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들려온 말에 인질 삼인방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정답이라고?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면 자신들을 구출하러 온 구조대가 저렇게 친절하게 문을 두드렸을 리가 없지 않나? 문을 부수고 기습적으로 들어왔겠지.
결정적으로 여인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젠장! 저쪽 사람이구나!’
양중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한데 대체 누구기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끼이익.
문이 열리자 이안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련님!”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검무극에게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예전에도 검무극에게 여러 번 안겼지만, 오늘만큼 반갑고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 정답이 오셨다!
아니, 오답이면 어떠하랴? 검무극인데. 이런 어려운 상황에 딱 등장해 주는 검무극이 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삼인방은 새로운 이들의 등장에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또 한편으론 남자가 부러웠다.
‘대체 누구기에 이 아름다운 여인이 저리 좋아하는 거지?’
얼굴을 보니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안은 뒤늦게 검무극 뒤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취마를 발견했다.
“앗! 취마님!”
화들짝 놀라 검무극에게서 떨어진 이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조금 전까지 팔을 자를까, 목을 자를까 하던 여인이 저렇게 수줍은 모습을 보이다니!
한데 지금 세 사람에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취마?’
붙잡혀 있던 세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아는 취마는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제발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그들의 시선이 다시 취마를 향했다.
잘생긴 중년 남자는 특별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왠지 시선을 빨아들이는 존재감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느낌과 허무한 눈빛을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허리에 찬 술병을 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취마의 독문병기가 술병이라는 것을.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존이 왔다고? 여기에? 대체 왜?’
무림에서 마존이 주는 공포심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취마가 그들을 슥 쳐다보자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취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나 구박받지, 나 밖에 나오면 이런 사람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웃어주었다. 겉으론 태연하게 굴어도 마음이 좋지 않음을 알기에 취마에게 많이 웃어주려 한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물었다.
“대체 누굴 구하려고 한 거냐?”
“역시!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는군요.”
이안이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에 우연히 한 아낙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 일을.
“……물 한 잔 얻어먹으며 사연을 듣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 비싼 물 마신 셈이죠.”
검무극은 안다. 이 일이 이안이란 사람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호위라서,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날린 게 아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기꺼이 몸을 날린 것이다.
“원래 이런 일 처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나요? 항상 도련님 보면 뚝딱뚝딱 처리하셔서 쉬운 줄 알았어요.”
이안이 납치해 온 세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잡아 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멋지게 인질 교환하고, 구출한 사람들 데리고 떠나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찌 알았겠어요? 자기 자식까지 버릴 줄. 그래서 이자들 확 죽이고 그냥 가버릴까 고민 중이었다고요.”
마음에도 없는 저 말은 붙잡혀 온 세 사람 들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어떻게 다루든 공포 분위기는 조성되어야 했으니까.
이제 검무극이 상황을 이어받았다.
“이후 일은 내게 맡겨도 되겠느냐?”
“제발 맡아주세요!”
검무극인데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일을 다 망친들 무슨 상관이랴. 그녀에게 검무극은 그런 존재였다.
검무극이 세 사람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살거렸다.
“너희 정말 내가 안 왔으면 큰일 날뻔했어. 저 예쁜 여자, 싹둑싹둑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뒤에서 이안이 말했다.
“다 들리거든요.”
이때 세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젊은 사내는 대체 누굴까? 취마의 수하인가?’
왠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여인이 도련님이라고 칭한 것으로 볼 때, 신분이 높은 것 같은데….
한데, 아무리 봐도 전혀 무공을 익힌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생김새나 풍기는 느낌은 딱 명문의 자제인데. 명문의 자제가 마존과 어울리며 이런 일을 저지른다고?
어쨌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양중은 어떻게든 이 변수를 이용해서 살아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놈을 이용해서 살아남는 거다.’
양중이 정중히 물었다.
“소협께선 누구시오?”
넌 또 누구냐며 악다구니 치고 싶은 욕망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었다.
“너희를 구할 생명의 은인이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어쨌든 살려 준다고 하니 이때다 싶었다.
“나를 살려주시면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리겠소.”
“뭐든?”
“그렇소. 돈을 원하면 돈을 드리고, 무공을 원하면 본문의 무공을 전수해주겠소. 명성을 원하시면 명성도 얻게 해드리겠소.”
일단, 될지 안 될지 모를 약속을 마구 남발했다. 지금 목숨이 걸린 일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뒤에 있던 이안이 옅게 웃었다. 누구에게 돈을 주고, 누구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건지. 게다가 명성은 너희 문파 사람 모두를 다 합쳐도 못 미칠 텐데.
“셋 다 주면 안 돼?”
“셋 다 드리겠소!”
하지만 이내 검무극은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되었다.
“한데 부친이 인질 교환을 거절했다면서? 그런 사람이 돈도 내주고 무공도 전수해줄까?”
“그건……!”
정말이지 이점은 양중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화나는 부분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넌지시 제안했다.
“차라리 이건 어때?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말해줘. 그럼 우리가 구할게. 그다음에 너희 풀어주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 목적은 그 사람들 구하는 거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아! 저게 정답이었구나.’
저자를 구슬려서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직접 구해내는 것.
‘왜 이 간단한 생각을 못 했지?’
당연히 이 생각을 먼저 했어야지 싶은 계획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안 했다.
이쪽과 저쪽을 맞바꾼다. 여기에 생각이 꽂히니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상대는 자식도 포기해 버리는 매정한 인물인데, 자신은 정당하게 맞교환하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이러니 상황이 뜻대로 흘러갈 리가 없었지.
만약 검무극이 오지 않았다면, 먼 훗날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라면서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으리라.
‘역시, 소교주님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때 이안은 취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취마는 ‘나도 그 마음 안다’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이렇게 편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지만, 만약 철부지 소교주였다면? 그 철부지가 치는 사고를 따라다니면서 수습해야 한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검무극의 회유는 이안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붙잡혀 온 여인의 남편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꼭 구해내고 싶을 테니까.
문제는 양중을 풀어주더라도 북혈문에서 그들을 절대 풀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들을 풀어줄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인질 교환에 응했을 테니까.
이안 말로는 특이한 체질의 사람들을 모았다고 하니, 뭔가 시험을 하는 것 같은데.
분명 외부에 밝혀지면 안 될 일을 꾸미는 중이겠지.
고민하던 양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그 사람들 옮겼을 거요.”
어느덧 반쯤 넘어온 그였다.
“어디로 옮겼을지 알잖아?”
물론, 양중은 대충 짐작 가는 장소들이 있었다.
“설령 말해준다 해도 경계가 삼엄해서 못 구해낼 거요.”
검무극이 취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누군지 못 들었어?”
양중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취마도 무서웠고, 자신이 결국 실토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게다가 우리가 가서 붙잡히면 당신에게 더 좋은 일이잖아? 왜? 배신자 취급을 당할까 봐 두려워? 나중에 그렇게 말하면 되지. 우릴 잡으려고 장소를 알려줬다고.”
검무극은 빠져나갈 길까지 마련해 주었다.
“정말 말해주면 우릴 풀어줄 거요?”
“풀어준다.”
“그걸 어떻게 믿소?”
“내가 풀어줄 거라 약속하고 있으니까.”
저 맑은 눈빛이며 이 선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면 꼭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인상만으로 상대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데.
그렇게 고민이 길어지자 검무극이 냉정히 돌아섰다.
“그럼 그냥 죽어라. 뭐해? 셋 다 죽여!”
검무극의 명령에 이안이 검을 뽑아 들곤 세 사람에게 다가섰다. 망설임 없는 진득한 살기가 훅 뻗쳐오자 양중이 다급히 소리쳤다.
“말하겠소!”
양중은 결국 장소를 실토했다. 한 곳이 아니라 있을 법한 여러 곳을 말했다.
“만약 말한 장소가 맞다면, 다시 눈을 떴을 때 북혈문의 네 방에서 깰 거다.”
휙! 휙! 휙!
세 줄기 지풍이 동시에 날아가 그들의 수혈을 제압했다. 그들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물론, 장소가 맞다고 해서 그냥 풀어줄 생각은 없다. 빙궁과 거래해서 그쪽에서 얻어낼 것부터 얻어내야 했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북혈문이 무슨 짓을 꾸몄는지에 대한 응징도 남아 있다.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전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때는 했어도 안 통했을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절대 발설하지 않았을 테니까. 끝까지 잡아뗐을 테고. 그렇다고 네가 사람을 고문할 성격도 아니고.”
“아!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실토한 거군요!”
“그렇지.”
“전 이 부분도 생각 못 했다고요! 왜 답은 절 피해 다니는 걸까요!”
이안은 새삼 감탄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잘난 척을 잊지 않았다.
“네 존경심이 그득한 눈빛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에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잠시 그쳤던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눈 구경은 정말 원 없이 하는군요.”
이안이 환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무극은 새삼 이안이 겨울과 잘 어울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이 눈 내리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신난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이안을 지켜보며 검무극이 취마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 구출은 형이 알아서 해줘. 나는 소궁주를 만나볼게.”
취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눈 속으로 걸어갔다.
뛰어다니던 이안이 잠시 서서 취마를 지켜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일까? 이안은 홀로 눈 속을 걸어가는 취마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알아서 해줘’, 이 한마디로 해결되는 문제인가요?”
“마존이 왜 마존이겠느냐?”
“덕분에 저는 이제 해방이에요!”
이안이 눈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무극이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 * *
검무극이 만나자는 기별에 한설은 찬과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무극과 함께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설은 예감할 수 있었다. 죽립과 면사를 착용한 저 여인이 이번에 북혈문주의 자제를 납치한 수하임을.
‘수하가 여자였구나.’
두 사람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둘의 관계가 편하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친구 같기도 했고 오누이 같기도 했다.
‘역시 권위가 없어.’
취마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소교주에 관한 소문과 업적이 과장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라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설이 그들 앞까지 다가가자 이안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궁주님을 뵙습니다.”
한설은 고개만 살짝 움직여 인사를 받았다. 수하는 어디까지나 수하일 뿐이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태도에서 검무극은 무뚝뚝함이나 권위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건 공허함이었다.
“왜 만나자고 하셨죠?”
한설의 물음에 검무극도 곧장 본론부터 밝혔다.
“북혈문주의 자제를 돌려주겠소.”
뜻밖에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으며 한설이 차분히 물었다.
“물론, 조건이 있겠지요?”
“당연히.”
“말씀하세요.”
“우선 그들을 납치한 내 수하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하오.”
한설의 시선이 슬쩍 이안을 향했다가 다시 검무극에게로 돌아왔다.
“과연 북혈문에서 받아들일지 모르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북혈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불어온 태풍을 탓하고 욕할 수는 있어도 화난다고 정면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좋아요. 받아들이죠. 양 공자는 어디 있죠?”
“조건이 하나 더 있소.”
“뭐죠?”
“우릴 빙궁에 머물게 해주시오. 잠시 머물며 백주설원 원주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소.”
한설은 단호히 거절했다.
“본궁은 외인을 머물게 하지 않아요.”
“내 조건은 그 두 가지뿐이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군요. 궁주님과 의논하고 말씀드리지요.”
한설이 돌아서려던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이 정도 일은 직접 결정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대가 결정을 내리고 궁주님을 설득하는 건 어떻소? 소궁주시니 이 정도 권한은 있지 않겠소?”
도발이라면 도발이지만, 한설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제겐 그런 권한은 없어요.”
“이번 기회에 가져 보시오.”
한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너무 속 보이는 속셈 아닌가요?”
“소궁주에게 기회라 생각합니다만.”
“어떤 기회죠?”
“마교 소교주와 정식으로 협상할 기회 말이오. 궁주께서도 그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실 거요. 오히려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소. 그대가 이번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문득 한설은 그 보고를 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이번 일은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십시오, 궁주님.
과연 이렇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어떻게 나올까?
이게 문제다. 예상이 전혀 안 된다는 점.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아직도 잘 모른다.
“다시 연락드리죠.”
그녀가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안이 나섰다. 그녀가 천천히 죽립과 면사를 벗었다.
한설은 잠시 이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게 아니었다.
한설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구나.
언제 이런 생각을 해봤지? 오래전에 어머니에게 했었나?
동시에 드는 의구심. 왜 마교 소교주의 일개 수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왜 이런 깊은 울림을 받는 거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차갑고 따스한, 상반된 두 여인의 시선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설은 물론이고 검무극도 이안의 대답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녀가 나서는 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차분하게 진심을 전했다.
“우리 소교주님 한번 믿어보시라고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한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소교주의 수하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서로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란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나?”
한설의 차가운 물음에 이안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그 모든 걸 초월하는 뭔가도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설의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한설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 초월적인 존재가 소교주란 말인가?”
“그래요. 소궁주님께는 미친년 말처럼 들리시겠지만요.”
이안을 쳐다보던 한설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 이 미친년에 대해 당신이 설명해 봐, 이런 눈빛이었다.
물론, 순순히 그 의도대로 따라 줄 검무극이 아니었다.
“내가 수하들의 존경을 이렇게 받고 있소.”
한설이 검무극을 꿰뚫듯 노려보았다.
원래도 검무극의 소문 속 신화에 대해 믿지 못했던 그녀였다. 한데 이안의 말을 들으니까 이젠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 조작된 것일지도.’
그렇지 않다면 수하가 자신의 수장은 ‘초월적인 존재’이니 믿으라는 말을 할 리가 없다. 세뇌당했거나, 명령을 받았거나, 아니면 정말 미친년이거나. 그게 무엇이든 무림의 판도를 바꿔가고 있는 일대 영웅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시작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어떤 일도 쉬워지지 않소? 그러니 소궁주도 그냥 확 저질러 버리시오!”
검무극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지금 저 아이처럼요.”
이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저렇게 말해주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이런 사고도 칠 수 있겠지.
이안이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말했다.
“소교주님을 믿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한설은 차갑게 코웃음을 친 후 검무극에게 작별을 고하며 돌아섰다.
“다시 연락하죠.”
그녀가 떠나자, 이안이 탄식했다.
“제가 다 망쳤죠?”
“초월은 좀 과했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버렸어요. 저 쌀쌀맞은 사람을 왜 도와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여기까지 온 너 아니냐?
검무극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데.
이안은 주위 경치에서 답을 찾았다.
북혈문 일을 처리하는 동안 주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검무극을 만난 이후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이 아름다워서 그랬나 봐요.”
* * *
“소교주가 새로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한설은 검무극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북혈문의 자제를 내주는 대신 본궁에 잠시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검무극에게는 빙궁주와 의논하겠다고 했지만, 어머니에게 받아들였다고 통보하듯 말한 것이다. 검무극을 믿어보란 이안의 말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반응이 궁금했다. 자신이 독단으로 결정을 내렸을 때 과연 어떻게 나오실지.
화를 내거나 차갑게 반응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 빙궁주은 차분했다.
그 이유를 묻는 빙궁주의 눈빛에 한설이 대답했다.
“북혈문의 자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아니, 네가 받아들인 진짜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건 첫 번째 이유가 아니지 않느냐?”
맞는 말이다. 북혈문주와 밀약을 맺은 건 어머니였으니까. 잡혀간 이들의 생사보다 앞서는 이유가 있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제 독단에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하실지를요.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유를 댔다.
“제 눈에 비친 소교주는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고 정말 그런 대단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소문은 안 통해, 하는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말 그들의 생각처럼 원주가 살해당한 거라면, 궁금하지 않으세요? 누가 그 사람을 죽였는지?”
빙궁주는 말없이 딸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라진 모습에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이번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감사합니다, 궁주님.”
한설이 정중히 인사하고 궁주전을 내려갔다.
빙궁주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쳐다보았다. 눈 덮인 빙궁의 정경은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지만 오늘은 다른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철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양일(楊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방에 있던 사람이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던 임씨 역시 끌려 나간 지 며칠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깨끗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이 음습한 뇌옥 같은 곳에 갇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현아, 민아.”
양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생 눈물이라고는 흘려본 적이 없는 그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계속 아이들 모습만 떠올랐다.
안 그래도 걱정 많은 아내는 지금쯤 밤잠도 못 자고 있을 거다.
데려올 때는 웃으며 데려온 그들이었는데 잘 왔다는 서찰 한 통 보내는 것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명의가 새로 개발한 약을 시험한다고 해서였다. 마을의 가장 큰 의원에서 사람들을 모아두고 여러 검사를 했다. 검사를 받아보는 것만 해도 며칠 일당이 되는 돈을 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자신과 임씨 두 사람만이 그들이 원하는 체질이었다.
두세 달만 실험에 응하면 큰돈을 준다고 했다. 지금 벌이로는 몇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
아내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몸이 상할 수도 있었고, 너무 큰돈을 준다는 것도 수상했다. 게다가 외지인들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양일은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가고 싶어도 체질이 안 맞아서 못 가는 이들도 있는데.
게다가 몸을 검사한 이들은 너무 예의가 바르고 점잖았다. 경우에 따라선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자신과 아내가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모이지 않았다. 좀 모았다 싶으면 쓸 일이 생기고, 악착같이 모았다 싶으면 또 쓸 일이 생기고.
목돈을 받으면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릴 작정이었다. 자신은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신이 하는 고생을 견뎌낼 수나 있을까? 아내는 아이들을 믿으라고 하지만, 양일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이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식구 먹고살 작은 가게 하나만! 제발!
하지만 고향을 떠난 후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검을 찬 무인들이 자신들을 호송했다.
원래 가야 할 곳이 아니라 북해까지 왔고, 의방이 아니라 은밀한 산장에 갇혔다. 외출은 물론이고, 문밖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에 옮겨진 이곳은 아예 뇌옥처럼 꾸며진 곳이었다.
‘마누라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때, 무인이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자.”
양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죽는 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눈앞의 이 무인을 기습해서 달아날까? 박치기라도 해서?
하지만 일반인이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상대는 무인이었다. 아무리 공사 일로 다져진 몸이라지만, 무인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양일이 끌려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무런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앞방에도 사람이 있었고, 옆방에도, 그 옆방에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끌려간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이구나!’
그렇게 끌려간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물건이 가득한 곳이었다. 평생 맡아본 적이 없는 괴이한 약 냄새가 났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옥으로 만들어진 침상이 있었다.
데려온 무인이 양일에게 말했다.
“옷을 벗고 침상에 누워라. 남김없이 싹 다 벗어.”
양일이 망설이자, 무인은 두 번 말 안 한다는 듯,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기세에 양일이 옷을 벗었다. 지금이라도 달려들어서 놈을 제압하고 달아 하나! 본능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평생 누군가와 싸워본 적 없는 몸은 본능에 충실하지 못했다.
집 짓고, 길 내고, 둑 쌓고. 평생 거칠고 힘든 일을 하고 살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는 온순한 성격이었다.
양일이 침상에 누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침상은 훨씬 차가웠다. 무인이 양일의 팔과 다리를 침상에 연결된 가죽 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다.
그가 준비되자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들어왔다.
푸른 장삼을 입은 중년 남자와 그를 호위하는 세 무인이었다. 무인 중 한 사람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푸른 장삼의 중년인보다 더 강렬했다.
중년인이 다가와서 양일을 내려다보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침상의 한기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었다.
양일은 간절히 빌었다. 이들이 어떤 시험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발 자신이 부합하는 사람이기를.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이제 돈도 필요 없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중년인이 본격적으로 시험을 시작했다.
그가 침상 아래를 조작하자 침상이 더욱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
너무 차가워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양일의 애원에 남자는 차갑게 말했다.
“빙한지체(氷寒之體)를 타고난 이들 천 명 중에서 한 명꼴로 있다는, 네가 만약 극한지체(極寒之體)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양일은 절망했다. 그 말인즉, 천 명 중 한 명이 아니라면 자신은 죽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방에 있던 중년인이 코를 벌름거렸다.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철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술 냄새입니다.”
중년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 대낮부터 술을 처마신단 말이냐?”
서 있던 세 무인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갔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무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복도 저 앞쪽은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뭐지?’
실내에 이런 안개가 낄 리가 없지 않은가?
뭔지 모를 위험을 감지한 무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안개가 밀려들었다. 술 냄새는 이 안개에서 풍기고 있었다.
‘안개에 술 냄새가? 그렇다면 이건!’
주기(酒氣)였다.
술이 약한 사람은 아니, 술에 강한 사람조차 이 기운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술을 모아둔 둑이 무너져서 무릎까지 흘러넘치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렬한 주기였다.
그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안개 속에서 주먹을 쥔 팔이 쑥 튀어나왔다.
주먹은 가볍게 툭 쳤는데, 무인은 날아가 벽에 처박힌 후 정신을 잃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취마였다.
주기는 마치 호신강기처럼 그의 몸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지금은 평범한 안개였지만, 사실 어떤 모습으로도 변하는 취마의 주기였다.
그는 무인이 나온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쉬이이익.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또 다른 무인이 취마를 향해 검을 날렸다.
취마는 날아든 검을 가볍게 피하더니, 이번에는 손날로 무인의 목을 가볍게 쳤다. 툭 쳤는데 쓰러진 무인은 일어나지 못했다.
휘류류류류.
바깥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 같은 주기는 취마에게로 모두 모여들더니 몸 주위를 감싸며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청의 장삼의 중년인은 놀란 얼굴로 취마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두 수하는 이렇게 쉽게 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말은 상대의 무공이 정말 강하다는 의미.
하지만 그는 아직 절망하지 않았다. 세 무인 중 진짜 실력자는 복면인이었다.
취마가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침상에 누워있는 양일을 살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에게 신경 쓰다가 복면인이 기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취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취마가 양일을 보느라 등을 돌렸음에도 복면인은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몸 주위에서 일렁이는 취마의 주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취마가 양일을 묶은 가죽을 풀어준 후, 그의 팔목을 잡았다. 뜨거운 기운이 흘러 들어가자, 양일은 평온한 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상대의 실력을 확인했음에도 중년인은 나직이 경고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시오? 이대로 물러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요.”
그러자 취마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어차피 이번 일에 천마신교가 개입한 것을 북해빙궁이 알고 있기에,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나 취마다.”
중년인은 얼어붙은 채, 사색이 되었다. 복면인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신이 왜?”
방금 수하에게 보였던 한 수가 아니었다면, 등을 돌려도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경지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말이다.
하지만 취마가 확실했다. 은은히 풍기는 이 깊은 주기와 주향은 취마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운일 테니까.
아니,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눈앞의 이 사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일도 그들만큼 놀랐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마교 팔마존의 취마라고? 세상에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울면 마존이 와서 잡아간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인데.
“혹 끌려온 사람 중에 양일이란 사람이 있나?”
취마가 자신을 찾자 양일은 깜짝 놀랐다.
“제가 양일입니다. 접니다.”
평생 삼류 무인과도 개인적으로 얽힌 적이 없던 그였는데, 마존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다행이군. 자넬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양일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존이 나를 구하러 왔다고?’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가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아, 죽기 직전에 꿈을 꾸는 건가?’
진짜 자신은 침상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고, 마지막 순간 이런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꿈이나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지금도 앉아 있는 침상은 엉덩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다.
“저를 구하러 오신 거라고요? 존귀하신 분이 왜 저를?”
양일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다른 일로 왔다가 마침 자신을 구하는 상황인 줄 알았는데.
그러자 취마의 입에서 놀랄만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마 양일이 태어나서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그를 놀라게 한 말이었으리라.
“자네 처가 부탁했네. 남편을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양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내가 어떻게 마존에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제 처가요? 우리 마누라는 저와 혼인한 후에 마을 밖도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내 양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
‘아, 난 이미 죽었구나. 마누라, 꿈에서라도 날 구해줘서 고맙네. 애들 잘 키우고, 잘 사시게. 끝까지 함께 못 해줘서 미안해.’
그 와중에도 꿈 같은 현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술을 안 마셔서 신경이 좀 예민하다.”
취마는 원주가 담은 빙주를 혈루에 넣은 후 아직 마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죽인 자를 죽일 때, 그 빙주를 마시고 죽일 작정이었다. 그녀가 복수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도록.
“내가 술을 마셨을 때가 위험할까? 마시지 않았을 때가 위험할까?”`
청의 중년인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걸 몰라서 묻소? 빌어먹을 취마인데, 둘 다 위험하겠지.’
물론 그럴 수 없었기에 최대한 정중히 말했다.
“이번 일에 마교가 개입해 있는 줄 몰랐소. 만약 알았다면 돕지 않았을 거요.”
진심이었다. 빌어먹을 마교와 얽혀서 좋은 꼴을 볼 리가 없었으니까.
취마가 그에게 물었다.
“자넨 누군가?”
그러자 남자는 복면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수하를 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복면인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중년인이 자신을 밝혔다.
“난 황수(黃洙)라고 하오. 사람의 신체를 연구하는 학자요.”
“학자는 무슨! 도살자겠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었지?”
황수는 변명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 숫자조차 알지도 못한다.
“이들에게 무슨 시험을 했나?”
황수가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침상에 있던 양일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무슨 체질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체질이었더라? 아, 맞습니다. 극한지체. 제가 극한지체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극한지체.
천성적으로 추위에 강하게 태어난 체질이 빙한지체다. 이 체질로 태어나면 평생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빙한지체 중에서도 특히 더 추위에 특화된 체질이 극한지체다.
극한지체를 타고난 인물은 적어도 추위에는 죽지 않는다. 가령 한겨울에 벌거벗고 얼음물에 들어가 있어도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얼어 죽지는 않는다.
“이 침상이 무섭도록 차가워졌었습니다.”
양일의 말에 취마가 침상을 살폈다. 평범한 침상이 아니었다.
“이게 극한지체를 찾아내는 침상인가 보군.”
취마가 황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극한지체를 찾고 있지?”
대답하지 않는 황수를 보며 취마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술을 마시지 않아서 신경이 예민하다고.”
황수가 옆에 있는 복면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취마 역시 처음부터 그가 수하가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수하의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너를 감시하려고 보낸 자로군.”
드디어 복면인이 나섰다.
“마존이라고 우리가 겁을 먹을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리라는 말은 황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으로 두 명의 복면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앞서 취마에게 당했던 무인들과는 기세가 달랐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던 복면인만큼이나 눈빛이 강렬했다.
애초에 세 사람이 와서 돌아가면서 황수를 감시하며 이번 임무를 도왔다. 실력도 동수였고, 성격도 비슷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황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복면인이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이들 셋이 함께라면!’
상대가 취마라도 한번 해볼 만할 거란 생각이 들던 바로 그때.
주우우우우우.
다음 순간, 취마의 몸 주위로 일렁이던 주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그곳에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황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발! 취마를 죽여!’
잠시 정적이 흐르던 그때, 황수의 눈에 검날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복면인 중 한 사람의 검날이었다.
다음 순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보였던 검이 한바탕 움찔하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듯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당했다!’
다시 그곳에 정적이 흘렀고.
휘이이잉.
다른 복면인이 검에 내력을 실어 허공에서 내젓자 안개처럼 깔린 주기가 그의 검 주위로 휘감겼다.
내력으로 끌어당겨 시야를 가리는 그것을 밖으로 배출하려는 의도였는데, 취마의 주기는 일반 안개나 연기가 아니었다.
잠깐 그의 검으로 휘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며 더욱 짙어졌다.
그 순간 황수는 보았다. 안개 속을 언뜻 스치는 취마의 모습을.
그는 여유롭게 뒷짐까지 진 채 움직이고 있었고 이쪽을 보며 씩 웃기까지 했다.
‘조심해!’
그 말이 채 나가기도 전에.
취마의 손날에 주기를 해소하려던 복면인의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황수가 본 마지막 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살인멸구!’
혼자 남은 복면인은 취마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부터 죽이려 한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명령을 받고 내려온 모양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자신을 죽이라는.
날아들던 검이 황수의 심장 앞에서 멈췄다.
꽈드득.
바로 앞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욱하던 안개가 사라지면서 복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검을 내질렀던 그는 목이 기이하게 꺾여 있었고, 그의 눈에서는 이미 생기가 빠져나간 후였다.
그가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뒤에 취마가 서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 허리에 찬 독문병기 혈루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셋이면 해볼 만하다고?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마존들의 실력이구나!’
황수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주기는 취마의 주위를 불꽃처럼 일렁이다가 그의 몸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극한지체를 구하려는 이유가 뭐지?”
이제 황수는 더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나는 극한지체를 구해달라는 일을 맡고 돈을 받았을 뿐이오.”
“누구에게?”
대답을 망설이는 황수에게 취마는 현실을 알려주었다.
“조금 전에 이미 넌 죽었어.”
황수가 쓰러진 복면인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이내 누구의 부탁이었는지 밝히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게 돈을 준 사람은 바로…….”
바로 그때였다.
후우욱.
황수의 이마 양쪽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퍼억! 퍼어억!
양쪽이 터져나가며 피를 뿜어냈다.
황수는 그대로 즉사했다. 놀랍게도 배후에 대해 언급하려면 이렇게 죽게 만드는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취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특정한 대답을 하려 할 때 죽게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암시이자 금제였다. 대단한 놈이 배후로 있다는 의미.
취마가 겁에 질린 채 앉아 있던 양일에게 말했다.
“옷 입게.”
그때까지도 벌거벗고 있던 양일이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게 꿈이 아니었구나.’
옷을 다 입은 양일은 취마를 따라 그곳을 나갔다.
양일은 자신을 데려온 무인을 기습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모한 발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십여 명의 무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건물 밖도 마찬가지였다. 무인들 수십 명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무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자, 양일은 이번 일이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극한지체였다면 대체 뭘 시키려는 거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일을 태우고 그의 고향으로 갈 천마신교 북해지부의 마차였다.
데려가는 이들이 양일의 고향 쪽 천마신교 지부와 협조해서 이들의 가족을 지켜줄 것이기에,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복 걱정은 안 해도 되니, 가족들과 잘 살게.”
그게 아니더라도 양일이 고향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쪽 일은 다 끝나 있을 것이다.
양일은 자신이 살아남은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마존께서 저를 구해주시다니요!”
“내가 구한 게 아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편을 구하고자 하는 자네 처의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면 이 먼 북해까지 누굴 보낼 수 있겠는가?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부인에게 듣게.”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양일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다니?
갇혀 있으면서 수도 없이 결심했다. 더는 행복을 한 번에 얻기 위해 욕심내지 않기로.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욕심 대신 아이들이 커나가는 순간순간을 함께해 주겠다고.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가 넙죽 절을 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양일은 해마다 이날 술을 한잔하면서 취마를 떠올릴 작정이었다.
“이 절은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잘 전해주지.”
그렇게 떠나가는 마차의 반대쪽으로 취마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뽀드득, 뽀드득.
새하얀 눈에 첫 흔적을 남기며 걸어가던 취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더는 눈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 * *
검무극과 이안은 마차를 한 대 빌려서 은월의 안가로 돌아왔다.
수혈을 제압당한 삼인방은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마차에 실었다.
“취마님 돌아오면 바로 빙궁으로 가자.”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취마가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편한 형처럼 대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존으로 여기고 있음을.
이안도 취마는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자신들이 만났던 소궁주였다.
“한데 빙궁에서 도련님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취마가 붙잡힌 사람을 구해내더라도, 빙궁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였으니까.
“받아들일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네가 소궁주에게 그랬잖아? 초월님이시니 믿으시라!”
“장난치지 마시고요. 왜죠?”
검무극이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조건은 두 가지였어. 너를 처벌하지 말라는 것과 빙궁에서 원주의 죽음을 조사하게 해 달라는 것.”
“그랬죠.”
“우선 너는 어차피 손을 댈 수가 없어. 내 수족인 너를 함부로 건들 수 없을뿐더러, 그쪽 자제를 납치했어야 할 명분까지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북혈문에서는 이번 일을 숨기려 하는데, 널 벌하겠다고 이번 일을 키울 수는 없지.”
“두 번째 조건은요? 빙궁에서 우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빙궁주는 그쪽 원주와 취마 형과의 관계를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야. 오랜 세월 서찰과 술을 주고받으며 맺어온 관계니까. 그런 사람이 이번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데 거절한다? 만약 그랬다간 취마 형은 더욱 그 죽음을 의심하고 본격적으로 파고들 거다. 그 과정에서 빙궁이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다 알아낼 수도 있고. 빙궁주도 그런 점을 예상할 테니 쉽게 거절할 수 없지.”
이안은 감탄했다. 검무극이 말한 이유를 자신은 하나도 생각지 못했다.
“저는 은퇴할래요. 이런 무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네요. 은퇴하고 무림인들 안 오는 시골에 가서 국수나 팔면서 살래요.”
“어디 국수 파는 일은 쉬운 줄 아냐? 종일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면, 아! 도련님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검 휘두를 때가 좋았지, 당장 달려오고 싶을 거다.”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 나온 김에 국수 드실래요? 주방에 재료 있던데.”
“할 줄 알아?”
“국수 정도야 하죠.”
“먹자. 그러잖아도 출출하던 참이다.”
“제가 금방 끓여올게요.”
이안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검무극은 마차 지붕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지붕에 내려섰음에도 깃털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곳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마존들도 보고 싶지만, 그래도 언제나 아버지가 제일 먼저 보고 싶다.
천마전 태사의에 무뚝뚝하게 앉아서 일 보고 계실 텐데.
‘아버지,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아버지는 제 생각, 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는 사이 이안이 뚝딱 국수를 만들어왔다.
“어디서 드실래요?”
“여기서 먹자.”
이안이 국수를 들고 훌쩍 몸을 날려 마차 지붕으로 올라왔다. 부드러운 경공술에 국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공 경지가 올라가고 있는 그녀다.
“드세요.”
금방 만든 것치고는 맛이 훌륭했다.
“맛있다. 이 정도 손맛이면 은퇴해도 굶어 죽진 않겠다. 그 국숫집에 나도 투자하자!”
이안은 기분이 좋았다. 검무극이 맛없다고 할까 봐 내심 걱정했었다.
두 사람이 후루룩 국수를 먹고 있을 그때였다.
취마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검무극과 이안이 그를 쳐다보았다. 취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 고갯짓을 보는 순간 이안은 안도했다. 무사히 구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소식도 있었다.
“그 사람만 구했네.”
이안은 너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좀 더 잘했으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은 하지 않을 거다. 그 분노는 이번 일을 꾸민 자에 대한 응징에 보탤 작정이었으니까.
“국수 남은 것 없나?”
“금방 해드릴 수 있어요. 한데 국수로 되겠어요?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에 나서준 것이었으니까.
“됐네, 국수면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제가 금방 삶아오겠습니다.”
“나도 한 그릇 더!”
“네!”
이안이 주방으로 달려가자 이번에는 취마가 훌쩍 마차 지붕으로 올라왔다.
“고생했어, 형.”
“고생은 무슨.”
“한데 사람들은 왜 잡아간 거였어?”
“놈들은 극한지체를 찾고 있었다.”
“극한지체?”
사람의 여러 체질 중에서 극한지체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체질이었다.
“누구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대답하려는 순간,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 아주 강력한 금제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회귀 전에 알았던 한 조직을 떠올렸다.
혈사맹(血死盟).
피로 뭉쳐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렸다.
모두가 혈사맹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졌다. 그들은 진심 어린 충성심으로 목숨을 바친 게 아니었다. 배신하면 몸이 터져서 죽는 강력한 금제에 걸려 있었다.
그 혈사맹을 이끈 인물.
십이지왕 중 구왕(九王).
혈왕(血王).
십이지왕 중 한 명이 또다시 등장한 것이다.
아래쪽 왕이라고 꼭 위쪽보다 약하다고 볼 수 없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십이지왕이 바로 혈왕이었다. 그는 아홉이란 숫자가 좋다면서 스스로 구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혈왕은 강력한 인물이었다. 일단 수없이 많은 수하를 거느렸고, 그 수하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배신도 하지 못하고, 자멸공도 서슴없이 쓰는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정작 혈왕이 어떤 무공을 쓰는지, 얼마나 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혈왕과 관련된 모든 역사는 수하들의 역사였고, 그들의 피의 역사였다.
‘그 혈왕이 극한지체를 찾고 있다고? 왜지?’
검무극이 눈 덮인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깨끗한 눈에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야 할지.’
국수를 가져온 이안은 검무극의 심각한 표정을 보았다.
그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 빙궁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그녀의 가슴이 투지로 끓어올랐다.
그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전 열심히 국수나 삶겠습니다.”
그녀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그때 취마가 불쑥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검무극이 돌아보자 취마는 취몽루에서 술을 마시는 것처럼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세는 풀어져 있었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도 강렬했다.
“이 형이 다 해결해 주마.”
“지금까지 만난 형 모습 중에 지금이 제일 멋있어.”
또 이런 말을 들으면 너스레로 받아 주는 취마였다.
“우리가 아직 덜 만난 거지. 내 남아 있는 멋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우린 초면이야. 처음 뵙겠소, 소교주.”
이렇게 너스레 떨기 좋아하고, 자기감정을 솔직히 잘 드러내고. 그래서 가끔 취마가 약한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아니다. 취마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다. 흔들리는 사람이기에 더 강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의 흔들림은 제 자리를 찾아가려는 흔들림이기에.
그리고 누구보다 고독한 사람이다. 언제나 그를 보면 조각배에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는 모습부터 떠올랐으니까.
나는 마차 옆에 서 있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이 다 해결해 준단다. 이번에는 우린 마음 편히 눈 구경이나 하자. 맛있게 요리하는 집이나 찾아놔라. 온 김에 다 먹어 보고 가자.”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은 이 국수부터 먹고요.”
그녀가 국수를 가지고 훌쩍 날아 올라왔다.
우린 마차 지붕에 나란히 앉아 국수를 먹었다.
“어? 맛있는데? 이게 왜 이리 맛있어?”
취마의 감탄에 호들갑을 보탰다.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천마전 숙수께서 몰래 다녀가신 줄 알았어.”
이안은 기분 좋게 웃었다.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그렇게 우린 마차 지붕에서 국물까지 싹 다 비웠다.
“자, 배도 채웠으니 가볼까?”
“마차는 제가 몰게요.”
이안이 훌쩍 뛰어내려 마부석에 앉았다.
“출발합니다.”
난 취마와 함께 그냥 마차 지붕에 있었다. 안에 타봤자, 꼴 보기 싫은 녀석들이 자고 있을 텐데. 차라리 여기가 시원하고 좋았다.
달리는 마차 위에서 취마가 말했다.
“어쩌면 이번 북혈문 일과 원주의 죽음이 관계있을지 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벌어진 개별의 사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의 배후에 혈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상대하기 지극히 까다롭고 위험천만한 바로 그 혈왕이.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북혈문과 북해빙궁, 우린 양쪽 일을 다 해결하고 돌아갈 테니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취마를 보며 너스레를 덧붙였다.
“아, 실수. 우리 말고 형이 해결하고 돌아갈 테니까.”
마차는 북해빙궁을 향해 끝없이 눈이 펼쳐진 설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 * *
검무극과 이안, 취마는 한설의 안내를 받으며 궁주전으로 올라갔다.
북해빙궁이 거래를 받아들였기에 빙궁주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려는 것이다.
빙궁주와의 첫 만남이 너무 떨린다던 이안은 빛에 따라 색이 변하는 원형 계단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 너무 아름답게 지어졌어요.”
그녀와 달리 검무극은 이 계단에서 미세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내는 살기가 아니었다.
‘기관이다.’
투명하게 속이 들여다보였기에 그 어디에도 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 아름다운 얼음벽과 계단, 그리고 기둥이 대체 어떻게 침입자를 상대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건 기관이 아니라 예술이다.
그랬기에 지금껏 경험했던 어떤 기관보다 위험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이안만 해도 비천검법이 구성이나 이른 고수인데, 이 기관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세 사람은 한설을 따라 궁주전으로 올라왔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먼저 검무극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빙궁주 역시 소교주를 대하는 예를 갖췄다.
“어서 오시게, 소교주.”
검무극은 회귀 전 인생에서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지금보다 훨씬 후의 일이긴 하지만.
그때 저 차가운 여인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딸의 죽음 앞에서.
반면 빙궁주는 검무극을 오늘 처음 만났다. 세작들의 보고에 끝없이 자신을 놀라게 했던 주인공을 드디어 만나는 순간이었다.
빙궁주는 찬찬히 검무극의 눈빛과 기도를 살폈다. 정말 그 모든 일을 해냈다고? 이 젊은 청년이?
검무극은 자신을 완전히 감추지 않았고, 그렇다고 과하게 드러내지도 않았다. 완전하게 자신을 감추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더 완벽한 반박귀진의 경지에 오른 그였다.
딸은 검무극에 대해 불신하는 것처럼 말했다. 좀 더 두고 보면서 확인하고 싶다고. 당연히 그랬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조차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교주께서는 잘 계시나?”
빙궁주가 아버지의 안부를 묻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아버지를 뵌 적이 있으십니까?”
“오래전에 뵈었지.”
그를 딱 한 번 봤는데 쉽게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건 그의 눈빛이 워낙 강렬해서였으리라.
“잘 지내고 계십니다.”
“이번에 큰일을 치르셨지? 자네가 주도한 일이라고 들었네만.”
정사마 회담은 극비리에 치른 것이 아니라 마가촌에서 치른 회담이었다. 빙궁주가 알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오늘 이렇게 궁주님을 뵈었으니, 다음 회담에는 궁주님도 참석하시지요? 그때는 풍천교주님도 초청할 생각입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지만, 빙궁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 불러주게.”
농담으로 대답했는데 검무극이 한 번 더 확인했다.
“정말 오자 회담이 열리면 참석하실 겁니까?”
한 번 모였던 정사마의 수장이 다시 모인다? 거기에 풍천교주까지?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기별하시게.”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렇게 검무극과 인사를 나눈 다음 이번에는 취마와 인사했다.
“먼 걸음 하셨습니다, 마존.”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물론이지요.”
취마는 아주 오래전에 빙궁주를 만난 적이 있다. 마존이 아니었을 때였고, 그녀 역시 궁주가 아닐 때다.
그때만 해도 그녀는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얼음 석상 같은 느낌이지만, 그때의 빙궁주는 새하얀 옷이 잘 어울리는 순수한 여인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얼어붙게 했을까? 북해의 찬바람이? 여인의 몸으로 빙궁을 지키려고 애써온 그녀의 힘들었던 삶이?
“흐르는 세월이 이리도 빠르니, 인생이 참 무상합니다.”
취마의 말에 빙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으로 검무극이 이안을 소개했다.
“여긴 제 수하입니다.”
빙궁주는 검무극이 이번 일을 벌인 수하를 데려왔다는 것을 이미 보고받았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숨겨도 모자랄 판에 굳이 이렇게 드러낸다?
“궁주님을 뵙습니다.”
이안의 인사에 빙궁주는 이번에도 찬찬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아름다움이 지나쳐서일까? 이안은 필요 이상으로 빙궁주의 시선을 끌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왜 그런 사고를 치셨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강호의 일 처리가 미숙합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이안은 정중히 사과했다. 어차피 빙궁주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안을 대신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미숙한 만큼 신중했습니다. 납치한 이들을 무사히 데려왔으니까요.”
검무극이 빙궁주를 빤히 응시하며 덧붙였다.
“반대로 경험 많고 능숙한 북혈문의 일 처리는 그러지 않더군요. 왜들 그리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지.”
그러면서 검무극은 빙궁주의 표정을 살폈다. 과연 북혈문에서 진행하고 있던 일을 빙궁주는 알고 있을까?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꺼낸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표정만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리죠.”
검무극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은 빙궁주를 자극할 때가 아니라 원주의 죽음을 조사해야 할 때였으니까.
혈왕을 상대하는 것만큼, 취마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그게 더 중요하다.
취마의 일을 처리하면서 혈왕은 곁다리로 처리하는 거다. 북해가 피에 잠기게 되더라도, 검무극은 그런 마음으로 이번 일을 대하리라 마음먹었다. 악은 하찮고 삶은 중요하니까.
빙궁주가 한설에게 물었다.
“양 공자는 무사하신가?”
“네.”
“양 공자 모셔 오고, 세 분은 숙소로 안내해 드려라.”
“알겠습니다.”
빙궁주가 끝으로 취마에게 말했다.
“백주설원 원주의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 죽음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 조사에 그리 긴 시간을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언제 축객령이 내려질지 모른다는 의미였다.
“최대한 서둘러보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무언의 탐색전이 오갔던 첫 만남이 끝났다.
* * *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 양중은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벽이며 기둥이 모든 것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일어났나?”
저 앞에 한 여인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인이 돌아서서 그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바로 북해빙궁의 궁주였다.
“궁주님?”
그녀를 알아본 양중이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이곳은 북해빙궁의 궁주전이었다.
“몸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한데 제가 왜 여기에?”
그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가 마교와 거래하고 양 공자를 빼내 왔네.”
자신이 살아났음을 깨달은 양중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그 마교 놈에게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할 필요 없는 경솔한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빙궁주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
양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빙궁에서 자신을 구한 것일까?
그때 그곳으로 한 중년 남자가 들어섰다.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매에 각진 턱, 우람한 체구를 지닌 그는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무인이었다.
상대가 누군지를 확인한 양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들어온 이는 바로 자신의 아버지인 북혈문주 양신(楊愼)이었다.
그가 북혈문을 북해 삼대 세력으로 키워낼 수 있었던 것은 북권십이초(北拳十二招)를 대성한 무공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보기에는 곰처럼 보였지만 누구보다 영민한 머리를 지녔고 야망도 큰 인물이었다.
“아버지!”
자신을 버렸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아버지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아버지가 부탁해서 빙궁이 움직인 것일까? 알고 보면 아버지의 큰 뜻이 있었던 걸까? 그런 희망도 잠시, 양신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곧 나갈 테니 먼저 내려가 있거라.”
양중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몸은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다고? 아버지가 자신을 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날 버렸다. 인질 교환을 거부한 순간, 그 여인은 그 자리에서 나를 죽일 수도 있었으니까.’
양중의 마음에 섭섭함과 미움이 뒤섞였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북혈문주와 빙궁주 모두 느꼈지만, 그들은 모른 척했다.
양중은 아버지와 빙궁주를 두고 얼음 계단을 돌아서 내려왔다. 힐끗 위를 쳐다보았지만,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만 희미하게 보일 뿐,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아들까지 버리면서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겁니까? 무슨 거래를 했기에 빙궁이 마교로부터 절 구한 겁니까?’
그렇게 양중이 궁주전 입구로 내려왔을 때, 그곳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당연히 수하라 여기고 그에게 말했다.
“마차는 어디에 있나?”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차 어디에 있냐니깐!”
아버지 때문에 치밀었던 격한 감정의 불똥이 괜한 사람에게 튀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와도 예전 같지 않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양중은 흠칫 놀랐다. 등을 돌리고 서 있던 남자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눈을 뜨면 당신 방이라고 약속했는데, 그건 못 지켰군. 그래도 아버지 봤으니 됐지?”
양중의 머리는 이렇게 말했다. 겨우 풀려났는데, 또 이자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사는 인물이었다. 특히 아버지를 언급하자 더 화가 났다.
“이번에 겪은 치욕은 잊지 않을 거요!”
큰소리치는 마음에는 이런 믿음이 있었다. 빙궁과 거래했다고 하니, 여기서 자신을 붙잡아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무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다음에 꼭 복수하러 와라.”
오라면 못 갈 줄 알고!
이렇게 소리칠 수 없기에 양중은 약이 올랐다. 그나마 생각난 것은 이것이었다.
“붙잡힌 이들은 절대 풀어주지 않을 거요.”
네 수하가 구하려고 나까지 납치한 그 사람들 말이다.
“아직 못 들었나 보군? 너희가 그 사람들 다 죽였다. 한 사람만 겨우 구했지.”
그 순간 양중은 주위의 공기가 검무극의 눈빛만큼이나 차가워졌음을 느꼈다.
“너희도 딱 한 명만 살아남으면 공평하겠지?”
그게 너일까? 네 아버지일까?
말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눈빛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평생 협박을 하면 했지, 당해본 적이 없는 인생이었는데. 그 첫 번째 협박을 아주 제대로 당하고 있었다.
그때 빙궁주와 대화를 마친 북혈문주가 그곳으로 내려왔다.
그가 검무극을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너무 정중히 인사해서 양중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마교 소교주라고 해도, 아버지는 북해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사람이 아닌가?
검무극이 포권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문주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교주님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는 자신을 특별히 대하는 듯하면서도 평소 다른 누군가를 대하는 것처럼 차분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검무극은 잘 안다.
아들과 달리 그는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 검무극은 그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 이 둘째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만간 본문에서 정식으로 소교주님을 모시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북혈문주가 먼저 걸어갔고, 양중이 그 뒤를 따랐다.
그에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면 네 아버지가 될 것 같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말이었다. 이 말은 계속 그의 마음에 남아 두 사람 사이를 불편하게 하고 분열하게 만들 것이다. 검무극은 결코 그들을 편하게 해줄 생각이 없다.
양중은 화난 얼굴로 검무극을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걸어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당신은 왜 궁금해하지 않소?”
그러자 뒤쪽 건물 뒤에서 한설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아까부터 와 있었다. 일부러 숨은 것은 아니었는데, 나설 기회를 찾지 못했다.
“뭘 말인가요?”
“저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말이오.”
“왜 내가 궁금해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시죠?”
검무극이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궁금해하고 있소?”
“당연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저들의 꿍꿍이야 뻔하다고 생각했다. 더 강해지려고. 그래서 북해의 패권을 유지하고 넓혀가려고.
어차피 어머니가 해결할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어머니는 다 알고 계실 거다. 이 북해에서 어머니의 눈을 피해 음모를 꾸밀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 생각은 달랐다.
“이번에는 당신 어머니가 딸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것 같은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검무극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자, 한설은 내심 놀랐다.
검무극이 그 말을 한 이유는 이번 일의 배후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혈왕이 빙궁을 노린다면 힘을 합쳐 막아야 했기 때문에.
물론, 그녀에게 이 말을 해줄 수는 없었으니.
“빙궁주께서 내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인 건 북혈문과 일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일 거요. 북혈문주의 둘째를 구해주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았겠지요.”
한설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빙궁으로 들어왔소. 어머니는 북혈문 일을 신경 쓰실 테니 당신이 우릴 감당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소.”
정말 그래서 그 말을 했던 걸까? 이것보다는 조금 더 중요한 느낌이었는데.
“소교주께서는 본궁의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그대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한설은 어머니를 제외한 어떤 사람과도 대화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일단 그녀가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데, 누가 감히 소궁주에게 말을 길게 늘이겠는가?
한데 이 소교주는 자꾸 말을 하게 한다. 아니, 안 할 수 없게 만든다.
“왜 나를 위한다는 거죠?”
“그냥 돕고 싶어서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죠.”
단호히 말하고,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호의를 받는 것도 싫지만 받았기에 돌려줘야 하는 그 상황은 더 싫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 그 교류는 그녀에겐 독이 발린 암기를 주고받는 느낌이었으니까.
검무극이 그녀 뒤를 따라 걸었다.
“왜 따라오는 거죠?”
“숨어서 내 말을 엿듣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순간 한설이 발끈했다.
“엿듣다니요? 난 그저.”
“그저?”
“나설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가 없듯, 핑계 없는 무덤도 없는 법이지요.”
한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발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약 올리고, 사람 감정을 제 마음대로 휘젓는 이런 사람, 정말 싫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에게 빠져들 거란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들은 그저… 당신이 소교주이기에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당신이 하급 무인이었다면 그들이 당신을 좋아했을까요?”
“아마 하급 무인 주제에 말까지 많다면서 엄청 두들겨 맞았을 거요.”
한설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버럭 화를 내려다 말았다. 그럼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말로 대응할 테니까.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무인들이 정중히 그녀에게 인사했다.
한설은 한결같이 무표정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검무극이 별걸 다 간섭했다.
“원래 이렇게 수하들에게 딱딱하게 구시오?”
“우린 무인들이에요. 왜 친절을 바라죠?”
결국,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남자와는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사람들 여기 놀러 왔나요? 함께 시시덕거리다가 목숨이 걸린 위험한 임무 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나요? 명령하면 저들이 기꺼이 나갈까요?”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죠?”
“맞는 말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소?”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한설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하급 무인이 아니라 소교주여도 당신은 언젠가 흠씬 얻어터질 거예요.”
한설은 따라오지 말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검무극의 말이 들려왔다.
“우리 언제 한잔합시다! 취마님이 금주 중이셔서 내가 술을 못 마시고 있어요! 이안은 의리 지킨다고 같이 안 마셔 줄 테고.”
끝까지 저런 식이지. 금주하는 취마라니? 그리고 뭐? 그 수하는 의리를 지킨다고 안 마신다면서? 그럼 자신은 의리가 없어 보여서 마시자는 건가? 대체 사람을 얼마나 놀리려는 건지.
그렇게 그녀가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던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있는 그녀에게 평범한 방법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기에 이렇게 파고들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가 그녀의 성격을 밝게 해주고 싶다거나 마음속 구멍을 메워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와 북해빙궁의 안위 때문이다.
만약 혈왕이 빙궁에 개입해 있다면, 분명 한설에게도 암수를 뻗쳤을 것이다. 혹은 뻗치려 들거나. 지금까지 저들의 방식이 그러했으니까.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척박한 땅에 우뚝 솟은 건물들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인상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혈왕,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 잔혹한 붉은 피를 어디에 감추고 있느냐?
* * *
북해빙궁에서 내어준 방은 총 세 개였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네가 가운데 방에서 묵어라.”
“두 분께서 양쪽에서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요?”
“맛있는 국수 얻어먹으려면 지켜줘야지.”
북해빙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취마는 알아서 자신의 몸은 지킬 것이고, 옆방 정도라면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반응할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은월과 통천각에 기별했어. 가능한 모든 정보력을 북해빙궁과 북혈문에 집중해 달라고.”
두 정보조직이 힘을 합치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난 이번 일의 배후가 무림맹과 사도맹에서 음모를 꾸몄던 자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생각해.”
취마와 이안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외 풍천교에서도 암약하던 자들이었다. 빙궁에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앞서 당한 게 있으니, 더 위험한 상황이군요. 조심하세요, 도련님!”
“괜찮아, 형이 지켜줄 거야. 그렇지? 왜 대답 안 해? 내가 해결해 주마! 왜 다시 안 하냐고?”
검무극의 재촉에 취마는 딴청을 부렸다.
“아! 술 마시고 싶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안 돼!”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이안은 옅게 웃었다.
취마가 이런 사람인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언제나 취해 있어서 말이 통하기나 할까 두려웠던 사람이었는데. 화가 나면 감정에 취해 광기 어린 주사가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슬픔을 술로 이겨내리라 여겼는데.
그는 알고 있는 거다. 술 마시고 슬퍼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가 아니라는 걸.
그는 오히려 술을 끊고 차분히 세상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음을 아는 거다.
“특히 북혈문을 조심해야 해. 그들이 숨기려던 일을 우리에게 들켰으니까.”
취마의 말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북혈문에서 모든 증거를 없애고 꼬리 자르기를 하려 들지 않을까요?”
“하겠지.”
대답을 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럼 이렇게 있어도 되나요?”
“괜찮아. 꼬리를 자르려고 벌인 일이 또 다른 꼬리가 될 테니까.”
“그렇군요.”
알겠다는 듯 대답은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싸움, 아직 해본 적이 없다.
배후세력, 북혈문, 북해빙궁.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적들이 둘러싼 적진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다.
“소감이 어때?”
“떨리죠.”
하지만 그녀는 함께 싸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후 그 떨림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분 좋게요.”
* * *
다음 날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원주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한설이 세 사람을 데리러 직접 왔다.
그녀는 어제 언제 발끈했느냐는 듯 담담히 검무극을 대했다.
“먼저 돌아가신 원주님 방부터 안내해 드리죠. 궁주님께서 아직 치우지 말라고 하셔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이번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한데 빙궁주는 왜 치우지 말라고 한 것일까? 그녀와 친해서? 아니면 빙궁주 역시 그녀의 죽음에 의문이 들어서?
“그녀의 사인은 무엇이었나?”
취마의 물음에 한설이 대답했다.
“독주를 드셨습니다.”
독주란 말에 취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독살당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가 없어요. 유서를 남기셨으니까요.”
“내가 볼 수 있겠나?”
취마가 요구하리라 예상했는지 품에서 유서를 꺼내서 건넸다.
삶이 힘들다는 고백과 함께 술을 만들던 백주설원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빙궁주에게 불충을 용서해 달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유서를 읽는 취마의 서글픈 눈빛에 어떤 이채가 스쳤다.
“조사한 결과 원주님의 필체가 확실했습니다.”
“맞아, 그녀의 필체가 확실하네.”
취마도 인정했다. 누구보다 그녀가 쓴 글을 많이 본 그였으니, 적어도 다른 사람이 쓴 유서는 아니라는 의미다.
“독은 어디서 구했다던가?”
“그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자결한 것이 확실했기에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원주의 시신은 어떻게 됐나?”
“본궁의 무인들이 묻히는 무덤에 매장했어요.”
이미 매장했다면 시체에서 어떤 독이 사용되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한설은 세 사람을 원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가족이 안 계셔서 고인의 물건을 찾아갈 사람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취마는 원주의 유일한 가족이기도 했다.
그들이 함께 원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취마가 잠시 그녀를 애도했다.
‘당신을 안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이 방에는 처음 들어오네.’
방은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혼자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침상이 창가에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당신은 저 책상에 앉아서 내게 서찰을 보냈겠구나.’
그녀가 그곳에 앉아 서찰을 쓰는 모습이 취마의 마음에 떠올랐다.
책상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양조장에서 쓰는 여러 부품이나 장치들도 구석에 놓여 있었고, 작업하면서 입는 옷들도 잘 개어져 있었다.
모두가 느끼는 감정은 같았다.
정말 그녀는 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한쪽 벽에 놓인 장식장에는 수십여 개의 술병이 모여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술병이었다.
“따로 모아둔 걸 보니 귀한 술이지?”
취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모아둔 술들 사이에는 자신이 보낸 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흔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술도 많았는데, 그녀가 모아둔 진귀한 술들과 함께 모아둔 것이다.
모아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취마가 그녀의 책상 아래에서 하나의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 자신에게 받았던 서찰들을 고이 모아두었다.
‘이걸 다 모아두었구나!’
취마는 그녀가 보낸 서찰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없어진 것도 있을 테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들도 있을 테고.
한데 원주는 날짜별로 서찰을 정리해서 보관해두었다.
취마가 그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 손때가 묻어 있었다.
‘아, 이런 일이 있었지.’
정말 오래전 일이 기억났다. 자신이 이런 이야기까지 전했나 싶었던 내용이 서찰에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역사가 서찰에 담겨 있었다.
“나와 주고받았던 서찰은 가져가도 되겠나?”
취마의 말에 한설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세요.”
서찰을 가슴 속에 수북이 넣으면서도 취마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백주설원으로 가세.”
* * *
백주설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에 원료를 싣고 나르는 이들 뒤로 술을 발효시키는 곳이 보였고, 숙성시키는 곳도 있었다. 또 완성된 술을 병에 담는 이들도 있었다.
잠시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백주설원의 임시 원주를 맡은 남자가 불려왔다. 그가 죽은 원주가 가장 신임하던 인물이라 했다.
“전대 원주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시지요.”
“그녀가 죽기 전에 이상한 점은 없었소? 다른 행동을 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싸웠던 사람은?”
“원주님은 누군가와 싸우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 남자 말고도 몇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눴지만,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취마는 백주설원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만들어진 술을 조사했다. 만들어지는 술의 종류며, 제조 일정이며, 그 술이 어디로 나가는지.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네 사람은 백주설원을 나섰다.
“이렇듯 자결한 것이 명백한데 더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가 자결한 것이 확실하면 세 사람은 더는 빙궁에 머물 명분이 없어진다.
하지만 한설의 확신에 취마는 또 다른 확신을 보였다.
“자결이 아니니 본격적으로 조사해야지. 빙궁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우릴 도와주게.”
한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취마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오늘 조사에서 자결이 아니란 심증과 증거를 세 가지나 발견했네.”
“어떤 부분에서요?”
한설뿐만 아니라 검무극과 이안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가지나 된다고?
“우선 자결하더라도 독주를 마시고 죽었을 리 없네.”
“평생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니 마지막 가는 길 역시 술과 함께했을 수 있잖아요?”
취마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 같은 술꾼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술꾼이 아니라 술을 만드는 사람이라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설에게 취마가 덧붙여 설명했다.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내렸지, 자신이 만든 술에 독이 섞이는 것을 절대 허용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네. 술을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이니까.”
검무극은 그 마음을 이렇게 이해했다.
무인은 자신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 자결할 수 있겠지만, 검을 만드는 장인은 자신이 만든 검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른 이유는 뭐죠?”
“아까 백주설원의 일정을 살펴보았네. 그녀가 죽고 나서 닷새 후에 궁주전으로 들어가는 빙주가 완성되었더군. 이 극상품의 빙주는 이 시기에만 만들 수 있는 술이지. 일 년 중 백주설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한데 그 마지막 술을 완성하지 않고 자결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네.”
검무극도 이안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 역시 겉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취마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유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가린 의문이리라.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뭐죠?”
“그게 결정적인 이유지.”
취마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내게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네.”
적어도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을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 기별을 보낸 거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 달라고.”
만약 협박을 당하면서 유서를 썼다면? 죽음을 예상했다면 취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이 죽음이 자결이 아님을 취마에게 알린 것이다. 깊은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의 실수가 뭔지 아나? 저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을 죽였다.”
취마는 허리에 매달린 혈루를 천천히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취해서 미쳐 날뛰는 걸 막아줄 사람을.”
검무극은 취마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에 개입된 모두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음을.
그가 마음을 먹은 이상, 자신은 개입할 수도, 개입해서도 안 될 결정이었다. 이것은 마존의 결정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상기된 채 취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 역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다. 취마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취하지 않았기에 더욱 무서운 취마의 결심을.
검무극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느끼고 있나?’
한설이라고 어찌 취마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다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할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좋아한 여인이라면 떨어져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서찰과 술을 주고받고. 그게 전부인 관계 아닌가?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사람을 기만하고 속이는 게 인간인데, 얼굴조차 보지 않았던 관계에 대체 뭐가 있다고.
다만, 한 가지는 공감했다.
“원주의 죽음에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네요.”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빙궁에서 적극적으로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원하시는 게 뭐죠?”
검무극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취마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취마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소교주께서 결정하시게. 더 똑똑한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조금 전에 그렇게 멋지게 추리했으면서요?”
“그건 그 사람을 내가 잘 아니까 그랬던 거고.”
취마가 똑똑한 사람이란 건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취마가 검무극을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그놈들 앞으로 나를 데려다줘.
검무극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반드시 그럴게.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다른 도움은 필요 없소. 그 하나면 되오.”
한설은 궁금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하나만이라고 할까?
“소궁주께서 우리 조사단에 들어와 주시오.”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한설은 눈을 크게 떴다.
“넷이서 해결합시다!”
취마와 이안은 크게 감탄했다.
한설이 합류하면 앞으로 그녀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면 빙궁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야말로 ‘네 소원이 뭐냐?’라고 악마가 물으면 ‘널 가지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부탁에는 이안과 취마가 모르는 검무극의 숨은 의도가 하나 더 감춰져 있었다. 혈왕이 그녀를 노릴 수도 있기에 그녀를 가까이 두려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진심이오.”
한설은 거절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사람과 어울리는 일은 본능이 거부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원주가 자결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면 빙궁을 위해서라도, 흉수를 찾아내야 한다.
“지금도 돕고 있잖아요?”
“같은 편으로 돕는 건 아니지 않소?”
맞는 말이다. 이번 제안을 독단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사실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걸 자신이 꿰뚫어 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들과 한편이 된다?’
한설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저 지나치게 아름다운 수하는 물 한 잔 내어 준 아낙의 남편을 구하러 이곳 북해까지 왔다.
금주 중이라는 취마는 때때로 술과 서찰을 주고받았던 사람을 위해 복수하겠다 하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칭송을 듣는 저 사기꾼 같은 소교주는 자신에게 함께하자고 하고 있다.
한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그 행동과는 반대였다.
“좋아요, 저도 함께하죠. 단,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오.”
“일을 처리하면서 어떤 일도 제게 숨겨선 안 돼요.”
“좋소, 남김없이 다 말씀드리죠. 대신 약속하시오. 듣기 싫다고 피하면 안 되오. 귀 아프다고 하면 안 되오.”
그렇게 한설도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지금부터였다.
“그럼 당장 거처부터 옮기시오. 이안과 같이 지내시면 될 것 같소.”
“거처를 옮기라고요?”
“왜 그리 놀라시오? 이제부터 한 식구인데 당연히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생각해야지요.”
한 식구라고? 한설은 함께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다. 같은 일원이 되겠다고 허락한 것만 해도 자신에게는 큰 결정인데.
‘대체 당신, 내게 뭘 원하는 거야?’
그런 반발을 느꼈음에도 검무극은 모른 척 그녀에게 말했다.
“함께 먹고 자는 경험이 주는 힘이 있을 거요. 이번 기회에 한 번 경험해 보시오.”
한설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저 여인과 함께 잠을 자라고? 남과 한방에서 자 본 적이 없는데.
이 상황에서 검무극은 이안을 챙겼다.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결정해서 미안해.”
“아뇨, 전 괜찮아요.”
이안이 한설에게 말했다.
“제게 소궁주님과 함께할 영광을 주세요.”
취마도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내겐 중요한 일이니, 소궁주께서 한 번 양보해주시게.”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한설이 허락했다.
“좋아요, 그러죠.”
두 사람 때문이 아니다. 한설은 이제 막 검무극과 비무를 시작했다. 검무극이 말로 사람을 흔들어서 이용하는 자란 걸 반드시 증명할 거다.
“이제 뭘 해야 하죠?”
질문을 한 한설뿐만 아니라 취마와 이안도 막막했다. 이제 무슨 조사를 하지? 주위 사람들을 더 만나봐야 하나? 아니면 전장 기록이라도 살펴야 하나?
다행히 검무극은 가야 할 길 앞에 서 있었다.
“의문을 가져야죠. 왜 원주였을까? 빙궁의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여야 했을까?”
그리고 검무극은 그 해답을 한 사람에게서 찾았다. 한설 앞이기에 정중히.
“저는 그 답을 이미 마존께서 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두 여인의 시선이 취마를 향했다. 다들 놀랐지만 취마가 가장 놀랐다.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왜 죽였는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난 모르는데?”
취마는 마치 흉수로 몰린 것처럼 당황했지만 검무극은 단호했다.
“아뇨, 알고 계십니다.”
검무극이 그렇게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원주님은 백주설원 내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렇다고 강한 무공을 익힌 분도 아니십니다. 권력이나 원한, 비밀을 가진 분도 아니시죠. 그렇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왜 취마가 알고 있다고 했는지, 이 마지막 말에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분의 죽음은 분명 술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 * *
마차가 북혈문으로 들어서자 양중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는 내원 깊숙한 대전에 도착해서야 멈춰 섰다.
양중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같은 마차를 타고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할 법도 했는데.
화가 나신 거다. 양중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했다. 북혈문이 자식보다 더 소중한 분이셨으니까. 이번 일로 큰 피해를 봤으니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양중은 막상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옅어졌다.
인질 교환을 요구했을 때는 자신을 버렸지만, 그래도 북해빙궁과 거래해서 자신을 구한 아버지였다. 어쨌든 살아남았으니까 됐다.
아버지는 대전에 홀로 계셨다. 평소 그곳을 지키던 무인들을 모두 물리신 상태였다.
‘내 실수를 질책하실 생각이시다.’
수하들이 있는 앞에서 아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아버지의 배려를 느끼자 마음은 더욱 풀어졌다.
“아버지.”
아버지는 말없이 등을 돌린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등이 더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양중은 무조건 마교에 책임을 미뤘다.
“마교 놈들이 나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자 북혈문주는 차갑게 물었다.
“왜 말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실험실 위치 말이다.”
순간, 양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잊고 있었다. 붙잡혀 온 사람들이 있을 만한 장소를 모두 말해줬었다는 사실을.
‘살기 위해서 말했습니다. 인질 교환도 거절하고 저를 버리셔서, 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평소 두 사람은 이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양중은 검무극이 알려준 대로 말했다.
“놈들을 그곳으로 유인해 붙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실험실을 옮겼다면 옮긴 곳엔 분명 침입을 대비한 비책을 세우셨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놈이 널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면, 실험실이 아닌 장소를 알려줬어야지. 나는 그곳밖에 모른다. 딱 잡아뗐어야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고요, 아버지!’
양중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쯤 야단치고 끝내면 좋았을 테지만, 본격적인 질책은 이제부터였다.
“너 때문에 황수가 죽었다.”
황수는 그곳에서 실험을 진행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죽은 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이 아들이 살아난 것보다요!’
지금껏 계속 마음속에 쌓아 왔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화만 더 돋울 게 틀림없다. 아버지는 공사 구분도 못 하는 유치한 투정으로 치부하실 테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다.
“떠나거라.”
“절강에 가서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절강은 이곳에서 멀어도 너무 먼 곳이었다. 절강으로 떠나라는 말은 곧 양중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는 사실에 양중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후계 싸움을 시켰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신임을 몰아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양중은 희망을 가졌다. 자신도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정말 온갖 일을 다 했다.
북혈문을 위해서, 또 아버지를 위해서.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들을 다 했는데.
하지만 이제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꿈은 혼자 꾸었다.
“싫습니다. 저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양중은 악을 썼다. 지금껏 아버지가 무서워 제대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참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은 뭐든 다했습니다. 죽이라면 죽이고, 납치하라면 납치하고. 한데 이제 와서 떠나라고요? 싫습니다!”
‘사냥개처럼 실컷 이용해놓고. 자식이 사냥개면 아버지는 대체 뭡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해버렸어도 되었을 원망이었다.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양중의 말과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오며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피 묻은 검날을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서였을까? 아프지 않았다.
검이 사람을 관통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봤으면서, 지금 이 모습은 너무나 낯설다.
대체 누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자신을 찌른 사람은 자신이 맨 먼저 떠올린 사람이었다.
북혈문의 장남이자 그의 형인 양석(楊席)이었다.
후계 싸움을 하며 언제나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형이었으니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지금 양중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저 아버지가. 형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거다.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죽이라고 한 거다.
“……이럴 거면 왜 구하신 겁니까?”
원망 가득한 물음에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북혈문의 핏줄을 남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직 우리 손에만 죽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랬다면 인질 교환을 해줬어야지. 죽일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절강에라도 보냈어야지. 안 간다면 설득해서 보냈어야지. 수혈이라도 짚어서 보냈어야지. 아버지라면 그렇게…….
양중의 원망은 거기까지였다.
푸우욱!
검이 거칠게 뽑혔고 양중은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앞서 양중과 같이 납치되었던 주규와 황추도 이미 제거된 후였다.
북혈문주가 양석에게 말했다.
“마교 소교주가 빙궁에 머물며 이번 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연결될 만한 꼬리는 다 자르겠습니다.”
“본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니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맡겨주십시오.”
양석이 나가고 북혈문주는 죽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견딜 만한 아픔이었다. 만약 북혈문이 무너진다면 그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 *
취마는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내 속에 답이 있다.’
검무극의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누구에게 원한을 살 사람도 아니고. 음모에 휘말렸다면 분명 술과 관련될 음모일 거다.
그렇게 거닐다가 그녀와 나눴던 서찰을 꺼내서 읽었다. 그러다 또 걷다가 멈춰서서 다른 서찰을 읽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또 걸었다.
그런 취마의 모습을 방 안 창가에서 이안이 쳐다보고 있었다.
“취마님이 고민이 많으시네요.”
한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져온 짐은 풀지도 않았다.
“후회하세요? 함께하겠다고 결정하신 것?”
한설은 냉랭한 눈빛을 보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안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바깥도 심각하고 안도 심각했다. 정작 두 사람에게 이렇게 큰 고민을 안겨준 검무극은 잠시 어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때, 뒤에서 한설이 불쑥 말했다.
“그대가 속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이안이 고개를 돌려 한설을 쳐다보았다.
“소교주님께요?”
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한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에게 속아서 이용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다.
그냥 미소나 한번 지어주고 말까 하다가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괜찮지만, 검무극을 그렇게 여기는 건 또 못 참는 이안이었으니까.
“어쩌면요.”
순순히 인정하듯 말했지만, 그건 ‘검무극 바로 알게 하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속아서 저는 익혔던 무공의 부작용을 고쳤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고민이 많았던 부작용이었지요.”
이안은 부작용의 구체적인 내용까진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속아서 꿈도 못 꿨을 검술을 익혔고, 원래라면 꿈도 못 꿨을 조직의 수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속아서 평생 꿈도 못 꿨을 분의 수양딸이 되기도 했죠.”
한설은 그게 어떤 검술인지, 어떤 조직인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평생 꿈도 못 꿨을 아버지가 누군지는 궁금했다.
“누굴 말하는 건가?”
이안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비밀이 아닌 일이었으니까.
“본교 마존이신 권마님이세요.”
이안이 권마의 딸이란 말에 한설은 놀랐다.
‘이 여자가 권마의 딸이라고?’
그래서 소교주가 이 여인을 아낀 것일까? 아니었다. 지금 이안은 소교주를 만났기에 권마의 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속아서 황천각주, 마군주와는 술친구가 되었고, 차기 마존이 되려던 분은 제가 이끄는 조직의 조장이 되었죠.”
계속되는 말 어느 하나도 평범한 내용이 없었기에 한설은 이안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감히 자신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할까? 알아보면 밝혀질 일을?
“그리고 지금은 북해빙궁의 소궁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 소교주님에게 속지 않았다면 방문 앞이나 지키고 있을 인생이었는데 말이죠.”
이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고요했다.
“이 정도면 속고 사는 인생도 괜찮지 않을까요?”
비단 검무극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한데 이상하게 한설에게는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쌀쌀맞은 소궁주는 자신이 좋아할 만한 성격도 아닌데.
“믿기 어려우시죠? 가끔은 저도 안 믿겨요. 이게 꿈인가 싶을 때가 많죠. 그래서 일전에 말씀드렸던 거였어요. 한 번 믿어보시라고요. 아, 이제는 다르게 말씀드려야겠네요.”
잠시 사이를 두고 이안이 말했다.
“소교주님께 한 번 속아보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한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맑은 눈빛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취마가 방으로 다급히 들어서며 검무극을 찾았다.
“소교주는? 소교주 어딨나?”
“볼일 있으시다고 나가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취마는 약간 흥분한 상태였는데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내 속에 답이 있었어!”
난 다루에서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을 사람들은 미끄러지지도 않고 잘만 걸어갔다. 새외의 모래바람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처럼, 이곳 북해의 사람들은 눈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던 이들 중 누가 불쑥 다루로 들어와서 내 앞에 앉을지 몰랐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죽립을 눌러 쓴 이유는 나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려는 상대 때문이었다. 그는 은밀함이 생명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한 중년 남자가 내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어이구, 춥다.”
후덕한 인상의 평범한 남자는 바로 은월의 북해지부 책임자였다.
통천각과 은월의 모든 정보력이 지금 북혈문과 북해빙궁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은월에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멀리서 전음으로 전해도 될 일이었지만, 책임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따스한 차부터 한잔하시오. 고생 많으시오.”
그의 찻잔에 차를 부어 주었다. 고생하는 수하에게 술은 못 주더라도 따스한 차라도 한 잔 주고 싶어서였다.
술이면 더 좋았겠지만, 약속 장소를 객잔이 아닌 다루로 잡은 이유는 취마 때문이었다. 한설에게는 다음에 술 마시자고 말했지만, 취마가 술을 마실 때까진 나도 술을 마시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차를 따르는 동안 남자는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북혈문 이공자 양중이 죽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소식이었다. 이번 일로 양중이 후계자에서 밀려날 것은 예상했지만.
한데 죽었다고? 날 초대하겠다던 북혈문주의 정중한 모습이 떠올랐다.
‘보기보다 훨씬 비정한 자였군.’
대체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가?
죽은 이유야 얼마든지 붙일 수 있을 거다. 북혈문주 아들의 죽음이니 사인을 나서서 조사할 사람도 없을 테고.
이 보고로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북혈문이 혈왕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렇지 않았다면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이번 일을 이렇게 급히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제는 북혈문 장남의 움직임에 주목하시오.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대로 기별하겠습니다.
―고맙소.
남자가 먼저 그곳을 떠났다.
나는 잠시 남아서 남은 차를 마신 후 다루를 나섰다.
다루 문을 열고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혈문이란 이름이 운명적으로 지어졌구나.
혈왕에게 날 안내해 줄 문.
아, 혈왕아. 그거 아느냐? 북쪽 문은 저승으로 가는 문이다.
* * *
검무극이 돌아왔을 때, 취마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 사람을 왜 죽였는지 알아냈다.”
검무극이 돌아오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려고 이안과 한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마존께서 알아내실 줄 알았습니다.”
검무극은 한설 앞에서는 취마를 형이 아닌 마존으로 대했다.
이제 모두가 모이자 취마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밝혔다.
“우선 술과 관련한 내용이 확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근에 그녀와 주고받은 서찰을 살폈네. 나눈 대화들 대부분이 술과 관련한 이야기들이었지.”
원주가 모아둔 서찰이니 당연히 읽은 것은 자신이 보낸 서찰이었다. 그래서 단서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러다 이런 대목을 발견했지.”
취마가 한 구절을 보여주었다.
―나도 향설빙주(香雪氷酒)를 마셔보고 싶소.
향설빙주는 검무극과 이안은 처음 듣는 술이었다. 반면 한설은 향설빙주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향설빙주는 그냥 평범한 술이 아니라 특별한 효과를 지닌 술이에요.”
“무슨 효과요?”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술이지요. 원래도 술을 마시면 몸이 뜨거워져서 추위를 덜 느끼지만, 이 향설빙주는 그 효과가 대단하죠.”
취마 역시 향설빙주의 효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향설빙주란 말을 보는 순간 떠오른 한 가지 사실.
“이번에 놈들이 찾으려고 한 체질이 극한지체였잖아?”
극한지체와 향설빙주. 둘 다 추위를 버티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교롭지 않나?”
검무극과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만으로 원주께서 죽었다고 하기에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나요?”
“맞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한 취마는 다른 결정적 이유를 보탰다.
“내가 알기로 향설빙주는 빙궁의 허가를 받아야 만들 수 있는 술로 알고 있네.”
“맞아요. 특별한 효능이 들어간 술은 궁의 허가를 받아야 하죠.”
“한데 아까 백주설원에서 지난 술 제조에 대해 살폈을 때, 향설빙주에 대한 것은 없었네.”
“없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확실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은밀히 만들어 준 거로군요.”
검무극의 추측에 취마도 동의했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렸다는 것은 그 술이 나쁜 곳에 쓰일 거란 생각을 전혀 안 했다는 거지. 아마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 부탁했을 거야. 믿을 만한 사람이었겠지.”
그녀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누가 만들어달라고 했는지 그분이 말했습니까?”
취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거기까진 말해주지 않았네. 향설빙주를 처음으로 만들어봤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고, 나는 마셔보고 싶다고 답을 했었지.”
“그 구절만으로 답을 찾아내다니. 대단하십니다.”
검무극이 취마를 칭찬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칭찬했다. 확실히 취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술을 안 마시니 머리가 쌩쌩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야!”
취마의 농담에 미소 지으며 검무극은 한설을 바라보았다.
한설은 검무극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보죠, 누가 향설빙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지.”
대답은 했지만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궁의 허락도 없이 만들었다면, 그 과정을 철저히 숨겼을 텐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을까?
“이안과 함께 움직이시오.”
검무극의 제안을 한설은 거절했다.
“혼자 조사하는 게 더 편해요.”
함께 한방에서 자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낮에도 함께 돌아다니라고? 싫은 일이다.
“알고 있소.”
“한데 왜 이러시죠?”
“그대가 위험할까 그렇소.”
한설은 물론이고 이안과 취마에게도 뜻밖의 이유였다.
“빙궁에서 소궁주인 제 안위를 걱정하는 건가요?”
그러자 검무극이 조금 전에 알아 온 소식을 전했다.
“양중이 죽었소.”
가장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가 죽었다고요? 왜요?”
“북혈문주에겐 그도 꼬리였나 보지.”
그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그 많은 사람을 속여서 데려온 후 실험으로 죽인 자니 죽어 마땅한 자였다. 하지만 그를 죽인 사람이 아버지란 사실은 놀라웠다.
한설도 놀랐지만, 그녀의 놀람은 양중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자신보다 먼저 검무극이 알고 있다는 점 때문에 놀랐다.
‘우리보다 정보력이 더 좋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북해에서? 어머니는 이 소식을 알고 계실까?’
검무극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한설에게 경고했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오. 북혈문주의 자제가 북혈문 내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게 이번 싸움의 본질이니까.”
확대해서 말하면 북해빙궁 내에서 빙궁주의 혈육이 죽을 수도 있는 싸움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이안과 함께 움직이시오.”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한설은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느꼈다.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강제였다.
“그러죠.”
한설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빙궁주의 딸로 살아오면서 이런 긴장감을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말도, 전음도, 고개를 끄덕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알아서 잘할 테니까. 눈빛 한 번 마주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두 여인이 방을 나서자 이제 검무극과 취마만 남았다.
“놈들은 극한의 한기를 버틸 방법을 찾고 있어. 왜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공이라도 익히려는 걸까? 아니면 북해빙궁과 관련된 음모를 꾸미려는 걸까?”
취마의 물음에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 곳이 있어. 형은 은밀히 이안과 소궁주를 지켜줘.”
“갑자기 어딜 가려고?”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추위에 대비하려고.”
“무슨 말이야?”
궁금해하는 취마를 남겨두고 검무극도 방을 나섰다.
“대답해 주고 가! 어서! 나 술 안 마셔서 예민하다고 했지?”
* * *
대답해 주고 싶어도 절대 알려줄 수 없는 일이었다. 회귀 전 인생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러 온 것이니까.
쾌속보로 순식간에 날아온 곳은 설산이었다.
그 넓은 설산 중에서도 가장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곳, 대풍곡(大風谷)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바람이 분다는 이곳.
휘이이이이이이이잉.
골짜기 사이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바람이 불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조차 통과할 수 없다고 알려진 바람 계곡이었다. 인간의 뼈와 살을 찢어발기는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거기에 바람에 눈까지 휘몰아쳐서 시야까지 잘 보이지 않았다.
북해 사람들은 이곳의 바람을 광살풍(狂殺風)이라고도 불렀다. 말 그대로 정말 미친 바람이었고 죽음의 바람이었다. 어찌나 차갑고 매서운지 내공을 일으켜서 몸을 보호하더라도, 계곡을 통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
놈들이 한기에 대비할 방법을 찾는다는 추리를 듣고 나자 나는 비로소 이곳에 와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회귀 전, 대법 재료를 찾아 헤맬 때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이런 곳을 만나면 오히려 더 악착같이 들어갔다.
이곳까지도 왔었으니까.
어휴, 정말 그 인생은 다시 살 자신은 없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을 뚫고 계곡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면 갈수록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바람은 호신강기조차 찢어발겨 버릴 것처럼 매섭게 불었고,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도 내력을 사용해야 했기에 안으로 들어가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여기쯤이었는데.’
그렇게 들어가다 오른쪽 벽에 난 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바깥의 바람을 피해 아주 잠깐 몸을 숨길 수 있을 공간이었다.
그때의 자신도 이렇게 몸을 숨겼다.
아마 운명이었을 거다. 이 틈의 끝 모서리에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은. 워낙 구석구석 살피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눈으로 봐선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또 다른 틈이 있었다. 굵은 넝쿨로 막힌 곳 뒤에 있는 좁은 틈이었다.
전혀 들어가고 싶지 않게 생겼다. 들어가다 끼여서 딱 죽기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그곳을 계속 들어갔다.
그곳을 모두 통과하자 조금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그곳은 햇살이 들어오고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바깥은 칼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곳은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태고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
“오랜만이구나.”
그 가운데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 열려있는 하얀 열매. 마치 얼음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영약.
만년설과(萬年雪果).
만년설삼보다 훨씬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으면서, 거기에 기가 막힌 효과가 하나 더 있었다.
추위에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차가운 속성의 어떤 기운이라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극도로 차가운 내공이 실린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빙장(寒氷掌)에 적중당하더라도, 그 한기에 혈맥이 상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한빙장을 익히는 것도 누구보다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예전 독왕에게서 얻은 천기단으로 한서불침(寒暑不侵)의 신체가 되었는데, 이 만년설과는 추위를 막는 데 있어서 특화된 영약이었다. 만약 두 영약이 중첩된다면 한계를 넘는 극한의 추위조차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회귀 전 삶에서는 만년설과를 복용하지 못했다.
만년설과에 담긴 한기가 워낙 강했기에 그냥은 복용할 수 없었다. 욕심을 부려 복용하는 즉시 혈맥이 얼어붙을 것이다. 아마 빙한신공(氷寒神功)을 대성한 빙궁주나 복용할 수 있는 영약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만년설과를 두고 가면서 했던 말을.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만나자.
그땐 회귀해서 이곳을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이제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내공을 얻었고, 혈맥은 튼튼해졌으며, 무엇보다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뤘기 때문이다.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이 만년설과가 내뿜는 한기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거라 믿었다.
이 믿음이 조금이라도 모자란다면 만년설과를 복용하면 안 된다. 큰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게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에 이곳을 발견했고,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었고, 적은 극한지체를 찾아내서 이용하려 하고 있고.
운명이 내게 말하고 있다.
이제 만년설과를 복용할 때가 되었다고. 아니, 반드시 그걸 복용해야 한다고.
운명과 함께 본능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극한의 한기에 대비한다면, 나 역시 대비하겠다.
‘천마호신공아, 너만 믿는다.’
만년설과를 손에 잡는 순간, 온몸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움이 전해져왔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만년설과는 그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먹으면 죽는다고.
난 망설이지 않고 만년설과를 복용했다. 그것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난생처음 느껴보는 한기를 느꼈다. 딱딱해서 쉽게 녹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녹으며 극한의 한기가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천마호신공은 발동해서 차가운 한기에 대항하고 있었다.
스스스스스스스슷.
비명이 절로 나올 차가움이었다. 정말 이렇게 차가운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했음에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이 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리고 싶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만년설과의 기운을 녹이는 내내 나는 구화마공의 구결을 외우며 악귀들을 떠올렸다. 동서남북을 떠올렸고, 환상에서 보았던 천마혼들을 떠올렸다.
구화마공, 천마호신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것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나를 보며 비웃는 그 모습을 떠올렸다.
효과는 있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놀랍게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으니까.
참고, 또 참고.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년설과의 기운을 모두 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많은 양의 내공이 단전에 보태졌고, 무엇보다 내가 원한 바를 이루었다. 만년설과의 차가운 기운이 혈맥 곳곳에 영구적으로 서렸다.
이제 만년설과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내 몸에 침입한다면 모를까, 그 어떤 차가운 기운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놈들에게 대항할 또 하나의 무기가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기뻤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해지는 거다.
“이 힘은 반드시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만년설과 나무에게 두 손을 모아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좁은 통로를 지나 광풍이 푸는 계곡으로 다시 나왔다.
휘이이이이이이잉.
엄청난 바람이 나를 엄습했다.
내력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지 않았음에도 살을 에는 바람이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광살풍은 이제 내게 춘풍이자 훈풍이 되었다.
회귀 전에는 이대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더는 계곡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나는 궁금했다.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렇게 난 바람의 근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설과 이안은 빙궁 내원을 함께 걷고 있었다.
한설은 원주가 향설빙주를 누구에게 만들어 주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 막막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이건 명석함과 우둔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험의 문제였다.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우선 백주설원부터 다시 가보죠.”
이안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정중해졌다. 지금까진 소교주의 수하로 대했지만, 이제는 권마의 딸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양딸이라고는 하지만 마존의 딸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좋은 생각이세요.”
“어째서죠?”
“돌아가신 원주님의 방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분은 정말 술 만드시는 일을 좋아하셨던 분이셨구나. 아마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백주설원에 있던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찾아야 할 답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안의 말에 한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명석하구나.’
이번에 검무극과 취마, 이안은 마인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쉈다.
마인들은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욕망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이들 셋은 기존에 생각했던 소교주도, 마존도, 수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인들에게 질 수는 없지.’
취마가 서찰을 조사해서 단서를 찾아냈으니, 자신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 소교주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을 압도하는 딸의 모습을. 살면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녀인데, 어머니에게만큼은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다시 오셨군요, 소궁주님.”
백주설원의 임시 원주가 두 사람을 반겼지만, 한설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한설은 그곳에서 술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를 담당하는 인물인 조명(曺銘)을 만났다.
조명은 한설의 방문에 잔뜩 긴장했다.
“그대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바쁘실 테니 돌려 말하지 않겠어요. 죽은 원주께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요구하신 적이 있나요?”
“아뇨, 없으십니다.”
긴장해서인지 조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중요한 일이니 나를 속여선 안 됩니다.”
한설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자, 조명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이안이 나섰다.
“아마 원주님과 약속했을 거로 생각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고개 숙인 조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린 그 술 때문에 원주님이 돌아가신 거로 추측하고 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조명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원주님을 죽게 한 자들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조명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에는 죽은 원주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이리라. 그는 눈도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속이는 그런 유형이 아니었다.
조명이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 술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안의 말을 소궁주가 받았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원주의 죽음을 다시 살필 일은 없을 거네.”
다소 차가운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조명은 더는 숨기지 않고 사실을 밝혔다.
“조용히 저만 불러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귀한 사람이 은밀히 청한 술이라고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보낸다고 했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
“평소 원주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있었나?”
“특별히 말씀드릴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 혼자 계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더는 물어볼 것이 없었기에 한설은 질문을 멈췄다.
“술 재료에 손을 대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징계를 받을 거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평소 원주를 존경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랬으니 은밀히 재료를 내어준 것이겠지.
이안은 솔직히 말해준 그를 따스하게 위로했다.
“원주께서도 틀림없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이안은 그를 벌주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있다가도 괜히 말을 꺼내는 바람에 벌을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마인답지 않게 사람들에게 다정하군요.”
그러자 이안이 물었다.
“이 무림에선 비정한 사람과 다정한 사람,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그야 당연히.”
한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답은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전 다정한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믿는 쪽이라서요.”
다정함이라? 한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다. 다정함을 받아 본 적도, 남을 다정하게 대한 적도 없다.
어쨌든 한설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비정강호에서 다정함 타령이라니?
그때 조명이 그들에게 뛰어와 말했다.
“조금 전에는 너무 긴장해서 생각이 안 났었는데, 원주님께서 서 장로님과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셔서, 기억에 남습니다.”
조명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한설에게 말했다.
“이것도 다정함이 만들어 낸 결과죠.”
그녀의 농담에도 한설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서 장로란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음을. 이안이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절대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이 소궁주님의 조건 아니었나요?”
너는 숨기지 마라, 나는 숨길 테니까. 이런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안의 눈빛까지 이렇게 묻자 결국 한설은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서 장로는 어머니가 가장 믿는 분이에요.”
서 장로는 빙궁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빙궁주의 가장 큰 조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주가 안심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줬을 수도 있겠네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만들어줬을 거란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서 장로는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향설빙주가 그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서 장로라고?
어머니가 아는 일이라도 문제고, 모르는 일이라도 문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서 장로는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 * *
휘이이이이잉.
바람은 점점 강해졌지만 계속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곳을 걷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바람의 세기도 세기였지만, 바람에 실린 무시무시한 한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차가움이었기에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내공 소모가 엄청났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쓰는 내공, 한기를 막는 데 쓰는 내공. 내공이 이중으로 들어야 했으니까.
반면 지금 나는 한기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바람의 세기만을 신경 쓰면 되었다.
이미 천기단으로 한서불침이 된 상태에서 만년설과까지 복용하자 그 효능은 정말 신비로울 정도로 놀라웠다. 피를 얼려 버릴 정도로 매서운 이 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쉽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바람은 무지막지해졌다. 걸을 때마다 바람 소리가 달라진다.
장담할 수 있다.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곳을 지나갈 수 없음을.
나도 선택받은 사람이다.
회귀한 후 정말 많은 내공을 얻었고,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을 익혔다. 게다가 만년설과까지 복용한 상태다. 그런 나도 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대체 누가 이곳을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이 극한지체를 왜 찾은 걸까?’
어쩌면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였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었는데, 그래서 가보려고 한 이유도 있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그건 확실히 아니다. 분명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이제 딴생각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강하게 불었다.
내가 가진 내공과 끝까지의 거리. 점점 강해지는 바람 세기. 이 모든 것을 계산했다. 무작정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공을 아끼려다간 그냥 날아가 버릴 상황이었다. 거기에 힘이 빠져서 날아가 버릴 때,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내공까지 계산했다.
그렇게 계산된 내공만을 사용하면서 걸었더니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바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플 줄이야.
하지만 내공을 더 끌어올려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고통을 참아내야 저곳까지 갈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내공이 더 들었다. 내공을 일으켜 고막을 지켜야 했다.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칠 정도였다. 그렇게 소모된 내공은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굳이 저곳을 왜 가려고? 이러다 내상이라도 입으면?’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끝없이 나를 유혹했다.
아마 회귀 전의 인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게 나아가지 못했을 거다.
그땐 너무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었다. 포기하자. 인간이 어찌 회귀할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내 인생 살자.
그 끝없는 유혹을 이겨냈고, 그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보았기에.
‘이 길도 걸을 수 있다.’
걷고 또 걷고.
단전 속 그 많던 내공이 어느새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 순간에는 바람 소리가 사라지며 주위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환각 증상인가? 이러다 주화입마에 빠지면 큰일인데?
만약 그런 전조현상이라면 당장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것이 마지막 유혹이었다.
나는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유혹을 이겨낸 것은 묵묵히 내디딘 그 한 걸음이었으니까.
고오오오오오오오!
유혹을 이겨내는 순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바람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렇게 난 드디어 바람의 근원에 도달했다. 바람의 세기가 극에 달했다. 아껴둔 내공을 모두 이용해서 호신강기와 천마호신공을 극한으로 발휘했다.
‘다 왔다! 여기만! 제발!’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이겨내며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 계곡을 통과하고 옆으로 몸을 틀어서 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그 엄청난 바람 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냈다!”
살았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금방 빠져나온 계곡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불었으면 바람의 물결이 눈으로 보였다.
바람의 근원은 하늘이었다. 저 멀리 비스듬히 하늘에서 내려온 바람이 계곡을 향해 맹렬히 불어닥치고 있었다. 마치 악마가 세상의 모든 공기를 입으로 빨아들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하고 낯설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 도달한 그 자체가 바로 그 어떤 기연보다 더 큰 기연이었음을.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면서 내가 가진 모든 내력을 발휘했다.
무인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발휘했다. 잠재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긴 없이 쓰고 나자, 무인으로서의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학의 경지가 올라간 느낌을 받았다. 나란 사람이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묘한 경험이자 느낌이었다.
평생 처음 느껴본 이 경험은 분명 구화마공에도 영향을 미칠 것임을 확신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악마의 입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뒤쪽으로는 거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너무 높아서 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설산의 줄기가 반대 방향을 모두 막고 있었다. 마치 저 바람 계곡을 뚫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는 곳처럼.
그 앞으로는 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토끼와 사슴이 나를 봤지만 달아나지 않았다. 인간을 처음 본다는 눈빛이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을 들인 적 없는 태초의 신비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모든 것의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을.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그는 노인이었다. 이런 곳에 노인이라니?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그분은 아니겠지?
“어르신?”
조심스럽게 노인을 불렀다. 그러자 노인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회귀시켜준 바로 그 노인이었다.
“어르신!”
노인이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술 한잔하자고 했잖나?”
노인이 나를 회귀시키기 직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노인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저 금주 중입니다만. 일부러 이때 온 거죠? 나 놀리려고.”
노인이 껄껄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보다 많이 밝아졌구먼.”
“덕분입니다.”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지? 잘하고 있네.”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남들에게는 온갖 표현을 다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지만.
나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니 잘하고 있다고 그 한마디만 해달라고. 그 한마디만 들으면 된다고.
“금주 중이니 술은 다음에 하세.”
“벌써 가시려는 거요?”
“알다시피 날 찾는 사람이 많아서 아주 바쁘다네.”
그래도 또다시 만나러 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휘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노인은 바람과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주위에 있던 낙원 같았던 풍경도 모두 사라졌다. 나무와 풀과 동물들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주위는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갔기에 꿈만 같았다. 헛것을 봤나?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심력과 내공을 모두 써버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손길은 너무나도 생생했으니까. 그를 다시 봐서 너무 반갑고 좋았다.
요 며칠 하늘 올려다보는 것을 잊고 지냈더니 이렇게 직접 보러 오셨소? 나도 자주 올려다볼 테니, 부디 끝까지 지켜봐 주시오. 만날 바쁜 척은 그만하시고. 그리고…… 정말 고맙소.
난 바람 계곡을 그냥 떠나지 않았다.
여길 얼마나 힘들게 들어왔는데 그냥 가나?
우선은 계곡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이렇게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곳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곳을 안가로 삼으면 최고가 될 것이다. 은밀한 건 둘째치고, 설령 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지킬 사람을 이곳에 데리고 들어오려면 지금보다 훨씬 내공이 많아야 하겠지만.
언젠가 이곳을 편하게 들어올 수 있을 경지에 이른다면, 이곳에 별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곧장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구화마공을 한차례 펼친 후에 이곳을 나가려는 것이다. 이곳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내 잠재력을 모두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었고, 그 성취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임에도 시공이환술을 펼친 이유는 이곳 내부를 보호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시천비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내게 내공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곧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목숨이었으니까.
시공이환술 속에서 구화마공을 펼쳤다. 처음부터 익힌 곳까지 한차례 정성껏 초식을 펼쳤다.
제일식 인멸식.
사아아아아악!
적이 보기에는 너무나 섬뜩하고 무시무시하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친근한 네 악귀의 환영이 동서남북 동시에 나타나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그리고 오늘의 인멸식은 이전과 또 달랐다.
이전의 성취에서 동서남북 네 악귀가 빠르고 강해졌다면 오늘은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곧장 사라지지 않고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서운 녀석이 잘생긴 녀석을 쳐다보았고, 신비감을 주는 녀석은 영리해 보이는 녀석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진 그저 본능이 느껴졌다면,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정말 일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들 넷이 쑥덕대는 느낌!
그 느낌은 확실했다.
그들 중 영리해 보이는 녀석이 사라지기 전에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녀석의 눈빛에 헤어짐의 아쉬움이 느껴졌으니까.
동서남북 네 악귀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그들에게 말했다.
“반갑다.”
동서남북 네 악귀가 조용히 사라져서 결국 혼잣말이 되었지만, 처음으로 그들에게 한 인사였다. 또다시 천마혼에게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제이식 대멸식을 펼쳤다. 대멸식만 봐도 내 구화마공의 경지가 올라갔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스스스스스스.
원래는 동서남북 중 무섭게 생긴 악귀가 여덟 개로 분열했는데 이제 또 둘이 더 늘어서 열 개로 분열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열 개의 악귀가 전방에 있는 모든 걸 휩쓸며 밀고 나갔다. 언제 펼쳐도 화끈한 대멸식이다.
제삼식 대마벽.
강기의 벽이라고 다르겠는가? 대마벽은 또 작아졌다. 대마벽은 그 크기를 줄이면서 나에게 성취를 축하해 준다.
그리고 제사식.
암흑일섬(暗黑一閃).
암흑이 내려앉았다. 이전의 암흑보다 더 깊고 무거운 암흑.
쉬이잉.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 가로질렀다.
이전의 일섬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어둠은 더 깊어졌고, 빛은 더 밝았다.
아직 제오식은 시도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아갈 때가 아니라 얻은 성취를 가다듬을 때임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나는 이 성취가 노인의 선물이라 여겼다. 회귀하고서도 열심히 잘하고 있다고 내게 준 선물.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가 나를 이끈 덕분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소.”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래서 설령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내 최선이었으니 아쉬울 게 없다.
오직 그럴 때만이 복수를 꿈꾸지만,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복수에 잡아먹히지 않고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곳을 떠날 땐 힘들게 수련하지 않았다.
바람의 근원에서 극한의 내공으로 버티다가.
“나 이제 간다아아아아아아아아!”
버티는 힘을 풀고 미친 바람에 몸을 싣고 입구 쪽을 향해 날아갔다. 신나게 날아갔다.
바람이 그리워지면 다시 찾아오리라.
* * *
한설은 고민에 빠졌다.
서 장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그녀는 심각해졌다.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자, 빙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니까.
눈치 빠른 이안은 그녀의 고민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지 짐작했다.
‘빙궁주가 개입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믿지 못하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안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존재가 떠올랐다. 있어도 힘들고, 없어도 힘든 그 이름이.
이안은 감정을 다스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빙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우선 서 장로님을 만나 뵈어야겠어요. 거긴 저 혼자 다녀올게요.”
“평소에 그분을 자주 찾아뵈었나요?”
한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틀림없이 의심할 거예요.”
“차라리 이러이러해서 조사하러 나왔다고 한다면요?”
그래서 뭔가를 알아내면 다행인데. 이안이 걱정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혹시 상대가 거짓말하면 눈치챌 수 있나요? 저는 자신 없거든요. 더구나 상대가 장로시라고.”
한설이라고 어디 특별히 잘 알아차리겠는가?
“만약 서 장로가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으면 틀림없이 거짓말을 할 텐데, 그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 들키는 셈이잖아요? 본격적으로 싸워보기도 전에 우리 패만 뒤집히는 거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죠?”
이안이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소교주님께 알리죠.”
한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들의 힘으로 서 장로까지 알아냈는데 벌써 포기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이번 일의 전모를 모두 다 밝혀내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이안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번 일에 서 장로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은 것만으로도 소궁주께서는 큰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원래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제안이었다.
“그대 소교주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믿나요?”
“네, 저는 믿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지금까지 많이 보여주셨거든요.”
한설은 잠시 고민했다.
“좋아요, 일단 돌아가죠.”
서 장로와 관계된 일이기에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거기에 마교 소교주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렇게 기세 좋게 거처로 돌아와 취마에게 검무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자.
“소교주는 외출하셨네.”
이럴 때 좀 계시지. 우리 소교주님만 믿으시라, 하고 거처로 돌아왔는데. 하필 지금 또 없으시네.
이안은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가셨겠죠.”
그러자 취마가 장난기를 발휘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했다.
“추위에 대비하러 간다던가?”
“네?”
“그 말만 하고 나갔네.”
“옷이라도 사러 가셨나?”
말해 놓고도 자신의 대답이 궁색한 이안이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한설을 돌아보았다.
“지금 바로 서 장로님 만나러 갈까요?”
이안의 농담에 한설이 웃었다.
“어? 지금 웃으셨어요.”
한설이 정색하며 말했다.
“비웃음도 웃음에 들어가나 보죠?”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비웃음도 웃음이지. 심지어 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비웃음을 알고 있소.”
돌아보니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안이 반갑게 소리쳤다.
“소교주님! 어딜 다녀오셨어요?”
“바람 쐬고 왔다.”
정말 평생 쐴 바람 다 쐬고 왔다.
* * *
반 시진 후, 서 장로의 거처에 방문객들이 있었다.
“소궁주가 마교 소교주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음에도 서낙(徐洛)은 놀라지 않았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검무극과 한설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무극입니다.”
“중원을 진동한 소문의 주인공을 드디어 뵙게 되는구려.”
두 사람이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눴다.
서낙은 인자해 보이는 미소와 말, 그리고 행동에 기품이 있었다.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좋은 말로 용서할 것 같은 따뜻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도 그는 빙궁은 물론이고 북해의 무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백주설원 원주의 죽음을 조사한다고요?”
“네, 궁주님께 허락을 맡았지요. 소교주이기 이전에 무림의 후배이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검무극도 서낙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만남의 시작은 좋았다.
“아쉬운 사람이었네.”
“원주님과 함께 술을 마셔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툭 던진 검무극의 질문에 오히려 한설이 긴장했다. 백주설원의 조명은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술을 마셨다고 했는데. 과연 진실을 말할 것인가?
“몇 번 마신 적이 있지. 그래봤자 술 이야기만 주로 해서, 원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네.”
서낙은 있던 사실을 속이지 않았다.
“원주님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그분께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낙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혹시, 나를 조사하러 온 건가?”
“그러면 안 됩니까?”
도발적인 되물음에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내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긴장을 풀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원주님 주변 사람들부터 조사해야겠다고 하니, 여기 소궁주가 그랬습니다. 그 주변 사람 중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궁주님이시고, 다음이 서 장로님이시라고요. 그래서 먼저 찾아뵌 겁니다. 먼저 흉수에서 제외하려고요.”
서낙이 사람 좋게 웃으며 한설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한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청을 잘 꾸며두셨군요.”
검무극이 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그 앞에 놓인 장식장을 구경했다. 그곳에는 갖가지 장식품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낙은 한설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인자한 미소로.
어려서부터 그를 숙부처럼 여기며 커왔다. 어머니가 빙궁주 자리에 오를 때에도 서 장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고. 막상 이곳에 와서 그의 얼굴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닌데.’
원주가 서 장로와 술자리를 여러 차례 가졌다는 증언을 들은 거지, 그가 술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원래라면 자신은 서낙 옆에 서서 검무극을 보고 있어야 했다.
마인들이 여기서 뭐 하느냐고. 한데 지금은 마인들과 함께 그를 의심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막연히 생각할 때는 서 장로가 의심스러웠는데, 막상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직접 볼 때와 아닐 때, 사람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
“북혈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검무극은 여전히 장식장에 놓인 물건들을 구경하며 물었다. 무례한 태도에 한설이 한마디 하려는 것을 서낙이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는 전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무슨 소식 말인가?”
“그쪽 둘째가 사람들을 유인해서 위험한 실험을 했습니다.”
“듣지 못했네.”
“그러시군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실험인지 안 물어보시는군요?”
“뻔하지. 그 둘째야 워낙 별난 사람이니까.”
“그렇더군요.”
검무극은 대화를 잇지 않고 장식장의 장식품들을 만졌다. 한설은 검무극에게서 이안이 말한 특별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초월적이라고? 무례한 것만큼은 초월적이군.
“더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역시 마교는 마교구먼. 인사만 하는데도 이렇게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걸 보니.”
“죄가 없으신데 긴장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한설이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으면 또 오게. 언제든지 협조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한설과 함께 문으로 걷던 검무극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며 불쑥 물었다.
“참, 향설빙주는 어디에 쓰셨습니까? 추운 곳이라도 가셨습니까?”
놀란 사람은 한설이었다. 갑자기 검무극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서낙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향설빙주라니? 그걸 왜 내게 묻나?”
“원주님께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난 받은 적 없네.”
너무 자연스럽게 반응해서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다 검무극이 한 번 더 돌아서며 물었다.
“또 묻지 않으시네요? 향설빙주를 줬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보통 궁금해하지 않나요? 누군가 자신에 대해 없는 말을 하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받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서낙은 묻지 않았지만 검무극이 알려주었다.
“원주께서 취마님께 보낸 서찰에 향설빙주를 서 장로님께 드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원주가 왜 그런 말을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향설빙주를 받은 적이 없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이 대청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그곳을 벗어나자 한설이 물었다.
“왜 그런 거죠?”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이것저것 찔러본 거요.”
“거짓말은 당신이 했죠.”
원주가 취마에게 서 장로를 언급한 적은 없었으니까.
“거짓말까지 해서, 서 장로님의 거짓말을 알아냈나요?”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었소.”
“서 장로께서는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검무극이 순순히 인정한 것은 다음 말을 위해서였다.
“다만, 한 가지는 이상했소.”
“뭐죠?”
“오늘 우리가 만난 후, 서 장로가 화를 낸 순간이 딱 한 번 있었소. 언제인지 아시오?”
“당신이 무례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언제죠?”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장식장 위의 물건들을 움직여 흐트러뜨렸을 때였소.”
한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서낙이 화를 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화 내내 은밀히 기를 발출해서 서낙의 감정을 세심히 살핀 검무극만이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 장식장 보셨소?”
“아뇨.”
“먼지 한 올 없고, 올려진 물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맞춰서 세워져 있었소. 강박증이 느껴질 정도였지.”
“시비들이 깨끗이 치우나 보죠.”
“그게 더 문제요.”
“무슨 뜻이죠?”
“주인이 얼마나 무서우면 그렇게까지 깨끗이 치우겠소?”
문제는 그게 시비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 장로가 장식장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내가 장식품들을 흐트러뜨렸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
검무극은 그 일로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인자한 모습과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모습을.”
한설은 내심 감탄했다. 자신은 그 오랜 세월 봤어도 알지 못한 사실을 검무극은 그 짧은 시간에 파악해 낸 것이다.
왜 이안이 소교주에게 알리자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례한 행동도 모두 계산된 것이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결국 성격일 뿐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상반된 성격이 의외긴 해도, 이번 일의 배후임을 입증할 증거는 아니었으니까.
“맞소. 그래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어떻게요?”
그 역시 한설은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이번에는 물건 말고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 보는 거요.”
한설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서낙의 주위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사람은, 살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과연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흔들 수 있을까?’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과 한설은 서낙을 만나서 있었던 일을 취마와 이안에게 전해주었다.
검무극의 말이 끝나자 한설이 이안에게 말했다.
“우리가 처리하지 말고 소교주께 맡기자는 의견은 좋은 판단이었어요.”
그녀가 검무극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초월적인 존재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장난기를 담은 검무극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수장에게 일거리를 떠넘기는 수하라니?”
“그럴 때는 모른 척 넘어가 주시는 것이 좋은 수장이랍니다.”
“어렵다, 수장으로 살기도.”
“소교주님이 어렵게 사시는 거죠. 다른 수장들은 다들 쉽게 삽니다.”
한설은 여전히 이런 대화가 낯설었다. 수하와 이런 편한 관계는 분명 큰 부작용이 따를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서 장로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은 솔직히 대답했다.
“가장 가까운 분은 궁주님이시죠.”
“내일 궁주님과의 자리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대신 내일 자리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왜죠?”
검무극은 뜻밖의 이유를 댔다.
“자식이 있는 자리에서는 궁주가 아니라 부모가 되기 때문이죠.”
한설은 검무극이 아직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자식은 절대 모르는 부모 마음도 있는 법이니까요.”
“소교주는 어떻게 부모 마음을 알죠? 아직 혼인도 안 하신 분이?”
이런 물음에 대답이 궁색할 검무극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을 부모로 두면, 부모에 관해 열심히 연구하게 되죠. 부모란 무엇인가!”
검무극은 자신의 말에 취마가 웃는 것을 보았다. 다들 아버지를 겁내고 신경 쓰지만 취마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할 거란 오해는 풀어서 다행이지.
검무극이 차를 마시는 취마에게 다가가서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소교주, 뭐 하시는 건가?”
“취마님과 차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전자에 차 대신 술이 들어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그 말과 함께 빈 찻잔에 검무극이 차를 부어서 마셨다.
“왠지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차 맛이 나는 술 아닙니까?”
“차도 마시다 보니 좋다네.”
“그래도 잘 참으시네요?”
“알잖나? 사람 몸만큼 신비한 놈도 없다는 걸. 언제 술을 그렇게 마셔댔냐는 듯, 벌써 몸이 차에 적응하고 있다네.”
“그거 말고요. 확 가서 다 엎어버리고 싶은 걸 잘 참는다고요.”
취마가 차를 쭉 마시고 말했다.
“오래는 못 버티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취마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이안과 한설은 알 수 있었다. 취마는 술을 참는 게 아니라 분노를 참고 있음을.
검무극이 창밖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마존이 아니라 형으로 대했다.
“곧 끌어낼 거야. 악인들이 숨어 있기에는 이곳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니까.”
모두 검무극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새하얀 세상을 잠시 쳐다보았다.
혈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검무극은 저 하얀 세상이 피로 덮이는 상상을 잠시 했다.
그래도 괜찮다.
곧 새하얀 눈으로 다시 덮일 테니까.
* * *
빙궁주는 다과로 나를 대접했다.
“천마신교의 후계자와 한자리에 앉는 것은 처음이라네.”
“영광입니다.”
“자, 들지.”
망설이지 않고 차를 마시자 빙궁주는 의외란 눈빛을 보냈다. 소교주인데 어찌 독을 확인하지도 않고 마시느냐는 의미.
“오기 전에 궁주님에 대해 조사도 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난 어떤 사람이던가?”
“총명하고 영민한 분이시더군요. 지금부터 반백 년이 흘러 치매가 와도 적어도 천마신교에서 온 소교주에게 독을 타서 먹이진 않으실 분이시죠.”
빙궁주가 옅게 웃었다. 지금 나이가 이삼십대로 보인다는 칭찬임을 알아들은 거다.
“나도 자네에 관해 공부를 좀 했지.”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빙궁주가 대답했다.
“그 질문에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사람.”
“잘 보셨군요. 제가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빙궁주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웃지 않았다.
“조사에 진전이 있다고?”
“네, 그래서 어제는 서 장로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서 장로를 의심하는 건가?”
난 천천히 차를 마시며 잠시 사이를 두었다.
“궁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도 침착하시네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빙궁주는 서낙을 누구보다 믿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직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네.”
단도직입적으로 네 생각을 말해 보란 질문이기도 했다.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배후세력이 궁주님을 위협하려면, 서 장로쯤 되는 인물이어야 할 테니까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는 말이군.”
검무극은 미소로 인정했다.
“서 장로가 왜 원주를 죽였겠는가?”
“저도 모르죠.”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네.”
그녀는 다시 한 번 못 박았지만 나는 느낀다. 저 믿음 속에 어떤 불신이 숨어 있음을. 만약 정말 서낙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 조사하는 걸 중단시켰을 거다.
나를 빙궁에 머물게 하며 사건조사를 허락한 이유가 따로 있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뭐요?’
원주를 죽인 흉수를 찾는 것 이상의, 눈 속에 깊이 감춰둔 비밀이 있음을 느낀다.
이번에는 북혈문으로 빙궁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번 일에는 북혈문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혈문이 언급되었음에도 그녀는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하셨습니까?”
“그쪽 둘째가 자네들과 얽혔으니까.”
“그가 죽은 건 알고 계시죠?”
당연히 빙궁주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 납치된 일에 충격을 받아서 자결했다고 하더군.”
“그걸 믿으십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차를 마셨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식까지 죽이는 부류를.”
“나도 그런 부류라네. 자식보다 빙궁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
자조적이면서도 도발적인 그녀의 대답이었다.
“제가 궁주님을 잘못 공부한 모양입니다. 제가 공부한 궁주님은 그 누구보다 따님을 아끼시는 분이신데요.”
빙궁주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으로.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소. 당신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금껏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난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히고, 잘 통하는 분을 끌고 왔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실 거라서요.”
과연 빙궁주가 옅게 웃었다. 당대 천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아버지도 궁주님도 다들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죠.”
생각지 못한 말에 빙궁주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앞에 있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천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어떤 점에서 말인가?”
언젠가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그녀에게 먼저 했다.
“조직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는 인생은 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뒤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달린 인생인데. 그래서 앞만 보고 뛰었는데. 너희가 이럴 수가 있냐? 그런 탄식하는 인생 말입니다. 뒤돌아보셔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되었지, 싶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뒤돌아보셔야 합니다. 야속하게도 열 번 중에 일곱, 여덟 번은 돌아본 줄조차 모르니까요. 그들도 자기 뒤를 돌아봐야 하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님을 돌아보셔야 할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뒤에 서 있는 것 같으니까요.”
* * *
다음 날, 다시 빙궁주를 찾아갔다.
“오늘은 무슨 일인가?”
“어제 너무 무례하게 군 건 아닌가 해서 오늘 또 찾아뵈었습니다.”
“딸과 대화하라고 하고선 자네가 또 왔군.”
다행히 어제 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딸 문제만큼은 그녀에게도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따님 아직 안 부르셨죠?”
빙궁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보란다고 당장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돌아보면서 살고 있었겠지.
“그런 일은 한 번 말씀드려선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될 때까지 오겠다는 뜻인가?”
“그럴 생각입니다만.”
“이러는 이유는?”
두 사람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서낙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빙궁주를 만나는 걸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또 만난다면?
그의 강박증적인 성격으로 볼 때, 사람 관계에서도 어떤 완벽성이나 질서를 추구하리라 추측한다.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을 분명히 밝힌 마교 소교주가 매일 빙궁주를 만난다? 이 일은 분명 그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 될 거다.
그가 이번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빨리 알아내야 한다. 그저 강박증 있는 사람 좋은 장로인지, 아니면 저들의 손발인지, 몸통 그 자체인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소궁주가 잘 되기를 바라서죠. 이번에 소궁주가 아니었다면 여기 와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궁주님을 이렇게 자주 뵙지도 못했을 테고요. 저를 공부하셨다니까, 잘 아시겠네요. 제가 후기지수들하고 어울리는 거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요. 같이 춤도 추는 사람입니다, 저.”
아무리 나를 파악하려 애써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거짓이라 확신하는 것들이 나의 진실인 이상.
“길을 잃는 느낌을 받아보셨습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말을 꺼내나? 빙궁주는 그런 감정을 표정에 고스란히 담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자주 받습니다. 어제 궁주님을 뵙고 나가면서도 그랬습니다. 건방지게 제가 뭐라고 궁주님께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애초에 전 취마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북해로 따라왔던 거였는데.”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 건방지게 군 것 죄송합니다.”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물었다.
“금주한다고 했나?”
“네, 의리의 금주죠.”
“언제 끝나나?”
같이 술을 한잔하자는 의미임을 알았다.
“멀지 않았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궁주님이 저를 믿어주신다면요.”
* * *
서낙이 움직인 건 검무극이 삼일 연속 궁주전을 찾아간 그날 저녁이었다.
“어서 오세요, 장로님.”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빙궁주가 소궁주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낙은 항상 그녀에게 정중했다.
서낙은 곧장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마교 소교주와 자주 만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흘 내내 저를 찾아왔습니다.”
서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교주쯤 되면 그냥 움직이지는 않을 터, 속셈이 무엇인 것 같았습니까?”
그는 속셈이란 표현을 쓰며 검무극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드러냈다.
“딸과 잘 지내보라더군요.”
서낙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마 그게 끝이 아니지 않느냐는 마음이었는데.
“사흘 동안 주로 그런 이야기만 했지요.”
서낙은 믿을 수 없었다.
‘궁주가 나를 속인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대하던 검무극은 나이에 비해 노련했다. 툭툭 찔러 오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와 뼈가 있었다.
한데 한설과 잘 지내란 말을 하기 위해 사흘이나 찾아왔다고? 믿기 어려웠다.
“잘 아시겠지만 마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저도 그들을 믿지 않아요.”
믿지 않는데 왜 그들을 불러들인 겁니까?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애써 삼키며 서낙이 말했다.
“소교주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한시라도 빨리 내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힘주어 덧붙였다.
“빙궁을 위해서라도.”
그러자 빙궁주가 나직이 말했다.
“또 빙궁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서낙이 흠칫하며 무슨 의미로 한 말이냐고 물으려던 그때, 빙궁주는 한발 먼저 말했다.
“옳으신 말씀이세요. 마인들이 궁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죠. 소교주에게 기한을 두고 이번 사건을 처리하라고 전하죠.”
순순히 자신의 뜻에 따랐지만, 서낙은 빙궁주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달랐다.
항상 빙궁주는 자신이 정한 거리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느꼈다. 원래 자리에서 아주 조금은 삐뚤게 서 있다는 것을.
“이게 다 빙궁을 위하는 길입니다.”
서낙은 그 말을 남기고 궁주전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까 빙궁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또 빙궁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또? 언제 했던 말을 의미한 거였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서 언제 했던 말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궁주전을 내려왔을 때, 서낙은 입구에서 검무극을 만났다.
“서 장로님?”
“소교주.”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눴다.
“궁주님 뵙고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렇다네. 자넨?”
굳이 안 보여도 될 모습을 보였지만, 서낙은 침착했다.
“저도 궁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함께 뵈었을 텐데. 아쉽네요.”
“요즘 자네가 자주 찾아뵙는다고 하더군.”
“궁주님의 높은 식견을 배울 기회가 흔하지 않아서요.”
“그럼 이야기하다 가시게.”
“궁주님 뵙고 북혈문으로 갈 예정입니다.”
북혈문이 언급되자 돌아서던 서낙의 발걸음이 멈췄다.
“북혈문에는 왜?”
“자제분을 잃었으니 상심이 클 겁니다. 가서 애도해 드려야지요.”
“소교주께서는 참 다정하시군.”
서낙은 애도하기 위해 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검무극은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의 주위를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검무극이 상체를 숙여 포권할 때 서낙은 보았다. 검무극의 품에 툭 튀어나온 한 통의 서찰을.
‘설마? 원주가 내게 향설빙주를 줬다고 적었다던 그 서찰인가?’
검무극은 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자하게 웃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지는 것을.
그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같이 올라가세!”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서낙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품에서 서찰을 본 이상 그냥 빙궁주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의 말에 궁주전으로 올라가려던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금방 궁주님 뵙고 내려오시는 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한데 조금 전에 자네가 아쉬워하지 않았나? 함께 궁주님을 뵙지 못했다고.”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었습니다만.”
서낙의 미소에 어색함이 더해지자, 검무극은 가벼운 손사래로 농담이었다는 시늉을 했다.
“자, 함께 올라가시지요.”
검무극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서낙의 얼굴에서 습관적으로 짓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서찰이 만약 향설빙주에 관한 서찰이라면, 궁주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주에게 향설빙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검무극과 한설 앞에서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만약 그 자리에 검무극만 있었다면 마교에서 누명을 씌운다고 잡아떼기라도 하겠지만, 그곳에는 한설도 함께였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자신이 한 입으로 두말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거다.
‘저 서찰을 미리 준비해 온 건가? 아니면 전서로 받은 건가? 그럴 시간적 여유가 되었을까? 혹시 다른 서찰인데 이러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서낙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음 자신을 찾아와서 술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자신을 떠보려는 수작이라 여겼는데.
‘정말 서찰이 있었어? 그리고 저 서찰을 궁주가 보면?’
자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필체를 조사하면 원주가 쓴 것으로 밝혀질 텐데? 그래도 위조라고 잡아떼야겠지? 상대가 마교니 좋은 점도 있다. 이런 완벽한 위조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길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궁주전 입구에서 검무극이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긴. 네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서찰을 꺼내 태우는 생각이지.
서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네, 어서 들어가세.”
검무극과 서낙이 궁주전으로 들어갔다.
방금 인사하고 나간 서낙이 다시 돌아오자 빙궁주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 입구에서 소교주를 만나서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입구에서 만났으면 인사하고 각자 갈 길 가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저 검무극이 뭔가 수를 써서 서 장로가 따라올 수밖에 없게 한 것 같은데.
‘소교주, 어떤 수를 쓴 건가?’
검무극이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기 위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좋은 분위기의 미담부터.
“그거 아십니까? 제가 서 장로님이 의심스럽다고 궁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서낙은 떳떳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랬더니 궁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서 장로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단호히 저를 꾸짖으셨지요.”
서낙은 환하게 웃으며 빙궁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믿는 분이신데요.”
정말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북해빙궁의 모든 무인도 인정하는 바였고. 지금 검무극은 그 오래된 거목에 톱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다시 말하지만, 서 장로님은 내가 가장 믿는 분이네. 오직 빙궁만을 위해 살아오신 분이지.”
그러자 검무극이 서낙에게 물었다.
“서 장로님도 궁주님을 아끼십니까?”
“당연하지. 나 자신보다 궁주님과 빙궁을 아낀다네.”
검무극이 그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말인가?”
“왜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겁니까?”
이제 검무극은 한발 더 나아가 서낙을 그녀를 죽인 사람으로 지목했다. 웃으며 시작한 자리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나를 모욕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추궁하는 쪽도 회피하는 쪽도 모두 당당했다.
빙궁주는 이 순간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봐온 서낙이었다. 평소에 허허 웃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결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특히 자신의 명성과 관련해서는 더욱 예민한 사람이었고.
원주를 죽였다는 게 누명이라면, 자신이 아는 서낙은 이보다는 조금 더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마교 소교주라 하더라도 말이다. 한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느낌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이 말이 빠져 있다.
―그럼 증거를 내놓게.
그건 서낙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랬다간 검무극은 품에 있던 서찰을 꺼내 들며 ‘증거가 여기 있지 않소?’라고 말할 테니까.
이런 내막을 몰랐기에 빙궁주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애초에 다시 검무극을 따라 올라온 것도 이상했고.
‘이렇게 젊은 사람에게 서 장로가 휘둘린다고?’
정말 놀랍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긴 남 말할 상황은 아니었지.
검무극의 뒤를 돌아보며 살라는 말에 자신도 밤잠을 설쳤으니까.
그 말이야 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직 한설이 뒤에 서 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잠을 못 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돌아봐야 할 텐데. 검무극의 말처럼 한 번 돌아보고 마는 게 아니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자꾸 돌아봐야 하는데.
하지만 아직 딸아이를 따로 부르지도 못하고 있다.
서낙과 대치하던 검무극이 빙궁주를 향해 돌아섰다.
“참, 오늘 궁주님을 뵈러…….”
동시에 검무극의 손이 서찰이 든 품으로 향했다.
그때 서낙이 재빨리 끼어들며 화제를 돌렸다.
“소교주, 궁주님께 설이 이야기를 했다지?”
이 순간 빙궁주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서낙은 누군가 말을 하는 중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박할 게 있어도 상대 말이 끝나고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 그 끼어든 화제가 설이 이야기라고?
이질감에 이질감이 더해졌다.
어디 서낙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갑자기 검무극이 서찰을 꺼내려 하자 순간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이것이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이 순간을 넘겨야 했다.
‘차라리 서찰을 전하게 하고, 위조된 것이라 우기는 게 더 나은 선택일까?’
잠시 침묵이 흐르던 순간, 빙궁주는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표정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보시오, 당신의 서 장로가 어떤 사람인지.
검무극이 서낙을 향해 돌아섰다. 서찰을 꺼내려던 손은 자연스럽게 다시 내려왔다.
“모녀간에 사이좋게 지내시란 말씀을 주로 드렸었지요. 소궁주가 보기보다 여린 성격이라서.”
“소궁주가 여리다고? 후기지수 중에선 보기 드물게 강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서 장로님은 고작 며칠 본 저보다도 소궁주를 모르시는 것 같군요. 사람을 제대로 안 보고 대충 보면 원래 그렇습니다. 선입견까지 쌓여서 상대를 더 모르는 법이지요.”
“자네 자만일세!”
정말 한마디 한마디 사람을 열받게 했지만, 서낙은 무슨 말이라도 자꾸 해서 저 서찰이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래서 서찰을 전하는 걸 잊고 이곳을 나가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서찰을 빼돌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물론 이 순간에도 빙궁주가 서낙에게 느끼는 이질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는 또 하나의 생각.
빙궁주는 조금 전에 검무극이 했던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낙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선입견만 쌓여 있는 상태.
이 이질감은 바로 그 선입견이 만들어낸 찌꺼기들이 아닐까?
자신도 빙궁주라는 자리를 짊어지고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음을 어찌 부정하겠는가?
검무극이 던진 돌멩이는 서낙에게 적중하면서 계속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파장은 그녀 자신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북혈문에 간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어서 가세. 너무 늦어도 그쪽에 실례일 테니.”
검무극이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죠.”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낙은 안도했다. 서찰이 전해져도 어떻게든 대비하겠지만, 애초에 안 전해지는 것이 상책이다.
‘북혈문으로 간다고? 어떻게 서찰을 빼내야 할까?’
그렇게 우선은 안도하던 그때, 검무극이 빙궁주를 향해 돌아서며 빠르게 말했다.
“이건 깜짝 선물입니다! 오늘 궁주님께 이걸 드리려고 왔지요.”
비로소 서낙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놀리려고 줄까 말까 하고 있었다고. 잊어버린 척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롱했다. 망할 놈! 어디 그걸 준다고 내가 순순히 인정할 거 같으냐?
빙궁주는 검무극이 건네준 서찰을 꺼내 읽었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낙은 그 표정에서 그 서찰이라 확신했다. 감정 변화 없는 그녀를 이렇게까지 놀라게 할 내용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조작된 서찰입니다.”
서낙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소교주가 그 조작된 서찰로 나를 협박했습니다. 한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향설빙주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이제 궁주에게까지 말했으니 물러설 곳은 없었다. 술은 영원히 받은 적이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자 빙궁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향설빙주라니요?”
순간 서낙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서찰이 아니었구나!’
진짜 농락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있어도 될 일인데, 자신의 입으로 향설빙주에 대해 꺼낸 것이다.
“그 서찰을 제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빙궁주가 서찰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요리와 인근 주점과 반점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걸 보고 빙궁주가 왜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서찰의 맨 아래 ‘따님이 좋아하는 요리입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제 수하인 이안이 요즘 소궁주와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중이라서 알아낸 거죠. 그 아래 적힌 객잔과 반점들은 이 근처에서 그 요리를 제일 잘하는 집들이고요. 제가 직접 알아 왔습니다. 색다른 분위기에서 따님과 식사하시라고요.”
서낙은 처음으로 표정이 무너졌다. 웃는 것도, 표정이 굳은 것도 아닌, 새로운 표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웃음을 지으려 해도 지어지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은 검무극만이 아니었다. 이런 얄팍한 수작에 놀아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었다. 애초에 아닐 수도 있다고 분명 생각했으면서,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저것이 그 서찰이라 확신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오늘의 실수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앞서 검무극에 의해 그의 질서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그래도 오랫동안 쌓아 온 서낙이란 사람의 벽은 두꺼웠다.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자신을 수습했다.
“저 소교주가 워낙 술수에 능하다는 생각에 제가 과잉 반응을 했습니다. 궁주께서는 이해해 주시기를. 아까 제가 오해한 내용으로 소교주가 저를 음해해 왔습니다.”
다 이해한다는 듯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가 어떤 증거를 가져와도, 저는 장로님을 믿어요.”
“감사합니다, 궁주님.”
서낙이 이번에는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졌다. 정말 졌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소교주, 그대가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궁주님과 나와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요.”
그 말을 한 후 서낙은 빙궁주에게 정중히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나갔다. 애초에 올라오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저 밉살스러운 놈이 입구에서 자신을 낚아 올리려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꼼짝없이 낚인 것이다.
둘만 남자 빙궁주는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가 뭔가? 저 사람 본모습이 어떤 사람인지 내게 보여주려는 건가?”
그렇다면 너무 위험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검무극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뇨.”
“아니라고?”
“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하려는 건 맞지만, 궁주님께 보여주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검무극은 대답 대신 작별을 고한 후 그곳을 나갔다.
“거기 적힌 곳에 꼭 가보십시오. 정말 따님이 좋아하는 요리니까요.”
검무극이 궁주전을 내려왔다.
입구를 나서는데 저 앞에서 이안이 다급히 달려왔다. 표정만 봐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냐?”
“백주설원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사건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상책이니까. 쾌속보로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백주설원에 도착했다.
이안이 다급하게 자신을 데리러 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피바다였다. 사방에 쓰러진 여러 구의 시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빙궁의 무인들이 겹겹이 포위한 채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취마였다.
“취마님!”
검무극의 부름에 취마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광기와 분노에 휩싸인 상태가 아님을 확인하자 검무극은 안도했다. 그가 맨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두 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좀 기다리죠.”
취마는 검무극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빙궁 무인들은 검무극의 등장에 더욱 긴장했다. 몇몇 이들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서서 경계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벌인 사람이 취마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이안이 도착했고 뒤이어 한설도 도착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이 만났던 백주설원에서 술 재료를 담당하던 조명이었다. 원주가 서 장로와 몇 차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려줬던 바로 그 사람.
서로를 쳐다본 두 여인의 시선이 각기 다른 사람을 향했다. 한설은 취마부터 쳐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이들을 죽인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취마의 소행처럼 보였다.
반면 이안은 검무극부터 쳐다보았다.
‘어쩌죠? 취마님이 함정에 빠지신 것 같아요.’
정말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거다.
하지만 검무극의 차분한 눈빛을 보자 그녀의 흥분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세상의 어떤 위험이 와도 해결할 것 같은 눈빛이다. 아니, 해결하지 못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방에서 방패와 창을 든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위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오직 빙궁주의 명령을 따르는 북해빙궁 최정예 무인들인 북풍대(北風隊)였다. 갑주와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빙궁 내 어떤 정예조직보다 무공이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범한 눈빛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북풍대가 사방을 철통처럼 틀어막았고, 일부 북풍대원이 좌우로 늘어서 방패로 길을 만들었다. 일사불란한 그들 사이로 빙궁주가 걸어들어왔다. 그녀 뒤로 새하얀 무복을 입은 호위 무인들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궁주전에서만 보던 그녀는 얼음성에 홀로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빙궁주는 말없이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죽은 이들 중 무공을 모르는 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제야 검무극이 취마에게 물었다.
“취마님, 어떻게 된 겁니까?”
비로소 취마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취마가 바라본 시체는 바로 이안과 한설이 만났던 조명이었다.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목의 혈맥이 터져 버렸다. 뒤이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들 역시 터졌고.”
그러자 누군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대 말을 어찌 믿으란 거요?”
뒤이어 도착한 사람은 바로 서낙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궁주전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물러간 그였는데, 지금의 기세는 그때와 달랐다.
“몸에 피를 그렇게 묻히고서 우리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거요?”
보이는 정황은 취마에게 불리했다. 피를 뒤집어써서 더 흉수처럼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검무극이 나섰다.
“그래서 믿을 수 있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검무극은 차분히 그들에게 물었다.
“정말 취마께서 저들을 죽였다면 몸에 피를 묻혔겠습니까?”
검무극이 취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앞에서 터졌어도, 마음만 먹으면 그 피를 다 피할 수 있었겠지요. 한데도 옷과 손에 저렇게 피가 묻었다는 건…….”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그들을 살리려 했던 거겠지요.”
취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자신이 변명하지 않아도 검무극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마존께서 저 사람들을 진정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죽였을 겁니다. 여기서 피를 뒤집어쓴 채 포위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본교의 마존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물론, 빙궁주는 잘 안다. 만약 취마가 마음먹었다면 맨 처음에 포위했던 무인들은 이미 다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러자 서낙이 흥분해서 물었다.
“하면, 왜 저리 서 있는 거요?”
검무극의 시선은 여전히 빙궁주를 향했다.
“궁주님에 대한 예의로 기다려 주신 겁니다. 현명하게 잘 판단 내려주시리라 믿고서. 이곳에서 자리를 이탈한다면 문제는 더 커졌을 테니까요.”
취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래서 차분할 수 있다. 검무극이 있는 한, 쉽게 누명을 쓰진 않을 테니까.
“마인들의 말을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당연히 조사가 끝날 때까진 구금해 두어야 합니다.”
단호한 서낙의 주장에 검무극이 반박했다.
“그건 공평하지 못한 처사요.”
“공평? 그게 무슨 말이오?”
검무극이 주위에 있던 무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우리가 백화설원 원주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계실 거요.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의심스러운 정황을 알아냈소. 이곳 빙궁의 고수 중 누군가가 죽은 원주에게 은밀히 향설빙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소.”
순간 서낙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 고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속였소. 하지만 우린 그 사실을 밝혔음에도 그를 구금하지 않았소. 왜냐? 북해빙궁과 빙궁주를 존중했기 때문이오.”
주위에 있던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낙은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말이 길어지면 그 의심스러웠던 사람이 자신임을 이 자리에서 밝힐 것이다.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빙궁에 와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서릿발 같은 기상을 드러냈다.
“우린 그대들을 존중하는데 그대들은 우릴 존중하지 않겠다는 건가?”
만약 이 자리에 빙궁주가 없었다면 자신의 기도를 발출해서 더 강하게 서낙을 압박했을 거다. 하지만 빙궁주 앞이었기에 예를 갖췄다.
한설은 검무극의 돌변한 모습에 놀랐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실없는 소리를 하던 검무극이 아니었다. 저 차가운 모습은 오히려 빙궁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윽고 지켜보던 빙궁주가 나섰다.
“소교주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잠시 취마와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던 빙궁주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검을 내려라.”
포위하고 있던 무인들이 검을 내렸다.
서낙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궁주님, 저들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네, 죽은 이들의 사인을 철저히 조사해야지요.”
빙궁주가 취마에게 말했다.
“본궁의 허가 없이 궁을 떠나지 마세요.”
감금하지는 않겠지만 함부로 떠나지도 마라. 거기까지가 빙궁주의 절충안이었다.
거기에 서낙이 말했다.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본궁의 고수들이 저들을 감시하게 해야 합니다.”
빙궁주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대신 검무극을 위해 한 가지 단서를 붙여주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에요.”
취마는 검무극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번 일은 검무극의 결정대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충안을 받아들이라는 의미.
취마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겠소.”
취마가 그곳을 떠나자 그 뒤로 이안이 뒤따랐다.
떠나기 전,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아까 그녀는 검무극에게 물었다. 서낙을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가 뭔지. 왜 그의 본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거냐고.
그러자 검무극은 그를 자극하는 건 맞지만 빙궁주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검무극이 그 질문에 답을 했다.
“드디어 그자가 봤나 봅니다.”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의미였다. 서낙을 자극한 건 배후의 그를 자극해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는.
“그럼 나중에 뵙지요.”
빙궁주에게 인사하고 가려던 검무극이 한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하시오, 같이 안 가고. 같은 일원이 되기로 한 것 아니었소? 상황이 좋을 때만 일원인 거요?”
빙궁주와 서낙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빙궁주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딸을 쳐다보았고, 서낙은 그 반대였다.
서낙은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역한 적이 없던 그녀였는데.
“같이 가요.”
한설이 검무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떠나자 서낙은 빙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궁주가 마교 소교주와 어울리게 해선 안 됩니다.”
빙궁주는 이 순간 그의 모습이 뻔뻔함인지, 진정 빙궁을 위한 마음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으니까.
그 오랜 세월을 배신한다고? 이 생각이 냉정한 판단을 흐렸다.
“제가 잘 살펴보지요.”
빙궁주가 돌아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가자 북풍대와 호위들이 순식간에 그곳에서 물러났다.
시체를 조사하려는 무인들에게 서낙이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게.”
그곳에 있던 이들은 서낙이 얼마나 빙궁 사람들을 아끼는지 다들 잘 알기에, 모두 조용히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낙은 홀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글픔이나 안타까움 대신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가 나를 돕고 있다.’
향설빙주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순간,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주르륵.
흥건하던 피 웅덩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는 서낙의 발이 있는 곳으로 흘렀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싶어 서낙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피가 방향을 틀어 서낙을 향했다.
흠칫 놀란 서낙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움직여서 피했다.
그러자 피가 다시 방향을 바꿔서 서낙 쪽으로 흘렀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서낙이 물었다.
“당신이오?”
서낙의 물음에 흘러오던 피가 멈췄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서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고맙소. 이제 실수하지 않고 놈들을 처리하겠소.”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잠시 멈춰 있던 피가 천천히 원래 있던 피 웅덩이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피가 흐르던 바닥에는 핏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렇게 피가 원래 있던 웅덩이로 흡수되듯 돌아갔다.
서낙이 천천히 걸어가서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피는 평범한 피로 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자신을 도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경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물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남자의 비장한 얼굴이었다.
* * *
“화 그만 삭이고 차라리 술을 마셔.”
검무극의 말에도 취마는 차를 마셨다.
“이러니까 더 무섭잖아.”
상대는 취마를 함정에 빠뜨렸다. 다시 말해 마존을 함정에 빠뜨린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텐데, 취마는 여전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이안도 취마가 정말 화가 많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절제하는 모습이다. 팔마존 중에서 제일 잘 흥분할 것 같았는데. 그는 어떤 마존보다 훌륭히 자신을 잘 제어하고 있었다.
“이래서 취마님이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이안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취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니, 스스로를 잘 조절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자신은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곳에 와서의 냉철함은 한 가지 욕심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검무극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술 취해서 호수에 몸을 던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검무극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덕분에 우린 확실히 알게 됐어. 서낙이 배후세력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드디어 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낙이 곤경에 처하자 즉시 움직였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한설이었다.
“배후세력이라니요?”
“누군가 그와 손잡고 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취마와 이안과는 달리 한설은 그런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죠?”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이건 궁주님께 해야 할 질문 같군요.”
“어머니도 알고 계시다고요?”
“그럴 거라 생각하오.”
왠지 소외된 기분에 한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자 검무극이 말했다.
“비단 궁주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무슨 뜻이죠?”
“소궁주께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오.”
빙궁주에게 했던 말을 이제 한설에게도 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대화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먼저 다가갔소.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한데 우리 나이쯤 키워주셨으면, 녀석이 이렇게 컸구나, 그런 말씀 한 번쯤 나오게 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소?”
물론, 한설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두 분의 관계는 멀고 가깝고. 차갑고 따듯하고의 문제는 아닐 거요. 굳어버린 것이 문제지.”
굳었다는 말이 한설의 가슴에 와닿았다.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섭섭함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라는 생각을 해버리니까.
먼 것을 당길 생각도,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까.
“왜 내게 이런 말들을 해주는 거죠?”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소.”
뭔가 의도가 있을 텐데. 한설은 검무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상대였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놈들이 왜 취마님에게 누명을 씌운 거죠?”
“그만큼 급했던 거지. 다시 말해 서 장로가 꼭 필요한 사람이란 의미기도 하고.”
검무극은 이번 일로 상대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게다가 다음 단계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놈들은 이번 일로 우리 발을 묶었어.”
거처 밖에는 빙궁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딜 가더라도 감시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잘 됐어.”
“잘됐다고요?”
이안은 물론이고 취마와 한설조차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역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꾸며도 우리 짓이 아닌 것이 되니까.”
“아! 우린 여기에 감시받고 있으니까! 한데 은밀히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린 안 나갈 거야. 우리 대신 그 일을 멋지게 해낼 사람이 있거든.”
검무극이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취마와 이안의 시선도 검무극을 따라 한 사람을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한설은 말을 듣기도 전에 소리쳤다.
“거절하겠어요!”
결론부터 말하면 한설은 거절하지 못했다.
검무극 한 명의 설득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오늘은 조력자도 있었다. 바로 이안이었다.
“아까 그분의 시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분은 아직 살아계실까?”
한설은 이안이 그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음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설은 이안에게서 이 말을 듣는 순간까지 그 사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곳에서 처음 본 사람인데. 정말 저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만약 가식이라면 이것부터가 가식이겠지. 물 한 잔 얻어 마신 부인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북해까지 왔다는 그것부터가.
“우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그분은 자신을 죽인 놈 때문에 죽은 거죠.”
이안은 괜한 자책은 하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그렇게 많은 걸 배웠는데, 이 정도 지혜는 발휘해야겠지.
“다만, 그 죽음이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되게 하고 싶진 않아요.”
이럴 때면 다정한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이안의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죽은 그 사람 역시 다정함을 발휘해서 알려줬던 건데.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또 다른 지혜를 발휘했다.
“복수해 주세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느꼈으니까. 이럴 때는 검무극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거다.
“그러마.”
흔쾌히 대답한 후, 이안의 마음까지 살펴 주었다.
“이런 일은 심장에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 얕은 상처 같지만, 영원히 남는 상처지. 아마 계속 생각날 거다. 지나가다 양조장만 봐도 생각날 테고.”
검무극은 안다. 때론 자신이 직접 입은 큰 상처보다 이런 상처가 훨씬 더 오래 남아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하지 마라. 그럼 상처가 더 깊어질 거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어지고, 또 그어지고. 그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래서 내 심장은 원래 이런 문양이 새겨진 심장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지. 이번에 네 심장에 새 문양 생긴 것, 축하한다.”
이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픔을 축하해 주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고작 제 심장이 이런데, 도련님 심장은 어떨지 상상이 안 가네요.”
이안은 검무극의 심장을 떠올려보았다. 수십, 수백 개의 상처가 새겨진, 그래서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강렬한 심장일까? 아니면 애초에 만년한철로 만들어져서 그어진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한 심장일까?
“내 심장이 어떤지는 네가 잘 알잖아?”
“네? 제가 어떻게? 아!”
이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검무극이 자신을 심장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다가, 방금 생각이 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설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자책하고, 그걸 위로하는 수장이라.
이전까지는 가식 같았고, 기만적인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저 관계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이번에는 한설의 시선이 취마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취마는 그들을 구하겠다고 저 피를 뒤집어썼다고 했지?
‘내가 너무 비인간적인 걸까?’
마교에서 온 세 사람 때문에 평생 하지 않았던 생각을 자꾸 하게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들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우릴 도와주시오.”
“거절한다니까요.”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소.”
“무슨 이유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난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당신이나 궁주님이라 생각하오.”
한설은 놀라지 않았다. 서 장로가 음모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칼날이 향할 곳은 뻔했으니까. 한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가족처럼 지낸 그였는데. 어머니와 나를 노린다고?
“정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가요?”
한설이 다시 한번 묻자 검무극이 단호히 대답했다.
“이번에 취마님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확실해졌소. 서낙은 저들과 한패요.”
한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취마와 이안의 표정은 검무극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 마음은 금강석이 되었다가도, 어느새 당과처럼 사르르 녹기도 하는 법이오. 그도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거요.”
혈왕이 파고들어서 마음이 변했든, 마음이 변한 그를 혈왕이 파고들었든, 결국 그는 변한 것이다.
괜히 거절하겠다고 소리쳤지만, 한설은 알고 있다. 이번 일은 자신이 나서서 처리해야 할 일임을. 빙궁의 사람이 죽었고, 적은 자신과 어머니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마인들을 정말 믿어도 되는가?
이 불신이 점점 희미해져 갈수록 반대로 한설은 더 불안해졌다. 마음이 풀어지면 안 되는데.
“나가서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소.”
“뭐죠?”
“북혈문의 장남을 만나주시오. 이번 일에 북혈문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오.”
숙부처럼 여긴 서 장로가 모종의 배후세력과 손을 잡은 상황에서 북혈문도 한패라고?
한설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만약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면, 빙궁은 정말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북혈문주나 서 장로는 아직 소궁주가 상대하긴 벅찬 자들이오. 그러니 북혈문의 장남을 공략하는 거요. 분명 그자가 알고 있는 바가 있을 테니까. 그게 뭐든 꼭 알아내시오.”
한설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움직이면서 판단할 문제였다.
“좋아요, 그 사람을 만나죠.”
“피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맛을 보여주시오.”
“그러죠.”
그녀가 방을 나서려고 할 때, 검무극이 말했다.
“가기 전에 꼭 어머니부터 만나세요.”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한설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궁주 혼자 내보내도 될까요?”
“걱정돼?”
“적들이 만만치 않잖아요.”
“걱정하지 마라. 북해에서 빙궁 소궁주 걱정을 왜 하냐? 차라리 저기 차만 마시고 계신 우리 취마님을 걱정해!”
그러자 취마가 불쑥 말했다.
“너도 나갈 작정이지?”
취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녀에게 저들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선 뒤에서 처리할 생각이지?”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술을 끊으니까 천재가 되고 있어! 앞으로 술 끊자. 이 좋은 머리 너무 아깝다.”
“이미 술에 찌든 머리야.”
이안은 마음속으로 자책했다.
‘전 그 찌든 머리보다 못한 머리고요.’
그녀는 검무극이 은밀히 나갈 생각임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나가서는 어쩌려고요?”
“아까 봐서 알겠지만, 이번 일의 배후는 천박하고 무자비한 놈이야.”
취마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고, 무공을 모르는 이들을 죽였다.
“저들이 이렇게 나오면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상대해 줘야지. 네가 쓴 방법을 쓸 거다.”
“제 방법요? 무슨 방법요?”
“서 장로와 북혈문주, 모두 납치할 거다. 양쪽 팔을 다 잘라버리면, 몸통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정말요?”
“당연히 농담이지.”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납치가 아니라 그냥 둘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혈왕은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또한 놈은 그 보복으로 수많은 이를 죽일 거다. 둘을 죽이면 이백 명을 죽일 놈이니까.
“술 마시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어서 놈을 데려와!”
취마의 말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래, 놈들 싹 다 해치우면 정말 진탕 마시자. 그날은 개가 되는 거야.”
이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개 한 마리, 추가입니다!”
검무극이 침상에 베개와 옷가지 등을 넣어서 자는 것처럼 만들었다. 누가 허락도 없이 감히 이 방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혹시 몰라서 만들어 둔 것이다.
“나 있는 척 잘해줘야 해. 그럼 나, 간다.”
“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가려고요?”
“일찍도 물어본다.”
아무리 봐도 몰래 나가는 건 힘들어 보이는 숫자가 밖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 전부 고수들이기에, 그저 사람을 감시하는 일반 무인들과는 달랐다.
밖으로 나가려던 검무극이 취마에게 말했다.
“참, 형. 아까는 말 못 했는데.”
호의와 궁금함이 담긴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 사람들 구하려고 피까지 뒤집어쓴 것, 멋있었어.”
그 말을 남기고 검무극이 밖으로 나갔다.
취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나의 노고를 알아봐 주는 사람.
그리고 그걸 말해주는 사람.
그게 바로 검무극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한잔하고 싶네.’
이안과 취마는 창으로 검무극이 그곳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신사보 중 암영보가 발휘되었다.
암영보는 어딘가 잠입할 때 사용하는 보법으로 처음에는 한 사람의 눈을 피하는 정도지만, 경지가 오를수록 피할 수 있는 숫자가 늘어난다. 대성을 이룬 암영보는 뻔히 두 눈을 뜨고 있는 고수들을 뚫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우리가 지금 뭘 본 거죠?”
이안의 감탄에 취마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두 눈 뜨고 코 베이는 빙궁 고수들.”
* * *
한설이 궁주전으로 들어섰다.
“궁주님.”
한설의 방문에 빙궁주는 검무극의 말을 떠올렸다.
―따님을 돌아보셔야 할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뒤에 서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난 후 처음 단둘이 만나는 순간이다.
“어쩐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말해 보아라.”
한설은 이렇게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가벼운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언제나 본론부터 말을 꺼냈던 거다.
자연스럽게 한설도 검무극의 말을 떠올렸다.
―두 분의 관계는 멀고 가깝고. 차갑고 따듯하고의 문제는 아닐 거요. 굳어 버린 것이 문제지.
막상 이 자리에 와서 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굳어 버린 관계를 나는 풀고 싶은가?’
그 의지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눈빛에 여러 생각이 스치는 딸을 보면서 빙궁주는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대화는 이어졌다.
“북혈문의 장남을 만날 생각입니다.”
“그는 왜?”
“소교주는 이번 일에 북혈문이 개입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 제가 확인해 볼까 합니다.”
낯설면서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딸이 먼저 나서서 뭔가를 조사한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냐?”
말을 하고 빙궁주는 자신의 어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한 말은 ‘혹 소교주가 시켜서 하는 일이냐?’라는 물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원해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해는 말아라, 안 하던 일을 해서 물어본 거니까.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소교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네요.
이런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가거나.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격려와 감사가 오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이러했다.
“북혈문을 잘못 건드렸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네, 그렇겠지요.”
다시 흐르는 침묵.
원래였다면 빙궁주는 ‘아직은 시기상조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이 이렇게 직접 와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안 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해볼 테냐?”
“네.”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는 몰랐다. 원래 이렇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전혀 이상한 줄 모르고 살았다.
한데 상대에게 마음을 열어볼까, 서로를 의식하며 대화하니 정말 어색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설이 인사하고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서 계단으로 가는데 뒤에서 빙궁주가 말했다.
“차 한잔하고 가거라.”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빙궁주였다. 그래, 고개를 돌려도 엄마인 자신이 먼저 돌려야지.
한설은 내심 놀랐다. 어머니와 함께 앉아서 차를 마셨던 적이 언제였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녀와서 마시겠습니다.”
당황해서 거절했고 빙궁주는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섭섭할 필요는 없다. 검무극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야속하게도 열 번 중에 일곱, 여덟 번은 돌아본 줄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 시도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궁주전 계단을 돌아 내려오며 한설은 후회했으니까.
차를 마시고 나올 걸 그랬나?
* * *
북혈문의 장남 양석이 시비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급하게 걸어가던 양석이 시비와 부딪칠 뻔했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이 쏟아지면서 옷에 몇 방울 튀었다.
“너 때문에 빙궁의 소궁주를 기다리게 해? 아니면 이 젖은 옷으로 소궁주를 만나?”
표가 날 정도로 물이 튄 것도 아니었다. 소궁주를 만나러 가는데 앞을 가로막은 것이 기분이 나빠서였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짝! 짜악!
그녀의 사과에도 양석은 사정없이 때렸다. 시비의 입술이 터졌고, 뺨에 벌건 손자국이 났다.
“이러실 시간 없습니다.”
수하의 말에 양석이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공 없이 팼다는 점이다. 빙궁의 소궁주가 자신을 만나러 왔는데 재수 없게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그냥 간 것이었다.
그렇게 양석이 떠나고 잠시 후.
누군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석의 호위 무인인 하결(夏結)이었다. 앞서 시간 없다고 말려준 바로 그다.
“어디 보자.”
하결이 쓰러진 그녀를 일으켜서 상처를 살폈다. 입과 볼의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결이 손으로 피를 닦아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손길이 부담스러웠지만, 감히 하결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앞서 그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두들겨 맞았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이는 안 다친 것 같네.”
시비는 하결의 손길이 정말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얼굴과 두 눈동자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괜히 공자님 눈에 띄면 큰일 날 테니, 오늘은 방에 꼭 있거라.”
“감사합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시비가 동경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맞을 때 느낌상 피가 많이 흘러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피는 남김없이 사라진 후였다.
피가 묻어 있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으로 대충 닦아주셨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녀는 얼굴을 살피느라 보지 못했다. 자신의 목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신의 목숨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작은 친절의 대가로 너무 큰 것을 내주었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우리가 세 번이나 만났다고요?”
한설은 북혈문의 장남인 양석을 세 번이나 본 기억이 없다. 예전에 한 번 봤던 기억만 있었는데.
“오늘로 네 번째지요.”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부족해서.”
“아니오. 워낙 바쁘신 분이니 그럴 수 있소.”
양석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마음이 넓은 척 호탕하게 굴었다.
그는 한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북해에 사는 젊은 남자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인을 얻는 것과 동시에 북해빙궁이라는 최고의 가문까지 얻게 되는데.
하지만 그녀는 얼음 미녀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 거요?”
우선 한설은 조의부터 표했다.
“동생 분 소식은 들었어요. 상심이 크시겠군요.”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만,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양석은 내심 의아했다.
‘이 쌀쌀맞은 소궁주가 동생 때문에 왔을 리는 없는데.’
그랬기에 양석이 짐작하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마인들과 백주설원 원주님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소식은 들었소. 잘 되고 있으시오?”
“이것저것 알아보고는 있지만 쉽지 않네요.”
이곳에 오면서 그녀는 여러 생각을 해봤다. 어떻게 해야 이 양석이 의심하지 않게 접근할까. 그래서 그 사건 조사차 방문한 것으로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고맙게도 상대가 먼저 물어봐 주었다.
“혹 그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신지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아는 게 없소.”
한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본궁에 마인들이 와 있는 걸 아시나요?”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들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는데.”
물론, 진심을 말하면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인들 덕분에 눈엣가시였던 동생을 죽일 수 있었지.
“마교의 소교주가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있어요. 이번 사건도 빨리 증거를 내놓으라고 우릴 압박하고 있지요.”
양석은 한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기회다.’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녀였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소.”
그렇게 양석이 한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있는 객청의 바깥에는 찬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곳으로 하결이 걸어왔다.
찬은 무심하게 그를 쳐다봤지만, 사실 유심히 하결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껏 수많은 호위를 만나 보았다.
처음 하결을 보았을 때, 그는 호위들 특유의 어떤 느낌을 다 가지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는 발걸음과 빠르게 주위를 살피는 시선 처리, 상대를 살필 때는 숨겨둔 암기까지 파악하려는 집요함에, 만성적인 피로를 드러내는 붉게 충혈된 눈까지. 그는 그야말로 호위 무인 그 자체였다.
‘한데 자리를 비운다고?’
이곳까지 함께 왔다가 양석이 객청으로 들어가자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무리 이곳이 북혈문 내부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후계자를 호위하는 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였다.
그사이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소궁주와 갑작스러운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남들은 하지 않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바로 호위 무인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호위기에 더 이질감이 드는 행동이었다.
대체 후계자를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찬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왔던 길을 돌아가 시비의 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왔음을.
그때, 하결이 건물 위를 슥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니오.”
뭔가를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찬도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를 끌어올려 더욱 적극적으로 살펴도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분명 뭔가를 느낀 것 같았는데?’
자신이 못 느낀 걸 느꼈다면? 자신보다 고수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조금 전에 뭔가를 느꼈다면 자신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이쪽이 그냥 손님인가? 빙궁의 소궁주 아닌가?
이래저래 신경이 거슬렸지만, 찬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객청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물론 주로 말을 하는 쪽은 양석이었고, 듣는 쪽은 한설이었다.
한설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한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남을 속이는데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동생분은 왜 마교와 얽힌 거죠?”
순간 양석의 표정이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히 말했다.
“소궁주께서도 아시잖소? 마교 놈들은 어떻게든 엮어서 한몫 뜯어가려는 이리떼 같은 자들이라는 것.”
그러니까. 자신도 마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맞아요. 거기다 이번에 온 자들은 정말 이상한 자들이에요.”
그에게는 욕처럼 들리겠지만, 칭찬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양석이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한설은 그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함께 소교주를 만나주시겠어요?”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이안 때문이다.
전에 일을 처리할 때 선택의 순간에 이안이 말했다. 할 만큼 했으니, 다음은 검무극에게 맡기자고.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랄 만큼 좋았다. 이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계속 혼자서 만나고 싶은 상대도 아니었고.
양석은 그녀의 제안을 이렇게 해석했다. 소교주를 상대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좀 보태 달라고.
“좋습니다. 북해 문파끼리 힘을 뭉쳐야지요.”
“감사해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양석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북해빙궁 소궁주와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마교 놈들 덕분에 동생을 처리했는데, 어쩌면 부인까지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한설은 찬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났다. 찬은 가면서 하결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도 완벽한 호위인데, 자꾸 이질감이 든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자 양석이 하결에게 말했다.
“차가우면서도 매력 있는 여자야.”
“얼음에 혀를 대면 잘 떨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양석은 차갑게 하결을 쳐다보았다.
그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결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아버지가 붙여둔 호위였으니까.
한 번씩 그를 보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언제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였는데, 이상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도 그랬다. 건방진 놈이 어디서 조심하라 마라야. 네놈 혀나 조심해라. 확 잘라버리기 전에.
그때, 무인 하나가 달려와서 양석에게 말했다.
“문주님께서 찾으십니다.”
* * *
“잘하면 소궁주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석이 북혈문주에게 한설과의 일을 보고했다.
“소궁주는 널 통해서 뭔가 알아내려고 온 것이다.”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그녀를 이용해서 저쪽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북혈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신중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보고 후에 물러나려는데, 북혈문주가 하결을 남겼다.
“자넨 좀 남게.”
양석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이런 순간이 기분 나쁘다. 자신의 보고를 다 들었으면서, 저놈에게 한 번 더 확인하려 들 때.
한설과 관련해서 뭔가 아버지에게 보고를 받겠지. 하여튼 의심 많은 아버지였다.
‘아들을 좀 믿으십시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아들이 나가자 북혈문주는 대청 뒤쪽 비밀 문을 열고 하결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직 둘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엔 작은 대청이 있었다. 사방이 온통 붉은색으로 꾸며진 괴이하고 섬뜩한 곳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대청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 관계는 역전되었다.
하결의 기도는 바깥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그의 두 눈과 몸에서는 핏빛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렵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직도 못 구했나?”
하결의 물음에 북혈문주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좀 전에 기별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극한지체를 지닌 자를 찾아내서 이쪽으로 호송 중이랍니다.”
정말 기다렸던 소식이기에 하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얼마나 걸리지?”
“사흘 후면 도착할 겁니다.”
“사흘 후!”
하결이 이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극한지체를 찾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극한지체를 찾아냈으니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순간 하결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으으윽! 그만!”
북혈문주가 두려움 가득한 비명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 양옆에서 붉은 원이 생기더니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북혈문주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조금만 더 부풀면 머리의 혈맥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다가, 이윽고 하결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북혈문주의 부풀어 오른 피부도 가라앉았다.
“약속은 극한지체를 내 앞에 데려올 때, 지켜질 거다.”
“알겠습니다.”
북혈문주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과연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가 순순히 약속을 지켜줄 것인가?
하결에게 당한 건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이 허점을 만들었고, 그 허점이 자신의 피에 몹쓸 것을 허용했다.
그래, 망하는 건 언제나 욕심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욕심 때문이었다.
북혈문주는 이조차도 과정이라 여겼다. 지금까지처럼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하결이 차분히 말했다.
“그때까지 마교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교 놈들은 이번 취마 일로 빙궁의 감시하에 발이 묶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마교 소교주가 오늘 이곳에 왔다 갔다. 아주 미세한 느낌이었지만, 내 눈을 피할 정도라면 그자가 틀림없겠지.”
북혈문주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 당장 서 장로에게 기별하겠습니다. 어쩌면 놈이 무단으로 나온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단 사흘이니까요.”
북혈문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돌아선 그의 눈빛에는 운명을 상대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세가 담겨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는 사흘 후에 결정될 것이다.
아니, 이 말이 그의 마음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한 것이리라.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한편 홀로 남은 하결은 뒤쪽 벽을 조작했다. 특정한 곳들을 누르고 당기고 또 누르고. 신중하게 장치를 조작하자.
스르르릉.
그러자 문이 열리며 또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밀실 속의 밀실.
그곳에 거대한 수조가 있었다. 오직 북해에서만 만들 수 있는 얼음으로 만들어져 안이 들여다보이는 특별한 수조였다.
수조 안은 핏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핏물에는 온갖 종류의 약물이 함께 섞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괴이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오직 취마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 냄새에 향설빙주의 주향까지 섞여 있다는 것을.
그 수조 안에 한 남자가 잠겨 있었다.
핏물 속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또렷이 다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긴 팔다리, 환상적인 근육, 그야말로 장인이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남자의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피처럼 붉었다.
피와 만난 그의 육체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결이 수조 속 남자에게 말했다.
“사부님, 드디어 극한지체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핏물 속에 있던 적발의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남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결을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젊어 보였지만 결코 젊지 않은, 이 수조 속 남자가 바로 혈왕이었다.
하결은 혈왕의 무공을 이어받은 유일한 수제자였다.
혈왕이 웃었다. 그가 기뻐하자 핏물도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부글부글 핏방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이 또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혈왕이 말했다. 핏속에서 하는 말이었음에도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똑똑히 들려왔다.
“우린 돌아가지 않는다. 북해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 * *
서낙이 빙궁 무인들을 거느리고 검무극의 거처로 들이닥쳤다.
이안이 문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소교주 어디에 있나?”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서낙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소교주가 거처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단으로 거처를 떠난 일이 밝혀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잘못 전해진 소식인 것 같네요.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서낙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이안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했지만, 서낙은 애초에 작정하고 왔다.
“비켜서게. 궁주님이 내린 명령을 확인하는 일을 방해하면, 그 또한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될 테니까.”
서낙이 고수들과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낙과 싸울 수는 없기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서낙이 침상에 불룩하게 올라온 이불을 쳐다보았다.
“보세요, 소교주님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들 물러가세요.”
이안이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열심히 연기했지만, 서낙에겐 통하지 않았다.
“목침이 보이지 않는군.”
베개를 넣어서 불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미 이곳에 검무극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네가 직접 이불을 걷어내게.”
서낙이 이안에게 명령했다.
이안이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마는 태평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하긴 이 상황에서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겠지.
“어서! 감히 무엄하게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작정인가?”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침상으로 걸어갔다.
휘리릭.
자포자기한 이안이 이불을 걷었다.
다음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검무극이 목침을 안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 추운 북해에서 이불까지 뺏어가시려고 그러시오? 목침까지 끌어안고 자는 걸 보면서 말이오?”
너무 놀란 서낙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까지 더듬었다.
“대, 대체 이게? 자네가 왜?”
다들 놀랐지만, 이 순간 제일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도련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검무극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주 봅니다, 요즘.”
검무극의 말에 서낙은 멍하게 서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
앞서 기세 좋게 밀어붙일 때와 달리 그는 차분했다.
“누군가 그릇된 정보로 서 장로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그게 너잖아!’
서낙은 발끈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
‘나답지 않다.’
소교주에게 말려들면서 요즘 감정조절이 안 되고 있다.
이곳에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그렇다. 더 차분히, 그리고 정중하게 이불 속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또한 침상 속에서 그를 보았더라도 그렇게 놀라선 안 되었다.
“결례를 범해서 미안하네.”
서낙은 예를 갖추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단순히 사과로 끝낼 일이 아니니, 오늘 일은 정식으로 궁주전에 항의하겠소.”
“그러시게.”
서낙은 데려온 무인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자 이안이 검무극에게 소리쳤다.
“대체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네가 서 장로 문 열어줄 때.”
“창문으로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어휴, 누구 형 아니랄까 봐, 오신 걸 아셨으면서 모른 척하셨네요!’
이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놀랐잖아요! 아까는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취마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심장 터뜨리려고 창문에 붙어 있었을 거네. 시기적절하게 들어와서 놀라게 하려고.”
취마의 농담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럼요, 남을 놀라게 할 수만 있으면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매달려 있을 분이시죠. 좋아요,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했으니 나가신 성과도 있으셨겠죠?”
검무극을 공격하려고 몰아붙인 말이었는데.
“배후를 찾았다.”
이안은 ‘어이구’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앞서 이불을 걷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정말요?”
“운이 좋았어.”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천하제일이시죠!”
검무극은 은밀히 북혈문에 잠입해서 한설이 양석과 만나는 것을 보았다.
다들 그 만남에 집중할 때, 북혈문 내부를 조사할 작정이었다. 한데 양석을 따라왔던 호위 무인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일은 아니기에 그의 뒤를 쫓았고, 그가 시비에게 피를 이용한 혈공(血功)을 거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를 돌봐주는 것처럼 굴다가 순식간에 혈공을 걸었기에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자가 누구죠?”
“북혈문 후계자의 호위 책임자다.”
취마와 이안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놈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럼 일부러 놈에게 정체를 드러내신 건가요?”
아까 서낙은 이곳에 검무극이 없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과연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의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겸, 북혈문과 서 장로가 서로 이어져 있는지도 확인하려 했지.”
“둘 다 확인하셨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하나 더. 우리가 이곳에 붙잡혀 있는 것도 풀리게 될 거다. 서낙이 신교의 소교주에게 큰 결례를 했으니, 빙궁주에게 우릴 풀어줄 명분이 생긴 셈이지.”
이안은 멍한 얼굴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럴 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어떤 생각이 드는데?”
“아! 도련님과 한편이란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도련님의 적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느냐?
네가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내 옆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가?
“어찌나 놀랐는지 덕분에 제 심장이 더 튼튼해졌어요.”
이제 검무극은 취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술? 아니면 죽은 원주? 아니면 두고 온 여빈?
하지만 다 틀렸다. 지금 취마는 검무극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저리 똑똑할 수 있을까? 어찌 저리 당황하지도 않고 일을 처리할까?
검무극이 없었다면 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인데,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정말 동생이지만 형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또 하고 있었다.
“형.”
형 아니다. 차라리 동생이라고 해라.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형 같은 동생의 입에서 자신이 너무나도 고대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술판을 벌일 때가 되었어.”
* * *
빙궁으로 돌아온 한설은 궁주전으로 향했다.
“차 마시러 왔어요.”
돌아와서 마시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찾아올 줄 몰랐기에 빙궁주는 당황했다.
“이리 오너라.”
한설이 궁주전에 마련된 다탁에 앉았고, 차는 빙궁주가 직접 탔다.
“제가 탈게요.”
“됐다, 그냥 앉아 있어라.”
빙궁주가 직접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설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떤 차인지를 물어볼까? 아니면 북혈문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나? 하다못해 날씨 이야기라도 할까?
공적인 말만 주고받으면서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하는 것도 무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초식이 머릿속에 있어도 몸에 익지 않으면 소용없듯,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말이 입에 붙지 않으니 나오지 않는다.
말은 머리나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하는 것임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빙궁주가 차를 우려 왔다.
“차 맛이 어떠냐?”
“좋습니다.”
말은 이어지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어색하기는 빙궁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빙궁주 역시 평생 안 하던 고민 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냥 조용히 차만 마셨다. 진짜 친한 관계는 침묵할 때 얼마나 어색하지 않은가로 알 수 있다더니, 두 사람은 아직 멀었다. 앞에 놓인 차라도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은 숨 막히는 침묵.
하지만 그렇다고 빙궁주는 아무 말이나 해서 이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어떤 의미에서는 이 어색함이 좋았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한참의 침묵을 깬 사람은 한설이었다.
“궁주님은 비정한 사람과 다정한 사람 중에 누가 오래 살아남을 것 같나요?”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단 질문에 답부터 했다.
“비정한 사람.”
그러자 한설이 옅게 웃었다.
“저와 답이 같으시네요.”
“무인이라면 다 같은 생각 아니겠느냐?”
“소교주와 함께 온 이안이 그러더군요. 자기는 다정한 사람이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고요.”
이안, 왠지 처음 만났을 때 시선이 갔던 아이였는데.
“그냥 궁금했어요. 궁주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 질문 때문이었을까? 빙궁주는 처음으로 마음에 있던 말을 꺼냈다.
“널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휘몰아치는 북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이로.”
한설이 들고 있던 찻잔 속 차가 한 차례 진동하며 파장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요? 어머니가 보시기에 그런 아이로 자랐나요?
딸과 대화를 나눠보니 비로소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조금 전에 그 말을 한 것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 때문이나 검무극 때문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본능은 알고 있었던 거다. 이대로라면 딸을 잃게 되리란 것을. 이미 거의 다 잃었음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이대로라면 자신은 그저 빙궁을 물려주는 궁주일 뿐, 엄마가 아니게 될 것임을.
아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며.
그러던 차에 검무극이 나타난 거다. 아직 뒤에 서 있을 거란 말이 가슴에 날아와 박히면서, 결국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조금은 민망하지만, 딸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넌 그런 아이로 잘 자라 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냥 한마디 말에 불과했는데. 한설은 마음속에 꽝꽝 얼어붙어 있던 얼음벽 일부가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장벽은 거대했지만, 처음으로 깨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으리라.
한설은 들고 있던 차를 다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에는 제가 타드릴게요.”
* * *
남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려면 주인의 허락이 필요한 법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내 말에 빙궁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딸아이가 다녀갔네.”
그 자리가 어땠는지는 빙궁주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자네 덕분이네.”
“저야 말씀만 드렸고, 뒤돌아보신 건 궁주님이시죠.”
빙궁주는 검무극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이해한다. 검무극에 관한 보고서 속, 그 믿을 수 없었던 마음의 움직임들을.
“한데 어쩌죠? 궁주님의 이 좋은 기분을 망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검무극이 진지하게 말했다.
“서 장로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충격적인 발언에 빙궁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북혈문에서 혈공을 사용하는 고수를 봤습니다.”
혈공이란 말에 빙궁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자신이 아는 한 북해에 혈기를 사용하는 고수는 없다. 다시 말해 북혈문에서 뭔가 음모가 진행 중이란 의미.
“그가 서 장로와 연결되어 있었지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 정황만으로 빙궁의 장로를 죽이겠다는 건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서 장로가 했던 몇 가지 실수와 거짓말까지 보태서 판단해야 하니까요.”
특히 죽은 원주에게 향설빙주를 담아달라고 한 일을 빙궁주에게까지 끝까지 속인 게 결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빙궁주는 서낙의 다른 면을 보기도 했고.
“이들에게서 더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 노회한 자들이죠. 설령 시간을 들여 찾아내더라도 그땐 이미 늦었을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지금 궁주님께서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서 장로가 아닙니다. 그를 안 지 오래돼서 그가 가장 신경 쓰이겠지만, 그는 몸통에 붙은 팔에 불과합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머리와 몸통이죠.”
그녀를 움직인 결정적인 말은 이것이었다.
“이 결정을 내리는 건 제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궁주님의 나쁜 예감이 우릴 부르신 거죠. 전 궁주님의 그 감이 옳았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윽고 빙궁주가 결정을 내렸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서 장로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네.”
“물론, 그러셔야죠. 다만 서 장로 문제만큼은 취마님에게 먼저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정황으로 볼 때,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사람이 서 장로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고민이 한 차례 더 있었고, 이번에도 결정은 빨랐다.
“술자리를 허락하겠네. 단, 나도 초대하게.”
* * *
서낙은 대청에서 장식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모든 장식품을 꺼내서 새로 장식하곤 했다.
다시 정확하게 줄을 세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맞춰 세울 때, 그 완벽함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열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대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원래라면 문이 열리기 전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수하의 보고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이 저렇게 혼자 열린다는 것은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의미.
밖을 지키던 수하들은 모두 제압되었으리라.
서낙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다 되어 가니까.”
서낙은 마지막 하나까지 완벽하게 줄을 맞춰 세운 후에야 뒤로 돌아섰다.
대청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취마였다.
취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러 왔다.’
서낙이 손님을 맞이하는 탁자에 앉았다.
“기다려 주셔서 고맙소. 자, 앉읍시다.”
취마는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서낙은 탁자에 놓여 있던 잔을 하나는 자신 앞에, 다른 하나는 건너편 자리에 놓았다.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런지 목이 마르오. 한 잔 주시겠소?”
취마는 허리춤에 매달린 혈루를 들어서 마개를 열었다.
향긋한 빙주의 냄새가 퍼져 나왔다. 원주가 죽기 전에 만든 빙주다.
취마가 주향을 깊게 맡더니 자신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부었다.
하지만 서낙에게는 술을 따라주지 않았다.
취마는 혼자 술을 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지자 눈을 지그시 감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빙주를 마시자 원주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났다.
바로 눈앞에서 두 눈까지 감았지만, 서낙은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주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기 때문이다.
천천히 눈을 뜨며 취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죽였소?”
취마는 두 잔째 술도 자신의 잔에만 따랐다.
서낙이 앞에 놓인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술이나 한 잔 주고 묻지. 인정머리 없소.”
이 상황에서도 서낙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자신하겠지?”
취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다 타성에 젖어서요. 나도 그랬지. 이 북해에서는 나를 긴장시킬 상대가 없었으니까.”
허허실실, 웃고 살았던 서낙이 본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본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뻗쳐나온 기도는 온 세상을 얼릴 듯 차갑고 강렬했다. 그는 원래 알려진 실력보다도 고수였다.
“타성에 젖는 게 참 무섭지. 당신도 마존이기에 뭐든 이루면서 살았겠지? 원래라면 이길 수 없는 적도 이겼을 테고. 이기고 또 이기고. 알고 보면 상대는 당신이 아니라 마교라는 두려움에 잡아먹힌 건데.”
취마는 서낙의 기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 잔의 술을 또 마셨다.
어느새 그들 주위에는 취마의 주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헛소리는 당신이 지껄이는군.”
취마의 여유에 서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는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처럼 웃었다.
“그 여자는 나약했지. 몰래 만들어줬으면 끝이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걸려 했소.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그러더군. 아무래도 궁주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이제 궁금증이 풀렸소?”
그러자 취마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소. 우리 같은 인간이 좋은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야 뻔하지 않소? 하찮고 이기적인 이유겠지.”
“그런데 왜 물었소?”
서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궁금하다고 했어요.”
짙은 안개 속을 가르며 걸어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빙궁주였다.
그녀가 서낙을 응시하며 담담히 물었다.
“그 일도 빙궁을 위한 것이었나요?”
빙궁주의 등장에 서낙은 충격을 받았다.
취마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궁주.”
처음에는 조금 전 한 말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다. 아무리 본색을 드러냈어도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빙궁주의 차가운 눈빛에서 어떤 변명도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궁주가 꾸민 일이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원주를 죽인 것도 빙궁을 위한 일인가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언제나 그렇지. 내 선택은 모두 빙궁을 위한 것이야. 내가 곧 빙궁이니까.”
빙궁주의 두 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빙궁주 앞에서 자신이 곧 빙궁이라는 말은 무례를 넘어 도전이었다.
자연스레 주위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 사이에서 취마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낙은 이미 술상을 엎었지만 빙궁주는 여전히 예를 갖춰 그를 대했다. 그래도 과거 그가 한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혈공을 쓰는 자들과 손을 잡은 것도 본궁을 위한 일이었나요?”
잠시 사이를 두고 서낙이 나직이 말했다.
“거기까지 다 알고 있었나?”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서낙은 오히려 표정을 굳히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빙궁주는 이런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이 본래의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고 살았으리라 생각하니 끔찍하다.
그 여린 원주를 앞에 두고 유서를 쓰게 하는 서낙의 모습을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왜 그들과 손을 잡았는지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그녀는 앞서 취마가 서낙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하찮고 이기적인 이유일 테니까요.”
그러자 서낙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감히 네가!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해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그는 원색적인 분노와 원망을 드러냈다.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서낙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네가 궁주 자리에 오를 때, 내가 딴마음을 품었다면!”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이 배신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는 후회하는 거다. 그때 궁주 자리를 찬탈하지 못했음을.
“그래서? 그들이 궁주 자리를 보장해 준다고 하던가요?”
서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긍정의 침묵이라는 걸. 그런 약속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그들과 손을 잡았을 리 없다.
언제 마음이 바뀌었을까?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기에 여러 의문이 줄지어 나올 것 같았는데, 막상 겪으니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온갖 구질구질한 말들로 서로의 감정만 긁어댈 게 분명했기에. 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는데, 다리 너머를 두고 입씨름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빙궁주가 취마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부탁대로 서낙의 처분은 취마에게 맡기려고 마음먹은 그녀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게 낫다고 여겼고.
취마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밖에서 기다리죠.”
빙궁주가 자신이 걸어왔던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사람 마음 따윈 헤아릴 줄 모르는 이기적인 년! 얼음덩어리 같은 년!”
서낙의 악담에 취마는 가소롭게 웃었다.
“왜 웃지?”
“한심해서. 왜 그들이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겠군.”
서낙의 차가운 웃음에 살기가 실렸다. 여전히 그는 겁을 먹지 않았다. 취마와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밖에 빙궁주가 있는데. 대체 뭘 믿기에.
그런 의문을 가지며 취마가 혈루의 마개를 닫았다.
서낙이 혈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것이 네 독문무기인가?”
다음 순간 취마는, 앞에 있는 탁자를 뒤집었다.
서낙의 일장에 탁자가 박살 나던 그 순간.
서낙의 어깨에 의자가 날아와 찍혔다. 취마가 앉아 있던 의자로 그를 내리친 것이다.
서낙은 당황했다. 너무 의외의 공격이었다. 나무 의자에 당할 리 없으니까, 애꿏은 의자만 박살 나서 흩어졌는데, 취마라고 그걸 몰랐겠는가?
취마의 다음 말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주정뱅이의 무기가 달리 뭐가 있겠나? 손에 잡히는 것이 다 무기지.”
취마는 파락호처럼 웃었지만, 서낙은 웃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파락호가 손에 잡힌 의자를 내리쳐 자신을 가격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보검으로 찌른 것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마존을 뽑으라면 독왕이나 극악소마, 섭혼마존 등이 치열한 경쟁을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취마를 첫 번째로 뽑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 서낙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문제가 되었다.
쇄애애액!
이번에는 서낙이 기습적으로 일장을 내지르며 장력을 발출했다.
취마가 옆으로 가볍게 몸을 틀어서 피했다.
뒤쪽 대청 벽이 부서지면서 그곳에 놓여 있던 장식장이 박살 났다. 서낙의 시선이 아주 잠깐 부서져서 바닥을 뒹구는 장식품들을 향했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광경이었으니까.
쇄애앵!
두 번째 장력이 날아들었을 때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비명이 들리지 않았으니, 이번 역시 피했으리라.
문득, 서낙은 자신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니라 주기다.’
그랬기에 몸이 알딸딸해지고 나른해졌다. 자연스럽게 경각심이 풀어졌다. 이건 정신력 문제나 내공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이 자연스럽게 술기운에 반응했다.
서낙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양손에서 차가운 한기가 피어올랐다.
‘정신 차려! 취하면 죽는다!’
서낙의 독문무공은 한백신장(寒白神掌)이다.
가볍게 적중당해도 장기에 한기가 들어 평생 고생할 것이고,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으며 즉사하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이보게, 마존. 비겁하게 안개 속에 숨지 말고 나와서 떳떳하게…….”
쇄애애액!
앞에서 날아든 것을 서낙이 몸을 틀어 피했다.
날아가서 뒤쪽 벽을 부순 것은 바닥을 뒹굴던 쇠구슬이었다. 앞서 부서진 장식품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취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무기로 사용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주운 쓰레기가 무림의 금용 암기보다 더 무섭게 날아든다.
“천하의 마존께서 이렇게 비겁하게…….”
쇄애애애액.
이번에는 등 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서낙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등으로 막았다.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취마의 주먹이었음을.
서낙이 앞으로 내동댕이치듯 날아갔다가 홱 돌아섰다. 등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견딜만했다.
취마는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서낙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서낙의 가슴에 섬뜩한 바람이 불었다. 나른하면서도 퇴폐적인 그 눈빛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살기와 광기가 담겨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후아아아아아앙!
서낙의 기습적인 장력이 안개를 가르며 휘몰아쳐 날아갔다.
하지만 취마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볍게 피한 뒤,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기가 넘쳐나는 이곳은 취마의 세상이었다.
고수일수록 더욱 이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작은 차이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연기를 가르며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쉭! 쉬익!
푹! 푹!
빠르게 날아든 것이 서낙의 어깨와 팔을 찔렀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취마의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너무 빨라서 미처 피하지 못했다.
한발 늦게 일장을 휘둘렀지만 이미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강하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강하다.’
서낙도 빠르게 움직여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안개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몸을 날린 주위의 안개가 흩어지며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쇄애액!
꽈아앙!
자신을 향해 날아든 장력을 막아냈지만, 공력에서 밀렸기에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장법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쇄애애애액!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취마의 손가락이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살갗이 뜯겨 나가며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조법(爪法)이다!’
이제 서낙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취마는 온갖 종류의 무공을 다 익히고 있었음을.
주정뱅이의 무공은 이래야 하니까.
치고받고 찌르고 뒹굴고 던지고.
이게 바로 취마의 무공이다.
마구잡이로 싸우는 주정뱅이의 무공이 자신의 뼈를 부수고 살을 뜯어내는 실력인 거다.
취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앞에서 보란 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더 강해졌다.
서낙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기운은 푸른색이었는데, 이제 새하얗게 변했다.
한백신장의 초식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초식인 백멸장(白滅掌)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안 피해? 백멸장을 그 자리에서 받는다고? 됐다!’
내심 쾌재를 부르던 바로 그 순간!
서낙은 보았다.
주위에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취마에게 몰려들더니 이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등을 돌린 채 있는 주신의 뒷모습이었다.
그가 익힌 여러 무공 속에 빛나는 취마의 독문무공이었다.
쇄애애애애액
백멸장이 발출되었다. 바닥을 뒤집고 공기를 찢어발기며 거대한 강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취마 뒤에 등을 돌리고 있던 주신이 돌아서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취마의 독문무공 주신공(酒神功) 중에서.
네 번째 잔, 주신폭주(酒神暴酒).
주신 모습으로 날아가던 주기가 합쳐지며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콰아아앙!
두 개의 거대한 강기가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으로 대청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취마는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면 서낙은 십여 걸음 뒤로 밀려나 있었다.
주신폭주가 백멸장을 압도하며 완전히 밀어버린 것이다.
서낙의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크에에엑.”
그가 입에서 왈칵 피를 쏟아냈다. 회생 불능의 상처였다.
취마는 독문무기인 혈루을 쓰지 않고서 그를 이긴 것이다. 그도 강했지만, 취마는 더 강했다.
취마가 술을 마셨다. 마지막 한 모금은 원주를 위한 술이었다.
곧 닥쳐올 죽음 앞에서 서낙은 분노했다. 졌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긴 그들에 대한 분노였다.
“나를 지켜준다고 했는데…….”
서낙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믿었던 건 자신의 실력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때, 그곳으로 새로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약속을 어기진 않았어.”
무엇인가 서낙 앞으로 날아왔다. 그의 앞에 내팽개쳐진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들어선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네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긴 한가 보군.”
두 무인은 이곳 서낙의 거처 은밀한 곳에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무공실력도 실력이지만 은신술과 경공술도 탁월해서 여차하면 서낙을 데리고 달아나려고 준비된 이들이었다.
검무극이 취마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는?”
검무극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온다!”
안개 너머에서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피이잉!
취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얼굴을 스치고 무엇인가 지나갔다.
핏방울이었다.
암기처럼 날아온 그것은 분명 핏방울이었다. 평범한 핏방울이 아니었다. 핏방울 모양을 한 혈기였다.
곧이어 핏방울을 날린 상대가 사람을 덮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와 얼굴, 목과 손은 괴이할 정도로 붉었다.
“피해!”
검무극의 외침에 두 사람이 양옆으로 피했다.
콰아아앙!
달려온 남자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튀어나온 피가 무너진 벽을 뚫었다. 자멸공이었다. 죽으면서 발출되는 혈기의 위력이 엄청났다.
이래서다. 검무극이 혈왕을 조심하고, 또 싫어하는 이유가. 그는 수하의 목숨을 이렇게 사용하는 자였으니까.
단지 짧은 시간 자멸공을 익힌 자가 아니다. 이 자멸공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오랜 수련을 통해 키워진 무인이었다. 그 노력 끝에 기다리는 것은 이 한순간의 자멸.
그래서 혈왕과의 싸움은 징글징글한 싸움이 된다.
이번에야말로 물어야 했다.
“괜찮아?”
검무극의 물음에 취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대답하려는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 곳을 향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많다!”
취마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앞에 펼쳐져 있던 안개를 걷어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보았다.
달려오던 십여 명이 일제히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꽈아앙아앙!
한꺼번에 폭사하며 자멸공을 발휘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키워진 것인지, 그들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예 전방으로만 혈기가 집중되게 만든 자멸공이었다.
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개의 혈기!
그것들은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그 어느 곳으로 피할 수 없이 빼곡하게 날아들었다.
너무 광범위하게 날아들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취마가 검무극 앞을 막아섰다.
“소교주! 내 뒤로!”
취마는 검무극 앞을 막아서며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두 팔을 교차해서 얼굴을 가렸다.
위기의 순간, 취마는 검무극을 소교주라 칭했다. 이 순간만큼은 동생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천마신교의 소교주였다. 자신은 그를 지켜주는 마존이었고.
취마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앞서 날아든 핏방울의 위력으로 볼 때, 부상은 불가피했다. 자신은 다치더라도 절대 검무극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소교주를 모시고 나온 마존의 자존심이었으니까.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날아든 혈기들이 무엇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취마가 얼굴 앞에 교차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앞을 올려다보았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든 혈기는 자신에게 닿지 못했다.
눈앞에 무엇인가 세워져 있었다.
햇살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강기의 벽.
혈기는 어느 한 곳 피할 곳 없이 촘촘하게 쏟아져 날아왔지만, 단 한 줄기의 혈기도 이 빛나는 강기의 벽을 뚫지 못했다.
거대한 강기의 벽, 모든 마인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벽.
바로 구화마공 대마벽이 세워져 있었다.
끝없이 혈기들이 날아와 부딪쳤지만, 대마벽을 뚫지는 못했다.
퍽퍽퍽퍽퍽!
쥐어짜듯 마지막까지 날아든 혈기는 모두 해소되었다.
허공으로 날아올라 자신의 피 대부분을 자멸공으로 쓴 십여 명의 무인은 모두 가슴이 뻥 뚫린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대마벽은 곧장 사라지지 않고 햇살에 반짝이며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취마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등 뒤에 있던 검무극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서 흑마검을 앞으로 내지른 채 서 있었다.
“저런 공격에 형을 다치게 할 순 없지.”
일반 공격도 아니고, 격렬하게 싸우다 마지막에 쓰는 최후의 절초도 아니고, 이건 보자마자 펼친 자멸공이었다. 뒤에 공(功)이 붙어 있지만 무공이라 할 수 없는 공격이다.
검무극은 이런 공격에 취마의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마벽을 펼친 것이다.
이 장면은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비열하고 악랄한 악을 더 비열하고 더 악랄하게 없애버릴 수 있는 무림의 유일한 존재, 전 여기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은 막아낼 수 없는 악을 우린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취마가 대마벽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자 비로소 대마벽이 서서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그는 검무극을 보며 정중히 말했다.
“고맙소, 소교주.”
구화마공으로 자신을 구해준 이 순간만큼은 형, 동생이 아니라 마존과 소교주의 관계였다. 검무극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
“마존께서 저를 지켜주기 위해서 나서준 일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취마가 몸으로 자멸공을 막으려 했을 때,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격했으니까.
그렇게 서로 마음을 나눈 후 검무극은 기를 끌어올려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를 살폈다. 더는 없었다. 이곳 부서진 대청 근처에 은신해 있던 자들은 이들이 전부였다.
그때 바깥으로 향하는 대문이 열리며 빙궁주가 들어왔다.
그녀 뒤쪽 저 멀리 서너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꽝꽝 얼어붙은 시체들이었다.
“몇 놈이 눈에 띄어서 내가 처리했네.”
그녀는 이 싸움에 될 수 있으면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취마에게 우선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나가 있었던 것이고.
그녀의 시선이 쓰러져 있던 십여 구의 시체를 향했다.
‘한꺼번에 자멸공을 썼구나.’
그녀는 담장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강기의 벽을 보았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가 만들어낸 것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소교주는 구화마공을 제대로 배웠구나.’
소교주의 무공이 이러할진대 천마의 무공은 얼마나 대단할지 섬뜩한 경외감이 들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놈들은 북해빙궁의 장로를 포섭하고, 북혈문과도 손을 잡았으며 자멸공까지 서슴없이 쓰는 자들입니다.”
빙궁주는 사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무림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그녀였지만, 이런 자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빙궁주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낙에게로 걸어갔다.
취마의 공격에 당한 그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와 손을 잡은 거야?’
빙궁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보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한마디 작별의 말도 해주기 싫었다.
그렇게 돌아서는 그녀에게 서낙이 말했다.
“……한이경(寒梨景)”
순간 빙궁주가 흠칫하며 신형을 멈췄다.
그녀가 다시 천천히 돌아서며 서낙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서낙이 웃었다. 입안에 피가 가득했기에 그 모습은 끔찍해 보였다.
한이경.
빙궁주의 언니였다.
오래전 그녀는 언니와 후계 다툼을 했고, 마음이 여렸던 언니는 자신을 위해 북해를 떠났다. 후계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이후에 언니를 찾지 않았다.
자신과 얽히는 것이 오히려 언니에게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애써 들춰보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괜히 자신과의 관계가 이어지면 다시 언니가 궁주 자리에 욕심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서였다. 그땐 정말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잊고 지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잊었다.
다시 언니가 생각난 것은 바로 저 검무극 때문이었다.
검무극이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잊고 있던 언니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검무극이 해낸 것처럼 평화롭게 후계자 선정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땐, 뭐가 그리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언니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위가 발작했었다.
어쨌든 빙궁주는 언니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이 모든 걸 언니가 누렸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죽어가던 서낙이 그 언니를 언급한 것이다.
‘대체 왜?’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서낙이 말했다.
“난 이경이가 아니라 널 선택했지.”
죽기 직전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회광반조에 든 서낙의 눈은 맑았다.
“보고 싶지 않나?”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빙궁주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그를 끝내버리려고 손을 내뻗던 그때.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뭔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낙이 웃었다. 입안 가득 차 있던 피가 흘러내렸다.
‘이건가? 마지막 복수가?’
뭔가 비밀을 알고 있는데 말해주지 않는 것.
이 순간 언니에 대한 일이 자신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임을 그는 아는 것이다. 다른 어떤 말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딸이 있으면 어떨까? 이모가 빙궁주라는 사실도 모른 채 평생 살아가겠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디선가 시비로 고생하면서 살지도 모르지. 아니면 기녀가 되어 웃음을 팔고 있을지도 모르고.”
빙궁주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시비로 살든, 기녀로 살든.”
빙궁주는 서 장로에게 막말하지 않았다. 네 어떤 도발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듯 여전히 정중했다.
“지금껏 잊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궁금해하리라 생각했나요? 이깟 말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낄 줄 알았나요? 당신은 죽을 때까지 어리석군요.”
서낙의 눈가가 꿈틀하며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빙궁주의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뻗어나가 서낙의 몸을 덮쳤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몸에 퍼져나갔다.
“으아아아아아!”
온몸이 얼어붙으며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쳤다.
“알아도 어디 있는지 말하지 마세요. 괜히 신경 쓰이니까. 입 다무세요!”
그 와중에도 서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평생 느꼈던 그 어떤 고통보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
빙궁주는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빛으로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내심 바랐다. 제발 살려달라고, 내가 아는 바를 다 말할 테니 고통을 멈춰달라고 애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고통에도 말하지 않고 죽는 걸 보니, 마지막으로 자신을 괴롭히려고 꺼낸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농간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으니까.
빙궁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본의 아니게 자네 앞에서 본궁의 치부를 드러냈군.”
“치부라니요? 빙궁주님도 혈육 간에 피를 보지 않고 훌륭하게 후계 다툼을 끝내셨군요.”
“언니가 훌륭했지.”
“그런 현명한 언니시라면,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실 겁니다.”
예의상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래도 검무극의 이 말이 그녀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빙궁주가 화제를 바꿨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다음은 북혈문을 칠 생각입니다.”
빙궁주는 마음 같아선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북혈문을 확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많은 희생을 낳을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궁주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정찰 삼아 소궁주와 함께 북혈문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딸을 북혈문에 보낸다? 빙궁주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적이 워낙 강력해서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차라리 검무극 옆에 있는 게 안전하리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담장 너머 강기의 벽을 보았고, 딸과는 차를 마셨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기에 믿는 거다.
“쓸어버리는 건 궁주님께서 맡아주십시오. 이번에는 궁주님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마와 소교주가 찾아온 이유는 원주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죽음을 밝히고 복수까지 했으니, 그들은 돌아가도 그만이었다.
한데, 같이 적과 맞서 싸워주겠다고 하는 거다. 빙궁주는 검무극이 고맙고 든든했다.
“그럼 나중에 보세.”
검무극과 인사한 빙궁주는 취마와도 정중히 작별을 나눴다.
그녀가 떠나자 검무극은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마가 혈루를 검무극에게 건넸다.
“마셔.”
그는 절대 독문병기인 혈루를 남의 손에 넘기지 않았다.
그것을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혈루에 든 빙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아, 좋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빙주다!”
다시 건네받은 혈루의 술을 취마가 마셨다.
“정말 맛있다!”
일부러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술을 담은 사람이 저 하늘 어디선가 듣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혈루에 남아 있던 술을 모두 마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취마가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저 하늘에서 원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 *
“걱정하지 마세요.”
뒤에서 들려온 말에 창가에 서 있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말한 사람은 침상에 걸터앉은 한설이었다.
“어머니가 함께 가셨으니까요.”
이안이 창밖을 멍하게 쳐다보자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안은 솔직히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도련님 하시는 일은 걱정 안 해요. 제 걱정만 해도 태산인데, 내일 해가 뜰지 안 뜰지를 왜 걱정하겠어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한설이 말했다.
“초월적 존재니까요?”
이안은 자신을 놀리는 말인 줄 알았다. 하필 저 표현을 해서 두고두고 고통받는구나!
“네, 제겐 초월적 존재니까요.”
언젠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에 한설이 다시 물었다.
“소교주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나요?”
쉽게 대답하지 못하리라 여긴 질문이지만,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죽을 수 있어요. 지옥문 활짝 열어젖히고 이렇게 말할 거예요. 우리 도련님이 보내서 왔다! 아, 도련님이라면 염왕이랑 친구 돼서 열외 되실 텐데. 저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생하겠죠?”
한설은 고개를 내저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참았다. 며칠 함께 지낸 정도 정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이안이 대신했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이안의 말에 한설은 ‘알면 됐어요’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질문은 제일 쉽게 대답할 수 있었어요. 절대 저 보고 죽으라 하실 분이 아니시니까. 죽을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되는 질문이죠.”
한설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깊은 유대감이 생길 수 있다고?
“당신이 그러면 소교주가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자신이라면 부담스러울 거 같다. 누군가 이렇게 기대하고 쳐다보면, 더 잘해야지, 더 좋은 모습 보여야지. 부담감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확신하죠?”
“제 그런 말을 부담으로 여기실 만큼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냥 좋아하실 거예요. 내가 고생한 보람 있구나, 하고.”
솔직히 한설은 검무극이 부러웠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검무극과 취마가 거처로 돌아왔다. 두 사람을 보자 한설이 다급히 물었다.
“어머니는요?”
“궁주께서는 빙궁으로 가셨소.”
서 장로가 정말 배신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설은 낯설게 느껴졌다. 서 장로의 배신이 낯선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어려서부터 숙부로 대했기에 그녀에게는 큰 어른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런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또 있다니. 그렇게나 강해 보였던 사람이었는데.
한설은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그래도 서 장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컸을 텐데.
문득 그녀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구나.’
놀랍게도 지금껏 어머니를 걱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강한 분이셨고. 이런 걱정을 할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한데 조금 전에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고, 또 지금은 어머니가 혹여라도 상처 입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생전 처음 어떤 열기를 느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걸까? 아니,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건가?
이렇게 바뀐다는 것은 더 큰 미움의 감정을 가지게끔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설은 문득 그런 문제에 관해 검무극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검무극이라면 이러이러하다고 명쾌하게 답을 내려줄 거 같아서였다. 뭐, 그렇다고 묻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죠?”
“우린 서 장로를 죽여서 저들에게 선전포고했소.”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목표는 북혈문이요. 그들을 치기 전에 북혈문에서 왜 극한지체를 구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일 거요. 그들 내부로 들어가면 좋은데.”
그러자 한설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검무극이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말했다.
“일전에 북혈문의 양 공자를 만났을 때, 소교주와 함께 다시 찾아가겠다고 말해두었어요. 함께 가요.”
검무극은 솔직하게 지금의 상황을 전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거요. 방금까지 말을 나누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서 자멸공을 쓸 수도 있소.”
마음속에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열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한설은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빙궁의 일이니, 자신이 앞장서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군 지옥문도 연다는데.”
한설은 미소 짓는 이안을 쳐다보며 힘차게 덧붙였다.
“북혈문은 제가 열죠.”
빙궁주는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 것을 보면 서낙의 마지막 개수작은 성공했다.
그곳으로 한설이 들어섰다.
“궁주님.”
“왔느냐?”
빙궁주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소교주와 북혈문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딸의 말에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상 위험한 일임을 알았지만, 검무극을 믿고 보내기로 이미 마음먹은 그녀였다. 딸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무인으로 성장할 테니까.
사실 한설이 찾아온 건 북혈문에 간다는 보고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혹여라도 서 장로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꼭 말로 표현하시오.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오겠다는 자신에게 검무극이 했던 말이었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자신에게는 생사관의 관문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예전이라면 ‘그래, 잘 다녀오너라’라는 어머니의 대답으로 이 만남은 끝이 났으리라. 시선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설은 똑바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느냐?”
잠시 사이를 두고 한설이 말했다.
“괜찮으신가 해서요.”
빙궁주는 느꼈다. 딸이 저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감정은 서로에게 잘 전달되고 있었다.
“차 한잔하자.”
“오늘은 제가 할게요.”
한설이 직접 차를 우렸다. 빙궁주는 다탁에 앉아 말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딸이 우려주는 차는 처음이었다. 그 덕분에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가셨다.
“다 컸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를 우리던 한설의 손이 잠시 멈췄다. 또다시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나이쯤 키워주셨으면, 이렇게나 컸구나, 그런 말씀 한 번쯤 나오게 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소?
잠시 후, 한설이 차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처음 마셨을 때보다는 덜 어색했다.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았다. 서 장로의 배신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미 그를 의심했기에 마인들을 궁에 받아들였던 거였고.
일부러 상처를 숨기는 기색이 아니기에 한설은 안도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괜히 어색해지기 전에 일어나려 했는데.
“잠깐만 기다려라.”
빙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준비해둔 것을 가져왔다. 그것은 한 벌의 호신갑이었다.
“천궁호갑(天宮護鉀)이다. 입고 가도록 해라.”
천궁호갑은 북해빙궁의 보물로 내려오는 호신갑이었다.
생각지 못한 호신갑에 놀란 한설에게 더 큰 감동이 전해졌다.
“만약 피할 사이도 없이 눈앞에서 자멸공을 쓰면 천궁호갑을 믿고 삭풍빙막(朔風氷膜) 초식으로 얼굴만 보호해라. 그럼 중상은 피할 수 있을 거다.”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설에게 전해졌다. 그랬기에 인사하는 한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말씀하신 대로 대처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한설은 천궁호갑을 들고 궁주전을 내려왔다. 제대로 고마움을 전하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하고 놀라고 감격해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하고 내려왔다.
관계의 변화가 기쁘면서도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봐온 서 장로도 어머니를 배신했다. 앉을 때 마음과 일어설 때 마음이 다른 게 인간인데.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봐 두려웠다. 상처받게 될까도. 너무 오랫동안 상대의 마음을 생각지 않고 살아온 탓이었다.
* * *
하결이 수조가 있는 밀실로 들어섰다.
오직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계산된 한기가 오늘도 느껴졌다.
혈왕은 여전히 수조의 핏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극한지체를 지닌 이만 도착하면 대법을 마무리 짓고 저곳을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불과 이틀 남았는데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한다니.
“서 장로가 죽었습니다.”
하결의 보고에 수조 속에 있던 혈왕이 눈을 번쩍 떴다.
“취마에게 당했습니다.”
그러자 핏물 속에서 들려오는 나직하고 깊은 울림.
“취마는?”
자멸공을 쓰는 혈인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취마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겼겠지만.
“취마는 무사합니다. 그 자리에 마교 소교주와 빙궁주가 함께 있었습니다. 추측건대 세 사람의 합공으로 자멸공을 막은 듯 보입니다.”
핏물 속에 잠긴 혈왕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자멸공을 쓸 수 있는 혈인 한 명을 키우는데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게다가 서낙은 빙궁을 온전하게 접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인물이었다. 그랬으니 혈왕의 분노는 당연했다.
수조의 핏물이 더욱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지더니.
잠겨 있던 혈왕이 천천히 수면으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악.
그가 핏물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팔과 몸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기는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취마를 살려두지 않겠다.”
그가 당장 밖으로 나오려던 그 순간.
하결이 수조 앞에 절을 하듯 엎드렸다.
“참으십시오, 사부님!”
혈왕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하결을 향했다.
“대업을 바로 앞에 두고 계십니다. 이제 이틀만 참으시면 됩니다.”
혈왕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결은 안다. 이틀이 아니라 한 시진이 남더라도 그는 참지 않을 사람이다. 사부는 피 같은 사람이었다. 그 피는 용암처럼 끓고, 빙하처럼 얼어붙는 피였다.
“부디 이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들은 아직 우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서낙이 죽은 건 놈들이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흉수를 찾는 과정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응징은 이틀 후로 미뤄주십시오.”
하결이 간절히 사부를 말렸다.
혈왕은 하결을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촤아아아아아아.
다시 핏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틀 후면 오늘 참았던 분노까지 쌓여서 나올 것이기에, 취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결이 두 눈에 힘을 주며 각오를 드러냈다.
“북혈문의 모두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틀을 버텨내겠습니다.”
* * *
밀실에서 나온 하결은 곧장 양석의 거처로 돌아왔다.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양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딜 다녀왔나?”
“죄송합니다. 문주님을 뵙고 왔습니다.”
자리를 비울 때면 언제나 문주 핑계를 댔다.
양석은 그런 그가 못마땅했다. 비단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하결을 대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고 두 사람은 뭔지 모르게 은밀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찮네. 난 자네 이해하네.”
이제 양석은 작전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자, 이건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주는 거니 받게.”
양석이 봉투를 건넸다. 하결이 받아서 열어보니 백 냥짜리 전표가 세 장이나 들어있었다. 고생을 한다고 주는 돈치고는 큰돈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성의니까 받게.”
양석이 억지로 권했고 결국 하결은 못 이기는 척 전표를 받았다.
양석은 하결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역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내는 역할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돈 싫어하는 놈이 어딨다고. 양석은 후회했다. 자신을 감시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는 바람에,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천 냥을 주면 자신은 이천 냥을 줄 거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때 수하가 와서 손님이 왔음을 보고했다.
“빙궁의 소궁주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왔다고?”
다시 오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혹시 동행한 사람이 있나?”
“네, 젊은 남자와 같이 왔습니다.”
양석은 그 젊은 남자가 마교 소교주임을 직감했다. 다시 올 때는 마교 소교주를 데려오겠다고 했으니까. 소교주가 안하무인으로 군다더니, 정말 그와의 갈등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다.
“가세.”
양석이 앞장서 걸었다. 마교 소교주가 어떤 자인지 어서 가서 보고 싶었다.
그를 뒤따르는 하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교에서 벌써 왔다?’
생각보다 마교의 움직임이 빨랐다. 서 장로를 죽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게다가 양 공자를 공략하겠다?’
제대로 짚었다. 자신이라도 그리했을 테니까.
하결 역시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마교 소교주가 궁금했기에 양석을 따르는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 * *
한설은 검무극과 함께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확실한 계획과 작전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 어지간한 일에도 잘 긴장하지 않는 한설이었는데, 오늘은 떨렸다.
그녀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은 안 떨려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떨리는지 아시오?”
“왜죠?”
“너무 잘하려고 해서요.”
그 말이 맞았다. 완벽한 연기로 계획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좀 못하면 어때. 내가 실수해도 저기 소교주가 알아서 하겠지. 이런 마음을 먹어 보시오. 그럼 하나도 안 떨릴 거요.”
그런 마음을 굳이 먹지 않더라도, 검무극의 말만 들어도 한설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 무인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절대 죽으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을 거라고요. 만약 그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요. 그래도 내리지 않을 건가요? 마교가 망해도?”
검무극이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맞소. 그래도 안 내릴 거요. 날 그렇게 좋아하는 수하를 죽여야 사는 인생이라면 살아서 뭐 하겠소? 본교도 마찬가지요. 여인 한 명의 생사에 존망이 오간다면, 차라리 망하는 게 낫소.”
한설은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허풍 아니오!”
알아요. 그래서 더 기분 나빠요.
그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하결은 입구 쪽을 지키고 섰고, 양석이 두 사람에게 걸어오며 밝게 인사했다.
“소궁주, 잘 오셨소.”
“소개해 드릴 귀한 분이 있어서 이렇게 또 찾아뵈었어요.”
그녀가 검무극을 소개했다.
“신교의 소교주이십니다.”
양석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북혈문의 양석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소, 검무극이오.”
양석은 조심스럽게 검무극을 살폈다.
그는 길 가다 부딪칠 뻔한 시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성격이었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예의 바르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뭐야, 이놈?’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잘생겼다. 우락부락 험악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소교주께서 직접 백주설원 원주가 돌아가신 사건을 조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건은 조사가 다 끝났소.”
“끝났다고요?”
아직 양석은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흉수는 서 장로였소.”
“설마 서낙 장로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
양석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북혈문주가 모든 정보를 아들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 장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소.”
양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북해가 발칵 뒤집혔을 텐데.”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우린 소문내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검무극의 말을 믿을 수 없기에 양석은 한설을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이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서낙의 죽음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검무극이 슬슬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생분이 극한지체를 찾았는데, 왜 찾았는지 아시오?”
검무극이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 몰랐기에 양석은 당황했다.
“저는 그 일에 대해 모릅니다.”
“당신은 운이 참 좋은 사람 같소. 후계 다툼을 하던 동생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는데, 후계자가 된 걸 보니.”
비꼬는 말임을 알았기에 양석은 인상을 굳혔지만, 검무극은 계속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긴. 당신은 우리 덕분에 후계자가 되었지.”
양석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나직이 말했다.
“이유가 어쨌든 귀교의 마인 때문에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중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사람 죽여놓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우리 때문에 죽은 것 맞소?”
검무극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를 풀어줄 때, 그는 전혀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소. 삶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지. 그런데 고작 납치당한 일로 자결했다? 당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소?”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 덧붙여 물었다.
“혹시 당신이 죽인 거 아니오?”
자연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설이 검무극을 말렸다.
“증거가 없는 말입니다.”
“원래 흉수를 찾을 때는 그 죽음으로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는가부터 살피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심증만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지요.”
이 상황에서 한설이 자기 편을 들어 주자 그녀에 대한 양석의 호감이 자연스럽게 커졌다.
이 모든 건 검무극이 미리 계획한 일이었다. 자신은 몰아붙이고, 한설은 그를 두둔하고.
검무극이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객청 입구에 서 있는 하결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검무극은 하결이 시비에게 혈공을 쓰는 모습을 목격했기에, 그가 혈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검무극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하결은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먼발치에서 검무극을 살폈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일 리는 없고. 그렇기에 묘한 느낌만 받고 있었다.
검무극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물었다.
“이름이 뭔가?”
“하결입니다.”
검무극이 하결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피 냄새가 짙군.”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하결은 긴장하며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호위 무인 전에 낭인 생활을 했지?”
그 물음에 하결은 안도했다. 피 냄새가 난다는 말은 혈공을 익힌 것을 알아차린 게 아니라 호위 무인 같지 않다는 말이었다.
“나는 여러 무인 중에서 호위 무인과 낭인을 정말 좋아한다네. 자넨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하결을 맡은 사이, 한설은 오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양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죄송해요, 저 사람을 괜히 데려왔군요.
그 말은 마치 네가 저 마교 소교주를 잘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말로 들렸다.
양석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교 소교주에게 욕을 할 수도, 한판 붙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감정이 복잡해졌을 때, 한설이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몇 번이나 고민했는데…….
―무슨 말이신데 그러시오?
―마교 소교주가 취마와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어요.
앞서 자신을 두둔해준 덕분에 지금 양석의 무의식에는 한설과 한편이란 생각이 있었다.
―말해보시오.
하지만 한설은 계속 망설였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 주시오.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하지만 양석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들에게서 알아낸 정보로는 북혈문주가 후계자를 양 공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후계자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극한지체를 구하는 목적도 새로운 후계자와 관련이 있다고 했죠.
사실과 거짓이 뒤섞이자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 못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였다. 그걸 아버지는 말리지 않고 보고 있었다. 자신의 집안은 그런 집안이었으니까.
―그게 누군지도 말했소?
그러자 한설의 시선이 천천히 객청 입구를 향했다. 검무극에게 붙잡혀 온갖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 사람.
―하결이라고 했어요.
양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저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놀람이 큰 이유는 배신의 충격이 담겨서다. 자연스럽게 그를 엄습하는 한 가지 의심.
‘그래서 저자를 그렇게 자주 불렀던 건가? 나에 관한 보고를 받았던 게 아니라?’
그때 한설이 다시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교의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제대로 알아보세요.
검무극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그를 속이려 들지 말고, 함께 공감하고 생각해 주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검무극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마교의 정보는 틀리지 않았을 거요.
양석은 마교의 정보망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북혈문도 마교의 통천각과 같은 정보 조직을 가져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으니까.
물론, 이런 가능성은 있었다.
‘만약 한설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왜 그런 거지? 하결과 자신을 이간질해서 그녀가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또 다른 가능성 하나.
‘마교 쪽에서 의도적으로 소궁주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다.’
차라리 전자보단 후자이길 바랐다. 한설이 마교와 한편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정말 그 정보가 사실일 수 있다는 가정까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기에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어떤 수작이고 이유든 간에 나를 얕잡아 봤다. 이깟 술수에는 절대 안 넘어갈 테니까.’
양석의 시선이 검무극과 하결을 향했다.
마침, 검무극이 이쪽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이 친구, 멋진 친구요. 자, 함께 가세.”
검무극이 하결을 이끌고 한설과 양석이 있는 곳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양석과 하결이 마주 보게 되었다.
하결을 보자 양석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 너라고? 아버지가 널 후계자로 삼았다고?’
그의 멱살을 틀어쥔 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결은 양석이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신을 후계자로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오히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마교 소교주에 대한 반감이라 여겼다. 게다가 저 빙궁의 소궁주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가 쉽지는 않겠지.
검무극은 혼자 신나 목청을 높였다.
“우리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넷이서 다 같이 한잔합시다. 내가 한동안 금주했는데 서 장로가 죽으면서 끝났소. 자,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신나게 마셔봅시다.”
소교주가 마시자는데 양석이 뭐라 하겠는가? 어차피 손님으로 왔으니 접대도 해야 했고. 그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술이 당겼다.
“좋습니다, 술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시비를 불러 객청에 술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하결은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문주님을 뵙기로 해서 곤란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검무극과 술자리를 벌이다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있다. 대업을 이틀 앞둔 지금, 떨어지는 눈송이도 조심해야 하는데 하물며 상대는 마교 소교주다.
자신 앞에서 동네 아낙처럼 수다 떠는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님을 어찌 모르겠는가?
양석은 그가 물러나는 모습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아까 만났을 때 아버지와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 이후, 쭉 같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그래, 소교주에게 거짓말할 수는 있다. 한데 여긴 자신도 있는 자리가 아닌가?
‘내 눈치 한 번 안 보고 가버린다고?’
검무극이 불꽃이 이는 그의 마음에 불쏘시개를 놓으며 훅훅 불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재미난 친구라고. 지켜야 할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는 호위 무인이라니? 양 공자가 이해하시오. 이 친구 낭인 출신이라지 않소?”
양석은 오히려 하결을 대변했다.
“본문에서 문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라서요.”
겉으론 웃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이 후계자라 여기기 때문에 날 무시하는 건가?’
평소에도 그는 평범한 수하들과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묘한 기세가 있었다. 아버지도 그를 다른 수하들과는 다르게 대했고.
‘그 모든 게 정말 그래서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의심하진 않았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을 가장 빠르게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아버지를 만나 뵙고 확인하는 것.
하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만약 마교에서 알아낸 정보가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나올까? 둘째가 눈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아버지인데, 첫째라고 못 죽일까?
양석이 어두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검무극은 한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말 잘했소.
한설이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사람하고 관계는 어려운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잘한 것 맞나요? 사람을 이렇게나 잘 속이는데.
―당신이 악녀라서 잘 속이는 게 아니라 똑똑해서 잘 속이는 거요.
―정말 당신은 어떤 말에도 대답이 준비된 사람 같아요.
―나도 똑똑해서 그렇소.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검무극이었다.
그러는 사이 객청에 술상이 차려졌다. 좋은 술과 요리가 준비되었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양석은 검무극의 잔에 술을 따르며 내심 생각했다.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자는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표를 내지 않고 있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야.’
양석은 두 잔의 술을 연거푸 비웠다.
“오, 양 공자. 술을 잘 하시는구려.”
원래 양석은 주량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술이 물처럼 넘어갔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검무극과 한설이 약속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지금부터 하는 대화가 외부에 흘러나가지 않도록 기를 발출해서 막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소교주, 신교로는 언제 돌아가시죠?”
“아시다시피 서 장로를 죽여 취마님의 복수를 했으니 우리 일은 끝났소.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빙궁주께서 극한지체에 관해 알아봐 달라고 하셔서 남은 거요.”
검무극은 이런 중요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 이유를 밝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극한지체에 관심 없소.”
검무극이 양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양 공자께서 속 시원하게 극한지체에 대해 알려주시오. 그럼 빙궁주께 전해드리고 나는 이만 교로 돌아갈 테니까. 내게 말하기 싫으면 소궁주에게 말해도 되오.”
“제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요.”
양석이 정중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아는 게 없었다.
동생과 함께 극한지체를 지닌 이들을 찾는 일만 했지, 정작 극한지체를 지닌 이를 어디에 쓸 건지 알지 못했다.
문득 아까 한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극한지체를 구하는 목적도 후계자와 관련이 있다고 했죠.
후계자는 나인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렇다는 건 하결과 극한지체가 관계있다는 의미인데?
검무극은 현재 북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 한마디 말로 정리했다.
“하여튼 늙은이들의 노욕(老慾)이란.”
여기서 늙은이들이란 서 장로와 북혈문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이었음에도 양석은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지금껏 아버지만 믿고 그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고 따랐는데.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자꾸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자, 마십시다.”
검무극은 자꾸 술을 권했다. 어느새 양석의 얼굴은 취기로 붉어져 있었다.
취마의 일로 시작된 북해 일이었는데, 이 순간에도 술은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멸공을 쓰며 달려드는 이상, 이쪽에서도 정당한 방법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한설이 양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교주에게 그 정보가 사실인지 직접 물어보세요.
―그럼 당신이 내게 그 말을 한 것이 밝혀지지 않겠소?
―난 괜찮아요. 애초에 말을 꺼낸 이상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당신, 이대로 후계자 자리를 수하에게 넘길 건가요?
양석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를 도우려는 거요?
검무극은 그가 분명 이렇게 물어볼 거라 예상했었다. 이제 그녀가 오늘 해야 할 두 번째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짧지만 강력한 한마디.
―전 당신이 북혈문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양석은 격정을 느꼈다. 한설에게 호감이 있는 데다가 술까지 취한 상태다 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검무극은 양석의 표정만 봐도 한설이 무슨 전음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른 척 술만 마시고 있는데, 양석이 드디어 칼을 뽑았다.
“소교주, 무인 대 무인으로 묻겠습니다.”
“무섭게 왜 이러시오?”
“정말 아버지가 하결을 후계자로 정하셨습니까?”
검무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변명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한설을 쳐다보았다.
“당신이군.”
한설은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소교주께서 취마님과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 이 사람에게 알렸어요.”
“우연히 들은 게 아니라 엿들은 거겠지.”
사실 무공 실력으로 볼 때 한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양석에겐 세 사람의 무공 실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온 신경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전 그저 양 공자를 돕고 싶었어요.”
한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그녀대로 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천궁호갑까지 입고 온 위험한 임무인데, 놀랍게도 이 순간이 재미있었다. 자신이 이런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양석은 그녀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나섰다.
“괜한 사람 잡지 마시고, 내 문제니 나와 해결합시다.”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남자 대 남자로, 무인 대 무인으로 이야기하자는 표정이었다.
“정말 아버지가 하결을 후계자로 삼은 거요?”
검무극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석을 노려보았다. 앞서 실실 웃으며 말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움이었다.
한설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반된 반응이 지금부터 그가 하는 말의 신뢰를 높여준다는 것을. 상대를 압도하고 속이는 일은 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에 느낌이 확 달라졌다.
“당신은 몰랐어야 할 사실을 알았소.”
검무극이 이렇게 나오니 양석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그는 점점 검무극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
“내 일입니다. 마땅히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이고.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후계자를 하결로 삼았습니까?”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소.”
“증거가 있습니까?”
“이번 일에 우리의 모든 정보력을 투입했소. 내 말이 증거요.”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검무극은, 정말이지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정말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당신네 문주가 극한지체를 찾으면 당신은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을 거요.”
면전이라 곤란하다고 표현했지만, 그 말은 곧 제거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북혈문주를 찾아가서 확인 못 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말이었다.
“그렇기에 본교의 통천각에서도 이번 일을 주시하고 있소. 혈육을 제거하면서까지 다른 누군가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이번에는 혈육을 제거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썼다. 한마디 한마디에 검무극의 계산이 담겨 있었다.
문득 양석은 왜 아버지가 동생을 제거하는 걸 그리 쉽게 허락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린 극한지체가 아니니까 필요가 없어서?
그의 마음에서 불붙은 의심의 불길은 이제 검은 연기를 내기 시작했다.
“특이한 체질을 찾을 때는 보통 대법을 하려는 것 아니겠소?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대법일지도 몰라, 본교에서는 이래저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소. 덕분에 나만 귀찮아졌지.”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더 기울어졌다. 검무극이 굳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마교 소교주가 뭐가 아쉬워서 이 추운 북해에서 머물겠는가?
“자, 솔직히 말했으니 당신도 극한지체에 관해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해주시오.”
양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나도 정확히 모르오. 아버지가 중요한 일이니 은밀히 처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오. 아, 이 말씀은 하셨소. 극한지체가 본문을 북해제일문파로 만들어줄 거라고.”
듣고 있던 한설의 마음에 한기가 스쳤다. 저 말은 곧 북해빙궁을 끌어내리겠다는 의미였다. 이들이 지금껏 해온 짓으로 볼 때, 그 방법은 절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럴 계획이라면 너흰 마교가 아니라 우리 손에 지워지게 될 거야.’
검무극이 넌지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당신이 먼저 극한지체를 찾아내면 쉽게 해결될 일이오.”
검무극은 여전히 자신은 크게 관심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덧붙여 말했다.
“알아내면 꼭 연락하시오. 나에게든, 여기 소궁주에게든.”
“그러겠습니다.”
세 사람은 다시 술을 마셨다.
이 순간 양석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극한지체를 가로채고 하결을 없앤다.’
만약 그를 진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죽여야 했고, 이 정보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눈엣가시 같았던 수하 하나가 죽는 것이니까. 맞으면 자신을 구하는 거고, 틀렸으면 수하 하나 죽는 일이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자신이 극한지체를 가로채고 하결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그 책임을 피하려면?
양석이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마교 소교주가 극한지체를 가로챈다면? 하결이 마교 소교주 손에 죽는다면?’
검무극을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무림에 존재하는 남의 칼 중에서 제일 무섭고 강한 칼이었으니까.
여기까지가 잔꾀라면, 그는 해서는 안 될 더 무서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마교 소교주에게 아버지까지 죽는다면?’
이제 그의 마음속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의심과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불길이었다.
‘이 모든 건 네가 저지르는 일이 될 거다. 그래, 바보처럼 그렇게 웃어라.’
정말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대를 보니 북혈문이 활짝 열린 것 같소.”
양석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지만, 한설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안은 지옥문도 연다는데 북혈문은 자신이 열어보겠다고.
그리고 검무극은 이제 그 문이 열렸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이다.
“자, 북혈문을 위해 건배합시다!”
욕망과 애도가 부딪치는 그 사이로, 감탄의 건배가 더해졌다.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검무극은 양석과 오랜 친구처럼 굴고 있었다.
“양 공자, 나와 같이 중원으로 가세.”
“저는 좋습니다. 제 좁디좁은 견문을 넓혀주십시오.”
조금만 더 마시면 호형호제라도 할 기세였다.
술자리 내내 한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 양석에게 공감하고 중간중간 편도 들어주고. 그를 이해하려는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에 대해 알 기회였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마음에 없는 말도 할 수 있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떨지 않고, 그 와중에 검무극이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할까 살피기도 하고. 참 냉담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면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혼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결론도 혼자 내렸다.
난 이런 사람이야.
하지만 그때 내렸던 결론과 오늘 알게 된 결론은 분명 달랐다.
어쩌면 자신을 알게 된다는 건, 홀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그때야말로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한설이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소궁주는 이만 돌아가시오.”
“소교주께서는요?”
“나는 양 공자와 밤새도록 마셔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석은 검무극의 기에 눌렸다.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지금은 빙궁의 소궁주라도 함께 있지, 대체 뭘 믿고 수하 하나 없이 홀로 이곳에서 술을 마시겠다는 걸까? 독이라도 타면? 술에 취했을 때 암습이라도 하면? 그걸 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래, 이래야지. 이 정도는 되어야 이 칼로 다 베어버리지.’
양석이 정중히 말했다.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 다음에 또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제시키는 양석도 많이 취해 있었다. 스스로는 안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한설이 봤을 때 그는 만취 상태였다. 마교 소교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자신이 그만큼 취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을 뿐.
“다음에? 이제 시작인데?”
아쉬움을 표하는 검무극에게 양석은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취마냐?
“제가 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아, 이거 아쉬운데. 좋소, 조만간 또 봅시다.”
작별하고 나가려던 검무극이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리고 극한지체 찾으면 꼭 연락하시오.”
“물론입니다.”
검무극은 한설과 함께 북혈문을 나섰다.
술자리에서 가볍게 웃고 떠들던 검무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밤새워 마실 생각이었어요?”
한설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술도 좋은 사람하고 마셔야 즐겁지. 답답해서 혼났소.”
그러리라 생각했다. 너무 연기를 잘해서 물어본 거였다.
“당신 혼자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소.”
“정말요?”
“지금 상황에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어찌 그대를 혼자 두겠소. 앞으로도 절대 혼자 움직여선 안 되오. 심지어 빙궁에 있는 이안도 취마님과 꼭 붙어 있으라고 했소.”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검무극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혈왕이기에 더 긴장해야 한다.
“북해에서 북해빙궁 궁주 딸을 걱정하다니.”
“그 북해빙궁의 궁주께서는 딸에게 호위갑까지 입히셨지요.”
그 말에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검무극과 함께 걸어가니 왠지 든든했다.
오늘 검무극이 어떻게 양석을 요리하는지 옆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를 속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양석이 검무극을 이용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점이다.
한설이 발걸음을 멈췄다. 검무극도 그녀를 따라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달빛 아래 얽혔다.
“당신, 보면 볼수록 무서워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설령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감정을 감추는 성격이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에게는 솔직해졌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무서워야 하지 않겠소? 마교 소교주인데.”
한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며 검무극은 말을 이었다.
“무서워야지. 우리가 상대하는 적을 생각해 보시오. 자신들이 원하는 체질을 찾기 위해 사람을 모아 실험한 후 죽였소. 자멸공을 서슴없이 쓰고, 심지어 혈육까지 죽이는 자들이오. 무섭지 않으면 어찌 그런 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소?”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하는 와중에도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한설은 역시 적보다 검무극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보다는 차라리 그런 적들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극한지체를 찾으면 그가 연락할까요?”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연락하지 않을 거요. 극한지체가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한 수라고 생각할 테니까. 자신을 더 강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을 테고.”
“그럼 왜 극한지체에 대해 반복해서 말한 거죠?”
“우리에게도 중요한 패라서 그렇소.”
검무극은 양석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고 있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우릴 극한지체로 안내해 줄 거요.”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양석은 문주전으로 향했다.
과음으로 인한 숙취에 시달렸지만,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극한지체를 반드시 빼돌려야 한다.’
아버지가 왜 극한지체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무조건 확보해야 한다. 검무극에게 넘겨서도 안 된다. 극한지체는 자신을 지켜줄 비장의 한 수가 될 테니까.
양석이 문주전으로 들어섰다.
저 앞 태사의에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선 적은 없었는데.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태사의 아래까지 걸어간 양석이 정중히 인사했다.
아버지를 보자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정말 후계자를 하결로 정하셨습니까?’
묻고 싶었다. 대체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그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원래라면 물어야 할 일이다. 날 어찌 보고 그런 오해를 했느냐, 호통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은 그런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다.
사건이 터져서 관계가 망가지는 건 어쩌면 사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건이 터질 때까지 어떤 관계였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 적어도 이번 경우는 그러했다.
“어제 마교 소교주와 소궁주가 찾아와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북혈문주였다.
솔직히 검무극의 방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제 하루만 있으면 극한지체가 북혈문에 도착한다. 내일이 지나면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북해의 운명도 바뀌게 될 것이다. 내일이 지나면.
“어떻더냐?”
“소문대로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양석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서 장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혹 우리와 관련된 일이 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북혈문주는 서낙의 죽음을 오히려 내심 반겼다. 혈인들이 손을 잡은 두 사람이 자신과 서낙이었다. 이제 서낙이 죽었으니, 자신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새외 무림이 그렇듯, 북해 무림도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다.
기존 세력의 도움 없이 새로운 누군가가 자리를 잡는다는 건 중원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게다가 새로운 세력이 크는 것을 마교나 무림맹이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었고. 따라서 서낙의 죽음은 북혈문주에겐 기회였다.
양석이 조심스럽게 북혈문주에게 물었다.
“참, 극한지체는 찾으셨습니까?”
“아직이다.”
이 순간 양석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실망했다.
우선,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아버지가 극한지체를 발견해서 이곳으로 호송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그 거짓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왔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거짓말한 것보다 그게 더 실망스러웠다.
‘나중에 제 원망은 마십시오.’
양석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단정했다. 어제 검무극이 밤늦도록 쌓아 올린 불신의 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덕분에 양석은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제 남은 일은 싸워서 살아남는 것이었으니까.
“되도록 소교주와 얽히지 마라. 그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양석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 나왔다.
오늘 아버지는 솔직히 말해줬어야 했다. 지금 극한지체가 오고 있으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제야 네게 말하는데 극한지체는 이러이러한 용도로 사용될 거다. 늦게 말해줘서 미안하다.
‘제게 그래선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
양석은 그렇게 앞으로 있을 배신에 차곡차곡 명분을 쌓았다.
* * *
다음 날, 한 대의 마차가 북혈문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매의 마부가 모는 마차 주위로 두 명의 무인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들은 중간중간 말을 교체해 가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목적지인 북혈문이 채 백 리도 남지 않았다.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천천히 마차가 멈춰 섰고 마부를 포함한 세 무인은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이번 호송의 책임자인 마부석 무인이 두 무인에게 경고했다.
“암습에 대비해라.”
쉭! 쉭!
그 순간 암습에 대비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반대쪽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빠르게 날아든 암기에 두 무인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기습을 감행한 사람은 바로 양석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무림에서 사용이 금지된 금용암기 칠보필살(七步必殺)이었다. 일곱 걸음 내에서 발출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암기였다.
어느새 마부석의 무인은 양석에게 쇄도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암기 발출이 늦어진 양석은 검으로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 일전이 벌어졌다. 마부석의 무인은 고수였지만 북혈문의 후계자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채 이십여 수가 지나지 않았을 때, 무인은 자신이 양석을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최후의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무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싸우는 와중에 코앞에서 자멸공을 쓰려하자 양석은 크게 당황했다.
피해야 하나, 막아야 하나. 망설이던 바로 그 순간!
무인의 얼굴이 박살 나며 그대로 쓰러졌다. 자멸공을 발휘하기 전에 누군가 강기를 날려 그를 죽인 것이다.
놀란 양석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하결이 서 있었다.
“너!”
양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이곳에 등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야 호위 역할 제대로 했소.”
하지만 하결이 자멸공을 쓰려는 수하를 죽인 것은 양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양석을 죽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북혈문주를 계속 이용하려면 약점이 될 아들을 살려둬야 했으니까.
“여긴 어떻게 온 거냐?”
“그야 나는 양 공자 호위가 아니오? 양 공자 가는 곳에 내가 가야지.”
“헛소리 말고!”
이제 하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양 공자, 마차가 이리로 온다는 건 여긴 어떻게 알았소?”
“그건 내가 물을 말이겠지.”
양석은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은 놈의 수하들이다.’
아니라면 이곳에 하결이 나타날 리 없었으니까. 자멸공을 쓰는 자를 수하로 쓴다고? 대체 너, 누구냐?
반면 하결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양석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는지.
극한지체를 찾았다는 소식에 급히 호송 임무가 내려졌지만, 그래도 죽은 세 사람은 하결이 믿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이용해서 정말 은밀히 극한지체를 호송했는데,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결은 혹시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양석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마차의 이동 경로를 알아냈다.
“알다시피 나와 동생은 오랫동안 극한지체를 찾는 일을 맡았다. 그때 주력한 일이 중원 곳곳에서 북해까지 최단 거리의 수송 경로를 만드는 것이었지.”
사람들을 모아서 북해로 데려와 실험해야 했으니까. 실험하고 버리고, 또 실험하고. 정작 실험은 며칠 내로 끝나는데, 데려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람은 너희 사람을 썼지만, 우리가 만든 수송 경로를 이용했지. 우리가 만든 경로로 달리면서 지역마다 준비해둔 마구간에서 말들을 교체했고.”
그제야 하결은 알 수 있었다. 말을 교체한 기록을 통해 어느 경로로 오고 있는지를 알아낸 것이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야 했기에 이용한 것인데, 그 점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똑똑하시오.”
“내가 똑똑했으면 널 진작 제거했겠지.”
하결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 일은 네 아버지도 못 하는 일이야.
“이번 일로 양 공자는 문주께 큰 문책을 받을 거요.”
양석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번 일을 저지른 건 네가 될 텐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결과 이들 호송 무인이 싸우다 서로 양패구상한 것으로 처리하려는 것이다. 물론 하결의 숨은 무공실력을 몰랐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전에 대체 어떤 자가 극한지체를 지녔는지 보자.”
양석이 마차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하결이 나직이 경고했다.
“그 문을 열면 내 손에 죽을 거요.”
하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양석도 기도를 끌어올리며 그에게 몸을 돌렸다. 하결이 숨기고 있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 기도가 대단했다.
아직 기도의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양석은 기가 눌렸다. 하긴, 평범한 놈이었다면 아버지가 선택하지도 않았겠지.
그의 실력에 놀란 양석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음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이 자는 소교주 손에 죽게 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검을 버려야 하나? 앞서 자신을 구해준 걸로 봤을 때,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던 그때였다.
두 사람 주위로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에 가끔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하결이 안개 속에서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
양석 역시 안개에 깃든 술 냄새를 맡았다. 안개가 아니라 주기임을 알아차리고는 하결이 소리쳤다.
“취마다!”
하결의 시선이 마차를 향했다. 어느새 마차는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다.
“마차를 지켜!”
하결의 외침에 양석이 검을 뽑아 들고 마차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마차를 휘감았던 안개는 불어온 바람을 따라 흩어져 사라졌다.
양석이 검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안을 확인한 양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검무극이 양석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찾으면 내가 연락하라고 했잖아?”
양석의 입에서 ‘어이쿠’하는 외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정말 너무 놀라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마차 안에 검무극이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왜 연락 안 했냐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양석이 뒤늦게 변명했다.
“그게… 저도 갑자기 알아낸 것이라서. 연락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찾아낸 후,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었지요.”
얼마나 당황했으면, 양석은 목소리가 떨렸고 말까지 더듬었다.
“한데 소교주께서는 어떻게 알고 이곳에 오신 겁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문제를 내듯 되묻는 검무극을 보며 양석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긴. 내 뒤를 밟았겠지. 젠장! 날 믿지 못해서 감시한 것이 틀림없다.’
검무극을 극한지체로 안내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던 거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동 경로를 알아냈다는 기쁨에 너무 흥분한 탓이다.
검무극의 등장에 놀란 건 양석만이 아니었다.
뒤쪽에 서 있던 하결은 양석보다 더 놀랐다. 검무극이 마차 안에 있어서가 아니다.
‘극한지체를 지닌 사람을 빼돌렸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서 취기가 깔렸을 때 취마가 빼돌린 것이 틀림없다. 지금 당장 취마의 뒤를 쫓아야 한다.
‘이쪽으론 오지 않았으니까. 저 마차 뒤쪽. 반대쪽이다.’
그가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양석을 향해 다가가는 척하다가 단숨에 마차를 넘어 취마를 뒤쫓을 생각이었다.
사람을 안고 빠져나가고 있을 테니, 잘하면 잡을 수도 있다.
소교주고 양석이고, 지금 하결의 머릿속에는 오직 극한지체뿐이었다.
검무극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어차피 못 간다. 시도도 하지 마라.”
검무극의 경고가 떨어지는 순간, 오히려 하결은 몸을 날렸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도약한 하결의 경공은 검무극의 경고를 무시해도 될 만큼 훌륭했다.
순식간에 마차를 뛰어넘어 날아가려던 그때.
허공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고, 하결은 원래 있던 자리로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공간을 순간적으로 이동하듯 순식간에 자신 앞을 막아선 검무극이 일장을 날린 것이다.
공격을 막은 하결의 왼팔이 욱신거렸다.
‘강하다.’
이번에는 당한 하결보다 양석이 더 놀랐다. 마차 지붕을 뚫고 올라가서 막았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거다.
한데 검무극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졌고, 어느새 마차 위 허공에서 하결을 막은 것이다. 언제 마차에서 내려서 위로 날아올랐단 말인가?
여기 세 사람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래도 자신은 북혈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검무극의 움직임을 두 눈 뜨고 놓쳤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거란 의미다.
하결을 원래 자리로 보낸 검무극은 마차 지붕에 걸터앉아 있었다.
“호위란 자가 모시는 사람 머리 위를 넘어가면 되겠나?”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차 옆에 서 있던 양석을 의미했다.
양석이 일러바치듯 소리쳤다.
“저자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차도살인을 실행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빼돌리려던 극한지체는 사라졌지만, 저 하결을 죽일 기회가 온 것이다.
“소교주님! 부디 바라옵건대 놈에게 이 무림에는 지엄한 상하(上下)가 존재한다는 엄중한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하결은 차갑게 조소했다. 자멸공에 죽을 걸 살려줬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것이다.
“처음 볼 때부터 내가 피 냄새가 난다고 했지.”
검무극의 여유에 하결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미 늦었다.’
극한지체를 데려간 사람이 일반 무인이라면 모를까, 취마가 데려간 것이라면 이미 추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변수가 발생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검무극과 취마가 원주의 죽음에만 신경 쓴다고 방심한 탓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소교주와 담판을 지어서 극한지체를 되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일단, 한발 물러나서 천천히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지만 극한지체를 찾을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희박해질 것이다.
문제는 사부다.
‘과연 사부께서 기다려 주실까?’
수조 속에서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사부였다. 극한지체를 검무극에게 빼앗겼다고 보고하면, 당장 수조 속을 나오고 말 것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과연 이 소교주를 이길 수 있을까?
조금 전 보여준 한 수는 정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이 마교 소교주를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랬다간 극한지체를 구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고수가 되면 될수록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데.
그가 이 골치 아픈 상황에서 갈등하는 사이 검무극은 마차 지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칼자루도 이쪽에서 쥐었고. 먼저 몰아붙일 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면서 대응하면 된다.
유리한 국면임에도 일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조급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서다. 유리하기에 이길 것 같고, 더 잘 될 것 같고. 그래서 더 빨리 좋은 결과를 보고 싶은 그 단순한 욕망.
단순하기에 강력한 그 욕망을 참아야 한다.
유리한 상황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유리했기에 더 급해지고, 더 아쉽고, 더 화나고. 게다가 상대는 역전의 기세까지 올릴 테고. 결국 다 망쳐버리는 거다.
이럴 때 보라고 하늘이 있는 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무극의 모습을 보며 양석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날 보지 말고 하늘을 보시오.”
“아, 네!”
검무극의 말에 양석은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하늘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그였다.
‘제발 죽여주시오!’
일단 하결부터 없애고 생각하는 거다. 차도살인지계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지금 검무극을 혈왕에게 데려다주는 안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때 주위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결이 감춰두었던 기도를 드러냈다.
앞서 양석에게는 반의반 정도 드러낸 기도를 완전히 다 개방한 것이다.
뜨거우면서도 무거운 그의 기도가 주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말 그의 기도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이 섬뜩한 기도에 양석은 토할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그가 고수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고수일 줄이야.
‘이거 혹시 소교주가 지는 것 아닌가?’
사실 그의 안목으론 누가 더 강한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을 드러낸 하결의 존재감이 그만큼 대단했던 거였다.
양석을 두렵게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하결의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모두 일곱. 눈빛과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고수임을 알 수 있는 그들은 모두 자멸공을 쓸 수 있었다.
하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예를 갖췄던 말투도 바뀌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 어디에 있나?”
그는 이곳에서 소교주를 압박해서 극한지체를 찾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무극은 그의 선택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진면목을 전부 드러내야 할 만큼 극한지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추위는 나도 잘 견디는데, 날 데려가는 건 어때?”
이 상황에서 장난을 쳐? 검무극을 향한 하결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마교 소교주라고 내가 못 죽일 것 같지?”
“아니. 너희는 혈육도 죽이는 자들이잖아? 죽일 수만 있다면 우리 아버지도 죽이려 들겠지.”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양석이 내심 움찔했다. 검무극이 말한 혈육도 죽이는 자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하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뭐냐?”
마차에 남아 있었다는 건,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 과연 검무극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네가 모시는 사람 만나게 해줘.”
하결은 겉으로 표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동요했다.
‘사부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양석은 순간 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오해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이제 그는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서슴없이 했다. 이곳에 하결이 나타나는 순간, 아버지는 완전히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 쪽에 붙어야 하나?’
하결이 이렇게 대단한 고수라는 사실을 알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하결에게 붙는 것도 최악의 선택은 아니었다. 맨 처음 수하까지 죽이면서 자신을 구한 걸 보면 자신을 죽일 것 같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하결에게 붙어야 하나? 아니야. 그러다 놈이 소교주에게 당하면?’
자신은 소교주를 배신한 셈이 된다.
하지만 이내 양석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싸우지는 않겠지?’
생각해 보라. 마교 소교주라는 귀한 신분인데, 굳이 함부로 목숨을 걸겠는가? 마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도 아닌데.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사부를 만나게 해줄 리 없는 하결이었다.
그러자 검무극은 담담히 말했다.
“그럼 널 살려둘 유일한 이유가 사라지겠지.”
하결은 검무극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다.’
그렇다면 죽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인데?
하결이 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 취마가 돌아온 것이 아닌지 살펴본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무극 혼자서 자신을 죽이려는 거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검무극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천마의 아들이라도, 아직 너무 젊은 그였으니까. 천마의 무공을 이어받고 나이보다 많은 내공이 있더라도, 경험만은 어쩌지 못할 터.
더구나 자신이 익힌 혈공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해보자.’
마교 소교주가 극한지체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소교주를 제압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극한지체를 내놓을 거다.
만에 하나라도 그 과정에서 검무극이 죽으면? 그땐 어쩔 수 없이 그 책임을 북혈문주에게 뒤집어씌워야겠지. 극한지체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해볼 만하다.
“우리 소교주께서 피 맛을 좀 보셔야겠소.”
일곱 명의 혈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일제히 뽑아 든 검에서 붉은 기운이 흘렀다. 혈기를 검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수들.
하결은 그들의 합공이라면 검무극을 죽이진 못해도 적어도 상처는 입힐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운이 좋으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검무극을 제압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이 점멸보로 왼쪽에 있는 혈인에게 쇄도했다.
쉬익! 서걱!
한 줄기 바람 소리와 목뼈가 잘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막을 수 없었다.
번쩍하고 눈앞에 나타난 검무극의 공격을 본능과 머리에 전하기도 전에 검은 이미 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그와 가장 가까운 혈인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허공만 갈랐다. 하지만 그 빗나감에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심장이 찔린 두 번째 혈인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검무극은 이미 암영보를 발휘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검무극은 가운데 서 있던 두 혈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푹! 푹! 푹! 푹!
검무극은 좌우에 있는 두 혈인의 목과 심장을 연속해서 찔렀다. 좌측 심장에 한 번, 우측 목에 한 번, 좌측 목 한 번, 우측 심장 한 번.
그 네 번의 공격은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두 혈인이 그대로 쓰러졌고, 다섯 번째 혈인이 자멸공을 쓰기 위해 얼굴과 몸이 붉어지던 바로 그 순간.
퍼어어어엉!
혈기에 쓰러진 사람은 또 다른 혈인이었다.
검무극이 자멸공을 쓰는 혈인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인형처럼 돌려서 그의 몸이 다른 혈인을 향하게 한 것이다.
여섯 번째 혈인은 자멸공에 당한 채 쓰러졌다. 자멸공으로 내뿜어지는 혈기는 그들 자신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일곱 번째 혈인도 자멸공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무극이 한 발 더 빨랐다.
푹푹푹푹푹!
흑마검이 그의 전신을 연이어 찔렀다. 순식간에 온몸의 주요 혈맥이 모두 끊어지자, 붉어진 얼굴이 다시 원래 색을 되찾았다. 자멸공을 쓰는 속도보다 검무극의 검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렇게 눈 깜박할 사이에 일곱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양석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껏 실전도 여러 번 경험해봤고, 남들 싸움도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싸움은 싸움도 아니었다고.
검무극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촤아아악. 바닥에 일직선으로 피가 뿌려졌다.
“피 맛이 별로인데?”
하결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마교 소교주니 강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하다고?
피 맛을 보여주겠다고 자신했지만, 검무극의 피 맛을 자신이 본 셈이었다.
“역시 구화마공이군.”
당연히 천마의 무공이라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구화마공 아닌데? 너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고작 네 수하들을 상대하는데 구화마공까지 사용할 줄 알았나?”
“독문무공을 쓰지 않은 실력이 이 정도라고?”
하결의 충격은 당연했다. 그냥 수하들이 아니었으니까. 저들 일곱을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저들은 이렇게 죽을 이들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을 보고 싶으면 네 수장에게 안내하라니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검무극을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허풍일 수도 있다. 겁을 먹게 해서 싸움에서 우위에 서려는 수작.
어쨌든 사부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 한, 자신을 그냥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사부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다.
하결이 검을 뽑았다. 그의 검에서 한 줄기 붉은 기운이 날을 따라 흘렀다. 앞서 수하들의 검에 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 느껴졌다.
“구화마공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내가 확인하면 되겠지.”
자신을 향한 차가운 눈빛과 주위를 휘감는 뜨거운 혈기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했음을.
“그럼 살짝 맛만 보여주지.”
검무극의 입에서 하결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을 좋아하나?”
생사결전을 앞두고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동서남북 중 어딜 좋아하냐니.
‘이건 심리전이다.’
당연히 하결은 검무극의 물음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여유 있게 받아주지.
“서쪽을 좋아한다.”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저런. 왜 하필 서쪽을? 잘생긴 녀석도 있고 영리한 녀석도 있고, 신비한 녀석도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결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소교주, 헛수작은 거기까지만 부려라. 내겐 안 통하니까.”
겉으론 여유를 부렸지만, 그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앞서 일곱 수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인 건 말로 죽인 게 아니었으니까. 저 입에 현혹되는 순간, 검이 심장을 관통하게 되리라.
‘대체 무슨 수를 쓰려고?’
검무극은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보려고 했다.
구화마공의 인멸식을 발휘하면서 서쪽의 악귀만 등장시키려는 거다. 베지 않고 등장만 딱! 하결을 당장 죽일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살려서 혈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가능할까?’
구화마공의 경지가 상승하면서 이제 제법 악귀들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어서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이내 검무극은 검을 거뒀다.
“마음이 바뀌었다.”
무공과 관련한 본능이 그 선택을 말렸다. 하나의 악귀만 출현하게 하는 것까진 가능한데, 상대를 죽이지 않는 건 악귀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적을 죽이지 않는데 구화마공의 악귀를 출현시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검무극은 새삼 느꼈다.
‘이제 그들과 유대감을 느끼고 있구나.’
바람 계곡에서 수련하며 그들을 불러냈을 때, 악귀들은 곧장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들에게 감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 중 영리해 보이는 녀석은 사라지기 전에 헤어짐의 아쉬움까지 보였으니까.
“내가 경솔했다. 미안해.”
하결은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그 말은 검무극이 악귀들에게 한 말이었다.
검무극이 뭐라고 하든 하결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끌어올렸다. 북혈문에서 양석의 호위를 하면서 묻어두었던 본성이었다.
그는 거칠고 잔혹한 사람이다. 수하들에게 자멸공을 심고, 수련 중 능력이 부족한 자는 서슴없이 터뜨리며 남은 자들을 공포로 세뇌했다. 목표한 바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뤘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날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지!”
하결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을 쉽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두 사람의 검이 허공을 부딪쳤다.
교차한 검 너머 검무극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너스레를 떠는 소교주였는데, 싸움이 시작되자 눈빛이 바뀌었다.
부딪친 흑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숨이 막혔다. 그에 저항하며 하결의 검에서는 더욱 강한 혈기가 뻗어 나왔다.
두 사람의 검이 연속해서 맞부딪치면서 불꽃을 일으켰다.
하결은 빠르고 강했다. 그의 무공은 검술과 혈공이 합쳐져 있었는데, 혈공을 빼고 검술만으로도 훌륭한 실력이었다.
“죽어라! 이 마교 놈아!”
하결의 눈이 길게 찢어지며 살기를 뿜어냈다. 마기에 반응하면서 그의 감정이 격렬해졌다. 엄청난 혈기가 검무극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끝없이 뿜어지는 혈기는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지켜주고 있었다. 검술 역시 검무극이 우위에 있었다.
하결은 공격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검을 내질러도 검무극은 다 막아냈다.
한 수, 한 수에 강력한 내공이 깃들어 있기에 검이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하결은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내공에서도 밀린다는 것을 격돌하면 할수록 알 수 있었다.
더는 버티지 못한 하결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빠르게 뒤쫓는 대신 검무극은 차분히 물었다.
“네가 모시는 사람 만나게 해달라니까. 네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누가 지켜주냐?”
검무극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하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단순한 수장이 아니다.’
혈육이거나 사부이거나.
하결의 몸에서 뻗쳐나오는 혈기가 더욱 거칠어졌다. 싸움이 진행될수록 그의 피는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쇄애애애액!
하결의 검에서 혈기가 발출되었다.
검무극 역시 피하지 않고 검기를 발출해서 맞섰다.
검기와 혈기가 충돌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결은 미친 듯이 혈기를 발출했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죽어!”
하결이 악을 쓰며 혈기를 쏟아부었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거죽이 뒤집힐 위력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자리에 서서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혈기를 쏟아붓던 하결은 공격을 멈추고 거친 숨을 헐떡였다. 반면 검무극은 평온한 모습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결이 검무극에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허용한 이유가 있었다. 이윽고 검무극의 뒤에서 소리 없이 날개가 펼쳐지듯 붉은 기운이 펼쳐지더니.
후우우욱.
그 붉은 기운이 먹이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검무극을 감싸며 덮어버렸다.
하결의 독문무공 만사혈공(萬邪血功)의 비기 결인혈막(結人血膜)이었다.
‘걸렸다!’
결인혈막에 상대를 가두는 데 성공하면 상대는 그 안에서 질식해서 죽게 되는 비장의 한 수였다. 어떤 수를 써도 혈막을 찢고 나올 수는 없었다.
과연 알에 갇힌 것처럼 검무극은 혈막 안에서 꿈틀거렸다.
“거기서 뒈져라! 소교주!”
그는 혈기에 반쯤 지배당한 상태였다. 극한지체를 찾아야 하는 목적과 마교 소교주를 죽였을 때의 후폭풍보다도 그저 상대를 죽이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하결이 피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양석을 쳐다보았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결은 당장에라도 달려와서 자신을 죽여버릴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혈막 속에서 푸른색 빛이 빛나는가 싶더니.
푸른빛이 막을 찢고 나왔다. 검강이 서린 흑마검이었다.
막이 찢어지는 순간 하결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푸른빛 검강을 머금은 흑마검이 혈막을 옆으로 쭉 찢었다.
찌이이이익.
하결이 비명을 내질렀고, 혈막이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찢어진 혈막 사이로 검무극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나 답답한 것 싫어해.”
그러면서 찢긴 혈막을 거칠게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한 번 찢긴 혈막은 검무극의 손으로도 찢겨나갔다.
하결의 비명이 극에 달했을 때.
퍽, 하면서 결인혈막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하결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검강으로도 찢을 수 없는 것인데.”
“앞으론 그 무공 전수하면서 꼭 전해라. 마교 소교주에게는 안 통한다고.”
그 말에 하결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더 짙어지기 시작했고 두 눈에 핏물이 차올랐다. 붉은 기운이 서리는 게 아니라 정말 핏물이었다.
이제 혈기는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완벽한 혈인이 되지 않으면 검무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 구슬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피 구슬이 떠오르더니, 작은 비수 모양으로 바뀌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
또 다른 그의 비기.
비도혈우(飛刀血雨).
수십 발의 암기가 검무극을 향해 쏟아졌다. 검무극이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파팍!
쏟아지는 핏빛 비수 사이로 검무극이 놀라운 경공을 발휘했다.
지켜보던 양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걸 어떻게 피하지? 라는 생각은 이미 검무극이 피한 후에 뒤따랐다.
쏟아지는 핏빛 비수들을 피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렇게 비수를 모두 피하고 내려섰을 때, 새로운 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비도혈우는 이 한 수에 빠뜨리기 위한 수법이었다.
촤악! 착! 촤아악! 촤아아악.
검무극 주위 사방에서 붉은 선들이 생겨났다. 혈선은 검무극을 가두며 거미줄처럼 주위를 포위했다. 마치 뇌옥에 갇힌 것처럼, 붉은 선 안에 갇혔다.
분체혈망(分體血網).
“움직이지 마. 혈선을 건드리면 죽는다.”
“입은 움직여도 되나?”
지켜보던 양석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이라니?
반면 하결의 눈동자에 서린 핏물은 더욱 새빨개졌다.
스스스스슷!
혈선들이 검무극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수십 가닥으로 잘라 시체조차 못 찾게 해주마!”
사방의 혈선들이 검무극을 절단할 기세로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검무극은 차분했다. 흑마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푸른 빛의 검강이 서렸다.
“네 무공이 내 내공과 흑마검을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파파파파파팍!
흑마검이 사방을 베었다.
치치치직! 뚝! 뚜욱!
사방의 혈선들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이 순간, 하결은 마지막 비기를 발휘했다. 선천진기의 절반을 사용해야만 하는 만사혈공의 마지막 한 수.
그의 손에서 핏방울이 올라오더니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혈선을 잘라내고 나오는 검무극 앞에서.
나비가 터졌다.
비접혈독(飛蝶血毒).
사부는 말했다. 비접혈독은 무형지독과 맞먹는 위력을 지닌 독이라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대신 선천지기의 반을 사용해야 했다.
혈접(血蝶)이 터지면서 검무극 주위는 완전히 붉은 연기에 휩싸였다.
하결은 더는 소교주가 버티지 못할 거로 확신했다. 그랬기에 비로소 그의 시선이 양석을 향했다.
“너 때문에 마교 소교주가 죽었다.”
양석은 억울했다. 자기가 죽였으면서 왜 책임을 이쪽에 지우는 건가? 하지만 감히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아직도 하결의 두 눈은 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존들이 몰려와서 북혈문을 쓸어버리겠지.”
그때 양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예상 못 하고 이번 일을 저지른 거냐?”
하지만 양석이 놀란 이유는 하결이 했던 말 때문이 아니었다. 하결 뒤쪽 붉은 연기 속에서 검무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하결은 경악했다.
‘혈독에서 살아나온다고? 대체 어떻게?’
사부에게 배웠던 모든 절대적인 진리가 오늘 다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잠깐이라도 검무극이 죽은 후를 걱정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눈앞에 서 있는 검무극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너는 내가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것, 알고 있지?”
“그래.”
“진작 나를 죽일 수 있었지?”
“그래.”
“왜 위험을 감수한 거지?”
단지 사부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 살려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과연 검무극이 이 싸움을 길게 가져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혈공에 익숙해지려고. 네 배후도 같은 무공을 쓸 테니까.”
순간 하결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장난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그래서 잊었다. 이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자인지.
“내가 졌소.”
하결이 자포자기하듯 고개를 숙였다. 말투도 공손해졌다.
“살려주시면 배후가 누군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하겠소.”
“진작 그럴 것이지.”
검무극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검무극이 다섯 걸음 앞까지 걸어왔을 때 하결의 표정이 달라졌다.
“멍청한 놈! 내가 순순히 알려주리라 여겼나?”
하결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 거리에선 내 자멸공을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는 검무극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는 순순히 네 말을 믿을 줄 알았나?”
“뭐? 그럼 왜 다가온 거지?”
“왜긴. 여전히 연습 중이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네 배후도 이런 수작을 부리겠지?”
“이 새끼야! 뒈지면서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순식간에 하결의 얼굴이 붉어졌고, 자멸공을 사용했다. 다른 수하들보다 빨랐다. 위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리라.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놀란 하결이 자멸공을 중단했다. 억지로 중단하는 바람에 기혈이 얽히면서 피를 토했다.
그러자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공이환술을 열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던 거였다.
무공에 있어 상성을 따지자면 그야말로 극과 극에 있는 두 무공이었다.
“네가 아무리 빨리 자멸공을 써도, 나보다 빠르진 않을 거다.”
하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리 자멸공을 쓰려했다.
하지만 구결을 모두 외웠을 때, 이미 검무극은 사라진 후였다.
“넌 대체…….”
말을 잇지 못하고 하결이 다시 피를 토했다. 이번에도 억지로 자멸공을 멈추는 바람에 아까보다 더 많은 피를 토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아무 의미 없이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큰 부상을 입힌 무공은 자멸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하결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어느새 검무극은 다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무인이 졌으면 그냥 죽는 거지, 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짓이냐?”
검무극이 하결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가득 찬 핏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며 검무극은 차분히 말했다.
“왜 배후를 그렇게 찾는지 아느냐? 너희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고, 물귀신처럼 남을 끌고 들어가려는 너희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서슴없이 자멸공을 쓰는 자들을 이 강호의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더럽고 치사하고 무서워서 피하지, 누가 이렇게 악착같이 뒤쫓아서 막으려 하겠는가?
사람을 더없이 두렵게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이들 역시 악이다. 마교란 이름으로 짓밟아서 처단해야 할 절대악.
“……나를 살려야 내 배후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하결은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말해줄 생각 없잖아? 내가 알아서 찾겠다.”
검무극은 그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서쪽을 좋아한다고 했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결은 옆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본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을. 그 무서운 것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휘두르는 일검을.
쉬이이익!
하결의 잘린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고인 핏물에 여러 모습이 비쳤다. 하늘이 비쳤고, 무정하게 바라보는 검무극의 모습도 비쳤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양석도, 무서운 악귀가 사라지는 모습도 비쳤다.
그러다 땅과 풀, 그리고 하늘이 빠르게 스치다 느려지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양석은 바닥을 구르는 하결의 머리통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대단한 고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대단한 고수를 연습 상대 취급하며 죽여 버린 검무극의 실력은 놀라움을 넘어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양석은 두 사람이 펼쳤던 격돌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번쩍번쩍, 콰콰쾅, 하다 보니 싸움이 끝나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제대로 본 것은 검무극이 마지막에 보여준 그 한 수였다.
‘대체 그 악귀는 뭐지?’
마교의 무공이 무서운 줄은 알았지만 정말 악귀가 현신할 줄은 몰랐다. 그것이 나왔을 때 너무 놀라고 무서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양석이 조심스럽게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같이 밤새 술 마시자던 그와 조금 전의 싸우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또 지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무극 역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죽일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만 같아서 양석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무릎을 꿇고 싹싹 비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살고 봐야 한다.’
검무극에게 연락하지 않고 혼자 극한지체를 빼돌리려 한 일은 분명 죽어 마땅한 일이다.
‘성공했다면 극한지체가 비장의 무기가 되었을 텐데.’
양석은 너무 아쉬웠다. 아버지와도, 검무극과도 협상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를 잃어버렸으니까. 여분의 목숨이 날아갔다.
“양 공자.”
“네, 소교주님.”
대답하는 양석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미안하지만 너도 죽어야겠다는 말만 나오지 않기를!
“이제 배후를 찾는 일은 양 공자에게 달렸소.”
양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살았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더 몸이 떨렸다.
“배후에 대해 아는 바가 있소?”
“아뇨, 없습니다.”
아니다. 지금 거짓말을 할 때가 아니다.
“사실 본문의 문주님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란 말 대신 문주란 표현을 썼다.
“저도 이번에 알았습니다.”
검무극은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다른 것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걸. 그랬기에 저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 거다.
“저자의 배후는 당신 아버지가 아니오.”
“아니라고요?”
검무극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은 후 말했다.
“대신 당신 아버지는 하결이 모시는 사람에 대해 알고 있을 거요.”
하긴. 생각해 보면 앞서 하결이 보여준 그 무서운 혈공은 아버지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야 양석은 아버지와 하결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하결을 어려워했는지. 하결의 무공이 고강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더 대단한 고수가 있었던 거다.
‘그래서 하결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거구나. 놈들의 협박에 못 이겨서.’
양석은 이 상황을 그렇게 곡해했다.
그럼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외압에 굴복해 자식들을 쳐내다니!’
이미 검무극이란 칼을 이용해서 모두 처리하고, 자신이 문주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였다. 그는 모든 상황을 천륜을 거역하려는 자신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해석했다.
게다가 아까 하결의 손짓에 혈맥이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지려 했다. 자신의 몸에 빌어먹을 뭔가가 심어진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양석은 분노가 치밀었다. 그건 이번 일에 관계된 자들을 남김없이 다 죽이고 싶은 강렬한 살의였다.
검무극은 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기에 그들 부자의 갈등을 더 부추겼다.
“당신 때문에 하결이 죽었다는 게 곧 당신 아버지에게 알려질 거요. 그럼 당신 아버지가 당신을 용서하겠소?”
살아남고자 하는 양석의 열망이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 낼 것이기에.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양석은 ‘왜 나 때문이오?’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라 검무극에게 잘 보여야 할 때였으니까.
“어떻게든 배후를 빨리 알아내야겠군요.”
“아까 말했듯 그걸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양 공자뿐이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양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를 만나서 하결의 배후에 있는 인물을 알아내시오.”
“제게 말해주지 않을 겁니다.”
“평소라면 그럴 거요. 한데 하결이 죽으면서 상황이 바뀌었소. 당신이 제대로 된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요.”
“그게 어떤 방법입니까?”
그러자 생각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솔직하게 다가가 보시오.”
솔직함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검무극의 말이 너무 낯설게 들렸다.
“당신이 얼마나 솔직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거요.”
양석은 반신반의했다. 아니, 통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자신은 솔직해져 본 적이 없고, 아버지는 상대의 거짓말을 누구보다 잘 알아차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하게 다가서는 것 자체가 거짓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양석은 그런 속마음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솔직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지금 양석의 바람은 이것뿐이었다.
‘그래, 내가 어떻게 해서든 알아낼 테니 아버지도, 그 배후란 놈도 다 해치우고 떠나라! 제발 나의 북해에서 꺼져라!’
* * *
검무극이 빙궁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취마는 창가 탁자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돌아올 거로 예상했는지 앞에 놓인 잔은 두 개였다.
미리 준비해둔 그 잔을 보자 검무극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잔은 자신에 대한 취마의 믿음이다.
그 믿음에 취마가 따라준 술이 가득 찼다.
“배후는 알아냈어?”
“아니.”
자멸공을 서슴없이 쓰는 자들이었다. 비밀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다.
물론, 한 가지 강하게 드는 예감은 있었다.
“놈이 북혈문에 있는 것 같아.”
극한지체를 구한다는 것은 대법을 하려는 목적일 터.
이런 상황에서 수족인 하결이 북혈문에 있었다면, 혈왕 역시 북혈문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겠는가?
“놈이 있든 없든 어차피 북혈문도 정리하겠지만.”
그들은 약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체질 조사를 하고 큰돈을 주겠다는 말로 사람들을 유혹했다.
사람들 대부분 극한지체가 아니기에 모두 죽음을 맞았다. 이것만으로도 북혈문주와 양석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참, 우리가 구한 분은?”
취마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솜씨로 마차에 있던 사람을 구해냈다.
“우선 본교 안가에 숨겨두었다.”
“어떤 분이었어?”
“자식 치료비를 구하려고 자원한 아버지.”
취마는 검무극이 할 일을 이미 다 처리한 후였다.
“그 사람이 사는 쪽 지단에 기별했다. 늦기 전에 애 치료부터 해주라고.”
“멋지다, 우리 형.”
“멋지긴.”
솔직히 고백하자면 검무극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랬다.
취마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구하고, 그 구한 사람의 자식을 위해 연락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닌 사람이다. 평생 홀로 술이나 마시며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던 인생이었는데.
그랬던 자신이 이제 남을 위하고 있다. 검무극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처음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었을 때만 해도 검무극과 이런 관계가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너 아니었다면 기별은커녕 그 사람 구하기나 했겠어?”
“마찬가지야. 이안이 물 얻어 마신 아낙의 남편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나도 극한지체에 관심이나 있었겠어?”
취마는 ‘그 이안이 무림에 나와 그 일을 한 것은 누구 때문인데?’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검무극이 의외로 생색내고 칭찬받는 걸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제 어떻게 하려고?”
“놈은 극한지체도, 수족도 잃었어.”
“복수하러 나오겠군. 아니면 영원히 숨어들거나.”
혈왕이 두 가지 길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혈왕은 당하면 반드시 갚는 인물이었다.
“반드시 피를 보려 할 거야.”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는 취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이젠 더 독한 술이 필요하겠군.”
* * *
북혈문주는 약간 들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군.’
극한지체가 도착하는 날이다. 극한지체를 이용해서 대법을 완성하면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예전에 하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극한지체만 찾아 대법을 마치면 북해빙궁은 끝장이다. 빙궁주의 무공은 무력화되고, 너무 추워서 오직 빙궁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빙궁보고(氷宮寶庫)에도 들어갈 수 있겠지.
이 북해 무림에서 빙궁이 사라진다는 건, 북혈문이 북해제일문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의 숙원이었다.
‘계집에게 눌려 평생 이렇게 지고 살 수는 없지.’
놀랍게도 젊은 시절부터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온 그였다. 그는 빙궁주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래서 더 쉽게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드디어 뱀 대가리에서 용 꼬리가 되는구나.’
꼬리라도 상관없다. 언제까지 꼬리로 살지는 않을 테니까. 언젠가 꼬리처럼 보였던 그것이 입을 쩍 벌려서 대가리부터 몸통까지 다 잡아먹어 버릴 테니까.
어쨌든 지금은 저들을 이용해서 북해빙궁을 쳐내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두 사람 모두 차도살인을 꿈꾸는 중이었다.
그때 그곳으로 양석이 들어왔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종일 하결이 보이지 않아서 찾아뵈었습니다. 혹 이곳에 있지 않나 해서요.”
당연히 북혈문주는 하결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었다. 극한지체를 인수하러 갔을 거다.
“내가 잠시 어디 보냈다.”
양석은 표정 관리를 위해 애썼다. 한 번 신뢰가 깨어지니 한마디 한마디가 다 거슬렸다.
‘내겐 단 한 번도 솔직히 말해주지 않는구나.’
이런 사이인데 솔직함을 발휘하라고?
‘놈이 죽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하결의 죽음이 전해지면 자신이 의심받을 수 있다. 그와 사이가 좋지 못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자신을 의심하진 않을 것이다. 하결의 무공 실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났으니까. 그 정도는 알고 계시잖아요? 문주님.
“한 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뭐냐?”
“극한지체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이기에 북혈문주는 의외란 눈빛으로 아들에게 되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느냐?”
“이제 저도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오랜 시간과 많은 돈을 들인 일이잖습니까?”
북혈문주는 말없이 아들을 응시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주마.”
그때 수하가 황급히 들어와서 소식을 전했다.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수하는 양석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빠르게 보고했다.
“소문주님의 호위인 하결이 죽었습니다.”
북혈문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양석은 아버지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동생이 죽었을 때도 저런 표정은 짓지 않았는데.
반대로 양석은 놀라는 연기를 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혼신의 연기를 해야 한다. 여기서 잘못 처신했다간 자신이 그 일에 개입한 사실이 들킬 테니까.
“자세히 보고하라니까!”
펄펄 날뛰는 양석과 달리 북혈문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상반된 두 감정이 격렬히 충돌하고 있었다.
우선은 기뻤다. 혈맥을 부풀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죽었으니까.
그와 동시에 걱정이 밀려들었다. 하결은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대체 누가 그를 죽였단 말인가?’
그의 죽음은 곧 그와 손잡은 자신의 위기 아니겠는가?
‘빙궁주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빙궁주였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느냐?”
“본문으로 오는 길목에서 목이 잘려서 죽었습니다. 주위에 마차와 다른 십여 구의 시체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마차가 발견되었다는 말에 북혈문주는 알 수 있었다.
‘호송이 털렸구나!’
누군가에게 극한지체를 빼앗겼음을 직감했다.
‘누군지 몰라도 극한지체가 오늘 우리 쪽에 호송되는 걸 알고 있는 자다.’
북혈문주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극한지체를 얻고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과 공을 들였는데. 낭패였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양석은 수하에게 명령했다.
“흉수를 추적해라! 죽은 자들을 조사해서 빨리 사인을 찾아내고.”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물러가자 양석이 물었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을 시키신 겁니까?”
북혈문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우선 밀실 속에 있는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거다. 밀실 속 밀실에 하결이 모시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문제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하결도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극한지체를 빼앗긴 상황에서 그를 만난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이 극한지체를 찾아내는 거다. 하결은 죽었지만, 극한지체만 있으면 밀실에 있는 인물은 만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결의 역할까지 대신하면서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양석은 양석대로 이때다 싶어 승부수를 던졌다.
“아버지.”
지금껏 문주님이라 칭하던 그가 아버지라 말했다.
북혈문주는 물끄러미 양석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께서 저 모르게 하결과 모종의 일을 계획하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양석은 검무극의 조언을 받아들여 솔직함으로 접근했다. 아니, 정확히는 허심탄회한 척이었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를 돕게 해주십시오.”
북혈문주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그르르릉.
태사의 뒤쪽 벽에 있던 비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결과 밀담을 나누던 바로 그 밀실의 문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밀실을 품고 있던 바로 그 방의 문이었다.
북혈문주는 하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경악한 눈빛으로 열리는 문을 쳐다보았다. 먼저 열려서는 안 될 문이 열리고 있었다.
“흐읍!”
양석이 인상을 쓰며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지독한 피 냄새가 문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혈왕이 걸어 나왔다.
피가 가득했던 수조에서 막 나온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몸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양석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짙은 혈향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술에 주정(酒精)이 있다면 이건 혈정(血精)에서 나는 냄새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반면 북혈문주는 냄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혈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젊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기다란 팔다리에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까지.
그가 풍겨내는 첫인상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무인보다 강렬했다.
‘미친 듯이 강한 자다.’
혈왕이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첫인상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면 양석은 피 냄새에 질려 혈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자가 배후구나.’
그가 문주전 뒤쪽 밀실에 숨어 지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비밀을 감추고 계시다니. 자식인 내게는 말했어야지.’
이 순간에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채우는 그였다.
착착착착!
좌‧우측 문에서 튀어나온 십여 명의 무인들이 북혈문주 앞을 막아섰다. 그들 역시 이 지독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 북혈문주가 비밀문으로 들어갈 때는 항상 수하들을 물린 후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밀실 속 사내가 밖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사전에 수하들을 물리지 못했다.
혈왕은 무심한 눈빛으로 무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북혈문주는 그 눈빛에서 여러 느낌을 받았다. 감정이 없는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다. 피처럼 뜨겁고, 피처럼 끈적하고, 피처럼 섬뜩한 그런 눈빛이었다.
느낌은 또 있었다. 질서나 논리가 통하지 않을 것 같고, 그저 본능에 따라, 아니, 피의 이끌림에 따라 살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북혈문주는 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만약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그 긴 시간을 밀실에서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에게는 그 모든 걸 압도하는 지독한 인내심이 있다. 그게 가장 무서운 점이다.
바로 그 순간.
혈왕이 천천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촤아아아악!
내뻗은 혈왕의 손가락에서 일제히 붉은 선이 뻗어나갔다.
퍽퍽퍽퍽퍽!
손가락 하나에서 하나의 선, 모두 열 개의 선이 무인들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실력이 아니었는데. 그 한 수에 무인들은 일제히 쓰러져 죽었다.
북혈문주도 처음 보는 무공이었다. 지풍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가 날아간 것도 아니었다.
혈왕이 천천히 태사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몸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혈왕은 벌거벗은 채 태사의에 앉았다.
그가 풍겨내는 기도와 존재감은 실로 엄청났다. 거기에 숨이 막혀오는 피 냄새까지.
혈왕이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구결을 외우더니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상처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르륵.
바닥에 떨어진 피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혈왕이 일장을 날려 천장을 날려버렸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붉은 연기는 뚫린 천장 위로 계속 올라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소란을 듣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북혈문주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모두 물러가라!”
이내 바깥의 소란이 잦아들며 침묵이 찾아왔다.
태사의에 앉은 혈왕은 북혈문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북혈문주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주군을 뵙습니다!”
북혈문주는 문주가 된 후, 아니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부모나 사부가 아닌 남에게 무릎을 꿇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게 되리란 것을.
엉거주춤 서 있던 양석도 재빨리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정말 놀랐다. 저 벌거벗은 남자가 강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주군이라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정말 낯설게 들렸다.
그러자 비로소 혈왕이 입을 열었다.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결이 어떻게 죽었나?”
밀실에서 바깥의 대화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하결과 피로 이어진 것일까? 그는 하결이 죽은 걸 알고 있었다.
“아직 저희도 모릅니다. 방금 소식을 들었습니다.”
북혈문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혈왕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북혈문주와 양석의 심장이 요동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북혈문주조차 두려움을 느꼈다.
이 남자는 앞선 하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도를 지녔다. 이런 무서운 자가 밀실에 있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혈왕이 다가간 사람은 양석이었다.
가까이서 본 혈왕의 눈동자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고 짙어진 피 냄새에 양석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결이 죽던 자리에 함께 있었지?”
물음이 아니라 추궁이었다.
양석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포심이 그를 엄습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잡아뗐다. 솔직히 말했다간 정말 고통스럽게 죽일 것 같아서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혈왕은 그냥 떠보는 게 아니었다.
“네게서 하결의 피 냄새가 난다.”
양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싸움을 구경했으니 어쩌면 그의 피가 몇 방울 자신에게 튀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피 냄새를 맡는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혈왕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석을 노려보았다.
“누가 하결을 죽였나? 너냐?”
모른다고 해야 했지만, 혈왕의 안광이 너무 무서워서 양석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안 죽였습니다.”
“그럼 누구냐?”
양석은 망설이지 않고 사실대로 고했다.
“마교 소교주입니다.”
혈왕은 몸에서 은은한 혈기가 뿜어내며 양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정수리에 닿자, 양석은 애원하듯 소리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수리에서 이상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저 기운이 머리 안에서 퍽하고 터져버릴까 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발!”
북혈문주는 아들을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나선다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 양석에게 몹시 화난 상태였다. 하결이 죽던 자리에 있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그의 죽음에 놀라는 연기까지 했으니.
혈왕이 정수리에 대었던 손을 뗐다.
“하아, 하아.”
그 기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았다는 생각에 양석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안도했다.
“극한지체를 지닌 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혈왕이 다시 묻자 양석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취마가 데려갔습니다.”
취마란 말에 혈왕의 두 눈이 길게 찢어지며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서낙이 죽었을 때, 그는 수조 속에서 결심했었다. 취마는 반드시 죽인다고. 그 취마가 다시 자신의 앞을 막은 것이다.
수하와 극한지체를 모두 잃은 혈왕은 거침없었다.
“소교주에게 만나자고 해.”
찢어진 눈 사이에 붉은 눈동자는 더없이 무서웠다.
“그사이 취마를 죽이고 극한지체를 되찾겠다.”
* * *
“놈은 형을 노릴 거야.”
검무극의 말에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취마가 고개를 돌렸다.
“서 장로도 죽였고, 극한지체도 빼 갔으니까. 반드시 형에게 복수하려 들 거야.”
“바라는 바다.”
취마는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될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혈왕의 자멸공은 겁내야 한다. 취마의 주기가 자멸공까지 막아주진 못할 테니까.
“부탁이 하나 있어.”
“무슨 부탁?”
“꼭 들어줘야 해.”
“싫어. 거절이다.”
그러자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데?”
“거절한다면서? 아! 역시 형은 형이야. 이 부탁을 거절하다니.”
결국 궁금해서 못 참는 취마였다.
“일단 들어는 보고.”
취마가 앞에 놓인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술 끊으란 말만 안 하면 돼. 이번에 끊으면서 느꼈다. 술 없으니까 삶의 기쁨이 사라졌어.”
“그것 빼곤 다 되지?”
“출교해서 돌아왔을 때 맨 마지막에 날 찾아오는 것도 안 돼. 그리고 또…….”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라니. 검무극이 웃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흑마검을 검집째 꺼내 들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괜히 내키지 않는 마음에 취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안 돼! 싫어!”
* * *
저 멀리 걸어오는 검무극을 보며 양석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최대한 오래 붙잡아둬야 한다. 실패하면 넌 죽는다.
차갑게 경고하던 혈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날 죽일 거다.’
혈왕은 검무극과 다르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도와주지도 않을 거다. 혈왕이 명령을 내릴 때, 옆에서 보였던 눈빛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사이 검무극이 그의 앞까지 왔다.
“오셨습니까?”
양석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제 예전과는 검무극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그였다.
“급히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왜 보자고 한 거요?”
“배후에 관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어떤 정보요?”
“잠시 좀 걸으시죠?”
양석은 검무극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만난 장소는 북혈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인적 드문 들판이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양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렸지요. 아버지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 정말 몰랐습니다.”
“배후는 어디에 있소?”
“그자가 빙검문에 있다고 했습니다.”
빙검문은 북해빙궁과 북혈문과 함께 북해삼대세력인 곳이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아버지께 다 뒤집어씌우면 된다.’
혈왕은 정말 무시무시했지만, 여기 이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다. 빠져나갈 굴을 파놓아야 한다.
가만히 양석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빙검문에 있다는 건 양 공자 생각이오? 아니면 그자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소?”
양석은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양석은 검무극이 떠보는 것인지, 진짜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걸 눈치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빙검문쯤 되어야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렇다는 말은 배후가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군.”
정말 놀라지 않으려 해도, 검무극과 있다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속였으면 됐지, 당신은 또 날 속이는군.”
더는 숨길 수 없음을 느꼈다. 양석은 혈왕이 너무 무서워서 그의 편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검무극을 보니 또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 검무극 앞에서는 자신이 벌거숭이가 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양석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이 눈치 빠른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난 반드시 살아남는다!’
이쪽에도 무릎 꿇고 저쪽에도 무릎 꿇고. 무릎이 굽혀지지 않을 때까지 꿇고 또 꿇어서라도 살아남을 거다.
“한데 제가 거짓말한 거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같이 걷자고 했을 때.”
“그게 왜?”
“당신이 정보를 알아냈다면 날 보자마자 알아낸 걸로 생색내기 바빴을 거야. 한데 같이 걷자고? 이상하잖아?”
검무극은 양석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자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에 있어? 자기가 잘못 선택한 일만 있지. 오늘도 그래. 날 만나자마자 상황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되었잖아?”
양석은 뭐라 변명할 수 없었다.
“그자가 또 뭐라고 했지?”
“그냥 소교주님을 만나라고만 했습니다.”
검무극이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불쑥 말했다.
“당신이 시간 끄는 사이 취마님을 죽이겠다고 했지?”
검무극은 양석의 눈동자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동요를 보았다.
“결국 취마님을 죽이려고, 이렇게 시간 끌고 있었던 거네.”
놀란 양석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면?”
“저는 다만…….”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콱 막혔다. 변명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양석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놈을 보시면 절 이해하실 겁니다. 그놈은 인간이 아닙니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속마음은 울부짖는 애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서해라. 잘난 너희들은 용서에서 쾌감을 얻는 것들이잖아?’
그건 검무극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이미 지은 죄가 커서 죽음은 확정인 그였다.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어서 가십시오. 당장 가셔서 취마님을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검무극은 전혀 취마를 걱정하지 않았다.
“네가 왜 마존을 걱정하나? 마존을 걱정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이 무림에 오직 천마뿐이시다.”
마존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이었고, 그만큼 취마를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검무극의 여유와 믿음은 취마의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으니까.
검무극이 들고 있는 흑마검에 감겨 있던 극품천잠사가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의 부탁은 바로 그 극품천잠사를 취마의 몸에 감으라는 것이었다.
죽어도 안 감겠다는 걸 결국 다 감게 했다. 심장은 물론이고 요혈마다 여러 번 감았다. 혈왕과의 싸움은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를 싸움이었으니까.
거기에 믿는 것 하나 더.
늦지 않게 되돌아갈 수 있는 쾌속보가 있었다.
“그만 일어나.”
자리에서 일어난 양석은 어떻게든 검무극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애썼다.
“전 믿습니다. 소교주님이 놈을 없애실 겁니다. 통쾌하게 없애실 겁니다.”
“넌 못 보겠다.”
검무극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양석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과 온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는 것을.
콰아아아아아앙!
그가 자멸공으로 폭발했다. 전방으로 엄청난 위력의 혈기가 휩쓸었지만, 이미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 들어가 있었다.
검무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양석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죽어 있었다.
놈은 북혈문의 소문주를 가차 없이 자멸공의 도구로 이용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마교 소교주인데 말이다.
검무극은 드디어 혈왕이 세상으로 나왔음을 실감했다.
하결도 못 죽였는데 양석이 죽일 거라 기대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건 혈왕이 보내는 인사였다.
검무극이 뻥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미친놈아.”
이안과 한설은 빙궁에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의 빙궁 방문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폐를 끼쳐 죄송해요.”
이안이 정중히 인사한 상대는 빙궁주였다.
“소교주님께서 절대 궁주전을 벗어나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리셔서요.”
“소교주가 이미 다녀갔네.”
출궁하면서 검무극이 이미 부탁하고 갔다. 이안과 한설을 한동안 함께 지내면서 보살펴 주라고. 다른 적이라면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이안도 함께 움직이게 했을 거다.
하지만 혈왕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이안이 비천검술의 대성을 이뤘어도 똑같이 궁주전에 있게 했을 거다.
빙궁주는 전혀 폐를 끼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딸과 빙궁의 안위와도 관련 있는 일이었고, 자신을 믿기에 한 부탁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부탁을 받아들이기까지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자넨 빙궁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아닌가?
마치 자신조차 궁주전에 숨어 있으란 말처럼 들려서였다.
―일반적인 적이었다면 궁주님께 맡기고 저는 이미 북해를 떠났을 겁니다. 한데 이자들은 자멸공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큰 희생을 치러야 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본궁을 노린 적이니 우리가 처리해야지.
물론, 빙궁에는 빙궁주 외에도 많은 고수가 있었다. 그들이 나선다면 큰 힘이 되겠지만, 역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적이 아니라 괴물이죠. 그리고 괴물은 저희가 잘 잡습니다.
여전히 망설이는 빙궁주에게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덧붙인 설득은 이것이었다.
―괴물은 마귀가 잡도록 놔두시지요.
스스로 마귀라 낮추면서까지 부탁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고마우면서도 다만 한 가지는 궁금했다.
―왜 이렇게까지 우릴 도우려는 건가?
적이 화무기의 수하이니까요.
―좋은 술을 대접받았으니까요.
빙궁주는 검무극의 부탁대로 취마의 거처 주위에 있는 무인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혈왕이 직접 움직이는 이상, 누가 지키더라도 불필요한 희생이라 여겼다.
잠시 검무극과의 대화를 떠올리던 빙궁주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 볼 때부터 묘하게 끌리던 여인이었는데.
“이안이라고 했지?”
창밖을 바라보던 이안이 빙궁주를 돌아보며 공손히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소교주가 자넬 많이 아끼는 것 같더군.”
“원래 정이 많으신 분이라서요.”
“정이 많은 마교 소교주라.”
“새로운 천마신교의 탄생을 지켜보고 계시는 중이시죠.”
이안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빙궁주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준 소교주였으니까.
‘세월이 지나 오늘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지. 소교주일 때의 천마를 그때 봤었다고.’
한설이 이안에게 물었다.
“소교주가 어려서는 어땠나요?”
빙궁주는 딸을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남에 대해서 궁금해한 적이 없었으니까. 정말 검무극 덕분에 새로운 경험 여럿 하고 있었다.
한설의 물음에 이안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원래 저러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
갑자기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검무극이 달라졌던 그날, 신마쟁투가 열렸던 그날 전까지는 말이다.
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 순간부터 검무극은 달라졌다.
그날 검무극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달라진 인생을 살기로 했다.
그는 정말 그 말을 지켰다. 검무극은 달라졌고, 그 변화가 주위 모두를 변화시켰다. 자신도, 마존들도, 천마도.
그날 검무극이 했던 말을 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소교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이 조금씩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어떤 계기가 있을 때, 확 바뀌는 거라고요.”
그랬기에 자신도 변하려고 노력했다. 사람 절대 안 변해, 라는 말의 예외가 되어 보려고.
“철드시고 많이 변하셨다고요.”
미소로 대답하던 그때, 이안의 시선에 뭔가가 들어왔다.
창밖 저 멀리 붉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느낌상 심상찮은 연기였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는 연기가 틀림없었다.
“아! 저쪽에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마치 봉화처럼 그 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또 다른 연기가 반대 방향 저 멀리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 *
“다음 달에 자네 월봉을 올려주겠네.”
주인장의 말에 숙수는 주방에서 싱긋 웃었다. 숙수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숙수를 얻은 것이 북양객잔 주인장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음식 맛도 좋고. 대우에 큰 불만도 없고. 금방 그만두겠다고 변덕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저 주방에서 묵묵히 요리만 하는 그였다.
그때 손님이 말했다.
“불이 났나 본데? 저기 연기 봐.”
“연기가 왜 저렇게 붉죠? 불이 났으면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야 하지 않나요?”
손님과 함께 주인장이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있던 그때였다.
“어이구, 깜짝이야!”
무심코 옆을 돌아본 주인장이 깜짝 놀랐다. 언제 나왔는지 기척도 없이 나온 숙수가 함께 연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사 시간에는 한 번도 주방에서 나온 적이 없던 그였다.
“저기 어디서 불이 난 모양이야.”
주인장의 말에 숙수가 말했다.
“불이 난 게 아니다.”
숙수의 말에 주인장도 손님도 깜짝 놀랐다. 이 숙수가 주방을 나온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네 말 할 줄 알았나?”
입을 연 그는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주인께서 우릴 부르시는 신호다.”
“내가?”
주인장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때였다.
숙수의 손이 주인장의 심장을 뚫었다.
“월봉은 올려주지 않아도 된다.”
함께 있던 손님이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났다. 숙수가 손을 휘젓자 달아나던 손님도 몸이 찢기며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숙수는 자신의 손과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웃음을 지으며 내려다보았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며 피 냄새를 맡더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구결을 외우자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피에서도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누군가를 깨우는 연기였다.
* * *
취마는 마당 평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 술병이 수십여 개나 놓여 있었고, 커다란 술독도 있었다. 그는 아예 작정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술이 아니었다. 북해에 있는 수십 종의 술을 모두 마시고 있었다.
취마는 이 술, 저 술 한 잔씩 마셨다. 그때마다 술에 대해 평가했다. 이 술은 가벼워서 좋구나, 이 술은 독해서 좋구나, 이 술은 달아서 좋구나, 이 술은 써서 좋구나.
모든 술을 이래서 안 좋다가 아니라, 이래서 좋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담벼락 위를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한잔하겠나?”
언제 왔는지 담벼락 위에 한 남자가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혈왕이었다. 벌거벗고 있던 그는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짙은 피 냄새가 자신이 누군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외부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지키는 무인도 없었다.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의미.
혈왕 뒤 저 멀리 붉은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쟁 전야의 긴장감이 피어오르는 붉은 연기에서 느껴졌다.
취마는 한 잔 더 마셨다.
“이리 와서 한잔해.”
혈왕은 말없이 취마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싫으면 말고.”
취마가 술을 쭉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시선은 혈왕을 향해 있었다.
뜨겁고 차갑고.
차갑고 뜨겁고.
두 사람 모두 뜨거움과 차가움을 모두 가지고 있는 눈빛이었다.
술 냄새와 피 냄새.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이 공간에 인간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두 냄새가 섞였다.
취마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몸은 달리 반응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이 긴장하며 상대의 공격에 대비했다.
‘날 죽이러 왔다.’
검무극의 말이 옳았다. 배후는 반드시 자신을 노릴 거라더니,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혈왕 혼자 온 게 아니었다.
혈왕이 서 있는 담장으로 십여 명의 무인이 올라섰다. 혈왕 바로 옆에 올라선 사람은 바로 북혈문주였다. 그와 함께 온 이들은 북혈문주가 아끼는 수족들이었다.
북혈문주가 취마에게 물었다.
“극한지체는 어디에 숨겼소?”
취마는 대답 대신 그를 질책했다.
“북혈문주나 되는 사람이 어쩌자고 이 더러운 피 냄새에 끌려다니고 있소?”
자존심을 건드는 말이었지만 북혈문주는 못 들은 척 다시 물었다.
“극한지체 어디에 있냐고 물었소.”
그러자 취마가 술을 마시며 대답했다.
“뭘 자꾸 물어. 맡겨 놨어?”
북혈문주가 혈왕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혈왕이 나직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순히 말해줄 자가 아니다, 죽여라.”
혈왕은 취마란 사람을 정확히 파악했다. 술이나 마시며 실실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저 술이 피만큼이나 진하다는 것을. 절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취마가 혈왕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혈왕은 어디 해보라는 듯 말없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너희가 쓰는 그 자멸공 말이야, 네가 터질 때는 그 빨간 머리통도 터지냐?”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북혈문주까지 있는 자리였기에 분명 어떤 감정을 드러낼 거로 생각했는데. 혈왕은 눈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보기보다 침착한 자다.’
취마도 혈왕이란 사람에 대해 느꼈다. 상대는 무작정 미쳐 날뛰는 살인마가 아니었다. 뜨거울 때는 뜨거움이 작동하고, 차가워야 할 때는 차가움이 작동하는, 그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유형의 적이었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사람은 북혈문주였다. 죽이라는 혈왕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자신들이 나서야 했다. 게다가 저렇게 취마가 혈왕을 도발하고 있는데 그냥 있다가는 혈왕에게 죽는 수가 있다.
북혈문주가 검을 뽑자 수하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들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기를 드러냈지만 취마의 시선은 혈왕을 향해 있었다.
이들이 희생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먼저 내보낸다는 것은.
‘내 실력을 확인하겠다?’
더불어 내공을 소모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을 테고. 피 냄새를 이렇게 진하게 풍기면서 정작 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다.
‘거기에 저 연기! 분명 누군가를 부른 신호가 틀림없다.’
한편 비정하기는 북혈문주도 마찬가지였다.
혈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왔지만, 지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잘 알았다. 마존을 상대하라고 내몰리고 있었으니까.
‘수하들을 모두 다 희생하더라도, 나만은 살아야 한다.’
우선 북혈문주는 수하 중 세 사람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세 수하가 훌쩍 담에서 내려섰다. 어차피 합공할 수 있는 숫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차륜전을 펼쳐 돌아가면서 상대의 힘을 빼는 것이 최선이리라.
세 무인이 세 방향에서 취마에게 접근했다.
취마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후우우욱!
갑자기 그들 주위로 주기가 확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그들 모두가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안개 속에서 검이 휘둘러지는 칼바람 소리가 들렸다. 살과 뼈가 잘려 나가는 소리도 들렸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스스스슷.
다시 안개가 사라졌을 때, 취마는 그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취마를 죽이려 접근했던 세 사람은 주위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안개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술 냄새보다 피 냄새가 더 좋다면, 실컷 맡게 해주마.”
북혈문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 사람이 당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당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안개 속에서의 싸움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검기와 검강을 쏟아부어라!”
북혈문주의 명령에 남은 수하들이 일제히 검기를 발출했다. 다시 주기가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한바탕 검기를 쏟아부은 후에야 북혈문주가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안개가 걷히고 엉망이 된 장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땅거죽이 뒤집히고 박살 난 모습.
취마는 부서진 평상 끝에 걸터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취마가 무사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 널려 있는 그 어떤 술병도 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날아드는 검기 속에서 취마가 술병을 지켰다는 의미.
‘이게 가능한 일이라고?’
북혈문주는 물론이고 나머지 무인들은 기가 죽었다.
취마가 북혈문주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리 와서 술 마시자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취마가 병째 술을 들이켰다.
여전히 혈왕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기에 취마를 상대하는 사람은 북혈문주였다.
“시간을 끌려는 모양인데 소교주의 도움은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시간은 너희가 끌고 있으면서.”
왜 혈왕이나 북혈문주가 먼저 나서지 않고 애꿎은 수하들을 희생시키느냐는 질책이었다.
“걱정돼? 날 죽이기 전에 소교주가 도착할까 봐?”
당연히 북혈문주는 걱정되었다.
혈왕이 소교주의 무공을 높이 산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둘을 함께 제거할 자신이 있었다면 양석에게 소교주를 유인하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
“소교주는 오지 못하오. 이미 우리 손에 들어와 있으니까.”
취마의 심기를 흔들기 위한 말이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소교주와 극한지체를 바꾸자고 했겠지.”
취마는 누구보다 총명할뿐더러 검무극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런 농담까지 했다.
“걱정하지 마. 소교주는 내겐 항상 맨 마지막에 오니까.”
취마가 술병을 들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 존재감이 모두를 긴장하게 했다.
“너희가 걱정할 사람은 소교주가 아니라 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 순간에도 취마는 벌컥벌컥 병째 술을 마셨다.
“너희처럼 술 상대는 안 해주고 칼이나 휘둘러 대는 바람에 혼자 마시다가 말이야.”
취마의 몸 주위에서 일렁이던 주기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많이 취했거든.”
취마의 몸 주위로 자색의 기운이 일렁였다.
그는 정말 술에 취해 있었다. 그 취한 모습에 이때가 ‘기회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반쯤 풀린 눈으로 휘청거리는 그에게 감히 아무도 달려들지 못했다.
그래, 취마라서 그럴 것이다.
취마가 본격적으로 술에 취해서 휘청거리는데. 어찌 감히 달려들 마음이 들겠는가?
게다가 반쯤 덮인 눈꺼풀 아래의 나른한 눈빛은 살기 가득한 눈빛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취마가 들고 있던 술병이 비자, 바닥에 있던 또 다른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는 또 술을 마셨다. 저렇게 마셔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셨다.
“아, 취한다.”
취마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북혈문주와 혈왕을 쳐다보았다.
“그만 내려들 오시지. 올려다보려니까 목 아프다.”
그러자 혈왕은 자리에 앉았다. 마치 이 싸움을 앉아서 편하게 구경하겠다는 듯, 아예 편한 자세로 앉았다.
이건 북혈문주에게는 압박이었다. 난 여기서 구경할 테니 넌 어서 가서 죽이라는 무언의 압박.
‘빌어먹을.’
북혈문주는 이 혈왕을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었다. 빙궁의 서 장로가 죽은 지금, 북해를 지배하려면 분명 북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이자는 자신을 소모품으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더 없이 감정적인 것 같으면서, 또 조금 전 취마의 도발에는 눈도 깜짝 안 한다.
북혈문주가 뒤쪽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게다가 자기 수하들까지 불러들였다.’
대체 뭘 하려는 계획인 거지? 이렇게 판을 키워버리면 뒷감당할 수가 없을 텐데.
어쨌든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다. 이 변덕스러운 혈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취마와 싸우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기에.
그리고 혈왕과 손을 잡고 이기면 북해 제일 세력이 되고자 하는 오랜 꿈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죽여라!”
북혈문주의 명령에 일곱 무인이 한 번에 담 아래로 내려섰다.
상대가 취마인데 그들이라고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래도 숫자가 일곱이란 사실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스스스슷.
순식간에 피어오른 주기가 그 희망을 가렸다.
안개 속에서 취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개가 일면 서쪽으로 뛰어. 그럼 살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취마가 열어준 활로로 달아나지 않았다.
그들은 평범한 북혈문의 무인이 아니었다. 북혈문주의 수족으로, 평생 문주의 명을 따라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그들이었다. 죽어도 살아도 한 몸인 그들.
이번에 피어오른 주기는 이전의 그것보다 더 취기가 강했다. 잠시 안개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벌써 취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주기 속에서 주기를 배출하는 것도 무의미한 시도였다.
차라리 독이었다면 해약이라도 먹으면 될 텐데. 독이 아니라서 막을 수 없다는 게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후우웅!
무인 하나가 손을 휘저어 주기를 흩어지게 했다. 그의 몸 주위의 안개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무인이 다시 손을 휘젓는 순간.
주기가 사라진 그곳에 취마가 서 있었다.
놀란 무인이 다급히 검을 내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취마의 손바닥이 먼저 무인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인이 꼬꾸라졌다.
그가 쓰러졌을 때 이미 취마는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살고 싶으면 서쪽으로 뛰라니까!”
하지만 그들은 그곳으로 뛰는 대신 말소리가 난 곳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쉭! 쉬이익! 쉬익!
검기가 쏟아졌지만 취마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서쪽은 저쪽이다. 아니, 이쪽인가?”
술 취한 취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무인이 목소리가 들린 쪽과 반대쪽으로 몸을 날리며 검을 내질렀다.
‘우릴 유인하는 수작이겠지만!’
나름대로 머리를 쓴 선택이었는데, 술에 취한 머리를 따라가진 못했다.
그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누군가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읽은 거지?’
우두둑.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무인은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쓰러졌다.
“아, 취한다.”
쉭! 쉭!
그곳으로 검이 두 방향에서 날아들었지만, 이미 취마는 사라진 후였다. 취마는 분명 취해 있었지만, 움직임은 누구보다 빨랐다. 이곳은 감히 혈왕조차 함부로 뛰어들지 못하는 그의 세상이었다.
“수하들 다 죽는다. 이래도 안 나설 거냐?”
안개 속에서 취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북혈문주는 담 위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책 없이 저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조금 떨어진 이곳에서도 냄새만 맡아도 취할 정도였다.
저 안에서 수하들은 정말 취해 있을 거다. 몸도 판단력도 느려져 있을 터. 평소보다 더 빨라도 모자랄 판에.
정말이지 혈왕이 아니었다면 절대 싸워선 안 될 상대.
어떻게든 수하들이 다 죽기 전에 약점을 찾아내야 한다.
안개 속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이번에도 수하의 비명이었다.
무인 하나가 공포심을 견디지 못하고 안개 위로 몸을 날리며 솟아올랐다. 일단, 주기에서 벗어나고 보자는 선택이었는데.
쇄애애애애앵!
안개를 뚫고 뭔가가 쾌속처럼 날아와 그의 턱을 부쉈다.
죽은 수하는 자신이 무엇에 맞고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북혈문주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였다. 취마에겐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가 되었다.
다시 안개 속에서 터져 나온 격타음.
안개를 뚫고 튕겨 나온 무인이 혈왕과 북혈문주가 있는 담에 처박히듯 부딪혔다. 이미 일권을 복부에 허용하는 순간 절명한 후였다.
이번에는 한 무인이 서쪽 안개를 뚫고 튀어나왔다. 정말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쉬이이이익!
퍼어억!
한줄기 강기가 날아가 그를 박살 냈다.
일장을 날려 그를 죽인 사람은 북혈문주였다. 이 싸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해선 안 되었으니까.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달아나는 걸 허락할 수 없었으니까.
안개가 좌우로 흩어지더니 안개의 중심에서 취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서 있는 주위만 안개가 물러났다.
취마가 취한 눈으로 북혈문주를 쳐다보았다.
그 나른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경멸과 가소로움이었다. 북혈문주가 눈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당신 때문에 죽은 거다!”
그때 일곱 번째 무인이 자포자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취마에게 걸어왔다.
“서쪽은 이쪽이 아니다.”
무인이 고개를 들던 바로 그 순간!
취마는 다급히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두 팔을 교차해 얼굴을 막았다.
이미 자멸공을 발동해 얼굴과 몸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꽈아앙!
그의 가슴에서 쏟아진 혈기가 취마를 덮쳤다. 그 충격에 취마는 뒤로 튕겨 날아갔다.
취마가 바닥을 뒹굴며 쓰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자욱하던 주기가 사라졌다.
“취마를 해치웠습니다!”
북혈문주는 기뻐하며 소리쳤다. 혈왕은 자신들을 무작정 죽음으로 내몬 것이 아니었던 거다.
“주군께서 안배하신 것이 이것이었군요!”
비록 자신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은 기분 나빴지만, 취마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소교주가 돌아오기 전에 가시지요.”
하지만 혈왕은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취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북혈문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을 향했을 때.
“으으으, 아프다.”
놀랍게도 취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취마는 가슴을 매만지면서 술부터 마셨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급하게 터져서 원래라면 크게 다쳤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몸에 두르고 있던 극품천잠사가 혈기에 몸이 뚫리는 걸 막아주면서 큰 부상을 피한 것이다.
‘동생아, 덕분에 살았다.’
검무극이 목숨을 구해주었다. 정말 어찌나 악착같이 극품천잠사를 몸에 두르게 했는지.
취마를 바라보는 혈왕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앞서 당한 거리에서 이렇게 멀쩡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호신갑을 입었다.”
혈왕은 확신하듯 북혈문주에게 말했다. 내내 취마를 향했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북혈문주는 알 수 있었다.
‘나도 나가서 싸우라고?’
결국은 너도 나가서 죽으라는 의미였다.
혈왕의 눈빛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죽을래, 싸우다 죽을래.’
살다가 문득 꿈에서 깨는 순간이 있다.
어? 이것이었나? 어? 이런 사람이었나? 어? 날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가슴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는 그 순간. 표정 관리가 안 돼 말을 더듬고,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지는 그 순간 말이다.
이 순간 북혈문주가 그랬다. 적어도 자신이 그에게 이 정도로 하찮은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혈왕은 앞서 죽은 수하들과 자신을 똑같이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술 한 잔 주시오.”
북혈문주가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래도 취마보단 혈왕이 더 무서웠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담장 위에서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북혈문주가 천천히 취마에게 걸어갔다. 술을 받아마실 때 기습을 시도할 작정이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주기 속에서 싸우면 필패일 테니까.
취마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를 반겼다.
“드디어 술친구가 생겼소. 함께 술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 어렵소?”
북혈문주가 한걸음, 한걸음 취마에게 다가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단 한 순간을 노렸다.
두 사람은 이제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섰다.
“잔이 없으니 그냥 마십시다.”
취마가 술병째 내밀려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한데 문주께선 저자가 그렇게 무섭소?”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주군을 존경하오.”
“상대가 무서워서 수하들부터 사지로 밀어 넣는 자가 뭐가 그리 존경스럽소.”
북혈문주는 씁쓸했다. 밀어 넣은 수하가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 여겼으니까.
“저기 저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힌 거요?”
북혈문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약점? 두 개나 잡혀 있다. 혈맥을 부풀려서 죽여 버리는 혈공과 북해빙궁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자신의 열망.
과연 자신은 어떤 약점에 끌려서 여기까지 온 걸까?
“차라리 나와 손잡고 저놈과 싸워보는 건 어떻소? 그럼 죽어도 여한은 없지 않겠소?”
그 말을 하는 순간, 담에 앉아 있는 혈왕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지어졌다.
“저기 저 사람이 어떻게 웃나 한번 보시오.”
대체 어떻게 웃길래?
북혈문주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바로 그 순간.
쉬익! 푹!
살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북혈문주가 놀란 얼굴로 다시 취마를 돌아보았을 때, 술병을 든 손 말고 다른 손에 피 묻은 비수가 들려 있었다.
‘뭐지?’
다음 순간.
푸아아아악.
북혈문주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돌아서서 혈왕을 보는 순간, 취마가 벼락처럼 기습해 그의 목을 찌른 것이다.
북혈문주는 자신이 기습할 생각만 했지, 설마 취마가 자신을 기습해서 죽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앞서 취마는 너무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너무 여유롭게 싸웠기에 더욱 그러했다.
“미안하오. 주정뱅이 싸움이 원래 추잡스럽소.”
취마의 말에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목을 움켜쥐었지만 흘러내리는 피를 막지 못했다.
북혈문주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그는 이 허무한 죽음이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취마가 쪼그리고 앉아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어차피 죽일 자였다. 북혈문에서 극한지체를 찾는 과정에서 저지른 짓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언제 정리하느냐의 문제였을 뿐.
북혈문주가 이 싸움에서 혈왕을 배신하지 않으리란 걸 예감했다. 술을 달라고 오는 이유가 기습을 위해서란 것도 느꼈고.
“저런 자 옆에 서면 끝이 좋을 수가 없지.”
북혈문주에게서 나는 자욱한 혈향을 안주 삼아 취마가 술을 마셨다. 물론, 술을 마시면서도 단 한 순간도 혈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허공에서 얽히는 차가움과 뜨거움, 뜨거움과 차가움.
혈왕이 처음으로 취마에게 말했다.
“그러는 네 옆에는 구경하는 사람조차 없지 않나?”
검무극을 두고 하는 조롱은 취마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런 더럽고 위험한 곳에는 안 와야지.”
오히려 취마는 한술 더 떴다.
“그 점은 네게 참 고맙다. 소교주를 여기 못 오게 한 거 말이야. 그분은 술 냄새, 피 냄새 찌든 이런 곳에 어울리는 분이 아니다. 너나 나 같은 인간들이나 멱살 잡고 뒹굴어야지.”
혈왕이 묘한 눈빛으로 취마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상한 자로군.”
“취해서 그래. 아니지, 네가 안 취해서 그래.”
횡설수설하며 취마는 또 술을 마셨다.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 하지만 혈왕은 보았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취마의 눈꺼풀이 풀렸지만, 그의 눈동자는 더욱 맑게 빛났다.
취마가 혈왕에게 내려오라고 손을 까닥했다.
그러자 드디어 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드디어 혈왕이 나선 것이다. 취기가 가득하던 그곳에 혈왕의 혈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는 술보다 진한 법이지.”
혈기와 주기는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하찮은 피를 어디 술에 비교하나?”
술과 피,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냄새가 뒤섞이며 두 기운은 팽팽하게 서로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두 기운이 팽팽히 맞섰다.
만약 누군가 이들 사이에 서 있었다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단지 두 사람이 내뿜는 기도가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이 두 기도의 성질 때문이었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으며 정신이 멍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견디기 힘든 지독한 혈향과 주향까지.
“힘들어서 안 되겠다.”
취마가 먼저 주기를 거둬들였다. 그는 앞서 북혈문의 수하들을 상대하느라 내공을 소모했고, 깊진 않지만 자멸공에 부상까지 당한 상태,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다.
그래서 굳이 이 상황에서 기도 싸움을 계속해서 내공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취마는 기도 싸움에서 완벽히 졌다는 표정으로 패배주를 마셨다.
“크, 쓰다. 써.”
반면, 혈왕은 혈기를 거둬들이지 않았기에 주위는 혈기로 가득 찼다.
짙은 피 냄새에 숨이 막힐 듯한 혈기였지만, 오히려 취마는 깊게 빨아들이며 피 냄새를 맡았다.
“당신 피 맛도 이래?”
혈왕은 무슨 뜻이냐는 눈빛으로 취마를 노려보았다.
“내 피에서는 술맛이 날 텐데, 당신 피는 이런 지독한 맛이냐고?”
피와 관련한 질문이어서였을까? 혈왕은 그 물음에 대답했다.
“내 피 맛을 알 수 있는 날은 없을 거다. 그 누구도.”
그러자 취마가 그를 도발했다.
자신의 가슴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펼치며 자멸공이 펑하고 터지는 시늉을 한 것이다. 그때 네 피 맛을 보겠다는 의미였다. 도발도 그냥 도발이 아니라 강력한 도발이었다.
그 도발에 혈왕은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에게 자멸공을 흉내 내며 조롱한다고? 치미는 분노만큼이나 낯선 느낌도 들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이런 건방을 떤 적은 없었으니까.
도발임을 알았지만 안 걸려들 수 없을 도발이었다.
대체 누구 때문에 대법을 포기하고 나와야 했는데?
취마의 도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옷자락을 열었다. 가슴에 동여맨 극품천잠사에 피가 묻어 있었다.
“여기에 당신 피도 묻겠지? 깨끗이 빨아서 돌려줘야겠네.”
혈왕은 취마가 두른 기물이 소교주가 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깟 기물을 받고, 소교주의 개가 되었나?”
앞선 도발에 대한 반격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검무극과 관련해서는 도발이 통하지 않았다.
“개는 소교주야.”
무슨 뜻이냐는 혈왕의 눈빛에 취마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넌 안 믿기겠지만 소교주가 우릴 위해 개가 되어 주신다네.”
독왕을 위해 연무장에서 함께 짖어준 일은 천마신교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취마는 덧붙여 설명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혈왕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종일 설명하라 해도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검무극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근데 이렇게 여유로워도 돼? 수하들이 먼저 올 거라 믿는 건가?”
아직도 저 멀리 곳곳에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소교주도 온다.”
“불안한가? 네 소교주가 이곳에 와서 죽게 될까 봐?”
“안 죽어. 소교주는.”
취마는 확신했다. 그럼에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다만, 우리 같은 사람과는 싸우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우리 같은?”
“그래, 우리 같은.”
그게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지 않은 채 취마는 술을 들이켰다. 그의 몸 주위로 주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러니 이 지독한 피 냄새, 술 냄새는 우리만 맡자고.”
스스스스슷.
두 사람 주위로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랐고 취마는 그 주기 속으로 사라졌다.
혈왕은 손을 들어서 시야를 가리는 주기를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냥 봐선 안개지만, 벌써 취기가 느껴질 정도로 독한 주기였다.
북혈문 무인들이 싸우는 내내 혈왕은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자신은 어떻게 이 주기 속에서 싸울 것인가? 저 주기를 어떻게 파훼할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혈왕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취마의 기습에 대비하면서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해법은 이것이었다.
극양지기로 주기를 모두 태워버리는 것.
주기의 성질상 불에 타기 쉬운 데다가, 지금 취마가 내뿜는 주기는 너무 독해서 더욱 잘 탈 것이다.
혈왕의 극양지기에 불길이 일었다.
화르르륵.
손끝에서부터 주기가 타오르자 혈왕의 두 눈에 만족스러운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었던 불길은 금방 꺼져 버렸다.
불이 사방으로 번질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극양지기가 발휘된 곳만 타다가 금방 꺼져버린 것이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극양지기를 일으켰다.
화르르르륵.
하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타버렸을 뿐, 불은 금방 꺼졌다. 다시 그 자리에 주기가 모여들었다.
그때 안개 속에서 취마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싼다.”
혈왕은 들은 척도 않고 손을 들어서 주위에 흐르는 주기를 움켜쥐듯 만졌다. 느낌은 전부 다 타버릴 것 같은데 왜 타지 않는 거지?
“백날 해도 안 탄다. 내 주기는 주인을 닮아서 불에 타오를 정도로 열정적이지 않거든.”
쇄애애애액.
혈왕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저 멀리 뒤쪽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취마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쇄애애애애액!
혈왕이 돌아서며 뒤에서 날아든 것을 손으로 잡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든 것은 돌멩이였다.
흐르르륵.
돌멩이는 혈왕의 손에서 가루가 되어 흘러내렸다. 날아든 내력과 그것을 막은 내력 모두 너무 강해서 충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깟 돌멩이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서 더 큰 걸로 준비했어.”
회애애애애액!
날아든 것은 마당에 서 있던 커다란 석등이었다.
혈왕의 일장에 석등이 박살 나고 부서지던 그 순간.
뒤에서 취마가 모습을 드러내며 비수를 내질렀다.
날아온 것은 석등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장을 노린 취마의 비수를 피하며 혈왕이 일장을 내질렀다.
장력과 장력이 부딪쳤고, 그 기운에 밀리면서 취마는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혈왕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조금 전 취마의 기습은 정말 매서웠다. 만약 ‘고작 석등 정도로 날 죽일 수 있겠는가?’라는 자만심을 가졌다면, 반드시 취마의 비수에 찔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산책하듯 시작한 싸움이 본격적으로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혈왕이 먼저 취마를 감지하고는 혈기를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주먹과 주먹이 충돌했다.
주르륵, 두 사람 모두 뒤로 밀려났는데 그 걸음 수가 똑같았다. 그야말로 둘은 박빙의 실력이었다.
이번에는 손바닥과 손바닥, 장법이 격돌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똑같은 걸음 수만큼 밀려났다.
바로 이때, 혈왕이 먼저 독문무공을 발휘했다.
뒤로 주르륵 밀렸을 때, 어느새 혈왕의 다른 쪽 손바닥 위에는 피 구슬들이 떠올라 있었다. 놀랍게도 격돌하고 밀려나는 그 짧은 사이에 만사혈공 중 비도혈우를 발휘한 것이다.
순식간에 피 구슬들이 작은 비수 모양으로 바뀌더니.
쉭쉭쉭쉭쉭쉭쉭쉭쉭!
취마가 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제자인 하결이 구사했던 비도혈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위력이었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팍!
뒤쪽에 있던 담장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구멍은 촘촘했고 이 영역에 있었다면 절대 피할 수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흔적이었다.
하지만 담장 어디에도 취마의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휘이이잉.
잠시 주기가 걷히면서 취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만! 한숨만 돌리고.”
취마가 간신히 위험을 넘겼다는 표정으로 술을 마셨다.
“살살 좀 하자. 이 좋은 걸 영영 못 마시는 줄 알았네.”
혈왕 역시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서로 운기조식을 통해 내공을 회복할 시간은 없었다. 지금 잠깐 쉬는 순간에도 상대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까.
“혼자만 마시려니 미안한데.”
취마가 혈왕을 보며 술병을 내밀었다.
“딱 한 잔만 하지.”
그 말이 끝나던 바로 그 순간.
꽈지지지직!
한 줄기 벼락같은 강기가 혈왕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한 혈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깊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마터면 머리통이 그대로 꿰뚫릴 뻔했다.
취마의 기습은 평범한 공격이 아니었다.
취마의 독문무공 주신공.
두 번째 잔, 주신독주(酒神獨酒).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줄기의 강기가 홀로 술을 마시는 모습이라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내 술 한 잔 받는 게 그렇게 싫나?”
씩 웃으며 취마는 피어오르는 주기 속으로 사라졌다.
혈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가 더욱 짙어지면서 두 눈에서도 붉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까닥했으면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분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취마는 다시 등 뒤에서 나타나 기습을 가했다.
쉭! 쉭!
취마의 비수가 허공을 갈랐고 빠르게 뒤돌아선 혈왕의 일장이 허공에서 터졌다.
“아플 거다, 주정뱅이.”
취마는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 주위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력을 일으켜 붉은 기운을 떨쳐냈다. 그만큼 혈왕의 공격은 묵직했다.
“피나 닦고 말해.”
혈왕 역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혈왕이 다친 상처에 입을 댔다. 피를 빨아먹듯 쪽 빠는 순간, 그의 얼굴에 핏줄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거기에 두 눈이 귀신처럼 길게 찢어지며 혈기가 뻗쳐 나왔다.
지금의 혈왕은 마주 보는 것조차 두려울 정도의 외모와 기세였다.
물론, 취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더 도발했다.
“극한지체는 왜 그리 찾는 건가?”
혈왕의 눈가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정말이지 상대는 자신이 가장 화나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극한지체를 뽑아내서 어쩌려고? 추위에 강해져서 이 북해에 정착해서 살려고?”
술에 취한 목소리기에 혈왕은 더욱 화가 났다. 극한지체는 취중에 마구 떠들어댈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알다시피 극한지체는 내가 데려갔다. 사과하는 의미로 솜옷이라도 한 벌 사줄까?”
취마는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 다 계산된 말이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오려면 우리에게 왔어야지. 아, 혹시 당신 실력이 제일 떨어지나? 그래서 이 북해까지 밀려난 건가?”
결국 혈왕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이 주정뱅이 새끼야!”
다른 건 참아도 조직 내에서 자신이 떨어진다는 말만큼은 참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당당하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돌아오라는 명령도 거역할 수 있었다.
그의 흥분에는 주기도 한몫했다. 주기 속에서 싸우면서 알게 모르게 혈왕은 취기에 취한 것이다.
흥분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취마의 기습이 시도되었다. 안개 속에서 나타난 취마의 비수가 혈왕의 옆구리를 찔렀다.
옆구리를 찌르고 다시 사라지려 할 때, 취마는 혈왕의 일격에 어깨를 강타당했다. 그때 취마는 보았다. 혈왕의 눈빛이 더없이 차갑다는 것을.
욕설을 내지를 때의 혈왕은 뜨거웠지만, 반격하는 그는 차가웠다. 어쩌면 반쯤은 의도적으로 흥분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수가 날고 주먹이 날았다. 또 혈기와 주기가 충돌했다.
치고, 박고, 구르고. 그야말로 두 사람은 용호상박의 격전을 벌였다.
그야말로 한 수, 한 수에 감정을 담아 싸웠다.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싸웠다.
두 사람 모두 처음이었다. 이렇게 팽팽한 맞수와 생사 대전을 펼쳐본 것은.
한바탕의 몸싸움 끝에 취마는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예상은 했지만, 혈왕은 예상보다도 훨씬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기 속에서 술을 마시며 이동하던 취마가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앞에 한 줄기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취마가 옆을 쳐다보았다. 옆에도 선이 있었다. 여기저기 하나씩 그어지기 시작한 혈선들.
그 선들은 안개처럼 핀 주기를 종이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취마는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 그 선에 던졌다.
사아악.
보검이 잘라낸 것처럼 돌멩이는 반으로 잘렸다.
주위로 점점 많은 혈선이 생겨나며 거미줄처럼 포위했다. 혈왕이 펼치는 분체혈망이었다.
취마가 주기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안개처럼 펼쳐졌던 주기가 사라지고 주위에 수십 가닥의 혈선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선들이 이미 너무 많이 그어져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호신강기로 돌파하는 것인데, 너무 큰 부상을 각오해야 했다.
붉은 선들 너머 혈왕의 모습이 보였다. 분체혈망을 펼쳐내면서 내공 소모가 극심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이 수로 반드시 취마를 죽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제대로 가뒀다.’
빠져나갈 틈은 없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혈선들이 취마를 향해 조여지기 시작했다.
취마가 허리에 차고 있던 독문병기 혈루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거 모르지?”
혈루에 고유한 내공을 주입하자, 한차례 진동하며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독문무공 주신공.
마지막 잔. 주신만취(酒神漫醉).
취마가 혈루의 마개를 열어서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자 취마의 몸에서 일렁이던 자색의 주기는 이제 검은빛으로 바뀌었고, 두 눈에서는 순백의 광기 어린 취기가 흘러나왔다.
그 광기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취마가 맨손으로 혈선을 덥석 잡은 것이다.
“우린 취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취마의 손과 혈선 사이에서 강기와 강기가 부딪친 것처럼 불꽃이 일어났다.
치이이이익.
싸움을 시작한 이래 혈왕은 가장 놀랐다.
혈선을 맨손으로 잡을 줄 몰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찌이이이익.
취마가 혈선을 양손으로 잡아서 뜯었다.
“으아아아!”
취마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혈선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외침이 극에 달하던 그 순간.
닿기만 해도 쇠를 잘라버리는 혈선이 끊어졌다.
혈선이 끊어지자 이번에는 혈왕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윽!”
지금 혈왕은 더욱 강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 분체혈망과 자신의 진기를 이어둔 상태였다. 이 한 수로 취마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혈선이 끊어지면서 진기를 운용하는 혈맥에 큰 충격을 입었다.
혈왕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설마 또 끊어내겠느냐?’
하지만 만취한 취마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금방 그렇게 아파했던 것도 잊고, 또 빨랫줄을 잡듯 두 번째 혈선도 와락 움켜쥐었다.
“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비명만큼이나 힘차게.
이번에도 잡아 뜯어서 끊어버렸다.
“으윽!”
두 번째 혈선이 끊어지자 혈왕에게서 아까보다 더 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더 큰 충격을 입고 혈맥이 뒤틀린 것이다.
결국 혈왕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초식을 펼치는 걸 포기했다.
사방에 그어져 있던 혈선이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취마는 혈왕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했다.
무공을 펼치기 위한 경공이 아니다.
취마는 흥분한 황소처럼 광기에 찬 취기를 흩뿌리며 돌진했다.
검기와 검강이 날아와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막아내는 혈왕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혈선을 맨손으로 끊고 달려드는 취마가 두려웠다.
‘지금은 안 돼!’
혈루의 술을 마시고 혈선을 찢었다. 다시 말해 지금 저 미쳐 있는 상태에 붙잡히면 자신도 뜯길 수 있다는 의미.
그래도 이 강력함이 계속 유지될 리는 없었으니.
‘방법은 하나다!’
황소처럼 달려든 취마가 주먹을 날리려던 그때.
후우우욱.
날개처럼 혈왕의 몸에서 펼쳐진 것이 취마를 감싸듯 잡아먹었다.
만사혈공의 비기 결인혈막이 발휘된 것이다.
취마가 막 안에서 허우적거렸다.
“풀어! 이 새끼야! 너 나가면 죽는다!”
취마는 술에 취해 주사 부리는 사람처럼 욕을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다 발버둥 치던 혈막 안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찌이이익.
취마가 혈막도 찢으며 머리를 내밀었다.
“너 이 새끼 죽었어!”
혈왕은 망설이지 않고 취마를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쇄애애액.
혈왕의 일장에 적중당한 취마가 혈막에 머리를 내민 채로 나가떨어졌다.
혈막이 바닥을 굴렀다. 구르면서 꼼짝도 안 하기에 죽었나 싶었는데 취마가 굼벵이처럼 혈막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훌쩍 허공으로 뛰어오른 혈왕이 혈기를 연속해서 발출했다.
쾅! 콰앙! 쾅쾅!
땅거죽이 뒤집히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예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릴 작정으로 혈기를 쏟아부었다.
그렇게 한바탕 공격이 끝나고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먼지가 가라앉자 움푹 파인 땅 구멍들 사이에 취마가 서 있었다. 어느새 혈막에서 벗어난 그는 쏟아진 혈기 속에서도 버텨낸 것이다.
그럼에도 혈왕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작전은 성공했다. 앞서 혈선을 끊을 때 취마의 몸 주위의 주기는 검은빛이었는데, 다시 자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신공의 마지막 초식, 주신만취의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이 마지막 초식은 막대한 내공이 필요했기에 죽음을 앞둔 상황이 아니면 절대 펼치지 않는 초식이었다.
숨을 몰아쉬던 취마가 발 옆에 굴러다니는 술병 중에 깨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향해 걸었다.
깨진 병이 발바닥을 찔러 피가 났지만 취마는 개의치 않았다.
혈왕이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기도 했다. 여전히 취마는 만취 상태였고, 여전히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취마가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처음부터 이 마당에 수십 병의 술을 두고 마셨다. 북혈문 무인들을 상대할 때까진 검기가 쏟아지는 공격에서도 술병만큼은 지켰는데 지금은 거의 다 마시고 깨어지고 남은 것이 몇 병 없었다.
혈왕은 처음에 취마가 마교 소교주와 함께 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심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팔마존 중에서 제일 만만하다고 여긴 마존이었으니까.
하지만 실제 실력은 그 어떤 마존에도 뒤지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무공 상성이 좋지 않았다. 원래 혈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지독한 피 냄새만으로도 상대를 짓눌러야 하는데, 취마의 술 냄새가 피 냄새를 잡아먹어 버렸다.
또한 기질 역시 마찬가지다.
취마는 뭔가 자신과 맞지 않았다. 혈공이 주는 두려움이 분명 있을진대, 이 술에 미친놈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겠지.
“너도 마실래?”
어찌나 취했는지 취마의 혀가 꼬여 있었다. 분명 곧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취했는데 눈빛만큼은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취마의 말에 혈왕이 고개를 내저었다.
술을 마시겠냐고? 지금 심정은 앞으로 눈앞에서 술 마시는 놈은 다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술? 냄새도 맡기 싫다.
취마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까 혈선과 혈막을 찢을 때 다친 상처였다. 아무리 취했어도 아픔이 느껴질 텐데. 발바닥도, 팔과 옆구리도 피에 젖어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싸우려는 거냐?”
내가 이기지 못하면 소교주가 싸워야 할 테니까. 징글징글한 너는 내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으니까.
사람 관계는 그냥은 알 수 없다. 이렇게 일이 터져 봐야 안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얼마나 검무극을 생각하느냐고?
자멸공이 터져도 내게 터져라!
이런 마음이었다. 마침 극품천잠사도 자신이 감싸고 있었으니까.
“소교주 때문이냐? 대체 소교주가 네게 뭘 해줬기에?”
취마가 비틀비틀 술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이야. 만날 내게 마지막에나 찾아오는데.”
취마가 비틀거리는 건 단지 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칠 대로 지쳤고, 내공도 거의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취마를 보며 혈왕은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공포심이 혈왕을 분노로 이끌었다.
‘죽인다.’
이 술주정뱅이 놈, 내 손으로 죽인다! 주먹으로 패 죽일 거다. 네 소교주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자.
혈왕의 두 눈에서 살기 가득한 혈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 사람의 싸움은 피와 술의 싸움.
이들의 싸움은 그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냄새를 닮아 있었다. 논리보단 감정적이었다. 말보다는 욕이 먼저였다. 왜 죽여야 하느냐보다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과가 앞서는 싸움이었다. 피와 술의 싸움은 운명적으로 그런 관계인 모양이다.
두 사람이 양 주먹에 남은 내공을 주입했다. 그들은 권마가 아니었는데, 권마처럼 주먹으로 싸웠다.
혈왕의 주먹이 취마의 가슴에 적중했다. 그 묵직한 위력에도 취마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픈데도 참는 건지, 술에 취해 아픔도 못 느끼는 건지. 취마는 피하지 않고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취마의 첫 번째 주먹은 빗나갔지만 두 번째 주먹이 그대로 혈왕의 얼굴을 강타했다.
턱이 돌아가며 혈왕이 휘청거렸다. 정확히 주먹이 들어갔지만, 혈왕은 쓰러지지 않았다.
뒤이어 날아드는 취마의 주먹을 피하며 반격했다. 주먹이 얽히듯 교차했고 취마의 어깨에 적중했다.
그들은 잘 때리고 잘 피했다.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 것 같았지만, 마존이고 혈왕이다. 그렇게 누가 이기나 보자, 기세 가득한 주먹질이 계속되던 그때였다.
취마가 휘청거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혈왕이 달려들던 그때.
취마의 박치기가 혈왕의 얼굴에 작렬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박치기라니? 혈왕은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다.
동시에 들려왔던 살이 찢기는 소리.
코를 매만지며 뒤로 물러서던 혈왕은 보았다. 취마가 훌쩍 뒤로 저만치 물러나는 모습을.
‘왜?’
조금 전 박치기 공격이 성공했을 때가 자신을 몰아붙일 기회였을 텐데.
바로 그때 혈왕은 낯선 피 냄새를 맡았다.
혈왕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있는 자리가 흥건히 핏물에 젖어 있었다. 뜨거운 것이 가슴을 거쳐 배로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혈왕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언제?’
박치기에 당하던 그 순간, 취마가 비수로 벼락처럼 빠르게 그의 심장을 찌른 것이다.
취마는 처음부터 오직 그 한 수만을 노렸다. 인사불성 취해있었지만, 그것은 취마의 만취였다. 취마가 황소처럼 달린 것은 혈왕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 결과를 향해서였다.
그제야 혈왕은 취마의 손에 들린 비수를 보았다. 어찌나 깊이 찔렸는지 날 전체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전에 말했잖아? 주정뱅이 싸움이 이렇게 추잡하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 비수를 보는 순간, 혈왕은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서둘러 혈도를 눌러 지혈했지만, 찔린 곳은 심장이었다. 겉만 지혈한다고 될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저 주정뱅이 놈에게?’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피보다 술이 진했다.
취마는 멀찌감치 서 있었다. 치명적인 공격이 성공했음에도, 아니 성공했기에 취마는 조심스러웠다.
언제 자멸공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혈왕과 눈이 마주쳤다. 가만히 그의 두 눈을 바라보는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한 가지.
“당신 설마?”
취마가 정말 설마, 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자멸공을 익히지 않은 거냐?”
싸우고 나서 상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듯,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리고 혈왕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는 자멸공을 익히지 않았음을.
자신의 최후만큼은 산산조각나면서 끝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딴 사람은 몰라도 너만큼은 정말 화려하고 큰 폭발로 끝내야 하잖아?”
수하들은 그렇게 자멸공으로 터뜨렸으면서.
“우리가 싸우기 전에 물었지? 왜 소교주를 우리하고 싸우게 하고 싶지 않냐고.”
차가운 눈빛으로 취마가 덧붙였다.
“이래서다. 너나 나나 우린 너무…….”
취마가 천천히 걸어왔다. 혈왕은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자멸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취마를 죽일 마지막 수가 있었다.
비접혈독.
비접혈독을 쓰면 선천진기의 절반이 영구적으로 사라지기에 함부로 쓰지 못했다. 하지만 어차피 죽는 마당이라면 놈과 함께 죽을 수 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취마가 오다가 뒷걸음질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너 같은 인간을 내가 뭘 믿고.”
술에 취하면 죽음의 냄새를 더 잘 맡는 취마였다.
취마가 바닥에 있던 부서진 석등을 가져왔다. 앞서 싸우면서 집어 던졌다가 반으로 갈라졌던 바로 그 석등이었다.
취마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한 혈왕이 힘겹게 소리쳤다.
“안 돼! 무인답게 죽여줘!”
“아니. 네겐 이게 딱 좋아!”
슈우우욱!
취마의 마지막 남은 내력이 실린 석등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석등이 그의 얼굴과 상반신을 그대로 깔아뭉갰다.
석등 아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혈왕의 시체에서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취마가 비틀거리며 걸어가 석등에 기대앉아서 술을 마셨다.
드디어 목숨을 건 싸움이 끝났다.
바닥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적셨다. 취마는 흐르는 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휘이이이익.
그곳에 두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패대기치듯 상대를 바닥에 내리꽂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움푹 파인 바닥과 함께 절명한 남자는 앞서 객잔에서 주인장을 죽인 바로 그 숙수였다. 혈왕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왔지만, 주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는 죽었다.
검무극과 취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취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또 늦었군.”
그 말에 검무극의 가슴에 격정이 일었다. 이 말을 다시 듣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는 모를 거다.
검무극이 그런 취마에게 걸어가 나란히 앉았다. 취마는 말없이 남은 술을 검무극에게 건넸다.
검무극이 쭉 마시고 다시 취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오기는 아까 왔어.”
부서진 담장 너머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마지막에 죽은 숙수 사내처럼 그들은 바로 혈왕이 소집한 수하들이었다.
“많이 왔더라고.”
그들은 두 사람이 싸우는 도중 계속 도착했고, 검무극은 그들이 도착하는 족족 처리했다.
취마는 알 수 있었다. 그 팽팽한 싸움에 저들 중 몇 사람만이라도 끼어들었으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검무극이 취마를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멋지다, 형.”
취마의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피어오르는 혈왕의 피 냄새를 맡으며 취마는 아까 그에게 하지 않은 대답을 지금 했다.
왜 이렇게까지 소교주를 위해 싸우느냐고?
이 한마디 말을 듣고 싶어서.
멋지다, 형.
취마가 술병을 들다가 인상을 썼다.
“아아, 긴장이 풀리니까 너무 아프다. 나 좀 누울게.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아. 맞다, 나 진짜 죽도록 두들겨 맞았지? 아아아. 괜히 멋 부리다가 나 죽는다.”
엄살 아닌 엄살을 부리며 그가 누웠다. 바닥은 온통 피가 흥건했지만 개의치 않고 누웠다.
“왔으면 나부터 구하러 와야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임을 검무극은 잘 안다. 취마는 진심으로 혈왕을 직접 죽이고 싶어 했으니까.
혈왕의 수하들도 수하들이지만, 검무극이 합류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또 다른 십이지왕이 개입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지난번 투왕과의 싸움에서 마지막에 누군가 그를 구해갔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심지어 싸움에 직접 개입할 수도 있었고.
그래서 누군가 이 싸움에 난입할 걸 대비해서 외부에서 철저히 지켰다. 혈왕 수하들을 상대하면서도 누군가 접근하는지를 살피고 또 살폈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까?
이번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이쪽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달라진 만큼 저들의 사정도 많이 달라졌을 거다. 살아 있어야 할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고, 얻어야 할 것들을 얻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드르릉.
코 고는 소리에 돌아보니 취마는 잠들어 있었다. 내공과 심력을 모두 소모한 그는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검무극은 피가 흥건한 그곳에서 잠든 그를 일으키려 하다가 말았다.
잠든 취마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인 것이다. 그는 지금 핏물에 누워있는 게 아니었다.
술 마시다가 취몽루 앞 호수에 뛰어들었을 때처럼 편안해 보였다. 호수에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등을 적신 핏물이 호수인 양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검무극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호수에 누워 그와 함께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을 떠올리며 남은 술을 마셨다.
“술맛 좋다.”
빙궁주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저 멀리 검무극과 취마의 거처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곳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한참 전에 받았는데 아직도 끝났다는 보고는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빙궁주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창밖 궁주전 아래에는 궁주 직속의 최정예 조직인 북풍대가 대기 중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빙궁의 여러 조직과 고수들이 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원래라면 이들 모두가 가서 싸웠어야 할 일이었는데.
―괴물은 마귀가 잡도록 놔두시지요.
잘 잡고 있는 건가? 혹시 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자식을 잃은 마귀의 왕이 복수를 위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아마 그때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리라.
한설은 그런 빙궁주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창밖을 보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평소와 달랐다.
일단 복장부터 달랐다. 활동하기 좋은 무복 차림에 팔에는 평소 차지 않던 기물까지 차고 있었다. 빙공의 위력을 극한으로 올려주는 팔찌인 대빙환(大氷環)이 소매 아래로 보인 것이다.
그야말로 여차하면 곧장 싸우러 달려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빙궁주를 바라보던 한설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긴박함이 느껴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이쪽은 평화 그 자체였다.
이안은 책을 읽고 있었다. 궁주전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었다. 읽어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하더니 앉아서 읽고 있다. 여기서 누군가 책을 읽는 모습을 처음 본다. 책장의 책 역시 장식용이라 생각했었는데.
‘무슨 책을 보는 걸까?’
한설이 걸어가서 이안 앞에 앉았다.
그러자 이안이 책에서 시선을 떼며 한설을 쳐다보았다.
“책을 좋아하시는 마존께서 계세요. 온갖 책을 많이 읽으셔서 모르시는 게 없으시죠. 그분이 항상 그러세요. 무공을 잘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무공서 말인가요?”
“아뇨, 가리지 말고 읽으라고 하세요.”
그러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의 겉장을 보여주었다. 정말 생뚱맞게도 북방 지역의 집짓기에 관한 책이었다.
“그게 무공에 도움이 된다고요?”
“모르죠. 달아나다가 이런 방식으로 지어진 집 어딘가에 숨을 곳이라도 찾을지도요.”
한설은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제가 너무 태평해 보이나요? 소교주님이 싸우고 계시는데?”
이번에도 한설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서다.
“소교주님 돌아가시면 따라 죽으면 그만이죠.”
한설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복수는 하고 따라 죽어야죠.”
여전히 말이 없는 한설에게 이안이 웃었다.
“이것도 농담인데.”
“안 웃겨요.”
지금 농담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이안은 애써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고 애썼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롭고 태평해 보였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에는 태풍이 불고 있었다.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뛰었고, 머릿속에는 계속 검무극이 적에게 죽는 모습만 떠올랐다.
자신이 몸을 날려 딱 한 수만 도우면 살 수 있는 상황이 자꾸 펼쳐졌다.
‘그래, 이건 호위 무인을 오래 한 부작용이지.’
예전에 검무극이 혼자 출교했다가 돌아올 때는 그저 막연히 잘 돌아오시겠지, 했는데. 가까이 함께 있으니 걱정은 백 배가 되었다.
‘도련님은 계속 이런 싸움을 하고 계셨구나.’
그때 한설이 물었다.
“차 마실래요?”
“네. 제가 준비할게요.”
“아뇨, 계속 책 읽어요.”
한설이 가서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냥 앉아 있기가 불편해서 이안이 그녀 옆으로 걸어갔다. 뭔가 도울 게 없나 살피던 그때, 놓여 있던 다기에 시선이 갔다.
하얀 찻잔에는 새가 두 마리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독특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이 찻잔에 새겨진 새, 어디서 본 것 같아서요.”
한설이 창가에 선 빙궁주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다시 이안에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을 거예요.”
독창적인 문양이란 말이었는데 이안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봤는데.”
빙궁주가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수하가 다급히 올라와서 보고했다.
“싸움이 끝났습니다.”
* * *
다급히 달려온 세 여인이 싸움이 벌어졌던 거처에 도달했을 때, 그녀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곳은 피바다였다. 수십 구의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는데 비릿한 피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그 피바다의 중심에 두 사람이 있었다.
취마는 핏물 위에 누워있었고, 검무극은 부서진 석등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핏물 위에 누워있는 취마가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렁찬 소리가 ‘나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 사람을 보자 검무극이 쉿 하고 시늉했다. 잠든 취마를 깨우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검무극 역시 취마와 같은 상태를 여러 번 경험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 후 잠이 쏟아질 때. 이때는 자야 한다. 몸이 간절히 원하는 것에 따라주는 것, 그게 바로 최고의 치료다. 고수의 몸을 믿어라.
빙궁주는 이곳을 직접 보자, 이번 싸움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새삼 느꼈다.
마존이 저 지경이 될 정도로 싸웠다면, 적이 얼마나 강했을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있던 시체를 살폈다.
이들은 검무극의 손에 죽은 혈왕의 수하들이었다.
단련된 몸만 봐도 그들의 무공 경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수들이다. 만약 이들이 자멸공까지 익혔다면, 정말 많은 빙궁의 무인들이 희생되었으리라.
그들의 요혈은 모두 검에 의해 잘려 있었다.
‘자멸공을 쓰기 전에 혈맥을 모두 잘랐다.’
사인만 봐도 검무극의 무공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빙궁주는 마지막으로 취마를 다시 살폈다.
핏속에 누워있어서였을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저 피에 빙궁의 수많은 무인이 잠겨 있었을 테니까.
“우린 돌아가자.”
빙궁주를 따라 이안과 한설이 돌아섰다.
이안이 돌아서기 전에 검무극이 먼저 나 괜찮아, 하는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손짓과 미소에 이안의 마음에 휘몰아치던 태풍이 멈췄다.
그녀도 활짝 웃어준 후 돌아섰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말 어려운 일은 그 좋아하는 사람을, 그 좋아하는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일이다.
행복은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의 도전에 매번 시달려야 하니까. 마음에 부는 태풍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그치지 않으니까.
* * *
취마는 볼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눈을 떴다.
볼에 떨어진 것은 눈이었다.
어둑해진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검무극이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나 얼마나 잤어?”
“세 시진쯤.”
“나 입 안 돌아갔냐? 이 추운 곳에서…….”
취마가 말을 멈췄다. 춥지 않았다. 피에 젖은 땅도, 주위도 따스했다.
취마는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열양지기로 주위를 따뜻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취마가 몸을 일으키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아프다. 너무 아프다.”
“술 줄까?”
“됐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싸우는 내내 술을 어찌나 마셨던지 숙취가 엄청났다.
“내가 다시 술 마시면…….”
“내 동생이다!”
“그래, 내가 다시 술 마시면 네 동생이다. 아, 머리가 아파서 터질 것만 같아.”
머리를 감싸 쥐던 취마가 무심코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으악! 이 피 뭐야? 그놈 피야? 설마 날 여기 눕혀둔 거야?”
“하나도 기억 안 나지?”
“으윽, 피 냄새 지독하다.”
“아깐 거기 누워서 미소까지 지었어.”
“너도 취했냐?”
그러다 자신의 발바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발! 발은 또 왜 이래?”
깨진 술병이 발바닥에 박혀 있었다. 취해서 싸우느라 발이 찢어지는지도 모르고 싸웠다.
취마가 발바닥에 박힌 깨진 병 조각을 빼냈다.
“으으으, 아프다. 취해있을 때 이거나 좀 빼두지.”
“그럴 거였으면 그 어깨에 꽂힌 것부터 뺐겠지.”
그러자 놀란 취마가 자신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으악! 이건 또 뭐야?”
그제야 날카로운 검 조각이 어깨에 박혀 있었다.
“이건 또 언제 박혔대?”
“반대쪽 팔에도 있어.”
“마의 불러! 어서 마의 오라고 해! 마존님 아프시다!”
취마가 엄살을 부리며 소리쳤다.
검무극이 어디 몇 시진이나 그냥 눕혀두었겠는가? 외상들이 뼈까지 다치지는 않았다는 걸 확인했고, 은밀히 진기를 넣어 몸 내부도 살폈다. 다행히 내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게 놔둔 것이다.
“무인에게 상처는 자랑거리지.”
“이번 상처는 자랑거리도 못 돼.”
취마가 아직도 바닥에 흥건한 피를 내려다보았다.
“겉모습은 잘생기고 멋진 놈이었는데, 속은 형편없는 놈이었어. 정작 본인은 자멸공을 익히지 않았더라고.”
그 사실에 검무극도 놀랐다.
회귀 전 혈왕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한다. 그의 수하들이 벌인 잔혹한 일들만 알 뿐.
“형편없는 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수하들에게 자멸공을 심지 않았겠지.”
공감한다는 듯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잠시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원주께서 편히 눈을 감으실 거야.”
원주가 술을 보내지 않은 일에서 시작된 일이 여기까지 왔다. 취마로 시작해서 취마로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검무극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운명은 이렇게 주위 사람들과 뒤엉켜서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돌아가기 전에 설산 꼭대기에서 술 한잔하자.”
취마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오냐, 아우야.”
* * *
취마는 씻고 밥 먹고 다시 잠이 들었다.
북해빙궁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이 와서 취마를 살피고 갔다. 몸을 빨리 회복할 수 있는 약도 지어주었다.
그렇게 취마가 쉬고 있는 사이 검무극은 빙궁주를 만나고 있었다.
“고생했네.”
“아닙니다. 우리가 처리하게 양보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대충 짐작이야 가지만. 빙궁주가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그자의 목적이 뭔지는 알았나?”
“싸움이 급박해서 직접 듣지는 못했습니다만, 극한지체를 이용해서 궁주님의 무공을 무력화하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검무극은 거기에 한 가지 추측을 덧붙였다.
“놈은 오랫동안 극한지체를 찾았습니다. 단지 궁주님을 해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자멸공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했을 겁니다. 아마 극한지체가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었으리라 예상되는데. 혹 짐작 가는 일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빙궁주는 한 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그럼에도 곧장 대답하지 않은 것은 함부로 외부에 밝힐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라면 절대 말해주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검무극만큼은 예외로 삼아야겠지.
“빙궁보고를 노린 것 같네.”
빙궁보고는 북해빙궁 궁주에게 전해지는 독문무공을 익혔거나, 극한지체가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보통 사람은 그곳의 추위를 절대 버티지 못하지.”
“그렇다면 확실히 빙궁보고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놈의 구체적인 목적까지 밝혀지자 빙궁주의 마음은 차가워졌다.
직접 놈을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검무극과 취마가 북해에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서 장로를 죽이지 않고, 극한지체를 빼돌리지 않았다면? 북혈문이 놈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밝혀내지 않았다면?
과연 이들의 음모를 버텨낼 수 있었을까?
막아낼 수 있었을 거라는 확신에 찬 대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막아내지 못했다면? 자신과 한설은 죽음을 맞았을 거고, 북해빙궁을 그들에게 빼앗겼을 거다.
그랬기에 검무극에게 아까운 것은 없었다.
“자네가 원하는 게 있나? 있으면 뭐든 들어주겠네.”
잠시 고민하더니 검무극이 말했다.
“하나 있습니다.”
“뭔가?”
“빙궁보고에서 한 가지 보물을 선택해서 가지게 해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부탁이었다.
“원하는 것이 뭔가? 말하면 내가 내어주겠네. 영약이든 보검이든, 뭐든 말하게.”
“아뇨. 직접 들어가서 보고 싶습니다.”
비궤 때문이었다. 풍천교에서는 흑정을 얻었고, 사도맹에서는 청정을 얻었다. 혹시 이곳에서도 관련된 뭔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번이 아니면 다시 얻기 어려운 기회였으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극한지체가 아니라면 들어갈 수 없다고.”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추위에 강합니다.”
검무극이 이런 일로 장난칠 사람은 아니라 여겼기에 빙궁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자네도 극한지체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갈 수 없네. 절대.”
절대라는 말을 붙였지만, 검무극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저를 한번 믿어보시지요.”
혹시라도 추위를 막아내는 마공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그 추위를 막아낼 수는 없을 텐데.
“우리 아버지의 그 차갑고도 쌀쌀맞은 부정도 버틴 접니다.”
“농담할 때가 아니네. 가다 죽을 수도 있어.”
빙궁주는 검무극이 절대 그곳에 갈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도 빙궁을 구한 그의 부탁이니. 또, 굳이 그곳에 가려는 이유도 궁금했고. 이 치기 어린 고집을 차갑게 꺾어주고도 싶었고.
“가세. 자네 후회와 반성은 자넬 되살렸을 때 듣겠네.”
검무극이 뒤따라 나서며 말했다.
“다들 북해 오면 심장이 얼어붙어 멈추는 경험 한 번쯤 하잖아요?”
검무극은 빙궁주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당연히 빙궁보고는 빙궁 외부에 있을 줄 알았다. 북해의 깊은 곳 어딘가, 눈보라 휘몰아치는 설산 어딘가에 심장이 얼어붙는 추운 곳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빙궁주는 검무극을 데리고 북해빙궁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외부인에게 처음으로 공개하는 거네.”
“영광입니다, 궁주님.”
“본궁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네.”
빙궁의 정예 무인들이 지키는 관문을 연이어 통과하자, 얼어붙은 호수가 나왔다.
“지금부터 내가 밟는 곳을 그대로 밟아서 따라오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이 호수에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이 진법의 무서움은 의외성이었다.
얼어붙은 호수에 진법이 펼쳐진 경우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다들 바닥이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정신이 팔렸을 때, 정작 위험은 다른 곳에서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검무극은 빙궁주가 밟은 자리를 그대로 밟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생문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바닥이 깨어지며 차디찬 호수 속으로 가라앉게 되거나, 이 호수 위를 영원히 헤매야 하겠지?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빙궁주가 불쑥 물었다.
“이안이라는 아이, 마인의 혈육인가?”
“아닙니다. 아주 어려서 본교에 맡겨졌습니다.”
빙궁주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왠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등이었다.
“한데 왜 물으십니까?”
외모든 심성이든 이안이 보통 사람은 아니지만, 빙궁주 성격상 이렇게 관심을 가질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아니네. 그냥 문득 생각나서 물어봤네. 발걸음 조심하게.”
다시 빙궁주는 부지런히 생문을 밟아가며 호수를 건넜다.
그렇게 진법을 통과하자 계곡이 나왔다. 어른 서너 명이 나란히 서면 꽉 찰 좁은 계곡의 사잇길이었다.
휘이잉.
입구에서부터 바람이 찼다. 그냥 차가운 것이 아니라 정말 차가웠다.
본격적으로 빙궁보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빙궁주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추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네.”
빙궁주는 소교주에게 추위 맛을 보여줄 생각에 살짝 들떠 있었다. 빙궁을 구해준 건 구해준 거고, 극한지체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을 가겠다고 고집부린 그에게 북해의 매서운 찬바람을 보여줄 작정이다.
“자, 가세.”
이번에는 앞장서서 걷지 않고 빙궁주는 검무극과 나란히 걸었다. 함께 걸으며 검무극의 상태를 살펴야 했으니까. 고수냐 아니냐를 떠나 까닥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추워졌다.
“너무 억지로 견디지는 말게.”
“아직은 참을 만합니다.”
정말 폐부가 얼어붙는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서 추운 게 아니었다. 극한의 추위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가는 느낌이었다. 한 걸음 걸어가면 더 추운 공간이고, 또 다음 한 걸음 앞은 더 추운 공간이고. 확확 달라졌다.
쉬이이.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닌데 묘한 소리가 났다.
“괜찮나?”
중간 이후부터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빙궁주가 검무극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멀쩡했다. 추위를 느끼긴 했지만, 그것이 몸에 영향을 끼치거나 고통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빙궁주는 검무극이 선 채로 얼어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잘만 걸었다. 오히려 그녀보다 더 씩씩하게 걸었다.
쉬이이이이.
바람이 불지는 않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묘한 소리가 계속 커졌다.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빙궁주는 놀랐다. 극한지체가 아니라면, 이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또 다른 마공이 있다는 의미.
‘정말 그런 마공이 있었단 말인가?’
가면 갈수록 추위는 심해졌다.
공기에 노출된 물이 순식간에 얼어버리는 정도의 추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식과 한계를 넘는 추위였다.
만년설과를 복용한 검무극도, 고유의 내공으로 버티는 빙궁주도, 두 사람 모두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곳의 추위는 엄청났다.
이윽고 두 사람은 길의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있었다. 아니, 거대한 얼음벽이었다.
그냥 평범한 얼음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추위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그 차가움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이 세상 추위의 근원을 향해 걸어온 셈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얼음벽에 문이 있었다.
여기에 구멍을 파고 공간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빙궁주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빙궁주가 문을 닫는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귓가에 울리던 묘한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동시에 그 미친 추위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오히려 안은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집 안으로 들어온 그런 느낌. 오히려 중앙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추위가 잦아들 것 같은 예감마저 들었다.
이제 대화가 가능했지만, 빙궁주는 한참 동안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재차 확인했다.
“극한지체인데 나를 속인 건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극한지체가 아닙니다.”
“그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마공이 있나?”
“아뇨. 본교의 어떤 마공도 이 추위를 버틸 수는 없을 겁니다.”
정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빙궁의 궁주에게만 전해지는 독문무공을 소교주가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떤 추위라도 견딜 방법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북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말입니다.”
잠시 멍하게 있던 빙궁주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자네?”
검무극은 솔직히 말해주었다. 괜히 얼버무려서 그녀의 마음에 찝찝함을 남기고 싶진 않았으니까.
“네, 만년설과를 복용했습니다.”
검무극은 확인했다. 빙궁주가 최대한 눈을 크게 뜨면 얼마나 큰지.
만년설과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영약이었다.
추위에 강해지는 효과를 지닌 영약의 최고봉으로, 추위뿐만 아니라 차가운 속성의 어떤 기운이라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말 만년설과가 실재했었나?”
빙궁주조차 그것이 전설 속의 영약이라 여기고 있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비.
“운이 좋아서 기회가 닿았습니다.”
빙궁주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만년설과는 운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그랬다면 그 영과가 전설로 내려오진 않았을 테니까.
그걸 얻은 사람이 마교의 소교주라고?
그런데 그 소교주가 빙궁을 구했다. 이 일이 우연일까? 배후가 노린 것이 빙궁보고였는데, 그 배후를 없앤 소교주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이 모든 게 그냥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적인 운명의 흐름 속에서 이렇게 마주 서 있는 것일까?
“들어가세.”
얼음으로 만들어진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 복도 끝에 커다란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빙궁보고였다.
벽과 천장, 바닥과 장식장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얼음으로 되어 있었다.
이곳은 다른 보고와는 달랐다. 놀랍게도 보물들은 모두 얼음 속에 들어 있었다. 마치 얼음 벽돌에 포장된 것처럼, 각기 다른 크기로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은 너무나 투명했다.
그랬기에 쌓여 있는 얼음 속 병장기들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검무극은 이런 신비로운 광경은 처음이었다.
“정말 멋집니다.”
빙궁주는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한 열양지기로도 쉽게 녹일 수 없지.”
이곳까지 오기도 힘들지만 설령 왔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저 얼음 속에서 보물을 꺼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과연 검무극이 이곳에서 무엇을 원할지 궁금했다.
검무극이 정면에 쌓여 있든 얼음 속 보물들 중에서 하나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저 검 한천신검(寒天神劍)입니까?”
“맞네.”
빙공을 익힌 사람이 사용하면 그 위력이 배가 된다고 알려진 전설의 검이었다.
“그 옆에 저건 파쇄도(破碎刀)군요.”
“자넨 정말 병장기에 대한 식견이 뛰어나군.”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병이기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북해빙궁이 모아온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빙궁주는 예감할 수 있었다.
‘검을 선택하진 않겠지.’
자신 앞에서 흑마검을 뽑지 않았지만,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이 차고 있는 검이 이곳에 있는 어떤 검보다도 좋은 검이라는 것을.
과연 검무극은 병장기 하나하나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그걸 선택하진 않았다.
그 옆에는 보석들이 허공에 떠 있었다. 작은 얼음 조각 속에 들어 있는 보석들은 더 신비로워 보였다.
보석 중에서는 정말 값비싼 것도 있었다. 옆에 떠 있는 최상품의 피독주와 야명주가 초라해 보일 정도의 보석들.
하지만 검무극은 그것들도 그냥 지나쳤다. 물론 혹시라도 비궤가 반응할까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비궤가 얻은 두 구슬은 귀한 것들 사이에 있지 않았다. 버려지고 숨겨지고.
그래서 반전으로 이런 귀한 보석들 사이에 당당히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비궤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이 보물들 맨 꼭대기에 당당히 올려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으로 영약들이 진열된 곳이 있었다.
그야말로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영약들이 즐비했다. 이 중 제일 효능이 떨어지는 것조차 무인들은 꿈에서라도 복용하고 싶어 하는 귀한 것들이었다.
그곳 역시 검무극은 지나갔다. 대신 특별한 뭔가를 찾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것저것 자세히 살폈다.
“원하는 게 없나?”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으면 선택하려 하는데, 아직은 없습니다.”
병장기와 영약, 온갖 기물들이 진열된 곳을 다 둘러보았지만 비궤는 반응하지 않았다.
‘비궤가 흡수할 것이 북해빙궁에는 없었나?’
얼음 속이라 반응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얼음 속에 있었으니까. 다 녹여 주십시오, 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포기하려던 그때, 검무극의 눈에 저 멀리 벽에 그려진 큰 벽화가 눈에 띄었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큰 백룡이 승천하는 모습이었다.
검무극이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벽화 근처에 도착했을 때, 품에서 비궤가 반응했다.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설마 벽화에 비궤가 반응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벽화에는 단지 그림만 그려져 있었던 게 아니었다.
백룡이 쥐고 있는 여의주 자리에는 푸른색 청옥(靑玉)이 박혀 있었고, 눈알에는 붉은 적옥(赤玉)이 박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발톱과 몸통 곳곳에도 여러 색의 옥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여러 옥 중에 하얀 백옥(白玉)도 있었다. 비궤는 그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백정(白睛)이다!’
만약 벽화를 보러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체 누가 왜 이것들을 이렇게 숨겨둔 것일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 자신에게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 벽화에 박힌 옥 중에 하나를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빙궁주는 놀랐다. 설마 벽화에 박힌 옥을 요구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리라.
“여의주를 원하는 건가?”
“아뇨.”
검무극이 가리킨 것은 꼬리 끝에 박혀 있는 백옥이었다.
“저 꼬리를 주십시오.”
백옥이 귀하긴 해도 앞서 봤던 보물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왜 하필 저걸 가지고 싶은지 물어봐도 되겠나?”
“본교에서는 저를 두고 잠룡이니 승천하는 용이니, 그런 비유를 많이들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꼬리가 되어 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저 백옥을 가지고 싶습니다.”
빙궁주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훌쩍 몸을 날려서 벽에 박혀 있던 백옥을 빼내서 내려왔다.
그녀가 아무리 살펴도 그냥 백옥에 불과했다.
“정말 이것으로 되겠나?”
“네, 충분합니다. 그리고 빙궁보고를 둘러본 것만 해도 제겐 너무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백옥을 건네받은 검무극이 품에 잘 넣었다.
백옥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기에 빙궁주는 이렇게 오해했다.
‘내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대로 보낼 수는 없지. 빙궁주가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충분하지 않네.”
애초에 안 왔으면 안 왔지, 여기까지 왔는데 빙궁을 구한 그에게 고작 백옥 하나 줘서 보낼 수는 없는 법이다.
빙궁주가 영약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쌓여 있는 영약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얼음을 허공섭물로 내렸다.
“어차피 자네밖에 복용하지 못하는 거네.”
빙궁주의 내력이 주입되자 얼음이 녹으며 작은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봐선 얼음을 구슬 모양으로 얼려둔 것 같은데, 이것은 북해 영약의 최고봉이었다.
만극빙정(萬極氷精).
차가운 속성을 지닌 영약 중에서 최고의 영약이지만 너무나도 극한의 기운을 지녔기에 만년설과를 복용한 사람만 복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이 귀한 것을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먹지 않으면 영원히 여기 얼어붙어 있겠지.”
검무극은 지금도 무림의 그 누구보다 많은 내공을 지녔지만, 아직도 내공에 목말랐다.
구화무공 연마에도 많은 내공이 필요한 데다, 그걸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까지 열어서 수련해야 했으니까. 검무극에게 내공은 곧 시간이었다. 그에게 내공은 모두를 지켜줄 힘이었다.
“어서 받게.”
“그럼 더는 사양하지 않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검무극은 이 자리에서 곧장 만극빙정을 복용했다.
정말 차가운 기운이었다. 만년설과의 효능으로 신체가 어떤 한기로 견딜 수 있는 상태가 되지 않았다면 이걸 삼키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어 절명했을 거다. 아니, 애초에 삼키지도 못했을 거다.
검무극의 혈맥을 타고 만극빙정의 크나큰 기운이 휘몰아쳤다. 미친 북풍처럼 휘몰아쳤지만, 이미 상대는 미친 바람까지 헤치고 온 신체였다.
몇 차례 신중하게 진기를 다스리자 만극빙정의 기운은 단전에 모여들어 정순한 내공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막연히 이 무림에서 내공이 제일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내공이 제일 많을 것이라고. 내공이 많아져서 기쁜 것이 아니었다. 시천비술과 구화마공의 경지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올릴 수 있어서 기뻤다.
오늘 빙궁주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빨리 만극빙정을 녹여낼 줄 몰랐으니까.
그랬기에 세 번째 호의는 더욱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하나 더 고르게.”
“이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네에게 세 개의 선물을 주는 세 가지 이유가 있네.”
“어떤 이유입니까?”
“첫 번째는 원주의 죽음을 밝히고 배후들을 없애준 것에 대한 보답이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빙궁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두 번째는 나를 뒤돌아보게 해주어서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딸이 아직 서 있다고 말해준 것. 영원히 잃어버렸을 딸과의 관계를 이어준 고마움 때문.
“세 번째는 미리 주는 선물이라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언젠가 알겠지. 그게 무슨 말인지.”
딸을 위한 투자였다.
한설이 빙궁주가 되었을 때, 이 검무극은 천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미리 부탁하는 거다. 앞으로 북해빙궁을, 그리고 내 딸을 잘 부탁한다고. 보물 하나에 그 부탁이라면, 싸게 먹히는 셈이다.
검무극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다. 그랬기에 딸을 위한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럼 하나 더 고르겠습니다.”
검무극이 한 번 더 그곳을 둘러보았다. 이번 것은 자신을 위한 선물이 아니었기에 더 신중히 골랐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검무극이 고른 것은 술잔이었다.
화려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의 술잔이었다.
새하얀 술잔은 설원에 달이 떠 있는 모습처럼 꾸며져 있었다. 가만히 술잔을 보고 있노라면 달빛 아래 새하얀 눈밭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잔의 한쪽에 떠 있는 초승달이 손잡이 역할을 해주었기에 허리에 차고 다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 술잔이 특별한 것은 생김새 때문이 아니었다.
“저 술잔이 어떤 잔인지 알고 있나?”
빙궁주는 검무극이 이 술잔을 선택할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북해빙궁에 성스러운 술잔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 술잔 아닙니까?”
“정확히 보았네.”
그녀가 술잔에 관해 설명했다.
빙궁성배(氷宮聖杯).
얼핏 봐서는 새하얀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술잔은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특별하게 합금한 이 잔은 정말 가벼우면서도 절대 부서지거나 휘어지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술잔의 효능이었다.
술잔 자체가 차가운 성질이라, 한여름에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또한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면 내공이 증진되고 몸을 보양하는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늘어나는 내공의 양이 같은 시간 운기조식으로 늘어나는 양보다 많지 않았기에, 내공을 증진할 목적으로 건강을 버려가며 술을 마시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무림에 단 한 사람만은 제외하고.
매 순간 술을 달고 사는 취마에게는 분명 큰 의미가 있는 잔이었다.
더구나 이런 효능을 지닌 술잔은 세상에 단 하나 존재했고 오직 이곳 빙궁보고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술을 목숨보다 더 좋아하고 평생 술을 마시고 살아갈 사람에게 이 술잔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정말 이걸로 할 텐가?”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취마님은 만년설삼보다 이 잔을 더 좋아할 거라서요.”
빙궁주는 그래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남을 위한 선물을 고르기엔 이곳에는 너무 귀한 물건이 많았으니까. 그녀가 반대쪽 허공에 진열된 보기만 해도 멋진 호신갑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빙호갑(氷護鉀)은 자네 목숨을 구할 수도 있네. 아까 복용한 만극빙정만큼은 아니더라도 만년설삼보다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영약도 있고.”
“저는 괜찮습니다.”
검무극이 술잔으로 마음을 굳혔음을 알자 빙궁주는 더는 다른 걸 권하지 않았다.
그녀가 손을 뻗자 술잔이 든 얼음 벽돌이 그녀에게 날아왔다.
빙궁주는 고유의 내공을 이용해서 손쉽게 얼음을 녹였다. 일반 고수가 열양지기로 이 특별한 얼음을 녹이려면 지금 사용한 내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내공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얼음에서 해방된 빙궁성배가 신비로운 기운을 드러냈다.
마치 설원에 눈바람이 날리는 것처럼 새하얀 기운이 술잔 주위에서 일렁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귀하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보통 사람은 들고 다니려고 해도 다닐 수 없는 잔이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자가 뺏으려 달려들 테니까.
“자, 받게.”
빙궁주가 술잔을 검무극에게 건넸다.
조심스럽게 술잔을 받아든 검무극이 손바닥에 술잔을 올려두고 감탄했다.
“정말 멋진 잔입니다.”
검무극은 취마에게 선물할 생각에 정말 기뻐했다.
빙궁주는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검무극이 정말 소년처럼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구나.’
검무극이 팔마존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있었다.
팔마존이 어떤 자들인데 모두 장악해?
진심으로 따르지 않겠지, 몇몇은 겉으로만 손을 잡았겠지. 젊은 후계자가 감당하기에는 팔마존은 호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었으니까.
한데 지금 이 모습을 보니까 반신반의에서 의심이 사라졌다.
이런 귀한 선물을 저렇게 기쁘게 줄 수 있는 관계라면? 장악이란 표현도 부족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오늘 베풀어 주신 큰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빙궁주가 고마웠다.
아무리 뭐든 고르라고 했지만, 성배란 이름이 달린 술잔을 이렇게 흔쾌히 내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자네가 본궁을 위해 해준 일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네. 자, 이만 돌아가세.”
검무극은 빙궁주와 함께 빙궁보고를 나섰다.
쉬이이이이이이.
문을 열고 나서자 묘한 소리와 함께 잊고 있었던 미친 추위가 밀려들었다.
대화조차 힘든 그곳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빠르게 그곳을 걸어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 계곡을 벗어날 때쯤 검무극이 말했다.
“가끔 제 또래끼리 모일 때가 있습니다.”
빙궁주도 알고 있었다. 이번 삼자회담에서도 각파의 후계자와 형제가 모두 모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 한 소저도 초대하겠습니다.”
빙궁주가 발걸음을 멈췄다.
말하지 않더라도 왜 자신의 딸을 초대하겠다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한설이 이 북해를 벗어나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더욱 성장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한 번도 중원에 내보낸 적 없는 딸을 과연 보낼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빙궁주가 검무극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보살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귀한 선물을 내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과연 그녀가 자신을 믿고 딸을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 * *
검무극이 돌아왔을 때 취마는 침상에 누워있었다.
“몸은 좀 어때?”
“아파 죽을 거 같아.”
조금 전에 의원이 왔다 갔을 때만 해도 늠름하게 치료를 받았던 그였다. 눈빛 하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존의 위엄을 보였었는데.
그렇게 잘 있다가 검무극을 보니 엄살을 떨기 시작했다.
“팔을 들지도 못하겠어. 너무 아파.”
취마가 누운 채로 발바닥을 들어 보였다.
“여기 좀 봐. 네가 병 조각 진작 빼줬으면 이렇게 아프지는 않지.”
“집요한 우리 형. 그래서 내가 선물 가져왔는데.”
“아파 죽겠는데 선물은 무슨.”
검무극이 탁자에 작은 상자를 올렸다.
“정말 필요 없어?”
“필요 없다.”
“후회할 텐데.”
“술이지? 술 사 왔지? 뭐 뻔하지.”
취마가 관심 없는 척하면서 슬쩍 상자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검무극이 다시 챙기려 하자 취마가 넌지시 물었다.
“뭔데? 한번 보기나 하자.”
“그럼 괜히 속만 쓰릴 텐데.”
이러니 어찌 안 볼 수가 있겠는가?
“괜찮으니까 보여줘!”
“딱 눈으로만 봐. 돌려줘야 하니까.”
검무극이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는 순간, 취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 사람 다 몰라도 취마만은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으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취마가 탁자로 달려왔다. 발바닥 아픈 줄도 모르고 그는 달렸다.
“설마 이거? 정말 그거야? 맞지? 그거지?”
취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취마가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취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다 주웠어.”
“장난치지 말고!”
“빙궁주에게 선물로 받았어.”
취마는 어떻게 된 일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빙궁주가 이번 일을 대가로 선물을 준 모양이다.
“네 것을 포기하고 내 선물을 받았구나.”
“그랬으면 정말 감동적이었겠지만, 내 것도 받았어.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가져. 아, 아니지. 형은 받기 싫다고 했지?”
“무슨 소리!”
취마가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쳐서 술잔을 지켰다. 아파서 들지도 못하던 팔이 그야말로 방어진을 펼쳤다.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 내 거야! 저리 가!”
취마가 어찌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이 술잔 대신 다른 걸 가질 수도 있었음을. 이 빙궁성배의 가치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선물을 준 것이다.
취마의 마음에 감격이 휘몰아쳤다. 받은 선물 중에 가장 값진 선물이었고, 또 무엇보다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검무극은 취마가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자, 한잔 마셔봐. 오기 전에 깨끗이 씻어 왔어.”
검무극이 술을 따라주었다.
또르르릉.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빙궁성배에 술이 부어지는 순간이었다. 기분 탓이었을까? 빙궁성배 주위에 일렁이는 새하얀 기운이 더욱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취마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술을 마셨다. 차가운 술이 취마의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쉬지 않고 넘어갔다.
“캬아아아! 정말 맛있다!”
검무극이 함께 캬아! 소리쳤다. 보기만 해도 너무 맛있어 보였다.
“나도 한 잔!”
이번에는 취마가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취마가 따르니 술잔의 달빛이 더욱 은은하게 비치는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빙궁성배에 담긴 술을 쭉 마셨다. 술은 정말 차갑고 맛있었다. 정말 ‘캬아!’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끝내준다!”
술맛은 언제나 기분에 달린 법, 이 순간처럼 술맛이 좋은 날은 자주 없을 것이다.
“자, 나 한잔 더.”
“약 먹는데 그만!”
“딱 한 잔만 더!”
검무극이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이 술잔, 형 술 더 마시라고 주는 거 아냐. 술 줄이라고 주는 거야. 술잔에 몸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다고 했어. 그러니 이걸 선물한 내 마음 생각해서 여기 술 따라 마실 때마다 두 잔 마실 거 한 잔만 마셔. 두 잔 마실 거 맛있는 술 한 잔으로 마신다. 이런 마음으로.”
검무극의 걱정이 전해져왔다. 안주 먹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하더니. 여기까지 와서 또 잔소리 중이다.
“절대 과음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 대신 마지막 한 잔만 더. 세 잔은 마셔야지.”
“그래, 오늘은 인정!”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세 잔의 술을 마신 취마는 혈루를 차고 있는 반대쪽에 빙궁성배를 찼다. 두 기물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물론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이 취마였기에 그랬겠지만.
“그럼 쉬어.”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취마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소교주님.”
장난기 없는 말이었기에 검무극도 정중히 대답했다.
“이번에 큰일 해내셨습니다, 취마님.”
* * *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백정을 흡수하기 위해 시공이환술을 발휘했다.
딱! 손가락을 튕기자 나는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항상 열던 해변이 아니라, 두 번째 공간인 새하얀 설원에 작은 온천이 있는 그곳을 열었다.
예전에 아버지의 온천에 흥취를 느껴서 만들었던 바로 그곳이다. 이곳이야말로 북해와 너무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으니까.
이 공간에는 오직 세 가지만 있었다.
새하얀 눈과 밤하늘의 별들, 그리고 따스한 온천.
우선 품에서 비궤와 백정을 꺼냈다.
우우우웅.
백정을 보자 비궤가 진동하며 반응했다.
벌써 세 번째이지만 그래도 긴장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백정을 비궤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스으으으으윽.
그러자 볼 때마다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딱딱한 백정이 액체처럼 비궤에 스며들었다.
백정을 모두 흡수한 비궤가 크게 진동하더니.
스으으으!
비궤에서 하얀 기운을 띤 뭔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그건 연기도, 액체도, 빛도 아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내 손과 팔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은 여전히 발동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의미. 난 천마호신공을 믿었기에 이 기운을 찾아 흡수하고 있다.
청량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기운이 온몸으로 퍼진 그 순간, 내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광채.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 하얀 기운은 몸속으로 모두 흡수된 후였다. 비궤를 통해 벌써 세 개의 기운을 흡수한 것이다.
앞서 두 번의 경우처럼 몸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기운들은 만나서 섞이지 않았다. 아직은 어떤 큰 변화를 이룰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혹은 다른 기운을 더 흡수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비궤가 기운을 다 흡수한 백정을 내뱉었다. 이제 그것은 평범한 돌이 된 후였다.
“너는 대체 누가 만든 거냐?”
언제나처럼 비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백정의 기운을 흡수한 나는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
“아, 좋다!”
위로는 찬 바람이 불고, 아래는 따스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온천을 즐겼다. 이 혼자만의 시간은 내게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다.
회귀한 후 내 인생은 하루하루 꽉 차서 흘러가고 있다. 꽉 찬 하루의 연속.
하지만 시공이환술 속에 홀로 있는 이 순간만큼은 부지런히 달려가던 삶이 속도를 늦추는 순간이다.
속도가 늦어질수록 나는 내 삶에서 더욱 멀어졌다. 이 멀어짐이 좋다. 벌거벗은 지금, 책임감도 다 벗어던졌다.
“무림이 망한다고? 마도가 무너진다고? 나보고 어쩌라고! 쉬는 데 방해하지 마라!”
이런 무책임이 더욱 삶의 속도를 늦췄다.
그렇게 속도는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바빴던 내 삶이 완전히 멈추는 순간,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외로움이 쌓이고 쌓여 외로움 그 자체가 되어 버린 회귀 전의 나를.
쉬지도 않고, 한 번도 스스로를 제대로 위로해주지 않은 채,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서 달려갔던 나를.
내 마음속 커다랗고 시커먼 구멍을 사이에 두고 우린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저 건너편의 내가 더 외로울까?
수많은 사람 속에서 웃고 있는 내가 더 외로울까?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도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모두 네 덕분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온갖 좋은 말을 다 해줬지만, 정작 내게는 처음으로 해주는 위로이자 감사였다.
―정말 고맙다.
나는 건너편의 외로운 나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사라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건너편의 나도, 결국은 나였으니까.
―이 구덩이에나 빠지지 마.
내 말에 건너편의 나는 이런 눈빛을 보냈다. 너나 조심하라고. 언제나 구덩이에 빠지는 사람은 완벽해지려는 사람이고 웃고 있는 사람이라고.
다음 순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시커먼 구멍이 온천으로 변했고 나는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난 총총한 별들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다가 온천에서 나왔다.
이제 다시 현실로 가야 할 시간이다.
“무림 망하면 안 되지. 내 마도, 무너지면 안 되지. 어쩌긴. 나가서 지켜야지.”
눈 덮인 마당은 깨끗하고 평온했다.
나무에 내린 눈은 흰 꽃이 핀 것만 같았고 처마에 늘어진 고드름은 맑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순백의 공간으로 들어선 이안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 위에서 비천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검무극과 취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걱정할 건 내 인생이지.’
성격 좋은 것도, 얼굴 예쁜 것도 실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오히려 무림에서 살아남는데 해가 될 때가 많다.
검무극을 위해 수련한다.
이젠 호위 무인 시절의 이런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수련했다. 대신 이 노력이 결국은 검무극을 위한 길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녀가 눈 위를 오가며 검을 휘둘렀다. 더없이 아름다운 그녀가 새하얀 눈 위에서 비천검법을 펼치니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렇게 한바탕 비천검법의 초식을 펼친 후, 그녀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쳐다보았다.
지금껏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서 초식을 펼친 적은 없기에 이렇게 생생하게 발자국이 남은 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제일식 균천식이고. 이건 제이식 변천식이고…….”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역시! 이 부분이 또 벌어졌구나. 대체 뭐가 문제지? 제발 알려주세요!”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머리 위에 검무극이 떠 있었던 거다.
“도련님, 거기서 뭐 하세요?”
“뭐하긴. 어디가 문제인지 함께 보고 있었지.”
허공에서 그녀의 발자국을 내려다보던 검무극이 아래로 내려왔다.
근래 검무극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그녀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재빨리 말했다.
“제팔식 황천식을 펼칠 때 뒤쪽 발이 자꾸 오른쪽으로 벌어져요. 이걸 고치기 위해 계속 수련했지만, 도저히 안 고쳐지네요.”
“왜 안 고쳐질까? 이렇게 문제점을 알고 있는데?”
“그야 제가 무공을 해석하는 능력이 떨어져서겠죠.”
“비천검법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고?”
이안이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검무극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다시 발자국을 쳐다보았다.
‘도련님 말씀은 내가 틀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만약에 그렇다면?’
이안은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혹시 이런 거였나요?”
고개를 들던 이안이 흠칫 놀랐다. 어느새 주위는 어둑해져 있었다.
검무극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네가 무아지경에 빠졌었다.”
무아지경이란 말에 그녀는 더 놀랐다.
“아주 잠깐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요?”
“그게 무아지경이지.”
“무아지경에 빠질 만큼 대단한 고민도 아니었고요.”
“그럼 어떤 고민이 대단한데?”
“저야 모르죠.”
“충분히 고민할 만한 부분이었어.”
그러다 이안이 놀라 물었다.
“설마? 그동안 거기 서 계셨던 거예요?”
“네 무아지경이 깨지면 안 되니까.”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검무극은 잘 알았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무인들이 대다수였으니까.
“괜히 저 때문에 다리 아프게 서 계셨네요.”
“네가 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이건 서 있는 것도 아니지.”
“저야 제 일이었고요.”
검무극이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웠다. 검무극을 호위했던 일에 어떤 보상을 바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말 한마디가 지난 고생을 보람으로 바꾸어 준다.
할 말이 있으면 꼭 표현하라는 가르침을 언제나 실천하는 검무극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제 생각에는 오른쪽으로 틀어져도 괜찮은 것 같아요.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 지장이 없는 발 자세고, 다른 초식과 연계에도 아무 문제가 없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것을 똑바로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비천검법이 틀렸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생각하는 비천검법은 완벽한 무공이었으니까. 구화마공을 익히기 전, 천마신교의 후계자들이 익히는 무공이니까.
검무극은 답을 말로 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었다.
그녀가 초식을 펼친 곳에서 그대로 비천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비슷한 자리에 찍히기 시작했다.
이안은 검무극이 펼치는 비천검법을 한 동작이라도 놓칠세라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았다.
같은 초식이지만 달랐다. 다르면서도 같고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예전에 시범을 봤을 때와 지금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대성을 이루고 보면 또 달라 보이겠지.
그렇게 남겨진 발자국들.
그녀가 주목한 것은 앞서 고민하던 그 발자국이었다.
“어? 도련님도 발이 오른쪽으로 벌어져 있네요.”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찾은 답이 맞았다는 의미지.”
이안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의외라고 여겼다. 한데 왜 초식은 발이 일직선이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 의문은 검무극이 풀어주었다.
“무공을 창시한 분이 의도한 건지, 우연히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부분이 비천검법의 대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벽으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꽉 짜인 초식이 처음으로 자유를 얻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지.”
그 말은 곧 그녀가 비천검법의 대성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는 의미기도 했다.
노력도 많이 하고 검무극이 여러 가르침을 내리기도 했지만, 그녀는 무공에 타고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도련님.”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찌 답을 찾아냈겠는가? 앞서 검술이 아닌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무아지경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슬슬 본교로 돌아가자.”
“도련님. 저는 돌아가지 않고 맡았던 임무를 계속할까 해요.”
원래 출교한 목적은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을 귀영대 조장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한데 남편을 구해달라는 여인의 부탁에 이곳 북해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도 같이 갈까?”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은 혼자 해내고 싶어요.”
물 한 잔 얻어 마시고 북해까지 오는 그녀의 무림행이다.
서진을 데려오느냐, 못 데려오느냐를 떠나 이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크게 성장해서 돌아올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비천검법의 대성까지 이루면 더 좋을 테고.
“물을 얻어 마실 때는 조심해.”
검무극의 농담에 이안이 활짝 웃었다.
그때 빙궁의 무인이 와서 빙궁주의 말을 전했다.
“궁주님께서 두 분을 뵙자고 청하십니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빙궁주가 이안 때문에 자신들을 불렀다는 걸.
* * *
궁주전에는 빙궁주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빙궁주는 궁금한 점부터 물었다.
“취마님은 만족하셨나?”
빙궁성배를 받은 취마의 반응이 궁금한 것이다.
검무극은 취마가 얼마나 좋아하고 신이 났는지 생생히 전하고 싶었지만, 취마의 위신을 생각했다.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다행이군. 자, 앉으시게.”
검무극과 이안이 자리에 앉자, 빙궁주가 차를 내왔다.
이안은 다시 찻잔의 문양을 쳐다보았다.
“전에 그 문양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했지?”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분명 언젠가 봤어요.”
검무극이 보니 새 두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이었는데,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었다.
빙궁주는 말없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처음 볼 때부터 왠지 자꾸 눈길이 갔었는데.
가만히 이안을 쳐다보던 빙궁주가 뜻밖의 부탁을 했다.
“자네 맥을 한 번만 짚어봐도 되겠나? 이유는 짚고 나서 말해주겠네.”
생각지 못한 제안에 이안은 당황했다. 무인이 맥을 내준다는 건 목숨을 내주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부상을 입었거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맥을 짚게 하지 않았다. 물론 빙궁주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망설임은 당연했다.
그녀가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말려야 할 상황이라 판단했다면 나서서 말렸겠지. 이런 마음으로 이안은 순순히 허락했다.
“네, 알겠습니다.”
이안이 순순히 팔을 내밀자 빙궁주가 그녀의 맥을 짚었다.
잠시 그녀의 혈맥을 살피던 빙궁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얼굴에 스친 것은 아주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격정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감정을 검무극도 느꼈고, 이안도 느꼈다.
잠시 차를 마시면서 격정을 가라앉힌 후 빙궁주는 차분히 말했다. 여전히 시선은 이안을 향한 채.
“이 찻잔에 그려진 문양은 오래전에 빙궁을 떠난 내 언니가 그린 문양이라네.”
아직도 이안은 빙궁주가 드러내는 이 낯선 격정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
“제가 언젠가 언니분이 그린 문양을 봤던 것일까요?”
“그럴지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문양은 세상에 유일한 문양이라는 점이야. 찻잔에 이런 문양을 그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빙궁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빙궁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침착함을 보였던 그녀였는데, 지금 그녀는 떨고 있었다.
“서 장로가 죽기 전에 내 언니를 언급했지. 그때 나는 느꼈다네. 이자가 언니를 죽였구나.”
당시의 서낙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언니가 궁주 자리를 위협하지 못하게 어긋난 충성심을 발휘했던 거다.
“죽기 전에 서 장로가 알려주었지. 언니에게 딸이 있다고. 나를 괴롭히려고 긴가민가하게 말했지만, 분명 딸이 있다는 말이었네.”
이제야 비로소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왜 맥을 짚어보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빙궁의 궁주전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결정적인 말이 빙궁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집안의 여인들은 빙공을 익히기 좋은 특별한 혈맥을 타고 난단다.”
이미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너는 내 조카다.”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해진 것일까? 출생의 비밀이 밝혀졌음에도 이안은 담담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여태껏 살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빙궁주의 언니라고?
그녀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이렇게 묻고 싶었다.
도련님, 내가 빙궁주의 혈족이라네요. 이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죠?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검무극이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
“그냥…….”
얼떨떨하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울컥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악인에게 목숨을 잃은 엄마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지금껏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저는…….”
물기에 목이 잠긴 이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검무극도 빙궁주도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 후에야 이안은 마음을 추슬렀다.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담담한 어조로 전했다.
“앞으로도 저는 권마님의 딸이고, 소교주님의 전직 호위이자, 귀영대주일 거예요. 저는 제 삶에 만족해요. 앞으로도 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모가 되는 빙궁주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말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빙궁주 역시 담담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해라.”
이안에게 미안했다. 언니의 비극은 결국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운명의 장난일까? 후계 싸움의 희생양이 된 이안은 피를 보지 않고 후계 싸움을 끝낸 사람을 가장 믿고 따르고 있다.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빙궁주는 이안이 너무 대견했다.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줘서 정말 고마웠다.
“물 한 잔 얻어 마신 여인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나는 오지 않았겠지만, 언니는 왔을 거다. 넌 네 엄마를 똑 닮았구나.”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녀를 이곳 북해까지 이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니의 간절함이 깃든 운명이.
“앞으로 빙궁의 문은 네게 열려있다. 오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오거라.”
“감사해요.”
빙궁주는 이안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안아보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어색하고, 마음이 복잡해서 이안이 먼저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전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가서 푹 쉬어라.”
이모란 말도, 조카란 말도 아직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궁주전을 나가자 이제 그곳에는 검무극과 빙궁주만 남았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겁니다.”
“그렇겠지.”
빙궁주는 언니의 딸을 찾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날아가는 그녀의 기분에 제동을 걸었다.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후계 다툼이 싫어서 언니분이 떠나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이안이 혈육인 것이 밝혀지면 언젠가 그 점을 이용해서 음모를 꾸미려는 서 장로 같은 자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결국 조카까지 같은 운명을 떠안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언니의 혈육을 찾았다는 생각에 어서 모두에게 밝히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으니까.
‘정말 겪으면 겪을수록 놀랍구나.’
만난 이래 검무극은 정말 빈틈이 없었다.
“저흰 내일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교 소교주가 떠나는 데 섭섭한 마음이 들다니? 검무극이 오기 전이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감정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와서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조카를 찾았고 빙궁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섭섭해도 되겠지.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부디 대업을 이루시게.”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빙궁주가 말했다.
“후기지수들 회합이 있을 때 설이도 불러주게.”
중원으로 딸을 보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래, 중원에서 검무극이 기다리고 있다면 믿고 보낼 수 있으리라.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뜻 모를 농담을 남겼다.
“물론입니다. 우리 소궁주 춤 솜씨가 궁금해서라도 초대해야지요.”
* * *
떠나기 전, 검무극은 설산 꼭대기에 취마와 나란히 서 있었다.
“네가 함께 와줘서 해낼 수 있었다.”
솔직한 말이다. 혼자 왔다면 이 큰 음모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혈왕을 죽이긴 했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혼자서 감당할 적이 아니었으니까.
“혼자였다면 이 술잔도 못 얻었을 거고, 출교해서 돌아올 때면 계속 제일 늦게 왔을 테고.”
은근슬쩍 이제는 내게 먼저 오라 압박을 가했지만, 검무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형한테는 마지막에 갈 건데?”
“대체 왜?”
“편해서.”
“만만해서겠지!”
“다 만나고 마지막에 편하게 술 마시려고 그러는 거지.”
“핑계도 좋다.”
마지막이 아니라 오지 않는다 한들, 어찌 검무극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겠는가?
이번 여정으로 검무극과 더 친해진 것은 물론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설산 정상에서만 볼 수 있는 장엄한 설경을 즐겼다.
산을 내려오기 전에 둘은 술을 한 잔씩 나눠 마셨고.
마지막 잔은 설산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뿌렸다.
“원주, 잘 마시고 가네!”
다음 날 새벽, 검무극 일행을 태운 마차가 빙궁을 나섰다.
본교로 돌아가지 않고 중단했던 임무를 이어서 하겠다던 이안도 일단 북해를 벗어날 때까진 함께하기로 했다.
마차가 빙궁 입구를 나가는데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소궁주 한설이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나왔어요.”
검무극과 취마는 마차에서 가볍게 눈인사를 했고, 대표로 이안이 내렸다. 두 사람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어머니께 말씀 들었어요.”
한설은 궁주님이 아니라 어머니라 칭했다. 최근 빙궁주와 사이가 가까워진 것도 있지만, 지금 하는 이야기가 가족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안은 가만히 한설을 응시했다. 그녀와는 이제 사촌지간이다.
“놀라셨죠? 저도 어제 궁주님께 듣고 놀랐어요.”
“언니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언니라는 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한설이었다. 예전이라면 이 말이 지금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으리라.
근래 어머니와의 관계가 변하면서 왠지 모를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 그 때문일 거다. 이 자리가 그렇게까지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제가 동생인 줄 알았는데.”
“…….”
“농담이에요.”
“여전히 안 웃겨요.”
지난번 이안의 농담을 안 웃기다고 했던 한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설은 말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한설이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어머니가 전해드리라고. 나중에 열어보라고 하셨어요.”
상자는 당장 열어보지 못하게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안에 든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이모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한설이 언니란 말을 처음했듯, 이안도 이모란 말을 처음 하는 순간이었다. 많이 어색했지만, 자신이 조카임을 알았을 때 좋아하던 빙궁주를 생각해서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럼 잘 가세요.”
돌아서려던 이안이 다시 한설을 쳐다보며 말했다.
“설아, 잘 있어.”
한설이 놀란 표정을 짓자 이안이 재빨리 말했다.
“아직 이른가요?”
“아뇨. 언니는 언니죠.”
이안은 이럴 때, 과감할 줄 아는 성격이다.
“다음에 중원에 오면 내가 구경시켜 줄게.”
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하고 낯선 느낌. 하지만 이 기분 역시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시 이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검무극이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한설에게 작별을 고했다.
“후기지수가 다 모이면 초대하겠소. 그때 봅시다.”
이 모임이야말로 북해빙궁 소궁주 신분이 전혀 특별하지 않게 되는, 그런 특별한 자리임을 아직 한설은 알지 못했다.
그렇게 검무극과 취마, 이안을 태운 마차는 그곳을 떠났다.
한설은 떠나가는 마차를 제자리에 서서 지켜보았다. 정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난 세 사람이었다.
그녀 옆으로 빙궁주가 다가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머니는 중원에 가보신 적 있어요?”
어머니란 말에 빙궁주는 흠칫 놀랐다. 자신을 어머니라 부른 게 언제였더라? 한설은 여전히 저 멀리 사라져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녀가 의도한 말인지 무심코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몇 번 있다.”
“중원은 어떤 곳이죠?”
한설은 중원에 대해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중원에 대해 듣고 싶었다.
마차는 멀어져 갔지만 그녀의 마음에 처음으로 중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빙궁주는 천천히 걸어가 눈 덮인 나무를 매만졌다. 나뭇가지에 있던 눈들이 휘날리듯 떨어졌다.
“젊은 시절 내게 중원은 이런 곳이었다. 가면 돌아오고 싶고, 막상 돌아오면 또 가고 싶은 곳.”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감정이 점점 옅어져 이제는 중원에 대한 그리움이 젊은 시절처럼 크지 않았다.
그녀는 북해가 좋았다.
흩날리는 봄꽃도 여름날의 그 뜨거운 열기도, 아름답게 수놓았던 단풍도, 이 설경의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생이고.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진 빙궁주의 부드러운 시선이 딸을 향했다.
“네 중원은 또 다르겠지.”
* * *
마차는 남쪽으로 빠르게 달렸다.
천마신교 북해지단에서 지원 나온 마차였기에 마부석의 무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이 소교주와 취마를 태운 마차를 몰게 될 줄이야. 심지어 호위 하나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습격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마차에 소교주가 탔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마부석의 불안함에 반해 마차 안은 평온했다.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취마는 한쪽 자리를 차지해서 누워있었다. 물론 엄살도 잊지 않았다.
“뭐가 급해서 다 죽어가는 형을 끌고 이렇게 가는 거냐?”
“일 끝났으면 가야지. 아버지도 뵙고 싶고, 마존분들도 보고 싶고. 형도 보고 싶고 대룡이와 장 군주도 보고 싶고.”
“나는 또…….”
찬밥신세가 되겠구나, 란 말을 하려다 말았다. 이안이 함께 타고 있어서 차마 그런 농담까진 쉽지 않았다.
물론, 해도 되었을 거 같다. 이안은 아까부터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취마가 이안 좀 챙기라고 눈짓한 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검무극은 이안이 보고 있는 창밖을 함께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자신을 신경 쓴다는 걸 느끼자 이안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사실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
검무극은 그녀가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궁주도 그랬을 거다.”
그러자 이안이 검무극 쪽을 돌아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새벽에 찾아뵙고 따로 인사를 드렸어야 했을까요?”
그럴까 말까 여러 번 고민했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다.
“아까 궁주가 멀리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 주기 싫어서 멀리서 지켜보는 그 마음이 어떤 건지 검무극은 잘 안다.
빙궁주가 자신을 지켜봤다는 말에 이안은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빙궁주가 준 상자를 향했다.
“열어봐.”
검무극의 말에 이안은 조심스럽게 밀봉을 뜯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 작은 상자가 또 들어 있었다. 아래에 책자도 보였지만 우선 상자부터 열어보았다.
상자를 열자 독특한 향이 마차 안에 퍼져나갔다.
자려던 취마가 눈을 번쩍 뜰 정도로 강렬한 향이었다.
상자에 든 것은 새하얀 열매였다. 열매에서 영기가 느껴지는 것이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이게 뭐죠?”
검무극은 단번에 그걸 알아봤다.
“빙설초 열매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놀릴 때 북해에 가면 설인이 빙설초를 키운다고 장난을 쳤었는데. 이걸 여기서 보는구나.
“귀한 건가요?”
앞서 빙궁주가 만년설삼보다 더 좋은 영약도 있는데 정말 술잔을 고를 거냐, 했을 때 그 영약이 바로 이 빙설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검무극은 곧장 마부에게 말했다.
“잠시 마차 좀 세우게.”
마차가 멈춰 섰다.
검무극이 빙설초 열매가 든 상자를 챙겨서 이안도 내리게 했다.
검무극이 마차 옆에 그녀를 앉게 한 후 빙설초 열매를 내밀었다.
“여기서 복용하라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함께 있을 때 영약을 선물 받는 것도, 네 복이겠지.”
영약을 복용할 때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서 지켜줘야 한다. 외부 공격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을 빼더라도, 혹시 약효를 이기지 못해 큰 내상을 입거나 주화입마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생각할 때 검무극만큼 든든한 사람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이렇게 귀한 걸 제가 먹어도 될까요? 차라리 도련님 드세요.”
“본교와 빙궁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검무극의 농담에 이안이 옅게 웃었다.
한 번 인생이 바뀌니 정신없이 바뀌고 있었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운명이란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는 기분. 그럼에도 그녀가 용감하고 꿋꿋할 수 있는 이유는 고개를 돌리면 항상 자신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럼 감사히 복용하겠습니다.”
이안이 신중히 빙설초 열매를 복용했다.
열매는 입안에서 순식간에 녹아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이안의 몸에 전율이 일었다. 혈맥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기운은 차가웠다. 이렇게 차가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하지만 차가움도 잠시, 마치 추위에 감기가 들어 열이 나는 사람처럼, 그녀의 몸은 불같이 뜨거워졌다.
차가움과 뜨거움을 오가며 빙설초 열매의 기운은 그녀의 몸을 마구 휘저었다.
이안은 이 강렬한 기운에 당황했다. 내심 각오는 했지만 이렇게 강한 기운일 줄은 몰랐다.
‘내가 이걸 녹여낼 수 있을까?’
진기를 일주천하면서 어떻게든 기운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야생마처럼 날뛰는 기운이 어느 정도 잡혔지만 기운들이 흩어져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하지만 약효 전부를 흡수하기에는 지금 이안의 내공과 실력으론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로 검무극의 손이 닿았다. 손바닥을 통해 한줄기 내력이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검무극의 내력은 그녀를 도와 흩어지는 기운을 다시 혈맥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단 한 줄기의 기운이었지만 천군만마보다 더 큰 도움을 주었다.
검무극은 도움을 줘도 처음부터 돕지 않았다.
그녀에게 영약을 녹이는 경험을 충분히 하게 한 후에 마지막 순간에 도움을 주었다. 이게 아까 검무극이 말한 복이었다.
마지막까지 이안도 노력했다. 진기를 반복해서 다스리며 영약의 기운을 녹여나갔다.
결국 빙설초 열매의 기운은 막대한 내공이 되어 이안의 단전에 모여들었다. 단전이 충만하게 꽉 차오르는 이 느낌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쾌감이었다. 특히 그녀 체질과 잘 맞는 영약이었기에 내공은 더욱 정순했다.
그 결과 이안의 눈빛은 한층 더 맑아졌고 강렬해졌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완전히 달라요. 소교주님은 지금까지 이런 멋진 세상에서 사셨던 건가요?”
그러자 취마가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채 말했다.
“과연 자네 소교주의 세상이 그 정도에 불과할까?”
“그렇죠? 제가 물웅덩이라면 도련님은 바다겠죠?”
내공 차이가 그만큼 나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손사래를 쳤다.
“그 정도 차이는 아니지.”
어찌 겸손을 떠는가 싶었는데.
“시냇물과 바다라면 또 모를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이안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시냇물로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인사는 나중에 궁주님을 뵈면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안은 알고 있었다. 빙설초를 녹이는 데 검무극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 그가 아니었다면 기운의 삼분지 일은 잃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상자 속에서 빙설초 열매가 들어 있던 작은 상자를 꺼내자 그 아래 서찰과 한 권의 비급이 들어 있었다.
빙결신공(氷結神功).
궁주의 독문무공은 아니지만, 빙궁주의 가전무공으로 빙공 중에서는 손에 꼽히는 무공이었다. 비유하자면 검무극의 비천검법과 구화마공의 관계와 비슷했다.
“비급은 사본이니 외우고 태우라고 하셨어요.”
서찰에 다른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안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예 아무 말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다 받아도 될까요?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로?”
검무극은 흔쾌한 답을 내려주었다.
“이 선물만 봐도 알 수 있지. 궁주께서 얼마나 네 어머니를 그리워했는지. 기쁘게 받는 게 두 분을 위한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안은 더는 두말하지 않고 비급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취마가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누군가를 심장이라 부르고 심장처럼 대하니 정말 심장이 되는구나.
이것이 검무극과 이안을 보는 취마의 소감이었다.
―그게 느껴진다면 이제 형 심장도 챙겨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거지.
취마를 좋아하는 여빈을 두고 한 말이지만, 취마는 괜히 딴소리했다.
―돌아가면 주정부터 살펴봐야겠다. 어디 또 썩나 한번 보자!
검무극은 미소를 지으며 마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다시 출발하세!”
* * *
물론, 아무리 심장이 강해졌다 하더라도 아직은 물가에 내놓은 아기 심장이다.
북해를 벗어나 이안과 헤어져야 할 지점에 도착했을 때, 검무극은 취마에게 말했다.
“이대로 쭉 가고 있어. 잠깐 이안을 배웅하고 올게.”
이안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검무극은 마차를 먼저 보냈다.
“업혀라.”
“왜요?”
“어서.”
설명해주지 않고 검무극이 이안을 등에 업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이성에 이른 쾌속보는 정말이지 빛처럼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도 업혀 있는 것이 편하다는 것. 검무극의 진짜 실력과 경지는 빠름이 아니라 그 편안함에 있었다.
‘근데 어디로 가시는 걸까?’
이안은 업혀 있는 내내 의아했다.
그렇게 거의 한 시진을 쉬지 않고 달린 후에야 검무극은 멈춰 섰다.
“여긴 어딘가요?”
“나도 몰라.”
이안이 이 무슨 장난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 검무극은 발길 닿는 대로 내달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안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다.
“혹시라도 우릴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을까 봐.”
이안이 놀라 물었다.
“감시하는 자가 있었나요?”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위에 감시자가 없다는 걸 느꼈지만, 만에 하나라도 은신의 대가가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놈이 이안을 노리고 뒤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쾌속보로 한 시진이나 달려와 버리면 그 어떤 감시자도 이안의 행적을 뒤쫓지 못할 것이다.
“너무 조심하시는 것 아닌가요?”
“만에 하나를 대비한 것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딱 한 번 방심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이안은 항상 검무극에게 감동하고 고마워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닐 것이다. 감격을 애써 감춘 채 그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절 걱정하시는데 이전에는 어떻게 내보내셨대요?”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니까. 지금은 혈왕을 막 죽이고 난 이후였으니까.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문제가 생기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최선을 다한 후에는 그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이안은 검무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 좁디좁은 시냇물, 강물이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교로 돌아온 나는 취마와 함께 교주전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취마는 살짝 긴장해 있었다.
예전에 취마는 아버지 앞에서 술주정을 부렸다. 자신을 너무 싫어하지 마시라고. 그때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편해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너 먼저 나가면 안 돼! 나부터 인사드리고 갈 거다.”
홀로 남아 아버지와 독대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안개 속 그 신비하고 무서운 취마님은 어디 가셨을까?”
“취해서 어디 마차 아래에 기어들어 가서 자고 있겠지.”
그래도 아버지 선물까지 챙겨온 그였다. 북해를 벗어나기 전에 유명한 양조장에 들러서 아버지께 드릴 술을 사 온 것이다.
가만 보면 취마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다.
그렇게 취마와 함께 교주전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나는 이곳에 들어설 때면, 변함없이 저 자리를 지켜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한다.
“아버지! 아들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두려움도 느낀다.
만약 저 태사의가 비어 있다면? 저 태사의를 내가 지켜야 한다면? 과연 아버지처럼 변함없는 믿음을 줄 수 있을까?
믿음을 줄 자신이 없어서 두려운 게 아니다. 그럴 수 있기에 두려운 거다.
나 역시 아버지처럼 묵묵히 저 자리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임을 전생의 삶으로 확인했기에. 이번 삶은 밝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기에.
“북해 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큰소리로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옆에서 취마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다녀왔습니다, 교주님.”
취마를 내려다보던 아버지는 대번에 그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다쳤나?”
“조금 다쳤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취마는 아버지가 자신의 몸 상태를 물어봐 준 것에 벌써 흥분하고 있었다. 술을 안 마셨는데도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군사에게 북해 쪽 일은 전해 들었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내가 나섰다.
“빙궁을 집어삼키려던 암중 세력의 수장을 취마님께서 홀로 해치우셨습니다.”
오늘 아버지 앞에서 취마 자랑을 제대로 하려 마음먹었는데.
“당연하지.”
당연하다는 말에 취마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취마가 아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디 가서 지고 돌아올 사람이 아니지 않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취마의 강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고.
굳이 옆을 쳐다보지 않아도 취마의 감격이 느껴진다. 아마 아버지에게 이렇게 인정받은 것이 처음이지 않을까? 그것도 누군가 있는 자리에서.
“덕분에 제가 무사했습니다. 이번에 취마님 싸우는 거 처음 봤는데, 정말 끝내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이 취마를 향했다. 취마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한 눈빛이었다.
“멋있었습니다. 친구의 복수를 해주는 취마님이.”
아버지 앞에서 띄워주려고 하는 말이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나는 북해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했다. 물론 아버지는 그 과정과 결과를 이미 통천각을 통해 보고받으셨겠지만, 그 사이사이 있었던 자잘한 일들은 당연히 알지 못하셨다.
출교하고 돌아오면 항상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바탕 수다를 떨 듯 있었던 일을 전해드리면 아버지와의 유대감이 커지는 걸 느꼈으니까.
오늘은 주로 취마의 활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워낙 재미있게 말해서 지겹진 않으셨을 거다. 현실보다 더 실감 나게 전해줬으니까.
“……그래서 취마님께 감사하는 의미로 빙궁주께서 빙궁성배까지 내리셨습니다.”
내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이미 아버지는 빙궁성배를 알아보셨으리라. 마치 후광처럼 하얀 기운이 술잔에 일렁이고 있기에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한 것처럼 감사의 뜻으로 받았다고 넘어가면 될 것을, 취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빙궁성배는 소교주가 자신의 선물을 포기하고 대신 받아준 겁니다.”
나를 보시면서 ‘제 것 포기하고 남 줄 녀석이 아닌데’ 이런 눈빛을 보낼 법도 했는데. 그 대신 아버지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도 그 잔에 한 잔 마셔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마침 교주님께 드리려고 북해에서 유명한 술을 사 왔습니다.”
취마가 차분한 걸음으로 태사의가 있는 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 온 술을 빙궁성배에 부어서 아버지께 주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차분했다. 교주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버지 말만 나와도 덜덜 떨었지만, 이럴 때 보면 마존은 마존이다.
아버지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술도 좋고, 잔도 좋으니 술맛이 아주 좋군.”
아버지가 좋아하자 취마는 기뻐했다.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나와 한잔하세.”
순간 놀란 취마의 눈빛이 떨렸다. 이 역시 처음인 모양이다. 아버지가 같이 술 마시자고 한 것이.
“좋습니다.”
취마는 기쁜 얼굴로 대답한 후 내 쪽을 쳐다보며 넌 어서 가라고 눈짓했다.
물론, 그를 놀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나다.
―먼저 가면 안 된다면서?
―어서 가! 가라고!
―셋이 마시자. 아니다, 내가 다른 마존들도 다 불러올게!
―안 돼! 이게 얼마만의 기회인데!
그렇게 취마를 놀린 후에야 나는 아버지께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 제가 형 없을 때 형 욕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두 분, 저 없다고 제 욕은 하시기 없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너는 괜찮으냐?”
순간 흠칫하며 아버지를 향해 돌아섰다.
무슨 뜻으로 물은 것일까?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을 보고 있으니, 아버지가 왜 그렇게 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생략된 말까지 했다면 이런 말이었으리라.
근래 네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히고 있는데, 괜찮으냐?
아버지의 걱정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악인들이라도 손에 피를 계속 묻히는 일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뛰어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아버지에게 나는 이십대의 철부지 막내였으니까.
“그래서 뭐든 혼자 하려고 욕심 안 내고 마존님들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제가 절 지키려고요.”
취마도 아버지만큼이나 깊어진 눈빛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만약 힘들다고 느껴지면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교주전을 나왔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보다 수십 배의 피를 더 묻혔어도 꿋꿋하게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소교주님!”
저쪽에서 서대룡이 환하게 웃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이 먼 거리에서도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데도 안 괜찮으면, 제 인생에게 너무 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 * *
서대룡은 정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반가워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걱정도 되고 보고 싶기도 했다.
황천각주도 되고, 혈천도마의 제자도 되고. 온전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할 상황임에도, 검무극이 없으니 인생의 낙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한데 조금 전 검무극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냥 한달음에 교주전으로 달려온 것이다.
“어떻게 지냈어?”
검무극의 물음에 서대룡이 대답했다.
“저야 똑같죠. 새벽 수련하고, 밥 먹고, 황천각 일보고, 사부님께 가서 수련하고, 밥 먹고 자고.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똑같아서 뒤죽박죽 섞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사람 인생이 이렇게 단조로워도 되는 겁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평범한 게 행복한 거다, 그런 말씀은 사절입니다.”
이렇게 말이 많은 녀석인데, 위엄있는 황천각주 노릇 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너만 모르고 있는 거 아니냐?”
“뭐가요?”
“매일 다른 날인데. 너만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순간 서대룡은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엄밀히 따지면 똑같지만 똑같지만은 않은 나날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처리하는 사건이 매일 같은 사건들이라고요.”
“죄수들은 다 다르잖아? 성격도 다르고 죄를 지은 이유도 다르고.”
“만날 같은 수하들이고요.”
“그 사람들 그날 기분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꾸고 나온 꿈도 다르고, 먹은 것도 다를 거다.”
“일 끝나면 사부님 뵙고 만날 수련만 하는 인생이라고요.”
“임독양맥 타통하고 무공실력이 많이 성장했지? 자연스럽게 수련도 바뀌었을 거고.”
검무극의 말이 맞았다. 근래에 사부에게 배우는 초식이 달랐다. 강해진 만큼 수련은 더 힘들어졌다.
“다르잖아? 네 하루하루는.”
“똑같잖아요. 한 번도 소교주님 말씀을 이길 수가 없는 건.”
“그것만은 평생 안 변하지.”
“소교주님의 잘난 척도요!”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야 소교주님 돌아오신 것 같네요. 아무도 제게 이런 말을 안 해준다고요. 이런 말을 들어야,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살죠. 오늘부터 제 하루하루는 다 다릅니다. 그냥 그렇게 정했습니다! 이제 수하들에게 물어볼 겁니다. 너 아침 뭐 먹었어? 똥은 누고 나왔어? 어제 무슨 꿈 꿨어? 요즘 무슨 생각 하고 살아?”
서대룡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빛깔을 띤 아름다운 꽃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대룡이를 보니 나도 교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가서 일 봐라.”
“이제 어디 가세요?”
“네 얼굴 봤으니까 마존들께 한 바퀴 돌아야지.”
“정말 소교주님은 지치지도 않으시네요.”
대룡아, 그건 숫자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징글징글한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정말이지 본교 마존들이 십육마존이었으면 어떡할 뻔했습니까?”
서대룡의 농담에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랬다면 우리 취마형 섭섭함이 두 배가 됐겠지.”
* * *
“어르신!”
나는 혈천도마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갔다.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던 혈천도마는 옆에 세워둔 도를 방패처럼 앞에 세웠다.
“너무 하십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은 멸천대도 너머로 혈천도마의 말이 들려왔다.
“집에서 쉬지. 만날 보는 얼굴 뭐가 반갑다고 이렇게 찾아와?”
마음에도 없는 소린 항상 저렇게 한다. 나는 멸천대도를 지나 혈천도마의 침상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렇게 따지면 만날 보는 책은 뭐가 재밌다고 그렇게 보십니까?”
“이건 다르지.”
그러면서 혈천도마는 내가 침상에 누울까 봐 눈빛으로 경고했다.
“잘 다녀왔습니다.”
혈천도마가 묻지 않았지만 내가 먼저 다녀온 이야기를 전했다.
앞서 아버지에게는 취마를 주인공으로 말했다면, 이번에는 내 위주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와 취마가 둘이 대작하고 있습니다.”
“교주가 주정뱅이와 술을 마신다고?”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 혈천도마의 눈빛에 살짝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혈천도마는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두었다.
“책 읽는 게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재밌다.”
“그렇게 많이 읽으셨는데 모르는 게 있으십니까?”
“그래서 재밌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게 해줘서.”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나중에 애 낳으면 책이나 많이 읽혀. 어차피 너 닮았으면 검술은 타고났을 테니까.”
과연 이번 생에 애를 낳고 사는 인생을 살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는데.
“아니, 어르신도 안 살아보신 인생을 살라고 하십니까?”
그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잠시 책장을 넘기는 혈천도마의 손길을 지켜보다가 문득 아버지가 물었던 것을 그에게 되물어보았다.
“저 괜찮아 보입니까?”
그러자 혈천도마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안 괜찮아 보인다.”
“왜요?”
“괜찮은 사람은 이런 거 안 물으니까.”
그래서였을까? 그에게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은 자고 가.”
만날 집에 가서 자라고 쫓아내는 그였는데. 씻지 않으면 침상에 눕지도 못하게 하는 그였는데.
“어쩐 일로요?”
“안 괜찮아 보여서.”
나는 활짝 웃으며 침상으로 몸을 날렸다.
“좋죠!”
허공섭물로 허공에서 잡을 줄 알았는데 혈천도마는 그러지 않았다.
“아, 편하다!”
뭐니 뭐니해도 이 침상에 누워있는 게 제일 편했다. 혈천도마라는 사람이 주는 특별함 때문일 거다.
그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제일 편해질 줄이야. 이렇게 제일 먼저 달려와서 보고 싶은 사람이 될 줄이야.
침상에 누워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저, 괜찮습니다. 어르신.”
“안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적인 한마디.
“안 괜찮은 건 교주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서 혈천도마를 응시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아직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교주가 잠에서 깨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해서.”
나는 이미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지만, 혈천도마는 쉽게 풀어서 다시 말해주었다.
“교주가 꿈을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해서.”
아버지의 꿈은 무림일통.
“너도 후계자로 삼았으니, 이제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르지.”
“삼자회합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그 좋았던 분위기가 아직도 생생한데. 아직도 담 너머 연주 소리만 들어도 몸이 들썩이는데.
“그걸 신경 쓸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꿈을 꾸지 않겠지. 오히려 그날 두 사람 모두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을 수도 있고.”
“지금 취마님과 술 마시는 걸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마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일 때문이라면 너무 비약적인 오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교주가 가면쟁이를 따로 만났다.”
아버지가 극악소마를 만났다고?
차라리 권마를 만났다면 이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를 사람이니까.
하지만 극악소마는 절대적으로 나를 따라줄 사람이다. 아버지의 명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하필 그를 만났다는 것은? 거기에 취마와 난생처음 대작까지? 자연스럽게 이런 가정을 해볼 수가 있으리라.
“아버지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마존들을 관리하기 시작했군요.”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계시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관건은 언제 아버지가 칼을 뽑아 드실 거냐는 것, 바로 그 시기의 문제였는데.
만약 혈천도마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내 생각보다 시기가 빠르다.
“아직 근래 각파에서 암약하는 배후 세력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잖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생각하신다고?
아버지가 이런 큰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는 분이 아님을 잘 안다. 대적을 두고 또 다른 대적을 만들 분도 아니시고.
혈천도마라고 어찌 그런 점을 모르겠는가?
지금은 소원해졌지만, 젊은 시절 아버지와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던 혈천도마다. 그랬기에 아버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무림은 아주 오랫동안 평화로웠다. 싸움다운 싸움이 없었지. 한데 이번에 그 배후들을 상대하면서 마존들이 깨어났다.”
맞는 말이었다. 마존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싸움에 참여했으니까. 막강한 적을 마주하면서 제대로 실전을 경험한 것이다. 마존급 고수들이 비슷한 실력의 적을 상대할 기회는 평생 몇 번 가지지 못할 기연이었으니까.
“우린 그들을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쟁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거지.”
혈천도마의 놀라운 말은 지금부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교에 그 무엇보다 강력한 전력이 생겨났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혈천도마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저를 두고 말씀하신 겁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배후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내 무공이 가장 많이 성장했으니까.
“너로 인해 본교가 무림일통을 해낼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역시 맞는 말이었다. 내가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고 아버지와 힘을 합친다면, 아버지가 혼자 하시는 것보다 더 쉽게 무림일통을 이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혈천도마의 놀라운 말이 덧붙여졌다.
“어쩌면 교주의 꿈을 깨운 사람은 너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혈천도마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으니까.
최근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나였으니까.
“물론 내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근래 아버지도 많이 변하셨으니까. 내가 마존들을 대하는 모습에 영향을 받으셔서 마존들과 가깝게 지내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배후 세력을 뿌리뽑기 위해 단지 마존들을 다독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이지 아버지의 속마음을 읽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혈천도마가 이렇게 추측하는 마지막 이유는 오래전 과거에 있었다.
“교주는 젊어서부터 무림일통을 꿈꾸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까?”
과거를 떠올리는 혈천도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교주가 천마에 오르기도 전이었지. 당시 교주는 권마와 함께 중원을 종횡하며 싸우러 다녔다. 딱 지금의 너처럼 호위도 없이 둘이서 돌아다녔지. 그러던 어느 날 교로 돌아온 교주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모두가 젊었던 그 시절, 아버지는 혈천도마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혈천도마가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 무림 내가 가져야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무림일통의 꿈을 가졌던 그 순간의 모습이. 아버지는 어떤 계기로 무림일통을 꿈꾸셨던 것일까? 그때 아버지가 본 것이 무림의 좋은 모습이었을까? 추악한 단면이었을까?
“그 이후로 교주는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는 그런 꿈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밝히고 다니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 때, 그 유일한 대상이 혈천도마였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예전에 혈천도마가 자식은 둘이라 포기할 수 있지만, 자신은 포기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부터 꾸었던 아버지의 꿈을 포기하게 할 수 있을까?
“어르신은요?”
“뭐가?”
“무림맹을 치라고 아버지가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혈천도마는 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 섭섭할 마음의 준비 끝났습니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혈천도마는 장난으로 받지 않았다.
“난 아직 섭섭하게 할 준비가 안 됐다. 너도, 네 아버지에게도.”
혈천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 말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나와 친해졌어도, 아무리 아버지와 소원해졌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적인 모든 걸 다 떠나 교주와 마존의 관계였으니까.
이렇게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어르신에게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하지 않을 겁니다.”
혈천도마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도 마찬가지였다. 날 위해 아버지의 명을 거역해야 하는 그런 고민에 빠지지 않게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나와의 문제다.
“어떻게 하려고?”
“제가 어떤 마도를 꿈꾸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야죠.”
혈천도마의 시선이 다시 책을 향했다. 잠시 멍하게 책을 내려다보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모두가 원하는 바대로 살 수는 없는 법이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 * *
잠은 다음에 잠옷 챙겨와서 자겠다고 하고는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왔다. 그가 혼자 있기를 바랄 것 같아서였다.
나는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아버지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마존들과의 관계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순간이 찾아왔다고. 친해지기는 쉽다. 언제나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이제 우린 관계의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그렇게 거처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서 한 사람이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호위 책임자인 적연이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졌을 테니, 내가 올 때까지 거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는 마지막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북해에 가 있는 동안 피나는 수련을 했다는 의미.
한바탕 무공 수련이 끝났을 때, 난 모습을 드러냈다.
“실력이 많이 늘었네?”
내 등장에 적연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교주님! 무사히 돌아오시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돌아오셨다는 소식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른 호위들도 함께 있겠다는 걸 제가 수련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그 말만 들어도 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정해진 수련에 지장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안대부터 벗어보게.”
“괜찮습니다.”
“항상 말하지만 내가 안 괜찮아.”
그의 눈을 보면 이안의 전신석화공이 생각난다. 이렇게까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누군가를 지키려는 호위들의 마음이 느껴져, 어서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안대를 푸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눈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성을 이뤘구나!”
깜짝 놀라게 해줄 요량이었다는 듯, 그제야 적연이 미소를 지었다.
“소교주님 덕분입니다. 소교주님이 틈틈이 눈을 만져주셔서 그런지, 귀안술의 수련에 빠른 성취가 있었습니다.”
그래서가 아님을 안다. 큰 고통을 참으며 피나는 수련을 했을 것이다.
“한데 왜 안대를 쓰고 있나?”
“갑자기 풀려니까 어색해서요.”
“풀어, 안대 풀면 여협들이 졸졸 따라다닐 거다.”
“그럼 더욱 안대를 써야죠. 저는 소교주님을 졸졸 따라다닐 거라서요.”
눈의 고통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가 예전보다 많이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안 하던 농담이 어색했는지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그럼 쉬십시오.”
“적연.”
“네, 소교주님.”
나를 보겠다고 밤늦게까지 기다린 그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축하주는 하고 가야지.”
적연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아버지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하듯, 적연 역시 교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전해주었다. 혹시라도 내게 도움이 될까, 일일이 다 챙겨둔 정보들이었다.
호위들의 실력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소교주님을 모시고 함께 다니고 싶은 열망이 있어서인지, 다들 죽을힘을 다해 수련하고 있습니다.”
항상 그들에게 말했다. 나와 함께 다니려면 더 강해져야 한다고.
혈천도마의 말이 맞다. 본교의 전력은 곳곳에서 강해지고 있었다.
특히 나와 관계된 이들은 모두 강해지고 있다. 심지어 배후와 싸우지 않았던 일화검존조차 나와의 비무를 통해 강해졌으니까.
어쩌면 정말 그 말이 사실일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꿈을 깨운 것이 정말 나 때문인지도.
* * *
다음 날 극악소마를 만나러 악인곡으로 갔다.
극악소마의 거처에 내 침상도, 그의 침상도 여전히 잘 있었다.
거기에 이전에는 없던 책상과 의자까지 생겼다.
극악소마는 책상에서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 다녀왔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가면 속 두 눈이 활짝 웃었다.
“오셨습니까?”
극악소마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책상이 생겼군요.”
물론 새하얗게 칠해진 책상과 의자였다.
“있으니까 편하더군요.”
그러면서 보고 있던 것을 들어서 보여주었다. 숫자들이 적힌 장부였다.
“요즘 새로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전 그를 따라 중원에 나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청면이 전음으로 장부 내용을 알려줬었는데, 이제 직접 보고 있었다. 아마 그사이에 장부 보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마존급의 고수들이 다음 경지로 올라설 때는, 전혀 생각지 않은 부분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무서운 거다. 책 읽는 혈천도마가, 장부 보는 극악소마가.
내가 침상을 가져다 둔 후부터의 변화였다. 나는 책상을 둔 극악소마의 마음이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었다.
누워서 편히 자라는 내 마음에 그는 더 큰 변화로 화답해주고 있는 거다. 네 덕분에 이렇게 변했다고.
“북해는 어땠습니까?”
“멋있고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많이 가보셨죠?”
하얀색을 좋아하는 극악소마였으니 정말 자주 갔으리라 생각했는데.
“딱 한 번 갔습니다. 제가 추운 것은 딱 질색이라서요.”
생각지 못한 이유에 큰소리로 웃었다.
이번에는 극악소마가 물었다.
“그럼 북해빙궁도 가보셨겠군요.”
“가봤다 뿐이겠습니까? 아예 거기서 한동안 지냈습니다.”
“외인을 받지 않는다고 알려진 곳인데. 역시 소교주님이십니다.”
나는 내 침상 끝에 앉아서 북해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특히 혈왕과 그의 수하들에게 관해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때론 귀찮기도 했지만, 나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작은 정보 하나가 나중에 목숨을 구할 값진 정보가 될 수도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렇게 북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나는 오늘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용건을 꺼냈다.
“얼마 전에 아버지를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그날 아버지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천마와 마존이 나눈 대화를 묻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함부로 물어볼 내용이 아니었다.
“무례한 질문인 줄 압니다.”
“당연히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나는 그에게 이번 일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신 게 아닌가 해서요.”
무림일통이란 말에 극악소마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어제 취마님과 대작하시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본격적으로 칼을 뽑아 드시는 게 아닐까.”
그제야 극악소마도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이해하는 눈빛이었다.
“저를 만났을 때 무림일통과 관련한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교내의 일과 일상적인 대화가 전부였습니다. 주로 소교주님 이야기를 많이 하셨지요.”
“제 이야기를요?”
“네, 소교주님을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요.”
아버지가 극악소마를 만나 내 부탁을 한다?
요즘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졌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걱정되십니까?”
“솔직히 걱정됩니다. 이렇게 찾아뵙고 무례를 범할 정도로요.”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 마존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회귀하면서 그들은 이전과 정말 많이 변했다. 나와의 관계도 바뀌었고.
하지만 무림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마음까지 변했을까? 가령 이런 물음을 던진다면?
과연 극악소마는 평화로운 무림을 좋아할까? 아니면 전쟁터를 내달리며 마기를 발산하고 싶을까?
그가 평화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눈앞의 극악소마는 그런 사람일까?
그때 극악소마가 말했다. 마치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말이었다.
“저는 참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에 대한 극악소마의 마음.
“저는 소마님이 참아야 하는 인생을 살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눈구멍 속 그의 눈이 묻는다. 방법이 있겠느냐고.
“지금부터 찾아야죠. 아버지도, 마존분들도 참는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하게 할 겁니다.”
참는다는 말, 그 자리에 어떤 말이 들어가야 할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다.
“소교주님.”
“네, 소마님.”
극악소마는 맑고 깊은 눈빛으로 나직이 말했다.
“어떤 명령이 떨어져도 저는 소교주님을 따를 겁니다. 소교주님의 마도가 제 마도입니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어떤 명령이 떨어져도 나를 따르겠다는 말은 천마의 명을 거역하더라도 나를 지지하겠다는 의미.
이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천마의 명령을 거역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이었으니까.
방금 극악소마는 날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랬기에 그를 향한 내 눈빛과 목소리도 떨렸다.
“이래서였을 겁니다. 아버지가 마존 중에서 소마님을 가장 먼저 만난 이유가요.”
극악소마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는 이번 일을 부자지간의 일로 끌고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번 일로 두 분 사이가 멀어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대신 교주와 마존들의 일로 만드십시오.”
극악소마는 나와 아버지 사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소교주께서는 마존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안이라면 모를까, 그것이 전쟁이라면 마존의 뜻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천마라 해도 모두의 목숨이 걸린 전쟁만큼은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으니까.
“마존 반 이상이 반대하면 교주님도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으실 겁니다.”
하지만 과연 다른 마존들이 극악소마처럼 기꺼이 내 편을 들어줄까? 아닐 것이다. 혈천도마조차 고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제가 마존분들과 친해졌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게 만드는 건 힘들 겁니다.”
“당연히 힘들겠지요. 그래도 소교주님의 마도를 이루려면 반드시 해내셔야 합니다.”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예전보다 더 가까워져서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아부신공을 발휘하고 온갖 말로 현혹하다시피 했잖습니까? 이젠 그게 좀 어렵게 느껴집니다. 드디어 아부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인가요?”
내 농담에도 가면 속 두 눈은 진지했다.
“마존들이 그 아부신공에 넘어간 것 같습니까?”
“아닙니까?”
극악소마는 단호히 말했다.
“소교주님의 진심에 넘어간 겁니다. 말씀하신 아부와 현란함 속에 항상 있던 그 진심 말입니다. 일개 주점 주인장까지 지켜주려는 소교주님의 마도 말입니다. 전 다들 거기에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평소보다 말이 많은 건 나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더 거침없이 하셔도 됩니다. 아부든, 강요든. 내 마도는 이러이러하니까 나를 따르라고 소리치십시오. 마존들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부담스럽게 할까 봐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이 결정을 내렸으면 그럴만하니까 선택한 것이고, 감당할 수 있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 테니까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덧붙여 말했다.
“우린 여덟입니다. 상처를 입어도 여덟이 나눠 입습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그 검 뽑으십시오.”
회귀 전의 극악소마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이런 뜨거움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나와 친구가 되기를 바랐던 그 마음은 바로 이 뜨거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소마야, 이번 생에서는 마지막까지 함께 가자. 친구로 끝까지 가자.
이것이 소마의 뜨거움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나는 정중하게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극악소마도 내게 정중히 포권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전에 제게 주신 만년설삼 덕분에 무공이 한 단계 올라섰습니다.”
“아, 감축드립니다!”
나는 내 일처럼 좋아했다. 아니, 내가 성취를 이룬 것보다 더 기뻤다.
그리고 난 이 고마움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그 성취는 만년설삼 때문이 아닐 겁니다.”
내공이 늘어났다고 무공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러 요인이 작용했을 거다. 만년설삼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나와 목숨을 건 싸움을 했던 것부터 방에 침상을 들이고 장부 공부를 하는 마음의 변화까지.
“무공이 한참 동안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답답했는데, 이번에 뚫고 올라섰습니다. 그 덕분에 제 무공에도 큰 변화가 있었고요.”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마존급 실력에서 다음 단계에 오르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으니까.
지금 그가 내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이것이지 않을까?
“우리의 다음 싸움이 기대됩니다.”
과연 극악소마의 눈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극악소마가 한 가지 사실을 강조했다.
“전쟁을 막으려면 팔마존 중 한 사람을 반드시 소교주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극악소마가 생각하는 이는 바로.
“독왕입니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전쟁에 있어 상대에게 가장 큰 공포를 안겨줄 사람이 바로 독왕이었으니까.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무림맹과 사도맹의 암살 대상 일호가 될 사람이 바로 그였다. 실제로 무수한 살수나 암살조들이 그를 죽이러 동원될 거다.
어쩌면 아버지나 나보다 더 우선해서 죽여야 할 적으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량 살상이 가능한 독왕은 두려운 존재일 테니까.
숲속에 홀로 있는 독왕을 떠올렸다. 주위에서 무슨 말을 하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독초와 독충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마존 중에서 설득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이군요.”
극악소마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그건 교주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 *
극악소마의 거처를 나온 나는 곧장 취몽루로 갔다.
다른 마존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단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과연 취마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오랜만에 만난 여빈이 반갑게 나를 맞으며 취몽루로 안내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소교주님.”
“취마님 덕분이었습니다.”
“취마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이 많다고요.”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취마님이 그렇게나 멋진 분이시라는 걸요.”
취마를 칭찬하자 여빈은 옅게 웃었다.
그녀가 모는 배를 타고 호수 가운데 취몽루로 건너갔다.
취마는 취몽루 난간에 걸터앉아 호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때면 홀로 하얀 벽을 쳐다보고 있던 극악소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멀리서 봐도 술에 취한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교주님께 다녀온 후로 계속 술을 드시고 계십니다.”
“기분이 안 좋게 돌아오셨습니까?”
“아뇨,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드시는 술입니다.”
그렇게 나룻배가 섬에 다다랐다.
나를 보자 취마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왔어? 어서 와! 내 동생!”
그는 혀 꼬인 목소리로 신이 나서 소리쳤다.
전각에 올라가니 빈 술병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는 지금도 술을 빙궁성배에 따라 마시고 있었다.
“이 무슨 폭주야? 그 술잔으로 마실 때 두 잔 마실 거 한 잔만 마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특별한 날이니 이번만 봐줘. 기분이 너무 좋아서 안 마실 수가 없다.”
취마가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을 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하고 술자리가 좋았나 보네. 많이 마셨어?”
“말도 마. 교주전에 있던 술 다 비웠다. 마실 때는 몰랐는데 교주전 나오니까 취기가 확 올라오더라. 교주님하고 있을 때는 긴장해서 취한 줄도 몰랐다.”
얼마나 긴장했을지 안 봐도 상상이 갔다.
“아버지와 대작은 처음이지?”
“마신 적이야 몇 번 있었지. 처음 마존이 되었을 때도 마셨고. 한데 그땐 가볍게 한두 잔 마신 거고.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고. 교주님과 제대로 술 마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땠어?”
“좋았다. 정말 좋았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온갖 이야기 다 했지. 교주께서 내 젊었을 때 일들도 다 기억하고 계시더라.”
다시 생각해도 좋은지 취마가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내가 제일 기분 좋았던 말씀은 이거였다. 교주님께서 그러시더라. 널 나와 함께 내보내서 안심했다고. 아, 교주님이 나를 이렇게 신뢰하고 계신 줄 처음 알았어.”
취마는 정말 감격한 모습이었다. 정말 아버지가 정말 마존들을 관리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순수하게 취마와 자리를 가지신 걸까?
“이게 다 네 덕분이다.”
“왜?”
“네가 이 빙궁성배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교주께서 술을 마시자고 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 술맛이 너무 좋아서 마시자고 하신 거니까.”
“성배 때문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라고?”
“이번 기회에 형을 아버지의 오른팔로 삼으려고 그러시는 걸 수도 있잖아?”
그러자 취마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는 없다.”
“모를 일이지.”
잠시 사이를 두고 취마가 말했다.
“나는 교주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교주는 권마나 혈천도마 같은 사람을 좋아해.”
“멀쩡히 판단하는 걸 보니 하나도 안 취했네.”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권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의 명을 따를 사람이니까. 이것이 권마라는 사람이 지닌 깊은 신뢰.
취마가 잠시 호수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여긴 왜 온 거냐?”
찾아봐야 할 마존이 많은데 취몽루에 왔다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어서임을 눈치챈 것이다.
이제 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
찾아온 용건을 솔직히 말하면 취마의 이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일인데. 그냥 좋게 넘어갈까?
이렇게 상대를 배려한다는 핑계로 귀찮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을 때가 있다. 딱 지금이다. 그냥 말 안 하면 웃으면서 넘어갈 텐데. 말을 꺼내면 심각해지고 얼굴을 붉히게 되겠지.
하지만 이때야말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야 한다. 상대가 날 위한답시고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 건지. 그 배려가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니 나는 기분 나쁠 것 같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결정적으로 말해주지 않은 이유가 너무 좋아하고 있는 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라고? 이건 아니지.
거기에 하나 더. 모두가 모르는 비밀이라면 또 모를까 이 일은 혈천도마도 알고, 극악소마도 아는 내용이다.
“충분히 즐겼어?”
“무슨 말이야?”
“아버지 애정 충분히 만끽했느냐고.”
취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아버지와의 술자리와 관련된 이야기임을 눈치챈 것이다.
“좋은 기분 깨서 미안한데. 그래도 형에게 솔직히 말해야 할 내용이라서.”
나는 앞서 두 마존과 나눴던 대화의 핵심을 취마에게 그대로 전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아버지의 속마음이 어떤지 추측만 할 뿐이니까.”
이야기를 다 들은 취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 술자리를 곰곰이 떠올려봤는데,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셨다. 그런 암시를 준 적도 없으셨고.”
그러다 취마는 갑자기 술을 당기는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표정이 딱 이랬다. 그래, 교주님이 날 좋아할 리가 없지!
“아직 정확한 내막은 몰라. 지금까지 형과 소원했던 것 풀려고 했을지도. 아버지 속을 누가 알겠어.”
술잔을 다시 채우며 취마는 한 가지 사실을 짚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네.”
“뭐가?”
“내게도 널 부탁한다고 하셨거든. 소마에게도 그런 말 했다면서.”
“형에게도 했어?”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또 나를 부탁하셨다?
“소마님과 형은 아예 포기하고 내 편으로 인정해 버린 걸까?”
그러자 취마가 억울해했다.
“왜 날 포기하시지?”
“뭐야? 형, 내 편 아니었어?”
그러자 취마가 정색하며 말했다.
“소교주, 공사는 구분하셔야지요.”
장난 반, 진담 반의 말이지만 진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래, 어디 취마뿐이겠는가? 아무리 나와 친해졌다고 해도, 아버지의 명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 부분만큼은 전혀 섭섭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번 기회에 취마의 생각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명령이 전쟁을 일으키는 명령이라도?”
취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취마는 전장의 안갯속을 누비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저 아름다운 호수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고 싶은 것일까?
취마는 내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자멸공 쓰던 그놈들 상대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이 본교 무서운 줄 모르고 설쳐대는구나.”
나는 취마가 이 말을 돌려 말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쓸어버려야 할 것들은 다 쓸어버리고 싶다.
물론 그것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는 말과 같은 뜻은 아니겠지만, 이 호수를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의미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아버지 편이라는 거네.”
“네 편, 내 편이 어딨어?”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이 편싸움이 되어야 할 거 같아서.”
취마는 대답 없이 술을 마셨다.
“아버지 뵈면 형의 충성심 내가 꼭 말해줄게. 우리의 호형호제보다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했습니다! 하고.”
그러자 취마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좋아하실까?”
“무슨 뜻이야?”
“오히려 싫어하실 것 같아서.”
“아버지를 따르겠다는데 왜 싫어하셔?”
취마가 다시 술을 마셨다.
“교주께서 너를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잖아? 왠지 내겐 네 편을 드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실지도 모르지.”
취마가 나를 보며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그가 따라준 술을 마신 후, 다시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그러는 거야?”
“왜겠냐? 주정뱅이라 그렇지.”
네 편, 내 편이 어디에 있냐고 말한 취마였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아버지 편이 되고 싶은 사람이란 걸.
취마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다.
저 사람에게만큼은 더 잘 보이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은, 취마에게 아버지가 바로 그런 사람인 거다.
그 열망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해온 오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소교주.”
장난기가 사라진 취마였기에 나도 정중히 말했다.
“네, 취마님.”
“다른 마존들은 꼭 설득하시게.”
“그러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후 내가 덧붙여 소리쳤다.
“그러긴 뭘 그래! 형도 날 버렸는데 누가 내 편을 들어주냐고.”
“미안해. 어쩔 수가 없어. 나도 잘 기억 안 나는 나를 기억해주셨다니까.”
“다음에 출교해서 돌아오면 형에게는 또 마지막에 찾아올 거야!”
그렇게 툴툴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취마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나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형인데.”
내 말에 취마는 깊이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오늘 우리 관계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나는 그에게 솔직했고, 그 역시 솔직했다.
솔직함은 때론 양날의 검이 되어 우릴 다치게 하지만, 우린 누구보다 날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랬기에 형이 아버지 편을 들겠다고 해도, 우린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누구야?”
어쩌면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사람.
난 취몽루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으로 한 번 부딪쳐 보려고. 제일 크고 단단한 절벽으로 간다.”
마른하늘에 작은 천둥소리가 들렸다.
내지른 주먹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뜬 사람은 천소희였다.
“혹시 들으셨습니까?”
앞에 서 있던 권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소희는 감격해서 소리쳤다.
“사부님! 제자가 해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무극에 이어 권마의 둘째 제자가 되었고 차기 권마로 선정된 그녀였다.
그날 이후 권마에게 배운 벽력수라권을 꾸준히 수련했고 오늘 처음으로 천둥소리를 낸 것이다.
천소희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권마는 미소를 지었다. 평소 거의 볼 수 없는 그의 귀한 웃음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네, 사부님.”
그녀는 날아갈 듯 기뻤다.
자신을 두고 여러 뒷말과 수군거림이 나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시기와 질투들.
특히 여인이 차기 권마로 내정되었다는 사실에 우려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당대 권마는 저 무서운 얼굴과 큰 몸집, 그리고 무엇보다 저 큰 주먹이 권마의 상징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이해한다. 대신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차기 권마가 이 작은 주먹으로 무엇을 부수는지. 실력으로 보여줄 것이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축하해, 사매.”
그녀가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연무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형! 돌아오셨군요!”
근래 수련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녀는 검무극이 돌아온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소로 답한 검무극이 권마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제자, 북해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잘 다녀왔다.”
권마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무서운 얼굴도 그대로고 근육질의 몸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빙궁 쪽에도 놈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결국 술에 취해 다 쓰러졌습니다만.”
“나도 들었다. 취마께서 고생하셨다고.”
아마 아버지와 북해 상황에 관해 대화를 나눴던 모양이다.
사부님, 아버지가 어떤 생각이신지 아십니까?
오래전 젊은 시절, 아버지가 상기된 얼굴로 혈천도마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면, 지금이라면 그에 관한 이야기를 권마에게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권마와 인사를 나눈 후 천소희를 챙겼다.
“벌써 천둥소리를 내다니. 대단하구나.”
“사부님께서 잘 지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조만간 축하주 사주마.”
“네, 사형.”
천소희는 검무극에게 깍듯했다. 사형이기도 했지만 차기 천마가 될 귀한 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차기 권마가 된 것은 검무극 덕분이었다. 그와 함께한 심야수련모임에서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으니까.
저만치 걸어가던 검무극이 그녀에게 돌아섰다.
“사매, 넌 정말 멋진 권마가 될 거다.”
지금 천소희의 마음에서는 검무극을 사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소교주라고도 부르지 않았다.
‘교주님, 그땐 제가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 *
권마와 함께 온 곳은 동권문 내에 있는 절벽 앞이었다.
일격에 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권마의 꿈. 과연 그 꿈은 얼마나 성장했을까?
나는 권마와 나란히 서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절벽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절벽은 그것을 올려다보는 권마를 닮아 있었다.
정말 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정말 이 권마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한참을 그렇게 올려다보다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줄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안은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습니다.”
“알고 있다.”
“어떻게요?”
“내게 전서를 보냈다.”
녀석이 아버지는 확실히 챙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북해에서 가족을 찾은 소식도 들었겠네요.”
권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소식에 놀라지 않으셨냐는 물음 대신 이렇게 말했다.
“빙궁주가 이안의 신분에 많이 놀랐습니다. 찾아낸 조카가 사부님의 수양딸이 되어 있었으니까요.”
놀라는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어야지. 빙궁주보다 권마를 더 높여주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혹시 답장도 하셨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권마가 저 큰 손에 더없이 조그마했을 붓을 들고 답장을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평소 서찰을 쓰는 사람이 아닐 테니, 무슨 말을 쓸까 끙끙 대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그는 딸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아버지였으리라.
“이번에 네가 북해로 가지 않았다면 안이가 위험했을 거라고 들었다.”
“제가 없었어도 잘 처리했을 겁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마 위험했을 겁니다.”
권마의 눈빛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지금은 제자이자 소교주가 아니라, 딸을 위기에서 구하기까지 한 제자이자 소교주였으니까.
이때가 기회다.
“사부님. 제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아버지가 좋습니까? 제가 좋습니까?”
권마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어렵죠?”
“아니, 너무 쉬운 질문이라서 놀랐다.”
권마는 다시 절벽을 올려다보았고, 나는 권마를 쳐다보았다.
과연 이 절벽보다 높고 단단한 충성심을 지닌 그에게서 아버지의 뜻을 알아낼 수 있을까?
내게 극악소마가 있다면 아버지에겐 권마가 있다.
권마를 내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무림일통의 꿈을 막기가 훨씬 쉬워질 텐데.
하지만 저 큰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눈앞의 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진다.
“아버지가 이상해지셨습니다.”
“교주님이?”
“극악소마님을 따로 만나고, 취마님과는 대작도 했습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권마는 무뚝뚝하게 내게 물었다.
“마교주가 마존을 만나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
“매번 하시던 일이셨으면 안 이상했겠죠.”
절벽을 향하던 권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뭐냐?”
“아버지 계획이 알고 싶습니다.”
“궁금하면 교주께 직접 여쭤봐라.”
그건 하책이었다. 아버지는 보란 듯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취마와 대작을 결정했다. 극악소마와 따로 만났다는 것 또한 내 귀에 들어올 줄 알고 계실 것이다.
처음 회귀해서 비무대 위에 섰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산공독에 당한 걸 알고 계셨다. 그런데도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셨다. 내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를.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이건 마치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 내가 이 수를 두었다. 이제 너는 어떤 수를 둘 테냐?
아버지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절반 이상의 마존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을.
이번에 아버지가 극악소마와 취마를 챙긴 것이 그 때문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의 야망을 지닌 한,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묻는다고 알려주실 분이면 고민도 안 했겠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 점만큼은 권마도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돌아오자마자 저 비상이었습니다. 왜 갑자기 안 하시던 마존 관리를 하시지? 혹시라도 무림일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신 건가?”
무림일통이란 말이 언급되었지만, 권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거 아십니까? 지금 사부님도 이상하시다는 것. 너무 침착하십니다. 마치 뭔가 다 알고 계신 것처럼요. 사부님이 알고 계신 것을 알려주십시오.”
권마의 입은 무거웠다. 그 무거운 입을 열기 위해 나는 솔직하게 내 상황을 밝혔다.
“혹여라도 제 예상이 맞을까 봐, 마존분들을 제 편으로 만들려는 중입니다. 지금까지 세 분을 뵈었는데 제 편이 한 분, 아버지 편이 한 분, 아직 결정하지 못한 한 분이 계십니다.”
권마가 주목한 것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한 표였다.
“결정하지 못한 마존이 누구냐?”
“도마 어르신입니다.”
권마는 잠시 뜻밖이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께서 너를 정말 아끼는구나. 그 성격에 결정을 못 내리고 계시니.”
맞는 말이다.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이도 저도 아닌 건 혈천도마 성격상 못 참을 일이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갈등하고 있다. 줏대 없다는 시선을 감수하면서, 오직 나를 위해서.
“사부님은 당연히 제 편이시죠? 하긴. 제자 편을 안 들면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제자는 둘이고 교주님은 한 분이시지.”
“제자이자 소교주이기도 합니다.”
“나중에 소희는 네 편을 들어주겠지.”
몇 마디 말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다.
그래서 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권마는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 명령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권마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교주의 명령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나는 그 무서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기에 사부님만큼은 반대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아버지가 사부님 말씀만큼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이것이 권마에게 부담되는 말임을 알고 있다. 마존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내 의지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난 극악소마의 말처럼 마존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내 마도와 함께하자고. 그래, 믿는다. 내 공격은 여덟 개로 나뉘어서 들어갈 것이라고.
“전쟁만큼은 안 됩니다, 사부님.”
권마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수련하자.”
“그 전쟁, 저와 벌이시려고요?”
내 농담에도 권마는 옷을 벗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권마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언제봐도 완벽한 권마의 몸. 고된 수련으로 다져진 크고 두꺼운 근육은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은 금강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권마의 가슴을 가르는 검상 하나. 예전에 그에게 저 상처가 왜 생겼는지 들었다. 본교에 뛰어들기 전, 지하 격투장에서 싸움을 하던 시절에 생긴 상처다.
승부 조작을 하는 흑도의 협박을 거절하는 바람에 생긴 상처, 지금은 손가락 하나로도 이길 수 있는 자들이 남긴 저 상처를 그는 수치스러워했지만, 나는 그에게 저 상처가 멋있다고 말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젊은 시절의 값진 용기가 만들어낸 상처였으니까.
처음 봤을 때는 그런 마음이 다였는데 오늘 다시 보니, 저 상처는 마치 권마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주는 상징처럼 보였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도 윗옷을 벗어 던지고 앞으로 나섰다.
“아! 전 언제 사부님 몸처럼 될까요?”
“바꿀 수 있다면 내 몸과 바꾸겠느냐?”
“…….”
쿠르릉.
꽉 쥔 권마의 주먹이 나직이 울었다.
“미리 고백하겠습니다. 근래 구화마공에 집중하느라 권법 수련을 등한시했습니다.”
매번 수련의 우선순위에서 밀렸기에 권마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그는 내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서두를 것 없다. 구화마공부터 확실히 익히고, 나중에 익혀도 충분하다.”
한바탕 비무라도 펼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권마는 평소와 같은 가르침을 내렸다.
우린 나란히 서서 벽력수라권을 펼치기 시작했다. 전쟁과 관련한 논쟁은 묻어두고, 수련에 몰입했다.
콰르르릉!
권마의 주먹이 허공을 찢기 시작했다. 나는 권마와 똑같은 동작으로 초식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일권 흑운수라를 펼치자 권마의 천둥소리와 내 천둥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제이권 벽력수라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주먹이 허공을 찢어발겼고, 천뢰수라는 무겁게 내리꽂혔다. 철각수라는 화려했고, 금강수라는 단단했다.
우린 그야말로 몸과 그림자처럼 똑같은 동작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동작에 담긴 무의는 완전히 달랐다. 권마가 깊은 바다라면 나는 아직 강물에 불과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염왕이 내리치는 벼락 염뢰수라를 끝으로 한차례의 수련을 마쳤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웃통 드러내고 권마와 하는 수련은 그 어떤 수련보다 화끈했다.
“주먹에 실린 힘이 달라졌구나.”
예전과 같은 힘을 썼음에도 내 내공이 늘어났음을 그는 알아차렸다.
이제 완벽한 반박귀진을 발휘하는 내 경지의 변화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만, 이 주먹에 담긴 힘만큼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에게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이번 일의 보답으로 빙궁주가 만극빙정을 내려주셨습니다.”
권마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만극빙정을 복용하려면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를.
“운이 좋아서 만년설과 역시 복용할 수 있었습니다.”
권마의 표정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어찌 운만으로 만년설과를 복용하고, 만극빙정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내공에서 한기를 일으킬 수 있느냐?”
만년설과의 기운이 온 혈맥과 장기에 녹아 있었으니.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최대한 차가운 기운으로 벽력수라권을 펼쳐보도록 해라.”
나는 홀로 벽력수라권을 다시 펼쳤다. 권마가 시키는 대로 내공에 차가운 기운을 담아 펼쳤다.
앞서 펼쳤던 느낌과는 완전히 달랐다. 같은 내공이라도 위력이 더욱 강했다.
“본래 벽력수라권은 극한의 내공일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만들어진 권법이다. 내 제자가 된 네가 만년설과와 만극빙정을 얻은 것은 벽력수라권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그러니 소홀히 여기지 말고 꼭 대성을 이루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권마는 다시 벽력수라권에 대해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예전 설산에서 내렸던 가르침과 또 다른 가르침이었다. 그때는 필요 없어서 생략했던 내용들, 그사이 얻은 새로운 깨달음까지.
권마는 정말 아낌없이 가르쳐주었다. 스승이 되면 진짜 스승이 되고, 아버지가 되면 진짜 아버지가 되는 사람, 권마는 이런 사람이다. 이 권마가 아버지의 마존이다.
권마의 가르침이 끝나자 나는 넙죽 그에게 절을 올렸다.
“사부께서는 이런 큰 가르침을 내려주시는데, 제자는 사부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권마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무뚝뚝한 그의 두 눈에 오래전 그날이 스쳤다.
“내가 교주와 어떻게 만났는지 알고 있지?”
지하 격투장의 흑도놈들에게 죽을 뻔했을 때 아버지가 그를 구했다. 권마는 아버지를 따라 본교로 와서 동권문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흑권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다시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나는 천마가 될 테니, 넌 내 권마가 돼라.
그날 권마는 아버지의 사람이 되었다.
“난 오래전에 이미 죽은 몸이다. 지금 살아가는 건 교주님이 덤으로 부여해준 삶이지.”
날 향한 권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나는 네 마도를 존중한다.”
그 강렬한 두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존중이 아버지를 향한 그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교주님의 마도를 따를 것이다.”
“그래서 이 무림이 피바다가 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교주님의 마도를 따를 것이다.”
권마가 진심을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권마는 이런 사람이었지.
그의 충성심은 설득이나 회유가 통하지 않는다. 어떤 협박도 통하지 않았고 그 어떤 인간관계도 파고들 수 없다.
한 번 충성을 바치면 끝까지 가는 사람.
물론, 그렇다고 저 말이 권마의 본심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가 어찌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하겠는가?
오히려 극악소마의 핏속에 그런 열망이 숨겨져 있을지 몰라도, 권마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문득 권마 옆에 극악소마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열망과 반대되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으로.
만약 반대로 인연이 되었다면 그들은 반대되는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줏대가 없어서 그렇겠는가? 그럴 리가! 충성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꺾을 수 있는 뜨거운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삼 극악소마에게 고마웠다. 그가 얼마나 내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지 권마의 모습에서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마도 고마웠다.
이렇게까지 충성으로 아버지를 지켜주고 있었기에.
“알겠습니다, 사부님.”
나는 정중히 대답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버지도, 권마도, 나도.
모두 오랜 세월을 거쳐 다져온 염원이자 가치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했던 말.
너의 마도를 존중한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내가 깨끗이 물러나고, 내가 진심으로 고마워해서였을까?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가 불쑥 말했다.
“교주께서 전쟁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느냐?”
순간 나를 움찔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뭔가 큰 게 이어질 것 같은 질문.
“그럼 아닙니까?”
그러자 권마의 입에서 오늘 만난 이후 가장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교주님은 이미 전쟁을 시작하셨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권마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말만 남기고는 성큼성큼 돌아서 걸어갔다.
그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나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 * *
동권문을 나온 검무극은 마가촌을 향했다.
술 생각도 났고 조춘배도 보고 싶어서였다.
“소교주님!”
정말이지 조춘배가 검무극을 반기는 마음만큼은 어떤 마존 못지않았다.
“주인장 잘 지내셨소?”
“저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주점 일 층에서 술을 마시던 손님들이 일제히 일어나 검무극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가촌 사람들은 검무극을 좋아했다. 검무극이 이곳 저잣거리에 황천각 지부를 만들고, 자주 풍류주점을 오가면서 이곳은 무림 그 어떤 마을보다 치안이 뛰어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천마신교 본단 앞에서 벌어지는 무인들의 횡포나 범죄가 무림맹 본단 앞에서 벌어지는 횟수보다 적다는 사실을.
검무극이 항상 앉는 이 층 자리에 앉았다. 조춘배는 우선 술과 간단한 안주만 가지고 따라 올라왔다.
“요즘 장사는 어떻소? 손님이 몰려들지 않았소?”
삼자 회담이 끝나고 풍류주점은 이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주점이 되었다.
회담이 열린 사실만으로도 유명해졌는데, 그곳에 천마와 무림맹주, 사도맹주가 남긴 글귀가 있다는 소문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풍류주점 앞에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가끔 벽을 구경하러 손님이 오긴 합니다만, 장사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무인들의 못 말리는 호기심이 천마신교 본단 앞이라는 높은 벽을 넘진 못한 모양이다.
정파나 사파 무인들은 아예 없었고, 간혹 오는 손님들도 대부분 마인들이거나 그들의 가족들이라고 했다.
하긴, 글을 남긴 사람들이 너무 거창해서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괜히 구경 왔는데 앉아서 지켜보던 마인이 벌떡 일어나며 ‘감히 그딴 불경한 눈빛으로 쳐다봤단 말이냐? 눈깔을 뽑아주마!’ 이렇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어찌 없겠는가?
“오히려 나중에 줄을 설지도 모르겠소.”
글을 남긴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그제야 이곳이 명소가 되리라. 그림도 화공이 죽고 나서 명화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되면 저도 없을 텐데요.”
짐짓 한숨을 내쉬는 조춘배였지만 그의 표정은 밝았다. 벽에 남겨진 글과 회담을 매일 한 번씩은 꼭 취객들에게 자랑하며 즐겁게 사는 그였다. 즐거우니 젊어지는 기분이었고. 그야말로 벽 때문에 회춘하고 있는 조춘배였다.
조춘배가 요리를 만들러 내려가고 검무극은 혼자 술을 마셨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벽에 남겨진 글들을 향했다.
무림맹주 진패천, 이곳에서 새로운 마도를 보다.
맹주가 그 글귀를 남길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그 아래 남겨진 글귀.
사도맹주 백자강, 풍류주점에서 제자의 춤사위를 보다.
백자강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날 그와 함께 춤을 추던 순간이 기억났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날의 일은 마교의 간사한 술책이 될 것이다. 자신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삼자 회담을 열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때 마음속에 권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주님은 이미 전쟁을 시작하셨다.
누구와 전쟁을 시작했다는 의미일까? 정파나 사파일까? 아니면 이번 배후 세력을 의미하는 걸까?
두 경우 모두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의 꿈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까.
한데 그런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면, 고월이 알아차렸을 텐데.
고월의 눈조차 속일 정도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 대상이 대체 누구일까?
이건 아버지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문제다. 권마가 특별히 나를 위해 알려준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몇 잔의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조춘배가 안주를 가져왔다.
“주인장, 오랜만에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어이구, 귀한 술 받습니다.”
조춘배가 황송하다는 표정과 시늉을 하며 검무극의 술을 받았다.
조춘배의 장점 중 하나는 친해졌다고 함부로 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아는 거다. 언제나 실수는 친해졌다고 방심할 때 저지른다는 것을. 어설픈 농담으로 인한 말실수도, 결국 친해졌다는 생각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그걸 알기에 그는 항상 일관된 모습을 보였다. 죽는 순간에 술을 받아도 그는 송구해 하면서 받을 사람이다.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은 사람인 거다.
“오랜만에 소교주님이 주시는 술을 마시니 너무 술맛이 좋습니다.”
“저도 한 잔 주시오.”
조춘배가 검무극의 술잔을 채워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고민 있으십니까?”
“고민 있어 보이오?”
조춘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술장사가 몇 년인데 모르겠는가? 우리가 병장기를 든 자세만 봐도 그 실력을 알아차리듯, 그는 술잔을 든 모습만 봐도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아맞힐 것이다.
“아버지에게 맞서다 보니 고민이 많습니다.”
그러자 조춘배의 입에서 ‘어이쿠’하는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괜히 물었지요?”
“저는 아무 말씀도 못 들었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사래를 치는 그에게 술을 한잔 더 따라주었다.
“그래도 우리 주인장은 제 편이라고 믿습니다.”
조춘배가 다시 어이구 앓는 소리를 내며 술을 받았다. 검무극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이제 천마와 대적하는 편에 서는 경험까지 다 해본다.
보통 평상시에는 딱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는 그였는데, 오늘 그는 한 잔 더 받았다.
“혹시 그때 그 일 기억나십니까?”
“무슨 일 말이오?”
“귀하신 분들께서 저 벽에 글귀를 남겨주셨을 때 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벽이 훼손되면 어떻게 할까,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할까. 정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걱정이었다.
“그때 소교주께서 조언해 주신 말씀 덕분에 마음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전전긍긍하던 조춘배에게 검무극은 이런 충고를 해줬다.
―모월 모시 누군가 이런저런 이유로 벽을 훼손하고 사라진다면, 그 또한 역사의 한순간이 될 거란 말씀입니다. 어쩌면 그게 더 재미있는 역사가 될 수도 있지요.
그게 조춘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신경쇠약으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또 안도하게 하는 것도 거창한 것이 작용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툭 던져진 말 한마디가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든다. 그 한마디가 두고두고 마음에 상처가 되어 사람을 괴롭힌다.
한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차라리 벽이 없어지면 그게 더 재미있다!
놀랍게도 이 말이 불안과 싸워서 이겼다.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인간이기에, 말 한마디에 치유도 되는 것임을 이번에 경험했다.
“그 말씀이 거짓말처럼 제 걱정을 지워줬습니다. 오히려 누가 저 벽 좀 안 훔쳐 가나, 일부러 그런 극단적인 생각도 하곤 합니다.”
조춘배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걱정했던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리 걱정했을까 싶을 정도로요.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마십시오. 다 잘 될 겁니다, 소교주님.”
거기에 그만의 방식이 보태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소교주님을 위해 특별 요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일층으로 내려가는 그를 보고 있으니 검무극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풍류주점이 주는, 저 조춘배가 주는 안도감이 있다. 그래서 이곳은 현실의 시공이환술 속 세상이기도 하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있을 때 풍류주점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대도를 등에 차고 이 층으로 올라온 사람은 바로 서대룡이었다.
“이상하게 왠지 여기 계실 것 같았습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저녁 수련은?”
“오늘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나 때문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 서대룡이 혈천도마에게 이번 일을 들었나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사부님이 대천산에 가신다고 오늘 쉬자고 하셨습니다.”
“대천산에는 왜?”
“이유는 말씀 안 하셨습니다.”
서대룡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이유야 삼라만상 모르는 게 없는 소교주님께서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히 알고 있다.”
장난으로 말했는데 알고 있다고 하니, 서대룡이 눈을 크게 떴다.
“아신다고요? 왜 대천산에 가셨는데요?”
“심란한 마음 정리하러 가셨다.”
대천산 정상에서 밤하늘을 보면 그 쏟아지는 별들은 정말 장관이었다. 아마 거기 서서 아버지와 나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리라.
“왜 심란하신데요?”
“내가 심란하게 만들었으니까.”
소교주와 사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두 사람이 관련된 일이니, 서대룡은 자연 신중해졌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래, 내 오른팔이니 너도 상황은 알아야겠지.”
검무극은 서대룡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서대룡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만약 제게도 선택할 결정권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럼 일대 이가 아니라 일대 삼이 되었겠지?”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대룡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소교주를 지지할 것임을. 교주를 거역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검무극을 지지할 것 같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람보다 안도감이 들었다.
검무극과 마존들과의 관계는 동등한 관계지만, 자신은 다르다.
검무극은 일개 조사관을 황천각주로 만들어주었고, 혈천도마의 제자가 되게 해주었다. 아니, 그 모든 걸 다 떠나, 우울하고 불만 가득하던 자신을 빛의 세계를 이끌어 주었다.
이런 검무극인데.
‘아무리 그래도 교주님을 거역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런 비겁한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에게 안도했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인데 비밀투표로 해야지요!”
이런 농담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해준, 자신이 고맙고 대견했다.
“그래서 이제 누굴 찾아뵐 겁니까?”
이제 남은 마존은 일화검존, 마불, 섭혼마존, 그리고 독왕이다. 과연 누가 소교주 편이 되어줄지 서대룡은 알 수 없었다.
“절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끄떡도 안 했으니.”
검무극이 술을 마시며 말했다.
“절벽을 타면서 독초라도 캐야겠지?”
* * *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려면 여러 방법이 있다. 조리에 맞는 말로 설득하거나, 마음으로 감동을 주거나, 아예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 가며 협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어떤 방법도 쉽게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
천독림에 도착했을 때, 항상 맞이하던 상선이 아니라 다른 독인이 나를 맞았다.
“소교주님, 상선께서 제게 안내를 맡기셨습니다. 가시지요.”
그를 따라 천독림을 걸어갔다. 독사가 나뭇가지 위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 수북이 쌓인 나뭇잎들 속에서 독충들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여기도 참 오랜만이구나.’
안내하는 독인에게 물었다.
“요즘도 마불께서 자주 오시나?”
“네, 자주 오셔서 약초를 캐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독왕과 마불.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인데. 나와 셋이서 함께 약초를 캐던 인연이 그들 두 사람의 우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독왕과 마불 중 예측이 쉬운 쪽은 마불이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형의 사람이다. 무엇보다 형의 의견이 그에게 영향을 끼칠 텐데, 안타깝게도 형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리가 없다. 모르긴 해도 마불 역시 아버지를 따를 가능성이 컸다.
설령 형이 아니더라도 권력에 대한 야망이 컸던 마불이다. 전쟁을 하자는 쪽이면 하자는 쪽이지, 평화에 손을 드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독왕만큼은 반드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독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상선은 독왕의 거처 앞에 서 있었다.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있으면서 왜 수하를 보낸 것일까?’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독왕께서 중요한 독 제조라도 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상선에게서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지금 교주님께서 와 계십니다.”
아버지가 와 계신다고?
아버지의 무림일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독왕.
아버지는 한발 먼저 그를 만나러 와 계신 거다.
그럼에도 걱정보다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들었다.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달랐다. 여태 나를 시험하신 거라면, 이번은 나와 승부를 보시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를 그만큼 인정한다는 의미이리라.
그렇다면 아버지와의 승부를 즐겨야지.
이 모든 과정은 아버지와의 추억이자 내 인생이니까. 항상 다짐하는 거지만, 오직 복수만을 위한 인생은 살지 않을 거다. 그런 인생은 한 번이면 족하다. 이번 삶에서는 즐길 거다. 아버지와의 이런 승부까지도.
나는 건물 안에 내 목소리가 들리게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아들 왔습니다! 저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상선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세상에 천마를 상대로 이렇게 소리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 정말 소교주님은 못 말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상선의 표정을 보고 있는데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의아한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독왕이 말해야 했다. 그가 아버지의 뜻을 대신해서 ‘소교주를 안으로 모시게.’라고 말해야 할 상황인데, 아버지가 직접 들어오라는 말을 한다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왜 아버지가 독왕 대신 대답했는지.
독왕은 독을 제조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장면이기에 나는 멍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독왕 앞에는 그가 독을 제조할 때 사용하는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떠 있는 십여 개의 병들.
그 병들을 허공에 띄워둔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독의 영향권에서 멀찌감치 벗어난 곳에서 허공섭물로 독 제조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입구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흑, 조금만 더 주십시오!”
쪼르르륵.
“녹, 멈춰주시고!”
그의 말대로 허공에 떠 있는 검은색 종이가 붙은 병에서 액체가 부어졌고, 녹색 종이가 붙은 병은 안에 든 것을 붓는 것을 멈췄다.
“이번에는 청, 적, 자를 동시에 부어주십시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청색 병과 적색 병, 자색 병이 동시에 기울어지며 안에 든 액체를 부었다.
치이이익.
섞인 독액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말을 하면서도 독왕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피어오르는 독연 속에서 나무막대기로 독액을 저으며 다른 독물을 추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냥 봐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와 독왕 모두 최고의 절기와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청, 잠깐 멈추시고! 대신 갈입니다.”
이번에도 독왕의 주문대로 청색 병이 멈추고 갈색 병이 움직였다.
아버지가 허공섭물로 물건을 다루는 경지는 그야말로 정교하고 정확했다. 병에 생명과 의지를 부여한 것처럼 느껴졌다.
독왕은 떨어지는 액체를 유심히 쳐다보며 그에 맞춰서 가루를 섞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독왕 뿐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이 작업을 그는 혼자서 했다.
이것을 붓고, 저것을 섞고. 그야말로 위험하고 복잡한 과정이 진행되던 그때.
“다 멈춰주십시오!”
독왕의 외침에 허공에 떠 있던 병들이 일제히 멈췄다.
들어가선 안 될 한 방울이 튀어서 안으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 한 방울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그 한 방울을 허공섭물로 막은 것이다.
찾아온 정적.
액체 한 방울이 허공에 떠 있자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시 그것이 허공을 날아서 원래 있던 병으로 들어갔다.
비로소 독왕의 독 제조가 끝난 순간이었다.
독왕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오직 독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독을 제조한다는 사실보다, 그는 독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에게 ‘예의상 교주와 함께’ 이런 마음은 애초에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독왕이 배합된 독을 꺼내서 냄새를 맡고 몇 가지 시험을 했다.
지금 독왕은 자신만의 세상에 있을까, 아니면 현실에 있을까? 항상 독왕이 어디에 서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확인을 마친 독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기쁨에 찬 얼굴로 말했다.
“성공입니다.”
독왕은 정말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배합되었습니다. 혼자서 계속 실패했었는데 교주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성공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독왕의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그는 독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흔쾌히 받는다. 마불에게 독초를 캐달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그렇고.
혼자만의 세상에 잘 빠지는 사람이라면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릴 법도 한데. 그는 뜻밖에 그런 아집이 없다.
그래서 독왕이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는 단정 지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어? 언제 왔어?”
독왕이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 괜히 모른 척하는 게 아니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독 제조에만 집중했던 그였다.
“아까 왔죠.”
“만사절독(萬死絶毒) 제조에 성공했다.”
“감축드립니다.”
만사절독은 독왕이 만들어낸 신독(新毒)으로 그간 수십여 차례 제조에 실패했던 독이었다. 상선이 함께 도왔지만 앞서 보다시피 독을 배합하는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워서 제조가 쉽지 않았는데 그걸 아버지와 함께 성공한 것이다.
“아쉽습니다! 제가 도와드려서 성공했어야 했는데.”
“그럼 오늘도 또 실패했겠지.”
이것이 아버지에게 전하는 독왕의 감사 인사였다.
나는 아버지께 뒤늦은 인사를 했다.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듯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잊어선 안 된다. 이곳에 들어오게 한 사람은 아버지라는 걸. 아버지는 내게 독왕과 독을 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거다.
“여기 와 계신 줄 몰랐습니다.”
“지나가다 들렀다.”
아버지, 그렇게 들르실 때마다 모두의 운명이 팍팍 바뀐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혹여라도 무림맹에 들러야겠다는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커다란 바둑판 위에 아버지와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
독왕과의 국면에서 아버지가 이번에 펼친 수는 독 제조의 수.
과연 내가 오기 전에 아버지와 독왕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또 나를 부탁하셨을까? 아니면 독왕만큼은 아버지의 사람으로 확실히 못을 박으려 했을까?
“북해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그랬느냐?”
내 인사에도 독왕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독을 경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독에 심취해 있었다. 아버지가 계셔서 그나마 대답하고 질문이라도 던지는 거였다.
“북해에서만 자라는 독초는 구해왔느냐?”
“그게 노력은 했지만…….”
실제로 돌아오는 길에 틈틈이 독초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선물로 가져올 만한 독초는 발견하지 못했다.
“저만 보면 독초들이 부끄러워서 다들 숨나 봅니다. 이게 다 아버지 때문이죠. 아버지를 닮아 제가 너무 잘 생겼잖아요.”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비웃음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버지 그렇게 자주 웃어주십시오. 아직은 승부보단 시험을 던져주십시오.
“아버지, 다음에 독왕님과 함께 독초 캐러 놀러 가시죠. 설마 아버지까지 채집꾼으로 이용하진 못할 겁니다.”
내기를 이용해서 마불을 채집꾼으로 삼았다는 농담으로 이어가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독왕에게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언제였지?”
뜬금없는 질문에 독왕은 잠시 기억을 떠올리더니.
“사 년 칠 개월 전입니다.”
“벌써 그리되었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설마 그 사 년 칠 개월 전이 두 분이 함께 독초를 캔 날은 아니겠지요?”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설마가 사실이었음을.
아버지가 종종 나를 놀라게 하시지만,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아버지와 독왕이 함께 독초를 캐는 모습은 잘 연상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독왕은 정확히 그 마지막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도 귀한 순간이었다는 의미. 독왕을 내 편으로 만들기가 절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문득 극악소마의 말이 떠올랐다.
―설득하기 어려운 건 교주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왠지 제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그러자 독왕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독 배합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다시 하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그때가 언제였지?’라고 묻는다면 독왕은 오늘 이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며 대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기 전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수는 끝났으니 이제 네 차례다.
아버지의 자신감이 느껴졌다.
견제도 강요도 없는 아버지만의 방식에서 여유는 강함에서 나온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아버지가 거처를 나가시자 곧장 독왕에게 물었다.
“독 제조를 도와달라고 먼저 부탁하신 겁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오신 겁니까?”
“감히 그럴 수는 없지. 마침 독을 제조하려는데 교주님이 기별 없이 오셨다. 제조를 미루려 했는데,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지.”
처음부터 독 제조에 아까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진 않았을 테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을 거다.
“오늘 아버지와 무슨 말씀 나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설마 한마디도 안 하셨다는 겁니까?”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서 독 제조만 도와주시고 그대로 떠나신 거였다.
온갖 말로 독왕을 설득한 것보다 더 강력한 한방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놓고 가버리신다고요? 제가 어떻게 이기라고요?
지금 독왕에게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 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것이다.
내 백 마디 아부도 한마디 말도 없이 독 제조를 돕고 간 아버지의 이 묵직한 한방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오늘은 저도 가보겠습니다. 작전상 후퇴 중입니다.”
그래도 그냥 갈 수는 없어서 오늘 내가 온 이유가 단지 인사만을 위함이 아님을 흘렸다.
다소 뜬금없는 말이었을 텐데, 독왕은 그게 무슨 말인지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오고, 내가 오고. 분명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낀 것이리라. 독왕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붙잡았다.
“기왕 왔으니 내 일이나 좀 도와주고 가.”
“말씀만 하십시오.”
“이 독부터 담자.”
독왕이 상자를 가져왔다. 안에 십여 개의 병이 들어 있었는데, 상자는 병들이 깨지지 않게 보관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특별 제작된 이 병들은 독이 새어나가지 않게 완벽하게 밀봉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병이었다.
“제가 담겠습니다. 쉬십시오.”
독왕은 조금 떨어진 책상에 걸터앉아 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나는 병에 만사절독을 나눠 담았다. 독은 정확히 열 병에 담겼다. 애초에 딱 이 한 상자 분량의 독을 제조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독 제조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모자랐거나 넘쳤겠지.
이 독으로 몇 명을 죽일 수 있을까? 수백 명? 수천 명?
“그거 챙겨서 따라와라.”
나는 독이 든 병을 다시 상자에 담았다. 그 상자를 들고 독왕을 따라나섰다.
독왕은 천독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이곳에서 독초를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한데 오늘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독왕은 없는 길을 만들며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천독림에 이런 곳이 있었나?
마치 천독림 안에서 새로운 구역에 들어온 것처럼, 그곳에는 바깥보다 더 지독하고 위험한 독을 지닌 온갖 종류의 독물들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구역은 늪지대였다. 평범한 늪이 아니었다. 사람이 빠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늪이었다.
그 늪지대에 운무처럼 뿌려진 안개에도 독이 섞여 있었다.
그야말로 이곳은 사람이 지킬 필요도 없었고, 진법을 펼칠 필요도 없었다.
만독불침이나 독왕이 아니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을 장소.
나는 독왕이 밟는 돌과 나뭇가지를 밟으며 늪을 통과했다.
츠츠츠츳!
사방에서 괴이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렇게 가다가 독왕은 멈춰서 독물들의 상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 독물이 어떤 것이며 지금 상태가 어떤지 소년 같은 얼굴로 내게 설명해 주었다. 저놈은 지금 짝짓기를 못 해 화가 났다거나, 저놈은 지금 어디가 아프다거나.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을 그는 알아보았다.
늪을 지나자 동굴이 있었다.
동굴 속에도 독물들은 가득했다. 우리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동굴 역시 보통의 고수는 한 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동굴 끝에 육중한 철문이 있었다. 독왕이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커다란 창고였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장내에 펼쳐진 광경에 압도되었다.
그 너른 공간에 병들이 가득했다. 수백 개의 장식대가 있고, 그 위에 병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병에 든 것이 모두 독이라는 것을. 수천 개가 넘는 엄청난 양이었다.
“본교의 독이 모두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이곳은 천독림의 극독을 보관하는 비밀창고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세상에 나가게 될 독이다.
독왕은 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가져온 독은 저기 끝에 넣어둬라.”
독왕이 가리킨 곳에 만사절독을 일렬로 세워서 보관했다. 독왕은 병에 독의 이름을 적었다. 옆에 세워진 병에도 각자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사독(蛇毒), 광독(狂毒), 혈독(血毒), 단장독(斷腸毒), 참독(斬毒), 단혼독(斷魂毒), 멸독(滅毒), 음양독(陰陽毒), 무영독(無影毒), 시독(屍毒), 고독(蠱毒), 실혼독(失魂毒)…….
그야말로 셀 수도 없을 온갖 독이 다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서운 독이란 독은 여기 다 있었다.
특이하게도 독의 배치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강력한 독이 있을 줄 알았는데, 입구 바로 옆에 무형지독이 든 병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강력한 것일수록 빨리 꺼내 써야지, 이런 느낌을 주는 배치였다.
“여기 있는 독들이 모두 세상에 풀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등 뒤에서 독왕이 대답했다.
“다 죽겠지.”
단지 과장만은 아닌 대답이었다.
독왕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편이냐, 내 편이냐를 따지기 전에, 나는 이것부터 물었다. 그를 만난 이후 처음 하는 질문이었다.
“독왕님은 왜 독을 만드십니까?”
독왕에게 왜 독을 만드냐는 질문만큼이나 도발적이고 무례한 질문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 사이가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면 당장 이 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독왕에게 무슨 그딴 질문이냐?
혹은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는 너는 왜 검술을 익히느냐?
다행히 독왕은 내 질문이 아무 생각 없이 내던져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
독왕은 대답 대신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장식장 사이로 들어갔다.
“독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가 바라보는 이 통로 사이에 있는 독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천독림에 대대로 내려오는 독이겠지만, 독왕이 모은 독도 많을 것이다. 아까처럼 새로 만든 독도 많이 있을 테고.
“왜 아까처럼 그렇게 온 열정을 다해, 독을 만드시는 겁니까?”
이 질문은 원론적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마존으로서 대답할 수도 있고,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대답할 수도 있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는 질문.
나는 독왕을 돌아보며 덧붙여 말했다.
“평생 독을 위해 헌신해 오셨잖아요? 독은 독왕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순간 독왕의 눈빛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작은 격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강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을 거고, 무서운 사람이란 말도 수없이 들었을 테고.
하지만 독을 위해 헌신해 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 말이 부담스러웠을까? 독왕의 시선이 내가 바라보는 반대쪽 독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전히 독왕은 왜 독을 만드느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것 역시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하는 질문이었다.
“아니면 언젠가 독으로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싶으신 겁니까?”
이것이 바로 회귀 전 그의 인생이었다.
이번 대답은 빨랐다. 독왕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야 한다면.”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그럴 일 절대 없다는 대답보다 차라리 이런 대답이 피바다와 먼 대답이라 생각하니까. 자결하는 사람은 어제 울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 웃고 있던 사람이니까.
그가 또 그런 일을 저지를까 걱정 안 되냐고? 전혀. 같은 사람이라도 처한 상황이나 환경, 주위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회귀 전의 독왕과 지금의 독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아니,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제가 괜한 질문을 드렸나 봅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멍하게 독병들을 쳐다보던 독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긴 감히 누가 독왕에게 왜 독을 만드느냐고 물었겠는가?
그리고 그가 대답하지 못한 건 내 질문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다.”
젊은 시절의 나였다면 믿지 않았을 거다. 괜히 멋있는 척하는 소리라 여겼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경지에 이르면 이를수록, 오히려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하셨겠죠. 지금 생각이 안 나시는 거고.”
“그래, 언젠가 했겠지. 한데 그 언젠가가 기억나지 않는다.”
“삶에 떠밀려 살아가는 것은 독왕님조차 피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독왕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가 걸음을 옮겨 장식대에서 오늘 만들었던 만사절독이 든 병을 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이렇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왜 이걸 만들었지?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민이 깊어져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대신 답을 말했다.
“본교를 지키기 위해서죠.”
독왕에게는 명백한 오답이었다.
“교주님이 계신 데, 내가 왜 지키나?”
이제 그에게 내가 찾아온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정파나 사파인들은 아버지보다 독왕님을 더 무서워할 겁니다.”
그 공포심의 근원에는 이런 두려움이 있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 두려움.
상대가 누구든 싸우다가 죽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독왕과의 싸움은 그냥 숨 한 번 잘못 쉬면, 물 한 모금 잘못 마시면 끝이다.
독왕이 가장 강력한 전쟁억제력인 이유는 어쩌면 대량 살상에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개죽음을 당하기 싫다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그런 질문을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돌아와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독왕에게 전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시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는 말까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독왕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에 나를 데려온 것도, 오늘 내가 천독림을 찾아온 이유가 따로 있었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교주님의 꿈을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너만은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니냐?”
“잘생기게만 낳아주신 게 아니라, 고집까지 물려주셨나 봅니다.”
“교주님의 길을 막겠다?”
아버지께는 너무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독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독들이 이곳에 영원히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거냐?”
“그 반대죠.”
“반대라고?”
나는 앞에 놓여 있는 독병을 천천히 만졌다. 병에 붙은 종이에는 염백절명독(炎魄絶命毒)이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몇 방울만 떨어져도 독이 주변으로 불길처럼 번지며 주위의 생명을 모두 앗아가는 무서운 독이다.
“이 독들이 이곳에 있을 때 독왕님의 공포와 위엄이 계속 유지될 테니까요. 독왕님이 무림을 향해 하독하는 순간 공포는 분노가 될 겁니다. 위엄은 원망으로 덮일 겁니다.”
독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독공의 정수는 하독이 아니라 해독이다.”
예전에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역시 자신의 후계자에게 이렇게 가르쳤으니, 분명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번 독패자의 독을 해독해서 모두를 구해주셨을 때, 독왕님은 너무 멋지셨습니다.”
이 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내 진심을 그대로 전했다.
“아버지의 마도에서 하독하는 독왕님이 아니라 부디 제 마도에서 해독하는 독왕님으로 살아주십시오.”
오늘 말없이 독 제조만 돕고 가신 아버지에게 졌다고 예감했기에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했다.
“무례한 요구, 죄송합니다.”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마음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는 강요였으니까.
그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던 독왕이 불쑥 말했다.
“너는 한 가지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 한 가지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교주가 나를 앞세워 무림일통을 하려는 줄 아느냐?”
“아닙니까?”
“사 년 칠 개월 전, 교주와 독초를 캐러 갔을 때, 교주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
독왕은 그날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독으로 무림일통을 하진 않을 거네. 내 무림에 독공은 필요 없네.”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을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독공을 싫어한다는 것은 알지만, 독왕에게 직접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섭섭하지 않으셨습니까?”
“섭섭했지. 한데 기분 나쁘진 않았어. 독공을 싫어하면서 겉으로 아닌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마존을 대하는 방식.
그런 두 사람이 오늘 한마디 말도 없이 함께 독을 제조한 것이다.
아마 모르긴 해도 두 사람만이 통하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독왕은 그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다시 전했다.
“내게 자네는 무림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본교를 지키는 사람이네. 내 무림일통이 실패하더라도, 자네 때문에 본교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네.”
그것이 아버지가 정한 독왕의 자리, 바로 최후의 보루였다.
“나는 교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그날 약속했네.”
나는 이제야 회귀 전 인생에서 독왕의 최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교주전이 휩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팔마존은 복수를 포기했다.
지금까지는 화무기의 압도적인 무위에 눌려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죽음보다 삶을 선택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배신이라 여겼고, 어차피 지는 싸움 이해도 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날 내가 모르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을 수도 있을 거라고. 모두가 복수를 포기해야 했을 상황이.
독왕만큼은 그냥 있지 않았을 거 같았으니까. 한데 그는 복수하지 않았고, 이후 참극을 일으키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마 우린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을 텐데, 그 상념을 독왕이 깼다.
“독을 좋아해서다.”
앞서 물었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이 간단한 대답을 그렇게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이 답이 생각나지 않아서 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정말 독을 좋아하고 있나? 혹시 그 마음 다 잊고, 그냥 습관적으로 독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이어진 여러 질문의 답을 찾느라 대답하지 못한 것이리라.
“당연히 독을 좋아해서죠.”
내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는 투로 말하자, 독왕이 나를 쳐다보았다.
“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몇 시진이나 쪼그리고 앉아서 독충이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잖아요? 그런 사람이 독사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진 않을 겁니다. 독왕님은 정말 독을 좋아하십니다. 그 독에 대한 사랑과 헌신 끝에 뭐가 있는지 제게 꼭 보여주십시오. 꼭 알려주십시오.”
독왕이기에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일 것이다. 독왕도, 아버지도, 회귀한 나도. 아니, 나를 회귀시켜준 그 노인조차도 듣고 싶은, 들어야 하는 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도 꼭 들어야 하는 말, 나는 지금 그 말을 독왕에게 했다.
독왕이 나를 보며 웃었다. 나를 향한 그의 눈빛에 기쁨과 고마움이 서렸다.
“이 좋은 분위기를 놓칠 수는 없죠. 자, 그럼 독왕님은 아버지 편입니까? 제 편입니까?”
이 물음에 대답은 금방 나왔다. 독왕이 창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 * *
명쾌한 답을 준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나는 교주님의 뜻을 따를 거네.”
그녀는 고민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연무장에서 검술을 연마하며 상황 설명을 듣더니, 마지막 초식을 날리며 저 말을 한 것이다.
한차례 수련을 마친 그녀는 연무장 가장자리에 놓아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안 본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화장하지 않는 그녀였는데 이젠 머리카락이 백발이었다.
“이게 원래 꾸미지 않은 내 머리라네.”
일화검 검집에 새겨진 붉은 동백꽃과 그녀의 머리카락이 대조되며 멋을 자아냈다.
“검존님은 갈수록 멋있어지십니다!”
“역시! 자네는 그렇게 말해줄지 알았네.”
어디 달라진 것이 외모뿐이겠는가? 한 단계 올라섰던 무공 경지는 또 다른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네 칭찬은 고맙지만, 그래도 나는 교주님의 뜻을 따를 거네.”
예상한 바였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였으니까.
만약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남은 마존은 섭혼마존과 마불이었다. 젊은 마존인 섭혼이 내 편이 되어준다 해도 마불이 아버지를 따르면 이미 반이 아버지를 따르게 된다. 독왕이 어느 편도 아니라고 했으니, 혈천도마가 내 편을 들어도 사 대 삼이다.
“너무 하십니다! 잊으셨습니까? 저 검존님 비무친구입니다.”
일화검존이 미안함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와 내가 많이 친해졌지?”
“네.”
“내가 얼마나 자네에게 고마워하는지도 알지?”
“압니다.”
“아니, 자넨 모를 걸세.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그렇지만 이 말은 해야겠네.”
일화검존이 이번 일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정말 생각지 못한 말이 그녀에게서 나왔다.
“나는 교주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봐 걱정되네.”
나와 친해진 건 친해진 거고, 그녀의 신념은 별개의 문제였다.
“교주님이시라면 무림일통의 대업을 이루실 수 있으리라 믿네. 자네도 알다시피 교주님은 정말 뛰어난 분이시니까. 본교의 숙원을 이룰 기회가 왔는데, 이 기회를 놓친다면 본교의 후인들은 두고두고 이때를 아쉬워하겠지.”
어쩌면 그녀가 이렇게 피나는 수련을 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무림일통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네 같은 아들이 나온 것은 교주님에겐 시련이라 볼 수 있네. 큰일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른다. 그 운명이 적용된 거지.”
내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나를 속이지 않고 솔직히 말해주는 것, 그녀는 그것으로 미안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부디 교주님이 자네라는 시련을 넘어서시기를 바라네. 그래서 대업을 이루시길 진심으로 바란다네.”
일화검존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네.”
나는 미소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다음 찾아뵐 때는 비무친구로 오겠습니다.”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일화검존이 뜻밖의 말을 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내가 볼 땐 이 승부, 지금 자네가 이기고 있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그녀에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는 검을 뽑아 들며 다시 수련에 돌입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교주님 편이라네.”
오랜만에 서환진을 찾았다.
사방에 놓여 있는 탑과 기괴한 장식들은 물론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화원의 꽃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귀기가 느껴졌다.
귀기는 여전했지만 지나가다 만나는 귀술사들은 예전처럼 적대적이지 않았다. 소교주를 대하는 예의로 정중히 인사했다.
안내하는 귀술사를 따라 달팽이 껍데기처럼 지어진 집들 사이를 걸었다.
너무나 요사하고 현란했기에 어지간한 고수가 아니라면 어지러워서 눈을 감고 걸어야 했다.
그 길의 끝에 원뿔 모양의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섭혼마존의 거처다.
벽과 천장, 바닥까지. 빙글빙글 도는 문양이 가득한 방에서 섭혼마존이 나를 맞이했다.
“소교주님, 오셨습니까?”
그녀의 두 눈에 흐르는 귀기는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강렬해져 있었다.
“이곳에서 뵙는 건 처음인 것 같소.”
“괜찮으십니까? 불편하시면 나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방의 어지러운 문양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흐트러졌다.
그녀는 혹시라도 내가 불편할까 봐 신경을 써주는 것이다. 물론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으니, 기우에 불과했지만.
“전대 마존이 있을 때 이곳은 메스껍고 어지러웠소. 한데 지금은 아름답고 신비롭소.”
그녀가 잘해 나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젊은 나이에 마존에 올랐지만 이미 서환진을 완전히 장악했고, 귀술사들에게 새 마존으로 인정도 받고 있었다. 남은 것은 독문무공의 대성을 이루고, 마존으로서의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이리라.
“무슨 일로 찾아주셨는지요?”
그녀는 다른 마존과들는 다르다. 아직 너무나 젊었기에 아버지의 마존이라기보단 나의 마존에 가까운 사람.
따라서 이 자리야말로 다음 세대 천마와 마존이 마주 선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금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어리다고 빼거나 보태지 않았다. 한 사람의 마존으로 존중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내 편에 선 마존은 딱 한 분뿐이시오.”
그게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었는데, 놀랍게도 섭혼마존은 그 한 사람을 알아맞혔다.
“혹시 그분이 극악소마님이십니까?”
“어떻게 알았소?”
그녀는 삼자회합 때 극악소마가 마존들과 떨어져 홀로 외롭게 있는 모습에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었다고 말해주었다.
“지난 삼자회합 때 소마님께서 저를 부러워하셨습니다. 제가 젊어서 소교주님을 오랫동안 모실 수 있다고요. 그때 소교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소마님이 아니신가 추측한 겁니다.”
그녀는 그날 주고받았던 대화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소마님에게 뭐라고 말씀드렸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하셨소?”
“소마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좋아하시는군요.”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나를 대할 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 있던 그녀가 이제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자리가 안정되고 자신감이 생겼다는 의미.
다른 마존들처럼, 아니,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그녀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소교주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마존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이번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소. 마존께서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오.”
그러자 섭혼마존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정말 내 도움 필요 없어요? 하는 장난이 섞인 눈빛이었다. 물론 아니다. 그랬다면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아니오. 마존의 도움이 절실하오.”
내 솔직한 대답에 섭혼마존은 미소를 지었다. 소리 없이 웃는 그녀의 미소는 이제 제법 귀기와 어울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상황은 불리하오. 심지어 아버지의 눈 밖에 날 수도 있소.”
그것이 다른 마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교주님의 눈 밖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눈에 들어가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 아버지에겐 아직 미완의 마존으로 여겨질 테니까.
그녀는 정확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저라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아버지의 눈 밖에 서 계시지만, 제게는 앞에 서 계십니다.”
그 말로 충분했다. 섭혼마존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귀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본교의 귀신은 모두 소교주님을 따를 겁니다.”
* * *
마불은 황금대불과 조금 떨어진 작은 공터에서 석상을 만들고 있었다.
정과 망치를 이용해서 돌을 깎아내는 마불의 모습은 잘 어울리면서도 또 낯설기도 했다.
주위의 건물이나 석상, 탑 등은 모두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는데, 지금 마불이 만드는 석상은 평범한 돌이었다.
“삼 대 이로 제가 이기고 있습니다.”
마불에게는 허풍부터 쳐보았다. 물론 통하지 않았다.
“안 본 사이에 거짓말만 늘었군.”
“마불님께서는 여전히 예리하시고요.”
이 말이야말로 거짓말이었다. 마불은 한결 더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마음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일까?
난 잠시 서서 석공이 된 마불을 지켜보았다. 그는 약초만 잘 캐는 게 아니었다. 석상을 깎는 손재주도 훌륭했다.
“한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쪽이 둘이라는 걸요.”
“둘도 많으니까.”
그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어찌 부정하겠는가? 상대가 아버지인데.
“이번 일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존분들을 다 만나 뵙고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의도하신 건지도 모르겠네요. 네 주제를 알고 현실을 자각하라!”
땅! 땅!
망치질이 잠시 멈추었다. 망치 너머로 마불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과연 교주가 자신을 지지하는 마존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려고 이 무대를 만들었을까?”
마불은 무대란 표현을 썼다. 다시 말해 그는 아버지가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었다.
“제가 마존들과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요?”
마치 틀렸다는 듯, 마불의 망치질 소리가 경쾌했다.
“아니면 이번 기회에 아버지가 마존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보시려는 걸까요?”
역시 오답이라는 듯, 망치질 소리만 땅땅 울려 퍼졌다.
과연 마불은 이번 일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한발 물러나 득도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한때 그는 팔마존 중 가장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알려주십시오. 아버지가 왜 이 무대를 만들었는지.”
마불이 망치질을 멈추고 석상을 살폈다. 균형이 맞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이런 대화를 나누며 어찌 일에 집중할 수 있었겠는가?
마불이 망치를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돌아섰다.
“우릴 그 무대에 관중으로 앉히려고.”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마존들을 관중으로 앉혔다면?
“설마? 그 무대에서 저와 싸우시겠다는 의미입니까?”
마불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권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주님은 이미 전쟁을 시작하셨다.
권마가 말한 아버지의 전쟁이 나와의 전쟁을 의미했던 거였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 않습니까?”
그러자 흘러나오는 뜻밖의 한마디.
“교주는 자네에게 져주지 않을 거야.”
마불 역시 혈천도마와 같은 시선으로 아버지를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적이 있을 때 또 다른 적을 만드는 걸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아닙니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렇겠지.”
“그럼 아버지에게는요?”
마불이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천마전을 바라보았다.
“교주는 한 번 뽑은 검으로 모두를 베려는 거다.”
“마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네를 설득해내고, 하나로 뭉쳐진 힘으로 배후를 처단하고, 나아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그 검으로 무림맹과 사도맹까지 베려 하는 거지.”
내 입에서 ‘그건 아닐 겁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빈 태사의.
항상 그 자리를 지키시던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모습이었다. 그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천마검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보다 더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있지.”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강렬하게 빛났다.
“본교가 이렇게 강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만약 마불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결과적으로 아버지를 움직인 것은 나다.
* * *
“소교주님!”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고월이었다.
마불을 만나고 나온 나는 그길로 고월이 있는 곳을 향해 쾌속보로 달렸다. 정말이지 바람처럼 달려왔다.
내가 북해에 가 있던 사이에도 고월은 본교와 외부를 오가며 은월을 더욱 단단히 다지고 있었다.
오늘 도착한 지부는 쾌속보로 한나절을 달리면 도착할 거리에 있었다.
“바쁘실 텐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가 앉아 있던 책상에는 여전히 서류가 가득 쌓여 있었다.
“무슨 일이 저렇게 많나? 다 수하들 시키라니까.”
“수하들 시킵니다.”
“자넨 그냥 차나 마시고, 잔소리나 하고.”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에 오늘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고 군사. 자네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자네 건강까지 걱정하게 하지 마.”
호위는 풍천교주가 보낸 고수들이 지킨다는 걸 알았으니 걱정하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오죽 잘 고월을 챙겼겠는가?
하지만 건강만큼은 잔소리를 해야 했다.
“마존들 만나시느라 바쁘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역시 고월은 본교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자네 보고 싶어서 왔지. 자, 잠깐이라도 바람 좀 쐬자고.”
고월과 함께 집무실을 나왔다. 뒷마당을 나오자 곧장 저잣거리로 이어졌다. 우린 사람들이 오가는 그곳을 나란히 걸었다.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 말게. 앉아 있는 만큼 수명이 준다는 말도 있잖나? 반 시진에 한 번이라도 일어나서 걷게.”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면서 잔소리가 너무 많지?”
고월이 부정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알고 있다. 고월이 풍천교주를 얼마나 잘 놀리는지. 만약 이 잔소리를 풍천교주가 했다면 그의 반응은 또 달랐을 것이다.
“교주에게는 연락 자주 오나?”
풍천교주는 제자이자 당대 풍천교주를 위해 풍천교에 남았다. 한 두어 달 있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제법 오래 있었다. 제자와의 관계가 회복된 상황이니, 가르치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다.
“가끔 전서가 옵니다. 제자 흉이 절반입니다.”
“나머지 반은 내 욕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린 함께 웃었다.
“전서 보내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는 걸 볼 때, 교주도 답답한 모양입니다. 멀지 않아 돌아올 거라 생각됩니다.”
“풍천교주도 보고 싶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가 찾아온 본론을 밝혔다.
“이번에 마존들을 만나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들었었다네.”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내게 아버지의 꿈을 꺾을 자격이 있을까?”
마존들은 다들 아버지의 염원을 이해하고 있었다. 일화검존처럼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혈천도마의 고민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 어디 극악소마라고 다르겠는가?
“그럼에도 막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을 테니까.
하지만 이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독왕이 ‘독이 좋아서다’ 이 말을 답하기 어려웠듯, 나도 쉽게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네가 모든 무림인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런 사람이냐?
당장 이 물음부터 마음에 떠올랐으니까.
원래라면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회귀한 목적은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리고, 죽어야 할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니까.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그게 누가 될지 모른다.
마존 중 누군가가, 이안이 될 수도, 서대룡이 될 수도 있다. 눈앞에 있는 고월이 될 수도 있고, 풍천교주가 될 수도 있다. 조춘배가 될 수도 있고, 풍류주점의 손님들이 될 수도 있다. 이 일은 탁자가 부서지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아버지를 위한 마음도 있다.
회귀 전의 인생에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여러 인생을 보았고, 극한의 외로움도 느꼈다. 참기 힘든 고생도 많이 했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나는 복수를 위해 그 모든 일을 다 참아냈다.
복수란 이런 거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이런 복수심을 만들어 내는 행위다. 몇 마디 상처가 되는 말에도 그 상대를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이 일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
죽은 이들의 친구, 동료, 가족.
전쟁으로 수천, 수만의 복수심이 생겨날 거다.
수만 명의 나.
수만 명의 화무기.
그 짐은 전쟁을 일으킨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가게 된다. 나는 아버지가 그 원망의 짐을 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수많은 복수의 검 끝에 서시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꿈이 아니냐고? 염원이 아니냐고?
회귀 전의 나도 그랬지만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우린 다른 꿈을 꿀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천마로 살았고, 난 그 천마를 잃은 혈육으로 살아왔었으니까.
우린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지만, 제대로 된 꿈을 꾸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 마음에 더해 한 가지 믿음이 더 있었다.
하늘이 내게 회귀의 기회를 준 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여러 생각이 돌고 돌아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 전쟁으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테니까.”
고월은 잠시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나를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 이유면 모든 걸 감수하고 막을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래, 난 고월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먼 길을 바람처럼 달려서 온 것이리라. 나의 군사에게 이 말을 듣고 싶어서.
이제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나야 할 순간이 되었다.
“나도 무대에 오를 준비가 된 것 같네.”
마음이 가벼워져서일까?
쾌속보는 돌아올 때가 더 빨랐다.
본교로 돌아온 나는 식사를 하고 충분히 쉬었다. 그런 다음 깨끗이 목욕하고 새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최상의 기분으로 아버지를 뵈러 천마전으로 가려는데,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문밖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서대룡과 장호였다. 장호의 커다란 덩치는 안 본 사이에 더 커진 것만 같았다.
서대룡이 내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넌지시 말했다.
“사부님이 계셔서 이런 농담 하면 안 되지만, 저희 둘을 합치면 마존 한 분으로 쳐주지 않을까요?”
두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저 말로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들도 나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은 심정인 거다.
“자네 둘이면 마존 셋과 맞먹지.”
“제가 마존 두 분을 감당하나요?”
“장 군주가 둘 반, 자네가 반.”
“오른팔은 접니다! 저라고요!”
그 오른팔을 호시탐탐 노렸던 장호는 나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언제 봐도 듬직한 그다.
“소교주님께서는 언제나 제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걱정은 안 합니다만, 그래도 신중하게 잘 판단하십시오.”
상대가 아버지였기에 이렇게 나를 걱정하는 것이다.
어느새 서대룡도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명령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두 사람이다. 절대 죽어선 안 될 내 사람들, 그래서 오늘 이 싸움은 이들을 위한 싸움이기도 했다.
“풍류주점 예약해 두겠습니다. 패배주 마시자고? 이런 농담 사절입니다.”
“그런 농담 할 생각 없었는데, 자네가 해버렸군.”
서대룡이 환하게 웃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장호도 함께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상 그 어떤 응원보다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풍류주점 통째로 예약하게. 밤새 취해 보자고.”
두 사람의 응원을 뒤로하고 거처를 나섰다.
그렇게 천마전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번에는 형 검무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일이 모두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불님께 말씀 다 들었다.”
마불이 이번 일에 대해 형에게 다 이야기한 모양이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동생을 도우러 온 거야?”
그러자 형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궁지에 몰린 아버지를 구하러 왔다.”
“그래, 이 무림에서 오직 형하고 나만 할 수 있는 농담이겠지.”
“농담 아니다.”
나를 향한 형의 눈빛에 질책이 담겼다.
“너를 믿고 소교주로 삼아주셨는데,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다고?”
“내가 아버지 눈 밖에 나면 오히려 형은 좋은 거 아냐?”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나와서 말리는 걸 보면.
우린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나란히 서서, 천마전에서 보이는 광경을 함께 쳐다보았다.
이제 한 번쯤은 나눴어야 할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다른 사람과는 할 수 없어도, 오직 형과 할 수 있는 대화를.
“그거 알아?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한다는 거?”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형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하셨을 거야. 누군가 아버지의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을.”
“총군사님이 계시지 않느냐?”
“그래, 계시지. 휘 아저씨도 계시고. 그분들이 직언은 할 수 있겠지. 교내 이야기를 편하게 주고받을 수도 있고. 한데 형, 과연 그분들이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아버지의 신념에 대해서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형은 한 번도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거다.
“그분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거냐?”
“그 충성심이 진짜라는 걸 알아서 하는 말이야. 진짜 충성하기에 못 할 거라고. 안 할 거라고. 아버지의 어떤 모습도 다 받아들이려 할 테니까. 다 감수하려 할 테니까. 알잖아? 가까우면 가까워서 못 하고, 멀면 멀어서 못 하고.”
잠시 사이를 두고 형이 물었다.
“그래서? 그걸 네가 하겠다는 거냐?”
“응, 내가 할 거야.”
형이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건방지다!”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해. 형조차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니까. 그렇기에 아버지는 평생 조언이나 충고를 받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계시니까. 우리가 말씀드려야 해. 아버지, 그건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말씀드려야 해.”
형은 뭐라 말을 하려다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어찌 내가 하는 말뜻을 모르겠는가?
“설령 내 선택이 옳지 않으면 어때? 아버지가 바로 잡아 주시겠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은 이런 곳에 쓰자.”
형은 더는 뭐라 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가 봐라.”
“그래도 고마워. 걱정해서 이렇게 와주고.”
“너 걱정해서 온 것 아니라고 했다.”
저만치 걸어가던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반대다.”
“그래서 내가 하려고.”
다시 돌아선 형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천마전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건 알아줘. 이제 내가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 중에 형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그래서 이 싸움을 한다는 걸.
* * *
나는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오늘 그 모습은 다른 날보다 특별했다. 저 태사의가 비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아버지, 저 왔습니다.”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아버지께 인사했다.
붉은 융단으로 이어진 피의 길을 천천히 걸어 태사의 아래까지 갔다. 오늘따라 그 길이 멀게 느껴진다.
피의 길 끝에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거 아십니까, 아버지. 제가 회귀했을 때 그날도 비무장에 서서 이렇게 아버지를 쳐다봤었습니다. 그날 이후 전 항상 아버지를 보고 있었죠.
회귀한 후 모든 사람에게 노력했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아버지가 있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하려는 말을 다 알고 계실 것이다. 하지만 난 출교했다 돌아왔을 때처럼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다 했다.
“요 며칠 마존들을 찾아다니면서 제 편이 되어 달라고 졸랐습니다.”
과연 아버지의 표정에는 어떤 놀라움이나 동요도 없었다.
“내 마존들인데 왜 네 편이 되어 달라고 한 거냐?”
“질투 때문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마존들이 너무 멋집니다. 그래서 질투가 나나 봅니다.”
아버지는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말했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들이 한 시대에 모이기도 쉽지 않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본교가 이렇게 강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 괜찮은 여덟 마존이 각자의 방식으로 변했고, 각자의 방식으로 강해졌다. 그들은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었다. 고여 있던 천마신교가 막힘없이 콸콸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말 나온 김에 다들 불러서 얼굴 한 번 보시죠? 자주 안 보면 마음도 멀어진다지 않습니까?”
응수타진이었다. 마불의 생각처럼 이 일이 아버지가 만든 무대라면, 그래서 나를 설득하고 마존들을 하나로 집결하려는 게 아버지의 목적이라면, 아버지는 마존을 부를 것이다. 아니라면 그냥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릴 테고.
아버지, 어떻게 이 수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버지는 손을 빼지 않고 내 수를 받았다.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마존들을 부르게.”
그러자 허공에서 휘의 대답이 들려왔다.
“명을 받듭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퍼져나가는 소리 없는 격정. 정말 아버지가 마존들을 불렀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마존을 소집하는 분이 아니셨기에, 마불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렇다면 이 무대에서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마존들을 관중으로 두고 정말 저를 설득하시려는 겁니까? 아니면 힘으로 누르시려는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이 침묵이 그리 어색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일부러 대화를 이어 나가지 않았다. 말을 아꼈다. 오늘 해야 할 말이 많을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권마였다. 그 큰 몸으로 붉은 융단 위를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문을 걸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태사의 아래까지 걸어온 그는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아버지가 내려다보는 방향의 오른쪽에 섰다.
“어서 오십시오, 사부님.”
아버지 앞이었기에 권마는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나는 눈빛으로 물었다.
말씀하신 아버지의 전쟁이 저와의 전쟁이었습니까?
권마는 내 눈빛에 담긴 뜻을 느꼈을 텐데,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다시 그곳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권마만큼이나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새하얀 무복과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은 너무 잘 어울렸다. 권마가 걸어올 때와는 정말 상반된 모습이었다. 사뿐한 걸음으로 피의 길을 걸어오는 그녀를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교의 여 무인들은 그녀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도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
그것이 요즘 일화검존이 주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변화에 있어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손수 보여주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도 아버지께 정중히 인사한 후 권마 옆에 나란히 섰다.
“오셨습니까?”
일화검존도 나를 보며 옅은 미소로 인사했다.
먼저 온 두 사람은 절대적으로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아버지를 선택한 그들.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하얀 가면을 쓴 그가 걸어들어왔다. 일화검존의 새하얀 머리카락처럼, 그의 가면도 붉은 융단과 강렬하게 대비되었다.
극악소마는 아버지께 정중히 인사한 후, 융단을 사이에 두고 권마와 일화검존 반대쪽에 섰다.
일부러 대치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한쪽에 섰기에 자연스럽게 붉은 융단 건너편에 선 것이다.
극악소마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눈빛으로 앞에선 권마와 일화검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 시선이 나를 향했다.
눈구멍 속 두 눈이 이렇게 말했다.
소교주님, 제가 왔습니다.
나는 그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소마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에만 통하는 예의, 나는 이 느낌을 너무 좋아한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아버지는 말없이 이런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마존이 너무 멋있어서 제 사람으로 데려왔습니다. 딱 한 사람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다음으로 도착한 섭혼마존은 극악소마와는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아버지의 마존만이 아니라 차기 마존이기도 했으니까.
아버지에게 인사를 마친 섭혼마존이 선택한 자리는 극악소마 옆자리였다. 건너편에 두 사람, 이쪽에 한 사람이었으니 그 자리에 선 것이지만, 결과적으론 대치하며 마주 보는 구도가 되었다.
권마와 일화검존을 마주했지만, 그녀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또한 극악소마와 함께 나란히 서자, 극악과 섭혼이라는 무인의 원초적 두려움을 자극하는 기운들이 뒤섞이며 공포는 배가되었다.
다음 도착한 마존은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선 취마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일화검존 옆에 섰다.
권마와 일화검존과는 달리 나를 향한 눈빛에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아버지를 선택한다고 내게 말한 후, 그는 술을 많이 마셨을 거다.
이럴 때 보면 더없이 약해 보이는 그지만, 나는 봐서 알지 않나? 전장에서 취마가 어떤 사람인지.
다음으로 들어온 마존은 마불이었다.
황금빛을 내며 들어온 그는 망설이지 않고 취마 옆에 섰다. 원래라면 둘이 서 있는 섭혼마존 옆에 서서 균형을 맞추는 게 정상적인 배치인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반대쪽에 섰다.
나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이 아버지가 만든 무대라고 말한 사람이 그였다. 그랬기에 이 무대의 긴장감을 한껏 돋우려는 것이리라.
아무리 열심히 석상에 망치질해도, 이런 다툼을 좋아하는 천성까진 어쩌진 못하는 모양이다.
일곱 번째 마존은 독왕이었다.
그는 아무 편도 아니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겠다는 듯, 양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홀로 섰다.
독왕은 아버지와 마존들 앞에서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실히 밝힌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제일 용감했다. 이번 경우에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보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서는 것으로 예전에 했던 아버지와의 약속도 지키는 셈이 되었다. 그에게 무림일통에 나서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마지막으로 들어선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을 내렸다면 내게 와서 말을 해주었을 테니까.
과연 오늘 그는 어떤 선택을 할까?
피의 길을 걸어오며 그는 양쪽에 서 있는 마존들을 보았다.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으니 내 편에 서지 않을까, 아주 잠깐 기대했었는데.
혈천도마는 망설이지 않고 건너편에 섰다.
나는 짐짓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어르신 너무 하십니다! 어르신만큼은 저를 지지해 주시리라 믿었는데.”
그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따끔하게 질책했다.
“너무한 건 소교주네. 어디 감히 교주님의 뜻에 반하는 것인가?”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그 사뭇 못마땅한 눈빛. 마치 관계를 처음으로 돌려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 차가운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선택해 주었음을.
비록 저쪽에 서 있지만, 그가 나를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그는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걱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염원이고, 내 마도고 다 접어두고, 오직 그것만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와 팽팽하게 맞서면 맞설수록 아버지와 나 사이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걱정.
차라리 이렇게 아버지 쪽에 서서 따끔하게 나를 혼내는 게 오히려 나를 위하는 길이라 판단을 내린 것이리라.
고맙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고맙다는 전음을 보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의 마음 다 안다는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의도대로 따라주는 게 그를 위한 감사일 테니까.
그런데 어쩌죠, 어르신. 오늘 전 아버지를 이기고 돌아갈 건데요.
그렇게 여덟 마존이 한자리에 모였다.
아버지와 여덟 마존들, 그리고 나.
이대로 걸어 나가 무림을 정복하러 출발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전력이다.
드디어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일어나셨다.
마존들은 일제히 자세를 바로 하며 긴장했다. 지금껏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던 그들이 일제히 흑백이 되어 자신을 감췄다.
흑백의 그림 속에서 오직 아버지와 나만이 피처럼 붉고 하늘처럼 푸른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는 관중이 꽉 찬 무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시는 아버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 회귀 전 인생에서 제가 아버지를 언제 가장 많이 떠올렸는지 아십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복수를 꿈꾸며 재료를 구하러 다녔을 때? 심신이 힘들었을 때? 아니면 외로웠을 때? 다 아닙니다. 제가 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였습니다.’
아버지와 제대로 마음을 터놓는 대화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없을 줄 알았다. 그저 막연한 그리움 정도일 줄 알았는데.
한데, 나이가 들자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한 번씩 생각났다.
지금이라면 아버지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이라면.
아버지는 나와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러 번 아버지와 마주 봤지만, 오늘처럼 긴장된 순간은 없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물었다.
“내 마존들이 멋있어서 질투가 난다 하였느냐?”
첫마디는 나를 위한 말이었다. 내가 마존들이 멋있다고 말한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말이었으니까.
나는 양쪽에 서 있는 마존들을 둘러보았다.
짧게나마 그들 모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릴 지켜보는 눈빛에 담긴 감정은 각각 달랐다.
언제나처럼 권마의 눈빛은 묵직했다. 차분한 일화검존 옆에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감춘 취마의 반쯤 감긴 눈이 있었다. 마불의 눈빛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고, 독왕은 무심했으며 혈천도마는 뜨거웠다. 섭혼마존은 당당했으며 극악소마는 웃고 있었다.
“네. 전부 제 마존으로 삼고 싶을 만큼 질투가 납니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소교주,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시오.”
혈천도마는 오늘 확실히 나를 꾸짖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군가는 이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가 고마웠다.
“멋있는 걸 어떡합니까?”
혈천도마가 꼬장꼬장한 눈빛을 보냈다. 이러시깁니까? 그에게 장난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으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언행에 조심하겠습니다.”
사과하면서 보았다. 마불이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을. 그는 오늘 관중 중에서 제일 즐거워하고 있었다.
요즘 석상이나 깎으며 물러나 있으니, 이런 일 신나시죠?
마치 내 생각에 화답이라도 하듯, 마불의 광채가 짙어졌다.
그래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마존과 단 둘이 있거나, 혹은 마존들끼리 있으면 장난이지만, 아버지 앞에서 치는 어설픈 장난은 마존들에게 큰 무례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장난은 치는 것보다 치고 싶을 때 참을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나는 드디어 이 질문을 아버지에게 했다.
“아버지 꿈이 뭔지 여쭙고 싶습니다.”
모두가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설마, 그걸 교주에게 직접 묻는다고? 라는 생각들이리라.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아버지에게 집중되었다. 대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여기 아버지의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거다. 순순히 대답해 줄지, 아니면 화를 내실지.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침묵은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마기를 내뿜지도, 표정을 굳힌 것도 아니지만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해소한 사람은 취마였다. 그가 혀 꼬인 목소리로 나섰다. 이럴 때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주정뱅이뿐이었으니까.
“교주님의 꿈을 여쭙기 전에 소교주 꿈부터 먼저 밝히시게.”
“마땅히 그래야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꿈이 자주 바뀌어서 나중에 물어보시면 또 다른 답을 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들으시라고 일부러 이 말을 먼저 붙였다. 하나의 꿈만 꾸지 마시라고. 꿈은 바뀔 수도 있는 거라고.
그때 취마가 고맙게도 이 질문을 해주었다.
“우리 소교주는 말처럼 꿈이 자주 바뀌시나?”
눈치 빠른 취마는 내가 무슨 의도로 저 말을 꺼냈는지 알았다.
“꿈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이런 꿈도 꿨다가 저런 꿈도 꿨다가. 설령 꿈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나는 취마를 보고 말했지만, 사실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었다. 물론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난 무대에 난입한 취객을 그냥 내려보내지 않았다.
“혹 취마님은 꿈이 있으십니까?”
원래라면 평생 술이나 마시며 사는 거지, 라며 웃었을 그였는데.
“교주님 모시고 무림일통을 하는 것이네.”
무림일통이란 말을 취마가 대신했다. 아버지가 스스로 저 말을 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내가 대신 나설 테니, 나를 이용해서 교주님에게 할 말을 해라.
그는 아버지 쪽에 선 미안함을 이렇게 갚고 있었다.
“무림일통을 하면 세상이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이런 말을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아뇨, 전 더 나빠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마인들과 정파인, 그리고 사파인들이 하나로 뭉쳐 있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인들은 우리가 일통했으니 정파인들과 사파인들을 짓누르려 할 테고, 패배감에 젖은 사파인들은 더욱 지독한 악행을 저지를 겁니다. 정파인들은 어떻게든 정파무림을 되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찾을 것이고요. 그 과정에서 또 수많은 희생이 있겠지요. 결국 모두가 불만인 세상이 될 겁니다.”
아버지도, 마존들도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 혼란을 우리가 강력하게 통제하면 되지 않나?”
그들을 대변해서 취마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억압과 통제로 지배하는 무림, 무림일통으로 바란다는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까?”
취마를 보고 말했지만 지금 하는 이 말이야말로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실제로 겪어보았다. 마정사의 균형이 무너진 무림을. 권력의 속성은 결코 빈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십이지왕이라는 또 다른 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무림인들은 살기가 더 팍팍해졌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십이지왕 자리를 팔마존이 대신하겠지.
“애초에 합쳐져서는 안 될 세상이라 생각합니다.”
취마가 나서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수 있었다.
이제 취마를 무대에서 내려보내고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앞서 했던 말이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과 변함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으니까.
“아버지, 다른 모든 걸 다 떠나서 전 여기 있는 사람 누구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누구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네, 알고 있습니다. 모두 용맹한 분이시라는 것을요. 아버지 명령에 주저 없이 목숨을 버리실 분들이란 것도 잘 압니다. 이건 어디까지 제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이분들을 잃고 싶지 않은 제 욕심입니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마존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계신 분 중 단 한 분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한 분이 돌아가시면 일곱이 남지 않느냐고요? 아뇨, 전 사는 내내 그 한 사람이 그리울 겁니다.”
아마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살리고 싶어 하는지.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했던 회귀 전의 노력을 알지 못하실 테니까.
마존들을 향했던 내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건 제 인생을 위한 노력입니다. 맞습니다.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은 제 안간힘입니다.”
“그게 네 꿈이냐?”
“아뇨, 이건 제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그저 제 이기심일 뿐입니다.”
“그럼 네 꿈은 뭐냐?”
아버지는 이 무대에서 내가 모든 말을 다 하도록 허락해 주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무대의 주인공인 것처럼 만들어주고 계셨다.
나와 마존들 앞에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봐라.
그래서 어쩌면 더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제 꿈은 저 태사의에서 궁리하며 사는 겁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다들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말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테니까.
“태사의에 앉아 있으면서 궁리할 겁니다. 오늘은 어느 마존을 찾아갈까? 천마전 숙수에게 무슨 요리를 해달라고 할까?”
“저 자리가 그리 한가한 자리처럼 보이느냐?”
“아닌 줄 압니다. 아버지가 저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느냐는 표정에 나는 차분히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더 궁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생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요.”
생각하기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기에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정작 아버지는 그냥 계셨지만, 마존들의 반응이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 처리를 할까? 어떻게 하면 최대한 내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매일 궁리할 겁니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무림맹주에게 놀러 갈 겁니다. 고지식한 그 사람을 놀리다 지치면 이번에는 사도맹주를 찾아가 춤 솜씨 여전하냐며 물어볼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진짜 내 꿈은 저 태사의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이 내 진짜 꿈이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평생 저 태사의에서 본교를 위해 살아온 아버지에게 그런 꿈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저 태사의에서 밀려난 형을 위해서도.
그래서 지금 드리는 말은 내 꿈의 절충안이다. 아버지, 꿈은 이렇게 타협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너무 소중히 다뤄서 오히려 이루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어떠십니까? 그런 삶 살아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 대답과 질문은 아슬아슬한 선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이 무대에서 아버지를 상대할 수가 없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현실은 차가웠다.
“네가 말한 그 고지식한 무림맹주는 어느 날 네 등에 칼을 꽂으며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거다. 무림맹주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죽어가는 네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같잖은 협의를 늘어놓겠지.”
권마와 일화검존,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도마와 취마 역시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정파인들을 믿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불신이 어디 정파에 국한되겠는가?
“사도맹주가 언제까지 춤을 출 수 있을까? 그 춤사위에서 언제쯤 기습이 튀어나올까? 정말 너는 인간들이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느냐? 상황이나 이익 앞에서도 굳건할 거라 믿는 거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반박하려면 반박할 말이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아버지의 오랜 삶과 경험이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면서 마존들을 둘러보았다.
“이럴 때 누가 좀 나서서 도와주실 분 안 계십니까? 교주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해주실 분!”
혈천도마가 눈빛으로 말했다. 이놈아, 까불지 말고. 진지하게!
마불은 그야말로 재미있어서 싱글벙글이었다.
일화검존은 미안하네, 하는 눈빛이었고 취마는 취한 척했다.
그리고 이 순간 정말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섰다.
“소교주가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극악소마가 아니었다. 나선 사람은 절대 나서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바로 권마였다.
“겉으로만 저렇게 보일 뿐, 소교주는 사람을 잘 믿지 않습니다.”
“역시! 사부님이 제자를 잘 알아보시는군요. 한데 그 말씀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나는 다시 아버지에게 말했다.
“설령 그들에게 속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무공수련을 미친 듯이 하고 있으니까요. 등 뒤의 칼은 제 살갗을 뚫지 못할 것이고, 결국 춤사위는 춤으로 끝날 겁니다.”
“그렇게 힘들게 쌓은 무공을 썩히겠다는 거냐?”
“그 실력으로 삶을 즐기겠다는 거죠.”
“고작 뭘 먹을까, 어딜 놀러 갈까 고민하면서?”
“네, 그럴 겁니다.”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버지가 향한 곳은 극악소마 앞이었다.
극악소마는 담담한 눈빛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긴장했다.
“이래도 소교주를 지지할 텐가?”
부담스러운 질문이었다. 질문 자체에 아니라고 대답하라는 요구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새하얀 그의 가면처럼 극악소마의 마음은 한마음이었다.
“네, 소교주의 뜻을 지지합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다시 물었다.
“자네의 그 불사귀면을 평생 쓸 수 없어도?”
불사귀면은 극악소마가 전쟁에 나갈 때 쓰는 가면이었다. 예전에 마존들이 나를 위해 아버지 앞에 나섰을 때, 극악소마는 불사귀면을 쓰고 아버지에게 부탁했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가면이기에 가장 아픈 곳을 찌른 셈이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히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행히 저는 가면이 여러 개입니다.”
아버지를 향하던 극악소마의 시선이 나를 바라보았다.
“소교주와 평생 환락귀면을 쓰고 살겠습니다.”
환락귀면은 교내의 큰 행사나 연회가 있을 때 쓰는 가면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불사귀면을 포기했음에도 가면 속 그의 두 눈은 맑고 깊었다. 그가 진심을 드러낼 때의 그 눈빛.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앞에서 드러낸 진심에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이 하나뿐이리라.
그 연회, 가장 성대한 연회가 되게 하겠습니다.
모든 마존이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저마다 다른 감정이 깃든 눈빛이었다.
아버지는 더는 극악소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과연 아버지가 극악소마의 저런 반응을 모르고 물었을까?
아버지가 이번에는 섭혼마존 앞에 섰다.
그녀는 아버지 앞에서도 당당했다. 아버지가 독왕과 섭혼마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더 당당하려고 애썼다.
왜 소교주 쪽에 섰느냐고 물어볼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수련은 잘 되어 가나?”
부드러운 질문에 내심 당황했지만, 섭혼마존은 정중히 대답했다.
“열심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그냥 격려만 하고 돌아설 것 같았는데.
“잊지 말게. 자넨 내 마존이네.”
이번에는 섭혼마존이 놀라고 감격했다. 아버지의 눈 밖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으니까.
“그래도 여기 서 있을 건가?”
섭혼마존은 당황했다.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이신지 모를 때가 많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마존을 압박해서 자신에게 데려가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는 말은? 이건 아버지가 나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챙기려는 거다.
아직 그녀는 튈 때가 아니라고. 그냥 마존들 사이에서 조용히 성장하라는 아버지의 마음이자 배려다.
내가 눈빛으로 내 마음을 그녀에게 전했다.
가도 괜찮소.
내 뜻을 알아차린 섭혼마존이 내게 정중히 포권했다.
“나중에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그녀가 붉은 융단을 건너 건너편에 섰다.
물론 난 그녀에게 보낸 눈빛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너무 하시오! 누구와 마존 생활 더 오래 할지 생각하고 결정한 것 맞소? 세상에 이렇게 줏대 없는 귀신이 어디 있소!”
그녀 옆에 서 있던 마불이 환하게 웃었다.
‘쉽지 않지?’
이 무대에서 아버지는 강했다.
나와 극악소마, 그리고 섭혼마존까지. 모두 챙기고 배려하면서 이 무대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싸움은 품격이 있으면서도 고상했다.
모든 마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들의 눈빛에 담긴 물음은 같았다.
소교주,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내게 시선이 집중되자 홀로 덩그러니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내 등 뒤에는 극악소마가 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역시 나의 마존들이었으니까. 사실 그들은 아버지의 마존들이고 아버지 편에 서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나의 마존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마존들과의 관계는 애초에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가능했던 관계임을.
그렇기에 이 무대가 중요하다. 이 무대에서의 승부를 잘 지어야 한다. 이기든 지든 나 역시 품격 있고 고상하게.
이 무대는 아버지와 나의 첫 무대이니까.
우선, 마존들 앞에서 절대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를 훼손해선 안 된다. 이것이 이 싸움의 원칙.
‘아버지, 제가 거기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그래서 이 싸움이 제게 얼마나 어려운 싸움인지요.’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앞서 내가 했던 말들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취마였다.
“교주님, 소교주에게 술을 한 잔 주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취마의 부탁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마가 빙궁성배에 술을 부어주었다.
“소교주, 내 술 한 잔 받고 마음을 바꿔 먹으시게.”
아버지의 편을 들고 있지만, 취마의 속마음은 달랐다.
―나는 무림이 피바다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 그러니 그 좋은 머리로 방법을 찾아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는 아버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취마는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 술은 그 응원의 술이었다.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천천히 술을 마시며 취마와 전음을 나눴다.
―형이 보다시피 아버지 마음을 돌리는 게 쉽지 않아.
―그래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 여기 너밖에 없다.
“잘 마셨습니다.”
그때, 혈천도마가 전음을 보냈다.
―포기해라. 교주님과 네 꿈은 평행선을 그리며 가고 있다. 결코 합쳐질 수가 없는 일이다.
그가 볼 때는 내가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아버지의 염원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혈천도마의 말이 맞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어찌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아버지에게 차분히 물었다.
“이걸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그 꿈을 자주 생각하십니까?”
아버지는 무슨 뜻으로 묻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어떤 꿈을 꾸다 보면 처음에는 설레고 신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꿈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잖아요?”
아버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아버지에게도 그 숙원은 ‘당연한’ 꿈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
“아버지, 같은 꿈을 꾸셔도 좋습니다. 대신 다시 처음부터 그 꿈을 꾸실 수는 없으십니까? 아무 꿈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꾸시는 겁니다.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예전부터 꾸었던 꿈이 아니라 생생한 지금 꿈으로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 마존분들을 만나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과연 아버지의 뜻을 거역해도 될까? 내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그래서 제 군사까지 만나고 왔습니다. 그 사람 만나서 마음을 다잡고 왔는데도 아버지를 뵈니 또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버지에게 전하는 내 진심이었다.
“그만큼 아버지 뜻을 거역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아버지를 존경하니까요.”
아부가 아니다. 모든 마존 앞에서 밝히는 아버지에 대한 내 진심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내 말을 듣고만 계셨다.
오늘 아버지는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으로 나를 상대하고 계신다. 덕분에 오늘 이 무대는 그야말로 나의 독무대였다.
“아버지의 꿈이, 그 염원과 이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도 잘 압니다. 제가 말씀드린 마도도 제 꿈의 일부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이따 저녁에는 뭘 먹을지, 내일은 누굴 만날지. 저는 원대한 꿈만큼이나 일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꿈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풍경 말입니다.”
화무기란 강적을 두고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내 삶을 살아가려는 이유기도 하다.
회귀한 후 지켜나가고 있는 내 삶의 원칙이지만 과연 아버지에게 새파랗게 젊은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와 바둑을 둬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고, 아버지와 함께 온천욕 하는 바람을 이루는 것도 제겐 중요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중원을 유람하는 것도 간절한 바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루지 못한 채 무림일통을 이룬 아버지가 태사의에 앉아 계신 모습을 본다고 과연 제가 행복할까요?”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내 시선이 마존들을 향했다.
“전 검존님과 비무를 나누는 것도 중요하고, 사부님과 심야 수련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도마님이 책 읽으실 때 옆에서 같이 책을 읽고 싶습니다. 독왕님과 함께 독초를 캐고, 취마님과 술을 마시면서 마불님이 완성하는 석상을 볼 겁니다. 섭혼마존께서 성장하는 모습도 볼 겁니다. 그리고 아직 소마님 방에 놔드리고 싶은 가구가 많이 남았습니다. 저는 제 꿈만큼이나 이 일들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죽기 전에 돌이켜봤을 때, 이 모든 순간이 너무나 그립고 아쉬울 테니까요.”
순간순간은 더없이 외롭고 힘들었는데 막상 지나고 돌아봤을 때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린 인생이었으니까. 나는 경험해 봤으니까.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은 조심스럽게 할 말이었다.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품어온 꿈은 선택지가 너무 적은 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마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여러 이정표는 필요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굳건했다.
“그 선택지가 백 가지였어도, 나는 같은 것을 골랐을 거다. 수십 개의 갈림길이 있다고 해도, 나는 계속 가던 길을 걸었을 거다.”
“다른 길을 가시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주위 경치를 보시면서 가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때론 발걸음이 멈추고, 때론 다른 길이 궁금해 지지기도 하고, 그래서 때론 내 길을 의심해보기도 하고.
그러려면 나도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걸어야 한다.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볼만한 경치가 나오면 저길 보시라고 말씀을 드려야 한다.
이것이 아버지의 꿈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깨달음은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아버지, 저와 약속 하나만 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물론이고 마존들도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모두 주목하는 가운데 내 말이 이어졌다.
“네, 무인 대 무인의 약속이죠. 교주와 소교주의 약속이기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이죠.”
“어떤 약속이냐?”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시간을?”
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할지를 생각했다. 너무 짧아도, 너무 길어도 안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확히 목표를 이룰 시간.
“지금부터 딱 오 년의 시간을 제게 주십시오.”
“주면?”
“그때 다시 여쭙겠습니다. 그때도 아버지의 꿈이 무림일통이라면, 그땐 제가 그 전쟁의 선봉에 서겠습니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마존 모두 깜짝 놀랐다. 취마는 당장에라도 ‘안 돼! 너 뭐 하는 짓이냐?’라고 소리치고 싶은 표정이었다.
반대쪽 극악소마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그 선봉에서 나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라도 떠올린 것일까?
내가 전쟁의 선봉에 서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던진 승부수였다.
오 년 안에 화무기 일당을 모두 없애고, 오 년 안에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반드시 아버지에게 새로운 꿈을 꾸게 해드릴 거다.
오 년.
전쟁은 하고 싶다고 당장에 치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전략으로 싸울 것이냐에 따라 그 준비에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고, 길게는 이삼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에게 오 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긴 시간만은 아니다.
이 내기에서 이기면 나를 얻을 수 있다.
시천비술로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룬 나겠지?
어디 나만 얻는 것이겠는가? 지금의 내가 그때까지 성취한 모든 걸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분명 내가 앞장서 돕는다면 아버지의 무림일통 꿈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이 약속은 마존들 앞에서 하는 공식적인 약속.
“제가 지금 제 인생을 걸고 아버지께 약속드리는 겁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아버지야말로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약속하면 반드시 지킬 두 사람임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랬기에 아버지도 나도 신중히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었다.
“왜 오 년이냐?”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마음을 바꾸는 일입니다. 마음 같아선 오십 년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마음을 그대로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다. 오 년 금방이다. 그래도 하겠다는 거냐?”
“그 사이 제가 반드시 아버지 마음을 바꿀 겁니다.”
아버지의 입가에 그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그 웃음이 오늘은 유쾌함을 담고 있었다. 마치 ‘사실은 너도 싸우고 싶은 거지?’ 이렇게 묻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 거다. 아버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약속 받아들이마.”
나는 마존들에게 모두의 운명을 바꿀 이 내기를 재차 확인했다.
“오 년 후 이날, 여기 계신 모든 마존들을 다시 모시고 제가 아버지의 꿈을 여쭙겠습니다. 그날 승부를 보시죠.”
오 년 후, 아버지의 꿈은 달라져 있을 겁니다. 여기 있는 모든 마존이 깜짝 놀라는 꿈을 이야기하게 되실 겁니다. 제가 꼭 그렇게 되도록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마존들은 이 생각지 못한 결과에 다들 놀랍다는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제 편한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제 다 끝났으니 여쭙는 건데, 마존분들 만나시고 한 것, 무림일통을 준비하시려던 거였지요?”
하지만 뜻밖에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시라고요?”
이런 일을 거짓말로 대답하실 분이 아니신데. 나는 놀란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마존들을 다 만나신 겁니까?”
“다 만나다니?”
“소마님도 만나시고, 취마님과는 술도 드시고, 독왕님 독 제조도 도와주시고.”
“그 셋뿐이잖느냐?”
맞는 말이다. 직접 만난 마존은 셋이었다. 그마저도 다른 이유를 댔다.
“소마의 방에 가구를 들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한 번 찾아갔던 것이고.”
만약 정말 그래서라면 아버지도 근래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게 틀림없다.
“취마와는 빙궁성배에 따른 술이 너무 맛있어서 함께 술을 마셨을 뿐이다.”
“독왕님은요?”
“정교한 허공섭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런 조력자가 없어서 여러 차례 제조에 실패했다고. 그래서 도우러 갔을 뿐이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셋만 만났는데, 너는 다 만나고 다니더구나.”
나는 흠칫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은 왜 다 모이게 한 겁니까? 저를 설득하고, 마존들을 하나로 단합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아니다.”
“아니라고요?”
“네가 설득한다고 마음을 바꿀 아이냐?”
그래, 아버지가 나에 대해 모를 리가 없다.
“네가 마존들을 다 만나고 다녔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렇게 설득한다고 돌아다녔는데, 마무리는 해야지 싶어서.”
다시 말해서 날 위한 자리였다.
“어? 그럼 제가 오 년 약속은 왜 드린 거죠?”
“네가 먼저 꺼냈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사실 아버지는 아직 자신의 꿈이 이러이러하다고 직접 말하지도 않은 상태다.
난 혈천도마에게 따지듯 소리쳤다.
“아버지가 꿈을 이루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지.”
다음으론 권마에게.
“아버지는 이미 전쟁 중이시라면서요?”
“자네 같은 아들을 둔 아버지는 항상 전쟁 중 아니겠나?”
“그런 뜻이었다고요?”
“달리 무슨 뜻이 있겠나?”
그리고 마불에게도.
“아버지가 이번 무대를 만드신 거라면서요?”
환하게 빛나던 마불의 광채가 사그라들었다.
“내가 그랬나? 요즘 정신이 없어서. 나는 이만 만들던 석상이나 마저 만들러 가야겠다.”
난 아버지와 마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맞죠? 이거 제가 당한 거죠? 처음부터 다 짠 거죠? 그런 거죠?”
내가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던 그때, 따로 멀찌감치 서 있던 독왕이 불쑥 전음을 보냈다.
―당한 건 교주님이지.
그는 내 속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어차피 너도 참전할 테니까. 내가 아는 넌 교주께 부탁해서 선봉에 서려 할 거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 들 테니까.
나는 그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전쟁이 싫다고 폐관에 들겠나, 아니면 무림맹 편을 들겠나? 어차피 사전에 못 막으면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내가 당한 듯 엄살을 부렸지만 이건 당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유리한 승부였다.
적어도 앞으로 오 년간 전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과연 교주께서 네 속셈을 모를까?
―아시겠죠.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봐주려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기회를 주심과 동시에 한 번 제대로 붙어 보자고 하시는 거다.
오늘 하루의 승부가 아니라 장장 오 년간에 걸친 대승부를.
이 승부에 무림의 운명이 걸려 있다.
난 그때까지 반드시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루고, 화무기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보다 더 어려운 싸움도 함께 해나갈 것이다.
아버지에게 무림일통보다 더 나은 꿈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버지와 함께 걸으며, 그동안 아버지가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하는 것.
빈 태사의.
이제 내 마음에 떠오른 빈 태사의는 앞서 떠올렸던 무서운 느낌이 아니다. 다른 이유의 부재일 테니까.
아버지, 이제 저와 여기저기 다니셔야 할 겁니다. 제게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선봉장이 되면 든든할 거다.”
내가 든든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전장에 선 내 모습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회귀 전에 있었던 수많은 싸움과 회귀한 후에 있었던 싸움들까지. 그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건 싸움일 뿐이지 전쟁은 아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한 개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그런 싸움이 중원 곳곳에서 매일 벌어진다.
처음의 그 피처럼 붉고 짙었던 명분은 점점 퇴색되고, 내가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 나간다.
더 끔찍한 건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몇 달이 될 수도 있고,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수십 년이 될 수도 있다. 시작은 쉽지만, 끝내기는 어려운 것이 전쟁이니까.
그렇게 수많은 희생으로 얻어내는 것이 과연 평화일까? 아니면 더 큰 갈등과 상처, 복수심일까?
만약 내가 그 전쟁의 선봉장 역할을 충실히 한다면?
멸마대주인 진하군은 내 검에 죽게 될 거다.
그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는 진하령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내게 저주에 찬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죽이기 위해 검을 내지르며 몸을 날리겠지. 결국, 그녀도 내 손에 죽게 되리라.
비사인도 다르지 않다. 죽어가는 그를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그에게 했던 그 모든 말은 어디에다 버려야 하나?
이렇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무림일통 전쟁이다. 앞으로 오 년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상상만으로도 알 수 있다.
‘아버지,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전 아버지의 새로운 꿈이 무엇일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반응하려다가, 평소의 나의 모습대로 행동했다.
나는 짐짓 괴로운 표정으로 엄살을 떨었다.
“너무하십니다! 저를 옭아매려고 마존분들과 짜고 처음부터 꾸민 거죠? 도마 어르신이 밑밥을 깔고, 사부님과 마불님이 살살 찌를 흔들고, 오늘 아버지가 확 낚아채고. 맞죠? 이거 통천각에서 세운 작전이죠?”
내 장난에 아버지가 천마전 입구를 쳐다보았다.
“군사께 직접 여쭤봐라.”
때마침 총군사 사마명이 천마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자리에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오늘 마존들을 모두 불러 모은 이유가 따로 또 있었다는 것을.
그래,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마존 모두를 불러 모으실 분은 아니시지.
아버지에게 예를 갖춘 후 사마명은 마존들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마존들 역시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사마명이 끝으로 내게 인사했다.
“소교주님, 북해에서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우리 군사님께서 준비한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좀 바빴습니다.”
난데없는 말이었음에도 사마명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제가 빠진 함정의 이름이 무림일통입니다.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제 입으로 선봉장이 되겠다고 했죠.”
내가 마존들을 만나고 다녔던 일은 그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이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대번에 짐작했다.
사마명이 이번 약속의 핵심을 짚었다.
“물론, 선봉장이 되는 일에 기한을 두셨겠지요? 얼마로 두셨습니까?”
“오 년을 두었습니다.”
“혹시 이번 함정의 이름이 오 년 아닙니까? 제가 볼 때는 거기에 교주님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만.”
그는 내가 오 년의 시간을 벌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알면서 약속을 받아준 것처럼, 그 역시 내 의중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과연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다. 사마명이 상황을 정확히 보고 있다는 사실에 흡족하신 거다.
사마명은 오 년이란 기간에 묘수가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아마 칠 년이나 십 년이었다면, 빠지지 않았을 함정이라 생각합니다. 오 년은 안 빠질 수 없는 절묘한 기간이죠.”
마존들 역시 사마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두 이해했을 것이다.
당장 취마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게 다 네 계획이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난 무리한 약속을 했다고 걱정했다.
―무리한 약속 맞아. 앞으로 오 년간 피나는 노력을 해야지. 형도 도와줘야 해.
―제발 교주님 일에는 날 끌어들이지 마!
그러는 사이 사마명이 모두에게 오늘 이 자리에 모습을 보인 이유를 밝혔다.
“오늘 여러 마존분들을 뵈려고 한 것은 본 통천각에서 조사한 내용을 직접 보고드리기 위해섭니다. 배후 놈들의 존재를 알고 난 후, 본 각에서는 자체적으로 놈들에 대해 추적했습니다. 본 각이 주목한 것은 놈들의 자금줄입니다. 이 정도의 고수들과 조직을 움직이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터, 은밀히 조사한 결과 배후 놈들을 추적할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그가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이 내용을 전하면서 마존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보인 놈들의 힘을 생각하면 마존분들께서 나서서 직접 처리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사마명은 이미 이번 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마음속으로 결정을 하고 왔을 거다.
그가 마존을 지목해서 부탁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그 전에 제가 먼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시지요.”
사마명이 대답을 기다렸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상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냐?”
“이번 일은 아버지와 제가 해결하죠.”
설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기에 아버지는 물론 사마명과 마존들도 모두 놀랐다.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들. 아니, 사마명은 차라리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표정이다.
“저와 둘이 나가시죠. 아버지와 저, 단둘이서요.”
아버지와 중원에 나가자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눴지만, 아직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이번에 기회가 왔을 때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려는 거다.
“오 년 금방이잖아요?”
앞서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바꿔야 하는 이번 약속의 성격상, 공정하게 하려면 아무래도 나에게 기회를 줘야 했다.
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할지 마존들이 궁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같이 나가셔서 후딱 해치우고 오시죠?”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사마명이 나섰다.
“그건 안 됩니다.”
특히 아버지와의 대화에 이런 식으로 끼어드는 일은 없던 그였기에, 안된다는 그의 말에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교주께서 지금 무슨 부탁을 하신 건지는 아십니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지만, 그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다.
“알고 있습니다.”
사마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소교주께서는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신다면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왜 안 됩니까?”
팽팽한 긴장감 속에 다들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와 나의 승부에서, 이제 사마명과 나의 승부로 바뀐 것이다. 아직 오늘 무대의 막은 내리지 않았다.
“본래 교주와 소교주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함께 움직이지 않는 것이 교칙입니다. 심지어 요리도 다르게 드셔야 합니다.”
암습이나 독살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둘이 함께 있다가 죽게 되면 교주가 부재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설마 아버지가 위험할까 봐 말리시는 겁니까? 걱정의 대상이 잘못됐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무림을 걱정해야 할 겁니다.”
그러자 사마명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맞습니다. 정확히 그 이유 때문입니다. 교주님이 움직이면 이 무림이 위험해지니까요.”
사마명이 걱정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교주님이 움직이시면 이 무림은 긴장하고 경직됩니다.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되고, 작은 일이 번져서 큰일이 되기도 하죠.”
나는 좋은 어조로 사마명을 설득했다.
“몰래 다녀오면 되죠. 아버지는 잠시 폐관에 드신 걸로 하고요.”
“그랬다가 밝혀지면 무림은 더욱 놀랄 겁니다.”
천마의 강호행은 이렇게 큰 책임을 져야 하는 무게감 있는 행보였다.
사마명이 무서운 말을 덧붙였다.
“자칫 일이 잘못 풀리면 소교주께서 선봉을 서야 하는 순간이 오 년 후가 아니라 오 일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마명이 어떤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알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평생 천마전에 계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 말만큼은 사마명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본교의 그 누구보다 아버지의 갑갑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그일 테니까.
내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아버지께서 꾸시는 꿈, 저는 존중합니다. 대신 그 꿈은 세상을 향한 꿈이니, 세상에 나가셔서 꾸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 이제 저와 나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실 거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는지.
아버지와 나와의 이야기였기에 마존들은 나서지 않고, 저마다의 눈빛으로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사마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함정 이름을 제가 잘못 알았습니다. 오 년이 아니라 출교였군요.”
함정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라는 농담이었다.
이윽고 아버지가 나섰다.
“이 일은 숙고한 후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그럼 오늘 회합은 여기까지 하세.”
분명 아버지는 이미 결정을 내리셨을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선택되지 않은 쪽의 체면을 위해서리라.
그렇게 나와 마존들은 정중히 작별을 고한 후 천마전을 나섰다.
입구에서 혈천도마가 내게 말했다.
“정말 너는 지치지도 않는구나.”
아버지와 오 년의 약속을 하고서는 또, 천마와의 출교라는 문제로 일을 만든다는 뜻이었다.
“오 년 금방 가지 않겠습니까?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그러자 취마가 참았던 말을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교주님 마음을 오 년 만에 바꿀 수는 없을 거 같다.”
그 점에 있어선 마불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내가 오늘 이 자리, 교주님이 만든 무대라고 하지 않았나?”
그의 몸에서 다시 광채가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권마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교주님은 아들과 전쟁 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그 전쟁이 오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권마의 그 커다란 덩치 뒤에 독왕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마존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면 그가 천마신교를 지킬 것이다. 아버지가 싫어하면서도 가장 믿는 존재.
또한, 내 의중을 가장 먼저 파악한 마존이기도 했다. 내가 당했다고 엄살떨 때 당한 건 아버지라는 전음을 보냈던 그였으니까.
“이번에는 꼭 캐와. 교주님 핑계 대지 말고.”
그는 내가 아버지와 함께 나갈 수 있으리라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섭혼마존이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음을 바꿔 아버지를 선택한 것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나는 미소로 답했다. 그대는 아버지의 마존이자 내 마존이라고.
일화검존은 한마디 격려를 해주었다.
“소교주라면 방법을 찾아낼 거라 믿네.”
아버지를 지지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저 말 역시 진심임을 나는 느낀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오늘 말도 많이 하고 큰소리도 쳤지만, 정말 힘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상대가 누굽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오랜 염원을 바꿔야 하는 일입니다. 천마검을 철검으로 두드린다고 흠집이나 나겠습니까? 앞으로 여러분들께서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존, 저의 마존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마존이죠. 자, 그런 의미로 오랜만에 모였으니 다 같이 술이나 한 잔… 어? 다들 어디 가세요? 어르신! 사부님! 형!”
마존들은 벌써 자신들의 거처가 있는 여덟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아니, 저 힘들다고요! 위로도 좀 해주시고, 작전도 세워주시고. 정말 너무 하십니다!”
다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다만, 저 멀리에서 혈천도마가 전음을 보냈다.
―지금 네가 술 마셔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
* * *
“소교주님.”
집무실에서 일하던 사마명은 내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얼굴이었다.
“딱 배고프실 시간이죠? 역시 늦게까지 일하시는군요.”
저녁 시간에 맞춰 풍류주점에서 술과 요리를 사서 왔다. 수하 군사들과 나눠 먹으라고 풍족하게 사 왔다.
“아직 일이 남아서 술은 사양하겠습니다. 대신 요리는 수하들과 잘 먹겠습니다.”
쌓인 일거리를 보자 고월의 방에 쌓여 있던 일거리가 겹쳐서 떠올랐다. 정말이지 고단한 군사의 삶이다.
“제가 왜 왔는지는 이미 아실 테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사마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사마명을 이해했다. 아니 고마워했다. 아버지를 이렇게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정 걱정되시면 마존들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그러자 사마명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마존요?”
“우선 눈에 띄면 안 되고, 아버지가 편하셔야 하니까.”
아버지가 편해야 한다는 점에서 독왕과 섭혼부터 탈락했다.
극악소마와는 내가 함께 가고 싶지만, 하얀 가면이 너무 눈에 띄었다. 그런 점에선 마불도 마찬가지고.
취마와 최근에 함께 출교했다 돌아왔고. 그게 아니더라도 아버지와 함께 가자고 했다간 취몽루 앞 호수로 뛰어들 그였다.
사실 아버지가 가장 편할 사람은 권마지만 그의 덩치와 인상은 어딜 가도 주목받을 거다. 얼굴은 숨겨도 그 큰 주먹은 어찌 숨길 것인가?
혈천도마 역시 그 큰 멸천대도를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위 시선을 잡아끌 거고. 그나마 일화검존이 무난했지만, 요즘 검술의 극의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는 출교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함께 갈 사람이 없군요. 여덟 명이나 되는데.”
대충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는지 사마명이 날 보며 웃었다.
“이게 다 우리 아버지가 까다로워서 그렇습니다. 우리 아버지 보필한다고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사실.
“이미 교주님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소교주님과 함께 나가시기로.”
“군사님께 말씀하셨습니까?”
“아직 안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확신하는 이유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리라.
“아마 며칠 내로 기별이 갈 테니, 그렇게 아시고 그사이 푹 쉬십시오. 북해에서 돌아오시고 마존분들 만나시느라 여독도 풀지 못하셨잖습니까?”
“감사합니다, 군사님.”
아버지가 움직이면 모든 게 기밀로 처리될 것이다. 나가는 것도, 돌아오는 것도.
“교주님과 나가게 돼서 좋으십니까?”
“벌써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제가 끝까지 반대할 수도 있지만,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아십니까?”
“뭡니까?”
“그 말씀이 좋았습니다. 교주님께 다른 풍경을 보여드리겠다는 그 말씀 말입니다.”
그라고 어찌 천마라는 이름에 갇혀 지내는 아버지가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랬기에 그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그 풍경, 교주님과 잘 구경하고 오십시오. 집은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는 상대해야 할 배후 세력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긴 아버지가 직접 나가는데 무슨 적 걱정을 하겠는가?
“군사님이 계셔서 제가 철없이 조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돌아서 나오려다가 불쑥 그에게 물었다.
“그럼 군사님 풍경은요?”
난데없이 물었지만, 그는 내 질문의 뜻을 곧장 알아차렸다.
“저는 이 책상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맑고 깊은 눈빛으로 그 헌신적인 마음에 답한 후,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언젠가 그가 자신만의 풍경을 찾고 싶어졌을 때, 부디 너무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마명을 만나고 거처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마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도를 마당에 박고, 도에 기대앉은 채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돌아오면서 왠지 그가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었는데. 이제 그런 예감이 맞을 정도의 사이가 된 모양이다.
“한잔해라.”
“좋죠.”
혈천도마가 주는 술을 받아서 시원하게 비웠다.
“오랜만에 어르신과 술 마시니까 너무 좋습니다.”
“주정뱅이와 실컷 마셨을 텐데?”
“거의 못 마셨습니다. 배후 놈들 베기 전까지 금주하셔서요.”
“그래?”
혈천도마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알 수 없는 주정뱅이의 세계죠?”
내 농담에 혈천도마가 옅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술을 따라주며 기분 좋게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비로소 혈천도마는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교주는 네 부탁, 허락할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술잔을 내려다보며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내가 교주라면 허락했을 테니까.”
어디 그래서겠는가? 혈천도마만이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감이 있었다. 이번에 무림일통을 위해 아버지가 움직였다는 것을 맨 처음 알아차린 것도 혈천도마였으니까.
“방금 군사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어르신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것 같다고 하시네요.”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에도 혈천도마는 기뻐하거나 잘난 척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출교가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교주와 나가니까 좋으냐?”
“네, 좋습니다.”
아버지와 출교한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아버지와 함께라도 우리의 적이 화무기임을 잊어선 안 된다.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도맹을 봉문시킨 후 화무기는 끝없는 수련으로 무학의 극의를 향해 걸어갔다.
그를 추종하던 십이지왕이 어떤 횡포를 부리든 그는 무림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세속적인 욕심을 부렸던 자는 아니라는 의미.
과연 그는 왜 무림의 세 수장을 죽인 것일까?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고 이후에는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법 재료를 찾는 일에 몰두하면서 그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한 게 지금에 와서는 못내 아쉽다.
당시 생각에는 괜히 그에게 접근해 일을 그르칠까 봐 두려웠으니까. 오히려 그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회귀만 하면 다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그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십이지왕이 다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갑자기 불쑥 등장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런 화무기였기에 내 삶의 방식도 지금처럼 정해졌을지 모르겠다.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맞춰서 대응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화무기, 네가 내 삶에 맞춰라!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 너도 나에게 맞춰서 대응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나 역시 상식과 예상을 벗어난 사람일 테니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불쑥했다.
“너 같은 아들을 둔 교주는 아들 복이 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이후 처음으로 하는 말이었다. 당연하죠, 복 많은 아버지 순위표에서도 천마 노릇하고 계실 거라고 장난을 칠까 하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혈천도마가 이런 말 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교주와 함께 나간다고 이렇게 좋아할 사람, 본교를 통틀어 몇 사람이나 있겠느냐?”
“하긴 무림을 통틀어도 마찬가지죠.”
“그렇다고 나가서 교주에게 너무 까불지 말고.”
“제가 걱정되십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가 또 가로저었다.
“매사 나보다도 잘하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겠나 싶다가도.”
혈천도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보면 새파란 애잖느냐?”
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나이 든 사람이 봤을 때 젊은 애들이 불안한 이유는 이 경험 때문이리라. 그때의 우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반드시 했었으니까.
그래서 걱정하는 거다. 아버지와 둘이 나갔다가 내가 실수라도 할까 봐. 지금껏 실수하지 않은 이유가 이때 하려고 모아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드는 거다.
“제가 애는 아니죠.”
“내 눈에는 애다.”
“그래도 제 나이 때로 돌아오고 싶으시면서.”
그가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항상 이렇게 부정하지만.
“가래도 안 간다.”
“왜요?”
“이 인생 또 살기 싫어서.”
젊음에 대한 그의 그리움도 진심이지만, 이 말도 진심으로 들렸다.
“다르게 사시면 되죠.”
“사람이 같은데 다르게 살아지냐?”
“살아질 겁니다. 이번 인생을 잘 사셨으니까요.”
혈천도마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마지막 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땅에 박힌 멸천대도를 뽑으며 작별을 고했다.
“잘 다녀오너라.”
“네, 어르신.”
돌아서서 저만치 걸어가던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 아버지와 나가서 많은 걸 보고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어르신도 보고 싶은 풍경 많이 보고 사십시오.”
그러자 혈천도마가 나를 돌아보며 단호히 말했다.
“이미 난 그렇게 살고 있다.”
나를 향한 눈빛에서 나는 느꼈다. 그 풍경 속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 * *
혈천도마가 돌아간 후, 방으로 들어온 나는 곧장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오 년 만에 이룰 수 없다. 무공수련에 필요한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 년의 시간을 약속한 것은 시천비술을 믿기 때문이다.
세 배의 시간을 더 주던 시천비술은 이후로도 밤잠을 줄여가며 꾸준히 수련한 결과 지금은 네 배의 시간까지 늘어났다. 남들이 한 시진 수련하면 나는 네 시진 수련할 수 있다는 의미.
게다가 이번 북해행에서 내공이 크게 늘어 수련은 더욱 수월해졌다.
어떻게든 시천비술에서 얻는 시간을 열 배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하지만 경지가 오를수록 수련은 어려워지고 성취 역시 더뎌질 것이다. 오직 노력만이 살길이다.
구화마공 제일식 인멸식부터 제사식 암흑일섬까지 한차례 펼쳤다.
그리고는 심법을 운용해서내공을 채운 후, 마음을 다스렸다.
이제 나는 처음으로 구화마공 제오식을 펼치려 한다.
아버지와 함께 나가게 되면, 아버지께 구화마공의 정수를 배울 기회가 분명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 제오식까지 펼칠 수 있게 해서 나가려는 거다.
구화마공 제오식, 절혼마격(切魂魔擊).
제오식은 수련부터가 위험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무공을 펼치는 사람이 치명상을 입거나 죽을 수 있다고 알려진 초식이었다. 그랬기에 그 어떤 초식을 발휘할 때보다 정신을 집중했다.
실수하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펼쳐야 한다.
나는 제오식의 구결을 읊으며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
주위가 달라졌다. 마치 태풍이 몰아치기 직전처럼 하늘과 주변이 어두워지며 을씨년스러워졌다.
이어지는 정적.
그냥 정적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삼켜 버리는, 그런 절대적인 정적이었다. 시끄러운 전쟁터의 한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검을 내지르던 그 순간!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열 줄기의 검기가 하늘에서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팍팍팍팍팍팍팍팍팍팍!
주위에 내리꽂히는 검기들!
검기들은 바닥에 얇고도 깊숙한 구멍을 내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그야말로 적의 정수리로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공격이었다.
처음 펼쳤기에 검기들은 내가 원한 곳에 박히지 않았다. 심지어 두 줄기의 검기는 바로 내 옆에 떨어졌다. 하마터면 나를 맞힐 뻔한 것이다.
인간의 여러 급소 중에서도 가장 막기 어려운 곳, 정수리.
호신강기 역시 정수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그곳으로 벼락처럼 빠르게 검기가 내리꽂힌다고 상상해 보라.
게다가 검기는 일반적인 검기가 아니다. 구화마공의 정수가 깃든 검기는 상대의 호신강기마저 찢어발기며 머리통을 수직으로 잘라버리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물론, 그만큼 내공 소모도 막대해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초식이기도 했다.
끝으로 절혼마격의 정수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초식이란 점이다. 지금은 열 줄기지만 구화마공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내리치는 검기의 위력은 강해지고 숫자는 점점 늘어나게 된다.
상상해 보라.
수십 개의 검기가 하늘에서 천벌이 내리듯 동시에 내리치며 수십 명의 적의 머리를 관통하는 광경을.
과연 아버지는 동시에 몇 명의 적에게 절혼마격을 내리칠 수 있을까?
스무 명? 오십 명? 백 명?
대성을 이룬 구화마공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겪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 없었다.
다시 두 번째 절혼마격이 펼쳐졌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슉!
다시 검기 벼락이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팍팍팍팍팍팍팍팍팍팍!
여전히 검기들은 내 의지를 벗어나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내게서 조금 멀어졌지만, 그중 한 줄기는 아까보다 더 가깝게 떨어졌다.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초식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절대 내겐 떨어지지 않을 거다. 나를 믿어라!
이 믿음이 없으면 절대 능숙해질 수 없는 죽음의 초식.
제오식을 펼치고 또 펼쳤다.
검기들은 여전히 내 의지를 벗어나 내 생명을 위협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반복되는 수련은 그 어떤 호신강기보다 더 안전하게 나를 구할 것이다.
나의 밤은 길었으니까.
* * *
사흘 후, 사마명이 내 거처를 찾아왔다.
“군사님, 어서 오십시오!”
“그간 잘 쉬셨습니까?”
“푹 잘 쉬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야 했다.
무인에게 무공수련이 쉬는 거 아니겠습니까?
방금 전까지도 시공이환술 속에서 무공수련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사흘 내내 절혼마격을 연마했고, 이제 드디어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곳에 내리칠 수 있다. 정확도는 떨어졌지만, 적어도 가슴이 철렁철렁한 단계는 벗어난 것이다.
사마명이 찾아온 이유는 한 가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교주님께서 정식으로 허락하셨습니다.”
역시 사마명의 예상은 정확했다.
“감사합니다! 다 군사님이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그가 결사반대했으면 이번에 나갈 수 없었을 거다. 설령 아버지가 원한다고 해도, 총군사가 강하게 반대하는데 쉽게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분명 사마명의 양보 덕분이다.
“출교하신 동안 교주님은 폐관 수련에 든 것으로 처리할 겁니다. 무림맹과 사도맹에 알리는 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지만, 정보가 샐 경우를 고려해 알리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버지의 안전이 최우선인 그였으니, 당연한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조심성이 하나 더 보태졌다.
“그리고 천마호위대가 은밀히 뒤따를 겁니다.”
휘가 이끄는 이들이다. 아버지가 어딜 가더라도, 항상 함께하는 무림 최고의 호위들.
나는 정말 이번 출교만큼은 아버지와 단둘이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걸 주장할 수는 없었다. 사마명도 양보했으니, 나도 양보해야지. 대신 절충안을 제시했다.
“대신 휘 아저씨만 따라가시는 걸로 하죠.”
사마명이 그들을 딸려 보내려는 이유를 짐작했다.
아버지를 지켜주는 임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본교와 주기적으로 연락을 받기 위해서일 거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야, 본교에서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휘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어차피 호위대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은밀히 뒤따를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만약 놈들이 우릴 감시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폐관 수련에 주목할 겁니다. 시기적으로 폐관에 들 상황은 아니니까요. 혹 위장일까 의심하면 놈들은 틀림없이 천마호위대를 살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재를 알아차린다면 아버지가 출교하신 것도 알아차리겠죠.”
물론, 나는 천마전까지 놈들의 세작이 들어와 있을 거로 여기지 않는다. 최대한 단출하게 나가려는 노력이다.
설득이 더 필요하리라 예상했었는데, 사마명은 흔쾌히 허락했다.
“좋습니다. 휘 대주만 가는 걸로 하시죠.”
난 짐짓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군사님께서는 처음부터 휘 아저씨만 내보내려고 하셨군요.”
“휘 대주만 나간다고 했으면, 소교주께선 다른 이유를 대서 교주님과 둘만 나가시려고 했겠지요.”
“아! 전 군사님께 다 읽히고 있었습니다.”
내 탄식에 사마명이 웃으며 말했다.
“목적지는 섬서입니다.”
섬서는 이곳에서 꽤 먼 거리에 있었으니, 아버지와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니,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알게 될 거라는 듯 임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배려였다. 도착할 때까진 임무 생각은 말고, 아버지의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
“이동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차로도 가다가, 걷기도 하고.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끝으로 그는 이 역사적인 첫 출교의 시간을 내게 알렸다.
“출발은 내일입니다. 새벽에 외부로 나가는 수송 마차들 사이에 끼어서 나갈 겁니다.”
* * *
사마명과 만난 후 아버지의 거처로 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아버지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당황한 모습.
“교주가 되신 후에 이렇게 장기간 출교하시는 거 처음 아니십니까? 제가 짐 싸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또 여행의 고수 아니겠습니까?”
“됐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거절한 후 돌아섰다. 오늘따라 나를 대하는 게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닫히는 문 사이로 방 안 모습이 보였다.
침상 위에 옷가지들이 펼쳐져 있었고, 커다란 혁낭도 보였다. 다른 여러 물건들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버지가 짐 싸고 계신다!
은밀히 일을 진행하려고 나를 천마전으로 부르지 않고 사마명을 내 거처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여행 준비하신다고 바쁘셨던 거다.
아버지도 이번 여행을 기대하고 계신 거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문밖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잊지 말고 잠옷도 꼭 챙기십시오!”
새벽에 마차들이 천마신교 본단을 빠져나갔다.
본단에서 각 지부로 보내는 물자를 실은 마차들이었다.
그 마차 중에는 나와 아버지가 탄 마차도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평범한 마부 복장을 한 휘였다.
그렇게 본단에서 멀어지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아들과의 첫 여행, 소감이 어떠십니까?”
신난 나의 물음에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되물었다.
“여행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버지 짐이 너무 많잖습니까? 뒤쪽 짐을 싣는 곳에 아버지의 커다란 혁낭이 실려 있었다.
“물론,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거죠. 그래도 오랜만에 출교하시는 거니까 기왕이면 가슴에 쌓인 것들도 다 풀고 돌아오면 좋죠. 걱정거리는 본단에 다 두고 가십시오.”
그러자 창밖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휘에게 말했다.
“마차 세우게.”
마차가 곧장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내려라.”
“제가요? 왜 저를?”
“걱정거리는 두고 가라면서?”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이렇게 장난을 쳐주시는 것만 봐도 지금 아버지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의미다.
“걱정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자, 가시죠. 출발!”
아버지가 다시 ‘가세’라고 말하자 마차는 출발했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휘에게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휘 아저씨!”
휘는 마차를 급하게 몰지 않았다. 어쩌면 사마명이 그에게 부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출교가 임무가 아니라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나는 창밖에 몸을 내민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날씨 정말 좋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설레신다는 것을.
“교를 조금만 벗어나도 얼마나 좋습니까? 아버지. 그러니까 이번 여행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자주자주 나오자고요. 아, 저쪽 언덕을 넘어가면 멋진 호수가 하나 있습니다. 가보셨습니까? 겨울에 가면 호수가 꽝꽝 얼어붙어서 얼음을 깨고 낚시하는 맛이 끝내줍니다.”
아버지는 벌써부터 귀가 아프다는 표정이지만 앞으로 계속될 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려면 주로 내가 수다를 떨어야 했으니까.
“참, 저쪽 반대쪽 산을 넘으면 국수 끝내주게 하는 천막이 있습니다.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그러자 아버지에게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옛날에는 만두를 잘했었지.”
나는 내민 고개를 다시 마차 안으로 넣었다.
“가보셨어요?”
“예전에.”
그래, 아버지도 나처럼 무림을 돌아다니던 시절이 있으셨다. 권마와 같이 싸우러 다녔던 때일까? 아니면 혈천도마나 일화검존과 친하게 지내던 때였을까?
“돌아올 때라도 한 번 들르시죠?”
아버지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으셨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입이 참 무섭죠. 맛있는 건 어찌나 잘 아는지, 저렇게 외진 곳에서 장사해도 귀신처럼 소문이 나서 찾아가지 않습니까?”
“조용히 가자.”
“네!”
아버지, 그거 모르시죠? 저도 아버지만큼이나 과묵하게 살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더 말이 없었을 겁니다. 그 못했던 말, 아버지 앞에서 실컷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휘가 말들을 풀어 쉬게 하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주변을 산책했다.
“떠나기 전에 도마 어르신이 찾아왔습니다.”
“뭐라더냐?”
“아버지께 까불지 말라고요.”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도마가 너를 많이 아끼더구나.”
그래, 아버지가 어찌 모르겠는가? 아버지를 설득하는 자리에서 나를 꾸중하는 역을 자처한 게 결국 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시죠. 도마 어르신은.”
괜히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다. 확실히 도마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정말 깊다.
“도마에게 까불지 마라.”
혈천도마는 아버지에게 까불지 말라 하고, 아버지는 혈천도마에게 까불지 말라고 한다. 어찌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함이 없겠는가?
그럼 전 누구에게 까붑니까, 하고 장난을 치고 싶지만, 까불지 말라는 말에 까불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항상 조심하겠습니다.”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며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도, 나도 처음 겪는 일이 될 거다.
‘아버지와 교를 떠나서 함께’라는 말이 앞에 나오는 이상, 무엇을 해도 처음 하는 일이 될 테니까.
그때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느껴지느냐?”
“늑대죠?”
내가 대번에 맞추자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우선 어디에서 느껴지는지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대답했다. 이십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느껴진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 놀란 것이다.
“낯선 곳에서는 이제 자연스럽게 기를 발출해서 주위를 살핍니다.”
내 몸 주위에서 거미줄처럼 많은 기운이 뻗어나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덕분이죠.”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사냥 가서 가늘고 긴 기를 발출하는 법을 배웠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었다.
“놀고만 다닌 건 아니구나.”
“원래 무공 수련과 사랑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법이랬습니다.”
어이없다는 표정만큼이나, 아버지의 미소도 짙어졌다.
그렇게 주위를 걷다 다시 마차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때, 저 멀리 마차 옆에서 휘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이미 모닥불을 피우고 식사 준비를 끝낸 휘였다.
“왠지 휘 아저씨도 신난 것 같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봐도 분명 평소와 다른 흥이 느껴졌을 테니까.
나는 아버지가 새로운 풍경을 많이 보기를 바란다.
지금 우릴 향해 손을 흔드는 저 휘의 모습도 처음 보는 풍경일 테니까.
휘가 차린 식사는 출발할 때 준비해서 가져온 것이었다.
“이후로는 식사가 부실할 겁니다.”
“괜찮네.”
내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아버지가 계시잖아요? 저는 아버지가 요리해 주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두 번째로 사냥 갔을 때, 그때 직접 요리를 하셨다.
고기를 채소, 버섯과 함께 볶은 그 요리는 뜻밖에도 정말 맛이 좋았다. 국도 함께 끓이면서 평소에 요리한다는 것을 증명하셨고.
그러고 보면 아버지에겐 내가 모르는 모습이 많이 있다. 꽃무늬 잠옷도 그렇고, 어제 여행을 위해 직접 짐을 싸는 모습도 그렇고, 요리를 하시는 것도 그렇고.
이번 여행에서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제가 준비한 것도 있습니다.”
나는 마차에 실려 있던 혁낭에서 가죽들을 꺼냈다.
우선 아버지를 위한 호랑이 가죽.
“자, 여기 앉으십시오.”
아버지가 그 위에 앉았다.
준비해 온 것이 더 있었다. 그중 하나를 휘에게 건넸다.
“이건 휘 아저씨 겁니다.”
자신의 것까지 준비한 사실에 휘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것도 있으니까 앉으십시오. 저희건 늑대 가죽입니다.”
휘와 내 것은 똑같은 가죽이었다.
계속 사양하는 휘에게 아버지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휘는 더는 사양하지 않고 내가 마련한 가죽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별말씀을요.”
나는 지난 삶을 통해 크게 느낀 바가 있다.
사람에게 자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아버지의 태사의도.
풍류주점의 이 층 자리도.
그리고 지금 휘가 앉은 저 가죽 자리도.
다들 자신의 자리에 앉기 위해 살아가고 있으니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도 일으키는 게 우리들이니까.
자리가 뭐가 중요하냐,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냐?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어딘가에 갔을 때 내 자리가 없을 때의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해서다.
그래서 누군가 내어주는 작은 의자 하나가 얼마나 사람을 안도하게 하고 고맙게 느껴지게 하는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휘의 자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은신해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 늑대 가죽은 더 중요하다.
그렇게 셋이 나란히 앉아서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
“아버지 우선 마차로 가셔서 비를…….”
피하시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이건 너무 비인간적인 모습이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냐?”
“사람이 비에 맞으면 젖어야죠.”
아버지의 몸 주위로 보이지 않는 기가 막처럼 펼쳐져 있어서 빗물이 튕겨 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이런 재주가 있으시면 우리도 안 맞게 해주셔야지요.”
물론, 이런 말을 한다고 아버지가 그 기를 확장시켜 주실 분은 아니셨다.
그때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차 안에 있던 아버지의 혁낭 입구가 풀어지더니 그곳에서 뭔가가 밖으로 나왔다.
마차 밖으로 날아온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서 착 펼쳐졌다. 그건 바람과 비를 피할 때 사용하는 피풍천이었다.
천에 달린 줄이 마차와 나무에 묶이며 고정되었다. 허공섭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 움직임은 능숙한 사람이 직접 손으로 묶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아버지가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을 줄이야!
“자고로 야영의 꽃은 비 구경이죠! 최고의 운치지요.”
내가 기분 좋게 말하자 아버지는 비에 꺼져가던 모닥불까지 열양지기로 되살렸다.
화르르륵.
“멋지십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뭐, 이 정도쯤이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행 중 비가 오면 언제든 펼치겠지만, 사실 지금이 정말 좋았다. 우리 여행의 첫날, 첫 끼니를 잊을 수 없게 만들어줬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휘가 준비해 온 차를 가져왔다.
우린 차를 마시면서 비 구경을 했다. 아버지는 가운데 앉으셨고, 나와 휘가 좌우로 앉았다.
“아저씨는 아버지 모시는 일, 안 힘드십니까?”
아버지 앞에서 이런 질문을 하면 당황할 법도 했는데.
“힘듭니다.”
솔직한 대답에 나와 아버지가 동시에 휘를 쳐다보았다.
휘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교주님께는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아버지와의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그다. 사마명이 나에 대해 보고하는 것도 다 들었을 테니. 그는 아버지만큼이나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제대로 제 허를 찌르셨습니다. 안 힘들다고 대답하셔야 아버지에게 화살을 돌릴 수 있었는데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과묵하셔서 전혀 힘들지 않다고 대답하시면 제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거든요. 과묵하셔서 힘든 부분이 있을 거라고요. 그냥 저처럼 다 말해주면 오히려 편한데, 말씀이 없으셔서 그 뜻을 헤아려야 하지 않느냐고요. 아래 사람에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고요.”
휘를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말한 거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평소에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의 성격상 뭐 그리 서로의 고충을 나누겠는가?
“결국, 넌 할 말은 다 하는구나.”
“해야죠. 말 안 하면 모르잖아요?”
내 말에 아버지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쑥 휘에게 물었다.
“그래서 힘들었나?”
이번에야말로 휘는 당황하고 놀랐다. 아버지는 이런 질문을 하실 분이 아니셨으니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말씀하지 않았을 성격이었는데.
“아닙니다.”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힘들었느냐고 물은 것만으로도 휘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에 비가 그쳤다.
* * *
그날 밤은 야영을 했다.
객잔을 찾아가려면 그럴 수 있지만, 첫날은 조용히 지내자는 내 의견을 아버지가 받아들여 주셨다.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아버지와 나란히 누워있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휘도 같이 누워 자자고 했지만, 감히 천마와 함께 몸을 눕힐 수는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사람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으니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왜?”
“아버지를 생각하면 형도 함께 오자고 했어야 했는데. 제가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아직도 아버지를 독차지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가.
“괜찮다.”
그 말에 무거운 내 마음이 조금은 덜어졌다. 그래도 아버지와 둘이 있을 때 형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혹시 주무시나 해서 불러봤습니다.”
“그럼 안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웃으며 옆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마음속에 이 장면을 각인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시는 아버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 그리고 저 하늘의 별들까지.
그렇게 우리의 첫 여행의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우린 마을에 들렀다.
휘가 마구간을 빌려 말을 먹이고 쉬게 하는 동안, 아버지와 나는 잠시 저잣거리를 구경하러 나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특별히 우릴 주목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버지도 나도 완벽한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렀고, 아버지는 극품천잠사가 감겨 있는 내 흑마검처럼 천마검에 낡은 천을 감아서 눈에 띄지 않게 했다.
“마가촌 말고 저잣거리에 나와보신 적 처음이시죠?”
“젊어서는 많이 다녔지.”
“권마님과 싸우러 다니셨지, 저잣거리 구경을 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제가 그때의 권마 사부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를 묻는 아버지의 눈빛에 대답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어떤 모습일지, 어떤 성격일지. 나와 닮았을까?
“혹시 저처럼 말이 많으셨던 건 아닙니까?”
살짝 코웃음을 친 후 아버지가 말했다.
“취마처럼 술을 마실 수도 있겠지. 한데 너처럼 말을 많이 하는 건 자신 없다.”
“주정뱅이를 이기는 수다쟁이라니요! 너무 하십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와 저잣거리를 구경했다.
우르르 사람들이 오면 멈춰서기도 했다. 이 경험조차 아버지는 생소하실 거다. 누군가 온다고 발걸음을 멈춘 적은 없으셨을 테니까.
이렇게 멈춰서 보시는 풍경은 어떻습니까?
오가는 사람들, 웃고 떠드는 사람들, 호객하는 사람들, 화가 나 있는 사람들. 그곳에는 온갖 사람이 다 있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들을 보았다. 저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죠? 총군사께서는 아버지가 출교하시면 막 사건들이 발생할까 봐 걱정하셨지만요. 무림의 운명이 아버지를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요. 작은 사건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커져서 또 다른 사건으로 번지고.”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단정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바로 그때였다.
한 남자가 우리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인님들, 남자답게 승부 한 번 보시죠.”
그가 가리키는 곳에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간이용 탁자에 뒤집힌 접시 세 개.
아! 천마와 사기꾼이라니! 이 즐거운 기회를 어찌 놓치겠는가?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 둘도 없을 승부사시긴 한데. 어떠십니까? 저녁값이라도…….”
굳이 아버지를 자극할 필요도 없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우릴 호객한 남자에게 웃으며 물었다.
“저 사람 손 빠르오? 우리 아버지 눈보다 빠르려면 정말 빨라야 할 텐데.”
다 한통속이었다.
기술을 부리는 노름꾼과 돈을 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분위기를 잡는 바람잡이들, 그리고 우릴 데려온 호객꾼까지 모두 한편이었다.
그들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돈을 잃은 사람들이거나 앞으로 잃을 사람들이었다.
“자, 주사위가 든 그릇을 맞추면 건 돈의 세 배를 드립니다!”
노름꾼은 중년의 왜소한 남자였는데, 눈빛만큼은 무인 못지않게 날카로웠다.
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돈 있냐?”
“돈 없으세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다닐 일이 없어서.”
하긴. 천마가 어디 전낭 꺼낼 일이 있겠는가?
아버지를 놀릴 이 귀한 기회를 내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저와 휘 아저씨 놓치면 밥도 못 사드시겠네요. 그럼 무전취식을 하시거나, 그 검을 맡겨두고 드시거나.”
아버지의 그런 모습, 상상만 해도 재미있었다.
“다 놀렸으면 돈.”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품속 전낭에서 한 냥을 꺼내 건넸다.
“신중히 거십시오! 이 바닥에선 저 사람이 검신이고 투신입니다. 저 손이 우리 눈보다 빠른 손이라고요.”
물론,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냥 사기꾼들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자, 그럼 섞겠습니다.”
남자가 그릇을 일일이 열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시켜 준 후 손에 들고 있던 주사위를 그중 하나에 넣었다.
열었다, 닫았다, 이리 보냈다, 저리 보냈다, 그 손놀림이 너무 빠르지 않아서 오히려 헷갈리고 의심스러웠다.
이윽고 남자의 손이 멈췄다.
“자,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아버지가 중간 그릇 앞에 한 냥을 내려놓았다.
아마 아버지 인생에서 처음 하는 길거리 도박이지 않을까?
“또 가실 분 없습니까? 그럼 열겠습니다.”
남자가 가운데 그릇을 열자, 그곳에 주사위가 있었다.
손은 눈보다 빠르지 못했다.
“눈이 좋으시네요.”
노름꾼 사내는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아직 제대로 기술을 발휘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처음에 살살 잃어주다가 결국에는 빈털터리를 만드는 전략인 걸까?
호객하던 남자도 옆에 와서 괜히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무인님, 눈이 정말 좋으시네요.”
아버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 아버지의 흥미를 붙잡고 있는 건, 저 세 개의 하얀 그릇이다.
“자, 또 섞겠습니다!”
노름꾼이 다시 주사위를 섞었다. 주사위가 그릇 사이를 현란하게 오갔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오른쪽을 선택했다.
“더 가실 분 없으십니까?”
이번에도 아버지 혼자 걸었다.
아버지가 선택한 그릇을 열자 주사위가 있었다.
연속으로 맞추자 구경하던 이들이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아버지의 세 번째 선택.
이번에도 주사위가 든 그릇을 맞혔다.
이때 나는 보았다. 노름꾼이 살짝 당황하는 모습을.
분명 상대가 다른 쪽을 선택하게끔 유도했는데, 통하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이 모습도 보았다. 아버지의 입가에 지어져 있는 즐거운 미소를. 아버지는 지금 녀석들과 어울려 노는 게 즐거우신 거다.
“아버지! 세 번 연속으로 따셨습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슬슬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노름꾼이 다시 주사위를 섞었다. 이번에는 더욱 신중한 손놀림이었지만.
“이번에도 맞혔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감탄하며 환호했다. 바람잡이들이 아니라 그들은 진짜 구경하던 이들이었다.
호객하던 남자부터 바람잡이들까지,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 저 노름꾼이 네 번 연속으로 맞히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그들 사이에 빠르게 시선이 오가는 와중에 다시 주사위가 섞였다.
다섯 번째에는 다른 사람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정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맞혔다. 사방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이제 지나가던 이들까지 모여들어 구경했다.
아버지를 향한 시선들. 지금까지 존경과 두려움이 담긴 시선만 받다가, 저잣거리 구경꾼들의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있으셨을까? 당연히 없을 거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가까이 올 수도 없었으니까.
“자, 또 섞게!”
아버지는 순수하게 즐기고 계셨다. 이들에게 악감정이 있었다면 계속 한 냥씩만 가진 않았을 테니까.
아니면 더 크게 낭패를 보게 할 수도 있다.
처음에 열 냥, 스무 냥 계속 져주다가 나중에 천 냥짜리 전표를 올리면 어찌 되겠는가? 녀석들이 좋다고 받아들이고, 그때 맞혀버리면?
돈을 탕진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을 안 주려고 하다가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한 냥씩만 계속 갔다.
여섯 번째도 맞추자 구경꾼들이 환호했고, 일곱 번째까지 맞추자 노름꾼 사내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졌다.
결국 호객하던 남자가 와서 넌지시 말했다.
“저기, 이제 그만 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버지가 그를 쳐다보았다. 과연 아버지는 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보고 계실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들을 괴롭히려고 시작한 일이 아님은 확실했다. 말 그대로 재미있어 보여서 잠깐 즐기신 것이리라.
“그러지.”
아버지는 지금까지 딴 돈을 내게 주었다.
“저녁은 이걸로 먹자.”
“이 돈이면 만찬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노름꾼 사내가 말했다.
“오늘 번 돈 다 걸고 한 판 하시지요?”
그러자 호객하던 사내가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가서 뭐라 속삭였다. 흥분하지 말고 끝내라는 말 같았는데, 노름꾼 사내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런 상황을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섞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노름꾼 사내는 비장의 한 수를 쓰지 않을까? 절대 지지 않을 수법 말이다.
세 개의 뒤집힌 그릇.
아버지는 가운데를 선택했다. 지금까지 딴 돈이 다 걸렸으니 액수는 제법 컸다.
노름꾼의 여유만만한 표정을 보니 주사위는 가운데에 없을 게 확실했다.
“자, 그럼 열겠습니다.”
남자가 가운데 그릇을 여는 순간,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비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사위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수법까지 통하지 않았다.
노름꾼은 물론이고 호객하던 남자와 구경하던 이들까지 모두 놀랐다. 설마 이 마지막까지 맞힐 줄은 몰랐을 것이다.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역시! 우리 아버지 최고십니다!”
나는 노름꾼에게 말했다.
“자, 돈 주시오.”
잠시 노름꾼 사내는 넋이 나간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객하는 사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줄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들의 운명이 갈라질 것이다.
이윽고 노름꾼이 품 안에 있던 전낭에서 돈을 꺼내서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이 노름꾼은 돈을 건 승부에는 졌지만, 목숨을 건 승부에서는 승리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아버지가 돈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자네 기술을 남에게 알려준 적 있나? 나도 마찬가지네.”
아버지의 대답에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노름꾼에게 저런 말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딴 돈의 절반을 노름꾼에게 돌려주었다.
“왜 반을 돌려주십니까?”
노름꾼의 물음에 아버지가 나직이 대답했다.
“가끔은 돈을 돌려줘서 보내야 할 사람들도 있을 거다. 그땐 반 돌려줘서 보내라.”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사기꾼들과 놀아주던 말랑말랑한 눈빛이 아니었다.
일개 노름꾼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눈빛.
그 눈빛을 본 순간 노름꾼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를 뒤로한 채 우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긴. 어차피 약속 안 지킬 텐데.”
아버지는 저 노름꾼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지킬 겁니다.”
“한두 번은 지키겠지. 그래봤자 결국은 이 순간의 무서움은 잊을 거다.”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았다. 하물며 길거리 노름꾼을 믿을 리가 없다.
맞습니다, 아버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평생 그 약속 지킬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눈빛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셔서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다.
“하면 왜 기회를 주셨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대답했다.
“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기분이 지금 저만큼 좋겠습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처음 본 저만큼요? 그 마음을 제게 표현하시는 걸 들은 저만큼요?
“돈 땄으니 저녁은 내가 사마.”
“그 저녁은 사서 마차 타고 가면서 드시죠?”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뜻을 알아차리신 거다.
저 노름꾼은 순순히 인정했지만 호객하던 사내는 저 돈이 아까워 밤에 칼잡이들을 풀 수도 있었다. 게다가 우리의 전낭은 두둑하다는 걸 봤으니까.
그래서 그놈들 없애면 배후에 또 다른 놈이 달려올 거고. 그럼 군사가 걱정했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뒤에 누가 있고, 그 뒤에 또 누가 있고.
여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말려들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겨우 이틀째니까.
아버지, 운명이 아무리 아버지를 끌어들이려 해도, 우리가 먼저 피해버리면 그만이죠.
* * *
다음 날, 우린 섬서를 향해 마차를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고, 나는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강을 따라 피어 있는 들꽃을 바라보다가 불쑥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낚시 잘하십니까?”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내가 못 하는 게 어디 있겠냐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오늘 저녁 생선 요리 어떻습니까? 대어 잡기 내기해서 진 사람이 생선 손질부터 요리까지 다 하기, 아, 뒷정리까지요. 자신 없으시면 기권하시고요.”
아버지가 눈을 감은 채 휘에게 말했다.
“강에 마차 대게.”
고민 같은 건 본단에 두고 오신 아버지였다.
휘가 마차를 강가에 댔다.
“아버지가 잡아본 물고기 중에 제일 대어가 얼마나 큽니까?”
그러자 아버지 입에서 놀라운 물고기가 언급되었다.
“금린성어(錦鱗星漁).”
전설로 내려오는 영물 물고기였다. 아마 사람보다 더 컸으리라.
“그게 실제로 있습니까?”
“내가 잡아서 내단까지 복용했지.”
“아! 금린성어는 못 이기죠.”
크기로는 내가 지겠지만, 귀한 것으로는 내가 이길 것이다.
만년화리.
영물 물고기의 끝판 수장.
물론, 지금은 그걸 잡을 수 없다. 만년화리는 훗날 내가 그걸 얻었던 그 장소에서, 그 시기에만 얻을 수 있으니까.
“제가 또 한 낚시 합니다.”
농담 아니다. 정말 그놈의 만년화리 잡으러 다닌다고 몸이 불어 터질 정도로 물속을 찾아 헤맸으니까.
“자, 그럼 낚싯대부터 만들죠.”
나는 경공으로 주위를 돌아 대나무를 찾았다. 그중 제일 괜찮은 대나무를 잘라 왔다. 아버지 것까지 두 개를 잘라 왔다.
“어느 대나무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네가 먼저 선택해라.”
“여유를 부리시는군요. 저, 안 봐 드립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두 대나무 중에 덜 괜찮은 걸로 선택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 것보다 좋은 걸 선택할 수는 없지.
비수를 꺼내 대나무를 깎아 낚싯대를 만들었다.
“나중에 장비 탓을 하시면 안 됩니다.”
“너야말로 하지 마라.”
“휘 아저씨, 들으셨죠? 심판 공정하게 보셔야 합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잡은 물고기 늘어뜨리고 하시면 안 됩니다!”
내 말에 휘가 웃었다. 정말 아버지가 잡은 물고기가 내 것보다 작으면 무공으로 늘어뜨리려 할 그였으니까.
“한데 아버진 안 만드세요?”
아버지는 내가 낚싯대를 만드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무공으로 잡으시려는 거는 아니시죠? 안 됩니다. 정정당당하게 낚싯대로 잡는 겁니다.”
“안다.”
“그런데 왜 안 만드세요? 아무리 그렇게 보셔도 제가 안 만들어 드립니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야죠. 나중에 낚싯대 탓을 하시려고요?”
그래도 아버지는 꼼짝도 안 하셨다.
결국, 내가 두 손을 들었다.
“제가 졌습니다, 졌어요.”
내가 만들던 것을 내려두고 아버지 낚싯대부터 만들었다. 물론 내 것보다 더 정성껏 잘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만 보았다.
대가 완성되자 내 짐에서 낚싯줄과 낚싯바늘을 가져와서 마무리 작업을 했다.
그렇게 두 개의 낚싯대가 만들어졌다.
“자, 여기 아버지 무기입니다. 먼저 고르시지요.”
내가 비장하게 두 낚싯대를 내밀자.
“필요 없다.”
아버지가 마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 불길한 손짓이라니!
그러자 마차에 있던 아버지의 커다란 혁낭이 풀리면서 안에서 뭔가가 빠져나와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건 어른 팔뚝만 한 길이의 대나무였다.
슈우우욱.
아버지가 대나무를 조작하자 그것은 여의봉처럼 길어졌다.
놀랍게도 그것은 낚싯대였다. 유연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는데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그게 뭡니까?”
그러자 흘러나오는 놀라운 이름.
“동해어옹(東海漁翁)의 독문병기다.”
동해어옹은 한 자루의 낚싯대로 중원을 종횡하던 무림 고수였다. 그리고 그의 낚싯대는 완벽한 낚싯대로 알려져 있었다. 낚싯대로 대왕고래를 잡을 수 있다면 그건 동해어옹의 낚싯대일 거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걸 왜 아버지가 가지고 계십니까?”
“예전에 나와의 비무에서 지고, 낚싯대를 바치고 떠났다.”
“그 사람 은퇴시킨 사람이 아버지셨습니까?”
“그 사람을 은퇴시킨 건 그 사람 자존심이었지.”
감격스러웠다. 이 감격은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동해어옹을 이겨서가 아니다. 저 완벽한 낚싯대를 직접 봐서도 아니다.
바로 아버지가 저걸 챙겨왔다는 것에 감동했다.
늦은 밤, 천마보고에서 가져온 저 낚싯대를 혁낭에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걸 챙기면서 아버지는 나와 낚시를 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을 거다.
“아니, 낚싯대가 있으시면 있다고 말씀을 하셔야죠. 꼭 이렇게 아들을 골려 먹으시려고.”
어쩌면 당신의 낚싯대를 만들어주는 아들의 모습이 보기 좋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동해어옹의 낚싯대라니요? 이건 반칙입니다!”
“장비 탓을 하지 말자고 누가 말했더라?”
아버지와 나란히 강가에 섰다.
대어를 낚기 위한 우리의 낚시 시합이 시작되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네 몸에서 비린내 날 테니까,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라.”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저는 아버지 몸에서 나는 냄새, 참고 자겠습니다. 자고로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걸로 잡으셔도 쉽지 않으실 겁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 위로 우리들의 낚싯줄이 날았다.
낚싯줄이 만들어내는 곡선은 그 어떤 무공이 만들어내는 선보다 아름다웠다. 미끼가 강물로 들어가자 잔잔한 파장이 흘렀고, 이내 고요해졌다.
잔잔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새가 퍼덕대는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왔다.
주위는 더없이 고요했고 평화로웠다.
아버지와의 첫 낚시였다.
아버지의 생선 손질이 시작되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고 비늘을 벗기는, 그 모습을 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절부절못한 채 지켜보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교주님.”
“괜찮네.”
이때, 내가 한마디 안 끼어들 수 없지.
“물고기를 잡아당겨 늘이려는 아저씨의 충성심도 제 낚시 실력을 어쩔 수는 없지요.”
아버지와의 대어 낚기 대결에서 내가 이긴 것이다.
“당연한 결과지요. 아버지가 목검을 들었다고 보검 든 상대를 못 죽이는 건 아니잖아요?”
아버지가 슬쩍 휘를 쳐다보았다.
저 입 좀 어떻게 할 수 없겠나? 하는 표정에 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요리에 진심이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마차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또 뭡니까?”
그러자 혁낭이 열리더니 안에서 또 뭔가가 날아왔다. 그것은 여러 개의 작은 병이었다. 놀랍게도 그건 양념이 든 병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감격했다. 아버지는 이번 여정에서 요리할 때를 대비해 양념까지 준비해 오신 거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버지의 요리는 정말 훌륭했다.
“맛있습니다. 정말 제 입에는 숙수들이 만든 것보다 더 맛있습니다.”
아버지의 표정에서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왠지 무공 칭찬보다 요리 칭찬을 더 기뻐하실 것 같은 모습이다.
그날 밤 우린 야영을 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누웠는데, 이 장난이 빠질 수 없지.
난 첫날과는 달리 아버지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잠자리를 깔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비린내가 나도 참고 자겠다고 하지 않았냐?”
“제가 그랬었나요?”
“코가 사라지면 냄새가 좀 덜 나겠지?”
아버지는 생선을 다듬던 비수를 찾아서 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향해 돌아섰을 때, 나는 어느새 바로 옆으로 잠자리를 옮겨와서 누워있었다.
“안 주무세요?”
아버지가 옅게 웃었다. 저 찰나의 미소에서 아버지가 즐거워하고 계시는 것이 느껴진다.
아버지도 옆에 나란히 누우셨다. 사냥을 나갔을 때보다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사실 냄새 하나도 안 납니다.”
“안다.”
마치 술기운을 없애듯, 생선의 비린내도 기를 발출해서 벌써 공기 중으로 다 날려버린 아버지였다.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무슨 생각을 하시기는. 복수전이지.
“밤낚시로 한 번 더 붙자.”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무공으로 패배했다면 절대 미련을 가지지 않을 아버지였다. 하지만 낚시는 달랐다.
“진심이십니까?”
“이번에는 많이 잡기로. 대신 낚싯대 바꿔서. 동해어옹 그 늙은이, 그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이게 아버지시다. 졌기 때문에 더 나은 조건을 찾는 게 아니라, 졌는데 한 판 더 붙자고 할 때는 기꺼이 불리함을 감수하려는, 나는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너무 좋다.
“좋습니다.”
나와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를 챙겼다. 아버지는 내가 만든 낚싯대를 잡았고, 나는 동해어옹의 낚싯대를 들었다. 가벼우면서도 손에 착 감기는 것이 역시 기물은 기물이었다.
“휘 아저씨. 지겨우시겠지만 내일 아침도 아버지가 해주시는 생선 요리입니다!”
* * *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생선을 다듬고 계셨다.
밤낚시 역시 나의 승리였다. 그야말로 나는 던지면 던지는 대로 물고기를 낚았다. 너무 많이 낚아서 먹을 만큼만 남기고 전부 다 풀어주었다.
“제 손에 들린 동해어옹의 낚싯대는 흡사 아버지 손에 들린 천마검과 같은 거죠.”
일부러 놀렸다. 이렇게 안 놀리면 아버지는 진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져주셨다는 걸 압니다. 제게 요리를 맡기면 맛없는 아침을 드셔야 하니까요. 맞죠?”
생선을 손질하던 아버지의 비수가 멈췄다. 저 멀리서 휘가 이제 그만하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 비수가 내게 날아오면 단지 비린내만 담겨 있진 않을 거다.
내가 입을 다물자 다시 아버지의 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구이다.”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닥불은 제가 피우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직접 구운 생선구이를 아침으로 먹었다.
생선구이가 거기서 거기가 아니냐 하겠지만, 천마가 구운 생선구이를 먹어 보지 않았다면 그런 말씀을 마시라. 아버지는 생선 굽는 실력도 수준급이셨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우리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아버지가 말렸다.
“그냥 있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 대한 파악이 이미 끝난 아버지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 남자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 물 좀 주십시오.”
우릴 보고 긴장이 풀린 그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외진 곳에서 만난 무인 세 명,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할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상황을 파악할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 물부터 먹였다. 산속을 헤맸는지 옷은 찢어지고 몰골은 엉망이었다. 특히 다친 발목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얼마나 굶었소?”
“사흘? 나흘?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밥과 남은 생선을 나눠 주었다.
“꼭꼭 씹어 드시오.”
“감사합니다.”
허기에 찬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자 몸을 살펴봐 주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다리를 다치셨소.”
그러자 남자가 내게 말했다.
“산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다쳤습니다.”
“그 다리로 마을까지 가려면 힘들 것 같은데. 제가 잠깐 봐 드리죠.”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나는 삐끗한 발목을 치료해 주고 나뭇가지로 부목을 대어주었다. 내 실력만큼이나 그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는 그제야 안도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이제 벗어난 것이다.
“어쩌다 길을 잃은 거요?”
“약초를 찾다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행색은 약초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사정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임계(林系).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학당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제 아버지는 천마신교에서 무인으로 일하시다 올해 물러나셨습니다.”
본단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천마신교의 영역.
그의 부친은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운 게 아니기에 평생 하급 무인으로 지내다가 퇴임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올해가 부친의 회갑이었다.
임계는 아버지 생신에 아버지가 몸담았던 지단의 단주를 초대해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회갑연에 지단주가 와서 축하해 주면 아버지가 정말 기뻐하실 거란 생각에서였다.
“한데 지단주를 초대하는 데 오십 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누가요?”
“마을에 지단주와 선이 닿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연회에 명숙을 초대해도 돈이 든다고. 액수는 그 이름값에 따라 값이 다르다고요. 머무르는 시간에 따라 다르고요. 지단주께서 잠시 와서 축하해 주고 가시는데, 오십 냥이 든다고 했습니다.”
나는 슬쩍 아버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지는 얼마나 받으십니까?”
내 장난 가득한 질문에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아버지가 십만 냥을 준다고 움직이겠나, 백만 냥에 움직이겠나? 천만 냥을 줘도 못 부를 사람이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여행을 돈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액수일 거다.
“아마 그 돈을 줘도 지단주는 오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임계가 놀라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교의 고위 인사가 돈을 받고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뇌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십 냥에 움직일 리가 없죠.”
“아, 그렇군요. 제가 평생 글공부만 하고 살아와서 세상 물정에 어둡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내 말을 곧장 믿는 것만 봐도 그래 보였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믿는단 말인가?
“그 사람은 오십 냥 챙기고 나중에 이렇게 말하겠죠. 갑자기 지단주에게 중요한 일정이 생겼다고요. 그럼 어쩔 겁니까? 가서 따질 겁니까? 따진들 돈을 돌려주겠습니까?”
이렇게 순진한 사람의 돈을 떼어먹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내가 좋은 마음이면 남도 좋은 마음일 거란 생각이 들죠. 한데 현실은 안 그렇죠?”
임계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아버지는 평생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해드리고 싶었는데, 세월만 가고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굳이 무리해서 지단주를 초대할 필요가 있습니까? 설령 그가 오더라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도 아닐 텐데.”
“맞습니다. 지단주는 아버지 이름도 모를 겁니다.”
그게 현실이다. 지단에는 수백 명이 넘는 무인이 있는데, 말단 하급 무인을 어찌 알겠는가?
“한데 왜?”
“아버지는 술을 한잔 드시면 입버릇처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말단 무인으로 살지만, 비록 말단이지만. 비록 큰 역할은 아니지만.”
그 말에서 자식 앞에서 한 번이라도 큰소리를 치고 싶었는데 결국은 못 이루고 끝낸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 와서 제 앞에서 자랑 한 번 하시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족들, 친척들, 마을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 한 번 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고생하셨다는 말보다, 그냥 그게 아버지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해드리고 싶다는 점에서, 이번 여행을 하는 나와 그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년설삼을 캐면 백 냥은 족히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게 제 눈에 띌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이 아버지 회갑연인데, 귀한 분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참석도 못 할 뻔했습니다. 제 평생의 은인이십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우리가 있던 곳에서 떠나갔다.
* * *
임계는 다행히 늦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라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며칠 다녀온다고 말은 하고 나갔지만, 평소 하지 않던 오라버니의 행동에 동생은 그간 걱정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다. 생신 준비는?”
“고모님들이 오셔서 도와주셨어요.”
아버지 임학(林壑)은 그를 보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왔으니 됐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걱정과 안도가.
‘죄송합니다.’
며칠간 산을 헤맨 게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려고. 나는 이만큼 노력했다고 하려고.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였고 동네 사람들도 초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단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옛 동료들에게 괜히 폐가 된다며 아예 초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누가 은퇴한 말단 무인의 회갑연에 관심이나 있겠는가? 괜히 초대했다가 아무도 오지 않으면 자식들 앞에서 그 수모를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여럿 모이다 보면 꼭 이런 사람이 있다.
“마교 사람들은 아무도 안 왔나 보네?”
그는 마을에서 무관을 운영하던 관주였는데, 아무리 말단이라도 아버지가 천마신교에 속해 있을 때는 함부로 못 하던 그였다.
한데 교에서 나오고 나니 그의 눈빛이 바뀌고 태도가 바뀌었다.
“일부러 안 불렀네. 일한다고 바쁜 사람들 괜히 폐만 끼치지.”
“불렀는데 안 온 건 아니고?”
아버지에게 악의가 있다기보단, 원래 평소에도 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같은 말을 해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
그래도 오늘은 좀 참아주지.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무공을 제대로 익힌 무관의 관주였으니까.
“농담이네, 농담. 뭘 그렇게 정색하나? 나이를 먹으니 사람이 소심해졌어.”
그는 마지막까지 기분을 나쁘게 했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일단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검을 찬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서자 장내는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들을 알아본 임학은 깜짝 놀랐다.
“지단주님!”
놀랍게도 함께 지내던 지단 동료들과 지단주가 그곳을 찾아온 것이다. 임계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임 무인, 자네 회갑이라면서? 축하해 주러 왔네.”
그 말에 임학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함께 일했던 후배들이 와서 그를 축하했다. 게 중에는 친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이들까지 함께였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아니네, 오늘 주인공은 자네니, 상석에 앉게.”
지단주는 예를 갖췄다. 이 사람이 어떻게 알고 왔고 왜 이렇게까지 예를 갖출까 의아하면서도, 한편으론 큰 희열을 느꼈다.
아들과 딸이 보는 앞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지켜보고 있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던 무관의 관주는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내게 연락하게.”
“감사합니다, 지단주님.”
임학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단 무인으로 일하면서 여러 지단주를 거쳤지만, 그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이 지단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몰랐을 사람인데?
그 비밀이 이제 밝혀졌다. 지단주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아셨는지 이걸 보내셨네.”
지단주가 품에 있던 작은 상자를 하나 조심해서 꺼냈다.
그의 손이 떨리는 걸 보며 임학은 덩달아 긴장했다. 대체 저게 뭣이길래?
“자, 받아서 열어보게”
얼떨결에 받아 든 임학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안에 든 것은 백년설삼이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요!”
상자를 든 임학의 손이 덜덜 떨렸다. 임계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다가와서 백년설삼을 구경했다.
하지만 임학을 놀라게 할 일은 지금부터였다.
“내 선물이 아니라네.”
지단주의 말에 임학은 상자에 함께 들어 있던 종이를 펼쳐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임학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임계는 아버지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옆에 서 있던 임계가 내용을 확인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마을 사람들도 기겁했다.
임학이 상자를 내려놓고 절을 올렸다. 임계도 함께 절을 했다.
임학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주름진 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열일곱에 입교한 이후 평생 힘들게 살아왔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무리 아파도 참고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실제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그리고 쪽지에 적힌 짧은 글은 그 모든 지난날의 노고를 씻어 내려주었다.
본교를 위해 헌신한 그대에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하네.
천마신교 교주 검우진.
마차는 가야 할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내게 말했다.
“왜 그리 보느냐?”
눈을 감고 계시면서도 어찌 저리 사람의 시선을 잘 느끼시는지.
“좋아서요.”
아버지가 슬쩍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농담 아닙니다. 장난도 아니고요. 전 아버지가 너무 좋습니다.”
“그 사람에게 선물을 보내서?”
“아뇨, 그 사람에게 서찰을 써주셔서요.”
아버지에게 백년설삼 한뿌리는 푼돈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쓴 서찰은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에게 감동한 것은 그 선물을 내가 말해서 보낸 게 아니라는 점이다.
임계가 떠나고 나는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설득해서 그를 도울까를 고민했다. 하지만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버지는 서찰을 쓰고 휘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백년설삼 한 뿌리와 함께 지단주가 직접 전하도록 하게.’
어떻게 내가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십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묵묵히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생색까지 안 내시니 더 좋잖아요!
그리고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들에게 최고란 말을 듣고 있는 이 순간, 아버지는 분명 기뻐하고 계셨다.
이제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아버지의 입꼬리 각도가 있다. 저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지금 순수하게 좋아하고 계신다는 증거다.
그러다 아버지가 불쑥 말씀하셨다.
“그 사람들이 있어서 본교가 지탱해 온 거다.”
그래, 아버지도 아버지만의 마도가 있으신 거다.
아버지의 마음이 그들에게 잘 전해졌기를 바란다. 임계의 아버지 역시 지금 내 아버지처럼 최고의 아버지가 되어 있기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불어온 바람이 상쾌해서였을까? 하늘은 더욱 푸르고 선명했다.
“날씨가 정말 좋습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반대쪽 창을 통해 하늘을 보고 계셨다.
아버지, 어떠십니까? 천마전에서 보던 하늘과 여기서 보는 하늘이 다르게 느껴지십니까?
그렇게 강을 따라 달리던 마차가 완전히 강에서 멀어지자, 아버지가 불쑥 말씀하셨다.
“돌아올 때 저 강에서 낚시 대결 한 번 더 하자. 이번에는 우리 둘 다 네가 만든 낚싯대로.”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내게 낚시만큼은 어떻게든 이기고 싶으신가 보다. 그렇다고 져드릴 수도 없다. 아버지 눈치가 어떤 눈치인데 일부러 질 수가 있겠느냐? 그랬다간 아버지는 진짜 화를 내실 터.
“좋습니다. 언제나 대결은 세 판이죠.”
아버지의 입가에 어떤 결의가 지어졌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의였다.
* * *
“휘 아저씨, 여기서 잠깐만 세워주세요.”
달리던 마차가 섰을 때, 아버지에게 말했다.
“잠시 산책 좀 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두말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저쪽 숲을 지나면 멋진 폭포가 있습니다. 기왕 지나가는 길인데 보고 가시죠.”
휘는 마차를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아버지와 둘이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긴 언제 와봤느냐?”
“예전에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회귀 전에 와봤던 곳이다. 이 길을 걸어가던 그때가 생각난다. 눈 쌓인 길을 홀로 걸었었는데… 이제 초록이 무성해진 그 길을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아버지와 걷고 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그저 걸으셨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표정 자체는 편안해 보였다. 나도 조용히 사색하며 함께 걸었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침묵하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다.
그 아름다운 숲길의 끝에 폭포가 있다. 은빛 실타래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포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쏴아아아아악.
아버지는 말없이 폭포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교를 나와서 폭포를 보신 적이 언제였을까? 정말 오래전이었을 것 같다.
“좋구나.”
그 한마디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정말 만족해하신다는 것을.
“아버지.”
“왜 그러느냐?”
“할아버지와는 어떠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인지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해서요.”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폭포를 향했다.
“아들이었던 아버지께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한참을 말이 없던 아버지가 뜻밖에 말을 꺼냈다.
“너를 보면 후회할 때가 있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설명해 주지 않으셨지만, 내가 잘하고 있다는 뜻임은 알 수 있었다.
우린 말없이 한참 폭포를 쳐다보다가 왔던 길을 걸어서 되돌아왔다.
그렇게 내가 한 번 마차를 세웠고, 반나절쯤 가다가 이번에는 아버지가 마차를 세웠다.
“한적한 곳이 있으면 잠시 세우게.”
휘가 마차를 인적이 없는 곳에 세웠다.
“내려라.”
아버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이번 여행에서 또 한 가지 내가 기대했던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구화마공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구화마공의 가르침을 내리시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백일을 수련하는 것보다 아버지 한 말씀이 더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눈치 빠른 휘는 구화마공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은신을 한 채 사라졌다. 구화마공을 전수할 때는 자리를 비켜야 했기에 멀찌감치 떨어져 주위를 경계하러 간 것이다.
“제오식까지 익혔습니다만, 아직 제오식은 불안정합니다.”
“사식까지 펼쳐봐라.”
나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제일식부터 사식까지 연속해서 구화마공을 펼쳤다.
지켜보시던 아버지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시천비술을 통한 내 수련이 이만큼 깊어졌을지 기대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럴 때는 내가 천무지체인 것이 너무 다행이다. 이해할 수 없이 빠른 성취를 천무지체가 대신 설명해 줄 테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주목한 부분은 나의 성취가 깊다는 점만은 아닐 것이다.
더 크게 주목한 부분은 다르다는 점이리라.
아버지의 구화마공과 내 구화마공은 다르다.
악귀들만 봐도 그렇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과 완전히 달랐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나타났다 사라질 때의 느낌이나 모습도.
물론, 그렇다고 내 악귀가 아버지의 악귀들보다 더 강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이 차이가 아버지와 나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완성된 아버지를 다시 연무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을 것이다.
“내공 소모가 극심함에도 제오식을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인지 아느냐?”
“아군과 적이 섞여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정확히 적들만 골라서 죽여야 할 때다. 그렇기에 제 오식은 정확도가 생명이다.”
정확도가 낮은 제오식은 그야말로 재앙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셈이었으니까.
“자, 한 번 펼쳐봐라.”
나는 흑마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정면 삼십 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다섯 보마다 적이 늘어서 있다고 가정하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적을 떠올렸다.
내 앞에 열 명의 고수가 쭉 늘어서 있었다.
‘단 한 수에 모두 죽인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제오식 절혼마격을 펼쳤다.
슉슉슉슉슉슉슉슉슉!
팍팍팍팍팍팍팍팍팍!
마음속에 떠올린 자리에 엇비슷하게는 떨어졌지만 정확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도 결과를 정확히 알아차렸다.
“아직 정확도도 떨어지고 깊이 역시 일정하지 않다. 여섯 번째와 여덟 번째는 얕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너무 깊다.”
가까이 가서 봐도 바닥에는 시커먼 구멍만 나 있을 뿐인데, 아버지는 멀리서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순식간에 열 개의 검기가 동시에 떨어졌음에도, 일일이 그 차이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버지가 제오식에 대한 강론을 해주셨다.
구화마공에 있어서 아버지의 강론은 내게 절대적인 깨달음과 배움을 주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구체적이었다.
구화마공이 얼마나 익히기 어려운 무공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설명은 쉬웠다.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쉬운 설명.
진짜 고수만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아버지는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게 증명해 보였다.
물론, 그 쉬움 속에는 깊은 무학의 이치가 숨어 있었다. 그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의심할 거다. 고작 이런 거라고? 이렇게 쉽다고? 결국 그에게는 쉬움이란 이름의 뜬구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는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셨고, 나는 구체적으로 물었다.
난 궁금한 점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었다. 묻고 답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경지.
“자, 다시 펼쳐봐라!”
이번에도 아버지가 떨어져야 할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다시금 수직으로 떨어지는 열 개의 검기.
“아까보다는 좋지만, 아직 멀었다.”
아버지는 다시 설명해 주었다.
곱씹고 깨달아야 할 바를 던져주고 생각하게 하는 수련이 아니었다. 그런 깊은 사고는 네 스스로 하고, 내가 가르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부분이다!
마치, 지금 수련은 무관의 사범이 수련생을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이전에 나를 가르치던 때와도 달랐다. 더 쉽고 더 구체적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사이 아버지도 성장하셨다.’
내가 성장했기에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처음 회귀했을 때의 아버지보다 지금의 아버지가 더 강해지셨다.
“자, 다시 펼쳐보아라.”
이번에는 아예 검기가 떨어지는 곳으로 아버지가 걸어갔다.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시며 물었다.
“여기 인질이 있다. 적은 모두 다섯.”
아버지가 지풍을 날려서 그들의 위치를 지정했다.
인질과 적들이 거의 붙어 있었다.
“자, 구해라.”
“그 인질 자리에 아버지가 서 계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보통 그러잖습니까?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니까 내가 인질 자리에 서겠다. 네가 실수하면 나는 죽는다.”
아버지가 단호히 말했다.
“너를 어찌 믿고?”
그러면서 오히려 몇 걸음 더 떨어지셨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았기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떠올렸다. 둘러싼 자들은 그냥 무인들이 아니다. 진짜 고수들이 인질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목에 겨눠진 검들.
기회는 단 한 번.
슉슉슉슉슉슉!
팍팍팍팍팍팍!
그리고 아버지가 결과를 말씀하셨다.
“적들은 모두 죽었다.”
내가 환호성을 내지르려던 그때!
“인질도 죽었다.”
인질이 서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과연 아버지 말씀대로 거기도 검기가 떨어져 있었다. 다섯 줄기가 아니라 여섯 줄기가 떨어졌다. 아직 검기의 숫자 조절이 익숙하지 못해서 나온 실수였다.
인질이 있던 자리의 구멍을 내려다보며 애도했다.
“대룡아, 미안하다.”
서대룡이 ‘왜 접니까?’라고 따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이안을 죽일 수는 없잖아? 왼팔 장 군주 있잖습니까? 전 오른팔이라고요! 절로 서대룡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래도 예전보단 낫다.”
내가 느꼈듯 아버지도 예전에 구화마공을 배울 때와는 다르다는 걸 아버지도 확실히 느끼셨다. 우린 함께 성장 중이었다.
“그럼요, 누가 가르쳐 주시는데요?”
우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이따 도착하는 마을에 솜씨 좋은 숙수가 있는 객잔이 있습니다. 아버지 모시고 꼭 가고 싶었던 곳이죠. 인질을 못 구했으니 제가 사겠습니다!”
* * *
주향월(周香月)은 요 며칠 계속 악몽을 꾸고 있었다. 평소 꿈을 잘 꾸지 않는 그녀를 이렇게나 압박한 것은 오늘의 약속 때문이었다.
“아가씨, 준비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시비들이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지만, 주향월은 벽장에서 깨끗한 무복을 꺼냈다.
“나는 이걸 입고 갈 거야.”
“가주께서 이 옷으로 꼭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주향월이 차갑게 시비들을 쳐다보자 그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안 하면 물러서지 않을 그녀들이라서 그렇다.
“어머니도 내가 무복 입고 나갈 걸 알고 계실 거다. 그러니 야단맞을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때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직접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여인은 주향월의 모친이자 주씨검가(周氏劍家)의 가주인 임소화(林素華)였다.
“그 옷 입고 가거라.”
“싫어요.”
“왜 싫은 거냐?”
주향월은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오늘 황 공자와의 회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느냐?”
어머니야말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계시죠? 저 화려한 궁장이 오늘의 회합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씀이죠? 만약에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주향월은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정말 그들에게 딸을 팔고 싶어요?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뱉고 나면 후회할 말이었으니까.
오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주씨검가는 급속히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가 가주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진 못했다. 이 선택이 실수였다. 가주 자리는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고 물러났어야 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검가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이제 검가에는 아버지를 존경하던 이들만 남아서 어렵게 검가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근래 잘 나가는 황도상단(黃道商團)에서 주씨검가와 손을 잡자는 제의를 해왔다. 오늘이 바로 그 협상 날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오늘 협상하러 나오는 황 공자가 자신의 딸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그는 협상 대상자로 딸을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의 선택은 저 화려한 궁장이었고.
‘이럴 때 무복을 입으라고 해야, 제가 저 궁장을 입고 나가죠. 그것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어설프게 상처를 주시냐고요!’
자신은 어머니에게 상처를 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자초한 상처임에도 놀라고 상처 입고 펄쩍 뛰며 분노하고, 죽은 아버지를 찾고.
그런 모습을 자꾸 떠올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가 약속 장소인 객잔에 도착했을 때 입구에서 황도상단의 무인들과 한 청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요? 오늘 꼭 들어가야 하오!”
주향월이 객잔 입구로 걸어왔다.
황도상단의 무인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주 소저,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죠?”
“아무 일도 아닙니다. 들어가 계시면 곧 공자께서 오실 겁니다.”
주향월이 실랑이하던 남자를 쳐다보았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내심 흠칫했다.
젊고 잘생긴 남자의 눈빛은 맑고 깊었다.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운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 청년의 뒤쪽에는 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는 이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저잣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불쑥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기에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두 사람을 보는 순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부자지간이구나.’
얼굴이 닮은 건 아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닮았다.
그리고 중년인 뒤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호위 무인인가?’
그들은 바로 검무극과 검우진, 그리고 휘였다.
휘는 따로 식사하겠다는 걸, 검무극이 억지로 그를 잡아끌었다. 이번 여행은 자신과 아버지의 여행이지만, 동시에 휘와 아버지의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은신한 상태가 아니라 최대한 두 발로 걸어 다니기를 바란다. 아버지와 시선도 맞추고 같이 밥도 먹고.
그래서 이 순간은 소중한 시간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테니.
왜 이렇게까지 해주려 하느냐고?
나는 아니까.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휘의 인생을. 평생 아버지를 지켜줬던 그는 마지막에 목숨을 바치는 걸로 자신의 인생을 끝냈으니까.
주향월이 황도상단의 무인에게 물었다.
“이분들을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죠?”
“오늘 황 공자께서 이 객잔을 통째로 빌리셨습니다.”
주향월이 인상을 굳혔다.
이곳 객잔에서 만나자고 약속 장소를 정한 사람은 황 공자였다. 주씨검가를 찾아와도 되는데 굳이 이곳 객잔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 이상했는데, 이곳을 통째로 빌리는 재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 중인 사람이오. 이곳 요리를 아버지께 대접해 드리려고 먼 길을 왔지요.”
그녀는 검무극과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원래의 그녀라면 다른 객잔에 가라며 돌려보냈을 거다. 그들을 위해서도 그게 맞다. 들어가봤자 좋은 일보단 나쁜 일이 더 많을 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선택은 달랐다.
“들어가게 해드리세요.”
“황 공자께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책임지죠. 자, 함께 들어가시죠.”
주향월이 세 사람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전히 무인들이 앞을 막았다.
주향월이 차갑게 그들을 쳐다보자, 그제야 무인들이 길을 열었다.
“정말 고맙소. 소저 덕분에 아버지께 요리를 대접해 드릴 수 있게 됐소.”
그렇게 주향월은 세 사람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래, 아버지와의 여행 중이라는 말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서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었으니까.
“굳이 이 객잔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이곳 요리 중에 열두 가지 채소로 만든 냉채 요리와 좋은 약재로 삶은 오리가 그야말로 별미죠. 건강에도 좋고. 아버지께 꼭 대접해 드리고 싶었소.”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가 부러웠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정말 잘해드릴 텐데. 함께 여행하면서 몸에 좋고 맛있는 요리를 마음껏 사드렸을 텐데. 하지만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래도 황도상단의 무인들에게 떼를 쓴 건 좋은 선택은 아니었어요.”
근래 황도상단의 위세가 대단해서 눈앞의 이 남자들도 알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젊은 남자는 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황도상단이 아니라 무림맹이 막고 있어도 들어와야죠. 아버지와 첫 여행인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디 거창하게 무림맹까지 들먹일까? 무림맹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검무극이 검우진을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요.”
검우진은 아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가장 놀란 사람은 휘였다.
객잔 앞에서 검무극이 실랑이하는 사이 교주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자신이 알던 교주의 성격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저씨 드시고 싶은 것도 하나 고르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안 됩니다. 무조건 골라야 합니다. 안 고르시면 주문 안 할 겁니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아버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는 것요? 아, 불쌍한 우리 아버지. 체통도 유지 못 하시고…….”
“고르겠습니다.”
검무극을 어찌 이기겠는가? 결국, 휘도 요리 하나를 골랐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주향월은 흠칫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띠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누가 와서 왜 이곳에 있냐고 하면 제 이름을 대세요. 저는 주씨검가의 주향월이라고 해요.”
“소저 덕분에 효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돌아서 가려던 그녀가 한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좋은 마음에서 한 말씀 드리겠어요. 두 분 검이 너무 눈에 띄어요.”
검무극은 극품천잠사로, 검우진은 붕대로 검을 감아두었다. 부자지간이 모두 검을 가린 모습이 오히려 눈에 띈다는 말이다. 사실은 검이 눈에 띈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두 사람 자체가 눈에 띄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다.
“천을 풀면 더 눈에 띄어서 그렇소.”
“무슨 뜻이죠?”
검무극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무리 눈에 띈다고 천마검을 차고 중원을 활보하실 수는 없었으니까.
“맛있게 드시고 가세요. 요리값은 안 내고 가셔도 될 거예요.”
통째로 빌렸다니 한 말이었는데.
“말씀은 고맙소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소.”
“무슨 뜻이죠?”
“저 사람들이 여길 빌리면서 돈을 지불하지 않았을 거요. 우리라도 돈을 내야지.”
주향월은 깜짝 놀랐다.
“함께 들었잖아요? 이곳을 통째로 빌렸다고.”
“그럼 주인장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빌려주는 대가로 얼마를 받기로 했는지. 아마 액수를 정하지 않았을 거요. 입구에 있는 무인들 피해서 주인장에게 살짝 물어보시오.”
그녀가 가서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어떻게 알았죠?”
주인장은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귀하신 분들께서 중요한 회합을 여시는데, 제가 도와야죠.
다시 말해서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할 거란 말이었다.
“무림 문파가 잘하는 짓이니까. 말로는 나중에 다 계산해 준다고 하지만, 가면서 먹은 음식값이라도 던져주고 가면 다행일 거요. 다른 손님을 받지 못한 것까지 챙겨 주는 경우는 거의 없소.”
주향월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엄밀히 따져서 이들에게 생색을 낸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제가 황 공자가 오면 확인하겠어요.”
“그에게 따져 물으면 누가 피해를 볼지는 생각하고 따지시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결국, 이곳 객잔 주인에게 피해가 갈 거란 말이다.
“그래도 소저에게 입은 신세는 기회가 되면 꼭 갚겠소.”
바로 그때였다. 객잔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주 낭자, 벌써 오셨소?”
그는 황도상단의 후계자인 황인(黃寅)이었다. 호위들을 주렁주렁 달고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혼자 왔다.
그녀에게 걸어오는 황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함께 있던 이들에게 향했다.
“함께 계신 분들은 누구신지요?”
그러자 입구에 있던 무인이 들어와서 그에게 앞서 있었던 일을 귓속말을 전했다.
황인은 의외라 생각했다. 사전에 조사한 주향월은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쫓아낼 수도 있기에 주향월이 황인에게 말했다.
“제 손님이에요.”
“아, 그러셨군요.”
부드럽게 반응하면서 황인은 내심 의아했다.
‘이렇게까지 할 사람이 아닌데? 조사가 잘못된 걸까?’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같은 편인데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주가 딸을 혼자 내보내기 불안했을 테니까.
“귀하신 분들을 뵙습니다.”
과연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세 사람이었다.
사전에 조사했을 때 이런 자들은 없었으니, 필시 외부에서 불러온 이들일 것이다.
“황도상단의 황인입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대표로 인사했다.
“우린 지나가는 객들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인은 상대가 의도적으로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돈을 주고 고용한 자들인가? 아니면 아직도 주씨검가를 도우려는 자들이 남아 있나?’
어차피 상관없다. 오늘 일은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검무극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아, 아버지. 이것부터 드셔보십시오.”
정말 여기에 먹으러 온 사람이라는 것처럼 검무극은 음식에 집중했다.
그가 작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 아버지와 휘에게 덜어주었다.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행동에 황인의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같은 편이라 의심받지 않으려고 애쓰는군.’
하여튼 무인들의 자존심이란!
상인으로서 상대하기 가장 쉬운 게 누구냐고 묻는다면 황인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무인들이라고. 저 어리석은 자존심이라고.
“자, 우리도 가시지요.”
황인이 객잔 가운데 자리에 주향월과 마주 앉았다.
“한잔하시죠.”
황인이 술을 부어주었지만 주향월은 술잔을 그대로 내려두고 마시지 않았다.
“왜 저를 선택하셨죠?”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다고 생각해서지요.”
주향월은 황인의 소문을 들은 적이 없다. 딱히 좋은 평판도 없지만 나쁜 평판도 없는 사람.
“우리에게 투자하려는 이유가 뭐죠?”
“상단이 검가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언제나 한 가지뿐이오. 검가의 힘이 필요해서지요.”
“그 돈을 직접 투자해서 상단 내부에 검대를 만들면 되지 않나요?”
“물론, 자체적으로 무인들을 키우고 있소. 한데 그거 아시오? 무림에서는 상인들의 검을 인정하지 않소. 돈 주고 검을 샀다며 대놓고 무시하지요. 그 때문에 고수 구하기도 쉽지 않소. 돈에 팔려 갔단 소릴 듣기 싫어하거든. 솔직히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갑자기 물어온 질문에 주향월은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그런 마음이 조금은 있었으니까.
“그래서요. 무림에서 큰 장사를 하려면 주씨검가라는 이름값이 필요하오. 아, 물론 그대나 그대 가문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 절대 오해하진 마시오. 우린 서로 도우면서 상생하는 관계를 원하고 있소.”
하지만 주향월은 그들과 손을 잡는 걸 바라지 않았다.
황도상단에 대해 잘 알아서도 아니고, 검가의 내부 사정을 잘 알아서도 아니었다. 이 협력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어머니의 판단을 믿지 못해서다. 어머니가 급할 때는 항상 실수했었으니까.
황도상단과의 문제를 그렇게 판단하면 안 되지만, 감정적으로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기대치가 낮아서였을까? 그나마 생각했던 것보다 황인이란 사람은 괜찮아 보였다. 돈 자랑이나 하고 여자나 밝히는 자일 줄 알았는데, 제법 뜻도 있고 생각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손을 잡자는 거죠?”
“우리 상인은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지 않소. 오직 계약만 믿지.”
황인이 가져온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
“본 상단과 주씨검가가 힘을 합친다는 합의문이오.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되오. 원래는 가주님이 하셔야 하는데, 가주께서 대리로 보낸 분이시고 또 따님이시기도 하니 주 소저도 충분히 자격이 있으시오.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읽어보시오. 원래 서명하는 서류는 꼼꼼히 읽어야 하는 거요.”
주향월은 내심 당황했다. 오늘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거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합의문까지 작성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들과 합의하고 돌아가면 좋아하실 거라는 점. 그 화려한 궁장을 입혀서 내보내려 했던 어머니셨으니.
마음 같아선 거절하겠다고 말하고 자리를 박차면 좋겠지만, 지금 검가의 사정이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주향월이 합의문을 쭉 읽어나갔다.
한눈에 이해되는 내용도 있고, 다시 읽어도 헷갈리는 대목도 있었다.
이런 불필요한 말들이 왜 필요하죠? 다 지우고 이것만 씁시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문제는 뭘 남겨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또 어떤 문구들은 꼭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없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대충 안다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거구나.’
아니, 모르는 것보다 더 나빴다. 확실하지 않은 구절도 대충 이해하고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감히 우릴 상대로 장난을 쳐?
마지막 장까지 읽었지만 이런 호통을 칠만한 구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냥 서명해 버리고 어머니에게 가져다드릴까? 내 뜻이 아니라 어머니 뜻이었으니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라고 소리치면서?
차라리 몇 년 전, 이런 철없는 시절이었다면 좋겠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검무극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이쪽이 중요한 자리란 걸 알아서였는지, 그들은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맛있죠?”
“괜찮다.”
“아저씨는요?”
“맛있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맛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중원에 맛있다는 객잔 전부 다 돌고, 제일 맛있는 집 숙수 납치해서 돌아가시죠! 아니면 각자 입맛에 맞는 숙수 한 명씩, 세 명 납치하죠!”
그의 농담에 주향월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저들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요즘 악몽도 자주 꾸고 심신이 불안정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인데.
그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실없는 소리를 하던 눈빛이 저렇게 깊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운명의 이끌림에 몸을 맡겼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의문을 들고 검무극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황인은 그녀의 돌발행동에 내심 당황했지만, 일단 신중하게 지켜보았다.
검무극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미친 짓이지.’
오늘은 정말 본능이 미쳐 날뛰는 날이다.
“저한테 신세 갚겠다고 했죠?”
“그랬소.”
“그 신세, 지금 갚을 수 있나요?”
“우린 상인이 아니라 무인이라서, 빚지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지요.”
그녀는 들고 있던 합의문을 검무극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걸 찢어버려야 할 이유를 찾아주세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도와달라고 했으니까.
이 이야기를 어머니나 검가 무인들이 들으면 미쳤냐고 말할 것이다. 실수를 넘어 사고라 여길 것이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한 거지?’
찢어버려야 할 이유를 찾아달라는 말을 하자 온몸이 짜릿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본능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정말 잘했다고.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대답은 이런 미친 짓에 걸맞았다.
“몇 개나 찾아주면 되오?”
합의문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런 자신감이라니?
이 말이 허풍이든 자신감이든 상관없었다. 그녀의 마음에 앞서 느꼈던 안도감이 다시 찾아들었으니까.
“많을수록 좋겠죠.”
그녀가 들고 있던 합의문을 검무극에게 내밀려던 그 순간.
이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인이 나섰다.
“주 소저, 그건 안될 일이오.”
황인의 차분한 제지에 주향월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주 소저께서 아직 이런 합의에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합의문을 외부인에게 보여줘서는 아니 되오.”
황인은 검무극이 외부 사람임을 확신했다. 주씨검가를 사전 조사했을 때, 이런 특별한 느낌을 주는 이들은 없었으니까. 또한 앞서 주향월이 그들에게 하는 말이나 태도를 봐서도 분명 내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주향월에게 물었다.
“외부인에게 보여줘선 안 된다는 약속을 사전에 했소?”
“아뇨, 저는 오늘 저 합의문을 처음 봤어요.”
황인이 다시 끼어들며 말했다.
“이건 계약상의 관례요.”
검무극 역시 차분하게 그를 대했다.
“관례를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런 실수를 하셨는지 모르겠소.”
“무슨 뜻이오?”
“원래 이런 합의문을 작성하면 사전에 먼저 보내 충분히 검토하게 한 후에 만나는 게 관례 아니오? 관례를 어긴 쪽은 그대인 것 같아서 말이오.”
그 말에 황인은 반박하지 못했다.
주향월은 그런 사실을 지금에야 알았다.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관례란 말은 뺍시다. 시작부터 없었으니까.”
황인은 눈앞의 이 젊은 상대가 보기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대는 누구요?”
“주 소저 덕분에 효자가 된 사람이오.”
황인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만 들어서는 저들이 주향월과 같은 편인지, 아니면 정말 객잔 입구에서 만난 사이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특이한 사람들인 건 확실했다. 이렇게 팽팽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검우진과 휘는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이것도 먹어 보게.’ ‘감사합니다.’와 같은 자연스러운 대화까지 나누면서 말이다.
“합의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본 상단이 양보를 많이 했소. 그래서 사전에 합의문을 보내는 일에 소홀했소. 직접 보면 만족할 거로 생각해서. 읽어보시오. 그럼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요.”
황인의 눈빛에는 분명 이런 자신감이 있었다.
‘네가 읽어본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검무극은 주향월의 손에 들린 합의문을 받아들었다.
“어디 한번 읽어봅시다.”
검무극은 그것을 탁자에 내려놓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검우진과 휘는 식사를 계속했다. 그들은 아예 이쪽 일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얼핏 아들에게 화가 나서 그러나 싶었지만, 표정이나 분위기로 볼 때 전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주향월과 황인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검무극은 몇 장이나 되는 합의문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다.
“뭐가 이렇게 어려운 말이 많소?”
“합의문에 사용되는 말들이 따로 있어서 그렇소. 그래서? 그 합의문을 찢어버려야 할 부분을 찾아냈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런 부분은 없는 것 같소.”
주향월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이 사람이라면 뭔가 답을 찾아줄 것만 같았는데.
반대로 황인의 표정에 그럼 그렇지, 하는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 이제 확인까지 했으니 서명하시죠.”
합의문을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돌발행동까지 했기에 이제 서명을 미루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번만큼은 어머니의 선택이 옳으셨을까?’
그녀가 검무극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읽어봐 주셔서 감사해요.”
그녀가 탁자 위의 합의문을 챙겨 들던 그 순간!
뜻밖의 사람이 침묵을 깼다.
“첫 번째 장 여섯 번째 줄.”
놀랍게도 말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주향월은 재빨리 검우진이 말한 조항을 읽어보았다.
서로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벌어지면, 서로 합의해서 금전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이게 문제가 있나요?”
주향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가와 상단이 합의를 하게 되면 누가 유리할까? 그래서 오히려 이 조항은 주씨검가에 유리하다고 여겼는데. 혹시 다른 항목을 잘못 말한 걸까?
검우진은 대답 대신 다시 다른 곳을 지목했다.
“두 번째 장 아홉째 줄. 세 번째 장 두 번째, 일곱 번째 항목.”
주향월은 검우진이 말한 곳을 모두 읽어보았다. 어려운 내용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여긴 내용이었다. 이번에 손을 잡기 위해 저쪽에서 양보했다고 여긴 부분들.
예를 들면 이런 조항이었다. 만약 상대에게 확실한 잘못이 있다고 드러나면 금전적 보상을 넘어 무력 행사를 해도 좋다는 내용.
검가에서 상단을 공격해도 좋다는, 황인의 말처럼 저들이 최대한 양보한 내용이었다.
‘왜 저들이 양보한 부분만 지적해 주는 거지?’
그녀는 의아한 마음으로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검우진이 불쑥 물었다.
“자네들이 더 강한 것은 확실한가?”
순간 주향월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합의문을 읽는 내내, 아니 이곳 객잔에 들어선 이후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던 부분이었다. 당연히 검가가 더 강한 쪽이라 여겼으니까.
만약 아니라면? 우리가 강한 게 아니라면?
이 모든 조항은 독소조항이 되어 나중에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합의문에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정신이 팔려,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함정은 숨겨져 있는 함정이 아니다. 훤히 드러나 있지만 아무도 그걸 함정이라 여기지 않을 때, 이럴 때 그 위력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다.
이 모든 의심을 한방에 정리하는 검우진의 마지막 한마디.
“상인이 이득을 양보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주향월은 검우진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게 그거였구나.’
동시에 밀려드는 감정은 앞서 느꼈던 편안함과 안도감이었다.
앞서 안도감은 젊은 쪽인 아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아버지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 보는 척하시면서 다 보고 계셨네요?”
“나도 보라고 탁자에 올려놓고 읽은 것 아니었느냐?”
“제가 눈치 빠른 건 다 아버지 닮아서죠. 아! 아버지의 명석한 두뇌도 닮았어야 했는데.”
“너도 알아차렸을 텐데?”
검우진은 검무극도 같은 생각을 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슬쩍슬쩍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테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끝까지 부정했다.
“부모 눈에는 자기 자식이 제일 똑똑해 보이는 법이죠.”
주향월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자꾸 그들에게 몰입하게 된다는 걸 느꼈다.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멍하게 그들을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부럽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황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상인의 혈육답게 감정조절을 잘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소. 우린 일개 상단에 불과하오. 우리가 그렇게 강했다면, 왜 주씨검가와 손을 잡으려 하겠소?”
그러자 주향월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말해보세요. 왜죠?”
만약 그들이 검가보다 강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런 사실을 숨기고 이런 합의문을 내밀었다면? 이건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음모였다.
황인은 여전히 차분했다.
“오해이시오.”
“그러시겠죠.”
주향월이 합의문을 들어서 눈앞에서 찢으려 했다.
그때, 검무극이 그녀를 말렸다.
“과연 그걸 찢으면 통쾌하겠소?”
주향월이 검무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찢지 않고 가지고 계시는 게 좋소. 소저가 들고 있는 그건 증거니까.”
“증거라고요?”
“저들이 검가를 집어삼키려 했다는 증거 아니겠소? 그걸 찢으면 소저가 통쾌할 것 같지만, 진짜 통쾌함은 저 사람이 느낄 거요.”
주향월은 아찔했다.
처음에 검무극에게 가져와서 이것을 찢어버려야 할 이유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래서 드디어 그 이유를 밝혀냈다고만 여겼는데. 그래서 신나게 찢어버리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도 막 함정에 빠질 뻔한 위험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이다.
그리고 함정은 계속 발견되었다.
“네, 제가 잘 보관해두죠.”
그녀가 합의문을 자신의 품에 넣으려 하자 검무극이 또 나섰다.
“거기 넣으면 안 되오.”
“왜죠?”
“저쪽이 더 강하다는 걸 인정했기에 그 합의문을 찢으려는 거 아니었소?”
“맞아요.”
아니라면 이 합의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셈이었으니까.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을 소저가 가지고 있으면 저들이 어떻게 나오겠소?”
주향월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황인은 차분히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린 일개 상인들이오.”
주향월은 이제 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일개 상인이 너무 침착하다는 것을.
그녀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지요. 소저가 생각하는 가장 안전한 곳에 맡기시오.”
주향월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어려서부터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사람이 있었어요.”
“그분에게 맡겨서 보관하시오.”
“그럴 수 없어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그녀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낀 곳은 아버지의 품 안이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는데, 왠지 하고 싶었다. 오늘 너무 큰 심리적 압박을 받아서였을까? 아니면 이상하게 자신을 매혹한 이 두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애써 용기를 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자신의 일이고, 자기 가문의 일이었으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또다시 생각지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검우진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내가 맡아주겠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향월은 가슴이 울컥했다.
손을 내밀고 있는 검우진의 모습 위로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검우진은 무뚝뚝하게 보고 있었지만, 그 위에 겹친 아버지는 웃고 계셨다.
“찢어야 할 내용을 내가 찾았으니 책임도 져야겠지.”
검무극은 그래서가 아님을 안다.
요즘 자신에게 영향을 받으신 아버지였으니 그녀를 잠깐 도와줄 수는 있다. 그래, 기분 좋게 합의문의 내용을 찾아줄 수는 있다.
한데 이걸 맡아준다고?
이들의 일이 언제 어떻게 결론이 날지 모를 일인데? 섬서로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상황에서? 절대 아버지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황도상단은 우리가 섬서에 가서 처리해야 할 일과 연결이 되어 있는 거다.
이번 임무에 대해 사마명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는 일부러 묻지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터, 가는 길만큼은 온전히 아버지와의 여행에만 집중하고 싶었으니까.
마존들이 모두 모였을 때 사마군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의 고수들과 조직을 움직이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터, 은밀히 조사한 결과 배후 놈들을 추적할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자금줄을 추적했다고 했으니 섬서에 가서도 막대한 부를 지닌 자들을 상대해야 할 터. 아마 황도상단은 그들의 하부조직이거나 어떤 연관성을 지닌 곳인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주게.”
망설이던 주향월은 뭔가에 홀린 듯 떨리는 손으로 합의문을 검우진에게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인은 가슴이 답답했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황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누군지 몰라도 너희는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
자신을 일개 장사치로 여겼겠지. 하지만 황도상단이 어떤 곳인지 알았다면 감히 이렇게 겁 없이 나서지는 못했으리라.
“바빠서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소.”
돌아서는 그를 검무극은 그냥 보내지 않았다.
“참, 그냥 가지 마시고 객잔을 통째로 빌린값은 치르고 가시오.”
살짝 굳은 얼굴로 돌아보는 그에게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상인이라면 셈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소?”
이내 황인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저는 주고받는 셈만큼은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객잔 주인장을 불러 값을 치르고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황인이 떠나자 주향월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기분을 느꼈다.
만약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해버렸다면?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말씀대로라면 놈들이 그 합의문을 뺏으러 올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걱정에 검우진은 주인장을 불러 새 요리를 시켰다.
“기왕 앉았으니 식사하고 가게.”
주향월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겪었다. 이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검우진 대신 그녀를 안심시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걱정 안 해도 될 거요. 소저가 맡긴 그것은 이제…….”
검무극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이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되었으니까요.”
이 무림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니?
주향월은 그 말을 허풍이나 허세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받아들였다.
‘이 사람은 아버지를 이렇게나 믿는구나.’
그게 어떤 마음인지 그녀도 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그녀에게 아버지의 품은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아버지와의 일들이 떠올랐다.
어려서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시던 모습.
위풍당당하게 검가의 무인들을 이끄시던 모습.
홀로 마당에 서서 달을 올려다보던 그 뒷모습.
돌아가시기 전 병환으로 아프셨던 모습까지.
그 여러 장면 속에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은 없었다. 먼저 나서서 아버지와 식사를 하자고 한 적도 없었고, 이 사람들처럼 먼저 나서서 아버지와 여행을 가자고 한 적도 없었다.
어려서는 그토록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클수록 점점 없어졌다. 아마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도, 다음으로 미뤘을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옆에 계실 줄 알았으니까.
‘아버지, 보고 싶어요.’
그녀의 시선이 오늘 이토록 아버지를 그립게 한 사람을 향했다. 묵묵히 손을 내밀어 합의문을 맡아준 사람을.
처음 객잔 앞에서 그를 봤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불쑥 솟구쳤다가 사라졌었다. 처음 느낀 감정. 이런 인연이 되려고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그에게 제대로 감사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예를 갖춰 감사를 전했다.
“합의문을 맡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네.”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더없이 든든하고 부드럽게 들렸다.
검무극은 그녀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럴 때 그냥 넘어가면 검무극이 아니지.
―아들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으면 어떡합니까?
검무극의 전음에 검우진의 입가에 그 비웃음이 지어졌다. 놀랍게도 그 비웃음은 아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남자시다, 이 말씀이죠?
이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주향월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소협께선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게 느껴지시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은 아버지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들으셨습니까? 제가 얼마나 아버지를 좋아하는지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애절한 메아리는 아버지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검우진은 관심 없다는 듯 휘에게 말했다.
“거기 차 좀 주게.”
휘가 주전자를 들어 정중히 검우진의 잔에 부어주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두 사람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안 보는 척, 관심 없는 척하시면서 합의문 문구까지 다 읽으셨으면서요!’
그래서 아버지와의 이 여행이 매 순간 즐거운 것이다.
“소저라도 알아주셨으니 됐소.”
“그러고 보니 전 당신 이름도 모르는군요.”
“검연(劍煙)이오.”
언제나 쓰는 가명을 썼고, 이 가명을 말할 때마다 하는 말도 덧붙였다.
“인연 연 아니고 연기 연 자요. 이렇게 만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질 거요.”
검무극이 아버지와 휘를 소개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 매정하신 분은 제 아버지시고, 저분은 제 숙부시오.”
숙부라는 소개에 휘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당연히 가문의 무인이나 호위 무인쯤으로 소개하리라 예상하다가 아버지의 형제로 소개했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그는 당황했지만, 아버지는 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휘 아저씨, 숙부 하셔도 됩니다. 그럴 자격 넘치십니다.
“과묵하기 대회가 있으면 나란히 우승, 준우승하실 분들이시죠.”
검무극의 말에 주향월이 공감의 미소를 지었다. 정말 두 사람은 과묵했으니까.
특히 숙부인 남자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느꼈다. 그는 모든 걸 보고, 모든 걸 듣고 있었다.
“물론, 두 분 몫의 말까지 제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주향월이 웃었다. 참 말이 많기는 했다. 그러다 이내 그녀가 정색했다. 웃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닌데, 또 생각 없이 웃고 있었던 거다.
그러는 사이 새로 시킨 요리가 나왔다.
새 요리는 주향월 앞에 두었고, 검무극은 아까 대화하느라 먹지 못한 남은 요리를 먹었다. 아버지와 휘는 그를 위해 따로 음식을 덜어서 남겨두었다.
이야기를 나눈다고 시간이 지났음에도 음식은 식지 않고 따뜻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열양지기로 남은 음식을 데워주셨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검무극은 조금씩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보고 있었다.
주향월은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이 자리가 주는 묘한 편안함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걱정이 있었다.
검무극이 어찌 그런 마음을 못 읽겠는가?
“걱정되시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건 주씨검가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런 고민은 돌아가서 어머니나 가문의 고수들과 나눠야 했으니까.
하지만 돌아갔을 때 어떤 상황일지 벌써 그려졌다.
어머니는 회합이 결렬된 것도 싫어하시겠지만, 그 중요한 합의문을 처음 본 사람에게 맡겼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난리를 치실 것이다. 어머니가 소리 지르고 화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모르실 거다. 애초에 황도상단과의 연합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추측은 어머니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을.
걸핏하면 자식에게 당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 모습이 만든 불신이라는 것을.
이번에도 그 불신은 정확했다. 어머니는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저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떤 때보다 상황은 심각했다.
그걸 느꼈기에 오히려 이 자리를 떠나기 싫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 심각한 상황은 고스란히 자신의 현실이 될 테니까.
이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 도피하고 싶어진다.
“돌아가서 대비하시오.”
말없이 음식을 내려다보던 주향월이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상대가 그대를 잡아먹겠다고 이를 드러냈소. 그럼 싸울 준비를 해야지요.”
검무극의 말에 힘을 내야 하는데, 오히려 걱정만 앞섰다.
“어머니는 제 말을 믿지 않으실 거예요.”
그 한마디에 그녀와 그녀의 모친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원래 부모는 자식 말을 잘 안 믿소. 왜인지 아시오?”
“왜죠?”
“그 시절을 겪은 분들이니까.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우기고, 거짓말하고, 반항하고. 그 성장기를 다 지켜본 분들이잖소? 그런 녀석이 이제 철 좀 들었다고 하는 말을 어찌 믿겠소? 천하제일경공을 익히고 왔다고 말해도 길 건널 때 마차 조심하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게 자식 아니겠소? 좌우도 안 살피고 앞만 보고 달려가던 우릴 기억하고 있으니까.”
주향월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자식 셋은 키워본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부모와 자식은 양방향 관계니까요. 우린 자꾸 잊지만.”
왜였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향월은 어머니가 떠올랐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우리 아버지도 저 안 믿으시오.”
일전에 구화마공 수련할 때, 위험한 자리에서 멀찌감치 물러선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검우진은 주향월에게 무심히 툭 내뱉었다.
“소저도 저 녀석 믿지 마시게.”
그 말에 주향월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하십니다!”
말과는 달리 아버지를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천천히 믿으셔도 됩니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믿으셔도 됩니다. 오 년쯤 후에 나는 너를 믿는다, 하셔도 좋습니다.
검무극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니 돌아가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눠보시오.”
“어머니를 설득할 자신이 없어요.”
“아까 돌아간 그 상인도 돌아가서는 누군가를 설득할 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오늘 합의에 실패했으니 누군가에게 이 일을 설명하고 설득할 거요. 다시 일을 맡겨달라고. 다음에는 반드시 성공하겠다고. 당신보다 유리한 처지에 있는 적도 그런 노력을 하는데, 당신은 왜 벌써 포기하려는 거요?”
생각지도 못한 질책이었다.
“대충 감으로만 생각해서 그렇소. 그러지 마시고.”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서 황인과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로 가서, 그녀가 서명하려던 붓을 가져왔다.
“적으시오. 어떤 말을 어떻게 할지. 첫마디는 어떻게 하고,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면 이렇게 해야지. 다 적으시오.”
주향월은 놀란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래도 안 통하면요?”
“그것도 적으시오. 그땐 어떻게 할지.”
“뚝딱뚝딱 쉬워 보여도 사람 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소. 그중에서도 가족 설득이 제일 어렵고. 오히려 서로 너무 잘 알아서 어렵지. 그러니 설득하려 들지 말고, 밀린 대화를 나눈다는 마음으로 하시오. 어머니가 요즘 뭐가 고민인지 물어본 적 있소? 밥은 제대로 드시는지 알고 있소?”
주향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어머니의 실수만 노려보며 아버지만 그리워했었으니까.
주향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인도 누군가를 설득하고 있을 거란 말도, 어머니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나누란 말도. 그녀를 벌떡 일어나게 했다.
그래, 도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그런 나약한 사람이 되진 않을 거다.
“조언 감사해요.”
그녀가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 위로 아버지가 다시 겹쳤다. 아버지, 저 힘낼게요.
“오늘 일 정말 감사했습니다.”
돌아서 가려던 그녀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한데 이 무림에서 제일 안전한 금고, 찾고 싶을 때 찾을 수는 있죠?”
처음으로 꺼낸 그녀의 농담을 검무극이 웃으며 받아주었다.
“저 얼굴 보시고 직접 판단하세요. 일단 저는 못 엽니다.”
그녀는 정말 그걸 판단이라도 하겠다는 듯, 가만히 검우진을 쳐다보다가 정중히 허리를 숙인 후 객잔을 떠났다.
이제 객잔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농담까지 하는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돌아가서 잘할 것 같습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검우진의 걱정은 따로 있었다.
“황도상단은 주씨검가가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이 말로 확실해졌다. 황도상단이 이번 일의 배후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렇겠지요.”
“알면서 왜 그녀를 자극한 거냐?”
“어차피 이번 일은 우리가 주도해서 처리하겠지만, 저들도 변해야 하니까요.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다른 자들에게 잡아먹힐 겁니다.”
거기에 실없는 농담이 덧붙여졌다.
“저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하는 여인인데, 도와야지요. 이번에 아버지의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역시 저는 아버지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 농담은 통하지 않았다.
허튼소리! 하실 것도 같았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소싯적에 내가 한 인기 했지, 하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이 도도하고 잘난 척하는 표정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검우진은 아들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아마 저들은 합의문부터 뺏으러 오겠죠?”
배후와 연결되어 있기에 하는 추측이 아니었다.
아까 황인이 남겼던 말 때문이다.
―저는 주고받는 셈만큼은 확실한 사람입니다.
상인의 미소로 위장되어 있지만, 놈은 빚지고는 못 견디는 자다.
“신중해 보이는 자니 우리 정체부터 파헤치려 들 거고요.”
검무극의 수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예측이 술술 흘러나왔다.
“일개 상인임을 강조했으니 아마 직접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정보 상인에게 맡겨서 우리 정체를 파악하려 들 텐데.”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 아버지나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미리 정보상에 손을 써두려 합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가짜 신분이 흘러 들어가게 끔요.”
검우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휘는 느낄 수 있었다. 교주가 아들의 판단에 흡족해하고 있음을.
오랫동안 교주를 모셔 왔지만, 근래처럼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휘는 교주의 이런 변화를 이해했다.
항상 그의 옆에 있었으니 검무극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들었다. 어디서 누굴 없애고, 또 어디서 누굴 없애고.
하지만 들었을 때의 검무극과 직접 경험하는 검무극은 완전히 달랐다.
이번 여행을 통해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소교주는 결과보다 과정이 더 빛나는 사람임을.
만약 이번 일을 천마전에서 결과만 들었다면 소교주가 황도상단의 암수에서 주씨검가를 도왔다는 사실만 알게 될 거다.
그랬다면 이런 일들은 생략되겠지.
이곳까지 오면서 했던 낚시 내기도, 교주와의 산책과 무공수련도, 주향월에게 해줬던 조언도. 심지어 호위인 자신의 자리를 찾아주려 애썼던 모습까지도.
그 모든 감정의 교류가 모두 생략되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옆에서 함께 겪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얼마나 빛나는지 결코 알지 못했으리라.
교주께서는 지금 그런 아들을 경험하고 있다. 소교주가 요구한 오 년의 시간이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다.
이번 여행 전까지 휘는 소교주에게 무리한 승부라 여겼다. 절대 교주의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씩 늘어남을 느낀다.
“우린 감숙 서도파로 위장할 겁니다.”
검연이란 이름을 쓰면 항상 그 문파로 위장했다. 실제 천마신교에서 운영하는 문파였기에 자세히 조사하면 할수록 위장은 확실해졌다.
“정파로구나.”
역시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정파의 가주 노릇을 해보시겠습니까?”
검우진은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다음은?”
아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한 모습이었다.
“놈들 뒤에 우리가 찾아야 할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검우진은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자들을 처리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무작정 처리했다간 배후 세력들이 꼭꼭 숨어 버리거나 대비하겠지요.”
자연스럽게 놈들에게 접근해서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황도상단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래서 저들에게 합의문을 하나 더 쓰게 하려고 합니다. 강한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진 그 합의문 말입니다.”
그 말인즉 그들에게 위장하려는 문파인 서도파를 끌어들이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우린 그 합의문 문구 그대로 서명하죠.”
주향월이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대답에 앞서 주향월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황인이 합의문을 가져온다는 것, 알고 계셨어요?”
“몰랐다.”
과연 모르셨을까? 일단 의심부터 든다. 이것이 어머니와 자신과의 관계의 현실이다.
“그래서? 합의문을 작성했느냐?”
그리고 이 반응만 봐도 어머니가 얼마나 서두르는지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말씀하셔야 했다.
―네게 합의문을 내밀었다고? 사전에 우리에게 보내지도 않고서?
그러면서 걱정스럽게 물어야 했다.
―설마 그 합의문에 서명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그 합의문에 서명 안 한 건 아니지? 이런 눈빛으로.
그녀는 품에 넣어온 종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검무극이 조언한 대로 어머니에게 할 말을 모두 적었다.
그냥 적기만 한 게 아니었다. 여러 경우를 예상해서 그럴 때 어떻게 답할지까지 적었다. 적은 것 중에 지금 이 경우도 있다.
“아뇨, 미뤘어요.”
어머니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실망했을 경우도 예상했기에 이때는 무슨 말을 할지 적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어머니는 예상 가능한 성격을 지닌 분이시다. 그래서 참 많이 싸우고, 그래서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하고.
그래서 이 모든 글 제일 위에 이 말부터 적었다.
절대 소리 지르지 말자! 부드럽게 말하자!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소릴 지르는 순간, 제대로 대화를 마친 적이 없었으니까. 낮은 목소리에 힘이 있고, 차분히 말할 때 내 감정이 잘 전해진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머니에게만은 이게 정말 잘 안 된다.
하지만 오늘은 잘하고 있었다.
“신중히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앞서 객잔에서 겪은 일을 말해봤자 어머니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합의문을 맡긴 건 펄쩍 뛰실 일이었고.
“황도상단에 대해 더 알아보고, 합의문도 전문가에게 맡겨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이 없는지 살펴야죠.”
예전이었다면 반드시 이 말을 덧붙였을 거다.
‘제대로 알아보셨어요? 아니죠? 항상 이런 식이죠.’
싸움의 시작을 알리고 서로의 목청을 높이는 서막을 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적은 종이에 저 말은 없다.
내게서 전문가에게 맡긴다는 말이 나온 것이 조금 의외였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전문가 누구?”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말씀드릴게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할 말을 했다.
“지금 본가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 저도 알고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의아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이것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신중했다고? 네가 언제부터 가문의 어려움을 신경 썼다고?
예전이었다면 앙칼지게 반응했을 거다. 하지만 오히려 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저도 컸잖아요? 저도 앞으로 어머니를 열심히 도울게요.”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모습에 어머니는 살짝 당황한 채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주향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적은 말의 반의반도 하지 않았지만, 대화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적고 안 적고, 분명 차이가 있었다.
‘아! 이 말을 안 했네.’
마지막에 나오기 전에 가문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식사 잘 챙기시라는 말을 꼭 하라고 밑줄까지 그었는데 그냥 나온 것이다.
어쨌든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 * *
황인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받았다. 그게 상인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 배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감정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전낙(全洛) 앞에 섰을 때다.
그는 자신이 손잡은 악마였다.
―너무 위험한 자다. 저들과 손을 잡으면 안 된다.
아버지의 만류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은 평생을 촌구석 상단의 단주로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으니까. 황도상단을 중원제일상단으로 만들고 싶은 야망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손을 잡은 사람이 이 전낙이다. 손을 잡고 나니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이 전낙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검을 들었고, 자신은 주판을 들었을 뿐이라는 걸. 그가 차갑게 노려볼 때, 자신은 미소를 짓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임을, 그와 자신은 궁극적으로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전낙과 손을 잡은 후, 황도상단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이 전낙 역시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대화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자신이 대체 어디에 휩쓸린 것인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천하제일상단이 되느냐, 아니면 이 전낙에게 죽느냐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다.
“합의가 결렬되었다고요?”
전낙은 언제나처럼 정중하고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황인은 언제나 소름이 돋았다.
알기 때문이다.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라는 것을. 앞으로 삼십 년을 같은 편으로 지내도 자신을 죽여야 할 순간이 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을 사람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번 일은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검가에서 외부 인사를 끌어들였습니다.”
“누구를요?”
“감숙 서도파입니다. 서도파의 문주가 죽은 검가주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검무극의 예상대로 그는 직접 움직이지 않고 정보상을 통해 정체를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알아낼 수 있었다. 이미 정보상은 그들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상대가 서도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황인은 안도했다.
객잔에서 만난 그들은 뭔지 모를 묘한 느낌을 주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여유가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이제 그 여유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소룡전에서 우승자를 배출한 가문이라 이거지?’
그 이해할 수 없었던 여유는 바로 거기서 나온 것이다. 그랬기에 오히려 안도했다.
‘고작 그런 이유라면?’
자신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상대다.
전낙이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후 일은 제가 처리하죠.”
황인은 알았다. 그가 말하는 처리가 어떤 방법인지. 서도파의 세 사람을 죽이고, 합의문을 찾아올 것이다. 그는 언제나 깔끔한 일 처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황인은 이번 일을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서도파는 지역 방파에 불과하지만, 소룡전에서 우승자를 배출하면서 무림맹과도 인연을 맺었습니다. 자칫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무림맹이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검무극이 위장 신분으로 굳이 서도파를 선택한 이유였다. 상대에게 무력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다른 방법을 택하라고. 검무극은 그들을 통해 배후를 알아차릴 생각이었으니까.
“제게 전귀(錢鬼)들을 빌려주십시오.”
돈귀신. 전낙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수들을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정말 돈에 있어서는 귀신들이었다. 지금껏 그들이 움직이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었다.
고집을 부렸던 이들이 마음을 바꾸었고, 검을 겨누던 이들은 사고를 당했으며 욕을 하던 이들은 실종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이 나서면 다음 날 서명이 적힌 계약서가 손에 들어오게 된다.
“이번 일은 무인보다는 상인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설득해서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때 원래 하려던 대로 일 처리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이윽고 전낙이 입을 열었다.
“몇 명이 필요하시오?”
“서도파 문주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황인은 자신을 믿어달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상인이 어디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겠습니까?”
* * *
그날 저녁 황인이 검무극을 찾아왔다.
검무극 일행은 저잣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장원을 빌려서 머물고 있었다.
황인의 입장에서는 이목을 끄는 객잔에 머물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황인은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검무극이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객잔 빌린값을 내고 가라고? 상인이 셈을 똑바로 해야 하지 않냐고? 주인장을 불러 돈을 치를 때 수치스러웠다. 감히 자신 앞에서 상인의 셈을 논하다니!
놈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실컷 희롱한 후에 떠나보낼 작정이다. 객잔에서 떠날 때 놈에게 말했다. 빚은 꼭 갚는 사람이라고.
휘의 안내를 받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검무극은 나무들이 심어진 곳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검무극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앞서 객잔에서 있었던 일은 잊은 사람처럼, 누가 보면 친한 친구인 줄 알 것 같았다.
“마침 잘 오셨소. 여기 줄 좀 잡아 주시오.”
황인이 얼떨결에 검무극이 내민 줄을 잡았다. 검무극이 반대쪽 나무에 줄을 매달았다.
양쪽으로 고정된 그 가운데 어른 하나가 누우면 될 크기의 그물이 있었다.
“그물침대요. 원래 독충이 많은 지역에서 잠을 잘 때 임시로 만드는 침대요.”
이미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가 더 만들어져 있었다.
“저건 아버지 것이오. 오늘 밤에 아버지와 나란히 여기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볼 생각이오.”
생각만 해도 좋은지 검무극은 기분 좋게 웃었다.
“소협은 아버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소.”
“물론이오. 아버지는 나를 믿지 않으시지만, 나는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오.”
일부러 건물 안에 들리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검무극이었다. 이곳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까지 다 듣고 계셨겠지만 건물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자, 이제 다 만들었으니 어디 한 번 누워봅시다.”
검무극이 그물에 누웠다. 그가 몸을 흔들자 나무 사이에서 살랑살랑 그물이 움직였다.
“너무 편하고 좋소.”
황인은 그런 검무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객잔에서도 느꼈지만, 참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랬으니 이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겠지.
“당신 아버지는 어떻소?”
갑자기 아버지에 대해 물어오자 황인은 내심 당황했다.
“무슨 말이오?”
“당신 아버지는 아들을 놀라게 하지 않느냐는 말이오. 나는 그때 깜짝 놀랐소. 아버지가 그 여인을 위해 나설 줄은 몰랐소.”
황인은 아버지에 대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아들의 뜻에 따라 전낙과 손을 잡았다. 자식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에게도 자신과 같은 야망이 있어서였을까? 황인은 정확히 아버지의 생각이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알기 쉽고, 또 제일 알기 어려운 사람이 아버지 아닐까 싶소.”
검무극의 말에 황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무극이 갑자기 그물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당신도 누워보시오.”
“나는 괜찮소.”
“누워보시라니까.”
황인을 억지로 거기 눕게 했다.
“거기서 하늘을 올려다보시오. 어떻소?”
이런 침대에는 처음 누워봤는데, 생각보다 편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휘청해서 바닥에 꼬꾸라지려는 걸 검무극이 붙잡아주었다.
“고맙소.”
“적응이 안 돼서 그렇소.”
적응이 안 되는 건 검무극의 태도였다. 앞서 객잔에서보다 훨씬 친근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이런다고 이번 일 그냥 넘어가진 않을 거요.”
황인이 쳐다본 담장 위에는 어느새 세 명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께 데려온 전귀들이었다. 전귀 중에서도 전낙이 아끼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서도파와 같은 지역 방파의 문주 정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고수들이었다.
“일개 상인이라고 하시더니, 일개 상인이 아니시오.”
“상인을 무시하고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바라기도 하오.”
“그런 이유라면 혼자 오셨어도 되었소. 보다시피 난 검으로 하는 대화보단 입으로 하는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황인은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야?’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을 실력자들을 데리고 왔음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기가 죽지 않았다. 혹시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거냐?
“내 명령이면 강제로라도 합의문을 뺏을 거요.”
그러자 검무극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저들 셋으로 되겠소? 우리 아버지 검을 뽑게 하려면 저런 사람들로 한 삼백 명은 와야 할 텐데.”
그러자 전귀들이 동시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들이 고수긴 해도 검무극의 진면목을 꿰뚫어 볼 정도의 고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서도파의 후계자.
이미 상대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가소로울 뿐이었다. 더구나 오기 전에 황인에게 그의 언변이 보통이 아니라는 말까지 들었다.
“순순히 합의문 내놓고 정중히 사과하고 떠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요.”
“아버지는 절대 내놓지 않으실 거요. 그 여인과 약속을 해버리셔서.”
“아버지를 살리고 싶으면 당신이 가서 설득하시오.”
그러자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불가하오. 우리 아버지는 설득하려면 최소 오 년은 필요한 분이라서.”
오 년?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황인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지만, 여전히 검무극은 여유로웠다.
그때까지도 지켜만 보던 담장 위의 세 사람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나는 말리지 못하오. 마지막 기회요. 당신이 가서 아버지 설득하고 합의문 받아오시오.”
세 사람의 전귀 중 한 사람이 나섰다.
“셋이 갈 필요도 없다. 내가 가서 받아오겠다. 네 아비도 데려와서 그 그물침대에 던져주지.”
그가 건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도 검무극은 태평하게 그물침대에 누워 있었다.
“당신은 아버지가 걱정되지도 않으시오?”
“세상 사람 다 걱정해도 딱 한 사람, 걱정 안 해도 될 분이오.”
황인은 이 여유의 정체를 이렇게 짐작했다.
‘혹시 무림맹이 지켜줄 거로 믿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룡전 우승자를 배출한 가문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란 자신감. 그래, 서도파가 믿을 건 그것밖에 없으리라.
‘그 어설픈 자부심이 당신네를 망쳤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들어간 전귀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에서 다투거나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건물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기다리다 지친 두 번째 전귀가 나섰다.
“내가 가보지.”
그가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실력이라면 첫 번째 전귀 못지않고, 게다가 더 침착한 성격을 지닌 그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소식이 없었다.
남은 전귀의 표정이 굳어졌다.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실감한 것이다. 처음부터 셋이 같이 들어갔어야 했다.
“함정일 수도 있소!”
황인의 만류에 세 번째 전귀가 차갑게 말했다.
“그럼 여긴들 안전할까?”
세 번째 전귀가 검을 뽑아 든 채 조심스럽게 건물로 들어갔다.
사납기 그지없는 세 사람이 들어갔지만, 하다못해 의자 넘어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게 더 무섭고도 놀라웠다.
세 번째 전귀도 소식이 없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건물을 쳐다보던 황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이윽고 검무극이 그물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먹이 종이에 번져 나가듯 붉은 기운이 세상에 퍼져 나갔고, 하늘은 더 넓게 보였다.
노을을 담은 신비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이 차분하게 물었다.
“당신이 진정 상인이라면 칼질이나 협박을 할 게 아니라 거래를 해야 하지 않겠소?”
검무극의 말이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상인이라면 거래를 해야 하지 않겠소?
황인은 자신이 상인이라는 자부심을 곧잘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안다. 이 자부심은 진실이란 파도가 치면 한 번에 부서져 내릴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는 상인으로서의 거래가 아닌 전귀들을 동원해서 일을 처리했었으니까.
“원래라면 당신 혼자 와서 내게 제안했어야지. 그 합의문을 돌려받고 싶소, 당신이 원하는 건 뭐요? 이렇게 말하는 게 진짜 상인 아니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것을 제시하고. 검으로는 할 수 없는 걸 해내는 사람, 그게 상인 아니오?”
황인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앞서 객잔에서도 상인이라면 셈은 똑바로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검무극의 말에 발끈한 것도 이런 자격지심 때문이리라.
잠시 말이 없던 황인의 시선이 전귀들이 들어간 건물로 향했다.
“들어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요?”
“그야 나도 모르오.”
“독이라도 푼 거요?”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버지 독이라면 질색하시는 분이시오. 그 때문에 섭섭한 분도 한 분 계시고.”
대체 무슨 말인지? 황인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궁금하면 들어가 봅시다.”
검무극이 앞장서 걸어 들어갔다.
황인은 마음 같아선 대문을 향해 달려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달아날 수도 없겠지만, 설령 보내준다고 해도 이대로 돌아가서 전낙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그가 아끼던 세 전귀 생사도 확인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무공을 모르는 자신이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전낙은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그냥 보내줬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황인은 두려운 마음으로 검무극을 따라 들어갔다.
깔끔하게 꾸며진 복도를 따라 걷는데 전귀들의 시체는커녕 싸운 흔적도 없었다. 장식장에 놓인 화병의 꽃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분명 그들은 서도파 문주를 죽일 수 있는 실력자들이라고 했는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쩌면 복도 끝 안방에 세 사람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그러기를! 아니면 서도파 문주를 죽인 후, 그 시체를 내려다보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데 그 반대라면 어쩌지?
온갖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 두 사람은 복도 끝 방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섰을 때, 검우진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방 안에 전귀들은 없었다.
“아버지, 그날 객잔에서 본 상인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검우진이 황인을 쳐다보았다.
“문주님을 뵙습니다.”
황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검우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객잔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눈빛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달랐다.
다른 인사를 이어 가야 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온 사람들이 먼저 이 건물에 들어갔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솔직히 대놓고 묻고 싶었다. 당신이 그들을 처치했느냐고.
검우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무극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을 처리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휘라는 사실을.
그들을 들여보내란 명령이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아버지를 목표로 집안에 들어선 자를 휘가 그냥 두고 보았을 리 없다. 휘에게는 그야말로 ‘감히 이것들이!’였을 테니까.
아마 은신한 채로 있다가 한 명씩 들어선 전귀를 소리 없이 처치했을 것이다. 피 한 방울, 비명 한마디 없이, 이것이 당대 천마의 호위 책임자의 실력이다.
“그럼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조심스럽게 말하며 황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당연히 그도 궁금해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저런 태연한 모습이라면?
그때, 문득 황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설마? 이 사람들?’
무림에 조용히 전해 내려오는 비화 속의 주인공들처럼.
‘힘을 감추고 살아온 비밀세가였나?’
그리고 이어지는 한 가지 생각.
‘그러다 젊은 후계자 중 하나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무림에 출도, 소룡전에 출전해서 우승을 한다? 결국, 그 때문에 가주까지 세상에 나오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이 이야기가 허황하다 생각지 않았다. 이런 배경이 없다면 어찌 일개 지역 방파의 무인이 소룡전에서 우승하고, 세 명의 전귀를 순식간에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무림에는 온갖 비밀과 신비를 지닌 이들이 존재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객잔에서 보았던 이들의 그 이해할 수 없었던 여유까지 이해되었다.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나까지 죽일지도 모른다.’
신비세력의 비밀은 감춰져야 할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황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살의와는 거리가 먼 저 맑고 깊은 눈빛을 보며 그는 희망을 떠올렸다.
‘기회가 되겠지.’
황도상단을 천하제일상단으로 만들 하늘이 준 기회.
비로소 침묵을 깬 검우진이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나?”
솔직히 대답해야 하나? 합의문을 찾으러 왔다고? 아니, 뺏으러 왔다고?
고민하던 황인은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신이 진정 상인이라면 거래를 해야 하지 않소?
황인이 크게 심호흡한 후에 검우진에게 말했다.
“문주님과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본 상단을 천하제일상단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누가 듣는다면 미친 소리라 할 것이다. 전귀 셋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빨리 전낙을 배신할 수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배신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저울질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짜 상인이 되어야 한다. 셈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버는 돈은 물론이고 이후에 벌어들이는 돈의 절반을 평생 바치겠습니다.”
자신을 죽일지 살릴지 모를 상대에게 던지는 황인의 본능적인 승부수였다.
자신이 아는 전낙은 피도 눈물도 없는 도살자다.
그런 그가 자신이 아끼는 세 전귀를 모두 잃었는데, 이들을 그냥 둘까? 아닐 것이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기는 쪽에 붙어야 한다.
‘이 사람들에게 운명을 걸자.’
지금은 이들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이윽고 검우진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들과 상의하게.”
황인은 검우진의 반응에서 자신의 추측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평범한 문파라면 이렇게 반응했겠지?
―천하제일상단을 만들어 달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그는 아들과 상의하라고 한다. 상의하면 그 일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는 듯.
검우진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차를 마시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자, 우린 이만 나갑시다.”
검무극의 말에 황인은 정중히 검우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황인이 검무극을 따라 방을 나왔다. 나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황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혹, 내가 문주님께 실수하진 않았소?”
“실수는 안 하셨소. 다만 거래 내용이 훌륭하다고 볼 순 없었지.”
“무슨 뜻이오?”
“당신이 거래의 대가로 제시한 것은 돈이었는데.”
검무극이 옅게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 아버지도 돈이 많으시오.”
황인이 항변하듯 말했다.
“내가 보장한 액수는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막대한 돈이오.”
“우리 아버지도 워낙 막대해서.”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천하제일상단이 절반의 돈을 바친다는데 어디 개인의 재산을 가져다 대는 것인지.
이렇게 한 번씩 이 사람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아무튼 이제 좀 상인답소.”
검무극의 부드러운 표정에 황인은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자신을 죽일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걱정은 전낙을 향했다.
“함께 왔던 세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면 그 사람이 가만있지 않을 거요. 모든 수하를 다 거느리고 당신들을 죽이러 올 거요.”
“수하가 한 삼백 명 되오?”
앞서 검무극이 했던 농담이었다. 삼백 명은 와야 아버지가 검을 뽑을 거라는 그 말이 이제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다해서 삼십 명 남짓이지만, 그들 중에는 아까 데려왔던 이들보다 더 뛰어난 고수도 있는 걸로 알고 있소.”
검무극이 잠시 황인을 응시했다. 검무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황인은 이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말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돌아가서 그 사람만 데리고 이리로 오시오.”
황인이 흠칫 놀랐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전낙을 이곳으로 유인해서 죽이겠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나를 의심해서 죽일 수도 있소.”
“당신이 우릴 배신할 수도 있겠지.”
황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시험임을. 이 시험을 넘어서면 손을 잡겠다는 뜻임을. 마음속에 있던 저울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요동쳤다. 이제 잘못 선택하면 죽는다.
“그를 데려오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자는 아까 왔던 자들보다 훨씬 고수요.”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당신이 판단하시오. 대신 이건 알아야 할 거요. 당신 꿈이 너무 커서 너무 위험한 사람을 끌어들였소.”
그는 그 위험한 사람이 자신과 손잡은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검무극이 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러니 잘 판단하시오. 이번 거래에서 물러주는 건 없을 거요.”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황인은 신비세가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대가 판단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건 자신이 배신해서 모두를 다 끌고 가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었으니까.
물론, 일시적인 선택이었다.
양쪽에 다리를 모두 걸친 후,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다. 저울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법 아니겠는가?
일단은 전낙을 그들에게 데려가는 거다. 데려가서 서도파가 전낙을 죽이면 원래 계획 그대로 그들에게 붙으면 되고, 만약 전낙이 그들을 이기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에게 붙을 작정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전낙에게 배후가 있다는 점이지만 그건 나중에 걱정해야 할 일이다. 지금 걱정해야 할 일은 그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어떻게 데려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오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전귀들이 그를 부른다고 할까? 그럼 전귀 중 한 명이 오면 되지 왜 당신을 보냈나? 세 명이 다 있어야 할 상황이겠지요. 아니다. 이런 이유는 안 통할 거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차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서도파를 우리 쪽으로 흡수하고 싶습니다.”
황인의 말에 전낙이 의아한 눈빛을 발했다. 전귀 셋을 딸려 보냈는데 혼자 돌아와서 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전낙이 차분히 물었다.
“갑자기 그들을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뭡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쪽 후계자가 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요?”
“그는 제가 근래 잊고 있었던 상도(商道)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전낙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존재 자체가 상도와는 정반대였으니까. 이제 와서 상도를 논하니 열을 받는 거다.
“분명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문파입니다. 제 판단을 믿어주시오.”
전낙은 이제야 전귀들에 대해 물었다.
“함께 간 전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을 붙잡아 두라고 일렀습니다. 그냥 허락만 해주십시오. 제가 가서 합의문에 서명을 받아오겠습니다. 그들이 주씨검가의 합의문을 맡은 건 이런 인연이 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그에게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의심 많은 전낙은 대번에 위험을 감지할 테니까.
“지금껏 당신 말을 잘 듣지 않았소. 그러니 이번 일만큼은 내게 맡겨 주시오.”
황인은 정말 혼신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그래야 했다. 정말 이 자리에서 죽을 수 있었으니까.
말없이 황인을 쳐다보던 전낙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좋소, 그들도 끌어들이시오.”
“고맙습니다. 당장 가서 합의문에 서명을 받아오겠습니다.”
돌아선 황인이 내심 소리쳤다.
‘같이 가자고 해! 나를 의심해야지!’
그렇게 문을 열고 나오려는 그때.
“같이 갑시다.”
돌아선 황인은 일부러 표정을 굳혔다.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습니다. 같이 안 가셔도 됩니다.”
“같이 갑시다. 대체 어떤 자길래 당신 마음을 바꿨는지 직접 보고 싶어졌소.”
의심이 만들어낸 성공이지만, 그 의심은 빈틈이 없었다. 그는 남아 있는 전귀들에게 은밀히 자신을 뒤따르라 명령한 후에 출발했으니까.
* * *
늦은 밤 검무극과 검우진은 그물침대에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물침대에 누워보신 적은 처음이시죠?”
“그래.”
“아버지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이런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알아주실 거라 믿었으니까.
모르고 지나가셔도 상관없다. 앞으로 계속 자신의 마음을 전할 작정이니까.
“이 그물침대 가져가서 천마전 앞 대형석상 손가락 사이에 걸어두겠습니다. 심심하시면 거기 누워서 쉬십시오.”
기울어진 손가락 사이에 설치하면 천마신교가 훤히 내려다보일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거기 누워 계실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네가 누우려는 거지?”
“그 사람 마음 읽어내는 무공은 언제 전수해 주실 겁니까?”
그렇게 한참을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전낙과 황인이 그곳에 도착했다.
두 사람이 마당의 그물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고 전낙은 내심 어이없었다.
‘고작 저런 자들을 끌어들이려고 내 허락까지 받은 건가?’
그물침대에 나란히 누운 채 놀고 있는 무인들이라니? 여태 그런 무인들은 본 적도 없다.
검무극이 그물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오셨군요!”
이쪽을 보며 환하게 웃는 검무극을 보며 전낙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무인치고는 너무 해맑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전낙의 시선이 여전히 그물침대에 누워있는 검우진을 향했다.
검우진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전낙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왜 올려다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저 사람이 보고 있으니 나도 봐야지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별을 보는데도 전낙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일이 잘못되었구나.’
그런 날이 있다.
별들은 유난히 외로워 보이고, 달빛이 차갑게 느껴지는 날.
뭔가 일이 벌어질 거 같은 불길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불편함과 위화감이 강하게 드는 날.
바로 지금이다.
이 모든 불안감의 근원은 바로 그물침대에 누워 있는 저 남자 때문이다.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본 것만으로 이런 느낌을 받게 하는 저 남자.
저런 존재감을 주는 남자가 일개 지역 방파의 문주에 불과하다고? 그럴 리가.
거기에 한 가지 더.
앞서 황인과 함께 보냈던 세 전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굴에 들어왔다.’
이건 자신의 위기본능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없던 예감까지 끌어내는 저 남자의 존재감 때문이다.
‘침착하자.’
전낙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내공을 다스렸다. 그래, 언제나 위기는 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를 어떻게든 넘어서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자신의 이 본능을 믿는 거다.
그때 함께 온 황인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본 상단이 귀파에 투자하는 것을 허락받고 왔소. 당장 합의문에 서명합시다.”
눈치 빠른 그라면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황인은 황인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은 전낙이 손을 뻗으면 닿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그가 눈빛으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데려왔으니 어서 이자를 죽이시오!’
그는 여전히 저울의 가운데 서 있었다. 확실히 기울어졌을 때, 그쪽으로 몸을 던질 거다. 둘 중 어느 쪽이 죽기 전까지 자신은 그 누구 편도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물었다.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시오?”
전낙이 자신을 낮춰서 소개했다.
“나는 황 단주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오.”
전낙은 제대로 검무극을 살폈다. 지금 그물침대에 누워 있는 저 중년인에 대한 이 불길한 예감이 정확하다면, 눈앞의 이 젊은 청년 역시 절대 우습게 보면 안 될 것이다.
앞서 느꼈던 해맑았던 첫인상은 이제 고수의 여유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원망은 황인에게 향했다.
‘이 자식이 나를 어디로 끌고 온 거지?’
정확하게는 제 발로 쫓아온 것이었지만.
검무극이 황인에게 말했다.
“이런 대단한 분을 거느리셨는데, 우리가 필요하겠소?”
마치 한눈에 그의 실력을 알아본 것처럼 말하자, 황인이 애써 담담히 반응했다.
“사람마다 쓰임이 다른 법 아니겠소?”
“맞는 말씀이시오. 자, 들어가서 합의문을 작성합시다.”
진작 그럴 것이지. 황인이 안도하며 검무극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낙이 정중하게 황인을 제지했다. 이 상황에서 황인을 상대에게 내줘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황 단주.”
“왜 그러십니까?”
“제 수하들을 이곳에 남겨두고 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그들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자 황인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 어디에 있소?”
이건 진심으로 묻는 말이기도 했다. 대체 그들 어떻게 된 거요?
“집안에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소. 같이 별을 보자니까 들은 척도 안 하고 들어가 버렸소.”
너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자 황인은 내심 기가 막혔다. 황인은 아까 전귀들이 사라지던 때를 떠올렸다. 저 집은 사람 잡아먹는 집이다.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르는.
“제가 합의문 쓰러 들어가서 오셨다는 말씀 전하겠습니다.”
황인은 서둘러 들어가려 했고, 전낙은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시지요. 저는 장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합의문에 서명하시고 나중에 함께 나오십시오.”
전낙은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정말이지 상대가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겁을 먹은 적은 무인이 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하지만 검무극은 순순히 그를 내보내 주지 않았다.
“기왕 오셨으니 함께 들어가서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전낙은 이런저런 예감이고 위기본능이고 다 떠나서 이 사실만으로 자신이 처한 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누군가 같이 술 한잔하자고 말하고 싶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보면 피하고 싶고, 되도록 안 보고 싶은 사람이지. 그런 자신에게 술을 마시자고 한다고?
“그럴까요?”
전낙이 돌아서서 자연스럽게 황인의 옆으로 걸어갔다.
‘들어가면 죽는다.’
동시에 전낙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검을 뽑아 드는 걸 신호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열 명의 전귀가 일제히 담을 넘어서 내려섰다.
황인은 그들이 따라왔다는 놀람보다 걱정이 앞섰다.
‘내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게 해선 안 돼!’
그래서 황인은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듯 물었다.
“수하들은 왜 데려온 겁니까?”
그런 황인을 바라보는 전낙의 눈빛은 차가웠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는데 수하들이 나와보지도 않는다?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정중히 말하고 있었다.
황인은 그래서 이 전낙이 무섭게 느껴졌다. 항상 저런 정중한 태도로 일을 처리해 왔으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 한마디면 언제나 일이 끝났으니까.
이제 그 무서운 정중함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시오.”
전낙의 눈빛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살기에도 황인은 딱 잡아뗐다.
“제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기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소?”
검무극을 향한 황인의 눈빛이 애절했다.
제발, 그랬다고 말해주시오.
검무극이 전낙에게 말했다.
“함께 왔던 사람들은 집안에 있다니까. 정 의심스러우면 들어가서 확인해 보시오.”
워낙 태연스럽게 말해서 정말 그런 것처럼 보였다.
전낙의 시선이 검무극 너머에 있는 검우진을 향했다. 그는 그물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인지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저 모습만으로도 자신의 신경을 잡아끌고 있었다.
“확인해 봐라.”
전낙이 전귀 하나를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에게 전음으로 누군가 숨어 있는지 잘 살피라는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그 명령에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들어갔던 전귀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술자리라도 벌어졌나 봅니다.”
검무극의 태연한 말에 전낙의 눈빛은 차갑게 내려앉았다. 적이 눈앞의 둘만 있는 게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다 당했다.’
처음 보낸 수하 셋은 전귀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전낙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지?”
“난 서도파의 검연이오. 여긴 우리 아버지시고.”
“아니. 당신들은 서도파가 아니다.”
전낙의 검이 옆에 서 있던 황인의 목을 겨눴다.
“내게 왜 이러시오? 나는 같은 편이오!”
황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대단한 자들이 당신과 손을 잡겠다고 했을 리가 없지. 네가 날 이들에게 유인한 거다.”
공손하던 태도가 바뀌었다. 만난 이래 처음이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넌 반드시 죽인다.”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기에 황인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 믿을 사람은 검무극뿐이었다.
‘나를 버릴 거요?’
그 간절한 눈빛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했다.
“훌륭한 상인은 이 물건도 사고 저 물건도 사고. 운에 맡기는 장사를 하진 않겠지요.”
그 말에 황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질책하고 있음을.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검날의 감촉.
검무극 편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전낙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이 미친 도살자에게 자비는 없었으니까.
그런 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검날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대답을 요구했다.
정말 당신 신비세가의 후계자 맞아? 내가 당신을 선택하더라도 날 구해줄 수 있냐고?
지금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마지막 저울질을 해야 하는 순간임을 느꼈다.
무인이 아니니 어느 쪽이 더 강한지는 알 수 없었다. 눈치와 감으로, 오직 본능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이윽고 황인이 결정을 내렸다.
“난 이미 당신을 선택했소.”
황인의 마음속 저울은 검무극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니 나를 구해주시오.”
목을 겨눈 검이 자신을 베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황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도살자의 검은 오늘따라 신중했다.
검무극이 다시 대답을 요구했다.
“당신을 죽이려는 저들은 어떤 자들이오?”
당신은 정말 나를 절벽 끝까지 밀어붙이려는구나.
이왕 내친걸음이었고,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자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손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당신이 시킨 일 아니오?”
“이들과 손을 잡았기에 제게 책임이 없다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 적도, 그러기를 바란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황도상단이 성장했겠지.”
그 말에 황인은 아무 변명도 하지 못했다. 이들과 손을 잡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이렇게 잔인한 자들인 줄 몰랐지만 말이다.
목에 겨눠진 검이 더욱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황인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왜 아직 죽이지 않는 거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 잔혹한 전낙이 아직 자신의 목을 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을 인질로 삼아서라도,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것임을.
그때 검무극의 입에서 희망적인 말이 나왔다.
“당신을 구할 초식이 하나 있소. 요즘 한창 연습하고 있는 초식인데. 마침 상대가 열 명이기도 하고.”
아니, 그걸 왜 적에게 설명하고 있소? 당장 쓰시오! 어서!
하지만 이내 희망은 청천벽력으로 바뀌었다.
“한데 정확도가 떨어져서 당신이 죽을 수도 있소.”
정확도가 떨어지는 초식이라고? 지금 그런 엉터리 초식을 언급할 상황이냐고!
황인이 어찌 알겠는가?
그 엉터리 초식이 바로 구화마공 제오식 절혼마격임을.
대화를 듣고 있는 전낙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자신이 없는 초식이라면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서다.
“애초에 나를 노린 거지?”
이런 고수들이 일개 상단을 노렸을 리는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상부를 노린 것이리라.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점을 이용해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내가 죽으면 무서운 사람이 올 거야. 그땐 당신들이라도 살아남지 못해.”
그러자 검무극이 물었다.
“그 무서운 사람이 누구지?”
“당신들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 날 죽이면 그 사람이 온다.”
이래도 나를 죽일 거냐는 눈빛에 검무극이 황인에게 물었다.
“당신 운이 좋은 편이오?”
황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좋으면 이런 상황을 맞았겠소?”
“그럼 내 운을 믿어야겠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눈 감으시오.”
검무극의 말에 황인이 눈을 감았다.
황인의 목에 닿은 전낙의 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움직이면 이자는 반드시 죽는다!”
어떤 적이라도, 검을 목에 겨눈 사람을 못 죽일 자신이 아니다. 만약 공격을 가하면 황인의 목을 베고 싸울 것이다.
다음 순간!
열 개의 검기가 수직으로 내리쳤다.
벼락처럼 내리친 이 열 개의 검기는 전귀들의 정수리에 정확히 내리꽂혔다. 전귀들은 저마다 실력 차이가 있었지만, 절혼마격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했다.
그들은 동시에 짚단처럼 쓰러졌다.
맨 처음 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황인은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끝이구나!’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상인이 무인들과 얽히면 끝이 좋지 않을 거라고. 그때 끝까지 말려주시지.
후끈 피어오르는 피 냄새에 황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
전귀는 모두 쓰러진 채 죽어 있었다. 그들의 정수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검을 겨눴던 전낙도 옆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전낙이 죽었다고? 그 무서운 전낙이? 대체 어떻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황인은 그렇게 넋이 나간 채 멍하게 서 있었다.
그때 그물침대에 누워있던 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그 엉터리 실력에 저 사람 머리에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럼 아버지가 구해주셨겠죠.”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끼자 검우진은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 그물침대에 누워서?”
“네. 아버지시니까요.”
검우진의 입가에 그 비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오늘의 비웃음에는 기분 좋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들의 신뢰는 구화마공조차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이제 열 가닥, 아직 멀었다.”
검우진은 그 말을 남기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무세요, 아버지.”
큰소리로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검무극은 멍하게 서 있던 황인에게 걸어왔다.
“괜찮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황인이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의 저울질은 정확했다. 이제 죽으나 사나 이 사람들을 믿고 따라야 한다. 알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지만, 지금 황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이 걱정이었다.
“한데 괜찮습니까?”
“뭐가 말이오?”
“자신을 죽이면 무서운 사람이 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죽인 거요.”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황인을 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마치 그를 보고 싶은 사람인 것처럼.
“죽여야 온다고 해서.”
“이제 좀 진정되시오?”
검무극의 말에 황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말과는 달리 여전히 황인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렇게까지 떨리진 않았다. 정신없이 지나갔으니까.
오히려 상황이 다 끝나고 내가 정말 죽을 뻔했구나를 실감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서 도저히 그 정신으로 돌아갈 수 없어 검무극의 방에서 물을 얻어 마시고 있었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사레가 걸렸다. 기침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정말 앞서 있었던 일이 꿈만 같다.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 역시 실감 나지 않았다.
“마지막에 펼치셨던 그 무공은…… 아닙니다.”
눈을 감는 바람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자신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앞서 전귀들이 죽어 있던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금 숨이 가빠졌다.
무공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있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눈앞의 이 사람이 펼친 무공이 신비세가의 절세신공이었으리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낙이 죽자, 황인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닥쳐왔다.
“전낙이 죽은 걸 알면 그가 말한 무서운 사람이 제일 먼저 저를 찾아올 겁니다.”
전낙도 그렇게 무서웠는데, 그가 무섭다고 겁준 사람은 얼마나 무섭겠는가? 아마 바지에 오줌을 지릴지도 모를 일이다.
차라리 멀리 도망을 가야 하나?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봤지만, 그럴 수는 없다. 황도상단을 버리고 도망가서 무얼 하고 살겠는가?
“저와 함께 계속 있어 주십시오.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소. 지금 나는 순간순간이 소중한 사람이오. 당신과 보낼 시간 없소.”
“그럼 그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합니까? 전낙이 죽은 게 전해져야 할 테니 당장 들이닥치지는 않겠지만. 아니죠. 운 나쁘면 지나가던 길에 불쑥 찾아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그 온다는 사람만 무섭고, 나는 안 무섭소?”
순간 황인이 움찔했다. 생각해 보니 전낙과 전귀들을 한 수에 죽인 그였다.
무서워해도 이 사람을 무서워해야지.
왠지 모르게 편하게 느껴져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이렇게 막 하소연하고 떼를 쓸 상대가 아닌데 말이다.
“죄송합니다.”
황인이 고개를 숙였다. 풀 죽은 그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누가 찾아오면 내게 데려오시오.”
황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너도 개입한 일이니,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이제 믿을 사람은 이 사람뿐이다.
“참, 남은 전귀들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처리해 줄 테니, 걱정마시오.”
믿음이 가는 말이었다.
창밖으로 마당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앞서 널려 있던 시체들은 모두 치워지고 없었다. 바닥에는 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앞서 건물에 들어갔던 전귀들이 사라졌듯, 시체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짧은 시간에 휘가 깨끗하게 정리한 것이다. 일 처리가 이런 사람들이니 믿어도 되리라.
마음이 안정되자 황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말씀드린 거래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
황인은 어떻게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었다. 이제 이렇게 무공이 강하다는 것까지 직접 확인했으니, 더욱 놓치기 싫었다.
“당신의 꿈이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되는 거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진심이오?”
“진심이 아니었다면 전낙 같은 자와 손을 잡지 않았겠지요.”
검무극이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심이 아니었기에 손을 잡은 것은 아니고?”
정곡을 찔린 황인에게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상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건 알 수 있소.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되려면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황인은 말없이 검무극이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의 그 꿈에는 전낙도, 나도, 아버지도, 그리고 앞으로 온다는 그 무서운 사람도 들어가선 안 된다고 생각하오.”
황인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그 꿈에는 뭐가 있어야 합니까?”
“상인이 있어야지요. 천하제일상단을 이끌 능력을 지닌 상인이. 신뢰와 명예가 있고, 협상 기술과 위기관리 능력이 있는 상인, 정보력과 지도력이 있으며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사람을 볼 줄 아는 안목까지 있는 상인 말이오. 이곳에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이 있소? 이 피비린내와 이 차가운 검이 끼어들 여유가 있소?”
황인은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웠다. 검무극이 말한 것 중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었을 때, 그 무엇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으니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황인이 결심을 밝혔다.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주씨검가와 손을 잡고 싶습니다. 새로 합의문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도 되겠습니까?”
검무극은 적어도 그가 형편없는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인을 위한 허락이 아니었다. 주씨검가의 주향월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지금도 이번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여전히 주씨검가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고, 이번 기회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이 한마디는 주향월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소.”
허튼짓하지 말라는 뜻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황인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대답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가 누워 있던 마당을 걸어 나가는 그에게 검무극이 마지막 충고를 해주었다.
“꿈에 현혹되어서 현실을 잊지 마시오. 당신 세상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요. 나는 연기처럼 사라질 사람이지만, 주씨검가는 계속 남을 테니까.”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버지의 거처로 향했다.
“아버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너라.”
들어가니까 아버지는 여러 통의 전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본단에서 사마명이 보낸 전서들이었다. 아버지의 허가가 꼭 필요한 일들이 긴급 전서로 날아온 것이다.
“나와서도 일하시는 겁니까?”
“너도 나중에 내 자리에 앉아봐라.”
나는 과장된 손사래를 쳤다.
“저는 싫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물려주십시오.”
“이 고생, 내가 계속하라고?”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제가 물려받으면 놀러 다니실 겁니까? 만약 그러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면, 저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이 어색한 침묵을 계속할 생각이 없기에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좋습니다, 미리 연습 좀 하죠.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전서 중 한 장을 내게 전했다. 한 가문의 최근 동태가 적혀 있었다.
드디어 아버지가 우리의 목표를 밝혔다.
“우리가 섬서로 가는 이유는 금룡세가(金龍世家) 때문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이름이 나왔다.
금룡세가.
돈이 많기로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가문이었다. 그야말로 거부의 상징인 그곳.
그들은 단지 돈만 많은 문파가 아니었다. 금룡세가의 가주 금천방(金千房)은 상계의 일에 밝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비전무공인 금룡신공(金龍神功)의 절대고수로 무림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따라서 금룡세가에는 그를 따르는 수많은 고수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금룡세가에서 은밀히 상단들을 흡수해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거부들이 비밀리에 상단을 인수하는 일은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있다.
“황도상단도 그런 상단 중 하나였군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을 이용해서 무리하게 상단을 확장해 나가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 한데 그 돈은 금룡세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막대한 돈이 어디론가 빠져나갔군요.”
금룡세가의 이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사마명은 그들을 본격적으로 조사했고, 그들이 배후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하긴 지금껏 배후세력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금룡세가쯤 되어야 감당할 수 있었을 거다.
“이번에 내려오는 자는 은밀히 금룡세가의 외부 일을 책임지는 자겠군요.”
은밀히 진행된 일인 만큼 죽은 전귀들은 금룡세가의 직속 무인이 아니라, 외부에서 고용된 자들일 것이다.
전낙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이 금룡세가 소속인지도 몰랐겠지.
“큰돈을 지원하는 일이니, 당연히 가주가 허락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이번 배후는 가주를 설득할 수 있는 자리에 있거나…….”
잠시 사이를 두고 덧붙여 말했다.
“이미 금룡세가의 권력을 쥐었겠군요.”
* * *
주씨검가의 가주 임소화는 딸의 거처로 들어섰다.
딸 주향월은 책상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건 책이었다. 딸이 책을 읽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더라?
“뭘 하고 있느냐?”
“아, 오셨어요?”
황도상단의 후계자를 만나고 온 그날 이후, 딸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계약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 책을 읽고 있었어요.”
“그건 왜?”
“황도상단에서 새 합의문을 미리 보내왔거든요.”
“어디 보자.”
임소화가 합의문을 읽었다.
몇 줄 읽다가 금방 집중력을 잃었다. 무공서는 밤새 읽어도 재미있는데, 이런 글은 정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잘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고 있었어요.”
황도상단이 새로운 합의문을 보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게 무슨 수작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독소조항이 없는 합의문을 보내왔습니다.”
“네가 봐서 아느냐?”
예전이라면 틀림없이 이 말에 발끈했을 거다. 무시하는 말이라 여겼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의 품에는 ‘화내지 말자’라는 글귀가 맨 위에 적힌 종이가 있다.
화내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어머니 입장에서는 할 만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화내지 말자란 말 밑에 적어둔 다음 말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대로 서명하지 않고 재차 확인할 생각이에요.”
“누구에게?”
“이런 일을 잘 아는 사람에게요. 다녀와서 말씀드릴게요.”
임소화는 화가 났다. 그냥 합의를 볼 것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뭔 조사를 한다는 건지.
한데, 화를 낼 기회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앙칼지게 대들던 딸이 이렇게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하는데 갑자기 버럭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다녀오겠습니다! 참, 밥 잘 챙겨 드세요!”
임소화는 딸의 마지막 말에 제일 놀랐다. 밥 챙겨 먹으란 말을 언제 들어봤을까? 아니, 들어본 적은 있었던가? 이젠 딸이 걱정되는 그녀였다.
검가를 나서는 주향월의 표정은 밝았다.
이번에도 어머니와 언성이 높아지지 않고 대화를 끝냈기에 그녀는 뿌듯했다.
참아야지 하는 마음에서 말을 곱게 하니 어머니와 싸울 일이 없다.
물론, 한 번은 제대로 터질 것 같은 위기감이 계속 들긴 했지만 말이다.
* * *
“합의문에 서명하셔도 될 것 같소.”
검무극의 말에 주향월은 기뻐했다. 그녀는 황인이 보낸 합의문을 검무극에게 살펴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과는 자신이 살폈던 것과 같았다.
“그들이 마음을 바꾼 것은 모두 소협 덕분이에요.”
“아니오. 주 소저께서 제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오.”
그날 객잔에서 검무극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다른 운명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관계도 좋아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불안해요. 이러다 쌓였던 게 크게 터질까 봐 걱정되네요.”
검무극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터지면 어떻습니까?”
검무극의 해결책은 단순했다.
“열 번 터지던 게 한 번으로 줄어든 건데요.”
“쌓였다가 터지면요?”
그 폭발이 열 배가 되면 어쩌냐는 걱정에 검무극은 도화선을 싹둑 잘랐다.
“참고, 또 참고. 그러다 터지면 크게 터질 수도 있을 거요. 오늘 어머니께 참다가 왔소?”
그녀가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꾹꾹 눌러 참은 게 아니었다. 다른 시선으로 어머니를 보려 한 거에 가까웠다. 그럴 수도 있지, 이런 마음으로.
“그럼 괜찮을 거요. 그대가 걱정하는 건 착각 때문이오.”
“무슨 말이죠?”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이죠. 관계가 좋다가 터지면 크게 터질지도 모른다는 착각.”
“아닌가요?”
“오히려 작은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크게 터지기 마련이오. 그 작은 싸움이 별것 아닌 거 같아도 사람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거든. 반대로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면 크게 터질 것도 오히려 작게 터질 거요. 한마디, 한마디 좋은 말을 주고받았던 그 순간의 힘을 의심하지 마시오.”
특히 마지막 말이 그녀에게 와닿았다. 어머니와 언성 높이지 않고 대화를 끝낸 것에 아직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주향월이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할 수가 있죠?
배우려면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요. 한평생을 보내고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까.
“그럼 가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주향월의 인사에 검무극이 말했다.
“기왕 오셨으니 무림에서 제일 안전한 금고 뵙고 가시오.”
검무극은 그녀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말을 못 꺼내고 있다는 것도.
“아버지는 뒷마당에서 산책하고 계시오. 갑시다.”
검무극을 따라 뒷마당으로 걸어가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죄송한데 오늘은 그냥 갈게요. 나중에 안부 인사만 전해주세요.”
“그러겠소.”
돌아선 그녀의 발걸음이 자신도 모르게 빨라졌다. 그를 보면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나서가 아니었다. 그를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멀리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등 뒤 저 멀리서 똑똑히 듣고 계실 분을 위한 말이었다.
“중원에 나오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인기도 확인하시고. 아버지, 섬서에 가면 우리 인기 대결 한 번 하시죠.”
지금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왠지 상상이 간다.
도도한 표정으로 이 대결을 거부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이.
주향월을 보내고 뒷마당으로 갔을 때,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아버지의 뒷모습은 언제나 외로워 보인다.
저 외로움은 내가 아무리 옆에서 다정하게 굴어도 지울 수 없는 태생적인 외로움.
아버지 너무 외로워 마십시오. 여기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아들이요.
“저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하는 주 소저가 다녀갔습니다. 아버지께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일부러 놀렸음에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저 당당함이라니?
“정말 붙어볼까요?”
앞마당에서 했던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아버지는 무슨 뜻이냐고 묻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든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와 함께 마음 편히 중원을 유람하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처럼 어쩔 수 없이 피를 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마음 편하게 놀러 다니는 여행 말이다.
여협들과 어울려 술도 마신다면? 그녀들 앞에서 아버지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 저는 거창한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이렇게 놀고 싶을 뿐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이렇게까지 주변을 챙기는 이유가 뭐냐?”
주씨검가와 황도상단이 서로 힘을 합치게 한 일을 묻는 것이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일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 정도는 챙기고 가도 될만하니까요? 악이 꼼꼼한 만큼 저도 꼼꼼해지려고요? 아니면 아버지 핑계를 대볼까? 아버지가 합의문을 맡아주셨으니, 이번에는 아버지가 챙기신 겁니다.
오늘은 이렇게 대답했다.
“재미있어서요.”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차라리 재미있다는 말이 가장 이해가 잘 되리라.
아버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후원을 걸으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말했다.
“전낙의 죽음이 전해지면 그 일을 조사하기 위해 누군가 내려올 겁니다. 그를 이용해 금룡세가로 접근할까 합니다.”
무조건 다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금룡세가가 배후 세력과 어떤 관계인지 알아내고, 그곳에 뿌리내린 자를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전낙의 죽음을 이용해서 저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을 생각이다.
“죽이지 않고 처리해야 하니 더 어렵겠지요.”
내 말에 동감하신다는 듯 아버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상대가 금룡세가니 신중히 처리해야 합니다. 금룡세가 가주가 무림맹주와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년 무림맹에 큰돈을 지원하기도 하고요.”
아버지의 표정에 못마땅한 기운이 스쳤다. 얼핏 이렇게 들렸을 테니까. 무림맹주와 친하니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오히려 반대로 말해야 아버지의 마음에 들겠지.
무림맹주와 친하니 이번에 제대로 맛을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게 아버지가 바라는 대답이리라.
하지만 아버지, 그런 대답은 앞으로도 제게서 듣지 못할 겁니다.
“생각한 바가 있느냐?”
“우리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채 금룡세가의 중심부로 접근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은 금룡세가의 가주에게까지 접근해야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지역 방파인 서도파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신비 문파 행세를 했다간 더욱 경계할 테고.
“그래서 한 곳의 도움을 바랄까 합니다.”
“어디 말이냐?”
난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곳을 말했다.
“은하상단(銀河商團)입니다.”
과연 아버지의 눈빛에는 의외라는 감정이 스쳤다.
은하상단은 명실공히 무림에서 가장 돈이 많다고 알려진 최고의 부호다.
은하상단이 최고라면 그 아래에는 금룡세가와 대륙상단(大陸商團)이 있다. 이 세 곳이 세상에서 제일 돈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릴 은하상단 사람으로 알게 하는 겁니다.”
그 정도 신분이 되어야 금룡세가의 중심부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수를 써야겠지만.
“은하상단이 우릴 돕겠느냐?”
은하상단은 정사마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세 곳 모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균형을 맞추는 데 성공하면서 그들은 중원제일상단이 되었다.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니, 아버지가 성사시켜 주십시오.”
내 말에 아버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 부탁은 억지 부탁이 아니다.
회귀 전, 삶을 통해 나는 알고 있었다. 은하상단의 상단주와 아버지와의 특별한 인연을.
은하상단 상단주인 용자명(龍滋明)은 죽기 전에 아버지에 대한 말을 남겼다.
젊은 시절 암습으로 쫓기던 그는 죽기 직전 아버지의 도움으로 구명지은을 입게 된다. 아버지 역시 권마와 함께 중원을 종횡하던 한창 젊었을 때였다.
당시 용자명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천마라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을 구해준 후, 그냥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참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우연한 기회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후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평생을 찾았는데 찾지 못한 이유를 알았다면서. 그 사람이 마교의 교주인데 어찌 찾아낼 수 있었겠는가?
원래 이 일은 그의 사후에도 알려지지 않을 성격의 일이었지만, 이미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였고 정사마 모두 봉문한 상태였기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버지, 이번 생에는 그때 구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걸, 조금은 일찍 알게 해주자고요. 그래야 그 사람도 은혜를 갚죠. 그 사람 한이었답니다, 평생 은인을 찾았답니다.’
이번 일에 도움도 얻고, 아버지와의 인연도 마무리 짓고.
물론, 내가 뜻한 대로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모든 건 운명이 말해줄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이렇게 하자, 라고.
“세간에 그런 말이 있더군요. 은하상단의 정보가 본교 통천각의 정보만큼 빠르고 정확하다고요.”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그들의 정보력도 대단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무림맹이나 사도맹은 물론이고, 본교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주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역대 최고의 후계자가 탄생한 것도 알고 있을 것이고요.”
“잘도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구나.”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근래 본교가 마정사 회담까지 이끈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쉽게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곳이 천마신교임을 그들도 알고 있을 터, 이럴 때 천마가 직접 부탁을 한다면?
“거기에 한 가지 더, 은하상단과 금룡세가의 관계는 좋지 않습니까?”
상계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지만 의외로 양쪽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무림맹주나 사도맹주가 부탁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왜 내 부탁은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느냐?”
아버지에겐 아부처럼 들리겠지만,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아버지시니까요.”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들에게 어떻게 해달라면 되느냐?”
아버지가 내 계획을 따라주겠다고 결정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잠깐만 다녀가면 됩니다.”
* * *
황인과 주향월은 검무극이 정해준 날에 합의문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났다.
어색함이 감도는 가운데 먼저 나선 사람은 황인이었다.
“지난번 일은 내가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주향월은 그의 태도에서 진심을 느꼈다.
“왜 마음이 바뀌었죠?”
진심으로 사과하고, 제대로 된 합의문을 보내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황인은 솔직히 대답했다.
“검 공자 때문이오.”
물론 전낙과 전귀들을 죽인 일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그 이외에는 솔직히 말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엉터리로 살아온 내 인생이 부끄러웠소. 말로는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촌구석 작은 상단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주씨검가에 투자하는 것이 새로운 시작이라 여겼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소. 그래서 이 객잔에서 만나자고 했고. 그 모든 일의 시작도 이곳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처음 검무극과 만났던 바로 그 객잔이었다.
다른 이유였다면 황인을 의심했을 거다. 하지만 이 이유만큼은 믿었다.
‘당신도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았군요.’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조금은 변했으니까. 물론 어머니도 자신도 타고난 성격은 바뀌지 않을 거다. 관계가 단숨에 바뀔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다만 검무극의 말처럼 한마디, 한마디 좋은 말을 주고받았던 그 순간의 힘을 의심하지 않고 노력할 생각이다. 버럭 화내지 않을 거다. 그럴 수 있지, 이해할 거다.
“자, 그럼 우리 서명할까요?”
두 사람이 합의문에 함께 서명했다. 두 장의 합의문을 한 장씩 나눠 가졌다. 황인도, 주향월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무엇인가를 해내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드리오.”
두 사람이 정중히 포권했다.
그렇게 주향월이 먼저 객잔을 나가고 황인이 남았다. 오늘 새로 출발하는 날이니, 벅찬 감회에 술을 한 잔 마시고 싶어서였다.
“정말 이곳에서 운명이 바뀌었구나.”
그렇게 감회에 젖어 술을 마시던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이 말을 걸었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닌데, 여기서 대단한 일이 있었나 봐요.”
무복을 단정하게 입은 삼십대 여인이었다. 젊음과 성숙미가 동시에 드러나는 미녀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이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아,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들었어요. 제가 호기심이 많거든요.”
여인이 술병을 들고 황인의 자리에 앉았다.
“사과하는 의미로 제가 술 한 잔 드리겠어요.”
그녀가 술을 부어주었다.
황인은 얼어붙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왜 그러시죠?”
여인이 부드러운 미소로 묻자, 황인이 나직이 대답했다.
“상부에서 온다던 사람이 무인님이시군요.”
대번에 자신을 알아보자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치 연기를 하는 사람처럼, 친근할 때와 지금 표정의 차이는 컸다.
“어떻게 알았지?”
그녀가 기도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경계해야 할 상황은 없었다.
황인이 알아차린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줄 리 없으니까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여인은 정말 매혹적이었으니까. 위험한 여자라 생각하니, 더 심장이 떨려서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군.”
그녀는 이런 수모에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을 외모를 지녔다.
“전 무인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녀는 바로 금룡세가가 은밀히 키우고 있는 비밀조직을 이끄는 수장 금아린(金芽鱗)이었다. 그녀는 이 아름다움만큼이나 무공도 고강한 여인이었다.
지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믿을만한 수하들도 모두 데려왔다. 전낙과 전귀들의 죽음은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황인은 전낙이 말한 그 무섭다는 사람이 여인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눈앞의 이 여인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 무인들이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이 순간이 오면 어떻게 말할지 수십 번도 더 생각했다.
우선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했다.
“적들은 모두 셋입니다.”
적이라는 표현도 미리 연습했다. 물론, 아직 저울질이 남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지금은 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들 중 검연이란 자가 전낙과 전귀 모두를 죽였습니다.”
솔직히 다 말해도 된다.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혼자서 다 죽였다고 했지만, 여인은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전낙과 전귀쯤은 그녀도 혼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걸까?
“어떻게 죽였지?”
물론, 그렇다고 모든 걸 솔직하진 않았다. 가령 그곳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그들이 죽는 자리에 너도 있었다고? 변명할 틈도 안 주고 베어버리면 어떻게 할 텐가?
“어떻게 죽였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자를 만나러 간 후에 소식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살아있을지도 모르지요.”
금아린의 의심스러운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죽었지만 너는 죽지 않았군.”
“검연이 날 찾아와서 그랬습니다. 누군가 이 일로 찾아오면 이 말을 전하라면서.”
“무슨 말을?”
“‘할 말이 있으니 내게 오시오.’라고요. 가시지요. 제가 그자에게 안내하겠습니다.”
황인은 당장에라도 가자며 벌떡 일어섰지만, 금아린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텐데? 내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나?”
“아닙니다.”
그녀의 차가운 기세에 황인은 자리에 앉으며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함정은 안 팠을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차마 그녀에게 할 수 없는 말이 떠올랐다.
함정은 필요 없을 테니까. 당신이 아직 그 사람들을 못 봐서 그래.
뭐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황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저기 왔거든요.”
객잔 입구로 검무극이 들어오고 있었다.
검무극에 대한 금아린의 첫인상은 이것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젊은데?’
믿기지 않았다. 전낙이 이렇게 젊은 상대에게 당했다는 것이. 게다가 전귀들까지 함께 당했다?
비단 나이뿐만 아니라,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잘 생겼으며 어딘지 모를 기품까지 느껴졌다. 아주 거칠고 살기 넘치는 자라 예상했는데.
금아린은 검무극의 나이와 첫인상, 그리고 그가 해낸 일의 결과를 합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상승의 무공을 익힌 자다!’
이렇게 당당하게 단신으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 봐도 그렇겠지. 문제는 자신보다 강한가, 약한가이다. 겉으로 봐선 알 수 없었다.
“객잔 앞을 지나가다 창문 안으로 황 단주가 보여서 들어왔소.”
마치, 우연히 지나가다 들른 사람처럼 검무극이 반갑게 인사하며 걸어왔다.
“손님이 함께 계셨군요.”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는 듯, 검무극이 금아린에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는 곳이라면, 나도 상계로 진출해야겠소.”
듣기 좋은 말로 인사했지만, 금아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황인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말조심하시오. 여기 계신 분은 그대가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될 분이시오.”
금아린을 존중해서 말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검무극에게 경고하는 말이었다.
‘이 여자요. 그 내려온다던 무서운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이 여자의 외모에 빠져 일을 그르치지 마시오!’
검무극이 금아린의 외모에 빠질까 봐 황인은 애가 탔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경고하지 않더라도, 어찌 검무극이 그녀라는 걸 모르겠는가?
검무극은 이미 그녀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나이에 비해 성취가 크군.’
죽을 만큼의 노력이든, 재능이든, 아니면 막대한 지원이나 기연이 있었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전낙같은 자가 무서운 사람으로 인식했으니, 결코 손속에 정을 두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
게다가 그녀 주위로 은신하고 있는 고수가 느껴졌다.
‘보통 신분이 아니군.’
고수이면서 은신술까지 익힌 이들은 흔하지 않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누군가를 지키는 일을 주로 하는데, 이 정도 실력자가 그녀를 지키고 있다?
‘이 여인, 금룡세가주의 혈육이겠군.’
이 짧은 순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황인은 결코 모를 것이다.
검무극은 뒤늦게 상대를 알아차렸다는 듯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 이분이 그분이시오?”
그 말에 금아린이 반응했다.
“저자가 나를 어떻게 소개했지?”
검무극이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주 무서운 분이 올 거라고 했소.”
황인은 내심 긴장했다. ‘나를 그딴 식으로 소개했다고?’ 이런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의 심장이 평소보다 더욱 두근거렸다.
‘제발 오늘이 제삿날이 되지 않게 해주시길!’
그는 두 눈에 애절한 마음을 담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금아린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검연이라 하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요. 당신을 만난 후에 나는 연기처럼 사라질 거요.”
“안 물었는데?”
금아린은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당신이 내 수하들을 죽였다지?”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검무극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본의 아니게 그쪽 분들과 갈등이 있었소. 그 점은 사과드리겠소.”
“죽은 이가 한둘이 아닌데, 사과로 끝날 일은 아니지.”
“달리 원하는 것이라도 있소?”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어조로 그녀가 말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시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금아린은 검을 뽑아서 상대를 베고 싶은 욕망을 애써 참았다. 그녀는 상대가 원하는 순간에 검을 뽑는 하수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검은 자신이 정한 순간에 뽑혀 나올 것이다.
이 숨 막히는 긴장감을 깬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목숨은 못 드려도 내가 술은 한잔 사드리겠소.”
이 상황에서 겁도 없이 점소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술을 새로 한 병 가져오게 했다.
술을 주문한 검무극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그의 목 앞에 검이 겨눠져 있었다.
정말 빠른 한 수였다. 작은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았던.
옆에 앉아 있던 황인에게는 눈을 깜박이고 나니 이런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검무극은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반응에 금아린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방금 이 한 수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전낙을 죽일 정도의 고수라면 어떻게든 반응을 했을 텐데?
설마 검이 목을 겨누는 걸 알고도 막지 않은 건가? 내가 죽이지 않을 거라 확신해서?
아니면 생각한 것만큼의 실력이 아닌 건가? 그렇다면 전낙과 전귀를 죽인 자가 이자가 아니겠지.
그녀는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쪽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찝찝했다.
‘이자, 잘 안 읽힌다.’
검무극의 시선이 검날을 따라 그녀를 향했다.
“나는 죽으면 안 되오.”
“왜지?”
그러자 검무극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이젠 내 죽음이… 우리 아버지의 명분이 될 테니까.”
자신이 죽는 순간, 아버지는 무림을 다 쓸어버리실 거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명분이 되어 무림은 전쟁터가 될 것이다.
당연히 금아린은 그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을 죽이면 아버지가 복수할 테니, 살려달라는 말인가?”
“뭐, 그런 셈이오.”
“당신 아버지는 어디에 있지?”
“장원에 계시오. 숙부님과 함께 계시지.”
황인에게 들었다. 모두 세 명이라고. 느낌상 이자의 아비나 숙부도 보통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난 장 보러 나온 거요. 아버지가 오늘 특별 요리를 해주신다고 하셨거든. 소저는 먹을 복이 있군. 같이 갑시다. 우리 아버지 요리 쉽게 먹을 수 있는 요리가 아니오. 어디 가서 평생 자랑해도 되오.”
금아린은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 했다. 연기든 실제든, 적어도 자신의 검 끝에서 이런 여유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금아린이 가벼운 손놀림으로 검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장 보러 나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
검무극이 목을 쓰다듬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하오.”
그 모습에 황인은 내심 낭패감을 느꼈다. 그의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여? 설마 당신? 이 여자보다 더 약한 거야?’
그럴 리가 없을 거다. 전낙과 전귀들을 한꺼번에 다 죽이는 자리에 분명 자신도 있었으니까. 아니지? 장난 그만치고 어서 이 여자를 단칼에 베고 내게 말해주시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상황은 그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녀가 지풍을 날려 검무극의 내공을 제압했다.
검무극은 미처 피하지 못했지만, 여유는 여전했다.
“괜찮소. 어차피 장 보는데 내공이 필요하진 않으니까.”
금아린은 ‘뭐 이런 놈이?’라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설마, 네가 내가 제압한 혈도를 풀 수 있을 정도의 고수는 아닐 테고.’
일단 상대의 내공을 제압한 이상, 그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여유를 보인다고? 그녀의 상식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아버지 기다리시겠소.”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같이 장 보러 갑시다.”
* * *
한 대의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겉으론 낡고 평범한 마차처럼 보이지만, 마차는 도검에도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고 하루 내내 달려도 지치지 않는 명마들이 끌고 있었다.
당연히 안에 탄 사람도 평범하지 않았다.
비범하면서도 귀티가 느껴지는 그는 바로 은하상단의 상단주인 용자명(龍滋明)이었다.
은하상단의 주인 용자명.
그를 여러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설명은 이것이리라.
이 세상에서 돈이 가장 많은 사람.
그랬기에 마부는 물론이고, 마차에 함께 탄 사람들 역시 보통의 고수들이 아니었다. 용자명이 가장 믿고 있는 은하상단 최고수들.
너무 바빠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면 몇 달 전에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알려진 그의 비밀행차였다.
호위로 따라나선 고수들은 마부를 포함해서 모두 셋, 은하상단이 중원제일상단이 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조차도 용자명은 한 명만 데려가려고 했었다.
물론 이들 세 명의 실력을 생각하면, 이 행차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용자명이 은하상단에서 가장 믿는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가장 실력 좋은 세 사람이었으니까.
특히 마주 앉은 백총(伯總)은 평생 용자명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은하상단을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마차 돌리시죠?”
용자명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도 겁이 나나?”
그러자 백총이 솔직히 대답했다.
“겁납니다.”
“자네에게서 처음 듣는군. 겁난다는 말.”
백총은 자신이 죽을까 겁이 나는 게 아니었다. 이번 행차에서 용자명을 잃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너무 위험한 선택이십니다.”
“마교주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가?”
백총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지금껏 용자명과 함께 상단을 키우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었지만, 그중에서 제일 위험한 상대는 바로 마교였으니까.
“마교의 단순한 부탁이었다면 다른 핑계를 대서라도 시간을 벌었을 거네. 한데 이번에는 마교주가 직접 밀서를 보냈어.”
심지어 마교주가 직접 쓴 전서였다.
마교주의 친필전서.
그야말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럼 무림맹과 사도맹에 은밀히 기별하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들이 알고 있다면 감히 헛된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백총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용자명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처리해선 안 될 일이었다.
“마교주야말로 ‘은밀히’란 말을 강조했네. 그쪽에 연락하지 말라는 의미지.”
“그래서 더 알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마교에서 이렇게 나온 적은 없었으니까요.”
이번 결정은 단지 감으로 내린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경험과 근래 수집된 수많은 정보를 모두 합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마인들이 얼마나 거칠고 잔혹한 자들인지.
“정보가 사실이기를 바라야지.”
“소교주에 관한 일 말씀이십니까?”
용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 내부에서 새로운 바람이 일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로 인해 정사마 삼자회담까지 이뤄졌고.
그래서 이번에 자신을 부른 것이 그 소교주 때문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냥 천마가 부른 것보다 그편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으니까.
“아시잖습니까? 언제나 현실은 소문과 다르다는 점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게. 다 잘 될 거네.”
용자명은 이런 사람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극복하려는 사람.
이번 일이 은하상단에 기회가 될지 이 일로 자신이 죽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헤쳐 나갈 것이다. 천마의 친필전서는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부름이라 생각했으니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 부르는 건 아니라고 믿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듣고 수집한 정보 속의 마교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은하상단의 정보력을 믿었다.
그냥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가 원하는 걸 주고, 자신이 원하는 걸 받아올 거다. 거래는 주고받는 거니까.
이런 위기의 순간이 오면 젊은 시절 그때를 떠올렸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던 그 순간을. 그 경험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다.
어차피 덤으로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자.
때론 용감하게, 때론 더 열심히.
어쩌면 그 덕분에 무림제일상단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차는 그렇게 약속 장소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 * *
‘정말 장을 본다고?’
검무극은 저자에서 이런저런 식재료를 사기 시작했다.
“채소나 과일은 색상이 고르고 선명한 것으로 골라야 하오. 무르지 않고 단단해야 하고, 이런 반점이 있는 건 피해야 하오.”
설명까지 하면서 장을 보는 모습을 금아린은 놀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라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신중하게 요리를 위한 재료들을 샀다. 심지어 뭘 살지 적어 온 종이도 있었다.
“자, 이제 고기까지 샀으니 됐소!”
그렇게 장을 다 본 후, 검무극은 그녀를 데리고 장원으로 돌아가려 했다.
“내가 순순히 당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가리라 생각했나?”
“겁나시오?”
금아린은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내공까지 제압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상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대체 이 여유는 뭐지? 아니면 미친놈인가?
검무극이 양손에 가득 든 재료를 높이 들었다.
“아주 맛있는 함정이 될 거요.”
금아린이 함께 있던 황인에게 말했다.
“네가 가서 전해. 아들을 살리고 싶으면 내가 오라는 곳으로 혼자 오라고.”
그러자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안 오실 거요. 누가 오란다고 오실 분이 아니시거든.”
“안 오면 아들이 죽는데?”
“그래도 안 오실 거요.”
검무극이 황인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아버지 뵙게 되면, 눈 마주치지 말고. 정중히 행동하시오. 어찌 된 상황인지 다 전해주시고.”
“그러겠소.”
고개를 끄덕이다 황인이 움찔했다. ‘넌 대체 누구 편이냐?’ 이런 못마땅한 눈빛으로 금아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자, 이왕 재료도 다 샀으니 오늘 저녁은 내가 해주겠소. 내 요리도 쉽게 맛보기 어려운 요리니 여전히 당신은 먹을 복이 있는 여자요.”
금아린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평생 자신에게 먹을 복 있는 여자란 말을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대체 네 정체가 뭐야? 누가 보낸 거지?”
검무극이 곧 알게 될 거란 미소를 지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배고프니 우리 밥부터 어서 해 먹읍시다.”
그러다 멈춰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참, 우리 어디로 가야 하오? 요리할 수 있는 곳으로 갑시다.”
검우진은 뒷마당에서 홀로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휘는 담장 밖에 서서 교주가 수련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항상 교주 옆에 있었기에 오직 그만이 알고 있다. 근래 교주가 그 어느 때보다 무공수련에 정말 열심히라는 사실을. 그 계기가 검무극 때문이란 것도.
교주의 숨소리, 걷는 소리, 뛰어오르는 소리, 검을 휘두르는 소리, 기도를 발출하고 거둬들이는 소리 등.
아주 오랜 세월 들어온 소리였다. 휘는 교주가 무공수련을 할 때,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교주는 봐도 괜찮다고 했지만, 휘는 원칙대로 수련하는 모습을 보지 않은 채 그저 소리만 들었다.
소리만으로도 휘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소리만 들었기에 더 잘 알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교주의 경지가 달라졌다는 걸. 더는 오를 곳이 없다고 여긴 교주였는데, 설마 또 다른 경지가 있는 것일까?
분명 교주의 소리는 달라졌다.
그렇게 한바탕 수련이 끝났을 때, 장원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휘가 나가보니 그는 일전에 왔었던 황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황인이 겁먹은 얼굴로 휘에게 말했다.
“문주님께 직접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휘가 그를 데리고 뒷마당으로 왔다.
“황도상단의 단주가 찾아왔습니다.”
담 너머에서 검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이게.”
황인은 오는 내내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눈 마주치지 말고, 정중히.
“문주님을 뵙습니다.”
정중히 인사한 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지금 아드님이 붙잡혀 갔습니다. 이번 일을 조사하러 내려온 사람에게요. 문주님께서 요리해주겠다고 했는데 말을 안 들어서, 그래서 직접 해주겠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휘가 말했다.
“장소가 어디요?”
“저자에서 서쪽으로 십여 리를 가면 오래된 장원이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이 이곳에 오기 전에 금아린이 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그렇게만 설명하면 헷갈리지 않겠소? 저잣거리 어디를 기준으로 십여 리이며, 중간에 갈림길은 없는지, 비슷한 곳에 다른 장원은 없는지 상세히 말해줘야지요.
―당신 아버지 안 올 거라면서?
금아린의 말에 짐짓 괴로워하는 검무극이었다.
―세상 무정하신 분이시라서요.
황인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은근히 아버지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한데 당신 예감이 맞았소.’
검무극의 말처럼 검우진은 걱정은커녕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리로 오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혼자 오시라고요.”
휘가 이만 됐다는 듯 말했다.
“알겠소. 당신은 이만 물러가시오.”
돌아선 황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떻게든 검우진을 데려가야 검무극이 살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검무극이 살아야 자신도 산다.
“아드님께서 내공이 제압당한 상태이신데.”
그래봤자 안 통했고.
“아드님께서 장원의 위치를 헷갈리지 않게 잘 설명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정말 간절하고 애절했습니다!”
과장을 보탠 간곡함도 안 통했다.
여전히 무뚝뚝한 반응에 황인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돌아섰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휘는 교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교주가 알아서 빠져나올 일에 굳이 행차할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검우진은 자신의 변화가 단지 무공 소리만이 아님을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휘에게 보여주었다.
그때, 검우진이 저만치 걸어가던 황인에게 물었다.
“장은 다 봤나?”
생각지 못한 질문에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이내 황인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내공이 제압당했으면서도 양손 가득 장을 봤습니다. 채소에 고기에, 후식으로 먹을 과일까지 다 샀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린 것일까? 검우진이 옅게 웃었다.
“앞장서게!”
사실 황인보다 더 놀란 사람은 휘였다.
묵묵히 검우진을 뒤따르는 휘는 앞으로 호위가 더 어려워질 것을 예감했다.
교주가 변한다면 자신도 변해야 그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휘에게 이 변화는 반갑게 다가온 모양이다. 뒤따르던 그의 입가에도 교주만큼이나 잘 볼 수 없는 귀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으니까.
* * *
약속 장소는 인적 드문 곳의 오래된 장원이었다.
금아린은 돌아오자마자 장원 곳곳에 매복을 심었다.
이번에 함께 데리고 내려온 자들이었다.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기습에 능통한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사방에 매복했다. 나무 위, 지붕 위, 건물 뒤. 워낙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기에 알아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기습을 막아내더라도, 그 틈을 탄 그녀 자신의 공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상대는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다.
이런 심각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주방에서 식기를 챙겨서 나왔다.
‘이 상황에서 정말 요리를 한다고?’
예상을 깨고 장을 봤듯, 매복이 한참인 그곳에서 검무극은 요리할 준비를 했다.
마당에 불을 피우고 그릇과 식기를 내와서 깨끗한 물에 씻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금아린은 네가 어디까지 하나, 그런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검무극이 양파를 까며 말했다.
“요리할 때마다 무공을 익히는 기분이 드오. 불 피우고 그릇 씻고, 어떤 재료를 쓸까 연구하고, 이 양념, 저 재료 넣어가며 만들어보고. 그러다 최적의 요리법이 나오면 그걸 반복하고. 어떻소? 우리 무공하고 비슷하지 않소?”
“그렇게 가져다 붙이면 뭔들 아닐까?”
냉랭한 금아린의 반응에 검무극이 웃으며 시인했다.
“맞는 말이오. 악기를 다루는 일도 그림 그리는 것도, 매일 나가서 일하는 것도 다 닮았지.”
그러면서 검무극이 양파가 매운지 눈을 감았다. 눈물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보며 금아린은 적어도 이 한 가지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이 양파 까다 울어? 정말 이런 자는 처음이구나.’
무인들도 대부분 저 양파 같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겉을 숨기거나 속을 숨기거나.
약한데 강한 척하거나, 강한데 약한 척하거나.
한데 이 사람은 새로운 유형이었다. 약한 것 같지도 않고, 강한 거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상식 밖을 오가는 이 황당한 모습을 보고 있는 거다.
“솔직히 요리는 내가 아버지보다 낫소. 덕분에 더 맛있는 요리를 먹게 된 줄 아시오.”
바로 그때였다.
자신도 모르게 금아린의 시선이 뒤쪽을 향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매복한 이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녀가 바라보는 대문을 향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일까? 활짝 열린 대문 밖에 한 사람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바로 검우진이었다.
순간 흐르는 정적.
금아린은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세차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상대가 어떤 기도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차갑게 노려본 것도 아니었는데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경직되었다.
왜 이러는 거지?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의 시선 역시 모두 그곳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서 있는 저 남자의 존재감이 모두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빨아들이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던 침묵을 깬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아버지! 아들을 구하러 오셨군요! 역시! 자식을 버리는 비정한 아버지가 아닌 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검우진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만들었다. 이번 비웃음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를? 네게 농락당하고 있는 저들을 구하러 온 거겠지.
검우진이 천천히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뒤로 황인이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검우진이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누군가 검우진과 금아린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허연 복면인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금아린을 지켜주던 수신호위 임혁(林赫)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아가씨.”
임혁은 오랫동안 무인으로 살아오면서 여러 무인을 경험했다. 이렇게까지 원초적인 위험을 느끼게 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상대가 그 어떤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쉬이익!
검우진을 향해 암기가 날아들었다. 원래라면 ‘더 세차게 합공해!’라고 소리쳤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몸을 날려 암기를 쳐낸 사람은 놀랍게도 임혁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날아든 암기도 그가 몸을 날려서 쳐냈다.
“공격 중지! 그만!”
그가 기습을 중단시켰다. 이들의 암습이 통하지 않을 상대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상대의 심기를 건들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판단.
‘건드렸다간 몰살당한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그의 연륜과 경험의 상징임을, 그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증명했다.
“모두 물러가라!”
임혁의 명령에 매복해 있던 이들이 모두 물러났다.
금아린이 몸을 날렸다. 그의 말을 듣고 달아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검무극의 뒤에서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임혁을 건들면 검무극을 죽이겠다는 의사였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군.”
임혁이 그녀를 잘 지켜주었다는 의미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검은 넣게.”
검우진의 나직한 한마디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임혁의 판단력은 마지막까지 좋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집어넣었다. 때론 검을 검집에 넣음으로써 누군가를 지킬 수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런 다음 금아린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했다. 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금아린이 검을 회수했다. 하지만 검무극에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요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양은 넉넉히 샀느냐?”
“네, 혹시 몰라서 넉넉히 샀습니다.”
혹시 몰라서, 란 말에는 아버지가 올 수도 있음을 예상했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고.
바로 그때였다.
검우진이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검무극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용히 채소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들이 요리하는 걸 도와주겠다는 거였다.
검무극은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이내 조용히 요리에 열중했다.
너무 놀라고 감격하니 뭐라 장난을 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요리하다.
회귀해서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하고 싶은 일은 많았지만, 요리를 함께 만드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지금은 자신이 만든 순간이 아니라 아버지가 만든 순간이어서 더욱 감격스러웠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금아린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임혁이 이렇게 나선 것은 상대에게서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한 강함을 느꼈다는 의미.
‘대체 이 사람들 뭐지?’
강호에 이런 부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절대 경거망동하시면 안 됩니다.
임혁의 전음이었다. 임혁이 이렇게 겁을 내고 긴장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자신은 이렇게까지 위험을 느끼지 못했는데.
잠시 후, 검무극과 검우진이 요리를 완성했다.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휘를 불렀다.
“숙부님.”
그러자 임혁과 검우진 사이에서 휘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헉!”
임혁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금아린은 처음 보았다. 누군가의 등장에 임혁이 저렇게 놀라는 모습을.
휘를 알아봐서 놀란 게 아니라 은신술의 경지에 놀랐다.
임혁은 상대가 자신에게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은신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막연히 대단하구나, 생각할지 몰라도 자신만은 안다. 방금 모습을 드러낸 이 한 수가 얼마나 대단한 은신술이었는지.
고수일수록 더 큰 놀람을 불러올 한 수, 그만큼 휘의 은신술은 완벽했다.
놀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고수의 풍모. 상대는 분명 호위 무인이었다. 호위는 호위가 알아보는 법이었으니까.
‘이렇게 강한 호위 무인은 평생 본 적이 없다.’
대체 누구를 지키는 것이기에?
앞서 등장한 남자의 존재감에 어울리는 실력.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우진을 향했다.
이건 확실했다. 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사람일 거다.
그때, 휘가 임혁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충성과 헌신을 바친 호위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다. 상대가 어떤 호위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지.
그랬기에 휘가 이런 전음을 보낸 것이리라.
―주인을 지키고 싶으시오? 그럼 멈추시오.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입을 다무시오.
모든 걸 이쪽에 맡기라는 충고임을 임혁은 알아들었다. 아무에게나 하는 충고가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 탁자에 둘러앉았다. 휘와 임혁, 그리고 황인까지 앉았다.
“자, 이제 식사하시죠.”
검우진이 음식을 먹었다.
“맛이 어떻습니까?”
검무극이 긴장해서 물었다. 오늘의 주 숙수는 자신이었고 아버지는 보조로 도왔을 뿐이니까. 소교주가 요리하고 천마가 보조하고. 그야말로 천마신교 역사상, 그리고 두 사람의 개인사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나쁘지 않다.”
아버지에게 이 정도 평가면 ‘별미구나!’라는 칭찬쯤 될 것이다.
이번에는 금아린에게 물었다.
“소저는 왜 드시지 않소? 어서 드시오. 아버지와 내가 만든 요리는 평생 먹어 보기 어려운 요리라니까.”
금아린은 아직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혼란스러웠다. 뭘 해보지도 못하고 상황이 끝나 버렸으니까. 이제 상황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자신은 분명 이런 때일수록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임혁이 눈빛으로 말했다. 참아야 한다고. 물론 그녀는 임혁의 판단을 믿었다.
그렇지만 검이 뽑히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이 물음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몇 번이나 묻고 생각했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질문.
그러자 검무극이 맑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우연히 불합리한 계약을 강요당하는 사람을 보고 도와줬소. 강요한 자는 일이 틀어지자 우릴 죽이려 했지. 그래서 내가 죽였소. 뭐 대단한 놈들이 죽었다고 이렇게 와서 복수까지 하려는 거요?”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기에, 지금까지는 대부분 실없는 소리만 했기에, 검무극의 말은 무겁게 그녀에게 전해졌다.
“우리가 누군지를 왜 묻소? 지금은 당신 자신에게 누군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니오? 죽은 그자들처럼 죽어 마땅한 인간인가? 아니면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금아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또 하나의 감정, 분노와 얽혀서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었으니까.
지금 검무극이 묻고 있다.
너는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무겁게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그곳에는 음식 씹는 소리만 들렸다.
물을 따르고 젓가락질을 하고.
검무극과 검우진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식사했다. 휘와 황인은 조심스럽게, 금아린과 임혁은 거의 먹지 못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다.
두두두두두.
마차가 달려오는 소리였다.
장원은 외진 곳에 있었기에 누군가 올 사람이 없는 곳인데.
그렇게 운명처럼 달려온 마차가 문밖에 도착했다.
“저 장원입니다.”
마부석 무인의 말에 용자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외진 곳에 서 있는 장원의 모습이 보였다.
저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표정은 호수처럼 평온했지만, 마음속에는 고요한 태풍이 불었다.
온갖 고생과 풍파를 거쳐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자부했는데, 심장이 이리 뛰는 걸 보니 아직 멀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용자명은 결코 자신의 떨림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불안은 지금 앞에 앉은 백총의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암어를 말씀하십시오.”
그들 사이에 정해둔 암어가 있었다. 그 암어에 따라 백총은 여러 위급 상황에 대처했다.
그러자 용자명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그걸 써본 적이 언제였지?”
정말이지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이었다.
용자명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만큼 우린 긴장감 없이 살아왔네.”
언젠가부터 긴장은 상대의 몫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오만함을 벌주듯 긴장감은 불쑥 다시 찾아왔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석 무인의 보고에 백총이 옆에 앉은 무인을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옆자리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자명은 돌아갈 마음이 없으니, 이제 그들 세 사람이 단주를 지켜야 했다. 각자가 극강의 고수였지만, 그들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저희만 믿으십시오.”
힘차게 말하며 백총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다음으로 용자명이 내렸다. 그의 움직임은 차분했으며 여유가 있었다.
뒤이어 함께 타고 있던 무인과 마부석의 무인이 연이어 내렸다.
장원의 문은 닫혀 있었다.
이 문 너머에 어떤 함정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마존들이 줄지어 서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왕의 독이 뿌려지고, 혈천도마의 대도가 자신들의 머리통 위로 날아들지 모른다. 죽어가는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극악소마가 차갑게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백총이 다른 무인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비슷한 마음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주위의 나무들이나 지형으로 볼 때 매복하기 좋은 곳이었다. 다행히 앞서 매복했던 무인들은 모두 물러갔기에 불필요한 오해는 사지 않았다.
백총의 신경을 더 거스르는 점은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약속 장소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원래의 장원이 아닌 그곳에서 서쪽에 있는 다른 장원에서 보자는 통천각의 기별이었다.
백총은 그런 것도 못마땅했다. 통천각에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이렇게 막바지에 약속 장소를 바꾼 것도.
백총이 천천히 문으로 걸어가서 천천히 문을 밀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끼이이익.
오래된 세월의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으로 생각지도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마당에 탁자가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검무극이 국자를 든 채 이렇게 말했다.
“국 더 드실 분?”
방문한 이들을 향한 검무극만의 환영인사였다. 밥 먹는 자리니 긴장하지 마시라!
백총이 옆으로 물러섰고, 뒤에서 용자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탁자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름표가 붙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들 중 누가 천마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마당에 수십 명이 북적대며 밥을 먹고 있었어도 알아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용자명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최고의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람과 최고의 재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사람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한 번쯤 볼 기회가 있었을 법도 하건만,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다. 아니, 두 번째겠지만.
용자명은 마차를 타고 오면서 마교주의 첫인상이 어떨지 상상했다.
무서울까? 떨릴까? 생각보다 푸근할까? 잘 생겼을까?
하지만 그가 떠올린 첫인상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낯이 익다!’
정말 어디서 본 사람처럼 낯이 익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다. 천마를 본 적이 없으니, 그와 닮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사꾼의 정점에 이른 사람이니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는가? 일일이 다 기억조차 못 하는 수많은 사람.
‘분명 저 사람을 닮은 이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상념은 오래갈 수 없었다. 감히 천마의 얼굴을 계속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그가 한 번에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아버지도 그도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니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설마 천마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의 숙원은 내가 이뤄드릴 테니까. 돌아가기 전에 꼭 기억나게 해주겠소.
그리고 이 순간 검무극은 궁금했다.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셨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에서 그런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검무극이 국자를 내려놓으며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십시오, 단주님.”
용자명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젊은 남자가 천마신교의 소교주임을. 저기 앉아 있는 천마와 어딘지 모르게 닮았으니까.
“서도파의 검연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용자명을 부른 이유는 자신들이 은하상단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후, 저 금아린을 이용해서 단숨에 저들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은하상단 사람인 것처럼 꾸미려는 생각도 해봤지만, 아버지의 저 존재감은 누군가의 밑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게 할 수가 없다.
차라리 신비문파가 용자명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걸로 그녀를 낚을 생각이었다.
“여긴 제 아버지십니다.”
검무극의 소개에 용자명은 검우진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 있던 백총은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은하상단의 용자명이라 합니다.”
용자명의 인사에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무극과 휘는 내심 놀란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래 아버지는 상단의 주인을 일어나서 맞이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상단이 천하제일상단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검우진은 예를 갖춰서 그를 맞이했다.
“와주셔서 고맙소.”
자신의 전서에 곧장 달려와 준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리라.
용자명은 검우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가 가슴을 쿵 하고 치는 것만 같았다.
흥분과 기대, 두려움. 이런 감정과는 다른 독특하고도 강렬한 어떤 느낌.
마치 운명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면 이런 느낌일까?
처음이 아니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인생의 큰 변화를 겪었는데.
한편 용자명이란 이름이 등장하자 그곳에 있던 모두는 깜짝 놀랐다.
특히 가장 놀란 사람은 금아린이었다.
‘저 사람이 은하상단의 주인이라고?’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힘은 재산이 아니다. 용자명이란 이름이 돈보다 더 큰 힘이 된 사람이다.
상인임에도 돈으로 사람과 세상을 지배하는 단계를 넘어선 인물이란 평가였다. 그때 그녀는 느꼈다. 아버지의 질투를.
그런 용자명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기에 그녀는 호위인 임혁을 쳐다보았다.
곧바로 임혁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정말 은하상단의 주인이 맞습니다.
임혁은 예전에 그를 본 적이 있다. 어려서 기억을 못 할 뿐, 금아린 역시 그를 본 적이 있다.
임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앞서 본 검무극과 검우진, 그리고 휘만 해도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곳에 용자명이 왔다?
상계에서는 용자명이 무림맹주고 천마인 사람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를 굴리는 임혁은 문득 건너편의 휘와 눈이 마주쳤다. 휘의 담담한 눈빛에 담긴 뜻은 앞서 보낸 전음과 같았다.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입을 다무시오.
상대를 무시하는 말이지만, 분명 호의적인 충고임을 임혁은 느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살고 싶으면 나서지 마시오. 물살을 거스르려 말고, 파도에 몸을 맡기시오.’
임혁은 아주 살짝 휘에게 고개를 숙인 후,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을 쳐다보았다.
금아린은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전설과도 같은 사람이 당신들을 만나러 왔다고? 당신들이 뭐기에?’
그녀가 속한 금룡세가의 가주조차 용자명을 만나려면 사전에 약속을 청하고, 그들이 정한 시간에 직접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
‘내게 내공까지 제압당하는 당신이 뭐라고?’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은하상단이 상계 최고라면 그녀가 속한 금룡세가 역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은하상단과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뭔가 심상치 않아. 이 만남이 왜 이뤄지는지 알아내서 보고 해야 해.’
검우진과 인사를 마친 용자명의 시선이 금아린과 임혁을 향했다.
“이분들은 누구신지요?”
검무극이 그녀를 소개했다.
“아직 여기 계신 소저의 이름을 듣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분이오.”
그녀는 대체 뭐라고 할까 내심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분은 먹을 복이 많은 소저시오.”
금아린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은하상단의 단주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고?
용자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복 중에서 아주 행복한 복을 지니셨군요.”
정중히 말했지만 내심 생각했다.
‘아직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이 누굴 상대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뜻이겠구나.’
오늘 이곳에 와달라고 한 이유가 이들과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검무극이 다음으로 황인을 소개했다.
“이분은 황도상단의 단주이십니다. 장차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을 꿈꾸는 분이시죠.”
황인은 정말 오늘 이곳에서 자신이 꿈꾸던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근 황도상단의 빠른 성장에 감탄하고 있었소.”
황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옳지 않은 방법으로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은하상단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본 상단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앞으로 잘 지켜봐 주십시오.”
황인은 상인답게 눈치가 빨랐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용자명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인연을 맺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간다고 멀어지는 것만은 아닐 거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아는 것이, 오히려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수신호위인 임혁이 금아린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리도 이만 일어나시죠.
―이들이 무슨 일로 만났는지 알아내야지.
―아시잖습니까? 쉽게 자신들을 드러낼 사람들이 아닙니다. 계속 있다간 우리 정체만 더 드러나게 될 겁니다.
그의 판단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좋았다.
판단을 주도하진 못했지만,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금아린의 판단도 좋았다.
“귀한 분께서 오셨으니 저희도 이만 물러가겠어요.”
금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을 고하는 그녀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다음에는 음식 제대로 드셔보시오. 후회 없으실 거요.”
헤어지면서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검무극과 앞서 이 말을 하던 검무극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금아린은 조만간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그녀는 검우진과 용자명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임혁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문을 향해 걸어가며 그녀와 임혁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우리가 정한 장소인데 우리가 먼저 쫓겨나는군.
―그래도 우리 목숨은 가지고 떠나지 않습니까?
좋은 판단이 그들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마저 떠나자, 검무극은 용자명에게 물었다.
“식사하셨습니까?”
원래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다. 누군가 식사하고 있는 자리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뒤늦게 식사할 사람이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고.
하지만 이 자리는 달랐다.
천마가 식사하던 자리였다. 마저 식사하십시오, 하고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직 식사 전이네.”
“요리를 넉넉히 해서 함께 드셔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용자명이 함께 자리에 앉았다. 백총을 비롯한 세 호위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함께 드시지요.”
검무극이 그들을 챙기자 백총이 정중히 사양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검무극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억지로 앉으면 그게 더 고역일 테니까.
검무극은 아직 덜지 않고 남겨둔 요리를 새 그릇에 담아서 가져왔다.
“제가 직접 만들고 우리 아버지가 옆에서 재료 손질을 해주신 요리입니다.”
그 말에 용자명은 깜짝 놀랐다.
“정말 귀한 음식이군.”
“그럼요, 두 번 다시 못 드실 겁니다.”
용자명이 검우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소.”
용자명이 음식을 맛보았다. 뒤에 있던 백총의 신경이 극도로 곤두섰다.
독이라도 들어 있으면? 죽이려는 게 아니라 고독이라도 넣어 용자명을 조종하려 든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은침을 찔러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천마와 소교주가 만들었다는 음식에 은침을 찔렀다간, 자신은 저들의 검에 심장이 찔리게 될 거다.
용자명은 그런 걱정 없이 편하게 음식을 먹었다.
“정말 맛있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맛있는 요리라면 안 먹어 본 음식이 없는 그였는데, 지금 이 요리는 제법 훌륭했다.
“다음에 아버지가 만드시고, 제가 보조를 한 음식을 드셔보십시오. 그리고 누구 음식이 더 맛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용자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자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마교주와 마교 소교주의 음식을 평가해서 우열을 가려달라는 말이었으니까.
그렇게 간단히 식사를 마친 후 용자명이 비로소 정중히 물었다.
“존귀하신 분께서 한낱 장사꾼을 왜 부르신 건지 궁금합니다.”
검무극은 이미 그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금아린이 자신들과 은하상단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당신을 그런 일로 부른 것이 아니라는 듯,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 아들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
용자명은 이곳에 오는 내내 마교주가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고민했었다.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하지만 그 이유가 아들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일 줄은 정말 몰랐다.
자연스럽게 용자명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다음 세대의 천마이자 근래 무림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된 인물. 그와 관련한 여러 소문과 정보는 언제나 상반되었다.
하찮고도 대단한.
하찮은 일은 너무 하찮아서 믿을 수가 없었고, 그가 이뤄낸 대단한 결과는 너무 대단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소문만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자신과의 첫 만남에서 국자를 들고 있었다. 그에게 들은 첫마디는 ‘국 더 드실 분?’이었고.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일에 담긴 아버지 속뜻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신을 위한 일이란 믿음이 있었다. 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느낄 수 있었다.
검우진과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알지 못했기에 용자명의 이런 의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교주가 자식의 인맥을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하나의 결론.
‘결국, 돈 때문인가?’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결론.
어떤 말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무인이 상인에게 원하는 것은 돈이었으니까.
천마가 직접 나설 수는 없을 테니 아들을 내세워서 어떤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려 한다?
물론, 그 액수는 천마신교와 은하상단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액수일 거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상대의 불합리에 무인은 분노하고 응징하려 들겠지만, 상인은 그래선 안 된다. 상인이라면 이때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낼 것인가?’
그런 속마음을 감춘 채 용자명은 검우진에게 예를 갖춰 말했다.
“소교주님과 친분을 맺는 것은 이 사람이야말로 간절히 바랄 일입니다.”
진심이었다. 마교 소교주와 친분을 쌓아둬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이렇게 나오면 나도 아는 사람 불러야겠소.
―감히 우릴 상대로 누굴 부를 텐가?
―마교 소교주.
이런 신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의미니까. 상대에게 숨겨진 불순한 의도만 없다면 말이다.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봅시다.”
검무극과 시간을 가지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따 보자는 건 곧바로 떠나지 말고 오늘 하루는 있으라는 뜻.
검우진이 소교주와 자신만 남겨두고 가버릴 줄 몰라기에 용자명은 내심 당황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은하상단의 단주인 그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나중에 보자고 했으니.
“나중에 뵙겠습니다.”
용자명이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예의는 비단 상대가 천마라서가 아니었다. 원래도 상인 용자명은 감정이 태도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우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용자명보다 뒤에 있던 백총이 더 긴장했다.
앉아서 식사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걸음을 옮기자 또 그 느낌이 달랐다. 천천히 걷는데도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주위의 공기가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검우진은 나가기 전에 용자명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당신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일 거요.”
무슨 뜻일까? 자식에 대한 믿음일까? 아니면 암시일까?
용자명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온갖 경험을 했지만, 오늘은 그 경험이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편 마교주가 그곳을 떠나자 백총은 오히려 더욱 긴장했다.
―무슨 수작이 있을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게
그렇게 함께 있는 무인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역시도 검우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용자명을 남기고 간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소교주만 두고 간다고?’
마교주가 자리를 비웠기에 그가 독단적인 일을 벌일 수도 있었으니까.
용자명이 주위를 돌아보며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호위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 있나?”
“제 호위는 본교에 남겨두고 왔습니다.”
검무극이 용자명 뒤에 서 있는 세 무인을 보며 말했다.
“저기 계신 분들만큼 실력을 쌓을 때까지 수련하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의 누구도 못 믿을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실제로도 그들은 지금 수련삼매경 중일 테니까. 지켜주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짐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 모두 어색한 침묵을 허용할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밥도 먹었으니 나가서 좀 걸으시겠습니까?”
“그러세.”
두 사람이 장원을 나섰다. 용자명은 궁금했던 것부터 물었다.
“왜 이 장원에서 만나자고 한 건가?”
“앞서 보셨던 먹을 복 있는 여자 때문입니다.”
“그 여인과 어떤 관계인가?”
“그녀는 우릴 죽이려고 온 사람입니다.”
앞서 검무극이 여인의 이름도 모른다는 말에서, 그녀가 이들의 신분을 모른다는 것은 짐작했다. 알았다면 감히 자신의 이름을 안 밝혔을 리가 없으니까. 몰랐으니 그런 짓을 꾸밀 수도 있었겠지.
문제는 이것이다.
‘마교주와 마교 소교주를 죽이려 한 여인을 그냥 돌려보냈다?’
절대 있을 리 없는 일이었으니.
자신의 방문 이유가 밝혀졌다.
“그 여인 때문에 나를 부른 것이군.”
“저도 그렇다고 믿고 있었는데.”
검무극이 용자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생각은 다르셨네요. 놀라셨죠? 저도 놀랐습니다.”
지금 둘만의 자리가 미리 이야기된 것이 아니었다고? 정말 그럴까?
용자명은 믿지 않았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치, 그런 생각을 읽은 것처럼.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좋은 마인은 없다. 정파를 자처하는 자들도 온갖 협잡을 일삼는데, 하물며 마인들이야.
그런 마음을 숨긴 채 용자명은 부드럽게 말했다.
“뭐든 말해보게.”
은하상단에 뭘 원하는가? 얼마를 원하는가?
하지만 검무극에게서 나온 건 그런 부탁이 아니었다.
“단주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용자명은 발걸음을 멈췄다. 검무극도 따라서 멈춰 섰다.
“내 이야기를?”
“네, 어떤 이야기도 좋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아버지가 왜 단주님을 소개해 주시려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검무극은 정말 고민했다. 이건 용자명과 자신의 문제에 앞서 아버지와 자신의 문제였으니까.
“봤으니 기왕이면 친해지면 좋잖아? 이런 의미로 꺼낸 말씀은 아닐 겁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거든요.”
“그래서? 답을 찾았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해 낸 답은 이것이었다.
“단주님께 배우기를 바라는 거겠죠.”
“뭘 말인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인생을요.”
용자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설마 그런 의도로 천마가 자신을 아들에게 소개해 줬다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내 용자명은 상대의 의도를 의심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걸 시작으로 뭔가를 요구할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저 눈빛이 워낙 맑고 깊으니, 순간 헷갈렸을 뿐.
“교주님께서 한낱 장사치를 너무 높이 쳐주시는군. 내가 아는 건 돈 이야기뿐이라네.”
검무극은 오히려 신나 했다.
“그게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검무극이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며 말했다.
“가시죠. 돈이야기에 술이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 * *
두 사람은 저잣거리의 객잔에 마주 앉았다.
이곳에서의 모든 만남이 이뤄졌던 바로 그 객잔이었다.
검무극과 용자명이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았다. 백총을 비롯한 무인들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명령했다.
마교 소교주가 자기 인생을 묻고 있는데, 뒤에 호위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해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술을 부어준 후, 첫 잔을 비웠다.
“이런 객잔에서 술 마시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 예전에는 가끔 와서 마셨는데.”
“한 끼 식사비로 이런 객잔을 통째로 살 수도 있는 분이 참 소박하십니다.”
검무극의 달콤한 말에 용자명은 미소로 대답했다.
“이렇게 평가해 주는 걸 즐기는 거라네.”
검무극이 그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건강한 유희네요.”
“건강하다고? 허세와 자만이 아니고?”
“그 유희가 사람만 안 향하면 되죠.”
순간 용자명은 흠칫했다.
“무슨 뜻인가?”
“내가 돈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데. 이렇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인데. 이 우월감이 사람을 향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죠. 처음에야 부러움을 즐기는 정도겠지만 차츰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결국 깊은 상처를 주고. 칼끝이 사람을 향하면 문제가 생기듯 말이죠.”
용자명은 말없이 검무극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반면에 이런 허름한 객잔에서 혼자 즐기는 우월감은 건강한 유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주 오셔서 즐기십시오.”
용자명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도 그래선가?”
은하상단의 주인인 용자명은 당연히 정사마 삼자 회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 회담이 작은 주점에서 열렸다는 소식과 그곳이 마교 소교주의 단골 주점이란 정보도 함께 딸려 왔었다.
결국,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너도 그 풍류주점에서 건강한 유희를 즐기는 건가?
검무극은 그가 어떤 의미로 물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그랬기에 그의 대답에는 확신이 있었다.
“아뇨, 저는 다릅니다.”
“어떻게?”
“저는 순수하게 그 주점 주인장을 좋아합니다. 술맛도 좋고 안주도 맛있고, 무엇보다 손님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다음에 본교에 오시게 되면 꼭 모시겠습니다.”
활짝 웃는 검무극에게 용자명도 미소로 말했다.
“자네는 말을 참 잘하는군. 상인에게 꼭 필요한 재능이지. 어떤가? 상계에 진출해 볼 생각 없나?”
“아버지께서 제가 돈나무가 될 만한 떡잎을 알아보시고, 단주님을 소개해 주신 걸까요?”
그렇게 농담이 오가며 분위기는 좋았다.
용자명은 뜻밖에도 이 자리가 좋았다. 어디까지 진실인지, 또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를 상대임에도 그와 함께하는 대화는 막힘이 없었으니까.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하지만 검과 돈이 만났는데 좋은 분위기가 계속될 수는 없는 법.
오히려 좋은 분위기일 때 묻는 것이 좋으리라.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돈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자명의 눈빛을 응시하며 검무극이 되물었다.
“돈이라면 주시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얼마를 원하나?”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를 원하냐? 그 말을 이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분께 듣는다? 모든 사람의 꿈이죠.”
검무극의 농담에도 용자명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지. 내게 뭘 돌려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겠지.”
이제 검무극의 얼굴에서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충분히 오해하실만한 상황이라 생각합니다만, 우리 아버지 보셨잖아요? 돈 필요하다고 단주님을 이곳으로 부를 사람처럼 보이던가요?”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덧붙임.
“아버지는 돈이 필요하면 찾아가는 사람이지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자명은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얼핏 들으면 예를 갖춰 찾아간다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쳐들어가서 모든 걸 차지해 버린다는 의미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돈 때문에 부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오해했네. 사과하겠네.”
“오해 안 하는 게 이상하죠.”
아니,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더 이상하다.
대체 마교주와 이 소교주는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뭔지 아나?”
검무극은 정확히 맞췄다.
“돈을 많이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자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자넨 왜 그걸 묻지 않나?”
그러자 나오는 의의의 대답.
“어차피 단주님의 인생에 그 답이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단주님 말씀 듣고 싶다고 한 겁니다.”
용자명 자신도 상대의 말은 믿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믿는 것은 상대의 인생이다. 사람을 볼 때는 그가 걸어온 길을 본다.
“정말 내 이야기가 궁금한가? 지난 과거를 말하다 보면 미화되고 결국 잘난 척이 될 텐데? 남의 잘난 척, 지루하지 않겠나?”
“잘난 척이 지루할 때는 잘나지 않은 사람이 잘난 척할 때죠. 진짜 잘난 사람의 잘난 척은 멋진 모험담이죠.”
용자명의 감탄은 자연스럽게 혈통을 생각하게 했다.
‘천마의 아들은 아들이구나.’
아니라면 이 젊은 나이가 주는 이 강렬함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는 항상 두 가지를 지키며 살려고 하네.”
“뭡니까?”
“첫 번째는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거고 두 번째는 돈 버는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으려는 거네.”
“두 가지 모두 중원 제일의 부자의 원칙과는 어울리지 않는군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의 인생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돈 버는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두지 않은 이유는 내가 돈을 쓰는 재미보다 버는 것에 더 재미를 느끼는 사람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라네.”
대부분 성공한 상인들이 이런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돈이란 놈에 잡아먹혀 버리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왔거든.”
이 생각이 용자명이란 이름에 돈보다 강한 힘을 실어준 이유였으리라.
“무공하고도 비슷한 것 같네요. 이기는 것에 너무 깊이 빠지면 무공에 잡아먹혀 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적절한 비유일세.”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셨다. 잔은 앞서 보다 더 힘차게 부딪쳤다.
“그럼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는 뭡니까?”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날을 떠올린 용자명의 눈빛이 깊어졌다.
“젊어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네. 거의 죽기 직전에 살았지. 그날 이후 덤으로 산다는 마음으로 매사 용기를 낸다네.”
“무인이다 보니 그런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일에 관심이 가는군요.”
당신이 죽을 때까지 한이 되었던 숙원을 이룰 기회요. 그러니 그날 일을 잘 떠올려 보시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정작 그날은 알지 못한다.
세월이 지나고 돌이켜 봤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아! 그날 내 인생이 바뀌었구나.
용자명의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비단 죽을 뻔한 목숨을 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항상 자신만만했지.”
사실 그럴 만했다. 젊은 데다가 머리도 좋고 장사수완까지 좋아서 손대는 일마다 성공을 거듭했으니까.
“잠자는 시간도 아까웠네. 사방에 돈이 널려 있는데, 내가 먼저 줍지 않으면 남이 주워갈 것만 같았거든.”
젊은 시절의 그는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다른 어떤 감정도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난 연이어 성공했네. 세상의 재운(財運)이 나에게만 집중되는 것만 같았지. 그렇다고 자만하지 않았네. 오히려 더 겸손했고 더 노력했네. 그런데도 찾아올 불운은 결국 찾아오더군.”
용자명은 말없이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술잔에 비친 모습에 젊은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 * *
“단주님은 상계의 신이 되실 겁니다!”
만소(滿紹)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괜히 얼굴에 금칠해 주지 마시오.”
용자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보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그의 미소는 젊은 시절에도 여전했다.
“금칠이 아닙니다. 제가 얼마나 많은 상인을 만났는지 아시잖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꼭 최고의 상인이 되실 겁니다.”
만소를 알게 된 건 삼사 년쯤 되었다. 그는 상인들 주위에서 여러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상품 정보를 알아봐 주기도 하고, 일꾼들을 알선하거나 상단에 낭인들을 연결해 주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다재다능했고, 나쁘게 말하면 잡일을 도맡았다. 상단 일도 제 일처럼 나서서 도와줬기에 은하상단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이 작은 장원으로 들어섰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만소가 사람을 소개해 주기 위해서였다.
“상단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무인들을 영입해야죠. 더 미룰 때가 아닙니다.”
아직 용자명이 백총과 인연을 맺기도 전, 이때만 해도 상단에 소속된 무인들은 없었다.
물건 운송은 표국을 이용하면 되었고, 상단 일은 예전부터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가끔 호위가 필요하면 만소를 통해 무인을 소개받아서 일을 처리했다.
한데, 상단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소속 무인의 필요성도 커졌다. 다루는 상품의 가치도, 양도 많아졌다. 창고 앞을 장정들이 돌아가며 지키는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자명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만약 그 무인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이 걱정이 언제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을 잘 믿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결국 만소의 설득으로 고수를 만나보기로 한 것이다.
“소개해 주실 무인은 어떤 분이오?”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단주님 마음에 안 드시면 굳이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소가 믿는 사람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여겼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실망이 오늘이 될 줄이야.
기다리던 무인의 첫인상은 좋지 못했다. 날카로운 눈매에서는 색기가 느껴졌고 어딘지 모르게 교활해 보이는 인상을 지녔다. 얼굴 흉터며 비틀린 입술까지.
“처음 뵙겠습니다.”
용자명의 인사에 무인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기분이 불쾌해졌다.
용자명이 옆에 선 만소를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거요?’
만소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진다고 느끼던 그때 무인이 입을 열었다.
“이자인가?”
불순한 저의가 느껴지는 그 한마디에 용자명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무인이 탁자에 있던 술병을 들고 병째 마신 후, 그 옆의 서류를 바닥에 던졌다.
“서명해.”
* * *
다시 용자명이 현실로 돌아왔다.
“만소란 자가 그 무인을 끌어들여서 저지른 일이었지. 그때 내가 정말 두려웠던 게 뭔지 아나?”
검무극이 그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물었다.
“뭡니까?”
“내 죽음이 개죽음이 될 거라는 점이었네.”
검무극은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
“놈들이 그리 많지 않은 돈을 노렸군요.”
용자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로채려 한 돈은 불과 수천 냥에 불과했네. 물론 누군가에게는 큰돈이었겠지만, 당시 상단의 기반을 단단히 잡아 나가는 내게는 그리 큰돈이 아니었지. 그저 창고에 들어온 물건들을 빼돌리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네. 내 서명이 있는 서류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지. 자주 만소가 우리 일을 도왔으니까.”
“만소란 자는 단주님의 재산 상태를 대충 알고 있었을 텐데요?”
“알았을 거네.”
“왜 더 큰 돈을 노리지 않고요?”
“함께 일을 꾸몄던 무인은 평범한 자가 아니었네. 당시 악명을 떨치던 음혈귀(陰血鬼)였지.”
음혈귀.
그는 당시 무림에서 악명을 떨치던 색귀였다. 나이와 관계없이 온갖 여인들을 겁탈하고 살해한 자로 무림맹에서 무림 공적에 올린 자였다.
“당시 놈은 누군가를 피해 급하게 도주하던 중이었다네. 급하게 도주 자금을 장만하려던 참에 만소와 손을 잡은 거지. 둘은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고.”
그런 내용은 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들이었다.
“믿어지나? 평생 색귀와 관계가 없는 삶이었는데, 그렇게 얽히게 될 줄을.”
검무극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지금 그의 역할은 들어주는 일이었으니까.
“난 만소에게 물었지. 너는 내 재산이 얼마인지 대충은 알지 않느냐? 한데 고작 수천 냥에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고.”
그 순간이 생각난다는 듯 용자명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러니 그자가 뻔뻔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그럼 더 주시든지.”
용자명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정말 화가 났지. 놈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이런 놈에게 속은 내게 화가 났었네. 애초에 색귀와 어울려 다닐 정도로 추악한 자였는데, 그런 낌새를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용자명이 술을 마셨고, 검무극은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술 없이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일단 두들겨 패더군.”
* * *
퍽! 퍽!
계속되는 매질에 용자명은 소리쳤다.
“서명하겠습니다! 합니다!”
두들겨 팬 사람은 음혈귀가 아니라 만소였다.
그는 들은 척하지 않고 무작정 두들겨 팼다. 일단 기를 꺾어놓으려는 것임을 알았다.
상인도 거래할 때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할 때가 있다. 그는 가장 극단적이고 빠른 방법을 택했다.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이가 처음으로 폭력에 노출되면 쉽게 굴복하기 마련이다. 놀라고 아프고, 두렵고. 정말 이러다 맞아 죽는 건 아닌가? 마음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하는 공포였다.
“제발! 그만!”
용자명은 몸을 웅크린 채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
그는 절망했다. 맞아서가 아니었다. 이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공공연히 일을 벌였다는 점이었다.
‘결국 나를 죽일 거다.’
매질을 멈춘 만소가 용자명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자, 서명해.”
용자명은 서명하는 순간 죽는다는 걸 안다.
“돈을 더 주겠네. 정말 큰돈을…….”
다시 만소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좀 전보다 더 심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만소는 용자명을 잘 알았다. 똑똑한 사람이라 쉽게 서명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래서 두들겨 패서 혼을 빼놓으려는 거였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용자명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살아야 해. 이런 놈에게 죽고 싶지 않다!’
놈이 다시 용자명을 일으켰다.
그러는 사이에도 음혈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듯 그는 초조해 보였다.
“빨리 처리해!”
그의 말에 만소가 용자명을 재촉했다.
“서명해.”
“내 전 재산을 다 주겠네. 그러니…….”
퍽! 퍽!
아픔도 죽음의 공포를 이기진 못했다.
용자명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파서 눈물이 났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잠을 줄여가며 일했다. 상단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좋은 대우를 해주려고 애썼다.
그 노력의 끝이 고작 이런 죽음이라고?
사람을 믿지 않았어야 했는데. 말로는 안 믿는다고 하고선.
‘상계의 신이 되실 겁니다!’
그 달콤한 말에 도취한 결과였다. 사람에게 속아 정신 차리고 보니 상황은 끝이었다.
전 재산을 잃느냐 마느냐의 선택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나마 기분이 더 나았을까?
‘살려주십시오.’
하늘에 빌었다. 장사꾼들의 신이 있다면, 그 신에게도 빌었다.
‘만약 살려주신다면! 살려주신다면!’
아직 약속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 * *
감격한 얼굴로 용자명이 말했다.
“그곳으로 그 사람이 들어왔네.”
검무극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네.”
용자명은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앞서 기억이 고통이라면, 지금부터는 기쁨과 그리움의 기억이었다.
“이 남자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고민하는 용자명을 보며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그 잠깐의 만남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우선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지.”
“저보다요?”
검무극의 물음에 용자명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누군지 잠깐 잊으신 것 같은데.”
“미안하네만, 은인이라네.”
“은공 점수가 더해진 걸로 알겠습니다.”
내 농담에 용자명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즐거운 이야기였기에 그는 여유가 있었다.
“잘 생겼으면서 강인한 느낌이었지. 어딘지 모르게 차가우면서 도도했고. 그 사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 저도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때 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를 보자마자 음혈귀는 벌벌 떨었지. 나는 누군가의 얼굴에 그렇게 극심한 공포심이 드러나는 걸 그때 처음 보았네. 놈이 그곳에 있던 내내 초조해한 것도 그 사람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지. 그리고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네. 환한 빛이 번쩍였고 그 색마 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조각나면서 허물어졌지. 무인인 자넨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겠지만, 사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네.”
산산조각 낸 걸 보니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모양이다. 아마 천마신교쪽 여인을 겁탈하고 살해했으리라.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처음에는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그 사람이 이쪽을 돌아봤을 때 소리쳤네.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자들과 한패가 아닙니다.”
용자명은 다시 과거의 그날, 그 자리로 돌아갔다.
* * *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눈빛이 이유를 묻고 있었다. 왜 내가 너를 믿어야 하는지, 왜 살려줘야 하는지.
용자명은 자신의 대답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는 것을 직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머릿속에서는 고민했지만 이미 입은 말하고 있었다. 본능이 제대로 작동했기를.
“저를 죽이려 한 저자가 항상 말했습니다. 제가 상계의 신이 될 거라고요. 그걸 이뤄내고 싶습니다.”
왜 이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나갔다.
남자는 감으로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그는 탁자로 가서 거기 놓인 계약서를 보았다. 계약서로 봤을 때 억지로 서명하게 하려는 상황이었음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만소를 쳐다보았다.
“저자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저자는…….”
남자는 기다렸지만,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소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럴듯한 말을 지어낼 수 있는 언변을 지녔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신을 말없이 응시하는 남자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혔다.
그는 평생을 위선과 거짓으로 살아왔지만, 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한마디 거짓말도 못 하고 진실하게 죽었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그의 몸이 양단되었다.
“제발 은공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하지만 남자는 말 없이 그곳을 떠나갔다.
“천하제일상인이 되어 꼭 보답하겠습니다!”
하늘에 약속하지 못한 걸 그 남자에게 했다.
아쉬웠다. 생색이라도 한마디 내주고 갔으면, 하다못해 자신을 보며 미소라도 지어줬으면.
그는 불쑥 왔던 것처럼 그렇게 가버렸다.
* * *
“이게 그날 있었던 일이라네.”
검무극이 그에게 술잔을 들었다. 용자명이 그 잔에 건배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잠시 그들은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천하제일의 상인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셨군요.”
“하지만 그분은 모르시잖나?”
그게 너무나 아쉬웠다. 그 사람을 만나서 말해주고 싶었다.
기억나십니까? 그때 살려준 그 사람입니다. 그때 말씀드린 대로 최고의 상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냥 ‘운이 좋았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일인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났다. 운명의 사슬에 얽혀 있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은공을 찾으려고 팔방으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네. 아무도 그 사람을 봤다는 이가 없었지.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네.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닐까?”
너무 아쉬웠다. 한해, 한해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데. 그 사람도 나이를 먹었을 텐데. 어떻게 변했을까? 무엇을 하고 살고 있을까?
“혹 그분을 그린 용모파기가 있습니까?”
그러자 용자명이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정말 손대면 부서질까 조심해서 꺼냈다.
“항상 품에 넣고 다닌다네.”
비단 천 안에 고이 접힌 종이는 낡고 변색되었고 가장자리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게 그때 처음 그렸던 원본이지. 이걸 수백 장 만들어서 그분을 찾으려다 말았네. 그분께 폐가 될 거란 생각에서.”
검무극이 낡은 종이에 그려진 얼굴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하게 색이 바래 있었지만, 검무극은 그 속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이젠 그분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네.”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니,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는데. 저 용모파기를 그린 종이처럼,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희미해져 갔다.
용자명은 검무극이 용모파기를 바라보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의 깊고 맑은 눈빛에서 그리움을 보았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다음 순간 용자명은 흠칫했다.
안개 속에 있듯 희미해지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서 희미해져만 가던 얼굴이었는데, 어제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 또렷이 떠올랐다.
‘은공!’
그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너무 반가웠다. 그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대체 왜?’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렇게 반가운 마음이 중요하지.
‘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당신은 그대로구려. 은공, 지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소? 혹시 돈이 없어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니오? 나 돈 많소. 어서 날 찾아와서 그때 그 은혜 갚아라, 해주시오!’
그러다 무심코 검무극을 쳐다보았는데.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때의 은공과 지금 앞에 있는 검무극과 비슷한 느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치, 그때의 그 사람이 지금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생김새는 그렇게 비슷하지 않은데.
바로 그 순간!
“……설마?”
젊은 시절 은공의 얼굴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겹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사람의 얼굴이.
이 시대의 절대자 얼굴이.
그렇게 마교주 검우진의 얼굴이 긴 세월을 건너서 젊은 은공의 얼굴에 겹쳐졌다.
두 얼굴은 정확히 하나가 되었다.
“은공!”
용자명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태어나서 이렇게 놀란 적은 처음이었다.
‘은공이 마교주였다고?’
심장이 요동치듯 뛰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교주라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혹시 내가 착각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날 봤던 은공의 모습과 오늘 만났던 천마의 모습은 한 사람처럼 딱 합쳐졌다.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용모파기를 보고 있던 검무극이 용자명을 올려다보았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과거 그를 구해준 사람이 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그래, 아버지 같은 분을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겠지.
검무극이 젊은 시절 아버지가 그려진 종이를 소중히 다시 접어서 비단에 쌌다. 그것을 다시 용자명에게 내밀었다.
“잘 봤습니다.”
그런데 용자명은 받지 않았다.
“그건 소교주께서 가지시오.”
검무극은 모른 척 그에게 물었다.
“이걸 왜 절 주시는 겁니까? 이 그림은 단주님께 소중한 것이잖습니까?”
그러자 검무극의 예상이 정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답이 나왔다.
“지금부터 그건 소교주께 더 소중한 물건이 될지도 모르겠소. 자, 이만 거처로 돌아가세.”
* * *
검우진은 거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검무극과 용자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검우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용자명의 눈빛이 아까와 달라졌음을 느꼈다. 눈빛에 가득한 격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잘 알았지만, 검우진은 모른 척 아들에게 물었다.
“단주님과 이야기는 잘 나눴느냐?”
“돈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겠습니까? 거기에 단주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검우진이 용자명을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단주께서는 어떠셨소?”
“그 어떤 자리보다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용자명은 방에 들어선 이후부터 검우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만났을 때만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교주님.”
용자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은하상단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이 순간만큼 떨린 적은 없었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아버지는 잠시 말없이 그를 보았다.
그 반응으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구나.’
생각해 보면 알고 계셨을 거다. 용자명이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천마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용자명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 음혈귀와 만소가 강제로 서명하게 하려 했던 그 계약서를 아버지가 봤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 은하상단의 젊은 단주였음을 알았으리라.
그날 이후 은하상단은 마정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성장했다.
하려고 했다면 아버지는 내가 널 구한 사람이다라고 밝혀서 은하상단을 천마신교를 따르는 상단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전혀 그런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분명 그가 자신을 구한 은인을 간절히 찾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받으셨을 텐데.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은혜를 갚기 위해 찾아도 연락하지 않는다니?
참 아버지다우시다. 이러니 아버지를 존경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용자명은 오래전 그날의 일을 물었다.
“혹 젊은 시절, 악행을 저지르던 음혈귀를 응징하시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의 떨리는 물음에도 검우진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랬기에 용자명은 그날 그 은공이 눈앞의 교주라고 확신했다. 아니었다면 ‘나는 그런 적이 없다’라고 했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검우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다.’
그날의 그 눈빛이 확실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을 구해주던 그날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는 오직 저 눈빛만 남겼다.
“그날 교주님께서 그곳에 잡혀 있던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교주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그날 죽었을 겁니다.”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었으리라. 자신의 전 재산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색마의 도피자금 때문에 창고 하나 털리면서 목숨까지 잃었을 테니. 아마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거다.
용자명이 천천히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우선 제 절부터 받으십시오.”
그는 정성을 다해 절했다. 은하상단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여본 적이 있었던가?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지난 세월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얼떨떨한 마음도 있었고, 천마 앞에서 두려운 마음도 있었고, 혹시 아닐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의심도 있었고. 그야말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몸을 숙이더니 용자명의 팔을 잡아서 일으켰다.
지켜보던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그를 일으켜 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자명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지만 그의 놀람은 이제부터였다.
“그대를 기억하오.”
심장으로 날아와 박힌 그 한마디에 용자명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교주가 맞구나! 그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팔을 잡아 일으켜준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자 동시에 당대 천마였다.
“그럼 처음부터 저인 줄 아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구해준 사람이 저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그러자 검우진의 입에서 평생 용자명이 듣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상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소식을 듣고 있었소.”
“아! 아셨군요!”
용자명은 가슴이 벅차오르며 목이 메었다.
그럼 왜 찾아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천마가 어디 평범한 사람이겠는가? 자신이 구해준 사람이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되었다고, 거길 찾아가 생색낼 사람이겠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은공께서 나를 기억해 주었구나. 내가 천하제일상인이 된 것을 알고 계셨구나.’
비로소 진정한 기쁨이 밀려들었다. 모든 게 확실히 밝혀졌을 때의 그 속 시원한 감동이 용자명의 온몸을 휘감았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은 건 지난 세월이 덧없이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가 자신의 인생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검우진이 그에게 전하는 값진 한마디.
“그간 고생하셨소.”
그 말에 더는 버티지 못했다.
용자명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생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독하게 살아왔던 인생이었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은 참을 수 없었다.
주위의 온갖 칭송을 들어도 마음 한구석이 언제나 허했다. 그래, 이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음을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그날 했던 약속을 지켰다고 얼마나 말씀드리고 싶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결국 용자명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에게는 두 가지 숙원이 있었다.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고 은공을 찾아 은혜를 갚는 것.
이제 두 번째 숙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용자명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고이 간직하고 있던 그것은 화려하게 생긴 열쇠였다.
한눈에 봐도 보통 열쇠가 아니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열쇠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은공을 찾게 되면 드리려던 것을 모아둔 비고의 열쇠입니다.”
용자명이 그것을 검우진에게 공손히 바쳤다.
아버지는 단박에 거절했다.
“보답은 필요 없소.”
거절의 이유도 아버지다웠다.
“당신이 지금까지 나를 찾으려 했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갚았소.”
그랬기에 용자명은 더욱 기분 좋게 이걸 줄 수 있었다.
“교주님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이걸 드리는 제 마음이 편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은 모두 얻으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그러니 편히 받아주십시오. 교주님께는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검무극은 이 하나만 봐도 용자명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은혜를 갚고자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해 이렇게 준비까지 해둔 사람은 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큰 성공도 이룰 수 있었으리라.
“아버지가 싫으시면 제가 대신 받겠습니다.”
검무극이 가서 받으려고 하자 아버지가 한발 먼저 열쇠를 받았다.
“아니, 저 주시라니까요? 여기 물욕의 화신인 아들이 있습니다!”
검우진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열쇠를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용자명이 옅게 웃었다. 검무극이 일부러 나서서 검우진이 열쇠를 받게끔 도와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중경 옥화산(玉化山) 아래 약초 캐는 중송(仲松)이란 사람을 찾아가시면 비고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대 마음은 기쁘게 받겠소.”
검무극이 검우진에게 물었다. 중경은 어차피 섬서와 본교 사이에 있으니. 가는 길이나 오는 길에 들리면 될 것이다.
과연 저 열쇠로 들어갈 수 있는 비고에는 무엇이 있을까? 분위기로 볼 때 오랫동안 준비한 선물을 보관해 두었을 것 같은데.
‘아버지보단 제가 확실히 속물 같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에 달려가서 뭐가 들었는지 보고 싶거든요.’
하긴, 천마보고의 주인이신 아버지가 뭐가 궁금하시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장 큰 선물은 저 열쇠가 아닐 것이다.
용자명이 아버지가 은공임을 알았다는 그 사실!
지금껏 마정사와 줄타기를 잘해오던 은하상단이었는데, 이제 천마신교를 따르는 은하상단이 된 것이다.
용자명은 그런 각오를 굳이 일부러 밝히지 않았다. 검우진이 찾아와 뭔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말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으로도 여전히 마정사와 줄을 타는 것처럼 상단을 운영하겠지만, 아무도 모르는 깊은 충성심으로 아버지를 대할 것이다.
검무극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혹시 이런 결과를 예상하셨습니까? 그래서 저를 이 사람에게 소개해 주신 겁니까? 저 사람의 충성심이 제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자신을 소개해 주겠다는 말은 정말 뜻밖의 말이었으니까.
용자명과 좋은 관계를 맺고 지내는 건 교를 이끌어 가는 데 큰 힘이 될 테니까. 아버지는 자신을 소개해 주면서 용자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일 거요.
자신과 용자명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기에.
“아버지, 이거 한 번 보시겠습니까?”
검무극은 용자명에게 받은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그때의 아버지십니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였는데, 이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에는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래, 아버지라고 어찌 지난 청춘이 그립지 않으시겠는가?
“용 단주께서는 저보다 아버지가 더 잘 생겼다고 잘못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러자 아버지는 단호히 말했다.
“최고의 상인답게 기억력도 좋으시구나.”
“노안이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용자명이 웃으며 빛바랜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때가 참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시선은 한참 동안 그림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잠시 후,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다시 그림을 받아서 곱게 접었다.
“이건 제겁니다. 그 열쇠는 양보해도 이건 안 됩니다.”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에게는 비고의 보물보다 더 값진 미소였다.
* * *
그날 밤, 용자명은 앞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안 오십니까?”
돌아보니 검무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음이 들떠서인지 잠이 오지 않네.”
검무극을 바라보는 눈빛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이제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용자명이 물었다.
“이번에 교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분명 과거 일과는 관련 없이 자신을 불렀음을 느꼈다.
검무극은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아버지와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금룡세가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용자명은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전혀 놀라지 않았다.
“금룡세가에서 요즘 은밀히 비밀조직을 운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도 주시하고 있었네.”
상계에서 오가는 정보 싸움은 무림 못지않았다. 천하제일상단인 만큼 경쟁 상단에 대한 정보력은 대단할 것이다.
“네, 그 조직으로 벌어들인 돈이 무림을 위협하는 무림 조직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포착되어서 조사하러 나온 겁니다.”
어디 그들의 정보력이 상계에만 능통하겠는가?
“삼자회담도 그들과 관계가 있었지?”
나직한 용자명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 보았던 그 여인이 아무래도 그 은밀한 조직을 이끄는 것 같습니다.”
“나를 이곳에 부른 이유도 그 여인 때문이었군.”
“맞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단주님을 뵌 것을 큰 정보로 여길 겁니다. 은하상단의 단주가 직접 찾아왔으니까요. 이 점을 이용해서 금룡세가의 중심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혹, 내가 더 도울 일이 있겠나?”
“이미 직접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을 주셨습니다.”
“더 돕고 싶네.”
그는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중원제일상단을 만드는데 어디 안전한 길만 걸어왔겠는가?
용자명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 만에 다시 만난 은공인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정말 천마가 아니라면, 상단으로 함께 가자고 해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함께 있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럼 사흘만 더 계시면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용자명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검무극은 사실 용자명이 없더라도 그 여인을 상대해서 일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랬기에 남으라고 한 건 용자명을 위한 배려였다. 아버지와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으니까.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 사흘은 더 즐기시오.
용자명은 오랫동안 상인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눈치도 빨랐다.
“고맙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위한 결정임을 알고 있네.”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저를 위해서입니다. 제가 언제 천하제일 상인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용자명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는 얼마든지.’
그는 이제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 은공의 아들이었으니까.
그 은공이 마교주란 사실이 더 기뻤다. 그냥 운이 좋아서 천하제일상단의 주인이 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큰 운명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운명이 된 기분이 들었으니까.
“자, 뭐든 말만 하게. 이제 내가 뭘 하면 되겠나?”
천마와 소교주, 이들과의 사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될 거다. 벌써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눈앞의 소교주가 웃으며 물었다.
“실례지만 돈 좀 있으십니까?”
근래 이렇게 호탕하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용자명은 정말 큰소리로 웃었다.
돈 좀 있냐고?
중원에서 제일가는 부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마치 마교주에게 ‘무공 좀 하시오?’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농담을 하는 사람이 당대 천마신교의 소교주다.
은하상단을 키워오면서 항상 무인들을 조심했다. 그중에서도 천마신교를 가장 조심하고 경계했다. 일이 터졌을 때 그들과는 협상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해일처럼 밀려올 것만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러던 중 마교의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이 청년. 마교 소교주에 대한 소식이었다.
은밀히 올라오는 정보는 정말 놀라운 것들이었다. 진실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
소교주가 지금까지의 마인들과 다르다는 정보를 연이어 들으면서도,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는가 생각했다. 그래봤자 마인은 마인이지.
한데, 직접 만나본 이 소교주는 다르다.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냐고? 보다시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소문보다 더 특별한 사람이었다.
“얼마면 되겠는가?”
용자명의 물음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일이군.”
겸손한 그의 말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다만, 진짜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주는 척만 해주시면 됩니다.”
용자명은 검무극의 의도를 짐작했다.
은하상단에서 서도파에 거액을 주었다는 정보만 흘리면 된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얼마면 되냐는 질문은 단주님이 아니라 상대편에게 들어야 할 말이죠.”
용자명은 검무극에게 감탄했다. 자신이 이곳에 남게 해달라고 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그래서 사흘의 시간을 얻었고.
다시 말해서 이 짧은 순간에 검무극은 뭔가 계획을 세운 것이다.
역대 소교주 중 가장 비범한 소교주.
그는 확실히 그 소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교주.”
“네, 단주님.”
이제 그에게 정식으로 고마움을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고맙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검우진이 은공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예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용모파기가 그려진 그림을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검무극의 모습에서 검우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검우진이 은공이란 사실은 절대 알 수 없었을 거다.
용자명이 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걸 알면서도,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부자와 함께 있으니 돈을 달라고 했는데도 고맙다 소릴 듣습니다.”
용자명은 검무극이 마음에 들었다. 당신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일 거란 마교주의 말, 이제 확실히 이해되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이런 소교주와 계속 좋은 인연을 맺어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은하상단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였으리라.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도.
“그 사흘은 내일부터 치는 거네.”
단 하루라도 아쉬운 그였다.
* * *
“은하상단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어.”
금아린의 말에 수신호위 임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상단주가 직접 이곳에 나타난 것이 그 증거였다. 우선 정황상 은하상단과 서도파가 서로 손을 잡는 상황처럼 보였는데.
“서도파는 보통 인물들이 아닙니다.”
임혁은 은신을 풀고 나타났던 휘를 떠올렸다.
그렇게 대단한 은신술은 처음이었다. 은신술을 익힌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야말로 극의에 달한 은신술.
그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주인을 지키고 싶으시오? 그럼 멈추시오. 생각도, 행동도. 그리고 입을 다무시오.
그 장원에서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던 것이었는데.
어쩐지 이번 일 전체에 적용해야 할 경고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러니까 은하상단의 단주가 직접 온 것이겠지.”
검연이란 인물도, 그의 아버지와 숙부란 사람이 보여준 모습도 보통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가 보인 존재감은 뭐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손을 잡은 거라면 결국 내 수하들은 은하상단에게 당한 셈이야.”
그냥 우연히 무림 문파와 시비가 붙어 당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번 일의 배후에 은하상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의미.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날 장원에서 자신들을 곱게 내보내 주지 않았을 테니까.
“세가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이미 은하상단의 상단주가 단독으로 움직인 사실을 세가에 보고했다.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 전에 이곳 상황이 끝나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자신이 나서서 알아봐야 한다. 은하상단과 서도파가 어떤 관계인지, 왜 은하상단주는 이곳에 직접 온 것인지.
“어떻게 하시려고요?”
“검연이란 자를 통해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아내야지.”
임혁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맡은 일을 잘해온 그녀였다. 젊은 나이에 비해 분명 남다른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금아린은 그런 임혁의 걱정을 느끼고 있었다.
“알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거.”
그녀가 검무극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면 웃으며 농담하는 모습부터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안다. 자고로 강한 자가 웃는 법이라는 걸.
검무극의 저 웃음은 여유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그 여유는 강함에서 나오고.
그때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검연과 은하상단의 상단주가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만?”
“네, 그렇습니다.”
“어디로?”
“대륙전장입니다.”
금아린은 대번에 그 이유를 짐작했다.
상인과 무인이 전장에 갔다면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나? 은하상단에서 서도파에 돈을 넘겨준 것이 틀림없다.
금아린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돈이 얼마가 오갔는지 은밀히 알아봐. 반드시 액수를 알아내야 해.”
* * *
그날 오후, 검무극의 거처로 금아린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들어오시오.”
“답답한데 우리 좀 걷죠.”
금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했다. 아직 이곳에 은하상단의 단주가 머무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기에 이 사람의 아버지도 있었고. 저 안은 호랑이굴이다.
검무극은 흔쾌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좋소, 그럽시다.”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왠지 이 남자에게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남자의 자신감을 이용해야 한다. 이 자신감에 대롱을 꽂아서 그 속에서 겸손만 쪽 빨아들여야 한다. 자신감에서 겸손이 사라지면 자만심이 되는 법이니까.
두 사람이 천천히 저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검무극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었다.
“왜 그렇게 떨어져 걷소?”
검무극의 물음에 금아린이 대답했다.
“잊었나요? 지난번 마지막 만남은 서로를 죽이려던 자리였어요.”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서로가 아니라, 당신이 나를 죽이려 하던 자리였지.”
“내 수하들의 피가 아직 당신 검에 남아 있을 거예요.”
“나를 먼저 죽이려 했으니까.”
“어쨌든 살았잖아요?”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면서도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한 번도 상대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농담 한마디를 해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가 이상하오?”
“아시다시피 그날 은하상단주와 제가 마주쳤어요. 그럼 그쪽 상단의 무인들이 제 뒷조사를 할 법도 한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어요.”
은하상단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떠보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은하상단 상단주의 호위는 철통같아서, 누군가 모르는 이가 접촉하면 반드시 뒷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먼저 말했소.”
“뭐라고 했죠?”
“그날 들었잖소? 먹을 복이 많은 여인이라고.”
금아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소. 그러니 나를 봐서도 당신을 조사하는 일은 없을 거요.”
금아린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자연스럽게 검무극도 멈춰 섰다.
“우린 악연이죠.”
그녀는 일부러 검무극에게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두고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호의가 있다는 의미. 이럴 때는 오히려 차갑게 대해야 한다.
과연 상대는 악연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건 아직 모르는 것 아니겠소? 우리 만남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슬쩍 상대에게 대롱을 꼽고 겸손을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은하상단의 단주가 직접 찾아오고. 당신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그러자 검무극이 묘한 미소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이럴 때의 저 눈빛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더 대단한 것 같소.”
“무슨 뜻이죠?”
“그런 대단한 사람을 이렇게 겁 없이 찾아오지 않았소?”
그런 대단한 사람?
앞서 그 말이 겸손을 제대로 빨아들였나 보다.
“나를 왜 찾아온 거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 같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저도 부담스러워요. 다만 일이 벌어졌으니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는 되어야겠지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저잣거리에 들어섰다.
검무극이 먼저 그녀에게 제안했다.
“한잔합시다.”
정말 바라던 제안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 튕겼다. 상대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려면 자신이 조급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어디까지나 전략적으로 다가서야 한다.
“우리가 마주 앉아 술 마실 사이는 아니죠.”
이건 그녀의 자신감이기도 했다.
이렇게 튕긴다고 남자가 거절하지 않을 거란 여자로서의 자신감. 지금까지 상대해온 남자들은 검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에 이 매력이 필요 없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못 마실 사이도 아니지 않소? 자, 갑시다.”
검무극이 앞장서서 객잔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는 금아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까진 계획은 순조로웠다.
“다른 주점도 많은데 당신은 여기를 좋아하는 것 같군요.”
“여기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소? 당신과는 의미가 있는 장소지.”
생각지 못한 말에 금아린은 흠칫했다.
검무극을 가만히 쳐다보았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농담처럼 하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여기 술 주시오.”
검무극은 그녀를 위한 요리 하나, 자신을 위한 요리 하나를 시켰다.
술을 한잔 마신 후 검무극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소?”
“왜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죠?”
“이런 일을 하기에…….”
검무극이 잠시 말을 끊었고, 금아린이 뒷말을 대신했다.
“너무 젊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이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소.”
“이런 일에 어울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죠?”
“남의 가업을 빼앗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지. 그 일을 말리는 사람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
정곡을 찔린 금아린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눈치 빠른 그녀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내게 하는 말이다.’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 자신을 꾸짖는 말이었다.
내심 화가 났지만, 그녀는 모른 척 화제를 돌렸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왔으니까.
“당신 아버님은 정말 대단하신 거 같아요. 은하상단 상단주와 독대할 수 있는 무인은 각파의 맹주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일부러 그의 아버지를 높였다. 상대에게서 겸손을 덜어내는데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으니까.
과연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은하상단을 부르자고 제안한 건 바로 나였소.”
“무슨 일로 부른 거죠?”
검무극은 크게 비밀도 아니라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은하상단에서 은밀히 고수를 구하고 있었소. 무림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고수 말이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 아버지가 제격이지. 정말 오랜만에 무림에 출도하신 거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정말 오랜만에 무림에 나오신 거니까.
금아린은 생각지 못한 큰 정보에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은하상단이 비밀리에 고수를 구하고 있다고? 대체 왜?’
은하상단에는 수많은 고수가 즐비했는데.
그런 속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검무극이 말했다.
“나는 왜 비밀리에 고수가 필요했는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봤소.”
금아린은 내심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검무극은 대답해 주지 않고 뜸을 들였다. 점소이를 불러 술을 더 시켰고 요리도 새로 하나 시켰다.
마치, 하던 말을 잊었다는 듯 술을 마시며 요리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결국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그녀가 물었다.
“은하상단에서 고수를 왜 구한다고 하던가요?”
“아, 그 말 내가 안 했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푸니,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쉽게 말해주지? 라는 그녀의 의심이 분산되었다.
“상계에 비밀리에 움직이는 조직이 있다고 했소. 상도덕을 무시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더군. 우리에게 그들을 제거해 달라더군.”
금아린은 정말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저 비밀조직은 바로 자신의 조직이 틀림없었다. 언젠가 은하상단이 알아차릴 거로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응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왜 자신들이 처리하지 않고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거죠?”
“그야 뻔하지.”
검무극은 그조차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들을 없앤 빈자리를 대신 꿰차려는 거겠지.”
“그럴 리가요? 그들은 천하제일상단이에요.”
검무극이 술잔을 비운 후 말했다.
“그래서 천하제일상단이 된 거겠지.”
잠시 침묵하던 금아린이 물었다.
“이런 비밀을 왜 순순히 내게 알려주는 거죠?”
“당신이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요. 이 정도면 악연이 아니라 인연이라 해도 되겠소?”
검무극이 금아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대체 이 남자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사실인지 아닌지는 다시 확인하면 될 테고. 기왕 말이 술술 나올 때, 물어볼 것은 다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얼마나 제안받았죠?”
만약 검무극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손잡는 걸 막아야 했다. 이들을 고용하는 돈보다 훨씬 큰 손해를 보게 될 테니까. 아니, 그보다 자신의 목숨부터 위험했다.
지금껏 거침없던 검무극이 이번에는 대답을 아꼈다.
“그건 왜 묻소?”
“내가 더 많은 돈을 주면 우리에게 올 수도 있잖아요?”
검무극이 대놓고 웃었다.
“미안하오. 비웃은 건 아니었소.”
마치 자신이 천하제일 부자를 상대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이봐, 우리도 세 손가락에 든다고.
“말해봐요, 얼마면 되죠?”
검무극은 금아린을 보며 웃었다.
“또 웃어서 미안하오.”
말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분명 그녀를 자극하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 웃음 하나하나에 검무극의 계산이 들어가 있음을.
“나 장난치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정색하자 그제야 검무극도 웃음기를 거뒀다.
“진심으로 묻는 거요?”
“그래요, 진심이에요.”
그녀를 응시하던 검무극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액수가 나왔다.
“삼만 냥.”
금아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삼만 냥이라고요?”
고작 삼만 냥에 자신들을 팔았다고?
금아린은 무공만 강하지 세상 물정 모르는 이 무인들이 은하상단에 속았다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다.
“당신들 가치가 고작 삼만 냥밖에 안 된다고 하던가요? 그들에게 속았어요!”
검무극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서 금아린은 자신이 뭔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만 냥에 그들과 계약한 게 아니군요.”
“당연히 아니지.”
“그럼 삼만 냥은 뭐죠?”
“저쪽에서 얼마를 불렀는지 듣고 싶으면 삼만 냥을 내라는 뜻이오.”
금아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반면 검무극은 차분하게 삼만 냥의 이유를 설명했다.
“당신은 은하상단보다 더 많은 돈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했소. 그럼 삼만 냥 정도는 질문 값으로 내놓는 모습을 보여야 나도 당신을 믿을 수 있지 않겠소?”
금아린은 말문이 막혔다. 질문 하나에 삼만 냥은 너무 큰돈이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었고, 대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라, 역정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없어 보이는 반응이다. 애초에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아무 대가 없이 들으려 한 것부터가 잘못이리라.
눈앞의 이 사내는 참 만만해 보이면서도 정말 만만하지 않다. 저렇게 차분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걸 보면.
자자, 술이나 마시자며 검무극이 잔을 비우는 모습을 보며 금아린은 임혁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장에 가서 삼만 냥 찾아와.
―아가씨, 어차피 대륙전장을 조사하고 있으니 액수를 알아낼 겁니다.
―알아. 이건 질문 값이 아니라 기세 값이야. 찾아와.
―알겠습니다.
잠시 후, 임혁이 그곳으로 와서 그녀에게 전표를 주었다.
전장에서 삼만 냥을 찾아온 것이다. 비밀조직을 운영하는데 드는 돈은 금룡세가에서 지원받았다. 그 돈은 허가 없이 함부로 쓸 수 없기에 지금 이 돈은 전적으로 그녀의 개인 돈이었다.
“여기 있어요. 삼만 냥.”
검무극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내가 당신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오. 미안하오.”
“자존심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이오?”
“당신을 데려오고 싶다는 내 진심을 표하는 거예요.”
그녀의 본능은 이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이 사람이 적이 된다면, 세가의 어떤 고수도 이들을 상대할 수 없을 거 같은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이 사람은 이렇게 편하게 웃다가 ‘어쩔 수 없지 않소?’라며 자신을 푹 찔러 죽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이제 말해주세요.”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금액을 밝혔다.
“이백만 냥.”
그야말로 막대한 금액이 나왔다.
“우릴 고용하려면 이백만 냥을 줘야 하오.”
놀랄만한 액수였지만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금아린은 놀라지 않았다.
“당신은 놀라지 않는군.”
“그대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녀는 어떻게든 검무극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은하상단에서 이백만 냥을 제시한 건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달라고 한 건가요?”
“아니오. 은하상단에게 받은 돈은 백만 냥이오.”
“한데 왜 이백만 냥이죠?”
“그쪽과 거래를 깨고 새로 당신들과 거래를 하는데, 두 배는 받아야 우리도 말할 명분이 서지 않겠소?”
검무극은 그녀를 응시하며 덧붙여 물었다.
“이백만 냥, 줄 수 있소?”
금아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주겠어요. 지금부터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정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설령 돈값을 하지 못하더라도,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다. 본능이 그걸 원했으니까.
하지만 이 일의 결정권자는 터무니없이 큰 금액이라 여길 것이다. 이들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금액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삼만 냥을 다시 돌려주었다.
“왜 돌려주는 거죠?”
“당신의 의지를 보려는 거였지, 돈이 목적은 아니었소.”
돈을 돌려준 검무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검무극은 심지어 술값까지 계산하고 그곳을 나갔다.
혼자 남은 금아린은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그를 잡아야 한다는 본능과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낀 임혁이 검무극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은하상단에서 자그마치 백만 냥이나 투자했군요.”
놀란 임혁에 비해 금아린은 다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저 사람들이 은하상단에 당했어.”
“당했다고요?”
“만약 혼자고, 한 가지 임무를 맡은 거라면 역대급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큰돈이지. 하지만 저들은 모두 세 사람이야.”
다른 둘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그의 아버지와 은신술의 대가였던 숙부였으니까.
“다른 사람이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들 셋만이라고 치자고. 그럼 한 사람당 대략 삼십삼만 냥이지?”
“그렇죠.”
“그리고 아까 그 사람이 말한 것 들었지? 비밀조직을 제거하고 그 자리를 대신 맡게 될 거라고 여기고 있어. 다시 말해 저 사람들은 이후 일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야. 결국 몇 년은 생각하고 있다는 거지. 최소 삼사 년 걸린다 치면, 한 사람당 십만 냥도 받지 못한 거야. 저 정도 고수를 마음껏 쓰고 거기다 우리가 벌던 돈까지 대신 벌게 될 거야. 그렇게 따지면 정말 싸게 고용했다고 볼 수 있지.”
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렇게 비싼 값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하상단이 맡긴 비밀조직, 혹시… 맞습니까?”
그게 우리 조직을 의미하는 거냐는 물음이었다.
금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틀림없어.”
예상은 했지만, 막상 자신들이 목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임혁도 심각해졌다.
휘의 은신술이 생각났다. 그가 소리 없이 다가와서 금아린을 죽이면, 과연 자신이 막아줄 수 있을까?
“우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야.”
임혁은 오랜만에 술 생각이 났다.
“이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저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지. 그냥 두면 우리가 당하는 건 시간문제야.”
임혁은 자신이 막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려 이백만 냥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최대한 깎아야지. 나도 명색이 상가의 핏줄인데.”
그 말에 임혁은 그녀가 진심임을 알았다. 정말 저들을 끌어들이려는 거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설령 가주께서 허락하셔서 저들을 우리 편으로 들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은하상단은요? 저들을 빼앗기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안 있으면? 저들을 죽이기라도 할까?”
“은하상단은 자존심을 중시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은하상단이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돈을 더 중시하지. 저 세 사람을 제거하려면 얼마나 들까? 그들에게 백만 냥 가치를 부여했으니, 제거하려 해도 최소한 그 돈은 들겠지? 그러다 만약 제거에 실패라도 하면? 저 정도 되는 고수들이 복수하겠다고 나선다면? 그들을 막기 위해선 또 얼마가 들까?”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천하제일의 상단주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지. 결국 우리가 데려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지.”
임혁이 그녀를 믿는 이유였다. 이렇게 똑똑하게 잘 판단했으니.
그의 마지막 걱정은 이것이었다.
“은하상단에서는 우리 뒤에 금룡세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우리가 세가 걱정까지 할 여유가 있나? 일단 우리 목숨부터 구하고 보자고.”
금아린이 임혁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딱 한 잔만 마셔. 그래도 축하주 해야지. 술까지 얻어 마시면서 원하던 정보를 모두 빼냈으니까.”
돈도 돌려받고, 정보도 얻고, 기분 좋게 잔까지 부딪쳤지만.
임혁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쓰디썼다.
‘그런데 왜 우리가 진 것 같죠?’
* * *
용자명은 마당을 거닐었다.
몇 걸음 걷다가 건물을 쳐다보고, 또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쳐다보고.
그가 바라보는 곳은 마교주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검우진을 보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감히 그를 찾아갈 용기는 없었다.
‘사흘밖에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마당을 오가고 있는데. 건물에서 검우진이 밖으로 나왔다.
“교주님!”
“용 단주.”
검우진의 얼굴을 보니 또 마음이 격동하는 용자명이었다. 나이 먹고서 누군가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 어찌 알았겠는가?
“어디 출타하십니까?”
“잠시 바람 좀 쐴까 해서. 같이 가시겠소?”
“괜히 제가 방해되진 않겠습니까?”
“별말씀을. 가십시다.”
용자명은 기분 좋게 검우진을 따라나섰다.
상단의 세 고수는 따라오지 말고 거처에서 기다리게 했다. 원래라면 안 될 일이지만 용자명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았던 은공이 천마임이 밝혀졌기에, 무인들은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두 사람은 저자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어색해지려면 한없이 어색할 수도 있는 자리였는데, 뜻밖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나눴다.
“자제분이 어떻게 되시오?”
“아들만 셋입니다.”
“쉽지 않겠구려.”
용자명은 검우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짐작했다. 후계 싸움이 치열할 거란 말이었다.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검우진이 다소 뜻밖이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상단을 이끌만한 자질을 지닌 녀석도 없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자질이 없다고 욕심까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재산이 좀 큰가? 자식놈들이 아니더라도 옆에 있는 자들이 얼마나 옆구리를 찔러댈지 잘 알기에 애초에 아무에게도 물려주지 않을 거라고 공표할 작정이다.
“대대로 편히 살 재산을 나눠주고 일체 상단의 일에 개입 못 하게 할 생각입니다. 상단은 누구보다 상단 일을 잘 알고 믿고 맡겨도 될만한 사람에게 맡길 겁니다. 상단에서 일하는 수많은 이와 그 가족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니까요.”
검우진이 그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훌륭하시오.”
칭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찌 모르겠는가? 용자명은 평판만큼이나 훌륭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자 용자명은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소교주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저도 제 재산을 다 물려줬을 겁니다.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요. 그런 점에선 교주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이렇게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낸 적이 언제였던가? 특히 자식들 문제는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다.
“아직 천방지축 철부지요. 그러니 앞으로 용 단주께서 잘 살펴봐 주시오.”
말은 그랬지만 용자명은 검우진이 아들을 뿌듯해한다는 걸 느꼈다. 같은 아버지인데, 어찌 그 감정을 못 느끼겠는가?
그때, 저 앞에서 한 대의 수레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수레를 향했다.
나귀가 끄는 수레에 노인이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뒤쪽 짐칸에 어른과 아이와 앉아 있었다. 어른은 검무극이었고, 아이는 노인의 손녀였다.
“자, 다 만들어졌다.”
검무극이 건넨 것은 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인형이었다.
저자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비수로 후딱 만든 것치고는 꽤 잘 만들었다.
“마음에 들어요!”
아이가 좋아하며 나무 인형을 받았다.
수레가 검우진과 용자명 옆을 지날 때, 검무극이 수레에서 내렸다.
“잘 가!”
검무극이 아이와 작별했다. 수레와 함께 멀어지면서 아이가 인형을 들고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수레를 보낸 후에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설명했다.
“아, 수레가 구덩이에 빠져 제가 꺼내줬습니다.”
용자명은 새삼스런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수레를 빼줄 수는 있다지만, 그 수레에 타고 있던 아이에게 인형을 만들어주며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용자명이 힐끗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온갖 오지랖은 다 부리고 다니는구나’라는 눈빛으로 아들을 보고 있지만,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부럽다는 거였습니다.
“두 분은 어딜 가십니까?”
“교주님과 바람 쐬러 가네.”
검무극은 용자명이 이 자리를 얼마나 만들고 싶었을지 상상이 갔다. 또 얼마나 어렵게 만들었을지도.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용자명과 대륙전장까지 가서 백만 냥을 받은 것처럼 처리했다. 그 소식을 흘리자 여인이 찾아왔다.
“이백만 냥 불렀습니다. 물론, 아버지 생각하면 십억 냥쯤 불러야겠지만요.”
용자명은 내심 놀랐다. 저 말은 상대를 이미 휘어잡았다는 의미 아닌가?
“자네가 나보다 돈을 더 잘 버는군.”
“아쉽지만 이 돈은 나눠야 합니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번에 버는 돈은 정확히 삼등분하겠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휘의 대답.
“저는 괜찮습니다.”
그의 성격상 감히 아버지와 같은 돈을 받으려 할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우리 셋을 한 묶음으로 파는 돈이라서 받으셔야 합니다.”
다시 들려온 단호한 휘의 거절.
“저는 필요 없습니다.”
“압니다. 무림에서 제일 몸값이 비싼 호위시라는 것을요.”
휘는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일부러 말해주었다. 최고의 실력인데, 자랑다운 자랑 한 번 못해본 그를 위해서.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한 그를 위해서.
이렇게 돈을 나누겠다는 건, 그를 위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에게 물질적인 보상을 해줄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호위 분야에선 아저씨가 천마고, 은하상단주시잖아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당황한 휘의 목소리도 참 오랜만이다.
그런 검무극을 쳐다보는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놈아, 그만 놀려라. 하는 미소였다.
“돈 많이 벌어두셨고, 그 돈 쓸 시간도 없으시다는 것도 잘 알죠. 그러니까 받으셔야죠. 쓸 시간은 없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이렇게나 많다. 그런 낙으로 사는 거죠. 아, 그리고 아버지 교주직에서 물러나시면 아저씨도 은퇴하시고 돈 펑펑 쓰면서 사셔야죠.”
잠시 사이를 두고 휘가 말했다.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교주님을 모실 겁니다.”
아버지가 교주에서 물러나도 죽을 때까지 모시겠다는 의미다. 휘는 그야말로 충성심의 상징 같은 사람이다.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드디어 나섰다.
“받게.”
설득은 필요 없었다. 그 한마디에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후에 아들에게 임무를 내렸다. 이 역시 휘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받아내라.”
휘는 진심으로 감격했다.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 돈을 나누겠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고, 그것을 받으라고 명령을 내린 교주도 고마웠다.
게다가 검무극이 자신을 최고 몸값을 가진 호위무인이라고 말해준 것도 고마웠다. 자신은 허영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니 허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기분 좋은 것 중에 가장 고마운 건 마지막 교주의 말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많이 받아내라.’
교주에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누구에게 돈을 받아내는 일, 그것도 최대한 많이 받아내라는 말은 교주란 사람에게 없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교주는 자신을 위해 저 말을 해준 것이다.
그 마음을 용자명도 똑같이 느꼈다.
만약 돈 욕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찾아와도 몇 번은 찾아왔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 수하를 위해 최대한 돈을 받아내란 말을 당당히 한 것이다.
용자명이 검우진과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들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새롭고 놀랍다. 소교주의 대답만 봐도 그렇다. 이들을 만나기 전에 소교주가 이런 대답을 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아들이 누굽니까? 물욕의 화신 아니겠습니까? 제가 확실하게 받아내겠습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인 후, 용자명에게 말했다.
“우린 갑시다.”
“네, 교주님.”
검무극을 뒤로 하고 검우진과 용자명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자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검무극은 반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장난치던 모습과는 달리 차분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용자명이 다시 앞을 보았을 때, 검우진은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용자명이 발걸음을 빨리해서 검우진과 함께 걸었다.
“살면서 물욕의 화신은 제가 제일 많이 봤을 겁니다. 저렇게 맑은 눈빛을 가진 물욕의 화신은 처음이네요.”
용자명의 농담에 검우진은 아무 대답 없이 발걸음만 옮겼지만, 용자명은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을 뿌듯해한다는 걸. 앞서 대화에서도 한 번 느꼈었는데 또 느꼈다.
그 말인즉 검우진이 그런 감정을 자신에게 감추지 않는다는 뜻.
이 감정은 자신이 자식에게 가업을 물려주지 않을 거라는 솔직한 심정을 밝힌 것과 같은 마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 표하겠는가?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을 함부로 옮기지 않을 사람에게 하게 되겠지.
사적이면서도 비밀스러운 부분을 공유하는 믿음은 상대와 얼마나 오래 교류했느냐 와는 별개의 문제다.
하루를 본 사이지만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십 년을 봐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교주가 자신을 믿고 있다는 사실에 용자명은 기뻤다.
이건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신뢰.
평생 한두 명 만날 수 있을까 말까한 인연이기도 했다. 원래도 교주가 좋았는데, 이런 감정까지 느끼니 용자명은 검우진이 더욱 좋았다.
외로웠던 모양이다.
천하제일상인으로서 살아오면서 이권과 인맥에서 벗어나 편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도, 편하게 의지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상대를 보면 저 사람은 또 뭘 원하는 걸까? 이런 생각부터 해야 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그런 자신에게 이 천마는… 은공에서 이제는 형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그들이었다. 그것도 힘과 돈이라는, 모든 욕망의 끝.
그야말로 정점의 정점.
그래서였을까? 이야기가 잘 통했다.
마교주는 과묵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있으면 곧잘 했고, 질문을 하기도 했다.
자식 이야기, 상계에 관한 이야기, 무림 이야기, 교주의 친필서찰을 받았을 때의 심정. 그야말로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용자명은 자신의 인생에서 천마와 사담을 나누며 산책할 기회는 마지막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 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는 사이 저자에 도착했고, 검우진은 잠시 서서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아들이 이번 여정에서 내게 가장 바라는 일이 뭔지 아시오?”
“뭡니까?”
“여기 서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거요.”
용자명은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우진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용자명은 나직한 검우진의 한마디를 들었다.
“과연…….”
‘과연’ 다음에 어떤 말이 생략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 금아린은 다시 검무극을 찾아왔다.
“이야기 좀 해요.”
“좋소.”
검무극은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에는 멀찌감치 걷던 그녀가 오늘은 조금 가까이서 걸으며 자신의 경계심이 줄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저잣거리 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에 있는 들판으로 왔다.
뻥 뚫린 시야 속에 들판은 저 멀리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풀과 곡식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쳐다보며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러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금아린이었다.
“이백만 냥은 무리에요.”
돈을 깎자는 말이었다. 검무극은 그녀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일은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신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무리인 액수요. 그게 우리가 은하상단과 손을 잡은 이유기도 하고.”
검무극의 말에 금아린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깎아주면 우리도 가능해요.”
그러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백구십칠만 냥쯤 깎아달라는 말이오?”
지난번에 돌려준 삼만 냥을 두고 하는 농담이었다.
“우리도 백만 냥에 해주세요.”
백만 냥. 절반을 깎고 들어온 그녀였다. 그들의 중심부로 들어가려는 계획만 생각하면 깎아줄 수도 있었지만, 검무극에게는 아쉽게도 최대한 받아내라는 지상과제가 내려진 상황.
“내가 말하지 않았소? 우리에게도 은하상단에 거절할 명분이 필요하다고. 똑같은 백만 냥에 다른 곳에 간다고 하면 그들이 뭐라 생각하겠소?”
“더 괜찮은 사람과 손을 잡았나 보다 하겠죠.”
검무극이 옆에 선 그녀를 돌아보았다.
“더 괜찮은 사람 맞소?”
빤히 쳐다보는 검무극의 눈빛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나야 모르죠. 은하상단주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당신은 봤으니 알 것 아니에요? 누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죠?”
묻고 있지만, 이미 답을 내린 자신감 있는 질문이었다. 이건 그녀의 기세였다.
“적어도 당신이 더 뻔뻔하긴 하오.”
검무극의 반응에 금아린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백만 냥이든, 이백만 냥이든 어차피 당신은 결정권자가 아니지 않소?”
“당신은 왜 자꾸 내가 누군가의 수하라고 여기는 거죠? 젊어서? 여자라서?”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가 아니오.”
검무극이 뜻밖의 이유를 밝혔다.
“당신이 조직에 모든 걸 걸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요.”
그 말에 금아린은 흠칫 놀랐다. 사실이었다. 자신은 이 비밀조직에 모든 걸 걸지 않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이 일을 어서 끝내고 싶어 했다. 애초에 이 일을 맡은 이유부터 싫었으니까.
‘그걸 읽어냈다고?’
상대는 이렇게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자신이 봤던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금아린은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자신의 생사가 걸린,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승부였다.
“당신이 없애려는 조직이 바로 내가 이끄는 조직이에요.”
목숨을 건 그녀의 승부수였다.
이 솔직함이 통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깜짝 놀랄 줄 알았는데 검무극은 놀라지 않았다. 결국, 놀란 사람은 그녀였다.
“설마 알고 있었나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죠?”
“은하상단에서 당신들에 대한 조사가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소.”
그녀에 대한 정보는 은하상단에서 알아낸 걸로 했다.
금아린은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주시했다. 은하상단을 통해 들었다면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알고 있었다는 의미인데?
“왜 나를 죽이지 않았죠? 백만 냥짜리 일인데.”
태연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검무극은 ‘그러잖아도 지금 죽이려고 하오.’라면서 검을 뽑아 들 수도 있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니까.
적어도 그 점만큼은 제대로 봤다.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했으니까.
“당신이 돈을 더 많이 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정말이지 놀람의 연속이었다.
적어도 이 사람의 입에서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서란 말이 나올 것 같진 않았으니까.
“왜 그렇게 놀라시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뭔가 고상한 느낌이었거든. 아, 이건 비꼬는 거 아니고 칭찬이니까 오해 마세요.”
솔직한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반박했다.
“돈에 관심 없다고 고상한 거요? 그럼 돈에 관심이 많으면 천박하고 저속한 거요? 상인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데.”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저 뜻밖이란 의미였지.”
“돈을 더 달라고 하면 저 사람이 싫어하겠지? 돈을 더 달라고 하면 저급하다 여기겠지? 나는 그런 마음, 귀찮음이고 현실도피라 생각하오. 돈 버는 일에는 없던 용기까지 내야지. 한 푼이 떨어진 곳이 구정물이라도 소매부터 걷어붙여야지.”
검무극은 물욕의 화신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회귀 전 인생은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오직 무공과 대법재료만을 위한 인생이었으니까.
“그 말, 취소해요.”
“취소해야지. 백만 냥짜리 적 앞에서도 검을 뽑는 대신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 정도면 아주 고상하지 않소?”
웃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금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내 그녀는 정색하며 화제를 돌렸다.
“나를 하수인으로 여기면서 더 많은 돈을 얻어낼 수 있겠어요?”
“하수인이면서 다른 신분도 있으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당신이 금룡세가 가주의 혈육이라 생각하오.”
그녀는 검무극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뭐든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내가 혈육이 아니라면 이런 거래는 애초에 제안 못 했을 테니까?”
“그런 점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더 크오.”
검무극은 다시 그녀를 정확히 파악했다.
“당신에게선 돈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지 않소.”
그 역시 그녀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금룡세가의 혈육으로 살면서 어찌 돈을 갈망할 일이 있겠는가?
자신이 어려서부터 돈 걱정 하지 않고 풍족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알아본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보죠?”
안다는 말이 아니라 본다는 표현을 썼다. 이 남자의 저 눈빛은 왠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였다.
“이백만 냥 주시고 우리와 손잡읍시다. 은하상단과 정리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깔끔하게 정리하겠소.”
정말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내 편으로 삼고 싶었다.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백만 냥이 안 되면 애초에 백만 냥도 안 되는 거 아니오?”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백만 냥이나, 이백만 냥이나 어차피 불벼락이 떨어지는 건 똑같았으니까.
“제 사정을 이해해 주세요.”
그녀의 간청에도 검무극은 단호했다.
“돈 주는 사람 사정이 받는 사람 사정만 하겠소? 그러니 돈 받는 사람에게 감정으로 호소하지 마시오. 그게 거래에서 최악이라 생각하오.”
금아린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워낙 큰돈이 오가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어쨌든 이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오늘 대화에서 더욱 확실히 느꼈다. 이 사람을 적으로 두면, 반드시 죽게 될 거다. 검 한 번 뽑지 않고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제대로 챙겨 주고 준 만큼 받아내시오.”
이백 만 냥을 준다는 계약을 한다?
과연 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까? 설마 하나뿐인 딸을 죽이시지야 않으시겠지.
문제는 오라버니들이다. 특히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둘째 오라버니는 이 일을 문제 삼아 자신을 지옥까지 몰아세울 텐데. 과연 이 사람이 둘째 오라버니를 막아줄 수 있을까?
그녀의 시선이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빛을 향했다.
정말 당신을 믿어도 될까?
그녀의 눈빛에서 그 물음을 읽은 것일까?
“계약한 기간만큼은 확실한 당신 편이 되어 주겠소.”
“그야 당연한 일이잖아요?”
“그 당연함을 지키지 못해 온갖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소?”
말뿐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확실한 내 편이 되어 주겠다는 약속, 지킬 수 있나요?”
“내 말을 믿을 게 아니라 상인인 당신의 눈을 믿어야지.”
그녀의 시선이 들판을 향했다.
너무 믿어서 이러는 거지.
얼마나 봤다고. 얼마나 안다고. 한데, 이 남자는 믿음을 주고 있었다. 본능을 자극하고 예감을 끌어당긴다. 나를 선택하라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도 그 파도에 실려 왔다 갔다 했다. 결정을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말은 이것이었다.
―제대로 챙겨 주고 준 만큼 받아내시오.
당신, 내가 뭘 챙기려 할지 알고나 한 말이야?
이윽고 금아린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결정을 내렸다.
“최대한 빨리 계약서 보내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임혁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검무극을 만나고 돌아온 금아린은 곧장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백만 냥을 지급하고 그들과 손을 잡는다는, 어떤 의도도 숨어 있지 않은 깔끔한 내용의 계약서를.
“괜찮겠어? 미친 짓을 하는데.”
금아린의 대답에 임혁은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상황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을 왜 이렇게까지 믿으시는 겁니까?”
대답은 딱 한 글자였다.
“감.”
글을 적던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나도 몰랐어. 내 운명을 감으로 결정하게 될 줄은.”
말과는 달리 그녀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계약서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이백만 냥을 주어야 한다.
상계의 생명은 신용이다. 아무리 비밀조직이라지만, 그 수장이 금룡세가 가주의 딸인 이상 금룡세가와의 계약과 같았으니까.
“이백만 냥을 주려면 올해 운영자금은 물론이고 우리 조직이 거둔 수익금까지 모두 합쳐야 합니다. 어쩌면 그래도 모자랄 수 있습니다.”
“전장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지급할 거야.”
임혁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둘째 공자께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둘째 오라버니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 결정이 경솔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임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생각해?”
아직 그들의 무공 한 자락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임혁은 휘를 떠올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과 차분한 충고는 쉽게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래서 임혁은 그녀의 감을 존중했다. 그녀에게 검무극이 주는 느낌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
“그래, 나도 아니야.”
금아린은 이 선택이 더 먼 곳을 향해 있음을 밝혔다.
“그 사람이 확실한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을 때 결심했어. 이들을 이용해서 후계자가 되어야겠다고.”
임혁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금룡세가의 후계 싸움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강 건너에서 두 오라버니의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녀가 본격적인 후계 싸움에 뛰어들려는 거다.
그녀는 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건 운명의 이끌림에 따른 것이리라.
“이거 가져가서 서명받고 돈 지급해.”
완성된 계약서를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이백 만 냥으로 산 건 우리 목숨도, 서도파도 아니야. 바로 후계자 자리지.”
* * *
“돈 벌어 왔습니다!”
검무극이 세 개의 봉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백만 냥을 받아서 셋으로 나눴습니다. 육십육만 육천 냥씩입니다.”
검우진이 보란 듯이 먼저 전표가 든 봉투를 챙겨 넣었다.
“잘했다.”
그러자 휘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교주와 똑같은 액수를 받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그였지만, 그보다 앞서는 건 돈을 받으라는 교주의 명령이었다.
“자, 이건 아저씨 몫입니다.”
“고맙습니다, 소교주님.”
휘가 봉투를 소중히 품에 넣었다.
“아버지, 휘 아저씨 생각해서라도 자주 나오자고요. 돈이 있으면 뭐 합니까? 쓸 시간이 없는데.”
검무극의 말에 휘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이 돈이 아니더라도 평생 신교에 몸담으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검무극의 말처럼 돈을 쓸 시간이 없었다.
검무극이 옆에 있던 용자명에게 말했다.
“돈 쓰는 법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용자명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돈에 관해서야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교주가 듣는 자리니 그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돈을 잘 버는 사람은 많아도 잘 쓰는 사람은 드물지요. 저도 잘 버는 쪽에 속해 있지, 잘 쓰는 쪽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검무극의 생각을 물었다.
“따로 소교주가 생각하는 바가 있나?”
“저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나중에 돈 잘 쓰는 사람을 찾아서 수하로 삼아야겠다. 그 수하, 최고 대우를 해줘야겠다. 이런 정도지요.”
“현명한 돈 쓰기의 답은 자네가 알고 있었군.”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검무극이 용자명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번 일은 단주님 덕분에 쉬웠습니다.”
은하상단 단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서 모든 일이 진행되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잘되었다는 사실은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저쪽에게서 돈을 받았으니 이제 이쪽은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처음 잡았던 사흘에서 며칠이 더 지났다. 검우진이 좀 더 있다가 가라는 바람에 기분 좋게 며칠을 더 보낸 것이다.
그야말로 꿈만 같았던 시간이었다.
검우진이 시간을 많이 내줘서 그와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와 보낸 시간이 참 즐거웠다.
“제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럽시다.”
검우진이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
“우리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시오.”
세상에 이보다 더 든든한 말이 어디에 있을까?
감격을 얼굴 가득 드러내며 용자명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떠나는 용자명을 검무극은 대문 앞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자네 덕분에 내 오랜 꿈을 이뤘네. 정말 고맙네.”
“단주님 복이시죠. 아버지를 기억해 내신 것도 단주님이시고요.”
그의 숙원을 꼭 풀어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일이 잘 풀렸다. 그렇다고 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려주신 가르침, 정말 감사합니다.”
검무극의 부탁에 용자명은 상계의 일에 대해 강론을 펼쳐주었다. 상대해야 할 적이 상계의 가문이었으니 많이 알면 알수록 싸움에 유리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덕분에 그의 강론을 이야기를 들으며 검무극은 많은 걸 배웠다.
주고, 받고. 이제 다시 줄 차례다.
“자주 아버지께 연락드리십시오.”
“교주님께?”
“단주님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시는 눈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참고로 아버지 바둑 좋아하십니다. 다음에 뵐 때 좋은 바둑판과 알을 사 오시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알려줘서 고맙네.”
용자명은 잠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소문 속의 소교주를 봤고, 이제 소문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소문은 축소되었다고. 소교주는 과소평가 되었다고.
마차에 올라탄 용자명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잘 있게.”
지내는 내내 여유 있는 웃음을 주던 소교주는 마지막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마지막 강론 없습니까?”
농담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용자명은 해주고 싶은 말을 남겨주었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돈은 자네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려고 애쓸 거네. 녀석에게 들키지 말게.”
그렇게 검무극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함께 타고 있던 백총은 용자명이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어 작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마차에 타면 항상 근엄하게 앉아 있던 그였는데.
“무사히 끝나서 다행입니다.”
정말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비장한 각오로 목숨을 걸었었다.
하지만 정작 마교주와의 만남은 정말 오랜만에 가진 휴식이었다. 용자명도 그랬고, 백총도 그랬다.
“돌아가면 애들을 다 만나야겠네.”
아들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언제였는지 모를 정도였다. 상단 일이 바쁘고 막상 만나면 어색했고. 그래서 미루다 보니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 천마 부자를 만나고 나니 자식들이 보고 싶었다.
용자명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에 옛 은공을 만났고 동시에 새 은공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 * *
“세가로 돌아갈 준비해.”
임혁에게 명령을 내린 금아린은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세 좋게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호통은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밤잠까지 설치며 악몽을 꿨다.
그들이 돈만 챙겨서 사라지는 꿈이었다. 또 다른 악몽도 꿨다. 그들이 아버지 앞에서 실력을 발휘했는데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난 그 사람 만나서 출발시간 잡고 올게.”
바로 그때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한 남자가 그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보자 금아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금아린의 둘째 오라비인 금아종(金芽從)이었다.
이번 일을 실행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사람이 그였는데, 먼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금아린을 닮아서 꽤 준수한 외모였지만, 성격은 외모에 미치지 못했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고.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그였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긴. 세가의 돈이 줄줄 새는 걸 막으러 왔지.”
이렇게 빨리 왔다는 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우리 오라버니야 언제나 내가 실수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지.”
두 오라비 중 특히 금아종은 그녀를 유난히 경계했다.
그는 언젠가 아버지가 딸에게 세가를 물려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이백만 냥? 너! 제정신이냐?”
과연 오라버니는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오라버니는 오라버니 일이나 잘해.”
“사기꾼에게 놀아난 줄도 모르고.”
사기꾼이란 말에 금아린은 흠칫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온 것이다.
“사기꾼이라니?”
“너는 그렇게 큰돈을 쓰면서 상대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지?”
그 말만큼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번 결정은 전적으로 감에 의존한 본능적인 결정이었으니까.
“서도파가 무림맹이 개최한 소룡전에서 우승자를 배출한 사실을 알고 있었어?”
몰랐던 일이기에 금아린은 흠칫했다. 지금까지는 신비문파였는데, 이제 소룡전에 출전한 현실적인 문파가 되는 순간이었다.
후기지수를 가리는 대회니 당연히 우승했겠지, 생각하던 그때.
“무림맹주 손녀와 격전 끝에 간신히 이겼지.”
그 말에 금아린의 가슴이 철렁했다.
‘무림맹주 손녀와 박빙이었다고?’
아무리 맹주 손녀라도 아직 후기지수에 불과한데.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걱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력이 못 따르는 건 아닐까?’
치밀어 오르는 걱정을 애써 억누르며 그녀가 말했다.
“우승했잖아? 실력을 숨겼을 수도 있고.”
금아종은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통쾌한 얼굴로 목청을 높였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네가 이백만 냥이나 준 검연이란 자는 소룡전에 나가지 않았다. 소룡전에 우승한 사람은 서룡이란 자다.”
“그럼 검연은?”
금아종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검연은 서룡의 시종이다.”
금아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 사람이 시종이라고?
“당시 무림맹주 손녀가 시종을 데려와서 혼인하겠다고 소동을 부린 건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 너처럼 그 손녀도 당한 거겠지.”
마치 여인을 속이고 다니는 사기꾼 취급을 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시종에 불과하다면?
그녀의 마음에 검무극의 모습이 떠올랐다. 속을 알 수 없었던 것도 사기꾼이었기 때문일까? 악몽이 현실이 되는 걸까?
“그를 만나야겠어.”
금아종은 당장 달려 나가려는 그녀를 말렸다.
“서두르지 마라. 이미 돈을 회수할 이들을 보냈으니까.”
금아린은 깜짝 놀랐다.
“누굴?”
“돈벌레들이 갔다.”
“안 돼!”
정말이지 안 된다는 말이 절로 터져 나왔다.
돈벌레들의 원래 이름은 황금충(黃金蟲)이었다. 그들은 세가에서 키워낸 음지의 고수들로 거친 일에 투입되는 이들이었다.
주로 세상에 밝혀져선 안 될 일에 투입되었는데, 상단을 공격한 자들을 찾아내 몰살시킨다거나 새로운 지역에 상권을 개척할 때 이권 다툼을 한다거나. 그야말로 거칠고 위험한 일들을 주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가 내에서 안하무인이었다. 일하는 이들이나 무인들은 그들을 무서워하고 싫어했다.
결정적으로 돈벌레들이 무서운 점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싫은 건 싫은 거고, 동시에 금룡세가에 꼭 필요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다 죽을 거야.”
“누구에게? 시종에게?”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여전히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컸다.
“그래, 시종에게.”
“너 어디 아프냐? 하긴. 맨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저지르진 못했겠지.”
금아린이 몸을 날려 거처를 나섰다.
금아종이 함께 경공으로 내달렸다.
“넌 이번 일로 완전히 아버지 눈 밖에 나게 될 거다.”
금아종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에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정말 검무극이 사기꾼이어서 돈벌레에게 처참하게 당한 채 죽어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다음으론 이미 달아나고 없다고 돈벌레들이 보고하는 모습도 떠올랐다.
반대로 돈벌레들이 모두 죽어 시체가 되어 널려 있는 장면도 떠올랐다.
그들을 모두 죽이면 아버지는 절대 서도파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다시 말해 그들을 이용해서 후계자가 되려는 자신의 계획도 망쳐버리게 된다.
그 어떤 상상도 모두 최악이었다.
“내게 상의도 없이 그들을 보낸 건 오라버니의 실수야.”
“상의도 없이 돈을 준 실수는 네가 먼저 했지.”
바람처럼 달려온 두 사람이 검무극이 기거하는 장원에 도착했다.
이미 상황이 끝났는지, 안은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대문으로 다가서는데 안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뭔가 바닥을 쓰는 소리 같은데.
뭔가를 닦는 소리도 났다.
그때 누군가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건들지 마.
금아린은 물론이고 여유만만하게 왔던 금아종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 찾아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맞아?”
“확실해.”
금아린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천천히 문이 열렸을 때, 장내에는 정말 상상조차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돈벌레들이 비를 들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또 다른 돈벌레들은 걸레로 벽을 닦고 있었다. 부서진 집기들을 치우고 있었고, 땅이 파인 곳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옮기는 이도 있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붕대로 감은 채 나무에 걸린 그물침대를 회수하는 이도 있었다. 건물 안에서 짐을 들고나오는 이도 있었다.
돈벌레들의 행동이 딱 멈추며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향했다.
돈벌레들의 어색하고 난감한 표정들.
금아종은 지금 헛것을 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요?”
금아종의 물음에 입구 쪽에 가깝게 있던 돈벌레가 인사를 꾸벅하며 말했다.
“곧 떠나실 거라고 깨끗이 치우라고 하셨습니다.”
돈벌레들이 이렇게 착한 얼굴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가? 대체 누가!”
그때 저 앞 건물에서 검무극이 나왔다. 그가 금아린을 보며 반갑게 말했다.
“청소할 사람들 보내줘서 고맙소.”
그 순간 금아린의 마음에 격정이 치밀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가졌던 온갖 나쁜 상상들이 그 격정에 씻겨 사라졌다.
돈벌레를 두들겨 패기만 했을 뿐 죽이지 않은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가 시종인지 아닌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더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내 선택은 옳다.
금아린이 환한 얼굴로 옆에 선 금아종에게 말했다.
“고마워, 오라버니. 이백만 냥짜리 시종에게 차마 청소를 시킬 수는 없었는데.”
금아종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상대가 돈벌레들보다 고수였다고 치자.
한데 저 사납고 거칠고 안하무인인 놈들을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고? 대체 어떻게?
지금 저 앞에서 바닥에 널린 부서진 돌을 치우는 놈은 평소 자신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정말 안하무인으로 오늘만 사는 이였는데. 저렇게 순박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러는 사이 검무극이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그때 근처에 있던 돈벌레 하나가 치우던 돌을 떨어뜨렸다.
검무극이 그걸 주워서 올려주자 돈벌레는 자신을 때리려는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아종은 기가 막혔다.
‘지랄한다, 지랄해.’
이해할 수 없는 건 이거다.
만약 돈벌레들의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렸다면 이해했을 거다. 정말 험한 꼴을 당했으니까. 청소가 아니라 바닥을 벌레처럼 기라고 해도 기어야지.
한데 그냥 두들겨 맞은 정도인데, 이렇게 고분고분하다고? 저 성질 더러운 놈들이? 대체 뭘 어떻게 팼기에?
“여긴 제 사형(舍兄)이에요.”
금아린이 검무극에게 오라버니를 소개했다.
“반갑소, 검연이오.”
검무극을 보는 금아종의 눈빛이 고울 수 없었다. 하지만 돈벌레들이 청소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네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추궁할 수는 없는 법.
“동생에게 말씀은 들었소.”
“동생분이 뭐라고 하던가요?”
검무극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금아린을 향했다. 검무극을 향한 그녀의 눈빛에 고마움이 담겼다.
‘고마워요. 달아나지 않아 줘서, 돈벌레들을 죽이지 않아 줘서.’
달아나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금아종 말처럼 사기꾼은 아니란 의미일 테니까.
금아종은 이기적인 성격인 만큼 자신을 그 무엇보다 아끼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성질도 가려가면서 부렸다.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자고로 무인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죠.”
돈 때문이겠지! 금아종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참았다. 어디 쏟아붓고 싶은 말이 그뿐이겠는가?
하찮은 시종 놈이!
분명 사기꾼이 확실한데. 시종 따위가 대체 돈벌레들을 어떻게 굴복시킨 거지? 속임수를 쓴 건가? 이자의 부친이란 자가 고수인가? 그래, 그럴 것이다. 저 집 안에 있는 자가 고수인 것이 틀림없다. 아마 아버지도 아니겠지. 돈 주고 구해온 자겠지.
그의 궁금증을 풀어준 사람은 금아린이었다. 그녀는 참지 않았다.
“서도파에서 소룡전에 우승자를 배출했다고요?”
어차피 한 번은 물어봐야 할 내용이었고,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에 담담히 물을 수 있었다.
“그랬었소.”
검무극이 서도파를 다시 사용하는 이유였다. 서도파에는 이런 역사가 있기에.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선은 겉모습이나 사실만을 볼 수밖에 없다.
서도파에서 우승자를 배출했다고?
검연이 그 우승자의 시종이라고?
이런 사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실은 껍질에 불과하다.
검연이 검무극이란 진실은 이 모든 껍질을 까고 안을 들여다봐야만 보일 테니까.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시종이라는 편견이 이들의 관심을 휘감고 있었으니까. 둘러싼 사실이 자극적일수록, 더욱 강력한 방패가 되어 진실을 가리는 법이니까.
“우승자가 서룡이란 분으로 들었어요.”
“맞소. 내 사형이오.”
“사형이라고요? 당신이 서룡이란 분의 시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검무극의 입에서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무림맹주 손녀가 나를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시종 행세를 했소.”
진하령이 자신을 맹주에게 데려간 일이 있으니 그럴듯해 보일 것이다.
“아! 신분조차 넘어서는 사랑의 위대함이라니!”
듣고 있던 금아종과 근처에 있던 돈벌레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돈벌레 중 하나가 자기도 모르게 ‘미친!’하며 툭 내뱉었다.
그러다 화들짝 놀랐다. 경솔하게 말을 내뱉었음을 깨닫고 얼어붙은 그를 옆에 있던 돈벌레들이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지켜보던 금아종은 이 돈벌레들의 반응이 더 어처구니없었다. 검무극 앞에서 아예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이런 놈들에게 그 비싼 월봉을 주고 있다니!
금아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정말인가요?”
무림맹주 손녀가 이 사람을 좋아했다고? 하긴, 좋아했으니 무림맹주에게 데려간 것이겠지. 그녀를 현혹하는 사실이 이렇게 바뀌었다.
‘검연은 시종이다’에서 이제는 ‘무림맹주 손녀가 그를 좋아했다’는 사실로.
“다음에 진 소저도 소개해 주겠소. 그때 이후로 친구처럼 지내니까.”
반신반의한 마음이 들었다가 이내 그녀의 시선이 돈벌레들을 향했다.
그래, 이 사람이라면.
금아린은 믿기로 했다. 어차피 이 사람에게 운명을 걸었으니까, 믿는 거다.
반면 금아종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한 사기꾼이다.’
원래 사기꾼들이 유명한 사람과의 친분을 앞세우는 법 아니겠는가?
무림맹주 손녀가 이자를 맹주에게 데려간 이유는 무림맹주에 대한 반항이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왜 맹주 손녀와 혼인하지 않고 여기서 이백만 냥을 뜯어내고 있겠는가? 이런 대단한 실력으로 말이다.
그래서 사기꾼인 거다. 어쩌면 맹주 손녀에게도 돈을 뜯어냈을지도 모르지.
금아종이 온갖 망상을 하고 있던 그때, 검무극이 돈벌레들을 불렀다.
“자, 청소 다 끝났으면 모이시오.”
그러자 돈벌레들이 그곳으로 모였다. 착하게 눈 뜨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다들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금아종은 가까이서 그 꼴을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저기 저 돈벌레의 팔뚝은 이 검연이란 자의 허리만큼 굵은데. 부끄럽지도 않으냐?
설마? 단체로 중독이라도 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젊은 놈에게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금아린은 안하무인처럼 굴던 그들이 주눅 든 모습을 보자 내심 통쾌했다. 통쾌해도 된다. 이제 검연이 자신의 수족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돈벌레들에게 말했다.
“자, 고생들 했소. 이만 가보시오.”
그러자 돈벌레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그곳을 나갔다.
금아종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저놈이 가란다고 정말 가?’
하지만 그들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겠지만, 그 때문에 금아종의 자존심도 상했다. 아무리 아버지를 따르는 놈들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은 아버지의 혈육인데.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두 분 모두 나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셨소. 운명적으로 날 그냥 못 두는 혈통 같은데. 형제가 얼마나 되오? 설마 구 남매, 이러지는 않겠지요?”
검무극의 농담에 금아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금아종은 돈벌레를 자신이 보낸 게 아니라는 듯 뻔뻔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언제 출발할 거요? 우린 출발 준비 다 끝났소.”
검무극의 물음에 금아린이 대답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반 시진 후에 이곳으로 올게요.”
“그럽시다. 앞장서시면 소저 마차를 뒤따르도록 하겠소.”
“그럼 이따 봐요.”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금아린이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고마워요.”
왜 고마운지 말하지 않았는데, 검무극은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금아린은 새삼 실감했다.
‘저거였구나.’
왜 자신이 검무극에게 끌렸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다. 저 여유 때문이다. 이백만 냥을 투자하고, 자신의 운명까지 건 이유는 저 여유로운 미소 때문이다. 뭐든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저 사람의 여유 때문에.
그렇게 금아린과 금아종이 그곳을 나왔다. 금아종은
“저놈 사기꾼이야.”
잠시 사이를 두고 금아린이 물었다.
“오라버니는 아니고?”
흠칫하는 금아종에게 날아든 질책은 따끔했다.
“나나 세가를 위하는 것처럼 굴지만, 아니잖아? 날 위했으면 미리 나와 의논해서 돈벌레들을 보냈겠지. 내가 실수했다고 확신하고, 그 일 바로잡아서 아버지에게 점수 따려고 한 거잖아?”
“무슨 헛소리냐?”
정곡을 찔린 금아종이 딱 잡아뗐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저 말에 이렇게 답해줬을 거다. 꼴좋다, 넌 이제 완전히 아버지 눈 밖에 났다.
“본가에서 봐. 참, 기회 되면 시종에게 꼭 고맙다고 해. 돈벌레들 다 잃었으면 오라버니야말로 아버지 눈 밖에 났을 테니까.”
금아린이 먼저 그곳을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금아종이 뒤쪽 장원을 쳐다보았다.
반쯤 열린 대문 안으로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검무극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검무극이 금아종의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쳐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금아종은 못 본 척 홱 돌아서서 걸음을 빨리했다.
형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있다. 넌 욕심이 많을뿐더러 사기꾼 기질까지 있다고. 그래, 인정한다. 사기꾼이 사기꾼을 알아보는 법. 저놈은 분명 뭔가 감추고 있다.
‘네 정체는 내가 까발려주마.’
그리고 자신은 그 일을 하기 위해 누구보다 뛰어난 수하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추(李追)!”
그러자 한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대한 빨리 놈이 사기꾼이란 증거를 찾아와!”
“알겠습니다.”
이추는 사람 뒤를 캐고 정보를 수집하는 일에 특화된 인물로 자신의 수하 중에 가장 비싼 몸값을 가진 이였다.
“절대 실패하지 마! 오늘 실패는 충분하니까.”
* * *
마차는 금룡세가의 본단이 있는 섬서를 향해 달렸다.
두 대의 마차는 거리를 두고 달렸는데, 금아린은 마차를 모는 임혁에게 검무극의 마차가 바짝 따라붙지 않더라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마차 안에서 검무극은 아버지에게 금룡세가에 대해 아는 바를 보고했다. 아버지 역시 통천각에서 모든 정보를 듣고 있겠지만, 이 정보는 은월에서 받은 정보였다.
“금룡세가의 자제는 모두 셋, 앞서 만난 금아종과 금아린이 각각 둘째와 셋째입니다. 대공자인 금아혁(金芽革)이 현재로선 후계자로 유력합니다. 굳이 그 가능성을 수치로 따지자면 금아혁이 육 할, 금아종이 삼 할, 금아린이 일 할이라 분석했습니다.”
검무극은 금아린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번에 금아린이 우릴 끌어들인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후계 싸움에 이용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어차피 진 싸움, 마지막 역전을 꿈꾸는 거죠.”
검무극의 보고에 검우진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금룡세가에 도착하면 세가주부터 조사할 생각입니다. 저는 그가 배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그 이유는 금아린 때문이었다.
“비밀조직이 벌어들인 돈이 배후에게 흘러갔습니다. 한데 이 비밀조직의 수장이 금룡세가의 세가주의 딸인 이상 세가주가 돈을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수장이 다른 인물이었다면, 수뇌부 중 누군가가 세가주 모르게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있었겠지만, 금아린인 이상 분명 금룡세가의 세가주가 개입되어 있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느냐입니다. 완전히 저들의 수하인지, 아니면 동조자인지, 아니면 협박을 받고 있을 수도 있겠죠. 속고 있을 수도 있고요.”
거기에 구체적인 계획도 있었다.
“한데, 이번에 우리에게 이백만 냥을 주는 바람에 그 지급에 지장이 생겼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큰 문제가 생긴 셈이죠. 그 점에 주목할 생각입니다. 세가주의 반응에서 저들과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겠지요.”
검우진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하고 돈을 받아낸 것이냐?”
검무극의 반짝이는 눈빛이 이미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자 검우진이 말했다.
“굳이 나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상황을 꿰뚫어 보는 데 굳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냐는 말이었는데.
“저들에게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뭐를?”
그러자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이 무림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요.”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을 쳐다보다가 달리는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아버지는 다른 방법으로 알리고 싶으시겠지만요.”
* * *
그날은 객잔에서 묵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복면 쓴 남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금아종이 보낸 이추였다.
그는 사람들이 잠든 객실이 아닌 마구간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았고, 마차 문을 열 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도둑이라 해도 믿겠고, 살수라 해도 믿을 움직임이었다.
이추는 경솔하게 그들이 잠든 객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우선 마차부터 살폈다.
마차 안 객실을 유심히 살핀 그가 이번에는 마부석을 살폈다. 짐은 객방에 옮겨 두었는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이추는 이 특별할 게 없는 마차에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해.’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는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말에 비해서 마차가 너무 낡았어.’
말은 그야말로 명마들인데 마차는 너무 낡은 것이다.
이추는 천천히 마차를 살폈다. 이리저리 살피고 두드려보고.
그 결과, 마차 외부를 얇은 합판으로 새로 덮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낡은 마차처럼 꾸민 것이다.
이추는 합판 끝을 비수로 긁어내서 살짝 벌어지게 했다.
벌어진 사이를 들여다보니 마차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세히 쳐다보니 초승달 같은 모양이었다.
“초승달?”
그가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무림에 초승달을 사용하는 문파가 있었던가?
조금 더 떼어내면 알아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한데 그랬다간 합판을 떼어낸 흔적을 남기게 될 것 같았다. 다시 합판을 붙일 재료를 구해와서 완전히 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한 번 더 그림을 확인하려고 벌어진 사이로 그림을 들여다보던 그때.
이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림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새 누군가 소리도 없이 자신의 옆에 와서 함께 합판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초승달이 아니라 뿔 같은데?”
이추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을까? 누군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 적이 있었을까?
이추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달아나려 했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날아오른 순간, 그는 느꼈다. 함께 서 있던 남자의 신형도 날아오른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을.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옆에 붙어 있었다.
검무극이 그의 어깨를 잡는 순간, 지붕을 뚫고 탈출하려던 이추는 검무극과 함께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다시 내려왔다.
붙잡혀서 다시 돌아오는 움직임이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두 사람이 합을 맞춰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이추는 상대의 무공이 자신을 압도한다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보여준 한 수는 조용히 다가와 마혈을 제압하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법이었다.
“기왕 벗긴 김에 다 벗겨 봅시다.”
검무극이 마차에 붙은 합판을 쭉 잡아당겼다.
찌이이이익.
그러자 마차 벽면이 드러났다. 독특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천마 전용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에서 가장 튼튼한 마차였다.
“사실 타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튼튼하게 만들 필요가 없는데.”
이추는 검무극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홀린 듯 마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에 그려진 그림.
검무극의 말처럼 그건 초승달이 아니라 뿔이었다.
악마처럼 두 개의 뿔이 달린 무시무시한 악귀의 얼굴.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악귀였다.
이추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런 그림을 공공연히 그리고 다니는 무림 조직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한 그곳의 마차라면?
‘나는 죽었다.’
정말이지 이곳 마구간에 들어올 때만 해도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이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이 다시 그의 옆으로 걸어와 나란히 서더니 태평스럽게 말했다.
“무섭지 않소? 이걸 이렇게까지 실감 나고 무섭게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볼 때마다 오싹오싹하오. 당신은 어떻소?”
검무극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추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처음 봐서.”
“맞소,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이지.”
검무극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졌다.
“이 그림을 아무나 마차에 그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정말 높은 사람만 그릴 수 있소.”
원래라면 ‘딱 한 분’이라고 말해야겠지만, 거기까지 알려주진 않았다.
그러자 이추의 마음에 불쑥 피어오른 의심.
‘어? 이자들 정말 사기꾼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의 정말 높은 사람들이 이렇게 세 명만 다닌다고? 왠지 믿기지 않았다.
‘이깟 그림이야 화공에게 돈만 주면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거잖아? 일부러 나 보라고 떼어낸 것도 그렇고.’
바로 그때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하늘에 서 있었다. 하늘도 푸르고 주위도 푸르렀다. 마치 이 모든 일이 꿈이었나 싶었다. 그래, 제발 꿈이었기를 바라며 그가 푸른 바닥에 손을 대자.
첨벙. 하늘이 아니라 너무나도 맑은 물이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물에 비친 하늘이었다.
바로 검무극의 기도였다. 순식간에 발출된 기도가 그를 새로운 세상 속으로 잡아끈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의 진짜 기도는 발아래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를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계속 가라앉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의 공포가 그를 엄습했다. 그 심연의 공포는 끝이 없었고 가공스러웠다.
“으아악!”
이추가 비명을 질렀을 때, 그는 여전히 마차 앞에 서 있었다.
검무극이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추는 알 수 있었다.
‘사기꾼이 아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그 생각을 정정했다.
‘아니, 이들은 사기꾼이다. 역대 최고의 사기꾼들이다.’
다들 마인인 줄도 모르고, 그것도 마교의 절대 고수들인 줄도 모르고, 이들을 데리고 신나게 세가로 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런 줄도 모르고 이들을 조사하게 시킨 것이다.
이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이시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길 말은 없소?”
“누굴 원망하겠소? 이런 일에 휘말린 내 운명을 탓해야지.”
잠시 눈을 감고 있어도 상대는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이추가 눈을 떴을 때 검무극은 여전히 마차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날 죽이지 않소?”
“뭐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당신을 죽이겠소? 마차 좀 뒤져본 게 다인데.”
“당신들은…….”
“왜? 우린 눈만 마주쳐도 다 죽이는 악귀들 같소?”
그러고 보니 아직 자신의 마혈도 제압하지 않은 상태였다.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날 살려주시는 거요?”
물론 그에 따른 조건이 있었다.
“금 소저가 우릴 고용했듯, 나도 당신을 고용합시다. 이번 일이 끝나고 우리가 떠날 때까지만.”
이추는 깜짝 놀랐다. 꼼짝없이 죽으리라 여겼는데, 살길이 열렸다.
“혹시 금아종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하고 있소?”
“아니오.”
“그럴 줄 알았소.”
알려진 금아종은 수하에게 그런 충성심을 받을만한 인물이 못 되었으니까.
“어차피 그의 운명은 지금 당신의 결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거요. 그러니 죄의식 가질 필요 없소. 돈은 지금 받는 돈의 세 배를 주겠소.”
“어차피 그 사람과는 받은 만큼 일하는 사이요. 죄의식 같은 거 없소.”
문제는 이것이었다. 이 새로운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이 상대는 돈을 더 주겠다는 경쟁 상단의 상인이 아니었으니까.
“내게 고독이라도 먹일 거요?”
“그럴 일은 없소.”
“내가 당신들 정체를 까발리기라도 하면? 날 어떻게 믿고?”
“당신 안 믿지.”
검무극의 시선이 마차 벽을 향했다.
“저걸 믿지.”
이추의 시선도 함께 마차 벽에 있는 악귀를 향했다.
검무극은 아무런 협박도 하지 않았다. 배신하면 평생 가둬두고 고문한다거나 잔인하게 죽이겠다거나, 가족까지 죽이겠다는 그 흔한 협박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 * *
“금룡세가의 후계 싸움에 개입할 작정입니다.”
달리던 마차에서 선전포고하듯 던져진 검무극의 말에 검우진이 대답했다.
“네 특기 아니더냐?”
“원래 남 싸움 붙이는 일이 제일 재미있잖습니까?”
물론 그래서 개입하는 것은 아니었다.
“후계 싸움이 벌어지면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그 싸움에 모두의 신경이 가게 될 겁니다. 우린 그 싸움을 이용해서 배후를 찾아내고 처리하고 빠져야죠. 제게 맡겨주십시오.”
검우진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부석에서 휘가 말했다.
“말들이 지쳐 쉬어가겠습니다.”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마차가 멈춘 곳에 앞서 달리던 금아린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들을 들판에 풀어준 후, 휘가 식사 준비를 했다.
“이번 식사는 내가 차리겠소.”
“제가 돕겠습니다.”
임혁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휘가 거절했다.
“그냥 쉬시오. 다음 휴식 때 식사를 맡아주시고.”
“알겠습니다.”
같은 호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임혁은 이들 세 사람 중 휘가 제일 신경 쓰였다. 묘한 동질감도 느껴졌고, 호위계의 대선배를 만난 그런 느낌도 받았다.
그때 금아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저와 이야기 좀 하죠.”
“그럽시다.”
검무극과 금아린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임혁이 따라붙으려 했는데,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저와 있을 때는 그냥 쉬셔도 됩니다.”
“저는 한 번도 아가씨를 혼자 둔 적이 없습니다.”
충성심 가득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이번에는 한 번 그래보시오. 한 번쯤 그래야 한다면, 오늘이 적기일 거요.”
금아린은 검무극이 하는 대로 지켜만 보았다. 이 사람이 이럴 때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겠지, 하는 마음에서였다.
“혹시 제가 들어선 안 될 대화라도 나누실 겁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순수하게 쉬시라는 뜻이오. 신경이 쓰여 잘 못 쉴 거 알지만, 그래도 쉬시라는 말씀이오.”
검무극의 시선이 그 옆에 있던 휘를 향했다. 이 말은 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번 여정에는 좀 쉬시라고. 이 충성스러운 호위들은 온갖 것에 능통했지만 정말이지 쉬는 법만은 배우지를 못했다.
옆에 있던 금아린이 임혁에게 그렇게 하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혁은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검무극과 금아린이 그곳을 떠나갔다.
둘을 보내고 마음이 불안했는지 임혁은 그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임혁이 휘의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할 말 있나?”
“아닙니다.”
결국 망설이던 임혁이 참았던 말을 꺼냈다.
“있습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시오.”
이런 질문을 해도 될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카분 말입니다. 제가 항상 아가씨 옆을 지키는 게 도리어 아가씨가 한 명의 무인으로 성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래서 저보고 쉬라고 했나 싶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검무극 핑계를 댔지만 그건 자신의 고민이었다. 정말이지 금아린을 딸처럼 아꼈기에 항상 지켜주려 애썼지만. 그래서 그녀를 망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해왔던 것이다.
휘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라면 답을 해줄 것 같아서.
“조카 생각은 잘 모르겠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그냥 그대를 쉬게 해주려고 한 말일 수도 있고.”
모르겠다고 넘어갈 거처럼 말을 꺼낸 휘가 고개를 들어 임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뭐가 됐든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소?”
“네?”
“무인으로서의 성장은 우리와 별개의 문제 아니겠소? 잘 성장할 사람은 호위를 하든 안 하든 알아서 잘 성장하겠지요. 일개 호위인 우리가 거기까지 고민한다는 건 직무를 넘어선 월권 아니겠소?”
호위 상대에게 깊이 감정 이입하지 말라는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맺혀 있던 가슴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찌 자신이라고 저 생각을 안 했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백번 고민해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한데 남이 말해주니 속이 후련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호위계의 대선배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해주니 그냥 이 말을 따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지요.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휘는 평소보다 많은 말을 했다. 임혁에게 휘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휘에게도 특별한 인연이었으니까. 호위 임무를 고민하는 무림의 후배를 만난 셈이니까. 그래서 이 말까지 해주었다.
“조카의 그 말은 맞을 거요. 조카와 함께 있을 때는 괜찮을 거라는 말. 그러니 마지막 휴가라 생각하고 즐기시오.”
임혁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과 있으면 거절하기가 어렵다. 검무극도, 이 호위도, 그리고 저 앞에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저 남자도.
모두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임혁의 시선이 금아린이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그러니 아가씨가 잘 선택하셔야 합니다.’
검무극과 금아린은 언덕에 나란히 서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갈대는 살아있는 것처럼 물결치고 그 너머로 흐르는 강물은 햇살에 반짝이며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금아린은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한 가지 일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검무극에게 그 결론을 전하려는 거다.
“당신과 계약을 맺은 이유는 당신이 은하상단과 계약을 하고 나를 죽이려 해서가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이오?”
“후계 싸움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요.”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이 결정 역시 감이었다. 검무극을 택한 것도 감이었고, 솔직해야 한다는 것도 감이었다. 이 감이 틀렸으면 자신은 망하는 거다.
“날 금룡세가의 후계자로 만들어주세요.”
검무극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당신, 알고 있었군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소.”
금아린은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이 사람이 주는 이 안정감은 참 기분이 좋다. 그래서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는 거겠지.
“절 후계자로 만들어줄 수 있나요?”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소.”
그녀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은 진지했다.
“당신은 날 어디까지 믿을 수 있소?”
* * *
금아종도 세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검무극과 금아린의 마차보다 더 빨리 가고 있었다. 먼저 세가로 돌아가면서 이추를 보내 검무극을 조사하게 한 거였다.
그리고 기다렸던 이추가 돌아왔다.
“알아낸 것이 있나?”
“네, 있습니다.”
이추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공자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놈들의 대화를 운 좋게 들었는데 세가로 가서 크게 한탕 더 치자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지? 내가 사기꾼이라고 했잖아! 이 망할 사기꾼 새끼!”
자신의 예상이 맞자 금아종은 크게 기뻐했다.
“증거는?”
“아직 못 찾았습니다.”
금아종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소용없었다. 이추가 들었다고 해봤자, 자신의 수족이니 뒤집어씌운다고 우길 거다.
“증거를 찾아야 해. 그래야 아린이를 날려버리지.”
그러자 이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그들을 이용해서 삼공녀가 아니라 대공자를 엮으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형을?”
“어차피 공자님의 진정한 경쟁자는 대공자가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동생을 후계자로 삼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그건 강박증에 가까웠다. 지금 유력한 후계자는 형이었다. 어쩌면 형과 대적할 용기가 없어 현실 도피하듯 동생을 괴롭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어떻게?”
“놈들이 사기꾼 아닙니까? 놈들에게 대공자를 먹잇감으로 던져 주십시오.”
금아종이 두 눈을 번쩍 떴다. 확 와닿는 말이었다. 이놈들을 형과 엮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와 세가 무인들의 신임을 확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형이 쉽게 넘어갈까?”
“넘어가게 해야죠.”
“어떻게?”
“거기까진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완벽하게 말을 하면 도리어 의심할 테니, 여기까지만 이야기해주라고 했다. 그러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 거라고. 나쁜 머리를 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 알아서 잘 할 거라고.
과연 검무극의 예상대로 금아종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사기꾼 놈들에게 형을 끌어들인다?”
방법을 찾는 그의 두 눈이 교활하게 빛났다.
상계의 사고는 역시 돈 사고가 치명적인 법. 동생이 이백만 냥짜리 사고를 쳤으니.
“형은 얼마짜리 사고를 치게 해야 하나?”
마차는 중경을 통과해 섬서로 향했다.
금아린과 함께 움직이고 있기에 은하상단주가 보답으로 준 비고에는 돌아올 때 들르기로 했다.
“거기 뭐가 들었는지 안 궁금하십니까?”
검무극의 물음에도 검우진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그저 창밖을 쳐다볼 뿐이었다.
“저도 고를 기회를 삼십 번만 주십시오!”
삼십 번이란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다.
“처음에 이쯤 불러야 나중에 세 개라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검무극은 보았다. 아버지의 입꼬리가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 그래, 세 개는 주시겠지.
검무극이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쳐다보았다.
“중경은 얼마 만이십니까?”
“오랜만이다.”
검우진은 과거의 중경을 떠올렸고, 검무극은 미래의 중경을 떠올렸다. 검우진은 오래전에 권마와 이곳을 종횡했고, 검무극은 대법 재료를 찾아 이곳을 헤매었으니까.
그때, 검우진이 저 앞으로 보이는 객잔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저기서 쉬어가세.”
아버지의 말에 휘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휘와 임혁이 이끄는대로 묵묵히 일정을 따랐다. 객잔에 가면 가고, 야영을 하면 하고.
한데, 오늘은 저 객잔에서 쉬어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이다.
휘는 앞서 달리던 금아린의 마차에 기별한 후에 객잔에 마차를 댔다.
검무극은 궁금했다. 예전에 이곳에서 뜻깊은 추억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쩌면 객잔 주인이 아버지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다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왜 이곳에서 묵자고 하신 걸까?’
짐을 풀고 나자 검우진은 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은 데려가지 않았다.
“너는 기다리고 있거라.”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두 분이서만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넌 몰라도 된다.”
그렇게 궁금증만 남기고 검우진과 휘가 객잔을 나섰다.
두 사람이 한참을 걷다가 검우진이 나직이 물었다.
“여기지?”
검우진의 물음에 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셨습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바로 휘의 고향이었다. 설마 교주가 자신의 고향임을 알고 이곳에 멈추자고 한 줄은 당사자인 휘도 몰랐다.
“어릴 때 떠나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곧장 떠났으니까요.”
“그래도 지나가는 길에 있는데 한번은 들러야지. 고향 집은 어딘가?”
“저쪽 고개 넘어 산골 마을입니다.”
검우진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교주가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그곳에 멈춰서 이렇게 함께 가는 것에 더 놀랐다.
‘교주님도 정말 변하셨군요.’
검우진 옆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그를 지켜봐 온 휘였다. 교주는 깊은 속정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휘는 검무극을 떠올렸다. 이번 여정 내내 자신의 시간을 가지라고 등을 떠밀던 소교주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요즘 본교에 변화의 물결이 치고 있잖아요? 아저씨도 빠뜨리려고 그러죠.
그래, 누구보다 그 변화가 어떤 변화인지 잘 안다. 그래서 물을 수 있었다.
―이 변화는 우릴 어디로 이끌고 있습니까?
그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낸 소교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휘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휘가 태어났던 곳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집은 그대로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려서 마을을 떠난 소년을, 또한 장년의 무인이 되어 돌아온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고향에 아무런 감흥이 없다고는 했지만, 살던 집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추억에 젖었다.
특히 기억나는 건 집 앞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르시던 모습이었다. 하나둘씩 아이들이 흩어지면서 집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아련히 떠올랐다.
한참을 집과 집 앞 골목을 구경하다가 마을에 있는 작은 국숫집에서 두 사람은 함께 국수를 먹었다.
검무극은 자신보고 변해야 한다, 변해라, 라고 하지만 이미 자신도 많이 변했다. 이렇게 교주와 한자리에 앉아서 국수를 먹고 있지 않은가?
말없이 국수 한 그릇하고 두 사람은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특별히 나눈 대화는 없었다. 하지만 휘는 이것만으로도 검우진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교주의 방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객잔 입구에서 휘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대답했다.
“나야말로 고맙네.”
항상 자신을 지켜주는 사람을 위한 검우진의 마음이었다. 이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부터 표현하기 시작한 그였다.
그 시간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발휘해 시천비술로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내내 시간이 날 때면 무공수련에 집중했다.
자신의 강함이 초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 있다고 항상 생각하지만, 그건 날아드는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 사람들과 함께한 낮이 빛나려면 밤에는 피나는 땀을 흘려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검무극의 밤은 길었다.
* * *
마차는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섬서에 있는 금룡세가에 도착했다.
검무극은 저 멀리 세가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아버지와 작별했다.
“제가 정찰대로 먼저 가겠습니다.”
굳이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금룡세가로 갈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주인공은 원래 나중에 등장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감추려 해도 아버지의 존재감을 어찌 감추겠는가?
더구나 세가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우선은 혼자 가서 분위기를 살피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검우진 역시 아들의 의도를 짐작했기에 순순히 그 뜻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통천각의 보고도 받아야 했고 밀린 일도 처리해야 했다.
“안가에서 기다리마.”
멀지 않은 곳에 천마신교의 안가가 있으니, 도움이 필요할 때는 금방 와주실 수 있을 것이다.
“제가 기별하겠습니다.”
아버지를 태운 마차가 반대 방향으로 떠나갔다.
검무극은 금아린의 마차에 합류했다.
금아린은 두 분도 함께 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믿자, 이 사람을 믿자. 다 생각이 있겠지.
마차가 금룡세가 입구에 도착했다.
웅장한 대문 위에는 황금색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필체가 마치 용이 휘몰아쳐 날아가는 것처럼 힘찼다.
대문이 열리고 마차가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는 이들은 무가의 무인들처럼 늠름했고, 잘 훈련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대문 안에 펼쳐진 넓은 마당과 화원, 그리고 연못이 조화롭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건물들은 웅장했고, 금룡세가를 상징하는 황금 용이 곳곳에 조각되어 있었다.
들어선 이를 압도하려는 여러 의도가 곳곳에서 느껴졌지만, 천마신교의 그 거대한 악귀상을 보고 자란 검무극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주전이 점차 가까워질수록 금아린이 더욱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긴장되시오?”
검무극의 물음에 금아린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감정을 감출 때가 아니라 아버지의 반응에 대비해야 할 때였으니까.
“아버지가 당신에게 호통을 치실 수도 있어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되오. ‘무서운 아버지’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이골이 나 있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당신은 정말 걱정도 안 되나요? 어떻게 이렇게 태평할 수 있을까?
가주전 앞에 먼저 도착한 둘째 금아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소?”
검무극의 정체를 확실히 오해한 그는 예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검무극을 보았다.
‘요 사기꾼 놈! 내 운명을 바꿔줄 귀여운 놈!’
그의 마음에는 어서 이 사기꾼을 형과 이어줘서 형을 망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했다.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으셨소?”
“괜찮았소.”
“나중에 시간 되면 한잔합시다. 본가에 온 손님이니 내가 대접하겠소.”
“그럽시다.”
검무극이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금아종과 작별한 후 검무극과 금아린이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걸어가며 금아린이 말했다.
“수상해요.”
“뭐가 말이오?”
“오라버니가 당신에게 친절할 리가 없는데. 지금 과해요.”
확실히 눈치가 빠른 그녀였다.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않소?”
“금방 보셨어요. 친해져서 나쁠 거 있는 사람.”
그렇게 두 사람이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가주인 금천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의 거상들이 인상도 좋고, 풍채도 좋은 것과는 달리 금천방은 왜소한 체구에 살짝 신경질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금아린도 그렇고, 금아종도 다행히 엄마를 닮은 모양이다.
이런 인상으로 금룡세가를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게 했으니, 그의 능력이 더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었다.
금아린은 아버지가 자신을 보자마자 불호령을 내리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버지는 침착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왔느냐?”
금천방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서도파의 검연이라고 합니다.”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하자 금천방도 부드럽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만나서 반갑네.”
금아린은 검무극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버지의 모습에 더욱 긴장했다. 이백만 냥이란 거금을 가져간 사람에게 저런 미소를 짓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이 자리에 이 사람의 아버지와 숙부란 사람은 함께 오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이백만 냥이나 먹고 젊은 놈을 대신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했다. 오라버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네. 우리 아린이를 돕기로 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 딸이 사람 보는 눈이 좋다네.”
“저를 고른 걸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검무극의 농담도 미소로 받아주는 금천방이었다.
“한데 세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와 숙부님은 잠시 들르실 곳이 있어서 나중에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랬군.”
금천방이 조심스러운 마음인 건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은하상단주가 직접 이자들을 만나러 왔다는 거지?’
은하상단주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상대가 누구라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였다면 분명 특별한 인물일 터.
과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겁 없이 그들과 맺은 계약을 깨고 딸과 다시 계약한 자들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기에?’
검무극 역시 유심히 그를 살피고 있었다.
검무극은 이번 일의 핵심이 이 금천방에게 있다고 여겼으니까.
‘당신은 당신의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 알고 있나?’
그렇게 서로에 대한 탐색을 마쳤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금천방이었다.
“나는 상인이라네. 물건은 제값에 사야 하고, 제값에 팔아야 한다는 것이 내 원칙이지.”
그런 사람이 비밀조직을 운영해서 주씨검가를 흡수하려 한 거요?
“그런 훌륭한 원칙을 지니셨으니 이런 큰 사업을 일궈내셨겠지요.”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나?”
이백만 냥이란 돈을 받았으니 제값을 하라는 의미였다.
“무슨 부탁입니까?”
“금룡세가는 수많은 거래를 한다네. 지금 자네와 대화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거래가 이뤄지고 있겠지. 좋은 거래도 있지만 나쁜 거래도 있기 마련이지. 우리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나 몰라라 하는 곳도 여러 곳이지. 그중에 우릴 오랫동안 괴롭힌 곳이 있는데.”
금천방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곳에 가서 수금해 줄 수 있겠나?”
“그 뻔뻔한 자들이 누굽니까?”
금천방이 짐짓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백선방(百仙幫)이라네.”
백선방. 백 명의 신선이 모인 방파라고 이름 붙었지만, 진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이름부터 그렇게 짓지 않았으리라.
백선방은 그야말로 악귀들의 소굴이었다. 검무극도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금아린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왜 이렇게 친절하게 나왔는지.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정도로 끝내지 않으려는 거다.
‘이 사람을 죽이려는 거구나.’
백선방은 금룡세가의 오랜 골칫거리를 넘어 너무나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금룡세가인 자신들도 그들에게 뜯긴 돈을 아직도 못 받고 있었다. 그걸 이 사람들에게 받아오라는 건, 단지 실력을 시험하는 것 이상의 악의가 담긴 부탁이었다.
“아버지, 그 일을 맡기는 건…….”
그때, 금천방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금아린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반면 검무극은 여유로웠다.
“받아야 할 돈이 얼마입니까?”
“오랫동안 액수가 쌓여 받아야 할 돈이 삼백만 냥이 되었네.”
이런저런 명목으로 그들에게 뜯긴 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빌렸다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 돈, 그랬기에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선방은 고수들이 득실댔으며 그 악랄함이 정점에 이른 자들이었으니까.
금천방은 검무극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받아들일 텐가?’
이건 일종의 응수타진이자 시험이었다.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를 보는.
금아린이 검무극에게 다급한 전음을 보냈다.
―거절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어요!
이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걸 걸었는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다.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했다.
물론, 검무극은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이 후계자로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소?
검무극이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날 어디까지 믿을 수 있소?
아무리 그렇다고 벌써 이런 시험에 들게 하다니.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검무극의 대답이 먼저 나갔다.
“제가 받아오죠.”
금천방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한다고? 백선방이 누군지 모르고 내린 결정이냐? 아니면 알고 내린 결정이냐?’
물론, 이런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그럼 그 대가로 몇 할을 제게 주실 겁니까?”
“뭐?”
놀란 금천방에게 검무극이 차분히 설명했다.
“저는 가주님의 수하가 아니라 여기 금 소저와 손을 잡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지금 전 제 수장이 말리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지요. 제 요구가 틀렸습니까?”
금천방은 반박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엄밀히 따져서 자신이 고용한 수하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백만 냥이나 받아 갔으면서 또 돈을 요구하다니? 원래라면 어림도 없는 요구였지만, 지금 상황은 특별했다.
“얼마를 원하나?”
“돈을 못 받은 지 오래되셨다고 하셨으니 악성부채군요. 어차피 못 받을 생각을 하셨을 거고. 가주님이 못 받아냈으니 그만큼 위험한 자들일 테고.”
이런저런 포석을 깔더니 검무극은 통 큰 한 수를 두었다.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절반이나 달라고?”
금천방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무리한 부탁만큼이나 무리한 요구였다.
“이런 경우 보통 수고료로 일 할, 많이 준다 해도 이 할의 돈을 주고 일을 처리한다네.”
“평범한 상대라면 그렇겠죠.”
오히려 검무극은 한술 더 떴다.
“사실 전부 다 주셔도 가주님에게는 이득인 일입니다.”
“그건 또 무슨 궤변인가?”
그러자 검무극은 목청을 높여 힘차게 말했다.
“금룡세가와 거래를 하면 반드시 돈을 갚아야 한다.”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이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절대 금룡세가의 돈은 떼먹지 못한다.”
이런저런 온갖 이유로 받지 못한 돈을 생각하면, 저 말대로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말이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로 그의 관심을 끄니, 금천방은 자연스럽게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소문은 또 어떻습니까? 백선방조차 돈을 갚았다더라.”
말해 무엇하겠는가? 끝내주는 소문이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그 누구라도 금룡세가의 돈을 떼먹을 생각은 못 할 겁니다.”
검무극이 금천방의 두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산이 빠른 금천방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그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모든 건 그들에게 돈을 받아왔을 때 해당하는 말이겠지?”
금천방의 말에 검무극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제가 받아오고, 그 돈의 절반만 받겠다는 겁니다.”
‘절반이나’가 ‘절반만’이 되었지만, 금천방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에 생색까지 더해졌다.
“따님을 생각해서 제가 특별히 양보한 겁니다.”
금천방의 눈빛에 호기심이 스쳤다. 제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군가와 거래할 때는 이렇게 해야지. 뻔뻔할 정도로 호기로우면서 설득력까지 있게끔.
‘그래, 은하상단주가 아무나 만나러 가진 않았겠지.’
어쩌면? 돈을 회수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백선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떠올리면 으레 잔인하고 감정적이며 막무가내라고 인식한다. 그야말로 말이 안 통하는 무식한 놈들.
처음에는 금천방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들을 이끄는 방주가 똑똑한 사람이란 걸. 그들의 복수도, 합법적 강탈도 모두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과연 네가 그 까다로운 인간을 상대할 수 있을까?’
상대가 안 된다 여기면서도 궁금증이 드는 걸 보니 이 젊은 녀석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긴 한 모양이다. 요즘은 이런 패기를 보기 어려우니까.
“만약 못 받으면 어쩔 텐가?”
딸에게 받은 이백만 냥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기대했지만.
“못 받으면 못 받는 거죠. 가주님도 못 받는 돈을 제가 쉽게 받겠습니까?”
자신을 끌어들이며 말하자 금천방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검무극의 대응에 감탄했다.
“절반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못 받고 있던 돈이다. 삼백만 냥 중 백오십만 냥이라도 챙기면 이득이고.
게다가 정말 받아내면 아까 이자가 말한 것처럼 돈보다 더 귀한 명성을 얻게 된다.
‘실패하면?’
백선방에서는 적당히 손을 봐주고 돌려보내겠지. 금룡세가에 진 빚이 있으니 일을 크게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놈의 기를 꺾어놓으면 앞으로 이백만 냥을 회수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게 금천방의 계산이 끝났다.
“좋네, 절반을 주겠네.”
지켜보던 금아린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안 돼요!”
아버지가 자신에게 화났다는 걸 알기에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는 이미 늦다.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하는 약속인가요?”
그러자 검무극은 그녀를 보며 차분히 말했다.
“이백만 냥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있소. 또 백오십만 냥 역시 큰돈이라는 걸 알고 있고. 큰돈을 벌려면 당연히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소?”
금천방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대가 없이 돈을 벌려는 사람을 싫어했다. 큰돈을 벌려면 큰 위험을 떠안아야지.
검무극의 시선이 금아린에서 다시 금천방을 향했다.
“역시 돈을 벌려면 상계로 뛰어들어야 하는군요. 도착하자마자 돈이 쏟아집니다.”
검무극의 여유에 금천방도 여유로 대응했다.
“돈이 쏟아질지 피가 쏟아질지, 끝나 봐야 알겠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탐색전으로 끝날 수 있었던 첫 만남의 자리에서 큰 약속이 걸렸다.
“그럼 돈 찾아와서 뵙겠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금아린이 말했다.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럽시다.”
검무극이 가주전을 나가자 이제 그곳에는 금천방과 금아린만 남았다.
금천방은 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절대 못 해낼 거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그런데도 이번 일을 시키신 건 제게 벌을 주시려는 거잖아요? 너무하세요.”
금천방은 냉정하게 반응했다.
“너무한 건 너다.”
“무슨 말씀이시죠?”
“후환거리를 데리고 본가로 왔다는 의미다.”
“은하상단이 저들을 끌어들여 제 조직을 치려고 했어요.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고요.”
엄밀히 따지면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이다.
딸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돈 때문에 역정을 내시다니요!
정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애써 참았다. 이백만 냥이나 되는 돈을 허락도 받지 않고 먼저 써버린 잘못이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곧장 세가로 돌아와서 이 아비와 상의를 했어야지.”
그에 대해 금아린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럼 오라버니들이 그 일을 꼬투리로 잡겠죠. 자기 일을 혼자 처리하지 못하고 아버지 품에 숨는다고요.”
“그래도 경솔했다. 저자가 은하상단이 우리에게 심은 세작이면 어떻게 할 거냐?”
“세상에 이렇게 요란한 세작도 있나요?”
금천방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금아린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곳을 나섰다.
“후환이 아니라 복덩이라고요. 그 복덩이를 시궁창에 던져버리셨지만요.”
금아린이 가주전을 나갔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백선방이라니.
검무극은 건물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일 정말 할 거예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백선방이 어떤 곳인지 알고는 있어요?”
“어떤 곳이오?”
금아린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생각하기도 싫은 그들을 설명했다.
“인간 말종들이 모여 있는 곳이에요. 그 말종이 동네 파락호들이 아니라 날고 기는 고수들이고요. 특히 그들을 이끄는 방주는 절세고수로 알려져 있어요.”
검무극은 그저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들이 정말 무서운 점은 한 명이 죽으면 나머지가 몰려가서 반드시 복수한다는 점이에요. 놈들은 그 친구며 가족까지 다 죽이는 잔혹한 자들이라고요.”
그 광범위한 복수가 백선방을 공포의 상징으로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동시에 죽어 마땅한 이유기도 했고.
“그런 자들이 어찌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소? 무림맹에서 그냥 뒀소?”
“그들은 절대 증거를 남기지 않으니까요. 만약 누군가 증거를 남기면 자신들이 그를 제거해서 꼬리를 잘라버린다고 들었어요. 결국 그들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이죠.”
회귀 전 삶에서는 결국 백선방은 무림맹에 의해 토벌된다. 무림맹에서는 그들이 악행을 저지른 증거를 찾아내서 공격했고, 놈들은 격렬히 저항하다 전멸했다. 그 과정에서 무림맹의 고수들도 상당수가 다치거나 죽은 걸로 알고 있다.
이번 생에서 백선방이 나와 인연을 맺는 걸 보니,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은 죽게 된다는 운명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내 말 들었어요? 놈들은 죄 없는 가족까지 죽인다고요.”
“내 가족은 괜찮소.”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너무 괜찮아서 탈이지.”
금아린은 그 자신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았다.
“당신이 아버지를 믿는 건 잘 알지만…….”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큰 결심을 했다.
“좋아요,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목숨을 건 큰 결심이었지만 그녀는 단박에 거부당했다.
“그들에게 돈을 더 뜯기고 싶소?”
“무슨 말이죠?”
“당신이 방문하면 그냥 있겠소? 어떻게든 시비를 걸어 당신을 붙잡은 후 당신 아버지에게 요구하겠지. 딸을 찾아가려면 돈을 가져오라고.”
그러고도 남을 자들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괜찮아요?”
“나는 괜찮소. 우리 아버지는 한 푼도 안 줄 거라서.”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라니? 그녀는 검무극의 여유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럼 좀 차분히 무슨 생각인지 설명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검무극은 가야 할 방향과 다른 곳을 향했다.
“어디 가세요? 객청은 이쪽이에요.”
“갈 곳이 있소. 나중에 봅시다.”
금아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검무극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알겠다. 저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당신은 날 어디까지 믿을 수 있소?
당신은 날 어디까지 걱정하게 할 거죠?
* * *
그날 밤, 금아린이 검무극의 처소를 찾아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검무극은 깨어 있었다.
“제가 잠을 방해했나요?”
“괜찮소, 들어오시오. 우린 밤에 바쁜 사람이라서.”
“네?”
검무극은 그저 뜻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금아린이 안으로 들어왔다. 탁자에 술병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술을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잔하시겠소?”
“주세요.”
정말 술 생각이 절로 나는 그녀였다.
세가로 돌아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아버지와 숙부께는 연락했나요?”
“무슨 연락 말이오?”
“백선방 일 말이에요. 그에 대해서 알려드려야지요.”
그녀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혼자 갈 생각은 아니죠?”
그들 셋이 같이 가도 위험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혼자 갈 거요.”
금아린은 깜짝 놀랐다. 검무극의 차분한 눈빛을 보자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앞서 받은 술을 쭉 들이켠 후 빈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백만 냥짜리 술자리군요.”
이 자리가 그를 마지막 보는 거란 농담이었다.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좋아요, 당신이 제가 모르는 절세고수라고 쳐요.”
그럴 수도 있다. 전낙을 죽이기도 했고, 돈벌레들을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만들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작전은 세워야죠. 상대는 무려 백 명이나 된다고요. 그들 중 누굴 먼저 찾아갈지, 가서는 무슨 말을 할지. 만약 순순히 돈을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아니, 반드시 돈을 안 줄 테니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생각해야죠.”
“세우고 있소.”
“아니면 상대의 약점이라도 찾고, 네? 뭐라고요?”
“작전 세우고 있었다고.”
그제야 그녀의 눈에 탁자에 쌓여 있는 종이가 들어왔다. 맨 위 종이에 백선방이란 글자가 보였다.
“이게 뭐죠?”
“백선방에 대한 자료요.”
“어디서 났어요?”
“정보상에게 샀소.”
사실 이 자료는 은월을 통해 받은 것이었다. 은월 섬서지단에서는 당연히 이곳의 요주의 조직인 백선방에 대한 조사가 되어 있었다.
“언제요?”
“아까 나가서 사 왔소.”
“제가 봐도 되나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금아린이 자료를 살펴보았다.
정말 그들에 대한 자료였다. 방주가 누구며 어떤 무공을 지녔고, 수족으로 누가 있으며 서로 얼마나 믿는지. 성격은 어떻고 무슨 일을 맡고 있는지. 각자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는지 모두 적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상단에 돈을 얼마나 빌렸고, 얼마를 떼먹었으며, 그 돈으로 어떤 사업을 펼치고 있는지도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들은 온갖 이권에 개입하며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었다.
“정보상에서 이렇게 상세한 정보까지 파는군요.”
“돈이 있으면 못 구하는 정보는 없소.”
그녀는 무안했다. 이렇게 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와서 말로만 작전을 세우라 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걱정이 되었다면 자신이 이 정보를 사 와서 그에게 줘야 했다. 자신은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걱정쟁이였다.
“그래서 작전은 세웠나요?”
“세웠소.”
정말 이 시원시원한 대답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거다.
“말해주세요.”
“비밀이오.”
이런 모습을 보이니 정말 돈을 받아오는 게 아닐까, 괜한 희망이 생겼다.
“대신 당신에게 부탁이 있소.”
“뭐죠?”
그 부탁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거기 적혀 있는 상단과 문파를 찾아가서 백선방에 떼인 돈을 받아주겠다고 하시오. 대신 절반을 수고료로 받겠다고 하시고.”
“뭐라고요?”
너무 놀란 나머지 금아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사람이 너무 놀라니까 벌떡 일어나졌다.
“내가 가는 거보다 당신이 가는 게 더 신뢰가 가겠지.”
금아린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었다. 그러는 사이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들의 돈을 내가 다 차지할 수도 있소. 하지만 그보다는 이게 더 나은 방법이겠지. 당신은 돈을 찾아줬다는 명성을 얻고, 그들은 돌려받지 못할 돈을 되찾고. 나도 절반의 이득을 얻고.”
검무극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 일이 다른 의미가 있음을 짚어주었다.
“이번 일이 당신이 후계자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해줄 거요. 섬서에서 당신 명성이 크게 올라갈 테니까.”
금아린은 검무극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 정말 그 돈을 다 받아내려는 거군요.”
다 받아낸다고? 백선방에게 당한 이들의 돈을 전부 다?
“그렇소. 원하는 이들의 돈은 모두 받아줄 거요.”
“우리 돈을 받아내는 것도 불가능한데…….”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벼락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당신 설마?”
검무극을 만난 이래 가장 놀라는 순간이었다.
“그자들을 다 죽일 생각이군요.”
금아린은 처음 경험했다.
이렇게 담담한 살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다 죽이려는 거죠?”
이제 알 수 있었다.
왜 검무극이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절반을 달라고 했는지. 또 다른 상단과 문파에게 돈을 받아주겠다고 전하라 했는지.
“푼돈이면 모를까 그런 거액을 순순히 내어줄 리 없다는 걸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이번 일은 돈을 받아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받은 후가 문제요.”
“무슨 뜻이죠?”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그들은 가족까지 다 죽이는 복수를 하는 자들이라고. 그런 거액을 빼앗기면 그들이 어떻게 나오겠소?”
“반드시 복수하겠지요.”
검무극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들을 죽이는 게 아니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 자신들을 죽이는 것이지.”
그녀는 자신의 예감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설마, 이 사람 혼자서 백선방을 몰살할 만큼 강한 실력을 지녔다고?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자, 가서 최대한 많이 받아오시오. 그들을 설득하는 건 당신에게 달렸소. 후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시오.”
검무극이 금아린의 손에 상단과 문파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며 밖으로 나가게 했다.
“지금 당장 출발하시오. 액수가 큰 곳부터 가시고.”
“아니, 밀지 마시고. 우리 이야기 좀 더 해요.”
“나 할 일 많소. 밤에 바쁜 사람이라고.”
그렇게 그녀는 떠밀리듯 방에서 쫓겨나왔다.
닫힌 문밖에서 그녀가 목청을 높였다.
“당신 수장은 나예요. 명령은 내가 해요.”
자그마치 이백만 냥짜리 수하에게 쫓겨나 본 적 있는가?
그러자 안에서 검무극의 대답이 들려왔다.
“수장이라고 앉아서 시키기만 하면 매력 없소. 자, 수장님, 다녀오십시오.”
* * *
금아린은 며칠간 각 상단과 문파들을 부지런히 오갔다.
정말 검무극이 시키는 대로 은밀히 상단과 문파를 돌며 그들의 허락을 받아냈다.
“백선방에게서 떼인 돈을 받아낼 생각이에요. 그때 함께 받아드릴 테니, 우리에게 그 절반을 수고비로 주세요.”
계약서를 남겨야 했다면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백선방의 보복을 걱정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계약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얼마를 빌려줬는지 차용증만 확인했다.
말로 하는 약속은 쉬웠다. 나중에 아니라고 잡아떼면 그만이니까. 금룡세가에서 명분을 만들려고 자신들을 끌어들였다고 우기면 그만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이 말을 했다면 절대 구두로도 약속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금룡세가라면? 섬서제일의 부자이자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금룡세가의 혈육이 직접 와서 하는 약속이라면? 다들 기대를 걸었다. 될만하니까 나서지 않았을까?
그렇게 금아린은 거액을 뜯긴 곳들의 허락을 받았다. 그들 중에는 지속해서 놈들에게 돈을 뜯겨서 가세가 기운 곳도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약속에 희망을 걸었다.
금아린이 돌아와서 각 상단과 문파들이 빌려준 액수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죠?”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녀오겠소.”
금아린이 그 앞을 막았다.
이 사람은 정말 혼자서 자그마치 백 명의 고수를 상대하러, 그것도 악인들만 가득한 소굴로 가려는 거다.
“말려도 갈 거죠?”
그녀도 함께 가고 싶었다. 하지만 함께 가면 짐이 된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돈 버는 일이 이렇게 어렵소.”
검무극이 그 말을 남기고 훌쩍 가버렸다.
그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원래라면 ‘조심해라’라는 말을 해야 했는데, 이 말이 자꾸 떠올라 하지 못했다.
‘차라리 이 길로 도망쳐 버려요.’
놀랍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랬다간 자신은 영영 후계자는 될 수 없을 것이고 이백만 냥을 사기당한 꼬리표가 평생 붙을 텐데도 말이다.
한데 왜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래, 이 사람. 적어도 백선방의 악인에게 죽어선 안 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유롭게 웃는 저 환한 얼굴이 그깟 악인들에게 찢겨 죽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금아린이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지리란 예감이 들었다. 이 말이라도 해줄 걸 그랬다.
‘돈 안 받아도 되니까, 무사히 돌아와요.’
* * *
“금룡세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백선방의 방주 염제(廉制)가 고개를 들었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백의 장삼을 입은 그는 정말 신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근엄한 흰 수염과 새하얀 옷으로도 그의 차갑고 교활한 심성이 담긴 눈빛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에게 진짜 신선 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지금 이 대청에 있는 악인들을 자신의 수하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저들 중 누군가의 칼에 맞아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거다. 이곳은 지옥이었고, 악귀가 아닌 자는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었다.
“누가 왔더냐?”
“새파랗게 젊은 놈인데 못 보던 얼굴이었습니다.”
염제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금룡세가에서 처음 보는 놈을 보냈다고?
“왜 왔다고 하더냐?”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적당히 핑계 대서 돌려보내라.”
“네.”
염제는 기분이 나빴다. 세가주가 직접 와도 만나줄까 말까인가 얼굴도 모르는 새파란 놈을 보내? 뭐 때문에 왔는지 용건을 떠나 기분이 상했다.
“금룡세가 기강을 한 번 잡아야 할 것 같군.”
그러자 태사의 아래에 있던 일선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일간 세가주 한번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일선 옆으로 아홉 명의 신선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바로 항상 염제의 곁을 지키는 십선(十仙)들이었다. 백선방 서열 일위부터 십 위까지가 바로 그들이다.
오늘 이곳에 있는 이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넓은 대청에는 백선방의 신선들로 가득했다.
“십칠선 정산 마쳤습니다!”
오늘은 월말에 있는 정산 날로, 각자 벌어 온 돈을 보고하고 염제에게 바치는 날이었다. 정산이 끝나면 다 같이 술을 마시며 연회를 열었다.
염제는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어 서로 경쟁시켰다.
백선방은 철저한 서열로 이뤄진 조직이었다.
방주 아래 십선이 있고, 그 아래에 십일선에서 구십구선까지 정해진 서열이 있다.
염제는 이 서열체계를 확실히 세웠다. 이 서열이야말로 백선방을 지키는 가장 큰 힘이었고 수익을 증대시키는 근원이었다.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
높은 서열일수록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가기 때문에, 그들은 어떻게든 공을 세워 위로 올라가려 애썼다. 그래서 서열은 일 년에 한 번 바뀌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곳에 있는 모두의 운명을 뒤바꿀 첫마디가 울려 퍼졌다.
“돈이 많으시네.”
대청에 울려 퍼지는 낯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한 젊은 청년이 정산하는 곳에 수북이 쌓여 있는 전표를 보면서 한 말이었다.
“돈이 이렇게 많으신데 왜 빚을 안 갚으실까?”
근처에 있던 신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너 누구냐?”
처음 본 놈이 옆에 들어와 있을 때까지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정신없이 바쁜 정산 날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무공실력을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 명 중 한 명은 봤어야지.
청년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중앙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태사의에 앉은 염제를 쳐다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방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금룡세가에서 나온 검연이라고 합니다.”
금룡세가란 말에 다들 긴장을 풀었다. ‘어휴, 놀랐잖아!’ 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상대가 정체 모를 신비 고수에서 금룡세가에 보낸 일개 무인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방주인 염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북적대는 분위기였다지만, 저놈이 들어올 때까지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저놈이 살수였다면?’
암습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 아닌가?
일선이 나서려는 걸 손을 들어 제지한 후 염제가 직접 검무극에게 물었다. 금룡세가쯤 되면 직접 상대해 줄만 했으니까.
“못 보던 얼굴이네만?”
“최근에 금룡세가와 연을 맺었습니다.”
염제는 내심 의아했다.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면서 최근에 들어온 사람을 보냈다? 근래 없던 일이었다.
“무슨 일로 왔나?”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검무극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빌려준 돈 받으러 왔습니다.”
흐르는 정적.
미친놈인가? 잘못 들었나?
이 두 가지 생각이 가득한 그곳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전염되면서 여기저기서 웃었다.
자신들을 직접 찾아와 돈을 받으러 왔다고 말하는 자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말 이렇게나 운이 나쁜 놈이 있을 수가 있을까? 다른 날도 아니고 자신들이 다 모인 정산 날에 찾아오다니.
“지금까지 갚지 않은 돈이 삼백만 냥이나 되더군요. 이자까지 받아야 하지만, 특별히 원금만 받겠습니다.”
또다시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염제는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죽여달라고 보냈나?
금룡세가 가주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보낸 게 아닐까? 아니라면 그자가 이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대체 뭐 하는 자이길래?
“자네는 누군가?”
“검연입니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지요. 인연이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져야 하는데 가끔은 미련이 남을 때가 있습니다. 술 좋아하는 그 사람의 취기처럼, 주위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지요. 하지만 오늘은 미련 없이 빠르게 사라질 것 같습니다.”
대체 뭔 헛소리지?
모두 고개를 돌려 시선을 교환했다. 그 눈빛에 여러 감정이 담겼지만 가장 많은 건 이것이었다.
미친놈이 왔구나!
그래서 그들의 눈빛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이놈을 어떻게 가지고 놀까?
별일 아닌 것 같으면서도 염제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낯설어서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 다 모이는 정산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나?”
“신선 백 분이 노니는 곳 아닙니까?”
검무극이 살짝 목소리를 낮췄다.
“한데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신선도 아니면서 스스로 신선이라 부르는 거 좀 그렇지 않습니까? 듣기로 나쁜 짓 많이 하셨다던데.”
이렇게 밉살스러운 말을 하는 걸 보니 죽이라고 보낸 게 맞는 모양이다.
염제가 한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는 서열의 마지막인 구십구선이었다. 염제는 이런 일이 있으면 철저히 서열대로 명령을 내렸다.
“사내놈이 뭔 말이 이렇게 많으냐?”
구십구선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방주에게 잘 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막내에서 벗어날 기회.
물론, 일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검무극이 그의 이름을 물었다.
“우리 신선께서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오?”
“이름은 왜 묻지?”
“확인할 게 있어서요.”
검무극이 품에서 전표를 꺼냈다. 십만 냥짜리 전표였다.
“대답해 주면 이걸 주겠소.”
이름을 말하면 십만 냥을 준다고? 순진하게 그걸 믿을 리가 없었다.
“가짜 전표로 나를 희롱하겠다?”
구십구선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에 올라갔다.
“진짜 전표요. 밑져야 본전 아니오? 진짜 전표면 이름 한번 말해주고 십만 냥을 얻고, 가짜 전표면 날 혼내줄 명분을 얻고.”
구십구선이 검무극과 손에 들린 전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끝으로 염제를 돌아보았다. 염제가 시키는 대로 해줘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조궁(曺弓)이다.”
그러자 검무극이 품에서 종이를 꺼내 그를 확인했다.
“조궁, 조궁. 아, 여기 있군요. 고향에서 친구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고 오히려 친구를 살해하고 도주, 낭인 생활을 전전하다 낭인 고수에게 사사, 이후 흑정삼호으로 활약하다 두 형제를 죽이고 도피. 우리 신선께서는 주로 가까운 사람들의 뒤통수를 찌르는 게 특기인 분이시군요.”
조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대가 자신의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온 것이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조궁의 눈빛에 살기가 차올랐다.
“여기 적힌 것 맞소? 내가 믿는 정보긴 한데 대표로 한 사람 정도는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소. 그래야 내 마음도 편하고.”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십선 중 한 사람이 말했다.
“틀렸다. 형제만 죽인 게 아니라 후환을 없애려고 그 가족들까지 다 죽이고 나왔지.”
조궁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런 자들이었으니까. 오히려 악하고 비열할수록 살기 편했다.
조궁이 검을 뽑아 들며 검무극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네 혓바닥과 그 십만 냥은 내 거다.”
조궁이 살수를 펼쳤다. 정말 혀를 자르겠다는 듯, 검을 내질러 검무극의 입을 찌른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의 혓바닥은 조궁의 검으로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아든 검을 피하며 검무극이 가볍게 반격했다.
일검에 심장이 꿰뚫린 조궁은 그대로 절명해 쓰러졌다.
피 냄새가 확 피어오르며 그곳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방금 검무극이 보여준 한 수는 지극히 평범했다. 특별한 초식을 발휘해 죽인 게 아니라, 날아든 공격을 피하며 그냥 검을 찔렀을 뿐이었다.
그래서 각자 실력에 따라 반응은 반반이었다.
저깟 공격에 당하다니!
저런 평범한 공격으로 조궁을 죽이다니?
물론 그렇다고 이곳의 그 누구도 겁을 먹진 않았다. 그래봤자 서열의 끝인 구십구선이 죽은 것에 불과했고, 이곳에는 아흔아홉 명이 함께 있었으니까.
검무극이 염제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염제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네. 칼 찬 사람들끼리 있다 보면 피도 보고 그러는 거지.”
“도량이 넓으신 분이시군요. 빌려 간 돈만 주시면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염제는 수하 하나가 죽었다고 삼백만 냥이란 거금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돈은 갚으려고 했었네. 한데 본방의 사정이 좋지 않아 미루고 있었던 거지. 돌아가서 가주께 전하게. 내 곧 돈을 갚겠다고.”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놈은 어떻게든 죽일 거고, 금룡세가에서는 오늘 일을 돈으로 갚아야 할 거다. 지금까지 바친 돈보다 훨씬 큰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시지요, 하고 돌아서 나가주면 좋았겠지만.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쌓여 있는 전표를 쳐다보았다.
“돈 저기 많잖아요? 보자, 매달 이렇게 돈이 들어왔다면, 금고에 엄청나게 쌓여 있을 거 같은데.”
금고가 언급되자 염제의 얼굴이 꿈틀했다.
“돈 갚으시죠?”
염제는 ‘저놈을 찢어 죽여라’라는 명령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참았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고. 죽여도 나중에 죽이라고. 저놈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냐고.
염제가 미소를 지으며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보다시피 내가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많아서.”
신선들이 그 입 가득 비웃음과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들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검무극이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했다.
“입을 좀 줄입시다.”
또다시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훨씬 더 많은 숫자를 차지한 쪽은 미친놈을 대하는 반응이었다. 아흔아홉이란 숫자가 주는 절대적인 안도감에 그들은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일부는 긴장했다.
그들의 마음에 떠오른 한 가지 걱정.
만약 미친놈이 아니라면?
이 가정이 사실이 되는 순간, 지금 입을 줄이자는 저 말은 사신이 명부를 펼친 것과 마찬가지다.
그 걱정하는 일부에는 염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검무극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숨겨진 실력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어떤 결론도 낼 수 없었다.
젊어도 너무 젊었고, 아무리 봐도 그렇게까지 고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방주님이야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테니, 제가 처리해 드리죠. 어느 입부터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는 다 없어져도 될 입들 같기는 한데.”
신선들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 달려 나가 이 건방진 놈을 죽이고 싶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염제는 정말 처음이었다. 세상에 어떤 고수도 자신들 앞에서 이런 미친 소리를 하진 못할 것이다. 자신들이 다 모였을 때는 무림맹도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할 텐데.
‘설마 그걸 노린 건가? 이런 광오한 말로 고수인 척하려고?’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정말이지 볼수록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자였다.
‘그래, 우선은 실력부터 봐야 한다.’
놈이 덮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염제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질긴 목숨이라 입을 줄이긴 쉽지 않을 거네.”
염제의 눈짓에 구십선에서 구십팔선까지 아홉 명이 앞으로 나왔다. 일단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뒷일을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들이 검무극 주위를 둘러쌌다.
검무극이 그들을 스윽 둘러본 후에 말했다.
“막내들인가요?”
추측하듯 물었지만, 검무극은 그들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했다. 기세로 봤을 때 다른 이들보다 더 떨어지는 이들이었다.
이 많은 사람 속에서 검무극은 잠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정확히 그들의 실력을 알아차린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아직 합공으로 싸워본 적도 없는 것 같고.”
그 역시 정확히 봤다. 그들이 합공으로 싸울 기회는 없었으니까. 대부분 복수를 위해 우르르 몰려가서 일방적인 학살극을 펼쳤을 뿐이다. 그조차 근래에는 거의 없었고.
‘내 실력을 알아보겠다?’
물론, 상대의 의도대로 따라줄 검무극이 아니다.
검을 늘어뜨린 채 검무극이 천천히 정면에 선 상대를 향해 걷는가 싶었는데.
휘이익.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쇄도했다. 너무나 빠르고 기습적인 움직임이었기에 우측에 있던 자는 미처 검을 휘둘러 보기도 전에 목이 그어졌다.
푸아아악!
피가 사방으로 뿌려지는 가운데 검무극의 신형은 또 다른 신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상대도 본능적으로 검을 내질렀다.
두 자루의 검이 허공을 스쳤다. 자신의 실력을 철저히 감추었기에, 검무극의 검은 그보다 딱 반 수 정도 앞섰다.
그랬기에 두 번째 신선을 죽였을 때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빨랐다면 그 신선이 이길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 때문이었다.
두 번째 상대의 심장을 찌른 검이 이번에는 크게 회전하면서 반대쪽에서 달려들던 자를 향해 날아갔다.
검무극의 검에 묻은 피가 허공을 날아가 신선의 눈에 들어갔다. 일부러 그랬는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그 감은 눈을 영원히 뜰 수 없었다. 이번에도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눈에 피가 들어가다니?
세 번째 사내를 베었을 때, 등 뒤에서 기습이 날아들었다.
기습을 가한 자는 거의 성공을 자신했는데,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너무 아까웠기에 ‘한 번 더’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그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그가 뿜어내는 핏물이 다시 사방으로 뿌려졌고, 남은 신선들의 시야를 가렸다.
정말 시야를 가리려고 일부러 이렇게 피를 뿌리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겠지?
지켜보던 이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많은 피가 분수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검무극의 싸움은 고상하지 않았다. 거칠고 사나웠다.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싸움이었다.
물론, 검무극이 이런 싸움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싸움은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빨랐으면. 조금만 더 다른 각도로 공격했으면.
그런 아쉬움을 남기며 남은 신선들도 연속해서 쓰러졌다. 아쉬움의 탄식이 계속 이어졌고, 아홉 번째 탄식이 끝났을 때 그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 냄새가 장내에 가득했다.
장내에 흐르는 침묵은 앞서 구십구선이 죽었을 때보다 당연히 무거웠다. 아홉 명의 고수가 상대에게 긁힌 상처 하나 주지 못하고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상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켜보던 이들 대부분은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 아쉽게 진 싸움이었다.
게다가 검무극의 검술이 너무 평범했다.
‘방어는 저렇게 하고, 공격은 저렇게 해야지.’
처음 무공을 배우는 입문자들을 앉혀두고 보여주면 딱 좋을 싸움이었다. 이대로 그려서 교본으로 내면 될 것 같은 그런 싸움.
물론, 염제의 눈에는 이 싸움이 다르게 보였다.
‘본능적으로 막 싸운 것처럼 보였지만.’
아홉 명의 수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합공하지 못했다.
둘이서, 혹은 셋이서 동시에 공격했다면 분명 더 쉽게 싸움을 이끌 수도 있었을 텐데. 분명 합공하려 했을 텐데, 상대의 움직임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만약 의도된 싸움이었다면? 이 아슬아슬한 운 좋은 싸움이 철저히 계산된 싸움이었다면?’
염제는 안다. 기본기로 이들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현란한 초식을 사용해서 죽이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이놈, 숨겨진 한 수가 있는 놈이다.’
검무극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에 염제를 쳐다보며 말했다.
“자, 입을 줄여드렸으니 이제 돈 갚으시죠?”
염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을 구해서 보낸 거지?’
검무극은 염제의 얼굴에 드러난 감출 수 없는 탐욕을 보았다.
검무극은 이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염제가 이런 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수하보다는 돈을 더 중요시하는 자다.
번 돈을 다 바쳐야 하면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자였다.
그랬기에 염제의 금고를 열기 위해선 절대 서둘러선 안 된다.
한 번에 싹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이렇게 피를 보면서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켜서 그의 마음을 조금씩 무너뜨려야 한다. 오늘의 주목적은 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돈을 회수하는 것이었으니까.
“심부름이나 하는 애들 몇 죽이고 기고만장하군.”
물론 그런 자들은 아니지만, 염제는 애써 기세를 살리면서 알지 못할 불안감을 억눌렀다.
‘누굴 보내지?’
아예 십선들을 내보내 싹을 잘라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바로 그때.
검무극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보였다.
“잠깐만 지나갑시다.”
검무극이 갑자기 오른쪽에 서 있던 신선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쪽에 있던 신선들이 검을 뽑아 들며 물러났다. 그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자연스럽게 길이 만들어졌다.
좌우 사나운 기세의 신선들이 노려보고 있었지만, 검무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얼굴로 그사이를 지나갔다.
자연스러운 걸음에 허점이 보였다. 공격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오히려 너무 명백한 허점이라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참지 못한 신선이 있었다. 이 한 수로 단번에 열 단계는 서열이 올라갈 계산까지 끝낸 공격이었다.
정말 누가 봐도 제대로 들어간 기습이었는데.
검무극이 몸을 틀어 피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이번 역시 운 좋게 공격을 피했고, 아슬아슬하게 반격에 성공했다.
그 순간에도 몇몇 신선이 움찔했다. 기회를 틈타 공격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지만, 조금 전 죽은 사람은 사십오선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 중 중간 이상의 실력자가 기습에 실패한 것이다.
구십팔선이 공격해도 아슬아슬했고, 사십오선이 공격해도 아슬아슬했다.
그러면 이 결과에서 현명한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하는데, 지금 검무극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 그림 진품이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서 그가 걸어간 곳은 뒤쪽 벽에 붙은 그림 앞이었다.
염제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왜 묻지?”
“방주께서 돈이 모자라면 이것도 가져가려고 그러지요.”
염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는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수하들 앞에서 챙겨야 할 위신이 분명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이 젊은 상대가 주는 묘한 불안감이 더 컸다.
“내가 사람이 들락거리는 이곳에 가짜를 걸어두는 사람처럼 보이나?”
수하들의 피 냄새가 자욱한 이런 상황에서 저런 자부심이라니? 검무극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걸 이질적으로 느끼는 사람은 검무극 뿐이었다.
오히려 수하들은 저 말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 모두 동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체면이고 돈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벽에 붙어 있던 액자를 떼기 시작했다.
정말 그림을 챙긴다고? 염제의 표정이 확 굳어지던 그 순간.
쉬이이익!
근처에 있던 신선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습을 가했다. 그림을 떼어서 드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게다가 검무극이 그림을 오른손에 들자, 그는 참지 못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는 참아야 했다.
간발의 차이로 검이 빗나갔고, 돌아선 검무극의 왼손 주먹이 그의 턱을 강타했다.
삼십구선이라면, 주먹 한 방 정도는 버틸 만도 했는데, 그대로 절명해 쓰러졌다.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권법도 아니었는데.
염제의 시선은 죽은 수하가 아니라 그림에 향해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의구심에 빠져들어 있었다.
‘굳이 왜 지금 그림을 가져가는 걸까? 정 필요하면 나중에 떼서 가져도 될 텐데.’
검무극이 액자를 가져가서 전표가 쌓여 있는 탁자에 올려두었다. 마치 여기 있는 물건은 다 내 것이라는 모습처럼 보였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염제의 물음에 검무극이 담담히 답했다.
“당신들이 이런 인생을 살아버리는 바람에 대처할 방법이 많지 않소. 그러니 원망은 하지 마시오.”
신선들은 대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순간 염제의 마음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
‘설마? 아니겠지?’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염제는 한 줄기 선을 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보았다. 한줄기 선이 쭉 하고 시원하게 그려졌다가 사라지는 것을.
선은 검무극의 오른쪽에 생겼다. 검무극이 걸어가서 그림을 떼왔던 바로 그쪽.
선이 그 앞에 서 있던 신선들을 지나갔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신선들도, 두 번째, 세 번째 줄에 서 있던 신선들도 모두 지나갔다.
뒤이어 그들은 검무극이 그들을 향해 검을 뻗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자신들이 보았던 그 선은 바로 검무극의 검이 만들어낸 검선이었다는 걸.
‘검기가 이렇게 한 줄의 선이 되어 날아갈 수도 있는 건가?’
화려한 빛처럼 날아간 것도 아니었고 잔상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자를 대고 쭉 그은 것 같은 한 줄의 선.
이렇게 깨끗한 검기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검무극의 흑마검이 검집에 들어가던 그 순간.
스르르륵.
오른쪽에 서 있던 신선들의 몸이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몸이 양단된 신선들이 일제히 피를 뿜어대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으아아아악!”
정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선 하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간담이 큰 고수들이라지만, 이십여 명이 단 일수에 몸통이 잘려 나가는 모습은 놀랍고도 두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왜 뒤쪽 그림을 가져왔는지. 신선들을 벤 검기는 뒤쪽 벽에 기다란 선을 남겼다.
염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무림에 뛰어들어 여러 고비를 넘겼지만, 이렇게 놀랐던 적이 있었을까?
상대에게 숨겨진 한 수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십여 명의 수하를 한 수에 죽일 줄은 몰랐다.
다른 신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곳에 비웃음을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끈 피어오른 피 냄새가 대청에 자욱하게 풍겼다.
“내공을 많이 소모해서 남은 내공이 없을 것이다!”
검무극의 단전을 들여다봤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지만, 염제의 외침에 신선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이 일제히 살기를 드러냈지만, 검무극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검을 뽑지 마시고 돈을 갚으시라니까.”
삼십여 명의 수하가 죽은 이 상황에서도 염제의 입에서는 돈을 주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들의 목숨으로도 아직 삼백만 냥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입이 더 줄어야 되나 봅니다.”
검무극이 이번에는 반대쪽인 왼쪽을 쳐다보며 그쪽에 서 있던 신선들에게 나직이 말했다.
“다행히 이쪽 벽에는 그림이 없군요.”
검무극의 왼쪽에 있던 신선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다행히 이쪽 벽에는 그림이 없다는 말은 여기에도 검기를 날리겠다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검무극의 기도는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이십 명을 한 수에 베면서 공포심을 다음 단계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만!”
염제가 나서서 말렸다. 여전히 그는 이런 의심을 했다.
‘그런 가공할 검기를 또 쓸 내공이 있을까?’
아닐 것 같지만 만약 그렇다면? 왼쪽의 수하들도 한꺼번에 쓸려나갈 것이다. 그는 수하들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수하들이 자신에게 벌어다 주는 돈을 생각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손해였다. 현재 이들이 버는 돈도 돈이지만, 이런 고수들을 키우거나 구하는 비용도 무시 못 했다.
삼백만 냥 아끼려다 장기적으로 더 큰 돈을 날려버리는 셈이 될 테니까.
그렇다고 순순히 삼백만 냥을 내어주기도 싫었다.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염제의 시선이 앞에 늘어선 십선을 향했다. 서열 일 위부터 십 위까지.
그들 중 한두 사람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확인해 주면 좋은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하긴 앞서 그 검기를 보고 나서기는 쉽지 않겠지.
염제가 일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선.
―네, 방주님.
―놈의 내공을 더 소모 시키도록.
―알겠습니다.
일선은 다시 육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솔선수범해서 직접 나서거나, 방주에게 진심 어린 충성심을 가졌거나.
여기 그런 사람은 없다. 그건 서로가 잘 알았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고. 오직 욕망과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이들뿐이었다.
이런 자들의 집합이기에 일선의 지목은 당연히 감정적이었다. 육선은 십선 중에서 가장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육선, 저자의 실력을 파악하고 내공을 소모시켜라.
육선은 나서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방금 상대가 보여준 검기는 생전 처음 본 수법이었다. 거울이 깨지듯 쨍하고 선이 그어지고 몸이 잘려 나가는 모습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일선의 명령을 거역했다간, 본보기로 자신이 먼저 당할 것이다. 염제와 일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육선은 혼자 늪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나서며 십일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날 도우면 십선에 넣어주지.
십일선에게 십선에 드는 일은 죽음의 공포조차 이겨낼 수 있는 그의 염원이었다. 육선이 돕는다면 가능한 일임을 안다.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공을 세운다면? 어쩌면 육선 위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지.
십일선도 육선과 함께 나섰다.
두 사람이 나서자 검무극이 육선에게 먼저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육선이다.”
검무극이 품에서 자료를 꺼내 다시 읽었다.
“육선이시라.”
잠시 육선에 대해 읽어가던 검무극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뭔 사람을 이렇게 많이 죽였소?”
검무극이 이번에는 십일선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십일선.”
이번에는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더 많이 죽였나로 서열이 정해지는 건 아닌가 보오.”
오히려 십일선이 더 많은 살육을 저지른 자였다. 검무극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비단 사람을 죽인 숫자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어린애들까지 죽였군.”
십일선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그 사실을 시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눈빛이었다. 본래 그는 백선방 내에서도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육선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대체 그대의 정체는 누군가?”
검무극은 대답 대신 천천히 십일선에게 걸어갔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십일선은 바짝 긴장한 채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을 준비를 했다. 육선 역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네가 뽑으면 우리도 뽑는다. 우리 둘이라면?
분명 이런 자신감이 있었는데.
쉭! 쉬익! 쉭!
푹! 푹! 푸욱!
검무극의 검이 십일선의 배와 가슴, 그리고 목을 연이어 찔렀다.
너무 빨라서 반격은커녕 피하거나 막을 여유조차 없었다.
옆에 있던 육선이 본능적으로 반격하려던 그 순간,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이미 세 번이나 십일선을 찌른 검무극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빠르다!’
이런 자를 둘이서 상대하려 했다고? 대체 무슨 자신감이었지?
선 채로 절명한 십일선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자 그제야 검무극이 물었다.
“참, 조금 전에 뭘 물었소?”
여전히 정중해서 더 섬뜩했다.
육선은 검을 든 손에 내력을 가득 주입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상대는 저 검으로 십일선을 죽이며 자신의 물음에 대답했다.
난 너희를 죽이러 온 사신이라고.
육선은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오직 선수만이 살길이다.’
공격할 수 있을 거리가 되었을 때 육선의 검이 먼저 날아들었고, 검무극의 검이 뒤이어 날았다.
하지만 늦게 날아간 검이 먼저 도착했다.
베어진 육선의 목에서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장내의 혈향은 더욱 짙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악인들은 악인들이었다. 동료들을 이렇게 줄지어 죽어 나가고 있어도,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끼는 자가 없었다.
그때 튀어나온 사람은 삼선이었다.
“돈타령 그만하고 나와 싸워보자!”
백선방의 신선들 중에서 싸우는 걸 제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짙은 혈향에 치미는 살심을 참지 못했다. 십일선이 미친놈이라면, 이 삼선은 더 미친놈이었다.
“죽이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 아닌가?”
삼선이 망설이지 않고 검기를 발출했다.
쇄애애액!
거친 검기가 검무극을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검기를 피하자 검기는 뒤쪽에 있던 신선들을 덮쳤다.
뒤에 서 있던 신선들 중 두 사람이 미처 검기를 피하지 못하고 휩쓸렸다.
쇄애애애액!
동료가 죽었지만 삼선은 다시 검기를 발출했다. 이번에는 더욱 거칠고 강력한 검기였다.
검무극은 검기를 발출해서 없앨 수 있었지만 그대로 두었다. 그의 검기에 뒤에 있던 또 다른 신선들이 휩쓸렸다. 사방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삼선은 미친놈처럼 검기를 발출했다. 동료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쇄액! 쇄애액!
꽈아앙! 꽝!
검기를 막기 위해 검기가 발출되었다. 그 검기를 막기 위해 또 다른 검기가 날았다.
그곳은 대번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무극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아드는 검기를 그야말로 절묘하게 피했다.
푸우욱!
삼선의 신형이 멈췄다.
그의 심장을 뚫고 나온 검은 염제의 검이었다.
“병신같은 새끼.”
차가운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뽑자 삼선이 피를 뿜으며 그대로 절명해 쓰러졌다. 그가 죽자 비로소 장내의 소란도 멈췄다. 이 미친 공격으로 십여 명이 같은 편의 공격으로 죽었다.
염제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내가 졌네. 돈을 주지.”
그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이놈을 죽이려면 내 모든 걸 걸어야 한다.’
그 모든 것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신위를 보인 상대에게 죽기 살기로 덤비는 건 다 같이 죽자는 공격이었다. 설령 이기더라도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일단은 돌려보내야 한다. 복수는 그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염제가 분노를 드러내지 않은 채 차분히 말했다.
“이 정도 입이 줄었으니 돈을 내줘도 본방이 유지가 되겠네.”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대신 삼백만 냥이나 되는 큰돈을 주려면 시간이 필요하네. 사업을 정리해야 하니까. 우선은 저것부터 가져가고 내게 시간을 주게.”
염제가 바라본 곳은 정산하던 탁자였다. 그곳에 전표들이 쌓여 있었다.
물론, 검무극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돈은 금고에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의 돈은 없네. 그리 큰돈을 어찌 금고에 넣어두겠나?”
염제는 딱 잡아뗐다.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열어서 있으면요?”
염제가 움찔했다.
“내가 다 가져도 됩니까?”
검무극은 보았다.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염제의 눈빛에 기쁨이 스치는 것을.
“좋네, 약속하지.”
염제는 금고에 삼백만 냥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본방의 금고는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곳 대청에 있네.”
염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 벽으로 걸어갔다.
그가 뒤쪽 벽에 붙은 조각들을 조작했다. 몸으로 가린 채 조작했기에 뭘 어떻게 만지는지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문을 열려 하면 기관이 작동해서 침입자를 죽일 거네.”
드르륵.
잠시 후 비밀 벽이 열리며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리 와서 보게.”
검무극이 그곳으로 걸어 올라갔다.
남은 십선들도 함께 따라와서 염제 주위를 지키며 섰다.
염제가 금고에 있는 전표와 금덩이를 꺼냈다.
“전표로 이백오십만 냥이 조금 넘는군. 금붙이들을 다 팔아도 삼백만 냥에는 턱없이 부족하네. 이래도 내가 자넬 속였나?”
염제는 자신이 속이지 않았다는 듯 당당했다.
“거기 정산했던 돈을 가져와라.”
그러자 신선들이 탁자에 올려진 전표를 가져왔다. 아직 정산하지 않았던 신선들도 그곳에 돈을 올렸다.
그렇게 모든 돈을 다 모으니 삼백만 냥이 되었다.
“다행히 자네에게 줄 돈이 되는군. 가지고 돌아가게. 오늘 일은 돈을 갚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 깨끗하게 잊겠네.”
“역시! 도량이 넓으신 분이시군요.”
물론 그럴 리가 있겠나?
복수는 지금부터 준비할 생각이다. 이놈은 물론이고 가족과 친구, 이웃들까지 모두 죽일 것이다. 금룡세가 역시 그냥 두지 않을 생각이다. 오늘 죽은 숫자의 열 배를 죽여서 백선방이 어떤 곳인지 이 강호에 알릴 것이다. 무림의 모든 살수를 다 사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돈을 챙겨서 떠나주면 정말 좋았겠지만.
“참, 깜박했네. 미안한데 받을 돈이 더 있소.”
검무극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내밀었다.
수많은 이름과 액수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였다. 지금까지 백선방이 각 상단에서 돈을 뜯어낸 내역이었다.
“이 돈도 받아오기로 부탁을 받아왔습니다.”
염제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이것들이!’
염제는 살심이 치밀었다. 지금껏 자신이 강탈한 돈을 다 내어놓으라고? 죽으면 죽었지 절대 갚을 수 없는 액수였다. 들끓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며 염제가 말했다.
“보다시피 금고는 텅 비었네. 다음에 받으러 오게.”
그러자 염제를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는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 방주님 개인 금고가 있잖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염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예 작정하고 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금고도 열지 않았을 거다. 아니다, 상관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제 이 돈도 주지 않을 생각이니까.
염제가 차가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내 돈을 다 가져가려고 온 거군.”
“그 말에는 두 가지가 잘못되었습니다. 우선 방주님 돈이 아니고요, 다음으로 다 가져가는 것도 아니겠지요? 그 돈을 이자도 주지 않고 빌려 가서는 그동안 많이 불렸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 돈을 바탕으로 온갖 사업을 꾸려온 것이었으니까.
“빌린 돈 갚으시고, 지금부터라도 떳떳하게 사업하십시오.”
물론, 염제가 그럴 리 없다고 검무극은 확신했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까.
아주 잠깐 염제는 고민했다.
‘그냥 다 줘버리고 후일을 기약할까?’
하지만 그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단지 빌린 돈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젊은 놈이 금고 속을 보면 분명 욕심을 부릴 거고, 모든 걸 다 털어갈 테니까. 자신이라면 반드시 그럴 것이니까.
결국 이 마지막 선택도 그의 인생이 하는 셈이었다.
“저자를 죽이는 자에게는 일선의 자리와 저 삼백만 냥을 주겠다!”
신선들이 일제히 살기를 드러냈다. 상대의 실력을 봤음에도 일선과 삼백만 냥이란 보상은 죽음을 불사하게 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 상황에서 방주의 명령을 거역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돈 빌릴 때는 웃으면서 빌리고, 돈 갚을 때는 검을 뽑고.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오?”
검무극의 말을 무시하며 염제가 소리쳤다.
“죽여!”
사방에서 신선들이 달려들었다. 육십 명의 고수가 동시에 달려들자 그 기세가 대단했다. 나만 안 죽으면 된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운 좋게 살아남으면 삼백만 냥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검무극이 그들에게 밀렸다. 그 모습에 염제가 소리쳤다.
“놈의 내공이 떨어졌다! 죽여라!”
그러면서도 그는 나서지 않았다. 돈과 자신의 목숨만이 전부인 그였다.
그렇게 검무극이 한쪽 벽으로 몰렸고, 그의 앞으로 남은 신선이 모두 모였다. 만약 정말 상대의 내공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라면?
먼저 죽이는 자가 삼백만 냥의 주인이 되는 거다.
일선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섰고, 나머지는 돈과 자리 모두를 차지하기 위해 나섰다.
승냥이 떼처럼 모여든 그들은 검무극 앞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눈빛치고는 너무나 맑고 깊었기에 앞줄에 서 있던 일선은 뒤로 물러나고 싶었다. 순간 드는 불길한 예감!
‘설마? 일부러 우릴 한곳에 모았나?’
검무극은 탐욕 가득한 그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대들의 다음 생은 없기를 바랍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검무극 앞에 가장 무서운 악귀가 생겨났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선두에 선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렇게 무서운 악귀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악귀는 열두 개로 분열되었다.
근래 피나는 수련으로 그 숫자가 열 개에서 열두 개로 늘어난, 바로 구화마공의 대멸식이었다.
악귀들을 대하는 순간, 그들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악귀들은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어떤 초식도, 어떤 호신강기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나며 소멸했다.
그렇게 육십여 명의 악인은 핏물만을 남겼다.
혼자 남은 염제는 두 눈을 부릅떴다. 공포에 질린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이런 가공할 무공은 처음이었다. 그 악귀는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당, 당신 대체 누구야?”
두려움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참방참방.
“아시잖습니까? 저는 떼인 돈 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검무극이 핏물 위를 걸으며 정중히 말했다.
“돈 갚으세요.”
염제는 태사의 옆에 주저앉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뜨면 자신의 침소이길 바랐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지난밤의 악몽이기를.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악몽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무극의 눈빛은 차분했다. 하지만 차분하고 정중했기에 더욱 무서웠다. 저 맑은 눈으로 수하들을 모두 죽였으니까. 정중하게 말하면서 다 죽였으니까.
이제 자신이 싸워야 할 때였다. 하지만 싸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이런 날이 오는구나.’
염제가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돈 좀 떼어먹었다고 이렇게까지 하느냐?”
어디 돈 떼먹었다고 죽였겠는가?
지금껏 이들이 지은 악행이 너무나 커서, 애초에 이곳에 올 때부터 모두 죽이려 마음먹었다.
만약 이들을 살려둬서 원래의 운명대로 흘러간다면 이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무림맹 무인들이 죽게 된다.
죽어야 할 자는 죽이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살린다. 회귀의 신념은 이곳 백선방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죽으면 싸 들고 가지도 못할 돈인데, 뭔 욕심을 이렇게나 부리셨소?”
염제가 흥건한 핏물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따위 말은 패배자들이나 하는 소리다. 돈을 못 버는 놈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대체 돈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에 있다고?
결국, 그는 욕설을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내 돈이라고! 다 내 돈이라고! 내가 저잣거리에서 돈을 뿌리든, 관짝에 가득 채워가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검무극은 그의 눈에서 광기를 보았다. 평생 이렇게 살아온 삶인데 어찌 몇 마디 말에 뉘우침이 있겠는가?
문득 은하상단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돈이란 놈에 잡아먹히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거든.
그 극한에 이른 자가 바로 이 염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이렇게 떳떳해선 안 된다.
“당신 돈 아니잖아?”
정곡을 찔린 염제는 이를 악물었다. 반박할 말은 이뿐이었다.
“네가 뭔데?”
대답은 곧장 나왔다.
“몇 번을 말해야 하오? 나는 돈 받으러 온 사람이라니까.”
자꾸 묻는 건 이 때문일 거다. 그는 빌린 돈을 갚는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자였다.
“개인 금고 여시오.”
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눌 가치가 없는 자.
“그런 거 없다니까.”
아흔아홉 명의 수하가 모두 죽었어도 그는 개인 금고를 열지 않으려 했다. 목숨보다도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정말 온갖 짓을 다 해서 번 돈이다. 사람을 때리고, 납치하고, 팔아넘기고, 죽이고. 지옥에 갈 때 가더라도 이승에서만큼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해서 번 돈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 내놓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당신 금고, 이 대청에 있다는 것 알고 있소.”
염제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누굴 속일 수 있겠는가? 그의 심장 뛰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검무극에게 들렸다.
“당신이 저 금고 열 때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이곳에 백선방의 금고가 있다고. 그럼 당신의 개인 금고도 이곳에 있겠지.”
검무극은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돈은 내가 알아서 찾아가겠소.”
검무극이 검을 뽑았다. 망설이지 않고 단칼에 베려던 바로 그때.
“열겠네! 살려주게!”
검무극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 와중에도 검무극은 놓치지 않았다. 염제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포기를 모르는 독기가 스치고 있었다.
“자네 말이 맞네. 금고는 이곳에 있네.”
염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앞서 열었던 텅 빈 금고로 들어가서 그곳의 천장을 매만졌다. 아무런 장치도 없는 밋밋한 벽이었는데, 그곳에 숨겨진 장치가 있었다.
지이이잉.
금고 내부의 한쪽 벽이 열리며 주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금고는 진짜 금고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이중금고.
첫 금고에 있는 돈과 금덩이들이 진짜 금고를 지키기 위한 기관 장치였고 경계 무인이었다.
이곳에 있는 돈과 금에 현혹되어 이 뒤에 또 다른 금고가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염제가 주판을 튕겼다. 정확한 숫자가 입력되어야 문이 열리는 정교한 기관 장치였다.
“한 숫자라도 잘못 넣어선 안 되지.”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주판에 숫자를 넣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삼, 이, 사.
그리고 마지막 숫자를 올리기 전에 염제가 등을 돌린 채 불쑥 말했다.
“이걸 열어도 날 살려주지 않을 거란 것 안다.”
염제가 검무극을 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이 웃었다.
그가 마지막 주판알을 위로 올렸다.
숫자는 사.
바로 그 순간.
치이이이이익.
두 사람이 서 있던 천장에서 연기가 뿌려졌다. 의도적으로 숫자를 잘못 입력하자 침입자를 대비한 기관에서 독연이 뿌려진 것이다.
독연 속에서 염제가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번호는 사가 아니라 삼이었다.”
그는 더없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독이지. 온몸의 장기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을 거야. 내 돈을 노리는 놈은 지옥 같은 고통을 느끼며 뒈져야지!”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정말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놈도 데려갈 수 있었으니까.
‘같이 죽자, 이 새끼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그는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마지막에 담는 이 세상의 광경은 검무극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모습은 없었다.
‘뭐지?’
검무극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분명 자신과 함께 독연을 뒤집어썼는데. 자신을 가소롭게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애처롭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혼란스러웠다. 정말이지 온몸이 녹아내리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궁금했다. 왜 죽지 않는 거지?
그렇게 숨이 끊어지기 직전 그의 귓가에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숫자가 삼이라고?”
그 말을 들으며 염제는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어차피 함께 죽을 거로 생각해서 번호를 보여주었다. 한데 이러면?
‘내 돈이야! 그건 내 돈이라고!’
온몸의 장기가 녹는 고통보다 자신의 돈을 빼앗긴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다가 그는 숨이 끊어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 그는 돈의 노예로 죽었다.
검무극은 쓰러진 그의 시체를 뒤로 한 채, 주판에 정확한 숫자를 입력했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금고가 열렸다.
금고 안에는 오직 전표만 쌓여 있었다.
전표들은 모두 중원삼대전장에서 발행한 고액전표였다. 언제라도 간단히 챙겨서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다.
검무극은 그것들을 모두 챙겨서 그곳을 나왔다.
염제의 시체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악인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으니까.
참방참방.
자신의 인생에서 그들은 발아래 핏물처럼 흘러가게 두었다.
* * *
금아린은 초조하게 마당을 왔다 갔다 거닐고 있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답답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봐야 할까?”
그녀의 말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임혁이 단호히 대답했다.
“안 됩니다.”
금아린을 지키는 것이 임무인 그가 받아들일 리 없는 말이었다.
“그 사람 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안 됩니다.”
임혁이 잠시 사이를 두고 덧붙였다.
“검 소협은 괜찮을 겁니다.”
그래, 그녀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점만 아니라면 말이다.
“상대가 백선방인데?”
임혁의 마음에 떠오른 대답.
‘네, 상대가 백선방이라도요.’
그럼에도 말하지 않은 건 금아린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괜히 기대했다가…….
바로 그때 바람을 타고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임혁이 훌쩍 몸을 날려 금아린 앞을 막아섰다.
점점 피 냄새가 짙어지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고 내원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당신?”
금아린은 잠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들어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옷과 몸이 온통 핏물에 젖어 있었다.
“다쳤어요?”
그녀의 놀란 물음에 검무극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가슴을 움켜쥐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지막 부탁이 있소. 내가 죽거든 아버지에게 꼭 전해주시오. 이 아들은 한 여인의 부탁을 받고 사지로 돈 받으러 갔다가…….”
“재미없으니까 그만하시죠.”
“표났소?”
물론, 과장된 연기를 했기에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실감 나는 연기를 했더라도, 그녀는 속지 않았을 거 같았다. 이 사람은 죽을 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작은 바위에 기대앉아 바람 부는 평원을 저 맑은 눈빛으로 바라보다 조용히 죽을 것 같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죽는 연기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뒤늦게 안도했다.
“무사히 돌아왔군요.”
“걱정했소?”
금아린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걱정하면서 기다렸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자, 이거 받으시오.”
검무극이 매고 있던 혁낭에서 봉투를 한가득 꺼냈다.
“이게 뭐죠?”
“백선방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돈이오. 가서 돌려주시오.”
봉투에는 상단과 문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금룡세가의 이름이 적힌 봉투도 있었다. 안을 확인해 보니 백오십만 냥짜리 전표가 들어 있었다.
금아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돈을 다 받아왔다고요?”
“약속대로 절반을 뗀 돈이오.”
그녀는 검무극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다.
정말 무사히만 돌아와라, 돈은 안 받아와도 되니까 무사히만 돌아와라, 간절히 빌었는데. 돈까지 다 받아왔다고?
“백선방은 어떻게 되었죠?”
떨리는 그녀의 물음에 충격적인 대답이 나왔다.
“이제 세상에 백선방은 없소.”
경악한 금아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뒤쪽에 서 있던 임혁도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당연히 그랬으니 돈을 받아왔겠지만. 직접 이 말을 듣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혼자서 백선방을 멸문시켰다고? 정말 이게 가능해?
그때 검무극이 봉투 하나를 더 내밀었다.
“이건 내 몫에서 떼서 주는 돈이오.”
액수를 보니 생각지도 못한 거액이었다.
“저는 필요 없어요.”
“당신 쓰라고 주는 돈이 아니오.”
“그럼요?”
“백선방의 횡포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사는 상단이나 주민들이 있을 거요.”
물론, 그런 사람들이야 널리고 널려 있었다.
“당신이 이 돈으로 그들을 도우시오.”
금아린은 깜짝 놀랐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제게 시키는 거죠? 직접 해도 되잖아요?”
그럼 그 선행도 모두 독차지할 수 있을 텐데.
“후계자로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소? 그 약속을 지키는 거요.”
“무슨 뜻이죠?”
“이번에 각 상단의 돈을 찾아준 일로 당신의 명성은 크게 올라갈 거요. 거기에 어려운 사람들까지 돕는다면, 또 한 걸음 더 후계자의 자리에 다가서게 되겠지.”
금아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사자인 저도 이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검무극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당신이 후계자가 될 만하다고 생각하오.”
“네?”
“아직은 그 욕망이 순수해서.”
잠시 검무극을 쳐다보던 금아린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 욕망 곧 더럽혀질 거예요.”
“나와 인연이 계속된다면, 적어도 더럽혀지지는 않을 거요.”
“왜 그렇게 확신하죠?”
“내가 친구들 소개해 줄 거거든. 자리에 비해서 제법 순수한 친구들이 있소. 같이 어울리다 보면 저 사람들도 순수한데 내가? 이런 생각이 들 거요.”
자리에 비해서? 대체 누굴 말하는 걸까?
검무극은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욱 신비로운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비싼 돈 주고 고용했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온종일 생색내도 모자랄 일을 하고 왔음에도 검무극은 금방 그곳을 떠나버렸다.
금아린은 검무극이 주고 간 봉투들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도 그랬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싼 값에 고용한 것은 아닌지.
* * *
탁자 위에 봉투 두 개를 내려놓았다.
“이번 일로 번 돈도 똑같이 나누겠습니다.”
봉투에 든 돈의 액수를 확인한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돈에 놀라신 거다.
“엄청 모아 두었더군요. 원래 더 많았는데, 그간 고통받았던 이들에게 일부는 쓰도록 했습니다.”
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앞서 받은 돈만 해도 충분합니다.”
당연히 휘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했다.
“챙겨두시면 나중에 꼭 쓸 일이 있을 겁니다.”
“아뇨, 저는 필요 없습니다. 교주님께 드리십시오.”
여전히 난감해하는 그를 설득했다.
“나중에 검들 힘도 없을 때를 대비하셔야죠. 여행도 다니시고. 평생 호위만 하셨는데, 그땐 아저씨도 호위 무인을 두시는 겁니다. 정말 비싼 호위로 말이죠.”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임을 휘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까분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휘에게 말했다.
“받게.”
“네, 교주님.”
휘도 봉투를 챙겨 넣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 돈은 후배들을 위해 쓰겠습니다.”
천마전 후배 호위들을 위해 쓰겠다는 말이었다.
“안 됩니다! 아저씨 노후 자금입니다!”
그러자 휘가 옅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소교주께서도 그 돈, 자신에게 쓰실 것 아니잖습니까?”
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번에 벌어들인 돈 역시 은월과 귀영대에 모두 투자하리란 것을.
“저야 아직 젊잖습니까? 노후 준비는…….”
“젊어서부터 하는 겁니다.”
휘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자 기분이 좋았다.
지난 인생은 만년한철처럼 경직되게 사셨으니, 이번 생에서는 부드럽고 즐겁게들 사십시오.
그때 아버지가 내게 불쑥 물었다.
“너는 괜찮으냐?”
내 마음에 훅 들어오는 한마디였다.
아버지는 지난번에도 똑같이 물으셨다.
그렇게 손에 많은 피를 묻혀도, 네 마음이 괜찮냐고.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고 왔어도 내게 풍기는 혈향을 다 지우진 못한 모양이다.
나는 잠시 내 마음이 어떤지, 내 기분이 어떤지를 스스로 살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모르실 거다. 괜찮냐고 묻는 한마디가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리고 이 순간 중요한 건 괜찮다, 안 괜찮다는 대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라도 힘들면 꼭 아버지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의지하고 있다는 이 마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리라.
“이번 일은 아버지만 믿고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온 걸 알게 되면 어쩌려고?”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뭐, 일이 꼬이면 아버지가 풀어주시겠죠. 오면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뒤에서 음모나 꾸미는 저들에게 한 번쯤은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요. 이 무림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걸.”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시고 나온 첫 강호행에서 내가 그들에게 전할 말은 이것이었다.
“자신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서 붙어보라지요.”
나의 자신감은 적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에게 드리는 말씀이었다.
이만큼 아버지를 믿고 있다고.
이게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에 힘이 될 지 나는 모른다.
자식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 생에 자식에게 이런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을까?
“아버지 믿고 저는 제 마음껏 편하게 일 처리 할 겁니다.”
이것이 이번 섬서 작전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가서 뒷정리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휘의 표정이 밝았다.
뒷정리하라는 말은 백선방에 남은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라는 의미였다.
그들이 백선방을 비우고 떠나버린 것으로 처리하라는 명령.
휘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안전한 귀교였다. 조용히,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그가 바라는 바일 테니, 이 명령은 그가 먼저 나서서 요청하고 싶은 것이었으리라.
이 농담을 하고 싶었다.
‘아니,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우고 싶으신 분이 왜 이렇게 조심하십니까!’
입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무림일통과 관련된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을 테니까.
대신 이번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번 일의 결과가 배후를 끌어낼 겁니다. 놈들이 곧 움직이겠죠. 금룡세가라는 자금줄을 포기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나나 아버지를 공격할 수도 있고, 생각지 못한 수를 쓸 수도 있다.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신중히 움직여라.”
“네!”
이 무림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분이신데.
“혹시 이렇게 신중하신 거, 저 때문입니까? 아들이 걱정돼서.”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입가에 지어지는 그 비웃음을.
요즘 함께 출교한 후 분위기가 좋다 보니 자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저 비웃음을 보면 이렇게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너무 하십니다! 아들 걱정도 좀 해주시라고요!”
아버지는 말없이 창가로 걸어가서 바깥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등과 그 위로 펼쳐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풍경이지만, 두 외로움은 닮아 있었다.
‘저를 위해서라는 것 잘 압니다.’
아버지가 누군가를 의식해서 뒷정리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럴 상황이면 검을 뽑지도 않을 분이셨으니까.
그러니 조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 *
금천방은 백오십만 냥 전표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건 그냥 돈이 아니다. 모두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정말 그가 백선방에서 이 돈을 받아온 거냐?”
놀란 아버지의 물음에 금아린은 담담히 되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버지도 성공할 거라고 예상하셨으니까 맡기신 거잖아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했다. 자신은 몇 배는 더 놀랐으니까.
“백선방은?”
설마 하는 눈빛을 향해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어요.”
금천방은 믿을 수 없었다. 딸의 말처럼 해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이 있었기에 일을 맡겼다. 성공했을 때 얻어지는 이득 역시 너무 컸기에 안 맡길 수 없었다.
한데 정말 그들을 멸문시키고 돈을 받아왔다고?
“그럴 리가 없다.”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그자는? 왜 그자는 오지 않은 거냐?”
그자를 보고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제 수하에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제 일이고요. 묻고 싶은 건 제게 말씀하세요.”
금아린은 일부러 혼자 왔다. 이제부터 후계자를 놓고 아버지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으니까.
“백선방은 확인해 보았느냐?”
순간 금아린은 흠칫했다.
“안 했구나.”
“저는 제 수하를 믿어요.”
그래서가 아니다. 확인해 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검무극을 믿어서?
아니다.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일의 결과에 놀라서, 이 일을 해낸 검무극이란 사람에게 신경이 팔려서, 백선방에 사람을 보내 어떻게 되었나 확인하는 것을 놓친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했으니, 다 죽였나보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다. 만약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만약 이 모든 일이 백선방과 검연이 짜고 저지른 일이라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확인하지 않은 건 분명 실수였다.
‘앞으론 이래선 안 돼.’
이렇게 제대로 반성하는 이유는 검무극이란 사람에게 자신이 현혹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내내 그의 생각만 했었으니까.
“드릴 말씀이 또 있어요.”
금아린은 검무극이 맡긴 일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백선방에 돈을 뜯긴 상단에게 돈을 받아주고 반을 챙겨갔다는 사실을. 이미 어제, 오늘 모든 상단을 돌면서 돈을 돌려주었다.
금천방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반응에서 아버지가 그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돈을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 상단주 중에는 아버지에게 따로 확인한 사람들도 있었을 테니까.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결과가 나오면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제가 뒤집어쓸 작정이었죠.”
비장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말릴까 봐 말하지 않았다. 이번 일에 성공하면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까. 성과를 낸 다음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각 상단에 돈을 다 돌려준 후, 아버지에게 마지막에 온 것이고.
이곳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개선장군처럼 왔었는데.
‘잘했다, 우리 딸’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추궁을 받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번 일로 백선방에게 당한 많은 상단과 문파들이 본가에 큰 호의를 가지게 될 거예요. 그 점을 잘 활용하시면 막대한 이익을 볼 거예요. 제가 헛돈 쓴 건 아니죠?”
여전히 아버지의 반응은 냉담했다.
“제가 뭘 실수했나요?”
미리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화가 나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후계자가 되고 싶으냐?”
금천방은 왜 그녀가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
“네,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후계자는 포기해라.”
아버지가 직접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요?”
금천방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아버지!”
금천방이 차갑게 딸을 쳐다보았다. 원래 이렇게 화를 내면 무서웠기에 조용히 물러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것에 화나신 건가요? 아니면 후계자를 욕심내는 것에 화내시는 건가요?”
금천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저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으신 건가요?”
그녀가 목청을 높였지만, 금천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긍정의 침묵으로 들렸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밀려드는 섭섭함.
‘딸이라서? 아니면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오라버니를 더 좋아해서?’
섭섭함 때문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저는 꼭 후계자가 될 거예요.”
선전포고하듯 말하고는 방을 나섰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금천방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가 봤다면 분명 이러는 이유가 있구나, 라고 생각할 그런 눈빛이었다.
아버지의 거처에서 나온 금아린은 잠시 마당 가운데 서서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너무 섭섭하고 화가 났다.
그때, 한 사람이 생각났다. 왜 이럴 때 그가 생각나는지 몰라도, 그의 거처를 향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 * *
금아린이 찾아왔을 때 검무극은 방에 있었다.
“잠시 시간 괜찮나요?”
“물론이오. 수장이 부르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요.”
검무극의 무복은 땀이 흠뻑 젖은 상태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오겠소.”
금아린은 내심 의아했다.
‘방에서 뭘 했기에 저렇게 땀을 흘렸지?’
그러다 흠칫 놀랐다.
‘설마?’
마당에 서 있던 그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복도를 걸어 검무극의 방에 도착했다. 창틈 사이로 안을 쳐다보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가 깨끗이 정리된 빈 침상에 괜한 안도감이 드는 그녀였다.
돌아서려던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언제 왔는지 뒤에 누가 서 있었다.
바로 검우진이었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한 그녀였다.
“아, 제가 훔쳐본 게 아니라 검 소협을 만나러 왔는데요. 아 그 사람은 지금 씻으러 갔고.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그녀는 횡설수설했다.
“들어가서 기다리게.”
“아뇨, 저는 밖에서 기다려도 됩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당으로 나온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검우진과 왜 이렇게 대하기가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방을 훔쳐본 걸 들켰는데.
잠시 후, 검무극이 돌아왔다.
깨끗한 무복을 입고 있는 검무극의 모습 위로 피 묻은 옷을 입고 돌아온 그때 모습이 겹쳤다.
‘어떤 게 당신 진짜 모습이죠?’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면서, 마음이 혼란스럽고 화가 나니까 검무극을 찾아오게 된다.
“땀을 많이 흘리셨던데?”
“무공수련을 좀 했소.”
“방에서요?”
“오히려 좁은 곳에서 하는 수련이 더 힘들고 심력 소모가 큰 법이오. 다음에 소저도 해보시오.”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방에서 시공이환술을 펼친 후 시천비술까지 써서 수련하던 중이었다.
자투리 시간도 아꼈다. 검무극에게는 자투리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기분이 울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알아봐 주는 검무극이 고마웠다. 어떻게 말을 꺼내나 고민하지 않고 이렇게 쉽게 찾아온 용건을 말할 수 있게 해줘서.
“우린 헛수고했어요. 아버지는 저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검무극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놀라죠? 설마 당신도 나는 후계자가 안 될 거로 생각하고 있었나요?”
쏘아붙이듯 말하고 나서 금아린은 아차 했다. 괜한 자격지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반면 검무극은 담담했다.
“쉽게 될 일이었다면 당신이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나를 고용했겠소?”
금아린은 검무극의 대답을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맞는 말이다. 애초에 쉬운 일도 아니었는데. 마치 벌써부터 후계자가 된 듯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은 꼭 치열한 후계자 싸움을 해본 사람 같아요. 해본 적도 없으면서.”
검무극이 웃었다. 형과의 싸움이 어땠는지 안다면, 아직 그녀의 싸움은 약속 비무 축에도 못 든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당신이 후계자가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시든가요?”
금아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밀조직을 맡긴 걸 보면 분명 그녀를 믿는 마음이 있는데. 그런데 후계자는 안 된다?
검무극은 어쩌면 그 이유가 배후들과 관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아린을 만나고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벌어들였던 돈이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알지 못했다. 둘째인 금아종 역시 후계 싸움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거 같아 보였고.
그렇다면 배후는 금룡세가의 가주나 첫째인 금아혁 주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너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그때 그곳으로 새로운 방문자가 있었다.
둘째인 금아종이었다.
“오라버니가 여긴 웬일이야?”
그가 검무극의 거처를 찾아오자 금아린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네가 모르는 사내들만의 약속이 있지.”
금아종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술 한잔하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겠지요?”
금아종은 어떻게든 이 사기꾼을 형에게 소개해 줄 생각뿐이었다. 동생을 망치고 형까지 망친다면, 널 업고 섬서를 한 바퀴 돌아주마.
한데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하기에 앞서 한 가지 풀어야 할 의문이 있었다. 오늘 그 의문을 풀러 작정하고 왔다.
“오늘 어떠시오? 한잔합시다.”
“좋소. 가십시다.”
검무극은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도 같이 가.”
검무극을 오라버니와 단둘이 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꼼수를 쓸지 모를 오라버니였으니까.
하지만 금아종은 그녀를 끼워주지 않았다.
“사전에 약속된 자리다.”
그녀가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지만 검무극은 모른 척했다. 금아종과 둘이 있는 게 그를 다루기가 더 쉬웠으니까.
* * *
둘만의 술자리가 벌어졌다.
두 사람 모두 목적이 뚜렷했으니 술자리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검무극은 금아종이 자신을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의 수하인 이추가 마차를 살피러 왔다가 자신에게 들켰다. 그를 역으로 이용해서 금아종이 자신을 사기꾼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때 이추는 금아종에게 이렇게 전했다. 세가로 가서 크게 한탕 하자는 말을 엿들었다고.
그러니 완전히 사기꾼으로 여기는 것이다.
반대로 이추는 그의 속셈을 검무극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대공자를 소개해줘서 망치게 할 작정입니다.
금아종이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혹 내게 묵은 감정이 있으면 잊으시오.”
금아종의 걱정에 검무극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했다.
“묵은 감정이 있으면 새 감정을 쌓아서 묻어버립시다.”
“멋진 말씀이시오!”
“자, 마십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신나게 술을 마셔댔다.
검무극은 주량을 자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셨다. 상대가 술에 취하게 해서 뭔가를 알아내려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 장단에 맞춰준 것이다.
그렇게 마셔대다 검무극이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자, 금아종이 넌지시 물었다.
“그때 돈벌레들은 어떻게 하신 거요?”
바로 풀어야 할 의문이 이것이었다.
그 사나운 자들이 그렇게 공손해져서 청소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돈벌레들을 통해 알아볼 수도 없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서 그 말을 꺼내면 칼부림을 낼 수 있는 자들이었다. 아버지가 물어보면 모를까, 자신에게 순순히 말해줄 자들이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나 실력이 좋은 사기꾼들인지, 아니면 다른 속임수를 쓴 건지.
금아종은 어떻게든 그 사실을 알아내려 했다. 요리를 해도 재료는 알고 해야 할 테니.
“그게 궁금하시오?”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소? 다 지난 일인데, 말해주셔도 되지 않소?”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채로 검무극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이거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소?”
만약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형에게 한탕하고도 떠나지 않는다면? 세가를 통 채로 집어삼키려 든다면? 정말 그런 실력까지 있는 사기꾼들이라면?
바로 그때였다. 이추의 전음이 들려왔다. 검무극이 자리를 비운 지금, 그의 거처를 뒤지러 갔던 그였다.
―놈의 거처에서 빈 약병들을 찾아냈습니다. 거기에 남은 약을 확인했는데, 제가 아는 약이었습니다.
―무슨 약인데?
―혹시 흑비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금아종은 들어본 적이 있다. 사도맹에서 만든 기가 막힌 산공독이 있는데, 그 이름이 흑비라고.
그렇다, 내공이 모두 사라졌으니 돈벌레들이 꼼짝도 못 한 것이리라.
이제 비밀은 밝혀졌다!
일은 술술 풀렸다. 마치 운명이 자신을 후계자로 밀어주는 것처럼, 검무극이 넌지시 물어온 것이다.
“대공자는 어떤 분이시오?”
마음 편히 다음 계획을 진행할 생각에 금아종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요 귀여운 사기꾼 놈아!’
이추는 검무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이제 흑비의 해약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물을 거요. 구할 수 있다고 대답하시오.
―알겠습니다.
정말 검무극의 예상대로 금아종이 전음을 보냈다.
―그 산공독 해약, 구할 수 있나?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최대한 빨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알겠습니다.
―뭐해? 빨리 안 가고!
그곳을 떠나려던 이추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술을 마시는 그 모습은 마치 마차 벽에 그려진 악귀의 손바닥 위에서 금아종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금아종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평소 자신을 함부로 대해서가 아니다.
‘그나 나나.’
어쩌면 자신도 함께 춤을 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 커서 지금 손바닥 위인지도 모를 거대한 악귀의 손바닥에서 말이다.
“우리 형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소?”
금아종이 검무극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돈벌레가 당한 비밀을 알아내자 이제 검무극이 만만하게 느껴졌다.
산공독은 일정 시간 내공을 못 쓰게 하는 독이지, 즉시 상대를 살상하는 독이 아니다. 해약만 미리 준비하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기꾼다운 독이다.
“우리 형님은 훌륭하신 분이오. 똑똑하고 성실하고 잘 생겼고. 본가를 이어받으실 분이시지.”
검무극은 느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유독 잘 생겼다는 말을 할 때 살짝 그의 감정이 묻어나는 것을. 형과 비교해서 외모에 자격지심이라도 있는 걸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어떤 분인지 한번 뵙고 싶소. 소개해 주실 수 있소?”
금아종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목표는 형이었구나!’
놈들이 세가에 와서 크게 한탕하려는 대상이 형인 거다.
‘이놈들에게 형이 당하면?’
자신은 동생과 형의 돈을 갈취한 사기꾼 놈들을 마지막 순간에 붙잡는 거다.
사기꾼들을 붙잡는 게 아니라 후계자 자리를 붙잡는 것이 되겠지.
소개해 달란 말에 금아종이 슬쩍 한발 물러났다.
“굳이 내 소개가 필요하겠소? 보고 싶으면 가서 만나면 되지. 이제 한 식구가 되셨는데.”
그러자 검무극이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내가 만나러 간다고 반겨주겠소?”
“하긴, 형 성격상 그대를 좋아하지 않을 거요. 본가의 돈을 이백만 냥이나 갈취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아, 오해는 마시오. 내 생각이 아니니까.”
이제 슬슬 금아종은 본색을 드러냈다.
“형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당신이라면 동생이 아니라 형을 도왔을 거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소?”
“무릇 사내대장부라면 큰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동생은 어차피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없소.”
검무극이 금아종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은 후계자가 될 자신이 없소? 야망이 크신 분 같은데?”
역시 사기꾼 놈이 되어서 눈치가 빠르구나.
“나야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요. 형에게 치이고, 동생에게 치이고. 현실이 녹록지 않소.”
“야망이 크면 그 날개도 큰 법 아니겠소?”
검무극은 마치 그의 등 뒤에 커다란 날개가 보인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금아종이 웃었다. 별것 아닌 반응이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 야망이 커 보인다는데, 나쁠 거 있나?
“그냥 둬도 후계자가 될 사람을 도와서 후계자로 만든다고 무슨 보람이 있겠소? 아예 후계자가 안 될 사람 옆에 있어도 문제고. 당신을 진작 만났으면 좋았겠소.”
금아종은 검무극의 아쉬움에 솔깃했다. 그래서 차라리 이놈에게 다 밝히고 아예 손을 잡고 일을 꾸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과 함께라면 왠지 잘 해낼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내 금아종은 흠칫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과연, 사기꾼은 사기꾼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놈과 손을 잡아볼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얼굴도 목소리도, 표정도 타고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놈 말을 듣고 있으면 자꾸 마음이 풀어진다.
“내일 같이 가봅시다. 내가 형을 소개해 주겠소.”
“고맙소.”
“내 특별히 한 가지 알려드리지.”
기분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놈이 형을 제대로 끌어들이려면 형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테니까.
“형이 절대 못 참는 게 있소.”
“그게 뭐요?”
금아종이 마지막 술을 비우며 말했다.
“돈으로 지는 거요.”
* * *
같은 시각, 금룡세가의 가주전에서 기다렸던 보고가 올라가고 있었다.
“백선방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금천방은 놀라 물었다.
“시체 한 구도 없었단 말인가?”
“네. 단 한 구도 없었습니다.”
“싸운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오직 시체들만 모두 치워져서 어떻게 싸웠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수하를 보낼 때만 해도 돌아온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선방이 자작극을 벌였을 가능성은?”
시체가 모두 사라졌다는 말에 드는 의혹이었다. 그들이 모두 당한 척하고 사라져 버렸다면?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죽었을 수도 있고, 싸운 척 흔적을 남기고 떠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에 금천방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보고 수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들이 모두 당한 것이 맞다면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치울 시간이 많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한 걸 보면, 뒷정리를 맡은 자는 무공실력이 상당하거나 아니면 이런 일에 전문가라 생각됩니다.”
수하의 보고는 여기까지였다.
“물러가도록.”
“네.”
금천방은 이번 일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백선방의 자작극인가? 아니면 은하상단 짓인가?”
여전히 검무극이 해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바로 그때였다.
“둘 다 아닙니다.”
그곳으로 들어선 사람은 장남인 금아혁이었다.
그는 명문의 대공자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대의대협한 기도를 풍기는 외모.
둘째인 금아종이 교활하고 이기적인 성정을 얼굴이나 행동에서 드러내는 유형이라면, 이 금아혁은 대협의 풍모 뒤로 철저히 자신을 숨기는 인물이었다.
“모두 물러나게.”
금천방은 은신해 있던 수하들까지 모두 물렸다.
이제 가주전에는 그들 두 사람만 남았다.
“둘 다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검연이란 자가 백선방의 신선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금아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금천방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 사람에게 들은 거냐?”
아들의 표정에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되도록 그와 접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직접 하겠다고.”
그러자 금아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분을 싫어하시는 겁니까?”
이런 분위기에서도 ‘그’가 아니라 ‘그분’이라 칭하는 모습에 금천방은 아들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자연 목청이 높아졌다.
“위험한 자니까!”
처음부터 그가 이런 위험한 느낌을 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점잖고 차분했다. 기꺼이 손을 잡아도 될 믿음을 오랜 시간 변함없이 주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는 자신의 가문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옷이 흠뻑 젖고 나서 알았다. 비가 아니라 피였음을.
“감수해야지요! 정사마 그 어느 곳보다 우리에게 큰 이득을 안겨준 분입니다. 장사꾼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까?”
평생 상인으로 살아온 금천방이었다. 어지간한 세상사, 어지간한 인간사 대충 보면 감이 오고, 대충 보면 값이 매겨지고, 대충 보면 알 것 같은 경험을 쌓았고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런 그가 요즘 들어 알 수 없는 두 가지 있다. 아니, 두 사람이 있다.
아들과 그 사람이다. 아들도 모르겠고, 아들이 ‘그분’이라 하는 그도 잘 모르겠다. 처음 볼 때는 철저히 그를 분석하고 알아봤는데,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오히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아들의 마음처럼 말이다.
“위험하기로 따지면 린이가 데려온 서도파 놈들이 더 위험합니다. 놈들은 그분을 노리고 온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
금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또 그가 말한 거구나.”
금아혁은 빤히 금천방을 쳐다보았다. 언젠가부터 아들이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이렇게나 낯선 눈빛으로.
금천방은 어려서부터 장남이 항상 자랑스러웠다. 왜소하고 볼품없는 자신에게 이런 아들이 어찌 나왔을까? 이런 뿌듯함이 매번 들었다.
아들을 데리고 나가면 다들 칭찬했고 부러워했다. 그래서 은근히 자랑도 많이 했다. 둘째 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로.
그리고 이렇게 믿고 살았다.
아들의 성정도 이 대협의 풍모를 지닌 외모와 같을 거라고.
정말 그렇게 믿고 살았다. 실제로도 아들은 큰 탈 없이 잘 자라줬으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달라졌다. 차라리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면 좋겠지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 전부터 아들에게 낯선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렇게 냉정하다고?
이렇게 저만 생각한다고?
이렇게 돈 욕심을 낸다고?
이랬기에 그가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럼에도 아들을 믿는다.
조금 전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믿었다. 아들이니까.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겠지.
“아버지, 중원제일의 거부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아버지의 꿈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랬다. 한데…….”
“뭐가 두려우신 겁니까? 우린 그 꿈을 이뤄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와 손을 잡은 덕분에 금룡세가가 더 빨리 성장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의 도움으로 막대한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가 요구하는 돈 역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언젠가 그는 우릴 통째로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집어삼켜도 우릴 최고로 만들어놓고 삼킬 겁니다.”
아들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무서우면 비키십시오.
저 눈빛 때문이었다. 딸에게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건.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동생도 치워버릴 저 눈빛 때문에.
“동생이 데려온 서도파 놈들은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모두 사라질 겁니다. 백선방이 사라졌듯이요.”
“안 된다!”
금천방의 심장이 뛰었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이쪽도 보복을 당해 죽을 수 있는 일인데. 어찌 이렇게 쉽게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이놈아, 우린 상인이다!
“네 말대로 백선방을 없앤 자들이라면,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될 자들이다!”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금아혁은 여유 있게 웃으며 덧붙였다.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고.”
금천방의 말문이 막힌 건, 정말 저 말을 자신이 자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 *
금아종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아버지와 휘는 안가에서 이곳 금룡세가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안가에서 나누었던 대화처럼 백선방을 처리한 것이 원인이 되어 조만간 저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리라 판단했다. 금룡세가라는 막대한 돈줄을 어떻게든 지키려 들 테니까.
잠시 아버지 방 앞에서 망설였다.
알딸딸한 취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생각해 보니 벌써 주무실 시간이었다.
아버지, 둘째 아들입니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주사라도 부리고 싶은 날이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무림인들은 절대 모를 겁니다. 천마가 이렇게 일찍 주무실 줄은요. 모름지기 천마면 막 새벽에도 깨어 있고, 그런 느낌 아니냐고요!’
조용히 발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서던 그때, 문이 열렸다.
놀라 돌아서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직 안 주무셨냐는 물음보다, 깨워서 죄송하다는 사죄보다, 이 말이 먼저 나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꽃무늬군요? 대체 몇 벌이나 가지고 계신 겁니까?”
아버지는 꽃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다.
설마 천마가 이런 잠옷을 입겠어? 그 최고의 살수 방지용 잠옷 말이다.
야영할 때는 입지 않으셔서 몰랐고, 객잔에서 묵을 때는 밤에 뵙지 않아서 몰랐고.
왠지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하실 법도 했는데, 아버지는 이 잠옷만큼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정말 이 잠옷, 무림맹주나 사도맹주 앞에서도 당당히 입으실 수 있을까?
“무슨 일이냐?”
무뚝뚝한 물음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 그냥 술기운에 불쑥 보고 싶어서 찾아왔던 거였다.
“그냥 잘 주무시라고 인사드리려고요.”
“자는 사람 깨워서 잘 자라고?”
어이없어하는 아버지에게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것뿐이다.
“고맙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아버지가 참아주고 계시다는 거다. 본단에만 계시다가 정말 오랜만에 하는 이 여행이 어찌 즐겁기만 하겠는가?
더구나 나는 아버지와 못 했던 것을 다해보려고 마음대로 굴고 있으니. 당장 이 밤에 아버지를 깨운 것도 아버지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일 테고.
고개 숙인 내 뒤통수라도 한 대 내리치실까 싶었는데.
잠시 나를 내려다보시던 아버지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비록 아버지를 깨우긴 했지만, 얼굴을 봬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잠깐의 마주침이었지만 내겐 이조차도 추억이 될 테니까. 제목은 한밤의 작은 주사쯤 되겠다.
내 인생에서의 진정한 승리는 적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바로 이런 순간일 테니까.
‘아버지가 귀찮으시더라도 이런 작은 추억이라도 자꾸 만들 겁니다.’
화무기가 코앞에서 검을 뽑아도, 아버지에게 너스레를 떨 겁니다. 내 마존들과도, 내 수하들과도 추억을 쌓아나갈 겁니다.
그래서 지독한 외로움에 홀로 잠들며 오직 이 순간만을 고대했던 내 지난날을 위로할 겁니다. 언제나 다짐하는 마음이지만.
‘아버지를 위해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요.’
그래야만 진정 상대를 위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기에.
아버지 방 앞 복도 창 앞에서 서서 캄캄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도 달도 모두 구름에 가린 밤이었다.
그러다 내 시선은 유성처럼 떨어져 어둠이 내려앉은 마당을 노려보았다.
나는 천천히 입술 위로 검지를 포개며 나직이 말했다.
“쉿! 아버지 주무신다.”
침입한 자들은 살수들이었다.
회귀 전 많은 살수를 상대해 봤기에, 그들 특유의 기도를 알고 있다.
감정이 깃들지 않은 살기.
상대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 때문에 죽이는 게 아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살수가 되면 감정을 배제하는 수련부터 하기에 그런 것일까?
그들의 살기는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내가 알아차렸다면 당연히 휘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니, 침입자를 발견하는 일이었으니 나보다 더 빨리 알아차렸으리라.
내가 나섰으니 그는 아버지의 거처 주위에서 은신한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알아차리고 휘가 알아차렸으면 당연히 아버지도 침입자의 존재를 알고 계실 거다.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자연스럽게 위기를 알렸을 테니까.
그냥 저 믿고 다시 주무십시오. 그 잠옷에 피가 튀는 건 어울리지 않잖아요?
조용히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렇게 마당에 서서 어둠 속을 응시하며 다시 쉿하는 시늉을 하며 속삭였다.
“아버지 주무시니까 조용히 싸우자.”
하지만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듯, 아무도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위에 들리는 건 풀벌레 소리뿐이었다.
아버지가 깨어계셨다면 틀림없이 이 말씀을 하셨겠지.
네가 제일 시끄럽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정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누군가 미세한 기척을 드러냈다.
실수가 아니다.
내가 그들이 숨어든 것을 알아차리자 위치를 드러내면서 스스로 미끼가 된 것이다.
주위 다른 살수들은 숨조차 쉬지 않은 채 내가 그를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살수들의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다.
살수들은 모두가 죽더라도 단 한 명만 성공하면 된다는 교육을 받는다. 따라서 이들은 여러 명이지만 동시에 단 한 명의 살수이기도 하다.
상대가 미끼를 던졌으니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 물어줘야지.
기척을 드러낸 살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빠르게 날아갔지만 바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소리가 사라진 세상에서의 움직임처럼, 내 경공은 부드러웠으며 고요했다.
상대는 피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면에 흑의, 그리고 검은 신발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게 위장한 그였다.
은신이 들킨 살수는 생명을 다한 살수라는 말은, 이 살수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그는 미끼이지만 미끼가 아니었다.
움직임이 더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어지간한 고수는 정면 대결로도 죽일 수 있을 실력. 이 실력으로 살수를 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대로 무공을 익힌 자였다.
아마 그래서 이자가 대표로 기척을 드러낸 모양이다. 싸우는 중에 다른 살수들이 기회를 엿보려면 정면 대결에서 버틸 수 있어야 했으니까.
물론, 나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나는 단 일격에 승부를 보았다.
얼굴을 노리고 검이 날아들던 그 순간, 내 신형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암영보를 발휘한 나는 그의 등 뒤에 있었다.
검이 등 뒤를 뚫고 튀어나왔음에도 그는 비명을 애써 참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자였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말 잘 훈련된 살수들임을.
‘이들에게 청부를 맡기느라 큰돈을 썼겠군.’
첫 번째 살수가 너무 빨리 죽자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기습을 가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다음 기회를 노리겠지?
내가 이 한 명만 침입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하는 그 순간을.
누군지 살피기 위해 시체의 품이라도 뒤졌다간, 치명적인 공격이 쏟아질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시체가 되어 쓰러지는 살수를 소리 나지 않게 몸을 잡고 조용히 눕혔다.
그러면서 정면의 어둠을 바라보며 쉿하는 시늉을 했다.
아무 곳에나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내 몸에서 뻗어나간 거미줄 같은 기운이 장내를 장악하고 있었다.
지금의 쉿은 그 거미줄의 떨림이 가장 심한 곳을 향해서였다.
자신의 위치가 들켰음을 알아차린 살수는 곧장 튀어나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수비를 도외시한 채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일격필살의 공격이었다.
쉬이이익.
날아든 검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검에 비친 내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쉬익! 서걱!
흑마검이 한줄기 곧은 검선을 만들어내며 그의 가슴을 베었다. 상대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이미 심장과 함께 가슴의 삼분지 이가 잘려 나갔다.
워낙 빠르고 예리하게 상대를 베었기에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나는 다시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내 검이 나무를 관통했다. 마치 두부에 박히듯 부드럽게. 하지만 그 어떤 쾌검보다 빠르게.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살수의 몸이 꿰뚫렸지만, 이번에도 비명은 없었다.
오히려 상대는 죽어가면서도 검날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죽어가는 그가 어찌 내 흑마검을 잡을 수 있겠는가?
난 검을 뽑으며 나무를 타고 솟구쳐 올랐다. 검을 붙잡은 살수의 손가락이 잘리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둠 속에서 검광이 번쩍였다.
푹! 푹!
나무에는 애초에 세 명의 살수가 붙어 있었다. 설마 하나의 나무에 셋이 붙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것을 노린 허허실실이지만,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내 기운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무에 줄줄이 매미처럼 붙어 있던 두 명의 살수가 떨어져 처음 시체에 겹쳤을 때, 나는 이미 십여 걸음 떨어진 담 앞에 내려서고 있었다.
역시나, 흑마검이 담벼락에 부드럽게 박혔다.
촤아아아아아악!
검을 박아 넣은 채 담을 따라 쭉 미끄러졌다.
마치 빙판을 미끄러지듯, 내 신형이 담을 따라 빠르게 미끄러졌다.
동시에 흑마검이 담을 가로로 쭉 찢었다.
담장 뒤에 기댄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살수들의 몸이 양단되며 쓰러졌다.
살수들의 놀람과 당황이 느껴졌다.
몸을 숨기는 실력으로 볼 때 지금껏 수많은 이를 죽이며 실력을 인정받았던 살수들이었을 거다. 나갔다 하면 실패 없이 청부 대상을 죽이고 돌아왔을 테지.
하지만 오늘 그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지고 있었다.
‘배신자가 있다!’
자신들의 위치가 정확하게 발각되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속전속결로 그들을 해치웠다.
나를, 그리고 아버지와 휘를 죽일 목적으로 온 자들이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지붕에 올라섰을 때 암기들이 날아왔다.
쉭! 쉭! 쉭! 쉭!
암기들 사이를 지나며 달렸다. 지붕 위를 달리는데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붕 끝에서 끝에 도달했고, 암기를 던졌던 살수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쿵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체가 바닥에 부딪치기 직전 내가 허공섭물로 소리가 나지 않게 한 것이다.
계속해서 은신한 자신들을 찾아내자 살수들은 더는 버터지 못했다. 그들이 먼저 공격을 해왔다.
나무 위와 왼쪽 어둠 속에서, 동시에 두 살수가 공격을 가해왔다.
이번에는 명왕보를 발휘했다. 목표는 쇄도해 오는 왼쪽 살수.
수많은 이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살수는, 그에게 죽었던 수많은 이가 그랬듯, 자신도 이 죽음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그가 목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질 때,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린 살수는 암기를 날리고 있었다.
피이잉! 푸욱!
암기와 비수가 허공을 스쳤다. 암기는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내가 날린 비수는 흑의 속으로 사라졌다.
석등 뒤에서 모습을 보인 살수의 손에 암기가 들려 있었다. 비수처럼 던지는 암기가 아니었다. 둥근 원통에서 강력한 힘으로 독침을 발출하는 암기였다.
점멸보로 그에게 쇄도했다.
서걱! 서걱!
그가 암기를 발출하기 전에 손목과 목이 연이어 잘려 나갔다.
“우리 조용히 싸우기로 했잖아?”
암기가 발출되면 폭발음이 들렸을 거다.
원래 이 정도 실력을 지닌 살수들은 이렇게 큰 소리가 나는 암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의미였다.
살수 하나가 그물을 펼치며 나를 덮쳐왔다.
살수들이 쓰는 철강망(鐵鋼網)이었다. 그물처럼 촘촘한 이 철망은 도검으로는 물론이고 검기로도 쉽게 잘리지 않는 특별한 그물이었다. 어딘가 고정해 두고 검기로 자르면 잘리겠지만, 이렇게 실전 중에 뒤집어쓰면 순간 당황해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 순간, 어둠을 가르며 머리 위로 또 다른 살수가 날아서 지나갔다.
촤아아아아악!
그가 뿌린 것은 화골산(化骨酸)이었다. 그물로 가두고 녹여 버리려는 악독한 한 수였다. 얼마나 합이 잘 맞았는지 두 살수의 움직임은 한 사람의 움직임 같았다.
두 번의 칼질에 그물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화골산이 쏟아졌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아아악!
그물을 던진 살수의 목을 긋는 순간, 머리 위를 지나간 살수는 저 멀리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목에는 이미 내가 던진 비수가 박혀 있었다. 물론 그 역시 내 허공섭물로 조용히 떨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애액!
바닥에서 튀어 오른 검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신해 있던 살수의 회심의 한 수였다.
땅굴을 파고들어 와 정확히 이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로 이 살수.
이 위력적인 한 수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살수 중에서 그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이 공격이 오늘 암습의 핵심이었음을.
하지만 그건 그들 사정이고.
내게 있어 그는 나를 죽이려다 실패한 살수고, 아마도 가장 사람을 많이 죽였을 살수일 뿐이다.
이미 내 검은 그의 어깨에서 그 아래로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는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조용한 이 싸움의 마지막을 망치겠다는 심산이었는지, 어깨에서 내부까지 찔린 이 고통을 정말 참을 수 없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왼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은 후 검을 뽑았다.
검이 뽑혀 나오자 그는 피를 뿜어내며 절명했다. 몸의 절반은 아직 바닥의 구덩이에 있었다.
기를 발출해 주위를 살폈다. 이제 이곳 마당에 살아 있거나 숨어 있는 살수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건물로 들어갔다.
* * *
살수가 천장을 기었다.
목표가 있는 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지금 기어가는 천장 아래에서도 검에 베이고 살이 찢기는 소리가 났다. 보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함께 온 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음을.
그는 오늘의 청부의 성패가 자신에게 달렸음을 직감했다.
‘오히려 잘 됐다.’
나눠야 할 그 큰돈을 전부 자신이 차지하게 될 거다.
‘내가 죽인다.’
그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였다.
살수로서의 진짜 실력은 기척 없이 숨어드는 것이고, 들키지 않고 몇 시진이라도 버티는 것이고, 적을 제거할 확실한 순간이 언제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오늘 온 살수 중에 가장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대상의 머리 위까지만 가면 성공이었다.
자다가 천장에서 소리 없이 쏘는 독침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더구나 그냥 독침이 아니었다. 털처럼 가느다란 이 독침은 찔렸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는 그런 특별한 암기였다.
나중에 검시해도 어디에 맞아서 독살당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얇은 침이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장에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래에서 누군가 구멍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검이 뚫고 올라오며 살수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를 죽인 사람은 휘였다.
검에 뚫린 천장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여긴 비가 주룩주룩 내리네요”
안으로 들어선 검무극이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바라보았다.
복도에도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집안 내부는 물론이고 뒤쪽에서 접근하던 살수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아저씨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아마 내가 없었어도 휘 혼자서 오늘의 침입을 다 막아냈으리라 확신한다.
살수와 호위무인.
그 천적 관계에서 휘는 살수들에게 천적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이었다.
무인은 나를 죽일 수 있지만, 살수는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한다.
휘에게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버지 깨셨네요. 들어가시죠.”
검무극과 휘가 방으로 들어갔다.
검우진은 침상에서 일어나 탁자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서 식은 차를 부어 마시고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검무극의 말에 검우진은 고개를 돌려 아들을 쳐다보았다.
“네 말소리밖에 안 들렸다.”
검무극이 웃었다. 이 말 듣고 싶어서 그랬던 겁니다.
“말을 참고 또 참은 게 그 정도입니다.”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휘가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침입자들은 살수들입니다.”
아버지의 입에 지어졌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독왕도 싫어하고 섭혼마존도 싫어하는 아버지였는데, 어찌 살수라고 좋아하겠는가?
검무극이 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나온 자들인지 혹시 알아보셨습니까?”
천마의 호위책임자인 휘는 무림의 살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명하면 할수록 더욱 잘 알았다.
과연 휘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공격방식으로 볼 때 이자들은 명부(冥府)의 살수들입니다.”
무림삼대살수 조직의 하나로 악명과 공포의 상징인 곳이었다.
검무극은 명부란 말을 듣는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있다.
살인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최고살수.
명부의 수장이었던 아버지를 죽이고 명부를 차지한 비정살수.
훗날 살수계를 통일하며 모든 살수의 왕이 된 남자.
염라의 목도 베어올 수 있을 거라 알려진 죽음의 신.
하지만 검무극에게 가장 의미 있는 수식어는 바로 이것이었다.
십이지왕 중 제 사왕(四王), 살왕(殺王).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금룡세가의 일에 그가 배후로 있음을 직감했다. 돈이 있는 곳에 칼이 따르는 법이었으니까.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한다. 십이지왕 중 누구 하나 쉬운 상대가 없지만, 특히 살왕은 조심해서 상대해야 한다.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니까.
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죽은 살수들의 후끈한 피 냄새가 실려 왔다.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피를 많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찾는 배후가 살수 조직과 깊은 관계인 것 같습니다.”
일단, 아버지와 휘에게는 상황을 정확히 알려야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금룡세가에서 청부를 넣은 것일 수도 있지 않냐는 휘의 물음이었다.
“제가 알기로 명부와 같은 큰 살수 조직은 청부 대상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우선시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처럼 대규모 살행은요.”
검무극의 말에 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날짜를 생각하면 제대로 조사할 시간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정체를 알고 보낸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이번에는 창가에 서 계신 아버지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청부 대상이 아버지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청부를 받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도 강행했다면 중원의 특급 살수들이 전부 다 왔어야죠.”
아버지가 살수들과 얽혀 싸우는 걸 좋아하실 리가 있겠는가? 지금 창가에서 풍겨오는 이 피 냄새도 짜증 나실 테고. 그래서 드린 말씀이다. 이렇게라도 기분 푸시라고.
“따라서 일상적인 청부가 아닙니다. 배후는 살수 조직과 깊은 관계에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구든 조사를 생략하고 단시간에 명부의 살수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겠지요.”
휘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는 아저씨가 전문가시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특히 살수에 대해 교육 좀 해주십시오.”
은하상단주에게 상계에 대해 배웠다면 휘에게는 살수에 대해 배우려는 것이다.
평소였다면 좋게 사양했을 텐데, 상황이 이러하니 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지요.”
검무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창가에 서 계신 아버지에게 농담을 던졌다.
“아버지, 휘 아저씨가 다 처리하실 겁니다. 우린 낚시나 가죠.”
검무극의 농담에 검우진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휘를 앞세울 거면, 네가 책임지고 지켜라.”
뜻밖의 말에 검무극도 놀랐고, 휘도 놀랐다.
아버지가 한 번씩 사람을 놀라게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다.
“아니, 농담은 제발 농담으로 받아주시라고요! 이 세상에서 지키는 일을 제일 잘하시는 분을 제가 어떻게 지킵니까?”
아버지는 농담 아니었다는 듯 창밖을 보고 계셨고, 휘는 검무극을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교주가 직접적인 말로 안위를 걱정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휘라는 남자의 마음은 아무리 큰돈을 삼등분해서 줘도, 아니 전부 다 준다 해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교주의 이런 한마디 말은 그의 마음을 진심으로 기쁘게 했다.
고마운 건 교주였지만, 이점만은 인정해야 했다.
이게 다 소교주님 덕분입니다.
“아저씨, 이제는 살수뿐만 아니라 호위 무인에 대해서도 알려주셔야겠는데요?”
난처해하며 휘는 자리를 피했다.
“저는 시체를 치우겠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를 제지했다.
“시체는 그냥 두세요.”
검무극의 시선이 창밖 저 멀리 가주전을 향했다.
“보낸 사람이 치우게 해야죠.”
* * *
“살수를 보냈다고?”
금천방은 정말 기가 막혔다.
아들이 무공을 배우긴 했지만 딱 잘 나가는 상단의 장남이 배울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이었다. 오히려 무공실력은 금아린이 더 강했고.
“네가 어찌…….”
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에는 ‘그’가 개입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살수까지 거침없이 부를 정도로 영향을 받았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 아비와 의논도 하지 않고 저질렀단 말이냐?”
금천방이 버럭 소리쳤지만, 아들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분을 지키기 위해섭니다.”
금천방은 기가 막혔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라 결과였다.
“좋다, 그렇다고 치자. 한데 넌 살수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기나 하느냐? 청부 넣은 걸 약점으로 삼아 평생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다.”
“삼류 살수들이나 그렇지요. 제가 보낸 사람들은 그런 삼류가 아닙니다.”
“넌 살수를 써본 경험이 없지 않으냐?”
금아혁이 금천방의 두 눈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이놈!”
금천방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무 화가 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상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쟁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았던 그였다. 먼저 흥분한 쪽이 지는 싸움을 평생 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졌다. 자식 놈에게는 완패였다.
흥분한 금천방과 달리 금아혁은 침착했다.
“지금쯤이면 그들은 죽었을 겁니다.”
이미 끝난 일이라는 듯, 금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무십시오, 아버지.”
정중히 인사하는 아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금천방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더없이 차갑고 냉랭한 눈빛. 근래 들어 여러 번 낯선 눈빛을 보았지만, 오늘이 제일 낯설었다.
그렇게 금아혁이 가주전을 나갔다.
와장창!
탁자에 있던 찻주전자와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깨어졌다. 화가 난다고 물건을 부순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잘 참는 사람인데. 자식 놈 문제가 되니 참기가 어려웠다.
금천방이 한쪽 벽장에 보관된 술을 가져와서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자식 키우는 일이란 말을 들을 때면, 그건 자기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식을 키우며 너무 뿌듯해했으니까.
하지만 남에게 자랑했던 모든 순간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것처럼 아들은 급변했다.
술병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은 것을 참으며 탁자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때려 부술 때가 아니라 수습을 해야 할 때였으니까.
‘이 일을 어떻게 한다?’
살행에 성공해도 문제, 실패해도 문제였다. 이 살행이 성공하면 아들은 앞으로 난관을 마주치면 이 방법으로 해결하려 들 테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그런 상태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래서 아들이 살수를 고용한 것이 밝혀진다면?
두 가지 경우 모두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때, 대청 문이 열렸다.
끼이익.
문을 쳐다보며 금천방은 기대했다.
아들이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께 상의드리지 않고 처리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해주기를. 그럼 어떻게든 합심해서 대책을 세울 텐데.
“밖에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를 보자 금천방은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랐다.
‘살행이 실패했구나.’
금천방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검무극을 맞이했다.
“잠시 수하들을 물렸었네.”
아들과 밀담을 나눈다고 수하들을 모두 물러나게 한 상황.
‘설마? 우리가 했던 대화를 다 엿들은 건 아니겠지?’
만약 아들이 살수를 보냈다는 걸 들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아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오다가 우연히 봤습니다. 젊은 공자가 가주전을 나가던데. 혹 대공자십니까?”
“맞네, 큰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네.”
검무극이 아들을 언급하자 금천방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떠보는 건가? 아니면 대화를 들었다는 걸 암시하는 걸까?’
지은 죄가 있으니 괜한 생각이 다 들었다.
“듣던 대로 정말 훤칠하게 잘 생겼더군요. 정말 대협의 풍모가 느껴졌습니다.”
언제나 기분 좋았던 말이었는데,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낯선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서? 인사는 나눴나?”
“아뇨, 저만 먼발치에서 봤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을 자세히도 봤군.”
“제가 눈이 좋거든요.”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멀리 있는 벽을 가리켰다.
“저 벽에 꽃문양에 잎 보이십니까?”
“너무 작아서 안 보이네.”
“아홉 개입니다. 가서 확인해 보시죠.”
이자는 백선방에서 돈을 수금해 왔고 살행을 실패로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가서 꽃잎 수를 세어보라고 한다.
이 알 수 없는 특별함은 정말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꽃잎은 됐네. 한데 이 밤에 웬일인가?”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제 거처에 살수가 들었습니다.”
금천방은 짐짓 깜짝 놀란 척했다.
“살수라고? 그게 정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연기했다. 속고 속이는 상계에서 온갖 경험을 다 한 그였다. 속내를 감추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가?”
“다행히 괜찮습니다.”
“살수들은?”
“다 처치했습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서 시체들을 치우도록 하겠네. 객청도 새로 내어주지.”
“감사합니다.”
원래라면 시체를 조사해서 어디에서 온 살수인지 조사하겠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그 말은 생략했다. 있던 증거까지 감춰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금천방이 수하들을 불러 급히 객청으로 보냈다.
“시체를 치우고 그곳에 계신 분들을 새 객청으로 옮겨드려라.”
“알겠습니다.”
수하들이 나가기 전에 검무극이 나섰다.
“한데 그냥 치울 게 아니라 시체를 조사해서 어느 조직에서 나왔는지 조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금천방은 내심 당황했지만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비상을 걸고 가주전 경계도 강화하시고요.”
“그러려고 했었네.”
정말 그렇다는 듯 검무극이 한 말을 그대로 수하에게 명령했다.
잠시 후, 바깥에서 종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금천방은 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자식 놈이 저지른 일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본가에 살수가 들다니?’
살수가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온몸이 떨렸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 금룡세가 내부를 활보했다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분노와 당혹스러움. 적어도 이 두 감정만큼은 연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앞으로 가주님께서도 조심하셔야겠습니다.”
“무슨 뜻인가?”
“살수들의 숫자가 꽤 많았거든요. 누가 침입을 허용해 준 게 아니라면 금룡세가가 뚫렸다는 의미 아닙니까?”
떠보는 말일까? 아니면 경고일까? 금천방은 검무극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전혀 모르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뭔가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경계를 철저히 강화하겠네.”
원래 금천방은 무인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상인들과의 일은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어떻게든 극복할 자신이 있는데, 무인들과 얽히면 너무 불안했다.
말도 안 통하고 계산도 안 통하고. 칼부터 뽑고 보는 그들이 어려서부터 무섭고 싫었다.
심지어 세가의 무인들도 무서웠다. 경쟁 상단에게 포섭된 누군가 갑자기 검을 뽑아 푹 찌르면? 죽어도 죽기 싫은 이 인생이 그 한 번으로 끝나게 된다.
이 근원적 공포심 때문이었을 거다.
아들들이 자기 대신 무인들과의 일들을 맡아주길 바랐던 것은.
세 자식 중 무재가 뛰어난 딸에게 비싼 무공 사부를 붙여준 것도.
그와의 일을 장남에게 맡긴 것도.
도피는 언제나 이렇게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법임을 잘 알았음에도.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조금 놀랐을 뿐이네.”
검무극이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대체 누가 절 죽이려 한 걸까요?”
의미심장한 검무극의 물음에 금천방은 애써 태연히 대답했다.
“그야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겠나?”
“하긴! 제가 적이 많은 인생이지요.”
검무극이 이 시간에 이곳에 온 이유는 금천방이 살수를 보낸 일과 관계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살수를 보낸 그날, 그것도 살행이 실시된 직후에 버젓이 살아서 나타나면 뭔가 실마리를 드러낼 테니까.
그리고 검무극은 누가 살수를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노련해도 미처 다 숨기지 못하는 금천방의 저 당혹감 때문이 아니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바닥에 산산히 부서진 찻잔과 주전자를 향했다.
“내던지신 겁니까?”
“아니네. 실수로 떨어뜨렸네.”
“이렇게 다 깨지긴 쉽지 않은데?”
이 깨진 찻잔으로 알 수 있었다. 살수를 보낸 사람이 아들인 금아혁임을. 그 사실을 좀 전에서야 알아차린 금천방이 분노를 드러낸 것이리라.
“자식 키우기가 쉽지 않죠?”
불쑥 던져진 물음에 금천방은 당황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아들 때문에 화가 나서 내던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되도록 아들에게 화제가 집중되지 않게 하려는 금천방의 급한 마음과는 달리 검무극은 화제를 자기에게로 돌렸다.
“절 두고 드린 말씀입니다. 아버지 속을 잘 썩여서요.”
“진짜 속 썩이는 아들은 자신이 그런 줄도 모르지. 그래도 어쩌겠나?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그래도 자식 아니겠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러자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때론 자식 이기는 부모가 되어야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금천방은 확신이 들었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혁이가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 모든 압박은 검무극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실수는 언제나 급하고 당황했을 때 나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실수는 자신을 배후에게 안내해 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 아버지가 최고시죠.”
“자네 아버지?”
“다음에 조언을 한 번 구해보시죠.”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분야에선 제일가는 분이시거든요.”
* * *
다음 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금아혁은 굳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평소에 나를 못 마땅해하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인상을 쓸 것까지 있나?”
금아혁이 표정을 굳힌 건 동생 때문이 아니었다. 금아종과 함께 들어온 검무극 때문이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온 것이다.
어젯밤 비상종이 울릴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곧 객청에 머물던 서도파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거란 생각에.
하지만 살수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여긴 동생이 데려온 이백만 냥짜리 비싼 분. 알지?”
금아종의 소개에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반갑소, 검연이라 하오.”
검무극은 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금아혁을 대하고 있었다.
“대공자님 말씀은 많이 들었소.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었지요.”
“무슨 말을 들었소?”
“차기 가주님으로 유력하시다고요?”
금아혁이 동생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좋은 말을 해줬을 리가 없는데.
“그건 되어 봐야 아는 일이고. 오늘은 내가 바빠서.”
인사하자마자 축객령이었다.
금아혁은 책상 위로 다시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금아종은 형 성격을 잘 알기에 여기서 뭐라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검무극에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검무극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돌아섰다.
“참, 우리 대공자께서는 묻지 않으시네요?”
금아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거냐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어제 제가 묵었던 객청에 살수가 들었다는 소식, 듣지 않으셨습니까?”
“들었소.”
금아혁의 냉담한 눈빛에 담긴 감정은 이것이었다. 그래서 네 걱정이라도 하라고?
“안 궁금하시오? 어떤 살수인지, 왜 우릴 죽이러 왔는지. 어떤 멍청한 놈이 보냈는지.”
순간 금아혁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서 검무극은 궁금증이라는 미끼를 달아서 느긋하게 낚싯줄을 던졌다.
“나는 누군지 알 것 같은데.”
절대 실패하지 않을 살수들이 실패했다.
무인의 싸움과 살수의 싸움은 다르다고. 아무리 고수라도 숨은 칼을 당해낼 수는 없다고 자신했었는데.
그 숨은 칼이 저 실실거리는 놈의 뱃가죽을 왜 뚫지 못한 걸까?
어쨌든 저자와 같이 있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해서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던 것인데.
누가 살수를 보냈는지 알 것 같다고?
이건 물지 않고 못 배기는 미끼다.
“그게 누구요?”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야 궁금해지신 모양이오.”
금아혁은 침착하게 반응했다.
“이번 살행은 당신네들의 은원과 관계있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난 청부자가 궁금한 게 아니오. 나는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는 거요.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
자신이 죽이려 했던 사람이 살아서 눈앞에 서 있는데, 이렇게 뻔뻔하고 당당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상대의 무공이 압도하는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말해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다.
‘이자는 배후와 직접 만나는구나.’
그렇게 검무극은 금아혁의 반응으로 배후와의 관계를 추측했다.
“그러니 말해보시오.”
두 사람 사이에서 둘째 금아종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요 귀여운 사기꾼놈, 자작극까지 펼치다니?’
금아종은 어젯밤 살수들의 침입을 검무극의 자작극이라 여겼다.
평생 멀쩡하던 금룡세가에 갑자기 살수가 들어올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아버지나 형이 살수를 불렀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자신이 가족 중에서 제일 성질이 더럽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제일 순진한 그였다.
‘어쨌든 형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군.’
금아종은 이 사기꾼이 어떻게 형을 조종할지 궁금했다.
금아혁이 강하게 밀어붙였다.
“말하기 싫으면 그만 가시오. 그리고 두 번 다시 날 찾지 마시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대공자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오. 오늘 인사드리러 찾아뵌 거 보면 모르겠소?”
검무극이 집무실에 있는 접객용 탁자에 앉았다.
“아, 이런 이야기는 저잣거리 주점에서 한잔하면서 나눠야 하는데. 당신들은 비싼 주점이나 기루에서 술을 마시겠지만, 길거리의 허름한 주점 중에는 숨겨진 장보도 같은 맛집이 있소.”
“실없는 소리 할 거면 가라니까!”
금아혁이 동생을 노려보았다. 당장 데리고 꺼지라는 눈빛이었다.
‘아, 이자도 형에게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근래 형은 많이 변했다. 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요즘은 아주 껄끄럽고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렇게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저 사람도 뭔가 아는 게 있으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그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당신.”
순간 정적이 흘렀다.
“청부자는 당신이오.”
금아혁은 설마 자신을 지목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면전에서.
듣고 있던 금아종이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재미있는 친구군.”
하지만 검무극과 금아혁은 웃지 않았다. 소리 내서 웃던 금아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뭐요? 설마 진심으로 한 말이었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아종의 입에서 절로 ‘미친!’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왜 나라고 의심하지? 말 똑바로 하시오. 당신 지금 금룡세가 대공자를, 살수를 청부한 사람으로 모는 중이니까.”
검무극이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그의 동요가 느껴졌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상황에서 침착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때 검무극에게서 또다시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살수 하나가 죽으면서 당신이라고 자백했소.”
검무극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반면 자백이란 말에 금아혁은 당황했다.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아종은 가슴이 철렁했다. 형이 정곡을 찔렸거나 거짓말이 들켰을 때 저렇게 눈가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만약 그런 말을 들었다면 왜 내게 그걸 말해주는 거요?”
차분한 물음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우리 대공자께서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오. 금룡세가 후계자가 될 분께서 설마 그런 짓을 저질렀겠소? 나도 이제 금룡세가 식구인데, 세가를 이어받을 분에게 그런 정보는 줘야 하지 않겠소?”
금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기에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너무 뺏었소.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나가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누가 누명을 씌웠을지 잘 생각해 보시오.”
그 말을 남긴 후, 검무극이 먼저 그곳을 나갔다.
금아종은 형을 쳐다보았다. 금아혁은 창가로 가서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다.
‘정말 살수들에게 청부한 거야? 아니지?’
만약 이 사실이 진짜라면 형을 후계자에서 쫓아낼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 미친놈이 나를 청부할 수도 있잖아?’
* * *
그날 밤, 한 작은 철방에서 중년 남자가 달아오른 쇠를 모루에 올려두고 쇠망치로 두드리고 있었다.
땅! 따앙!
망치질은 경쾌하고 힘찼다. 웃통을 벗은 남자는 마르고 왜소했는데, 뼈만 남은 마른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찬 망치질이 나오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때 그곳으로 금아혁이 들어섰다.
그는 조용히 망치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망치질하는 이 남자는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일할 때 방해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
길게 울려 퍼지는 망치질 소리를 끝으로 남자가 고개를 들어 금아혁을 쳐다보았다.
“왔느냐?”
“어르신,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중년 남자의 이름은 명신(明神).
금아혁이 아버지에게 그분이라 칭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금아혁은 명신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 무식한 무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와 있으면 좋았다. 무림에 대해서 배웠고, 인간사에 대해서도 배웠다. 특히 함께 있을 때만큼은 그 누구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란 안도감을 주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아버지 금천방의 무인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은 아들인 금아혁에게도 이어져 있었다.
“더 마르신 것 같습니다. 식사를 잘 챙겨 드십시오.”
지금은 땀범벅에 철방의 흔한 일꾼처럼 보였지만, 학사건에 백의를 차려입고 부채까지 들면 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똑똑했고.
가끔 취미 삼아 검을 만들고 비수를 만드는 데 그 실력 역시 대단했다.
“살행이 실패했느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명신은 대답 대신 뜻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었다.
금아혁이 큰돈을 들여 명부에 청부를 넣은 것은 명신을 위해서였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제가 어르신을 꼭 지켜드릴 겁니다.”
아버지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말이지만 금아혁의 진심이었다. 금아혁은 사이비에 빠진 사람처럼 명신을 믿고 따랐다.
그렇게 자신의 각오를 밝힌 후, 금아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한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뭐냐?”
“살수가 죽어가면서 제가 청부를 넣었다고 자백했다고 합니다.”
“누가 그러더냐?”
“검연이란 자가 그랬습니다.”
검연이란 이름에 명신은 잠시 침묵했다. 이때의 표정은 금아혁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기에 낯설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느꼈던 낯선 감정을 이 순간 명신에게 느끼고 있었다.
“그 말은 거짓말이다. 살행을 나오는 살수는 청부자가 누군지 모르니까.”
금아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랬을 것 같았는데.
“하면 왜 제게 거짓말을 한 걸까요?”
명신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걸 모르겠느냐? 하는 눈빛이었는데, 금아혁은 알 수 없었다. 그 답은 명신이 알고 있었다.
“오늘은 만나야 할 손님이 있으니 이만 돌아가 보거라.”
이 밤에 손님이라고? 그럴 리가 있겠는가? 청부에 실패한 자신을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금아혁은 아쉬웠다. 오늘 같은 날에는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뭔가 문제가 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이 불안한 마음이면 잠은 다 잤다.
“또 찾아뵈겠습니다.”
금아혁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러다 돌아서서 말했다.
“이번 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든든하구나.”
명신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금아혁이 그곳을 떠나자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금아혁을 미행해서 이곳에 도착한 검무극이었다.
딴에는 몇 번이나 미행을 대비해서 빙빙 돌아서 왔지만, 어디 검무극의 눈을 피할 수 있겠는가?
“얕은수를 써서 찾아뵌 점, 양해를 구하겠소.”
“상대를 정확히 본 수법을 어찌 얕은수라 할 수 있겠나?”
금아혁이 있었다면 실로 섭섭했을 말이지만, 명신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검무극이 그의 눈빛에서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군.”
명신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네. 마교 소교주 검무극, 어서 오시게.”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이미 상대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이 장소 때문이기도 했다.
살왕의 오른팔.
무림서열 이 위의 살수.
원래라면 살왕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퉈야 할 그였는데,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살왕의 수족이 되는 결정을 내렸다.
그들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무림에 알려진 바가 없다. 명신이 살왕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분분했을 뿐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삶에서 명신이 죽고 나서 그 이유가 밝혀졌었다. 평생 자신에게 충성한 명신을 죽인 사람은 살왕이었다.
“내가 누군지 묻지 않는군?”
“살수에게 이름도 있소? 당신은 몇 번으로 불리오?”
그를 도발하는 말이었음에도 명신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검무극이 단번에 자신이 살수라는 걸 알아차리자 그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명신은 검무극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의 살수였다. 실제로도 그의 기도는 일반 살수들과는 달랐다.
그의 기도에선 감정이 느껴진다.
검무극이 철방 내부에 걸려 있는 물건들을 돌아보았다.
“이것들 다 직접 만든 거요?”
“그렇네.”
“만져봐도 되오?”
“얼마든지.”
명신은 암기를 제작하는데 일가견이 있었는데 살왕도 그가 만든 암기를 자주 애용했다고 했다. 살왕이 그의 암기를 좋아한 이유가 그것들이 치명적인 위력을 지녀서만은 아니었다. 명신이 만든 암기 중에는 기상천외한 것이 많았다고 했다.
아쉽게도 여기에 걸린 것들은 그냥 일반적인 비수와 도검이었다. 그 실력 어디 가냐는 듯, 균형이 완벽하게 잘 맞는 무기들이었다.
“팔기도 하는 거요?”
“소일거리로 하는 일이라 팔지는 않는다네.”
“아쉽소. 팔면 여기 있는 거 다 사 가려고 했는데.”
명신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소문대로군.”
“당신이 들은 내 소문은 어떤 것이오?”
명신이 천천히 검무극을 향해 걸어왔다.
무림에서 사람을 두 번째로 잘 죽이는 사람이 걸어온다.
검무극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했다.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그가 차분히 말했다.
“소문은 다 잊어야겠군.”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검무극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은 소문들이 많았을 텐데. 아쉽소.”
두 사람이 마주 선 거리는 검을 휘두르면 닿을 거리였다.
“놀랍소. 우리가 왔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이렇게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오히려 내가 놀랍네. 자넬 이렇게 방치하다니.”
혼자 다니는 마교 소교주를 죽일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워낙 자식을 강하게 키우셔서 그렇소. 절벽으로 던지고서는 떨어지면서 경신법을 생각해 내라는 분이시거든.”
명신이 웃음으로 농담을 받아주었다. 그는 확실히 여유로웠다. 강함과 자신감이 주는 여유.
“내가 금아혁을 추적해 올 것을 예상했을 텐데, 왜 기다린 거요?”
명신이 검무극을 응시하며 말했다.
“떠나라는 말을 해주려고 기다렸네.”
차분했기에 위협적인 경고였다.
“나를 알고 있다면, 이번에 함께 누가 왔는지도 알 텐데. 그분이 가란다고 가시겠소? 당신이 직접 가서 말해보시오.”
그건 곤란하지, 하는 표정으로 명신이 설득을 위한 설득을 했다.
“자네가 설득하게. 그럼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네.”
물론, 통할 리는 없었고.
“아직 젊어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삶은 너무 따분하오.”
명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반대쪽 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우린 이번 일을 돈으로 해결할 작정이네.”
그가 화로 옆 벽에 툭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게 뭔지 아나?”
“뭐요?”
“무림에 있는 전 살수들에게 한 가지 소식을 알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치지. 당기는 순간 내 수하들이 일제히 소식을 전하기 시작할 거네.”
“어떤 소식이오?”
그러자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 목에 현상금을 건다는 소식이네.”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마신교 소교주를 죽일 마음이 들게 하려면 많이 걸어야 할 텐데.”
“그래서 많이 걸었네.”
명신의 입에서 놀라운 액수가 흘러나왔다.
“천만 냥.”
검무극도 놀랄만한 액수였다.
“무림이 생긴 이래 역대 최고 현상금.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 그 대상을 찾아 지옥까지 뛰어들 액수지.”
명신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이걸 당기는 순간 자넨 오늘부터 바빠질 거네. 이래도 떠나지 않을 텐가?”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무극이 천천히 그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명신은 검무극의 반응에 긴장했다.
“더 다가오면 당길 거네.”
하지만 당길 테면 당겨보라는 듯, 검무극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명신의 옆까지 다가간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했다.
검무극도 명신이 잡은 손잡이를 덥석 잡은 것이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순식간에 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 명신은 검무극이 하는 대로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상식을 벗어난 행동과 반응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차분하고 평온했다.
검무극이 명신을 보며 씩 웃더니, 손잡이를 힘껏 당겼다.
그러자 화로 문이 덜컥 열렸다. 이 손잡이는 그 문을 여는 장치였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나?”
검무극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들 돈 때문에 금룡세가에 있는 것 아니었소? 한데 나 하나 죽이려고 그리 큰돈을 쓰겠소?”
명신은 자신의 감탄을 솔직히 드러냈다.
“제법 똑똑하군.”
“내 소문에 있었을 텐데. 똑똑하다 못해 영특하고, 영특하다 못해 천재적이다.”
명신이 씩 웃었다.
“천재 소교주, 그럼 또 보세.”
손잡이는 화로를 여는 장치만이 아니었다. 시간차를 두고 또 다른 장치가 발동했다.
명신이 서 있던 바닥이 열리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검무극이 서 있던 자리로 강침이 쏟아졌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챙챙챙챙챙챙챙챙챙!
검을 뽑아 강침을 모두 쳐냈을 때 이미 명신은 그곳을 빠져나간 후였다. 검무극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구멍을 쫓아 추격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사라진 구멍으로 소리쳤다.
“당신, 천만 냥은커녕 천 냥도 없어 보인다고!”
구멍 속 저 멀리서 명신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철방에서 빠져나온 명신이 도착한 곳은 금룡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한 저잣거리였다.
이십여 채의 건물이 좌우로 늘어선 이 거리가 마을의 전부였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있는 여행자들의 쉼터 같은 거리.
불 꺼진 거리를 걸어서 명신이 도착한 곳은 그곳의 한 허름한 주점이었다.
장사를 끝낸 주점에는 주인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행주로 탁자를 닦으며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정말 평범한 남자였다. 외모도, 키도, 생김새도.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마주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상인으로 마주쳐도, 점소이로 마주쳐도, 혹은 무인으로 마주쳐도. 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갈 거 같은 외모였다. 점도, 흉터도, 특징도 없었다.
명신이 주점으로 들어서자 행주질을 하던 주인장이 말했다.
“손님, 장사 끝났습니다.”
“간단히 요기하면서 한 잔만 마시고 가겠소.”
주인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상대의 행색을 살폈다. 상대가 무인이 아니라 판단했는지 긴장을 풀었다.
“보아하니 끼니도 거르신 것 같은데 뭐 한다고 야밤까지 밥도 못 드셨소?”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주인장이 행주를 내려놓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고맙소. 내 금방 먹고 가겠소.”
명신이 창가 자리에 앉자 주인장은 주방에 가서 술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져왔다.
“식었지만 드실 만할 거요.”
“고맙소.”
술과 음식을 내주고 주인장은 행주를 들고 원래 닦던 탁자를 닦았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어색한 점은?”
난데없는 말에 명신이 대답했다.
“완벽했습니다.”
행주를 내려놓고 주인장이 명신을 바라보았다.
“주점 주인은 오랜만이라서. 마지막이 언제였지?”
“사 년 전, 정무삼객(正武三客)을 죽일 때였습니다.”
“아, 그랬지.”
놀랍게도 이 주인장이 현 명부의 수장이자 훗날 살수들의 왕이 되는 바로 살왕이었다.
평범함 속의 비범함, 그 극의에 다다른 자.
백 가지 인생을 흉내 내면 그 인생 자체가 되는 사람이 바로 살왕이었다. 오늘 그의 인생은 주점의 주인장이었다.
살왕이 다시 행주질을 슥슥 했다.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까, 놀랍게도 그는 연구하고 연습하고 있었다.
“예상하신 대로 검무극이 찾아왔습니다.”
“직접 보니까 어떻던가?”
“듣던 대로 특별한 자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명신은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손을 잡고 손잡이를 당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그 맑고 깊은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하고, 유쾌하고, 자유롭고.”
“소교주가 자네에게 점수를 많이 땄군.”
살왕이 명신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와 웃음이 어울리겠나 싶겠지만, 살왕은 표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만큼 감정 표현도 풍부했다. 슬픈 일을 보면 눈물을 펑펑 쏟을 수도 있었고, 정말 화난 것처럼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줄도 알았다.
하지만 명신은 안다. 이 모든 감정은 연습한 것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자신이 생각하는 살왕이란 사람을 표현할 수 있는 단 한마디는 이것이다.
공허(空虛).
그의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살육에 대한 열망도, 추잡한 탐욕도.
아니,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치 얼음 절벽 같다. 그의 마음에 들어간 어떤 것도 다 미끄러져 내려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아래 어둠 속으로.
그렇기에 명신은 눈앞의 이 남자가 언젠가는 살수들의 왕이 될 것을 믿었다.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그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기에.
명신이 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암습을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구석 자리에 젓가락을 담아둔 나무통도, 주방 입구에 늘어진 오래된 주렴도, 계산대 앞에 놓인 저 돼지 인형도, 부서진 벽의 구멍도…….
그 외에도 수많은 것들이 모두 사람을 죽이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그 어떤 것에도 기관 특유의 쇳내 나는 살기를 머금지 않았기에 보통 사람은 절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자신이 만든 것들이었다.
“정말 소교주를 죽일 겁니까?”
사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준비가 진행되는 곳은 이 주점만이 아니었으니까.
명신의 시선이 건너편 건물로 향했다.
건물의 창으로 안이 보였다. 남자들이 벽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 건물 앞으로 수레가 도착하자 살수들이 건물에서 시체를 옮겨 수레에 쌓기 시작했다.
건물 지붕에 올라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은 근래 명부에서 제일 잘나가는 신예살수 혈라(血羅)였다.
서른아홉 번의 살행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그가 죽인 고수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고수들이 태반이었다.
그는 명신의 직속 후배였지만, 눈빛은 전혀 선배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다른 건물에도 시체들을 실려 나오고 있었다.
그 건물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가볍게 눈인사를 해왔다.
그는 명부의 살수가 아니었다.
업화(業火). 살천(殺天)의 특급 살수.
살왕은 이번 일을 위해 다른 조직에 있는 최고 실력의 살수들까지 빌려왔다.
그 옆 건물에서 포목점의 간판을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살수가 보였다. 그들은 조직에 매여 있진 않지만 근래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는 흑영쌍살(黑影雙殺)이었다.
오늘 이 거리 전체가 몰살당했다.
이제 이 최고의 살수들이 그들을 대신할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수십 명의 살수가 동원된 살행.
살수 역사상 이런 대규모 살행은 처음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영원히 살수의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소교주를 죽이면 우리도 다 죽을 겁니다.”
“죽는 게 겁나는가?”
명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체를 실은 수레가 떠나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살왕이 소리쳤다.
“잠깐!”
살왕이 성큼성큼 길가로 나가더니.
시체가 쌓인 수레로 걸어갔다.
무심한 눈빛으로 시체 중 하나의 목을 부여잡았다. 그 순간 시체가 눈을 떴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 떨어진 건물 안에서도 놓치지 않은 희미한 생기였다.
꽈드드드득.
고요한 밤거리에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안으로 들어온 살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죽으면 지금껏 우리가 죽인 인간들도 다시 보고 좋지 않겠나? 넌 안 보고 싶으냐?”
잠시 사이를 두고 명신이 대답했다.
“지금도 매일 봅니다.”
살왕의 두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 차가움에 명신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결정은 우리 손에서 벗어났다. 위에서 그렇게 결정 내렸으니까. 그러니까 소교주만 죽이고 우린 빠져나간다.”
대체 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명신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들을 잃은 천마가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지옥 끝까지 우릴 쫓아오겠죠.”
“우린 지옥에 없다. 여기 이 세상 속에 있지. 우리가 숨고자 한다면 영원히 찾지 못해.”
그래, 살왕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추격하는 추격자의 인생으로도 들키지 않고 살아갈 사람이었으니까.
“왜 접니까?”
명신의 역할은 소교주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것이었다.
원래 이런 일을 맡는 살수들이 있다. 청부 대상을 살행 장소로 유인하는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한데 살왕은 그 일을 명신에게 맡겼다.
살왕에게서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소교주가 너와 닮았더군.”
명신이 살왕을 돌아보았다.
“마인 주제에 정파 놈 흉내를 낸다지?”
자신을 질책하는 말임을 알았지만, 명신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살수 주제에.
아이는 죽이지 않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죽이지 않고. 악인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고.
이게 다 지금까지 명신이 살행을 하면서 내건 조건이었으니까.
살왕이 천천히 걸어와서 명신 옆에 섰다.
“신아.”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제 위선은 그만 떨어라.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에 자꾸 의미를 부여하면 너만 힘들다.”
명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을 거다.”
자신은 지금 살왕의 그 매끄러운 얼음 절벽에 벌거벗겨진 채 붙어 있다. 억지로 떨어지려면 온몸의 피부가 뜯겨 나가게 될 것이다.
그마저도 살왕이 그 절벽에 유일하게 허용한 단 한 사람이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마 데려오는 게 쉽진 않을 겁니다.”
명신의 작별에 살왕은 다시 행주로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어디 죽이는 건 쉽겠는가?”
명신이 걸음을 옮겨 주점을 나섰다. 주위에 서 있던 살수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집중되었다.
건너편 건물의 혈라가 살왕에게 말했다.
“사람 죽이는 게 싫어진 살수를 죽이려면 청부금이 얼마나 듭니까?”
명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근래 명신이 청부를 회피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은퇴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살왕이 행주질을 멈추고 나직이 대답했다.
“사람을 죽이기 싫어하는 살수라면, 그자는 이미 죽은 자 아닌가?”
살왕의 대답에 혈라가 소리 내서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후아아아아악!
살왕이 내민 손으로 건너편 건물 지붕에 서 있던 혈라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왔다. 엄청난 내공이 바탕이 된 신위였다.
살왕이 혈라의 목을 움켜잡아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제, 제발 용서를!”
그의 애원에도 살왕은 망설이지 않고 비수를 꺼내 삭둑 혀를 잘라버렸다.
푸아악!
잘린 혀에서 나온 피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혈라는 감히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스스로 지혈했다.
명부 살수들은 물론이고 다른 곳에서 나온 살수들도 숨을 죽였다.
길에 서 있던 명신과 살왕의 시선이 마주쳤다.
명신은 말없이 돌아서 걸음을 옮겼고, 살왕은 걸레를 찾았다.
“우리 소교주께서 허름한 주점에서 술 마시는 걸 좋아하니까.”
살왕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걸레로 바닥의 피를 닦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곳에서 보내드려야지.”
* * *
검무극이 거처로 돌아왔을 때, 금아린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밤늦게 어딜 다니는 거예요?”
검무극의 거처에 살수가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 검무극은 외출하고 없었다. 오고 또 와도 없고. 결국 이 밤에 만나게 된 것이다.
“무림 역사상 최고의 현상금이 걸릴 뻔하다 왔소.”
금아린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엉뚱한 소리 들으려고 온종일 왔다 갔다 한 게 아니라고요!
“살수들하고 싸우다가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없소. 내 몸값보다 싼 살수들을 보낸 모양이오.”
변함없는 농담을 보니 괜찮은 모양이다.
“누구 짓이죠?”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은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다.
“모르겠소. 내가 워낙 적이 많은 사람이라서.”
금아린은 어쩌면 그 청부자가 자신의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적이 많더라도 굳이 금룡세가에 있는 그를 기습했을까?
“죽지 마세요. 나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하잖아요?”
후계자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상기시키자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당신은 오라버니들을 죽일 수 있소?”
갑작스러운 물음에 금아린은 당황했다.
“당신 오라버니들이 후계자 자리 쉽게 내놓겠소? 만약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들면, 그 목숨 뺏을 수 있느냐는 말이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검무극이 묻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못한다는 말도, 할 수 있다는 말도.
한참 후에 그녀가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고개 숙인 그녀는 검무극이 옅게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잘 모른다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기에, 검무극이 그나마 셋 중 제일 낫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오.”
이제 별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을 바라볼 때였으니까.
그 땅이 단단한 땅이 될지, 시궁창이 될지, 아니면 천 길 낭떠러지가 될지는 그녀의 선택과 운명에 달렸으리라.
검무극은 그녀를 떠나보내고 잠시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휘의 말소리.
“무림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를 놓치셨군요.”
아까 현상금 이야기를 듣고 한 말이었다.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재물욕만큼이나 명예욕의 화신이긴 합니다만, 살수들의 역사에 오르는 건 사절입니다.”
휘가 미소를 지으며 검무극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번 일의 배후는 살수들입니다.”
검무극은 짐작이 확신이 되었음을 휘에게 알렸다.
지금 주무시고 계실 아버지보다 휘가 먼저 알아야 할 일이었다.
과연 상대가 살수로 확정되자 휘의 두 눈에 강렬한 빛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현상금을 걸겠다는 협박이 단지 장난처럼 들리진 않았습니다. 아마 목표로 삼는다면 저를 삼겠죠.”
감히 아버지를 암살하려 들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살수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셨죠?”
그는 검무극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살수 하면 뭐가 떠오르십니까?”
검무극은 고민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기습, 암습, 비겁, 자결, 독, 지독하다, 치사하다, 역대 최고의 현상금, 못 받아서 아깝다. 뭐 이런 것들이죠.”
휘는 미소를 지으며 같은 질문에 답했다.
“제가 살수를 떠올리면 이런 것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건 검무극이 말한 것 중에서는 하나도 없는 것들이었다.
“인내, 계획, 조사, 준비, 공부.”
검무극은 지금껏 살수를 떠올릴 때 이런 부분을 먼저 떠올린 적은 없었다.
“우리가 흔히 살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살수만큼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자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인내하고 공부하고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실력 차이를 그것으로 극복하죠.”
휘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이었다.
“저들은 소교주님에 대해 모든 조사를 끝냈을 겁니다. 어떤 성격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어쩌면 소교주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검무극은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더 쉽게 살수에게 죽겠구나.
“살수의 모든 조사와 준비는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한 일이죠.”
“그게 어떤 순간입니까?”
모두가 알고 있지만 단 한 순간 잊게 되는 그 순간.
“바로 긴장을 푸는 순간입니다.”
휘가 눈빛을 빛내며 차분하게 물었다.
“소교주께서는 가장 방심하는 순간이 언제십니까?”
휘가 전하는 가르침이었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다!’
당대 최고의 호위가 전하는 평범한 진실.
검무극은 안다. 저 한 줄의 말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언제나 지키기 어려운 진리들은 단순하다는 것을.
“아! 큰일입니다.”
검무극이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렸다.
“제 인생에서 방심하는 순간이 너무 많아서요. 놀고 술 마시고! 심지어 춤까지 추는 인생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방심하는 순간은 딱 두 경우뿐이다.
“아버지와 있을 때는 방심 그 자체죠. 살수가 오거나 말거나. 아버지가 막아주시겠죠!”
사실 아버지와 있을 때도 긴장한다. 누군가의 암습에 긴장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사이가 좋아질수록 더 긴장한다. 이제 실수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니까.
내가 유일하게 모든 긴장을 푸는 순간은 시공이환술 속에 있을 때다.
아, 생각만 해도 좋은 그곳.
그 뜨거운 모래사장에 누워있을 때의 그 편안함. 갈매기 소리와 파도 소리, 모래사장을 기어가는 게 한 마리.
물론 지금은 한 곳이 더 생겼다. 사방이 눈으로 덮인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걱정을 다 잊는다.
살수를 염두에 두고 그곳을 생각하니, 그곳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새삼 느껴졌다.
“아, 아저씨 말씀을 듣는 지금도 방심 중입니다.”
휘가 웃었다. 그가 옅은 미소를 지은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 기분 좋게 웃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금 아저씨도 방심하신 거죠?”
그러자 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때 암습을 당했으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우린 같이 죽었겠군요.”
그러자 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먼저 죽었겠죠.”
진정한 호위 무인이라면 절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세상의 온갖 참혹하고 무서운 것들을 다 보더라도, 설령 자신의 심장에 박히는 검을 볼지라도, 단 하나 절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그것.
바로 지켜야 할 사람이 죽는 모습.
이안이 나를 위해 몸을 던졌듯, 휘도 먼저 죽을 각오가 된 사람이다.
“어쩌면 그게 호위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미 그는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었는데.
나는 평생 아버지를 지켜주었고, 죽음까지 함께한 이 남자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약속할 수 있다.
이번 생에서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 고생을 하며 회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제가 방심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저씨.”
“네, 소교주님.”
“오늘 해 주신 말씀 반드시 명심해서 이 말씀 꼭 드리겠습니다. 휘 아저씨가 말씀해 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살왕을 죽이고 돌아와서 꼭 이 말을 전해주리라.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휘는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십시오.”
“네, 아저씨도 쉬십시오.”
건물로 들어가 복도를 걸어가는데 창밖으로 여전히 마당에 서 있는 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달빛 아래 서 있는 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 * *
금천방이 검무극의 거처에 도착했다.
근래 그는 아들 고민에 통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살수들에게 청부한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들이 살수에게 청부를 넣도록 영향을 준 것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아들과는 별개로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었음을. 처음부터 자신들은 맹수들의 싸움에 낀 풀 뜯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를 찾아가서 따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와의 일을 아들에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그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만나더라도 검무극 쪽을 먼저 만나보고 결정할 작정이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해.’
그자의 영향 때문에 청부했더라도, 아들은 이번 청부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오늘 방문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정말 누가 청부했는지 알고 있을까?’
검무극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뭔가 아는 눈치기도 했는데.
그걸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온 것이다. 만약 알고 있다면? 수하들도 거느리지 않고 이렇게 홀로 찾아온 건 정말 그랬을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안 되면 돈으로라도 해결해야지.’
검연이란 자의 아버지와 숙부와는 아직 인사조차 하지 않은 상황.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문을 두드리자 휘가 그를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검연의 부친 되시오?”
“아닙니다. 저는 연이 숙부 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겠소. 난 금룡세가 가주 되는 사람이오.”
딸이 데려온 수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이렇게 정중할 필요는 없었는데.
휘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었다.
“검연의 부친분을 뵙고 싶소.”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안에 여쭙고 오겠습니다.”
“그러시오.”
세가주가 찾아왔으니 원래라면 무조건 안으로 들여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자고 있으면 돌려보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휘가 다시 나왔다.
“들어가시지요.”
휘가 그를 검우진에게 안내했다.
“금룡세가의 가주께서 오셨습니다.”
“모시게.”
금천방이 방으로 들어갔다. 휘도 따라 들어갔다. 지금은 호위가 아니라 숙부로 있는 것이니까.
창가에 서서 바깥을 쳐다보고 있던 검우진이 돌아서면서 금천방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금천방은 온몸의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앞서 휘를 만났을 때의 위압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세가를 이끄는 금천방이라고 하오.”
금천방은 평소의 인사보다 더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서도파 가주라는 위장 신분이 있었지만, 검우진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연이 아비 되는 사람이오.”
금천방은 상단을 이끌면서 수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불미스럽게도 최근에 본가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소. 그 점 사죄드리오.”
먼저 사과부터 한 후에 안위를 물었다.
“몸은 괜찮으시오?”
“괜찮소.”
“누구 소행인지 혹시 짐작 가는 자라도 있으시오?”
“없소.”
짤막한 대답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상대의 표정에서라도 그 진의를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진의는커녕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쉽지 않은 상대구나.’
아들인 검연도 그렇고. 보통 부자가 아니었다.
정말 이들이 딸아이의 수하로 온 거라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많은 사람을 만나왔기에 대화를 이끄는 데 능숙한 그였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이대로라면 금방이라도 축객령이 나올 상황.
그때 문득 검무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드님이 아버지를 찾아뵙고 조언을 구하라 권했었지요.”
“나를요?”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찾아뵙고 자식 이기는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우라고 했소. 그 분야에서 최고시라고.”
그제야 검우진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떻게 해야 자식을 이길 수 있소?”
잠시 사이를 두고 검우진이 대답했다.
“나도 지고 있소.”
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히 교주의 말에 웃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교주의 패배 선언이라니?
농담 섞인 대답이었지만, 또 농담만은 아닌 대답임을 휘는 안다. 요즘 잘 지고 있는 교주였고, 심지어 낚시도 졌다.
휘가 고개를 숙인 채 미소 짓는 걸 본 검우진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식이 없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서 묻는 거네.”
자식이 있으면 오히려 답을 찾지 못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생각지 못한 물음에 당황했지만, 교주가 물었는데 어찌 대답이 소홀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이기고 지는 문제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전에 이런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질문은 교주가 했지만, 대답은 금천방에게 했다. 그에게 필요한 말이었으니까.
“자식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자란다.”
금천방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말에 담긴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자식을 못 이긴다면 그건 당신 자신을 못 이기는 거요.
그 점에 있어서 금천방은 너무 부끄러웠다.
자신이 무엇을 보여줬는지는 아들은 돈으로 해결 못 할 일은 없다는 신념으로 답하고 있었으니까.
검우진이 금천방에게 말했다.
“그렇다는군요.”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들이 아들의 청부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의 방문이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후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그에게 검우진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내 아들이 그대들을 잘 본 모양이오.”
금천방에게 그 말은 이렇게 들렸다.
아들이 용서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꽉 막혀서 갑갑하던 마음에 작은 숨구멍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부디 그런 뜻이었기를.
금천방은 고개를 살짝 숙여 다시금 인사한 후 그곳을 나갔다.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휘에게 검우진이 말했다.
“어디 숨겨둔 자식이라도 있는 것 아닌가?”
앞서 질문에 잘 대답했다는 칭찬이었다.
휘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잠시 검우진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다가 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배후에 있는 살수가 보통 자가 아닐 것 같습니다.”
검우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휘는 알고 있었다. 교주가 천하태평처럼 있는 것 같아도, 많은 것을 알고 있음을. 총군사의 보고를 매번 받고 있었으니까.
지금 어떤 살수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최고 중의 최고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교주는 지켜보고만 있었다.
교주가 보는 소교주는 어떨까?
아마 자신은 보지 못하는 더 깊은 어떤 것까지 보고 있겠지?
자신은 그것까지는 보지 못했기에, 그랬기에.
“부탁이 있습니다, 교주님.”
검우진은 뜻밖이란 표정으로 잠시 휘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내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있었나?”
검우진의 물음에 휘가 정중히 대답했다.
“처음입니다.”
“무슨 부탁인가?”
“감히 드려서는 안 될 말씀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검우진은 조용히 휘의 말을 기다렸다.
“당분간만 소교주님 호위를 맡고 싶습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도 아닌 천마의 호위였다. 단 한 순간도 천마에게서 눈을 떼선 안 될 사람이었다. 여기 천마가 밥을 먹고 있고, 저기서 소교주가 죽음을 맞아도 그리로 가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정말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었는데, 지금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
검우진은 휘에게 단호히 말했다.
“거절하겠네.”
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네, 교주님. 괜한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 크나큰 무례에 대한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휘, 그대에게 명령한다.”
“네, 교주님.”
휘가 착 소리가 나게 포권하며 긴장했다. 정식 명령을 받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소교주를 호위하도록.”
놀란 휘가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검우진이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생 처음 하는 부탁인데 고작 내 아들을 지키겠다는 부탁으로 쓰게 할 수는 없지.”
“아껴뒀다가 자넬 위한 부탁을 하게.”
휘는 뜨거운 눈빛으로 검우진을 바라보다가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교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 * *
“지금부터 아저씨가 제 호위를 맡아주신다고요?”
휘의 말에 난 깜짝 놀랐다.
“교주님 명령이십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아저씨도 아시잖아요? 아들을 절벽으로 내던지시면서 아래에 그물 쳐주시는 분 아니라는 것.”
나는 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저씨가 지켜주겠다고 하셨죠?”
“아닙니다. 교주님 명령이셨습니다.”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목소리와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휘가 자청한 일임을.
그날 달빛 아래 뭘 그리 고민하나 했더니, 나를 걱정했구나.
“명령이 아니었다면 교주님 곁을 절대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휘는 끝까지 부인했다. 아버지가 날 위해서 마음을 써준 것으로 하려는 거다.
“저를 의식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소교주님께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은신한 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테니까.
과연 살왕이 알아차릴까?
그때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휘를 앞세울 거면, 네가 책임지고 지켜라.
아버지가 휘를 내게 보낸 건 나를 지켜주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내가 휘를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휘야 나를 지킬 생각뿐이겠지만, 우린 서로서로 지켜야 한다.
“아저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서 한마디 농담이 빠질 수는 없지.
나는 두 손을 번쩍 들며 기뻐했다.
“그럼 전 이제부터 마음 놓고 방심합니다!”
휘가 미소 짓던 바로 그때였다.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휘는 당대 최고의 은신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소리 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명신이 서 있었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천만 냥은 없지만, 술 한 잔 살 돈은 있네. 어떤가? 나와 한잔할 텐가?”
아저씨 말씀이 맞네요. 방심하는 순간 살수가 찾아오는군요.
검무극은 말없이 명신을 응시했다.
명신 역시 담담히 그 시선을 받았다.
그들은 동시에 느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운명이, 나아가 많은 이들의 운명까지 결정짓게 될 것임을.
“놀랐나?”
명신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이 대답했다.
“벌써 잊었소? 당신 마지막 모습이 내게 강침을 쏟아붓고 달아나던 뒷모습이었소.”
그러자 명신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잊었나? 그 손잡이를 잡아당긴 건 자네였네.”
이번에는 검무극이 웃었다.
“어떤가? 한잔할 텐가?”
좋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물었지만, 검무극은 곧바로 받아주지 않았다.
“당신들 조사에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적혀 있소? 자신을 죽이려던 무시무시한 살수가 술 마시러 가자고 하면, 바보처럼 따라가는 사람이라 적혀 있소?”
“딱 그렇게 적혀 있네. 그러니 내가 왔지.”
눈을 껌벅이던 검무극이 짐짓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분하지만 나를 제대로 조사했소.”
이 순간에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던가? 앞으로 볼 일은 있겠는가?
명신은 확신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 이 말도 안 되는 만남을 받아줄 사람은 소교주가 유일하리라.
검무극이 이번에는 눈빛을 가라앉히며 넌지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당신을 죽이고 변수를 만든다면?”
명신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반응했다.
“자네에 대한 보고서에는 이런 협박을 할 거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네.”
농담이었다. 설마 그런 내용까지 적혀 있을 리가 있겠는가?
물론 명부에서 검무극에 대해 샅샅이 조사했고, 마교 소교주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명신은 그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상당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마교 소교주는 없었으니까.
“좋소, 갑시다.”
검무극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오히려 명신이 놀라 물었다.
“정말 가려고? 함정일 수도 있잖나?”
“물론 그렇겠지요.”
“한데 왜 받아들이나?”
“그렇다고 평생 집안에서만 살 수는 없지 않겠소? 당신들도 평생 내가 나오길 기다릴 수도 없을 테고. 특히 당신들은 시간이 돈이지 않소?”
검무극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명신이 함께 걸었다.
은신한 휘가 은밀히 뒤따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이제부터 휘는 있으면서도 없는 사람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이 모두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리라.
두 사람은 몇 걸음 떨어진 채 저잣거리를 향해 걸었다. 떨어졌다고는 해도, 마음만 먹으면 서로에게 치명적인 기습을 가할 거리였다.
명신은 검무극을 기습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살수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수를 만나면 이런 상상을 하게 된다. 과연 저자는 내 암습을 막아낼 수 있을까? 기습을 가하면 이렇게 막고, 그러면 다시 또 추가 공격하고. 대충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었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검무극에게는 그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정보를 읽었으면서도 말이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왜 당신이오?”
앞뒤 다 자른 난데없는 질문이지만, 무슨 뜻으로 묻는지 알 수 있었다.
명신은 살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왜 접니까?
―소교주가 너와 닮았더군.
명신은 그 말을 전하진 않았다.
“조직 내에서 내가 눈엣가시였나 보지.”
그의 농담 섞인 자조를 검무극이 바로 잡았다.
“아니면 실력이 제일 좋거나요.”
명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명부에서 살왕 다음으로 실력이 좋은 살수는 누가 뭐래도 자신이었으니까.
“상계의 일이라 다른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소. 당신들이 배후일 줄 몰랐지.”
명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조직에서 돈 관리를 명부에 맡긴 건, 살왕이 돈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일 거다.
그에게 무엇을 약속한 걸까?
자신에게는 살왕의 공허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는데.
“참, 그날 보니까 무기 만드는 실력이 장인이시던데?”
“그냥 소일거리일세.”
“사람 죽이는 데 쓰기에는 손재주가 너무 아깝소.”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면 화가 났을 텐데, 소교주는 진심으로 자신이 만든 것을 높이 샀다.
“본교 철방의 곽 장인께서 보셨으면 당신 납치라도 해서 데려오라고 부탁했을 거요.”
“날 질투해서 죽이라고 부탁할 수도 있겠지.”
명신의 자부심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시고.”
오히려 그렇게 말하니까 명신은 검무극의 칭찬이 무작정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만들어둔 비수라도 몇 개 파시오. 마침 비수도 다 떨어졌는데.”
“그걸로 날 죽이려고?”
“손에 익숙하지 않은 비수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 보이진 않소만.”
명신은 소교주와 이런 대화를 나눠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확실히 소교주는 대화를 편하게 이끌어가는 능력이 있었다. 불편한 이야기도 그가 하니까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두서없이 나누며 저잣거리에 도착했다.
함정으로 준비된 그곳은 이곳 저잣거리에 없었다. 그곳은 이 마을과 다른 마을 사이에 존재하는 쉼터였다.
“어디서 마실 텐가?”
명신은 주점을 고를 선택권을 검무극에게 주었다.
검무극이 그곳에 있던 몇 군데 주점을 둘러보더니 한 곳을 골랐다.
“저기로 갑시다.”
검무극이 고른 곳은 그중에서도 제일 허름한 주점이었다. 명신은 검무극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주점 내부는 살왕이 준비하고 있는 곳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이 소교주는 정말 이런 분위기의 주점을 좋아하는구나.’
명신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삼자회담도 이런 주점에서 했다고 들었네.”
“운치 있고 좋지 않소?”
검무극이 주인장을 쳐다보았다.
“여긴 술과 음식 맛도 좋을 거요.”
“어떻게 확신하나?”
“난 주인장 얼굴만 봐도 맛을 알 수 있소. 타고난 능력이지.”
하지만 잠시 후, 검무극이 울상을 지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안주로 나온 요리는 맛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술맛도 별로였다.
검무극이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주인장이 얼굴을 바꾼 모양이오. 전직 살수가 손을 씻고 장사를 하는 곳일지도 모르지.”
검무극의 농담에 명신이 옅게 웃었다.
농담을 받아준 그 웃음에 씁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전직 살수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자신의 원칙대로 살행을 해왔다.
아이는 죽이지 않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죽이지 않고. 악인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고.
한데 언젠가부터 살왕이 이 원칙을 건드리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원칙.
―악과 선을 누가 정할 수 있겠나? 자네가 이런 원칙으로 살수를 하면, 자넨 착한 사람인가?
명신은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이를 안 죽이는 것 인정해. 무인이 아닌 사람 안 죽이겠다는 것도 인정해. 하지만 악인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겠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네.
조직의 명령이 내려오면 군말 없이 죽이라는 의미였다.
―이건 자네를 위한 일이기도 해. 이런 쓸데없는 원칙을 세웠다가 나중에 실수라도 하면? 그 죄책감으로 손을 씻기라도 할 건가? 아님, 자결이라도 할 건가? 그냥 살아도 힘든 세상을 왜 스스로 더 힘들게 살려고 하지?
점점 압박해 오는 살왕의 설득.
명신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조만간 살왕에게 말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자신의 원칙을 깨겠다.
아니, 깨지 않겠다.
그 고민의 끝에서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의 의구심.
‘만약 내가 명부에서 두 번째 실력이 아니라면?’
과연 아직까지 살아남았을까? 그 살왕의 마음속 얼음 절벽에 붙어 있을 수 있었을까? 친구이기에 살아남은 것일까? 버리기엔 아까운 실력이기에 살아남은 것일까?
원칙과 관련해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온 요즘, 그의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아까 검무극에게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눈엣가시라서 보낸 거라는 그 말. 검무극이란 강적의 손을 빌려서 그 가시를 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검무극은 말없이 술잔을 내려다보는 명신을 쳐다보다가 창밖을 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각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긴 침묵을 깬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오?”
“얼마든지 묻게.”
“왜 달아나지 않았소? 지금껏 내 손에 당신들 동료들이 여럿 죽은 것 알고 있을 거 아니오?”
그 동료가 어디 보통 고수들인가? 훗날 십이지왕이 되는 절대 고수들.
살왕의 오른팔이니 그도 대충은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표정으로 봤을 때,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명신이 담담히 대답했다.
“우린 이럴 때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사람 죽이는 일은 우리가 전문가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검무극을 보며 명신이 슬쩍 덧붙였다.
“사람 죽이는 일은 자네들도 우리만큼 전문가들 아닌가? 아니지. 자네들은 우리보다 더하지. 우린 돈을 안 주면 절대 움직이지 않지만, 자네들은 돈과 관계없이 막 죽이는 사람들 아닌가?”
이것이 무림이 천마신교를 보는 지금까지의 시선이었다.
“막 죽이다니요? 다 옛말이오. 요즘 본교도 많이 변했소. 당신 그 보고서에 자세히 나와 있었을 텐데.”
물론, 명신은 알고 있었다. 그 변화의 선두에 여기 이 소교주가 있다는 것도.
“좋소, 말 나온 김에 하나 물어봅시다.”
검무극이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살수 일은 재미있소?”
무심코 던진 말처럼 보였지만 의도가 있는 질문이었다.
“일을 재미로 하겠나? 그냥 일이니까 하지. 한데 왜 묻나?”
명신은 검무극에 대해 모든 걸 다 조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검무극도 명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세세한 정보는 명신이 더 많이 알았지만, 검무극은 결정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최후를. 그가 왜 살왕에게 충성했으며 왜 결국 살왕에게 죽음을 맞았는지를.
“당신은 왠지 살수와 어울리지 않소.”
“자네의 그 느낌은 못 믿겠네.”
명신의 시선이 계산대에 앉아 있는 주인장을 향하며 덧붙여 말했다.
“자네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이미 증명이 되지 않았나?”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 가식 없는 웃음에 명신도 함께 웃었다. 이 순간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누가 더 방심하고 있을까?
검무극이 명신에게 물었다.
“술맛도 별로인데, 자리 옮깁시다. 아는 주점이라도 있소?”
명신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없네.”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단골집이 있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검무극이 자신을 떠보기 위해서 물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곳은 정말 자연스럽게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가 방심하는 그 순간에. 설마 이 사람이? 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그런 순간에.
오히려 명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또 마시세.”
“벌써 끝내자고요? 더 놉시다!”
“바쁘다네. 죽여야 할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거든.”
떠나기 전에 명신이 물었다.
“왜 위험을 무릎 쓰고 나와 술을 마셔준 건가?”
검무극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당신들 보고서에 나와 있겠지만, 나는 친구 사귀는 걸 좋아하오. 한데 살수 친구는 한 명도 없어서.”
명신은 놀라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다들 그런 표정에서부터 시작하지요.”
* * *
명신이 살왕의 주점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거리는 완전히 정리가 되어 있었다.
살수들은 각 건물의 주인과 점원이 되어 있었다. 최고의 살수들인 그들은 포목점 주인이 되었고, 다루의 주인이 되기도 했으며 손님이 되어 있었다. 같은 살수가 봐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살수가 아닌 평범한 여행객들도 섞여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가 가장 중요했다. 살수들을 가려줄 가장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테니까.
‘이곳에 오면 소교주는 반드시 죽는다.’
명신이 살왕의 주점에 왔다. 그곳에도 이곳을 지나던 여행객들이 술과 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과 합석까지 한 채 대화를 주고받던 살왕이 명신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명신이 구석 자리에 앉아 간단히 요기할 거리와 술을 시켰다.
주문한 걸 가져다준 후에 살왕은 다시 손님들과 수다를 떨었다. 중원을 오가다 보면 한 번쯤은 만날 법한 말 많은 주인장의 모습이었다. 누가 저 사람을 명부의 주인이라 여기겠는가?
여행객들이 떠나자 살왕이 비로소 명신에게 왔다.
“소교주는 만나봤나?”
“네, 만났습니다.”
“어떻든가?”
“저와 닮았다고 하셨습니까?”
물론 좋은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마인 주제에, 살수 주제에. 다른 길을 가려 한다는 점을 두고 닮았다고 했던 것이니까.
“그럼 절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그만큼 검무극이 보통 사람이 아니란 뜻으로 말했다.
“어떤 점에서?”
“묘합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살왕이 명신의 자리에 있던 술을 한 잔 부어 마셨다.
이미 예상한 바다. 검무극이 보통 놈이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자네는 악인이 아니면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그는 악인인가? 선인인가?”
명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마교 소교주라면 당연히 악인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대화를 나눈 그가 악인일까?
살왕은 검무극을 통해 명신을 설득하려 했다.
“이래서네. 답을 내릴 수 없는 일이니까. 자네의 그 원칙은 젊은 시절의 치기로 흘려보내게.”
명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금 그 말이 불편한 걸 보니, 아직은 인정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번 일, 해낼 수 있겠나?”
“해낼 겁니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여러 번 죽었을 거란 말까지 들은 상황이었다. 이미 살행은 시작되었고, 이제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린 이 살행으로 무림의 역사에 남을 거다.”
살왕의 말에 명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데려올 수는 없다면 금룡세가를 이용하게.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그들 역시 정리하고 떠나야 할 테니까. 우리가 안 죽이더라도 그들은 멸문이야. 소교주가 죽는 순간, 마교는 관련된 자들을 풀 한 포기 남지 않고 다 쓸어버릴 테니까.”
명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떠나는 그에게 살왕이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은 휘가 말한 살수의 인내심이었고, 그 인내심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의 각오였다.
“자네가 소교주를 데려오지 못하면 난 평생 이곳 주인장으로 살아가게 될 거네.”
거처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 신묘하게 나타나는 휘.
검무극은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절 지켜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무극의 인사에 휘가 미소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은신하고 있을 때가 더 편합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상대나 주위까지 살펴야 하니 심적으로도 힘들 것이다. 내가 불편해할까 봐 저렇게 말해주는 거다.
“그자는 어때 보였습니까?”
검무극이 명신에 대해 휘에게 물었다.
“최고 수준의 살수였습니다.”
과연 휘는 그와 겨뤄보지 않고서도 그 수준을 파악했다. 걸음걸이, 손동작 등만 보고 딱 상대의 실력을 파악한 것이다.
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원래라면 묻지 않았을 텐데. 앞서 명신과 너무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헤어지는 모습을 보았기에 물었다. 그러자 검무극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그자를 제 편으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검무극의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휘였지만, 문제는 상대가 살수라는 점이었다.
“살수는 믿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휘의 이렇게 단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휘를 이해했다.
휘와 명신은 상극이자 대척점에 존재하는 이들이다.
휘는 그를 믿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미워하고 경멸할 거다.
자신 앞에서 그런 표를 내지 않을 뿐.
그걸 알면서도 명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의 인생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기에.
“네, 믿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노력은 의미가 있는 노력일 겁니다. 제 편이 안 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 그의 망설임 한 번이 우리의 목숨을 구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휘는 느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소교주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살수 문제만큼은 확실히 말해야 한다.
“살수는 믿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부디 그 점만은 잊지 말아 주시기를.”
휘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일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금 확인하고 나서야 휘의 표정이 풀렸다.
“저도 아저씨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검무극이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아둔 극품천잠사를 풀어 그에게 건넸다.
“심장과 단전에 두르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소교주님이 두르십시오.”
그러자 검무극이 옷자락을 풀어 심장과 배에 두른 극품천잠사를 보여주었다.
“저는 이미 둘렀습니다.”
“두 겹 두르십시오.”
“세 겹 둘렀습니다. 그러니 한 겹은 아저씨가 두르십시오.”
휘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래 봬도 유서가 깊은 극품천잠사입니다. 마존들도 이미 둘렀고요. 아, 물론 깨끗이 빨았습니다. 그리고 아예 드리는 거 아닙니다. 나중에 돌려주셔야 합니다.”
마지막 싸움에서 그것을 온몸에 둘러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싸움의 선두에는 자신이 설 것이다.
휘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거절해도 검무극이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휘는 검무극이 보는 앞에서 극품천잠사를 둘렀다.
그제야 검무극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십니다. 자, 보십시오.”
검무극이 검을 뽑아 검날에 비친 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검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평생 누군가를 지키는 일만 해온 그였는데, 이렇게 보호받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고맙습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금 빨리 제가 아버지께 갔으면 좋겠죠?”
아버지를 지키지 않고 나를 따라 나갔다 들어왔으니까. 아버지가 잘 계시는지 궁금할 것이다.
“아닙니다.”
“그럼 바로 딴 볼일 보러 나가도 되겠습니까?”
금방이라도 다시 나갈 것처럼 굴자 휘가 내가 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들어오셨는데, 인사는 드리고 나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돌아섰다.
“제가 나가긴 어딜 나가겠습니까?”
검무극이 건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아들 왔습니다, 아버지.”
휘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 * *
아버지는 방에 계셨다.
통천각에서 보내온 전서를 읽고 계셨다.
상황 파악을 확실히 하면서도 전적으로 나에게 일을 맡겨주시는 중이다.
그래, 절벽에서 혼자 기어 올라올 자식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지녀야만, 그 절벽이 의미가 있는 법이겠지.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눈빛이 마주치는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더 강해지셨다!
수련은 나만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더 강해지셨다는 걸 은근히 알 수 있었다면 이제는 확실히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더 강해지면서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결과이다.
아버지, 더 강해지십시오. 화무기도, 무림일통도, 모든 게 가소로워질 정도로 강해지십시오. 그 허무함은 제가 채워드릴 테니까요.
아버지의 시선이 휘를 향했다.
휘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아버지께 예를 갖췄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과 함께 고마움이 피어올랐다.
“처음이죠? 아버지 곁을 이렇게 비운 것이.”
휘도 사람인데 어찌 잠시도 쉬지 않고 옆에 있었겠는가?
밥도 먹고, 뒷간도 가고, 씻고 옷도 갈아입고.
하지만 나는 상상이 된다. 그 시간이 얼마나 촉박하게 지나갔을지. 그 짧은 시간 속에서 휘가 얼마나 서둘렀을지.
내가 없는 순간 사고가 터지지 않기를!
휘는 말했다. 지켜줘야 하는 사람보다 먼저 죽는 것이 호위에게 내려진 유일한 축복일 거라고.
하지만 저주도 있으리라.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다가 단 한 순간 자리를 비웠을 때, 지켜야 할 사람이 죽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아버지는 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안가에 가 있겠네.”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배려.
심지어 아버지는 짐도 다 싸두신 후였다.
아버지가 커다란 혁낭을 메자 휘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거 주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휘는 당황 했다. 아버지에게 짐을 들게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휘에게 말했다.
“자넨 내 명령을 수행 중이지 않나?”
“교주님!”
“나는 괜찮네.”
휘가 나를 쳐다보았다. 어서 짐 받아 들고 앞장서라는 눈빛.
“아버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다. 넌 죽지나 마라.”
아버지가 혁낭을 메고 방을 나섰다.
“아버지 혁낭을 메신 모습 멋지십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선했다.
안절부절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는 휘를 보며 아버지께 들리게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만 좀 보세요! 저 어깨, 태산을 짊어져도 끄떡 안 할 어깨인데 아저씨 눈빛에 다 닳겠습니다!”
* * *
명신이 다시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당장에라도 달려오고 싶었지만, 그는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자신이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으니까.
“한잔할까?”
“좋지요.”
떠나기에 앞서 명신이 가져온 목곽을 건넸다.
그 안에 든 것은 비수들이었다.
“사실 검이나 다른 병장기는 인정하겠는데, 비수만큼은 인정할 수 없네. 이래도 마교 철방에서 나를 죽이지 않으려 할까?”
지난번 만났을 때 본교 철방의 장인이 질투심에 죽이려 들 정도는 아니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검무극이 비수를 살펴보더니.
“아, 우리 곽 장인께 다른 건 몰라도 비수는 보여드리면 안 되겠소. 당신 죽여달라고 내게 부탁하면 곤란할 테니까.”
검무극의 말에 명신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비수도 선물 받았으니 오늘은 제가 술을 사야겠군요. 지난번에는 내가 주점을 잘못 골랐으니 오늘은 당신이 고르시오.”
명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오늘인가?’
하지만 저잣거리를 벗어나야 한다면 의심할 수도 있을 터. 신중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렇게 다시 두 사람은 저잣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묻게.”
“이 금룡세가 사람들, 당신하고 급이 너무 안 맞지 않소?”
명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넨 시키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우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인생이라네. 우리가 달리 무슨 힘이 있겠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에게 들으니 변명처럼 들리오.”
명신은 검무극의 그 말에 뼈가 있음을 느꼈다.
“자네도 나를 조사했지?”
천마신교의 정보력은 무림에서 제일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렇게 같이 뒤섞였는데, 자신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그렇소.”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자네가 조사한 그 보고서의 나는 어떤 사람인가?”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명신, 명부의 이인자. 그의 살행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는데 아이는 죽이지 않고, 무공을 모르는 이는 죽이지 않고, 악인이 아닌 자는 죽이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천마신교였으니까.
하지만 다음 정보는 명신을 놀라게 했다.
“그 일로 근래 명부의 수장과 갈등을 겪고 있고.”
순간 명신은 흠칫 놀랐다.
‘그 일은 오직 우리 둘만의 일인데? 어떻게 알았지?’
명신은 모른 척 검무극에게 물었다.
“갈등? 왜 그렇게 생각하나?”
그때까지 걸어가던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명신도 함께 서서 대답을 기다렸다.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당신 같은 살수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요즘 세상에 그런 원칙 지키고 사는 살수는 없소. 어디 이야기에서나 나올법한 살수지요. 당신 수장도 그런 사람이라면 문제없겠지만, 그런 사람은 아니더군.”
두 사람은 길가에 서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살수 싫어하오. 혼자 놀면 놀지, 굳이 친구 삼고 싶지도 않고. 한데 당신이 그런 원칙을 지키는 살수라기에 호기심이 생긴 거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을 보낸 거겠지. 내가 당신 같은 사람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걸 조사했을 테니까. 만약 며칠 전에 당신이 아닌 다른 이가 왔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요. 기회가 있을 때 한 사람의 적이라도 더 없애두는 것, 그게 나란 사람이지. 그런 점에서 볼 때, 당신을 보낸 수장은 꽤 머리가 좋은 사람이오.”
명신은 검무극이 이렇게까지 자신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왜 내게 다 말해주는 건가? 말해줘도 날 상대할 자신이 있어서인가?”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대체 지금까지 뭐 들은 거요? 당신 같은 살수에게 흥미가 생겼다고. 이런 살수라면 친구가 되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찰나의 순간 명신은 비수를 뽑아 검무극의 목을 찌르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상대가 방심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느꼈다는 건, 상대가 진심을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를 이용해서 명부를 쓸어버리려는 건 아니고?”
검무극이 짐짓 놀라는 척하며 밝게 웃었다.
“벌써 눈치챈 거요?”
명신은 검무극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그때 마침 머리 위로 새떼가 무리 지어 날아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했다.
“마교 소교주와 살수가 친구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마교 소교주와 주점 주인장도 친구가 될 수 있소.”
명신은 그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주점 주인장과 살수의 처지가 어디 같겠나? 주점 주인장은 내일 문을 닫을 수 있겠지만, 우린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인데.”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나는 주점 주인장이 문을 닫는 게 더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하늘을 바라보던 명신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모를 거요. 가족이 붙잡혀 가야만 문을 닫는 사람들이오. 당신이 그 사람보다 더 성실하다고? 정말 그렇소?”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느꼈기에 명신은 대답을 아꼈다.
“하루 쉬면 손님이 끊어질 텐데. 내가 쉬면 일부러 걸음 한 사람이 돌아가야 할 텐데. 당신은 적어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소? 내게 죽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런 걱정 안 하잖소?”
명신의 한쪽 눈가가 살짝 꿈틀했다. 되도록 검무극과 잘 지내려는 그였다. 한데 검무극이 자꾸 마음속 어딘가를 찔러온다.
“떠날 수 없다는 것, 그냥 귀찮은 건 아니시오? 익숙한 삶에 변화를 주려는 게 엄두가 안 나서?”
명신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남 일이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자네가 나에 관해서 뭘 안다고? 고작 세작들이 수집해 온 정보를 보고 평가하는 게 전부지 않나?”
“그게 당신 아니오?”
다시 명신이 움찔했다.
“당신의 보고서에 있는 나, 내 보고서에 있는 당신. 그게 우리지 않소? 남들이 보는 모습 말고, 진짜 내 모습이 따로 있는 거요? 그럼 우린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인데. 그거 잘못된 거 아니오?”
명신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는 게 우리요. 오히려 그게 더 정확하지. 실제로는 더 거창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그 보고서에 있는 당신과 나, 그게 우리지 않소?”
명신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남들이 보는 것보다 자신은 더 나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깨달았다.
‘아!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구나.’
한 번도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에,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이런 생각이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발견했다. 어쩌면 살행의 원칙을 정한 것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왜 이러는 건가? 자네가 정말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무슨 생각인지 솔직히 말해보게.”
검무극을 살왕에게 데려가야 했기에, 울컥 치민 말은 애써 삼켰다.
‘넌 지금 나를 이용해서 명부를 날려버리려는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날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이딴 식으로 파고들려는 거냐?’
길에 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운명을 가를 수도 있는 중요한 대화가 길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검무극의 두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깊었다.
“내가 가는 길에 당신 같은 사람까지 휩쓸고 가고 싶지 않아서. 이 세상 어딘가에는 억울하게 부모를 잃은 꼬마가 내민 동전 한 닢을 청부금으로 받아서 악인을 죽여주는 멋진 살수가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 사람까지 죽이면서 내 길을 가고 싶지 않아서요. 맞소, 이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그러자 검무극이 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서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 돈은 나를 지키기 위한 청부금이오.”
명신은 검무극이 내민 동전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살왕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소교주가 저와 닮았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절 너무 과대평가하셨습니다.
그 말은 살왕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여기 있었으니까.
명신은 검무극이 내민 동전을 받지 않았다.
“나는 동전 한 닢짜리 청부를 받는 그런 살수가 아니네.”
명신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뒤따라 걸었다.
“아, 물론 당신 몸값이 명부에서 두 번째로 비싼 살수라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검무극의 마음에는 말과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당신은 그런 살수요.’
그가 이 동전 한 닢의 청부를 받는 것은 미래의 일이다.
그는 조직을 떠나 중원을 떠돌며 아이가 내민 한 닢의 동전을 청부금으로 받는 그런 살수로 살았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원한을 갚아주었다. 그 대가로 주먹밥 한 덩이를 받기도 했고, 노래 한가락을 듣고 살행을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살왕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가 조직을 떠난 이유는 살왕 때문에 원칙을 지키지 못한 살행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왕은 무자비했다. 악인으로 속여 명신에게 죽게 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는 더없이 선한 사람.
명신은 언제나처럼 자기 나름대로 청부 대상을 조사했지만 작정하고 속인 살왕의 계략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사건 이후 명신은 큰 충격을 받고 잠적했다.
그가 사람들을 돕는 살수로 살아간 것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선한 마음에 무고한 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이 더해졌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살왕은 끝내 그를 찾아내서 죽였다.
그를 죽일 때 살왕은 무슨 말을 했을까?
명신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히고 죽였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말을 하고 죽였을까? 그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회귀 전에는 살왕이 살고 명신이 죽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살아야 할 사람은 명신이고, 죽어야 할 사람은 살왕이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없이 걸었다.
명신은 고민하고 있었다.
오히려 기회였다. 뭔가 어색한 지금, 이때는 어딜 가더라도 검무극이 따라올 것 같았다.
‘이대로 데려갈까?’
만약 따라오지 않더라도,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명신은 망설였다. 그건 바로 검무극이 했던 말 때문이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꼬마가 내민 동전 한 닢을 청부금으로 받아서 악인을 죽여주는 멋진 살수가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정말 그런 살수가 되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딴 말로 자신을 현혹하려는 검무극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짧은 순간이지만 검무극의 말에 감정이 흔들렸었다. 누군가 다른 살수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그 순간을 노렸으리라.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태평했다.
“자, 이 서먹서먹한 관계를 풀려면 한잔해야겠지요? 어서 가시죠.”
오히려 검무극이 앞장서 걸어갔다.
명신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곳에 데려가면…… 오늘 소교주는 죽는다.’
만약 이번 임무를 수행해 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외부의 특급 살수들까지 불러들일 정도의 사상 최대의 살행을 망치게 되는 것이니까. 더구나 요즘처럼 살왕과의 관계가 좋지 못할 때라면 더욱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거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당신을 죽일지 말지.
“그냥 떠날 수는 없나?”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시오?”
소교주가 갑자기 떠나버렸습니다.
살왕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해준 유일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마교 소교주를 죽이는 순간부터 평생 숨어다녀야 할 거다. 살왕에게는 이번 일을 받아들인 명확한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감정적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나 죽이라는 명령 내려왔소?”
훅 들어오는 검무극의 물음에 명신은 내심 흠칫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걸음만 옮겼다.
“정말 그랬나 보네.”
명신이 멈춰 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만.”
“보통 사람들은 괜한 오해 받기 싫어서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하지 않소?”
“그깟 오해 좀 받으면 어떤가?”
검무극은 한마디 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깟 오해라고 괜찮다는 사람은 오해받는 걸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던데. 남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는 욕 듣는 거 끔찍이 싫어하듯이 말이오.”
정확히 봤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신은 오해받은 걸 싫어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싫어했으니까.
“세상은 자네의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네.”
인정한다는 듯 검무극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신은 검무극과 대화를 나눌수록 자꾸 화가 났다.
남을 들여다보는 게 직업인 살수에게 자꾸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쉴 새 없이 그의 감정을 흔들어댔다.
“당신의 원칙에서 나는 죽여야 할 사람이오, 아니오?”
명신은 이 물음을 살왕도 했음을 기억했다.
―자네는 악인이 아니면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소교주는 악인인가? 선인인가?
살왕에게도, 그리고 당사자인 검무극에게도 명신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집된 정보만 볼 때 그는 악인이 아니었으니까. 오직 그를 죽일 명분은 그가 마교의 소교주란 신분뿐이었다.
만약 소교주가 악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원칙을 어기는 셈이 된다. 혹 지금 자신은 마교라는 이유를 핑계 삼아 어물쩍 넘어가 버리려는 건 아닐까? 이 모든 일이 다 지나가 버리기를 바라면서.
“자네가 말해보게. 자네는 악인인가, 악인이 아닌가?”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야 죽이면 안 될 사람이지요.”
“왜 그렇나?”
“당신의 원칙이 악인이 아니면 죽이지 않는다라면, 내 원칙은 악인은 반드시 죽인다요. 난 당신의 원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이오. 결국 우린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검무극의 저 원칙은 직접 들어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에 관한 정보에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나와 있었으니까.
악을 용서하지 않는 마교 소교주라니?
당연히 기만이고 위장이라 여겼는데.
만약 그렇다면? 정말 굉장한 위장이고 기만이었다. 그 정보들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으니까.
오히려 사전 조사가 독이 되고 있었다. 아니었다면 애초에 마교 소교주를 믿을 일은 절대 없었을 텐데.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저잣거리에 도착했다.
“자, 말한 대로 오늘은 당신이 고른 곳으로 갑시다.”
명신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곳으로 데려갈까? 아니면 오늘은 참을까?’
언젠가 데려가야 한다면 미룰 필요가 있겠는가? 오늘이 기회임을 알면서도 명신은 망설여졌다.
“이 마을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곳 알고 있으면 그곳으로 갑시다.”
명신의 마음에는 태풍이 일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명경지수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아는 주점이 있는데 괜찮겠나?”
만약 그냥 여기서 먹자고 한다면,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검무극이 다가오더니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작 말씀하시지. 자, 갑시다. 한잔을 마셔도 맛있는 곳에서 마셔야지.”
마치 철방에서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손을 잡고 함께 손잡이를 당겼던 것처럼, 오늘도 검무극은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고 있었다.
‘그래, 이게 다 네가 정한 네 운명이다’라고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저잣거리를 벗어나 걸음을 옮기는 내내 명신의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검무극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동전이 자꾸 떠올랐다.
‘말려들면 안 돼.’
그 동전은 자신의 심장으로 날아든 마인의 암기일 뿐이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걸어가는데 명신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말이 검무극에게서 흘러나왔다.
“조만간 당신 수장은 절대 죽여선 안 될 사람을 악인이라고 속이고 당신에게 죽이게 할 거요. 그때 어떻게 할 거요? 그를 죽일 거요? 아니면 명부를 떠날 거요?”
“명부의 이인자인 나에게 왜 그런 짓을 하겠나?”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과는 달리 명신은 살왕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쓸데없는 원칙을 세웠다가 나중에 실수라도 하면? 그 죄책감으로 손을 씻기라도 할 건가? 아님, 자결이라도 할 건가?
생각해 보면 그 실수는 살왕이 하게 될 실수였다. 선인을 악인으로 착각해서 명령을 내리는 실수일 테니. 자신이 아는 살왕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지만 이내 명신은 이 역시 상대의 술책이라 여겼다.
‘그와 내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구나.’
발걸음을 멈춘 채 명신은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나와 그분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건가?”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렇소.”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당신을 내 편으로 데려오려면 이간질이라도 해야겠소.”
그리고 대놓고 하는 검무극의 이간질은 강력했다.
“당신을 구해준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일까?”
명신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어린 시절 당신은 멸문한 가문에서 유일한 생존자였소. 쓰러진 옷장에 깔려 죽어가던 당신을 구했지.”
명신은 놀랐다. 소교주는 살왕이 자신을 구해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어떻게 알았느냐는 놀람에 검무극은 담담히 대답했다.
“나 천마신교 소교주요. 내가 알고자 하면 무림맹주가 몇 살 때 누굴 짝사랑했는지까지 다 알아낼 수 있소.”
명신이 놀란 것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게 아니었다.
“그분이 날 구한 게 아니라는 말은 뭐지?”
“누군가를 떠밀어서 강에 빠뜨린 후, 다시 구해줬다고 칩시다. 그럼 그 사람을 구해준 것이오?”
설마 하는 생각에 명신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당신네 가문을 멸문시킨 청부를 받아들인 곳이 명부였소.”
이 이간질이 강력한 건 그 재료가 진실이기 때문이다.
살수로 살아오면서 마음의 평정심을 지키는 훈련을 수없이 해온 명신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는 터져 나오는 격정과 혼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무겁게 짓누르던 옷장이 세워지자, 어둠이 걷히며 빛이 보였다.
그 빛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음 같은 눈빛으로 소년은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았소?”
아니, 몰랐다.
그땐 고작 일곱 살 때였으니까. 막연히 나를 구해줬기에 그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가문의 복수를 꿈꾸지도 않았다. 아니, 꿈꿀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살수 훈련을 받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지금까지 살수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를 지배하는 것은 배신감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의구심이었다.
어쩌면 검무극의 말처럼 알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래서 지금까지 묻지 못한 게 아닐까?
그때 왜 자신을 구해준 거냐고? 아니, 왜 하필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느냐고.
지금까지 살왕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예감했던 건 아닐까? 살왕이 무덤덤하게 우리가 네 가문을 멸문시켰다. 너도 알다시피 일이었을 뿐이다.
그런 말을 듣게 될까 봐?
애써 그 모든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슨 생각을! 저깟 술수에 넘어가지 마!’
말 그대로 교묘한 이간질일 뿐이다. 자신과 살왕의 사이가 벌어졌다는 정보를 토대로 한 마교 놈들의 이간질.
‘악독하구나!’
칼날을 자신에게서 검무극으로 향했지만, 그 칼의 손잡이를 잡은 손이 묻고 있다.
‘이 또한 직면한 일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검무극이 물었다.
“이간질이 좀 됐소?”
명신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버럭 내뱉는 말에 감정이 실렸다.
“이간질하는 순간은 짜릿하지? 하지만 그거 아나? 그 한순간의 짜릿함으로 내 신뢰를 영원히 잃었네.”
명신이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은 그 옆에 나란히 걸었다.
“당신 가문에 대해서 옛 청부록에 남아 있을 거요. 만약 당신 수장이 없애지 않았다면, 언젠가 당신이 그것을 보기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명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상대의 술수라고 여기면서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건, 자신이 아는 살왕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공허한 사람이 왜 자신을 구한 것일까?
그의 내면 얼음 절벽에 왜 자신만을 붙여둔 것일까?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검무극과 감정싸움을 하는 바람에 한 가지는 좋았다. 그를 손쉽게 쉼터까지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
그 작은 거리는 여러 여행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소.”
검무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고, 명신은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가끔 오는 곳이네.”
하지만 명신의 마음에서는 두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어서 임무를 끝내고 싶은 욕망.
갑자기 술맛이 떨어졌소, 이러면서 검무극이 떠나버리기를 바라는 마음.
이렇게 사람을 심란하게 하고 열받게 하는 자인데, 그가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왜 자꾸 드는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가라!’
하지만 검무극은 먼저 성큼성큼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죽음의 함정을 향한 그의 발걸음은 너무나 경쾌했다.
“새 비단이 어제 들어왔습니다. 보고 가세요!”
포목상의 점원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다루의 주인으로.
뛰어다니는 꼬마를 손짓해 부르는 여인으로.
가판을 메고 호객하는 상인으로.
또 다른 모습들로.
살수들은 완벽하게 이 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수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특급 살수들이다.
살인의 극에 달한 진짜들의 이 완벽한 향연을 과연 너는 버텨낼 수 있느냐?
명신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비수도 선물로 받았으니 오늘은 내가 사겠소. 다음에는 당신이 사시고. 우리 화해도 하고, 오늘은 신나게 마십시다.”
미안하지만 다음은 없네.
“저기 저 주점이오?”
“그렇네.”
“벌써부터 분위기가 딱 좋소. 진작 여길 오자고 하시지.”
그렇게 두 사람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손님들과 잡담을 하고 있던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장이 두 사람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중인장이 명신에게 아는 척을 했다.
“편하신 자리에 앉으십시오.”
검무극이 주인장에게 말했다.
“내가 주점 주인장 얼굴만 보면 압니다. 술맛이 좋은지, 안 좋은지.”
검무극이 주인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술맛을 결정했다.
“이거 이거 평생 잊지 못할 맛일 것 같은데요?”
그러자 주인장이 활짝 웃으며 손뼉을 짝짝 소리 나게 쳤다.
“오늘 끝내주게 모시겠습니다!”
검무극이 고른 자리는 객잔 중앙 자리였다.
함께 자리에 앉으며 명신은 내심 검무극이 자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방심하고 있군.’
보통 의심스러운 상황이면 본능적으로 벽을 등지고 앉기 마련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사방이 뻥 뚫린 곳에 앉았다.
명신이 객잔 내부를 돌아보면서 몇몇 구석 자리를 쳐다보았다.
‘결과적으론 잘한 선택이지.’
왜냐하면 벽을 등지고 앉을 것에 대비하여 벽에 여러 장치를 준비해 두었으니까.
한데 검무극이 가운데 앉으면서 몇 가지 장치가 무력화된 것이다.
‘우연이겠지?’
설마 벽에 그런 것들이 있다는 걸 알고서 여기 앉은 것은 아닐 테니까.
검무극이 주인장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제일 좋은 술과 제일 잘하는 요리를 내오시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주인장이 신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여기 분위기가 참 좋소.”
검무극의 말에 명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를 이곳에 데려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이곳을 떠나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갑자기 마교에 일이 생겼다며 떠나버렸으면. 그럼 자신은 임무를 수행하고 검무극은 살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기분이 다 안 풀리셨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간질은 두 번 다시 하지 말게.”
앞으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겠지만.
검무극은 끝까지 자신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렸다.
“내가 말한 건 사실이오. 본교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지.”
명신은 굳은 얼굴로 객잔 밖을 쳐다보았다.
정말 명부가 우리 집안을 멸문시켰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릴 게 아니라 이 사실을 더 파고들어 물어봐야 하지 않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소교주가 여기서 죽게 해선 안 되지 않나? 오히려 소교주를 도와 함께 싸우고 가문의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나?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명신은 또 외면하고 있었다. 애써 믿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건 마교의 간악한 간계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하면서.
‘나는 혹시 그가 두려운 건가?’
그의 시선이 주방에 있는 주인장, 살왕을 향했다.
죽음이 두려운 건가? 아니면 그와의 관계가 깨어져 버리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그때 검무극이 속마음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불쑥 물었다.
“변화가 두렵소?”
“…….”
“당신을 이해하오. 한번 사로잡힌 것에서 벗어나는 건 정말 쉽지 않지.”
여전히 명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검무극의 저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왕에게 왜 자신을 구했느냐고 묻지 않았던 것처럼, 이 인생이 복잡하게 얽히지 않고 그냥 이대로 흘러가기만을 바라며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그때 술을 가져오던 주인장과 명신이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얼마 만이죠?”
“한 서너 달 된 듯합니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살왕의 모습이 낯설다. 그는 완전히 이곳 주점의 주인장이 되어 있었다.
지금껏 살왕의 살행을 여러 번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역할에 몰입한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 소교주는 반드시 죽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명신의 시선 곳곳에 숨겨진 죽음의 함정들, 외부에서 대기 중인 특급 살수들까지.
“자, 술부터 드시고 계시면 바로 요리가 나올 겁니다.”
검무극이 살왕에게 술을 권했다.
“가시기 전에 내 술 한잔 받고 가시오.”
“좋습니다.”
살왕이 술을 받았다.
“장사는 얼마나 하셨소?”
“오래 했습니다.”
“역시! 처음 뵈었을 때, 느낌이 딱 왔지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명신은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 살왕이 암습을 가할지 알 수 없었다. 살왕의 암습은 언제나 자신의 예상을 벗어났으니까.
지금? 저 술잔을 내려놓는 순간? 아니면 술잔을 내려놓고 검무극에게 술을 따르는 순간?
살왕의 한 수가 얼마나 빠른지 안다. 거기에 자신까지 있다. 암습하는 순간, 자신도 그를 도와 일격을 가할 것이다.
명부 제일 살수와 제이 살수의 합공을 과연 저 젊은 소교주가 버텨낼 수 있을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에 있는지도 모르고, 저 소교주는 태평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장사를 오래 하셨으니 온갖 일을 다 겪으셨겠소.”
“그런 편이지요.”
지금 검무극은 허점투성이였다.
하지만 살왕은 그를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닌데.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아니면 더 극적인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아니다, 살왕에게 그런 감정은 없다. 그래서 그가 최고의 살수인 거다.
‘한데 왜?’
그때 검무극이 살왕에게 생뚱맞은 말을 꺼냈다.
“경험 많으신 주인장께서 고민 상담 좀 해주시오.”
검무극의 말에 명신이 살짝 긴장했다.
‘고민 상담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 말은 엉뚱함을 넘어서 명신에게 충격적인 말이었다.
“어떤 사람이 뒤늦게 원수가 누군지 알아냈소. 한데 알고 보니 오랫동안 친분을 맺은 사람이었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오?”
명신은 설마 저 말을 주점 주인장에게 할 줄은 몰랐다.
‘설마? 주인장의 정체를 눈치챈 건가?’
아니다. 눈치챘다면 오히려 이런 말을 안 해야 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상식을 벗어난 말이었기에 명신은 혼란스러웠다.
살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어떤 친분이냐가 중요하겠군요.”
“한쪽은 이용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생명의 은인이라 오해하고 있소.”
그러자 대번에 살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원수인데 이용까지 했다고요? 정말 악독한 자로군요. 저라면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내 힘이 부족하면 살수를 사서라도 복수해야죠.”
이 질문을 한 검무극도, 대답에 살수란 말을 거침없이 언급하는 살왕도, 명신은 두 사람 모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왕의 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복수할 거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명부 손에 자신의 가문이 멸문했다는 사실은 분명 소교주의 이간질이 틀림없다.
반대로 소교주 말이 사실이라면? 설마 살왕은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그 사실조차 잊은 건가?
물론 그냥 질문에 충실한 대답이었겠지만, 지금 명신의 마음은 한 곳을 쿡 찌르면 열 곳의 몸을 비틀만큼 복잡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드십시오.”
살왕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자 명신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이야기를 왜 저 사람에게 하나?”
“제삼자에게 물어야 객관적으로 판단해 주지 않겠소?”
“이미 자네의 말부터가 객관적이지 않은데?”
검무극이 명신을 쳐다보았다.
“이해하오. 나를 만난 건 불과 며칠이지만, 그와 함께한 세월은 수십 년일 테니까.”
검무극이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명신은 긴장했다.
저 술에 독이 들어 있을까?
전혀 의심하지 않고 검무극은 술잔을 비웠다.
“하지만 며칠의 시간이 수십 년의 시간을 이길 수도 있을 거요. 이쪽은 진실이고, 저쪽은 거짓이니까. 거짓은 백 년을 쌓아도, 하룻밤 진실보다 못할 테니까.”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해야 했다.
“자넨 정말 집요하군.”
“인정하오. 아마 내가 이렇게 집요한 사람이기에 당신 보고서에 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었겠지.”
명신의 눈빛이 떨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검무극을 보는 내내 본능이 계속 소리쳤으니까. 저 사람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평생 살수로 살면서 이 본능을 믿었으면서, 왜 이 순간은 믿지 않느냐고.
“그리고 이건 앞서도 말했듯 나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오. 끝내 당신이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나는 이토록 노력했다고 스스로 위안할 테니까. 나는 집요한 사람임과 동시에 이토록 이기적인 사람이오.”
그러는 사이 살왕이 안주를 완성해서 가져왔다.
검무극이 젓가락을 들어 요리를 맛보았다.
“맛있소!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소!”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자자, 한 잔 더 받으시오.”
“이러면 안 되는데.”
검무극이 주인장에게 점점 더 마음을 푸는 걸 보며 명신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소교주를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소교주를 도울 것인가? 돕지 않을 것인가?
이 결정에 소교주와 자신의 생사와 운명이 달려 있었다.
소교주를 믿는다면?
아마 자신은 죽게 될지도 모른다. 살왕이 자신을 살려둘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저 소교주는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운이 더 좋다면 복수에 성공하고 한 닢짜리 청부를 받는 꽤 괜찮은 살수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명신에게 살왕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놈을 지키는 자가 있다.
왜 살왕이 허점투성이인 소교주를 암습하지 않는지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은신술이 보통이 아니다.
명부의 이인자인 명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실력이었다.
―그놈을 먼저 해치워야 한다.
그리고 이 순간 검무극에게도 휘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놈이 제 존재를 알아차렸습니다.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인지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처음부터 검무극은 이곳 주인장이 살왕임을 알고 있었다. 명신이 이끄는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그뿐이었으니까.
검무극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명신 앞에 놓았다.
그것은 앞서 내밀었던 동전 한 닢이었다.
그 동전을 명신도 보고, 살왕도 보았다.
명신은 이제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맞서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걸 묻는 자신의 모습이다.
동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명신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주인장, 나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소.”
살왕은 완벽하게 주점 주인장을 행세하고 있었지만, 이 약속되지 않은 명신의 행동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오늘 이 미천한 사람이 인기가 많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주인장은 친구가 있으시오?”
난데없는 질문이지만 살왕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친구 만들 시간은 없지만, 그래도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는 어떤 친구요?”
“마음도 약하고 귀가 얇아서 남들에게 잘 속는 친구지만, 그래도 좋은 친구지요.”
아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마교 소교주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아니면 그에게 현혹당했다고.
하지만 명신은 오해를 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주인장은 그 친구를 속여본 적 있소?”
“무슨 의미이신지?”
“말씀하시지 않았소? 마음도 약하고 귀도 얇다고 하지 않으셨소? 본의 아니게 주인장도 그 사람을 속일 기회가 있었을 거 아니오.”
“글쎄요.”
살왕이 잠깐 생각에 잠기던 그 순간.
명신이 살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리 가문을 멸문시킨 곳이 명부였습니까?
이 질문을 하기에 적절치 않은 순간임을 알았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의미가 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네 마음에 마가 끼었구나.
돌아오는 살왕의 대답에 명신이 다시 물었다.
―물었습니다. 명부가 우리 가문을 멸문시켰냐고요.
명신은 오랫동안 그를 봐오면서 정말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예상했던, 그리고 걱정했던 그 대답이 나왔다.
―그래, 명부가 처리했다.
명신은 이 무서운 진실에도 놀라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놀랐다.
―너도 알다시피 그건 일이었다. 우리가 아니었다면 다른 쪽에서 맡았겠지. 그리고 잊지 마라. 널 살려준 게 나였다는 사실을.
놀랍게도 이 순간 화가 나는 건 명부가 저지른 짓 때문이 아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솔직하고 당당하게 시인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이 일이 이렇게 넘어갈 일인가?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하지만 이내 살왕을 이해했다.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저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왜 나를 살려줬습니까?”
전음이 아니라 그냥 물었다.
명신이 자신의 선택을 명확히 밝히는 순간이었다.
살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무극이 대신 대답했다.
“거기에 의미를 담지 마시오. 그건 저 사람도 모르는 일이니까.”
살왕과 명신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아버지를 따라 살행에 나온 꼬마 아이의 변덕스러운 마음이었을 테니까. 벌레를 죽이기도 하고, 살려서 통에 넣어가기도 하고. 의미가 있다 한들 뭐 대단한 의미가 있었겠소?”
검무극의 시선이 살왕을 향했다.
“당신도 모르지? 기억도 안 나지?”
바로 그 물음이 끝나던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액!
귀를 찢는 바람 소리.
카아앙!
날카로운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검무극의 눈앞에서 튕겨 나간 강침이 허공을 붕 날아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검무극의 얼굴을 가로막은 한 자루의 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살왕의 벼락같았던 기습을 막은 사람은 은신을 풀고 등장한 휘였다.
살왕과 휘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살왕은 이미 은신한 존재를 인지했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이 공격은 그를 끌어내기 위한 공격일지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살수와 호위.
무림에서 가장 잘 죽이는 사람과 무림에서 가장 잘 지키는 사람과의 만남.
그 상극의 만남 중에서도 양극단에 존재한 두 사람이었다.
“마교주의 호위.”
살왕은 단번에 휘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런 실력을 지닌 호위는 단 한 명뿐일 테니까.
“살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지.”
살왕의 눈빛에 묘한 감정이 실린 이채가 스쳤다.
상대가 자신을 알아봤음에도 휘는 말 없이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휘를 대신해 검무극이 살왕에게 말했다.
“이래도 날 죽일 수 있겠나?”
살왕은 자신의 첫 기습이 실패했음에도, 명신이 진실을 알았음에도, 그리고 천마의 호위 책임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살왕의 두 눈이 투명해졌다. 그의 살기는 일반적인 살수의 그것과는 달랐다. 애초에 아무런 감정을 지니지 않고 태어난 그의 살기는 눈처럼 깨끗하고 얼음처럼 맑았다.
이 기도만으로도 느낌이 온다.
누구도 이자가 내리는 죽음을 쉽게 막지는 못할 것임을.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 되리란 것을.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명신이 탁자에 놓여 있던 동전 한 닢을 들면서 앞서 살왕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저라면 반드시 복수할 겁니다. 내 힘이 부족하면 살수를 사서라도 복수해야죠.”
여전히 살왕은 투명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명신이 천천히 손바닥의 동전을 꽉 쥐었다. 피하기만 했던 자신의 인생을 직면하는 순간이었다.
“이 한 닢의 청부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소? 아니오. 지금부터 이 청부는 나를 위한 청부요. 이 한 닢으로 내게 청부를 맡겼거든.”
명신은 자기 자신에게 청부했다.
돌아가신 부모의 복수를 해달라고.
인생에서 자신에게 하는 첫 청부였고, 마지막 청부가 될 것이다.
이 한 닢의 동전으로 자신의 청부도 받았으니, 이제 남이 주는 한 닢의 청부도 받아야겠지.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리고 이 순간 명신은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후련함을 만끽했다.
내내 직면하지 못한 인생을 지금 정면으로 쳐다보는 중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살왕은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내가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 순간에도, 당신은 고작 그 눈빛 밖에 내게 줄 것이 없나?’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기에 의미를 담지 마시오.
지금까지는 저 투명한 눈빛 속에 자신은 알지 못하는 깊은 마음이 숨겨져 있으리라 여겼다.
또다시 떠오르는 검무극의 말.
―의미가 있다 한들 뭐 대단한 의미가 있겠소?
그래, 저 눈빛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으면 내 인생까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애써 의미를 찾으려고 했을 뿐.
그가 자신을 특별히 여긴 게 아니라, 특별한 자신이 살아남은 것.
마음을 정리하자 명신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곳의 수장이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을 살수로 키웠다.
이것만으로도 그와 끝장을 볼 이유는 충분했다.
그 이전에 검무극에게 알려주었다.
“손님 중에는 다섯 명의 살수가 섞여 있네.”
그 말에 이미 앞선 상황에 바짝 얼어붙어 있던 손님들이 사색이 되었다. 싸움이 벌어진 것도 모자라, 살수들이 손님인 척 섞여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정말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입구 쪽에는 정체가 밝혀진 주인장이 서 있었고, 이 상황에서 움직였다간 먼저 죽음을 맞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고, 바닥에 주저앉는 이도 있었고, 온몸을 떨며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도 있었다.
검무극은 굳이 그들의 안위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건들지 말라는 경고도 하지 않았고, 인질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다는 허세를 떨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에 관해 조사했다면 자신이 그들을 살려주려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그들을 인질로 이용하겠지. 그렇기에 좋은 점도 있다. 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테니까.
명신이 정확히 그 다섯을 지목했다.
“살수는 왼쪽에서부터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저쪽은 살왕과 밝혀진 다섯 명의 살수.
이쪽은 검무극과 휘, 그리고 명신.
그 팽팽한 대치 속에서 검무극과 살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살왕은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는 이 상황 역시 자신이 예측한 여러 가지 것 중 하나라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왜 그들과 손을 잡았소?”
살왕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였기에 그들과 손을 잡은 것일까?
살왕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청부자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살수들의 원칙이지.”
이번 살행의 청부자는 그들일 테니까.
검무극이 천천히 흑마검을 뽑으며 말했다.
“나도 원칙이 있소. 내 마도는 주점의 탁자를 부수지 않는다. 한데 오늘만큼은 그 원칙을 깨야겠소.”
그렇게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휘가 말했다.
“살수는 다섯이 아니라 여섯입니다. 저기 저자까지.”
휘가 지목한 사람은 구석 자리에 혼자 와 있던 손님이었다.
그는 명신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휘는 호위무인 특유의 감각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던 살수를 찾아낸 것이다.
“역시! 아저씨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검무극이 기뻐하자 휘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아직 긴가민가한 자도 남아 있습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정말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의미다. 휘의 눈을 속일 정도의 살수를 손님들 사이에 숨겨두었다는 의미니까.
한편 명신은 자신도 몰랐던 살수의 존재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군.’
원래라면 자신도 이 싸움에 그를 도와 검무극을 죽였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는 살수란 절대 존재해선 안 되었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준비해 둔 자일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살왕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리가 친구가 아니었다면 넌 벌써 죽었을 거다.
더욱 확실해지는 그와의 관계. 이제 자신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친구라서 살아남은 게 아니야.’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호기심에 주워 온 아이가 제 이인자가 되는 게 놀랍고 신기했을 뿐이다. 명부를 위해 그 이인자가 해내는 살행들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게 자신을 살려둔 이유다.
자신이 비참해지기 싫어서 애써 부인했을 뿐. 얼음 절벽까지 만들어가며 애써 의미를 부여했을 뿐.
명신의 마음속에 얼음 절벽을 타고 올라가 정상으로 올라서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제 친구가 아니니, 어디 한번 죽여 봐라!”
명신의 두 눈에 살왕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검무극이 휘를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휘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명신의 뒤를 봐주라는 의미.
이 싸움은 검무극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명신의 싸움이었고, 동시에 휘의 싸움이기도 했다.
세 사람이 싸우는 사이 검무극은 이곳의 살수들을 모두 해치울 작정이었다.
‘최대한 빨리 해치우고 두 사람을 돕는다.’
검무극이 소리쳤다.
“살수로 지목되지 않은 분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리시오!”
그러자 살수들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엎드렸다.
동시에 명신이 살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챙챙!
두 사람의 비수가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었다. 무공도, 실력도.
맹렬하게 몰아붙이는 기세에 밀려 살왕이 주점 밖으로 튀어 나갔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명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음을.
남은 살수들이 이곳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란 자신감 때문에. 이 죽음의 공간에 준비한 것을 마음껏 발휘하라고.
휘가 검무극을 쳐다보았고, 검무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절대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그였지만, 검무극은 눈빛으로 말했다.
저를 믿고, 그를 지켜주십시오. 바로 나가겠습니다.
휘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번에 자신이 검무극의 호위를 자청한 건 그저 그의 생명만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나아가 그 신념까지 지켜주고 싶었으니까.
휘는 소리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장내에 있던 살수들이 일제히 검무극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들의 소맷자락 안에 특별한 암기가 숨겨져 있었다.
살혼뢰(殺魂雷).
명부에서 만들어진 암살용 무기.
살혼뢰는 사용하는 이의 내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위력적인 암기다.
콰콰콰쾅!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암기들.
검무극이 탁자를 뒤집으며 내력을 주입했다. 탁자로 막으려던 그 순간.
슉슉슉!
탁자 바닥에 난 작은 구멍에서 강침이 검무극을 향해 발출되었다.
상대의 공격을 탁자를 뒤집어 막으려 하는 것을 예상한 장치였다.
여섯 살수의 살혼뢰가 이 기습을 위한 위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 숨겨진 한 수는 강력했다.
다행히 검무극의 본능적인 회피는 공격보다 빨랐다.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이 허를 찌르는 공격을 허용할 뻔했다.
파파파파파파팍!
그 와중에도 탁자에 암기가 날아와 박혔다. 살혼뢰는 평범한 암기가 아니다. 그 한 발, 한 발이 철검을 부러뜨리고 돌벽을 뚫어버리는 강력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내력이 주입된 탁자를 부수지는 못했다.
검무극이 탁자를 내던지며 살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살수가 검을 내리치며 탁자를 쳐내던 그 순간!
그 뒤에 검무극은 없었다.
바닥을 미끄러지듯 쇄도한 검무극의 검이 살수의 배를 가르며 지나갔다.
몸통이 잘린 살수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훅 풍겨 나는 피 냄새에 바닥에 엎드린 손님들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검무극을 향해 살혼뢰의 공격이 쏟아졌다.
파파파파파파팍!
암기가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검무극은 허공을 가로지르며 두 번째 살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또 다른 살수가 계산대에 있던 주판을 내리쳤다.
그 순간!
퍼퍼퍼펑!
주판알들이 일제히 전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평범해 보였지만 그것이 분리되어 날아갈 때는 평범하지 않았다.
사정거리 내의 적은 반드시 죽인다고 알려진 그 암기는 바로!
귀산탄(鬼算彈).
수십 개의 주판알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귀산탄의 알은 평범한 암기가 아니었다. 소문으로는 고수들의 호신강기조차 뚫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검무극이 몸을 날렸다.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공격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사선들 사이에서 생명의 공간을 찾아냈다. 허리와 팔, 몸을 크게 비틀고 휘며 날아든 공격을 피했다.
모습은 괴이했지만 단 한 발도 검무극의 몸에 맞지 않았다. 귀산탄의 알들이 온몸을 스치며 지나갔다.
퍽퍽퍽퍽퍽퍽퍽퍽!
바둑알들이 사방 벽을 뚫고 날아갔다.
사방 벽에서 햇살이 수십 개의 선을 만들며 실내로 들어왔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빛의 향연.
얼핏 그 모습은 환상적으로 보였다.
햇빛이 만들어낸 선들 사이로 암기들을 날을 번쩍이며 날았다.
쉭쉭쉭쉭!
최고 실력의 살수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판단은 빨랐고, 행동에 두려움도 없었다.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서로 고생했다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을 텐데.
날아든 암기를 피하며 검무극이 계산대를 넘었다.
귀산탄을 발출한 살수의 턱이 부서지며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그때 또 다른 살수는 주방에 매달린 주렴을 당기고 있었다. 주렴이 당겨지는 순간.
촤아아아아악!
계산대 위에서 검무극의 머리 위로 화골산이 쏟아졌다.
치이이이이이익.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지독한 냄새.
앞서 주판 공격과 이 독액 공격은 연계된 암습이었다. 주판 공격을 날린 자를 제거하려 하면, 바로 화골산을 쏟아붓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신형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풍신사보는 이 좁은 곳에서 그야말로 대단한 신위를 보이고 있었다.
또 다른 살수가 달려들며 탁자를 걷어차며 쇄도해 왔다.
그가 탁자를 걷어차는 순간, 탁자가 부서지며 그 위에 있던 물건들이 튀어 올랐다.
탁자에 있던 그릇과 술병들, 요리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중에는 젓가락이 들어 있던 젓가락 통도 있었다.
검무극 앞에서 터진 것은 젓가락 통이었다.
젓가락 통이 충격을 받고, 거기서 젓가락이 튀어 나가면 통이 터지면서 독연이 터져 나오는 장치였다.
상대가 탁자를 부수거나 엎었을 때, 누가 젓가락 통에 신경을 쓰겠는가? 이것 역시 명신이 만든 것이다. 살왕이 이곳에서 명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오늘 준비한 대부분 명신이 개발한 것들이었으니까.
얼굴에 독연을 맞은 검무극이 그대로 픽 쓰러졌다.
탁자를 뒤집으며 공격을 해온 남자도 검무극의 검에 가슴이 베이며 함께 쓰러졌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임무를 해냈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바닥에 쓰러진 검무극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두 명의 살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검무극을 살피던 그들이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검무극의 목에 양쪽에서 비수를 찔러넣던 그 순간!
그들의 비수가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눈을 뜬 검무극의 양손이 그들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검무극의 손은 그들의 손목을 잡고 있는 상태.
그들이 재빨리 다른 손으로 일장을 내리치려던 그때.
검무극이 훅하고 입안에 머금던 독연을 뿜었다.
어찌나 지독한 독인지 두 살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죽음을 맞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지막 남은 살수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인질을 잡아 일으켰다.
“아아악!”
여인을 인질로 잡은 살수가 그녀의 목에 비수를 가져다 댔다.
“검 내려놔. 아니면 이 년은 죽는다.”
“나에 대한 조사 제대로 안 했나 보네. 나는 인질극 벌인다고 검 내려놓는 그런 사람 아닌데.”
말이 끝나는 순간 검무극은 그를 향해 쇄도했다.
쉬이이익.
점멸보로 인질을 붙잡고 있던 살수를 향해 쇄도했다.
살수가 방패로 삼은 인질 여인을 앞으로 떠밀며 뒤에서 검을 내지르던 그 순간.
살이 찢기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안타깝게도 인질과 살수 두 사람 모두 쓰러졌다.
인질 여인의 잘려진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살수의 심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인질 여인은 살수가 죽였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검무극이 죽였다.
죽어가던 살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죽은 인질 여인의 손에 비수가 들려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도 살수였다. 앞으로 떠밀린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 기습을 가했다. 오히려 그녀의 무공실력은 인질로 잡았던 살수보다 더 강했다.
오늘 이곳에 준비된 살수들의 핵심이 바로 그녀였다.
사전에 몰랐다면 검무극조차 피할 수 없었을 만큼 의외이자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베고 뒤에 살수까지 베었던 것이다.
검무극은 죽어가는 살수에게 그는 죽어서도 결코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우리 아저씨께서 긴가민가한 자가 남았다고 하셔서.”
명신은 무아지경에 빠진 채 비수를 휘두르고 있었다.
살왕과 맞부딪치는 비수에서 불꽃이 튀었다.
명부 일인자와 이인자의 싸움.
단 한 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싸움이었다.
격돌하는 비수는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살왕과 가벼운 비무는 해본 적이 있지만, 이런 생사대전은 처음이었다.
훅훅훅훅훅!
비수가 빠르게 서로를 찔렀다.
그 공격만큼이나 빠른 보법이 현란하게 움직였고,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경신법으로 상체를 움직이며 날아드는 비수를 피했다.
비수끼리 맞부딪치며 맑은 소리도 냈고, 쇠와 쇠가 긁히는 소리도 냈다.
‘강하다!’
머리나 본능보다도 먼저 명신의 손이 느끼고 있었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살왕의 공격에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반면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 실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싸움을 벌일 수 있는 이유는 기세 때문이었다.
명신은 사생결단의 마음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기세가 아슬아슬하게 실력 차이를 보완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백여 수가 지났고.
한 차례 큰 격타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물러섰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주점 건너편 건물의 지붕이었다.
명신의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살왕은 평온했다. 두 사람에게는 딱 이만큼의 실력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죽음을 각오했기에 명신은 겁나지 않았다.
살행을 나갈 때면 언제나 살행이 실패해 죽는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무인들이 자신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어디에서 나온 살수인지를 살피는 모습.
살수의 시체를 묻어주는 이는 없으니까 그들은 시체를 들판에 버릴 것이다. 그러면 늑대들이 어슬렁거리며 와서 시체를 뜯어먹겠지.
명신은 이것이 살수의 마지막이라 여겼다.
그런데 살왕과 싸우다 죽는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죽음이지.’
그때, 살왕은 건너편 주점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안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모습이 얼핏얼핏 보였다.
“소교주는 저기서 살아나오지 못할 거다.”
명신이 차분히 말했다.
“소교주는 살아나올 거야.”
항상 존대하던 명신이 하대했지만 살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네가 만든 장치들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의미지.”
명신은 그래서 자신을 밖으로 끌어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날 믿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나.”
그걸 알았음에도 이렇게 밖으로 나온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소용없을 거야. 저 소교주에게는.”
검무극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료로 봤을 때의 검무극과 직접 봤을 때의 검무극. 그 두 가지를 합쳐서 나온 결론이었다.
그를 만난 지 불과 며칠이지만,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 대한 보고서는 자신이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물론, 그럴 일은 이제 없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주점에 남으면 살왕도 남을 것이다.
그럼 또 그만큼 어려운 싸움이 될 터. 차라리 자신이 살왕과 시간을 끌 때, 검무극이 저들을 정리하고 나오는 걸 기대했다.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아니면 역시 할 수 없는 선택.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살왕을 직접 죽이고 싶어서였다.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이 은원을 마무리 짓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명신이 등 뒤에서 날아온 암기를 피했다. 죽이려고 날린 암기가 아니라 이쪽을 보라고 날린 암기였다.
어느새 옆쪽 건물 지붕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앞서 명신을 조롱하다가 살왕에게 혀가 잘렸던 혈라였다.
혈라가 표정과 눈빛으로 살왕에게 부탁했다. 저 명신을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자신의 혀가 잘린 게 명신 때문이라 여기는 증오심이 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살왕은 명신과 혈라를 한 차례 번갈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성격상 원래라면 온갖 조롱으로 명신을 자극했을 그였지만, 지금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혈라가 검을 휘두르며 명신에게 쇄도했다.
명신 역시 피하지 않고 비수를 휘두르며 그에게 맞섰다.
살수는 준비하고 계획해서 상대를 죽이는 이들이다. 그래서 상대의 방심이 극에 달했을 때, 힘들이지 않고 그냥 푹푹 찌르고 나와야 한다. 그렇기에 해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살수는 보법을 쓰면 안 된다.
살수는 무공을 쓰면 안 된다.
그것들을 써야 한다는 말은 살행 준비가 미흡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보법을 쓰고 무공을 쓴다는 건 살행에 실패했을 때뿐이다.
그랬기에 대놓고 싸우는 지금은 살수로서 싸우는 게 아니라 무인으로서 싸움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기본기 싸움이었다. 지닌 무공과 암기술, 경공 싸움이었다.
쉬이익!
날아든 검이 명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검날이 얼굴을 스치며 그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데도 명신은 그대로 비수를 찌르며 쇄도했다.
혈라가 몸을 틀어 비수를 피하며 내지른 검도 함께 틀었다.
얼굴 옆을 지나가던 검이 방향을 바꿔 얼굴을 자르려 했지만, 이미 명신은 몸을 낮추며 혈라의 배를 찔러가고 있었다.
챙챙챙!
혈라의 검이 다시 방향을 바꾸며 그 공격을 막아냈다.
명부를 대표하는 살수답게 그들의 싸움은 대단했다.
움직임은 바람 같았고, 공격할 때는 맹수처럼 용맹했다.
짧게 끊어지는 쇳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점차 검이 비수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근래 살수로 더 잘나갔기에, 명신을 이길 자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이 싸움은 살수로서의 싸움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싸움이었고, 그는 기본기에서 밀렸다.
‘젠장! 네놈에게는 절대 안 진다!’
하지만 혈라는 점점 더 밀리면서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혈라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혈라는 자신이 진정한 이인자라 여겼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잘린 혀보다 더 큰 실력 차이가 있었다.
혈라가 비장의 한 수를 발휘하려 했지만, 명신은 큰 수법을 쓸 때 생기는 그 찰나의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푹! 푹! 푹!
명신의 비수가 빠르게 혈라의 가슴을 연이어 찔렀다.
“크에엑.”
혈라가 왈칵 피를 토했다.
그의 시선이 살왕을 향했다. 왜 도와주지 않느냐는 원망의 눈빛이 담겼지만, 살왕은 그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명신과의 싸움 때부터 그는 휘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 휘는 놓치지 않고 치명적인 공격을 해 올 것이다.
마교주의 호위.
앞서 명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휘 때문이었다.
섣불리 죽이려 들다간 나도 죽는다.
상대는 반드시 이 본능적인 위기감을 현실로 만들 실력자였으니까.
그때였다.
파파파파파팍!
건너편 주점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귀산탄이 터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멍으로 짙은 피 냄새가 풍겨 나왔다. 안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명신은 혈라의 시신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도 알고 있었다. 살왕이 왜 혈라와의 싸움에 난입하지 않았는지. 휘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느꼈다.
그랬기에 이 순간 검무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는 정말!’
말만 친구하자가 아니었고, 말만 살려주겠다가 아니었다.
살왕은 말없이 주점을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네 복수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청부를 넣은 사람이어야지.”
“그렇지.”
명신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런데 왜?”
명신은 살왕의 말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왜 나를 배신했나?
명신은 살왕이 진심으로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화가 나지 않았다. 저게 살왕이란 사람이었으니까.
살려주고 살수로 키워주기까지 했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고 배신을 할까?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인간의 복잡하면서도 폭넓은 여러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는 너는 왜 아버지를 죽였나?”
살왕의 투명한 두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하지만 명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좋다. 고수 간의 싸움에서는 상대가 분노하면 할수록 더욱 유리하니까.
“그런 말 들으니 기분 나쁘지? 네가 아버지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듯, 나도 마찬가지다.”
살왕은 말없이 자신을 응시했다.
명신은 자신이 살왕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이유가 저 투명한 눈빛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이라는 느낌보다는 순수하다는 느낌.
자신도 모르게 그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거다. 때론 외모가 주는 심상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설 때가 있었으니까.
살왕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눈빛에서 반드시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읽었다.
명신도 비수에 묻은 혈라의 피를 털어내며 맞서 걸어갔다.
굳이 시간을 끌자면 이런저런 대화를 유도하면서 끌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 복수는 검무극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해 싸워보는 거다.’
두 사람이 다시 맞붙었다.
챙챙챙챙챙챙!
예상한 궤적과 예상하지 않은 궤적이 뒤섞였다.
실력으로 막고 본능으로 막아야 할 공격이 이어졌다.
내공에서 밀리며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지만, 명신은 이를 악물고 싸웠다.
일인자의 무서움이 있다면 이인자의 무서움도 있는 법이지만, 이 명백한 실력 차이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명신의 팔에서 피가 튀었고.
쉬이이익!
이어진 공격이 명신의 심장을 찌르려던 그때.
한 자루의 검이 살왕의 비수를 쳐냈다.
그의 비수를 쳐낸 사람은 은신을 풀고 나타난 휘였다.
살왕이 명신을 찌르려던 이 순간은, 그를 직접 공격할 기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명신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 확실했기에 그를 지켜주는 선택을 한 것이다.
명신이 재빨리 상처의 혈도를 눌러 지혈하며 말했다.
“당신 신세는 지고 싶지 않았는데. 고맙소.”
하지만 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교주의 명령이기에 명신을 지켜주는 것일 뿐, 이 살수에게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없었다.
명신이 다시 일어나서 싸우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뭔 준비를 이렇게나 많이 했소? 나, 죽을 뻔했다니까!”
검무극이 주점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살왕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빨리 주점을 정리하고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검무극은 긁힌 상처조차 없는 멀쩡한 몸이었다.
사실 놀라기는 명신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놀람을 감추며 명신이 물었다.
“준비된 것들 어떻든가? 대부분 내가 만든 것들인데.”
“당신이 만들었다는 걸 알았다면 휘 아저씨께 당신 살려주라는 부탁 안 했을 거요.”
명신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질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암기가 뛰어났다는 칭찬을 하고 있음을.
과연 이 무림에 이 상황에서 이런 여유로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 죽음의 주점에서 빠져나왔으면 농담이라도 한마디 자만심을 드러낼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상대방을 추켜세워주고 있었다. 진짜 자존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졌다.’
검무극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새파란 청년에게 존경심이라니? 하지만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으니까.
“많이 다쳤소?”
검무극의 물음에 명신은 이제 이 싸움을 이들에게 넘겨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싸우겠다고 우기지 않았다.
너무나 아쉽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살왕을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괜한 고집은 휘나 검무극에게 폐만 끼치게 될 거다. 살왕은 자신이 생각한 실력보다 훨씬 강했다.
명신이 훌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망치나 두드리던 몸으로 싸우니 힘들었네. 난 잠시 쉴 테니 자네가 상대해 주게.”
그러자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려 명신이 서 있던 자리로 올라섰다.
“고맙습니다, 아저씨.”
명신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무사히 완수한 휘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검무극이 뒤에 서자 휘의 표정이 달라졌다. 지켜야 할 대상이 검무극이 되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뒤에 누가 서 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이들이 바로 호위 무인들이었으니까.
휘의 등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느꼈다.
살왕과의 싸움을 휘가 바라고 있음을.
이 싸움은 그야말로 두 개의 상반된 운명이 만들어낸 필연이었다.
‘휘 아저씨가 싸워야 한다면?’
자신이 그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검술만큼이나 잘하는 것으로.
검무극이 지붕 아래에 서 있는 명신에게 물었다.
“당신 수장이 왜 그들과 손을 잡은 줄 아시오?”
“모르겠네. 그대는 알고 있나?”
“그들이 제안했을 거요. 세상의 모든 살수의 왕이 되게 해줄 거라고. 밤의 지배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명신은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 살행에 미친 사람이었으니까. 오직 그 조건만이 통했을지도 모르지.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겠지만, 결국 칼잡이로 쓰겠다는 말 아니겠소?”
투명한 눈빛이 꿈틀하는 걸 보면서 검무극은 본격적으로 살왕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지배자가 어디에 있겠소? 낮의 지배자에게 고개 숙이는 밤의 지배자? 정말 멋대가리 없소. 지배자는 무슨! 한낱 도구에 불과하지.”
검무극은 살왕을 자극하는 말을 연이어 내뱉었다. 싸움에 앞서 그의 마음을 뒤흔들려는 것이다.
“그는 남의 인생을 흉내 낼 줄만 알았지, 스스로 자신이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는…….”
바로 그때였다.
카아앙!
두 개의 검선이 동시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나의 검선이 검무극의 몸을 양단하려 했고, 다른 검선은 날아든 공격을 막는 검선이었다.
살왕의 공격을 휘가 막은 것이다. 검무극을 죽이려는 공격이 아니라, 그 입 닥쳐라! 하는 경고성 공격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입을 다물면 검무극이 아닐 것이다.
검무극은 어떤 공격도 휘가 막아줄 거라는 듯, 편안한 얼굴로 계속 살왕을 자극했다. 이번에는 명신을 이용해서 자극했다.
“저 사람이 왜 당신의 원칙을 깨려는지 아시오?”
이건 순수하게 명신도 궁금했다.
“왜인가?”
“질투가 나기 때문이오. 일인자인 그는 아무런 원칙도 없이 살인만 저지르는데, 이인자인 당신은 원칙을 가지고…….”
콰콰콰콰쾅!
살왕의 소맷자락에서 살혼뢰가 발출되었다. 앞서 주점에서 상대했던 살수들의 것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휘의 검이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며 날아든 암기를 모두 쳐낸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명신은 깜짝 놀랐다. 저 거리에서 살혼뢰의 암기를 쳐내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으니까.
‘마교주의 호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구나.’
휘와 살왕이 서로를 응시했다.
이 싸움에 다른 이유는 불필요했다. 서로 가장 싫어하는 존재였으니까.
무림을 대표하는 상극의 싸움.
언제나 과묵하기만 하던 휘가 오늘만큼은 할 말을 했다.
“살수들은 호위들을 무시합니다. 우직하게 지키기만 할 줄 안다고 여기지요. 그래서 오늘 저자에게 알려줄까 합니다.”
호위와 살수는 결국 한 동전의 앞뒷면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마음먹으면 얼마나 잘 죽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십시오, 아저씨.”
휘가 흥분한 상태였다면 말렸겠지만, 그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이 싸움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싸움이 아니었다.
평생을 호위로 살아온 한 충직한 남자가 살수에게 하는 엄중한 경고였고 상극의 두 운명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충돌이었다.
“살수들이 갈 곳은 지옥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아저씨.”
검무극의 말이 끝나는 순간, 휘는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적을 향해 쇄도하는 휘.
항상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만 보였던 그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살왕 역시 피하지 않고 비수를 휘두르며 맞섰다. 그의 두 눈은 더욱 투명해졌고, 그 투명함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실렸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상대를 인정하고 있었다.
싸움 시작을 알리는 검과 비수가 부딪치는 맑은 쇳소리.
두 사람 모두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무인들이다.
그들은 은밀히 움직여 목적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이 싸움은 그런 두 사람의 싸움이었다.
휘의 검술은 천마의 호위 책임자들에게 전수되어 내려오는 절세무공.
마령수호검법(魔靈守護劍法).
마령수호검법은 쾌검술에 기반하고 있었다. 호위 무인 특성상 반응이 빨라야 한다. 호위 무인들이 받는 첫수는 언제나 기습이었으니까.
반면 살왕이 익힌 무공은 삼백 년 전 살수의 제왕이었던 사령제(死靈帝)의 독문무공.
암살비격술(暗殺匕擊術).
그는 살수계의 전설로 알려진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휘는 살왕을 거칠게 몰아붙였다.
검무극은 평소 평온한 모습만 보였던 그에게 이런 거친 면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오늘의 휘는 후퇴를 모르는 저돌적인 싸움꾼 같았다.
검과 비수가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불꽃이 터져 나왔다.
암살비격술 역시 쾌에 기반한 무공.
그랬기에 두 사람의 격돌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방심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공방들.
촤아악.
휘가 만들어낸 검선이 반원을 그리며 살왕을 절단하려 했다.
공격을 막은 살왕이 비수를 연속해서 내질렀다. 순식간에 내지른 세 수는 그야말로 상대의 요혈만을 노렸다.
검으로 공격을 막은 휘의 신형이 허공으로 튀어 올라서, 위에서 아래를 향해 연속해서 살왕을 찔러 갔다.
살왕은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그 역시 펼치는 무공에 걸맞은 대단한 보법을 구사했다.
집요하게 목숨을 노리는 살왕.
그 살왕의 몸통을 잘라버리려는 휘.
주인의 살심을 가득 담은 검과 비수가 만나서 빠른 곡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를 냈다.
챙! 챙챙! 채채채채챙!
그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둘의 공방이 너무 빨라서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사방에서 불꽃이 튀었다.
빠르게 펼쳐지는 방어검법과 암살술의 대향연.
상대를 스치고 지나가고 뛰어넘고, 들어가고 물러나고, 부딪혔다가 떨어지고. 그들의 몸도 검과 비수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칼날이 서로의 살갗을 스치며 피가 튀었다.
대체 저 무공으로 어떻게 조용히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휘는 화려하고 멋진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휘의 기세에 살왕은 밀리고 있었다.
평생 먼저 공격하지 않았던 휘의 무공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린 죽이지 않았을 뿐이다.
살왕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상대가 강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신은 앞서 자신이 살왕에게 살아남은 것은 전적으로 휘 덕분임을 새삼 느꼈다.
휘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기에.
그것을 감지한 살왕이 경거망동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살왕도 보통이 아니었다.
이렇게 대단한 휘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박빙의 실력.
휘가 이길 것을 염원하고 확신하면서도 검무극은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아저씨!’
만약 적이 살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긴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휘의 싸움이니까 끝까지 그에게 맡겨야 하지 않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휘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곧장 개입할 것이다.
나중에 휘에게 원망을 듣더라도,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들 거다.
휘와 살왕.
애초에 휘와 살왕의 목숨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천 명의 살왕이라도, 아니 중원의 모든 살수라도 휘와는 바꾸지 않을 테니까.
문득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휘를 앞세울 거면 네가 책임져라.’
이 순간은 정말 휘를 앞세우고 있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
바로 그때였다.
검무극의 등 뒤에서 누군가 기습했다.
뒤로 돌아서며 검을 휘둘러 암습을 막아낸 검무극이 상대에게 쉿하는 시늉을 했다.
“잠깐만!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서.”
검무극이 다시 휘와 살왕이 싸우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휘와 살왕의 싸움에서 긴박한 순간이었다.
살왕의 손에서 뭔가가 터져 나왔다.
파파팍!
왼손에 감춰둔 손가락 굵기의 작은 원통에서 강침이 발출된 것이다.
챙챙챙!
날아든 암기를 검으로 쳐내며 휘가 위로 날아올랐다. 휘는 이 기습이 다음 공격과 연계되리라 예상했기에, 날아오르며 먼저 공격을 가했다. 방어를 공격으로 대신한 것이다.
파파파팍!
예상치 못한 반격에도 살왕은 당황하지 않고 공격을 피했다.
휘는 살왕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살수가 이런 정면 대결을 펼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싸우고 있었으니까.
휘가 기습을 무사히 넘기자 그제야 검무극이 뒤쪽 살수를 쳐다보았다.
이미 검무극의 검은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검무극이 쉿, 했다고 살수인 그가 그냥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재차 공격을 가하려던 그때, 검무극이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심장을 찔러서 죽인 것이다.
검무극이 고개를 돌려 길거리를 쳐다보았다. 곳곳에 사람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들 중 상당수가 기회만을 노리고 있을 살수들일 것이다.
검무극이 명신에게 말했다.
“자, 우리도 갑시다!”
살수들을 모두 해치우자는 말이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두 사람의 싸움에 개입할지 모를 일이기에,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는 게 이로운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검무극의 신경은 휘의 싸움에 가 있었다.
겉으로는 이쪽만 보는 것 같지만 양쪽 모두를 신경 쓰는, 그야말로 진짜 경지에 오른 고수만이 할 수 있는 신위가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세.”
명신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마교의 소교주와 같은 편이 되어 살왕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인생이었다.
‘그래, 내가 맡긴 나의 청부를 수행해야지.’
두 사람이 성큼성큼 거리를 걸어갔다.
살수임이 틀림없는데 구경꾼 행세를 하는 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명신의 기억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쉭쉭쉭쉭!
연속해서 날아든 명신의 비수는 피했지만.
뒤이어 쇄도한 검무극의 검은 피하지 못했다.
“다 골라내시오!”
명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부와, 나아가 모든 살수 조직과의 결별을 알리는 고갯짓이었다.
그때 이 층 건물에서 무엇인가 쏟아져 내렸다.
촤르르르르륵.
길거리에 쏟아져 내린 건 별 모양의 암기였다.
바닥에 떨어진 그곳은 뾰족한 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맞혀서 상대를 죽이는 암기가 아니라 바닥에 깔아서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목적의 암기였다. 저 뾰족한 걸 밟으면 즉시 독에 중독될 것이다.
하지만 이 암기는 그런 암기가 아니었다.
“걸을 때 조심하시오!”
검무극의 경고에 명신이 소리쳤다.
“지금 조심하게!”
명신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암기들이 폭발하듯 발사되었다.
팍팍팍팍팍팍팍팍!
폭발하며 튀어나온 날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흔히 이런 암기를 보면 밟지 않으려 조심하지, 이렇게 발사되리라 전혀 예상 못 하는 점을 노린 공격이었다.
경고까지 있었는데 못 피할 검무극이 아니었다.
“설마 이것도 당신이 만들었소?”
“미안하지만 그렇다네.”
“이 기술, 나중에 날 위해서도 써주시오!”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그러자 검무극이 훌쩍 몸을 날리며 말했다.
“우린 반드시 살아남을 거요!”
검무극이 이 층으로 날아갔다. 방금 암기를 뿌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꽈지직.
창문을 부수며 검무극이 그대로 방으로 날아들었다.
쉬이익!
창 옆에서 대기하던 살수의 비수가 검무극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수에게는 더없이 아까운 순간이었겠지만, 검무극은 창을 부수고 들어가는 그 찰나의 순간, 이미 그의 기척을 느꼈다.
그를 죽이는 순간 침상 아래에서 암기가 검무극의 발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 역시 쉽게 피할 수 없을 암습이었지만.
푹! 푹!
이미 검무극은 침상 위에 서서 침상에 검을 박아 넣고 있었다.
이 방에 설계된 공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벽장이 벌컥 열리며 살수의 공격이 이어졌다.
쉭쉭쉭쉭쉭쉭!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아주 작은 쇠뇌였다.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쇠뇌였는데, 위력이 정말 강력했다.
퍽! 퍽! 퍽! 퍽!
검무극이 서 있던 쪽의 벽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살수가 뒤로 쓰러졌다. 그의 이마에 어느새 비수가 박혀 있었다. 명신이 선물로 줬던 그 비수였다.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 두 명의 살수가 명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검무극이 잠깐 이 층으로 날아오른 사이를 노린 습격.
그들은 일반 살수가 아니었다.
일급 살수들 사이 곳곳에 숨어 있던 특급살수들.
바로 포목점의 주인장과 점원으로 위장했던 흑영쌍살이었다.
그들이 좌우에서 검을 내지르며 명신을 합공했다. 주인이고 점원이고, 어차피 상대가 명신이기에 위장은 의미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명신을 없애야 자신들의 위장이 힘을 발휘할 것이다.
특급살수 둘과의 혈투.
팔을 다친 명신이지만, 그는 명부의 이 인자 자리를 동전 던지기로 따낸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붕에서 싸우던 휘와 살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싸우는 소리는 건물 너머에서 들렸다.
검무극의 신형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가 향한 곳은 휘가 싸우는 곳도 아니고, 명신이 싸우는 곳도 아니었다. 다른 건물의 창가에서 누군가 명신을 겨누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그는 살천의 특급살수 업화였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자 명신을 향했던 암기가 검무극을 향해 발사되었다.
차라라라랑!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든 암기는 살수조직 살천에서 사용하는 독문암기였다.
마비연환(痲痹煙環).
가장 높은 살상율의 절대암기.
날아간 암기는 스치기만 해도 무인의 뼈와 살을 찢어발기는 무서운 위력을 지녔다. 하지만 이 암기의 진정한 정체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검무극이 날아든 암기를 검으로 잘라버리는 순간.
잘린 암기에서 마비산이 터져 나왔다. 독이 아니라 일순간 근육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날아가던 검무극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오히려 업화가 창에서 튀어나왔다. 상대가 마비되는 이 짧은 순간이 바로 그가 노린 순간이었다.
쇄애액!
업화가 떨어지는 기세로 몸이 굳은 검무극의 머리통을 양단하려던 그 순간.
쉬이익! 서걱!
검무극의 흑마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와 그의 목을 베었다.
업화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절명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통한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검무극에게는 마비산도 통하지 않았다. 업화는 이런 경우를 경험한 적이 없기에 특급살수인 그가 단 일수에 당하고 만 것이다.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며 비수를 날렸다.
쉭쉭쉭!
세 개의 비수가 날아간 곳은 흑영쌍살 중 한 사람에게였다.
상대가 돌아서서 비수를 쳐냈지만, 싸움의 팽팽함을 깨뜨리기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신은 상대의 팔과 허벅지를 연속해서 찔렀고, 한 명이 다치면서 팽팽하던 싸움이 기울어졌다.
“그러니까 앞으로 선물 많이 만들어주시오! 이렇게 필요할 때 되돌아가잖소?”
이 와중에도 농담이라니?
명신이 뭐라 대꾸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한 명을 해치우고 이제 남은 흑영쌍살과 싸우고 있는 그를 남겨두고 검무극의 신형이 건너편 건물 지붕에 내려섰다.
휘와 살왕은 뒤쪽 공터에서 싸우고 있었다.
검과 비수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격돌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무기를 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눈빛을 보았다.
‘이길 수 있다.’
휘의 실력은 단단했다. 어떤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성벽 같았다. 아마 살왕은 더욱 실감 나게 느꼈겠지.
살왕이 암기를 한꺼번에 날려 거리를 벌렸다.
바로 그 순간!
살왕의 비수가 하얗게 빛났다.
‘위험해!’
그가 큰 초식을 쓰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나서려던 그 순간, 휘의 얼굴을 보았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담담한 그의 표정.
살왕의 비수 끝에서 은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다음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앙!
수십 개의 은빛 강기들이 휘를 향해 쏟아졌다.
비검광우(飛劍光雨).
암살비격술의 비장의 초식 중 하나.
비처럼, 아니 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은빛 강기에 맞서 휘의 검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차차차차차차차착!
검무극은 보았다. 휘의 전방에 빠르게 그려지는 검선들을. 마치 거미가 집을 짓는 모습을 빠르게 본다면 저런 모습일까?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검선들.
어떤 공격도 반드시 막는다는 의지가 담긴 마령수호검법의 절초.
수호검벽(守護劍壁).
검무극은 처음 보았다. 휘가 만들어낸 검벽을.
쾅! 콰앙! 쾅쾅쾅! 쾅쾅!
강기와 검벽이 충돌했다. 은빛 광채들이 산산이 부서지며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살왕의 공격이 막힌 것이다.
설마 비검광우가 막힐 줄 몰랐기에 살왕은 진심으로 놀랐다.
“마교주의 호위.”
그리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소문 이상이군.”
휘는 말 없이 검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휙휙휙휙휙휙휙휙!
살왕의 양옆으로 십여 명의 살수가 떨어져 내렸다. 움직임만 봐도 보통 실력이 아니다.
살왕은 오직 상대를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라는 듯, 살수들과 함께 휘를 향해 달려왔다.
살왕 하나와도 이렇게 박빙의 싸움이었는데.
하지만 휘는 겁을 먹거나 피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해야 하는 게 호위 무인이다.
휘는 뒤에 교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뒤에 소교주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면 두 배, 세 배의 힘을 낼 수 있는 게 자신이었으니까.
“살수는 지옥으로!”
싸움 초반에 검무극이 했던 말을 그가 다시 했다. 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휘가 힘차게 검을 고쳐 쥐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등 뒤에는 교주가 있고, 소교주가 있고, 천마신교 호위 책임자라는 자존심이 있었으니까.
바로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목소리.
“외로워 마십시오, 아저씨! 여기 우리 편이 있습니다!”
다음 순간.
스스스스스스스슷.
휘를 향해 달려가던 살수들이 경악했다.
자신들을 향해 맞서 달려오던 휘의 양옆으로 무엇인가 쫙 펼쳐진 것이다.
그들의 두 눈을 부릅뜨게 만든 그것은!
그것은 무시무시하게 생긴 악귀들이었다.
검무극이 구화마공 대멸식을 펼친 것이다.
휘가 있는 위치의 악귀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악귀들이 분열되면서 휘의 양옆으로 날개처럼 펼쳐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악귀들이 휘와 함께 돌진했다.
악귀들을 보는 순간 살왕은 알 수 있었다.
‘천마의 무공이다!’
이렇게 무서운 악귀가 등장하는 무공은 오직 그 하나뿐일 테니까.
말로만 듣던 천마의 무공을 직접 보자 그 위압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투지가 사그라들었다.
살왕이 그럴진대 함께 내달리던 살수들은 어떻겠는가?
그들의 몸은 움직이고 있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후였다. 그들 중 몇은 발걸음이 느려졌고, 또 누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경험 많은 살수들이었지만, 구화마공의 악귀들을 처음 보자 심장이 얼어붙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살수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비수를 내지르는 자도 있었고, 암기를 발출하는 자도 있었다. 호신강기를 일으키기도 했고, 검기를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공격도 호신강기도 통하지 않았다. 내지른 검은 악귀들에게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피하려고 날아오른 살수들도 보이지 않는 마기에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들의 실력으론 어떤 방법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한 수였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
부서지고 갈라지고 으깨지고. 악귀는 모든 걸 파괴하며 휩쓸고 지나갔다.
남은 사람은 휘와 마주 달려왔던 살왕뿐이었다.
살왕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싸움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긴장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과연 휘의 자리에도 악귀가 있어서 자신을 밀고 들어왔다면? 과연 막아낼 수 있었을까?
차아아앙!
한차례 격돌한 후 휘와 살왕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수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핏물이 되어 있었다.
휘는 그 핏물을 향해 검을 세운 후 정중히 예를 갖췄다. 죽은 자들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였다.
휘는 감격했다. 천마가 무공 수련을 하면 항상 자리를 떠나거나 등을 돌려서 단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쩌다 구화마공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예를 갖췄다.
한데 지금 그 구화마공과 함께 내달렸다. 황송하게도 그 구화마공이 자신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무공과 관련해서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었다.
반면 살왕은 어느새 가라앉은 눈빛으로 주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수하들의 죽음에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다. 텅 빈 그의 마음에 찬 바람만 불 뿐이었다.
휘가 검무극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고마움을 전하는 휘의 눈빛에 검무극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제가 고맙습니다, 아저씨.’
언제나 아버지를 지켜주는 휘에게 그 누구보다 고마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검무극이었으니까.
휘와 인사한 후 검무극은 다시 살왕을 자극했다.
“이해하오. 원래 살수는 겁이 많잖소?”
다른 살수들과 합공한 것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검무극이 그의 감정을 건드리려 애썼지만, 살왕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때, 명신이 말했다.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네.”
그 말에 살왕이 명신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명신에게는 어떤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눈빛이었다.
검무극이 그 눈빛 사이로 끼어들었다.
“사람이 말을 해야지. 싫으면 싫다, 미우면 밉다. 그렇게 쳐다만 보면 어떻게 당신 마음을 알겠소?”
그러자 살왕이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할 말이 뭐가 있나?”
“나는 당신에게 궁금한 게 많은데.”
살왕은 검무극의 말을 기다렸다.
“내 청부금으로 무엇을 받았소? 정말 밤의 지배자 자리를 약속받기라도 했소?”
검무극은 그걸로 살왕을 놀리기도 했지만,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왕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청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 살행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라는 것을.
살왕이 신호를 보내자 살수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에서 걸어 나오고, 지붕 위에 모습을 보이고. 곳곳에 숨어 있던 살수들의 숫자는 수십에 달했다.
“나 하나 죽이려고 많이도 모였소.”
모두 실력 좋고 잘나가는 살수들이었다. 특히 중간중간 특급으로 분류된 진짜 무서운 살수들도 섞여 있었다. 최대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이쪽에는 명신이 있었다.
―왼쪽 지붕 위 두 사람 중에 오른쪽, 우측 골목 입구, 중앙에 털보…….
자신이 아는 특급 살수들을 검무극에게 전음으로 알려주었다.
―내가 죽을까 봐 걱정되시오?
―자네가 살아야 그나마 내 배신이 의미가 있겠지.
명부가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켰다는 걸 알았으니 배신이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워낙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이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나온 것이다.
―배신이라 생각하지 마시오. 저들도 일이고, 당신도 일이잖소?
―스스로 청부했잖소? 당신도 저들도 자기 일을 하는 거지.
명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은 이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챙겨 주고 있었다. 검무극이 던진 그 말은 분명 위로가 되었으니까.
검무극이 살왕과 살수들을 쳐다보며 검을 뽑았다.
“맞소,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그러자 휘가 살왕을 향해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휘의 등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왕만큼은 끝까지 내게 맡겨 달라고.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라고.
‘알겠습니다, 아저씨. 대신 조심하십시오!’
살왕은 투명한 눈빛으로 휘를 쳐다보았다.
휘가 그렇듯, 지금 살왕의 눈에도 휘만 들어왔다.
살왕은 알 수 있었다.
이번 청부에서 가장 큰 난관은 구화마공을 익힌 검무극이 아니라 바로 이 휘라는 사실을.
살수들에게 상대의 무공이 강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어떻게든 약점을 찾아내서 죽이는 것이 자신들이니까.
하지만 이 마교주의 호위에게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그 약점을 보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휘와 살왕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격돌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수없는 생겨나는 검선들.
평범한 선이 아니다. 평생의 수련이 담긴 선들이 상대의 목숨을 향해 그어지고 또 그어졌다.
두 사람이 싸움을 시작했을 때 검무극도 살수들을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일반 살수들과 특급 살수들이 개와 늑대라면, 검무극은 한 마리 거대한 호랑이였다.
살수 중에는 자신이 생사를 관장하는 사신이라 여겼던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사신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상대에게 뛰어든 검무극이 암영보를 발휘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놀란 살수가 검무극의 위치를 찾으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보인 시야는 왼쪽이 아니라 하늘이었다. 덜렁. 이미 검무극의 검이 그의 목을 깊게 베어버린 것이다.
이때, 검무극을 향해 날아드는 검이 있었다.
명부의 살수 중에 가장 검이 빠른 살수였다.
‘됐다!’
자신의 검날이 이미 검무극의 목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검무극의 검이 그의 심장을 갈랐다.
‘어째서?’
그는 죽어가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대가 훨씬 늦게 대응했는데, 어째서?
하지만 살수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검무극이 또 다른 살수의 심장과 목을 연속해서 찌르며 방패로 삼아 밀어붙였다.
뒤에 있던 살수가 시체 뒤에서 날아든 검에 목이 뚫렸다.
쉬익! 쉭!
좌우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날아든 검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검무극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음속의 탄식들.
‘아깝다.’
너무 아슬아슬해서 얼핏 실력 차가 거의 나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오히려 실력 차가 압도적으로 나기에 연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한다는 건 그야말로 최적화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뜻.
쉬이이이이이.
서걱! 서걱!
점멸보로 미끄러져 간 검무극의 검이 양쪽에 서 있는 살수를 모두 베고 지나갔다. 그야말로 번쩍하는 순간 살수들이 쓰러졌다.
더 놀라운 점은 검무극이 이렇게 싸우면서도 휘의 싸움도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잠시 스치듯 보이는 휘와 살왕의 움직임으로, 검과 비수가 맞부딪히는 소리로, 싸움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검무극은 명신까지 신경 썼다.
명신은 잘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지닌 모든 절기를 사용해서 살수들을 상대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장치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가 던진 암기가 터지며 주위에 있던 살수들을 죽였다. 그는 누구보다 살수들의 심리를 잘 알았다.
물론, 살수들도 그냥 당하진 않았다. 그들은 온갖 암기를 다 썼다. 신발에서 칼날이 튀어나왔고, 극독이 발린 암기가 사방을 날았다.
그 난전 속에서 명신은 뒤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느끼고 절망했다.
‘늦었다!’
외부에서 데려온 특급 살수의 공격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에, 이렇게 빨리 뒤를 찔러올 줄 몰랐다.
‘어깨를 내주고.’
명신이 몸을 틀어서 즉사만은 피하려던 그 순간.
쉬이이이이잉!
엄청난 바람과 함께 그의 얼굴을 스치고 뭔가가 지나갔다.
푸우욱!
뒤에서 쇄도하던 살수의 목을 꿰뚫은 것은 검무극의 흑마검이었다.
명신이 고마움을 전할 여유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벌떼처럼 살수들이 달려들었다.
특히 검무극의 손에서 검이 사라지자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기회는 검무극에게도 있었다. 실전에서 하나의 무공을 사용해 볼 기회가.
날아든 검을 피하며 검무극이 주먹을 내질렀다.
늑골이 박살 난 살수가 저 멀리 날아가며 뒹굴었다.
꽈르르르릉!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권마의 벽력수라권이었다.
퍽! 퍼억! 퍽!
날아든 검을 가볍게 피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살수들의 턱이 박살 났고 내부 장기가 터져나갔다. 오히려 검으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세에 질려 살수들이 잠시 공격을 멈췄다.
검무극이 한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휘이이익.
그러자 시체에 박혀 있던 흑마검이 뽑혀서 허공에 떠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몇몇 살수의 마음에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죽음은 언제나 상대의 것이라 여기고 살아온 그들이었는데.
이제 죽음이 허공에 떠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죽음이 허공을 가로질러 검무극의 손에 들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살수들은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검무극과 명신을 죽이려 했다.
검무극에게 검기가 쏟아졌다. 쇠 그물이 펼쳐졌고, 독이 발린 암기가 날았다. 그들이 배운 모든 초식과 모든 암살 기술을 다 쏟아부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대체 피할 곳이 어디에 있을까? 피할 공간이 있었다.
저 상황에서 어떻게 반격을 할 수 있을까? 검무극은 했다.
도저히 나오지 않을 방향을 찾아냈고, 각도를 맞췄으며, 속도를 조종했다.
푸아아아악!
그렇게 마지막 살수까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검무극은 이미 피를 뒤집어쓰고 있기에 쏟아지는 피를 피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언제나처럼 죽은 그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명신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껏 봤던 검무극이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말 많고 농담 잘하던 소교주가 아니라, 전장에서 홀로 살아남은 외로운 투신처럼 느껴졌다.
‘지금 저 모습이 소교주의 본모습이다.’
그때 명신은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외로움이란 단어와 너무나 잘 어울렸던 검무극의 두 눈이 환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다시 밝은 검무극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살아남았군요.”
검무극의 말에 명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청부는 마쳐야 하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감정을 나눌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휘와 살왕이 싸우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싸움도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더없이 고요했다.
살왕도 휘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은신한 채로 싸우고 있었다.
살수의 은신과 호위무인의 은신.
은신에 있어 자부심이 있는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검과 비수의 날만이 번쩍였다.
챙! 채앵!
허공에서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나타난 비수와 검은 다시 사라졌다.
쉭! 파앗!
날이 번뜩일 때마다 누군가의 피가 튀었다.
숨조차 쉬지 않는 존재를 느끼고 상대를 베는 그들이었다.
그야말로 극한의 은신술 실력을 지닌 이들의 대결.
이 싸움에는 그들의 모든 것이 작용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과 감각과 지금까지의 노력과 마음가짐과 운까지.
분명 그 총합이 큰 쪽이 있을 것이다.
서걱! 파아악!
또다시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피의 양으로 볼 때 이번에는 앞서보다 상처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상대방도 피가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순순히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번 베이면 상대도 베고.
피가 튀고 또 튀었다.
두 사람은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기에 검무극과 명신은 누가 더 깊은 상처를 입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저씨!’
싸움이 은신술 싸움이 되어버렸기에 자신이 개입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잘못 개입했다가 오히려 휘가 당할 수도 있었다.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은 휘의 정신을 흐트러뜨릴 가장 큰 변수였으니까.
베이고 또 베이고. 숨고, 드러내고. 느끼고, 또 느끼고. 살을 내주고 뼈를 노리고. 또 숨고.
그렇게 숨 막히는 싸움이 계속되던 그때.
쉬이이잉.
쇄애애앵.
지금까지와 다른 두 개의 칼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리는 지금처럼 살이 베이는 정도의 소리가 아니었다. 살과 뼈를 관통하는 소리였다.
푸우우욱!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주르르륵.
허공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곳에서부터 은신이 풀리며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관통당한 그의 심장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를 찌른 사람의 모습도 서서히 드러났다.
검날을 흐르는 핏물, 그 손잡이를 잡은 손, 내뻗은 팔, 그리고 전력을 다해 싸운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휘였다.
검무극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싸움을 지켜보면서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혼자 올걸. 어떻게 핑계를 대서라도 혼자 올걸.
그렇게 마음을 졸였기에 지금 검무극은 너무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검무극은 이 승부를 가로지른 건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은신술이 더 상위의 은신술이고, 더 정교했는지는 상관없었으리라.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휘가 살왕보다 더 오랜 시간 은신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평생을 묵묵히 은신한 채 아버지를 지켜온 휘였기에.
휘의 은신은 무공이 아니라 그의 삶, 그 자체였으니까.
결국 살왕을 죽은 것은 휘의 헌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살왕이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나왔다.
이번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살왕은 이런 죽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죽더라도 마교주나 저 소교주에게 죽게 되리라 생각했다.
살왕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분노와 짜증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호위 따위에게 죽다니.
휘는 보여주었다.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마음먹으면 얼마나 잘 죽일 수 있는지를.
휘는 생기가 사라져가는 살왕의 투명한 두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의 말은 모든 호위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린 지키는 삶을 선택했을 뿐이다.”
말을 마친 휘는 단숨에 검을 뽑았다.
살왕은 피를 뿜어내며 뒤로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지기 전 그는 이미 선 채로 절명한 후였다.
지금은 명부의 수장에 불과하지만, 훗날 살수들의 왕이자 십이지왕의 일좌(一座)를 차지할 살왕이 죽는 순간이었다.
휘는 그의 죽음에, 그리고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이 싸움에 여운을 남기지 않았다.
촤아아악.
휘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다시 검집에 회수했다.
털어낸 피에 지난 싸움까지 함께 보냈다는 듯, 휘는 살왕의 시체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이제 죽이는 싸움을 끝내고 다시 지키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검무극이 휘에게 걸어가서 정중히 예를 갖추며 말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 호위 무인에게 필요한 말은 이것일 테니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휘는 잠시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살왕이 살수들과 함께 덤벼들 때 구화마공을 발휘해 주지 않았다면 그때 죽었을 테니까.
소교주가 도움이 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 싸움 내내 그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싸웠다. 자신은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일 때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명신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말 많은 검무극과 과묵한 휘.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었는데, 명신은 문득 두 사람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때 문득 명신은 살수들을 죽이고 나서 그 앞에 서 있던 검무극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외로워 보이던 모습이 이 휘라는 남자의 분위기와 닮았음을 깨달았다.
명신이 그 느낌을 전했다.
“왠지 두 분이 닮은 것 같소.”
명신의 말에 검무극이 너스레를 떨었다.
“저와 아저씨의 공통점이야 많죠. 잘생기고, 멋있고, 과묵하고.”
휘는 옅게 웃었고 명신은 과묵하다는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세 사람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명신을 향한 휘의 눈빛도 싸우기 전보다는 부드러워져 있었다. 여전히 살수를 싫어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함께 목숨을 건 동료였으니까.
검무극이 휘의 몸 상태를 챙겼다.
“한데 부상은 괜찮으십니까?”
중상은 피했다는 걸 알지만 휘의 몸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괜찮습니다. 다행히 살가죽이 베인 정도입니다.”
휘가 가슴의 옷자락을 열었다.
“소교주께서 주신 이것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싸울 수 있었습니다.”
어디 극품천잠사 때문에 살왕을 이겼겠느냐마는, 휘는 그렇게 검무극에게 공을 돌렸다.
이게 휘라는 사람이다.
공은 남에게 돌리고, 자신은 조용히 누군가를 지켜주는 삶.
그 삶이 오늘 살왕을 죽였다.
“오늘 멋졌습니다, 아저씨.”
휘가 옅게 웃었다. 검무극은 오늘이라도 실컷 그를 추켜세우고 싶었지만, 휘는 이런 분위기를 멋쩍어했다.
그래서 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곳 뒷정리는 이쪽 지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래 주십시오.”
이제 명신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나는 어쩌면 되나?”
“그걸 왜 내게 묻소?”
그야 자네에게 달렸으니까. 수하가 되라면 되어야 하고, 죽으라면 죽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물론, 그건 검무극이란 사람을 아직 잘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이제 알아서 인생 사셔야죠.”
명신은 잠시 사이를 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이대로 떠나도 괜찮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신은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자유를 주려 한다는 것을.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처럼 내뱉어지는 한마디.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하나?”
검무극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그 막막함을 검무극은 즐거움으로 여겼다.
“이때가 좋지 않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딱 지금. 물건도 고를 때가 좋고, 계획도 세울 때가 좋고. 그러니 이 순간을 만끽하시오.”
자네는 정말.
명신은 검무극을 두고 이 말을, 이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명신이 검무극에게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자네가 말했지. 이 세상 어딘가에 억울하게 부모를 잃은 꼬마가 내민 동전 한 닢을 청부금으로 받아서 악인을 죽여주는 멋진 살수가 한 명쯤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한데 자네가 나를 잘못 보았네. 나는 동전 한 닢 받고 청부를 받아주는 그런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네. 원칙을 정해서 살행을 나섰지만, 그 와중에도 돈 욕심도 많았고.”
검무극은 맑고 깊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미래의 당신은 그런 삶을 살았소. 하긴, 그렇다고 이번 인생에서 또 그런 삶을 살게 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겠지.
그건 회귀 전의 인생이고 지금 인생에서 그는 다른 사람이니까. 이번 인생에서는 우리는 분명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지는 천천히 결정하시오.”
“이미 결정했네.”
검무극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이렇게 쉽게 정해도 되오?”
“그래서네.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고민해 봤자 제대로 답을 못 낼 테니까. 장고 끝에 악수나 두겠지. 이럴 때는 처음 떠오른 생각이 정답이었을 때가 많았네.”
명신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살수로 살았는데 어떤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 다루나 객잔을 열어 유유자적 산다고? 진상들 상대하다 속만 터지겠지.
“작은 철방을 운영하며 살아갈까 하네.”
여러 병장기나 장치를 만드는 일만큼은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잘 어울리시오.”
검무극은 그가 작은 철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런 풍운을 겪은 그를 운명이 그냥 두진 않을 거다. 아마 동전 한 닢을 받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그 철방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라도 어느 날 쇠를 두드리다 문득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오면 본교 철방의 곽 장인을 찾아가 보시오. 내가 소개해 줬다고 하면 만나줄 거요. 그분이라면 답을 알려주시겠지. 일의 권태든, 당신 인생의 권태든.”
검무극의 배려에 명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왜 이렇게까지 내게 잘해주는 건가?”
“꼭 당신을 위해서만은 아니오. 당신 기술을 보면 우리 곽 장인께서도 분명 어떤 자극을 받으실 테니까. 그러면 두 분은 물론이고 본교에도 좋은 일이 되지 않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신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위한 마음이라는 걸.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건 행동으로 답해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가끔 좋은 물건 만들면 자네에게 보내주겠네.”
“우리가 또 주는 선물은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감사히 받겠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명신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그의 마지막 인사는 아주 정중했다.
“소교주께서는 이 무림에 두 번 다시 없을 천마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부디 대업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진심 어린 그의 인사에 검무극도 정중히 예를 갖췄다. 평생을 조직에 매여 살아온 그였으니.
“부디 자유롭게 살아가시기를.”
명신이 고개를 끄덕인 후 휘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그대를 만나 죽이는 삶보다 지키는 삶이 훨씬 더 어렵고 가치 있음을 배웠소.”
휘도 정중히 포권하며 그를 보냈다.
“어디서든 잘 사시오.”
그렇게 명신이 그곳을 떠나갔다.
검무극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았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건, 이렇게 지켜만 봐도 기분이 좋습니다.”
휘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어떤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소교주도 저런 자유로운 삶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검무극이 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두 눈을 가득 채웠던 열망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저씨, 우리도 이만 돌아가죠.”
검무극과 휘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 * *
아버지는 천마신교 안가의 거처에서 뭔가를 만들고 계셨다.
등을 돌린 채 너무 열심히 만들고 계셔서 인사도 드릴 수 없었다.
“설마? 무림을 정복할 수 있는 병장기를 만들고 계신 겁니까?”
거의 그 분위기였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쪽으로 돌아보셨다. 아버지의 손에 들린 걸 확인한 나는 크게 웃었다.
“아니군요. 물고기를 정복하시려는 거였군요.”
만들고 계신 건 낚싯대였다.
이곳 섬서까지 오는 동안 아버지와 낚시 대결에서 두 번이나 이겼다.
돌아갈 때 또 대결하자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벌써 돌아갈 준비 중이신 거다. 아버지는 당연히 우리가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임무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교주님.”
우리가 정식으로 인사하자 아들보다 휘를 먼저 챙기는 아버지였다.
“다쳤군.”
이곳에 들기 전에 휘는 피 묻은 무복을 갈아입었지만, 아버지는 한눈에 알아보셨다.
“그냥 긁힌 상처가 전부입니다.”
휘를 향한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난 아버지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아들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으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세워진 혁낭에서 뭔가를 찾았다. 보통 허공섭물로 물건을 꺼내시던 아버지셨는데, 무슨 물건이기에 직접 찾으시는 걸까?
아버지가 혁낭에서 가져와 휘에게 내민 것은 순백의 작은 병이었다.
“이걸 바르게.”
그것은 바로 천마가 사용하는 금창약이었다. 당연히 일반 금창약과는 비교할 수 없는 효능을 지닌 약이었다.
“안 됩니다. 감히 제가 교주님의 약을 바를 수는 없습니다.”
“바르게.”
단호한 아버지의 한마디에 휘는 더는 사양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인 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깊었다. 휘가 이만큼 다쳤다는 건,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아버지는 아시는 거다.
“아버지! 저도 베인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가소로운 웃음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혁낭이 저절로 열리며 이번에는 다른 병이 나와서 내게로 휙 날아왔다.
“제가 본 허공섭물 중에 제일 무성의한 허공섭물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약병을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너무 하십니다! 이건 저도 있는 금창약이라고요!”
휘에게 준 것은 천마 전용의 최상품이었고, 이건 그 아래 등급의 금창약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휘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싫으면 말고.”
아버지가 다시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잽싸게 그걸 품에 넣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주신 첫 금창약인데 발라야지요. 두고두고 바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사람을 다치게 했으니 너는 벌을 받아야겠지? 따라오너라.”
휘를 앞세울 거면 네가 책임지고 지켜라. 그 약속을 어긴 셈이니까.
“오해십니다. 제가 다치면 아저씨 마음이 힘드실까 봐 안간힘을 다해 안 다친 거라고요! 물론 저만 너무 안간힘을 다한 감은 있습니다만! 아버지!”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안가 인근에 있는 인적 없는 공터로 갔다.
그곳에서 검을 뽑으며 말했다.
“앞으로 약 바를 일은 만들지 말아야지.”
나는 알 수 있었다. 비무를 통해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시려는 것을. 벌이 아니라 상이었다. 둘 다 무사히 돌아온 거에 대한 상이었고, 아버지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와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그리고 오늘의 비무는 남달랐다.
아버지는 일체의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기운이 있었다.
그건 바로 천마검의 기운이었다.
아버지는 오직 검의 기운만을 느껴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모든 기도를 거둬들였다. 아예 단 한 줌의 기운도 없이, 최소한의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느껴지는 천마검의 기운.
느껴지는 흑마검의 기운.
이렇게 흑마검의 기운만을 느끼기 위해 집중한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구화마공을 익힌다고, 시천비술을 사용한다고, 내공을 늘린다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느라 흑마검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문득 회귀한 후 처음 이안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이런 반성을 했었다.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평소에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이 흑마검으로 적들을 상대해 왔는데, 고마움 대신 당연시하고 있었다.
“제가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분명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이렇듯 아버지는 내게 끊임없는 가르침과 자극을 주신다.
그리고 오늘의 가르침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을 펼쳐보아라.”
구화마공을 아버지 앞에서 펼쳤다. 내 성취를 숨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펼쳤다.
아버지는 정확히 내 실력을 알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것이 다시 아버지를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나는 바란다.
‘아버지, 제 구화마공은 아버지의 구화마공과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내 구화마공을 보신 후 아버지가 다시 구화마공 구결을 강론하셨다.
같은 무공이고 여러 번 강론을 들었지만, 오늘은 또 다르게 느껴지는 점들이 있었다.
내 경지가 달라졌고, 아버지의 경지가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똑같은 말이어도 느껴지는 게 달랐다. 정말이지 아버지와의 수련은 한마디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실력이 느는 것 같다.
그렇게 묻고 답하고, 생각하고 다시 펼쳐보고. 그렇게 한바탕 수련이 끝났을 때,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잠시 아버지와 함께 휘영청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무엇이 너를 불안하게 하느냐?”
처음으로 받은 질문이었다. 회귀한 후 아들의 변화를 보며 그 속에 깊이 담긴 불안을 읽으신 모양이다.
“완벽한 아들로 낳아주셨는데, 딱 한 가지 불안증이 있습니다.”
“어떤 불안이냐?”
“아버지와 저를 시기한 거대한 악이 우릴 잡아먹으려 드는 불안증입니다.”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악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우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말한 마도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 아버지.
“너무 커서 못 삼키는 놈을 만날까 겁나는 모양입니다.”
아버지는 이 불안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그럼 입과 배를 키워야지.”
이 간단하고 명쾌한 답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을 한마디로 정의한 말이기도 했다. 그래, 불안은 실력으로 채워야 하는 법.
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벌떡 일어났다.
“네! 아무리 커도 삼켜버리겠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무공수련은 밤새 계속되었다.
우릴 지켜보던 달이 지고, 그 자리를 새벽별들이 물려받았다. 그러다 별들까지 물러가자 아침 여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환하면서도 붉은 기운이 대지를 깨울 때, 한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수련하는 내내 한 사람만은 등을 돌린 채 홀로 서서 우릴 지켜주고 있었다.
하얗게 밤새웠던 무공수련을 마치고 우린 함께 걸어서 돌아왔다.
아버지가 앞장서고 한 걸음 뒤에 나와 휘가 양쪽에서 걸었다.
이번 여정에는 되도록 은신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휘도 함께 걷는 것이다. 은신으로 살왕을 이겼지만, 은신하지 않은 삶도 휘의 삶이었으니까.
“참, 아버지. 돌아가기 전에 금룡세가를 정리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는 걸 알고 계셨다. 셋째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도.
“솔직히 살수들 상대하는 것보다 이 일이 훨씬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만,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정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며칠 만에 가능하겠냐?”
“정상적으로 설득해서는 불가능하겠죠.”
가주와 세 자식들.
이 사람들의 각기 다른 마음과 그 욕심들을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설득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쓰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살짝 스쳤다가 사라졌다. 어떤 방법이냐고 묻지 않으셨다.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니까.
그렇게 거처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낚싯대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고. 줄을 바꿔 보기도 하고, 비수로 대를 깎아내서 균형을 맞추고.
“무림맹이나 사도맹 세작이 이 모습을 보면, 이런 보고서가 올라갈 겁니다. 천마가 뭔지 모를 것을 혼신을 다해 만들고 있음. 그 집중하는 모습으로 볼 때 정말 위험천만한 물건이라 생각되는데 그 모습이 낚싯대로 위장되어 있음.”
내 농담에도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낚싯대에 집중했다.
앞서 무공을 가르쳐 주실 때보다 더 진지했다. 그 신중한 손길에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래도 일부러 져드리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겨야 한다. 그래야 또 낚시하러 갈 기회가 생길 테니까.
* * *
며칠 후 금룡세가 가주전으로 금아린과 검무극이 들어섰다.
아버지의 긴급한 호출로 달려온 것인데 그곳에는 금아혁과 금아종도 이미 와 있었다.
그들뿐만 아니라 세가의 고수가 모두 모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와 일전을 펼치기 직전처럼 모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금아린에게도 검무극과 호위 임혁까지 모두 데려오라고 한 것으로 볼 때, 세가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밖에서 금룡세가 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금천방의 얼굴이 경직되며 긴장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잠시 후, 그곳으로 네 명의 무인이 들어섰다.
그들을 보는 순간 금아린은 아버지가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 이해했다.
‘마인이다!’
상대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마기였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마기를 숨기지 않았다. 특히 가운데 걸어들어오는 마인의 기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고수들!’
과연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중년인이 차가운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천마신교 섬서지단주 대양(臺楊)이오.”
금아린은 더욱 놀랐다. 놀랍게도 그냥 마교 고수가 아니라, 섬서지역을 책임지는 지단주가 직접 방문한 것이다.
대양 뒤로 세 명의 고수만 수행무인으로 따라왔는데, 오히려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겁을 주는 것보다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금천방이 나서서 정중히 인사했다. 마교의 지단주는 절대 소홀히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금룡세가를 이끄는 금천방입니다.”
금천방은 금룡신공을 익힌 고수였지만, 어려서부터 무인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인들을 상대하자 다시 그 공포심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는 애써 긴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본가는 귀교와는 평소 왕래가 없는데 무슨 일이신지요?”
오늘 아침 천마신교 섬서지단에서 급보가 왔다.
가주는 물론 후계자들까지 모두 불러서 기다리라는 기별이었다. 일 처리는 마교다웠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방문 시간만 알려왔으니까.
연락을 받는 즉시 금천방은 무림맹 섬서지단에 도움을 청했다. 한데 무림맹 고수들이 도착하기 전에 마교에서 먼저 들이닥친 것이다.
대양이 장내에 있는 인물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내심 긴장했다. 무공 고하를 떠나서 마교와 잘못 얽혔다간 멸문지화를 면치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대양의 시선이 멈춘 곳은 금아혁이었다. 함께 온 무인 중 하나가 그가 금아혁임을 전음으로 알려준 것이다.
“자네가 금아혁인가?”
“그렇습니다.”
요즘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까칠한 모습을 보인 그였지만, 마인들을 상대로는 감히 함부로 굴지 못했다.
“명신이란 자를 아는가?”
“그게 누굽니까?”
“잡아뗄 생각은 마라. 네가 그의 철방을 수시로 방문하며 그를 만난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금아혁이 어르신이라 부르며 따랐던 이의 본명이 명신이란 것을.
“금룡세가의 막대한 자금이 그에게 흘러 들어간 증거도 있다.”
금아혁이 차분히 설명했다.
“맞습니다. 그분은 본가를 도와 여러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러자 대양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명부의 자객으로 본교에 추살령이 내려진 인물이다.”
금아혁은 물론이고 금천방도 깜짝 놀랐다. 그가 명부의 자객이란 사실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란 점은 그들이 마교와 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금천방이 아들 대신 황급히 나섰다.
“우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소.”
대양이 차가운 눈빛으로 금천방을 주시했다.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금아혁을 우리가 데려가겠소.”
금천방은 사색이 되었다. 아들이 마교에 끌려갔다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반면 금아혁은 명신부터 찾았다.
“그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분?”
대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추살령이 내려진 상대라고 말했는데도 그분이라 표현하고 있다.
금천방이 놀라 아들 대신 나서려던 그때, 대양이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명신은 물론이고 명부의 살수들은 본교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명신이 죽었다는 말에 금아혁의 인상이 굳어졌다.
반면 금천방은 내심 기뻤다. 아들이 그에게 빠져서 살수까지 동원했다. 그런데 아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던 그가 죽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교는 그에게 은인이었다.
“당신들이 죽였소?”
금아혁이 목청을 높였다. 명신이 죽었다는 소리에 그는 흥분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었는데. 금아혁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했다.
금천방이 재빨리 나서서 아들을 말렸다.
“너는 조용히 해라.”
하지만 금아혁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마교가 그분을 음해해서 죽인 겁니다!”
“닥치래도!”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이건 마교 놈들의 음모…….”
금천방이 재빨리 아들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다. 그 상황에서도 금아혁은 눈에 힘을 주고 인상을 썼다. 함께 있던 세가의 고수들이 금아혁의 경솔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 아들놈의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대양은 차가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더욱 아들을 이들에게 보낼 수는 없다. 이렇게 흥분한 상태로 갔다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죽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금천방이 기다렸던 사람들이 도착했다. 무림맹 섬서지단의 무인들이 도착한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금천방이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한데 평소 친분이 있던 지단주가 직접 오지 않고 몇 사람의 수하들만 도착했다.
“지단주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놀랍게도 무림맹에서도 이미 이곳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흘러나온 말은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명부의 살수들은 무림맹에서도 무림공적에 오른 자들입니다.”
무림맹 섬서지단 지단주가 수하들만 보내 이 사실을 전하는 건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대양이 차가운 마기를 뿜어내며 금천방을 압박했다.
“이제 데려가도 되겠소?”
금천방은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마교의 적이자 무림맹에 무림공적으로 오른 자와 관계를 맺었다. 잘못하다간 금룡세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우선은 형을 보내시지요.”
둘째인 금아종이 나섰다. 금천방이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아종이 더는 입을 놀리지 않고 물러났다. 그는 내심 신이 났다. 형이 끝장나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때 금아린은 옆에 서 있던 검무극의 시선을 느꼈다.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한 사람처럼 차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물었다. 그냥 이렇게 있을 거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가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하고 싶소? 나서서 오라버니를 구하고 싶소?
―솔직히 아니에요.
―그렇더라도 끌려가지 않도록 막아야 할 거요. 후계자가 되고 싶으면.
뭔가 상황을 꿰뚫어 보는 듯한 검무극의 조언이었다.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다. 마인들이 금아혁을 데려가려고 다가서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이 상황에서 나서는 게 두렵고 내키지 않았지만, 용기를 냈다. 검무극의 조언을 믿었다.
“지단주님께 부탁이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금아린이 차분하게 대양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조사하더라도 본가 내에서 진행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자넨 우리가 누군지 알고도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우린 무림문파가 아니라 상계에 속한 문파예요. 한데 천마신교에서 무작정 쳐들어와서 본가의 혈육을 데려가는 일은 전 상계는 물론이고 무림인들의 공분을 살 일이겠지요. 더구나 조사를 안 받겠다는 게 아니에요. 이곳에서 받게 해달라는 부탁이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끝까지 할 말을 했다.
“거절한다면?”
약하게 나갈 거라면 애초에 나서지 않았어야 했겠지.
“이번 일을 무림에 공론화하기 위해 애쓸 거예요. 모르긴 해도 단주님의 명성에도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지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금아린은 마교에서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무림맹 무인들까지 와 있는데, 싸움을 벌이진 않을 테니까. 그랬다간 정말 큰일로 번질 테니까.
“가주의 혈육이 관여된 일이에요. 조금만 신중히 처리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요.”
그녀가 정중히 부탁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가 사람들은 뜻밖이란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후계 다툼을 하면 둘째처럼 금아혁을 마인들에게 보내려 할 텐데.
대양 역시 이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넨 오라버니들과 후계 다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나선 건가?”
그러자 금아린이 차분히 대답했다.
“후계 싸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본 세가의 명예가 더 중요하니까요.”
금천방과 세가의 고수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특히 금천방은 크게 감격했다. 딸은 오라비를 구하면서 동시에 세가의 명예까지 지키려 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이 순간은 자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나았다.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대양이 한발 물러났다.
“자식 중에서 제일 낫군.”
생각지 못한 칭찬과 함께.
“좋네, 이곳에서 조사하는 걸로 하지. 우선은 물러가고 내일 조사관을 보내겠네.”
금아린은 정중히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양이 금아혁을 쳐다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이곳을 떠나지 마시게. 떠났다간 자네에게 추살령이 내릴 거네.”
그 말을 남기고 마인들이 모두 물러났다.
무림맹 무인들도 뒤이어 그곳을 나섰다. 적어도 이번 사안만큼은 깊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금천방이 금아린을 보며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의 고수들 역시 그녀를 보는 표정이 부드러웠다.
반면 금아혁을 보는 눈빛은 냉담했다. 그는 금룡세가를 큰 위험에 빠뜨릴 뻔했으니까.
그렇게 어수선한 장내 상황이 정리되는 와중에 검무극과 금아린이 가주전 앞에서 따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 길로 이곳을 떠날 거요.”
“뭐라고요?”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떠나야지요.”
할 일을 다 했다고? 순간 금아린의 마음에 떠오른 한 가지 생각.
“설마? 조금 전의 일들, 당신이 꾸민 일인가요?”
“아니면? 천마신교가 이렇게 순순히 물러났겠소? 당신 칭찬까지 해주면서?”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마교를 움직였다고? 그것도 섬서지단주를? 대체 어떻게?
이 사람, 혹시 마인인가? 하지만 단 한 줌의 마기도 느끼지 못했는데? 아니면 무림맹을 움직여서 마교를 움직인 건가? 정말 무림맹주 손녀가 이 사람을 좋아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났다.
“이번 일로 유력하던 당신 오라버니는 후계자 자리에서 멀어졌소. 반대로 당신이 유력해졌지. 섬서 여러 상단의 빚을 받아내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니까. 또 이번에 나서서 오라버니를 구하고 세가의 명예까지 지켰으니까.”
“하지만 아직 둘째 오라버니가 있어요.”
검무극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거기까지 바라는 거요?”
순간 금아린은 움찔했다. 검무극의 눈빛이 말했다. 그건 당신이 해내야 하지 않느냐고. 모두에게 후계자의 역량을 직접 보여주라고.
“아니에요. 제가 해내야죠.”
지금 그녀의 마음에 걸리는 건 금아종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더라도 마교를 끌어들인 건 실수였어요.”
검무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깊어지며 떠날 때 해주려던 말을 비로소 꺼냈다.
“당신도, 그대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오. 악과 손잡고 자신들의 부를 불리려 했지. 주씨검가 같은 곳을 부당한 계약으로 끌어들이려고도 했고. 아마 다른 잘못들도 저질렀을 거요.”
금아린은 뭐라 변명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는 건지 아시오?”
금아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죠?”
“명부의 살수들이 작정하고 당신들을 노렸기 때문이오. 놈들은 워낙 악독한 자들이라서 어떻게든 그대들을 끌어들였을 거요. 물론 그렇다고 거기 넘어간 그대들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검무극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눈빛과는 달리 엄중한 눈빛이었다.
“비밀 조직을 운영하면서 잘못한 것들을 다 바로 잡으시오. 그걸로 끝이 아니오. 이후 후계자가 되고 나서, 또 가주가 되어서도 지난 과오를 갚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거요. 당신이 그 정도는 할 사람이라 믿었기에, 당신을 선택한 거요.”
금아린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후계자 자리를 약속한 건 상이 아니라 벌이었음을. 자신이 그 벌을 가장 잘 받을 것 같은 사람이기에 선택했음을.
“내가 전에 물었소. 당신은 오라버니들을 죽일 수 있느냐고. 그때 당신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 자, 다시 대답해 보시오. 죽일 수 있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할 것 같아요.”
검무극이 그녀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래서 천마신교는 오히려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요. 그들이 당신들을 주시하고 있는 한, 당신 오라버니들은 감히 당신 자리를 노리지 못할 테니까. 그 사이에 힘을 기르시오. 외부의 감시와 관리가 없더라도,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금아린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던 이 사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었다. 명부를 없애고, 마교를 끌어들이고, 또 이런 기회를 주는 사람임을.
“그럼 나는 가보겠소.”
검무극은 그길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대로 떠난다는 걸 알고는 그녀는 당황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벌써 저만치나 걸어간 검무극이 이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먹을 복 많은 사람으로 쭉 살아가시오!”
금아린이 웃었다. 은하상단주에게 자신을 먹을 복 많은 여자라고 농담처럼 소개했었는데, 그 말을 마지막 인사로 할 줄이야.
“대체 당신 누구죠?”
“난 검연이오.”
인연 연, 자가 아니라 연기 연, 자라더니. 정말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금아린은 검무극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다음에는 연기 연이 아니라 인연 연자로 만나자고요.’
검무극이 안가로 돌아왔을 때, 출발 준비가 한창이었다.
짐은 이미 다 실었고, 휘는 말과 마차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뒷짐을 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셨다.
검무극이 아버지 옆으로 다가갔다.
“금룡세가 일은 마무리 지었습니다.”
검무극은 언제나 그렇듯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상세히 전해드렸다. 아버지는 중간에 뭘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하느냐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최대한 자세히 말씀드렸다.
검무극은 지금까지 해온 이 보고가 아버지와의 관계에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안다. 적어도 이제는 대화 그 자체에는 익숙해졌으니까.
“마무리는 당사자에게 맡겼습니다.”
다행히 이번 일은 무림맹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삼자회합을 통해 배후 세력을 함께 처리하기로 했기에 통천각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것이다.
“결국 본교의 권위와 힘으로 밀어붙여서 해결한 셈이죠.”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우진의 시선이 아들을 향했다.
“본교 힘이 곧 네 힘이지.”
검무극은 기분 좋게 웃었다. 소교주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중요한 건 그런 생각이 아니라.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렇게 표현해 주셔서.
검우진이 먼저 마차에 올라탔고 검무극도 뒤따라 올라탔다.
“섬서야, 잘 있거라!”
검무극의 작별을 신호로 휘가 모는 마차가 안가를 떠나 천마신교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저, 섬서에서 누가 소저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한 번 붙자고 했었는데, 결국 못해보고 떠나네요. 아버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붙어보시죠.”
검우진은 안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젊은 네가 유리한 대결이지 않으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우리 아버지시지.’
검우진의 얼굴에 도도함이 드러났다.
남들은 알아보기 힘든 미세한 표정 변화지만 이제 검무극은 느낀다.
아버지도 남자인 거다.
검무극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석의 휘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잊지 말고 가는 길에 중경에 들러야 합니다.”
은하상단주가 선물로 준 보물창고에 들러야 했으니까.
“제가 거기서 삼십 개 고르기로 했잖아요.”
그러자 곧장 들려오는 검우진의 목소리.
“그런 약속 한 적 없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삼십 개는 너무 많습니다. 딱 열 개만 고르겠습니다.”
“…….”
“사실 열 개도 많죠. 누가 물욕의 화신 아니랄까 봐. 좋습니다. 기분 좋게 여덟 개 고르겠습니다. 마침 운명적으로 본교 마존도 여덟이니.”
“…….”
“그렇죠? 마존하고 선물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다섯 개만 하겠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럼 세 개만요! 제발요!”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고 있던 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살면서 이렇게 많이 미소 지었던 적이 있었을까?
이번 여정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값진 시간이었다. 교주와 소교주의 여행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여행이기도 했다.
교주와 소교주가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오늘 길에 교주는 고향에 들르게 해주었고, 소교주는 돈을 삼등분하면서 큰돈을 벌게 해주었다. 그리고 직접 살왕을 죽일 기회를 주었고. 교주는 직접 금창약을 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은신 대신 셋이 함께 걸었다.
역대 천마의 호위 중에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있을까? 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절대 없었을 거라고.
‘고맙습니다, 두 분.’
잠시 후, 보물 세 개조차 실패한 검무극이 입을 내밀며 마차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바람을 맞았다.
“너무 하십니다! 이렇게 냉정하실 수가!”
휘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불평하는 말과는 달리 저 멀리 풍경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얼굴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사실 이 순간 검무극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언제 또 이렇게 아버지와 나올 수 있을까? 이제 돌아가면 당분간은 못 나오실 텐데.
시간은 왜 이리 빨리 흘러가는 것인지. 이제 출발이지만 어느새 도착해 버리겠지.
“아저씨, 우리 천천히 돌아가죠. 올 때보다 더 천천히요. 가다가 돈 뺏는 파락호가 보이면 마차 멈추십시오. 도적들이 보여도 서시고 인질극도 좋습니다! 길 가다 목마른 행인도 길 잃은 고양이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제발 천천히 돌아가요!”
아버지도 부디 자신처럼 아쉬워하셨으면 좋겠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차 창문으로 튀어나온 낚싯대만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릴 뿐이었다.
* * *
마차가 중경 옥화산 아래 도착했다.
은하상단주는 이곳에서 약초를 캐는 중송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저자에서 거처를 물어 산 아래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 중송은 집에서 검무극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은하상단주가 조만간 사람이 찾아올 거란 기별을 해준 것이다. 그래서 요 근래에는 약초 채집을 나가지 않고 집에서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가시죠.”
어쩌면 보물을 얻는 사람보다 보물을 지키고 있던 그가 이 순간은 더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모르게 묶여 있던 것에서 자유를 얻는 순간일 테니까.
중송이 세 사람을 데리고 옥화산을 올랐다.
정상에 오른 그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리로 뛰어내려야 합니다. 내려가다 보면 절벽 중턱에 돌출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 정확히 내려서야 하지요.”
“먼저 내려가시오.”
중송이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보았다. 다른 두 사람보다 아무래도 젊은 검무극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검무극이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자식을 절벽에 내던져서 키우는 아버지를 두었거든요.”
검무극의 말에 중송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었구나.’
분위기가 다른 듯 닮은 그들이었다.
중송이 훌쩍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빠르게 떨어지던 그가 두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속도를 줄였다.
저 아래 절벽 중간쯤 튀어나온 공간이 있었다.
경공에 자신 있는 그였지만 매번 긴장된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돌출된 곳에 내려서는 게, 보는 건 쉬워 보여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공의 경지도 높아야 하고, 무엇보다 배짱도 있어야 한다. 또 이런 경험도 있어야 하고. 게다가 오늘은 바람도 많이 불어서 더 힘든 날이었다.
중송이 돌출부에 내려섰다.
‘잘 내려올 수 있을지?’
그렇게 걱정되어 위를 올려다보는데.
검무극이 휙하고 떨어지더니 그의 옆에 가볍게 내려섰다.
“엇?”
중송이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아닙니다.”
정말 말 그대로 뚝 떨어졌다. 보통의 경우라면 경공을 펼치며 손발을 움직여서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런데 검무극은 그냥 바위가 떨어지듯 빠르게 떨어졌는데 정작 내려설 때는 솜털처럼 가볍게 내려선 것이다. 심지어 손발을 놀리지도 않았다.
‘이런 경공술은 처음이다. 젊은 사람이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그러다 무심코 반대쪽을 쳐다보던 중송이 깜짝 놀랐다.
‘헉!’
이미 휘는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정말 소리도 기척도 없었다. 처음에 자신과 같이 내려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 놀람을 선사한 사람은 검우진이었다.
어느새 내려온 검우진이 허공에 뜬 채 옷자락을 펄럭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땅에 서 있는 거처럼 편안한 얼굴로 돌출부 앞 허공에 떠 있었다.
세 사람의 무공 실력에 중송은 원래는 하지 않으려던 말을 전했다.
“상단주께서는 해마다 오셔서 새 보물과 열쇠를 주시면 제가 이곳에 들어가서 채워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상단주와 저만 아는 곳이지요. 처음에는 상단주의 개인 보고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말씀해 주시더군요. 이곳은 은공께 드릴 선물을 모으는 곳이라고요.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대체 어떤 은공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지.”
중송이 세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말했다.
“이제는 이해가 갑니다.”
평범한 무인이 아닌 정도가 아니었다. 무인으로 살면서 평생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고수를, 그것도 세 명이나 한꺼번에 만나는 순간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힘든 시기도 있었는데, 오히려 보람 있는 기다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경공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는 고수였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기다려주셔서 고맙소.”
“제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으십니다. 저야 상단주와의 친분 때문에 맡았던 일이니까요. 돈도 많이 받았고요.”
“그래도 무인이 어딘가에 묶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소. 정말 고생하셨소.”
이번 여정을 통해 휘는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렇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검무극의 진심임을. 저 진심으로 돌진하는 사람이 당대 천마신교의 소교주임을.
휘의 시선이 슬쩍 검우진을 향했다.
‘저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교주님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하고 계셨는지를요.’
이번 여정에서 자신에게 보여준 검무극의 마음에.
‘저는 이미 진 것 같습니다.’
돈을 삼등분해서가 아니다. 처음에 자신을 위해서 가져온 거라면서 야영할 때 가죽을 깔아주었을 때, 이미 졌다. 같이 밥 먹자고 잡아끌 때 이미 졌다.
‘교주님은 이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직 오 년이나 남았는데.’
그러는 사이 중송은 절벽에 박혀 있던 작은 돌을 빼냈다.
그곳에 구멍이 있었는데, 절벽에 흔히 나 있는 구멍이었다.
“여기 열쇠를 넣고 돌리시면 됩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이곳이 비고 입구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설령 누군가 절벽에서 떨어져 극적으로 이곳 돌출부에 내려서게 되더라도 벽의 이 작은 구멍이 열쇠 구멍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송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훌쩍 몸을 날려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자유를 찾은 그의 몸은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중송이 서 있던 자리로 검우진이 허공을 걸어와서 내려섰다.
그가 용자명에게 받았던 만년한철 열쇠를 꺼내 휘에게 주었다.
휘가 열쇠를 구멍에 넣어서 돌리자.
스르르릉.
절벽에 감춰진 문이 열렸다.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를 챙겼다.
“이번 여정은 무조건 함께 아닙니까?”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들어가세.”
“네.”
그렇게 세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침입자를 방어하는 기관 장치는 따로 없었다.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니, 이 보물창고의 핵심은 중송이란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가 딴마음을 먹고 이곳을 열려고 작정하면, 벽을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을 테니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은하상단주가 무림제일의 부자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을.
그에게는 보물을 맡길 수 있는 믿을만한 사람이 있고, 한 번 믿으면 진짜 믿고 맡기는 신뢰와 배짱이 있었다.
사방에 박힌 야명주로 실내는 환했고, 어디선가 공기가 통해 내부는 쾌적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 있는 동경이었다. 온몸을 비춰볼 수 있는 큰 거울이었다.
그 양옆으로 보물이 진열되어 있었다.
왼쪽 벽에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 물론 평범한 무복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거 흑룡비갑(黑龍飛甲) 아닙니까?”
검은 용이 수놓아진 보의는 무림에서 아주 유명한 보의였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걸려 있는 보의도 만만치 않았다.
“이건 비호철의(飛虎鐵衣)고요. 아! 저건 금강신갑(金剛神甲)입니다.”
이렇게 딱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보의부터.
“이건 뭡니까?”
“소오진갑(笑傲眞甲)이다. 아주 오래된 보의지.”
아버지만이 알아보는 보의까지.
일반적인 보고에 들어가면 이런 보의들은 벽에 멋지게 장식되어 있었다. 귀한 것이 중앙에, 나머지가 그 주위에.
하지만 이곳에는 보의가 너무 많아서 일반 무복처럼 포개져서 걸려 있었다.
보의를 이렇게 모아두었는데 어디 무기는 없었겠는가?
한옆에 진열된 보검들이 드디어 자랑할 순간이 되었다며 날을 빛내고 있었다.
“태극신검(太極神劍)에 연화검(蓮花劍)에 저건 혈풍광휘검(血風光輝劍) 맞죠?”
보검뿐만 아니라 보도와 창, 비수까지. 온갖 보물들이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공비급들도 꽂혀 있었는데 보검이나 보의의 수준으로 볼 때, 무공비급 역시 구하기 어려운 무공일 것이다.
게다가 피독주와 야명주, 그 외 여러 값비싼 보물들까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액수의 보물들이었다.
용자명이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돈이 있다고 하루아침에 구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구하셨네요.”
그야말로 중원제일부자가 평생 은공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 모여 있었다. 무림제일부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 있는 보의는 백룡무갑(白龍武甲)인 것 같습니다. 정파 무림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의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이게 여기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것 보십시오. 어?”
뒤를 돌아본 검무극이 흠칫 놀랐다.
아버지는 어느새 보의를 차려입고 동경 앞에 서 계셨다.
아버지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검은색 보의였다.
“뭡니까? 그 옷은?”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했다.
“경혼갑(驚魂甲)이다. 예전부터 한번 입어 보고 싶었는데 구하지 못했지. 이게 여기 있었구나.”
무인이 무슨 보의냐며 안 입으실 것 같았는데.
아버지는 누구보다 무림 기물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아버지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걸려 있던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그것을 양 팔목에 찼다. 손목을 보호하는 보호대였다.
“무흔(無痕)이다.”
그건 검무극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 어떤 검기로도 자를 수 없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보호대.
아버지가 다시 손을 내밀자 이번에는 비수가 날아왔다.
“천애단심(天涯丹心)이다.”
무림의 비수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비수였다. 그 비수를 무흔에 꽂았다. 무흔은 애초에 비수를 꽂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이 농담을 잊지 않았다.
“제가 왜 그렇게 보물만 보면 가지고 싶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원조 물욕의 화신님 피가 제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그 비웃음에 검무극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뒷짐을 지고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멋있으신 분이시지만, 아버지는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다.
보의를 보면 입어 보고 싶고 보검을 보면 써보고 싶어 하는 분이신 거다. 강자를 보면 싸우고 싶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싶은 분이시다.
검무극에게 이 순간이 값진 이유는 이제 그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계신다는 점이다.
동경을 보며 기물을 갖춰 입으시던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두 사람은 안 고르고 뭐 하나?”
검무극이 기쁜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우리도 골라도 됩니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거울 속에서 아버지가 말했다.
“두 사람 다 제대로 갖춰 입는다. 남 줄 생각 말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
“어느 색이 제게 더 어울릴 것 같습니까?”
검무극의 양손에 보의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왼손에는 철비갑(鐵秘甲), 오른손에는 화양갑(華陽甲). 두 보의 모두 강호인들이 칼부림을 불사하며 차지하려고 들 그런 보의였다.
“색깔보다는 기능을 더 중요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러운 휘의 대답에 검무극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뭐니 뭐니 해도 자고로 멋이 있어야죠. 생각해 보십시오. 목숨을 건 혈전을 펼치다가 옷자락이 펼쳐지면서 보의가 딱 드러났는데!”
검무극이 옆에 던져둔 보의를 들어 보였다.
“안에 이런 칙칙한 걸 입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 차라리 그냥 찔리고 말지.”
검우진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제가 못 고르고 있는 게 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검우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나 때문이냐?”
“아버지가 맨 처음 고른 경혼갑이 제일 멋집니다. 그보다 더 멋진 걸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에게 양보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물론 검우진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찾아내고 말 겁니다. 더 멋지고 더 끝내주는 보의를요.”
검무극이 다시 보의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보의를 골라서 돌아서며 물었다.
“이것 중에는 어떤 게 낫습니까?”
하지만 검우진은 휘의 보의를 골라주고 있었다. 그냥 놔두면 절대 고르지 않을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거 한 번 입어보게.”
“저는 괜찮습니다, 교주님.”
“입어보게.”
“네.”
휘가 보의를 입는 동안 검무극이 들고 있는 옷을 흔들었다.
“여기 사람 있어요! 저 혹시 자동으로 은신 되는 보의를 입었나요?”
검우진은 못 들은 척 휘에게만 신경 썼다.
검우진이 휘에게 골라준 보의는 무영갑(無影甲)이었다. 이곳에 있는 보의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은신과 속도를 중시하는 휘에게 가장 적합한 보의였다.
“잘 어울리는군.”
동경을 바라보는 휘의 눈빛이 떨렸다. 무영갑을 입은 자신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거울에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해하는 교주의 모습이 비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한 것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받게.”
“네.”
물론 휘에게 골라준 것은 호신갑만이 아니었다.
휘에게 고르라고 하면 그중 제일 나쁜 걸 고를 게 뻔했기에, 검우진은 직접 무기도 골라주었다.
“이거 들어보게.”
검우진이 건넨 것은 한 자루의 비수였다. 살과 뼈는 물론이고 사람 마음까지 베어버릴 거 같은 차가운 검날의 예기, 그리고 손잡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문구들.
“범상치 않은 비수입니다.”
“진혼(鎭魂)일세.”
진혼이란 말에 휘는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이 있는 비수였다. 비수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최고의 비수.
처음 검우진이 고른 천애단심보다 더 좋다고 알려진 비수였다.
“왜 진혼을 고르지 않으시고요? 교주님께서 쓰십시오.”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비수 쓰는 것 봤나? 대신에 자넨 비수를 쓰지 않나?”
휘는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검우진이 진혼을 보았음에도 자신에게 주려고 두 번째로 좋은 천애단심을 골랐다는 것을.
‘교주님!’
검우진이 진혼을 내밀었고, 휘는 떨리는 손으로 정중히 그것을 받았다.
“자, 내공을 주입해보게. 자네도 알다시피 처음이 중요하네.”
휘가 조심스럽게 진혼에 내공을 주입했다.
진혼이 휘의 내공에 반응해서 진동했다. 새로운 주인과의 만남의 순간이었다.
“아!”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휘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감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딱 한 번 내공을 주입한 것만으로도 이 진혼이 얼마나 좋은 비수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비수는 처음이었다. 이 비수로 싸우면 아무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앞으로 잘해보자.’
휘는 무영갑 위에 원래 차고 있던 가죽대를 둘렀다. 가죽대에는 몇 자루의 비수와 용도를 알 수 없는 몇 가지 물건들이 꽂혀 있었다.
휘가 비수 하나를 뽑은 후 그 자리에 진혼을 꽂았다.
그리고는 검우진을 향해 돌아본 후 정중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떤 말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잘 어울리는군. 둘러보고 필요한 게 있으면 가지게.”
“이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휘가 단호히 말했다. 더 주려 했다간 준 것도 다 내놓을 기세였기에, 검우진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휘를 먼저 챙긴 후에야 검우진은 아들을 쳐다보았다.
왜 자신은 안 골라주냐, 의기소침해 있을 줄 알았는데.
“자, 어떻습니까?”
검무극은 이미 한 벌 차려입은 후였다.
“아버지 보의와 색을 맞춰서 흑룡비갑으로 결정했습니다.”
보의들 중 흑룡비갑,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목 보호대는 물론이고 허리에 주머니를 걸 수 있는 요대부터, 무릎 보호대, 팔꿈치 보호대에 권법을 사용하는 이들의 권갑까지. 몸에 찰 수 있는 건 다 차고 있었다.
“아버지가 제대로 갖춰 입으라고 하셔서요.”
그러자 검우진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네 겹이나 껴입으라고 하진 않았는데?”
순간 검무극이 흠칫했다.
“설마? 보의들과 대화하는 마공까지 익히신 겁니까?”
“굳이 그런 마공 안 익혀도 동경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검무극이 동경 앞에 섰다. 평소보다 몸이 두툼했다. 누가 봐도 껴입은 모습이었다.
“표가 좀 나네요.”
정말 검무극은 보의를 네 벌이나 겹쳐서 껴입고 있었다.
“누굴 주려고 그러는 거냐?”
“이 귀한 기물들, 어디 줄 사람 없겠습니까? 아, 그리고 아버지 말씀대로 이 흑룡비갑은 제가 입으려고 했습니다. 이 쌍랑(雙狼)도 제가 찰 거고요.”
검은색인 흑룡비갑은 자세히 보면 흑룡이 그려져 있었고, 팔목보호대 쌍랑에는 멋진 늑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제가 맵시까지 포기하고 입은 것들인데.”
검무극이 불쌍한 얼굴로 보의를 벗으려고 하자, 검우진이 말했다.
“됐다. 기왕 입었으니 가져가거라.”
그러자 검무극의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우리 아버지가 최고이십니다!”
검무극이 겹쳐 입었던 보의들과 보호구를 벗었다. 안에서 나오는 보의들을 보니, 이 와중에도 제일 좋은 것들로 챙긴 그였다.
검무극은 흑룡비갑과 쌍랑은 자신이 착용하고, 나머지는 잘 개어서 챙겼다.
검우진은 아들의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보의 사이에 혈풍광휘검을 슬쩍 숨겨 넣는 것도 못 본 척해주었다.
보의들을 챙긴 검무극이 이번에는 따로 챙겨두었던 무복을 가져왔다.
“자, 보의 위에 이 무복을 입으시죠.”
어디서 찾아냈는지 그것들은 천잠사로 만든 무복이었다. 극품천잠사만큼 대단한 보물은 아니었지만, 일반 무복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품질이 좋은 무복이었다.
일반 무복보다 가벼우면서도 비교할 수 없이 질기고, 공기도 잘 통하는 무복이었다.
아버지에게 제일 좋은 걸 드렸고, 다음 것을 휘에게 주었다.
“전 그 색이 마음에 안 듭니다.”
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이미 소교주님께 졌으니까요.’
그렇게 세 사람은 제대로 차려입고 동경 앞에 나란히 섰다. 색은 달랐지만 같은 문양의 무복을 입고 있으니 한 문파에서 나온 사제지간처럼 보였다. 물론 검무극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만들지 않았다.
“이제부터 사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더 젊어 보이시니까 둘째 사형, 휘 아저씨는 대사형. 사형들! 이대로 중경의 가장 번화한 저잣거리로 출동하시죠. 소저들이 줄을 설 겁니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미소로 동경 속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그래요, 그렇게 웃으십시오. 그렇게 웃으면서 사십시오. 제가 자꾸 웃겨 드리겠습니다. 썰렁한 농담이라도, 그 너스레가 무리수가 되더라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 웃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인상 쓰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아버지가 동굴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며 휘에게 명령했다.
“나중에 와서 이곳에 남은 것들은 전부 천마보고에 옮겨 두도록 하게.”
* * *
입구에서부터 피 냄새가 났다.
장원으로 들어선 멸마대주 진하군은 인상을 굳혔다. 밖에서도 이런 피 냄새가 난다는 건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이리라.
입구를 지키던 무림맹 무인들이 진하군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들을 거느리고 장원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년 무인은 주궐(周闕)로 무림맹 중경지단주였다.
“어서 오십시오, 진 대주님.”
“주 단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궐이 진하군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정중했다. 아직 정식 후계자로 임명되지는 않았지만, 진하군이 차기 맹주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되고 있었다. 그는 멸마대주로 협행을 이어가며 착실히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곳 유명장(遺名莊)에서 사건이 발생해 대주님께 도움을 청하려고 급히 모셨습니다.”
보통 어떤 사건이 생기더라도 먼저 중경지단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다. 처음부터 자신을 불렀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고 심각한 일이라는 의미인데.
“자, 들어가시죠.”
주궐이 진하군을 데리고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건물로 다가갈수록 피 냄새가 짙어졌다.
“유명장은 이곳 중경에서도 이름난 문파입니다. 유명장주는 협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서 중경 무림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요.”
건물로 들어서자 내부는 그야말로 피범벅이었다. 사방에 피가 뿌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기습을 당한 것 같습니다.”
복도를 따라 핏물이 쭉 이어져 있었다.
확실히 평소와 주궐의 일 처리가 달랐다.
누군가의 기습이라 말하는 걸로 볼 때, 아직 흉수가 누군지 모른다는 의미다.
보통 멸마대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는 흉수가 밝혀졌는데 지단 병력으로 상대하기 힘든 고수일 때다. 한데 지금은 흉수도 모르는데 자신을 불렀다. 대체 왜?
그리고 그 이유는 문을 열고 대청으로 들어갔을 때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곳 역시 온통 피투성이였다.
진하군의 시선이 뒤쪽 벽에 고정되었다. 그곳에 피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진하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마도천하(魔道天下).
오직 네 글자만 적어서 멸마대주를 가장 놀라게 할 글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네 글자가 정답이리라.
진하군은 피로 적힌 글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유명장에서 당한 시체는 어디에 있소?”
당장 마공에 당했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는데.
“시체가 없습니다.”
글자를 바라보던 진하군이 빠르게 주궐을 쳐다보았다.
“시체가 없다고요?”
“네, 단 한 구의 시체도 없었습니다. 하나 남겨진 피의 양으로 볼 때,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진하군의 시선이 다시 벽을 향했다.
“누가 자신이 죽인 시체를 가져가는 괴이한 짓을 하겠습니까? 마교 놈들 짓이 틀림없습니다.”
주궐의 단정에 진하군이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저기에 주 단주 이름을 적어두면 주 단주 짓이오?”
주궐은 내심 당황했다. 멸마대주 역시 당연히 마교 짓이라 여길 줄 알았는데.
“하나 누가 감히 마교를 사칭하겠습니까?”
“예전에도 마교를 사칭한 사건이 있었소. 그러니 섣불리 단정 짓지 마시오.”
주궐은 더는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진짜 마인의 짓이든, 마교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든. 이 사건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진하군이 주궐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비상을 걸고, 지단의 모든 무인을 이 사건에 투입하시오. 중경은 물론이고 인접한 모든 지단과 지부에 협조 요청하시고 중경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하시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주궐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진하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벽에 새겨진 글을 쳐다보았다.
마도천하.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마도란 말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자네의 마도가 피로 물들고 있는데.
‘자넨 지금 어디에 있나?’
* * *
마차는 남쪽으로 계속 달렸다.
“아, 이대로 중경도 작별이군요.”
조금만 더 달리면 마차는 중경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정말 안 가실 거예요? 딱 사흘만 놀다 가시죠. 중경 여인들이 그렇게 예쁘답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나직이 말했다.
“사마 군사 기다린다.”
실없는 농담을 다 무시하던 아버지가 모처럼 말을 받아주었다. 이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그건 군사님의 마음을 모르시는 말씀이십니다. 사마 군사님은 정말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고 계실 겁니다. 일인지하만인지상도 좋지만 가끔은 앞에 일인지하 빼고 만인지상만을 즐기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침마다 천마전 앞마당에서 기지개를 쭉 켜시면서 교주님 안 계시니 너무 좋다! 교주님, 중경에서 사흘만 더 놀다 오십시오! 이러고 계실 거라고요!”
정말 그런 사마명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듯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바로 그때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오!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건 휘 아저씨뿐입니다! 마차 돌리시는 겁니까?”
물론 그래서 휘가 마차를 세웠겠는가?
“저 앞에서 무인들이 길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휘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내밀어 보니, 길에 마차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무림맹 무인들이 행인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무인들이 서너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나 되는 걸로 볼 때 평범한 검문이 아니었다.
그때 행인으로 위장해서 지나가던 통천각 무인이 접힌 종이를 휘에게 슬쩍 건네주고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휘가 그 기별을 검무극에게 전해주었다.
검무극이 종이를 펼쳐서 내용을 확인했다. 검무극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중경의 정파 문파인 유명장 식솔들이 모두 실종되고 벽에 피로 마도천하란 글자가 남겨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아버지의 두 눈에 스치는 서늘한 기운을. 누군지 모르지만 남겨서는 안 될 말을 남겼다.
이내 검우진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나직이 말했다.
“마차 돌리게.”
휘가 마차를 돌렸다.
중경을 벗어나려던 마차는 다시 중경의 중심을 향했다.
“우선 안가로 가겠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아버지는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농담이나 너스레를 떨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분노를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원래 적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시다. 이번에 살수들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살수를 싫어하시지만, 그렇다고 이번 살왕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그런 감정을 특별히 드러내지 않으신 것처럼 말이다.
한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냥 천마신교를 사칭했다는 소식이었다면, 아버지는 그대로 본교로 돌아가자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겨진 글귀였다.
마도천하.
결코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을 뱉은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자신의 마도와 아들의 마도 사이에서 여러 생각을 하시는 중이실 텐데.
마차가 도착한 곳은 중경의 여러 안가 중 특별한 곳이다. 은밀히 숨겨진 길과 진법까지 통과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곳, 바로 교주 전용 안가였다.
도착한 후 검우진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들어갔다.
검무극은 휘가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걸 도왔다.
“들어가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짐은 제가 날라야죠.”
검무극은 휘와 함께 마차에 실려 있던 자신의 짐과 보고에서 가져온 기물들을 방으로 옮겼다.
그것들은 잘 개어서 챙겨두고 앞서 착용했던 흑룡비갑과 쌍랑은 계속 착용했다.
자신을 위해서 고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여러 벌 챙겼으니 그 죄송함 때문에라도 본교로 돌아갈 때까지 착용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짐을 풀고 검무극은 곧장 아버지 방으로 갔다.
그사이 통천각에서 보낸 새로운 보고서가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가 이미 확인한 그것을 검무극이 읽었다.
“무림맹에서 중경을 중심으로 천라지망을 고려하고 있군요.”
천라지망을 펼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무인이 동원되어야 하고, 막대한 비용이 든다.
게다가 다른 두 세력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다. 수많은 병력과 고수가 움직이는 일이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서둘러 천라지망을 고려한다는 의미는.
“그만큼 이번 일을 중요시한다는 뜻이겠지요.”
검무극의 말에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검무극은 마차를 타고 오는 동안 생각했던 바를 전했다.
“아시다시피 본교를 음해하고 사칭하는 자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한데 이번 경우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검무극이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왜 하필 다른 곳이 아닌 유명장일까?”
같은 생각을 하신 것일까? 아니면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은 것일까? 아버지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제가 유명장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장주가 중경의 정파 무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유명장의 규모는 중소방파에 불과하지만, 그 규모에 비해 유명장주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자신의 세를 키우는 것보다는 협행에 늘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경에서 유명장주를 건드리는 일은 곧 정파 전체를 공격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그랬기에 벌써 천라지망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이번 일의 흉수를 반드시 잡아야 했고, 또 잡을 작정인 거다.
무림맹의 급박한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사마군사와 함께 본교를 이끌어온 분이시다. 화가 난다고 성급하게 움직이면 상대의 의도대로 놀아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테니까.
아버지가 휘를 불러서 명령했다.
“중경의 모든 지단과 지부에 비상을 걸고, 통천각은 이번 일에 모든 정보망을 집중하라고 명하게.”
“네,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분노는 차갑다.
그리고 검무극은 안다. 이 차가움이 머금고 있는 것이 용암이라는 걸.
이 차가움을 버텨서 녹여낸 적은 오히려 그때 진짜 분노를 보게 될 것이다.
* * *
그날 저녁 아버지와 나, 그리고 휘는 저잣거리에서 제일 큰 객잔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자고로 객잔은 세상 모든 소문의 원천이 되는 곳. 그래서 때론 비싼 돈 주고 사는 정보 상인의 정보보다 더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간단한 요리와 술을 시켜 마시는데, 과연 주위에서는 유명장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대부분 유명장주가 생전에 펼쳤던 협행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죽일 놈의 마교로 끝이 났다.
술자리를 오가는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검무극은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소문이 너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물론 중경에서 유명장주의 명성을 생각하면 화제의 중심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무림맹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벽에 남겨진 글자에 대해서는 최대한 비밀로 했을 겁니다.”
천마신교와의 문제였으니까 신중하게 처리했을 거다.
“한데 벌써 이렇게까지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누군가 소문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주 의도적이고 계획적입니다.”
그때, 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래 두 사람의 대화에 절대 나서지 않는 그였는데, 호위책임자로서 이 부분만큼은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혹시 교주님을 노리는 건 아니겠습니까?”
검무극은 대답에 앞서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부터 보았다. 편하게 앉아 계셨지만, 허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무공실력으로도 허점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는 애초에 허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이윽고 검무극이 휘에게 대답했다.
“차라리 그런 무모한 자라면 상대하기 쉬울 겁니다.”
이번 일은 그보다 훨씬 더 계획적인 음모라는 의미였다.
“느낌상 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검무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객잔으로 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모두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대정문(大正門)이 마교 놈들에게 당했다네!”
객잔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장내가 시끄러워졌다. 대정문 역시 중경에서 정파를 상징하는 문파 중 하나였다.
마교를 없애야 한다는 누군가의 외침에 분노한 군웅들이 함께 소리쳤다.
상대의 의도는 명백했다. 본교와 정파의 갈등을 유발하려는 속셈이었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말했다.
“무림맹 쪽에 기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소행이 아니라고 아버지가 직접 무림맹주에게 알려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는데.
그러자 검우진은 술잔을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전에 확인부터 해야지.”
* * *
진하군이 굳은 얼굴로 대정문으로 들어섰다.
무림맹 무인들로 철저히 주위가 통제되었지만, 안에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이미 소문을 듣고 중경의 정파 무인이 모여들고 있었다.
소문이 너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그만큼 중경 무인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의미이리라.
건물로 들어선 진하군이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깊은 한숨.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참상이었다.
대정문 무인들이 온몸이 찢기고 베여서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앞서 유명장에서는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라도 그들이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었는데. 이 시체를 보니 그 희망도 사라졌다.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시체들 사이를 지나서 문주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대정문주는 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가슴이 완전히 갈라져서 차마 쳐다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죽어 있었다.
그리고 시체 위에 피로 새겨진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마도천하.
유명장에 남겨진 것과 같은 말이었다.
진하군이 말없이 그것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곳으로 중경지단주 주궐이 들어섰다.
“대정문에 속한 사람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였습니다. 청소하는 여인들과 주방에서 밥을 해주던 숙수들까지 다 죽였습니다.”
진하군이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죽고 죽이는 이들이라지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라는 게 있다. 설령 누군가와 원한을 가졌으면 그 원수만 죽여야지.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그 선을 넘은 일이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른 자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들이 존재했으니까.
옆에 서 있던 주궐은 이래도 마인들의 짓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성 선생이 오고 있습니다.”
성 선생은 평생 마공을 연구한 무림맹의 마공연구가였다.
그는 누구보다 마공에 정통한 인물로, 싸움 현장에 핏자국이나 싸운 흔적, 그리고 시체에 남겨진 상처로 어떤 마공에 죽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주궐은 성 선생이 와서 결과를 내놓을 때까진 참을 작정이었다. 벽에 남겨진 저 글자를 보고도 이 멸마대주는 마인들의 짓임을 믿지 않고 있었으니까.
‘성 선생의 결과까지 의심하지는 못하겠지.’
그런 주궐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몇 년 전이었다면 나도 주 단주처럼 마인의 짓이라 여겼을 거요.”
“그때와 뭐가 달라졌습니까?”
피로 적힌 글자를 바라보던 진하군이 주궐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가 달라졌소.”
주궐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지만, 이미 중경의 정파 문파 두 곳이 연속해서 당한 상태였다. 주궐이 참았던 말을 꺼냈다.
“대주님과 마교 소교주와의 관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근래 가장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누가 뭐래도 마교 소교주였으니까.
무림맹 고위급 인사들 사이에서 검무극과 진하군과의 친분에 대한 우려의 말들이 있다는 것도 소문으로 들었다.
“마인들을 믿어선 안 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진하군이 대답했다.
“나도 마인들을 믿지 않소.”
진하군의 마음에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다만 그가 소교주로 있는 한 마교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소.’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
‘이게 정말 마교의 소행이라면? 그 모든 것이 이런 짓을 감추기 위한 가식이었다면?’
지금까지 검무극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두 번째 생각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의심이었다. 그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안다. 나중에 얼마나 검무극에게 미안해할 생각인지도.
하지만 눈앞에 대정문주의 참혹한 시체와 피로 적힌 마도천하란 글자를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섭섭하군. 나는 자네 믿는데.”
뒤에서 들려온 말에 진하군과 주궐이 깜짝 놀라 돌아섰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입구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진하군은 너무 놀라서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정말 오늘 여기서 검무극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더구나 마침 그를 떠올리던 중이어서 더 놀랐다.
주궐이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침입자다!”
바깥에 수십 명의 수하가 깔려 있는데 이곳까지 몰래 들어온 것이다. 어디 지단 무인뿐인가? 진하군이 이끄는 멸마대 무인들도 있었다.
‘어떻게 여길?’
주궐의 외침에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도 자신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검무극을 보고 놀라고 당황했다.
그때, 진하군이 모두에게 말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니 검 집어넣으시고. 자네들은 물러나게.”
진하군이 무인들을 모두 물렸다.
주궐이 검을 회수하며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과연 주궐의 예상대로였다.
“오랜만이야, 친구.”
근래 진하군에게 친구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소문 속 그 사람뿐이다.
‘이자가 마교 소교주구나!’
주궐의 심장이 떨렸다. 그는 마교 소교주를 오늘 처음 본 것이다.
진하군은 느긋하게 안부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지나가다 들렀네.”
정말 중경을 지나가다 일이 벌어졌으니까.
주궐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미친! 지나가다 들렀다고?
이곳에 소교주가 등장하자 그는 더욱 이번 일이 마교 소행이라 확신했다.
반면 진하군은 비로소 검무극을 만났음을 실감했다. 검무극은 이런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저 엉뚱한 말들은 다 진심이었고 진실이었다.
솔직히 검무극을 만나니 반가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반가움을 드러낼 수 없었다. 지금 그의 마음에 가득한 건 이번 일을 저지른 자에 대한 분노와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이었으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검무극도 실없는 소리 대신 정말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었음을 밝혔다.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을 거네. 자네들 섬서지단의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쪽 일을 처리하고 본교로 돌아가는 길이지.”
다행히 살왕의 일을 처리하면서 섬서지단의 도움을 받았다. 이동 경로와 시간을 조사해 보면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어느 정도는 될 것이다.
검무극이 천천히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주궐은 내심 경계하며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도록 내력을 끌어올렸다.
‘정말 마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군.’
마인인데 이렇게 철저히 마기를 감출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마기뿐만 아니라 아예 무공을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반박귀진의 완성된 모습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검무극이 진하군 앞에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내가 이렇게 화나는데 자네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을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
검무극의 위로에 진하군이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난 이번 일을 저지른 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네.”
만에 하나 그게 자네라도 말일세.
“그래야지. 나도 그럴 작정이라네.”
검무극의 시선이 벽에 적힌 글자를 향했다.
“저기 글을 남긴 자는 아버지와 나의 마도가 어떤 것인지 하나도 모르는 자라네.”
진하군은 남겨진 글자 때문에라도 마교의 소행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삼자회합 때 본 천마도, 자신이 아는 검무극도. 이런 글을 남기며 사람을 죽일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 사람 짓이 아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바로 그때 입구 쪽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 선생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돌아보니 그곳으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성 선생은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허리는 꼿꼿했고 두 눈빛은 강렬했다.
게다가 단정하게 갖춰 입은 흑의 장삼은 백발과 대조되면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는데, 흰 천이 덮인 그것에는 알 수 없는 여러 도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하군은 어려서부터 성 선생을 알았다. 성 선생은 무림맹에서 마공과 관련해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마공 연구에 있어서는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무림맹 입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적의 무공을 연구하는 사람이니, 어찌 귀히 여기지 않겠는가? 그는 여러 제자를 양성하면서 늙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잘 지냈는가, 진 대주. 멸마대주로서 자네 활약은 잘 듣고 있네.”
진하군이 그에게 검무극을 소개했다.
“여긴 신교의 소교주입니다.”
이곳에 마교 소교주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성 선생은 깜짝 놀랐다. 그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살폈다.
“상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군.”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르신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자네들은 나를 싫어할 텐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같은 날에도 선생이 계셔서 우리가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텐데요.”
성 선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성 선생을 모신 주궐이 정중히 부탁했다.
“아시다시피 엄중한 사안입니다. 이번 사건의 진실은 오직 선생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때 검무극이 주궐에게 말했다.
“흉수가 우리이기를 바라는 거요?”
주궐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잔혹한 짓을 저지른 자가 마교 이외에 또 있다면, 그것은 흉수가 마교인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될 테니까.
주궐은 다시 성 선생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마공임을 놓치지 말아 달라는 심정이 담긴 부탁이었다.
“그대들이 무엇을 바라든 나는 있는 그대로를 밝힐 뿐이네.”
성 선생이 대정문주의 시체로 걸어갔다.
그가 상자를 열어서 도구들을 꺼내더니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그는 시체의 피를 채취해서 약병의 액체와 섞었다.
상처 부위를 유심히 살폈고, 잘린 살과 뼈, 장기에 각기 다른 약을 발랐다.
시체만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피가 어디에서 어디로 튀었는지, 벽에 어떤 흔적이 남았는지를 조사했다.
바닥에 가루로 된 약품을 뿌려 발자국이 나타나게 해서 이곳에서 어떤 보법이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했다.
아주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초식이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해도 정확히 사용된 무공을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이 무림에 워낙 비슷한 무공이 많았으니까.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무극과 진하군은 창가로 걸어갔다.
주궐은 따라가지 못하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진하군이 마교 소교주와 어울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검무극과 진하군이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무림맹 무인들이 시체를 마당으로 옮기고 있었다.
진하군은 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결코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도 자신만큼이나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음을.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앞서 검무극을 의심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아니, 믿는 법을 모르는 사람일지도.
“섬서에는 왜 간 건가?”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본교 통천각에서 섬서에 있는 배후 놈들 자금줄을 발견했어. 그 돈줄 자르려고 갔지.”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잘랐나?”
“싹둑.”
진하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가 사라졌다.
“이번 일을 저지른 것도 그자들이라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살왕을 제거한 복수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까지 숨어서 음모를 꾸미던 그들이 처음으로 주도적인 공격을 하는 셈이다.
한데 불과 얼마 전에 살왕이 죽었는데 이렇게 빨리 복수전을 펼친다고? 이번 일은 치밀하게 준비된 것 같은데. 과연 그사이에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아버지와 같이 나와 있네.
진하군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네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말해주는 거네.
―지금 어디 계신가?
―본교 안가에 계시네.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그게 증거라네. 이번 일을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아버지가 함께 계신 데 이런 짓을 저지르겠는가?
진하군은 이제 확실히 믿었다. 검무극이 천마를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설령 어떤 속임수를 쓰더라도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쓸 사람은 아니었다.
―말해줘서 고맙네.
―우리가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었을 때, 또 지금 같은 일을 겪게 될 수도 있을 걸세. 그때 자네도 말해주게. 지금 나처럼 솔직하게. 그럼 어떤 이간질도, 어떤 오해도 우린 이겨낼 수 있을 거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마당을 쳐다보았다. 시체는 계속 옮겨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성 선생의 조사는 계속되었다. 그의 조사는 치밀하고 열정적이었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약품에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핏물이 고인 바닥에 엎드려서 뭔가를 찾았고. 붉은 실을 장내 여기저기 이으면서 이곳에서의 싸움을 재현하려 애썼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성 선생이 조사를 마쳤다.
모두 성 선생 주위로 모였다. 긴장된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성 선생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무공인지 알아냈네.”
진하군과 주궐은 물론이고, 검무극도 긴장된 얼굴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정문주를 죽인 무공은…….”
성 선생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마공이었네.”
진하군은 흠칫 놀랐고, 주궐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검무극은 담담했다.
이번 음모는 정말 계획적이었으니까. 성 선생에게는 누명을 벗겨줄 거라 말했지만, 흉수가 마공을 이용해서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주궐이 성 선생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마공인지도 알아내셨습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성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충격적인 사실.
“마존의 마공이네.”
듣고 있던 세 사람 모두 놀랐다.
이번에는 앞서 담담했던 검무극이 제일 놀랐다. 마존의 마공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마공이라 장담했던 주궐조차 마존이 언급되자 바짝 긴장했다. 흉수가 마존이라고? 이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누굽니까? 그 마존은?”
주궐의 떨리는 물음에 성 선생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혈천도마.”
“대정문주를 죽인 건 그의 멸천마도식이네.”
그곳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혈천도마가 유명장과 대정문을 몰살했다.
이 소식이 강호에 전해지면 중경무림은 물론이고 전 무림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무림맹과 천마신교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도, 그 발단으로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건이었다.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말없이 성 선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반응을 성 선생의 말에 대한 시인이라 여긴 주궐은 빠르게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밖에 있는 수하들을 모두 불렀다. 검무극은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 선생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혹시 성 선생 이자도 화무기 쪽에 포섭된 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내놓았으니까.
하지만 회귀 전 삶에서 성 선생이 십이지왕과 관련되어 등장한 적은 없었다.
암중에서 그들을 도왔을 수는 있었지만, 그랬을 리가 없다. 천마신교가 봉문한 이후에 십이지왕이 등장했고, 그 시절의 성 선생은 불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한 가지 더.
놈들에게 포섭되었다면 당장에 의심받을 걸 알면서 자신의 앞에서 이런 결과를 내놓지는 않았을 거다.
여기서는 다른 무공이라고 하고, 무림맹주를 찾아가서 이간질했겠지. 소교주 앞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러면서.
‘이자는 놈들의 하수인이 아니다.’
그랬기에 이 결과는 검무극에게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진하군이 성 선생에게 다시 확인했다.
“혈천도마의 무공이 확실합니까? 선생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자 성 선생이 단호히 말했다.
“확실하네.”
성 선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 장담에 힘을 더했다.
“여기에 마교 소교주가 아니라 마교주가 있어도 난 같은 대답을 할 거네.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네.”
그의 확신에 진하군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마공이라 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번 일을 꾸민 자가 마공을 쓰는 고수를 포섭해서 일을 저질렀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마존의 무공이라고?
‘누군가 마존의 마공을 위조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혈천도마의 짓이라면?’
진하군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상황에서 검무극에게 뭐라 해야 할지. 성 선생의 안목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 선생 앞에서 그를 믿는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물었다.
“만약 이 일을 저지른 것이 무림맹주님이라는 증거가 나왔다면 자넨 그 증거를 믿을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기에 진하군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절대 믿지 않겠지? 지금 내 심정도 그렇다네.”
검무극이 성 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분이 결과를 속이는 게 아니라면, 놈들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지를 알아봐야겠지.”
그러자 성 선생이 단호히 말했다.
“나는 속이지 않았네. 자네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아.”
검무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야 할 거요. 누군지 모르지만 절대 건드려선 안 될 것들을 자꾸 건들고 있소. 아버지를 열받게 했고, 이제 나를 열받게 했으니까.”
놈이 아버지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대청으로 중경지단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검무극 주위를 겹겹이 에워쌌다. 사건이 터졌다는 생각에 멸마대 무인들까지 모두 들어서와 상황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진하군에게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네.”
진하군은 검무극의 눈빛 어디에서도 음모를 들킨 당혹스러움을 발견하진 못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맑고 깊었다.
“최대한 빨리 밝혀야 할 거네.”
진하군은 검무극을 믿었다. 마교도 믿지 않고, 마인도 믿지 않고 혈천도마도 믿지 않지만, 친구는 믿었다.
“그러지. 고맙네.”
검무극이 그곳을 나가려 하자 주궐이 막았다. 지단 무인들이 내력을 끌어올리며 일제히 검을 겨눴다.
“흉수가 사용한 무공이 마공으로 밝혀진 이상, 이대로 보내선 안 됩니다.”
만약 이번 일이 마교의 소행이라면, 마교 소교주를 잡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자 진하군이 그에게 말했다.
“잡고 싶어도 지금 우리만으로는 못 잡소. 그러니 그냥 보내주시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주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중경지단 무인들의 생각은 같았다.
‘우린 그렇다지만 진 대주와 멸마대가 있는데 소교주 하나를 못 잡는다고?’
이 순간 주궐은 크게 오해했다.
‘친구라서 봐주는 거구나. 이보시오, 진 대주. 이 일이 당신을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소.’
진하군이 주궐을 쳐다보며 말했다.
“길을 여시오.”
진하군의 눈빛은 단호해서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주궐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제야 지단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거두며 길을 열었다.
검무극이 무림맹 무인들 사이를 조용히 걸어 나갔다.
진하군은 창가에 서서 검무극이 마당을 지나 건물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주궐과 지단 무인들에게서 분노와 동요를 느꼈다.
후계자로 유력한 무림맹주의 손자와 마교 소교주와의 우정을 이해해 줄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더구나 성 선생은 마공에 있어서는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이 결과 역시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친구, 시간이 많이 없네.’
* * *
안가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마당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요즘 부쩍 심법 수련에 매진하는 아버지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아버지가 수련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운기를 마치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몸 주위를 휘감던 진기가 마치 뜨거운 열기 속의 신기루처럼 뭉쳐지는 것을.
그 모습은 천마혼이었다.
진기로 만들어진 천마혼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언제봐도 무서운 모습이지만, 나는 오랜만에 보는 천마혼이 반가웠다.
반가움도 잠시, 천마혼은 진기가 되어 다시 흩어지더니 아버지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천천히 눈을 뜬 아버지의 눈빛은 심연처럼 깊었다.
“봤느냐?”
“네, 봤습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구화마공의 진기는 구화마공을 익힌 사람에게만 보이고, 또한 그 경지가 칠 성에 이르러야만 천마혼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네 경지가 칠 성에 이르렀다는 의미지.”
내가 벌써 칠 성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이룬 성취보다 훨씬 빠르다.”
아버지도 역대로 빠른 성취라는 소리를 들으셨을 텐데.
구화마공을 배운 시기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게 빠른 성취.
이 성취는 당연했다. 아버지의 반복된 강론에 더해, 시천비술로 더 많은 시간을 수련하고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내 성취는 분명 아버지를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대성을 이뤄 천마혼을 강림시키고 싶다. 아버지의 천마혼과 내 천마혼은 어떻게 다른지 너무나도 궁금했으니까.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아버지 예상대로였습니다.”
아버지는 무림맹주에게 연락하기에 앞서 대정문이 어떤 무공에 당했는지 확인부터 하고 오라고 했다. 내게 확인시킨 이유는 아버지도 마공에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거였다.
“어떤 마공이었냐?”
아버진 분명 알려진 마공일 거로 생각하고 계셨다. 그래야 우리에게 죄를 확실히 뒤집어씌울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아버지라도 놀라지 않으실 수 없을 사실이 전해졌다.
“도마 어르신의 무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도를 건들고, 마존을 건드렸으니 아버지의 분노는 당연했다.
“어떻게 조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본교 마공에 정통한 성 선생이 밝혀냈으니 무림맹에서는 이번 일의 해명을 요구할 겁니다. 물론 도마 어르신은 본교에서 책 보시면서 대룡이를 가르치고 계실 테니까,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요.”
바로 그때 그곳으로 안가 무인의 안내를 받으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가 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는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도를 등에 찬 서대룡이 안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대룡이 검우진 앞으로 달려가서 정중히 예를 갖췄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검우진이 서대룡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이네.”
아버지도 그의 등장에 살짝 놀라신 듯 보였다.
황천각주 서대룡이라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가 혈천도마의 무공을 이어받은 수제자라는 점이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검우진이 있는 자리기에 서대룡은 검무극에게도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원래라면 정말 오랜만의 재회였기에 ‘보고 싶었어요! 소교주님!’ 하면서 달려갔을 거다.
다른 때 같으면 검무극도 농담을 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 앞에서 황천각주의 권위를 챙겨줘야 했다. 장난치는 즐거움은 잠시지만, 아버지 앞에서의 이 순간은 앞으로 서대룡의 삶에 영향을 미칠 테니까.
“황천각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시오?”
서대룡은 느꼈다. 자신의 등장에 검무극은 물론이고 검우진까지 놀랐다는 것을.
서대룡은 울상을 지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죠?
하지만 교주 앞에서 감히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검무극이 그런 서대룡의 마음을 표정에서 읽었다.
“우린 지금 이곳에서 서 각주를 만나면 안 될 상황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아버지와 제가 유명장과 대정문을 멸문시킨 흉수와 같이 있거든요.”
그 흉수가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서 서대룡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가요?”
“네, 지금 유력합니다.”
그리고 서대룡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한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그곳에 갔다는 걸.”
이번에는 검무극이 놀랐다.
“거기에 가셨다고요?”
“네, 갔습니다. 두 군데 모두 갔습니다.”
심지어 한 곳도 아니었다. 참지 못한 검무극이 소리쳤다.
“서 각주가 흉수였구려!”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게 무슨…….”
서대룡이 평소처럼 반응하려다 다시 정중히 말을 이었다.
“제가 흉수라니요? 전 아닙니다!”
물론, 검무극의 농담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이라도 한 가문을 몰살시키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무공을 모르는 숙수와 일하는 여인들까지 다 죽였다고 했다. 서대룡은 물론이고 혈천도마도 절대 그런 잔혹한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중경에는 왜 오신 겁니까?”
부디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대답이 나왔다. 혈천도마는 본교에서 책이나 보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사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듣고 있던 검우진의 눈빛도 강렬해졌다.
서대룡의 등장에 혹시 했는데. 만약 혈천도마까지 이곳에 있다면,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
“설마? 도마 어르신께서 여기 계십니까?”
서대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여기 계십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시지요.”
서대룡은 검무극을 한 번 쳐다본 후 떨리는 목소리로 지난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말은 검무극에게 했지만, 교주에게 하는 보고였다.
“일전에 사부님께서 볼일이 있다며 출교하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고요?”
“네. 다녀올 곳이 있다고만 하셨지요. 한데 평소와는 좀 다르셨습니다.”
“어떤 점이요?”
혈천도마가 무공을 가르칠 때면 워낙 엄격했기에, 서대룡은 사부의 감정이나 속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둘 사이에 유대감이 깊어졌고, 가끔 서대룡의 농담도 받아주곤 했다. 그래서 사부의 감정을 예전보다는 잘 느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셨지만, 왠지 모르게 표정이 어두우셨습니다.”
그 말에 검무극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눈치가 빠른 서대룡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천도마라면, 그가 본 것이 정확했을 거다. 혈천도마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
“한데 더는 여쭙지 못했습니다.”
그랬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혈천도마가 일이 있어 출교한다는데 어찌 꼬치꼬치 캐물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출교하시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제 앞으로 이게 도착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대룡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가 건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설마 이건?”
“맞습니다. 사부님께서 평소 즐겨 읽으시던 시화집입니다.”
이 시화집은 혈천도마의 책이 확실했다. 검무극이 빌렸다가 돌려주면서 남긴 글이 앞장에 남아 있었다.
―어르신은 무인이 안 되셨으면 시인이 되셨을 겁니다.
“이게 왔었다고요?”
검무극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그리고 책 사이에 이게 꽂혀 있었습니다.”
서대룡이 또 다른 종이를 건넸다.
―모월모일 중경 유명장.
멸문한 유명장에서 만나자는 기별이었다.
검무극이 놀라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서대룡에게 기별할 일이 있으면 전서를 보내면 되지, 굳이 책을 보낼 이유가 없었으니까. 과연 아버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르신 필체입니까?”
“그게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본각의 필체연구가에게 조사를 맡기려 했습니다. 한데 마음을 바꿔먹고 바로 출발했습니다.”
“왜 결과를 보지 않고 출발하셨소?”
“생각해 보니 확인할 필요가 없더군요. 사부님 필체면 당연히 와야 하고, 사부님 필체가 아니라면 더 빨리 와야 했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적어 보낸 거면 혈천도마가 위험하다는 의미였으니까.
“소교주님이 계셨다면 상의드렸겠지만.”
검무극도 없고, 이안도 없고. 때마침 장호마저 마군들과 교를 나간 상태였다.
결국 서대룡은 혼자 중경으로 왔다.
검무극은 깨달았다. 이번 일은 서대룡이 반드시 중경까지 찾아올 것임을 알고 있는 자의 음모였음을. 놈은 본교나 혈천도마에 대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다.
“거기 적혀 있던 날에 유명장을 찾아갔는데 사부님은 안 계시더군요. 날짜를 잘못 적은 건지, 장소를 잘못 적은 건지.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인근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었죠.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곧장 통천각을 통해 총군사님께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건 잘하셨습니다.”
역시 총명한 서대룡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날 밤 제가 묵고 있는 객방으로 누군가 서찰을 보냈습니다.”
검무극은 정확히 서찰 내용을 알아맞혔다.
“대정문에서 보자는 기별이었습니까?”
“맞습니다. 앞서 허탕을 쳤기에 안 가볼 수가 없었죠. 한데 이번에도 허탕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연속해서 그 일들이 터졌습니다.”
우리가 마차를 돌렸을 때, 서대룡은 이미 이곳에 와 있었고, 이 사건들에 연루되어 있었던 거다.
“유명장과 대정문 사건으로 중경이 봉쇄되었지요. 굳이 빠져나가자면 나갈 수 있었지만, 사부님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한 상황에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통천각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교주님과 소교주님이 안가에 계시니 그곳으로 가라고요.”
총군사가 특별히 허가해 주지 않았다면 아무리 황천각주라 하더라도 천마 전용 안가에 올 수는 없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사마 군사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내려준 것이다.
서대룡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한데 아까 하신 말씀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제가 흉수라는 겁니까? 혹시 그곳을 찾아갔기 때문입니까?”
하지만 아까 검무극은 그곳에 찾아갔다고 말하기 전에 흉수 이야기를 꺼냈다.
검무극이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대정문주를 죽인 무공이 멸천마도식입니다.”
깜짝 놀란 서대룡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다.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누군지 몰라도 제법 그럴듯하게 음모를 꾸몄습니다.”
아버지의 분노가 느껴졌다.
차라리 아버지는 자신에게 도전했다면 이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마도천하라는 말을 남겨 마도를 건드렸고, 이제 아버지의 마존을 건드렸다.
‘나의 혈천도마이기에 앞서 도마는 아버지의 마존이니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아버지는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것임을.
이윽고 검우진이 나직하게 말했다.
“어디 가서 당할 사람이 아니니 그 사람 걱정은 할 필요 없다.”
혈천도마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하고는 아버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말하고 있었다. 어서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라고.
검무극이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르신이 어디 계신지 알아내겠습니다.”
검우진이 거처로 들어가자 안가 마당에서는 검무극과 서대룡 둘만 남았다.
비로소 서대룡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마 앞에서 많이 긴장했다. 겉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많이 떨었다.
“교주님께서 네 짓 아니냐! 추궁하실까 봐 겁났습니다.”
이제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그럴 리가? 아버지는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계신다.”
“저에 대해 아신다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추천했다고 황천각주 자리를 그냥 맡겼겠어? 아마 총군사께서 인간 서대룡에 대해 모든 걸 다 보고하셨겠지.”
“제 소심함도 다 알고 계시겠군요.”
이 상황의 심각함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서대룡을 보니까 좋았다. 좋은 사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봐도 이렇게 좋다.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습니다.”
소교주님은 모르실 겁니다. 제가 얼마나 소교주님이 보고 싶었는지요. 소교주님 돌아오셨는지 매일 확인했습니다.
“가셨던 일은 잘 처리하셨어요?”
서대룡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누가 갔는데 잘 안 끝났겠습니까?”
검무극이 혼자 갔어도 믿을 수 있는데, 교주님까지 함께 갔으니.
“거기 일 처리 할 때만 해도 진짜 문제가 이곳 중경에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지.”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님 괜찮으시겠죠?”
하지만 이내 시화집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우리 손에 있는데 괜찮으실 리가 없죠.”
그렇게 좌절했다가 혼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제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교주님도 그러셨잖아요? 우리 사부님, 어디 가서 쉽게 당할 분이 아니시라고요. 괜찮으실 거예요.”
애정이 깊어질수록 걱정도 많아진다고.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든 버텼는데, 검무극을 보자 참았던 걱정이 터져 나왔다. 혈천도마 걱정에 이번 일이 터지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서대룡이었다.
검무극이 서대룡을 안심시켰다.
“어르신은 괜찮으실 거다.”
“정말 그러시겠죠?”
“내 말이 언제 틀린 적이 있더냐?”
“그럼요, 절대 틀린 적 없으시죠!”
검무극은 혈천도마를 떠올렸다.
지금 떠올린 모습은 커다란 도를 휘두르던 모습도 아니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눈빛도,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도 아니었다.
떠올린 모습은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믿는다. 어디 가서도, 그 누구에게도 쉽게 당하지 않을 것임을.
책을 읽는 마존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검무극이 책을 품에 넣었다. 이 책이 혈천도마를 지켜주리라 확신한다.
“어르신 일이니, 너와 내가 해결해야겠지?”
서대룡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뭐든 맡겨만 주십시오.”
“저들은 너를 이번 일의 흉수로 만들려고 했다. 아마 널 목격한 사람들이 나올 거다.”
대정문주를 죽인 무공을 익힌 사람이 그곳을 사전에 방문했다? 거의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자고.”
“어떻게요?”
“살면서 언제 이런 악인이 되어 보겠어?”
서대룡에게 대정문을 몰살한 악인이 되라는 의미였다. 그것만은 안 할 수 없겠냐고 뺄 것 같았는데, 서대룡은 흔쾌히 대답했다.
“지금부터 제가 흉수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저 무자비하고 무서운 놈입니다!”
“하겠다고? 자칫 잘못하면 무림인들에게 그런 악인으로 찍혀버리고 이번 일이 끝날 수도 있는데? 겁 안 나냐?”
“겁나죠.”
서대룡이 솔직히 말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겁 많고 소심한지. 제 한 몸 얼마나 챙기는지. 또 다른 사람 시선도 정말 많이 의식하고요.”
하지만 그런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었다.
“그래도 해야죠. 사부님 일인데요. 제가 죽더라도 해야죠.”
서대룡은 검무극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의 어둡고 우울하고 소심했던 자신의 모습을.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도 기억한다. 술에 취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그날을. 그런 자신을 침상에 재워주었던 혈천도마를. 그렇게 깔끔한 성격인데.
그때를 생각하면 뭘 망설이겠는가?
“안타깝네요. 미끼 역할밖에 못 해서.”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멋지게 활약해서 이번 일을 해결하고 싶은 그의 마음을. 그래서 혈천도마에게 인정받고 싶은 열망을.
하지만 아직은 무리다. 이번 일의 배후는 보통 놈이 아니었으니까. 미끼 역할도 쉽지 않은 일이다.
“미끼긴 미끼지만, 괴물을 낚을 미끼다. 미끼 계의 최고봉, 수석 입학 출신의 똑똑한 미끼, 무림 최고의 미끼.”
서대룡이 옅게 웃었다. 정말 눈앞의 이 소교주가 아니라면 이 상황에 벌써 몇 번은 기절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도망가고 외면하는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미끼, 괴물 뱃속에 삼켜져도 꼭 꺼내주셔야 합니다!”
진하군은 중경지단 단주의 집무실 창가에서 밖을 쳐다보았다.
연무장으로 무인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맹 섬서지단에서 지원을 나온 무인들이었다. 중경과 인접한 모든 지단과 지부에서 무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이곳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교와의 일전을 각오한 모습이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중경 곳곳에서 정파 무인들과 마인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야말로 분위기는 흉흉했다.
진하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지단주 주궐이 서 있었다.
“맹주님께서 천라지망에 대한 결정권을 대주님께 내리셨습니다.”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
진하군은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일을 잘못 처리했다가는 후계자가 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할아버지는 손자라는 이유로 실수를 용서해 주는 분이 아니셨으니까.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하실 거다. 그래서 잘 판단해서 처리해야 한다.
“천라지망을 펼치시려면 지금 당장 펼치셔야 합니다.”
천라지망의 생명은 시간이다. 적이 빠져나간 후에 펼쳐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주궐의 마음은 급했지만 진하군의 생각은 달랐다.
‘흉수가 혈천도마든 아니든.’
진하군의 시선이 저 멀리 담장 너머를 향했다.
‘그들은 모두 이곳에 있다.’
음모를 꾸미는 자도, 음모에 당한 자도.
‘그들은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곳에서 끝장을 보려 한다.’
만약 그렇다면 천라지망을 펼쳐서 병력을 분산할 것이 아니라, 한 곳에 집결해 두는 게 이후 벌어질 사건에 좀 더 쉽게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집무실로 수하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흉수를 목격한 제보자를 찾았습니다.”
진하군과 주궐은 깜짝 놀랐다.
“당장 데려와라.”
주궐의 명령에 수하가 한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잔뜩 긴장하고 겁먹은 얼굴로 들어선 그는 저잣거리에서 가판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이었다.
“참사가 있기 전날, 대정문이 어딘지를 묻는 무인이 있었습니다.”
주궐이 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인지 기억나는가?”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였지요.”
“나이는? 노인이었나?”
“아닙니다.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젊다는 말에 주궐은 내심 실망했다. 혈천도마를 목격한 사람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병장기는 뭘 들고 있었지?”
“등에 커다란 도를 차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도를 찼다는 말에 주궐의 눈빛이 다시 살아났다.
“그 사람 얼굴은 기억나나?”
“네, 특이한 얼굴이라 기억납니다.”
주궐은 수하에게 당장 그를 화공에게 데려가 용모파기를 그리라고 명령했다.
“혈천도마가 수제자에게 무공을 전수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쩌면 흉수가 그 수제자일 수도 있겠습니다.”
진하군은 오히려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착착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으니까.
“지단주께서는 누군가를 멸문시키러 가면서, 길에서 그곳 위치를 물어보고 갔으리라 생각하시오?”
주궐은 그 말에는 할 말이 없었지만 다른 할 말은 있었다.
“만약에 그자가 혈천도마의 수제자라면 말입니다. 마공에 멸문당한 곳으로 하필 그 무공을 익힌 마인이 우연히 다른 볼일로 찾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반박하기 어려운 건 진하군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가 혈천도마의 수제자로 밝혀진다면, 다들 이번 일을 마교의 소행으로 여길 것이다. 주궐의 말처럼 그런 우연이 일어날 리는 없었으니까.
“일단 목격자가 진술한 용모파기를 최대한 많이 그려서 중경 곳곳에 붙이시오. 그를 찾는 것이 우선이오.”
검무극을 믿는 마음과는 별개로, 혈천도마의 제자가 이번 참사를 저질렀을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으니까.
“천라지망을 펼치셔야 합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결정하겠소. 우선은 그를 찾는 데 집중하시오.”
“알겠습니다.”
주궐이 밖으로 나갔다.
진하군이 멸마대 수하에게 말했다.
“소교주에게 기별해라. 내가 은밀히 보잔다고.”
* * *
은은한 달빛이 풀잎 하나하나에 내려앉았다.
검무극은 넓게 펼쳐진 들판에 홀로 서 있었다.
서대룡에게 괜찮을 거라 확신했지만,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걱정되었다. 강하다는 걸 알기에 더 걱정되었다. 그 강한 사람에게서 소식이 끊어졌으니까.
‘어르신.’
그가 보고 싶었다. 멸천대도를 땅에 박아두고, 칼에 기대서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번 일 끝나면 그 칼에 같이 기대서 한잔하시죠, 어르신.’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걸어와서 검무극 옆에 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왔나?”
“나와줘서 고맙네.”
“당신이 부르는데 당연히 나와야지. 바쁠 텐데, 왜 불렀나?”
그러자 진하군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검무극에게 건넸다.
한 사람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닮게 그려졌나?”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순순히 대답했다.
“똑같군. 앞에 앉혀두고 그린 것처럼 닮았어.”
그 말은 그림 속 인물이 혈천도마의 제자임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누가 제보한 건가?”
“그 사람이 저잣거리 행상에게 대정문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더군.”
“하루에도 수백 명을 상대하는 사람일 텐데, 이렇게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서대룡의 특징을 잘 잡아서 그렸다. 미리 준비된 일이 아니라면 이런 그림이 나올 수가 없다.
“조작이다?”
“그 제보자는 이미 사라졌거나, 죽었을 거네.”
이미 증언을 마치고 용모파기까지 진술했으니 달라지는 것은 없다. 증인을 살인멸구했다고 여겨 오히려 마교에 대한 증오심만 더욱 높아질 것이다.
“확인해 보지.”
진하군의 마음 한구석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제거했을 수도 있지 않나?’
나를 역으로 속이기 위해서.
아직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역시 그를 완전히 믿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혈천도마의 제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나와 함께 있네.”
진하군이 검무극의 손에 들린 그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부터 그 그림이 중경 곳곳에 붙게 될 거네. 흉수가 혈천도마의 수제자란 소문까지 돌겠지.”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곤란하겠군.”
곤란이란 말로는 부족했다. 자신은 그 흉수를 찾아내야 하는 책임자였고, 할아버지는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후계자로 삼느냐 마느냐를 결정하실 테니까.
―그 사람, 내게 넘겨주게.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직접 조사해서 확실히 하고 싶었다.
지금은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열 중에 아홉이다. 그 나머지 하나가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자네들에게 붙잡히면 풀려날 수 없을 거네. 대정문주를 죽인 멸천마도식을 익혔고, 그 전날 대정문을 방문까지 했으니까. 한데 그거 아나?”
검무극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 사람, 황천각에 수석 입학했었다네. 생긴 건 이렇게 우울해 보이지만,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라고. 골수 정파 문파를 멸문시키는데 이렇게 증거를 철철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네.”
진하군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하지만 결국 드러난 증거가 진실이 될 수밖에 없다네. 저 수제자를 위한다면 자네가 진짜 흉수를 찾아야 하네. 그것도 최대한 빨리.”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풀들이 파도처럼 움직였고 멀리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해서 저들이 노리는 게 뭐라고 생각하나?”
진하군의 물음에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자네들과 우리 사이의 전쟁.”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놈들이 이간질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목적이 정마대전이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진하군이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검무극은 진심이었다.
“이 사건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네. 이렇게 우리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킨 후에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킬 거네. 어떤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는 돌이킬 수 없겠지.”
이 참혹한 사건들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전쟁을 일으켜서는?”
뭔가 얻는 것이 있으니까 그런 큰일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건 나도 모르겠네. 그들이 뭘 원하는지는.”
검무극은 처음에는 혈천도마의 개인적인 은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놈들은 일을 너무 크게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서대룡까지 불러들였다.
‘뭔가 더 있다.’
진하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군.”
어려운 가운데 검무극이 찾아낸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놈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네.”
“그게 뭔가?”
“자네와 나.”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저들이 생각한 것보다 우린 더 친한 친구라는 사실.”
자신을 향한 검무극의 눈빛에 진하군이 시선을 피했다. 이제 이 말을 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열에 아홉밖에 자넬 믿지 않는데. 그래도 우리가 친구인가?”
진하군은 용기를 냈다. 항상 자신을 괴롭혀 온 부분이었다. 검무극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데, 나는 그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사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를 열에 아홉이나 믿나? 나는 자넬 열에 여덟밖에 안 믿는데.”
또 장난치나 싶었는데 검무극은 진심이었다.
“자넨 정말 대협이 될 사람이네. 사람을 열에 아홉이나 믿으면서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다니. 이봐, 친구. 심지어 자넨 멸마대주고 나는 신교의 소교주야. 그런데 날 열에 아홉이나 믿는다고?”
진하군에게 믿음이란 열이 있으면 열을 다 믿었을 때 쓸 수 있는 말이었으니까.
“우린 열에 여덟 정도인 관계로 가자고. 그 여덟은 죽을 만큼 진심으로 노력하는 거지. 대신 나머지 둘은 여유로 남겨두자고. 우리도 사람인데 가끔은 의심도 하고, 미워도 하고 해야 하지 않나?”
진하군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의심이란 말도, 미움이란 말도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저런 말을 하고 있다.
“그 나머지 둘이 배신하면?”
“둘이 배신을 어떻게 하나? 나머지가 여덟이나 되는데.”
진하군은 한 번도 사람 사이의 믿음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 채우지 못한 그 나머지 하나가 배신한다고 여겼으니까.
“여덟이 굳건하면 그 둘의 반란은 배신이 아니라 섭섭함 정도가 되겠지. 여덟이 굳건하면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거고. 거기다 믿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믿음을 주는 거잖아? 완전한 믿음? 우린 그런 피곤한 인생 살지 말자고. 자네도 나도 적당히 실수하고 미움받고‚ 그렇게 살자고. 여덟만 확실히 믿어도 충분해.”
진하군은 알 수 없었다.
검무극은 자신이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 왔음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그럼 우린 친구겠군.”
“당연하지. 그런 의미에서 미끼 한 번 구경해 볼 텐가?”
“미끼?”
검무극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멀리 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진하군은 그곳에 도착한 사람이 그림 속의 서대룡임을 알아차렸다. 검무극이 이곳에 그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검무극은 인사를 시키는 대신 서대룡에게 물었다.
“너는 일에서 십 중에 나를 어느 정도로 믿느냐?”
물어 뭐하겠는가? 당연히 십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이런 장난칠 기회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서대룡이 아닐 것이다.
“칠쯤 되지 않겠습니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내 오른팔인데도 칠이라네.”
“첫 만남에서 일로 시작했으니, 장족의 발전이지요. 정말 그때는 일도 안 믿었습니다.”
교를 변화시키겠다는 소교주라니?
검무극이 손에 들린 종이를 서대룡에게 건넸다.
“자, 이건 기념으로 가지고.”
그리고는 진하군에게 말했다.
“이 그림, 내일 뿌리지 않아도 되네.”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서대룡을 맡기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진심인가?”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을 자네에게 맡기는 이유는 흉수이기 때문이 아니야. 이 사람은 내 오른팔이다. 이 사람이 흉수면 나도 흉수지.”
이렇게나 믿는 사람인데.
“쉽게 나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왜?”
맡기는 이유는 검무극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자네들이 이 사람을 찾지 못하면 놈들은 또 다른 가문을 멸문시킬 테니까.”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서대룡이 자신에게 붙잡혀 있으면 적어도 새로운 사건은 일으키지 않을 거란 말이었다. 정파 무림을 위한 결정이었다.
물론 검무극이 서대룡을 데려온 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놈들의 허를 찌를 생각이네.”
“허를? 무슨 말인가?”
“그들은 내가 절대 내 오른팔을 내주지 않을 거로 예상했을 거야. 나와 이 사람과의 관계를 알고 있을 테니까. 한데 자네에게 내어주면 어떻게 나올까?”
생각지 않은 행보로 미끼를 던지려는 거다.
그 반응과 대응에서 놈들을 뒤쫓을 실마리를 반드시 찾아낼 작정이다.
“나는 궁금해졌네. 놈들이 도마님을 끌어들였으면서 왜 그분의 제자까지 끌어들인 걸까? 그들의 계획에서 내 오른팔이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단지 본교와 무림맹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기 위한 역할이 다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그 궁금증을 푸는 과정에서 자네가 위험할 수 있네.”
무림맹에 붙잡힌 서대룡을 어떻게 처리하려 들지 알 수 없었으니까. 서대룡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위험을 경고했지만 오히려 진하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칠도 이렇게 용감하게 나서는데, 나는 구 아닌가?”
그의 농담은 참 오랜만이었기에 검무극은 반갑게 그 말을 받았다.
“그럼 여기 칠팔구가 다 모였군.”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렇게 긴장을 풀고 난 후 검무극이 서대룡을 보며 말했다.
“악인이여, 이제 벌 받을 시간이다.”
진하군이 이끄는 멸마대가 무림맹 중경지단으로 들어섰다.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주궐의 눈에 비친 광경.
여덟 명의 멸마대 무인이 중앙의 한 사람을 빙 둘러선 채 연무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궐은 가운데 붙잡혀 오는 사람이 그림 속의 남자임을 알아차렸다.
“잡았구나!”
지켜보던 무림맹 무인들이 일제히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곧이어 서대룡을 향해 살기가 쏟아졌다. 진하군과 멸마대가 아니었다면 욕설과 야유를 쏟아냈을 거다.
주궐이 진하군에게 달려갔다. 진하군을 향한 그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잘하셨습니다.”
검무극이 친구이기 때문에 마인들을 봐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진하군이 서대룡을 붙잡아 온 것이다.
‘이렇게 공사 구분을 잘하셔야 합니다.’
사실 공사 구분을 못 하는 것은 주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건들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중경에서 벌어졌고, 당연히 유명장주와 대정문주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은 그에게도 사적인 감정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주궐이 무서운 눈빛으로 서대룡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서대룡은 그 시선을 모른 척 앞에 걸어가는 무인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소교주님, 정말 제 인생에서 별의별 경험을 다 하는군요.’
무림맹 소룡전에서 우승해서 축하의 함성을 듣기도 했고, 이번에는 이렇게 강렬한 증오의 살기를 받기도 하고.
그렇게 들어선 곳은 중경지단의 조사실이었다.
황천각 조사실에서 죄인들을 조사하던 그가 이제 죄인의 신분이 되어 이곳에 앉은 것이다.
서대룡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끼가 되어 작전을 펼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막상 무림맹의 조사실에 들어오니 긴장되고 두려웠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지금은 멸마대가 자신을 철통같이 지켜주고 있지만, 언제 빈틈을 노려 자신을 죽이려 들지 모를 일이니까.
먼저 그곳에 들어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목마르지 않으시오?”
“괜찮습니다.”
진하군의 물음에 서대룡은 정중히 대답했다.
각주와 대주, 단지 직위만 따지면 오히려 서대룡이 더 높았다. 그런데도 공손히 예를 갖추는 이유는 진하군은 차기 맹주 자리에 유력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소교주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사람은 진하군이었다. 흉수를 잡았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고 그건 곧 자신의 명성을 크게 높여줄 것이다.
“겁나지 않으시오?”
“소교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괴물 뱃속에 삼켜져도 꼭 꺼내주시겠다고. 그럼 저는 맛있게 삼켜지는 역할만 하면 되죠.”
만약 검무극이란 사람을 알기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속으로 비웃었을 거다.
넌 이용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제는 서대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 아무리 봐도 이 눈빛은 칠 점짜리 눈빛이 아니다.
“이제 곧 조사관들이 들어올 텐데. 그들은 어떻게든 당신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려 할 거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서대룡이 진하군을 걱정했다.
“대주께서는 되도록 저와 함께 있지 마십시오.”
“나를 걱정해 주는 거요?”
“굳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같이 있을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서대룡은 진하군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소교주를 걱정해서다. 친구를 잃었을 때 얼마나 크게 상심할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그곳으로 조사관들이 들어왔다.
진하군은 그들에게 말했다.
“철저히 진상을 밝혀내게.”
“알겠습니다.”
진하군이 서대룡을 한 번 쳐다본 후 그곳을 나섰다.
문밖에 지단주 주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자는 혈천도마의 수제자요. 그를 구하기 위해 마존이 올 수도 있으니, 지단 방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감히 본 지단에 들어올 생각은 못 할 겁니다.”
섬서지단을 필두로 인근 지단에서 속속 지원 무인들이 오고 있었다.
“그래서 당장 단주께서도 방심하고 있지 않소?”
주궐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정중히 말했다.
“방심하지 않고 잘 지키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을 습격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진하군이 건물을 나왔다.
검무극과 손을 잡고 상대의 예상을 벗어나는 수를 뒀다.
‘자, 이제 너희는 어떻게 나올 거냐?’
* * *
중경의 저잣거리 구석에 점쟁이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파가 느껴지는 주름살이 가득했는데, 그는 인생의 비밀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눈빛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 깔린 돗자리에는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여러 물건이 놓여 있었다. 피어오르고 있는 초와 향, 괴이한 색이 칠해진 거북 등껍질, 점을 치기 위해 특별하게 만들어진 동전인 점동, 붉은 글씨로 그려진 부적, 나무통에 가득 들어 있는 점대까지. 그야말로 온갖 물건이 다 놓여 있었다.
그 앞으로 행인이 많이 오갔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점쟁이 노인 역시 장사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손님이 왔다.
그곳을 지나던 한 남자가 쪼그리고 앉은 것이다. 평범한 인상과 옷차림의 남자였다.
점쟁이 노인이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얼굴에 우환이 가득하구먼.”
“그건 나도 맞히겠소.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라면 여기 쳐다나 보겠소?”
지나가다 그 말을 들은 행인들이 웃었다.
“어디 얼마나 안 풀리는지 어디 한 번 보세.”
점쟁이 노인이 점통을 흔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었다.
노인에게 손님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혈천도마의 제자가 멸마대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내용의 보고였지만 눈을 감은 노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소교주가 오른팔을 내어줬다? 제법이군.
노인은 서대룡이 검무극의 오른팔이라는 사실도 알았고, 의도적으로 체포되게 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노인이 눈을 뜨며 대나무 막대기가 가득 든 통을 내밀었다.
“자네의 미래가 여기 있으니 하나 골라 보시게.”
남자가 그중에 하나를 골랐다.
꽂혀 있는 대나무 막대기 중의 하나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고, 남자가 그것을 빼 들었다.
―피로 새 역사를 쓰다.
놀랍게도 노인은 서대룡이 붙잡혀 가는 경우도 예상했고, 이후 대처에 대해서도 이미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남자는 이 명령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중경지단을 공격해서 피바다를 만들라는 의미.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마교에 대한 정파 무인들의 악감정은 극에 달할 것이다.
―중경지단에 지원 나온 무인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을 테니, 오히려 이 기습은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외부에서 온 무인들이 많기에 오히려 더욱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걱정은 이것이었다.
―한데 멸마대가 있어서 우리 쪽 희생이 클 겁니다.
일반 무인들과 멸마대의 수준은 차원이 달랐으니까. 경험 많은 멸마대 무인들은 혼란스러운 상황도 일순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통을 내밀었다.
“첫 번째 점괘로는 부족하나? 그럼 하나 더 고르게.”
이 역시 대비가 되어 있었다는 듯, 대나무 막대기 중 하나가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이번 역시 남자는 그것을 빼 들었다.
―사라진 자들이 남은 자들을 도우리라.
남자는 이 명령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떤가? 이 정도면 자네 살길이 되겠는가?”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두 사람은 점쟁이와 손님으로 돌아왔다.
“충분히 해볼 만한 것 같소. 고맙소!”
남자가 동전 몇 개를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채 더 주고 가!”
“성공하면 못 준 복채 주러 오겠소.”
“그래 놓고 다시 가져다주는 놈 한 놈도 못 봤네!”
점쟁이 노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는 못 들은 척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건너편 길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점쟁이 노인은 남자가 뽑았던 대나무 막대기를 주워서 다시 통에 꽂았다. 손님의 손끝에서인지, 노인의 손끝에서인지, 어느새 막대기에 쓰여 있던 글자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노인은 연신 하품을 해가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 *
검무극과 진하군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중경지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였다.
“녀석, 고생하고 있겠군.”
“보기보다 정신력이 강하더군.”
서대룡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종일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잘 버티고 있었다.
“원래 황천각 조사관 출신이니 상대 조사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을 거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검무극의 눈빛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자네가 이렇게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알 거네.”
“어떻게?”
“그도 그랬을 테니까.”
“나도 오른팔부터 만들어야겠군.”
진하군의 농담에 검무극이 함께 웃었다.
그때였다.
멸마대 무인 하나가 달려와서 빠르게 보고했다. 옆에 검무극이 있었기에 전음으로 보고했다.
―유명장주의 행적을 발견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유명장에서는 피만 흥건히 남았을 뿐, 한 구의 시체도 없었다.
―그가 살아 있다고?
―네, 일단의 무인들에게 붙잡혀 있는 걸 알아냈습니다.
진하군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즉시 멸마대 출동 준비해라.”
“네!”
수하가 그곳을 떠나자 진하군은 이 내용을 검무극에게 전했다.
“유명장주가 살아 있네.”
검무극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들의 시체가 없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그의 행적이 드러난다?
“멸마대와 가서 그를 구해오겠네.”
진하군 역시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은 가야 했다. 유명장주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구해야 했으니까.
검무극은 세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들을 구하러 간 진하군이 죽는다.
서대룡을 지키고 있던 중경지단 무인들이 죽는다.
서대룡이 죽는다.
모든 경우가 최악이었다.
분명 저들은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일으킬 것이다.
검무극은 이때를 대비해서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부탁이 두 가지 있네.”
“뭔가?”
“우선 그들이 중경지단에 들어올 수 있게 해주게.”
진하군은 검무극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맹에서 내려온 보고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진하군이 대답을 망설이자 검무극이 그를 설득했다.
“알고 있네. 그걸 허용하는 일이 얼마나 자네에게 부담되는 일인지. 한데 그걸 허용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생각해 보게.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이게 하겠네.”
진하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아, 그렇게 하지. 단, 나와 멸마대가 돌아올 때까지네.”
“당연히. 이번 일만 처리하면 조용히 물러갈 거네.”
정말이지 검무극이 아니라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부탁이었다.
“다른 부탁은 뭔가?”
“자네를 따라가게 해주게.”
진하군은 검무극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양쪽 어딘가에서 큰 사건이 터질 거로 여기는 거다.
“왜 나를 따라가려고?”
“자넬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마교 소교주가 멸마대주를 지켜주려고 따라간다니? 무림의 그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원래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거절했겠지만, 이미 검무극과의 관계는 그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와 그 많은 일을 겪고도 자존심을 내세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으니까.
어쨌든 검무극이 이런 위기감을 느낀다면, 이 상황은 정말 위험한 상황인 거다.
“이 말을 들으면 자네 오른팔이 섭섭해할 텐데.”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가 오는지를 알면 절대 안 그럴 거네.”
* * *
진하군이 언덕에서 내려왔을 때, 주궐이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함께 가서 구출하겠습니다.”
진하군이 그를 제지했다.
“주 단주 마음은 제가 잘 알고 있소만 내가 멸마대를 이끌고 다녀오겠소. 놈들이 성동격서 계략을 펼칠 수도 있으니 지단주께서 지단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주궐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지단도 지켜야 했지만, 그보다 유명장주를 납치할 정도의 적이라면 정예들이 상대해야 했으니까.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고맙소.”
주궐과 헤어지고 지단을 출발하기 전에 진하군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지하에 마련된 임시 뇌옥이었다.
그곳은 임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진하군은 서대룡 주위를 지키던 무인들을 잠시 물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서대룡이 놀란 이유는 진하군의 손에 자신의 대도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멸마대를 이끌고 급히 지단을 떠나야 할 일이 생겼소.”
서대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생길 리가 있겠는가?
만약 상대가 검무극이었다면 서대룡은 이런 농담을 했을 것이다.
―아! 결국 이렇게 절 버리시는군요! 그동안 감사…… 감사는 무슨! 저 죽어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진하군에게 서대룡은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서대룡을 바라보는 진하군의 눈빛이 깊어졌다.
검무극도 그렇고, 저 서대룡도 그렇고. 자신이 마인을 상대하고 있다는 걸 잊게 한다.
“이리 가까이 오시오.”
진하군은 서대룡의 제압된 내공을 풀어준 후 대도를 건네주었다.
“도는 이곳을 지키는 이들이 못 보는 곳에 숨겨두시오.”
“고맙습니다.”
자신의 도를 받아 들자 서대룡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죽음이 성큼 다가서는 느낌이다.
“이런 시기에 그대를 두고 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소.”
진하군이 놀라운 말을 전했다.
“그대들 통천각에서 당신을 위해 지원을 보냈소.”
“통천각에서요?”
자신이 중경에 와서 통천각에 상황을 보고했었다. 그래서 특별 안가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고.
혈천도마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사마명이 지원을 보낸 모양이다. 그때는 검무극과 검우진이 중경에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통천각에서 보낸 지원이 중경 외곽에서 대기 중이었소.”
대정문의 참사가 마교의 소행이란 소문이 돌면서 중경무림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교주가 내게 부탁했소. 그들을 이곳 지단으로 들어오게 해달라고.”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그 부탁을 받아들였음을.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멸마대의 내 수하가 남아서 그들을 은밀히 받아들일 거요. 물론 신교 소속이 아니라 멸마대가 외부에서 도움을 청한 외부 무인처럼 들어올 거요. 그럼 무사히 다시 볼 수 있길 바라겠소.”
그 말을 남기고 진하군이 그곳을 떠났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자세한 말을 물을 수 없었다.
서대룡은 궁금했다.
‘대체 누굴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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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두두.
마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큰 짐을 옮길 때 쓰는 운송용 대형마차였다. 마차는 아주 작은 창문만이 나 있어서 밖에서는 무엇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차에 실린 것은 무인들이었다.
평범한 무복을 입었기에 어느 소속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생김새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었다.
하나같이 사납고 무서운 얼굴에 산전수전 다 겪은 예리한 눈빛이었고, 그리고 보통 사람 두 배의 덩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을 꽉꽉 채운 마차들이 중경지단을 향해 줄지어 내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