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회귀" [600-650화]

고기 사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 이번에 틀리게 만드십시오 너에게 닿았으니 오늘도 안 나오면 안에 든 채로 우릴 기다리는 건 제가 모임이 하나 있거든요? 살인멸구는 아무나 당하는 줄 아냐? 그 고사리손으로 무슨!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천마는 과로 중 우리보다 돈 더 버는 거 아냐? 세상에 없는 해약 각성한 교주님을 감당할 수 있겠나? 이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팍팍 돈 받으러 왔소 우린 무림에 친절했던 적이 없었는데 이 무림은 잠시 형에게 맡기고 너무 잘 감당할까 봐 걱정됩니다. 왜 우리 허락 없이 만들었지? 죽는 날 하늘은 왜 봐요? 피도 눈물도 없는 마교라지만 쪼그리고 앉아 뭐 하고 있냐? 안 들키면 되죠 선물을 주려거든 세 개를 내 옛날 성질 나오게 하지 마라 네가 부른 사람은 언제 오나? 나는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오 나는 이것들과 끝장을 볼 생각이오 더 잘생겨졌고 더 무서워졌다 이 싸움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조금만 풀어줘도 이런 식이지 수작을 부리는 검우진보다 앞으로 네가 앉아야 할 자리는 큰 악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들이 형과 친구를 동시에 건드려? 여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경솔한 생각이 듣고 싶네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다들 형만 좋아하기 있습니까? 우리가 악당이 된 기분인데? 아니면 죽지 않을 방법이 있거나 누굴 죽이러 오는지는 맞아도 좋고 틀려도 좋고 그가 죽으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인사 정도는 괜찮잖아요? 듣지 말고 죽이십시오! 우리 독왕님 드릴 거요 백 세까지는 사실 것 같습니다 살려주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제가 최고죠? 그때 아버지께 일러바치마

고기 사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

신녀를 만나고 검무극은 다시 무림맹 진영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미 다 갚았으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녀와의 인연이 원래 내 세상까지 이어진다는 의미처럼 들렸는데.

그러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녀처럼 참 신비한 느낌을 주었던 한 사람이.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는 없었기에.

그래, 나중에 확인하자.

지금 집중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내린 예언이었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대체 어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예언에서 말하는 천의는 과연 무엇일까?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하나의 확실한 예감은 있었다.

천의궁주와 무황신검의 대결이 벌어지기 전에 예언의 의미를 찾아내어야 한다고.

비궤가 그 싸움이 끝나고도 자신을 이곳에 남겨둘 것 같지 않아서다. 자신을 예고 없이 쑥 빨아들였듯, 언제 획하고 튕겨내 버릴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렇게 무림맹 막사로 돌아왔을 때,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조장 정대는 깨어있었다.

“어딜 다녀왔어?”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라고 홀연 듯 사라졌다 이렇게 나타나는 검무극이 수상하지 않겠느냐마는, 어쨌든 그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바람 좀 쐬고 왔습니다.”

“조웅이 널 주시하고 있어. 이럴 때는 몸 사리는 거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밥은?”

“괜찮습니다.”

“자, 이거 먹어. 좀 식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할 거다.”

그가 챙겨둔 고기를 건네주었다.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고기는 정말 맛보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그걸 특별히 남겨서 챙겨준 것이다.

고기를 받아든 검무극이 환하게 웃자 정대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그렇게 좋냐?”

“원래 고기 사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 아닙니까?”

환하게 웃은 건 고기 때문이 아니다. 정대의 호의에 기분이 좋아져서다.

삼백 년 전에도 이런 좋은 사람들이 무림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생각. 약육강식의 칼부림만이 전부였다면, 아마 무림은 자신의 시대까지 이어져 오지 못했으리라.

“조장님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뭐 하실 겁니까?”

“이번에는 꼭 장가갈 거다. 우리 노모 소원이시거든.”

“형수 되실 분은 있고요?”

정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얼굴에 안 믿기겠지만 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착해빠져서. 이제 더는 못 기다릴 나이까지 날 기다려줬지.”

그래, 이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야 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어야 한다. 뒤에서 꾸며대는 음모 때문이 아니라.

“혼례를 올리게 되면 너도 초대하마.”

검무극은 말없이 웃었다. 정말 갈 수만 있다면 꼭 가고 싶었다.

‘천마신교 소교주님 오셨습니다!’ 그 외침에 신랑도 신부도, 하객들도 기절초풍할 텐데.

“안 올 거지?”

“멀리서라도 축하드리겠습니다.”

정말 멀리서겠지만.

정대는 기분 좋게 고기를 뜯는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넌 확실히 이상한 놈이야.”

* * *

검무극은 조원들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

예언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했다.

한가하게 정찰이나 하고 있을 때냐?

정말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검무극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여러 번 경험했다. 뭔가 답을 얻기 위해서 온종일 고민만 한다고 그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이렇게 시간을 들였는데도 답을 못 찾는구나, 그 초조함 때문에 결과는 더 좋지 못했다.

이럴 때는 오히려 일상을 더 열심히 사는 게 도움이 된다. 때론 어떤 답은 한 곳을 깊게 파헤쳐서 얻는 게 아니라 문득 바라본 나뭇가지에 던져진 신발처럼 걸려있기도 했으니까.

물론, 오늘은 그 신발을 발견하지 못했다.

정찰하는 동안 예언에 대해 알아낸 것은 없지만, 아예 수확이 없진 않았다.

일부러 정대에게 이곳저곳 물어보면서, 백양봉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으니까.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서 밥을 먹는데 저쪽에서 함성이 들렸다.

그쪽을 쳐다보니 무황신검이 무인들을 시찰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는 무림맹 무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처음 무황신검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앞에 있던 이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묻고 인사했었다. 보여준 모습으로 볼 때 그는 수하들을 존중하고 아끼는 맹주였다.

이윽고 무황신검이 밥상 앞에 늘어선 검무극과 조원들을 지나갔다.

“식사 중이었나? 어서 편하게 먹게.”

그렇게 인사하고 지나가는데, 뒤에서 들려온 힘찬 목소리!

“식사 안 하셨으면 함께하시죠!”

물론,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무극이었다.

조원들이 눈을 크게 뜨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그들의 눈빛들이 딱 이랬다. 생명의 은인이라도 이랬다.

이거 미친놈인가?

무황신검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가 검무극을 알아보았다.

“자넨 그때 그 친구로군?”

첫날 자신에게 맹랑한 질문을 던지던 그 청년. 왠지 모르게 인상적이었기에 알아본 것이다.

“기억해 주시는군요. 가문의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무황신검 뒤에 있던 몇 사람의 무인 중에 조웅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직접 찾아가서 경고까지 했는데 검무극이 또 나선 것이다.

검무극은 그를 못 본 척했다. 그가 천마신교와 결탁한 것을 알리려면 어떻게든 맹주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결탁한 곳이 천마신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큰 사건 줄기에는 개입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이 이곳에 오면서 바뀐 부분들도 있고 이 순간도 어떤 변화를 끼치겠지만, 대세에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내가 함께하면 자네들이 불편할 텐데?”

“저희는 괜찮습니다.”

물론, 조원들은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 안 괜찮습니다!

검무극이 그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한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눈앞에 맹주가 지나가는데 그냥 지나가게 할 수는 없지, 그런 예언의 단서를 찾으려는 노력과는 별개의 이유가.

“그러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무황신검이 자리에 함께 앉았다.

뒤따르던 이들이 안 된다고 말리기 전에 무황신검은 그들을 멀찌감치 물렸다. 그러지 않으면 무인들이 편히 밥을 먹지 못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검무극은 이런 모습에서 맹주가 좋은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허물없는 사람이다, 보여주기식으로 앉을 수는 있다. 하지만 수하들을 멀리 물리는, 이런 사소한 부분을 챙기기는 쉽지 않다.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놓쳐버리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

사람이 큰 건 속이기 쉬워도 오히려 작은 걸 속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다.

“자네들 먹는 거로 같이 먹지.”

정대가 후다닥 가서 무황신검에게 줄 식사를 챙겨왔다. 이게 웬 난리란 말인가?

“찬이 귀하신 분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괜찮네.”

무황신검이 자리에 앉은 것은 순전히 검무극 때문이었다.

이상하게 끌리는 친구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저 맑고 깊은 눈빛도 그렇고. 맹주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이런 의외성도 그렇고.

혹시 무공의 고수가 실력을 숨기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감지되는 내공은 고작 수년에 불과했다.

자신의 눈을 속일 고수라면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일 텐데, 그럴 리는 없었으니까.

검무극이 수년의 내공으로 시작한 것이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무황신검은 백호십칠조와 함께 식사했다.

묵묵히 젓가락질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검무극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는 천의궁주와의 일전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렇게 수하들과 밥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맹주님과 함께 식사했다고 고향에 돌아가면 친구들에게 자랑할 겁니다.”

진하군아, 무려 삼백 년 전에 너희 무림맹에서 가장 유명했던 맹주님과 칼질은 못 했어도 젓가락질은 함께했단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하고 말 자랑이겠지만.

그렇게 무황신검이 식사를 마쳤다. 그는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밥을 다 먹고 일어서기 전, 무황신검이 옆에 앉은 검무극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들리지 않게 나직이 말했다.

“전에 물었지? 저들에게 이길 방법이 있냐고.”

“네, 그때 맹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방법이 있으신데 사람이 많은 곳에선 말할 수 없다고요.”

그러자 무황신검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특별한 방법은 없네.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검무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놀라지 않나?”

무림맹주가 일개 무인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 내용이 자신이 거짓말했다는 거다. 분명 이보다는 더 놀라는 반응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니?”

“이길 방법이 있었다면 맹주님께서는 벌써 이기셨을 테니까요. 어떤 이유에서라도, 무인들이 죽어가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을 분이라는 것,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릴 위해서도 꼭 이겨주십시오.”

검무극을 바라보는 무황신검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무림맹주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무인이, 그것도 이렇게 젊은 청년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말은 분명 자신에게 힘이 되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부탁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여기 우리 조장이 고향에 돌아가서 혼례를 올릴 겁니다.”

뭐야? 그 이야기를 왜 꺼내? 자신이 언급되자 정대는 내심 크게 놀랐다. 왜 꺼냈겠는가?

“그 혼례식에 맹주님께서 축사를 해주십시오.”

너무 놀란 정대의 입에서 악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닙니다, 맹주님. 아닙니다!”

그가 손사래까지 쳤지만, 검무극은 모른 척 덧붙였다.

“열세 명이었던 조원이 이제 다섯이 되었습니다. 그 슬픔 다 이겨가며 꿋꿋하게 조원들 챙겨가며 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충분히 맹주님 축하를 받을 자격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대가 뒤늦게 달려가 검무극의 입을 막았다.

“이놈이 전쟁통에 미쳤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그때 무황신검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그러지. 내가 축사해주겠네.”

그러겠다는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정대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검무극은 그가 진심으로 말했음을 그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식사 마저 하게.”

무황신검이 그곳을 떠나갔다.

정대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의 혼례에 무림맹주가 축사를 해준다고? 정말 상상만 해도 좋았다. 노모는 사람만 만나면 그 자랑을 하시겠지.

“저 잘했죠?”

검무극이 넌지시 묻자 정대가 괜히 좋으면서도 소리쳤다.

“넌 정말 미친놈이야!”

삼백 년 전 정대에게 미친놈 소릴 듣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답게 잘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검무극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고기 챙겨준 사람에게 이 정도 보답은 해야지요.”

* * *

검무극은 정대의 혼례는 챙겼지만, 여전히 예언의 실마리는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밤.

검무극은 백양봉으로 올랐다.

결투 장소였기에 누군가 이곳을 지키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그곳에 올랐다.

내공이 부족해서 구화마공을 쓰지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검무극의 감각은 그대로였다.

감각을 살려 조심히 이동했다. 다행히 가는 도중에 만난 이는 없었다.

백양봉 정상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하긴, 대결 장소로 정해진 곳에 함부로 사람을 보내거나 할 수는 없겠지. 그랬다가 상대가 알게 되면 싸우기도 전에 비겁한 수를 썼다고 구설수에 휩싸이게 될 테니까.

올라와서 보니 왜 백양봉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상은 두 절대자가 멋진 싸움을 펼칠 수 있을 만큼 너른 공간이 있었다. 나무도 있고 바위도 있고, 운치도 있었다.

검무극은 환한 달빛을 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이곳이 예언과 관련된 장소일까?

하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달이 휘영청 밝아서 어둠과는 거리가 더욱 멀었다.

‘비궤야, 예언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냐?’

바로 그때 뒤쪽 저 멀리서 인기척을 느껴졌다.

그 순간 검무극은 사라졌다. 순식간에 시공이환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워낙 빨리 반응했기에 상대는 검무극이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무극은 딱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시공이환술의 어둠 속에서 그곳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도착했다.

그는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흑의 장삼을 입은 젊은 남자였는데, 이곳에 온 이후 처음 보는 이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그가 드러내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정파의 기도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위무천과도 달랐고, 수호궁주와도 다른 느낌의 기도였다.

‘누구지?’

달빛을 가득 담은 남자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뜨거운 열망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홀로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그곳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놀랍게도 두 번째로 도착한 그는 검무극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조웅과 은밀히 만났던 바로 그 천마신교의 복면인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복면인의 입에서 남자의 신분이 밝혀졌다.

“암흑궁주(暗黑宮主).”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천의궁 삼대신궁의 마지막 궁인 암흑궁의 궁주였다.

그가 왜 이곳에서 천마신교의 마인과 만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마음에 신녀가 말해준 예언이 떠올랐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어둠이 바로 천의궁의 마지막 궁주 암흑궁주를 의미했음을.

‘이 사람이 나를 천의로 안내해줄 사람이다.’

이번에 틀리게 만드십시오

마치 운명의 외침처럼, 멀리서 나직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쿠르르릉.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공기가 벌써 습한 느낌을 주었다.

급변하는 날씨처럼 이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것임을 검무극은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서 암흑궁주를 쳐다보았다.

그는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대체 당신은 왜 이곳에서 천마신교와 접촉하고 있는 거지?’

마침 서 있는 곳은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암흑궁주의 강렬한 눈빛에서 차갑고, 뜨거운 상반된 두 가지 느낌을 모두 받았다.

처음 느낌은 뜨거움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강렬한 열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검무극은 그 불꽃의 중심에서 볼 수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할 수 있는 차디찬 비정함을.

지금까지 수많은 악인을 봐온 검무극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음에서 답을 만들어내는 자라는 것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임을.

검무극의 시선이 이번에는 복면인을 향했다. 지난번에는 먼발치에서 보았지만, 오늘은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느낌상 마존은 아니었고, 최소 단주급 이상의 실력을 지닌 마인이었다. 이런 일 처리에 능숙한 인물이겠지.

천마신교는 무림맹의 조웅과도 만났고, 천의궁의 암흑군주와도 만났다. 다시 말해 양쪽 모두에 선을 대었다는 의미인데.

“곧 비가 내릴 것 같소.”

복면인이 먹구름에 어두워지는 주변을 둘러본 후 덧붙여 말했다.

“어둠은 당신 편 아니오? 하늘이 당신을 돕는 것 같소.”

암흑궁주가 뒤에 서 있던 복면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눈빛으로 바뀌는 것을.

‘자신을 감추는 데 능통한 자다.’

암흑궁주가 담담한 얼굴로 뜻밖의 대답을 했다.

“어둠이 악이고, 어둠이 나쁘다는 인식 그거 선입견이오. 의외로 나쁜 일 대부분은 환한 대낮에 벌어지지요. 어둠은 인간에게 휴식과 안식만을 줄 뿐이오.”

농담 섞인 그 말에 복면인의 눈이 웃었다.

“당신의 어둠이 어떤 어둠인지 잘 아는데, 그런 당신이 안식을 이야기하니 우습소.”

복면인은 암흑궁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상대의 눈치를 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들 사이에서 검무극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서로 믿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뭔가 필요한 것을 위해 손을 잡았다는 의미.

과연 암흑궁주는 이 위험한 상대와 무슨 거래를 하려는 걸까?

복면인이 암흑궁주에게 물었다.

“그건 지금 누가 가지고 있소?”

복면인의 물음에 암흑궁주가 대답했다.

“궁주가 가지고 있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복면인이 물은 그것이 바로 비궤라는 사실을.

‘천마신교에서도 비궤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았구나.’

그렇다면 이번에 개입하는 이유 역시 비궤 때문일 것이다.

“그가 힘을 얻었소?”

“아직 얻지 못했소.”

“왜 그렇게 확신하시오? 이미 얻었을 수도 있지 않소?”

“아니오.”

암흑궁주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만약 그랬다면 무황신검은 이미 죽은 목숨일 거요.”

그는 누구보다 천의궁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힘을 얻었는데 이렇게 무황신검을 두고 볼 사람이 아니었다.

“자, 받으시오.”

복면인이 등에 지고 있던 혁낭을 그에게 건넸다.

암흑궁주가 혁낭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내일이면 모든 일이 끝나겠군.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 미리 천의궁주 자리에 오를 것, 축하드리오.”

그 말을 하고 복면인이 돌아서려는데, 암흑궁주가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약속 꼭 지켜야 할 거요. 사는 내내 어둠이 악몽이 되지 않으려면.”

복면인의 눈빛에 ‘감히 우릴 협박하는 거냐?’는 가소로움이 스쳤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부드러웠다.

“지금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본교는 약속을 꼭 지킬 거요.”

검무극은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암흑궁주가 천의궁주를 배신했다.’

처음에는 천의궁주의 명령에 따라 이번 일을 진행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천마신교를 끌어들여 무림맹주를 죽이려 들 수도 있었으니까.

한데 아니었다. 이건 암흑궁주의 반란이었다.

대체 저 혁낭 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쿠르르릉.

천둥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오자 혁낭을 둘러맨 암흑궁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하산했다.

그가 사라지자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서 나왔다.

암흑궁주는 이대로 천의궁주를 만나러 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무슨 속셈인지 알려면 그보다 더 빨리 진영으로 가야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반드시 들어야 한다.’

물론 천의궁주가 막사에 있으면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문제고.

검무극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내공으로 뛰어내리기에는 아슬아슬한 느낌이었지만.

“풍신아, 너만 믿는다!”

검무극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 * *

쏴아아아아아아!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천의궁주는 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내리는 비는 그의 몸에 맞지 않고 튕겨 나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막이 그의 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처럼 느껴졌다.

그는 진영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내일의 결전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아직 비궤의 힘은 자신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싸운다면? 과연 무황신검을 이길 수 있을까?

막연히라도 ‘당연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상대는 무(武)에 황(皇)이 붙고, 검(劍)에 신(神)이 붙은 자였으니까.

‘하늘이시여, 나를 농락하는 겁니까?’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바로 그때 수호궁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암흑궁주가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천의궁주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 스친 감정은 분명 ‘드디어!’ 하는 기대감이었다.

두 사람이 막사로 돌아왔을 때, 암흑궁주는 벽에 붙은 중원지도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천의궁주가 들어서자 암흑궁주는 더없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존엄하신 궁주님을 뵙습니다.”

“어서 오게, 화 궁주.”

암흑궁주 화소강(華紹强).

그가 수호궁주와도 인사를 나눴다. 겉으론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눴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곱지 않았다.

특히 수호궁주는 암흑궁주를 언제나 의심하고 경계했다. 그는 암흑궁주가 천의궁을 차지할 야욕을 지녔다고 여겼다.

물론 그런 의심을 천의궁주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증거도 없었고, 무엇보다 천의궁주는 암흑궁주를 신뢰했다. 자신보다 그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긴 매번 그의 뜻을 반하는 말을 하는 자신과는 달리, 암흑궁주는 주로 천의궁주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으니까.

오늘의 첫마디도 그러했다.

“내일 드디어 정파 무림의 주인이 바뀌게 되겠군요.”

천의궁주의 승리를 장담한다는 듯한 말에 수호궁주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궁주께서 저 말을 듣고 싶어 하셨겠구나.’

자신은 내내 궁주와 붙어 있었으면서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천의가 궁주에게 내렸음은 믿지만, 이 전쟁 자체는 달갑지 않은 마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천의궁주가 겸손하게 반응했다.

“내일의 싸움은 장담할 수는 없네. 무황신검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니까.”

“천의가 궁주님께 닿았습니다. 한낱 인간이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자 천의궁주가 신녀를 언급했다. 너는 예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듣겠다는 의도였다.

“신녀가 왔었네.”

암흑궁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예언이 내렸습니까?”

천의궁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암흑궁주는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감히 신성한 예언을 여쭙겠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천의궁주가 대답했다.

“내가 이번 전쟁에서 진다는 예언이었네. 우리의 천의는 삼백 년 후에나 이뤄진다고 하더군.”

그 놀라운 말에도 암흑궁주는 전혀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자넨 놀라지 않는군.”

그러자 암흑궁주가 차분히 말했다.

“삼백 년 후라, 너무 먼 이야기라서 와닿지 않는군요.”

예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의 감정을 충분히 담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삼백 년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암흑궁주의 말에 천의궁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수호궁주는 알 수 있었다. 저 역시 궁주가 기대했던 말임을. 누군가 저렇게 자신을 지지해주길 바라고 있었음을.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임을 알았기에 앞서 암흑궁주가 왔다는 말에 그렇게 반가워한 것이리라.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에 불과합니다.”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예언이었는데?”

“그럼 이번에 틀리게 만드십시오.”

천의궁주가 큰소리로 웃었다.

암흑궁주가 준비한 것은 비단 듣기 좋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암흑궁주가 매고 온 혁낭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걸 입으십시오, 궁주님.”

그가 내놓은 것은 한 벌의 호신갑이었다.

“빙룡신갑(氷龍神鉀)입니다.”

빙룡신갑이란 사실에 천의궁주와 수호궁주 모두 놀랐다. 이 빙룡신갑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 호신갑이었다.

“이걸 어떻게 구했나?”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간신히 구했습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빙룡신갑인 이유도 있었다.

“무황신검의 무공은 극양의 내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빙룡신갑은 극음의 기운을 품고 있어, 무황신검을 상대하기에 가장 적합한 호신갑입니다.”

천의궁주는 크게 기뻐했다.

“고맙네.”

암흑궁주가 준비해 온 것이 더 있었다.

그가 혁낭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것도 복용하십시오.”

천의궁주가 열어보니 하나의 단약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본 천의궁주와 수호궁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들도 아는 영약이었다.

“천음단(天陰丹)입니다.”

천음단은 만년설삼보다 효능이 좋은 영약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역시 극음을 바탕으로 한 영약이니 무황신검을 상대하시기에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극음의 기운이 온몸에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하니 지금 복용하십시오. 저희가 호법을 서겠습니다.”

영약의 기운을 녹여내면 내공이 되지만, 그 특유의 성질이 몸에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특히 이번 영약의 경우는 내공보다는 극음의 성질이 더 중요했다.

“고맙네. 지금 복용하겠네.”

그때 수호궁주가 천의궁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약은 복용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게 천의궁주에게 어떻게 들릴지 잘 알았다. 암흑궁주는 내일 싸움을 위해 호신갑과 영약까지 구해왔는데, 자신은 상대의 호의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암흑궁주가 준 영약은 복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암흑궁주가 나를 배신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나?

정말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자신이 질투심에 눈이 먼 것일까?

―제가 아는 화 궁주는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이번 기회에 무슨 일을 꾸밀까 걱정됩니다.

암흑궁주는 천의궁주와 수호궁주가 전음을 주고받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나서지 않고 모른 척 기다렸다. 상황은 자신의 편이었다.

천의궁주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맞네, 누구보다 화 궁주는 야망이 큰 사람이지.

그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수호궁주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 자리에 앉는 것이 일생의 꿈인 사람이지.

수호궁주가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

―한데 어찌 단약을 복용하시려는 겁니까?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단약에 독을 타는 짓은 하지 않을 거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날 독살하는 순간, 궁주 자리는 사라져 버릴 테니까.

전대 궁주를 독살한 사람을 궁도들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수호궁주는 놀라운 마음으로 천의궁주를 바라보았다. 간신의 달콤한 혀에 녹아나는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호법을 서 주게.”

천의궁주가 그 자리에서 천음단을 복용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운기하며 약의 기운을 녹여서 흡수하기 시작했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일주천하고.

천의궁주가 약효를 녹이는 동안 수호궁주는 내심 긴장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반면 암흑궁주는 별일 아니라는 듯, 팔짱을 낀 채 벽의 지도만 쳐다보고 있었다.

수호궁주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궁주의 말이 맞다면.

‘당신 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는 내일의 대결에서 천의궁주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일 텐데. 왜 호신갑과 영약을 구해와서 주는 것일까?

잠시 후 영약의 기운을 모두 녹이고 난 후 천의궁주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과연 그의 말처럼 천음단에 독은 없었다.

“내공 증진에 큰 도움이 되었네. 게다가 내일쯤이면 극음의 기운이 무황신검의 극양의 진기로부터 나를 지켜줄 거네. 고맙네.”

“궁주님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겁니다.”

영약에 아무런 이상이 없자 수호궁주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오히려 머쓱한 마음이었지만, 천의궁주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빙룡신갑도 착용하십시오.”

천의궁주는 그들 앞에서 빙룡신갑도 착용했다. 이 역시 선물해준 사람 앞에서 착용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귀한 것이었다.

그렇게 빙룡신갑까지 착용한 천의궁주가 수호궁주에게 말했다.

“자넨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궁주의 뜻을 지지하고 호신갑에 영약까지. 열 번이라도 나가라면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수호궁주는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쏴아아아아아.

그가 천천히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의궁주도 그의 야망을 알고 있다고 했으니,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를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서로를 이용하며 살고 있는데, 혼자만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그저 우직하게 충성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천의궁주가 수호궁주를 내보낸 것은 암흑궁주를 편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은밀히 암흑궁주에게 내린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궤는 가져왔나?”

“네, 가져왔습니다.”

천의궁의 보고에 있던 큰 비궤를 이곳에 가져온 것이다.

천의궁주가 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예언을 무시하고 싸움을 계속해나가려는 것도, 모두 비궤 때문이었다. 비궤가 자신을 선택했고, 힘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작은 비궤에서 힘을 얻지 못하자 그는 하루가 다르게 초조해졌다.

결국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어쩌면 큰 비궤가 있어야 작은 비궤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 마지막 노력이라도 해보려고 비궤를 은밀히 가져오게 한 것이다.

지금 믿을 건 비궤뿐이었으니까.

“지금 어디에 있나?”

너에게 닿았으니

검무극은 그곳에 있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먼저 진영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천의궁주는 막사에 없었다.

덕분에 은밀히 잠입에 성공한 후 세 사람의 대화를 모두 지켜보며 들을 수 있었다.

예언과 관련한 일들이야 검무극도 아는 이야기였으니 별것이 없었는데.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암흑궁주가 가져온 선물이었다.

그가 혁낭에서 빙룡신갑과 천음단을 꺼냈을 때 검무극은 정말 놀랐다.

‘저 두 가지 기물은 천마신교에서 받은 것인데?’

암흑궁주와 손을 잡은 천마신교에서 천의궁주를 위해서 호신갑과 영약을 내어줬을 리가 없었다.

‘영약에 독을 섞었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천음단에 뭔가 수작을 부렸을 거라고.

하지만 천의궁주는 그것을 복용한 후, 아무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천마신교에서 천의궁주가 이기기를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뒤이어 천의궁주가 빙룡신갑을 착용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또다시 의심했다. 두 번째부터는 수호궁주는 하지 못했던 의심들이었다.

‘빙룡신갑에 수를 썼다?’

천음단이 미끼라면?

영약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방심하게 되는 점을 노렸다면?

과연 천의궁주는 아무 의심 없이 빙룡신갑을 착용했다.

만약 저 신갑 내부에 천의궁주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뭔가를 발라두었다면?

하지만 천의궁주는 아무런 이상도 느끼지 않은 듯 보였다.

이내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이건 들킬 수도 있다.’

천의궁주가 호신갑 내부를 조사할 수도 있는 일이고, 나중에 입겠다고 입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완벽한 계획은 아니었기에, 저 차디찬 야망으로 가득 찬 암흑궁주가 일 처리를 이렇게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의도지?’

반드시 저기에 함정이 있다는 걸 전제로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설마?’

극음과 극음, 저 천음단과 빙룡신갑이 합쳐지면서 천의궁주의 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음의 상태가 되었다.

무황신검이 발휘할 극양의 공격에만 대비하고 있던 이때.

만약 저 상태에서 극음의 내공이 실린 기습을 받게 된다면?

그때는 저 천음단과 빙룡신갑은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정해져 있다.

내일 대결에서 천의궁주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천마신교가 개입했기에 무림맹의 역사에 내일의 싸움이 자세히 남아 있지 않은 것이고. 그저 무황신검이 천의궁주를 죽였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

그리고 수호궁주를 내보낸 후 천의궁주와 암흑궁주는 놀라운 이야기를 나눴다.

“비궤는 가져왔나?”

“네, 가져왔습니다.”

큰 비궤를 이곳에 가져왔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예언이 떠올랐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검무극은 그 예언이 큰 비궤와 관련이 있음을 직감했다. 암흑궁주는 자신을 큰 비궤가 있는 곳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

“지금 어디에 있나?”

천의궁주의 물음에 암흑궁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비궤는 등잔 아래에 있습니다.”

* * *

쏴아아아아아.

거센 빗줄기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칼날처럼 쏟아진 빗물이 바닥에 수많은 파편을 만들었다.

번쩍! 콰르르릉!

벼락이 칠 때 주위가 밝아졌고, 죽립과 도롱이를 쓴 천의궁주와 암흑궁주가 산을 오르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가 사라졌다.

벼락이 칠 때마다 그들은 다른 장소에 있었다.

그렇게 빗속을 걸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내일의 대결 장소인 백양봉이 있는 산 중턱이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헤치며 걸어가다가 암흑궁주가 말했다.

“여기서부터 본궁의 미로진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밟는 곳을 그대로 밟고 와주십시오.”

천의궁주는 암흑궁주가 밟는 곳을 그대로 밟으며 걸었다.

그렇게 진법을 통과해서 수풀 사이를 더 걸어 들어가자, 조금 널따란 공간에 나무로 지어놓은 임시 건물이 있었다.

“급히 옮겨오느라 제대로 짓지 못했습니다.”

그것치고는 제법 잘 지어둔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천의궁주가 물었다.

“왜 하필 이곳인가?”

후방 어딘가에 보관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질문이었다.

암흑궁주가 이렇게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궁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

“대결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 비궤가 어떤 신성한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암흑궁주는 이 순간까지도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있었다.

천의궁주는 이 암흑궁주의 야망을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 해야 했다.

적들의 눈을 피해 비궤를 이런 의외의 곳에 숨겨둘 수 있는 발상을 하고 그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은 암흑궁주뿐이라는 걸.

“들어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의궁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 비궤가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되었던 그 비궤가.

천의궁주가 비궤 앞에 섰다.

마음이 얼마나 급박했으면 천의궁의 신물을 이곳까지 가져오게 했겠는가?

처음 큰 비궤가 작은 비궤를 내놓았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닿았다고 기뻐했었는데.

비궤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지난날의 회한이 스쳤다. 자신의 천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었다.

“그거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나는 당신을 보고 자랐습니다.”

그는 마치 비궤가 사람인 양 말했다.

“당신을 지키는 것이 본궁의 사명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들어왔지요. 하늘의 뜻이 담긴 신성한 보물이었기에 나는 당신을 감히 마주 볼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지키는 사명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순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았다. 이토록 비궤를 믿고 지켜온 이유가 가문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도, 비궤의 신성함 때문도 아니었음을.

천하일통.

그 진짜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음을. 그는 비궤만 깨어나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나이를 먹어도 저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당신은 먼지 쌓인 불상이 아니다. 그저 본궁에 전해오는 오랜 상징에 불과하지 않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비궤를 응시하던 천의궁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랬는데 당신이 깨어난 겁니다. 평생 지켜보면서, 평생 믿었던 당신이.”

천의궁주가 품에서 작은 비궤를 꺼내 높이 쳐들었다.

“그러니 내게 힘을 주십시오! 내게 천의를 전해주십시오!”

하지만 큰 비궤도, 작은 비궤도 아무 변화도 없었다.

천의궁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심을 전하면 비궤도 진심을 전해줄 거란 한 줄기 믿음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작은 비궤를 큰 비궤에 가져다 댔다. 혹시라도 작은 비궤를 다시 흡수해 버릴까 긴장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궤 주위를 돌아도 보고, 비궤에 내공을 주입해 보기도 했다.

예전이었다면 이 신성한 비궤를 손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힘을 주지 않을 거면 대체 왜 깨어난 겁니까!”

천의궁주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문득 신녀의 예언이 떠올랐다.

―하늘의 뜻은 궁주님께 있지 않습니다.

천의궁주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격전이 벌어지고, 생사가 오가는 순간에 비궤에서 힘이 전해지리라.

천하일통을 이룰 대영웅이 탄생이 그리 쉽게 이뤄지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후 천의궁주는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암흑궁주는 비를 맞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에서 들려온 말을 들었기에, 천의궁주가 힘을 얻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만 가세.”

천의궁주가 빗속을 걸어 나갔다.

암흑궁주가 그 뒤를 따랐다. 표정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떠올랐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예언이 당신을 버렸는데, 어찌 비궤가 반응을 보이겠소?’

암흑궁주가 신녀의 예언을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번 비궤가 깨어난 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비궤가 깨어난 것은 당신을 위한 천의가 아니었소. 결과적으로 나를 천의궁주로 앉히기 위해서지.’

비궤가 그에게 힘을 주지 않는 것만 봐도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믿었다.

그렇게 동상이몽의 두 사람은 함께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 이윽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는 검무극이었다. 신안술을 이용해서 멀리서 두 사람을 미행해왔다. 쏟아지는 비 덕분에 미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이 비는 자신을 위해 하늘이 보내준 선물 같았다.

검무극은 멀리서 그들을 뒤따르면서 신안술로 두 사람이 어디를 밟고 들어가는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이곳으로 들어선 것이다. 검무극이 비궤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을 비궤가 그곳에 있었다.

오늘 이곳에 온 세 사람은 각기 자신만의 천의를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 역시 마찬가지였다.

“삼백 년 후의 네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검무극이 비궤에게 천천히 다가가 친근하게 말했다. 품에 있던 비궤와 워낙 친구처럼 지냈던 터라, 이 큰 비궤 역시 대하기가 편했다.

“미래의 네가 지금의 너에게 나를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잖아?”

검무극이 비궤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앞서 검왕과 함께 보았던 황룡무관 지하의 비궤와는 생긴 것은 똑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기운이 달랐다. 지금이 더 팔팔하고 생기가 넘쳤다.

“그사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긴, 삼백 년 동안 고생했으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겠지.”

검무극은 다시 돌아가면 미래의 비궤에게 고생했다고 위로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마음이 전해졌을까? 비궤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비궤가 나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비궤에게 해야 할 말은 이것일 거다.

자신을 이 세상에 부른 건 지난 일을 보여주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바로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여겼으니까.

검무극은 비궤에 손을 댄 채 차분히 말했다.

“어둠이 그대를 천의로 이끌 것이다.”

너에게 닿았으니, 이제 나의 천의를 보여다오.

검무극이 예언을 말하는 그 순간, 품에 있던 작은 비궤가 진동했다.

다음 순간!

빠바바박.

큰 비궤에서 괴이한 굉음이 났다. 천의궁주가 그토록 바랐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깜짝 놀란 검무극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치이이잉.

역시 난생처음 듣는 소리를 내며 비궤의 벽면에 무엇인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원이었다. 흑색의 원, 백색의 원, 청색의 원, 적색의 원, 황색의 원, 마지막 자색의 원까지.

이미 흡수한 기운들이 비궤에 새겨진 원을 보자 일제히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여섯 개의 원에서 일제히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그 빛이 허공에 글자를 만들었다.

―이 심법은 여섯 개의 기운을 하나의 기운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진기를 움직임에 있어 바람처럼 자유롭되 대지처럼 무거워야 한다. 불처럼 뜨겁게 몰아치다가도 얼음처럼 멈출 수 있어야 한다. 어둠처럼 깊고 벼락처럼 강력해야 한다. 이 여섯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면 그대는 능히 고금제일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검무극의 심장이 요동쳤다.

이 구결은 바로 자신이 비궤를 통해 얻은 기운을 사용하게 해주는 심법 구결이 틀림없었다.

바로 그 순간!

찌이이이익.

검무극이 바라보던 정면의 허공이 찢어졌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양쪽에서 잡아당겨 찢은 것처럼 갈라지며 그 사이로 어둠이 펼쳐졌다.

그 어둠 속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심법 구결이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섞여 있었는데, 옛날 무림에서 사용하던 말인 것 같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쿠르르릉!

디디고 있던 땅이 뒤집히며 그 아래에서 땅거죽이 밀려 올라왔다. 그 땅거죽에 흙으로 구결이 적혀 있었다. 이 역시 알아볼 수 있는 말도 있었고, 모르는 말도 있었다.

동시에 천장에서도 무엇인가 밀고 내려왔다.

콰콰콰쾅.

허공에서 내려온 것은 거대한 고드름들이었다. 마치 송곳으로 새긴 것처럼 그 고드름에도 구결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불길 속에서 구결이 일렁거렸다.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경탄이 나오는 광경이 계속 이어졌다.

휘이이이이잉.

머리 위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놀랍게도 바람 속에서도 글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꽈지지직!

벼락이 내리쳤다. 벼락이 내리쳐 그을린 자리에도 구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 본 적 없는 모습으로 구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무극은 이 심법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이 아무리 똑똑해도 알 수 없는 단어들까지 가득한 이 모든 것을 다 외울 수는 없었다.

잠시 흐르는 정적.

검무극의 가슴에 있던 작은 비궤가 진동했다.

우우웅.

다음 순간 사방에 있던 구결의 글자들이 각자의 색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솨아아아아아아앙!

각각의 구결을 담은 여섯 줄기의 빛무리가 검무극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도 안 나오면 안에 든 채로

여섯 색의 빛이 검무극에게 쏟아졌다.

사아아아.

빛은 대지를 적시는 비처럼 검무극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몸속으로 들어간 빛은 마치 내력처럼 검무극의 몸속을 강물처럼 흘렀다. 심장이 뛸 때마다 빛들은 온몸으로 쭉쭉 퍼져나갔다.

빛은 뜨겁기도 했고, 차갑기도 했으며, 짜릿하기도 했다. 시원하기도 했고 아늑하기도 했으며 두려움을 주기도 했다.

검무극은 이 빛에 저항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이 빛이 자신을 위한 빛임을. 아무리 뜨겁고 아무리 차가워도, 아무리 깊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그렇게 전신 구석구석을 휘돌던 그 여섯 개의 빛이 모여든 곳은 검무극의 머릿속이었다.

뇌에 모인 빛들이 일제히 광채를 내뿜었다.

싸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검무극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흑정과 청정과 백정, 이 세 기운이 저절로 혈맥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검무극은 심법 구결을 알고 있었다.

조금 전 빛무리들이 들어와서 검무극에게 구결을 직접 알려준 것이다. 아니, 알려준 게 아니라 완전히 익힌 상태로 만들었다.

상대에게 내공을 전수해주는 경우는 알았어도, 이렇게 단숨에 어떤 지식을 전하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이었다.

비궤가 알려준 심법은 기존의 운기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세 개의 기운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서로 혈맥을 따라 움직였다. 내달리는 혈맥의 풍경이 알던 모습과 달랐다. 더없이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풍경.

진기는 반대로 흐르기도 했고, 심지어 내상을 입을 것 같은 길로도 무리하게 움직였다.

그야말로 이 심법은 기존에 알았던 무학의 상식을 단숨에 허물어뜨렸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 구결을 믿었다. 자신의 몸에 있던 기운도, 이 심법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비궤와 관련한 것은 그냥 믿기로 했다.

처음 비궤에서 기운을 흡수했을 때의 그 알 수 없던 안도감처럼, 자신에게 호의적인 기운이라는 이 본능을 믿은 것이다.

그렇게 진기를 일주천하자, 마지막 순간 세 개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졌다.

엄청난 힘이 느껴지던 바로 그 순간.

세 개의 기운은 다시 맥없이 흩어지더니 혈맥 곳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앞서 비궤가 남긴 말처럼 여섯 개의 기운이 모두 모여야 이 심법이 완성된다는 것을.

그 외에는 모두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여섯 개의 기운이 다 모여서 이 심법을 운용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그 모인 기운들이 따로 운영되는지, 아니면 기존의 내공과 합쳐지는지.

이 심법에 맞는 무공이 따로 있는지, 아니면 심법 그 자체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고금제일의 힘을 준다는 것인지.

바로 그때, 주위가 바뀌기 시작했다.

사르르르릉.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 비궤가 처음 듣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치이이이.

비궤에 새겨졌던 여섯 개의 원이 사라졌다. 칼로 새긴 듯 깊게 나타났던 문양이었는데,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찌이이이익.

정면에 찢어져 있던 공간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 공간에 펼쳐진 깊은 어둠.

검무극은 그 어둠이 싫지 않았다. 홀로 깨어있는 밤이 낮보다 외롭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쿠르르르!

뒤집힌 땅거죽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가는 그것은 네가 딛고 있는 발밑에 내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콰콰콰콰.

하얗게 빛나던 고드름들이 천장으로 다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작별이 아쉬웠는지 마지막 순간 얼음은 순백의 빛을 반짝였다.

무섭게 치솟던 불길이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불길이 좌우로 흔들리며 손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휘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새겨진 벼락 자국을 스치고 지나가자, 놀랍게도 바닥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졌다. 마치 파도에 씻겨 나가는 모래 그림처럼 사라졌다.

바람은 마지막으로 검무극의 옷과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휘날린 후에 완전히 사라졌다.

그렇게 주위의 모든 것들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제 이곳은 검무극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과 같았다.

마치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똑같이 세 개의 기운은 몸속에 잠들었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의 기운이 그저 기운들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그 기운이 내 기운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객방의 손님이었다가 이제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 기운에서 미증유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었다. 세 개의 기운이 이럴진대 여섯 기운을 모두 다 모였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이 품에서 비궤를 꺼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비궤의 모습이 자신의 마음과도 같았다.

검무극은 기뻤다. 정말 기뻤다. 그 무엇보다 기쁜 건, 이 힘이 적에게 넘어가지 않고 자신에게 온 것이다.

회귀한 후 꾸준하게 이전과 삶을 바꿔왔지만, 지금은 큰 분기점을 다르게 지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노력하는 거다.’

이제 작은 비궤는 품에 넣고 검무극이 큰 비궤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검무극이 비궤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 고대의 힘이 일개 영약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검무극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하늘이 제게 내리신 뜻이라면 기꺼이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애초 회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늘이 자신의 노력을 높이 사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식으로 인사한 후, 검무극은 비궤에게 다가가 손을 가져다 댔다.

“고맙다, 비궤야.”

하늘의 뜻은 하늘의 뜻이고, 여전히 이 비궤들은 친구라 여겼으니까.

바로 그 순간!

쑤우욱.

비궤 속으로 검무극의 손이 들어갔다. 미처 저항하기도 전에 비궤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갔다. 비궤가 검무극을 흡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 안 돼! 아직 마지막 대결을 못 봤어!”

하지만 비궤는 거기까진 네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듯, 순식간에 검무극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 들어올 때도 그랬지만.

그래, 이게 네가 정한 운명이라면.

‘삼백 년 후에 보자!’

* * *

검왕이 비궤가 있는 공간의 벽을 살펴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비궤로 빨려 들어가고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검왕은 비궤로 들어가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했다.

당연히 비궤부터 샅샅이 살폈다. 두드려도 보고 움직여도 보고 내공을 주입하기도 하고. 하지만 비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관문을 돌아가서 이전 관문을 살펴보기도 했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비급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궤로 들어갈 수 있는 단서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렇게 주위 벽을 살펴본 검왕이 비궤로 와서 기대앉았다. 지금 앉은 자리는 검무극이 빨려 들어간 바로 그 자리였다.

혹시라도 자신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루에 한 번은 꼭 그 자리에 앉아서 기대보지만, 비궤는 오늘도 차갑고 딱딱하기만 했다.

“후우우.”

검왕의 입에서 처음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인데.

사실 자신의 임무는 저 비궤를 가져가는 것.

검무극이 안에 있든 말든, 가져다주면 끝인 일이다.

하지만…… 그는 며칠째 기다리고 있었다.

검무극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되지 않았다. 냉정히 보자면 걱정이 안 되는 쪽에 가까웠다.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늪에 빠져드는 모양새였지만, 검무극을 해치기 위해 빨아들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검무극이란 사람이 보여준 그 특별함 때문일 거다.

‘너,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아니잖아?’

검무극을 떠올리니 실없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오늘도 안 나오면 네가 안에 든 채로 가져간다.”

검왕의 협박에도 검무극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비궤를 협박했다.

“내 관원 내놓지 않으면 반으로 싹둑 잘라버린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 비궤를 검으로 잘라내서 안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저 딱딱한 비궤 안에 검무극이 있을 리는 없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이 정말 무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소교주를 삼킨 거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신발을 만지작거리던 검왕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설마 무림의 운명을 바꿀 사람이…… 너냐?”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검왕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비궤에 기대 있던 검왕의 머리 위로 나와서 바닥을 뒹군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왕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검무극을 벨 뻔했다.

사람을 이렇게나 놀라게 해놓고선.

“사범님, 며칠 사이 핼쑥해지셨습니다.”

그 첫마디에 검왕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잘 놀다 온 모습인데?”

검무극의 눈빛은 더욱 맑았고, 몸에서 느껴지는 생기는 더욱 활기차게 느껴졌다. 검왕과 같은 고수이기에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어휴, 말도 마십시오. 내공도 없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검무극이 자신의 몸부터 살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웅혼한 내공.

다행히 들어가기 전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도 흑마검으로 되돌아와 있었고. 품속에 비궤도 여전히 잘 있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심호흡했다.

삼백 년 후의 냄새, 살아서 돌아왔구나!

“저 걱정 많이 하셨죠? 식음까지 전폐하셨을 테고.”

“전혀. 고기는 매일 먹었고.”

하지만 검무극은 느꼈다. 자신을 보았을 때 그의 안도감을.

그는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나오기를 걱정하며 기다려주고 있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검왕은 정말 살면서 무엇인가가 이렇게 궁금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씀드리기 전에 잠시만요.”

검무극이 비궤에게 걸어갔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서 비궤를 봤을 때와 삼백 년 전 비궤를 만나고 와서 보는 비궤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그 비궤가 삼백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검무극이 비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삼백 년간 외롭게 지냈겠구나. 그동안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 줘서.’

마지막 싸움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비궤와 인사한 후, 검무극이 검왕에게 돌아섰다.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주어야 할까? 검무극은 딱 두 가지만 제외하기로 했다.

자신에 관한 예언과 비궤의 구결을 익힌 것.

“혹시 무황신검에 대해 아십니까?”

과연 검왕은 이 과거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들어본 적 있다. 삼백 년 전 무림맹주였지.”

그는 가장 유명한 무림맹주였으니까.

“갑자기 그 사람은 왜 묻는 거냐?”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무황신검을 만나고 왔습니다.”

“뭐?”

처음에는 농담이지? 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점점 검왕의 얼굴에 놀람이 피어올랐다. 검무극이 농담하는 것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정말이구나!”

“무황신검과 같이 밥도 먹었습니다.”

검무극의 시선이 비궤를 향했다.

“이 상자가 저를 삼백 년 전으로 데려갔었습니다.”

검왕도 놀란 마음으로 비궤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이 상자는 과거 천의궁이라는 신비 세력의 신물이었습니다.”

검무극은 검왕이 천의궁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폈다.

특별한 반응이 아니라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알고 있다. 무황신검이 천의궁을 멸했지.”

무황신검을 아는 사람들이 아는 역사는 대부분 여기까지. 이 반응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검왕은 천의궁의 후예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에게 천의궁은 역사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 설마 천의궁주도 만났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그만 만났겠는가? 신녀까지 만나고 왔는데.

“양쪽의 최후의 전쟁이 벌어지던 그곳에 며칠 있다 왔습니다.”

“왜 너를 그곳에 데려갔지?”

자신에 대한 예언 부분을 알려주지 않을 작정이었기에, 검무극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저도 모르죠. 아마 사범님보다 제가 잘생겨서가 아닐까요? 먼 여행을 가는데 기왕이면 젊고 잘생긴…….”

“헛소리는 그만!”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이제 비로소 이 질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왜 저를 이곳에 데려온 겁니까? 진짜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분명 어떤 의도가 있었다. 지하에 있던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기관 해체에 도움이 되어서도 아니었다. 분명 그만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윽고 검왕이 말하는 진심.

“네가 무림의 운명을 바꿀 사람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왜 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왕이 대답했다.

“우리의 운명을 네가 바꿨으니까.”

자신들이 이 무림의 운명을 바꿀 거라 믿었는데, 검무극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꿨다.

“이제는 내 운명까지 바꾸려 들고 있지.”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검왕과 자신과의 운명이 결정될 순간임을. 이 질문의 대답에 따라 결정지어질 것이다.

“제가 만약 무림의 운명을 바꿀 사람이라면요?”

검무극이 검왕의 두 눈을 응시하며 덧붙여 물었다.

“우리 관계가 달라질 수 있습니까?”

우릴 기다리는 건

“네가 무림의 운명을 바꿀 사람이라면?”

관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으면 좋았겠지만, 검왕은 냉정하고 단호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관계는 바뀌지 않을 거다.”

검무극이 얼굴 가득 간절함을 담아보았지만,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사실 검무극은 그가 이렇게 대답하리라 예상했다. 지금까지 그와 특별한 유대를 이뤘지만 그렇다고 함께 손을 잡을 정도까진 아니었으니까.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십이지왕 중 일왕이 되었던 검왕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을 어찌 쉽게 돌릴 수 있겠는가?

아니, 마음을 돌리는 건 둘째치고 여전히 그에게 죽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관계였다. 비무대에서 한판 붙기로 했었으니까.

검무극은 비궤로 걸어가서 얼싸안았다.

“나 버림받았다. 다시 삼백 년 전으로 보내줘.”

검왕은 그 호들갑 떠는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저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비궤를 어루만지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빚 때문입니까?”

예전에 대화를 나눴었다. 왜 이들과 손을 잡았냐는 질문에 검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빚을 졌다고.

검무극이 검왕에게 돌아서며 진지하게 말했다.

“빚 때문이시라면 이거 가져다주고 싹 갚아버리십시오. 이 신물,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검왕이 검무극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왜 내 것으로 생색을 내지?”

검무극이 지지 않고 되물었다.

“이게 왜 사범님 겁니까? 제 거죠.”

“네 거라고?”

“이 방에 있는 건 저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이 방의 것은 전부 다 주십시오.

마지막 관문인 이 방에 들어서기 직전 검무극이 했던 말이었다.

“난 그러겠다고 대답한 적 없다.”

물론 검무극의 억지였다. 이 비궤를 얻기 위해 황룡무관의 지하에서 기관을 해체하느라 고생한 그였는데. 이걸 순순히 내어 줄 리 없었으니까.

“아까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 이 신물에서 나왔습니다. 저, 보통 사람 아니라고요.”

검왕은 그 말만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것이 정말 무림의 운명을 바꿀 물건이라면? 그리고 이 신물이 선택한 사람이라면? 소교주는 무림의 운명을 바꿀 사람이고, 동시에 이 신물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그가 아무 말도 못 하는 모습에 되레 검무극이 머쓱해졌다.

“이러시면 제가 끝까지 못 우기잖아요?”

검왕이 검무극 뒤에 있는 비궤에게 다가섰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만졌다. 지난 며칠간 그랬듯, 비궤가 자신에게 허용하는 것은 이 차가움뿐이다.

검왕이 비궤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나를 죽이면 가질 수 있겠지.”

검무극은 아무 말이 없었다.

“왜 말이 없나?”

“생각 중입니다. 사범님을 죽여서라도 가져야 할 만큼 가지고 싶은지.”

그렇게 진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검왕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문제는 이런 말이 진심으로 들린다는 점이었다.

“무림의 운명을 바꾸려면 이게 필요할 수도 있을 텐데?”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 비궤보다 사범님이 더 중요합니다.”

검왕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설마?”

검무극이 돌아왔을 때 더 깊어진 눈빛도 그렇고, 더 활기찬 생기도 그렇고.

“들어가서 뭔가를 얻었지? 그래서 이제 필요 없어졌지? 이거 텅 빈 거고. 그래서 나 주려는 거지?”

검무극은 그를 속이지 않았다.

“정말 눈치도 빠르시지.”

사실 그건 절반의 진실이었다. 검무극이 비궤를 쳐다보며 말했다.

“뭔가 얻은 것도 사실이지만, 껍데기만 남은 것도 아닙니다.”

분명 작은 비궤와도 연결된 녀석이었으니까. 언제 어떤 모습으로 또 다른 놀람을 보여줄지 몰랐으니까.

“그런데 왜 포기하려는 거냐?”

정말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이것이 어디에 있더라도 다시 자신과 연결될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그랬기에 그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사범님이 더 중요하다고요.”

“나에 대해서 네가 뭘 안다고!”

“서로 잘 모를 때가 더 좋은 법 아닙니까?”

순간 흠칫하는 검왕에게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더 알게 되면 몰랐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고, 권태를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한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 사람 속에 뭐가 있을까? 뭐가 있는데 이렇게 사람을 끌리게 할까? 나를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뭘 믿고 이렇게 설득하고 있을까?”

“그만!”

검왕의 외침과 동시에 신발이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날아든 신발을 손으로 받아 들었다.

“이 신발을 던지면서 기습을 하셨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예전에 장난처럼 던지신 적이 있었으니, 지금 방심하고 받았거든요. 한데 왜 기습하지 않은 겁니까? 왜 절 죽이고 돌아가서 내가 신물도 얻고 죽은 동료들의 복수까지 했다! 왜 공을 세우지 않으시는 겁니까?”

검왕이 자신의 허리춤에 남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한 짝 남았으니까. 그러니 헛소리 그만해라. 정말 죽는 수가 있으니까.”

검왕이 화가 나는 것은 소교주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지고 있음을 인식해서였다.

“관계가 바뀌면? 나를 길잡이로 우리 조직의 비밀을 다 밝혀내려는 거냐? 나를 앞세워 다 죽이려고?”

“아닙니다.”

“그럼? 네 수하라도 되라는 거냐?”

“그 역시 아닙니다.”

“아니면!”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사범님이 제 옆에 있을 사람 아니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신발 신으시고, 멀리 떠나버릴 사람이란 것도요.”

“그런데 왜? 왜 자꾸 나를 흔들려는 거냐?”

버럭 소리쳐 묻는 검왕에게 검무극이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게 싫으시다면 허름한 무복에 머리를 질끈 묶고, 저잣거리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낡은 철검 한 자루 차고, 맨발로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요. 흑마검을 차고, 보의를 두 겹 세 겹 껴입고, 극품천잠사까지 칭칭 감으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제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말았어야지요!”

“전 그런 사람 못 죽입니다. 아니, 안 죽입니다. 절 위해서라도 두고두고 후회할 짓 안 합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 몰랐기에 검왕은 말문이 막혔다.

이 순간 그의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은 기쁨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왜 좋은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한 침묵을 깨며 검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내 분위기 때문이냐?”

검무극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고작이라니요? 그게 제가 바라는 모습이고, 제가 바라는 자유인데요.”

“헛똑똑이다. 내가 자유롭게 보였다면.”

“그러니까 제게 오십시오. 빚도 갚고 사범님 붙잡아 매는 거 다 뿌리치고, 제게 오십시오.”

“가서는?”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지금까지의 대화 중에서 가장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삼백 년 전 세상에 다녀왔다는 말보다 더 검왕을 놀라게 한 말이었다.

“저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검왕은 만난 이래 가장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 미친놈아, 작작 좀 해라! 이 말 대신 검왕이 물었다.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세상에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도 있지 않습니까?”

“왜 많고 많은 관계 중에 하필 친구냐?”

“제 사부께서 위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사부는 필요 없습니다. 마침 함께 오신 분은 검존이십니다. 검 쓰는 마존이 이미 계시니 마존으로 모실 수도 없습니다. 저는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수신호위도 필요 없습니다. 소교주니 수하들이 넘치도록 많습니다. 그러니 제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저 애늙은이 소리 많이 듣습니다. 그러니 잘 맞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검왕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보고 싶을 때 보고, 도와야 할 때 돕고. 때론 신발도 서로에게 던지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다시 신발을 내밀었다.

잠시 신발을 응시하던 검왕이 손을 내밀어 받아 들던 그때, 뭔가에 생각이 미친 검왕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위에 마존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네. 틀림없이 저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검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기분 좋은 꿈을 꾸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는 순간이었다.

“그 때문에라도 우린 친구가 될 수 없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위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 그에게 마존들이 죽었을 거란 의미.

“저 위에 올라가면 너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될 거다. 스승과 검존을 잃은 슬픔으로 검을 빼 들고 나까지 겨누겠지. 그래도 나는 이해한다.”

권왕의 실력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함께 온 고수들도 있었고.

“사부님과 검존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을 겁니다.”

“우린 마존의 실력을 파악하고 있다. 그들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검왕은 서글픈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우릴 기다리는 건 너와 내가 싸워야 할 텅 빈 비무장뿐일 거다.”

반면 검무극의 눈빛에는 믿음이 가득 차 있었다.

“만약 두 분이 그 비무대에 무사히 서 계신다면요?”

* * *

“아버지,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잠시 들어가서 쉬세요.”

이안의 말에 권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다.”

며칠이 지나도록 검무극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동안 권마는 비무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밥도 이곳에서 먹었고, 잠은 운기조식으로 대신했다.

이안은 새삼 알 수 있었다. 막연히 검무극과 아버지를 사제지간 정도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더 검무극을 위하고 계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교주께서는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올라올 거예요.”

권마가 이안을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이유는 단지 이곳에 검무극이 올라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검무극과 관련해서 급박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조금이라도 빨리 대처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가 천추의 한이 되게 하지 않으려고.

비무대 구석에 연백인도 있었다.

시체와 부서진 잔해들을 깨끗이 치운 그는 아직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권마와 일화검존은 그가 떠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연백인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지하에서 올라올 검왕만을 기다렸다. 이 황룡무관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는 자포자기를 의지로 착각한 채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일화검존은 권마와 달리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다. 무공 수련도 하고, 잠도 편히 자고.

검무극에 대해서는 이안에게 딱 한마디만 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검무극이 올라오지 않자 그녀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소교주, 장난 좋아하는 건 알지만, 이런 장난은 치지 말게.’

만약 오늘이 지나도 검무극이 올라오지 않으면, 권마에게 함께 내려가 보는 것에 대해 상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륵.

기관 장치가 설치된 의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일화검존이 훌쩍 몸을 날려서 권마 뒤로 내려섰다. 이안 역시 아버지 뒤에 서서 의자가 있던 곳만을 쳐다보았다.

스르르륵.

잠시 후, 의자가 다시 올라왔다.

지켜보던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은 검무극이 아니라 검왕이었다.

권마는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살폈다.

머리를 질끈 묶고 철검을 허리에 찬 맨발의 남자.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번에 그가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대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의 존재감이라면?

권마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한편 지상으로 올라온 검왕은 생각지 못한 광경에 당황했다. 있어야 할 사람 대신 마존들이 있었다.

주위는 격전이 벌어진 흔적만 있을 뿐 권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상황으로 볼 때 그와 제자, 그리고 함께 온 고수들이 모두 죽은 모양이다.

권마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소교주는 어디에 계시나?”

검왕은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권마는 자신이 예상한 실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그 뒤에 선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 권왕이 왜 이 자리에 없는지를 말해주는 이유였다.

검왕을 바라보는 일화검존의 눈빛 역시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적보다 존재감이 있었다.

그녀도 기도를 드러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소교주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다.”

사아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그들의 기도와 기도가 충돌했다.

권마와 일화검존, 이안이 서 있던 곳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 검날이 가득 찼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면 살이 베일 것만 같았다.

그 수많은 칼날 사이에 검왕을 겨눈 단 한 자루의 칼날.

그 칼날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이 아니었지만, 마음과 영혼을 서늘하게 하는 바람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의 기도가 충돌하면서 금방이라도 서로를 공격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펼쳐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의 끈은 누군가 숨이라도 크게 쉬면 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르륵.

의자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자는 너무나도 반가운 사람을 태우고 다시 올라왔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주위에 펼쳐진 무시무시한 기도를 느끼며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올라간다고 했잖아요?”

그 모습에 권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이안은 비로소 안도했다.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 검무극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검무극이 권마와 눈이 마주쳤다. 무섭고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 봐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일화검존은 드디어 돌아왔구나, 하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까지 풀린 이안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검무극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격전이 심했으면 주위가 휑했다. 그리고 오직 지하로 연결되는 의자만이 남아 있는 걸 보며 내심 크게 감격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을 위한 권마의 마음임을 느낀 것이다.

권마가 중심에, 그리고 좌우로 일화검존과 이안이 섰다.

세 사람이 정중히 포권하며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권마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권왕을 때려잡고 이곳을 지켰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기다려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권마는 그 말로 충분했다. 저 믿음에 부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주 때부터 내려온 권마란 남자의 사명이자 기쁨이었으니까.

검무극이 검왕을 돌아보았다. 검왕은 여러 감정을 얼굴에 담은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복잡한 감정 속에 안도감도 있기를 바라면서.

“자, 이제 하던 이야기 계속하시지요.”

제가 모임이 하나 있거든요?

아래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다 올라왔느냐고?

검왕의 자신감에 검무극이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내기하죠. 만약 두 분이 비무대에 있으면!”

“친구하자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 중요한 문제를 다른 사람들 일로 정할 수는 없죠.”

“그럼 무슨 내기를 하자고?”

“지는 사람이 부탁 하나 들어주기로 하시죠. 친구가 되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나, 검왕이 검무극을 의심스럽게 보았지만, 그 속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대신 반드시 들어주기입니다.”

원래라면 여기서 검왕은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이런 약속을 하겠느냐?

내용도 묻고, 조건도 걸고. 이런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저런 부탁은 애초에 말도 꺼내지 마라.

하지만 검왕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좋다, 하자.”

이래서 검왕이란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리라.

“무슨 부탁인지 먼저 말씀하시죠?”

“벌써 졌다고 인정하는 거냐?”

“그럴 리가요. 어차피 사범님 부탁은 들을 일이 없을 테니, 무슨 부탁인가 궁금해서요. 내기에 지면 말씀 안 하실 거잖아요?”

검왕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미리 부탁 하나 할까?”

“하십시오.”

검무극은 장난하듯 꺼낸 말이지만 검왕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마존들 죽음 확인하면 복수하려 들지 말고 오늘은 그냥 떠나라.”

자연 가볍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저를 죽이게 될까 두려우십니까?”

검왕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만 올라가자. 참, 가기 전에 챙길 게 있다.”

검왕은 책장 앞으로 걸어가서 연백인에게 줄 비급 한 권을 골라서 품에 넣었다.

“약속도 지키시는 분이고. 멋지시다니까요.”

“과연 그럴까?”

검왕은 왠지 모를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였다.

두 사람은 마지막 방을 나왔다. 비궤는 일단 두었다. 어차피 위쪽 일이 정리되고 난 후에 가져가면 되었으니까.

두 사람은 자신들이 뚫었던 관문과 기관을 해체했던 곳들을 되돌아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의자 아래까지 왔다.

“제가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그러자 검왕이 검무극을 제지하며 나섰다.

“아니. 내가 먼저 올라간다.”

“설마 저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우리 쪽 사람 걱정하는 거다.”

하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검왕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그의 확신처럼 두 마존을 죽일 정도의 고수라면, 적어도 그를 걱정하진 않을 테니까. 자신이 복수를 위해 날뛰며 그를 공격할까 걱정하는 거다.

검왕은 말없이 기관을 움직였다.

“아, 내가 먼저 올라가야 하는데. 싸우지 말고 인사하고 계십시오!”

이렇게 검왕을 먼저 올려보낸 것이다.

뒤이어 올라온 검무극이 세 사람과 재회한 후에 검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하던 이야기 계속하시죠.”

검무극의 말에 권마와 일화검존이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비슷한 마음이었다.

역시! 소교주는 소교주구나!

검왕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조금 전 나눴던 기도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강적과 함께 올라와서는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저 아래에서 검으로 안 싸우고 입으로 싸우다 온 모양이다.

두 사람의 심정을 그대로 이안이 드러냈다.

“적어도 우리 소교주님, 누군가에게 영혼을 빼앗기진 않으셨습니다.”

그녀의 나직한 말에 권마와 일화검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검왕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내기에 진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부탁이 뭐냐?”

분명 뭔가 부탁할 게 있어서 한 내기처럼 보였는데. 검무극은 곧장 말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할 부탁입니다.”

친구가 되고 나서 말하겠다는 의미.

그러자 검왕은 쌓았던 친분이 다 무너지고 원점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했다.

“그럼 영원히 못 하겠군.”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래, 둘이 있을 때와 지금은 또 다른 기분일 것이다.

동료가 죽었고 그 자리에 마존들이 서 있다.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 것이다.

남은 설득은 이 현실 속에서 해내야 한다.

마존이 있는 자리에서 설득은 두 배는 더 어려울 일이었다. 누군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새파랗게 젊은 사람과 친구가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검무극이 검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세 사람은 보내고 사범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면 좋겠지만, 제가 걱정되어서 절대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마존들이 있는 자리에서 하던 대화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바로 그때였다.

“난 좀 씻으러 가야겠다.”

권마가 먼저 돌아섰다.

검무극이 다급히 그에게 소리쳤다.

“사부님! 저만 두고 가신다고요?”

사부라는 호칭에 이제 권마도 검무극을 소교주에서 제자로 대했다.

“널 기다린다고 며칠 안 씻었더니 영 찝찝해서.”

그 말을 하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일화검존이 그 뒤를 따랐다.

“소교주, 먼저 안가에 가 있겠네. 마저 정리하고 오게.”

“저만 있다가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면 어쩌려고요?”

그러자 뒤따르던 이안이 그 말을 받았다.

“그 누군가도 고생하겠죠.”

이안이 지나가며 검왕에게 꾸벅 인사했다.

“고생이 많으세요.”

내 마음 네가 알아주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검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소리쳤다.

“그 말은 내게 해야지.”

이안은 못 들은 척 일화검존을 따라갔다.

권마와 일화검존, 그리고 이안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했다면, 자신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게 검무극을 돕는 일이란 것쯤은 이제 아는 것이다.

“올 때 술이랑 맛있는 안주 부탁드려요!”

이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이 멀어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검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가느냐, 마느냐. 이걸로 내기했어야 했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검왕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이 누구보다 이 소교주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동시에 정말 진심으로 소교주를 위하고 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앞서 보여준 마존들의 기세와, 검무극과 재회할 때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았는데.

그렇게 그곳에는 검무극과 검왕, 그리고 연백인만 남았다.

사실 검왕의 등장에 가장 반가워한 사람은 바로 연백인이었다.

정말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순간을 위해 천륜까지 저버렸는데.

마존들이 떠났음에도 연백인은 뻘쭘하게 서서 두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황룡무관이 무너지고, 마존들을 적으로 삼고, 사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제 오직 남은 희망은 비급뿐이었다.

그는 검무극이 천마신교 소교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때 검왕이 품에서 비급을 꺼내서 그에게 던졌다.

“약속한 거, 여기 있소!”

옜다, 받아라! 하고 날아든 비급을 연백인은 몸을 던져서 받았다.

연백인의 입이 좋아서 찢어졌다.

‘이 순간을 위해 다 참았다. 내가 절세신공만 익히면 반드시 이 수모를 갚아주마. 이제 다 죽었다!’

연백인이 비급의 제목을 보는 순간 흠칫 놀랐다. 서둘러 내용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확 굳었다.

“이건 창술 비급이지 않소?”

“맞소. 그 창술의 대성을 이루면 우리 연 관주에게 함부로 굴 사람은 없을 거요.”

검술을 익혔던 사람이 다시 처음부터 창술을 익히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나이를 먹은 사람이 언제 다시 익혀서 대성을 이루겠는가?

“당신! 나를 기만한 거요?”

검왕은 겁 없이 버럭하는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인데. 이런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나?”

검왕이 떠보듯 묻자 검무극이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이쪽도 만만치 않아서요.”

푸아아아악!

순식간에 날아든 검기에 연백인은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어떻습니까? 이런 비정한 친구는?”

사실 비정해서 죽인 것이 아니었다.

연백인은 죽어 마땅한 죄를 여럿 지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검무극과 검왕을 분노하게 한 일은 이것이었다.

그는 지하에서 나온 무관 출신 관원들이 지하 비고에 관해 소문을 낼까 봐, 청부 조직에 청부해 살인멸구를 하려 했었다.

그 결정을 내린 순간, 그의 운명은 이미 죽음으로 결정되었다. 때가 언제였느냐의 문제였을 뿐.

이제 그곳에 남은 사람은 둘.

검왕과 검무극만이 비무대 위에 서 있었다.

휘이이이이.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무극은 어쩌면 이렇게 비무대에 마주 서는 것이 그와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운명이라면?

하지만 운명이 내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두드려도 보고,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고. 이건 아니라고 소리도 쳐보고. 그렇게 할 거 다 하고 나서 말하는 거다.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역시 이 비무대 위에 사범님과 단둘이 서게 되는군요.”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싸움의 결과에 따라 친구가 되느냐가 결정되리라 생각하던 그때.

“우리답게 이 비무대를 이용하죠.”

검무극은 자신을 향해 굴러온 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를 필사적으로 옆으로 밀어붙였다.

이곳에서 아주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저 멀리 굴러갔을 때는 완전히 다른 곳에 도착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우리답게 이용하자고?”

“네, 우리답게요.”

검무극은 그와 생사혈전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우린 사범과 관원으로 만났잖습니까?”

여전히 무슨 의도인지 알지 못하는 검왕에게 검무극이 놀라운 말을 전했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주십시오.”

검왕은 깜짝 놀랐다. 앞서 수업 때야 수업이었다고 치지만, 이 자리에서 검술을 가르쳐달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넌 마지막까지 미쳐 있구나.”

“오죽하면 소교주를 버려두고 마존들이 다 달아났겠습니까? 제 심장까지도요.”

검왕이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더니.

“좋다, 한 수 가르쳐주지.”

검왕이 천천히 검무극에게 걸어왔다.

검을 내질렀을 때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다가와서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어떤 기교도 기술도, 혹은 현란한 초식도 들어가지 않았다. 검술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보는 초급 검술 비급에 있는 동작.

검왕은 그냥 검을 뽑아서 앞으로 찌른 것이다.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보며 검무극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완벽한 찌르기다!’

검왕 검술의 정수가 담긴 한 수였고, 그 한 수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검술의 모든 초식은 이 동작에서 비롯된다.

검왕의 검이 검무극의 심장 앞에서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죽일 수 있는데 왜 죽이지 않았느냐는 묻지 않았다. 이제 그런 단계는 지났으니까.

검무극이 검왕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 배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방금 검왕이 보여준 이 한 수는 앞으로 검술을 익혀나가는 검무극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한 수였다.

검왕이 철검을 검집에 회수하며 말했다.

“너와 친구가 되는 건…… 내가 손해 보는 장사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먼저 친구란 말이 나왔다.

“친구 사이에 손해고 이득이고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검무극이 모자란다거나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누군 사부고 누군 마존인데. 나는 친구잖아? 내가 너무 손해다.”

그는 권마와 일화검존과 비교하고 있었다.

검무극의 마음에 격정이 일었다. 그가 말하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껏 나를 잡아달라고.

“손해는 마존분들이 더 크십니다.”

“왜?”

“저분들은 평생 가도 천마신교의 소교주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아마 사범님을 정말 부러워할 겁니다.”

검무극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간 후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운명이 우릴 이렇게까지 민다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명이 아니라…… 네가 밀었지.”

그리고는 작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자.”

“네? 뭐라고요?”

앞서 보다는 조금 더 컸지만, 여전히 개미 소리였다.

“하자고, 친구.”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들어놓고선 검무극이 더 크게 물었다.

“뭐라시는지 안 들립니다. 뭐라고요?”

결국 검왕이 크게 소리쳤다.

“친구 하자고, 이 자식아!”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가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 잘 안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안 한다고 했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좋아했다.

“대신 네가 교주가 되어도 우린 친구다.”

“그렇게 생각하니 전혀 손해가 아니시죠?”

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 마교주의 친구라면,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대신 오래 사셔야 할 겁니다. 우리 아버지가 원체 정정하셔서.”

“반로환동을 해서라도 꼭 마교주와 친구 할 거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검왕이 작별을 고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빚부터 갚아야지.”

“거길 알려주지 않으실 거죠?”

“그래.”

“저를 데려가지도 않을 거고요.”

역시 검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비궤는 내가 알아서 회수해 가마.”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덜렁거리는 신발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검왕이 잊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아껴둔 부탁을 쓰겠습니다.”

발걸음을 멈춘 검왕이 무슨 부탁인지 알겠다는 듯 대답했다.

“절대 죽지 않는다. 걱정하지 마라.”

휘이이잉.

두 사람 사이에 비장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 부탁 아닌데요?”

멋쩍은 얼굴로 검왕이 돌아섰다.

“왜 아닌데? 지금은 그런 부탁 할 상황 아니냐?”

“내 친구가 이렇게 강한데 어떻게 죽입니까? 괜히 열받게 한다고 사람들 죽이지나 마십시오.”

그 말에 결국 검왕이 웃고 말았다. 자신을 그만큼 믿어주는 말이었다.

“그럼 무슨 부탁인데?”

절대 거절할 수 없다고 약속한 그 부탁은 바로.

“제가 친구 모임이 하나 있거든요? 나중에 열리면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의무입니다.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모임인데.”

어느새 검왕은 신발을 손에 들고 던지려 하고 있었다.

“초대하기만 해!”

그렇게 저만치 걸어가던 검왕이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걷다가 누군가를 이렇게 돌아본 적이 있었던가?

새로 사귄 젊은 친구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말없이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홀로 비무대 위에 서 있어서 그랬을까? 저 맑고 깊은 눈빛이 외롭게 보였다.

검왕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이름은 악군학이다.”

그 외로워 보이던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이름이었다.

십이지왕 일왕 악군학.

이것이 자신이 알던 악군학.

하지만 이 새로운 삶에서의 악군학은 다른 의미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검무극 친구 악군학으로.

“정말 멋진 이름입니다.”

살인멸구는 아무나 당하는 줄 아냐?

서진은 천마신교 안가 마당에서 검술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녀가 펼치는 검술은 황룡검법.

검무극이 재해석한 황룡검법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심오했다.

실력이 오를 때마다 다른 면을 보게 되는 그런 검술. 그렇기에 그녀는 실력이 오르면 오를수록 더 큰 감탄을 하게 될 것이다.

지난 며칠간 그녀는 수련에 열중했다. 낮에는 검술 수련을 하고 밤이 되면 귀술을 연마했다. 살면서 이렇게 무공을 열심히 수련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을 겪기 이전에도 무림은 무서운 곳이고 위험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문의 혈육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도 진심으로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한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그녀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무림은 온실 속 무림이었음을. 동네 파락호 놈들이나 혼내주는 무림이었다는 것을.

진짜 무림은 내 앞에서 활짝 웃는 청년이 천마신교의 소교주일수도 있고, 맨발의 무관 사범이 그 소교주를 노리는 곳임을.

온실 문을 열고 나가면 세찬 바람이 부는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천길 절벽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 검무극과 이안이 자신을 도우러 와주지 않았다면 과연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서진의 시선이 다시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문이 열릴 것만 같은데.

소교주를 데리러 떠난 두 마존과 이안은 며칠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저 영입할 때 그랬잖아요? 나만 믿으라고. 저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서 와요.’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의 시작은 자신 때문에 시작된 일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고향 오라버니인 임현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그때 안가로 함께 왔던 백룡반의 교석과 유광이 그곳으로 나왔다.

이제 상대의 신분을 알게 된 그들은 서진을 대하는 것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수련 중이셨습니까?”

서진이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편하게 대해도 돼.”

“그래도 그럴 수는 없죠.”

평범한 무인에게 천마신교의 마인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다.

지난 며칠 안가에 머무르면서도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혹여라도 안가를 관리하는 마인과 마주칠까 봐,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었다.

“답답하지? 이제 다들 곧 오실 거야.”

서진의 눈치를 보던 교석이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뱉었다.

“결국에는 우릴 죽이실 거죠?”

서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며칠간 잘 있더니.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러자 교석이 옆에 있던 유광을 쳐다보았다.

“녀석이 오늘 아침부터 불안함이 사라졌다고 했거든요.”

불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유광이 오늘 갑자기 불안함이 사라졌다고 했다.

“왠지 모르지만 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유광의 말에 교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저는 더 불길해졌습니다.”

“불안이 사라졌다니까!”

“그러니까 왜 갑자기 사라지느냐고!”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지.”

“아냐, 넌 계속 불안해야 해! 그게 내 마음이 편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교석의 불안은 진심이었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 방에 부모님께 보낼 서찰을 써두었습니다. 제가 죽으면 꼭 보내주십시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마교, 아니 천마신교와 관련된 말은 한마디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이 신교에 살인멸구 당한 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살인멸구는 아무나 당하는 줄 아냐?”

세 사람이 놀라 돌아보니 그곳으로 이안이 들어서고 있었다.

“대주님! 오셨습니까?”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서진은 크게 기뻐했다.

그녀 뒤로 권마와 일화검존이 뒤따라 들어왔다.

서진은 권마와 일화검존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교석과 유광은 뒤로 물러나 고개를 숙인 채 숨도 쉬지 않았다.

두 마존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서진이 이안에게 물었다.

“소교주님은요?”

“곧 오실 거야.”

안도하는 그녀를 두고 이안은 교석과 유광을 놀렸다.

“서찰은 나가면 네가 직접 보내. 이놈아,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살인멸구 당할 정도로 크고 해라.”

그러자 교석이 기뻐하며 물었다.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죽일 거면 벌써 죽였지.”

“감사합니다.”

그러던 교석이 유광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네 감이 왜 이렇게 잘 맞는 건데?’

자신의 감이 맞았다는 생각에 유광은 용기를 냈다.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저도 천마신교로 따라가고 싶습니다.”

교석이 깜짝 놀라 유광을 제지했다.

“너! 미쳤어?”

이안은 가만히 유광을 쳐다보았다. 불길함을 잘 감지하는 녀석이 하나쯤 수하로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이유로 데려가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했다.

“거절한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마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모르는 철부지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전쟁이 벌어지면 네 친구들과 검을 겨눠야 한다? 너, 옆에 있는 교석을 죽일 수 있어? 무공 배우라고 무관에 보낸 부모님 기절하실 거다? 그래도 괜찮아?

이안이 어떤 대답으로 그를 설득할까 고민하던 그때.

입구에서 시원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 실력이 안 되니까.”

돌아보니 검무극이 안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안과 서진이 함께 그를 반겼다.

“소교주님!”

이안은 서진에게는 검무극이 곧 올 거라고 확신에 차서 대답했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였으니까.

누가 누굴 걱정해? 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아니면 또 누가 검무극을 걱정하겠는가?

“지금보다 딱 열 배 정도 강해지면 그때 이안을 찾아와라.”

그 순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이 대답이 정답이라고. 이런저런 말로 그에게 설명해 봤자, 유광에게는 미련만 남고 마음만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열 배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는 한 사람의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가 열 배쯤 강해졌을 때, 이번 일은 젊은 시절의 추억이 되어 있겠지. 그때도 이 일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면, 그건 정말 인연이라 할 수 있을 테고.

“그럴 수 있겠나?”

검무극의 물음에 유광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열 배 더 강해져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큰소리를 치고 난 후 유광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 다시 불안해졌어.”

그 모습에 교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 배 강해질 때까지 불안해하겠군. 난 평생 불안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할 테고.”

“난 불안해야 한다면서!”

검무극은 두 사람의 우정이 이대로 계속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 배 강해져서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이 함께 올 거 같은 느낌. 그래, 이 우정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놓치지 말고, 잘 지켜라.

그때 그곳으로 연백진이 걸어 나왔다. 그가 나오자 교석과 유광은 거처로 들어가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셨습니까?”

연백진은 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감히 먼저 묻지는 못했다.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이제부터 당신이 황룡무관의 관주요.”

그 말로 알 수 있었다. 형이 죽었다는 것을. 누가 죽였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그건 마교 소교주에게 ‘당신이 우리 형을 죽였소?’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생각보다 놀라지 않았고, 또 생각보다는 후련하거나 신나지 않았다.

“그는 고통 없이 갔소.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죽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오.”

자신을 죽이려 한 형이었지만 고통 없이 죽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혈육은 혈육이었던 모양이다.

“이제부터 황룡무관은 달라질 겁니다.”

형은 오직 중원 제일의 무관을 위해서만 달렸다. 연백진은 그런 욕심은 없었다.

“한 명을 키워도 제대로 인성을 갖춘 무인을 키워내겠습니다.”

“저기 들어간 두 녀석부터 시작하시면 되겠습니다.”

연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무극을, 이안을, 그리고 서진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서진을 보는 그의 눈빛에는 끝까지 가버린 비극적인 운명의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은 이번 일이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기에.

‘해냈다.’

이렇게 황룡무관의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 * *

검무극은 권마와 일화검존에게 검왕과의 일을 전했다.

“그 사람과는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습니다.”

마존들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솔직히 말했다.

권마도 일화검존도 이 말을 한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보았던 검왕의 기도.

그 빽빽한 검날 사이에 누군가 타인이 들어설 공간은 없었으니까.

“그는 어떤 사람인가?”

일화검존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상대가 검을 쓰는 사람이기에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들었다.

“사실 저도 깊이 알지는 못합니다만, 이런 느낌은 받았습니다.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은 사람인데 저들에게 꽁꽁 묶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처럼?”

검무극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일화검존의 눈에는 자신도 꽁꽁 묶여서 자유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이렇게 알아주는 분이 계시니, 묶인 줄이 아파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소교주를 묶을 수 있겠나? 스스로 묶인 거겠지.”

그랬기에 검무극이 갈망하는 자유는 더욱 간절할 거로 생각했다.

“맞습니다. 저는 자유롭게 이 무림을 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나간 것도, 아버지 역시 자유로운 삶을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요.”

거기에 또 다른 솔직함이 더해졌다.

“한데 자유를 원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권력욕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천마신교의 교주 자리 아닙니까? 자유도 하루이틀이지 무슨 대단한 자유라고 이 자리를 망설이지 않고 박차겠습니까? 물려받아서 잘 꾸려나가고 싶은 욕심도 분명 있습니다.”

물론 그보다 아버지와 약속한 오 년 안에,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게 먼저였지만.

그때 듣고만 있던 권마가 담담히 말했다.

“너는 좋은 교주가 될 거다.”

검무극의 시선이 권마를 향했다. 이럴 때면 과묵한 이들의 침묵이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느낄 수 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해주면 ‘또 아부냐!’라고 하겠지만, 말수가 적은 권마의 이런 한마디는 큰 힘이 되어 날아들었다.

“당연히 아버지보다 더 좋은 교주겠죠?”

물론, 권마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난공불락의 성.

“그건 힘들겠지.”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 그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 때다.

“지하로 통하는 의자 남겨주신 것, 사부님 뜻이었죠?”

검왕이 믿었던 사람은 정말 고수였을 것이다. 아마 십이지왕 중 한 사람이겠지. 권마는 그런 고수와 싸우면서도 의자를 남긴 것이다.

권마는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그에 대해 생색내지 않았다.

원래 생색내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크게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법이다.

이렇게 그의 의도를 알아봐 주고 고마움을 말로 전했을 때, 권마가 했을 그 힘든 싸움이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을 테니까.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마침표를 찍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 * *

그날 밤,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열었다.

오랜만에 수련이 아니라 휴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모래사장. 잎이 큰 나무 아래 편안한 의자.

“아! 너무 좋다!”

의자에 편히 기대앉자 좋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자, 너도 좀 쉬어라.”

옆에 만들어둔 비궤용 자리에 비궤를 올렸다.

그러고는 한동안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따스한 열기를 싣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번 여행으로 너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구나.”

몸속 기운이 내 것이 되면서 비궤에 대한 마음 역시 더욱 친근해졌다.

“나머지 세 개의 기운은 어디에 있냐?”

일단 짐작 가는 곳이 한군데 있긴 했다.

무림맹.

본교에서 비궤가 나왔고, 사도맹과 풍천교, 북해빙궁에서 구슬을 구했다. 그러면 무림맹에도 하나쯤 있지 않을까?

“무림맹에도 있지? 그렇지?”

네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림맹에 보관되어 있다 하더라도, 무림맹주나 진하군을 찾아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얻은 것들처럼, 자신과 인연이 되었을 때 얻게 되겠지.

검무극은 서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다. 처음 비궤를 얻었을 때도 그러했다. 운명에 맡기고 마음 편히 있자고.

검무극은 머릿속을 비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다 깨서는 해변을 거닐었고, 쪼그리고 앉아 기어다니는 게를 구경했다.

다시 누웠다가 잠이 들었고, 또 깨어서 바다를 구경했다. 그러다 소리쳤다.

“정말 나가기 싫다!”

* * *

다음 날 아침, 본교로 돌아가는 마차가 준비되었다.

세 대의 마차.

권마가 선두에 타고 일화검존이 중간에, 그리고 검무극과 이안, 서진이 마지막 마차에 탔다. 편하게 가시라고 두 마존은 따로 마차를 준비했다.

서진이 마주 앉은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오라버니의 원한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회귀 전 인생에서 네가 나에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검무극이 뜻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본교로 가는 소감이 어때?”

뭐라 말할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서진이 불쑥 손바닥이 위를 향하게끔 손을 내밀었다.

스스슷.

손바닥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한 마리의 검은 늑대가 만들어졌다. 크기는 손바닥 위에 올라갈 만큼 작았지만, 멋지게 생긴 늑대였고 그 눈빛은 늠름했다.

“처음 대주님께서 영입할 때만 해도 제가 이랬습니다.”

스스스스슷!

다시 늑대 앞에 더 많은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커다란 호랑이의 얼굴이 만들어졌다.

그 호랑이가 입을 쩍 벌리는 순간!

멋진 늑대가 퍽하고 터지며 꼬리를 만 겁에 질린 개로 바뀌었다.

“지금은 이런 상태죠.”

검무극이 개를 보며 웃었다. 이런 재주를 부릴 줄 알았으면서 낭인 시절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구나.

“꼭 아버지 앞에서의 내 모습 같네.”

동병상련이라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개를 쓰다듬자,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개가 검무극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개를 쓰다듬으며 검무극이 말했다.

“호랑이냐 늑대냐 개냐는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하죠?”

검무극이 이안에게 바라는 그 마음이 서진에게도 전해졌다.

“본단에 갔을 때 지금보다 더 행복하냐가 중요하지. 난 불행한 호랑이는 원하지 않는다.”

서진은 소교주와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 말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은 알았다.

개가 사라지고 다시 그 자리에 아까의 늑대가 다시 만들어졌다.

“제가 행복한 호랑이까지 못 되더라도, 행복한 늑대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회귀 전 낭인으로 만난 그녀는 한 마리 늑대 같았다.

꼭 그렇게 살아라, 서진아. 대신 이번 늑대는 활짝 웃으면서 사는 늑대로.

이제 본교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보고 싶은 얼굴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너무 서둘러 출교하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들이.

검무극이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며 크게 소리쳤다.

“자, 본교로 출발! 이번에는 최대한 빠르게 갑니다!”

그 고사리손으로 무슨!

마차는 천마신교 본단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중간중간 식사하거나 말을 쉬게 할 때, 그리고 밤에 객잔에서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마차는 쉬지 않고 달렸다.

오늘도 마차는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차가 지나가자 허수아비에 앉은 참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꼭 저 같네요.”

이안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

조금 전, 날아올라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간 참새들 너머 논두렁에 학이 한 마리의 서 있었다.

그 고고한 모습은 마치 검무극 같았고, 자신은 방금 날아오른 참새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검무극이 마차 창밖을 쳐다봤을 때는 모든 건 다 찰나에 불과하다는 듯, 어느새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있어요, 그런 게. 짹짹거리는 게.”

“싱겁긴.”

“한데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검무극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과연 잘릴까 잘리지 않을까?”

“네?”

무슨 말인지 몰라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함께 있던 서진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무극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쪽 마차에 소리쳤다.

“잠깐 멈춥시다!”

그러자 앞서 달리던 두 대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검무극이 권마와 일화검존의 마차로 가서 말했다.

“본단까지 이제 사나흘밖에 남지 않았는데 여기서부터는 함께 가시죠.”

굳이 잘 가고 있는데 이럴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권마와 일화검존이 흔쾌히 마차에서 내렸다.

검무극이 앞서 달리던 두 대의 마차와 세 마부를 모두 돌려보냈다.

“앞으로 마차는 제가 몰고 가겠습니다.”

과연 검무극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말을 풀어서 인근 들판에서 먹이를 먹게 한 후, 검무극은 두 마존과 이안, 그리고 서진을 한곳에 모았다.

“잠깐만 이리 와주십시오!”

네 사람이 검무극 주위로 모여들었다. 다들 검무극이 왜 이러나 싶었는데.

“이안아, 검을 뽑아봐.”

난데없이 검을 뽑으라고 하자 이안은 일단 시키는 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일월검의 예기가 검날을 타고 흘렀다.

‘나와 비무라도 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검무극이 소매를 걷더니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검으로 내 팔을 내리쳐 봐.”

잠시 흐르는 정적.

“호신강기 시험하시게요?”

“아니. 호신강기 없이 막아보려고.”

그 말에 이안은 물론이고 다른 세 사람도 깜짝 놀랐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의 팔과 일월검에 쏠렸다.

“이거 일월검이에요. 소교주님이 제게 선물로 주신 그 일월검요. 진품인지 아닌지 시험하시기에는 검날이 너무 예리하잖아요?”

“그게 진품인지 시험하려는 게 아니야. 다른 게 진품인지 시험하려는 거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팔 아프다. 어서 내리쳐.”

“내리치면 그 아픈 팔도 없어질 거라고요.”

“어서!”

이안이 권마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라고 검무극의 의중을 알 수 있겠는가?

이윽고 권마가 딸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정말 칩니다.”

“세게 쳐!”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소교주님이시라면 무슨 생각이 있겠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일월검이 허공을 갈랐다. 호신강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녀도 검에 내공은 넣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맨몸으로 막을 수 있는 검이 아니었는데.

쉬이익.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두의 동작이 멈춰 있었다.

일월검은 검무극의 팔뚝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일월검으로 강하게 내리쳤음에도 검무극의 팔을 자르지 못했다.

“괜찮으세요?”

“아니. 아파 죽겠다. 소교주의 팔을 자를 셈이냐!”

“세게 내리치라면서요?”

“이 정도까지 세게는 아니었어. 뼈가 부러졌나 보다.”

물론, 엄살과는 달리 검무극의 팔은 멀쩡했다.

“방금 호신강기 일으키셨죠? 맞죠?”

“아니.”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켜보던 권마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호신강기가 아니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부님은 알아보시는군요.”

그 말에 모두 놀랐다. 특히 이안의 놀람은 컸다.

“아무리 소교주님이시라도, 일월검을 호신강기 없이 버텼다고요?”

“대신에 이걸 펼쳤거든.”

검무극이 품에서 한 권의 무공비급을 꺼냈다.

천강신.

몸을 보호하는 호신마공.

비궤가 있던 보고에서 단 한 권 챙겨왔던 바로 그 비급이었다.

권마는 이 무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천강신은 오래전에 실전된 마공인데? 어디서 구한 것이냐?”

“이번에 지하 보고에서 구했습니다.”

검무극이 천강신에 관해 아는 바를 설명했다.

“천강신이 좋은 점은 다른 호신공과 중복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호신강기와 함께 사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번에 황룡무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얻었으니, 이 무공은 다 같이 배우도록 하죠.”

그러자 권마가 사양했다.

“이런 극상승의 무공은 그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다. 네게 인연이 닿았으니, 너만 익혀라.”

“사실 그러잖아도 저만 익히려고 했습니다.”

인연이나 욕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린 상태에서, 이 천강신까지 동시에 펼치려면 막대한 내공이 필요합니다. 자칫 어설프게 사용했다간 내공만 소모하고 기존 호신강기 하나만 펼친 것보다 못할 수도 있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 사용하려고 했었는데.

“한데 이걸 익히다 보니 내공을 최소화하면서 기존 호신공과 함께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말에 권마와 일화검존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천강신과 같은 극상승의 마공을 고쳐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큰 약점을 고쳤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걸 알아낸 거냐?”

“제가 또 무공에 있어서는 천재적이지 않습니까?”

물론, 객잔에서 묵어갈 때면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발휘해 더욱 긴 시간을 고민하고 수련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강신과 같은 무공을 새롭게 개량해서 사용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부디 이 제자가 잘난 척 좀 하게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두 분이 받아주셔야 이안과 서진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존이 사양한 마공을 그들이 냉큼 배울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자 권마는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구결을 읊겠습니다.”

그러자 이안과 서진이 크게 황송해했다.

“정말 이렇게 귀한 마공을 저희에게도 전수해 주시는 겁니까?”

이안은 정말 감격했다. 비천검법에 일월검에 또 천강신까지. 교주님은 만년설삼까지 주셨고.

‘대체 저를 얼마나 부려 먹으시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검무극이 감동을 산산히 깼다.

“널 위해서가 아니야.”

“그럼요?”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면서 말했다.

“그래야 나도 내리치지. 여기 피멍 보이지? 너도 딱 대!”

이안이 흑마검을 보며 흠칫 뒤로 물러났다.

“저는 대성을 이루고 팔 내밀겠습니다. 한 삼십 년만 기다려주세요.”

뻔히 농담인 줄 알면서도 검무극이 받아주었다.

“그때 잊지 않고 시험할 거야.”

그 말에 이안의 기분이 좋아졌다. 삼십 년 후에도 함께 있을 거란 말이기도 했으니까.

그들 중 가장 황송해한 사람은 서진이었다. 그녀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물러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안이야 검무극의 직속 대주이자 심장이라 불리는 사람이니 그렇다지만, 자신은 일개 조장이 아닌가? 마존과 함께 저 대단한 마공을 익힐 수는 없었다.

“아니, 이 무공은 네가 제일 필요해. 네 귀술로 우릴 구할 때까지 살아남아야 할 거 아니냐?”

서진은 정말 그러고 싶었다. 이 사람들을 자신의 귀술로 구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무인이 신중해야 할 때는 무공을 익힐 때가 아니라 사용할 때다. 지금은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돼.”

서진은 또 느꼈다. 소교주의 과분한 애정을.

“고맙습니다.”

검무극이 어찌 그녀들에게 과분한 정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안과 서진.

자신의 회귀를 이루게 해준 두 사람인데.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검무극은 네 사람에게 새로운 천강신의 구결을 알려주었다. 모두가 다 외울 수 있도록 몇 번이나 반복해서 구결을 반복했다.

이후 본단으로 돌아가는 며칠 동안 다들 천강신을 수련했다.

처음에 천강신을 극구 사양했던 권마가 제일 열심히 수련했다.

“아니, 전수 안 해드렸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 큰 덩치로 야밤에까지 수련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검무극이 놀렸지만 권마는 묵묵히 수련에만 집중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천강신과 같은 호신공은 맨몸으로 싸우는 권법가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무공이었으니까.

그 열기가 전해졌을까?

일화검존 역시 천강신을 제대로 수련했다. 마공과 잘 어울리는 호신공이었기에, 그녀 역시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검무극과 두 마존은 함께 천강신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권마가 느끼는 천강신의 약점이 있었고 일화검존이 느끼는 바가 또 있었다. 어떤 한 무공을 두고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기에, 두 마존은 이 대화가 몹시 흥미로웠다.

특히 최근에 무공에 큰 성취가 있었던 세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호신공의 이치를 넘어 무학 전반에 걸친 깊은 함축과 깨달음이 깃들어 있었다.

이안과 서진은 듣고만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도 많았지만, 두 사람은 최대한 잘 기억해 두려고 애썼다. 언젠가 오늘 들었던 이야기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결과, 구결을 조금 더 부드럽게 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두 분 덕분에 신(新) 천강신이 아니라 신신(新新) 천강신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무공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권마와 일화검존은 안다. 자신들이 이런저런 제안을 할 수 있었던 건, 검무극이 개량한 초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만약 기존의 천강신을 들었다면 이것을 더 낫게 개량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이런 무공이구나 하고 넘어갔겠지. 이 차이가 너무나 크다.

“자, 검을 뽑아봐라.”

이번에는 권마가 검무극에게 검을 뽑게 했다.

권마가 그 큰 주먹과 팔뚝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리쳐라.”

“아시죠? 제 검은 흑마검입니다. 서열 이 위의 마검입니다. 참, 내리치는 사람도 서열 이 위입니다. 잘립니다, 잘려요.”

“됐고. 어서 내리쳐라.”

“그럼 갑니다!”

쉬이이익.

파아아악!

흑마검은 권마의 그 두꺼운 팔뚝을 자르지 못했다.

“훌륭하다.”

물론 검무극 역시 검에 내공을 싣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배운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흑마검의 예기를 막아낸 것으로 천강신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호신공인지를 증명해 냈다.

“자, 이번에는 타격 시험을 해보자.”

“좋습니다. 어딜 칠까요? 말씀만 하십시오.”

“이번에는 내가 쳐야지. 그 고사리손으로 무슨 시험이 되겠느냐?”

권마가 그 큰 주먹을 말아쥐는 모습을 보며 검무극이 후다닥 뒤로 달아났다.

“삼십 년 후에 이안의 팔을 자르는 날, 그 주먹에 맞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 여인이 함께 웃었다.

그때 서진이 불쑥 이안에게 말했다.

“제가 혹시 말씀드렸었나요?”

“어떤 말?”

“저를 뽑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요.”

서진이 이안을 응시하며 정식으로 말했다.

“제 대주님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삼스러운 말이었지만, 제대로 진심으로 하는 인사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경험했던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이번에 배우고 깨달은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평생 고생을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너무나 편하고 쉽게 얻는 것에 감사했다.

“서 조장 덕분에 나도 많이 배웠어.”

그냥 듣기 좋은 말로 한 말이 아니었다. 이번 출교에서 이안 역시 많은 깨달음과 배움이 있었다.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는 일화검존을 향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그녀.

이안은 일화검존에게서 앞으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모습을 보았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녀는 잘 안다.

언제나 중요한 건 방향이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노력의 방향이 잘못되면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그 노력이 독이 되어 그 사람을 집어삼켜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고작 이런 결과라니. 멍청하게 헛고생했구나.

이럴 때는 되돌아가면 되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했던 노력이 발목을 붙잡는다.

그렇기에 애초에 방향이 중요하다.

노력이 올바른 방향을 만났을 때 비로소 운명이 되는 법이니까.

이안의 시선이 이 모든 걸 가르쳐준 사람을 향했다.

언제 장난을 쳤냐는 듯, 검무극과 권마는 무공에 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안은 서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검무극에게 전했다.

‘고마워요. 제 소교주님이 되어 주셔서.’

* * *

검무극과 두 마존이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검무극을 중심에 두고 권마와 일화검존이 그 뒤를 따랐다. 소교주는 당연했고, 마존들도 출교하고 돌아오면 천마를 찾아 인사하는 것이 통례였다.

천마전 안으로 들어선 검무극이 언제나처럼 크게 소리쳤다.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한데 피의 길 끝, 아버지의 태사의가 비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대신 총군사 사마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교주님, 오셨습니까?”

“총군사님.”

마존들과 사마명도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가 끝나자 검무극이 재빨리 물었다.

“아버지는요?”

그러자 사마명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교주님은 폐관 수련에 드셨습니다.”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아버지가 폐관에 드셨다고?

검무극은 물론이고 함께 왔던 권마와 일화검존도 긴장한 얼굴로 사마명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폐관 수련에 든 적은 꽤 오래전 일이었으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검무극의 걱정에 사마명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수련을 위해 폐관에 드셨습니다.”

자신이 회귀한 후 아버지 역시 변화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전 삶과 다르게 무공수련에 더 집중하셨다는 것도.

그런 아버지가 폐관에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 무학의 경지에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는 의미.

구화마공이 십 성 대성을 넘어 십일 성의 경지로 들어가신 것일까? 아니면 십이 성 대성을 이루시려는 것일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폐관 전의 아버지와 후의 아버지는 분명 다른 실력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출관하시면, 본교의 전력은 더욱 강해지겠군요.”

그러자 사마명이 검무극을 응시하며 물었다.

“불안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이 강해지시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 자신이었는데.

다만 그 강함이 지금 질문에 담긴 의도처럼, 무림일통과 직결된다면?

이미 아버지의 무림일통을 공식적으로 막겠다고 나선 상태이니, 검무극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넘치는 힘은 언젠가는 터져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검무극이 권마와 일화검존을 돌아보았다.

‘정말 힘이 넘치고 있구나.’

하필이면 오늘 함께 온 이 두 마존이야말로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높은 이들이었다.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권마.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일화검존.

이들은 아버지의 명령이라면 수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내일 당장 전쟁에 뛰어들 것이다.

“천강신은 알려드리지 말 걸 그랬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담긴 뜻을 알기에 두 마존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시 검무극이 사마명을 바라보자, 그는 아버지의 말을 전했다.

“안 계신 사이에 소교주님이 돌아오시면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검무극이 손을 들어 다음 말을 맞추겠다는 시늉을 했다.

“본교를 잘 보살펴라? 우리 아들 믿는다!”

꿈도 크십니다! 하는 표정으로 사마명은 굵은 목소리로 아버지 흉내를 내며 말했다.

“사고 치지 마라.”

뒤에서 일화검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저를 모르시는군요. 저는 사고를 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고수습 전문가라고요!”

검무극이 돌아보며 일화검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보셨잖습니까? 제가 이번 일을 얼마나 잘 수습했는지.”

그러자 일화검존이 옆에 서 있는 권마를 보며 말했다.

“수습은 권마께서 하셨지. 우리 소교주는 지하에서 일이 다 끝나니까 슬그머니 나왔고. 아닌가?”

일화검존의 눈빛에 스친 장난기만큼 검무극은 억울해했다.

“검존님까지 이러시기입니까? 정말 너무하십니다! 제가 지하에서 흙먼지 마셔가며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말도 마십시오, 딱딱한 나무 침상에서 자 보셨습니까? 신발에 맞아보셨냐고요? 제가 과묵해서 말씀을 다 안 드려서 그렇지…….”

검무극의 말이 길어지려 하자 권마와 일화검존이 사마명에게 작별을 고했다.

“우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마명도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받았다.

“가셔서 편히 쉬십시오.”

두 사람이 돌아서자 검무극이 따라붙었다.

“같이 가요. 제 말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군사님.”

검무극도 따라 나가려던 그때, 사마명이 그를 불렀다.

“소교주님은 어딜 가십니까?”

“어딜 가다니요?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이제 사람들도 만나고 놀아야죠. 제발 믿으십시오, 저 고생하고 왔습니다.”

“그건 믿습니다만, 소교주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요?”

“오늘부터 소교주님께서 교주님의 일을 대신하셔야 합니다.”

사마명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이 순간부터 소교주님이 교주 대행이십니다.”

검무극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농담이시죠?”

“교주님께서 폐관에 드시기 전에 그렇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언제까지요?”

“교주님이 폐관에서 나오실 때까지입니다.”

폐관 수련이란 게 내일 나오실지 십 년 후에 나오실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인데.

“이러시다 일 년 후에 나오시면요?”

“그때까지 하셔야죠.”

바로 그때였다.

스스스스슷.

은신해 있던 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착착착착착착!

휘 뒤로 같은 복장을 한 고수들이 일렬로 모습을 드러냈다. 휘가 이끄는 천마호위대 무인들, 그중에서도 천마전 내부에 들어올 수 있는 조장들이었다. 이들을 이렇게 한 자리에 보는 건 검무극도 처음이었다.

호위대 정복을 입은 그들의 가슴에는 방패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방패 안에 천마혼을 본떠 만든 악귀가 그려져 있었다.

휘가 정중히 예를 갖춰 충성을 맹세했다.

“호위대주 휘, 앞으로 교주 대행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모시겠습니다.”

아니, 휘 아저씨 왜 이러세요.

스스스슷.

정식으로 인사를 한 후에 그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사라지자 돌아서 나가려던 권마와 일화검존이 다시 돌아서서 정중히 포권했다.

“교주 대행께 인사드립니다.”

앞서 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정중한 태도였다. 실제 교주는 아니었지만, 두 마존들은 교주를 대하는 예를 갖췄다. 놀리는 게 아니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소교주와 교주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음을.

“아니, 한순간에 너무 태도가 달라지시는 거 아닙니까?”

장난으로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권마와 일화검존은 더없이 진지하기만 했다.

“사람 차별하시는 두 분!”

그러자 두 마존이 착착! 포권하며 함께 말했다.

“명을 내려주십시오.”

끝까지 장난을 받아주지 않았기에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원래라면 사고수습은 누가 했습니까? 라며 장난을 치려고 했는데, 두 사람의 진지함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가서 쉬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권마와 일화검존이 피의 길을 따라 천마전을 나섰다.

저 멀리 문 앞에서 권마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자리니 잘하거라.’

검무극 역시 장난기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네, 사부님.’

아버지가 내린 명령이었으니 사부에게 이 일은 장난이 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대행을 받아들일 검무극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사마명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교주 대행으로서 명령합니다. 대행직을 총군사께 맡기겠습니다. 앞으로 본교를 맡아주십시오.”

물론 안 통했다.

“소교주님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면서, 절대 불가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아버지. 정말 이러시기입니까?

“저 기다리는 사람이 줄 서 있다고요!”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저 아직 여장도 안 풀었다고요!”

“일과 후에 하십시오.”

“안 되겠습니다. 저도 폐관에 들어야겠습니다. 솔직히 폐관에 들어야 할 사람은 저라고요.”

이번에도 사마명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 역시 예상하시고 절대 불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사마명이 태사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만 태사의에 오르시지요?”

“아버지 자리에서 일을 봐야 합니까? 그냥 여기서 편하게 일 처리하죠?”

“안 됩니다. 대행이라고 해도 존엄하신 교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일입니다.”

단호한 사마명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검무극은 계단을 올라갔다.

검무극은 곧바로 앉지 않았다.

태사의 옆에 서서 잠시 빈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이곳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여기 앉아서 절 비웃어 주셨어야지요. 그 비웃음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

항상 자리를 지키던 분의 부재였기에 그 상실감은 더욱 컸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태사의에 앉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곳에 앉아서 보이는 광경을 둘러보았다.

회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이 자리에 앉아보게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아무 감흥이 없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도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묘한 떨림이 온몸에서 전해져온다.

‘아버지, 왜 제게 이 일을 맡기신 겁니까?’

굳이 자신에게 대행을 맡기지 않아도, 사마명에게 일을 맡겨도 상관없었다. 예전에 사마명에게 맡기고 함께 여행도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자신에게 교주 대행을 맡기셨다는 건?

‘혹시 저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교주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이윽고 검무극의 시선이 사마명을 향했다.

“군사님을 이렇게 내려보려니까 황송하고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지금은 교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계시니까요.”

“제가 뭐부터 하면 됩니까?”

사마명이 구석에 놓인 탁자로 걸어갔다. 그곳에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평생 처리해야 할 일인가요?”

검무극의 말에 사마명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검무극이 다시 허공에 소리쳤다.

“휘 아저씨! 듣고 계십니까? 아버지께 꼭 전해주세요! 저 사고 칠 겁니다! 우당탕 난리가 날 거라고 꼭 전해주십시오!”

폐관 수련을 하는 곳에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휘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이 전해질 리가 없다.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그 정도 급보가 아니라면 어떤 일로도 아버지의 수련을 방해하지는 못할 테니까.

사마명이 본격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우선 중원의 주요 사건 사고부터 보고드리겠습니다.”

중원 각지에서 발생한 여러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 보고되었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움직임과 관련한 정보를 필두로 거대 문파들의 동향, 상계의 흐름까지. 온갖 정보가 보고되었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고수들이 어디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느 문파들끼리 분쟁이 있었는지. 어느 상단과 어느 문파가 손을 잡았는지.

그 보고를 다 듣고 나면 다음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은 허가를 내려주셔야 할 일들입니다. 우선 하남지단 병력을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림맹 하남지단의 인원이 늘어난 것에 대응하기 위함입니다.”

“무림맹에서는 얼마나 늘렸습니까?”

“열 명입니다.”

하남은 정파 세력권이었다. 그랬기에 본교도 그렇고 사도맹도 그렇고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로 지단과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서로 각자의 세력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굳이 열 명의 인원 변동에 반응할 필요가 있습니까? 공연히 무림맹을 자극하지 않겠습니까?”

혹 하남이 본단에서 멀어서 신경을 쓰는 건가 생각했는데.

사마명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것이 그들을 자극하는 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대응은 일종의 대화에 가깝습니다. 이쪽에서도 그쪽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거죠. 열 명 늘렸다는 것,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만큼 늘린다. 한데 우리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위험 신호가 됩니다. 본교의 내부 정보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그럼 위험 신호가 아니라 좋은 소식 아닙니까?”

“아뇨, 그들은 본교의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통천각에서 이런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

첫날 첫 결정이었기 때문일까? 사마명은 그 결정을 검무극에게 맡겼다.

“우린 몇 명이나 보낼까요?”

우린 다섯 명만 보내죠, 하려다가.

“한 천 명쯤 보내서 놀라게 해줄까요?”

“그러시지요.”

정말 그러겠다는 듯, 사마명이 다음 서류를 챙겨 들자 검무극이 재빨리 말했다.

“농담입니다!”

사마명이 어찌 농담인 줄 몰랐겠는가?

“아쉽군요. 하남지단에 천 명을 배치할 절호의 기회였는데.”

반면 그의 말은 농담만이 아님을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다.

“군사님도 바라십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버지의 무림일통 말입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제가 여기 앉아서 물었을 때 가장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거 같아서요.”

잠시 사이를 두고 사마명이 대답했다.

“저는 교주님의 강호를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의미.

어쩌면 사마명은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도와 천하일통을 이루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 일이야말로 군사로서 최고의 업적이 될 테니까.

그에 대해 더 깊이 캐묻진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을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자, 다음은 뭐죠?”

* * *

생전 처음 하는 일을 해서였을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시간 다 됐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사마명과 하는 일 처리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 일이 많이 남았는데요?”

가져온 일의 삼분지 일도 끝내지 못했다.

“내일 이어서 하시죠.”

“아버지와 하시면 시간 내에 다 처리하십니까?”

“보통 그렇습니다.”

검무극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왜 태사의를 그렇게 지키고 계셨는지. 도망가고 싶어도 일이 너무 많아서 못 가셨습니다.”

막연히 일이 많으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일을 처리하고 계셨는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막중한 책임감이 없다면 일일이 신경 쓸 수가 없는 일들이었다.

“첫날치곤 잘하셨습니다.”

사마명은 오늘 함께 일을 하면서 검무극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꼼꼼하십니다.”

검무극은 모르는 건 즉시 물었고, 일을 대충 처리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숙고했다.

“꼼꼼해서가 아니라 불안증이 있어서입니다. 제가 잘못 결정해서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아버지나 총군사께서 실망하시면 어쩌나.”

사마명이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더니.

“불안증이 클수록 성과도 큰 법이지요. 대신 당사자는 힘들겠지만요. 그럼 쉬십시오.”

사마명이 정중히 인사한 후에 천마전을 나갔다.

일과를 마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아버지는 이렇게 사마명이 나가고 나서도 홀로 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을 거다.

‘여기 앉으셔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셨습니까?’

계실 때는 잘 몰랐는데.

오히려 아버지의 부재가 아버지를 더욱 이해할 기회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천마는 과로 중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검무극이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아아! 드디어 끝났다!”

임시 교주가 된 첫날인데.

이렇게 하루가 길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수련하거나 피 터지게 싸우는 게 낫지.

계단에서 내려와 천마전을 나가려 하자 휘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

“지금부터는 휘 대주라고 부르셔야 합니다.”

“둘만 있을 때는 아저씨라 부르겠습니다.”

검무극을 바라보는 휘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셋이 여행을 다녀온 후, 휘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친해졌다. 서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거처는 천마전 내원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당분간 그곳에서 주무셔야 합니다.”

교주를 대신하는 자리이니 당연히 교주에 준하는 대우와 호위가 뒤따랐다.

휘를 따라 내원을 걷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시죠?”

“괜찮으십니다.”

“그럼 됐습니다.”

검무극은 혹여라도 이번 폐관에 다른 이유가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휘에게서 어떤 걱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와 관련해서 가장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휘일 것이다.

“이 방입니다.”

휘가 안내한 곳은 아버지의 처소 건너편 방이었다.

“이곳도 아버지가 쓰시는 방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곳에서 책도 읽으시고, 사색도 하시곤 하셨습니다. 소교주님께 이곳을 내주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만큼은 아니지만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럽게 꾸며진 방이었다. 책장이나 다탁도 겉으론 평범해 보였지만, 모두 다 가구를 만드는 장인이 만든 것들이었다.

이 방에도 큰 침상이 있었는데, 깨끗하고 푹신한 침구가 깔려 있었다. 침상에 걸터앉으며 검무극이 말했다.

“아버지가 왜 그리 일찍 주무시는지 이제 이해가 됩니다. 낮에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시고 일을 하니까 잠이 안 올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이서 그 모습을 다 지켜본 사람이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휘였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필요한 건 아버지입니다! 제발 가셔서 아버지 좀 데려와 주세요.”

그렇게 농담을 하며 휘를 내보내던 바로 그때, 검무극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어? 이건!”

깜짝 놀란 검무극이 장식장으로 걸어갔다.

한옆에 놓인 장식장에 무엇인가 올려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마가촌에서 파는 마존 인형들이었다.

팔마존 모두 있었고, 그 가운데 검무극 자신의 인형도 있었다.

일전에 한설이 천마신교에 왔을 때, 마가촌에서 인형을 팔던 상인이 소교주 인형도 곧 나올 거란 말을 했었는데.

황룡무관 일을 처리하러 다녀온 사이에 인형이 나온 모양이다.

검무극이 놀란 건 자신의 인형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습니까?”

아버지의 방에 마존 인형이라니!

휘는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설마? 이거 아버지가 사신 겁니까?”

놀랍게도 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관에 들어가시기 전에 교주님께서 마가촌 풍류주점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돌아오시는 길에 소교주님 인형을 보시고는 전부 다 사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무 관심이 없었다가 아들 인형이 나온 걸 보고 사셨다는 말이었다. 하나만 사기 그래서 마존들 것까지 모두 사신 것이리라.

그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풍류주점에서 한잔하시고 돌아가시다가 발갛게 취기 오른 모습으로 인형을 사는 그 모습이.

그걸 사신 것도 감동이었는데, 이렇게 진열해 두신 것은 더 감동이었다.

“여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검무극이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검무극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쾌속보로 순식간에 날아가서 사 온 것은 천마 인형이었다. 진열된 인형 중에 아버지 인형은 없었던 것이다.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인형을 옆으로 옮긴 후 가운데 아버지의 인형을 세웠다.

“이제야 완성되었네요.”

그 모습을 지켜보는 휘의 미소가 짙어졌다.

원래는 검무극에게 방을 내어주기 전에 알아서 이 인형을 치워야 했다. 교주는 이런 걸 아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휘는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교주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 자신이 모시는 교주님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아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 내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럼 편히 쉬십시오.”

방을 나서며 문을 닫는데 검무극이 인형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우지 않길 잘했다.

* * *

다음 날 아침 검무극은 휘에게 호위들을 소집하게 했다.

“천마전 호위대를 다 모아주십시오. 제 거처에 있는 소교주 호위들까지 모두요.”

휘는 내심 긴장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호위대를 전부 불러달라는 말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휘는 이유를 묻지 않고 명령에 따랐다.

잠시 후, 천마전 후원에 호위대 무인들이 모두 모였다.

천마신교에 여러 호위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은 이들이 당연히 천마전 호위대다.

특히 천마전 내부에서 휘와 함께 교주를 지키는 조장들은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직책은 조장이지만 단주급 이상의 실력자들.

그곳에 소교주의 호위 책임자인 적연을 비롯한 열두 명의 호위도 불려 왔다.

천마전에는 교주를 지키는 호위들만이 출입할 수 있기에 그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대주인 휘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호위들도 그들에겐 하나같이 대선배들이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했다.

“이야, 내 호위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얼굴 잊어버리겠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검무극이 적연 앞으로 다가갔다.

“따라다니는 여인들 줄을 섰지?”

귀안술의 대성을 이루고도 어색하다며 안대를 쓰고 다녔던 적연은 이제 안대를 벗고 있었다.

“아닙니다!”

무공 수련한다고 저잣거리에 나간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둘만 있었다면 이런 정도의 대답은 했을 텐데.

선배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적연은 휘나 선배들에게 부끄러웠다. 자신들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검무극이 워낙 자유분방하고 혼자 다니길 좋아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어쨌든 임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동안 수련들 열심히 했네.”

검무극은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보았다.

실제로도 그들은 검무극을 기다리면서 무공수련에 매진했다. 덕분에 처음 검무극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렇게 모든 호위들을 모은 후 검무극은 차분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휘 대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임시 교주직을 하는 동안의 호위는 제 호위들에게 받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휘는 물론이고 기존 천마의 호위들도 당황했다.

소교주의 호위들은 아무래도 막내급들인데, 그들에게 자신의 호위를 맡기겠다는 말이었다.

“이번 기회에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휘가 정중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적연을 비롯한 호위들은 모두 기뻐했다. 드디어 제대로 검무극의 호위를 맡게 된 것이다. 그것도 천마전에서의 임무였다.

오늘 검무극이 이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 호위들과 휘 대주님을 제외하고 나머지 호위들에게 전원 휴가를 내리겠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이번에는 더욱 당황했다.

“이건 임시 교주가 되고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기도 합니다.”

아예 명령으로 못을 박았다. 사실 가장 휴가를 주고 싶은 사람은 휘였지만, 그랬다간 절대 이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는 제외했다.

휘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이번 기회에 호위들에게 쉴 기회를 주려 한다는 것을.

“제게는 호위 임무와 상반되는 명령에는 불복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이 호위대주에게 주어진 가장 큰 권한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러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휘는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검무극이 어떤 마음인지 수하들에게 알려주려고 일부러 물었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지난번 셋이 여행을 할 때도 호위들은 쉴 수가 없었다. 비록 함께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휘와 교류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며 움직여야 했다.

검무극의 시선이 호위들을 향했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 푹들 쉬시게. 고향에도 다녀오고, 가족들과 여행도 가고. 밀린 잠도 자고.”

소교주가 자신들을 위해 휴가를 내려줄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휘를 향했다.

“불복하시겠습니까?”

만약 자신까지 배제했다면 불복했겠지만. 이번이 수하들을 쉬게 해줄 절호의 기회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내려주신 명령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휴가가 결정되자 호위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스쳤다. 물론 그들이라고 어찌 하루도 빠짐없이 일만 했겠는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쉬기도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된 휴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자, 이거 나눠 가지게.”

검무극이 준비한 봉투를 그들에게 주었다. 안에는 휴가를 만끽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다. 액수를 떠나 그 마음에 한층 더 감동했다.

“다들 푹 쉬다 오도록.”

“감사합니다!”

우렁찬 대답에 고마움이 깃들었다.

천마전 호위들이 모두 물러났다.

휘가 그들과 함께 나갔다. 휘 성격상 무작정 그들을 한꺼번에 보내진 않을 것이다. 일정도 조율하고 긴급 연락망도 점검하고. 할 일이 많겠지.

이제 그곳에 남은 이들은 적연과 호위들이었다.

“휴가 못 가 섭섭한가?”

그러자 적연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서 대답했다.

“우린 그동안 일을 못 해 섭섭했었습니다!”

선배들이 없는 자리였기에 솔직할 수 있었다.

“나를 잘 지켜줄 수 있지?”

“네!”

“너희만 믿는다.”

적연은 물론이고 다른 호위들도 눈빛이 타올랐다.

언젠가 이들이 앞서 선배들처럼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 옆에 휘가 있듯이, 자신의 옆에는 이 적연이 함께하겠지.

“적연!”

“네!”

비장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그 용건은 적연을 당황하게 하는 것이었다.

“안대도 풀었는데 우리 여자 꼬시러 갈까?”

적연이 얼굴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

“안 됩니다.”

검무극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걸어갔다.

“맞아, 안 돼. 어제 일도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 * *

사마명은 어제 남은 서류 옆에 또 다른 서류를 수북이 쌓았다.

“설마 가져오신 것들이 오늘 처리해야 할 일입니까?”

“네, 맞습니다.”

사마명의 대답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루 만에 이런 일들이 생겼다고요? 아니죠? 이거 다 지어내서 가져오신 거죠?”

검무극의 농담을 사마명이 농담으로 받았다.

“네, 밤새 지어낸다고 한숨도 못 잤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루 사이에 뭔 일이 이렇게 많이 일어납니까!”

통천각 군사들은 중원 각지에서 날아든 정보를 늦은 시간까지 분류했을 것이다. 사마명 역시 늦도록 잠을 자지 못했을 테고.

“휴가 보낼 사람은 따로 있었네요.”

무슨 말이냐고 묻지 않는 걸 보니 호위들 휴가 보낸 것도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저희가 자리를 비우면 본교 일이 마비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네?”

“한 열흘 마비되는 거죠. 무림맹과 사도맹에 공식 전서 보내는 거죠. 우리 열흘간 쉴 테니까 절대 건들지 마라! 건들면 열흘 후에 전쟁이다!”

휴가는 마치고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에 사마명이 웃었다.

“돌아가면서 잘 쉬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사마명 본인은 쉬는 날 없이 일만 하고 있음을.

“젊은 군사들은 걱정 안 합니다. 총 군사님이 걱정이죠.”

“저는 괜찮습니다. 예전에 교주님께서 알려주신 심법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꼭 합니다. 덕분에 아주 건강해졌습니다.”

하긴, 아버지도 사마명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실 것이다. 본교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사마명이었으니까.

그래, 사마명을 위하는 일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는 거겠지.

“자, 오늘은 속도를 더 내보죠.”

확실히 어제보다 일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함께 일하는 동안 사마명은 검무극에게서 한 가지 큰 장점을 발견했다.

검무극은 잘 물었다. 모르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물어서 알게 된 것을 확실히 기억하려 애썼다.

군사 일을 하는 사마명이었기에 이 점이 더 큰 장점으로 여겼다.

모르는 걸 아는 것처럼 넘어갈 때, 그 아는 척이 때론 큰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았으니까.

그래서 수하들에게 항상 말한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하지 말라고. 느리게 가도 좋고, 무식해 보여도 좋으니까, 절대 모르는 걸 아는 척 말라고.

그때 서류를 넘기던 검무극이 사마명에게 물었다.

“한데 이런 일까지 아버지가 결정하셨습니까?”

“네, 그러셨습니다.”

“교주님께서는 교내의 작은 부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큰일을 결정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심지어 이 말을 아버지가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해받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셨네요. 아들에게조차.”

무림인들이 천마를 생각하면 온갖 유희와 환락에 젖어 피의 연회를 즐기고 있을 거로 여기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교를 위해 일하고 계셨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방식으로 마존들을 챙기셨고.

“천마는 과로 중이셨습니다.”

이런 줄 알았으면 낚시는 져드릴 걸 그랬습니다.

우리보다 돈 더 버는 거 아냐?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났다.

검무극은 임시 교주 일에 열중했다. 예전이라면 일과를 마치고 나서 풍류 주점에 가서 술을 마시고, 또 마존들을 만나서 놀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생하고 계셨구나, 신경을 많이 쓰셨겠구나, 생각하니 놀 수가 없었다. 맡은 일이 워낙 중책이기도 했고.

그리고 오늘 드디어!

“다음 안건은요?”

“없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들자 사마명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을 제시간에 다 끝내셨습니다.”

소교주가 총명한 사람이란 건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일에 적응할 줄은 몰랐다. 단지 머리가 똑똑한 것만이 아니었다. 소교주는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볼 줄 알았고, 조직이 돌아가는 방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소교주의 깊은 통찰은 정말 교주와 함께 일을 보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지금껏 사마명은 소교주가 이뤄낸 결과를 주로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몸소 느꼈다.

“대단하십니다.”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일을 한시라도 빨리 없애버리겠다는 의지가 발휘된 거죠.”

“그런 셈치고는 너무 잘 처리하셨지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사마명이 서류를 챙겨서 돌아서려는데.

“한 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돌아온 것 마존 분들도 다 알죠?”

“그들뿐만 아니라 전 교도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한 명도 와보지 않는다고요? 이거 너무 하잖아요!”

일을 마치고 나갈 때면 천마전 입구에 혈천도마가 대도를 꽂아 두고 술을 마시고 있기를 기대했다.

극악소마가 거대 악귀상에 올라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기를 바랐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취마가 와서 일 안 힘드냐, 이 형이 도와주랴, 이렇게 놀리러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오다니요!”

사마명이 좋은 어조로 검무극을 위로했다.

“원래도 교주님이 부르지 않으면 안 오시는 분들입니다. 천마전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시죠.”

“그야 아버지가 어려우니까 당연하죠. 어디 아버지하고 저하고 같습니까?”

그러자 사마명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다릅니까?”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사마명에게 물었다.

“그럼 같습니까? 저는 아버지보다 훨씬 편하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사마명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존분들께서는 교주님보다 소교주님을 대하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

“제가요?”

검무극은 놀람을 넘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당연히 농담인가 싶었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볼 때 진심으로 말한 듯 보였다.

“귀교하던 날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말을 끝까지 안 듣고 나가버리는 권마님과 일화검존님을요. 본교 역사상 제일 만만한 소교주가 저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어렵다니요?”

사마명은 검무극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저는 더 어렵게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장난을 많이 치고 농담도 많이 하는데요?”

마존들이 아버지보다 나를 더 어렵게 생각한다고? 그럴 리가!

그러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군사님은 어떠십니까?”

사마명은 대답 대신 뜻 모를 미소를 지은 후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내일 뵙겠습니다.”

“아니, 대답해 주고 가셔야죠!”

하지만 사마명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렇게 무시하면서 제가 어렵다니요?”

혼자 남은 검무극이 허공에 말했다.

“적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도 내가 어려워?”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어렵긴 합니다만, 교주님만큼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네.”

한데 저 똑똑한 사마명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잠시 자리를 지키던 검무극이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가십니까?”

“정말 그런지 확인해야겠다.”

“어느 마존분께 가십니까?”

당연히 마존 중 누군가를 찾아갈 줄 알았는데.

“마존에게 안 간다.”

“네?”

검무극이 성큼성큼 피의 길을 걸어 나가며 말했다.

“내 눈치 안 보고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있거든.”

* * *

십여 개의 상자들이 바닥에 일렬로 놓여 있었다.

그 상자에는 각기 다른 암기들이 적게는 서너 개, 많게는 십여 개 이상 들어 있었다.

그 앞으로 걸어온 사람은 검무극의 형 검무양이었다.

“이것들인가?”

“네, 이번에 수거된 위조 암기들입니다.”

검무양은 교의 여러 중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철방에서 생산되는 무기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주된 임무는 철방에서 만들어진 병장기를 각 지역 지단과 지부로 보내는 일.

한데 근래에 새롭게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중원 곳곳에서 제작되는 위조 병장기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천마신교에서 만들어지는 여러 병장기가 위조되어서 무림의 암시장을 통해 팔려나갔다.

위조 병기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단연 암기류였다.

특히 발사 장치를 이용해서 발출하는 여러 암기가 위조의 주 대상이 되었다. 그것들이 비싼 값으로 팔렸기 때문이다.

마인들이 쓰는 암기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가짜들은 가치가 있었다. 그걸 가지고 있다가 마인으로 몰릴 수도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천마신교의 암기를 찾았다.

그리고 최근에 그 위조 암기의 숫자가 부쩍 늘어났다.

검무양이 첫 번째 상자에서 암기를 하나 들었다. 원통으로 생긴 암기였다.

“살망(殺網)입니다.”

수하의 설명을 들으며 검무양은 그것을 벽에 발사했다.

푸아아악!

원래는 수십 발의 암기가 그물처럼 날아가 전방을 휩쓰는 암기였다.

하지만 고작 십여 발이 날아가 벽에 박혔다.

“조잡하군.”

원래 위조 암기들은 이렇게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똑같이 만들 기술이 있으면 애초에 이런 위조 암기나 만들어서 팔아먹지는 않을 테니까.

한데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낸 암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호남에서 주로 유통되고 있는데, 제작자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붙잡히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큰돈이 되는 일이었기에 가짜는 끊임없이 나왔다.

중원에 풀리는 물량으로 볼 때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 것은 호북에서 들어온 물건입니다.”

검무양이 다음 상자에 있던 암기를 들어서 벽에 발출했다.

슈우우욱!

파아아악!

“이건 지난번에 회수된 거보다 더 강력해졌군. 그사이에 개량한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놈들 기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습니다.”

검무양이 다음 상자의 암기를 들었을 때, 암기를 설명하던 수하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그곳으로 검무극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이쪽에 발사하면 소교주 암살 시도가 아니라, 임시 교주 암살 시도가 될 거야. 죄가 두 배는 더 크겠지?”

물론 그 말에도 검무양은 그대로 발출했다.

슉슉슉슉슉슉!

파파파파파팍!

날아간 암기가 검무극이 걸어오던 옆쪽 벽에 박혔다. 그래, 이래야 형이지.

“나도 오랜만이야, 형.”

두 사람의 모습에 옆에 있던 수하가 알아서 멀리 물러났다.

검무극이 벽에 박힌 암기를 보며 말했다.

“암기 위력을 시험하는 거야?”

“본교 암기를 본떠 만든 위조 암기들이다.”

검무양이 들고 있던 것을 검무극에게 던졌다.

검무극이 받아든 암기를 살펴보았다.

“가짜라고? 제법 그럴싸한데?”

“날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지.”

“이런 건 얼마에 파나?”

“수십 냥에서 수백 냥까지 간다더군.”

그러자 검무극이 버럭 했다.

“이것들이 우리보다 돈 더 버는 거 아냐?”

검무극의 농담에 검무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가 허리를 숙여 다음 상자의 암기를 들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예전과 달리 부드럽다는 것을.

“형 보러 왔지.”

“왜?”

“보고 싶었으니까.”

검무양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암기를 겨눴다.

“비켜라, 바쁘다.”

“나만큼 바빴을까?”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렇게 일이 많은 줄 알았다면, 형하고 후계자 싸움 안 했을 거야. 정말 제일 미운 놈에게 이 자리를 양보했겠지. 아, 그때라면 형이었겠네.”

그 말에 검무양이 결국 피식 웃었다.

슉슉슉슉슉!

팍팍팍팍팍!

다시 날아간 암기가 검무극의 어깨를 스치며 벽에 박혔다.

“그만, 그만! 바쁜 척 그만하고 나랑 이야기 좀 해.”

검무극이 벽 앞을 막아서며 손을 좌우로 휘저었다.

“무슨 얘기?”

“아버지는 폐관하시고, 오랜만에 본 동생은 임시 교주가 되어 있고. 이런 상황에서도 할 말이 없으면 그 입은 왜 달고 다니나?”

검무양이 다음 상자의 암기를 집어 들었다.

“아버지가 폐관에 들기 전날에 나를 찾아오셨다.”

“뭐하고 하셨어?”

검무극이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사고 치나 안 치나 감시 잘하라고 하셨다.”

검무극이 목청을 높였다.

“형한테도 그랬다고? 아버지, 너무 하십니다! 대체 이 아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검무극의 원망이 방향을 바꿨다.

“그런 말을 들었으면 동생에게 와서 도와주고 했어야지.”

“보다시피 내 일도 많다.”

사실 검무양은 사마명을 찾아갔었다.

검무극을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였는데, 검무극이 하루가 다르게 일에 적응한다는 말에 그냥 돌아왔다. 자신이 돕지 않는 게 오히려 동생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검무양이 어찌 모르겠는가? 아버지가 진짜 검무극이 사고 칠 것을 걱정했다면 애초에 후계자로 삼지도 않으셨을 것임을. 이건 후계자 수업이다.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온 건 검무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장남에게 미안해서.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검무극은 후계자가 되어서 아버지를 더 이해하고 있었고, 검무양은 후계자가 되지 않아서 아버지를 더 이해하고 있었다.

“뭐 예쁘다고 돕나?”

“다들 너무해.”

“다들?”

“오늘 사마 군사께 황당한 말을 들었거든. 마존들이 아버지보다 나를 더 어려워할 거라는 말.”

검무양은 ‘음’하는 나직한 신음성을 내었다.

“무슨 반응이 그래?”

검무극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형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야 네가 우습지.”

“그렇지? 이게 올바른 반응이지.”

그때 검무양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마존들이라면 너를 더 어려워할 수도 있겠지.”

검무극이 깜짝 놀라 형에게 되물었다.

“마존들이 날 아버지보다 대하기 어렵다고 여긴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사람의 마음을 휘젓고 멱살을 잡아당기니까. 가만히 있고 싶은데 너와 있으면 무대 위로 끌려 나가야 하니까.”

검무양이 보는 검무극이었다.

“너와 있으면 뭔가 잘해야 할 거 같은 부담감이 생기니까.”

검무양은 마존들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야 당연히 아버지가 더 어려웠다. 아버지에게 정말 잘 보이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바뀌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마존들에게는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타인, 자신이 두 사람을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아버지는 예측이 가능하신 분이지만, 넌 예측 불가니까.”

검무양이 들고 있던 암기를 검무극에게 겨누었다.

“말 다 했으니까 이제 비켜.”

벽 앞을 막고 서 있던 검무극이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형이 아니라면 마존들에게는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거야. 형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지? 마가촌에 가서 형 인형도 꼭 제작하라고 할게. 물론 내 인형보다는 멋있게 나오지는 않겠지만…….”

“어휴, 그냥 맞아라!”

쇄애애애애액!

파파파파파팍!

으악하는 검무극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암기를 쏜 검무양은 깜짝 놀랐다.

방금 쏜 암기는 정말 강력하게 날아갔던 것이다.

“괜찮아?”

검무양의 외침에 엉거주춤 벽에 기대 있던 검무극이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어이구, 놀래라.”

그의 머리 위로 강침이 박혀 있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거리도 가까운데다 위력도 엄청나서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적중당했을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쐈던 검무양이 더 놀랐다.

“날 죽이려고 계획을 제대로 세웠네!”

검무양이 멍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암기를 내려다보았다. 동생과 대화에 빠져 뭔지 보지도 않고 그냥 발출했었다. 아니, 봤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동생이 가짜 암기에 적중당할 리는 없었으니까.

진격(進擊).

천마신교를 대표하는 암기 중 하나였다.

방패와 갑옷은 그대로 뚫고 들어가는 위력이었기에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면 막기가 쉽지 않았다.

무림맹에서는 진격을 십대금용암기 중 하나로 지정했는데, 그 강력한 위력도 위력이지만 진격의 강침에는 극독이 발려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마신교에서도 진격의 사용을 극도로 조심했다. 독과 암기는 무림에서 가장 큰 분쟁의 소지가 있었기에, 전쟁 상황이 아니면 진격은 천마신교 내에서도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치이이이익.

독이 얼마나 강력했으면 벽에서 거품이 일며 녹아내렸다. 모습을 드러낸 강침에 파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극독까지 발려 있는데? 이거 진짜 같은데?”

“그럴 리가 없다.”

검무양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대금용암기인 만큼 진격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검무양에게 걸어왔다.

“가짜인데 이런 위력이다?”

검무극이 검무양에게서 진격을 받아서 살펴보았다. 가짜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만든 자를 찾아서 죽일 게 아니라 우리가 고용해야겠는데?”

세상에 없는 해약

“한데 이건 어디서 얻었어?”

검무극의 물음에 검무양은 저 멀리 물러나 있던 수하를 불렀다.

“이 위조 진격은 어디서 구했나?”

검무양의 물음에 수하가 대답했다.

“정보가 있었습니다. 흑도 방파인 흑수파(黑手派)에서 은밀히 진격을 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회수한 물건입니다.”

“물건을 판 자들은?”

“표국을 이용해서 물건을 보냈습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국을 이용해서 물건을 보냈다는 의미.

“그럼 대금은?”

“물건을 받으면 돈을 받으러 오겠다고 했답니다.”

그 말에 검무극과 검무양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그 값을 후불로 받겠다는 건, 받아낼 자신이 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저기 박힌 강침을 수거해서 발린 독이 어떤 독인지 확인하도록!”

“네! 곧장 천독림에 보내겠습니다.”

검무양이 진격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철방에. 곽 장인이라면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

“같이 가.”

검무극이 형의 뒤를 따라붙었다.

“천천히 가!”

검무양은 마음이 급한지 발걸음이 바빴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진짜 같은 가짜 암기가 나타나서가 아니다.

하마터면 검무극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에 뒤늦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놀람은 분노로 이어졌다.

이걸 만든 놈을 고용하자고? 어림없는 소리다. 동생이 죽을 뻔했는데.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그냥 두지 않을 거다.

낯선 감정이었다. 동생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은.

한때는 동생이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는데.

인간의 감정이 참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바람의 끝에서는 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렇게 두 사람이 철방으로 들어섰다.

화끈한 열기와 함께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깡! 깡! 까앙!

내부에는 웃통을 벗은 수백 명의 사내가 일하고 있었다.

쇳물을 녹이고 쇠를 두드리고, 물건을 나르고.

그들의 땀 냄새와 쇳내가 뜨거운 열기를 타고 후끈 전해져왔다.

입구에 있던 사내가 검무극을 알아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곽 장인을 뵈러 왔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내가 곽 장인을 부르러 간 사이 검무극은 형과 함께 그곳에서 기다렸다.

“이런 얕은 계략에는 나 안 죽어.”

다음에는 제대로 죽여주마.

이런 반응을 기대한 농담이었지만, 검무양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형이 정말 놀라고 화가 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형에게 고마웠다. 자신을 죽일 뻔한 일이 형에게 이렇게 큰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

거기에 교훈 하나 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아까처럼 사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을 때, 그리고 방심하고 있을 때 터지는 법이니까.

그 모든 게 한순간의 일이기에 인생이 피곤하더라도 더 신경 쓰며 살아가는 수밖에.

잠시 후, 곽 장인이 그곳으로 나왔다.

“두 분이 함께 오셨군요.”

“방주님을 뵙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검무양이 가져온 진격을 그에게 주었다.

“진격이군요.”

곽 장인이 진격을 받아들었다. 암기를 설계하는 조직은 교내에 따로 있는데, 그곳에서 만들어진 설계도에 따라 이곳 철방에서 만들었다.

곽 장인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진격을 살폈다.

“좀 가볍군요.”

그는 대번에 무게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곽 장인이 자세히 살피자 몇 군데 차이가 나는 곳들을 발견했다.

“위조 진격이군요.”

“맞습니다.”

“얼핏 봐서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곽 장인이 수하를 불러 해체 도구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능숙하게 진격을 분리해서 내부를 살폈다.

안을 살핀 곽 장인은 더욱 놀랐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습니다. 위력도 거의 그대로였을 거 같습니다만.”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의미였다.

“맞습니다. 거의 제가 죽을 뻔했죠.”

그러자 곽 장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강침에 독이 발라져 있었습니까?”

“네, 독이 발라져 있었습니다.”

“독에 암기 내부가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진격의 핵심 기술입니다. 이건 거의 우리가 만들었다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자가 위조 암기를 만들다니?”

곽 장인은 탄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 짐작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곽 장인이 몇 사람을 지목했다.

“생각나는 이가 몇 있긴 합니다만, 다들 명성이 높은 이들입니다. 무림맹의 홍 장인이나, 사도맹의 주 장인. 대륙철방의 양 장인. 한데 그 사람들은 이런 위품을 만들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 같이 이름난 장인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 정도 실력이 되는 이가 만든 위품이란 뜻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가 있을 수 있겠지요.”

검무극의 말에 곽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게 이 무림이라면, 장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손재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이들이 아직 자신들의 진가를 모른 채 어디선가 망치질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의심 가는 이가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곽 장인과 작별하고 검무극은 형과 함께 철방을 나왔다.

“어떻게 처리할 거야?”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할 거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신경 쓸 필요 없다.”

검무양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만치 걸어가던 검무양이 돌아서며 경고했다.

“쓸데없이 참견할 생각 마라!”

검무극을 죽일뻔했기에 이번 일만큼은 자신이 혼자 처리할 생각이었다. 죽일 뻔했는데 도움까지 받고. 그건 검무양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나도 바빠. 제발 참견할 시간이나 나면 좋겠다.”

검무양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검무양만큼이나 급한 걸음이었다.

* * *

“절대 안 됩니다. 특히 대공자님과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형과 같이 나가서 이번 일만 처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말에 사마명은 단호하게 반대했다.

반대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후계자가 되실 분들이 이런 일로 함께 출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칙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변을 당했을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지금껏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던 것은 형이 본교에 있어서였군요.”

사마명은 꼭 그래서겠느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한데 왜 대공자와 함께 나가시려는 겁니까?”

“이건 전적으로 제 불안증 때문입니다.”

사마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번 일의 배후에 놈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제 가슴이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거든요.”

놈들과 얽혀서 죽을 고비를 연속해서 넘겨온 검무극이었다. 놈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형을 혼자 내보낼 수는 없었다.

물론, 이번 일이 단순히 위조 암기를 만들어 파는 조직에서 벌인 일일 수도 있었지만.

“자라인지 솥뚜껑인지 확인하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차라리 아버지라면 설득하기가 더 쉽겠지만, 사마명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저를 내보내면 아버지도 이런 심정이셨겠군요.”

“송구스러운 말씀이지만 교주님은 소교주님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성격상 표를 내지 않았을 뿐, 어찌 걱정이 안 되었겠는가?

예전 같았으면 몰래 탈출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사마명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라고 어찌 대공자를 소홀히 여기겠는가?

“마존을 함께 보내시지요.”

물론, 검무극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형이 거절할 겁니다. 저보고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거든요.”

“그래서 안 보내실 겁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는 없죠. 마존을 보낼 겁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어떤 마존도 가실 겁니다.”

이미 검무극은 누굴 보낼 건지 정해둔 후였다.

“제가 보낼 분은 제 명령은 듣지 않을 분이십니다.”

* * *

검무극이 도착한 곳은 천독림이었다.

독왕은 거처 근처 숲에 있었다. 뒷짐을 진 채 홀로 서서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이 봐선 외로워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시간임을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독왕님! 저 왔습니다!”

검무극이 반갑게 소리쳤다.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 독왕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출교했다. 그래서 그와의 재회는 꽤 오랜만이었다.

“쉿!”

독왕이 조용히 하라고 하고는 다시 나무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조용히 다가가서 독왕 옆에 나란히 섰다.

나무에서는 독충 두 마리가 포개져 있었다. 아마 짝짓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독왕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미소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잘생긴 얼굴을 너무 낭비 중이십니다. 독왕님이야말로 세상에 나가서 연인이 될 여인을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독왕은 그런 즐거움보다 천독림에 독충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더 즐거워 보였다.

“오면서 상선이 말해주었습니다. 암기에 발린 독은 화골신독(化骨辛毒)이라고요.”

상선의 말에 따르면 화골신독은 화골산을 암기에 바르기 위해 개발된 독이라고 했다. 화골산을 주재료로 여러 독을 배합해서 만든 독으로 적중당하는 순간 그 부위와 내부까지 순식간에 녹아 버리는 무서운 독이었다.

그 위력만큼 화골신독은 다루기도 매우 어려웠다. 암기통 내부에서 암기를 녹여버리지 않게 하면서 그것이 외부에 발출되었을 때, 비로소 그 효과를 드러내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독왕은 말없이 독충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위조 암기를 조사하러 형이 직접 출교할 겁니다. 독왕님이 은밀히 따라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 부탁은 더 어려운 부탁이었다. 함께 가는 게 아니라 은밀히 지켜주라는 부탁이었기에.

“화골신독을 쓰는 자들이니 다른 독을 쓸 수도 있어서요.”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독왕은 대번에 거절했다.

“싫다.”

“상대가 독을 쓸 수도 있다고요!”

“상선에게 말해서 해약 챙겨 가.”

독왕이 쉽게 나가리라 생각지 않았다. 원래도 천독림 밖에 나가는 걸 정말 싫어하는 그였으니까.

“자자, 이럴 줄 알고 제가 준비해 온 게 있습니다.”

검무극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시 교주로 명하겠다. 독왕은 본 교주의 명을 받들라!”

독왕이 검무극 쪽으로 돌아섰다. 정중히 예를 갖추며 명을 받으려는가 싶었는데.

“싫은데?”

휘이잉.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교주 명령인데요?”

“임시 교주잖아.”

“반역입니다, 반역!”

“그럼 붙잡아 가든지.”

임시 교주의 권위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너무하십니다. 아버지가 가라고 하시면 가실 거 아닙니까?”

“너는 교주님이 아니잖아?”

독왕의 시선이 다시 나무를 향했다. 짝짓기를 마친 녀석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그럼 준비한 두 번째 비장의 무기를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독왕의 입가에 살짝 웃음기가 스쳤다. 이래서 ‘싫은데?’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다. 이렇게 유연하게 넘어가 줄 검무극임을 알기에.

“이번에는 꼭 가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무슨 이유?”

“독왕님 때문에 제가 죽을 뻔했거든요.”

독왕이 다시 검무극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억나십니까? 그때 독왕님 독에 당한 채 달아났던 자 말입니다.”

아직 독왕에게 투왕이 되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 독왕을 만나기 전에 다시 출교해야 했으니까.

“그자가 살아서 돌아왔었습니다.”

독왕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그럴 리 없다.”

또한 이런 일로 검무극이 거짓말할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떻게 된 일이냐?”

“놈들이 대법을 여러 번 펼쳐서 간신히 살렸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히 치료되지 않아서 싸울 때 지독한 독기가 풀풀 풍겨 나왔습니다.”

독왕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물론, 검무극은 어설프게 그 자존심을 챙겨주지 않았다.

“그놈이 살아오면서 더 강해져서 돌아왔었습니다. 덕분에 죽을 뻔했으니까, 이번에는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죠.”

물론 억지를 부리는 거였지만, 독왕에게는 먹혔다. 당연히 죽었으리라 확신한 놈이 살아온 것이었으니까.

“내가 안 미더울 텐데, 왜 나를 보내려는 거냐? 네가 좋아하는 극악소마를 내보내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독왕님이 가셔야 제 마음이 더 놓일 것 같아서요.”

“병 주고 약 주는 거냐?”

“실수는 실수고, 실력은 실력이니까요.”

독왕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극악소마가 들으면 섭섭할 텐데?”

“소마님은 이해하실 겁니다. 소마님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마존분들 그 누구도 조금 전 제 말을 부정하실 수 없을 테니까요.”

돌려 말했지만 결국 이 말이었다.

독왕이 가장 강하다.

검무극은 독왕의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후우.”

독왕이 한숨을 내쉬며 나무 아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놈을 되살렸단 말이지?”

검무극이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깨졌다고 하더군요. 그놈과의 싸움에서 극악소마님과 함께 죽을 뻔했습니다. 이번에도 권마님과 일화검존님이 따라갔음에도 위험한 상황이 있었고요. 그러니 독왕님이 가셔야 합니다. 저는 만에 하나의 경우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아직도 독왕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검무극이 한 사람을 끌어들였다.

“혼자 안내키시면 마불님과 함께 가시죠? 이번에 나가셔서 희귀 독초도 캐오시고요. 요즘 마불님 하고 독초 좀 캐셨습니까?”

독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통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도 어색해.”

“아니, 그새 어색해지셨다고요?”

검무극이 웃음을 터뜨렸고, 독왕도 말해놓고 자신도 우스운지 따라 웃었다.

“은밀히 지켜주라면서? 한데 마불 그 사람과 은밀히 따라갈 수 있겠나?”

그 황금빛 광채와 은밀함은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래서 독왕님께 부탁드리러 온 거였죠.”

“확 다 죽여버리고 올 수도 있어.”

“형만 살려서 데려오시면 됩니다.”

검무극은 진심을 전했다.

“제가 얼마나 독왕님과 같이 나가고 싶은지 모르실 겁니다.”

그래서 독충들 짝짓기 구경이 아니라, 독왕님과 함께 여협들과 얼마나 어울려 놀고 싶은지도요.

검무극을 응시하던 독왕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다녀오지.”

그 말로 충분했다. 이제 형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제 빚은 갚은 셈 치겠습니다.”

“무슨 빚?”

“그놈 살아와서 제가 죽을 뻔한 빚요.”

“그게 왜 내 탓이냐!”

검무극이 원했던 말이 나왔다. 그래, 그건 독왕의 잘못이 아니지.

자존심이 걸린 민감한 문제일수록,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몇 번이나 반복해 이야기하고 놀리고, 또 이야기하고, 또 놀리고.

상대와의 신뢰는 이런 순간을 위해 쌓아두는 거니까.

그래서 이런 일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기분 나쁘고 말아야 한다. 어설프게 넘어가서 헤어진 후에 두고두고 생각나게 해선 안 된다.

“그거 아십니까? 세상에 없는 해약을 오직 독왕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검무극은 옆자리의 그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독왕님은 제 불안증의 해약이십니다.”

각성한 교주님을 감당할 수 있겠나?

독왕이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면, 마불은 법당에서 무섭게 생긴 황금 불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인사.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무극이 법당에 들어서자 마불이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인가?”

“마불님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죠. 얼굴 뵌 지도 오래됐고 해서요.”

마불의 저 못되게 생긴 뒤통수만 봤는데도 이리 반가운 걸 보니 오랜만에 보긴 하나 보다.

“잘 지내셨습니까?”

마불이 불상을 등지며 검무극 쪽으로 돌아섰다. 키 작은 마불 뒤로 거대한 황금 불상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마불을 볼 때면 느끼곤 한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작은 거인 마불은 저 황금 불상보다 훨씬 큰 사람임을 검무극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임시 교주 일은 할 만한가?”

“어휴, 말도 마십시오.”

검무극이 손사래까지 치며 엄살을 부렸다.

“저는 아버지가 교내 일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중요한 사안이 있으면 한두 개 정도 결정하시고. 한데 아니었습니다. 병력 이동 하나하나 다 관리하셨더군요.”

“교주께서는 역대 그 어떤 교주보다 꼼꼼하게 교내의 일을 살피셨지.”

검무극은 마불이 아버지의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워낙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였으니, 교주전의 상황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었으리라.

“교주께서 왜 그리 신경을 쓰시는지 아나? 성격이 꼼꼼하셔서? 천만에.”

“그럼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마불에게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무림일통을 위해서.”

“교주께선 교내를 확실하게 다스릴 수 있을 때, 천하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셨지.”

아마도 언젠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마존들에게 각기 다른 면을 보이셨다. 그랬기에 마존들이 보는 아버지의 단면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결국, 오 년 후에 자네는 무림일통의 선봉에 서게 될 거야.”

그는 예전에도 그랬다. 아버지가 자신을 봐주지 않을 거라고.

마불의 단언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때는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다.

“결코 자네의 의지를 무시해서가 아니네.”

무시했다면 이 자리에 마주 서서 이런 말을 해주고 있을 리도 없었으니까.

“그럼 뭐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검무극을 지극히 높이 사지만 그럼에도 이길 수 없을 거로 여기는 이유는 바로.

“자네 때문에 교주님도 각성하고 계시니까.”

마불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각성한 교주님을 감당할 수 있겠나?”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마불이 말한 각성이 비단 폐관 수련으로 강해질 무공만은 아니라는 것을. 검우진이란 사람 자체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저희는 아홉 명 아닙니까?”

팔마존이 다 자신의 편이라는 농담에.

“전에 보니까 둘이던데?”

오 년 후를 약속하던 그날, 마지막까지 검무극에게 남은 마존은 극악소마 뿐이었으니까.

“그럼 제가 더 분발해야겠군요.”

분발로 되겠냐는 표정으로 마불은 법당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경내를 함께 걸었다. 지나가던 광승들이 합장하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석상 만들던 일은 그만두셨습니까?”

“그만뒀네.”

마당 구석에 그가 만들던 석상들이 그대로 있었다. 먼지가 쌓인 도구들을 보니 손을 놓은 지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았다.

검무극이 의지박약이라며 놀릴 줄 알았는데.

“잘 그만두셨습니다.”

“잘 그만두다니?”

“사실 마불님하고 안 어울렸거든요. 석상을 깎으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마불님은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마불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마불님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열정으로 설득하고, 목표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는 그런 분이시잖아요? 마음을 다스리는 건 사람들하고 실컷 싸우다가 잠시 숨돌릴 때, 그때 다스리는 분이시죠.”

“욕인가? 칭찬인가?”

“기분이 나쁘시면 욕이고, 좋으면 칭찬인데.”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그냥 진실을 말씀드린 거죠.”

말이나 못 하면. 그런 표정을 지으며 마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로 왔나? 바쁜 사람이 그냥 놀러 오진 않았을 테고. 교주로서 내게 시킬 일이라도 있나?”

“아뇨. 시키지 않은 일을 보고드리려고 왔습니다.”

마불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안다. 일을 시키는 것보다 시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오라는 것보다 돌아가 달라는 부탁이 훨씬 어렵듯이.

그래서 독왕과의 자리보다 마불과의 이 자리가 더욱 조심스럽다.

“형이 출교하는데 은밀히 독왕님께 부탁드렸습니다. 형을 좀 지켜달라고요.”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듯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이 조금 더 강렬하게 빛났다.

“그걸 왜 내게 보고하는 건가?”

“마불님께는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물었다.

“왜 하필 독왕인가?”

“이번에 형이 조사할 위조 암기에 극독이 발려 있었습니다. 혹여라도 독을 다루는 자가 있을까 걱정해서 독왕님께 부탁드렸습니다.”

“그걸 내게 말하는 이유는?”

“나중에 혹시 오해하실까 봐요. 형이 부탁해서 독왕님을 데려간 것이라 여길까 봐요.”

다시 말해 검무양과 마불 사이에 오해가 생길 것을 걱정해서였다. 형 성격상 이렇다 저렇다 변명할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왕이 구구절절 설명할 성격도 아니고.

“오해 좀 하면 어때서?”

“어떻긴요. 섭섭하죠. 저라면 섭섭해서 확 욕이라도 할 것 같은데요? 내가 널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데, 나를 두고 독왕을 데려가냐?”

“속 좁은 너나 욕하지, 나는 욕 안 한다.”

“하셔야죠. 욕 안 하시면 이번에는 형이 섭섭할 테니까요.”

결국 마불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런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다 신경 쓰고 사는 거냐?”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사람과 멀어지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고 믿으니까요. 천하일통이라는 거대한 꿈도, 결국 이런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검무극의 진심이 이어졌다.

“그러니 뒤로 물러나지 마시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나서십시오. 후계자 싸움이 아니더라도 본교에서 마불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본교를 위해 움직여 주십시오.”

검무극을 바라보는 마불의 두 눈에 황금빛 이채가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강렬했던 황금빛 광채가 부드러워졌다.

마불은 근래 답을 모르는 무기력증을 느끼고 있었다. 석상을 깎은 것도 그 때문이었고.

하지만 물러나지 말고 전진하는 것, 자신답게 맞서는 것. 어쩌면 검무극의 저 말이 무기력증을 이겨낼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다. 난 석상이나 다시 깎으련다.”

“그럼 석상을 깎더라도 그걸 파십시오. 팔 수 있는 석상을 깎으십시오. 제가 첫 번째 고객이 되겠습니다.”

뭘 해도 가라앉지 말라는 의미. 이 순간 마불은 검우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아드님 이기시려면 제대로 각성하셔야겠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어휴, 바빠서 언제 또 놀러 올지 모르겠습니다.”

돌아나가는 검무극의 뒤에서 마불이 말했다.

“자네 형은 강한 사람이네.”

마불은 누구보다 형을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형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대공자의 몸속에는 자네 아버지와 자네에게 흐르는 피가 똑같이 흐르고 있으니까.”

환하게 빛나는 황금빛 광채를 보며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네, 저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무극의 말과 행동은 달랐다.

믿는 건 믿는 거고. 걱정은 걱정이었으니까.

‘같은 피라서 더 걱정되는 부분도 있거든요.’

마불의 거처를 나온 후 수행하는 적연에게 말했다.

“은월에 연락해서 가능한 모든 정보망을 형과 독왕님께 집중하라고 해. 그리고 한 가지 더.”

검무극은 은월에 미뤄두었던 하나의 명령을 덧붙여 전했다.

* * *

검무양이 출교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 검무극의 일 처리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그리고 오늘의 속도는 더욱 빨랐다.

단지 일에 능숙해져서가 아니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오늘은 유난히 더 빨리 일을 처리했다. 보통 일 하나 끝내면 실없는 농담을 하던 검무극이었는데, 오늘은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찍 끝내면 좋잖아요? 쉴 시간도 더 많이 생기고.”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평소보다 일을 빨리 마친 검무극이 사마명을 따라나섰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일도 일찍 끝났는데 오랜만에 통천각 구경이나 할까 해서요. 괜찮겠습니까?”

누구 말이라고 안 괜찮겠는가?

“네, 가시지요.”

그렇게 검무극이 사마명을 따라 통천각으로 들어갔다.

천마전보다 더 경계가 삼엄한 곳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통천각 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은 바빴다. 정말이지 바쁘다는 말을 가장 잘 표현하려면, 이곳을 보여주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슉, 슈욱, 슉!

한쪽 벽에 설치된 구멍에서 계속 전서가 든 원통이 도착했다.

도착한 전서를 군사들은 그 중요도에 따라 분류했다.

전서 내용에 따라 중원지형도에 꽂혀 있는 깃발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검무양의 소식이 궁금해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형이 많이 걱정되고 있음을.

“기왕 오셨으니 형님 소식이나 듣고 가시죠.”

사마명이 수하 군사에게 말했다.

“대공자와 관련한 최근 정보를 가져오게.”

군사가 곧바로 서류를 가져오더니 보고했다.

“대공자께서는 현재 목적지인 장사(長沙)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동안 딱 두 군데 객잔에만 들렀고,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쉬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셨습니다.”

이러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형, 나 죽일 뻔한 일 마음에 담지 말라니까! 그거 맞았어도 안 죽었다고!

“여기 있으면 형이 무슨 밥을 먹었는지도 알 수 있겠군요.”

그러자 군사가 가져온 서류를 뒤적였다.

“여기 객잔에서 뭘 드셨는지 있습니다. 말씀드릴까요?”

“괜찮네.”

정말이지 통천각이 얼마나 제대로 형을 주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 공조하고 있는 은월의 역할도 클 것이고.

“우리 형, 중원에 숨겨둔 여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밝혀지겠군요.”

검무극의 실없는 소리에 사마명이 넌지시 물었다.

“형님이 걱정되십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형이 얼마나 못 된 사람인데요. 오히려 무림이 걱정됩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검무극의 시선이 향한 곳은 무양이라 적힌 깃발이었다. 깃발은 놓인 위치는 장사 지역이었는데, 형의 깃발 옆에 장사표국(長沙鏢局)의 깃발이 함께 놓였다.

그리고 두 깃발과 조금 떨어진 곳에 화려한 녹색 깃발이 하나 꽂혀 있었다.

* * *

검무양은 장사의 저잣거리를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그는 검무극과 함께 나왔다면 들렀을 온갖 주점과 볼거리를 모두 통과했다. 그는 오직 목표만을 향해 달려왔다.

동생을 죽일 뻔한,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안길뻔한 그 위조 암기를 만든 자를 붙잡아야만, 이 오랜만의 출교가 주는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모하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검무양은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작정 천마신교 대공자임을 드러내거나 무력을 이용해서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았다. 마음이 급하다고 일 처리마저 급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장사 표국 앞에 한 중년 무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미리 연락을 받고 나온 천마신교 장사지단 단주 호명(扈明)이었다.

“귀한 분을 뵙습니다, 대공자님.”

“호 단주, 나와주셔서 고맙소.”

“지단의 정예가 모두 인근에서 대기 중입니다.”

호명은 대공자의 전갈을 받고 정말 놀랐다. 아무리 후계 다툼에서 졌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천마의 장남이었다. 말 한마디 실수에 목이 날아간다.

“명령만 내리시면 반 시진 내로 장사표국의 모두를 꿇릴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둘이서만 국주를 만납시다. 내 신분은 드러내지 마시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명이 장사표국의 입구를 지키는 무인에게 몇 마디를 했다. 그러자 사색이 된 무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다른 무인이 검무양과 호명을 안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대청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표국주인 지대형(池大亨)이 표두들을 거느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표두 중 한 사람이 호명의 얼굴을 알아보고 지대형에게 지단주가 맞다고 전음을 보냈다.

검무양은 장사 지단주를 이용해서 가장 빨리 표국주를 만난 것이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게 아니라, 호랑이가 여우의 위세를 빌린 셈이지만.

“신교의 지단주께서 본 표국에는 어쩐 일이시오?”

지대형의 눈에는 호명만 보였다. 평소 교류가 없던 마교 장사지단주의 방문은 그야말로 심각한 일이었다.

“그대들이 일전에 흑수파에 전한 표물에 관해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호명의 말에 순간 지대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린 외인에게 표물에 대해 발설하지 않소.”

그러자 지단주 호명이 차가운 마기를 드러냈다.

표두들 역시 호락호락 겁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들이 믿는 건 이것이었다.

“아무리 당신들이라지만, 우릴 건드리면 중원표국연합(中原鏢局聯合)에서 그냥 있지 않을 거요.”

그들은 무림에서 가장 큰 이권단체 중 하나였기에 정사마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검무양이 나섰다.

“그대들을 겁주거나 곤란하게 하러 온 것이 아니오.”

검무양이 입을 여는 순간 지대양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젊은 남자는 당연히 지단주의 수행무인쯤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자가 지단주를 모시고 온 게 아니다. 지단주가 이 사람을 모시고 왔다.’

말을 한 순간부터 검무양에게서 드러나는 기품과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대들이 전한 물건이 본교 병기의 위품이었소.”

순간 지대형은 깜짝 놀랐다. 표정으로 볼 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장사표국처럼 큰 표국이 표물의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흑도에 전했을 리 없으니.”

검무양이 차가운 눈빛으로 함께 온 표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국주를 속인 사람이 누구요?”

이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팍팍

표국주 지대형과 표두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그는 바로 흑수파에 표물을 전한 책임자 표두 충백(充栢)이었다.

충백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국주를 따라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지목당할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음해입니다.”

그의 외침은 흔들리는 눈동자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반면 검무양은 침착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충백에게 다가갔다. 충백은 물론이고 지대형과 다른 표두들도 긴장했다.

검무양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충백을 응시했다. 일부러 노려보지 않아도 검무양의 눈빛은 기본적으로 차가웠다.

“우리가 할 일이 그렇게 없어 보이시오?”

이곳까지 와서 일개 표두를 음해하고 있겠냐는 말이었다.

차분한 그 말은 듣는 이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장사 지단주 호명까지 직접 왔고, 지단주보다 높은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하는 말이었으니까.

충백이 뭐라 변명하기 전에 검무양의 말이 이어졌다. 낮은 목소리에 힘이 있듯, 무례하지 않았기에 더 권위가 있었다.

“당신이 국주를 속인 문제는 따지지 않겠소. 당신네 표국에서 알아서 처리할 문제니.”

검무양이 지대형을 한 번 쳐다본 후에 다시 시선을 충백에게 향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하나요. 누가 표물을 맡겼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대형은 대답할 필요 없다면서 충백을 옹호하고 나서지 않았다. 검무양에게 압도되기도 했고, 은연중에 충백을 의심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물건이 아니었소! 국주님!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지금 저를 음해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충백의 변명은 구체적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그 무자비한 마교였으니까.

지대형이 나서서 충백에게 좋은 어조로 물었다. 아직은 자기 사람이었으니까.

“충 표두. 진정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차분히 말해보게.”

“표물은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것이었나?”

근래 표행과 관련해서 여러 보고를 받지만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할 물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충백이 거짓 보고를 했거나, 아니면 마교가 누명을 씌우고 있다는 뜻인데.

“표물은 일반적인 병장기였습니다.”

“누가 맡긴 건가?”

“외인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네. 내가 허락할 테니 말하게.”

그러자 이 상황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왔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확실히 그는 의심스러웠다.

“아니네. 자네 말처럼 음모라면, 밝혀내야 할 것 아닌가?”

“좋습니다. 그럼 국주님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게 물건을 전한 사람은…….”

그가 목청을 낮추고 국주 쪽으로 다가서는가 싶더니.

휘이익.

충백이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입구를 빠져나가기 전에 날아든 발길질에 충백은 바닥을 뒹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던 그때.

그를 걷어찬 사람이 혈도를 눌러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달아날 것을 예상하고 그를 제지한 사람은 바로 장사 지단주 호명이었다.

호남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단을 이끄는 책임자인 만큼 그의 실력은 대단했다.

호명이 그의 멱살을 잡아끌고 와서 검무양 앞에 꿇렸다. 그 과정에서 감히 나서서 제지하는 표두는 없었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달아났을 리 없으니까. 달아나려는 순간, 이미 다 끝난 상황이었다.

검무양이 지대형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 말을 믿으리라 생각하오.”

정중한 말이었지만, 검무양의 눈빛은 차가웠다. 눈빛에 담긴 뜻은 이러했다. 이 정도 예를 갖췄으면 너희도 갖춰야지.

“이자는 장사지단으로 데려가겠소.”

지대형은 그럴 수 없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이미 실력을 드러낸 호명은 거친 마기를 풀풀 드러내고 있었다.

검무양이 충백을 내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한낱 위조 병기를 만드는 자들이 우리보다 더 두렵다?”

충백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눈앞의 마교도 무섭고, 자신이 거래한 그들도 무섭고.

호명이 걸을 수만 있도록 충백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렇게 그를 데리고 대청을 나와 정문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쇄애애애애애액!

귀를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그 바람이 만들어낸 살을 찢는 소리!

푹푹푹푹!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충백이 멍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치이이이익.

암기에 집중적으로 적중당한 그의 가슴이 뻥 뚫린 채 녹아내리고 있었다.

충백의 신형이 허무하게 앞으로 쿵 쓰러졌다.

그 앞에 원통형 암기를 겨누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방금까지 표국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위장해 마당을 쓸고 있다가 갑자기 기습을 가한 것이다.

충백과 나란히 걸어가던 호명도, 뒤에서 따라 나오던 검무양도 그 기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새끼가!”

호명이 달려들려던 그때, 검무양이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진격을 들었소.”

순간 호명이 멈칫했다. 지단주인 그는 진격이 어떤 암기인지 잘 알았다. 무림맹에서 정한 십대금용암기.

남자가 앞을 겨누고 있던 진격을 검무양을 향해 겨누었다.

하지만 검무양은 쏠 테면 쏴보라는 표정으로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때 검을 뽑아 든 호명이 검무양 앞을 막아섰다.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기세였다.

남자가 검무양을 보며 씩 웃었다. 마치 미친놈처럼 실실 웃는 웃음이었다.

그리고는 검무양을 향해 겨눴던 진격을 자신의 턱 아래에 가져다 대더니.

쇄애액!

푹푹푹!

말릴 사이도 없이 진격으로 자결해 버렸다. 애초에 놈의 목적은 충백을 죽이고 자결하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호명이 달려가서 시체를 살폈지만, 살아 있을 리 만무했다.

검무양이 가서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진격을 들어서 살폈다. 하마터면 동생을 죽일 뻔한 그 위조 진격이었다.

검무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암습을 가한 후 자결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 쉬워 자결이지 누군가에게 목적을 이룬 후 자결하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보통 조직이 아니라는 의미.

검무양은 이번 일이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님을 직감하고는 곧바로 호명에게 명령했다.

“이 상황을 그대로 통천각에 전하시오. 그리고 지단 무인 중에서 정예들만 따로 추리시고.”

“네, 알겠습니다.”

그러고 난 후 검무양이 표국주 지대형에게 돌아섰다.

지대형은 놀라고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자는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표국 내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혹시라도 자신들이 개입했다고 오해할까 봐 그는 겁에 질렸다. 마교에서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면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알고 있소.”

차분한 검무양의 말에 지대형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혹시라도 마교에서 어떤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 암습으로 그 의심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저자가 단순히 물건을 한 번 날라준 것 때문에 살인멸구 하진 않았을 거요.”

지대형도 그렇게 생각했다. 충백 역시 딱 한 번의 실수였다면 달아나는 선택이 아닌 용서를 구하려 했을 거고. 다시 말해 여러 번 표물로 위장해서 물건을 전했다는 의미.

“저자가 표두로 있는 동안의 표행 기록을 우리에게 넘겨줄 수 있겠소?”

지금 상황에서야 죽기 싫으면 내놔, 해도 줘야 하는 상황인데. 검무양은 정중하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그 목록이 유출될 걱정은 마시오. 그걸로 저자를 죽인 자들을 찾아내려는 목적일 뿐이니까. 표두가 죽었는데 당신들도 진상은 알아야 하지 않겠소?”

지대형은 고민하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알겠습니다. 기록을 드리겠습니다.”

“본교 장사지단으로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검무양이 걸음을 옮겨 그곳을 나왔다.

뒤따르던 호명이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물건을 건넨 쪽에 왔으니, 이제는 받은 쪽으로 가야겠지.

“흑수파로 갑니다.”

* * *

검무극이 천마전에서 나오는데 누군가 저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교주님!”

그는 바로 서대룡이었다.

“오른팔아! 잘 지냈느냐?”

검무극이 반갑게 인사하자 서대룡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천마전으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백 번은 고민했습니다.”

“찾아오지 그랬어?”

“임시 교주님이 되셨는데, 왠지 가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서대룡이 천마전을 올려다보았다. 웅장한 천마전과 그곳을 지키는 천마혼의 거대석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어찌 옵니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곳인데.”

그러자 검무극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게 아니시겠지.”

“아니라니요?”

“단 소저하고 논다고 난 잊었던 거 아니냐?”

서대룡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시간이 나면 단아와 보냈으니까.

단씨 자매들은 모두 바빴다. 둘째인 단비는 황천각 집행무인으로 열심이었고, 막내 단연은 귀영대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첫째인 단아는 일화검존을 찾아가 한 차례 검술 가르침을 받은 후, 검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다 밤늦게 서대룡의 일과가 끝나면 만나서 사랑을 키워나갔다. 바쁜 와중에 잠깐잠깐 만나니까 그 시간이 더 소중했다.

“생각만 해도 좋아?”

서대룡이 대답 대신 헤벌쭉 웃었다.

누군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여인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좋을 때다.”

“그 좋은 시절, 소교주님은 한 번도 겪어보지도 않으셨으면서요.”

서대룡이 어깨를 으쓱했다.

“드디어 저에게도 소교주님을 이기는 게 생겼습니다!”

“과연 이기는 걸까?”

“무섭게 그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서대룡을 보면 언제나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시죠?”

“왜 그렇게 생각해?”

“저야 소교주님 몸통에 붙어 있는 오른팔이지 않습니까? 그냥 알죠.”

어디 그래서 알았겠는가? 예전이었다면 풍류주점에서 몇 번이나 술을 마셨을 거다. 세월이 갈수록 모든 게 변해간다. 사람도, 상황도.

하지만 서대룡은 그 변화를 어떻게든 늦춰보려고 애썼다. 오늘 검무극을 만나러 온 것도, 그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막으려는 거였으니까.

‘세상 모든 게 다 변해도 소교주님과 관계만큼은 변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칠 사람이 있는 인생, 계속 유지하며 살고 싶습니다.’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놀릴 수도 있는 거고.

“오른팔에도 심장이 생겼으니, 이제 슬슬 떼어내 볼까?”

“죄송하지만 그 오른팔에 심장이 아니라 팔다리가 주렁주렁 달려도 안 떨어질 겁니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은 후에야 검무극은 서대룡에게 솔직히 말해주었다.

“형이 출교했다.”

이 사실은 아직 황천각주조차 모르는 극비였다.

“위험한 임무를 맡으셨습니까?”

“몰라. 그래서 더 신경 쓰이고.”

차라리 위험한 임무가 확실하면 그에 맞춰 대응하면 되겠지만. 이렇듯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사람 마음을 힘들게 한다.

“제가 나가서 대공자님을 보좌할까요?”

“형 어려워하잖아?”

“어려운 정도가 아니지요. 무섭죠. 대공자님은.”

“한데도 가겠다고?”

“소교주님이 걱정하시잖아요? 눈치 빠른 제가 옆에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소교주를 위해서라면 대공자와 함께 다닐 수도 있었다. 뭔들 못하겠는가?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 몸 사려야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말임을 느꼈기에 서대룡은 움찔했다.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사려야 한다고요?”

“어디 행복이 호락호락 주어지는 거더냐? 하나 얻으면 하나 버려야지. 나 봐라, 임시 교주 자리를 얻으니까 안절부절 걱정이 생겼잖아? 이 잘생긴 얼굴에 주름이 팍팍 늘고 있다. 저기 새 주름살이 달려오고 있네.”

그곳으로 통천각 군사가 달려왔다.

“새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군사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검무극이 서대룡을 돌아보았다. 그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회귀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행복해질 겁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이 길을 가려면 행복 따윈 생각도 마라.

맞습니다, 아버지. 그때는 저는 행복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무공이 더 강해질수록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더 어려운 길임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 오히려 더 큰소리칠 수 있다는 것도요.

그래도 지금껏 그래왔듯, 저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검무극이 서대룡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조만간에 어르신 뵈러 갈게. 그때 한잔하자!”

* * *

“흑수파에 표물을 전한 표두가 죽었습니다. 다행히 대공자님은 무사하십니다.”

사마명의 보고에 검무극은 안도했다. 검무극이 농담으로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었다.

“제가 우리 형 못됐다고 했죠? 붙잡았으면 살려줄 것이지. 혼자만 피했네.”

농담임을 알면서도 사마명은 웃지 않았다.

“이번에도 위조 진격이 사용되었습니다. 흉수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고요.”

두 가지 모두 심각한 보고였다. 이번 위품은 진품처럼 강력한 진격이었다.

그 진격이 형에게 발출되었다면?

게다가 상대는 암살자를 자결시키는 조직.

사마명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지원을 더 보내시겠습니까?”

깊어진 검무극의 시선이 지형도의 본단을 향했다.

다양한 색의 마존기(魔尊旗)들이 꽂혀 있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중에서도 마불을 상징하는 황금색 깃발이었다.

지금 자신이 지원을 보낸다면 형은 크게 화를 낼 것이다. 형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했으니까. 그나마 그 분노를 가장 누그러뜨릴 사람이 마불이겠지.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마불이 나가더라도 독초를 캐러 가면 가지, 도와주러 가선 안 된다.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장사 지역을 향했다.

형의 깃발 옆에 녹색 깃발이 있었다.

바로 독왕의 마존기.

깃발 위로 열두 개의 독주머니를 차고 서 있는 독왕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독왕은 천독림이라는 자기만의 세계에서 걸어 나가 바깥세상에 서 있다. 그럴 때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 되는지,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 그를 믿어야지.

“만약 진격이 형을 노렸다면, 장치를 당기기 전에 녹아버렸을 겁니다.”

돈 받으러 왔소

사마명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검무극의 마음속에 녹색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는 것을. 독왕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음을.

그들 간의 특별한 유대는 통천각의 그 머리 좋은 군사들의 분석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형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사마명이 지형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대공자의 다음 목적지는 악양(岳陽)에 있는 흑수파입니다.”

수하 군사가 악양 지명 위에 흑수파란 이름이 적힌 종이를 붙였다.

사마명이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통천각 군사들은 알아서 흑수파에 대한 자료를 모아서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강호 최고의 정보 조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사마명은 흑수파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를 숙지하고 있었다.

“흑수파는 호남의 흑도 중에서도 악명 높은 곳입니다. 온갖 악행으로 조직의 몸집을 키워 이제 호남 흑도 방파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세력이 되었지요. 이번에 위조 진격을 사들이려 한 것은 경쟁 방파를 누르고 호남 흑도를 장악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수장은 어떤 자입니까?”

“흑수파의 수장은 황패(黃覇)란 자로 뼛속까지 흑도인 자입니다. 돈에 환장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재물욕이 강한 자인데, 거친 바닥에서 나고 자란 놈이라서 적을 상대할 때 물러난 적이 없습니다. 호남 무림에서는 미친놈으로 여기고 있죠. 아마 본교도 두려워하지 않을 놈입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 점은 오히려 형이 상대하기 편할 겁니다. 놈의 욕심은 이용하기 좋은 약점이 될 테고. 상대가 수틀리게 나오면 형도 자기 성격 나올 테니까요. 다들 몰라서 그렇다니까요. 형 성질이 본교에서 제일 더러워요! 지금 다들 속고 있다고요!”

검무극의 목소리가 작전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뒤에서 형을 욕한다고 인상을 찌푸릴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마명과 이곳 군사들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성질 더러운 형을 죽이지 않기 위해 검무극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최대한 빨리 흑수파에 대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형에게 보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사마명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한데 밤이 늦었는데 군사님은 안 가십니까?”

“이곳에 잘 곳이 있습니다. 비상시에는 그곳에서 잡니다.”

“집무실 말씀이십니까?”

“아뇨. 침상이 있는 거처도 있습니다.”

통천각 내에 잠을 잘 수 있는 곳도 있는 모양이었다. 매번 이곳 작전실과 그의 집무실에서만 만나서 그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잠시 구경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사마명이 검무극을 군사들 숙소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일반 군사들이 잘 수 있는 방들이 있었고, 사마명 방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다.

“제가 총군사가 되고 얼마 후에 교주님께서 새로 꾸며주셨습니다.”

어쩌면 그즈음 아버지가 사마명을 진심으로 믿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주 여기서 주무십니까?”

“원래는 비상 상황에서만 잤습니다만. 요즘은 자주 잡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집에서 주무셔야지요.”

사마명의 집은 교내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가봤자 그 큰 집에 혼자였다. 차라리 이곳이 더 편했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를 댈 수는 없었기에.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교주님이 알려주신 심법 덕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사마명과는 대화도 여러 번 해보고, 풍류주점에서 술까지 마셨던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당장 집만 해도 그렇다. 본교 안에 집이 있는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고월을 생각해서 검무극 스스로 거리를 둔 것도 있었고, 사마명 역시 사적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숨겨둔 술 없습니까?”

예전에 사마명이 그랬다. 자신도 소싯적에는 말술이었다고.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사마명이 장식장 속에서 술을 꺼내왔다.

“잠이 안 올 때면 가끔 한 잔씩 마십니다.”

사마명이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군사님도 한잔하시지요.”

“비상이 걸렸을 때는 마시지 않습니다.”

사마명은 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부어서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외부에 나가 있을 때도 이렇게 비상이 걸립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더 높은 등급의 비상이 걸리지요.”

하긴. 형이 나가도 비상이 걸리는데 후계자가 외부에 나가 있는 것이니.

돌아왔을 때 언제나 사마명은 평온하게 자신을 대했지만, 알고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길고 긴 긴장감을 거쳐 온 것이다.

저 벽에 놓인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사마명의 평화로운 미소가 어떻게 만들어진 미소인지.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아뇨, 미리 죄송하다는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버지 폐관에서 나오시면 또 싸돌아다닐지도 몰라서요.”

검무극의 농담 반 진담에 사마명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은 소교주 잘못 만나 고생하는 총군사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군사께서는 하고 싶으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 무림일통은 제외하고요.”

검무극의 덧붙임에 사마명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딱히 없습니다.”

“어디 가고 싶으신 곳은요?”

역시 없다는 듯 사마명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차를 마셨다.

“그럼 어릴 적 꿈은 뭐였습니까? 설마 천마신교 총군사는 아니었을 거 아닙니까?”

사마명이 잠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런저런 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놀랍게도 뭐가 되고 싶었는지, 뭘 하고 싶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잘 안 납니다만, 천마신교 총군사가 아니었을까요?”

사마명의 농담에 이번에는 검무극이 웃었다.

“생각이 안 나신다면 본교 먹여 살리는 일에 머리를 너무 많이 쓰셔서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사마명이 검무극의 꿈을 물었다.

“임시 교주님 꿈은 뭐였습니까? 후계자가 되는 일 말고요.”

“그거 빼곤 없었습니다.”

검무극의 대답에 사마명이 놀라 물었다.

“없었다고요?”

“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회귀 전 인생에서는 정말 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시작된 형과의 경쟁으로, 후계자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후에는 오직 회귀하는 것만 보고 살았고.

회귀한 후의 꿈이라면?

“임시 교주님이시라면 왠지 꿈이 많았을 거 같아서요.”

“제가 말이 많아서 그렇게 느껴지셨겠지요.”

검무극이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방해하고 저는 진짜 가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사마명이 따라 나오며 검무극을 배웅했다.

입구에서 돌아보니 사마명은 침상이 있는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작전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가 있는 깃발들이 교내로 돌아올 때까지 이곳의 비상은 계속될 것이다.

* * *

흑수파의 수장인 황패는 화가 나 있었다.

그는 늘 화가 나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물건을 못 찾았다고?”

“네.”

짤막하게 대답한 수하는 황패의 수족인 명귀(冥鬼)였다.

보고한 이가 명귀가 아니라 다른 수하였다면 벌써 일장이 날아가 머리통이 깨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명귀에겐 그럴 수 없었다.

오늘날의 흑수파를 있게 한 사람이 바로 명귀다. 명귀는 수장인 황패보다도 무공이 고강했는데, 그런 그가 황패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아들을 구해준 은혜 때문이었다.

오 년 전, 한 무리의 낭인들이 명귀의 아내를 간살하고 어린 아들까지 죽이려는 것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황패가 낭인들을 죽여 아들을 구해냈다.

그날 이후 명귀는 황패의 수족이 되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물건 판 놈들이 자작극을 벌인 건 아니고?”

이번에 비밀리에 거금을 주기로 하고 십대금용암기를 구입했다. 한데 물건을 인수한 그날 누군가에게 물건이 털렸다.

누군지 몰라도 사전에 거래 사실을 알고 기회를 노린 것이 틀림없었다.

“돈을 주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물건을 판 쪽은 물건 대금을 후불로 받겠다고 했다. 애초에 물건을 훔칠 생각이었다면 돈도 선불로 받았겠지.

“역시 대광파(大光派) 놈들인가?”

대광파는 호남지역에서 흑수파와 이권을 다투는 또 다른 흑도방파였다.

그때 명귀가 조용히 손을 들어 황패의 주의를 환기한 후 문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누구냐?”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돈 받으러 왔소.”

남자는 죽립을 푹 눌러써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나직한 목소리에서 거칠고 패도적인 기운이 묻어났다.

명귀가 황패에게 전음을 보냈다.

―조심하십시오, 보통 놈이 아닙니다.

이곳까지 수하들의 눈을 피해 잠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황패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죽립을 쓴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돈 말인가?”

“물건을 받았으면 돈을 주셔야지.”

남자가 걸어와서 황패 앞에 마주 앉았다.

“우린 물건을 받지 못했네.”

“장사표국에서는 분명 당신들에게 물건을 전달했다고 했소.”

황패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물건을 받지도 못하고 돈을 내어줘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물론, 그가 이런 상황에서 순순히 돈을 내주는 사람이었다면 이 거친 흑도 바닥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돈을 못 주겠다면?”

그러자 남자가 나직이 말했다.

“물건을 받지 못했으니 암기를 시험해보지 못했겠군.”

그가 손을 들어 황패에게 겨눴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진격이 들려 있었다.

“직접 시험 대상이 되어 보시겠소?”

명귀의 검이 반쯤 뽑혀 나왔다. 그 역시 순식간에 상대를 벨 준비가 되었다.

“그 검이 아무리 빨라도 이것보다 빠를 수는 없을 거요.”

진격이 겨눠졌음에도 황패는 기가 죽지 않았다.

“이놈이 날 죽이면, 이놈 팔다리를 자르고 몸통의 껍데기를 모두 벗겨서 소금통에 넣어라.”

황패의 배짱에는 돈을 받지 않은 한 쏘지 못할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남자는 진격을 발출하지 않았다.

“처음에 우리와 거래를 튼 자를 데려오시오.”

“그는 왜?”

“돈이 없다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오. 처음 우릴 부른 자의 목숨이라도 회수해 가겠소.”

마치 그게 자신들의 법칙이라는 듯 말했다.

황패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돈을 깎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수하의 목숨으로 대신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황패가 수하를 데려오라 말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당신!”

그때까지도 말없이 남자를 지켜보던 명귀가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나온 사람 아니지?”

황패가 놀란 얼굴로 명귀를 쳐다보자.

“이자는 누군가의 수하로 있으면서 돈이나 수금하러 다닐 자가 아닙니다.”

명귀가 상대에게서 느끼는 본능적인 위기감은 평생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죽립을 벗어라!”

그러자 남자가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죽립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검무양이었다.

위조 병장기를 판 자들이 후불로 돈을 받겠다고 한 사실을 이용해서 그들로 위장한 것이다.

검무양이 흑수파에서 알아내야 할 사실은 암기를 판 자를 어떻게 알게 돼서 어떤 방식으로 거래했느냐였다. 분명 흑수파에서 누군가 실무를 맡은 자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황패가 돈에 환장한 놈이란 정보를 바탕으로 세운 계획이었다. 놈은 분명 돈 대신 수하를 내놓을 놈이었으니까. 미친놈 두들겨 패서 알아내는 거보다 쉽고 확실한 방법이라 여겼는데.

명귀가 검무양이 돈이나 받으러 다닐 사람이 아님을 꿰뚫어 본 것이다. 죽립을 쓰고 사납고 거친 기도로 위장했음에도 알아봤다는 건, 명귀의 사람 보는 안목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검무양이 자신이 들은 말을 그대로 명귀에게 되돌려주었다.

“당신도 이런 자의 수하로 있을 사람은 아니군.”

검무양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명귀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반면 자신이 무시 받았다는 생각에 황패가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 너 누구냐?”

검무양이 들고 있던 진격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우리 물건 사서 누굴 죽이려고?”

순간 멍하게 있던 황패가 벌떡 일어났다.

“마교!”

이 반응은 자신이 사려고 한 물건이 마교의 암기임을 알고 있었음을 실토하는 것이었다.

무겁게 흐르는 침묵.

검무양의 입에서 차갑게 흘러나오는 한마디.

“앉아. 내려다보지 말고.”

이제 검무양은 앞서 보였던 기도와 차원이 다른 기도를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차가운 한기에 황패는 숨이 막혔다.

‘날 죽이려 했다면 애초에 위장하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강단 있게 나가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마교라면 누가 겁먹을 줄…….”

빠아악!

황패의 얼굴이 사정없이 돌아갔다. 언제 어떻게 날아들었는지 모를 검무양의 주먹이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명귀가 검을 뽑아 들던 그 순간.

“하지 마.”

검무양의 한마디에 명귀의 몸이 얼어붙었다. 강력한 마기가 그를 짓누르면서 꼼짝도 못 하게 만든 것이다.

황패가 부러진 이를 우수수 뱉어내며 소리쳤다.

“이 새끼 죽이라고!”

마교고 나발이고 일단 성질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다음 순간 황패의 몸이 허공으로 붕 날았다. 검무양이 그를 문으로 집어 던져버린 것이다.

문을 부수며 날아가 마당을 뒹군 황패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번에는 마당에 가득 서 있던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 죽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뭐하냐고, 이 새끼들아!”

순간 황패가 흠칫 놀랐다. 수하들인 줄 알았는데, 낯선 무인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지단주 호명과 장사 지단의 정예들이었다.

그들 뒤로 자신의 수하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덤빈 몇몇은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흑수파가 호남에서 잘나가는 흑도 방파지만, 어찌 천마신교의 지단주와 그 정예 수하들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황패를 보자 수하 하나가 본능적으로 일어나 튀어나오려고 했다.

뒤에 서 있던 지단 무인이 무심하게 그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피를 뿜어내며 꼬꾸라지는 그를 보며 흑수파 무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았던 그들이다. 저잣거리 나가면 아무도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그들이 오늘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이다.

황패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었다.

“마교면 다냐? 어디 나도 죽여 봐! 이 호남 땅에서 황패를 죽여 보라고! 우릴 건들면 사도맹이 그냥 있을 줄 아느냐!”

죽이려 했으면 벌써 죽였겠지. 이 믿음 하나로 그는 끝까지 버텼다. 수하들이 보고 있는 자리여서 더욱 세게 나갔다.

길길이 날뛰는 그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검무양이 고개를 돌려 명귀를 쳐다보았다.

“낭인들에게 가족을 잃었다지?”

갑자기 그 일을 언급하자 명귀는 깜짝 놀랐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해 알아보고 왔다는 의미.

“우리가 알아보니까…….”

그때 검무양의 말을 끊으며 황패가 소리쳤다.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린 무림에 친절했던 적이 없었는데

장내에 흐르는 침묵을 만든 건 황패의 돌변 때문이었다.

미친놈처럼 길길이 날뛰던 그가 차분해지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제야 황패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쌍욕을 해대다가 원하는 게 뭡니까, 라고 했으니? 하지만 조금 전에는 정말 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황패는 헛말이 튀어나왔다는 듯 버럭 소리치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뭘 원하냐고 묻지 않느냐!”

반면 검무양은 여전히 무심하리만치 담담했다.

“그들과 거래한 사람.”

잠시 눈을 껌벅이던 황패가 다급히 누군가를 불렀다.

“구용(具瑢)! 구용 어디에 있느냐!”

그가 바로 이번 거래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구용은 흑수파에서 총관 같은 역할을 했다. 돈 냄새를 곧잘 맡아서 돈이 되는 일을 많이 물어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생각지도 못한 건수를 가져왔다. 무림금용암기로 지정된 마교의 암기를 구입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마교 무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또 그렇기에 욕심이 났다.

황패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피 같은 거금이 들어가야 했지만, 후불이기에 돈을 떼일 걱정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암기만 있으면 대광파의 고수들을 처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나둘씩 암살하다 보면 언젠가 호남제일흑도가 되는 것 역시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런 큰 꿈을 꾸고 진행한 일인데,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다 이 새끼 때문이다.

“구용, 어서 안 나와?”

다급히 찾았지만, 무릎 꿇은 무인 중에 황패가 찾는 구용은 없었다.

황패가 달려가서 수하 하나를 일으켜 멱살을 흔들며 물었다.

“구용 어디에 있나?”

“저는 모릅니다.”

황패가 다른 놈을 잡아 흔들었지만 역시 몰랐다.

그때 뒤쪽에 있던 다른 수하가 말했다.

“화영루에 술을 마시러 갔습니다.”

순간 황패의 눈이 뒤집혔다.

“이 미친 새끼가!”

제 놈 때문에 이 난리가 났는데 기루에 술을 처마시러 갔다고?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괜히 멱살을 잡고 있던 자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당장 가서 찾아와! 어서!”

소리를 질러대는 그에게 지단주 호명이 손가락을 들어 쉿하는 시늉을 했다.

황패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이 새끼가 말이 아니라 손가락질을 해?’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호명과 그 주변에 서 있는 마인들은 더없이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확 달려들어 자신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마교 새끼들!’

싸울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미친놈처럼 달려든다고 알려진 그였는데, 이 순간 그의 광기는 선택적 광기였다.

피를 질질 흘리며 쌍욕을 해대는 흑도 놈들과 싸울 때는 겁이 안 났는데, 저 무심한 눈빛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푹 찔러 죽이는 놈들을 보니까 겁이 났다.

“일어나.”

호명이 화영루로 갔다고 말한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직접 수하 넷을 데리고 따라나섰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건 그만큼 이번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황패가 다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이 도살자들 같은 놈들보단, 그래도 수장으로 보이는 이 남자와 말이 더 잘 통할 것처럼 느껴졌다.

황패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구용이 오면 데리고 가시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은 없던 일로 하고 사도맹에 알리지 않겠소.”

누군가 길 가다 발을 밟으면 상대의 발목을 자르는 황패였다. 그런 그가 이가 몇 개나 부러졌는데도 없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지.”

검무양이 순순히 대답하자 황패는 내심 안도했다.

‘수하들 앞에서 약속했으니 두말하진 않겠지.’

그가 슬쩍 명귀를 쳐다보았다. 명귀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서 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황패를 쳐다보았다.

황패는 잘 참고 있으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잠시 후, 구용을 데리러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구용은 함께 오지 않았다.

호명이 심각한 표정으로 검무양에게 보고했다.

“구용이란 자는 기방에서 칼에 찔려 죽어 있었습니다.”

검무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표국에서 나와 곧장 쉴 새 없이 달려왔는데, 놈들이 한발 먼저 손을 쓴 것이다.

“정말 열받게 하는군.”

한마디 말과 함께 검무양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주변 공기를 차갑고 무겁게 만들었다.

호명은 검무양이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호명과 지단 무인들이 숨죽여 있는데, 나서야 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었음에도 마음이 급한 황패가 나섰다.

“구용이 죽은 건 우리 잘못이 아니오. 그러니 이만 떠나시오. 약속을 지키시오!”

황패가 약속을 강조하자 검무양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놀란 황패가 본능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단전은 제압당해 있었다. 아까 마당으로 집어 던졌을 때, 검무양이 그의 내공을 제압한 것이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그는 내공이 제압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빠아악!

황패의 얼굴에 다시 검무양의 주먹이 박혔다. 붕 날아간 황패가 바닥을 뒹굴었다. 몸을 일으킨 황패의 입에서 부러진 이 서너 개가 다시 튀어나왔다. 입을 벌리자 이제 앞니가 훤했다.

“우릴 건드리면…….”

사도맹이 그냥 있지 않을 거란 말을 하려 했는데, 황패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에게 걸어와 차갑게 내려다보는 검무양의 눈빛이 더없이 무서웠다.

그때 검무양의 입에서 황패는 절대 알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게 다 동생 때문이다.”

검무양이 발로 얼굴을 차버리자 황패는 다시 바닥에 처박히듯 쓰러졌다.

이번에는 그의 코뼈와 광대뼈가 부러졌다. 황패가 고통스럽게 신음을 내뱉었다.

“너 같은 놈이 우릴 보고 고함을 질러도 되는 줄 알지.”

검무양이 다시 그에게 걸어갔다.

“우린 단 한 번도 이 무림에 친절했던 적이 없었는데.”

검무양이 머리통을 부숴버릴 듯 발을 들자 황패가 살려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벌레 보듯 그를 내려다보던 검무양이 발을 내린 후 무릎을 꿇고 있는 흑수파 무인들을 쳐다보았다.

“이번 거래에 대해 알고 있는 자가 있나?”

흑수파 무인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자 검무양이 차갑게 말했다.

“다 죽여라.”

그러자 호명과 지단 무인들이 망설이지 않고 검을 뽑았다.

“살려주십시오!”

비명과 애원이 터져 나왔지만, 무인들은 가차 없이 검을 들었다.

그들이 흑수파를 몰살하려던 바로 그때.

“제가 압니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그는 앞서 구용이 기루에 있다고 알려준 바로 그였다. 이름은 석수(石洙). 구용과는 친구였다.

“제가 이번 거래에 대해 들었습니다.”

검무양이 손을 들어 수하들을 제지했다.

흑수파 무인들을 찌르려던 검들이 그들의 목 뒤에서 일제히 멈췄다.

호명이 석수를 옆으로 끌어냈고, 무인들이 사방으로 둘러싸 그를 막았다.

“그가 뭘 말해줬지?”

바로 그때였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무인 중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진격이었다.

“막아!”

호명이 소리치며 석수 앞을 막아섰다.

이 거리에선 진격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호명은 피하지 않았다.

진격이 발출되려던 바로 그 순간.

쉬이이이이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번쩍하며 허공을 갈랐다.

살과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진격을 날리려던 자의 팔이 잘려 나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비천검법 제오식 창천식.

비천검법 최고의 쾌검식이 대성을 이룬 검무양의 손에서 발휘된 것이다.

호명이 달려가서 팔이 잘려 피를 뿜어내고 있는 자의 마혈을 제압한 후 잘린 팔의 혈도를 눌러 피를 멈추게 했다.

“히히히히.”

팔이 잘렸음에도 그는 미친놈처럼 웃고 있었다. 표국에서 자결하던 자의 모습과 똑같았다.

호명이 재빨리 그의 아혈과 수혈까지 눌렀다. 남자가 픽 쓰러지자, 지단 무인들은 석수와 쓰러진 사내 주위를 빙 둘러선 채 사방을 경계했다.

호명이 꿇어앉은 자들에게 소리쳤다.

“전부 옷 벗어!”

호명은 성큼성큼 걸어가 머뭇거리는 자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남은 이들이 순식간에 옷을 벗었다. 다행히 벌거벗은 자 중에서 암기를 지닌 자는 없었다.

검무양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명귀에게 말했다.

“속인 자를 탓해서 뭐 하겠나? 속은 네가 병신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명귀의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사실 명귀는 앞서 황패가 돌변했을 때 수상함을 느꼈다. 아내의 죽음을 조사했다는 말에 황패가 놀라서 말을 끊었으니까.

그리고 이 순간 알 수 있었다. 과거 그 일을 꾸미고 저지른 자가 황패라는 사실을. 자신을 얻기 위해 꾸민 일이었음을.

명귀가 황패에게 다가갔다. 이가 부러지고 코뼈가 내려앉은 그는 몰골이 엉망이었다.

“네 짓이었나?”

“무슨 미친 소리냐?”

흥분한 황패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저 도살자 같은 마인들보다, 자신을 두들겨 팬 저 마교의 고수보다,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바로 이 순간이었다.

“널 위해서 기꺼이 칼잡이가 되어 주었는데.”

오 년 동안 그를 위해 충성을 바쳤다. 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들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황패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 가지 의구심이 커졌다.

이 사람은 남을 위해 나설 사람이 아닌데.

남을 괴롭히고 뺏고 죽이는 사람인데. 어찌 그날은 낭인들을 죽이고 아들을 구해준 것일까?

빠악! 빡! 빠악!

명귀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연속해서 박혔다.

“말해! 네 짓이냐?”

황패가 고통스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파. 그만해.”

그의 입과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퍽! 퍼억! 퍽! 퍽!

감정이 실린 주먹질에 아파서라도 더 버틸 수가 없었다. 황패는 직감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변명해도 명귀가 자신을 죽일 것임을. 어차피 죽을 거라면?

“언제 봤다고 저놈 말만 믿고 이 지랄을 떠냐? 하긴, 넌 구해줬다는 내 말을 병신처럼 믿었지.”

자신의 짓임을 스스로 자백하는 말에 명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깟 계집이 뭐라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배은망덕한 새끼.”

명귀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왜 내 아들은 살려뒀지?”

“병신아, 그래야 널 붙잡아두지!”

그러면서 엉망이 된 얼굴로 히죽 웃었다.

푹! 푹! 푹! 푹! 푹!

명귀의 검이 그의 몸을 난자했다.

그래 놈의 말이 옳다. 알지 못할 위화감과 의구심에도 황패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어린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싸움에 휘말리면 아들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자신의 의구심을 눌러버렸다는 것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일어난 명귀가 검무양을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속은 제가 병신이었습니다. 죽이실 거면 죽이십시오.”

아들이 걱정되었지만, 적어도 복수는 하고 죽어서 다행이었다.

검무양은 그를 쳐다보다 말없이 돌아섰다.

그가 그대로 수하들을 거느리고 가버리려 하자 뒤에서 명귀가 다급히 물었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안 가면?”

만약 동생이었다면 어떻게든 정리를 하고 갔겠지. 악행이 정도를 넘은 자들은 응징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검무양은 관심 없었다. 상황에 따라 다 죽일 수도 있고, 살려두고 갈 수도 있다.

이 하찮은 인생들을 두고 쓸데없는 참견을 하는 것은 오지랖 넓은 동생의 몫이다.

“진실을 밝혀주지 않으셨다면, 평생 저 더러운 놈에게 이용만 당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실은 내가 밝힌 게 아니라 저자 스스로 밝혔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명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무양은 더는 말해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오 년 전 그 사건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떠보듯 말을 꺼낸 것이었는데, 황패가 지레 겁먹고 난리를 치다 자멸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죽어서도 곱게 눈을 감지 못하리라.

어쨌든 황패를 죽인 사람이 명귀이니 이 일로 천마신교와 사도맹 사이에 분란이 일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곳을 떠나는 검무양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고,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명귀는 정중히 포권한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

흑수파를 나온 검무양과 지단 무인들은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부에 도착했다.

“고문을 해서라도 알고 있는 것 다 알아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검무양의 명령에 무인들이 데려온 두 사람을 지부의 조사실로 데려갔다.

다음으로는 호명에게 명령했다.

“호남의 다른 모든 지단과 지부에 긴급 전서를 보내서 정예들을 불러 모으시오.”

오늘 일로 확실해졌다. 놈들은 자신이 생각한 거보다 훨씬 치밀하고 큰 조직이었다.

검무양이 앞서 팔이 잘렸음에도 미친놈처럼 웃고 있던 사내를 떠올렸다. 황패는 가짜 미친놈이었고, 그자야말로 진짜 미친놈이다.

그런 놈들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제대로 병력을 갖춰야 했다.

“지단과 지부에 비축한 호위갑 전부 입혀서 내보내라 하고.”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호명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한데 그러면 무림맹과 사도맹이 긴장할 겁니다.”

이번 일은 동생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동생이 무림맹과 사도맹의 후계자들과 아무리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하마터면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일뻔했다는 개인적인 분노를 떠나, 이번 일은 본교의 암기를 위조한 자들을 붙잡는 공식적인 임무였다.

“무림맹과 사도맹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소. 이해를 바라지도 마시오. 딱 이렇게만 전하시오.”

검무양이 짤막하게 덧붙였다.

“천마신교 작전 중.”

이 무림은 잠시 형에게 맡기고

“그들이 먼저 접근해 왔다고 했습니다.”

흑수파에서 위조 암기 거래를 담당했던 구용의 친구 석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묻지 않아도 술술 자백했다.

석수는 공포에 질린 상태였다. 자신의 인생에서 마교에 끌려와서 취조받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구용이 기루에서 칼을 맞아 죽었고 게다가 앞서 암기를 발출하려 했던 자는 분명 자신을 죽이려고 했었다. 팔이 잘렸는데도 미친놈처럼 웃는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마교 쪽 무기가 있는데 살 생각이 없느냐고요.”

석수 앞에 앉은 사람은 지단주 호명이었다. 수하들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기에 자신이 직접 취조에 나선 것이다.

석수는 앞서 보았던 모습에서 호명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더욱 긴장했다.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구용에게도 돈을 주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만 있던 호명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얼마나?”

“액수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몇천 냥은 받은 눈치였습니다. 녀석이 기분이 좋아서 화영루에 가서 술을 거하게 샀거든요.”

호명은 그 말을 다 믿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눈앞의 이놈이 살기 위해 헛소리를 지어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겁에 질렸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천만에.

평생 마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많은 이를 봐왔다.

겁에 질린 사람도 거짓말을 잘한다.

그는 검에 찔린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모습도 보았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생존 욕구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돈을 준 놈에 대해서 말해라.”

“놈이 아닙니다.”

“뭐?”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그 점은 호명도 의외였다. 여자가 접근했다고?

“그 여자에 대해 아는 바를 다 말해.”

“전 여자라는 사실밖에 모릅니다. 이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순간 호명의 목소리가 차갑게 낮아졌다.

“그런데 왜 이번 일에 대해 안다고 했지?”

석수는 당황했다.

“이 정도만 해도 정보가 될 줄 알았습니다.”

“여자가 큰돈을 줬다? 이 정보로 어떻게 그 여자를 찾으라고?”

호명의 두 눈에서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어찌 대충 말하면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우릴 속였군.”

“아닙니다, 아닙니다!”

손사래를 치는 석수는 순진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호명은 흑수파 놈들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 고혈을 빨아먹는 거머리 같은 자들이었다.

호명이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라.”

석수는 겁에 질린 채 물었다.

“이게 뭡니까?”

“자백제다.”

석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마시면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묻는 말에 다 대답하게 되는 자백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백제에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운이 나쁘면 미쳐버리기도 하고, 때론 죽기도 한다는 것을.

“살려주십시오!”

석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강제로 마시게 하면 실토해도 넌 죽는다.”

석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병에 손을 가져갔다.

‘생각해내야 해. 제발.’

석수는 필사적으로 그날 구용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만나서 시답잖은 음담패설을 했고. 함께 화영루로 갔다.

아, 그래. 기녀들과 술을 마시면서 그 일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더 했는데. 그때 무슨 말을 했었지?

그 간절함이 마침내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가 마시려던 자백제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아! 맞습니다! 그 여자 손등에 화상자국이 있다고 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는데, 손에 화상자국이 있어서 아쉬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기녀 손을 잡으면서 녀석이 했던 말이었다.

“화상자국?”

“네, 분명 화상 흉터라고 했습니다. 확실합니다.”

석수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호명의 눈치를 살폈다. 중요한 걸 생각해냈으니까 자백제는 먹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호명은 눈빛과 말만 부드럽게 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마셔.”

이 빌어먹을 마교 새끼들!

* * *

반 각 후 호명이 취조실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뒤쪽으로 석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호명이 향한 곳은 자신이 나온 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조사실이었다. 그곳에서는 팔이 잘린 암살자에 대한 조사가 한창이었다.

팔이 잘린 암살자야말로 제대로 정신이 나간 상태라서 정상적인 취조는 이뤄지지 않았다. 고문도 통하지 않았기에 놈에게 배후를 듣는 게 아니라, 무슨 방법으로 이자를 세뇌했는지를 알아내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검무양이 팔짱을 낀 채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고했다.

“중개를 한 사람이 여인이었는데, 손등에 화상자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백제를 쓴 증언도 같은 것으로 볼 때, 사실인 것 같습니다. 들은 내용을 모두 통천각에 알려서 그 여인을 찾으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겠지만, 그래도 실마리는 찾은 셈이다.

그렇게 돌아서 나가려는데 검무양이 불쑥 말했다.

“그 여자, 철방에서 일하는 여인일 수도 있다.”

왜 철방에서 일한다고 하지? 의아해하던 호명이 뒤늦게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화상 때문이군요!”

호명의 말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본단에서 철방과 주로 일을 많이 했다. 그랬기에 철방에서 일하는 이를 많이 접했다. 쇠와 불을 다루는 그들에게 화상은 자주 있는 일이다.

“철방에서 일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하겠습니다.”

호명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듣고 나면 당연히 연관이 있겠구나 싶지만, 그냥 들었을 때 둘을 연관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철방에서 일하는 여인들은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적은 데다 손등의 상처까지 특징이 있다면? 어쩌면 통천각이라면 찾아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찾아낸다면 대공자님 덕분입니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체 이 공자는 어떤 사람이어서 이런 대공자를 이기고 소교주가 된 것일까?

그때, 팔 잘린 남자의 몸을 살피던 무인이 조사를 마치고 그들에게 돌아섰다. 그는 이번에 동원된 지단 무인 중에서 이런 대법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잠재의식 속에 명령을 심어둬서 평소에는 그냥 지내다가 어떤 특별한 조건이 되면 명령만을 수행하는 대법처럼 보입니다.”

앞서 이자도 무릎을 꿇고 있다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돌변한 것도 석수가 비밀을 밝히려 하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해서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대법이 발동하면 곧바로 이지를 상실해 버리면서 자결하게 합니다.”

팔이 잘린 후에 재빨리 마혈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이자도 자결했을 거란 의미였다.

“대법을 심은 자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위조 암기도 거의 진품에 가깝게 만들었고, 이런 대법까지. 그냥 위품이나 팔아서 돈이나 벌려는 자들이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대법이 사용되었는지 알아보려면 본단으로 호송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검무양이 취조실에서 웃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놈이 정상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나?”

“이런 수준의 대법이라면 대법을 펼친 자가 직접 풀어야 합니다.”

“그럼 영원히 풀 수 없겠군.”

사람을 인형처럼 부리다가 자결하게 하는 대법을 펼치는 자가 순순히 풀어줄 리는 없었으니까.

쉬이이익.

검무양이 날린 한 줄기 검광에 암습을 가했던 남자는 심장이 잘리며 절명했다.

“대법에 걸린 자는 앞으로 실컷 보게 될 거다. 그리고…….”

검무양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곳을 걸어 나가며 말했다.

“어떤 대법인지는 놈에게 직접 듣지.”

* * *

검무극이 거대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으로 보이는 광장.

그곳에 가득 차 있는 아흔아홉 개의 거대한 책장.

그 책장에는 무인들을 격동시키는 수많은 절세비급이 꽂혀 있었다.

예전에 풍신사보를 얻기도 했던 바로 천마서각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허락 없이 저 여기 들어왔습니다! 저 여기 막 어지럽힐 수도 있어요. 아무 데나 앉아서 막 음식도 먹고 그럴 거라고요. 그러니 빨리 나오세요!”

임시 교주가 되자 천마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이제는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여러 곳 중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 바로 이 천마서각이었다.

검무극이 책장 사이를 걸어가면서 여기저기서 책을 뽑아 들었다.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눈에 띄는 책들을 골랐다.

무학의 원론에 관한 이야기부터 실전을 위한 고수의 조언 같은 책도 있었다. 무림의 역사도 있었고, 무공 전반에 관한 기초도 있었다.

기와 혈도를 설명한 비급부터 몸의 균형을 잡는 방법, 무인이 몸 쓰는 방법, 기본적인 공격과 방어.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허점을 찾아내는 방법. 진기를 운용하고 응용하는 방법.

또 어떤 책은 제목이 좋아서 고르고, 표지에 적힌 서체가 마음에 들어서 고르고, 그냥 한번 읽어보고 싶어서 고르고.

그렇게 이십 여권이나 골랐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주위가 바뀌면서 주위가 푸른 들판이 되었다.

스스슷.

들판 가운데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놓였다.

다시 손짓을 까닥하자 선선한 산들바람이 불었다.

검무극이 시천비술을 발휘했다.

이제 검무극의 시천비술은 바깥세상보다 일곱 배 많은 시간을 주었다. 검왕을 상대할 때만 해도 여섯 배였는데 그사이 성취가 있었다.

이제 바깥의 한 시진이 이곳에서는 일곱 시진.

‘믿을 건 너뿐이다!’

검무극이 책상에 책을 쌓아두고 읽기 시작했다.

여러 종류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것들은 천마서각에 꽂혀 있을 만큼 엄선된 책이었다.

검무극은 한 권씩, 한 권씩 읽어나갔다.

이번 독서의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검무극은 사마명에게 불안증이 있다고 말했지만, 형보다 더 큰 불안증의 원인은 구화마공에 있었다.

팔 성에 이른 구화마공.

지금의 성취도 역대 그 어떤 교주와도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성취였지만, 검무극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팔 성에서 구 성이 고비다.’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

이 벽을 넘으면 더 큰 벽이 있을 거다. 우선 이 벽부터 넘어야 한다.

검무극은 이번 벽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천마서각의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구화마공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지독한 수련으로 넘어섰다. 또 어떤 순간에는 죽음을 넘어선 실전으로 넘어섰다. 또 아버지의 가르침으로 넘어서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곳에서 무공비급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넘어서려 한다.

왜 하필 이 방법이냐고?

그것은 본능의 이끌림이었다.

아버지가 폐관에 들어가시고, 임시 교주가 되어 이곳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

거기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검왕을 만난 이후 부쩍 무공의 기본에 대한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황룡검법을 응용해서 무공을 만드는 과정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검무극은 자신의 본능을 믿었다. 고기가 먹고 싶으면 몸이 고기에 든 성분이 필요하다는 신호인 것처럼, 지금 무공에 관한 온갖 책들이 읽고 싶다면, 지금은 그게 필요한 시기일 것이다.

검무극은 마음 편히 읽었다. 뭘 꼭 얻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읽지 않았다. 읽다가 너무 재미없으면 그대로 덮고 다음 책을 읽었다. 검무극의 수준에 어려운 내용이 뭐가 있겠는가? 어떤 책도 막힘없이 술술 읽어나갔다.

한 시진, 두 시진, 세 시진…… 일곱 시진.

그렇게 얼마나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을까? 밖에서 호위책임자 적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천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의 주위가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주위에 천마서각의 수많은 책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서 가지고 나온 책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

휘릭. 휘리릭, 휙.

비급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허공을 붕 떠서 날아갔다.

책들이 원래 자리에 꽂혔다. 별거 아닌 재주 같아 보였지만, 책들을 동시에 허공섭물로 꽂는, 그야말로 이곳의 어떤 무공비급에도 없는 신위였다.

검무극이 천마서각 밖으로 나왔다.

적연이 통천각에서 전해온 소식을 전했다.

“대공자께서 호남의 정예 무인들을 모으고 있으시답니다.”

그쪽 상황이 심각하다는 보고였는데 오히려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놈들이 형을 단단히 열받게 했나 보군.”

형이 긴장 상태인 것은 오히려 안심이다. 적어도 방심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무림맹과 사도맹에 천마신교 작전 중이라는 말만 보내셨답니다.”

그 보고에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아버지가 계셨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

아버지,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장남이 무림을 뒤집고 있습니다.

이 일로 아버지 놀리면 틀림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그 특유의 비웃음을 지으셨겠지.

그리고 형 소식을 많이 좋아하셨을 거다.

“형은 형이고, 난 도저히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나온 김에 뭐 좀 먹고 들어가야지.”

적연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시진 전에 식사하고 들어간 검무극이었는데, 또 저렇게 허기가 진 것이다.

임시 교주가 되어서 좋은 점 또 하나.

천마전 숙수가 차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제일 부러운 점은 천마보고나 천마서각이 아니라 바로 숙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천마전 숙수의 환한 웃음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검무극은 배부르게 먹고 그가 만들어준 음식까지 챙겨서 다시 천마서각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이 책장에서 책을 골랐다. 이번에도 신중하게 고르지 않았다. 기분대로 골랐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천마서각에 있는 책 다 읽고 나올 작정이니까.

‘아버지, 이 무림은 잠시 형에게 맡기고 저는 천마서각에서 폐관수련하겠습니다.’

너무 잘 감당할까 봐 걱정됩니다.

천마신교 악양지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대공자가 장사 지단 정예들을 이끌고 왔을 때만 해도 다들 지나가는 바람이라 여겼다.

급한 일이 있으면 들를 수도 있지. 마인으로 사는 인생에 바람 한 번 어찌 불지 않겠는가? 그 바람에 날아가지만 않으면 된다.

하지만 바람은 계속 불었다.

다음 날 평강(平江) 지부 무인들이 도착했다.

가까운 곳이라 그들 사정을 잘 안다. 평강 지부에서 제일 강한 무인들이 도착했다. 그것도 창고를 열어 호신갑까지 착용하고서.

그들을 시작으로 호남의 정예들이 모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익양(益陽)지부의 정예들이 도착했고, 다음으로 형산(衡山)지단 무인들이 도착했다. 형산지단에서 요즘 그렇게 잘 나간다는 누구도 왔고, 영흥(永興)지부에 들어왔다는 괴물 신입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지단과 지부에서도 줄줄이 정예들이 도착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태풍이었음을. 자신들의 악양지부가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드디어 태풍 속으로 하나의 소식이 전해졌다.

호명이 빠른 걸음으로 검무양의 방으로 들어섰다.

“통천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손등에 화상을 입은 철방 여인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철방에서 일하는 여인의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그런 여인이 중원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럼에도 통천각에서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검무양은 그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이 찾았다면 찾은 것이다.

검무양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당장에 잡으러 가려는 검무양의 반응에 호명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한데 그 여인이 속한 곳이…….”

호명이 조심스럽게 덧붙여 말했다.

“무림맹 본단 철방 소속입니다.”

검무양이 인상을 굳혔다.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이름이 나온 것이다.

호명이 통천각에서 보낸 정보를 이어 나갔다.

“여인의 이름은 곽영(郭永), 나이는 이십칠 세. 무림맹 본단 철방의 세 장인 중 일인입니다.”

“스물일곱에 장인이라?”

젊은 나이에,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 되었다는 건 재능도 재능이지만 극한의 노력을 했다는 의미.

‘한데 위품을 만들었다?’

심지어 물건을 팔기 위해 직접 구용을 만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구용을 만난 시기에 철방을 비운 사실까지 확인되었습니다. 한데 문제는 무한으로 돌아온 후 여인의 행적을 놓쳤다고 합니다. 아마 이쪽 흑수회 일이 전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녀의 행적으로 볼 때, 자신들이 찾는 여인이 확실해 보였다.

“결국 우리가 무한으로 가야겠군.”

혼잣말처럼 나온 검무양의 말에 호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무림맹 본단이 있는 곳.

그야말로 천마신교에 있어 금단의 영역이 무한이었다.

게다가 사전에 기별한다 하더라도 천마신교 정예들을 이끌고 무한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작전, 무림맹에서 절대 허용하지 않을 테니까.

“나 혼자 무한으로 들어가겠소.”

그런 결정에는 이유도 있었다.

“이곳에 정예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나 혼자 무한으로 들어가리라곤 예상치 못할 거요.”

그러자 호명이 단호히 말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소?”

물론, 방법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무양 혼자 그곳에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저와 제 수하들만이라도 함께 모시겠습니다.”

호명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검무양을 응시했다.

“혼자 가실 거면 우릴 베고 가십시오.”

검무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좋소. 그럼 이곳 지부장에게만 알리고 조용히 빠져나갑시다.”

이곳의 다른 무인들에게는 아무도 알리지 말자는 의미였다.

대신 지부장에게는 알려야 했다. 대공자가 사라졌다고 찾기라도 하면, 금방 소문이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은밀히 나갈 방법을 찾겠습니다.”

그러자 검무양이 이리 와서 창밖을 보라는 시늉을 했다.

호명이 걸어와 나란히 바깥을 쳐다보았다.

그곳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마차와 수레가 줄지어 도착하고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당연히 출입하는 이도 많아졌다. 이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려면 정말 많은 요리 재료와 음식을 사야 했고, 설거지하고 청소할 사람도 더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마차와 수레가 음식과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호명은 검무양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지요. 나가는 수레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법이지요.”

들어오는 마차는 철저히 수색해도 나가는 빈 마차나 수레는 그만큼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으니까.

* * *

며칠 후, 한 대의 대형마차가 무한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제 곧 무한에 도착합니다.”

뒤쪽 짐칸에 가득 탄 사람은 검무양과 호명, 그리고 장사지단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무복을 벗고 평범한 일꾼 복장을 했다. 몇몇은 웃통을 벗었고, 또 몇몇은 주름살과 수염으로 나이 든 노인으로 위장했다. 마차는 무한에 있는 공사판에 인부를 나르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지단의 정예들이긴 해도, 무림맹 본단 앞에서의 작전을 펼쳐본 경험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호명이 수하들을 안심시키는 대신 위험을 강조했다.

“알다시피 이번 작전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작전이었다.

“우린 두 부류의 적을 상대해야 할 거다. 위품을 만든 자들과 정파인들까지.”

어떤 면에서는 위품을 만드는 놈들보다 무림맹 고수들이 더 위험했다. 천마신교에 원한을 가진 무림맹 고수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결정적으로 이번 일을 무림맹에게 알리지 않았기에 그들의 손에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아닌 대공자와 함께하는 작전.

“우리 임무는 하나다. 대공자님의 명령을 따르고, 대공자님을 지키는 거다.”

호명이 검무양을 보며 힘차게 말했다.

“저희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그 말은 뺐다. 우리가 다 죽는 한이 있어도. 호명의 충성심은 진짜였다.

검무양은 점차 다가오는 무한을 바라보며 무심히 대답했다.

“이 길을 나 혼자 돌아오진 않을 거다.”

* * *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을 때, 뭔가가 허공에 떠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흠칫 놀란 혈천도마의 눈앞으로 둥둥 떠서 날아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혈천도마가 날아온 책을 받아들었다. 책 제목을 확인한 그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고, 곧바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책에 독이라도 발라놨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 받아서 읽습니까? 가끔 책장 넘기실 때 침도 바르시면서요.”

침 바른다는 누명을 씌우며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혈천도마는 검무극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책 읽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검무극이 반갑게 소리치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르신! 보고 싶었습니다!”

검무극이 달려들어 안으려고 하자 혈천도마가 일어나서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임시 교주님을 뵙습니다.”

달려들던 검무극이 머쓱하게 멈춰 섰다.

“왜 이러세요? 우리 사이에.”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임시 교주님.”

“접니다, 저. 출교했다 돌아오면 제발 와달라고 애원하는 나머지 일곱 마존을 뿌리치고 어르신을 제일 먼저 뵈러 달려오는 그 잘생긴 소교주라고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제야 혈천도마도 표정을 풀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무해? 이제야 인사하러 온 네가 너무하겠지.”

“그래서 선물을 가져온 것 아니겠습니까? 읽고 싶었던 책이죠? 그게 딱, 천마서각에 있더라고요.”

가져온 책은 옛 고수가 남긴 수필집이었다. 그가 남긴 몇 권의 책은 다 읽었는데, 유일하게 구하지 못했던 책이 이 책이었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거기서 책 가져 나오면 안 되는 것 모르냐?”

“그런데도 열심히 잘 읽고 계시네요.”

혈천도마는 다시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이걸 읽을 기회는 지금밖에 없으니까.”

“아뇨, 천천히 읽으십시오.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이걸 내게 주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저를 보면서 하셔야지요!”

여전히 혈천도마의 시선은 책에 가 있었다.

“교주 허락 없이 줄 수 없는 책인데?”

“제가 교주지 않습니까?”

“임시 교주지.”

“그럼 교칙을 바꾸죠. 임시 교칙도 교칙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아버지께도 실례입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이 있으니, 천마서각에 있는지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그거 말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혈천도마는 말없이 책을 읽었다.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는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리라.

“요즘 천마서각에 틀어박혀 있다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읽을까 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다.”

혈천도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에 책 읽겠다는 결정은 순전히 어르신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어르신을 뵙고 책 읽는 맛을 알게 되었잖습니까?”

“그렇게 많이 읽지도 않았으면서. 몇 장 읽다가 만날 졸았으면서.”

검무극이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우리 어르신께서 책을 많이 읽으셔서 이렇게 강하시구나. 그래서 이렇게 멋지시구나. 나도 책을 많이 읽으면 지금 꽉 막힌 무학의 벽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은 확실히 믿는 바였기에 혈천도마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높은 벽이라도 책을 계단으로 쌓으면 언젠가는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

그 책을 밟고 넘어서라는 말이었다.

“못 올라간다면, 읽은 책이 부족해서다.”

“구화마공의 다음 경지를 책으로 넘어서려는 소교주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그러자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그래서 네 구화마공이 가장 강하겠지.”

검무극이 혈천도마를 쳐다봤을 때, 그는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고.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슬쩍 고개를 들고 쳐다봤을 때, 검무극은 책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새 못 보던 책이 많네요.”

혈천도마는 자신의 말을 아부나 농담으로 들었는지 몰라도, 정말 천마서각에 들어가기로 한 이유에 그의 영향이 컸다.

검무극이 책장에서 이 책, 저 책 꺼내서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 책은 가져다 둬라.”

“왜요? 선물이라니까요.”

“됐다. 나중에 교주님께 달라고 하마.”

검무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이미 다 읽으셨죠?”

혈천도마가 움찔하는 모습에 검무극이 공세를 펼쳤다.

“당연히 다 읽으셨어야지요. 조금 전에 책 읽으신다고 제 얘기 건성으로 들으셨죠? 맞죠? 제 얼굴 한 번 보시지도 않으셨죠? 그 책에 이런 소제목은 없던가요? 책과 바꾼 내 소교주!”

혈천도마가 비로소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좋은 책도 읽었고, 또 이렇게 검무극과 농담을 주고받으니 너무 즐거웠다.

그때 바깥에서 적연의 보고가 들려왔다.

“사마 군사께서 통천각에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어떠어떠한 일이 있었다고 소식을 직접 전했다. 한데 통천각에서 보자는 건, 일이 생겼다는 의미.

“어르신, 저 갑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책 가져가!”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허공섭물로 조심해서 보낸 책을 받아서 품에 넣은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떠나고 혈천도마가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검무극이 있던 자리에 못 보던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안 받을 것을 예상했는지, 쪽지까지 준비해 두었다.

―천마서각에서 시화집 한 권 없어졌다고 본교 안 망합니다.

그 책 역시 혈천도마가 구하지 못해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심지어 아까 책보다 더 가지고 싶었던 책이었다.

언젠가 흘러가듯 말한 이 책도 검무극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넌 임시 교주가 되어도 여전하구나.”

아마 교주가 되어도 변하지 않겠지.

혈천도마가 깊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침도 한 번 발라주면서.

* * *

검무극은 형이 무한으로 향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오늘 사마명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다른 사람도 무한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지형도에 깃발 하나가 올라갔다. 깃발에 적힌 글자는 차가울 한(寒)이었다. 통천각에서 깃발로 표현하는 고수는 그만큼 실력이 대단한 고수임을 의미했다.

“한월객(寒月客)이 무한으로 가고 있습니다.”

한월객은 정파의 고수로 과거 마인에게 가족을 잃었다. 그래서 천마신교에 대한 원한이 깊은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대공자께서 무한으로 떠난 이후, 그도 무한으로 향했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고,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검무극을 부르지 않았겠지만.

“한월객은 본교의 요주의 인물이라 항시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지형도에 새로운 깃발이 올려졌다. 이번에는 푸를 벽(碧)이었다.

“우연히 다른 일을 조사하는 과정에 벽산검(碧山劍)도 무한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그 역시 고유 깃발이 있을 정도의 고수였다. 문제는 시기였다. 하필이면 대공자가 무한으로 향한 이때, 정파의 이름난 두 고수가 그곳으로 향했다.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만약 형 때문에 저들이 가는 거라면, 최소한 깃발 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배후에 있군요.”

저 두 고수가 이번 일의 배후와 어떻게 엮여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정파를 대표하는 고수들. 설사 저들이 공격한다고 그냥 막 죽여서 될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도 무한에서는 더욱.

사마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소한 둘이죠.”

만약 통천각에서 파악하지 못한 다른 고수들까지 합류한다면?

“대공자의 귀환을 명령해 주십시오.”

군사로서의 감이 좋지 않아서 하는 말이겠지만.

“형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검무극이 사마명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마명은 자신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긴, 상황이 위험해지면 질수록 오히려 더욱 내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보내달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사마명이 먼저 단호히 말했다.

“안 됩니다.”

검무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천마신교의 후계자를 지키는 일을 그 어떤 사명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사마명이 가달라고 부탁해도 고민할 문제였다. 위험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간다? 그건 하책이다. 형의 자존심과 형의 부탁을 무시하고, 오직 그의 목숨만 살리겠다는 선택.

검무극의 시선이 지형도의 녹색 마존기를 향했다. 사마명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독왕님이 감당할 수 없을까 걱정되십니까?”

“아뇨, 너무 잘 감당할까 봐 걱정됩니다.”

사마명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독왕이 무한에서 학살극을 펼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면?

지금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전쟁억제력이 최전방에 가 있는 셈이었으니까.

독왕도, 형도 너무 강경한 사람들이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사람들. 이 사람들을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지금 이 상황을 한 분께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한 사람에게 소식이 전해졌고.

잠시 후, 검무극의 명령을 받고 소식을 전하러 갔던 군사가 되돌아왔다.

그가 돌아와서 지형도에 새로운 깃발을 올려놓았다. 형이 가장 믿고, 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의 깃발, 그것은 황금색 깃발이었다.

“마불님께서 조금 전 무한으로 출교하셨습니다.”

왜 우리 허락 없이 만들었지?

마불은 무한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통천각에서 보내온 정보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

한월객과 벽산검.

대공자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상대들이다. 특히 본교에 대한 한월객의 원한이 바다처럼 깊다는 걸 마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잠시만요오오오오.”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귀에 익은 목소리에 마불이 경공술을 멈췄다.

쉬이이이이이.

뒤에서 빛처럼 빠르게 달려와 내려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다리도 짧으신 분이 어찌나 빠르신지.”

“임시 교주가 되더니 이제 대놓고 인신공격까지 하는군.”

“권좌에 앉으니 절로 오만해지는군요. 다들 꿇어라!”

부정적인 단어들이 가득한 대화였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았다.

“무슨 일인가?”

“일을 시켰는데 인사는 드려야죠.”

“임시 교주에게 인사도 안 하고 간다고 쫓아온 건 아니고?”

“역시! 권력의 속성에 대해선 너무 잘 아십니다! 아무리 석상을 깎아도마불님은 권력욕의 화신 그 자체이십니다.”

마불이 코웃음을 쳤다. 검무극이 일부러 자꾸 자신을 자극하고 있음을 느꼈다. 석상을 깎아도 팔기 위해 깎으라는 말처럼, 다시 권력을 잡으려던 예전의 그때로 돌아가라는 거였다. 생생하게, 가라앉지 말고.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검무극이 흑마검 손잡이에 감겨 있는 극품천잠사를 풀었다. 극악소마와도 나눠 쓰고, 취마와도 나눠 쓰던 그것이 이제는 새로운 사람에게 전해졌다.

“이거 형 심장에 좀 감아주십시오.”

마불이 극품천잠사를 받아 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형을 살리면서 후계자 싸움을 하겠다는 검무극의 말을. 하지만 이젠 믿는다.

그래, 어쩌면 그때도 대공자의 심장에는 이런 게 감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심장을 지켜주었던, 지금 손에 든 이것보다 강력했던 어떤 것이.

마불의 시선이 흑마검을 향했다. 손잡이에는 아직 극품천잠사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마불이 불쑥 말했다.

“나는?”

농담으로 들었다는 듯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하지만 마불은 웃지 않았다.

“대공자 심장만 심장인가?”

“마불님이야 이런 거 없어도 되잖습니까?”

“나도 칼에 맞으면 피 나는 사람이네. 내게선 피 대신 금가루라도 쏟아질 줄 아나?”

“마존이 이런 거 감으면 멋없어요.”

“다른 마존 준 적 없나?”

“…….”

“역시. 내게 주기 싫어서군.”

결국 검무극이 못이기는 척 나머지를 전부 풀어서 그에게 건넸다.

“쓰지도 않으실 거면서 왜 가져가신다는 겁니까?”

“쓸 거네.”

“절대 안 쓸 겁니다, 마불님은!”

“두고 보면 알겠지.”

처음부터 다 주면서 반은 형 주고, 반은 마불님 하세요, 했으면 분명 마불은 자신은 필요 없다고 했을 거다.

그래서 일부러 청개구리 작전을 펼친 것이다. 마불이 그런 의도를 짐작하고 모른 척 받아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불이 검무극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혁낭을 보며 말했다.

“그것도 나 주려고 가져온 거 같은데. 이리 주게.”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혁낭에 든 것은 천마보고에서 챙겨온 세 벌의 호신갑이었다. 그중 하나는 마불을 위한 작은 크기의 호신갑이었고.

“왜 세 벌인가?”

“혹시 만나시게 되면 독왕님도 주십시오.”

마불이 검무극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하는 눈빛으로.

“그 사람은 입지 않을 거야.”

“네, 싫다고 하겠죠.”

“그런데 왜?”

“누가 보면 형과 친해서 마불님을 보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서 마불님께 부탁드린 게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인가?”

검무극이 생각하는 마불의 진정한 가치.

“안 되는 걸 되게 하기 위해서요. 다른 어떤 분들보다 잘하시는 거죠.”

잠시 검무극을 바라보던 마불이 극품천잠사를 양 손목에 천천히 감기 시작했다.

“자네 형 때문에 보내는 게 아니지? 독왕에게 호신갑을 입히라고 보내는 것도 아닐 테고.”

그는 검무극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독왕 그 사람을 말리라는 거지?”

검무극은 대답 대신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천마신교에 원한이 깊은 한월객이 미쳐 날뛰면 결국 독왕이 나서야 할 테고.

그 미소년처럼 풋풋한 외모에 방심해서 헛소리라도 지껄여대는 순간,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이 깨어지게 될 거다.

독왕을 열받게 하지 말라는 원칙이.

운 나쁘게 일이 풀리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오직 마불님만이 독왕님을 말릴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왜?”

거창한 이유를 기대했지만.

“마불님은 독초 채집의 왕이시잖아요?”

생각지 못한 이유에 마불은 웃고 말았다.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일을 부탁드려서 죄송합니다.”

극품천잠사를 다 감은 마불이 혁낭을 등에 멨다. 키가 작은 마불이 그것을 매니까, 몸이 다 가려질 정도였다.

“교주가 되니까 짐부터 맡기는구나.”

“작은 거인만이 짊어질 수 있는 짐이거든요.”

“말이나 못 하면.”

마불이 돌아서 다시 달려가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직접 나가서 싸우는 거보다 지켜보는 게 더 힘들었다.

하지만 불안증에 잠을 이룰 수 없더라도 지켜볼 때는 지켜봐야 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홀로 서게 되었을 때 우린 성장하게 될 테니까. 상대도, 심지어 지켜보았던 자신조차도.

검무극이 그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럼 읽다 만 책이나 읽으러 갈까?”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의 신형은 점이 되며 사라졌다.

* * *

검무양 일행이 탄 마차가 무한의 중심 거리를 천천히 지나갔다.

공사장 인부로 변장한 그들은 낡은 마차의 짐칸에 붙어 앉아서 주변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긴 칼을 등에 차고 도포 자락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중년 무인도, 주점에 앉아 흰 수염을 매만지며 술잔을 나누는 노인도, 젊디젊은 얼굴로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들고 서 있는 저 젊은 무인들도, 정복을 입고 매서운 눈빛으로 지나가는 무림맹 무인들도, 그들의 눈에 보이는 모두가 정파인이었다.

저 멀리 무림맹 본단의 웅장한 건물들과 협객을 상징하는 거대한 무인 석상이 보였다.

호명은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무림맹 본단 앞까지 와본 건 처음이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함께 온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나는 길에 보이는 크고 작은 수많은 문파도 모두 무림맹을 따르는 정파 문파들이었다.

만약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사방에서 정파 무인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야말로 그들은 용담호혈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장원이었다.

멀리 한적한 곳이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옆에는 다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조금만 걸어가면 조금 전에 지나온 저잣거리였다.

무림맹 본단의 웅장한 건물들이 더 크게 보이는 곳. 그야말로 무림맹의 턱밑이었다.

모두 마차에서 내려서 장원으로 들어섰다. 내부로 들어서자 장원 건물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마치 그 보수 공사를 위해 인부들을 부른 것처럼.

“어서들 오시오!”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이곳의 주인장이었다.

“이곳을 멋지게 새로 단장할 작정이오.”

동시에 그는 통천각에서 나온 무인이었다.

“자자, 오늘은 들어가서 쉬고 내일부터 일 시작합시다.”

통천각에서는 이곳 장원을 사들여서 새로 확장 공사를 하는 것처럼 꾸몄다. 인부로 위장해서 무한에 도착한 검무양과 지단 무인들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야말로 통천각에서는 검무양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장원의 문이 닫히자 지단 무인들이 주위를 살폈다. 담장 너머와 지붕까지. 아무도 감시하는 눈이 없음을 확인하자, 그들은 마차 바닥에 숨겨둔 검과 호신갑을 꺼낸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중년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통천각에서 나온 화인(華寅)입니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래 통천각 소속의 무인들은 작전명으로 자신을 밝히는데 이번만큼은 본명을 밝혔다. 비록 후계자 싸움에서는 밀렸지만, 상대는 천마의 혈육이었다. 그래서 무한을 책임지는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고.

“잘 부탁하오.”

검무양이 짤막하게 인사하자 지단주 호명이 나섰다.

“곽영의 행방을 놓쳤다고요?”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아니라는 말에 호명은 물론이고 다른 무인들까지 모두 놀랐다.

“곽영은 오늘 아침 철방에 복귀했습니다.”

듣고 있던 검무양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를 찾아서 좋아해야 할 상황이지만.

하필 자신이 무한에 들어온 날, 보란 듯이 돌아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호명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하지만 설령 함정이라 해도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한월객이 무한에 와있습니다.”

한월객이란 말에 검무양이 흠칫 놀랐다.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또 전해진 나쁜 소식.

“그리고 곧 벽산검이 도착할 겁니다.”

호명이 화인에게 재빨리 물었다.

“이번 우리 작전 때문에 온 거요?”

“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곽영이 제 발로 돌아왔고, 정파에서 이름난 두 고수가 이곳으로 온다?

그야말로 용담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고, 호혈에서는 배고픈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호명이 검무양을 돌아보았다. 설령 자신들 때문에 왔다 해도 검무양은 겁먹고 돌아갈 사람이 아님을 안다.

과연 검무양은 차분히 화인에게 물었다.

“곽영의 집은 어디에 있소?”

“무림맹 내원에 거처가 있습니다.”

철방의 장인이니 특별히 내원에 거처를 마련해준 모양이다.

외원도 아니고 내원이라면? 들어가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곽영이 자주 가는 다루가 있습니다. 일을 마치면 그곳에 들러서 차를 마시곤 합니다.”

“거기가 어디요?”

“저잣거리에 있는 향향(香香)이라는 다루입니다.”

화인이 준비한 것은 정보만이 아니었다. 그가 벽장을 열었다. 그곳에 여러 종류의 무복이 가득 있었다.

“그 차림으론 병장기를 착용할 수 없으니, 이걸 입으십시오. 이곳 무한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무복들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신분도 주었다.

“만약 신분을 밝혀야 할 일이 생기면 호남에 있는 정파 문파인 숭검문(崇劍門)의 문도라고 하십시오.”

숭검문 역시 천마신교의 위장 문파였다.

“숭검문의 문도들이 지금 대사형을 따라 이곳 무림맹 본단을 구경하러 나와 있는 겁니다.”

화인이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가져와서 각자 이름을 알려주었다. 누군가 숭검문에 확인하면, 이들이 무림맹 본단을 구경하러 갔다는 사실을 듣게 될 것이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소.”

모두 무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옷 안에 호신갑도 빠뜨리지 말고 모두 입도록.”

수하들을 챙긴 호명은 검무양만 호신갑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입던 것을 줄 수도 없었다. 일반 무인에게 보급되는 호신갑을 대공자에게 줄 수는 없었으니까. 워낙 무공이 고강하니 괜찮다 싶으면서도, 뭐라도 더 좋은 게 있으면 입히고 싶은 마음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장원의 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 * *

검무양이 홀로 향향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머지 무인들은 건너편 주점과 길가, 골목길, 옆 건물. 곳곳에 흩어져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신중하게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는지 모른다.

사실 오늘은 정찰에 가까웠다. 설마 첫날부터 그녀를 만나게 될까 싶었는데.

―그녀입니다!

호명의 전음에 고개를 드니 한 여인이 다루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인의 손등에 큰 화상 자국이 있었다. 몰라볼 수 없었다. 그녀는 흉터를 가릴 생각하지 않고, 아예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으니까.

당당하게 상처를 드러낸 그녀는 듣던 대로 얼굴도 예뻤고 몸매도 아름다웠다.

그렇게 다루에 들어온 곽영이 어디에 앉을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때 검무양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곽영이 눈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검무양은 알 수 없었다. 자신인지 알고 웃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눈인사를 한 것인지.

어쨌든 한 가지는 예상 밖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의 분위기는 밝았다.

그때 호명이 외부에서 검무양에게 전음을 보냈다.

―미행이나 매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검무양도 기를 끌어올려 살폈지만, 내부의 손님들도 그렇고 특별히 눈에 띄는 위험은 감지되지 않았다.

‘정말 혼자 차를 마시러 왔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를 제압해서 데리고 나가는 일만 남았다. 바깥에는 그녀를 싣고 갈 마차도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검무양은 신중했다. 너무 일이 술술 풀리니 오히려 더 조심스러웠다.

곽영은 차를 마시며 바깥에 행인들이 오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이 깊었다.

그러다 지나가던 한 무리의 남자들이 그녀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나 같이 근육질인 것을 보니 아마 철방에서 일하는 남자들인 모양이다.

바깥을 쳐다보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차를 마시려 했을 때, 어느새 검무양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깜짝 놀랄 상황이었는데 그녀는 차분하게 물었다.

“왜 허락도 구하지 않고 앉죠?”

반면 검무양은 강하게 나갔다.

“그러는 너는 왜 우리 허락 없이 만들었지?”

첫마디부터 정체를 밝히는 말이었고, 그녀를 추궁하는 말이었다.

만약 소리를 지르거나 달아나려 한다면, 시도를 하기도 전에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할 것이다.

하지만 곽영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검무양의 얼굴에 다가서더니 너무나도 당당히 말했다.

“당신 바보예요? 누가 위품을 만드는데 허락을 받아요?”

죽는 날 하늘은 왜 봐요?

‘누가 허락받고 위품을 만드냐고?’

검무양은 곽영이 이렇게 맹랑하게 물어올 줄은 몰랐다. 맞는 말이라서 더 당황했고.

“똑같은 재료였다면, 당신들은 위품인 줄도 몰랐을 거예요.”

뭐지? 이 뻔뻔함은?

그녀는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바짝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어야 하는 상황인데.

역시 함정인가?

검무양이 침착하게 주위를 다시 살폈다. 여전히 다루 내부에서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곽영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고, 손은 거칠었다. 화상자국뿐만 아니라 여자 손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많은 상처가 있었다.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녀의 손.

검무양의 시선을 느낀 곽영이 손등이 상대에게 보이도록 들었다.

“영광의 상처!”

그녀는 그 상처를 자랑스러워했다.

“이 손 덕분에 그날 여러 사람이 살았거든요.”

곽영이 검무양에게 물었다.

“당신도 이런 상처가 있나요?”

여전히 말이 없자, 그녀는 이 침묵의 원인을 엉뚱한 데에서 찾았다.

“혹시 제가 바보라고 해서 화가 났나요?”

그러자 비로소 검무양이 입을 열었다.

“화가 났다면 네가 만든 위품 때문이겠지.”

“가짜가 넘쳐나는 세상이잖아요!”

물론, 검무양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이 더 차가워지는 걸 느끼자 그녀는 시선을 피해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차를 홀짝 마신 후 창밖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활기차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그녀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앞에서 당당한 듯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 당당한 만큼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탄식했다.

“절대 들킬 일 없다더니, 이게 뭐야?”

느낌상 그녀는 오늘 이곳에서 자신을 만나게 될 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증인들까지 없애는 치밀함을 보인 그들이다. 한월객과 벽산검까지 불러들일 수 있는 자들인데.

한데 왜 그녀를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두고 있을까?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일 텐데.

여전히 바깥에 시선을 둔 채 그녀가 물었다.

“저 많이 곤란해졌죠?”

위품을 만든 죄는 그녀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정도로 가볍지 않다. 그녀를 통해 배후를 밝히려는 이유가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심지어 정보를 얻어낸 후에도 그녀 목숨은 풍전등화일 것이다.

검무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따라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차 아직 다 안 마셨어요.”

끌려가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찻잔을 드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다루 앞을 지나가던 누군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곽 장인!”

그는 무림맹 복장을 한 중년 무인이었다. 그 뒤로 십여 명의 무인이 수행하며 뒤따라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날렵한 발걸음에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바로 청룡단과 더불어 무림맹의 정예조직인 백룡단의 단주 도인수(道仁洙)였다.

“도 단주님!”

곽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무양에게 나직이 말했다.

“어떡하죠? 제가 안 가면 저 사람이 이리로 올 텐데요?”

그녀가 검무양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지난번에 보내드린 검, 어땠나요?”

“아주 좋았네. 곽 장인이 만든 건데, 안 좋을 리가 있나?”

곽용의 실력은 모두가 인정했고 최연소 철방 책임자가 될 거라고 다들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백룡단주가 이렇게 친근하게 그녀를 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무림맹 내 모든 조직은 철방과 사이가 좋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다른 조직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무기를 보내줄 테니까.

백룡단주의 시선이 검무양을 향했다. 왠지 모르게 눈길을 끄는 인물이었다.

“저 대협은 누구신가?”

곽영이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마교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확 밝혀버릴까요?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곽영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제 친구예요. 예전부터 제 일을 많이 도와준 친구지요.”

검무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숭검문에서 온 장형(張炯)입니다.”

“오, 장 대협이셨구려.”

곽영의 친구란 말에 경계의 눈빛이 풀어졌다. 그만큼 곽영에게 잘 보이려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주님과 할 이야기가 남아서. 친구, 다음에 또 보자.”

그녀의 말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백룡단주와 백룡단 무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곽영이 백룡단주와 함께 그곳을 떠나갔다. 저 멀리 걸어가던 곽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시 검무양을 바라보던 그녀가 발걸음을 빨리하며 사라졌다.

검무양이 향향을 나와 걸어가자 조용히 호명이 옆에 붙었다. 곽영이 무림맹 무인을 이용해서 빠져나간 것을 그도 지켜보고 있었다.

“통천각에 곽영이 다시 잠적할 거라 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감시망을 펼치라고요.”

그러자 검무양이 뜻밖의 대답을 했다.

“곽영은 달아나지 않을 것이오.”

“네?”

“아마 내일 다시 올 거요.”

저렇게 달아났는데 내일 다시 온다고? 호명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검무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검무양의 감이었다. 왠지 이렇게 떠나버릴 것 같지 않다는 예감.

굳이 호명에게 이유를 대자면.

“만약 배후 놈들이 그녀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다시 돌아오게 하지 않았을 거요.”

한데 놈들은 반대로 행동했다. 자취를 감췄던 그녀가 오히려 자신들이 온 날에 되돌아왔으니까.

* * *

다음 날 호명은 더욱 신경 써서 향향 주위를 경계했다.

통천각 화인을 통해 무림맹 고수들과 정예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파악하려 했고, 지단 무인들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평화가 그들을 오히려 불안하게 했다.

검무양이 홀로 향향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어제 앉았던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했다.

“또 오셨군요.”

주인장이 검무양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통천각에서 알아본바, 그는 수상한 자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다루를 운영하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통천각에서는 단골들까지 모두 조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손님은 찾을 수 없었다.

검무양이 홀로 앉아서 차를 마셨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 예감이 틀렸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너무 당당하고 밝은 모습에 헷갈려 오판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한 시진이 훌쩍 지나고 검무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그녀가 왔습니다.

호명의 전음이 전해지고 잠시 후, 다루로 곽영이 들어섰다.

어제 그렇게 도망가듯이 달아난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검무양이 앉아 있는 자리로 왔다.

“오늘 들어온 철의 품질이 제가 철방에 들어온 이래 제일 좋았어요. 정말 이렇게 좋은 철이 들어온 적이 없었죠.”

마치 어제 달아났던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진짜 친구를 대하는 거처럼 행동했다. 심지어 방글방글 웃기까지 했다.

“그거 모르죠? 좋은 철이 들어온 날에는 좋은 일이 생긴답니다. 철방의 오랜 믿음이죠.”

“미신이겠지.”

냉랭한 대답과 함께 검무양은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며 물었다.

“왜 달아나지 않고 다시 왔나?”

예상한 바였지만 이유가 궁금했다. 게다가 오늘도 혼자 왔다.

어제보다 더 샅샅이 주위를 살폈지만, 여전히 매복한 고수는 없었다.

“당신들에게 찍혔는데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어요?”

만약 이런 이유가 진심이라면, 그녀는 똑똑한 선택을 했다. 어제 그렇게 갔다고, 그녀가 달아나는 걸 놓쳤을 리 없었으니까.

“어디 깊은 산속에나 숨으면 모를까.”

“그러면 목숨은 구할 수 있겠지.”

그녀가 다루 주인에게 항상 마시는 차를 주문한 후 검무양에게 말했다.

“산에 숨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그렇게까지 대단한 목숨은 아니라서요.”

당당하면서도 서글픔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산에서 혼자 뭐 하겠어요? 철방 일을 못 하는 삶이라면…….”

말을 잇진 않았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을 좋아하면서 왜 그런 짓을 했지?”

찻잔을 만지작거릴 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어떤 사정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차피 자백제를 써서 심문을 하게 될 테니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이만 일어나지.”

“전 이제 한 모금 마셨어요!”

하지만 검무양이 먼저 일어나서 다루를 나갔다.

그녀가 찻잔에 남은 차를 홀짝 다 마신 후에 검무양을 따라 나갔다.

다루 근처 골목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걸어가죠.”

“오늘은 누굴 만나서 빠져나가려고?”

검무양이 먼저 마차에 올라타자 어쩔 수 없이 그녀도 함께 올라탔다.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게 창을 가린 마차였다.

“밖을 보면서 가고 싶은데.”

마차가 출발했지만 검무양은 닫힌 창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전해지는 한마디.

“죽기 전에 하늘 한 번 볼 기회는 있을 거다.”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대답했다.

“죽는 날 하늘은 왜 봐요? 사람들을 봐야지.”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곽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누군지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배후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검무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가 장원에 도착했다.

몇 번이나 외곽을 돌며 미행이 있는지를 확인했지만 쫓아오는 이도, 지켜주려는 이도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

검무양이 마차 문을 열고 내리려던 바로 그때였다.

곽영이 뭔가를 검무양에게 겨눴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진격이었다. 하지만 앞서 검무양이 보았던 그 위조 진격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작았다. 손바닥에 감쪽같이 감춰질 정도로 작은 크기.

“딱 한 발만 나가는 진격이에요. 이것도 내가 만든 거죠.”

마차 안에 마주 보고 있었기에 진격은 얼굴 앞에서 겨눠졌다.

하지만 검무양은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당신 누구냐고요.”

상대가 그냥 평범한 마인이 아니란 것은 처음 볼 때부터 느꼈다. 위품을 만든 이들을 추격해 잡아 죽이는 도살자가 아닌 느낌. 말은 참 없었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권위가 느껴졌다.

지금도 눈앞에 진격이 겨눠져도 상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죽이려는 건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왜 쏘지 않지? 손가락만 까닥하면 되는데.”

곽영의 눈동자는 떨렸고, 검무양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사람 죽여 본 적 없지?”

“자랑인가요? 사람 죽여본 게.”

그녀는 떨면서도 당당하려고 애썼다.

“처음이지만 죽일 수 있어요.”

“그럼 죽여.”

하지만 그녀는 진격을 발출하지 않았다.

“죽이려고 꺼낸 거 아니에요. 살려고 꺼낸 거지.”

곽영이 겨눴던 진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당신에게 내 목숨과 운명을 걸겠어요.”

그녀의 눈빛은 더없이 비장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뭘 믿고 운명을 걸지?”

곽영이 검무양을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을 믿는 게 아니에요. 나를 믿는 거지. 내 선택을 믿는 거예요.”

곽영이 검무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 다루에서 만났을 때,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눈이 마주친 손님이기에 지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어떤 울림이 있었다. 그게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당신을 살려줬으니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다음에는 저를 죽여도 좋아요.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서 약속해요.”

죽음을 각오한 그녀의 눈빛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래로 내렸던 진격이 다시 검무양을 겨눴다.

진격을 겨눈 그녀가 더 놀랐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며 암기를 발출하는 장치를 당기려 했다.

“안 돼!”

옆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피해요!”

그녀가 소리쳤지만, 진격은 발출되었다.

순간 곽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거리에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으니까.

‘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절대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서 진격을 발출한 것이다.

치이이익.

무엇인가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두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그때 들려온 한마디.

“눈 떠.”

검무양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검무양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 바로 옆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 손이 움직여 그 옆을 쏘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손이 움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크게 안도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검무양이 허공섭물로 물건을 움직이듯 그녀의 손가락과 팔을 자기 뜻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워낙 가까이 있었고, 그녀는 무공을 할 줄 몰랐기에 손쉬운 일이었다.

그녀가 죽이려 했어도 죽일 수 없었다는 걸 직접 보여준 것이다.

검무양이 마차 문을 열고 먼저 내렸다.

“운명 같은 소리 말고 내려.”

검무양이 수하에게 명령을 내렸다.

“조사실로 끌고 가.”

곽영이 멋쩍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분명 좋은 철이 들어온 날인데.”

피도 눈물도 없는 마교라지만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말이 조사실이지 그곳은 사실 고문실이었다. 벽에는 족쇄와 쇠사슬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고문 도구들이 기다란 책상에 진열되듯 놓여 있었다.

어디를 찌르려고 저렇게 다양한 굵기의 쇠침들이 있을까?

날카로운 톱과 비수, 그 외에도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기분 나쁜 도구들.

그리고 책상 옆에 놓인 화로와 인두는 적어도 고구마를 구워 먹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곽영은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이 절로 떨렸다.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공포가 아니었다.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지만, 이번에는 바닥에 붉은 얼룩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핏물이었다.

아무리 성정이 강해도 이런 분위기까지 여유 있기는 힘들었다.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비참하게 죽어서 뒷마당에 묻혀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을 뺨을 짝짝 때렸다.

“정신 차려, 곽영! 네가 선택한 길이야.”

그 남자를 만났던 첫날 백룡단주를 통해 빠져나올 수 있었을 때, 그길로 달아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이 남자를 만나러 다시 다루에 간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내린 결론이었다.

뭐 때문이었을까?

백룡단주를 따라 걸어가면서 돌아보았을 때, 그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어쩌면 짜증이나 분노를 드러내도 좋을 그 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그 무덤덤한 표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화를 냈어도, 웃었어도 모두 기분 나빴을 그 상황에서.

바로 그때!

끼이이이익.

철문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마음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가 들어오기를 바랐는데, 들어선 사람은 지단주 호명과 수하였다.

“지시대로 따르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호명의 말에 곽영이 부탁했다.

“아까 그 사람을 불러주세요.”

“귀한 분이시다.”

“그 귀한 분 불러주세요. 그분에게 다 말할 테니까.”

곽영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들에게 말해선 안 된다고.

모든 것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정보만 모두 얻고 자신은 죽여버리겠지. 그래, 마인들인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이 아니라 앞서 그 남자에게 운명을 걸어야 한다. 그 남자에게서 약속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호명은 그녀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녀 앞에 놓인 탁자에 올려다 놓았다.

“마셔라.”

“이게 뭐죠?”

“자백제다.”

비록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무림맹에서 일하는 그녀였다. 이 자백제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끝까지 자백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부작용으로 죽거나, 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호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은 여러 경우가 있다. 그냥 운이 나빠서 술술 다 말한 사람도 죽을 수도 있고, 그녀 말처럼 진실을 밝히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그 부작용이 더욱 잘 나타난다.

“그 정도 의지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

“지금 눈앞에 있네요.”

곽영은 허풍으로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정말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믿었다. 그래서 정말 부작용으로 죽을까 봐 걱정되었다.

“당신도 내가 죽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곽영은 애써 두려운 기색을 떨치며 당당하려고 애썼다.

“그러니 그분을 불러주세요.”

물론, 호명에겐 통하지 않았다. 마혈을 제압하고 강제로 마시게 해도 되겠지만, 호명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눈짓하자 함께 들어온 수하가 화로에 불을 붙인 후 그 위에 인두를 올렸다.

치이이이.

잠시 후, 인두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로 겁줄 생각은 말아요. 어려서부터 철방 일을 도우면서 불을 겁내지 않으니까. 제 친구나 다름없죠.”

“친구에게 당하면 더 아플 거다.”

호명이 눈짓으로 명령을 내리자 수하가 인두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는 인두를 그녀의 얼굴로 가져갔다. 사람에게 가장 확실하게 겁을 줄 수 있는 부위는 얼굴이었다. 특히 여인이라면 더욱 두려워할 테고.

하지만 곽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다가오는 인두를 쳐다보며 눈을 똑바로 뜨고 이를 악물었다.

인두가 그녀의 얼굴에 닿기 직전.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다행히 얼굴을 지지기 전에 인두가 멈췄다.

열린 철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인두를 들었던 수하는 밖으로 나가고 호명만 남았다.

검무양이 걸어와서 그녀 앞에 섰다.

“왜 나를 불러달라고 한 거지?”

검무양은 문밖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어떤 고문으로도 그녀에게서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임을.

이 정도 각오면 정말 그녀 말처럼 자백제 부작용으로 그녀는 죽게 될 거다.

“마차에서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에게 목숨과 운명을 걸었다고요.”

여전히 검무양의 반응은 냉랭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제 느낌을 믿는다고 했잖아요.”

검무양이 앞에 놓인 자백제를 보며 말했다.

“마셔라.”

떨리는 눈빛으로 자백제를 내려다보던 곽영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개를 연 후에 검무양의 두 눈을 바라보며 쭉 마셨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녀 얼굴이 발그스름해지면서 약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었다.

“내게 접근한 이유는 뭐지?”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접근은 당신이 했어요. 당신이 내 자리로 왔잖아요?”

그녀는 마치 잠에서 막 깬 것 같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내게 접근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나?”

“받지 않았어요.”

“그럼 다음날 왜 또 다루에 왔지?”

곽영의 눈동자는 풀려서 몽롱했다.

“당신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이유는?”

“느낌이었어요. 이 사람이 나를 잡으러 와서 다행이다.”

곽영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자백제를 먹으면 이런 기분인가요? 어지럽고 속이 너무 울렁거려요.”

원래 자백제를 복용하면 무의식 상태에서 대답하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 자백제를 먹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건 그녀의 정신력이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검무양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곽영이 배시시 웃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당신 잘 생겼어요.”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당신만 묻지 말고 나도 물어볼래요. 이 흉터, 많이 흉해요?”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나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웃지 말라고요. 이건 내 영광의 상처라고요.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아냐고요?”

주르륵.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어? 피 나네. 거짓말 안 했는데 피가 나네.”

호명이 재빨리 말했다.

“부작용이 나타나려 하고 있습니다.”

“해독약 먹이시오.”

“네.”

호명이 곽영에게 해약을 먹였다. 자백제의 기운을 풀어주는 약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곽영이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일이죠?”

“부작용이 나와서 해독약을 먹였다.”

죽다 살아났다는 생각에 그녀가 안도했다.

“감사해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뇨, 다 끝났어요. 제가 다음날 당신을 찾아갔을 때 이미 다 끝났죠. 오로지 남은 건 당신이 나와 약속을 해주느냐 마느냐만 남았죠.”

“무슨 약속?”

앞서 마차에서도 그녀는 진격을 쏘지 않았으니 한 가지 약속을 해달라고 했었다.

“살려주세요.”

당연히 그녀 자신이라 생각했는데.

“제 동생을 살려주세요.”

이제야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왜 위조 암기를 만들었는지. 왜 자신을 찾아와서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하려고 애썼는지. 그녀는 자신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동생이 그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어요.”

그녀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족이라고는 동생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에서 그 아이만큼 착한 애도 없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드는 한 가지 의문.

“왜 무림맹에 알리지 않았지?”

무림맹 철방의 장인이라면, 그녀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맹 차원에서 움직였을 것이다.

“그들이 말했어요. 무림맹 높은 자리에 자기 편이 있다고. 아무리 은밀히 무림맹에 일러바쳐도 결국 자신들이 먼저 알게 될 거라고 했죠.”

“그 말을 믿었나?”

똑똑해서 쉽게 믿지 않았을 거 같은데.

그러자 그녀가 놀라운 말을 꺼냈다.

“믿을 수밖에 없었죠. 그 말을 들은 곳이 무림맹의 내원에 있는 제 거처였으니까요.”

외부인이 무림맹 내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건, 그들의 말처럼 누군가 높은 사람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딱 한 번만 만들어주면 동생을 풀어주고 영원히 찾지 않을 거라고 했죠.”

그녀가 후회의 탄식을 내쉬었다.

“그들은 약속을 어겼죠. 멍청한! 애초에 지킬 리가 없었던 약속이었는데.”

동생을 풀어주지 않았다는 건 다른 암기를 만들기를 강요하기 위함일 것이다.

“왜 당신에게 운명을 걸었느냐고요? 계속 놈들에게 끌려갈 수는 없으니까요. 설령 그렇게 끌려가더라도, 결국 놈들은 동생을 죽일 거예요. 이번에 약속을 어기는 걸 보면서 확신했죠.”

그건 잘 판단했다는 표정으로 검무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를 이용해도 좋고, 죽여도 좋아요. 저 인두로 지져도 좋고, 자백제 열 병을 먹여도 좋아요. 아는 건 다 말할게요. 대신 제 동생은 꼭 구해주세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는 얄팍한 수를 쓰는 것보다 차라리 솔직한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아는 정보로 당신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당신들이 너무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곽영이 다시 애원했다.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마교라지만, 당신도 형제가 있을 거잖아요? 있다면 제 심정 이해하실 거잖아요?”

내내 침묵하던 검무양이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순간 곽영이 흠칫했다.

“방금 말은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 애원했다.

“그럼 평생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만들라는 것 다 만들게요. 당신 직위가 얼마나 높은지 모르겠지만, 저를 데려가면 승진도 하게 될 거예요.”

지켜보던 호명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차피 제 경력은 끝장났어요. 무림맹 철방의 명예를 더럽혔는데 어찌 장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당신을 위해 만들게요. 보셨죠? 그 작은 진격? 그것도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 드릴게요.”

여전히 검무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곽영이 버럭 했다.

“이 무정한 사람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빌면 빈말이라도 약속한다고 하겠다!”

검무양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난 지키지 않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래, 이런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기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안 도와주면 죽어서 귀신이 되어서 매일 당신 꿈에 나타나 괴롭힐 거예요.”

이렇게 협박도 해보고 선의에 호소하기도 했다. 마인에게 선의를 호소하다니.

“남 돕는 성격 아니면, 당신 인생에 딱 한 번만 남을 도와봐요. 혹시 알아요? 지옥에 떨어졌을 때, 염왕이 그 선행 때문에 용서해 줄지.”

하지만 검무양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이 난공불락의 요새는 자신의 애원이나 설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내가 미쳤지. 마인은 마인일 뿐인데. 예감은 무슨 예감이라고.’

그녀가 잠시 말없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더니.

“정말 화나는 게 뭔지 아세요?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게 제 노력 때문이라는 점이에요. 잠도 자지 않고 밤에 혼자 나와 망치질을 했었던 그 노력이 결국 내 동생을 죽이는 노력이었어요. 전 너무 분하고 억울해요.”

달궈진 인두가 얼굴을 지지려 해도 참아냈는데, 결국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떨어진 눈물이 그녀 손등의 화상자국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이 누나가 미안하다. 그래도 다시 태어나도 꼭 내 동생으로 태어나다오. 그땐 장인 같은 거 절대 하지 않을 거다. 미안해, 정말.’

정말이지 자신의 인생에 천재지변처럼 찾아온 불행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천재지변 같은 불운만 있는 건 아니라는 듯, 나직이 들려온 한마디가 있었다.

“동생은 내가 구해주지.”

곽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검무양은 그 한마디 말만 했을 뿐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곽영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진짜 약속을 지키는 사람임을.

검무양이 호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놈들과 관련한 나머지 진술을 상세히 들으시오. 하나도 빠짐없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검무양이 철문을 향해 돌아서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곽영이 소리쳐 물었다.

“왜죠?”

구해준다는데 이유를 묻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너무 궁금했다.

검무양은 돌아보지 않은 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남겼다.

“그냥 좋은 철이 들어온 날이라서 그렇다고 하지.”

쪼그리고 앉아 뭐 하고 있냐?

검무양은 자신의 거처에서 창밖을 쳐다보았다.

마당에 보이는 지단 무인들.

일하다 쉬는 것처럼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축 늘어져 있지만, 그 나름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펼치고 있었다.

검무양은 문득 아까 곽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도 형제가 있을 거잖아요? 있다면 제 심정 이해하실 거잖아요?”

동생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감정이다.

만약 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다.

제발 누가 좀 잡아가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생각이 있었다.

잡아가고 싶다고 잡아갈 수도 없겠지만, 설령 잡아가더라도 열불이 터져서 죽을 거다. 정말 녀석의 온갖 말을 듣다 보면 누가 인질인지 헷갈리게 될 테니까. 제발 풀어줄 테니 가주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검무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동생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젠 놀랍지 않다. 그 놀랍지 않은 감정이 놀라울 뿐.

그때 밖에서 호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사가 끝났습니다.”

문이 열리고 호명과 곽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호명이 검무양에게 조사 결과를 적은 종이를 건넸다.

검무양이 그것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놈들이 언제 어떻게 접근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또한 그들의 생김새와 말투, 그리고 신체적 특징까지도 모두 적혀 있었다.

또 위조 암기를 만들기 위해 눈이 가려진 채 마차로 옮겨질 때 얼마나 갔으며, 가는 중에 어떤 소리가 들렸는지도 그녀는 기억했다.

내용을 읽던 검무양이 고개를 들어 곽영을 쳐다보았다. 그가 왜 쳐다보는지 묻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그녀가 대답했다.

“필사적으로 기억했어요. 어쩌면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거든요. 그게 무림맹이 아니라 당신들이 될 줄은 몰랐지만.”

검무양의 시선이 다시 종이를 향했다.

위품을 만드는 그곳에서 어떤 이들을 만났고 어떤 과정으로 암기를 만들었는지. 그곳에 사용된 철은 어떤 종류의 것이고, 만들기 위한 도구들은 어떤 것들인지까지 다 적혀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총명했다. 기억력이 좋아서 총명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부분만을 다 외웠기 때문이다.

검무양이 종이를 다시 호명에게 주었다.

“바로 통천각에 보내시오.”

이렇게 자세한 정보라면 통천각에서는 분명 놈들에 대한 단서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호명이 나가고 그곳에는 검무양과 곽영만 남았다.

그녀는 우선 검무양이 동생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아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정말 감사해요.”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밖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조사를 마치자 오히려 그녀는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마교 암기를 위조했다는 죄가 남아 있다.

동생을 구해준다고 약속했지, 자신을 용서한다고 약속하진 않았으니까.

“이제 저는 쓸모가 없어졌네요.”

그녀는 자신이 아는 바를 모든 다 말했다.

“저를 죽여서 묻어 버린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도 않을 거예요.”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동생을 구하는 일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지만, 만약 이 사람이 동생을 구해낸다면?

동생과 함께 계속 살아가고 싶었다. 동생이 혼인해서 자식 낳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동생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마저 죽으면 천애 고아 신세가 될 텐데.

그때 검무양이 불쑥 말했다.

“나를 승진시켜 준다더니?”

순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아까 고문실에서 그에게 소리칠 때 말했다. 평생 당신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만들라는 것을 다 만들겠다고 했다. 자신을 데려가면 승진도 할 거라고.

물론, 흥분해서 막 내뱉던 말이었을 뿐이다. 단 한 번도 마교를 위해 무기를 만드는 인생은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까.

“그게… 정말 저를 데려가시겠다고요? 농담이시죠?”

당황한 그녀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하던 그때.

호명이 다급히 되돌아왔다. 그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다급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검무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천각에서 긴급하게 기별이 왔습니다. 백룡단에 긴급 작전이 떨어졌는데 목표가 이곳이라고 합니다.”

벌써 창밖에서는 지단 무인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목재와 흙더미 사이에 숨겨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고 담과 지붕 위로 올라가 진짜 경계에 들어섰다.

무림맹이 이곳 위치를 알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목적은 더욱 놀라웠다.

“이 여인의 구출 작전이라고 합니다.”

비밀작전이 아니라 맹의 공식작전이기에 통천각에서 빠르게 알아차리고 연락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급박한 상황이었음임에도 검무양은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있소?”

“일각 내에 빠져나가야 합니다.”

검무양은 왜 그들이 곽영을 살려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이용해서 자신들과 무림맹을 충돌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놈들이 나서지 않고도 자신들을 무한에서 물러나게 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저들이 이곳을 어떻게 알아냈느냐였다. 분명 이곳으로 오면서 미행이나 감시를 피하려고 몇 번이나 확인했었는데.

그러다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검무양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곽영에게 물었다.

“혹시 놈들에게 받은 물건 있나?”

“아뇨, 없어요.”

그러다 그녀가 흠칫 놀랐다.

“하나 있어요.”

그녀가 품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냈다.

“동생이 제게 보낸 거예요.”

검무양은 그녀가 내민 서찰을 손으로 받지 않았다.

허공섭물로 둥둥 떠오르게 하자, 호명은 검무양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호명이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펼치자 그곳에는 십여 개의 크고 작은 병들이 꽂혀 있었다.

호명이 그중 하나의 병을 꺼내서 마개를 열더니 서찰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자 서찰의 색이 푸르게 변했다.

“추종향입니다.”

그 말에 곽영이 깜짝 놀랐다.

“우리가 이 여인을 찾을 걸 예상하고 추종향을 묻혀두었을 겁니다. 아니면 이 여인이 달아날 것을 대비해서 발라두었을 수도 있을 테고요.”

호명의 말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똑똑한 놈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생이 보낸 서찰이기에 항상 품에 넣어 다닐 테니까.

곽영은 두려웠다.

이 남자가 불같이 자신에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건, 약속을 취소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었다.

그때 서찰이 둥둥 떠서 그녀에게 날아갔다.

엉겁결에 서찰을 받아 든 그녀가 의아한 마음으로 검무양에게 물었다.

“왜 이걸 제게?”

검무양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마지막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뒤늦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태워버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번 읽어보라는 의미임을. 만약 동생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이 서찰이 그녀에게 전한 동생의 마지막 유언이 될 것이니까.

그녀의 마음에 격정이 일었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해 준 검무양이 정말 고마웠다.

“수십 번이나 봐서 이미 내용은 다 외웠어요.”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다시 서찰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화르르륵.

검무양의 열양지기에 허공에서 서찰이 불타올랐다.

그사이 호명은 주머니에서 다른 약병을 꺼내더니 그녀의 몸에 확 들이부었다.

서찰을 품고 다녀서 그녀 몸에도 추종향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냄새를 다른 냄새로 덮어버렸다.

검무양이 앞장서 방을 나갔고, 그 뒤를 곽영과 호명이 뒤따랐다.

무인들은 정찰조와 본대, 후방조로 나뉘어 움직였고, 두 명의 무인은 곽영의 양옆에서 혹시라도 날아들 암기를 대비하며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렇게 백룡단이 들이닥치기 전, 그들은 먼저 장원을 빠져나갔다.

* * *

무한의 최고급 기루 홍화루(紅花樓)에서 한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각진 얼굴, 마치 상처 입은 맹수와 같은 눈빛. 실제로도 그는 마음의 상처가 큰 사람이었다.

기녀들을 들이지 않고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월객이었다.

가족을 마인에게 잃은 그는 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물이었다. 상대가 마인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죽였다. 그 정도로 마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 무한에 오게 된 건 한 사람의 부탁 때문이었다. 평생 누구에게 부탁할 거 같지 않았던 사람의 부탁. 그래서 그 부탁은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마교를 향한 자신의 증오심이 얼마나 깊은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판을 깔아 줄 테니 칼춤을 한 번 춰주시오. 당신이 아니면 막을 수 없는 마인이 무한으로 오고 있소.

한월객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상대가 마인이라면 얼마든지 춰주지.’

그때 심부름을 전하는 무인이 와서 정중히 예를 갖춘 후 보고했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한월객의 두 눈에는 강력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가 마지막 술잔을 비운 후에 차갑게 말했다.

“가서 전하게. 오늘 무한 땅에 들어온 마교 놈들은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 * *

홍화루를 나온 한월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눈에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기루 담벼락에 한 청년이 쪼그리고 앉아서 돌을 뚫고서 피어난 작은 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놓여 있는 건 대나무로 만든 채집통과 몇 뿌리의 약초가 들어 있는 작은 약초 주머니였다. 채집통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들어 있었다.

한월객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성격상 이런 꼴은 못 보는 그였다.

그가 걸어가면서 청년에게 말했다.

“사내놈이 쪼그리고 앉아 뭐 하고 있나?”

그러자 청년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아주 앳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이럴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라. 농땡이 치다간 마교 놈들에게 목이 잘릴 거다.”

평소에도 후배들의 못마땅한 모습을 보면 참지 않는 그였다.

특히 요즘 젊은것들은 선배들의 잔소리를 싫어한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했다. 이 녀석들이 무너지면 정파 무림은 끝장이었으니까.

진심 어린 잔소리를 내뱉고는 한월객은 성큼성큼 걸어서 그곳을 지나갔다.

청년은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보더니 다시 풀을 쳐다보았다.

한월객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한 노인이 청년에게 다가왔다.

“무슨 풀을 그리 보고 계십니까?”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다.

“이거 봐. 비사초(秘莎草)가 이런 데 피어 있어.”

청년은 바로 독왕이었고 노인은 그를 보좌하는 상선이었다.

독왕은 자신의 복장 위에 장삼을 입고 있어서 허리에 찬 독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 평범한 장삼은 이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병장기라 볼 수 있었다.

독왕이 장삼을 벗어 던지는 순간, 열두 개의 독주머니에 그려진 십이지신을 보게 된다면, 상대는 공포에 질려 달아나게 될 테니까.

“정말 비사초군요.”

상선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독왕 옆에 앉았다. 못 보던 독초들을 벌써 여럿 보았다. 독왕이 무한에서 독초를 캘 일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조금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한월객이었다.

급하게 달려오는 그는 마치 중요한 것을 놓고 간 것처럼 다급해 보였다.

근엄했던 그의 얼굴은 다급했고 창백했다.

“비켜라!”

한월객이 독왕과 상선 옆을 바람처럼 지나갔다. 이번에는 잔소리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곧장 홍화루로 뛰어 들어가 뒷간을 향해 달려갔다. 한월객은 생리현상쯤은 스스로 조종할 수 있는 고수였는데, 오늘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급한 날은 처음이었다. 체면도 마인도, 나중 문제였다.

그가 홍화루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상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는 꼼짝없이 뒷간에 앉아 있어야겠군요.”

상선의 말에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처음에 그가 말을 걸며 지나가던 그 순간, 배탈을 나게 하는 독을 하독한 것이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냥 쳐다만 봤을 뿐인데, 그사이에 하독했다.

어떤 의미에서 독왕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의 독이 아니라, 보는 순간 방심하게 하는 그의 앳된 외모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한월객은 이 정도에서 끝내준 게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독왕이 제대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이번에 재미난 독들을 여러 개 가져 나왔지.”

독왕의 말이 아니더라도 상선은 이번 무한행에서 사용될 독들은 색다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검무양의 생사가 오가는 일이 아니라면, 독왕의 독에 죽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 누구보다 독왕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이 무림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무림맹 본단 앞에서 독으로 정파인을 죽였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도.

두 사람이 함께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약초 주머니를 옆에 차고 곤충 채집통을 든 그를 누가 독왕이라 여기겠는가?

“객잔에서 좀 쉬십시오. 대공자의 새로운 은신처가 정해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독왕은 도착해서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검무양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그 사람은 언제 오나?”

“마불님께서는 최대한 빠르게 오고 계신다니 조만간 무한에 도착하실 겁니다.”

독왕의 얼굴에 묘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상선은 당연히 검무양을 지켜주는 일을 분담할 수 있어서 좋아한다고 여겼는데.

독왕의 기대하는 바는 상선이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무한 쪽에만 있는 희귀 독초들 목록 좀 뽑아봐.”

안 들키면 되죠

“대공자께서 두 번째 거처에 무사히 도착하셨습니다.”

군사의 보고에 검무극과 사마명이 안도했다.

원래 있던 중원지형도 옆에 무림맹 본단을 중심으로 무한의 상세 지형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 올라 있는 세 개의 깃발.

가까워질 뻔했던 두 개의 깃발이 멀어져 있었다.

바로 검무양의 깃발과 한월객의 깃발이었다.

그 두 깃발 사이에 하나의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만나서는 안 될 두 깃발을 멀어지게 만든 그것은.

독왕의 마존기.

그래, 저 녹색 깃발이 아니라면 화난 한월객을 살려서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고맙습니다, 독왕님. 돌아오시면 제가 이 한 몸 바쳐 독 실험 실컷 해드리겠습니다.

사마명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위급한 상황은 지나갔으니, 이만 가서 쉬시지요. 천마전의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천마전에서 일을 하던 와중에 긴급한 연락을 받고 통천각으로 왔었다.

천마서각에서 책이나 보면 좋겠지만, 할 일은 하면서 봐야 했다. 독서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뇨, 천마전의 남은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군사님이야말로 쉬셔야 할 거 같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통천각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었기에 사마명은 근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 누적된 피로가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나고 있었다.

“이리 오십시오.”

검무극이 사마명의 손을 잡아끌었다. 함께 간 곳은 일전에 그가 보여줬던 통천각 내 침상이 있는 그의 방이었다.

“잠시라도 눈 좀 붙이십시오. 누우시기 전에 안 갈 겁니다.”

검무극이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사마명은 어쩔 수 없이 침상에 누웠다.

“그럼 임시 교주님께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얼른 자는 척이라도 해야 검무극이 가리라 생각해서 사마명이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검무극의 손이 가볍게 움직였다.

지금까지 검무극이 펼친 수법 중에 가장 부드러운 지풍이 날아가 사마명의 수혈을 눌렀다. 혈도가 눌리는 것을 의식조차 못 한 그야말로 고절한 수법이었다.

스르륵, 자신이 잠이 드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며 사마명은 잠이 들었다.

검무극이 방을 나와서 사마명을 보좌하는 수행 군사에게만 살짝 말했다.

“두 시진 후에 저절로 깨실 거네. 그전에는 무림맹이 쳐들어와도 깨우지 말도록.”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마명이 늙은 몸으로 얼마나 과로하는지 잘 알기에, 수행 군사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통천각을 나선 검무극이 천마전으로 돌아가서 그날 해야 할 일을 처리했다.

다행히 이제 교내 일은 어느 정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어떤 선택을 내릴 때면 항상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그러면 선택이 쉬워졌다. 내 생각이나 주장보다는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 중점을 두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낸 검무극이 이번에는 천마서각으로 향했다. 그의 하루는 바빴다.

검무극은 천마서각에 들어가서 곧바로 책을 골랐다.

독서만큼 취향을 타는 일이 없다. 그래서 매번 좋아하는 류의 책만 주로 읽게 된다.

하지만 검무극은 오늘도 읽을 책을 무작위로 뽑았다.

골라 읽지 않는 독서가 주는 뜻밖의 배움.

관심 분야가 아니라서 절대 읽지 않을 책에서 얻는 색다른 지식과 감흥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느끼지 못할 경험이었다.

검무극은 막연히 느꼈다.

이곳 천마서각에서 책을 많이 읽어서 뭔가를 얻는 게 아니라, 가리지 않고 읽는 선택에서 뭔가를 얻어낼 것이라고.

책을 다 고른 후에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이곳 들판에는 책상 하나, 그리고 의자 하나만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방법을 썼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그물침대를 놓아서 편하게 누워서 읽기도 했고, 침상에 기대서도 읽었고, 따스한 방바닥에서 엎드려 읽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선택한 건 그냥 책상에 앉아서 읽는 것이었다. 이게 제일 편했다.

오늘도 검무극은 읽고 또 읽었다.

무공비급도 읽고, 역사책도 읽고, 시화집도 읽고, 활극책도 읽고, 절세 고수의 자서전도 읽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는 게 많아지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많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분야에 눈을 떴다.

예전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무공비급은 일절 읽지 않았다.

구화마공은 말할 것도 없고 비천검법만 해도 다른 무공을 욕심낼 필요가 없는 극상승의 무공.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무공서들도 읽어보았다. 읽을 가치는 충분했다. 적어도 천마서고에 들어올 정도의 무공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다 읽은 책을 옆으로 두고 다음 책을 펼쳤다.

철추(鐵錘)의 운용 원리.

정말 책장을 넘기고 싶지 않은 제목이다.

추는 저울을 의미하는데, 무림에는 아주 드물게 추를 병장기로 사용하는 무인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것이 추를 사용하는 무인이었다.

그랬기에 보통 무인이라면 책장에서 꺼내지도 않았겠지만 검무극은 달랐다. 가리지 않고 모든 책을 다 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던 검무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급의 제목과 내용이 달랐다. 책의 내용은 비수를 사용하는 무공인데?

검무극이 책의 표지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 표지를 덧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찌이이익.

표지를 떼어내자 그 아래 새로운 제목이 적혀 있었다. 다른 무공비급인데 손이 가지 않을 무공의 제목을 붙여 둔 것이다.

새롭게 드러난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자신도 아는 무공비급이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간절히 바랐던 무공이기도 했다.

“이게 여기 있었구나!”

하늘이 안배한 인연의 깊음에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곧바로 시공이환술을 풀었다.

숨겨져 있던 비급을 챙긴 후 책장에 꽂혀 있던 또 다른 책을 한 권 더 챙겼다. 이 두 권 모두 그를 위한 책이었다.

그 시각 천마서각 밖에서는 호위 책임자 적연이 음식을 가져다 두고 있었다.

자신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이곳에 있을 수도 없기에 이렇게 음식을 입구에 가져다 두면 나중에 빈 그릇을 내놓았다.

검무극은 보통 서너 시진 있다가 나오는데, 그 시간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고 나왔다.

갑자기 식탐이라도 생긴 것일까?

검무극이 요구하는 음식량은 여러 명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김없이 음식은 모두 빈 그릇으로 나왔다.

적연인 혼잣말로 걱정했다.

“이렇게 많이 드셔도 정말 괜찮으십니까? 소교주님.”

그는 알지 못했다. 밖에서는 한 끼지만, 시천비술이 발휘되었기에 여러 끼니가 필요하다는 것을. 밖에서의 한 시진이 안에서는 일곱 시진임을.

그나마 다행은 살이 찌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책 읽는데 그만큼이나 심력 소모가 많으신가?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시길래 이리 폭식을 하시는 겁니까?”

그때 천마서각의 문이 열리며 검무극이 나왔다.

“누구 걱정이겠어? 형 걱정이지.”

적연이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 아니, 임시 교주님!”

검무극이 후다닥 어디론가 달려갔다.

“살면서 형은 두지 마!”

“그게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닌데…… 한데 어디 가십니까?”

“주방에.”

“여기 요리 가져왔습니다!”

“먹을 게 아니라 차릴 거야.”

“네?”

어리둥절한 적연을 남겨두고 검무극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 * *

천마가 식사하는 공간에 식사가 차려졌다.

한 사람을 위해 검무극이 직접 차린 요리였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바로 하얀 가면에 새하얀 무복을 입은 극악소마였다.

요리 앞에 서 있던 검무극이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마님.”

이번에 귀교하고 소마와는 처음 재회했다.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아끼고 아껴두었던 순간이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극악소마가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는 임시 교주라 하지 않고 교주라 호칭했다.

어찌 검무극이 모르겠는가? 굳이 임시란 말을 붙이지 않은 극악소마의 마음을.

아버지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처음으로 임시 교주 자리에 오른 자신을 존중해주는 마음이라는 것을.

“교주란 말, 어색하네요.”

“나중에 지겹도록 들으실 말이지요.”

“그 자리, 말도 마십시오. 그렇게 일이 많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오죽 심란하면 책 싫어하는 제가 천마서각에서 책을 다 읽겠습니까?”

“그래서가 아니겠지요.”

극악소마는 검무극의 심정을 알고 있었다.

“대공자께 달려가고 싶으신 마음을 책을 읽으면서 참으시는 거겠지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말 그런 마음도 있었다. 아무리 독왕을 믿고, 마불을 믿지만. 그래도 형이 걱정되었다.

가면 속 두 눈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가 소교주님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입니다.”

음식을 먹는 곳과 극악소마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소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가 더 의미가 있으리라.

“자, 앉으시지요.”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마주 앉았다.

“제가 전부 직접 만든 요리입니다.”

극악소마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검무극이 야영에서 보여준 요리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근사한 상을 차리다니?

“그날 가면 벗으셨던 날, 제가 요리와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오늘입니다.”

가면 속 두 눈이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은 지나가듯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검무극이 이곳을 선택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본교에서, 아니 이 무림에서 가장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일 겁니다.”

여기서 가면 벗고 편하게 식사하자는 의미였다. 그 누구도 그의 얼굴을 훔쳐보지 못하는 곳.

극악소마를 위한 배려였다.

아무리 친해지고, 아무리 극악소마가 깊은 충성심을 내보여도, 검무극은 이 관계를 방심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예의를 갖추고 잘하려고 애썼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지난번 싸움이 끝나고 가면을 벗었을 때와 지금 가면을 벗는 순간은 또 달랐다.

극악소마가 새하얗게 웃고 있는 가면을 상에 올렸다.

가면 아래에서 드러나는 극악소마의 얼굴.

선한 눈빛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 역시 다시 봐도 잘생긴 극악소마다.

“소교주님과 편하게 술 마실 수 있는 이 날을 오래전부터 고대했습니다.”

극악소마가 먼저 정중히 검무극의 잔에 술을 부어주었고, 검무극도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맑은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시원하게 술을 마신 후, 검무극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드셔보시지요.”

음식을 맛본 극악소마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그러자 검무극이 가져온 두 권의 책 중에 한 권을 꺼냈다. 이 책은 책장에서 챙겨온 두 번째 책이었다.

“천마서각에 이 책이 있더라고요.”

태숙진미록(泰熟珍味錄).

그 책은 바로 과거에 중원에서 가장 유명했던 숙수였던 태중(泰仲)이 지은 요리서였다. 그야말로 숙수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비법서였다.

“여기 적혀 있는 비법대로 요리했지요. 물론 숙수들께서 좀 도와주셨지만요. 저, 이제 소교주에서 쫓겨나도 굶어 죽을 일은 없습니다. 천하일미 숙수로 거듭날 테니까요.”

검무극의 농담에 극악소마가 웃었다. 그 웃는 모습에 검무극은 기분이 좋아졌다.

극악소마는 가면을 썼을 때가 더 멋있고 신비롭다. 하지만 저 잘생긴 웃음이 주는 답답하지 않은 기쁨이 있다.

“참, 이번에 천마서각에서 기연을 얻었습니다.”

“감축드립니다. 정말 감축드립니다.”

극악소마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래, 소마는 슬픔보다 열 배는 더 나누기 힘들다는 기쁨을, 이렇게 진심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랬기에 자신도 이렇게 기분 좋게 이걸 내놓을 수 있는 거겠지.

“저를 위한 기연은 아닙니다.”

의아해하는 극악소마에게 검무극은 품에서 한 권의 책을 내놓았다. 다른 표지에 감춰져 있던 무공비급이었다.

소향비술(笑香匕術).

비급의 제목을 본 극악소마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소마님께 선물로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이 무공을 찾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그대가 내게 말해줬기 때문이지.

회귀 전 인생에서의 극악소마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 했던 그가.

마극광폭장과 혈앙지, 그리고 소향비술.

이 세 개의 무공이 조화롭게 이뤄지면 그야말로 무적의 신위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언젠가부터 소향비술이 실전되면서 후대 극악소마에겐 마극광폭장과 혈앙지만이 전수되었다고.

과거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 소향비술이 천마서각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검무극이 모른 척 물었다.

“이 무공을 찾고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에 싸울 때 소마님께서 비수를 써서 적을 상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비수를 쓰는 좋은 무공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요. 한데 우연히 발견한 이 무공에 웃을 소(笑)자가 들어간 것을 보고 소마님과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져 나왔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제 극악소마의 표정을 전부 볼 수 있었기에 그의 감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극악소마는 검무극과 이렇게 깊은 인연으로 엮여있음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검무극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 고마움은 이번 생이 아니라 다음 생에서까지 갚아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제가 간절히 원했던 비급입니다.”

그의 목소리마저 떨렸다.

‘이건 제가 주는 비급이 아닙니다.’

과거의 그가, 나이 든 먼 미래의 그가,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 무공을 극악소마에게 줄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검무극이 회귀 전 극악소마를 떠올렸다.

‘이제 너무 서러워 마라. 너와는 이런 친구가 되었으니까.’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비급을 내밀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필요하신 거라니까요. 제가 이렇게 운이 좋습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비급을 선뜻 받지 못했다. 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천마서각의 무공비급은 교주님의 허락 없이 함부로 빼 올 수는 없습니다.”

“제가 교주이지 않습니까? 아까 교주라고 부르셨잖아요?”

“아니, 그건.”

검무극의 농담에 극악소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검무극을 위하는 마음이 커도, 검우진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은 여전한 그였다. 검우진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무공을 받으려니 마음에 걸렸다.

생색을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검무극은 소마가 편하게 받기를 원했다.

검무극이 손을 입가에 가리는 시늉을 하며 작게 소곤거렸다.

“이미 천마서각의 책을 도마 어르신께도 한 권 드렸고요. 이 요리서는 천마전 숙수님께 드릴 겁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받으셔도 됩니다.”

검무극이 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밀이라곤 없는 본교에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께 안 들키면 되죠.”

선물을 주려거든 세 개를

“알겠습니다. 비급, 감사히 받겠습니다.”

극악소마가 정중히 비급을 받았다.

아무리 간절히 원하던 비급이었다 하더라도, 만약 주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는 그 수많은 책이 있는 곳에서 딱 이 비급을 가져오는 사람이다. 소교주는 이렇게 깊은 인연으로 자신과 맺어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극악소마는 소향비술을 기쁘게 받았고 그 기쁨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가면을 벗은 오늘, 그는 어느 때보다 활짝 웃었다.

극악소마가 검무극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나중에 교주님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요?”

“어쩌긴요. 이미 때는 늦었죠. 그때면 소마님이 무공을 다 익히셨을 테니까요. 아버지께서 내놓으라 하시면 돌려드리죠.”

검무극의 뻔뻔한 전략에 소마는 웃고 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검무극은 확신했다.

아버지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으실 거다. 대신 그 벌로 다른 일을 시키면 시키시지.

이번에는 검무극이 소마의 잔을 채워주었다.

“축하드립니다, 소마님.”

검무극이 소마에게 하는 축하가 아니라, 무인이 무인에게 하는 축하였다. 자신을 완성할 무공을 얻는 건 모든 무인이 꿈에서라도 바라는 순간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검무극의 선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제 이것이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때가 되었군요.”

검무극이 품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고월의 족쇄를 녹이고 만든 만년한철 비수였다.

“소마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소마는 이 비수가 어떤 비수인지 알았다.

“이건 소교주님께 의미가 있는 비수 아닙니까?”

“맞습니다.”

족쇄를 처분할 당시 함께 있었던 사람들과 비수를 만들어서 나눠 가졌다.

“한데 이걸 저를 주시는 겁니까?”

“의미가 있는 물건이니까요. 의미 없는 물건을 소마님께 드릴 수는 없죠.”

의미가 있어 못 주는 게 아니라, 의미가 있어서 준다는 뜻.

함께 나눠 가졌던 이들도 모두 이해해 줄 것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극악소마가 극구 사양했지만 이미 주기로 마음먹은 검무극이었다.

“저야 검을 쓰고, 검을 쓰지 않을 때는 권법을 쓰니까. 사실 이 비수를 쓸 일은 과일을 깎을 때뿐입니다. 만년한철로 태어난 비수인데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검무극이 비수를 내밀었다.

“부디 이 비수를 구해주십시오.”

그래도 극악소마는 여전히 받지 않았다. 오늘 받은 소향비술만 해도 너무나 큰 선물이었으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날을 잡으며 비수 손잡이를 보여주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소마님.”

손잡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笑).

하아, 하는 탄식이 극악소마에게서 흘러나왔다. 소교주님, 어찌 이렇게나 큰 애정을 주십니까?

결국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그는 검무극이 내민 비수를 정중히 받았다.

그렇게 만년한철 비수가 제 주인을 찾았다.

검무극은 그날이 기대되었다. 소마의 손에 들린 저 비수에서 소향비술이 발휘되는 그날이. 그의 세 무공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완벽한 무인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이.

“참, 그거 아십니까? 교칙에 선물을 주려거든 세 개를 주라고 나와 있다는 걸요.”

“그런 교칙도 있습니까?”

“임시 교주가 되어서 찾아보니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검무극이 탁자 아래 미리 준비해 두었던 커다란 상자를 열었다.

여러 칸으로 나눠진 상자에 들어있는 것들은 영약이었다.

일전에 검왕과 함께 내려갔던 지하보고에서 챙겨 왔던 바로 그 영약들이었다.

그때 검왕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입에 넣어봤자 다 헛수고다. 그냥 먹을 수 있을 때 너나 다 먹어.

하지만 지금 주려는 입은 내 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의 입도 아니다.

마존들에게 한뿌리씩 나눠줄 수도 있었지만,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소향비술을 자신이 발견하게 될 운명이었다면? 이 영약을 극악소마에게 주는 것도 운명일 것이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검무극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딱 한마디만 했다. 소마를 설득한 가장 강력한 한마디를.

“강해지십시오.”

순간 극악소마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검무극과 함께 몇 번이나 생사의 순간을 넘어섰던 그였다.

자신들이 누굴 상대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고, 말도 안 되는 강한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랬기에 검무극이 더욱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 소교주는 지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더 강해져서 나와 함께 싸우자고.

극악소마 역시 긴말하지 않았다. 선물을 사양하지도 않았다.

그는 탁자에 놓여 있던 새하얀 가면을 천천히 다시 얼굴에 썼다. 그도 딱 한 마디만 했다.

“강해지겠습니다.”

* * *

검무양은 여전히 무한을 벗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거처는 첫 번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히려 무림맹 본단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멀리 달아날 거란 예상의 허를 찌른 것이다.

검무양은 창가에 서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바깥을 쳐다보았다.

곽영은 말없이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세상 무뚝뚝한 등.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의 등이 이렇게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언제나 밝고 당당한 것이 자신인데.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 건 미안함 때문이다. 동생의 서찰에 추종향을 발라두었을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이들은 큰 위험을 겪을 뻔했고.

화났나요?

아니다. 화난 사람에게 화났냐고 묻는 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그건 알아서 뭐 해! 그래, 자신이 물어볼 말이 아니다.

결국 그녀가 찾아낸 말은 이것이었다.

“저를 이용해서 놈들을 잡으세요.”

너무 당연한 말이었을까? 무뚝뚝한 등은 여전히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다.

검무양은 그녀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를 살려둔 이유가 있을 거로 예상했었다. 그 이유를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그때 지단주 호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

“백룡단이 무한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처는 철저하게 숨겨진 천마신교의 안가가 아니기에 결국 저들의 수색에 발각되게 될 것이다.

“이곳이 발각되기까지 얼마나 걸리겠소?”

“빠르면 하루, 많아 봐야 이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호명이 곽영을 쳐다보았다.

“저 여인이 맹으로 돌아가면 수색이 중단될 겁니다.”

그들의 수색은 곽영을 찾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러자 곽영이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저 안 나가요.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어요.”

그녀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나가면 죽게 될 것임을.

“창고에 숨어 있으라면 있고, 땅을 파고 대롱을 물고 있으라고 해도 있을 거예요. 대신 돌아가라고 하지 마세요.”

검무양과 호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버티는 건 자신의 말처럼 이기적인 결정이다. 동생을 살릴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저 남자였으니까.

“제가 나갈게요. 대신 약속은 꼭 지켜줘요.”

그러자 검무양이 나직이 말했다.

“나가면 죽는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동생을 살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이었는데.

“너 말고 네 동생이 죽는다.”

“너는 우리하고 있을 때 이용 가치가 있으니까.”

그 말을 듣자 곽영은 깨달았다. 당장 지금만 해도 자신은 이용 가치가 있었다. 이들을 백룡단에 쫓기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동생의 생명을 담보로 다른 요구를 해올 수도 있을 테고.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에 동생을 살려둘 것이다.

곽영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마인인데 너무 똑똑해!”

무심코 말을 내뱉은 그녀가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검무양이 눈빛에 황당함이 스치자 그녀가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떠올린 말이 튀어나왔어요.”

다행히 때마침 수하가 방으로 들어와서 통천각에서 온 소식을 전했다.

“통천각에서 위조 무기를 만든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곽영의 진술을 토대로 통천각에서 장소를 분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창고 건물에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미 텅 비어 있을 테니까.

“창고 소유주는?”

“소공(蘇公)이란 자입니다.”

이름을 듣자 곽영은 깜짝 놀랐다.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무림맹 철방에 자재를 대는 상인인데.”

자신과는 안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무림맹 철방과 거래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놈들과 한패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호명이 검무양에게 말했다.

“제가 가서 잡아 오겠습니다.”

“나와 함께 갑시다.”

상대가 상대이니만치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검무양이 나갈 때 곽영이 오히려 큰 소리로 말했다. 아까 실수했다고 주눅 들지 말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거다.

“잘 다녀오세요!”

검무양은 그녀를 힐끗 쳐다본 후 말없이 그곳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그녀가 혼잣말로 나직이 말했다.

“사람이 말하면 좀 받아도 주시고요.”

* * *

소공이 잠에서 깼다.

복면을 쓴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호명이었다.

소공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내지르려는데,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의 아혈이 제압당해 있었던 것이다.

“소리 내면 너만 죽는 게 아니라 이 집에 있는 사람 다 죽는다.”

이보다 더 무서운 협박은 없었기에 소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호명이 그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소공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에는 또 다른 복면인이 있었다. 검무양이 구석의 의자에 앉아 소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요?”

평생 상인으로 잔뼈가 굵은 그였다. 아직 죽이지 않았다는 건, 자신에게 뭔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일 것이다.

질문을 한 사람은 호명이었다. 그는 앞뒤 다 자르고, 알고자 하는 것을 물었다.

“창고, 누구에게 빌려줬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딱 잡아뗐지만 이미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호명이 곧바로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고문할 때 누르는 혈도였다.

밀려드는 끔찍한 고통에 소공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비명이 쏙 들어가게 하는 무서운 말이 호명에게서 흘러나왔다.

“네 소리에 깨서 달려오는 사람은 다 죽는다.”

소공이 이를 악물었다. 밀려드는 끔찍한 고통에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잠시 후 호명이 어깨에서 손을 떼자 소공은 그야말로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말할 수 없소.”

그의 말이 모른다에서 말할 수 없다로 바뀌었다.

호명이 이번에는 그 혈도를 더욱 강하게 눌렀다.

일개 상인인 그가 한 번은 버틸 수 있었지만, 두 번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도 단주요!”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었다.

“도 단주? 어느 도단주?”

호명의 물음에 소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룡단 도 단주입니다.”

검무양도 놀랐고 호명도 놀랐다.

백룡단의 단주 도인수.

그의 이름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앉아 있던 검무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공에게 다가왔다. 그 기세에 질려 소공이 재빨리 덧붙였다. 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도 단주가 맹의 일이라고 빌렸소. 비밀작전을 수행 중이니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고 했소.”

가까이 다가간 검무양이 소공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 아니오. 제발 살려주시오.”

검무양은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백룡단주는 거짓말로 나올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으니까.

검무양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왔다 간 걸 밝히면 일이 복잡해질 거다. 상인이니 그 정도 계산은 하겠지. 그냥 나쁜 꿈꿨다고 생각하도록.”

수혈을 제압당한 소공이 잠이 들었다.

검무양과 호명은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밀히 소공의 집을 나왔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숲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복면을 벗었다.

호명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이 일에 백룡단주가 개입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놈이 애초부터 악인일 수도 있고.

앞서 곽영에게 그랬듯, 놈들이 백룡단주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느 쪽 경우라도 쉽게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이었다. 자칫 문제가 커지면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호명은 검무양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내심 긴장했다. 백룡단주 거꾸로 매답시다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이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테니까.

그리고 호명의 예상대로 검무양은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단서가 백룡단주로 이어지니 그를 만나봐야겠지요.”

검무양의 말에 호명이 정중히 대답했다.

“네! 통천각에 그자에 대한 모든 정보 요청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 거처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잠시 후 그곳에 한 남자가 빠르게 날아와 소리 없이 그곳에 내려섰다.

그 경신법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백의 장삼을 휘날리며 내려선 그는 키가 아주 컸다. 얼굴도 크고 눈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는데 허리에 찬란한 푸른색 검을 차고 있었다.

그가 바로 한월객과 함께 이번에 무한으로 온 절대고수 벽산검이었다.

통천각 작전실에서 꽂혀 있던 푸른 깃발이 바로 그였다.

“고얀 것들! 오늘이 너희들의 마지막 날이 될 거다.”

벽산검이 다시 은밀히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가려던 그때.

그가 흠칫 멈추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이곳에 있었다.

“나와라.”

과연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처께서는 항상 자비를 베풀라고 하셨지요.”

나무 뒤에서 황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 옛날 성질 나오게 하지 마라

황금빛 광채 끝에서 마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는 순간 벽산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대 부처는 단 한 번도 자비를 베푼 적이 없지 않나?”

마불이 손에 든 염주알을 굴리며 대답했다.

“오해네. 우리 부처께서는 이 불쌍한 중생을 자비로 대하시지. 아주 가끔 혈기를 못 참으실 때가 있긴 하시지만.”

마불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왔다.

두 사람이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벽산검의 키가 워낙 컸기에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다. 둘의 이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과 제일 작은 사람이 마주 서 있는 거 같았다.

“못 본 사이 키가 더 큰 것 같네, 친구.”

“누구 마음대로 친구인가?”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

마불은 젊은 시절부터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고수와 교류했다.

오죽하면 새외의 풍천교주와 친구로 지냈겠는가?

“우리가 몇 번이나 봤지?”

벽산검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 번.”

“이 험난한 무림에서 살아서 세 번 만났으면 친구지. 아닌가?”

벽산검의 반응은 냉랭했다.

“오늘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자넨 너무 경솔해.”

마불은 본래 사람의 감정을 건드는 말을 잘 내뱉었다. 그래서 상대의 속을 곧잘 뒤집어 놓곤 했다.

“세 번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심기를 건드렸지.”

그러자 마불이 차분히 물었다.

“내가 한 말에 틀린 말이 있었나?”

벽산검의 표정이 꿈틀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심기를 건드린 거였다. 정곡을 찌르는 말을 툭툭 내뱉었으니까.

“올려다보고 있자니 목이 아프군.”

마불이 뒤로 돌아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잠시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아마 자네 키 때문에 더 그랬을 거네. 내가 못 가진 걸 자네가 뺏어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더 미운 말을 했었지.”

예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기에, 벽산검은 오히려 마불을 경계했다.

“수작 부리지 말게.”

이해한다는 듯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말을 한 것도 검무극의 영향 때문이다. 키 이야기를 스스로 꺼낸다? 정말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벽산검이 웅혼한 내력을 일으키며 호통쳤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는 지금 절대 밟아서는 안 될 땅을 밟고 있다!”

애초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무한에 들어온 마교 놈들을 뿌리 뽑기 위해서였다.

바위에 앉아 있던 마불이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땅 안 딛고 있는데.”

마불의 다리가 짧아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물론 벽산검은 농담으로 받지 않고 조롱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래, 너는 원래 사람을 조롱하길 즐겼지.”

마불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대가 오늘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나?”

벽산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대공자라는 걸 알고 있었군.”

마불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며 황금빛이 감돌았다. 원래 그의 독문무공인 황금대라마공의 대성을 이룬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벽산검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그는 마불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

“무림맹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한 땅에 들어왔으면 죽어도 싸지. 당신도 마찬가지고.”

그가 기도를 발출했다. 풀과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렸고, 순식간에 주위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번도 마불과 생사결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에, 그와의 싸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벽산검의 손이 천천히 검 손잡이를 향했다.

그는 뼛속까지 정파의 고수였다. 한월검만큼은 아니지만, 마교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마불은 언젠가 한 번 크게 손을 봐주고자 했던 상대였다.

“그 칼 뽑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알고 있겠지?”

마불의 물음에 벽산검이 차갑게 대답했다.

“사마외도 척결은 내가 평생 걸어온 길이다. 후회할 일 없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마불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 점은 존중하네. 자넨 훌륭한 정파인이지.”

마불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벽산검이 흠칫했다.

확실히 오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하는 눈빛으로 마불을 노려보았다.

마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 사이로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나는 요즘 삶이 느긋해졌네. 예전의 내가 아니지.”

벽산검은 그런 마불을 조롱했다.

“줄 끊어진 연 신세가 되어서 그렇겠지.”

마불이 대공자를 지지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당신이나 대공자나 쓸모가 없어지지 않았나? 내가 죽여주면 당신네 마교에서는 오히려 고마워할 거 같은데.”

검무양을 들먹이자 마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벽산검.”

마불이 차갑게 그를 부른 후.

“좋게 말하고 있는데 내 옛날 성질 나오게 하지 마라.”

벽산검은 적어도 저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잘 안다. 저 말을 해도 될 만한 실력을 지녔다는 것도. 성질이 더럽다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대공자를 쫓았음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거였다. 오늘 이 자리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하는 자리다.

“바뀌어 봤자지.”

벽산검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마교 놈들 고쳐 쓰는 거 아니지.”

그때 마불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좋게 말하면 좋게 알아들어야지, 어디서 지랄염병을 떨고 있나?”

그렇게 쏟아낸 후 마불이 탄식했다.

“욕해서 미안하네. 요즘 너무 위축되고 움츠러들어 있었거든. 오랜만에 자네를 보니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군.”

그래서 검무극이 가라앉지 말라고 자꾸 말했었나 보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라고.

“미친놈.”

벽산검이 검을 겨눴다.

검과 하나가 된 벽산검을 보며 마불이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거 아나? 밖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 본교가 많이 변했네. 특히 요즘 마존들 사이에 더 강해지는 게 유행이지. 다들 무공에 미쳐 있어.”

마불이 바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 유행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알게 모르게 나도 애를 썼다네. 내가 또 지는 건 딱 질색인 사람이라서.”

마불의 몸에서 새로운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평소의 황금빛과 싸울 때의 황금빛은 그 색의 깊이가 달랐다.

허공에서 진동한 벽산검의 검 날을 타고 푸른 강기가 물결처럼 흘렀다.

벽산검이 마불에게 쇄도하려던 그 순간!

강하게 쏘아져 나간 건 마불의 염주알이었다. 염주알이 반으로 조각나며 떨어졌다.

슉슉슉슉슉슉슉!

염주알이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적중당하면 그대로 몸이 뚫려버릴 위력의 공격이었다.

벽산검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수십 가닥의 검선이 순식간에 생겨났다. 염주알이 반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마지막 염주알을 잘랐을 때, 벽산검은 보았다.

빈손이 된 마불의 양손이 어느새 수인을 짓고 있었음을.

황금대라마공!

살법회인!

마불의 양손에서 황금빛 강기가 휘몰아쳐 날아갔다.

쇄애애애애애애애애액!

물결처럼 퍼져나간 강기를 그냥 막을 수는 없었다.

벽산검법(碧山劍法)!

벽산풍림(碧山風林)!

그의 검에서도 푸른 강기가 쏟아져 날아갔다.

그렇게 황금빛 강기와 푸른 강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무가 꺾이고 바위가 굴렀으며 흙먼지가 일었다.

쇄애애애액.

그 먼지를 가르며 벽산검이 쇄도해 들어왔다. 마불을 상대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접근해서 저 수인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때 벽산검은 보았다.

이미 마불의 손에 또 다른 수인이 지어져 있었음을.

천공서인(天空誓印)!

허공에서 정수리를 향해 벼락처럼 내리치는 한 줄기 강기.

마불을 찔러가던 그가 신형을 틀었다.

꽈아앙!

벽산검이 벼락처럼 빠르게 강기를 머금은 검을 휘둘러 막았다. 손목이 끊어질 것 같은 충격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마불은 훨씬 강했다.

‘어떻게든 저 손을 잘라야 해!’

벽산검이 다시 쇄도하며 날아들었다. 번쩍하는 순간 마불의 앞까지 쇄도했는데, 다른 번쩍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법광인!

순간 마불의 몸에서 태양보다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밤이었기에 그 빛은 더욱 강렬했다.

벽산검이 눈을 질끈 감으며 검을 휘둘렀다. 눈이 아니라 감각으로 마불을 베었다.

쉬이익!

‘빗나갔다!’

그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다시 절초를 발휘했다. 공격이 곧 방어이기에.

벽산회륜(碧山回輪)!

휘리리리리리릭!

벽산검이 그 자리에서 회오리처럼 돌며 사방으로 검을 날렸다.

파파파파파파팍!

사방으로 날아간 수십 가닥의 검기가 나무와 바위에 박혔다.

파파파파파파파팍!

있을 만한 모든 곳을 향해 검기가 날아갔지만 마불의 살이 찢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디냐?’

찰나 간 마불을 시야에서 놓친 그였다.

뒤쪽 잘린 나무 너머에서 빛나는 황금빛 광채를 찾아냈을 때.

마불은 이미 수인을 완성한 상태였다. 양 손가락이 복잡하게 얽힌 가장 화려한 수인을.

마장멸인!

후우우우우우우.

거대한 기운이 짓쳐오며 벽산검의 몸 주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대한 황금 불상의 손바닥이 그를 내리치고 있었다.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광채!

이미 피하기는 늦었다. 벽산검이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뒤집히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가 가라앉자 그곳에 벽산검이 서 있었다. 그는 움푹 파인 손바닥 모양의 거대한 구덩이 속에 있었다. 깊이가 사람 키의 몇 배는 되었다.

위로 뛰어오르려던 벽산검이 왈칵 피를 쏟아냈다. 그는 내상이 깊어 더는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죽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비틀거리던 그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 그는 보았다.

구덩이 위에서 이제는 마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마불은 엄청나게 큰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당했다고?’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명백한 실력 차를 느꼈다. 싸움은 저 작은 염주알을 날려서 이 거대한 손바닥을 내리칠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상대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최소한 박빙은 될 줄 알았는데, 그는 한 수 위였다.

저 위에서 마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들려오는 마불의 말소리.

“다행히 유행에 뒤처지진 않은 것 같은데.”

마불이 다시 수인을 짓는 모습을 보며 벽산검이 눈을 감았다.

‘완벽한 패배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끊을 강기가 날아들 줄 알았는데.

휘이이이익.

그의 몸이 황금빛 물결을 타고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부드럽게 마불 앞에 내려섰다.

벽산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죽이지 않는 거냐?”

“죽일 거 같았으면 저 아래에서 이미 죽었겠지.”

마지막 한 수 만큼은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벽산검은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마불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렇게나 강했었다고?”

마불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얼굴은 편안했다. 죽일 듯 싸우던 기세는 이미 모두 사라진 후였다. 싸움 내내 환하게 빛났던 그의 광채는 이미 잦아들어 있었다.

후계자 싸움 이후, 마불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다. 검무극과의 만남에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고. 석상을 깎으면서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고.

평생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게 마불의 삶이 변하면서 무공도 변한 것이다.

마불은 모든 걸 내려놓았기에 더 강해졌다.

“나를 살려준다 해도 누가 불러서 왔는지는 말해주지 않을 거다.”

“안 물을 거네.”

벽산검이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걸 묻기 위해 자신을 살려주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자네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혀내는 건 대공자 일이네. 나는 대공자가 자기 일을 할 수 있게만 해주려고 온 거고.”

마불은 벽산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자, 이제 선택하게. 이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건가?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겠나?”

벽산검은 대공자를 죽이려 했고, 또한 마불도 죽이려 했었는데.

“나를 살려준다고? 왜?”

마불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우리 부처께서는 가여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헛소리 말고!”

마불이 솔직히 대답했다.

“자네 말대로 여긴 무한이니까.”

벽산검이 무한에서 마존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나는 순간, 정파 무림은 불같이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놈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를 일.

“그래도 자네가 원한다면 죽여주지. 큰 문제가 생기겠지만 어떻게든 수습될 거네. 결국 죽은 놈만 억울하다는 것, 자네도 알잖아?”

마불이 차분하게 그를 설득했다.

“대공자가 왜 무한까지 와서 이 난리겠나? 무림맹을 무너뜨리려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생각해 낸 일이 고작 대공자를 무한에 보내 정파 무림을 무너뜨리는 거라고?”

잠시 사이를 두고 벽산검이 물었다. 자신이 없는 물음이었다.

“……아니면?”

“자넬 부른 사람은 뭐 때문이라고 하든가?”

벽산검은 마불의 말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너를 부른 그 사람을 믿어서 왔느냐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들이 정말 대단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 자신을 살려주진 않았을 것이다.

한참을 말이 없던 벽산검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돌아가겠네. 고향으로 돌아가 삼 년간 나오지 않겠네.”

마불은 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자신에게 졌기에 돌아갔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핑계를 대며 돌아갈 테니, 적어도 자신이 무한에 온 것이 알려지진 않을 것이다.

“이번이 네 번째니, 우리 다섯 번째 만났을 때는 술 한잔하세.”

마불을 응시하던 벽산검이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걸어갔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그를 마불이 불렀다.

“이봐 친구.”

벽산검이 돌아보자 마불이 담담하게 말했다.

“다음에도 대공자는 안 돼.”

벽산검은 마불의 깊어진 눈빛에서 그가 얼마나 대공자를 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또한 마불은 그러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무한이 아니라, 무림맹 맹주전 앞이라도 내 손에 죽을 거네.”

말을 마친 마불이 공손히 합장한 후 뒤돌아서 걸어갔다.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벽산검이 다시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개의 깃발이 다시 멀어졌다.

네가 부른 사람은 언제 오나?

“믿어 지지가 않아요.”

곽영은 이번 일에 백룡단주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앞서 철방에 자재를 대던 상인이 개입된 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백룡단주가 배후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이 사람이 혹시 나를 속이는 건 아닐까?’

얼마나 믿기지 않으면 이런 생각이 다 스쳤을까?

하지만 곽영은 이 남자를 믿었다. 그랬기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저 사람이 나를 속이려면 속절없이 속고 말겠구나.’

우리가 몇 번이나 봤다고. 그녀는 지금 백룡단주가 아닌 이 사람을 믿고 있다.

“정말 당신이 말한 게 아니었다면 저는 믿지 않았을 거예요.”

원래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검무양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한마디 해주었다.

“그렇게 아무나 믿다간 이 무림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거다.”

잠시 사이를 두고 곽영이 말했다.

“당신은 아무나가 아니라 제 동생을 살려줄 은인이잖아요? 믿어야죠.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당신은 믿어야죠. 세상 사람 다 당신을 욕해도 저만은 욕 안 할 거예요.”

검무양이 빤히 쳐다보자 곽영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부담 주는 거 맞아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요.”

그녀를 바라보던 검무양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방으로 호명이 들어왔다.

“백룡단주에 대해 통천각에서 보낸 자료입니다.”

검무양이 호명이 건넨 몇 장의 종이를 받아서 읽었다. 그것에는 백룡단주에 관한 신상정보가 담겨 있었다. 성격은 어떻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단주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아내는 일찍 죽었고 딸이 하나 있군.”

그러자 곽영이 소리쳤다.

“딸이 납치되었을 거예요.”

당연히 모두가 그렇게 여길 거로 생각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네?”

“이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일일 수도 있잖아?”

검무양의 물음에 곽영은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백룡단주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항상 자신을 보면 웃는 얼굴로 편하게 대해줬으니까.

한데 생각해 보면 백룡단주에 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냉정하게 따지면 지금 자료를 읽은 저 남자가 십여 년 이상을 알고 지낸 자신보다 더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리라.

정말 협박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이었을까?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백룡단주를 만날 거다.”

“그가 당신을 만나줄까요?”

백룡단주가 그를 만나줄 리도 없고. 설령 만나더라도 수많은 고수를 매복시켜 두겠지.

그러자 검무양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백룡단주를 만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다.”

곽영은 깜짝 놀랐다.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만난 이래 한 번도 농담 같은 걸 한 적이 없었으니까.

“너를 이용해서 놈들을 잡으라고 네가 말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녀도 안다. 이렇게 쫓기듯 숨어 있어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동생의 행방을 알아내려면 이 단서를 쫓아가야 했으니까. 지금 놈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백룡단주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제가 나가면 동생이 죽는다고 하셨잖아요?”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가라고요?”

역시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원망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그리 쉽게 약속을 깰 사람이 아님을 잘 알았기에.

“동생을 구해주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곽영은 검무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어봐.

지난번에는 죽어도 내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소리쳤었다. 대롱이라도 물고 흙 속에 있으라 해도 있겠다고.

한데 이번에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음에도 자신에게 시키는 거니까. 이건 해야 하는 일이다.

“좋아요, 대신 한 가지 약속을 더 해줘요.”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기왕 살리는 거, 저도 꼭 살려주세요.”

* * *

“여기 죽 내오게.”

손님의 요구에 반점 주인장은 죽은 팔지 않는다고 말하려다 흠칫 놀랐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에 각진 얼굴을 한 무인이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화가 가득했다.

주인장은 이런 손님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네, 금방 해서 올리겠습니다.”

무인은 바로 한월객이었다.

온종일 뒷간을 들락거리다가 이제 겨우 진정되었다. 정말 이렇게 심하게 배탈이 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력으로 조절이 안 된다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

설마 누군가 일부러 자신에게 배탈이 나게 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홍화루에서 술과 안주를 먹다가 탈이 났으니, 그곳을 발칵 뒤집어야 했는데. 이렇게 참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한월객이 배탈이 났다더라, 온종일 뒷간만 들락거렸다더라.

무림에 그런 소문이 도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주인장이 죽을 가져왔다.

그렇게 죽이라도 한 그릇 먹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고작 하루 굶었다고 이렇게나 허기가 지다니.

그때 꼬마애 하나가 반점으로 들어오더니 한월객에게 쪽지를 전했다.

“어떤 무인분께서 전해주시라고 했어요.”

그리고는 쪼르르 달려 나갔다.

한월객이 쪽지 내용을 확인한 후 열양진기로 태워버렸다.

화르륵.

어제 죽이지 못한 마교 놈들, 오늘 싹 다 죽여버리면 된다. 그 비루한 목숨들, 자비를 베풀어 하루 더 연명하게 해준 거다.

한월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점을 나섰다.

입구로 걸어가는데 낯익은 청년이 밥을 먹고 있었다.

‘어디서 봤지?’

그때 청년 옆에 놓인 채집통과 약초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아! 그때 그 녀석이군!’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풀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에 이럴 시간에 검이나 휘두르라고 충고를 해줬던 그 녀석. 물론 그는 독왕이었다.

그냥 지나쳐 가려다가 한월객이 다시 돌아서서 독왕에게 걸어갔다.

배탈이 나기 직전에 만났던 사람이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수작을 부렸다면 이렇게 다시 얼굴을 보일 리 없을 텐데.

누군가 앞에 서서 노려보는지도 모른다는 듯, 독왕은 고개를 숙인 채 밥만 먹고 있었다.

“이봐.”

한월객이 부르자 그제야 독왕이 고개를 들었다.

“왜 내 주위를 얼쩡거리지?”

독왕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한월객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기억하는데 상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은근히 짜증 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감히 나를 기억하지 못해?

기분이 나빴지만, 그렇다고 이 일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 머리가 나쁘면 약초라도 부지런히 캐야 먹고 살겠지.”

한월객이 돌아섰다. 그는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얼굴 좀 기억 못 했다고 이렇게 쏘아붙일 일인가? 참 옹졸하다, 옹졸해.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돌아가서 미안하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반점을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한월객이 팔을 긁기 시작했다. 모기에 물린 것처럼 간지러웠는데,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팔이 근질거리다가 이번에는 등이 근질거렸다.

‘젠장, 갑자기 왜 이렇게 간지럽나?’

소매를 걷어보니 팔에 좁쌀 같은 두드러기가 잔뜩 나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설마? 죽 먹은 게 또 탈이 났나?’

팔 뿐만이 아니었다. 등과 배, 다리와 엉덩이까지. 온몸이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체면이고 뭐고 길에 서서 몸을 벅벅 긁어댔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멀리 돌아서 피해 갔다. 너무 간지러워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내공을 끌어올려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자신이 아는 어떤 방법으로도 이 간지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길에서 점을 보고 있던 노인이 그에게 말했다. 정말 간지러움도 잊게 할 말이었다.

“선생께서는 와서는 안 될 곳을 왔소이다.”

한월객이 몸을 긁으면서 점쟁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제법 눈빛이 깊은 것이 신기가 있어 보였다.

“뭔 소리요?”

점쟁이 노인이 한월객에게 말했다.

“마귀를 쫓으러 왔다가 마귀가 씌어버렸소.”

한월객은 잠시 멍하게 서서 점쟁이 노인을 쳐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냐며 버럭 하지 못한 이유는 마귀를 쫓으러 왔다는 걸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어서 무한 땅을 떠나시오.”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헛소리 집어치우시오!”

간지러워 환장하겠는데, 이 늙은이는 또 무슨 소리인지. 정말 오늘 다들 왜 이러나?

노인과 이야기를 더 나눠야 했지만, 한월객은 이제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의원을 향해 경공을 발휘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월객이 떠나자 독왕이 와서 노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점쟁이 노인은 바로 독왕을 보좌하는 상선이었다.

“저 사람은 오늘도 꼼짝 못 하겠군요.”

의원에 가서 해결할 수 있다면 어찌 그가 독왕이라 불리겠는가? 무림맹 신의라도 오면 모를까. 오늘 하루는 몸 긁다 볼일 다 볼 것이다.

“원래는 덜 괴로운 걸로 해주려 했는데.”

한월객이 입을 잘못 놀린 결과였다.

상선은 미소를 지으며 독왕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나오기 그렇게나 싫어하면서도, 막상 나오면 뭐든 이렇게 잘 해내는 독왕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상선의 말에 독왕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귀신이라도 보면 자네 점괘를 믿겠지.”

* * *

“곽 장인이 돌아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룡단주가 깜짝 놀랐다.

정말 수하를 따라 곽영이 들어서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잠시 외부 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제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 말에 백룡단주는 물론이고 함께 있던 무인들도 모두 놀랐다.

“그럼 납치된 게 아니란 말인가?”

“보시다시피요.”

백룡단주가 그녀를 살폈다. 다친 곳 하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은 사실처럼 보였다.

“대체 누가 그랬나요? 제가 납치되었다고?”

“자네가 납치되는 걸 목격했다는 익명의 제보가 있었네. 제보를 받고 자네 거처를 확인하니 자네가 없었고.”

“엉터리 제보였어요.”

백룡단주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이렇게 돌아왔으니 다행이네.”

백룡단주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수색 중단하고 맹으로 돌아간다. 곽 장인을 모실 마차를 준비해라.”

명령을 받은 수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른 지역을 수색하는 이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명령을 전달했다.

백룡단주가 곽영에게 말했다.

“자, 우리와 함께 돌아가세.”

“괜히 저 때문에 고생만 하셨군요.”

“자네가 무사했으니 됐네.”

두 사람은 마차를 탔고, 수하들이 마차를 호위하고 갔다.

곽영은 아무리 봐도 백룡단주에게 수상한 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물었다.

‘이 사람이 악인이라고?’

이번만큼은 그 남자가 잘못 짚은 것 같았다. 다시 만나보니 알 수 있었다. 백룡단주는 좋은 사람이었음을.

그렇게 돌아가던 길에 백룡단주가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먼저 돌아가라.”

그렇게 백룡단주가 마차와 수하들을 먼저 돌려보냈다.

“자넨 나와 잠깐 이야기 좀 하세.”

마차가 멈춰 섰던 곳은 처음 검무양이 숨었던 그 장원이었다.

두 사람이 장원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공사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요?”

그러자 백룡단주가 냉담하게 말했다.

“자네도 알잖아?”

“무슨 말씀이신지요?”

“놈들이 처음 자네를 끌고 온 곳.”

그는 그녀가 납치당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건가?”

“거짓말 아닙니다.”

백룡단주의 표정이 변했다. 이 사람에게 이런 차가운 표정도 있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 표정이었다.

“그자들 지금 어디에 있나?”

백룡단주의 추궁에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질문을 모두가 있는 데서 하지 않고, 이런 곳에서 둘만 있을 때 하는 거죠?”

“자넬 위해서지.”

곽영의 표정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제가 그들과 한패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닌가?”

그러자 곽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단주님과 한 패죠.”

순간 백룡단주의 표정이 흠칫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단주님이 제 편이라는 것을.”

백룡단주는 말없이 곽영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서 곽영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정말 그들과 손을 잡았구나.

“저를 의심했다면, 이렇게 혼자 계시면 위험하지 않나요?”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말소리.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지.”

건물 뒤에서 검무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호명과 지단 무인들이 뒤따라 나왔다.

하지만 백룡단주는 그들의 등장에도 전혀 놀라거나 겁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 반가움이 스쳤다.

“이 여인을 이용해서 나를 끌어내려 했겠지만, 이미 예상했던 바다.”

그 말에 곽영이 놀란 마음으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함정을 팠는데 역으로 함정에 걸린 것이다.

검무양은 무덤덤한 얼굴로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룡단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오셔서 이 마귀 놈들을 다 없애주십시오!”

그가 믿고 있는 사람은 한월객이었다. 그라면 이곳에 있는 마인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아는 한월객은 정파를 대표하는 절대 고수였으니까.

“나와주십시오!”

하지만 한월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룡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드시 오리라 믿고 이번 일을 진행한 거였는데. 반드시 온다고 했는데.

“누군지 몰라도 안 온 모양이군.”

바로 그때!

천천히 장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왔다!’

기뻐하던 백룡단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들어선 사람은 한월객이 아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그는 너무 놀라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한 가지 생각에 미쳤다. 저 마인들과 한편일 리는 없으니.

‘한월객 대신 이 사람을 보냈구나!’

백룡단주는 내심 정말 놀랐다. 그의 영향력이 이 사람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게.

놀랍게도 그곳에 등장한 사람은 멸마대주 진하군이었다.

장원의 담장 위로 무인들이 빙 둘러 올라섰다. 그들은 멸마대 무인들이었다.

호명과 지단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며 검무양 주위를 둘러쌌다.

백룡단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진 대주님! 어서 마교의 악적들을 없애시지요!”

진하군과 검무양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수하 무인들 사이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거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무양의 시선이 진하군에서 백룡단주를 향했다.

“네가 부른 사람은 언제 오나?”

뜻밖의 질문에 백룡단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하군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 무슨 미친 소리냐? 여기 계시지 않느냐?”

그러자 검무양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저 사람은 내가 부른 사람이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오

누가 누굴 불렀다고?

백룡단주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무슨 헛소리냐!”

버럭 소리친 후, 백룡단주가 자신의 옆까지 걸어들어온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진하군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나왔다.

“그렇소.”

백룡단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멸마대가 한월객을 대신해서 왔어야 했는데.

‘늦게라도 한월객이 와야 한다.’

그가 와서 이런저런 말이 오가기 전에 저들을 공격해 버린다면? 한월객이 얼마나 마교를 싫어하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싸움이 벌어지면 멸마대는 한월객을 도와 싸우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마교 편을 들지는 않을 테니까.

‘제발 와라!’

지금 한월객이 어떤 상황인지 안다면 하지 않았을 애원이었다.

놀란 건 백룡단주만이 아니었다. 곽영과 지단 무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대공자가 멸마대주를 불렀다고?

검무양의 명령으로 통천각을 통해 진하군에게 기별하도록 한 호명만이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곽영의 시선이 멸마대주를 향했다. 무림맹 소속인 그녀는 저 멸마대주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무림맹주의 손자이면서 가장 유력한 무림맹주 후계자.

그런 그가 이끄는 멸마대는 무림맹 최고 정예였다. 그래서 철방에서 품질이 가장 좋은 무기는 언제나 멸마대부터 먼저 지급되었다.

‘그런 사람을 당신이 불렀다고요? 오란다고 오는 사람이 아닌데. 대체 당신이 누구길래요?’

곽영은 놀란 마음으로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준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그가 백룡단주에게 물었다.

“도 단주께서는 저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모릅니다.”

그러자 진하군이 차분히 말했다.

“천마신교의 대공자요.”

백룡단주가 깜짝 놀랐다. 아니, 놀라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는 상대가 검무양이란 걸 알고 있었다. 상대가 평범한 마인이었다면 자신이 직접 처리하지 한월객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작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곽영이었다.

‘저 사람이 마교의 대공자라고?’

그 말은 곧 차기 천마의 형이라는 의미. 마교의 후계자 다툼이 평화롭게 끝났다는 건 한때 무림의 화제였으니까.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 함께 지냈던 남자가 마교의 대공자란 사실은. 그런 사람에게 소리도 지르고, 살려달라고 떼도 쓰고.

천마가 될 뻔했던 사람에게 그랬던 거였다.

‘아니, 사람이! 그런 대단한 신분이었으면 미리 말을 좀 해주지. 나 이런 사람이야, 자랑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 둘만 있었다면 저 말을 했을 거다.

검무양이 먼저 진하군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소.”

“잘 지내셨습니까?”

진하군은 검무양에게 예를 갖췄다. 지금의 인사는 천마신교의 대공자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의 형에게 한 인사였다.

“와주셔서 고맙소.”

“당연히 와야지요.”

진하군은 문득 삼자회합에서 검무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 우리 형이 무뚝뚝하오. 당신 많이 닮았지.

정말 내가 저 사람을 많이 닮았나? 아직 그와는 사적인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알 수 없었다.

검무양에게 전서를 받았을 때 의외라 생각했다. 정말이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연락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전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천마신교의 암기를 위조해서 파는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추격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이들이 무한에 들어온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아무리 천마신교가 작전 중이라 할지라도 무한만큼은 작전 금지 구역이었으니까.

검무극이라는 존재가 완충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 분위기는 훨씬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으리라.

백룡단주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진 대주께서는 마교의 대공자와 어떤 사이시오? 친분이 있어 보이십니다만.”

이 물음에는 분명 의도가 있었다.

‘멸마대주를 불렀다? 오히려 그게 악수가 되도록 해주지.’

백룡단주는 진하군의 가장 큰 약점을 끄집어냈다.

“진 대주께서 마교의 대공자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파 무인들이 크게 동요할 겁니다. 이 사실을 맹주님도 아십니까?”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맹주의 눈 밖에 나거나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을 저지르면 후계자가 될 수 없다.

그 점을 노려 멸마대주가 검무양과 친분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의도가 통했는지 진하군이 항변하듯 검무양에게 물었다.

“그 일이 여기 백룡단주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백룡단주가 그 조직에 포섭되어 있다고 생각하오.”

검무양의 대답에 멸마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룡단주를 향했다.

그러자 백룡단주가 당당하게 목청을 높였다.

“그대가 아무리 마교의 대공자라 할지라도 말조심하시오. 내게 그런 누명을 씌운다는 것은 정파무림을 무시하고 본맹을 업신여기는 짓이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백룡단주가 자신의 뜻에 동조해 달라고 진하군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무림맹을 언급했다. 맹의 명예가 달린 문제가 되면?

‘무림맹 후계자 자리가 걸려있는 한, 멸마대주는 내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그 말에 동조하는 대신 진하군이 질문을 던졌다.

“도 단주께서는 그 조직이 어떤 조직인지 알고 있으시오?”

“아뇨, 모릅니다.”

진하군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하면 왜 어떤 조직인지 묻지 않으시오? 가장 먼저 그것부터 궁금했을 텐데.”

순간 백룡단주는 흠칫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 점을 놓치고 있었다.

이내 백룡단주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보나 마나 마교 놈들이 만든 조직이겠지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진하군이 다시 물었다.

“누굴 기다리고 계셨소?”

“무슨 말씀입니까?”

“아까 제가 도착했을 때 들었소. 단주께서 누군가에게 나와 달라고 하셨잖소?”

순간 백룡단주는 말문이 막혔다. 아까 한월객이 있는 줄 알고 나와달라고 소리쳤었다. 그걸 진하군이 들었던 모양이다. 누구라고 해야 하지?

“이자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게 누군가 있는 것처럼 위장했던 거였습니다.”

임기응변으로 대답했음에도 진하군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그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대주께서도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평생 맹을 위해 충성한 나를요!”

소리칠수록 약해 보이고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진하군의 시선이 다시 검무양에게 향했다.

사실 검무양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를 믿음이 가는 이유는 검무극 때문이다.

검무극이 그토록 살리고 싶어 했던 형이었으니까.

“증거가 있으시오?”

“위조 암기를 만든 곳을 저 백룡단주가 빌렸소.”

검무양의 대답에 백룡단주는 다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이오! 막말로 내가 그 조직이었다면, 내가 직접 빌렸겠습니까?”

그때 누군가 차갑게 말했다.

“위선자!”

모두의 시선이 그 말을 한 곽영에게 향했다. 그녀는 앞서 그와 단둘이 있을 때 그가 놈들과 한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믿었었는데.”

진하군은 당연히 곽영을 알고 있었다. 철방에 드문 여인인 데다가 최연소 장인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백룡단이 무한을 수색한 것도 그녀 때문임을 알고 있다.

“곽 장인은 어떻게 연루된 거요?”

진하군의 물음에 그녀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가 어쨌든 맹의 명예를 실추했으니까.

그녀가 크게 심호흡한 후에 솔직히 말했다.

“제가 위조 무기를 만들었어요.”

진하군은 의외라 생각했다.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 동생이 놈들에게 납치되었어요.”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있는 그였으니 어찌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이해할 수 없던 건 이것이었다.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소?”

대답을 대신한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무림맹 최고위층에 놈들의 수장이 있다고 생각하오.”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백룡단주가 얽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더 윗선이 관계되어 있다?

이 순간 곽영은 고민했다. 진하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할까? 제발 동생을 살려달라고. 동생을 위해서 그게 최선일 텐데.

한데 검무양과 했던 약속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마교의 대공자가 한 약속인데 또 다른 사람에게 구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 검무양이 곽영에게 불쑥 말했다.

“나는 두 번째 약속만 지키겠다.”

두 번째 약속이라면?

곽영은 그것이 기왕 살리는 거 자신도 꼭 살려달라는 부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첫 번째 약속은요? 그게 더 중요한 약속이라고요.

그 약속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진 대주. 이 여인의 동생을 구해주시오.”

진하군도 놀랐고 곽영은 더 놀랐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오. 사람을 구하는 건, 진 대주가 훨씬 잘하는 일이지 않소?”

그 순간 진하군은 검무양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백룡단주의 일 처리나, 고위층에 있다는 그 수장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라면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해내려 했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을 불렀다는 건?

어쩌면 저 여인과의 약속을 지켜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활동에 제약이 있는 그들이 누군가를 구하는 것보다 자신과 멸마대가 구하는 게 훨씬 더 가능성이 컸으니까.

‘당신이 이런 사람이었소?’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자신이라도 이런 선택을 했을 거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구해야 하는 목숨이었으니까. 어쩌면 검무극이 그래서 닮았다고 했던 것일지도.

이윽고 진하군이 차분히 말했다.

“알겠소. 동생분은 우리가 꼭 구해내겠소.”

무림맹 철방 소속인 곽영의 일이기에 자신들이 나설 명분도 있었다.

곽영은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주님.”

이렇게 기뻐하면 검무양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가장 뛰어난 무인들이 멸마대 무인들이었다.

또한 진하군이 얼마나 협의로운 무인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동생을 위해서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곽영이 진하군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검무양에게 돌아섰다.

여전히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뚝뚝한 남자가 자신의 동생을 구해주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을.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으면서 말이다.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할 것 같은 이 남자가.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다면 평생 당신을 위해 병장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순간 그녀가 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검무양을 위해 한마디 진술을 더 했다.

“백룡단주는 그들에게 포섭되었어요.”

“그걸 어떻게 아시오?”

진하군의 물음에 그녀는 백룡단주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이곳에서 저 사람의 다른 얼굴을 보았으니까요.”

증거가 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백룡단주는 코웃음을 쳤다.

“진 대주, 저 여자는 마인들에게 넘어간 상태요. 섭혼술을 당했을 수도 있고, 협박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설마 제 말을 안 믿으시고 저 마인들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진하군은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요.”

“가시지요, 저는 뭐든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백룡단주는 내심 안도했다. 이곳을 벗어나 맹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다.

진하군은 검무양에게 이만 우리에게 맡기고 이대로 돌아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가 무한에 무단으로 들어온 일은 어떻게든 자신의 선에서 무마할 작정이었다.

그때 검무양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 조사, 우리에게 맡겨주시오.”

순간 흐르는 정적.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알았다. 백룡단주를 자신들이 직접 심문하겠다는 의미.

“불가하오.”

진하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른 건 양보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저자가 잡혔다는 걸 알게 되면 놈들은 모든 꼬리를 끊어버릴 거요.”

그러면서 곽영을 쳐다보았다.

진하군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의 동생부터 죽게 될 거란 말임을.

“그전에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하오.”

이 싸움은 시간 싸움이란 의미.

아직 죄가 밝혀지지 않은 백룡단주를 고문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정말 검무양의 말처럼 수뇌부에 이자들의 수장이 있다면 꼬리를 잘라버린 그놈은 영영 찾지 못하게 될 거다.

“우리에게 딱 한 시진만 주시오.”

진하군이 옆에 선 백룡단주를 쳐다보았다.

“정말 나를 넘길 건 아니겠지요?”

진하군이 아무 대답이 없자 백룡단주는 다시 약점을 건드렸다.

“나를 저들에게 넘기는 순간, 진 대주의 후계자 자리는 끝장날 겁니다. 마인에게 백룡단주를 넘긴 멸마대주, 과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어도 아니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소! 난 결백하오!”

진하군이 그의 혈도를 제압했다.

그리고는 검무양에게 단호히 말했다.

“딱 일각 주겠소.”

검무양과 지단 무인들이 그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되는 이유는 수도 없었지만 되는 이유는 단 하나.

진하군은 본능을 따랐다. 이 선택이 옳다는 자신의 본능을.

멸마대 무인들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잘 알았다.

만약 백룡단주가 아무 죄가 없다면?

그 후폭풍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진법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진하군과의 유대가 깊어진 멸마대 무인들은 그 누구도 이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각 후.

검무양이 건물에서 걸어 나오며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놈이 실토했소.”

나는 이것들과 끝장을 볼 생각이오

정확하게 일각이었다.

모두 놀란 표정으로 검무양을 바라보았다. 검무양의 손에 묻은 피로 볼 때, 직접 고문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검무양이 천천히 진하군에게 걸어갔다.

진하군은 백룡단주가 실토했다는 말에 내심 안도했다.

그가 거짓말하고 있을 거로 의심했지만, 만약 그 의심이 잘못된 것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우선은 백룡단주의 생사부터 물었다.

“그 사람은 살아있소?”

검무양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소.”

그가 죽었다면 그건 자신을 믿고 맡긴 진하군에게 큰 결례를 하는 셈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놀라웠다.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멀쩡한 채로 자백을 받아냈으니까.

“그 사람이 뭐라고 실토했소?”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양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멸마대 수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해도 되느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진하군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배후는 당신네 고위층이 아니었소. 무림맹에서는 아무런 직위도 없는 사람이었지.”

진하군이 내심 안도하면서 동시에 의아했다. 맹의 수뇌부가 아닌데, 왜 백룡단주가 그들에게 포섭당한 것일까?

곧이어 검무양의 입에서 상상도 못 할 이름이 나왔다.

“천애거사(天涯居士) 화율청(華律淸).”

충격을 받은 진하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정말이오? 정말? 진하군이 검무양을 노려보듯 쳐다보다가.

“그럴 리 없소.”

오히려 진하군은 차분해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화율청은 정파의 절대고수다. 무공은 물론이고 인품까지 훌륭해서 수많은 무인이 그를 존경한다. 심지어 그는 재산이나 권력을 탐하지도 않았다. 돈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악행을 저지른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분은 할아버지의 오랜 친우시오.”

무림맹주 진패천과 가장 친한 친구였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두 사람이었다. 아마도 손자인 자신보다 그를 더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배후라고 지목했으니, 어찌 진하군이 믿을 수 있겠는가?

멸마대 무인들은 물론이고, 곽영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정파 무인 중에 천애거사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진하군이 단호히 말했다.

“그자가 거짓을 고한 것이 틀림없소.”

진하군은 검무양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떤 불의한 목적으로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닌가 하고. 아니다, 이건 속고 싶어도 속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백룡단주에게 직접 들어야겠소.”

“그러시오.”

진하군이 건물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고, 그 뒤를 검무양이 뒤따랐다. 그리고 멸마대 무인들과 지단 무인들 역시 뒤따라 들어갔다.

넓은 방 가운데 백룡단주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가 말로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반쯤은 초주검이 되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는 멀쩡했다.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고 눈빛에 생기도 돌았다. 다만 그의 옷은 흥건히 피에 젖어 있었다.

진하군에게 반가운 기색을 보였던 그가 뒤따라 들어온 검무양을 보자 기겁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앞서 큰소리치던 백룡단주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진하군이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도 단주, 괜찮소?”

백룡단주는 울컥 감정이 격해졌지만 그걸 표출하지 못했다. 뒤에 서 있는 검무양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다.

“내가 있으니 괜찮소. 그러니 다시 말해보시오. 누가 배후에 있소?”

두려움과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백룡단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무 이름이나 댔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말을 하고 난 그가 오열했다. 누가 봐도 억울함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진하군이 검무양을 돌아보았다. 백룡단주의 번복에도 검무양은 그를 다그치지 않았다. 그가 진술을 바꾸리라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였다.

과연 검무양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래서 난 사람을 믿지 않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누구 말을 믿을지는 네 선택이다. 이런 느낌이었다.

진하군은 백룡단주를 맡겼을 때까지만 해도 검무양을 믿었다. 믿었기 때문에 넘겨준 것이고.

한데 지금은 고민이 되었다. 정말 검무양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천애거사’라는 그 무거운 이름 때문에.

백룡단주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제 충성심을 믿어주십시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하군이 백룡단주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대를 오해한 것 같소.”

진하군이 검무양을 대하던 태도를 돌변했다.

“천애거사께서 배후에 있다니? 하마터면 마인들에게 속을 뻔했소.”

차가운 눈빛으로 검무양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수작이 통할 거라 여겼소?”

그러자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서 지단 무인들에게 겨눴다. 지단 무인들 역시 검을 뽑았다.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펼쳐졌다.

하지만 숫자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지단 무인들이 멸마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몰살은 시간문제.

검무양은 깊은 눈빛으로 진하군을 응시할 뿐이었다. 허공에서 얽히는 두 사람의 시선.

갑작스러운 상황에 곽영은 당황했다. 자신이 나서서 소리치고 싶었다.

‘저는 대공자를 믿어요!’

백룡단주가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직접 확인했었으니까. 자신의 목숨이라도 걸고 보증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서지 못했다. 지금은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동생을 구해주기로 한 것은 저 멸마대주였다.

진하군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룡단주에게 사과했다.

“도 단주. 내가 미안하오.”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제 충심을 알아주셨으니 됐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죽다 살아난 얼굴이었다. 그의 성격이면 이런 상황에서 검무양에게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공포가 얼마나 깊게 각인되었는지 그는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돌아가시면 의원부터 가셔서 치료하시오. 나는 이번 일을 맹주님께 보고드리겠소.”

순간 백룡단주가 흠칫 놀랐다. 맹주에게 이 일이 들어가면 자신이 자백한 사실이 천애거사에게도 들어갈 것이다. 고문당했다고 홀랑 이름을 댄 사실이.

“제가 귀한 분의 이름을 댔다는 건 말씀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소. 맹주님께는 일의 전모를 다 말씀드려야 하오. 하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사정을 들으시면 고문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댔다는 걸 이해해 주실 거요.”

백룡단주는 다시 애원하듯 부탁했다.

“굳이 귀하신 분께 심려를 끼쳐드릴 필요 있겠습니까?”

진하군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부드럽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혹 살인멸구라도 당할까 봐 두려우시오?”

진하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백룡단주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정곡을 찔린 자의 숨길 수 없는 그 당혹감을.

진하군이 그를 추궁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해 아무 이름이나 댔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천애거사님이라고? 그걸 변명이라고 한 거요? 그걸 믿을 정도로 내가 멍청해 보였소?”

천애거사는 음모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 아무 이름이나 댈 때 나올 만한 이름이 아니었다.

게다가 앞서 검무양은 무림맹의 최고위층에 저들의 수장이 있다고 말했다. 이름을 대도 그들 중에서 아무나 대었겠지.

그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천애거사의 귀에 자신이 자백한 사실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모습에서, 그가 진짜 배후로 천애거사를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진하군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정말 배후에 천애거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뜬금없이 나온 이름이었으니까.

백룡단주는 마지막까지 애원하고 변명했다.

“아닙니다. 제발! 오해이십니다! 저는 다만…….”

변명을 듣기 싫다는 듯 진하군이 그의 수혈을 눌렀다.

백룡단주가 바닥에 쓰러지자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검을 거둬라.”

지단 무인들을 포위하고 있던 그들이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지단 무인들도 내심 안도하며 검을 거뒀다. 잠깐 사이에 생사의 갈림길을 오갔던 그들이었다.

진하군이 검무양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저자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연기를 했을 뿐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오.”

놀랍게도 검무양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럴 거라 믿고 있었소.”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양이 대답했다.

“무극이 친구니까.”

진하군이 검무극의 형을 믿는 것처럼, 검무양 역시 검무극의 친구를 믿었다.

“내 동생이 아무나와 친구가 되진 않았을 테니까.”

정말 검무극이 들었다면 온종일 자랑하고 다닐 말이었다.

이렇게 오해는 풀었지만, 여전히 진하군의 마음은 무거웠다.

‘정말 천애거사라고?’

백룡단주가 실토했음을 확인하고 나서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검무양의 물음에 진하군은 아직은 나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질문을 다시 검무양에게 되돌려주었다.

“어떻게 하실 거요?”

원래라면 우리 일이니 그대들은 모두 무한에서 물러가시오, 라고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큰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을 테니까.

검무양의 눈에 저 멀리 있던 곽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대로 떠난다 해도 진하군이 그녀를 지켜주고 동생도 구해줄 것이다.

진하군을 도울 필요도 없다. 무림맹 내부 일이니 그가 처리해야 할 일.

하지만 이번에 직접 출교한 이유가 남아 있었다.

그 위조 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죽일 뻔했다. 그 분노는 놈들을 모두 없애지 않는 한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결심의 이유로 충분했다.

“나는 이것들과 끝장을 볼 생각이오.”

* * *

마불은 생각에 잠긴 채 홀로 앉아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무한 인근 산속의 빈 오두막이었다. 벽산검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그는 잠시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몸에서 뿜어지는 황금빛 광채는 조절할 수 있지만, 작은 키는 감출 수가 없었다.

수많은 고수가 오가는 무한이기에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까 봐,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계시오?”

“들어오시오.”

오두막으로 들어선 사람은 독왕이었다. 이곳 무한에 와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본교에 있을 때는 주로 마불이 독왕을 찾아갔었는데, 오늘은 반대였다.

“분위기가 참 좋소.”

괜히 어색해서 한 말이었지만 사냥꾼이 비워둔 이 썰렁한 오두막이 무슨 분위기가 좋겠는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천독림에서 같이 독초 캐러 다닐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자주 보지 않아서 다소 어색해진 두 사람이었다. 원래 관계로 돌아간 것이다.

그때 마불이 구석에 있던 망태기에서 뭔가를 가져오더니 슬그머니 독왕에게 내밀었다.

“아까 산책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길래.”

그것은 서너 뿌리의 독초였다.

“마생초(魔生草)군요!”

독왕이 이곳 무한에서 꼭 캐어가려고 만들어둔 목록 중에 있는 독초였다.

아무리 찾으려고 노력해도 안 보이던 것이, 산책하는 마불의 눈에는 이렇게 잘 띈다.

“정말 고맙소.”

독초가 등장하자 어색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독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리 나가서 산책이나 하시겠소?”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하는 독왕의 모습에 마불이 옅게 웃었다. 독초와 관련되면 눈에서 빛이 났다. 저렇게 독을 좋아해야 독왕이란 이름을 달 수 있는 거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식사는 하셨소?”

“아직이오.”

“출출한데 간단히 요기하고 산책합시다. 잠시 기다려 보시오. 별 건 없지만 요기는 될 거요.”

마불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보니 망태기에 몇 가지 버섯이 들어 있었다. 아마 독초를 캐면서 함께 캤던 모양이다.

우선 오두막 앞 모닥불에 불을 피워 물을 끓이고 버섯을 익혔다.

“마생초도 주셨으니, 식사는 제가 대접해야 하는데.”

“요리하실 수 있으시오?”

독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식사를 만드는 건 언제나 상선이었다. 반면 마불은 손놀림이 능숙했다.

“요리를 많이 해보신 솜씨요.”

“중원을 떠돌아다니며 혼자 밥 먹을 일이 많았소.”

마불이 워낙 눈에 띄는 외모라서 주로 야영을 하며 허기를 채웠던 것이다. 이번에 나올 때도 야영할 때 쓸 기본적인 양념은 챙겨서 나왔다.

세상이 어찌 알겠는가? 숲속 어딘가에서 홀로 요리하던 키 작은 사람이 마불이었다는 사실을.

독왕은 마불이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래 다른 마존들은 일절 관심 없는 그였는데, 마불만큼은 달랐다.

뚝딱 만든 요리지만, 마불의 버섯요리는 훌륭했다.

“맛있소.”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오.”

독왕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어서 다 먹고 마불과 나가서 함께 독초를 캐러 다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상선이 와서 통천각에서 보낸 긴급 전서의 내용을 전했다.

“대공자가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이번 일의 배후에 천애거사가 있다고 합니다.”

담담한 독왕과 달리 마불은 깜짝 놀랐다.

그는 천애거사가 정파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또 무림맹주와 얼마나 깊은 우정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의외군요.”

마불의 말에 독왕이 두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한월객과 벽산검.”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애거사쯤 되어야 한월객과 벽산검을 불러들일 수 있었을 거다.

만약 정말 그가 개입한 거라면?

이번 일은 훨씬 위험해졌다.

“그렇다 해도 대공자는 끝까지 가려 할 겁니다.”

자신이 아는 대공자는 하던 일을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독왕은 말없이 앞에 놓인 마생초를 만지작거렸다. 산책하러 가자던 눈빛과 지금의 눈빛은 또 달랐다. 그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전면에 나서야 할 수도 있음을.

마불은 자신이 와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떠올렸다.

독왕이 나서지 않게 하는 것.

하지만 일이 이렇게 커지면? 자칫 오해가 쌓이고 일이 잘못 풀리게 된다면?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짙어졌다.

“우리의 적은 천애거사가 아니라 무림맹주가 될 거요.”

더 잘생겨졌고 더 무서워졌다

검무극은 들판에 서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신안술을 익혀 아무리 많은 책을 봐도 눈은 피곤하지 않은데, 날고뛰고 강호를 활보하던 사람이 궁둥이 붙이고 있으려니 그게 고역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렇게 서서 읽는 것이었다. 그조차도 지겨웠기에.

검무극이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걷는 게 아니라 위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허공답보로 천천히 허공을 걸어 다니며 책을 읽다가 이번에는 침상에 눕듯 몸을 던졌다.

검무극은 허공 위를 뒹굴었다. 누워서도 보고, 엎드려서 읽기도 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구름이 그를 받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발휘하면서 또 이런 신위를 발휘하며 책까지 읽고 있었다. 물론 무공수련을 하지 않았기에, 넘쳐나는 내공으로 펼치는 일종의 유희였다.

검무극은 지금까지 수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삼 분지 일은 무공과 관련 없는 책이었고, 나머지 삼 분지 이는 무공비급이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고비가 몇 번이나 왔었다. 무공수련보다 더 힘든 책 읽기. 지루하고 힘들고 답답하고. 그럴 때마다 찾아오는 강렬한 유혹.

―책 좀 읽는다고 도움이 되겠어? 너! 이럴 여유가 있냐?

하지만 검무극은 포기하지 않았다.

회귀 전 인생에서 홀로 그 먼 길을 걸었던 그였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으니까.

아마 이대로 계속 책을 읽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그 책이 어디 있었더라, 하시면 여덟 번째 책장, 네 번째 칸에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 있는 책을 다 읽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곳에서 책만 계속 읽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지.

“도마 어르신, 제가 교주가 되면 우리 어르신께는 천마서각을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게 허가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실컷 읽으십시오. 다 읽으십시오!”

혈천도마가 아니었다면 책 읽기에 관심도 없었을 테고, 이곳에 들어올 생각조차 안 했을 거다. 이번 수련은 혈천도마 덕분이다.

게다가 이 모든 책은 이미 검증된 양질의 책들.

검무극이 읽은 비급 중 몇 권은 지금 무림에 풀리면 혈겁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극강의 무공들이었다. 당장 지금 읽고 있는 이 단월검법(斷月劍法)만 해도, 삼백 년 전 무림을 휩쓸었던 검술이었으니까.

허공에서 비급을 읽고 있던 검무극이 바닥으로 내려섰다.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벼락처럼 빠르게 흑마검을 출수했다.

번쩍하는 순간 공간을 수직으로 가르는 한 줄기 검광.

쏴아아아아아아아.

들판의 풀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누웠다.

쩌어어어어어억.

그와 동시에 땅바닥이 일직선으로 저 멀리까지 쫙 갈라졌다.

갈라진 단면을 살펴보던 검무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검을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억!

이번에는 앞서 갈라진 옆으로 새롭게 땅이 갈라졌다.

두 번째 단면과 첫 번째 단면을 비교하면서 검무극은 두 개의 선 사이에 앉아 고민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세 번째 분열.

세 번째 단면을 확인한 검무극은 이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월검이 달을 베는 순간이었다.

손가락을 튕기자 갈라졌던 땅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무극은 단월검법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음 책을 펼쳐 들었다.

이번에도 무공비급이었다. 근래 무공비급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읽다가 흥취가 나면 조금 전 단월검법처럼 실제로 펼쳐보기도 하고.

처음 읽는 비급이니 초반 초식 정도 펼칠 수 있겠지 싶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심오하고 깊이 있는 초식을 펼치기가 더 쉬웠다. 검무극의 경지가 워낙 높으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쉽게 펼칠 수 있었다.

오히려 쉬운 초식은 그것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졌다. 역시 경지가 높아서였다. 그냥 펼치고 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바꾸면 더 강해질 텐데. 저렇게 바꾸면 더 빠를 텐데.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으니까.

이런 경험도 이번에 처음 했다. 서각에 들어온 이후 겪는 대부분이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기에 이 배움은 검무극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서로 비교도 하고 연구도 하고, 잘못된 부분들을 발견해 내기도 하고.

그렇게 무공비급을 계속 읽다 보니 검무극은 무공의 원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무공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거기서 더 나아가.

무공은 어떻게 계승되며 발전하는가?

이윽고 그 무공들과 구화마공과의 차이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구화마공을 특별하게 하는가?

지금까지 구화마공을 익히면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무공비급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으리라.

원래 강한 무공이니까.

하지만 이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연구하고. 읽고 또 읽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수많은 비급을 읽었기에 가능한 추측.

구화마공이 이래서 강한 것일까?

결론도 아니고 단지 추측만이었는데, 그 순간 검무극은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당장 검을 뽑으라는 격정이 일어났다.

검무극은 당장 책을 내려놓고 구화마공을 펼쳤다.

제일식 인멸식.

모습을 드러낸 네 악귀.

무서운 녀석, 잘생긴 녀석, 신비감을 주는 녀석, 영리해 보이는 녀석까지. 이제는 너무 친근해져서 가족처럼 느껴지는 녀석들.

‘오랜만이다, 동서남북!’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목표한 곳을 사방에서 벤 후에 녀석들이 사라졌다.

언제나 무공경지가 상승하려 할 때면, 이 녀석들에게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그들이 사라지기 직전 검무극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과 달랐다.

뭔가를 원하는 시선.

그것이 검무극의 마음을 간질였다.

검무극은 이 간지러운 느낌이 무슨 느낌인지 잘 알았다. 무공경지가 오를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 드디어 그 순간이 찾아왔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무공경지가 오를 때는 서서히 비탈을 오르는 것처럼 오르는 게 아니라, 어느 한순간 계단 위로 올라서는 것이었으니까.

검무극은 무아지경에 빠져 구화마공을 수련을 했다. 펼치고 또 펼치고. 수십, 수백, 수천 번 악귀를 만났다.

“아, 힘들다!”

검무극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구경하고 있으니 넌 편하지?”

검무극이 말하는 상대는 책상 위에 올려둔 비궤였다. 수련하다 힘들면 이렇게 비궤에게 말을 걸었다.

“뭐라고? 책 좀 읽었다고 구화마공의 성취를 얻을 수 있겠냐고? 차라리 이 시간에 마존을 만나라고? 네가 온 지가 언젠데. 취마가 섭섭해서 술독에 빠졌겠다고?”

여기까지가 비궤의 입을 빌린 악마의 속삭임을 대신 말한 거라면.

검무극 내면의 의지가 속삭였다.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고? 폐관까지 하신 아버지가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하고 계실지. 한데 네가 놀아? 아버지가 나오셨을 때 새파랗게 젊은 저는 힘들어서 쉬었습니다, 이럴 거냐?”

아니지, 절대 그럴 수는 없지.

검무극이 벌떡 일어났다. 처음 회귀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아버지였다. 더구나 아버지도 폐관수련 중이신 지금이라면.

‘아버지, 저도 반드시 해낼 겁니다.’

검무극은 또다시 검을 휘둘렀다.

네 악귀가 하나의 의지로 공간을 베었고, 무서운 악귀들이 일렬로 돌진하며 세상을 휩쓸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벽이 세워지면 짙은 어둠 속을 한 줄기 검광이 갈랐고, 검기 벼락이 비처럼 떨어졌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도 검을 휘둘렀다. 내공이 떨어지면 운기조식한 후 다시 반복했다.

지금 포기하면 동서남북 네 악귀가 두 번 다시 자신을 보며 뭔가를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을 것만 같았다. 녀석들이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날 며칠이 흘렀는지 모른다.

힘들지 않았다. 힘들다고 생각지 않았다.

노력이란 힘듦의 범주에 있지 않다. 정말 힘든 건 노력할 기회조차 없는 상황이다.

검무극은 그동안 책 읽는다고 소홀했던 수련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마치 기를 모아 한 번에 터뜨리는 것처럼.

그 피나는 노력을 오직 비궤만이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운명의 순간!

멍하게 한곳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똑같이 초식을 펼쳤는데 인멸식이 달라져 있었다.

동서남북 네 악귀의 덩치가 더 커졌다.

잘못 본 것인가 눈을 감았다 떠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들은 더 잘생겨졌고, 더 무서워졌으며, 더 신비해졌고, 더 똑똑해 보였다.

쇄애액! 쇄애액! 쇄액! 쇄애액!

그들이 내려치는 검의 위력 역시 훨씬 강해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검무극이 탄성과 함께 내뱉었다.

“……구 성에 올랐다.”

과연 자신에게 뭔가를 원하던 악귀의 눈빛은 다시 차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네 악귀가 사라지기 직전, 고생했다는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았을까?

긴장이 풀린 검무극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검무극은 벌떡 일어났다. 이 귀한 순간을 잠으로 보낼 수는 없지. 너무 좋으니까 잠도 오지 않았다.

꿈이 아니었길 바라면서 다시 구화마공을 펼쳤다.

제이식 대멸식.

촤아악 눈앞에서 펼쳐지는 악귀 역시 몸집이 더욱 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무려 스물여섯.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어마어마한 기세로 전방을 완전히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움푹 파이며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이전과 위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말 구 성에 올랐다!”

검무극이 환호했다. 정말 기뻤다. 그는 하늘이 내린 천무지체가 피나는 노력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여주었다.

노력을 함께 지켜본 것도 비궤였고, 지금 웃어주는 것도 비궤였다.

물론, 이 성취는 책만 읽어서 이룬 게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 때문만도 아니었다.

회귀 전 삶에서 얻은 평생의 경험과 배움.

거기에 이번 생에서 아버지를 비롯해 여러 주위 사람과 나눈 인간관계들, 십이지왕을 상대하면서 경험한 생사를 오간 실전경험들.

이 모든 게 합쳐져서 이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구 성에서 대성을 이루는 것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검무극의 목표는 십 성 대성이 아니다. 십이 성 대성.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검무극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하나의 기대감.

이제 한 단계만 더 오르면 천마혼을 만나게 된다.

과연 나의 천마혼은 어떤 천마혼일까?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만약 어떻게 구 성에 이르렀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입니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어떤 벽을 넘고 계시는 걸까?

‘아버지, 저는 한고비 넘었습니다!’

그때 밖에서 호위 책임자 적연의 보고가 들려왔다.

“통천각에서 급히 찾으십니다.”

* * *

검무극이 통천각에 도착했을 때, 전략지형도에는 새 깃발이 꽂혀 있었다.

형의 깃발 옆에 나란히 꽂혀 있는 새로운 깃발.

멸(滅).

바로 멸마대주를 의미하는 진하군의 깃발이었다.

“두 사람이 만났군요!”

검무극은 형이 진하군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모두가 적인 무한 땅에서 그나마 형을 배려해 줄 사람이었으니까.

“세상 재미없는 무뚝뚝쟁이 둘이 만났군요.”

그 말에 사마명이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만났답니까?”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대공자께서 먼저 기별하셨답니다.”

“형이 먼저요? 그럴 리가 없는데.”

형 성격상 진하군을 먼저 찾았을 리가 없다. 분명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때 무한에서 날아온 새로운 전서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한 사마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표정만으로도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수하 군사가 무한의 전략지형도를 향해 걸어갔다.

무림맹 본단.

그곳에 꽂혀 있는 십여 개의 깃발.

자신의 기를 가질만한 무림맹의 고수들.

그 중앙 맹주전에 용이 그려진 화려한 깃발이 있었다. 용의 중심에 정(正)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무림맹주 진패천의 맹주기였다.

수하 군사가 무림맹주의 깃발 옆에 다른 깃발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무림맹에 없었던 새로운 깃발이었다.

그것도 맹주기 옆자리에.

화(華).

이 싸움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이들의 배후에 천애거사 화율청이 있었습니다.”

사마명의 말에 검무극은 잊고 있었던 그를 떠올렸다.

무림맹주와 가장 친했던 벗, 천애거사.

회귀 전 인생에서 그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십이지왕이 무림을 지배하던 시대에도 그는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맹주 사후에 천애거사의 소식은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맹주의 복수를 위해 나섰다는 소문도, 어딘가에서 봤다는 소문도. 생각해 보니 그는 무림에서 사라졌었구나.

회귀 전, 검무극의 삶에서 무림맹주의 절친한 벗이었던 그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그 이름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저 한 글자 깃발이 검무극에게만 주는 남다른 의미는.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화씨였구나.’

함께 깃발을 쳐다보며 사마명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천애거사를 따르는 정파 고수는 한둘이 아닙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진짜 이번 일의 배후라면, 이번 싸움은 쉽지 않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는 이것이다.

그가 악인임을 세상에 밝혀내지 못한 상태로 그를 죽였을 경우.

천마신교가 무림맹주의 절친한 벗이자 정파의 존경받는 노고수를 살해한 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파 무인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고 그때는 수많은 이들이 타죽고 나서야 불은 꺼질 것이다.

당연히 총군사인 사마명은 이 천애거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맹주와 우정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놈들에게 포섭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요.”

사마명은 이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반면, 검무극은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불쑥 등장한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포섭당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요.”

사마명은 검무극이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포섭당한 게 아니라 음모의 주체일 수도 있다는 의미.

“설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말씀이십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은 이 음모가 수십 년 전부터 계획되었다는 의미였으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해 온 배후 놈들이 아주 오랜 세월 준비했다는 걸 이미 확인했잖습니까? 어쩌면 그 준비의 시작점이 맹주의 옆자리였을지도 모르지요.”

검무극의 말에 사마명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진짜 그런 것이라면? 이번 싸움은 쉽지 않은 싸움 정도가 아니다.

‘하필이면 교주님이 안 계실 때 일이 벌어졌구나!’

두 사람은 잠시 바쁘게 돌아가는 작전지휘실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윽고 사마명이 먼저 침묵을 깼다.

“무한으로 가고 싶으십니까?”

검무극은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지만.

“네, 형에게 가고 싶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보내주시겠습니까?”

검무극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았지만, 사마명은 단호히 거절했다.

“안 됩니다. 대신 마존들을 더 보내겠습니다.”

위험한 상황이기에 사마명은 오히려 더 검무극을 보낼 수 없었다.

검무극은 그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 이해와는 별개로 검무극에게 내려진 운명의 신호도 있었다.

구화마공이 구 성을 이룬 날 이런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제가 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전 독왕님과 마불님만 계셔도 형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가시겠다는 겁니까?”

보내지 못하는 이유가 확실하듯, 가야만 하는 이유도 명확했다.

“천애거사가 배후라면 놈은 틀림없이 무림맹주를 움직이려 들 겁니다. 맹주가 움직이면 무림맹이 움직이고 그럼 정파 무림 전체가 움직이게 됩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걸 노리고 우릴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무림맹 철방의 장인을 이용해서 천마신교의 금용암기를 만들었으니까.

“아마 놈들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 겁니다.”

사마명이 어찌 모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가장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검무극이란 것을. 게다가 소교주는 무림맹주 진패천과의 친분이 깊었다.

그럼에도 사마명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전략지형도의 두 깃발을 향했다.

정(正)과 화(華).

그 주위에 놓인 십여 개의 정파 고수의 깃발들.

지금은 비록 십여 개지만, 무림맹주가 기치를 내거는 순간 중원에 있는 수십, 수백 개의 깃발이 정파 무림을 수호하기 위해 모여들 것이다.

나가 있던 대공자도 불러들이고 싶은 마당에 검무극까지 내보낸다고?

두 사람이 팽팽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던 그때, 무한에서 날아온 새 전서가 도착했다.

“대공자께서 보내신 전서입니다.”

전서가 사마명에게 전해졌다. 내용을 확인한 사마명이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대공자께서 마불님께 지원을 청하셨습니다.”

독왕과 마불이 이미 무한에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기에 본단으로 마불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형 성격 아시잖아요?”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을 사람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처럼 도움을 청했다.

예전의 형이었다면 죽으면 죽었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데 이제 형은 변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진하군을 먼저 불렀다더니, 어쩌면 그것도 이런 마음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형 성격상 지원을 요청했다는 건, 천애거사가 배후라고 확신한다는 겁니다. 또 그만큼 현장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크다는 의미기도 하겠지요.”

깊이 고민하던 사마명이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가십시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마존 두 분을 더 데려가십시오.”

그야말로 정파와의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더라도, 검무극만은 절대 죽게 하지 않겠다는 사마명의 각오가 깃든 제안이었다.

“저와 형, 거기에 마존이 네 분이라. 마정대전을 펼쳐도 되겠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을 사마명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전쟁이 나더라도 임시 교주님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전쟁은 수습할 수 있지만 검무극의 죽음은 수습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사마명의 제안을 사양했다.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임시 교주님!”

“지금 가 있는 사람들만 해도 무림맹을 자극하기에 충분합니다. 여기에 마존들이 더 가게 되면 겪지 않아도 될 문제까지 생길 겁니다.”

사마명은 검무극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인정했다. 그의 말처럼 마존을 보내면 보낼수록 더 큰 위험이 생겨날 상황이니까. 이건 오직 검무극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이점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사마명이 전략지형도를 향해 걸어갔다.

“임시 교주님은 놈들과 싸우러 가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판단하건대 이번 싸움을 힘 싸움이 되게 해선 안 됩니다.”

사마명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깃발 중 천애거사의 깃발을 들어서 무림맹 밖으로 옮겨놓았다.

“이걸 위해서 가시는 겁니다.”

무림맹주가 진실을 알게 하라는 의미.

“그리고 놈들을 없애는 건 무림맹이 되어야 합니다.”

천마신교가 싸움의 중심에 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무림맹주와 대공자를 설득해서 이렇게 만드셔야 합니다. 이 싸움은 무림맹의 싸움이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맹주와 화율청이 오랜 지기(知己)이기에 더욱 그래야 합니다.”

검무극은 사마명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자칫 일이 잘못 풀리면 천마신교가 무림맹주의 친구를 죽였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오랜 우정은 때론 우리의 눈을 가리고 아픈 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까.

“임시 교주님은 그곳에 계시지만 동시에 본교의 천마서각에 계신 겁니다.”

그만큼 은밀하고 안전하게 있다 돌아오라는 사마명의 부탁이었다.

모든 말을 다 듣고 나서 검무극이 정중히 대답했다.

“총군사님의 작전대로 움직이겠습니다.”

표정이 좀 풀어질 법도 했건만, 사마명은 더욱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마군을 최대한 전진 배치하고, 마존들에게도 본교를 떠나지 말라고 미리 기별해 두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곧장 기별하십시오.”

검무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자신이 갔음에도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이미 전쟁이 발발한 후일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검무극은 떠나는 순간에도 한마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임시 교주 일이 너무 많아서 가는 거 절대 아닙니다!”

검무극이 나가자 사마명은 곧장 옆에 있던 수행 군사에게 말했다.

“이 순간부터 통천각 비상 등급을 최고 수준으로 올린다!”

* * *

지난 이틀 내내 간지러움에 잠 못 이루던 한월객이 의방에서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지나서였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곳이 의원의 의방이란 것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정말 죽을 만큼 간지러웠는데, 눈을 뜨자 하나도 간지럽지 않았다. 온몸에 났던 두드러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뭐 때문이었지?’

그러다 문득 점쟁이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마귀를 쫓으러 왔다가 마귀가 씌어버렸소.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난 것을.

그는 자신을 무한으로 부른 사람에게 미안했다. 벌써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자신이 이렇게 신용 없는 사람이 아닌데.

그렇다고 배탈이 나서 못 갔다고 할 수도 없고, 간지럼 때문이라고 할 수는 더욱 없었다.

‘마교 놈들을 말살시키는 걸로 갚는 수밖에.’

이번 일을 만회할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한월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다.

누군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헛!”

누군지를 확인한 한월객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감히 누가 그를 뒷걸음질 치게 하겠는가마는.

한월객은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선 남자는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대는?”

한월객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그저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어떤 놈이 장난질이냐!”

한월객이 버럭 소리치며 일장을 내질렀다.

쇄애애애액.

콰아앙.

뒤쪽 복도의 벽이 박살 났지만, 상대는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월객은 보았다. 자신의 장력이 그를 지나쳐 버리는걸. 그는 환영이었다.

‘귀신?’

그것도 대낮에 귀신이라고? 믿기 어려웠지만 정말이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스슷.

그 남자 뒤로 다른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여인이었다.

그 여인 역시 한월객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에 나타난 남자의 부인이었다. 한월객을 향한 여인의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한월객이 탄식하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가족들이 마인에게 죽고 난 이후에 미친놈처럼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마인들을 죽였다.

당시 악행을 저질러대던 음행귀(淫行鬼)란 놈도 마인이었다. 한월객은 몇 달에 걸친 추격 끝에 놈을 찾아냈다.

그날도 놈은 여인을 겁탈 중이었다.

음적 따위야 손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놈은 생각보다 강했다.

생사혈투를 벌이다 결국 놈을 죽이던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한월객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 뒤에서 달려든 자를 베었다.

남자의 목에 혈선이 그어지며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남자는 여인의 남편이었다.

상대를 확인하지 않고 벤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실수였는데. 그때는 그랬다.

그 좁은 방에서 수십 합을 겨루면서도 여인이 죽지 않게 온 신경을 다 써서 싸웠다. 그 정도나 실력이 있었는데도 왜? 대체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그 남자의 얼굴도, 그 모습을 보며 소리치던 여인의 모습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한월객은 속이 울렁거리며 현기증이 났다.

그때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목에서 혈선이 그어지며 피가 흘러내렸다.

한월객이 미친 듯이 장법을 날렸다.

쇄애액! 쇄애애애액!

쾅! 콰앙!

연속해서 발출된 장력에 사방 벽이 무너져 내렸다.

점쟁이가 했던 말이 마음속에 울려 퍼지듯 들려왔다.

―더 큰 화를 당하기 전에 어서 무한 땅을 떠나시오.

사방 벽이 부서졌다.

무너져 내리던 천장도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귀신들의 모습이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한월객은 폐허가 된 방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앞에 귀신 대신 다른 모습이 보였다.

의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중에 무너진 담장 옆에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는 젊은 의원이 있었다.

그 모습에 한월객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금 전 발작하듯 장력을 쏟아내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한 것이다.

그때 왜 그랬느냐고? 지금도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데?

“하아.”

한월객이 깊은 탄식을 내쉰 후 품에서 가진 전표를 모두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집을 부숴서 미안하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의원을 걸어 나갔다.

그는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한을 떠났다.

멀리 거목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독왕과 마불이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거요?”

“저 사람은 심환영지(心幻靈芝)라는 버섯으로 만든 독에 중독되었소.”

“저 사람이 대체 무슨 환각을 본 거요?”

“나도 모르오. 사람마다 보는 게 달라서.”

한월객이 본 것은 귀신이 아니라 평생을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죄책감이었다.

마불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독왕을 쳐다보았다. 자신은 힘들게 싸워서 벽산검을 돌려보냈는데, 독왕은 싸우지도 않고 그를 돌려보냈다.

한월검을 이렇게 돌려보낼 수 있는 건 오직 독왕의 독뿐일 것이다. 아, 하나 더 있다. 소교주의 입이랑.

“한 번 경험해 보시겠소? 어떤 환각이 보이는지?”

독왕이 진지하게 묻자 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양하겠소. 내 속에 뭐 그리 좋은 게 들어 있다고.”

그때 그들이 있던 거목으로 상선이 날아와 내려섰다.

“대공자께서 본단에 연락하셨답니다.”

그 누구보다 마불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대공자께서 마불님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불은 깜짝 놀랐다.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다.

평온하던 마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공자가 자신을 골랐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한때 가장 가까웠던 마존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다른 사람을 선택했을 때의 그 섭섭함을 생각하면, 이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를 위해 이곳 무한에 와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마불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지만 눌러두었던 은은한 광채가 흘러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내가 간다고 전하게.”

조금만 풀어줘도 이런 식이지

먹구름이 몰려들자 금세 주위가 어두워졌다.

번쩍이는 섬광이 점점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꽝! 콰콰쾅!

하늘은 참았던 천둥을 연이어 뱉어내면서 비를 쏟아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검무양은 창가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하군이 멸마대와 함께 떠나고 검무양과 지단 무인들은 그곳 장원에 남았다.

백룡단주는 진하군이 데리고 갔다. 백룡단주를 자신이 계속 데리고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진하군 역시 그를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을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백룡단주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맹이 발칵 뒤집힐 테니까. 과연 그가 어떻게 처리할까?

자신이었다면 정면돌파 했을 거다. 아버지에게 데려가서 그 앞에서 모든 걸 말하게 했겠지. 그 오랜 우정을 어떻게 수습할지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몫이다.

물론, 검무양은 진하군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곽영의 동생을 구하는 일을 맡겼으면 됐지, 다른 일을 손잡고 할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뒤에서 곽영이 말했다.

“비가 오니까 술 생각이 나는군요.”

사실은 비가 오니까 동생 생각이 간절했다. 어디서 어떻게 있는 걸까?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까? 두들겨 맞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을까? 이 일이 평생의 악몽처럼 동생을 괴롭힐 텐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곽영은 내심 두려웠다. 천애거사라는 이름이 나오기 전만 해도, 이 사람이라면, 그리고 멸마대주라면 동생을 구해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천애거사라니?

평생을 정파 무림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그가 배후에 있다니?

검무양과 진하군이 알아내는 걸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누군가의 음모와 누명이 아닐까?

직접 봐도 이렇게 믿기지 않는데,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천애거사는 정파인들에게 그런 존재였다.

위조 무기를 만들어 돈이나 벌고 납치에 협박까지.

그녀는 상대가 몰려다니며 살점이나 뜯어먹는 식인어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뒤에 있는 건 바다마저 삼켜버릴 것 같은 거대한 고래였다.

“왜 저를 멸마대로 넘기지 않으셨죠?”

그는 자신을 진하군에게 보낼 수도 있었다.

동생을 구해주겠다는 약속은 약속이고, 자신은 철방 장인의 명예를 저버리고 위조 암기를 만든 죄를 지었다. 그쪽에 넘겨버리면 신경 쓰지 않아서 속 편할 텐데.

창밖을 바라보던 검무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거짓말이었나?”

“네?”

“나를 위해 무기를 만들어주겠다는 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곽영은 알 수 있었다. 아! 이 사람, 정말 나를 데려가서 쓸 생각이구나.

“몰랐네요. 당신들 철방이 이렇게 인력난에 시달리는 줄은.”

괜한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별반 다른 말 없이 검무양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위해 무기를 만들겠다는 말은 진심으로 했던 말이다. 마인으로 사는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두렵게 하는 건 이것이었다. 동생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쏴아아아아아아.

그녀는 검무양의 어깨 너머로 쏟아져 내리는 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배후에…….”

‘천애거사가 있는데 과연 멸마대가 제 동생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애거사란 말이 입에 붙지 않았다.

‘멸마대가 내부의 압력으로 그를 조사하지 못하면 어쩌죠?’

괜히 방정맞게 말을 꺼냈다간 실제로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검무양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변한 건 없다.”

만약 그가 천마신교의 대공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허세라 여겼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저 말이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배후에 누가 있든 똑같이 상대할 작정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말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때 지단주인 호명이 들어와서 보고했다.

“화율청의 행방에 대해서 통천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호명이 그 정보를 검무양에게 전했다.

“화율청은 무한의 무소장(無所壯)에 거처를 두고 있습니다. 중원 곳곳을 돌아다녀 일 년 중 대부분을 비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현재는 무한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그가 무한에 있다고?”

“네, 며칠 전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 년 중 대부분을 자리 비우는 사람인데, 며칠 전에 무한에 돌아왔다고? 하필이면 자신이 무한에 와 있던 이때? 과연 우연일까?

검무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가 이번 일에 개입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화율청에 관한 정보를 빠짐없이 다 보내라고 해. 성격, 가족 관계, 무공, 그를 따르는 이들까지 모두.”

“네, 알겠습니다.”

호명이 밖으로 나가자 곽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를 상대하실 건가요?”

검무양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따르는 고수가 많다는 것 아시죠?”

내리친 벼락에 검무양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눈빛은 벼락을 닮아 있었다. 이 남자는 정말 앞에 누가 막아서도 묵묵히 밀고 나갈 것만 같은 그런 남자였다. 변한 건 없다, 한마디 하면서.

이윽고 검무양이 나직이 말했다.

“그런 사람은…….”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 넘겨왔고, 못날 꼴도 많이 보여서 자신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

“나도 있다.”

* * *

진하군이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맹주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언제나처럼 진하군은 할아버지에게 맹주를 대하는 예를 갖췄다.

“어서 오너라.”

손자를 향한 진패천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근래 진하군은 역대 그 어떤 멸마대주보다 훌륭히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한층 더 성숙한 모습이 느껴졌으며, 수하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멸마대의 원래 일정을 바꾸고 돌아왔다고 들었다.”

“네,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진하군에게서 생각지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신교의 대공자에게 기별이 왔습니다.”

대공자가 언급되자 진패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비록 검무극에게 후계자는 밀렸지만, 그가 야망이 큰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암기를 위조해서 만든 후, 중원에 유통한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배후를 쫓고 있는데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진패천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마신교가 자신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무슨 일로?”

“우리 쪽 철방 장인이 개입했습니다.”

진하군은 곽영이 개입했고, 그 이유가 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기 때문임을 보고했다.

“그 일로 대공자가 무한에 와 있습니다.”

진패천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자신의 허락 없이 천마신교의 대공자가 무한에 들어왔다? 진패천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하여튼 그 이들은 조금만 풀어줘도 이런 식이지.”

진패천이 천마신교에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미리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무례함도 무례함이지만, 무림맹의 정보망이 검무양의 행적을 놓친 것에 더 화가 났다.

“그들은 돌려보냈겠지?”

“아닙니다. 아직 무한에 있습니다.”

진패천의 질책이 손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돌려보냈어야지!”

“죄송합니다.”

진하군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못마땅한 것이 아니라 엄격하게 대하는 것임을. 후계자로 삼을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어서다. 할아버지는 후계자로서 단 하나의 오점도 없기를 바라고 계셨으니까.

진패천은 잠시 말없이 진하군을 응시하더니 태사의에서 일어나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손자 앞까지 다가와서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하군아.”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은 맹주가 멸마대주를 보는 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할 때라는 것을.

“네, 할아버지.”

“네가 소교주를 믿는 마음은 잘 안다.”

나이 든 자신도 검무극이란 사람에게 그토록 매혹되었는데, 젊은 진하군이 어찌 냉정할 수 있겠는가?

그랬기에 꼭 당부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앞으로도 반복해야 할 당부가.

검무극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강조해야 하는 말.

“앞으로 살면서 아무리 친해지고, 아무리 관계가 깊어져도 그가 마인이란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으면 안 된다.”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인이었으니까.

진하군은 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잘 알았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검무극의 형이기에 거기까진 봐줄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보고드릴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이 보고가 오늘 방문의 핵심이었다.

“그 일로 백룡단주를 조사 중입니다.”

“백룡단주를? 왜?”

“그 사람이 이번 일의 배후 중 한 사람입니다.”

진패천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다.

“증거가 있느냐?”

“네. 위조 암기를 만든 창고를 빌린 사람이 백룡단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룡단주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 존재하는 정황도 알아냈습니다.”

누군지 직접 말하지 않았다.

화율청이 배후에 있다는 걸 백룡단주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셔야 했으니까.

“내가 직접 그 사람을 봐야겠다.”

“밖에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들여라.”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밖에 없다.

천애거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할아버지뿐이었으니까.

잠시 후, 멸마대 무인들이 백룡단주를 데려온 후 다시 나갔다.

진하군은 이미 백룡단주와 이야기를 끝낸 후였다. 맹주님께 모든 사실을 그대로 말하면, 참형을 면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진실을 밝힌 대가로 형량을 최소로 줄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백룡단주가 약속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진하군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가 배후구나.’

계속 마음 한편에서는 그 사실을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이 순간에도 그 의심은 다 떨치지 못했다. 정말 그가 배후에 있다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존경한 사람이었는데.

진패천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게.”

백룡단주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정말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었나?”

진패천은 차분하게 물었지만, 그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백룡단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차마 말문을 잇지 못하던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맹주님.”

그는 차마 면목이 없는지 실토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진하군이 그에게 말했다.

“다 끝났으니 어서 자백하시오.”

백룡단주가 이윽고 진실을 밝혔다.

“이 일은 천애거사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깜짝 놀랄 말이었음에도 진패천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누가 시켰다고?”

“천애거사께서 시키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진패천의 신형이 어느새 백룡단주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다.

“감히 어디서 수작질이냐!”

진하군은 당연히 천애거사를 언급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패천이 그의 앞에서 기합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아아압!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거친 바람이 백룡단주를 휘몰아쳤다.

무림맹주의 웅혼한 내력이 깃든 사자후(獅子吼)였다.

그대로 날아갈 버릴 것 같은 엄청난 기세가 백룡단주를 얼굴과 몸을 뒤흔들던 그 순간!

진하군은 보았다.

백룡단주의 눈이 뒤집혔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마치 검은 눈동자가 눈동자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만 같았다.

“하아아아아아압!”

더 큰 사자후에 백룡단주의 눈동자가 다시 뒤집혔다.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고 새하얀 눈자위만 보였다.

“으으으으으으.”

비명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검은 액체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마치 사라진 검은 눈동자가 액체가 되어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백룡단주는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천애거사 짓입니다.”

느릿하게 흘러나온 말은 백룡단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괴물이 깃든 목소리처럼 괴이한 소리로 말하고 나서는.

백룡단주의 몸이 한차례 크게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픽 쓰러졌다.

진패천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진하군이 살폈을 때는 이미 그는 절명한 후였다. 진기를 주입해서 몸 내부를 살피자 혈맥이 가닥가닥 끊어져 있었다.

내공이 제압당한 상태였으니 스스로 자결한 것은 아니었다.

‘자백하면 혈맥이 끊어지는 사술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앞서 검무양의 고문에 이미 자백하지 않았나? 왜 그때는 끊어지지 않은 거지?

진패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심령제어술(心靈制御術)이다.”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심령제어술은 사람의 마음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는 사술이었다.

할아버지는 그가 심령제어술에 걸려있음을 알아차리고 사자후로 그것을 파훼해 버린 것이다.

“심령제어술이 강제로 풀리면 모든 혈맥이 끊어져 죽게끔 되어 있었다.”

대체 왜?

놈들이 심령제어술을 걸었다면 왜 천애거사를 자백하게 한 거지? 오히려 배후인 그에 대해서는 숨겨야…….

그 순간 진하군은 흠칫 놀라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런!’

할아버지께서는 누군가 심령제어술을 걸어서 천애거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고 생각하실 테니까.

그를 밝혔기에, 그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진패천의 의심은 한 사람을 향했다.

“지금 대공자 어디에 있느냐?”

수작을 부리는 검우진보다

“대공자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진하군의 물음에 진패천이 되물었다.

“그럼 너는 화 거사를 의심하는 거냐?”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진하군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저 말을 듣는 순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애거사가 심령제어술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도록 심어두었구나.’

부리는 수하에게 심령제어술을 심는다면, 고문을 당해도 다른 이의 이름을 대도록 하지 않겠는가?

한데 천애거사는 그 상식의 허를 찌르며 스스로 배후로 몰리면서 완벽하게 배후에서 벗어났다.

이 선택은 그 대상이 할아버지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천애거사를 알고 지냈다. 이후 두 사람의 우정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그건 마치 이런 거겠지.

자신이 지금부터 검무극과 계속 우정을 쌓아가서 수십 년이 지났는데.

그런데 누가 와서 검무극이 악의 배후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들이 미쳤나!

지금 할아버지가 딱 그런 심정일 것이다.

그리고 천애거사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명확했다.

“대공자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대공자가 무한에 와 있는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천마신교에서 꾸민 일이라 믿을 수밖에.

이 상황에서 검무양을 옹호하면 할아버지의 분노가 더욱 커질 것임을 알기에 진하군은 순순히 대답했다.

“멀지 않은 장원에 있습니다.”

무림맹주가 직접 갈 수도 없고, 맹주전으로 부를 수도 없었으니.

“그 사람을 청운림(靑雲林)으로 데려오너라.”

진하군이 순순히 할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네, 알겠습니다.”

진하군이 맹주전을 나섰다.

쏴아아아아아.

진하군이 맹주전을 나왔을 때,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다. 맹주전 무인에게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말한 후 잠시 서서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이 일은 자신의 손에서 처리했어야 했는데, 백룡단주가 그렇게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이제 천애거사가 배후에 있다는 걸 밝히는 건 더욱 어려워졌다. 다른 증거가 나와도 조작된 거라 여기실 테니까.

천애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려서 할아버지라 부르며 그를 따랐었다. 엄격한 할아버지와 달리 그는 친근하게 자신과 진하령을 대해주었는데. 가끔 자신들을 보러 올 때면 중원 곳곳의 귀한 장난감들을 사가지고 오곤 했었다.

그런 그가 음모의 배후에 있다고?

진하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커먼 먹구름 안에서 뇌성이 번쩍이고 있었다.

* * *

검무양은 장원의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마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차 문이 열리자 안에 진하군이 타고 있었다. 검무양은 그가 직접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백룡단주를 데려간 일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맹주님께서 뵙기를 바라시오.”

검무양이 곧장 마차를 향해 걸어가자 호명이 뒤를 따랐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라고 했지만 검무양이 사양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호명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무림맹주가 직접 나선 이상, 그의 일검에 자신들은 모두 죽게 될 것임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검무양을 혼자 보내려니 걱정되고 불안했다. 그에게 변고가 생기면 자신들 모두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차라리 그를 지켜주다 죽는 게 낫지.

한 번 더 따라가겠다고 눈빛을 보냈지만, 검무양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호명과 지단 무인들, 그리고 맨 뒤에 서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곽영을 뒤로 하고 검무양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 마차가 출발했다.

마차가 출발하자 진하군은 맹주전에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털끝만 한 오해도 없어야 했기에 그에게 어떤 일도 숨겨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백룡단주에게 심령제어술이 걸려있었소.”

검무양이 흠칫했다. 자신이 직접 고문했음에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눈을 피할 정도의 심령제어술이라면, 자신보다 더 강한 사람이 심은 사술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천애거사가 건 사술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봐오면서 그가 그런 사술을 지녔다는 걸 무림맹주가 몰라봤을 리 없으니까.

“그가 누구라고 말했소?”

“역시 천애거사라고 했소.”

검무양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놈들이 얼마나 치밀한 자인지는 여러 번 확인했기에.

“그는 죽었겠군.”

“어찌 아시오?”

“나라면 그렇게 처리했을 테니까.”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검무양도 놈들의 속셈을 알아차렸음을.

“우리가 꿰뚫어 보는 걸 맹주님께서 못 보셨을 리 없소. 다만…….”

믿고 싶지 않으신 것뿐이오.

진하군은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 말을 잇지 못했다.

검무양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하군의 생각과는 달리 맹주가 꿰뚫어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을 테고.

정작 믿고 싶지 않은 건 진하군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검무양은 그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해관계가 멀기에 훈수 두듯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자기 일이 되면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대나무 숲에 도착했다.

맹주전 호위 무인은 모두 입구에 서 있었다. 맹주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 모양이다.

마차에서 내린 검무양과 진하군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들어서자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두 사람은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참 오랜만에 맞는 비였다. 검무양도, 진하군도.

대나무 숲 가운데 작은 정자가 있었다.

진패천은 뒷짐을 진 채 정자에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지 않았다.

“비 내리는 날이면 가끔 여기로 온다네.”

검무양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자로 올라갔다.

진하군은 함께 올라가지 않고 아래에서 기다렸다.

정자에 올라선 검무양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던 진패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대공자, 오랜만이네.”

검무양을 향한 그의 눈빛과 태도는 차분하고 정중했다. 데려오라고 할 때만 해도 당장 호통을 칠 기세였지만, 지금 태도는 전혀 달랐다.

그랬기에 정자 아래에 서 있는 진하군은 한편으로 안도하면서 동시에 더 긴장했다. 언제 어떻게 할아버지의 격노가 터져 나올지 몰랐으니까.

“경치가 어떤가?”

“좋습니다.”

과연 정자에서 둘러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가늘어진 빗줄기 사이로 흐르는 안개는 아름답고 몽환적이었다.

그곳에는 오직 비 오는 소리만 들릴 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교주께선 잘 지내시나?”

“폐관에 드셨습니다.”

이미 무림맹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검무양은 솔직히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 그 소식 듣고 놀랐다네.”

자신들의 경지에서 폐관 수련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맹에서는 비상회의까지 열렸었다. 정말 폐관 수련 중인지, 아니면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건지.

하지만 여러 보고와 의견이 오가는 회의 속에서 진패천은 검우진이 폐관 수련 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아는 검우진은 이런 일로 속임수를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난번 삼자 회합에서 만나보았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수작을 부리는 검우진보다 수작을 부리지 않는 검우진이 더 두려운 존재다.

그랬기에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마의 무공 경지가 변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이번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동생이 임시 교주를 맡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언급되자 진패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미소 짓게 하는 유일한 마인. 그래,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소교주야 무슨 일을 맡겨도 잘할 사람이지.”

검무양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을 떠올려서였을까?

대나무 사이를 흘러가는 안개처럼 두 사람 사이에도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진패천이 불쑥 말했다.

“의외였네.”

검무양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제 진패천도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가 무한까지 온 것이.”

당연한 의문이었다. 금용암기 위조가 중대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공자가 무한까지 올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검무양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진패천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 눈빛 변화를 느꼈음에도 검무양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교주보다 자네가 더 자네 아버지를 닮았네.”

그를 보고 있으면 검우진이 떠오른다.

하긴, 검무극이었다면 벌써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재잘재잘 다 말하고 있었겠지.

검무양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리고 이 순간에 필요한 건 자신의 무뚝뚝함이 아니라, 동생의 친절함이란 것도 느꼈다.

정말 다른 상황이었거나, 혹은 다른 상대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지만.

“그 암기로 동생을 죽일 뻔했습니다.”

검무양의 대답에 진패천이 눈을 크게 떴다.

정자 아래에 있던 진하군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무양이 왜 끝장을 보겠다고 했는지.

만약 자신이 진하령을 죽일 뻔했다면? 그래, 자신이라도 끝장을 봐야지. 자신도 마교 본단 앞까지 쫓아갔을 것이다.

“저는 그저 위조 암기를 만든 자를 추적했을 뿐인데, 이렇게 맹주님을 뵙게 되는군요.”

누군지 몰라도 길을 잘 닦아두었다는 의미. 진패천은 그 말에 뼈가 있음을 느꼈다.

“백룡단주가 누굴 언급했는지 들었나?”

“네.”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그 사람에 대해 모릅니다.”

검무양이 진패천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답은 맹주님께서 알고 계시겠지요.”

순간 진패천의 표정이 꿈틀했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압도적인 기세가 주위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며 세상은 어두워졌다. 진패천의 기도는 어두운 바다에서 맞이하는 태풍.

순식간에 불어닥친 거친 파도에 검무양은 날아올랐다 추락하기를 반복했다. 심연을 파고드는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속까지 휘저었다.

원래 진패천은 이런 기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패도적이고 강력한. 오랫동안 무림맹주로 살아오면서 그 기세를 드러낼 기회가 자주 없었을 뿐.

폭풍 속에서도 검무양은 꿋꿋하게 맞섰다. 그러자 진패천의 기도가 더욱 강력해졌다.

정자 아래에 있던 진하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화난 할아버지와 부러지지 않으려는 검무양이었다.

만약 검무극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를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자신은 검무극이 아니었다. 검무극처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래, 할아버지를 믿자. 비록 지금은 화가 나 계시지만 그렇다고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분은 아니셨으니까.

이번 일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할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자신이었고, 천마신교와 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자신이었으니까.

‘그래, 지금부터는 선입견 가지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똑바로 봐야 한다.’

검무극이 그렇게 반복했던 그 말이 다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이 된 것이다.

휘몰아치던 진패천의 기도가 점차 잦아들더니 다시 주위가 평온해졌다.

내상을 입지 않을 한계선까지 몰아붙였지만, 검무양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버텨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진패천이 차분히 말했다.

“무한을 떠나게.”

다른 지역이라면 모를까, 무한에서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무양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습니다.”

진패천이 좋게 말했다.

“이번 일은 우리 일이네. 답을 찾게 되면 자네에게 기별하겠네.”

“죄송합니다.”

혼자서는 결코 그 답을 찾지 못하실 겁니다.

검무양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진패천과의 약속이다. 가겠다고 하고선 가지 않는다면 그건 더 그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정말 자네들은!”

이 무림에 누가 있어 자신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검무양의 얼굴 위로 검우진의 모습이 겹쳤다. 그 사람의 아들이니 그 고집이 오죽하겠는가?

그때 진패천의 시선이 천천히 저 멀리 안갯속을 향했다.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군가 저 멀리 안개 속에 있었다.

이 정도까지 접근해서야 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으로도 상대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그만 엿듣고 이만 나오시게.”

그러자 누군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맹주님께서도 지난 수십 년간 겪지 않으셨습니까?”

새하얀 안개 너머에서 황금빛 광채가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교 놈들이 말을 참 안 듣지요.”

앞으로 네가 앉아야 할 자리는

황금빛 안개를 헤치며 마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은 키에도 어떻게 이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는 정자 아래에서 위쪽을 올려다보며 정중히 합장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맹주님.”

진패천도 예를 갖춰 마불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소.”

마불의 등장은 의외였다. 하나 대공자가 있는 곳에 마불이 있는 건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진패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진패천과 인사를 나눈 마불이 옆에 있는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오셨습니까?”

“네, 왔습니다.”

간단한 인사 속에 서로에 대한 깊은 마음이 깃들었다.

사실 검무양은 무한을 떠나라는 맹주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 말을 무시해 버렸겠지만, 무림맹주의 말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서 마불을 보자, 그의 광채가 이 난감한 상황을 환하게 밝히는 기분이 들었다.

마불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정자로 올라왔다. 올라오기 전 진하군과도 인사를 나눴다.

“마존을 뵙습니다.”

“멀리서도 진 대주의 협행을 잘 듣고 있소. 젊은 나이에 아주 훌륭하시오.”

진하군도 그의 등장에 내심 기뻤다. 조금 전, 그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이 그의 등장으로 풀어졌기 때문이다.

“여기 맹주님이 좋아하시는 술이오.”

마불이 가져온 술을 진하군에게 맡기며 정자 위에 있는 진패천에게 물었다.

“그새 취향이 바뀌신 건 아니시겠지요?”

자신을 만날 때면 언제나 빈손으로 오지 않는 마불이었다. 예전부터 무림맹의 행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선물을 보내온 유일한 마존이기도 했고.

물론 마교에서 보낸 선물은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고, 마불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언제나 빠지지 않고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대공자가 후계자에서 밀린 후, 이제 그의 선물은 받지 못하겠거니 여겼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선물을 받게 되었다.

정자 위로 올라온 마불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위에서 보는 풍광이 아래에서 볼 때와는 또 다릅니다.”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쳤고 안개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쭉쭉 뻗은 대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신 감탄하며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 했지만, 진패천의 반응은 냉랭했다.

“무한에 그대까지 와 있을 줄은 몰랐소.”

마불이었기에 그나마 부드럽게 반응했다. 대공자가 온 것도 문제인데, 마존이 사전에 기별도 없이 무한에 와 있었다? 이건 천마신교에 공식적으로 항의를 해도 될만한 일이었다.

“저야말로 급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마존께서는 어떤 사정이셨소?”

그러자 마불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무엄하게도 본교의 대공자를 노리는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검무양이었지만, 이 말에는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도 모르고 있던 내용이었으니까.

“그게 누구였소?”

진패천은 당연히 사파 쪽 인물이거나 천마신교와 은원이 있는 인물이라 예상했는데.

“벽산검입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진패천의 가슴에 쿵, 하는 충격이 있었다.

벽산검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천마신교의 대공자를 죽이려 했다는 건, 대공자가 무한에 온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사건이었다.

마불이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며 목청을 높였다.

“이 미친 인간이 감히 누굴!”

마불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천마신교를 대표해서 그 분노를 맹주에게 직접 전하고 있었다.

“대공자님을 해치려는 시도는 본교에 대한 도전이자 공격입니다!”

이 순간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왜 마불이 이렇게 빨리 자신 앞에 등장했는지를.

‘이미 마불께서는 나를 구하기 위해 무한에 와 있었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마불이었기에 검무양의 마음이 벅차올랐다. 과거 자신이 그렇게 못나게 굴었음에도 마불은 변함없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히 일을 저지르기 전에 제가 먼저 도착했지요.”

무림맹주 상대로 진짜 분노할 수는 없었기에, 마불의 광채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당당한 마불의 태도는 마치 이렇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래도 내가 무한에 온 일을 따져 물을 것이오?

앞서까지 무한을 떠나라고 강요하던 대화의 주도권이 이제 마불에게 넘어갔다.

“맹주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이렇게 묻지 않았을 텐데.

“정말 그였소?”

벽산검과 같은 사람이 뒷일을 생각지 않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한월객이었다면 믿었을 텐데.

“이번이 그 사람과 세 번째 만남이었지요.”

다른 사람을 착각했을 리 없다는 말이었다.

마불은 진패천이 묻기 전에 그 일의 결과까지 밝혔다. 마불은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 번째 만남에서는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좋게 돌려 말했지만, 진패천은 알 수 있었다. 그를 실력으로 눌렀다는 의미임을. 두 사람이 말싸움이나 하고 끝내진 않았을 테니까.

벽산검이 살아있다는 말에 진패천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동시에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벽산검이 이 사람에게 졌단 말인가?’

진패천은 가만히 마불을 살폈다. 마지막 봤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여유. 딱 그 여유만큼 실력도 늘어났으리라.

순간 폐관수련을 하고 있을 검우진이 떠올랐다.

‘마교가 강해지고 있다.’

다시 한번 그 불편한 진실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벽산검을 통해 확인하면 될 일을 마불이 거짓말하진 않았을 터.

‘벽산검이 왜 신교의 대공자를 죽이려 했을까? 설마?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누군가 벽산검에게 부탁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부탁이 천마신교의 대공자를 죽여 주시오, 이게 될 수는 없다.

자신의 부탁이 아니라면.

“왜 그랬는지 들었소?”

“말하진 않았지만 누군가의 부탁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진패천이 떠보듯 마불에게 물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소?”

마불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미 통천각을 통해 배후에 천애거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천애거사의 천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배후의 속성에 대해서만 짚었다.

“본교와 무림맹을 이간질해 온 자들이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겠습니까?”

그게 누가 되었든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불은 한월객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를 돌려보낸 걸 설명하려면 독왕이 무한에 있다는 것도 알려야 했으니까.

“그래서 사전에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쪼록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감사합니다.”

마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뒤에 숨어 있던 해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비도 그쳤으니 우린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마불의 인사에 검무양도 작별을 고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맹주님.”

“살펴들 가시게.”

무한을 떠나라, 혹은 또 보자, 그들은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이후 일은 신중하게 판단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자를 내려가면서 검무양은 진하군과 눈이 마주쳤다.

검무양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진하군 역시 화답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잘 협력해서 일을 처리하자는 마음을 그렇게 주고받은 것이다.

* * *

정자를 떠난 검무양과 마불은 대나무 숲을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외부에서 이렇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무림맹 본단 앞을 이렇게 나란히 걷는 날이 올 줄이야.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배후는 천애거사가 확실합니다.”

검무양의 말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할 수 있었다.

“맹주가 그를 믿고 있는 한, 함부로 천애거사를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맹주와의 친분도 친분이지만, 정파인들의 존경도 문제였다. 자칫 천애거사를 잘못 건드는 순간, 놈들은 천마신교와 무림맹의 갈등으로 확산시킬 것이다.

검무양이 발걸음을 멈추자 마불도 따라 멈춰 섰다.

검무양은 하고자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다시 내려갔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에게도 해본 적이 없었고, 검무극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 말을 마불에게 했다.

“도와주십시오.”

저 말이 얼마나 어렵게 나온 말인지, 또 얼마나 귀한 말인지 마불이 어찌 모르겠는가?

마불의 눈동자가 떨렸고,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광채가 짙어졌다. 진심에는 더 큰 진심으로.

“이 한 몸 다 바쳐 충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환한 광채에 휩싸이며 검무양은 후회했다.

후계자 싸움할 때도 그와 이런 관계였다면? 자신이 이렇게 진심으로 마불을 대했다면? 과연 그 싸움의 결과는 달라졌을까?

* * *

진패천과 진하군은 정자에 나란히 서서 멀어져가는 검무양과 마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진하군은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따라 자신의 후계자 선정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을 예감했다.

이 모든 과정이 할아버지의 시험이 될 수도 있었기에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판단하고 대답해야 한다.

“세 가지 중 하나겠지요. 신교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천애거사께서 진짜 배후이거나, 혹은 누군가 그렇게 믿게끔 이간질을 하거나.”

진패천이 바라는 대답이 아니었다.

“네 생각을 물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신이 검무극을 너무 믿어서 낭패를 보게 될까 봐 걱정하고 계신 걸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신교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진패천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예전이라면 눈치껏 할아버지가 듣고 싶어 하시는 대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순간을 모면하는 대답은 상대를 향해 모래로 만든 다리를 짓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통하더라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거다. 더 많이 완성되고, 상대에게 더 가까이 갔을 때 무너지게 될 테니, 상대의 실망감은 더욱 클 것이고 자신은 더 깊은 모래 구덩이에 파묻히겠지.

“대공자를 그만큼 믿는 것이냐?”

분명 검무양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실을 말했음을. 하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아닙니다.”

“한데 왜?”

할아버지가 더 걱정하실 대답이었지만.

“제가 믿는 건 소교주입니다.”

진하군이 솔직한 심정을 할아버지에게 전했다.

“소교주가 임시 교주를 맡고 있으니 현재 신교의 주인은 소교주입니다.”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결정권이 그에게 있을 것이다.

“그에게 숨겨둔 야망이 있을 수도 있지.”

그렇지 않다고 대변해줄 줄 알았는데, 손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워낙 똑똑한 사람이니 그럴지도 모르지요.”

“한데 왜 그를 믿는다는 거냐?”

검무극이란 사람을 완전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확실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까.

“그는 계략을 꾸미더라도 형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일을 진행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대공자는 무한에 고립되어 있었고, 위험한 상황이었다. 검무극이 자신의 형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었을 거 같진 않았다.

“만약 그런 사람이었다면 후계자 싸움에서 이미 대공자는 죽었을 겁니다.”

진패천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이 봐온 검무극도 손자의 말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의 꾸짖음을 각오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자는 말은 천애거사를 의심하자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진패천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눈빛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하군아.”

“네, 할아버지.”

“이 할애비가 걱정되느냐?”

“아닙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분명 걱정하고 있었다. 오랜 우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지실까 봐. 믿었던 우정이 깨어졌을 때 받으실 상처까지도.

그때 진패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내 마음속에선 이미 그를 죽였다.”

“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크게 떴는데.

“그 사람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이미 그의 무덤 앞에 섰지.”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화율청을 의미한다는 것을. 할아버지의 깊고도 씁쓸한 눈빛에.

‘아! 할아버지는 이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계셨구나!’

잊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 번 행하기도 어려운 협의를 평생 지키며 살아오셨고, 오랫동안 무림맹주 자리에서 온갖 인간군상들을 지켜봐 오셨다는걸.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수십 년을 봐온 친구가 나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이미 받아들였다.”

이 자리에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었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무림맹주니까.”

그는 지금껏 한 번도 손자에게 해주지 않았던 말을 해주고 있었다.

“앞으로 네가 앉아야 할 자리는 이런 자리다.”

진하군은 면목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대로 봐야지, 똑바로 봐야지 했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을 똑바로 본다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오히려 진패천은 더욱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으면서 내가 느낀 건, 우리 정파는 마교나 사파를 같은 걸음으로 쫓아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제일 먼저 달려 나가 그들을 이끌려고 해도 항상 몇 걸음씩 뒤처졌지. 수습하고 뒤쫓기에 바빴다. 한데도 왜 저들의 그 잔혹하고 집요한 욕망에 우리가 무너지지 않은 줄 아느냐?”

“왜입니까?”

진패천은 먹구름이 물러간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푸른 하늘을 두 눈 가득 담고 힘차게 말했다.

“우리가 옳으니까.”

진하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할아버지는 이 믿음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너도 옳은 길을 가라.

하늘을 가득 담았던 진패천의 시선이 손자를 향했다.

“그러니 소교주는 이 믿음 다음으로 믿어라.”

큰 악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분기점을 맞는 순간이 있다.

보통의 경우는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였구나 하지만, 오늘 진하군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모래가 아닌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가 지어지기 시작했음을.

“소교주는 두 번째가 아니라 다섯 번째로 믿겠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가야 할 길을 보여주셨으니, 자신도 그 보답을 해드려야겠지.

“우리가 옳다는 믿음을 첫 번째로 믿겠습니다. 그다음으로 할아버지를 믿겠습니다. 다음으로 제 멸마대 수하들을 믿고 다음으로 이 시간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무림맹 무인들을 믿겠습니다. 그렇게 다 믿고 난 다음에 소교주를 믿겠습니다.”

진패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철부지처럼 보이기만 했던 손자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의젓하게 성장했다.

“이만 돌아가자.”

“네, 할아버지.”

두 사람이 정자를 내려와서 대나무숲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질문의 답에 따라 많은 이들의 운명이 바뀌게 되리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패천은 대답 대신 손자의 생각을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이번 기회를 통해 손자가 이런 일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 싶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까 보셨다시피 대공자는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습니다. 결국 배후는 다시금 본맹과 신교를 분열시키려 들 겁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곧장 말을 잇지 못한 건 할아버지께서 불편하실 수도 있을 일이었기 때문이다.

“천애거사님을 만나 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배후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로 누명을 쓰고 있는지, 그것부터 알아내어야 할 것이다.

“만나서는?”

“만약 천애거사님이 배후라면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걸 알 겁니다.”

심령제어술로 백룡단주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게 꾸몄으니까.

“이런 상황에 찾아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가 의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자신을 믿는다면 맹주가 찾아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해줄 거로 생각할 테니까.

“거사님께서 무고하든, 무고하지 않든, 두 경우 모두 우리가 먼저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진패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입구에 도착했다.

진패천이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타며 뜻밖의 명령을 내렸다.

“그 사람은 네가 만나보거라.”

이번 일의 처리를 손자에게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진하군은 예감했다. 이 시험이 후계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 될지도 모른다고.

“네, 그러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속마음을 모를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두 분의 관계를 신경 쓰지 않고 객관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진패천을 태운 마차가 그대로 출발했다.

맹주 호위대와 함께 마차가 떠나가자 홀로 남은 진하군 주위로 멸마대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진하군과 함께 움직이고 있기에 그들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린 무소장으로 간다.”

* * *

진하군은 무소장 입구에 서서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무소장.

평생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살아온 천애거사를 기리기 위해 무한의 무인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진하군은 문득 무소불위(無所不爲)할 때의 무소도 같은 글자를 쓴다는 걸 떠올렸다.

그가 원한 삶이 무소유의 삶인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원한 삶인지는 조만간에 알게 될 것이다.

멸마대 무인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주 총관이 모습을 보였다.

그가 진하군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주님.”

주 총관은 오랫동안 천애거사를 보필한 사람으로, 뛰어난 무공실력에도 불구하고 무소장의 살림살이를 떠맡고 있었다. 천애거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그에게 바친 것이다.

진하군이 그의 뒤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주 총관 뒤로 마당이 보였는데, 수십 명의 무인이 가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주 총관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소식 듣고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미 진하군이 알고 왔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진하군은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들어가 보면 알게 되겠지.

“자, 들어가시지요.”

주 총관이 진하군을 안으로 안내했다. 멸마대 무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마당에 있던 이들은 모두 무한에 있는 문파의 무인들이었다.

그들이 진하군을 알아보고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차기 무림맹주로 유력한 사람이었고, 그가 이끄는 멸마대는 무림맹 최정예 무인들이었다.

멸마대가 그들 사이에 늘어서며 통로를 만들었다.

진하군과 주 총관은 멸마대가 만든 길을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진하군은 걸어가면서 마당의 무인들을 살폈는데, 다들 긴장한 채 표정이 굳은 것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주 총관이 안내한 곳은 대청이었다.

안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진하군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진하군이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곳 무한에 있는 여러 문파의 수장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진하군에게 말없이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진하군 역시 조용히 포권으로만 인사했다. 이렇게 소리 없는 인사를 나눈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침상이 놓여 있었고 의원이 누군가를 치료하고 있었다.

침상에 누워서 치료를 받는 한 노인.

오랜 세월 바깥을 떠돌았음을 보여주듯 그의 피부는 검게 탔고 거칠었다. 낡고 허름한 무복은 수십 년 세월을 그와 함께 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외모로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투박하고 거친 겉모습은 그를 빛나게 했다.

천애거사 화율청.

평생 중원을 떠돌며 좋은 일을 해온 그였다. 가여운 이가 있으면 주머니를 털어주었고, 억울한 이가 있으면 반드시 원한을 갚아주었다.

대협이란 말로도 부족한 사람, 그 화율청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진하군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 이유가 이런 이유일 줄은 더욱이.

주 총관이 놀라운 사실을 전했다.

“오늘 어르신께서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필 이때 천애거사가 기습을 당했다고?

진하군의 시선이 그의 팔을 향했다.

의원이 그의 팔을 치료하고 있었다. 검에 당한 상처가 아니었다. 거칠게 찢어진 상처가 자작극이라 하기에는 꽤 깊었다.

정성껏 치료를 마친 의원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찢기고 뜯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만, 문제는 독입니다.”

천애거사가 독에 당했다고?

“해독약이 듣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길 겁니다.”

의원의 말에 주위에 싸늘한 한기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 있던 이들의 분노였다.

진하군과 수장들이 침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율청이 잠들어 있었기에 진하군은 밖으로 나가서 대화하려 했는데, 그들은 이곳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화율청이 깨어날 때까지 이곳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진하군의 나직한 물음에 조금 떨어져 있던 젊은 무인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저를 구하시다가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는 무한의 작은 방파인 정소문(正昭門)의 문주 혁인(赫仁)이었다. 얼마 전 전대 문주가 사고로 죽은 이후, 새로 문주가 된 그였다.

“오랜만에 무한에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어르신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떻게 문파를 이끌어야 하는지 여쭙고 싶어서요. 어르신의 귀한 말씀을 듣고 배웅하던 중에 마인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마인이란 말에 진하군의 가슴이 철렁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선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온 것이다.

“지금 마인이라 하셨소?”

혁인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듯 주 총관은 침상 아래 놓여 있던 것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장주님께서 이것에 당하셨습니다.”

무엇인지를 확인한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천마신교의 암기 진격이었다.

검무양을 이곳 무한으로 끌어들인 그것이 이제 진하군 앞에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암습한 자는 어떻게 되었소?”

“어르신의 손에 죽었습니다.”

옆에 서 있던 중년 무인이 나섰다.

그는 일검문(一劍門)의 문주 고형(高兄)이었다. 예전에 마인과 싸우다가 한쪽 팔을 잃은 인물로 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는 인물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그 암기는 무림맹이 금용암기로 지정한 마교의 암기네. 이런 추악하고 비열한 암기가 아니었다면, 어찌 어르신께서 당하셨겠는가?”

무겁게 흐르는 침묵.

다른 수장들은 그 말에 맞장구를 치지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지도 않았다.

만약 정말 마교의 소행이라면, 이번 일은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때 또 다른 사람이 나섰다. 그는 무한 벽송문(碧松門)의 문주 황근(黃根)이었다. 그는 천애거사를 마음 깊이 존경해서 스승으로 여기며 따르는 인물이었다.

그가 다시 침상으로 걸어가서 화율청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누구 소행이든 내 남은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흉수를 찾아낼 작정이네.”

다른 수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 앞에 섰다.

정파 무인이라면 모두가 천애거사를 존경하지만, 특히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목숨을 바쳐도 좋을 정도로 그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이들이 움직이면 무한 무림이 움직일 거고, 무한이 움직이면 전 무림이 움직이게 될 것이다.

진하군이 말없이 화율청을 쳐다보았다.

‘자작극일까? 아니면 진짜 공격을 당한 걸까?’

지금 상황에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이 많은 정파의 고수들을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마교에서 천애거사를 죽이려 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사건으로 다가와 있는지. 지금은 이 사람들뿐이지만 이 사건이 알려지면 무림은 발칵 뒤집힐 것이다.

황근이 진하군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진 대주, 맹에서도 이번 일을 좌시하지 않기를 바라오.”

그러자 다른 이들도 함께 돌아섰다. 모두의 시선이 진하군에게 집중되었다.

“무림맹이 나서서 천라지망을 펼치고 흉수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주시오.”

“마교에 공식적으로 항의해야 하오.”

요구들이 이어졌지만 진하군은 말을 아꼈다.

‘당신이 원한 게 이런 것이오? 정말 이들을 방패 삼아서 이번 일을 빠져나갈 작정이시오? 나를 건들지 마라. 나를 건들면 모두가 움직인다. 그 경고를 이렇게 하는 겁니까?

화율청 앞에 늘어선 그들.

비단 정파 무인이 암습을 당했기 때문에 세워진 벽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그가 쌓아온 신뢰의 벽이고, 존경의 벽이었다. 수십 년의 노력으로 쌓은 벽이었다. 그랬기에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 뒤에서 나직한 말이 들려왔다.

“……그만들 하시게.”

그 말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말소리가 들려온 곳은 뒤쪽 침상이었다.

모두가 놀라 돌아서자, 화율청이 깨어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르신!”

“장주님!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왜들 이리 소란들인가?”

잠들어 있던 그의 존재감이 깨어나자 그곳에 있던 모두를 압도했다.

그의 존재감은 날카롭거나 강하지 않았다. 더없이 부드러운 존재감.

하지만 그 어떤 강함으로도 부술 수 없을 거 같은 부드러움이었다.

황근이 그의 상태부터 살폈다.

“별것 아니라니요. 어르신께서는 독에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화율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내력으로 눌러놨으니 괜찮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일검문주가 소리쳤다.

“마교 놈들 소행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교의 암기를 들었다고 어찌 마인의 소행이라 단정할 수 있겠나?”

그는 진하군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괜찮으니 괜히 일을 키우지 말고 모두 돌아들 가게.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마교와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무고한 생명이 여럿 죽게 될 거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입들 조심하게.”

그들을 엄중하게 꾸짖은 후,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찾은 사람은 자신이 구해준 젊은 혁인이었다.

“자넨 괜찮나?”

그가 자신을 보며 웃자 혁인은 크게 감격하며 큰절을 올렸다.

“구해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 늙은이를 기억해서 뭐 하겠나? 자네 사람이나 잘 챙기게. 내가 했던 말 다 기억하지?”

“어르신!”

혁인이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었다.

끝으로 화율청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둘만 있으면 하군아, 하고 이름을 불렀는데, 지금은 멸마대주로 대했다.

“진 대주.”

“어르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화율청은 언제나처럼 부드럽고 인자한 눈빛으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꼬마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항상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그였다.

정말 이 사람이 음모의 배후에 있는 사람이라고?

그랬기에 혼란스러웠고, 그랬기에 더 의심스러웠다.

화율청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이 무한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겁니까?

모두 진하군의 대답을 기다렸다. 멸마대주라면 자신들이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했다. 마교의 소행이든 아니든, 천애거사를 암습한 일은 일대 사건이었으니까.

“아직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다만 평화롭던 이 무림에…….”

진하군이 화율청을 응시하며 차분히 덧붙였다.

“큰 악이 깨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들이 형과 친구를 동시에 건드려?

진하군은 천애거사가 반응을 보일 거라 기대했다.

악이 깨어났다는 말에 그가 이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그래, 그 악이 바로 나다.

하지만 화율청은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놀라고 당황하고 걱정하는. 이쪽의 의도가 무색해지는 반응을 보였다.

“진 대주,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큰 악이라니?”

진하군이 앞서 주 총관이 보여주었던 진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암기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위조품입니다. 최근에 저 위품이 은밀히 무림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수장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특히 마교를 미워하고 그들 소행이라 여겼던 일검문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위품이라면 꼭 마교의 소행이라 할 수 없었으니까.

“더 구체적인 내용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진하군은 천마신교의 소행이 아니란 말은 하지 않았다. 백룡단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지금은 이들의 심기를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었으니까.

화율청은 의협심이 가득한 눈빛을 빛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화율청의 말에 문파의 수장들도 언제든 불러만 달라는 듯 든든한 눈빛을 보냈다.

진하군이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대의대협한 여러분들이 이 무림의 정기를 지켜내 주시고 계십니다. 맹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그렇게 인사한 후, 작별을 고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십시오.”

“같이 나가세.”

그냥 쉬라고 했지만, 화율청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평생 그의 삶이 그랬듯, 한시도 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하군이 가서 그를 부축했다. 거친 그의 손은 말라서 뼈만 잡혔다.

“자네 손을 잡은 것도 참 오랜만이군.”

진하군은 그와 손을 잡았던 적이 있었나 떠올려 봤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오래전 어렸을 때의 일인 모양이다.

화율청이 그곳에 있는 수장들에게도 말했다.

“자네들도 이만 돌아가게.”

진하군은 그들이 화율청을 지키는 벽이라 여겼는데, 화율청은 모두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가 한마디 할 때마다 의심도 한 푼씩 덜어졌다.

수장들이 두 사람 뒤를 따라 걸었다.

“또 암습을 해올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벽송문주의 말에 화율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나이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번에는 일검문주가 나섰다.

“앞으로 삼십 년은 더 무림을 지켜주셔야지요.”

“이 사람아, 그땐 자네도 장담 못 해.”

뒤따르던 수장들이 웃었다. 화율청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다들 안도하며 기뻐했다.

자신을 의지하는 손길을 느끼며 진하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말 악인이라면?

어쩌면 수십 년간 살아온 위장된 삶이 진짜 삶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하게 사는 척하려다가 대협이 되어버렸을지도.

만약 그렇다면 어찌 그 삶을 꿰뚫어 볼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있을진대.

그러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숨기고 숨겨도 결국은 파헤쳐낼 것만 같은 사람.

상대의 마음속 깊이 고개를 쑥 들이밀면서 ‘여기 이 시커먼 구멍은 뭐요?’라고 해맑게 물어볼 거 같은 사람.

‘같이 춤추기로 약속하면 알려주지!’ 할 거 같은 사람.

그때 옆에서 화율청이 물었다.

“왜 그리 웃나?”

순간 진하군이 흠칫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르신께서 무사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진하군은 떠오른 그 사람을 마음에서 털어냈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이 대청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인들이 화율청을 보자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저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달랐다.

화 장주, 화 대협, 화 어르신, 화 영웅.

하지만 얼굴에 가득한 존경심은 모두 같았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그에게 도움 한번 안 받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아까보다 모여 있는 무인들 숫자가 더 많았다.

안에서 환호성을 듣고 밖에서도 함성을 질렀다. 장원에 들어오지 못한 무인들이 바깥에 진을 친 모양이다.

이 추세라면 오늘이 가기 전에 무한의 무인들은 모두 화율청이 암습 당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하군은 말없이 마당에서 화율청을 연호하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마치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처럼 흥분한 상태였다.

암기 한 방에 그야말로 무한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한 무인이 들어오며 일검문주에게 뭔가를 보고했다.

일검문주가 화율청에게 보고했다.

“마교 놈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그 말에 제일 놀란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일검문주가 자신의 수하들을 챙겨서 먼저 나갔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 뒤를 다른 이들도 따랐다.

“우리가 돕겠소.”

몇몇 수장이 그와 함께 움직였다. 그곳에 있던 이들의 절반이 함께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진하군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저들이 검무양의 처소를 알아내기라도 한 것이라면, 자신이 가서 충돌을 막아야 했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뒤따라 나가는 진하군에게 화율청이 말했다.

“큰 악은 신념을 지니고 있다. 사악하고 왜곡된 신념이지. 그 신념이 악을 더욱 강하게 만들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걸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진하군이 몸을 날렸다. 뒤에서 화율청의 말이 들려왔다. 둘이 있을 때처럼 그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조심하거라, 하군아.”

* * *

통천각 작전실은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최고 수준의 비상이 걸려있었기에 그야말로 지금은 전시 상황이었다.

통천각은 물론이고 은월까지 힘을 합쳐서 모든 정보력을 무한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가 본단과 무한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생각지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수행군사가 놀란 얼굴로 긴급 전서를 가져오며 보고했다.

“금마령(禁魔令)이 깨졌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작전실이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의 시선이 보고를 한 수행군사를 향했다.

사마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총군사가 된 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금마령이 깨어졌다?

절대 있어선 안 될 보고였다. 하필 이런 초비상 상황에서.

금마령은 교주령으로 내려지는 특별한 형벌이었다.

주로 큰 공을 세운 마인이 죄를 지었을 때 내려지는 벌로 뇌옥에 가두기에는 이전에 세운 공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그 죄를 눈감아 줄 수 없을 때 내려진다.

그들은 내공을 제압당한 채 중원 곳곳에 정체를 숨긴 채 살게 된다. 주로 사냥꾼이나 나무꾼, 약초꾼같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가끔은 예외적으로 저잣거리에서 장사를 허락하기도 한다.

그들은 각자 정해진 저마다의 지역에서 절대 벗어나면 안 된다.

만약 금마령을 어기고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면 극형이 내려졌다. 교주령을 어긴 것이기에 그것도 지독한 고통을 준 후에 죽였다.

그랬기에 차라리 자결을 하면 하지, 절대 금마령을 깨지 않는데.

“누가 깼느냐?”

그러자 놀라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염군(魔焰君)이 금마령을 어기고 구역을 벗어났습니다.”

마염군은 전대 마인으로 그 당시에도 마존급의 실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수행군사가 깃발이 든 상자에서 염(焰)이라 적힌 깃발을 찾아왔다. 작전지형도에 올라온 깃발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내공 금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탈출했다는 말보다 더 놀라운 보고였다.

당연히 그들을 가둬둘 때 내공을 사용할 수 없도록 혈도를 제압한다. 그때 금제를 함께 가하는데, 본단에서 풀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공을 풀면 며칠 내로 죽게 된다.

지녔던 무공실력에 따라 죽는 날이 달라지는 데 짧게는 하루고, 길게는 칠 일. 칠 일 후면 무조건 죽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그들이었는데 내공 금제까지 풀고 탈출했다고?

죽음을 각오했거나, 아니면 죽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거나.

그리고 오늘 금마령을 어긴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급박한 보고가 날아들었다.

“금마령을 깨고 백골혼마(白骨魂魔)가 이탈했습니다.”

골(骨)이라는 깃발도 전략지형도에 올라왔다. 백골혼마는 마염군보다 나이가 많은 전전대 마인으로 그 나이가 무려 백오십 세에 달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구나!’

사마명조차 그 존재를 잊고 있었을 정도였다.

한 명이 나갔다면 즉흥적인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둘이 나갔다는 건 외부의 영향이 있었다는 의미.

‘누군가 그들을 빼 내갔다.’

본교의 기밀인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또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예상한 보고가 뒤따랐다.

“그들이 무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마명이 인상을 굳혔다. 두 고수 중 한 사람만 풀려나도 무림에 큰 혈풍을 일으킬 인물들이었다. 그런 거마들이 무한으로 간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지금 마존들이 가 있는 것도 살얼음판인데, 금마령을 깬 노마들이 그곳으로 간다?

그야말로 얼음이 깨어지면서 누굴 붙잡고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모를 일이었다.

“추격대를 보낼까요?”

원래라면 마군을 비롯한 정예들을 출동시키고 그들을 추격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추격해서 잡았다. 그래서 금마령은 절대 깨서는 안 될 원칙임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사마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한에 마군까지 출동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사마명이 새로 출현한 두 깃발을 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그곳에 누가 가 있는지 알고나 가는 것인가?”

사마명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긴급 전서를 보내 이 사실을 전해라.”

오늘 막 무한에 도착한 새로운 깃발을 향해서였다.

극(極).

* * *

“무한에 제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불이 그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엮어둔 인연이 이곳 무한에도 있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천애거사 쪽을 파고들까 합니다.”

그냥 좀 아는 사람이 이런 일을 돕겠는가? 마불은 아껴둔 패를 자신을 위해 쓰려는 거다. 그것을 짐작했기에 검무양은 정중히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당연한 일이지요.”

대공자가 도와달라는 말을 꺼낸 이상, 마불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검무양을 도울 것이다. 더 도울 게 없으면 입고 있던 속옷을 팔아서라도 도울 작정이다.

그때였다. 호명이 재빨리 들어와서 보고했다.

“멸마대와 무한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당장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검무양과 마불이 두말하지 않고 재빨리 방을 나섰다.

멸마대가 그들을 합류시켜서 올 리는 없었으니까. 무한 무인들이 쳐들어오는 것에 그들이 함께 오는 것이리라. 어떻게든 충돌을 막으려고. 빨리 빠져나가 주는 게 진하군을 위하는 일이었다.

검무양은 이렇게 다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정말이지 무한의 상황은 급류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처음이 아니었기에 곽영 겁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마불의 지풍에 골목 끝에서 감시하던 남자가 쓰러졌다. 마불은 그를 죽이지 않고 정신만 잃게 했다.

검무양이 지단 무인들에게 말했다.

“마주치더라도 죽여선 안 된다!”

배후 세력이 원하는 게 그것일 테니까.

그들이 빠져나가자마자 그곳으로 멸마대와 무한 무인들이 들이닥쳤다.

“방금 빠져나갔소! 어서 추격합시다.”

일검문주의 외침에 진하군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본대가 추격하겠습니다.”

하지만 일검문주는 곱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거사님과 관계된 일입니다. 돕게 해주시오.”

뒤에 선 무인들의 눈빛 역시 간절했다.

억지로 막자면 막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더구나 한쪽 팔이 마인에게 잘렸던 일검문주였다.

‘알아서 잘 빠져나가리라 믿소.’

진하군은 검무양을 믿었다. 게다가 마불도 함께 있으니.

“좋습니다, 함께 추격하시죠.”

그렇게 그들이 추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 고목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위에 서 있는 그들은 잘생기고 풋풋했다.

그들은 바로 검무극과 독왕이었다.

“제겐 그리 잘난 척하면서. 저 보십시오. 무림맹 무인들에게 허둥지둥 쫓기는 거.”

“너라면 뒤에 더 많이 달고 쫓기고 있었겠지.”

검무극이 못 들은 척 제 할 말만 했다.

“어휴, 마불님 몸에서 빛까지 납니다. 저래서 어찌 달아나려고.”

그들이 나란히 나뭇가지에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저 멀리 쫓고 쫓기는 검무양과 진하군의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나저나 이것들이 형과 친구를 동시에 건드리고 있네요.”

검무극이 독왕을 돌아본 후 덧붙여 말했다.

“우리 독왕님의 충실한 채집꾼까지도요.”

독왕이 그게 제일 화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어서 무한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마불과 함께 독초 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독왕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번 일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직접 온 것이고.

게다가 직접 나서지 않기로 사마명에게 약속까지 하고 왔다. 물론, 그건 지킬 수 없는 약속이겠지만.

“우리 예쁜 여협들 많이 오는 주점에 가서 술부터 한잔하시죠. 저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무한의 여인들이 그리 예쁘답니다.”

독왕이 저 멀리 쫓고 쫓기는 쪽을 쳐다보았다. 저긴 저 난리인데? 하는 표정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둘이서 알아서 잘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저 재미없는 두 사람, 좀 친해지라고 하죠. 우린 여협들과 술이나 한잔 마시면서 계획을 세워보죠.”

검무극이 화려하게 펼쳐진 무한 거리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덧붙였다.

“음모를 그들만 꾸미란 법 있습니까?”

여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멸마대가 앞장서 내달렸고, 그 뒤를 일검문주가 이끄는 무한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일검문주는 자신이 쫓는 마인들이 천애거사를 공격한 자라 생각했기에 추격에 필사적이었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뒤에서 들려온 외침에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졌다. 검무양과 마불만 있었다면 자신들이 뒤쫓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지단 무인들과 곽영까지 있었다.

그랬기에 이쪽의 추격을 쉽게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그때 저 앞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앞장서 달리던 멸마대 무인 하나가 바닥과 주위 풀과 나무를 살피더니 왼쪽 길을 쳐다보았다. 멸마대에서 가장 추종술에 능통한 그가 검무양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낸 것이다.

곧이어 뒤따르던 일검문주와 무한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진하군이 일검문주에게 다급히 말했다.

“여기서부터 나눠서 추격하시죠! 우리가 좌측 길을 맡겠습니다. 우측을 맡아주십시오.”

“진 대주, 조심하시게!”

다행히 일검문주는 곧장 오른쪽으로 무인들을 데리고 달렸다. 설마 멸마대주가 일부러 자신을 떨쳐놓으려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 듯 보였다.

진하군과 멸마대 무인들은 지금까지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조금 전에는 전력으로 뒤쫓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달리니 저 앞으로 검무양 일행이 달려가는 게 보였다. 지단 무인과 멸마대 무인들 사이에 실력 차이가 확실히 난다는 것은 이 경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달려가던 마불이 뒤를 돌아보았다.

뒤쫓는 이들이 멸마대뿐임을 확인한 그가 속도를 늦췄고, 일행들이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섰다. 쉬지 않고 달렸던 지단 무인들은 숨을 헐떡였다.

검무양이 등에 업고 있던 곽영을 내려놓았다.

“괜찮나?”

“네,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업혀 온 자신이 불편해봤자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자신을 업고 달려온 검무양이 걱정이지.

검무양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숨소리는 평온했다.

정말이지 마교 대공자 등에 업혀 보다니. 정말이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곽영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해요.”

멸마대가 뒤이어 도착하지 않았다면 이런 농담을 덧붙였을 것이다.

저를 정파에 버리지 않고 뛰어주셔서.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심일지도 모르겠다. 놀랍게도 이들 마인들과 함께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했으니까.

도착한 멸마대가 주위를 경계했고, 진하군이 검무양을 향해 다가왔다.

검무양이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맙소.”

검무양은 진하군이 뒤쫓는 속도를 조절했고, 지금은 다른 무인들을 떨치고 자신을 만나러 왔음을 잘 알았다.

진하군도 고마움을 전했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와주셔서 고맙소.”

탈출 과정에서 정파인들을 아무도 죽이지 않고 빠져나온 것이다.

사실 이 상황에서 더 고마운 쪽은 당연히 검무양이었다. 검무양은 지금 진하군이 크게 무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무림에 알려지면, 크나큰 구설에 오를 것이다. 멸마대주가 마교의 대공자와 밀담을 나누는 것이었으니까. 의도적으로 뒤쫓던 마인들을 풀어준 것이니까. 그는 후계자 자리를 걸고 있었다.

“한데 우리 거처로는 어떻게 알고 오신 거요?”

검무양의 물음에 진하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일검문주의 수하가 장소를 알려왔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일검문주가 무인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일검문이 놈들과 한패인 거 같소?”

이 역시 장담할 수 없었다. 일검문은 역사가 오래된 무한의 문파였다.

일검문주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 역시 그가 마인에게 팔이 잘린 것 때문이었고. 그랬기에 이 상황만으로 그들이 배후 조직이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 무한의 무인들이 흥분한 상태요. 조심하셔야 할 거요.”

진하군이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언제 일검문주가 이곳으로 돌아올지 모를 상황에서 한가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저쪽 능선을 돌아서 내려가면 다시 무한으로 갈 수 있소.”

진하군이 눈에 띄지 않고 무한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검무양과 진하군이 서로 포권했다.

“고맙소.”

“나중에 봅시다.”

진하군은 마불에게도 정중히 인사한 후 마지막으로 곽영을 보았다. 그녀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준 후 멸마대를 이끌고 그곳을 떠났다.

곽영은 알 수 있었다. 동생을 구하는 일, 잊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임을.

그가 떠나자 검무양이 마불을 쳐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눈빛에 마불이 차분히 말했다.

“우선 저 여인과 수하들부터 안가로 보내시지요.”

무한의 무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마인들을 찾는 상황에서 수하들과 곽영을 데리고 움직이는 건 눈에 띌 위험이 너무 컸다.

지금까지는 무한에 있는 일반 은신처에 있었다면 이제 안전한 안가로 보내려는 것이다.

검무양이 호명에게 말했다.

“곽 장인과 함께 안가로 가 있도록.”

호명은 마불이 오지 않았다면 자신만이라도 남겠다고 했겠지만, 마존이 그를 지켜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곽영은 끝까지 자신을 챙겨주는 검무양이 고마웠다. 저 여자란 호칭 대신에 곽 장인이란 호칭에 더 고마웠고.

그래, 이 인연은 끝까지 잘될 거라 믿었다. 좋은 철이 들어온 날 시작된 인연이었으니까.

멸마대주에게만 맡기지 말고 동생 잘 부탁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남자를 보다 보니까, 그런 말은 필요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구해도 생색내지 않을 사람이고, 못 구해도 겉으로 미안해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겐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세요.”

그렇게 호명과 지단 무인들이 그녀를 데리고 안가로 떠났다.

검무양과 마불이 능선을 돌아 무한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 그들 앞으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계속 검무양에게 정보를 전했던 통천각 무인이었다.

“지금 당장 두 분께 만나자는 기별입니다.”

“누가?”

“임시 교주님 명령입니다.”

검무양이 무인에게 말했다.

“지금은 못 돌아간다고 전하게.”

돌아오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이번 일을 해결할 작정이었다.

“아뇨, 본단에서 뵙자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통천각 무인의 입에서 정말 상상도 못 한 장소가 흘러나왔다.

“무한에서 제일 물 좋은 주점에서 뵙자고 하셨습니다.”

아! 확실히 동생이 보낸 연락이었다.

* * *

“저기 여협들이 우릴 쳐다봅니다. 보지 마세요. 아, 저기 반대쪽에 연분홍 무복 여인도 보이십니까? 아까부터 우릴, 아니 정확히 저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역시! 이 얼굴은 지역 불문! 나이 불문! 다 통한다니까요.”

그러자 주점 바깥을 쳐다보고 있던 독왕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날 봤겠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부정할 수 없군요. 반만 인정합니다.”

여전히 독왕은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님이 가득한 시끌벅적한 주점은 정신이 없었다. 정말 검무극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주점에 앉아 있을 일은 평생 없었을 거다.

“여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독왕의 말에 검무극이 말했다.

“무슨 그런 오해를! 저 여자 좋아합니다.”

독왕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좋아한다니까요?”

물론 검무극은 이 말이 통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이안을 그냥 두고 있는 한, 여자 좋아한다는 말은 통할 수가 없다.

검무극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무한에 와보신 적 없으시죠?”

외부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독왕이었다. 그런 그가 무림맹 본단 앞에 와 본 적은 당연히 없을 줄 알았는데.

“있다.”

“언제요?”

“예전에.”

“누구하고요?”

그러자 정말 뜻밖의 사람이 나왔다.

“교주님과.”

“아버지요?”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요?”

“내가 막 마존 자리에 올랐을 때.”

그때 아버지와 무한을 함께 왔었다고?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닌 거 같으면서도 우리 아버지, 의외로 부지런하다니까요. 무슨 일로요?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하지만 독왕은 말해주지 않았다.

검무극은 아버지와 독왕이 무한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독왕을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생각했기에 참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두 사람이 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의외로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독초도 함께 캔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일단의 무인들이 객잔 앞을 뛰어서 지나갔다.

“비켜라!”

길을 가던 이들이 양옆으로 비켜섰다.

“마교 놈들이 나타났다!”

아마 형을 뒤쫓으러 합류하는 이들처럼 보였다. 길 가던 무인들이 무작정 그 뒤를 따라 달려갔다. 무한은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

소문은 굉장히 빨리 퍼졌고 놈들은 소문을 이용해서 우릴 압박하고 있었다. 칼보다 더 강한 소문이었다.

그때 주점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죽립을 눌러 쓴 채 들어온 그들은 검무양과 마불이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얼핏 봐서는 아들과 함께 온 것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으며 검무양이 독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이네.”

독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오면서 마불님께 한월객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의치 말게.”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검무양이 옆자리의 마불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검무극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형, 나도 있어!”

검무극이 나는 보이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검무양 앞에 손을 휘저었다.

“나 여기 있다니까. 죽립이 이쪽은 안 보이게 가려졌어?”

하지만 검무양은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 술잔을 비웠다.

검무극이 목소리를 깔고 형에게 말했다.

“무엄하다! 임시 교주님이 납시었는데!”

그러자 검무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가 들었을까 걱정한 것인데.

“내가 교주라고 고함을 질러도 아무도 신경 안 써.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고.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술 마시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그래서 얼굴을 이렇게 훤히 드러내놓고 있는 거냐?”

“넷이 모였는데, 넷 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 그게 더 눈에 띌걸? 기왕이면 잘생긴 둘이 얼굴을 드러내야지.”

“그럼 은밀한 곳에서 만나자고 해야지!”

동생이 왜 왔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애거사가 등장했으니 교에서도 바짝 긴장했을 거다.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가출이라도 한 거냐?”

사마 군사가 절대 보내주지 않았을 텐데.

“가출은 무슨. 군사님 허락받고 왔어.”

쉽게 허락해줬을 리가 없다. 검무극이 어떻게든 그를 설득했겠지.

어쨌든 결국 검무극을 보냈다는 건 사마명도 그만큼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긴다는 뜻이리라.

“대체 무슨 일이야?”

동생의 물음에 검무양은 술잔을 비운 후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놈들이 의도적으로 우릴 무한으로 끌어들인 거 같다.”

무림맹주에게도 한 말이었다. 위조 암기를 만든 자를 쫓았더니, 맹주님 앞에 서게 되었다고. 분명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형이 제대로 판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검무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이 무한이 거대한 함정이 된 거군.”

다른 두 마존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왔는데 일이 커져 휘말린 것과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것과는 차이가 컸다.

“그래서 너도 온 거 아니냐?”

검무양의 물음에 검무극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아니. 나는 독왕님 뵈러 왔어. 독왕님과 함께 무한의 여인들에게 눈 호강 시켜주려고.”

그러자 독왕이 허를 찔렀다.

“내가 사고 칠까 봐 감시하러 왔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마불은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그런 목적이 있었으니까.

검무극도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본교 최후의 보루이신데, 옆에서 말려야죠.”

오히려 더 강조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아버지의 무림일통도 말리려는 사람인데, 무림 멸망을 두고 보겠습니까?”

무림 멸망이란 말에 독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듣기에 따라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이었는데, 독왕은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듣고 있던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같은 말을 해도 ‘독왕님이 알아서 잘하실 텐데, 왜 말려?’ 하는 말보다 지금 저 말이 독왕의 기분을 훨씬 좋게 해줬음을.

기분을 좋게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독왕을 말리는 말임을. 쉽게 쉽게 말을 내뱉는 것처럼 들리지만, 절대 허투루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이제 막 도착한 사람이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는 형이 내게 말해줘야지.”

지금은 갑갑하게 꽉 막힌 상황이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일이 정말 자존심 상했을 텐데.

하지만 검무양은 이제 이런 농담을 할 정도로 사람이 변했다.

“지엄하신 임시 교주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형의 이런 변화가 너무 기분이 좋았다. 형, 더 변해도 돼. 자꾸 변해도 돼.

“그럼 이 임시 교주님이 나서줘야 할 때가 됐군.”

검무극이 차분히 형에게 말했다.

“천애거사는 평생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이야. 따로 자신의 수하들을 두지도 않았고. 한데 과연 혼자일까?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그러자 검무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지.”

분명 누군가 주위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마불이 조심스럽게 검무양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무한의 문파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러자 검무양이 한 곳을 지목했다.

“일검문이 우리 은신처를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우릴 뒤쫓기도 했지요.”

마불 역시 그들일 거로 확신하려던 그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겁니다. 그들은 무한의 정파 문파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인데. 굳이 자신들의 칼을 우리에게 노출할 리 없지요. 그 칼은 마지막에 쓰겠지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기에 검무양과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천애거사를 따르는 문파 중에서 잘 나서지 않았던 문파겠군.”

검무양의 추측에 마불이 덧붙여 말했다.

“그자와 비슷한 시기에 이곳 무한에 자리를 잡은 문파겠군요.”

이 내용에 해당하는 문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감탄했다.

“역시 우리 형과 마불님은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독왕님, 우린 이만 돌아가시죠. 여긴 두 분에게 맡겨도 충분할 거 같습니다.”

두 사람에게 공을 돌렸지만, 검무양과 마불은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함께 있었기에 이런 결론이 내려졌다는 것을.

“저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검무극이 저 멀리 무림맹 본단 건물을 바라보며 덧붙여 말했다.

“친구 집에 놀러 왔으면 어른께 인사부터 드려야지요.”

그 경솔한 생각이 듣고 싶네

맹주전으로 돌아오는 내내 진하군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할아버지에게 천애거사에 관해 뭐라 보고드려야 할지.

후계자를 위한 시험처럼 맡긴 일이기에 명쾌한 답을 내놓았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진하군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실망하실 줄 알았던 할아버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패천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했다.

만약 천애거사가 진짜 악인이라면?

자신마저 속인 그 깊고도 무서운 흉계를 손자가 어찌 알아낼 수 있겠는가?

만약 아니라면?

결백한 사람을 의심하니 헷갈리고 알 수 없을 수밖에.

이래저래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진패천이 태사의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맹주전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림맹의 전경.

이 변함없는 풍경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싸움보다 어려운 싸움에 직면했음을 느꼈다.

뒤에서 진하군의 물음이 들려왔다.

“거사님을 만나 보실 겁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암습을 당했는데 만나봐야지.”

직접 만나봐야 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까?

손자야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커서 이번 일이 마교의 음모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일.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자칫 오해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때 허공에서 뜻밖의 보고가 들려왔다.

“천마신교의 임시 교주가 뵙기를 청합니다.”

창밖을 바라보던 진패천이 뒤로 돌아섰다. 진하군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손자에게도 미리 기별하지 않고 온 모양이다.

검무극까지 직접 왔다고?

두 가지 중 하나다. 정말 천애거사를 배후로 생각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들이 직접 음모를 꾸미는 것이거나.

진패천이 차분히 말했다.

“모셔라.”

“네.”

진하군은 할아버지의 기도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이제 손자를 대하는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무림맹주의 위엄과 권위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제 할아버지는 전장에 서 계셨다.

자신과 친구인 검무극이지만, 그는 할아버지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과연 그렇다는 듯 진패천이 한 가지 사실을 되새기게 했다.

“잊지 마라. 네가 그 사람을 몇 번째로 믿는다고 말했는지.”

진하군은 검무극을 다섯 번째로 믿는다고 했다. 우리가 옳다는 믿음과 할아버지, 멸마대 수하들과 무림맹 무인들, 그다음으로 믿겠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 말씀하고 계셨다. 괜한 우정에 휘둘려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고.

“명심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죽립을 눌러쓴 검무극이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그는 입구에서 죽립을 벗은 후 태사의 아래까지 천천히 걸어와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진패천이 태사의에서 아래로 걸어 내려왔다.

그 역시 정중히 예를 갖춰 검무극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검 교주.”

소교주 검무극이 아니라 임시 교주 검무극으로 대했다. 개인적인 친분은 친분이고,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이에 지켜야 할 예의는 따로 있었다.

“편히 대해주십시오. 오늘 방문은 임시 교주로 찾아뵌 게 아니라, 하군이 친구로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면서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이 눈빛에 담겼다.

반갑다, 친구.

항상 이렇게 사람 놀라게 하지?

할아버지가 보고 계셨지만, 진하군은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막상 검무극을 보자 그 반가움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매번 그렇게 놀리는 그인데도, 보면 이렇게나 반갑다.

검무극이 다시 진패천에게 정중히 말했다.

“오늘 무한에 도착했습니다. 형과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은밀히 움직였습니다. 미리 기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도착한 날 인사하는 거였으니, 무한에 몰래 들어와서 활동한 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사전에 연락 없이 찾아왔다는 게 문제일 뿐, 검무극이 무한에 온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진패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교주가 되어 보니 어떤가?”

검무극이 계단 위의 태사의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태사의 만큼이나 맹주의 태사의도 편한 자리가 아닐 것이다. 편하게 앉아 있었다면 이미 저 자리는 아버지에게 빼앗겼을 테니까.

“저 자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진하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친구. 지금이 훨씬 좋은 때더라고.”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은 미소만 옅게 지었다.

“왜? 안 믿겨?”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잠시라도 맡겨서 혼 좀 내주십시오. 저만 당하니까 억울합니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이런 농담을 하는 건, 할아버지에게 어서 손자에게 후계자 자리를 맡기십시오, 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할아버지, 이런 사람을 어찌 안 믿겠습니까?’

이미 자신의 목숨도, 동생의 목숨까지 구해줬던 그였는데.

그런 그는 여러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섰다.

소교주가 아닐 때도 있었고, 소교주일 때도 있었으며, 지금은 임시 교주가 되어 서 있다.

각기 다른 자리지만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장담할 수 있다. 교주 자리에 올라도 검무극은 지금과 똑같은 모습일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 올 때만 해도 은밀히 움직이려 했습니다. 이번 일은 우리 일이 아니라 무림맹이 해결할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한데 왜 마음이 바뀌었나?”

검무극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저 친구와 예전에 약속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서로 연락하자고요. 위험한 일이 있으면 꼭 서로 돕자고요.”

그러자 진패천이 넌지시 물었다.

“자네가 제일 위험한 건 아니고?”

검무극이 목소리를 음산하게 깔며 대답했다.

“확실히 제가 제일 위험하죠.”

순순히 인정하는가 싶더니.

“단, 악한 놈들에게만요. 저는 맹주님이 악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아량과 자비가 없거든요. 개과천선을 믿지도 않습니다.”

검무극의 생각을 알 기회였기에 진패천은 차분히 물었다.

“왜 믿지 않나?”

“백 명의 죄인 중 한 명만이 가능한 개과천선 때문에 나머지 아흔아홉의 악인이 개과천선을 방패로 삼거든요.”

어설픈 용서가 만들어낼 더 큰 비극을 막겠다는 말이었다.

진패천에게서 그래도 그 한 명을 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패도적인 성격의 진패천은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같은 생각이었다.

“나도 악인에겐 자비가 없네.”

“그래서 맹주님을 존경합니다.”

진패천의 강렬한 눈빛을 검무극은 당당히 마주 보았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맹주님 허락은 꼭 받고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 예의면 충분했다. 아니, 예전을 생각하면 예의는 넘치고 있었다. 천마신교가 언제 자신들에게 기별하고 일을 처리했던가? 검무극이 소교주가 되고 그나마 변하는 중이었다.

진패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무극이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이 말을 묻고 싶었다.

“이번 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진패천은 물론이고 진하군도 검무극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이제 막 도착해서 아직 천애거사 얼굴도 못 본 제 경솔한 생각 말씀이십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의 그 경솔한 생각이 듣고 싶네.”

검무극은 잠시 말을 아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결코 경솔한 대답이 아님을 이 잠깐의 침묵으로 보여준 후, 검무극이 단호히 말했다.

“저는 천애거사가 이번 일의 배후이고 악인이라 생각합니다.”

맹주전 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사도맹주를 천마신교 본단 앞 허름한 주점으로 데려다 놓은 사람이다.

사도맹 후계자와 자신의 손녀를 그 많은 고수가 보는 앞에서 춤을 추게 하는 사람이다. 그곳에서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피를 보지 않고 후계 싸움을 끝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맹주님의 친구는 악인입니다.

이유를 듣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분명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할아버지 대신 진하군이 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진하군은 딱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진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들어야 했다. 할아버지를 지키고 맹을 지키기 위해서.

진하군이 물었지만, 대답은 진패천에게 했다.

“저도 그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까요.”

감정적이지만 그 어떤 대답보다 강렬한 대답이었다. 검무극의 말이었기에 그 대답은 더욱 힘이 있었다. 이처럼 똑똑한 사람이 선택할 방법이었으니까.

“맹주님의 신뢰를 얻는 것은 정파 무림 전체의 신뢰를 얻는 것이니까요. 과연 천애거사가 맹주님의 친우라는 사실이 없었다면, 지금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것이다. 무림에 의를 행하고 협을 베푸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화율청이 그 모든 이의 대표처럼 알려진 것은 무림맹주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걸 물었다.

“천애거사와 처음 친분을 맺었을 때가 기억나십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검무극은 그들의 첫 만남부터 파고들었다.

진패천은 오래전 그날을 말해주었다.

협객행을 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악을 처단하고 다니던 그 무렵, 지나가는 마을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달려가 보니 그 친구가 마을을 습격한 녹림도들과 싸우고 있었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를 도와 도적들을 모두 해치웠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자넨 그 만남이 계획된 거라고 말하고 싶은가 보군.”

과연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도적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도 많이 죽었다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았지.”

진패천이 한숨을 내쉰 후 덧붙여 말했다.

“심지어 아이들까지 여럿 죽었고.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네.”

진패천은 단호히 대답했다. 백번 양보해서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공도 익히지 않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자신에게 접근했다고?

그날 죽은 아이를 부여안고 펑펑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눈물이 진심이 아니라고? 아직도 각인되듯 생생히 기억나는 그 눈물이?

“그럴 리 없네.”

검무극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 천애거사 얼굴도 못 본 제 경솔한 생각이라고요. 제 생각이 과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마지막 대법 재료인 비마혼을 찾기 위해 천마신교로 돌아왔을 때.

그때는 오직 비마혼을 가져가겠다는 목적을 위해 모든 걸 속였다.

그 역시 그런 의지를 가진 인물이라면?

검무극은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단, 저는 진 대주와 이번 일에 대해 조사하겠습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맹주님의 우정을 이용하려 들었으니, 우리도 우정을 이용해서 상대해야지요.”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과 함께라면 분명 진의를 밝혀낼 수 있으리란 믿음이 들었다.

진하군은 이 안도감에 더는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믿음직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반면 진패천은 말이 없었다.

검무극이 경솔한 말을 했다며 한발 물러났지만, 여전히 천애거사를 배후로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가 악인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조언을 했다.

“친구분을 만나시면 솔직히 다 말씀하십시오.”

그 솔직함의 범위가 생각 밖이었다.

“제가 왔다는 말씀도 하시고, 저와 형이 그를 강력하게 의심하고 있다는 것도 다 말해주십시오. 마교 놈들이 자꾸 이렇게 나오니 심란하다, 맹주님의 심정도 솔직하게 말씀하시고요.”

정말이지 의외의 조언이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랫동안 맹주 자리를 지켜오신 분이시니 계략을 부리는 수많은 군상을 보셨을 겁니다. 하시려고 들면 표나지 않게 천애거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 못 속일 거라 생각한다.

상대는 수십 년을 맹주 옆에 있었던 자다. 누구보다 맹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맹주님이 속임수 싸움을 왜 하십니까? 그보다 훨씬 강한 무기를 가지고 계신데요.”

검무극이 말한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진실로 싸우시는 겁니다. 평생 거짓 없는 삶으로 정파 무림을 이끌어온 분이시잖습니까? 어설픈 진실은 간계한 악에게 이용만 당하겠지만, 맹주님의 진실은 만년한철처럼 강할 겁니다.”

손자 앞에서 차마 거짓말은 못 해서였을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진패천이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거짓말 잘하네. 거짓말로 사람들 대한 적도 있고.”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네, 지금의 이 진실로 싸우십시오.”

물론, 맹주의 진실이 놈을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진심이나 진실이 통한다면 어찌 악이라 불리겠는가?

그런데도 맹주에게 이런 말을 해준 이유가 있었다.

맹주가 지금처럼 복잡한 심경으로 그를 만나면 백전백패할 게 뻔했으니까. 그의 의도대로 휘둘리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아무리 강인한 사람도, 상대에게 휘둘리는 순간 끝이다. 오히려 똑똑하고 강하기에 더 깊고 강하게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기준을 잡아준 것이다.

고지식하고 다소 답답한 면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지식했기에 꾸준하게 쌓아올 수 있었던 그것을 꽉 붙잡으라고. 경건하고 굳건했던 그의 삶을 무기로 삼으라고.

그래서 무림맹주 진패천이 적어도 휘둘리지 않고 그를 대할 수만 있다면.

“그럼 오직 맹주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뭔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검무극과 진하군이 무림맹을 나섰다.

검무극은 주위의 이목을 피하려고 여전히 죽립을 착용하고 있었지만.

“내가 맹주님을 만났다는 걸 저쪽에서도 알고 있을 거네.”

검무극은 적들의 정보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이곳 무한은 그들이 만든 무대였으니까. 이 무대의 주인공은 저들이었다.

진하군의 눈빛에 심각함이 스쳤다. 검무극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들은 자신들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있다는 의미.

“맹 내부에도 놈들의 눈이 있다는 건가?”

“수십 년을 준비해 왔다고 생각해 보게.”

검무극이 자신이 쓰고 있는 죽립을 툭 치며 말했다.

“이것으로는 막을 수 없는 세월이지.”

그 말을 듣자 진하군 역시 진패천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번 싸움이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그 어떤 싸움보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고.

“그들인가?”

진하군이 말한 그들이란 정사마 삼자회합을 하게 만든 그 배후 세력을 의미했다.

검무극은 단번에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이라 생각하네.”

오직 그들만이 천마신교와 무림맹을 상대로 이런 음모를 꾸밀 수 있을 테니까.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넨 여전히 천애거사라고 생각하지?”

진하군은 마지막으로 더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보다는 검무극이 더 뛰어난 통찰력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리라 믿었기에.

검무극은 아니었을 경우를 들어 자신의 믿음을 설득했다.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니었을 경우는 염두에 둘 필요가 없네.”

“어째서?”

“만약 그가 결백하다면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그만이니까.”

진하군이 뭐가 그리 쉽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정말 쉽게 생각했다.

“수십 년 우정은 그럴 때 발휘해야지. 그 귀한 것으로 헷갈릴 게 아니라.”

진하군은 이 말에 이번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에 대한 핵심이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천애거사의 흑심을 알아보지 못해서 발생하는 결과에 비하면 친구를 잠시 오해한 건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어차피 확실한 증거 없이 할아버지가 느낌만으로 천애거사를 죽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은 마음껏 그를 의심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검무극의 시원시원한 결론에 진하군은 답답했던 마음이 확 풀렸다.

“와줘서 고맙네.”

진하군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검무극이 와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와야지.”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래, 당연히 와야지.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일 거다. 당연히 가야지.

“한데 우리 어디 가나?”

검무극의 물음에 진하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친구가 멀리서 왔는데 잘 방은 내줘야지.”

* * *

진하군이 마련해준 장원은 멸마대가 사용하는 곳이었다.

저잣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산 아래에 있었는데, 이곳이 무림맹 소유라는 걸 다들 알기에 당분간 무한의 무인들에게 수색당할 걱정은 없었다.

“보십시오, 제가 딱 오니까 대우가 달라지죠?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검무극이 입구에서부터 큰소리쳤지만, 물론 아무도 그 잘난 척을 받아주지 않았다.

검무양은 의심스러운 게 있는지 장원 내부를 살폈고, 마불은 외부를 살피러 나갔다. 독왕이 마불 뒤를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검무극이 소리쳤다.

“독왕님이 독초 캐러 가자고 유혹해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마불님을 약초채집꾼으로 여기고 있다고요!”

독왕의 뒷모습에서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검무양이 동생을 야단쳤다.

“마불님께 무례하게 굴지 마라.

그러자 검무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옆에 계실 때 야단쳐야, 마불님이 형 마음을 알아주지.”

“알아달라고 하는 말 아니다.”

“알지. 아는데 기왕이면 알아주면 더 좋잖아?”

형만의 마존이니까. 형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마존이니까.

검무극은 진심으로 이 관계가 그들 인생의 마지막까지 변함없기를 바랐다.

마당을 살핀 검무양이 방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혹시 기관 장치가 설치되지는 않았나 유심히 살폈다.

“진 대주가 이 장원에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뒀을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검무양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사람 뭘 믿고?”

진패천이 손자에게 했던 걱정을 검무양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고.

“사람들이 다 너 같지 않다.”

검무극이 바짝 뒤따라 붙었다.

“이거 칭찬이지?”

검무양은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방들을 확인했다.

“넌 여기 작은 방 쓰고. 이 방은 마불님 드려.”

제일 크고 좋은 방을 마불 방으로 정하는 검무양이었다. 물론 제일 작은 방은 검무극에게 주었다.

“마불님이야 말로 제일 작은 방을 드려도…….”

검무양이 인상을 쓰며 홱 돌아서자 검무극이 도망치듯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마불님 계실 때 그렇게 좀 하라고.”

검무극이 침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 편하고 좋다!”

검무극은 누운 채 창밖을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다가 큰소리로 물었다.

“진 대주를 형이 먼저 불렀다면서?”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양의 방에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구해줘야 할 사람이 있다.”

검무극도 곽영이라는 장인의 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날 사람 죽이는 궁리만 하던 사람이 누굴 구한다니까 너무 어색하다.”

살인마로 몰아도 검무양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물론, 형을 놀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그 여자 예뻐?”

버럭 할 법도 했는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검무극은 이렇게 농담이나 하고 태평하게 보였지만 내심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화율청.

회귀한 후 처음 상대하는 화씨인데 어찌 방심하겠는가?

그때 문 쪽에서 들려오는 질책.

“너는 오지 말고 본교를 지켰어야지.”

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 형이 서 있었다.

천마의 혈육인 두 사람이 위험한 한 장소에 있는 건 절대 안 될 일임을 검무양도 잘 알고 있었다.

“본교는 내가 없어야 지켜질걸?”

임시 교주에게 천마서각이 털리고 있었으니까.

“장난치지 말고!”

“뭐가 걱정이야? 형이 날 지켜줄 텐데.”

“내가? 왜?”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라면서?”

생각지도 못한 말에 검무양은 당황했다.

“누가 그런 소릴 해?”

“누구겠어? 입 싼 누군가겠지.”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셋, 진패천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진하군은 정자 아래에 있었고, 마불은 안개 속에 있었다.

“진 대주지?”

당연히 친구인 진하군이 알려줬으리라 생각했는데. 범인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마불님이 알려주셨어.”

오늘 길에 마불이 슬쩍 전음으로 알려주었다.

형과 관계가 더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해준 말인데.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을 위해서 말해준 거지. 형에게 더 잘하라고.”

이럴 때면 저 무뚝뚝한 형의 얼굴에도 격정이 스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형도 표현 좀 하고 살아. 마불님이 형만 바라보고 산 세월이 얼마인데. 이젠 좀 표현해도 돼.”

그러자 검무양이 불쑥 말했다.

“고맙다.”

“나 말고. 마불님께 직접 말씀드리라니까.”

하지만 검무양은 마불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네게 고맙다고.”

“갑자기?”

뜬금없는 감사였기에 검무극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형에게 감사 인사 받을 일을 워낙 많이 해서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괜찮아. 형제끼리 그 정도쯤이야.”

그러자 검무양이 옷깃을 살짝 열었다. 안에 극품천잠사를 감고 있었다.

마불에게 형 심장에 감아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형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은 마불이다.

“아, 이건 그 정도쯤이야가 아니네. 내 목숨을 뜯어 준 거야.”

예전의 형이었다면 누굴 무시하는 거냐면서 당장 가져가라며 풀어줬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심장에 감지도 않았겠지. 억지로 감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보여주지도 않았을 테고.

이렇게 변한 면도 있었지만, 변함없이 형다운 모습도 있었다.

“이건 돌아가서 돌려주마.”

돌아가서 돌려주겠다는 건 자신이 앞장서서 싸우겠다는 말이었다.

동생을 죽일뻔해서 열받았는데, 이제 동생까지 이 위험한 곳에 오게 했으니. 진짜 놈들에게 열받은 거다.

“우리 형 화났네. 너희들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제 큰일 났다.”

* * *

검무극과 검무양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통천각을 통해 천애거사가 무한에 정착한 시기를 전후해서 몇 년 동안 생겨났던 문파들 자료를 모두 받았다.

대상이 되는 문파는 모두 여덟.

검무극과 검무양은 조사해야 할 문파를 반으로 나눠서 직접 조사했다.

보내온 내용만으로 그 실체를 알 수 없었기에 문파에 가서 직접 살펴보았다. 두 사람이야 문지기 얼굴만 봐도, 마당에 흐르는 공기만 봐도 수상한 점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두 사람이 조사를 마친 후 다시 돌아왔다.

“영천파(寧川派)는 중원에 너무 많은 지부를 내서 제외, 패검문(覇劍門)은 얼마 전 문주가 사고로 죽고 그 혈육이 이어받아서 제외, 사검문(士劍門)은 너무 열렬히 천애거사를 추종해서 제외, 그리고 생도방(生道幇)은 문도 숫자가 너무 많아.”

두 사람이 서로 조사한 바를 공유했는데 검무양의 조사도 검무극과 다를 바 없었다. 천애거사를 은밀히 지켜주고 있었던 수호문파는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예상이 틀렸던 것 같습니다.”

검무양의 결론에 두 마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천각 자료를 바탕으로 두 사람이 직접 나가서 조사했으니, 결과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이곳 무한에서 그를 지켜주는 문파가 없다는 의미. 정말 그는 혼자서 이 일을 맡아서 지금까지 온 걸까?

검무극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뭔가 놓친 게 있을 거라 여겼다.

“이 일은 한두 해에 끝나는 일이 아니야.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일인데, 그 한 사람의 노력과 운에 모든 걸 맡겼다고? 그럴 리 없지.”

이십 년간 잘해오다가 그다음 해 사고가 나서 죽게 된다면? 그럼 이십 년이란 세월이 그냥 날아가는 일이었다.

누군가 반드시 옆에서 그를 지지하고 도왔을 거다. 아무도 모르는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을 거다. 세월의 풍파를 함께 넘어온 존재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당시 세운 문파가 아니라 명성을 얻은 후에 다른 문파를 회유했을 수도 있지 않나?”

마불의 생각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아닐 것 같습니다. 왠지 처음부터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었을 거 같거든요.”

이번에는 검무양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문파가 아니라 개인이 그를 도왔을 수도 있잖아?”

“그는 맹주와 친구로 지냈어. 당연히 무림맹에서는 맹칙에 따라 그를 감시하고 조사했을 거고. 정말 철저히 했겠지. 우리에게 아버지 절친이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얼마나 철저히 그를 조사할지.”

그리고 통천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천애거사는 맹주 이외에 친구가 없었다. 그야말로 철저히 혼자인 그였다.

“놈들이 독을 다룬다고 하지 않았나?”

마불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위조 암기를 뒤쫓는 과정에서 직접 겪은 사람이 그였으니까.

“맞습니다. 위조 암기에 강력한 독이 발려 있었지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약물을 쓴 건지, 대법을 한 건지 사람들의 정신까지 조종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결하게 했고, 특정한 자백을 하게 했으니까. 그것만 봐도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독이라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는지. 섭혼술에 얼마나 치를 떠는지.

무림인들은 독왕과 섭혼마존을 가장 두려워했다.

한데 무림맹에서 맹주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독이나 섭혼술을 쓰는 자와 어울리는 것을 놓쳤다?

검무극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놓친 건 자신들이다.

검무극이 자료를 다시 살폈다. 처음과는 다른 마음으로 읽었다.

분명 빠뜨린 게 있다. 답은 여기 있다.

그런 마음으로 자료를 읽어가던 검무극의 시선이 한 곳에서 딱 멈췄다.

검무극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지어졌다.

“개인도 아니고, 문파도 아니고. 합법적으로 독을 쓰기도 하고, 사람의 머리에 침을 꽂기도 하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 * *

검무극을 비롯한 네 사람은 다루에 앉아 길 건너에 있는 건물을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저잣거리 한가운데 비싼 땅을 차지한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명심의원(明心醫院).

“협행을 자주 펼치는 천애거사가 가장 자주 들렀던 곳입니다. 돈 없는 이들을 데려가서 매번 치료를 받게 했지요. 그래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 곳입니다.”

검무양과 두 마존도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의원이라고? 이 음모의 배후를 받쳐준 곳이 의원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이곳이 배후조직이란 의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곳의 의원인 소정락(紹情洛)은 의술 실력도 뛰어나고 평판도 좋아서 무한에서는 무림맹 신의 다음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독왕과 마불 역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었으니까.

“특히 소정락은 독을 잘 해독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해독만큼은 무림맹의 신의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그래서 중원의 무인들이 독에 당하면 저곳부터 찾아간답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린 무인이 한두 명이 아니죠.”

그러자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독왕이 차분한 눈빛으로 핵심을 짚었다.

“독공의 꽃은 하독이 아니라 해독이지.”

다들 형만 좋아하기 있습니까?

독공의 꽃은 하독이 아니라 해독이다.

독왕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소정락은 의원이 아니라 독공을 쓰는 자라는 말씀이시군요.”

검무극의 말에 독왕이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밝혀낸 거지.”

검무극이 답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소정락은 해독을 잘하는 의원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이 저 명심의원이 천애거사를 떠받치는 곳일지도 모른다고 답을 찾아내는 순간, 이제 의원 소정락은 독공의 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밝혀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정락 역시 오랜 세월을 존경받는 의원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천애거사보다 상대하기 더 어려웠다. 그는 수많은 무인에게 가장 갚기 어려운 빚을 안겼다. 바로 목숨 빚을.

지금까지 소정락 덕분에 목숨을 구한 무인들이 무한은 물론이고 전 중원에 가득할 테니까.

검무극이 독왕에게 물었다.

“독 중에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독이 있습니까?”

독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蠱毒)을 쓴다면 가능하긴 한데.”

독왕이 검무양에게 물었다.

“대공자, 조종당한 자가 한 명이었나? 아니면 여럿이었나?”

“지금까지 여럿 보았습니다.”

“중요 인물이었나?”

“아닙니다.”

그렇게 숫자와 내용을 확인한 후에 독왕은 검무극에게 답을 주었다.

“그러면 고독을 쓴 건 아닐 거다. 사람을 조종하는 벌레는 구하기도 어렵고 다루기도 쉽지 않아서 남발해서 쓸 수가 없지.”

검무극이 결론을 내렸다.

“그럼 소정락 말고 사람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닌 자도 있겠군요. 독공에 의술까지 쓰는 소정락이 사람을 조종하는 사술이나 대법까지 익혔을 리는 없으니까요.”

독왕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보다 더 독을 잘 해독하는 실력이라면, 독공 역시 극한의 실력에 다다랐을 테고. 거기에 의술까지 능통했으니 다른 걸 익혔을 가능성은 없었다.

“천애거사 쪽은 맹주께서 알아보실 테니, 이쪽은 우리가 알아내야겠습니다.”

넷이 은밀히 들어가서 소정락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니, 넷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만독불침인 자신에게 소정락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해야 할 일은 그가 배후 세력임을 밝히는 일이다.

그가 의술을 펼치는 의원이 아니라 독공을 펼치는 독인이란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

그래서 그 증거를 무림맹주에게 보여줘야 한다. 정파 무림이 그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

증거도 없이 그를 죽인 후에 우릴 믿어달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번 일이 어려운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에게 접근해 볼까 합니다.”

멀리서는 절대 밝혀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체를 숨긴 기간이 길어도 너무 길다.

“어떻게?”

마불의 물음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의원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뭐가 있겠습니까? 환자로 가야지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통천각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문제는 일반 환자로 가서는 소정락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워낙 환자도 많고, 소정락 아래에서 일하는 의원만 스무 명이 넘는다고 하니까요. 일반 환자들은 소정락 얼굴 보기도 힘들죠. 단, 극독에 당한 이들은 예외입니다. 특별한 독일수록 더욱 그의 관심을 끌겠죠.”

결론적으로 극독에 중독되어 가야만 소정락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다행히 우리에겐 소정락에게 해독하게 할 독을 하독하실 분이 계시지요.”

검무극의 말에 독왕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검무극은 알았다. 지금 저 독왕의 웃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저놈이 감히 내 독을 해독해? 정말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하냐?

정말 독에 있어선 진심인 독왕임을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알죠, 알죠. 독왕님이 작정하고 하독하면 누구도 절대 해독 못 하죠.”

그 말에 독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딱 한 번, 죽었을 거라 장담했던 자가 살아서 돌아왔었으니까. 물론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고 했지만, 독왕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일이었다.

“며칠 동안 간신히 해독할 정도의 독으로 부탁드립니다. 되도록 놈의 시선을 끌 만한 독으로요.”

그럴만한 독은 분명 독왕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이 아니라 환자였다.

“누구에게 하독해?”

독왕의 물음에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검무극이 독왕부터 제외했다.

“독왕님이 직접 나설 수는 없죠.”

상대가 독왕을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숨겨도 오직 두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뭔가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마불님이 나서실 수도 없으시고.”

그러면서 검무극이 슬그머니 형을 쳐다보았다.

“아시다시피 우리 형이 독해서 고통을 잘 참긴 한데요.”

검무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검무극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만독불침이라 독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독왕 뿐이었다.

“나 임시 교주야, 형.”

그러면서 마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아무리 독왕님이시라도 임시 교주를 중독시켰다간 아버지에게 혼나겠죠?”

검무양으로 몰고 가는 걸 마불은 두고 보지 않았다.

“대공자를 중독시키는 게 더 혼날 텐데.”

“왜요?”

검무극이 따지듯 묻자 마불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장남이잖나? 교주가 원래 대공자를 많이 아꼈지.”

“저는요?”

“뭐, 자네도 아꼈겠지.”

“너무하십니다! 형은 마불님께 예의 없이 군다고 혼내고, 마불님은 형 편만 들고. 두 분이 짰습니까?”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저 말을 꺼내려고 마불에게 지원을 요청했음을. 자신이 예의 없이 굴지 말라고 혼냈다는 걸 마불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뭘 그렇게까지 애를 쓰냐? 나는 널 그렇게나 미워했는데.’

마불은 마불 대로 애쓰고 있었다.

“자네가 아픈 연기를 더 잘하잖아?”

“해보지도 않은 연기를 어찌 아시고요! 그리고 환자 보호자 연기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둘의 대화에 옅은 미소를 짓던 검무양이 독왕에게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검무양은 이 일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하마터면 독이 발린 암기로 검무극을 죽일 뻔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 중독되어야 할 일이 생겼다. 그 실수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운명이 아닐까?

“차라리 안가에 있는 무인을 하나 데려오십시오.”

이만큼이나 자신을 아끼는 마불의 마음에 검무양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불님.”

“괜찮긴요. 그냥 독도 아니고 놈의 눈에 띌 정도의 독이면, 몸이 많이 상할 겁니다. 차라리 내가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이럴 때 자신의 외모가 평범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검무양이 그 마음 감사하다는 듯,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독왕에게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왕이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독이나 하독할 그였겠는가?

“이번에 하독한 독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네 몸은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해질 거네. 같은 독을 당해도 지금보다 더 오래 버틸 수 있게 되겠지.”

그 말로 볼 때 독왕이 굉장히 귀한 독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재빨리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형에게 독이라니요! 이 사랑 받지 못하는 차남이 하겠습니다.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정말 다들 형만 좋아하기 있습니까!”

마불이 그제야 표정을 풀며 독왕에게 말했다. 안전 문제야 알아서 잘할 테니.

“그래도 덜 아픈 독으로 부탁하오.”

검무극이 입을 내밀며 얄밉게 한마디 했다.

“그럼 효과가 없죠. 비명이 절로 나는 독으로…….”

순간 검무양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독왕은 그저 검무양을 한 번 쳐다봤을 뿐인데.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하독한 것이다.

“으으으윽.”

흘러나오는 검무양의 비명이 심상치 않았다.

“어휴, 성격도 급하시지!”

검무극이 재빨리 형을 둘러업고 밖으로 내달렸다.

마불은 내심 놀랐다. 독왕의 하독 실력이야 잘 알고 있지만, 바로 눈앞에서 하독했는데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때 독왕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대공자는 괜찮을 거요.”

독왕의 그 한마디는 어떤 말보다 든든했다.

마불은 명심의원으로 달려 들어가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더니.

“독을 치료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마불은 독왕의 고마움을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우린 독초나 캐러 가십시다.”

* * *

밖에서 본 것보다 명심의원은 훨씬 컸다.

광장처럼 큰 마당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코를 찌르는 약 향이 입구까지 전해져오는 가운데 그곳의 광경이 펼쳐졌다.

붕대를 감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환자부터 백의를 입고 바쁘게 오가는 의원들, 약초 더미를 수레에서 내리는 일꾼들, 나무 아래에서 약초를 다듬는 아낙들, 나란히 늘어서서 절구통에 약초를 찧는 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무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한눈에 봐도 행색이 곤궁한 이들, 돈 없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짜로 치료해 준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검무극이 형을 업은 채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우리 형이 독, 독에 당했습니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청년이 달려왔다. 행색을 보니 아직 정식 의원은 아니고 의원들을 보조하고 도우며 의술을 배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리로! 어서 이쪽으로!”

청년이 안내한 곳은 급한 상태의 환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면 곧 의원님께서 오실 겁니다.”

청년은 검무양을 침상에 눕히게 한 후, 급히 사람을 부르러 달려갔다.

검무극이 그곳을 둘러보았다. 이십여 개의 침상에는 환자가 가득 차 있었는데, 칼에 찔린 사람부터 머리가 깨진 사람까지. 위급한 환자가 가득 있었다.

규모가 큰 줄은 알았지만 실제로 본 명심의원은 정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 빼고 어디 전쟁이라도 벌어지고 있나 봐.”

검무양은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 온몸이 타버리는 것처럼 아팠다. 의식이 멀쩡했기에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형, 괜찮아?”

검무극의 물음에 검무양이 눈으로 욕했다. 괜찮겠냐? 네가 당해봐라!

“정말 내가 대신 아프고 싶네.”

말과는 달리 눈은 웃고 있었다. 이때 놀려야지 언제 놀려? 그 의도가 명백한 눈웃음이었다.

딴 데 신경 쓰면 고통이 좀 나을까 해서 검무극은 자꾸 말을 걸었다.

“내공은?”

검무양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쓸 수 있다는 의미. 혹시라도 급박한 일이 생기면 무공을 쓰게 하려는 의도. 그 짧은 시간에 하독하면서 고려할 건 다 고려한 독왕이었다.

그때 젊은 의원 하나가 그곳으로 왔다.

“무슨 독에 당했소?”

“모릅니다. 제발 우리 형을 살려주세요!”

의원이 검무양의 상태를 살폈다. 몸을 만지자 검무양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형이 이런 비명을 내지른다는 건 정말 아픈 거다.

젊은 의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독인지 알아내고 고통을 줄여주려고 노력했지만, 비명만 더욱 커졌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도 없이 의원이 달려 나갔다.

고통스러워하는 형을 내려다보며 검무극은 문득 이 상황이 진짜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다. 독왕이 알아서 안배했겠지, 하는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정말 형이 눈앞에서 죽어간다면?

그때는 어떤 심정이 될까? 절로 가슴이 조여지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보니 형에 대한 마음도 많이 깊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참는 만큼 나중에 웃을 거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형의 입 모양이 말했다.

곧이어 다른 의원이 달려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단 더 나이가 든 중년 의원이었다.

그가 앞서 청년보다는 능숙하게 검무양의 몸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도 그의 몸 상태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독왕의 독을 어찌 일개 의원들이 다스릴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는 앞서 젊은 의원보다 빨리 포기했다. 그것만 봐도 그의 실력이 훨씬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중년 의원이 물러가고 얼마 후, 드디어 그가 왔다.

인상 좋고 풍채 좋은 의원을 보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소정락이라는 것을.

그는 소정락이란 이름표를 다는 대신 날개를 달고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 서너 명의 의원이 공손한 표정으로 뒤따라 걷고 있었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십이지왕 중에 독왕이 없었던 이유는 이 사람이 따로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정락이 환자들을 지나오면서 처방을 내렸다. 환자의 상태를 한 번 쓱 보면 처방이 나왔다.

“청목련(靑木蓮)과 칠성초(七星草)를 반반 넣어서 달여 먹여라!”

다음 환자의 붕대를 풀어 상처를 살피더니 직접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다행히 검이 장기를 스치고 지나갔네.”

그는 겉만 봐도 내부의 장기가 다쳤는지 안 다쳤는지 알아보았다.

다음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는 환자의 뼈를 직접 맞추고 부목을 댔다. 몸에 피가 묻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손길이 닿자 고통을 호소하던 비명이 잦아들었다.

검무극이 놀랍다는 듯 검무양을 내려다보았다. 형도 그 아픈 와중에 소정락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처럼 거침없이 환자를 치료하며 소정락이 검무양의 침상까지 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풍채가 좋아서인지 피부는 팽팽했고 두 눈에는 정기가 깃들어 있었다.

거침없던 처방이 잠시 멈췄다.

검무양의 상태를 살피던 그가 옆에 있던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 독, 누구에게 당한 건가?”

검무극이 그에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형이 워낙 성질이 더러워서 원수가 많습니다.”

검무양은 고통을 참으면서도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독 해독은 중원에서 의원님이 제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발 우리 형 살려주십시오.”

검무양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놀랍게도 소정락은 이 독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독은 세상에서 딱 세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독이네.”

우리가 악당이 된 기분인데?

“그 세 사람이 누굽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소정락은 대답 대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이 독은 당하고 싶어도 당하기 쉽지 않은 독인데.”

그는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들은 누군가?”

소정락은 정말 검무극의 정체를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드러난 모습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무극은 진하군에게 말했었다. 놈들은 자신이 맹주님을 만난 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

이 소정락 역시 자신을 알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모른다면 그조차도 배후가 의도한 계획일 거라고.

그만큼 검무극은 이번 상대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감숙 서도파의 검연입니다. 저기는 제 형이고요.”

일단, 검무극은 항상 위장하는 이름과 문파로 신분을 밝혔다.

“어쩌다 중독된 건가?”

검무극이 솔직히 말했다.

“길 건너 다루에서 차를 마시는데 갑자기 형이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습니다.”

그곳에서 형을 업고 달려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있을 테니, 금방 확인이 될 것이다.

“한데 이렇게 시간 낭비해도 되는 겁니까? 우리 형 죽습니다!”

이 순간에도 검무양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소정락은 그리 급한 기색이 아니었다. 당장 목숨을 끊는 독이 아니라는 걸 아는 듯 보였다. 거기에 결정적인 한마디.

“참게. 아프면 아플수록 자네에게는 이로울 거네.”

그 말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정확히 이 독에 대해 알고 있음을.

“아! 이 독을 여기서 보다니. 당대에 사용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실전된 독이라 여겼는데.”

검무극은 소정락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격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소정락이 자신을 뒤따라온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이 사람이 당한 독은 오망신독(蜈蟒身毒)이라는 독이다. 팔색오공(八色蜈蚣)을 빻은 가루와 태음혈망(太陰血蟒)의 내단을 섞어 만든 독이지.”

팔색오공은 여덟 가지 색을 지닌 독지네로 길이가 어른 키만큼 길다고 알려져 있었고, 태음혈망은 극한의 음기가 흐르는 지역에만 사는 능구렁이 영물이었다.

그러니까 이 오망신독은 평생 한 마리 보기도 어려운 두 영물을 섞어 만든 독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자 검무양은 내심 감동했다.

‘독왕께서 정말 귀한 독을 주셨구나.’

너무 아픈 나머지 치료가 끝나면 독에 대한 내성이 강해진다는 독왕의 말을 잊고 있었다. 이렇게 귀한 독이기에 그런 효능이 있는 것이리라.

물론, 검무양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서 이 독을 하독한 게 아니라는 것을. 동생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소정락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오망신독에 중독되면 그날부터 칠 일간 불에 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마지막 칠 일째에는 온몸의 혈맥이 얼어붙는 고통을 느끼다 죽게 된다.”

의원들에게 설명하던 소정락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며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해약도 통하지 않는 극독이네.”

검무극이 넙죽 엎드리며 그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우리 형 살려주십시오! 제겐 하나밖에 없는 형입니다. 제발 그 세 분 중에 한 분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소정락이 검무극을 일으켜 세웠다.

“맞네. 내가 그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네.”

검무극이 기뻐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다행입니다! 의원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몸에 손을 대도 그는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무극의 손을 꽉 잡아주며 말했다.

“그런 점에서 자네 형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네. 중원에 딱 세 명 해독할 수 있는데 그중 한 사람이 있는 곳 근처에서 중독되었으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잡았던 손을 놓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면 형이 중독된 게 의원님 때문이군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소정락은 물론이고 뒤에 있던 의원들도 표정을 굳혔다. 감히 소정락에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들을 지었는데.

검무극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아무리 우리 형이 성질이 더러워 원수가 많아도 그렇지, 공교롭게도 명심의원 바로 앞 다루에서 이런 희귀한 독에 당하겠습니까? 이건 누군가 의원님께 도전한 거죠. 이 독 해독할 수 있느냐! 아닙니까?”

오히려 검무극이 따지고 들자 소정락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책임지십시오. 우리 형 살려내시라고요! 우리 형 죽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다 알릴 겁니다! 의원님이 우리 형 죽게 했다고요!”

누워 있던 검무양은 아픈 와중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같은 편이지만 어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형 살려내라고요!”

소정락은 당황했다. 화를 버럭 내고 쫓아내 버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알았네. 내가 해독해 주겠네.”

소정락이 함께 온 의원들에게 약과 약초들, 그리고 치료할 도구들을 가져오게 했다.

정말 이 모습만 보면 평생 의술만 익혀왔을 거 같은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이었다.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와중에도 검무극은 소정락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반응하고 말하는지를.

다리를 붙잡고 손을 붙잡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정말 당신은 평범한 의원인가?

잠시 후 의원들이 그가 가져오라고 한 약과 약초, 약병들을 가져왔다.

“이번 치료에는 큰 운이 따라야 하네. 워낙 어려운 해독이라서 약초 배합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실패한다네.”

소정락이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당연히 해약은 주위를 물리거나 어디 방에 들어가서 혼자 만들어서 나올 거라 여겼었는데.

“자,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소정락은 의원들에게 설명하면서 해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검무극과 검무양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형은 아픈 와중에도 이 모습만큼은 정말 의외였는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상에서 세 명밖에 해독하지 못하는 독이라면서, 이걸 사람들에게 다 알려주십니까?”

의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과 형도 듣고 있었고, 다른 환자들도 듣고 있었다.

소정락이 밝힌 이유는 더욱더 의외였다.

“독을 만드는 비법도 아니고 해독약을 만드는 비법을 아껴서 뭐 하려고? 의원으로서 혼자 해독할 줄 아는 게 무슨 자랑이겠나?”

그러면서 의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구하는 데 있어서 너희만의 비법을 가지지 마라. 널리 알리고 또 알려서 죽지 않아도 될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의원들의 얼굴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

그는 신중하게 재료를 배합했다. 물론, 그 과정에 고비도 있었다. 자기 뜻대로 배합이 안 되자, 그는 한참 동안 골똘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검무극은 정말이지 이곳에 와서 그가 해약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도 의원들에게 전수까지 하면서 말이다.

조금이라도 양이 틀리면 또 만들고. 재료가 신선하지 않아도 새로 가져와서 또 만들고. 자신이 생각한 색이 나오지 않으면 다시 배합하고.

어찌나 집중하는지 그는 금방 온몸이 땀에 젖었다. 덩치가 커서인지 땀도 많이 흘렸다.

그렇게 장장 두 시진에 걸친 노력 끝에 해약이 만들어졌다.

소정락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해약을 검무양에게 복용시켰다.

모두가 긴장해서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이 줄어들면서 검무양의 얼굴이 다소 편안해졌다.

“성공했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다른 환자들이 모두 환호하며 박수쳤다.

“해약은 사흘간 세 번 복용해야 하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네.”

소정락은 진이 다 빠져 비틀거리며 걸었다. 의원들이 그의 양 팔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이 검무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째 우리가 악당이 된 기분인데?”

이제 좀 살 것 같다는 얼굴로 검무양이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악당 맞잖아.”

* * *

다음 날에도 소정락은 정성껏 약을 배합했다.

오히려 첫째 날보다 더 시간이 더 걸렸다.

그는 의원들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고 중간에 직접 배합을 시키기도 했다. 정말이지 후배 의원들의 교육에 진심이었다.

“직접 만드셔야지요! 저 사람들이 뭘 안다고요!”

검무극이 소리쳐도 소용없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만드니까 괜찮네.”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저 손 떨리는 거 안 보이십니까?”

검무극의 항의에도 그는 후배 의원들에게 시키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해약 만들 수 있다고 하신 나머지 두 사람 누굽니까?”

그러자 소정락이 잠시 배합을 멈추게 한 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무림맹의 신의가 포함되실 테죠?”

아닌 줄 알면서도 슬쩍 그를 언급하자 소정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술만으로 따지면 무림맹의 신의 선배나 마교의 마의를 따를 사람이 없지. 하나 의술이 최고라고 독까지 가장 잘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이건 별개의 문제라네.”

그러면서 검무극이 듣기에 너무나 반가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충의라는 분이 계시네. 독충을 이용해서 병을 치료하시는 분이시지. 그분이라면 충분히 이 독을 치료할 수 있을 거네.”

그래, 자신을 만독불침으로 만들어준 그녀인데 어찌 빠질 수 있겠는가?

형이 진짜 극독에 당해 다급한 상황이라면, 형을 업고 그녀에게 쾌속보로 달려갔을 거다.

‘충의님! 잘 지내고 계시죠?’

제자로 들어간 표기광이 그녀의 어깨를 잘 주물러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한 사람은 누굽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그가 말했다. 앞서 충의를 언급할 때보다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교의 독왕이다.”

검무극은 독왕을 언급할 때의 그의 표정과 말을 유심히 살폈다.

“독왕에 대해 아십니까?”

“본적은 없네. 하지만 그 사람의 명성은 들은 바가 있지.”

“독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생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그는 다시 의원들에게 배합을 지시했다.

“자꾸 이러면 형 업고 충의님에게 갑니다. 그분 어디 사십니까? 내가 마교는 못 찾아갈 줄 압니까?”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소정락이 후배 의원들과 함께 만든 두 번째 날의 해약이 완성되었다.

그가 자신 있게 완성된 해약을 검무양에게 복용시켰다.

그러자 어제보다 더 안색이 돌아왔다.

“성공이네.”

검무극이 안도했다.

“아까 괜히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내일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저기 팔 부러진 환자랑 같이요.”

그 농담에 소정락이 환하게 웃었다. 웃음까지 더해지자 그는 정말 사람이 좋아 보였다. 의심이 미안할 정도로.

“다시 말하지만 자네 형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네.”

검무극의 시선이 형을 향했다.

“저는 형이 참 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동생 때문에 천마신교의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인데 어찌 운이 좋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때, 검무양이 나직이 말했다.

“나도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소정락을 만났기에 이런 말을 한다고 여기겠지만.

검무양의 대답에는 다른 뜻이 담겨 있었다.

‘너 같은 동생을 둔 것도 운이 좋은 거지.’

그 후계 싸움에서 지고서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자신의 성격상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을 텐데, 대단한 상대에게 져서 별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었으니까.

“그럼 내일 마지막 치료 때 보세.”

그날도 검무극은 명심의원을 돌아다니며 그곳을 살폈다.

환자들은 아파서 정신없었고, 의원들은 바빠서 정신없었다. 소정락도 바빴고, 다른 의원들도 바빴다. 환자들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생사의 갈림길 속에서 의심이 파고들 틈은 없었다.

이곳저곳 살펴보았지만, 수상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명심의원에서 유일하게 수상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 * *

“몸은 괜찮아?”

검무극의 물음에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이 불에 타는 거 같았던 고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 세 번째 해약을 복용하자 다 나은 것이다.

소정락은 사흘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정말 신의십니다!”

검무극이 감탄하자 소정락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양도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옆에서 말했다.

“뭘 물어? 돈으로 갚아야지. 치료비가 얼마나 나왔습니까?”

독을 생각하면 부르는 게 값이라 여겼는데.

“그냥 가시게. 이렇게 귀한 독을 해독할 기회를 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네.”

소정락이 검무극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네가 형을 아끼는 마음에 진심으로 감동했네. 앞으로도 잘 지내게.”

그렇게 환하게 웃어준 후 소정락이 돌아섰다.

첫날에는 덩치 좋은 의원이 걸어왔었는데 지금은 신선이 걸어가고 있었다.

검무극과 검무양이 명심의원을 나서서 거처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소정락만큼은 우리가 잘못 짚었군.”

그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신의였다.

만약 오망신독이 아니라 다른 독이었으면, 정말 사흘 내내 헛고생만 한 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망신독의 효능으로 자신은 독에 강한 내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때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자는 독공 쓰는 자가 확실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느꼈기에 검무양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첫날은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소정락을 유심히 보고 들었다.

자신이 판단하기에는 의심할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의심스럽다면 의심스러웠는데.

한데 독공을 쓰는 자가 확실하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검무극이 차분히 이유를 밝혔다.

“형이 당한 독이 오망신독임을 확인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좋아했어. 그 기쁨은 분명 의원이 아니라 독공 고수의 기쁨이었지.”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게 그가 독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독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니 희귀한 독에 기뻐했을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검무양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검무극은 또 다른 증거를 들었다.

“첫날에 그가 한 말 기억해? 오망신독이 당대에 나타나지 않아 실전된 줄 알았다고 했어. 독이 실전되었다고 표현하는 건 독공을 쓰는 이들이 하는 말이지.”

검무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검무극이 의심스러워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독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서 왜 그 말은 하지 않았을까?”

“무슨 말?”

“이 독을 하독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해독할 사람이 셋뿐이다! 했으면 하독할 수 있는 사람도 누구밖에 없다 할 법도 했는데.”

이번에는 검무양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누군지 알고 있어서 안 했다?”

이 추측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 심증만 있었지, 확실한 물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자가 배후다 단정하고 생각해서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거 아냐?”

“아냐, 놈이 확실해.”

검무양은 처음으로 동생의 허점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끼워 맞춰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느낌.

‘너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싫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징글징글 완벽한 모습만 보였으니까. 그래, 이런 빈틈이 있어야 내가 돕지.

그렇게 걸어가다 검무극이 불쑥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한 가지가 더 있었네.”

“뭔데?”

내겐 이렇게까지 완벽한 척 안 해도 된다.

“아까 작별할 때 내 어깨 두드려주면서…….”

또 심증적인 의심이겠거니 했는데.

검무극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내게 하독했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검무양이 버럭 소리쳤다.

“그걸 맨 먼저 말했어야지!”

아니면 죽지 않을 방법이 있거나

“무슨 독이냐?”

검무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정락이 동생에게 하독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상대는 독왕이 하독한 오망신독을 해독한 자였다. 그런 자가 하독한 독이 어디 평범한 독이겠는가?

“어서 말해! 무슨 독이냐고?”

검무극은 형이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후계자 자리를 빼앗길 때도 이렇게 흥분하지는 않았던 형이었는데.

“형이 흥분한 모습이 이렇게나 감동적일 수가.”

“이 자식아! 장난치지 마라!”

검무양은 진짜로 화를 냈다. 놀라고 흥분하고 화난 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형, 나 괜찮아.”

검무극의 눈빛은 차분했다. 서 있는 모습이나 풍겨내는 기도 역시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독에 당했는데 왜 괜찮아?”

“내게 독액은 물이고 독연은 모닥불 연기거든. 아니, 그보다도 못하지. 눈도 안 따가우니까.”

“헛소리 말고!”

“나 만독불침이야.”

“그래, 너 만독불침이겠…… 뭐? 방금 뭐라고 했어?”

검무양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런 표정을 짓는 형을 보며 검무극이 다시 말했다.

“나 만독불침이라고.”

검무양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생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천부적인 무재를 타고났는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한데 만독불침이라고?

만독불침은 앞서 말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무림사에서도 만독불침을 이룬 무인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되기가 어렵다는 의미.

그냥 기연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기연이어야 이룰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검무양이 생각하는 만독불침이었다.

그랬기에 동생의 장난이 아닐까 마지막까지 의심했는데. 더없이 진지한 검무극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 만독불침이란 사실을. 그걸 증명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만독불침이 아니었으면 이번 일 어떻게 해서든 내가 맡았을 거야. 형에게 그런 위험한 일 안 맡겼어.”

어쩐지 악착같이 자신을 환자 역할을 하게끔 하더라니.

검무극이 웃으며 농담을 덧붙였다.

“나 죽이고 싶어도 독으론 안 돼.”

검무양은 질투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이런 대단한 운명을 가진 동생에게 후계자 싸움에서 진 것이니까.

“어떻게 된 거냐?”

“황천각의 서 각주를 구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기연을 얻었어.”

어쩌면 이것이 하늘이 동생을 돕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죽이는 인생이 아니라 살리는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 어찌 하늘이 눈여겨보지 않겠는가?

주점의 탁자를 부수지 않게 할 때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달릴 때마다, 동생을 위한 기연 조각들이 하나씩 모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정락이 네게 하독했다는 의미는?”

“놈이 독공을 쓰는 자라는 뜻이지.”

동시에 천애거사의 뒤를 받쳐주는 곳이 명심의원이 확실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검무양은 소정락을 떠올렸다. 환자를 위하던 그 헌신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후배 의원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던 모습도.

“그게 다 가식이었다고?”

검무양의 의구심에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차라리 모든 게 다 가식이고 연기였으면 좋겠지만.

“아니면 연기를 하다 보니 진짜 삶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

천애거사 화율청만큼이나 이 소정락을 상대하는 일 역시 쉽지 않은 일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존경받는 삶을 사는 사람을 무림맹 본단 앞에서 처리해야 했으니까.

“일단 돌아가자. 독왕님과 마불님하고 같이 의논해야지.”

* * *

두 사람이 장원으로 들어섰을 때, 검무극은 장내에 펼쳐진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당에 약초를 한가득 말리고 있었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의원에 있던 사흘 동안 우리 마불님께서 얼마나 노동착취를 당했는지.

“저희 왔습니다.”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하자 건물 안에서 마불이 먼저 나왔다.

“오셨습니까?”

마불은 검무양이 무사한 걸 보고 안도했다.

그 모습을 그냥 넘어갈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저도 있습니다! 임시 교주이자 환자 보호자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온 저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불이 그냥 돌아서 들어가려 할 때.

“독까지 당한 임시 교주죠.”

마불이 흠칫 놀라며 돌아섰다. 그는 검무극 대신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동생에게 그런 장난치지 말라는 반응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독왕께서는 잠시 나와보시오.”

그는 독왕부터 불렀다.

“너무 하십니다. 제 말보다는 형의 반응으로 판단하시는군요!”

검무극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마불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어서 나오시오!”

그러자 독왕이 밖으로 나왔다.

“임시 교주가 독에 당했다고 하오.”

그 다급한 말이 무색하게도 독왕은 태평했다. 독왕은 검무극을 살피는 대신 쪼그리고 앉아 마당에 널어둔 독초를 살피며 말했다.

“당해도 싼 짓을 했겠지요.”

그 반응에 마불이 의아함을 느끼던 그 순간, 뒤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마불님, 저 만독불침입니다.”

마불이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검무극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마불은 이번에도 검무양을 통해 진위를 알아내려 했다.

검무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반응만큼 확실한 대답은 없었다.

‘정말이지 놀랍고도 대단하구나!’

이제야 마불은 독왕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독왕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구려.”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검무극이 천기단을 복용할 때, 그때 독왕이 밝혔었다. 이미 네가 만독불침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검무극은 굳이 이들 두 사람에게 비밀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그 비밀을 알게 된 분이 두 분 더 늘었군요. 아, 서 각주도 알고 있습니다. 만독불침의 기연을 얻을 때 함께 있었거든요.”

일부러 자랑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 독공을 상대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형과 마불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마불은 비밀을 알려줬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당부했다.

“이 사실을 앞으로 더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제게 알려줬으니 형평성 때문에라도 다른 마존에게도 알려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지 마시라는 겁니다. 오늘로 이 일은 영원한 비밀이 되는 겁니다. 저와 약속하십시오.”

무슨 뜻으로 이러는지 검무극이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라도 이 비밀이 더는 새어 나가지 않게 해주려는 거였다.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했으니까.

“약속드리겠습니다, 마불님.”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검무극이 마불을 좋아하고 높이 사는 이유가 이런 모습에 있었다.

자신 때문에 꿈이 꺾였으니 미울 법도 한데.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다. 키는 작아도 그 어떤 사람보다 큰 가슴을 가진 마불이었다.

마불에게 고맙기는 검무양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에게 만독불침이란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은 이런 생각까지 하지 못했다. 아직 마불에게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았다.

검무극이 두 마존에게 보고했다.

“제게 하독했다는 건 저와 형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검무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면 왜 너에게만 하독했지? 죽이려면 나까지 죽이려 했을 텐데.”

심지어 소정락은 자신의 독을 해독해 주지 않았는가? 자신은 해독해 주고 동생에겐 하독하고. 뭔가 일관성이 없었다.

검무극은 그 답을 말해줄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로 독왕이었다. 그는 여전히 여기저기를 오가며 마당에 널린 독초들을 살피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몸에 독이 들어오면, 몸이 스스로 독성을 없애버립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독을 남겨서 가져왔습니다.”

독을 남겨 왔다는 말에 독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검무극에게 다가왔다. 마불과 검무양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서는.

“무슨 독인지 보자.”

검무극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스스슷.

검무극의 손가락 끝으로 아주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몸속에 남겨두었던 독을 외부로 발출한 것이다.

검무극은 그저 독이 통하지 않는 단순한 만독지체가 아니었다. 무공이 극의에 달한 검무극은 이런 경지까지 발휘했다.

독왕이 손부채질하며 그 냄새를 맡더니, 대번에 그 독이 무엇인지 알아맞혔다.

“삼일생(三日生)이다.”

삼일생은 검무극도 알고 있는 독이었다.

검무극이 예전에 천독림에서 독왕을 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독에 대해 많은 걸 배웠는데, 삼일생 역시 그때 배웠던 독이다.

화르륵.

손가락 끝에 있던 삼일생이 열양지기에 타서 사라졌다.

“저를 죽이려 한 게 아니었군요.”

삼일생은 중독된 후, 삼일 이내 해독약을 복용하지 못하면 나흘째 되는 날 죽게 되는 무서운 극독이었다. 그래서 삼 일만 살 수 있다 해서 삼일생이었다.

“만약 단순히 저를 죽이려 했다면 그 자리서 즉사할 독을 하독했을 겁니다. 아니, 이목을 피해야 하니 오늘 밤이나 내일 아침에 죽게 만드는 독을 하독했겠지요. 한데 사흘이나 지나서 죽는 독을 하독했다는 건?”

검무극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소정락은 형에게 하독한 사람이 독왕님인 걸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왕을 향했던 시선이 이번에는 형에게 향했다.

“왜 형이 아니라 내게만 하독했냐고 물었지? 그자가 독왕님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다시 시선이 독왕을 향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소정락의 의도를 전했다.

“네 독은 내가 해독했으니, 이제 내 독을 해독해 봐라.”

순간 독왕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나를 시험한 거로군.”

삼일생은 중독된 것을 알아차리기가 정말 어려운 독 중 하나였다. 시험으로 쓰기에 가장 적절한 독.

“삼 일 내로 제게 하독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셨다면? 독왕님은 본교의 후계자가 코앞에서 독살당하는 걸 막지 못한 책임을 지게 되었을 겁니다.”

설령 아버지가 용서해 주신다고 해도, 독왕이 견딜 수 없을 일이었다.

찰나의 순간 독왕의 눈동자에 차가운 한기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물론, 당연히 알아보셨겠지만요.”

검무극은 믿었다. 아무리 독왕이 딴 곳을 쳐다보고 있어도, 아무리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더라도, 독왕은 알아봤을 것이다.

독초와 독충을 보느라 자신의 팔이 잘려온 건 몰라볼 수 있을지언정, 중독된 자신을 못 알아볼 리는 없을 것이다. 독과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혹시 이전에 소정락을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독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관해서는 무한에 해독에 뛰어난 의원이 있다는 정도의 소문만 들은 정도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그가 독왕님께 도전을 해왔습니다.”

도전이란 자극적인 말에 독왕이 당장에라도 그를 찾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다시 쪼그리고 앉아 잘 마른 독초를 종이에 싸기 시작했다.

이래야 독왕님이시죠. 맞습니다. 반응하면 지는 겁니다.

마불이 함께 쪼그리고 앉아 그 일을 돕기 시작했다. 독왕이 그에게 독초를 어떻게 싸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마불이 배운 대로 독초를 싸기 시작했다. 한 번 배웠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능숙하고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삼 일 후에 다시 소정락을 찾아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멀쩡히 가면 독왕님이 해독해 줬다고 생각할 겁니다. 또 어떤 독을 하독 할지, 그를 통해 놈들의 의도를 확인해 볼 작정입니다.”

검무극이 독왕에게 말했다.

“나중에 마무리는 독왕님이 맡아주십시오.”

그것이 독왕이 원하는 바일 것이다. 놈이 이렇게 독으로 도전해 왔으니 독왕이 끝장을 봐야겠지.

마불은 독왕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긴장했다. 살면서 여러 번 겪어보지 않았겠는가? 이런 사람이 화나면 정말 무섭다는 것을.

그때 그곳으로 항상 기별을 전하는 통천각 무인이 왔다.

“긴급 전서입니다.”

그가 검무양에게 긴급 전서를 전하고 물러났다.

내용을 확인한 검무양이 놀란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금마령이 깨졌습니다.”

금마령이 깨졌다는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상대가 독으로 도전해 왔다고 해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던 독왕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불은 그전에 먼저 일어났고.

“누가 깼습니까?”

마불의 물음에 검무양이 대답했다.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마염군과 백골혼마입니다.”

이름만으로도 무림을 공포에 몰아넣을 전대, 전전대 마인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전서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그들이 이곳 무한으로 오고 있습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화율청과 소정락, 이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과 정반대의 악명을 지닌 이들이 오는 것이다.

“어느 길로 오고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답니다.”

두 사람의 무공이 워낙 고강하기에 제대로 추적할 수 없었으리라.

검무양이 마불에게 물었다.

“금마령이 내려진 이들에게는 금제가 걸려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스스로 내공을 풀면 며칠 내로 죽게 됩니다. 길어야 칠 일입니다.”

마불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이 늙은것들이 목숨을 버릴 작정인 거 같습니다.”

금마령을 깨는 건 그냥 교칙을 어기는 정도가 아니었다. 가장 엄격히 금한 교주령을 어기는 것이었기에 중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였다.

죽을 각오를 했다?

검무극의 생각은 달랐다. 차라리 늙어서 노망이 났거나, 마지막 한 번 불사르고 죽겠다 하는 거라면 오히려 나았다.

“아니면 죽지 않을 방법이 있거나요.”

마염군과 백골혼마쯤 되면 자신들의 명성도 중요시하는 인물들이었다.

“금마령을 깨고 고작 칠 일간의 자유를 즐기다 죽을 자들 같았으면 벌써 일을 저질렀을 겁니다.”

따라서 그들이 움직인 이유는 하나였다.

“배후 놈들이 그들의 금제를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거죠.”

듣고 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아니라면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을 리가 없다.

“이미 금제를 풀어주었을 가능성은?”

검무양의 의문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노마들을 이용하려면 미리 풀어주진 않았을 거야. 대신 그들에게 금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을 줬겠지.”

과연 어떤 믿음을 주었기에 이들 노마들을 움직인 걸까?

검무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목표는 너일 거다.”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소정락은 내게 즉사할 극독을 하독했겠지.”

“네가 목표가 아니라면 왜 그들을 무한으로 끌어들이는 거지?”

분명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우선은 그들의 금제를 풀어줄 사람이 이곳에 있어서겠지.”

칠 일 내로 배후 놈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금제를 풀어야 할 테니까. 그들의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들이 와서 무한의 정파 고수를 죽이면? 그럼 정파 무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이미 무한에는 자신과 형, 독왕과 마불이 와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악명 높은 전대, 전전대 노마들이 함께 합류했다고 알려진다면? 공포심과 증오가 정파 무림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놈들의 목적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차분하게 덧붙였다. 이곳으로 오는 두 노마가 무서운 건 그들의 무시무시한 무공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 오고 있어.”

누굴 죽이러 오는지는

십여 대의 마차가 일렬로 달렸다.

마차 벽에 그려진 용들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만 같았다.

지나가던 무인들이 마차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무한에서 용이 그려진 마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과연 선두를 달리는 마차에는 무림맹주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달려간 마차가 멈춰 선 곳은 무소장 앞이었다.

일렬로 늘어선 열 대의 마차 문이 동시에 열렸다.

진패천은 그중 일곱 번째 마차에서 내렸다. 나머지 마차에서는 호위대 무인들이 내렸다.

무림맹주의 공식 행차에서는 이렇게 어느 마차에 탔는지 알 수 없도록, 같은 마차 십여 대가 함께 움직였다.

진패천이 내리자 무소장 앞을 지키고 있던 군웅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군웅들은 천애거사가 기습을 당한 이후 계속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진패천은 무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무소장으로 들어갔다. 마당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도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적어도 이곳에 와 있는 무인들은 무림맹주보다 천애거사를 더 존경하고 따르는 이들이었다.

맹주 행차 소식을 들은 천애거사가 밖으로 나왔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오랜 친구였지만 군웅들이 함께하는 자리였기에 천애거사는 맹주를 대하는 깍듯한 예를 보였다.

“몸은 좀 괜찮으시오?”

“걱정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천애거사가 주위를 모두 물리자 그제야 그들은 말을 편하게 했다.

“더 일찍 찾아왔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아니네. 바쁜데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고맙네.”

화율청이 진패천의 손을 맞잡았다. 화율청의 손은 말라서 마른 나뭇가지를 붙잡는 것만 같았다.

진패천이 품에서 준비해 온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가?”

화율청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작은 단약이 들어 있었다.

“보혈단(補血丹)이네.”

보혈단은 피를 많이 흘렸을 때 먹는 약으로 다쳤을 때 원기를 보충하는 데 가장 좋은 약이었다.

“이렇게 귀한 걸 왜 가져왔나?”

“내게 자네보다 귀한 게 어디 있겠나?”

“고맙네. 잘 복용하겠네.”

“지금 복용하게. 나중에 팔아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쓸 거 아닌가? 내가 보는 앞에서 복용하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진패천은 물러나지 않았다.

“알겠네.”

화율청이 그 자리에서 보혈단을 복용하고 진기를 일주천했다.

다친 데에는 이보다 좋은 약이 없었기에 대번에 화율청의 혈색이 좋아졌다.

“고맙네.”

“고맙긴.”

“오랜만에 봤는데 술 한잔할 텐가?”

진패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 먹고 술은 무슨. 괜찮네.”

“그럼 차라도 하세. 아까 우려놓은 차가 있네.”

화율청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진패천은 내부를 둘러보았다.

마지막 왔을 때와 변한 게 없었다. 가구며 책상이며 모두 낡고 값싼 것들이었다. 돈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를 지켜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와 있는 무인들이 그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음모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화율청이 탁자로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차에 독을 탔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올 줄이야.

“이게 얼마 만인가? 삼자 회합 후에 보고 처음이지?”

화율청은 마지막 만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자네 꽤 흥분했었지.”

“내가?”

내가 흥분했었다고? 진패천은 자신이 그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면 화율청은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자넨 마교주나 사도맹주보다 소교주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었지. 그가 성장하면 무서워질 거라면서.”

기억난다. 아마 그에게는 흥분한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진짜 흥분했을지도. 화율청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솔직히 전할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소교주가 무한에 와 있네.”

찻잔을 들던 화율청의 손이 멈췄다. 찻잔 위 화율청의 표정에 놀람이 스쳤다.

“그게 정말인가?”

진패천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신교의 암기를 위조해서 판매한 자들이 있네. 자넬 공격한 바로 그 암기네.”

“그 일로 마교의 소교주가 직접 이곳까지 왔다고?”

화율청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해줬던 말이 떠올렸다.

진실로 싸우십시오. 그럼 오직 맹주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뭔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만이 아니지.”

진패천은 자신의 패를 먼저 보여주었다. 수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그 배후에 자네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네.”

화율청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가 결국 헛웃음을 지었다.

“마교에서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우는 걸까?”

화율청은 설마 자네가 그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진패천이 믿지 않으리라 여기는 듯 보였다.

“그럼 내가 기습을 당한 것도 그 일과 관련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네.”

“놈들이 뭔가 음모를 꾸미는 모양일세.”

음모란 말이 진패천의 가슴에 박히듯 와 닿았다.

이 음모는 누구의 음모인가?

검무극인가? 화율청인가?

진패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화율청은 자리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곳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평소와 다른 진패천의 뒷모습이 하나의 물음을 강요했다.

“나를 의심하는 건가?”

어렵게 물은 질문에 비해 대답은 곧장 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나? 자네의 인생을 옆에서 평생 봐왔는데. 다만… 그 똑똑한 사람이 자네 말처럼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우는 걸까? 그 생각이 자꾸 드네.”

하지만 화율청은 친구의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니, 자넨 지금 흔들리고 있네.”

진패천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때 부정하지 않는 것.

이 부분이 바로 검무극이 의도한 바였다. 진실을 꽉 붙잡고 상대하면 적어도 휘둘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진패천이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그래, 인정하네. 소교주는 내게 그만큼 믿음을 준 사람이라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단언하건대 화율청을 의심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명확한 증거가 나왔어도, 그가 쓴 연판장(連判狀)이 나왔어도, 친구를 믿었을 거다.

검무극 때문에 자신은 지금 친구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었다.

평생 쌓아온 신뢰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나?”

진패천의 물음에 화율청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찌 잊겠나?”

화율청이 지난날의 회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그날 자네를 만나면서 내 인생이 바뀌었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진패천이 천천히 돌아서 화율청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였을까? 화율청은 그동안 진패천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왔는지 아나?”

대의대협한 그의 성품 말고, 거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까 싶었는데.

“자네 때문이었네.”

“나 때문이었다고?”

“자네를 만나기 전의 나는 이렇게까지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네.”

그런데도 이런 인생을 살아온 이유는 진패천이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자네에게 걸맞은 친구가 되고 싶었지.”

진패천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나 난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였네.”

화율청의 시선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진패천의 찻잔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너 때문에 평생 이런 인생을 살았는데, 고작 마인의 말을 듣고 나를 의심하는 거냐?

따지고 묻지 않았기에 그 눈빛은 더 서글퍼 보였다.

진패천이 차분하게 작별을 고했다. 자신의 감정도 격해져 더는 이성적으로 그를 볼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디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 날이 오기를 바라네. 그럼 몸조리 잘하시게.”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옆을 지나가는데, 화율청이 말했다.

“나를 의심해도 좋으니 소교주도 의심하게. 그 소교주는 자네와 나를 이만큼이나 갈라놓을 수 있는 무서운 사람이네.”

화율청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친구에게 전했다.

“나는 괜찮으니, 부디 조심하게.”

* * *

청운림의 정자에 진패천이 서 있었다.

앞서 검무양을 만났던 바로 그 대나무숲의 정자였다. 오늘도 이곳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곳에 검무극이 도착했다. 그와 만나자고 연락한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친구를 만났으니 이제 검무극을 만나야 할 때란 생각에서였다.

검무극은 정자에 올라서서 진패천 옆에 나란히 섰다.

“이곳에 오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 뭘까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답을 찾았나?”

“네, 찾았습니다.”

안개를 향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여전히 진패천의 눈빛은 진실을 찾고 있었다.

“믿음입니다. 맹주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나는 맹주님을 믿어야겠다. 맹주님께 뭐든 다 알려드리자. 그래서 맹주님과 저 사이에 어떤 오해도 없도록 하자. 그게 제 결론입니다.”

아무리 맑고 깊은 눈빛으로 말해도, 지금 진패천에게 고스란히 그 마음이 전해지긴 쉽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 때문에 진실이 가려지기도 하는 법이지.”

검무극에게도, 화율청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이네.”

이미 검무극도 알고 있었다. 공식적인 행차를 했었으니까.

“솔직히 다 말했네.”

“그러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검무극은 화율청의 반응이 궁금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화를 내지 않았네.”

검무극은 화율청이 그렇게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겠구나, 싶었는데. 오히려 그랬기에 진패천이 발견한 것이 있었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네.”

진패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 친구가 내게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패천이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수십 년을 친구로 지냈는데 그 친구는 내게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네. 놀랍게도 오늘 그 사실을 깨달았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워낙 성품이 좋은 친구니까. 하면 나는 어땠는지 아나?”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맹주님은 화를 많이 내셨겠지요.”

지금에야 나이를 먹고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지만, 그는 원래 거칠고 패도적인 사람이다.

“아니. 나도 그 사람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네.”

듣는 검무극도, 당사자인 진패천도 모두 놀랄만한 결과였다.

“젊은 시절 내 성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오면서 생각해 봤네. 내가 왜 그 사람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지?”

그리고 진패천은 답을 찾아냈다.

“그 친구는 내 기분을 다 맞춰줬었거든.”

진패천은 살면서 한 번도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성격 좋은 친구고, 그래서 만나면 편했고.

“후계자 시절에도, 맹주가 되어서도 그는 내게 모든 걸 맞춰주었지. 내가 화를 내면 같이 화를 내주고, 내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해 주고.”

한마디로 정말 좋은 친구였다.

“한데 생각해 보니 그 친구는 내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네. 기쁨도 슬픔도. 하다못해 짜증 한 번 낸 적이 없다네.”

그가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면 그럴 수 있을 텐데.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눈물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네. 불의를 보면 누구보다 분노하는 사람이지. 한데 그 넘치는 감정을 내게는 표현한 적이 없었다네.”

진패천이 검무극에게 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맹주라서? 내가 어려워서?”

진패천은 흥분한 상태였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도 오늘 처음이었다. 그 대상이 검무극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윽고 듣고만 있던 검무극이 입을 열었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잖습니까?”

“관계를 망칠 일 없었고, 수십 년 세월을 꾸준히 우정을 쌓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무림맹주라고 어찌 오랜 친구를 의심하는 불편함이 없겠는가? 그것도 스스로 찾아낸 관계의 왜곡이었는데. 진패천의 의심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좋은 말로 사람을 대하는 건 자네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검무극은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만약 제가 임시 교주가 아니라 진짜 교주였다면 이 상황을 본교가 꾸몄다고 의심하셔도 될 겁니다. 저는 이간질도 잘하고, 잔머리도 잘 굴리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교주로 계시는 한 우린 이런 방식을 쓰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밀고 들어오실 겁니다. 어디 한번 막아봐라, 하시면서.”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검우진은 그런 남자였으니까.

“더구나 이런 상황을 만들지도 않으실 겁니다.”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소식을 전했다.

“금마령을 깬 노마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진패천은 금마령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수백 년 전부터 천마신교에 내려온 금마령이었다.

저들이 죄를 지은 마교의 고수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이유는 결국 언젠가 무림맹과의 싸움이 벌어지면, 그들을 이용하기 위함이라 판단했다.

“금마령을 깼다는 건 교주령을 어겼다는 의미인데. 그런 자들을 이용해서 일을 꾸민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 아버지를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아시는 겁니다.”

노마들이 금마령을 깬 것이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진패천 역시 검무극의 말에 공감했으니까.

“누가 오고 있나?”

“마염군과 백골혼마가 오고 있습니다.”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잘못 대처했다간 피바람을 일으킬 자들이었다.

“그들이 왜 오는 건가?”

“우리가 보낸 게 아니니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게 사람 죽이는 일이니,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오는 거겠지요.”

진패천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도 터질 것 같은 분노를 맹과 정파 무림을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제 마교의 죄인들까지 오고 있다고?

그 차가운 분노를 향해 검무극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누굴 죽이러 오는지는 맹주님이 알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놀람을 넘어 황당한 표정을 짓는 진패천에게 검무극이 물었다. 놈들의 목적이 본교와 무림맹의 분열이라면.

“그들이 누굴 죽이면 못 참을 거 같으십니까?”

맞아도 좋고 틀려도 좋고

누가 죽으면 못 참을 거 같냐고?

진패천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이 일로 세상 누구보다 깊은 슬픔을 느꼈던 그였다. 사람이 슬픈 일은 어떻게든 잊으려 하지만, 가슴에 묻은 자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랬기에 살면서 수없이 그를 괴롭힌 걱정.

손주들마저 잃는다면?

검무극이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는가?

예전에 진패천과 아들 내외의 죽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를 나눠봤기에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했다.

자신의 질문이 그의 지난 상처를 들추는 일이 된다는 걸 알았지만, 해야만 했다.

지금 자신들은 상처만, 상처만 찾아서 찌르려는 비열한 적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맹주에게 너무나 배려 없는 질문임을 잘 알았지만.

“그냥 맨 처음에 떠오른 사람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진패천은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이 젊은 소교주에게 오늘 할 말, 안 할 말 충분히 했으니까.

“자네는 정말 그들이 오는 이유가 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라 생각하나?”

검무극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확신하는 이유는?”

“그 이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이런 이유일 수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진패천 역시 다른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저나 형을 죽이러 오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목적이었으면 소정락의 행보부터 달랐겠지.

진패천에게서 나오지 않았던 이름이 검무극에게서 나왔다.

“진 소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 순간!

진패천의 몸에서 강력한 기도가 발출되었다.

촤아아아아아!

사방으로 뻗쳐나간 진패천의 기도에 대나무들이 일제히 기울어졌다.

검무극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폭풍에 날려갈 듯 거세게 휘날렸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서 벨 것 같은 무서운 기도였다.

착착착착착착착착착!

진패천의 기도를 느낀 호위 무인들이 그곳으로 날아와 내려섰다. 대나무숲 외부를 지키고 있던 그들에게까지 기도가 뻗어나갔던 것이다.

진패천이 호위 무인들에게 말했다.

“하령이를 찾아 맹주전으로 데려오게.”

휙휙휙휙휙휙휙!

호위 무인 중 절반이 몸을 날려 그곳에서 사라졌다.

진패천은 검무극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따지지 않았다.

“다음은 진 대주일 겁니다.”

이번 역시 이 말의 진의 여부는 나중 문제였다.

“진 대주와 멸마대에게 마염군과 백골혼마가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전하게.”

다시 한 명의 호위 무인이 몸을 날려서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야 진패천은 호위 무인들을 멀리 물렸다.

진패천이 칼처럼 날카로웠던 기도를 거둬들이며 물었다.

“이제 질문에 대답이 되었나?”

“네, 충분히 되었습니다.”

겉으로 태연했지만 진패천의 마음에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손주들의 안위가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에 안개가 끼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죽으면 가장 못 참을 것 같냐는 질문이 나왔을 때, 그때 바로 내렸어야 했을 명령이었는데.

검무극이 하령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번쩍 정신이 들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 역시 맹주에게는 큰 충격이 될 말이었다. 하지만 꼭 알려줘야 하는 내용이었다.

“명심의원의 소정락에 대해 아십니까?”

소정락이 언급되자 진패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음모의 난장판 속에서 나올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잘 아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진패천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대체 또 어떤 말을 하려고?

“말 돌리지 말고 바로 용건을 말하게.”

천애거사에 이어 소정락까지. 자신에 대한 맹주의 신뢰가 더욱 떨어질 수도 있었지만, 검무극은 어쩔 수 없었다.

“그도 배후 세력 중 한 사람입니다. 독공의 고수이기도 하고요.”

폭발할 듯 거친 반응이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가만히 검무극의 두 눈을 들여다보던 진패천이 고개를 돌려 대나무숲을 바라보았다. 더없이 차분한 눈빛이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내 유일한 친구가 적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더 놀랄 일이 뭐가 있겠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패천은 마음이 복잡했다.

소정락은 천애거사만큼이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의원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를 칭찬하는 말을 셀 수 없이 했고,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한데 그도 배후라고?

너무 황당하니까 화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기도에 흩어졌던 안개들이 다시 주위를 채우기 시작했다. 주위는 다시 안개로 가득 찼다.

“증거가 있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뭔가?”

“접니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진패천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가 제게 직접 하독했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검무극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장 불확실한 증거 아니고?”

맹주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았기에 검무극은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독에 중독되었다면서 어찌 이리 멀쩡한가?”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드리는 말씀에 화가 많이 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미리 포석을 깔아둔 후.

“무한에 독왕님이 와 계십니다.”

맹주에게는 충격의 연속일 것이다.

천애거사에 금마령에 소정락에 독왕에.

“후우.”

진패천이 내뱉은 나직한 숨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맹주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려 애쓰고 있는지.

독왕이 와 있다는 건 다른 마존이 와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으니까.

“위조 암기에 강력한 독이 발려 있었습니다. 형과 관련된 일이라 제가 독왕님께 부탁드려서 형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진패천이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나를 믿는다더니, 왜 말하지 않았나?”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진패천을 바라보았다. 만난 이래 가장 차가운 눈빛이었다.

“천애거사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교를 비울 수 없었고요.”

사실대로 말한 변명이었지만, 검무극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든 맹주님께 먼저 알려드렸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검무극은 속마음을 그대로 전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걱정했습니다. 맹주님과 수십 년을 친구로 지낸 사람이 배후인데, 섣불리 말씀드렸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고 걱정한 거죠. 한마디로 맹주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저는 맹주님께 믿음을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진패천은 고개 숙인 검무극의 뒤통수를 말없이 내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네의 사과는 받아들이겠네.”

“감사합니다.”

독왕의 일만큼은 크게 화를 내도 될 일이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어도 이곳 무한에 자신의 허락 없이 독왕이 들어온 것은 있어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진패천이 이 사과를 받아들인 이유가 있었다.

“자네의 그 못됐게 생긴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 만약 자네 말이 다 사실이라면? 자네가 이런 사실들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번 일을 당했을 텐데.”

정말 하기 싫은 상상이 이어졌다.

“화 거사 그 친구가 적이고, 소정락이 적이고, 금마령을 깬 노마가 하령이와 하군이를 죽이러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진패천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진패천이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 다 사실이냐?

그러자 내내 진지했던 검무극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맹주님이라면 저는 정말 기뻤을 겁니다. 내 소중한 것을 지켜 낼 기회를 하늘이 내려줬구나, 하면서 마가촌 한가운데서 춤을 췄을 겁니다.”

그 춤판으로 검무극이 진패천을 끌어들였다.

“그래서 진 대주와 진 소저를 구해내었다면, 맹주님은 춤 안 추실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진패천은 당황했지만, 대답만큼은 단호했다.

“춰야지. 애들이 무사한데 못 할 게 뭐가 있겠나?”

“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제 말이 다 맞고, 덕분에 진 소저와 진 대주를 구해낸다면 저와 춤추시죠! 약속하신 겁니다!”

활짝 웃는 검무극을 보며 ‘아니, 약속은 안 했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이들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일 거다.

“만약, 제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손자분에게서 이 위험한 마교 친구 놈을 떼어낼 절호의 기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제 말이 맞아도 좋고, 틀려도 좋고. 어떤 경우에도 기쁜 일입니다.”

검무극을 바라보는 진패천의 눈빛이 깊어졌다.

맑고 깊은 눈빛 때문일까? 아니면 저 거침없는 말 때문일까?

검무극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말이 다 사실처럼 들렸다. 이렇게 나이 든 자신마저 휘감듯 매혹해 버리니까.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에 진패천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고서 또 할 말이 남았나?”

“맹주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진패천과의 믿음에 관련한 말이었다.

“앞으로는 맹주님을 믿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오해가 생기지 않게 다 말씀드릴 겁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마교의 소교주가 무림맹주를 믿는다고 하고, 지켜봐 달라고 한다. 같이 춤추자고 한다. 듣다 보면 정말 자신이 뱉은 말을 다 지킬 거 같은 사람이라서.

이런 사람이라서 손자에게 조심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거다.

그리고 이 순간 진패천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부터 조심하자.’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정자를 내려가는데 뒤에서 진패천이 차분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난 자네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니길 바라네.”

진심 반, 농담 반의 그 눈빛을 향해 검무극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뇨, 저는 제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이 아니면…… 제가 적이라는 뜻인데.”

검무극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그건 그거대로 문제 아니겠습니까?”

* * *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은 형과 두 마존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맹주에게는 진 소저와 진 대주가 목표일 거라고 말했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마불이 검무극의 마음을 읽고 한 사람을 지목했다.

“천애거사지?”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네, 저는 그가 일 순위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마인의 손에 죽는다면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길 것이다.

“한데 왜 그가 일 순위냐? 맹주에게는 혈육의 죽음이 더 충격일 거 같은데.”

검무양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충격은 어디 비할 수가 없겠지.”

“한데 왜? 혹시 천애거사가 무인들에게 더 존경받아서?”

“그런 점에서는 진 대주의 죽음이 끼치는 여파도 만만치 않을 거야. 생각해 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멸마대주가 본교 무인에게 죽었어. 그 상징성으로 볼 때 천애거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그의 죽음에도 정파 무인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거다. 게다가 맹주님의 손자잖아?”

“그런데 왜 천애거사가 일 순위라는 거냐?”

검무극이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맹주님의 명분 때문에.”

검무극은 진패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맹주께서 자신의 혈육이 죽었다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협과 의를 위해, 무림의 정의를 위해 평생 몸 바쳐 온 그인데.

“정파 무인들을 위해 살아온 사람인데, 자기 혈육이 죽었다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을까? 그 고결한 성품으로? 차라리 남이라면 더 쉽지.”

반면 천애거사가 죽는다면?

“정파 무인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 마인의 손에 죽었어. 이건 참으면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겠지.”

그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와 정파의 분열이 목적이라면 과연 천애거사가 일 순위가 될 만했다.

다만 이런 의문은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수십 년을 키운 사람을 희생시킨다고?”

검무양의 의문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래서 더 의미가 크겠지. 단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마정대전이 발발한다면.”

검무극은 거기에 다른 가능성을 보탰다.

“죽음이 하나가 아니라면? 천애거사가 죽고 진 소저가 죽는다면? 천애거사가 죽고 진 대주가 죽는다면? 혹은 세 사람이 모두 죽는다면? 맹주의 분노는 물론이고 마정대전이 발발하는 걸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거야.”

아무리 정신 나간 마인이라도 이런 짓을 저지를 고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그들이라면?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불이 물었다.

“어떻게 대처할 거냐?”

마불은 이 질문의 대상이 검무극이란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앞서 검무극이 했던 생각들을 자신은 하지 못했으니까.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야겠지요.”

검무극은 그 첫 번째 대상을 이미 정해둔 상태였다.

“과연 이곳 무한에서 금마령의 금제를 누가 풀어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독왕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소정락.”

검무극도 같은 생각이었다. 예전에 독왕에게 중독된 투왕을 살리는 대법을 펼친 것도 소정락이었을 것이다.

그때 암왕이 말했었다. 여러 번 대법을 펼쳐서 살려냈다고. 대법을 펼칠 수 있다는 건, 금마령의 금제를 풀 수도 있다는 의미.

혼자서 해냈는지 또 다른 누가 있었는지 몰라도, 소정락이 그 중심에 있는 것만은 확실했으니까.

“감히 독왕님께 도전을 해왔으니 소정락부터 처리하죠.”

모두가 별개인 것 같지만 이번 일은 모두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끊어지게 된다면?

“과연 금마령의 금제를 풀 수 없게 되었을 때, 두 노마가 어떻게 나올까요?”

그가 죽으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소정락은 오늘도 의원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의방을 돌고 있었다.

그는 환자들의 몸 상태를 살펴서 약을 처방하고 뼈를 맞춰주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그를 바라보는 환자들의 눈빛에는 존경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환자들은 그를 신처럼 대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소정락과 의원들이 돌아보니 검무극이 서 있었다.

“우리 형 치료해 주셨잖아요?”

“기억하네.”

“워낙 환자가 많아서 기억 못 하실까 봐 걱정했습니다.”

“자네 같은 사람은 잊기 어렵지.”

그러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렇게 잘생긴 환자 보호자를 잊기는 어려울 겁니다.”

옆에 선 의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은 웃었다.

“형은 어떤가?”

“벌써 다 나은 사람처럼 돌아다닙니다. 저러다 또 독에 당하죠.”

검무극은 빠르게 자신을 훑어보는 소정락의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해독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있음을.

독왕도 소정락도,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는 고수들이다.

“여긴 어쩐 일인가?”

“형을 치료해 주셨는데, 그냥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검무극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제 성의니 받아주십시오.”

소정락이 검무극이 내민 주머니를 쳐다보더니.

“괜찮네.”

“저잣거리에서 산 싸구려지만 제 정성이 담긴 선물입니다.”

“환자에게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게 내 원칙이네.”

“이러면 제 손이 너무 부끄러워지는데.”

그때 옆에 있던 의원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의원께서는 바쁘시니 나중에 다시 찾아뵙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선물이 뭔지나 봐주시기나 하십시오.”

말릴 사이도 없이 검무극이 주머니를 열었다.

그 순간!

주머니에서 하얀 연기가 터져 나왔다.

연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의원들은 물론이고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까지 모두 스르륵 쓰러진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검무극과 소정락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소정락이 옆에 쓰러져 있는 의원을 살펴보았다. 모두 잠이 든 상태였다.

검무극이 손으로 연기를 휘휘 저으며 감탄했다.

“효과 끝내주는군요. 이런 맛에 독공을 익히나 봅니다.”

검무극이 소정락을 쳐다보았다.

“당신도 그렇고, 천애거사도 그렇고, 어찌나 죄 없는 사람들을 방패로 삼는지. 어쩔 수가 없었소.”

“방패라니?”

“평생을 거짓 인생으로 살아왔는데 지겹지 않소? 우리 둘만 있을 때만이라도 원래 자신으로 돌아오시오.”

하지만 소정락은 여전히 이 상황에 놀란 의원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잠든 환자를 살피기까지 했다.

“정말 당신을 만날 때마다 내가 너무 악당 같소.”

검무극이 수행하던 의원이 바닥에 떨어뜨린 종이를 주워들었다.

“환자들 기록표군.”

검무극이 그것을 창가 쪽 허공으로 들어서 다른 글자가 보이나 확인했다.

“이렇게 비춰보면 독 구결이 적혀 있고, 당신 조직의 비밀 연락이 적혀 있고 이래야 하는데.”

물론, 그런 게 적혀 있을 리 없었다.

“이런 심심한 낮의 삶을 당신은 어떻게 버티는 거요?”

무작정 넘겨짚는 말은 아니었다.

천독림에서 독왕과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바가 있었다. 독공을 익힌다는 건 일반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온전히 그 세상에 빠지지 않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왜냐면 독이 그를 죽여버렸을 테니까.

오직 독만을 생각하는 자만이 독공의 고수가 된다.

이 소정락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젊은 시절 익힌 독공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그걸 피나는 수련으로 연마하지 않았는데도 독왕이 하독한 독을 해독해 낸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아무도 모르게 독공을 연마했을 거다. 낮에는 생명을 살리고, 밤에는 생명을 죽였을 것이다.

소정락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자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부르겠네. 나를 해치려면 해치게.”

그는 일단 예상치 못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일단 그 순간에서 벗어나라!

그 상황을 제어할 수 있을 거 같아도 일단 벗어나라. 뭔가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은, 그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만든 함정이고 착각이니까.

소정락은 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원칙을 어기게 만드는 한마디가 뒤에서 들려왔다.

“삼일생.”

순간 소정락이 흠칫 동작을 멈췄다.

“우리 독왕님은 한눈에 알아보시더군요.”

소정락이 다시 검무극을 향해 돌아섰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독왕 이야기는 못 참는 것만 봐도, 그는 독왕을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나는 독을 알아보는 재주는 없지만, 다른 걸 알아보는 재주가 있소.”

검무극이 가만히 소정락을 응시하며 덧붙였다.

“악인을 알아보는 재주지.”

사람 좋은 소정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당신은 수십 년도 넘게 연기를 하지 않았소? 이제 그만하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소정락이 대답했다.

“나는 연기한 적 없다.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게 내 삶이다.”

검무극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소. 당신은 오랫동안 좋은 의원으로 살았지.”

정말 그렇게 살아온 삶이었으니까.

“한데 그렇다고 그 삶을 존경할 수는 없을 거 같소.”

검무극이 환자가 잠든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당신들 때문에 마정대전이 벌어지면 당신이 평생 살렸던 목숨보다 수백 배는 더 죽게 될 텐데.”

검무극은 볼 수 있었다. 소정락의 얼굴 어디에도 양심의 가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검무극이 침상의 환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그 속죄를 이 사람들 구하는 걸로 미리 하는 거요?”

소정락이 천천히 걸어오더니 건너편 환자의 침상 끝에 앉았다.

그가 자기가 앉은 침상의 환자를 쳐다보며 불쑥 말했다.

“지랄하네.”

소정락의 입가에 짙은 비웃음이 지어졌다.

“마교 소교주 입에서 속죄란 말이 나오다니. 너희가 속죄가 뭔지나 알고 있나?”

검무극이 활짝 웃었다.

“이러니 얼마나 좋소. 가면 딱 벗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눕시다.”

가라앉은 소정락의 눈빛부터 달랐다. 그 사람 좋아 보이던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완전히 달라 보였다.

“당신,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소?”

소정락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후욱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기도가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사람의 몸을 무겁게 만드는 기도였다.

그리고 검무극은 보았다. 그의 몸에서 뻗어나간 이십여 개의 넝쿨 같은 기운이 그곳에 잠든 이들의 몸과 이어졌다.

“내가 죽으면 저들도 함께 죽는다.”

유리한 상황이라 여길 법도 했는데, 성격이 철두철미했다.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패는 잠이 들어도 방패지.”

앞서 소정락에게 이들을 너무 방패 삼는다고 했던 말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이었다.

“마교 소교주가 협객 흉내를 낸다는 건 익히 들었다.”

인질이 있는 한 절대 어쩌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듯 보였는데.

정작 검무극을 향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강렬한 불신이었다.

“그래봤자 피는 못 속이지.”

당연히 무림을 지배하기 위한 더러운 수작이라 확신했다. 마인들은 태생적으로 그런 자들이니까.

“솔직히 말해. 저자들 죽어도 상관없잖아?”

검무극이 순순히 인정했다. 굳이 이 상황에서 반드시 저들을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역시! 나를 알아보는군. 악인은 악인을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소.”

검무극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맞소. 지금도 내 몸속에서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소. 이딴 말 다 집어치우고 그냥 확 베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나를 끝없이 유혹하고 있소. 이 음흉한 새끼 그냥 죽여버리라고. 정파인들이 오해하면 하라고 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라고!”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소정락을 쳐다보았다. 소정락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욕설을 들은 불쾌감이 차가운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분노에 장작을 더 넣으려는 듯 검무극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거 감추려고 착한 척 엄청나게 하면서 살고 있소. 그러고 보니 우리 공통점이 많소.”

소정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해야겠군. 나도 널 죽여버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으니까.”

“당신은 왜 참고 있소?”

소정락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살아있어야 당신들 음모가 완성되어서?”

소정락의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이오? 당신이 내게 하독하는 순간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건데.”

이제 때가 되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자신이 이렇게 찾아올 것을 예상한 선택이기도 했고.

“네 역할이 궁금한가? 아주 중요한 역할이지.”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에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당신은 완벽하게 의원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가난한 사람들을 공짜로 치료해 주고, 수많은 무인을 살리고. 모두의 존경을 받고.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검무극이 침상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 당신에게도 허점이 없을까?”

소정락은 검무극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완벽했겠지. 한데 그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실수가 없었을까? 방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을까? 안 들키는 삶을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

소정락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난 이 의원 지하 어딘가에 당신의 비밀 작업장이 있을 거라고 확신해. 그곳에서 독을 연구하고 시험했겠지. 입구를 아무리 잘 숨겨둬도 전문가를 불러 찾아내면 찾을 수 있겠지.”

소정락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게 내 공간이란 증거가 있다면 내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겠지.”

그러자 검무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정말 지하에 비밀 장소가 있어? 그냥 넘겨짚어서 한 말인데.”

얄미운 표정을 짓자 소정락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검무극이 또 다른 부분을 찔러갔다.

“그 실험은 누구에게 했을까? 나는 당신이 왜 이렇게 열심히 환자를 보는지 이해가 안 됐어. 천성이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희생적으로 살 수 없을 텐데. 한데 천성이 착한 사람이 이런 독공을 연마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이 들더군. 자신이 필요한 체질을 지닌 사람을 찾기 위해서라면?”

검무극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당신 환자 중에 특별한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실종되었을 거 같은데.”

소정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지하에 독을 시험한 밀실도 있고, 알고 보니 환자들은 실종되었고. 이 정도면 당신을 의심할 만한 이유로 충분할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당신을 죽여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소정락은 자신만만했다.

“지금까지 내가 구한 사람이 몇 사람인지 아나?”

“그건 상관없지. 당신이 안 구한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

“당신에 대한 소문과 평판은 그들이 만들 거야.”

검무극이 소정락을 차갑게 응시했다.

“당신을 죽여도 별일 없을 거라는 결론이지.”

강한 협박에 검무극은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그를 죽이는 건 쉬운 일이다. 독을 쓰는 이들에게 자신은 그야말로 상극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소정락은 여유로웠다.

“아까 처음 본 그 순간 이미 네게 하독했다. 내공을 쓰는 순간 기혈이 팽창해서 터질 거다.”

물론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그 독이 들어오는 순간 몸에서 태워버렸으니까.

검무극은 짐짓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검무극이 넌지시 물었다.

“좋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거 하나는 물어봅시다. 금마령의 노마들을 이용해 대체 누굴 죽이려는 거요?”

검무극이 떠보듯 물었다.

“진 소저요?”

그러면서 그의 표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살폈다.

“진 대주요?”

여전히 소정락은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검무극이 마지막 한 사람을 물었다.

“천애거사겠지.”

소정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 순간이었다.

“너 때문에 대상이 바뀌었다.”

“나 때문에?”

하긴, 자신과 마존들이 이곳 무한으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테니까.

바뀐 대상이 누굴지 궁금했다.

“우린 여러 가능성을 고려했지. 그동안 모은 모든 자료를 분석하고 또 분석했지.”

소정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오히려 바뀐 그 사람이 죽는다면 그 누구보다 전쟁이 발발할 확률이 높게 나왔다.”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이 들던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백발의 노고수였는데 온몸에 핏빛 마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보는 순간 온몸을 얼어붙게 하는 존재감이었다.

백 세에 이른 절대고수. 놀랍게도 그는 금마령을 깨고 무한으로 온 마염군이었다.

반대쪽 문에서도 모습을 드러낸 고수가 있었다.

육신이 말라비틀어져 마치 해골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툭 치면 온몸이 부서져 내릴 거 같았다.

하지만 그의 두 눈만은 깊고 깊었다. 백오십 년 세월을 담은 심연이 죽음처럼 담겨 있었다.

그는 바로 백골혼마였다.

놀랍게도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검무극은 두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정락이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누구에게 죽어도 상관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가 죽으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검무극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 새로운 이가 누군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였구나.”

소정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죽음에 마교주는 절대 참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인사 정도는 괜찮잖아요?

내 죽음에 아버지가 절대 참지 않을 거다?

검무극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정말 내가 죽는다면 아버지는 마정대전을 일으키실까?’

평소처럼 태사의에 앉으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오늘부터 본교의 후계자는 무양이다.

이 한마디만 하시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실지도 모를 일인데. 이런 말씀 한마디 덧붙이시면서.

―이제 좀 본교가 조용해지겠군.

물론 저들의 분석이 정확한 경우도 떠올려 보았다.

홀로 천마전 태사의에 앉아서 깊은 슬픔에 잠겨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쩌면 형을 새롭게 후계자로 정하는 그 날, 앞에 늘어선 팔마존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으리라.

―가자, 중원으로!

출정하는 아버지의 마차 창문으로 낚싯대가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를 데리고 출정하실지도.

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는 정말 알 수 없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이 예측한 거 맞소?”

검무극의 물음에 소정락이 대답했다.

“이 결과는 네가 만든 거다.”

솔직히 검무극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가 자신을 생각해 주신다는 말이었으니까.

“한데 내가 죽는 바람에 전쟁이 발발하면, 당신들은 무사할까?”

소정락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우린 다른 삶을 사는데 익숙한 사람들이다.”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지낸다는 말이었다. 이와 같은 고수들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긴다면, 전쟁 중에 그들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전쟁은 우리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겠지.”

그 부를 바탕으로 키운 힘으로 상처 입은 승자의 목을 물어뜯으려 들겠지.

검무극은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하긴. 그게 당신들 방식이었지. 착한 얼굴로 숨죽인 채 뒤통수를 칠 그 순간만을 기다리는 인생, 당신의 지난 삶 아닌가?”

발끈할 수도 있을 말이었음에도 소정락은 여유가 넘쳤다. 죽기 직전의 발악은 언제나 가소로울 뿐이다.

어떤 변수도 없을 상황이었다. 내공을 쓰면 혈맥이 터져 죽는 독을 하독한 상태에서 두 고수까지 있었으니까.

소정락은 흐뭇하게 두 노마를 쳐다보았다.

마염군은 핏빛 마기를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렇게 붉으면서도 선명한 마기를 드러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알려진 그의 독문무공은 염화장(焰火掌).

용암처럼 뜨거운 극양의 기운을 담은 마공으로 가슴에 화인처럼 날아와 박힌 손바닥이 피부를 태우며 몸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무서운 무공이었다.

백 세에 이른 나이에도 그의 두 눈에서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무서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 이번에는 백골혼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과 손발이 분칠한 것처럼 하얬기에 얼핏 보면 정말 해골처럼 보였다. 하긴,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정말 백골이 되어야 할 나이지.

그 삐쩍 마른 몸에는 온갖 백골 장신구들이 걸려있었는데 진짜 사람의 백골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의 독문무공은 환혼귀령공(還魂鬼靈功)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다루는 금기의 마공이었다.

영혼을 강탈하고 시체를 되살리며 수백의 백골이 몸을 일으켜 달려드는 모습은 그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마공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은 그야말로 지옥과 연결되어있는 느낌을 주었다.

‘어떠냐? 아무리 너라고 해도 이들 앞에서도 큰소리를 칠 테냐?’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소정락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두 노마에게 말했다.

“인사 안 하냐?”

소정락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검무극이 더 큰 소리로 그들에게 말했다.

“나 임시 교주다. 인사부터 해라!”

마염군과 백골혼마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라고 검무극이 이렇게 나올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임시 교주라니? 교주가 죽었나?”

마염군이 쇠 긁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나이를 목소리로 먹은 듯, 목소리는 듣기에 아주 거북했다.

그러자 소정락이 정중히 대답했다.

“마교주가 현재 폐관수련 중입니다.”

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백골혼마의 입이 활짝 벌어졌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그의 입속이 훤히 보였는데 이가 다 빠지고 몇 개만 남아 있었다.

“살아 있다니 잘 됐군. 마교주는 내 손으로 찢어 죽일 거다.”

나이가 백오십에 이른 그는 맑고 가는 아이 목소리를 냈다.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처럼 목소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그는 해맑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어둠의 기운이 가득한 눈동자는 그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었기에 전체적으로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마염군의 몸에서 일렁이는 기운이 화끈 달아오르며 뜨거워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요. 오늘은 저 어린놈이나 찢어버립시다.”

금마령에 묶여 있으면서 오직 이날만 바랐다. 그야말로 악에 받친 세월이었다.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금제를 풀면, 그간의 세월은 피로 보상받을 것이다.

검무극이 피식 웃었다. 자신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싶은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세월 금마령에 묶여 있다 보니 현실 감각을 다 잃어버린 걸까?

차라리 정파의 고수라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마공을 익힌 자는 무조건 허세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마공의 정점에 있는 구화마공이었기에 마공으로 구화마공을 상대하는 것은 몇 배나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버지는 십 성 대성을 넘어 새로운 경지에 도전하고 계시는 중.

검무극이 웃자 백골혼마도 활짝 웃었다.

검무극이 그의 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가 없는데 밥은 먹고 다니나?”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다가 백골혼마가 마염군을 쳐다보았다.

“내가 없는 사이 본교가 어찌 된 건가?”

“요즘 젊은것들 예의가 없어졌다고 들었소.”

“우리 때도 그랬는데 여전하군.”

그렇게 아이 목소리와 쇠 긁는 목소리가 오고 갔다.

둘의 대화를 들었음에도 검무극은 더 준엄하게 대했다.

“인사부터! 예의는 그대들이 먼저 지킨 후에 따지도록!”

마염군과 백골혼마는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있나, 괘씸한 마음으로 쳐다보았는데.

자신들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맑고 깊었다.

뜨거움에도 함께 뜨거워지지 않고.

깊은 어둠에도 잠겨 들지 않았다.

그 눈빛에 천지 분간 못 하는 후계자의 치기나 경솔함은 없었다.

검무극은 진짜로 꾸짖고 있었다.

이 예의 없는 것들아! 좋게 말할 때 예의를 갖춰라!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위엄과 권위로 자신들을 야단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검무극은 전혀 내공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람 본연의 존재감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했다.

“대단하군.”

마염군이 손뼉을 쳤다. 진심으로 치는 박수였다. 이렇게 젊은 상대에게 감탄할 정도로 압도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백골혼마 역시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죽이기엔 아깝다, 아까워.”

마교주가 마정대전을 일으킨다는 분석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아들을 잃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검무극은 여전히 차분하게 그들을 꾸짖었다.

“나이는 입으로 먹는 거다. 말할 때를 알고, 다물어야 할 때를 알고. 욕할 때를 알고 인사해야 할 때를 알지. 그대들이 나이를 헛먹지 않았음을 그 입으로 증명해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마염군이 정말 인사한 것이다.

“마염군이 임시 교주를 뵙소.”

쇠 긁는 소리였지만 나름 예의를 갖춘 인사였다. 물론 인사했다고 그를 죽이지 않겠다는 건 아니었다. 이 가상한 기도에 대한 감탄이었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 기세라면 인사 정도는 해줘야지.

반면 백골혼마는 순순히 인사하지 않았다.

“난 나이를 헛먹었지. 너희들의 그 빌어먹을 교주령 때문에.”

그런다고 검무극에게서 호락호락한 반응이 나올 리 없었다.

“당신이 지은 죄 때문이지. 인사!”

화아아아악!

순간 백골혼마의 두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내게 인사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자.”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암흑심안(暗黑心眼)이 발휘되었다. 이 마공으로 상대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암흑심안 앞에서는 어떤 허풍도, 어떤 가식도 통하지 않았다. 벌거벗은 그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호랑이 탈을 쓴 여우를 보고, 갑옷을 입은 겁쟁이를 보고.

검무극의 마음을 들여다보던 그 순간!

백골혼마가 흠칫 놀랐다.

잠시 후 그의 두 눈에서 어두운 기운이 사라졌다.

검무극이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본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그가 기 싸움에서 한발 물러섰다.

“백골혼마가 임시 교주를 뵙소.”

그제야 검무극이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았다.

“임시 교주 검무극이네.”

이 순간 그들은 마치 천마전에 있는 것 같았다. 검무극은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그 아래에서 검무극을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 권위를 내세웠느냐는 듯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새로 인사했다. 마치 조금 전과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친근했다.

“우리 선배님들 반갑습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인사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락은 이번에 목표를 검무극으로 바꾼 건 정말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받아낸다고? 대체 무림의 누가 해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소교주가 더 성장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소정락이 검무극의 기세를 눌렀다. 그 역시 대단함을 느꼈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깎아내렸다.

“내공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두 분을 만나니 완전히 겁에 질렸습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내공을 쓸 수 없다는 말에 마염군이 더욱 쇠 긁는 목소리로 불만을 드러냈다.

“왜 내공을 제압했나? 우리가 직접 죽이겠다고 했거늘!”

인사는 인사고, 여전히 검무극을 찢어 죽이고 싶은 욕망도 그대로였다.

소정락이 검무극에 대해 설명했다. 금마령에 묶여 수십 년을 보낸 이들이니 근래 무림의 상황을 모를 것이다.

“저 소교주는 그야말로 불세출의 무공실력을 지녔습니다.”

이미 소교주에게 죽은 이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심지어 내공이 제압당한 지금도 절대 방심해선 안 되는 자입니다.”

“그렇다고 내공도 못 쓰는 자를 죽일 수는 없지. 풀어주게.”

소정락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두 노마가 두려운 존재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정락은 그들을 겁내지 않았다. 독을 쓰는 사람은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오직 독왕뿐.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끊으며 백골혼마가 나섰다. 그는 검무극의 내공을 풀어주라는 말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금제를 풀 준비는 다 되었나?”

“약속대로 두 사람만 죽여주시면 그 즉시 대법을 시행할 겁니다.”

그 말에 검무극이 깜짝 놀라 물었다.

“목표가 나로 바뀌었다면서? 한데 왜 둘이지?”

그러자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나왔다.

“널 죽이고 진하군도 죽일 거다. 한쪽이 아들을 잃었으니, 다른 쪽은 손자를 잃어야 형평성에 맞겠지.”

소정락이 두 노마에게 말했다.

“이제 끝장을 내주십시오.”

백골혼마가 마염군을 쳐다보았다. 함께 손을 쓰자는 눈빛에 마염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검무극의 마음을 들여다본 백골혼마가 처음보다 신중해졌음을 느꼈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대체 무엇을 봤길래?

두 사람이 검무극을 향해 걸어 나오려던 그때.

“한데 두 분께서는 금제를 풀어줄 사람은 만나보셨소?”

검무극의 물음에 마염군과 백골혼마가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정락을 향했다.

“저기 있지 않나?”

마염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사람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마염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아니라고?”

“금마령의 금제를 어찌 혼자서 풀 수 있겠소?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다면, 그 오랜 세월 금마령이 유지될 수 있었겠소?”

마염군이 소정락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소정락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입니다.”

소정락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또 다른 자신의 배후까지 끌어들이려 한다는 것을. 정말이지 이 자는…… 미친놈이다!

대번에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사람의 기도가 한쪽은 더 뜨거워졌고 한쪽은 더 차가워졌다.

소정락은 난감했다. 여유를 부리지 말고 처음부터 그냥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검무극이 입을 열 때마다 생각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그 입이 다시 열렸다.

“모르긴 해도 그 대법, 돈도 막대하게 들어갈 겁니다. 아마 그 액수 생각하면 딴생각이 들 만큼 들어가겠지요.”

그 딴생각이 무엇인지 두 노마가 어찌 모르겠는가? 대법을 해주는 것보다 차라리 죽이는 비용이 더 싸게 들 거란 의미.

마염군은 그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

백골혼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이번 약속을 한 사람을 믿고 있다는 모습이었다.

“누가 약속했는지 몰라도 실무를 보는 사람은 저 사람이오. 그대들 몸에 칼을 대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법 아니겠소?”

그러자 소정락이 여유롭게 말했다.

“하찮은 말로 이간질을 하려는 모양인데, 어림없다.”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저 사람이 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지금부터 내가 보여주겠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쉬이익.

검무극의 검이 뽑혀 나왔다.

촤아아악.

“윽!”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사람은 소정락이었다. 검무극의 검에서 날아간 검기가 사방으로 갈라지면서 소정락과 잠든 환자들 사이를 잇고 있던 넝쿨 같은 선을 잘라버린 것이다.

가벼운 한 수처럼 보였지만, 그야말로 극상승의 무학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쉽고 간단해 보이는 것이었고.

“조금 전에 내가 내공을 쓸 수 없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소?”

소정락이 변명하기 전에 검무극이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 두 선배께서 내게 무방비로 덤비다가 위험에 빠지라는 의도지요.”

순간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분명 내공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우리가 양패구상하게 한 후 마지막에 독으로 모두를 죽이려는 게 아니겠소?”

소정락은 멍하게 검무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지금 오해받는 것보다, 앞서 하독한 자신의 독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왜 혈맥이 터져 죽지 않는 거지?’

하지만 그 모습은 두 노마에게는 검무극의 말을 시인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소정락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왜 중독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는데.

“어떻게 되긴. 나를 이용해서 양패구상하게 하려는 계획이 실패한 거지.”

검무극이 두 노마를 구워삶기 시작했다.

“자고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소. 우리가 힘을 합쳐서 나는 목숨을 구하고 그대들은 금제를 풀고. 어떻소?”

소정락은 당황했다. 설마 검무극이 두 마인과 한 편이 되려고 시도할 줄은 몰랐다.

‘대체 무슨 의도냐?’

하지만 이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검무극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간악한 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그러면서 소정락은 은밀히 다시 검무극에게 하독했다.

백사분(白蛇粉).

눈이 멀고 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독이었다. 일단 저 얄미운 입부터 닫게 해야 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목청을 높였다.

“우리 선배님들, 저 거짓말쟁이를 믿고 생명을 맡기실 겁니까?”

듣지 말고 죽이십시오!

소정락은 기가 막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이 거짓말쟁이로 몰리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독이 통하지 않아?’

소정락은 당황했다. 다른 일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 당황하지 않았을 그였다. 당황하면 더욱 의심받게 된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한데 독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소정락이 당황하는 모습에 마염군과 백골혼마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보이는 소정락의 모습은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의 반응처럼 보였다.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소정락이 다시 다른 독을 하독했다.

이번에는 광분독(狂奔毒)이었다.

이 독은 직접적으로 신체에 해를 가하는 독이 아니었다.

바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분노와 광기를 터뜨리게 하는 독이었다.

최고 수준의 독공 고수들만이 다룰 수 있는 독으로, 앞서 하독한 백사분과는 완전히 성질이 다른 독이었다.

‘격해져라! 저들에게 네 쌓인 분노를 폭발해!’

그러는 순간 끝이었다. 저 자존심 강한 두 노마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자신에게 분노를 터뜨려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먼저 흥분한 쪽이 지는 법이다.

검무극이 고함을 내지르며 분노를 터뜨리기를 기대했지만.

검무극은 오히려 더 활짝 웃으며 두 노마에게 말했다.

“두 분이 신중하고 현명한 분들이시라 얼마나 다행인 줄 모릅니다.”

웃어? 웃는다고? 검무극의 반응에 소정락은 더욱 놀랐다.

‘또 독이 안 통했다!’

검무극은 멀쩡했다. 심지어 얄미운 얼굴로 또 자신을 몰아붙였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보십시오. 양패구상을 노린 게 확실하다니까요. 제가 두 분이었다면 벌써 흥분해서 쌍욕을 날리면서 저 사람 두들겨 팼을 겁니다.”

소정락은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정말 자신이 하독한 독이 자신을 중독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가 뻗쳤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독이 자신을 중독시켰다면 반드시 고함을 내질렀을 테니까.

‘대체 왜 독이 통하지 않는 거지?’

그때 소정락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

‘설마? 독왕이 사전에 복용하는 해약을 준 건가?’

미리 특정한 독에 대비해서 해약을 복용할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어떤 독을 하독할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설마 독왕이 자신이 백사분과 광분독을 하독할지 예상했다고?

설령 백번 양보해서 독왕이 자신의 독을 예측하고 미리 해약을 줬다 하더라도, 이렇게 성질이 완전히 다른 독 두 개를 멀쩡하게 막아낼 수는 없다. 게다가 순서까지 정확히 맞춰서 복용해야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독은 두 개가 아니었다. 맨 처음 하독한 독이 있지 않나? 내공을 쓰는 순간 기혈이 팽창해서 터지는 독까지 안 통했다.

‘독왕이 그 정도 실력자라고?’

소정락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비장의 독을 하독해서 죽여야 하는지. 아니면 원래 계획대로 이들 두 사람 손에 죽게 해야 하는지.

‘기회가 있을 때 죽여야 한다!’

만약 검무극이 자신을 죽이려 들면, 속수무책으로 죽게 된다.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 일단 죽이고 다음 일을 고민해야 한다.

결국 소정락은 자신이 지닌 비장의 독을 하독했다. 독에 들어가는 재료가 워낙 귀한 것들이라서 정말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는 독이었다.

무생진독(無生眞毒).

단숨에 상대를 즉사시키는 극독으로 자신이 직접 제작한 독이었다. 하독하는 즉시 죽기 때문에 해약은 없었다.

‘이건 못 막을 거다.’

그대로 눈을 뒤집고 쓰러져야 했는데.

이번에도 검무극은 멀쩡했다. 심지어 또 이간질했다.

“솔직히 말해보시오. 애초에 금제를 깨는 대법을 펼칠 생각도 없었지?”

소정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독문독까지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마치 그 모습은 검무극의 말에 정곡이 찔린 것처럼 보였다.

뭐라 말을 해서 의심을 벗어나야 했는데, 소정락은 무생진독이 통하지 않았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독왕이라도 무생진독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는 해약은 만들 수 없다. 그런 해약이 있다면 그건 사람을 만독불침이나 다름없게 만드는 건데. 그런 해약이 존재할 리가 없지.’

바로 그 순간 소정락이 흠칫하며 눈이 점점 커졌다.

‘설마?’

소정락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겠지?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소정락이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독을 연속해서 당했음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불쾌감이나 어지럼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모습에서 소정락이 떠올린 네 글자.

독공을 익힌 이들이 꿈에서조차 보기 싫어하는 네 글자.

만독불침!

그러는 와중에도 검무극의 이간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저 불안한 표정 보십시오. 저래도 두 분을 속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염군과 백골혼마는 말없이 소정락을 응시했다. 확실히 그는 내공이 없다고 말한 게 거짓말로 드러난 이후부터 미심쩍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불신 가득한 얼굴로 검무극을 바라보던 소정락이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소교주는 만독불침입니다!”

순간 무겁게 흐르는 침묵 속에서 검무극은 태연하게 대응했다.

“고작 생각해 낸 변명이 그거요?”

그때 마염군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둘 다 그만!”

마염군의 쇠 긁는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면서 더욱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대체 무슨 헛소리들인가?”

두 사람 모두에게 내는 화였다.

소정락이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방금 소교주에게 독을 연속해서 하독했습니다. 한데 하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소교주의 이간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건 그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검무극이 두 노마에게 물었다.

“혹시 살면서 만독불침 보신 적 있습니까?”

마염군은 만독불침을 본 적이 없었다.

백골혼마는 나이가 백오십 세에 이르렀으니 한 번 봤을 법도 했는데.

백골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만독불침이다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검무극이 소정락을 비꼬았다.

“그럼 오늘 보시겠군요. 자, 여기 만독불침 있으니 실컷 보십시오. 화공 불러서 함께 있는 그림 한 장 그리시죠.”

두 노마는 검무극을 보지 않고 소정락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은 이러했다.

무슨 생뚱맞은 만독불침 타령이냐?

소정락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망할! 벌써 뒈져도 몇 번은 뒈졌어야 할 늙은 망령들이 무슨 제대로 된 판단력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들을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검무극에게 독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소교주가 보통이 아니라고요. 오죽하면 내공을 제압한 상태에서 두 분까지 함께 불러서 처리해 달라고 했겠습니까?”

두 노마는 반신반의했다.

애초에 검무극을 죽이러 온 그들이었다. 반신반의한다는 것만 해도, 검무극의 이간계가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했다.

“대법 장소도 보고, 대법을 도울 사람도 확인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진짜로 두 분께 대법을 펼칠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저를 죽이시지요.”

그러자 마염군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주려는 거냐? 우린 너를 죽이려는 사람인데?”

백골혼마 역시 비슷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의심했다.

“이유야 간단하죠. 저자가 너무 괘씸해서입니다. 본교를 우습게 보고 두 분 선배님과 저를 양패구상하게끔 모략을 꾸몄으니까요. 비록 다른 시대에 활약했지만 우린 다 같은 마인들 아닙니까?”

소정락이 인상을 굳혔다. 우리? 검무극이 의도적으로 저런 표현을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우리 마인들만의 기질이 있지 않습니까?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남에게 이용당하다가 죽는 건 딱 질색이다! 그것도 몰래 숨어서 음모나 꾸미는 쥐새끼 같은 놈들에게는 더욱이!”

그러면서 검무극이 소정락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그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했기에 두 노마는 소정락을 힐끗 쳐다보았다.

소정락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말을 할 때마다 저 노마들이 소교주를 믿는 마음도 커지고 있음을.

‘말로 싸워선 안 돼. 뭔가 수를 내야 한다.’

검무극이 계속 그를 몰아붙였다.

“그깟 대법 장소 좀 미리 보여달라는 게 뭐가 그리 힘든 일인지.”

그때 소정락이 노마들에게 말했다.

“소교주를 죽이십시오. 그럼 곧바로 그곳으로 모시겠습니다. 함께 대법을 펼칠 사람도 부르겠습니다.”

소정락이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네가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이들을 움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염군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빛 기운과 백골혼마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

어쩌니 해도 두 사람은 천마신교에 증오가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소정락이 수상하게 굴고는 있지만 검무극을 죽이겠다는 마음만큼은 아직 변함이 없었다.

그때 검무극이 차분하게 의문을 제시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무슨 수작을 부릴까 싶어 소정락이 소리쳤다.

“듣지 말고 죽이십시오!”

하지만 검무극이 꺼낸 말은 다음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뭐가 이상하지?”

마염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의문을 제기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면, 내공까지 제압한 상태에서 두 분을 불렀다는 건데. 그냥 죽일 수도 있는데 굳이 왜 두 분에게 저를 죽이게끔 한 것일까요?”

소정락이 뭐라 나서려는 것을 백골혼마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계속 이야기하라는 눈빛에 검무극이 자신이 물은 질문의 답을 스스로 했다.

“저를 죽인 사람이 두 분이라는 게 세상에 밝혀지게 하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은 평생 본교 고수들에게 쫓기게 될 겁니다. 아버지가 절대 그냥 두지 않으실 테니까요.”

이윽고 듣고 있던 백골혼마가 아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쫓길 각오는 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하려던 말은 지금부터였다.

“하지만 쫓길 일은 없을 겁니다. 금제를 풀지 못할 테니까요.”

백골혼마의 눈에서 흘러나온 어둠의 기운이 주위를 장악하기 시작했지만, 검무극의 말은 계속 흘러나왔다.

“본교와 무림맹이 피 터지게 싸우다가 양패구상하는 게 저들의 목적인 건 아실 겁니다. 한데 두 분이 저를 죽였다는 게 밝혀진 상황에서 아버지가 전쟁을 하신다고요?”

검무극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수를 위해서 전쟁을 미루실 겁니다. 아들 때문에 전쟁까지 일으키실 분인데, 복수를 안 하실 리는 없으니까요. 과연 그게 저들이 바라는 상황일까요?”

백골혼마와 마염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들이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두 분이 쉽게 잡히시겠습니까?”

절대 쉽게 잡혀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은 교주까지 죽이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죽으려고 이 모든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이 더욱 강력하게 그들을 밀어붙였다.

“저들이 전쟁이 연기되는 걸 바랄까요? 아니면 저와 멸마대주를 죽인 두 분이 금제를 풀지 못해 죽어버리길 바랄까요? 막대하게 드는 대법 비용도 아끼면서요.”

정말 그럴듯한 말이었기에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마음이 흔들렸다.

백골혼마가 소정락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대법 장소로 안내하게.”

자신을 향한 백골혼마의 눈빛은 단호했다. 소정락은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검무극의 말에 자신조차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어찌 저 두 노마가 넘어가지 않겠는가?

검무극이 보통이 아님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당해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괜히 어설프게 거역했다간 상황만 더 힘들어 질 게 뻔했다.

하지만 갈 때 가더라도 검무극의 내공을 제압해야 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자존심 강한 늙은이들의 심기를 건드려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돌려서 말했다.

“소교주가 기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마염군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염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둘이 나란히 앞에서 가도록. 우리가 뒤따를 테니까.”

이제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이런 변수는 싫어하는 그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습니다, 가시죠.”

결국 소정락이 앞장서 걸었다.

‘그렇다고 오늘의 결말이 바뀌지는 않을 거다.’

바로 뒤를 검무극이 뒤따랐고, 그 뒤를 두 노마가 따랐다.

환자들과 보호자들, 그리고 의원들은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다. 검무극은 관심 밖이라는 듯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렇게 소정락이 세 사람을 데리고 의방을 나왔다.

의원 내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소정락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평소 인사를 잘 받아주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소정락이 안내한 곳은 자신의 거처였다.

책상과 책장, 장식장에 숨겨진 은밀한 장치를 연속해서 조종하자 지하로 내려가는 비밀 문이 열렸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쭉 내려가자 그곳에 넓은 공간이 있었다. 야명주가 곳곳에 박혀 주위도 잘 보였고, 공기 구멍이 있는지 답답하지도 않았다.

이곳이 바로 소정락이 은밀히 독공을 연마하는 곳이었다. 사방 벽에는 온갖 독초와 독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그의 수십 년 비밀이 그곳에 다 있었다.

“이곳에서 대법을 진행할 겁니다.”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 굳어 있던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소정락은 내심 검무극의 속내가 궁금했다.

대체 왜 그리 이곳을 보자고 한 것일까? 단지 시간을 끌기 위해서? 누군가 구해주러 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끌려고?

‘그렇다면 너는 판단을 잘못했다.’

지하에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이곳은 달아나기에 불가능한 공간이었으니까. 게다가 비밀 입구가 닫힌 이상, 이곳으로 찾으러 올 수도 없었다.

소정락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집 구경 온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성격이 참 꼼꼼하신 거 같은데 독초 정리는 영 별로네요. 내가 대신 정리를 좀 해드릴까? 내가 또 독초 정리만큼은 맹훈련을 받은 사람이라서.”

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는 순간, 소정락은 가슴이 서늘해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달아날 곳이 없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구나.’

우리 독왕님 드릴 거요

검무극이 내부를 살펴보더니 한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밀실을 옮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소.”

그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걸까?

검무극의 말처럼 이곳은 새로 만든 지하 밀실이었다. 원래는 의원 내 구석진 창고 아래에 있었는데, 몇 년 전 자신의 거처 아래에 새로 만들었다. 그곳 지하를 쓰기에 너무 불편해서였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소정락의 눈빛에 검무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소. 당신은 처음에는 완벽하리만치 조심했겠지만, 점차 방심했을 거라고.”

소정락은 이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분명 방심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자신은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이 장소가 들킨다 해도 해독제를 연구하고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독을 다루니 위험해서 지하에 밀실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검무극이 파고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그의 화려한 언변으로 이곳이 독공을 연마하던 장소라고 밀어붙이면, 자신은 정말 그런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검무극은 검 한 번 뽑지 않고,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자신들을 이곳까지 오게 한 사람이었으니까. 이 밀실의 문을 연 열쇠는 저 세 치 혀다.

이내 소정락이 마음을 다스렸다.

‘침착하자, 놈도 불안에 떨고 있을 거다.’

검무극을 바라보던 시선이 두 노마를 향했다.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사람은 노마들이었다.

검무극이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그들을 현혹하더라도, 자신의 독보다 강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럴 리는 없지만 끝내 두 노마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에게 하독해서 해약을 빌미로 죽이게 할 작정이었으니까.

“소교주의 말은 틀렸습니다. 여기서 두 분의 금제를 풀어드릴 겁니다.”

소정락이 걸어가서 그곳 가운데 돌로 만든 큰 침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대법을 위한 침상까지 준비해 두지 않았습니까?”

누가 봐도 대법을 할 장소처럼 보였다.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표정도 앞서보다 많이 풀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검무극의 눈은 예리했다.

“독공을 실험하던 침상인가 봅니다.”

마염군이 인상을 굳히며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기 옆면을 보십시오.”

검무극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대번에 핏자국임을 알아차린 두 노마가 인상을 굳혔다.

검무극이 돌 침상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기서 몇 명이나 죽었을까요?”

두 노마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정락을 응시했다.

조금 전에 소정락은 꼭 자신들을 위해서 침상을 마련한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사람들이 독으로 죽어 나간 자리에서 대법을 한다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소정락은 내심 당황하고 짜증이 났지만, 애써 차분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맞습니다. 제가 쓰던 연구실이기도 하지요. 익숙한 곳에서 대법을 펼쳐야 실수가 없겠지요.”

그 말을 부정하진 않았지만,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소정락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대법은 아무 지장 없이 잘 진행될 겁니다. 기본 재료들은 이미 준비해 뒀고, 남은 재료들은 대법이 진행되는 날 가져올 겁니다.”

그의 설명에 검무극이 약초들을 보며 말했다.

“과연 그럴까요?”

두 노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곳에는 독초밖에 없습니다. 대법 재료는 하나도 없죠. 두 분께서 약초에 대해 잘 모른다고 또 속이고 있는 겁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대법 재료가 있는 곳에서 싸움이 나려는데도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 않습니까?”

소정락은 두 노마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기본 재료라 금방 다시 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디 저 간교한 혓바닥에 놀아나지 마십시오. 오직 살아남기 위해 온갖 이간질을 하는 중이니까요.”

한시라도 빨리 검무극을 죽여야 했다.

“자, 이제 대법 장소까지 보셨으니 약속대로 소교주를 죽여 주십시오. 누굴 믿을지는 두 분께서 판단하십시오.”

그들은 결국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아무리 검무극이 이간질을 해도, 결국 금제를 풀어줄 사람은 이쪽이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검무극을 믿는다면?

그렇게 되면 이곳에서 다 같이 죽게 될 거다. 그들은 자신의 독을 막아낼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저 노마들이 그냥 죽을 리 없을 테니, 자신 역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다.

결국 검무극만 살아남게 되겠지. 그러니 제발 나를 칠 생각은 하지 마라, 이 늙은이들아.

검무극이 두 노마에게 말했다.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마지막 확인은 하시죠?”

“무슨 확인?”

“대법을 함께 펼칠 사람까지 보여준다고 했잖습니까? 그 사람까지 보시죠?”

소정락은 왜 검무극이 이 장소와 그 사람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놈의 수작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검무극이 기다렸다는 듯 항변했다.

“이게 수작이라면 또 다른 사람을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요. 제게 적이 한 명 더 생기는 셈인데.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마염군과 백골혼마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정락은 의아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강적이 한 명 더 생기는데 왜 자꾸 보자는 걸까?

그 순간 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소정락의 떨리는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너, 설마! 한자리에 다 모아서 한꺼번에 죽이려는 거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얼굴에 가득한 여유를 달리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그러자 자연스럽게 드는 한 가지 의문.

그렇게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아까 그 의방에서 죽여버리지 왜 이곳까지 오자고 한 거냐?

‘거기나 여기나…….’

바로 그 순간 소정락은 그곳과 다른 점이 하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있지만 이곳에는 없는 것.

바로 잠든 의원들과 환자들, 그리고 보호자들이었다.

‘이곳으로 오자고 한 이유가 그들 때문이라고?’

그곳에서 싸우지 않으려고?

만약 그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면 잠들어 있던 이들 중 다수가 다치거나 죽게 되었을 거다.

의방 밖에서 싸워도 마찬가지였을 거고. 어디나 환자들로 바글바글했으니까.

오직 이곳만이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싸울 수 있는 장소였다. 그 와중에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앞서 검무극은 자신이 내공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신과 환자들 사이에 연결된 선을 잘라냈다.

의방에서 대화하는 내내 검무극은 단 한 번도 환자들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다. 그곳을 나올 때조차도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었고.

‘그게 다 그들을 걱정하고 있다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한 거냐?’

그게 놀라운 게 아니었다.

검무극이 평범한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사람 목숨을 귀하게 여길 수도 있지. 자신도 겉으로는 그런 인생을 살아왔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었다. 상황이 좋을 때야 무슨 가면인들 쓰지 못할까?

한데 지금은 가면을 쓰고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이 오가는 그 와중에 무관심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생사까지 신경 썼다고?

소정락은 믿기 어려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들을 치료하던 자신조차 잠든 환자들은 신경 쓰지 못했는데.

“혹시 환자들 때문에 이곳에 오자고 한 거냐?”

검무극은 대답 대신 소정락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이 챙겨야 하는 사람들 아니오?”

“뭐?”

“당신은 의원이고, 그 사람들은 환자잖소. 그래서 흔쾌히 여기로 우릴 데려온 거라고 여겼는데?”

소정락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의 행동을 꾸짖고 있음을.

그들을 위하기는커녕 인질로 삼았던 자신이었다. 그들과 연결해서 자신이 죽으면 저들도 죽는다고 협박까지 했었다.

검무극은 평생 존경받는 의원으로 살아온 그의 역린을 건드리고 있었다.

“조롱은 거기까지만 해.”

검무극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 깊은 눈빛은 마치 소정락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 시커먼 구멍을.

“화율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당신이 이 지하에서 무고한 이들을 죽여가며 억눌렀던 욕망을 충족했듯, 그도 뭔가가 있겠지.”

묘한 수치심을 느끼며 소정락은 두 노마를 재촉했다.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러자 두 노마가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이미 검무극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은 사실이었다.

소정락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설득하러 온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마염군이 백골혼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후배가 처리하겠소.”

그러자 백골혼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함께 하세.”

“합공을 하자는 거요?”

놀랍게도 백골혼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염군은 백골혼마가 자신만큼이나, 아니 자신보다 더 자존심이 강한 늙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데 합공하자고?’

마염군은 앞서 백골혼마가 암흑심안으로 검무극을 들여다본 후부터 말수가 줄고 행동이 신중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소교주에게서 뭘 보신 거요?”

검무극을 향한 백골혼마의 눈동자에서 더욱 짙은 어둠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백골혼마가 봐왔던 인물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사나운 맹수의 모습을 보여준 이도 있었고, 길을 잃고 울고 있는 꼬마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 이도 있었다. 잘 벼린 검을 보기도 했고, 어둠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검무극에게서 본 것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은 구덩이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관을 넣으면 딱 맞을 크기의 구덩이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암흑심안을 사용한 이래 이렇게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함께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의 눈빛에 살기나 증오, 분노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길가의 돌멩이를 보듯 무심했다. 그 눈빛이 기분 나빴고 신경 쓰였다.

암흑심안을 마쳤을 때, 마치 그를 들여다본 게 아니라 자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 순순히 인사했던 이유는 바로 그 지독한 불쾌감 때문이었다.

백골혼마는 마염군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전해졌다.

그랬기에 마염군 역시 방심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락은 내심 기뻐했다.

‘됐다.’

두 사람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소교주의 무공이 대단하더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두 노마가 본격적으로 기도를 일으키자 검무극이 손을 들며 말했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정락은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다.

‘또 뭐! 제발 말 좀 그만하고 싸워! 싸워서 죽으라고!’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것도 아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검무극이 한쪽 벽 끝에서 다른 쪽 벽 끝까지 발걸음으로 거리를 쟀다.

“뭐 하는 거냐?”

차라리 묻지를 말 걸 싶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최근에 몸집이 더 커져서요. 가늠이 잘 안되네요.”

소정락은 두 노마를 쳐다보았다. 그냥 없애버리시오, 하는 감정을 담았지만, 그들은 검무극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만큼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고, 소정락을 완벽하게 믿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검무극은 지하 밀실의 너비를 잰 후에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아, 할 일이 더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선배님들의 노후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는데 어찌 안 궁금하겠는가?

검무극이 구석에 놓여 있던 혁낭을 집어 들더니 그 안에 독초를 챙기기 시작했다.

“기화초는 새외에서만 구할 수 있는데 많이도 모아두셨소. 여긴 음풍화(陰風花) 뿌리도 있고. 이것도 정말 귀한 건데.”

왠지 모를 불길함에 소정락이 소리쳤다. 뭔가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해서였는데.

“어서 죽이십시오!”

그러자 오히려 검무극이 그를 야단쳤다.

“그럼 당신은 의원으로도 실격이고, 독인으로도 실격이야!”

“뭐?”

“싸움 통에 이 귀한 독초들이 훼손되어도 좋다고? 당신에게 독초는 그런 하찮은 것에 불과한가? 환자도 버려, 독초도 버려. 당신 대체 뭐야?”

설마 검무극이 이렇게 야단칠 줄은 몰랐기에 소정락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반박은 못 했지만 어이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휘말렸는데?

검무극은 장식장 안에 따로 보관한 귀한 독초들 위주로 챙겼다.

“당신은 그냥 있으시오. 내가 독은 못 만들어도 뭐가 귀한 독초인지는 잘 알고 있거든. 이건 돈 주고도 못 사는 것들인데.”

그러니까 노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을 죽이고 나서 이 독초를 챙겨서 팔라는 의미였다.

그냥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독초를 챙겼다.

하나라도 더 넣으려는 듯 혁낭에 꽉꽉 채워 넣었다. 정말이지 돈으로 값을 따지기조차 힘든 귀한 독초들이었다.

소정락은 반쯤 포기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말처럼 싸움에 휘말려 훼손될 수 있으니 저렇게 정리해주면 오히려 자신에겐 좋은 일이었다.

검무극을 죽이고 난 후, 두 노마가 독초를 탐낸다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금제를 풀어야 하는데 그런 욕심을 부리겠는가?

“선배님들 잠시만 비켜주십시오.”

검무극이 두 사람 뒤에 있는 독초들까지 챙겼다.

혹시라도 기습을 가할까 내심 긴장했는데 검무극은 독초를 챙기는 데만 집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소정락이 차갑게 비웃었다.

“이렇게 시간 끈다고 아무도 널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내 독초를 챙겨줘서 고맙다만.”

“미안한데 당신 줄 거 아니오.”

“뭐?”

“우리 독왕님 드릴 거요.”

소정락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이 싸움에서 그가 이길 거라는 의미였다.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 귀한 독초를 다른 사람도 아닌 독왕에게 줘버린다고?

검무극이 그에게 독초로 가득 찬 혁낭을 던졌다.

“살고 싶으면 그거 안고 벽에 딱 붙어 있으시오. 앞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그리고는 검무극이 마염군과 백골혼마를 향해 돌아서며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본교 방식으로 대화를 나눠봅시다.”

백 세까지는 사실 것 같습니다

온갖 말들이 오갔던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기도가 달라지면서 주변 공기도 바뀌었다. 백 년의 세월을, 백 오십 년의 세월을 담은 응고된 압박감이 장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진짜 싸움을 앞두고 제대로 기도를 드러내자 그들은 더는 검무극의 말에 현혹되었던 늙은 망령이 아니었다.

검무극 뒤쪽 벽에 붙어 있던 소정락은 처음으로 그들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저들은 극독을 하독해도 그냥 죽지 않을 자들이다.’

독에 미쳐 날뛰다가 온통 주위를 피바다로 만든 후에야 숨을 거두는 그런 괴물들을 마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런 자들이니까 조직에서 그들을 포섭한 것이겠지.

이번에는 소정락의 시선이 검무극의 등을 향했다.

‘네가 정말 저들을 이길 수 있다고?’

뒤쪽 벽에 붙어 있었기에 검무극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자신처럼 공포를 느끼는 게 당연한 반응일 텐데, 옆으로 흑마검을 늘어뜨린 뒷모습은 여전히 여유롭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마염군이었다.

“소교주. 네가 뭘 믿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의 몸에서는 핏빛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단전에서 퍼져나간 내력은 용암처럼 뜨겁게 그의 온몸을 달구었다.

“구화마공, 정말 무서운 무공이지.”

그는 결코 구화마공을 무시하지 않았다.

“내가 그 구화마공을 물려받았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노마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믿음도 있었다.

“아무리 구화마공이라도 고작 이십 대의 성취로는 절대 우릴 이길 수 없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저것이 바로 이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 이유였다.

대체 어디서 온 확신일까? 그래, 여기서겠지?

세월의 힘.

그들이 가진 가장 큰 힘.

마염군은 백 세의 나이였고, 백골혼마는 백오십 세에 이른 나이였으니까.

그들에게 이십 대의 나이가 만만해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이십 대 시절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과거일 테니까.

세월은 그들에게 가장 큰 힘이었고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었다.

“두 분이 젊었을 때 나이 든 고수들을 잘만 죽이고 다니셨을 텐데. 하긴, 다 잊으셨겠네요.”

그러자 백골혼마의 두 눈이 시커멓게 변하면서 그의 몸에서 무엇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걱정마라. 사람 죽이는 법은 잊지 않았으니까.”

츠으으으으.

흘러나온 것은 검은 안개였다.

마치 뱀 떼가 몰려들듯 검은 안개가 검무극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덮쳐가기 시작했다.

그의 독문무공인 환혼귀령공 중 하나인 사령흑무(死靈黑霧)가 발휘된 것이다.

사령흑무에 노출되면 기혈이 막히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전력이 십인 사람도 이 흑무 속에서는 오의 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방이 꽉 막힌 이곳 지하 밀실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마공이었다.

마염군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기고만장한 건 이해한다만, 그렇다고 우리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다니.”

반면 백골혼마는 신중하게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눈빛이 남아 있었다. 그가 시체가 되기 전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각인처럼.

츠으으으으으!

인간이 어찌 덮쳐오는 안개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싶었지만.

다음 순간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검은 안개는 검무극이 서 있는 쪽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투명한 벽이 자신들과 검무극 사이를 막고 있었다.

안개는 검무극 앞에서 한참을 헤매더니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위로 올라간 안개는 천장을 타고 넘어가려 했지만, 그곳 역시 막혀 있었다.

츠츠츠츠츠츳.

마치 목이 잘린 뱀이 발광하듯 검은 안개가 요동쳤지만, 검무극 쪽으로 넘어갈 길을 찾지 못했다.

쇄애애애액!

지켜보고 있던 마염군이 일장을 날렸다.

그 바람에 검은 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하지만 그의 일장에도 그곳을 가로막고 있던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사령흑무는 백골혼마에게로 되돌아와서 그의 몸속으로 회수되었다.

마염군이 신중하게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다가온 마염군이 사령흑무가 나아가지 못하는 곳까지 걸어왔다. 과연 그곳에는 투명한 벽이 있었다.

“구화마공인가?”

“그렇습니다.”

구화마공 제 삼초식 대마벽.

그 투명한 벽은 대마벽이었다.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대마벽을 발휘한 것도 놀라웠지만, 이 대마벽이 빈틈없이 전방을 꽉 채우고 있다는 점은 더 놀라웠다.

구 성에 이르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정교하게 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검무극이 대마벽 너머에 서 있는 마염군에게 물었다.

“한 번이라도 구화마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마염군이 차갑게 말했다.

“오만하군.”

“믿음이죠. 선배님들처럼 거친 분들을 거느리고도 지금까지 본교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무공이니까요.”

눈앞에서 대마벽을 보고 있음에도 마염군은 전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어 보였다.

“언젠가 이 손으로 구화마공을 불태워버리고 싶었지.”

우우우웅.

마염군의 손이 붉게 타올랐다.

그 타오르는 손을 대마벽에 가져다 댔다.

치이이익.

바로 검무극의 얼굴 앞이었다. 이 벽을 태우고 네 얼굴마저 녹여버리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이다.

검무극은 대마벽 너머에서 시뻘건 그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손금을 보니 우리 선배님 생명선이 아주 길군요. 백 세까지는 사실 것 같습니다.”

마염군은 코웃음을 치며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그의 손이 더욱 시뻘겋게 변했다.

치이이익.

뜨거운 열기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염군이 흠칫하며 대마벽에서 손을 뗐다.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기로 만들어진 벽은 뚫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피를 보자 마염군의 눈빛에 흥분이 스쳤다.

그가 곧장 쌍장을 내질렀다. 녹이는 게 안 된다면 때려 부술 것이다.

꽝! 꽈앙!

강한 충격이 전해졌지만 대마벽은 끄덕하지 않았다. 투명한 대마벽에 그의 피가 묻었다.

하지만 그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콰아앙! 콰앙!

그의 쌍수는 계속 검무극의 얼굴 앞을 강타했다.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깃든 공격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흥분해서 마구잡이로 공격을 날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다 계획이 있었다.

이렇게 강한 충격을 버티면서 대마벽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내공이 필요할 것이다.

‘감히 나와 내공 싸움을 하겠다고?’

마염군이 더욱 내공을 끌어올리며 대마벽을 가격했다.

‘젊은 혈기고 오만이다.’

이 순간은 멋있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내공을 소모했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모든 내공이 고갈될 것이다. 게다가 벽은 전면을 모두 막고 있지 않은가? 작지 않은 크기였다.

“네 아비가 무림을 피로 물들이는 모습을 내가 대신 봐주마!”

마염군은 검무극을 도발했다. 자존심을 건드려서 끝까지 내공 대결을 펼치게 하려는 의도였다.

검무극이 벽 너머에서 하품하는 시늉을 하자 마염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걸려들었구나!’

지켜보던 백골혼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대마벽으로 공격을 막으려 한 것은 명백히 잘못된 선택이라 여겼다. 처음부터 난전을 선택했어야지. 그러다 보면 기회가 생길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겠군.’

콰앙! 쾅! 쾅!

약초가 든 혁낭을 가슴에 안고 소정락은 마염군을 응원했다.

‘부숴라! 제발 부숴버려!’

쾅! 콰앙!

이제 그곳에는 쌍장이 대마벽을 부수는 소리만 들렸다.

‘아직도 버틴다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염군의 마음에 불신과 놀람이 가득했다. 벽 너머 검무극은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때 뒤에서 백골혼마의 말이 들려왔다.

“이만 돌아오게.”

꽝! 콰앙! 콰아앙!

신경질적인 몇 차례의 공격이 더 있고 난 뒤에야 마염군이 공격을 멈췄다.

붉게 타올랐던 마염군의 손이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검무극은 무심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조롱하거나 무시했다면 지금보단 기분이 나았을 거다.

하지만 저 무심한 눈빛은 한 가지 감정을 느끼게 했다.

내내 벽을 두드렸던 그였는데.

이 순간 마염군은 진짜 벽을 느꼈다.

백골혼마가 나직이 말했다.

“소교주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더 강하네.”

그는 곧장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한 수를 발휘했다.

크르륵. 크륵.

바닥을 흐르는 안개를 따라 땅이 흔들리면서 그곳에서 뭔가가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것들은 백골이었다. 그냥 뼈가 아니었다. 두 눈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환혼귀령공의 정수, 사령귀로(死靈歸路)였다.

환술이었지만 실제 눈앞에 해골이 존재했다.

앞에 늘어선 해골들에게서 나오는 마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함께 서 있던 마염군조차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한 마리만 불러내도 어지간한 고수들을 도륙하는 마물이었는데, 지금은 그가 불러낼 수 있는 전부를 불러냈다.

“백골귀(白骨鬼)들이다. 도검불침의 존재로 이들이 내뿜는 마기를 한 줌만 들이쉬어도 온몸의 혈맥이 뒤틀리게 될 거다.”

더 무서운 건 어떻게 이것들을 박살 내더라도, 다시 뼈가 붙으며 되살아난다는 점이었다. 백골혼마가 죽거나 내공이 고갈되지 않는 한 지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백골혼마는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수를 곧장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히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 이해해. 자기 지은 죄는 생각 안 하고 금마령만 원망하는 거, 그럴 수 있지. 당신들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정락은 내심 환호했다.

‘너는 이제 죽었다!’

불리해졌다고 판단한 검무극이 살기 위해 세 치 혀를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저 무서운 백골귀들은 혓바닥으로 죽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금제만 풀 수 있다면 마정대전이 일어나도 상관없는 거, 그것도 이해해.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열받아서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지. 구화마공을 이겨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해. 우리 선배님들, 다 이해합니다.”

마치 모든 걸 다 이해하는,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처럼 말한 후에 검무극의 기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러는 나도 이해해 줘.”

말이 끝나자 앞에 세워졌던 대마벽이 사라졌다.

동시에 그곳에 다른 것이 생겨났다.

스스스스스스스슷!

검무극 앞에 일렬로 늘어선 것들.

더욱 커지고 더욱 무서워진 그것들은 바로 구화마공의 악귀들이었다.

벽에서 벽까지 조금의 틈도 없이 악귀들이 가득 메웠다.

구화마공 제 이식 대멸식이 발휘된 것이다.

악귀의 모습에 그곳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구화마공이 아니었다. 이렇게 무서운 악귀들이 현신할 줄은 몰랐다.

뒤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소정락 역시 두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는 갑자기 어두워지며 거대한 벽이 생겼다.

하지만 벽이 아니었다. 늘어선 것들 중 하나가 스윽 그를 돌아보았다.

그 악귀를 보는 순간 소정락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정말이지 태어나 본 모습 중에 제일 무서운 얼굴이었다.

앞서 몸을 일으킨 해골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서웠다. 그 무섭던 백골귀들이 초라해 보였다.

검무극의 준엄한 목소리가 그곳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마염군과 백골혼마, 본교의 지엄한 교칙인 금마령을 어긴 것도 모자라 마정대전을 도모한 죄, 그 죄를 물어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한다.”

죽음의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악귀들은 가차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지하 밀실을 꽉 채운 악귀들이 모든 것을 휩쓸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을 막아선 백골귀들이 검을 내질렀다.

꽈득! 꽈드득! 꽈드드드득!

검기는 물론이고 검강까지 버티는 백골귀들이 산산조각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것이 다시 합쳐지기도 전에 이미 악귀들은 백골혼마를 향해 쇄도했다.

백골혼마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버틴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무서운 악귀를 보자 몸이 얼어붙었다. 그는 호랑이의 포효에 떨고 있는 한 마리의 늙은 늑대였다.

파파파파팍!

호신강기가 깨어지는 순간 온몸에 충격이 밀려들었다. 그 마지막 순간, 그는 암흑심안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구덩이 속에서 검무극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역시 그때 본 것은 검무극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었다.

퍼퍼퍼퍽!

그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졌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던 백골귀들이 그대로 무너져내리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마염군도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내공을 다 실은 염화장에는 용암처럼 뜨거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아앙!

쇄도하는 악귀와 쌍장이 충돌하던 그 순간!

지금껏 모든 상대의 몸을 다 뚫으며 태워버렸던 그 뜨거운 수인은 악귀의 몸을 파고들지 못했다. 달궈진 쇠를 찬물에 담근 것처럼 순식간에 몸이 식어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순간은 오래전 언젠가 마공으로는 절대 구화마공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을 듣던 자리였다.

젊은 혈기에 그때는 내심 부정했었다.

구화마공이라고 별거 있겠어? 내가 언젠가는 이 손으로 찢어버릴 거다!

퍼퍼퍼퍽!

마염군의 온몸이 박살 나며 터져나갔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그렇게 악귀들은 밀실의 끝까지 밀고 나간 후에야 사라졌다.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체는커녕 독초 한뿌리 남지 않았다.

바닥에 흥건한 핏물만이 그곳에 백골혼마와 마염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텅빈 공간에 검무극만이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더 강해졌다!’

팔 성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구화마공이었다. 구 성의 구화마공이 실전에서 발휘되자 검무극은 대성을 이루고 싶은 강한 열망에 휩싸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소정락이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마염군과 백골혼마가 단 한 수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이 일초지적이라고?’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게 천마의 무공이구나!’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처음에 들어왔을 때 검무극이 이 공간의 너비를 발걸음으로 쟀는지. 자신이 펼칠 저 악귀를 몇 명이나 소환하면 되는지를 잰 것이다.

‘이미 그때부터 이렇게 죽이려고 마음먹고 있었구나!’

검무극이 뒤로 걸어오더니 공포에 질린 소정락 옆에 나란히 앉았다.

소정락은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두 노마를 산산조각 내고서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저 차갑고도 무정한 눈빛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앞서 그 말 많던 소교주가 지금 이 사람이 맞는지 헷갈렸다.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소정락에게 마지막 희망은 이것이었다.

검무극이 만독불침이 아니라 독왕이 사전에 준 해독약을 먹은 것이기를. 운 좋게 여러 번 맞아 떨어진 것이기를.

소정락은 마지막으로 극독을 하독하려 했다. 방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제발 독왕이 이것까지 예상하지 못했기를!

바로 그때 검무극이 그가 안고 있던 혁낭에서 삐죽 삐져나온 독초를 꺼내더니 도라지를 먹듯 씹어먹었다.

하독을 포기한 소정락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검무극이 맛있게 먹고 있는 저 독초는 혀를 대기만 해도 즉사한다는 천음만독초(天陰萬毒草)였으니까.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검무극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정락,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살려주기가 쉽지 않다

이야기 좀 하자고?

어떻게 죽여줄까? 분명 이 말보다는 나은 말이었지만 소정락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지금 옆에 있는 검무극과는 이야기하기 싫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궁지에 몰리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우리가 할 이야기가 더 남았소?”

검무극을 대하는 태도가 정중해졌다. 아니,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그 싸움을 보고 누가 감히 성질대로 할 수 있겠는가?

“상황이 바뀌면 나눌 말도 바뀌는 법이지.”

그러자 소정락이 떠보듯 말했다.

“어차피 죽일 거, 그냥 죽이시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소정락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작정이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의 반응은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도 명예가 있는 사람인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검무극이 앉은 채로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로 망설이지 않고 소정락의 목을 찔러버리려던 그때.

“잠깐!”

다급한 소정락의 외침에 검무극의 검이 그의 목 앞에서 멈췄다.

검무극이 검을 옆으로 눕혀서 그의 머리통을 톡 때렸다. 까불지 마,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누굴 속이겠는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면, 아까 두 노마가 죽었을 때 남은 독을 모두 하독하며 공격했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치고는 벽에 너무 꼭 붙어 있었다.

소정락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농락하는군.”

그러자 검무극이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소정락.”

그냥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소정락은 기가 눌리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진짜 농락당하는 게 어떤 건지 겪어보고 싶나?”

소정락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독이 안 통하면 어르고 달래고, 부추기고 협박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데.

소정락은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검무극에게 그런 것들이 통할까?

살면서 이렇게 무기력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차분한 말소리.

“네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나는 관심 없다. 너는 나를 죽이려 했고, 내 친구를 죽이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충분해.”

그러자 소정락이 불쑥 말했다.

“안 죽었잖소?”

궁색한 항변에 검무극이 웃었다.

“그래, 안 죽긴 했지.”

소정락은 검무극의 이 반응에 희망을 걸었다.

검무극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무자비하지 못하다는 점. 저 약한 마음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이 밀실을 살아서 걸어 나갈 것이다.

나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이곳에서 독 실험을 하면서 사람을 죽인 건 어쩌고? 마정대전을 일으켜서 수많은 이를 죽게 하려던 건?”

그 죄에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나는 평생 수많은 환자를 살렸소.”

“네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였지.”

“어쨌든 환자는 살지 않았소? 당신들은 안 죽었고, 환자들은 살았고, 전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것으로 죗값을 대신할 수 있지 않겠소?”

독실험으로 죽은 이들을 따지고 들기 전에 소정락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는 최후의 순간에 담담하고 멋있을 줄 알았소. 한데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군.”

소정락이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난 죽고 싶지 않소.”

그러자 검무극도 솔직히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살려주기가 쉽지 않다.”

소정락은 이 대답에서도 희망을 보았다. 정말 무자비한 자였다면 이런 말도 해주지 않을 테니까. 팔을 자르고 눈을 파내면서 듣고자 하는 말을 들으려 했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주니 차라리 고맙소. 살려준다고 했다가 막판에 죽이는 것보다 낫지.”

소정락은 텅 비어버린 공간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침상도, 책상도, 장식장도, 독초와 자신을 지켜줄 두 고수도 모두 사라지고 없는 그곳을.

그의 눈빛은 지금 처한 상황처럼 처량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이곳을 나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소교주, 당신 정말 만독불침이오?”

“그게 그리 궁금한가?”

사실 천음만독초를 씹는 순간 더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직접 검무극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만큼 믿기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다른 것도 먹어봐?”

소정락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

평생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만독불침이 독공을 쓰는 자신과 얽히다니.

“당신에게 나는 무림맹 문지기 무인보다 덜 위협적이겠군.”

심지어 그냥 단순한 만독불침이 아니었다. 마염군과 백골혼마를 단 한 수에 죽이는 실력까지 지닌 천재지변급 만독불침이었다.

“나를 죽이면 큰 문제가 생길 거요. 오늘 당신이 의원을 찾아온 걸 많은 사람이 봤소. 내가 죽으면 결국 당신이 죽였다는 것이 밝혀질 테고. 그럼 무한의 정파 무인들은 그냥 있지 않을 거요.”

의원 소정락.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구할 가장 큰 희망이라 여겼었는데.

검무극의 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당신이 죽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정말이지 사람의 자존심을 확 후벼파는 말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소정락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 말했지? 내가 구한 사람보다 구하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한데 그건 무인들에게 목숨 빚이 얼마나 큰지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나를 위해 나설 줄 사람들이 많을 거요.”

그건 인정한다는 듯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당신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천애거사 때문이야.”

천애거사 때문이라고? 소정락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천애거사를 위해 몇 사람이나 죽였나?”

하여튼 허를 찌르는 데는 도가 튼 소교주다. 갑자기 이런 걸 물어올 줄은 몰랐다.

한 명도 죽인 사람이 없었다면 쉽게 대답했을 텐데. 많이 죽였다. 그를 지켜온 세월이 어디 한두 해 세월이었던가?

순간 당황한 소정락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일 없다고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검무극의 기세에 눌려서였을까? 머리가 빨리 돌아가지 않았다.

“많이 죽였겠지.”

검무극의 말에 뒤늦게라도 변명하려던 소정락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니지,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천애거사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길 거니까.

“천애거사 때문에 나를 죽여도 되는 이유나 말하시오!”

검무극이 뜻밖의 이유를 밝혔다.

“당신의 죽음은 천애거사의 일에 파묻힐 테니까.”

“조만간에 천애거사 일도 결론이 날 거야. 그가 두 얼굴을 가진 악인임이 밝혀지면, 이 무림은 그의 이야기로 덮이겠지. 그쪽만 제대로 밝혀지면 당신은 덤이 되는 거다. 아, 천애거사를 도운 사람이 소 의원이었어? 아무도 당신 일에 분노하는 일은 없을 거야. 천애거사가 그런 놀라운 일을 저질렀는데, 당신이 그를 도왔다 한들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소정락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자신의 인생을 전면으로 부정당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화를 내는 건 이 상황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소정락은 답답했는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을 오갔다. 그러다 저 멀리 벽에 기댄 채 그가 물었다.

“한데 과연 천애거사의 다른 모습을 알아낼 수 있겠소? 그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오.”

진심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독공을 익힌 탓일까? 아니면 천성 때문일까? 아무리 사람 좋은 의원의 삶을 살아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성질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 검무극에게 모든 것을 들켜 버린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하지만 천애거사는 자신과 달랐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사람이 과연 같은 편이 맞나?

그만큼 그는 철저히 천애거사의 삶을 살아왔으니까.

검무극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신만의 시커먼 구멍을 가지고 있지. 그만큼 잘 감춰왔다면, 아마도 천애거사의 구멍이 너보다 더 클 거다.”

의원 소정락으로 살아날 수 없다면?

이제 이 질문이 자신을 살릴 유일한 것이리라.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게 뭐요?”

처음으로 자신이 예상한 질문이 나왔다.

“대법을 함께 펼칠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래, 검무극이 그걸 궁금해할 줄 예상했다. 이곳에 와서도 어떻게든 그를 불러오게 하려고 애썼으니까.

현재로선 그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동아줄이었다.

검무극은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염군과 백골혼마를 설득한 사람이 그 사람이지?”

소정락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당신은!”

왜 마염군과 백골혼마를 죽이기 전에 그들을 설득한 사람에 관해 묻지 않았나 궁금했는데, 검무극은 자신과 대법을 함께 펼칠 사람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소?”

“그 의심 많은 두 사람을 말로 설득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곳까지 와서도 마염군과 백골혼마는 소정락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래서 검무극의 말에 흔들렸던 것이고. 그들은 천성적으로 남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에게 금마령을 깨게 했다면?

“워낙 내공이 심후한 자들이니 섭혼술로 그들을 완벽하게 조종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번 일에 참여하게 할 정도의 섭혼술은 발휘할 수 있었겠지.”

그는 섭혼술의 대가일 것이다. 앞서 위조 암기로 자결한 이들 역시 그가 섭혼술을 건 자들일 테고.

소정락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담긴 감탄이 이미 대답을 대신했다.

“당신은 절대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없소.”

“무슨 뜻이지?”

소정락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그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존재기 때문이오.”

검무극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소정락을 쳐다보았다.

“그를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이었소.”

“위장을 잘한다는 말인가?”

고개를 내젓는 소정락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같은 사람이지만, 그를 떠올리면 매번 기억이 달랐소. 어떨 때는 뚱뚱한 사람이었고, 어떨 때는 비쩍 마른 사람이었소. 심지어 여자였었나? 하는 날도 있었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섭혼술로 상대의 기억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보통 적이 아니었다.

소정락이 이렇게 순순히 정보를 밝힌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오직 나를 통해서 접촉할 수 있소.”

검무극은 반드시 그를 잡으려 들 것이기에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두 노마의 금제를 풀어주려고 했지. 당신은 우릴 믿지 않았지만.”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과연 금제만 풀어주고 말았을까?”

소정락이 흠칫 놀랐다.

“금제를 풀면서 그들을 복종하게 할 고독(蠱毒)까지 함께 심었겠지.”

막대한 돈을 들여 금제를 풀어주는데 이 정도만 부려 먹을 리가 없었으니까. 죽을 때까지 그들을 수하로 부려 먹었을 거다.

소정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지 이 소교주는 어떻게 모르는 게 없는 것일까? 이런 자를 적으로 삼다니?

검무극이 바닥에 놓여 있던 독초 혁낭을 등에 멨다.

소정락은 긴장했다. 자신을 죽이느냐 마느냐의 순간이었다.

“나를 살려야 그를 만날 수 있소.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니오?”

잠시 고민하던 검무극이 그에게 제안했다.

“그를 만나게 해준다면 살려주지.”

“만나게 해주겠소.”

거기에 하나 더 조건을 걸었다.

“앞으로 평생 의원으로 살아갈 수 있겠나?”

“그러겠소.”

“독공을 아예 쓰지 않아야 하는데?”

소정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의 삶도 나쁘지 않았소.”

검무극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의원님, 환자들 기다릴 텐데 어서 나가시지요.”

소정락은 정말 기뻐했다. 단지 목숨을 구해서만이 아니었다.

‘이제 두 번째 계획이 진행될 거다.’

마염군과 백골혼마의 일이 틀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두 번째 계획을 세워두었다.

자신이 중심이 된 계획이었다.

무한에 대량학살 독이 살포되고 수천 명이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죄는 이곳에 와 있는 독왕이 뒤집어쓰게 된다.

‘이 빌어먹을 마교 놈들아! 나를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그땐 웃으며 기꺼이 죽어주리라.

소정락이 환하게 웃었고 검무극도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나란히 통로를 향해 걸어가던 검무극이 뒤늦게 기억났다는 듯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참, 이거.”

검무극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푸우욱!

주머니를 열자 두 사람에게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독왕님 선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정락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라 말을 할 틈이 없었다. 이미 독이 자신의 혈맥을 빠르게 파고들고 있었다.

소정락이 다급히 해약을 꺼내 복용했다. 하나로 부족했기에 다른 가루를 꺼내 허공에 뿌렸고, 또 다른 약병을 꺼내 마셨다.

“크엑.”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해약이 통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해약을 꺼내 먹었고, 또 다른 해약을 먹었다.

독과 해약이 뒤섞인 그곳에서 검무극은 손으로 가루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독왕님께서 그러셨지. 독공의 꽃은 해독이라고.”

하지만 소정락은 독왕의 독을 해독하지 못했다.

그는 입과 코, 눈과 귀, 사람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정락이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차갑고 무심한 눈빛은 아까 봤던 그 악귀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무자비하지 못한 게 약점이라고? 마지막까지 검무극을 잘못 보았구나.

“이번에는 독왕님 차례잖아?”

앞서 소정락은 검무극이 만독불침인 줄 모르고 하독했었다. 해독할 수 있으면 해독해 봐라, 그건 분명 독왕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검무극은 두 사람의 확실한 실력 차이를 보고 있었다.

독왕의 독이 아니었더라도 검무극은 그를 죽일 작정이었다. 독왕이 너무나 두려운 존재이듯, 그 역시 너무 위협적인 존재였으니까. 자신에게 아무런 해가 안 된다고, 이 위험한 자를 세상에 풀어놓을 검무극이 아니었다.

소정락은 자신이 이렇게 죽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를 통해야만 그를 찾을 수 있다.”

두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며 소정락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통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검무극의 혁낭이었다. 튀어나온 독초가 작별 인사를 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도 제가 최고죠?

마불은 마당에 널린 독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일찍 걷어야 하는 건 이미 다 걷었고, 오래 말려야 하는 것들만 남아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제가 돕겠습니다.”

돌아보니 검무양이 그곳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마불은 사양하지 않았다.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와서 돕겠다고 하는 것도 검무양에게는 누군가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검무양이 옆으로 걸어와서 잠시 마불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함께 독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혼자 계시고 싶으신데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사실 좀 지겨워지던 참이었습니다.”

검무양은 항상 마불을 보면 날카로운 면이 있다고 느꼈었는데, 요즘 보면 너무 부드러워서 딴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불이 볼 때 자신도 그렇게 달라져 보일까?

“약초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습니다.”

“사실 약초나 독초에는 관심 없습니다.”

마불이 잠시 정리하던 손길을 멈췄다.

“약초를 발견해 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거죠.”

정말 순수하게 약초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아무도 못 찾고 지나가는 걸 자신이 딱 발견해 냈을 때의 쾌감과 그 약초를 살살 뿌리까지 손상 없이 캐냈을 때의 손맛은 취미의 영역에서는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서 약초를 캐러 다닐 정도는 아니기에, 독왕과 교류하지 않을 때는 석상을 깎는 일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약초 캐는 즐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 즐겁더군요.”

캐온 독초를 보고 독왕만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대공자께선 요즘 즐기시는 취미가 있으십니까?”

무슨 새로운 취미가 있겠냐마는, 문득 생각해 보니 대답할 만한 것이 하나 있었다.

“요즘 일하는 취미가 생겼습니다.”

후계자 싸움을 할 때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교내에서의 평판은 더 좋아졌다.

“놀기 좋아하는 소교주에게 후계 싸움에서 진 업보라고 할까요?”

그렇게 마불과 쪼그리고 앉아 독초를 정리하면서 검무양은 힐끗 대문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명심의원에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소교주가 걱정되십니까?”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을 줄 알았는데, 검무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잘난 동생이라도 동생은 동생이죠.”

검무양은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무극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아버지 뵐 면목이 없을 겁니다.”

검무극이 자신보다 무공이 월등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함께 나와 있으면 동생을 돌봐야 하는 건 자신이라 생각했으니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 기대마저 놓쳐버린다면…….

그래서 오늘 일도 상대가 독을 쓰는 자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자신도 함께 갔을 거다.

마불이 어찌 검무양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잘난 동생을 둔 형 노릇도 쉽지 않죠?”

그것도 동생이 검무극이라면?

“그림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더군요.”

검무양의 솔직한 말에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말했다.

“저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마불이 검무양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무한 앞마당에서 독초를 말리며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소교주가 피를 보지 않고 후계자 싸움을 하려 했던 건, 대공자께서 자신의 그림자로 살기를 바라서가 아닐 겁니다.”

“마지막까지 소교주에게 긴장감을 주는 형이 되어 주십시오. 소교주를 위해서도, 대공자를 위해서도.”

검무양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던 마불이 너는 그림자가 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불은 알고 있는 거다.

무극이의 그림자가 되어 산다는 것.

거창한 희생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건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버둥이자 도피처의 끝에서 찾아낸 그럴듯한 변명임을.

그림자가 되어 지켜주는 게 아니라, 그림자가 되어 숨으려 한다는 것을.

눈앞의 이 작은 남자 마불은 아는 것이다. 이 사람은 정말 자신을 똑바로 보고 있다.

말없이 독초를 내려다보던 검무양이 나직이 말했다.

“마불님께서는 저를 끝까지 힘들게 하시는군요.”

마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견디려 하지 마시고 그냥 대공자답게 사십시오. 분명 그 발자국은 남을 겁니다.”

검무양의 시선도 하늘을 향했다.

‘나답게 사는 게 견디는 삶보다 더 어려운 일 아닙니까?’

하지만 검무양은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렇게나 내 편이 되어주려는 사람에게는 변명 대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대신 그 발자국 옆에 다른 발자국도 꼭 필요합니다.’

누구보다 작지만, 더없이 큰 걸음을 옮기는 발자국이.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 * *

지하 밀실에서 올라온 검무극은 소정락의 거처를 나왔다.

명심의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향한 곳은 앞서 잠든 환자들이 있던 의방이었다.

의방에 잠들어 있던 사람은 다 깨어나 있었다.

여기서 깨어난 의원들이 소정락을 찾느라 난리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소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검무극이 의방의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그곳에 한 남자가 등을 까고 침을 맞고 있었다.

“아니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러자 남자가 엎드린 채 대답했다.

“요즘 독초를 캐느라 허리가 아파서.”

“독초는 마불님이 다 캤을 텐데요.”

못 들은 척하는 그는 바로 독왕이었다. 이곳에 잠든 이들을 모두 깨운 사람도 바로 그였다.

검무극이 의원에 올 때, 그도 함께 왔었다. 아무리 자신이 만독불침이라 해도, 검무극은 독공의 고수인 소정락을 방심하지 않았다. 죽으면서 대량학살독을 하독하고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의원들이 깨어나서 난리가 났을 줄 알았는데, 조용하네요.”

독왕은 여전히 엎드린 채 말했다.

“내가 말해줬다. 소 의원은 무림의 노 고수들을 치료해 주러 가는 바람에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앞서 의방에서 소정락의 거처로 가는 동안 마염군과 백골혼마와 함께 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고수분들께서 은밀히 치료받길 원하셔서 여기 사람들을 재웠다고 둘러댔지. 환자가 무림맹 쪽 원로고수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확인하고 싶으면 멸마대에 하라고.”

그 말에 다들 안도한 것이다. 나중에 그의 실종이 문제가 될 때쯤이면 이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된 후가 될 테고.

“가만 보면 독왕님 정말 똑똑하십니다! 일 처리를 어떻게 이렇게 잘하십니까? 사람들 몰래 중원 돌아다니시는 거죠? 중원 곳곳에 정인도 많이 만들어두셨죠? 중경에도 있고, 호북에도 막 있고!”

독왕은 엎드린 채 혼자 웃었다. 대놓고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도, 저 말도 안 되는 여인 이야기도, 검무극과 함께 있을 때나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검무극이 독왕이 누운 침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침 맞으시려면 마의님께 맞으시지.”

“그 사람에게는 팔이 하나 떨어졌을 때나 가는 거지.”

마존이 자존심이 있지, 허리 아프다고 갈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검무극은 말해놓고 보니 마의 본 지도 오래되었음을 실감했다. 다 잘 챙기면서 가야지 아무리 마음먹어도 현실은 항상 이렇게 놓치는 부분이 많다. 그러고 보니 임시 교주 하느라 바빠 조춘배와 술 한 잔 못 하고 출교했구나.

검무극이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구름이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가고 있었다.

“어찌 됐는지 안 물어보시네요.”

검무극의 말에 독왕이 엎드린 채 대답했다.

“물어보나 마나지.”

자신의 독에 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고, 동시에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래서 소정락은 물론이고 금마령을 어긴 두 노마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한데 무슨 독초 더미 속에서 뒹굴며 싸웠느냐? 무슨 냄새가 이리 나냐?”

그제야 고개를 들어 검무극 쪽을 바라보는 독왕이었다.

“어?”

그의 눈에 검무극이 소중히 안고 있는 혁낭이 보였다. 그 혁낭 끝에 삐죽 튀어나온 독초잎을 보자 독왕이 눈을 크게 떴다.

“설몽화(雪夢花)?”

쏙쏙쏙쏙쏙!

독왕의 허리에 박혀 있던 침들이 저절로 빠져나왔다.

벌떡 몸을 일으켜 앉은 독왕이 본격적으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흑연초(黑煙草) 냄새도 난다.”

검무극이 혁낭을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 정확하십니다.”

독왕이 그 아래 있는 것들도 순서대로 맞췄다.

“기화초에 음풍화까지!”

검무극이 놀란 얼굴로 혁낭 속과 독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혁낭 안에 이런이런 것들이 있다, 알아맞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놀랍게도 독왕은 넣어둔 순서대로 줄줄 읊었다.

“칠색화양초(七色華陽草)에, 월영초(月影草)까지!”

그는 냄새만으로 혁낭 맨 아래에 들어 있는 독초까지 모두 알아맞혔다.

“환락초(歡樂草)는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

소정락이 오랫동안 모아온 정말 귀한 독초들이었다.

독왕이 살짝 손을 내밀어 혁낭을 잡으려 하자, 검무극이 슬그머니 반대쪽 옆으로 내려놓았다.

“이제야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 섭섭했습니다. 원래 독왕님께 제일 아끼는 사람이 저 아니었습니까?”

“너 맞다.”

독왕이 침을 삼키며 검무극의 눈치를 봤다. 물론 그의 시선은 혁낭을 향해 있었다.

“요즘 보면 아닌 것 같던데요?”

“확실히 너다.”

“정말이죠?”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두 번째 채집꾼 앞에서도 확실히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대는 소교주 다음이오! 하실 수 있으십니까?”

독왕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검무극이 웃음을 참았다. 두 사람의 우정을 놀리는 건 여기까지. 검무극이 혁낭을 독왕에게 건넸다.

“소정락이 독왕님께 드리는 선물이라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존경한답니다.”

이 말이면 충분했다. 소정락이 독왕의 독에 죽었음을 알리기에는.

독왕이 혁낭을 열어보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이렇게 독초가 좋을까?

“그렇게 좋으십니까?”

“이것들이면 새로 구상한 독을 만들어볼 수 있겠다.”

어서 거처로 돌아가고 싶어진 독왕이 곧장 의방을 나섰고 검무극이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다 독왕이 불쑥 말했다.

“챙겨와 줘서 고맙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독왕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느껴졌다. 검무극이 옅게 미소 지었고, 독왕 역시 같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알아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어휴,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마염군과 백골혼마와 싸우면서 이것까지 챙기느라 얼마나 애썼는지 아십니까? 두 노마와 삼백 초가 넘는 혈투를 벌이면서 그 중간중간 달려가서 독초를 혁낭에 챙겼습니다. 마염군의 장법에 호신강기가 녹고, 백골혼마가 만든 백골귀가 무려 다섯 번이나 재결합하며 부활했습니다. 오직 독왕님을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으면 못 챙겨왔을 겁니다.”

“…….”

“…….”

“솔직히 말해. 몇 초식 만에 이겼느냐?”

“삼백 초식이라니까요.”

“…….”

“이백 초식요. 아니, 백 초식요.”

독왕이 계속 빤히 쳐다보자 결국 검무극이 솔직히 말했다.

“일초식요.”

독왕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독왕이 자신의 무공에 성취가 있음을 느꼈음을.

독왕의 독공 역시 성장하고 있는 걸까?

다시 독왕이 걸음을 옮겼고 검무극이 그 뒤를 따랐다.

“쉽게 챙겨왔어도 그래도 제가 최고죠? 그렇죠?”

“가면서 마불 그 사람 좋아하는 요리나 사 가야겠다.”

“왜 갑자기 마불님 이야기를 하십니까?”

“침은 그 사람이 맞아야 하는데.”

“그새 첫 번째가 바뀐 겁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의원 앞 거리를 걸어가자 지나가던 여인들이 힐끗힐끗 시선을 주는 게 느껴졌다.

“저 시선들 느껴지십니까? 우리 돌아가기 전에 꼭 무한 여협들과 한잔하시죠.”

그때 힐끗힐끗 쳐다보던 여인 하나가 두 사람에게로 걸어왔다.

“저기…….”

여인이 수줍게 고백하듯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당연히 술 한잔하자, 차 한잔하자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마교로 돌아가라, 검무극.”

순간 검무극과 독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인의 눈빛도 표정은 아까 걸어올 때와 다르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듯한 눈빛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인은 분명 섭혼술에 걸려있었다.

그녀가 품에 손을 넣더니 뭔가를 꺼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위조 진격이었다.

빠르게 기습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그것을 꺼내면서.

나 이제 암기를 꺼내 공격할 거야.

이렇게 알려주려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진격을 겨누기 전에 검무극이 지풍을 날려 그녀의 마혈을 제압했다.

그 순간!

여인의 눈이 뒤집히며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에 혈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 그냥 두면 목숨을 잃을 게 틀림없었다.

검무극이 역시 빠르게 지풍을 날려 수혈을 제압했다. 차라리 재워버리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으으으으!”

여인의 핏줄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어떤 제압이든 하는 순간, 목숨이 끊어지는 섭혼술이 걸려있었다. 이런 섭혼술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혈도를 제압하는 게 통하지 않으면 때려서 기절시킨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검무극이 일단 마혈과 수혈을 다시 풀었다.

그러자 부풀어 올랐던 핏줄이 가라앉으며, 여인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천천히 진격을 겨눴다.

워낙 천천히 움직였기에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네가 살려면 이 여자를 죽여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서 진격을 피했다간 뒤쪽에 지나가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대마벽을 세우기에는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검무극은 독왕 앞을 막아서며 흑마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검으로 진격의 암기를 쳐낼 생각이었다. 모두 땅으로 쳐낸다!

겨눠진 진격. 그 너머 여인과 시선이 마주치던 그 순간.

여인은 겨눴던 진격을 다시 품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검무극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제 일행들이 있는데 함께 차 한 잔 같이하시겠어요?”

여인은 조금 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품에 진격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다른 두 행동 사이에 어떤 변화도 없었다.

눈빛이 달라지거나 어떤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오거나.

두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냥 여인이 일인이역 연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쉽네요. 지금 바삐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다음에 꼭 한잔하시죠.”

여인이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놀라울 정도로 능숙한 섭혼술입니다.”

검무극의 말에 독왕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섭혼술에 걸렸다는 그 어떤 표도 나지 않았다. 이번 적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 수 있었다.

“돌아가라는 경고로군.”

당연히 검무극도 그렇게 여길 거로 생각했는데.

“아뇨, 제게는 다르게 들렸습니다.”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들은 이런 협박에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한데도 이렇게 나왔다는 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 일러바치마

검무극과 독왕이 거처로 돌아왔을 때, 검무양과 마불은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은 입구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빛에 믿음이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검무극은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자신이 형에게 해줄 수 없는 부분을 마불이 채워주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마불님.’

물론,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너무들 하십니다. 제가 그 무서운 노마들과 장장 삼백 초식의 생사혈전을 펼치는 동안 두 분은 놀고 계셨군요!”

검무양과 마불은 힐끗 검무극을 쳐다본 후 독왕에게만 인사했다.

다녀오셨냐, 잘 다녀왔다, 고생하셨다, 그렇게 인사가 오가는 모습에 검무극이 더욱 목청을 높였다.

“저 소교주라고요! 심지어 임시 교주라고요! 자꾸 이러시면 돌아가서 마존분들 다 집합시킵니다!”

물론, 검무극은 보았다. 힐끗 자신을 쳐다봤을 때 형의 표정에서 스치는 감출 수 없는 안도감을.

걱정했지? 나, 잘 다녀왔어.

그렇게 검무극과 독왕이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독왕은 들어서자마자 혁낭을 열어 마불에게 독초부터 보여주었다.

“이것 좀 보시오.”

“오, 독왕께서 찾으시던 독초들이군요.”

마불은 독왕이 무슨 독초를 찾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독초가 독왕님이 가장 아끼는 사람을 바꾸게 했죠. 영구적으로 일등이 바뀌었습니다.”

검무극의 말을 독왕이 정정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바뀌었었지.”

검무극이 마불에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행동으로 마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다시 일등이 되었음을.

‘그렇게 알려주지 않아도 되네, 소교주.’

하지만 말이라도 누군가가 자신을 가장 아낀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검무양은 저 독초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소정락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생사혈전을 펼쳤다고 엄살을 부리는 걸 보니, 두 노마도 직접 죽인 모양이다.

그때, 마불이 혁낭 앞 작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뭔가를 꺼냈다.

반쯤 먹고 넣어둔 그것은 바로 천음만독초였다. 앞서 소정락 앞에서 도라지처럼 씹어먹던 바로 그것!

‘앗! 그건 안 됩니다!’

검무극이 마불을 보며 그건 꺼내지 말라고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불이 슬쩍 다시 집어넣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독왕이 먼저 보고 그걸 받아들었다.

“그래, 분명 천음만독초 냄새가 났었는데. 이게 여기 있었군.”

독왕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이 귀한 걸 누가 먹었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검무극이 딱 잡아떼자 독왕은 잘린 부위를 유심히 보았다.

“네 치아 모양과 맞는지 확인해 보면 되겠지.”

그렇다고 어찌 맞추겠는가? 처음부터 그 상태였다고 딱 잡아떼면 되었겠지만, 검무극이 어디 이런 일로 독왕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인가?

“그게…… 소정락이 제가 만독불침이란 걸 믿지 않아서. 제가 본보기로 보여줬습니다.”

“이 귀한 걸 먹어서?”

“……네. 독한 걸 씹어야 믿죠. 그래야 멋있죠.”

검무극이 괜히 애꿎은 마불을 원망했다.

“아니! 독초를 잘 찾다 못해 혁낭 앞주머니에 들어 있는 거까지 찾아내시면 어찌합니까?”

“그냥 느낌이 나서.”

“그 앞주머니에서 독왕님께 혼나는 소교주 느낌이 딱 났죠? 그렇죠?”

마불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좋습니다. 인정합니다. 독왕님이 최고 아끼는 자리는 제가 마불님께 양보합니다!”

검무양은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검무극이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 농담에는 마불과 독왕의 관계가 좋아지게 하려는 노력이 들어 있었다.

그게 어떤 마음에서 비롯하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와 가장 친할 필요 없다.

이런 마음이 있기에 상대가 또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왜곡하지 않는다. 질투하지도 않았다.

검무양은 안다. 사람 관계를 맺다 보면 저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한바탕 소동 아닌 소동이 벌어지고 나서야 검무극이 진지하게 말했다.

“참, 마불님과 형이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검무극이 돌아오면서 겪은 일을 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저잣거리에서 만났던 여인의 이야기를.

“상대는 섭혼술의 고수입니다.”

섭혼술이란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놈들의 의도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앞서 검무극은 돌아가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을 거로 판단했다.

일단은 그 의도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이것이 우선이었다.

“섭혼술에 대비해야 합니다. 절대 우리가 당해선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섭혼술에 가장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마불이었다. 마불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구화마공을 익힌 소교주는 섭혼술이 거의 통하지 않을 거네.”

거기에 천마호신공까지 익힌 상태니 섭혼술로 자신의 정신이 조종당할 일은 없었다.

“나 역시 섭혼술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하지.”

마불의 무공 역시 태생적으로 섭혼술에 강했다.

검무극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독왕님은요?”

독왕에게도 대비책이 있었다.

“나도 섭혼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독을 쓰는 독왕이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다는 건 심각함을 넘어 초비상 사태가 될 일이었다. 그랬기에 애초에 대비가 되어 있었다.

“천독림에서는 독주머니가 세 개 이상이 되는 순간부터 심혼초(心魂草) 열매를 주기적으로 복용한다. 심혼초는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하고 정신을 공격하는 사술의 침입을 막아주는 효과를 지녔지. 당연히 오래 복용할수록 더욱 효과가 좋고.”

검무극은 심혼초가 아니더라도, 독왕이란 사람의 정신세계를 외부에서 파고들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검무양이었다.

“문제는 저로군요.”

예전의 형이라면 이런 상황이 되면 자존심 상해하며 많이 예민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검무극이 두 마존에게 말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마불이 독왕에게 말했다.

“독초 정리하는 거 내가 돕겠소.”

“고맙소.”

두 사람은 검무극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곳을 나갔다.

나가면서 독왕이 반 남은 천음만독초를 검무극에게 한 번 흔들어 보인 후에 나갔다.

“어휴, 집요하시지. 독에 있어선 어찌나 집요하신지.”

그렇게 그곳에는 검무극과 검무양만 남았다.

“뭐 때문이냐?”

그러자 검무극이 창가로 걸어갔다.

방에서 나간 독왕과 마불이 마당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검무극이 창문을 꽉 닫았다.

검무양은 동생이 왜 갑자기 두 마존을 내보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구결을 외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천마서각에서 익힌 무공이야. 섭혼술에 대항하는 심법이지.”

검무양은 당황했다. 갑자기 섭혼술에 대항하는 무공을 전수해준다고?

“한데 구결이 정말 어려워.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야 외울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내 검무양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래, 전수해줘.”

지금 이대로라면 앞장서서 싸울 수 없는 상황이다. 까닥 잘못하다간 짐이 될 수도 있는 상황, 그건 검무양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자, 그럼 시작한다.”

검무극이 기도를 발출해서 두 사람 주위로 막을 만들었다. 안에서 하는 말이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동생이 이렇게 신중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검무양은 더 궁금했다.

‘대체 무슨 무공이기에?’

검무양이 무공 이름을 물어보려 했을 때 검무극이 심법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무공 이름도 모른 채 전수가 시작되었다.

일단, 검무양은 구결부터 외웠다.

“명문혈에서 신유, 지실, 위유로 부드럽게 내력을 움직여야 해. 이때의 진기는 풀잎에 내려앉는 눈처럼 가벼워야 하고. 비유, 간유, 격유까지는 내력을 움직이는 속도가 중요해…….”

정말 구결은 어려웠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후에야 모두 외울 수 있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은 경지의 무공이다.’

검무극은 형에게 구결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우게 한 다음.

“자, 이번에는 같이 펼쳐보자.”

검무극은 구결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아예 가르쳐 주려고 했다.

“상황이 급하니까.”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무공 자체가 어려워서 검무극이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구결을 외웠어도 아예 감조차 오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다. 게다가 워낙 극상승의 무공이어서 까닥 진기를 잘못 움직였다간 내상을 크게 입을 수도 있었다.

이 순간 검무양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헛된 자존심의 화신이 세상 겸손한 동생을 두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사람은 자존심에 넘어지고 겸손에 일어난다는 것을.

“그래, 부탁한다.”

검무양의 삶이 진짜 변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형의 등을 통해 한 줄기 내력을 주입했다. 마치 선발대처럼 혈맥을 따라 움직이며 진기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직접 가르쳐주었다.

“눈처럼 가볍다는 걸 난 이렇게 해석했어. 자, 느껴봐.”

검무극이 자신의 진기로 움직임을 먼저 보였다.

어려운 구간마다 검무극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쉽게 설명해주었다. 자칫 이런 과정이 상대를 망칠 수도 있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검무극이었다.

그렇게 검무양은 검무극의 진기를 느끼며 구결을 끝까지 마무리 지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위험한 고비도 있었지만, 차분하게 검무극을 믿고 따랐다.

정말이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무공을 모두 익힌 후,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이렇게 쉽게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혼자서 익히려면 수년의 세월이 걸렸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예 제대로 못 익혔을 수도 있었으리라.

“형, 잠시 쉬었다 해.”

검무양은 어찌나 정신을 집중했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느낌이 왔을 때 바로 해볼게.”

검무양은 홀로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검무극은 바짝 긴장한 채 형의 상태를 살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진기를 주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검무양은 무사히 구결을 마쳤다.

“역시! 우리 형, 끝내준다. 하긴, 누구 아들인데 이걸 못 해내겠어?”

전율처럼 차오르는 기쁨은 동생의 칭찬 때문이 아니었다. 구결을 마쳤을 때, 온몸에서 느껴지는 벅찬 감동이 있었다.

무공을 익혔을 때 이렇게나 꽉 찬 만족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비천검법을 익혔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검무양이 벅찬 마음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무공이냐?”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천마호신공이야.”

순간 검무양의 표정이 굳어지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천마호신공을 두고 농담할 동생이 아니었기에. 아니 이미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말하고 있었다. 천마호신공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느낌을 줄 수 있겠느냐고.

검무양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너! 미쳤어?”

검무양은 무서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

검무양은 진심으로 동생을 꾸짖었다. 천마호신공은 오직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무공이었으니까.

“형에게 목숨 하나를 줬지.”

흔히 천마호신공을 두고 또 하나의 목숨이 생겨났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룬 검무극은 이미 여러 번 경험했다.

하나의 목숨이 아니었다. 천마호신공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평생 수없이 도움을 받게 될 것임을.

“형, 이번 적은 섭혼술의 대가야. 평범한 무공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어.”

검무양의 마음에 가장 걸리는 건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시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거다.”

그걸 떠나서 자신이 배웠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천마호신공인 줄 모르고 배웠습니다. 실제 그러했지만, 아버지께 그런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르실 거야.”

“뭐?”

“형만 말 안 하면 돼. 천마호신공은 절대 겉으로 표나는 무공이 아니거든. 그래서 대단한 무공이기도 하고.”

“너!”

“이로써 형과 나 사이에 비밀이 하나 생겼네.”

검무양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형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단지 이번 섭혼술을 쓰는 적 때문에 알려준 건 아니야.”

상대가 섭혼술을 쓰면 물러나 있으면 된다. 형은 아쉬워하겠지만, 지금의 형은 충분히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뭐 때문이냐?”

그러자 이 무공이 천마호신공이라 했을 때보다 더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형이 오랫동안 무사히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검무극의 진심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구화마공도 전수해주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의 진심임을 느낀 검무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형, 드디어 내 약점 제대로 잡았네. 이 사실을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난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날 거야.”

물론,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천마호신공에 있어선 아버지도 뭐라 하실 처지가 아니다. 후계자가 되기 전에 풍신사보와 교환하며 천마호신공을 가르쳐 주셨으니까.

검무양은 문득 마불이 한 말이 떠올랐다.

―소교주는 대공자께서 자신의 그림자로 살기를 바라지 않을 겁니다.

검무양이 깊어진 눈빛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냐, 네가 정말 꼴보기 싫으면 그때 아버지께 일러바치마.”

“아마 우리 둘 다 본교에서 쫓겨날 거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형이 웃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형의 모습은. 형에게 저런 표정이 있었던가?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저 웃음이야말로 형이 자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천 번 한 것보다 더 큰 고마움의 표현임을.

저 웃음에 대해 말하는 순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웃음임을 알기에.

검무극은 형에게 뭐라 말하는 대신 창가로 걸어가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독왕과 마불이 마당에 독초를 늘어놓고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무극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 형제가 아버지께 쫓겨나면 두 분도 같이 따라와 주실 거죠?”

독왕과 마불은 힐끗 검무극을 쳐다보더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머리를 맞대고 하던 이야기를 나눴다.

“약초 팔아서 우리 형제 먹여 살려 주실 거죠? 그렇죠?”

검무양은 말없이 동생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또다시 마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잘난 동생을 둔 형 노릇도 쉽지 않죠?

검무양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천마호신공의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동생이니 지켜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제 그 형 노릇 제대로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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