!”

암왕이 나서서 격장지계를 막았다.

“어디 한 번 해보세요. 누구의 내공이 빨리 떨어지나 어디 한 번 보죠. 아, 그 전에 당신 친구들은 모두 죽겠지만요.”

그 말에 검무극이 호기로운 기세를 접었다.

“친구들 이야기로 내 불안증 도지게 하지 마시오.”

가마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 말이 옳다. 이렇게 무작정 시간을 끌 수는 없다. 최대한 빨리 없애고 모두를 구해야 한다.

다시 투왕과 맞붙었다. 검은 기운을 흡수한 그는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원래도 박빙이었는데 더 강해졌으니.

챙챙챙챙챙챙!

검과 주먹이 만나 불꽃이 튀던 싸움 속에서, 결국 검무극은 주먹 하나를 놓쳤다.

퍼어어억!

가슴을 적중당한 검무극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담벼락과 나무 위에서 지켜보던 무면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검무극을 향했다.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을 교환하더니.

무면객들이 일제히 뛰어내려 검무극을 빙 둘러 막아섰다. 원래 극악소마의 명령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었는데, 오늘은 예외였다.

투왕이 가소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살기를 내뿜었다.

“싹 다 죽여주마!”

하지만 무면객들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하얀 가면들 사이로 검무극의 얼굴이 모습을 보였다.

“나 괜찮으니 다시 제자리로 올라가 있게. 곧 소마님 오실 거네.”

그러자 마차 안에서 나긋하고 매혹적인 암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극악소마는 절대 제시간에 오지 못할 겁니다.”

무면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무극은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다.

“내기할까? 오나 안 오나?”

* * *

극악소마는 말 그대로 개싸움을 하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마극광폭장에 두 마리의 지옥견이 휩쓸려 사라졌다.

하지만 뒤쪽의 지옥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했다. 그냥 개가 아니었다. 녀석들은 마치 무림의 고수처럼 움직였다.

놈들이 으르릉거리면서 내뿜는 지독한 사기는 기분 나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은 무심하고 차가울 뿐이었다.

슉슉슉!

극악소마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지옥견에게 혈앙지가 연속해서 발출되었다.

슉슉슉!

퍽퍽퍽!

머리통에 구멍이 세 개가 나고서야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연기를 뚫고 또 다른 악마견이 달려들었다.

놈의 턱을 주먹으로 쳐올리며 극악소마가 뛰어올랐다.

다리와 등을 노렸던 악마견들이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날아갔다. 또 다른 악마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극악소마는 허공으로 튀어 오른 놈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내공을 실어 바닥에 내리치자 놈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곳으로 다시 악마견들이 달려들었다.

휘이익, 휘익.

몸을 틀어 달려드는 악마견을 피했다. 다시 반대로 몸을 틀어 피하자 또 다른 악마견이 극악소마 옆을 스쳐 지나갔다.

수십 마리의 악마견이 사방에서 달려드는 상황에서, 보통의 고수라면 시각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도 손발이 어지러워질 상황이었지만, 극악소마의 움직임은 우아할 정도로 차분했다.

극악소마의 신형이 빠르게 몸을 날려 왼쪽에 동떨어져 있던 놈을 노렸다.

슉! 퍽!

이마 중앙에서 약간이라도 빗나가면 한 방에 죽지 않았다. 연이은 혈앙지가 머리통을 꿰뚫자 그제야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놈도 아니었다.

놈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천천히 포위한 채 다가서는 놈들의 눈에서는 시뻘건 살기가 흘러나왔고 몸에서는 암흑 사술 특유의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한 마리, 한 마리 잡아내면서 극악소마는 개장수를 찾아낼 생각만 하고 있었다. 놈을 빨리 죽이면 죽일수록 내공 소모를 줄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놈은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분명 개장수는 이 악마견들 중에 있다. 얼핏 봐선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악마견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분명 개장수는 저들 속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다.

쉬이익.

극악소마가 이번에는 가장 멀리 있는 놈을 노리며 쇄도했다. 이 싸움에서 가장 안전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된 녀석을. 그러자 사방에서 악마견들이 달려들었다.

극악소마가 악마견들을 호신강기로 돌파해서 목표한 놈을 덮쳤다.

마극광폭장에 놈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지만, 남은 악마견들은 그대로였다. 놈은 개장수가 아니었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달려든 악마견이 극악소마의 팔을 물었다.

하지만 송곳니는 박히지 않았다. 극품천잠사를 감아둔 곳을 일부러 내준 것이다.

슉! 퍼엉!

이마 가운데 정확히 혈앙지가 적중하자 팔을 문 악마견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마견들을 피해 극악소마는 천화루 내부로 몸을 날렸다. 안에 들어선 극악소마가 이 층에 있는 한 기방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뚫린 곳에서 싸우는 게 불리했기에 내부로 유인해서 싸우려는 것이다.

하지만 악마견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는 듯, 천화루 앞에 모여서 극악소마를 올려다보았다.

창가에 선 극악소마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악마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악마견 중 하나가 늑대처럼 길게 짖었다. 그러자 다른 악마견들이 모두 함께 짖었다. 극악소마는 알 수 있었다. 처음 짖는 놈을 이용해서 자신을 유인하려는 것임을.

악마견들이 짖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예전에 연무장에서 독왕과 함께 개 짖는 소리를 내던 검무극이 떠올랐다. 어서 검무극을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바로 그때 한 가지 생각이 극악소마를 스쳤다.

극악소마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반원으로 둘러싼 악마견들이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으르릉거렸다.

솨아아아아아아.

극악소마는 다시 소악심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원래 소악심은 존재의 근원적인 폭력성을 깨우는 마기. 소악심에 노출되면 심장이 빨리 뛰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 때 소악심을 발출한 것은 어떤 특별한 목적보다는 싸우기 전 자신의 고유 마기를 드러낸 것이었다. 소악심 때문에 악마견들이 흥분해서 조금 더 유리한 싸움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소악심을 뿜어내는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점차 소악심에 노출된 악마견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악마견이 참지 못하고 극악소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쇄애애애액!

콰아앙!

마극광폭장으로 허공에서 폭사시킨 후에 더욱 소악심을 강하게 발출했다.

극한의 소악심에 악마견들이 미쳐 날뛰었다. 더욱 미쳐서 달려들었고 포악해졌다. 급기야 옆에 있던 악마견을 물어뜯으며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극악소마는 자신에게 달려든 놈을 뒤이어 달려들던 놈에게 내던졌다. 그 와중에도 소악심을 계속 끌어올렸고 극악소마의 눈빛은 악마견들을 향해 있었다.

쏴아아아아아아.

극악소마가 내공을 소모하면서도 이러는 이유는 개장수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검무극과 독왕을 떠올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두 사람처럼, 개장수 역시 형체만 개일뿐 결국은 개 흉내를 내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다는 말은?

극한의 소악심 앞에서 분명 놈은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개와 인간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소악심이 극에 달했을 때, 극악소마의 눈에 한 마리가 들어왔다.

‘저놈이다!’

놈의 반응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것은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쇄애애액.

극악소마가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악마견들이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서며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달려든 악마견들이 극악소마를 덮쳤다.

덮치고 또 덮치고, 필사적으로 막았다. 모든 악마견이 달려들어서 극악소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극악소마가 목표로 했던 악마견의 눈빛은 개의 눈빛이 아니었다.

극악소마의 예감이 정확했던 것이다. 이 악마견이 바로 개장수.

‘호신강기로 버티고 있겠지만, 저 많은 숫자를 감당하지는 못할 거다.’

만족스러운 눈빛을 발하던 바로 그때, 개장수가 흠칫 놀랐다.

쌓여 있는 악마견들 사이로 팔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슈우우욱!

혈앙지가 개장수를 향해 빛처럼 뻗어갔다.

근처에 그를 지키고 있던 몇 마리의 악마견이 일제히 몸을 던졌다. 만에 하나를 대비한 악마견들이었다.

‘어림없다!’

개장수의 눈빛에 의기양양함이 스치던 바로 그 순간.

촤아아아아아악!

혈앙지가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갈라진 혈앙지가 막아선 악마견들을 피해 크게 휘어지더니.

퍽! 퍽! 퍽! 퍽! 퍽!

뒤에 있던 개장수의 얼굴에 모두 적중했다.

잠시 흐르는 정적.

극악소마가 내민 팔 옆에 있던 악마견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펑! 펑! 펑! 펑!

그것을 시작으로 악마견들이 연이어 터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 그곳에 극악소마의 하얀 가면이 웃고 있었다.

연기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개장수는 원래 사람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얼굴에 구멍이 숭숭 뚫린 개장수의 시체 너머로 극악소마가 검무극이 싸우고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제가 갑니다!’

그 가마는 이제 내 거요.

등롱이 흔들릴 때마다 칼날 같은 검기가 밤하늘을 갈랐다.

네 명의 흑의인은 한 손에는 등롱을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들고 싸웠다. 그럼에도 사도십삼랑과 비사인을 감당했다.

쉬이익! 콰앙!

비사인이 몸을 날려 날아든 검기를 피했다. 뒤에 있던 석등이 잘려 나가며 부서져 내렸다.

사사사사사삭!

비사인을 향해 연속해서 검기가 쏟아졌다.

날아든 검기를 막은 것은 일랑과 이랑, 삼랑이었다.

펑! 퍼엉! 퍼엉!

검기와 검기가 충돌하며 허공에서 해소되었다.

다시 쏟아지는 검기는 또 다른 사도십삼랑이 교대하듯 자리를 바꾸며 막았다.

놈들은 집요하게 비사인만 노렸고, 사도십삼랑은 완벽한 호흡으로 날아드는 공격을 막았다.

사대 십사의 싸움. 이 기울어진 싸움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놈들의 내공 때문이었다.

놈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쉬지 않고 검기를 쏟아붓고 있었다.

비사인은 처음에는 이 싸움이 금방 끝나리라 예상했다. 저렇게 내공을 마구잡이로 썼다간 결국 금방 단전이 비어버릴 테니까.

하지만 놈들의 내공은 마르지 않았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건 공격만이 아니었다. 사도십삼랑이 반격을 가하면, 네 흑의인은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검기를 피했다.

그들의 발은 살짝 바닥에서 떠 있었기에 날아다니고 있다는 말이 정확했다. 빙판을 미끄러지는 듯한 그들의 경신술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롱에서 퍼져 나오는 검고 푸른 빛은 사람의 마음뿐만 아니라 움직임마저 더디게 가라앉히는 암흑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뒤로!”

비사인의 명령에 사도십삼랑이 다시 삼 장을 물러났다.

얼핏 봐선 놈들의 기세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비사인의 의도적인 후퇴였다.

비사인은 싸우면서 한 가지 사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놈들은 정상적인 무인이 아니다. 이들이 이런 놀라운 움직임을 보이고, 끝없이 검기를 쏟아낼 수 있는 이유는 가마와 연결된 저 그림자 같은 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더 길어지나 보자!’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비사인은 자꾸 뒤로 물러나고 있었던 거였다.

놀랍게도 천화루를 완전히 벗어나서 싸우는데도 저 줄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어쨌든 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쁠 건 없었다. 길어진다면 자를 기회는 늘어날 테고, 아무래도 저들에게 전해지는 내공도 줄면 줄지 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라는 듯 네 흑의인들에게서 더욱 거칠고 강력한 검기가 휘몰아쳤다.

다행히 사도십삼랑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 상대가 상식을 넘어선 공격을 해오고 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일랑! 저걸 끊어야 해!

―제 생각도 같습니다.

―내가 제일 왼쪽 놈 것을 끊을 거네! 나머지 셋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네, 소맹주님!

피하기만 하던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역습을 가했다.

쉭! 쉭! 쉭! 쉭! 쉭! 쉭!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검기를 날려며 엄호하는 순간, 비사인은 땅을 박차며 제일 왼쪽 흑의인에게 쇄도했다.

비사인은 흑의인이 날린 검기를 보법으로 피하며 검을 내질렀다.

흑의인이 빠르게 미끄러지며 피했다.

그를 지나친 비사인이 몸을 틀며 검을 내리쳤다. 목표는 흑의인이 아니라 그의 몸에 연결된 검은 줄이었다.

그때, 검은 줄이 출렁이며 공격을 피했다.

비사인이 집요하게 줄을 뒤쫓았고, 흑의인은 매섭게 비사인에게 공격을 가했다.

다른 흑의인들은 그를 돕지 못했다. 사도십삼랑이 지금껏 참았던 공격을 그들에게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아악!

비사인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대신 부상을 각오하면서까지 몸을 날린 그 대가는 확실히 챙겼다.

촤아아악!

왼쪽 흑의인의 줄이 끊어졌다. 마치 잘린 뱀처럼 줄이 요동쳤다. 잘린 줄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 속에서 비사인과 흑의인이 교차했다.

쉬이이익!

푸아아악!

연기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

바로 흑의인의 가슴에서 뿜어진 것이었다. 줄이 끊어진 흑의인은 비사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흑의인이 주저앉으며 절명하자 들고 있던 등롱이 꺼졌다.

동료를 잃은 남은 세 명의 흑의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들이 들고 있던 등롱에서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쏴아아아아아악!

암흑 사술이 만들어낸 사기가 등롱에서 뻗어나가며 그들을 덮쳤다.

일랑이 소리쳤다.

“멸귀진(滅鬼陣)을 펼쳐라!”

그러자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비사인을 중심으로 모여들더니 검진을 펼쳤다.

완성된 검진에서 펼쳐진 강력한 기운이 날아든 사기를 막아냈다.

뻗어나간 사악한 기운이 막히자 등롱의 귀곡성은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비사인은 놈들의 공격이 막히던 이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사인과 일랑, 이랑, 삼랑, 네 사람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일랑은 땅을 박차고 쇄도해 두 번째 흑의인을 직접 노렸다.

이랑은 검은 줄을 노렸고 삼랑은 흑의인이 피할 곳을 예상해서 노렸다.

삼랑은 피했지만, 그가 피한 곳에는 비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걱! 푸아아악!

머리통이 떨어진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피를 뒤집어쓴 그들이 다시 몸을 날렸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그들은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았다. 그들에겐 무한한 내공을 이기는 세월이 있었다.

그들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았다.

“십삼비검(十三飛劍)!”

일랑의 외침에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검기를 날렸다.

열세 가닥의 검기가 빛처럼 빠르게 세 번째 흑의인을 향해 날아갔다.

사사사사삭

흑의인은 곡예 하듯 검기 사이를 빠져나갔다. 정말 믿을 수 없는 현란한 움직임이었는데.

바로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다, 이 새끼야!”

세 번째 흑의인이 돌아봤을 때, 어느새 일랑이 그와 연결된 줄을 내리치고 있었다.

파파파파!

잘린 줄이 피처럼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미친 듯이 요동쳤다.

흑의인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눈동자에 날아오는 열두 개의 검기가 보였다. 이제는 못 피했다.

푹푹푹푹푹푹푹푹푹!

검기가 일제히 그의 몸을 꿰뚫자, 끊어진 줄이 마지막으로 요동쳤고 이내 그의 손에 들린 등롱의 불도 꺼졌다.

네 번째 흑의인은 그를 돕지 못했다.

그를 막으러 쇄도해 온 비사인과 내공 대결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손바닥이 허공에서 맞붙어 있었다.

쏴아아아아악!

마지막 흑의인과 가마와 이어져 있던 검은 줄이 부풀어 올랐다.

엄청난 내공이 흑의인의 몸으로 들어와서 비사인을 밀어붙였다.

비사인이 이를 악물고 버텼다. 상대의 내공은 무지막지했다.

비사인이 일랑을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일랑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리쳐 흑의인의 팔을 잘라버렸다.

“으아악!”

잘린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사도십삼랑이 달려들어 그를 난도질했다.

일랑이 바닥에 널린 시체들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새끼들이! 우릴 뭘로 보고.”

그렇게 마지막 등롱까지 모두 꺼졌다.

비사인이 모두에게 물었다.

“괜찮나?”

“괜찮습니다.”

검기에 다친 십일랑의 어깨에 뼈가 보였다.

“조금 긁혔습니다.”

“그게 조금 긁힌 거면, 나는 말도 못 꺼내겠군.”

비사인의 말에 십일랑이 멋쩍게 웃었다.

일랑이 비사인의 어깨를 치료했고, 십이랑이 십일랑의 어깨를 치료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검을 쓰는 쪽이 아니었다.

비사인이 모두에게 말했다.

“줄이 이어져 있던 가마에 비밀이 있어.”

아무리 암흑사술을 발휘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사용한 내공은 진짜 내공이었다.

가마 안에 있는 누군가 이렇게 많은 내공을 보냈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네 흑의인은 그야말로 내공을 무한정 쏟아부으며 공격했으니까. 이건 한 사람이 내보낼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쪽 가마는 지금 검무극과 싸우고 있지 않은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비사인이 결정을 내렸다.

“우린 소교주를 도우러 가지 않는다.”

비사인이 어둠 속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저 가마의 비밀은 우리가 찾아낸다.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다.”

그 뒤를 사도십삼랑이 조용히 뒤따랐다.

* * *

“내기에 그 가마를 거시오.”

검무극의 말에 가마 속에서 암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기는 서로 걸어야 할 것이 있을 때 성립하는 거잖아요?”

“맞소.”

“소교주는 곧 죽을 텐데 뭘 걸 수 있죠?”

“한 대 맞았다고 왜 그러시오? 싸우다 보면 한 대쯤 맞을 수도 있는 거지.”

여전히 검무극은 여유로웠다.

“나는 내 입을 걸겠소. 어떻소? 요 입을 가지고 다니면 심심할 일은 없을 거요.”

“대신 화병이 생기겠지요.”

여유에는 여유로. 가마에서 나직한 웃음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교주.”

잠시 사이를 두고 암왕이 덧붙여 말했다.

“당신은 졌어요. 오늘 아무도 살리지 못할 거예요. 당신조차도.”

그 말이 끝나자 투왕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검무극이 자신을 막아서 줬던 무면객들에게 말했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게.”

하지만 무면객들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교주가 불리한 상황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 모습에 분노한 사람은 투왕이었다.

“기분 나쁜 것들!”

보는 것도 기분 나쁜데 자신을 막아서고 있었으니까.

“내가 싹 다 보내주마!”

투왕이 무면객과 검무극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

극한의 내공을 실은 연환풍운권 섬전난무를 발출한 것이다.

수십 개의 주먹이 무면객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무극 앞을 막아섰던 무면객들은 피하지 않고 일제히 악영지를 발출했다.

슉슉슉슉슉슉슉!

하지만 그들의 악영지로 투왕의 섬전난무를 파훼할 수는 없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팍.

지풍을 부수며 주먹 모양의 강기가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끝까지 무면객들은 피하지 않았다. 몸으로라도 막아서 소교주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가면이 웃는 모습이었기에 이 모습은 정말 미친놈처럼 보였다.

쾅! 콰앙! 쾅! 콰앙!

귀를 찢는 폭음이 이어지며 지축이 흔들렸다.

무면객들이 놀란 눈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자신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야 할 상황이었는데.

스읏! 스스슷! 스스! 스스스슷!

날아든 주먹 모양의 강기가 눈앞에서 녹고 있었다. 정말 얼음처럼 녹고 있었다.

그들 앞에 뭔가가 세워져 있었다.

그 무서운 공격을 막아선 하나의 벽이.

바로 구화마공의 대마벽이었다.

무면객들의 눈앞에서 섬전난무가 발휘한 모든 주먹이 녹았다.

“이 징글징글한 구화마공!”

가라앉은 투왕의 말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나는 당신들하고 내기도 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당신들은 자꾸 벽을 세우게 하네.”

무면객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고개 숙여 구화마공에 대한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검무극이 그들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날 지켜줘서 고맙네.”

무면객들은 감동했다. 소교주 자신은 얻어터지면서도 쓰지 않았던 대마벽을 자신들을 위해 펼쳐준 것이다. 목숨을 구한 무공이 구화마공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감격했다.

이제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만나러 악인곡을 찾으면 이들의 미소는 더욱 환해질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날 믿고 올라가게.”

무면객들이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려서 나무와 담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 앞에 대치하고 있던 어둠 속의 눈동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투왕과 암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마벽의 위력에 놀란 모습이었다.

앞서 대멸식도, 인멸식도 암로귀환술을 써야만 피할 수 있었는데. 이 대마벽을 보자 그 위용에 압도당했다.

가마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암왕의 목소리.

“왜 구화마공을 고금제일마공이라 부르는지 알겠군요.”

“겁내지 마시오. 이제 고작 칠 성이오. 한 판 제대로 붙어봅시다.”

검무극이 다시 투왕을 자극했다. 구화마공과 맞붙어 주면 좋겠는데.

바로 그때 가마에서 길게 늘어져 있던 줄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다른 줄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무극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나쁜 소식 같소.”

검무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자 암왕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소교주에게도 나쁜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가마 안에서 알 수 없는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주위 공기가 달라졌다.

나뭇가지에 쪼그리고 있던 무면객들이 일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생명을 부여받은 어둠이 먹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눈에 보이는 어둠이었고, 어둠 속의 어둠이었다.

검무극도 무면객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가마에서는 귀를 간지럽히는 나직한 주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 있던 눈동자들이 일제히 눈을 크게 뜨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모여든 어둠이 가마 위 허공에서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어둠이지만 투명했고, 어둠이지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어둠이 만들어낸 것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어둠 속에서 화공의 붓끝 같은 섬세한 빛이 흐르면서 그녀의 이목구비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인은 허공에 떠 있었다.

무면객들도, 어둠 속의 눈동자들도 모두 어둠이 만들어낸 여인을 쳐다보았다.

어둠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모든 생명은 암흑으로 돌아가리라!”

암왕의 목소리가 어둠으로 만들어진 여인에게서 나왔다. 앞서의 목소리가 나긋하고 매혹적이었다면 지금의 목소리는 깊고 신비로웠다.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아아아아아아.

여인이 투왕의 몸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투왕과 어둠이 하나로 합쳐졌다.

투왕의 몸에 투명한 그림자처럼 여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투왕이 손을 드니 어둠의 여인도 똑같이 손을 들었다. 둘이지만 하나였고, 하나였지만 둘이었다.

바로 암왕의 독문절기 암흑강림술(暗黑降臨術)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강해져서 돌아온 투왕에게 암왕까지 강림한 것이다. 앞서 투왕이 검은 기운을 흡수해서 강해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기세를 드러냈다.

“혼자 싸워도 박빙이었는데, 어쩌죠? 우린 둘이서 싸울 건데요?”

투왕과 겹쳐진 채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니, 그 모습은 참으로 괴이했다.

바로 그때 어둠을 뚫고 날아온 굵직한 한마디.

“우리도 둘이다.”

누군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밤하늘을 가로질러 검무극 옆에 내려섰다.

어둠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하얀 가면, 그는 바로 극악소마였다.

“오셨습니까?”

“제가 늦지는 않았습니까?”

“딱 맞춰 오셨습니다.”

극악소마의 등장에 무면객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무면객들의 눈빛에서 기쁨과 더없이 깊은 충성심이 느껴졌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바라보았다. 눈구멍 속 두 눈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소마님께서 제시간에 못 온다고 해서 내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사람 무는 개를 싫어합니다.”

극악소마의 말에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소마와는 항상 어려운 싸움을 해왔다. 그리고 오늘 이 싸움은 그와 해왔던 어떤 싸움보다 어려울 것임을 예감했다.

그럼에도 전혀 겁나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나의 마존과 함께 싸울 거니까.

“내기는 내가 이겼소. 그 가마는 이제 내 거요.”

투왕과 합쳐진 채 암왕이 나직하게 말했다.

“오늘 밤 바뀌는 건 없을 거예요.”

투왕의 매서운 얼굴 위에서 깊고 아름다운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봅시다. 내가 뭔가를 바꾸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

검무극은 극악소마와 나란히 걸어 나갔다.

가면서 흑마검을 뽑아서 늘어뜨리자 극악소마가 손가락으로 검날을 가볍게 튕겼다.

맑은 쇳소리가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도.

진하령과 여정은 천화루의 밀실에 숨어 있었다.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그 혼란을 틈타 두 사람은 천화루의 밀실에 숨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지고 깨지고 박살 나고.

바깥 상황이 너무나 궁금하고 걱정되었지만, 진하령은 꼼짝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렇게 숨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라버니를 도와 싸우며 여정을 지킬 생각을 했을 거다.

다른 어떤 것보다 명예가 중요했으니까. 또한, 나중에 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오라버니의 시체를 보게 될까 봐 두려워했을 테니까. 혼자 살아남는 그 공포를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진하령은 그때와 달라졌다. 명예보단 약속이 중요했고, 지켜야 할 사람이 중요했다. 오라버니에 대한 믿음도 비교할 수 없이 커졌고.

이 모든 변화는 검무극과의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마교 소교주도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내가 뭐라고.

이곳에 숨어 있었다는 말을 검무극이 들었을 때의 반응이 예상된다.

―정말 잘했다. 제일 현명한 선택을 했어!

그러면서도 놀리겠지.

―아, 내가 루주님 지켜준다고 할걸! 내가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알아?

그 반응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여튼 당신은 날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는 미친년으로 만드네.’

그때 뒤에서 여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진 소저.”

“네, 루주님.”

진하령이 돌아봤을 때 여정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다. 어쩌면 그녀가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중에 혹시라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미련 없이 저를 포기하세요.”

진하령은 알 수 있었다. 여정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네, 그럴게요.”

너무 쉽게 대답해서였을까? 여정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 사람과 약속했어요. 루주님을 꼭 지켜드리겠다고.”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약속한 사람은 혼자 살아남아도 진 소저를 이해할 겁니다. 아마 누구보다 따뜻하게 진 소저를 위로해 줄 거예요.”

진하령이 내심 생각했다.

‘아뇨, 그 사람은 제게 원망의 말을 내뱉을 거예요. 너 때문에 죽었다고 막말을 퍼부을 거예요. 만정이 떨어지게. 제가 죄책감이 아니라 다른 감정을 품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게 절 위한다고 생각할 사람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검무극임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다. 여정을 꼭 지켜야 하는 이유가.

진하령이 화제를 돌렸다.

“우리 오라버니 잘 싸우고 있나 모르겠네요.”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건 오라버니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만큼 오라버니는 정파 무림에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르시죠?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우직하고 고지식한 사람인지. 그래서 소교주와 친해진 것이 놀라울 정도랍니다.”

“그럼 걱정 안 하셔도 되겠네요.”

“네?”

여정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원래 우직한 사람들이 위기에 강하답니다.”

* * *

그곳은 복잡한 미로였다. 벽은 두꺼운 강철로 되어 있었고 길은 복잡했다.

혈로미로진(血路迷路陣).

한 번 빠지면 결코 살아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절진.

그 절진에서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을 이끄는 사람은 멸마대 무인 정경(鄭慶)이었다.

“이쪽입니다.”

멸마대 무인들은 무공이 강한 건 기본이고, 무공 이외에도 저마다 특기를 지니고 있었다. 독에 대해 잘 아는 이도 있고, 사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도 있으며, 추종술에 특화된 이도 있었다.

정경의 특기는 진법 파훼였다.

멸마대의 특성상 사공을 발휘하거나 진법을 이용하는 적을 만나곤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다 같이 진법 파훼 훈련도 하고 연구도 했다.

하지만 앞장서 걸어가는 정경은 긴장하고 있었다.

진법에 관한 책이라면 읽고 또 읽고. 다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혈로미로진은 정말 위험한 진법이었으니까.

혈로미로진은 단순히 길을 잃게만 하는 진법이 아니다.

길을 잘못 들어 생문이 아니라 사문을 선택할 때마다 무서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평소 아무리 연구하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진법은 끝없이 발전하고 변화했다. 파훼하는 쪽이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서도 정확한 계산은 물론이고 많은 응용과 새로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

자신의 손에 모두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정경은 두렵고도 흥분되었다.

“이쪽 문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사방에 동경이 가득한 방이었다. 수십 개의 작은 거울이 온통 붙어 있어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서자.

스르르륵.

정면 단상에 있던 장치가 발동했다.

기울어져 있던 양팔저울의 한쪽으로 모래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정경이 소리쳤다.

“저 저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생문을 찾아야 합니다! 동경 중에 하나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 짧은 시간에 저 많은 거울 중에 어떤 것이 생문인지 어떻게 알아내란 말인가? 정경 역시 이 방식은 처음 접하는 것이었기에 당황했다.

멸마대 무인들이 달려가서 거울을 만져보고 뭔가 다른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저울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저울이 바닥에 닿기 직전.

진하군이 몸을 날려서 거울 하나를 힘껏 밀었다.

“여기다!”

그가 거울을 확 미는 순간!

모두들 긴장한 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했다. 독연이 뿜어질지 암기가 쏟아질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내려오던 모래가 멈추면서 저울이 다시 원래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하군이 선택한 거울이 생문이었던 것이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나갈 문이 열렸다.

다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저 동경인지 아셨습니까?”

정경의 물음에 진하군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다.

“그냥 찍었네.”

“네?”

다들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멸마대의 광효(廣嚆)가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좋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게 운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진하군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마지막 순간 진하군은 그 거울에 자신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다른 모든 거울을 확인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골랐으니 찍은 거나 다름없지만, 그 본능적인 선택이 옳았다.

거울방을 나온 그들이 계속 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차근차근 미로를 빠져나가다가 결국 정경이 실수로 사문을 선택했다. 정확히 추측하고 계산해서 선택했는데, 그 과정에 함정이 있었다.

바닥이 비탈길처럼 기울어졌다.

쿠루루루룽.

저 위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뭔가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하십시오!”

정경의 외침에 모두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는데.

순간 진하군이 뭔가가 굴러오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속도가 더 붙기 전에 막는다!”

이것이 순간 그가 생각한 이번 함정의 파훼법이었다.

멸마대 무인들도 그를 뒤따랐다.

구르르르릉!

굴러오는 것은 거대한 쇠공이었다.

진하군의 선택은 옳았다. 만약 그냥 뒀으면 걷잡을 수 없을 속도가 되어 자신들을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꽈아악!

진하군이 등으로 쇠공을 막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뒤따라온 멸마대 무인들이 함께 붙었다.

쿠르르르르릉.

달라붙은 이들이 온 힘을 다해 내공을 끌어올리자 이윽고 속도가 줄어들며 거대한 쇠공이 멈췄다.

그러자 기울어졌던 바닥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우!”

진하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수하들의 물음에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네.”

“대주님의 선택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이 함정에 다 죽진 않겠지만, 여럿이 다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다.

정말 그 순간에 반대로 달려갈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랬기에 멸마대 수하들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진하군을 바라보았다. 협의도 강하고 무공도 고강했지만, 이런 임기응변과 지혜를 발휘하는 모습은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진하군은 위기에 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모두를 살려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자 이 책임감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정경이 와서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네.”

그냥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을 것이다.

“갈수록 생문을 찾는 게 어려워지겠지. 실수해도 괜찮아. 자네 뒤에 파훼법들이 저렇게나 많이 있지 않나?”

정경이 돌아보자 동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실수해도 다 같이 뚫고 가자는 말이었다.

진하군이 모두에게 말했다.

“뚫고 나가서 이걸 만든 놈에게 우리가 누군지 말해줘야지.”

“네!”

멸마대 무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은 다시 다음 생사의 선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투왕은 눈을 감았다.

그냥 햇빛이 아니었다. 온 세상을 말려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햇빛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으로 해를 가렸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투왕은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바닥이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이었다.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건 정말 해였다. 그것도 구름 한 점 없는 한낮의 뜨거운 태양.

“이게 뭐냐?”

저 앞에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 있었다.

둘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면서 극악소마가 검무극의 검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던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이 이렇게 바뀌었다.

어리둥절한 그와는 달리 암왕은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시공이환술이군요.”

암왕은 한눈에 시공이환술을 알아보았다. 투왕과 겹쳐져 일렁이는 그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풍천교주의 독문비술이죠. 놀랍군요. 그 욕심 많은 늙은이가 이걸 소교주에게 전수해 주다니.”

암왕이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시공이환술을 펼칠 줄 알았다면 왜 처음부터 발휘하지 않았지요?”

그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곳에 친구들이 함께 싸우고 있었으니까.”

투왕만 끌고 들어오면 암왕이 비사인이나 진하군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암왕까지 데리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시공이환술 속으로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데려올 수는 있지만, 가마에 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으니까.

설령 데려올 수 있다 하더라도 선택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암왕까지 상대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바깥에 친구들이나 극악소마의 싸움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자신이 버티다가 마지막에 한 번 쓰려고 했었는데.

앞서 가마와 이어진 줄이 끊어지는 걸 봤기에 비사인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했다.

극악소마도 무사했고, 진하군은 어차피 진법으로 들어간 상태.

마지막으로 암왕이 투왕의 몸에 강림한 순간.

이제 시공이환술을 쓸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암흑 사술의 절대고수. 절대 방심해선 안 될 일이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암왕의 감정은 놀람과 감탄에 가까웠지, 동요나 불안이 아니었다.

“친구 때문이라.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증, 그거 사실이었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불안은 나의 힘이기도 하오.”

듣고 있던 투왕이 말했다.

“밤이 아니라고 널 못 죽일 거 같으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을까? 암천야신공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텐데.”

과연 투왕의 눈동자에 있었던 흰 테두리는 너무 가늘어져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친 이상, 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정말 그랬다면 애초에 낮에 쳐들어왔겠지. 쥐새끼들처럼 야심한 밤에 이 난리를 떨지는 않았겠지.”

쥐새끼란 말에 투왕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흥분한 투왕을 암왕이 말렸다.

“참으세요. 소교주와 말을 할수록 그대에겐 손해니까요.”

그리고는 암왕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소교주 말이 맞아요, 여기서 싸우면 우린 집니다.”

그녀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투왕은 상처 입은 야수처럼 무섭게 노려봤지만, 그 위에 겹쳐져 있는 암왕은 차분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은 닮아 있었다.

그랬기에 아직 싸워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얼마나 환상적인 호흡으로 싸울지는.

“그걸 알면서 당신은 왜 이리 여유롭소?”

검무극의 물음에 암왕이 대답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둠도 함께 하는 법이니까요.”

투왕의 몸에서 일렁이는 암왕이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검무극이 만든 세상, 절대 어두워질 수 없는 곳인데.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달이 해를 가리고 있었다.

일식(日蝕)이었다.

우리 마존께서 감상적인 면이.

주위 풍경이 빛을 잃어갔다.

달이 완전히 태양을 가리자 얇은 고리가 빛나더니, 이내 그조차 사라졌다.

그렇게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검무극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들이 있는 공간이 다른 장소로 바뀌었다.

휘이이잉.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은 그림자 하나 질 곳 없는 새외의 사막이었다. 태양이 그 어디보다 뜨겁게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했는데.

하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이 공간에서도 일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소용없어요, 소교주. 이미 일식이 시작된 이상, 내 어둠을 없앨 수 없어요.”

시간이 지나도 일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 암왕이 끝내지 않는 한.

검무극은 말없이 완전히 가려진 해를 올려다보았다. 해에 달이 박혀 버린 것만 같았다. 역시 암왕의 암흑사술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나를 이곳에 불러들였으니, 이 정도 각오는 했어야지요.”

어둠이 내리면서 투왕의 눈동자의 하얀 테두리는 다시 굵어져 있었다. 암천야신공이 다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주도권은 투왕과 암왕에게 넘어갔다.

그때 극악소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각오는 너희가 했어야지.”

천마신교 소교주를 건드릴 때, 제대로 각오했느냐는 의미였다.

투왕과 암왕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암왕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확실히 그대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요.”

개장수를 이렇게 빨리 없앨 줄은 몰랐으니까.

그랬기에 암왕은 극악소마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당신은 소교주 때문에 죽는 첫 번째 마존이 될 거예요.”

극악소마의 두 눈이 웃었다. 소교주를 위해 죽는다?

“내 죽음의 이유로는 최고군.”

극악소마의 말에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한 번 나 때문에 죽었는데, 또 죽게 하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검무극은 한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당신의 그 암로귀환술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나 보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해를 가릴 필요 없이 이곳을 빠져나갔을 테니까.”

암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의 침묵이었다. 비록 이곳에서 어둠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시공이환술은 허락 없이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터엉! 텅!

그때 투왕이 양 주먹을 힘차게 마주치며 쇳소리를 냈다. 그의 두 눈 가득 살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나갈 수 있어도 나갈 생각 없다.”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눈빛이다.

검무극은 그의 기세를 단번에 꺾었다.

“그건 당신 의지요, 아니면 당신을 지배하는 저 여인 의지요?”

투왕의 얼굴이 꿈틀했다.

“당연히 나의 의지다!”

투왕이 주먹을 날리며 쇄도했다. 그는 번쩍하는 순간 어느새 검무극의 코앞에서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후아아앙!

검무극의 얼굴을 노리고 날아든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위해 날렸던 검이 방향을 틀었다.

투왕의 두 번째 주먹이 너무 빨라서 공격을 포기하고 검으로 쳐낸 것이다.

연속된 투왕의 공격이 허공을 갈랐다.

진각을 내리치며 날린 강력한 주먹에 주위의 모래가 확 피어올랐다.

그렇게 모두의 시야가 가려지던 그 순간.

슈우욱!

극악소마의 첫 번째 혈앙지가 발출되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투왕의 표정이 찌푸려져 있었다.

주르륵.

그의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혈앙지는 검무극의 어깨를 스치고 날아와 자신의 어깨에 적중했다.

정말 생각지 못한 순간에,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날아든 공격이었다.

소교주를 지키려는 극악소마인데, 오히려 시야가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위험하게 공격한다? 정말 허를 찌르는 공격이었다.

그때 어깨의 상처에 검은 연기가 맺혔다. 그러자 흘러내리던 피가 그쳤다.

들려오는 암왕의 목소리.

“우리 마존께서는 소교주의 안위는 걱정되지 않나 봅니다.”

극악소마의 과감한 공격을 막으려는 말이었는데 오히려 검무극은 그녀의 말을 이용했다.

“그대야말로 함께 하는 분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것 같소만.”

“무슨 뜻이지요?”

“누군가의 몸에 강림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큰 악영향을 미칠 텐데. 암흑의 기운으로 치료까지 하다니요? 아예 저 사람을 쓰고 버릴 도구로만 여기는 거 아니오?”

사실 정확히는 모르는 내용이었다. 암왕의 강림이 그 당사자에게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는. 또한 저런 치료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저런 모습이 어찌 사람에게 좋겠는가? 그래서 넘겨짚어서 말한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싸움의 주도권이 저쪽으로 넘어갔으니 어떻게든 흔들어야 했으니까.

“도구로 쓰기에는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살려냈지요.”

암왕이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이 값비싼 싸움에서 이기면 그만한 값은 하는 셈이니까. 지금까지 당신들 방해한 날 죽이는 역할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잠시 사이를 두고 암왕이 말했다.

“역시. 소교주를 말로 상대할 수는 없군요.”

“그건 맞는 말이오. 한데 적어도 지금 이 상황은 말싸움에서 진 게 아니라, 진실 싸움에서 진 거 아니겠소?”

검무극은 암왕에게 맞췄던 시선을 그림자 너머 투왕의 눈동자에 맞췄다.

“물론 당신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거 같지만.”

투왕은 무서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이 이간질이고, 자신을 흔들려는 것임을 그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이간질은 알면서도 당하는 게 이간질이다. 일단 들으면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함부터 시작되는 게 이간질이니까.

“널 죽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투왕이 다시 몸을 날렸다. 그의 분노까지 실린, 앞서보다 더 강력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챙챙챙챙챙!

검과 쇠사슬이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그 불꽃은 아름다운 장관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암왕이 강림한 투왕은 정말 강했다. 정말이지 흑마검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투왕의 주먹에 격돌할 때마다 들었으니까.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검무극이 암영보로 공격을 빠져나왔다.

투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슉! 슉! 슉!

적시에 날아든 혈앙지가 그의 어깨에 적중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린 투왕이 모래를 박차고 날아 극악소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너부터 죽여주마!”

쉭! 쉭! 쉭!

혈앙지가 허공을 갈랐다.

투왕은 몸을 비틀어 혈앙지를 피했다. 발출한 세 개의 혈앙지 중 하나가 몸에 적중했지만, 몸에 구멍은 뚫리지 않았다. 암왕의 암흑 기운이 호신강기가 되어 투왕을 지켜주었다.

투왕의 주먹이 극악소마의 가슴에 적중하려던 그때.

극악소마 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점멸보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검무극이 그의 팔을 자르려 내리친 것이다.

공격을 멈추고 검이 주먹 위를 내리치게 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극악소마를 공격했으면 팔이 잘렸을 상황이었다.

쉬이익!

검무극의 검이 그의 팔을 연속해서 찍었다.

챙! 채앵! 챙!

투왕이 팔을 당기며 주먹으로 공격을 막았다.

마지막 한 수는 어깨나 목을 노릴 줄 알았는데.

서걱! 파악!

생각지 못한 궤적으로 날아든 검무극의 검이 투왕의 허리를 베었다.

파아악!

투왕의 허리에서 피가 튀었다. 분명 제대로 들어갔는데.

오히려 투왕이 주먹을 날리며 빠르게 반격했다.

후우우웅!

첫 번째 주먹은 피했고.

두 번째 주먹이 날아드는 것을 이번에는 연속해서 발출된 혈앙지가 막았다.

뒤로 물러난 투왕이 극악소마를 욕했다.

“비겁한 새끼!”

극악소마를 모욕하는 걸 그냥 둘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그딴 말은 네 허리에게나 해. 비겁한 허리 새끼!”

허리에 베인 상처에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었다. 다시 암흑 기운이 그의 상처를 막아준 것이다.

“당신 이러다가 큰일 나. 이 싸움에서 이긴들 그 부작용은 어쩌려고? 나 소교주와 극악소마 죽였다, 유언으로 남기시려고?”

검무극의 말에 투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알아. 당신이 그런 사람이란 거를. 한데 그것과 어리석은 놈으로 죽는 건 다른 문제지. 왜 당신 목숨이냐고? 저 여자가 당신 몸에 붙었으면 자기 목숨도 공평하게 내놓아야지. 왜 당신 목숨만 줄여가며 싸우느냐고.”

그러자 암왕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세요.”

검무극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숨을 헐떡여가며 팔이 떨어질 뻔해가면서 싸우는데, 저 차분한 목소리는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결국 참지 못한 투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닥쳐라!”

자신을 위해주는 척 말했지만 결국 너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는 조롱이었으니까. 원래라면 암왕이 감정을 드러내길 바랐는데, 이번에도 투왕이 빨랐다.

그가 분노하던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의 검이 벼락처럼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이 한 수를 쓰기 위해 그들을 도발했던 거다.

어둠에 어둠이 내렸다.

그 어둠을 가르는 하나의 새하얀 검선.

구화마공 제사식 암흑일섬.

카아앙!

귀를 찢는 듯한 금속음과 함께 투왕의 모습이 보였다.

목 앞으로 내민 투왕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찌이익.

그의 주먹에 두른 쇠사슬에 금이 갔다. 하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금 간 사이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놀랍게도 암흑일섬을 막아낸 것이다. 아직 칠 성의 경지로는 투왕과 암왕의 힘이 합쳐진 그를 벨 수 없었다.

“나를 상대로 암흑을 이용한 초식을 사용하다니요?”

암흑일섬을 발휘하는 순간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졌기 때문에.

“혹시 압니까? 방심하다가 싹둑 목이 잘려줄지?”

한 번은 써서 확인해 봐야 했다. 그리고 결과는 역시 어둠은 그들의 편임을 확인했다.

여유로운 암왕에 비해 투왕의 살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막기는 했지만 만약 암왕이 자신에게 강림하지 않았다면, 저 한 수에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는 구화마공을 쓸 기회가 없을 거다!”

투왕이 매섭게 검무극을 몰아붙였다.

그의 주먹에서 권풍이 휘몰아쳤다. 모래가 그들 주위를 회오리쳤다.

투왕은 쉴 새 없이 검무극에게 공격을 날렸다. 그는 내공을 아끼지 않았다. 극한의 내공을 실은 공격이 이어지니 검무극은 맞서지 못하고 정신없이 피했다.

이 싸움에서 검무극은 한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냥 쏟아붓는 공격이 아니다. 암왕이 강림한 투왕의 공격이었다. 그것도 거의 무제한의 내공으로.

마치 얼음이 꽝꽝 얼어붙은 호수의 수면 아래에서 싸우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을 때마다, 얼음에 숨구멍이 뚫렸다.

혈앙지에 투왕이 멈칫하는 순간이 검무극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을 스치며 날아든 혈앙지를 투왕이 몸을 틀어서 피했다. 이번에는 안 피할 수가 없었다. 혈앙지가 정확히 그의 눈을 노리고 날아온 것이다. 검무극이 조금만 머리를 옆으로 돌렸어도 뒤통수가 뚫렸을 상황이었다.

투왕은 미친놈이라 욕했지만, 이 공격은 오직 믿음에서 비롯한 공격이었다.

극악소마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또 검무극을 믿었다. 그 믿음이 없으면 조금 전처럼 아슬아슬하게 혈앙지를 날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과감하게 공격하지 않으면 투왕과 암왕을 상대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기에 극악소마는 공격을 남발하지 않았다. 내공을 아껴가며 정확히 꼭 필요한 순간에만 공격을 가했다.

만약 실력이 오르기 전이었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은 공격을 했을 것이다. 그때라면 이렇게 정교한 혈앙지를 발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때마다 투왕은 극악소마를 노렸지만, 그건 검무극이 허용하지 않았다.

함께 쇄도하며 검을 내지르던 그때.

흑마검이 그의 몸에 박혔다. 앞서 보여준 실력이라면 이 공격에 찔릴 투왕이 아니었는데.

화아아악!

검을 뽑는 순간 투왕의 배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검과 함께 딸려 나오며 그것이 보자기처럼 검무극을 덮었다.

순간 검무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고래뱃속 같은 곳에 갇힌 것이다.

그때 암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흑장막(暗黑帳幕)이에요.”

그때까지 기회만 노리던 암왕이 드디어 비장의 한 수를 발휘한 것이다.

“내가 풀어주기 전까지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요. 이곳에서 나왔을 때는 극악소마의 시체를 보게 될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극악소마는 어둠의 장막을 찢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꽃봉오리처럼 핀 검은 장막은 혈앙지에도, 마극광폭장에도 찢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투왕이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승기를 잡은 표정이었다.

“내가 풀어주기 전에는 절대 찢을 수 없답니다.”

암왕의 목소리에 여유가 담겼다. 극악소마를 죽이면 자연스럽게 검무극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소교주님을 두고 절대란 말을 함부로 쓰는군.”

투왕이 극악소마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실린 강력한 기운에 극악소마는 주르륵 뒤로 밀렸다. 등 뒤에 암흑장막에 부딪히며 멈췄다.

극악소마는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걸 직감했다. 개장수를 상대하면서 지금까지 계속 소모된 내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신의 그 내공, 대체 어디서 전해지는 거지?”

극악소마의 물음에 암왕이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그 비밀은 죽어야 알 수 있어요.”

성큼성큼 걸어오며 이번에는 투왕이 말했다.

“내가 비밀을 알려주지!”

암흑장막에 기댄 채 극악소마가 말했다.

“어서 나오십시오! 소교주님!”

암왕이 감미롭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존께서 보기보다 감상적인 면이 있으시군요.”

투왕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고 주먹을 내질렀다.

쉬이이이익!

바로 그때였다.

등 뒤에 있던 암흑장막을 흑마검이 뚫고 나오며 주먹이 극악소마에게 닿기 전, 투왕의 어깨를 먼저 관통했다.

정말 생각지 못한 일격이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순간 암왕과 투왕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투왕은 어깨가 제대로 찔렸고 암왕은 자신이 펼친 암흑 사술이 깨어지면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찌이이이이이익.

암흑장막이 길게 찢기기 시작했다.

암왕의 두 눈에 놀람이 스쳤다.

“어떻게 암흑장막을!”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다.

검무극의 눈에 푸르스름한 파훼법이 보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혈안정수와 신안술이 합쳐진 효과가 발휘된 것이다.

원래 혈안정수는 혈교 사술의 파훼법을 꿰뚫어 보았는데, 그녀의 암흑 사술 역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혈교 무공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랬기에 이곳에서 일식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내가 또 답답한 건 싫어해서.”

검무극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검무극이 나오리라 믿었다. 등진 채 투왕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믿음 때문이었고.

‘제가 더 큰 힘이 되어 드려야 하는데.’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읽지 못하겠는가?

“그거 아십니까? 저는 소마님께서 감상적인 면이 있으셔서 더 좋아합니다.”

그 말에 가면 속 소마의 두 눈이 웃었다.

반면 투왕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이 징글징글한 놈들!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여전히 그는 팔팔했다. 암왕이 내상을 입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내공이 그를 지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상 때문인지 검은 기운이 어깨의 부상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시죠.”

극악소마가 먼저 투왕에게 몸을 돌렸다. 내공이 바닥이라도 극악소마는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 눈은 더욱 맑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와 나란히 투왕에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언제 내공이 넘쳐서 싸웠습니까?”

그 친구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자넨 지금 어디에 있나?’

비사인이 외곽 조사에 허탕을 치고 돌아왔을 때,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물론이고 투왕과 가마 속 여인까지 사라지고 없었다. 가마가 그대로 있는 걸로 봐서 암흑사술 속에서 싸우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쉽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

게다가 진법에 빠진 진하군과 멸마대도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진하령과 천화루주 역시 보이지 않았고.

‘저 가마의 비밀은 우리가 풀어야 해.’

저 가마와 연결된 채 자신과 싸웠던 자들은 정말 내공을 끝없이 발휘했다. 분명 내공과 관련해서 비밀이 숨겨져 있으리라.

그렇다고 무작정 가마를 부술 수도 없었다. 가마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고, 또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사라진 것이 저 가마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수색 영역을 조금 더 확대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비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무지막지한 내공을 멀리서 보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어.’

그러던 비사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수색하지 않은 한 곳.

수색할 수 없었던 그곳.

그곳은 바로 어둠 속에 눈동자만 드러낸 무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주위에서 수색하지 않은 곳은 바로 저곳뿐이다.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던 비사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저자들 수상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무면객들과 대치하며 눈동자만 보이고 있었다. 눈동자에 하얀 테두리가 있는 괴이한 눈동자들.

“암천야신공을 익히면 저런 눈동자를 가진다고 들었습니다.”

일랑의 말에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아는 사실이었다.

“눈동자 때문에 드린 말이 아닙니다.”

일랑이 그럼 뭐 때문이냐는 표정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저자들 너무 한곳에 모여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러했다.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무면객들만 해도,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있는 것 같지만 상대의 공격에 대비해서 자연스럽게 분산해 있었다.

반면 그들은 어둠 속에 도사린 채 똘똘 뭉쳐 있었다. 다들 저 괴이한 눈에만 신경을 쓰는 바람에 그 사실을 놓치고 있었는데, 비사인이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군요. 암기를 쏟아부으면 피해가 클 텐데요.”

그뿐만 아니라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들은 묘하게 비사인의 본능을 건드렸다.

“저들 뒤쪽을 한 번 살펴보시죠.”

비사인이 은밀히 움직여 그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뒤쪽으로 접근했다.

비사인도, 사도십삼랑도 모두 놀랐다.

정면에서 봤을 때와 달랐다. 뒤로 가도 가도 계속 그들이 있었다. 앞에서 반짝이는 눈동자들은 이 전체 눈동자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거리가 멀기도 했고 이들은 기도를 일절 드러내지 않고 있기에 앞에서는 이렇게 많은 숫자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어두운 심해에서 빛이 나는 돌기로 먹잇감을 유혹하는 물고기처럼 그들의 본체는 따로 있었다.

“상황이 급해지면 우릴 치려고 숨겨둔 병력일까요?”

일랑이 속삭이며 묻자 비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더 잘 숨겨뒀겠죠.”

매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게 눈에 띄었고, 공격하기 위한 대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뭉쳐 있었다.

“보통 이 정도 규모가 움직이면 외부 경계 인원이 있어야 하는데, 한 명도 없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그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같았다.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던 중 칠랑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들 눈동자의 깜박임이 이상합니다.”

칠랑은 원래 눈썰미가 좋고 사파의 괴이한 무공에 대해 잘 알았다.

“눈동자를 깜박이는데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눈동자의 깜박임에 집중했다.

과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보니 이상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한 번 감으면 오랫동안 뜨지 않았고, 한 번 뜨면 눈을 감지 않았다. 그 모습은 정말 괴이했는데,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그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잠시 모습을 보였다.

암왕이 시공이환술로 들어가자 외부에는 드디어 달빛이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때 칠랑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길 보십시오.”

허공을 가르는 뭔가가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어떤 기운이 눈동자들이 있는 어둠 속에서 가마로 이어져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정말 자세히 봐야 눈에 보이는 기의 흐름이었다.

“저들이다!”

비밀은 멀리 있지 않았다.

저들이 가마에 내공을 전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자들은 내공을 채우는 중이고, 눈을 뜬 자들은 그들만의 어떤 사이한 대법으로 내공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들이 어둠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비밀을 알자 비사인의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최악의 싸움 중이리라. 텅 빈 내공으로 저 끝없이 지원되는 내공에 맞서면서.

“다 없애버린다!”

비사인의 명령에 사도십삼랑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공격 준비를 했다.

“동시에 검기로 친다.”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 후 비사인이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이익!

비사인의 검이 검기를 발출했다.

뒤따르던 사도십삼랑도 일제히 검기를 날렸다.

뭉쳐 있었기에 검기로 한 번에 다 쓸어버리려고 했는데.

후우우우욱!

그들 주위로 검은 연기가 확 피어올라 왔다.

퍽! 퍽! 퍽퍽퍽퍽!

날아든 검기를 시커먼 연기가 막았다. 투왕의 몸을 호신강기가 되어 지키는 것처럼, 이들을 지키는 것이다.

마치 받은 것은 돌려주겠다는 듯.

이번에는 연기 속에서 검기가 날아왔다.

쉭쉭쉭쉭쉭!

파파파파팍!

사도십삼랑이 좌우로 흩어지며 피했다.

“근접전으로!”

비사인이 앞장서서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멀리서 검기를 주고받는 싸움은 결국 내공 싸움이 될 테고, 자신들이 불리할 거라 직감한 것이다.

선두에 선 흑의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내질렀다. 아무렇게나 뭉쳐 서 있었던 게 아니다. 누군가 공격을 해왔을 때 막아낼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놈들의 검에 실린 내공이 엄청났다. 생각지 못한 위력에 비사인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모두 조심해!”

날아드는 검을 쳐내며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앞서 네 흑의인들과의 싸움이 그랬듯, 이들의 검에 실린 내공 역시 한 사람의 내공이 아니라는 것을.

촤아아악.

놈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뒤에 있던 흑의무인들이 검기를 날렸다.

비사인이 몸을 날려 검기를 피했다. 그쪽에 있던 흑의인들도 검기를 쏟아냈다.

비사인은 위험을 감수하며 그들에게 쇄도했다.

쉬이익!

놈들의 허를 찌르며 비사인이 정면에 선 흑의인의 가슴에 검을 찔러넣었다.

심장이 찔린 놈의 눈동자가 순간 새하얗게 변했고 몸은 시커멓게 변하면서 털썩 쓰러졌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휘리리리리릭!

그가 쓰러지자 흑의인 무리가 일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쓰러진 시체는 어디론가 휩쓸렸고, 회전하면서 그들이 검기를 뿌렸다.

비사인이 검기를 피해 몸을 날렸다.

처음에 공격 명령을 내릴 때만 해도 한 번에 다 휩쓸어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놈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공격에 실린 내공이 엄청났다.

‘그래, 내공을 쓰려거든 이쪽에 다 써라!’

하지만 어둠 속에서 가마로 흐르는 내공의 흐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파파파팍!

검기를 피해 달리며 사도십삼랑을 보았다. 그들 역시 쉽게 뚫지 못하고 있었다.

“뒤로!”

비사인의 명령에 사도십삼랑이 잠시 물러났다.

비사인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사도맹주의 독문무공인 패왕진천검법을 발휘했다.

제일검 백천식.

새하얀 광채를 내뿜는 강기가 그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그들을 지키는 연기를 뚫고 백천식이 그대로 그들을 휩쓸었다.

하지만 강기가 덮치던 그 순간, 한 덩어리였던 그들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졌다.

퍼버버버벅!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강기에 휩쓸려 날아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합쳐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눈동자들이 일제히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같이 보았다가 동시에 깜박이고.

그 모습은 정말 기괴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검진이나 합격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비사인은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이어져 있음을.

이번에는 그들이 먼저 공격했다.

마치 문어 다리처럼 큰 덩어리에서 십여 갈래가 앞으로 튀어나오며 일제히 검을 내질렀다.

챙챙챙챙챙!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깨를 다쳤던 십일랑이 궁지에 몰렸다.

옆에 있던 사도십삼랑들이 그를 도우려 했지만 흑의인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조심해!”

그와 가장 가까운 십이랑이 부상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그때.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지풍이 흑의인들에게 비처럼 쏟아졌다.

십일랑을 몰아붙이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비사인이 돌아보니 무면객들이었다.

무면객들은 사도맹 무인들이 어둠 속 눈동자들을 치는 것을 보고는 도우러 나선 것이다.

비사인이 무면객들에게 소리쳤다.

“이것들이 자신들의 수장에게 내공을 보내고 있네.”

그 말로 충분했다. 이들 때문에 소교주와 극악소마가 위험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무면객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일제히 비수를 뽑아 들었다. 지풍을 주무공으로 사용하는 그들은 근접전을 펼칠 때는 비수를 사용했다.

무면객들은 밤바다 파도의 새하얀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무면객들까지 싸움에 뛰어들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면객들은 아예 겁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미친 듯이 비수를 휘두르며 싸우다가 갑자기 다른 손으로 상대의 얼굴에 지풍을 발출했다.

마치 괴이하고 거대한 생명체를 사냥하는 더 괴이한 생명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다 놈들에게 깊이 들어간 무면객 하나가 동료들과 연결이 끊어졌다.

사방을 둘러싼 흑의인이 그를 합공했다.

작은 비수와 지풍으로는 버틸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악착같이 놈들을 쓰러뜨리며 버텼지만.

결국 허리를 찔리고 주저앉은 그의 얼굴로 흑의인이 검을 내리쳤다.

무면객의 가면에 피가 뿌려졌다.

자신을 죽이려던 흑의인의 가슴에 검이 튀어나와 있었다.

흑의인이 쓰러지자 그 뒤에 비사인이 있었다. 반대쪽을 뚫고 들어와서 그를 구해준 것이다.

‘내 평생에 무면객을 구하는 날이 올 줄이야!’

비사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때 다른 쪽에서 무면객들이 뚫고 들어왔다.

비사인은 왔던 쪽으로 사라졌고, 무면객들은 비사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싸움이 계속되면 될수록 똘똘 뭉쳐 있던 흑의인들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암천야신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었고 거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면객들이었다.

비사인은 보았다. 공기를 가르며 전해지던 내공이 끊어졌음을.

“내공이 끊어졌다! 더 밀어붙여!”

흑의인들은 어떻게든 내공을 보내려고 했다.

내공을 보내려는 무리를 다른 무리가 지키려 했고,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으려 했다.

‘저 내공이 검무극을 죽이는 내공이 될 거다!’

쇄애애애애액!

비사인이 황소처럼 돌진해서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검기가 날아들었지만, 호신강기로 막았다.

바닥을 뒹굴다 벌떡 일어난 비사인이 또 다른 무리를 향해 쇄도했다. 내공을 보내던 이가 죽자 날아가던 기운은 가마에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

“저기 막아!”

그야말로 보내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의 필사적인 싸움이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흑의인들이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그들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여들었고 잠시 기분 나쁜 침묵이 흘렀다. 흑의인들의 눈동자에 있던 하얀 테두리가 일제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검은 연기가 그들 주위를 회오리치듯 돌기 시작했다. 귀신 울음처럼 처연한 소리가 들렸고, 사악한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위험해! 모두 뒤로!”

비사인은 가마로 내공을 보내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휘이이이.

회오리가 사라지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흑의인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눈은 하얗게 변했고, 몸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가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평범한 내공이 아니었다. 죽음을 대가로 한 괴이하고 강력한 기운이었고, 그 기운을 검은 연기가 회오리치며 감싸고 있었다.

“안 돼!”

비사인이 그 기운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은 그 기운을 가르고 지나갔을 뿐, 그뿐이었다. 공기를 죽일 수 없듯, 그 기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검기를 날렸지만, 그 또한 소용없었다. 오히려 검기를 맞은 검은 연기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천천히 가마를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은 정말 놀랍고도 괴이했다.

비사인이 몸을 날려서 가마 앞에 섰다. 비사인은 느낄 수 있었다. 이 힘이 전해지면 검무극은 죽게 될 것임을.

“내력으로 막아야겠습니다.”

저 기운도 결국 내공이 될 기운, 막을 수 있는 건 내공뿐이라 생각했다.

일랑이 달려와서 그를 말렸다.

“안 됩니다, 저 강력한 힘을 이길 수도 없고, 설령 이긴다고 하더라도 저 검은 기운 때문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될 겁니다! 아니,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힘이 전해지면 소교주가 죽을 겁니다.”

“차라리 가마를 부숴버리시죠?”

비사인이라고 어찌 그 생각을 안 했겠는가?

“만에 하나 저 안에 소교주와 극악소마가 있으면요?”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친구를 죽이게 되는 셈이다.

“안에서의 싸움은 소교주에게 맡기고, 우린 저 기운을 막아야 합니다.”

휘이이이잉.

그러는 사이 기운은 저 앞까지 다가왔다.

“그럼 제가 막겠습니다.”

일랑이 앞에 서고 그 뒤로 사도십삼랑이 뒤에 줄줄이 섰다.

물론 그 뒤에 설 사람이 아니었다.

비사인이 일랑 앞에 섰다.

“소맹주님!”

“일랑, 만약 소교주와 마존이 죽으면 우리 목숨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두 사람을 죽인 그들이 나타나서 이곳을 휩쓸기 시작하면 막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한마디.

“그 친구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일랑은 비사인이 검무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말릴 수 없다는 것도.

비사인이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돌아섰다.

다툴 시간은 없었다. 이미 기운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비사인의 등에 일랑이 손바닥을 댔다. 그 일랑 뒤를 이랑이, 이랑 뒤를 삼랑이. 그렇게 사도십삼랑 모두가 앞 사람의 등에 손바닥을 댔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겠다는 각오가 그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휘이이이이이!

검은 유성이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비사인이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검무극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 수 있을지 자신도 처음 알았다. 춤이나 추게 하고, 매번 자신을 놀리기나 하는 사람인데.

‘내가 저 내공은 반드시 끊을 테니, 꼭 이겨서 나오시오!’

날아온 것이 비사인의 손바닥에 닿으려던 바로 그 순간!

눈앞에서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사아아아아아.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기운이 순간 느려지는가 싶더니.

기운을 휘감은 검은 연기가 투명하게 바뀌면서 얼음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로 바뀌었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싸아아아아아아!

폐부를 얼리는 듯한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기운을 휘감던 연기의 움직임도 멈추기 시작했다.

찌이이익, 쩌엉!

날아오던 모든 것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지금 오고 있소.

회오리치던 검은 연기가 하얗게 얼어붙자 그것은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얼음 결정이 어둠 속에서 빛나면서 마치 장인이 혼을 바쳐 만든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그 너머로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백의를 입은 여인의 손바닥에 눈의 결정체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수를 그녀가 발휘했음을 알 수 있었다.

비사인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새하얀 피부에 맑고 차가운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깨끗한 느낌을 줄 수가 있지?’

이런 느낌을 주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여인은 바로 북해빙궁의 소궁주 한설이었다.

그녀 뒤에 역시 백의를 입은 두 명의 중년 남녀가 호위하듯 서 있었는데 그들은 북해의 절세고수인 한빙쌍검(寒氷雙劍)이었다.

빙궁주가 딸의 첫 중원행을 걱정해서 딸려 보낸 사람들이니 그 실력이 어떨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비사인이 그녀에게 걸어가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사도맹 소맹주 비사인이오.”

그러자 한설도 자신을 소개했다.

“북해빙궁 소궁주 한설이에요.”

그녀의 신분을 알자 비사인은 내심 놀랐다. 검무극에게 이번 회합에 새로운 사람이 온다고 들었지만 설마 북해빙궁의 소궁주일 줄은 몰랐다.

비사인이 그러했듯 한설에게도 비사인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이렇게 무섭고 강렬한 인상을 지닌 사람은 처음이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비사인의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얼어붙은 암흑 기운으로 향했다.

한설이 그건 알아서 처리하라고 우아하면서도 정중한 손짓으로 뜻을 전했고, 비사인 역시 감사하다며 정중히 포권했다.

비사인이 검을 뽑은 후 패왕진천검법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검에 강력한 사기가 휘몰아쳤다.

쉬이이익!

뭉쳐져 있던 기운들이 얼어붙은 채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중심이 되는 핵이 깨어지자 기운들은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완전히 소멸하자 아름다운 얼음 조각만이 사방에서 반짝였다.

비사인이 사도십삼랑을 돌아보았다. 마지막 순간 함께 목숨을 걸어준 그들이 고마웠다. 비사인의 눈빛에 담긴 마음을 읽었기에 사도십삼랑은 변함없는 충성심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예전 비사인은 이럴 때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 여겼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들과 교감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비사인은 그들을 돌아본다. 돌아보는 사람이 되었고,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비사인의 시선이 다시 한설을 향했다.

“고맙소. 덕분에 목숨을 구했소.”

그 말에 한설의 눈빛에 살짝 이채가 스쳤다. 앞서 기운을 막아서던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의 기세를 보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냥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면 될 일인데, 목숨을 구해줬다는 말까지 했다. 사도맹 소맹주쯤 되면 목숨 빚을 지길 싫어할 텐데.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전 그저 저 불길한 것을 얼렸을 뿐이에요.”

뒤에 서 있던 한빙쌍검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빙궁주의 가장 큰 걱정은 딸이 중원에 나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할까였는데, 그녀는 차분하게 잘하고 있었다. 이래서 밖에서의 자식이 다르고, 부모 앞에서의 자식이 다르다고 하는 거겠지.

“천마신교 소교주의 초대를 받고 왔어요. 축제라고 했는데.”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서지고 깨지고. 시체들이 수북했다. 거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귀면객들까지.

비사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초대한 사람 생각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텐데요.”

한설은 그 말에 공감했다. 정말 북해빙궁을 발칵 뒤집어 놓고 돌아간 검무극이었으니까.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까지도.

“소교주는 지금 어디에 있죠?”

비사인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오고 있소.”

* * *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공이 넘쳐나는 상대를 내공을 아끼고 또 아껴가며 싸웠으니까.

쇄애애액.

투왕의 주먹이 극악소마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투왕의 손목을 쳐서 진로를 바꾼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푹! 푹!

극악소마의 비수가 투왕의 배에 연속해서 박혔다. 아예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이었는데, 검무극이 막아줄 것을 믿지 못했다면 엄두도 못 낼 공격이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집중력의 한계를 찢고 새로운 집중력의 영역으로 들어서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싸움을 함께했지만, 오늘의 싸움만큼 하나의 호흡으로 싸운 적은 처음이었다.

후아앙!

배를 찔린 투왕의 신경질적인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팔을 자르려고 날아든 검무극의 검이 주먹 끝 쇠사슬을 스쳤다.

연이어 날아든 투왕의 신경질적인 주먹이 빗나가면서 두 사람은 주먹의 사정권 내에서 빠져나갔다.

투왕이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치명적인 상처가 될 공격이었지만, 검은 연기가 그의 상처를 덮었다.

“젠장!”

암왕이 없었다면 이번 역시 치명상이었다.

투왕은 분노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맞을 듯 맞지 않았다. 저렇게 내공을 아끼며 쓰는 것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차분한 암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착하세요.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말했다.

“과연 당신들 편일까?”

무슨 뜻이냐는 그녀의 눈빛에 검무극이 말했다.

“난 시간은 우리 편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궁금하시오?”

“우리 소교주께서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군요.”

검무극은 내심 한 가지를 기대하고 있었다. 가마와 연결된 네 개의 검은 줄이 끊어졌을 때, 비사인은 자신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반드시 올 사람이 오지 않았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 그 이유가 자신이 바라는 그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보기보단 똑똑한 친구라서. 시간은 우리 편이라 확신하오.”

암왕 역시 확신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오늘 이 어둠 속에서 아무도 그대들을 구하지 못합니다.”

투왕이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했다. 그의 두 눈에는 반드시 검무극을 죽이겠다는 살의의 집념이 가득했다.

쇄애애애애애애액!

휘몰아치는 권풍에 모래바람이 돌풍이 되어 불었다.

날아드는 공격을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바닥을 구르며 피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은 내세우지 않았다.

오직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었고 단 한 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싸움이기도 했다. 실수하면 극악소마가 죽고, 실수하면 검무극이 죽었으니까.

그랬기에 이 싸움은 검무극에게나 극악소마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극한의 빠름. 극한의 강함.

그 주먹에서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공격을 최소한의 내공으로 맞서고 있었다.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무공 경지에 영향을 끼칠, 최악이자 최고의 싸움이었다.

내공은 꼭 써야 할 때만 썼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에.

파파파파파파팍!

연환풍운권이 발휘되면서 수십 개의 주먹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암영보로 강기를 피하며 검기를 발출했다. 목표는 투왕이 아니었다.

날아든 강기들 중 하나가 허공에서 해소되었다.

극악소마는 정확히 그것이 날아들었을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퍼엉! 펑펑펑! 펑!

극악소마가 서 있던 자리 주변이 박살 나며 뒤집혔다.

큰 초식을 날리면 다음 수로 이어지기까지 빈틈이 생기기 마련,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무극이 좌측에서, 극악소마는 우측에서 빠르게 쇄도했다.

투왕은 검무극을 우선해서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언제 구화마공을 쓸지 몰랐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아꼈던 내공을 쏟아부으며 그를 공격했다.

챙챙챙챙챙챙!

주먹과 검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푹! 푹!

그 사이 극악소마의 비수가 투왕의 배와 어깨를 연속해서 찔렀다. 검은 기운이 끝없이 그를 구했지만,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투왕이 부상을 신경 쓰지 않고 미친놈처럼 공격을 가했고, 결국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호신강기로 공격을 막으며 뒤로 튕겨 나왔다.

투왕이 자신의 어깨에 깊숙이 박힌 비수를 뽑았다. 뒤로 튕겨 나면서 극악소마가 날린 비수였다.

푸아악.

피가 뿜어졌지만 이내 검은 연기가 그곳을 막으며 출혈을 멈췄다.

“이제 이딴 공격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 텐데?”

투왕의 조롱에 검무극이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연기가 한 번쯤은 당신을 배신할 수도 있잖아?”

검무극은 투왕이 아니라 그의 눈동자 위에 일렁이는 암왕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암왕이 신비롭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들 상태를 보면 배신할 이유가 없을 것 같군요.”

극악소마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하아.”

가면 아래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가만히 그 숨소리를 듣고 있던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이 바뀌었다.

절벽 끝에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 있었고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투왕이 서 있었다.

“내공도 다 떨어졌는데 벼랑 끝 전술 어떻습니까?”

검무극의 말에 암왕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소교주가 이런 방법을 택할 리가 없는데 하는 눈빛이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수영 잘하십니까?”

“잘합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사정없이 극악소마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뭐 하는 짓이지?”

투왕은 알지 못했지만, 암왕은 검무극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극악소마에게 진기를 일주천하고 오게 했군요.”

내공이 완전히 바닥난 채 자신들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굳이 이런 절벽을 택한 이유는 극악소마를 쉽게 못 찾게 하기 위해서고.”

일렁이는 암왕의 눈빛에 감탄이 스쳤다.

“누구나 이런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는 중에 생각해 내기는 쉽지 않지요. 소교주는 정말 똑똑하군요.”

“내 의중을 단숨에 간파하는 당신도 만만치 않소.”

“어쨌든 이제 끝났습니다. 극악소마가 진기를 일주천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당신은 죽었을 테니까요.”

혼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앞서 싸움으로 판명이 되었으니까.

투왕이 다시 달려들었다.

일대일.

절벽 끝에서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검무극은 절벽 끝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싸웠지만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채 삼십여 수를 버티지 못하고 검무극이 바닥에 쓰러졌다.

숨을 헐떡이는 검무극도 내공이 완전히 고갈된 것처럼 보였다. 옆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려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고 끝내 붙잡지 못했다.

투왕이 다가와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절벽으로 뛰어내려 달아나지 않은 거지?”

대답은 암왕이 대신했다.

“그랬다간 우리도 뛰어내릴 테니까요. 그럼 극악소마가 죽을 수도 있겠지요. 차라리 먼저 죽겠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암왕이 감탄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소교주의 소원대로 먼저 보내주세요. 소교주가 죽으면 시공이환술이 깨어지면서 극악소마도 모습을 보일 겁니다.”

투왕이 두 주먹을 마주치며 웃었다.

카앙! 카앙!

그때 투왕의 쇠사슬이 반짝였다. 두 주먹이 부딪쳐서 반짝인 것이 아니었다.

쇠사슬을 타고 한 줄기 빛이 흘렀다. 그 빛이 길게 이어지더니 투왕의 몸을 타고 얼굴로 이어졌다.

순간 투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희미하지만 분명 눈으로 들어온 것은 빛이었다.

투왕이 놀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테두리에 빛의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투왕의 눈동자 테두리를 닮아 있었다.

달이 빠르게 태양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암흑에 갇혔던 세상이 제빛을 찾아갔다.

순식간에 일식이 끝난 것이다.

동시에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

투왕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그와 겹쳐 있던 암왕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시공이환술 밖에서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바닥에 누운 채 검무극이 말했다.

“당신이 말했지. 빛이 있는 곳에 어둠도 함께 하는 법이라고. 하지만 영원한 어둠도 없는 법 아니겠소?”

암왕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쉽겠군요. 밖에서 조금만 일찍 해냈다면 소교주 당신이 이겼을 수도 있어요.”

“아쉽소. 이 태양 아래에선 당신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암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암흑강림술을 지탱하게 해주던 힘이 끊어진 이상,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밝은 곳에서 죽게 되어서 다행이오.”

투왕이 쓰러져 있던 검무극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지독한 놈! 이제 끝이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모든 고통을 참았던 그였다.

바로 그때 검무극이 그의 두 팔목을 잡았다.

“발악은…….”

순간 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검무극에게 내공이 남아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꽉 잡았다. 남은 모든 내공을 쏟아붓는 것일까? 엄청난 힘이었다. 내공이 있으면서 왜 없는 척을 한 것이지?

‘대체 왜?’

그때 암왕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투왕이 본능적으로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본 건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투왕과 암왕의 겹쳐 있던 두 눈이 동시에 부릅떠지던 그 순간.

쇄애애애애애애애액!

극악소마의 마극광폭장이 투왕의 얼굴 앞에서 발출되었다.

퍼어어엉!

투왕의 머리통이 강기에 휩쓸리며 날아갔다.

사실 극악소마는 내공이 완전히 고갈된 것이 아니었다. 딱 한 번 마극광폭장을 발휘할 내공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작전이었다. 실패하면 죽을 수 있는 목숨을 건 속임수였다.

검무극이 만든 절벽 아래에 그가 딛고 서 있을 돌출부가 있었다. 극악소마는 그곳에서 저들이 방심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리에 도취한 이 한순간을!

그리고 때마침 일식이 끝나면서 이 작전은 더욱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두 번 다시 투왕이 돌아올 수 없음을.

목 위쪽이 완전히 사라진 투왕은 여전히 서 있었다.

투왕의 얼굴이 있던 그 자리에 저 앞에 서 있는 암왕의 얼굴이 대신 보였다. 마치 투왕의 몸에 암왕의 머리통이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암왕은 투왕이 죽기 직전 그의 몸에서 빠져나갔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도 그 공격을 버틸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이 햇빛 아래서라면?

그 검은 연기가 한 번쯤 당신을 배신할 수 있지 않냐는 검무극의 물음이 적중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내내 투왕과 겹쳐져 있었던 그녀가 홀로 햇살 아래에서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이제야 당신 얼굴이 잘 보이는군.”

목숨 좀 걸면 어떻습니까?

진하군과 멸마대는 혈로미로진의 마지막 관문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왼쪽 조심!”

진하군이 날아드는 암기를 검을 휘둘러서 막았다. 뒤쪽에서는 기다란 창이 빠르게 튀어나왔다가 진하군의 귓가를 스친 후 다시 들어갔다.

사방에서 온갖 기관이 멸마대 무인들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관은 더욱 강하고 빠르게 공격하고 있었다.

“서두르게!”

진하군의 외침은 정경을 향한 것이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멸마대의 진법 담당 정경은 관문의 생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번 관문은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이용해서 풀어야 하는 관문이었다.

바닥에 적혀 있는 오행의 글자가 적힌 발판들.

처음엔 오행의 상생을 이용해서, 그다음에는 상극을 이용해서 풀어야 했다.

“나무가 흙의 기운을 빼앗고, 또 흙은 물의 흐름을 막으니까.”

정경이 목(木)에서 토(土)로, 다시 수(水)의 발판을 순서대로 밟았다.

문제는 진법이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엎드려!”

진하군의 외침에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휘류류류류류류!

그들 머리 위로 회전하는 거대한 칼날이 엄청난 속도로 지나갔다.

정말이지 이 미로진에 왜 ‘혈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불(火)은 금속(金)을 녹이고 금속은 나무를 자르니까.”

바닥을 밟는 게 조금이라도 늦으면 사문으로 빠지게 된다. 그럼 또 목숨을 걸고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됐다!’

정경이 다시 몸을 날려서 마지막 발판을 밟으려던 그 순간!

쇄애애액!

그 순간을 노린 칼날이 정경을 향해 날아들었다. 너무 좋아서 흥분한 나머지 너무 성급했다.

‘안 돼!’

피하기에 늦었기에 그는 절망했다. 목이 잘리더라도 몸이 나아가서 저 발판을 밟기만을!

회전 칼날이 그를 스치며 지나갔다. 쇄도한 진하군이 칼날을 쳐낸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를 주고받을 여유도 없었다.

진하군은 다시 반대쪽으로 쇄도했고, 정경이 마지막 발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행을 돌고 돌아 마지막 목(木)의 발판을 밟던 그 순간!

철컹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기관이 멈췄다. 자신의 눈앞에서 가까스로 멈춘 칼날을 쳐다보는 멸마대 무인도 있었다.

여기저기 쇳소리를 내며 공간을 어지럽히던 기관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르릉.

벽에 숨겨져 있던 문이 열렸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의 생문을 연 것이다.

모두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정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모른다.

“자네가 고생했네.”

진하군이 정경을 치하했다.

“아닙니다. 대주님이 아니셨다면 우린 정말 많은 동료를 잃었을 겁니다.”

모든 멸마대 무인이 동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이번 진법에서 진하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였다.

“일단 나가지.”

아직 진법을 펼친 천괴를 죽이지 못했다. 진법이 파훼 되었으니 저 문으로 나가면 그가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들이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천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관문까지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뚫다니 정말 대단하군.”

목소리가 울려 퍼져서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멸마대, 과연 무림맹의 자랑이라 할만하군.”

진하군은 불길함을 느꼈다. 마지막 관문을 뚫었음에도 놈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냥 보내기 아쉬워 작별선물을 준비했지.”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십여 개가 넘는 문이 사방에서 열렸다. 그 안쪽은 기다란 복도가 있었는데, 그 끝에 사람들이 묶여 있었다. 한 사람이 있는 곳도 있었고, 여러 명이 있는 곳도 있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구해주세요!”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주세요!”

그들의 머리 위에 수십 개의 칼날이 겨눠져 있었다. 그들은 언제 그것이 떨어질지 모를 공포심에 떨고 있었다.

다시 들려오는 천괴의 목소리.

“저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야.”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있는 각각의 복도마다 위험한 기관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스르르르륵.

정면 생문 앞에 바닥에서 뭔가가 위로 올라왔다. 앞서 관문에서 봤던 제한 시간을 알리는 저울이었다.

“시간 내에 저 생문으로 나가지 못하면 너희는 더욱 강해진 혈로미로진을 처음부터 다시 뚫어야 한다. 끔찍하지? 아마 지금처럼 모두가 살아서 여기까지 오지 못하겠지.”

만약 더 강해진 미로라면 많은 희생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온 것도 정말 쉽지 않았으니까.

“너희가 구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죽을 거다. 자, 몇 명이나 구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자랑스러운 멸마대의 선택을 받게 될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천괴는 그야말로 악마처럼 굴고 있었다.

“너희는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될 거다!”

천괴의 웃음소리와 함께 저울이 작동하며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울이 기울어지는 속도로 볼 때 그리 많은 시간은 없었다.

복도 안에서 저마다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저쪽 방은 여덟 명입니다. 숫자가 많은 곳부터 구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이쪽 방에 아이가 있습니다. 이쪽부터 구하시죠!”

멸마대 무인들이 저마다의 방 사정을 알렸다.

그들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누굴 구하느냐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의 명령에 누군가는 살고 또 누군가는 죽게 될 거니까. 그러는 사이에도 저울은 계속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때 진하군이 나직이 말했다.

“누굴 구할지 고민할 필요 없다.”

진하군의 말에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하군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서 자신들이 빠져나갈 생문의 문을 스스로 닫았다.

문을 닫고 돌아선 진하군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다 구하고 이 진법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생각지 못한 결정이었기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하군이 방을 돌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구해드릴 테니, 침착하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자 각각 복도에서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진하군이 다시 멸마대 수하들에게 말했다.

“누군가는 이 결정이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중에 몇 명이 죽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이 선택이 우리가 마교나 사파와 다른 점이라 생각한다.”

진하군의 얼굴에 미안함이 스쳤다. 그가 수하들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아 미안하다. 사죄는 저승에 가서 하마.”

멸마대 무인들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착착착착착착.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외쳤다.

“멸마파사(滅魔破邪)! 협의지도(俠義之道)!”

애초에 그들은 수장인 진하군의 결정에 거역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멸마대주가 죽으라면 죽는 게 멸마대였으니까.

그들이 첫 번째 방의 사람들을 구하려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스스스.

주위의 모든 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열린 문들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 그들이 있는 곳은 다른 광장이었다.

사방에 향이 피어 있었고, 벽과 바닥에 온갖 알 수 없는 문자가 가득 적힌 곳이었다.

저 중심에 천괴가 앉아 있었다.

진하군을 바라보는 천괴의 눈빛에 불신이 가득했다.

“정말 생문을 스스로 닫는 선택을 했다고?”

그의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알 수 있었다. 진법이 파훼되었다는 것을. 진법이 파괴되면서 천괴가 큰 내상을 입었음을.

바로 생문의 문을 스스로 닫는 것.

놀랍게도 그 선택이 바로 이 혈로미로진을 완전히 파괴하는 파훼법이었던 것이다.

아이가 있는 방, 구해야 할 숫자가 많은 방, 그렇게 여러 상황을 만들어둔 것은 함정이었다. 누굴 구하느냐를 고민하게 해서 본질을 못 보게 하려고.

“정말 알지도 못하는 놈들을 살리겠다고 이 미로진에 남았다고?”

그 의심 가득한 물음에 진하군은 차분히 대답했다.

“네게는 놀라운 일이겠지만,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라서.”

천괴는 믿지 않았다. 위선자를 보는 눈빛으로 그가 다시 물었다.

“멸마대주,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이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뭔가가 나를 바꾼 것일까?

“누가 내게 그러더군. ‘자넨 멋진 맹주가 될 거라고.’ 그래서 한 번 돼보려고 한다.”

진하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멸마대 무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서 천괴를 겨눴다.

휘이이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람 소리가 났다. 바닥의 괴이한 문양과 글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쉬이익!

진하군이 검기를 발출했다. 하지만 마치 허상을 베는 것처럼 검기는 그를 지나가 버렸다.

그때 사술에 능한 황주(黃朱)가 소리쳤다.

“저자가 앉은 원으로 들어가서 직접 베어야 합니다.”

과연 천괴는 알아볼 수 없는 주문으로 가득한 원의 중심에 앉아 있었다.

진하군이 그를 향해 몸을 날리려던 그때.

솨아아아아아아아.

지독한 사기가 휘몰아쳐 날아들었다.

천괴가 마지막 내공을 끌어올려 독문사술을 발휘한 것이다.

심마흑영술(心魔黑影術)!

순간 멸마대 무인들이 흠칫했다. 누군가는 욕설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다.

모두에게 환상이 보였다. 자신의 마음에 가장 깊숙이 숨겨둔 사람과 사건이었다. 모두가 감추고 싶은 것들.

“모두 정심공(正心功) 구결을 외워라!”

사악한 사술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무림맹 고유의 심법이었다.

정심공을 외우자 그들 마음 속의 환상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멸마대가 정심공으로 대항하자 천괴 주위의 다른 문양과 글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형형색색 여러 색으로 빛났다.

스르르르륵.

그러자 바닥에서 검을 든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다시 황주가 외쳤다.

“영귀(影鬼)들입니다! 사방의 초를 꺼뜨려야 합니다!”

멸마객들이 일제히 검을 휘두르며 영귀에 맞섰다. 영귀가 휘두르는 그림자 검과 부딪치자 쇳소리가 났다.

챙챙챙챙!

저 존재는 환영인지 몰라도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은 진짜였다.

멸마대 무인들은 영귀와 싸우는 중에도 정심공을 외우며 초를 꺼뜨리려 애썼다. 영귀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고 발악하듯 그들을 공격했다.

그렇게 사방에서 싸움이 벌어진 그때, 진하군은 천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쇠애애애애애애애.

엄청난 사기가 그에게 불어닥쳤다.

피부가 찢겨나가고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지만, 진하군은 정심공을 외우며 묵묵히 앞으로 나갔다.

그를 공격하려는 영귀들은 멸마대 무인들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천괴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환상이 계속 나타났다. 할아버지의 환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너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내 자리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할아버지가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너무 생생한 환상이어서 가슴이 아릴 정도로 섭섭했다.

진하군은 정심공을 외우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 나타난 사람은 동생이었다.

―오라버니는 위선자야. 협의를 지키려는 이 모든 모습이 결국 무림맹주가 되려는 목적 때문이잖아? 왜 오라버니의 협의가 피곤해지겠어? 이런 순수하지 못한 목적 때문이지.

이 역시 사술이 만들어낸 환상인 줄 알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챙챙챙!

귓가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멸마대 무인들이 자신을 막아주지 않고 있다면, 이 환상에 홀려서 저 공격을 허용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예전에 구했던 아이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맹주 자리를 포기하더라도, 저를 구해주실 수 있나요?

그러자 곧바로 후계자가 되지 못한 자신에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무능했으면 할아버지가 맹주인데도 그 자리를 이어받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 모든 환상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건.

‘내 마음속에는 무림맹주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전부인가?’

그랬기에 그 마음을 파고들어 공격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게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맹주가 되기 위한 욕망이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돈에 영혼을 판 돈벌레처럼, 색심에 영혼을 판 색마처럼. 난 권력에 내 영혼을 판 것일까?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이 환상이 노리는 것임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괴로웠다. 아니, 알기에 더 괴로웠다.

히이이이이이.

천괴와 가까워질수록 사악한 기운은 극에 달했다. 현기증이 났고 어지러웠다. 그냥 주저앉아서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진하군이 있었다면, 마음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웃기지 마! 절대 이딴 사술에는 안 진다!’

이를 악무는 진하군도 있었다.

이 진하군은 계속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왜 그 사람이 검무극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극한의 순간에 그가 필요했다.

―나도 자네처럼 이겨낼 거네.

그러자 검무극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라면 이럴 때 이런 말을 해주겠지.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니까. 팔만큼만 믿고, 팔만큼만 잘하고.

검무극을 떠올리며 진하군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걷고 또 걷고. 몸이 찢겨나가도 좋다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딛던 어느 순간!

자신을 짓누르던 지독한 사기가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졌다. 마음을 괴롭히던 사념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는 천괴가 입에서 피를 왈칵왈칵 토해내고 있었다. 내상이 너무 깊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천괴의 심마흑영술을 진하군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겨낸 것이다.

천괴가 표독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맹주에 목숨 걸었지? 네 협의는 맹주가 되려는 도구에 불과해.”

죽는 순간에도 상대에게 상처를 남기려는 그의 악의에 진하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쉬이이익!

진하군의 검이 천괴의 심장을 관통했다.

검을 뽑지 않은 채 진하군은 수하들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자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네.”

놈에게 하지 않은 말을 수하들에게 솔직하게 밝혔다.

잠시 흐르는 침묵.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목숨 좀 걸면 어떻습니까?”

진하군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그는 정경이었다. 진법을 파훼하며 여러 번 그를 구해줘서 저런 말을 한다 생각했는데.

황주가 그의 말을 받았다.

“저는 오히려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협의나 선의보다도 그 욕망이 앞서셨으면 좋겠습니다.”

진법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이었을까?

협의보다 맹주 자리를 더 원한다는 말에도 멸마대 무인들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는 이런 말까지 했다.

“저도 욕심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과 대업을 이루고 싶습니다.”

처음 있는 기회라 생각해서였을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과묵한 이들도 한마디씩 했다.

“지금까지 그만큼 잘하셨는데, 더 어찌 잘하겠습니까?”

“그 이상은 욕심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완벽하시면 저희가 힘듭니다.”

진하군은 수하들이 이런 말을 해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구나. 이렇게 목숨을 함께 해온 사이인데도.

잠시 말없이 수하들을 응시하던 진하군이 다시 천귀를 돌아보았다.

부릅뜬 그의 두 눈은 완전히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

“그래, 나 맹주에 목숨 걸었다.”

진하군이 천귀의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푸아아악.

진하군은 피가 몸에 뿌려지는 걸 피하지 않았다.

절명한 천괴가 서서히 옆으로 쓰러지면서 주변이 바뀌기 시작했고.

천괴가 쓰러진 곳은 천화루 마당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하군과 멸마대가 돌아왔다.

제 마음에도 시커먼 구멍이.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암왕은 금방이라도 소멸할 것처럼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이대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저 사람을 살리는 데 막대한 돈이 들었는데. 아쉽게 되었군요.”

과연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보며 말했다.

“머리통을 반만 날려서 살려 보낼 걸 그랬습니다. 그놈 살리느라 파산해 버리라고요.”

농담하면서 검무극의 손이 자연스럽게 극악소마의 등에 닿았다.

우우우.

내력이 은밀히 극악소마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내력의 일부를 극악소마에게 나눠주려는 것이다.

극악소마는 거절하지 않고 내공을 받아들였다. 암왕은 내공이 떨어진 자신을 노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검무극이 자신을 지켜주려 할 테고.

그렇게 소모할 내공이라면 차라리 자신에게 전해주는 게 나았다. 언제나처럼 소교주의 선택을 믿었다.

“두 번은 살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 한 번조차도 의견이 대립했었으니까.”

“당신은 어느 쪽이었소? 아, 당연히 살리자는 쪽이었겠군.”

일렁이는 그림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투왕과 함께 왔지만 살리지 않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구해간 것도 당신이었잖소?”

“명령에 따랐을 뿐이에요.”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밤의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낮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아무 의미도 없을 테니까.

명령을 내린 사람이 화무기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검무극은 화무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이 시기에도 이들의 수장으로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지만 화무기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을 작정이다. 이번 생에서 이미 많은 게 바뀌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화무기만큼은 원래의 운명대로 미래의 그 시기에 나타나길 바랐으니까. 그를 상대할 사람은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미래의 우리여야 하니까.

그를 궁금해하는 대신 암왕에 대해 물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사라지면 본체는 어떻게 되는 거요? 가마에서 죽는 거요?”

검무극은 가마 속에 그녀의 본래 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 내가 소교주에게 질 거로 생각하죠?”

“그야 우린 질 생각이 없으니까.”

“마존의 내공도 바닥났을 테고, 소교주께서도 이 시공이환술을 유지할 내공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요?”

과연 뜨겁게 비치던 햇살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쨍쨍한 해를 유지할 수 없기에 이제 이곳에서의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정말 놀라워요. 아무리 천마신교의 후계자라 해도 그 나이에 대체 어떻게 이런 내공을 모은 거죠?”

정말 검무극은 끝도 없는 심후한 공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내가 탐욕의 화신이오.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앞으로 더 많이 모을 생각이오. 당신 만나고 결심했소. 내공과 무공에 있어서는 탐욕의 화신이 아니라 탐욕 그 자체가 되어야겠구나. 그래야 당신들을 상대할 수 있겠구나.”

그러는 사이 극악소마에게 내공이 모두 전해졌다. 검무극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상대가 모르게 내공을 전하는 신위를 발휘한 것이다.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투왕의 주먹에 담금질이 된 것처럼, 검날을 타고 더욱 날카로운 예기가 흘렀다.

“자, 이제 끝장을 봅시다. 난 친구들과 연회 약속이 있어서.”

검무극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극악소마 역시 차분한 눈빛으로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암왕을 쳐다보았다.

암왕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가 그 뒤쪽의 해를 향했다. 그새 또 많이 내려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강렬해지는 순간, 그녀 주위로 검은 연기가 회오리치며 허공으로 올라갔다.

연기가 사라진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놀랍게도 암왕은 가마가 아니라 이곳에 있었다.

“연회가 아니라 모두의 제삿날이 될 거다.”

검은 무복을 입은 여인.

그녀는 목소리와는 상반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튀어나오고 찢어지고 균형이 맞지 않는, 그야말로 일렁이던 때가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달랐다. 귀에 거슬리는 찢어지는 목소리.

“이 빌어먹을 소교주 새끼야!”

원래 인격이 이렇다는 듯 두 눈에는 깊은 증오만이 가득했다.

“당신이 왜 그 사람의 몸에 강림해서 싸웠는지 알 것 같소.”

암왕의 눈빛에 살의가 스쳤다. 이런 외모라서 그런 게 아니냐는 조롱을 예상했는데, 검무극은 다른 부분을 보고 있었다.

“당신은 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사람이군.”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강림했을 때 그 대상이 죽더라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육신을 드러낸 지금은 다르다. 진짜 죽을 수도 있다.

“죽어도 너의 이 더러운 세상에선 죽지 않는다!”

암왕이 기습적으로 쌍장을 날리며 공격했다.

쇄애애액.

검무극은 피하겠지만, 극악소마는 내공이 없어 못 피할 줄 알았는데.

극악소마는 그녀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까지 했다.

그녀는 날아든 혈앙지를 가까스로 피했다.

기습도 자신이 하고 놀라기는 자신이 더 놀랐다. 암왕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괴물 같은 놈들! 대체 내공이 어디서 나오는 거냐!”

쇄애애애액!

그녀의 장법에 땅이 뒤집혔다. 그들이 있던 절벽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어둠이 아닌 곳에서 발휘하는 그녀의 무공은 ‘대단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대단한 정도로 잡을 수는 없었다.

모자란 실력을 내공으로 대신하며 그녀는 팽팽한 싸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싸움의 시작부터 그녀가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그녀에게 다가가던 검무극이 문득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불그스름한 빛깔이 스며들고 있었다. 저 멀리 지기 시작한 노을, 낮과 밤이 교차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은 늑대의 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흰 테두리가 생기는가 싶더니.

그녀의 몸이 다시 어둠의 그림자로 바뀌었다.

스르륵.

순간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빠른 움직임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암로귀환술을 쓴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못 쓸 줄 알았는데!

극악소마를 향해 돌아서던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암로귀환술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극악소마의 가면 위로 암왕의 얼굴이 일렁이고 있었다.

암왕이 극악소마의 몸에 강림한 것이다.

그녀는 싸움을 시작할 때부터 오직 이 한순간만을 노렸다. 빛이 사라져서 암흑강림술을 발휘할 수 있는 이 순간만을.

기왕이면 검무극의 몸에 강림하면 더 좋았겠지만,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을 익힌 검무극의 몸에는 강림할 수 없었다.

검무극은 놀란 마음으로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 역시 놀란 눈빛이었다. 몸은 지배했어도 정신을 지배하진 못했다는 의미. 투왕 때도 두 사람은 따로였으니까.

“하루에 두 번 암흑강림술을 쓸 수는 없지요.”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변했다.

“만약 쓰게 되면 저주가 내리지요. 어떤 저주일까요?”

그녀가 충격적인 말을 이었다.

“영원히 강림한 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주랍니다. 나는 영원히 극악소마와 함께할 겁니다.”

“헛소리하지 마라!”

검무극은 믿지 않았다. 그런 저주가 있는데 강림술을 썼을 리가 없으니까.

카랑카랑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그녀는 미친 것처럼 웃어댔다.

“맞아요, 헛소리죠. 앞으로 사흘간 이 몸에서 나갈 수 없을 뿐이죠. 그때까진 공생공사랍니다. 당신들 모두를 죽일 충분한 시간이죠.”

검무극은 일렁이는 그녀의 눈빛 아래 극악소마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그의 눈빛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암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극악소마의 손가락에서 혈앙지가 날아들었다. 그의 손과 암왕의 일렁이는 그림자가 겹쳐서 움직였다. 극악소마는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었다. 강림한 암왕의 내공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몸을 날려 혈앙지를 피했다. 극악소마의 혈앙지를 피하는 상황이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슉! 슉!

검무극이 다시 몸을 날렸다. 혈앙지가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 돼!”

극악소마의 외침에도 오히려 혈앙지는 분열되어 검무극을 노렸다.

검무극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암왕이 극악소마에게 강림하자 혈앙지의 위력이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내공이 바닥난 검무극이 피하기에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걱정마십시오, 소마님! 제가 방법을 찾겠습니다!”

혈앙지를 피하면서 오히려 검무극은 극악소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공이환술을 풀 수도 없다.

바깥의 상황을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진하군과 비사인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극악소마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그녀가 극악소마와 함께 암로귀환술로 사라져 버리는 거였다.

이대로 극악소마가 그들에게 끌려간다면?

놈들은 극악소마를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살려둔다면 죽음보다 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고.

휘어지면서 분열한 혈앙지에 다시 검무극의 몸에 피가 튀었다.

극악소마가 소리쳤다.

“시공이환술을 푸십시오, 소교주님!”

바깥의 동료들과 합공하라는 의미였다.

‘이대로라면 소교주가 죽는다.’

하지만 검무극은 풀지 않았다.

극악소마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소교주님, 저를 죽이셔야 합니다.”

암왕이 웃으며 말했다.

“소교주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어요. 소교주는 절대 당신을 죽이지 못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제가 죽으면 죽었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기다리십시오, 제가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물론, 극악소마는 검무극을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없었고 내공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자신의 몸에 깃든 암왕의 살의는 확고했고, 검무극은 절대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

무엇인가를 결심한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슉슉슉!

퍽! 퍽!

남은 내공을 시공이환술을 유지하는 데 쓰고 있었기에 검무극은 계속 상처를 입고 있었다. 치명상은 피하고 있었지만 검무극의 온몸은 피에 젖었다.

휘리리리릭.

검무극의 발밑에서 검은 연기가 넝쿨처럼 타고 올라와서 검무극의 몸을 옭아맸다. 다치고 지친 검무극은 그 기운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도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풀지 않았다.

“자, 그 사람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그 수로 끝장내 드리죠.”

마극광폭장을 발출하려 손을 들던 그 순간.

암왕이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자신의 일렁이는 팔만 앞으로 내뻗은 것이다.

극악소마의 팔은 그대로 있었다. 그의 몸이 자신을 거부한 것이다.

‘강림의 명을 버틸 수 있다고? 대체 어떻게?’

암왕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시 암왕이 그를 조종해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면 속 두 눈에서 붉은 핏줄이 터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극악소마의 팔이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암왕에게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극악소마의 마음에는 온통 백색뿐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방에 서 있었다. 그곳에 서서 벽에 그어진 기다란 줄을 쳐다보고 있었다. 암흑의 힘은 순백의 가운데 서 있는 극악소마의 마음을 침입할 수 없었다.

극악소마의 손이 향한 곳은 검무극이 아니었다. 자신의 머리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흘 동안 이 몸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고 했으니, 암왕과 함께 죽으려는 것이다.

“안 돼! 소마님! 안 됩니다!”

검무극의 외침에도 극악소마의 팔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소마님! 소마야, 안 돼!”

검무극이 외침에도 팔은 계속 올라갔다.

암왕도 다급했다. 극악소마가 죽으면 자신도 죽게 된다.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막으려 했지만 극악소마의 의지를 이길 수 없었다.

지금 극악소마가 보이는 힘은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있었다.

“이거 풀어! 어서!”

암왕이 망설이지 않고 검무극을 옭아맨 기운을 풀었다. 우선 살고 봐야 했다.

손바닥이 극악소마의 하얀 가면을 향하던 그 순간!

꽈아악.

검무극이 그의 팔을 잡아 손바닥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아슬아슬하게 마극광폭장은 발출되지 않았다.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묻고 대답했다.

정말 이럴 겁니까?

네, 소교주님을 살릴 수 있다면 이럴 겁니다.

그래, 그는 그럴 것이다. 내가 그를 포기하지 않듯, 그 역시 나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검무극의 시선이 암왕의 일렁이는 그림자를 보았다.

‘저걸 잡을 수만 있다면!’

검무극이 그 팔을 잡았다.

하지만 연기를 붙잡는 것처럼 손에서 빠져나갔다.

잡고 또 잡았지만, 그림자는 잡히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 간절함이 극에 달했을 때, 검무극의 몸에서 응답이 있었다.

우우우웅!

깊은 진동과 함께 그때까지 몸속에서 잠들어만 있던 것이 깨어났다.

비궤가 흡수했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금 움직인 기운은 바로 흑정의 기운이었다.

흑정의 기운이 검무극의 양손으로 몰려가자, 검무극의 손에도 검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검무극의 손에 암왕의 팔목이 잡혔다.

암왕도 놀라고 검무극도 놀랐다. 암왕의 경악한 표정이 하얀 가면 위에서 일렁거렸다. 그 아래 눈구멍 안에서 극악소마도 놀란 눈빛을 발했다.

“잡았다!”

검무극이 암왕의 손을 꽉 잡았다. 암왕이 뿌리치려 했지만, 어디 검무극이 그 손을 놓치겠는가? 팔이 잘려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잡아당겼다.

찌이이이이.

그녀의 몸이 극악소마에게서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소마님! 뒤로!”

극악소마가 반대로 힘을 주며 그녀를 벗어나려 했다.

“……말도 안 돼!”

경악한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암흑의 기운이 검무극의 팔을 할퀴었다.

팍! 팍!

팔에서 피가 튀었지만 검무극은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팔에 두른 극품천잠사가 잘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검무극은 이 손을 놓으면 극악소마가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으아아아아아!”

찌이이이익.

조금씩 조금씩 그녀가 끌려 나왔다.

암왕이 극악소마의 몸에서 완전히 벗어나던 그 순간!

후아아아악! 사락!

그 암흑 기운을 흑정의 기운이 순식간에 삼키듯 잡아먹어 버렸다.

“아아아악!”

그와 동시에 원래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대체 뭐야!”

그녀만큼 놀란 검무극이었다. 그녀의 암흑 기운은 어느새 흑정의 기운에 흡수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속에서 잠든 후였다.

“……안 돼!”

암흑의 기운을 완전히 잃은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하더니.

파스스스스스.

검은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렸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검무극이 그대로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극악소마 역시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아, 하아.”

그곳에는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이렇게 끝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숨소리가 잦아들자 극악소마가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제 마음에도 시커먼 구멍이 있습니다. 그게 잡아 먹어버렸나 봅니다.”

반쯤은 사실인 말이었는데, 극악소마는 농담으로 들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뇨, 아파 죽을 것 같습니다.”

극악소마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검무극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 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잡아당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극품천잠사가 아니었다면 잘렸을 것이다.

극악소마가 말없이 팔의 혈도를 눌러 지혈해 주었다. 검무극이 아프다고 엄살을 떨었다.

이제 검무극이 물었다.

“소마님은 괜찮으십니까?”

검무극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 꽤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던 일을 할 순간임을 느꼈다.

“괜찮은지…… 직접 봐주십시오.”

극악소마가 천천히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지각하면 막내 되는 거지.

검무극은 문득 그날이 떠 올랐다.

시공이환술 속에서 극악소마와 이틀간 수련을 마치던 그 순간이.

그 혈전의 마지막에 검무극은 극악소마를 배려해서 자신들이 있던 장소를 설경으로 바꿨다.

―다음에 꼭 저와 여행 가시는 겁니다.

―그때는…….

그때 극악소마는 말을 망설였다. 그답지 않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망설이나 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망설임이 바로 가면을 벗겠다는 말이었음을.

검무극은 말리지 않았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그는 얼굴을 보여주었고, 지금 인생에서도 스스로 가면을 벗었다.

그와는 얼굴을 보면서 살라는 운명인 모양이다.

스르륵.

가면을 벗는 극악소마의 손이 살짝 떨렸다.

가면 아래 드러나는 극악소마의 얼굴.

회귀 전에 그의 얼굴을 봤을 때는 지금보다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마지막 대법 재료를 찾으러 갔던 그 시절이었으니까.

그때도 잘 생겼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소마.

극악소마는 정말 잘 생겼다. 독왕이 미소년의 잘 생김이고, 취마가 특유의 분위기를 내는 잘 생김이라면, 극악소마는 완벽한 잘 생김이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눈빛은 선명하면서도 깊었다.

세상에 누가 이 얼굴을 보고 극악소마를 떠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이렇게 잘생긴 얼굴 자랑하고 싶은 것을요.”

극악소마가 웃었다. 지금껏 그의 눈이 웃는 모습만 봤는데 이제 그의 얼굴 전부가 웃는 모습을 본다.

“소교주님과 편하게 술 마시고 싶어서 벗었습니다. 가면 아래로 마시는 건 흥취가 나지 않아서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극악소마는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가면을 내려다보았다. 가면이 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가면을 벗는 순간 극악소마는 더욱 강해졌음을.

지금껏 가면이 그를 지켜주었다. 가면은 그의 상징이자 정체성이고, 자존심이었다. 가면이 그를 강하게 했고, 가면이 그를 악하게 만들었다.

“이제 쓰고 싶을 때 쓰고, 벗고 싶을 때 벗을 겁니다.”

이제 그는 가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스스스스스슷.

그때 주위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공이 완전히 다 떨어지자 시공이환술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나십니까? 가면 벗으면 제가 끝내주는 요리 대접하겠다고 했던 말요.”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로 돌아가면 제가 좋은 술과 음식을 대접하겠습니다.”

극악소마가 다시 가면을 쓰며 말했다.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 * *

한설은 이곳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검무극과의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사도맹 소맹주를 향해 날아가는 암흑의 기운을 얼리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피를 뒤집어쓴 무인들이 진법을 뚫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설아, 심상치 않구나. 일단 물러가는 게 어떻겠느냐?

오죽하면 자신을 호위하는 한빙쌍검이 이런 전음을 다 보냈을까?

‘소교주 당신은 대체 날 어떤 회합에 초대한 거죠?’

정말 그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는 물러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사인이 이제 막 진법에서 빠져나온 진하군에게 달려가서 물었다.

“자네 괜찮나?”

진하군이 뒤를 돌아보며 멸마대 무인들부터 살폈다. 다행히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진법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제야 진하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린 괜찮네.”

“다행이네.”

이 순간 두 사람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비사인은 조금 전 진하군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았다. 그 눈빛은 진법에 들어가기 전보다 더 끈끈해져 있었다.

자신들이 그러하듯, 저들 역시 죽음을 넘나드는 사투를 벌였음을 알 수 있었다.

“자네들은?”

“이쪽도 쉽지 않았지만 잘 해결했네. 한 소저 도움이 컸네.”

비사인이 진하군에게 한설을 소개했다.

“이분은 북해빙궁의 소궁주시네. 여기 이 친구는 무림맹 멸마대주요.”

상대가 멸마대주란 말에 한설은 내심 놀랐다. 그가 유력한 무림맹주의 후계자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니까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소개해 주겠다는 친구는 바로 무림맹과 사도맹의 후계자들이었던 거다.

검무극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은 익히 알았지만, 이들과 친구로 어울릴 줄이야.

“오라버니!”

그때 때마침 진하령과 천화루주도 밀실에서 나왔다. 바깥에서 싸우는 소리가 멈추자 진하령이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피러 나왔고, 싸움이 끝났음을 알게 된 것이다.

진하군과 진하령은 서로 무사한 것을 보며 함께 안도했다.

진하령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소교주는?”

진하령의 물음에 진하군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비사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마만 쳐다보았다. 아직 싸우고 있다는 의미.

진하군이 진하령에게 대답했다.

“오고 있겠지.”

앞서 비사인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믿음의 크기는 비슷했다.

그렇게 모두 가마를 사이에 두고 경계망을 펼쳤다.

한쪽은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 맞은편은 진하군과 멸마대가, 한쪽은 무면객들과 진하령이, 그 맞은편은 한설과 한빙쌍검(寒氷雙劍)이.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모두 뒤로 물러서며 무기를 뽑아 들고 긴장하던 그 순간.

가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가마의 틈새마다 뿜어져 나온 빛은 어둠 속을 번지며 하늘에 닿을 것처럼 뻗어나갔다.

그 강렬한 빛이 훅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스스스스스스.

가마는 재가 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두 놀란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어딜 그렇게 봐! 우린 여기야.”

돌아보니 그곳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검무극과 극악소마였다.

만신창이가 된 겉모습만 봐도 이들이 어떤 싸움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먼저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았다. 있어야 할 사람이 모두 있었다.

검무극의 얼굴에 퍼지는 안도감.

그 표정은 속일 수도, 위장할 수도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고 나서야 검무극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팔이야, 다리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 아니지, 실제로도 엄청 두들겨 맞았구나.”

그제야 모두의 얼굴도 편안해지며 미소를 지었다. 이 너스레야말로 싸움이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자리에 주저앉은 채 검무극이 한설에게 물었다.

“중원에 오신 소감이 어떠시오?”

사람을 초대해 놓고 피투성이가 되어 저렇게 인사하다니? 그래도 그가 무사한 걸 보자 내심 반갑고 기뻤다.

“이번 연회가 피의 연회라는 말씀은 안 하셨던 것 같은데요.”

농담을 잘 하지 않는 그녀의 귀한 농담이었다.

“모름지기 축제에는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녀와 인사가 끝나자 진하군과 비사인이 그에게 다가갔다.

검무극은 지금껏 만난 모습 중에 가장 초췌해 보였다. 정말 모든 힘을 다 쓰고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천마신교 소교주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네.”

검무극의 농담에 비사인과 진하군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래볼까? 하는 눈빛을 교환하자 검무극이 재빨리 말했다.

“농담이야. 내 뒤에 있는 사람 믿고 한 농담!”

비사인의 굵직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다면 정말 기회겠군.”

검무극이 돌아보자 극악소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언제 갔는지 그는 여정에게 가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나오기가 무섭게 저를 버리십니까!”

검무극의 외침에도 극악소마는 못 들은 척했다.

검무극은 극악소마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정을 보니 정말 무사히 돌아왔음을 새삼 실감했다.

여정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어떤 마음의 인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려다보고 서 있던 비사인과 진하군도 검무극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정말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 같은 두 사람이기에, 검무극을 사이에 두고 두 후계자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은 평생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자네가 내공을 끊어주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거네.”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내공을 끊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가마에 연결된 선이 끊어졌는데도 날 도우러 오지 않는 걸 보고 짐작했네. 자네가 그 무한한 내공을 끊어주는 그 순간만 바라면서 싸웠지.”

비사인은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뻤다.

원래 비사인은 나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며 검무극을 놀리려 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그런 농담이 잘 나오지 않았다. 장난도 치는 사람이 쳐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바로 지금의 검무극처럼 말이다. 그 목표는 바로 진하군이었다.

“자넨 지금 아쉬워하고 있지? 이 친구가 진법에 들어가고 자네가 밖에 있었으면, 자네가 내 목숨을 구했을 건데.”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우린 친구 하나 잃었을 거네.”

“사인이는 천괴의 진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다? 지금 우리 소맹주 무시하는 건가?”

“아니. 나는 그거 끊을 생각 못 했을 거라는 말이네.”

그래서 검무극이 죽게 되었을 거란 솔직한 대답이자, 비사인을 높이 사는 말이기도 했다. 체면과 자존심을 중시하던 진하군이었는데, 지금의 눈빛에는 내려놓은 사람만이 보이는 여유가 있었다.

내려놓았기에 두 손이 빈 그였다. 과연 저 손으로 무엇을 다시 잡을까?

“자꾸 자네들이 이렇게 멋있어지면 안 돼! 멋있는 건 내 몫이라고.”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과 비사인이 양쪽에서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진하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

“난 밀실에 숨어만 있었어.”

“그래서 더 고맙다.”

그녀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솔직히 말해봐. 몇 번이나 뛰쳐나오고 싶었어?”

진하령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검무극이 좋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니까. 나와서 싸우는 것보다 밀실에서 숨어 있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니까.

“한 열 번쯤?”

“나보다는 적군.”

“뭐가?”

검무극의 시선이 비사인을 향했다. 어찌 그냥 넘어가나 했다.

“이 느려터진 친구 때문에 내가 애원한 숫자지. 제발 내공 좀 끊어줘! 죽도록 얻어터지면서 애원했지.”

“엄살은! 자네가 그렇게 얻어터졌으면 상대는 가루가 되었겠지.”

“헛! 어떻게 알았나? 정말 가루가 되어 날아갔는데.”

비로소 세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때 검무극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아, 저기!”

모두 고개를 돌려 검무극이 쳐다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서 번져 나온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시공이환술 속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는데, 바깥 현실에서는 처절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고 있었다.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장엄한 일출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천화루주가 나서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덕분에 본루의 모두가 목숨을 구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근에 숨어 있던 기녀들과 숙수들, 일하는 이들이 모두 와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다들 쉬세요. 오늘 저녁 연회는 저희가 성심껏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 한 기녀의 탈출에서 시작한 또 하나의 싸움이 끝이 났다.

* * *

방으로 돌아온 검무극은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채웠다.

정말 이렇게 바닥까지 내공을 써본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정말 완전히 다 써버렸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이주천하고 삼주천하고. 내공을 가득 채울 때까지 반복했다.

내공을 다 채운 후 검무극은 비궤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웃고 있는 비궤를 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고맙다.”

하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암왕의 기운을 삼킨 흑정의 기운도, 또 다른 기운도 애초에 없는 기운처럼 몸속 깊이 잠들어 있었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

비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언젠가 알게 될 날도 오겠지.

비궤를 다시 품에 넣고는 침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운기조식을 하면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지만, 사람에게 잠만큼 좋은 휴식이 어디 있겠는가? 검무극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꿈속에서 어둠 속을 걸었다.

암왕의 그 지긋지긋한 어둠이 아니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자신과 함께한 그 어둠이었다.

어둠이 좋은 점도 있었다. 외로움을 감춰주기도 하니까. 밤에 더 외롭지 않냐고? 꼭 그렇지도 않았다. 때론 환한 세상이 주는 외로움이 더 강력했으니까.

그렇게 어둠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그 어둠의 끝에서 하나의 존재를 만났다.

칠 성의 구화마공이 몇 차례나 실패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재의식이 그를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일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존재는 천마혼이었다.

검무극은 거대한 천마혼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얼굴 윤곽이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잘 보였다. 왜일까? 혹시 이번 암왕과의 싸움으로 구화마공에 성취가 있는 것일까?

―혹시 자존심 상했어?

이렇게 말을 걸어도 천마혼은 언제나 도도한 눈빛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는데 오늘의 반응은 달랐다.

천마혼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내 말을 듣고 있어?

검무극은 그렇게 소리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마지막 말은 잠꼬대처럼 실제로도 소리쳤다.

“……분명 고개를 끄덕였어.”

비록 꿈이었지만 검무극은 천마혼의 반응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잠깐 잤다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가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 있었다.

천화루는 연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벽이 부서지고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지만, 오히려 오늘 이 연회의 운치가 되어 주었다.

천화루 숙수들과 일하는 사람들이 총출동해서 음식을 장만했다. 그들은 목숨을 살려준 은인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요리하고 연회 준비를 했다.

“오늘 밤새 마실 겁니다! 술 많이 준비해 주세요!”

검무극의 말을 받은 사람은 천화루주가 아니라 먼저 와 있던 진하군이었다.

“자네 술 창고 안 가봤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네.”

그러고 보니 진하군과 멸마대는 천화루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위장해서 술을 나르며 일했었다.

검무극이 진하군과 마주 앉으며 말했다.

“아! 기루에서 일한 경험까지 있는 맹주라니! 앞으로 어떻게 상대하라고!”

“모르긴 해도 자넨 더한 일도 했을걸?”

“물론 나는 시종 역할까지도 해봤지.”

그 말에 진하군이 웃었다. 검무극과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게 이제는 편하다. 같이 있다 보니 닮는다고 이런 농담도 하게 되고.

“내가 날라 온 술 한잔 받게, 시종!”

“오늘 여러 번 나르셔야 할 겁니다, 어르신!”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는데 진하령과 한설이 도착했다.

평소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비사인인데, 오늘따라 늦었다.

“형님들 모여 있는데 막내가 왜 이리 늦나?”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이 말했다.

“비 소맹주가 자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텐데?”

“원래 지각하면 막내 되는 거지.”

그때 검무극이 입구를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의외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평소 입지 않는 백의를 단정히 차려입은 비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함께 싸웠으니 함께 마셔야지.

모두의 시선이 비사인에게 집중되었다.

평소 흑의를 주로 입고 다녔던 비사인이 처음으로 백의를 입었기에 절로 눈길이 갔다.

비사인은 걸어오면서 악착같이 검무극의 시선을 피했다.

앉자마자 복장으로 놀릴 것 같았는데.

검무극이 그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내 생명의 은인, 한 잔 받게.”

비사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방심하면 안 돼!’

언제 어떻게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지 모를 검무극이었다.

비사인이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도 고마움을 전했다.

“자네 덕분에 내 명성을 지켰네.”

원래 놈들은 비사인을 이용해서 천화루주를 제거하려 했었다. 검무극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이들의 운명은 더욱 복잡하게 얽혔을 거다.

그때 직접 요리를 가져오던 천화루주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더불어 천화루의 모든 목숨들을 구해주셨죠.”

그녀가 상에 요리를 내려놓았다. 오늘 차려진 상은 정말이지 진수성찬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온갖 산해진미에 좋은 술이 준비되었다.

“참, 그리고 따로 무인분들을 위한 술과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미리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외부에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혹여 불편할까 봐 기루 구석에 정사마 각각 따로, 그랬기에 서로 부딪힐 일은 없었다.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천화루주가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저를 구해주셨는데, 이번에도 또 구해주셨네요.”

그러자 검무극이 자리에 앉은 친구들을 둘러본 후 차분히 말했다.

“우리 루주님께는 제가 없는 생색도 내고 싶습니다만, 이번에는 마정사가 모두 힘을 합쳐서 해낸 일입니다. 풍류주점의 삼자회합이 드디어 결실을 본 순간이지요.”

정사마가 힘을 합쳐 하나의 적을 상대한 역사적인 날이었으니까. 그것도 교주와 맹주들이 아닌, 후계자들의 힘으로 해냈다.

천화루주가 다른 이들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특히 자신을 지켜주었던 진하령에게는 따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마음껏 드세요.”

그녀가 인사하고 물러나자 검무극이 모두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 다시 만난 기념으로 같이 한잔하세.”

검무극이 잔을 들었고 모두 건배했다.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놀자고. 이 술자리가 끝날 때까진 적도 음모도 다 잊어! 우리가 어느 소속인지도 잊어. 그냥 첫사랑 이야기나 하면서 시답잖은 잡담이나 하면서 노는 거야!”

다들 시원하게 술을 비웠다.

비사인의 제 발 저린 전음이 날아들었다.

―오해하지 말게.

―무슨 오해?

―내가 옷을 백의로 입은 건, 전적으로 우연이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갈아입다 보니 백의를 입은 거네.

검무극이 빤히 비사인을 쳐다보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머리 빗질은 직접 한 건가?

움찔한 비사인이 단호히 말했다.

―안 했네!

곧이어 비사인이 넌지시 물었다.

―……이상해?

검무극이 애써 웃음을 참으며 술을 마셨다. 지각까지 하면서 머리 빗질까지 하고 온 그였다. 저 무서운 얼굴에, 그 무서운 사도맹 소맹주지만, 아직 젊은 청춘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오해는 말게.

한설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백의를 입고 나왔을 리 없지. 게다가 빗질까지? 이건 첫인상이 마음에 든 정도가 아니라 첫눈에 반한 정도 아니겠는가?

검무극이 다시 술을 마시려다가 흠칫 놀랐다. 비사인이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난 치기만 해 봐! 그날로 사마대전 발발이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경고했어!

물론 경고는 통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싱글벙글하며 어떻게 놀려야 잘 놀렸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던 바로 그때.

“흰색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모두의 시선이 말을 한 사람을 향했다.

―어라?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비사인은 검무극의 전음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놀랍게도 한설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비사인을 보며 말했다.

“어제 입으셨던 흑의보다 더 잘 어울리신다고요.”

비사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면서 눈동자가 커졌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멍하게 있는데.

―어서 고맙다고 해!

검무극의 전음에 비사인이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맙소.”

“그냥 제 느낌을 말씀드렸을 뿐이에요.”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다시 전음을 보냈다.

―자네가 시킨 거지? 나 놀리려고.

강적과 싸울 때도 떨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 한 소저와 친하지 않다고.

검무극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한설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봤을 때는 사람 관계가 아주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줬었는데. 그때와는 좀 달라진 기분이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가 말한 이유를 덧붙였다.

“본궁 사람들은 대부분 백의를 입어서 백의가 어울리는 사람,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 대해 알죠.”

그녀의 말을 검무극이 받았다.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기왕 말씀 나온 김에 소맹주에게 백의 입는 법에 관해 한마디 조언해 주시죠?”

한설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비사인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제가 어찌 그런 조언을 하겠어요?”

그녀가 정중히 사양하자 검무극이 설득했다.

“아시잖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듣지 못할 말일 거요. 말해 주지 않으면 비 소맹주는 평생 칙칙한 흑의만 입고 다닐 거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는지 그녀는 비사인을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차분히 말했다.

“인상이 강하셔서 오히려 흑의나 적의 같은 강렬한 색의 무복을 입으셨을 거예요. 한데 그러면 오히려 인상이 더 강조되죠. 지금처럼 백의가 아니더라도, 밝고 따스한 색의 옷으로 입으시면 한결 부드럽게 느껴질 거예요.”

비사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색 무복을 입으라는 조언을 듣는 순간이었다.

그 따뜻한 색 무복이 자신에게 어울릴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아니 애초에 그런 무복을 입어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비사인이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씀 고맙소.”

한설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한빙쌍검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짓을 교환했다. 소궁주에게 저런 면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주로 말을 듣고만 있는 그녀였는데.

―궁주께서 들으시면 놀라시겠군.

―안 믿으시겠지.

이 역시 빙궁주가 전혀 모르는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다시 잔을 들었다.

“자, 우리 소맹주의 화사한 무복을 위해서!”

모두 다시 술잔을 비웠다.

잔을 내려놓으며 검무극이 한설에게 물었다.

“한 소저께서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오?”

갑작스러운 물음에 한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비사인이 검무극을 노려봤다.

―하지 말라고!

검무극은 모른 척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처음 듣는 질문이라서요.”

하긴. 빙궁의 소궁주에게 이상형이 누군지 물어본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건 왜 묻는 거죠?”

“친구끼리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니오?”

친구란 말에 한설의 맑은 눈빛이 더욱 빛이 났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저는 듬직한 남자가 좋아요. 말수는 적으면서.”

“너무하시오!”

눈치 빠른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맹주 백의 입으라는 거, 당신이 시킨 거지?

갑자기 이런 자리에 백의를 입고 나타날 리 없었으니까. 술자리에서 미묘하게 흐르는 기류도 있었고.

―그랬지.

―두 사람 이어주려고?

굳이 여자의 촉까지 발동하지 않더라도, 검무극이란 사람을 아니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은 진하령은 자신의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우리 오라버니는!’

검무극이 비사인만 챙겼다는 걸 알고 섭섭해할까 봐 걱정된 것이다.

평소 얼마나 검무극을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이런 걱정도 하는 것이다.

―우리 오라버니도 좀 챙겨주지.

―진 대주는 당신이 챙겨야지. 후기지수들 모임을 이끄는 사람이면서. 여협들 수백 명은 만났지?

순간 진하령은 흠칫했다. 수백 명까진 아니더라도 괜찮은 여협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에게 맞는 여인을 찾아야지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무림맹주가 될 사람인데 나중에 더 좋은 여협을 만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사실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 놓고선 검무극에게 왜 신경 써 주지 않느냐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진심으로 반성했다. 친구라지만 그래도 남인데, 남도 저렇게 신경 써 주고 있는데.

진하령이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진법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이후로 오라버니의 생각이 많아진 것을 느꼈다. 그래, 저렇게 바쁘고 저렇게 힘든데. 언제 여자를 사귈 시간이 있겠는가?

‘그래, 오라버니는 내가 찾아줄게!’

검무극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술자리 분위기를 이끌면서 비사인과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게 앉아서 술만 마시지 말고, 한 소저에게 질문도 좀 하게.

―자네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네.

솔직히 비사인은 한설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외모만으로 봐선 자신의 이상형이었다.

―어차피 안 될 일이야. 빙궁과 사도맹이 이어질 수가 있겠나?

빙궁은 새외신비 세력에 속해 있지만, 정파에 가까운 문파였다.

―자네와 난 어디 이어질 관계라서 친구가 됐나?

―우리와는 다르지.

검무극이 비사인의 빈잔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안 되면 자네 얼굴 때문에 안 되겠지. 어디 사도맹과 빙궁이라서 안 되겠나?

발끈하려다 비사인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맞는 말이야.

―반대로 자네 얼굴 때문에 될 수도 있지.

―무슨 뜻이지?

―내가 예전에 말했잖나? 자네 웃는 모습이 멋있다고. 나처럼 생각하는 여인이면 그 얼굴 때문에 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봐도 정말 무섭고도 사납게 생겼으니까.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아까 백의가 잘 어울린다는 말, 안 해줬을 거네.

비사인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볼지 몰라.

―자네 속셈을 알겠군. 내가 고백했다가 거절당하는 걸 놀리고 싶은 거지?

―물론 그런 마음이 없진 않지만, 자네가 화가 나서 이 좋은 술자리 망치는 걸 뭐가 그리 보고 싶겠나?

비사인이 넘어가면 안 된다 싶으면서도 또 넘어갔다.

―그럼 왜 이러는데?

―강호도 좋고 사도맹도 좋고, 다 좋은데. 우린 청춘이기도 하잖나?

아직 이 청춘들은 알지 못한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하는지.

―나중에 한 소저는 기억날지 몰라도 이 설렘이 어땠는지 기억 안 날걸?

비사인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잘도 저런 말을 하지.

―용기를 내.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춤까지 춘 자네인데.

비사인은 결국 웃고 말았다. 적어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쉬움은 없었다.

―거절당하면 북해 쪽으론 오줌도 안 누는 거야. 전쟁 나면 북해빙궁부터 쳐들어가는 거야! 그땐 본교도 함께 간다!

사실 이 장난스러운 헛소리보다 강력한 유혹은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검무극 말을 들어서 손해 보거나 후회한 적이 없다는 점.

물론 그렇다고 한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이렇게 검무극이 설득하던 추억만으로 충분했다. 나중에 검무극이 자신을 놀리겠지. 그때 내 말 듣지 그랬냐고. 그래,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검무극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아직 밤은 기니까. 자, 분위기 좀 끌어올려 볼까?

검무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밤에 싸운 건 우리들만이 아니지.”

검무극의 시선이 곳곳을 지키고 있는 사도십삼랑과 멸마대, 그리고 저 멀리 담장에 걸터앉아 있는 무면객들을 향했다.

“다 함께 싸웠으니 다 함께 마셔야지. 적어도 오늘만큼은.”

검무극이 손을 내밀자 허공섭물이 발휘되었다.

스르르륵.

구석에 각각 마련된 탁자와 의자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요리가 가득한 탁자들이 빠르게 움직였지만 술 한 방울 쏟아지지 않았고, 수많은 의자들이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늘은 다 같이 모여서 마시죠. 서로 술도 주고받고, 건배도 하고. 오늘 하루 외곽 경계는 필요 없습니다. 맨정신인 우리도 못 이겼는데, 술까지 마신 우리를 어찌 이기겠습니까?”

그 말에 몇몇 무인들이 웃었다. 하지만 소맹주와 멸마대주가 있는 자리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수는 없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오늘 천화루는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돌아보니 극악소마가 입구에 서 있었다. 그 뒤로 무면객들이 늘어서 있었다.

진하군과 비사인은 놀라고 당황했다.

어차피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이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극악소마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할 줄은 몰랐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가면 속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마음껏 마십시오.”

검무극이 진하군과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나섰고, 극악소마까지 나선 이상 더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후, 수하들을 모두 안으로 불렀다.

“자, 오늘은 편히 술을 마시도록! 명령이다!”

천화루 사람들이 술과 요리를 날랐다.

사도십삼랑과 멸마대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예전에도 함께 작전을 펼쳐본 적이 있었기에 그리 서먹한 관계는 아니었다.

검무극이 가서 모두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자, 오늘은 편하게 마시는 겁니다. 고민,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오늘만큼은 우리가 살아남았음을 자축하면서!”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극악소마는 천화루의 제일 꼭대기 지붕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아래로 무면객들이 지붕과 담장 곳곳에 흩어져서 서거나 쪼그리고 앉아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부서진 벽의 구멍으로 달빛이 비쳤다.

그 구멍 안에서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를 외치는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허리에 찬 검이 아니라, 함께 드는 술잔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

나와 바람 좀 쐬시겠소?

한설의 놀람은 계속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피 터지는 싸움 중이고 장력까지 발출해야 했던 건 시기를 잘못 맞춰서 왔다고 치자.

그래, 북해빙궁 소궁주가 정사마 후계자들 앞에서 이상형쯤 말할 수도 있다고 치고.

한데 지금은 정파와 사파의 상징이자 최정예들인 멸마대와 사도십삼랑이 함께 건배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 그것도 극악소마와 무면객이 지켜주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한설이 먼저 한빙쌍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중원이 원래 이런 곳인가요? 제가 배운 중원과는 너무 다른데요?

물론, 농담으로 한 말임을 알면서도 한빙쌍검 역시 자신들의 놀람을 전했다. 사실 놀라기는 그들이 더 놀랐다.

―내가 아는 한 무림 역사에서 정사마가 이렇게까지 격 없이 어울린 적은 없다.

―이럴수록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저들의 음모일지도 모른다, 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음모라고 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거창했다. 한설 하나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들이 모두 동원되었을 리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저들은 너무 진심이었다.

사도십삼랑과 멸마대가 같이 건배하며 술잔을 비웠다. 앞에 있는 사람과는 통성명도 나눴다.

“일랑이네.”

“광효라고 합니다.”

첫잔을 검무극이 따라주었다면 이번에는 비사인과 진하군이 함께 나섰다.

비사인이 멸마대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진하군이 사도십삼랑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술을 따르는 두 사람도, 술을 받는 수하들도 모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다른 무림맹 조직이나 사도맹 조직이었다면 결코 이런 분위기가 연출될 수는 없었을 거다. 서로 술을 마시더라도 기싸움을 하고 언제라도 서로를 공격할 준비를 갖춘 채 긴장하는 자리였겠지.

하지만 멸마대와 사도십삼랑은 자신들의 수장과 함께 검무극의 도움으로 생사의 고비를 극복한 경험이 있었다. 이제는 이들의 우정이 진짜임을 가장 잘 아는 무인들이기도 했고.

다음으로는 원래대로 술을 따랐다. 비사인은 사도십삼랑에게, 진하군은 멸마대에게. 수장을 향한 눈빛에 깊은 충성심과 신뢰가 담겼다.

지금껏 쌓아왔던 감정에 이번 싸움을 통해 단단한 빗장이 채워진 느낌이었다.

사람 관계에서 이 빗장이 채워지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되고 좋은 관계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아니, 대수롭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

그래서였을까? 비사인이 모두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렸다.

“올해로 여기 일랑께서 사도십삼랑에 들어온 지 삼십 년이 되는 해요.”

갑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자 일랑이 당황했다.

하지만 비사인은 모두가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속과 지위를 떠나,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비사인이 술잔을 들자 모두 술잔을 들었다.

사도십삼랑들은 큰소리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고, 멸마대들은 예를 갖춰 술잔을 들어 보이며 술을 마시는 것으로 축하의 말을 대신했다.

진하군이 그들을 대표해서 일랑에게 말했다.

“삼십 년을 한 자리를 지킨다는 건 위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멸마대주의 존중이 느껴졌기에 당사자인 일랑은 물론이고 사도십삼랑들도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그렇게 일랑도 정중히 감사를 전한 후 마지막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냥 단둘이 있을 때 말해줘도 고마웠을 텐데,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챙겨주니 정말 고마웠다. 이건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배운 태도이자 방식이었다.

“제가 태어나서 걸음마를 걸을 때, 일랑은 사도의 길을 걷고 계셨겠습니다.”

비사인의 말에 일랑은 웃었고, 사도십삼랑은 일제히 잔을 들었다.

“십삼사도(十三邪道) 공생공사(共生共死)!”

그들이 크게 소리치며 함께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하군은 느꼈다.

‘자네도 수하들을 똑바로 보고 있구나.’

자신이 진법 안에서 천괴를 죽일 때, 멸마대 수하들을 돌아본 것처럼. 그때 돌아보지 않았다면 수하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으리라.

진하군이 잔을 높이 올리자 멸마대 무인들도 잔을 들었다. 이 자리는 일랑을 축하하는 자리였으니, 기세를 높여 소리치지 않고 눈빛만 주고받으며 술을 마셨다.

예전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배려. 예전이었다면 멸마파사를 저들보다 더 크게 소리쳤으리라.

진하군이 이 순간을 만든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원래 자리에서 한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단합의 분위기에선 자신이 빠져주는 게 옳다고 판단해서였다.

한설이 검무극과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너무 취할 것 같아 입만 대었다가 내려놓았는데, 검무극은 또 술을 다 비웠다. 검무극은 술을 억지로 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술 마시는 걸 말리지도 않았다.

“술을 잘 마시는군요. 취기를 내력으로 빼내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이지 검무극은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 모두와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기분 좋은 취기를 왜 내공까지 써가며 빼내겠소?”

“주량이 상당하시군요.”

“아시잖소? 내 형이 취마존이오.”

예전에 취마와 함께 북해에 왔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며 한설이 물었다.

“언니는 잘 지내나요?”

이곳에 오면 이안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나도 잘 모르겠소.”

“네?”

검무극의 시선이 저 멀리 바깥을 쳐다보았다.

“이안은 혼자 세상에 나가 있소.”

이안을 심장으로 여긴다는 걸 알았기에, 한설은 그녀를 홀로 내보낸 사실이 놀라웠다.

“걱정 안 되세요?”

“걱정이 왜 안 되겠소? 귀신이 돼서 꿈에 맨날 나오고 있소.”

“한데 왜 혼자 내보낸 거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홀로 걸을 줄도 알아야지.”

평범한 말이지만 검무극의 저 말은 자신의 회귀 전 인생이 담긴 말이었다.

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다는 걸, 직접 경험한 그였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설은 가슴이 뛰었다. 자신도 홀로 세상을 걷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아쉽군요. 이번에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보고 가시오.”

“네?”

“이제 본교로 돌아올 때가 되었소. 이미 돌아와 있을 수도 있고. 나와 함께 본교로 갑시다. 내가 그대를 정식으로 초대하겠소.”

대답하기 전에 그녀에게 한빙쌍검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신교는 절대 안 됩니다!

―본궁이 신교를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전음이 그녀의 결정에 힘을 주었다.

―그 첫 시작을 제 중원행에서 하죠.

한설은 천마신교 본단에 가보고 싶었다. 그들도 북해빙궁에 왔으니 자신도 가보는 게 맞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혼자 세상에 나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예전에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어요. 어머니에게 중원은 어떤 곳인지. 그때 이렇게 말씀하셨죠. 가면 돌아오고 싶고, 막상 돌아오면 또 가고 싶은 곳이라고요. 제게 중원은 어떤 곳이 될지 궁금하네요.”

공식적인 초대였기에 그녀는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검무극도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본교가 소궁주님의 중원에 좋은 기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설의 신교행이 결정되었다.

* * *

밤이 깊어지고 술자리도 깊어졌다.

모두들 취했다.

물론, 그렇다고 사도십삼랑이나 멸마대가 서로 실수하는 일은 없었다. 최정예 무인들, 그것도 후계자를 모시는 이들이었기에 술을 마시더라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검무극은 진하군과 비사인과 함께 술을 마셨고, 진하령과 한설은 천화루주와 함께 술을 마셨다. 무슨 대화를 저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몰라도, 두 청춘은 오늘 그녀들 인생에 큰 도움이 될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검무극이 이층 난간에서 연주하고 있던 악공들에게 소리쳤다.

“더 신나는 곡으로 부탁드립니다!”

은은하던 음악이 빨라지며 절로 흥이 났다.

검무극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자 비사인이 먼저 소리쳤다.

“꿈도 꾸지 마!”

하지만 검무극은 본격적으로 발동을 거는 사람처럼, 슬슬 움직임이 커지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한설 쪽을 쳐다보자 비사인이 다시 선수를 쳤다.

“춤 이야기 나오면 그 순간 사마대전 발발이야!”

검무극이 아쉬워했다.

“한 소저가 자네의 춤 솜씨를 보면 더욱 반할 텐데.”

말만 아쉬워했지 몸은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흔들어댈 것만 같았다. 어디 검무극이 혼자만 추겠는가? 진짜 춤꾼은 저기 있다면, 결국 끌려 나가게 될 게 틀림없었다.

궁지에 몰린 비사인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안 말리면 사마대전이 아니라 사정대전이 발발할 것이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진하군은 취기에 오른 얼굴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자네들이 추면 나는 검무라도 추겠네.”

그냥 춤은 못 추더라도 검무 정도야 출 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비사인이 놀란 얼굴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놀리는 건 예상 내의 일이지만, 진하군이 검무를 추겠다고?

“다들 미쳤군! 취해도 너무 취했어!”

진하군까지 합세했으니 검무극의 살랑대는 몸짓에 날개를 달았다. 그는 어떻게든 춤을 추는 분위기를 만들 것이다.

비사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무극이 놀라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추게?”

물론 그럴 리가 있겠나?

비사인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한설에게 말했다.

“나와 바람 좀 쐬시겠소?”

그냥 달아나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그 말에 한설도 당황했고, 진하령은 더 놀랐다.

이 소맹주가 여인에게 산책하자고 한다고?

진하령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억울해!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당신 때문에 소맹주가 이상해졌어.

그녀가 오라버니가 검무 추겠다는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지켜보는 시선을 배려해 준 걸까? 아니면 정말 산책할 마음이 있어서였을까?

가만히 비사인을 바라보던 한설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취기가 올라 답답하던 참이었습니다.”

한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사인과 함께 건물을 나갔다.

물론 비사인에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남자다, 진짜 남자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한숨을 타고 날아든 전음에 검무극의 전음에선 장난기가 빠졌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산책하자고 말할 때의 설렘만큼은 잊히지 않을 거야.

비사인은 안다. 정말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밀어주고 있다는 걸.

―전쟁 나면 신교부터 쳐들어갈 거네! 북해는 무슨!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검무극이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승리의 축배를 들자고!”

과연 승리의 축배일까? 진하군은 걱정스럽게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어울리는 건 옷뿐인데, 말이라도 한마디 제대로 할까 싶었다.

그렇게 둘이서 몇 잔의 술을 마신 후에 진하군이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을 밝혔다.

“이번에 돌아가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생각이네. 나를 후계자로 결정해 달라고.”

검무극이 말없이 진하군의 잔을 채워주었다. 속마음은 편안하게 나왔다.

“지금까지 너무 내 욕망을 감추고 살았어. 그게 협의고 정도라 생각했지. 이렇게 살면 자연스럽게 모든 게 이뤄질 거라고. 한데…… 이 역시 현실도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네. 할아버지께 차기 맹주가 되고 싶다는 내 욕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미루고 또 미뤄온 도피. 그 말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멸마대주가 되어 싸우는 것이 더 쉬웠거든.”

그의 말을 들으며 검무극은 조용히 술을 마셨다.

어쩌면 무림맹주도 마찬가지 마음이지 않을까?

손자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부담감. 평생을 명예만을 추구해 온 무림맹주의 부담.

그는 더 유능한 이가 있는데도 손자를 후계자로 삼았다는 불명예를 감당할 수 없기에, 어쩌면 그도 현실도피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손자가 멸마대주로 오랫동안 활동하다 보면 모두가 인정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검무극은 진하군의 결심이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가장 위험한 관계는 양쪽 모두 욕망에 솔직하지 못할 때다. 이런 관계가 어긋나면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지기 때문에.

“나도 자네의 용암이 분출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네.”

검무극의 응원에 진하군은 힘을 얻었다.

“목숨 걸려고.”

“아니! 아직도 안 걸었단 말인가? 동네 파락호들도 두목이 되려고 목숨을 거는데 무림맹주가 되는 일인데 벌써 걸었어야지! 맹주님께 가서 소리쳐! 이제 후계자 자리 저 주십시오! 혼나면 다음 날에는 가서 아부하고! 그냥 네 훤한 속을 다 보여줘!”

진하군이 웃었다. 그래, 검무극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렇게 힘이 난다.

그때 그들의 눈에 저 멀리 비사인과 한설이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사도맹과 북해빙궁이 손을 잡고 무림맹을 치겠다는 밀담?”

“아까 못 들었나? 쳐도 자네겠지.”

“그럴 리 없지. 두 사람 사이 붉은 실을 매어준 사람이 나라고.”

진하군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러다 저 친구 마음의 상처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그럼 입는 거지.”

검무극이 진하군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나중에 우리 삶을 돌아봤을 때, 적과 싸웠던 기억밖에 없으면 우리 인생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겠어?”

태양처럼, 바람같은.

밤공기는 맑고 찼다.

비사인과 한설은 천화루의 내원을 함께 걸었다.

그녀에게는 이 산책도 놀람의 연장선에 있었다. 빙궁을 출발할 때만 해도 사도맹 소맹주와 단둘이서 달밤에 산책하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거기 발아래 조심하시오.”

지난밤의 싸움으로 천화루 곳곳이 부서져 있었다. 괜히 술 잘 마시고 있는 사람, 이런 곳으로 산책 나오자고 해서 비사인은 내심 그녀에게 미안했다. 춤추라고 할까 봐 너무 대책 없이 나왔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오.”

비사인의 사과에 한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바람 쐬고 싶었어요. 주량보다 술을 많이 마셨어요.”

그녀 역시 얼굴이 취기로 발그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두 사람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근처 지붕에 있던 무면객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한빙쌍검도 멀찌감치 서서 이 자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오늘은 달이 참 밝네요.”

그녀의 말에 비사인도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그런 지독한 어둠이 세상을 덮었나 싶게, 오늘은 달과 별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비사인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말실수 안 하고 멋지게. 그런 욕심이 부담되어서일까? 오히려 말이 잘 안 나왔다.

‘편안하게 대해야 해! 자연스럽게.’

그럴수록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한설이었다.

“이곳에서 보자는 소교주의 서찰을 받았을 때, 솔직히 놀랐어요. 정말 친구들과 만나는 회합에 저를 초대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녀와 친했다면 비사인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사람 놀라게 하는 게 인생의 낙인 친구입니다.

“자기가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친구지요.”

“지난번에 본궁이 소교주의 도움을 크게 받았어요. 소교주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제가 중원에 나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거예요.”

빙궁을 도와서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크게 어머니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자신과 어머니의 그 얼어붙은 관계를 녹였기 때문임을.

한설이 잠시 빙궁주를 떠올리고 있던 사이 비사인은 슬쩍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웠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이안이 훨씬 아름답고, 진하령 역시 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들을 볼 때는 그냥 아름답구나 하는 정도인데, 한설을 보면 마음이 설렜다. 정말 첫눈에 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고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고백이야 할 수 있다. 그다음은?

자신은 사도맹을 이끌어 가야 할 몸이고, 그녀는 북해빙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빙궁주가 이 관계를 허락할 리도 없고. 사도맹주님 역시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 여인에게 신경을 팔 때가 아니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길은 자꾸 그녀를 향했다.

“저기로 가볼까요?”

그녀가 후원 쪽으로 통하는 길을 바라보았다.

“그러시죠.”

두 사람이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동안 비사인은 흥미로운 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솔직히 인정했다.

“미안하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괜찮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비사인은 궁금했다. 그녀의 이상형이 듬직하고 말이 없는 남자라고 했는데. 괜히 검무극 놀리려고 한 말인지, 진심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은 담장 일부가 무너진 곳 앞에 멈춰 섰다.

“어떤 악당 놈이 이 아름다운 담장을 무너뜨렸을까요?”

안타까운 그녀의 말에 비사인이 움찔하는 얼굴로 말했다.

“나요.”

“네?”

“내가 이곳에서 싸우다 무너뜨렸소.”

그녀가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하필이면 비사인이 무너뜨린 곳이었다.

한설이 다시 무너진 담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쪽에 문을 내면 좋을 것 같네요.”

그 말에 비사인이 웃었다. 한설도 따라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 비사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흰 눈을 바라보는 환한 느낌이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덕분에 어색함이 가셨다.

“참, 천마신교로 초대받았어요.”

비사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의 소궁주를 초대했는데, 그냥 보내진 않을 것이다.

“가면 재미있을 거요.”

솔직히 자신도 따라가고 싶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갑시다!’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 말을 확 내뱉으면 검무극에게 하듯, 여러 농담이 이어질 수도 있을 텐데.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천화루 건물을 두고 한 바퀴 돌았다.

‘아, 벌써!’

비사인은 너무 아쉬웠다. 자신은 뭐 하나 제대로 말한 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그 어색한 산책을 한 바퀴 더 돌자고 할 수도 없었다.

“즐거웠소.”

“저도 즐거웠어요.”

한설이 다시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는 건물로 걸어갔다.

“한 소저.”

“네?”

비사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가끔은 따스한 색깔의 무복도 입어보겠소.”

비사인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끼며 한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잘 어울리실 거예요.”

그렇게 돌아서려다가, 그녀가 덧붙였다.

“참, 그리고 신교에는 언니 만나러 가는 거예요.”

그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비사인은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다가 지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만들 훔쳐보고 나오게.”

그러자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검무극과 진하군이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지붕 끝에 걸터앉았다.

“우린 앞으로 사도맹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맹주가 될 사람이 저리 눈치가 없으니. 어휴, 정말 속 터져서 죽을 뻔했어.”

비사인은 검무극을 상대하지 않고 진하군에게 말했다.

“저 친구야 원래 그렇다지만, 자네까지 왜 이러나?”

진하군이 멋쩍게 웃었다. 무슨 말 나누는지 엿들으러 가자며 검무극에게 끌려 나왔지만, 그렇다고 정말 강제로 끌려 나왔겠는가? 솔직히 재미있을 거 같아서 왔다.

검무극이 그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우리 진 대주도 가끔은 일탈을 즐겨야지. 매일 어떻게 협객으로 사나?”

“일탈이 아니라 나쁜 친구에게 휩쓸려 타락해가는 모범생 학동 같은데?”

“이렇게 말을 잘하면서? 아까 좀 이렇게 하지!”

검무극이 가져온 술병을 내보였다.

“자, 이리 올라와! 내가 여자에 대해 알려주지! 여자란 무엇인가?”

“됐네. 자기 심장이 어딨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강론은 듣고 싶지 않네.”

비사인이 훌쩍 몸을 날려 처마 끝에 함께 앉았다.

속이 탔는지 술병 채로 꿀꺽꿀꺽 마신 후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 함께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떨렸다. 그녀는 이 산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괜히 불러내 다 망쳐버린 건 아닐까?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나 당신 마음에 들었소. 이 말이 그렇게 어려웠나?”

“그다음은?”

이 검무극이라면 어떤 대책이 있을까? 답을 줄 수 있을까?

이번에는 검무극이 병 채로 술을 마셨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야지. 내일 비 올까 봐 걱정돼서 오늘부터 도롱이를 입을 필요는 없잖아?”

진하군은 옅게 웃었고 비사인은 검무극이 들고 있던 술병을 가져와 마셨다.

“자기 일 아니라고 말은 쉽지.”

“그래서 그 말에 귀를 기울여야지. 그 쉽게 하는 말에.”

술을 마시던 비사인의 손길이 멈췄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검무극이 대답했다.

“자네 마음속은 지금 너무 복잡할 테니까.”

맞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오만가지 걱정이 다 떠올랐으니까.

멈췄던 술병이 다시 기울어졌다. 자신도 어떤 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게. 아직 자네들 사이에 붉은 실은 끊어지지 않았어. 내가 천잠사로 이었거든.”

그때 멀리서 첫닭이 울며 새벽 여명이 뿌옇게 세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 밤도 다 지나가는구나.”

세 사람은 아쉬웠다. 날이 밝으면 또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마음 같아선 몇 날 며칠 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다들 중요한 사람들이고,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화루를 정비해야 했고.

“아! 더 놀고 싶다! 계속 놀고 싶다!”

검무극의 외침이 모두의 마음을 대신해서 새벽 공기를 갈랐다.

* * *

다음 날 아침, 천화루주는 마지막 식사를 대접했다.

지난밤 다들 과음했는데, 그녀가 정성껏 끓여준 해장국은 너무 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아쉬운 작별을 했다.

세 친구들도 친구들이지만, 수하 무인들도 아쉬워했다. 그들은 알았다. 앞으로 살면서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을 것임을. 오히려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 순간이 먼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검무극이 진하군과 비사인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위험에 빠지면 지체하지 않고 부르는 거다. 알지? 위험하다고 안 부르는 건 우정 아니라는 것.”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이 작별의 농담을 던졌다.

“우리가 싸웠던 그런 징글징글한 놈이 또 나타나면 자넬 꼭 부르겠네.”

검무극이 움찔하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럴 땐 진 대주부터 불러도 좋고.”

비사인은 그렇게 두 친구와 인사하고, 극악소마에게도 정중히 감사를 전했다. 어제 그들이 지켜준 덕분에 수하들과 회포를 풀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그에게 가장 아쉬운 이별은 한설이었다. 물론 겉으로 전혀 표 내지 않았다.

“중원 구경 잘하고 돌아가시길 바라겠소.”

“감사해요. 소 맹주께서도 보중하세요.”

돌아서려던 비사인이 불쑥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본 맹에 들르셔도 좋소. 인근에 풍광 좋은 곳이 꽤 있소. 인근에 와서 기별하시면 내가 나가겠소.”

빠르게 말을 뱉은 후에 그가 돌아섰다. 할까 말까 했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린 것이다.

‘아, 사고 쳤다.’

돌아선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있는 데서.

당황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그는 그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너무 걸음이 빨라 사도십삼랑도 당황해서 빠르게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때 뒤에서 한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죠.”

순간 비사인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한설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돌아갈 때 들르죠.”

비사인은 너무 기뻐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한설은 그 표정에서 비사인의 감정을 읽었다.

“그럼 그때 뵙겠소.”

비사인도 그렇게 사도십삼랑과 함께 떠났다.

검무극은 그에게 전음을 보내 놀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 이 행복감을 온전히 느끼라고.

대신 진하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고 보면 바람둥이인데, 우릴 속이는 거 아냐?

그 전음에 진하군이 웃었다. 자신이 볼 때, 셋 다 바람둥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무극이 진하군과도 작별했다.

“좋은 소식 기대하겠네.”

진하군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뜻하리라. 그래, 자신도 그 소식을 검무극과 비사인에게 전해주고 싶다.

“설령 나쁜 소식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네.”

두 사람의 작별을 말없이 지켜보는 사람은 진하령이었다.

그녀도 아쉬웠다. 마음 같아선 한설과 함께 천마신교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괜히 검무극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그때 동떨어져 서 있던 그녀에게 천화루주가 다가왔다.

“진 소저.”

“아, 루주님. 어제 좋은 말씀 감사했어요.”

“저도 오랜만에 즐거웠어요.”

어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화루주는 검무극에 대한 그녀 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챘다. 아니, 진하령이 취기를 빌려 일부러 감정을 드러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다. 주변 사람이 아니라 한 번 보면 또 안 볼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검무극과 진하군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진하령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술자리에서도 하지 않았던 말을 이 작별의 순간에 불쑥 꺼냈다.

“지금까지 저는 항상 주인공이었어요. 무림맹주의 손녀에 호북일미, 어딜 가도 항상 중심에 섰죠. 제가 말하면 귀를 기울이고 모두 저만 보았지요. 지금도 그래요. 한데…….”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어제 술자리 내내 주인공 주변을 맴도는 조연이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못 할 말이었다. 한데 이 천화루주에게는 이상하게 속에 든 말이 편하게 나왔다. 어제부터 느꼈지만, 그녀가 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천화루주가 물었다.

“소교주를 보면 어때요? 주인공 같나요?”

“저 사람이야 항상 주인공이죠.”

“과연 그럴까요?”

“네?”

진하군과 인사를 마친 검무극이 멸마대 무인들과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멸마대주가 너무 멋있어져서 부담스럽다며 그들에게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순간 진하령은 천화루주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주인공이 되게 해주려고 애쓰고 있구나.’

생각해 보니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서대룡의 시종이었다.

“그는 태양처럼 보이지만, 저는 소교주가 바람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득 진하령의 마음에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검무극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런 심상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화루주가 진하령을 쳐다보았다.

“만약 진 소저께서 바람과 함께 하는 여행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많이 힘들 겁니다. 하지만 그건 예쁜 심장 때문도 아니고, 서로의 신분 때문도 아닐 거예요. 바람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겠죠.”

진하령은 떨리는 눈동자로 말없이 천화루주를 응시했다. 갈피를 못 잡던 복잡한 마음에 어떤 이정표가 되어 주는 말이었다.

“다음에 또 놀러 와도 되나요? 그땐 저 혼자서요.”

“언제든지요.”

진하령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는 진하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이별이 너무 길다! 어서 가자.”

그리고 검무극에게도 씩씩하게 말했다.

“한 소저 잘 모셔!”

한설에게도 큰소리로 작별했다.

“한 소저, 중원 남자들이 다 저렇게 수다스럽지 않답니다. 오해 마세요!”

그렇게 진하군과 진하령, 그리고 멸마대도 천화루를 떠났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작별.

극악소마와 무면객들은 천화루에 남겠다고 했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저는 천화루에 조금 더 머물다가 돌아가겠습니다.”

극악소마는 남아서 부서진 천화루 건물을 재건하고,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나름의 방비를 세울 것이다.

극악소마가 깨끗이 빤 극품천잠사를 돌려주었다. 검무극이 흑마검 손잡이에 그것을 감으며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도 우린 살아남았군요.”

그러자 극악소마에게서 흘러나오는 나직한 진심.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검무극도 그에게 진심을 전했다.

“소마님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검무극이 마존을 대하는 예의로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본교에서 뵙겠습니다.”

그러자 극악소마 뒤에 늘어선 무면객들도 일제히 소교주를 대하는 예의로 일제히 인사했다.

그들의 가면 속 눈들이 웃고 있었다. 호의 가득한 눈빛들. 이번 여정에서 얻은 수확에 무면객들도 빠질 수 없으리라.

모두와 작별한 검무극이 한설에게 돌아섰다.

“자, 이제 중원에서 가장 맵고 자극적이고 위험천만한 맛을 보러 가실까요?”

마인은 헤어지지 않는다.

서대룡은 단씨 자매들과 함께 안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계속 치료한 덕분에 그녀들의 부상은 거의 다 나았고, 이제 검무극의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동안 단아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서로의 과거 이야기들부터 무공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그러면서 서대룡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여자다!

만약 단아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고백은 하지 못했다. 천마신교 안가에서 부상을 회복하고 있는데, 상대에게 그런 고백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목숨을 담보로 한 압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문제는 다 나아도 마찬가지란 점이었다. 상대가 천마신교의 각주인데.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그래서 이 관계가 참 어려웠다. 차라리 정체를 모르고 시를 읊어줄 때가 정말 좋았었는데.

그날 오후 안가 무인이 전서를 전했다.

전서 내용을 확인한 서대룡이 환한 얼굴로 단씨 자매를 찾아갔다.

“소교주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놈들을 다 처리하셨습니다.”

단아 자매들의 기뻐했다. 막내 단연은 환호성까지 질렀다.

“이제 여러분들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이내 단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 소식은 곧 서대룡과의 이별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장내를 흐르는 침묵.

솔직히 단아는 서대룡을 따라나서는 삶도 생각해 봤다.

황천각주이면서 시화집을 읽는 사람.

우울하고 어두웠던 과거를 솔직히 말해주는 사람, 그리고 그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참 순수한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함께 인생을 꾸려나가도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들과 헤어질 수 없다. 지금껏 셋이 힘을 합쳤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빠진다면? 동생들이 이 무림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매일 동생들 걱정에 행복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고 동생들까지 마인이 되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건 너무 큰 운명의 변화였으니까.

“저희는 이만 떠나겠어요.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대룡은 당황했다. 그녀와 함께 천마신교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었는데. 그녀는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이별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단아가 애틋한 눈빛으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저는 동생들을 지켜야 해요.’

지난 며칠간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았다. 동생들을 위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서대룡은 아쉬운 마음에 왈칵 눈물이 나려 해서 딴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대룡의 눈물에 단아도 눈물이 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신이 슬퍼하는 걸 보면 동생들이 마음 아파할 것이다.

“정말 감사했어요, 서 각주님.”

그녀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서대룡은 지금 그녀를 보내면 영원히 끝이라는 걸 알았다. 다시 만날 인연이라면 지금도 잘 될 인연일 거다. 지금 잡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애원해서라도.

바로 그때였다. 막내 단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린 짐 쌀게, 언니.”

두 동생이 곧장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랄 것도 몇 가지 없지만, 이것저것 혁낭에 챙겨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단아를 잡으려던 마지막 용기가 꺾였다.

섭섭함이 밀려들었다.

두 동생과도 친해졌다. 아니, 친해졌다고 착각했다.

형부, 형부 불러줬던 막내 소저의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물론 장난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장난에 취해 상황을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여자야!’

약한 마음이 들자 대번에 악귀가 귓가에 속삭였다.

―저런 멋진 여자가 널 좋아할 리가 있겠냐? 신교의 각주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척한 거지. 너 바보냐? 시 한 번 읊었다고 될 줄 알았냐고? 동경을 봐! 네 꼴을 보라고!

단아는 서대룡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먼저 방을 나섰다.

“부디 큰일을 해내시기를!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단아가 방을 나갔다.

‘그래, 내 주제에 무슨 남자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동생들하고 서로 도와가며 이 모진 강호에서 살아남는 거다. 지금까지도 남자 없이 잘 살아왔다.

그녀가 안가 문을 막 나가려던 그때였다.

“어디가?”

뒤에서 그녀를 부른 사람은 막내 단연이었다.

단아가 돌아보자 단비와 단연은 마차 옆에 서 있었다.

“이거 타고 가야지.”

“뭐?”

단연이 뒤따라 나와 멍하게 서 있던 서대룡에게 말했다.

“신교에 이 마차 타고 가실 거죠?”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대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연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둘째 언니와 저, 마교에 투신하고 싶어요.”

서대룡은 물론이고 단아까지 깜짝 놀랐다.

“저희를 받아주실 수 있나요?”

당황한 서대룡이 단아와 두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아가 재빨리 서대룡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동생이 장난치는 거니까.”

“장난 아니야, 언니.”

“그만해! 농담이라 해도 서 각주님께 실례되는 말이야.”

단연의 표정은 진지했다.

“우리, 농담 아니라고.”

그때 둘째 단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꼭 언니 때문만은 아니야.”

모두의 시선이 단비를 향했다.

“낭인으로 사는 것, 이제 힘들고 지쳤어.”

단아는 동생이 진심으로 말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둘째는 이런 일로 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정착해서 살고 싶어.”

단아는 단비의 마음을 이해했다. 여자 셋이서 낭인으로 살아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으며, 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자신이야 동생들 챙기는 의무감으로 고생이 고생인 줄도 몰랐지만, 동생들 마음은 또 달랐을 거다.

“돈 모아서 정착하는 게 우리 목표였잖아? 이제 그때가 된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아가 막내를 바라보았다. 네 생각도 그렇냐는 눈빛에 단연은 대답을 질문으로 대신했다.

“우릴 받아주실 수 있나요?”

서대룡은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런 동생들에게 잠시나마 섭섭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막내 소저, 내가 권위가 없어 보이는 외모라서 잘 모르겠지만, 황천각주는 꽤 높은 자리야.”

겸손하게 말해서 ‘꽤’라고 했지, 황천각주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단연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말했다.

“오늘부터 마인 첫날입니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단비도 미소를 지었다.

단아는 알고 있었다. 힘들고 지친 것도 사실이지만, 마인이 되려는 결정은 자신 때문이란 것을.

“정말 괜찮아? 앞으로 마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녀의 차분한 질문에 단비가 대답했다.

“우린 밑바닥부터 낭인으로 살아남았어. 마인으로는 못 살까?”

단연도 낙천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너무 힘들면 셋이 야반도주하면 되지! 우리가 또 도망은 끝내주게 치잖아?”

웃으라고 한 말인데 단아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동생들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단비가 결정적인 말을 했다.

“너무 큰 희생은 우리에게 부담이야. 나중에 우리가 떠나야 할 때가 되면 그땐 어쩌라고? 우릴 위해서라도 그러지 마. 다 알아서 잘 산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단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결정을 내렸음을.

서대룡은 ‘제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안 되겠어요, 이런 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단아가 크게 심호흡한 후에 힘차게 말했다.

“서 각주님, 단씨삼매는 천마신교에 투신하겠습니다!”

순간 서대룡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너무 기뻐서 고함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천마신교에 교도가 세 명이 늘어나는 순간이 아니다.

자신을 남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여인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천마신교에 투신까지 하면서 말이다.

평생 여자에게 선택받은 일이 없던 자신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여인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 것이다.

“저에 대해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저라도 좋습니까?”

그러자 단아가 특유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저에 대해서는 다 모르실 거예요. 숨겨둔 나쁜 면도 많을 거고요. 이런 저라도 괜찮으세요?”

서대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듣고 있던 막내가 말했다.

“무르시면 안 돼요, 형부!”

형부란 말에 서대룡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절대 무르지 않을 거야, 처제.”

모든 용기를 다 써서 처음으로 처제라는 말을 썼다. 서대룡의 귓불이 빨개졌다.

그때 단비가 무심하게 말했다.

“한데 저렇게 좋다가 헤어지면 어쩌지?”

그러자 막내가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우리 마인은 헤어지지 않는다. 죽일 뿐이지!”

서대룡이 손사래를 쳤다.

“오해야! 본교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단비와 단연이 마차에 먼저 올라탔다.

서대룡이 단아에게 진심을 전했다.

“내가 평생 지켜주겠소.”

단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는 서로 지켜야죠.”

서대룡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정말 꿈만 같았다. 어서 검무극을 만나서 자랑하고 싶었다. 이안이랑 장호 앞에서 밤새 자랑하고 싶었다.

단아가 마차에 타기 위해 서대룡을 스쳐 지나가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저는 죽일 거예요.”

“네?”

놀라서 돌아보니 막내가 웃으며 말했다.

“무르기 없다고 분명 말했어요!”

마차에 탄 세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은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처음 사부를 만나러 출교할 때는 혼자였는데, 이제 넷이 되어 돌아간다.

서대룡이 마부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우리 처제 때문에라도 안 무른다.”

* * *

또 다른 운명을 실은 마차도 천마신교를 향해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달려가는 내내 한설의 호위를 책임지는 한빙쌍검은 긴장하고 있었다.

온갖 암투와 음모가 난무하는 중원 무림도 위험한 곳인데, 하물며 천마신교라니!

천마신교만은 안 된다고 말렸지만, 한설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한빙쌍검이 그녀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이유는 검무극 때문이었다. 검무극이 북해빙궁의 큰 은인이자, 빙궁주의 신임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

―괜찮을까요?

―우리가 잘 지켜야지.

한빙쌍검은 부부였다.

남편은 사한(司寒), 부인은 소빙(邵氷). 한빙쌍검이란 이름은 이름을 따서 지은 별호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부부로 북해 무림에서 활약한 고수들이었다.

북해빙궁의 궁주가 이들을 신임하는 이유는 그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아주 오랫동안 금실 좋은 부부로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부부라면,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천마신교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검무극은 풍경 좋은 곳에서는 꼭 마차를 세우게 해서 한설에게 보여주었다.

“굉장해요.”

꺾어지는 절벽을 올려다보며 한설이 감탄했다. 정말 이런 압도적인 절경이었다.

그렇다고 꼭 이런 절경만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이름난 고수들이 싸운 무림의 역사적인 장소라든지, 북해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장소라든지.

“들었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오. 나는 한 소저의 이번 중원행이 많은 걸 보는 여행이 되길 바라오.”

한설은 확실히 검무극의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누군가를 북해빙궁에 초대했다면 어서 가서 빙궁을 보여주려 했을 거다. 빙궁은 이렇게 화려하고, 멋지고, 이렇게 강하다.

하지만 검무극은 신교에 초대했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첫 중원행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이 많은 것을 보고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 따라 해보시오! 많이 보고 간다!”

한설이 머뭇거리자 검무극이 말했다.

“생각만 하는 것과 입 밖으로 내는 것도 다르오. 자 따라 하시오.”

계속된 재촉에 결국 못이기는 척 한설이 말했다.

“많이 보고 간다!”

또 달리다가 요리 솜씨가 좋은 숙수가 있는 객잔이나 반점에도 반드시 들렀다.

그럴 때는 주로 한빙쌍검을 챙겼다.

“이 요리는 두 분이 좋아하실 겁니다.”

“우린 신경 쓸 필요 없으시네.”

“소교주와 소궁주 입맛에 맞는 음식을 드시게.”

그들의 사양에 검무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야 젊어서 돌도 씹어 먹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검무극의 시선에 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 짧은 그녀가 돌도 씹어 먹는 청춘이 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대접한 요리들은 한빙쌍검의 식성에 잘 맞는 것들이었다.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모두 북해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중원에서의 미식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래도 마인은 마인이니 조심합시다.

―맞소. 저렇게 사람 좋은 얼굴로 있다가 언제 돌변할지 모를 일이오.

―특히 독을 조심합시다.

처음에는 이런 전음을 매번 주고받았는데, 점차 그 빈도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오늘은 어떤 요리일지 궁금하다는 전음을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 검무극의 입에서 기쁨의 외침이 들렸다.

“드디어 돌아왔다!”

마차가 마가촌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가촌입니다. 마가촌 구경도 할 겸 걸어서 가시죠?”

그녀는 긴장했다. 마가촌에 대해 어려서부터 들은 소문들이 있다. 천마신교 본단 앞에 마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는데 그 이름이 마가촌.

그곳에 들어가서 온전한 몸으로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고 했다.

누군 두 팔이 잘렸고, 누군 미치광이가 되어 나왔다더라, 인육으로 만두를 해 먹는다더라, 저주받은 마존들 인형을 판다더라, 그야말로 온갖 무서운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다.

사악한 눈빛을 품은 자들이 길을 오가고 있을 것이고, 술에 취한 자들이 벽에 기대앉은 채 음침한 눈빛을 보낼 것이다. 물론, 소교주가 옆에 있으니 감히 대놓고 시비를 거는 자들은 없겠지?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최대한 참아주세요!

한설이 한빙쌍검에게 전음을 보낸 후 검무극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드디어 그녀가 처음으로 천마신교 앞마당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전부 다 사면 삼 할을 깎아드려요!

“여기가 마가촌이라고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한설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예상한 장면이 아니었다.

깨끗한 거리 양쪽으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수많은 행인이 오가고 있었다.

한탕을 노리는 사악한 눈빛을 지닌 자들도,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자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을 거 같은 골목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정말 마가촌이냐는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은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소교주님!”

입구에 있던 약초 파는 상인이 달려 나오더니 반갑게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장사 잘되시오?”

“덕분에 잘되고 있습니다.”

한설은 솔직히 놀랐다. 신교의 소교주에게 저렇게 허물없이 인사를 한다고? 저잣거리의 일개 상인이?

물론,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곳 마가촌에서의 인기만큼은 검무극이 천마보다 더 높다는 것을. 이곳이 이렇게 살기 좋은 마을이 된 것은 모두 검무극의 노력 덕분이었으니까.

한빙쌍검 중 소빙이 재빨리 한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뒤로 물러나세요! 독초들일지 모릅니다.

―설마 독초들을 약재 팔 듯 저렇게 내놓고 팔겠어요?

―그러니까 마교지요.

검무극과의 미식 여행으로 마음이 많이 풀어졌었는데, 이제 마가촌에 도착하자 그들은 다시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만에 하나라도 한설을 노리는 자가 있을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소교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너편에 농기구를 파는 상인도 나와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조심하세요. 농기구로 위장한 암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길거리의 돌멩이도 조심하라고 할 태세였다.

그때 한빙쌍검 중 남편인 사한이 한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궁주님 온다고 조작한 거리입니다. 미리 전서를 보내 정리했겠지요.

한설이 상인들의 표정을 살피며 전음으로 답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 상인들이 소교주를 너무 반가워하는데요?

―연기하는 겁니다.

한빙쌍검은 검무극은 믿어도 마인은 믿지 않았다.

검무극이 북해빙궁에 큰 도움을 줬고, 또 그가 마인답지 않은 성품을 지녔다는 것까진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던 마교가 있다. 그 사나운 사도맹조차 한 수 접게 만드는 난폭함과 냉혹함을 지닌 그 마교 말이다.

한 명의 사람도 쉽게 바뀌지 않는데 그 큰 조직이 쉽게 바뀌겠는가?

그래서 사한은 이렇게 추측했다.

―이곳은 마교 본단을 지키는 첫 관문일 겁니다.

―관문이라고요?

―분명 곳곳에 마인들이 잠복해 있을 겁니다. 수상한 이가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본단에 연락이 가겠지요.

한설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검무극은 자신을 속이려고 상인과 친한 척 연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곳이라면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갔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한빙쌍검의 의심도 이해했다. 그녀조차도 이 생각지 못한 분위기에 많이 놀랐으니까.

‘무림맹 앞도 이렇게 밝은 분위기는 아닐 거 같은데? 정말 조작한 거리일까? 이 많은 사람을 동원해서 우릴 속이는 걸까?’

검무극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만두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를 보자 그녀는 마가촌의 소문이 떠올랐다.

‘정말 저 만두 속에 인육이 들어가 있을까?’

그렇다고 하기에 중년 주인장은 너무 사람 좋은 얼굴이었고 만둣집 안에는 손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그녀가 만두를 쳐다보고 있자 검무극이 만두를 권했다.

“여기 맛있소. 만두 맛 좀 보시겠소?”

“괜찮아요.”

한설은 혹여라도 먹어보라 할까 걸음을 빨리했다.

포목점에서 옷을 고르는 이들도, 과일상과 미곡상의 주인장과 점원도 모두 검무극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많이 파시오!”

그때마다 검무극은 일일이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모습이 한설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검무극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임은 잘 알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어머니인 빙궁주를 상대할 때, 자신을 상대할 때, 또 무림맹이나 사도맹의 후계자들을 상대할 때 발휘되는 일종의 전술이라 여겼다. 당연히 그 친절에는 의도가 숨어있겠지. 보통 사람은 알면서도 하기 힘 드는 일이니까 대단한 거였고.

하지만 검무극은 상인들을 대할 때도 똑같이 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북해빙궁 소궁주나 다른 후계자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상점 주인을 대하는 모습이 어찌 같을 수가 있지? 아니 오히려 상인 쪽을 대할 때 더 다정한 느낌이었다.

‘정말 두 어르신 말씀대로 위장된 거리인가?’

오죽하면 이런 의심이 들었겠는가?

그때 한설 눈에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을 파는 행상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있었구나! 마존 인형을 파는 사람이!’

정말 가판을 펼쳐놓고 마존 인형을 팔고 있었다.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냥 무서운 모습의 인형을 마존 인형이라 한 줄 알았는데.

정말 마존 모습을 그대로 본뜬 인형이었다. 취마와 직접 만나봤기에 똑같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천마 인형까지 있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무림맹 앞에서 무림맹주 인형을 팔아도 끌려갈 것 같은데.

인형을 팔던 염소수염의 상인이 그녀에게 호객했다.

“중원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파는 겁니다! 마존들을 전부 다 사시면 삼 할을 깎아드립니다!”

그때 행상이 그녀 뒤에 있던 검무극을 알아보았다.

“아, 소교주님!”

“잘 지내셨소?”

한설은 상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는 걸 보았다.

‘저 표정이 연기라고?’

그렇다면 중원의 배우란 배우들은 여기 다 모인 것이리라.

한설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정말 이걸 팔아도 된다고 교주께서 허락하신 건가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의 도량이 얼마나 넓은지는 이 한 가지만 봐도 알 수 있소.”

사한의 전음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소문처럼 저주를 심어둔 인형일지도 모릅니다. 위급한 상황에 저 인형이 스스로 움직여서 상대를 공격할지도 모르고요.

그에게 한설이 전음을 보냈다.

―그런 인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멋있고 귀엽네요.

사다가 장식장 위에 올려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염소수염이 검무극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소교주님을 뵙는군요. 그러잖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로요?”

“이제 곧 소교주님 인형도 나올 겁니다.”

“오! 드디어 내 인형도 나오는군요!”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었으니, 이제 검무극의 인형도 출시하려는 것이다.

“혹시 원하시는 자세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분들은 여쭙지 못하고 임의로 만들었지만, 소교주님께는 여쭤보고 만들려고요.”

한설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로 이곳의 상인들이 검무극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를. 감히 저런 말을 어찌 물어볼 수 있겠는가?

“알아서 만들어주세요. 그저 멋있으면 됩니다. 저기 딱 놓아두면 제일 먼저 손이 가게끔! 아시죠?”

검무극이 짐짓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보다도 더 멋있게요.”

염소수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님은 제일 못 만들어도, 제일 많이 팔릴 겁니다.”

검무극이 한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인형 하나 사시겠소? 어떤 게 마음에 드시오?”

그러자 한설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전부 다 주세요.”

그와 동시에 한빙쌍검이 동시에 전음을 보냈다.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물론, 그들 말을 잘 듣는 그녀였다면 애초에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으리라.

“다 사면 삼 할 깎아주신다고요?”

그녀의 말에 염소수염 상인이 포장부터 하면서 말했다.

“잘하신 선택이십니다! 세워놓고 보시면 정말 집안이 환하게 빛날 겁니다. 손님들은 어디서 샀느냐고 다 물어볼 겁니다.”

여전히 고개를 내젓는 한빙쌍검을 보며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교에 놀러 왔는데 기념품 하나는 사 가야겠지요?”

다른 상점의 물건들이야 어디에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인형들은 오직 마가촌에서만 파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 사한이 앞으로 나섰다.

“그 전에 우리가 한번 살펴보겠네.”

사한이 싸고 있던 인형들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형이었다.

“됐네.”

염소수염이 다시 포장을 시작했고, 검무극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느 게 제일 마음에 드오? 취마님은 이미 한 번 보셨으니 제일 친밀감이 들지 않소?”

하지만 그녀가 고른 건 뜻밖에도 권마의 인형이었다. 인형 중에서 제일 크고, 제일 무섭게 생긴 그것을 고른 것이다.

검무극이 그녀의 취향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 소저가 무서운 얼굴을 좋아하는 건 알겠소. 아, 말수 적은 남자 좋다는 말도 사실이었구려.”

팔마존 중에 말수 적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울 권마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염소수염 상인이 잘 포장해서 그녀에게 건넸다. 검무극이 선물로 사주겠다는 걸, 그녀가 직접 돈을 냈다.

“다음에 소교주님 인형이 나오면 그때도 애용해 주십시오!”

“다시 올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재빨리 말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요?”

“인형 하나 사러 여기까지 오라고요?”

“어디 내 인형만 생기겠소? 당신 인형이 생길 수도 있고, 황천각주 인형도 생길 수도 있을 거요.”

그래, 이 사람이라면 이 염소수염 행상의 인형도 만들라고 할 사람이다.

함께 팔리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명예가 실추되지 않을까?

검무극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아마 저 천마와 마존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랬으니 이렇게 계속 팔리고 있었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자신이었다. 자신은 급이 맞지 않은 인형과 함께 팔리는 것을 싫어했을 테니까.

그녀는 이 인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이들도 가지지 않은 그런 허세와 쓸데없는 권위주의를 자신은 가지고 있음을.

‘저주받은 인형 맞나보네요. 이렇게 가슴을 아프게 찌르는 걸 보니까.’

원래 남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아왔던 자신이었는데. 이 사람과 있다 보면 혼자만의 세상에서 자꾸 끌려 나오게 된다.

그때, 길 건너 주점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소교주님!”

지금까지 봤던 상인 중에서 가장 검무극을 반가워했다.

그는 바로 풍류주점의 주인장 조춘배였다. 소교주가 마가촌을 걷고 있다는 소식을 손님을 통해 듣고 달려 나온 것이다.

“넘어지시오, 천천히 오시오.”

“소교주님! 오셨습니까?”

정말이지 조춘배는 너무 반가워했다.

그녀가 한빙쌍검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제 그들에게서 이게 다 연기라는 전음은 날아들지 않았다.

“주인장, 잘 계셨소?”

“그럼요, 그럼요. 저야 잘 지냈습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 출교는 꽤 길었기에 조춘배는 내심 검무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주인장께서는 더 마르신 것 같소.”

검무극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조춘배가 어이쿠, 이러지 마십시오,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검무극이 한설에게 조춘배를 소개했다.

“여긴 내 단골 주점의 주인장이시오.”

빙궁의 후계자인 그녀 인생에서 주점 주인장을 소개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여긴 북해빙궁의 소궁주시오.”

북해빙궁이란 말에 조춘배가 화들짝 놀랐다. 북해빙궁은 무림맹과 사도맹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다. 술꾼들에게 북해빙궁은 가장 신비로운 문파였으니까.

“어이구, 귀한 분을 뵙습니다.”

조춘배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주인장, 아버지께 인사를 드려야 해서. 나중에 봅시다.”

“언제든지 오십시오!”

돌아서 가려는데 조춘배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소교주님.”

한설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정말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하고 있음을.

한설이 한빙쌍검에게 단언하듯 전음을 보냈다.

―이래도요?

하지만 한빙쌍검은 끝까지 믿지 못했다.

―마가촌의 주점에서 삼자회합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중요한 일이 평범한 주점에서 열렸겠습니까?

여전히 그들은 이곳 마가촌에 자신들이 모르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저기서 친구들하고 술 한잔합시다. 본교에도 그대에게 소개해 줄 친구들이 있소.”

친구 한 명 없었던 그녀에게 그야말로 친구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가촌을 벗어난 네 사람은 천마신교 본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소? 마가촌에 와 본 소감이?”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은 느낀 그대로 대답했다.

“좋았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깨끗했어요.”

그때 사한이 끼어들며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꼭 일부러 만든 것처럼.”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일부러 만든 곳 맞소.”

순간 놀란 세 사람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소. 누가 봐도 마가촌이다 싶을 만큼 험악했지. 무인이라는 이유로 행패 부리는 놈도 많았고, 술에 취해서 사고 치는 자들도 많았소. 내가 황천각주가 되면서 전부 다 잡아넣었소. 술 마시고 사람 때리는 놈들, 돈 뺏거나 사람을 협박하는 놈들, 사기 치고 사람 죽이는 놈들 다 때려잡았소. 술 마시고 사고 치면 기존 형량의 두 배를, 무인이 일반인들을 건들면 세 배 엄벌했소. 사실 여기 다 만든 거요.”

한설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다가 차분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거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아니, 더 정확히는 나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한설은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당신과 나는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오. 우린 여러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자리에 있으니까.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

한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후계자고 자신도 후계자다. 하지만 자신은 단 한 번도 북해빙궁 인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진짜 저주받은 인형은 그곳에서 팔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저잣거리를 걸어서 통과했을 뿐인데, 그녀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천마신교 본단에 도착했다.

성벽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거대한 철문에는 악귀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한설은 긴장했다. 어려서부터 말로만 듣던 천마신교에 드디어 온 것이다. 이곳은 빙궁주인 어머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는데, 자신이 먼저 오게 된 것이다. 한빙쌍검도 천마신교 본단에는 처음이었다.

정문을 지키는 정예 마인들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마인들의 눈빛은 예리했고 기강이 확실히 잡혀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빙쌍검은 더욱 조심하자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크르르르릉.

보통 마인들은 거대한 철문 아래 작은 문을 통해 출입하는데, 소교주가 긴 출교에서 돌아오자 거대한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러난 전경에 한설과 한빙쌍검은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아!”

내부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했고 곳곳에 세워진 건물들은 높고 웅장했다. 북해빙궁도 크고 웅장했지만, 천마신교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 중심으로 향하는 크고 너른 대로가 있었다. 그 길 양쪽에 선 거대한 악귀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수문장처럼 세워진 그것들은 마치 이곳을 통과하면 돌아갈 수 없다는 무서운 눈빛으로 오만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단의 웅장함에 한설은 기가 죽었고 이렇게 거대한 석상 역시 처음이었다.

검무극이 그 앞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천마신교에 오신 걸 환영하오.”

인형보다 더 잘 생기셨어!

한설은 검무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무인들이 검무극을 보며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들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에 대한 깊은 신뢰와 충성심을.

마가촌에서의 일 때문일까? 자꾸 검무극과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빙궁 무인들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보는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본적이야 있었겠지만 관심이 없으니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들이 어떤 눈빛일지 궁금해졌다.

그들이 천마전 안으로 들어섰다.

한설은 처음으로 마교주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사한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사실 긴장은 한빙쌍검이 더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삶에서 천마를 볼 일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저 멀리 태사의에 앉아 있는 검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한설은 이 큰 천마전에 홀로 있는 그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외롭게 느껴졌다.

피의 길을 걸어가며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아들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멀어서 아무도 못 볼 줄 아셨겠지만, 검무극은 신안술로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걸 보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고 계시는 것이리라.

그렇게 태사의 아래에 도착한 검무극이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버지를 뵈니 비로소 본교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 안도감을 아버지를 보고 느끼다니. 정말 처음 회귀했을 때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한설은 말없이 검우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우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인형보다 더 잘 생기셨어!’

실제로 보는 검우진의 외모와 존재감은 인형이 절대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천마’기에 인형을 미화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겼다. 엄청 무서운 외모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리고 가까이 와서 그를 보고서야 느낄 수 있었다. 이 공간이 절대 넓지 않았음을. 검우진이란 사람의 존재감이 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검무극이 한설을 소개했다.

“북해빙궁의 소궁주입니다.”

물론, 사전에 통천각에 기별했기에 한설과 함께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한설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한설입니다. 존엄하신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네.”

“소교주 덕분에 중원 구경 잘하면서 왔습니다.”

함께 온 한빙쌍검 역시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빙쌍검입니다. 신교지존을 뵙습니다.”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두 사람은 한설보다 훨씬 강렬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검우진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특별히 기도를 발출하지 않았음에도, 검우진의 존재감이 두 사람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사한이 그 존재감에 맞서려 하던 그 순간.

쉬이익.

칼바람 소리와 함께 살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한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핏물이 흥건했다. 옆에 선 소빙의 가슴에도 기다란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사한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소빙을 베고 지나간 검우진의 뒷모습이 보였다.

사한이 다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한 뼘쯤 뽑혀 나와 있었다.

‘이것이 천마와 나의 실력 차다!’

이 모든 일은 사한의 상상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상대의 존재감이나 기도를 읽어서 자신의 싸움을 상상하고 예감하기를 좋아했는데, 대부분의 싸움은 그 예감대로 끝났다.

만약 오늘 천마와 싸우려 들었다면? 그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초지적!’

마교주가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존재감일 줄이야.

검우진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본교에서 편히 쉬었다 가시오.”

한설과 한빙쌍검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검우진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잘 모시거라.”

“네, 그럼 저는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많았지만, 그건 둘만의 시간으로 미뤄야 할 것이다.

한설과 한빙쌍검이 검우진에게 인사한 후, 검무극과 함께 천마전을 나왔다.

“하아.”

문을 열고 나오자 한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왔는데, 몸살이 난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너무 긴장했던 탓이다.

사한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빙은 남편이 어떤 상상을 했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 어땠소?”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이 솔직히 대답했다.

“정말 멋지셨어요.”

“당신까지 그러진 마시오. 요즘 아버지에게 인기 대결에서 자꾸 밀리는 중이니까.”

“그럴 만해요.”

“너무하시오!”

검무극은 그들을 가장 귀한 손님이 묵는 객청으로 안내했다. 손님을 맞는 방이 이렇게 화려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잘 꾸며진 곳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는데, 우선은 푹 쉬시고. 저녁에 풍류주점에서 봅시다.”

“고마워요.”

그때,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천마전으로 가기 전에 수하에게 이안이 돌아왔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시켰다.

“이 무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한설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언니를 못 보고 갈 수도 있겠군요.”

이 역시 낯선 아쉬움이었다. 누군가를 만나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그때 수하가 덧붙여 말했다.

“참, 그리고 황천각주께서는 막 돌아오셨습니다.”

“혼자 왔던가?”

검무극은 이 물음의 대답에 따라 서대룡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닙니다. 여인들과 함께 왔습니다.”

검무극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보고를 마친 수하가 물러가자 한설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좋아하시죠?”

“내 오른팔이 드디어 봄날을 맞은 모양이오.”

그녀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검무극은 설명 대신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안이 돌아올 때까지 본교에 머무시는 건 어떠시오?”

생각지 못한 말에 한설은 물론이고 한빙쌍검까지 놀랐다.

“급하게 북해로 돌아가야 할 이유라도 있소?”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안 될 것 없잖소?”

“이상하지 않나요? 북해빙궁 소궁주가 신교에 머무는 것.”

“그냥 친구네 집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시오.”

천화루에서도 친구란 표현을 썼는데, 또 자신을 친구라 하고 있었다.

“정말 절 친구라 여기시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대답은 쉽게 나왔다.

“그렇소.”

“우린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잖아요?”

“다 알고 시작하는 친구가 어디 있겠소? 느낌으로 괜찮다 싶으면 친구가 되는 거지. 오히려 많이 알면 알수록 친구는 되기 어렵소.”

한설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친구가 있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시오. 우리가 나이 들어서 친구가 되려면 온갖 걸 다 따질 거요. 과거에 뭘 했으며, 어떤 성격이고, 술 마시면 어떻고, 뒤끝은 있는지, 욕심은 또 얼마나 있는지. 그러다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게 걸리면 그게 찝찝해서 못 사귀게 될 거요. 한데 젊었을 때는 그 반대잖소? 다 싫어도 딱 하나만 통해도 친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럼 저와는 뭐가 통했나요?”

그러자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북해 바람처럼 시원한 사람이라서.”

한설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본단에 갑시다, 하면 가는 사람이고. 사도맹에서 봅시다, 하면 가는 사람이고. 인형을 사도 다 사는 사람이고. 느낌대로 사는 친구도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오. 내가 걱정 많고 고민 많은 사람이라 더 그렇소. 자, 그럼 편히 쉬시고 나중에 봅시다.”

그렇게 검무극이 객청을 떠나자 한설은 잠시 멍하게 있었다.

바람처럼 시원한 사람이라서 통했다고?

내가 느낌대로 사는 친구라고?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그리고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물론 검무극의 제안은 한빙쌍검에겐 내키지 않았다.

“신교에 오래 머무시면 안 됩니다.”

한설이 그에게 되물었다.

“소교주가 음모를 꾸밀까 봐요?”

“그렇지 않더라도, 이곳은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용담호혈(龍潭虎穴)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한설이 창가로 걸어갔다. 저기 객청의 화원을 지나서 밖으로 걸어가는 검무극의 뒷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정말 저 사람 하나 믿고 이곳까지 온 셈이다.

“중원 무림의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이곳이야말로 잠시 쉴 수 있는 곳은 아니고요?”

그 말에 한빙쌍검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정말 어려서부터 봐왔던 한설이 낯설게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찬 바람 쌩쌩 불며 조금만 불편해도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녀였는데.

사한이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소교주를 믿지 마십시오. 그도 결국 마인일 뿐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한설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분은 서로를 믿으시잖아요?”

“그야…….”

사한이 어떻게든 설득하려 하던 그때, 소빙이 말했다.

“얼마가 됐든 있는 동안만이라도 즐겁게 지내세요.”

사한이 소빙을 쳐다보았다.

―소궁주의 첫 중원행이잖아요?

그렇게 남편에게 전음을 보낸 후 소빙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꼭 한설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또 언제 천마신교에 와보겠어요?”

* * *

“이제부터 이곳이 우리가 살 곳인가요?”

웅장한 천마신교 본단의 위용에 막내 단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떨리기는 단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옆에 있는 서대룡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 하나 믿고 천마신교 본단으로 온 그녀다. 그것도 두 동생까지 데리고.

서대룡이 단아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가 집입니다. 자, 들어가시죠.”

서대룡이 그녀들과 함께 정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지키는 이들은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무시무시한 마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서대룡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오, 형부! 멋진데요?”

단연의 속삭임에 서대룡은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와아아아아!”

단연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거대한 악귀상에 놀란 것이다.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무섭긴. 이제부터 우릴 지켜주는 존재인데.”

그 말을 듣자 단씨 자매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세 여인은 내원으로 걸어가면서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정말 규모가 압도적이었다.

지나가던 이들 중에 황천각주를 알아본 마인들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대부분 상대가 먼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단씨 자매는 새삼 서대룡에 대해 실감했다.

막연히 높은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정말 천마신교의 높은 사람임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서대룡은 그녀들을 우선 자신의 거처로 데려왔다.

시비들이 깨끗이 청소해 두었기에 장기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집은 깨끗했다.

“당분간은 이곳에 머무르시오.”

황천각주의 거처였기에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처제, 마음에 드는 방 골라!”

이제 처제 소리가 입에 착 붙은 서대룡이었다. 물론 농담을 잘 받아주는 막내에게만 처제라 불렀다.

“집이 너무 좋아요!”

이방 저방 다니며 좋아하는 단연이 둘째 언니에게 말했다.

“방 선택권은 먼저 준다. 어느 방 쓸래?”

둘째 언니가 누구보다 정착하기를 바라는 걸 잘 알았기에, 마음에 드는 방을 먼저 고르라고 한 거였다.

자신이 고른 방의 침상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단비의 얼굴에 어떤 안도감이 스쳤다.

더 좋은 곳에서도 여러 번 묵어봤지만, 아무리 좋아도 집은 아니었다. 이제 이곳이 자신의 집이고 방이었다.

그런 단비를 보며 단연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언니만큼 정착에 목마르지 않았다. 아직은 중원을 돌아다니는 게 더 좋은 그녀였지만, 언니들을 위해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방도 고르고 세 자매가 한곳에 모였다.

단아가 서대룡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해요.”

“무슨 말씀이시오? 날 믿고 따라와 주셔서 내가 고맙소.”

단아는 이곳까지 오면서 결심한 바가 있었다.

“각주님께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저희 신경 쓴다고 무리하실 필요도 없어요. 제일 하급 무인부터 시작하면 돼요. 시험을 쳐서 정식으로 들어갈게요.”

그녀는 황천각이 천마신교의 법을 집행하는 기관임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황천각주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들을 어딘가에 넣어주었다간 문제가 생길까 걱정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그 힘든 낭인 생활도 다 이겨낸 그녀들이었으니까.

“우린 걱정하지 마세요, 형부! 정 안되면 허드렛일이라도 하면 되죠.”

그때 누군가 말했다.

“귀한 분들인데 그럴 수는 없지요.”

네 사람이 놀라 돌아보니 문 앞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소교주님!”

단씨 자매가 다급히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과는 객잔에서도 보고, 지부에서도 봤던 사이였다.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달려갔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단아 앞에서 여전히 자신을 챙겨주는 모습에 서대룡이 말했다.

“이젠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제 앞으로 계속 볼 사이가 되었습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은 머쓱하게 웃었지만, 승자의 표정으로 도발했다. 검무극은 오랜만에 장난치고 싶어 하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감히 소교주보다 먼저 사랑에 빠진다?”

“나이는 제가 좀 더 많긴 합니다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검무극이 단아에게 말했다.

“남자 보는 눈이 끝내주시오.”

단아가 미소를 지었고 서대룡은 그런 말 마시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서대룡의 눈빛은 ‘조금만 더 해주세요’였다.

“예전에 서 각주가 그랬지요. 본교는 바뀌지 않을 거라고. 본교의 변화는 그 말을 내게 꺼내는 순간부터 시작되었지요. 아마 서 각주가 세 분을 본교로 모셔 오고 싶어서 그랬나 봅니다.”

세 여인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서대룡은 예전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 언제나 자신 때문에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해주는 검무극이 너무나 고마웠다.

검무극이 세 여인에게 말했다.

“이번에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소.”

결국 천화루주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테니까.

“큰 공을 세운 그대들이 하급 무인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 내가 그대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려 하오.”

각기 생각해 둔 자리가 있다는 듯, 검무극이 세 여인에게 말했다.

“평생 함께했으니 이제 떨어지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떻소?”

이미 바람은 불었으니

단씨 자매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소교주가 직접 자신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단아가 얼떨떨한 마음으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격정에 찬 얼굴로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던 것도 모두 검무극 덕분이었다. 한데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위해 직접 나서주려는 것이다. 그것도 동생들까지.

“미리부터 감격하지 마! 마구간에서 말똥을 치워야 하는 일일 수도 있어!”

그러자 단아가 힘차게 말했다.

“소교주님이 시키신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말똥이 아니라 매일 시체를 치우라고 해도 치우겠습니다.”

두 동생도 함께 소리쳤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녀들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신교의 소교주가 자신들을 직접 챙겨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그럼 따라오시오.”

검무극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이안이 이끄는 귀영대였다.

일조장 청면이 검무극을 맞았다.

“소교주님!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귀영대 무인이 모두 나와서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간 수련에 매진했는지 처음 봤을 때보다 기도가 더욱 날카로웠다.

그들을 살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청면을 향했다.

그에게 요즘 어떤지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행복한가?”

극악소마의 수제자에서 일개 조장의 길을 선택한 그였으니까.

가면 속 그의 눈빛이 기분 좋게 웃었다.

“네.”

짤막한 대답으로 충분했다. 그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음을 느꼈다.

“이번에 소마님과 함께 싸웠네.”

검무극은 일부러 극악소마를 언급했다. 언급을 피한다고 그가 극악소마를 잊었겠는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게 그를 위한 길이라 여겼다.

“소마님 덕분에 살았네.”

청면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그리움이 스쳤다.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오랜만의 재회를 나눈 후, 검무극이 오늘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오늘은 귀영대에 새로운 신입을 추천하려고 왔네.”

검무극의 첫 추천이기에 청면은 뜻밖이란 표정으로 함께 온 세 여인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선택한 사람은 단연이었다.

“막내 소저!”

설마 자신을 부를 줄 몰랐기에 단연은 깜짝 놀랐다.

“저요?”

“막내 소저, 귀영대는 내 직속 조직이자 내 심장이 대주로 있는 곳이오. 내가 신임하는 청면이 일조장으로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런 중요한 곳에 저를 넣어주시려는 건가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소저의 활발한 성격이면 귀영대가 맞다고 생각했소. 앞으로 귀영대는 중원을 활보하며 임무를 해나갈 테니까. 어떻소? 한 번 해보겠소?”

단연은 검무극이 자신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의 시선이 검무극에서 귀영대 무인들을 향했다. 푸른 가면을 쓰고 있는 청면과 그 뒤로 늘어선 무인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낭인이 아니라 이제 마교의 정예 무인이 되는 것이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저기 일 조장도 모르는 일이오. 오직 막내 소저만이 알겠지. 막내 소저, 할 수 있겠소?”

일의 중요성에 비해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에 도장을 찍은 건 잘하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이나 잘할 수 있으리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어온 지난 발자취였다. 그 힘든 낭인 생활을 이겨낸 그녀의 과거가 꽝, 결정을 내렸다.

단연은 청면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저를 받아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무극은 막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데려왔으니 청면은 무조건 받아야 하는데, 그녀는 청면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소교주님의 추천이지만, 특별대우는 없을 거요.”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청면이 기분 좋게 그녀를 받아들였다.

“내일부터 이곳으로 나오도록.”

“감사합니다!”

“인사는 소교주님께 해. 우린 오직 소교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들이니까.”

단연이 검무극에게 포권하며 힘차게 말했다.

“소교주님, 감사합니다.”

단아와 단비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동생을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쳤다.

“그대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막내 소저 때문이오. 자, 막내 소저, 이래도 우리 아버지에게 요리를 보내겠소?”

단연이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너무하시오! 막내 소저!”

단연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실감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신교의 소교주와 격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도, 귀영대에 들어간 것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은 알았지만, 천마신교에 온 첫날, 이렇게 갑작스럽게 바뀔 줄은 몰랐다. 아직 짐도 다 안 풀었는데.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어찌 검무극이 모르겠는가? 검무극의 따스한 격려가 더해졌다.

“이미 바람은 불었으니, 돛은 우리 막내 소저가 잘 조종하시오.”

* * *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황천각 조사관 종화가 정중히 인사했다.

부패를 저지른 교내 마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검을 휘두르며 조사관을 인질로 잡으려는 바람에 크게 위험했었다.

다행히 집행 삼대에 새로 임명된 삼대주가 재빠르게 대응해서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이거 과잉 진압이야. 이 새끼들아! 너희 다 모가지라고!”

그 과정에서 검에 찔린 마인이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리고 술까지 취한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건 약과입니다. 앞으로 별의별 놈이 다 있을 겁니다.”

종화의 말에 삼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종화와 집행무인들이 죄인을 체포해서 먼저 출발하고, 혼자 남은 삼대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벌써 정안지부가 그립습니까?”

그가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과 서대룡, 그리고 단씨 자매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교주님?”

“오랜만이오, 강 지부장. 아니, 강 대주.”

그는 바로 천마신교 정안지부장 강달이었다. 단씨 자매를 구하는 큰 공을 세우고 검우진의 눈에 들었던 그는 집행대의 삼대주에 임명되었다.

총대주 아래 세 명의 대주가 있는데 그 중 삼대의 대주로 발령받은 것이다. 지역의 지부장에서 황천각 집행대주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의 판단력과 일 처리를 높이 산 검우진의 포상이었다.

발령받고 본단에 올 때만 해도 걱정이 많았다. 파격적인 인사에는 언제나 뒷말과 불만이 나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뒷말과 불만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발령받던 날, 황천각에 검우진이 직접 찾아온 것이다. 모든 집행무인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큰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고 직접 대주에 임명했다.

문이 열리며 자신이 부임하는 그곳으로 걸어들어온 교주님의 모습은, 강달은 죽을 때까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강달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서대룡에게도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앞으로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서대룡은 이제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직접 그를 만나는 게 처음일 뿐, 서대룡은 그가 집행대주로 임명받은 것을 이미 보고 받았다.

“강 대주라면 잘 해내시리라 믿소.”

“실망하지 않으시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검무극이 강달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집행 삼대에 신입 한 명 받아주시오.”

“그러잖아도 새로 인원을 보충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검무극이 둘째 단비를 쳐다보았다.

“둘째 소저는 차분하고 이성적이니 집행무인에 적성이 맞으리라 생각하오. 어떻소? 해보겠소?”

하급 무인은 물론이고 허드렛일까지 각오한 그녀였는데, 황천각의 집행무인이라니? 어찌 마음에 안 들겠는가?

“정말 감사합니다.”

단비의 무공 실력 역시 집행무인을 하기에 충분했다.

중책을 맡겨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각자의 성격까지 고려한 검무극의 배려에 단씨 자매들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사실 그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소교주가 마련해준 자리인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면?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기에 정말 고통스러울 것이다.

단비가 강달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주님!”

“구면이라 더 반갑군.”

강달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 출세한 것은 이들 단씨 자매가 자신의 지부를 찾아주었기 때문이었다.

소교주, 황천각주, 단씨 자매.

그 인연은 본단에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둘째와 셋째에게 자리를 만들어준 검무극이었는데.

“첫째 소저 자리는 없소.”

당연히 검무극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두 사람이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하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해서 이렇게 본단까지 함께 왔다. 한데 단아가 새 일을 맡으면 그 일에 적응하느라 바쁘고 정신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시간을 두고 즐기시오. 둘이서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본교 적응도 하고, 동생들도 챙기고”

검무극의 마음 씀씀이에 서대룡은 온몸이 떨렸다.

‘이제 소교주님께는 더 감격할 수도 없습니다. 제 인생의 감격은 이미 소교주님께 다 썼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이러시면 어찌합니까?’

진심으로 이런 마음이 들었다. 그랬기에 절로 이런 질문이 나왔다.

“나중에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뭐가?”

“젊어서 이렇게 멋있으신 데 나중에 어쩌시려고요?”

“그때 초라하고 재미없고 안 멋있으면, 자네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우리 소교주님은 이십대 때 인생의 멋짐을 다 쓰셨소! 그러니 우리가 이해해 줍시다.”

서대룡은 물론이고 강달과 단씨 자매 모두 웃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서대룡과 단아가 잘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개입해서 될 문제가 아님을 안다.

“낭인의 삶을 살다가 황천각주를 따라 본교까지 오는 인생이라면, 그대만의 운명이 따로 있으리라 믿소. 그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보시오.”

단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베풀어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왜 이 서대룡이 입만 열면 소교주 이야기만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이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저녁에 모두 풍류주점에서 봅시다! 강 대주도 오시오!”

* * *

검무극은 그길로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어르신!”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을 때, 그곳에 누군가 와 있었다.

“소교주, 출교했다 돌아오면 항상 여기가 먼저군.”

화원을 가꾸던 여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이제는 화장기 없는 얼굴과 새하얀 백발이 더없이 어울리는 일화검존이었다.

“제가 어르신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잘 지내셨습니까? 검존님.”

일화검존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지는 기도가 더욱 부드러워진 걸 보니, 그녀의 수련은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그때 혈천도마가 창고 건물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러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혈천도마였다.

“어르신!”

검무극이 달려가서 안기려 했지만, 언제나처럼 혈천도마가 보법을 발휘해 피했다.

그는 창고에서 가지고 나온 호미를 가지고 일화검존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잠시 두 사람이 화원을 가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로 어떤 마음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무리해서 더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고, 그들은 딱 저 거리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저만큼의 거리가 두 사람 사이를 지켜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혈천도마가 호미질을 하며 물었다.

“갔던 일은?”

“죽다 살아왔습니다. 비 소맹주와 멸마대주가 없었고, 특히 소마님이 안 계셨다면 죽었을 겁니다.”

혈천도마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였다.

“갈수록 어렵겠지. 죽이면 죽일수록 더욱 독하고 강하게 반격할 테니까.”

“어르신께서 절 지켜주셔야죠.”

“늙은이 부려 먹을 생각 말고, 수련이나 열심히 해.”

이제부터 정말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칠성의 구화마공이 통하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 것은 꿈속의 천마혼만이 아니었으니까.

“검존님. 비무친구 다시 가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나야 언제든 환영이네.”

그때 그곳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을 바로 서대룡과 단아였다. 출교에서 돌아왔으니 사부께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이다. 단아도 인사시키려고 함께 데려왔고.

“사부님, 저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일어나서 서대룡에게로 걸어갔다.

걱정스러운 시선이 제자의 몸을 훑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네, 괜찮습니다.”

“그럼 됐다.”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볼 검무극이 아니었다.

“아니, 아무리 수제자라지만, 너무 차별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더 위험했다고요!”

못 들은 척 혈천도마의 시선이 단아를 향했다.

“이 소저는 누구신가?”

“단아 소저입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본교로 왔습니다.”

혈천도마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서대룡은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얼굴만 붉혔다.

단아는 긴장하고 있었다. 서대룡의 사부인 혈천도마에게 정말 잘 보이고 싶었다.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보다 더 심장이 뛰었다.

그때 일화검존이 일어나서 그들에게 걸어왔다.

“그걸 뭘 물어보세요.”

그녀가 서대룡과 단아를 쳐다보았다. 서로 얼굴도 잘 쳐다보지 못하는, 이제 막 시작하는 풋풋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서대룡이 일화검존을 단아에게 소개했다.

“본교의 마존이신 일화검존이시오.”

그 말에 단아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검 한 자루로 마존의 자리에 오른 여인.

단아에게 그런 일화검존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곳에 오면서도 서대룡의 사부인 혈천도마 다음으로 보고 싶었던 마존이 그녀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단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화검존을 선망하는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그녀의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여인의 몸으로 본교에 투신하려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도를 찬 서대룡과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서일까?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어디가 그리 좋던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일화검존이 물어보자 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무인답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좋았습니다.”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원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대도를 등에 차고 나란히 서 있는 혈천도마와 서대룡의 모습에 문득 돌아서며 물었다.

“혹시 서 각주가…….”

무슨 질문인지 짐작한 것일까? 혈천도마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지. 마침 좋은 차가 있네.”

혈천도마가 단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 뒤를 서대룡이 따라 들어갔다.

일화검존이 오래전 그날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사제지간 아니랄까 봐!”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차를 우리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여러 번 차를 우려줬는데, 오늘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었기에 단아가 가서 대신하겠다고 했다.

“괜찮다.”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단아를 향한 혈천도마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단아는 옆에서 혈천도마를 도왔다. 그녀는 혈천도마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낭인으로 살아서 예의 없다는 소리를 들어선 안 될 일이었다.

“동생들과 낭인으로 살았다고?”

“네.”

“고생 많았겠구나.”

단아는 그 말이 낯설게 들렸다. 한 번도 어른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주위 사람들은 애나 어른이나 모두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이들뿐이었으니까.

“저 녀석이 속 썩이면 언제든 내게 와서 말해라.”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오늘 혈천도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그에게 오늘은 아들이 며느리가 될 사람을 데려온 날이다.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서대룡과는 달리 일화검존은 말없이 혈천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에게 시를 읊어주던 젊은 시절의 혈천도마를 떠올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시를 듣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까?

아버지가 권마와 함께 중원을 종횡하던 그 시절, 모두가 젊었던 그 시절을.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일화검존과 검무극의 시선이 마주쳤다.

“소교주.”

“네, 검존님.”

“지나고 보니 세월이 참 무상하네.”

“아직 남은 날이 더 많지 않습니까?”

“과연 그럴까?”

“심지어 반로환동하실 수도 있고요.”

일화검존이 에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끝났다 생각 마십시오. 십 년쯤 후에는 오늘을 돌이키며 그때가 팔팔했었는데, 그때 할걸, 그렇게 후회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깊어진 눈빛으로 그녀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혈천도마와 단아가 차를 가지고 왔다.

“향이 좋습니다.”

검무극이 냄새를 맡으며 향을 음미했다.

먼저 감탄을 터뜨린 사람은 단아였다.

“너무 맛있어요. 지금껏 마셔본 차 중에 제일 맛있어요.”

그러자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연하오. 귀한 손님 오면 내줄 거라고, 우리에게는 절대 안 내주신 차요.”

단아는 그 말을 농담으로 들었는데 서대룡이 진짜 그렇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일화검존까지 가세했다.

“이 차는 나도 처음 마셔보는군.”

자연 단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정말 기뻤다. 지금까지 그녀가 느꼈던 기쁨의 대부분은 살아남았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 이번 청부도 무사히 마쳤구나. 동생들도 무사하구나.

한데 지금의 기쁨은 그런 기쁨과는 달랐다.

지금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사부가 자신을 위해 특별히 내준 차를 마시고 있다. 앞에는 평소 동경하던 일화검존이 있었고, 또 자신과 동생을 구해준 소교주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대룡이 옆에 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순간.

대체 언제였지? 함께 있는 타인들을 보며 긴장하고 경계하지 않았던 적이.

대체 언제였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적이.

그래서 지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동은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단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녀의 감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대룡이가 수련하는 동안 여기 와 있어도 된다.”

서대룡은 일과를 마치고 늦게까지 수련하니, 함께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녀보다 서대룡이 더 감격하던 그때, 일화검존이 불쑥 말했다.

“검을 쓰는 아이인데 그 무식한 도를 휘두르는 걸 보고 있으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무식하다니!”

“저 답답한 사제지간 보고 있으면 열불이 날 거다. 그러니…….”

그러면서 놀라운 말을 꺼냈다.

“가끔 시간 나면 내게 오너라.”

단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동경했던 사람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하고 있다. 감히 마주 볼 수도 없는, 아니 한자리에 있는 것조차 말이 안 되는 일화검존이 말이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꼭 가겠습니다.”

단아에게도 새 운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음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오늘 술은 네가 사야겠다!”

* * *

한설은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배를 모는 사람은 삼대 취객 여빈이었다.

한설은 한빙쌍검을 호수 건너편에서 기다리게 하고 혼자 배에 올랐다. 사한은 안 된다고 했지만, 소빙이 그렇게 하라고 보냈다.

“대체 왜 이러시오?”

사한은 아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보다 더 호위에 신경을 썼던 그녀였는데.

“마교주도 그렇고, 소교주도 그렇고. 우리가 봤던 극악소마도 그렇고. 빈틈이 있던가요?”

심지어 천마신교를 통과하면서 봤던 마인들 역시 기강이 제대로 서 있었다.

“결국 소궁주를 노린다면 반드시 마교주의 허락이 떨어진 일일 텐데. 우리가 막을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호위를 포기하잔 말이오?”

“포기가 아니라 소궁주가 자유롭게 보고, 놀게 놔두자는 거예요.”

사한이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당신, 소교주를 믿는군.”

“소교주는 믿지 않아요.”

단호히 대답한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배에 탄 한설을 향했다.

“한설이는 이제 우리가 알던 그 꼬맹이가 아니에요. 이제 어른이 되려는 소궁주를 믿는 거죠.”

한설이 탄 배가 호수 가운데 섬에 도착했다.

그녀는 여빈의 안내를 받아 취몽루에 올랐다.

취마는 취몽루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존을 뵙습니다.”

“소궁주, 어서 오게! 왔다는 소식은 들었네.”

천마신교에 왔는데, 다른 마존은 몰라도 취마는 찾아봬야 할 것 같아서 인사하러 온 것이다. 소교주와 함께 북해빙궁을 구해낸 사람이니까.

“호수가 참 아름다워요. 이 전각도 아름답고.”

“문제는 이 아름다운 곳에 못 말리는 주정뱅이가 살고 있다는 점이지.”

취마의 농담에 한설이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세요, 이곳과.”

취마는 예전에 빙궁에서 그녀를 봤을 때와 달라졌음을 느꼈다.

“자, 앉게.”

한설은 취마가 허리에 찬 잔을 보았다.

취마가 그 잔을 앞에 내려놓았다.

“이 술잔이 어떤 잔인지 아나?”

“네, 본교의 보물인 빙궁성배입니다.”

“이 잔으로 술을 마셔본 적이 있나?”

한설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깨끗이 씻어둔 잔이니 한 잔 마셔보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한설이 빙궁성배에 담긴 술을 마셨다. 술을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한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술맛이 정말 좋아요.”

“좋은 술에 좋은 잔이 합쳐졌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잠시 호수를 바라보던 그녀가 취마에게 말했다.

“제가 이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취마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교주와 있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본교지?”

한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이 된 말이지만, 거의 비슷했다.

“그와 있으면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잠시 그녀가 생각에 잠기더니.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

취마가 그녀의 빈 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정상이네.”

“네?”

“나는 수십 번도 더한 생각이니까.”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한설이 놀란 얼굴로 취마를 쳐다보았다.

“비교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러다 보면 화도 나고 변명도 하고 싶지. 한데 그거 아나? 화나고 변명하고 싶을 때, 바로 그때가 자네라는 사람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순간이라네.”

언제 분노하고 언제 반박하는지, 거기에 내가 있다?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취마가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결론은 우린 소교주처럼 못 사네. 소교주는 미쳤거든!”

한설이 웃으며 함께 술잔을 마셨다. 미쳤다는 말, 오직 취마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 동지끼리 한잔하세!”

취마를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약간 망설였는데. 검무극의 그 말 때문에 왔다.

이번 여행은 많이 보고 가시오.

이러나저러나 검무극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오면 취마와 자신의 이야기만 하겠지 싶었는데, 또 소교주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취마와 이렇게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검무극이라는 화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 저녁에 풍류주점에서 술 마시겠군.”

“어떻게 아셨어요?”

“술과 관계된 일이잖나?”

취마가 취몽루 구석에 있던 술 상자를 통째로 한설에게 주었다.

“소교주에게 무사 귀교를 축하한다고 전해주게.”

* * *

한설이 풍류주점에 도착했을 때,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조춘배가 정중히 그녀를 맞았다. 앞서 인사했기에 그녀가 북해빙궁의 소궁주임을 알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 전에 이것부터 받으세요.”

한빙쌍검이 들고 온 술 상자를 그에게 전했다.

“취마께서 소교주에게 주신 선물이에요.”

“네, 오늘은 이 술로 내겠습니다.”

외부에서 술이 들어오면 기분이 나쁠 법도 했는데, 조춘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검무극과 조춘배가 얼마나 끈끈하게 맺어진 관계인지 아직 몰랐으니까.

조춘배가 이 층 고정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다.

한빙쌍검은 따라 올라오지 않고 일 층에서 기다렸다.

원래였다면 사한은 이 층에 올라와서 구석에 자리 잡았을 텐데, 이번에도 소빙이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자고 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여보, 우리도 한잔해요. 중원에 나온 후에 제대로 술 마신 적이 없었잖아요.

―그럽시다. 어차피 소궁주가 잘못돼서 우리까지 죽게 된다면 마지막 술이라도 한잔해야지.

자포자기하듯 말했지만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언제나 큰일이 있을 때면 그녀의 감과 판단을 믿었고,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다. 지금도 아내의 판단을 믿었다.

이 층 자리에 앉으려던 한설은 무심코 벽에 새겨진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진짜 교주님과 맹주님이 남긴 글인가요?”

조춘배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삼자회합 때 남겨주셨지요.”

그들뿐만 아니라 마존들이 남긴 글도 있었다.

그녀는 주점 벽에 이런 글이 남겨져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신선하면서도 놀라웠다.

조춘배의 입에서 소궁주님도 한 말씀 써주시지요, 란 말이 맴돌았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때 주점으로 검무극과 서대룡이 들어왔다.

“주인장, 여기 이 사람이 오늘 술 살 사람이니 잘 모시세요.”

“왜 이러십니까? 저도 이제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너 없어도 잘 먹고 잘살 사람들이다.”

그 뒤로 단씨 자매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내일부터 당장 새로운 조직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당분간 마음 편히 술을 마시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단연이 서대룡 편을 들었다.

“우리 형부 괴롭히지 마세요!”

단아가 놀라 무례하게 굴지 말라며 그녀를 야단쳤고, 서대룡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무하시오, 막내 소저! 처제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소?”

이 층에서 내려온 조춘배가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술값 걱정은 마십시오. 취마님께서 술을 보내셨습니다. 요리는 간만에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서대룡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가 단연을 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돈 굳었으니 처제 용돈 줄게!”

검무극은 웃고 말았다. 서대룡이 저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웃어라.

자신이 회귀한 이유가 이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니까. 그러니 신나게 웃고 신나게 놀아라.

그때 주점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소교주님!”

이번에 도착한 사람은 마군주 장호였다.

“장 군주! 잘 지내셨소?”

“소교주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재회했다. 언제 봐도 든든한 장호는 근육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장 군주님!”

정말 그가 반가운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어서 둘만의 자리에서 단아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검무극을 제외하고 그가 마음 편히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안과 장호뿐이었으니까.

그때 문 앞에서 누군가 슬쩍 안을 살피다가 그대로 지나가는 것을 검무극이 보았다.

“강 대주!”

그는 바로 강달이었다. 검무극이 오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몇 번이나 올까 말까 망설였다. 그냥 예의상 초대한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도 그냥 지나쳐서 돌아갈까 했었는데.

“여기요, 어딜 가시오!”

검무극이 너무 반갑게 맞아줘서 그의 긴장이 풀렸다.

“제가 와도 될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자리의 시작이 강 대주요! 강 대주가 없었으면 애초에 없을 자리요.”

그렇게 말해주니 강달은 기뻤다. 본단으로 와서 한동안 적응하느라 바빠서 기분 좋은 줄도 모르고 지냈는데. 검무극이 돌아오자 사람 사는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군주님을 뵙습니다!”

강달이 정중히 장호에게 인사했다. 설마 이 술자리에 마군주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반갑소.”

검무극이 옆에 있어서였을까? 이곳에서 보는 마군주는 교내에서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마지막으로 온 사람은 권마의 후계자인 천소희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교주님.”

권마의 후계자가 된 이후 그녀는 무공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을 것을 알았기에, 오늘 일부러 부른 것이다. 한설을 위해서 부른 게 아니라, 천소희를 위해서 불렀다. 사람들도 보고, 숨 좀 쉬라고.

그렇게 입구에 가득 모인 채 검무극이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다 왔소.”

한설은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본교에도 소개할 친구가 있다고 해서, 한두 사람 정도라 생각했다.

한데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아예 신교 사람들을 다 부르시지?

취마 말이 떠올랐다.

‘맞아요,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에요.’

검무극이 앞장서서 걸어 올라왔다.

“주인장, 문 닫으시고 술상 펴시오!”

진심보다 강력한 가식

모두 이 층 자리에 둘러앉았다.

먼저 단씨 자매들이 자신을 소개했다.

차분한 두 언니의 인사와는 달리 막내 단연은 씩씩하게 자신의 새 조직을 자랑했다.

“오늘까진 낭인이지만 내일부터는 귀영대 소속이 될 단연입니다!”

한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도착하자마자 주점 주인장을 소개해 주더니, 이제 낭인 자매를 친구라 소개해 준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후계자부터 주점 주인에 낭인까지, 그들 모두를 친구로 둔 사람이 바로 검무극인 것이다.

장호가 검무극을 쳐다보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앞서 정안 지부 싸움에서 단씨 자매들과 만난 사이지만, 이렇게 본단에서 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검무극이 단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오른팔께서 드디어 반쪽 날개를 찾았네.”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장호는 서대룡에게 축하를 건네는 대신, 단아에게 정중히 말했다.

“제가 술 한 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장호가 당황한 단아에게 정중히 술을 따라주었다. 낭인으로 살아오던 그녀가 마군주에게 술을 받는 순간이었다.

“잘 오셨습니다, 제수씨.”

제수씨란 말에 단아도 놀랐고, 서대룡은 더욱 놀랐다. 그가 자신을 친구로, 또 형제로 여긴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고 난 다음에야 장호가 모두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단아를 따로 챙기는 것으로 서대룡에 대한 예를 차린 것이다.

서대룡이 그런 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서대룡이 고개를 숙여 장호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군주님.

다음으로 강달이 인사했다. 여전히 이 자리가 어색한 그였는데.

검무극이 나서서 그를 정식으로 소개했다.

“강 대주가 여기 세 분 소저를 살렸습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요.”

강달은 검무극이 고마웠다. 사실 그 선택은 결국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 거창한 대의나 희생정신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검무극은 자신의 선택을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폄하하지 않고 실제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해 준다. 다들 깎아내리기에 바쁜 세상인데.

검무극이 강달에게 술을 주었다.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네, 소교주님.”

“지금 맡은 책임이 매우 막중하오. 앞으로 본교의 법과 규율을 잘 지켜주시오.”

“충성을 다해 지켜내겠습니다.”

소교주가 따라준 술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 비로소 강달은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실감했다.

강달의 인사가 끝나고 천소희가 인사했다. 천소희야말로 갑작스러운 검무극의 기별에 곧바로 달려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검무극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갈 그녀다.

검무극 덕분에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권마가 되었을 때, 앞으로 자신이 모실 미래의 교주님이기 때문이다.

“권마님의 수제자이자 차기 권마가 되실 분이십니다.”

그녀를 몰랐던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차기 권마가 이 술자리에 참석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게다가 여인이 차기 권마라니?

단씨 자매는 서로를 돌아보며 놀란 눈빛을 교환했다. 마군주에 차기 권마까지. 우리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돼? 정말이지 천마신교에 도착한 순간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저의 유일한 사매이기도 하죠.”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천소희를 바라보았다.

“잘 지냈느냐?”

“네, 사형.”

원래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선 소교주라 불러야 하는데, 마지막에 사매라 소개하는 바람에 사형이라 불렀다.

소교주의 사매라는 것을 얼마나 자랑하고 싶은지 모른다. 오늘 검무극이 판을 깔아줘서 참았던 자부심을 드러냈다.

“사부님은 잘 계시지? 인사도 안 드리고 술잔치부터 벌이고 있다.”

어디 권마뿐이겠는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을 제외하고 다른 마존들은 아직 만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한설을 소개했다.

“북해빙궁 소궁주이십니다.”

그녀를 모르는 이들이 이번에도 깜짝 놀랐다. 마교 본단 앞이니 차기 권마는 만날 수 있다지만, 차기 빙궁주라니?

“오늘 이 자리는 빙궁의 소궁주께 중원의 내 친구들을 소개해 주기 위함이오.”

내 친구란 표현에 강달도 단씨 자매들도 내심 긴장했다. 소교주와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거기에 더해 강 대주의 본단 진출을 축하하는 자리기도 하고.”

검무극의 시선이 강달에게서 단씨 자매를 향했다.

“세 분의 새로운 인생을 축하하는 자리기도 하고.”

다음으로 천소희를 바라보고서는.

“우리 사매와 간만에 신나게 놀 자리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장호와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이 몸뚱이에 내 오른팔과 왼팔을 붙이는 자리요.”

검무극이 잔을 들었다.

“자, 오늘만큼은 다 내려놓고 신나게 놉시다!”

힘차게 건배한 후 모두 술잔을 비웠다. 검무극이 분위기를 주도하자 술자리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검무극은 한설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취마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소?”

한설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다 당신 이야기지 누구 이야기겠어요?

“술 이야기도 하고, 아름다운 호수 이야기도 하고, 미친 사람 이야기도 하고.”

“미친 사람? 누구 말이오?”

“그런 사람이 있어요. 볼 때마다 화나게 하는 사람이.”

한설이 빤히 쳐다보자 검무극은 그 사람이 자신임을 알 수 있었다.

“주정뱅이 말은 믿지 마시오!”

그 말에 한설이 웃었다.

“맞아요, 당신처럼 부지런한 미친 사람은 없겠죠.”

검무극이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출교에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아시오? 더 부지런해져야겠다. 내 딴에는 정말 부지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죽을 뻔했소. 내가 잠시 잊고 있었소.”

검무극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언제나 적은 나보다 부지런하다는 걸.”

장호는 검무극이 목숨을 잃을뻔했다는 말에 홀로 술을 마셨다. 속상했다. 이렇게 살아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마군을 이끌고 검무극을 보필하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

서대룡이 말없이 잔을 내밀었고 장호가 건배했다. 서대룡의 잔에 담긴 속상함 역시 장호의 아쉬움과 비슷했다.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던 그때, 마침 조춘배가 양손 가득 요리를 가지고 올라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 우리 주인장이 해준 요리가 먹고 싶어서 정말 혼났소.”

“특별히 준비한 좋은 재료로 만들었으니, 맛있게 드십시오.”

요리만 내려놓고 그냥 가려는 걸 검무극이 붙잡았다.

“어딜 가시오. 오랜만에 뵈었는데 한잔하고 가셔야죠.”

“어이구, 아닙니다. 귀한 분들 계신 자리에 제가 어떻게 끼겠습니까?”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려는 그를 억지로 앉혔다.

“여기 주인장보다 귀한 사람 없소. 자, 앉아서 한잔 받으시오.”

“제가 먼저 드리겠습니다.”

“받으시오.”

조춘배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술을 받아서 마셨다.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자신을 대하는 검무극이었다.

평생 술장사를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조춘배였다. 이렇게 변함없이 누군가를 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비교할 수 없는 신분 차이가 있음에도.

“술맛이 너무 좋습니다.”

조춘배가 정중히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역시 우리 주인장이 주는 술이 제일 맛있소.”

“무사히 귀환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참 그리고 술은 한 병 따로 빼두었다가 주인장 술 생각날 때 마시시오.”

“어이구, 괜찮습니다.”

“취마님이 내린 술 마실 기회요. 거절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한설은 검무극을 살피듯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저 모든 행동에 아무런 가식도 없는 걸까? 지금 내게 보여주려고 연기하는 건 아닐까? 나는 이런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다. 사기 치는 건 아닐까?

아닌 줄 알면서도 자꾸 의심하게 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문득 취마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수십 번도 더한 생각이니까.

그 수십 번이 어디 나도 이 사람처럼 살고 싶다만 있었겠는가? 가식이 아닐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는 의미이리라.

난간에 기댄 채 일 층으로 내려가는 조춘배와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검무극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가식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가식은 진심보다 더 강력한 가식이다. 누구의 진심도 저 가식을 따라갈 수는 없을 테니까.

한설이 또 한 잔의 술을 마셨다.

마침 그때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던 단아와 눈이 마주쳤다.

단아가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찌 감히 북해빙궁의 소궁주와 눈이 마주치겠느냐는 표현이었는데.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한설이 단아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제 인생 첫 낭인 친구네요.”

그 말에 단아가 깜짝 놀랐다.

“친구라니요. 가당치 않은 말씀이세요.”

한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당장 이 자리만 해도 저기 저 서대룡은 이 여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고, 장호는 깍듯하게 그녀를 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 검무극이 낭인이라고 무시하고, 소궁주라고 높이 살 사람인가?

어떤 신분이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자리.

그녀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주인공이라 소개했지만, 이 자리의 주인은 검무극이다.

그 주인이 지금은 천소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힘들지?”

그 물음에 확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그녀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죽을 만큼 노력하고 있는 그녀다. 후계자를 잘못 정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만큼은, 죽기보다 싫은 그녀였으니까. 그건 사부와 검무극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이었으니까.

“가끔 심야수련모임이 그리워요.”

“나도.”

그러고 보면 권마와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심야수련이었는데.

“다음에 다시 모일 날이 있을 거다.”

“그런 날이 올까요?”

“무조건 온다.”

그날을 위해서, 오늘처럼 이렇게 모여서 웃고 떠들기 위해서.

검무극이 노력하는 이유였으니까.

그렇게 술자리는 점점 무르익었다. 다들 마음을 풀고 술을 마셨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자리만큼은 어떤 보증인이 있는 느낌이었다.

검무극이 초대한 사람이라면?

마음을 풀고 대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러다 한설과 장호가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 인사할 때 단아에게는 술을 주었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술을 주지 않은 그였다. 예전이었다면 이 별것 아닌 것에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겠지만.

“제 술 한잔 받으세요.”

이제 그녀가 먼저 술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장호가 정중히 술을 받아 마셨다.

“저도 한 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장호가 정중히 술을 부어주었다. 자신에게 아무런 사감이 없다는 걸 저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잘 보일 생각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인 거다. 서대룡을 위해서 예를 갖춘 것일 뿐.

만약 자신이 술을 권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찝찝한 마음이 남았겠지만, 그저 술을 권한 것으로 한 사람에 대한 느낌은 달라졌다.

이 작은 것들을 쌓아나가면 검무극이 되는 것이리라.

그녀가 검무극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뜻밖의 자리에 있었다.

언제 내려갔는지 한빙쌍검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소교주를 절대 믿지 말라던 사한과 소빙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껄껄 웃고 있었다.

그래, 취마의 말이 옳다.

‘난 당신처럼은 못 살아.’

그녀는 인정했다. 아무리 쌓고 쌓아도 저렇게는 될 수 없을 거다. 이 사람들을 챙기면서 일 층의 한빙쌍검까지 챙긴다고?

비록 검무극처럼 살 수는 없더라도, 느끼고 배운 바가 컸다.

북해에서 나올 때는 아이였지만,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검무극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단연이 그의 옆에 와서 발그스레 취한 얼굴로 물었다.

“전에 그러셨잖아요? 귀영대는 소교주님 심장이 대주로 있는 곳이라고요.”

“그랬지.”

“대주님은 어떤 분이시죠? 너무 궁금해요.”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낸 그녀였다.

그러자 서대룡이 대신 대답했다.

“아름답지.”

이안 이야기가 나오자 반가운 마음에 끼어든 것이다.

단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아름답다니?

“얼마나요?”

서대룡이 신이 나서 천하제일미라 해도 된다고 말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검무극의 다급한 전음이 날아들었다.

―정신 차려!

순간 서대룡의 술이 확 깼다.

서대룡이 옆의 단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단 소저보다는 못하지만, 예쁜 편이지.”

단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괜한 말씀 마세요.”

그럼에도 싫지 않은 그녀의 기색을 보면서,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심하면 죽는 거야!

단연이 다시 물었다.

“그럼 대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옆에서 듣고 있던 한설이 언니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주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들어선 사람을 본 조춘배가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한빙쌍검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들어선 사람은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들어서자 주위가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단씨 세 자매는 물론이고 강달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나 처음 보았다.

장호와 서대룡이 드디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바로 이안이었다.

눈빛은 더욱 맑고 깊어졌고 기도 역시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드디어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구나!’

대성의 성취는 그녀에게 또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이제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강인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안이 검무극을 올려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귀영대주 이안,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검무극을, 서대룡을, 장호를, 그리고 한설을 바라보았다.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반가움. 이안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저 빼놓고 이렇게 놀기 있나요?”

악착같이 챙겨온 건데 받아야지

이안이 이 층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가까이서 본 이안은 내려다볼 때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게다가 범접할 수 없는 기도까지 느껴졌다.

“소교주님!”

이안이 검무극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이 없었다면 소교주가 아니라 도련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도련님! 하고 달려가서 와락 안겼을 거다. 그만큼 검무극이 보고 싶었다.

“고생했다.”

검무극의 그 한마디에 이안은 경직되고 긴장한 마음이 거짓말처럼 풀리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고 느꼈던 그 감정을 이안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설을 향했다.

한설이 천마신교에 온 첫 번째 이유가 이안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못 보고 가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안이 돌아온 것이다.

한설이 이안을 불렀다.

“언니.”

언니, 동생 하기로 하고 헤어진 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많이 어색하고 서먹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 않았다.

언니란 말에 두 사람 관계를 모르는 이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다음에 중원에 오면 구경시켜 준다고 했잖아?”

이안이 했던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던 그녀였다.

“그래, 잘 왔어.”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이안을 보며 한설은 느꼈다. 이안이 뭔가 달라졌음을. 한데 그게 어떤 변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서대룡이 반갑게 이안에게 인사했다.

“이 무인, 잘 돌아오셨소.”

“각주님 잘 지내셨어요?”

그러자 검무극이 슬쩍 말했다.

“우리 중에서 제일 잘 지냈다.”

그러면서 단아를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아니죠? 이 배신자!”

이안이 허물없는 농담으로 친분을 과시했고 서대룡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안이 단아에게 환한 미소로 말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주님.”

단아가 막내를 보며 말했다.

“막내가 소교주님 덕분에 귀영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서 인사해라.”

단연이 멍하게 이안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너무 아름다우셔서. 신입으로 들어오게 된 단연입니다. 일 조장님이 내일부터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단연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안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뭐 하는 조직인지는 들었나?”

“네, 소교주님의 그림자가 되는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좋아 그럼 묻겠다. 교주님 명령과 소교주님 명령이 상충되면 어떻게 하겠나?”

단연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소교주님의 명령을 따라야겠지요?”

“그럼 반역인데?”

반역이란 말에 흠칫했지만, 단연의 생각은 확고했다.

“어차피 본체가 없으면 그림자는 사라지는 존재잖아요.”

단연의 대답에 이안이 검무극을 보며 말했다.

“아직 첫날 시작도 안 했는데 저보다 충성심이 높은데요?”

그 말에 단연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실제로 세 자매 중에 제일 밝고 재치 있는 그녀이기도 했고. 앞서 서대룡에게 배신자라고 장난친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녀 마음에 꼭 들었다.

검무극에게 큰 호의를 느끼는 것도 그가 소교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럴 때 던지는 저런 여유로운 농담 때문이다.

“그래도 요리는 아버지에게 보낼걸?”

무슨 뜻이냐는 이안의 눈빛에 검무극은 그저 뜻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시 장호가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 무인, 잘 돌아오셨습니다.”

“군주님은 몸이 더 커지셨습니다!”

천소희와의 재회도 오랜만이었다.

“매일 보다가 이제 얼굴 한 번 보기가 어려워졌네요.”

“소교주님이 심야수련을 꼭 부활시키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마지막으로 강달과도 인사를 마친 후 자리에 둘러앉았다.

검무극이 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내 심장이 돌아왔습니다!”

이안은 또 저러신다, 부끄러워했지만, 그래도 잔은 높이 들었다.

그렇게 모두 기분 좋게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으며 단연이 서대룡에게 속삭였다.

“형부, 너무 표나는 거짓말이었어요.”

아까 서대룡이 언니가 더 예쁘다고 했던 말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서대룡이 머쓱하게 웃자 단연이 다시 귓속말로 했다.

“이럴 때는 내 눈에는 더 예뻐, 하는 거예요.”

“아!”

서대룡도 단연에게 귓속말을 했다.

“앞으로 처제가 잘 알려줘.”

“형부의 용돈 액수에 따라 조언의 질이 달라지겠죠?”

그 말에 서대룡이 웃었다. 문득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늘이 이 행복을 질투해서 불행을 보낼까 두려웠다.

그러다 문득 이안과 술을 마시고 있는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막연히 머리로만 알았던 것을 이젠 확실히 가슴으로 알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검무극이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검무극에게는 이안이 단아고, 장호가 단비며 자신이 단연일 테니까. 불행이 감히 찾아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였던 것이리라. 게으름이 불행을 자초하지 않게 하려고.

‘저도 부지런함으로 지켜내겠습니다, 소교주님.’

그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이 허공에 건배한 후 술잔을 비웠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있는 자리였음에도 분위기는 좋았다.

검무극이란 기둥이 모두를 방심하게 했다.

웃고 떠들고. 다들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눴다.

술자리 말미에는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황천각 집행무인으로 들어가게 된 단비는 서대룡, 강달과 함께 여러 대화를 나눴다. 평소 말이 없는 편인 둘째였는데, 그렇다고 자신의 직속 수장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를 놓칠 정도로 내성적이지는 않았다.

서대룡이 두 수하에게 말했다.

“난 우리 황천각이 길잡이별이라고 생각하네. 어두운 밤,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역할이지. 다들 더 편한 길을 찾으려 하기에, 교내 모든 조직이 흔들려도 우리만은 흔들려선 안 된다고 생각하네.”

단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린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서대룡이 솔직히 대답했다.

“각자 자신만의 길잡이 별을 찾아야겠지.”

강달과 단비가 생각에 잠겨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서대룡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자신은 이미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한편 단연은 이안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인 이안에게 완전히 반했다. 아름다웠고, 강했으며, 무엇보다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안은 자신이 꿈꾸는 모습이었다.

“대주님은 꿈이 있으세요?”

용기를 낸 단연의 질문에 이안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잘 살아남는 것.”

이안은 한 마디 중요한 말은 빼고 말했다.

검무극은 천소희와 장호와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권마 이야기도 하고, 장호 그림 그리는 이야기도 하고.

천소희는 정말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하고 술 마시니까 너무 좋았다. 예전에는 동권문 철권들하고 편하게 술을 마시곤 했지만, 후계자가 되고 난 후에는 그런 자리가 없어졌다.

“저희는 먼저 일어날게요.”

다음날 새로운 조직에 첫날을 맞아야 했기에 단씨 자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아는 술자리 내내 조용히 있었다.

사실 술도 잘 마시고, 말도 하려 들면 많이 하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술도 참고 말도 참았다. 서대룡과 동생들을 위해 아무 실수도 하지 않으려고.

헤어지기 전에 이안이 단아에게 살짝 말했다.

“서 각주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감사해요.”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강달도 작별을 고했다.

“수하가 내일을 위해서 가는데 수장이 놀고 있을 수는 없겠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들의 오랜만의 재회를 위해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껴서였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확실히 빠질 줄 아는 그였다.

한설도 함께 일어났다.

“어르신들 피곤하신 거 같아서, 저도 먼저 가봐야겠어요.”

일 층의 한빙쌍검 중 사한은 아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취한 것이다.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한 소저, 부탁이 있소.”

“말씀하세요.”

“여기 벽에 한 말씀 남겨주시오.”

그 말에 일 층에 있던 조춘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역시 검무극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알고 챙겨주었다.

그녀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자격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이쪽 벽에 남겨주시오. 여기는 우리 젊은 고수들 이름을 남깁시다. 시작을 우리 소궁주께서 열어주시오.”

그렇게 부탁을 하자 결국 한설이 글을 남겼다.

―친구들과 잘 마시고 갑니다. 북해빙궁 소궁주 한설.

드디어 풍류주점 벽에 북해빙궁 후계자의 글귀까지 남겨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란 표현에 서대룡이 흐뭇하게 웃었고, 조춘배는 너무 좋아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춘배는 한설에게 고마움을 표한 후 검무극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검무극이 아니었으면 절대 남기지 않았을 글이다.

그렇게 모두 돌아가고 풍류주점에는 검무극과 천소희, 그리고 술 모임 삼인방이 남았다. 천소희도 가려는 걸 검무극이 일부러 남겼다.

“잠깐만 술 마시고 있어. 가져올 게 있다.”

검무극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네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이안이 서대룡에게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소감이 어때요?”

서대룡에게 장호와 이안은 단순한 술친구 그 이상이었다.

“솔직히 단 소저와 함께 돌아왔지만, 겁납니다. 평생 나 혼자만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다들 미혼이었기에 서대룡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일 층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목소리.

“그런 고민은 경험자에게 여쭤봐야지.”

검무극이 조춘배를 데리고 이 층으로 함께 올라왔다. 검무극은 그새 어딜 다녀왔는지 혁낭과 기다란 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주인장께서는 혼인을 후회하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조춘배가 웃으며 말했다.

“후회한 적도 있었지요. 마누라랑 크게 싸우고 나면 어휴, 그날은 잘 때 혼자 살던 시절 꿈꾸면서 잠이 들곤 했으니까요.”

솔직한 그의 고백에 모두 웃었다.

“한데 혼자 살았어도 후회했을 겁니다. 아무리 말 안 듣는 자식놈도, 내 인생에 저놈 없었으면 어쨌을까 아찔하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인지 나이 먹을수록 마누라밖에 없고.”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말했다.

“애정사로 힘들 때 상담은 풍류주점으로!”

“네!”

조춘배가 황송하다며 인사한 후 일 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그는 웃고 있었다. 이제 황천각주 애정 상담까지 하게 될 줄이야.

서대룡의 시선이 검무극이 가져온 상자와 혁낭을 쳐다보았다.

“한데 그건 뭡니까? 검 상자 같은데?”

검무극이 검 상자를 이안에게 주었다.

“자, 선물이다.”

상자를 받아 든 이안이 깜짝 놀랐다. 이 자리에서 선물을 받게 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선물이라고요?”

상자에는 해와 달이 멋있게 새겨져 있었는데,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자만 봐도 안에 든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안에 든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이안이 천천히 검을 뽑아보았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아아아아아.

섬뜩한 예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보통 보검이 아니었다.

“일월검이다.”

검무극의 말에 이안은 물론이고 장호와 서대룡, 천소희까지 깜짝 놀랐다. 일월검은 무림에서 이름난 보검이었다.

과거 비사인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흑사단주에게 받은 바로 그 일월검이었다. 비사인이 다시 이 검을 검무극에게 주었었는데, 그때 검무극은 심장에게 줄 거라고 했었다. 이후 고이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안에게 줄 순간이 되었다.

“이렇게 귀한 검을 왜 주시는 거죠?”

“이제 이 검을 지킬 수 있는 경지에 올랐으니까. 축하한다, 이안.”

“아, 역시! 아셨군요.”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다. 아무리 무공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해낼 수 없는 기간이었는데,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이 아낌없이 가르침을 내려준 검무극 덕분이었다.

“정말 이걸 저 주시는 건가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에게 검은 목숨과 같은 것, 일월검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목숨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검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저 사양 안 해요. 제 인생에 이런 검, 두 번 다시 못 얻을 것 알아요. 저 가져요.”

“너 좋아할 것 같아서 검 상자까지 챙겼어.”

“정말 감사합니다, 도련님.”

부담은 부담이고, 정말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어서 이 검으로 비천검법을 발휘하고 싶었다.

한편으론 자신만 이렇게 선물을 받으려니 너무 부담되고 다른 세 사람에게 미안했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아무리 심장이라지만 너무 하십니다! 우리는요?”

일부러 너스레를 떨어준 것이었는데, 검무극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장 군주와 너희 것도 있지.”

설마 했는데, 검무극이 혁낭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혁낭에서 나오는 보의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는 비호철의(飛虎鐵衣)를, 장호에게는 금강신갑(金剛神甲)을, 천소희에게는 화양갑(華陽甲)을 주었다.

이 보의는 은하상단주의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보의였다. 검무극이 네 겹이나 껴입고 챙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귀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서대룡의 사양에 검무극이 비호철의를 다시 챙겼다.

“그래? 그럼 이것도 이안이 줘야겠다.”

다시 가져가려는 걸 서대룡은 필사적으로 비호철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무인을 욕심쟁이로 만들 수는 없죠.”

세 사람 모두 너무 감격했다. 지금 받은 보의는 자신들이 평생 돈을 모아도 살 수 없는 값비싼 보의였고, 설령 돈이 있다 해도 구할 수 없었다.

천소희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이 보의를 입고, 교주님을 꼭 지켜드리겠습니다.’

장호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검무극 덕분에 마군주까지 된 자신인데, 이제 이런 귀한 선물까지 받았으니까.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받아야지. 자네들 주려고 아버지 보는 앞에서 탐욕의 화신이 되어서 악착같이 챙겨온 건데.”

“소교주님 것은요?”

그러자 검무극이 옷자락을 펼쳤다. 안에 입은 옷은 흑룡비갑이었다.

“당연히 제일 좋은 것 챙겼으니 부담 안 가져도 되네.”

그들이 안 받을까 봐 일부러 입고 온 것이다.

이 마음이 보의보다 더 고마웠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그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더 강해져라. 감히 누구도 우릴 건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라.

“이건 그대들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야. 내 심장과 오른팔, 왼팔,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사매에게 주는 선물이니 내가 내게 주는 선물이지.”

* * *

술자리가 끝나고 검무극과 이안 둘이서 새벽녘 오솔길을 산책했다. 이안은 사람들이 있을 때는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이번 임무에 대해 안 물어보시네요?”

임무는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을 귀영대 이 조장으로 데려오려는 것.

회귀 전 인생에서 유일한 친구.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자신의 회귀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낭인이 아니라 이안과 인연이 되어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실패했잖아?”

성공했으면 같이 왔을 테니까.

“이번에도 또 다른 일이라도 있었어?”

이전에는 이안이 아낙에게 물을 얻어먹는 것을 인연으로 다른 일에 휘말렸었다.

“아뇨, 이번에는 서 소저를 만났어요.”

“만났다고?”

“서 소저 설득도 다 했고요. 정말 쉽지 않았어요.”

“한데 왜 같이 안 왔어?”

“해야 할 일만 마치고 오겠다고 했어요. 황룡무관(黃龍武館)에 볼일이 있다고요.”

황룡무관.

그곳은 수많은 고수를 배출한 명실공히 무림제일의 거대무관이었다.

“일 마치는 대로 곧바로 온다고…… 소교주님?”

이안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검무극이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춰 있었다.

“왜 그러세요?”

회귀 전 인생에서 그녀를 죽인 사람은 바로 황룡무관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이 시기에 그 악연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운명이 바뀌었거나.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며칠간의 달콤한 휴식이 끝나고 이제 다시 강호로 나가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

“이안아, 짐 아직 안 풀었지?”

널 위해서 준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죠?”

이안의 물음에 검무극은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황룡무관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어. 혹시라도 서 소저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봐.”

단지 그런 정보가 있다고 그녀를 곧장 찾아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안을 이해시킬 말은 오히려 이 말이었다.

“예감이 안 좋아.”

과연 이안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가봐야죠.”

지금껏 검무극이 해낸 그 많은 일이 어찌 이해할 수 있는 일일까? 이안은 검무극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란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걸 이해했다.

“돌아와서 쉬지도 못했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니요? 서 소저 일은 제 일인데요. 한데 소교주님도 함께 가시나요?”

“당연하지.”

함께 간다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검무극과의 출교는 그녀가 정말 바라는 바였으니까.

“지금 당장 출발하나요?”

“이제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거야. 한 소저 만나서 얘기하고 출발하자.”

“그럼 아버지는 뵙고 갈 수 있겠네요.”

그녀 인생에 평생 소교주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 이제 아버지도, 동생도 생긴 그녀였다.

그길로 두 사람은 본단으로 돌아와서 각자 처소로 헤어졌다.

“한두 시진이라도 눈 좀 붙여. 나중에 보자.”

“네, 소교주님.”

검무극이 돌아서려는데 이안이 말했다.

“일월검 감사해요. 너무 좋아서 한동안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검무극이 그녀의 허리에 찬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잘 어울린다.”

그냥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그녀에게 해와 달이 수놓아진 일월검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거처로 돌아온 이안은 짐을 꾸렸다.

갈아입을 옷과 금창약, 내상약.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을 새로 혁낭에 챙겼다.

검 상자는 거처에 잘 보관해 두었다. 상자를 볼 때마다 자신을 위해서 상자까지 꼼꼼히 챙겨준 검무극의 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

이안은 내력으로 취기를 몸 밖으로 몰아낸 후 마당으로 나갔다.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천천히 일월검을 뽑았다.

스르릉.

부드럽게 뽑혀 나오는 검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새벽녘 여명이 검날을 타고 흘렀다. 검날은 너무나 날카로워서 보는 사람을 빨아들여 영혼을 벨 것만 같았다.

이안은 천천히 내력을 일으켰다.

보검은 처음 얻었을 때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검무극에게 몇 번이나 들었다. 검과 교감해야 한다. 주인을 받아들인 검과 그렇지 않은 검의 위력은 분명 큰 차이가 있다고 했으니까.

진기가 주입된 일월검이 가볍게 진동했다. 이안은 검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 노력의 결과는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알게 될 것이다.

‘일월아, 우리 평생 가는 거다.’

* * *

날이 밝자마자 검무극은 이안과 함께 한설을 찾아갔다.

“무슨 일이죠?”

두 사람의 방문에 그녀는 놀랐다. 아직 세안도 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두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안과 출교해야 할 것 같소.”

그 순간 한설의 마음에 스치는 것은 분명 아쉬움이었다. 물론, 한설은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두 분이 가면 우리도 떠나야지요.”

한설은 곧장 한빙쌍검에게 곧 떠날 것을 알렸다.

검무극은 남아서 더 놀다 가란 말을 하진 못했다. 자신과 이안을 보려고 온 그녀였으니까. 서대룡이나 장호가 챙겨줄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게 됐소.”

검무극의 사과에 한설은 이안을 쳐다보았다.

“언니 보러 온 거였는데. 봤으니까 됐어요.”

이번에는 이안이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중원 구경 시켜주기로 약속했었는데.”

“다음에. 그리고 오면서 소교주가 많이 시켜줬어.”

“곧바로 북해로 돌아갈 거야?”

“아니. 들러야 할 곳이 있어.”

한설은 돌아가기 전에 비사인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아마 좋은 구경은 거기서 많이 하겠지.”

검무극의 의미심장한 말에 이안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고, 한설은 못 들은 척했다.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었다.

“난 먼저 아버지께 가 있겠소. 조금 있다 천마전에서 봅시다.”

떠나더라도 교주에게 인사는 하고 떠나야 했으니까.

검무극이 먼저 방을 나갔다.

“소교주는 항상 바쁘네.”

한설의 말에 이안이 창밖 저 멀리 담 너머로 날아가는 검무극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차 한잔할 시간은 되겠지?”

한설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우려줄게.”

이안이 직접 동생을 위해 차를 우렸다.

“궁주님은 잘 계시지?”

“잘 계셔.”

“용케도 중원에 내보내 주셨네?”

“소교주 믿고 보내준 거지.”

사실이었다. 검무극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절대 딸을 중원으로 내보내진 않았을 거다.

“언니는 지난번에 봤을 때와 달라진 거 같아.”

이안이 한설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고생을 좀 했거든.”

그러자 검무극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심장이라면서 그렇게 혼자 내보내도 괜찮냐는 물음에 검무극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홀로 걸을 줄도 알아야지.

한설은 지금 그 홀로 걸은 결과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 이안이 차를 가져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셨다.

“향이 좋다.”

“맛도 좋고.”

이안이 향을 음미하던 그때, 한설이 불쑥 물었다.

“소교주 사랑하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매번 검무극이 자신을 심장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질문을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좋아해.”

한설은 말없이 이안을 응시했다.

“왜? 내가 실연의 상처라도 입을까 걱정돼?”

이안이 차를 호로록 마시며 말했다.

“칼 맞는 상처만으로도 벅찬 인생이야.”

이안이 창밖을 바라보았고, 한설도 따라서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 화창한 하늘로 새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중원 구경 많이 하고 가.”

* * *

검무극이 아버지의 처소에 도착했다.

다른 마존은 못 보고 가더라도 아버지께 인사는 드리고 가야지.

아버지는 아침 수련을 하고 계셨다. 연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랍니다.”

검무극이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천마검을 앞으로 내민 채 눈을 감고 계셨다. 기도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검에 진기를 주입하지도 않으셨다. 오직 검을 느끼며 그렇게 서 계셨다. 지난번에 아버지는 온전히 검의 기운을 느끼도록 가르침을 주셨다.

검무극도 흑마검을 뽑았다. 역시 검에 진기를 주입하지 않고, 아무런 기도도 발출하지 않은 채 흑마검에만 집중했다.

‘너도 참 바빴지?’

적을 죽이기 위해서 바빴고, 구화마공을 수련한다고 바빴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눈을 감고 오롯이 검의 기운에만 집중할 여유가 잘 나지 않았다. 하늘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자꾸 잊는 것처럼.

눈을 감고 검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문득 어릴 때가 생각났다.

어린 시절.

검술을 배운 후 처음으로 목검이 아니라 진검을 뽑던 그날이었다.

어린 손에 들린 검의 칼날이 너무 무서웠지만, 검무극은 무섭지 않은 척했다. 오히려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아버지가 해줬던 말씀이 떠올랐다.

―검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라면 검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거 같은데. 어쨌든,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흘려들었는데.

‘나는 지금 검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검무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버지는 어느새 눈을 뜬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근래 구화마공의 악귀들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구화마공의 위력에, 구화마공의 성취에. 언제 천마혼을 볼 수 있을까? 그런 마음에만 정신이 팔려서.”

검무극이 깊어진 눈빛으로 덧붙였다.

“저는 검이 무서운 것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야말로 검술의 본질임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날 아버지가 제게 해주셨던 말씀이셨는데도요.”

아들을 바라보는 검우진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버지는 어떠실까? 과연 아버지는 천마검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셨던 것일까?

검무극은 자신이 들고 있던 흑마검을 잠시 내려보다가 다시 검집에 회수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다시 출교할 일이 생겨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어딜 가려고?”

검무극이 아버지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지금 아들 또 나간다니까 섭섭하신 거죠?”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아들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안과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통천각 통해서 기별하겠습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소저와 이안이 인사드리러 천마전으로 올 겁니다. 그럼 저도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검우진이 말했다.

“나는 여전히 검이 두렵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들을 위해 솔직하게 말해주는 진심에는 경지에 이른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검술의 극의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검을 존경하나 봅니다.”

잔혹한 마검이 아님을 알기에. 그 누구보다 강한 검이지만, 그 강함을 경계하는 검이기에.

“저도 오늘부터 다시 두려워질 겁니다.”

* * *

이안과 한설, 그리고 한빙쌍검이 천마전에서 작별을 고했다.

한설이 정중히 포권하며 검우진에게 인사했다.

“덕분에 잘 지내다 떠납니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궁주님께 안부 전해주고.”

“그리하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강녕하시기를.”

한설이 인사했고, 한빙쌍검도 인사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교주님.”

“두 분도 조심히 돌아가시오.”

다음으로 이안은 떨리는 마음으로 정중히 인사했다.

“동생을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소교주님 잘 보필해서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도 북해빙궁의 핏줄이었으니까, 한설이 인사하는 자리에 함께 왔던 것이다.

그때 검우진이 한설과 한빙쌍검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시오?”

“네, 천천히 말씀 나누십시오.”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천마전 앞에서 기다려주시오.”

그러자 검우진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너도!”

“저도요?”

이안만 남기고 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이안아, 부디 살아서 보자!”

저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요! 이안의 마음속 외침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이 천마전을 나갔다.

혼자 남은 이안은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야단맞을 일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소교주님 관련해서 뭔가를 말씀하시려는 걸까?’

가슴이 두근두근 온갖 생각이 다 들던 그때, 검우진에게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구나.”

검우진은 처음 이안이 천마전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비천검법이었기에 모를 수 없었다.

“네, 얼마 전에 이뤘습니다. 그동안 어리석은 제게 소교주님께서 큰 가르침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애초에 교주님께서 배움을 허락해 주신 덕분입니다.”

이안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천부적인 무재가 없다면 무극이가 아니라 내가 직접 가르쳤다 해도, 이 기간에 대성을 이룰 수는 없을 거다.”

그때 그곳으로 휘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와서 이안에게 건네주었다.

“교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네.”

이안이 떨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안에 든 것은 만년설삼이었다.

이안이 놀라서 고개를 들아 바라보자 검우진이 차분히 말했다.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기념으로 주는 것이다.”

순간 이안은 깜짝 놀랐다. 천마가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줄줄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앉으며 이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귀한 선물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자 거절할 수 없는 한마디가 떨어졌다.

“받아라.”

이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 검우진을 쳐다보았고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 교주님.”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복용하거라. 내가 봐주마.”

이안은 정신이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만년설삼을 복용했다. 천마 앞에서 만년설삼 씹는 기분이 어떤지 아는 사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녀가 만년설삼을 다 복용하자 검우진은 그녀의 등으로 한 줄기 내력을 주입해 기운을 녹이게 도와주었다. 누가 도와주는 데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안의 단전에 만년설삼의 웅혼한 내공이 더해졌다. 최근 빙궁주가 준 빙설초를 복용해서 크게 내공을 증진한 그녀였는데, 거기에 만년설삼의 내공까지 더해졌다.

그야말로 누구와 겨뤄도 밀리지 않을 내공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비천검법의 대성과 일월검, 거기에 만년설삼까지.

그야말로 그녀는 제대로 강해졌다.

이안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리 천마신교의 교주라도 만년설삼이 흔해서 내려주는 것이겠는가?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이 은혜는 소교주님에 대한 충성으로 갚겠습니다.”

그녀는 소교주를 잘 지켜주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검우진이 만년설삼을 내려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무극이 때문에 준 것이 아니다.”

“네?”

“널 위해서 준 것이다.”

이안이 놀란 얼굴로 검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애초에 혈육에게만 전수되는 비천검법을 익히는 걸 허락한 것도 소교주님의 부탁 때문이었을 텐데?’

이 순간 그녀가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소교주를 지키는 호위라서도 아니고, 빙궁의 혈육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아끼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권마의 딸은 내 딸이나 다름없다.”

검우진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너라.”

내 딸 잘 데려갔다 돌아오너라

넌 내 딸과 다름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은 너무 놀라고 당황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주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으니까. 천마가 자신을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으니까.

이안은 멍하게 검우진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황송한 감사 인사뿐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붉은 융단을 걸어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현기증이 났다.

‘난 그저 보잘것없는 호위에 불과했었는데.’

한데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없앴고, 비천검법을 물려받았으며, 권마의 수양딸이 되었고, 자신의 혈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교주에게 딸과 다름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이 천마전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무슨 말을 저리 열심히 한빙쌍검에게 하는 걸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이 국숫집이 정말 맛있습니다. 예전에는 만둣집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여기서 동쪽으로 삼십 리를 가면 객잔이 하나 있습니다. 겉은 허름해 보여도 거기 수육 요리가 끝내줍니다. 또 거기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가는 길목에 있는 맛있는 요리를 파는 집을 알려주고 있었다. 길도 잘 알았고, 기억력은 어찌나 좋은지 그 집에 뭐가 맛있는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한빙쌍검 중 사한은 관심 없는 척 한발 물러서 있었지만 검무극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소빙은 적극적으로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집들은 다 두 분의 입맛에 맞는 곳일 테니 꼭 들렀다 가십시오.”

사한이 슬쩍 한설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우리보다 소궁주님 입맛에 맞아야지요.”

검무극의 시선도 한설을 향했다.

“소궁주는 먹을 기회가 많을 겁니다. 앞으로 중원에 자주 나올 거지 않소?”

한설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에게 앞으로 자주 나오라고 권하고 있음을.

검무극이 다시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니 두 분께서 많이 드시고 가십시오.”

소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겠네.”

“나중에 두 분만 중원에 나오실 일이 있더라도 제게 기별하십시오. 그때 더 맛있는 요리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빈말이라도 고마운 말이었다. 게다가 어제 술자리에서 자신들까지 잘 챙겨주지 않았던가?

그렇게 북해의 두 고수에게 확실히 점수를 딴 다음에야 검무극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안을 향했다.

“무슨 비밀 대화가 이리 길었어?”

그사이 마음이 많이 안정된 이안이었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

그녀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영약을 하사하셨음을. 그녀에게 만년설삼의 좋은 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먹어봐서 잘 아는 향이다.

축하한다, 이안.

그렇게 마음으로 축하해 준 후 한설에게 말했다.

“자, 그럼 가시죠.”

검무극과 이안이 한설과 한빙쌍검을 본단 정문까지 배웅했다.

한설은 걸어가면서 곳곳에 세워진 악귀상들을 쳐다보았다. 너무 짧게 있어서 천마신교에 대한 소감이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저 거대한 악귀상들만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정문에 그들이 타고 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설은 이안과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럼 다음에 봐.”

“잘 가.”

이안은 그들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검무극은 언제 그런 수다쟁이였나 싶을 만큼 과묵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이 얼굴이 소교주님의 본모습과 가깝다는 것을.

검무극이 이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자, 사부님께.”

* * *

권마는 철권들과 함께 아침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단상에서 주먹을 내지르는 권마 아래에 천소희가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고, 그 앞으로 검은 무복을 입은 흑권들이 같은 동작으로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다.

파아앙!

동권문의 철권 중에서 제일 고수들이었기에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에는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절도와 힘이 담겨 있었다.

권마부터 흑권들까지, 권법의 기초 동작임에도 한 동작 한 동작 정성을 다했다.

아무리 복잡하고 현란한 초식도 이 기본 동작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법. 권마는 이 기초를 굉장히 중요시했다.

그가 직접 철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이 기본기를 완전히 몸에 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수련이 끝났을 때, 그곳으로 검무극과 이안이 들어섰다.

“아버지!”

철권들의 시선이 반반으로 나뉘었다. 피 끓는 젊은 시선은 이안을 향했고, 주로 나이 든 이들은 권마를 향했다.

평소 볼 수 없는 권마의 표정을 볼 기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권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예외였다.

“왔느냐?”

권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정말 저 무서운 얼굴 속에 숨겨져 있던 저 기분 좋고 편안한 표정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권마를 바라보았던 철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이 놀라운 감정을 공유했다.

이안 뒤를 따라온 검무극이 말했다.

“불효녀 도착입니다.”

“불효녀라니요?”

이안이 놀라 묻자 검무극이 일러바쳤다.

“따님께서 본교에 도착한 후에 사부님께 인사도 안 드리고 곧장 저와 술 마셨거든요.”

이안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었잖아요?”

“사부님 밤잠 없으신 줄 뻔히 알면서.”

이안이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정말 이러실 거예요?

검무극이 웃으면서 권마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사부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가운 얼굴로 검무극을 맞이했다. 딸과 제자 모두 오랜만의 재회였다.

그때 함성처럼 들려오는 인사.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철권들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그들은 소교주가 권마의 제자인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잘들 지냈나?”

함께 수련했던 적이 있었기에 검무극도 철권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천소희는 숙취 가득한 얼굴로 검무극과 이안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권마는 그녀에게 수련을 맡긴 후, 검무극과 이안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수련장에서 멀어지자 이안이 죄송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일이 생겨 바로 소교주님과 출교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쉬워하면 이안의 마음이 무거울 것을 알았기에, 권마는 이유를 묻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안은 권마에게 검우진에게 만년설삼을 받은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이유도 그대로 전했다.

“교주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네.”

아버지와 권마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검무극은 볼 수 있었다. 권마의 저 무서운 얼굴에 스치는 감출 수 없는 감격을. 권마에게 아버지의 그 말은 만년설삼보다 훨씬 귀한 것이었으리라.

이런 순간이면 검무극은 항상 하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철 같은 두 남자가 중원을 활보하던 그 젊은 시절의 모습이.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동권문 입구에 도착했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네, 아버지.”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이안이 권마에게 말했다.

“오늘 교주님께 받은 과분한 선물은 모두 아버지 덕분입니다.”

권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덕분이다.”

잠시 사이를 두고 권마가 덧붙여 말했다.

“네가 내 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다 없을 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마 앞에서도 참았고, 검무극 앞에서도 참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결국 아버지 앞에서 터져 나왔다.

다들 너무나 고마웠다. 자신은 그저 천마신교에 버려진 아이에 불과했었는데. 이 대단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저, 다녀올게요.”

멈추지 않는 눈물에 당황한 이안이 황급히 그곳을 먼저 나갔다.

권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눈빛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속에서 권마의 마음을 읽었다.

―내 딸 잘 데려갔다 돌아오너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부님. 따님이 소교주 잘 데려갔다 돌아올 테니까요. 아시잖아요? 따님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그렇게 권마와 작별을 고한 후에 검무극도 그곳을 나왔다.

바깥에서 이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바쁘다면서 왜 이렇게 늦장을 부려요?”

검무극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이 녀석아, 눈가에 눈물 자국 다 안 지워졌다.

그녀가 눈물 흘린 것으로 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 눈물만큼 값진 눈물은 없을 테니까.

“준비됐어?”

“네!”

검무극이 먼저 몸을 날리며 말했다.

“가자, 이안!”

* * *

서진은 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큰 현판은 본 적이 없었다.

황룡무관

마치 현판 크기가 이 무관의 위세를 보여주기라도 한다는 듯, 거대한 현판에는 황룡무관이란 네 글자가 황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입구를 지키는 무인은 한 명도 없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감히 너희가 불손한 마음으로 황룡무관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하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안으로 보이는 거대한 연무장. 연무장이 얼마나 큰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수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무인이 그녀를 보며 걸어 나왔다.

“무슨 일로 오셨소?”

서진이 무인을 쳐다보았다.

“임 사범님을 만나 뵈러 왔어요.”

“임 사범이 한두 분이 아니신데 어느 임 사부를 말하는 거요?”

“임현(林賢) 사범님이에요.”

“잠시 기다리시오.”

무인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나왔다.

“따라오시오.”

서진은 무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걸으며 내부를 구경했다. 정말 무림맹에 온 건지 무관에 온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연무장 곳곳에 관원들이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수십 명이 모여 있기도 했고, 몇 사람이 모여 수련하기도 했다. 강해지고자 하는 그들의 열기가 느껴졌다.

“여긴 정말 대단하군요.”

서진의 말에 안내하던 무인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중원제일무관 황룡무관, 못 들어보셨소? 우린 일반 무관처럼 돈을 낸다고 받아주지 않소. 시험을 치러야 들어올 수 있는 곳이오.”

그래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입관보다 더 어려운 것이 출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출관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 이곳 출신이라 할 수 없었다.

무인이 서진을 안내한 곳은 큰 건물에 있는 한 무인의 집무실이었다.

“어서 오시오. 나는 황룡무관의 사부 기석(基席)이오.”

황룡무관의 체계는 관주, 대사부, 사부, 사범 이렇게 나뉘어 있었다. 사범은 백여 명에 달했지만, 사부는 일곱으로 그들을 칠사부(七師父)라 불렀다.

그는 황룡무관에 있는 칠사부 중 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임현에게 안내할 줄 알았는데, 이곳으로 안내받자 서진은 내심 의아했다.

“서진이라고 합니다.”

“임 사범을 찾아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임 사범과는 어떻게 되는 사이시오?”

서진은 왠지 모르게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고향 동생이에요.”

임현은 오라버니인 귀령자의 어려서부터 친구였는데 그녀와 더 친했다. 매번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오라버니보단 자신과 많이 놀았던 것이다.

오늘 그를 찾아온 건 임현이 오라버니에게 전할 물건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시군요.”

기석이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임 사범께서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소.”

서진은 깜짝 놀라 악, 하고 소리쳤다. 너무 당황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라버니가 죽었다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석이 식은 차를 가져와서 그녀에게 주었다.

“우선 한 잔 마시고 진정하시오.”

서진이 찻잔을 손에 든 채 그에게 물었다.

“어쩌다가요?”

“교육 중에 사고를 당했소.”

“어떤 사고죠?”

제자들과 비무를 하다가 죽은 걸까? 아니면 무슨 사고를 당했다는 거지?

“직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소.”

“저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그렇다고 가족은 아니지 않소?

십여 년 전 홀로 남은 모친마저 돌아가시고, 이제 가족이 없는 그였다.

“본관의 원칙이니 이해해 주시오.”

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제 와서 이유를 알면 뭐 하겠는가? 이미 그는 죽었는데. 이 먼 타지에서 외롭게 혼자 죽은 것이다.

“시신은요?”

임현의 시신이라도 자신이 수습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묻어줘야지 했는데.

“직계 가족이 아니면 내줄 수가 없지요. 우리가 이미 매장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매장을 해버렸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나 오라버니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임 사범은 긴급 시 연락할 곳을 남기지 않았소.”

서진의 마음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그럴 리가?’

예전에 임현이 자신에게 말했다. 급할 때는 너희들에게 연락이 가게 해뒀다고. 이제 너희가 내 가족이라고.

‘사인도 알려주지 않고 시신도 내주지 않으면서 심지어 거짓말까지 해?’

그녀는 임현의 죽음을 두고 이들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음을 직감했다.

기석이 그녀에게 물었다.

“한데 소저께선 무슨 일로 임 사범을 찾아온 거요?”

기석을 응시하던 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룡무관에 입관하려고요.”

당신과 함께여서 나쁘지 않았어.

“본 무관에 들어오려 했다고?”

서진이 그렇게 대답한 건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임현 오라버니의 죽음을 파헤치려면 이곳에 들어와야 가능할 거란 즉흥적인 판단에서.

“오라버니가 계신 곳에서 무공을 배워보려고 했죠.”

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오라버니가 죽었으니…….”

그녀는 어찌할지 몰라 고민하는 거처럼 말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임현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는 자신을 더 걱정하는 거처럼 보였다.

그의 죽음은 슬프지만 내 걱정이 우선인, 그녀는 딱 이 정도 사이처럼 보이려 노력했다.

너무 슬퍼하거나 무조건 들어가겠다고 하면 임현의 죽음을 파헤치러 들어가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미안해, 오라버니.’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멍했었는데, 임현의 죽음에 의문이 생기면서 그녀의 머리가 차갑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임 사범이 있었더라도 시험을 쳐서 들어와야 했을 거네.”

“시험에는 합격할 자신 있어요.”

“그럼 시험을 쳐서 들어오시게. 우리 무관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네.”

기석은 들어와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렇게만 보면 임현의 죽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오라버니 없는 곳에서 다닐 수 있을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석이 방을 나서는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게. 생사에 연연하면 무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네.”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서진이 기석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갔다.

그녀가 떠나고 잠시 후 그곳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황룡무관의 사범이자 기석의 수족인 표산(豹山)이었다.

그가 들어왔을 때 기석은 창가에서 건물을 나서는 서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산이 그의 옆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임 사범이 비상시에 연락할 사람으로 적어두었던 이름이…….”

그의 시선도 저 아래 걸어가고 있는 서진을 향했다.

“바로 저 서진이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기석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평범해 보이지 않던데. 어느 가문인가?”

“귀문입니다.”

기석이 표산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귀문이라고?”

“네, 저 여인은 귀문주의 막내딸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군.”

귀문의 귀술은 일반 무인이 상대하기가 더없이 까다로웠다.

여차하면 살인멸구로 처리하려 했는데, 귀문의 혈육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그녀를 함부로 죽였다간 귀문이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설 것이다.

“저 어린 귀신이 임 사범의 죽음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아마 입관해서 조사하려 할 거다.”

“시험에서 떨어뜨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러자 기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력이 되는데도 떨어뜨리면 더욱 의심할 거야. 괜히 밖에서 조사한다고 설치게 하는 거보다 차라리 가까이 두고 저 아이를 감시하는 게 낫다.”

기석이 표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입문하게 되면 네가 직접 맡아라.”

“네.”

기석의 시선이 다시 저 멀리 연무장 옆에 서 있는 서진을 향했다.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관원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주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이 광활한 연무장에 임현이 홀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기석의 집무실을 나와 혼자가 되자 비로소 본격적으로 슬픔이 밀려들었다.

어려서부터 매일 아버지를 따라 대법 연구만 하는 오라버니는 재미없었다. 그런 그녀와 놀아준 사람이 바로 임현이었다. 먼저 오라버니에게 놀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 다음으로 자신을 불렀다.

―진아, 매미 잡으러 가자!

―공부해야 해. 아버지께 혼나!

―공부는 나중에 하고 매미 잡으러 가자!

조금 더 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아, 마을에 연희단이 왔대. 구경 가자!

―오라버니가 시킨 게 있어. 그냥 갔다간 오라버니에게 혼나!

―혼나도 후회 안 할 거야! 정말 재미있는 공연이래!

대법 연구를 해야 하는 삶이 너무 답답했던 그녀에게 임현은 동네 오라버니를 넘어 숨구멍 같은 존재였다.

언젠가 대법 연구로 다투며 귀령자에게 이렇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오라버니 말처럼 회귀대법이 가능하다고 쳐. 과거로 돌아가면 오라버니는 뭐 할 건데? 또 틀어박혀서 연구할 거야? 회귀는 해냈으니, 환생 연구라도 할 거야? 그게 아니라 다른 일을 떠올렸다면…… 오라버니, 우린 잘못된 인생을 사는 거잖아? 지금 그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 돌아가서 살고 싶은 삶, 그걸 살아야 하잖아?

그런 삶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임현이었다. 그와 함께 놀면서 실험실 밖의 세상을 구경했으니까.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은 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얼굴 좀 보자는 걸 몸이 너무 피곤해서 거절한 적도 있었고, 또 한 번은 정말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다. 나중에 보면 되지, 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나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봤어야 했는데.’

미안함이 북받쳐 오르며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애써 울음을 삼켰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오라버니를 살해하고 은폐하는 거면 내가 반드시 밝혀낼 거야.’

이번 일의 피해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자신도,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을 귀령자 오라버니도 모두 피해자였다. 평생 후회하고 아파할 테니까.

그녀는 오라버니가 더 걱정되었다.

그나마 하나 있던 친구를 잃었으니까. 대법 연구한다고 그의 손길을 더 많이 거절했던 사람이 오라버니였으니까.

* * *

다음 날 서진은 입문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합격!”

초식 시범과 내공 시험, 마지막 사범과의 비무까지 서진은 무사히 통과했다. 귀술을 주로 배운 그녀였지만, 황룡무관에 입관할 정도의 무공실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축하하네.”

그녀와 시범 비무를 한 사람은 기석의 수족이었던 표산이었다.

“감사합니다.”

표산이 황룡무관의 체계에 대해 간단히 알려주었다.

“처음 입관한 신입 관원은 백룡반에 속하게 된다. 백룡반을 통과하면 청룡반으로, 청룡반을 통과하면 흑룡반으로, 그리고 마지막 반이 황룡반이다. 황룡반을 나와야 비로소 황룡무관 출신이 되는 것이다.”

“보통 황룡반까지 마치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무재가 뛰어난 자는 일 년 안에도 해내고 무재가 없는 자는 이십 년이 지나도 못 해내지.”

막상 들어와서 보니 관원이 정말 많았다.

당장 그녀가 속하게 될 백룡반에만 수백 명의 관원이 있었고, 그들을 가르치는 사범만 삼십 명이나 되었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돈도 엄청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출관하기가 어려우니 매달 돈만 바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어쨌든 막연히 무관에 들어오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지, 하는 바람은 그야말로 막연한 기대에 불과했다. 임현을 아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거다.

“자, 나를 따라오도록.”

관원에서 안내를 맡길 법도 했는데, 표산이 직접 그녀를 데리고 무관을 안내했다. 이곳은 어떤 건물이고, 저곳은 또 어떤 건물이고.

그곳 중에서 신입이 꼭 알아야 하는 장소들을 알려주었다. 씻을 수 있는 곳,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곳, 밥을 먹을 수 있는 곳까지.

그리고 마지막에 연무장 한구석으로 왔다.

“여기가 내일부터 수련할 곳이다. 늦지 않고 나오도록!”

“알겠습니다.”

표산이 돌아서 가려는데 서진이 불쑥 물었다.

“사범님은 임 사범님을 아세요?”

“안다.”

“그럼 어떤 사고로 돌아가셨는지도 아시나요?”

표산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는 임 사범과 어떤 관계기에 그걸 묻는 거냐?”

“고향에서 친하게 지냈던 오라버니에요. 이곳에 들어오려 한 것도 오라버니 때문이고요.”

표산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임 사범은 제자와 비무를 하다 죽었다.”

생각지 못한 말에 서진은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는 사범의 명예를 생각해서 사인을 비밀로 한다.”

“대체 누구와 싸우다 죽은 거죠?”

표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누군지 알면? 가서 복수라도 하려는 거냐? 정당한 비무에서 죽었는데.”

“아닙니다.”

“하면 왜 알려는 거지?”

아무 말도 못 하는 서진을 두고 표산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석처럼 숨기는 것 없이 시원하게 말했기에 그의 말이 모두 사실처럼 들렸다. 하지만 서진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녀를 안내했던 무인이 말했다. 임씨 성을 가진 사범이 많은데 누굴 찾느냐고.

한데 아까 표산은 임 사범을 아느냐는 물음에 곧장 안다고 대답했다. 원래라면 당연히 ‘어느 임 사부?’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걸 아는 이유는 한 가지뿐이지.’

기석과 이미 대화를 나눈 것이다.

이 많은 사범이 있는 곳에서 우연히 내 시험을 담당한 사람과 기석이 나를 두고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결국 두 사람이 한패라는 의미다.

‘당신들, 대체 뭘 숨기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 * *

멀리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검무극과 이안은 숲속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룡무관으로 경공을 이용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내공이 늘어난 이안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속도 또한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훨씬 빨랐다.

달리고 또 달리고. 그러다 내공이 떨어지면 운기조식을 하고, 내공을 채우면 또 달렸다.

제대로 대화를 나눌 여유도, 식사 한 번 제대로 할 수도 없는 오직 달리는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이안은 좋았다.

검무극과 이렇게 원 없이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으니까.

운기조식을 마친 이안이 눈을 떴다.

벌써 운기를 마쳤을 검무극이었는데, 그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뭐라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검무극은 예전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진아!”

미친 듯이 경공을 펼쳐서 도착했을 때, 서진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저 멀리 빠르게 달아나는 흉수의 뒷모습이 보였다.

볼 수 있었던 것은 치렁치렁 늘어뜨린 하얀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를 쫓을 수는 없었다. 서진의 상태가 위중했다.

“정신 차려!”

서진의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즉사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깊은 상처.

“조금만 참아!”

서진을 안아서 의원에게 데려가려 했는데, 그녀가 검무극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됐어.”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검무극의 얼굴에 가득한 절망을 보며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친구.”

“나는 안 괜찮아.”

검무극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였고 희망이었다.

그녀에게 회귀대법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노력하지 않았을 거다. 자결했거나 화무기를 찾아가서 헛된 개죽음을 당했겠지.

“나중에 오라버니 만나면 꼭 전해줘. 나는 원 없는 인생 살다가 간다고.”

회광반조로 그녀의 눈빛이 맑아졌고 말도 또박또박 다치지 않은 사람처럼 말했다.

“부디 오라버니도 대법만 연구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자기 인생 살라고.”

“그래, 꼭 전해주마.”

오히려 서진이 검무극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낭인의 삶도 당신과 함께여서 나쁘지 않았어.”

검무극은 마음이 아팠다. 낭인으로 살면서 그 어떤 죽음에도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너무 화가 나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

“당신이라면 꼭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서서히 눈이 감기는 그녀에게 검무극은 소리쳤다. 그녀가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아까 그놈 누구야? 널 죽인 놈 누구냐고?”

서진이 검무극을 보며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당신 복수만 생각해.”

서진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녀의 눈이 완전히 감겼을 때 검무극은 눈을 떴다.

서진은 복수하지 말라고 했지만, 놈을 악착같이 찾아내서 복수했다.

귀령자를 찾아간 것은 그 이후였다. 그녀의 복수도 하지 않고 그를 찾아갈 수는 없었으니까. 복수도 하지 않고 찾아가서 그녀의 말을 전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심각하세요?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검무극의 심각한 표정이 천천히 풀어지며 이안에게 웃으며 말했다.

“네게 돈 빌려줬다가 못 받는 꿈 꿨어.”

이안이 옅게 웃었다. 도련님은 꿈에서 누굴 잃으셨습니까?

“얼마나 빌렸죠? 기왕 떼먹은 거 왕창 떼먹었으면 좋았겠네요. 꿈속의 이안아, 너라도 잘살아라!”

이안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오랜만에 한 번 업어 볼까?”

쾌속보로 더 빨리 가자는 말임을 알고, 이안이 훌쩍 검무극 등에 업혔다.

이안이 검무극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돈 좀 빌려아아아아아아아!”

* * *

다음날부터 서진의 본격적인 황룡무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동기들과 함께 표산에게 무공을 배웠다.

하루 세 시진 수련을 받으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다. 집으로 돌아가도 되고, 남아서 무공수련을 해도 된다.

오늘 첫 수련이 끝나고 서진은 무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늘이 기회였다. 수련 첫날이니 어디라도 가볼 수 있었다. 가선 안 될 구역을 가더라도 몰랐다는 말이 통할 때니까.

그렇게 황룡무관 곳곳을 돌아보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점차 무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무복 색이 바뀌었다. 흰색에서 푸른색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니 검은색으로. 당연히 관원들의 기도 역시 더욱 날카롭고 강력해졌다.

흑룡반 영역까지는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황색 무복을 입은 이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녀를 제지하는 이가 있었다.

“백룡반이 어찌 이곳까지 온 거냐?”

황룡반 구역부터는 입구마다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황색 무복을 입은 걸로 볼 때, 그들 역시 황룡반에 속한 무인인 듯 보였다.

“오늘 입관 첫날입니다.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어요.”

첫날이란 말에 무인의 차갑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여긴 너희가 들어올 수 없다. 물러가라.”

무인이 딱 잘라 그녀를 돌려보내려던 그때였다.

“신입이라고?”

뒤에서 들려온 말에 서진이 돌아섰다.

백발이 치렁치렁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귀신도 못 막지

남자를 보자 경계를 서던 무인이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를 대하는 무인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 반응으로 이 남자가 수하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신입이냐고 물었다.”

서진이 정중히 대답했다.

“네, 오늘 들어왔습니다.”

남자는 피부가 팽팽한 것이 젊은 나이 같기도 했고, 표정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완숙함으로 볼 때 나이가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치렁치렁한 백발 때문에 더욱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궁금한가?”

“네?”

“저 안이 궁금하냐고.”

그녀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뭐해? 안 오고.”

“네.”

서진이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황룡반 구역은 바깥과는 완전히 달랐다.

연무장과 건물만으로 이뤄진 다른 구역과는 달리 이곳은 잘 가꿔져 있었다. 건물은 더 크고 아름다웠고, 잘 정리된 자갈길 옆으로 오래된 은행나무가 심겨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화원 사이사이 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수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너희도 어서 열심히 수련해서 이곳으로 오라, 이런 의도가 명백하게 느껴졌다.

지나가던 황룡반 무인들이 남자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분명 황룡반 무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사범도 아닌 것 같은데. 칠사부 중 한 사람인가?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계가 삼엄해졌다. 그 경계의 끝에 성처럼 큰 건물이 있었다.

“저기는 어디죠?”

건물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실렸다.

“황룡무관의 관주전이다. 이곳의 주인이 계시는 곳이지.”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한마디.

“무관의 주인은 관원이다.”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제 적었던 입관 서류 맨 처음에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남자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건 분명 분노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너는 네가 주인이라 생각하나?”

“아직 모르겠네요.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이 첫날이라서요.”

남자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그녀의 시선이 다시 관주전을 향했다.

남자가 불쑥 물었다.

“들어가 보고 싶나?”

“제가 감히 들어갈 수 있나요?”

“너는 저곳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녀가 정중히 거절했다.

“오해십니다. 저는 오늘 이만큼 본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덕분에 잘 봤습니다.”

관주전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건 첫날부터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아니, 지금도 충분히 눈에 띄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던 그때,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가지?”

흠칫 놀란 그녀가 다시 남자에게 돌아섰다.

“내가 가라고 허락하지 않았는데?”

서진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가도 되나요?”

겁을 먹지 않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남자의 입에서 가도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연 대협.”

그곳에 등장한 사람은 칠사부 중 일인인 기석이었다. 그와 조금 떨어진 뒤에 수족인 표산도 서 있었다.

그때 서진은 보았다. 기석을 향한 남자의 표정이 그리 곱지 않다는 것을. 그는 자신이 상대를 싫어한다는 걸 굳이 감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기석이 정중히 인사했지만 남자는 그저 고개를 까닥했을 뿐이었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기석은 전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의 차분한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너는 여기서 뭘 하느냐?”

“여기 이분께서 이곳을 구경시켜 주셨습니다.”

기석이 남자에게 말했다.

“입관 첫날인 아이입니다. 규율을 어기는 것부터 가르쳐서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후에 서진에게 다시 말했다.

“물러가라!”

“네, 사부님.”

이때 서진은 한 가지를 알아차렸다.

기석이 자신을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님을 안다. 그렇다는 말은 자신이 이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의미.

‘적어도 이 남자와 한패는 아니겠구나.’

물론 단정은 금물이다. 한편이면서 겉으로는 원수인 양 사이가 나쁜 척할 수도 있고, 어제 원수처럼 싸웠던 이들이 오늘은 친구가 되기도 하는 곳이 무림이니까.

그녀가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하얀 머리 남자가 말했다.

“나는 아직 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기 싸움의 승자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기석은 곧장 물러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석이 걸음을 옮겼고 표산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을 잠시 쳐다보던 남자가 다시 서진을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보내주십시오. 첫날이라 많이 긴장됩니다.”

그녀는 차분했고 당당했으며, 본능대로 행동했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주눅 들고 겁먹는 모습보다, 이렇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고.

“가더라도 내가 누군지는 알고 가야지.”

“누구시죠?”

“나는 연백진(燕白進)이다.”

남자가 담담하게 덧붙여 말했다.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이곳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지.”

그는 바로 관주의 친동생인 연백진이었다. 이곳 황룡무관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자, 가장 무서운 사람이기도 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상대에 따라 여러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다.

서진이 그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돌아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가 그녀가 말했다.

“너무 아쉬워 마세요. 이곳 주인은 관원이라고 분명 적혀 있었거든요.”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연백진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시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건물 안 복도 창에 지켜보는 이들은 기석과 표산이었다.

“연 대협이 서진에게 관심이 있나 봅니다. 나이 차이가 꽤 날 텐데.”

표산의 말에 기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들 연백진이 호방하고 자유로운 사람인 줄 알지. 여자 좋아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으로.”

관주의 동생이면서 무공도 고강한 그를 좋아하는 여인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여인과 소문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기석이 판단하는 연백진은 이런 사람이었다.

“연백진은 누구보다 계산적이고 냉혹한 인물이다.”

“그럼 의도적으로 서진에게 접근했다는 겁니까?”

“그래, 임 사범 일을 냄새 맡은 거다.”

그 말에 표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약 그렇다면 심각한 일이었다. 한 사람은 귀문주의 딸이고, 또 다른 사람은 관주의 동생이었으니까.

“마지막 발굴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선을 외부로 돌려야지.”

이미 기석은 답을 내린 후였다.

“아무리 그래도 관주님의 혈육을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

* * *

그날 저녁, 서진은 객잔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술 생각이 났다. 아까 만났던 그 연백진 때문이었다.

‘그를 이용해서 이번 사건을 파헤친다.’

처음에 이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까 본 대로 기석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분명 해볼 만한 시도였다.

하지만 꺼려지는 마음이 있었다.

위기 본능인지 아니면 여자의 촉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이 그녀를 말렸다.

이자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한마디라도 덜 섞으라고.

현실은 이렇게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 객잔에 묵나?”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연백진이었다. 그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앞에 앉았다.

서진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아까는 귀하신 분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연백진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귀문주의 딸이었더군.”

마치 만난 이후에 알게 되었는지 듯이 말했다.

“귀문의 귀술 좀 보여줄 수 있나?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하군.”

물론 그렇다고 쉽게 보여줄 그녀가 아니었다.

“제가 아직 서툴러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답니다.”

연백진이 새 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건방지군.”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연백진이 술을 비운 후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과연 귀문이란 이름이 너를 지켜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을까?”

기분 나쁘게 들으면 가문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백진은 끝까지 경고했다.

“인간의 욕심은 귀신도 못 막지.”

이 사람, 뭔가를 알고 있다.

서진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굳이 감추고 있지 않다는 것도. 무슨 의도로 접근한 걸까?

기석과 표신, 그리고 이 연백진.

이들 모두 임현 오라버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직접 개입했든, 간접적으로 이어졌든.

이번에는 그녀가 술을 비운 후 물었다.

“왜 내 방패가 귀문 뿐일 거로 생각하죠?”

“또 뭐가 있지?”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난 천마신교 귀영대 이 조장이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저런 오만한 눈으로 나를 볼 수 있을까?

정말이지 귀영대 신분으로 와서 대체 이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낱낱이 밝혀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은 귀영대에 들어가기 전이다. 이 일을 끝내고 가기로 했으니까.

마인이 되기 전 마지막 일.

‘어떻게든 해결하고 돌아간다.’

그녀가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던 바로 그때였다.

한 청년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황룡무관 분들이십니까?”

그녀가 백룡반의 무복을 입고 있었기에 알아본 모양이다.

“우리도 입관 시험을 치르러 왔습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청년 뒤로 여인도 함께 걸어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저희들에게 어떻게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그들이 있던 자리에 합석했다.

그들을 본 서진과 연백진은 각기 다른 이유로 깜짝 놀랐다. 그 이유로 합석하는 걸 막지 않았다.

우선 연백진이 놀란 이유는 이들 남녀가 너무 잘 생기고 아름다워서였다. 특히 여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녀를 보는 순간 감히 어딜 함부로 앉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 서진이 놀란 이유는 달랐다. 청년은 검무극이었고, 여인은 바로 이안이었던 것이다. 소교주와 귀영대주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서진은 너무 놀랐지만 애써 침착하려 했다. 이안을 통해 예전에 오라버니 혼인 때 봤던 검무극이 천마신교 소교주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할 상황도 아니었다.

“저는 황룡무관이 오늘 첫날이었어요.”

“그럼 더 좋지요. 더 생생하게 시험을 치른 기억이 있으시잖소?”

검무극의 시선이 연백진을 향했다.

“그럼 백발이 멋진 이분도 우리 선배님이신가요?”

그러자 서진이 그를 정확히 소개했다.

“이분은 황룡무관 관주의 동생이신 연백진 대협이세요.”

“오! 귀한 분이셨군요!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말과 눈빛이 달라서였을까? 연백진이 차갑게 따지듯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제가 어떤 눈빛이었기에 그러십니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을 때 연백진의 기분이 나빴다. 그 눈빛은 마치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눈빛에 이렇게 마음이 동요한 적은 처음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원래 잘생긴 사람 보면 저도 모르게 경쟁심을 느낍니다.”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서진과 그가 객잔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 검무극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역시 이곳에서 이들의 인연이 시작되었구나.

서진이 죽게 되는 건 지금보다 한참 뒤지만, 악연의 시작은 이곳에서 맺어진 것이다.

검무극이 이곳까지 달려온 이유는 애초에 이 악연을 시작부터 끊어내 버리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자신의 회귀로 그 악연이 당겨질까 걱정되어서였다.

서진아, 이제 내가 왔으니 괜찮다.

이 자리에 자신과 이안이 합석해서 앉는 순간, 서진의 운명은 이미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을 테니까.

검무극의 시선이 연백진을 향했다.

그리고 너는? 너는 또 나에게 죽는 운명을 걷게 될 것이냐?

“머리가 너무 멋지십니다. 저도 그렇게 백발로 다니고 싶습니다.”

“닥쳐라.”

검무극이 벌써 연백진의 입에서 닥쳐라란 말을 끌어내고 있던 사이, 서진과 이안은 은밀히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대주님,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이곳에 일 처리하러 간다고 말했잖아요?

물론 그 말은 했었다. 궁금한 점은 여기 왜 왔느냐는 거다.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왔어요.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처리하면 더 빨리 귀영대로 들어오실 테니까요.

정말 그래서 왔을까? 아닐 것이다. 자신이 어려운 상황임을 알고 온 것이 틀림없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저를 도와주러 오신 거죠?

―도움이 필요해요?

두 여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내세우는 자존심은 자존심이 아니라 어리석음일 테니까.

―네,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이안이 그녀에게 진심을 전했다.

―서 조장의 일은 제 일이기도 해요.

그렇기에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니라 내 일을 처리하러 왔다. 이안은 그렇게 마음먹고 있었다.

―이번 일은 우리 귀영대의 첫 임무가 될 거예요.

서진은 기뻤다. 아까 연백진에게 귀영대 이 조장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때, 그녀를 떠올렸었다. 한데 거짓말처럼 그녀가 와준 것이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자, 우리 미래의 동기끼리 한잔하죠.”

그 동기가 황룡무관이 아니라 귀영대임을 서진이 어찌 모르겠는가?

힘차게 건배하는 서진을 따라 검무극도 함께 잔을 부딪쳤다.

“황룡무관은 우리가 접수합시다!”

너, 사실 욕 잘 못 하지?

연백진이 소리 내서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그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입 셋이 황룡무관을 접수한다는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럼 도와주시겠습니까?”

“뭐?”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협께서 도와주시면 접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순간 검무극은 보았다. 연백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헛소리하지 말라고 웃으며 넘겨야 할 순간이었는데.

이 감출 수 없는 동요는 분명 쌓이고 쌓인 오랜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연백진이 탁하고 술잔을 소리 내서 내려놓았다.

검무극이 재빨리 그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 시험 때문에 긴장해서 헛소리를 지껄였습니다.”

연백진이 검무극을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천하제일미라 해도 좋을 정도의 미녀와 함께 합석을 청한 자.

“너는 누구냐?”

이안의 외모에 잠시 눌려 있던 강렬한 의심이 솟구쳐 올라왔다.

“검연입니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를 씁니다. 일이 다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겁니다.”

“안 물었다.”

“네. 죄송합니다.”

연백진의 의심이 이내 수그러졌다. 누군가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려 했으면 이런 이상한 놈을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또 더더욱 저런 아름다운 여인을 함께 보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 둘은 눈에 띄어도 너무 눈에 띄었다.

연백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서진에게 말했다.

“다음에 조용할 때 한잔하지.”

서진은 말없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옆에 있는데도 자신과 술을 마시자는 건, 자신을 단순한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면 이안에게 찝쩍댔을 테니까.

연백진은 떠나가 전에 이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정말 다시 봐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 여인이 무관에 입관하면 한동안 시끄러울 것 같았다.

연백진이 객잔을 나가자 이제 그곳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서진은 보았다. 검무극의 변화를. 정말 연백진 앞에서는 내일 입관 시험을 앞둔 풋내기처럼 보였다. 정말 말실수 같았고 진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검무극의 모습 어디에도 그런 허술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황룡무관의 관주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검무극이 제대로 봤음을 서진이 확인시켜 주었다.

“잘 보셨습니다. 제게 자신을 소개할 때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이곳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서진의 복수를 할 때, 연백진이란 사람이나 황룡무관에 대해서 깊이 파헤치진 못했다. 그때는 복수가 급했으니까. 이젠 차분히 그를 볼 필요가 있다.

서진이 검무극과 이안에게 말했다.

“잠시 제 방으로 올라가시지요.”

서진이 두 사람을 객잔 이 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를 갖춰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귀영대 이 조장 서진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귀영대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그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감격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지.

‘이번 생에서는 친구로서 네가 해줬던 그 고마운 말들은 듣지 못하겠구나.’

그 점은 아쉬웠지만, 비교할 수 없이 나은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안을 대주로 삼고, 청면을 동료 조장으로, 그리고 또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겠지.

‘이제 이름 모를 들판에서 낭인으로 죽는 삶은 없을 거다.’

서진이 이번에는 이안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이 조장 서진 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요.”

“이제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대주님.”

“그럴게, 서 조장.”

이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때문에 고생 많이 한 것 알지?”

두 여인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이안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서진은 절대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서 조장을 하루라도 빨리 내 사람을 만들고 싶었어.”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이안이 물었다.

“서 조장,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줘.”

서진은 지금까지 황룡무관에 와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해주었다.

“사부인 기석과 사범인 표산이 뭔가 숨기고 있고, 오늘 봤던 저 연백진도 뭔가 알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군.”

“네, 맞아요.”

이안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지를 눈빛으로 묻자, 검무극은 한발 물러났다.

“날 보지 마. 이번 일은 귀영대 일이니 알아서 처리해. 나는 방패와 칼 역할만 해주마.”

이안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이번 일은 되도록 서진과 함께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무림에서 가장 든든한 칼과 방패가 있으니 세상 무서울 게 없습니다. 이대로 강호 정복이라도 하러 갈까요?”

말 그대로 이안은 고민하지 않았다.

“우선 내일 입관부터 하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죠.”

“좋아!”

검무극은 태어나서 무관에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며 신나 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검무극은 객잔 주인에게 내려가 서진의 옆방을 잡았다.

“불편하겠지만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써. 나는 옆에 묵을게.”

만에 하나 기습이 있더라도, 그녀들이 함께 있으면 더 안전할 것이다. 거기에 두 사람이 친해질 기회도 될 테고.

그날 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발휘해서 무공을 수련했다.

그곳에서 검무극은 구화마공의 칠 성을 깨고 팔 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주어졌기에 그 노력 또한 몇 배의 노력이었다.

오직 자신만의 이 공간.

검무극에게 진짜 무관은 바로 이곳이었다.

* * *

다음 날 서진은 백룡반 표산의 무공 수업을 듣고 있었다.

“힘차게! 절도 있게!”

표산이 이끄는 백룡반 관원의 숫자는 삼십여 명이었다.

그는 서진을 감시하느라 이제 막 들어오는 신입들 수업을 맡았다. 이들 중에서 실력이 되면 다음 반으로 올려보내고, 그렇게 백룡반 내에서도 여러 단계를 거친 후에 청룡반으로 올라가는 시험을 치르게 된다.

관원들은 사범들을 무서워했고 잘 보이려고 애썼다. 그들의 눈에 찍혔다가는 승반 시험 자체를 치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혹여 표산에게 밉보일까, 다들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업이 거의 끝났을 때, 사범 하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그곳으로 걸어왔다.

초식을 수련하던 관원 하나가 발을 헛디뎌서 자세가 무너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 그곳으로 오고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느라 주위는 신경 쓰지 못했다.

“백룡반 새 신입들입니다.”

모두의 시선을 빨아들인 두 사람은 바로 검무극과 이안이었다. 입관시험을 통과하고 백룡반에 합류한 것이다.

백룡반 관원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가르치던 표산마저 이안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내 표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와서 인사하도록.”

검무극이 먼저 나가서 인사했다.

“검연입니다.”

“이안입니다.”

표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이곳으로 나오도록.”

검무극과 이안이 힘차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표산의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서진도 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관원들처럼 평범하게 행동했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표산이 물러나자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이도 있었고, 몰래 훔쳐보는 이도 있었다.

그중 노골의 최전선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나는 유광(柳廣)이다.”

어딘지 모르게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는데, 제법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용감함과 무례의 경계선쯤에 있는 태도였는데, 지금의 이안에게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게다가 애써 기세를 세우는 녀석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네 마음 알았다고.”

뭔가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유광은 당황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해 있어서였을까? 그는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환영하는 의미로 술 한잔하자.”

“다 같이?”

“아니, 우리 둘이.”

“첫날부터 술은 안 내키네. 다음에 해.”

좋게 거절하면 다음에 먹자고 하면 될 것인데, 유광은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첫날부터 선배의 청을 거절하는 후배라. 배짱이 보통이 아닌데?”

같은 백룡반이지만 먼저 백룡반이 되었다고 선배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이안이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서진과 함께 재미난 구경났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난 배짱 좋은 여자가 좋아.”

바로 그때였다.

“그만하지?”

또다시 나선 사람은 교석(橋錫)이었다. 앞서 나온 유광보다는 왜소한 체격을 지닌 관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용감했다.

“싫다는 사람 왜 강요하나?”

유광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거절당한 분노가 교석에게로 향했다.

“하여튼 이 새끼는 내 일에는 사사건건 시비지?”

대뜸 욕부터 하는 걸 보니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비가 아니라 사람 괴롭히지 말라는 거다.”

“내가 뭘 괴롭혔다고 지랄이냐? 술 먹자고 했을 뿐인데.”

“그게 괴롭히는 거다.”

교석도 유광처럼 한눈에 이안에게 반한 모양이다. 이렇게 나서는 성격이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집안 믿고 까불다가 혼나는 수가 있어.”

그 말로 뒤에 나선 교석이 제법 이름 있는 명문의 자제임을 알 수 있었다.

“또 그 소리군!”

“네게 집안 빼고 볼 게 뭐가 있나?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억울하면 덤벼 봐!”

검무극과 서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난리가 났군요.”

“난투극을 일으키는 얼굴이잖아? 이안 보고 청춘들 피가 안 끓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서진 역시 인정했다. 같은 여인이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외모를 지녔으니까.

“서 조장도 예쁜 여자 좋아하잖나?”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네가 말해줬으니까 알지.

회귀 전의 서진은 예쁜 여자들을 참 좋아했다.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미녀뿐만 아니라 꽃이나 예쁜 옷도 좋아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빛에 서진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소교주의 눈빛은 저 날뛰고 피 끓는 눈빛이 아니다. 그럼에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울림이 느껴진다.

서진이 이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난리가 날 줄 아셨을 텐데. 못생기게 분장이라도 하게 하지 그랬어요?”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예쁘게 태어났는데, 예쁜 얼굴 즐기며 살아야지.”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으니, 이안도 이런 일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나 지키며 산다고 평생 저런 경험해 본 적 없었거든. 남자들이 좋아서 결투하고 줄 서고. 나중에 자식들에게 자랑하기 좋은 추억이잖아?”

검무극은 앞으로도 그녀가 자신의 얼굴로 살아가길 바랐다. 분장할 시간에 무공수련을 해서, 저 얼굴로 살아가는 삶이 귀찮거나 힘들지 않게 살아가게 이끌 것이다.

서진은 잠시 이해할 수 없는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수하의 그런 부분까지 배려한다고요?’

아직 검무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그때 저쪽에서 백룡반 무인 중 여인이 검무극을 향해 걸어왔다.

“나 보러 온다, 그래, 여인이라고 피 끓는 청춘이 아니겠어?”

여인이 두 사람 앞까지 다가왔다.

“검연이라고 했지?”

“연기 연 자 쓰는 검연이야. 이렇게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고 해서 검연. 같이 술 마실까? 나는 첫날이라도 괜찮아. 참, 네 이름은? 뭐 좋아해?”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내자 여인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스쳤다. 잘 생기고 분위기가 좋았는데, 첫 마디부터 이런 수다라니!

여인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오늘 일이 있어서.”

그녀가 물러가자 서진이 검무극을 놀렸다.

“정말 연기처럼 사라졌군요.”

검무극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서진은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일부러 여인을 쫓아낸 것이라는 걸.

“한심한 놈! 저리 안 꺼져!”

“너나 신입에게서 물러나!”

말로 싸우던 유광과 교석은 금방이라도 치고받을 기세였는데, 검무극은 나 몰라,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결국 서진이 나섰다. 명색이 조장인데 대주를 위해 그냥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사적인 일로 상대에게 폭행을 가하면 즉시 퇴관 조치 된다.”

서진의 말에 유광과 교석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입관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제가 그런 건 꼼꼼하게 읽어보거든요.”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낭인 생활할 때도 그랬다. 보통 낭인들이 계약을 대충 맺는 방면에, 서진은 정말 꼼꼼하게 계약서를 읽고, 이상한 부분은 고치곤 했다. 그 성격 그대로다.

퇴관이란 말에도 두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신입을 지켜주지 못하면 선배라면 퇴관 당해도 싸다!”

그때 이안이 밝은 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의 뜨거운 우정을 생각해서 한잔해야겠네.”

우정이란 말에 유광과 교석이 흠칫했다.

“우정이라니?”

유광이 따지듯 묻자 이안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둘이 친한 사이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이안이 유광 앞으로 다가섰다.

“너, 사실 욕 잘 못 하지?”

유광이 움찔했다. 이안이 얼굴 가까이 다가오니 버럭버럭 욕을 하던 그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내가 욕을 많이 듣고 자란 환경이어서. 진짜 욕과 가짜 욕 구분을 잘해.”

유광이 시선을 피한 곳으로 얼굴을 가져가며 말했다.

“사실 네가 더 착하지? 내 눈에는 그래 보이는데?”

유광이 다시 시선을 피했다. 이안이 다시 그와 얼굴을 마주쳤고 결국 유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듣고 있던 교석이 자백했다.

“미안. 내가 친구에게 부탁했어. 네가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유광이 시비를 걸면 자신이 정의의 협객처럼 나서서 그녀를 구해내려 한 것이다. 사실 두 사람은 제일 친한 사이였다.

“어떻게 알았어?”

교석의 물음에 이안이 웃었다.

“눈빛은 순진하고, 연기는 어색하고.”

유광이 교석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아니, 내가 미안. 괜히 나 때문에 망쳤다.”

이안이 그들의 가운데로 끼어들며 양쪽으로 팔짱을 꼈다.

“너희들 너무 귀엽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래, 무관은 이래야지. 이렇게 순수해야 무관이지. 가서 한잔해. 너희들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팔짱을 낀 채 두 녀석이 이안에게 끌려갔다.

지켜보던 이들도 이안의 생각지 못한 모습에 모두 놀랐다.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운 미녀가 말하는 것은 너무나 친근했다.

서진 역시 놀랐다. 성격이 이렇게 밝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안이 저들이 짰다는 것을 알아차려서였다.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이안보다 멀리 떨어져 있긴 했어도, 가까이 있었다고 알아차렸을 거 같지 않았다.

‘아직 대주님에 비하면 멀었구나.’

대주님이 알았으면 소교주님도 알았을까? 서진은 그게 궁금했다.

저 앞에서 걸어가던 이안이 검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향해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 없이 말했다.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이안아.

방패는 모집 중.

유광과 교석은 서로 쳐다보다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아름다운 미녀가 앞에 앉아서 묻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냐니까?”

유광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어찌나 이 상황이 당혹스러우면 존대로 말을 했을까?

“내가 후배라면서?”

이안이 놀리듯 묻자 유광이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같은 백룡반인데 다 동기지요.”

“그렇지? 우리 동기니까 말 편하게 하자.”

유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천마신교 귀영대주와 동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럼 나 좋아하는 거 시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안은 검무극이 좋아하는 요리를 시켰다.

유광은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아는 미녀들은, 아니 상상해 왔던 미녀들은 신비로운 존재들이었다.

말없이 눈빛으로 말하고, 너무나 고귀해서 감히 옷깃조차 밟기 어려운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 미녀는 자신들의 팔짱을 낀 채 친구처럼 이곳까지 왔다. 그녀는 정말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대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밝은 성격의 절세미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신도 이안에게 반했다. 교석이 악역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친구를 위해 흔쾌히 대답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아쉬웠다.

‘내가 먼저 말할걸.’

하지만 아니다. 생김새로 볼 때, 누가 봐도 자신이 악역에 더 어울렸으니까.

아직도 그녀의 손길이 자신의 팔에 남아 있다.

평생 살면서 이런 미녀가 자신의 팔짱을 끼는 순간이 다시 올까? 없을 것이다.

오늘 악당 역할을 맡았던 유광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정의의 협객이 되려 했던 교석은 이안 옆에 조금 떨어진 채 나란히 앉아 있는 검무극과 서진을 쳐다보았다.

‘어떤 관계일까? 왜 이곳까지 함께 온 거지?’

그들은 자연스럽게 이곳 객잔까지 따라와서 한자리에 앉았다.

그런 그의 의문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이안이 교석에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여기 와서 사귄 친구들이야. 알다시피 저기 검연과는 입관 시험 동기고, 서진과는 우연히 객잔에서 만나서 알게 됐고.”

검무극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두 사람, 정말 멋진 우정이었어. 나도 두고 온 친구들이 생각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번 출교는 급히 나오느라 못 보고 온 이들이 많아서 더욱 그랬다.

교석은 검무극에게 질투를 느꼈다. 상대가 여유로운 척한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너는 뭔데 이 여인들과 어울리는 거지?’

잘생기면 다냐? 마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저 소저의 칼과 방패가 되어 주기로 했어.”

피 끓는 두 청춘의 얼굴은 같은 표정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뭐래? 이 자식이!’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그래, 나라도 그랬을 거다.’라는 표정이 되었다.

유광과 교석은 검무극을 이해했다. 이런 여인이라면 자신들이라도 칼과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쉬웠다.

‘아! 내가 이때 입관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저 자리에 내가 있을 텐데.’

이안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칼과 방패가 되어 주겠다는 저 말은 들을수록 기분이 좋았다. 특히 방패가 되어 주겠다는 말은 가슴에 남았다. 평생 소교주의 방패로 살아온 그녀였으니까.

―제가 소교주님 방패인데요?

이안의 전음에 검무극이 답했다.

―그럼 내 방패는 누가 지키나?

―방패는…….

이안의 장난기 가득한 시선이 유광과 교석을 향했다.

“방패는 계속 모집 중이야!”

유광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 여인이라면 평생 호위 무인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협객 역할을 하려 했던 교석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자, 내 술 한잔 받아.”

이안이 술을 부어주자 잔을 든 유광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손으로 검이나 들겠어?”

교석은 손은 떨지 않았지만,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검무극은 그런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실컷 즐겨라, 이안.’

검무극에게는 적을 죽이는 순간보다 이 순간이 더 값지고 귀한 순간이었다.

이번 무관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면서 이안이 성장하기를 바란다. 많이 배우고 많이 느끼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바라는 게 있었다.

‘즐겨라, 이안.’

젊은 애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청춘을 즐기기를 바랐다. 평생 받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마음껏 받길 바란다.

그때 서진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내 물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든지.

―소교주님도 아셨어요? 저들이 짜고 연기했다는 걸.

―알았지.

―어떻게요?

아까 자신들이 서 있던 곳에서는 두 사람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단지 목소리만 듣고 그걸 알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검무극이 주목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구경하고 있던 관원들의 반응으로.

검무극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주위 다른 관원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처럼 나서는 놈이라면 분명 평소에 동기들에게도 행패를 부렸을 텐데, 아무도 인상을 찌푸리는 이들이 없었지.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들이었어.

서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보면 간단한 해답이지만, 그때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저는 양쪽을 다 놓쳤군요.

이안은 저 둘에게서, 검무극은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냈으니까.

검무극은 아쉬워하는 그녀에게 잔을 채워주었다.

이안이 즐기기를 바란다면 서진에게 바라는 바는 달랐다.

지금까지 귀문의 혈육으로 귀하게 자라온 그녀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온실 밖으로 나설 때가 되었다.

서진아, 이제 너의 그 멋졌던 모습으로 첫발을 딛는 거다. 아니, 이번 생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멋진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무인이라면 습관적으로 봐야지. 어딘가를 가면 그 공간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샅샅이 살피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해. 안도감을 주는 장소거나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긴장해야지. 무인은 그때 죽는다.

서진은 자신의 방심을 인정했다. 백룡반 풋내기들이 있는 곳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사실 풋내기는 자신이었는데.

―명심할게요, 소교주님.

그러는 와중에도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주로 유광과 교석을 상대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면서도 꿈만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친구처럼 대하다니.

게다가 자신들은 그녀를 속이려 했는데도 이렇게 편하게 대해주는 모습에 크게 감격했다. 거기에 몇 잔의 술이 더해지자 여러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나는 고향에 무관을 차려서 사는 게 꿈이야.”

유광의 꿈이 언제나 답답한 교석이었다.

“말이 좋아 무관이지. 무관 하나 차리는 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데.”

“작게 차리면 되지.”

“그럼 관원이 안 모이지. 너도 당장 황룡무관에 들어오려고 애썼었잖아.”

그렇다고 교석의 꿈이 현실적이지 않았다.

“나는 돈 많이 버는 게 꿈이야. 이곳에서 출관하면 부자들 호위 무인을 할 거다. 부자들 옆에 있다 보면 어떻게 돈 버는지 배울 수 있겠지. 돈 많이 벌어서 무관은 내가 차려줄게.”

그 말에 이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안 겪어봐서 모른다. 호위 무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호위하면서 부자들에게 돈 버는 법을 배우는 게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정작 돈을 벌었을 때 남을 위해 큰돈을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그래도 이안은 좋았다. 적어도 지금 이들의 마음은 진심이란 것이 느껴졌으니까.

“야, 너희들 정말 마음에 든다. 친구를 위해 악역을 맡고, 친구를 위해 돈 벌어서 무관을 차려주고, 이거 아무나 못 하는데. 자, 우정을 위해서 건배.”

셋이서만 건배하고 술을 마셨다.

검무극은 이안을 만나고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인공이 된 이안은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구나.

그래서 귀한 날이었다.

물론 이안은 단지 그들과 놀기 위해 이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이 풀릴 만큼 풀렸을 때, 이안이 넌지시 물었다.

“참, 얼마 전에 돌아가신 사범님이 계신다면서?”

순간 두 사람이 흠칫 놀랐다. 그 반응만으로도 두 사람이 임현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임 사범님 돌아가신 걸 어떻게 알았지?”

교석의 물음에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들었어.”

“누구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함구령이 내려졌는데.”

아마 그 일을 아는 관원들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모양이다.

“다들 아는 것 같던데?”

이들 두 사람이 안다면 다른 이들도 알 거라고 넘겨짚었다. 과연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 친구잖아? 그 정도는 알려줘도 되지 않나?”

유광이 진지하게 고민하자 교석이 말했다.

“하지 마. 함구령을 어긴 게 밝혀지면 무관에서 쫓겨날 수도 있어. 이만 가자.”

교석이 고민하는 유광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가 유광을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객잔 입구까지 갔던 유광이 다시 성큼성큼 돌아왔다. 교석은 더는 말리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뒤따라왔다.

“임 사범님은 방소(方昭)와 비무하다 사고로 돌아가셨어.”

“방소가 누구야?”

“우리 백룡반 소속이야. 임 사범님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들어온 동기지.”

이안은 물론이고 듣고 있던 서진도 놀랐다. 임현이 그들이 말한 대로 비무로 죽은 것도 놀라운데 그 대상이 설마 백룡반 관원일지 몰랐다.

“방소가 아까 연무장에 있었어?”

이안의 물음에 유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사건 이후 수업에 계속 빠지고 있어.”

거기에 유광이 한 가지 느낌을 더했다.

“그 일이 있고 뭔가 달라졌어.”

교석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너는 못 느껴? 뭔가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 괜히 기분 나쁜 이 느낌을 못 느끼냐고.”

자신의 이런 느낌을 교석은 믿지 않았기에, 유광은 이 기분을 누군가에게 꼭 말하고 싶었다.

“분명 뭔가 달라졌어.”

이안은 그를 달리 봤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변화된 기류를 느끼는 건 정말 대단한 재능인데. 지금은 술잔을 받으며 손을 덜덜 떨고 있지만, 언제가 큰 고수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이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말해줘서 고마워.”

유광이 솔직히 말해준 데에는 단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까 이안이 네가 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준 것에 감동해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다들 겉모습만 보고 교석이 더 착하다고 생각한다. 첫인상만으로 자신을 파락호처럼 여기는 이도 많았고.

하지만 이안은 정확히 자신에 대해 알아봐 주었다.

“나도 고마웠다. 내일 보자.”

그는 마지막 인사만큼은 떨지 않고 씩씩하게 하고 갔다.

교석이 말했다.

“절대 저 친구에게 들었다고 하면 안 돼.”

“약속할게.”

그렇게 두 사람이 객잔을 떠나자 이제 그곳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방소란 자가 그자들의 하수인일까요?”

이안의 의문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건 알아봐야겠지. 다만 이건 확실해. 백룡반 관원과 비무에서 죽었으니 누구든 이번 일을 단순 사고로 생각할 거야.”

풋내기가 검을 잘못 다뤄서 사범을 죽였다고 생각할 테니까.

거기에 검무극은 뜻밖의 말을 덧붙였다.

“만약 방소란 자가 놈들의 칼잡이라면 내일 수업부터는 나오겠지.”

“네? 갑자기 왜요?”

이안의 물음에 검무극의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죽여야 할 사람이 또 생겼잖아?”

* * *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다! 당연히 검무극이 농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음 날 수업에 방소가 나왔다.

방소는 축 처진 어깨에 어두운 표정이었다. 남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그가 오자 백룡반 관원들의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안타까워했다. 만약 자신이 사범을 죽게 했다면?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유광과 교석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많이 놀란 상태였다. 어제 유광이 그를 말해주고 나자 등장했으니까.

그들이 이안을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방소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실력을 감추고 있군요.

―잘 봤다.

서진은 물론이고 다른 누구도 그 숨겨진 실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사범들 실력을 훨씬 능가하는 고수였다.

―설마? 정말 도련님 말씀대로 서 조장을 죽이려고 나타난 걸까요?

―아니라면? 굳이 저자를 여기에 다시 오게 할 이유가 있을까?

―멍청한 짓이잖아요? 한 번 사람을 죽인 그가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면 이목이 쏠릴 텐데요.

―나는 오히려 똑똑한 선택 같은데?

―무슨 말씀이시죠?

검무극은 그녀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었다.

―귀문의 혈육인 서진이 황룡무관에 들어온 건 임현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서야.

―그렇죠.

―임현을 죽인 사람은 방소고. 저 방소에게 그녀가 죽는다고 생각해봐.

이제야 이안은 검무극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고향 오라버니의 죽음을 조사하러 온 서진과 실수로 사범을 죽인 방소. 그녀의 조사에 압박을 느낀 방소가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방소마저 자결한 것으로 처리하거나 사라져버리면 모든 것이 깔끔하게 처리될 것이다.

―서로 은원이 있는 사이니까, 다른 배후를 찾으려 들지 않겠군요.

표산은 방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괜찮은지 상태를 살피는 듯 보였다.

한참의 대화를 마친 표산이 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약속 비무를 하겠다.”

관원들은 방소를 앞선 비무의 충격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일부러 비무 수련을 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이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이런 미친놈들이!’

검무극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안에게 맡겼다.

‘자, 이안. 이제 어떻게 대처할 테냐?’

그 상상력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안은 솔직한 심정을 검무극에게 전했다.

―제 마음대로 처리했다가 일을 망쳐 버릴까 두려워요.

그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다. 혼자 있으면 이런 두려움도 없이 누구보다 일을 잘 처리할 그녀였다. 소교주인 자신이 지켜보고 있으니 부담스러운 거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을 테고.

―이안아, 네 약점이 뭐였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제 약점은 이 예쁜 얼굴이라고 장난치고 싶은 저의 이 허술함 아닐까요?

―꼬리 아홉과 허술함은 안 어울리는데?

―그럼 제 약점이 뭐죠?

이안은 검무극이 생각하는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네 약점은 바로 나다.

생각지 못한 답에 이안은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이라고요?

―그래, 나였지. 날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네 인생의 가장 큰 약점이었지.

검무극을 향한 이안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서 검무극이 자신을 호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귀영대주에 앉혔다는 것을. 물론 어디까지나 검무극의 입장이다.

‘소교주님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제 삶의 원동력이었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고요.’

검무극의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두 번째 약점은 부족한 내공이었다. 한데 그것도 해결됐지. 세 번째는 경험인데 그 역시 근래 혼자 출교해서 어느 정도 채워졌으리라 생각한다.

검무극은 지금 이안에게 필요한 게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실마리가 아님을 안다. 실수하면 어떻고, 좀 돌아가면 어떠하랴. 자신이 지켜주고 있는데. 그 역시 그녀에게 큰 배움이 될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너는 네가 얼마나 강한지 아느냐?

약점이 보완된 그녀는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상태다.

―제가 얼마나 강하죠?

검무극의 시선이 저 앞에 서 있는 표산을 향했다가 다시 방소를 향했다.

―저런 자들은 비교의 가치조차 없다. 황룡무관의 칠사부? 대사부? 그들과 비교해도 비천검법을 너무 무시하는 거지.

그녀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이들까지 모두 날아갔다.

―네 강함을 말하려면 이렇게 물어야 한다.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이곳 황룡관주를 몇 초식 안에 죽일 수 있겠느냐?

아직 진짜 고수들과 제대로 싸워보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검무극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안, 이 무림은 이제 네 것이다.

이안에게는 그래도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안의 눈동자가 떨렸다. 태어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봤을 테니까.

―도저히 부담스러워서 안 되겠어요. 이 무림, 얼마에 사실래요?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그녀의 긴장이 풀어졌음을 느꼈다.

이안이 검무극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이 말했다.

‘네, 소교주님. 제가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던 사이 사범인 표산은 직접 두 사람씩 비무 상대를 맺어주었다.

검무극과 이안이 한 쌍이 되었고, 예상대로 방소는 서진과 짝을 지었다.

검무극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죽이려는 거구나.’

임현을 죽인 방소가 우연히 오늘 돌아오고, 우연히 서진과 짝이 되고. 이런 우연이 겹쳐서 일어날 리는 없었으니까.

만약 이대로 비무가 진행되면 방소는 반드시 서진을 죽일 것이다. 처음부터 귀술을 사용한다면 모를까, 아직 서진의 무공실력으로는 방소를 상대할 수가 없다.

‘이안, 어떻게 할 거냐?’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짝을 바꿔서 자신이 방소를 상대하려는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안은 그대로 두고 보고 있었다.

“약속 비무는 세 단계로 이뤄진다. 공격하고, 막고, 반격하고. 아직 배우지 못한 신입들은 시범대로 따라 하도록!”

시범을 보이는 이들은 백룡반에서 제일 오래된 유광과 교석이었다.

“서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시작한다!”

유광과 교석이 약속 비무를 시작했다.

약속된 곳으로 내지르는 검을 막고, 이번에는 반대로 상대가 검을 내지르고. 그렇게 검과 검이 서로를 오갔다.

두 사람이 가까이 붙었을 때, 유광이 속삭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아.”

“쉿! 조용해!”

“느낌이 안 좋다고!”

“제발!”

그 나쁜 느낌의 근원지에서도 약속된 동작이 이어지고 있었다.

방소는 서진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녀를 죽인 후,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뒷일은 상부에서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가짜 시체로 백룡반의 미친놈은 죽은 것으로 처리되겠지.

‘잘 가라!’

다음 한 수로 그녀를 죽이려던 그때, 방소는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검을 쥔 자신의 손등에 뭔가 붙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그것은 알록달록 화려한 색을 지닌 커다란 지네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기분 나쁜 촉감까지 있었다.

그는 지네 같은 것에 비명을 지를 사람이 아니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게다가 저 색을 보는 순간, 지독한 독을 지닌 지네란 직감이 들었기에 더욱 놀랐다.

다음 순간 자신의 몸이 서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뭐야, 이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옥죄며 밀어붙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아!”

방소의 비명에 모두 동작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남들이 볼 때는 방소가 괴성을 내지른 채 서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앞서 사건의 충격이 되살아나 미쳐 버린 모습이었다.

방소의 검이 서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 순간.

서진의 검이 그의 심장에 박혔다.

방소가 검에 찔린 채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하자 서진이 검을 뽑으며 뒤로 물러났다.

파파파팍.

방소는 사방으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그의 눈에 그때까지도 손등에 붙어 있던 지네가 퍽, 하고 터지면서 오색찬란하게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직 그의 눈에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몇몇 관원이 비명을 질렀다. 멀리 있던 이들은 달려왔고, 가까이 있던 이들은 물러났다.

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표산이었다. 처음 방소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그는 의외라 생각했다. 저자가 저런 실감 나는 연기까지 할 줄 알았나?

하지만 허무하게 서진의 검에 찔려 죽은 것이다.

표산이 놀란 표정으로 서진을 쳐다보았다.

‘방소를 한 수에 죽일 정도의 고수였다고?’

사실 방소의 손등에 붙은 지네는 서진의 귀술이었다.

이안은 약속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서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서 조장, 귀술로 놈이 비명을 내지르게 할 수 있어?

―네, 할 수 있을 거예요.

온몸에 벌레가 기어오르는 환상을 보여줄 수도 있고, 실제 느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 귀문의 귀술이었다.

서진이 귀술을 발휘한 순간.

이안은 허공섭물로 방소의 몸을 제압해서 서진에게로 날렸다.

해낼 자신은 있었지만 정말 가능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만약 검무극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다면, 시도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리고 검무극이 보고 있다는 최후의 믿음도 있었다.

결국 귀술에 놀라고 이안의 내공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이안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안은 놈들의 계획을 역이용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흥분한 방소가 서진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반대로 서진이 어쩔 수 없이 방소를 죽인 것이 되었다. 당당히 할 수 있는 복수의 장을 오히려 놈들이 만들어 준 셈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표산이 당황한 척 서진에게 물었다. 아니, 실제로 당황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어요.”

그녀 역시 놀라고 당황한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정말 죽이자 검을 든 손이 떨렸다. 그의 검이 빗나가며 얼굴을 지나갈 때의 칼바람이 생생했다. 물론 이안이 허공섭물로 실감이 나게 연출한 상황이었지만.

그녀가 충격을 받은 모습을 보며 표산은 내심 의아했다.

‘아무리 봐도 실력으로 죽인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대체 방소는 왜 죽은 거지? 사람 죽이는 일만큼은 믿을 수 있는 방소였는데.

어쨌든 이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표산이 관원들에게 차분하게 경고했다.

“모두 돌아가도록! 이 일을 입 밖에 내면 그 즉시 퇴관 조치 될 거다!”

그는 일단 백룡반을 전부 물러나게 했다.

“너는 남고.”

표산이 서진을 남겼다.

우선 그녀를 데려가 가둬둔 후, 기석에게 보고할 작정이었다. 이번에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면 조사를 받다 죄책감에 자결한 걸로 처리할 수도 있었으니까.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때, 이안이 나섰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제가 바로 옆에서 목격했어요. 당황한 저 친구보다 제 증언이 더 유용할 겁니다.”

표산은 이안도 의심스러웠다. 서진이 들어오고 곧장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입관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물러가 있으면 나중에 부르겠다.”

“물러가기 전에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표산이 질문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이안이 먼저 말했다.

“왜 저런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을 이제 갓 들어온 신입과 붙였습니까?”

표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 모두 능숙한 사람과 붙여야 하지 않나요?”

모두의 시선이 표산을 향했다. 방소의 죽음에 정신이 없어 다들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안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 일에서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지적했음에도 그는 차분했다.

“내가 일부러 방소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물론, 관원들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사고는 능숙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너희도 알지 않느냐?”

임 사부의 죽음을 의미했다. 사범을 붙여도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의미.

“어서 돌아가.”

관원들이 돌아서려던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이자의 가슴에 흰 뱀 문신이 있습니다!”

표산이 놀라 돌아서자 어느새 검무극이 쪼그리고 앉아 시체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 손 떼!”

검무극이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표산은 낭패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아주 잠깐 이쪽을 신경 쓰고 있었는데, 저놈은 어느새 시체 있는 곳으로 갔단 말인가?

“똬리 튼 흰 뱀입니다!”

그러자 이안이 말했다.

“무림에 흰 뱀을 상징으로 쓰는 조직은 백사단(白蛇團)이지 않습니까?”

백사단이란 말에 관원들이 웅성거렸다. 백사단은 무림에서 악명 높은 청부조직 중 하나였다.

“모두 조용히 해!”

표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껏 차분하게 관원들을 대했던 그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표산이 검무극에게 걸어갔다. 검무극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누구 마음대로 시체에 손을 대라고 했나? 사인을 알아내기도 전에 누가!”

“사인은 우리 모두가 보지 않았습니까?”

표산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지금 중요한 건 시체에 손을 댔냐 안 댔냐가 아니라 왜 백사단이 백룡반에 와 있느냐를 알아내야 하는 것 같은데요?”

검무극이 겁먹은 얼굴로 우물쭈물 말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거기에 어이없는 농담까지.

“우린 백룡이지 백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표산이 검무극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너는 당장 짐 싸서 무관을 떠나도록! 너 같은 놈은 필요 없다!”

그때 서진이 먼저 나섰다.

“부당한 처사십니다.”

이안도 부당하다고 나섰다. 그녀야 당연히 나설 상황이었는데.

어제 술을 마셨던 유광이 갑자기 나섰다.

“부당하십니다.”

이안이 나서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것이다.

표산이 버럭 소리쳤다.

“너희 셋도 모두 짐 싸도록!”

교석이 인상을 굳혔다. 말릴 사이도 없이 유광이 나선 것이다. 그는 고민했다.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유광이 너는 나서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자식아! 그러면 내가 안 나설 수 없잖아.’

교석도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나서긴 했지만 다른 방식이었다.

“동기들이 철없이 한 말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른 관원들은 감히 이 분위기에서 나서지 못했다.

표산은 분노가 치밀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이 아니었는데.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모두 물러가서 징계를 기다리도록.”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그곳에 등장한 사람은 바로 연백진이었다.

그의 등장에 표산은 정말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런 내색 없이 정중히 그에게 인사한 후 보고했다.

“비무 수련 중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또?”

그때 검무극이 소리쳤다.

“백룡반에 백사단이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표산은 달려가서 검무극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연백진이 쓰러진 시체를 힐끗 쳐다보았다. 백사단이 있다는 말에도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쓴 쪽은 그 상대였다.

“누구와 비무 중이었나?”

서진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접니다.”

연백진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나?”

“네.”

다른 말은 묻지 않았다.

연백진의 시선이 다시 표산을 향했다.

“자네 수업 중에 발생한 사고니 먼저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네겠군. 따라오게.”

표산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백진이 우연히 지나가다 들렀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방소의 죽음도 이해가 갔다.

‘이자가 도운 것이군.’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먼저 걸어가던 연백진이 표산을 돌아보았다.

“내 명을 거절할 셈인가?”

“아닙니다.”

표산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관원들 앞을 지나 걸어갔다.

연백진의 시선이 슬쩍 향한 곳은 서진이었다.

뒤따르던 표산은 오직 검무극만을 노려보았다.

‘저놈이 일을 키웠다!’

어이쿠, 무섭다면서 시선을 피하는 검무극의 모습이 더욱 밉살스러웠다.

‘두고 보자!’

그렇게 두 사람이 그곳을 떠났고, 연백진의 수하로 보이는 무인들이 와서 시체를 거둬 갔다.

“내 말 맞지? 내가 무슨 일 생길 거라고 했지?”

유광의 말에 교석이 억지로 그를 끌고 갔다. 이제 더욱 음모병이 도질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관원들은 모두 흩어졌고, 이제 그곳에는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게 제 최선이었습니다. 제 빈약한 상상력으론 서 조장을 죽이러 온 자를 다르게 처리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러자 서진이 이안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 상상력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처음으로 귀영대가 합작으로 적을 물리친 순간이기도 했어.”

두 여인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검무극이 바라던 서진의 삶이었다. 이안 같은 좋은 사람과 함께 이 무림을 웃으며 살아가기를. 자신이 이안과 함께 이곳까지 달려온 이유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검무극의 물음에 이안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약속 비무에서 배웠잖아요? 공격하고 막고 반격하고. 공격을 막았으니…….”

이안이 저 멀리 보이는 황룡무관의 건물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반격할 차례죠.”

우리 집안도 물려받을 게 좀 있어서요

“반격은 어떻게 할 거야?”

검무극의 물음에 이안이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연백진을 통해서요.”

이안은 이번 일의 중심에 그가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서 조장에게 접근한 것도 그렇고, 오늘 이곳에 나타난 것도 그렇고. 그 사람은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요.”

검무극과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그 사람이 적인지, 아닌지부터 알아내야 해요.”

이안의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그리고 분명 연백진은 서 조장에게 다시 접근할 거야.”

“그때 제가 어떤 의도인지 알아내 볼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 사람, 왠지 찝찝해. 서 조장 보는 눈빛도 심상치 않고.”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안도 느낀 것이다. 그의 눈빛에 담긴 어떤 불길함을. 이들 두 사람의 운명이 가지는 파국적 예감을.

지금은 단순한 호감이지만 그 감정은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이 커져서 결국 두 사람 모두를 파멸로 이끌게 될 테니까.

이안아, 우리가 그 운명을 바꿔야 한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소교주님은 연백진이 표산에게 무엇을 밝혀내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러지.”

이런 부탁을 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누가 이렇게 흔쾌히 대답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새삼 실감했다. 무림에서 가장 훌륭한 칼과 방패를 가지고 이 싸움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절대 져선 안 되는 싸움이기도 했다.

“그동안 저는 서 조장과 함께 통천각과 은월 지부에 들러서 필요한 정보를 알아 오겠어요. 반격은 그 정보를 토대로 시작될 거예요.”

서진과 함께 통천각과 은월 지부로 가는 이유는 어떻게 그들과 접선하며, 또 어떻게 정보를 받는지 그녀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럼 이따 보자.”

검무극이 먼저 가려는데 뒤에서 이안이 말했다.

“고마워요, 소교주님.”

“뭐가?”

“전부 다요.”

이안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이렇게 옆에서 지켜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차라리 직접 나서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경험을 쌓고 성장할 기회를.

검무극은 이렇게 항상 고맙다고 말해주는 이안이 고마웠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저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마지막까지 버티게 해주는 궁극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고맙다는 저 한마디의 힘을.

우린 알면서도 실수한다. 남들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하는 저 말을 정작 해야 할 사람에게는 몇 년이 지나도 안 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고마우면 돈으로 갚아라!”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럼 전 수십 번을 파산해도 다 못 갚아요.”

* * *

표산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마혈이 제압당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백진을 따라가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곳이었다.

‘여긴?’

온몸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사방에 걸려 있는 병장기들, 그을린 벽, 용암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화로의 불길.

표산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황룡무관에서 직접 운영하는 철방이라는 사실을.

무관에 워낙 많은 수의 관원이 있기에 하루에도 수십 자루의 병장기가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다. 그래서 황룡무관에서 아예 자체적으로 철방을 운영해서 병장기를 공급했고, 남는 물량은 외부에 팔았다.

‘왜 이곳으로 데려왔지?’

주위에 철방에서 일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의 앞에 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 그가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연백진은 구석에 쌓여 있는 병장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돌아보지 않고도 표산이 깨어난 걸 알아차렸다.

“여기 쌓여 있는 것들 전부 불량품이라네. 겉으로 봐선 멀쩡해 보이는 데 쓸 수 없는 것들이지. 나중에 저 불구덩이에 녹여서 새 병장기로 태어나겠지.”

표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관주님의 동생이라도, 사범에게 이러면 안 되지 않소?”

연백진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표산은 그가 차갑게 웃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관원을 죽이려는 자는 사범이 아니지.”

“관원을 죽이다니요? 무슨 말씀이시오?”

표산은 딱 잡아뗐지만, 그게 통했으면 애초에 잡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연백진이 돌아서서 표산에게 다가왔다. 그가 허리를 숙여 앉아 있는 표산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표산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주위는 온통 뜨거웠는데 오직 연백진만이 차갑게 느껴졌다.

표산은 문득 기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연백진은 누구보다 계산적이고 냉혹한 인물이다.

표산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직감했다.

“나는 단 하나의 대답만 원한다.”

그건 서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죽은 임현에 관한 것도 아니었으며 죽은 백사단의 방소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정작 연백진이 원하는 것은 하나의 장소였다.

“그곳이 어디냐?”

포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구나. 연백진은 이미 알고 있었어.’

표산은 애써 담담하게 연백진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연백진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피어오르는 불쾌감.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는 두 번 묻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한 번 더 묻겠다. 그곳이 어디냐?”

표산은 느낄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정말 죽게 될 것임을.

하지만 역시 안다. 대답한들 살려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비밀을 누설한 자신을 상부에서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정말이지 연백진이 이렇게 과감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아무 대답이 없자 연백진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돌아섰다.

“이곳에서 불필요한 것들의 운명은 하나뿐이지.”

연백진의 수하들이 와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산 채로 태워 버리려는 듯 그를 끌고 불길이 치솟는 화로로 끌고 갔다.

“잠깐! 연 대협! 내가 당신에게 끌려간 걸 백룡반원 전부가 봤소. 날 죽이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요.”

연백진은 말없이 등을 돌린 채 그냥 서 있었다.

‘날 죽일 리 없다.’

하지만 수하들은 그의 얼굴을 불구덩이로 밀어붙였다.

화끈하게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표산은 극심한 공포심을 느꼈다.

설령 죽이지 않더라도 얼굴이 완전히 망가져 버릴 것이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는 듯, 무인들이 계속 밀어붙였다.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내공이 제압된 그가 어찌 무인들의 힘을 이기겠는가?

“으아아아악!”

너무 뜨거웠다. 불에 타서 죽는 고통이 가장 괴롭다던데.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산 채로 불타서 끝나게 될 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정말 그 사람, 태워 죽일 작정이냐?”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말에 표산을 밀어붙이던 무인들이 동작을 멈췄다.

“으아아아아!”

표산이 뒤로 자빠지듯 불에서 멀어졌다.

한쪽 얼굴이 반쯤 익은 것처럼 붉었다.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은 완전히 망가졌을 것이다. 표산이 숨을 몰아쉬었다.

등장한 사람은 바로 연백진의 형이자 황룡무관의 관주 연백인(燕白寅)이었다.

보통 기도가 아니었다. 그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규모가 크더라도 그래봤자 무관주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직접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서는 절대고수의 풍모가 느껴졌다.

그는 연백진의 한 살 터울 형이었는데, 형제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의 생김새는 닮아 있었다. 다만 풍기는 분위는 사뭇 달랐다.

자유로운 느낌인 연백진과 달리 연백인은 잘 정리되고 절제된 느낌이었다. 또한 머리카락 역시 새카맸다.

그의 뒤로 관주를 수호하는 직속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고, 칠사부 중 표산의 수장인 기석의 모습도 보였다.

형의 등장에도 연백진은 별반 놀라지 않았다. 너무 태연해서 연백인이 올 줄 예상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의 등장에 연백진의 수하들은 모두 조용히 뒷문으로 물러났다.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쩐 일이실까?”

“지금 뭐 하려는 거냐?”

두 형제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로에게 할 말이 너무나 많지만 두 사람 모두 참고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뭐하다니? 표 사범과 대화 중이었지.”

연백진이 표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금방 표산이 타죽을 뻔한 불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남자들끼리 아주 뜨거운 대화였지. 안 그렇소? 표 사범.”

표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기석이 나서서 표산에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인지 관주님께 고하게.”

표산이 연백인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오늘 일을 고했다.

“오늘 백룡반의 비무 중에 관원이 죽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연 대협께서는 그 일로 저를 붙잡아서 제가 연루된 것이 아니냐며 자백을 강요하셨습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그가 물은 장소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연백인이 동생에게 물었다.

“사실이냐?”

“오늘 죽은 관원이 백사단에서 나온 놈이라는 것만 빼고는.”

표산이 다급히 말했다.

“문신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놈이 이미 사범을 죽인 전력이 있다는 말도 빠졌군.”

그 말에 표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백인이 차분히 말했다.

“이 일은 관주인 내가 직접 조사하겠다.”

그러자 연백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겠지.”

마치, 형도 같은 편이 아니냐는 어조였기에 연백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표 사범을 관주전으로 데려가라.”

뒤에 있던 수하들이 표산을 데리고 나갔다.

연백인이 엄중하게 경고했다.

“앞으론 일절 무관 일에 끼어들지 마라! 만약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너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차갑게 한마디 하고는 연백인이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연백진이 말했다.

“형은 무관 일에 관심이 있기는 하고?”

연백인이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연백진이 등을 돌린 채 화로의 불길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동생을 쳐다보던 연백인은 뭔가 말을 뱉으려다 다시 삼키고선 가던 걸음을 옮겼다.

잠시 그렇게 연백진은 불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곳을 나서려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그는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누군가 구석에 쌓여 있던 불량 병장기들 앞에 서 있었다.

연백진은 내심 깜짝 놀랐다. 아무리 머릿속이 복잡하고 멍하게 불을 보고 있었다지만, 누군가 이곳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가 자신을 공격하려 했다면 당했을 수도 있었다.

“누구냐?”

그러자 백룡반 무복을 입은 남자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검무극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직접 그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 연 대협님!”

연백진의 눈빛이 절로 차가워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아, 이것들 중에 다시 쓸 수 있는 병장기가 있나 보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멀쩡한 건데 운이 나쁘게 섞여 들어와서 녹아 버리게 될 운명도 있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연백진은 검무극이 평범한 자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안과 같은 미녀와 같이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입관하자마자 서진과 친해진 것도 그렇고. 그리고 이곳에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렇고.

‘놈은 일부러 기척을 드러냈다. 아니었다면 조용히 사라졌겠지.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연백진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래서? 고쳐 쓸만한 것은 찾았나?”

검무극이 연백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봐선 잘 모르겠습니다.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막상 써보면 역시 쓰레기였구나, 싶은 것이 대부분이겠지요.”

검무극이 연백진이 서 있는 불길 옆으로 걸어왔다.

연백진은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상대의 기습에 대비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시 불을 바라보던 그가 지난날을 떠올렸다.

“어려서 형이랑 불장난했던 기억이 납니다.”

연백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검무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허점투성이다.’

모든 것이 허점이었다. 당장 일격에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뒤통수, 목, 등. 모두 다 허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일격에 그를 제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싸울 마음이 들지 않는 느낌. 이런 상황을 겪는 것도, 이런 이상한 놈을 그냥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그때 형이 나를 불 속으로 밀어버리지 않을까, 겁을 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불안증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형 이야기에 연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형과 만나는 걸 보고 꺼낸 이야기가 분명했으니까.

‘그때부터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형이나 다른 무인들도 이자가 숨어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의미.

“형과 안 친한가 보군.”

“서로 죽이려 했었죠. 우리 집안도 물려받을 게 좀 있어서요.”

“얼마나 되기에?”

“좀 많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형은 죽었겠군.”

검무극의 미소 짓는 입가에 불빛이 일렁였다.

“아뇨.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꽤 친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게 많지 않았겠지.”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하시면 비법을 알려드릴 수도 있지요. 권력 암투 속에서 형제간에 피를 보지 않는 법! 어떻습니까? 술 한 잔 사주시면 알려드리죠.”

“필요 없다.”

분명 범상치 않은 자는 확실한 데 헛소리가 너무 많으니 진면목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쪼그리고 있던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원래의 고철 더미 앞에 섰다.

“우리 한 번 찾아볼까요? 하나쯤은 녹이지 않아도 되는 게 있는지?”

정말 이상한 놈이었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떠나,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왜 이것에 집착하는 거지?”

“이 세상에 버려지는 게 너무 많기도 하고.”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덧붙여 말했다.

“억울하잖아요? 멀쩡한데 이렇게 버려지면.”

검무극을 응시하는 연백진의 얼굴에 화로의 불길이 뜨겁게 일렁거렸다.

“너 누구냐?”

지옥을 가더라도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백룡반 신입 검연입니다. 인연 연자가 아니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백진이 기습적으로 검무극의 혈도를 제압하려 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가볍게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했다.

“연기 연자를 쓰죠. 이번 일이 끝나면 사라질 사람입니다. 영원히.”

허공을 움켜쥔 빈손을 보며 연백진은 묘한 떨림을 느꼈다. 두려움인가? 아니, 분명 두려움과는 다른 감정이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허점이 없는데 허점투성이로 보았다는 것은, 결국 그 허점은 자신의 허점이라는 것을.

“아, 물론 황룡무관에 무공을 배우러 오진 않았습니다.”

“그럼 왜 왔지?”

“친구를 도우러 왔지요.”

“누구?”

검무극이 오늘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연백진이 표산과 대적하는 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서였다.

적의 적이라고 다 아군이겠냐마는, 적들이 귀문의 혈육까지 죽이려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 연백진과 손을 잡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물론 서진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운명의 수레바퀴가 끝까지 파국을 향해 굴러간다면, 기꺼이 그 수레바퀴에 함께 올라탈 생각이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백진만큼은 가까워져야 한다.

“난 귀문에 속한 사람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귀문에 큰 신세를 진 사람입니다.”

서진을 도우러 왔다는 대답이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귀문에 큰 신세를 졌으니까.

“설마 귀문주가 자신의 딸을 혼자 돌아다니게 했겠습니까?”

“그럼 이안이란 여인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켜주는 중입니다.”

이들이 귀문주의 딸을 지켜주고 있다?

믿을만한 말이었다. 서진이 들어온 다음 날 두 사람이 입관했고. 이후에는 같이 어울려 다니고 있으니까.

“서진이 복수할 대상과 연 대협의 적이 같은 상대란 생각이 들어서 모습을 보인 겁니다.”

검무극이 다시 쌓여 있는 병장기 중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제 같이 찾아볼 마음이 생겼습니까?”

연백진은 그 검을 다시 고철 더미에 던졌다.

“거절하겠네.”

그의 시선이 벽에 걸린 새 병장기들을 향했다.

“저렇게 많은 새것이 매일 쏟아져 나오는데, 굳이 고철을 뒤질 필요는 없겠지.”

설령 상대의 말이 사실이라도 상대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연백진이 돌아서 그곳을 나갔다.

“신입이면 수업에나 늦지 말게.”

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연백진이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한데 이자는 내가 표산에게 그곳이 어딘지를 추궁하는 말까지 들었을까?’

연백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언제 사라졌는지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 *

“연 대협이 그곳의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표산은 화상을 입은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약을 바를 여유도 없었다.

“연 대협 성격상 계속 파고들 겁니다.”

황룡관주인 연백인은 말없이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수장인 기석이 더는 말하지 말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표산은 참지 못하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무슨 일을 저질러도 관주님께서 용서한다는 걸 아는 한, 연 대협은 계속 시도할 겁니다.”

정말이지 기석과 단둘이 있었다면 욕설부터 내뱉었을 거다.

연백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표산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표산을 향해 걸어왔다.

“화상이 심하군. 어디 보세.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

연백인의 손끝에서 표산의 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돌아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너무나 빠른 한 수였기에 의식할 사이도 없이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시체를 내려다보는 연백인이 나직하게 분노에 찬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하며 흘러 나가는 그 분노는 비단 표산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반면 수족의 죽음에도 기석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연백진이 본격적으로 뛰어든 이 상황에서 그를 제거하는 건 적절하다고 여겼다. 다만 입술이 없어졌으니 이제 시린 이를 악물어야겠지.

“발굴이 막바지라고?”

연백인의 물음에 기석이 정중히 대답했다.

“네. 거의 다 뚫었다고 합니다. 곧 입구를 찾아낼 겁니다.”

연백인의 눈빛에 격정이 스쳤다. 그래, 찾아내야지. 그 순간을 위해 사범의 목을 비트는 관주가 되었는데.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연백인이 다시 표산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가 창밖 저 멀리 바라보았다.

“그래, 지옥문이 우릴 기다리고 있겠지.”

연백인의 자조 섞인 대답에 기석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지옥을 가시더라도 천하제일인이 되어서 가시겠지요.”

* * *

검무극은 객잔에서 이안과 서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앉은 곳으로 연백진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더니 탁자 위에 한 자루의 낡은 철검을 올려놓았다.

“버리지 않아도 될 검이 한 자루 있더군.”

철방에 쌓여 있던 고철 더미에서 쓸만한 검을 찾아온 것이다.

검무극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까 헤어질 때와 느낌이 달랐다. 그때보다 조금 더 격양된 모습이었다.

“설마, 진짜 다시 가서 찾은 건 아니죠?”

“직접 찾았다.”

“오다가 사 오셨어도 몰랐을 텐데요.”

연백진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성격을 살짝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왜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그건 한 사람의 죽음 때문이었다.

“표산이 죽었다. 목을 매어서 자결했다더군.”

연백진은 알 수 있었다. 형이 그를 죽였다는 것을. 긴가민가하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나를 대체 뭘로 보고!”

놀라운 소식임에도 검무극은 담담했다.

“혹시 예상했었나?”

“예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요. 귀문의 혈육까지 죽이려 들었던 자들입니다. 정체가 드러난 수족 하나 잘라내는 건 문제가 아니겠죠. 자, 앉으십시오. 식사 전이시면 하시고요.”

연백진이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마음이 복잡하고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막상 검무극을 보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젊은 녀석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면이 있었다.

“술이나 한 잔.”

검무극이 그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한 잔 더.”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비운 후 그가 생각지 못한 사실을 밝혔다.

“임 사범이 죽기 전에 나를 찾아왔었다.”

연백진이 이번 일에 휘말려 든 것은 바로 임혁 때문이었다.

“관 내에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하더군.”

연백진이 임혁이 전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처음 임혁이 이번 일에 주목하게 된 것은 이 년 전이었다.

이 년 전 백룡반 때부터 직접 가르친 정말 재능이 뛰어난 관원이 있었다. 실력도 뛰어나고 성공에 대한 욕심도 많았던 친구였다.

이대로라면 황룡반 출관 시험은 당연히 합격이었는데,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와서 무관을 그만두겠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무래도 사범님께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임현은 조금만 더 참으면 무조건 출관할 수 있다고 말려보았지만, 그는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떠나버렸다.

그때, 그 관원의 눈에서 알 수 없는 열망을 느꼈다. 그동안 고생한 시간을 날려버리면서 얻으려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 일이 지나고 올해 또 비슷한 일이 생겼다. 이번에도 출관 시험 합격이 보장된 관원이었는데 그에게서 그때 그 관원의 눈에서 보았던 열망을 다시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은밀히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삼 년 사이 충분히 출관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이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워낙 많은 이가 다니는 곳이기에 이런 사실에 주목한 이들은 없었다. 자기가 그만두겠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다면서 찾아왔었다. 내가 좀 알아봐 달라고. 솔직히 그 말을 들을 때만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지.”

그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날 찾아온 이틀 후에 임 사범이 죽었다.”

빈 술잔을 향했던 연백진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건 정말 이상했지.”

그 무렵 관주인 형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어딘지 모르게 예민하고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범을 죽이는 일에 개입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오늘 표산의 죽음으로 확실해졌다. 임현의 죽음에도 형이 개입되어 있음을.

“앞서 표산을 추궁할 때 물었던 그곳은 어디를 의미하는 겁니까?”

“역시 들었군.”

이미 모든 것을 말해줄 생각을 하고 찾아온 그였다.

“은밀히 무관의 재정을 조사한 결과 알게 되었다. 대규모 공사에 필요한 물자를 사들이는 데 돈을 썼다는 걸.”

그래서 표산에게 장소가 어디냐고 추궁한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 무슨 공사가 진행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임혁이 어떤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되었는지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비밀스러운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값진 정보까지.

연백진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굳이 가질 필요는 없는 죄책감이었는데, 검무극은 그가 임현의 죽음에 약간의 부채감을 가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연백진은 악인이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악인이 선한 척 연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평범한 사람이, 왜 그런 길을 걸었을까? 서진의 복수를 했을 때 그의 형도 이미 죽고 없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연백진이 죽였으리라 생각했다.

이런 당신이 왜 형을 죽이고 좋아하던 여인까지 죽이는 운명의 길을 걸었소?

검무극의 시선이 연백진이 가져온 철검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검을 골라 오는 순간 운명의 수레바퀴는 조금 방향을 틀기 시작했을 것이다.

검무극이 천천히 철검을 뽑으며 말했다.

“잘 찾아내셨습니다. 이 검은 이제 불구덩이에 녹지 않아도 될 운명이 되었습니다.”

* * *

기관은 지하로 끝없이 하강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가 탈 수 있는 그곳에 연백인이 홀로 타고 있었다.

그는 기관 쇳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낯설어진 얼굴.

멈춰 선 기관의 문이 열렸다.

그 앞에 무인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 그는 황룡무관 출신의 사내였다.

“제가 밟는 곳만 밟고 따라오십시오.”

연백인이 그를 따라서 걸었다.

바닥 곳곳에는 바둑판처럼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각각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다.

연백인은 안내자가 밟는 곳을 따라 밟았다.

가는 길 중간중간 벽이 뜯겨 있었다. 안에 보이는 복잡한 장치들은 무시무시한 기관 장치들이었다.

어떤 것은 이미 완전히 해체된 상태였고, 또 일부는 그대로 있기에 바닥을 잘못 밟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외줄을 타고 건너야 하는 곳도 있었고, 오히려 기어 올라갔다가 다시 미끄러져 내려가야 하는 곳도 있었다.

작은 통로를 기어야 하는 곳도 있었고 물을 헤엄치기도 해야 했다. 정말 안내하는 사람이 없으면 절대 찾아갈 수 없는 미로였다. 지난 삼 년 사이 몇 번이나 왔지만, 길이 바뀌기도 해서 올 때마다 헷갈렸다.

그리고 마지막 공간에 도착했다.

광장처럼 너른 그곳에서 한때 황룡무관의 관원이었던 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검기를 일으켜 벽을 자르는 이와 도면을 내려다보며 뭔가를 열심히 적는 이, 그리고 상자를 나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끌려온 게 아니었다. 모두 자발적으로 선택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무관을 나간 후 선택할 수 있는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보수를 다달이 지급하고 있었다. 이 일만 끝나면 모두가 꿈을 이룰만한 액수였다.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황룡관주였던 자신의 인생은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두의 인생을 바꾼 그 남자가.

남자가 자신에게 와서 했던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나하고 땅 좀 파야겠소.

그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아주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눈에는 여유가 있었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는 장난기가 묻어났다.

“거기 조심!”

남자는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웃통을 벗고 맨발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몸에 난 수많은 상처가 그가 어떤 지난날을 보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거기 조심하라니까!”

한 청년을 향해 남자의 외침이 터지는 순간.

쇄애애애애액!

사람 크기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쇳덩이가 그의 머리로 떨어졌다.

쩌억! 콰아앙!

연백인은 너무 큰 쇳덩이였기에 시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우우우우.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쇳덩이는 반으로 갈라져 있고,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는 청년의 옆에 서 있었다.

소리를 질렀을 때 꽤 멀리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곳으로 날아가 쇳덩이를 반으로 자른 것이다.

잘린 단면은 빛이 날 정도로 깨끗하고 매끄러웠다. 놀랍게도 남자는 이 큰 쇳덩이를 검기를 발출하지 않고 잘랐다.

그렇다고 보검으로 자른 것도 아니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은 저잣거리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있는 낡은 철검이었다.

남자의 신위에 연백인은 물론이고 그곳의 모두가 경외심을 드러냈다. 그가 보여준 한 수는 그야말로 검술의 극의였다.

남자가 청년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돈 써보지도 못하고 죽으려고?”

“죄송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청년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다른 청년들도 고마움을 표했다. 한 번쯤 이 남자에게 도움을 안 받은 이는 없었으니까.

“다들 이것부터 치워라!”

“네!”

청년들이 쇳덩이를 치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이 검기를 일으켜서 쇳덩이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검기를 일으키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 다들 능숙하게 검기를 일으켰다.

남자는 한참을 서서 쇳덩이를 치우는 뒷정리까지 신경 쓴 후에야 연백인을 향해 돌아섰다.

“오랜만에 오셨소.”

남자는 몸에 뒤집어쓴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환하게 웃으며 걸어왔다.

“바깥세상에 재미난 일이라도 생겼소?”

귀신보다 무서운 마귀가 붙어왔소

처음 봤을 때, 미친놈인 줄 알았다.

허름한 무복에 낡은 철검을 차고 와서는 대뜸 같이 땅을 파자고 했으니.

하지만 미친놈이 아니었다. 남자에게서 그 어떤 광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날 죽이러 온 건가?’

같이 땅을 파자는 의미가 널 거기 묻겠다는 의미인가?

―어딜 파자는 거요?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지면서 연백인은 남자에게 기습을 가했다.

강호에는 무관의 사범이나 사부를 인정하지 않는 무인이 많다. 코 묻은 애들 돈을 뺏어 먹는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자신은 무관이라는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했는데.

쉬이익.

그냥 이뤄낸 자리가 아니었는데.

휘리릭.

다음 순간 연백인은 멍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남자의 손에 들린 자신의 검을 보았다.

검을 빼앗긴 게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빼앗겼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손이나 팔목을 어떤 식으로든 제압했어야 했을 텐데. 멀쩡했다. 하다못해 그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검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실력이었으니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고, 협박으로 일을 진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검을 돌려서 손잡이 쪽을 향하게 돌려주었다.

―성격이 참 급하시네.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첫 단추가 끼워진 때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혈도를 제압하고 목을 부러뜨릴 듯 협박해도 될 실력자가 검을 돌려서 손잡이 쪽을 내밀어준 이 단순한 행동 하나 때문에.

―살다 보면 한 번쯤은 기연이 제 발로 찾아오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날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었던 그 모습 그대로, 남자는 오늘도 그렇게 웃고 있었다.

연백인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천장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에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을 씻더니 입까지 헹궜다.

“이놈의 먼지가 어찌나 나는지. 참, 식사는 하셨소?”

“먹고 왔소.”

대충 씻고 난 남자가 구석에 덮여 있던 천을 열었다. 바구니에 주먹밥이 가득 쌓여 있었다.

남자가 주먹밥을 우걱우걱 먹었다.

“그걸로 괜찮소?”

“술과 고기를 실컷 먹는 날도 있소.”

연백인은 이 작업이 시작될 때 모든 편의를 제공하려 했었다. 방도 멋지게 꾸며주고 안락한 침상에 숙수들을 데려와서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만들어 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이것이었다.

―좀 불편하고 부족해야 더 빨리 강해질 거요.

결핍이 사람을 더 빨리 성장시킨다는 그 말이 맞았다는 걸 조금 전에 직접 확인했다. 검기를 자유롭게 쓰는 관원들의 모습으로.

그들은 풋내기 시절의 관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제대로 된 무인이 되어 있었다.

이 갑갑하고 불편한 공간에서 바깥의 그 넓은 연무장에서도 익히지 못한 것들을 익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말은 이 남자에게 가장 크게 적용되는 말이다.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보다 남자가 더 강해졌음을 느꼈으니까.

관원들과 똑같이 먹고 똑같은 곳에서 자면서 어쩌면 남자는 이곳마저 자신의 수련장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먹밥을 먹는 사이 연백인은 남자와 처음 만난 그날을 다시 떠올렸다.

―황룡무관 지하 깊숙이 보물과 절세신공이 보관된 장소가 있소.

이 정도 고수가 헛소리를 할 리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드는 하나의 의문.

―당신 실력이라면 나를 죽이고 황룡무관을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맞소. 한데 황룡무관의 주인이 바뀌면 무림의 이목이 집중될 거요. 나는 조용히 이번 일을 진행하고 싶소.

―일이 끝나고 나를 죽여서 살인멸구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소. 나를 믿는 수밖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손을 잡았다. 거절한다면 죽음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를 믿지 않았다. 믿는 척하면서 살아날 방도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지금은?

연백인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난 시간 동안 남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임을.

그를 믿냐고? 그래,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저 벽 너머 찾고자 했던 문을 발견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곳에 있는 절세신공은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은 왜 비급을 원하지 않소?

―뭘 익혀도 내가 더 강할 테니까?

그러면서 남자가 껄껄 웃었다. 황룡무관주의 기습을 단 한 수만에, 그것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검을 빼앗은 사람의 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소.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과연 그는 보물이 든 방에서도 같은 사람으로 자신을 쳐다볼까? 그래서 자신을 살려주고 저 관원들까지 모두 살려줄까?

아니면 저 철검이 뽑혀 나오면서 단 한 수에 여기 있는 모두가 죽게 될까?

이 남자와의 만남이 악몽이 될지, 기연이 될지 이제 그 결과가 얼마 남지 않았다.

주먹밥을 다 먹은 남자가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옷을 허름하게 입고 다닐 뿐, 남자는 깨끗하고 깔끔한 사람이었다.

“왜 내려오셨소?”

“발굴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내려왔소. 오랜만에 당신 얼굴도 보고.”

손을 다 씻은 남자가 연백인을 향해 돌아섰다. 자신을 응시하는 남자의 눈빛에 연백인은 심장이 쪼여 드는 압박감을 느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이 남자의 눈을 보면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동생 때문에 고민이 많겠소.”

순간 연백인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동생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까지.

연백인은 동생 이야기가 남자에게서 나오자 내심 긴장했다. 동생은 이곳을 찾아내려 하고 있었으니까.

“귀문의 혈육이 입관하면서 문제가 커졌소.”

그러자 남자는 서진이 와 있는 것까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문제는 귀문의 어린 귀신이 아니오.”

“무슨 말씀이시오?”

“귀신보다 더 무서운 마귀가 붙어 왔소.”

“누굴 말씀하시는 거요?”

남자는 뜻 모를 미소만 지을 뿐 누군지 말해주지 않았다.

“우리 관주께선 어린 귀신 하나도 쩔쩔매니 내가 올라가 봐야겠소.”

그가 나오겠다는 말에 연백인은 깜짝 놀랐다. 대체 누가 왔기에?

“그러지 마시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당신이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않소?”

그러자 남자가 소리쳤다.

“우리도 좀 쉽시다!”

정말 생각지 못한 말에 연백인이 당황했다.

관원들이 ‘옳소!’ 하는 표정으로 모두 이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쉬셔야지요.”

당황한 연백인을 보며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장난을 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많이 지쳤소. 마지막 관문을 뚫으려면 새로운 인원도 필요하고.”

“몇 사람이나 필요하시오? 내가 뛰어난 애들로 가려 뽑아서 보내겠소.”

그러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남자는 거절했다.

“그럴 것 없소. 이번에는 내가 직접 뽑아서 데려오겠소.”

그러고는 남자가 관원들에게 소리쳤다.

“와서 밥 먹어라.”

관원들이 우르르 와서 주먹밥을 챙겨갔다.

“손 씻고 먹어! 어휴, 더러운 놈들!”

남자의 외침에 몇몇은 손을 씻었고, 몇몇은 웃으면서 그냥 주먹밥을 가져갔다. 함께 고생해서인지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그들 중 몇몇은 연백인도 잘 아는 관원이었다. 이 사람과 있으면서 아예 다른 사람처럼 눈빛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남자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한 며칠 외출할 거다. 그동안은 모두 푹 쉬도록! 막내들 받을 준비하고.”

관원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뻐했다.

맨발로 다녔던 남자가 신발을 챙겨 신더니 연백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우린 올라갑시다.”

“그러시죠.”

위로 올라가는 기관으로 걸어가며 남자는 물었다.

“이곳이 중요하오? 아니면 동생이 중요하오?”

연백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남자에게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동생을 선택하지 않았소?

연백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대답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마땅히 동생이 중요하다는 말이 곧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남자가 연백인의 등을 찰싹 때렸다.

“말이라도 동생이라고 하셔야지.”

연백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차분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내가 좋게 해결할 테니.”

연백인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놓였다. 죽을 때 죽을지라도, 이 순간 이 남자가 주는 특유의 믿음이 있다.

그리고 남자의 이런 면이 관계의 단추를 계속 채워오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 * *

“소교주님은 어떤 분이세요?”

서진의 물음에 이안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여인은 통천각과 은월 지부를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검무극과 이안이 서로를 대하는 말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는지.

그랬기에 소교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이안이 아닐까? 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안은 딱 한 글자로 검무극을 표현했다.

“꿈, 그야말로 꿈 같은 분이지.”

“꿈이라고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하는 분이고.”

좋은 꿈이 있다면 나쁜 꿈도 있었다.

“어느 날 일어나면 이 모든 일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게 하는 분이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달라졌던 것처럼, 또 어느 날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녀의 마음에 그런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서대룡이나 장호에게도 말하지 않은 두려움이었는데, 서진에게 처음으로 꺼내는 말이었다.

“꿈이면 어떻습니까? 죽을 때까지 안 깨면 되죠.”

그 말에 이안이 웃었다. 서진이 조장으로 들어와서 이안은 좋았다. 같은 여자기도 했고, 잘 통하기도 했고. 아무래도 청면은 상대적으로 어려웠으니까.

“암튼 놀랄 준비만 하면 돼. 매번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시는 분이니까.”

그때 서진이 말했다.

“벌써 조금은 알겠네요.”

객잔 안에서 검무극과 연백진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깐깐해 보이던 연백진이 불콰한 얼굴로 검무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혀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뭐, 저 정도 가지고.”

두 사람이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검무극과 연백진이 앉아 있던 자리에 함께 앉았다.

“다녀왔습니다.”

검무극에게 인사한 후 연백진에게도 인사했다.

검무극이 두 여인에게 말했다.

“연 대협에게 솔직히 말했다. 우리가 서진이를 보호하러 따라온 거라고.”

그 말로 충분했다. 연백진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연백진의 시선이 서진을 향했다.

임현이 찾아와서 이 일을 알게 되었다는, 원래라면 그녀와 나눴어야 할 대화를 검무극과 이미 나눴다. 굳이 또 할 필요는 없기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무극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녀와 깊이 개입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이 인연이 스쳐지나가기를 바랐기에.

떠나려는 연백진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형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에 연백진은 흠칫 놀랐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그가 지난번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술 한잔 사주면 권력 암투 속에서 형제간에 피를 보지 않는 법을 알려준다고 했지?”

“그랬지요.”

“설마 형과 대화하라는 것이 그 해법인가?”

고작 그게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런 감정이 그의 표정에 드러났다.

“네, 맞습니다.”

연백진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로 풀릴 일이 아니기에.

“아직 술은 못 사겠군.”

돌아서려는 그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무인들이 갈등을 푸는데 대단히 많은 방법이 있을 거 같지만 대부분 두 가지로 풀리죠.”

“그게 뭐지?”

“대화와 칼이죠.”

검무극이 차분히 덧붙였다.

“되든 안 되든 우선 만나보십시오. 안 될 것 같은 관계일수록 의외로 잘 될 수도 있습니다.”

* * *

다음 날 백룡반 분위기는 침울했다.

백룡반에서 벌써 두 명이나 죽음을 맞았다. 거기에 사범이었던 표산이 자결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오늘 새 사범님이 배정되기 전에 임시 사범님이 오신다고 했어.”

관원들이 임시 사범이 누가 올지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던 그때, 유광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더 큰 일이 벌어질 거 같아.”

이제 교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에는 누가 죽는데? 나? 너?”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야.”

“나도 농담 아니야. 그래서 어쩌라고? 무관 그만두고 고향으로 갈까?”

“미안.”

유광은 교석에게 미안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면 그냥 속으로 삼켜야지. 다른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가 말했다.

“불길한 일이 벌어지는 걸 모르는 것보다는 낫겠지.”

돌아보니 이안이었다. 이안은 어제 용감하게 나서준 유광이 고마웠고 그의 이 재능이 무인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본능이라 여겼다.

“오히려 그 감각을 잘 키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다른 사람도 아닌 이안이 그 말을 해주니 유광은 감격했다.

“혹시 그때 말한 그 방패…….”

교석이 유광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 마.”

그 방패 아직 모집 중이냐고 물어볼까 봐 미리 말린 것이다.

“안 해, 안 한다고! 내가 그렇게 바보 같냐?”

“딱 그만큼! 아니 그 이상!”

이안이 두 사람을 보며 웃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둘을 귀영대로 데리고 가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순박한 녀석들을 천마신교에 입교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떠들썩하던 그곳이 조용해졌다.

“저기 새 사범님이 오신다.”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허름한 무복에 한 자루의 철검을 찬 남자였는데 분위기가 밝았다.

이곳에서 본 사범이나 사부들 중 가장 환한 표정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왜 연백진이 그런 운명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형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형도 결국은 피해자였으리라.

눈앞의 저 남자는 바로 십이지왕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냥 십이지왕이 아니었다.

십이지왕 중 제일왕(一王).

검왕(劍王) 악군학(岳群鶴).

비록 시대의 세 절대자가 죽고 화무기가 은거한 후였지만, 그는 십이지왕 시대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다. 명실공히 가장 강한 무인이었다.

검무극은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흑마검의 손잡이를 잡으며 안정시켰다. 혹시라도 상대의 기도에 스스로 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여러 명의 십이지왕을 만났지만, 지금처럼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관원들 앞까지 온 검왕이 모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새 사범이 배정될 때까지 임시로 너희를 가르치게 된 악 사범이다.”

검왕이 관원들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한 사람씩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요즘 무관 수준이 이 정도인 줄

검왕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관원들은 이 새로운 사범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여유 때문일까? 아니면 허름한 무복과 철검, 뒤로 묶은 머리카락 때문일까? 그에게서 자유분방함이 느껴졌다.

뭐라고 할까? 검 한 자루 차고 중원을 자유롭게 떠돌며 자유를 만끽하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더욱 긴장했다.

이 자유로운 느낌이 어떤 경지에서 비롯된 여유인지 잘 알았으니까.

검무극이 이안과 서진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두 여인이 자신의 좌우 뒤쪽에 위치하게 했다.

혼자였다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을 거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관원들이 가득했고 그 누구보다 이안과 서진이 있었다.

검왕이 지금 이곳에서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지금까지 배후 세력과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안의 시선이 검무극의 등을 향했다. 그는 임시 사범이 등장한 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소교주였다. 이제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알 거 같은 그녀였다. 지금 검무극이 왠지 모르게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이지 긴장과는 거리가 먼 분이신데.’

자연스럽게 이안의 시선이 새로 온 사범을 향했다.

무관 내에 다들 비슷비슷한 느낌을 주던 사범들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느꼈을 뿐, 별다른 특별한 기도를 느낄 수 없었다.

만약 정말 검무극이 저 사범 때문에 긴장한 거라면, 그녀 자신보다 훨씬 고수라는 의미다.

‘설마? 백사단에서 나온 고수일까?’

지금껏 검무극이 상대했던 그 배후 세력이 여기서 등장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그녀는 상대가 백사단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자네부터 소개하지.”

검왕 가까이 있던 관원부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검왕은 관원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몇 살이냐? 무관에는 왜 들어왔냐? 출관 후에는 뭘 할 거냐? 여자 친구는 있냐?

정말 이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무관의 사범이었다. 남의 일에 관심 많고 오지랖 부리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렇게 검무극 차례가 되었다.

“검연입니다.”

오늘의 이름 소개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이안은 자신의 느낌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평소였다면 반드시 인연 연 자가 아니라 연기 연 자라는 말을 꺼냈을 소교주였으니까.

검무극이 긴장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것이었다.

‘나를 알고 왔다.’

십이지왕과 자신이 어찌 우연히 만나는 운명이겠는가? 그것도 다른 십이지왕도 아닌 일왕과의 만남이.

문제는 검왕이 정면에 나섰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왔다는 걸 알았다면 은밀히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십이지왕이 그랬듯이.

하지만 검왕은 자신의 앞에 당당히 나섰다.

자신이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해서?

그럴 리가. 아무리 기도를 감추더라도 저 존재감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이건 검왕의 자신감이다. 우리 제대로 붙어보자는.

검무극을 응시하던 검왕이 반갑게 소리쳤다.

“야! 너구나!”

마치 그 말은 검무극에게 이렇게 들렸다.

지금까지 우리 조직을 그렇게나 속 썩인 놈을 드디어 만났구나!

물론 검왕은 다른 이유를 들었다.

“벌써 무관에 소문이 자자하다. 아름다운 두 미녀와 함께 다니는 신입이 있다고. 이 부러운 놈!”

그는 정말 부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관원들이 여기저기서 웃었다. 관원의 미모를 두고 이렇게 대놓고 부러워하는 사범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들은 벌써부터 이 임시 사범에게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 번 두드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 멋진 신입입니다.”

“어디 한 번 가까이서 보자. 얼마나 멋진 놈인지.”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걸어왔다.

그 순간 검무극의 긴장을 느낀 천마호신공이 저절로 발동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면서도 검왕은 어떤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다.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그는 정말 제자와 장난치기 좋아하는 사범처럼 보였다.

검왕이 검무극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서로 검을 뽑으면 상대의 목을 벨 수도 있는 거리.

검무극의 심장이 뛰었다.

상대는 검왕이다.

검왕은 거기서도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검무극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검무극보다 뒤에 선 이안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만약 두 사람이 격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소교주님을 도와야 하나? 아니면 소교주님을 믿고 서진을 챙겨서 물러나야 하나?

검무극을 향해 내민 손이 목적한 곳에 닿았다.

검왕이 검무극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 멋지다.”

그때까지 검무극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격렬한 싸움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걸 두고 보는 게 더 힘들었다. 언제 어떻게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심력 소모가 극에 달했으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사범님이 더 멋지십니다.”

“내가?”

“보통은 질투심에 이글거리거든요. 한데 사범님은 멋지다고 해주시네요.”

그러자 검왕이 검무극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두 눈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검무극은 말없이 응시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고 참는 게 더 어려웠다.

검왕이 검무극의 귓가에 속삭였다.

“솔직히 질투 나. 나도 남자야.”

그러면서 검무극을 보며 씩 웃었다.

검왕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검왕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거다. 자신이 그를 평범한 사범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이런 그의 행동이 더욱 대단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검왕의 손은 검무극의 어깨에 있었다. 손가락 끝에 미약한 진기라도 느껴지는 순간, 미친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검왕의 시선이 검무극 뒤에 서 있던 이안을 향했다.

검왕과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이름을 밝혔다.

“이안입니다.”

검왕이 검무극의 어깨에서 손을 떼더니 이번에는 이안에게 한 걸음 앞으로 갔다.

검무극이 따라서 돌아섰다.

‘이안을 베면 너도 죽는다.’

하지만 자신을 등 뒤에 두고 그런 모험은 하지 않으리라. 그 역시 소교주의 실력이 어떤지 알고 있을 테니까.

과연 검왕은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대단하다!”

그녀의 외모를 보고 감탄한 것처럼 보였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안의 성취를 읽어냈다.’

다시 말해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룬 이안의 무공 경지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는 의미.

긴장한 표를 전혀 내지 않았고, 기도 역시 철저히 잘 감추고 있었음에도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검왕이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가 이번에는 서진을 바라보았다.

“서진입니다.”

두 여인을 향한 검왕의 눈빛에는 어떤 욕정이나 열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검왕이 그녀들을 부른 것이다.

“이안, 서진. 앞으로 나오도록!”

이건 검무극을 향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사범이 관원들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자, 이제 넌 어떻게 할래?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사범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이안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소교주님을 이렇게나 긴장하게 하는 고수군요!’

검무극이 걱정하고 있음을 느꼈다.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반면 서진은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기에 이안을 쳐다보며 함께 나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때 이안의 아홉 개 꼬리 중 하나가 펼쳐졌다.

그녀가 검무극의 손목을 잡았다.

놀란 검무극이 그녀를 쳐다보자 이안은 검무극을 잡아끌고 앞으로 나갔다.

“같이 가자.”

서진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녀도 직감했다.

검왕이 그 모습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둘만 나오라고 했을 텐데?”

이안이 그에게 말했다.

“이 친구를 데려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안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친구는 평생 우리 곁에서 칼과 방패가 되어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원래 자신을 위해서 칼과 방패가 되어 준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우리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서진까지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을 지금 처음 들은 관원들이 시끄러워졌다. 대부분 웃음보다는 인상을 찌푸렸고, 박수보다는 야유를 보냈다.

“무인인데 어딜 가나 칼과 방패를 가지고 다녀야죠.”

말을 하면서도 이안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순간 생각해 낸 것이라 이 방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검무극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검왕이 이안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이 방패가 박살 나면 어쩌려고?”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이안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방패는 항상 모집 중입니다.”

잠시 멍하게 있던 검왕이 이내 큰소리로 웃었다.

“좋다, 재밌어. 혹시 그 방패에 나이 제한이 있나?”

자신도 들어갈 수 있느냐는 의미가 담긴 농담이었기에 관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 다 들어가도록.”

그녀의 재치를 받아들였는지 검왕이 그들을 들어가게 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려는데 검왕이 검무극을 불렀다.

“검연이라고 했지?”

“네.”

“여인은 둘이고 방패는 하나인데?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을 받으면 어쩌지?”

장난처럼 물었지만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이들 두 여인을 동시에 공격하면 너는 누굴 지키겠느냐는 물음.

정말 어려운 질문이었다. 이 두 여인이 아니었다면 검무극은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이안이 전신석화공으로 막아주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거고, 서진이 회귀대법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테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돌아섰다.

“아무도 안 구해도 될 겁니다.”

“왜지?”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이런 아름다운 여인들을 찔러 죽이겠습니까? 사범님이라면 찌르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대답에 검왕은 이번에도 소리 내서 웃었다.

“난 못 찔렀을 거야. 대신 자네를 세 번 찔렀겠지.”

“왜 세 번입니까?”

“여인들 몫까지 찔러야지.”

이번에는 검무극이 웃으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입관 동기, 들었지? 네 방패가 이런 위험에 처한 방패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번은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막아볼게. 그러니 두 번만 찔려.”

그러자 반대쪽에 있던 서진이 말했다.

“한 번만 막아도 되게끔, 나도 열심히 할게.”

검무극이 다시 검왕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검왕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고, 검무극은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관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검무극과 두 여인만 특별대우한 것이 아니라는 듯, 검왕은 관원들에게 또 온갖 것을 다 물었다.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냐? 돈을 벌면 어디에 쓸 거냐?

그러는 사이 수련 시간이 끝났다. 수련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검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내일 보자!”

후다닥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하루 잘 때웠다는 듯, 농땡이 사범처럼 보였다.

그가 멀어지자 검무극이 비로소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내공 한 가닥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와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어떤 싸움보다 힘들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망쳤나요?”

“아니. 잘했다.”

그제야 이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제 강함을 말하자면 이곳 황룡관주를 몇 초식 안에 죽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물어야 한다면서요! 한데 지금 일개 사범 때문에 심장 터질 뻔했다고요!”

그녀의 농담에 검무극도 농담으로 받았다.

“요즘 무관 수준이 이 정도인 줄 몰랐지.”

물론 이안은 안다. 조금 전 저 사범이 지금껏 검무극이 상대했던 배후 세력의 고수라는 것을. 백사단에서 나온 고수가 검무극을 이렇게까지 긴장하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 실력쯤 되면 이제 저런 적들이 앞에 나타나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검무극이 답을 알려주었다.

“십이성 대성을 이뤄야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반드시 십이성 대성을 이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가서 이러시면 안 돼요! 미안, 이제는 더 강한 적을 상대해야 해!”

검무극이 그럴지도,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두 사람 옆에 서 있던 서진도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아기 귀신이 아니라 진짜 귀신이 필요하다.”

오늘 누굴 살릴 거냐는 검왕의 그 질문은 오히려 이안과 서진에게 강해지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유발이 되었다. 누굴 지켜주면 지켜줬지,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는 삶은 사절인 성격들이었으니까.

이안이 검왕이 걸어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부터 위험한 수업이 시작되겠네요.”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위험하면 할수록 배우는 것이 많을 거다.”

가슴에 멍 좀 들어도 괜찮잖아?

다음 날, 백룡반 수업을 받으러 가면서 서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자가 또 우릴 인질로 삼아서 소교주님을 죽이려 들면 어쩌죠?”

그러자 이안이 저 앞에 먼저 걸어가고 있는 검무극의 뒷모습을 보며 태평하게 말했다.

“소교주님이 막아주시겠지.”

하지만 서진은 어제 분위기가 얼마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혹시 저 때문에 남으시려는 거면 저는 괜찮습니다.”

서진은 혹시 자신의 복수 때문에 이안이 무리해서 남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이안이 발걸음을 멈추자 서진도 따라 멈췄다.

“소교주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지?”

“네.”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고 판단하셨으면 소교주님이 손수 짐을 싸서 우릴 돌려보냈을 거야. 명예? 명분? 자존심? 그런 걸로 무리하는 분이 아니시지. 소교주님이 아무 말씀 없으시면 괜찮은 거야.”

어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후 검무극은 어딘가 외출을 했다가 돌아왔다. 어딜 다녀왔는지 묻지 않았지만, 분명 이번 일을 대비하기 위한 외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새벽에 검무극의 방 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 자지 않고 있던 거다.

이안은 침상에 누운 채 반쯤 열린 창으로 보이는 별을 쳐다보았다. 아마 지금 검무극도 저 별을 바라보고 있겠지.

“소교주님이 내일은 해가 안 뜰 거 같다, 하시면 난 해가 안 뜬다에 전 재산 걸 거야.”

검무극에 대한 이안의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돈 거실 때 꼭 제게 알려주세요.”

“같이 안 뜬다에 걸려고?”

“아뇨, 그럴 수는 없죠. 저도 집 나오니까 돈 쓸데가 많아서요.”

이안과 서진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때 저 앞에서 검무극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뭐해? 빨리 와!”

두 여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이안은 또 다른 낙관론을 펼쳤다.

“소교주님은 그냥 고수가 아니야. 소교주님의 실력이라면, 또 그런 소교주님을 위협하는 정도의 실력자라면 인질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로 생각해. 이런 거지. 소교주님이 이길 수 있는 자라면 우릴 인질로 잡아도 이기실 거고, 소교주님이 못 이기는 상대라면 애초에 인질로 잡지도 않겠지.”

서진은 귀문의 혈육으로 살아오면서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생소하면서도 강렬한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진심으로.”

그래서 이 강자들의 세상에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인질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이안이 어찌 그녀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자신도 예전에 똑같은 열망을 느꼈었고, 미친 듯이 수련에 매진했었다.

검무극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아마도 저 남자가 걷는 길이 심장이 터지도록 뛰지 않으면 함께 걸을 수 없는 그런 길이기 때문이겠지.

“그러려면 수업 중에 절대 졸지 마!”

* * *

검왕의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어제와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허름한 무복에 질끈 묶은 머리, 한 자루의 철검까지는 똑같았는데, 오늘은 맨발로 나왔다.

“가끔 맨발로 다녀 봐. 땅의 기운도 느껴지고 아주 좋아.”

그가 검을 찬 반대쪽에 신발을 매달고 있는 모습에 관원들이 웃었다.

거기에 커다란 상자까지 끌고 왔다.

“창고에서 가져왔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를 열자 안에는 훈련용 목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황룡무관 초창기에는 입관 몇 년 차까지는 목검으로 수련했었다.

하지만 황룡무관이 유명해지고 시험을 쳐서 관원을 뽑게 되면서 언젠가부터 목검 수업이 사라졌다.

“자, 한 자루씩 들어라.”

지금껏 각자 자신의 진검을 차고 수련했는데, 갑자기 목검을 내주니 관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이놈들아, 너희 주제에 누굴 잡으려고 벌써 진검이냐? 목검도 과분하다.”

관원들이 내심 어이없어하며 목검을 들었다. 어제 보여준 모습이나 맨발에 생뚱맞은 목검까지, 그야말로 농땡이 사범이었으니.

이안이 목검을 들면서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의외네요. 더욱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업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되돌아온 뜻밖의 전음.

―나는 더 무서운데?

―네? 왜요?

―목검이라고 마음껏 휘두를 거 아냐?

검왕의 손에 들린 목검은 보검보다 더 날카로울 거야, 이안아.

검무극이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목검인지.’

일전에 아버지의 수련장에서 처음 진검을 잡았던 날을 떠 올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진검을 잡았던 날은 특별하다고 여기고, 처음 목검을 잡았던 날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면 그 순간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황룡무관에서 가르치는 무공은 황룡검법(黃龍劍法)이었다.

황룡검법은 황룡무관을 중원제일무관으로 만들어 준 가장 큰 역할을 했는데, 검술의 위력이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내공심법을 익혔어도 충돌하지 않고 검술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황룡검법은 모두 스물여섯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자 관원들이 말했다.

“스물아홉 개입니다.”

“아, 그랬었나?”

관원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검왕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 검법을 제대로 익히면 마교 소교주의 엉덩이쯤은 흠씬 때려줄 수 있지.”

그 말에 관원들이 웃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웃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는 전혀 불쾌함을 느끼지 않은 채 검왕의 농담을 즐기고 있었다.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들은 모두 즐기고 있었다.

“자, 오늘은 황룡검법의 초반 삼 초식을 배워보겠다.”

검왕이 목검을 들고 모두 앞에 섰다.

오직 검무극만이 제대로 느꼈다. 비록 목검이지만 그가 검을 들자 존재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만약 진검을 뽑아 들면 어떤 존재감을 드러낼까? 이런 두려움이 절로 들 정도로, 검을 든 검왕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거 잘 안 알려주는데 말이야.”

관원들은 너스레나 떠는 사범으로 받아들였지만, 검무극은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까지 집중했다. 관원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 자신들이 누구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는지.

검왕의 움직임은 정말 부드러웠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거 같아서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배운 황룡검법은 빠르고 강한 움직임으로 펼치는 무공이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생각했다. 보아하니 또 어제처럼 대충 때우고 가려는구나.

심지어 초식을 펼치다 동작을 바꾸기까지 했다.

“아,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낫겠다.”

다들 고개를 내저었지만, 검무극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검왕이 강맹한 황룡검법을 부드러움을 바탕으로 재해석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디 황룡검법을 제대로, 오래 배웠겠는가? 임시 사범을 하기 위해 잠시 비급을 봤을 텐데, 무공 하나를 재해석해서 다른 무공으로 내놓은 것이다.

초식을 펼친 후 검왕이 목검을 꺼냈던 상자에 걸터앉아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잘들 봤냐?”

그러면서 검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이렇게 펼쳤는데 너는 어떻게 이 황룡검법을 펼쳐 보일 테냐?

검무극의 실력을 보려는 응수타진이었고, 검술의 극의에 다다른 자의 유희였으며, 언제라도 상대의 목을 날려버릴 싸움의 시작이기도 했다.

“자, 다들 해 봐!”

관원들이 일제히 목검을 내질렀다. 황룡검법은 이런 겁니다, 하듯 그들은 이미 배운 대로 빠르고 강하게 초식을 발휘했다.

몇몇은 검왕이 한 대로 흉내를 내보았지만, 이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마음이 들어 원래대로 무공을 펼쳤다.

이곳에서 검왕이 펼친 대로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은 검무극과 이안, 서진뿐이었다.

물론 검왕의 재해석을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검무극뿐이었다.

검무극의 움직임은 검왕의 그것과 똑같았다.

부드럽게, 물이 흐르듯.

한 동작, 한 동작에 모든 정성을 쏟아서 황룡검법의 세 초식을 발휘했다.

그런 검무극을 바라보는 검왕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정말 한 번에 해낸다고?

“검연, 앞으로 나오도록.”

검왕이 검무극을 불러냈다.

이안은 내심 긴장했지만, 검무극은 목검을 손에 든 채 겁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한 번 시범을 보이도록.”

검무극은 검왕이 보인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 무공에 자신의 해석을 담지 않았다. 검왕이 알려준 그대로 무공을 펼쳤다.

자신만의 해석은 원래의 것을 완벽하게 펼쳐낼 수 있을 때 하는 것.

독창성은 때론 본연의 완성을 방해하는 함정이 되기도 하는 법임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본연에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관원들의 눈에는 우습게 보였다. 애초에 사범의 시범도 이상했는데, 마치 사범에게 잘 보이려고 그 어설픈 동작을 따라 한다고 여겼다.

몇몇 관원들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신입 검연이 아니라 방패 검연이 된 이후 질투와 미움을 받는 중이라 더욱 그랬다.

한 차례 시범이 끝나자 검왕이 관원들에게 물었다.

“자, 오늘 배운 초식으로 약속 비무 해 볼 사람?”

다들 눈치를 보고 있던 그때 한 사람이 나섰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는 바로 유광이었다. 검연에게 개인적인 사감은 없었다.

그가 나선 이유는 두 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이안의 눈에 띄고 싶은 마음 반, 이안이 왜 이 친구를 그렇게 옆에 두는지 궁금함 반이었다. 뭐가 그리 특별해서?

“자, 마주 보고 오늘 배운 초식을 펼쳐보도록.”

두 사람이 초식을 펼쳤다.

그가 평소에 익힌 것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초식을 발휘했다면 검무극은 오늘 배운 대로 더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문제는 유광이 펼치는 속도가 더 빨라서 약속 비무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두 사람의 약속 비무는 정확히 합을 맞췄다.

검무극이 혼자 펼칠 때는 정말 느릿해 보였는데, 막상 실제로 유광과 합을 맞추니 전혀 느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검무극이 아까는 느리게 펼치고 지금은 빨리 초식을 발휘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이안만은 정확히 알아보았다.

‘아까와 속도가 똑같아. 너무 부드럽게 보여서 느려 보였을 뿐이지.’

하지만 정작 이안을 놀라게 한 것은 다음에 일어났다.

마주 보고 황룡검법 초식을 펼치면 삼 초식 때 검과 검이 부딪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두 목검이 허공에서 부딪치는 순간.

사아악.

유광이 들고 있던 목검이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당사자인 유광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이들까지 깜짝 놀랐다.

목검이 부러지려면 딱 하는 소리가 나면서 부러져야 하는데. 정말 종이가 칼에 잘리는 소리가 났다.

당사자인 유광이 가장 놀랐다. 그가 자신의 잘린 검을 내려다보았다. 잘린 단면은 마치 검에 잘린 것처럼 매끄러웠다.

심지어 검끼리 부딪쳤을 때 충격도 없었다.

‘처음부터 잘려 있었나?’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검왕을 제외하고 이 비밀을 알아차린 사람은 역시 이안이었다.

검무극의 움직임은 물처럼 유연했고, 그 물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물이었다.

이 물이 한 곳에 집중되는 순간 모든 것을 잘라낼 수 있는 물이 되었다. 내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멈춰 있는 거처럼 보이는 그런 물이었다.

부드러움 속에 극한의 강함을 심은 검왕의 재해석이 검무극이 펼쳐낸 초식에 담겨 있었다.

검왕의 두 눈에 감격이 스쳤다. 검무극은 단 한 번 시범을 보는 것으로 완벽하게 자신의 해석을 받아들인 것이다.

검왕이 성큼성큼 검무극 앞으로 걸어왔다.

너, 내 검에 죽을 자격이 있다!

그러면서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것만 같은 발걸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검왕과의 싸움에서 가장 힘든 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순간이다.

다행히 이번에도 기습은 없었다.

대신 정면에 멈춰 선 검왕이 목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행동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약속 비무를 해 보자는 의미였다.

‘당신은 이곳 무관에서 뭘 하고 있었소?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 모습을 보였고, 또 무슨 생각으로 무공 강론을 하고 있소?’

잠시 검왕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당신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인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두 사람이 움직였다.

그들의 움직임은 똑같았다. 검이 향하는 위치도, 속도도, 발의 움직임도, 마치 거울을 보며 초식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을 겹쳐놓으면 한 사람이 펼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목검이 서로의 어깨를 스쳤고, 얼굴을 스쳤다. 그들은 약속된 초식을 그대로 발휘했다. 손의 각도를 조금만 틀어도 얼굴을 찔렀을 텐데, 두 사람은 초식 그대로 펼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은 서로의 두 눈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삼 초식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의 목검이 서로 부딪쳤다.

사아아악!

검무극의 손에 들린 목검이 아까 유광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그 기세 그대로 검왕의 목검이 검무극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검왕의 목검이었다. 제대로 적중하면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는데.

사아아악.

검무극의 가슴에 닿기 전에 검왕의 목검도 종이처럼 잘려 나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발 늦게 떨어졌을 뿐, 애초에 두 목검은 함께 잘린 것이다.

“아아! 아깝다!”

검왕은 정말 아깝다는 듯 맨발로 폴짝 뛰었다.

그의 얼굴에 피어오른 건 분노가 아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자신의 검을 자른 사람을 눈앞에 둔 기쁨.

“이 목검으로 딱 세 번만 찌르려고 했는데. 여인을 지키려는 남자 가슴에 멍 좀 들어도 괜찮잖아?”

어디 멍만 들었겠는가?

검왕의 목검에 세 번이나 찔렸으면 서 있지도 못했으리라.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목검들이 낡아서 다행이었네요.”

“그럼 우리 진검으로 한번 해 볼까?”

생각지 못한 제안에 검무극은 아까 검왕이 관원들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신입 주제에 누굴 잡으려고 진검을 들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범이 상대해 주겠다는 거잖아?”

스르릉.

검왕이 철검을 뽑기 시작했다.

“이 반에서 사범도 죽고 관원도 죽었다지요?”

검무극의 말에 철검이 반쯤 뽑힌 채로 멈췄다.

“그럼 이번에는 누가 죽을까?”

“차례로 보면 사범 차례입니다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검왕의 철검은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종이 치자 그는 홱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내일 보자!”

좋다고 떠나는 모습은 첫날이나 다를 바 없는 종 칠 때만 기다리는 농땡이 사범이었다. 모두의 눈엔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신발만 보였다.

관원들이 모여서 잘린 목검을 살폈다.

“검으로 미리 잘라둔 거네.”

백룡반의 사범이 목검으로 목검을 이렇게 자를 수는 없을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 목검, 사범이 가져왔잖아?”

“뻔하다, 뻔해.”

다들 사범이 미리 목검을 잘라두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혹시 같이 짠 거 아냐, 하는 눈빛으로 검무극까지 의심했다. 두 사람이 짜고 고수 행세를 했다고 여겼다. 마지막에 나눴던 대화도 평범한 사범과 관원의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볼 수 있었다.

검무극의 얼굴에도 아까 검왕의 얼굴에 피어오른 똑같은 희열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지금 저 얼굴은 소교주가 아니라 무인의 얼굴이었다.

다들 장난이고 미리 짰다고 여기는 상황 속에서.

‘두 사람, 진짜 싸우고 있어.’

악인은 욕먹으면서 가는 거요.

갑작스러운 동생의 방문이었다.

사실 연백인은 조금 전까지도 동생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정말 지하에서 나온 남자에게 동생을 맡겨도 될지, 아니면 자신이 나서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지.

그런데 연백진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여긴 오랜만이네.”

연백진이 집무실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형을 찾아오니 어색했다.

“앉아라.”

두 사람이 접객용 탁자에 마주 앉았다.

연백인이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자신의 잔과 동생의 잔에 부었다.

잠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연백진이었다.

“누가 그러더군. 무인들이 갈등을 푸는 방법은 대화와 칼밖에 없다고.”

연백인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뭘 가져왔냐?”

“형의 대답에 따라 달라지겠지.”

연백진이 형을 응시했다. 솔직히 이렇게 묻고 싶었다.

―다 형이 저지른 일이지?

임 사범의 죽음도, 표산의 죽음도. 그래서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하지만 연백진은 애써 차분히 물었다.

“백룡반에 백사단이 잠입해 있던 건 알았어?”

애써 돌려 물어본 건데, 연백인의 반응은 차가웠다.

“갑자기 왜 무관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거냐? 넌 관심도 없었으면서.”

연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왜 무관에 관심이 없었을까?’

왜 관심이 없었는지, 왜 관심이 없는 척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질문에 대답부터 해.”

“그렇다고 하면? 해결 방법은 칼이냐?”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네가 다 오해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형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 신경질적인 반응이 뜻하는 건 하나뿐이리라.

“내가 말했지? 앞으론 일절 무관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어떻게 관여를 안 해? 우리 무관 일인데!”

“우리?”

황당해하는 형의 반응에 그 순간 연백진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가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연백진은 형이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을 줄 알았다. 자신이 무관을 두고 권력 다툼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나 준 것에 대해서.

한데 지금 저 반응을 보니 형은 자신을 무관에 아무 관심 없는 망나니 동생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부분에 대해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구나. 당연히 알아주겠지 생각했으니까.

“무관을 떠나라.”

“뭐?”

“멀리 떠나라고. 평생 편히 살 돈은 챙겨줄 테니까.”

잠시 형을 노려보던 연백진이 물었다.

“안 떠나면? 나를 죽이기라도 하게?”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는 당연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자연 연백진의 언성은 높아졌다.

“착각하지 마. 이 무관은 형 것이 아니야. 아버지의 평생 노고가 담겨 있고, 수많은 관원의 꿈이 있는 곳이야.”

그 말을 들으면서 연백인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동생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은, 동생이 죽을까 걱정해서가 아니었음을. 오히려 지하에서 나온 남자가 동생을 살려서 해결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음을.

그래, 자신은 내 것을 건드리면 동생조차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좋게 좋게 지낼 때만 좋은 사람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언젠가 동생을 죽여야 할 날이 올 것임을.

그 생각은 마음속 깊은 곳 쉽사리 녹지 않는 얼음덩어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쉽게 녹지는 않았지만, 얼음은 투명해서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애써 못 본 척했을 뿐.

“형은 지금 나를 뜨겁게 만들고 있어. 원래라면 영원히 식어버렸을 텐데. 난 아버지가 남겨준 무관을 형이 망쳐 버리는 걸 절대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연백진은 알지 못했다. 정작 뜨거워진 건 연백인이었고, 살심을 감춰뒀던 얼음이 모두 녹아버렸다는 것을.

그렇게 두 사람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그때, 그곳에 새로운 방문자가 있었다.

그는 수업을 마치고 온 검왕이었다.

검왕이 연백진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 연 대협이시군요!”

반면 연백진은 그의 얼굴을 오늘 처음 보았다.

“이번에 백룡반 임시 사범을 맡았습니다.”

무관에 이런 사범이 있었던가? 워낙 많은 사범이 있으니.

연백진이 다시 형을 쳐다보았을 때, 연백인은 말없이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백진은 인사도 없이 그대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다 문 입구에서 검왕을 힐끗 돌아보았다.

‘한데 사범이 형의 집무실에 찾아올 일이 있나? 그것도 임시 사범이?’

보통 칠사부만 상대하는 형이었다. 사범과 관련한 일은 칠사부들, 그중에서도 수족처럼 부리는 기석과 주로 의논했고.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기에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

걸어가면서 검무극의 조언을 떠올렸다.

‘대화로 풀리기는. 젠장!’

그가 나가자 연백진이 앉아 있던 자리로 검왕이 앉았다.

그가 스스로 주전자를 부어 식은 차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신 동생을 영원히 눈앞에서 보이지 않게 해주겠소.”

동생을 죽여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에 연백인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검왕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조금 전에 살짝 설레셨소?”

검왕의 장난임을 알고 연백인은 불쾌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어차피 화를 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었고, 원래 이 남자는 이런 장난을 거리낌 없이 치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선을 돌린 채 연백인이 화제를 돌렸다.

“수업은 잘하셨소?”

연백인은 이 남자가 그 마귀란 자를 찾으러 올라왔음을 알고 있었다. 백룡반 사범이 되겠다고 했으니 그 귀신보다 무서운 마귀는 백룡반에 있을 것이고.

검왕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수업이 너무 재미있소.”

연백인은 자신이 만난 이래 이 남자가 가장 흥분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마귀란 자가 누굽니까?”

“모르는 게 낫소. 그러잖아도 고민이 많으실 텐데.”

사실 연백인의 고민은 끝났다. 그에게 어떻게 전하느냐만 남았을 뿐.

연백인은 이 말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설렜었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검왕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했다. 지금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테니까.

그때 들려오는 검왕의 말소리.

“당신은 또 둘 다 가지려는구려. 동생을 죽이려는 형이지만, 또 일말의 양심은 있는 형도 되고 싶은.”

정곡이 찔린 연백인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욕심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죽이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으니까.

“고개 드시오.”

연백인이 고개를 들어 검왕을 쳐다보았다.

“그건 뻔뻔한 악인보다 더 나쁜 경우요. 자신의 마음까지 지켜가면서 악인이 되겠다는 거니까.”

검왕이 마시던 차를 홀짝 다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인은 욕먹으면서 쭉 한길 가는 거요.”

* * *

기석이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연백인은 등을 돌린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자신의 인사에도 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랫동안 연백인을 보필한 기석이었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드디어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과연 연백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석이 바라던 결정이었다. 이번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사람은 바로 연백진이었으니까. 그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수족인 표산도 죽었고.

이제 연백인은 고민도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백사단에 기별하게.”

그래, 기왕 악인의 길을 걷고자 마음먹었다면.

“실패하지 않게 최고들로 보내라고.”

* * *

집무실을 나선 검왕이 검무극을 본 것은 무관의 연무장에서였다.

관원이 모두 떠난 연무장에서 그는 홀로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검무극은 맨발이었고, 목검을 들고 있었다.

검무극이 펼치는 무공은 황룡검법이었다. 앞서 검왕이 가르쳐줬던 것과는 달랐다.

검왕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이 새롭게 재해석한 황룡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앞서 검왕의 무공이 물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움 속에 극강을 숨겨두었다면 지금 펼치는 무공은 바람을 바탕으로 해석한 황룡검법이었다.

느리게 움직이던 검무극의 목검이 빨라졌다. 갈대를 흔드는 고요한 산들바람은 계곡을 타고 오르는 돌풍이 되었다가 이내 태풍이 되어 주위를 휩쓸었다.

검왕은 검무극이 펼치는 황룡검법에서 자유를 느꼈다. 살랑살랑 불다가 갑자기 회오리치는, 그야말로 제멋대로 부는 거친 자유였다.

검무극이 삼 초식을 모두 마쳤을 때, 검왕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반항인가?”

가르쳐준 대로 안 했다는 말이었는데.

“이게 다 사범님께 배운 거죠.”

원래 황룡검법을 재해석해서 가르쳐준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재해석한 걸 또 재해석했으니까.

마치 보여주려고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은 그의 등장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나 보여주려고 기다렸지?”

그리고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이걸 알아봐 줄 사람은 사범님뿐이니까요.”

서로의 정체에 대해 알아도 검무극은 그를 사범으로 대했고, 검왕은 관원으로 대했다.

검왕의 시선이 검무극의 맨발을 향했다. 맨발이 좋다고 말했지만, 직접 실천한 사람은 검무극 한 사람뿐일 것이다.

“맨발로 수련하니까 좋은데요?”

단지 땅의 기운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보법을 딛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더 정확히 발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까 펼쳤던 초식, 다시 한 번 보여줘.”

검무극은 자신이 재해석한 황룡검법 삼 초식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다 보고 나서 검왕이 손을 내밀었다.

“목검!”

검무극이 목검을 돌려서 손잡이를 그에게 정중히 건넸다. 마치 진검을 건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목검을 받아든 검왕이 검무극의 초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딱 한 번 눈으로 본 것으로 그 역시 검무극이 재해석한 무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무공을 두고 재해석하고, 그것을 또 재해석하고. 두 사람의 경지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기습적으로 쇄도했다.

쇄애애액!

검왕의 목검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른 무공이 아니었다. 바로 황룡검법의 제일초식이었다. 그것도 검무극이 해석한 대로 무공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이어진 삼 초식, 강풍은 돌풍이 되고 태풍을 일으켰다.

후아아악,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무서운 공격을 다 피해낸 검무극이었다.

“어휴, 이 지긋지긋한 먼지.”

검왕이 손을 휘저었다.

두 사람 모두 조금 전에 기습한 일은 없던 것처럼 굴었다. 왜 기습했냐고 따지지도 않았고,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자네 것이 더 나은데?”

검왕은 솔직히 인정했다. 검무극이 재해석한 것이 더 완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그러자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더 낫다는데 왜 한숨인가?”

“그래서 쉰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저보다 멋진 사람을 보면 습관적으로 한숨을 쉽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검왕 정도 되는 사람은 쉽게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검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갑자기 웬 아부인가?”

“저야 방패잖습니까?”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는 의미.

“기왕 한 아부 마저 하겠습니다. 제 것이 나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훨씬 훌륭한 걸 바탕으로 재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던 검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조금은 알 것 같군.”

앞뒤 말이 붙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무슨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왜 번번이 마교의 소교주에게 조직의 일이 막혔는지 알 것 같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방패라면서 지켜야 할 여인들은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방패도 좀 쉬어야지요. 막상 해 보니까 방패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거의 말로만 방패 역할 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 데. 이안도 그렇고, 휘 아저씨도 그렇고. 자신의 호위들도 그렇고. 정말 힘들었겠구나, 또 새삼 느꼈다.

“방패는 저처럼 걱정 많은 사람의 적성에는 전혀 안 맞습니다.”

그러자 검왕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이안이란 여인, 자네와 어떤 사이지?”

“제 심장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솔직한 대답에 검왕은 의아해했다.

“이런 큰 약점을 솔직히 말해도 되나?”

“그녀는 제 약점이 아니라 제 적들의 약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녀를 건드렸다간 내 손에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까 건드리고 싶은 욕망을 끝끝내 참아야 하는, 적들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약점이죠.”

검왕이 큰소리로 기분 좋게 웃었다.

“신선한 궤변이었다.”

다시 검왕이 가던 길로 걸음을 옮겼다. 허리에서 덜렁거리는 신발을 쳐다보며 검무극이 물었다.

“왜 나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분명 그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사범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틀림없었는데.

“왜 미루고 계십니까?”

검왕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 답을 저 하늘에서 찾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검무극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뭘 물었었지?”

“제가 뭘 물었죠? 아, 왜 절 죽이지 않으시냐고요?”

“오랜만에 바깥바람 쐬는 거기도 하고.”

검왕이 다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덧붙여 말했다.

“이 무림에 시시한 놈들이 너무 많아서.”

너무 낡아 보여서요

검무극이 객방 창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객잔 앞 골목에는 희뿌연 새벽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저녁에 시공이환술에 들어갔다가 지금 막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시간상으로는 네 시진이 지났지만, 실제로 수련한 시간은 꼬박 이틀간 수련했다. 꾸준히 성취를 이룬 시천비술은 이제 현실보다 여섯 배가 많은 시간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틀 동안 내공을 전부 소모하고, 다시 회복하고 또 소모하고, 또 회복하고. 얼마나 많은 악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수련의 마지막에는 시공이환술 속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펼쳤다.

피어오르는 김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설원 속 온천을 펼쳐낸 것이다.

그곳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하루 반 내내 계속되었던 수련의 노고가 풀렸다.

정말이지 얼마나 구화마공을 반복했으면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악귀들이 나도 몸 좀 풀자며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느낌이 오고 있었다. 칠 성의 구화마공이 한 단계 올라가려 하고 있음을.

암왕과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이 황룡검법의 초식을 재해석하면서 느낀 깨달음과 합쳐지면서 무공 경지가 꿈틀대고 있었다.

검왕의 재해석을 다시 재해석하는 이 경험은 생각지 못한 특별한 깨달음을 선사했다. 무관의 무공을 검왕과 같은 고수와 함께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지금껏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계속하게 해야 한다.’

검왕과의 이 작업이 자신에게 큰 성취를 안겨줄 것이 느껴진 것이다.

그때 옆방 객방의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안 주무세요?”

그녀는 바로 이안이었다.

“너는?”

“심법 수련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녀는 요즘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풋내기들 가득한 이곳에서 검무극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적이 출현했으니까. 그러니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수련도 좋지만 잠도 중요해.”

“누가 할 소린데요.”

언제나 검무극이 새벽까지 수련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물론 조용히 방에서 수련하니 검무극도 심법 수련을 하겠지, 싶었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바로 옆방에서 얼마나 많은 검기와 검강이 난무하는지.

“잠은 죽은 후에 실컷 자죠!”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희미하게 웃었다.

‘넌 이미 실컷 자봤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깨어 있어라.

나이 들어서 백발 노파가 될 때까지, 그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깨어 있어라.

백발이 된 이안은 정말 아름답게 늙어 있겠지. 그때도 이렇게 나란히 서서 세상을 함께 볼 수 있을까?

“그 사람… 강하죠?”

이안은 처음으로 검왕에 관해 물었다.

검무극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요?”

“지금까지 진짜 고수인데 맨발인 사람 봤어?”

“아뇨.”

“딱 그만큼 강해.”

그만큼 특별한 고수라는 말임을 알았지만, 이안은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뭐, 그 정도면 괜찮겠네요. 도련님도 특별함으로는 어디 가서 안 빠지시잖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두 번 탁탁 두드렸다.

“도련님 심장을 뚫으려면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를 뚫어야 할 테니까요.”

농담 반 진담에 검무극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눈빛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방금 한 말 역시 그녀는 이미 겪은 일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심장 두 개인 사람의 장점인가?”

“저만 믿으세요!”

“네 심장 절대 뚫리면 안 돼! 나는 그 심장만 믿고 자러 간다!”

“제 몫까지 푹 주무세요.”

물론, 검무극의 마음에는 순서가 반대다.

그녀의 심장을 뚫으려면 자신의 심장부터 뚫어야 할 거다.

자신의 심장이 뚫려서 그 검날이 이안의 심장에 닿을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모든 노력은 그런 순간이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이안이 새벽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방에서는 다시 땅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격전이 소리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검왕은 다음날에도 제시간에 수업에 나왔다.

심지어 그는 황룡검법의 다음 세 초식까지 준비해 왔다.

“자, 오늘은 사 초식부터 육 초식까지를 가르치겠다.”

대체 이 사람이 원하는 건 뭘까?

검무극은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적어도 그가 왜 황룡검법을 또 가르치는지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을 향한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다시 한판 붙자!

어제 재해석은 그가 패배했었다. 검무극이 재해석한 초식이 더 낫다고 인정했으니까. 그랬기에 오늘 다시 붙으려는 거였다.

―이번 재해석은 네가 아무리 내 것을 바탕으로 해도, 더 낫게 만들 수는 없을 거다.

검무극이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럽시다. 서로 죽일 때 죽이더라도, 지금은 한 번 즐겨봅시다.’

서로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인으로 살면서 이런 적을 만나는 것은 평생 단 한 번 올까 말까 하다는 것을.

검왕이 사 초식에서 육 초식까지 시범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저게 뭐야?”

“어제하고도 다른데?”

“제 마음대로군.”

오늘 검왕이 펼치는 초식의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이었다.

어제 보였던 황룡검법은 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했었다. 그래서 춤처럼 보이기까지 했었는데.

한데 오늘은 무심했다. 정말 무심하다는 말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무심히 검을 휘두르고. 저벅저벅 걸어가서 푹 찌르고. 바닥에 놓인 돌멩이를 툭 발로 걷어차는 것만 같은 움직임이 연속해서 이어졌다.

물론 관원들은 이 한 수, 한 수에 깃든 무학의 깊은 정수를 알 수 없었기에, 이번 역시도 무성의한 시범처럼 보였다.

반면 검무극은 신발까지 벗고 맨발로 그의 초식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모습에 관원들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과 서진의 방패가 되겠다는 것도 그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이라 여겼는데, 이제는 사범에게 잘 보이려고 맨발 수련을 하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흑룡반 선배들을 불러서 손 좀 봐줘야 하지 않나?”

“정말 밉상이군.”

이런 속삭임을 주고받는 자들까지 생겼으니까.

물론, 관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유광과 교석은 열심히 따라 하고 있었다. 교석은 친구 때문이고, 유광은 이안 때문이었다. 이안이 저렇게 열심히 따라 하는데,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저 여인이 그렇게 좋냐?”

교석이 고개를 내젓자 유광은 더욱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가 아니야.”

“그럼?”

“요즘 너무 불안해서 잠이 잘 안 올 정도야. 한데 이 소저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이상하게 불안이 다 사라져 버려. 저 여인에게 뭔가가 있어.”

“그냥 예뻐서 그런 거야.”

“아니라고!”

유광은 열심히 따라 하려 애썼다. 교석도 못 이기는 척 동작을 따라 했다. 망상 좀 그만 펼치라고 만날 구박하긴 하지만, 친구에게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둘째 날 수업이 끝났다.

첫째 날 만났던 그곳에서 검무극과 검왕은 다시 만났다.

검무극이 펼치는 무공을 보며 검왕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는 자신이 가르친 것을 다시 재해석했었는데, 오늘은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펼치고 있었다.

“오늘 이 초식은 사범님이 재해석한 것이 완벽합니다. 괜히 이기고 싶은 욕심이 이 좋은 초식을 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솔직히 패배를 인정하자 이번에는 검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졌다는 데 왜 한숨을 쉬십니까?”

“너무 깔끔하게 인정해서.”

그러면서 흘러나오는 뜻밖의 말.

“너 같은 소교주는 마교 역사상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데, 하늘이 내린 사람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여전히 그는 검무극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죽는 건 사범님일 겁니다. 앞서 제게 죽었던 그 동료들처럼요.”

처음으로 그에게 다른 십이지왕에 대해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동료들? 누가 동료인데?”

검왕은 앞서 죽은 십이지왕들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둔다는 것에 항상 여유롭던 그가 처음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내 동료를 보여주지.”

다음 순간 검왕이 기도를 발출했다.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기도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사아아아아아.

온 사방이 반짝이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햇살에 보석이 반짝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검날들이었다.

벽과 바닥 천장, 사방 모든 곳에 검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수백, 수천 개의 검날이었다. 그야말로 조금만 움직여도 검에 베일 것 같이 온 사방이 검날로 빼곡했다.

검무극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검날이 자신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반대쪽에도 검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정면에도, 머리 위에도 검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검무극이 손을 내밀어 검날을 만졌다.

손가락이 검날에 베이면서 피가 흘렀다. 기도가 너무나 날카로웠기에 실제로 손가락이 베였다. 물론 호신강기를 펼치지 않았기에 베인 것이기도 했지만.

번쩍이는 검날 사이 저 멀리 검왕의 모습이 보였다.

“내 친구들 어때?”

오직 검만이 자신의 친구라는 의미였다.

이 외로움 가득한 곳에 대체 친구가 어디에 있소?

검무극은 기분 좋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친구가 너무 많아서 제가 끼어들 틈이 없네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검왕도 함께 웃었다.

스스스스.

검왕의 기도가 사라지면서 주위의 검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중에 자네가 죽기 전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검왕이 자신 앞에 모습을 보인 것도, 이렇게 느긋하게 수업을 주고받고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저 부탁을 하기 위해서일지 모른다고.

“좋습니다. 사범님을 죽이기 전에 부탁 들어드리죠.”

물론 그냥 순순히 약속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십시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요.”

“말하게.”

“황룡검법 마지막 초식까지 지금까지처럼 계속 재해석해 주십시오. 저와 계속 내기하시죠.”

자연스럽게 검왕의 얼굴에 스치는 의구심.

“내가 아무리 재해석을 잘하더라도 자네에겐 필요 없는 무공일 텐데?”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 가지씩이나?”

“우선은 이 내기가 너무 즐겁습니다.”

이 즐거움은 검왕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곳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

“두 번째는 이렇게 완성될 무공을 전수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이건 제 예감인데 이 과정이 끝날 때쯤이면 제 무공 경지가 올라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르쳐 달라고? 하는 표정으로 검왕이 웃으며 물었다.

“대체 이 뻔뻔할 정도의 솔직함은 어디서 배웠나?”

“시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요. 그 사람들은 제 솔직함을 약점으로 삼지 않았거든요.”

검왕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흘렀다. 어제 헤어질 때 자신이 말했다. 이 무림에 시시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우린 관원과 사범으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운명이 우릴 이렇게 만나게 했으니,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싶습니다.”

분명 쉽지 않았을 부탁이었음에도 검왕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시시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면 거절도 못 하겠군. 좋아, 자네 부탁 들어주지.”

“감사합니다.”

검왕이 돌아서려다가 불쑥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할 부탁, 자네가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면 어쩔 텐가?”

검무극이 미안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부탁드리잖습니까?”

* * *

먼저 강해져서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의도임을 말해줬음에도, 검왕은 약속대로 황룡검식의 마지막 초식까지 모두 가르쳐주었다. 처음 임시 사범을 할 때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어느 날은 검무극이 더 잘 재해석했고, 또 어떤 날은 검왕이 잘했다. 두 사람의 것을 합쳐 보완하기도 했고, 아예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초식은 물처럼 흐르다가 바람이 불다가 뜨거운 불길이 치솟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벼락이 쳤다.

마치 두 사람은 한 수, 한 수 바둑을 두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유희였으며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관원들은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깊은 무학의 정수를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황룡검식의 마지막 초식까지 배운 날, 황룡검식은 새롭게 완성되었다.

두 사람이 완성한 초식은 서로 달랐다. 서로에게 끝없이 영향은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다른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할 때는 승부욕에 불타올랐었지만, 막상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누가 더 많이 이겼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검무극이 포장된 뭔가를 검왕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선물입니다.”

“죽음의 선물인가? 펼치면 무형지독이 퍼져나가는?”

“그렇다고 하기에는 제가 포장을 너무 허술하게 해서요.”

검왕이 포장을 펼쳤다. 안에 든 것은 그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건 한 켤레의 신발이었다.

“너무 낡아 보여서요.”

검왕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검왕은 신발을 뒤집어서 흔들었다. 안에 암기라도 들어 있나 살피는 모습이었다.

“왜 주는 건가?”

궁금해하는 그에게 검무극은 솔직히 말했다.

“제 무공이 팔 성에 올라섰습니다.”

요동치던 구화마공의 경지가 어젯밤 드디어 팔 성에 오른 것이다.

더욱 강해진 구화마공의 위력에 검무극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역대 교주 중 최단 시간에 팔 성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소식이었음에도, 오히려 검왕은 환하게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이겨도 칠 성보다는 팔 성을 이기는 게 더 자랑스럽고, 져도 칠 성에게 지는 것보다는 팔 성에게 지는 게 덜 부끄럽잖아?”

검무극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투왕과 암왕이 합쳐진 것보다 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그게 어떤 의미에서든.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검왕이 담담한 눈빛으로 물었다.

“더 강해졌는데 자넨 왜 검 대신 신발을 내밀고 있는 건가?”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솔직함으로 그를 대했다.

“저는 더 강해지고 싶나 봅니다.”

누가 보면 무관이 아니라 마교를

검왕의 시선이 손에 든 신발을 향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신발은 잘 신지도 않는데?”

“그래서 더 깨끗한 신발을 신어야죠.”

“무슨 뜻인가?”

“맨발로 다니시니 오히려 그 매달고 다니는 신발이 더 눈에 띄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렇군.”

검왕은 아직 신발을 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검무극이 검을 뽑은 것보다 더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거 받으면 나중에 부탁할 때 곤란한데.”

검무극은 그가 하려는 부탁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농담으로 그 말을 받았다.

“제게 부탁할 때는 꼭 허리춤을 내려다보십시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검왕이 자리에 앉더니 발바닥을 손으로 탁탁 털었다.

그리고 검무극이 보는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딱 맞는데?”

“제 눈썰미가 어디 보통 눈썰미겠습니까? 나중에 사범님 초식을 뚫고 정확히 그 심장을 꿰뚫을 눈썰미인데요.”

“그럼 그 눈부터 찔러야겠군.”

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털었다.

“한데 그 신발에 수작이라도 부렸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신습니까?”

“그런 시시한 자를 알아보지 못한 내 안목 때문에 죽는 거지. 죽어도 싸다.”

검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헌 신발을 꺼내 들었다.

“이것도 오래 신었구나.”

언제부터 신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낡아 있었다.

“의미가 있는 신발입니까?”

검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헌 신발에 의미가 있다면, 내가 그만큼 남들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는 의미 정도겠지?”

“부럽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엄청나게 의식해서요.”

“자네가?”

누구보다 자유로울 것 같은 검무극이었는데.

“저 사람에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 저 사람에게 재치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위급한 순간에는 나부터 떠올렸으면 좋겠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내가 되고 싶다. 그야말로 온갖 의식을 다합니다. 지금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사범님을 의식하는 겁니다. 진솔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요.”

검왕은 검무극이 거짓말로 하는 말이 아님을 느꼈다.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한가?”

“피곤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의식하지 않았다면, 저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계셨겠습니까?”

아닐 것이다.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결론이 났을지도 모른다.

화르르륵.

검왕이 손바닥에 열양지기를 일으켜서 들고 있던 신발을 태웠다.

활활 타오르던 신발을 잠시 쳐다보던 검왕은 재가 된 신발을 남겨둔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를 향해 검무극이 소리쳤다.

“제 눈은 찌르시면 안 됩니다! 제일 자신 있는 곳이라고요!”

* * *

검무극은 인적 없는 공터로 이안과 서진을 불렀다.

“지금부터 서 조장에게 황룡검법을 전수하겠다.”

서진은 깜짝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알았다. 지난 십여 일간 사범과 검무극 사이에 황룡검법을 매개로 뭔가가 오가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결실을 지금 자신에게 전수해 주겠다는 것을.

놀란 그녀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순순히 받아도 되느냐는 표정이었는데,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로소 서진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근래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귀술이 하루아침에 성과가 있을 무공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새로운 무공을 익힐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검무극이 검술을 전수하려 하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서 조장에게 검술을 전수하는 거면 저는 물러가 있겠습니다.”

이안이 눈치껏 빠져주려 했다. 원래 남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그녀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서진만 불렀을 거다.

“아니. 너도 함께 배워.”

“네? 저도요?”

“보조 검술로 익혀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자신 역시 구화마공을 주 무공으로 삼고 있지만, 비천검법을 쓸 때가 있었다. 굳이 구화마공을 쓰지 않아도 될 적들은 비천검법으로 상대했으니까. 그녀 역시 마찬가지 상황들이 자주 있을 거다.

“배우면서 특히 신경 써야 할 게 있다. 기존 황룡검법을 왜 이렇게 재해석했는지 고민해 봐.”

그리고 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너라면 어떻게 재해석할지.”

이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제가 그럴 주제가 되나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검무극은 검술 자체보다 그 고민의 과정이 이안에게 더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다.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이 수련 역시 너무나도 귀한 기연임을. 언제나 검무극은 자신에게 이런 순간을 안겨준다.

그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검무극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안이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이안에게는 재해석이 더 중요했다면, 서진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서 조장은 이 검술로 죽을 때까지 간다.”

더 나은 검술을 얻을 확률은 거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자신과 검왕의 해석이 뒤섞인 새로운 황룡검법은 더없이 훌륭한 검술로 완성되었으니까.

그녀에게 제대로 된 검술이 필요했다. 귀술의 진정한 고수가 되면 다른 무공이 필요 없겠지만, 그때까진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아니, 그때가 되어도 제대로 된 검술을 알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할 테니까.

검무극은 두 여인에게 자신이 재해석한 황룡검법을 그대로 전수했다.

정말 쉽게 설명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법, 그 깊은 무학의 정수가 쉬운 말로 두 여인에게 전해졌다.

이안은 물론이고 서진 역시 총명했다. 그랬기에 무공 전수는 거침이 없었다. 모르는 건 그때그때 질문했고,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안이 함께 배웠으니 앞으로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함께 의논하면서 수련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전수가 끝나갈 무렵 한 사람이 와서 이안에게 작은 종이를 전하고 사라졌다. 그는 바로 은월에서 나온 무인이었다.

지난번에 이안과 서진은 통천각과 은월로 가서 황룡무관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살피라고 했었다. 그리고 오늘 은월에서 급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안이 종이에 적힌 정보를 전했다.

“백사단이 이곳으로 오고 있답니다.”

검무극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도착 예정 시간은?”

“오늘 자정쯤 될 것 같다네요.”

검무극이 이안의 일월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눈에 띄지 말라고 낡은 천으로 검집에 감아두었다.

“드디어 그 검에 피를 묻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 * *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 탄 사람은 모두 세 사람이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처음입니다, 제가 막내로 작전 나가는 게.”

남자는 바로 백사단에 속한 백팔사(白八蛇)였다.

백사단에 속한 백 마리의 독사 중에서 서열 십 위 안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어떤 임무도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 임무는 달랐다. 마차에 셋이 탔는데 다른 둘이 모두 자신보다 서열이 위였다.

백일사(白一蛇)와 백오사(白五蛇).

이 숫자는 당연히 서열을 뜻했다. 다시 말해 백일사는 백사단에서 단주를 제외하고 가장 실력이 좋은 고수였다. 백오사는 서열 오 위의 고수.

백오사만 해도 정말 비싼 몸값을 자랑했는데, 하물며 백일사라면?

백일사가 해낸 여러 전설적인 청부들이 있었다. 무림맹의 원로고수 자청검(紫淸劍)을 홀로 죽이고 탈출한 일화는 백사단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이번 청부에 제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그는 다른 청부를 마치고 어제 이 마차에 합류했는데, 마차에 먼저 타고 있던 두 사람을 보고 정말 놀랐다. 아마 앞선 합류에서 백오사도 백일사를 보고 깜짝 놀랐었겠지?

어쨌든 이번 청부 대상을 생각하면 자신이 혼자 나가도 될 거 같았는데.

“세 사람이 다 필요한 청부는 아닐 테고요.”

그러면서 백팔사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이런 경우는 자신이 청부 일을 맡은 이래 처음이었다.

드디어 백오사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백오사가 옆에 앉은 백일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다 필요한 일이면 우리가 살아서 돌아갈 수나 있겠나?”

그야말로 죽음의 임무가 될 테니까.

물론, 백오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봐온 단주의 성격으로 볼 때.

“단주가 돈 냄새를 맡은 거지.”

백오사의 말에 백팔사는 단번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주는 황룡무관에서 돈을 제대로 뜯어내려는 거다.

백일사를 동원하는 순간 청부금은 비교할 수 없이 비싸진다. 백일사는 그 이름만으로 상징성이 있었으니까.

한마디로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써서 바가지를 제대로 씌우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과연 그 욕심 많은 백사단주가 이 청부만으로 끝낼까? 어떻게든 일을 꾸며서 돈을 뜯어내려 할 거다.

‘무관으로 번 코 묻은 돈, 다 빨아먹겠지.’

무관이나 운영하는 자가 애초에 백사단과 손을 잡은 것이 문제다. 한 번 발을 디디면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길이라는 걸, 그 순진한 자가 어찌 알았겠는가? 언제나 비열함의 시작은 더없이 점잖고 믿음직스러운 법이니까.

그렇다면 이번 청부는 자신이 다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하늘 같은 선배들과 함께 나와서 그들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백팔사는 슬쩍 백일사를 쳐다보았다. 백일사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청부로 얼마나 받을까?’

자신보다 세 배? 다섯 배? 일은 자신이 다 처리하게 될 텐데. 최고가 되니 그냥 몸만 가는 것만으로 돈을 버는구나.

물론 불만은 없었다. 언젠가 자신도 저 자리에 앉아 무게만 잡으면서 돈 벌 날도 올 테니까.

백팔사가 마부석을 향해 물었다.

“언제 도착하나?”

“자정 전에는 도착할 겁니다.”

백팔사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도착하면 한잔하고 계십시오. 제가 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백일사가 눈을 떴다. 뱀처럼 차가운 그의 눈빛에 그 어떤 방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주가…….”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서 웅혼한 내공이 느껴졌다.

“백이사(白二蛇)를 보냈다면 돈 때문이겠지. 한데 나를 보냈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는 의미다.”

백일사가 다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살아서 돌아가고 싶으면 함께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백팔사는 정중히 고개 숙여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방금 백일사의 저 말은 공돈 버는 것에 대한 무안함이라 여겼다.

‘뭐가 그리 비장하시오? 누가 보면 무관이 아니라 마교 상대하러 가는 줄 알겠소.’

* * *

“누가 보면 절세신공이라도 익히는 줄 알겠다.”

공터로 들어선 사람은 연백진이었다.

갑자기 검무극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생사가 걸린 중요한 일이니 약속 시간에 늦지 말고 꼭 이곳에서 보자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내심 긴장한 채 약속 장소로 왔는데, 이안과 서진이 황룡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가르치는 검무극도, 배우는 두 여인도 더없이 진지했다.

“한데 황룡검법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배운 지 며칠 안 돼서 아직 미숙합니다.”

“그래서가 아니겠지. 사범이 이상하게 가르쳐서겠지.”

연백진은 형의 집무실에서 만났던 임시 사범이 자꾸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그에 대해 알아보니 정말 백룡반에서 임시 사범을 하고 있었다.

한데 관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황룡검법을 이상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형의 집무실에서 그 사범이란 자를 만났다. 형은 사범을 상대하지 않는데, 그곳에 왔었지.”

“형님을 만나셨군요.”

연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형을 만나보라고 했던 조언도 있었기에, 그날의 상황을 한마디로 설명했다.

“나는 대화를 하러 갔는데, 형은 칼을 쓰게 만들더군.”

그리고 검무극이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을 부른 것도 형과 관련된 일이라 예상했다.

“왜 나를 보자고 했나? 생사가 달린 일이라고?”

정말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 오란다고, 그것도 일개 관원이 부른다고 이렇게 달려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사가 달렸다면, 그럼 네가 와야지, 이러는 사람이었는데.

검무극 때문인지 서진 때문인지, 아니면 저 아름다운 여인 때문인지. 왠지 이들에게 자꾸 휘둘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검무극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백사단의 고수들이 황룡무관으로 오고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연백진은 깜짝 놀랐다.

“확실한 정보인가? 백사단은 쉽게 정보를 흘리는 곳이 아닌데 어떻게 알아냈지?”

“백사단 무인이 일개 백룡반 관원의 검에 죽었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을 풀어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지요.”

연백진은 귀문이라면 그 정도 정보력은 발휘할 수 있겠다 싶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진을 향했다.

“내가 지켜주겠다.”

남에게, 그것도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가는 그녀다. 게다가 이번 일의 시작도 형의 잘못이었으니까.

당연히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인데도 서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연백진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입에서 그들이 온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청부 대상에 서진뿐만 아니라 연 대협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무 놀라서 잠시 멍하게 서 있던 연백진에게 뒤늦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형을 만나러 갔을 때 그럴 수도 있을 거란 느낌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정말 죽이려 든다고? 정말 백사단에 청부했다고?

“그들이 언제 오는지 아나?”

검무극의 시선이 연백진의 뒤쪽을 향했다. 일부러 시간에 맞춰 연백진을 이런 외진 곳으로 불렀다.

청부 대상들이 이런 외진 곳에서 만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에.

“이미 온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백진이 돌아서서 서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내 뒤에 꼭 붙어 있어!”

흰 뱀이 올 리는 없을 겁니다

검무극은 서진 앞을 막아선 연백진의 등을 쳐다보았다.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죽음에 맞서는 사람.

하지만 회귀 전에는 이 영웅적인 모습의 반대쪽 어두운 면을 살았다. 아마 그때는 그의 형도, 검왕도, 모두가 동전의 뒷면을 보고 있었겠지.

서진이 연백진에게 물었다.

“왜 저를 구해주려는 거죠?”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형이 잘못한 일이니까.”

연백진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서진을 지켜주려고 나왔다고 했지?”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도와서 그녀를 지켜!”

그는 흥분해 있었다. 이런 순간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눈앞에 모습을 보인 세 복면인은 보통 기도가 아니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굳이 암습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고수라는 의미.

‘백사단 중에서도 최고수들이 나왔다.’

검을 뽑아 든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단순히 겁이 나서가 아니었다. 지금 이 분노가 향하는 대상은 형이었다. 이런 고수를 보냈다는 건,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으니까.

‘정말 나를 죽이려는구나.’

연백진은 어차피 죽는다면, 이 여인이라도 살려주고 싶었다.

“나는 일개 무관주의 동생이지만, 내 옆에 있는 이 여인은 귀문의 혈육이다. 네놈들이 저 여인을 죽였다간, 귀문에게 몰살당할 것이다.”

연백진 뒤에 서 있던 서진이 앞으로 나와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다고 물러갈 상대가 아닌 것 같네요.”

연백진이 서진을 바라보았다. 겁을 먹을 법도 했는데, 그녀는 침착했다.

‘역시 명문의 자제여서 그런가?’

서진의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그녀가 침착한 것은 뒤에 선 두 사람을 믿어서였다. 검무극과 이안이 뒤에 서 있는데 뭐가 두렵겠는가?

연백진의 시선이 뒤에 있는 검무극과 이안을 향했다. 그는 두 사람을 오해했다.

‘앞으로 안 나서고 거기 있을 거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진 않았다. 그래, 젊은 나이에 얼마나 두렵겠는가? 그들을 이해했다.

등장한 세 복면인 중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백오사였다.

“우리에게 죽을 사람이 하는 말은 오직 세 가지뿐이지. 협박하거나 증오하거나 애원하거나.”

연백진을 향한 백오사의 눈빛에 조롱이 담겼다.

“경험상 협박하는 자가 가장 약하더군.”

연백진은 동요하지 않았다. 형에 대한 분노는 잠시 잊고, 이 순간에는 침착해야 했다.

“협박이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귀문주가 딸의 죽음을 그냥 넘어갈 리 있겠나?”

그러자 이번에는 백팔사가 입을 열었다.

“신입 관원들의 미모에 홀려 그녀들을 간살하고 사라진 황룡무관 관주의 동생.”

그 말로 이들이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연백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목숨을 잃는 것도 모자라 명성까지 바닥에 처박히게 될 것이다.

연백진이 검을 앞으로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

“어디 해봐.”

백팔사가 검을 뽑아 들며 백일사를 돌아보았다. 남은 건 백일사의 허가였다.

이때 백일사는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대상은 바로 이안이었다.

백팔사나 백오사는 그녀가 너무 아름다워서 쳐다보고 있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 두 사람이 볼 수 없는 진면목을 백일사는 보고 있었다.

‘왜 문주가 나를 보냈는지 알겠군.’

연백진과 서진은 백팔사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뒤에 선 두 젊은 남녀였다. 검무극과 이안이 풍기는 느낌이 묘했다. 문제는 실력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수면 고수고, 하수면 하수여야 하는데, 느껴지는 바는 자신보다 고수 같기도 했고, 별거 아닌 실력 같기도 했다.

‘여인이 더 고수다!’

반면 백오사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죽이기 아까운 여인이군요.”

백오사는 별거 아닌 실력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이윽고 백일사의 명령이 떨어졌다.

“저자부터 죽여라.”

그러자 백팔사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백팔사가 연백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가 마음의 준비를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의 검이 연백진의 목과 심장, 주요 요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챙챙챙!

다행히 연백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한 수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을 공방이 이어졌다.

이안은 연백진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연백진은 황룡검법의 대성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기존의 황룡검법이 실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의 싸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존의 황룡검법을 정확히 알아야, 재해석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삼십여 수가 흘렀다. 황룡검법의 대성을 이룬 연백진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가 지나갈수록 불리해졌다. 그가 익힌 무공은 그야말로 무관의 정통 검술이었고, 백팔사의 무공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전 경험이 상대적으로 턱없이 부족했다.

연백진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피를 보자 연백진은 흥분했고,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팔사가 그를 몰아붙였다.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할 상황에서.

히이이이이익.

갑자기 귀신 울음을 내며 연백진의 그림자가 백팔사를 확 덮쳤다.

위기의 순간 그를 도운 사람은 서진의 귀술이었다. 아직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환영을 보여주거나, 상대의 시야를 제한하는 귀술만을 발휘할 수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그 한 수는 승패를 뒤바꿀 수 있는 기회의 한 수였다.

자신의 얼굴을 덮치는 그림자 때문에 백팔사는 순간 연백진을 시야에서 놓쳤다.

연백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기보다 비스듬히 미끄러져 쇄도하며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미처 막지 못한 백팔사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 연백진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그의 숨통을 끊으려 달려들려던 그때.

지켜보고 있던 백오사가 암기를 뿌렸다. 연백진과 서진, 두 사람 모두에게였다.

촤아아아아악!

암기가 날아들자 연백진은 본능적으로 서진에게 몸을 던졌다. 자신을 구해준 그녀가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끝인가?’

등에 여러 발의 암기가 박힐 거라 예상했는데.

챙챙챙챙챙!

뒤에서 암기가 튕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백진이 돌아보니 어느새 이안이 그들 앞을 막아서 있었다.

‘그 암기를 모두 쳐냈다고?’

확 뿌려진 암기가 수십 개가 넘었던 것 같은데. 연백진이 놀란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백팔사가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목과 심장에 이안이 튕겨 낸 암기가 박혀 있었다.

백오사가 앞으로 나섰다.

“실력을 감추고 있었구나.”

그가 백일사를 돌아보았다. 암기를 튕겨내는 수법이 심상치 않으니 함께 합공하자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지만, 백일사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 귀한 몸, 자존심에 합공은 사양하는 건가?’

차라리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정말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위기감에 나서지 않는 거라면, 자신들은 정말 곤란한 상황에 빠져든 것일 테니까.

그러는 사이 서진은 연백진의 팔을 지혈해 주었다. 앞서 암기가 날아들 때, 자신을 향해 몸을 날렸던 그였다.

검무극은 그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확신했다. 이제 서로 목숨을 구해준 사이가 된 것이다.

‘됐다.’

이곳 황룡무관에 왔던 가장 큰 목적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백오사와 이안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안은 황룡검법을 사용해서 싸웠기에, 그 검술을 바라보던 연백진은 내심 놀랐다.

‘황룡검법과 비슷하다.’

비슷한 듯하면서도 자신이 익힌 것과는 달랐다.

‘그 사범이 가르친 거구나!’

연백진은 그 초식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았고,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을 보았다. 불길이 뜨겁게 일었고, 벼락이 치는 것도 보았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연백진의 두 눈은 점점 커졌다. 황룡검법이 이렇게 강하고, 아름다운 검술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펼쳐지는 검술은 오늘 막 배운 것임을. 그것을 실전에서 이렇게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앞서 연백진과의 싸움에서는 수가 지날수록 백팔사가 유리해졌지만, 이번 싸움에서는 수가 지날수록 이안이 유리해졌다. 그녀의 황룡검법은 첫 실전을 통해 한 수가 지날 때마다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되고 있었으니까.

백오사는 첫수를 겨룰 때만 해도 해볼 만하다고 여겼는데,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지며 밀리기 시작했다.

백오사가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순간.

쉬이익!

이안의 검이 백오사의 가슴을 꿰뚫었다. 앞서 백팔사에게서 간살이란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이들을 죽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너는 비참하게 죽을 거다. 저분이 본단의 서열 일 위이시다.”

백오사의 말에도 이안은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당신도 죽기 전에 하는 말은 마찬가지네.”

앞서 백오사가 했던 말이었다.

자신에게 죽기 전에 상대는 협박하거나 증오하거나 애원한다고. 그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파파파파파!

이안이 검을 뽑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검무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늘 배운 무공으로 이만큼 실력을 발휘한 것은 무공에 대한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또한 지금 그녀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더 강해져라, 이안.’

온갖 악인들이 북적대는 이 무림에서, 저 얼굴을 세상에 내놓고 살아가려면, 감히 그 누구도 덤비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야 할 테니까.

이안은 기뻐하거나 통쾌해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 다 처음이었다.

황룡검법으로 죽인 것도, 일월검에 피를 묻힌 것도.

재해석한 황룡검법은 정말 군더더기가 단 하나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비천검법에 비해 위력은 약하지만, 들어가는 내공이 훨씬 적었다.

그랬기에 보조 검술로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신분을 속여야 할 때도 있을 거고, 또 내공을 아껴가며 싸워야 할 때도 있으니까.

백일사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신은 백일사였으니까.

“너희는 누구냐?”

검무극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황룡무관 백룡반 신입들이잖아? 조사하고 왔을 거면서.”

조사가 완전히 잘못되었다.

‘단주!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면, 청부를 받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단주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백이사가 아니라 자신을 보냈다는 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라고 온갖 오만함을 다 떨었으니까.

“백사단 서열 일 위라고? 서열 일 위가 황룡무관 기초반인 백룡반 관원과 맞붙다니!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순위는 가릴 거야.”

검무극은 맨 뒤에 서서 말로 자극하고 놀렸지만, 백일사는 말려들지 않았다.

그는 신중히 이안을 상대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하나씩 하나씩 다 죽일 작정이다. 어차피 마지막에 살아남는 사람은 자신이 될 거다.

쐐애애애액!

백일사의 검에서 기습적으로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안의 검에서 발출된 검기가 백일사의 검기와 충돌했다.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챙챙챙챙!

검과 검이 맞부딪치자 먼지 속에서 불꽃이 일었다.

백일사는 강했다. 앞서 죽은 둘과는 수준이 달랐다.

백일사의 무공은 살인의 탑을 기어올라 꼭대기에 올라선 검법이었다.

하지만 대성을 이룬 이안의 비천검법은 그 살의의 탑이 하늘에 닿아도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녀의 비천검법은 앞서 펼쳤던 황룡검법과는 완전히 달랐고, 검무극이 펼치는 비천검법과도 달랐다.

그녀의 검술은 섬세했으며 우아했고, 동시에 예리하면서 강력했다.

놀랍게도 백일사는 그녀와 첫수를 나눴을 때, 이미 패배를 예감했다.

백팔사와 백오사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이 싸움을 봐야, 아! 이래서 졌구나라고 생각할 테니까.

아니다, 그들은 봐도 모를 거다. 이 여인이 얼마나 강한지.

샤아아아아악.

그녀의 검이 자신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눈부신 궤적을 만들어내며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이안의 눈동자에서 자신이 죽였던 수많은 이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쉬이익.

검이 가슴을 관통했음에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애원도 증오도 협박도 아니었다.

“완벽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안에 대한 찬사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일사는 그대로 꼬꾸라져 절명했다.

이안은 얼떨떨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될지 알았는데. 오죽하면 검무극에게 이런 전음을 보냈을까?

―정말 이 사람이 백사단 서열 일 위인가요?

검무극의 기분 좋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네 실력을 알겠느냐?

이안의 경지는 백사단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연백진은 멍한 표정으로 백일사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저 여인이 백사단 서열 일 위의 고수를 죽였다고?

연백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안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제 함부로 하대하지 않았다.

“구해줘서 고맙소.”

“연 대협도 우리 서진이를 구해주려고 하셨잖아요?”

연백진은 살아났다는 기쁨보다 우울함을 느꼈다.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도 몰랐고, 이 여인이 이런 대단한 고수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죽어도 싸다.’

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만난 이후 내내 묘한 느낌을 주었던 그였다. 어쩌면 이 여인보다 더 고수일지도 모른다.

“서열 일위를 죽였으니 백사단이 그냥 있지 않을 거요. 백사단 전체가 몰려올 거요!”

연백진의 걱정에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살다 보면 온갖 동물이 황룡무관으로 올 수 있겠죠. 하지만 흰 뱀이 다시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장담하시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백사단에 기별해. 더는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네.”

연백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들이 대체 누구기에?”

그 흉흉한 백사단이 끼어들지 말라면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검무극이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난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순간 연백진은 얼어붙었다.

이안과 서진도 자신을 밝혔다.

“천마신교 귀영대주 이안입니다.”

“천마신교 귀영대 이 조장 서진입니다.”

연백진은 사색이 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문의 혈육이 일개 대의 조장으로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 오직 한 곳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백사단 서열 일 위를 가볍게 죽이는 천하제일미녀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래, 오직 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으리라.

‘아무리 그래도 천마신교 소교주라니!’

지금까지 그를 막 대했었는데.

그 혼란과 불신을 향해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당신 인생에서 내가 연기처럼 사라질지, 악독한 소교주가 될지는 이제 당신에게 달렸소.”

당신은 두 번 등을 보였지

연백진은 자신의 인생에서 마교 소교주와 만나는 일이 있으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눈앞의 세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제 그의 말과 태도는 아주 정중해졌다.

“마교의…… 아니, 신교의 소교주께서 여긴 왜 와 있는 겁니까?”

너 때문에.

네가 서진을 죽이는 운명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연 대협도 아시다시피 우리 서 조장 일 때문에 왔소.”

일개 조장의 일에 소교주가 직접 움직인다고? 연백진의 표정에 드러나는 당연한 의구심에 검무극이 서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 조장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오.”

검무극의 말에 서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한 번씩 느낀다. 소교주가 자신에게 과분한 애정을 준다는 것을. 그렇다고 이성을 바라보는 호감은 분명 아닌데. 이안을 너무 아껴서일까?

연백진은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형은 마교 귀영대 조장의 고향 오라버니를 죽인 셈이 된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로 인해 마교 소교주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교주가 왔다는 말은 마교 전체가 와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의 말 한마디면 황룡무관은 하루아침에 멸문이다.

연백진의 신형이 파르르 떨렸다. 배짱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밀려드는 두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연백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검무극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형을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순간 연백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형이 자신을 죽이려 한 이상 답은 나와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형이라는 이유로 고분고분 죽어줄 그런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죽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도 모질어지는 수밖에.

연백진의 대답에 이안은 검무극과 대공자의 일을 떠올렸다.

일개 무관에서도 이런 혈육 간의 피바람을 피할 수가 없는데, 천마신교의 후계자 다툼을 평화롭게 끝냈다. 새삼 검무극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연백진은 검무극이 자신이 찾으려는 그곳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혹시 소교주께서도 그곳을 찾으려는 겁니까?”

정말 순수하게 일개 조장을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고 믿어지지 않았기에 하는 질문이었다.

“맞소. 그 일도 해결할 생각이오.”

연백진의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형이 뭔가에 홀려 있는 그곳을 마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과연 자신들을 살려둘까? 자신이 아는 마교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마교에 대한 이야기는 피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저 잘생기고 예쁜 얼굴 아래 괴물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백사단의 시체들이었다.

‘어차피 이들이 아니었다면 내 시체가 저곳에 있겠지.’

어차피 죽었던 목숨이라 생각하자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어떻게 해야 악독한 소교주가 아니라 연기처럼 사라지는 소교주가 되실 겁니까?”

“두 가지면 되오.”

“뭡니까?”

“솔직하시오. 그리고 우릴 믿으시오.”

연백진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상대의 정체를 안 이상,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믿는 건 아직이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솔직함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고마움 반, 두려움 반에서 비롯했다.

“형은 지금 뭔가에 홀려 있습니다. 분명 비밀 공사와 관련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약속받은 것은…….”

그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 무공 비급일 겁니다.”

“왜 비급이라 생각하시오?”

“형은 무림인들이 무관 무공이라고 무시하는 걸 못 견뎌 했습니다. 절세신공의 유혹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검무극이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놓았다.

“황룡무관 지하에 절세신공이 보관된 보고가 있고, 실력이 되는데도 출관하지 않고 떠난 관원들이 그곳을 파고 있다?”

그곳을 관리하는 것은 검왕.

검왕의 무공 실력이라면 무공 비급 때문에 이런 공을 들이지는 않을 터.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지?’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분명 검왕은 자신을 이용해서 뭔가를 하려 했다.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때 주더라도, 한 걸음 앞서가야 한다. 그곳에 몰래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당신 형 말고 그곳에 대해 알만한 사람이 있소?”

“한 사람 있습니다. 칠사부 중 일인인 기석이 형님의 수족입니다. 그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무공이…….”

다른 사부들보다 훨씬 고강하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가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무공만 봐도, 소교주의 무공 실력이어떨지는 알 수 있었다.

“형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백사단을 불러들인 것도 기석이겠군요?”

“형이 직접 그들과 접촉하진 않았을 테니, 틀림없이 그랬을 겁니다.”

순순히 묻는 말에 대답했지만, 연백진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형은…… 형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참하게 이용만 당하다 놈들 손에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교의 손에 죽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만약 자신이 못 죽이면 함께 동귀어진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형을 다시 만나시오.”

연백진이 깜짝 놀랐다.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는 나를 죽이려고 백사단을 불렀습니다. 그것도 서열 일 위의 고수를!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라는 거요.”

연백진은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형의 죄책감을 이용하라는 거군요! 지금 찾아가면 아직 백사단이 청부를 하기 전이라 생각할 테고. 어차피 곧 죽을 동생이니 뭐라도 말해 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가 아니오. 죄책감으로 정보를 흘릴 사람이라면, 애초에 백사단을 부르지도 않았을 거요.”

“아니라면 왜?”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시오. 그래야 앞으로 살면서 후회가 없을 테니까.”

연백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나를 위해서라고?’

연백진은 믿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챙기는 걸 믿으라는 겁니까? 내가 뭐라고?”

그러자 검무극은 연백진이 잊고 있었던 일을 꺼냈다.

“당신은 두 번 등을 보였지. 우리 쪽으로 한 번, 적에게 한 번. 두 번 모두 서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소.”

처음에는 서진 앞을 막아서면서. 다음에는 암기를 막아주기 위해서.

“당신이 뭐라니? 내 수하를 지켜 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인데.”

정말 순수하게 그를 위한 배려였다.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결론이 나버리면, 당신은 평생 형 생각이 날 거요. 황룡관주가 되어 살아가더라도, 평생 마음에 그늘이 져 있겠지.”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연백진이 밝게 살아가면 그건 서진에게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검무극은 끝까지 노력 중이다. 자신에게 서진은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신들 관계라면 말을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겠지만 이번에는 안 하는 후회가 더 클 거요. 그러니 형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다 말하고 오시오.”

* * *

연백인은 집무실 창가에 서서 야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무관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고 늦게까지 수련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도착한다고?”

연백인의 물음에 뒤쪽에 서 있던 기석이 정중히 대답했다.

“네, 이미 도착했을 겁니다.”

연백인은 더는 묻지 않았지만, 기석이 그의 마음을 대신해서 말했다.

“연 대협은 내일 아침 해를 보기 어려울 겁니다.”

연백인이 반사적으로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문득 검왕의 말을 떠올렸다.

―악인은 욕먹으면서 쭉 한길 가는 거요.

그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욕을 안 먹으려는 게 오히려 더 부끄러운 모습이다.

“별이 총총한 걸 보니 내일은 날이 맑겠군.”

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유부단하고 착한 척하는 수장보다는 이런 수장이 훨씬 낫다고 여겼으니까.

“그 사람은 요즘도 백룡반 수련에 나가고 있나?”

“최근 매일 나갔습니다. 기존과 전혀 다른 황룡검법을 전수했다는데.”

기석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아느냐는 뜻에서 말한 것인데 연백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에게 들은 마귀에 대해서 기석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수하의 말이 들려왔다.

“동생분이 찾아왔습니다.”

연백인과 기석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늦은 시간, 뜻밖의 방문이었다.

“제가 있을까요?”

기석의 물음에 연백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셔라.”

문이 열리자 연백진이 들어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기석을 보자마자 인사 대신 술주정을 부렸다.

“우리 기 사부님은 꼬리가 닳아서 없어졌겠소.”

무례한 말이었지만 기석은 전혀 불쾌한 표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제 충성심이 그 정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인사를 하고는 기석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기석에게 무례했다며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연백인은 평소보다 부드럽게 그를 대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냐?”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연백진은 화가 치솟았다. 백사단을 불러서 자신을 죽이려 하면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사람이라면 미안해서라도 조금은 당황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나? 하다못해 평소처럼 냉정해야 하지 않나?

연백진은 접객용 탁자에 걸터앉아서 병째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치미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잠도 안 오고, 할 말도 있고.”

술을 한잔하고 가라고 조언해 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릴 테니까. 정말 잘 가져왔다. 아니었다면 조금 전에 버럭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연백진이 술병을 내밀었다.

“마실래?”

연백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백진이 다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래, 하려는 말이 뭐냐?”

잠시 탁자에 앉아 멍하게 있던 연백진이 오면서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이기도 했다. 형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형에게 관주 자리를 양보했다고 생각했어.”

연백인은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어려서부터 내가 더 무재가 뛰어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니까. 내가 마음을 먹으면 관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연백진은 형을 보지 않고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지금은 형이 훨씬 강하지만, 그것조차 나는 내가 양보했다고 생각했어. 일부러 형보다 강해지지 않으려고 더는 노력하지 않았거든.”

연백인은 동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놈인가?

“다 내 착각이었지. 한 번도 이 무관은 내 것인 적이 없었는데.”

동생의 고백에 연백인이 좋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내 생각만 하고 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앞으로…….”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린 하나밖에 없는 형제지 않느냐?”

형이 이렇게까지 뻔뻔하고 비정한 사람이었던가?

“고마워, 형.”

이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겨주어서.

연백인은 자신의 마음이 더없이 차갑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 그 어떤 좋은 말도 다 해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애초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 살거나, 아니면 기석 같은 충성심으로 나를 도왔어야지. 그럼 이러지 않았어도 되잖아?’

하지만 동생은 절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술 깨면 또 자신의 뒷조사를 시작하겠지.

“내일은 같이 밥이라도 먹자.”

무슨 밥? 내 제삿밥? 그 말에 연백진의 분노는 한계선을 넘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웃으면서 물었다.

“어떤 무공이야?”

연백인이 흠칫 놀랐다.

“무슨 말이냐?”

“형이 홀려 있는 무공이 어떤 무공이냐고?”

연백진은 웃으며 물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연백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연백진은 알 수 있었다. 이 무공이 형에게는 역린 같은 것임을. 하긴, 여기에 모든 걸 다 걸었을 테니.

“아직 그 무공 비급 못 받았지? 그 보고를 다 파야 준다고 했겠지?”

연백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지만 연백진은 계속 몰아붙였다.

“세상에 어느 누가 절세신공을 그냥 주겠어? 준다고 그걸 믿어? 형, 병신이야?”

연백인은 끝까지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방을 나가면 앞으로 영원히 볼 일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동생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조차 이걸로 사라졌다.

연백진은 정말 화가 났다. 그런 자에게 속고, 동생을 죽이려 백사단을 부르고. 결국 자신의 손에 죽게 될, 형, 정말 머저리냐고!

연백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답답한 마음에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렇게 한참을 창가에 서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 다 했으면 가라.”

연백진은 힐끗 형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그곳을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연백인이 벽장을 열어 술병을 꺼냈다. 평소 아껴 마시는 비싼 술이었다.

새하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은 후 쭉 마셨다.

“이만 내 인생에서 꺼져라.”

* * *

연백진이 검무극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흥분해 있었다.

“어디까지나 제 느낌입니다만, 입구가 어딘지 찾은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형의 집무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았을 때 황룡무관의 야경이 보였다.

환하게 밝은 곳도 있고, 덜 밝은 곳도 있었다. 그래도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었는데 유난히 어두운 곳이 있었다. 밤에 이곳에 서서 바깥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저곳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평소에는 관원 모두가 잊고 있는 곳이다.

집무실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으면서 일 년에 단 한 번만 사용되는 곳. 무관에서 신성시되는 곳이었기에 평소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형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

“출관 시험이 치러지는 비무대입니다.”

내 부탁 잊지 않았지?

비무대 주위는 어두웠다.

돌바닥의 무수한 흠집 위로 소리 없이 내려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이곳에 내려서기 전에 검무극은 사방으로 기를 발출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기가 거미줄처럼 펼쳐지면서 주위에 은신한 이가 있는지를 살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불 꺼진 연백인의 집무실에도, 건물의 다른 창에도, 또 이곳 비무대 주위 어둠 속에도, 은신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입구가 잘 숨겨져 있다는 의미.

우선 비무대에 올라서 바닥을 살폈지만, 입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비무대에 입구가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싸움이 격렬해지면 땅이 갈라지거나 파여서 입구가 노출될 수도 있는데, 이런 곳에 입구를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런 곳에 입구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상징적인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면?

검무극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관중석의 상석이었다. 관주와 사부, 사범들이 앉아서 지켜보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크고 화려한 관주석을 중심으로 사부들과 사범들의 자리가 좌우로 배치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관주 자리부터 살폈다. 태사의처럼 만들어진 큰 의자는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곳에 반드시 있다.’

회귀 전의 온갖 경험을 통해 기관 장치에 대해서는 제법 정통한 검무극이었다.

기관을 찾을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반드시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참 신기하게도 긴가민가한 마음에서는 절대 숨겨진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반드시 이곳에 있다는 마음으로 찾아야 보인다.

검무극은 의자 아래까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으며 미세한 균열 하나까지도 꼼꼼히 살폈다.

관주석을 찾고, 다음 사부의 의자를 살폈다. 살피고 또 살피고, 다음 의자를 살폈다.

그러던 중, 세 번째 의자에서 미세한 균열을 느꼈다. 동그란 균열. 반드시 여기에 있다고 믿지 않으면 느껴지지도 않았을 그런 미세한 균열이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그곳을 꾹 눌렀다.

살짝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입구가 드러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게 아닌가 보다 넘어갔겠지만, 검무극은 알았다.

‘이중장치로 여는 문이다. 이게 일차 장치고.’

검무극이 다시 관주석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아서 이것저것 다시 살피던 그때, 아까는 움직이지 않던 손잡이의 황룡 장식이 옆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아주 살짝.

바로 그 순간!

스르륵, 부드럽게 아래쪽이 열리면서 의자에 앉은 채로 밑으로 내려갔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의자는 원래 자리로 올라갔고 천장의 문이 닫히면서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검무극은 신안술을 발휘해서 주위를 살폈다. 내려선 곳 바로 옆에 있는 장치를 누르자 다시 천장이 열리며 의자가 아래로 내려왔다. 사람이 의자에 앉을 시간이 지나자 자동으로 다시 위로 올라갔다. 정말 정교하고 부드럽게 작동하는 최상급 기관이었다.

검무극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서너 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한쪽 벽에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 장치가 있었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기관으로 걸어갔다. 아래쪽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함부로 기관에 타지 않았다.

검무극이 기관 사이를 살폈다. 아래로 내려갈 틈이 있으면 그 사이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아무리 깊어도 자신의 무공실력이라면 소리 없이 내려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의 기관은 아래로 내려가려면 무조건 이 장치에 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기관에 타면, 분명 아래에서 누군가 내려온다는 걸 알도록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다시 위에서 문이 열리고 의자가 내려왔다. 내려온 사람은 놀랍게도 검왕이었다. 그는 양손에 물건을 한가득 들고 있었는데, 술과 고기였다.

의자에서 내린 그가 기관 장치에 올라탔다.

검왕이 바라보는 곳에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이 서 있었다. 천장이 열리는 순간, 동시에 사라졌던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은 바깥을 볼 수 있기에 검왕을 보고 있었지만, 검왕은 아무도 없는 공간을 쳐다볼 뿐이었다.

기관의 안과 밖, 마주 선 두 사람.

검무극의 시선이 그의 발을 향했다. 그는 자신이 선물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곧이어 검왕이 탄 기관이 아래로 내려갔다.

우우웅.

그가 기관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자 그제야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서 나와 모습을 보였다.

검무극은 기관이 내려간 끝도 없는 어둠 속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그 아래에서 무엇을 찾고 있소?’

* * *

검무극이 다시 돌아왔을 때, 연백진은 이안, 서진과 함께 객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는 그곳에 있었소.”

검무극의 말에 연백진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신의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형의 성격상 눈에 보이는 곳에 입구를 두었을 것 같았습니다.”

“잘 발견하셨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곳을 직접 찾아냈다는 사실에 연백진은 기뻤다.

“당장 그곳으로 함께 들어갑시다.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연백진은 자신도 그곳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정말 절세신공이 있는지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구를 알았어도 섣불리 들어갈 수가 없소.”

이유는 연백진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당신 형 주위에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고수가 있소.”

당연히 연백진은 깜짝 놀랐다. 마교 소교주도 어쩌지 못하는 고수가 있다고? 그런 사람을 무관에서 본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연백진은 거짓말처럼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혹시 그 임시 사범입니까?”

왜 그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형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백룡반 관원들에게 이상한 초식을 가르친 바로 그 사람 말이다.

“맞소. 그 사람이오. 그가 있는 한, 당신 형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간 당신이 먼저 죽겠지.”

“그럼 애초에 왜 나를 죽이라고 그 사람에게 시키지 않은 겁니까? 백사단을 부를 필요도 없었을 텐데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백사단보다 그를 더 무서워하고 있을 거요.”

연백진은 갑갑함을 느꼈다. 형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고, 그런 형 주위에는 마교 소교주조차 조심하는 고수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거죠?”

“그 사람이 없을 때 들어가 봐야지.”

그래서 그가 발굴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그걸 먼저 가로채야 한다. 이건 검왕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검왕이 이토록 정성을 들인 것이라면, 그건 분명 천마신교에 매우 위협적인 물건이 될 테니까.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검무극은 이미 한 가지 계획을 세운 후였다.

검무극이 연백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 죽어줘야겠소. 백사단 서열 일 위가 죽이러 왔는데 안 죽으면 이상하지 않겠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소스라치게 놀란 연백진에게 검무극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이어졌다.

검무극이 이안과 서진에게 물었다.

“뱀은 누가 더 잘 그리려나?”

* * *

기석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복면을 착용하고 죽립까지 눌러쓴 남자였는데, 벌어진 옷깃 사이로 똬리를 튼 하얀 뱀이 보였다.

‘백사단!’

물론, 백사단으로 위장한 남자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가슴에 그림을 그려준 사람은 이안이었다. 물론 서진이 옆에서 거들었다. 똬리를 한 번 더 틀어야 한다, 꼬리가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 두 여인이 머리를 맞대자 제법 그럴듯한 백사가 탄생했다.

기석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눈을 뜨지도 못했을 테니까.

“청부는 어떻게 되었소?”

기석의 물음에 검무극이 나직이 대답했다.

“잘 끝났소.”

검무극은 목소리를 굵게 변조해서 말했다.

“한데 왜 나를 찾아온 거요? 원래 백사단은 청부자와 접촉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번은 예외요.”

검무극이 구석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 사이 기석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상대는 침상 옆에 세워둔 자신의 검을 치우지 않았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

“연백진이 죽기 전에 이상한 말을 하더군.”

그 말에 기석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무슨 말을 못 하겠소?”

검무극이 죽은 백사단의 백오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보통 뻔한 반응을 보이지. 협박하거나 증오하거나 애원하거나. 한데 연백진은 다른 말을 하더군.”

기석이 제발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들 지하에서 보물을 캐고 있다고?”

기석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

‘젠장! 그냥 뒈질 것이지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구나.’

기석은 일단 딱 잡아뗐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처음부터 이상했지. 한낱 무관주의 동생을 죽이는 일에 백사단 서열 일 위인 나를 부른 것이.”

기석은 다시금 놀랐다.

‘이번에 온 저자가 백사문 서열 일 위였구나.’

관주가 이번 일을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고 백사단에 부탁했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그렇다고 서열 일 위를 보냈다고?

이 일은 백사단주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인데, 기석은 이렇게 오해했다.

‘우리를 협박해 돈을 뜯으려고 이 자를 보냈구나.’

상대가 무관이라고 만만하게 본 것이다. 중원제일무관이라는 명성에서 그들이 맡은 건 돈 냄새였을 테니까. 순진한 무관 놈 상대로 돈을 더 뜯어내려고 왔는데, 연백진이 그런 말을 해버린 거겠지.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애초에 얽히지 말았어야 할 자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차가운 살기가 쏟아내며 돈을 요구했다.

“내가 특별히 움직였으니 삼십만 냥을 추가로 더 받아야겠소.”

말도 안 되는 요구에 기석은 이번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상했다.

‘이 욕심 때문에 서열 일 위도, 관주도 다 바뀌게 될 거다.’

이쪽에 얼마나 대단한 고수가 있는지 저들은 꿈에도 모를 테니까.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오. 우선 관주님께 보고부터 해야 하오.”

검무극이 차갑게 말을 전하고 돌아섰다.

“닷새 안으로 삼십만 냥을 백사단 본단으로 가져오시오. 하루 늦을 때마다 십만 냥씩 추가할 거요.”

* * *

급한 기별을 받고 검왕이 연백인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미 연백인의 표정만으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왕이 모른 척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어제 애들하고 술을 마셨소. 이제 휴식도 충분히 취한 거 같으니, 다시 작업을 재개할까 하오. 지하로 데려갈 관원들도 대충 봐뒀고.”

연백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시지 전에 한 가지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소.”

“말씀하시오.”

연백인은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동생이 백사단에게 죽었소.”

검왕은 이 상황을 예상했는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연백인은 그가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볼 거로 예상했는데.

백사단이 아니라 당신에게 죽은 거 아니오? 내가 죽였다! 당당히 말하라니까!

한데 눈앞의 검왕은 왠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채. 분명한 건 자신을 향한 비웃음은 아니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소. 녀석이 죽기 전에 백사단 놈에게 지하 보고의 존재를 밝혔소.”

큰 문제가 될 일이었는데, 검왕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들이 뭘 요구했소?”

“삼십만 냥이오.”

연백인이 품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검왕 앞에 내려놓았다.

“여기 삼십만 냥이오.”

이 돈을 그들에게 가져다주라는 게 아니었다. 이 돈을 받고 그들을 처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놈들의 요구는 삼십만 냥에 끝나지 않을 테니까.

“원래라면 내가 스스로 처리하려 했을 거요. 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백사단을 처리할 이들을 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소.”

더 두려운 건 또 다른 늑대를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었다. 돈 냄새를 맡은 백사단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으니까.

“이런 부탁을 드리게 돼서 면목이 없소.”

연백인이 고개를 숙였다.

검왕이 뜻 모를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큰일을 하다 보면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지요. 내가 처리해 주겠소.”

무슨 생각인지 검왕이 흔쾌히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연백인이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막말을 들을 각오를 했고, 정말 무릎을 꿇을 각오까지 했다.

한데 검왕은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삼십만 냥이 든 봉투를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출발할 생각이시오?”

집무실을 나서며 검왕이 말했다.

“수업은 마치고 가야지요.”

* * *

“오늘이 내 마지막 수업이다.”

검왕은 모두에게 황룡검식을 펼치게 했다. 대부분 제대로 배우지 않았으니, 기존의 황룡검식을 펼쳤다.

그렇게 한바탕 관원들이 황룡검법을 펼쳐내자 검왕이 관원들에게 말했다.

“내 수업을 열심히 들은 사람은 몇 명 안 되는구나.”

그가 몇 사람을 지목했다. 검무극과 이안, 서진, 그리고 열심히 따라 했던 유광과 교석까지.

“너희 다섯 명만 제대로 배웠군.”

그들을 쳐다보는 관원들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여자에게 빠져서, 혹은 이 임시 사범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초식을 따라 했다고 여겼으니까.

“너희는 나를 따라와라.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지.”

검왕은 홱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남은 관원들에게는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

지목당한 다섯 명이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검왕이 도착한 곳은 황룡반 출문시험 비무대였다. 비무대에 오른 검왕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다들 어딜 가고, 왜 자네만 왔나?”

그곳에 도착한 사람은 검무극뿐이었다.

“제가 달아나라고 전음을 보냈습니다. 지금쯤 이안이 본교 안가로 데려가고 있을 겁니다.”

검무극도 비무대 위로 올라와 그의 앞에 섰다.

“갑자기 왜?”

검왕은 시치미를 떼며 물었지만 검무극은 그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사범님께서 제 계획을 알아차렸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다른 곳도 아닌 이곳으로, 그것도 자신만이 아닌 다른 관원까지 모두 데리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하나였다. 모두를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려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검무극에게 정말 큰 부담이 되었으리라.

“방패 하나가 넷을 지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검왕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다른 넷이 따라오지 않은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되리란 걸 어느 정도 예상한 얼굴이었다.

“자네가 우리 편이었다면, 우린 벌써 목표를 이뤘을 거야.”

그 목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아직 그걸 알려줄 만큼의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 질문만큼은 아껴야 한다. 딱 한 번 물어볼 때, 질문이 힘을 발휘하려면.

검왕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검무극에게 주었다.

“이게 뭡니까?”

“자네가 달라고 했다면서?”

열어보니 삼십만 냥이 들어 있었다.

“제 계획을 알아차리고도 주시는 겁니까?”

“어차피 내 돈 아니잖나? 그 사람에게는 이번 일을 처리해 준 걸로 생색내고, 자네에겐 돈을 줘서 생색내고.”

역시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백만 냥쯤 부를 걸 그랬습니다.”

“그랬다면 더 아쉬웠겠지. 어차피 다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될 텐데.”

검무극이 돈을 챙겨 넣으며 웃었다. 자신이 준 신발은 삼십만 냥짜리였나 보다.

“한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번 일을 제가 꾸민 것을요?”

“관주에게 연백진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알았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자넨 인연을 맺은 사람을 쉽게 죽게 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나? 연백진이 백사단 따위에 죽었을 리가 없지.”

그는 정확히 자신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해주셨군요.”

“아직도 과소평가 중이지. 자넬 이렇게 살려두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마음은 오늘 검무극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와도 관계가 있었다.

“내 부탁 들어주기로 한 것 잊지 않았지?”

“물론입니다.”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비무대 위에서 하는 말이었기에 싸움과 관련한 부탁이 아닐까 예감했다.

하지만 검왕의 부탁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와 같이 땅 좀 파자.”

신발이나 벗고 말씀하시죠?

지하로 같이 내려가자고?

일부러 감춰도 모자랄 판에 함께 지하 보고를 파자고?

“진심이십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지금 눈앞에서 저렇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더라도 그가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함께 지하로 내려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저를 데려가려는 겁니까?”

당연히 자신이 필요해서 데려가려는 것일 텐데.

문제는 그가 찾는 것을 찾았을 때다.

그걸 자신과 나눌 생각일 리는 없으니, 실컷 이용하고 그때 죽이겠다는 의미일까? 그걸 빼앗길 가능성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검왕이 손가락으로 검무극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것 때문에.”

검무극이 고개를 숙이자 열린 옷자락 사이로 하얀 뱀 그림이 보였다. 이안이 그려준 뱀 그림을 지우기 아까워, 아직 지우지 않고 있었다.

“뱀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물론, 그가 뱀이나 백사단을 좋아해서 한 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내려가는 입구 찾았지?”

검왕의 물음에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네, 찾았습니다.”

검무극이 의자가 배치된 곳으로 걸어가서 사부들을 위한 의자 아래에 숨겨진 일차 장치를 조작했다.

그리고 다시 관주석에 앉은 후 손잡이를 조작했다.

스르륵.

검무극이 의자와 함께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 사이 검왕은 관주석 앞까지 와 있었다. 검무극을 내려다보며 검왕은 자신의 얼굴에 스치는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이 찾기 어려운 입구를 찾아내고, 그 짧은 시간에 나를 외부로 보내려는 계략까지 실행했지. 나는 이런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다. 똑똑한 삽질이 필요할 때라서.”

“그러신 거라면 정말 잘 고르셨습니다.”

“내가 사람은 잘 보거든.”

검왕이 검무극 옆 사부들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빈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그림은 누가 그려줬나?”

“제 심장이 그려줬습니다.”

그에게 이미 이안을 심장과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었으니까.

“꽤 괜찮은 생각이었어.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면 자네가 이 아래에서 무슨 일을 벌였을지 알 수 없지.”

검왕의 칭찬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오면서는 인질이 될 수도 있었을 넷을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달아나게 했고.”

“인질로 안 삼았을 것, 압니다.”

“그래도 자네에겐 신경 쓰였겠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텅 빈 비무대를 향해 있었다.

“관주에겐 절세신공을 준다고 약속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제게는 뭘 주실 겁니까?”

“욕심은! 이미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혔으면서.”

“모르셨겠지만 제 별명이 물욕의 화신입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말했다.

“자네가 그랬지. 더 강해지고 싶다고.”

그가 주려는 것 또한 참으로 뜻밖의 것이었다.

“이 아래에서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내 손에 죽을 텐데?

검무극은 그에게 더 자세한 말을 들을 수 없음을 직감했다.

“역시 훌륭한 사범이시군요.”

이윽고 검무극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죠. 가시죠.”

“겁나지 않나? 이 밑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파야 할 흙과 파다 지친 관원들이 있겠죠.”

“자넬 죽음의 함정으로 이끌 사범이 있을 수도 있지.”

이윽고 비무대를 향했던 검무극의 시선이 검왕을 향했다.

“저는 조심성도 많고, 자존심이나 호기심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내려가겠다는 건 한 가지 믿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검왕의 시선도 검무극을 향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사범님께서 저와 싸우려는 장소가 적어도 이 땅 밑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뜻밖의 이유.

“죽을 때 꽉 막힌 흙 천장이 아니라 저 하늘을 보며 죽고 싶으실 테니까요.”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삽질이나 가슴에 뱀을 그리는 계략은 이 하늘 아래서 하시죠. 아니, 마지막 싸움은 저 비무대 위에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나 사범님이나 이 무관 사람들 아닙니까?”

검무극을 바라보는 검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자, 그럼 똑똑한 삽, 내려갑니다.”

검무극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 공간으로 내려가는 검무극의 두 눈이 깊어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이 아래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단 한 순간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모험이다. 하지만 이번에 검왕을 통해 화무기와 그 조직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한 것도 있었고.

검무극이 아래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자 검왕도 의자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이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에 올랐다. 그들이 타니 그곳은 꽉 찼다.

우우웅.

두 사람을 태운 기관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검왕이 정면을 바라본 채 말했다.

“자넨 너무 감상적이야.”

기관 쇳덩이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것에 검무극의 웃는 모습도 비쳤다.

“그 신발이나 벗고 말씀하시죠?”

그래, 아직은 그와 즐기는 이 순간들이 즐겁다.

우린 아직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그 시커먼 구멍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니까. 그 심연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아직 몰랐으니까.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기관이 어둠 속으로 계속 내려갔다.

* * *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무관 앞에서 교석이 이안에게 물었다. 사범을 따라 걸어가다 갑자기 이안과 서진이 자신들을 데리고 무관을 벗어났다. 그 순간에는 아혈과 내공까지 제압해서 잡아끌었기에 반항 한 번 못하고 끌려 나왔다. 정말 납치되는 줄 알았다.

무관을 나오고 나서야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아혈과 내공을 풀어주었다.

“가보면 알아.”

불안해하는 교석과 달리 유광은 이안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들은 곧장 저잣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변두리 민가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번에 백사단에게 죽은 것으로 처리된 연백진이었다.

“연 대협님!”

연백진이 이런 곳에 숨어 있는 모습에 유광과 교석은 깜짝 놀랐다. 비로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실감했다.

물론 아직은 관주 자리를 둔 형제간의 갈등쯤으로 예상했는데, 이안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바로 본교의 안가로 갈 겁니다.”

본교? 안가?

그 생소한 말에 유광과 교석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는 단어지만 한 번도 현실에서 쓰거나 직접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놀란 그들에게 이안이 차분히 말했다.

“이번 일에 말려들어서 유감이야. 하지만 지금부터는 내 말을 들어야 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했다. 이안이 드러내는 기도는 일개 백룡반 관원이 아니었으니까.

원래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관주 동생인 연백진보다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으로 마차가 도착했다. 평범해 보이는 농부가 모는 마차였다. 너무 평범해 보여서 오히려 비범하게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평범한 농부가 올 리 없었으니까.

다섯 사람이 창문조차 없는 허름한 짐마차의 뒤 칸에 올라타자 마차가 출발했다.

교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검무극 이전의 천마신교였다면, 이미 이들은 마혈과 수혈까지 제압당해서 실려 가고 있었을 거다. 목숨을 구해줘도, 상대가 누군지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알지도 못했을 거였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이 경험하는 천마신교는 검무극 이후의 천마신교다.

“이곳 황룡무관에 강호의 음모가 진행 중이야. 우린 그 일을 해결하려고 왔고.”

유광이 그것보라는 표정으로 교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지금 교석은 음모론 친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희가 누군데?”

이안이 차분하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려던 교석을, 옆에 있던 유광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운명이 이끄는 대로 가는 거지!”

예쁜 여자가 이끄는 대로겠지!

그 운명 같은 예쁜 여자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순간 들었던 검무극의 전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무대 관주석 아래에 입구가 있다. 안가에 가서 이 말을 전해.

그러면서 그녀에게 또 다른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이안은 의아했다.

대체 이 중요한 말을 누구에게 전하라는 거지? 안가 무인에게? 아니면 누군가 안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두 번이나 마차를 옮겨타고 미행이 있는지를 확인한 마차가 이윽고 한 장원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도착할 때 진법까지 통과했다는 것을 이안과 서진만이 느꼈다. 오히려 서진이 더 정확히 느꼈다.

귀술을 익힌 서진은 진법에도 능통했기에, 방금 자신들이 통과한 진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더 정확히 알았다.

무림맹과 사도맹도 마찬가지겠지만, 천마신교에서도 안가만큼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다.

안가 마당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그 낯익은 커다란 등을 보자 이안은 흠칫 놀랐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사람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그녀를 향해 돌아선 사람은 바로 권마였다.

“이안아.”

이안이 달려가서 권마에게 안겼다. 출교했다 본교로 돌아왔을 때 겨우 인사만 하고 헤어졌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권마의 무서운 얼굴에 오직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물론, 다른 세 사람은 권마의 무서운 외모에 기겁했다. 서진조차 그 위압적인 외모에는 기가 눌렸다. 그녀도 마존과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으니까.

‘대주님의 아버지라고? 저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올 수가 있나?’

서진뿐만 아니라 모두가 비슷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건물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권마와는 전혀 상반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깊은 눈빛, 그녀는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그녀를 보자 이안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검존님을 뵙습니다!”

“이 대주, 반갑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맞았다. 검무극이 이안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는 데다, 이제 그녀는 권마의 딸이었다. 자연히 이안을 향한 눈빛은 부드러웠다.

두 마존의 존재감은 굉장했다. 근래 피나는 수련으로 무학의 성취를 얻은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고.

검무극은 황룡무관에 검왕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날, 외출하고 돌아왔었다. 그때 이안은 이번 일을 대비하기 위한 외출임을 짐작했었는데. 검무극은 긴급전서를 날려서 권마와 일화검존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검무극은 상대가 검왕임을 안 이상 혼자서 그를 상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안과 서진까지 함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권마를 부른 이유는 이안 때문이었고, 일화검존을 부른 이유는 상대가 검왕이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 검을 쓰는 모두에게 큰 자극이 될 것임을 예감했기에.

이안이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다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세상 무서운 남자와 세상 우아한 여인이라니?

‘대체 누구지?’

이안이 두 친구에게 자신과 서진의 신분부터 먼저 밝혔다.

“나는 천마신교 귀영대주 이안이고 이쪽은 이 조장 서진이다.”

충격을 받은 유광과 교석은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교와 안가’의 의미를 이제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너희… 아니, 두 분께서 마교, 아니, 신교에서 나오신 분이시라고요?”

교석은 덜덜 떨면서 말을 더듬었다. 유광이 불길해, 불길해,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녀석의 음모론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를 끌어들였다.

“그래, 아까 말했듯, 조사할 일이 있어서 나왔다.”

하지만 놀람은 이제부터였다. 이안이 두 마존을 정식으로 소개한 것이다.

“본교의 팔마존이신 권마님이시고, 일화검존님이시다. 서진부터 정식으로 인사드려.”

검존이란 말에 설마, 했는데 진짜 마존이었다. 서진은 정중히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귀영대 이 조장 서진입니다.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이지 말로만 들었던 팔마존을, 그것도 한자리에서 두 사람이나 보는 순간이었다.

특히 일화검존이 인상적이었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 우아한,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서진이 이렇게 놀랐으니 유광, 교석의 놀람은 얼마나 컸겠는가? 살면서 팔마존을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어이쿠!”

“살려주십시오!”

두 사람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야말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물론, 놀란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연백진 역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역시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놀랐다.

원래라면 검무극이 신분을 밝혔을 때 더 놀라야 했는데, 지금 더 놀랐다.

검무극을 봤을 때는 별로 실감이 가지 않았다. 워낙 마교 소교주와는 동떨어진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짜 마교와 마인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살면서 이렇게 무섭고, 이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주는 사람을 만나봤던가?

그는 이제 이 싸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나서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막연했던 마교가 이제 눈앞에 실체를 드러냈으니까.

“자, 다들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이안이 안가 무인을 불러서 다른 이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게 했다.

이제 그곳에는 이안과 권마, 그리고 일화검존만이 남았다. 이안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전했다.

“소교주님이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이었어요.”

그 말에 권마와 일화검존이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이번 적이 그 어느 때보다 강적임을 예감했다.

“지금 소교주는 어디에 있느냐?”

권마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전하라는 말만 전했다.

“비무대 아래에 지하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고 전하라고 했어요.”

검무극이 마지막에 그녀에게 전하라고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그리고 열흘 후에도 이곳 안가에 나타나지 않으면, 구하러 와달라고 하셨어요.”

한 명이지만 일당백

“적어도 열흘은 버틸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속마음이 어떤지 몰라도 권마는 겉으로 걱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이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교주와 열흘이나 함께 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농담에 권마와 이안이 함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게 하는 사람이 바로 검무극이다. 이것이 자신과 마존들이 소교주를 믿는 마음.

“무극이가 기한을 두었으니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권마의 정중한 제안에 일화검존이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시지요.”

정황상 검무극은 적과 함께 지하로 내려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권마는 무작정 두 손 놓고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가 이안에게 말했다.

“대신 통천각에 기별해서 황룡무관과 관련한 모든 움직임을 보고하라고 전해라. 무극이가 황룡무관이나 인근에 없다는 것도 확인하고.”

“네, 그러겠습니다.”

이미 통천각뿐만 아니라 은월까지 이번 일에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고 있었다. 조금만 이상한 조짐이 보여도 곧장 이곳으로 연락을 줄 것이다.

권마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다시 일화검존에게 말했다.

“다른 강적이 도와주러 올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습니다.”

검무극이 긴장할 정도의 상대라면 분명 뛰어난 수하들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적을 불러들일 수도 있을 터.

“놈들이 몰이사냥을 할 수도 있지요.”

검무극을 지하로 몰아넣고 떼로 몰려올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권마의 말에 일화검존이 정중히 대답했다.

“저도 대비하겠습니다.”

일화검존은 안다. 단지 권마가 얼굴만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젊은 시절부터 교주와 함께 무림의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였다. 상황이 급할 때는 그의 판단을 믿어도 될 것이다.

그렇게 일화검존과의 대화가 끝나자 그제야 권마가 딸을 챙겼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저는 괜찮아요.”

일화검존은 부녀가 편하게 대화하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럼 저는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이안이 재빨리 일화검존에게 말했다.

“검존님, 불편한 일이나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뭐든 제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겠네.”

그녀의 배려를 듣고 돌아서기 전에 일화검존이 한마디 건넸다.

“이 대주, 무공에 성취가 있었지?”

과연 일화검존은 이안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루고, 내공까지 크게 늘어난 그녀의 변화를 일화검존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축하하네.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성취지. 나도 자네 나이에 이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이안이 포권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검존을 만난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직 배울 것이 너무 많습니다. 언제 시간 나실 때 잠깐이라도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어렵게 전한 부탁이었는데 일화검존은 흔쾌히 허락했다.

“나야말로 바라는 바네.”

일화검존 역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배울 때의 깨달음만큼이나 가르칠 때의 깨달음도 큰 법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안만큼 훌륭한 대상은 없을 것이다. 여전히 수련에 목마른 그녀였다.

일화검존이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건물에 들어가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창밖 저 멀리 권마와 이안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일화검존의 시선이 웃고 있는 권마를 향했다.

‘저렇게 좋을까?’

함께 마존으로 활약하면서 권마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이곳까지 함께 오면서도 그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문득 그녀의 마음에 혈천도마가 떠올랐다. 지금은 검무극을 아들처럼 여기며 좋아하지만, 그에게도 자식을 가질 운명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오늘 저 권마의 얼굴에서 영초보다 보기 힘든 웃음꽃을 보고 있자니, 왠지 한 번쯤 다른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 *

기관이 지하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앞에 젊은 남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검왕에게 정중히 인사한 남자가 힐끗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신입 받아라.”

검왕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스치는 반가움, 하지만 이내 그 반가움은 아쉬움이 되었다.

“이번에는 한 명입니까?”

“부족한가?”

“아닙니다.”

한동안 쉬긴 했지만 다들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이번에 적어도 대여섯 명은 데리고 내려올 줄 알았는데.

검왕이 신발을 벗어서 남자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인상 펴! 한 명이지만 일당백이니까.”

이곳에 내려오자 그는 신발부터 벗었다.

“험한 곳이라 신발이 워낙 금방 찢어져서.”

신발을 허리에 찬 후에 검왕이 먼저 걸음을 옮겨서 가버렸다.

검무극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빛에 의심이 실렸다.

네가 정말 일당백이라고?

눈앞의 이 잘생긴 녀석은 이곳에서의 거친 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 보였는데.

남자가 돌아서서 검왕이 걸어간 곳을 뒤따랐다.

“내가 밟는 곳을 정확히 밟고 따라와야 한다. 잘못 밟으면 죽는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더없이 복잡했다. 기관이 해체된 곳을 지나야 했는데, 밟아야 할 바닥 역시 황색이었다가 붉은색, 또 푸른색으로 정신없이 바뀌었다.

“행여라도 혼자 나올 생각은 말아.”

남자는 한 번 따라오는 걸로 길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지만, 사실 검무극의 머릿속에는 정확한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곳을 빠져나와야 할 수도 있었기에, 검무극은 혼신을 다해 길을 기억했다.

정말 이곳은 위험했다. 곳곳에는 아직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기관들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튀어나온 칼날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저쪽으로 한 번에 뛰어야 한다. 할 수 있지?”

“잠깐만요. 숨 좀 고르고요.”

검무극이 엄살을 부렸다.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저는 검연이라고 합니다.”

“나는 홍인(紅仁)이다.”

홍인이 조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돈이 필요해서 들어왔냐?”

“저는…… 사범님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사범님? 대형 말이냐?”

검왕은 이들에게 대형이라 불리고 있었다. 하긴, 이전에는 이들을 가르치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범이었던 적은 없었을 거다. 대형이라. 대형이란 호칭에서 검왕이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으시더라고요.”

그 점은 공감한다는 듯 홍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돈을 안 준다고 했으면 안 오지 않았겠느냐?”

결국 돈 때문에 왔으면서 괜히 딴소리 말라는 눈빛에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해 주었다.

“맞습니다. 돈 때문이죠.”

“자, 뛰어.”

홍인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검무극도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잘 뛰면서 엄살은!”

다시 홍인이 길을 열었다.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많은 기관이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을 뚫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널따란 공간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검왕 주위로 관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무극을 향했다. 자신들과 합류하는 자가 과연 누구인지 경계하는 눈빛들.

검무극도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우선 그들은 지쳐 있었다. 피곤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눈빛에는 열정과 열기가 있었다.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니까. 모두 꿈을 꾸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들에게서 또 다른 것도 읽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젊은 청춘들이 이 갑갑한 곳에서,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이 위험천만한 곳에서 오직 돈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어찌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그들은 스스로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검무극은 이들의 눈빛이 정상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니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검무극이 검왕을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는 저 지친 광기가 보이지 않습니까?’

목적을 위해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이들과 함께라서 그 역시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검무극이 그들에게 큰소리로 밝게 인사했다.

“백룡반에서 온 신입 검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백룡반이란 말에 모두 웅성거렸다. 백룡반 출신이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검왕이 있는 자리임에도 관원 하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룡반이 어떻게 여길 왔지?”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똑똑하고 무공도 강하겠습니까? 아, 그런 실력자가 왜 백룡반에 들어갔느냐고요?”

집중되는 시선에 검무극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거기엔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할 때,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여자 문제죠.”

그 순간 몇몇 관원이 웃었다. 어이없다는 웃음부터 공감의 웃음까지.

처음으로 이들의 풀어진 표정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웃으니까 땅 위 관원들과 비슷해 보였다.

어쨌든 검왕이 데려왔고, 검왕이 있는 자리에서 저렇게 큰소리를 친다는 건 적어도 자신들을 속이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다.

“잠은 어디서 잡니까? 제 자리는요? 아, 급히 내려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겨서 왔습니다.”

검왕은 수하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나서서 그곳을 안내했다.

“따라오게.”

검왕이 우선 잠자는 곳부터 데려갔다.

벽을 파서 큰 방을 만들었는데 허름한 나무 침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곳은 모두 공평한 관계인 듯, 더 나은 자리도, 못한 자리도 없었다.

“침상이 너무 작고 딱딱한데요?”

검무극이 침상에 걸터앉아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너무 편하면 잡생각만 많아지지.”

“그건 부리는 쪽 생각 아닙니까?”

“나도 여기서 잔다.”

“그게 불편해도 되는 이유는 아닌데.”

검왕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다른 이유를 댔다.

“덕분에 저들은 훨씬 더 강해졌지.”

“아! 그럼 누워야죠.”

검무극이 침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왕은 그 옆에 서서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검무극은 침상에 누워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지하에 내려오니까 벌써 갑갑합니다.”

검왕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걸으면서도 조심해야 했다. 생활 공간 곳곳에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의미로 그대로 둔 것임을 느꼈다.

졸졸졸.

물소리를 따라가자 그곳에 지하수가 흘러내리는 곳이 있었다.

“씻으려면 여기서 씻으면 되고.”

검왕이 구석에 있는 나무상자에서 필요한 기본 물품들을 꺼내서 챙겨주었다. 그는 이곳 구석구석에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끝으로 안내한 곳은 발굴이 중단된 곳이었다.

동굴 속 앞을 막아선 철벽.

검왕은 땅을 파자고 표현했지만, 정확히는 이 철벽을 파고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벽에 알 수 없는 글자와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을 주었다.

“이게 마지막 관문이다.”

“마지막인지는 어떻게 알죠?”

“할 만큼 했으니까. 더는 하기 싫으니까.”

진심이 담긴 농담이기에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가만히 철벽을 응시하던 검무극이 그곳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기운이 이렇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더는 들어오지 마라.

이 벽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위험한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검왕이 그랬다. 이곳에서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곳은 누가 만든 겁니까?”

“나도 모른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것만 알지. 대신 절세신공과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건 확실해.”

당신은 그걸 원하지 않잖아? 삼십만 냥이라는 거금도 거침없이 내게 주는 사람인데.

검무극이 철벽을 등지며 돌아섰다.

“자, 여기까지 왔으니 말씀해 주십시오. 왜 제가 필요합니까? 제가 이 관문을 파훼할 특별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검왕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사실 나도 지쳤다. 이 마지막 관문은 정말 위험할 테고. 많은 희생자가 나겠지.”

그게 다라는 듯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검무극이 놀라 물었다.

“설마 관원들을 구해주라는 뜻입니까?”

놀랍게도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서는 역부족일 테니까. 자넬 부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지.”

할 말 다 했다는 듯 검왕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검무극이 물었다.

“정말 이 관원들을 살려줄 생각입니까?”

검왕의 발걸음이 멈췄다.

“절세신공과 온갖 보물이 있는 비고가 열렸을 때, 관원들도 그곳을 보게 될 겁니다. 물론 사범님이 계시니 감히 욕심은 못 내겠지요. 세상으로 돌아간 저들은 언젠가 소문을 낼 겁니다. 사범님이 이곳에서 절세신공과 보물을 차지했다고요.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고요.”

그러자 검왕이 대답했다.

“그게 어때서?”

그래, 지금까지 봐온 검왕이라면 저 대답처럼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소문내면 어떠한가? 그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실력을 지녔는데.

하지만 검무극이 이 말을 꺼낸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회귀 전에 이런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적이 없었다. 그런 소문을 퍼뜨린 사람이 무관의 관원이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 많은 이들이 모두 비밀을 지켰다고?

‘아니면 이들을 다 죽인 거요?’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다 살인멸구 하라는 의미인가?”

“그게 깔끔하지 않겠습니까?”

무서운 말이 오갔지만, 오히려 두 사람 사이를 오가던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럼 자네가 그 일도 맡아주게.”

검왕이 웃었고, 검무극도 따라 웃었다.

“농담이었습니다. 제 소문 아시잖습니까?”

검왕이 검무극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소문 속의 소교주라면 저 아이들을 구해주겠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일까?

검무극은 그가 맨발로 자신 앞에 서 있는 한, 그래서 이 벽 너머 끝까지 가지 않는 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검무극이 다시 돌아서 철벽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가만히 벽에 귀를 댔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들립니다.”

검왕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슨 소리가?”

“일을 무사히 해내려면…….”

검무극이 눈까지 지그시 감으며 정신을 집중하더니.

“좋은 침상과 부드러운 침구가 필요하다네요.”

고기 안 주면 일 안 합니다

오후부터 본격적인 기관 해체 작업이 시작되었다.

철벽 앞으로 관원들이 모였다. 이곳에서의 작업은 분업이 잘 이뤄져 있었는데, 지금 모인 이들은 기관을 탐색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었다.

이 작업 지휘는 홍인이 맡았다.

“이곳의 기관들은 이전보다 더욱 민감할 거로 예상되는바, 지금부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내공 사용을 금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뭐라도 하나 잘못 건드렸다간 다 죽는 거다!”

홍인은 관원들이 긴장을 풀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실수는 곧 죽음이었으니까.

“작업 시작!”

관원들이 긴장한 채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철벽 앞 땅바닥부터 가늘고 긴 철심 같은 도구를 이용해 땅속을 살피기 시작했다. 관원들의 손놀림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검무극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홍인은 검무극에게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다. 검왕이 그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 작업에 참여하는 그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길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관원 하나가 뭔가를 찾아냈다.

“여긴 것 같습니다.”

그러자 다른 관원들이 정과 망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그곳을 파기 시작했다. 반 이상이 돌바닥인 데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파야 했기에 작업은 느리게 진행되었다.

검무극은 그 작업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속도라면 열흘이 걸려도 이 입구의 문조차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검무극이 힐끗 검왕을 쳐다보았다.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도 돕겠습니다.”

검무극이 나서자 홍인은 검왕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검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일을 시키라는 의미.

홍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위험한 작업을 처음 온 검무극에게 맡기다니! 설령 그가 고수라 하더라도, 이 작업에 필요한 건 경험이었다.

그는 검무극이 미덥지 못했기에 몇 번이나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금방이라도 망치를 이리저리 휘둘러 댈 것 같았기에 홍인은 제발! 사고만 치지 마라! 마음속으로 빌었다.

캉캉캉캉!

검무극의 손놀림은 빠르고 능숙했다.

그 모습에 홍인은 물론이고 다른 관원들 역시 깜짝 놀랐다.

“안 돼!”

“됩니다!”

더욱 빨라지는 검무극의 손놀림.

홍인이 다급히 검왕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검왕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검무극이 나서자 작업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얼핏 보기에는 대충 파는 것처럼 보이지만, 검무극의 손놀림이 어디 그렇겠는가?

검무극은 정 끝에 기를 발출해서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파고 있었다. 허공에 기를 발출하는 것보다 땅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기로 확인하는 건 몇 배는 어려운 일.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얼마나 파 내려갔을까?

드디어 그곳에서 기관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홍인은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관원을 불렀다.

“기관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관원 하나가 이쪽으로 왔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자는 황룡무관의 관원이 아니구나.’

일반적인 관원들의 그것이 아닌 특별한 기도를 감추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은 피할 수 있었겠지만, 검무극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 다른 작업은 몰라도 기관을 해체하려면 제대로 된 기관 전문가가 있어야 했을 거다. 워낙 많은 이가 다니는 황룡무관이니, 일반 관원들은 이 남자가 검왕의 직속 수하인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드러난 기관을 살핀 후 남자가 검왕에게 보고했다.

“억지로 벽을 부수려 하거나 땅을 파서 들어가려는 걸 방지하는 기관입니다.”

그리고는 홍인에게 말했다.

“최대한 많이 드러나게 해주시오. 뒤는 우리 조에서 맡겠소.”

“알겠습니다.”

홍인이 자신도 모르게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이 자신의 건너편에서 작업하던 관원에게 갔다.

“이쪽은 제가 맡겠습니다. 제 쪽을 마무리해 주십시오.”

그와 교대한 후 다시 빠르게 그쪽을 파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걱정스럽게 보던 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미 검무극이 한 작업량은 며칠은 걸려야 할 양이었다.

다른 쪽도 기관이 드러났다. 그냥 막 파는 게 아니었다. 이쪽은 앞서 작업했던 곳과 다른 높이로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긁힌 흔적 하나 없이 정확히 파낸 것이다.

홍인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제법인데?”

원래라면 굉장한데? 라고 말해야 했지만, 왠지 이 신입 녀석을 칭찬했다간 흥분해서 저 망치질에 과한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원래 제가 손의 감각이 예민합니다. 저쪽도 제가 하겠습니다.”

드러나는 기관의 사방을 돌며 검무극이 능숙하게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일에 집중했다. 저 벽 너머에 뭐가 있을지, 관원들은 어떻게 할지, 검왕은 또 어떤 마음일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진 듯 망치질에 열중했다.

검왕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는 검무극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관원들의 시선은 어느새 감탄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검무극은 마치 조각품을 깎는 예술가처럼 보였다.

그렇게 사방의 땅이 깎여나가면서 매복되어 있던 기관이 제법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오늘은 여기까지. 식사 시간이다.”

뒤에서 들리는 홍인의 말에 검무극이 망치를 내려놓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네요.”

관원들이 검무극 주위로 모여들었다.

목숨이 걸린 일을 하다 보니,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내게 잘해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실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일이 잘 진행되면 하루라도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을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검무극이 작업 시간을 얼마나 많이 단축했는지 모른다. 게다가 성격까지 좋았다.

“배고파 죽겠습니다! 고기 주세요, 고기! 고기 안 주면 내일부터 일 안 합니다!”

검무극은 관원들과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정말 고기도 나왔다.

몇몇 이가 옆으로 와서 통성명했다. 무관 관원 출신들인 그들이니, 기본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언제나 맨 처음 궁금한 건 이거였다.

“자넨 여기 왜 들어왔나?”

강해 보이기도 하고, 손재주도 좋고.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의 물음에 검무극의 시선이 건너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검왕을 향했다.

“여기 오면 강해질 수 있다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버틴 이들 상당수가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 고수가 되었으니까.

“자넨 일당백이라면서?”

“사람 욕심이 끝이 있습니까? 일당천, 일당만이 되고 싶은 거죠. 우리 선배님은 무슨 일로 내려오신 겁니까?”

검무극이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렇게 지하로 내려온 첫날 일과가 끝났다.

* * *

그날 밤, 생각지 못한 일도 있었다.

검왕이 커다란 짐을 몇 개씩이나 가져와서 관원들에게 나눠주었다.

“모두 하나씩 가져가라.”

내공으로 꽉꽉 눌린 것이 풀어지자, 꽃이 피듯 부풀어 오르는 그것은 놀랍게도 솜이불이었다.

아무리 이불을 꽉꽉 눌러 왔더라도, 이 많은 것을 옮기느라 몇 번이나 위아래를 오갔을 것이 틀림없었다.

검무극이 기뻐하며 환호했다.

“새 이불입니다!”

곧장 솜이불을 가져가서 자신의 침상에 깔고는 그 위로 몸을 던졌다.

“으아! 푹신하다!”

검왕의 이런 모습이 갑작스러웠기에 관원들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려운 작업이 시작되었으니 편히 자라고 마련했다. 가져가라.”

그제야 관원들이 긴장을 풀고 이불을 가져갔다. 새 이불 준다는 데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기뻐했다.

물론, 신입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새 이불 냄새 너무 좋습니다!”

* * *

모두가 잠든 새벽, 검무극은 낮에 작업하던 곳에서 검왕을 만났다.

검왕은 겁도 없이 드러난 기관 위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아도 검무극이 왔음을 알았다.

“어차피 자지도 않을 거면서, 왜 이불 타령이었나? 자네 때문이 아니었지?”

“일도 고된 데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죠.”

검왕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진짜 이유를 말해보게.”

그는 검무극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듣기 위해서 이불을 가져온 것이기도 했고.

“들으면 기분이 상하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욕 많이 듣고 살았네.”

“사범님이요? 누가 감히 사범님에게 욕을 합니까?”

“자네만 해도 욕할 준비 중이지 않나? 그러니까 편하게 말해보게.”

검무극이 이유를 밝혔다.

“다들 너무 지쳐 보여서요.”

검왕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그게 기분 상할 말인가? 하는 눈빛에 검무극이 담담히 말했다.

“제가 저 사람들의 부모였다면, 사범님에게 쌍욕을 했을 겁니다.”

그 말까지도 이해한다는 듯, 검왕은 아무 동요가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송곳 같은 말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이곳에는 가족이 없는 관원들만 뽑았죠.”

마치 정으로 돌을 깎아내는 것처럼, 검무극의 망치질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대형이라 불리신다면서요?”

다시 벽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검왕의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확실히 대형이란 말은 단지 윗사람을 뜻하는 의미 이상의 가족과 가까운 느낌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들렸을 거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 대형이라 불리면서 당신은 지금 그들 부모에게 욕을 듣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제가 기분 나쁘실 거라 했잖습니까?”

“기분 나쁘지 않아. 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다. 큰돈을 버는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기분 나빴을 겁니다. 다른 것도 아닌 돈 때문에 자식이 낚였으니까요.”

검왕이 검무극을 다시 홱 쳐다보았다.

“물론, 그 일을 계획하고 진행한 사람은 황룡관주였겠지요.”

검무극은 당근을 주는 척하다가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알고 계셨잖습니까? 그가 어떤 관원을 모았는지.”

악인은 욕먹으면서 가는 거라고 연백인에게 말해주던 그였는데. 지금은 그 뻔뻔함을 발휘하지 않았다.

“화난다고 거기 내리치면 안 됩니다. 터집니다.”

가만히 앉아 있던 검왕이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신발을 검무극에게 던졌다.

“새파란 나이에 무슨 부모 타령이야!”

검무극이 날아온 신발을 연속해서 잡았다.

“제가 또 유별난 부자지간 아니겠습니까? 부모 마음에 대해선 좀 알죠.”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검왕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평정심을 깨며 신발을 던지는 행위로 사과한 것이다.

검무극이 신발을 가져가 그가 앉아 있던 기관 옆에 내려놓았다.

“그래도 이불은 감사했습니다.”

검왕이 나란히 놓인 신발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너 때문에 준 거 아니다. 저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면서? 이불 가져다 달라고.”

그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벽으로 걸어가서는 다시 귀를 댔다.

“또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에는 뭐라는가?”

검무극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후, 생각지도 못한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관원들이 별을 보고 싶어 한다네요.”

순간 검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왜 말이 안 됩니까?”

검무극이 벽에서 귀를 떼며 검왕에게 돌아섰다.

“저들이 나갔다가 달아나기라도 할까 걱정되십니까?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되십니까?”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덧붙여 말했다.

“그게 어때서? 사범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관원들이 이곳에 대해 소문내면 어쩌나 하는 제 물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게 어때서.”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아나는 이가 있으면 어때서요? 그게 어때서요? 나중에 저 안을 봐도 풀어줄 사람들인데. 설마 풀어줄 생각이 없는 겁니까?”

“이렇게까지 해서 관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뭐냐? 그들이 원하지도, 알아주지도 않을 일인데.”

검왕이 옆에 있던 신발을 들었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또 던지겠다는 표현이었다. 이번에는 사과가 아니라 분노가 될 것이다.

검무극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살아서 보는 마지막 하늘일 수도 있으니까요.”

검왕의 손에서 신발은 날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들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닙니다. 사범님께 베푸는 호의죠.”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짓는 검왕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해야 할 일을 지금이라도 하시라고.”

신발 하나가 다시 검무극에게 날아갔다.

“너, 너무 감상적이라고 했지?”

나머지 신발을 들고 검왕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면 네가 얻는 건 뭐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번에 제게 말씀하셨죠. 이겨도 칠 성보다는 팔 성을 이기는 게 더 자랑스럽고, 져도 칠 성보다는 팔 성에게 지는 게 덜 부끄럽다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조금이라도 더 괜찮은 사람과 싸우고 싶습니다.”

결국 검왕은 들고 있던 나머지 신발을 던지지 못했다. 검무극이 내려와서 이제 하루가 되었는데, 이런 농담을 하게 될 줄이야.

“야! 너 그만 올라가면 안 되겠냐?”

* * *

권마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뭐를 사서 들어갔다고?”

그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이안이었다.

“이불이랍니다.”

함께 보고를 듣고 있던 일화검존이 재차 확인했다.

“이불? 우리가 아는 그 이불 말인가?”

“네, 덮는 이불 맞습니다.”

검무극도 긴장했다는 그 고수가 이불을 사 갔다고?

지금 통천각과 은월에서는 최고의 무인들이 황룡무관을 집중감시 하고 있었다.

특히 지하로 내려가는 비무대 입구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온 검왕이 저잣거리에서 이불을 대량 사 간 게 포착된 것이다. 그는 스스로의 행적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한 보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밤에 그곳에서 수십 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수십 명이나? 그래서?”

어딘가로 이동한 것일까? 모종의 임무라도 펼쳤을까? 그것도 아니면?

하지만 이안에게서 나온 대답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무대에 모여 있다가 다시 내려갔답니다.”

사실 보고하는 이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통천각 무인에게 몇 번이나 물었다. 정말 그게 맞냐고.

“그냥 내려갔다고?”

“네, 거기 서서 밤하늘을 보다가 내려갔답니다.”

권마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지만, 이해가 안 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정말 이불을 사 간 것만큼이나 기괴한 보고였다.

“그들 사이에 소교주도 있었고?”

“네, 소교주님과 그 사범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검무극이 함께였다는 말에 일화검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적이 누군지 몰라도, 소교주와 열흘이나 함께 있기도 쉽지 않을 거라고요.”

강하면 강해서 어렵고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모두 비무대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져 내리는 별을 올려다보며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별을 쳐다보았다. 침묵이 가장 어울리는 순간이었으니까.

갑자기 집합해서 밖으로 나올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했다. 발굴의 막바지가 되니 우릴 다 죽이려는 거구나!

이곳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검왕은 모두에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했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점차 감격이 밀려들었다.

아름다운 별들, 오랜만에 맡는 바깥바람.

이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살아남으면 그 돈으로! 그 희망으로! 시작되는 온갖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별과 바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희는 살아있다.

만약 혼자였으면 이렇게까지 감흥이 크진 않았으리라. 그 지옥을 함께 버텨낸 이들이 함께 올려다보았기에 오늘의 별빛은 더욱 깊었다.

그들 속에 검왕도 있었다.

그도 별을 보고 있었다. 아주 한참 동안을.

그러다 문득 검왕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관원들에게 보여주자고 나와놓고 검무극이 제일 열심히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을 담은 저 깊어진 눈빛으로 소교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들 생각하는 바는 달랐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같을 것이다.

이 별을, 이 밤공기를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 * *

아침에 눈을 뜬 홍인은 어젯밤 일이 꿈만 같았다. 실제로 꿈도 꿨다. 물론 그렇게 모여 있다가 유성이 떨어져 사방으로 날아가면서 깨어났지만.

그의 꿈은 이곳에서 모은 돈으로 인심 좋은 마을에 작은 무관을 세우고, 착한 여자 만나서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였다.

그 꿈에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밤마다 매일 별을 보겠다고.

침상에서 일어나려던 홍인은 덮고 있던 새하얀 이불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검무극이 이불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운기하고 있었다. 저대로 밤을 새운 걸까?

이 모든 일은 저 신입이 들어오면서 생긴 일인데. 정말 저 신입 때문일까?

“자, 모두 기상!”

홍인이 침상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관원들은 평소처럼 씻고 아침 식사를 했다. 어제와 같은 아침이지만 관원들에게 흐르는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후 다시 철벽 앞에 모였다.

“자, 우리가 왜 집중해야 하는지, 오늘만큼은 말 안 해도 알겠지?”

홍인의 말에 관원들이 모두 웃었다. 이렇게 함께 웃은 것도 정말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홍인이 대표로 검왕에게 말했다.

“어젠 정말 감사했습니다.”

홍인 뒤에 서 있던 관원들도 다 함께 검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검왕은 그들을 응시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내가 너무 늦었지?”

아닙니다, 하는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검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제 만족하느냐? 하는 눈빛에 검무극은 이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하는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작업 시작!”

캉캉캉.

검무극의 경쾌한 망치질을 시작으로 관원들은 각자 맡은 일을 시작했다.

발굴조의 작업은 이렇게 이뤄졌다. 검무극이 빠르게 파내면, 관원들이 마무리 지었다.

첫날보다 기관 발굴은 더욱 어려웠다. 복잡한 장치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무극의 손놀림은 여전히 경쾌했다. 작업이 어려워진 만큼, 그만큼 작업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혼자 모든 일을 다 하려 욕심내지 않았다.

“여기 좀 도와주십시오.”

필요할 때마다 관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관원들로 어려울 거 같으면 검왕에게도 도와달라고 했다. 그랬기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지하에 묻혀 있던 기관이 점점 더 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여기저기 뻗어있는 기관의 모습이.

기관진식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던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요즘에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기관이지만, 그 섬세함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다. 이걸 만들었던 시대에서도 굉장한 장인이 만든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체가 더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기관진식학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으니까.

그렇게 작업이 계속되던 그때!

철컹! 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한 관원의 당황한 표정. 그가 실수로 뭔가를 잘못 건든 것이다.

스르륵.

양쪽 벽이 열리며 보이는 수십 개의 구멍.

“조심해!”

검무극의 외침이 들리던 그 순간.

쇄쇄쇄쇄쇄쇄쇄쇄쇄쇄!

벽 양쪽에서 수십 발의 치명적인 암기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나왔다.

순간 검무극의 검이 회전했다.

휘이이이잉.

작은 원이 순식간에 커지며 바람이 휘몰아쳤다.

휘류류류류류류!

검무극의 검풍(劍風)이었다. 검으로 쳐내려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검풍을 일으킨 것이다.

파파파파파파파팍!

날아든 암기가 검풍에 휩싸여 날아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모든 암기를 다 막은 것은 아니었다. 검무극이 막은 건 왼쪽 벽에서 날아온 암기.

오른쪽 벽에서 나온 암기에 그쪽에 있던 관원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어야 했는데, 단 하나의 비명도 없었다.

검무극이 돌아보자 검왕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가 순식간에 쇄도해서 검을 휘둘러 암기를 모두 튕겨낸 것이다.

서로 등을 지고 있기에 두 사람은 상대가 어떻게 암기를 막아냈는지 볼 수 없었다. 관원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정말 환상적이었을 텐데. 검무극은 그 수법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한데 그는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을까? 아니면 한 명쯤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까?

“다친 사람은?”

검왕의 물음에 홍인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없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원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안도했다. 어제 별을 보고 와서였을까? 살아남았다는 감동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실수한 동료를 질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검무극과 검왕이 튕겨낸 수십 개의 암기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검왕이 막아낸 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검무극이 이 암기를 다 막아낼 줄은 몰랐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제가 일당백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검무극이 정말 대단한 고수였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래, 검왕이 특별대우를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관원들이 검왕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검무극에게 모여들었다.

모두를 대신해서 홍인이 대표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이제 검무극을 대하는 홍인의 말과 태도가 정중해졌다.

“이전처럼 편하게 신입으로 대해주십시오.”

일도 제일 잘하고, 무공도 이렇게나 강한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심지어 목숨까지 구해준 그를.

“제가 원래 강함을 숨긴 막내인 걸 즐깁니다! 그러니 편히 대해주세요!”

검무극의 농담에 홍인뿐만 아니라 다른 관원들까지 웃었다.

홍인은 검무극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고마워, 막내.”

다시 작업이 재개되었다.

언제 그런 사고가 있었냐는 듯, 검무극은 작업에 열중했다.

검무극이 작업을 이끌면서 얼마가 걸렸을지 짐작도 안 가는 작업이 벌써 끝났다.

이 추세라면 내일 중으로 기관을 완전히 발굴하고 해체까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작업 끝!”

홍인의 외침에 검무극이 배고픕니다! 라고 소리쳤다. 그걸로 끝나면 좋았을 텐데.

“근데 신입 환영회는 안 열어주십니까?”

자연스럽게 검왕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신발에 올라갔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걸 던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모두를 구한 사람에게는 더욱이.

* * *

“이번에는 술과 고기를 사 갔다고?”

이안의 보고에 권마마저 헛웃음을 지었다. 검무극과 관련한 보고만 오면 저 진지하고 무서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자꾸 지어진다.

“아직 소교주님은 괜찮으신 것 같네요. 약이나 관을 사 간 건 아니니까요.”

이안의 농담을 일화검존이 받았다.

“오히려 약이 낫지 않을까? 적의 입장에서는.”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았기에 이안이 웃었다. 술자리에서 검무극을 상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검기를 막는 게 더 쉬울 테니까.

“그럼 보고 들어오는 대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녀가 방을 나와서 마당으로 나왔다.

겉으로는 웃고 나왔지만, 속으로는 검무극이 걱정되었다.

이불을 사고, 별을 보고, 술을 사고.

그렇다고 어찌 검무극이 놀고 있겠는가? 오히려 더 걱정되었다. 검무극이란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곳에서도 도련님은 정말 애쓰고 계시는군요.’

괴이한 보고면 보고일수록 더욱 애쓰고 있을 테니까.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소교주가 걱정되나?”

돌아보니 일화검존이 그녀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안이 솔직히 대답했다.

“소교주님은 그에게서 제가 보지 못하는 뭔가를 보셨습니다.”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그런 사람이지.”

이안이 검왕을 꿰뚫어 본 그 사실을 부정적으로 봤다면 일화검존은 긍정적으로 여겼다. 남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않나?”

그래, 알기에 걱정하는 것만큼, 알기에 아무 걱정도 안 되는 사람이 검무극이지.

“네! 누가 누굴 걱정하겠습니까? 이제부터 걱정은 이불 속에 꽁꽁 싸매 넣겠습니다.”

두 여인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전까지 함께 한 일이 많지 않아 어렵고 어색할 수 있는 검존이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편하게 대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일화검존이 다시 가던 길을 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이 대주.”

“네, 검존님.”

일화검존이 전하는 뜻밖의 조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말게.”

갑작스런 조언에 이안은 내심 당황했다. 지금 저 말은 무공을 펼칠 때 망설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었다.

살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망설이지 말라는 의미. 그것도 결정을 빨리하라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하라는 뜻처럼 들렸다.

“네! 절대 망설이지 않겠습니다.”

씩씩한 대답에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은 후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잠시 그곳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녀의 눈에서 후회를 보았다. 그 깊은 후회에서 나온 충동적인 한마디였다.

‘무슨 결정을 망설이셔서 그리 후회하고 계십니까?’

* * *

기관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마치 땅속에 숨어있던 괴물이 뼈와 내장을 드러낸 모습처럼 보였다.

지하의 관원들이 모두 모여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저걸 보기 위해서 그 고생을 했던 것이니까.

물론 저 철벽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 위험한 것이 줄줄이 있을지, 아니면 저 안이 그냥 끝일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이 과정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기관 전문가 남자가 검왕에게 말했다.

“아주 오래된 기술로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해체할 수 있겠나?”

남자가 기관을 쳐다본 후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검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자신이 이끄는 관원들에게 힘차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이 남자가 가르친 이들이었다.

“작업 시작한다.”

검무극은 검왕과 나란히 서서 기관해체조의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어제 환영식은 감사했습니다.”

검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 환영회는 난리도 아니었다. 바깥바람을 한 번 쐰 탓일까? 검무극이 분위기를 이끌자 다들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검무극이 술에 취해 대형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 혼잣말로 이런 말은 했었다. 미쳤군. 검무극에게 한 말이자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환영식까지 해준 자신에게 말이다.

“솔직히 아직도 헷갈려. 이게 자네의 진심인지, 아니면 보여주기식인지.”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답을 내렸다.

“보여주기식이죠.”

검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저를 봐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했을 것 같진 않거든요. 지금도 사범님께 노력 중입니다. 제 특별함을 봐달라고요.”

“이렇게 의도를 말하면서?”

“고백도 노력의 일부입니다.”

“좋아, 그렇다고 치고. 왜 노력하는데?”

잠시 말이 없던 검무극이 솔직히 말했다.

“사범님과 싸우는 게 겁나나 봅니다.”

검무극을 바라보는 검왕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절 죽이기 직전에 찰나라도 망설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 망설임 때문에 제게 죽겠죠.”

검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솔직히 다 말해버리면 의미 없잖아?”

“이것도 다 작전입니다.”

검무극이 짐짓 음흉하게 웃는 걸 보며 검왕이 다시 해체 작업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검왕이 불쑥 말했다.

“사람이 운명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법이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물었다.

“사범님의 실력이면 그 운명조차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검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마가촌에서 장사하는 조춘배도, 눈앞의 이 검왕도, 그리고 자신도. 인생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강하면 강해서 어렵고, 약하면 약해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예전에 화를 내셨죠. 제가 죽인 자들을 사범님의 동료라고 표현했을 때. 그럼 동료도 아닌 자들과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리고 정말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사범님 위에 누가 있습니까?”

검무극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검왕의 입에서 과연 화무기가 나올까?

하지만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다시 묻지 않았다. 이 역시 아끼고 아껴야 할 물음이었으니까.

그때 기관 전문가 남자가 와서 보고했다.

“기관해체 끝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놀람과 긴장, 두려움과 기대. 온갖 감정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검무극과 검왕이 철벽 맨 앞에 섰다. 다른 관원들이 두 사람 뒤에 모여들었다. 부디 그 길었던 고생이 여기까지기를.

“그럼 열겠습니다.”

크르르륵.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철벽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런 악당 처음입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오래된 공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마치 공간이 비로소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만 같았다.

이 퀴퀴한 세월의 냄새만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으로 얼핏 보이는 긴 통로.

신안술로 그 안을 바라본 검무극은 통로 양쪽 벽에도 문에 새겨져 있던 온갖 문양과 글자, 그리고 그림들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마치 창자에 새겨진 것처럼, 어둠은 그 모든 걸 집어삼킨 채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으며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들어와라, 어서 들어와라.

이 기운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는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당대 무림을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아주 낯선 기운이었다.

들어가면 죽는다.

하지만 본능의 경고에도 검무극은 저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공포가 주는 반발이나 도전 의식이 아니었다.

황룡무관을 오고, 검왕을 만나고, 그가 자신에게 이곳으로 내려오자고 말한 모든 것이 운명의 이끌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옆에 선 검왕에게 물었다.

“느껴지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관원 중 한 사람이 뭔가에 홀린 듯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과 검왕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홍인이 달려가서 붙잡았다.

“정신 차려!”

홍인이 사정없이 그의 뺨을 때렸다.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렸다.

어둠이 그를 유혹해서 불러들인 것이다. 관원 중에서 가장 내공이 부족하고 정신력이 약했던 그가 먼저 그 유혹에 넘어갔다.

곧이어 다른 관원 하나도 앞으로 걸어가려다 옆에 있던 관원이 붙잡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검무극이 검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 관원들을 돌려보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이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저와 단둘이 들어가시죠?

흔쾌히 그러자고 할 것 같았는데, 검왕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검무극은 이런 말로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이 사람들, 살려준다는 말 거짓말이었습니까?

그가 고민하는 게 이들을 저 안으로 데려가서 죽이려는 계획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고 믿었다.

분명 이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별을 보여주지도 않았을 거다.

과연 검왕의 고민은 관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저들에게 마지막 그곳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죽을 고생을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돈을 떠나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었는지는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저 불길한 어둠 속으로 저들을 데려가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 생각했다.

―저 안에서 보게 될 것들이 저들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겁니다. 그 보물을 나눠주실 게 아니라면요. 나눠주실 겁니까?

검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왕이 기관 전문가 사내에게 전음으로 뭔가를 지시하자 그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러고는 검왕은 뒤에 선 관원들에게 돌아섰다.

“너희 임무는 여기까지다.”

그 말에 관원들은 깜짝 놀랐다. 이번 발굴이 거의 다 끝났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 문을 여는 것으로 끝이 날 줄은 몰랐다. 저 어둠으로 들어가서 또 기관을 해체 해야 할 거로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저 문 너머의 어둠 속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홀린 듯 걸어가는 동료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의 유혹이 이 정도인데, 안에서는 어떠하겠는가?

이제 끝이라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밀려들었다. 놀람에 이어 기쁨을 느꼈고. 마지막에 그들을 지배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대형으로 모시며 검왕을 믿고 따랐던 그들이지만, 이 마지막 순간 살인멸구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믿음이 정확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명령을 받았던 기관 전문가 사내가 돌아와서 모두에게 봉투를 나눠주었다. 안에 든 것은 약속한 전표였다.

원래 처음에는 월봉으로 챙겨서 돈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보내달라면 대신 보내주기도 했다. 혹시 나중에 돈을 주지 않을까 걱정해서 꼬박꼬박 돈을 받았지만, 어차피 나가지 못하는데 가지고 있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관원들은 검왕을 믿고 나갈 때 돈을 달라고 해둔 상황이었는데, 정말 약속한 돈을 챙겨준 것이다.

돈을 보자 관원들은 모두 울컥했다. 이 돈을 벌고자 지금껏 그 고생을 했었으니까.

“그동안 고생했다.”

검왕의 말에 몇몇 관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길고 지긋지긋한 일이 끝나는 순간이었으니까.

물론, 저 문 너머 끝까지 가보고 싶었던 관원도 많이 있었다. 대체 어떤 보물이 있기에 이런 기관들을 장치해 뒀을까?

거기에 더불어 한 가지 기대감. 혹시라도 보물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동료들이 홀리는 모습을 보자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어서 이 지긋지긋한 곳을 나가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나가서 전장에 돈부터 넣어두고, 주점에서 술부터 한잔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객잔에서 온종일 잠만 잘 거다. 또 누구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날 생각을 했다. 다들 하고 싶은 바가 달랐다.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위해 검왕 앞에 모여 섰다. 이들 중에는 검왕이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준 이도 있었다.

모두를 대표해서 홍인이 검왕에게 말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뒤에서 관원들이 입을 모아 감사하다고 외쳤다.

검왕이 홍인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말했다.

“행복해라. 언젠가 자네가 운영하는 무관에 들르는 날이 오면 좋겠군.”

검왕은 그의 꿈이 무관을 하는 것임을 잊지 않았다.

홍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검왕이 관원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조언을 해주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 내 손에 죽는 게 아니라, 다른 욕심 많은 자에게 죽게 될 거다. 그냥 돈은 유산으로 받았다고 하고.”

무슨 뜻으로 해주는 말인지 잘 알았기에 관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의 전음이 다시 검왕에게 날아갔다.

―이런 악당 처음입니다.

검무극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회귀 전 삶에서 왜 이곳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는지.

관원들이 저 문 안으로 들어가서 모두 죽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렇게 보내주었고 놀랍게도 모두 비밀을 지키며 살아서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일이 있었을까?

어쨌든 이번 생에서 저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돈에 목숨을 걸었다고 깎아내릴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용감한 생존자들이다.

홍인이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기관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그였다. 별을 보고 솜이불을 덮은 게 저 신입 때문이라 여겨서일까? 어쩌면 지금 이렇게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것도 저 신입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인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를 든 그가 마지막 농담을 던졌다. 원래라면 검왕에게 할 농담이었는데, 감히 못 했던 것이었다.

“제 무관에 꼭 오십시오. 우리 막내분 자제들은 삼 개월 공짜로 가르쳐주겠습니다!”

그의 마지막 농담에 주위 관원들이 함께 웃었다.

그렇게 홍인과 관원들이 그곳을 나갔다.

검왕의 명령을 받았는지 기관 전문가 남자도 그들 뒤를 따라 나갔다.

이제 그곳에는 검무극과 검왕 둘만 남았다.

“이제 마음 놓고 자네에게 신발을 던질 수 있겠군.”

검왕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안은 어두우니까 조심해서 던지십시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검왕이 물었다.

“왜 저들을 배웅하지 않나? 내가 수하를 시켜 저들을 죽이면 어쩌려고?”

“정말 죽이려는 사람은 이런 말 안 하니까요.”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곳에서 무사히 내보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 사람들을 반드시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이곳 무관을 떠난 후에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텐데요.”

이들이 얼마나 큰 조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자네 덕분에 저들이 살았을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다면 제 덕이 아니라 사범님 덕분이죠.”

왜냐고 묻는 눈빛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왜 저를 지하로 데려가냐는 제 질문에 저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말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니, 결국 사범님께서 구한 셈이죠. 그러니 내가 저 관원들을 다 살려줬지, 그런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검왕이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볼까?”

“좋습니다. 잠시만요.”

검무극이 작업 도구를 넣어두는 상자에서 줄을 가져왔다.

자신의 허리에 묶고 다른 쪽을 검왕에게 건넸다.

“허리에 묶으십시오. 어떤 수법을 써서 우릴 떼어놓으려 할 수도 있으니까요.”

서로 흩어지지 말자는 의미였다. 줄을 받아든 검왕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이러는 거냐?”

“사범님께서 저를 지켜주셔야죠.”

검왕이 검무극을 응시하다 말했다.

“그 반대가 아니고?”

눈앞의 이 소교주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묶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더 놀랍게 여긴 것은 이 부분이었다.

“자넨 욕심을 내지 않는군. 어떻게 해서라도 혼자 들어가서 저 안에 있는 것을 차지하려 들 텐데.”

오히려 자신을 떼놓으려 할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줄을 내밀고 있다.

“무림의 보물은 다 주인이 있다지 않습니까? 제게 올 운명이라면 욕심내지 않아도 오겠지요.”

검무극은 지난 삶에서 충분히 느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할 때 욕심은 한 방울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욕심으로 내디딘 첫걸음을 끝까지 걷게 해주는 건 의지와 노력이다. 두 번째 걸음부터의 욕심은 발을 걸어 넘어뜨릴 뿐.

검왕이 허리에 줄을 묶었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충분히 여유를 두었다.

“자, 그럼 가시죠.”

두 사람은 어둠 속 통로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온몸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통로의 중간까지 걸어갔을 때였다.

시이이이이이.

양쪽 벽에 새겨진 글자와 문양에서 빛이 나는가 싶더니.

샥샥샥샥샥!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듯 정면에 창을 든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를 일렬로 막아선 그들이 일제히 창을 겨눴다.

착착착착착!

숫자는 모두 다섯!

뒤에서도 무인들이 나타나 창을 겨눴다. 앞에 등장한 숫자만큼 뒤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벽의 그림 속에 있던 무인들이다.’

그림과 똑같은 모습을 한 무인들이었는데, 물론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한 환술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뒤를 맡지.”

검왕이 뒤를 맡았고, 검무극이 앞을 맡았다.

착착착착착!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창을 겨눈 채 무인들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보통이 아니었다.

쉬이이익.

검무극의 검기가 놈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날아간 검기가 놈들을 지나갔다. 휩쓸고 지나갔어야 했는데, 말 그대로 그냥 지나갔다. 마치 연기처럼 실체 하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다가온 그것들이 창을 내질렀다.

챙챙챙챙챙!

하지만 검에 부딪친 창은 진짜였다.

검무극이 재빨리 검을 휘둘러 창을 잘라버리려 했다.

휘이익.

하지만 검기를 날렸던 순간처럼, 검은 창을 그냥 지나쳤다.

놈들이 공격할 때는 진짜 창이 되었고, 검무극이 그것을 베려 하면 허상으로 바뀌었다. 이런 환술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챙챙챙챙챙!

찔러오는 창을 막으며 기습적으로 공격했지만, 역시 검은 그들의 몸을 지나쳐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검무극이 뒤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물러났다. 뒤쪽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은 무작정 창만 찔러대는 인형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창술을 발휘했다.

뒤로 밀리던 두 사람이 결국 서로 등을 맞댔다.

“이런 곳으로 관원들을 데려오자고요?”

정말 데려왔다면 여기서 다 죽었을 거다. 정말 아수라장이 되었을 거다.

휙휙휙휙휙!

놈들의 싸움 방식이 바뀌었다. 그들이 창을 빠르게 내던졌다.

두 사람은 각자 검을 빠르게 휘둘러 막았다. 튕겨 나간 창은 빛처럼 부서져서 사라졌고, 다시 그들의 손에 창이 생겨났다.

그나마 검무극과 검왕에게 다행인 점은 등 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파훼법을 찾지 못하면, 여기서 내공이 말라서 죽는다!’

어떤 환술이나 사술에도 반드시 파훼법은 존재한다. 이건 변하지 않는 절대 원칙. 그렇다면? 파훼법은 이 공간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혈안정수와 신안술로는 그 파훼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을 쳐내면서 검무극의 시선이 벽의 그림을 향했다. 신안술을 발휘해서 창을 든 무인들이 있는 그림을 보았다.

그때 눈에 띄는 하나의 그림.

창을 든 무인들이 하나의 문양을 중심에 두고 그걸 지키고 있는 듯 서 있는 그림이 있었다.

‘혹시?’

그 문양은 벽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려서 그 문양 중 하나를 찔러넣었다.

그 순간, 창을 든 무인 하나가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쉭! 쉭! 쉭! 쉭!

거칠게 날아드는 창을 쳐내며 검무극이 소리쳤다.

“파훼법을 찾았습니다. 저 대신 버텨주십시오!”

검무극이 또 다른 곳에 그려진 문양에 검을 찔러넣었다. 또다시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무인.

앞과 뒤에서 일제히 검무극을 향해 창이 날아들었다.

검왕이 몸을 날려서 검무극에게 날아가는 창을 쳐냈다.

그 사이 검무극은 벽화에서 그 문양을 하나둘씩 찾아냈다.

문양에 검을 찔러 넣을 때마다 놈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그들은 더욱 거칠게 검무극을 공격했다.

그들은 미쳐 날뛰듯 공격했지만, 그 상대는 검무극과 검왕이었다. 해답을 찾아낸 그들을 줄어드는 숫자로 어찌 막아내겠는가?

그렇게 검무극은 마지막 문양을 찾아내어 검으로 찔렀다. 마지막 남은 창을 든 무인이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통로 끝에 숨겨져 있던 비밀 문이 철컹하면서 열렸다.

“파훼법을 어떻게 알았나?”

“원래 강력한 환술 일수록 파훼법은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법이지요. 다행히 예전 환술이라서 요즘 것처럼 파훼법을 꼬아두지 않아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검왕은 알 수 있었다.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과연 자신이라면 저 그림으로 파훼법을 유추할 수 있었을까?

“나 혼자 왔다면 파훼하지 못했을 거네.”

검왕이 솔직히 인정하자 검무극은 내심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 삶에서는 어떻게 여길 통과한 거였소? 그때는 누구와 왔소?

“그럼 이곳에 있는 보물 반은 제게 나눠주실 겁니까?”

농담 반, 진담 반 물었는데, 뜻밖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정말이죠? 어차피 죽일 거니 준다고 선심 쓰는 거 아니죠?”

그렇게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통로 끝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침묵을 깬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방금 그 약속 어기면 안 됩니다.”

단칼에 자르면 더 생각나서

내부는 황홀한 광채로 가득했다.

가운데 금덩이가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장식장에 진열된 보석들. 최상급 야명주는 물론이고 홍옥과 청옥, 비취, 진주와 수정까지. 그야말로 온갖 보석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어젯밤 꿈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나오더니, 횡재했습니다!”

검무극이 슬쩍 검왕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이 엄청난 보물에 놀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눈빛에 탐욕이 깃들지는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재물이 아니라는 것은 저 담담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싸움이 어렵다. 그는 평범한 악인이 아니었으니까.

“반 나눠주기로 한 거 후회하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했던 거보다 너무 많군.”

“무르기 없기입니다.”

검무극이 황금이 쌓인 곳에서 벌러덩 몸을 눕혔다.

“황금 속에서 잠들다! 아마 이런 황홀한 잠자리는 없을 겁니다.”

그러자 들려오는 검왕의 말소리.

“자넨 그 황금보다 솜이불을 더 좋아하잖아?”

검무극이 누운 채 고개만 들고 따지듯 물었다.

“누가 그래요?”

“아닌가?”

“저는 탐욕의 화신으로 불리는데요?”

“누가 그렇게 부르는데? 자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겠지.”

자신을 응시하는 검왕을 보며 검무극은 단호히 말했다.

“제게 보물을 주지 않으려고 슬슬 수작을 부리시는데요, 안 통해요. 여기 절반은 제 것입니다.”

검무극이 다시 편하게 머리를 뒤로 눕혔다.

이런 지하에 저렇게 높고 화려한 천장이라니? 그걸 올려다보고 있으니 절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누가 만든 곳일까? 옛날 어느 거부의 비밀 보고였을까?

아니다. 단지 거부의 보물 창고를 차지하기 위해 이 검왕이 땅을 파고 있었을 리 없다. 그가 원하는 건 분명 따로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누가 만들 걸까?

외부 진법도 그렇고, 통로의 환술도 그렇고. 그 시대 최고의 힘이 들어간 곳인데.

검무극이 누운 채 검왕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과 허리를 연결했던 줄은 끊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허리에 와 있는 걸 보고 검왕이 대답했다.

“아까 싸울 때 내가 끊었다.”

“싸울 때 편히 싸우라고 끊은 건 알지만 왠지 사범님과의 사이가 끊어진 것 같아 속상합니다. 설마 저와의 관계도 이렇게 칼 자르듯 자르실 건 아니죠?”

물론 검왕은 전혀 속상해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단칼에 자르겠지. 난 깔끔하게 자르고 잊는 사람이네.”

검무극이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묶이는 거보다 자르는 게 더 힘든 게 인간관계인데.”

그러면서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인간관계를 단칼에 자르면 그 사람이 더 생각나지 않습니까?”

검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하며 그 설명을 기다렸다.

“지금은 꼴 보기 싫고 피하고 싶어서 확 끊어버리면, 오히려 두고두고 계속 생각나더군요. 어휴, 안 보니 좋다 하면서 생각나고. 내가 잘 끊었지, 하면서 생각나고. 진작 끊을 걸 왜 그랬을까 하면서 생각나고.”

이번에는 검왕이 물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정리하나?”

“미우면 미울 수록 철수 작전을 잘 세웁니다.”

작전이란 말에 검왕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 관계 하나 정리하는 데 작전까지 세워야 하나?”

“그럼요. 막 자르면 평생 못 잊게 되니까요. 그래서 대부분 떠올릴 가치도 없는 관계가 끝까지 마음에 남잖아요?”

“확 자른다고 빨리 잊히는 게 아닙니다. 천천히 한 줌씩 마음을 덜어내는 거죠. 내가 그 사람하고 줄이 묶였었다는 것조차 잊을 때까지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미울수록 더 천천히.”

“그렇게 공을 들이면 그 사람 생각이 더 나겠다.”

“더 나죠. 한데 그 생각의 질이 다릅니다.”

“어떻게?”

“끈적거리지 않거든요. 갑자기 훅훅 치고 들어오지 않거든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게 하지 않거든요.”

검왕은 잠시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절 너무 단칼에 자르려 하지 마십시오. 그럼 계속 제 생각이 날 겁니다.”

검왕이 허리춤의 신발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이래놓고 날 단칼에 벨 거지?”

“아! 눈치가 어찌 이리 빠르십니까?”

검왕은 코웃음을 치면서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문이 있었다.

“그만 가자.”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이 보물들 좀 만끽하고 가시지.”

“우리가 만끽할 건 이 방에는 없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설마 그 문 열면 또 관문을 뚫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검왕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앞서 봤던 그 어둠의 통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봤던 기운보다 더욱 강력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기운도 앞서보다 더욱 강력했다.

“저 끝에 대체 뭐가 있습니까?”

그러자 검왕은 처음으로 이곳에 대해 말했다.

“이 무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

검무극이 여전히 어둠 속을 바라보며 검왕에게 물었다.

“좋게요? 아니면 나쁘게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렸겠지.”

두 사람이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그들을 모두 추적해서 없애버려!”

연백인의 말에 기석은 순간 흠칫했다. 자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연백인이 이렇게 쉽게 그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지하에 있던 관원들이 모두 떠났다는 보고에 연백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많은 이들을 그냥 보낸다고?’

처음에는 잘못된 보고라 생각했다. 지하의 그가 그들을 그냥 보내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당연히 살인멸구 할 줄 알았다. 한데 돈까지 줘서 보냈다고?

그는 그냥 보내줘도 상관없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황룡무관 지하에 보물 창고가 있다!

누군가 한 명만 입을 놀려도 승냥이 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연백인은 그들이 비밀을 지킬 거라 믿지 않는다.

설령 그곳이 이제는 비었다고 해도 와서 눈으로 확인하려 들 거다.

어쩌면 지하의 그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수작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제대로 엿 먹였어.’

어쨌든 다 찾아내서 죽일 거다. 당신이 말했잖아? 악인은 욕먹으면서 가는 거라고.

“백사단은 쓸 수가 없으니, 다른 청부 조직을 물색해서 청부를 넣겠습니다.”

“최대한 서두르게.”

이제 기석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백인이 악하게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수십 명을 죽이라는 명령은 그 누구도 쉽게 내릴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

“백룡반 관원의 부모라고 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연백인과 기석이 서로 마주 보았다. 자신은 관원의 부모를 직접 만나지 않는다. 그걸 수하가 모를 리가 없는데. 굳이 보고를 한다?

그때 문이 열렸다. 아직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는 일은 평소에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감히 제지하지 못하는 상대라는 의미인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연백인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눈길을 한눈에 잡아끄는 그야말로 우아한 여인이었다.

“제 딸 때문에 찾아뵈었어요.”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연백인의 굳었던 표정이 절로 펴졌다.

“따님이 누굽니까?”

“이안이에요.”

들어선 여인은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옆에 있던 기석이 전음을 보냈다.

―귀문의 서진과 함께 어울렸던 아이입니다.

전음이 아니더라도 연백인은 이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관원이 들어왔다고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그 미모가 엄마를 닮았겠구나.’

연백인이 흔쾌히 그녀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들어오시죠.”

그녀만 온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다른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문을 꽉 채우며 들어선 사람을 본 연백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철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 같은 근육질의 남자가 들어왔는데, 그는 감히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난 이안이 애비되는 사람이오.”

진짜 이안 아버지, 권마였다.

이제야 연백인은 알 수 있었다. 바깥의 수하들이 왜 이들을 사전에 막지 못했는지. 무서운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큰 주먹이라니?

권마는 들어서자마자 연백인에게 물었다.

“내 딸 지금 어디에 있소?”

권마와 일화검존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통천각의 보고가 있었다. 지하에 있던 관원들이 모두 은밀히 나왔다는 보고였다.

이젠 굳이 듣지 않더라도 검무극이 그들을 살려 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하로 솜이불이 들어가고, 다 나와서 별을 보고. 그리고 그 마지막은 모두 살려 보내주기. 정말이지 검무극다운 행보였으니까.

문제는 눈앞의 관주였다. 지금까지의 행적들과 동생인 연백진의 말을 들어봤을 때, 지하에서 나온 관원들을 살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일화검존과 함께 나선 것이다. 그들을 구해 주기 위해서.

그들은 마존님들께 맡깁니다.

분명 그런 마음이었을 테니까. 이 순간의 두 마존은 검무극과 이심전심의 마음이었다.

모습을 보인 두 번째 이유는 배후 세력에 대한 압박이자 경고였다.

우리가 왔으니 경거망동하지 마라! 소교주 옆에는 우리가 있다.

또 다른 고수가 지하로 힘을 보태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듯 저들도 이쪽의 움직임에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권마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듣자니 사범을 따라간 후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던데?”

연백인은 내심 당황했다. 이런 무서운 분위기의 아버지가, 저런 우아한 어머니가 찾아올 줄 몰랐다. 정말이지 이런 부모라면 굳이 딸을 무관에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거 같은데.

다시 기석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안은 지금 지하에 있습니다.

검왕이 검무극과 이안, 서진, 그리고 유광과 교석을 데리고 간 이후 그들은 수업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천마신교의 안가에 있다는 걸 알지 못했으니, 연백인은 당연히 지하의 검왕이 데려갔다고 여겼다.

“묻고 있지 않소? 우리 애 어디에 있냐니까?”

원래라면 이 무슨 무례냐고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감히 권마에게 그러지 못했다. 마기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권마의 기도는 연백인을 숨도 못 쉬게 압박하고 있었다.

그때 일화검존이 나섰다.

“관주께서 이해해 주세요. 이 사람 성격이 워낙 불같아서요.”

정말이지 어떻게 이렇게 대조되는 부부가 있을 수 있을까? 여인을 보면 미소가 지어졌고, 남자를 보면 인상이 굳혀졌다.

일화검존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딸을 보러 왔다가 어디 갔는지를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저도 걱정이 되는군요.”

외부 출입을 잘 하지 않았던 그녀였는데,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것은 누구보다 능숙했다.

그러자 기석이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백룡반 사범과 야외 수련을 나간 상태입니다.”

“백룡반의 다른 관원들은 수업을 받고 있던데요?”

“특별히 몇 사람만 뽑아서 나갔습니다. 특출난 실력을 발휘한 모양입니다.”

기석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며칠만 기다리면 돌아올 겁니다.”

“이렇게 외부로 수련하러 나가기도 하나요?”

그러자 이번에는 연백인이 대답했다.

“사범이 어떻게 가르치냐는 관주인 저도 참견하지 못합니다.”

연백인이 당당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교육을 맡겼으면 믿어주셔야지요.”

일화검존이 좋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부부가 급한 마음에 실례했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어요.”

권마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맞소, 우린 당신들을 믿고 아이를 맡긴 거요.”

의미심장한 이 말은 연백인에게 마지막 살 기회를 주는 말이었다. 절대 관원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하지만 지금의 연백인이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집무실을 나가자 그제야 연백인이 안도했다. 권마의 기세가 어찌나 강렬했는지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안이란 관원이 워낙 미모가 출중해서 그렇습니다.”

권마의 반응은 이해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딸을 두었다면 당연히 신경이 곤두서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찾아와서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이게 다 무관의 관주를 무시해서다. 정말이지 절세신공만 익히면 이런 수모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뒤에 데려간 백룡반 애들만 지하에 있겠군.”

“그렇습니다.”

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관원들을 내보낸 걸로 봐서 이제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틀림없었다.

“저 부부는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보통 고수가 아닌 것 같았는데.”

반면 연백인은 이미 다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딸을 데리고 있는 사람이 책임져야지.”

검왕에게 처리를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자넨 최대한 빨리 관원들부터 처리해.”

* * *

죽립을 눌러 쓴 기석이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청부를 넣으려는 쪽은 흑호파(黑虎派)였다. 백사단과 마찬가지로 돈만 맞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 주는 청부조직이었다. 백사단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이번 청부를 넣기에는 제격이었다.

보통 청부 조직과 접선할 때는 아주 한적한 곳에서 만나거나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만난다.

오늘은 저잣거리의 다루에서 만나기로 했다.

행인들 사이를 걸어가던 기석은 저 앞에 있는 다루를 쳐다보았다. 약속한 창가 자리에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향해 걸어가던 그때.

‘어? 저들은?’

저 멀리 연백인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이안의 부모들이 있었다. 여인이 자신을 알아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무심코 인사하려던 기석이 흠칫 놀랐다.

‘죽립을 쓰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

옆에 있던 남자는 손을 흔드는 대신 기석 쪽으로 주먹을 천천히 뻗었다.

저 멀리서 천천히, 수많은 사람 사이로 내밀어지는 주먹.

‘뭐 하는 거야?’

기석은 자신에게 경고한다고 여겼다. 내 딸 어서 찾아오라고.

그리고 그 경고는 간지러웠다. 아니, 실제로 간지러웠다.

기석은 가슴에서 참을 수 없는 간지럼을 느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가 옷깃을 열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기석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가슴이 움푹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윤곽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거대한 주먹 모양이었다.

가슴을 꽉 채운 거대한 주먹.

하지만 이내 그 윤곽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주먹 모양의 윤곽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사라졌을 때, 길 가운데 멍하게 서서 가슴을 내려다보던 기석은 천천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미 절명한 그의 고개가 뚝 떨어졌다.

날아가는 소리도, 비명도, 그리고 몸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침묵의 주먹이었다.

혼자가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면

검무극과 검왕이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이번에도 벽에는 온갖 문양과 글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앞서 봤던 그림과는 화풍이 비슷하면서 달랐다. 같은 사람이 그린 것 같진 않지만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걸로 봐서.

‘사형제들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그림에서 파훼법을 찾아낸 만큼, 글자 하나 예사롭게 넘기지 않았다.

“여길 보십시오.”

검무극이 가리킨 곳에 그림이 있었다. 앞서 파훼법이 되었던 그 문양이 이곳에도 그려져 있었다.

“이곳을 만든 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문양인 것 같습니다.”

검왕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통로의 중앙쯤에 도달했을 때였다.

스스스스슷.

진법이 발동하는 것을 느끼던 그 순간, 주변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여긴?’

발밑에 반사되는 푸른 하늘. 마치 하늘에 서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곳은 검무극이 기도를 발출했을 때의 그곳이었다.

그래서 아래는 바다였다. 위에서는 한없이 맑고 평화롭지만, 아래에는 끝이 없는 심연의 바다.

“사범님!”

검무극이 소리쳐 불렀지만, 검왕은 그곳에 없었다.

“줄을 다시 묶었어야 했나?”

물론, 농담이었다. 줄을 묶는다고 검왕과 이 공간에 같이 들어오진 못했을 테니까. 이 관문은 각자 넘어야 하는 관문이 틀림없었다.

“나만 고생시키고 놀면서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죠?”

검무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지던 그때, 정면에 누군가 모습을 보였다.

놀랍게도 상대는 검무극 자신이었다. 또 다른 자신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검무극은 놀라지 않았다.

옛날 환술이나 진법에서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이런 방식이 곧잘 사용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관문은 내면의 강함을 시험하는 관문이리라.

이곳은 나의 마음속이다. 그러니 나 자신을 믿어라.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검무극이 먼저 자신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그 얼굴을 쳐다본 검무극이 자신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이란 인사에 또 다른 검무극이 의아한 눈빛을 지었다.

“가끔 너를 보거든.”

다른 사람이 들으면 미친놈인가 싶은 말이었지만, 실제 검무극은 혼자만의 휴식을 취할 때면 가끔 회귀 전 외롭던 시절의 자신과 마주 서곤 한다.

언젠가는 커다란 구멍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이 구멍에 빠지지 말라는 말을 자신에게 해준 적도 있었다.

“너, 오늘은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왔구나.”

또 다른 자신의 눈빛이 반짝이던 그 순간, 서 있던 장소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검무극은 달리고 있었다.

‘여긴?’

그가 향하는 곳은 천마신교 내 천마전이었다.

‘아버지!’

그날이었다. 화무기에게 천마전 식솔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던 그날!

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며 검무극은 무작정 천마전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었는데, 그때의 자신은 너무 흥분해서 다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쓰러져 있는 시체들. 무인들은 물론이고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이들까지, 천마전의 모든 식솔이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더욱 흥분했다.

‘외원이 멀쩡한데 대체 어떻게 천마전이 뚫린 거지?’

마치 그 의문에 답을 하듯,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천마전을 둘러싼 담장 위에 팔짱을 낀 채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사람, 그는 예전 섭혼마존이었다.

과거 그날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지금 이 진법 속에서만 보이는 환상.

그를 배신자라 여겼으니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리라. 지금 이곳은 자신의 마음이었으니까.

저 멀리 화무기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을 향해 차갑게 웃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말 한마디 걸지 않고 날아든 한 줄기 검기.

자신의 앞으로 이안이 몸을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이안아.’

이안의 가슴을 꿰뚫은 검기가 자신의 가슴까지 꿰뚫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포개진 채 쓰러졌기에 이안의 뜨거운 피가 자신의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정말 무기력했기에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그날이 진법 안에서 생생히 재현되고 있었다.

그때 쓰러진 자신에게 누군가 걸어와서 내려다보았다. 그는 화무기도 섭혼마존도 아니었다.

그는 커다란 대도를 등에 찬 혈천도마였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의 옆으로 극악소마가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가면 속 그의 웃음이 낯설었다. 다른 마존들이 죽어가는 자신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권마의 큰 주먹이 보였고, 화장 짙은 일화검존의 얼굴도 보였다. 취마의 술 냄새가 진동했고, 마불의 몸에서는 황금빛이 아니라 시뻘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독왕의 허리에 찬 독주머니의 그림들은 지금의 귀여운 모습이 아니라 무섭게 형상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을 비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 진법이 자신을 현혹하고 있음을. 그날 모두가 배신자였다고.

―분노해라!

그래서 자신의 피를 용암처럼 끓게 하려는 것을.

회귀를 하지 않은 평범한 자신이었다면 이 괴로움과 증오심이 자신을 지배했을 것이다. 진법이 뿜어낸 알 수 없는 기운이 끝없이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의심과 분노를 끌어내고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은 절대 막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이 진법은 바로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의 분노와 증오심을 자극해서 미쳐버리게 하는 혈파광혼진(血波狂魂陣)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에겐 통하지 않았다.

‘애초에 난 처음 회귀했을 때부터 저들 모두가 배신자라 생각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저들을 진심으로 대했느냐고? 이번 인생은 지난 인생과는 다른 인생이니까.

지난 삶에서 누가 배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 삶의 마존들은 그때와는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로 만들었으니까. 그들의 운명은 모두 바뀌었다.

검무극이 비웃고 있는 마존들을 올려다보며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어디 구경났습니까?”

검무극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이안의 시체도 사라졌고, 몸을 꿰뚫은 부상도 사라진 후였다.

검무극이 웃으며 그들을 대하자 진법은 또 다른 약점을 파고들었다.

―정말 저들을 다 지켜내겠다고?

돌아보니 어느새 다른 이들까지 있었다.

마존들뿐만이 아니라 이안과 서대룡, 장호에 형, 거기에 친구들까지 모습을 보였다. 비사인과 진하군, 진하령, 한설까지. 호위무인들과 조춘배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

―넌 오만해. 자신 한 몸 지키며 살아가는 것도 힘든 게 인생인데, 저 많은 사람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니.

또 다른 자신이 검무극을 향해 걸어왔다.

―인정해. 힘들다고. 정말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고 인정하라고.

마존들이 검무극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발밑의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까지 모두 달려들어 검무극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우릴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게 검무극은 심연 속으로 잠겨 들었다.

또 다른 검무극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순간.

푸아아아아악.

검무극이 다시 물속에서 튀어 올랐다.

그를 끌어당겼던 모두가 검무극을 받쳐 들고 물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들은 조금 전 검무극을 끌어당기던 진법이 만든 이들이 아니었다. 지금 검무극과 함께하는 이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법은 검무극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했다.

“난 힘들지 않다.”

―너 자신을 속이지 마라.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힘들다고 인정하는 순간, 진법에 빠진 사람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동시에 이 진법의 파훼법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진법이 납득할 수 있도록.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 혼자가 더 힘들다는 걸 알게 되면.”

이번에는 검무극이 또 다른 자신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 검무극 뒤에는 모두가 서 있었고, 또 다른 검무극은 혼자였다.

검무극이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지 진법에서 만든 환영이 아니었다. 그는 회귀 전 자신의 모습이었다.

“네가 있었기에, 이 사람들을 만들 수 있었지. 진심이야.”

그랬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힘들지 않냐고? 힘들지. 혼자 어디론가 가고 싶지 않냐고? 때로는 가고 싶지. 한데 네가 나라면 너도 알 거다.”

이제 검무극은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이 관문을 만든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혼자인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을 테니까. 홀로 그 많은 밤을 지새 본 적도, 자신의 발자국과 대화하며 끝없는 길을 걸어본 적도 없을 거야. 그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보면 안다. 혼자만의 시간이 그렇게까지 좋지도, 자유로운 느낌을 주지도 않다는 것을. 함께 가는 이들이 있을 때 비로소 그 혼자만의 시간이 가치를 지닌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

검무극이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신에게, 그리고 진법에게 말했다.

“내겐 안 통하는 진법이니 이만 물러가시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놀랍게도 진법이 파훼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돌아서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마음에서 탄생해서 마음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이었다.

“다들 본교에서 봅시다!”

다른 이들이 먼저 사라졌고, 마존들이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마음이 만든 것이었기에 검무극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라졌다.

혈천도마는 대도를 땅에 박은 채 앉아서 술잔을 내밀면서, 극악소마는 가면을 벗으면서. 취마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 자빠지면서. 미안해, 형. 독왕은 쪼그리고 앉아 독충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일화검존은 검을 뽑아 자신에게 겨누면서. 마불은 불상을 만들면서. 섭혼마존은 반갑게 인사하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그 비웃음을 지으시면서.

아버지가 사라지는 순간 진법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검무극은 다시 어둠 속 통로에 서 있었다.

“후우.”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통로 끝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끝에 있던 문이 열렸다.

오히려 첫 번째 관문보다 쉽게 이번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누구보다 굳은 마음을 지녔기에 혈파광혼진은 그의 정신을 파고들지 못했다.

하지만 검왕은 아직 그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검무극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을 등진 채 자신이 지나온 통로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만 헤매고 어서 나오시오.”

검무극이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검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한숨에서 이번 관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붙잡고 심연으로 끌어당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다행히 떨쳐내셨군요.”

검무극이 먼저 나와 있는 걸 보며 검왕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안 힘들었냐?”

“저야 워낙 단순한 인생이라서요.”

과연 그럴까? 하는 눈빛을 보내던 검왕이 뒤쪽에 열린 문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곳에서 풍겨나는 냄새는 무림인이라면 참을 수 없는 냄새였다. 영약이 내는 그 특유의 기분 좋은 향.

“왜 혼자 들어가지 않았지?”

“그걸 참을 정도의 의리는 있으니까요.”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의리 인정해서 이번에도 반 준다.”

검왕이 문을 활짝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검무극과 검왕이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 방보다 더 큰 감격이 두 사람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그 말씀이 맞았네요. 우리가 만끽할 것은 그 방이 아니었다는 말씀.”

이번 방이야말로 무인을 위한 공간이었다. 사방의 장식대에 온갖 영약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말 반 가져도 됩니까?”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인데, 그래도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곳에 있는 영약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물론 구할 수는 있다. 영약 하나에 수만 냥, 수십만 냥, 수백 냥을 치른다면.

검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 정도 의리는 있으니까. 자, 배고프니까 일단 좀 먹자. 남겨봐야 남 좋은 일만 할 거다.”

검왕이 앞에 놓인 영약을 검무극에게 던졌다.

그냥 막 던진 영약이 놀랍게도 만년설삼과 맞먹는 효능을 지닌 신화단(神火丹)이었다.

“전 주는 영약 절대 사양하지 않습니다.”

“반은 네 것이라니까.”

“감사히 먹겠습니다.”

검무극이 신화단을 씹어 삼키며 물었다.

“한데 싸워야 할 상대에게 영약을 막 줘도 됩니까?”

“그래서 나도 먹잖아?”

검왕도 영단을 씹어 먹었다.

검무극이 먼저 자리에 앉아 운기하며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다.

검왕도 운기하려다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그 앞에 서서 가만히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약효를 녹이느라 운기 중이었으니 지금이 공격할 절호의 기회. 자연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운기할 때 내가 기습하면 어쩌려고?”

검무극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왕이 허리를 숙여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운기하면서 말할 수 있지? 움직일 수도 있고.”

그래도 말이 없자 검왕이 눈을 확 찌르려고 했다. 그때 검무극이 고개를 홱 돌려 피하며 눈을 떴다.

“그런 분 아니라는 것 믿거든요.”

검왕이 역시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기 중에 말도 하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일반 무리를 이미 넘어선 소교주였다.

검왕이 옆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제가 먼저 끝내고 공격하면 어쩌려고요?”

검왕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럼, 그러든지.”

정말 검무극을 믿는다는 듯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검무극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운기에 집중해서 약효를 모두 녹였다.

운기를 마친 후에 검왕이 또 다른 영약을 검무극에게 던졌다.

“이것도 맛있는 거다.”

이번 영약은 적운단(積雲丹)이었다.

“약효의 성질로 볼 때 이거 두 개는 같이 녹여도 될 것 같은데?”

그가 다른 영단도 검무극에게 던졌다. 이번 것은 소명단(昭明丹)이었다.

“정말 다 먹자고요?”

“싫어? 싫으면 말고.”

검왕이 돌려달라고 손을 내밀자, 검무극이 들고 있던 영단을 연속해서 입에 넣었다.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은 영약을 복용하고 녹이고, 또 복용하고 녹이기를 반복했다. 영약을 먹고 배가 부른 날이 올 줄이야.

그렇게 운기를 마쳤을 때 두 사람의 눈빛은 더없이 맑고 깊었다.

특히 검무극의 내공은 그의 기도와 같았다. 너무나 맑고 깊어서 이제 그 양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곳의 영약은 남았기에 검무극이 자기 몫을 따로 챙겼다.

“누굴 주려고 그리 챙기나?”

“어디 줄 사람 없겠습니까?”

“남의 입에 넣어봤자 다 헛수고다. 그냥 먹을 수 있을 때 너나 다 먹어.”

하지만 검무극은 품에 고이 챙긴 후 다시 문 앞에 섰다.

앞서보다 더욱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어둠의 통로.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여기가 마지막 관문이란 것을.

저 너머에 검왕이 바라는 것이 있으리라. 이 지하보고의 핵심은 보물도 영약도 아닌 바로 저곳이다.

“이 시점에서 고백하셔야죠. 사실 나는 이곳 관문을 모두 통과할 수 있지만 널 시험하기 위해서 힘든 척 연기했다. 이제 너에 대한 시험이 끝났으니, 마지막 관문은 내가 그냥 통과시켜 주겠다.”

검왕은 다른 고백을 했다.

“나, 아까 관문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

“…….”

검무극이 먼저 어둠 속 통로로 들어가며 그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반 주십니까?”

이제야 마교 소교주 같군

연백인은 기석의 시체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연백인은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감히 수하가 자신의 앞에서 헛소리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믿기 싫어서였다.

게다가 길을 걸어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죽었다고 했다. 일반 사부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실력을 지닌 그였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죽음이었다.

그가 있는 곳으로 기석의 시체를 검시했던 의원이 들어왔다. 그는 이 고장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이었다.

“어떻게 죽은 거요?”

인사도 생략한 채 사인부터 물었다. 의원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내부를 살펴보니 오장육부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연백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이었다.

“독에 당한 거요?”

“아닙니다. 외부에서 강한 충격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연백인의 시선이 기석의 시체를 향했다. 그의 몸 어디에도 충격을 받은 흔적은 없었다. 하다못해 멍든 자국도 없었다.

“강력한 내가중수법으로 내부에만 충격을 가한 것 같기는 한데. 이렇게까지 외부에 흔적이 없는 건 저도 처음 봅니다.”

게다가 목격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를 직접 때린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멀리서 주먹을 날려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인데?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경지였다.

흉수가 누군지를 생각하자 연백인은 두 사람을 떠올렸다.

먼저 떠오른 사람은 바로 집무실로 찾아왔던 그 부부 중에 남편이었다. 아마 병장기에 찔려 죽은 것이 아니라 외부 타격으로 죽었다고 하니, 그 남자의 커다란 주먹이 떠오른 모양이다. 워낙 인상적인 상대였으니까.

‘한데 그가 기석을 죽일 이유가 없는데?’

다음으로 떠올린 사람은 지하의 그 사람이었다.

‘설마 그 사람 짓인가?’

관원을 풀어준 것도 혹시 이런 일을 예상한 걸까? 이번 일을 꼬투리 잡아서 자신을 버리려고? 아니면 자신이 풀어준 이들을 죽이려 했다고 정말 화가 나서?

동기가 무엇이든 이런 놀라운 실력으로 기석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주위에 그 사람뿐이었다.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그럴 만한 고수를 보낼 수 있는 사람도 그가 유력했고.

‘아무리 그래도 내 수족을 이렇게 죽이다니!’

이 죽음이 자신을 향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다음은 너라고.

두려움 다음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곳은 내 무관인데. 내 땅이고 내 사람인데.’

그곳을 나온 연백인은 곧장 비무대로 향했다.

정말 그가 한 일인지 확실히 알아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서라도 그의 화를 풀어야 한다. 동생까지 죽이고 가는 길이었으니까.

그가 비무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한 사람이 그가 지하로 내려가는 걸 제지했다.

바로 검왕의 수족이었던 기관 전문가 사내였다.

“내려갈 수 없습니다.”

“비키게. 꼭 만나 봬야 하네.”

무력 행사를 해서라도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때 기관진식 사내가 옆을 돌아보았다. 연백인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관중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사람이 있는 걸 보지 못했다니?

남자는 의자에 앉아 두 팔을 자신의 양쪽 무릎에 걸쳐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뭔가를 끼고 있는 걸까? 햇살에 하얗게 반사된 그것만 눈에 들어왔다.

“그만 돌아가십시오.”

다시 기관 전문가 사내에게 고개를 돌려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연백인이 알 수 없는 기운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 멀리 앉아 있던 남자는 바로 옆에 서 있었다. 그가 이곳까지 오는 기척을 아예 느끼지 못했다. 마치 공간을 이동한 사람처럼, 아니 원래 처음부터 여기 서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보면 얼굴부터 보기 마련인데 이 남자에게는 시선이 몸으로 먼저 갔다.

긴 팔과 긴 다리, 그는 정말 잘 빠진 몸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멋진 근육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정말 몸에 불필요한 근육이 단 한 부분도 없다는 말이 있다면 그 표현의 주인은 이 남자가 되어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양 주먹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는데 다친 것인지, 아니면 손을 보호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을 다 보고 난 후 마지막에 그의 얼굴을 보았다. 사실 얼굴부터 봐야 했다. 그랬다면 이 사람 앞에서 한가롭게 몸이나 훑어보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공허한 듯 보이는 그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연백인은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상대가 기도를 내뿜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말 많은 사람을 죽여 본 사람의 눈빛. 이 남자 뒤로 불구덩이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지옥이 보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연백인은 허둥지둥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얼마나 무서웠으면 잠깐 기억이 끊어졌다. 어떻게 돌아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다시 그곳을 돌아봤을 때,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검무극과 검왕은 어두운 통로를 함께 걸었다.

이번에는 무슨 관문이 기다리고 있을까? 앞서보다 더 강력한 것이라면 통과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이곳 통로의 벽에도 알아볼 수 없는 온갖 글자와 문양, 그림들이 있었다.

“여기도 그 문양이 있습니다.”

앞서 봤던 문양이 또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이 관문을 설계한 이들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문양일까?

“이게 무슨 문양인지 알고 계시죠?”

“왜 안다고 생각하나?”

“느낌입니다. 잘 모르는 일을 하셨을 것 같지 않아서요.”

“나를 높이 봐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겸손까지 하십니다.”

“아니라니까!”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지만 두 사람은 날카롭게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통로의 중간쯤 왔을 때 관문이 시작되었다.

스스스슷.

진법이 발동하며 주변이 바뀌었다.

황량한 황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바닥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열기가 저 멀리 지평선에서 일렁였고 바람은 먼지를 안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번 진법은 마음에 듭니다!”

검무극이 기뻐한 이유는 검왕이 옆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을 합쳐서 뚫어내야 하는 관문인 모양입니다. 외롭지 않아서 좋은데요? 여길 보십시오.”

검무극이 가리키는 곳에 하나의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모두를 죽이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미리 경고까지 하는 걸 보니 피를 많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들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땅을 진동했고, 함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영약 방을 앞에 둔 이유를 알겠습니다.”

달려드는 숫자가 엄청났다. 그야말로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자네 지금 기뻐하는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적을 보니 살짝 흥분되는데요?”

물론 겁이 나서 흥분하는 게 아니었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기쁨이었다. 진짜 사람이 아니라 진법이 만들어낸 것이니, 거침없이 베어도 되는 적이었다.

“피 볼 생각에 흥분하는 걸 보니 이제야 마교 소교주 같군.”

“감추느라 혼났습니다.”

검무극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쪽 편은 제가 맡겠습니다. 아, 함께 싸워서 좋은 점이 뭔지 아십니까? 벽을 등지고 싸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뒤를 믿는다는 의미였는데.

“그 벽이 자네 쪽으로 무너지면 어쩌려고?”

“솜이불처럼 부드러울 겁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흑마검에서 한줄기 검기가 날았다.

쉬이이이이익.

앞서 달려오던 이들이 몸을 날려 검기를 피했다. 하지만 뒤에 있던 이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검기에 휩쓸렸다.

검무극은 상대가 검기를 어떻게 피하는지를 보면서 그들의 무공 수준을 파악한 것이다.

이 한 수로 검무극은 확신했다.

“첫 번째 단계입니다. 내공을 아껴 상대하십시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이들이 다가 아님을 확신한 것이다.

검무극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흑마검이 그들을 베어 넘겼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심장이 찔린 적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내공을 아낀다고 무조건 검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만큼 체력소모가 뒤따르는 법이니까.

쇄애애애액!

가까이서 날린 검기를 그들은 피하지 못했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검기에 휩쓸려 죽었다.

하지만 놈들은 쓰러진 시체를 넘어 끝없이 몰려들었다.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싸우던 중에 검무극은 검왕 쪽으로 돌아보았다.

검왕의 검이 번쩍하는 순간, 적들 십여 명이 한 번에 쓰러졌다. 검기를 발출하지 않는데도, 검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 적들까지 목이 베어졌다.

‘무형검기(無形劍氣)!’

검무극은 검왕의 신위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회귀 전 천하제일인이 된 검왕의 이름을 드높여 준 것이 바로 저 무형검기였다.

검기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저것을 피하는 것은 그냥 검기에 비해 몇 배는 더 어려웠다.

자신감일까? 검왕은 자신이 볼 수 있는 이 싸움에서 무형검기를 사용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이 몰려오더라도, 이쪽은 검무극에 무형검기까지 쓰는 검왕이었다.

순식간에 그 많던 적들이 모두 쓰러졌다.

스스스스스.

쌓여 있던 시체가 모두 사라졌다.

쉴 사이도 주지 않고 저 멀리서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적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보다 달려오는 속도가 빨랐다.

“무형검기는 처음 봅니다.”

“피할 수 있겠어?”

“작전을 더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작전?”

“마지막 순간 사범님을 망설이게 할 그 작전 말입니다.”

그러자 검왕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내 작전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거다.”

“무슨 말씀입니까?”

“망설여줄 것처럼 굴다가, 망설이지 않고 벨 거거든.”

“그걸 말씀해 주시네요.”

“헷갈리게 하려고.”

이 사람과의 싸움은 마지막 방을 들어간 후에 이뤄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필요해서 데려왔다. 단지 이 관문들을 통과하기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방에 무엇이 있는지만큼이나, 검무극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서 나와 함께 저 방에 들어갑시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적들이 수백 개의 칼날을 번뜩이며 쇄도해 왔다. 아까보다 숫자는 줄었지만 기세는 더욱 날카로웠다.

두 사람은 침착하게 그들을 상대했다. 검무극은 구화마공을 사용하지 않았고, 검왕 역시 무형검기만 사용할 뿐 자신의 독문무공은 사용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고수들이었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몰려드는 숫자는 많았고 그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두려움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어떻게 잘 상대하더라도 문제는 내공이었다. 어지간한 고수는 이 두 번째 공격을 마무리 짓기 전에 내공이 말랐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내공이 넘쳐나고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싸움만으로는 내공을 썼다는 표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검왕 역시 팔팔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적들의 수준은 분명 달랐지만, 두 번째 적들도 앞서와 똑같이 쓰러져나갔다.

검무극과 검왕의 무공 앞에 그 실력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상대적인 기준으로 냉정히 따지면 처음 적도 하수고, 두 번째도 하수였다.

두 사람이 다시 그들을 모두 해치웠다.

이번 역시 쌓여 있던 시체들이 모두 사라졌다.

또다시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앞서 보다 천천히 왔다. 마치 천천히 와서 죽여주겠다는 것처럼.

“이번이 마지막 같습니다.”

아무리 진법이지만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다. 지금까지의 공격만 해도 이 진법에 막대한 돈과 내공, 그리고 심력이 들어갔을 것이다.

“마지막이라 아쉬워하는 거 같은데?”

“솔직히 아쉽습니다. 사범님과 함께 싸우니까 너무 재미있는데. 지금부터 열 단계만 더 나와주면 좋겠는데.”

“내 무공을 훔쳐보고 싶어서겠지.”

“만날 제 의도만 다 들키고, 사범님 눈치 빠른 것만 알게 되네요.”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검왕이 바깥 이야기를 꺼냈다.

“바깥 걱정은 안 되나? 방패가 여기 있는데, 지켜야 할 대상은 밖에 있잖나?”

“제가 걱정해야 합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말했다. 말할까 말까 고민이 살짝 드러났다.

“지금쯤 다른 사람이 도착했을 거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말한 다른 이가 또 다른 십이지왕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곳으로 내려올 수도 있고, 자네 사람들을 붙잡아두려 할 수도 있지.”

어떻게 움직일지 자신도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말로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십이지왕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고 있지만, 꽤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이전에도 그들이 의견대립을 하기도 한다는 걸 알았는데, 오늘 더 확실해졌다.

“자네 사람을 붙잡아 갈 수도 있다는데 왜 웃나?”

“기뻐서요. 지금 절 걱정해서 말해주시는 거잖아요?”

지금 이런 여유 부릴 때인가 하는 표정으로 검왕이 이안을 언급했다.

“심장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미. 이번에는 검무극이 솔직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른 방패가 와 있습니다.”

검왕이 놀라 물었다.

“마존들이 와 있나?”

“사범님을 처음 본 그날, 바로 불렀죠.”

그가 나중에 십이지왕 중 일왕이 된다는 걸 알았기에 부른 거지만, 지금 검왕에게는 자신을 높이 평가해서 부른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세 번째 적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이번 적들은 검기를 발출했다. 이전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수십 가닥의 검기가 사방에서 날아들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그들의 검기에 실린 강력한 살기는 주변 공기를 차갑게 식게 했다.

거미줄처럼 수놓는 검기 사이로 검무극과 검왕이 허공을 누볐다. 아무리 촘촘한 검기의 그물을 짜도 두 사람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들이 만든 검기 사이로 진짜 검기란 이런 것이다, 하는 검기들이 날았다.

검이 번쩍일 때마다 검기의 그물이 찢겨나갔다. 큰 그물은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마지막 검기를 날리던 적에게 앞뒤로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박혔다. 앞에서는 검무극이, 뒤에서는 검왕이 검을 찔러넣은 것이다.

몸을 뚫고 나간 검날이 서로를 겨눴다.

스스스스스스.

쓰러진 시체들과 함께 검에 찔린 마지막 적도 사라졌다.

그러자 두 사람은 서로가 검을 겨눈 모양이 되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검무극이 먼저 미소를 지으며 검을 거두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네도.”

과연 진법은 여기까지라는 듯 더는 적들이 몰려들지 않았다.

“아마 이 진법이 생긴 이래 가장 빠르게 파훼한 기록을 세웠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시체가 사라졌지만 두 사람 주위에 있던 황무지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진법은 파훼되지 않았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죽이지 않은 적이 있는지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시체는 모두 사라진 후였고, 그 너른 황무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로운 적이 출현하지도 않았다.

그곳에 남아 있는 건 처음 본 푯말뿐이었다.

―모두를 죽이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 아닙니까?

모두를 죽이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고?

검무극과 검왕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함께 이곳에 온 상대까지 죽이라는 의미군.”

검왕의 인상이 확 굳어지면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뭐 이따위 진법이 있어?”

검왕이 푯말을 사정없이 차버렸다. 산산조각이 난 푯말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그걸로 분이 안 풀리는지 푯말의 막대기까지 뽑아서 뚝뚝 분질렀다.

반면 검무극은 말없이 검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네는 화 안 나나?”

“제가 낼 화까지 다 내주셔서요.”

“우린 이런 거 딱 질색이거든.”

그렇게 화를 내던 검왕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가 싶더니.

그가 부드럽게 철검을 뽑았다.

쉬이이익.

검무극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무형검기가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검왕이 검을 뽑아 든 채 말했다.

“지금 할 텐가?”

“아니, 화풀이를 왜 제게 하십니까?”

그가 검을 뽑자 순식간에 주위의 공기가 달라졌다.

검무극은 느꼈다. 흑마검이 울고 싶어 한다는 것을. 검왕을 만난 이후 지금껏 내내 눌러둔 흑마검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할 겁니다.”

그 순간 검무극은 보았다. 찰나간 검왕의 두 눈에 스치는 어떤 감정을. 그건 분명 안도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안 하면? 어쩌자고?”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안 나가면 되죠.”

“뭐?”

“나가지 말고 여기서 살죠.”

검무극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걸 만들었을 사람에게 하는 외침이었다.

“야! 우린 안 나간다!”

그 말에 검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만, 이런 상황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자넨 정말…….”

검왕은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검무극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검왕에게 말했다.

“그 신발 한 짝만 잠시 빌려주십시오.”

“내가 자네에게 신발을 던지게 할 말을 하려고?”

“아뇨, 그랬다면 두 짝 다 달라고 했겠죠.”

대체 뭘 하려고? 하는 눈빛으로 검왕이 허리춤에 찬 신발을 건네주었다.

검무극이 잠시 눈을 감고 뭔가를 비는가 싶더니 신발을 위로 던졌다. 허공으로 높이 올라간 신발이 땅에 떨어졌다. 검무극이 신발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이쪽으로 가보죠.”

검왕이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신발을 던져 방향을 정하는 점을 칠 줄은 몰랐다.

“네 신발로 안 하고?”

“흙 묻잖아요.”

검무극이 신발에 묻은 흙을 탈탈 털며 돌려주자, 검왕은 앞서 참았던 말을 결국 했다.

“자넨 미친놈이야.”

드디어 그 말을 듣자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미친놈이라는데 왜 웃어?”

“제게 미친놈이라고 한 사람과는 대부분 끝이 좋았습니다.”

“그 말을 한 놈도 미친놈이겠지.”

검무극이 더욱 크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검왕이 검을 검집에 다시 넣은 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당장 싸우지 않아도 되어서였을까? 검왕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아까 한 말 정정해야겠습니다. 이 진법이 생긴 이래 가장 늦게 깨야 할지도요.”

“어차피 이 진법은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하긴 그렇겠군요.”

다른 곳에 이 진법이 설치되어 있을 거 같진 않았으니까.

두 사람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황무지 끝은 높은 절벽이 막고 있었다.

“진법이 만든 세상은 여기까지군요. 아마 다른 방향도 다 이 정도 걸어가면 절벽으로 막혀 있을 겁니다.”

검왕은 검무극이 진법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기 위해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체 뭘 하려고?’

분명 뭔가 계획이 있는 눈치였는데. 그때 검무극이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오늘은 여기서 묵어가죠.”

그러면서 주위에 널린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모닥불을 피웠다. 이곳이 진법 안이라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무슨 미친 짓이냐고 했겠지만. 아니, 애초에 남과의 비교는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함께 지하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불씨가 타닥거리며 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말라버린 바위와 풀들이 일렁이는 불빛에 물들었다.

“그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검왕이 그 옆에 벌러덩 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검무극도 모닥불 건너편에 편하게 누웠다.

“하루가 뭡니까? 한 일 년 쉬어도 됩니다. 우리 좀 쉬자고요.”

검왕의 얼굴에도 그래, 그러자는 표정이 피어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쉬는 그였다. 그 휴식을 진법 안에서, 그것도 마교 소교주와 할 줄은 몰랐지만.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 아닙니까? 푹 쉬십시오.”

“내가 쉴 새 없이 달려온 건 어찌 알고?”

“저와 만났으니까요. 저도 쉬지 않고 달려왔거든요. 달리는 사람은 달리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죠.”

검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이 품는 색이 달라졌다. 황혼의 빛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 이제 새로운 빛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그날 별은…… 나도 좋았다.”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검왕을 쳐다보았다. 그날 별을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누구를 떠올렸을까?

“왜 이들과 손을 잡은 겁니까?”

지금까지 봤던 다른 십이지왕과는 분명 다른 면모를 지닌 그였다.

이전이었다면 절대 말해주지 않았을 그였는데, 오늘만큼은 달랐다.

“빚을 졌지.”

그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큰 빚이겠군요.”

검왕이 누운 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툭 내뱉어지는 한마디.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말과는 달리 검왕의 눈빛에 아쉬움이 스쳤다. 적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분명 이 마교 소교주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모닥불 너머에서 검무극의 말이 들려왔다.

“미리 단정 짓지 마십시오. 사범님 인생이고, 제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정하면 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덧붙였다.

“그리고 빚은 갚으면 되고요.”

검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모닥불이 꺼져가면서 밤은 더욱 깊어만 갔다.

* * *

통천각의 새로운 보고가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비무대로 황룡무관의 관주가 찾아왔었는데, 그곳에 대단한 고수가 나타났다고 했다. 특히 주먹에 붕대를 감고 있다는 보고에 권마는 눈빛을 반짝였다.

지난 천화루 싸움에서 두 명의 절대고수가 힘을 합쳤다고 들었으니, 이번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고수가 지원을 나온 것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고수들이 속속 황룡무관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보고를 마친 이안이 권마에게 자기 생각을 전했다.

“아무래도 소교주님이 나올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아요. 입구를 지킨 채 지하로 내려가지 않는 건 그만큼 지금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이 중요하다는 의미겠죠. 아니면, 소교주님과 함께 간 사람을 믿고 있는 것이거나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권마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일화검존을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마란 사람이 내리는 결정은 바로 이것이었다.

“소교주는 우리가 기다립시다.”

놈들을 다 없애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검무극을 자신들이 맞아주자는 의미였다.

일화검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 미소와는 달리 그녀의 눈빛은 자신의 검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안은 아버지의 이런 결정을 예상했다.

이게 바로 검무극이 마존들을 부른 이유일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 믿었을 테니까.

그래, 마존이란 말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안가란 말이 될 거다. 두 사람은 자신과 서진을 위해 잠시 머무르고 있을 뿐.

하지만 아버지의 이런 결정까진 예상하지 못했다.

“너도 함께 가자.”

위험하다고 자신은 데려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무인은 싸움터에 있어야지. 지금 소교주가 지하에 있는 것처럼.”

이게 바로 권마의 인생관이었다.

또한 자식이 귀하면 귀할수록 고생도 시켜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안고 있는 건 오히려 쉽다. 내보내는 게 어려운 일이지.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안이 환한 얼굴로 고마움을 전했다.

일화검존이 먼저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가시죠, 소교주의 머리 위에 적이 서 있게 할 수는 없지요.”

* * *

다음 날 아침, 검무극이 눈을 떴을 때 검왕은 홀로 서서 떠오르는 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푹 자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 거야.”

“근래 사범님 덕분에 긴장하느라 잠을 통 못 잤거든요.”

검무극이 크게 기지개를 켜며 검왕 옆에 나란히 섰다.

“저를 죽이셨다면 진법을 파훼하고 나가셨을 텐데요.”

“우리가 잠잘 때 찌르지 않을 정도의 의리는 있지 않나?”

“그럼요. 그래서 푹 잤습니다.”

물론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을 믿고 잔 이유도 있었지만.

“아쉽군. 자네와는 그 비무대에서 싸우고 싶었는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저를 죽이실 작정이시군요.”

“내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자, 죽여서 후련하다 생각이 들지, 아쉬운 마음이 들지. 제가 먼저 고백하죠. 사범님을 죽이면 저는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습니다. 평생 후회하고 생각날 겁니다.”

“자넨 마지막까지 작전 중이군.”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마지막 방은 함께 보고 싸우시죠.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삽질했는지.”

“알지. 한데 이 빌어먹을 진법이…….”

순간 검왕이 흠칫하며 하던 말을 중단했다. 검무극에게 뭔가 계획이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 예감은 적중했다.

“여기서 안 싸워도 됩니다.”

“어떻게?”

“느끼셨겠지만 제가 환술이나 진법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본 중의 기본에 이번 문제의 해법이 있었다.

“환술이나 진법에는 반드시 파훼법이 존재한다. 이게 제 일 원칙입니다.”

검왕이 자신도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파훼법이 진법에 들어온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건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파훼법을 깨면 살 수 있다는 제일 원칙의 전제를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검무극은 놓쳐선 안 되는 걸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푯말이 속임수였습니다.”

“적들을 물리쳤는데도 진법이 파훼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푯말이 남아 있다면, 당연히 상대까지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겠죠. 마지막 관문의 진법이니까 정말 지독하겠지? 이런 마음을 노린 속임수죠.”

검무극의 시선이 저 멀리 떠오르는 해를 향했다.

“남은 적이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그 남은 놈을 제거하면 모두를 제거하는 게 될 겁니다.”

검왕은 정말 놀라고 감탄했다. 이 속임수를 꿰뚫어 보지 못하면 함께 온 동료를 서로 죽였을 것이다. 만약 소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진법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정말 악질적인 진법이었다.

아! 그래서 진법 끝까지 와서 이곳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아본 것이구나!

“하면 왜 어제 이 말을 하지 않았나?”

“사범님하고 모닥불 한번 피워보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다 추억 아니겠습니까?”

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비밀을 캐내려 한 게 아니었느냐, 농담 반 진담 반 말하려 했는데, 지금 검무극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냥 자신과 하루 야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만약 비밀을 캐내려 했다면 어떻게든 집요하게 알아내려 했을 거다. 하지만 어제 그와 자신은 밤하늘을 올려보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는 검왕이 스스로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신발을 위로 던졌다.

땅에 떨어진 신발을 주워 들며 그가 말했다.

“이쪽부터 뒤져보세.”

그리고 정말 있었다.

그것도 처음 시작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남은 적은 한 명이었다.

“내가 베겠다.”

검왕이 손길에 감정이 실렸다.

한 명이 남았으니 정말 강한 놈이 남았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세 번의 공격 중 첫 번째 공격을 왔던 무인들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더 사람을 열받게 할 진법이었다. 이런 약한 놈을 찾아 죽이면 그만인데. 이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이미 함께 온 동료를 모두 죽인 이후였을 테니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진법을 만든 사람은 인간을, 그리고 무인을 조롱하고 있음을. 그 악의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진법이었다.

상대를 베자 비로소 진법이 파훼되기 시작했다. 진법이 말한 모두를 베는 순간이었다. 그 모두에 진법에 들어온 이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스스스스스스.

진법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어둠의 통로에 서 있었다.

저 멀리 통로 끝에 있던 문이 열렸다.

검왕이 복잡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또 자네 덕분에 관문을 넘겼군.”

검왕이 먼저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번에는 반을 줄 수가 없네.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곳이니까.”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할 수 없죠.”

두 사람이 통로 끝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때 검무극의 시선이 문 위를 향했다. 거기에 하나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앞선 통로의 벽이나 방에서 봤던 문양이 아니었다.

이 문양은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그림보다 강렬하게 검무극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네모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여섯 개의 작은 원이 둘러싸고 있었다.

원의 색은 각기 달랐다.

흑색과 백색, 청색과 적색, 그리고 황색과 자색이었다.

‘설마?’

가운데 네모난 것은 비궤처럼 보였고, 주위에 여섯 개의 원은 비궤가 흡수하는 구슬처럼 보였다.

검무극이 문양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검왕이 물었다.

“왜 그러나?”

“아까 한 말 취소입니다.”

검무극이 천천히 문을 열며 말했다.

“이 방의 것은 전부 다 주십시오.”

뒤집혔다고 잘못되는 거라면

연백인이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이 조용한 침입자는 마치 주인인 양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커다란 등이 집무실 창을 전부 다 가리고 있었다.

등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딸이 어디 갔느냐고 닦달하던 이안의 아버지임을.

문 앞에 수하가 멀쩡히 지키고 있는데도 이렇게 들어왔다는 건,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창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저 큰 덩치가 저 창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앞서 봤을 때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뒷짐을 쥔 그의 커다란 주먹을 보자 왠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연백인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 뭐야?”

언제나 그렇듯 싸움은 기세다. 처음에 밀리면 끝까지 밀리는 법.

하지만 그는 이내 후회했다.

권마가 몸을 돌려서 자신을 쳐다보는 순간,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특별히 어떤 살기를 발출하지 않았음에도 상대의 기도는 자신이 용기나 마음가짐으로 맞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날 봤던 얼굴보다 더 무서웠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소.”

권마는 정중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무슨 부탁이오?”

“지금 당장 관원들을 다 내보내시오.”

연백인이 흠칫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오늘 하루 황룡무관은 휴관이오.”

관원들을 무시하고 싸우기에는 황룡무관은 너무 대형 무관이었다. 분명 싸움에 휘말려서 수많은 관원이 죽게 될 거다.

연백인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황룡무관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임을.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요?”

권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연백인은 권마의 눈빛만 봐도 겁이 났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면 지하의 그가 있었으니까.

“대체 당신 누구요?”

“이안이 아버지 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소?”

“진짜 정체를 밝히시오.”

단순한 관원의 부모가 이런 일을 저지를 리 없었으니까.

“누구냐고 물었소!”

권마는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권마가 마기를 드러냈다. 아무런 기도가 없을 때도 무서워서 온몸의 털이 곤두섰는데, 마기를 드러내자 연백인의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신교에서 나왔소.”

신교란 말을 듣는 순간 연백인은 속이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네가 누구든 그가 해결하겠지, 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과연 그가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무림인들에게 마교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번 일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그 누구도 모르리라 안심했었는데. 대체 왜 이 마지막 순간 마교가 개입하는 것인가?

‘그놈들이다!’

지하에서 나간 관원들! 그들이 마교에 소문을 낸 것이다. 그는 그렇게 오해했다.

어쨌든 이 순간만은 모면해야 했다.

“신교에서 왜 우릴 겁박하는 겁니까?”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소.”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잡아떼려고 했는데. 권마와 눈이 마주치자 감히 그러지 못했다. 딸이 어딨냐고 캐묻던 첫날보다 마기를 드러낸 지금이 백 배는 더 무섭게 느껴졌다.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권마가 다시 창밖을 향해 돌아섰다.

“어서 무관 문 닫으시오. 곧 새로운 문이 열릴 거요.”

연백인은 그 문이 지옥문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황룡무관의 사부와 사범 모두가 나서서 관원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모두 돌아가도록.”

관원들은 모두 놀랐다. 한 번도 이렇게 관원들을 돌려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너희는 알 것 없다. 지금 당장 무관에서 나가도록!”

사부들 역시 말해주고 싶어도 말해줄 수 없었다. 자신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수백 명의 관원이 모두 무관을 나가기 시작했다. 무관 내에서 먹고 자고 하는 이들도 내보냈고, 숙수들과 허드렛일을 하는 이들까지 모두 내보냈다.

정말 무관에 독연이라도 퍼진 것처럼, 순식간에 황룡무관을 완전히 비운 것이다.

마지막에 사부와 사범들이 건물 앞에 서서 대연무장을 쳐다보고 있던 연백인에게 보고했다.

“명령하신 대로 모두 내보냈습니다.”

이제는 이유를 들을 수 있겠지 했는데.

“자네들도 다 나가게.”

“네?”

그들 모두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들까지 내보낼 줄은 몰랐다. 강적이 오고 있으니 자신들과 함께 맞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면 대체 혼자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무슨 일이십니까?”

“나중에 알려주겠네.”

그렇게 사부와 사범들까지 모두 내보낸 후, 연백인은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권마는 창밖의 비무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없었는데, 관원들이 나가자 그곳에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관원들과 교대라도 하듯, 그곳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 중 권마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과연 통천각의 보고대로 남자는 양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내 역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분명 권마의 시선을 의식했을 텐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연백인의 말소리.

“당신 뜻대로 했소.”

권마는 말없이 집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연백인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알아야 했으니까.

“정말 내 무관을 지옥으로 만들 작정이오?”

“그래서 다 내보내지 않았소? 지옥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들은.”

권마가 마지막 한마디 남긴 후에 그곳을 나갔다.

“그래서 당신이 남은 걸 테고.”

* * *

검무극과 검왕이 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마지막 방이라는 것을.

그 어떤 보석도, 그 어떤 영약도 이곳에서 풍겨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바닥의 문양이었다. 앞서 문 위에 있던 것과 같았는데 네모와 여섯 개의 작은 원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바닥뿐만 아니라 주위 벽에도 네모와 원으로 이뤄진 여러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색은 흑색과 백색, 청색과 적색, 그리고 황색과 자색이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비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방의 중앙에 놓여 있는 그것은 놀랍게도 비궤였다.

색과 모양도 똑같았다. 다만 검무극이 가지고 다니는 비궤를 어른 키만큼 크게 만든 비궤였다.

대형 비궤를 보자 몸속의 그 신비한 기운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몸속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검무극이 검왕을 쳐다보았다. 검왕 역시 떨리는 눈빛으로 비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감격하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곳에 도착한 것이다.

“저겁니까? 찾으려고 했던 것이?”

그러자 들려온 뜻밖의 대답.

“나도 모른다.”

그 역시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들어온 모양이다.

“이곳에 보관된 것을 가져다주기로 했을 뿐.”

처음에는 검왕 같은 사람이 자신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을 했을 리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진법에서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걸 가져다주면 빚을 갚는 거겠군요.”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상이 누구일까? 화무기일까?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일까?

검왕이 천천히 비궤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이렇게 큰 쇳덩이일 줄은 알지 못했을 테니까.

검왕이 조심스럽게 비궤에 살짝 손을 대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쇳덩이일 뿐.

앞면을 살핀 후 걸음을 옮겨 옆면을 살폈다. 그리고는 뒤쪽으로 걸어갔다가 한 바퀴 돌아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검무극은 말없이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들어오면서 이곳에 있는 것을 전부 달라고 했지만, 이 공간에 있는 것의 우선 권한은 검왕이 가지고 있었다. 검무극은 그걸 인정해 주었다.

스르르르.

검왕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비궤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서더니 위쪽 면을 살폈다. 그리고 아래로 다시 내려왔다.

“열 수 있는 장치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상자가 다가 아니라 판단한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만져 봐.”

검왕의 말에 비로소 검무극이 나섰다. 검왕이 검무극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비단 그의 언변 때문만이 아니었다. 욕심을 자제하며 기다릴 줄 아는 바로 이런 모습 때문이다.

검무극이 비궤에 손을 댔다. 그러자 몸속의 기운이 반응했다.

‘이 비궤, 단지 겉모습만 흉내 낸 것이 아니다.’

검왕이 뒤에서 물었다.

“혹시 만년한철인가?”

자신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는데. 검왕이 잘못 볼 리 있겠는가?

“아뇨, 그냥 쇳덩이로 만들어졌습니다.”

검왕의 표정에 살짝 낭패감이 스쳤다.

설령 이게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이 상자가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년한철이 무림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이 큰 만년한철을 팔아서 무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돈 때문이었다면 자신을 지하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 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검왕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뭔가 비밀이 있을 겁니다. 저와 같이 천천히 풀어보시죠.”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검무극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비밀도 척척 풀어낼 것만 같았다. 과연 자신이 생각지 못한 부분도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뒤집어서 아래쪽 면을 보죠.”

검왕이 흠칫 놀랐다.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좋은 생각이었지만 검왕은 잠시 망설였다. 혹시 뒤집었다가 뭔가 잘못될까 걱정한 건데, 검무극은 대번에 그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뒤집혔다고 뭐가 잘못되는 거라면, 이 안에서 뭐 대단한 것이 나오겠습니까?”

그 말에 검왕이 웃었다. 맞는 말이다. 혼자였다면 몇 시진을 고민했을 일인데, 이렇게 흔쾌히 답을 내린다.

물론 검무극은 저 큰 비궤를 품 안의 비궤와 같은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디 뒤집기만 했나? 웃는 얼굴까지 그려두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뒤집어 보자.”

두 사람이 비궤를 뒤집었다. 아래에 혹시나 기대한 통로 같은 건 없었고, 바닥 면 역시 다른 면과 똑같았다.

“괜히 헛수고만 하시게 했습니다.”

“아니야. 좋은 생각이었어.”

애초에 자신과는 발상이 다른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작은 장식장이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책들이 꽂혀 있었다. 많이 있는 건 아니었고, 열 권 정도였다.

“허허실실로 이런 곳에 중요한 게 숨겨져 있을 수도 있지요.”

검왕도 와서 함께 살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 쇳덩이를 열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곳에 꽂힌 것들은 모두 무공비급이었다.

“관주가 보면 좋아할 만한 비급도 있습니다.”

무공비급이 있는 걸 보니 연백인에게 없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진심으로 챙기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비급은 반 주겠네.”

남는 것 중에 연백인에게 챙겨주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검무극은 더 중요한 한 가지를 느꼈다. 비급은 반 주겠다는 말에는 다른 건 줄 수 없다는 의미가 깔려 있었다.

일단 검무극은 주는 것부터 챙겼다.

“반은 필요 없고, 한 권만 챙기겠습니다.”

검무극이 비급 중에 한 권을 챙겼다. 천강신(天罡身)이라는 강기로 몸을 보호하는 마공이었다.

“오래전에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마공인데, 여기에 있었네요.”

천강신은 강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는 호신마공이었다. 이 무공이 좋은 이유는 다른 호신공과 중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천마호신공이나 벽력수라권의 금강수라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

물론 원래라면 가장 강력한 호신공에 내공을 집중하는 게 맞는 선택이지만, 검무극은 여러 호신공에 극한의 내공을 안배할 수 있는 막대한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천강신은 또 하나의 목숨이 되어 줄 수도 있는 무공이라 할 수 있었다.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제가 정말 죽음에 관한 불안증이 있나 봅니다. 이런 무공을 보면 참지를 못하겠네요.”

그렇게 비급을 챙긴 후, 이번에는 벽의 문양을 꼼꼼히 살폈다. 검왕 역시 반대쪽 벽을 살폈다.

진법 안이 아니었으니, 정 안 되면 식량을 가져와서라도 버티면서 연구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살폈을까?

검무극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돌아섰다.

“아! 하도 뚫어지게 봤더니 눈알이 빠지겠습니다. 잠시 쉽니다, 쉬어요.”

검무극이 말에 검왕이 돌아보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찾아도 이것만큼은 줄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한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하지?”

“일단 찾고. 그다음에 사범님 설득해야죠.”

검왕은 이 욕심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고자 했다.

“갑자기 왜 욕심을 내는 거냐?”

“갑자기가 아닙니다. 원래 저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욕심이 없다면 이 지하까지 내려오지도 않았겠지요.”

검무극이 비궤에 기대앉았다.

이번에는 벽의 문양을 살피는 검왕에게 검무극이 물었다.

“이곳에 무림의 운명을 바꿀 것이 있다고 하셨으면서.”

검무극이 차분히 덧붙이며 물었다.

“저는 왜 데리고 내려온 겁니까?”

검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깊어진 눈빛으로 벽을 보고 있는데.

“어? 어어?”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그러나, 검왕은 돌아보지 않았다.

“사범님!”

다급한 외침에 그제야 검왕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검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검무극이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거의 다 빨려 들어간 후였다.

‘비궤야, 네 아버지가 우릴 잡아먹는다.’

다른 게 아니라 비궤에 흡수되어서였을까? 이 다급한 순간에도 검무극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그랬기에 억지로 이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쑤우우욱.

검왕이 쇄도해서 검무극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검무극은 비궤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검왕이 검무극이 빨려 들어간 곳을 두드렸다. 하지만 언제 사람을 흡수했느냐는 듯, 벽면은 딱딱하고 차가운 쇳덩이였다.

비궤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양손에 붕대를 감은 남자는 관중석에 앉아서 텅 빈 비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선 사람은 연백인이었다.

“나는 황룡무관의 관주 연백인이오.”

우선 남자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상대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다. 이렇게 자신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곳에 저렇게 앉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인사를 한 이유는 이 무서운 사람에게 예를 갖추기 위함이었다.

앞서 그를 보고 잠깐 기억이 끊어질 정도로 무서워서 달아났었다. 그만큼 이 남자가 풍기는 살기는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지하에 있는 사람과 손을 잡았으니 당신과도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을 거요.”

원래라면 달아났어야 했다. 달아나지 않더라도, 집무실에 숨어서 이 모든 싸움이 끝나고 나왔어야 했다.

한데 집무실에서 권마가 했던 마지막 말이 그를 이곳으로 나서게 했다.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다 내보내지 않았느냐, 당신이 남은 건 지옥에 어울려서 남은 거고.

연백인은 그 말을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마교가 개입한 이상, 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안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의 모든 걸 빼앗고 죽일 것이다.

차라리 지하에 있는 그를 믿는 편이 목숨을 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무서운 남자가 같은 편이라면, 그 마교 놈들을 없애줄지도 모른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마교 놈들이 무시하는 것도, 이 남자가 저렇게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두 자신이 약해서다. 무관의 관주 따윈 무인으로 인정하지 않아서다.

‘비급만 얻으면!’

죽을 만큼 노력해서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 저 가소롭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을 마주 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눈 깔아라.

그는 이 열망이 있었기에 이렇게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이렇게 온 이유는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서요. 상대는 마교에서 나온 자들이오.”

마교란 말에도 남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 걸로 볼 때,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이 나에게는 알려주지도 않고.’

여전히 말이 없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기 거북했기에 연백인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변 곳곳에 남자의 수하로 보이는 이들이 서 있었다. 그 숫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그들은 병장기 대신 양손에 권갑을 차고 있었다.

‘모두 권법을 쓰는 자들이다.’

수하들은 수장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면, 이 경우에 써야 할 말일 것이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일말의 자비조차 없는 그야말로 얼음처럼 차가운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연백인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인 수하가 아니라, 그 어떤 감정도 없이 키워진 살인 병기들임을.

‘마교도 겁내지 않는 당신은 대체 누구지?’

연백인은 물론 권마도 일화검존도, 다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는 검무극만이 알았다.

십이왕(十二王) 권왕(拳王) 강후(姜厚).

십이지왕 중 마지막 열두 번째 왕인 권왕이었다.

그들이 무림을 지배할 당시 이런 말이 유행했다.

십이지왕은 검으로 시작해서 권으로 끝난다.

마지막 열두 번째라고 해서 실력이 마지막이란 의미는 아니다. 일왕인 검왕을 제외하고는 실력과 관계없이 정해진 순서였으니까.

회귀 전 삶에서는 권왕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죽었다. 당시의 무림인들은 태생적인 살기가 담긴 그 주먹을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시대를 살았으니까.

그때 강후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 무심한 표정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연백인이 돌아보니 젊은 남자가 그곳으로 걸어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마치 피에 담갔다가 건져낸 것처럼 붉은색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흰 붕대인 강후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남자가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추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등장한 젊은 남자의 기도 역시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가 함께 온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번 일을 위해 지원 나온 분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젊어 보였는데, 한 사람의 복장이 특이했다.

그는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흰 선으로 귀신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복장을 보는 순간 연백인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귀도(鬼刀)!’

도를 귀신같이 사용한다고 해서 귀도라 불리기도 하는 사파의 절대고수였다.

‘귀도가 저렇게 젊었다고? 언제 적 귀도인데?’

설마 반로환동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젊은 고수가 그의 옷을 흉내 내서 입은 걸까? 연백인은 알 수가 없었다.

나머지 남자는 눈이 길게 찢어져 있었고, 손과 발이 유난히 길었다. 그는 검을 허리나 등에 차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었다.

두 남자는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운 그런 모습이었다.

연백인의 눈에 비친 강후는 그 누구에게도 인사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정중히 포권하는 두 사람에게 그 역시 앉은 자리에서 포권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 연백인은 더욱 큰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이 그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멸시의 눈빛만 보낼 뿐이었는데.

인사를 마친 세 남자가 연백인을 지나쳐 강후가 앉아 있는 옆쪽 관중석으로 걸어갔다. 가면서 연백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연백인은 그 무서운 마인의 말이 한 가지는 정확했음을 실감했다. 차갑고 비정하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지옥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느새 자신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존재감으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권마였고 그 양옆으로 일화검존과 이안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이 걸어오니 어찌 시선이 집중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쪽에 수십 명이 있음에도 그들은 성큼성큼 걸어왔다.

강후의 수하들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져 나갔다. 이안은 실전에서 이렇게 강력한 살기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연백인의 시선이 권마와 마주쳤다. 연백인은 두려웠지만, 기세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권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당신이 그러지 않았소? 나도 이 지옥에 어울린다고. 마교라면 내가 무서워서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소?”

권마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후를 쳐다보았다. 또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연백인은 발끈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저 무서운 얼굴을 보고 따지지는 못했다.

이윽고 연백인이 이곳에 온 이후, 처음으로 강후의 입이 열렸다. 자신을 지원 나온 이들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그였는데.

“권마, 꼭 한번 보고 싶었다.”

권마는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상대가 누군지 묻지 않았다.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연백인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권마? 권마라고? 저 사람이 마존이었다고?’

그냥 마교의 고수인 줄 알았는데. 마교의 팔마존이 이곳에 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 사람에게 조금 전에 큰소리를 쳤단 말인가?

심지어 마존은 하나가 아니었다.

“일화검존까지. 역시 소교주는 소교주군.”

연백인은 일화검존이란 말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소교주란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소교주? 무슨 소교주? 설마 마교 소교주?’

연백인이 놀라 기절하는 사이, 권마와 강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연백인은 그가 진짜 마존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저 무섭던 강후의 살기가 권마와 마주치자 그렇게까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살기와 마기는 팽팽했다.

이번에는 권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무관 쉬는 날이다.”

권마가 천천히 그들 전부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연백인이 꿈에서라도 하고 싶은 그런 말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가 여는 문으로 모두 퇴장하도록.”

* * *

“이제 다 왔다, 다들 일어나!”

누군가 깨우는 소리에 검무극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비궤에 흡수된 후 처음으로 눈을 떴는데.

덜컹, 덜컹.

자신이 있는 곳은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훅 느껴지는 불쾌한 냄새. 십여 명의 남자들이 창문조차 없는 마차의 짐칸에 다닥다닥 붙어서 타고 있었다.

다들 검을 차고 있는 걸로 봐서 어디 끌려가는 것은 아니었다.

‘비궤 안에서 어떤 진법이 발동한 건가?’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한 진법이?

하지만 비궤에 빨려 들어올 때만 해도 아주 기분이 편안하고 좋았었는데. 비궤가 자신을 죽이려 들 것 같진 않았는데.

검무극이 자신의 몸 상태부터 살펴보았다.

우선 팔다리가 잘 붙어 있는지부터 살폈다. 팔도 정상, 다리도 정상. 눈도 잘 보였고, 귀도 잘 들렸다.

몸 상태는 좋았다. 문제는 내공이었다.

내공은 고작 몇 년 수련을 한 사람의 것만큼 있었다. 구화마공이나 비천검법의 초식들을 사용할 수 없는 내공.

‘다행이다, 다행.’

몇 년이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한 줌의 내공만 있어도 위급한 상황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다. 그게 자신의 실력이었으니까.

다음으로 검을 살폈다. 흑마검이 아니라 일반 철검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다시 흑마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그대로였다. 품 안에 비궤는 그대로 있었다.

‘비궤야, 네 아버지가 대체 무슨 시험을 하려는 거냐?’

검무극은 이 상황이 비궤가 자신에게 주는 어떤 시험이라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비궤의 시험이라면?

반드시 깰 방법이 있을 거고, 또한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스르릉.

검무극이 검을 살짝 뽑아서 얼굴을 비췄다.

‘내 얼굴이다.’

일단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 모습에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을 깨우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곳에서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질 몸이라 여겼다.

“검연입니다.”

“처음인가?”

대체 뭐가 처음이냐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초짜는 지원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원이란 말을 들으니 대충 상황은 알 수 있었다.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뒈진다. 너 같은 초짜들부터 죽어 나간다고.”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비궤가 자신을 흡수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설상가상 이런 상황이라니?

문득 바깥에 있을 검왕이 생각났다.

‘내가 이곳에 빨려 들어오는 걸 봤으면,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걱정되는 건 자신을 구하겠다고 비궤를 파괴하는 것인데,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무식한 성격이 아닐뿐더러, 자신이 흡수되는 걸 봤으니 이 쇳덩이가 진짜 목적했던 것임을 확신했을 테니까.

아마 어떻게 해서든 이 안으로 들어올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들어올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비궤가 있거나, 아니면 몸속에 비궤가 흡수한 기운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자신은 분명 비궤에게 초대받은 것이었으니까.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휘장이 걷어지고 눈 부신 햇살이 들어왔다.

“자, 모두 내려라!”

검무극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곳은 산 아래 광활한 들판이었는데 수십 개의 천막이 펼쳐져 있었고, 수백 명의 무인이 오가고 있었다.

소리 지르는 이들, 부상자를 옮기는 이들, 어딘가로 달려가는 이들. 그 모습에서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전쟁터다!’

앞서 마차에 함께 온 이들은 모두 전쟁에 자원한 사람들인 것이다.

“자, 너희들은 이쪽이다.”

인계받은 무인이 마차를 타고 온 이들을 여러 천막에 나눠 넣었다.

“신입 받아라.”

검무극도 그중 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무인들이 서넛 있었다. 자는 이들도 있었고 뭔가를 먹고 있는 이도 있었으며, 침상에 걸터앉아 병장기를 손질하는 이도 있었다. 다들 지치고 힘든 얼굴들.

그중 한 남자가 검무극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또 초짜를 보냈네.”

왜 이런 상황에 부닥쳤는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언제나 그렇듯 검무극은 닥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검연입니다. 다행히 제가 아주 운이 좋습니다.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자 초짜라고 인상 쓴 남자가 침상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던 혁낭 하나를 검무극에게 안겼다.

“난 네 상관인 백호십칠조 조장 정대(鄭大)다. 헛소리 말고 앞으로 내 말이나 잘 들어! 알았나?”

“네!”

“네 자리는 저기다.”

그렇게 대충 나무를 깎아 만든 낡고 허름한 침상을 배정받았다.

검무극은 정대를 통해 상황을 알아볼까 하다가, 일단 바깥부터 살피려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중원 곳곳 그렇게 온갖 곳을 다 다녀봤는데, 이곳은 낯설었다. 어차피 비궤가 만든 세상이라면, 다 가상의 세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진짜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비궤야, 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냐?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그런 시험이냐?’

아니다, 그런 쉬운 시험일 리가 없지. 자신의 무공이라면 설령 내공이 없다 한들 살아남지 못하겠는가?

바로 그때였다.

“무림맹주이시다!”

“맹주님이 오셨다!”

주위의 함성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 맹주께서 여길 왔다고?’

검무극이 무인들이 몰려가는 곳으로 달려갔다.

용과 호랑이가 그려진 장삼을 입은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존재감!

그를 보는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신이 아는 무림맹주 진패천이 아니었다.

둘러싼 무인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환호하며 소리쳤다.

“무황신검(武皇神劍)! 무황신검!”

무황신검이란 말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무황신검은 자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들어본 사람이었다.

무림맹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맹주 중 한 명이었으니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깨어난 곳이 자신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이곳은 바로 삼백 년 전의 무림이었다.

신입이 간도 크군

무황신검의 등장에 검무극은 이 싸움이 어떤 전쟁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전쟁은 무림맹과 천의궁(天意宮)과의 싸움이구나.’

무황신검이 삼백 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회자되는 이유는 신검이라 불린 그의 절대적인 무공 외에 한 가지 큰 업적이 있었다.

천의궁의 멸문.

당시 무림에서는 천의궁이라는 신비 세력이 무림맹을 무너뜨리고 정파 무림을 차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천의궁은 온갖 기이한 환술과 진법을 사용하는 문파로 그야말로 막강한 힘을 드러냈다. 무림의 고수들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진법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다. 그랬기에 정정당당한 승부를 바라는 정파인들의 증오와 미움은 더욱 커졌고, 두려운 만큼 더 미워했다.

혈교가 배후에 있다, 천마신교가 배후에 있다, 사도맹이 배후에 있다, 그야말로 온갖 소문이 자자한 가운데 무림맹과 천의궁의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했다.

처음 전쟁이 발발할 때만 해도 이 싸움은 금방 끝날 거로 예상했다. 제아무리 천의궁이 강력하더라도 상대는 무림맹이었으니까. 그것도 무림의 절대고수 무황신검이 이끄는 무림맹이었으니까.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천마신교와 사도맹은 나서지 않았지만, 그들을 제외한 수많은 문파가 이 싸움에 개입했다. 대의명분을 위해 나서는 이들부터 실리를 추구하는 이들까지. 그리고 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상인들까지. 그야말로 얽히고설킨 대혼란이 펼쳐졌다.

이 무림에는 무림맹을 지지하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천의궁을 지지하고 무림맹을 싫어하는 수많은 문파가 함께 참전했다. 그들을 천마신교와 사도맹이 은밀히 지원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대체 왜?’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궤는 자신을 삼백 년 전 무림맹과 천의궁의 싸움 한복판으로 데려왔다.

‘내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그러는 사이 무황신검이 무인들 앞에 섰다.

더욱 커지는 함성!

그를 직접 보았다는 사실에 무인들은 모두 감격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무인들 대부분은 하급 무인들이기에, 무림맹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무황신검이 차분한 눈빛으로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눈빛만으로도 이 많은 이들을 압도했다.

게다가 생각보다 젊었는데 이제 갓 중년이 된 듯한 외모에 무인들은 더욱 열광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무인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윽고 무황신검이 입을 열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많은 희생이 있었다. 우린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내공이 실린 그의 나직한 음성은 저 멀리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정의를 지키려는 수많은 고수가 저들의 사악한 환술과 진법에 갇혀 희생되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무인들은 격앙된 열기를 뿜어냈다. 이 전쟁 속에서 무황신검은 그들의 영웅이자 버팀목이었다.

물론, 검무극은 냉정한 마음으로 그를 보았다. 하필이면 그가 도착한 오늘 이곳에 자신을 데려온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무황신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우린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 친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기에, 간악한 악적들이 이 무림을 집어삼키게 할 수 없기에, 우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황신검이 모두를 둘러본 후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우린 이곳에서 마지막 싸움을 할 것이다.”

비궤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왜 이 시기, 이 장소인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곳이 천의궁과의 마지막 결전의 장소였던 것이다.

무황신검의 우렁찬 외침이 들판에 울려 퍼졌다.

“죽음을 두려워 마라! 그대들의 피가 이 무림을 지켜낼 것이다!”

희생을 강요하는 말이었음에도 무인들은 열광했다.

연설을 마친 무황신검이 앞줄에 있는 무인들에게 다가갔다. 암살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가만히 그를 살폈다.

‘예전 고수들은 또 다른 느낌을 주는구나.’

느껴지는 존재감이 달랐다. 기도를 발출하는 방식도 달랐고.

거칠지만, 더 강력한 느낌.

무황신검이 앞줄에 선 몇 사람에게 전체를 대표해서 격려의 말을 전했다.

“무림은 그대들의 노고와 희생을 기억할 거네.”

맹주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무인들이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검무극 차례가 되었다.

“고생이 많네.”

검무극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저는 아닙니다.”

감히 맹주에게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무황신검도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오늘 첫날이거든요.”

그제야 무황신검이 미소를 지었고 주위 무인들이 웃었다. 엄숙하던 분위기가 일순간 풀어졌다.

“이름이 뭔가?”

“검연입니다.”

“자네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겠네.”

옆으로 가려던 그에게 검무극이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습니까?”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는 것을. 그 감정은 분명 곤혹스러움이었다.

검무극은 일부러 물었다. 이 싸움은 분명 정파와 무황신검의 승리로 끝난다.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날 마지막 싸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그 마지막 싸움을 어떻게 끝낸 겁니까?’

맹주를 보좌하며 뒤따르던 몇 명의 무인 중 한 중년 무인이 인상을 굳히며 나섰다.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함부로 나서는 게냐?”

그러자 무황신검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후 검무극에게 말했다.

“내겐 이 싸움을 끝낼 방법이 있네.”

검무극에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무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과연 무인들이 깜짝 놀랐다가 이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하나 그런 중요한 내용을 공개된 곳에서 밝힐 수는 없지. 그러니 자네는 자네의 소임을 다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무황신검은 몇 사람을 더 격려한 후 곧장 중앙에 있는 막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서 인상을 굳히며 나섰던 중년 무인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본 후 맹주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나직한 한마디.

“신입이 간도 크군.”

뒤를 돌아보니 조장인 정대가 서 있었다.

“무섭게 노려보고 간 저분은 누굽니까?”

“이곳의 책임자이시다.”

그는 조웅(曺雄)으로 마지막 무대가 될 이곳 전장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거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맹주님과 대화를 나눠보겠습니까?”

정대가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더니 미친놈, 한마디를 남긴 후에 돌아섰다. 미친놈 소릴 듣더라도 맹주를 그냥 스쳐 지나가게 해선 안 된다는 게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이렇게라도 눈도장을 찍어 두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검무극은 멀어져가는 무황신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큰 비궤야, 왜 나를 이곳에 데려온 거냐? 대체 무엇 때문에.’

* * *

막사로 돌아온 검무극은 조용히 눈을 감고 진기를 일주천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정말 미약한 내공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늘리고, 조금이라도 더 정순한 내공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무슨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모두 주목, 정찰 임무가 떨어졌다.”

조장인 정대가 잠들어 있던 이들까지 모두 깨웠다.

“야간 임무입니까?”

놀란 조원의 물음에 정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은 조원들과 함께 막사를 나섰다.

백호십칠조는 검무극까지 해서 다섯 명이었다. 원래 열세 명이었는데, 두 차례의 큰 싸움을 치르면서 모두 죽었다고 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정대가 이 야간 정찰의 책임을 검무극에게 씌웠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네가 맹주님께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야간 임무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숫자가 넷으로 줄고 난 후 우리 조에 야간 임무가 떨어진 적이 없었거든.”

그렇다고 그 일로 욕을 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검무극이 볼 때, 정대는 정파인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선하고 점잖은 무인이었다. 금방 헤어질 인연이겠지만, 있을 때만이라도 잘해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제가 왔잖습니까?”

“넷이나 다섯이나!”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우연히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다. 맹주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조웅이 벌을 내리는 것이리라.

검무극은 이 일조차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기를 바랐다. 그는 필연의 연속에서 뭔가를 찾아내야 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으니까.

“그런 질문을 했다고 이런 불이익을 주다니요? 맹주님, 너무하십니다!”

“설마 맹주님이 그랬겠냐?”

정대는 조웅이 아까 일로 벌주는 거겠지란 말을 끝내 참았다. 말할까 말까 고민되면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나가는 이 전쟁터에서라면 더욱 그러했다. 죽일까 말까 고민되면 죽여야 한다.

그렇게 검무극이 속한 백호십칠조가 산속으로 들어섰다.

양쪽 진영은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국지적인 싸움만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대는 이곳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답게 어두운 산길을 능숙하게 헤쳤다.

“저쪽 능선을 넘어가면 적들 진영이다. 절대 이 이상 들어가면 안 돼. 알겠나? 곳곳에 매복이 있다.”

“알겠습니다.”

물론 검무극은 순순한 대답과는 달리 적진부터 살펴보고 싶었다. 사실 이쪽보다 저쪽이 더 궁금했다.

천의궁의 궁주는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그의 주변에는 누가 있는지.

차라리 저쪽 진영에서 시작하게 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이쪽이었을까?

비궤가 자신을 데려온 이유가 그저 무황신검을 만나게 해주려는 이유는 아닐진대 말이다.

“자, 오늘은 이만 돌아간다.”

그렇게 정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려던 그때였다.

“조심!”

검무극이 몸을 날려 정대를 옆으로 밀었다.

정대가 있던 자리로 암기가 지나갔다.

앞쪽 숲에서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상대 숫자는 모두 넷.

그들이 가장 가까이 있던 검무극을 향해 합공하며 검을 내질렀다. 빠른 움직임에 잘 훈련된 이들이었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쉬이익.

검무극은 정면에서의 공격을 바닥에 눕듯 피했다.

그대로 쓰러져야 할 자세였는데, 검무극의 허리는 그리 약하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검무극이 검을 쳐올렸다.

가슴이 크게 베이며 쓰러지는 그의 배를 밟으며 왼쪽 적을 향해 쇄도했다. 생각지 못한 움직임에 상대가 당황했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갔지만, 목표한 곳에 다다른 것은 하나뿐이었다.

상대의 심장을 찌른 검무극이 빠르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뒤에서 달려들던 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령 뒤통수에 눈이 달렸다 해도, 이렇게 빠르고 정확하게 자신의 허점을 찔러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세 번째 적이 쓰러지자 나머지 한 명은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검무극은 그의 등에 검을 던져서 잡으려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말았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머지 조원들이 어찌 달려들어야 할지 잠시 망설이던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검무극에게 밀려서 바닥을 구른 정대가 벌떡 일어났을 때는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정대가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너! 뭐야? 무공 잘하잖아?”

“못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왜 신입으로 온 거냐?”

“그래야 오래 살죠. 잘 싸우면 고수를 상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정대가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 그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다. 네 덕분에 살았다.”

“그럼 좋은 침상으로 옮겨주십니까?”

“내 침상하고 바꿔준다.”

그는 정말 감격스러웠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게다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오늘 여기서 누가 던졌는지도 모를 비수에 죽었다면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했을 거다.

검무극이 쓰러진 시체를 살폈다.

“이 자들도 정찰조입니까?”

“아니다. 정찰조는 암묵적으로 마주쳐도 서로 피해 간다.”

전쟁 속에서 생겨난 서로의 생존 전략이었다.

“그럼, 이자들은 무슨 일로 이 밤에 나와 있었던 걸까요?”

정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환술이나 사술을 사용하지 않는군요.”

“천의궁의 고수들만 진법과 환술을 사용한다. 적들이 천의궁만 있는 것도 아니고, 천의궁이라 해도 하급 무인들은 일반 무공을 사용하지. 자, 어서 돌아가자.”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아까 놓친 그자를 잡아 오겠습니다.”

“위험해!”

“맹주님까지 와 계시는데, 이런 이상한 움직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오래 살고 싶다면서? 그래서 무공도 숨겼다면서?”

“큰 공을 세우면 일찍 내보내 줄지 압니까? 자, 먼저 가십시오.”

검무극이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정대는 이번 싸움으로 검무극이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는 말리지 않았다.

“꼭 살아 돌아와라!”

아까 남은 한 명을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그자를 추격하겠다는 명분으로 적진을 살펴볼 생각으로.

정대가 알려준 길로 그들의 야영지에 도착했다.

중앙의 큰 막사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막사가 지어져 있었다.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저쪽의 궁주가 와 있다면 대단한 고수들이 함께 와 있을 테니까.

검무극이 신안술을 발휘했다. 비록 내공은 줄어들었지만, 만독불침도 그대로였고, 신안술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들의 막사를 살피던 검무극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그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비궤가 왜 하필이면 삼백 년 전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왔는지.

검무극이 바라보는 큰 천막의 입구에 하나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검무극도 아는 문양이었는데 비궤 문양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지하 관문의 통로 곳곳에 새겨져 있던 그 문양이었다. 첫 번째 관문의 파훼법이 되었던, 혹시 이 관문을 만든 가문의 문양이 아닐까 추측했던 바로 그 문양 말이다.

이제 첫 번째 실마리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황룡무관의 지하 보고를 만든 건 멸문당했던 천의궁이었구나.’

자식을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우리가 여는 문으로 모두 퇴장해라.

권왕과 그의 수하들은 알 수 있었다. 권마가 말한 문이 지옥문이라는 사실을.

권왕 강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이 열어주는 문이라면 기꺼이 갈 수 있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방에 서 있던 권왕의 수하들이 몸을 날려 앞으로 모여들었다.

살인병기로 길러진 그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살기 그 자체였는데 대략 삼십이 넘는 숫자였다.

그 흉흉한 기세를 가만히 응시하던 권마가 이안을 쳐다보았다. 권마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한번 해보겠느냐?

이안은 무작정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적들을 향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저 살기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 혹은 위기의 순간.

즉흥적인 감정에 결정을 맡겨선 안 된다. 저 물음에 대답할 이들은 따로 있었다.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은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이었다.

―네가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잊었나?

다음으로 응답한 것은 손에 들린 일월검이었다.

일월검이 그녀의 손에서 나직이 울었다. 검을 받은 이후 꾸준한 교감으로 이제 그녀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한 일월검이었다.

마지막으로 대답한 것은 그녀의 노력이었다.

―세상 모든 게 다 배신해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밤잠을 줄여가며 수련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이 아버지의 물음에 답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대답이 아니라 지난 인생의 대답이었다.

이안의 신중한 대답에 권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화검존은 이 싸움을 예상해 보았다.

과연 이안이 이길 수 있을까?

그 답이 곧장 내려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 싸움을 박빙으로 본다면 권마 역시 마찬가지일 터.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더 떨리고 두려운 건 이안이 아니라 권마라는 사실을. 저 무뚝뚝하고 무서운 얼굴 속에서 얼마나 큰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을지.

‘그러니 이겨라, 이안. 네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무인이 진짜 강해지는 순간을 만끽해라.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백 명 이기는 것보다,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기는 바로 그 순간을!

이안이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할 듯 커졌다. 천하제일미라 불려도 좋을 미녀와의 싸움이지만, 그들에겐 이 남다른 경험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안이 풍겨내는 기도가 범상치 않았기에 그들은 더욱 강하게 기세를 끌어올렸다.

이안이 시원하게 검을 뽑았다. 권법을 사용하는 이들을, 그것도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곧게 뻗은 일월검이 햇살에 반짝이던 그 순간!

그녀는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포위당하지 않고 싸우는 게 당연한 전술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 허를 찌르며 그들 중심으로 몸을 날렸다.

쉬이이이익.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크게 회전한 그녀의 검 끝에서 피가 튀었다.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빠르게 움직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주먹보다 빠르게, 이안은 정면의 적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날아들었다.

쉬이익!

상대가 몸을 비틀며 주먹을 날리던 그때, 그녀의 몸도 반대로 회전했다. 순간적으로 목표가 바뀌었다.

이안이 뒤쪽에서 달려들던 적을 찌르며 그대로 앞으로 밀어붙였다. 놈은 죽어가면서도 권갑을 낀 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촤아아아악!

이안의 검이 그의 몸통을 옆으로 가르며 옆에서 달려들던 적의 목을 베었다.

일월검의 날카로움은 사람의 뼈는 물론이고 그가 낀 권갑도 그대로 베어내 버렸다.

이안이 적진 한가운데를 휘젓자 장점과 단점이 동시에 생겼다.

단점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장점은 상대가 강기를 함부로 발출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삼십여 명이나 되는 자들이 일제히 강기를 발출해서 자신을 공격한다면?

그건 피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한 번 적중당하는 순간 모두의 강기가 자신에게 퍼부어질 기회를 줄 것이다.

첫수부터 비천검법의 초식을 쏟아부으며 싸우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싸움이 강기 싸움, 내공 싸움이 되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하지만 적들 한복판이라면?

쇄애애액!

그녀의 검에서 검기가 휘몰아쳤다. 적들은 같은 편을 공격할까 봐 쉽사리 강기를 날리지 못했지만, 그녀는 달랐다.

휘몰아친 검기의 결과를 보지 않고 그녀는 반대쪽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자신의 검기에 몇 명이 어떻게 다치고 죽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마치 정해진 순서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어떤 행동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파파파파팍!

뿜어지는 피 사이를 뚫고 이안의 검광이 무섭게 번뜩였다.

그녀의 머리통을 노렸던 팔이 잘려 나갔고, 그 복수를 위해 날아든 다른 이의 주먹은 빈 허공만 갈랐다. 이미 이안은 또 다른 적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파아앙! 파앙!

쇳덩이가 쏘아진 것처럼 사방에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녀의 신형이 주먹 사이를 누볐다. 그녀는 단 한 방도 맞지 않겠다는 각오로 싸웠다. 한 방 제대로 맞는 순간, 그냥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

적들 중 하나가 몸으로 파고들어 그녀를 넘어뜨리려고 쇄도했다.

푹푹푹!

그의 가슴을 연속으로 찌르며 그녀가 상대를 뒤로 던지듯 몸을 틀었다.

뒤에서 그녀에게 날아들던 공격이 시체를 강타했다.

이번에는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쓰러뜨리면 끝이란 생각이었다. 이안 같은 고수에게 말도 안 되는 작전이지만, 그들 역시 권강을 발출하는 고수들이었으니까.

마치 술래잡기하듯 보법을 발휘하며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수놓을 때마다 살이 잘리고 피가 튀었다.

이안은 정말 빠르고 강했다. 무아지경으로 싸우고 있기에,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잘 싸우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주먹이 아니라 피였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피들. 얼굴에 튄 피가 눈에 들어갈까 하는 두려움이 제일 컸다.

이런 싸움을 해보기 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걱정이었다.

적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그녀의 싸움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숫자로 밀어붙이던 적들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싸웠다.

쾅! 콰아앙!

그리고 이제 적들도 권강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먹에서 발출된 강기가 그녀에게 쏟아졌다. 이제 그녀 뒤에 같은 편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쾅! 콰앙!

그들이 날린 강기끼리 충돌했다. 강기와 강기 사이에서 이안을 박살 내 버릴 작정이었다.

한 방을 허용한 그녀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호신강기가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오장육부가 박살 났을 위력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더 강한 자들이었다. 강한 자들이었기에 살아남았고.

내공도 점점 떨어져 갔다. 이 정도 내공이면 누구라도 상대할 수 있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권갑까지 착용한 권왕의 수하 삼십여 명을 모두 죽이기에는 내공이 부족했다.

푸아아악!

이안은 피를 뒤집어쓴 채 정신없이 싸웠다. 날아드는 주먹을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면 돌멩이 하나라도 쥐고 일어나는 악바리처럼, 바닥을 뒹굴며 발목을 베었다.

파아아아아!

쓰러진 적의 가슴에 검을 박아 넣었고,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녀는 완전 혈인이 되어 있었다. 이 싸움에 고상함 따윈 없었다. 서로 죽이려는 살의만이 가득한, 그야말로 진짜 싸움이었다.

권마쪽도 권왕쪽도 아무도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안이 점점 지쳐가자 권마보다 오히려 일화검존이 더 긴장했다.

일화검존이 권마를 쳐다보았다.

‘대단하구나.’

분명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걱정하고 있을 텐데. 이안이 스스로 이 싸움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서지 않고 있으리라.

자신이라면 이렇게 지켜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 버티십니까?’

붉은 붕대를 감은 젊은 남자가 권왕을 쳐다보았다. 수하들이 다 죽어가는 데 자신이라도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눈빛이었는데, 권왕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권왕은 수하들의 죽음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마치 그깟 여자애 하나 죽이지 못하는 것들이라면 차라리 다 죽어라! 이런 눈빛이었다.

붉은 붕대를 따라왔던 두 고수 중 검을 가슴에 안고 있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식의 싸움이었다. 수하가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고?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움이 장난인가? 목숨이 장난인가? 다 같이 나서서 난전을 벌였어야지. 그래서 숫적 우세를 차지했어야지.

이제 그곳에는 이안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비로소 이안의 눈에 장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주위는 완전 피바다였고, 다른 적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적은 넷.

그 넷은 승리를 장담했다.

“지독한 년. 드디어 내공이 다 떨어졌구나.”

그들은 질린 얼굴이었다. 이 싸움이 시작될 때만 해도, 자신들 넷만 남는 싸움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

“설마 이제 와서 도움을 바라진 않겠지?”

이안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래, 내공 다 떨어졌다.”

의미심장하게 덧붙여지는 한 마디.

“딱 한 초식을 발휘할 내공만 남기고.”

다음 순간 그녀의 가슴 앞으로 일월검이 떠오르더니.

촤르르륵.

순식간에 일월검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일월검 모양의 네 자루의 검기.

비천검법 제칠식 유천식.

쏴아아아아아아!

네 방향으로 빛처럼 쏘아진 검기가 그들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갔다.

퍽! 퍽! 퍼억! 퍼어억!

이겼다! 하는 기쁨도 잠시.

가슴에 검을 품고 있던 남자가 기습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목표는 이안이었다.

‘이 어린 년이 이 정도일진대.’

마존들과의 싸움이 얼마나 어려워질지 짐작조차 안 되었다. 그래서 눈앞의 이 여인이라도 없애고 다음 싸움을 하려는 것이다.

쉬이이잉.

가슴에 안고 있던 검은 어느새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고, 검은 이안의 목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이안의 몸에는 더는 내공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내공 없이 막기에는 남자의 공격이 너무 빨랐다.

바로 그 순간.

마치 초를 끄는 듯한 짤막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번쩍하면서 허공을 가른 한 줄기 검광.

이안은 보았다. 자신을 베려던 남자의 검이 허공에 멈췄다는 것을.

남자의 얼굴에 붉은 사선이 그어지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턱을 지나 몸 아래까지 이어졌다.

남자의 몸이 붉은 선을 따라 어긋나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사선으로 베어진 혈선을 따라 남자의 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예리하게 베인 탓일까? 잘려 나간 단면에서는 피도 나지 않았다.

반으로 분리된 몸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비로소 피가 솟구쳐 나왔다.

뿌려지는 핏물 너머로 한 사람의 등이 보였다.

빛처럼 빠르게 쇄도해 그를 벤 사람은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일화검의 끝에서.

한 방울의 핏물만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검신을 따라 흐르는 예기는 검이 내쉬는 차가운 숨결같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저 멀리 벽에 박혀 있던 일월검이 허공섭물로 이쪽으로 날아왔다.

검을 받아든 일화검존이 일월검을 이안에게 건넸다.

“멋진 싸움이었다.”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으로 이안이 다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평생 중원을 떠돌며 악당을 찾아다녀도 이런 싸움을 할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에 젖어 있던 이안이 정중히 검을 받았다. 멋진 싸움이라는 검존의 말에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잘 싸워놓고. 울면 안 돼! 아직 적들이 남아 있어!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라리 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에 서 있던 권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더는 참지 못했다. 적이 남아 있든 말든, 약해 보이든 말든,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권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안은 그걸로 충분했다.

아버지의 저 고갯짓에 담긴 깊은 애정이 온몸으로 느껴졌으니까.

그곳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권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음 차례로 나선 사람은 귀도였다. 그가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쓰러진 남자의 시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시시하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귀도가 일화검존을 응시하며 물었다.

“당신이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아나?”

그의 물음에 일화검존이 천천히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차갑고도 우아한 기도.

앞서 검무극에게 보여줬던 검왕의 기도가 사방에 수백, 수천 개의 검날이 가득했다면, 일화검존의 기도는 반대였다.

단 한 자루의 검.

그 외로운 검이 바로 눈앞에 겨눠져 있는 느낌.

그것이 바로 일화검존의 기도였다.

“누군지 관심 없다.”

일화검존이 그 외롭고도 깊은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 너도 네가 누군지 구구절절 말하지 마라.”

주먹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일화검존을 바라보는 이안의 두 눈에 동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 바로 저 모습이다.

저렇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침없이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검 한 자루 차고 중원을 주유하는 거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삶.

약자에게 자유는 환상일 뿐, 진정 강한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건 옆에서 지켜보던 황룡무관 관주 연백인도 마찬가지였다. 구구절절 말하지 말란 말을 한마디로 줄이면 이 말이 될 거다. 자신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닥쳐라!’

저 한마디를 하고 싶은 열망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열망이 무관의 모든 이를 내보내고 홀로 이 피바다 속에 자신을 서 있게 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장내에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널려 있는 시체들.

고수라 생각되었던 자도 단 한 수에 죽었고.

그리고 자신은 상대가 마존인지도 모른 채 시건방을 떨고는 이쪽 편에 붙어 있는 상황.

연백인의 시선이 권왕 강후를 향했다.

관중석에 앉아 있는 그는 정말 구경꾼처럼 굴고 있었다.

‘이렇게 다 죽어 나가는데도 거기 그냥 앉아만 있을 거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에 연백인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뭐 하고 있소, 당신.’

그는 지하에 있는 남자가 이곳으로 올라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저 의자가 스르륵 내려갔다가 그 남자가 앉은 채 올라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라면 저 무서운 마존들 모두를 죽일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귀도의 얼굴에 살짝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일화검존에게 철저히 무시당했음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그건 곤란하군.”

그가 여유롭게 자신의 옷을 손으로 매만졌다.

“나는 내가 누군지 널리 알리고 싶은 사람이거든. 내 옷을 보면 알지 않나?”

붉은 무복에 흰색으로 그려진 귀신 그림, 바로 귀도의 상징.

“특히 요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져서 말이야.”

그는 우연히 영초를 복용했다. 아, 우연히는 아니었다. 자신과 가장 친했던 사람이 오랫동안 보관해 온 보물을, 그를 죽이고 강탈한 것이었으니까.

사령불사초(邪靈不死草).

그 영초 덕분에 막대한 내공을 얻은 것은 물론이고, 그 이후부터 피부가 팽팽해지고, 검은 머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이 귀한 것을 친우가 복용하지 않은 것은, 이 영초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사악한 기운이 점점 머릿속을 파고들어서 결국 미쳐버린다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부작용이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복용 다음 날 나타날 수도 있고, 십 년 후에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귀도는 과감하게 그걸 복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난 사악하고 미친놈이니까.

늙은 귀도 시절에도 사도의 이름난 고수였는데, 젊음과 내공까지 더해지자 그는 정말 강해졌다. 그 누구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조금 전 일화검존의 대단한 한 수를 보고도 여유가 넘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일화검존, 너는 내가 죽인 이들 중에 가장 자랑스러운 이름이 될 거다.”

일화검존은 여전히 차갑게 반응했다.

“관심 없고.”

다만 이건 궁금해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다.”

권마가 이런 질문을 할 성격이 아니었으니, 알아낼 만한 것이 있다면 자신이 알아봐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소교주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으니까.

적들은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지만, 이쪽은 모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소교주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면, 벌써 아래로 내려가 봤어야 할 상황.

귀도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아래쪽 상황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챈 일화검존이 다시금 귀도를 무시했다.

“넌 말은 많지만 정작 알아야 할 건 모르고 있군.”

일화검존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여야 할 적이고, 귀도는 존경받을 만한 무인이 아니었으니까.

일화검존의 조롱에 귀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부분만큼은 그도 내심 분노하고 있었다. 강후는 절대 그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 너 같은 하수인에게는 말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정말이지 귀도는 지금껏 온갖 부류의 악인들을 만나봤지만, 저놈처럼 정이 안 가고 기분 나쁜 사람은 없었다.

그때, 강후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나? 당신들은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와 있지.”

그는 검무극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소교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자리. 우리가 아니더라도 너희 교주에게 죽게 되겠지.”

일화검존이 옅게 웃었다.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군.”

소교주에 대해서도, 교주님에 대해서도.

소교주는 죽지 않을 것이고, 설령 그렇더라도 교주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을 것이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롭겠지.

일화검존의 시선이 다시 귀도를 향했다.

“그럼 네놈들과 더는 할 말이 없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차가운 멸시가 깃들었기에, 귀도 역시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도를 뽑았다.

그의 독문도법은 흑영귀수도법(黑影鬼手刀法).

일곱 개의 패도적인 초식으로 이뤄진 도법으로, 수많은 이가 이 도법에 목숨을 잃었다. 이제 이 강력한 무공에 날개를 달았다.

쏴아아아아아아.

귀도의 몸에서 강력한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원래도 사악한 성정을 지닌 그였는데, 사령불사초의 사기까지 합쳐지면서 그의 기도는 정말 지독한 악의를 담고 있었다.

후아아아앙.

불어온 사기가 일화검존의 새하얀 무복을 휘날렸다.

그 지독한 기운 속에서도 일화검존은 도도한 눈빛으로 귀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 검무극과 비무를 할 때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성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그녀의 검술은 십일 성을 넘어 십이 성 대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독문무공은 일화검법(一花劍法).

별호와 검도 모두 독문검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만큼 자신의 독문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녀였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그녀는 더는 초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해 나가는 중이었다. 일화검법의 여덟 개의 초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二) 초식이 하나(一)가 되고, 그리고 그 하나의 초식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 비로소 검술의 극의에 도달하게 되리라.

검이 자유를 얻을 때 비로소 완벽한 무의(武意)에 도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선공을 날린 사람은 귀도였다.

쇄애애앵!

그녀를 향해 강력한 도기가 날아들었다.

일화검(一花儉)이 뽑히며 날아든 허공을 갈랐다.

촤아아아아악!

마치 비단천이 쫙 갈라지듯, 휘몰아쳐 날아온 도기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꽝! 콰앙!

갈라진 도기가 뒤쪽으로 날아가서 담벼락을 부수며 무너뜨렸다.

귀도의 표정이 굳어졌다. 막아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가볍게 막아낼 줄은 몰랐다.

“역시! 마존은 마존이다, 이 말이지.”

번쩍하는 순간, 일화검존은 어느새 귀도를 베어가고 있었다.

짧고 경쾌한 칼바람 소리.

검과 도가 맞부딪쳤다. 찰나라도 늦었으면 목이 날아갔을 한 수였다.

어느새 뒤로 물러간 일화검존을 보며 귀도의 두 눈이 순식간에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검존! 넌 오늘 내 손에…….”

다시 튀어 오른 불꽃.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랐다.

목을 노리며 검을 날렸던 일화검존이 또다시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훅!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다시 눈앞에서 검을 날리고 있었다.

귀도는 이 한 수를 막아냈지만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벌써 이 공격에 어딘가 크게 베였을 거라는 것을.

‘강하구나!’

시작부터 속도와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자신이 이렇게 밀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마존을 무시한 건 아니지만, 젊어진 자신보다 더 강할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물론, 그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강력한 사기를 뿜어내며 귀도의 도가 허공을 연속해서 찢어발겼다.

파파파파팍!

일화검존은 연속된 다섯 번의 공격을 두 번의 검으로 막았고 나머지 세 번의 공격은 보법을 발휘해서 피했다.

일화검존의 움직임은 간결하면서도 우아했다. 보통 우아하면 동작이 크고 느릴 것 같겠지만, 그녀는 빠르고 간결한 움직임이 어떻게 우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는가 싶다가도 한 줄기 바람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신형은 귀도를 베고 있었다.

가벼운 움직임, 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검, 급한 상황에서도 다급하지 않은 그녀의 한 수, 한 수는 그야말로 우아함을 넘어 고고한 느낌마저 들었다.

귀도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곧장 반격했지만 이미 일화검존은 도가 공격할 수 있는 범위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초식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았다. 가볍게 불었다가 강하게 불고, 봄바람처럼 부드럽다가도 또 폭풍처럼 매서웠다.

지켜보고 있던 이안은 단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금 일화검존은 보여주고 있었다.

검을 든 사람의 움직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귀도는 이 싸움이 길어질수록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끼지 않고 자신의 절초를 발출했다.

수십 가닥의 도기가 쏟아져 내리는 귀신비, 바로 귀우(鬼雨)였다.

도기가 비처럼 일화검존에게 쏟아졌다. 과연 인간이 비를 피할 수 있을까?

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팍!

일화검존은 빗속을 내달렸다. 빗속을 달렸으면 젖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건만, 그녀는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먼저 쏟아진 곳으로 피하고, 도기와 도기 사이를 피하며, 검으로 쳐내면서 피하고. 그야말로 인식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다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귀도는 보았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에 있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그 차분한 눈빛을 보는 순간, 귀도는 자신의 모든 내공을 다음 초식에 쏟아부었다.

후아아아아앙!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귀신 바람, 그의 마지막 초식 귀풍(鬼風)이었다.

그녀에게 거대한 도풍이 불어닥쳤다. 막대한 내공이 실린 도풍에 땅거죽이 뒤집혔고, 바위와 나무 담벼락이 모두 휩쓸려 날아갔다.

권마는 돌아서 내공이 없는 이안을 안으며 호신강기를 크게 일으켰다.

휘이이이이이이이.

이안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건물에서 창밖으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일화검존이 걱정되었다.

주위가 이럴진대, 일화검존은 이 도풍의 한가운데 휘말렸다.

휘이이이이이.

이윽고 발광한 귀신처럼 휘몰아치던 바람이 멈췄다.

귀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이 한 수는 정말 제대로 들어갔다. 건방진 일화검존은 피하지 않고 자신의 귀풍을 정면으로 맞섰다.

‘언제나 자만이 문제지.’

먼지가 가라앉으며 드러나는 장내의 모습에 귀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불신에 가득 찬 두 눈을 부릅떴다.

일화검존은 그 자리에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옷자락 하나 찢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가 차분하게 물었다.

“더 보여줄 것이 남았나?”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불신과 공포뿐이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제나 죽어가던 적들이 자신에게 했던 상투적인 말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이번에 들린 훅하는 바람 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지금껏 들렸던 바람 소리 중에 가장 경쾌했다.

귀도는 그 앞에 멍하게 서 있더니.

스스스슥.

그의 얼굴과 몸에 혈선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내 인생은 이제 다시 시작인데…….”

그가 반토막이 되어 허물어졌다. 흘러나온 핏물이 귀도의 옷을 빠르게 적셨다. 하얀색으로 그려진 귀신이 붉게 물들었다.

아무리 젊어져도, 아무리 사악한 기운이 강해지고, 내공이 많아졌어도 일화검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근래 검술의 극의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아니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귀도의 시체 너머 뒤쪽 저 멀리 본관 건물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이 사선으로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쾅쾅!

연백인의 집무실이 있던 본관 건물이 사선으로 무너져 내렸다.

귀도에게 날린 마지막 한 수에 담긴 검의 정수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일화검존이 권마와 이안 쪽으로 돌아섰다.

일화검존이 돌아서 들어오자 권마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검술에 대한 예의였고, 그녀에 대한 예의였다.

일화검존 역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았다.

이안의 얼굴에는 놀람과 감동이 가득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감동한 것은 귀도를 죽여서도, 건물이 무너져 내린 것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일화검존의 옷 때문이었다.

시체들이 널린 피바다 속에서 이 싸움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녀의 백의에는 피 한 방울 튀어 있지 않았다. 그 비처럼 쏟아지는 도기 속을 누볐는데, 바닥의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이안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말했다.

“검존님께서는 방금 제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일화검존이 이안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사이 권마가 앞으로 나섰다.

이제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강후와 붉은 붕대를 감은 젊은 남자, 그리고 연백인뿐이었다.

도풍 밖으로 필사적으로 달아나 간신히 목숨을 구한 연백인은 무너진 건물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수하가 모두 죽고, 데려온 두 고수까지 죽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강후는 침착했다.

“언젠가 당신과 싸워보고 싶었지.”

강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붉은 붕대의 젊은 남자도 함께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이 동시에 붕대를 풀었다.

그 아래 주먹에 알아볼 수 없는 작은 크기의 글자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두 사람에게 새겨진 글자는 색과 내용이 서로 달랐는데 그들의 주먹에서 괴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는 일화검존과는 달리 이안은 표정을 굳혔다.

붕대를 풀지 않았을 때의 기도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들의 주먹에 괴이한 사술까지 보태져 있었다.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저 죽음의 기운은 보통 사악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제자로 보이는 붉은 붕대 남자까지. 분명 어떤 역할을 하기에 함께 나선 것이리라.

내공만 남아 있었다면 자신이 함께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저 젊은 쪽을 자신이 상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태산 같은 아버지의 등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매일 밤 절벽 아래에서 권법을 연마하던 그 등처럼 말이다.

“주먹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권마가 자신의 큰 주먹을 힘차게 말아쥐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주먹에 자신 없으면 차라리 무기를 들어.”

이제 관중석에는 죽음이

‘무섭다.’

붉은 붕대를 감은 남자는 권왕 강후의 수제자 진단(珍緞)이었다. 사부에게 권법을 배운 이래 누군가를 보며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지옥에서나 봄 직한 저 무서운 외모도 그랬고, 자신들의 주먹에서 흘러나오는 이 불길한 기운을 분명 느꼈을 텐데도 성큼성큼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거침없는 기세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무섭게 느껴진 것은 사부의 반응이었다.

강후에게 권법을 배운 지 십오 년이 되는 동안, 사부에게 이런 멸시의 말을 하는 사람을 본 적도, 또한 사부가 이렇게 참는 모습을 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존은 마존이구나.’

앞서 일화검존이 보여준 실력도 정말 대단했다. 아니,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저 젊은 여인이 혼자서 수하들을 모두 베었으니까. 단 세 명이지만, 수천 명을 앞에 둔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

자신의 사부가 누군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그는 사부를 믿었다.

‘내가 어떻게 싸우느냐가 중요하다.’

권마와 박빙의 승부가 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승패는 갈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의 큰 착각이었다. 이 싸움에 그의 의지나 판단이 개입될 여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걸어온 권마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강후는 피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첫 주먹.

내공이 실린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자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한걸음 뒤로 물러난 권마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강후의 주먹에서 퍼져나오는 지독한 기운 때문이었다. 사기와 요기가 뒤섞인 이 괴이하고 혼탁한 기운은, 정신력이 약하거나 내공이 부족한 이라면 벌써 정신이 혼미해졌을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전장을 잠식하며 짓누르는 죽음의 기운처럼 주변을 부유했다.

강후는 차갑게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이 주먹에 아직 무기까지 들어야 할 상대는 만나지 못해서.”

앞서 권마의 조롱에 대한 반격이었지만, 이제 권마는 말이 아니라 주먹으로 대답했다.

그것도 강력한 주먹으로.

우르르릉! 콰콰쾅!

천둥소리와 함께, 엄청난 위력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앙!

두 사람의 주먹이 다시 맞부딪쳤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친 거였지만, 그 어떤 병장기가 부딪친 것보다 강력한 여파를 남겼다.

후아아아앙.

충격의 여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는데 이런 충격파가 밀려들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불어온 돌풍에 이안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앞서 싸움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었듯,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내공이 바닥난 그녀를 지켜주었다. 일화검존이 아니었다면 이 돌풍에 휩쓸려 날아갔을 것이다.

실제로 저쪽에 서 있던 황룡관주 연백인은 저 멀리 바닥을 굴렀다.

파아아악.

멀리 담장 주위에 세워진 나무들이 크게 휘어지며 나뭇잎들이 허공으로 휘날렸다.

쏴아아아아아.

마치 쏟아지는 눈처럼 나뭇잎이 휘날리는 그곳에서 권마와 권왕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조금 전 그 주먹은 그냥 주먹이 아니었다.

권마의 독문무공 벽력수라권의 총 여섯 개의 권 중에서 세 번째 주먹.

제삼권 천뢰수라.

그 무거운 주먹이 날아가 박힌 것이다.

이안은 아버지의 무공에서 한 가지 변화를 느꼈다.

‘아버지의 천둥소리가 작아졌어.’

심야수련을 하면서 여러 차례 들어본 천둥소리였는데? 한데 작아져도 너무 작아졌다.

‘혹시 몸에 문제라도 있으신 걸까?’

아직 그녀는 알지 못했다. 이 천둥소리가 줄어들고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절벽을 무너뜨릴 준비가 되는 순간임을. 권마의 무공이 그 순간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중이라는 것을.

강후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에서 더욱 강력한 사기와 요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 한 수로 주먹이 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바로 시작하자고?”

강후의 물음에 권마가 나직이 말했다.

“네 주먹의 악취가 너무 심해서.”

다시 강후의 인상이 굳어졌다. 권마는 자신을 철저히 조롱하고 있었다. 천지도 모르는 자의 조롱이라면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되겠지만, 상대는 그럴 자격이 있는 자였다.

강후가 솟구치려는 살심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 살심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강후가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주먹보다 더 아프군.”

그 침착한 반응에 권마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상대를 인정해 주는 고갯짓이 아니었다.

죽여야 할 상대를 왜 인정해 주겠는가?

이건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상대가 인정해 줄만 한 자니까, 스스로 자만해선 안 된다는 고갯짓. 상대는 천뢰수라에도 죽지 않고 멀쩡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성질은 나도 못지않게 급해서.”

이번에는 강후가 쇄도하며 주먹을 날렸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치는데도 마치 쇳덩이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났다.

진단은 한발 물러선 채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눈에 허점들이 보였다.

‘저기! 지금!’

왜 사부는 저곳을 반격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이라면 공격을 날렸을 빈틈이 보였는데, 사부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위험합니다, 사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부의 빈틈이었다.

하지만 권마는 그 빈틈을 노리고 공격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빈틈이 아니구나.’

그 빈틈은 허점이 아니라, 함정이었다. 그곳으로 주먹을 날리는 순간, 역으로 공격을 당하게 될 죽음의 함정. 권왕의 수제자쯤 되는 인물의 눈으로도 알아보지 못하는 최상의 수들이 순식간에 오가고 있었다.

그냥 봐선 무식한 싸움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들의 싸움은 그런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권법가는 맨손으로 병장기를 상대해야 하는 이들이다.

그랬기에 이 무식하게 주먹을 주고받는 권법가들은 더 똑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날카로운 무기를 든 이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 권법의 극의에 가장 가까이 다다른 두 사람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진단이 끼어들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 수가 어떤 노림수고, 다음 수는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그가 할 일은 사부가 자신을 소리쳐 부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리라.

기회를 엿보던 공방이 오가던 중, 이번에는 강후가 비장의 한 수를 날렸다.

강후의 독문무공은 유혼절명권(幽魂絶命拳).

그중에서 지금 발출한 한 수는 제이권 참혼격(斬魂擊).

쇄애애애애애액.

주먹에서 날아간 작은 강기는 상대방에게 이르는 순간 갑자기 거대한 대도처럼 커졌다. 몸을 날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강기.

쇄애애애애액.

권마의 주먹이 날아드는 참혼격을 강타했다. 그 거대한 강기를 향해 한 걸음도 피하지 않은 채 주먹을 날렸다.

제일권 흑운수라.

여섯 초식 중 첫 번째 초식이지만 그렇다고 위력도 가장 아래란 의미는 아니었다. 맞아 보면 안다는 그 흑운수라가 강기가 되어 허공을 찢어발겼다.

두 개의 강기가 충돌하던 그 순간!

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주위가 휩쓸렸다.

와지끈! 꽈르르릉!

앞서 나뭇잎만 날렸던 나무는 통째로 뽑혀 나갔고, 주변 담장이 일제히 충격으로 무너졌다. 앞서 일화검존이 반만 무너뜨렸던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번 충격에 휩쓸려 아까보다 더 멀리 바닥을 뒹굴었다가 일어난 사람은 황룡무관주 연백인이었다. 내상을 입어 가슴을 움켜쥔 그가 내심 탄식했다.

‘내 무관이, 내 무관이 다 무너지는구나.’

물론 무관이야 다시 지으면 되지만, 일화검존의 일검에 본관 건물이 무너진 후에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살 수 있다.’

이것이 본능의 외침이었다.

‘이건 내가 끼어들 싸움이 아니야.’

누가 이기든 자신에게는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을 거란 불길한 예감.

하지만 지하에 있는 그 사람이 절세비급을 들고나왔을 때, 자신이 없다면? 그가 자신을 찾는다면?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이 마지막 순간에 없다면?

상상만 해도 무서운 그 아쉬움이 연백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때론 탐욕보다 더 무서운 것이 미련이고 아쉬움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리고 그가 벼랑 끝을 보고도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동생까지 죽였는데!’

그 사실이 그를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이 살면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벼랑 끝에 서고 나서야 절실하게 느꼈다.

‘그가 나올 거다. 그때까지만 살아남자.’

그는 혼자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이안을 보호하며 싸움을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권마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전의 실력이 아님을 느꼈다. 검무극과 인연이 된 이후, 그 역시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런 권마에게 이런 싸움을 벌이는 강후의 모습을 보며 이번 배후가 얼마나 강한 자들인지 새삼 느꼈다. 한두 해 준비해 온 조직이 아니다.

‘대체 언제부터 만들어진 조직이지?’

그녀의 시선이 강후를 향했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참혼격을 선 자리에서 막아내자 강후의 기세가 달라졌다. 언제나 죽음의 기운을 상대에게 풍겨내던 그였는데, 이제 그 죽음의 기운이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느꼈다.

쇄애애애애액!

이제 관중석에 앉은 이가 죽음임을 느끼자 두 사람의 속도는 더욱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지켜보는 이들도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다.

덩치가 크면 느리다고?

권마는 그 선입견을 산산이 부수었다. 그는 빨랐다. 그 큰 몸의 근육은 힘이 아니라 속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속도의 향연 끝에서.

다른 시도가 만들어낸 지금까지와는 다른 바람 소리.

바람 소린 가벼웠고 격타음은 무거웠다.

강후의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었다. 마치 하늘이라도 올려다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턱 앞에 권마의 주먹이 내질러져 있었다.

푸아악!

강후가 하늘을 바라보며 피를 뿜어냈다. 정말 분수처럼 솟구친 피가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이권 벽력수라가 그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벽력수라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날리는 초식. 비천검법으로 따지면 쾌검식인 창천식과 마찬가지인 그 초식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정말 마지막 순간 고개를 뒤로 젖히지 않았다면 얼굴이 통째로 날아갔을 위력이었다.

바로 그때 강후가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

“권마, 이 씹어 죽일 새끼야! 그 더러운 상판대기를 완전히 뭉개주마.”

실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제 그가 또 다른, 아니 본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살기는 우아한 살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가장 바닥에 있는 폭력적이고 저급한 살기, 그는 그런 원색적인 살기를 이용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닌 모든 살기를 다 끌어올리고 있었다.

“온몸이 가루가 되도록 패주겠다. 몸속에 있는 단 하나의 뼈도 남기지 않을 거다. 질근질근 씹어서 삼켜주마.”

평생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살기들. 정말 미워서 나오는 욕설과 살기.

권마는 그 살기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저 저급함에 속으면 안 된다. 이 새끼가 본래의 하찮은 모습을 보이는구나, 이런 생각을 품는 순간 상대에게 죽는다.

강후의 살기는 바로 그런 살기다.

상대가 파락호라면 모를까, 저런 실력을 갖춘 자라면 이건 지옥불 옆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치는 살기다. 저급함에 숨긴 인간 본연의 진짜 살기.

과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강후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빛이 난생처음 겪는 강렬한 살기로 하얗게 빛나는가 싶더니.

스스스슷.

그의 양손에 새겨져 있던 글자들이 귀신불처럼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 역시 이 세상에는 없는 빛이었다.

권마는 상대가 마지막 수를 쓰려한다는 것을 직감했고 이 싸움이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라 예감했다.

그래, 이 싸움이 바닥까지 가서 뒹굴어야 하는 싸움이라면, 그래서 그 지옥문을 누가 열고 나오느냐의 싸움이라면.

강후가 붕대를 풀게 한 것이 오랜만이라고 말한 것처럼.

권마가 웃통을 훌훌 벗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냈다.

수련에서야 자주 옷을 벗긴 했지만, 실전에서 웃통을 벗게 한 상대를 만난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권마가 주먹을 힘차게 말아쥐었다. 그의 팔 근육은 터질 듯 팽팽했고, 핏줄은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 혈관 속을 흐르는 진기는 용암처럼 뜨거웠다.

물론 권마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딸이 보는 앞에서의 싸움이었으니.

“맞다가 도저히 못 참겠으면 말해. 검으로 상대해 줄 테니까.”

너,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다들 지쳐있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천의궁 무인들은 그 흔한 잡담조차 하지 않은 채 피곤한 눈빛으로 타오르는 불만 쳐다보았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상자를 어깨에 짊어진 채 다가왔다. 그는 천의궁 무인 복장을 한 검무극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모닥불 건너편 무인의 질문에 검무극이 상자를 내려놓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그야 처음 보니까. 거, 엉덩이 좀 옆으로 치우시오.”

다른 무인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많은 이가 진을 치고 있는 곳이니, 누가 누군지 다 알 수는 없었다. 죽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롭게 도착한 이겠지.

검무극이 자신이 가져온 상자에서 술병을 하나 꺼내더니 한 모금 쭉 마셨다. 그러고는 그 술병을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에게 던졌다.

“술은 어디서 구했나?”

“알고 싶소?”

“아니.”

남자가 술을 마셨다. 다른 이들도 기다렸다가 한 모금씩 돌려 마셨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술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요즘이었다.

검무극의 행동이 워낙 자연스러운 데다 술까지 주자 아무도 이 새로운 얼굴을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적이라면, 일부러 이렇게 와서 끼어 앉을 리는 없을 테니까.

검무극은 천의궁 진영의 제법 중심부까지 잠입했다. 목표는 저 앞으로 보이는 중앙 막사.

‘쉽진 않겠군.’

그곳 주변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문제는 그들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을 펼칠 수 있을 만큼의 내공은 없지만, 풍신사보의 보법을 변형해서 펼칠 수는 있었다. 저들의 눈을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천의궁주와 그를 바로 옆에서 호위하는 진짜 고수들이었다. 그들까지 속인 채 저곳으로 잠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긴 너무 아까운 일이기에 뭔가 수를 찾아내야 했다.

그때 아까 그 무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술 더 없나?”

“있지. 한데 그랬다간 감당할 수 있겠소?”

검무극이 중앙 대형막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져가는 술이라는 의미였다. 한 병 정도야 어찌 빼돌린다 치더라도, 더 빼돌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정말 비싼 술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남자는 감히 술을 더 내놓으라는 말은 하지 못했고 대신 불평을 쏟아냈다.

“젠장. 이놈의 전쟁은 언제 끝날는지.”

그러자 둘러앉은 이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곧 끝날 거야. 저쪽에 무황신검이 도착했다는 소문 못 들었나? 조만간에 우리 궁주님과 일전을 벌일 거다.”

“혹시라도 우리 궁주님이 지면 어쩌지?”

“어쩌긴. 그럼 우리도 다 뒈지는 거지.”

죽는다는 말에 오히려 다들 웃었다.

대화를 듣고 있으니 이들이나 무림맹 무인들이나 똑같았다. 처음에야 온갖 의미를 부여하고 참전했겠지만, 결국 시간이 흐르면 모두의 바람은 한 가지뿐이었다. 어서 전쟁이 끝나기를.

그때 저쪽에서 무인 하나가 뛰어오며 말했다.

“궁주님께서 돌아오셨다!”

그러자 다들 벌떡 일어나며 주위가 부산해졌다.

검무극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지금 저 막사에 지금 천의궁주가 없다는 의미잖아?’

검무극이 상자를 든 채 대형막사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근처에 상자를 내려두고 실력을 발휘했다.

두 눈 뜬 채 코 베이는, 그런 화려한 보법이 아니더라도, 일반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막사 내부로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과연 막사 내부는 비어 있었다. 안에 있는 모든 게 고급스러웠다. 의자를 덮은 털가죽도, 작은 탁자도, 그 위에 놓은 술병과 술잔조차도.

천의궁주가 올 줄 알면서도 이곳으로 들어온 데에는 한 가지 믿는 바가 있어서였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왔을 때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공이환술을 펼친 것이다. 검무극이 만든 공간은 딱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 그마저도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어둠 속 공간이었다.

지금 지닌 내공으로 펼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것도 시공이환술과 시천비술을 쉬지 않고 수련한 덕분에 그 경지가 높아져서 아주 적은 내공으로도 공간을 열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들어선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들어선 이는 노인과 중년 남자였다.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골을 이루고 있었지만, 노인이라 불리기는 아까운 면도 있었다. 그의 허리는 꼿꼿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서는 인생을 마무리하는 석양이 아니라, 아직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다.

이 노인이 바로 천의궁주 위무천(尉武天)이었다.

정파의 상징인 무림맹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바로 그다.

위무천이 흠칫 멈춰서 내부를 돌아보았다.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다. 위무천의 무공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위무천과 함께 들어온 중년 무인이 물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인상이었는데, 그가 바로 천의궁 삼대신궁 중 하나인 수호궁(守護宮)의 궁주 백양기(白陽基)였다.

“아무것도 아니네.”

위무천은 검무극이 펼친 시공이환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옆에 놓인 탁자의 술을 부었다.

“그럼 쉬십시오.”

수호궁주가 돌아서 나가려는데 위무천이 물었다.

“무림맹과의 이 싸움에 천마신교와 사도맹이 개입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나?”

수호궁주가 다시 위무천을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

“이 전쟁으로 정파 무림의 정기가 크게 훼손되기를 바라서겠지요.”

차분한 그의 대답에 위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차도살인지계. 천의궁이라는 칼로 무림맹을 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속셈이라네.”

위무천은 그 속셈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전쟁을 시작했다.

정사마의 오랜 증오를 이용한 전략이었다. 서로 잘되는 꼴을 절대 보지 못하는 그 오랜 미움 때문에, 다른 곳이 공격을 받아도 절대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과연 예상대로 천마신교와 사도맹은 무림맹을 돕지 않았다. 오히려 천의궁을 돕는 각파를 지원했다.

“우리가 정파 무림과 싸우다가 양패구상할 거라고 여기겠지만.”

위무천의 입가 주름이 만들어낸 미소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오만함 때문에 우린 승리하게 될 거네.”

그를 바라보는 수호궁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과연 오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 천의궁주는 무림일통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일까?

“한잔 받게.”

위무천이 수호궁주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수호궁주가 정중히 술을 받았다.

또르르릉.

“자넨 이 전쟁을 반대했지.”

잔으로 떨어지는 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수호궁주는 안다. 궁주의 간절한 꿈이 천하일통이라는 것을. 그 꿈을 위해 오랜 세월 준비를 해왔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황신검은 강한 자입니다.”

수호궁주는 이 말이 자칫 잘못했다간 위무천의 자존심을 건드는 말이 될 수 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었다.

설령 무황신검을 죽인다 해도, 무림맹이 무너지면 정파의 수많은 은거 고수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도맹이 남아 있고, 천마신교가 남아 있었다.

천하일통.

이 네 글자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건 오직 피다.

그리고 이 네 글자가 조합되는 순간, 아무리 피를 빨아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괴물이 된다.

이 글자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들이부어야 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위무천이 말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물론 수호궁주는 안다. 어디 그라고 피에 미친 광인이겠는가? 무림일통을 향한 의지가 강할 뿐.

그의 야망도 이해한다. 천재적인 무재인 그는 역대 천의궁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수호궁주의 사과에 위무천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니네.”

위무천이 술잔을 비웠다. 수호궁주는 그가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그럼 누구의 전쟁입니까?”

“천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늘의 뜻.

천의궁은 그 천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다. 천의궁이 언제부터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늘의 뜻을 지키는 조직이라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하늘이 피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호궁주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이 말 역시 천의궁주의 심기를 크게 건드는 말임을 알았지만, 이 역시 해야 할 말이었다. 수호궁은 천의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위무천이 수호궁주를 응시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지만, 수호궁주는 겁을 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는 듯 천의궁주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놀라운 사실을 전해주었다.

“비궤가 깨어났네.”

수호궁주는 깜짝 놀랐다. 그뿐만 아니라 듣고 있던 검무극도 깜짝 놀랐다. 비궤가 천의궁과 관련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들의 대화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비궤가 깨어났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일까?

“자네도 알다시피 비궤는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전해지는 본궁의 신물이네.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초대 천의궁주가 비궤를 얻은 후, 천의궁은 대대로 이 비궤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되었지.”

그의 말에 검무극은 비궤와 천의궁과의 관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비궤가 천의궁의 신물이었구나.’

그 비궤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호궁주는 놀란 얼굴로 위무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믿기 어려웠다. 지난 세월 비궤는 그냥 하나의 상징물처럼 존재해 왔다. 어딘가의 종처럼, 어딘가의 향로처럼, 또 어딘가의 검처럼.

‘한데 그 비궤가 깨어났다고?’

위무천은 그 증거를 직접 보여주었다.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비궤가 이것을 내놓았다.”

위무천이 꺼내 든 것은 작은 비궤였다.

그 비궤를 보는 순간 수호궁주가 그 자리에 예를 갖추며 무릎을 꿇었다. 큰 비궤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이 한 몸 신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천의비궁의 신물인 비궤는 감히 눈을 마주치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비궤는 천의궁의 보고에 보관되어 있으면서, 오직 천의궁주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비궤를 바라보는 위무천의 눈빛에도 경외와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기에 담긴 힘이 느껴지네. 가공할 힘이지. 무황신검 따위가 막을 수 있는 힘이 아니지.”

수호궁주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천의궁주가 이런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는지.

바로 그때였다.

이 순간, 놀랍게도 비궤가 울었다.

우우우웅.

위무천조차 놀랐다. 이 작은 비궤를 얻은 후,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위무천은 높이 비궤를 치켜들었고, 수호궁주는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하늘의 뜻에 따라 이 싸움을 시작했네.”

“궁주님께서 천의에 따라 반드시 천하일통을 이뤄내시도록 돕겠습니다.”

더는 이 전쟁의 의미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수호궁주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궤는 천의궁주 때문에 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의 품에서도 비궤가 진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무극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비궤다.’

삼백 년의 세월을 넘어 같은 비궤인 두 비궤가 서로 교감하고 있음을.

그 긴 세월을 넘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것도, 저 비궤가 이곳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너, 이렇게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미안. 이렇게 대단한 신물인 줄도 모르고 얼굴에 웃는 그림을 그렸으니.

그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녀궁의 신녀(神女)께서 오셨습니다.”

신녀는 또 다른 삼대신궁 중 하나인 신녀궁을 이끄는 궁주였다.

그녀가 왔다는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곳 전쟁터에 직접 신녀가 왔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으니까.

“모셔라.”

잠시 후 그곳으로 백의를 입은 여인들이 먼저 들어왔다.

그녀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길을 만들자, 그 사이로 신녀가 걸어들어왔다.

신녀궁 궁주 예설(豫說).

그녀는 두 눈을 하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본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신성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비로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위무천이 그녀를 정중히 맞이했다. 신녀 역시 자신의 수하이긴 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존재였다.

“신녀께서 이 험한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자 신녀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한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예언이 내려왔습니다.”

그 말에 위무천과 수호궁주 모두 깜짝 놀랐다.

천의궁 사람들이 신녀를 존경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그녀가 천기를 읽고 예언을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역대 신녀들 중에 가장 정확한 예언을 해온 그녀였다.

위무천과 수호궁주가 동시에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본궁을 대표해서 하늘의 뜻을 듣습니다.”

위무천의 두 눈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중요한 싸움을 앞두고 내린 예언이었다.

부디 자신의 천하일통에 대한 긍정적인 예언이기를 바랐다.

“천하일통이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위무천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그래, 비궤가 깨어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비궤가 왜 울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 신녀에게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다만 하늘의 뜻은 궁주님께 있지 않습니다.”

위무천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분명 천하일통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데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니?

신녀의 입에서 충격적인 예언이 흘러나왔다.

“본궁의 천의가 이뤄지는 시기는 삼백 년 후입니다.”

내 제자가 선물로 준 거다

천의궁주 위무천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천의가 이뤄지는 게 삼백 년 후라고?’

바로 옆에서 수호궁주는 위무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직접 보았다. 이렇게 놀라고 당황한 궁주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놀라기는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삼백 년 전에 이미 그 일을 예언했었다고?’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신녀를 응시하던 위무천이 천천히 걸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

신녀를 앞에 세워두고 앉아서 술을 따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또로로롱.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곳에는 오직 술 따르는 소리만 들렸다.

수호궁주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위무천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술이 떨어지는 저 맑은 소리는 그가 분노를 참아내는 소리다.

위무천은 말없이 넘칠 듯 가득 찬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수많은 많은 피를 흘렸는데.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왔는데. 인제 와서 하늘이 그런 예언을 전했다고? 그럼 비궤는 왜 깨어난 것인가? 왜 자신의 손에서 그렇게 운 것일까?

잠시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위무천이 차분한 어조로 신녀에게 물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양옆으로 도열했던 백의 여인들의 인상이 굳어졌다.

혼자 앉아서 술을 따르는 것도 모자라 이제 술을 권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의궁주라지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신녀의 두 눈이 가려져 있기에 그녀가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차분한 신녀의 대답에 위무천은 홀로 술을 마셨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던 바로 그 순간, 신녀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시진 못해도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신녀의 말에 백의 여인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들은 놀라고 긴장했다. 신녀가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는 건, 비단 자신들이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번 예언이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신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그녀는 정확히 위무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술병을 들어서 정확히 위무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또로로롱.

술이 채워지는 맑은소리가 백의 여인들의 마음을 더욱 두렵게 했다. 금방이라도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신녀가 전한 예언이 천의궁주에게 어떤 의미일지 모두가 잘 알았으니까.

그녀가 따라준 술을 마시지 않은 채 위무천이 물었다.

“내가 이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신녀는 차분히 예언을 전했다.

“이번 싸움에서 천의궁은 대패할 겁니다. 궁주님께서는 저들의 손에 돌아가실 테고요.”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신녀가 아니었다면, 천의궁주의 일장에 머리통이 박살 나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

하지만 위무천은 그러지 않았다. 차가운 분노는 오히려 그를 차분하게 했다.

그가 신녀가 따라준 술을 비웠다.

“안타깝지만 이번 예언은 틀렸습니다.”

틀린 것 같습니다도 아니고, 틀렸다고 단정하는 말이었다. 앞서 술을 권한 것보다 더 큰 무례였다.

늘어선 여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천의궁주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건 눈빛이었다. 신녀의 예언을 부정한다는 건,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위무천은 그녀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신녀만을 향해 있었다.

차가운 긴장감 속에서 신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당연히 궁주가 부정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더없이 차분했다.

“신녀의 일생에 단 한 번도 예언이 내리지 않을 수는 있어도, 내린 예언은 틀리지 않습니다.”

위무천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의 욕망이 치밀어 올랐다.

눈앞의 그녀를 죽이고 이번 싸움의 제물로 삼고 싶다는 살의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간 천의궁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민심은 자신을 떠나게 될 것이다. 천의궁의 무인들은 신녀의 예언을 믿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하늘이 직접 내게 뜻을 전하셨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당신이라면 다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위무천의 감정은 조롱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비궤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신녀의 예언을 믿었을 테니까. 설령 믿지 않았더라도 전쟁을 그만뒀을 것이다. 이 엉터리 예언에 말이다.

위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신녀에게 다가섰다. 바짝 붙어선 그가 신녀에게만 들리게 나직이 속삭였다.

“천하를 일통한 후, 당신을 죽이고 신녀궁을 멸하겠소.”

그 충격적인 말에도 신녀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위무천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겠소? 만약 그대의 예언이 맞다면 어차피 나는 죽을 테니까. 반대로 예언이 틀렸다면 당신이 나를 엉터리 예언으로 기만한 것이 되니까 죽어 마땅한 짓을 저지른 것이고.”

위무천이 미소를 지으며 모두가 다 들리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예언은 특별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녀가 고개를 돌려 위무천을 쳐다보았다.

가려진 천 너머로 위무천의 얼굴을 보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아가 미래까지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선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위무천은 신녀의 눈에 가려진 천을 벗겨 버리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저 천 아래서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지금껏 너희를 그토록 귀하게 대했는데, 이 중요한 싸움을 앞둔 나에게 너희는 고작 이것밖에 못 하는가?’

신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차분하게 위무천에게 말했다.

“저는 예언을 전할 뿐입니다.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시는 건 궁주님이시지요.”

위무천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녀가 돌아섰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눈을 가린 그녀의 시선이 잠시 한쪽 벽을 향했다.

다들 그곳에 붙어 있는 중원 지도를 쳐다본다고 생각했지만, 그 지도 앞에는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이 서 있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있다.’

신녀가 위무천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저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백의 여인들은 물론이고 위무천 역시 깜짝 놀랐다. 그녀가 전장에 남겠다고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위무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가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은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

* * *

권왕 강후의 기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살기는 새하얗게 빛나며 형체를 가졌고, 양손에서 귀신불처럼 빛나는 글자들은 상대의 시야를 현혹했다.

강후의 등 뒤로 지옥문이 열렸다. 악행을 저지르고 지옥 불에 빠진 자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불바다 속에서 악귀들은 사방으로 날뛰었다.

강후의 기도는 지옥.

느끼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리고, 싸울 의지를 빼앗는 그런 기도였다.

권마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웃통을 벗고 본격적으로 싸움에 나선 권마의 기세는 무서웠다.

그는 거침없이 지옥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악귀들이 사방에서 달라붙었고 사방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권마는 그 지옥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들어갔다.

휘이이이잉!

권마의 기도는 바람이었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찢어발기는 바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부는 바람, 달라진 권마의 바람.

그 바람이 지옥에서 불기 시작했다.

권마의 바람에 악귀들이 날아갔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불덩이가 바람에 휩쓸리며 사방으로 날았다. 악귀들이 불에 타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지옥은 진짜 지옥이 되었다.

그 바람 부는 지옥의 한가운데서 두 사람이 격돌했다.

콰아앙!

서로를 향해 날아드는 주먹에 막대한 내공이 실렸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두 사람의 진각에 땅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두 사람 모두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맞부딪친 주먹에서 귀신 울음이 들렸고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쾅! 콰앙! 쾅!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살기와 마기가 서로를 짓눌렀다.

지켜보던 이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멀리 서 있는 그녀에게도 느껴졌다. 강후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지독한 기운이.

일화검존이 그 기운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내공이 소진된 그녀는 이렇게 서서 구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내공이 멀쩡한 연백인조차 저 멀리 물러선 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 내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괴물들이야.’

자신이 절세비급을 얻게 되더라도 저자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비급을 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비급, 비급, 비급.

오직 머릿속에 그것만이 가득한 그는 잊고 있었다. 애초에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어쩔 수 없이 시작된 일임을.

그걸 잊게 만든 건 지하로 내려간 그 남자다.

그의 점잖은 태도에 어쩌면 정말 절세신공을 줄지도 모른다고 믿어버린 것. 결국 그 남자도 저런 괴물일 텐데. 아니, 어쩌면 이들보다 더 무서운 괴물일 텐데.

그러는 사이에도 권마와 강후 사이에서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주먹에 새겨진 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귀신불이 강후의 살기와 뒤섞이면서 주위 공기는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 속에서도 권마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이 권마의 주먹이라는 듯.

한데, 아니었다.

권마에겐 주먹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쇄애애애애액!

팽팽한 접전을 단숨에 무너뜨린 한 수는 주먹과 주먹 사이를 가르며 쭉 내뻗어진 권마의 발차기였다.

벽력수라권 제사권 철권수라.

그 한 방에 강후의 턱이 돌아가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설마 권마가 발차기를 할 줄은 몰랐기에 그 빠르고 강력한 한 방을 제대로 허용한 것이다.

권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권마의 주먹이 강후의 배에 사정없이 박혔다. 호신강기가 발휘되었지만, 창자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으윽!”

처음으로 강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승기를 잡은 권마의 주먹이 더욱 빠르고 강해졌다.

퍽! 퍽! 퍼억!

강후의 몸으로 권마의 주먹이 연속해서 박혔다.

“이런 썅! 그만!”

연속해서 주먹을 허용한 강후가 욕설을 내지르며 저 멀리 관중석으로 튀어 달아났다. 관중석에 앉아 있던 죽음과 나란히 앉던 그 순간.

쇄애애애액!

뒤이어 쇄도한 권마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완전히 뭉개버리려 날아들었다.

순간 강후의 눈빛이 달라졌다. 나 역시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눈빛으로.

강후는 주먹으로 막는 대신 손바닥을 쫙 펼쳤다.

시이이이익.

시커먼 벽이 손바닥 앞을 막았다. 무엇이든 다 때려 부술 기세로 권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주먹이 벽을 강타하는 순간, 격타음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렸다.

쑤우욱.

벽이 꿀렁거렸다. 액체처럼 느껴지는 벽이 권마의 주먹을 흡수했다.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이 괴이한 액체가 주먹을 꽉 잡았다.

쇄애애애액.

그와 동시에 강후의 다른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도 소리가 달랐다.

쾅, 하는 격타음이 아니라.

서걱! 서걱!

연속해서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고.

파아아악.

액체 덩어리에서 간신히 주먹을 빼낸 권마가 뒤로 튕겨져 나왔다.

주르르륵.

붙잡히지 않았던 권마의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두껍고 큰 팔뚝과 주먹이 길게 베여 있었는데 상처가 깊었다. 이것도 다행이었다. 강후가 노렸던 곳은 목과 심장이었으니까.

강후의 주먹 끝에서 빛처럼 일렁이는 칼날이 보였다. 평범한 칼날이 아니었다. 강후의 살의가 만들어낸 살기의 칼날.

그의 비장의 한 수가 발휘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권마는 잠깐 쉬자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권마가 팔과 손의 혈도를 눌러 지혈하자 강후도 앞서 얻어터진 내상을 다스렸다.

내상을 다스리던 강후가 피를 토했다. 피를 토하자 오히려 얼굴이 편안해졌다.

그 사이 권마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바닥에 던져둔 자신의 윗옷을 들었다.

설마 금창약이라도 바르려는 것일까? 그럴 리가. 강후는 이런 생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권마가 옷에서 뭔가를 찾아 꺼냈다.

그것은 한 벌의 장갑이었다.

신축성 있게 늘어지더니 권마의 그 큰 손에 밀착하며 끼워졌다.

“설마?”

강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권법을 연마한 이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그것.

“투신!”

예전에 검무극이 줬던 투신이었다. 검의 최고가 천마검이라면, 권갑의 최고는 바로 투신이다.

강후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권마가 투신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문제는 그게 권마의 손에 끼워졌다는 거다.

“천하의 권마가 권갑을 낀다고? 세상이 비웃을 일이군.”

어떻게든 투신을 벗기려는 도발이었다.

하지만 강후의 도발에 권마는 걸려들지 않았다. 권마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죽으면 죽었지, 맨주먹으로 상대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권마는 달라졌다. 수치심을 보이는 대신 강후에게 자랑했다.

“내 제자가 선물로 준 거다.”

“뭐?”

놀라고 당황한 강후에게 권마가 덧붙였다.

“우리 소교주님이 주신 거라고.”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권마의 변화가 비단 무공 수준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권마가 유연해졌구나.’

권마가 변했다. 세상 단단해서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가,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가.

‘변했기에 강해졌다.’

일화검존은 이 변화가 누구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화장하지 않고, 하얀 머리카락으로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이런 썅!”

강후는 다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저급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자신이 지닌 모든 살기를 끌어올렸다. 의도해서가 아니라 정말 쌍욕이 나왔다. 정말 권마가 죽이도록 미웠다.

사아아악.

강후의 주먹 끝에서 살기의 칼날이 더욱 길고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정말 만년한철도 잘라버릴 것 같은 예기였다.

“이 징글징글한 마존놈아! 어서 와라, 그 큰 몸뚱어리 썰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자 권마는 투신을 낀 주먹을 손바닥에 쳐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파앙! 팡!

“첫 개시니 영광으로 알도록!”

차라리 검 좀 빌려달라고 해

투신을 착용했다고 권마는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강했다. 자신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싸워도 아직 놈을 죽이지 못했으니까. 자신에게 권갑까지 끼게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강후는 마지막 독기까지 모두 끌어올린 상태.

방심하면 죽는다.

여전히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강후의 주먹에서 튀어나온 칼날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의 팔은 권마보다 더 길었다.

쇄애애애액.

무쇠도 종잇장처럼 잘라버릴 칼날이 권마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투신이 저 살기의 칼날을 막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기에, 권마는 되도록 공격을 피하며 신중히 대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순간, 피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든 살기의 칼날.

파아악!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든 그 칼날은 권마의 손바닥에 막혀 멈춰 있었다.

‘젠장! 막혔다.’

강후는 보았다. 권갑에 아무런 손상이 가지 않았음을. 이것이 바로 천하제일권갑의 위용이었다.

쇄애애애액.

권마의 반격에 강후가 몸을 틀고는 이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권갑 뒤에 숨어서 좋겠군. 차라리 방패까지 들지 그래?”

어떻게든 자존심을 긁어서 투신을 벗게 하려는 끈질긴 시도였는데.

팡, 팡!

권마가 다시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이걸로 충분해.”

강후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의 도발과 조롱은 통하지 않았다.

강후는 한 가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권마는 젊은 시절부터 교주와 중원을 떠돌았기에 마존들 중 그 누구보다 실전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온갖 유형의 적들에게서 도발이란 도발은 다 경험해 본 사람이었다.

쇄애애액.

강후의 주먹이 빠르게 권마의 요혈을 노렸다. 딱 한 번만 제대로 적중하면 끝이었다.

칼날에 몸이 뚫리면 그 상처 난 자리를 주먹이 강타하게 될 테니까.

날아든 칼날을 피하며 권마가 주먹을 날렸다.

후우웅.

거대한 쇳덩이가 스친 것처럼, 권마의 주먹이 스친 볼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쉬이익!

공격을 피한 강후의 칼날이 복부를 노렸다. 정말 아무렇게나 찔러도 어딘가는 찔릴 것 같은 큰 몸이었는데.

공격은 스치고, 또 스치기만 했다.

권마의 몸에 긁힌 흔적 하나 남기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강후 역시 쉽사리 권마의 주먹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건 생존의 문제였다.

한 방 맞으면 죽는다.

이 위기의식이 두 사람의 육체를 극한의 흥분상태로 유지했다.

두 사람의 실력이라면 당연히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싸운다고 여기겠지만, 아니었다. 지금 두 사람은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나가도 아프지 않을 것이고, 손목이 잘려도 잘린 그대로 주먹을 날릴 것 같은 극한의 흥분상태였다.

그랬기에 막을 수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공격은 이런 흥분상태가 아니라면 결코 막을 수 없는 극한의 속도와 위력으로 날아들었으니까. 흥분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티지 못했다.

그들의 주먹에 갑자기 강기가 실리기도 했고,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연이어 터져나갔다.

펑! 퍼엉! 퍼어엉!

그곳에 그 어떤 것이 있었어도 박살이 났을 그런 위력이었다. 바위가 있었다면 가루가 되었을 거고, 쇳덩이가 있었다면 떡처럼 뭉개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초식에 얽매이는 경지를 넘어섰기에, 그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권법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이제 이 싸움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저렇게 엄청난 내공을 담아 쉴 새 없이 싸웠는데, 내공이 많이 남았을 리 없다. 두 사람 모두 조만간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권마를 응원했다.

만에 하나라도 권마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닐 것이다. 이안도, 검무극도, 또 그 모습을 지켜봤던 자신까지도. 그 여파는 모두에게 미칠 것이다.

‘우릴 위해서라도 이기셔야 합니다.’

일화검존이 옆에 서 있는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버지의 싸움으로 보지 말고, 권마의 싸움으로 봐라.

똑똑한 이안이 그게 어떤 말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네, 검존님.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새겨두라는 의미.

어디서 이런 싸움을 직접 볼 기회가 있겠는가?

파파파팡!

치고받으며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던 그때, 강후가 균형을 잃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권마의 어깨가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적중당하는 순간 강후가 살기의 칼날을 휘둘렀지만, 권마의 손에 막혔다.

쇄애애액.

권마의 주먹에 얼굴을 적중당한 강후가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런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코피라니?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이들의 싸움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강후가 콧등의 혈도를 눌러 피를 멈추며 물었다.

“기회였는데 왜 따라붙지 않았지?”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도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권마가 자신의 손목과 주먹을 주무르며 말했다.

“넌 함정 파는 걸 좋아하잖아?”

앞서 위험에 몰렸을 때, 살기의 칼날을 쓴 것을 의미했다.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실제로 따라붙었으면 기습을 가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강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권마의 딸을 인질로 삼을 수만 있다면.’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이안 앞에 서 있는 일화검존 때문이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그녀까지 이 싸움에 개입하게 된다면. 그땐 진짜 지옥문이 열리게 될 테니까.

‘이 방법까진 쓰지 않으려 했는데.’

강후가 아껴둔 수를 발휘했다.

선천진기까지 써야 하는 수였으며 수제자인 진단의 목숨을 거둬야만 쓸 수 있는 수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한 저 큰 주먹을 이기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래, 이제 끝을 보자”

강후의 시선이 지금까지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던 수제자 진단을 향했다.

사부의 시선에 진단은 드디어 자신이 나설 때임을 느꼈다.

‘제가 목숨을 바쳐 돕겠습니다.’

진단의 주먹에 새겨진 글자들이 붉은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강후의 손에서도 귀신불 같았던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사아아아아아.

푸르고 붉은빛이 서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원래 강후는 이 두 가지 기운을 모두 자신의 주먹에 담아야 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기운은 상극이었기에, 한 사람의 몸에 있으면 그 충돌로 큰 내상을 입게 된다. 그걸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공력은 아니기에 하나의 기운을 제자의 주먹에 그 기운을 보관해둔 것이다.

이 기운을 하나로 모아 최대한 빨리 권마를 없애야 한다.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기 시작하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자신이 기운을 전해줘야 한다는 것까진 진단도 알고 있지만, 그가 모르는 결정적인 사실이 있었다.

자신의 손에 있던 기운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기와 선천진기마저 함께 빨려 나가서 결국 절명하고 만다는 것을. 그만큼 사악한 사술이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아니, 그만큼 비정한 사부라는 점을.

휘이이이이이이.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허공에서 만나며 뒤섞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경쾌하고 짤막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허공을 가득 채웠던 붉은 기운이 다시 진단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검이 회수되는 소리.

어느새 일화검존은 진단의 뒤쪽에 서 있었다.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분열이 시작되더니.

스르르르륵.

진단의 신형이 사선으로 잘려 나가며 피를 뿜어냈다. 자신이 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설마 일화검존이 이 싸움에 개입할 줄 몰랐기에 강후는 격노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 미친년이!”

일화검존이 강후를 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일 대 일 싸움 아니었어? 이 대 일로 싸워도 되는 싸움이었나?”

그렇다고 하는 순간, 일화검존이 끼어들어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강후의 입에서 또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개 같은 년이! 이 버러지만도 못한 비겁한 마교 놈들!”

일화검존에게 욕설을 하자 이안은 화가 났다.

하지만 당사자인 일화검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녀가 신경 쓴 사람은 권마였다.

일화검존이 권마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 제자 놈의 기운이 합쳐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함부로 끼어들어선 안 되는 싸움이었지만.

일화검존은 권마의 변화를 믿었다.

유연해진 그의 마음을. 그의 바뀐 삶을.

오늘 이 싸움이 명예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싸움이기를.

다행히 권마는 전혀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소.”

강후가 권마를 비웃었다.

“투신을 끼고, 이제는 여자 도움까지 받는군.”

끝까지 그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애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여자가 검존이라면 그 도움, 받아볼 만하지 않겠나?”

권마의 말에 일화검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자신을 두고 저런 말을 할 줄이야. 그래, 자신의 예상은 맞았다.

이안은 이제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진짜 마존들의 싸움이구나. 상대의 도발 따위엔 말려들지 않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않는 진짜 어른들의 싸움. 그녀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또 보고 있었다.

반대로 강후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팔마존에 대해 보고서를 올렸던 놈이 눈앞에 있다면 당장 머리통을 박살 냈을 거다. 그가 올렸던 마존들에 관한 보고는 다 엉터리였으니까.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권마가 이 싸움에서 이기려는 이유를.

권마는 그를 이겨서 명예를 얻으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그를 어서 이기고, 이곳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싶을 뿐이다.

검무극이 나왔을 때 처음 보는 사람이 저 추잡스러운 욕을 해대는 강후가 아니라 자신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소교주가 활짝 웃으며 농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농담이 자신에게 하는 농담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아니었으면 더 좋겠다.

이안에게 하고, 일화검존에게 하고.

자신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 교주와 함께 다닐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구나.’

감히 그 누구도 교주에게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교주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바로 그 마음 말이다.

권마가 그 마음을 담아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꽈아악.

강후의 주먹에도 막대한 내공과 함께 감정이 실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마지막 격돌이라는 것을.

스스스스슥.

강후의 주먹에서 튀어나온 살기의 칼날이 더욱 길어졌다.

권마가 그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차라리 내 딸에게 가서 검 좀 빌려달라고 해.”

권마도 조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싸울 때는 즐길 줄도 알고. 이안이 보고 있어서 오히려 참고 있을 뿐.

물론, 강후 역시 호락호락 당하지 않았다.

“빌리긴 왜 빌리나? 다 찢어 죽이고 뺏으면 되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쇄애애애애액!

강후의 유혼절명권

마지막 제칠권 사혼격(死魂擊).

권마의 벽력수라권

마지막 제육권 염뢰수라.

권마의 주먹에 담긴 것은 기다림과 그리움.

강후의 주먹에 담긴 것은 미움과 증오.

주먹과 주먹이 충돌하기 전, 권마의 눈에 보인 것은 강후가 펼쳐낸 지옥이 아니라 절벽이었다.

오랫동안 올려다보던 그 절벽.

권마는 팔에, 주먹에 들어가는 힘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절벽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주먹에서 터져 나왔다.

‘그래, 무너뜨린다!’

그렇게 권마와 권왕, 두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아아앙!

겹겹이 눌러 담은 미움과 증오도, 검무극을 위한 권마의 마음을 이길 수는 없었다.

파파파파팍!

살기의 칼날이 하얀 빛무리를 일으키며 부서졌다.

칼날을 부순 권마의 주먹이 강후의 주먹까지 박살 냈다.

꽈드드드득!

“으아아아아아악!”

강후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그 비명은 길지 않았다. 강후는 보았다. 시야를 가득 덮는 시커먼 그림자를.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주먹을 부순 권마의 그 큰 주먹이 그대로 날아가 강후의 얼굴에 박혔다.

강후의 호신강기가 산산이 깨어지면서, 그의 얼굴이 움푹 파이며 완전히 함몰되었다.

얼굴이 박살 난 권왕 강후가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염뢰수라에서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강후가 마지막 순간 본 것은 관중석에 앉아서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죽음이었다.

절명한 강후가 바닥에 쓰러졌다.

드디어 권마와 권왕 간의 생사혈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이안이 권마에게 달려가 와락 안았다. 아버지가 무사해서 너무 기뻤다.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애타는 마음으로 보았는지 모를 것이다.

일화검존은 아버지의 싸움이 아니라 권마의 싸움으로 보라고 했지만,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나는 괜찮다.”

권마의 든든한 대답에 그제야 이안이 안도했다.

이제 그녀는 딸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조금 전 싸움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정말 멋지셨어요.”

권마가 씩 미소를 지었다. 어색하지만 그 거친 얼굴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권마가 이 싸움으로 또 다른 경지에 올라섰음을.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서 이런 맞수와의 생사혈전은 그야말로 영약보다 귀한 기연이었다.

연백인은 완전히 박살난 무관을 멍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쌓인 시체들은 모두 자신과 같은 편의 시체들이었다. 자신은 명백히 강후 쪽에 붙었으니 권마가 일장에 쳐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연백인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어?’

주위의 모든 것이 박살 나 있었는데, 박살 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기관 장치가 있는 의자들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진 이곳에 오직 유일하게 그것들만이 멀쩡했다.

‘설마?’

우연일까? 아니면?

연백인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권마는 끼고 있던 투신을 천천히 벗고 있었다.

투신을 내려다보는 권마의 눈빛이 깊었다.

권마는 그것을 곱게 포갠 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들어 그 품에 넣었다.

아까 꺼낼 때는 몰랐는데, 투신을 넣어두는 가죽 주머니가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옷을 빼앗아 벗기지 않는 한, 절대 잃어버리지 않게끔 권갑 주머니를 달아둔 것이다.

연백인은 긴가민가했지만. 이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저 의자를 부수지 않는 싸움을 했음을.

어디 통로가 부서진다고 그들이 못 올라오겠느냐마는, 이건 소교주에 대한 예의였다.

들어간 기관으로 편하게 올라오라는, 땅바닥을 파헤치고 올라오게 하지 않으려는 권마의 예의.

아버지는 운이 좋아서 그를 이긴 게 아니었다. 그 긴박한 싸움 속에서도 이 의자를 남겼다는 의미는.

‘아버지가 더 강했어.’

그리고 이안은 소교주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소교주를 기다리고자 했던 마존의 마음을.

어쩌면 검무극이 풍류주점의 탁자를 부수지 않으려 했던 마음과 의자를 지켜낸 아버지의 마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녀의 추측이 정확했다는 듯, 권마가 난장판이 된 그곳을 바라보며 연백인에게 말했다.

“귀한 분 올라오실 거니, 깨끗이 치우시오.”

연기 연자가 아니라 인연 연자로

신녀가 함께 온 백의 여인들과 나가자 막사에는 천의궁주 위무천과 수호궁주, 그리고 시공이환술 속 검무극이 남았다.

검무극은 이들이 나가지 않으면 막사를 나갈 수 없었다. 특히 위무천의 눈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불과 수년의 내공으로 저와 같은 고수의 감각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무슨 속셈이지?”

위무천이 신녀가 이곳에 남겠다는 의중을 궁금해하자 수호궁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궁주님을 설득해서 전쟁을 그만두게 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위무천이 신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은 예언을 전할 뿐이라고 말할 때만 해도, 설득하려는 의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분명 마지막에 마음을 바꿨다. 왜?’

위무천이 지도 앞으로 걸어갔다. 마지막에 신녀는 저 지도를 쳐다보다가 마음을 바꿨다.

그 이유가 위무천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위무천은 볼 수 없지만, 검무극과 그는 서로를 바라보며 마주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비궤를 품고서.

그래서였을까? 위무천은 마음의 격정을 느꼈다. 매번 보던 지도를 보고 있는데 오늘따라 묘하게 심장이 뛰었다.

그가 지도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하던 그때, 뒤에서 수호궁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들었습니다. 천하일통을 이루시면…….”

그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뒷말을 잇지 못했다.

신녀와 신녀궁을 죽이고 멸하겠다는 위무천의 귓속말을 그도 들은 것이다.

“설령 이번 예언이 엉터리라 할지라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수호궁주는 이미 이 전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비궤가 깨어난 이상, 천의가 위무천에게 있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수호궁은 태생적으로 천의궁주가 아니라 천의궁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곳.

수호궁주로서 신녀를 죽이는 천의궁주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건 천의궁의 붕괴를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궁주님을 위해서라도 그러시면 안 됩니다.”

위무천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뜻에 반하는 말을 했음에도 표정은 부드러웠다.

“알겠네, 그렇게 하지.”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의 모든 걸 내게 걸었는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그때 밖에서 수하의 보고가 들렸다.

“무림맹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무림맹의 전서라는 말에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전쟁의 막바지에 적에게서 전서가 날아왔다?

수하가 들어와서 위무천에게 공손히 전서를 전하고 나갔다.

내용을 확인하는 위무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고개를 든 위무천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무황신검이 보낸 친필서찰이네.”

무림맹주가 직접 보낸 첫 전서였지만 그 내용은 마지막을 담고 있었다.

“수하들의 희생을 더는 볼 수 없으니, 사흘 후에 백양봉(白陽峰) 정상에서 나와 단둘이 승부를 보자는군.”

수호궁주는 깜짝 놀랐다. 설마 무림맹주가 일대일 생사대전을 제안해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거절하십시오!”

수호궁주는 단호했지만, 위무천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무황신검은 이런 일로 계략을 부리는 자가 아니지.”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무황신검이라는 걸 두 사람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거절하면 세상은 나를 겁쟁이로 여길 거네.”

수호궁주도 이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감이 확 치밀었다.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대결을 신청한 거겠지, 라는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그랬기에 수호궁주는 무례를 저지르면서까지 강하게 반대했다.

“무림은 겁쟁이와 용자가 아니라 승자와 패자만을 기억할 겁니다.”

겁쟁이가 되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말로 들릴 게 뻔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위무천이라고 어찌 찝찝함이 없겠는가? 받아들이면 상대의 제안에 끌려가는 셈이 되는데.

바로 그때였다. 마치 이 대화에 끼고 싶다는 듯 위무천 품에 있던 비궤가 진동했다.

갑작스럽게 비궤가 진동하자 두 사람은 모두 놀랐다.

하필이면 이때 비궤가 운다고?

위무천은 이것을 천의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설마 이 반응이 싸우자겠지, 도망가자는 것이겠는가?

“이 싸움이 끝이라면 그래, 작은 수모쯤은 감수할 수도 있겠지. 한데 이 싸움은 시작이라네.”

그는 사도맹과 천마신교까지 없애고, 천하일통을 꿈꾸는 이였으니까. 겁쟁이 취급을 받아선 결코 이룰 수 없는 대업이었다.

“이 대결 받아들이겠네.”

위무천이 그 자리에서 친필로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내용이었다.

“이걸 무황신검에게 보내게.”

비궤의 진동을 보았기에 수호궁주는 더는 말리지 못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궁주님.”

서찰을 받아 든 수호궁주가 그곳을 나갔다.

검무극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 싸움의 결과를 알고 있다. 신녀의 예언대로 위무천은 무황신검에게 죽는다.

하지만 그 마지막 싸움에 대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기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후인들은 알지 못했다.

‘그 싸움이 사흘 후에 벌어지는구나.’

홀로 남은 위무천이 품에서 비궤를 꺼냈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모습과 지금 비궤를 바라보는 저 눈빛에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직 비궤에 담긴 힘을 얻지 못했다.’

만약 힘을 얻었다면 서찰을 먼저 보낸 사람은 위무천이었겠지.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왜 신녀에게 그렇게 화가 났는지.

그 예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검무극에게도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저 비궤는 텅 빈 비궤일까?

만약 기운이 들어 있다면 저 비궤에는 어떤 구슬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일까? 만약 들어 있다면 왜 그 힘을 위무천에게 주지 않고 있는 걸까? 조금 전에는 왜 진동한 것일까?

검무극이 품에 있던 비궤를 꺼내 들었다.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비궤를 내려다보았다.

‘삼백 년 전 이곳에서 대체 너는 무슨 일을 벌였던 거냐?’

* * *

검무극이 막사를 나왔다.

위무천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를 놓치지 않고 나온 것이다.

곧장 신녀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신녀가 묵는 막사 주위에는 백의 여인들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고, 수많은 천의궁 무인이 그녀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자 몰려들어 있었다.

천의궁 사람들에게 있어 그녀는 그야말로 성스러운 존재였다.

아무래도 새벽녘에 조용히 찾아와야 할 것 같았다.

그길로 곧장 검무극은 다시 무림맹 진영으로 넘어왔다.

황룡무관 지하에 있던 큰 비궤는 자신을 흡수한 후 무림맹 진영으로 먼저 보냈다. 분명 이곳에서 시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 살았구나!”

조장인 정대와 조원들이 반갑게 검무극을 맞이했다. 정찰 중 맞닥뜨린 적과의 싸움에서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모두 목숨을 잃었을 그들이었다.

“달아난 놈을 잡으려 했는데, 결국 놓쳤습니다.”

“살아왔으면 됐다, 됐어.”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한마디.

“되긴 뭐가 돼?”

험악한 기세로 막사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조웅이었다. 무림맹주인 무황신검에게 우리가 이길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나서서 호통을 쳤었다. 감히 어디서 함부로 나서느냐며.

결국 심야 정찰을 내보낸 것도 조웅이었고.

“네가 적 셋을 베었다고?”

이미 그는 앞서 정찰에서 복귀한 이들의 보고를 들은 후였다.

그의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고생하라고 내보냈는데 오히려 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적을 셋이나 한자리에서 벨 수는 없지. 그럼 달아난 자는 어떻게 되었나?”

“놓쳤습니다.”

“그를 뒤쫓다가 이제야 복귀했고?”

“네.”

조웅은 어떻게라도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네 집안이 어떻게 되나?”

“고아로 자랐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여기서는 감숙 서도파 행세도 할 수가 없어서요.

“그럼 무공은 누구에게 배웠지?”

“우연히 중상을 입은 고수를 치료해 주면서 한 수 배웠습니다.”

조웅의 얼굴에 의심이 스쳤다. 이 눈엣가시 같은 놈은 확인해 볼 수 없는 말만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정대가 나섰다.

“저 친구가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을 겁니다.”

다른 조원들도 나서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찰조가 적을 셋이나 벤 것은 근래 없던 일입니다.”

“신입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결국 조웅은 못마땅한 얼굴로 검무극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오히려 의심이 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처음에는 어디에나 한 사람쯤은 있을 법한 속 좁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지?’

그리고 그 의문이 밝혀진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복면을 착용한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은 앞서 검무극을 찾아왔던 그 조웅이었다.

“사흘 후 백양봉이오.”

수뇌부만 아는 정보가 복면인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어둠 속 수풀 사이에서 검무극이 지켜보고 있었다. 조웅을 감시하다가 밤에 은밀히 나서는 것을 미행한 것이다.

검무극은 조웅이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배신자였기에 그는 주변 모든 걸 의심하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조사하러 나온 것은 아닐까? 누군가 또 다른 배신자는 아닐까?

하지만 그가 배신자라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검무극은 복면인의 기도에서 낯익은 기도를 느꼈다. 복면인이 드러낸 기도는 마기였다.

‘마인!’

놀랍게도 조웅은 천마신교에 정보를 건네고 있었다. 무림맹 역사에 이 마지막 싸움이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에 천마신교가 개입해 있었어!’

* * *

늦은 밤, 신녀는 막사에 앉아 있었다.

천의궁주는 특별히 그녀를 챙겨주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제공된 막사는 무인들이 쓰는 일반 막사였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이 좁고 낡은 공간에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다.

신녀를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백의 여인들의 총책임자인 화선(華仙)이 그녀에게 말했다.

“날이 밝으면 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궁주님.”

화선은 신녀가 걱정되었다.

당대 신녀는 역대 신녀 중에 가장 신성한 기운을 타고났으며 그녀가 했던 모든 예언은 정확했다.

그런 그녀를 천의궁주는 앞에 세워두고 술까지 권하는 그야말로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

다시 말해 이번 예언을 부정하겠다는 뜻.

이런 상황에서 무림맹과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신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천의궁주는 신녀를 구해주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까.

함께 온 백의 여인들이 무공을 익혔지만, 기본적으로 신녀궁은 무공을 중시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곳.

애초에 정파의 고수들을 해치우고 유유히 떠나갈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돌아가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누구 말일입니까?”

“동이 트기 전에 손님이 올 거야.”

그 말에 화선은 내심 놀랐다. 이 전장에서 누구를 만나려는 것일까?

“새벽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안으로 들여보내. 그리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게 하고.”

“네, 알겠습니다.”

동트기 전, 정말 그녀의 말대로 누군가 그곳에 찾아왔다.

마치 약속이나 한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여인들은 누군지 묻지도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다시 말해 신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

‘정말 시공이환술 속에 있던 나를 봤구나.’

신녀는 아까 막사에서 보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신녀가 먼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없이 매혹적이면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당신은 누구죠?”

시공이환술 속의 자신을 봤지만, 삼백 년의 세월을 넘어서 온 사람이란 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묻는 것일까?

눈을 가린 이 신비로운 여인에게서 뭔가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검연입니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를 씁니다. 이 만남이 끝나면 영원히 연기처럼 사라질 사람이지요.”

정말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찾을 수 없을 테니. 이 말로 소개한 이래, 가장 적합한 소개였다.

“왜 이곳에 왔나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검무극은 자신의 대답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닙니다.”

상대가 그것을 받아 약점으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언제나 그렇듯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건 진실이리라.

“운명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저도 왜, 무엇 때문에 왔는지 모릅니다.”

검무극이 신녀를 응시하며 정중히 덧붙여 물었다.

“그러니 알려주십시오. 저는 왜 온 겁니까?”

어디서 왔는지 말하지 않았고, 그녀는 묻지 않았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눈을 가린 천이 밖을 볼 수 있는 천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에게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이번 예언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내려왔어요.”

생각지 못한 말이었기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전장의 한가운데,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전하라는 예언이었지요.”

어둠 속에 서 있는?

내공이 부족해서 자신이 만들었던 좁은 시공이환술 속은 어두웠다. 만약 그녀가 정말 자신을 보았다면,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이었으리라.

그녀가 위무천에게는 전하지 않았던 두 번째 예언이 전해졌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검무극은 그녀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렸다.

어둠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말 그대로 밤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걸까?

오직 예언을 전할 뿐이라는 듯, 신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축객령을 느꼈기에 검무극은 신녀에게 작별을 고했다.

“예언을 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정중히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신녀가 말했다.

“제겐 연기 연자가 아니라 인연 연자로 느껴지는군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제게 감사할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눈을 가린 하얀 천 아래 여전히 알 수 없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은 이미 다 갚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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