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회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편중과의 여정은 더없이 즐거웠다.
그가 능숙하게 모는 마차에서는 천마호신공을 수련했고, 맛 좋은 객잔에 들러 밥을 먹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마차를 세우고 함께 구경했다. 폭포 너머에서 뜨는 무지개를 보았고, 술 한잔하면서 마부의 삶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마가촌에 도착하고, 나는 그에게 돌아가는 비용까지 지불했다.
“여긴 험악한 마인들이 많아서 손님을 태우고 돌아가기에는 위험하오. 이 돈은 그대에게 주는 돈이 아니라 애들 옷이라도 한 벌 사 입히라고 주는 돈이니 내 성의를 무시하지 마시오.”
편중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 얼굴이었지만 이 한마디로 대신했다.
“언젠가 다시 모실 날이 있기만을 고대하겠습니다.”
이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겠지만, 사람 인연 또 모를 일이다. 언젠가 허연 백발이 된 편중의 마차에 올라탈 일이 생길지.
“조심히 돌아가시오.”
편중을 돌려보내고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아, 좋다! 이 냄새!”
마가촌 특유의 냄새가 나를 반겼다. 드디어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소교주님!”
저쪽에서 나를 보고 달려온 사람은 풍류주점의 조춘배였다. 어찌나 반갑게 뛰어오는지 넘어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주인장, 잘 지냈소?”
“언제 돌아오신 겁니까?”
“지금 막 도착하는 길이오. 오자마자 우리 주인장부터 만나는 걸 보니 오늘 일진이 아주 좋을 것 같소.”
“어이구,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까짓게 뭐라고요.”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춘배까지 보자 정말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그는 수레에 식재료를 싣고 풍류주점으로 가던 중이었다.
“재료를 직접 사시는군요.”
“그럼요. 제가 일일이 싱싱한 재료로 직접 고른답니다. 자, 가시지요.”
조춘배가 수레를 밀려고 할 때, 나는 그를 수레에 앉혔다.
“같이 앉아서 갑시다.”
나는 수레 앞에 조춘배와 나란히 앉았다.
조춘배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둘 다 앉으면 수레는 누가 끕니까?”
“마음으로 끄는 거죠.”
내가 장난친다 여긴 조춘배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밀어드리겠습니다. 처음으로 제 수레에 한 번 타보십시오!”
그가 수레에서 내리려던 그 순간, 수레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이구! 저절로 움직입니다!”
물론 내가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수레를 움직이는 거였다. 조춘배는 신기한지 감탄을 연발했다.
“제가 어려서부터 주점 일을 시작해서 온갖 경험을 다 했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입니다.”
“사실 나도 처음이오.”
“소교주님의 귀한 내공을 이런 데 써서 되겠습니까?”
“그 귀한 내공은 항상 쓰레기들에게만 쓰이고 있소. 오히려 지금이 제일 귀한 일에 쓰이는 거요.”
조춘배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무인이라면 꼭 소교주님을 모셨을 겁니다.”
“나는 싫소.”
혹여 말실수했나 바짝 긴장한 조춘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풍류주점이 없을 것 아니오? 주인장 아니더라도 수하들은 많소.”
조춘배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우린 풍류주점에 도착했다.
나는 항상 앉아서 술을 마시던 이 층 자리로 올라갔다.
“여긴 여전히 비워두시오?”
“네, 소교주님과 특별한 분들을 위한 자리죠.”
“이러면 주인장 손해 아니오?”
“그 손해 안 보려고 평생 아등바등 살아온 인생입니다. 이제 이런 재미도 있어야지요.”
조춘배가 흐뭇하게 벽에 새겨진 마존들의 서명을 쳐다보았다.
나도 함께 그곳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버지도 남기셨군요!”
“소교주님이 출교하시고 한 달쯤 되었을 무렵에 오셨습니다.”
“혼자 오셨소?”
“네, 두 번 오셨는데 두 번 다 혼자 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이곳에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고 계시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저기 서명을 남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 이러니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있나?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버지께 인사부터 드려야 해서요. 나중에 들르겠소.”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풍류주점을 나선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버지 서명을 보고 나니, 아버지가 더 보고 싶었다.
* * *
천마전 앞에서 호위 책임자 적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이미 전해진 모양이다.
그는 재빨리 내 아래위를 훑어보며 다친 곳은 없는지를 살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호위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강서지단에 간 사실에 화가 났겠지만,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안도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해. 갈 길이 아주 머니까.”
“아무리 그러셔도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죽으면 그들이 모든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돌아서려는 적연에게 물었다.
“눈은 어때?”
“괜찮습니다.”
“한 번 보자.”
이제 그는 실랑이 없이 순순히 안대를 벗었다. 눈에 붉은 기운을 살펴보니 그사이 수련에 진척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고통이 줄어드는 단계로 접어들 거다.”
적연의 눈에 손바닥을 대고 부드러운 내력을 주입했다.
“소교주님 무공 경지가 바뀌는 것은 제가 제일 잘 알겠습니다.”
“느낌이 달라?”
“네, 마지막에 살펴봐 주셨을 때와 또 다른 느낌입니다.”
오히려 나는 느끼지 못하는 변화를 그의 눈은 미세하게 다 느끼고 있었다.
“대체 언제 수련하시는 겁니까?”
“농땡이처럼 보이지만 내가 의외로 부지런해. 올 때도 마차 타고 오면서 내내 수련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가면서 마차에서 한 천마호신공 수련 때문에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지 않는다.
편중과 함께 석양을 바라보았을 때 바뀌지 않았을까? 주양의 손에 동전을 올려줄 때 바뀌지 않았을까? 지단주 호경의 고충을 들어주고 있을 때 바뀌지 않았을까?
여전히 나는 믿는다.
삶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야 무공도 바뀌는 법이라고.
* * *
드디어 뵙고 싶었던 아버지가 저 멀리 앉아 계신다.
피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서 태사의 아래까지 걸어갔다. 아버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본교를 지키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버지께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나갔다 돌아오면 항상 아버지를 먼저 찾아뵙는다. 벌써 여러 번이고, 똑같은 인사를 하지만, 그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갈수록 아버지가 더 반갑고 좋다.
“나가기만 하면 손에 피를 묻혀서 돌아오는구나.”
호남에서도, 강서에서도.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이게 다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오랜만에 보는 저 비웃음이 어찌나 반가운지.
아버지도 예전과 많이 달라지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 태사의에서 내려다보시던 분이었는데.
“나가서 좀 걷자.”
요즘은 이렇게 나와 함께 걷기를 좋아하신다.
아버지를 따라 천마전을 나왔다. 후원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을 함께 걸었다.
“마부를 잘 만나서 솜씨 좋은 객잔을 많이 알아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 맛집이 숨어 있더라고요. 나중에 제가 다 모시겠습니다.”
나는 내 손에 죽은 자들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통천각을 통해 있었던 일들을 보고 받으셨을 테니까. 내가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풍경 좋은 곳이 어디인지, 또 어디에 가면 분위기 좋은 다루가 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이곳 후원까지 나오셨듯, 이제는 중원으로 함께 나가고 싶었으니까.
“요즘 염왕채에서 이자를 얼마나 받는 줄 아십니까? 미친놈들입니다.”
염왕채 이야기도 하고 마검대 무인들과 나눴던 대화도 전해주었다.
“마검대에게 아버지가 직접 선물을 보내주시면 사기가 많이 오를 겁니다.”
“그러지.”
아버지가 순순히 대답하자 너스레를 안 떨 수가 없었다.
“차별이 너무 심하십니다.”
“무슨 차별?”
“이공자일 때와 소교주일 때 너무 다르시다고요.”
“달라야지. 그래야 네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 알지. 왜? 예전처럼 대해주랴?”
“아버지 지풍에 이 잘생긴 얼굴 구멍이 날 뻔한 그 시절요? 사양합니다!”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너무 좋다.
아버지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멀리 보이는 대천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다음에는 저와 놀러 가시죠.”
“내가 움직이면 강호가 놀란다.”
“놀래라고 하고요. 천마전은 그만 지키시고 이제…… 아버지 인생을 지키러 가시죠.”
순간 아버지의 등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 아버지의 무림출도가 전쟁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아버지의 출도는 즐거운 여행이길 바란다.
“아버지하고 놀고 싶어서 그럽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저 멀리 있는 대천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 어디 아버지라고 나가고 싶지 않으시겠는가? 저 자리가 주는 중압감은 앉아보지 않으면 모를 테니까.
“권마에게 딸이 생겼더구나.”
“저도 놀랐습니다. 사부가 그런 결정을 할지.”
“네가 개입한 것은 아니고?”
“제가 온갖 일 참견하기 좋아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아닙니다. 부모 자식의 일인데 감히 어찌 끼어들겠습니까?”
“의외였다.”
어디 놀란 사람이 아버지뿐이겠는가?
“세상에 혼자 남겨져도 잘살 것처럼 보이지만 외로웠던 거죠. 어떠십니까? 아버지도 딸 하나 있으면 좋겠습니까?”
어쩐 일로 아버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어지고 딸이 생긴다면요?”
아버지는 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하십니다!”
오랜만에 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떠니 기분이 좋았다.
“따라오너라.”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천마전의 후원에서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외부의 침입을 불허하는 온갖 경계들을 지나 은밀히 펼쳐진 진법까지 연속으로 지나고 나서야 목적지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는데 현판에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마보고(天魔寶庫).
천마신교의 보물창고로 나를 데려오신 것이다.
“아! 여긴 처음 와봅니다.”
아버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병장기가 날을 번쩍이고 있었고 영약과 영초들은 온갖 향을 풍기고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야명주와 피독주와 같은 눈부신 보석들은 수도 없었다.
무인이다 보니 우선 눈이 가는 것은 병장기나 영약이었다.
검과 도, 창은 물론이고 부(斧), 륜(輪)과 겸(鎌), 척(尺), 선(扇), 필(筆), 침(針)……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신병이기들이 다 전시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무림에 출현하면 피바람을 일으킬 신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약 역시 천년설삼은 아예 취급도 하지 않았다. 만년설삼급의 최상급 영약과 영초들이 음기와 양기의 성질에 따라 분류되어 보관되어 있었다.
거기에 따로 보관된 영약도 있었다. 숫자는 모두 여덟.
“여기 이쪽 것들은 전쟁이 발발하면 즉시 마존들에게 지급될 영약이다.”
그뿐 아니라 전쟁에 사용할 독과 암기들도 있었다. 암기는 무림에서 사용이 금지된 금용암기들이었고, 독은 한 번에 수백, 수천 명을 한 번에 앗아갈 수 있는 대량살상용 독이었다. 그 비싼 무형지독이 병째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독이 준비되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섬뜩해졌다. 전쟁이 터지면 곧장 이 독들은 독왕에게 전해지겠지?
어디 그뿐인가? 한쪽에는 호신갑들이 쌓여 있었다. 이렇게 쌓여 있으니 얼핏 저잣거리 싸구려 무복처럼 보였지만, 하나하나 무림에서 구하기 힘든 호신갑이었다. 이 역시 전쟁이 발발하면 마존들과 각 조직의 수장들에게 지급될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하고 계셨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너무나도 존경하지만, 전쟁만은 안 됩니다.
아버지도 내가 그런 마음임을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이걸 보여주시는 것은 설득하시는 거다. 너와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그때 아버지가 뜻밖의 말씀을 꺼냈다.
“이 중에서 하나만 골라라.”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씀이 이어졌다.
“소교주에게 주는 내 선물이다.”
생각지 못한 선물이었기에 감동은 더욱 컸다.
소교주님가 된 후에 소교주님, 소교주님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제 진짜 소교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여기 있는 것 중에 무엇이라도 골라도 됩니까?”
“어차피 천마가 되면 다 네 것이다. 물론 지금은 단 하나지만.”
이 값진 보물들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이 중에서 내게 가장 도움이 될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병장기와 영약이 있는 곳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어딜 가느냐? 거긴 영약 없다.”
아버지는 당연히 영약 중에서 하나를 고를 거라 여기셨다. 천마검 다음 보검인 흑마검이 있으니 병장기는 필요 없었으니까.
“왠지 거기부터 보여주시는 것이 저쪽에 더 좋은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나는 보고의 물건들을 구경하며 계속 걸어갔다. 정말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음기를 보충해주는 방석도 있었고, 양기를 북돋아 주는 향로도 있었다. 기계장치로 무공을 펼치는 철제인형도 있었고, 춤을 추는 미녀상도 있었다. 철제인형의 무공은 절세신공일 것 같았고 춤을 추면 절세의 보법을 펼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지나쳐갔다.
귀하고 화려하고 신기한 온갖 것들이 있었지만 내 마음을 당기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돌아서려던 그때 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 크기의 정방형의 쇳덩어리였다.
“이건 뭡니까?”
“비궤(秘櫃)라는 거다.”
궤라는 이름이 붙었다면 상자라는 뜻인데, 어디에도 뚜껑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쓰이는 겁니까?”
“나도 모른다.”
아버지를 돌아보자 정말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부터인가 본교에 전해져 내려온 물건이다.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밝혀진 바가 없고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열릴 거라는 말만 전해져 온다.”
“아버지는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그저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혹시 지금 이것에 끌리는 마음이 그 인연일까?
이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이 칙칙한 쇳덩이가 눈길을 끌었다.
나 역시 인연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 많은 보물 중에서 이걸 고르고 싶다는 이 마음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제302회 우린 지금 강해져야 할 때.
“진심이냐?”
아버지의 저 한마디 물음에는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불확실한 선택을 할 거냐?’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인연이 닿지 않을 수도 있는 데다가 설령 인연이라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저와 인연이 없다면…… 적 머리통을 갈겨 버릴 때 쓰죠. 아니면 녹여서 검이라도 한 자루 만들면 그만입니다.”
“뭐 어차피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니.”
“지금까지 너무 완벽한 모습만 보여드려서, 가끔 이런 실수도 한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의미에서 이걸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비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에 손을 대는 순간.
“아아!”
내 깊은 탄식에 아버지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이것을 집었을 때 뭔가 짜릿한 느낌이 오거나, 구우우우 울리는 뭔가 신비한 소리가 제게만 들려야 하는데…….”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아무 느낌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 선택이었다. 저기 만년설삼 사이에 보면 공청석유가 몇 방울 담긴 병도 있었을 텐데.”
“아니죠? 제발 농담이라고 해주십시오!”
나는 영약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정말 영약과 영초 사이에 공청석유가 담긴 병이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날 못 봤다고? 이 우윳빛 영롱함을?
“진작 말씀해주셔야죠!”
“일부러 숨겨도 모자랄 판국에 내가 왜 말을 해주냐?”
나는 짐짓 괴로운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설마, 또 뭐가 있는 것 아니죠?”
아버지는 나를 놀리는 맛에 흠뻑 빠져 드셨다.
“명색이 본교의 보고인데 그것만 있으랴? 빙극설과(氷極雪果)도 있지.”
나는 아버지 옆으로 가서 나직이 말했다.
“물려주십시오.”
“불가!”
그래, 이걸 물러주시면 아버지가 아니시지.
“이것들 쓰지 말고 꼭 그대로 두세요! 나중에 제가 교주 될 때까지 꼭 남겨두세요! 아버지!”
이걸 보관해 두시는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라고 욕심이 없으실까? 지금이 아니라 결정적일 때 쓰시려고 모아둔 것이리라. 역시 아버지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거다.
나는 비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놈아, 너는 공청석유보다 귀한 놈이다!”
괜히 아버지에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여전히 내 본능은 이 비궤에 이끌리고 있었다. 잘못한 선택을 했을 때의 그 가슴 철렁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비궤를 선택했을 것 같은 이 느낌은 단지 잘못된 선택을 애써 부정하는 어리석은 고집이 아니었다.
아직도 이 칙칙한 쇳덩어리는 나를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
아버지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겉으론 까불다 잘 됐다는 표정을 지으셨지만,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눈치셨다. 당신이 풀지 못한 비밀을 내가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때가 되면 열릴 겁니다. 연자여, 잘 선택했다! 그깟 공청석유와 나를 비교했을 때 자존심 상했다! 이러면서요.”
“그래, 그런 희망이라도 가지고 살아야지.”
‘연자여!’를 다시금 외치며 비궤를 품에 넣었다.
아, 무겁기는 왜 이리 무겁냐!
아버지와 함께 천마보고를 나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사실 오늘 난 비궤보다 더 큰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가 내게 축하선물을 줬다는 그 사실. 그것이 제일 큰 선물이었다.
“이제 뭘 할 거냐?”
“수련해야죠. 수련하다 지치면 마존들하고 놀고. 또 노냐, 하셔도 놀 겁니다. 지겹지도 않냐? 하셔도 놀 겁니다.”
아버지 눈치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놀 때 아버지도 불러드려요?”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지만, 부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까 함께 놀러 가고 싶다는 말씀 괜히 드린 말씀 아니었습니다. 조만간에 저와 놀러 가시죠. 사마군사께서 말리면 몰래 둘이서 야반도주하는 겁니다. 천마비행술과 쾌속보로 냅다 달리는 거죠.”
아버지는 끝내 그러자, 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선물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버지가 말했다.
“조만간 바둑이나 한판 두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제 군사가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 * *
천마전을 나오자 내 뒤로 착착 적연을 비롯한 주간조 호위들이 줄을 지어 따라붙었다. 무언의 인사이자 반가움의 표시였다.
“다들 수련 열심히 했구나.”
드러나는 기세와 걷는 모습만 봐도 수련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제법 피나는 수련을 한 모양이다.
그래, 다들 강해지자. 우린 지금 모두 강해져야 할 때니까.
그길로 곧장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어르신!”
평소처럼 반갑게 달려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생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마당에 화원이 만들어져 있었고, 혈천도마는 그 큰 멸천대도를 세심하게 움직이며 꽃나무 가지를 치고 있었다.
“이런! 남도종인 줄 알고 왔는데 북천검가에 왔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검존님. 그사이 왜 이리 못나졌나요?”
“허튼소리 그만하고 저기 물 좀 뿌려라.”
“네.”
요즘 일화검존과 잘 지내면서 그녀에게 꽃을 키우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겉모습만 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나는 안다. 화원을 가꾸는 일은 책을 좋아하는 혈천도마와 꽤 어울리는 일임을. 저 남자다움 이면에 존재하는 도마의 부드러움이 있다.
“한 곳에 물 너무 많이 주면 죽는다. 골고루 줘.”
나는 혈천도마가 시키는 대로 다른 곳에 물을 줬다.
“검존 선배와는 요즘 잘 지내시나 봅니다.”
“뒤늦게 무공수련에 빠져서 바쁘시다. 화장 안 한 모습 보이기 싫다고 만나주지도 않는다.”
나와 마지막으로 비무한 후에 무공 수련에 전념하는 모양이다. 꾸미기 좋아하는 검존이 화장을 안 했다는 것은, 제대로 진심이란 의미.
“너 때문이지?”
“아닙니다.”
“아니긴. 다 늙어서 뭔 호승심인지.”
다 늙어야 와닿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젊어서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달리 보이잖아요? 어르신도 그렇잖습니까? 제자에게 칼을 선물하고, 마당에서 꽃을 키운다? 예전이라면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혈천도마는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가면쟁이만 챙기지 말고 주정뱅이도 챙겨.”
“취마 형님요?”
“내가 돌아온 날 지붕에서 술 마시며 너 기다리고 있더라.”
“어휴, 우리 못난 형. 술 취해서 또 궁상을 떨었군요.”
혈천도마는 그 말만 했을 뿐 취마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를 챙겼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변화였다.
“자,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혈천도마가 가지치기를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려 하자 그가 쫓아내려 했다.
“얼굴 봤으니 됐다. 괜히 나 신경 안 써도 된다.”
“저는 여기가 제일 편하고 좋습니다.”
“난 불편해. 혼자가 편해.”
잽싸게 들어가서 침상으로 몸을 던졌지만, 혈천도마의 허공섭물로 허공에 뜬 채 멈췄다.
“저 소교주입니다! 소교주라고요!”
내 몸이 천천히 창가 쪽으로 날아갔다.
“교주가 돼도 안 돼! 씻고 옷 갈아입고 누워.”
혈천도마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난 창가 자리에 앉았다. 탁자에 혈천도마가 읽던 책이 놓여 있었다. 화원 가꾸는 법에 관한 책이었다.
도법과는 무관한 책이지만, 그의 멸천대도는 더욱 강력해지고 무서워질 거라 믿는다. 가끔은 적의 목을 자를 때보다 꽃나무 가지를 칠 때,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일화검존이 수련으로 내달리면, 그러잖아도 열심히 수련하던 혈천도마가 그냥 있을 리 없다. 검존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달릴 것이다.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다 같이 강해지고 있다.
“어르신.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나는 품에서 비궤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게 뭐냐며 호기심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계속 옷을 갈아입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궤구나.”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젊은 시절에 교주가 그거 비밀을 풀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쳤는데.”
젊은 혈천도마와 아버지가 친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때와 비하면 요즘은 좀 소원한 사이가 된 것 같긴 하지만.
그나저나 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난리를 치셨으면 선택하기 전에 좀 말려주시지. 참 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왜 네 수중에 있느냐?”
“소교주가 된 선물로 받았습니다. 아니, 제가 골랐죠.”
“골라도 왜 하필 그걸 골라?”
“인연이 있는 자에게만 열린다. 이 말을 듣고 어찌 참습니까? 어르신도 골랐을 겁니다.”
“나는 안 골랐을 거다. 나처럼 불운한 사람이 보물과 인연이 있을 리가 없지.”
처음 만났을 때, 혈천도마가 했던 말이다.
불운과 함께한 인생이었다고.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이젠 아니시잖아요?”
혈천도마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고를지도 모르지.”
그럼요, 그래야죠. 아버지 뵙고 당장 어르신 뵈러 달려오는 저를 위해서라도, 그러셔야죠.
내 시선이 비궤를 향했다.
“어느 날 갑자기 철컥하고 열릴 겁니다. 제가 열릴 때까지 매일 열려라, 제발 열려라, 할 거라서 듣기 싫어서라도 열릴 겁니다.”
비궤를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럼 가보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래도 어르신 제일 먼저 뵈러 왔다는 걸요.”
“생색은.”
말은 그러면서도 내심 좋아할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온 후 거처로 돌아왔다. 원래는 권마도 보려 했는데 내일로 미뤘다.
호위들은 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돌아온 첫날인데 얼마나 호위를 하고 싶었겠는가?
“잘 부탁한다!”
“걱정 마시고 푹 쉬십시오!”
그들에게 호위를 맡기고 집으로 들어왔다. 꽤 오래 집을 비웠음에도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그래도 집이 좋구나.”
나는 침상에 누워 잠부터 잤다.
출교한 이후 하루도 푹 잔 적이 없었다. 잠은 운기로 대신했고, 남은 시간은 다 무공수련에 쏟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푹 자고 여독을 풀 작정이다. 아무리 고수라도 장거리 마차여행은 피곤한 법이다.
* * *
잠에서 깨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정말 꿈 한번 꾸지 않고 푹 잤다. 잘 잤을 때의 그 개운함에 기분이 상쾌했다.
누워서 잠시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누워서 보는 경치가 좋았구나.
한참을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호위는 야간조로 교체되어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오늘 야간조를 이끄는 사람은 삼호였다.
“배고파. 자네 어머니가 해주신 집밥 먹고 싶어.”
삼호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어나시면 시장하실 것 같아 간단한 요기를 준비해뒀습니다.”
다른 호위가 준비한 요리를 방으로 가져갔다.
“다 같이 들어가서 먹자.”
“저희는 이미 먹었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나?”
“야간 임무 시작 전에 먹고, 새벽에는 돌아가면서 먹습니다.”
“밤낮도 바뀌었는데 대충 먹지 말고 제대로 먹어. 속 다 버린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 감사하다고 하지 말고. 꼭 지켜!”
방으로 들어가서 식사했다.
간단한 요기라더니 제대로 된 식사였다. 내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식어도 괜찮은 요리를 준비해둔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셨다.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일상의 기쁨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의 즐거움이 있다면 이렇게 혼자 조용히 있을 때의 행복이 있다. 사람들과 있을 때 너스레를 많이 떨면 떨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해진다.
그러다 회귀 전 삶을 떠올렸다. 그때는 혼자인 것이 지긋지긋했는데.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밥을 다 먹고, 품에서 비궤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폈다.
과연 이게 뭘까? 만약 상자라면 이 안에 뭐가 들었을까?
비궤를 흔들어보았다. 그냥 꽉 찬 쇳덩이지, 상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버지나 전대 천마들이 온갖 시도를 다 해봤을 거다. 내력도 주입해 보고, 물에도 담가도 보고, 열을 가해 보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인연이 있으면 열린다고 했다. 비밀을 풀어야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래, 지금 열리기 싫으면 너 편할 때 열려라.”
그렇게 비궤를 바라보고 있는데 밖에서 삼호가 말했다.
“극악소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나가보니 정말 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가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소마님!”
“소교주!”
“내일 찾아뵈려고 했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긴장했는데, 그가 찾아온 이유는 정말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보고 싶어서 찾아뵈었습니다.”
“!”
“항상 소교주님이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찾아올 때도 있어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찾아가면 항상 하얀 벽을 보며 서 있던 그였는데. 그게 아무리 무공수련에 도움이 된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방에 홀로 있는 것이 항상 마음이 좋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그 방에서 나와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오늘 아버지는 태사의에서 내려오셨고, 극악소마는 하얀 방에서 나왔다.
거처 주위에 경계를 서고 있던 호위들의 표정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그 무서운 극악소마가 저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출교하신 일은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은 예전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소마님 느낌이 다릅니다.”
“소교주가 주신 만년설삼 덕분에 무공에 성취가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게 어찌 한낱 인삼 때문이겠습니까? 소마님 노력 덕분이죠.”
한낱 인삼이란 표현이 우스웠는지 소마는 소리 내어 웃었다.
“얼굴 뵈었으니 됐습니다.”
극악소마는 다른 용무가 아니라 정말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듯 곧장 작별을 고했다.
행동 하나가 백 마디 좋은 말보다 더 감동일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돌아서 걸어가는 극악소마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걸었다.
“되긴 뭐가 됐습니까?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죠. 소마님하고 밤새워 놀 겁니다. 이미 아버지에게 선포도 했습니다, 놀겠다고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말했다.
“지금까지로 봐서는 무림의 운명이 소교주님을 놀게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거창하게 운명까지 가지 않더라도, 내가 급해서라도 놀고 있진 못하겠지. 물론 오늘은 예외다.
“그럼 서둘러야겠네요. 운명이란 놈이 방해하기 전에요.”
제303회 우리 관계는 깃털처럼 가벼워서.
극악소마와 함께 있는 곳은 대연무장에 세워진 거대석상 위였다.
앞으로 내뻗은 악귀상의 손가락 끝에 나는 앉아 있었고, 극악소마는 내 옆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천마신교의 거창하면서도 화려한 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밤새워 놀자고 했지만, 우리가 뭘 하고 놀겠는가? 극악소마와는 이렇게 함께 있는 것이 노는 것이었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하얀 방에 동화된 채 홀로 서 있던 그의 모습이, 그에게 했던 첫 마디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러자 극악소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러자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농땡이 치는 걸 보고 있습니다. 저기 서쪽 담벼락 아래 횃불 든 놈 보이십니까? 원래는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왔다 갔다 순찰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쉬고 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변화가 기뻐 웃는 것이다.
신안술 덕분에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무인의 무료한 표정까지 볼 수 있었다. 내 전음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내공과 무학이 경지에 이르면서 펼칠 수 있게 된 천리전음술이었다.
―자네 농땡이 그만 쳐야겠네. 무서운 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내 전음에 그는 벌떡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마님 말씀 들었나 봅니다. 귀도 밝지.”
내 농담에도 극악소마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천리전음을 보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내 실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우리의 시선이 다시 기강이 바짝 든 남자를 향했다. 오고 가고, 그의 순찰이 두 번쯤 반복되었을 때, 극악소마가 불쑥 말했다.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지운다는 것은 확실히 관계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그것이 목숨 빚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을 테고.
하지만 극악소마의 관계에서만큼은 이런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나는 오히려 이 목숨 빚이 우리 관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제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죽을 위험도 없었겠지요.”
앉아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극악소마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 진심을 전했다.
“저는 소마님이 제게 목숨 빚을 졌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죠?”
“그럼 관계가 무거워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왜곡될 겁니다. 불만을 터뜨리고 싶을 때, 뭐라 욕을 해주고 싶을 때 할 수 없잖아요? 한데 저는 하고 싶습니다. 소마님이 뭔가 잘못하고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욕할 겁니다. 그 욕, 저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욕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서.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관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진짜 오래가는 관계는 오히려 깃털처럼 가볍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불어오면 허공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날아가고, 바람이 그치면 다시 그 자리에 살랑살랑 내려오는 깃털처럼요. 극악소마님과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좋겠죠. 관계가 우뚝 서는 느낌이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그 성을 쌓는데 들어가는 벽돌의 재료는 ‘이번에는 뭘 해줘야 감동하지?’ 하는 부담감일 겁니다. ‘난 이만큼 친한 줄 알았는데 고작 날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이런 실망감일 겁니다. 그냥 우리 관계는 깃털처럼 가벼워서, 죽을 때까지 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
죽을 때까지.
내가 한 말의 핵심이 이 다섯 글자임을 그가 알아주길 바란다.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싶은 관계임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극악소마는 내 진심을 잘 이해했다.
“소교주 때문에 죽을 뻔했습니다. 나중에 술 사십시오.”
이래서 내가 극악소마를 좋아하는 거다.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맞죠. 언제 시간 내서 천화루주님 보러 가시죠.”
그곳이야말로 극악소마가 소마가 되어, 가장 마음 편히 술을 마시는 곳이었으니까.
우린 그렇게 악귀상의 손가락 끝에 서서 깊어가는 천마신교의 야경을 지켜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동권문이었다. 아버지 뵙고, 혈천도마 만났으면 사부께 인사드리러 가야지.
“사부님!”
권마의 거처에서도 혈천도마의 화원만큼이나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권마와 이안이 비무를 하고 있었다.
권법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안의 비천검법을 벽력수라권으로 상대해 주고 있었다.
권마와의 실전보다 더 도움이 되는 수련이 있을까? 생각보다 빠르게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룰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대성만 이루면, 마존급 고수가 아닌 이상 어지간한 고수는 그녀를 죽일 수 없을 거다.
만나는 모든 이가 무공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닥쳐오는 운명이 우릴 큰 싸움의 한가운데로 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무공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비무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런 가정으로 이어졌다.
만약 나였다면?
내가 이 비무의 주인공이 되었다. 검을 휘두르는 이안이 되었다가 주먹을 휘두르는 권마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이 비무 위로 내 모습이 겹쳐졌다. 같은 동작일 때도 있었고, 그들과 다른 동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 상상의 마지막에는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모습까지 떠올렸다. 권마와는 비천검법으로 싸웠고, 이안과는 권법으로 싸웠다.
치열한 이대 일의 싸움.
그 싸움이 끝났을 때, 나는 이 상상에서 얻은 깨달음을 갈무리했다. 지금의 내 경지는 아무 생각 없이 본 비무에서도 이렇게 무학적인 성취를 얻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비무를 끝낸 권마와 이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 비무를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생각하겠지.
“사부님.”
“왔느냐?”
권마와 인사를 나누자 이안이 반갑게 인사했다.
“도련님.”
“이안. 아버지라고 봐주면 안 돼!”
내 장난에 이안이 뭔가 받아치고 싶어 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권마 앞이었기에 애써 참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나와 둘이었다면 ‘아! 강해지기 위해서 천륜마저도 거역해야 하는 건가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사부님을 많이 부러워하고 계십니다.”
“나를?”
“딸이 생겼다고요. 하긴 저라도 그렇겠습니다. 저나 형요? 이안이 백배 낫지요.”
이안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정말 교주님이 그러셨나요?”
아버지가 이안에게 비천검법 전수를 허락한 이후, 그녀에게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조만간에 사부님과 한판 붙자고 하실 수도 있어. 그 수양딸 내 딸 하자고.”
내 너스레를 권마가 받아주었다.
“내 딸 탐내지 마시라 전해드려라.”
권마가 평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 감격만큼이나 이안의 얼굴은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그럼 말씀 나누세요.”
이안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권마는 나를 데리고 거처를 나섰다.
“잠시 나와 갈 곳이 있다.”
권마와 함께 도착한 곳은 동권문의 마인들이 묵고 있는 숙소 앞이었다. 그곳을 권마와 내가 불시에 방문하자 마인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가던 마인들이 모두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모두 나오라고 해라.”
권마의 명령에 모든 동권문의 마인이 연무장에 집합했다. 백권의 마인부터 청권, 적권, 그리고 최고수인 흑권의 마인들까지 모두 모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천소희도 있었다.
이렇게 권마가 이곳을 찾아와 소집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마인들은 모두 긴장했다.
권마가 기세를 끌어올리자 주위 공기가 차가우면서도 무거워졌다. 지금 하려는 발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한 것이다. 숨 막히는 그 순간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천소희를 둘째 제자로 삼고 동시에 차기 권마로 결정하겠다.”
생각지도 못한 선언에 모두 깜짝 놀랐다.
천소희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입까지 벌린 채 멍하게 서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부족한 제게 이렇게나 막중한 자리를 물려주셔서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절치부심 노력해서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안이 수양딸이 되고 나서 가장 실망한 사람은 당연히 그녀였을 거다. 권마의 후계자는 이제 이안이 되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랬기에 그녀의 놀람은 더욱 컸다.
“너라면 잘 해낼 거라 믿는다.”
그 한마디에 천소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그녀가 어떤 각오를 하고 있을지 느낄 수 있었다.
모두 환호하며 그녀를 축하해 주었다. 동권문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그녀였다. 그랬기에 이 결정은 대세를 따르는 결정이었고, 내심 불만인 이들도 있겠지만 감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매, 축하해.”
내 축하도 이 결정에 큰 힘을 실어주리라. 차기 교주가 그녀를 축하해 주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이제 사형이라 불러야지.”
“……사형.”
그렇게 기습적으로 후계자를 발표한 권마는 훌쩍 그곳을 떠났다. 나도 그를 따라서 그곳을 나섰다.
“저는 왜 데려오신 겁니까?”
“그래야 소희가 네가 이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할 것 아니냐?”
나를 위한 배려였다. 차기 권마에게 차기 교주를 잘 모시라는 뜻으로 나를 데려간 것이다.
“우리 사부님이 이렇게 꼼꼼한 분이실 줄이야!”
생각해 보니 마존들도 다 제각각의 비상함과 꼼꼼함을 지니고 있다. 하긴 보통 무인의 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노력을 해온 사람들이고, 덤벙거리는 성격으로는 결코 이루기가 쉽지 않은 자리였으니까.
“잘하셨습니다. 사매는 누구보다 훌륭한 권마가 될 겁니다.”
권마의 무공을 모두 이어받은 천소희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정말 멋있으리라. 그녀는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테니까.
“돌아와서 인사드리니 교주께서 좋아하시지?”
“천마보고도 구경시켜 주셨습니다.”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해 주신 거다.”
“그건 감사한 일인데…….”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천마보고와 관련해서 권마에게 할 말이 있었다. 다른 마존이 아니라 권마에게 할 말이었다.
“보고에 준비된 영약들을 보니 아버지께서 전쟁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가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선봉장은 권마일 테니.
“사부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아주 곤란한 부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해봐라.”
“아버지가 무림맹과 사도맹을 밀어버릴 결정을 내리시면 마존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사부님께 뜻을 밝힐 겁니다.”
권마는 말없이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란 부탁은 감히 드리지 않을 겁니다. 제가 부탁드린다 해도 뜻을 굽히실 사부님이 아니시니까요.”
“그럼 부탁이 뭐냐?”
“제게 알려주십시오. 아버지를 설득하고 막는 것은 제가 할 테니, 알려만 주십시오.”
이것만 해도 굉장히 부담스러운 부탁이었다. 그 중요한 일을 내게 누설하는 셈이 되니까. 게다가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말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권마는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말해주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생색을 내지도 않았고. 이게 권마란 남자의 본모습이다.
“감사합니다.”
나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정중히 고개 숙였다.
권마와 작별하고 동권문을 나서는데 입구에 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는 아버지가 계셔서 편하게 여쭙지 못했어요. 강서지단 일은 잘 처리하셨어요?”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빤히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솔직히 내 걱정 하나도 안 했지?”
“아! 했어야 했나요?”
농담처럼 반응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 동동 구르며 나만 걱정하던 때가 그리워.”
“제가 그랬었나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내 너스레를 그녀도 장난으로 받아주었다.
“제가 아련하게 기억나는 건 누군가 ‘네 인생의 행복을 찾아라!’라고 했던 말뿐인데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행복하라는 말은 아니었을 거야.”
너무 잘하고 있다는 칭찬임을 알기에 이안은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 생긴 소감은 어때?”
“얼떨떨하죠. 도련님 조언이 필요한 순간이에요.”
“나도 부모가 돼 본 적은 없어서.”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면, 이안에게 이 말은 해주고 싶다.
“네가 너무 잘하려고 하면 사부님도 부담스러울 거다. 생각해 봐. 네가 마음에 들어서 딸로 삼았어. 그런데 너무 잘하려고 애쓰고 눈치 보고 경직되어 있어. 좋겠어? 아니면 한없이 밝고 유쾌해. 만나면 웃겨서 웃음이 막 나와. 그러다 실수도 해. 괜찮아. 왜냐? 자식이니까. 그러니까 웃길 기회는 놓치지 말아야지. 아버지를 웃겨라. 난 거기서 두 사람 관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이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자식 있죠? 어디 숨겨둔 애가 다섯쯤 있죠?”
“나 같은 녀석이 다섯쯤 큰다 생각하면? 아, 끔찍하다.”
“왜 끔찍해요. 저는 정말 든든할 것 같은데.”
무심코 말한 이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그 자식들을 나와 그녀의 자식이라 상상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귀영대 이조장 말인데요. 전에 뵈었던 귀령자님의 동생분을 모셔올까 해요.”
“네 판단대로 해.”
드디어 서진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과연 그녀가 오게 될지는 이안에게 달려있었다.
이안과 헤어지고 동권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지붕 위에서 말했다.
“이렇게 바쁘시니 대체 내게는 언제 오려나?”
취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올려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줄 서요.”
취마가 지붕 위를 따라 걷는 것이 느껴졌다.
“줄이 너무 길다. 지금은 어디 가는데? 독왕? 검존? 대공자? 마불? 황천각주? 마군주?”
혈천도마와 권마, 극악소마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을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섭섭했어? 형 먼저 안 찾아가서?”
“섭섭은. 어르신들부터 챙겨야지.”
“그래, 기다리면 갈 텐데. 뭐가 급해서 이렇게 왔어?”
취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혈천도마가 전해주었다. 그래서 챙겨주라는 말도 한 것이었고.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분명 나와 할 이야기가 있는 거다. 나는 취마에게만 할 수 있는 농담을 던졌다.
“뭐야? 맨정신에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그 말에 취마가 옅게 웃었다.
뭐라 말을 꺼내려던 그가 내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줄이 정말 길구나. 나중에 보자.”
돌아보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상대는 조금 전 취마가 언급한 사람 중에도 없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섭혼마존 청선이었다.
천천히 내게 걸어온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소교주님께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요.”
제304회 넌 뭘 믿고 목숨을 건 거냐?
청선과 함께 내원을 걸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마존이 된 것은 소교주님 덕분이라 여기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소만, 섭혼께서 마존 자리에 앉으신 것은 본인의 능력 때문이오.”
“그래서일 거예요. 오늘 이렇게 소교주님을 찾아뵌 것도. 이렇게 저를 믿어주시는 분이시니까.”
인적이 없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청선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막상 용기를 내서 찾아오긴 했지만, 말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무공 때문일까?
풍천교주가 가르쳐주긴 했어도 지금 부재중이니 막히는 부분이 많이 있을 거다.
아니면? 혹시?
그녀와 관계된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전자이길 바랐는데 그녀의 고민은 후자였다.
“마존이 되기 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있어요. 그는 북천검가의 사우종이에요.”
두 사람이 사귀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 사실을 이용해서 그녀를 풍천교주에게 찾아가게 하기도 했었고.
회귀 전의 인생에서 사우종은 섭혼술에 당한 채 일화검존을 죽이려다 역으로 죽었다. 그가 죽고 난 후 일화검존을 여인으로 좋아했음이 밝혀졌고, 당시에는 그에게 섭혼술을 걸었던 사람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사람이 청선이었음을 알고 있다.
“마존 자리에 오르고 나서 그와 결별을 선언했어요. 그런데도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 주변을 맴돌았어요. 이후 시간이 지나고 저를 잊고 잘 사나 싶었는데, 일전에 갑자기 저를 찾아왔어요. 다시 만나주지 않으면 자신과 사귀면서 있었던 일들을 폭로하겠다고요.”
사우종, 스스로 성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폭로를 빌미로 협박이나 하는 한심한 놈이다.
“마존이 되기 전의 일이니 상관없지 않소?”
협박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과거 그의 부탁을 받고 사형의 부채를 훔쳤던 적이 있어요. 그것까지 폭로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어요.”
당시 섭혼마존은 사람의 심장을 뽑아내서 생기를 흡수하는 심혼대법을 주기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바로 사우종이었다. 물론, 좋은 뜻으로 알려준 것은 아니다. 섭혼마존을 앞세워 나를 견제하려던 목적이었으니까.
심혼대법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었고, 시체와 함께 섭혼마존 제자의 부채가 나왔다. 그것을 훔쳤던 사람이 바로 사우종의 부탁을 받은 청선이었다.
의도가 어쨌든 사우종으로 인해 섭혼마존의 악행을 막았고, 단지 섭혼마존을 끌어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수 없어 살려뒀던 자였는데, 이렇게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 일까지 밝혀지면 제 명성에 흠이 가게 될 거예요.”
그녀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마존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한창 조직을 장악하며 커나가고 있는 그녀였기에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겼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녀의 두 눈에서 귀기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살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를 없애버릴까 고민도 했어요.”
“왜 없애지 않았소?”
사우종의 검술이 보통 실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존이 된 그녀의 섭혼술을 감당할 수는 없다. 따로 그를 유인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이런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이 사람은 매사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인데 왜 내게 이런 무모한 협박을 할까? 이러다 내게 살인멸구 당할 수도 있는데.”
확실히 의아한 부분이다. 내가 본 사우종도 매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조심스러운 자였으니까. 그런 자가 갑자기 무모한 짓을 벌일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무심코 뱉은 말 때문이었어요. 누구나 다 약점이 있지. 검존이라고 없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꼈어요. 아, 이 사람 일화검존의 약점도 쥐고 있구나. 오랫동안 검존을 모셔 왔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때 이 일은 제가 처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죽여버려선 안 되겠구나, 그때 떠오른 사람이 소교주님이었고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합격이다. 좀 전에 권마와 대화를 나누며 마존들은 저마다의 비상함과 꼼꼼함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바로 이런 점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거다.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내게 알려야 한다고. 그녀가 말한 첫 번째 이유도, 두 번째 이유도 모두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으니까.
본능은 또 말해줬을 거다. 이래야 나와의 관계도 더 가까워질 거라고. 그녀의 본능은 잘 작동되고 있다.
“정말 잘 판단했소. 이후 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청선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지금까지 내가 보였던 결과들을 생각하면, 이후부터 발 뻗고 잘 수 있을 거다. 그래, 똑똑한 선택의 대가로 그 정도 선물은 받아야지.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한마디를 해주었다.
“정파와 사파가 제일 두려워하는 마존이 섭혼마존과 독왕이란 것을 알고 있을 거요. 그 두려움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청선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났다. 그 자부심이야말로 그녀가 노력해야 하는 최고의 동기가 될 것이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순한 협박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검존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일까? 만약 약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절로 마음이 차가워졌다. 누군가의 약점을 쥐고 협박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자들은 악질 중에서도 악질이었으니까.
그길로 내가 향한 곳은 북천검가였다.
* * *
“요즘 검존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내 방문에 입구를 지키는 마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혈천도마 말대로 오직 무공수련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왔다고 기별만 해주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검이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그곳에 서 있었는데 마침 사우종이 연무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교주가 되신 것 감축드립니다.”
“오랜만이오, 사 무인.”
그는 평소와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원래 일화검존을 방문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인자에서 밀려나 평범한 마검이 된 그였다.
그가 다시 공손히 인사한 후, 가던 길을 걸어갔다. 누가 알겠는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대하면서 뒤로는 섭혼마존을 협박하고 있을 줄. 지난번에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그때, 일화검존에게 보고를 하러 간 마검이 돌아왔다.
“들어오시랍니다.”
누군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면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정말 노력하는 사람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내는 그 시간을 절대 소홀히 쓰지 않는다.
내가 궁둥이 붙일 기회만 있으면 천마호신공을 수련하듯, 일화검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거처 앞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수하의 보고를 받고 내가 올 때까지 그 짧은 시간도 아까워서 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기세가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말 모두가 강해지고 있구나.’
하지만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무공의 성취가 아니었다.
그녀는 얼굴에 화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혈천도마에게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민얼굴이었을 줄이야.
정말 딴 사람 같았다. 화장을 안 해서 못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느낌이 완전 달랐다.
내 놀람을 느낀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이라네. 다른 사람에게 화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화장 안 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변했다고. 예전의 그 아름다움에만 빠져 있던 그 검존이 아니라고. 보라고, 내 의지를. 화장까지 지우고 너를 보는 내 의지를.
“선배님의 민얼굴을 보다니! 영광입니다.”
짐짓 격앙된 어조로 감탄하자 일화검존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영광은 무슨. 초라하고 늙었지.”
“오히려 더 아름다우십니다.”
“괜한 소리 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정말 더 아름답습니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짙은 화장을 하셨나 싶을 정도로요.”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당연히 화장한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모양이다.
“지금 모습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깨끗하고 우아합니다.”
“이 주름살은 어쩌고?”
“조금 전에 선배님의 검이 만들어 낸 검선처럼 아름답습니다.”
검존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사람은 소교주가 유일하네.”
“저는 진심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화장하고 아름답고 꾸민다 한들, 이안이나 진하령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중년 여인들과 비교하면 화장하지 않았더라도 검존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그 세상에선 검존이 이안이고 진하령이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자넨 정말이지 지치지도 않는군. 아무리 자네라도 사람들 챙기다 보면 지치기 마련일 텐데. 어찌 이렇게 기분 좋은 말을 해주나?”
“제가 아부쟁이라서 그렇죠.”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만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자네의 그 자존감이 부럽네.”
생긴 모습이나 분위기만 봤을 때는 마존들 중에 가장 자존감이 높을 것 같은 그녀였는데. 이럴 때 보면 자존감이 바닥이다.
“마존분들과 친해지는 일이 곧 제가 강해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제 한 마디 한 마디가 검을 한 번 휘두르고 두 번 휘두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팔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수련하기도 하는데, 그에 비하면 쉬운 일이죠.”
“사람 상대하는 일이 더 어렵지 않나?”
“너무 쉬운 수련을 하시는 것 아니십니까?”
“아! 내 수련 강도가 약했나 보군.”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맞죠, 사람 상대하는 것이 열 배는 더 어렵죠.
“선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시게.”
“사우종이…….”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그녀의 얼굴에 살짝 불편함이 스쳤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사우종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더라도 그녀에게 사전에 보고는 해야 한다. 나는 그녀의 약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섭혼마존이 개입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묻지 마시고, 제게 맡겨주십시오.”
일화검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일화검존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사우종을 처리해 버릴까도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일이다. 사우종은 비열한 자이지만 멍청한 자는 아니었으니까.
‘사우종, 넌 대체 뭘 믿고 목숨을 건 거냐?’
* * *
“삼인자야, 꽃을 피우려면 봄이 올 때까지 참아라.”
이인자였다가 삼인자가 된 화분을 바라보며 서대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우리에겐 영원히 봄은 오지 않을 거야.”
황천각주가 된 후 매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였다.
책상에는 업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각주가 되니 해야 할 일도 많았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다. 황천각주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아! 일하기 너무 싫다.”
그런 날 있잖은가? 괜히 일하기 싫은 날. 자꾸 창밖만 바라보게 되는 그런 날.
그가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검무극이 황천각주이고 옆에서 도울 때도 업무량은 비슷했다. 그때도 거의 자신이 다 도맡아 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이 본격적으로 자기 일로 주어지자 느낌과 압박감이 달랐다. 같은 일이라도 더 힘들게 느껴졌다.
“소교주님과 출교했을 때가 좋았는데.”
특히 소룡전에 출전해서 우승했던 그 순간은 정말 잊히지 않았다. 비무대 위에서 들려오던 그 함성! 이안이나 장호에게는 너무 자랑을 많이 해서 더는 꺼낼 수 없는 그 영광의 순간!
“아!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그때 문이 덜컥 열렸다.
책상에 엎드려 있던 서대룡은 벼락처럼 빠르게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이리 급히 들어오는가?”
그러자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그때로 돌아가면 본교는 누가 바꿉니까? 각주님.”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소리쳤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웃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힘드냐?”
서대룡이 짐짓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힘들어요.”
이렇게 마음 편하게 힘들다는 말, 황천각주가 되고 처음으로 꺼냈다. 그 대상이 천마 다음으로 어려운 사람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힘드니까 네게 맡겼지. 아니면 내가 계속했지.”
“너무하십니다!”
오랜만에 소리치면서 서대룡은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정말 검무극을 보고 싶어 했었구나. 황천각주도 좋고, 혈천도마의 제자도 좋고, 다 좋지만 그래도 검무극이 제일 보고 싶었구나.
“그렇게 힘들면 나랑 일 바꾸자.”
“소교주님이랑요?”
“자, 네가 할 일을 말해주마. 취마 만나러 가서 고민 들어주고, 형이랑 마불 잘 있는지도 확인하고, 독왕 만나서 독초도 캐고. 아버지하고 바둑도 둬야 하고. 밤새워 무공수련하고.”
자신의 신분이 뭐였든지 똑같이 이런 너스레를 떨어주는 검무극이 너무나 보고 싶었구나.
“갑자기 제 일이 너무 쉽게 느껴지는데요? 죽을 때까지 월봉 받으면서 버틸 겁니다. 저 뿌리 내렸습니다.”
검무극은 위로는 너스레로 끝나지 않았다. 가만히 서대룡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고생 많다, 내 오른팔.”
오랜만에 듣는 오른팔이란 말에 서대룡은 울컥했다. 어찌나 바쁜지 자신이 검무극의 오른팔이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래, 고생했다는 저 한마디면 충분했다.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더 고생은 못 하겠는가?
그래, 알아줘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일조차 힘든 일이 되는 법이니까. 서대룡은 앞으로 수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몸소 경험으로 배우고 있었다.
“고생은요, 제 삶이 누군가에게는 꿈일 텐데. 열심히 해야죠. 죽도록 하겠습니다! 소교주님과 함께 봄은 왔습니다. 제 마음에 꽃을 피워보겠습니다!”
한바탕 기분 좋게 외친 후에 서대룡이 물었다.
“한데 황천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예전이었다면 ‘나하고 일하나 하자’라고 했을 검무극이었는데 오늘은 서대룡의 권위를 제대로 세워 주었다.
검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서 각주께 부탁할 일이 있소. 나와 질 나쁜 악당 하나 잡읍시다.”
제305회 두 사람이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서대룡은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일이 손에 안 잡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가슴 떨리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서대룡이 목소리를 깔고 대답했다.
“악당 잡는 일이 본 각의 일입니다, 소교주님.”
분위기를 잡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어휴, 소교주님하고 있을 때만이라도 좀 편하게 있을래요.”
사실 일보다 더 힘든 것은 각주로서의 위엄을 보여야 하는 점이었다. 검무극과 지내며 너스레 떨고 장난치는 것에 익숙해져서 더 그랬다.
“한데 잡아야 할 놈은 누굽니까?”
“사우종.”
서대룡도 한때 일화검존의 오른팔이었던 그를 알고 있었다.
검무극은 사우종이 청선을 찾아간 일을 전해주었다. 다만 개인사가 될 수도 있기에 일화검존의 약점을 언급했다는 것은 전하지 않았다.
“뭔가 수상쩍군요. 그럼 본각이 할 일은 뭡니까?”
“비밀리에 놈에 대한 특별감찰을 시행해 줘.”
특별감찰에 들어가면 사우종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재산, 업무, 무공,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취미는 무엇이며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까지. 그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낼 수 있다.
“통천각에도 지원 요청 하고.”
“알겠습니다.”
그러자 서대룡이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마존을 협박했으면 그 자체로도 중죄 아닙니까?”
사안에 따라서는 참형도 내릴 수 있었다. 그만큼 천마신교 내에서 마존의 지위는 절대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간단하게 해결하지 않고 이런 거창한 조사를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사우종도 그걸 알 텐데, 그걸 아는 자가 왜 그랬을까 싶어서.”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죽기 전에 발악하는 게 아니라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지요?”
검무극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 알아내 보자고.”
“바로 조사 들어가겠습니다.”
사실 서대룡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은 검무극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나 간다. 일하기 싫으면 나랑 바꾸고!”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서대룡이 뒤에서 말했다.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는 서대룡이지만, 각주 서대룡에게는 예전과는 다른 든든함이 있었다. 스스로 그 변화를 못 느낄 뿐이지.
“그럼 잘 부탁합니다, 서 각주님.”
* * *
황천각에서 나온 후 곧장 천독림으로 갔다.
지난번에 독왕이 구해온 독성 강한 영약 덕분에 내공이 크게 늘었었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독왕은 자신의 돈까지 보탰다. 물론 제일 고마웠던 것은 밖을 나가기 싫어하는 그가 직접 중원에 나가서 구해왔다는 점이었지만.
우리 잘생긴 독왕, 오늘도 외롭게 땅이나 파면서 독충을 찾고 있겠지.
“독왕님! 제가 같이 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놀라운 광경.
혈천도마의 화원도 놀라웠고, 권마와 이안의 비무도 놀라웠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졌을 때, 지금 이 광경이 제일 놀랍다.
독왕과 마불이 숲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정말 마불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아, 이렇게 눈썰미가 좋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야 보통이지요.”
독왕의 가방에는 독초가 들어 있었다. 함께 독초를 캔 모양이다. 내가 없는 이곳에 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예전에 나와 마불이 천독림에서 독초 찾는 내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마불이 독초를 찾았고, 그게 다 우릴 채집꾼으로 부려 먹으려는 독왕의 음모였다고 너스레를 떤 적이 있었다. 한데 마불이 다시 와 있다고?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조심하십시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가짜입니다!”
내 너스레에 두 사람이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본척만척하고 하던 대화를 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으신 겁니까? 비결을 알려주시오.”
“비결이랄 것이 뭐 있겠습니까? 운이 좋았을 뿐이지요.”
“정말 마불께서는 타고난 약초꾼의 소질이 있소. 지금이라도 직업을 바꾸시는 걸 추천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마불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취미로 삼아볼까 싶기도 합니다. 공기 좋은 곳을 다니니 건강에도 좋은 것 같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번에는 상선에게 소리쳤다.
“두 사람 모두 가짜입니다!”
상선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이 두 사람이 어울리고 있을 줄은.
“두 분 지금 뭐 하신 겁니까?”
그러자 독왕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마불께서 오늘은 구음초(九陰草)를 찾아주셨다. 내가 몇 년은 찾아 헤맸던 거다.”
말하는 걸 보니 처음 온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내기가 걸린 겁니까?”
그러자 독왕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내기도 내가 졌다.”
“뭐가 걸렸는데요?”
“밥 내기. 상선, 밥 준비해 줘.”
상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 내기도 지실 것 같아서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거처 앞마당에 거창한 식사가 차려졌다.
나도 끼어 앉았다. 상선이 나를 위해 밥과 젓가락을 가져다주었다.
“구음초 한 뿌리에 얼마나 하는데요?”
“못해도 십만 냥은 하겠지?”
“그런데 겨우 식사 한 끼로 때우시려고요?”
“내기에 이겼다는 것이 중요하지.”
나는 마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악덕 내기꾼에게 속고 계십니다.”
마불이 요리를 맛있게 먹으며 대답했다.
“독왕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네.”
닳고 닳은 마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한 사람은 속이는 척, 한 사람은 속아주는 척. 참으로 귀여운 두 사람이다.
독왕이 내 앞에 놓인 요리를 마불 앞으로 당겼다.
“넌 조금만 먹어. 고생하신 마불님 드시라고 만든 거야.”
“저 소교주입니다. 이공자 아니고 소교주라고요! 밥상 엎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독왕도 못 들은 척 마불만 챙겼다.
“많이 드십시오.”
“맛이 좋습니다.”
“호남지단, 강서지단 겨우 두 군데 돌고 왔는데 이러면, 중원을 다 돌고 오면 의형제라도 맺었겠습니다.”
내 말에 웃어주는 사람은 상선이었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인 사람이다. 한 사람은 천독림을 벗어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오만 사람 다 만나고 돌아다니며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마음에는 상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독왕은 마불이 부러울지도 모른다. 세상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마불이. 저 작은 키에도 서슴없이 사람을 만나고 다니는 그가. 정작 누구보다 잘생긴 자신은 천독림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마불은 독왕이 부러울지도 모른다. 돌아다니는 것에 지치고, 사람들에게 지쳐서 이제는 혼자만의 조용한 삶을 살고 싶을지도.
그래서 지금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잘 어울려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화무기를 죽이고 내 삶 앞에 섰을 때,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묻고 있다.
중요한 것부터 해내고 생각하자! 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정작 더 중요한 것이 지금 나도 모르는 사이 흘러가 버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밥을 먹던 마불이 불쑥 물었다.
“권마의 행보가 바쁘던데. 자네 영향이지?”
제자를 둘이나 삼고, 딸도 구하고. 후계자까지 선정했으니 마불의 관심을 끄는 것은 당연하리라.
“사부님 성격 아시잖습니까? 누구에게 영향을 받을 분이 아니죠.”
“자네라면 또 모르지.”
“과대평가십니다.”
독왕은 밥을 먹는 내내 구음초만 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저 독초에 푹 빠져 있음을 나는 안다. 지금 독왕의 머릿속에는 어서 들어가서 저 구음초로 새로운 독을 제조하고 싶은 생각뿐일 것이다.
“자네 형은 언제 만나러 갈 건가?”
“뭐 좋다고 먼저 달려갑니까? 맨 나중에 갈 겁니다.”
“지난번에 대공자와 한잔했네. 그날 자네 이야기를 꺼내더군.”
“욕이나 안 했으면 다행이죠.”
평생 형 보고 싶다는 생각 안 들었는데, 오늘은 형이 보고 싶었다.
“승자는 결코 모르는 패자의 마음이 있다네. 자네 형은 위대한 패자라네.”
“마불님이 형의 곁에 남아주셨기에 그렇게 되었죠.”
마불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런 말 안 해줘도 되네.”
“계속할 겁니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니까요.”
마불의 몸에서 나는 황금빛 광채가 조금 더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불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독왕은 그새를 못 참고 구음초를 가지고 자신의 거처로 들어간 후였다. 창문으로 그가 구음초를 자르며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우린 이만 가지.”
“그러시죠.”
마불과 함께 그의 거처를 나왔다. 상선은 따라나서지 않고 그곳에서 정중히 인사했다.
잠시 후, 저 멀리 뒤에서 독왕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소교주 어디 갔어? 어디가! 독성 실험해 줘야지!”
지난번 영약들을 사다 주는 대가로 독성 실험을 해주기로 했었다.
나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마불에게도 전하는 독왕의 외침이 있었다.
“우리 다음 내기는 반선초(返仙草)를 찾는 걸로 합시다!”
마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도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천독림을 빠져나가는 길만 봐도 그렇다. 예전이라면 최단 길을 선택해서 저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을 텐데. 지금은 경치 좋고 뺑뺑 돌아가는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심지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풍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문득 그의 고향 언덕의 동굴 앞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그만 그 좁고 답답한 곳에서 나오십시오.
어쩌면 마불은 이미 그 동굴에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도 마불님을 채집꾼으로 부려 먹어서 반선초를 찾아낼 겁니다.”
마불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식사가 입에 맞아서…… 괜찮네.”
* * *
같은 시각 사우종은 마가촌 저잣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풍류주점을 지나서 계속 걸어 내려가니 변두리에 작은 화원이 나왔다. 꽃도 팔고 나무도 팔고, 모종도 파는 곳이었다.
그가 이곳 화원에 자주 온다는 것은 이미 북천검가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원래 일화검존의 오른팔 시절에 주로 가던 대형 화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마검에게 그 역할을 내주고, 원래 가던 화원도 아닌 이곳 변두리 화원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가곤 했던 것이다.
그가 일화검존의 후계자가 되려는 열망이 얼마나 컸던 사람인지 잘 알았기에 다들 이런 행동을 이해했다.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상실감은 컸지만 아무도 그에게 와서 위로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 오직 앞만 보고 달린 결과였다.
화원 주인은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었다.
“어서 오세요.”
사우종은 인사도 받지 않고 마치 내 집인 양 화원 구석에 앉아 멍하니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꽃은 다 지고, 사철나무 묘목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가 와서 이렇게 멍하니 앉아 있다 가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는지 여인은 그를 그냥 두었다.
이곳에서 식물들을 보며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그는 번뇌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세속의 욕망 속을 거닐고 있었다.
‘마존이 되기 위해서 남자까지 가져다 바쳤는데, 나를 버려?’
좋아하는 여자에게 남자를 바치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나 알까? 그녀에게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다. 애초에 남자를 이용해서 검존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 했던 것이 자신이었음을 그는 생각지 않았다.
애증의 대상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청선은 마존의 자리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이별을 고했다. 검존이 되기 위한 마지막 보루까지 무너진 것이다.
한동안 증오심만 키우며 살았다. 매일 꿈을 꿨다. 어떤 날은 일화검존을 죽이고 자결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청선을 죽이고 자결하는 꿈도 꿨다. 어떤 날은 두 여자 모두를 죽이고 자결했다. 그래, 어차피 마존이 될 수 없다면 둘 다 죽이고 자결하는 거다.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루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에 이 버림받은 욕망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다. 죽일 실력이 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
이 절망의 끝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해 왔다.
바로 지금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는 이 사람이다.
―섭혼은 만났나요?
놀랍게도 전음을 보낸 사람은 화원의 주인 여자였다. 사우종이 이곳을 드나든 이유는 괴로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죽이고 죽었으면 죽었지, 괴로움을 잊기 위해 화원이나 드나드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만, 그녀는 저를 죽이려 들지 않았습니다.
사우종은 지극히 공손했다. 자신은 누군가를 쉽게 믿는 사람도 아니고, 고개 숙이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한창 괴로운 시기에 접근해 온 이 여인은 자신을 단숨에 포섭했다.
감히 천마신교의 섭혼마존을 노리고 있는 여인, 하지만 그녀는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란 믿음을 주었다. 사우종은 저 평범함 속에 감춰진 무서움을 이미 경험했다.
이로써 그는 세 여인과 얽혔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여인을 통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운명이라고.
―다시 섭혼마존을 만나서 자극하세요. 반드시 섭혼술을 써서 그대를 죽이게 해야 해요.
―그리하겠습니다.
사우종은 순순히 죽어줄 사람이 아니었으니, 여인의 말에는 한 가지 대비책이 있었다.
―섭혼마존이 섭혼술을 쓰는 순간, 반드시 음양역혼술(陰陽逆魂術)을 발동해야 해요.
음양역혼술.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새외의 비술로 상대의 섭혼술을 막아내고 역으로 섭혼술을 걸 수 있는 비기였다. 단, 잠자리를 가진 상대에게만 통하는 비술이었다.
그것이 이번 일에 자신이 선택된 이유였다. 저 여인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관심 없었다. 음양역혼술에 당한 섭혼마존을 꼭두각시 삼아서 교주를 죽이든, 소교주를 죽이든 상관없었다. 사우종의 마음에는 오직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사우종의 재차 확인에 여인은 몸통만큼이나 큰 묘목을 옮기다가 잠시 멈추고 허리를 폈다. 그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전음을 보냈다. 사우종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보상이었다.
―이번 일을 해내면 검존은 당신이 될 거고, 일화검존은 그대의 여자가 될 거예요.
제306회 무슨 마존이 미신을 믿어?
천독림을 나와서 향한 곳은 대취림이었다.
언제나처럼 삼대취객 여빈이 나를 취마에게 안내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취마님 요즘도 술 많이 마십니까?”
“한때 많이 줄이셨는데 요즘 부쩍 과음하시는 것 같아요.”
그녀의 눈빛은 내가 좀 말려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빈은 취마를 좋아하고 진심으로 위해주는 유일한 여인이다.
그렇게 섬에 도착하고 취몽루에 올랐다.
취마는 이미 취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마지막에 오냐? 내가 마존들 중에 꼴찌지? 아니면 이럴 수가 없다.”
취마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형하고는 마지막에 만나야 편하게 술 마시지.”
“핑계는 좋다.”
“아이고, 형이 이해해 주라. 피곤한 하루였어.”
취마 앞에 다리를 쭉 펴고 편하게 앉았다.
“그거 모르지? 난 형하고 있을 때가 제일 편해.”
“만만한 거겠지!”
“그런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취마가 술을 따라 주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풀려 있었다. 구구절절한 변명보단 차라리 ‘그런가?’ 한마디가 이렇게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우린 함께 술을 마셨다.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속이 화끈했다. 예전에 취마가 마시던 술보다 더 독한 술이었다.
“술 줄였다더니, 더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네.”
“독하면 이 술 마셔.”
취마가 누각에 쌓여 있는 다른 술병을 가져와서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원래 마시던 독주를 마셨다.
대체 무슨 고민일까?
궁금했지만 먼저 묻지 않았다. 주정뱅이에게 진실을 들으려면 두 가지 방법뿐이다. 술을 깨게 하거나, 술을 더 먹이거나.
“자, 한잔 더!”
그의 고민이 무엇이든 이렇게 오랜만에 취마와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분위기 끝내준다.”
오늘따라 자욱한 물안개와 구름 속에서 뿌옇게 빛나는 달이 이 밤의 흥취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나가 있으면서도 술 생각나면 여기가 항상 떠올랐어. 형은 술 마시고 있을까? 호수에 떠다니고 있을까?”
“이제 추워서 물에 잘 안 들어간다.”
“시간 참 잘 간다.”
엊그제 봄이었는데, 벌써 춥다. 우린 잠시 각자 생각에 잠겨 술을 마셨다. 취마는 확실히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형 술 많이 마신다고 여 무인이 걱정 많이 하더라.”
“여빈이야 만날 걱정이지.”
“걱정해줄 때 잘해. 나중에 후회 말고.”
“후회?”
취마가 무슨 뜻이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알면서 왜 묻나? 만날 술이나 마셔대는 것 같지만 취마는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여빈이 자신을 남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모른 척하는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마존들은 하나 같이 가족을 이루지 못했다. 그나마 권마에게 최근에 딸이 생겼고. 다들 이렇게 혼자 살고 있다.
혈천도마가 만날 하는 말처럼 가족이 원수라서 그럴까? 가족이 약점이라 그럴까?
“잠시 나와 갈 곳이 있다.”
취마가 나를 배에 태웠다.
노를 저어서 입구 반대쪽 호숫가에 배를 댔다. 배에서 내린 취마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만날 내가 취몽루에만 와서 그렇지, 대취림도 굉장히 넓은 곳이다.
한참을 걸어가자 주위에 안개가 자욱했다.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살펴보니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기(酒氣)였다. 나는 주기가 이렇게 안개처럼 펼쳐진 것을 처음 보았다.
“이곳에 노출되면 술에 취해 쓰러지게 된다. 내력으로 뽑아낼 수 있는 주기도 아니어서, 보통 사람은 절대 통과할 수 없지.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와라.”
취마가 걸어가자 주기가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지나가자 갈라졌던 주기가 합쳐지며 길이 사라졌다.
경공으로 달려서 갈 수도 없었다. 안개처럼 깔린 주기로 앞을 볼 수가 없었고 길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결국 이 길은 오직 취마만이 갈 수 있는 대취림의 금지(禁地)였다.
그렇게 미로를 빠져나오자 비로소 주기가 걷혔다.
눈앞에 서 있는 하나의 건물.
“대대로 대취마들이 술을 담아 먹는 곳이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양조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시설들은 낡고 오래되어 보였지만 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벽의 장식장에는 전대 취마들이 좋아했던 술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야 다양한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해서 여기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아. 게다가 내가 마시는 재주는 있어도 담그는 재주는 별로더라고. 그래서 가끔 와서 쉬었다 간다.”
양조장 가운데 특이하게 생긴 술잔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취마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주정(酒精)이 상했어.”
과연 그곳에선 썩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내가 마존이 되고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취마가 어두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불길해.”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취마가 고민이 있는 기색이었는지.
“혹시 나 죽으려나?”
“죽기는 싫은가 보네.”
“아직 못 마신 술이 얼마나 많은데.”
“걱정하지 마. 형 죽으면 중원의 모든 술을 다 사 와서 무덤에 뿌려 줄게.”
취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함을 느낀 그의 마음에는 지진 나기 전 새 떼가 날아오르고 동물들이 떼를 지어 달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정말이지 이런 이유로 심각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무슨 마존이 미신을 믿고 있어?”
“사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주정이 상하면 큰일이 생긴다. 대취마에게 문제가 생기거나 본교에 문제가 생긴다고. 물론 믿지는 않았지만.”
막상 주정이 상하니 심란한 모양이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아버지에게 알려.”
“싫어! 이제 겨우 교주님과 오해를 풀었는데.”
원래 취마는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아니라 사부를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오해를 풀었다.
“교주님께 술 선물도 하고. 그동안 잘 지냈단 말이지. 한데 주정이 상했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찝찝하지 않겠어? 그럼 그렇지, 그 사부에 그 제자지. 하여튼 재수 없는 주정뱅이들 같으니라고.”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걱정하나 싶지만, 이렇게 섬세한 사람이 취마다. 적어도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더욱 그러했고.
“아버진 미신으로 치부하고 마실 거야. 그런 분이시니까.”
나는 주정이 담긴 잔을 살피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치우면 돼? 실수로 깼는데 천년을 내려온 대취림의 보물이다, 그런 말로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왜? 지금 치우게? 됐어. 나중에 내가 할게.”
“뭘 나중에 해. 혼자 온갖 우울하고 나쁜 생각 하면서 치울 거잖아. 나 있을 때 후딱 치워.”
취마와 함께 잔에 담긴 상한 주정을 비웠다.
내가 물을 퍼와서 잔을 씻는 사이 취마는 새로 술을 담기 위해 준비했다.
잔을 씻으며 그에게 말했다.
“형 때문에 상한 것 아니야. 요즘 본교를 어지럽히려는 자가 하나 있어. 그 재수 없는 놈 때문에 상한 걸 거야.”
“나 위로한다고 괜히 지어낼 필요 없다.”
“지어낸 말 아니야. 황천각과 통천각까지 동원해서 뒷조사 중이니까.”
“정말 그런 놈이 있어?”
“있어. 우리 형 우습게 보면 안 되겠네. 이런 것도 다 알아맞히고.”
그럼에도 취마의 표정이 편해지지 않았다. 내가 또 미신에 잡아먹히는 마존을 두고 볼 순 없지.
“형은 사람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해?”
“어느 정도는.”
“나는 아니야. 지금 당장 내가 형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당장 형과의 관계가 바뀌는데, 대체 뭐가 정해져 있다는 거야? 나는 주정이 상한 게 형이 나를 이곳에 데려오게 하려는 운명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영원히 몰랐을 거야. 세상일을 어떻게 알겠어? 언젠가 위기에 빠져서 이곳으로 도망쳐 오게 될지. 이건 불길한 경고가 아니라, 동생의 생명을 구하는 위대한 운명의 알림이지.”
“정말이지 잘도 가져다 붙이는구나.”
어이가 없어 웃었지만, 덕분에 불길한 마음이 많이 풀린 모양이다. 취마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런 말 듣고 싶어서 날 그렇게 기다린 거지?”
취마는 순순히 인정했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어.”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손님!”
깨끗이 씻은 술잔을 원래 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이용에 필요한 값은 술 한 잔과 미신 좋아하는 우리 형이면 됩니다.”
* * *
거처로 돌아왔을 때 야간조 호위들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강서지단에서 돌아온 후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났다. 게다가 어디 보통 사람들인가?
“지금부터 쉴 테니까, 방해하지 마.”
당장 침상에 몸을 던질 듯 방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잠을 자는 대신 시공이환술을 열었다.
불길함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는? 수련이다.
불길한 일이 생기면 없애버리면 된다. 불운도 어쩌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티는 거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버티는데. 불운, 너 따위가 어쩔 건데?
시공이환술 속에서 다시 시천비술을 발휘해서 시간을 달리 흐르게 했다.
그동안 피나는 노력을 해서 외부의 시간보다 두 배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무한대의 시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딱 열 배의 시간 차이를 내는 것이 시천비술의 최종 목표이다.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이룰 시간까지만, 제발.
오늘 수련은 구화마공이었다. 그동안 제일초식만 반복해서 수련했는데, 이제 제이초식을 익힐 때가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극의에 이른 내 무공 경지가 이러하다.
구화마공 제이초식
대멸식(大滅式).
제일초식 인멸식이 한 사람만을 노리는 공격이라면 제이초식 대멸식은 다수를 상대하는 초식이었다.
제이초식을 발휘하자 악귀 하나가 소리 없이 내 앞에 등을 돌린 채 출현했다.
일 초식에 출현하는 네 악귀 중 가장 무섭게 생긴 그 악귀였다.
순간 녀석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스륵.
악귀가 분열했다. 분열한 개수는 모두 셋.
콰콰콰콰콰콰콰!
세 악귀가 검을 내지르며 앞을 휩쓸며 나아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곳에 무엇이 있던 다 쓸어버리는 공격이었다.
제이초식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분열하는 개수도 늘어난다.
나중에는 수십 개로 분열해서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초식이 될 것이다.
물론 소모되는 내공의 양도 분열되는 개수에 따라 늘어날 테고.
아버지는 몇 개까지 분열하실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숫자를 넘어설 것이다.
과연 내 한계는 몇 개일까?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악귀들이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격동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초식 수련에 몰두했고, 해가 떠올 무렵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이제는 정말 쉬어야 할 때다.
시천비술을 풀고 시공이환술을 다시 발휘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공간이 펼쳐졌다.
뜨거운 태양, 푸른 바다, 새하얀 모래사장, 잎 넓은 나무 아래 편안한 의자.
정말 오랜만이었다. 일부러 아꼈다. 이런 날 열려고.
나는 털썩 의자에 눕듯이 주저앉았다.
내 검강 색처럼 푸른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정이 상했든, 사우종이 설치든, 배후가 있든.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쉬었다.
품에 있던 비궤를 내 옆에 내려놓았다. 비궤에 사람처럼 눈과 입을 그려두었다.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말로는 매일 열려라, 열려라 해서 기어코 열겠다고 말했지만, 비궤를 얻은 이후에 열려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너도 쉬어라. 그 오랜 세월을 사람들이 열려라, 열려라 재촉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냐? 너도 쉬고 나도 쉬자.”
잠이 밀려들었다. 수마는 나를 오랜만에 보는 존재로 안내했다.
꿈속에서 나는 하늘에 서 있었다.
하늘을 닮은 바다 위, 내 기도 속이었다.
그때 그림자가 지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돌아보니 거대한 무엇인가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성벽처럼 높은 해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천마혼.
몇 번이나 내게 모습을 보였던 그것이 꿈속에 나타난 것이다. 천마혼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나의 천마혼이라는 것을.
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천마혼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안술도 통하지 않았다.
‘너도 내가 더 빨리 너에게 도달하기를 바라는 거냐?’
천마혼은 그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 * *
사흘 후, 서대룡의 집무실에서 첫 보고를 받았다.
“사우종의 재산 상태를 샅샅이 살펴봤음에도 별다른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돈이 오간 흔적도 없다?”
“네. 저축하고 쓰는 습관을 분석해 봤을 때 돈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인물입니다.”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섭혼마존의 손에 죽으려고 한 것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더 나쁜 경우다. 네 말은 돈이 아닌 것에 움직였다는 의미잖아? 협객이라면 대의로 움직였겠지만 그런 사람 아니니까.”
“소교주님은 놈의 배후에 누군가 있다고 여기시는군요.”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거다.”
무림맹에 잠입해 있었던 목천가의 백천경을 생각해 보면 본교라고 그런 자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앞으로 일어나는 어떤 사건에도 항상 배후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건 사우종의 일과를 감시한 내용입니다.”
종이에 적힌 그의 하루를 차분히 살폈다. 보통 무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기 화원은 뭐야?”
“근래 그 화원에 자주 간답니다. 가서 멍하니 앉아 있다 온다네요. 일화검존이 화원 가꾸는 것을 돕던 자였으니, 화원에 드나드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요.”
“아니, 이상한데? 나라면 꽃이라면 꼴도 보기 싫을 것 같은데. 차라리 생뚱맞게 거문고를 배우러 갔다면 의심 안 했을 거다. 한데 다들 그러려니 의심하지 않는 곳을 주기적으로 찾았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수상하네요. 아, 소교주님이 제 동기가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에요. 전 수석 입학 못 했을 겁니다.”
녀석의 너스레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제 어딜 갈 것인지는 명확했기에 서대룡은 창가에 놓인 화분을 쳐다보며 말했다.
“삼인자야, 너 친구 생기겠다.”
제307회 왜 제게 맡겨진 꽃들은.
자연스러운 화원 방문을 위해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사 가냐?”
방을 가득 채운 옷가지와 짐 사이에서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이안은 출교 준비에 한창이었다.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을 만나러 떠나려는 것이다.
“먼 길 가려니 준비할 게 너무 많아요. 갈아입을 옷이며, 서 소저 만났을 때 입을 정복도 챙겨야 하고, 가다가 배고프면 먹을 것들이랑, 금창약하고 해독제는 챙겼고, 물갈이할 때 먹을 약은 필요 없겠죠? 지도도 챙겼고. 또…….”
“이것들은 뭔데?”
“아, 이건 혹시라도 야영하게 되면 쓸 그릇들이고 이건 양념이에요. 또 이건 바닥에 깔고 잘 가죽이고.”
나는 혁낭에서 그릇들을 다 뺐다.
“그릇 필요한 요리는 하지 말고. 양념도 소금만 챙겨. 이건 뭔데?”
“잠 안 올 때 읽을 책이죠.”
“언제 책을 그렇게 읽었다고! 한 권만 골라!”
그녀가 짐 싸는 걸 도와주었다. 아니, 짐을 빼는 걸 도왔다.
“언제 출발해?”
“내일 아침에요. 그러잖아도 인사드리러 가려 했어요.”
“혼자 가려고?”
“네. 여자 대 여자로, 설득해 보려고요.”
만약 귀영대에 귀문의 후예인 서진이 들어오게 된다면 전력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진법은 물론이고 귀술에도 능통한 그녀였으니까.
“짐이 아무리 많아도 이 정도는 가져갈 수 있겠지? 자, 이거 차봐.”
가져온 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허리에 차는 가죽띠에 작은 비수들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철방 곽 장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비수다. 위험할 때 써. 출교 선물이다.”
“아! 감사해요, 도련님!”
생각지 못한 선물에 이안은 크게 감격했다.
그녀는 가죽띠를 허리에 두른 후 빠르게 비수를 뽑아 벽에 던졌다.
네 자루의 비수가 벽에 꽂혔다. 사람 모양의 그림이 있었다면 팔과 다리 위치였다.
나는 그녀의 허리띠에서 비수를 하나 뽑아서 벽에 던졌다.
비수가 박힌 위치는 목이었다.
“언제나 여기에.”
적을 상대할 때 마음을 독하게 먹으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기억해. 내가 베푼 어설픈 자비가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
이안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다시 비수를 던졌다.
내 비수가 박힌 곳 바로 옆에 박혔다.
나는 잘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안이 벽에 박힌 비수를 회수해 다시 허리에 찼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도련님.”
“너무 아낄 필요는 없다. 다 쓰면 또 만들어 줄 테니까.”
“조심히 잘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한다. 천마신교 소교주의 직속 대주이자 권마의 딸을 왜 걱정해?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잠시 산책 좀 할까?”
“보시다시피 바빠서요. 저기 저것 좀 주워주세요. 걸려 있는 옷도 가져다주시고요.”
“마교 소교주에게 퇴짜 놓는 여인이라니!”
물론 바쁜 척은 이안의 장난이었다.
“잠깐 산책이 아니라 새외까지 산책하자고 해도 가야죠.”
그녀가 내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려다가 흠칫했다. 예전이라면 업히기도 하고 팔짱도 끼고 했는데, 소교주가 되고 난 후에는 아무래도 편하게 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그녀와 거처에서 나왔을 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안도 그들에게 인사했다. 나의 최측근인 두 조직이었기에 알게 모르게 서로를 의식했다. 정확히는 호위 책임자인 적연이 조금 더 신경 쓰는 편이었지만.
호위들이 뒤따르자 이안은 살짝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인데, 이렇게 호위까지 데려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미리 말하지 않아 미안하지만, 오늘의 외출은 사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에 가까웠다.
그렇게 본단을 나선 후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이안과 함께 걸으니 기분이 좋았다. 저자에 파는 물건도 구경하고, 이런저런 잡담도 하다 보니 풍류주점에 도착했다. 그곳을 그냥 지나치니 이안이 놀라 물었다.
“어? 우리 풍류주점 가는 것 아니었어요?”
“아니.”
마가촌에 나왔으니 당연히 풍류주점에 간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길로 계속 걸어서 서대룡의 보고서에 있던 변두리 화원에 도착했다.
“꽃 하나 사. 겨우내 잘 피는 놈으로.”
“설마? 저 꽃 사주시려고 온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비수를 받았을 때보다 더 좋아했다.
“꽃 선물은 처음이에요!”
그녀와 함께 들어가기 전에 호위들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수색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 화분을 들고 화원 뒷마당에서 나왔다.
무슨 일인가 놀라 화분을 내려놓는 그녀를 보는 순간!
‘낯이 익다.’
분명 어디선가 봤던 여인이었다. 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녀에게 꽃을 샀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은 아닐 테니.
‘뭔가 있다.’
나는 그녀의 기도를 살폈다. 무심코 봤다면 그녀가 무인이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여인은 자신의 기도를 잘 감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짚었다.
사우종이 매번 이곳에 들른 건 저 여인 때문이리라. 단순한 접선이었다면 한두 번 정도만 왔을 텐데, 매일 오다시피 자주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여인에게 뭔가를 전수받은 것이 틀림없다.
“주인장, 여기 이 아름다운 소저에게 잘 어울리는 꽃 좀 추천해주시오.”
그러자 중년 여인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귀하고 아름다우신 분께 어울리는 꽃들이 있지요. 자, 이리로 오시지요.”
그녀가 이안을 데리고 가서 꽃을 소개했다. 꽃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볼 때 누가 봐도 화원의 주인처럼 보였다.
‘이 정도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는 고수라면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의아한 마음으로 화원을 둘러보았다. 예전 백천경의 공방에서는 인형들에게서 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꽃이고 나무들이었다.
화무기를 추종했던 십이지왕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낭인 시절에 봤던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대법 재료를 찾으러 다녔을 때 봤을까?
그녀의 체형까지 살폈다. 얼굴이 아니라면 몸이나 걸음걸이에서 누군가를 연상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안이 꽃을 골랐다.
“이게 제일 오래 사는 꽃나무래요. 이 꽃망울에서 정말 예쁜 꽃이 필 거예요.”
그러다 그녀는 흠칫 놀랐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내일 출교해야 하는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꽃 가꾸기 전문가가 있지 않느냐?”
그게 누군지 짐작한 이안이 웃으며 안도했다.
중년 여인에게 꽃값을 치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내 방문을 수상스럽게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데려왔기 때문에, 그녀는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좋아하고 있었다.
또 일부러 호위까지 이끌고 왔다. 뭔가를 탐색하러 오면서 이렇게 거창하게 오진 않을 거란 생각에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겠지.
이봐, 당신 누구지? 처음 봤다면 왜 이렇게 낯이 익은 거야?
* * *
다음 날 서대룡의 집무실에 들렀을 때, 그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이제 창가에 화분은 두 개가 되었다.
“이쪽이 이 무인이 맡기고 간 화분입니다.”
서대룡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무인이 이걸 맡기고 가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꽃을 죽이면 자넬 그냥 두지 않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낫죠. 부탁하는 주제에 무슨 협박이냐고 반발이라도 했을 테니.”
서대룡이 이안을 흉내 냈다.
“아! 이 꽃망울 좀 보세요. 이게 피면 너무 예쁘겠죠? 저 너무너무 기대돼요. 제가 도련님께 처음 받은 꽃이거든요. 제가 다녀왔을 때는 꽃이 피어 있을 거예요. 그죠?”
서대룡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그 눈을 보셨어야 했어요. 기대에 반짝이는 그 눈에 눈물이 스치는데. 아! 이 꽃을 어떻게 죽여요?”
협박보다 더 무서운 이안의 고단수에 제대로 당한 서대룡이었다.
“왜 제게 맡겨진 꽃들은 절대 죽여서는 안 되는 것들 뿐이냐고요!”
한숨을 내쉰 서대룡이 화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오라버니 옆에서 잘 자라거라.”
“왜 오라버니야?”
“둘이 닮았잖아요? 검존님이 주신 꽃나무는…….”
다음 순간 나는 서대룡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와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누군지 생각났다.
환여(幻呂)!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녀를 본 것이라 착각한 것은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알기 때문이었다.
화무기를 추종한 십이지왕 중 오왕(五王).
환술과 섭혼술의 절대고수 환왕(幻王).
환여와 환왕은 쌍둥이였다.
환왕에게 쌍둥이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십이지왕으로 활약하고도 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 밝혀졌다.
환왕이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십이지왕까지 오를 수 있던 이유는 은밀히 활동하던 환여 때문이었다.
또한 환왕과 환여는 무섭고 악독한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들의 뜻에 방해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섭혼술을 이용해서 부모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친구가 친구를 죽이게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들을 두려워했다.
‘환여가 노리는 사람은 섭혼마존이다!’
* * *
“검존께서 은밀히 전하실 말씀이 있으십니다.”
북천검가에서 온 마검을 보고 청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사람은 바로 사우종이었던 것이다.
만나자는 걸 거절했더니 이렇게 검존의 심부름을 핑계로 대놓고 찾아온 것이다.
“따라오세요.”
청선은 수하들을 물리고 사우종을 객청으로 데리고 갔다.
둘만 남자 청선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마존의 명을 사칭하는 것도 중죄임을 몰라? 검존이 알면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그럼 검존에게 가서 일러바쳐.”
사우종은 실연 때문에 삐뚤어진 철부지처럼 굴었다.
“정말 이럴 거야? 남자면 남자답게 포기할 줄 알아야지.”
“마존 자리에 올랐다고 남자를 걷어차는 네가 할 소린 아니지.”
“내가 마존이 되었다고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해?”
청선의 입가에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당신, 나 말고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그녀는 사우종이 일화검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나와 잠자리 가질 때 그 여자 생각하고 있는 것 모를 줄 알았어?”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해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말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부모뻘 되는 나이의 일화검존을 여인으로 좋아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가끔 벽에 붙은 그림을 뜨거운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검존에 대한 존경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눈에 쓰인 콩깍지를 빼고 보니 그건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임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과 잠자리를 할 때 검존의 그림을 쳐다본 적도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 당장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지만 검무극에게 이번 일을 맡긴 이상,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했다.
“당신을 살려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해. 이만 돌아가.”
사우종은 끝까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어쩔 수 없잖아? 검존이 더 매력적이니까. 어떤 남자라도 마찬가지일걸?”
청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어도 자신이 죽이지 못할 거로 생각하는 것이 더 화가 났다.
“그거 알아? 놀랍게도 피부는 검존이 더 좋았어.”
사우종은 사람을 가장 열받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비교하고 또 비교했다.
“그만해. 죽기 싫으면.”
청선은 끝까지 참았다. 하지만 사우종은 없던 일까지 만들어내면서 그녀를 자극했다.
“검존에게는 좋은 냄새가 나는데. 사술을 익혀서 그런가? 말은 안 했지만, 네게서 역한 냄새가 났어. 너는 모르겠지만 코를 막고 한 적도…….”
청선이 홱 돌아섰다. 그녀의 두 눈은 흰자위까지 시커멓게 변한 상태였다.
키이이이이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청선의 두 눈에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사우종의 눈에서는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청선의 섭혼술에서 귀신 소리가 났다면 음양역혼술에서는 남녀의 교성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아든 검은 기운을 뱀처럼 휘감으며 붉은 기운이 청선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오직 잠자리를 가졌던 상대만이 가질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해냈다.’
검은 기운을 타고 역으로 날아간 붉은 기운이 그녀의 두 눈을 파고들었을 때, 사우종은 날아갈 듯 기뻤다. 마존이 되어 일화검존을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 그 순간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
사우종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른손이 검을 뽑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안 돼!’
화원의 여인이 분명히 말했다. 음양역혼술이 걸리는 순간 청선이 건 섭혼술은 파훼될 거라고.
‘분명 제대로 음양역혼술이 걸렸는데?’
이 순간에도 붉은 기운이 두 눈을 차지하며 그녀의 검은 기운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청선의 섭혼술은 그대로 자신의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스르릉.
뽑아든 검으로 자신의 목을 겨눴다.
그제야 사우종은 알 수 있었다.
‘날 속였구나.’
상대의 섭혼술을 파훼할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고 의심 많은 자신이었는데. 뭔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 속았다.
‘설마 나도?’
화원의 여인이 자신에게 어떤 암시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던 그 순간!
서걱!
그는 검으로 스스로 목을 베었다.
바로 이때 검무극이 객청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우종이 목에서 피 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 너머 청선의 모습이 보였다.
음양역혼술의 붉은 기운은 이제 그녀의 눈동자에서 검은 기운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눈을 가득 채웠던 붉은 기운이 점점 작아져서 점처럼 작아지더니, 이내 원래 평상시의 눈동자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청선이 섭혼술에 당했다.’
원래라면 저들의 목표는 이전의 섭혼마존이었을 것이다.
한데 이번 생에서 내가 섭혼마존을 죽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목표가 청선으로 바뀐 것이리라.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회귀 전 배신자는 섭혼마존이었구나.’
제308회 옆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
배신자가 섭혼마존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다른 마존 중 누군가가 배신자였다면? 그래서 그가 이번 생에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는 백천경이 있었고 본교에는 섭혼마존이 있었으니, 사도맹에도 누군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희망을 느꼈다. 지금까지 화무기는 천재지변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막을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하지만 이제 그 일들이 오랜 세월 치밀한 준비를 통해 이뤄낸 결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청선의 두 눈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제정신을 차린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우종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다 그곳에 내가 와 있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소교주님?”
이내 그녀가 자책했다. 자신이 섭혼술에 걸렸다는 사실만 모를 뿐, 그 외 모든 게 정상인 그녀였다. 자신이 참지 못하고 사우종에게 섭혼술을 걸었던 것도 똑똑히 기억했다.
“제가 놈의 도발에 넘어갔어요.”
이렇게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 청선은 복잡한 눈빛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한때 몸을 섞었던 사이인데 이런 파국을 맞은 것이다.
“소교주님을 뵐 면목이 없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게 맡긴다고 해놓고선 사우종을 죽여버린 것이 못내 미안하고 민망한 모양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저 사람은 내게 죽으려는 사람처럼 굴었죠.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아예 작정한 사람이었어요.”
어차피 벌어진 일이기에 그녀를 위로했다.
“마존 손에 죽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도발했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요.”
“아뇨, 무슨 말을 했더라도 제가 더 참았어야 했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 앞으로 마존으로 살아가려면 어떤 도발에도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일은 그녀에게 큰 경험이 될 것이다.
“놈은 죽어 마땅한 자였소. 다만 사우종은 북천검가에 속한 무인이니, 이대로 사건을 묻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청선의 표정에 걱정이 스쳤다. 이 문제가 불거지면 구설에 오를 것이다.
“마존.”
“네, 소교주.”
“끝까지 나를 믿을 수 있겠소?”
청선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궁지에 몰렸을 때 의지가 되어 주는 것만큼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는 일은 없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일은 내게 맡기시고, 일단은 돌아가시오. 시체는 황천각에서 처리하게 하겠소.”
돌아서려던 청선이 내게 물었다.
“한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죠?”
환여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기에.
“사우종을 비밀감찰 중이었소. 마존을 만나러 갔다는 보고에 놈이 대체 무슨 마음으로 마존을 만나려는지 엿보려고 왔었소.”
“그러셨군요. 면목 없는 말씀이지만 뒷일은 소교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청선은 정중히 포권한 후 그곳을 나갔다.
혼자 남아서 사우종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일화검존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했었는데, 그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묻혔다.
환여.
역시 회귀 전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실컷 이용만 하고 제거해버린 것이다.
환여가 화원에 있다면 환왕은 어디에 있을까? 이곳 근처에 있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있을까?
* * *
객청을 나온 후, 곧장 황천각으로 돌아갔다.
대화하다가 내가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서대룡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서대룡이 화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환여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우종이 죽었다.”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한 감찰 내용을 보고했었는데, 그새 죽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역시! 소교주님이 달려 나가시면 영락없이 악인들이 죽는군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아니야.”
“그럼 누가 죽였습니까?”
“섭혼마존.”
서대룡이 놀라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서대룡에게 이번 일의 배후가 화원의 주인이라고만 알려주었다.
“그 여인이 사우종을 이용해서 섭혼마존에게 섭혼술을 걸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아, 물론 아직 섭혼마존이 젊긴 하지만요.”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지. 그만큼 상대가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서대룡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존을 상대로 한 음모였다.
“화원의 여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아무리 서대룡이라도 그녀의 정체가 환여라는 것을 알려줄 수는 없었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특별감찰 중단하고 화원을 감시해. 실력 좋은 이들로 은밀하게. 마존을 상대로 일을 꾸미는 자들이다. 멀리서 큰 동선만 감시하게 해. 그리고 집행무인들 보내서 사우종 시체 수습해 오고.”
“알겠습니다.”
환여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되지 않았다. 섭혼술을 걸었으니 일단 이곳을 떠날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근처에 있으면서 섭혼마존에게 걸린 섭혼술을 관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이번 일은 나와 황천각 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섭혼술이 내게 통하지 않을 뿐, 누군가에게 걸려 있는 섭혼술을 풀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장 돌아오라고 전서를 보내야지.”
“누구에게요?”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유일한 사람이지만 올 때는 두 사람이 올 것이다.
* * *
“내가 졌네.”
노인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인근에서 바둑을 잘 두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한 달쯤 전에 젊은 청년이 찾아와서 배움을 청하기에 한 판에 얼마씩 돈을 받고 가르쳤다.
처음에는 실력 차이가 나서 접바둑을 뒀는데, 둘 때마다 실력이 늘더니 어느새 자신을 이겨버린 것이다. 이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실력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늘었나? 혹시 처음부터 날 속인 것 아닌가?”
노인에게 바둑을 배운 사람은 고월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수강료를 바둑판 옆에 내려놓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잘 배웠습니다.”
이제 더는 배우러 오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마지막 인사였다.
“한 판만 더 두세!”
하지만 노인은 이미 세 판이나 연속해서 진 상태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어르신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
고월이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나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풍천교주가 노인에게 한마디 했다.
“맞소. 저자는 원래부터 바둑 고수였소. 세상 음흉한 놈이라 처음부터 속였던 거요. 노인장 속여서 역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만 노인은 전혀 그에게 동조해주지 않았다. 패배의 불똥이 풍천교주에게 튀었다.
“생긴 건 그쪽이 더 음흉하네만.”
풍천교주가 노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허, 바둑만 두셔서 그러신가, 사람 볼 줄 모르시는구려. 난 살면서 음흉하다는 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오.”
“원체 음흉해 보이니 다들 조심하지 않았겠나? 음흉할 기회가 없었겠지.”
괜히 고월을 놀려먹으려다 음흉한 사람이 돼버린 풍천교주가 발끈했다.
“나 무림 고수요.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 되시오.”
“나 낼모레 여든일곱이네. 어쩔 텐가?”
두 사람이 불꽃 튀는 눈싸움을 했다. 나 내일 죽어도 좋은 늙은이야, 그 무적의 기세에 풍천교주가 밀렸다.
그때 저 멀리서 고월이 풍천교주를 불렀다.
“뭐하시오? 빨리 안 오고!”
풍천교주가 심술 난 애처럼 바둑판 위의 돌을 확 흐트러뜨렸다.
“나이 많아 좋겠소!”
훌쩍 몸을 날려 저 멀리 대문 앞에 서 있는 고월에게 내려섰다. 저 뒤에서 에끼, 음흉한 놈! 노인의 외침이 들렸다.
두 사람이 집을 나섰다.
“늙으니 무서운 게 없다.”
“어디 안 무서워서 저러겠어? 우리 교주 마음씨 좋은 사람이란 것 눈치채서 그렇지. 수를 다 읽혔어.”
“좋게 대해주면 왜 이렇게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거야!”
“솔직히 좋게 대해주진 않았잖아? 옆에서 만날 심심하다, 배고프다, 언제 끝나냐, 투정이나 부렸지.”
“뭐야? 바둑선생과 그새 친해진 거야? 둘이 짰어?”
고월이 웃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제 다음 지부로 가자.”
“또 가자고? 이제 바둑도 고수가 되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고월은 바둑 고수가 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였고 정보조직인 은월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느라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각 지부를 돌면서 점검하고 살피고. 수장이 없더라도 모든 일이 체계적으로 알아서 척척 돌아가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런다고 소교주가 안 알아준다. 자기 필요할 때나 나타나서 이것 좀 도와줘, 이것 좀 알려줘! 역시 우리 고 군사야! 말로만 칭찬하겠지.”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욕만 하면 뒤에서 검무극이 나타났기에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소교주님이 오길 바라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리!”
가끔은 검무극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때론 검무극 욕을 더 하기도 했다. 뒤에서 ‘또 제 욕을 하고 계시는군요.’ 하면서 검무극이 나타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인정머리 없는 놈은 우릴 잊었다니까. 우리가 돈을 얼마나 벌어주는데.”
검무극에게 보내는 최고 등급의 정보를 제외하고 팔아도 될만한 정보들은 무림인들에게 팔았다. 거기서 얻어지는 수익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다.
통천각이야 천마신교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이지만 은월은 달랐다. 전 중원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이 방대한 조직을 검무극의 돈만으로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공자는 욕심쟁이야.”
“욕심쟁이 아니시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큰돈을 주고 가셨어. 개인적으로 쓰라고 명령까지 내리시고.”
“그만큼 고생시켰으면 당연히 줘야지. 한데 나는? 왜 너만 줘?”
“교주는 부자잖아?”
“그런 법이 어딨어? 부자 고생은 고생도 아니야?”
그때 고월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고생은 내가 챙겨야지.”
“네가 왜?”
“교주의 자발적 고생 날 위해 한 거잖아? 소교주님 때문이 아니라.”
그러면서 고월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풍천교주에게 건넸다.
그게 무엇인지를 확인한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집문서였다. 더 놀라운 것은 주인이 풍천교주로 되어 있었다.
“중원에 집 가지고 싶어 했잖아? 교주 집이다.”
집문서를 든 풍천교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풍천교주는 중원에 집을 가지고 싶어 했다. 고월과 술을 마시다가 가끔 집을 사고 싶다고 말하곤 했었다. 풍천교주로 있을 때는 거창하게 중원진출이 꿈이었는데, 자유롭게 중원을 활보하면서도 작은 집 한 칸 마련하는 것이 이리 어렵다면서 말이다.
중원에 집을 사는 순간, 새외를 떠나 진정으로 중원에 정착하는 기분이 들 것만 같았다.
“이번에 소교주님께 받은 돈하고, 그간의 월봉까지 보태서 샀다.”
“이걸 왜 네가 사냐고!”
고월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교주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내 선물이다.”
풍천교주는 내심 감격했다. 지금껏 이보다 귀한 선물을 수없이 받아봤지만, 이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다.
“나 돈 많아.”
“알아. 그런 집 수백 채도 더 살 수 있다는 것.”
“수천 채겠지!”
“그런데 한 채도 안 샀잖아? 왜 안 샀어? 우리가 중원을 돌아다닐 때 각 지역에 한 채씩 사도 됐잖아?”
풍천교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월은 그의 마음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이걸 사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그래도 전대 풍천교주인데. 새외에 있는 후배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 거지.”
어떻게 알았을까? 분명 그런 마음도 있었다.
“안 미안해! 내가 왜 미안해? 교주까지 시켜주고 각자 자리 다 챙겨주고 나왔는데.”
그러자 고월이 다른 이유를 들었다.
“소교주 눈치도 보였을 테고. 군사 돕는다고 나가 있더니 집이나 사고 있구나!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잖아?”
물론 이런 마음도 있었다. 어찌나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지.
“이공자 눈치를 왜 봐! 내 돈으로 내가 산다는데.”
“그럼 왜 안 샀어?”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풍천교주는 내 마음도 몰라주냐는 표정으로 이유를 밝혔다.
“나 혼자 좋다고 살 수는 없잖아? 집을 사도 가까운 데 두 채 사서 이웃으로 살아야지? 나만 좋다고 사면 안 되잖아? 너하고 의논하고 사야지. 네가 일한다고 그렇게나 바쁜데, 집 보러 다니자는 말을 어떻게 하냐? 왜? 싫어? 내 옆집에 살기 싫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풍천교주가 시선을 외면하며 내뱉듯 말했다.
“옆 사람 마음도 모르면서 무슨 군사를 한다고. 이공자야, 사람 잘못 골랐다! 차라리 아까 그 바둑선생 데려다 군사 시켜라! 나 음흉한 것 딱딱 잘 맞추는 그 늙은이가 백 배는 더 낫겠다.”
그러자 고월이 품에서 뭔가를 또 꺼냈다.
“그래서 근처에 집 하나 더 샀다. 이건 내 이름으로.”
풍천교주는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한참을 멍하게 고월을 쳐다보던 그가 불쑥 물었다.
“내 집보다는 작지?”
고월이 큰 소리로 웃었다.
“우리 교주 성격 내가 잘 아는데 그랬을 리가. 나는 작은 걸로 샀다.”
“그럼 됐어.”
“교주 집, 예전에 살던 집하고는 비교가 안 될 거다. 나중에 보고 집 작다고 실망하지 마라.”
“실망해야지. 나 풍천교주다! 전대 풍천교주였다고!”
풍천교주가 먼 산을 쳐다보았다. 고월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을 받아서도 좋지만, 그 옆에 고월이 자기 집까지 샀다는 것이 열 배는 더 기뻤다. 그것이 진짜 선물이었다.
‘나중에 네 집, 중원에서 제일 큰 집으로 지어주마. 이공자보다 더 큰 집으로 지어주마.’
이것이 풍천교주의 마음이었다.
그때였다. 그들에게 수하가 와서 전서를 전하고 갔다.
“누군데?”
“소교주님.”
“이러니 내가 욕을 안 할 수가 있나? 이 기분 좋은 날 또 뭔 일을 시키려고 전서까지 보냈대? 못한다고 해! 안 한다고 해!”
고월이 풍천교주에게 전서를 내밀었다.
“나 말고 교주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순간 풍천교주가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나? 너 말고 나? 확실해? 정말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교주 도움이 절실하니 빨리 돌아와 달라네.”
풍천교주의 양어깨가 하늘로 치솟으며 괜한 심술을 부렸다.
“뭐야? 뺏어갈 신물이 없으니 이제 날 부려 먹으려고?”
“그럼 못 간다고 전서 보낼까?”
풍천교주가 못이기는 척 말했다.
“새로 산 집도 구경할 겸 돌아가자!”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뒤따르며 고월이 말했다.
“우리가 산 집은 본단 가는 길과 반대쪽인데?”
풍천교주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빨리했다.
고월이 웃으며 뒤따랐다. 드디어 본단으로 돌아간다. 정보조직을 만드는 임무를 확실하게 완수한 후, 돌아가는 기분 좋은 귀환이었다.
아까 바둑선생 집에서와는 반대로 이번에는 저 앞에서 풍천교주가 손짓하며 재촉했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제309회 꽃을 좋아하는 악인은 없다.
내가 방문했을 때, 오늘도 일화검존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검술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녀가 왜 이리 무공에 푹 빠졌는지 나는 잘 안다. 마존급 실력의 고수들에게 무공의 성취는 정말 쉽게 오지 않는 기연과도 같은 일이다. 그리고 일화검존은 이런 순간이 오면 그 성취를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허공을 날아오른 그녀가 한바탕 검을 휘두른 후,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나를 향한 도발적인 눈빛이 딱 이러했다.
들어와!
한판 붙자면 붙어줘야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차고 날아올라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흑마검과 일화검이 허공에서 연이어 부딪쳤다. 마지막 비무 때보다 더 빠르게 공격했음에도 그녀는 공격을 막아냈다.
확실히 강해진 그녀의 실력에 나는 공력과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검과 검이 너무 빠르게 부딪쳐서 챙챙챙 끊어져서 울려야 할 소리가 채애애애앵, 하나의 소리로 들렸다.
수십 가닥의 검선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보더라도 어딜 어떻게 공격하고 방어하는지 알아볼 수 없을 빠른 공방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올라갔다.
싸우는 것은 나와 일화검존이 아니었다. 본능이 검을 내지르고, 본능이 검을 막는 싸움. 순간의 실수에 팔이 날아가고 목이 잘릴 그런 비무였다. 실전보다 더 실전 같은 비무였다.
속도가 극에 다다랐을 때.
따당! 하는 이질적인 소리가 터져 나왔고, 우린 함께 바닥으로 내려섰다.
푹.
일화검이 바닥에 박혔다.
그녀는 다시 검을 떨어뜨린 것이다.
일화검존에게서 패배의 아쉬움이나 수치심은 느낄 수 없었다. 졌지만 너무 잘 싸웠기에 오히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의 공방에서 그녀는 평생 펼쳤던 그 어느 검술보다 뛰어난 검술을 발휘했으리라.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를 어디까지 데려가려고 이러나?”
그녀는 한계까지 밀어붙인 내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만족하지 말라는, 아직 멈추지 말라는 내 마음을.
“끝까지 가려고 합니다.”
끝까지.
그래, 나는 이 마존들과 끝까지 가보려고 한다.
“왜?”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검술을 나누며 자극받을 사람은 선배님밖에 없다고요. 이렇게 마음껏 검술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선배님밖에 없는데, 아버지와는 이렇게 자주 겨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싸우더라도 다른 싸움이 됩니다. 따라서 선배님과의 비무는 제게 너무나 소중합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내 진심을 전했다.
“우리가 이 손에서 검을 놓게 되는 그 순간까지 같이 가고 싶습니다.”
일화검존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그녀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우리가 첫 비무를 했을 때 생각나나?”
“기억납니다.”
일화검존도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그 무렵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네. 마존으로 십여 년만 더 있다가 후계자에게 마존 자리 넘기고 편안한 노후나 즐겨야지.”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무렵의 내겐 도착지가 보였다네. 무인으로서, 또 마존으로서. 사람들이 환호하고 축하해주려고 줄을 서 있는 내 인생의 결승점 말이네. 지금도 보이네.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길이지. 한데 자넨 나를 출발선에 세우고 있네. 나는 지금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기분이야.”
나는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 결승점을 통과하면 편하고 즐거울 것 같지만 딱 한 달쯤만 좋을 겁니다. 그다음 날부터 지루하고 심심할 겁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뭐라도 더 해볼걸.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허망하지 않나? 온갖 잡념과 후회가 선배님을 괴롭힐 겁니다.”
일화검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자넨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제가 상상력이 풍부하거든요.”
사우종에게 약점이나 잡히고, 어울리지도 않는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그런 인생으로 살기에는 그녀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일화검존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 있던 일화검이 뽑혀 나오더니 그녀의 손으로 날아갔다. 검을 손에 쥔 채 그녀는 선언하듯 말했다.
“난 다시 출발점에 섰네. 죽는 순간까지 이 손에서 검을 내려놓는 일은 없을 거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눈앞의 그녀는 회귀 전 일화검존과 다른 사람임을. 누굴 만나고, 누가 옆에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법이다.
“오늘은 왜 찾아왔나?”
“섭혼마존의 손에 사우종이 죽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일화검존이 흠칫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가?”
환여와 관련된 내용을 빼고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렇게 되니 치정으로 인한 죽음이 되었다.
“사우종은 마존을 협박하고 모욕했으니 죽어 마땅한 중죄를 저질렀습니다. 다만 다른 마존의 손에 마검이 죽었으니 선배님이나 북천검가의 명성에 누가 될 수는 있겠지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자네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나?”
“섭혼마존을 위해서 이번 한 번은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한창 서환진 내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입니다. 이번 일이 부각 되면 그녀의 입지는 좁아지겠죠.”
일화검존은 내 부탁을 받아주었다.
“조용히 처리하세.”
“감사합니다.”
“대신 그 사람을 어디에 묻었는지는 알려주게. 그래도 한때 나를 보필했던 사람인데, 가는 길 술 한 잔은 뿌려줘야겠지.”
말을 마친 그녀가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그곳을 떠났다.
일화검존의 거처를 벗어나기 직전,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검을 늘어뜨린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심경이 느껴졌다. 사우종과 어떤 관계였는지, 약점이 무엇이었는지는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일이 그녀의 삶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녀의 검술까지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북천검가를 나서는데 서대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원을 감시하던 쪽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매일 들어오던 모종이 어제, 오늘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그 일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떠나려는 거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선 안 된다. 어떻게든 붙잡아 두어야 한다. 만에 하나 풍천교주가 섭혼술을 풀 수 없을 수도 있고, 풀기 위해서 그녀가 필요할 수도 있었으니까. 환왕 또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면 그녀가 필요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본단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가며 대답했다.
“어쩌긴. 못 가게 말려야지. 집행무인들 되는대로 내게 보내.”
* * *
환여는 화원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우종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놈이 죽었다는 의미는 곧 음양역혼술이 성공했다는 뜻. 일단 물러갔다가 일 년 후에 다시 와서 그녀를 확인하면 되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한 방에 섭혼술을 성공시켜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릴 수 있지만, 섭혼술을 익힌 섭혼마존은 단번에 조종할 수 없다. 그녀의 정신에 심어진 적혼(赤魂)이 자리를 잡아서 커져야 한다. 그 과정은 씨를 뿌려 꽃을 키우는 것과 같다. 봉우리에서 활짝 꽃이 피어날 때, 섭혼마존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다.
그때 그곳으로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서더니 그 사이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환여는 깜짝 놀랐다. 검무극이 호위들은 물론이고 황천각 집행 무인들까지 거느리고 들어온 것이다.
“귀한 분께서 또 오셨군요.”
“그날도 나를 바로 알아보는 것 같던데. 나와는 초면인데 어떻게 아셨소?”
“이곳 마가촌에서 장사하는 사람 중에 소교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이곳에서 일을 꾸미면서 근래 가장 많은 소식을 들은 것이 검무극에 관한 소문이었다. 대부분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는데, 그녀는 안다. 그 소문들이 다 사실이라는 것을. 그래서 검무극을 상대하는 일만큼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그랬기에 환여는 검무극의 방문을 의심했다. 한 번은 우연이라 쳐도 두 번이나?
‘뭔가 눈치를 챘나?’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소교주가 직접 나설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불안해하진 않았다. 빠져나갈 방법은 많았으니까. 당장 섭혼술을 발휘해서 호위들에게 검을 뽑아서 소교주를 죽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 혼란을 틈타 자신은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내 수하가 그날 사준 꽃을 정말 마음에 들어 하더이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꽃 선물만큼 좋은 것은 없는 법이지요.”
만약 이런 이유만으로 방문했다면 틀림없이 소교주를 의심했을 것이다. 한데 검무극은 직설적으로 물어왔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지요.”
“근래 이곳에 자주 왔던 무인을 아시오?”
사우종을 언급하자 환여는 내심 놀랐지만 그런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항상 와서 꽃과 나무를 구경하다 돌아가시곤 했죠.”
“사우종이란 사람이오.”
“제겐 이름을 말씀해주지 않으셔서요.”
“얼마 전에 그가 죽었소.”
“저런! 어쩌다가요?”
환여가 못내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연기는 훌륭해서 누가 봐도 매일 찾아온 마인과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본교에서 그 사람의 죽음과 관련해서 조사 중이오. 내가 여기 온 이유도 그 때문이고.”
“아, 그러셨군요.”
환여가 머리를 조아리며 두려운 기색을 드러냈다.
“한데 소교주님께서 직접 조사하시는 걸 보니 그분이 대단한 신분이셨습니까?”
“그 사람 죽음이 본교의 마존과 관련되어 있소.”
오히려 이렇게 밝혀버리니까 환여는 내심 의아했다.
‘섭혼마존 일을 알아차린 건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찾아올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으려고 마존들을 이끌고 왔을 것이다.
‘아직은 나에 대해서 모른다.’
그녀를 대하는 검무극의 태도 역시 의심을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 당분간 화원을 떠나지 마시오.”
“저는 어디 갈 곳이 없는 사람이에요.”
“한데 왜 매일 오던 모종이 오지 않는 거요?”
검무극은 의도적으로 이쪽에서 화원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까지 밝혔다.
“제가 몸이 아파서 며칠 쉬려고 멈췄답니다.”
검무극은 그녀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이래야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다.
딴 이유로 와서 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해봤자, 그녀는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차라리 널 주시하고 있으니 떠나지 마라! 이게 그녀를 붙잡아 둘 가능성이 컸다. 거기에 결정적 한 가지를 보탰다.
“만약 겁을 먹고 떠나면 본교의 공적으로 올려서 추적대를 보낼 거요. 그대 용모파기가 전 중원에 뿌려질 거라서 숨을 곳은 없을 것이오.”
검무극은 그녀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들은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조심하는 것이 외부에 자신이 드러나는 일이었다. 용모파기가 전 중원에 나붙는다? 절대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환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젠장.’
자신이 드러나는 일만큼은 절대 허용해선 안 될 일이었다.
검무극이 이안이 샀던 꽃 앞으로 가서 향기를 맡았다.
“수하들이 이곳 화원이 수상하다고 보고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뭐라고 하셨죠?”
“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악인은 없다.”
검무극은 데려온 이들과 함께 화원을 떠났다.
환여는 말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아! 이 얼마 만에 오는 본단이냐?”
본단에 들어선 풍천교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풍천교도 아니고 천마신교 본단인데, 내 집에 돌아온 안락함이 있었다.
내원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곧장 검무극의 거처로 향했다. 예전 거처가 아니라 소교주가 되고 난 후의 크고 좋은 거처였다.
“소교주가 되고 나니 집이 으리으리해졌는데?”
풍천교주는 예전에는 신경도 안 쓰던 검무극의 거처를 살폈다.
“역시 권력이 좋긴 좋다.”
“부러우면 새외로 돌아가. 교주 거처는 이것보다 열 배는 더 컸잖아?”
“누가 부럽대? 그냥 그렇다는 거지.”
풍천교주가 창가에서 내부를 살폈다.
“이공자 어디 갔어? 우리가 왔는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설마 우리 부른 것도 잊은 거 아냐? 아, 맞다. 제가 불렀죠? 그 일은 다 해결됐습니다. 기왕 오셨으니 한 며칠 쉬셨다가 이제 다른 일 하러 가시죠? 제가 바빠서 이만.”
하도 흉내를 자주 내서 이제 검무극 흉내를 누구보다 잘 내는 그였다.
“그나마 봐줄 만했던 이공자에서 악덕 소교주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언제나 제가 없을 때는 어김없이 제 욕을 하시는군요.”
풍천교주는 돌아보지 않은 채 혼자 씩 웃었다. 그래, 이 목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던 거였다.
풍천교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무극이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직은 그나마 봐줄 만한 소교주입니다. 악덕까진 좀 남았을 겁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
보고 싶었으면서 풍천교주는 괜한 심술을 부렸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교주님.”
풍천교주가 옆에 선 고월을 쳐다보았다.
“그런 인사라면 이쪽에다 해야지.”
검무극이 고월을 쳐다보며 말했다.
“고생했네.”
고월이 미소를 지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풍천교주가 끼어들며 고월을 치하했다.
“자기 일이라도 그렇게 열심히는 못 해. 소교주, 자네 군사 보약 좀 사 먹여. 고생 많이 했어.”
고월이 괜한 소리 말라며 풍천교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일 좋은 보약으로 사 먹이겠습니다.”
“살 때 내 것도 살 거지?”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웃지만 말고 꼭 사. 먹는 걸로 사람 섭섭하게 하지 말고. 그래, 무슨 도움이 필요해서 이 몸을 불렀는가?”
“섭혼마존 일입니다.”
전대 섭혼마존이 죽고 청선은 풍천교주에게 섭혼술을 전수받았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풍천교주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 아이가 왜?”
검무극은 결론부터 말했다.
“알 수 없는 자들이 섭혼마존에게 섭혼술을 걸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풍천교주의 기도가 바뀌었다.
휘이이이이이이!
풍천교주의 기도는 사람의 원초적 공포심을 일깨웠다.
사방에서 먹구름이 몰려와 순식간에 주위가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태풍이 몰려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되었다. 멀리서 불어온 스산한 바람에 종소리가 실려 왔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땅바닥에서 문이 열리며 갖가지 형태의 시커먼 괴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연속해서 지옥문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빠른 속도로 튀어나온 그것들은 망설이지 않고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실제 괴수들이 아니라 기도를 형상화한 환영들이었다.
검무극을 향해 수백 마리의 괴수들이 달려들었다.
그것들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섬뜩함이 투지를 식게 했고 정신력을 무너뜨렸다. 절로 천마호신공이 발동했다.
만약 내공이나 심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이미 이 기도만으로 혼자 검을 휘두르며 미친놈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천교주의 화난 기도였다.
지금의 풍천교주는 농담하고 너스레 떠는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새외제일공 앙천대마기를 대성한 새외무림의 절대자로.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풍천교주가 차갑게 말했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렸단 말이지?”
제310회 그 망할 년 앞에 데려다주게.
검무극은 풍천교주의 기도에 흠뻑 취했다.
날아드는 야수들의 환영에서 교주의 분노를 느꼈다.
만약 천마호신공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그의 기도에 반응해 온몸의 피가 끓고, 검을 뽑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으리라.
이게 진짜 고수의 기도다. 한 무공의 극의에 다다른 진짜 고수의 기도.
이제 그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할 때다.
검무극은 달려드는 괴수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손을 휘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자분을 제가 건든 건 아니고요. 아이고, 저 죽어요!”
그러자 풍천교주가 기도를 거둬들였다.
날뛰던 괴수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먹구름이 사라지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심장을 두드리듯 울려 퍼지며 지옥문을 열던 종소리가 멀어져 갔다. 여운을 남기는 종소리의 긴 울림을 끝으로 풍천교주의 감정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풍천교주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청선은 지금 어디에 있나?”
차분한 물음에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겼다.
이래서 사람은 자세히 봐야 하는 법이다. 아니, 자세히 본다고 봤어도 풍천교주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걸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 그 겹겹이 다른 면모를 이해하고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섭혼마존은 잘 있습니다.”
그제야 풍천교주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교주님이 이렇게 걱정해주신 걸 알면 많이 좋아할 겁니다. 덕분에 저는 죽을 뻔했지만요.”
“엄살은! 멀쩡히 잘 버텨놓고선.”
“천마호신공까지 썼습니다!”
풍천교주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일부러 천마호신공을 언급했다. 과연 그 말에 풍천교주는 대번에 기분이 풀어졌다. 그는 아버지를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풍천교주 뒤에 서 있던 고월이 한마디 했다.
“교주, 제자를 이렇게까지 생각했었어? 그렇게 안 아끼잖아?”
“안 아껴. 아끼기는 뭘 아껴?”
괜히 무안했는지 풍천교주가 다른 이유를 댔다.
“청선이 때문이 아니라 내 자존심 때문이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려? 이건 날 무시하는 일이야. 설마 내 제자란 것을 몰랐을 리는 없잖아? 아, 몰랐나? 몰랐으니까 저질렀겠지?”
검무극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런 일을 꾸미는 사람이 그 정도 조사도 안 했을 리 없죠.”
“대체 어떤 자인가?”
“여인입니다.”
풍천교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섭혼술을 익힌 여인 중에 이런 일을 저지를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남자도 마찬가지다. 감히 천마신교의 마존을 건든다? 들키면 가문이 몰살당할 텐데. 대체 누가?
“그 여인이 누군가?”
“마가촌에서 화원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여인입니다.”
“내가 직접 봐야 알겠군. 그 전에 청선 먼저 보세.”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참, 제자분은 자신이 섭혼술에 당한 걸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다른 일은 몰라도 섭혼술과 관련된 일만큼은 절대 소홀히 여기지 않는 그였다.
검무극이 나가자 고월이 그에게 말했다.
“교주.”
사람을 불러놓고 고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날 붙어 있는 사이인데, 어찌 고월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제자 일이니 혹여라도 감정에 휘말리지 말라는 걱정이었다.
“뭔 걱정이냐? 내가 얼마나 못돼먹은 인간인지 잘 알면서.”
잘 알지, 하는 얼굴로 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제자가 오기 전까진 위엄은 잠시 숨겨두었다.
“너는 아니라고 해줘야지! 교주 은근히 정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해야지! 말이라도 아니라고 해줘야지!”
* * *
청선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이 그녀의 팔을 감쌌다.
검은 연기는 물고기 비늘 모양의 갑옷처럼 변했다. 완벽하게 그녀의 팔을 보호하면서 환갑술(幻鉀術)이 성공하나 싶었는데.
쩡.
쇠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비늘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나가며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청선이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구결을 잘못 외우는 바람에 팔을 크게 다칠 뻔한 것이다.
사우종을 죽이고 난 후, 무공수련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냐고? 천만에. 그녀는 그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독하고 모진 성격이었기에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그녀를 괴롭혔다.
자꾸 그날의 일이 떠올랐고, 침착하게 대처하는 자신을 상상했다. 이렇게 대답했으면 되었는데. 이렇게 대처했으면 되었는데. 참았어야 했는데.
소교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오직 자신만이 다음 세대의 마존이다. 다른 마존들은 다 늙어 죽어도 자신은 살아서 교주가 된 검무극을 모실 것이다. 그런 중요한 관계의 시작을 망친 것 같아 자꾸 미련이 남는 것이다.
그때 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교주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마침 검무극 생각을 하던 차라 그녀는 내심 놀랐다. 어찌나 시기적절하게 잘 나타나시는지.
잠시 후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교주.”
“마존.”
두 사람이 포권하며 인사를 나눴다. 청선은 혹시 사우종 문제가 커졌나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검무극은 너무나 기쁜 소식을 가져온 참이었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일화검존께서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 주시기로 했소.”
청선은 크게 안도했다.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검존께서 마존을 위해 양보해 주셨소.”
청선이 어찌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중간에서 중재를 잘 해줬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도와주신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풍천교주께서 돌아오셨소.”
“아! 사부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마존을 먼저 찾았소.”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섭혼술을 걸었다는 말에 그대 사부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당신을 많이 아끼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말해주리라.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기를 바라면서.
“어디 계시나요?”
“지금 제 거처에서 마존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에는 청선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 * *
검무극과 청선이 거처로 돌아왔다.
“사부님.”
청선은 모두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지만, 항상 이런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섭혼은 언제 강해져서 다른 마존처럼 될까?
감히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강박증처럼 따라다니는 물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풍천교주는 든든한 울타리 같은 사람이었다. 근래 사우종 때문에 우울해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사부가 더 반가웠다.
“잘 다녀오셨어요? 사부님.”
청선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풍천교주는 청선의 기도만으로 그녀의 무공 성취를 알아보았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구나!”
사부가 자신의 성취를 알아봐 주자 청선은 기뻤다. 다른 마존을 따라잡으려고 수련만큼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그녀였다. 사부가 그 노력을 알아주니 지난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일어나거라.”
풍천교주는 빤히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사부가 이렇게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라, 청선은 내심 당황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내 눈을 똑바로 봐라.”
“네, 사부님.”
청선이 고개를 들어 사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검무극과 고월은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디 풍천교주가 풀 수 있는 섭혼술이어야 할 텐데.
“자, 이제 심혼술(心魂術)을 펼쳐보아라.”
풍천교주의 계속된 시험에 검무극은 고월과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녀에게 어떤 섭혼술에 걸렸는지 알아보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존이 무공을 펼치는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검무극과 고월이 함께 내원을 산책했다.
“고생 많았지?”
“아닙니다. 저는 일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자네 입으로 그런 말 말아. 그럼 정말 일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시키니까.”
고월이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은 고월에게만큼은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줘야 한다고 여겼다.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이 지난번 무림맹에서 사건을 저질렀던 자들과 같은 일당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게.”
만약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이었음에도 생각보다 고월은 놀라지 않았다.
“혹시 예상했었나?”
“양쪽 모두 최고위층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 점으로 볼 때, 같은 배후일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했습니다. 만약 소교주님의 추측이 정확하다면, 사도맹에도 저들의 음모가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역시 고월은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정보를 수집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교주와 내 거처에서 지내도록. 조만간 아버지께 허락을 받고 작은 규모나마 은월 본단을 만들어주지.”
그러자 고월은 검무극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그 일은 미뤄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왜?”
“그렇게 되면 은월은 천마신교의 공식 조직이 됩니다. 소교주님이 교주님이 되셨을 때, 은월을 공식 조직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지금은 오직 검무극을 위한, 검무극의 명령만 수행하는 조직으로 남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의 충성심에 검무극은 환한 웃음으로 기쁨을 표현해주었다. 네 충성심에 나는 이렇게 기쁘다고. 또 눈빛으로도 말했다. 고맙다, 고월아.
“고 군사.”
“네, 소교주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린 가야 할 길이 멀다. 적당히 쉬어가면서 해. 너무 열심히 하다 지쳐버릴까 걱정된다.”
“사람이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건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노고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아니겠습니까? 소교주님이 이렇게 잘 알아주시니,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고월이 미소를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풍천교주가 과장해서 그렇지 나가떨어질 정도로 열심히 일하진 않습니다.”
모처럼의 농담에 검무극은 소리 내서 웃었다.
두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제 또 바빠질지 몰랐기에 오랜만의 이 산책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 * *
고월과 함께 거처로 돌아갔을 때, 청선은 돌아가고 없었다.
“어땠습니까?”
풍천교주는 청선이 정확히 무엇에 당했는지 알아내었다.
“음양역혼술에 당했다.”
나도 고월도 처음 듣는 무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공은 중원의 무공이 아니었고 오래전에 실전된 무공이었다.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새외 무공이라네.”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은 이유는 새외 무공 중에서도 특별한 곳의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이젠 사라지고 없는 혈교 무공이지.”
풍천교의 전신이 혈교였다. 오래전에 실전되어서 풍천교로 이어지지 못한 무공이 갑자기 튀어나와 찝찝한 모양이다.
어느 시대에나 귀신처럼 부유하는 ‘혈교 부활’의 소문은 있었다. 당연히 풍천교주는 그런 소문에 더욱 민감했을 테고.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화무기는 혈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 화무기가 정사마 세 곳을 봉문한 이후, 십이지왕이 중원을 지배할 때도 혈교 부활과 관련한 일은 일절 없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섭혼마존에게 걸린 음양역혼술은 풀어낼 수 있습니까?”
풍천교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고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못한다는 것을 표하고 싶었지만 잘난 척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연기를 방해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연하지. 나, 풍천교주네.”
나와 고월이 환호했다.
“역시! 교주님이 최고십니다!”
“멋지다, 교주!”
풍천교주가 치솟은 어깨를 으쓱대며 잘난 척을 이어 나갔다.
“매개체가 된 자는 죽었지?”
그는 사우종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음양역혼술은 잠자리를 한 상태에서 상대가 섭혼술을 걸 때, 역으로 걸 수 있다네. 조건이 아주 까다롭지. 한데 잠자리한 사이에 섭혼술 걸 일이 뭐가 있겠나?”
“상대를 죽이려고 할 때겠죠.”
“청선이 죽이려 했다면 그자는 죽었겠지. 배후가 여자라고 했으니, 직접 나서지 않고 사내놈을 매개를 썼을 테고. 이용한 놈은 뒤탈 없게 청선에게 죽게끔 뒀을 테고.”
“정말 딴사람 같으십니다! 대체 제 앞에 계신 분, 누구십니까? 혹시 교주님이 섭혼술에 당한 상태 아니십니까?”
“이거 욕이지? 칭찬 아니지?”
괜히 기분 좋아지라고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자기 일을 할 때의 풍천교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는 매개에 불과하고, 그자에게 구결을 가르쳐준 그 여자의 몸에 제령인(制靈印)이 찍혀 있을 거네. 대법으로 그것을 뽑아내서 없애면 청선에게 심어진 적혼도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거네.”
풍천교주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시퍼런 한기가 흘러나왔다.
“내 제자의 생사는 내가 책임지겠네. 그러니 나를 그 망할 년 앞에만 데려다주게.”
나는 풍천교주를 믿는다. 환여를 제압하고 대법을 성공시킬 것임을. 섭혼술에 있어 그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겠는가?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대법이 진행되면 그 여인은 어떻게 됩니까?”
“제령인이 강제로 뽑혀 나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으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지.”
“그 여인을 죽이기 전에 알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환왕이 어디에 있느냐다.
환여를 죽이면 환왕은 반드시 복수할 거다. 저 쌍둥이들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환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복수의 칼날을 갈고, 그 복수 대상이 풍천교주라고?
결코 내가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환여를 죽일 거면 환왕까지 같이 죽여야 한다.
“대법 시기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진 참아주시지요.”
풍천교주의 눈에 흘러나오던 시퍼런 안광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러잖아도 눈에 힘을 너무 줬더니 힘들다.”
눈을 비비며 한바탕 너스레를 부린 후 풍천교주가 내게 물었다.
“자네, 대체 무슨 생각인가?”
당신 살릴 생각 하고 있소. 환왕 같은 자에게 복수 당하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해주려고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주님 멋지게 활약하실까 고민 중입니다.”
제311회 하다 하다 이제 내 약점까지.
내 말에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다른 제자만 챙길 게 아니고 이쪽 제자도 챙겨야겠군.”
풍천교주는 손가락을 튕겨 시공이환술을 발휘했다.
시공이환술을 그에게 배웠을 때, 이곳에서만큼은 그를 사부로 모시겠다고 했었다.
“제자야. 무슨 고민이 있느냐?”
장난기 묻어나는 풍천교주의 질문에 대답 대신 주위부터 둘러보았다.
그곳은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시체가 쌓여 있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대체 왜 이런 곳을 연 겁니까? 여긴 어딥니까?”
“자네에겐 이런 곳이 어울릴 것 같아서.”
그저 장난만은 아님을 알았기에 나는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교주가 보는 제 마음이 이렇습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가 되물었다.
“볼 때마다 강해지는 이유가 자네 마음속이 항상 싸움터이기 때문 아닌가?”
장난기 없는 풍천교주는 이런 사람이다. 본능적으로 피 냄새를 맡는 사람.
“죄송하지만 제 마음속은 이렇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풍천교주를 흉내 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는 시공이환술을 열 때면 이렇게 손가락 튕기는 것을 좋아했다.
스스스스슷!
장소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새하얀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아름다운 들판이었다.
“제 마음은 이렇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풍천교주가 웃으며 물었다.
“이런 곳을 꿈꾸는 것은 아니고?”
더는 반박하지 않고 나도 옅게 웃었다.
풍천교주가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 들며 말했다.
“여기 있다 보면 여기가 진짜 세상인지 저기가 진짜 세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네. 내가 만들어낸 공간에 있고 싶은 욕심 때문이겠지? 자넨 어떤가?”
“저도 마찬가지죠. 가끔은 다 잊고 도망쳐 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쉴 때, 너무 좋거든요.”
태양과 바다, 모래사장과 잎 넓은 나무 아래 편안한 의자. 아마 풍천교주에게도 나처럼 자신만의 공간이 있을 것이다.
“이곳이 안식처가 되면 낙원이 될 테고, 도피처가 되면 지옥이 되겠지. 이곳도, 바깥세상도.”
풍천교주가 손에 들었던 꽃잎들을 허공에 던져버리며 물었다.
“자, 다시 묻겠네. 자네 무슨 생각인가? 배후에게 뭘 알아내겠다는 건가?”
그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걱정은 고맙지만 환왕에 대해서 말해줄 수는 없었다.
“자넨 풍파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지. 섭혼마존에게 섭혼술을 거는 자들까지 끌어들이다니.”
“누가 들으면 저 때문에 등장한 줄 알겠습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일 아닌가? 그렇다면 자네 때문에 세상에 드러난 자들이라 할 수 있지.”
궤변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이곳에서의 환여는 그저 화원 주인으로 기억되다 사라졌을 테니까.
“그래도 혈교와 관련된 일이니, 이번 일은 내가 처리하겠네.”
그는 나를 보호하려는 거다. 섭혼술로 시작된 이 일을 자신이 책임지고 끝내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그가 고마웠다.
“교주님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뭔가?”
“섭혼술을 익힌 사람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풍천교주는 대체 이게 무슨 질문이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다 하다 이제 내 약점까지 내놓으라는 건가?”
“나쁜 건 얼른 내다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고월아! 봐라, 여기 이 사람이 네가 그렇게 존경하는 소교주다. 내가 말했지? 그냥 소교주가 아니라 악덕 소교주라고.”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풍천교주는 화원 여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질문이란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내게 맡기면 되지. 대체 그 여자에게 뭘 알아낼 것이 있어서 이러는가?”
풍천교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따라 바닥 가득 꽃잎이 깔린 길을 걸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천교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그 순간을 떠올렸다.
“섭혼술을 처음 성공시켰을 때를 잊을 수가 없네. 나뿐만 아니라 섭혼술을 익힌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럴 거야.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이니 얼마나 신기하겠나? 그렇게 몇 번 성공하다 보면 불쑥 두려운 마음이 든다네. 내가 이렇게 남의 마음을 조종하듯, 나보다 강한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조종하면 어쩌지?”
예전에 서대룡이 전대 섭혼마존이 마존 중에서 제일 무섭다고 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강시처럼 조종당하다가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깔끔하게 칼 맞고 죽는 게 낫다고.
“그러다 그 시기가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나는 잠자코 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사람 마음이 참 우습게 보이지. 제아무리 굳건한 사람도 결국 섭혼술에 걸리는 것을 보면서 사람 의지란 게 별거 아니구나. 그러다 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풍천교주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나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우습게 보인다네.”
그랬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나를 향했던 시선이 길 밖 저 멀리 산을 향했다.
“사람이 우습게 보이다 보면 결국 세상까지 우습게 보이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극복? 나는 못 했네.”
풍천교주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고수가 되면 바뀐다고? 그건 마치 노인이 되면 현명해질 거라는 근거 없는 추측과 같네. 현명한 젊은이가 현명한 노인이 되는 거라네.”
만난 이후 처음으로 풍천교주가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라면 달랐겠네. 섭혼술이 아니라 섭혼술 할아비를 익혔어도 다른 사람을 우습게 보진 않겠지. 하나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은 다르다네. 남의 정신을 빼앗는 일에는 반드시 대가를 따르기 마련이지.”
어쩌면 고월을 족쇄로 묶어두었을 때의 자신이 그러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안다. 내겐 극복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이미 극복했음을. 고월의 족쇄를 풀어주었을 때, 그는 사람을 이전과 다르게 보기 시작했으니까.
“그 여인의 속마음 어딘가에는 반드시 오만과 자만과 허무가 있을 거네. 자네 마음을 우습게 여길 거고, 사람을 우습게 여길 거고, 세상을 우습게 여길 거네. 그 마음 어딘가가 시커멓게 뻥 뚫려 있을 거야.”
마음속에 시커멓게 뻥 뚫린 구멍.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회귀 전 삶에서 내 마음속에도 그런 구멍이 있었으니까. 한도 끝도 없이 깊어서,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그런 구멍이.
그때 불쑥 풍천교주가 말했다.
“고맙네.”
그는 그 구멍을 메우기 시작한 것을 내 덕이라 여기고 있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풍천교의 교주전에 있었겠지. 매일 똑같은 신물을 보면서, 혹여라도 그걸 잃어버릴까 봐 고월을 꽁꽁 묶어둔 채 그렇게 살고 있었겠지. 그때의 난 세상 누구보다 편한 삶이라 여겼지만, 결코 편하지 못했던 삶이었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족쇄를 차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네.”
새하얀 꽃잎들이 우수수 우리에게 쏟아져 내렸다.
“어떤가? 도움이 좀 됐나?”
하다 하다 약점까지 퍼준 그에게 어떤 감사를 해야 할까?
그래, 이 한마디면 대답이 될 것이다.
“네, 사부님.”
언제 심각했냐는 듯 풍천교주는 껄껄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들어왔으니 좀 더 있다가 나갈까?”
오늘 실컷 사부가 된 기분 만끽하라고 한참을 더 있다가 나왔다. 안은 봄이었지만 바깥은 겨울이 오고 있었다.
* * *
마군들이 기거하는 마룡원에 들어섰다.
지나가던 마군들이 나를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덩치들이다.
마군들은 예전의 마군들이 아니었다. 눈빛과 움직임에 절도와 기백이 있었다.
바로 이 남자 덕분이다.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소교주님.”
마군주 장호가 늠름한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자리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고, 예전의 장호와 지금의 그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이제 그는 그 누구보다 마군주에 잘 어울렸다.
“장 군주 보고 싶어서 왔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바쁜 사람이 그럴 필요 없네. 나처럼 한가한 사람이 와야지.”
장호가 웃었다. 내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그도 잘 알 테니까. 인사하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나다.
아무튼 그의 얼굴에 난 섬뜩한 상처가 이렇게 반가운 걸 보니, 오랜만에 보긴 보는구나 싶었다.
“요즘 어때?”
“저는 변함 없습니다. 오히려 이 무인이나 서 각주가 바빠져서 술 모임도 못 하고 있습니다.”
“원래 게으름뱅이들이 바쁜 척하지.”
장호가 또 웃었다. 서대룡처럼 그 역시 수하들과 있으면서 웃을 일이 잘 없을 것이다. 두 조직 모두 수장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니까. 그래, 나와 있을 때라도 그렇게 편하게 웃어라.
권마도 그렇고 장호도 그렇고. 평소 무뚝뚝한 이 남자들이 이렇게 웃으면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자넨 내 믿음을 지켰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그랬잖나? 역대 마군주 중에서 최고의 마군주가 될 거라고.”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다. 벌써 그런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장호도 예전 생각이 나는 모양이다.
“저는 아직 제 바람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떤 바람?”
“저를 마군주 자리에 앉혀주셨을 때 제가 말씀드렸었죠. 전 소교주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함께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제 바람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이미 이룬 것 아닌가?”
의아한 빛을 드러내는 그에게 말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니 자넬 찾아왔잖아? 자네 도움이 필요해.”
장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자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그 어떤 칭찬보다 그를 기분 좋게 하는 말일 것이다.
“마군들 수련 중에 사술이나 환술에 대항하는 훈련도 있다고 들었네.”
“네, 사파 고수들을 대비해서 특별수련을 합니다.”
“섭혼술도?”
“선천적으로 정신력이 강한 이들로 구성된 특별조가 있습니다.”
“그들로 나 좀 지원해 주게.”
장호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근래 나와 함께한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도움 될 일이 생긴 것이다.
“언제 필요하십니까?”
“지금 당장.”
잠시 후, 장호를 비롯한 이십여 명의 마군을 거느리고 함께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적연과 호위들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군들이 동원된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위험한 일이 진행된다는 의미였으니까.
* * *
환여는 화원을 떠나지 못했다.
조사가 끝나기 전에 떠나면 전 중원에 용모파기를 뿌려서 추적하겠다는 소교주의 협박 때문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 조사가 끝날지 모르는데 이렇게 붙잡혀 있을 수도 없다.
그때 수레를 끌고 한 남자가 화원으로 들어왔다. 모종과 화분을 배달하러 온 남자였다. 그는 수레에서 화분을 내려놓으며 환여에게 전음을 보냈다.
―보고드립니다. 풍천교주가 마교 본단으로 돌아왔습니다.
순간 환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부재중이던 풍천교주가 하필 이 시점에 돌아왔다고?
‘설마?’
섭혼마존에게 음양역혼술을 펼친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풍천교주라면 음양역혼술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뭔가를 알아차렸기에 그를 불러들인 것이리라.
―아무래도 떠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걱정스러운 전음에도 그녀는 침착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명령을 내렸다.
―혈령(血靈)들을 대기시키고 귀숙(鬼熟)에게 손님이 있을 수도 있다고 전해라.
남자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정중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남자는 다시 수레를 끌고 화원을 떠났다.
환여가 배달온 화분을 들어서 나르려던 바로 그때였다.
처마 밑에 달려 있던 나무 모양의 풍경이 소리를 냈다.
환여는 수레에서 내린 화분을 들고 화원 뒤쪽을 향해 갔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서던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우우우우웅.
그녀는 나직한 울림이 들리는 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주위 벽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고, 징그러운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괴물의 뱃속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외모도 달라져 있었다. 입술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고 두 눈은 무섭게 찢어져 있었다.
바뀐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던 화분의 꽃은 어느새 곤충을 잡아먹는 식인초로 변해 있었다. 그 섬뜩한 기운으로 볼 때 아마 잡아먹는 게 곤충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지나자 작은 공간이 나왔다.
스산한 분위기가 흐르는 그곳에 들어섰을 때, 정면의 벽이 꿈틀거리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찌이이이이익.
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투명한 막을 뚫고 얼굴이 튀어나오려고 애쓰는 그런 기괴한 모습이었다. 자연 목소리도 괴이했다.
“왜 돌아오지 않는지 궁금해하십니다.”
동생이 보낸 전갈이다.
“아직 돌아가지 못한다고 전해라.”
“이유를 궁금해하실 겁니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전해.”
“걱정하고 계…….”
전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마치 남자를 튕겨내듯 벽이 팽팽해졌고, 튀어나와 있던 얼굴이 사라졌다.
그녀가 뒤로 몸을 던지듯 누웠다.
바닥이 꿀렁꿀렁 튀어나오더니 편안한 침상처럼 그녀를 감쌌다.
이곳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고 유일하게 편히 쉬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에 잠겼다. 문제는 소교주였다. 그가 어떤 생각인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자극했다.
찌이이이이익.
다시 아까 그 벽에서 얼굴이 밀고 나왔다. 막을 뚫으려고 애쓰는 얼굴.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다음 순간, 그녀는 흠칫 놀랐다. 동생과 연결을 맡은 수하의 얼굴이 아니었다. 막을 밀어붙이며 밀고 나오는 얼굴이 왠지 낯이 익었다.
푸아악!
막을 찢으며 누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랍게도 그는 검무극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검무극이 씩 웃으며 말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악인이 있었네?”
그 순간 환여가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고 그사이에 꿈을 꾼 것이다. 누군가를 의식했다고 꿈까지 꾼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때 바깥 화원에서 누군가의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장! 주인장 계시오?”
악몽 속 주인공의 목소리였다.
제312회 저 문은 절대 열 수 없다.
화원 마당에서 검무극이 환여를 불렀다.
“주인장 계시오?”
그러자 화원 뒤쪽에서 환여가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소교주님.”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는 원래의 후덕한 화원 주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주인장 계셨구려. 혹시 달아난 줄 알고 용모파기를 그릴 화공을 부르려고 했소.”
환여가 살짝 얼어붙은 모습을 보이자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농담이오. 죄가 없는데 우리 주인장이 달아날 리가 있겠소?”
이제 이곳이 익숙하다는 듯 검무극은 구석에 놓인 화분으로 걸어갔다.
“새 꽃이 들어왔군요.”
“좀 전에 들어왔어요.”
검무극은 쪼그려 앉아 꽃을 구경했다.
소교주의 세 번째 방문.
‘명백히 어떤 의도가 있다.’
조금 전에 꾼 꿈 때문이었을까? 환여는 앞서 방문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꼈다.
풍천교주가 돌아왔다고 수하가 보고했다.
어쩌면 섭혼마존이 음양역혼술에 당한 것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그럼 날 잡아 죽이지, 뭐 때문에 망설이는 거냐?’
당장이라도 저 소교주가 자신을 기습할 수도 있는 상황. 그녀는 언제라도 환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녀의 마음에 감도는 긴장감과는 별개로 검무극은 태연했다.
“그 죽은 무인이 왜 여길 자꾸 왔는지 이해가 되오. 여기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소.”
“좋게 봐주시니 정말 감사해요.”
“그 무인에 대해 아시는 게 있소?”
“아뇨. 통 말이 없으셨던 분이셔서요.”
사우종을 이용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의심받게 될 줄 몰랐다. 섭혼마존과 치정 관계에 있었으니, 당연히 거기에 집중할 거로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일이 꼬였지?’
그 해답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내가 자주 찾아오니 이상하시오?”
“아뇨. 원래도 마가촌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신다고 알고 있었어요. 저기 풍류주점 주인장과는 각별한 사이시잖아요?”
검무극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저 말에는 은연중에 협박이 깔려 있었다. 나는 네가 아끼는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는 조금 전에 지어졌던 차가운 미소 대신 기분 좋은 웃음이 대신하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아시는구려.”
“상대방 신분은 개의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주점 주인과 친하게 지내시는 분이니 화원 주인과도 친할 수 있겠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로를 대하는 그들의 행동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혹시 가족이 있소?”
쌍둥이 동생이 있어요, 라고 해주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뇨, 없어요.”
“혼자서 외로우시겠소.”
“꽃과 나무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살고 있답니다.”
오늘 대화하면서 검무극은 확실히 느꼈다. 이 빈틈없는 여인의 입에서 환왕이 언급되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겨울이 지나 봄꽃의 꽃망울이 터질 때가 되어도 쉽지 않을 것임을. 하지만 이 여인, 오랫동안 공을 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하다.
“주인장에게 말해줄 소식이 있소.”
평온한 상황에서 안 된다면, 그녀를 궁지로 몰아붙여야 할 것이다.
“어떤 소식이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소. 뭐부터 듣겠소?”
“나쁜 소식부터 듣죠.”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풍천교주가 돌아왔소. 섭혼마존이 관련된 일이라 풍천교주가 직접 이번 사건을 조사할 거요. 잠시 후에 풍천교주가 마군들을 이끌고 직접 와서 화원도 뒤질 거요.”
검무극은 숨기지 않고 정보를 노출했기에 환여는 오히려 헷갈렸다. 자신을 진짜 의심했다면 풍천교주와 함께 오면 되었을 텐데.
“풍천교주는 자신했소. 자신이 직접 와서 살피면 반드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화원은 걱정 없었다. 이곳 화원에는 환술이나 섭혼술과 관련해서 그 어떤 증거가 될만한 것도 없었으니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아낼 수 있는 증거도 없었고.
문제는 자신이었다.
과연 풍천교주가 자신을 직접 본다면? 그라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 소교주에겐 숨길 수 있었지만 풍천교주는 자신이 없다.
‘풍천교주와 맞부딪치기 전에 떠나야 해.’
아까 풍천교주가 돌아왔다는 수하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당장 떠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소교주 때문이었다.
자신의 용모파기를 공개하고 추격대를 보내지 않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먼저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정말 자신을 믿기 때문이라면? 여전히 의심스럽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아직도 그대가 무고하다고 생각하오. 꽃을 좋아하는 악인은 없는 법이니까.”
그래, 밑져야 본전이다. 어차피 소교주에게서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으니까.
“좋은 소식은 뭐죠?”
“나와 식사합시다. 내가 사겠소.”
생각지 못한 제안에 환여는 놀랐다. 왜 자신과 밥을 먹으려는 것일까? 음식에 독을 타려고? 자신을 제압하려면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을 텐데.
정말이지 이 사람은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답이 내려지지 않으니까 자꾸 휘말리게 된다.
“더 나쁜 소식 아닌가요? 소교주님처럼 귀한 분과 밥을 먹다간 체할 거예요.”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역시. 우리 주인장이 왠지 유쾌한 분일 것 같았소.”
검무극의 너스레에도 환여는 진지했다.
“소교주님은 편하게 저를 대하시지만 저는 너무 힘들답니다. 소교주님을 뵌 것만으로도 힘든데 풍천교주 같은 분을 뵈면 저는 쓰러지고 말 거예요. 정말 제가 무고하다고 믿으신다면 잠시 화원 문을 닫고 고향에 다녀올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용모파기가 공개되고 추격대가 자신을 쫓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붙잡힐 리가 있겠는가?
문제는 이 일을 맡긴 사람이 자신을 무능하게 여길 거라는 점이다.
정체가 노출된 채 마교에 쫓기게 된다면 앞으로 주된 역할은 동생이 맡게 될 거고, 자신은 그를 보조하는 역할이 될 것이다.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녀는 그림자가 아니라 빛이 되고 싶었다.
“저를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물론이오.”
“그럼 부탁드릴게요.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
“풍천교주만 만나면 보내주겠소. 내가 옆에 있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환여는 빤히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귀하신 분께서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의심하지 않소.”
이제 검무극은 상황을 다음 국면으로 넘겼다.
“의심은 긴가민가한 상태에서 하는 거지 당신이 확실한 흉수인데 의심을 왜 하겠소?”
“!”
환여는 깜짝 놀랐다. 검무극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악인이었다니.”
공교롭게도 검무극은 꿈속에서 했던 말을 비슷하게 했다.
환여는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이것이었다.
“언제부터 알았지?”
환여의 기도가 달라졌다. 섭혼마존에게 섭혼술을 걸고, 마교 소교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본모습이 나왔다.
“처음부터.”
여인에게 꽃을 사주러 왔을 때부터 알았다는 의미.
환여가 탄식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알아내려고 한 거였구나.”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검무극의 대답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당신도 모르잖아?”
순간 환여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당신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잖아? 그가 어떤 목적인지 모르잖아? 나를 죽이려는 건지,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는 건지, 소모품인 당신에게는 말해주지 않았겠지.”
환여의 기도가 거칠어졌다. 바뀐 기도에 담긴 분노는 검무극의 말을 시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소교주란 지위가 당신 목숨을 지켜줄 방패가 되었겠지. 그 방패가 내게도 통할까?”
“그건 나도 모르지. 당신이 든 창이 어떤 창인지 모르니까.”
바로 그때였다.
화원 담장 너머 저 멀리 일단의 무인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선 사람은 풍천교주였고, 뒤따르는 이들은 마군들이었다. 덩치가 원체 크니 멀리서도 잘 보였다.
“화원을 수색할 때, 우린 식사나 합시다.”
환여가 차갑게 제안을 받았다.
“그 밥 내가 사지.”
그녀가 손뼉을 치는 순간!
주위가 바뀌었다.
* * *
환술 속의 공간.
눈앞에 술과 음식을 파는 반점이 있었다.
귀혼반점(鬼魂飯店).
그 반점 앞에 서 있는 환여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눈이 찢어지고 입술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환술 속의 모습과 평소의 모습이 극과 극인 그녀다.
“이런 얼굴인 줄 알았으면 같이 밥 먹자고 안 했을 텐데.”
내 말에 환여는 인상을 찌푸리며 차갑게 조소했다.
그녀가 먼저 걸어가자 귀혼반점의 문이 저절로 활짝 열렸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반점 안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웃고 떠들던 장내가 일제히 조용해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들의 초점 없는 텅 빈 눈동자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귀혼(鬼魂)들이었다.
귀혼들로 가득 찬 그곳은 강력한 귀기가 반점 안을 채우고 있었다. 천마호신공이 스스로 발동하며 나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환여가 앉은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는 눈빛부터 여유로웠다. 적어도 이곳 귀혼반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 옆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귀혼반점의 주인이신 귀숙이시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이 노인 역시 환술의 절대고수라는 것을.
회귀 전 일을 떠올려보면 환왕과 환여는 다른 십이지왕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하를 거느렸었다. 이 귀숙이란 노인도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귀숙, 오늘 함께 오신 분은 신교의 귀한 분이시니 특별히 잘 부탁드려요.”
귀숙은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마교에 귀한 신분이 있을 리가! 다 하찮은 것들이다.”
그의 목소리에 강력한 귀기가 느껴졌다. 환여가 환술 중에서도 섭혼술에 능통하다면 노인은 귀술에 특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귀숙의 등에 소리쳤다.
“이보시오, 주인장. 본교도 많이 바뀌었으니, 선입견을 버리시오!”
내가 전혀 겁을 먹지 않는 모습에 환여는 감탄했다.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군. 네 나이에 이런 기도와 여유는 흉내조차 내기 어렵지.”
“우리 마존들하고 얽히다 보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거요. 어휴, 그 사람들 처음에 어땠는지 아무도 몰라. 내 시커멓게 탄 속을 누가 알까?”
환여의 길게 찢어진 눈에서 이제 대놓고 섭혼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섭혼술을 이용해서 내 속마음을 읽으려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천마호신공이 발동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사술은 통하지 않았다.
“내 의도를 파악하려 한 것도 아니면 뭐 때문에 나를 지켜본 건가?”
“그야 당연히 궁금해서요. 배후가 누구기에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왜 알아내지 않고 포기한 건가? 풍천교주를 동원하지 않았다면 좀 더 나에 대해 알 수 있었을 텐데.”
“당신은 쉽게 대답하지 않을 사람이고.”
잘 봤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당신에게 내 귀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소.”
다 포기한 듯 말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마지막 승부수가 통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인질로 잡아 환왕을 끌어들일 것이다. 그녀를 고문해서라도 알아낼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낼 것이다. 이 일은 풍천교주의 생사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정 안 되면 복수의 대상을 내게 돌려서 환왕을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아낌없이 나에게 모든 것을 준 풍천교주에 대한 내 보답이다.
그때 점소이가 술부터 먼저 가져왔다. 점소이 역시 두 눈이 공허한 귀혼이었다.
나는 술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거 죽은 자들이나 먹는 술 아니오?”
죽은 자란 말이 나오자 시끄럽던 주위가 조용해지며 모두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텅 빈 눈동자에 담긴 귀기. 아마 천마호신공이 아니었다면 공포에 휩싸이며 온몸이 떨렸을 것이다.
옆에 앉아 있던 귀혼과 눈이 마주쳤다. 그놈에게서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감히 달려들지 못했다.
환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소교주, 그대가 믿는 것이 구화마공이겠지. 맞아, 구화마공을 익힌 그대를 환술로는 죽일 수 없지.”
이것이 구화마공의 위엄이다. 어떤 사술과 환술도 통하지 않는 절대마공의 위엄.
“알면서 왜 데려왔소?”
“죽일 순 없어도 가둘 순 있으니까.”
혈안정수와 신안술로 주위를 살폈다. 푸르스름한 빛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예전 섭혼마존과의 싸움에서처럼, 파훼법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을 죽이면 이곳도 사라지겠지.”
죽음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이건 장담하지. 이곳에서 나를 죽이면 소교주 너는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영원히 저 귀혼들과 함께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하지. 내가 자결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죽는 순간 파훼법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일제히 귀혼들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공허한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평생 우리와 함께하자.
우리가 들어온 문을 쳐다보았다. 저 문으로 나가면 되지 않느냐는 눈빛에 환여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저 문은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다.”
“풍천교주가 나를 구하러 오겠지.”
“저 문밖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
여유를 부리며 환여는 호언장담했다.
“저 문은 풍천교주가 아니라 풍천교주 할아버지가 와도 못 연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환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뿐만 아니라 주방 안에서 고개를 내민 귀숙의 표정도 심각했다. 귀혼들도 일제히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바로 풍천교주였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귀혼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발목에는 귀혼의 잘린 손이 붙어 있었다.
“누가 그래? 내가 못 연다고?”
열린 문 너머로 바깥이 보였다. 과연 환여의 말처럼 들어올 때와 풍경이 달랐다. 저 멀리 불길이 치솟고 피의 비가 내리는 지옥,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귀혼들의 시체가 저 멀리 지평선까지 끝없이 널려 있었다.
풍천교주는 저 귀혼들을 뚫고 나를 찾으러 온 것이다.
“우리 악덕 소교주에게 돌려받아야 할 것이 좀 많아야 말이지.”
제313회 나 아니면 어쩌려고?
평소 너스레를 떨던 풍천교주와 지금의 교주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반점에 있던 귀혼들의 반응이 검무극이 등장했을 때와 달랐다. 검무극에게는 호기심과 더불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풍천교주에게는 감히 그러지 못했다. 그들도 열린 문 너머 펼쳐진 지옥도를 본 것이다. 그곳에 널린 귀혼들의 시체를.
풍천교주는 천천히 귀혼들 사이를 지나 검무극과 환여의 근처까지 걸어왔다.
그의 등장에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던 귀숙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모두가 나타나도 되지만 나타나선 안 될 단 한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그 반응을 보며 검무극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보다 더 풍천교주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 이들 두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두 사람이 있는 자리까지 걸어온 풍천교주가 환여를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너냐? 내 제자 건드린 년이.”
순간 환여의 표정이 꿈틀했다. 그녀가 어디 이런 욕설을 들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만약 들었다면 참았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감히 ‘그 한심한 년이 제자였나?’라고 되묻지 못했다.
검무극이 풍천교주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환술 속에서 풍천교주의 존재가 이렇게나 듬직할 줄이야.
“환술 속에서는 교주님이 천마십니다.”
풍천교주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다.
“나 아니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끌려왔나?”
“교주님 믿고 있었지요.”
너스레를 주고받으며 풍천교주가 눈빛으로 물었다. 알아내야 할 것을 알아냈냐고. 검무극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자신이 한번 알아내 보겠다는 듯 풍천교주가 환여에게 물었다.
“음양역혼술은 오래전에 실전된 혈교의 섭혼술인데, 어떻게 익힌 거냐?”
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자신을 몰랐지만, 그녀는 풍천교주를 잘 알았다. 환술을 익히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은 천마도 아니고 무림맹주도 아니고 바로 풍천교주였으니까.
“그 유명한 당신이 마교의 개가 되었군요.”
검무극은 그녀의 도발에 풍천교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고월의 도발에 만날 버럭 대던 풍천교주였는데.
그는 친구를 대하는 마음과 적을 대하는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똑똑히 보여주었다.
“몰래 뒤에서 음모나 꾸미는 인간들보다 개가 백배 낫지 않나?”
바로 그때 뒤쪽에 있던 귀혼이 달려들어 기습했다.
놈이 풍천교주의 목을 깨물려던 그 순간.
풍천교주가 재빨리 돌아서서 귀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디서 못 된 걸 배워서. 뒤에서 무는 것이 딱 제 주인 닮았구나!”
풍천교주가 귀혼을 뺨을 때렸다.
장난스럽게 찰싹 때린 것 같았지만, 풍천교주의 손놀림에는 극의에 다다른 환술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영혼 없는 귀혼의 눈동자에서 빛이 한차례 나는가 싶더니 이내 빛이 사라졌다.
털썩.
바닥에 쓰러진 귀혼은 시체가 되어 있었다.
다시 앞서 죽은 귀혼과 같은 자리에 있던 귀혼들이 달려들었다.
풍천교주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상대했다. 거칠게 달려들던 그들을 가볍게 제압한 후, 그들의 얼굴을 박치기를 시켰다.
퍼억!
이번 역시 두 귀혼의 눈이 빛나더니 완전히 꺼졌다. 부딪친 충격으로 죽는 것이 아니었다. 풍천교주의 손에 담긴 현기 때문이었다.
귀혼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괴성을 내질렀다.
키히히히히히히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귀곡성이었다.
검무극의 호신강기가 발동하여 영혼을 흔드는 소리를 제어했다.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시끄럽다, 이놈들아!”
마치, 사자후(獅子吼)를 내지르는 것처럼 쩌렁쩌렁 울려 퍼진 그의 외침에 귀곡성이 사라졌다.
귀혼들이 일제히 겁을 먹던 그 순간.
귀숙이 나직이 구결을 외웠다. 그러자 귀혼들의 몸에서 일제히 귀기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환여 역시 훌쩍 뒤로 물러나더니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인이 내공을 증폭시키는 약을 먹은 것처럼 귀혼의 눈에서 광기가 흘렀다. 귀숙으로 인해 두 배로 강해진 그들이 다시 두 배 더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 싸움을 가장 간단히 끝내는 방법은 저들 두 사람을 없애는 것이겠지만, 환여는 절대 죽여선 안 되었다. 대법으로 청선에게 걸린 음양역혼술을 없애줘야 했으니까. 또한 환왕에 대해 알아낼 마지막 기회기도 했다.
귀기와 살기를 내뿜으며 사방에 있던 귀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은 급소를 노리고 쌍장을 휘둘렀다. 숨 막히는 귀기를 발산하며 휘두르고 할퀴고 물고 뜯고. 그야말로 그들은 온몸이 무기였다.
풍천교주가 앞장서서 그들을 상대했다.
그는 문밖의 그 수많은 귀혼을 어떻게 뚫고 왔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풍천교주는 생각보다 움직임이 빨랐다. 환술을 익혀 무공은 약할 거라는 추측은 그야말로 선입견이었다.
풍천교주가 귀혼들 사이를 누볐다.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보법을 사용하며 그들의 이마와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건드리듯 쳤다.
가벼워 보이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수법이었다. 그 손짓에 미쳐 날뛰던 귀혼들이 짚단처럼 픽픽 쓰러졌다.
환여와 귀숙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들의 구결이 더욱 빠르게 읊어졌고, 귀혼들은 더욱 강력해졌다.
장내를 가득 덮은 귀기에 숨이 막혀왔다. 천마호신공이 더욱 강력하게 발동하며 내 몸을 지켰다. 천마호신공이 아니었다면, 이 기운을 버티는 게 쉽지 않았으리라.
반면, 풍천교주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들을 상대했다.
귀혼을 방패로 삼아 공격을 막기도 했고, 인형처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기도 했다. 뺨을 얻어맞거나 뒤통수를 얻어맞거나, 배를 얻어맞을 때마다 그것들은 시체가 되었다.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환여와 귀숙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결국, 구결을 외는 것을 포기했다. 이들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남은 귀혼들은 더욱 빨리 시체가 되었다.
퍼어어억!
풍천교주는 마지막 귀혼에겐 제대로 일격을 날렸다. 온몸이 박살 난 귀혼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순식간에 내부에 있던 귀혼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원래부터 영혼이 없었으니 시체라 하는 것도 어색한 말이기는 했지만.
귀숙과 환여가 마주 보았다. 귀혼으로 풍천교주를 죽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부상 하나 없이 모든 귀혼을 다 처리할 줄은 몰랐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교주께서 이렇게 날쌔신 줄은 몰랐습니다.”
“고월이 잔소리 때문에 살을 뺐지.”
화공인 줄 몰랐던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악사인 줄 몰랐는데 악기를 연주할 때처럼, 실력을 드러낸 풍천교주는 멋있었다.
지금 저 눈빛만 봐도 그렇다. 평소라면 온갖 너스레를 다 떨었을 상황에서도 그는 깊어진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싸움터에서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라는 듯 귀숙이 앞으로 나섰다.
그를 차분히 응시하며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귀기가 짙네. 조심하시게.”
그는 귀숙을 얕잡아 보지 않았다.
귀숙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고 풍천교주도 마중하듯 걸어 나갔다.
“당신은 새외 무림의 수치야.”
귀숙 역시 풍천교주가 검무극과 손을 잡은 것을 찔러왔다. 그것이 가장 큰 약점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풍천교주가 검무극과 어떤 인간관계를 맺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치라 치고. 그러는 자네는 뭔가? 새외 무림의 자랑인가?”
고월과 검무극을 얻었기에 수치라는 소릴 듣더라도 전혀 화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방방 뛰었을 말이었는데.
“누군가를 욕하려면 자신이 누군지는 밝히고 해야겠지? 너는 누구신가?”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귀숙은 대답 대신 주방에 있던 수하들을 불러냈다.
숙수 복장을 한 자들이 우르르 걸어 나왔다. 저 주방에 저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숫자는 모두 아홉 명.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모두 주방에서 쓰는 네모난 칼이었다. 그들의 눈과 칼에서 붉은 귀기가 흘렀다.
그들 역시 산 자들이 아니었는데 앞서 달려들었던 귀혼들보다 훨씬 강력한 귀기가 흘러넘쳤다. 귀혼들이 무질서했다면 이놈들은 잘 훈련된 무인이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나섰다.
“저들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이 스쳤다. 아무리 검무극이라도 이곳은 환술 속 세상이었으니까.
“다음이 더 강할 것 같아서, 약한 놈들 먼저 상대하려고요.”
검무극의 여유에 풍천교주는 걱정을 털었다. 그래, 검무극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는가?
반면 숙수 놈들의 기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환술에서만 존재하는 자들이지만 사람 말을 알아듣고 감정까지 지닌 놈들이었다.
놈들이 검무극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익! 쉭! 쉬이익!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든 칼이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의 공격은 빠르면서도 변화무쌍했다. 거기에 완벽한 합격술까지 구사했다. 순식간에 수십 가닥의 검선이 허공을 수놓았다.
챙챙챙챙챙챙챙!
환여와 귀숙은 이번에도 구결을 외우며 귀기로 검무극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기도를 발출하며 그들의 기운을 막았다.
검무극과 숙수들이 싸우던 그 경계선에서 두 개의 기운이 충돌했다. 이대 일의 기 싸움이었지만 풍천교주는 밀리지 않았다.
서걱!
검무극의 흑마검이 가장 선두에서 공격해온 숙수의 가슴을 베었다. 공격은 몸을 양단할 정도로 깊게 들어갔지만,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두 번째 놈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관통당했는데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떤 치명상도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귀혼들과는 달리 정확히 파훼법을 찾아서 찌르지 않으면 죽일 수 없는 놈들이었다.
풍천교주의 내공에 밀리면서도 환여와 귀숙의 표정엔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날고 기는 소교주라도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라 확신했다.
검무극이 눈에 혈안정수를 넣지 않았다면, 또 신안술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 이 싸움은 그들의 예상대로 피를 말리는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혈안정수와 신안술을 발휘해서 그들을 집중해서 쳐다보자 몸의 한 부위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떤 자는 팔이었고, 또 어떤 자는 왼쪽 무릎이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찔러야 할 곳이 어딘지를 정확히 아는데 어찌 그들이 검무극의 상대가 되겠는가?
아껴두었던 암영보와 점멸보, 명왕보가 연속해서 발휘되었다. 풍신사보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정교해졌다. 검무극 스스로 느낄 정도였으니, 지켜보던 이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은 시공간을 초월한 사람처럼 움직였다.
정확히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파훼법을 향해 검을 찔러 넣자 목이 떨어져도 덤벼들 것 같았던 그들이 그대로 절명하며 쓰러졌다.
환여와 귀숙의 놀람이 이어질 때마다 놈들이 쓰러졌다.
중간에 귀숙이 끼어들려 했지만 적절한 순간을 찾지 못했다. 검무극은 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자칫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함께 저 검에 죽을 것이 확실했다.
그렇게 아홉 숙수는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귀숙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파훼법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어떻게 그걸 볼 수 있었는지 놀랐다.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교주님 덕분입니다.”
저들 두 사람의 귀기를 막아주지 않았다면 몸이 훨씬 더 무거웠을 것이다. 아무리 파훼법이 보였더라도 쉽지 않았을 싸움이 되었을 터. 이번 싸움 역시 풍천교주의 공이 컸다.
그 고마움의 표시를 귀숙은 오해했다.
“역시 당신은 비겁한 인간이군.”
풍천교주가 파훼법을 알려줬다고 여긴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기도 했다. 혈안정수도 풍천교의 신물이었으니까.
풍천교주는 딱히 변명하지 않았다.
“심장이 찔려도 죽지 않는 것을 내놓고서 누구더러 비겁 운운이냐?”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로를 많이 걱정하고 있었지만, 또 한 편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제대로 싸워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번에는 환여가 나섰다.
“이번에는 쉽지 않을 거다.”
천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한 방울, 한 방울이 바닥에서 점차 커져 나가더니 이내 끔찍한 괴물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역겹고 두려운 존재들이 연속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덩치는 마군들보다 더 컸다. 그야말로 수십 개의 커다란 괴물들이 반점 내를 가득 채웠다.
“어떻게 파훼법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이 혈령들은 다를 거다. 혈령은 이 공간이 파훼되지 않는 한 절대 죽일 수 없다.”
과연 혈령이라 불린 존재들에게는 푸르스름한 빛이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제가 다음이 더 셀 것 같다고 했죠.”
“저 다음은 더 끔찍할 텐데?”
풍천교주는 검무극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내가 걱정되나?”
분명 저들에게 남은 수가 있을 터, 더 강한 적을 네가 맡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말이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누구보다 풍천교주를 믿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위험한 적은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것이 검무극의 마음이었다.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당신이지만, 데리고 나가는 것은 내가 될 거요.
손가락에 긁힌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그를 데리고 나갈 것이다.
“그럴 리가요? 다음도 교주님이 맡아주십시오!”
이렇게 답해야만 다음 말이 나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다.
“어림없네! 다음은 자네가 맡게.”
풍천교주가 검무극의 앞을 막아섰다.
검무극은 그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욕을 하며 너스레를 떨던 풍천교주의 등도 그의 등이고, 저 무시무시한 혈령들 앞에서도 한 치의 두려움도 없는 이 등도 그의 등이다. 그의 등이 주는 느낌은 다른 이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쿵! 쿵! 쿵!
바닥을 진동하며 혈령들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섰다.
풍천교주라도 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검무극은 내심 긴장하며 언제라도 싸움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풍천교주가 손을 내밀자 허공에 먹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그 작은 점이 순식간에 쑥 커지더니, 허공에 커다란 검은 구멍이 생겼다.
“위험해!”
본능적인 위기감에 귀숙이 소리치던 그 순간!
휘류류류류류!
검은 구멍이 회오리치며 혈령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속으로 혈령들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버틸 수 있는 구멍이 아니었다. 대상이 무엇이든 반드시 빨아들이는 구멍이었다.
그 크고 무서운 혈령들이 무기력하게 휘리릭 빨려 들어가는 장면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혈령들을 모두 빨아들이자 검은 원은 순식간에 원래 크기의 점으로 작아지더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사라졌다.
애초에 이곳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았다.
이 압도적인 환술에 환여와 귀숙은 물론이고 검무극조차 놀란 마음으로 멍하게 서 있던 그때.
풍천교주의 입에서 환술의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 담담히 흘러나왔다.
“너희가 열었지만 여긴 내 세상이다.”
제314회 너는 어떤 인생을 산 거냐?
검무극은 오늘 풍천교주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아니, 그의 세상을 보았다. 환술 속 그의 세상을.
지난번 시공이환술 속에서 풍천교주가 말했다.
―여기 있다 보면 여기가 진짜 세상인지 저기가 진짜 세상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네. 내가 만들어낸 공간에 있고 싶은 욕심 때문이겠지?
이제야 그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모래사장에 누워 있으면서 느끼는 더 있고 싶다는 열망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강력한 존재가 되는데 어찌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을까?
“교주님.”
“왜 그러나?”
“혹시 제가 잘못한 것들이 있더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그럼 용서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왜? 두렵나? 저런 곳에 빨려 들어가서 사라져 버릴까 봐?”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상상하기 싫은 사람은 나라네. 자네가 저걸 찢고 나오는 모습을 생각하면.”
“과대평가십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욕을 해주십시오.”
검무극과 풍천교주는 정면에 서 있는 환여와 귀숙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스레를 떠는 이 순간에도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무인으로서 진심 어린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멋지십니다, 교주님.”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겠지만, 그 상대가 검무극이었기에 더 기뻤다.
“고맙네.”
검무극과 풍천교주는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적을 앞에 둔 두 사람은 평소보다 더 깊은 교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환여와 귀숙은 압도적인 풍천교주의 환술 앞에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그들에게는 발휘할 수가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제 차례입니다.”
검무극이 나서자 이번에는 환여가 나섰다.
귀숙이 죽은 자를 부리는 귀술 계열의 고수라면 환여는 섭혼술의 고수.
“소교주, 당신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으려 했어.”
조용히 마교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검무극을 목표로 할 걸 그랬다.
“마존을 건든 게 나를 건든 것과 마찬가지다.”
검무극이 차갑게 대답하던 그 순간, 환여의 찢어진 두 눈에서 검붉은 빛이 쏟아져나왔다.
쏴아아아아아아.
빛은 순식간에 검무극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눈을 뜬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섭혼술을 펼치고 있을 때 함부로 건드리면 두 사람 모두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풍천교주도 귀숙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당신이라면 그녀가 소교주에게 섭혼술을 사용할 것을 알았을 텐데?”
“알았지.”
“왜 막지 않았나? 소교주가 섭혼술에 당했는데 걱정되지 않나?”
귀숙의 말에 풍천교주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천마신교의 여덟 마존이 있었다 해도 다들 똑같은 말을 했을 거야.”
풍천교주는 가만히 검무극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당신은 안 겪어봐서 몰라.”
* * *
환여가 선택한 섭혼술은 스스로 자결하게 하거나 풍천교주를 죽이게 하는 그런 공격적인 섭혼술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런 수법은 통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섭혼술은 바로 이것이었다.
심마제혼술(心魔制魂術).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섭혼술이었다.
마음속 심마를 통해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는 비술이었다. 때론 섭혼술에 걸리는 상대조차 알지 못하는 잠재의식까지 파고들 수 있는 궁극의 비술이었다.
이 무림에 오직 자신만이 펼칠 수 있는 실전된 혈교의 환술이기에 만약 자신이 죽게 되면 이 환술 역시 실전될 것이다.
휘이이잉.
환여는 지금 눈보라가 몰아치는 눈밭에 서 있었다.
‘여기가 그의 마음이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검무극이 남긴 발자국만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심마제혼술을 걸었을 때, 상대가 보여주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 달랐다. 누군가는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했고, 어떤 이는 수치스러워서 평생의 비밀로 삼았던 내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가장 후회하는 순간을, 또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상대의 기쁨을, 상대의 아픔을, 상대의 비밀을 심마로 만들어서 그를 뒤흔들 테니까.
그 기쁨을 갑자기 잃어버릴지도 모를 공포감이 증폭되고 또 증폭되어서 미쳐 버릴 정도까지 밀어버릴 것이다. 그 아픔을 키우고 또 키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할 것이다. 비밀이 밝혀질 거라는 두려움에 한숨도 잠들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심마제혼술이었다.
심마제혼술은 자주 쓸 수 없었다. 한 번 쓸 때마다 자신의 선천진기를 막대하게 소모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실로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환여는 이 발자국의 끝에서 무엇을 발견할지 궁금했다. 또 검무극이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도. 그의 비밀은 무엇일까?
눈에 난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무리 걸어도 검무극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보통 조금 지나면 뭔가를 보여주기 마련인데.
환여는 걸음을 빨리했다. 눈보라가 점점 더 세차게 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걸어도 눈밭에 발자국만 계속될 뿐,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 홀로 선 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검무극의 인생이라는 것을.
눈보라를 헤치며 끝없이 먼 길을 걸었던 외로운 인생이었음을.
그가 겪었던 감정이 눈보라를 몰고 온 바람에 전해져 왔다. 그 고달픔과 처절함과 쓸쓸함이. 이 묵묵한 발자국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었다.
‘너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산 거냐?’
더는 선천진기를 소모할 수 없기에 그녀는 심마제혼술을 중단했다.
* * *
환여와 검무극이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너 뭐야? 당신 마교 소교주잖아? 새파랗게 젊잖아? 그런데 그게 뭐야?”
풍천교주도, 귀숙도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궁금했다.
“세상 마인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데…… 왜 그렇게 외로운 거지?”
검무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환여가 들여다본 검무극의 마음은 더없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만날 자신을 놀리고 너스레를 떨기 바쁜 소교주인데 말이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환여만이 말하고 있었다.
“모든 마존을 네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는데, 대체 너는 왜 혼자인 거지?”
듣고만 있던 풍천교주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마음속에도 시커먼 구멍이 있나 보군.”
풍천교주가 일전에 말한 바로 그 구멍이었다. 환술을 익힌 자들의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그것.
“저라고 왜 없겠습니까?”
“자네 구멍은 우리 것과는 다를 거야. 한 번쯤은 횃불을 들고 들어가 보고 싶은 그런 구멍이겠지.”
“실망하실 겁니다.”
“놀리려고 들어가는 거니까. 괜찮아.”
풍천교주에게 옅게 웃어준 후, 검무극은 환여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도 당신을 봤어. 당신 마음에 있는 그 시커먼 구멍, 나도 봤지.”
순간 환여는 흠칫 놀랐다. 무슨 뜻이지? 의아해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 동생을 봤어.”
순간 환여는 얼어붙었다. 검무극이 절대 알 리 없는 존재가 언급된 것이다. 너무 놀란 나머지 환여는 귀숙을 쳐다보았다. 혹시 귀숙이 그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정말 내 마음을 봤다고? 어떻게?’
사실 검무극은 그녀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동생에 대해 알았기에 본 것처럼 말한 것이다. 동생에 대해 언급되었으니, 이제 뭔가 단서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당신과 똑 닮은 동생이더군.”
그녀는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정말 봤구나.’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 사람이 풍천교주도 아닌 검무극이라니? 구화마공이 정말 이 정도로 대단한 무공이었나?
“당신, 동생을 미워하고 있지?”
환여의 눈동자가 떨렸다.
회귀 전 삶에서 환여는 환왕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그 명예를 차지한 사람은 환왕이었다. 쌍둥이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진심으로 동생에게 헌신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녀는 어둠이 되었고, 환왕은 빛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반응만으로도 그 애증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교주 너 때문이라도 더 미워하게 생겼군.”
이번 일이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까. 운이 좋아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천마신교 일을 망쳐 버린 벌로 중요한 일은 동생 차지가 될 것이다.
그때 귀숙이 그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단 이곳을 나가시게.
―귀숙 혼자서는 저들을 상대할 수 없어요.
귀숙은 그녀가 있다고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라도 살려야 한다.
―나가면 동생에게 먼저 도움부터 청하시게.
환여가 뭐라 대답하려는 순간, 그녀의 신형이 순식간에 휙 사라졌다.
환여가 자발적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귀숙이 강제로 이곳에서 내보낸 것이다.
그녀가 사라졌음에도 검무극과 풍천교주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이곳의 파훼법을 아십니까?”
검무극의 차분한 물음에 풍천교주가 대답했다.
“뭔 대단한 파훼법이 있으려고? 숙수 죽고 주인장 죽으면 반점 문 닫는 거지.”
귀숙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풍천교주는 파훼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숙수들과 자신이 죽으면 이곳은 사라지게 된다.
평생 처음 경험하는 참패였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 상대가 풍천교주라면 죽음이 헛되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 나 혼자 가진 않을 거다.”
귀숙의 기도가 바뀌었다. 살의와 악의가 피어오르며 그의 외모도 바뀌었다. 눈과 귀가 앞서 환여가 그랬던 것처럼 길게 찢어졌다. 그의 몸 주위로 시퍼런 귀화(鬼火)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귀술만 두고 봤을 때, 귀숙처럼 강한 고수는 쉽게 볼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검무극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다행히 교주님이 싸울 차례군요.”
“자네 차례 아닌가?”
“저는 방금 섭혼술을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일방적으로 당한 거고. 싸운 건 아니잖나?”
“마음속에서 굉장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귀숙이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일장을 내지르는 귀숙의 손바닥 역시 귀화에 불타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일장을 받아쳤다.
콰앙!
장력이 충돌하자 굉음과 함께 두 사람 모두 뒤로 주르륵 밀렸다.
귀숙이 훨씬 더 많이 밀렸다. 풍천교주가 자신의 손에 옮겨붙은 귀화를 훅하고 입으로 불었다. 타오르던 귀화가 꺼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귀숙은 절망했다. 절대 꺼지지 않는 귀화가 꺼진다는 것은 그냥 싸워서는 결코 풍천교주를 이길 수 없다는 의미였다. 어떤 발버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명백한 실력 차가 느껴졌다.
‘결국 그 수뿐이구나.’
귀숙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귀화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그를 불태울 것만 같았다.
그의 피부에서 핏방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핏방울들이 튀어나와 주위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평범한 핏방울이 아니었다. 한 맺힌 귀기가 서린 그야말로 귀숙이라는 환술 고수의 마지막 정수가 담긴 핏방울이었다. 선천진기까지 모두 쏟아내고 자신도 함께 죽는 동귀어진의 수법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호신강기는 반드시 뚫을 것이다. 교주, 선택하시오. 소교주 앞에 설지, 소교주 뒤에 설지.”
풍천교주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당당히 검무극 앞에 서려 했다.
“여긴 내 세상이니까.”
그렇다고 풍천교주를 앞에 세울 검무극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마지막 한 수를 발휘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 차례라서요.”
구화마공 제이식 대멸식.
그의 앞에 출현한 악귀가 네 개로 분열되었다.
쾅!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핏방울들이 발출되었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수천 개의 핏방울을 피할 공간은 없었다.
그와 동시에 네 악귀가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며 앞을 향해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악귀들을 향해 핏방울들이 날아들었다.
팍팍팍팍팍팍팍!
호신강기까지 뚫는다고 자신했지만, 핏방울은 악귀들을 뚫지 못했다. 네 악귀는 검무극과 풍천교주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귀숙을 향해 돌진했다.
콰콰콰콰콱!
방안은 온통 피로 물들었지만 대멸식이 지나간 자리만큼은 깨끗했다.
악귀들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는 한때 귀숙이었던 핏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교주는 앞서 검무극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되돌려주었다.
“혹시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좀 봐주게.”
* * *
환여는 자신이 만든 공간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앞서 악몽을 꿨던 바로 그 장소였다. 어쩌면 이 순간이 더 악몽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던 천장에서 종이 내려왔다.
땡땡땡!
다급히 종을 쳤다.
동생 쪽에 연락을 받으라고 알리는 것이다. 상대에게서 연락이 오면 화원의 풍경에서 소리가 나듯, 반대쪽에도 신호가 가고 있을 거다.
종을 친 후에 벽 앞에 가서 기다렸다.
‘서둘러! 어서!’
그렇게 연락을 맡은 자가 오기를 기다리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홱 돌아섰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무극과 풍천교주가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공간이 뚫린 것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이미 귀숙마저 당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을 억지로 내보냈을 때 동귀어진의 수법을 쓸 거라 예상했다. 그 수법을 썼는데도 두 사람이 이렇게 멀쩡하다니.
그러자 풍천교주의 시선이 그녀 뒤쪽 벽을 향했다. 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만리전벽(萬里傳壁)인가? 저걸 만들려면 수천 명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했을 텐데?”
정말이지 환술에 있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풍천교주였다.
“다가오면 자결하겠다!”
섭혼마존 때문에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풍천교주가 차갑게 말했다.
“죽어.”
“!”
“제자는 새로 구하면 그뿐이지.”
상대가 이렇게 나와버리자 자결도 쉽게 할 수 없었다.
이미 사용법을 잘 안다는 듯 풍천교주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만리전벽 안으로 쑥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본 풍천교주가 고개를 빼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환여에게 쇄도해서 그녀의 내공을 제압하고 목을 움켜쥐었다.
“죽고 싶은 게냐!”
검무극은 그가 이렇게 분노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장이라도 환여의 목을 부러뜨려 죽일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침착하게 그의 팔을 잡으며 나직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교주님.”
“저쪽이 어딘지 아나?”
풍천교주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장소가 흘러나왔다.
“풍천교라네.”
제315회 칼 찬 인생이 그렇지.
환여가 연락을 주고받은 자가 풍천교에 있다는 의미는 한 가지 사실을 뜻했다.
환왕이 풍천교에 있다.
분노한 풍천교주가 환여에게 소리쳤다.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목을 분질러 버릴 거다.”
하지만 환여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내공이 제압당한 상태였지만 그녀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하는 눈빛으로 풍천교주를 노려보았다.
꽈악.
그녀의 목을 붙잡은 풍천교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제자를 건든 것도 모자라 풍천교까지 음모를 꾸몄으니 당장 목을 부러뜨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교주님, 풍천교와 섭혼을 위해서라도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 만류에 풍천교주는 숨을 길게 내쉬더니 천천히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재빨리 환여의 아혈을 제압했다. 혹시라도 혀를 깨물어 자결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저 벽을 통해서 연락을 취한 듯하니 곧 누군가 모습을 보일 겁니다.”
환여가 우리에게 붙잡힌 것이 밝혀지면 저쪽에서 대비책을 세울 것이다. 그녀가 붙잡힌 것은 최대한 늦게 알려져야 한다.
“저 여인을 섭혼술로 조종하실 수 있으십니까?”
풍천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정도 실력의 환술 고수는 섭혼술로 조종할 수가 없다네.”
그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시죠.”
저쪽에서 이쪽을 봤을 때 아무도 없으면 다시 연락을 기다릴 것이다. 환여에게 바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나간 후에 고민할 문제였다.
풍천교주가 손을 한 번 획 하고 휘젓는 순간.
나와 풍천교주, 그리고 환여는 화원 가운데 서 있었다.
그러잖아도 굳어 있던 환여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졌다. 자신이 만든 공간을 이렇게 쉽게 들어왔다가 나오는 모습에 분노와 자괴감이 들었으리라.
화원 바깥에 장호가 마군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장호는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안도했다. 나와 환여가 갑자기 사라지고, 또 풍천교주가 뒤이어 사라졌으니 내심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풍천교주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할 작정인가?”
“풍천교로 가서 싹 다 박살 내야죠. 가시죠, 저도 돕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는 듯 풍천교주가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홱 돌아섰다.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화원 안으로 들어왔다.
“뭐부터 해야 해?”
이대로 당장 가면 안 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마음이 급하다는 것을 보여준 거였고.
“섭혼마존에게 걸린 음양역혼술부터 풀어주고 가야죠. 고 군사도 만나서 풍천교로 어떻게 돌아갈지 그 방식에 대해서도 작전을 짜야 하고요. 잠입할지, 당당히 돌아갈지.”
이미 겪었다시피 신중해야 할 적이었다.
“보셨다시피 상대는 보통이 아닌 자들입니다. 당장 이 여인만 해도 섭혼마존에게 음양역혼술을 걸기 위해 오랜 시간 화원을 하며 숨어지냈습니다. 무림맹의 적은 십 년을 잠입해 있었고요. 아마 풍천교 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경솔하게 움직이면 수면 아래로 사라져서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겁니다.”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맵기로 따지면 둘째라면 서러울 늙은 생강인데, 어찌 내가 하는 말을 모르겠는가?
“풍천교 일은 제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 풍천교주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해야 할 일부터 하세.”
이번 싸움을 통해 풍천교주와의 관계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환여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턱의 혈도를 정교하게 눌렀다. 말은 할 수 있되 혀를 깨물 정도로 힘을 줄 수는 없게 만든 것이다.
“동생을 살리고 싶나?”
그러자 환여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동생도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 알고 있다. 그러니 헛수고 말고 죽여라.”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다 보면 네 배후가 널 살려줄 수도 있잖아?”
배후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자존심이 상해서였을까?
환여는 부정했다.
“혼자 계획한 일이다. 나는 누구의 명령 따윈 받지 않는다.”
“배후가 없다면 네가 하는 짓은 말도 안 되는 짓인데?”
“무슨 뜻이지?”
“혈교 환술을 이어받은 네가 굳이 섭혼마존을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 그걸 위해서 몇 년간 화원 주인 행세까지 하면서? 대체 왜? 마존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런다고 마존이 될 수도 없잖아? 아니면 돈 때문에? 우리 아버지를 노리고? 대체 왜? 네가 혼자 꾸몄다고 가정할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돼.”
환여는 잠자코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한데 누군가 너희들에게 시켰다고 가정하면 너무 쉽게 이해가 돼. 환술 고수인 너희를 이용해서 섭혼마존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이해되잖아? 네가 아니면 누가 섭혼마존을 건드릴 수 있겠어? 역시 환술 고수인 네 동생을 이용해서 풍천교에 잠입한다. 바로 이해되잖아?”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슬쩍 끼어들었다.
“이럴 때 보면 고월이보다 더 똑똑하단 말이지.”
“제가 아는 건 고 군사도 압니다.”
“아냐, 아냐. 자넨 뭔가 달라.”
그때 환여가 불쑥 말했다.
“넌 괴물이야.”
회귀 전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그녀다. 어쩌면 아직도 그때의 감정들이 내 마음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때의 나는 괴물이었지.
“너희 같은 괴물을 어떻게 사람이 잡나? 괴물은 괴물이 잡아야지.”
과연 그녀가 환왕을 잡는 일에 협조할까? 아닐 것이다. 아무리 동생을 질투하고 경쟁심이 있다 하더라도, 동생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진 않을 테니까. 만약 그랬다면 회귀 전에 그런 삶을 살지 않았겠지. 싸우다 둘 중 하나는 죽었을 테니까.
환여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찾아야 한다. 분명 환여보다 환왕을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 테니까.
그러던 내 눈에 뭔가가 눈에 띄었다. 새로 들어온 화분들이 구석에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나는 곧장 장호를 불렀다.
“그대들이 잡아 와야 할 사람이 하나 있네.”
* * *
교로 돌아온 풍천교주는 고월부터 만났다.
풍천교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고월이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검무극이 옆에 있었음에도 고월이 먼저 떠올랐다.
그래, 어쩌면 이 말을 듣고 싶어서였으리라.
“풍천교가 교주에게 어떤 의미인지, 놈들이 몰라서 그렇겠지. 이번에 제대로 알게 해줘, 교주.”
거기에 덧붙여지는 감격스러운 한마디.
“내게도 소중한 곳이다. 교주, 용서하지 마.”
풍천교주가 내심 울컥했다. 족쇄가 떠오를 그곳을 소중한 곳이라 말해주는 그가 고맙고 미안했다. 잠시 복잡한 심경으로 생각에 잠기자 고월은 끓어오르는 자신에게 찬물을 부었다.
“교주. 날 따라 심호흡해. 숨 쉬어.”
“뭐 하자는 거야?”
“따라 하라고.”
고월이 숨소리가 나도록 크게 심호흡했고 마지못해 풍천교주가 따라 했다.
“내가 애냐? 심호흡까지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게.”
“애잖아? 풍천교 일이라면 눈 뒤집힐 거잖아? 애처럼 굴 거잖아.”
“안 그래.”
“애들은 다 안 그런다고 해. 그러면서 하니까 애고.”
풍천교주가 고월을 따라서 반복해서 심호흡했다. 심호흡해서 마음이 가라앉는 게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주는 고월의 마음 때문에 차분해졌다.
“누가 볼까 무섭다.”
“새외 절세심법 펼치나보다 하겠지.”
“내가 얼마나 멋지게 활약하고 왔는데. 네가 봤어야 해!”
“안 봐도 안다. 교주가 얼마나 잘했을지.”
“보지도 않았으면서.”
사실 그 활약을 제일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 고월이었다. 어서 검무극이 와서 있었던 일을 말해줘야 하는데.
“안다. 세상 사람은 다 몰라줘도 나는 알지. 환술 속에서 얼마나 멋있었을지. 아니까 이번 일은 소교주에게 맡기고 옆에서 도와.”
그러자 풍천교주가 버럭 소리쳤다.
“내 일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객관적으로 못 볼 거다. 원래도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보는 사람인데.”
“그럼 같이 가서 도와줘. 내가 멍청하게 굴면 옆에서 잔소리해.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들에게 인사 한번 하러 가야지.”
고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술과 섭혼술을 쓰는 자들이 적이라면, 그에 맞설 수 있는 사람들이 가야지. 나는 방해만 될 거야. 음뢰종 악귀들에게는 나 대신 안부 전해줘.”
“싫다! 종하고 대화 나누는 미친놈은 너 하나로 족해!”
고월이 창밖 저 멀리 고향 땅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흥분한다. 숨 쉬어!”
* * *
풍천교주가 고월을 만나고 있던 그 시각, 나는 섭혼마존과 만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우종을 죽일 때 음양역혼술에 당한 것을 말해주었다.
“그때는 나도 그 사실을 몰랐소. 배후를 쫓는 과정에서 알게 됐소.”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아무리 젊어도 청선은 마존의 신분이었으니까.
특히 그녀가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섭혼마존이 섭혼술에 당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무공이라면 통하지 않았겠지만, 혈교의 마공이라 어쩔 수 없었을 거요.”
다행히 그녀는 현명하게 받아들였다.
“제게 걸린 섭혼술을 파훼할 수 있나요?”
“다행히 풍천교주께서 음양역혼술을 없앨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섭혼마존은 안도하며 기뻐했다.
“사부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죠?”
“마존을 기다리고 계시오. 함께 갑시다.”
나는 그녀를 다른 방에 기다리고 있는 풍천교주에게 데려갔다.
방에는 풍천교주와 고월, 그리고 마혈과 수혈을 제압당해 잠이 든 환여가 있었다.
섭혼마존이 큰절을 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사부님.”
나는 그녀의 막연한 감동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처음 교주께서 이 사실을 아셨을 때 뭐라고 하셨는지 아시오?”
난 풍천교주를 흉내 냈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렸단 말이지? 나를 그년 앞에 데려다주게.”
섭혼마존이 감격한 표정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풍천교주의 어깨가 또 하늘로 치솟았다.
“별것 아니다.”
풍천교주의 눈빛이 내게 말했다. 더 해줘, 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귀술의 고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풍천교주가 아니라 풍천교주 할아버지가 와도 저 문은 못 연다. 바로 그때! 교주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데. 아! 교주님 뒤에 펼쳐진 지옥도를 봤어야 했는데.”
풍천교주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별것 아니래도 그러네.”
그만하라고 내젓는 그의 손끝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교주님이 저 손가락을 튕기면 세상이 바뀝니다! 이번에 그 세상 제대로 보고 왔습니다.”
섭혼마존은 진심으로 존경하는 눈빛을 보냈다. 나야 장난 반으로 전하는 말이지만, 섭혼마존에게는 자신이 꿈꾸는 미래였을 테니까.
“사부님, 언젠가 저도 제 세상을 펼쳐보겠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먼 그녀다. 모나고 이기적인 성격도 있었다. 하지만 십 년 후의 그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린 모른다. 부디 그녀가 다른 마존들처럼 멋있게 성장하길 바랄 뿐이다.
“적어도 사부 복만큼은 무림에서 제일이라 생각하오. 그 복을 잘 지켜가시길.”
진심 어린 조언에 섭혼마존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녀 너머 풍천교주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너머 고월이 또 웃고 있었다.
“자, 그럼 바로 대법을 펼치시지요.”
사람들 말고는 다른 준비는 필요 없었기에 대법은 이곳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풍천교주가 환여를 깨웠다. 그녀는 섭혼마존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듯 보였다.
풍천교주가 두 여인을 나란히 앉혔다.
환여의 등에 알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풍천교주가 말한 바로 그 제령인이었다.
저것을 뽑아내면 섭혼마존의 몸에 잠들어 있는 적혼이 빠져나올 것이라 했다.
어렵고 위험한 대법이라고 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풍천교주가 시행하는 대법이었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 알아서 잘하겠지.
신뢰는 말로 생기는 게 아니라 행동에서 생기는 법이니까.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똑똑히 보여주었다.
대법이 시작되기 전에 환여가 말했다.
“소교주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풍천교주가 나를 쳐다보며 내 의사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두 사람을 남겨두고 다들 자리를 피해주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몰랐어. 내 마지막이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칼 찬 인생이 그렇지.”
“부탁이 있어.”
그녀가 뜻밖의 부탁을 했다.
“동생을 보면 말해줘. 나는 배신하지 않았다고.”
내가 그 말을 할 때면 그도 죽을 운명일 텐데. 이 부탁이 의미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내가 약속을 지킬 거라 믿나?”
“믿어.”
“왜 믿지?”
“당신 마음속을 봤으니까. 그런 처절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면 약속을 지킬 거야.”
“괴물이라더니?”
“그야 적이니까. 너 때문에 죽는데 그 정도 말도 못 해?”
“나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섭혼마존에게 음양역혼술을 심어서 죽는 거야. 수천 명을 희생시켜야만 만들 수 있는 벽을 세워서 죽는 거고. 죽는 이유는 알고 죽어.”
환여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를 죽이고 싶은 분노도 느껴졌고, 내게 살려달라고 하고 싶은 애절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을 들여다본 그녀는 알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의 마지막 후회는 이것이었다.
“……내 삶을 살았어야 했는데.”
동생하고도, 배후하고도 얽히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 * *
대법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장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 마혈이 제압당한 채 서 있는 남자는 바로 환여의 수하였다.
마군은 마군이었다. 장호는 화원에 꽃과 화분을 공급한다는 정보만으로 채 한 시진도 안 돼서 그를 붙잡아온 것이다.
“데려가서 철저히 심문하게. 아는 바를 모두 실토하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안에 중요한 대법이 진행 중이니, 마군들로 호법을 세워 주게.”
거대한 덩치들이 대법이 진행 중인 내 거처 주위를 둘러쌌다. 세상에 존재하는 벽 중에 제일 든든한 벽이었다.
잠시 장호와 함께 마군들의 벽을 따라 걸었다. 소교주인 내가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수장으로서 장호의 위신을 세워 줄 것이다.
착! 착!
우리가 지나가면 그곳에 있던 마군들이 절도있게 예를 차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면 하늘을 올려다봐야지 하는 것을 잊는다. 올려다보자, 올려다보자 말하는 나조차도 잊는다.
“아까 붙잡아 온 여자가 후회하더군. 자신의 삶을 살았어야 했다면서. 자넨 어떤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장호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모시는 소교주님이 옆에 계시고, 제가 이끄는 수하들이 뒤에 있습니다. 제가 바라던 삶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장호를 쳐다보았다. 그는 누구보다 듬직한 모습으로 내 옆에 서 있다.
“장 군주.”
“네, 소교주님.”
“큰 적이 오고 있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는 어떤 적인지 묻지 않았다. 내 말에 묵묵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비할 것이다.
장호는 뒤쪽에 선 마군들을 돌아보며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커도 저희만큼 크겠습니까?”
제316회 그 모래바람이 그립기도 해서.
대법은 마무리 단계였다.
풍천교주의 왼쪽 손끝에서 자색의 기운이 뻗어나갔다.
자색 기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환여의 등에 새겨진 제령인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문신처럼 새겨진 제령인이었는데 마치 못이 뽑혀 나오듯 몸에서 뽑혀 나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순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풍천교주는 온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제령인이 완전히 다 뽑혀 나오는 순간, 풍천교주는 오른손을 섭혼마존의 머리 위로 내뻗으며 기합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정수리에서 나무가 뿌리째 뽑히듯 쑥하고 붉은 기운이 뽑혀 나왔다. 그녀의 머리에 박혀 있던 적혼이었다.
양손 끝에 각기 떠 있던 제령인과 적혼이 화르르 불에 타오르며 사라졌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두 여인이 털썩 쓰러졌다.
“후우우.”
풍천교주가 숨을 고르며 내뻗은 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의 손에 피어올랐던 자색의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대법이 무사히 끝난 것이다.
잠시 후 쓰러져 있던 섭혼마존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를 기다리는 반가운 소식.
“네 몸에 있던 적혼은 사라졌다.”
“아! 감사합니다, 사부님.”
풍천교주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와 같은 고수가 이렇게 땀에 젖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심력 소모가 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비록 대법은 내가 했지만, 이번 음모를 알아낸 것은 소교주다. 그 점 잊지 마라.”
풍천교주는 공을 검무극에게 돌렸다. 섭혼마존에게는 두 사람이 친하면 친할수록 좋은 일이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충성을 다짐했다.
“소교주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사부님.”
섭혼마존의 시선이 환여를 향했다. 화난 마음에 손을 번쩍 들었다. 머리통이라도 박살 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는데.
“그럴 것 없다. 이미 죽었다.”
강제로 제령인이 뽑혀 나오는 순간 환여는 절명했던 것이다.
“청선아.”
“네, 사부님.”
“앞으로 살면서 넌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될 거다. 수많은 사람을 네 마음대로 조종하게 될 테고. 그때마다 네가 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이죠?”
“네 마음속 구멍이다. 네 섭혼술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 구멍이 점점 커질 거다.”
섭혼마존은 사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세상을 우습게 여기지 마라.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하던 풍천교주는 해결을 제자에게 맡겼다.
“그 구멍을 어떻게 메울지는 네가 찾아야겠지. 구멍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자주 들여다봐라. 자꾸 보다 보면 너만의 방법을 찾겠지.”
섭혼마존이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자신을 이렇게나 신경 써 주는 사부가 고마웠다.
“혹시라도 이 어리석은 제자가 그 구멍에 빠지는 날이 오면, 사부님께서 꼭 건져내 주십시오.”
그러자 풍천교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부탁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키워왔으니 내 구멍은 얼마나 크겠느냐?”
허심탄회한 풍천교주의 말에 섭혼마존은 내심 감격했다. 사부와 막연한 거리감이 있었는데, 이번 일로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나가서 소교주 들어오라고 해라.”
* * *
오랜만에 장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와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마군들도 놀란 눈치였다.
무뚝뚝한 장호와의 대화가 뭐 그리 재미있었겠는가? 마군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내가 장호를 이만큼이나 신뢰하고 아낀다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법이 진행되는 긴 시간 동안 이렇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할 테니까. 그를 위한 내 노력이었다.
덕분에 장호의 어릴 적 꿈이 화공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 은퇴하면 그림을 그려볼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잠깐 기다리게.”
쾌속보로 번쩍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나는 그에게 화공들이 사용하는 종이와 붓과 물감 등의 도구를 내밀었다. 마가촌에 가서 제일 좋은 것들로 사 온 것이다.
“미루지 말고 오늘부터 그리게.”
설마 내가 이것을 사러 갔다 왔을 줄은 몰랐기에 장호는 당황했다. 뒤에 서 있던 마군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밤부터 그려보게. 자기 전에 반 각만이라도. 그릴 게 없으면 저 덩치 큰 수하들을 그려보든지, 아니면 자네 얼굴의 그 멋진 상처를 그려보든지.”
나는 안다. 이런 일에 필요한 건 시간이 아님을. 시간이 생기면 다른 할 일도 함께 생기기 마련이니까.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계기다. 가령 소교주가 억지로 안겨주는 그림 도구 같은 것 말이다.
장호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오늘부터 그려보겠습니다.”
“만년한철로 된 붓을 사줘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 억센 손에 들어가면 붓들이 다 부러질 것 같은데?”
내 너스레에 장호는 기분 좋게 웃었다. 어떻게든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은 대상 삼 위다. 아버지, 권마, 그리고 장호. 평생 웃음이라곤 모르고 사는 이 무뚝뚝한 사내들을 계속 웃게 할 거다.
그때 거처에서 섭혼마존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표정만으로 대법의 결과를 알 수 있었다.
* * *
거처에는 나와 풍천교주, 그리고 고월만 남았다.
섭혼마존은 돌아갔고 환여의 시체는 마군들에게 맡겨서 묻어주게 했다. 마지막 인사를 내게 남겨서인지 그녀는 편한 얼굴이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풍천교로 갈 계획을 세워야 할 때다.
“고 군사, 어떻게 하면 좋을까?”
대법이 진행되는 동안 고월은 그에 대해 생각을 해둔 상태였다.
“풍천교에는 공식적으로 가시기를 권합니다.”
“전대 교주의 귀환으로?”
“아뇨. 천마신교 소교주의 공식 방문으로요.”
풍천교주의 눈치를 살폈다. 돌아가도 자신이 주인공으로 가고 싶어 할 텐데. 고월은 이미 거기까지 생각해둔 상태였다.
“소교주님과 함께 돌아가면 교주의 위신은 더욱 높아질 겁니다. 이 방문을 성사시킨 것이 될 테니까요.”
그 말에 풍천교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들은 풍천교의 수뇌부에 잠입해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공식적으로 가셔야 활동하기가 편할 겁니다. 소교주가 되셨으니 방문의 명분도 있으시고요.”
맞는 말이었다. 몰래 가서 풍천교를 잠입해서 돌아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조만간 환여가 사라졌다는 것이 알려질 텐데?”
“무시하십시오.”
“무시하라고?”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움직이시면 저들도 긴가민가할 겁니다.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는데 공식 방문을 한다고? 이런 의구심이 들 테니까요.”
“위험을 느끼고 놈이 사라져버리면?”
“화원의 여인이 수년의 세월을 두고 공을 들였다면 그쪽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맞는 말이다. 환왕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자였다. 자부심만큼이나 능력도 출중한 인물이었고.
고월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교주와 내가 있을 때부터 놈이 있었어. 우린 모르고 떠났고.”
“!”
거기까진 생각 못 하고 있었기에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숨죽인 채 기회를 엿보다가 교주가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움직인 거지.”
그의 말을 내가 받았다.
“이쪽에선 젊은 청선이 마존이 되자 움직인 것처럼.”
“맞습니다.”
“좋아, 자네 말을 따르겠네. 공식적으로 방문하지.”
두말하지 않고 고월의 뜻에 따랐다. 군사에게 힘을 실어주는 최고의 방법은 믿고 따르는 것 아니겠는가?
“저는 심문 중인 자에게서 뭐라도 더 건져내면서 최대한 가까이서 지원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소교주 공식 방문에는 마존이 동행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이번에 함께 갈 마존은 신중히 고르셔야 합니다.”
“생각해둔 사람이 있나?”
“환술에 강한 마존이어야겠지요.”
그게 누구인지는 풍천교주가 잘 알고 있었다.
“마불이다. 환술에는 마불이 강하지.”
마불과 동행이라? 나야 상관없지만, 풍천교주가 문제였다.
원래 풍천교주는 팔마존 중 마불과 가장 친했다. 예전에 풍천교주를 데리고 천마신교에 온 것도 마불이었고.
하지만 이후에 사이가 틀어지면서 지금은 어색한 사이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무슨 생각인지 풍천교주가 나섰다.
“마불에게는 내가 가서 말해보겠네.”
그래, 결자해지하는 것이 맞겠지.
“그럼 전 일단 아버지께 허락부터 받고 오겠습니다.”
공식적인 방문이니 아버지께 보고드리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우린 각자 맡은 일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마불은 대법당에 있었다.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황금 불상이 그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비라곤 느낄 수 없는 그곳에서 마불은 홀로 염불을 외고 있었다.
풍천교주가 들어와서 그의 뒤에 앉았다. 하던 염불을 마치자 마불이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어쩐 일이시오?”
어색했다. 과거에는 속내가 어떻든 껄껄 웃으며 서로를 대했었는데.
“잘 지내셨소?”
“잘 지냈겠소?”
마불이 대공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잘 지냈을 리 없겠지.
마불이 뒤로 돌아앉아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보시다시피 닭 쫓던 개 신세요.”
“그 개 신수가 좋소.”
마불의 몸에서 나는 황금빛이 유독 빛나서가 아니다. 정말 마불의 표정이 예전과 달리 편해 보였다.
“비결이 뭐요?”
“당신은 알 것 아니오?”
마불은 묻는 것이다. 너는 알지 않느냐? 다 내려놓았을 때 마음이 얼마나 편안해지는지를.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모두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풍천교주가 불쑥 물었다.
“나 살 좀 빠진 것 같지 않소?”
마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자랑하러 왔소?”
“맞소. 당신 얼굴 편안해진 것만큼, 나도 편안해졌다고 말해주러 왔소.”
마불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풍천교주도 많이 변했음을.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겉으론 웃어도 속에는 꿍꿍이가 가득했던 그였었는데 이젠 왠지 편해 보인다.
“부탁이 있어서 왔소.”
“말씀하시오.”
“풍천교에 고얀 놈들이 수작을 부리고 있소. 소교주가 공식 방문을 빌미로 나와 함께 갈 거요. 그대도 함께 가서 도와주시오.”
“왜 나요?”
풍천교주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마존이 함께 가야 하는데, 마존들 중에서 그나마 당신이 제일 편하오.”
풍천교주를 응시하던 마불이 한마디로 거절했다.
“싫소.”
단박에 거절하니 풍천교주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잘 있으시오.”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그가 말했다. 한마디 독설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전에 당신한테 막말했던 것 미안하오.”
둘이 사이가 나빠져서 싸웠을 때 풍천교주는 그를 황금색 똥 취급을 하며 놀렸다.
“갑자기 왜 사과하는 거요? 그런다고 따라가지 않을 거요.”
“그래서 사과하는 게 아니오.”
“그럼 뭐 때문이오?”
“소교주나 고월과 함께 지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소. 사람 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사과하는 일이라고. 좋은 말 백 번보다 사과 한 번이 더 중요하다고.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소. 평생 사과 같은 걸 안 하고 살았던 인생이라서 사과가 늦었소. 미안하오.”
마불은 당황했다. 그때 막말은 풍천교주만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말을 하곤 돌아서 나가려는데 마불이 풍천교주를 불렀다.
“기왕 왔는데 패배주나 한잔하고 가시오.”
“법당에 술도 있소?”
“어디 술만 있겠소. 마귀도 있고 술도 있고 저기 어디 뒤져보면 시체도 있을 거요.”
정말 마불이 술을 두 병 가져와서 한 병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병 채로 쭉 들이켰다.
풍천교주는 그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마불은 벽에 그려진 마승들이 살육하는 그림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속마음을 밝혔다.
“대공자를 소교주로 만들려고 애쓰던 시절에는 내 눈에는 그것만 보였소.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후계자 다툼에 도움이 되겠다 안 되겠다. 어떤 일을 해도 도움이 될 일이겠다 안 될 일이겠다. 나는 거기에 미쳐 있었소.”
풍천교주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대공자가 소교주가 되면 다 해결될 거로 생각했소.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미안하게 굴었던 것도, 나중에 찾아가서 사과하면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었소. 이제 생각해보면 대공자가 후계자가 되었다면 나는 아무에게도 사과하지 않았을 거요.”
그리고 검무양이 후계자가 되지 않은 지금, 그도 풍천교주에게 사과했다.
“그땐 나도 미안했소.”
풍천교주가 말없이 술병을 내밀었고 마불은 가볍게 건배한 후에 술을 마셨다.
“이 술은 패배주가 아니라 승리주라 합시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풍천교주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마불이 물었다.
“언제 출발이오?”
풍천교주가 놀라 돌아서자 마불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 모래바람이 그립기도 해서.”
* * *
아버지는 연무장에 계셨다.
무거운 마기가 내려앉은 그 가운데 아버지는 홀로 천마검을 빼 들고 서 계셨다. 검을 든 그 뒷모습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구화마공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제 이식까지 익혔습니다.”
“그럼 어디 막아보아라.”
아버지는 나를 향해 빠르게 돌아섰다.
내게 검을 겨누는 순간, 아버지 앞에 악귀가 출현했다.
내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의 악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그것은 아버지가 불러낸 악귀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대멸식을 펼치려 한다는 것을.
구화마공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구화마공뿐!
내 앞에도 악귀가 출현했다. 생긴 것만으로는 내 것이 더 무섭게 생겼다. 내 것은 무섭게, 아버지 것은 냉혹하게.
같은 무공에서 나온 악귀였지만 그들은 가차 없었다. 반드시 상대를 멸하겠다는 눈빛으로 무섭게 서로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스스스스슥!
마주 본 두 악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나는 넷에서 멈췄지만, 아버지의 악귀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분열한 악귀가 아버지 앞에 쫙 늘어섰다. 구화마공 대성을 이룬 아버지가 만들어낸 숫자는 모두 마흔넷,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관이었다.
사대 사십사.
그렇다고 봐줄 아버지가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쓸어버리며 밀려오는 악귀들을 향해 나의 네 악귀도 힘차게 돌진했다.
제317회 더 싸우고 싶습니다.
사십사 대 사이지만, 실제로는 사 대 사의 싸움이다.
일렬로 선 악귀들은 정면으로만 밀고 나갔으니까. 이 악귀들이 방향을 틀어 우리에게 집중되는 초식이었으면 애초에 이렇게 많이 분열하지 않으셨을 거다. 마흔네 기의 악귀들을 어떻게 막겠는가?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네 악귀가 마주 오던 악귀들과 격돌하던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쇄도하던 다른 악귀들이 제자리에 멈춘 것이다. 당연히 네 악귀끼리만 충돌하고 나머지는 휩쓸고 옆을 지나가리라 생각했는데.
이걸 멈출 수도 있구나!
아직 경지가 낮았기에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줄 몰랐다.
그렇다면 설마? 우리에게 달려드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악귀들은 그 자리에 멈춘 채 그대로 있었다.
압박감이 대단했다. 네 악귀가 서로 싸우고 있었고, 그 양옆으로 사십 기의 악귀들이 위협적으로 서 있었으니까.
꽝! 꽈꽝! 쾅! 쾅쾅!
엄청난 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든 걸 쓸어버리는 악귀들이었는데, 서로를 밀어내지 못했다. 마치 전쟁터의 최전방에서 우리가 밀리면 후방이 다 죽는다는 마음으로 싸우는 무인들 같았다. 검과 몸이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터져 나왔고 불꽃이 튀었다.
악귀 너머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마흔네 기로 분열했기에 엄청난 내공이 소모되고 있을 터인데도 아버지는 평온했다.
지금 내게 보여주고 계시는 거다. 대성을 이룬 대멸식은 이런 것이라고.
그리고 묻고 계신다. 앞으로 네가 대성할 대멸식은 어떤 것이냐고.
네 악귀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내공을 극한으로 쏟아부었지만, 대성을 이룬 아버지의 악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장작을 아무리 땐다고 용암의 뜨거움을 이길 수 없듯, 아직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너지면 내가 죽는다는 걸 알기라도 한 걸까? 네 악귀는 끝까지 버텨주다가 소멸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선택은 점멸보로 이 구역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아예 저 멀리 대멸식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전 피하지 않을 겁니다.
천마호신공을 끌어올리며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거기에 일시적으로 몸을 강철처럼 만들어서 보호하는 벽력수라권 제오권 금강수라까지 일으켰다.
자, 와라! 이래도 날 죽일 수 있는지.
콰쾅!
쇄도한 악귀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온몸으로 충격이 전해졌지만, 나는 버텼다. 이 첫 격돌을 버텼다면 버틸 수 있다.
악귀가 내리치는 검을 흑마검으로 막았다.
그 가공할 위력에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카앙! 카아앙! 캉!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악귀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강력했다. 마치 아버지가 눈앞에서 나를 내리치는 것만 같았다.
계속된 난타전. 상대가 아버지가 아니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지만 나는 오히려 악귀를 이기려고 애썼다.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떻게든 내가 없앨 것이다.
벼락처럼 빠른 내 공격이 악귀를 강타했다. 마치 만년한철을 두드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두드리는 내 팔이 더 아팠다.
카앙! 캉! 카아앙! 캉!
오고 가던 공방의 마지막 순간, 흑마검이 정확히 악귀의 심장을 찔렀다.
푸우우욱!
지금까지는 쇠를 두드리던 느낌이었는데, 살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슷.
다음 순간 악귀가 소멸되기 시작했다. 나와 싸웠던 악귀가 사라지면서 동시에 다른 악귀들도 함께 소멸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대멸식을 회수하셨다는 것을. 그래서 심장을 찌를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아버지의 구화마공이구나.
아버지가 천천히 내게 걸어오셨다.
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이 죽을 것처럼 아파도,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느꼈어도, 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더 싸우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웃으셨다. 항상 지으시는 그 비웃음도 아니었고, 내 너스레에 참지 못하고 나오는 그 웃음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무인 대 무인으로서 웃으셨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일어나야지.”
끙하는 신음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의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대멸식을 막아내는 모습에서 아버지도 불타오르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막아낼 줄은 몰랐을 테니까.
“구화마공 제삼식을 펼쳐보아라.”
아버지가 제삼식을 봐주시겠다는 뜻이다. 이건 오직 소교주만이 얻어낼 수 있는 기연이자, 더 싸우고자 했던 내 투지에 대한 보상이었다.
나는 구화마공 제삼식을 처음으로 펼쳐보았다.
구화마공 제삼식 대마벽(大魔壁).
제삼식은 악귀들이 출현하는 초식이 아니었다. 검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일초식 인멸식이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초식이라면 이초식 대멸식은 대량 살상을 목적으로 한 초식이었다.
그리고 제삼식 대마벽은 정면에 강기의 벽을 세우는 방어 초식이었다. 검기로 벽을 만드는 검벽(劍壁)과는 본질에서 달랐다.
확실히 제삼식이 되니까 어려웠다.
배운 구결대로 진기를 운용해도 대마벽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잠깐 진기 좀 보충하겠습니다.”
혹시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가부좌를 틀고 진기를 일주천했다.
하지만 내공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전히 대마벽은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어렵습니까?”
“그야 공격보다 방어가 어려우니까.”
그래, 맞다. 언제나 공격이 어렵다고 느끼지만, 사실 방어가 더 어렵다. 특히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모르는 부분을 물었고, 아버지는 내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혼자서 연마했으면 몇 달은 걸렸을 깨달음을 한순간에 알게 되었다.
다시 펼쳐보고 또 막히는 부분은 여쭙고. 그렇게 반복하던 끝에.
“됐다!”
후우웅!
깊고 웅장한 바람 소리와 함께 드디어 대마벽이 세워졌다.
내 검강의 색처럼 하늘빛이 흐르는 강기의 벽이었다.
성처럼 우뚝 솟은 그것은 적어도 수십 명은 그 뒤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큰 벽이었다. 수련하면 할수록 벽은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
계속 보고 싶었지만 엄청난 내력을 소모했기에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문득 나는 아버지의 대마벽이 궁금했다.
“아버지의 대마벽을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것보다 열 배는 더 큰 벽이 지어지겠지?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으신 아버지였다. 오냐, 보여주마, 하시며 아버지가 제삼식을 펼쳤다.
휘웅!
더 간결하고 경쾌한 바람 소리.
아버지 앞에 나타난 대마벽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마벽이었다.
아버지의 대마벽은 작았다. 그야말로 어른 몸 하나 숨길 수 있을 크기의 방패였다.
하얀 기운이 안개처럼 흐르는 그것을 보자 나는 알 수 있었다.
강기가 집중되고 집중된 그것은 그 어떤 공격으로도 부술 수 없다는 것을. 금강석보다, 만년한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을.
“경지가 오를수록 마벽은 작아질 것이다.”
“대신 더 단단해지겠지요?”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말했다.
“대성을 이룬 대마벽은 어떤 공격으로도 뚫을 수 없다.”
그 말씀에 당연히 떠오르는 의문.
“대멸식으로도요?”
“같은 대성을 이뤘다면 누구의 무재가 뛰어난지에 따라 결정되겠지. 내공이 얼마나 정순한지도 관계있을 테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구화마공은 언제나 내 가슴을 이렇게 뛰게 만든다.
“대성을 이룬 제 대마벽을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아버지의 대멸식을 막아보고 싶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서 지금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내 대마벽을 밀어버리는 모습을 떠올리고 계실 거다. 부자지간을 떠나 우린 무의 극의에 도달하고자 하는 무인들이었으니까.
“오늘 베풀어주신 은혜는 그날 뚫리지 않는 걸로 갚겠습니다. 아버지가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상대가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었나보다.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기다리겠다.”
제가 아버지께 갈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우리 종착역은 거기가 아닐 겁니다. 저와 더 멀리 가셔야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연무장을 걸어 나왔다. 아버지 기분이 좋으신 것이 느껴져, 나도 기분 좋았다.
“비궤의 비밀은 풀었느냐?”
“아직 못 풀었습니다.”
품에서 비궤를 꺼냈다.
“아버지께 인사드려라.”
눈과 입이 그려진 것을 보시더니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래, 아버지 뵈었으면 이 웃음도 보고 가야지.
“어떤 시도를 해 봤느냐?”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놈도 마음이 편한지 이렇게 웃고 있지 않습니까?”
비궤를 다시 품에 넣었다.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그냥 비궤와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것 같은. 그때까진 이렇게 친구로 지내는 거다.
“섭혼의 대법은 잘 끝났고?”
과연 아버지는 돌아가는 상황을 다 알고 계셨다. 통천각 자체가 워낙 뛰어난 조직이기도 했고, 고월 역시 통천각에는 정보 제공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천교주가 섭마존에게 걸린 섭혼술을 파훼했습니다. 배후도 처리했고요.”
아버지의 기도가 차가워졌다. 감히 본교의 마존을 건드렸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으실 것이다.
“일전에 무림맹에서 일을 꾸몄던 자와 한패인 것 같습니다. 풍천교에도 놈들이 잠입해 있는 걸 밝혀냈고요. 제가 풍천교주와 함께 새외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불을 데려가라.”
역시 빈틈이 없으시다. 아버지도 마불이 환술에 강하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면 네 형이랑 셋이 밥 한번 먹자.”
밥 먹자는 말씀이 아니었다. 아무리 바빠도 네 형도 챙기라는 뜻이었다.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우린 한자리에 모였다.
풍천교로 가는 인원은 내 호위들과 풍천교주, 그리고 마불로 결정되었다.
마불은 어차피 아버지가 데려가라 했으니 안 가겠다 했어도 가야 했겠지만, 그 전에 풍천교주와 이야기가 잘된 모양이었다.
“마불께서 함께 가시니 정말 든든합니다.”
“나 말고 함께 가고 싶었던 마존들이 많을 텐데?”
괜히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 않을 테니.
“있긴 있었죠. 한데 우리 교주님이 강력하게 마불님과 함께 가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러면서 옆에 있던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풍천교주는 못 들은 척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귀가 쫑긋 세워진 것이 느껴졌다.
“다른 마존들보다 마불님이 우릴 더 잘 지켜주실 거라 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내외하며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풍천교주와 마불이라.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기는 한데.
그때 적연이 와서 보고했다.
“출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우리가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려던 그때, 누군가 찾아왔다. 뜻밖에도 독왕이었다.
“독왕님! 제가 멀리 간다고 이렇게 와주셨군요.”
내 반가운 인사에 독왕은 못 본 척 지나쳤다. 그의 눈에는 지금 한 사람만 보였다.
독왕은 풍천교주에게도 대충 형식적인 인사만 하고는 마불에게로 갔다. 놀랍게도 마불을 찾아온 것이다.
“새외로 떠나신다고 들었소.”
“소교주 모시고 풍천교에 다녀오게 됐소.”
“그래서 드리는 부탁인데.”
독왕이 품에서 종이를 몇 장 꺼냈다.
“가시는 걸 어젯밤에 알아서, 급히 만드느라고 밤을 꼬박 새웠소.”
과연 그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는 덥수룩했다.
그가 내민 종이에는 여러 종류의 독초들이 그려져 있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주로 어디서 자라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까지 상세히 적어둔 종이였다.
“새외에서 나는 독초들이오. 혹 지나가다 눈에 띄면 부탁하오.”
그 부탁에 마불이 껄껄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 자신에게 이럴 수 있는 사람은 독왕밖에 없으리라. 어쨌든 마불이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좋소, 눈에 띄면 꼭 캐다 드리겠소.”
독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이건 좀 미안하오만.”
독왕이 품에서 종이를 몇 장 더 꺼냈다.
“너무 많이 드리는 것 같아서 남겨둔 건데. 기왕 가시는 김에 이것도 좀. 아, 너무 많나요? 이것 중에서 몇 개만 고르겠소. 이건 꼭 필요하고…….”
이걸 골랐다 저걸 골랐다 독왕이 고민했다.
그때 마불이 독왕이 들고 있던 종이를 다 가져갔다.
“다 주시오.”
“그래 주시겠소?”
“그래야 하나라도 더 캐올 수 있지 않겠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독왕이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독초와 관련해서는 진심인 사람이니까.
“아니, 왜 제게는 부탁 안 하시는 겁니까?”
“마불님은 네가 못 보는 걸 보시는 분이시다. 가서 방해나 하지 마라.”
이렇게 나오면 또 참을 수 없지. 나는 마불에게 소리쳤다.
“이용당하고 계십니다! 더 필요한 독초가 없으면 저처럼 버림받으실 거라고요!”
마불은 독초가 적힌 종이를 뒤적이며 내게 말했다.
“독왕에게 독초가 필요 없는 날이 오겠나?”
그 말에 독왕이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 이 순간의 독왕은 자신만의 세상에서 현실로 나온 독왕이다. 나는 이 경계선 즈음에 서 있는 독왕을 좋아한다.
“다녀오겠소.”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 대신 독왕이 말했다.
“꼭 캐서 돌아오시오.”
돌아서는 독왕과 눈이 마주쳤다.
“제겐 인사 안 해주십니까?”
“너야 당연히 잘 다녀오겠지.”
나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당연히란 말에 담겨 있었다.
“나오신 김에 같이 가시죠?”
“싫다. 모래 먼지 질색이다.”
“그 모래바람 속에서 캐라고 주신 종이가 산더미입니다.”
독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옅게 미소 짓던 마불이 독초 그림들을 접어서 품에 잘 넣었다.
“독왕하고는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요?”
어쩌면 풍천교주는 아주 약간은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니 해도 마불과는 자신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안 친하오.”
“그런데 왜 이런 부탁을 들어주는 거요?”
“당신과 안 친해도 새외까지 가잖소?”
쌀쌀맞은 대답에 풍천교주도 한마디 했다.
“사람이 너무 변하지 마시오.”
“누가 할 소리.”
출발도 하기 전부터 티격태격하는 이 두 사람 데리고 이제 출발이다.
“자, 이제 숨어 있는 독초 뽑으러 가시죠.”
제318회 해답은 여기 없습니다.
중원을 벗어나 새외에 들어선 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모래폭풍입니다!”
바깥에서 들려온 적연의 외침에 재빨리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후우우우우우우웅!
저 멀리서 엄청난 모래폭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붉은 모래 벽이 밀려오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 우린 이런 광경을 보지 않을까? 할 만큼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서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내 명령에 마차가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을 하루 이틀 겪는 것이 아니라는 듯 풍천교주는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반면 마불과 나는 대자연의 노여움을 놀란 마음으로 지켜보며 내심 모래폭풍에 휩쓸렸을 때를 대비했다.
나나 풍천교주, 마불이야 폭풍에 휩쓸려도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말이나 마차는 물론이고 호위들은 멀리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말과 마차는 포기하더라도, 사람은 어떻게든 다치지 않게 구해야 한다.
후우우우우우우웅!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모래 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폭풍을 구화마공 제삼식 대마벽을 세워서 막아버리고 싶다.
대마벽의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마벽의 크기는 작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내 마벽은 다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성을 넘어 십이 성 대성을 이룬 내 대마벽은 저 모래폭풍을 막을 수 있을 만큼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십 성의 방패가 점점 커져서 거대한 벽이 되는 상상을 했다. 그 어떤 것에도 무너지지 않는 거대한 성벽이 되는 모습을.
다행히 마차는 아슬아슬하게 모래폭풍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빠르게 판단하고 내달린 덕분이었다.
풍천교주가 내게 말했다.
“어때? 새외의 맛이.”
“시작부터 맵습니다.”
우린 마차 뒤로 모든 것을 휩쓸며 지나가는 모래폭풍을 지켜보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어떻게 살까 싶었지만, 한참을 이동하니 가축을 몰고 지나가는 부자지간을 볼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은 기다란 작대기로 가축을 몰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모래폭풍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어디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잠시 마차를 세우고 그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천교주가 불쑥 물었다.
“혹시 내가 자네에게 새외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는 말 한 적 있나? 요즘 자꾸 깜박깜박 잊어버려서.”
“했으면 어떻고 안 했으면 어떻습니까? 또 하시면 되죠.”
“싫네.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정신없는 늙은이 같잖아?”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풍천교주의 시선이 다시 저 멀리 가축을 몰고 있는 부자지간을 향했다.
“예전에 고월이 그러더군. 중원진출, 중원진출 노래를 불렀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지 않으냐고. 그때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네. 솔직히 나는 이곳에서 사는 것이 좋았거든. 중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곳만의 정취가 있지. 아, 물론 인정하네. 아무 걱정 없이 살아서 그랬을 거라는 거. 교주전에는 저런 모래폭풍이 불어닥치지 않으니까.”
그때 마불이 불쑥 말했다.
“촌놈이라 그렇다.”
풍천교주가 그를 쳐다보자 마불이 말을 이었다.
“촌놈이 고향 좋다는 말에 뭔 쓸데없는 이유가 그리 붙나? 멋대가리없이.”
그의 질책은 속상함에 가까웠다. 마지막에 걱정 없이 교주로 살아서 그렇다는 말을 왜 하냐는 거다. 그냥 당당히 말하면 되지. 나는 이곳이 좋고, 떠나기 싫었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두 사람은 이런 식이었다. 종일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또 별일 아닌 걸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또 이렇게 서로를 위해주기도 하고.
겉으로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풍천교주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느꼈다면 당연히 마불도 느꼈을 터.
마불이 괜히 시비도 걸고 조금 전의 그런 말을 해주는 이유는 풍천교주의 긴장감을 낮춰주려는 의도이리라.
모르는 사람은 마불에게 그런 배려심이 있나? 뜻밖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마존들 중에서 마불은 배려심이 깊고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랬기에 형에게 충성하고 의리를 지켰던 그를 작은 거인이라 생각했던 것이고.
“자, 다시 출발하지.”
마차는 모래폭풍이 불어왔던 그곳을 향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 *
풍천교로 가는 길에 여러 일이 있었다.
비적 떼가 숫자만 믿고 달려들었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고, 호위 무인 몇이 물갈이를 해서 복통을 일으키기도 했다.
풍천교주는 근처에서 약초를 찾아 그들에게 먹였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것들 약해빠졌다면서, 나 젊었을 때는 피와 독이 섞인 물을 마셔도 멀쩡했다는 믿기 어려운 말을 했다.
마불이 어김없이 한마디 던졌다.
“뭔 잔소리를 그리하냐? 늙으면 입은 닫고 주머니를 열라고 했다.”
순순히 입을 닫을 풍천교주가 아니었다.
“외로워서 그런다, 외로워서! 나이 먹어서 다 알면 뭐 하나? 젊은것들은 아무도 물어봐 주지 않는데. 이 약초 뭐고, 어떤 효과가 있고. 언제부터 알았고.”
농담만은 아님을 알았기에 나는 그를 보며 웃어주었다.
여정의 힘든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연은 여러 번 길을 잃고 헤매었다. 지도와 실제 지형이 다른 곳이 많았던 것이다.
오히려 길은 풍천교주보다 마불이 더 잘 알았다.
“여긴 당신 구역 아냐?”
“그러니 더 모르지. 수하들이 실어다 주는데 내가 길을 어찌 알겠나?”
은근히 길치인 풍천교주의 항변이었다.
새외 여정의 또 다른 문제는 잠자리였다. 새외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객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해야겠습니다.”
적연이 마차에서 내리며 야영 준비를 했다.
호위들은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주위를 경계하면서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해온 짐승을 손질해서 저녁거리도 마련했다.
나는 직접 풍천교주와 마불의 잠자리를 챙겼다. 바닥에 푹신한 풀을 깔고 그 위에 부드러운 짐승 가죽을 올렸다.
자신들의 잠자리를 신경 쓰자 마불이 말했다.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자네 잠자리나 챙기게.”
“저야 젊잖습니까? 자갈밭에서 자도 괜찮습니다. 자, 앉아보십시오.”
“겉모습만 젊지, 저기 저 길눈 어두운 사람보다 자네가 더 윗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
마불이 놀리자 풍천교주는 일부러 애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편해, 아주 편해.”
마불 역시 잠자리가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난 두 사람 것보다 더 푹신한 잠자리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교주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는 아예 푹신한 호랑이 가죽인데?”
“저는 소교주잖습니까?”
풍천교주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고 마불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풍천교주와 마불이 의기투합했다.
“봤나? 저 뻔뻔한 표정?”
“자갈밭에서도 잔다면서!”
나는 푹신한 가죽에 누워서 웃다가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차기 교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애초에 후계자로 낙점하고 키웠던 사람이라네. 믿을만한 사람이지.”
물론, 믿을만한 사람일 거다. 하지만 환왕이 개입한 이상 그 믿음이 온전히 지켜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놈은 분명 새 교주 주위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놈을 찾아내는 것은 교주님께 달렸습니다. 누구보다 풍천교에 대해서 잘 아시니까요.”
나는 그를 믿는다. 누군가와의 우정을 위해 풍천교주의 자리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았으니까. 그의 특별함을 믿는다.
“나를 너무 믿지 마시게. 자네도 알다시피 난 우유부단하고, 감정적인 사람이라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겁니다. 저는 심지가 너무 곧은 사람 좋아하지 않습니다.”
풍천교주는 또 무슨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이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그때 변할 수 있고, 변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교주님 같은 분요. 자신 없을 때 이렇게 자신 없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괜히 아는 척, 괜히 자신 있는 척하다 큰 사고를 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주님은 이미 보여주셨잖습니까? 교주님이 잘 아는 분야에선 어떤 분이신지, 교주님의 세상에서 어떤 분이신지요.”
풍천교주가 마불을 쳐다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소교주와 있으면 심지가 곧지 않은 걸로도 이렇게 기분 좋을 수가 있다네!”
새외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 * *
드디어 우린 풍천교에 도착했다.
정문에 도착했을 때 거창한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무인이 도열해 있었고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너무 휘황찬란한 환영식이었다.
그들 앞에 새 풍천교주 소백타(昭伯打)가 직접 나와 있었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소.”
소백타는 알록달록 화려한 풍천교주의 고유 복식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 환술에 쓰이는 여러 문양을 역시 강렬한 원색들로 그려둔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좋게 보면 첫 만남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철두철미함이 느껴졌고, 나쁘게 보면 어딘지 모르게 요사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신교의 소교주가 역대 최고의 재능을 지니신 분이란 소문이 자자해서 기대하고 있었소.”
“원래 소문은 부풀어지기 마련이지요.”
“최고 미남자란 소문은 전혀 부풀어지지 않은 듯하오.”
겉모습과는 달리 대화를 능숙하게 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검무극과 인사한 후 이번에는 마불과 인사했다.
“마존을 뵙습니다.”
“교주께 인사드립니다.”
“지난번에 오셨을 때 인사드렸었지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마불은 소백타가 이렇게 빨리 교주 자리에 오를 줄은 몰랐다.
소백타는 마지막으로 풍천교주와 인사했다. 달려가서 덥석 손을 잡았다.
“스승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소? 교주.”
교주가 되었으니 풍천교주도 그에게 예를 차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오랜만에 만난 제자는 예전보다 훨씬 자신만만하고 여유가 있었다. 소백타는 어려서부터 키웠던 제자 중 하나로 무공도 가장 고강했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도 깊었다. 그래서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찍어 두었던 인물이었다.
“뵙고 싶어서 교주전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이렇게 달려 나왔습니다.”
원래 풍천교주가 함께 오지 않았다면 검무극을 교주전에서 맞이했을 거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천마신교 교주 방문이었다면 모를까, 소교주의 방문이었으니까.
“자, 들어가시죠.”
소백타를 따라 세 사람이 함께 걸었다.
그는 검무극과 마불에게 풍천교의 여러 건물을 소개하면서 걸었다. 그는 유쾌하고 밝은 면모를 보였는데, 풍천교주는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원래도 이런 성격이었나?’
자신이 알고 있던 소백타는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교주전에 들어섰다.
순간 풍천교주는 흠칫 놀랐다. 자신이 교주로 있었을 때와 내부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태사의는 더 높은 곳에 있었고 더 큰 것으로 바뀌었다, 벽의 색도 새롭게 칠했고 석상이나 그림, 장식 등도 모두 달라져 있었다.
“내부가 많이 바뀌었소.”
“수하들이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를 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잘하셨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요.”
풍천교주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풍천교주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물려줄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물려준 자리였다. 한데 그 자리에 오르기가 무섭게 홀랑 교주전부터 이렇게 마음대로 바꾸었으니 어찌 기분이 좋겠는가?
거기에 소백타는 한술 더 떴다.
교주전에 들어온 소백타는 태사의로 올라가서 앉았다. 그러자 그가 세 사람을 내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물론 말은 여전히 정중했다.
“오랫동안 그대 교주 일가는 본교를 찾지 않았소. 한데 소교주가 이렇게 찾아주시니 참으로 기념이 될 일이오.”
지금껏 너희가 우릴 찾지 않았다는, 말에 뼈가 있었다.
“그게 다 여기 계신 전대 교주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소백타의 시선이 풍천교주를 향했다.
“본교에 보물 같은 분이시지요.”
풍천교주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검무극의 예상대로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상대는 소교주고, 자신은 교주니 태사의에 앉아서 맞을 수 있다지만, 오늘은 자신도 와 있는 날이 아닌가? 아래쪽 접객용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는데 굳이 저기서 내려다보는 것이다.
몇 마디 검무극과 형식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천마신교와 풍천교와의 평화로운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가 오간 후에 소백타가 말했다.
“여독이 안 풀렸을 텐데, 오늘은 쉬시고 내일 말씀 나누시지요. 내일은 소교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할 겁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과 마불이 먼저 교주전을 나섰다.
이제 교주전에는 풍천교주와 소백타만 남았다.
그러자 소백타가 태사의에서 내려왔다.
“스승님 노여워 마십시오. 마교 소교주가 있어서 일부러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내려보면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시오?”
순간 흐르는 정적. 이내 소백타가 고개를 숙였다.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풍천교주가 말했다.
“아니오. 우리 교주를 질책하려 한 말이 아니었소. 고개 드시오. 대 풍천교 교주는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법이오.”
소백타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때 보면 또 예전 제자 모습이기도 했는데.
“스승님이 오셔서 너무 기쁩니다. 푹 쉬다 가십시오.”
풍천교주가 천천히 교주전을 나왔다. 바뀐 교주전이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 * *
객청으로 돌아온 풍천교주의 표정에서 심상찮음을 느꼈다.
“어땠습니까?”
풍천교주는 내내 느꼈던 위화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뭔가 묘하게 다르네. 교주가 되어 자연스럽게 바뀐 건지, 아니면 배후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섭혼술에 당한 것 아닙니까?”
풍천교주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네.”
풍천교주가 아니라면 확실히 아닐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한 가지를 꼭 지키셔야 합니다.”
풍천교주에게 회귀 후 내 첫 번째 원칙을 말해주었다.
“그 사람을 똑똑히 보십시오. 대충 보지 마시고 제대로 보십시오. 대신 선입견을 버리고 보셔야 합니다. 내 제자는 원래 이러이러했었는데,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그런 생각 다 버리십시오.”
그렇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해답은 교주님에게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뭔가를 찾아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해답은 교주님이 보는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제319회 언제나 소교주 때문이다.
그날 밤, 풍천교주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상대를 선입견 없이 제대로 보라는 검무극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제자인 소백타를 선입견 없이 보지 못했다.
차이에만 집중했다. 그가 이런 성격이었나? 예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그를 제대로 보지 않고 감정에만 휘둘렸다.
‘교주전을 그렇게 다 바꿔버렸다고? 나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지만 냉정히 따지면 자신에 대한 존경심과 교주전을 바꾼 것은 별개의 일이다. 대수롭지 않게 결정해서 바꿨을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 검무극의 말이 옳다. 해답은 내 마음에 있는 게 아니라 소백타에게 있다. 바뀐 교주전을 볼 것이 아니라 소백타의 눈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으로 앞마당을 서성이고 있는데 황금빛으로 어둠을 밝히며 마불이 걸어 나왔다.
“자네를 잠 못 자게 하는 교주가 세 교주 중 어느 교주인가?”
“세 교주?”
“우리 소교주인가? 풍천교의 당대 교주인가?”
“나머지 한 교주는?”
마불은 풍천교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제야 풍천교주는 마불이 말한 마지막 교주가 전대 교주인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풍천교주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 문제는 마지막 교주 때문이지.”
그러자 마불은 다른 해답을 내놓았다.
“아니. 우리가 잠 못 드는 이유는 소교주 때문이네.”
어찌 모르겠는가?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오늘 이 자리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저 소백타는 아직도 ‘언제 교주 되나?’ 교주전만 바라보는 신세였을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했다.
고월은 여전히 교주전에 묶인 채로 있을 것이다. 아니, 족쇄의 열쇠를 지니고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자신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은 고월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며 펄쩍펄쩍 뛰고 있겠지. 그런 인생을 살고 있을 자신이 섬뜩했다.
풍천교주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마불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아마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저 마불도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
지금의 소교주가 아니라 다른 소교주였다면 대공자는 후계자가 되었을까?
그때 마불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솔직히 요즘 난 즐겁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도 모르게 ‘미쳤군’이란 말이 튀어나오려다 말았다.
마불의 입에서 즐겁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그래, 그도 사람인데 즐거울 수 있겠지. 한데 그 감정을 자신에게 드러낼 줄은 몰랐다.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사는 이 기분이 즐겁다네. 지금까지 너무 지겨운 삶을 살아왔었나?”
권력투쟁을 내려놓은 삶도, 풍천교주를 도와주러 이곳까지 오는 삶도, 독초가 그려진 종이를 가득 받아드는 삶도, 그는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다른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마불의 말을 듣고 있던 풍천교주가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 한 번도 자네를 똑바로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네.”
한때 친구처럼 지냈을 때도, 그러다 후계자 다툼으로 막말하며 싸울 때도, 그리고 이 순간까지도. 단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마불은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풍천교주의 말에 담긴 뜻을 그 역시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마불은 쉽게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모든 책임은 소교주 때문이네.”
풍천교주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제나 소교주 때문이지. 어른들 잠도 못 자게 만드는 건방지고 똑똑한 우리 소교주 때문이지.”
요즘 마불과 검무극 흉을 볼 때가 제일 재미있는 그였다. 언제나 검무극 욕할 때가 제일 신나는 그였다.
풍천교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외의 달은 더 처량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러다 순간 아차 했다.
‘또 이런다. 또 마음에서 먼저 해답을 찾는다.’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보니 새외의 달이나 중원의 달이나 똑같았다. 그래, 달 보면서도 연습하는 거다. 답은 저 달에 있다.
* * *
다음 날 환영회장으로 가기 전에 작전회의가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쪽 배후는 화원의 여인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일 겁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겠죠. 반응은 둘일 겁니다. 몸을 사리거나, 보복하거나.”
풍천교주와 마불은 겁을 먹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이 누구든 천마신교의 소교주나 마불, 그리고 전대 풍천교주에게 감히 복수할 거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상대는 환여를 잃은 환왕이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경각심을 깨웠다.
“화원 여인을 통해 보셨다시피 실전된 혈교의 마공을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시면 안 됩니다.”
혈교는 확실히 풍천교주에게 효과가 있다.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그의 눈빛이 강렬해졌으니까. 또한 풍천교주는 멸망한 혈교를 부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었고.
“교주님은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 혹시라도 섭혼술에 당한 사람이 있는지 잘 살펴봐 주십시오.”
마불에게는 다른 당부를 했다.
“놈들이 저나 교주님이 아니라 허를 찔러서 마불님께 접근하려 들 수도 있습니다. 그 점 유의하셔서 의심스러운 자가 접근해오는지 살펴주십시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힘차게 말했다.
“자, 가시죠. 전쟁은 이제부터입니다.”
두 사람과 함께 객청을 나섰다.
검무극 양옆으로 풍천교주와 마불이 나란히 걸었다. 이곳 새외에서는 그들이 날개였다.
* * *
환영연회장에는 풍천교 오대장로들은 물론이고 주요 고수가 모두 모였다.
풍천교라고 전부 환술의 고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술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 무인들도 있었다. 지금 풍천교주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장로 후양(候洋)이 그러했다. 그는 새외삼대검객에 속한 검술의 고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교주님이란 호칭을 쓰지 못하니 후양은 풍천교주를 뭐라 불러야 할지 어색했다.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풍천교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제일 듣기 좋아하는 말이 그 말이다.
“얼굴도 편안해 보이십니다.”
“고맙네. 자네도 아주 보기 좋군.”
예전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예전에 관계가 좋았으니 당연히 지금도 내게 호의적이겠지.
풍천교주는 차분히 그를 응시했다.
정말 그럴까?
이제 이 물음이 무겁게 다가온다.
검무극이 말하는 게 이런 거다.
지난 관계, 성격, 평판, 듣기 좋았던 말, 혹은 말실수. 이런 것들 끌어와서 지레짐작으로 판단하지 말고, 지금 자신을 보는 저 눈빛과 표정과 말을 똑바로 보고 들으라는 거다.
“자네를 더 귀히 중용하지 못해 미안했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순수 무인 출신인 자네를 존중했었다네. 본교에 투신해줘서 고마웠고. 그래서 좀 더 나은 대접을 해줘야지, 생각은 있었는데 미루다가 기회를 놓쳤지. 미안하네.”
그에게 사과했다. 이렇게 사과를 하는 것도 검무극을 만난 후의 변화였다. 고월에게도 사과하고, 마불에게도 사과하고, 후양에게도 사과하고. 그래, 다 사과하는 거다.
후양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속셈인가 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후양이란 사람과 자신의 관계는 딱 이 정도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친절하게 굴지?’라는 당혹감이 생기는 정도의 거리. 이것이 그와 자신과의 거리다. 앞서 느꼈던 막연한 친근함은 자신의 마음에만 있던 감정이었고.
자세히 보려고 노력하니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그냥 오늘 아니면 다시 해줄 기회가 없어서 말해준 거라네.”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후양을 필두로 다른 장로들도 풍천교주에게 와서 인사했다.
그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후 풍천교주가 물었다.
“한데 성 장로가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후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 장로님은 장로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성 장로는 성야(星爺)라는 인물로 오대장로의 수석 장로였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사람이기도 했고.
“물러난 이유가 뭔가?”
“이제 그만 쉬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풍천교주는 자신이 교주직을 내려놓고 떠날 때 성 장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새 교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자네만 믿고 가네.
그랬던 사람인데 쉬고 싶다고 물러났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가 물러났다면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검무극에게도 사람들이 와서 인사했다.
천마신교의 소교주를 직접 만날 일은 평생 있을까 말까한 기회였다. 그래서 다들 자신을 소개하며 어떻게든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했다.
그때 한 여인이 과감한 인사를 해왔다.
“소교주가 이렇게 잘생긴 줄 알았다면 저는 이미 새외를 탈출했을 거예요.”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거칠고 요사한 기운을 풍기는 풍천교 사람답지 않게 그녀는 선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구숙(具淑)이에요.”
“검무극입니다.”
검무극은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오대장로 중 한 사람으로 풍천교주를 많이 따랐던 여인이다.
그때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소교주에게 빠졌다간 정말 새외탈출을 감행하게 될 거라네.”
구숙이 환하게 웃으며 풍천교주에게 인사했다.
“우리 오라버니처럼요?”
“오라버니?”
오라버니란 말에 풍천교주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이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이제 교주도 물러났는데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죠. 기억 안 나세요? 교주직에서 물러나시면 제가 오라버니라고 부른다고 했었는데.”
솔직히 기억나지 않았다. 저런 말을 지어낼 리 없으니, 자신이 얼마나 남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농담인 줄 알았지.”
“저는 단 한 번도 농담한 적이 없답니다.”
풍천교주는 그저 눈을 껌벅이며 듣고 있었지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교주를 존경하고 있음을.
“소교주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술 한 잔 대접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저야 언제든지 좋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름다운 누님께 술과 인생을 배울 기회를 어찌 놓치겠습니까?”
검무극의 너스레에 구숙은 활짝 웃으며 소교주의 반만이라도 닮으시라고 풍천교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렇게 시원시원한 성격의 장로가 있는가 하면 인사만 한 후에 조용히 탐색만 하는 왕효(汪梟)같은 장로도 있었다.
옆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검무극이 돌아보니 마불이 탁자에 걸터앉은 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녔기에 대화를 이끄는 재주가 있었다.
그때 교주 소백타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풍천교의 무인들은 일제히 예를 갖추며 그를 맞았다. 소백타의 얼굴에는 어제의 그 문양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요사스러웠던 분위기가 오늘은 순수하게 느껴졌다.
소백타는 검무극부터 챙겼다.
“오늘은 소교주님을 위한 날이니, 마음껏 드십시오.”
“새외의 술이 이렇게 맛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귀한 분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술이지요.”
다음으로 마불과 인사했고 마지막으로 풍천교주를 챙겼다.
“사부님,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우리 교주가 신경 써 준 덕분에 편히 잤네.”
일부러 다들 들으라고 우리 교주라고 표현했다. 배후가 어디에 어떻게 잠입해 있는지 몰라도 풍천교주는 소백타를, 그리고 풍천교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교주.”
“네, 사부님.”
“오랜만에 교로 돌아오니 문득 음뢰종이 보고 싶네. 볼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소백타와 단둘이 있고 싶어서 한 말이기도 했고, 실제로 음뢰종이 보고 싶기도 했다.
연회장을 나온 소백타는 풍천교주를 데리고 교주전으로 향했다.
‘어제 갔던 그곳에는 음뢰종이 없었는데?’
의아한 마음이었지만 풍천교주는 잠자코 소백타의 뒤를 따랐다.
교주전에 들어선 소백타가 태사의에 올라가 앉더니 손을 올려두는 곳에 내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사방 벽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벽 뒤에 장식장이 놓여 있었고 풍천교의 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기왕 내부를 바꾸는 것, 신물들 보관도 이렇게 바꿨습니다.”
“아주 정교한 기관이로군. 멋있네.”
물론 신물들 쳐다보는 재미로 살았던 풍천교주와는 맞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신물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것들을 다 챙겨서 신교로 갔었는데.
음뢰종은 태사의 뒤쪽 중앙에 놓여 있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음뢰종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음뢰종에 새겨진 악귀는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고월이 안부 전하라네.’
나란히 옆에 서 있던 소백타가 나직이 말했다.
“교를 떠나실 때 제게 하셨던 말 기억하십니까?”
순간 풍천교주는 흠칫했다.
‘내가 뭐라고 하고 떠났었지?’
그때의 자신은 정말 정신없었다. 어서 일을 끝내고 고월에게 돌아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그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앞서 구숙에게 들었던 말을 잊은 것도 그렇고.
이건 기억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삶의 태도의 문제다. 오직 자신의 감정에만 취해 상대를 잘 보지 않고, 상대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태도의 문제. 그래서 다 잊어버리는 거다.
자신에게 현실은…… 환술 속 세상보다 못한 세상이었나 보다.
음뢰종을 쳐다보던 풍천교주가 고개를 돌려 소백타를 쳐다보았다.
소백타는 차분히 그날 풍천교주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했다.
“나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너는 꼭 이루도록 해라.”
그 말을 들으니 기억났다. 그래, 이 말을 그에게 해주었다. 떠나는 사람이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너는 부디 오래 남아서 교주로 죽으라는 뜻으로 해준 말이었다.
소백타도 고개를 돌려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음뢰종의 악귀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저는 그 꿈을 이루려고 합니다.”
“교주 꿈이 무엇이오?”
왠지 나와서는 안 될 말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무림일통입니다.”
“!”
그래,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풍천교라는 크나큰 패권을 가진 수장이라면 한 번쯤 가져볼 수 있는 꿈이었으니까.
문제는 다음에 나온 말이었다.
“이제 그 첫발을 내딛을까 합니다.”
제320회 내 뒷물결이 그러더라.
낯설었다.
자신 앞에서 무림일통을 말하고 있는 제자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풍천교를 누구보다 잘 지켜나가리라 믿고 교주 자리를 물려줬던 제자였는데.
오죽했으면 그가 섭혼술에 걸린 것이 아닌지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백타에게는 그 어떤 섭혼술도 걸려있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섭혼술이면 어찌하냐고? 그런 섭혼술이 있었다면 이미 그자가 무림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무림일통의 첫발을 내디딘다고? 이 미친놈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교주 대접을 해주었다.
“어떻게 말이오?”
농담이었습니다, 사부님. 풍천교주가 기대한 말이었다. 그래, 껄껄 웃으며 넘어가자.
하지만 소백타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새외무림부터 일통해야겠지요.”
새외에 풍천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곳에도 많은 문파가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새외에서 풍천교는 중원에서의 천마신교와 같은 위치였다. 당연히 무림맹이나 사도맹과 같은 위치에 있는 세력이 있었다.
“설마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뜻이오?”
“피를 흘리지 않고 저들을 굴복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요.”
거기에 소백타는 한술 더 떴다.
“도와주십시오, 사부님. 사부님이 도와주시면 더 쉽게 새외일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본교를 위해서라도 도와주십시오.”
결국 풍천교주의 분노가 폭발했다.
“닥쳐라! 네 이놈!”
풍천교주의 몸에서 차가운 기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갔다.
쏴아아아아아!
소백타는 처음 이 말을 꺼낼 때 이미 사부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로 예상했는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겁을 먹지도 않았다.
“헛된 꿈이다!”
“왜 헛된 꿈입니까? 무인이 무림일통을 꿈꾼다는데 왜 헛된 꿈입니까?”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일지 모르고 하는 소리냐? 수천, 수만 명이 죽을 거다.”
풍천교주의 언성은 높아졌지만 소백타의 어조는 더 가라앉았다.
“사부님이 언제부터 사람들 목숨을 아끼셨다고요.”
“!”
풍천교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제자는 선을 넘고 있었다. 아니, 첫발을 내디딘다는 말을 꺼낼 때 그 발은 선 너머에 있었다.
“왜 그 꿈은 마교만 꾸고 무림맹만 꾸고, 사도맹만 꿀 수 있는 겁니까? 우린 꾸면 안 되는 꿈입니까? 어려서부터 제가 사부님이나 선배들에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중원진출입니다. 이럴 거였으면 그 말씀은 왜 그리들 하신 겁니까?”
이렇게 따지고 물으니 풍천교주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이 순간 풍천교주는 건방지고 똑똑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어른들 밤잠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그라면 이 멍청한 놈이 정신을 차릴 따끔한 말을 해줄 텐데. 자신이 해줄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넌 지금 제정신 아니다.”
소백타는 정말 미친놈처럼 음뢰종으로 걸어가더니 종을 쳤다.
뎅! 데엥!
음뢰종 소리가 교주전에 울려 퍼졌다. 마치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그렇게 듣고 싶었던 음뢰종 소리를 이렇게 듣다니.
풍천교주는 이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 종소리가 신호가 되어 휘장 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교주님 복귀 기념 깜짝 환영회입니다! 라고 할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백타는 자신을 만난 이후 가장 진지한 눈빛이었으니까.
“사부님은 어디 제정신으로 교를 떠나셨겠습니까?”
그래, 녀석의 말처럼 정말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미안함은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풍천교면 풍천교지 소백타는 아니었다. 내 것을 다 물려받은 놈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도 너만은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냐?”
“아뇨, 다른 사람은 못 해도 저는 할 수 있습니다.”
데엥!
다시 음뢰종이 울려 퍼졌다.
종에 새겨진 악귀가 자신을 쳐다보며 비웃는 것만 같아서 풍천교주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노는 충분히 끓었고 이제 넘칠 일만 남았다.
그때, 검무극이 했던 말이 마음에 울려 퍼졌다.
―해답은 교주님에게 없습니다.
아, 또 흥분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구나. 또 내 마음하고 싸우고 있었구나.
종소리가 잦아드는 소리에 맞춰서 풍천교주도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좋다. 그래, 네 꿈을 인정한다 치자. 한데 너! 아직 앙천대마기의 대성을 이루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무림일통을 꿈꾸는 거냐?”
차라리 환술이라도 극의에 도달했다면 또 모르겠다. 그 강함이 유혹하는 바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소백타가 앙천대마기의 대성을 이루려면 적어도 십 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소백타는 음뢰종을 쓰다듬으며 차분히 대답했다.
“비무대회가 열리면 무공실력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무림을 일통하는 일에는 다른 것이 더 중요할 겁니다.”
“다른 어떤 것?”
소백타는 대답하지 않고 풍천교주 쪽으로 걸어 나왔다.
“음뢰종도 봤으니 이만 돌아가시죠. 장로들이 사부님 기다리겠네요.”
태사의의 장치에 내력을 주입하자 신물 앞으로 벽이 내려왔다.
음뢰종 앞으로도 벽이 내려왔다. 벽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음뢰종의 악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너는 퇴물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안 돼. 장강의 뒷물결이 밀어내면 밀려나야지.
다행히 풍천교주는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냈다.
악귀 놈아, 그 뒷물결이 그러더라. 제발 마음속에서 이런 혼자만의 싸움, 하지 말라고. 내 뒷물결은 지겹도록 그 말을 해주는 뒷물결이다. 알겠냐, 이놈아!
풍천교주는 마음에서 회오리치던 풍랑을 가라앉히며 다시 소백타를 쳐다보았다. 그래, 난 지금의 너만 보겠다.
자신을 향한 눈빛에서 강력한 의지를 읽었다. 이놈, 진심이다.
“내가 말릴 것을 알았을 텐데 왜 말해준 거냐?”
풍천교를 떠날 때 말릴 자격을 잃으셨다, 이런 말을 예상했는데. 소백타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아뇨, 몰랐습니다. 제가 사부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혹시라도 도와주신다고 하실 수도 있잖습니까? 소교주 뒷바라지나 하는 신세, 질렸을 수도 있고요. 제 꿈을 이루는 것이 몇 배는 더 쉬워질 가능성이 있는 일인데, 당연히 말씀드려야죠. 자, 가시죠.”
소백타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아까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었다.
그 차분하던 제자를 이렇게 만든 놈은 누구일까?
한데 자신만만하게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소백타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었고, 자신이 그걸 못 본 것일지도.
제자에게 네 꿈이 뭐냐는 질문 한 번 안 던진 대가를 이제야 치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 *
객청으로 돌아온 풍천교주가 꺼낸 첫마디였다.
“나는 잘 모르겠네.”
풍천교주는 교주전에서 제자와 나눈 이야기를 검무극과 마불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감정이 격렬해졌다. 제자 앞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바람에 많이 참았다. 그게 다 터져 나왔다.
이야기를 다 들은 검무극과 마불은 깜짝 놀랐다. 새 풍천교주가 그런 일을 진행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자네처럼 대처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되더군. 일방적으로 당한 기분이네.”
풍천교주는 검무극 앞에서 괜한 자존심 세우지 않았다. 마불 앞에서도 마음에 걸리는 게 없는 걸 보니, 모래바람 맞으며 함께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보고 참으란 소리 말게! 자세히 보란 소리도 말게! 그냥 내 마음대로 소리치고, 내 마음대로 화내고, 내 마음대로 생각할 테니까! 어휴, 이 미친놈 하면서 뒤통수를 후려갈겼어야 했는데.”
듣고 있던 마불이 자넨 그게 어울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은 풍천교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노력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교주님, 잘하셨습니다. 환왕이 배후에 있으니 우린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합니다.
“교주님께 계획을 밝혔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일 겁니다.”
환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밝히는 것만큼이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풍천교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검무극도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자연스럽게 드는 한 가지 의문.
“만약 배후에 있는 자가 이번 결정에 영향을 미친 거라면, 새외를 전쟁으로 몰아넣어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풍천교주는 제자에게만 몰입하다 보니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
“뭐 때문이지?”
“이제부터 밝혀내야죠.”
환왕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풍천교를 장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는 쪽으로 유도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 환왕과 소백타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회귀 전의 풍천교는 새외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니 이렇게 사건도 바뀌는 것이다.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그 사람을 교주 자리에 앉힌 것을요.”
당연히라는 말이 나오려다가 목구멍에서 걸렸다. 정말 후회하고 있나? 그렇다면 왜 대답이 곧장 나오지 않는 걸까?
검무극이 다르게 물었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을 앉힐 겁니까?”
잠시 고민 끝에 풍천교주가 대답했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녀석을 앉힐 거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최선은 소백타였다. 다만 다시 돌아간다면 녀석의 꿈을 물어봐 줄 거고, 그 헛된 꿈이 자라기 전에 다른 꿈을 심어줄 거다.
누군가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시커먼 욕망을 툭툭 건드리더라도, 그건 왜 건드려 새끼야! 저리 안 꺼져? 라고 말할 수 있는 제자로 키워줄 거다.
“그럼 됐습니다. 지금이라도 제자를 바로 잡아주시면 되죠.”
“어떻게?”
“그 대답은 교주님께서 해주셔야지요. 여긴 풍천교니까요. 어떻게 할까요?”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만나야 할 사람이 있네.”
이목을 끌 필요가 없었기에 마불과 호위들은 남겨두고 풍천교주와 은밀히 객청을 빠져나왔다.
* * *
검무극이 풍천교주와 함께 도착한 곳은 육대장로 중 수석장로였던 성야의 집이었다.
교주 시절 풍천교주가 가장 아꼈던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네.”
풍천교주는 그를 믿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황무지에 그의 집이 덩그러니 있었다. 휑한 느낌이지만 또 그만큼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사방이 뻥 뚫린 곳에 있었기에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성 장로.”
마당에서 풍천교주가 불러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무극과 풍천교주가 눈빛을 교환한 후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먼지가 쌓인 걸로 볼 때 집을 비운 지 꽤 된 것 같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풍천교주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성야의 부재가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내부를 살펴보았다. 반듯하고 깔끔하고. 집이 정리된 것만 봐도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가족은 없습니까?”
“원래 혼자였던 사람이네.”
“그와 가장 친했던 사람은 누굽니까?”
잠시 고민하던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성야가 누구와 친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 놓고선 제일 아끼는 사람이라 하고 있다. 남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만 신경 쓰고 살아온 인생이다.
“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었는지 모르겠군.”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다들 비슷하죠.”
“자넨 다르지 않나?”
저도 같았습니다. 아니, 저는 더했습니다.
“저야 소교주 아닙니까?”
“난 교주였다고!”
“교주님!”
“그래, 교주.”
“아뇨, 이것 좀 보시라고요.”
검무극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책상 옆에 불에 탄 종이가 남아 있었다.
“집이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 재를 치우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내용을 보고 급하게 달려 나갔던 모양입니다.”
아쉽게도 타다 남은 종이 귀퉁이만 남았을 뿐,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 종이를 손으로 만져보며 유심히 살피던 풍천교주가 놀라운 말을 했다.
“자네 이 내용 복원할 수 있나?”
“아뇨.”
“난 할 수 있네.”
그 말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그런 환술도 있습니까? 그거 저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 환술은 없네.”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타다 남은 재를 그냥 두고 집 밖으로 나갔다.
검무극이 그를 뒤따르며 물었다.
“복원하신다면서요?”
“복원하러 가는 거네.”
“타다 남은 재라도 가져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종이는 특수한 약물이 처리된 밀지(密紙)라네. 열을 가하면 진짜 내용이 나오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자 풍천교주에게서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내가 고른 거니까.”
“풍천교에서 쓰는 밀지입니까?”
“아니네.”
그런데 어떻게 교주가 알지?
한데 자신이 고른 거라고? 풍천교주가 저 종이를 골랐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싸고 품질 좋은 것을 골라야 한다고 고월이 어찌나 잔소리했었는지. 자네 돈 아껴준다고 말일세.”
그 말에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골랐다는 말에, 내용을 복원할 수 있다는 말에 이미 답이 있었다.
“은월에서 쓰는 밀지군요.”
제321회 본교는 허락하지 않는다.
변두리 외진 숲속에서 고월이 보낸 은월의 무인을 기다렸다.
풍천교주와 내가 작정하고 움직이자 우릴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환왕이 직접 움직이면 모를까, 우리 움직임을 쫓아서 감시할 수 있는 은신술과 경공술은 아버지를 호위하는 휘 아저씨 정도의 실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교주님 말씀대로 성 장로가 신의가 깊은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장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겁니다.”
“제자 놈이 압박을 가해서 쫓아냈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죠. 새외일통을 하겠다는 것에 필사적으로 반대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종된 상태.
“소백타가 성 장로를 죽였다고 생각하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풍천교주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랬다면……나는 녀석을 용서하지 않을 거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풍천교주와 제자와의 문제였으니, 그의 뜻에 달린 일이었다.
그때, 그곳으로 한 남자가 도착했다.
황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자신이 은월의 새외 책임자라고 했다.
그의 걸음걸이만으로도 무공과 경공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평범해 보였다. 은월에서 활약하는 무인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어두면 평범해서 절대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말씀하신 것을 알아 왔습니다. 성 장로가 우리에게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정보는 한 철방에 관한 정보였습니다.”
“그곳이 어디요?”
그러자 예상치 못한 한 곳이 등장했다.
“신웅철방(新雄鐵房)입니다.”
풍천교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신웅철방? 그런 곳도 있었나?”
풍천교주도 몰랐던 새외의 신웅철방.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규모도 크지 않아서 모르셨을 겁니다.”
황의 설명에 풍천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모르니 당연히 나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나는 신웅철방에 대해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신웅철방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중원제일철방.
화무기와 십이지왕이 무림을 차지했을 그 시절, 신웅철방은 중원에서 가장 유명한 철방이었다. 중원 각지에 수백 개의 지역 철방을 거느리고 대부분의 큰 문파에 병장기를 공급하는 그야말로 최고의 철방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병장기를 팔아 엄청난 부를 쌓았다.
‘신웅철방의 시작은 이곳에서부터였구나!’
신웅철방은 화무기나 십이지왕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 역시 그들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
“뜻밖이군. 성 장로가 알아보려 했던 것이 화양문(華陽門)이나 흑사방(黑沙幇)일 줄 알았는데.”
세력 크기만 따진다면 풍천교가 천마신교요, 화양문이 무림맹, 흑사방이 사도맹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백타가 새외일통을 하겠다는 말은 화양문과 흑사방을 쳐서 무릎을 꿇리겠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그들과 관련한 조사라 예상했는데, 처음 듣는 철방이 나왔으니 풍천교주의 의문은 당연했다.
“그가 왜 신웅철방에 관해 조사를 부탁했는지 혹시 알고 있나?”
풍천교주가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대답은 역시였다.
“이유까진 알 수 없습니다. 여기 그가 가져간 정보입니다.”
“고맙네.”
황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풍천교주와 함께 그 자리에 서서 신웅철방에 관한 자료를 나눠 읽었다. 정보는 다양했다. 방주를 비롯해 그 아래에서 일하는 이들의 신상 명세가 있었고, 병장기는 얼마나 생산하며 어느 문파에 얼마나 공급하는지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곳의 건물 배치도까지 있었다.
“분명 제자 놈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과 신웅철방이 관련 있을 거네. 성 장로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은월에 조사를 맡겼던 거고.”
“제 생각도 같습니다. 성 장로는 이 자료를 보다가 달려 나갔습니다. 분명 성 장로가 주목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자료를 읽으며 풍천교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숫자는 딱 질색인데.”
자료의 상당수가 숫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얼마 생산하고 얼마나 벌고. 얼마나 쓰고.
그때 내 눈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이것 보십시오. 작년에 구입한 철의 양입니다. 재작년과 비교해서 열 배는 많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여긴 작년에 그들이 판매한 병장기 양입니다.”
“사들인 철에 비해서 병장기를 그렇게 많이 팔지 못했군. 차이가 너무 나는데?”
“그런데 올해는 더 많은 철을 구입했습니다. 재고가 많이 남았을 텐데요.”
“확실히 수상하군.”
우린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신웅철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신웅철방을 방문하기 전 우리는 면사가 달린 죽립을 하나 사서 얼굴을 가렸다. 우린 손님으로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규모가 큰데?”
“아까 자료에 의하면 작년에 철방 근처 땅을 사서 확장했습니다.”
짐을 실은 수많은 수레가 오가고 있었고, 쇠 두드리는 소리며 풀무질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안내하는 이가 우릴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을 사러 왔소.”
“검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만.”
“상품의 검으로.”
“따라오시지요.”
남자는 우릴 어디론가 안내했다. 그를 따라 걸어가면서 주위를 살폈다. 이렇게 손님으로 와서 좋은 점은 당당하게 그곳을 살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마다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사내들이 병장기를 만드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냥 봐서는 아무런 수상한 점도 없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철방이었다.
남자가 안내한 곳에 들어가자, 그곳은 여러 검이 전시되어 있었다.
“편히 살펴보시죠.”
그곳의 검을 살펴본 후 남자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소?”
“극상품이 있습니다만, 값이 많이 비쌉니다.”
“봅시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잠시 후 앞서 안내했던 남자가 아니라 근육질의 젊은 남자가 들어섰다.
“호경(胡京)입니다.”
호경.
이 사람 역시 은월에서 받은 정보에 있던 인물이다. 방주가 외부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 철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이 호경이었다. 손님으로 온 이유도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극상품으로 보시고 싶다고요?”
그가 가져온 상자를 열어 검을 건네주었다.
검을 뽑아서 살펴보았다. 명검이나 보검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검 중에서는 정말 잘 만들어진 검이었다.
“이것으로 열두 자루 주시오.”
“열두 자루씩이나요?”
호경은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풍천교주도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사려는 건 아니지?
―살 겁니다. 멀리 와서 고생하는데 호위들 검이나 한 자루씩 사주게요.
―자네 돈으로 사게!
―물론이지요.
큰 고객이 될 수 있기에 호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어디서 나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죽립 앞에 내려선 면사를 손으로 툭 건드렸다. 밝히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본 방과는 처음 거래를 하시는 것 같아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인을 많이 상대하는 사람인지라 호경은 말과 행동이 아주 정중했다.
“소개해 준 사람이 있소.”
“누굽니까?”
“풍천교 성 장로요.”
성 장로가 언급될 때 호경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아, 그러셨군요. 아주 훌륭하신 분이지요.”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느낌상 적어도 호경은 성 장로의 실종과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실종된 것이 아닌가? 자발적으로 몸을 숨긴 거라면 다행인데.
“그럼 검은 직접 들고 가시겠군요.”
“그렇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경이 검을 준비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난 풍천교주를 그곳에 두고 재빨리 밖으로 나왔다. 은월의 정보에는 이곳의 건물 배치도까지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중간에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성을 이룬 암영보가 그들을 눈뜬장님으로 만들며 나를 철방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이곳저곳 건물들 사이를 누볐다. 쾌속보도 썼고, 암영보도 썼으며 점멸보도 썼다.
가장 구석진 곳에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그 안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그곳 주위에 무인들이 은신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철통같은 경계로 미뤄볼 때 방주가 검을 만드는 곳으로 보였다. 이것만 봐도 결코 평범한 철방이 아니다.
과연 대성을 이룬 나의 암영보를 그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오늘 그 시험을 하진 않았다. 내가 찾는 건 방주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들이 구입한 철을 찾고 있었다. 그 많은 철이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인데, 곳곳을 다 뒤져도 철이 보관된 곳이 없었다.
‘비밀리에 다 만들어서 어딘가로 내보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철방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그때,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보였다.
은월의 자료에 있던 작년에 그들이 사들인 땅이었다. 뭔가 활발하게 일을 꾸미고 있던 차에 사들인 땅이었는데. 저렇게 방치할 것 같으면 왜 사들인 것일까?
나는 수십 가닥의 기를 동시에 발출해서 주위를 살폈다. 혹시 그곳에 은신해 있는 이가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그때 공터 바닥에서 뭔가를 느꼈다. 처음에는 은신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 모든 기가 그곳에 집중되었다.
* * *
“검 준비됐습니다.”
호경이 긴 혁낭에 가죽으로 잘 포장한 검을 열두 자루 꽂아서 가져왔다.
방에는 풍천교주 혼자만 있었다.
“다른 분은 어딜 가셨습니까?”
“잠깐 답답하다고 바람 쐬러 나갔네.”
“제가 모시고 오겠습니다.”
호경이 밖으로 나가보려는데, 풍천교주가 말했다.
“일단, 검 값부터 치르세.”
시간을 벌려고 붙잡았지만 풍천교주는 내심 의심했다.
‘설마? 소교주는 여기까지 계산한 건가? 내가 계산하면서 시간을 벌 거라고. 그래, 이 무자비하고 욕심 많은 소교주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고월아, 고월아. 내가 새외까지 와서 뜯기고 있다.’
풍천교주가 값을 계산했다.
최대한 천천히 돈을 꺼내서 두 번, 세 번 세어서 확인했다.
계산을 끝냈을 때도 검무극이 돌아오지 않자 호경이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돌아온 검무극은 건물 앞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검이 다 준비되었습니다.”
* * *
신웅철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서고 나서야 풍천교주에게 수색 결과를 말해주었다.
“그 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어디에 있던가?”
“지하에 비밀 작업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병장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 발출을 통해 땅바닥 아래에 넓은 지하공간이 있고, 그곳에서 끊임없는 미세한 진동과 소음이 느껴지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전쟁 준비를 그곳에서 하고 있었군.”
전쟁에는 막대한 물자가 필요했다.
물자도 물자지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이쪽의 준비를 들키지 않는 것. 소백타는 신웅철방과 손잡고 은밀하게 전쟁물자를 준비해 온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환왕이 이들 둘을 연결해 줬으리라.
“그곳에 상당한 물자가 쌓여 있을 겁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제가 소백타를 한 번 만나야겠습니다.”
드디어 그를 독대할 순간이 된 것이다.
“어쩌려고?”
“교주님께 그 계획을 밝혔다는 것은 제게도 그 사실이 들어갈 것을 예상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와 할 이야기도 있을 겁니다. 패 하나는 깠으니 또 다른 어떤 패를 가졌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풍천교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제자가 임자 만났구나, 싶을 것이다.
“참, 그리고 이건 검 사는 데 든 돈입니다. 받으십시오.”
“됐네. 젊은 애들에게 내가 선물한 셈 치세.”
“나중에 또 후회하시려고요?”
“두고두고 이걸로 자네 탓을 하려면 내가 사야지.”
매고 있던 검이 든 혁낭을 그에게 주었다.
“그럼 직접 주십시오. 교주님이 주시면 호위들이 정말 좋아할 겁니다. 전 교주전에 다녀오겠습니다.”
풍천교주가 혁낭을 받아들며 말했다.
“내가 생색낼 동안 자넨 진짜 뒷물결 맛을 보여주게.”
* * *
소백타를 만나러 교주전에 들어섰을 때, 그는 벽에 걸린 동경 앞에서 얼굴에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소교주,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동경 속에서 소백타가 인사를 건네왔다.
“천천히 하십시오.”
나는 그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세상에 없을 독특한 선이 만들어지는 것을 구경했다.
“본교의 문양은 모두 세 개요. 본교를 상징하는 교화(敎畵), 전쟁에 임할 때의 문양인 천화(天畵), 죽었을 때 그려주는 풍화(風畵). 지금 내가 그리는 문양은 전쟁에 나설 때 그리는 천화요.”
과연 그 색감이나 모양이 강렬했다. 첫날에 본 것이 교화였는데 이제 두 번째 천화를 보게 된 것이다.
“어떻소? 한 번 그려보겠소?”
“사양하겠습니다. 제 소문 못 들으셨나 봅니다. 저는 평화주의자라서요.”
동경 속에서 소백타가 옅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겁이 많으신가 봅니다.”
“오히려 겁이 많은 사람이 전쟁을 벌이는 것 아닙니까?”
흠칫 소백타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겁쟁이를 조심하시오. 그들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난 차분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다.
“교주에게 말하면 내 귀에도 들어올 줄 알았을 텐데, 왜 밝힌 거요?”
“내가 기억하는 사부는 본교의 중대사를 남에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사부도 그럴 거요. 사부가 기억하는 당신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는 제자가 아니었겠지.”
동경 속에서 그가 웃었다.
“이러는 진짜 이유가 뭐요?”
“당신들 허락을 받으려고 그랬소. 어차피 우리가 전쟁을 벌이려면 허가든 묵인이든 당신들 허락이 떨어져야 하지 않소? 그냥 저질렀다간 그걸 명분으로 우릴 칠 수도 있지. 당신들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 아니오?”
이윽고 소백타가 얼굴에 천화를 완성하며 돌아섰다.
“우리의 전쟁을 허락해 주시오.”
자신만만한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허락하지 않더라도 그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무엇이 너를 이토록 흥분하게 만들었나? 무엇이 너를 이토록 자신감이 넘치게 했나? 무엇이 새외의 모래바람을 본교의 칼날이 뚫지 못할 거라 너를 현혹했나?
“좋소. 우리의 공식 입장을 밝히겠소.”
그의 패를 보려면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것이다.
나는 차가우면서도 권위적인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본교는 그대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소백타의 눈빛에 알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니 세안하고 다 지우고 오시오.”
제322회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소.
소백타의 몸에서 사나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본교는 그대의 전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얼굴을 씻고 오라는 말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모욕감을 느꼈다. 자존심을 제대로 건든 것이다.
‘네가 그렇게 강해?’
귀신 울음이 사방에 울려 퍼지며 검무극을 귀기로 짓눌렀다.
아직 대성을 이루지 못한 마공이지만 앙천대마기였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하며 검무극의 몸을 보호했다. 검무극이 편안한 얼굴로 서 있자 소백타는 더욱 내공을 끌어올렸다.
‘네가 정말 그렇게 강하냐고!’
정말 강했다. 귀기에 눌리기는커녕 오히려 성큼성큼 소백타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으니까.
“당신이 가진 게 뭐기에 이 난리요? 뒷골목 파락호들 기루 뺏기도 아니고, 대체 뭘 가졌기에 새외일통을 논하고 무림일통을 꿈꾸는 거요?”
검무극은 소백타 앞까지 다가섰다.
“당신 얼굴의 이 정신 사나운 문양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 같진 않은데?”
소백타의 눈빛에 어떤 결의가 스치던 그 순간, 그의 또 다른 패가 뒤집혔다.
두 눈에서 선홍빛 기운이 흘러나오면서 앞서 나왔던 귀기와 합쳐지기 시작했다.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저 기운은 앙천대마기가 아니다!’
다음 순간, 시뻘건 기운이 검무극을 덮치면서 주위가 바뀌었다.
검무극이 서 있는 곳은 교주전이 아니었다.
주변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벽과 바닥이 꿀렁대고 있었다. 짐승의 내장 속에 있는 기분이 드는 이곳, 와본 곳이다.
그래, 화원의 여인이었던 환여가 만들었던 그 공간!
하지만 환여가 만들었던 공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색이 달랐고 모양이 달랐다. 풍천교주의 앙천대마기의 기운과 예전에 느꼈던 환여의 기운이 모두 느껴졌다.
‘두 무공이 합쳐졌구나!’
합쳐진 기운은 더욱 강력했다. 물론 두 무공을 합치게 해준 사람은 환왕일 거다.
소백타가 뭔가 바뀐 것처럼 느껴진 것은 그가 섭혼술에 당해서가 아니었다. 두 강력한 무공이 합쳐지면서 그것이 인성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거기에 환왕의 설득과 세뇌가 더해졌을 테고.
환왕이 자신의 무공을 제공해서 그를 더 강하게 만들어줬다고?
천만에! 만약 그런 효과를 낸다면 소백타의 무공을 훔쳐서 자신이 흡수했을 것이다.
‘이 합쳐진 무공의 끝은 죽음이다.’
검무극은 확신했다. 환왕이란 사람은 이미 회귀 전의 삶에서 보여줬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임을.
이 공간의 정면에는 사람의 얼굴이 튀어나오던 만리전벽이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 누군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소교주, 보여달라고 했소?”
얇은 막 뒤에서 튀어나온 얼굴은 소백타였다. 그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구화마공을 익힌 당신을 죽일 순 없겠지. 대신 이곳에 영원히 가둬버릴 순 있소.”
무림일통의 자신감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마교 소교주까지 가둬버릴 수 있다고 믿는 이 강력한 무공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마지막 패도 알 수 있었다. 환왕이 무공을 전수해줬다면, 그가 도와줄 거란 믿음도 있을 것이다. 이 합쳐진 무공에 환왕까지 돕는다?
이제야 그의 흥분과 자신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무공은 무슨 무공이오?”
검무극의 물음에 소백타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앙천혈령술(殃天血令術)!”
그가 자신할 만큼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건 앞서 사도맹이 팔았던 불안정한 내공증폭제 광폭을 복용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강해지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모르오?”
소백타가 웃었다. 출렁이는 막에 드러나는 그의 표정에서 그 어떤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가는 당신들이 치러야 하지 않소? 구화마공만 믿고 안주해온 당신들이! 어떻소? 이제 충분히 내 능력을 보았소?”
검무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그에게 소백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서 환왕에 대해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소.”
검무극이 흑마검을 뽑아 들자 소백타가 비웃었다.
“막이 얇아 보이니 쉽게 찢어질 것 같겠지.”
여유로운 웃음으로 막을 뒤흔들고 있는 소백타는 결코 알지 못했다.
혈안정수와 신안술을 발휘한 검무극의 눈에는 막을 파훼할 수 있는 푸르스름한 선이 보인다는 것을.
물론 모든 파훼법이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 섭혼마존과의 싸움처럼 생사가 오가는 위험을 넘어서야 찾아낼 수 있는 환술이나 사술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만리전벽의 막을 자르는 파훼법은 검무극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쉭!
흑마검이 가볍게 허공을 갈랐다.
찌이이이익.
마치 천이 찢기듯 막이 찢어졌다. 그 바람에 막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던 소백타가 안으로 고개를 푹 들이밀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경악했다. 심지어 검무극은 막을 베면서 자신의 얼굴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검무극은 손을 쑥 집어넣어서 벽 너머에 있던 소백타의 멱살을 잡은 후 안으로 잡아당겼다.
소백타가 그곳으로 끌려 들어왔다.
검무극은 바닥에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여기서 영원히 못 나간다고 했소? 평생 나하고 있을 자신 있소?”
소백타가 반사적으로 공간을 없앴다. 공간이 없어지면서 교주전으로 돌아오는가 싶었는데.
스스슷.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공간으로 돌아왔다.
“!”
소백타는 깜짝 놀랐다.
공간을 없애는 구결을 외웠고 분명 교주전으로 다시 돌아왔었다. 한데 다시 그 공간으로 끌려오듯 되돌아온 것이다.
다시 구결을 외웠다. 하지만 벽과 바닥이 출렁대며 요동칠 뿐, 만들어진 공간은 없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됐다!’
그는 내심 당황했다. 이 공간을 만드는 법을 배운 이래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시선이 찢어진 벽을 향했다.
‘저것 때문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이 만들었던 공간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색도 다르고 느낌도 달랐다.
‘저걸 찢는 바람에 뭔가 달라졌다!’
소백타는 알 수 없는 불길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침착하게 다시 해보시오.”
검무극의 말에 다시 시도했지만, 여전히 공간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백타는 만리전벽으로 달려가서 검무극이 찢었던 곳으로 다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찢어진 막 뒤에 새로운 막이 생겨 있었다.
진기를 주입해서 막을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늘어나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백타가 검무극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당신이 다시 저 벽을 찢어보시오.”
검무극이 검을 뽑아서 막을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막은 찢어지지 않았다. 찔러도 베어도 막은 늘어나고 출렁일 뿐이었다.
“아까는 어떻게 찢은 거요?”
“나도 모르겠소. 당신 얼굴이 날 놀리는 것을 보니까 화가 나서 찢었는데. 저쪽에서 얼굴을 들이밀어야 찢어지는 거요?”
검무극이 되물었지만 소백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도 몰랐으니까.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 설마 못 나가겠소?”
다소 여유로운 검무극과는 달리 소백타의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 태평한 자는 이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모른다. 공간을 없애지 못하면 여기서 굶어 죽게 되는 거다.
“내공이 소모되고 있소?”
소백타가 자신의 내공을 살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무극이 벽에 털썩 기대앉으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아니었다면 선천진기가 고갈돼서 죽었을 테니까. 쉬었다 다시 해보시오.”
검무극의 말이 옳다. 흥분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소백타는 침착하게 벽을 살폈다. 내장처럼 꿈틀거리는 벽의 움직임이 잦아들고 있었고 서서히 색깔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벽은 죽어가고 있었다.
“앙천대마기와 같은 대단한 마공에 다른 마공을 합쳤는데 부작용이 없으리라 생각했소?”
그랬다. 소백타는 부작용 따윈 없을 거라 믿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소백타는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마음을 다스리고 내공도 채워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도하려는 것이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눈을 떴을 때 검무극은 벽을 살피고 있었다.
소백타가 침착하게 다시 공간을 없애는 구결을 외웠다. 하지만 여전히 실패였다.
바로 그때였다.
주르르르륵.
사방 벽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듯 벽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멈추지 않았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핀 소백타는 절망했다.
“피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
바닥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핏물이 차오르면 결국 익사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환술 속에서 핏물에 익사해 죽는다고? 그것도 마교 소교주와 함께?
소백타는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맹렬한 적개심이 치밀었다. 소백타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에서 시뻘건 기운이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소백타가 검무극을 향해 강기를 발출하려고 손을 내뻗었지만 검무극은 한 발 더 빨랐다. 암영보로 쇄도한 그가 일격을 날렸다.
퍼억!
가슴을 맞은 소백타가 날아가 벽에 부딪힌 후 바닥에 쓰러졌다.
검무극은 피에 잠긴 그를 잡아 일으켜서 내공을 제압했다. 어느새 피는 무릎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왜 나 때문이오? 자기가 만든 것도 못 없애면서 새외일통을 하겠다고 설쳐댄 당신 때문이지.”
검무극이 사정없이 소백타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건 당신 사부 몫! 당신 사부가 당신 만나고 돌아와서 그러더군. 어휴, 이 미친놈 하면서 뒤통수를 후려갈겼어야 했다고.”
소백타가 이를 악물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지금 검무극과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피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소백타는 차오르는 핏물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였다.
이런 와중에 검무극이 그를 자극했다.
“당신 사부가 교주 자리를 물려줬으면 그걸 지켜낼 생각을 했어야지. 자기에게 주어진 복도 못 지키는 주제에 뭘 하겠다고!”
“복? 대체 무슨 복?”
복 받았다는 말은 그에게 역린 같은 말이었다.
“원래도 나는 교주 자리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더 일찍 물려받았으니 좋은 거잖아?”
“좋다고? 그때의 난 아직 교주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었는데? 더 수련해서 앙천대마기의 대성을 이룰 때쯤 물려받아야 할 자리였다. 한데 사부는 나에게 교주 자리를 내던지고 가버렸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것들이 터져 나왔다.
“내게 그러더군.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많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 그 사람들 사부를 따르지 날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왜 그걸 몰라? 사부 앞에서 하는 말과 내 앞에서 하는 말이 다르다는 걸 왜 모르냐고!”
피는 어느새 배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사부가 떠나고 내가 어땠는지 아나?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어. 누가 내 자리를 노리지는 않나? 속으로 날 무시하는 건 아닌가? 암살당할까 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지. 그래놓고 뭐?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도 너만은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언뜻언뜻 느껴졌던 치기는 바로 사부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된 것임을.
‘때문에’ 자리에 ‘덕분에’를 넣고 버티고 이겨냈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오직 그만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지.”
환왕은 그의 원망과 분노, 두려움의 틈을 비집고 파고들었으리라.
소백타는 이걸 말하고 싶었다. 빌어먹을 사부보다 그 사람이 백 배 더 나은 사람이라고.
“그는 혈교의 마지막 후예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환왕과 환여를 끝으로 더는 혈교의 무공이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조용히 살아가려고 했는데, 내가 사부에게 버림받고 교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변했다고 했지.”
환왕은 한 인간이 가장 약한 순간,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는 척했을 것이다. 혈교의 마공을 가르쳐주며 그의 마음을 녹였으리라.
소백타가 이제 가슴까지 차오른 핏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피를 거울삼아 핏물을 찍어 마지막 문양을 얼굴에 그리기 시작했다.
세 문양 중 죽은 사람의 얼굴에 그리는 풍화였다. 물론 핏물로 잘 그려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 그려준 천화로 싸움터에 나가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설마 그 사람이 교주전의 화공이었소?”
이제 마지막이라 여겼는지 소백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얼굴 문양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가르쳐준 사람이지.”
드디어 환왕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준 사람이지.”
피는 이제 턱밑까지 차올랐다.
‘이제 죽는 건가?’
소백타는 문득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빛에 알 수 없는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뭐가 좋아서 웃고 있지?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마지막까지 잘난 척이지?”
“평소의 나라면 정말 잘난 척 많이 했겠지만, 오늘은 많이 참았소.”
이어진 말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공간을 없애는 당신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았소. 내가 성공했을 뿐이지.”
“뭐?”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난 당신 사제가 되겠군.”
“무슨 헛소리냐?”
“내게만 전수해줬으니 당신은 알 수가 없지.”
핏물은 얼굴까지 차올라서 까치발을 해야 대화할 수 있었다.
“당신 사부가 이곳을 펼치고 접을 때마다 항상 하는 동작이 있소.”
검무극이 핏물 밖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소백타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핏물은 두 사람 얼굴 위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핏물 속으로 잠겨 들던 바로 그때, 밖으로 내민 검무극의 손가락이 딱하고 튕겼다.
제323회 비교하려면 이렇게 하시오.
검무극과 소백타는 교주전에 서 있었다.
핏물이 차오르던 지옥 같았던 환술 속 세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백타는 멍한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핏물이 코와 입으로 들어왔었는데. 이제 진짜 죽는구나 절망했었는데.
‘우리가 죽었나?’
하지만 죽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이 순간이 너무 생생했다.
소백타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다가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죽은 게 아니었다. 눈앞에 담담하게 서 있는 검무극도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앞서 소백타가 앙천혈령술로 만들어낸 공간을 없애고 다시 교주전으로 돌아왔을 때, 검무극은 시공이환술을 펼쳐서 앞서 있던 곳과 흡사한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을 펼칠 줄 안다는 것을 모르는 소백타였기에 당연히 자신이 만들었던 공간으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시공이환술이 펼쳐지고 난 후부터 검무극의 모든 말과 행동은 연기였다.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였고, 이제 환왕이 누군지 알아냈다.
그런 내막을 알지 못했기에 소백타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고 있소.”
아직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환왕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소백타와 풍천교주와의 갈등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했으니까. 아니, 검무극에게는 그게 더 중요했다.
“나 천마신교 소교주요.”
풍천교주에게 시공이환술을 배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사부에 대한 반감이 많은데, 그런 말을 했다간 감정만 더 상할 것이다.
“그대가 풀었다는 거요?”
검무극의 목적이 환왕이 누군지를 밝히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소백타는 화공에 대해 말한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소백타는 그 공간에서 어떻게 나왔는지가 궁금했다.
“우리가 구화마공만 믿고 안주해왔다고 했소?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나나 아버지를 만난 적도, 심지어 본교에 와본 적도 없는 사람일 텐데, 왜 그 사람 말을 믿는 거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소백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일단 나와 같이 갑시다.”
“어딜 가자는 거요?”
“당신 사부를 만나서 풀어야 할 것이 있지 않소?”
핏물에 잠기면서 사부에 대한 마음을 토해낸 그였다.
하지만 막상 사부를 만나서 그 말을 한다고 생각하니 소백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죽음을 앞두었기에 사부에 대해 말한 것이지, 직접 만나서 자신의 심정을 밝힐 자신은 없었다.
“사부와는 풀 것 없소.”
검무극은 강요하지 않았다. 막상 당사자들끼리 만나면 또 지금 마음과는 다를 테니까. 어떻게든 그를 데려가는 것이 중요했다.
“알겠소. 두 사람 사정이니 참견하지 않겠소. 그래도 가긴 갑시다. 다 같이 있는 데서 드릴 말씀이 있소.”
소백타도 대체 어떻게 환술에서 빠져나온 것인지 궁금한 점이 남아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그렇게 소백타와 함께 교주전을 나섰다.
* * *
“자네들 소교주가 자네들을 위해 산 검이네.”
풍천교주는 신웅철방에서 사 온 검을 호위들에게 나눠주었다. 생색은 내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온 검무극을 위해서 그가 산 것으로 해준 것이다.
“소교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교주전에 들렀다 올 거네. 자네들 먼저 가져다주라고 했네.”
검을 확인한 호위들은 크게 기뻐했다. 자고로 무인에게 병장기 선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선물 받은 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검보다 더 좋은 검이었다.
“명검, 보검 다 좋지만 자고로 병장기는 자기 손에 익은 것이 최고라네. 다만 그 최고가 부러져서 다른 검을 들고 싸워야 할 때가 살다 보면 한 번은 온다는 점이 문제지. 그러니 자네들 소교주처럼 길에 떨어진 나뭇가지 주워서 싸워도 될 정도가 될 때까진, 이 검 저 검 다양하게 수련하게. 무인은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네. 걱정 많은 무인이 오래 사는 법이지.”
덕담처럼 말해줬지만 풍천교주의 깨달음이 깃든 말이었다.
호위들은 일제히 포권하며 감사를 전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풍천교주가 거처로 들어왔다.
마불은 차를 마시며 독왕이 준 독초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네 진심으로 그걸 캘 생각인가?”
“이곳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캐 볼 생각이네. 날이 더 추워지면 캘 수 없는 것들도 제법 있네.”
원래 마불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풍천교주였기에 이런 그가 적응되지 않았다.
“독왕과 이만큼이나 친한 줄은 몰랐군.”
“그래서가 아니네.”
마불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자넨 새로운 일을 해본 적이 있었나? 풍천교주로 살면서 반복했던 일 말고 아예 새로운 일 말일세.”
물론 있었다. 고용할 사람 직접 뽑기도 하고, 밀지도 사고. 고월과 은월을 만들러 중원을 다니며 했던 대부분이 새로운 일이었다.
“나는 약초 캐는 일이었다네. 찾아야 하는 약초를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은 난생처음 느껴본 것이었지.”
또한 자신이 캔 독초 때문에 독왕은 정말 기뻐했다. 자신의 행동으로 누군가 이렇게 기뻐했던 적이 있었던가?
놀랍게도 그게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본 적 없었고, 무인으로 살면서도 없었다. 마존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그렇게 기뻐할 일이 있었겠나?
“누군가를 두렵게 만들면서 한평생을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그래서 몰랐다. 누군가를 기쁘게 했을 때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뭔가를 얻은 기쁨보다 남의 기쁨에서 더 큰 기쁨을 느끼다니.
잠시 두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풍천교주는 마불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되었나?”
풍천교주는 신웅철방에서 있었던 일을 마불에게 말해주었다.
“그동안 자네 제자가 꽤 바빴군.”
“누굴 탓하겠나?”
“자넨 원래 남 탓하던 사람이잖나?”
“맞아. 자넨 이렇게 미운 말 잘하던 사람이었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이런 독설이 낯설다. 한 사람만 바뀌었다면 이렇게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변했고, 두 사람 모두 그 변화에 만족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같은 사람이었다.
“소교주는?”
풍천교주가 창밖 저 멀리 교주전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자 놈에게 갔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으니 지금쯤 제자 놈의 마음에 있는 시커먼 구멍을 들여다보고 있겠지.”
* * *
검무극과 소백타가 거처로 들어왔다.
제자가 함께 온 것을 보자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뭔가를 알아냈음을 직감했다.
“사부님.”
“어서 오시게, 교주.”
소백타는 지난번 만났을 때와는 달리 자신을 어색하게 대했다. 확실히 뭔가 일이 있었구나 싶어서 풍천교주는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자 놈이 숨겨둔 패는 알아냈나?
―배후가 누군지까지 알아냈습니다.
과연 소교주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긴, 자신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제자 놈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제자 놈은 왜 데려온 건가?
―교주님과 풀어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아서요. 한데 쉽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 할 겁니다.
마불이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나는 잠시 나가 있겠네.”
그러자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마불님도 함께 하시죠.”
지금 소백타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이미 말했으니, 이젠 마불이 있는 게 그의 입을 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때론 당사자보다 지켜봐 줄 제삼자가 더 필요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검무극과 소백타, 풍천교주와 마불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나를 데려온 거요?”
“우선 내게 했던 말을 사부께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소백타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나는 사부님과는 풀어야 할 일이 없다고 분명 말했소.”
“그럼 평생 당신 사부는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 모르고 살아갈 거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바요?”
물론 소백타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부에게 그때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사부에게 떼를 쓰는 애처럼 보이기도 싫었고, 굳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었다.
그때 풍천교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 원망했느냐?”
“아뇨.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오히려 저를 교주로 선택해주셔서 감사해야죠.”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소백타의 말에 깊은 원망의 감정이 깃들어 있음을. 지금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쭉 사부님을 원망했습니다.
검무극은 궁금했다. 풍천교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풍천교주는 제자가 성 장로를 죽였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성 장로의 생사를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과연 부드럽게 그를 대할 수 있을까?
한참을 말없이 소백타를 쳐다보던 풍천교주가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다, 제자야.”
풍천교주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러자 오히려 소백타가 당황했다. 사부가 이렇게 사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사과를 하십니까? 전 사부님 원망하지 않는다니까요.”
풍천교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소백타는 울컥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네 마음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저 눈빛!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은 저런 눈빛이다.
“각자 자기 인생 사는 것 아닙니까?”
예전이라면 풍천교주는 버럭 했을 것이다. 어디서 한심한 투정이냐면서, 네가 받은 것은 새외 지존의 자리다! 아무런 고통이나 희생 없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자리가 아니라고 소릴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다시 사과했다.
“미안하다.”
검무극은 풍천교주가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백타는 모른다. 이 순간 이런 사과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성 장로를 어떻게 했느냐에 대한 결과와는 별개로, 사과할 일은 사과하는 것이다.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하십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소백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벌떡 일어났다.
그때 풍천교주가 말했다.
“나는 중원진출을 할 마음이 없었다. 나는 새외가 좋았다.”
“하면 왜 중원진출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그래, 나는 중원진출 노래를 불렀지. 그건 내 진심과 내 입이 따로 놀아서다.”
풍천교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너처럼 그 말만 듣고 살았으니까. 내 사부도, 사부의 사부도, 모두 중원진출이 염원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염원 아닌 염원이 되고 말았다.”
“그럼 끝입니까? 항상 그런 식이죠. 사부님은 자기 생각만 하시는 분이셨죠. 중원으로 떠난 후에 새외가 좋았다고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검무극은 느꼈다. 이 순간 소백타가 환왕을 떠올리고 있음을. 사부와 그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였다. 환왕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면 이 화해는 영원히 이뤄질 수 없었으니까.
“그 화공은 교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자요.”
검무극의 말에 소백타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가 차갑게 반응했다.
“헛소리 마시오.”
검무극은 감정적으로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있는 사실을 전했다.
“그대뿐만 아니라 본교와 무림맹에도 이자들이 파고들었었소.”
“!”
충격적인 말이었기에 소백타는 깜짝 놀랐다.
“이미 있었던 사실이니 확인 가능한 일이오.”
“믿을 수 없소.”
“우리 쪽은 섭혼마존을 노렸고, 무림맹 쪽은 맹주의 손자를 노렸소. 본교 통천각을 통해 공식적으로 사실을 전해주겠소.”
구체적인 내용까지 언급되자 소백타는 당황했다.
“내가 여기 왜 왔다고 생각하시오? 당신 말마따나 천마신교 교주나 소교주는 공식적으로 풍천교를 방문하지 않았었는데, 왜 이 먼 길을 직접 찾아왔겠소?”
계속되는 진실의 끝에서 검무극이 물었다.
“교주는 그를 한 번이라도 의심해 본 적 있소?”
물론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를 알게 되어서 믿게 되었고,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소백타는 애써 검무극의 말을 부정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요?”
이렇게 의심부터 하고 보는 자신이었는데, 왜 그는 의심하지 않았던 걸까?
“수작은 그자가 부렸소. 사부에 대한 원망을 파고들어서 당신의 마음을 얻은 거요. 만약 내 말이 거짓이라면 천마신교 소교주의 권한으로 그대의 새외일통을 허락하겠소. 아니, 우리가 그대의 새외일통을 지원하겠소.”
소백타는 깜짝 놀랐다.
“진심이시오?”
“그렇소.”
검무극은 솔직한 마음을 밝혔다.
“내가 일을 왜 이렇게 번거롭게 진행하는지 아시오? 당신 수혈을 눌러 재워놓고 그를 처리하면 되는데.”
맞는 말이었다. 여전히 내공은 제압당한 상태였으니까. 자신을 재우고 여기 있는 셋이 몰려가면 그는 이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는 이유가 뭐요?”
“당신 사부가 그랬소.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당신을 후계자로 삼을 거라고. 당신밖에 없다고.”
“!”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오. 나는 저분이 제자를 잘 골랐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소. 저분이 이 일로 두고두고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기를 바라서요. 저 분을 위해서라면 더 큰 번거로움도 감수할 수 있소.”
검무극의 말에 풍천교주는 내심 울컥했다. 지금껏 검무극이 자신에게 해줬던 어떤 말보다 감격스러웠다. 두 사람의 거리가 또 한 걸음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소백타는 소백타대로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줬다고 했소?”
검무극은 그가 시공이환술 내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 당신 사부는 그렇게 비교하면 안 되지.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할 때 영웅이 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비교하려면 그 사람은 당신을 위해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를 비교하시오. 당신 사부는 교주직을 내놓았소. 당신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소. 자, 그럼 그는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당신이 직접 시험해 보시오.”
이제야 소백타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직접 그자의 정체를 밝혀내라는 의미였다. 자신과 사부과 화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그 사람을 시험하는 척하면서 전음으로 이 사실을 다 알려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럼 그 악당 놈과 같이 내 손에 죽겠지.
차가운 현실을 전하는 대신 검무극은 풍천교주를 쳐다보며 차분히 말했다.
“내가 믿는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 사부요. 적어도 끝까지 바보인 사람에게 교주 자리를 물려주지는 않았을 거라고.”
제324회 오늘만큼은 적이라 생각하고.
소백타는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대신 사부와 둘만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건 검무극이 원했던 바였다.
검무극과 마불이 밖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풍천교주와 소백타만 남았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깬 사람은 소백타였다.
“정말 다시 돌아가도 저를 차기 교주로 삼으실 겁니까?”
“그래.”
“무림일통을 꿈꾸는 저를요?”
“그래, 그래도 널 차기 교주로 삼을 거다.”
풍천교주의 단호한 대답에도 소백타는 여전히 의심했다.
“왜 그러시겠다는 겁니까?”
“네가 풍천교를 가장 잘 지킬 거라 믿으니까.”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 지키는 겁니까?”
풍천교주는 제자에게 자신이 느꼈던 반성과 후회를 그대로 전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네게 물었을 거다. 네 꿈이 뭐냐고. 혹시라도 중원진출이라 대답하면 이 말을 해줄 거다. 그 꿈은 우리 꿈이 아니라 언젠가 선대의 누군가가 꿨던 꿈이라고. 그래서 너와 함께 황무지를 걸으면서 새외가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 모래바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 이들인지 보여줄 거다. 너라면 이 새외를 누구보다 잘 지켜내고 가꿔갈 수 있으리라 믿으니까.”
소백타는 화가 났다.
“지금에서야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요? 만약 이렇게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말해주지 않았을 이야기 아닙니까?”
“네가 잘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었을 테니까. 네가 이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만약 알았다면 진작에 달려왔을 거다.”
풍천교주가 제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다. 네 마음이 다 풀릴 때까지 계속해주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들 뒤 창문 너머로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 * *
검무극과 마불은 마당에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바위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먼 새외까지 와서 함께 하늘을 보고 있다.
마불이 불쑥 말했다.
“저 친구의 운명도 오늘 바뀌겠군.”
소백타를 의미한 것이겠지만 그의 운명은 풍천교주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랬기에 검무극은 저 둘의 관계가 어떤 식이든 잘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전 교주님이 걱정됩니다.”
그러자 마불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교주, 까불지 마라! 그런 걱정은 어른이 자네에게 하는 거다.”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마불님이 제 걱정해주시는 것처럼요?”
“난 자네 형만 걱정하지.”
냉정한 말이 오히려 더 고맙다. 그는 변함없이 형을 잘 챙기고 있었으니까.
“형이 술자리에서 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하셨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어떻게 하면 소교주 자리를 다시 뺏을까 고민하진 않고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검무극을 향한 마불의 눈빛에 걱정이 담겼다.
“사람이 갑자기 목표를 잃으면 삶이 흔들리기 마련이지.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많이 힘들 거야. 그러니 건방지게 어른들 걱정은 말고, 자네 형이나 잘 챙기게.”
“역시 마불님은 제게 작은 거인이십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
마불이 괜히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검무극은 그가 작은 거인이란 말을 제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 거인은 아부로 우뚝 섰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검무극에게 마불은 작은 거인이었다.
동굴에서 나온 그가 이제 자신의 집을 짓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형을 챙기면서 바닥을 다지고, 새외에 함께 가겠다고 대답하면서 기둥을 세우고, 약초를 캐오겠다고 약속하면서 지붕을 덮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집을 짓고 있다.
집이 완성되면 그 집에 형을 부르고, 풍천교주를 부르고, 독왕을 부르고, 또 자신까지 초대해 작은 연회를 열기를 바란다. 그가 황금빛 인생을 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검무극의 시선이 마불을 따라 다시 하늘을 향했다.
그때 적연을 비롯한 호위들이 다가와서 고마움을 전했다.
“검 선물로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왜 내게 고마워해?”
“소교주님이 선물로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풍천교주가 너희를 위해 사주신 거다.”
“아! 교주님께서는 소교주님이 사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괜히 생색내기 싫으셨나 보다. 나중에 뵈면 인사드리도록!”
그들이 물러나자 마불이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돈은 풍천 그 사람이 냈겠지만, 사려고 했던 사람은 자네지?”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마불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이 자네 호위까지 챙길 사람은 아니니까.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사람이 그렇게까지 한꺼번에 바뀌지는 않거든. 투덜대면서 돈을 냈겠지.”
검무극이 미소 짓던 그때 풍천교주와 소백타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소백타가 검무극에게 걸어와 말했다.
“내가 끝까지 바보인지 아닌지 확인할 시간이 된 것 같소.”
검무극이 제압한 내공을 풀어주며 말했다.
“지금껏 그를 같은 편으로만 봤을 테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적이라 생각하고 한번 봐 보시오.”
* * *
환왕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환여를 똑 닮은 그는 큰 키에 남자답고 호방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은 그의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어두우면서도 기괴한 그림이었다.
지옥문을 연상케 하는 문이 있었고 그 주위에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과 야수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기괴함은 지금부터였다.
그림이 움직였다. 문 옆으로 난 작은 길에서 그림으로 그려진 한 남자가 걸어 나오더니 이쪽을 쳐다보며 말을 한 것이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환왕에게만 들렸다.
―다만 아직 소교주는 건들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다른 언급은?
―없었습니다. 오직 소교주에 대해서만 언급하셨습니다.
―환여를 죽인 사람이 풍천이 확실한가?
―정황상 그렇습니다.
환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고를 마친 남자는 자신이 걸어 나왔던 길로 다시 사라졌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소백타가 안으로 들어왔다.
“스승님.”
그는 환왕에게 스승이라 부르고 있었다. 환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백타에게 깍듯한 예를 갖췄다.
“어서 오세요, 교주.”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리고 계셨습니까?”
환왕이 그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소백타는 흠칫 놀랐다.
“평소와 다른 화풍이십니다.”
평소에는 새외의 아름다운 풍경을 주로 그렸던 그였다. 웃고 있는 사람을 그렸고, 개와 고양이를 그렸다. 한데 오늘의 그림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도 가끔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집니다.”
하필 자신이 찾아온 이날,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걸까?
“이 문은 어디로 향하는 문입니까?”
“제 지옥으로 향하는 문입니다.”
의미심장한 대답에 소백타는 환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림만 달랐을 뿐 환왕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평소처럼 그에게 차를 내주었다.
소백타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마 당신에게 주는 차나 술이 있다면 거기에도 어떤 약물이 들어가 있었을 거요.
이곳에 오기 전 검무극이 해준 몇 마디 말 중의 하나였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오면 항상 차를 내주었다.
처음에는 호위들이 독이 있는지를 검사했지만, 그에게 무공을 배운 이후에는 그 과정은 생략되었다. 결국 여기 뭐가 들었는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동안 마신 거였다.
검무극 말처럼 상대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등줄기가 오싹해질 일이다.
“드세요, 새 차가 들어왔는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
“향이 아주 좋네요.”
소백타는 향만 음미하고는 차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까 마교 소교주가 홀로 저를 찾아왔길래 새외일통을 허락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하던가요?”
“능력을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겠다고. 그래서 앙천혈령술을 발휘해서 힘을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환왕이 인상을 굳혔다.
“앙천혈령술은 되도록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소백타는 검무극이 했던 말을 흉내 냈다.
“본교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세수나 하고 와라. 건방진 소교주 같으니!”
소백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차가 놓여 있던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박살 나며 차가 쏟아졌다.
“언젠가 중원을 치게 된다면 마교부터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환왕은 차분히 자리를 닦고 치운 후에 다시 차를 타왔다. 예전이라면 미안해하고, 고마워했을 상황인데 지금 소백타의 마음은 달랐다. 검무극 말처럼 그를 적이라 생각하고 그를 보니.
‘끝까지 차를 마시게 하려고?’
같은 행동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새 다탁에 차를 내려놓으며 환왕이 물었다. 집요하되 억지로 권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교주가 제 앙천혈령술을 파훼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수작에 빠졌을 겁니다.”
환왕의 단정에 소백타가 따지듯 물었다.
“왜 이리 자신하십니까? 구화마공을 직접 겪어보신 것도 아니면서요.”
순간 환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에도 구화마공이 언급되면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화난 얼굴이었다.
소백타가 재빨리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앙천혈령술이 안 통하는 바람에 제가 무례하고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 환왕이 물었다.
“소교주가 새외에 왜 온 것 같습니까?”
“속셈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때 환왕이 허를 찔렀다.
“저를 잡으러 왔습니다.”
소백타는 흠칫 놀랐다. 감출 줄 알았던 내용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스승님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요?”
“마교에 제 사람을 심어뒀습니다. 한데 최근에 그 사람이 붙잡히면서 제 존재가 드러났습니다.”
“왜 마교에 사람을 심어둔 겁니까?”
“제가 왜 구화마공에 예민하게 구는 줄 아십니까? 그 구화마공에 혈교가 몰락했기 때문입니다. 본교와 마교는 철천지원수입니다. 어떤 화해로도 그 피를 닦아낼 수 없습니다. 혈교의 마지막 후예인 제가 어찌 그들을 그냥 두고 보고만 있겠습니까?”
완벽한 거짓말의 재료는 구 할의 진실이다.
이렇게 사실을 왕창 섞어서 말하니 소백타는 내심 혼란스러웠다. 이쪽이 맞고 저쪽이 틀린 건 아닐까? 소백타는 어떻게든 진실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셔야지요. 분명 교주께서는 대업을 이루실 겁니다.”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경솔하게 다른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드러냈으니 사부 성격상 저를 그냥 두진 않을 겁니다. 스승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빤히 소백태를 응시하던 환왕이 품에서 약지보다 더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 약을 사부에게 먹이십시오! 무색무취이니 술에 타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소백타는 깜짝 놀랐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부를 죽일 독약이란 것을.
“곧장 효과를 내지 않습니다. 사흘 후에 독이 발동하니, 교주가 탄 약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설마 독을 먹여서 사부를 죽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교주가 당합니다.”
순간 소백타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독을 술에 타서 적을 죽이는 짓만큼 비겁한 짓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존경하고 좋아했었단 말인가?
환왕은 그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소백타는 솔직히 대답했다.
“술에 독을 타라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를 상대하려면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교주께서 약을 타면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고요. 그렇다면 타야 하지 않습니까?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습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소백타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저 때문입니까? 아니면 스승님 본인을 구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린 이미 한배를 탔는데, 그 둘의 차이가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배는 가라앉지 않겠지요. 대신 저는 술자리에서 사부를 독살한 사람이 되겠지만요.”
더 비교할 필요도 없다. 마치 만리전벽의 막이 찢어졌던 것처럼, 소백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환왕은 여유로웠다.
“벌써 저들이 우리 교주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심었군요.”
“애초에 제가 심고 키웠어야 할 씨앗이었지요.”
환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공손함과 웃음기가 사라진 환왕의 얼굴은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그들에게 넘어갈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지.”
이미 소백타가 찾아온 속셈을 짐작하고 있었던 그였다.
독을 타라고 한 것은 환왕의 시험이었다. 백소타가 소교주에게 넘어갔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
소백타는 지난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당신은 정말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것이었군.”
교주가 되면서 당면한 어려움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누구보다 훌륭하게 도피처 역할을 해주었다.
그와 함께 사부 욕을 했었다. 그는 겁쟁이지만 너는 훌륭한 교주가 될 거라 세뇌하면서. 미운 사람을 함께 욕해주는 사람만큼, 박약한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없었다.
그곳은 도피처가 아니었다. 도피처라는 이름을 단 지옥이었다.
‘사부님!’
지금 소백타의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죄송합니다.’
소백타가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환왕이 자신보다 강한 것을 알았지만 전혀 겁이 나지 않았다. 회한이 만들어낸 흥분이 소백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환왕의 환술은 그를 압도했다.
후우우우웅!
깊은 울림과 함께 주변이 바뀌었다.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은 조금 전 환왕의 거처가 아니었다.
주변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그림에서나 나올법한 야수들이 사방에서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문.
‘저 문은?’
아까 환왕이 자신의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라고 했던 바로 그 문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환왕이 그렸던 그림 속이었다.
“어쩌려는 거냐?”
“너야말로 어쩌려고 했냐? 저 인간들이 너를 지켜줄 거로 믿고 나를 시험한 거냐?”
그 말에 소백타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하늘에 거인처럼 큰 검무극과 풍천교주가 그리고 지평선 너머에 진짜 거인이 된 마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백타는 알 수 있었다. 거처로 들어온 세 사람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환왕과 자신은 이 장소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풍천교주는 환왕이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빛에 담긴 것은 걱정이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마음에 맺혀있던 뭔가가 완전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사부님!’
사부에게 너무 미안했다. 교주 자리를 물려준 그 고마움도 모르고 철부지처럼 원망만 하다 일을 그르친 것이다. 그럼에도 사부는 자신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제가 다 망쳤습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마치 그 어리석음의 결과가 이것이라는 듯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 앞에서 환왕이 말했다.
“네 사부는 알 거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풍천교주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곳이지.”
그가 손을 내뻗자 소백타는 무기력하게 그에게로 빨려 들어가듯 날아갔다.
닫히기 시작한 문 너머에서 환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네 사부가 널 구하기 위해 이 지옥문을 열까?”
그의 말이 끝나자 소백타의 간절한 외침이 닫히는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오지 마십시오, 사부님! 오시면 안 됩…….”
두 사람을 집어삼킨 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제325회 그럴 땐 이렇게 말하는 거다.
두 사람은 그림 속에 있었다.
실제 인물과 똑같이 생긴 그림이었고 움직임도 생생했다.
풍천교주가 소백타를 쳐다보고 있을 때, 나는 환왕을 보았다.
회귀 전 보았던 그 환왕이었다.
환왕, 이 시기에 너는 이곳에 있었구나.
그림 속에서 환왕이 소백타를 데리고 문 안으로 사라졌다.
나와 마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풍천교주에게 모였다.
그림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저 문 너머의 불길한 기운을 느끼는 것이리라.
“제법이군.”
환왕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래, 당연히 그럴 것이다. 환왕이 만든 세상이었으니까. 환여보다 환왕이 더 뛰어난 고수였다. 그랬기에 세상에 이름을 떨친 것도 결국 그였고.
“위험해. 나 혼자 다녀오겠네.”
그 말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제자분이 누굴 닮았나 했네요.”
“무슨 뜻인가?”
“진심으로 혼자 가고 싶으셨다면 위험하다는 말씀을 안 하셨겠죠?”
아까 끌려가면서 소백타가 오지 말라고 소리친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다. 제발 구해달란 말보다 더 부담스러운 말이었다. 위험하니 혼자 가겠다는 말만큼이나.
“어차피 두고 가겠다고 해도 내 말 들을 사람 아니지 않나?”
“같이 왔으니 같이 끝내야죠.”
풍천교주를 저 그림 속으로 혼자 들여보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준비됐나?”
“됐습니다.”
마불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가 그림 앞에서 구결을 외웠다.
후우우우우웅.
깊은 울림과 함께 우린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순식간에 그림 속에 들어온 것이다.
극의에 이른 고수가 펼치는 환술의 향연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사방에서 커다란 야수들이 이를 드러내며 모여들었다.
하지만 풍천교주가 풍겨내는 기도가 무서웠는지 감히 덤비지 못했다.
반면 나와 마불에게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
마불이 성큼성큼 그것들에게 걸어갔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댔지만 마불에게도 덤벼들지 못했다.
마불이 손을 내밀어 야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야수들은 그대로 있었다.
마불이 얼마나 환술에 강한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풍천교주가 문 앞에 섰다.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리던 그가 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풍천교주가 구결을 읊으며 천천히 밀자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엔 긴 복도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이 복도를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였다.
“그자 얼굴을 봤을 때, 화원의 그 여인과 너무 닮았습니다. 아마 쌍둥이거나 남매일 겁니다.”
걸음을 옮기며 환왕과 환여가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을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그럼 이곳은 더욱 위험하겠군.”
마불의 말에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죽인 것이 자신이기에, 둘 중 한 사람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자넨 전혀 긴장하지 않는 것 같군.”
“두 분 계시는데 제가 왜 긴장이 되겠습니까?”
풍천교주가 이번에는 마불에게 물었다.
“자넨 왜 긴장하지 않나?”
“자네들 두 사람 있는데 알아서 하겠지.”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교주님은요?”
“나야…… 내가 있으니까. 젠장!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이야!”
풍천교주의 농담에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환여를 상대하던 지난번보다 풍천교주는 더 긴장하고 있었다. 환술 고수만이 느끼는 어떤 기운이 있는 모양이다.
우린 그렇게 긴 복도를 계속 걸어갔다.
“이 환술도 혈교에서 실전된 것이라네.”
“전에도 느꼈지만 교주님은 혈교 무공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곧 혈교니까.”
풍천교의 전신이 혈교였으니까.
“오래전 천마신교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혈교의 수뇌부 모두가 죽었다네. 천마신교는 혈교를 말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새외에 퍼진 그들을 모두 죽이려면 너무 큰 희생을 치러야 했으니까. 그래서 천마신교는 새로운 혈교가 되기를 바랐지.”
“그게 풍천교군요.”
“그래. 초창기에는 혈교를 그대로 살려야 한다는 쪽과 혈교란 이름을 버려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섰다고 하더군. 하지만 천마신교가 풍천교를 세우려는 쪽을 지지했으니 결국 풍천교로 새롭게 태어났지. 한동안은 친마교 성향의 풍천교가 계속 내려오다가 언젠가부터 그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네.”
그 긴 역사 속에서 천마신교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자는 혈교 마공을 제대로 이은 자야. 틀림없이 혈교를 다시 세우려는 세력이 있어.”
“비밀결사 말씀이십니까?”
“이제 비밀도 아니겠군. 풍천교주를 납치하고 천마신교 소교주까지 끌어들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복도 끝에 도착했다.
우릴 기다리는 세 개의 문.
신비스러운 기운을 풍겨내는 세 문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떤 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너희의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어디로 들어갈까요?”
세 문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함정이야. 한 곳으로 같이 가면 흩어지게 되고, 따로 들어가야 만나는.”
“그럼 각자 따로 가시죠.”
“내가 가운데로 가겠네.”
풍천교주가 가운데 문을 선택했고 나와 마불은 각자 좌우 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시 복도가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자 들어왔던 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젠 되돌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복도 끝에 있던 문으로 나왔을 때 풍천교주나 마불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느꼈다. 풍천교주가 우릴 속였다는 것을.
자신이 홀로 환왕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그 세 개의 문은 환왕이 풍천교주에게 남긴 전언.
두 사람 떼어두고 혼자 오시오.
이 싸움은 풍천교주와 환왕의 싸움이었으니까. 풍천교주는 나와 마불을 보호하고 싶었을 테니까.
내가 들어선 곳은 연회장이었다. 무희들은 춤을 추고 있었고 악공들은 경쾌한 곡을 연주했다. 젊은 여인들이 술병을 들고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이곳의 분위기만 봐도 앞서의 추측에 힘이 실린다.
넌 여기서 쉬고 있어라.
주위를 둘러보며 나가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푸르스름한 빛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도 환술로 만들어진 곳인 이상, 분명 어딘가에 파훼법이 있을 텐데.
그때 연회장에 있던 한 남자가 걸어와서 내게 말했다.
“편히 쉬십시오.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제게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나가는 길은 어딘가?”
“때가 되어야만 문이 열립니다. 그전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쉬이이익! 서걱!
나는 단칼에 남자를 베어버렸다.
쓰러진 남자는 퍽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 바람에 음악이 멈췄고 모두 동작을 멈춘 채 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귀기로 뭉친 악귀들이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나가는 방법 아는 사람 손!”
손을 드는 대신 사방에서 그것들이 달려들었다.
* * *
연회장에 들어섰던 검무극에 반해 마불이 들어선 곳은 분위기가 살벌했다.
칠흑 같은 어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평소 빛나는 몸의 광채로도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마불은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뭔가 있다는 것을.
그가 빠르게 손가락으로 수인을 지었다.
전법광인(轉法光印)!
순간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그곳이 보였다.
수십 기의 괴수가 빛을 피해 눈을 가리는 모습을.
빛에 반응한 그것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찢어지는 큰 울음이었다.
마불의 손에 새로운 수인이 만들어졌다.
살법회인(殺法悔印)!
다음 순간 마불의 쌍장에서 황금빛 강기가 휘몰아치며 발출되었다.
쇄애애애애애애애애액!
파도처럼 밀려간 엄청난 강기에 그곳에 있던 괴수들을 모두 쓸려나갔다.
퍽! 퍼억! 퍽! 퍽! 퍽!
괴수들은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마불이 성큼성큼 걸어서 다음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앞의 방보다 열 배는 더 큰 광장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꽉 차 있던 악귀들이 일제히 마불을 돌아보았다. 시뻘건 두 눈과 찢어진 입. 정말 다시 문을 닫고 싶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마불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곳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아무도 나가지 못한다는 듯 방문을 꽉 닫았다.
악귀들이 괴성을 지르며 사방에서 일제히 마불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무 숫자가 많아 저희끼리 밟고 밟혔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새로운 황금빛 수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 *
환왕과 소백타는 넓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사방의 석상과 벽화, 커다란 태사의. 알 수 없는 문양들로 가득 찬 그곳은 소백타도 분명 처음 와본 곳이었다. 한데 낯이 익었다.
“여긴 어디요?”
소백타는 침착하게 그를 대했다. 욕을 하며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차분히 기회를 찾아내야 한다.
“자네가 매일 있는 곳이지 않나?”
“설마? 교주전?”
지금의 교주전과는 달랐고 사부 때 교주전과도 달랐다.
“혈교의 교주전이구나.”
“그래.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교주전이지.”
그곳을 둘러보는 환왕의 눈빛에 감격이 서렸다. 그는 정말 이곳을 존중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진짜 새외의 마인들이 살았던 곳이지. 지금 너처럼 한심한 철부지가 아니라.”
철부지란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철부지 짓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왜 데려온 거요?”
“인질로 삼으려고.”
소백타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참 멋대가리 없는 소리 하시는군요.”
“자네 사부는 멋을 부리며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소백타는 알 수 있었다. 환왕이 사부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과 있을 때는 그렇게 욕을 하더니.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욕은 결국 자신에게 한 욕이었다.
“사부는 오지 않을 거요.”
“올 거야.”
“나를 그렇게 아끼지 않소.”
“그랬다면 이 새외까지 달려오지도 않았겠지. 소교주는 나를 죽이러 왔지만, 네 사부는 너를 구하러 왔다.”
잠시 멍하게 있던 소백타가 불쑥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너보단 내가 나은 인생 같다.”
갑자기 돌변한 그를 환왕은 말없이 응시했다.
“넌 겁도 많고 자존심도 없고, 심지어 비겁하잖아? 아마도 넌 누군가의 명령이나 듣는 충실한 개새끼겠지.”
소백타는 겁 없이 달려들었다.
“넌 내게 언제나 굽신거렸지. 교주님, 오셨습니까? 오늘 기분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교주님이야말로 새로운 무림을 이끌어 나가실 분이죠. 교주님, 교주님. 어제도 핥고 오늘도 핥고. 핥으라고 했으면 아마 내 발바닥도 핥았을 거야.”
환왕이 손을 뻗자 소백타가 날아갔다.
이미 내공이 제압당한 소백타는 무기력하게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싸울 것은 오직 입밖에 없었다.
“뭐가 무서워서 내공을 제압했지? 여긴 네 지옥이라면서? 겁쟁이 새끼! 내 똥구멍이나 핥아라!”
쏟아지는 조롱에도 환왕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를 보며 웃었다.
“뜻밖이군. 네 사부를 이렇게나 위하다니.”
환왕은 소백타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 보았다. 자신을 자극해서 죽으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저기 석상 뿔에 머리를 박고 자결해라. 과연 네게 그럴 용기가 있을까?”
환왕이 소백타를 석상 앞으로 내던졌다.
소백타는 떨리는 눈으로 석상을 쳐다보았다. 괴수의 이마에 난 뿔이 창처럼 날카로웠다.
날카로운 뿔을 쳐다보고 있으니 죽음이 성큼 다가옴을 느꼈다.
그러자 주마등처럼 어려서 사부와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사부는 유난히 자신을 아꼈다. 재능을 타고났다고 인정해줬고, 동기들에게 백타를 본받으라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사부에게 칭찬받은 날은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혈신제날 음뢰종을 칠 때면 자신을 불러서 함께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부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네가 내 자리를 물려받을 거라고.
열 번 잘하다 한 번 못 해줬다고, 사부를 원망하고 부정했다. 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아! 열 번 잘하다 한 번 못하면 아홉 번 잘해준 사람이어야지.
자책하던 소백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부께 더는 짐이 될 수 없다.’
그는 사정없이 뿔을 향해 얼굴을 날렸다.
퍼억!
이대로 죽는다 생각했는데, 석상의 뿔이 부드러운 진흙처럼 뭉개졌다.
멀리서 환왕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가 환술로 뿔을 바꾼 것이다.
“이래서 널 죽일 수가 없지. 사부를 이렇게까지 생각하는데 이런 귀한 인질을 어찌 죽이겠나?”
소백타가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벽에 머리를 부딪히기 전에 환왕의 손아귀로 날아갔다.
소백타를 움켜쥐고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네 사부가 죽게 되면 너 때문에 죽는 거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혀를 깨물려 해도 턱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발 날 죽여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때는 날 죽여달라는 말 대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성큼성큼 들어선 사람은 바로 풍천교주였다.
“사부가 죽으면 그건 너 때문에 죽는 거다. 사부가 죽으면 그건 우리 사부 무공이 약해서 죽는 거다. 사부가 죽는 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놀려는 저런 놈들에게는 또 이렇게 말하는 거다. 저리 안 꺼져, 새끼야!”
격정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백타에게 풍천교주는 담담히 말했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다시 가르쳐주마.”
제326회 그 사람을 몰라서 그런다니까.
소백타는 환왕을 돌아보며 말하려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던 그에게.
저리 안 꺼져? 새끼야!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환왕이 한발 먼저 말했다.
“이미 들었으니까 하지 말게.”
환왕은 풍천교주의 등장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소백타를 자신의 방패로 막아 세우며 그 뒤에서 말했다.
“어서 오시오, 교주. 모양새가 이래도 이해해주시오.”
제자를 인질로 삼아 겁쟁이처럼 굴고 있지만, 환왕이 정말 강하다는 것을 풍천교주는 느끼고 있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상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뭐든 하는 부류였다.
“괜찮네. 그렇게 겁먹어 주는 게 내게 예의를 차리는 것 아니겠나?”
서로를 죽일 사이였지만 그들은 정중하게 서로를 대했다. 아니, 어차피 죽일 상대기에 정중할 수 있었다.
검무극이나 마불과는 달리 이곳까지 오는데 풍천교주의 앞길을 막은 것은 없었다.
과연 환왕은 풍천교주만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이다.
“언제나 고수가 죽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지요. 소교주나 마불이 함께 왔으면 상대하기 까다로웠을 텐데.”
“사람 많으면 싸우는데 정신만 사납지. 자넨 소교주를 안 겪어봐서 모르네. 싸우기도 전에 열불이 나서 저 벽에 자네 스스로 머리통을 박을 거야.”
그러면서 풍천교주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혈교의 교주전이 이랬군. 오, 원래는 이 혈귀가 이런 생김새였나?”
벽에 그려진 혈귀는 풍천교에 전해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진짜 혈교인들이 살던 곳이지요.”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나? 난 오히려 지금보다 개판이었을 것 같은데? 이 대전에 피에 굶주려서 날뛰는 것들이 우글대지 않았겠나?”
환왕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반응에 풍천교주가 슬쩍 물었다.
“자네 그쪽 맞지? 혈교를 부활하려는 비밀결사?”
“비밀결사라고 하니 너무 거창하오. 처음에는 맞았소.”
“지금은 아니고?”
“혈교 부활은 내 이상이 아니라서.”
그러자 풍천교주는 비로소 제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저래야 한다는 거다. 저런 자도 제 꿈을 찾으려 하지 않느냐? 네가 어려서부터 들었던 중원진출도 저렇게 흘려 버려라.”
여전히 소백타는 격정(激情)에 싸인 채 사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사부가 죽게 될까 봐, 그는 그 걱정뿐이었다.
“괜찮냐, 백타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며 괜찮냐고 묻자 소백타는 마음이 울컥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저 때문에 이자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럴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환왕은 풍천교주가 어떤 대답을 할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여기 그림 속으로 들어올 때 위험해서 혼자 간다고 하니까 소교주가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
풍천교주는 검무극 이야기를 꺼냈다.
“소교주가 그러더라. 그건 제발 같이 가자는 말이라고. 그러니 네가 날 걱정하면 반대로 말해야지. 제발 나 좀 살려줘. 당신이 사부라면 날 살려줘야 하잖아. 살려내! 당신이 죽더라도 살려내! 이렇게 말이다. 그럼 내가 괘씸해서 죽거나 말거나 하지 않겠냐?”
장난처럼 한 말이었지만 소백타의 마음에 와닿았다.
‘맞다. 내가 의연하게 굴수록 살려줘야 하는 부담감이 커지겠구나.’
그런 생각에 이르자 소백타는 사부가 한 말을 그대로 했다.
“살려주십시오. 사부가 죽더라도 저는 꼭 살려주십시오.”
그 뻔뻔한 말에 풍천교주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살려주마.”
그런 말 들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기에 소백타는 당황했다.
‘이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부님.’
풍천교주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이제 내게 맡겨라, 제자야.
그랬기에 소백타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잽싸게 돌아서며 환왕의 뺨이라도 때리려 했다.
하지만 환왕이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소백타는 그를 노려보며 마지막으로 노력했다.
“이 새끼야, 안 꺼져도 된다. 대신 날 죽이고 사부와 제대로 한판 붙어라. 나 신경 쓰느라 너도 마음껏 못 싸울 거다. 난 네 발목을 잡는 인질이기도 해. 그러니 날 죽이고 네가 가진 것 다 쏟아부어라.”
환왕이 소백타를 말없이 응시하다가 그의 너머에 있는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이러니 신경이 쓰이시겠소.”
풍천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환왕에게 굳이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제자와 그렇게 붙어 있을 때는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떨어져 있으니 이렇게 계기가 생기는군.”
그래서 계기가 참 무섭다.
검무극을 만난 것을 계기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고월과의 관계가 바뀌었고 결국 자신의 인생까지 바뀌었다.
이번에 새외로 오게 되면서 제자와의 관계도 크게 바뀌었다.
이렇듯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꾸는 것은 노력보다 계기가 우선할 때가 있다. 이 환왕과 원수가 된 것처럼 말이다.
“당신이 내 누이를 죽였다고 알고 있소.”
“그랬지.”
“어떻게 죽었소?”
“제령인이 빠져나가면서 죽었다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환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내가 마교로 가고, 누이가 이곳에 오기로 했었소. 한데 고집을 피우더군. 마교 임무가 아무래도 더 커 보였을 테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소. 어떻게든 나를 이기고 싶어 했지. 한 번도 못 이겼지만.”
환왕에게서 어떤 슬픔이나 애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당신 제자를 죽이면 공평해지겠군.”
“그렇게 내 평정심을 흔들려 해도 소용없네. 자네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느꼈으니까.”
그냥 싸워선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말로 되돌려 친 것이었지만, 환왕 역시 동요하지 않았다.
“사부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는 제자니 꼭 구하시오.”
“노력해 보겠네.”
이 순간 소백타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기회만 보고 있었다. 사부를 위해 놈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그래서 사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살아남게 된다면 남은 생은 사부를 위해 살아갈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쇄애액!
푹!
풍천교주가 자신의 왼쪽 허공에 손을 내질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시체가 쿵 하고 떨어졌다. 대화하는 틈을 타서 기습하려고 은신한 채 접근하던 환왕의 수하였다.
그의 옷에다 손에 묻은 피를 슥슥 닦으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그나저나 내 제자에게 새외일통의 바람은 왜 넣은 건가?”
“그야 제자분 꿈을 위한 거고.”
순간 소백타가 꿈틀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대처하는 것임을 알려주듯, 풍천교주가 담담히 말했다.
“자네 덕분에 제자 놈이 진짜 꿈을 찾게 되었지. 오히려 고맙네.”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리라. 검무극을 만나고, 고월의 새로운 면을 보고.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 자신도 성장한 것이다.
번쩍하는 순간 풍천교주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푸욱!
허공에서 피 묻은 손이 튀어나왔다.
은신해서 접근하던 또 다른 적을 잡아낸 것이다. 기습을 비난하는 대신.
“요즘 살을 빼서 내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네.”
살 뺀 자랑을 환왕에게도 하는 풍천교주였다.
또 은신한 자가 없나, 주위를 둘러보던 풍천교주가 본격적으로 싸워보자는 듯 환왕에게로 걸어왔다. 그 전에 검무극에 관해 물었다.
“소교주는?”
“그는 괜찮을 거요.”
“아니, 제대로 잘 가둬두었냐는 말이네.”
“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혀 있소. 그곳을 뚫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뚫을 수 없는 관문이 셋이나 더 있고.”
“고작 셋인가?”
“고작이라니?”
“자네가 그 사람을 몰라서 그런다니까.”
풍천교주가 자신의 기도를 개방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지금껏 경험한 적 없는 강력한 귀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풍천교주의 양손에서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 소교주 왔을 때 잘난 척하려면.”
* * *
“아! 이건 아니지.”
난 기세 좋게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연회장에 있던 악귀들을 모두 해치우고 파훼법을 찾아내서 다음 문을 찾았다.
파훼법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악공이 연주하던 거문고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숨겨져 있던 파훼법을 여러 번 찾아낸 경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처음 찾는 사람은 정말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음 방이었다.
조금 전 문을 열었을 때, 광장처럼 큰 방에는 거대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혈독대망(血毒大蟒).
독사들의 왕이라 불리는 혈독대망이었다. 혈독대망 주위에는 수천 마리의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잠깐 문을 열었다고 독기와 비린내가 엄청나게 났다. 독기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평범한 고수였다면 문을 연 것만으로도 중독되어 운기조식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그나저나 뱀은 딱 질색인데.
“교주님, 잘 싸우세요. 믿고 돌아갑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환왕만 잡는 일이라면 풍천교주를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소백타라는 변수가 있었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이 어떤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가서 ‘검무극’이란 변수를 만들어줘야 한다.
문득 풍천교주가 환술에 갇혀 있던 자신을 구하러 왔을 때가 떠올랐다. 열린 문 너머로 펼쳐진 그 지옥도가 생각났다. 그 길을 뚫고 자신을 구하러 온 풍천교주다.
그래, 중원의 뱀이 다 있어도 뚫고 간다.
흑마검을 뽑아 들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근처에 있던 독사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쉭! 쉬이익!
흑마검을 휘둘러 그것들에 베었다. 뱀이 터져나가면서 독기가 뿜어졌다.
다른 뱀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뱀이 아니었다. 휙휙 몸을 솟구치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하나의 초식이 발휘되었다.
구화마공 제 삼식 대마벽.
내 앞에 거대한 강기의 벽이 세워졌다.
퍽! 퍽! 퍼어억! 퍼억!
강기의 벽에 부딪힌 뱀들이 터져나갔다. 독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그 독기가 그 방의 모든 독사를 자극했다.
혈독대망이 거대한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꽝!
폭음과 함께 대마벽이 흔들렸다. 강기에 상처가 난 혈독대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작은 뱀들이 깔려서 죽고 난리였다.
혈독대망이 독액을 내뿜었다.
치이이이익!
몸에 닿으면 뭐든 녹여버릴 이 극악한 독은 그야말로 독성이 엄청났다. 독연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만독불침이 아니었다면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독액이 대마벽을 녹이기 시작했다.
대마벽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내공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싸움에서 처음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다.
대마벽을 세워둔 채 또 다른 초식을 발휘한 것이다.
대마벽 앞에 악귀가 출현했다. 바로 제이식 대멸식을 발휘한 것이다.
스스스스스스.
악귀가 여섯으로 분열했다. 그 사이 무공에 성취가 있어 분열할 수 있는 숫자가 넷에서 여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가자!”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여섯의 악귀들이 뱀들을 휩쓸면서 앞으로 밀고 들어갔다.
퍼퍼퍼퍼퍼퍼퍼퍽!
경로에 있던 뱀들이 모두 다 썰려 나갔다.
목표는 전면의 혈독대망이었다.
과연 잡을 수 있을까?
대마벽을 녹이던 혈독대망이 악귀를 향해 독을 뿌렸다. 독액을 뒤집어쓴 채 악귀는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콰콰콰콰콰콰콰!
푸아아아아아악!
나는 보았다. 여섯 악귀가 혈독대망의 몸통을 절단해 버리는 것을.
두 동강이 난 머리 쪽과 꼬리 쪽이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놈이 몸부림치자 주변의 독사들이 깔려서 죽어 나갔다.
몸부림치던 혈독대망은 잘린 몸으로 대마벽으로 돌진해왔다.
콰아아앙!
대마벽이 크게 흔들렸지만 잘린 몸으로 대마벽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쿵!
바닥에 쓰러져 마지막으로 꿈틀거리던 혈독대망이 퍼엉! 소리와 함께 지독한 독기를 터뜨리며 사라졌다. 그러자 다른 독사들도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퍽!
원래라면 이것들을 해치웠어도 독연이 가득한 이 방을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가로질러 혈독대망의 뒤에 있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놀랍게도 문 너머는 교주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혈투의 흔적이 가득한 그곳은 사방이 부서져 있었고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저 멀리 태사의였다.
그곳에 낯익은 누군가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풍천교주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고개를 떨군 상태였다.
태사의 앞에 누워있는 시체는 바로 소백타였다. 끝내 제자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풍천교주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근래 이렇게 놀랐던 적이 있었을까?
태사의 앞에 내려선 후 그를 불렀다.
“교주님.”
풍천교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교주님.”
그러자 풍천교주가 힘겹게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놈을 죽이지 못했네.”
“교주님.”
“……미안하네.”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며 다시 고개를 떨구려 했다.
“교주님!”
그를 부축하려던 바로 그때.
쉬이이익!
푸욱!
내 마혈을 제압하려고 내민 풍천교주의 손이 내 가슴 앞에 멈추어 있었다. 반대로 내 만년한철 비수는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그의 두 눈에 검은 기운이 감돌며 시커먼 귀기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알았지?”
그는 가짜 풍천교주였던 것이다.
“내가 아는 교주는 마지막 말로 미안하다고 안 했을 테니까. 너 때문에 내가 죽는다. 내 신물 내놔라, 소교주야! 고월이랑 나 없이 잘살아 봐라! 이랬을 테니까. 풍천교주는 그런 사람이다.”
내 믿음이 전해지는 그 순간 가짜 풍천교주의 몸이 퍽하고는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쓰러져 있던 소백타의 시체도 퍽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믿는다.
“그 사람, 마가촌에서 술 먹다가 칼 맞아 죽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곳 환술 속에서는 죽지 않을 거다. 여긴 그의 세상이니까.”
태사의 뒤쪽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금 전 나는 풍천교주가 죽으면 어떤 기분일지 느껴보았다. 함정임을 짐작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이곳에서 본 장면이 현실이 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흑마검을 뽑아 든 채 힘차게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너머 무엇이 기다리든 상관없었다. 당신이 나를 구하러 왔듯이.
‘이번에는 제가 갑니다!’
제327회 이미 저를 구하셨습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악귀들의 시체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꼭대기에 마불이 앉아서 눈을 감은 채 불경을 외고 있었다.
퍽퍽퍽퍽퍽퍽퍽!
악귀들이 연속해서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모두 해치웠기에 그들이 사라지는 것도 함께 사라졌다.
악귀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 너머로 문이 보였다.
마불은 문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런 걱정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정말 풍천교주가 걱정되었다.
우리 친구 아닌가? 껄껄 웃으며 말로만 가깝게 지냈던 예전이라면 그를 구하기 위해 결코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데 요즘은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 풍천교주를 그만뒀다고 했을 때, 그 무슨 멍청한 짓이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를 이해한다.
그래서였을까?
풍천교주를 이런 곳에서 죽게 하고 싶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은 황무지였다.
휘이이이잉!
모래바람이 불어와 마불을 덮쳤다.
“빌어먹을.”
이놈의 환술도, 이놈의 모래바람도 징글징글하다.
이 끝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서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라는 것일까?
그때 뭔가가 마불의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위틈에 핀 꽃이었다. 마불은 한참을 그 앞에 서서 꽃을 내려다보았다.
휘이이이이잉.
뒤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며 그림자가 졌다.
마불이 돌아보자 보통 엄청난 덩치의 거대한 악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래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악귀였다.
살법회인!
마불의 쌍장에서 황금빛 강기가 휘몰아치며 발출되었다.
쇄애애액! 퍼억!
강기는 정확히 악귀의 가슴에 적중했다.
다음 순간.
휘류류류류.
주위의 모래들이 휘몰아쳐 올라오더니 이내 구멍을 메웠다.
쇄애애애액! 퍼엉!
두 번째 강기에 악귀의 얼굴에 구멍이 났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래가 순식간에 구멍을 메웠다.
쉬이잉!
악귀가 손을 내밀자 촤르르르르 모래가 쏟아져나왔다.
그냥 모래가 아니었다. 스치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그런 날카로운 강기가 모래 주위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불이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콰쾅!
마불이 서 있던 바닥이 깊게 파이며 흙먼지가 일었다.
마불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서자 거대 악귀는 밟아버리려는 듯 천천히 다가섰다.
마불은 재빨리 두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마장멸인(魔掌滅印)!
다음 순간!
이번에는 악귀 주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악귀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악귀보다도 훨씬 큰 거대한 불상의 손바닥이 그를 내리치고 있었다. 손에서는 황금빛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쿠에에에에에에엑!”
귀를 찢는 괴성을 내지르며 악귀는 모래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마불이 합장하며 기도하자 황금빛 손이 빛무리가 되면서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악귀가 있던 바닥에 거대한 손바닥 자국만 깊게 남았다.
거대 악귀가 사라진 자리에 문이 생겼다.
문으로 걸어가려던 마불의 눈에 아까 보았던 꽃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불이 꽃을 들어서 잠시 쳐다보더니 허리춤에 꽂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음 문으로 들어갔다.
* * *
풍천교주가 양손에 푸른 기운을 머금자 환왕이 소백타 뒤로 몸을 숨기며 말했다.
“당신 상대는 내가 아니오.”
철컹, 철컹.
풍천교주가 서 있던 곳의 좌우 철문이 열리면서 각각 환술 고수가 한 명씩 그곳으로 등장했다.
환왕이 그들을 소개했다.
“혈교를 지키는 혈수인(血守人)들이오.”
그러자 풍천교주가 말했다.
“혈수인을 흉내 내서 만든 모조품들이지. 이보게, 잊지 말게. 혈교는 이미 사라진 조직이야.”
말을 끝낸 풍천교주가 손을 내밀었다.
휘류류류류류류!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혈수인 중 하나가 풍천교주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앞서 환왕이 소백타를 끌어당길 때와 마찬가지 수법이었다. 두 사람의 수법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풍천교주의 손아귀에서 남자는 저항 한 번 못 하고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끄으으으윽.”
혈수인의 눈에서 귀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기운이 아니었다.
꽈드드드득.
온몸이 빨래처럼 비틀리며 절명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만든 곳인가?”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이 그림 속 공간은 눈앞에 선 사내 환왕 혼자만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님을.
혈교 부활을 꿈꾸며 수백 년에 걸쳐 준비된 안배이자 혈교 환술의 집합체였다.
“내가 처음 이 조직에 들어왔을 때부터 있었소.”
“그 오랜 역사를 버리고 자넨 자네 꿈을 꾼 것이군.”
“당신도 알지 않소?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바람이 불기도 한다는 것을.”
고개를 끄덕이며 풍천교주가 뭐라 답을 하려는데 다른 혈수인이 풍천교주를 향해 기습적으로 쇄도했다.
그가 풍천교주의 요혈을 노리고 쇄도하던 그 순간.
쉬이익! 푸욱!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뭔가가 그의 몸통을 관통했다. 달려들던 혈수인은 그대로 쓰러졌다.
풍천교주가 그의 몸에서 뭔가를 뽑아내는 시늉을 했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풍천교주의 행동으로 볼 때 기다란 창처럼 느껴졌다.
“어떤가? 자네의 무형기(無形氣)와 한번 겨뤄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강기를 무기처럼 사용하는 것은 혈교에도 있었고, 풍천교에도 있었다.
당연히 환왕은 거절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일 사람이었다면 소백타를 인질로 잡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의가 아니지.”
철컹, 철컹.
다시 양쪽에서 철문이 열리면서 이번에는 혈수인이 두 사람씩 나왔다.
“자네들 혈수인이 몇 명이었더라. 오래전에 읽었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군.”
환왕의 여유로운 미소만 봐도 준비된 자들은 많을 것이다. 한 번에 등장하지 않고 나눠서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내공을 최대한 소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을 이렇게 버리긴 아깝지 않나?”
“애초에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오.”
냉정한 환왕이 혈수인이 소모되는 것을 걱정할 리 없었다.
혈수인 역시 두려움을 모르고 달려들었다.
쇄애애앵!
보이지 않는 무형기가 풍천교주의 손에서 날았다.
푸악!
선두에서 달려들던 혈수인이 벽에 가서 꽂혔다. 창이 보이지 않으니 허공에 뜬 채 죽은 모습이었다.
나머지 세 혈수인이 동시에 일장을 내지르며 쇄도했다. 귀기 가득한 장력이 풍천교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풍천교주가 서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났지만, 이미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정면의 혈수인은 허리가 꺾였고, 좌측은 가슴에 일장을 맞았고, 마지막은 목이 꿰뚫렸다.
다시 철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각기 네 명의 혈수인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이곳 환술 속에서의 혈수인은 오직 명령만 수행하는 살인병기들이었다.
“앞서 했던 말 취소하네. 예전 혈교가 지금보다 더 피에 굶주려 날뛰었을 거란 말 취소네. 자네가 더하군.”
풍천교주의 조롱에 환왕의 입에 차가운 조소만 지어질 뿐이었다.
이번에 나온 여덟 명의 혈수인들은 앞서 나온 이들과 공격 방식이 달랐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일제히 구결을 읊었다.
그러자 그들의 손끝에서 붉은 선들이 뻗어나가며 사방에 붉은 거미줄이 쳐졌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처럼 그것들이 풍천교주를 압박하며 조여갔다.
“위험합니다, 사부님!”
놀란 소백타가 소리쳤지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서걱.
풍천교주가 십여 개의 조각으로 갈라지던 그 순간, 그곳에 풍천교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동쪽에서 공격하던 혈수인 뒤였다.
휘리릭.
서걱.
풍천교주의 양손에 있던 푸른 기운이 기다란 선이 되어서 혈수인의 목을 잘라버렸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다시 풍천교주의 푸른 선이 허공을 갈랐다.
퍽!
정면에 있던 혈수인의 이마가 꿰뚫리며 쓰러졌다.
휘리리리리릭.
붉은 선과 푸른 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하지만 붉은 선은 푸른 선을 따라잡지 못했다. 푸른 선은 복잡하게 꼬이는 선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푸른 선이 팽팽해질 때마다 혈수인의 몸이 잘려 나갔다. 강기의 선을 이용하는 풍천교주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환술 무공의 극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정도 공격에는 당연히 버틸 것이라 예상했기에 혈수인이 죽어 나감에도 환왕은 여유로웠다.
지금 풍천교주가 쓰는 수법 하나하나가 얼마나 많은 내공이 소모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풍천교주의 내공이 아무리 중후해도 혈수인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다.
다시 철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각각 여덟 명씩 걸어 나왔다.
* * *
팔락팔락.
푸른 나비가 혈수인의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스르륵.
혈수인이 스르륵 쓰러져 절명했다.
마지막 혈수인을 쓰러뜨린 나비가 허공에서 퍽하고 사라졌다.
양쪽 문에서 나왔던 총 서른두 명 중 마지막 혈수인을 쓰러뜨리는 순간이었다.
여전히 풍천교주는 뒷짐을 진 채 여유롭고 고고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백타는 듣고 있었다. 들리지 않았던 사부의 숨소리를. 사부가 지친 것이다.
사부는 실로 어려운 싸움을 해나가고 있었다. 혈수인도 위협적이지만 문제는 환왕이었다. 그는 혈수인이 싸우는 도중에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견제하며 사부를 위협했다. 큰 환술로 그들을 한꺼번에 휩쓸어버리려면 어김없이 나서서 방해했다.
‘……사부님.’
자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환왕을 먼저 죽이려 했을 텐데.
이제 양쪽 방에서 나온 혈수인은 각각 서른둘. 모두 합쳐 예순네 명이었다.
풍천교주와 그들과 격전이 벌어졌다. 벌떼처럼 달려들었고, 풍천교주는 자신이 지닌 모든 무공과 환술을 동원해서 그들을 상대했다.
풍천교주의 장력에 혈수인들이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풍천교주는 그들의 공격을 환술로 피했다. 무공이 발휘될 때마다 혈수인들은 시체가 되어 쓰러졌지만, 그만큼 내공 소모도 계속되고 있었다.
꽝! 꽈앙!
쏟아지는 장법을 호신강기로 막으며 뒤로 밀려난 풍천교주에게 혈수인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거기에 비겁한 환왕의 공격이 더해졌다.
충격을 견디며 풍천교주가 쌍장을 휘둘렀다. 푸른 강기가 공간을 휩쓸며 다시 몇 명의 혈수인을 박살 냈다.
긴박한 싸움의 와중에 풍천교주의 전음이 소백타에게 날아들었다.
―셋, 둘…….
다른 일언반구 없이 숫자만 세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사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나.
소백타는 뒤통수로 사정없이 뒤에 선 환왕을 가격하려 했다.
환왕이 풍천교주의 싸움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바람에 뒤통수 박치기는 거의 그의 얼굴을 가격할 뻔했다.
그가 피하느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피하던 그 순간.
쇄애애애애애액!
소백타가 몸을 낮췄고 그곳으로 풍천교주가 날린 강기가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풍천교주가 그곳으로 쇄도했다.
무리한 공격이었기에 혈수인들의 공격을 연속해서 허용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호신강기로 버티며 소백타를 향해 날아갔다.
풍천교주가 소백타와 함께 시공이환술 속으로 피하려던 바로 그때.
휘리리리리릭.
한발 먼저 보이지 않는 줄이 소백타를 잡아당겼다.
뒤로 물러난 환왕이 그를 먼저 낚아챈 것이다.
기습적으로 소백타를 구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갔고 혈수인들의 공격이 풍천교주에게 쏟아졌다.
꽝! 꽈앙! 쾅!
풍천교주는 다시 그들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그리고 남은 혈수인들을 모두 해치웠을 때 풍천교주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리하게 내력을 사용하면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풍천교주는 어쩌면 이곳에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검무극 앞에서야 여기가 내 세상이다, 큰소리쳤지만.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풍천교주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소백타를 쳐다보았다. 녀석이 꼬마일 때가 떠올랐다. 똘똘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녀석이.
“이상하게도 네가 마음에 들었다. 그 많은 제자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지. 백타야. 나는 다시 돌아가도 너를 내 후계자로 삼을 거다.”
소백타의 눈에서 싸움 내내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이제 잘 할 수 있는데. 살 수만 있다면 이제 정말 잘 할 수 있는데.
그때 환왕이 소백타에게 속삭였다.
“네 말이 맞다. 이제 싸움에 집중할 때가 되었다.”
환왕은 이제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마지막 문이 열리면 각 방에서 육십네 명의 혈수인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과 함께 합공하면 풍천교주는 끝이었다.
“똑바로 봐라. 네 사부가 어떻게 죽는지. 그런 다음 네 단전을 파괴하고 사지 근맥을 끊고 혀를 잘라서 뇌옥에 처넣을 거다. 평생 오늘 일을 떠올리며 살게 해주마.”
소백타는 절망했다. 자신이 고통받는 것은 괜찮다. 지금 괜찮지 않은 것은 자신 때문에 사부가 죽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정말 죄송합니다.
풍천교주가 제자에게 말했다.
“환술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풍천교주가 어디에 있다더냐? 눈물 닦아라.”
소백타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내가 저런 놈 만나면 뭐라고 하라고 했느냐?”
소백타가 환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비겁한 겁쟁이 새끼야! 저리 안 꺼져?”
소백타는 사부의 눈빛에 담긴 미안함을 보았다. 사부는 자신을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있었다. 정말 이 큰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은 이미 저를 구하셨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영혼을 구해주었으니까.
풍천교주는 환왕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천천히 몇 걸음 걸어 나온 환왕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래도 제일 오래 기다렸는데 바람은 쐬게 해줘야 하지 않겠소?”
끝까지 모험하지 않는 그였다. 철문 뒤에 각각 예순넷이나 되는 혈수인이 기다리고 있는데, 굳이 먼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철문을 바라보던 바로 그 순간!
철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부딪치고 진동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점점 커졌다.
쿵! 쿠웅! 쿵! 콰직! 콰드득!
바람 소리에 비명까지 섞이는가 싶더니 다시 그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철컹.
문이 열리면서 빛이 흘러나왔다.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걸어 나온 사람은 마불이었다. 마불 뒤로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혈수인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등장에 풍천교주와 소백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면 환왕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풍천교주의 시선이 마불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꽃을 향했다. 그래,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니, 그 어떤 감사로도 부족하리라. 그래서 투덜거렸다.
“꽃 꺾을 시간은 있지? 친구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친구란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소교주보단 일찍 온 것 같은데?”
“소교주야 항상 늦장이지. 자기 필요한 게 있을 때나 바람처럼 달려와서 이거 내놔라, 저거 해내라, 사람 열불 터지게 하지.”
마불이 동감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바로 그때였다.
콰콰콰콰콰콰콰쾅!
무엇인가를 쓸어버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꽈아앙!
마불이 나왔던 문의 반대쪽 문이 박살 나면서 무엇인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들은 바로 대멸식의 여섯 악귀였다.
여섯 악귀가 밀고 나온 복도에는 시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악귀의 모습에 모두 숨을 죽였다. 동서남북 네 악귀 중 가장 무서운 생김새의 악귀가 분열된 것이었기에, 이 여섯 악귀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모두를 압도했다.
마불은 합장하며 그것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구화마공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여섯 악귀가 서서히 사라지자 검무극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흑마검을 늘어뜨린 채 걸어 나왔다. 피를 뒤집어쓴 채 옷은 찢어지고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이곳에 오기 전 관문이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얼마나 다급히 돌파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과 풍천교주의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여튼 우리 교주님은 저만 없으면 제 욕을 하시는군요.”
제328회 열심히 살아보고 도망쳐라.
환왕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관문을 다 뚫고 왔다고?’
풍천교주가 환왕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잖나? 자네가 이 사람을 몰라서 그런다고.”
마불의 관문도 어려웠지만, 검무극을 막은 관문은 절대 통과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특히 혈독대망이 있는 관문을 생각해 보면.
“만독불침이 아니면 통과할 수 없는데.”
독 때문에 아예 시도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소교주를 죽이지 않고 묶어둘 수 있다고 판단했던 거고.
검무극이 풍천교주 옆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내가 독왕하고 친해서.”
마불도 풍천교주 옆에 나란히 섰다.
“독왕하고는 나도 친하지.”
풍천교주는 자신의 좌우에 든든하게 서는 두 사람을 보며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희열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사람이 검무극이고 마불이었으니 이 벅찬 감정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기쁨이 휘몰아친 후에 밀려든 다음 감정은 이것이었다.
‘소교주가 왔다!’
검무극이라면 왠지 소백타를 구해낼 수도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이공자, 이공자, 소교주, 소교주 노래를 부르며 뒤엉켰던 것이 아니겠는가?
‘소교주, 부디 부탁하네.’
그의 기쁨과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듯, 검무극의 다음 행동은 풍천교주를 더욱 격정에 휩싸이게 했다.
검무극이 자신의 등에 은밀히 손을 대더니 한 줄기 내력을 넣어 내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자네는!’
풍천교주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무극 이 사람은 사람 자체가 다르구나. 이 순간 내상부터 걱정하는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선 채로 과감하게 내공을 주입하는 것도 그렇고. 이 상황에서 보통 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풍천교주의 내부가 편안해지며 안색이 좋아졌다.
끝으로 날아든 검무극의 전음.
―놈을 놓쳐도 좋으니 절대 무리하지 마십시오.
검무극에게는 환왕을 쫓는 것도 중요하고 소백타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풍천교주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다.
환왕은 소백타 뒤에 완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소백타는 여전히 인질 상태였지만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두 사람이 왔으니 사부님은 무사하실 거다.’
기쁜 만큼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세 사람이 합공하면 환왕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자신이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지는 그를 검무극이 위로했다.
“본교에서는 섭혼마존이 당했고, 무림맹주의 손자도 당했소.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소. 저들이 워낙 치밀하게 접근해온 탓이오.”
환왕이 소백타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협박했다.
“이대로 떠나라. 제자를 죽이고 싶지 않으면.”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소백타의 목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제자는 본교에도 있으니 한 명쯤 없어도 되지 않습니까?”
풍천교주가 대답하기 전에 환왕이 먼저 말했다.
“허풍은 안 통해. 교주가 제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환왕은 조급해하고 있었다. 앞에 나란히 선 세 사람은 일 대 일로 붙어도 방심해선 안 될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나마 그에게 다행이라면 풍천교주는 내상을 입었고, 나머지 두 사람의 내공 역시 많이 소모되었을 거란 점이었다. 급하게 달려왔으니 내공을 회복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서 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 사람 내공을 합친 것이 설령 자신보다 적다 하더라도, 그게 어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겠는가? 상대는 한 줌의 내력으로도 뭐가 나올지 모를 절대고수들인데.
환왕의 협박에 풍천교주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미리 작별 인사나 해두자. 못 구해줘서 미안하다.”
검무극과 마불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제자를 구하기 위한 어떤 계략이 아님을 느꼈다. 그는 제자와 진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소백타는 자신을 향한 눈빛에서 사부의 마음을 느꼈다. 그에게 할 말은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저 역시 다시 돌아가도 꼭 사부님의 제자가 되는 인생을 살 겁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환왕의 표정은 절로 굳어졌다.
소백타가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자신이 죽을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풍천교주가 없다면 환술로 달아날 수도 있을 텐데. 풍천교주가 있기에 그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공간에서 섣불리 나가면 안 된다.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이 공간에서 자신의 무공은 훨씬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믿는 것은 혈교의 유산, 바로 이곳이었다.
“비겁하게 삼 대 일로 덤빌 건가?”
환왕의 말을 받은 사람은 소백타였다.
“이 비겁한 놈아! 내 뒤에 숨어서 그게 할 소리냐? 날 죽이고 너도 자결해라. 너나 나나 한심한 인생, 같이 죽자!”
그의 말을 무시하며 환왕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지 않느냐는 눈빛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보지 마시오. 솔직히 인질로 잡고 계신 분은 내겐 중요하지 않소. 인질로 잡으려 했으면 여기 두 분 중에 한 분을…….”
그렇게 풍천교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환왕의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향하던 바로 그때.
검무극의 신형이 번쩍하면서 환왕을 향해 쇄도했다.
쇄애애애애액.
공격하지 않을 것 같았던 바로 그 순간은 노린 기습이었다. 소백타를 죽여도 상관없다는 그런 공격이었다.
이 순간 이렇게 공격해올 줄 몰랐기에 환왕은 허를 찔렸다.
본능적으로 소백타를 죽이려다가 포기했다. 검무극의 움직임이 빨라도 너무 빨라서 자신도 최소 팔 하나는 잘릴 것 같아서였다. 본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소백타로 막았어야 했는데.
환왕이 사라지던 그 순간.
검무극은 소백타를 안고 뒤쪽으로 쇄도했다.
쉬쉬쉭!
내려서려는 쪽에 검을 내질렀다. 환왕이 그쪽으로 은신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였다.
그때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위험해!”
풍천교주가 일장을 내질렀다. 그의 장력이 향한 곳은 소백타의 그림자였다.
소백타의 그림자 속에 숨었던 환왕이 몸을 일으켜서 검무극을 기습하려 했던 것이다.
꽝!
그림자가 사라졌고 소백타의 그림자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무극은 재빨리 소백타의 내공을 풀어주었다. 그제야 내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그였다. 검무극의 과감한 판단으로 소백타를 구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구했다는 기쁨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풍천교주가 모두에게 환왕이 이 공간에 은신해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환왕의 은신술은 그야말로 최고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용하는 혈풍은영술(血風隱影術)은 혈교 은신술의 정점에 있는 무공이었다. 은신술로만 따지면 아버지의 호위인 휘의 실력에도 전혀 밀리지 않을 실력이었다.
검무극이 마불에게 전음을 보냈다.
―빛을 부탁합니다!
마불이 재빨리 수인을 맺었다.
전법광인!
마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공간을 밝혔다. 그 찰나의 순간 검무극은 신안술을 발휘했다. 그리고 보았다. 다른 곳과 빛이 다르게 반사되는 곳이 있음을.
쉬이이익.
파악!
허공에서 피가 튀며 환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천교주가 쇄도해서 그를 끌어내려 했는데 간발의 차로 다시 숨어버렸다. 하지만 풍천교주가 다시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어서 그를 끌어냈다.
파파파팡!
모습을 드러낸 환왕과 풍천교주가 허공에서 장법을 주고받았다.
환왕은 풍천교주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내상을 입은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풍천교주가 내공에서 불리했다.
그랬기에 검무극이 그를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마불은 소백타 앞으로 와서 그를 지켰다. 다시 환왕이 그를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이 혼신을 다해 쌍장을 내질렀다.
꽈앙! 꽝!
검무극과 풍천교주를 뒤로 밀어낸 환왕이 비장의 한 수를 발휘했다. 비기를 아꼈다간 써보지도 못하고 죽을 상황이었다.
휘류류류류류류.
환왕의 몸 주위를 피처럼 붉은 안개가 감싸는가 싶더니, 안개가 사라졌을 때 그의 모습도 바뀌어 있었다.
그의 피부는 붉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변해 있었다. 두 눈 역시 시뻘겋게 변한 채 지독한 혈기를 내뿜고 있었다.
환왕이 펼친 무공을 알아본 풍천교주가 소리쳐 경고했다.
“조심하게! 철혈파천술(鐵血破天術)이네!”
혈교의 마공도 여러 계파가 있고 갈래가 있었다. 환왕이 계승한 마공은 혈령술 계열이었는데, 철혈파천술은 몸의 내력과 혈기를 모두 끌어올려 일정 시간 몸을 강철처럼 만들면서 동시에 가진 힘의 몇 배를 발휘하는 혈령술의 마지막 비기였다. 거기에 이 공간에서 발휘되었기에 위력은 더욱 강력했다.
쇄애애애액!
환왕은 망설이지 않고 검무극을 향해 쇄도했다.
파파파파파팡!
환왕이 두 주먹을 연속해서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너무나 빠르고 강력해서 검을 쓸 여유가 없었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권법으로 그와 맞섰다.
환왕의 마지막 비기인 만큼 주먹이 부딪칠 때마다 온몸에 밀려드는 충격이 엄청났다.
검무극은 벽력수라권의 수비식인 금강수라를 발휘했고, 천마호신공까지 발휘했다. 공격은커녕 막는 것도 급급했다.
풍천교주의 손에서 날아간 무형기가 정확하게 환왕의 등에 박혔다.
하지만 환왕은 한차례 휘청했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꽝꽝꽝꽝!
마불도 그냥 있지 않았다.
살법회인!
강기가 휘몰아쳤다. 적중당하기 직전 환왕은 옆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강기는 그대로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무극도 반대로 몸을 피했다.
콰콰콰쾅!
그들이 있던 곳이 휩쓸려 날아갔다.
환왕은 곧바로 검무극을 노리고 다시 날아들었다. 철혈파천술을 사용한 환왕은 신풍사보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있었다.
환왕은 오직 검무극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들 넷 중에서 검무극이 가장 위협적이라는 것을.
구화마공이 펼쳐지면 혈교 마공으로는 절대 막아낼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검무극을 먼저 죽이려는 것이다.
소백타도 공격할 기회를 노렸지만 검무극과 환왕이 뒤엉켜 싸우고 있기에 함부로 공격을 가할 수 없었다.
마불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마불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풍천교주가 구결을 읊는 그 순간!
환왕이 순간 어딘가로 쑥 빠져들려다가 튀어 올랐다. 발밑에 시커먼 구멍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를 빠뜨리기 위한 함정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 공격을 멈추게 할 목적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으로 충분했다.
검무극이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리던 바로 그 순간!
마불의 수인이 완성되었다.
마장멸인!
거대한 손바닥이 환왕을 내리찍었다.
꽈아아앙!
하지만 환왕은 양손을 들어서 그것을 막았다. 마불과 환왕 모두 내력을 끌어올렸다. 짓누르는 쪽과 눌리지 않으려는 쪽이 팽팽하게 맞서던 바로 그때! 환왕이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거리와 시간을 번 검무극에게서 구화마공 제일식 인멸식이 발휘된 것이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동서남북 사방에서 나타난 네 악귀가 환왕을 베었다.
쩌어어엉!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몸에 있던 붉은 피부가 깨진 쇳조각이 되어 촤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환왕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그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검무극과 풍천교주, 마불의 합공은 수없는 연습을 한 것처럼 완벽했지만, 순간적인 기지로 발휘한 합공이었다. 이렇게 상대가 검무극이고 마불이고 풍천교주니 자기 뜻대로 싸움이 진행될 리가 없었다.
스스슷!
큰 부상에도 그는 홀연히 사라졌고, 그 자리에 세 개의 문이 생겨났다.
정말이지 눈으로 보면서도 극의에 다다른 환술 실력이 감탄스러웠다.
검무극이 풍천교주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혼자 가시면 안 됩니다.”
“혼자 가라고 등 떠밀어도 안 가네.”
“어느 문으로 가야 합니까?”
풍천교주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세 번째 문을 가리켰다.
“저쪽이네.”
네 사람이 나란히 그 문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사라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스스슷.
환왕이 다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환왕은 재빨리 소환한 세 개의 문을 모두 없앴다.
그제야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철혈파천술이 깨어지면서 큰 내상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환왕의 표정에는 해냈다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더라도 이곳의 마지막 남은 관문으로 향하게 될 거다. 빠져나오려면 적어도 한 시진은 걸리겠지.”
환왕의 속임수였다. 앞서 그들은 세 개의 문을 통해 들어왔다. 자신이 그 문으로 달아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을 세 개의 문으로 현혹한 것이다.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곳까지 멀리 달아날 것이다. 다음에 반드시 복수해주마!
구결을 읊어 이곳을 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
푸우우욱!
한 자루의 검이 그의 심장을 뚫었다.
환왕이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그의 옆으로 풍천교주와 마불, 소백타도 있었다.
풍천교주가 환왕에게 말했다.
“자네 속임수는 내가 간파했네.”
문으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풍천교주는 세 사람을 데리고 시공이환술 속으로 들어갔다. 앞서 검무극이 시공이환술로 소백타를 속였듯, 풍천교주는 환왕을 속인 것이다.
환왕이 뭐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려던 그때, 악인을 대하는 검무극의 한결같은 태도는 환왕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굳이 죽기 전에 악인이 남기는 저주 같은 말은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쉬이이이익!
서걱!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서 그의 목을 쳐버렸다. 두 눈을 부릅뜬 환왕의 머리통이 바닥을 떼구루루 굴렀다. 드디어 환왕을 제거하는 순간이었다.
“우선은 이곳부터 나가세.”
풍천교주가 구결을 읊자 네 사람은 그림 앞에 서 있었다.
드디어 이 징글징글한 그림 속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모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백타가 풍천교주에게 넙죽 엎드렸다.
“사부님.”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살 줄은 정말 몰랐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하러 와준 사부가 정말 고마웠다. 검무극과 마불도 고마웠다. 모두에게 감사를 전한 후, 사부에게 속마음을 전했다.
“환술 속에서 몇 번이나 다짐했습니다. 살아남으면 사부님을 위해 살아갈 거라고요.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남은 인생은 사부님의 뜻대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러자 풍천교주는 부드러운 눈빛과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걸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교주 자리를 버리고 떠났겠느냐?”
“……사부님.”
“널 위해 살아가야지. 풍천교주로 살아가면 교주가 된 널 위해 살아가는 거고, 나처럼 도망쳐 나오면 도망친 널 위해 사는 거고.”
풍천교주가 마지막으로 해줄 말은 이것이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도망을 치더라도 열심히 살아보고 도망쳐라.”
소백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풍천교주가 제자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검무극은 환왕의 그림을 구긴 후 손바닥에 올렸다.
화르르르륵.
삼매진화에 타오르며 날아오르는 재를 올려다보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혈교 부활을 위한 비밀결사는 이제 믿지 마십시오. 오늘부터는 음모론이고 소문입니다.”
제329회 이런 독초 없다는 데 제 손목 겁니다.
혈교 부활이 목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소백타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자는 왜 제게 새외일통을 하게끔 바람을 넣었을까요?”
소백타뿐만 아니라 풍천교주와 마불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연 검무극에게 시선이 모였다.
“왜 저를 보십니까?”
“삼라만상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는 우리 소교주 아니신가?”
그래도 설마 이것까지 알겠냐는 풍천교주의 장난이었는데, 검무극은 꿰뚫고 있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긴 합니다.”
말은 짐작이라고 했지만 사실 확신하는 바가 있었다.
“신웅철방 때문입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소백타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거긴 본교에서 은밀히 병장기를 준비하게 한 곳이오.”
“알고 있소. 이미 그대 사부님과 다녀왔소. 지하에 대형 작업장이 있는 것도 밝혀냈고.”
소백타의 얼굴이 붉어졌다. 신웅철방 역시 부끄러운 과거사의 결정적인 한 부분이었으니까.
“그자는 전쟁을 통해 신웅철방을 새외제일의 철방으로 키우려 한 것 같소.”
회귀 전 인생에서 실제로 신웅철방이 중원제일철방이 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측이었다.
“전쟁은 아마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거요. 신웅철방은 풍천교에 맞서는 세력에게도 은밀히 병장기를 팔았을 테니까요.”
긴 전쟁만큼 철방에게 큰 부를 안겨주는 일은 없었으니까.
“나중에 조사해 보시오. 만약 신웅철방이 새외의 다른 세력들과의 접촉한 사실이 있다면, 내 추측은 사실일 거요.”
소백타는 그 말이 사실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환왕은 자신에게 바람을 넣는 내내 신웅철방을 통한 철저한 전쟁 준비를 강조했으며 장기전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결국 놈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신웅철방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확인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확인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고는 전음을 보냈다.
―내가 직접 하겠네.
풍천교주는 소백타의 두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물었다.
“성 장로는 어떻게 된 거냐?”
풍천교주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고, 지금은 소백타가 죽이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이번 인질극 과정에서 풍천교주는 왜 자신이 소백타를 선택했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확신했다. 비록 환왕에게 현혹되어 헛된 꿈을 꾸긴 했지만 적어도 그런 짓을 저지를 사람은 아니란 것을.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 장로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지금 실종된 상태다.”
소백타의 반응만 봐도, 성 장로를 죽인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설마! 그자 짓입니까?”
풍천교주보다 검무극이 더 안도했다. 만약 소백타가 그를 죽였다면, 풍천교주는 제자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든 풍천교주는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소백타는 침울한 얼굴로 자책했다.
“아! 만약 성 장로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저 때문입니다. 애초에 그자에게 말려들지 않았다면 성 장로께서 교를 떠나시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심지어 전 성 장로께서 실종된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풍천교주는 제자를 위로해주었다.
“아직 생사가 밝혀진 것은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라.”
네 사람은 그렇게 환왕의 거처에서 나왔다.
그들이 교주전으로 가려던 그때, 한 무인이 와서 전서를 전해주고 갔다. 고월에게서 온 전서였다. 이번 일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고월이었다.
“고 군사가 성 장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풍천교주는 물론 소백타까지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이 살아 있나?”
“네, 생존해 계십니다.”
“어디에 있나?”
검무극의 입에서 또 같은 곳이 언급되었다.
“신웅철방입니다.”
* * *
풍천교주와 소백타는 풍천교 고수들과 함께 신웅철방을 다 쓸어버렸고, 지하에 갇혀 있던 성 장로를 무사히 구해냈다.
그 과정에서 환왕과 관련된 고수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일했던 자들은 죽이지 않고 모두 흩어버렸다. 환왕이 사라졌듯 신웅철방도 무림에서 사라진 것이다.
풍천교주와 소백타가 성 장로와 재회하는 사이 나는 마불과 함께 새외의 이름 모를 산에서 독초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제 풍천교의 일은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새외에서 자라는 약초들은 중원의 것들과 달랐다.
마불은 자신이 찾는 것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약초를 보면 유심히 살폈다. 독왕이 정리한 것처럼 자신도 종이에 약초를 그리고 특징을 적기도 했다.
이 일이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란 생각도 들었고, 또 한편으론 이렇게라도 뭔가에 열중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약초채집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어떤 마음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혹시 이 약초 아닙니까?”
내 외침에 마불이 와서 확인했다.
“똑같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독왕님, 딱 기다리십시오! 제가 찾은 약초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마불님이 아니라 제가 찾은 약초를 가지고요!”
마불은 그림의 약초를 다 외웠기에 종이를 가지고 비교하는 사람은 나였다. 마불이 내 손에 들린 종이속 독초와 내가 찾은 독초를 비교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이건 아니네.”
“질투, 방해, 안 통합니다. 독초에게서 떨어지십시오!”
“입이 다섯이어야 하는데, 이건 여섯이지 않나? 여길 보게. 특별히 써놓기도 했잖나? 잎이 여섯 개짜리는 흔하게 발견된다고.”
“이 흔하게 발견되는 것조차 어렵게 찾았다고요! 너무 찾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벌써 한 시진째 하나도 못 찾았습니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으면 부탁도 안 했겠지.”
“어이구 허리야.”
마불은 다시 허리를 굽힌 채 풀들을 살피며 말했다.
“엄살은. 그 허리 철혈파천술로 두들겨 맞아도 멀쩡했던 허리네.”
“일하는 허리랑 싸우는 허리가 같습니까? 저는 더 못 찾아요! 못 해요!”
검무극이 벌러덩 바위에 누웠다.
“어른 일하는 데 잘하는 짓이다.”
“여기서 하늘 올려다보니 좋습니다. 잠시 누워보시죠.”
흘러가는 구름이 평화로웠다. 이 잠깐의 휴식이 너무 소중하게 다가왔다. 물론 마불이 일하고 있는데 혼자 쉴 수만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독초가 그려진 종이들을 주변에 늘어놓았다.
“이렇게 생긴 애들은 평생 본 적이 없습니다. 이거 독왕께서 우릴 골탕 먹이려는 거라고요! 이런 독초 없다는데 제 손목 겁니다.”
그때 거짓말처럼 마불이 독초를 번쩍 들었다.
“찾았다!”
마불이 가져온 독초와 그림에 그려진 것을 비교하니 똑같았다.
“정말 있었네요.”
“어느 쪽 손목인가?”
“마불님과 내기는 금강불괴가 되고 나서 해야겠습니다.”
마불이 바위 위에 독초를 올려놓고 또 캐러 달려갔다.
“하나 캤는데 좀 쉬었다 캐세요!”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마불은 부지런히 주위를 살폈다.
바위에 앉아서 그가 약초 캐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불은 저 짧은 다리로 항상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형을 후계자로 만들려고 할 때도 그렇고, 독초를 캐는 지금도 그렇고. 그는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또 찾았다!”
마불이 또 다른 독초를 캐왔다. 그것 역시 종이에 있는 독초였다.
“짰죠? 애초에 여기 독초 숨겨두고 짠 거죠? 제 손목 노리고 짠 거잖아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독초를 잘 찾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독왕이 내게 부탁한 것 아니겠나?”
또 캐러 가려는 것을 이번에는 강제로 좀 쉬라고 붙잡았다.
마불은 못이기는 척 흙 묻은 손을 탈탈 털은 후 바위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었다.
“이번에 함께 와주셔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야 뭐 병풍 역할만 했지.”
“우리 목숨을 지켜준 병풍이었죠.”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물었다.
“이보게, 소교주.”
“네.”
“이번 일의 배후는 어떤 자들인가?”
마불은 앞서 소백타에게 말할 때, 본교는 섭혼마존이 무림맹은 맹주의 손자가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모종의 조직이 무림 중요조직에 암약하며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 어떤 조직인지는 모릅니다.”
“교주님도 알고 계시나?”
고월은 모든 정보를 통천각과 공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모종의 조직이 암약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총군사께서 알고 계시니 아버지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자 마불이 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아버지에 대한 마존들의 믿음이리라.
“혈교 환술을 정통으로 이은 자를 끌어들인 놈들이야. 앞으로도 조심하게.”
“저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본교를 잘 지켜야, 내가 이런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나?”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또 독초를 찾아 나서는 마불에게 소리쳤다.
“이거 한 뿌리만 제가 찾은 걸로 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가서 큰소리치죠! 제발요!”
마불은 못 들은 척 더욱 깊숙한 곳으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 * *
독초를 캐고 돌아왔을 때, 소백타는 교주전에서 검무극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교주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모셨소.”
성 장로까지 무사히 돌아오자 그는 밝은 표정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라 해도 될 만큼 느낌이 달랐다. 이게 원래 그의 본모습이리라.
소백타는 천천히 교주전을 둘러보았다.
“사부가 처음 여길 봤을 때 당황하시는 걸 느꼈었소. 여길 싹 뜯어고쳤으니 놀라셨을 거요. 사실 그걸 노리기도 했지. 한창 사부를 미워하던 때였으니까. 그래도 이 교주전 바꾸지 않을 생각이오. 예전 교주전, 솔직히 많이 구식이었소.”
그는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는 사부의 당부를 제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오.”
“교주께서 잘 해내시리라 믿소.”
“이번에 도와주신 일 정말 고맙소.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은혜는 꼭 갚겠소.”
“그대 사부를 위해서 한 일이었소.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소.”
“그래서 더 고맙소.”
이번 일로 풍천교주와 더 가까워진 것은 검무극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로 소교주께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소.”
소백타가 태사의를 조작하자 사방의 벽이 올라가며 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교 신물 중에서 하나 고르시오.”
“진심이시오?”
“그렇소.”
신물이 대수겠는가? 목숨을 구했고, 사부와의 관계까지 회복했으니까.
그럼에도 검무극은 소백타의 이 신물이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골라도 되겠소?”
“물론이오. 단, 음뢰종은 안 되오.”
“그 정도는 알고 있소. 한데 사부께서는 알고 계시오?”
“왜? 사부께 허락받아야 하오?”
“그건 아니오만. 후회하지 마시오. 나는 주는 선물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원하는 것을 고르시오.”
검무극이 신물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음뢰종에 가서 악귀들에게 인사했다.
‘곧 떠날 테니 너희들은 이제 못 보겠구나.’
구화마공의 악귀만큼이나 음뢰종의 악귀도 이제 친구처럼 느껴졌다.
‘다음에는 고월과 함께 돌아오마.’
검무극은 신물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사실 예전에 풍천교주에게 혈신단이나 극품천잠사를 받았을 때 다 보았던 신물이었다.
또 다른 신물 중에 고르라면 피풍의처럼 두르면서 도검불침의 효능을 지닌 보의인 혈룡신포(血龍神袍)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게 아니라면 혈신단보다는 효과가 덜하지만 큰 내공 증진을 바랄 수 있는 화소단(火燒丹)도 있고.
검무극은 천천히 걸으면서 신물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렇게 교주전 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데 가슴 속에서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웅!
놀랍게도 품속에 넣어둔 비궤가 살짝 진동한 것이다. 비궤를 얻은 후에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비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신물에 반응했음을. 정확히 확인해 보려고 조금 떨어졌다가 다시 와보았다. 이번에도 그 신물 앞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비궤가 반응한 신물은 주먹보다 조금 작은 검은 쇠구슬이었다.
“이건 어떤 신물이오?”
“검은 눈동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흑정(黑睛)이라 불리는 거요.”
“어디에 쓰는 거요?”
“모르오. 본교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소.”
예전에도 봤지만, 그냥 지나쳤던 물건이었다.
비궤가 가까이 있어야만 이 두 개의 물건이 관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 흑정이 비궤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비밀을 풀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갔다. 전대 천마신교 교주 중에 비궤를 가진 채 흑정 근처에 와본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비궤의 비밀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절로 마음이 격동했다.
“이걸 고르겠소.”
“정말 그걸로 괜찮겠소? 전대 교주님들이 연구를 많이 했지만, 그냥 쇠구슬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린 물건이오.”
“그래도 여전히 신물 자리에 놓여 있었지 않소? 그래서 더 대단한 녀석 같은데.”
“그렇게 해석하실 줄은 몰랐소.”
“이걸로 하겠소.”
검무극이 흑정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이게 맞다는 듯 품 안에 있던 철궤가 한 차례 더 진동했다.
“귀한 선물을 주셔서 고맙소.”
검무극은 이것을 운명이라 받아들였다. 철궤를 얻고, 새외를 오게 되고, 또 그에게 신물을 선물 받고. 만약 그를 구하지 못했다면 흑정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그곳으로 풍천교주가 들어섰다.
“그거 뭐야?”
검무극이 재빨리 흑정을 품에 넣었다.
“설마? 내 제자에게도 신물을 뜯은 건 아니겠지?”
“제가 뜯은 건 아니고, 교주가 선물로 주셨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물러나신 교주님 말고, 여기 현 교주님 마음대로겠죠!”
검무극이 후다닥 몸을 날려 달아나며 말했다.
“이제부터 제 욕 하실 때, 이 일도 포함되겠네요!”
아니나 다를까 풍천교주는 곧장 소리쳤다.
“멈춰! 사제 간을 다 털어먹는 이 파렴치한 소교주야!”
물론 검무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교주전을 나갔다.
제자와 둘만 남자 핏대를 올리던 풍천교주의 표정이 온화하게 풀어졌다.
“내 부탁 들어줘서 고맙네.”
제330회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어.
놀랍게도 소백타가 검무극에게 신물을 선물로 준 것은 풍천교주가 부탁한 일이었다.
“내가 왜 소교주에게 선물을 주라고 한 줄 아는가?”
“이번 일에 대한 고마움 때문 아닙니까?”
“물론, 그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가 있네.”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풍천교주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바로 교주 때문이네.”
“저 때문이라고요?”
검무극과 소백타 사이의 인연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맺어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자신도 그에게 신물을 주면서 시작된 관계기도 했고.
그냥 이대로 헤어지는 것과 고마움을 표하며 신물을 선물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으니까.
설령 상대가 보답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양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의 몫이다. 그조차 선물이 된다.
“소교주와 인연의 끈을 놓치지 말게. 교주를 위해서도, 풍천교를 위해서도.”
그제야 소백타는 사부의 깊은 뜻을 이해했다. 그만큼 검무극을 높이 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좋은 교주가 되려면 물건보다 사람 욕심을 내야 하네. 저기 있는 신물을 다 쓰더라도, 주위에 교주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게.”
“알겠습니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소백타를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정말? 정말 여기 있는 신물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그야…….”
소백타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불과 어제만 해도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사람 관계 징글징글하지.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 노력하고, 실망하고, 배신당하고. 정말 이만큼 심력 소모가 큰일도 없지. 그래도 자넨 사람을 보고 다스리는 일을 최우선에 둬야 하네. 왜인지 아나?”
풍천교주는 지금껏 못했던 말들을 제자에게 다 해주고 있었다.
“자네가 교주라서 그렇네.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사람 관계를 이렇게나 중요시할 필요가 없겠지. 하나 교주는 결국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네. 본교는 물론이고 우방이 되는 조직들, 나아가 적들까지 다룰 수 있어야 하네. 자네가 어떤 사람을 곁에 두고, 어떤 사람을 쓰는지에 따라 풍천교와 새외에 사는 모두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게.”
소백타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만날 신물만 쳐다보며 살았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렇기에 하실 수 있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데 소교주가 뭘 고른 건가?”
“흑정을 골랐습니다.”
풍천교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좋은 것만 고르다가, 또 제일 가치 없는 것을 고르고. 정말 소교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교주라면 아까워할 필요 없네. 조금 전에는 오히려 자네가 선물을 받은 거야. 그러니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또 주게.”
신물 하나로 검무극과 인연을 맺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란 뜻이었다.
이런 마음이 들어선 안 되지만 소백타는 검무극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도 사부에게 이런 신뢰받는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풍천교주는 그런 제자의 속마음을 읽고 있었다.
“서두르지 말게. 나는 자네 나이의 두 배가 넘어서야 비로소 내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네. 그전까진 정신없이 막 떠밀려서 살아온 것 같아.”
정말이지 이 나이에 진짜 인생이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게 될 줄이야.
“그러니 조급하지 말게. 자네의 진짜 인생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소백타는 사부와 이별하고 싶지 않았다.
“소교주와 함께 돌아가실 겁니까?”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웠는데. 풍천교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분간 우리 교주와 있다 갈 거네. 같이 수련도 하고, 술도 마시고. 옛날이야기도 하고.”
적어도 지금은 고월보다도, 검무극보다도 제자가 우선이었다.
두 사람에 비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제자였기에, 좀 더 함께 있으면서 가르쳐주고 싶었다.
소백타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질투했다가 좋았다가. 이 짧은 시간에도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걸 보니. 그래, 사부님 말씀이 맞다. 난 아직 멀었다.
* * *
교주전을 나와 거처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 오랜 세월 전대 천마들도 풀지 못한 비궤의 비밀을 드디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호위들에게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품에서 비궤와 흑정을 함께 꺼내 탁자에 나란히 올려두었다.
“비궤야, 너 친구 생겼다.”
비궤에 웃는 모습을 그려두었기에 정말 친구가 생겨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둘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흑정을 들어서 비궤 위에 올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동까지 하면서 흑정을 고르라고 했으면서.
“이렇게 내외할 거면 이 친구는 왜 찾은 거야?”
잠시 기다렸지만 비궤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비궤를 돌려서 다른 면에도 흑정을 올려보았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또 다른 면에 올리고, 또 다른 면에 올리고.
“물구나무가 불편해도 좀 참아라.”
그렇게 웃고 있는 비궤를 뒤집어서 바닥 면에 흑정을 올리던 그 순간.
스으윽.
흑정이 비궤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궤가 흑정을 흡수할 줄 상상도 못 했기에 나는 놀란 마음으로 그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마치 물방울이 흡수되듯, 흑정이 비궤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내력을 끌어올려 만반의 사태에 대비하며 숨을 죽인 채 비궤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궤는 그대로 있었다.
“너! 친구 잡아먹었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우웅!
비궤가 한차례 진동했다.
“너 내 말 알아듣는 거냐?”
비궤가 또 흔들리며 진동했다. 탁자가 흔들릴 정도로 큰 진동이었다. 무섭게 진동하던 비궤가 허공에 떠올랐다.
비궤가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리리리릭!
이러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고, 또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길게 생각할 시간 없었다. 본능에 따랐다.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후 허공에 떠 있던 비궤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바로 그 순간!
슈우우우우우우!
처음 들어본 소리가 들리더니 무엇인가 시커먼 것이 비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커먼 것은 연기도 아니고, 액체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내공이나 기운 같은 것도 아니고, 빛도 아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것은 난생처음 보고 느끼는 것이었다.
비궤에서 나온 그것이 손과 팔을 거쳐 몸으로 퍼져나갔다. 다른 곳으로 뻗어나가지 않았다. 마치 종이에 먹이 번져 나가듯, 그것은 내 몸으로만 퍼져나갔다.
파아아아아아아.
나는 번져 나가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보았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이것이 나를 해치려는 기운이 아님을. 만약 그랬다면 천마호신공이 발동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본능적으로 비궤를 바닥에 내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궤를 꽉 쥔 채 그것이 나에게 옮겨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빛처럼 일렁이기도 했고, 물결 같기도 했고, 기운처럼 어떤 느낌을 주기도 했다. 시커먼 색이었지만 느낌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처럼 청량했다.
화아아아아아악!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것이 번져간 그 순간.
번쩍!
전신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광채는 사라지고 없었다. 몸에 퍼져나갔던 그것은 어느새 내 몸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다급히 몸부터 살폈다.
분명 비궤에서 나온 기운이 내 몸 곳곳에 깊이 스며들었는데,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내공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고, 단전 어딘가에 녹이지 못한 기운이 뭉쳐져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그것이 내 몸에 남아 있음을.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음을.
‘대체 뭐지?’
바로 그때였다.
덜컥!
비궤가 삼켰던 흑정을 툭 하고 뱉어냈다.
튕겨 나온 흑정이 바닥을 떼구루루 굴렀다.
흑정을 주워서 살펴보니 처음의 윤기 나는 묵빛이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평범한 쇳덩이가 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흑정에 숨겨져 있던 기운이 비궤를 통해 나에게 흡수되었다는 것을. 비궤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비궤는 바로 다른 무엇인가에 담겨 있는 기운을 흡수하는 장치였다.
흑정과 같이 흡수할 수 있는 뭔가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야말로 비궤는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니 어찌 이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비밀을 밝혀낸 것은 오히려 풀려고 애쓰지 않은 덕분이었다. 그냥 친구처럼 품에 넣어 다녔기에 비밀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드는 또 하나의 예감.
이것이 끝이 아닐 것 같았다. 흑정 말고도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이 비궤로 흡수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든 것이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누가 만든 거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궤는 거꾸로 뒤집힌 채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디가 위인지 알았으니 얼굴을 새로 그려줘야겠다.
* * *
다음 날 우린 작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호위들이 마차를 준비하느라 바쁠 때, 풍천교주와 소백타가 우릴 배웅하러 나왔다.
“조심히 돌아가시오.”
소백타의 인사에 그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직접 겪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암중에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소. 앞으로 조심하시길 바라오.”
“그러겠소. 소교주도 보중하시오.”
다음으로 풍천교주와 작별을 나눴다.
긴 시간 이별이 아님에도 이렇게 섭섭한 것을 보니 그와 정이 많이 들긴 했나 보다.
“이번에 신웅철방을 처리하면서 뭘 느꼈는지 아나?”
“뭘 느끼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었고 무엇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네. 한데도 손발이 맞아 잘 돌아가고 있었지. 그들을 보면서 누굴 떠올렸는지 아나? 바로 은월이었네. 철저한 점조직으로 이뤄져 있지만 완벽한 체계하에서 돌아가는 그런 조직 말이야.”
그래서 그가 알려주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네나 고월처럼 정말 똑똑한 누군가가 배후에 있는 것이 틀림없네.”
풍천교주쯤 되면 꼬리만 만져봐도 이 괴물이 얼마나 크고 난폭할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 점 유의해서 상대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월에게는 내 따로 기별하겠네. 그리 오래 있다 가진 않을 거야.”
“편히 지내다 오십시오.”
“풍천교를 다 털어먹은 우리 소교주, 잘 가시게.”
한동안 이걸로 나를 공격할 생각에 그는 싱글벙글하였다.
나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에 신물을 보니 욕심나는 것들이 많이 남았더라고요.”
풍천교주가 소백타에게 소리쳤다.
“소교주로부터 우리 신물 잘 지키게!”
나와의 작별이 이렇게 농담과 너스레로 끝났다면, 마불과는 아주 무뚝뚝한 작별이었다.
“먼저 가겠소.”
“교에서 봅시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눈빛은 올 때와는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마불과 풍천교를 떠났다. 올 땐 셋이 왔는데, 갈 땐 둘이 돌아간다. 하지만 마음은 넷이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풍천교주와 소백타는 정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 * *
돌아오는 길은 여유로웠다.
높은 산이 보이면 마차를 멈추고 올라가서 독초를 캤고 황무지에서 별을 보며 야영했다.
끼니 해결은 호위들이 사냥해온 짐승들로 요리했다. 난 호위들에게 짐승 가죽 손질부터 고기의 어느 부위가 맛있고 어떻게 요리해야 질기지 않은지 알려주었다. 덕분에 날이 갈수록 호위들의 요리 실력이 늘었다.
“정말 소교주님은 못 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호위들의 감탄에 고개를 내저었다.
“못 하는 것 딱 하나 있어.”
“뭡니까?”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렇게 오늘도 밥 잘 먹고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잠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마불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불님도 별이시군요.”
모닥불 너머 마불이 이쪽을 향해 돌아보았다.
“무슨 뜻인가?”
“별들처럼 항상 스스로 빛나시잖아요?”
일렁이는 불 너머로 마불의 얼굴이 보인다.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난 풍천교주처럼 신물 같은 것 없네.”
“대신 독초는 있으시잖아요?”
마불은 일곱 개나 캤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도 캐지 못한 상태였다. 호위들에게 말하지 않은 딱 하나 못하는 것, 약초 캐기다.
“제발 하나만 주세요!”
마불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그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안다. 독왕에게 역시 우리 마불님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다. 아무도 못 캐는 독초를 캘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그럴수록 장난은 더 치고 싶은 법.
소리 없이 일어나 마불이 캔 약초 상자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려던 그때.
마불이 누운 채로 그곳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서 뻗어나간 황금빛 광채는 황금용이 되어 상자 주위를 보호하듯 휘감았다. 마불의 독문마공 황금대라마공이었다.
“너무하십니다! 저, 소교주라고요! 앞으로 천마가 될 사람이라고요!”
안 통한다는 듯 황금용은 용트림을 하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네, 자야죠. 잡니다.”
나는 다시 누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호위 책임자 적연이 웃음을 참지 못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아서 누워있던 마불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소교주.”
“네, 마불님.”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말했다.
“고맙네.”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저도요.”
우린 뭐가 고마운지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그렇게 새외의 모래바람을 가르며 천마신교로 돌아왔다.
제331회 독초는 캤소?
휘몰아쳐 날아든 장력이 세워진 대도와 충돌했다.
꽝하는 폭음과 충격에도 대도는 부러지지 않았다.
“겁내지 마라! 겁내는 순간 죽는 거다!”
소리친 사람은 혈천도마였고 대도를 방패처럼 세워서 장력을 막아낸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대도는 혈천도마가 선물로 준 그것이었다. 젊은 시절 사용했던 바로 그 대도.
“자, 다시 간다!”
혈천도마의 손에서 더욱 강력한 장력이 발출되었다.
서대룡은 대도에 내력을 주입하며 다시 자신의 정면에 세웠다.
콰쾅!
앞서보다 강력한 위력이었지만 이번에도 그 자리를 버텼다.
세워진 도 뒤에서 서대룡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공격만 해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데. 더 강력한 공격이 날아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더는 못 막겠다고 해야 하나?
그때 서대룡의 눈에 도의 날에 새겨진 글자가 들어왔다.
무쌍(無雙).
젊은 시절 혈천도마가 새겨둔 글자였다. 당시의 사부가 어떤 마음으로 수련했는지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저 두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 버틴다! 팔이 부러져도 버틴다!’
내력을 끌어올리며 이를 악무는 순간, 더 강력한 장력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애액!
무정한 장력은 더 큰 위력으로 날아와 서대룡의 의지와 충돌했다.
잠시 후.
똑똑.
도를 두드리는 소리에 서대룡이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혈천도마가 도 옆에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선 채로 정신을 잃었었나?
“살아 있냐?”
“그런 것 같습니다.”
서대룡의 얼굴은 창백했고 팔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가 막아냈나요?”
“그래.”
너무 기뻐 두 손을 번쩍 들려다가 비명을 질렀다. 팔은 물론이고 온몸이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혈천도마가 앞을 막고 있던 도의 손잡이를 눌렀다. 그러자 대도는 쑥 하고 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서대룡을 대도에 기대 앉힌 후 그의 가슴으로 내력을 주입해서 부상을 치료해주었다. 한 번 더 막았으면 그땐 정말 죽었을 거다.
“도가 부러질까 겁났지?”
“네.”
서대룡은 솔직히 대답했다.
“겁나는 것이 당연하다. 한데 믿어야 한다. 어떤 공격도 내 도로 막아낸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멸천마도식은 그 믿음에서 시작해서 그 믿음으로 끝나는 무공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혈천도마가 품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서 서대룡에게 내밀었다.
“복용해라.”
“이게 뭡니까?”
“마정단이다.”
마정단이란 말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마정단은 마교를 대표하는 영약 중 하나였다. 검무극이 소천동에서 얻은 영약이 바로 이것이었다.
“교주께 부탁드려서 특별히 하나 얻었다.”
“이렇게 귀한 것을! 안 됩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내 수제자는 귀하지 않으냐?”
순간 서대룡은 흠칫 놀랐다.
“아닙니다!”
“그럼 복용해라.”
놀라고 당황했지만 더는 거절할 수 없기에 서대룡은 마정단을 복용했다. 심법을 운용하며 마정단의 약효를 녹였다.
혈맥을 타고 돌던 마정단의 기운이 큰 내공이 되어 단전에 갈무리되었다.
천천히 눈을 뜬 서대룡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웅혼한 내공이 단전에서 꿈틀거렸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서대룡은 너무 감격스러웠다. 마정단 같은 영약은 죽을 때까지 복용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었다.
서대룡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혈천도마에게 큰절을 올렸다.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젊었을 때 쓰던 도를 주고, 이제 마정단까지 주었다. 정말 완전히 후계자로 여기는 것이다. 풍류주점에서 술에 취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결과다. 죽을 때까지 그 손을 놓지 않으리라.
“이 정도 내공은 되어야 멸천마도식의 후반부 초식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수련은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울 거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황천각주 업무와 잠까지 줄여가며 노력하는 제자임을 잘 알기에, 혈천도마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고비를 넘기면 서대룡은 진정한 고수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이 수련장을 나섰다.
대도를 등에 찬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음을 옮기자 그야말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소교주에게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돌아오고 계신다는 연락은 받았습니다만, 정확히 언제 도착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서대룡은 검무극이 너무 보고 싶었다. 어찌나 보고 싶었는지 며칠 전에는 꿈속에서도 등장했다. 빨리 만나서 사부가 마정단을 하사한 일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때 남도종의 도귀가 와서 혈천도마에게 보고했다.
“소교주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서대룡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가봐라.”
“네.”
교주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기에 서대룡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그는 급한 마음에 혈천도마의 얼굴에도 자신 못지않은 반가움이 피어올랐다는 것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지금은 오직 검무극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 *
“늦바람은 왜 든 거야?”
취마의 물음에 일화검존은 대답 대신 술잔을 비웠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좋다.”
두 사람은 대취림의 취몽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공수련 뭐냐니까? 무림맹에서 쳐들어온대? 아니면 어디 검 잘 쓰는 놈팡이에게 잘 보일 일이라도 있어?”
일화검존이 무공 삼매경에 빠져들었다는 소문이 아니더라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색에서 알 수 있었다.
취마 앞에서 화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새하얀 무복만 입고 다녔던 그녀는 흙이 묻은 회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 무공수련을 하다 온 것이다.
“명색이 검존인데, 검으로 끝을 봐야지.”
“그러니까 왜? 갑자기 왜?”
일화검존은 자신의 잔에 술을 부었다.
“무인이 무공수련하는 게 뭐 대수라고 난리야?”
‘부끄러워서.’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저 취마는 시시콜콜 캐물을 테고, 그렇다고 이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사우종과 관련된 일도 부끄러웠고, 겉모습에 신경 썼던 모습도 부끄러웠다. 혈천도마와 갈등했던 지난날도 돌이켜 생각하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보긴 좋네.”
취마의 한마디에 일화검존의 기분이 좋아졌다.
“너도 요즘 술 줄이고 수련한다면서?”
취마도 술이나 마셔대던 주정뱅이가 아니었다. 술을 조절하기 시작한 취마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다들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혼자 술이나 마시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게 다 소교주 때문이야.”
일화검존이 옅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마존들이 변한 것은 소교주 때문이었으니까.
“도착할 때 됐지?”
“올 때 되면 오겠지.”
일화검존은 취마가 왜 심술이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검무극은 이번에 출교하면서 마불을 데리고 나갔다. 은근히 자신과 함께 가자고 했길 바랐을 텐데. 심지어 마불은 대공자를 지지하던 사람 아닌가? 섭섭함이 술잔에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술 마시고 실없는 소리 잘했지만,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소교주, 자네 때문이 맞나보네.’
일화검존이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가려고?”
“수련해야지.”
“안 돼! 오랜만에 왔는데 더 놀다 가.”
“다음에 해. 오늘 중요한 수련이야.”
그 말에 취마는 또 술을 비웠다.
“소교주도 날 버리고 친구도 날 버리고. 그래, 내 친구는 술밖에 없지.”
일화검존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삼대취객 여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과연 그럴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았지만 취마는 술잔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온 여빈이 공손히 보고했다.
“소교주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취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동생이 새외까지 갔다 돌아왔는데 가 봐야지.”
일화검존에게는 저 말이 이렇게 들렸다. 나 빼고 가서 얼마나 잘하고 왔는지 보자!
“가서 주정 부리면 안 돼!”
“애냐, 거기서 주정을 부리게.”
취마가 훌쩍 몸을 날려서 수상비로 호수를 건너갔다.
그래, 다들 돌아가면서 검무극과 출교했었는데. 호형호제하면서도 한 번도 못 나갔으니 섭섭할 만도 하지.
일화검존은 여빈과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손 많이 가지?”
취마를 두고 한 말임을 알았기에 노를 젓던 여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화검존은 평소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또 취마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는 지난날의 나를 후회하네. 부디 자네는 그러지 말게.”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말이었지만 여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일화검존을 태운 배가 조용히 안개 낀 호수를 건넜다.
* * *
천독림 곳곳에서 독연이 피어올랐다.
오늘은 천독림 독인들의 특별수련이 있는 날이었다.
수련에 나선 이들은 대부분 허리에 독주머니를 하나에서 세 개까지 찬 이들이었다.
독공의 특성상 이렇게 외부에서 독을 살포하는 수련은 자주 할 수 없었다. 어설픈 실력의 독인만큼이나 위험한 존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수련을 하게 되면 선배들의 철저한 통제하에서 했다.
이들이 하독하면 적어도 독주머니가 다섯 개 이상인 선배들이 곧바로 그 독을 해독했다. 바람에 독연이 외부로 날아가기라도 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하독보다 해독이 어려운 법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독이 살포된 공간에서 그곳에 마련된 여러 약초를 배합해 해독하고 나오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늦으면 목숨을 잃는 그런 위험천만한 수련이었다. 이곳은 독주머니가 일곱 개 이상인 선배들이 직접 지도하고 관리하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독이 발린 암기를 던지는 수련이 한창이었다. 독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전까지 필수로 익혀야 하는 것이 암기술이었다. 그들을 지도하는 선배가 독인이 가장 많이 죽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독인의 사망 원인 일 위는 자기 독에 죽는 경우다!
그렇게 한차례 수련이 끝나고 모든 독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앞으로 독왕이 나섰다.
“실전에서 무인들이 우릴 상대할 때 반응은 두 가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거나, 무섭게 돌진해 오거나. 그들은 독을 살포하기 전에 죽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지. 숨을 참으면서 공격하기 때문에 대부분 제대로 독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당하게 된다. 잘해봤자 동귀어진이고.”
독인들 앞에 선 독왕은 평소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는 자기 세상에서 나와서 수하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에 있는 열두 개의 독주머니가 어떤 의미인지는 오히려 풋내기들은 잘 모른다. 주머니 숫자가 늘어날수록 존경심도 더욱 커지게 되리라.
“독인에게 가장 중요한 무공은 하독술도 아니고 암기술도 아니다. 바로 보법과 경공이다. 쫓아오면 달아나면서 하독하고, 달아나면 그보다 더 빨리 뒤쫓을 수 있어야 한다. 숨을 참은 채 검을 휘둘러 대는 상대를 피해야 한다. 그 시간 싸움에 너희의 목숨이 달려있다. 알겠나?”
독인들의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자, 그럼 수련 시작하도록.”
그러자 선배 독인들이 나와서 보법과 경공 수련을 시작했다.
독왕은 말없이 서서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상선이 와서 보고했다.
“소교주께서 돌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왕은 그곳에 없었다. 모두 독왕의 경공이 어떤지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제자리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본교 특유의 냄새가 있다. 출교했다가 돌아왔을 때 이 냄새를 맡으면 드디어 돌아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우릴 가장 먼저 맞아준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소교주님!”
둘만 있었다면 사정없이 달려들어 안겼을 텐데.
서대룡은 점잖은 얼굴로 와서 인사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각주께서도 잘 지내셨소?”
본심은 전음으로 날아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다음에는 저도 데려가 주세요!
―황천각은 누가 지키고?
―저 없어도 잘만 돌아갑니다! 무조건 따라갈 거에요! 저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그래, 가자. 혈독대망과 수천 마리 독사들이 가득한 방을 건너서 거대한 악귀가 널 밟아서 터트리려는 곳도 통과하고. 네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서 널 죽이려는 긴박함을 너도 즐겨야지.
―…….
―…….
―아쉽지만 전 황천각을 지켜야죠. 어찌 된 조직이 저 아니면 돌아가질 않으니.
어찌 모르겠는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은 그의 마음을. 함께 소룡전에 나갔던 그때가 얼마나 그립겠는가? 그러니 어서 더 강해져라, 내 오른팔아!
나를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이 서대룡이었다면 마불을 가장 먼저 반긴 사람은 독왕이었다.
바람처럼 달려온 그가 우리 앞에 내려섰다. 그가 다급히 마불에게 물었다.
“내 독초는! 독초는 캤소?”
난 독왕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저 다녀왔습니다. 목숨이 오가는 새외를 무사히 다녀왔다고요!”
독왕이 나를 옆으로 밀면서 마불만 쳐다보았다.
그를 대하는 마불도 눈빛에도 생기가 돌았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 고생을 했던 마불 아니겠는가?
“여기 있소.”
마불이 직접 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았다. 독왕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고, 나와 서대룡도 함께 쪼그리고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상자를 열자 독초가 일렬로 들어 있었다.
“오! 이렇게나 많이 캤소? 한독초(寒毒草)에 영불초(英佛草)까지! 이 소독초(小毒草)는 정말 캐기 어려운 건데. 고맙소. 정말 고맙소.”
독왕은 뛸 듯이 기뻐했다. 독왕이 캐왔으니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정말 진심으로 독초를 구한 것에 기뻐했다.
이러니 마불이 어찌 독초 캐는 일에 소홀할 수 있었겠는가?
“정말 하늘이 내린 재주요.”
“운이 좋았소.”
독왕이 그제야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네가 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저 눈빛에 나는 더 많이 캤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좋겠지만.
나는 독왕이 캔 독초 중에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캘 때 저 산에서 캐자고 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저 아니었으면…….”
독왕은 궁색한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주섬주섬 상자를 챙겨 들며 마불에게 말했다.
“이따가 밥 드시러 오시오!”
“그럽시다.”
독왕과 마불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사이에서 내가 소리쳤다.
“저도 갈 겁니다!”
하지만 독왕은 대답도 해주지 않고 가버렸다.
독왕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마불의 얼굴에서 독초를 캐던 그간의 노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러게 한 뿌리만 주시지. 비정하신 마불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다정한 사람과 나가도록 하게.”
돌아보니 취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마불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이제 자네가 생색낼 차례군.”
(계속)
절대회귀 332화
제332회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하려 한다.
취마를 위한 선물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새외에서 유명한 양조장을 들러서 술을 사 온 것이다.
적연이 마차에서 술이 든 상자들을 내렸다. 한두 병이 아니었다. 두고두고 마시라고 다양한 종류의 술을 각각 여러 병 사 왔다.
“설마 날 위해 사 온 거냐?”
“형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샀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너무 독한 것들은 일부러 뺐어. 건강 생각해서.”
생각지 못한 선물에 취마는 당황했다. 원래는 나 빼고 마불과 잘 다녀왔냐고 검무극에게 한마디 하려고 왔다. 한데 선물이라니?
마불이 검무극을 대신해서 말해주었다.
“소교주가 자넬 위해서 새외 여러 곳을 들렸네. 일부러 먼 곳까지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지.”
마불은 검무극에게 독초를 넘겨주지 않은 미안함을 이렇게 생색내는 걸로 대신했다.
“그럼 이야기 나누시게. 나는 먼저 교주전에 가보겠네.”
마불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나고 나자 취마가 술을 살폈다. 감동은 단지 술을 사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검무극과 술 마시면서 새외의 술 중에 괜찮다고 했던 것들이 다 있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던 거다.
취마가 술 한 병을 들어 마개를 열고 병째 마셨다.
술맛이 끝내주게 달았다.
“나도 한 모금 줘.”
취마가 건넨 술을 검무극도 마셨다.
“확실히 중원 술과는 맛이 다르네. 조만간 갈 테니까 같이 한잔하자.”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했다.
“잘 다녀왔나?”
그녀는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취마가 그녀에게 물었다.
“수련 바쁘다면서?”
검무극이 보고 싶어서 왔다. 아직도 이렇게 화장 안 하고 수련 중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거기에 한 가지 더.
“다음에 나갈 때는 우리 주정뱅이도 좀 챙겨가라는 말을 해주려고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네.”
그녀가 술 상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많이도 사 왔네. 내 선물은 없나?”
“죄송하지만 이번에 선물은 우리 취마님 것뿐입니다.”
그러자 취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교주님 것도?”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취마는 내심 당황하면서도 좋았다.
원래라면 한바탕 너스레가 나와야 할 순간이었는데, 일화검존 앞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이 여기 온 이유가 마불만 데려간 것에 대한 시위임을.
일화검존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그래, 자네가 갔으니.”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앞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래, 자네가 갔으니.”
검무극에게 풍운이 뒤따른다는 말이었다.
“돌아왔으니 한 번 들르게.”
“네, 곧 찾아뵙겠습니다.”
일화검존이 취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같이 들어다 줘?”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력으로 들고 가면 열 상자면 어떻고 백 상자는 못 들고 가겠는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고.
취마와 일화검존이 술병이 든 상자를 들고 나란히 그곳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일화검존이 취마에게 불쑥 말했다.
“마존님, 철 좀 듭시다.”
취마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취마과 일화검존이 떠난 그곳에 또 다른 마존이 왔다. 이번에는 섭혼마존이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이번 새외행이 자신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으니 어찌 나와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다녀왔소.”
인사를 나눈 그녀가 풍천교주를 찾았다.
“사부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교주께선 풍천교에 남으셨소.”
깜짝 놀라는 그녀에게 재빨리 말했다.
“그쪽 일이 끝나는 대로 오신다고 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실 거요.”
섭혼마존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그녀가 누구보다 풍천교주를 많이 기다렸다는 것이 느껴졌다. 요즘 제자들에게 인기 폭발 중인 풍천교주였다.
그녀가 떠나자 서대룡이 말했다.
“대체 마존이 몇 분이나 오신 겁니까? 가만 보자. 한 분, 두 분…… 자그마치 네 분이나 오셨네요.”
그러자 검무극이 대답했다.
“아니, 다섯 분이야.”
“네? 제가 잘못 셌나요?”
검무극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 멀리 서 있는 거대석상이었다.
“저기도 한 분 계시거든.”
“누구시죠?”
서대룡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작게 보였다.
하지만 신안술로 검무극은 똑똑히 보았다. 누구보다 반가운 사람.
흰 가면을 쓰고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 사람은 바로 극악소마였다. 예전에 함께 서 있던 그 석상 위였다.
‘소마님!’
저렇게 멀리서라도 자신이 돌아온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번에 그가 말했다. 교로 돌아왔을 때 자신이 먼저 만나러 올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 말과 행동을 그때에만 그치지 않고 이번에도 먼저 자신을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소마님.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그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교주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 * *
천마전에서 아버지는 총군사 사마명과 함께 있었다.
이미 마불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돌아간 상태였다.
“다녀왔습니다, 아버지.”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너무 반갑고 좋았다. 이 감정이 내 표정에 드러나기를. 아버지가 알아주시기를.
“군사님,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소교주.”
이미 은월을 통해 새외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 받은 그였다.
“그간 본각에서는 혈교 부활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제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그자가 죽기 전에 제게 말하기를 혈교 부활이 목적이었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걸 증명하듯 마지막 순간 혈교가 남긴 성지를 없애려고도 했고요. 그는 사적인 욕망으로 움직인 자입니다.”
물론 사마명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무림맹에서 암약하던 백천경은 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으니까.
“잔당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조심은 그들이 해야죠. 누구 아들을 건드렸는데요?”
내 농담에 사마명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우리 대화를 듣고만 계시던 아버지가 불쑥 내게 물었다.
“어떤 자들이냐?”
앞뒤 다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감을 묻고 계신 거다.
“아주 위험한 자들입니다. 지금껏 무림에 등장했던 어떤 조직보다도 더 위험합니다. 그 누구도 마정사와 새외를 한꺼번에 건들 생각을 하진 않았으니까요.”
아버지도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사마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바빠지겠군.”
신중히 잘 처리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담긴 말이었고, 총군사에 대한 신뢰가 담긴 말이기도 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사마명이 정중히 인사한 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내려오셨다.
“좀 걷자.”
“네.”
요즘 나와 걷는 것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시다. 내원을 함께 걷는 모습은 여러모로 내게 좋았다. 지나가던 마인들이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에 대한 권위와 충성심이 높아져 갈 테니까.
“참, 그리고 아버지. 저 비궤 비밀 풀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나는 품에서 비궤를 꺼냈다. 그리고 풍천교에서 흑정의 기운을 흡수한 것을 말씀해 드렸다.
“원하신다면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네게 인연이 닿은 물건이니 이제 네 물건이다.”
언제나 나를 감동하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 이럴 때면 아버지는 아버지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버지는 손을 내밀어 비궤 대신 내 손목을 잡았다. 손목을 통해 한 줄기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내 몸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 기운이 들어와 있는 느낌인데, 그게 어떤 것인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나쁜 느낌은 아닙니다.”
들고 있던 비궤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인연은 내게 닿았다. 이 인연이 결코 나쁜 인연이 아님을 느낀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즉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흑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걱정은 느껴진다. 세상 어떤 기운보다 더 소중하고 힘이 되는 기운이다.
“참, 그리고 풍천교주는 교에 남았습니다. 이번 일로 현 교주와 사이가 돈독해졌죠. 아버지와 저처럼요.”
“우리 사이가 돈독해졌다고 생각하느냐?”
“돈독이란 말로는 부족하죠. 끈끈하고 두텁고 뜨겁고. 아! 이 느낌,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저 웃음을 보니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기분 좋은 안도감이 들었다.
“네가 돈독해져야 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으냐?”
나는 웃으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인사드리고 형부터 보러 가려고 했습니다.”
* * *
천마신교 철방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새 병장기를 개발해서 최종 시험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시험할 병장기는 권법을 사용하는 이들을 위한 권갑(拳鉀)이었다.
“이번에 개발한 권갑은 손에 착용했는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얇고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강도는 이전보다 훨씬 개선되어서 도검에 잘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한 사람은 철방의 곽 장인이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대공자인 검무양이었다.
이번 권갑 개발을 기획하고 추진한 사람이 바로 검무양이다. 그는 천마신교의 여러 주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검무양은 처음에는 당연히 한직으로 밀려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자신의 업무 중 중요한 것들을 그와 분담했다. 심지어 그 일들은 행정 업무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맹 내의 주요 정예조직들과 관련된 일이라거나 팔마존과 관련한 업무도 맡겼다. 그야말로 형을 믿는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것이다.
강도 실험은 성공이었다. 검으로 내리쳤음에도 권갑은 잘리지 않았다.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권의 위력도 일할 이상 더 향상되었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대공자께서 하셨지요.”
사실 곽 장인은 이번 일을 하면서 고개를 몇 번이나 절레절레 저었다. 일을 꼼꼼히 하는 것이라면 자신도 어디 가서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대공자에 비하면 자신은 대충 일하는 농땡이가 되었다.
검무양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찾아와서 일의 진행을 살폈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검무양이 그냥 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조사하고 알아보고, 솔선수범하니 철방 쪽에서도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권갑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우선 오십 명이 사용할 수 있는 권갑입니다. 대공자께서 직접 동권문에 전해주시지요.”
이 정도 노력이면 직접 가져가서 생색낼 자격 있다는 생각이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권갑을 보며 권마께서 아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권마님께서도 착용하실 권갑을 만들어야겠지요.”
품질이 뛰어나긴 했지만 아직은 보급형 권갑이었으니까.
“그 권갑은 부디 다른 철방에서 만드십시오.”
곽 방주의 농담에 검무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군.”
두 사람이 돌아보니 검무극이 그곳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기 밀어줬던 사람 것부터 먼저 개발해주는군.”
후계자 싸움을 할 때, 권마는 공식적으로 검무양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예전과는 달리 검무양은 부드럽게 그 말을 받았다.
“당연한 것 아니냐? 앞으로도 권마님과 마불님 것만 개발할 거다. 그게 싫으면 날 쫓아내면 되고.”
“그러기에는 형이 일을 너무 잘해서.”
검무극이 곽 방주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방주님.”
“돌아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권갑 제가 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검무극이 권갑을 손에 껴 보았다. 곽 방주는 다소 긴장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검무극이 권마의 권법을 이어받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 권법의 고수가 첫 시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권갑을 끼고 이리저리 주먹을 휘둘러 보던 검무극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이거 저 가져도 됩니까?”
그제야 곽 방주도 긴장을 풀었다.
“그럼요.”
“여기 기념으로 방주님이 이름 좀 남겨주십시오. 그럼 가치가 열 배는 더 오르지 않겠습니까?”
곽 방주는 웃으며 말씀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검무양이 권갑 상자를 한 번에 다 들려고 하는 것을 검무극이 반 나눠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나가서 마불님 도움이 컸어.”
“좋은 분이시다. 무례하게 굴면 안 돼.”
검무극이 검무양을 보며 웃었다.
“왜 웃어?”
“형도 가만 보면 주위 사람 잘 챙긴단 말이지. 권갑도 이렇게 먼저 개발하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지.”
“그 소, 멀리 안 가고 외양간 주위에 있더라.”
검무양도 픽 웃고 말았다.
“고마워, 형.”
그러자 검무양이 다소 냉담하게 말했다.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난 일을 떠올리며 후회한다는 것 알고 있냐? 매일 밤 내가 후계자가 된 모습을 상상하며 잠든다는 것 알고 있냐? 고마워할 사람 아니니까, 고마워하지 마라.”
“그래서 고마워.”
“뭐?”
“이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앞으로도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도저히 못 견디겠으면 날 찾아와서 이렇게 말해줘. 내가 없으면 마불님을 찾아가서 말해. 안되면 권마님을 찾아가. 정말 못 참겠으면 아버지 찾아가고.”
“왜 마지막이 아버지냐? 아버지는 빼야지.”
“아버지께 말하는 게 제일 속 시원할걸?”
검무양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하고 친해질 필요가 있어. 소교주니 뭐니 이런 것 다 떠나서. 우린 아버지 아들이잖아?”
난 나만의 방식으로 형을 위로하려 한다.
“아버지나 마불님은 형을 걱정하고 있지. 한데 난 형을 걱정하지 않아. 위로할 생각도 전혀 없고. 알아서 잘하겠지. 형이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나만은 잘 알잖아?”
검무양은 자조적으로 옅게 웃었다.
물론 나는 안다.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빨리 무너져 버리는지.
마음이 우릴 유혹하며 속삭이기 시작할 때, 우린 알게 된다. 우리의 의지는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자물쇠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것을. 때론 살짝 당기면 풀어져 버리는 천으로 매듭지어 있다는 것을.
“아버지한테 물어본 적 있어?”
“뭘?”
“아버지는 뭐가 힘드시냐고.”
순간 검무양이 흠칫했다.
“너는 물어봤냐?”
“나도 안 물어봤어. 그건 장남이 먼저 해야 할 일 같아서.”
형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형을 위로하는 방법은 이것이었다. 자기연민에 빠져들면 끝없는 심연에 잠겨 들 테니.
“이젠 우리가 그분들 챙겨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 형부터 해, 형이니까.”
절대회귀 333화
제333회 나이 든 욕망을 드러낼 때는.
취마와 일화검존이 대취림에 도착했다.
“술 상자는 여기 두고 가. 지금부터는 내가 들고 갈게.”
취마의 말에 일화검존은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잔 마시고 갈래.”
“그렇게 붙잡을 때는 매정하게 그냥 가려고 하더니?”
“좋은 술이 생겼잖아.”
물론, 그래서가 아니었다. 취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기에 위로해주려는 것이다. 어쩌니 해도 하나 있는 친구였으니까.
일화검존은 자신들을 맞이한 삼대취객 여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같이 마시지.”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마시고 싶어서 그러네.”
그러자 여빈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취마는 일화검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여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안주를 챙겨오겠습니다.”
일화검존과 취마가 먼저 취몽루에 올랐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질문을 하면서 취마는 스스로 답을 떠 올렸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화해하도록 뒤에서 몰래 노력했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묵은 갈등도 많이 해소했고.
일화검존은 그 사실을 모르는데도 여빈과 자신을 이어주려 하고 있다. 정말 돌고 도는 것이 인생인가?
“만날 하던 짓만 하니 지겨워서 그래.”
일화검존이 손을 내밀자 가져온 상자에서 술 한 병이 떠오르더니 그녀가 앉아 있던 누각으로 날아왔다.
“금손이네. 저 많은 술 중에서도 제일 귀하고 비싼 술을 딱 뽑는 걸 보니. 하긴, 검존의 손이니 제일 존귀하지.”
예전이었다면 저 농담에 살짝 발끈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제 노여움이 들지 않았다.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지금 자신의 손은 귀한 손이다.
일화검존은 안주를 챙겨온 여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공손히 술을 받은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일화검존은 잔을 든 그녀의 손이 긴장으로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한잔 더 받게.”
일화검존이 또 따라주었고, 석 잔까지 따라주었다.
석 잔을 연속해서 마시니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대가 대취림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일화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객들 중 많지 않은 여인이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빈이 일화검존의 삶에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최근에 일화검존이 심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녀가 눈에 들어온 것일 뿐.
삶이 변해야 무공도 변한다.
검무극의 하던 말과 반대 경우였다. 무공이 변하니, 더 정확하게는 무공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 변하니 삶이 변하고 있었다. 이렇듯 삶과 무공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때의 자네는 어렸고, 나는 꽤 젊었고, 저기 자네 마존은 상당히 멋있었는데.”
취마가 소리 없이 웃었다. 평소라면 지금이 더 멋있다면서, 그 치기를 어디 중년의 매력에 갖다 대냐면서 온갖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오늘의 취마는 차분했다.
세 사람이 술을 마셨다. 일화검존은 취마를 대화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냥 혼자 술 마시게 두고, 여빈과 둘이 대화를 나눴다.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노련한 검존답게 여빈이 불편해할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단 이 질문은 제외하고.
“혼인하고 싶지 않은가?”
취마가 쓸데없는 것 묻는다는 눈빛으로 일화검존을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을 무시한 채 일화검존은 여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생각 없어요.”
“왜 없나?”
“매일 이렇게 술을 마시는 부인을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같이 술 좋아하는 사람 만나면 되지. 대취림에 남자들 많지 않나?”
여빈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네 마존은 어때?”
그러자 취마가 끼어들었다.
“괜한 소리 한다! 취했어?”
일화검존이 취마에게 말했다.
“그래, 취했다. 너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셔대면서 왜 안 취하는데? 취마면 취해야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일화검존이 작정했던 말을 꺼냈다.
“너 요즘 왜 이리 삐치고 화나는 줄 알아?”
취마는 발끈했다. 삐치다니? 지금 내 수하 앞에서 그딴 말 할 거야?
하지만 일화검존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참아서 그래. 나이 먹었다고 참고, 마존이니까 참고. 그놈의 나이가 뭔지. 체면이 뭔지. 이봐, 친구. 나이가 들수록 자기 욕망을 품격 있게 잘 드러낼 줄 알아야 해. 화 그만 내고 그만 삐치려면 그래야 한다고.”
정작 자신은 품격 있게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그래서다. 그녀가 이 부분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이유가. 잠시라도 상념에 빠지게 되면 어김없이 지난날 자신의 수치스러웠던 욕망을 떠올렸으니까.
“헛소리 그만하시고 가. 남의 귀한 선물 그만 축내고.”
“싫어.”
“그럼 내가 간다.”
술 한 병 손에 든 채 취몽루를 내려간 취마가 홀로 호수에 배를 띄웠다.
두 여인은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향해 서서히 흘러가는 취마의 배를 쳐다보았다.
“사실 자네에게 한 말이었네. 이런 말 해봤자 저 친구는 들어먹지 않을 것 알거든.”
여빈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참고 또 참으면. 처음에는 삐치게 되고, 나중에는 화가 나겠지.”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기에 오히려 여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겁나나? 이러다가 옆에서 지켜보는 삶까지 사라져 버릴까 봐?”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겁내지 말게. 이만큼 지켜봤으면 됐어. 그건 미련이고 습관이네. 그 삶은 이만 떠내려 보내게.”
취몽루에도, 호수에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선가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일화검존은 취기가 깨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충고할 처지인가? 여빈에 대해 뭘 그리 잘 안다고.
두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외 술이 너무 독해서 기억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술 취해 한 말이니 너무 깊이 생각지 말게.”
일화검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드디어 여빈이 입을 열었다.
“검존께서 제대로 보셨어요. 이미 전 삐친 상태를 거쳐서 화가 나 있습니다. 화가 난지도 몇 년이 되었지요.”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였다. 항상 공손한 태도를 보였기에 그녀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도 이렇게 떨리는 걸 보면 전 이 화난 삶조차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나 봅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처음으로 밝힌 여빈의 눈빛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일화검존은 더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래서 주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용기를 그녀의 잔에 가득 채워주었다.
“오늘 하루는 진짜 주정뱅이가 돼 보게.”
그 말을 해주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술에 취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우아한 경공으로 호수를 건너갔다.
호숫가에 내려서서 돌아봤을 때 여빈이 술을 한 병 들고 호수에 떠 있는 취마의 배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일화검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후회할 때 하더라도 일단 저질러 볼 수 있는 그녀의 젊음이 부러웠다.
하지만 괜찮다. 앞으로 자신도 욕망을 드러내며 살아갈 생각이니까.
대신 고상하고 품격 있게.
* * *
형과 함께 동권문에 도착했다.
한때 백권부터 흑권까지 수련했던 탓에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나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철권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내원으로 들어섰다.
내원의 연무장에서 권마는 흑권들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는 흑권의 수련만 직접 지도하고 나머지 철권들의 수련은 천소희가 맡고 있었다.
“사부님! 저 돌아왔습니다.”
“왔느냐?”
오랜만에 보면 권마의 저 무서운 얼굴도 이렇게나 반가운 법이다.
권마는 무뚝뚝하게 나를 맞이한 것에 비해 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맞았다.
“오셨소? 대공자. 무거운 것 이리 내려놓으시오.”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제가 든 상자가 더 무겁다고요! 사람 차별하십니까?”
차별의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곽 방주에게 여러 번 들었소. 대공자께서 권갑을 만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마땅히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권갑이 완성되어서 가져왔습니다.”
검무양이 상자를 열어서 권갑을 보여주었다.
그사이 인사할 기회를 놓치고 꾸벅 고개만 숙였던 천소희가 내게 와서 속삭이며 인사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소교주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사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천소희는 지금은 우리끼리가 아니잖아요? 하는 눈빛으로 권마와 형을 쳐다보았다.
그들 두 사람 들으라고 다시 말했다. 속삭임을 가장한 외침이었다.
“매정한 사부님 밑에 이렇게 다정한 우리 사매가 있어서 다행이야.”
권마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정하면 다정할수록 네 사매의 수명은 줄어들 거다.”
“그건 안 되죠. 다정한 사매 취소입니다! 사매야, 비정강호다!”
지켜보던 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내 성격을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 분위기는 좋았다.
권마가 권갑을 들어서 살폈다.
“손바닥에 얇은 쇠 그물을 넣었군.”
“맞습니다. 가벼우면서 강도도 대단합니다. 철방의 기술이 그 부분에 집약되었지요.”
권마는 권갑을 천소희에게 건넸다.
천소희가 직접 권갑을 끼고 위력을 시험했다.
“일단 착용감은 아주 좋아요.”
그녀가 철권을 시켜 검을 가져오게 했다.
“힘껏 내질러!”
검을 가져온 철권이 힘차게 검을 내질렀고, 그녀는 손바닥으로 검을 막았다.
상당히 강한 위력이었음에도 손바닥은 멀쩡했다.
지켜보던 흑권들이 감탄했다.
권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권갑이군. 고생했네.”
“지금은 오십 명이 사용할 수 있지만 몇 달 내로 모든 동권문 철권들의 숫자만큼 제작해서 보내올 겁니다.”
“자네가 신경 써준 덕분이겠지. 고맙네.”
권마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고, 검무양은 지난 노고가 해소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천소희가 권갑을 흑권들에게 나눠주는 사이 우린 함께 내원을 걸었다.
권마는 나보다 검무양과 대화를 주로 했다. 이번 권갑 제작과 관련한 이야기부터 동권문에 필요한 지원이 어떤 것인 있는지에 대한 부분까지. 일과 관련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말없이 함께 걸으며 확실히 느꼈다. 역시 이런 일들은 형이 더 잘한다는 것을. 일의 결과가 제대로 나오려면 누군가는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권마가 전음을 보낸 것은 우리가 작별을 고하고 돌아설 때였다.
―잘 돌아왔다.
―나중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나를 위한 사부의 환대는 이 한마디 전음으로 충분했다. 수백 발의 폭죽을 터뜨려 환영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았으니까.
동권문 입구에서 검무양에게 말했다.
“배고프다. 같이 밥 먹자.”
“언제부터 우리가 밥 같이 먹었다고.”
“이번에 새외에 나가보니까 아버지 생각, 형 생각 많이 나더라.”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양이 말했다.
“조만간에 아버지 모시고 식사하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챙기라는 내 말에 대한 대답임을. 함께 해나가자는 뜻이었다.
“밥은 형이 사.”
“싫다. 돈 많은 네가 사라.”
놀랍게도 형이 좋아지고 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사람 사이의 실수는 딱 이럴 때. 이제 막 좋아지기 시작할 때 저지르게 되니까. 이럴 때일수록 더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봐야 한다.
잠시 서서 형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내가 향한 곳은 남도종이었다.
혈천도마는 자신의 거처에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여독이나 풀지, 여긴 왜 왔어?”
“어르신 뵙는 것이 쉬는 거죠. 한데 웬 책 정리십니까?”
그는 시화집과 문예집을 빼고 그 자리에 무공비급을 꽂고 있었다.
“젊었을 때 봤던 비급들이다. 대룡이 녀석 읽히려고.”
“다들 제자 사랑이 넘쳐나는군요.”
“다들?”
원래는 풍천교주를 두고 한 말이었지만.
“저도 권마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말씀이죠.”
“행여나. 두들겨 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정리 도와 드려요?”
“다 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혈천도마가 쌓아둔 책을 뒤적였다.
“못 보던 책도 많이 생겼네요. 빌려주십시오.”
“책 읽을 시간은 있고?”
“없어도 내야죠.”
그렇게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책장 정리를 하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무림맹의 그자와 같은 놈들이었나?”
무림맹의 백천경을 잡을 때 혈천도마와 함께 했었다.
“네, 같은 편 같습니다.”
“이놈의 무림은 바람 잘 날이 없구나.”
혈천도마는 더는 그에 대해 묻지 않으며 책을 몇 권 골라주었다.
“다 읽으면 또 빌려주마.”
“또 들르겠습니다.”
혈천도마가 빌려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나는 거처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적연이 술을 한 병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선물입니다.”
“선물?”
“취마님 선물 사실 때, 저희가 돈 모아서 한 병 샀습니다.”
보니 취마에게 선물한 술 중에서 비싼 편에 속하는 술이었다. 그걸 살 때, 호위들도 나 몰래 따로 한 병을 산 모양이다.
“너희가 돈이 어디에 있다고?”
“저희가 누군지 잘 모르시겠지만, 자그마치 천마신교 소교주님 호위들입니다. 돈 많이 받습니다.”
적연의 자학 농담이었다.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호받는 느낌을 받고 있을 테니까.
“선물 고맙다. 아껴 먹으마.”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적연이 물러가고, 나는 몸을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불을 끄고 침상에 눕는 대신 책과 술을 챙겨서는.
딱.
시공이환술로 나만의 공간을 열었다.
맑은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푸른 하늘과 잎 넓은 나무, 그 아래 편안한 의자.
“이 녀석들아, 보고 싶었다!”
편안한 의자에 몸을 눕혔다.
“아, 좋다.”
정말 이곳에서의 행복감이란! 풍천교주는 환술을 익힌 사람들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지만, 이 공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지난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중요하고 필요했던 것은 나만의 공간이었고, 나만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세상만사 다 잊고 조용히 나만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은 안식처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내 의자 옆에 작은 의자가 하나 생겨났다.
그 위에 비궤를 올려놨다.
“어떠냐? 마음에 들어?”
비궤도 좋은지 활짝 웃고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술을 홀짝이며 책을 읽었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와 갈매기 울음, 그리고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무림을 다 준다 해도 이 순간과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돌아와서가 더 바빴던 귀교 첫날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절대회귀 334화
제334회 극악소마가 그렇게 좋으냐?
다음 날 아침, 내 거처로 생각지 못한 사람이 찾아왔다.
장호가 찾아온 것이다.
“소교주님.”
“이 아침에 자네가 웬일인가?”
“돌아오셨다는 소식 듣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모래바람 징글징글하게 맞고 왔지.”
“저는 새외에 가본 적이 없어서 한 번쯤 가보고 싶습니다.”
“밥에서 모래가 자글자글 씹히면 그때 아, 우리 소교주가 왜 그렇게 징글징글하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구나, 할 거네.”
장호가 웃었다. 수하들 앞에서 잘 웃지 않는 그였기에 이 멋진 웃음은 언제나 내 차지다.
“참, 그리고 이것 받으십시오.”
장호가 들고 온 것을 내밀었다. 종이에 싸인 것을 풀자 안에서 그림이 나왔다.
검을 허리에 차고 절벽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이 무섭도록 멋진 남자는 누군가?”
“소교주님이십니다. 아직 솜씨가 엉망이지만, 그래도 첫 그림은 소교주님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감히 존안을 그릴 수는 없어서 뒷모습을 그렸지요.”
나중에 은퇴하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화공들이 쓰는 도구를 그에게 사다 줬었다. 그 첫 작품이 나일 줄은 몰랐다.
“이렇게 실력이 좋을 줄 몰랐네.”
듣기 좋으라고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 화공이 그린 것처럼 멋진 그림이었다.
“그림 선물은 처음 받아 봐.”
“저도 처음입니다. 그림 선물 드리는 것은.”
“아버지에게 가서 자랑해야겠다. 마군주가 비록 녹봉은 아버지께 받지만 그림 선물은 제게 해줬습니다, 라고.”
장난인 줄 알지만 상상만 해도 땀이 나는지 장호가 당황했다.
“그것만은 봐주십시오.”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너스레는 계속되었다.
“중원에 가져 나가서 팔면 얼마나 받을까? 천마신교 마군주가 그린 그림이다, 그러면 부르는 것이 값이겠는데? 안 살 거야? 정말 안 사? 고작 그 돈에 사겠다고?”
장호는 난처한 표정으로 제발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고맙네. 평생 잘 간직하겠네.”
“나중에 실력이 늘면 더 잘 그려서 드리겠습니다.”
“그땐 앞모습으로 그려줘. 이 잘생긴 얼굴 아깝잖아?”
순간 흠칫하는 장호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뭐야? 설마 나 잘 생겼다고 생각 안 하는 건가?”
이제 장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할 얼굴이십니다.”
“그렇지만 잘생긴 얼굴은 아니다?”
대답하진 않았지만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자네 눈에는 누가 잘 생겼는데?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뽑아 봐.”
독왕일까? 아니지, 독왕은 나보다 어려 보이니까 아닐 테고. 잘 생기긴 극악소마가 잘 생겼는데 가면 속을 봤을 리 없고. 아, 그럼 취마이겠구나, 하고 있는데 생각지 못한 이름이 나왔다.
“권마님이 잘 생기지 않았습니까?”
“뭐? 미쳤어?”
정말 미쳤냐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남자답고 멋있고. 잘 생기셨잖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진심임을 알고는 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안목에 정말 실망이야. 제발 가기 전에 농담이었다고 말해주고 가!”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장호가 웃었다. 하지만 끝내 뜻을 굳히지 않았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장호가 정중히 인사하고 거처를 나갔다.
그가 가고 나자 적연을 비롯한 호위들이 와서 그림을 구경했다.
“멋집니다, 그림.”
“그렇지? 이런 재능을 썩히려고 했다니. 자네들도 취미 하나씩 가져. 자네들 인생을 위해서는 붓질 한 번이 백 번 칼질보다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나의 이런 말들이 이제는 진심임을 알기에 호위들의 대답이 우렁찼다.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나는 거처를 나서며 말했다.
“나중에 물어볼 거야. 그러니 꼭 생각해둬. 아, 그리고 그림은 방에 잘 보이는 곳에 좀 걸어주고. 나, 악인곡 간다. 안 따라와도 돼.”
* * *
악인곡에 들어섰을 때 평소와 달랐다.
그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건물마다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고, 무면객들의 가면은 전부 알록달록 화려한 색들이 칠해져 있었다. 곳곳에선 모닥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있었고 술을 항아리째 나르고 있었다. 평소의 그 무서운 느낌의 가면들이 아니었다. 오늘은 다들 들떠 있었다.
날 알아보고 인사하던 무면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오늘 마존님 생신이십니다.”
“극악소마님 생신이시라고?”
“그렇습니다.”
“나 왔다 갔다는 소식 전하지 말게.”
일단, 악인곡을 도로 나왔다.
극악소마 생일인 줄은 몰랐다. 몰랐으면 몰랐지, 알았는데 그냥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
뭘 선물해 주지?
예전에 혈천도마 생일에는 최상급 피독주를 선물로 주었는데. 그때 관계와 지금 관계는 또 달라서 당시에는 그것만 해도 큰 선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장 천마전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뵙고 싶어서 또 왔습니다.”
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제 인사하고 오늘 또 찾아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한 것이다.
“바둑 한판 두실래요?”
“바쁘다.”
“그럼 비무라도 한번 하실래요?”
“용건이 뭐냐?”
조심스럽게 아버지에게 말했다.
“천마보고에서 보물 하나만 더 가져가게 해주십시오.”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았다.
“불가!”
그래, 소교주가 된 기념으로 특별히 개방해주셨는데. 불쑥 찾아와서 달라고 하면 안 주시겠지.
“제가 뭘 하면 주시겠습니까?”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어깨 주물러 드릴 수 있습니다. 평생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남이 내 몸에 손대는 것, 딱 질색이다.”
“제가 남입니까?”
물론, 그래봤자 어림도 없는 시도였고.
“매일 바둑 두러 오겠습니다.”
“하수와 두면 수 준다.”
“매일 열심히 무공수련하겠습니다.”
“그러든지.”
“혹시 숨겨둔 딸 없습니까? 위험할까 봐 신분을 감추게 해서 몰래 숨겨두신 딸 말입니다. 어디선가 평범한 신분으로 크고 있는 거죠. 한데 그 딸이 위험에 빠진 겁니다. 아들아, 비밀리에 가서 구해오너라.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 대신 보물을 하나 주마.”
아버지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말려 올라갔다.
“위험할까 걱정되면 본교에 두어야 하지 않겠냐?”
“그야 야망에 미쳐 있던 형이 걱정돼서 숨겨두었을 수도 있죠.”
“지금 상태를 보니 네가 더 걱정된다.”
“세상 다 가진 분에게 제가 뭘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냥 주십시오!”
뻔뻔한 요구에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았는데.
“걷자.”
아버지와 함께 내원을 거닐었다. 지나가던 마인들이 모두 정중히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놀랍게도 산책길이 향한 곳은 천마보고였다.
“하나 골라서 나오너라.”
이렇게 순순히 주시자 오히려 불안해졌다.
“왜 이렇게 순순히 주시는 겁니까?”
“헛된 욕망이 쌓이지 말라고.”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천마가 되면 마음껏 써야지. 이런 욕망 말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만큼 중요한 일이니까. 너도, 천마보고도.”
너도란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더 놀랄 일은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는 점이었다.
“극악소마가 그렇게 좋으냐?”
“알고 계셨군요.”
오늘 극악소마 생일이란 것을 알고 계셨고, 내 방문이 그에게 선물을 주기 위함임을 짐작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어볼 법도 했는데.
“가지고 나오너라.”
잠시 후, 난 하나의 보물을 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헛된 욕망은 쌓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가득 쌓이고…….”
아버지는 내 말을 다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잠시 서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평소 아버지의 등은 크고 든든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온갖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오늘은 나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처음 회귀했을 때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았기에 자신했던 부분이 분명 있었다. 전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았답니다!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느낀다.
더 오래 산 것과는 별개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느냐와도 별개로, 아버지로서의 강함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남들에게는 아부에 너스레에 농담에, 온갖 말을 다 하는 나지만, 아들에게만큼은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런 아버지 말이다. 평생 자식 욕심이 없던 나인데, 오늘 이 순간만큼은 욕심이 난다.
저 앞에서 아버지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안 올 거냐는 아버지의 눈빛에 아버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제가 매일 찾아뵙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바둑도 두고, 용돈도 자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같이 가요! 마존들이 누굴 닮아 그렇게 가버리나 했더니. 아버지!”
* * *
극악소마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새하얀 방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생일인데도 그렇게 있었다.
“소마님!”
“소교주님!”
날 향해 돌아선 극악소마의 눈구멍 속 두 눈이 활짝 웃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교감해서일까? 그냥 보기만 해도 저 소마의 눈빛이 주는 울컥함이 있다.
“어제 석상 위에 서 계신 것 봤습니다.”
“먼 여정에 피곤하실 것 같아서 멀리서나마 인사드리려고 했었지요. 가셨던 일은요?”
“잘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풍천교주와 마불께서 계시니, 별일이 있으려 해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극악소마는 함께 싸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지도 모르겠다.
“참, 생신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틀만 늦었어도 지나고 도착할 뻔했습니다.”
“뭐 대수로운 날이라고요.”
“중요한 날이지요. 소마님이 태어나신 날인데요.”
그러자 극악소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사실 저는 생일 챙기는 것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밖은 축제던데요?”
극악소마가 창가로 걸어가서 밖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와 나란히 섰다. 극악소마의 거처 주위는 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 앞에서 무면객들이 모여서 마치 자신들 생일인 양 떠들고 있었다.
“원래는 안 그랬습니다만, 제 생일 핑계로 오늘 하루는 마음껏 놀라고 했습니다. 외부에서 선물 들어온 것은 나눠 가지라고 했고요.”
극악소마 역시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품에서 가져온 것을 꺼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선물은 안 됩니다.”
내가 건넨 선물을 극악소마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건!”
그의 두 눈이 떨렸다.
“창고에 처박혀있던 건데 혹시 필요하실까 봐 가져왔습니다.”
천마보고에서 가져온 것은 손목에 두르는 보호대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귀함이 느껴지는 그것은 한쪽에는 검은 용의 포효하는 그림이, 다른 한쪽에는 호랑이가 날아오르는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묵룡비호갑(墨龍飛虎鉀).
도검불침은 물론이고 검기에도 잘리지 않는다고 알려진 이것은 손목 보호대 중 최고에 속한 기물이었다. 특히 극악소마처럼 검과 도를 쓰지 않는 이들에게는 급한 상황에서 방어할 때 꼭 필요한 보물이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졌다.
“세상 그 누구도 천마보고를 창고라 말하진 않을 겁니다.”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얼마나 귀한 건지는 알고 계신 겁니까?”
“그 귀한 것이 보고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극악소마가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야 오래 가는 관계라면서요? 저와는 난공불락의 성을 쌓고 싶지 않다면서요? 우리 관계는 깃털처럼 가벼워서 죽을 때까지 편하게 가고 싶다면서요? 이러면 다음 생일에는 뭘 해주실 겁니까? 저는 또 뭘 해드려야 하고요.”
나는 잠시 말없이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생에 저 소교주가 내게 죄를 지어서 이번 생에 갚으려는 가보다.”
“제 목숨을 구해주시면서 벌써 갚았습니다.”
“죄를 두 번 지었나 보죠.”
“소교주!”
“소마님!”
어차피 내가 위험에 빠지면 그는 가장 먼저 달려올 사람이다. 기꺼이 목숨을 던질 사람이다.
그랬기에 이 선물이 그에게 부담이 될까는 걱정할 필요 없다. 주든, 주지 않든, 그는 똑같이 행동할 테니까.
“받아주십시오, 소마님.”
우리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결국 그는 내 간절한 바람을 거절하지 못했다.
“좋습니다.”
“아, 다행입니다. 만약 끝까지 거절하셨다면, 아버지는 평생 이 일로 저를 놀리셨을 겁니다.”
극악소마가 소매를 걷은 후 묵룡비호갑을 양손에 찼다. 그것은 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제 평생 가장 귀한 생일선물입니다.”
“누가 혹시 기록을 깨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또 이 등은 못 참거든요.”
가면 속 깊어진 그의 두 눈이 고마움을 전했다.
“다른 마존들이 알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자기 생일에는 뭘 줄까 기대하겠죠.”
“그래서 못 주면요?”
“소마님을 제일 좋아하나보다 하겠죠.”
극악소마가 소리 내서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기분 좋은 소마의 웃음이었다.
* * *
악인곡에서 나온 후 곧장 마가촌으로 갔다.
조춘배도 보고 식사도 할 겸, 풍류주점에 가려는 것이다.
오랜만에 돌아온 마가촌은 떠날 때나 다름없었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호객하는 행상들, 수레를 끌며 비키라고 소리치는 늙은이, 물건을 구경하는 여인들, 멱살잡이를 하는 남자들, 웃으며 손을 잡고 걷는 연인, 뛰어노는 아이들과 뛰지 말라고 소리치는 아낙네까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와서 보는 이 풍경은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이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풍류주점에 도착했을 때, 난 너무 놀라서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풍류주점의 문이 닫혀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곳이 문을 닫은 적은. 어디 아픈가? 아니면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때 누군가 와서 말했다.
“소교주님, 저는 저 아래에서 과일상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곳 마가촌을 오가면서 자주 보던 사람이었다. 조춘배와 친하기도 했고.
“풍류주점 주인장은 며칠 전에 처가에 일이 생겼다며 부인과 함께 떠났습니다.”
조춘배가 부인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혹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시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얼핏 그쪽 가족 중 누군가가 무림인과 얽혔다는 것 같았습니다.”
무림인과 얽혔다는 말에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보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주점의 문까지 닫고 다급히 갔다는 것은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
하필이면 내가 교를 비웠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안도 멀리 떠난 상태니 요즘 서대룡과 장호도 주점 모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가가 어딘지 아십니까?”
처가의 위치를 듣고 나는 곧장 몸을 날렸다.
쾌속보로 순식간에 마가촌을 벗어났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좋은 것은 늦지 않게 도착하는 것이리라.
별일 아니길 빌지만, 만약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거라면 믿을 것은 주인장의 경험이었다. 이곳에서 주점을 하면서 온갖 경험을 한 그였으니까.
‘주인장, 내가 갈 때까지만!’
극한에 이른 쾌속보가 또다시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절대회귀 335화
제335회 마교 앞에서 주점을 합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양인(梁仁)은 조춘배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여보.”
“왜 그러시오, 부인.”
“당신은 그냥 돌아가요. 이번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돌아가서 장사해요.”
홀어머니에 딸만 둘인 가난한 집의 맏사위로 들어와 아들 노릇을 도맡아 한 남편이었다. 그간 집안에 여러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남편이 나서서 수습했다. 동생을 혼인시킨 것도 조춘배였다.
한데 이번처럼 무림인이 개입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이 잘못될까 봐 두려웠다.
“당신이 어떻게 처리한단 말이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갑시다.”
조춘배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참 오랜만에 오는구려.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장사하다 보니 장모님 찾아뵙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나마 처제 내외가 장모님 댁 근처에 살고 있어서 생활비를 보내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집에 도착했을 장모 윤씨가 달려 나와 조춘배를 맞았다.
“조 서방!”
뼈만 남은 늙은 손이 애처로웠다.
“오느라 힘들었지?”
그녀는 항상 딸보다 사위를 먼저 챙겼다. 혼인한 그 날부터 그랬다. 그녀만의 딸 사랑이기도 했다.
“엄마!”
양인이 윤씨를 끌어안았다. 안 본 사이 엄마는 너무 말라 있었다.
집에는 처제 양선(梁善)이 와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처제.”
“형부.”
조춘배와 양인을 보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양인이 가서 동생을 안아주었다.
인편을 통해 대충의 상황은 들었다. 양선의 남편인 종학(鍾鶴)은 황룡표국(黃龍鏢局)의 쟁자수로 일했다. 한데 표행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종 서방은?”
“지금 표국에 붙잡혀 있어요. 표사가 그랬어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양손을 자를 거라고…….”
양선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조춘배와 양인은 깜짝 놀랐다.
“손을 자른다고?”
조춘배는 이번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왔다.
표국에서는 내부인이 표물을 훔치는 일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엄격하게 처벌했다. 외부의 도적도 많은 데 내부에서 물건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점 문을 닫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도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한데 양손을 자른다고? 형벌 중에서도 최고 형벌을 내리는 것이다. 대체 뭘 훔치려 했기에?
“언니, 형부. 그이가 남의 물건 훔칠 사람 아닌 줄 알잖아요? 누가 누명을 씌운 거라고요.”
안다. 자신들이 아는 종학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다.
절박한 마음에 양선은 형부에게 애원했다.
“형부, 마교 앞에서 주점을 하시잖아요? 혹시 마교에 아는 사람 없어요? 마교에 누군가 나서주면 우리 그이 누명 벗겨줄 수도 있잖아요?”
아는 사람? 많다. 소교주도 알고 황천각주도 알고 마군주도 알고 귀영대주도 알고 마존들도 알고 심지어 천마도 안다.
하지만 이 일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그들은 소교주 때문에 알게 된 귀빈들일 뿐이고. 원래는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나마 심적으로 제일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검무극이다. 워낙 특별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새외에 가고 없었다.
그렇다고 풍류주점의 단골인 하급 마인들에게 며칠이 걸리는 고향에 같이 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친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설령 누군가 돕겠다 하더라도, 하급 마인이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남편이 골똘한 생각에 잠기자 양인이 동생을 야단쳤다.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아는 사람 있으면? 일 크게 만들어서 어쩌려고?”
“아냐. 미안해, 언니. 그냥 답답해서 한 소리였어. 신경 쓰지 마세요, 형부.”
“아니야, 처제. 그럴 수 있어.”
지금 무슨 말을 못 하겠는가?
조춘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표국에 다녀올게.”
윤씨가 조춘배의 손을 붙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괜히 자네에게 폐를 끼치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종 서방 일인데요.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조춘배가 밖으로 나왔다. 아내인 양인이 따라 나왔다.
“같이 가요, 여보.”
“괜찮아, 기다리고 있어.”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그만하게.”
미안한 거로 따지면 평생 자기 만나 고생한 게 더 미안하다. 정말 땡전 한 푼 없던 시절에도 자신을 믿고 함께 고생해준 조강지처였으니까.
“조심해요. 절대 무리하면 안 돼요. 종 서방도 중요하지만, 당신이 더 중요해요, 알았죠?”
동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게 진심이었다. 남편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으니까.
* * *
조춘배는 황룡표국 입구를 지키고 있던 표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뉘시오?”
“저는 종학이 손윗동서 되는 사람입니다.”
표사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으로 볼 때 종학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만날 수 없소.”
“알고 있습니다. 추운데 고생하십니다. 자, 이거부터 받아주십시오.”
종이에 싼 요리와 술을 그에게 주었다. 이곳에 오면서 주점에 들러 사 온 것이다.
“이런 건 못 받소.”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인들이 주점에서 제일 선호하는 안주로 사 왔다.
“뒀다가 교대하시면 들어가서 드십시오. 여기 뒤쪽에 두겠습니다.”
조춘배가 기둥 뒤쪽에 술과 요리를 내려두었다. 그는 무인들 마음을 잘 알았기에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능숙하게 행동했다.
“그냥 무사한지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족인데 생사는 알아야지요.”
조춘배가 간절히 부탁하자 무인은 차마 그것까진 거절하지 못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손을 자른다고 들었습니다.”
양손을 자른다는 것은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재빨리 지혈해주고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의원에 가는 동안 죽게 될 것이다. 설령 운 좋게 살아나더라도, 그 뒤의 삶은 또 어찌할 것인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맞습니다, 맞지요. 하면 그 벌은 언제 내린답니까?”
“세 시진 후요. 마을 사람들 불러서 실행할 거요.”
세 시진? 조춘배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자, 이만 물러나시오.”
“표사님, 그래도 그 사람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주십시오.”
조춘배가 소맷자락에 준비해온 전표를 슬쩍 보였다. 삼십 냥짜리 전표였다.
잠깐 얼굴 한 번 보여주고 받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조춘배는 안다. 기왕 뇌물을 쓰려면 거절하기 힘든 액수를 써야 효과가 있다는 것을.
“나 말고 거기 지키는 사람도 있는데.”
돈이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성사만 시켜주시면 그곳을 지키시는 분들에게도 열 냥을 드리고, 표사님께는 삼십 냥 드리겠습니다. 제발 얼굴만 보게 해주십시오.”
표사가 문을 열고 안쪽 동태를 슬쩍 살피더니.
“따라오게. 돈 먼저 주고.”
“가서 드리겠습니다.”
표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돈 욕심에 넘어간 상태였다.
표사를 따라 조춘배가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앞을 지키던 표사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나무 뒤에 있던 조춘배를 손짓해 불렀다.
“아주 잠깐만이네.”
조춘배가 품에 있던 사십 냥을 그에게 건넨 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종학이 꽁꽁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고문을 당했는지 얼굴과 몸이 엉망이었다.
흔들어 깨워도 그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종 서방.”
몇 번이나 흔들어 깨우자 가까스로 그가 눈을 떴다.
“형님? 형님!”
“자네 괜찮나?”
“형님!”
억울함이 가득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누명을 씌운 거라고요!”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조춘배가 입을 막았다.
“쉿! 한데 저들이 왜 자네에게 누명을 씌운 겐가?”
“제가 보면 안 될 걸 봤습니다.”
그가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 표사가 들어오더니 조춘배를 끌어내듯 잡아당겼다.
“가야 해. 교대자가 오고 있어.”
그를 따라 다시 표국 입구로 나왔다.
“오늘 일 입 밖에 내면 죽을 줄 알아.”
뇌물 준 것 절대 누설하지 말라는 협박이었다.
“썩 물러가게.”
조춘배가 표국을 나섰다.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차라리 물건을 훔친 거라면 지금처럼 뇌물을 써서라도 손이 잘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지만. 뭔가 음모에 휘말린 거라면?
조춘배는 급히 마차를 빌려 한 곳을 찾아갔다.
그곳은 처가에서 마차로 한 시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천마신교 지부였다.
규모가 작은 소지부였는데, 앞서 표국 앞을 지키는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험악한 인상의 마인이 입구에 서 있었다.
마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조춘배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가 뭐라 묻기 전에 조춘배가 먼저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다.
“소인은 천마신교 본단 앞에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는 조춘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지부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무슨 일로?”
“직접 뵙고 드릴 말씀이…….”
쉬익.
마인은 일언반구없이 검을 뽑았다.
“어이쿠!”
조춘배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을 찌르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목을 겨누기만 했다.
“주점을 운영하는 자가 무슨 일로 지부장님을 뵙겠다는 거냐?”
“제 손아래 동서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지부장님께 도움을 청하려는 겁니다.”
“이거 미친놈이군. 안 꺼져?”
소교주가 보내서 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감히 마교 소교주의 이름을 팔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검무극이 용서하더라도 다른 마인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준비해온 돈을 줄까도 고민했는데, 분위기로 볼 때 돈만 빼앗기고 지부장을 만나지는 못할 것이 확실했다.
그래, 원래 이게 정상이다. 주점 주인과 마인의 관계는 딱 이 정도인 거다. 무시는 기본이고 목에 칼을 들이밀어 겁을 줘도 되는 관계. 세상에 둘도 없는 소교주였기에, 특별한 주점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일 뿐.
조춘배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서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양인이 달려왔다. 남편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다행이었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함께였다.
“한 시진 후에 조 서방 손을 자를 거요.”
양인은 엄마와 동생이 얼마나 상심할지 벌써 마음이 아팠다.
조춘배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아내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그의 눈에 어떤 결심이 스치는 것을 그녀는 보지 못했다.
* * *
황룡표국에 사람들이 모였다.
표국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자르려 했다. 그것이 정해진 표국의 법도였다.
종학은 아혈과 혈도를 제압당했기에 그가 순순히 끌려 나오는 모습이 순순히 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일을 진행하는 사람은 표두 공찬(孔燦)이었다.
“순순히 죄를 인정하겠느냐?”
혈도가 제압당한 그는 대답하지 못했고 고개를 내젓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조춘배 가족도 있었다. 그들은 의원을 사서 데려왔다. 손이 잘리더라도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치료해서 목숨이라도 살리려는 것이다.
“죄를 인정했으니 양손을 잘라 일벌백계하겠다!”
그 외침에 윤씨가 쓰러질 듯 휘청했고, 양선은 통곡했다.
“여보! 여보!”
종학은 억울함과 비통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평생 죄를 짓지 않았는데, 이렇게 누명을 쓰고 손이 잘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언제나 나쁜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공찬이 검을 뽑아서 손을 자르려던 그때, 조춘배가 나섰다.
“저는 저 사람 손윗동서 되는 사람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저희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은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춘배가 나서자 양인은 물론이고 윤씨와 양선도 놀랐다. 이러다 조춘배까지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이미 조사가 끝난 일이다. 저자는 표물을 훔치려 했고, 그 벌을 받는 거다.”
공찬은 너까지 한 번 혼나 볼래? 하는 위협적인 눈빛을 보냈지만 조춘배는 어떻게든 동서를 구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대체 뭘 훔치다가 붙잡힌 겁니까? 훔친 물건을 되찾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훔치려다 걸렸다고 양손을 자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조춘배의 팔을 붙잡고 있는 양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혹한 처사라고?”
공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조춘배는 겁을 먹지 않았다. 풍류주점에서 그가 봐온 눈빛이 어떤 눈빛이었던가?
조춘배는 상대의 반응으로 이치를 따져서는 해결이 안 될 것을 직감했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마교에서도 일을 이렇게 처리하진 않습니다.”
마교가 언급되자 주위가 조용해졌다.
“저는 마교의 고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와서 중재해 줄 때까지만이라도 참아주십시오.”
공찬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마교가 주는 공포와 위압감이 있었다. 잘못 휘말리면 표국 하나쯤은 그대로 몰살당하게 될 것이다.
“마교의 누구를 안다는 거지?”
“황천각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순간 주위가 얼어붙었다. 주민들은 몰라도 표사들은 황천각주가 어떤 직위인지 알고 있었다.
“마군주님도 알고 있습니다.”
마군주까지 언급되자 주위는 조용해졌다. 마존이나 소교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너무 과해도 효과가 없을 테니까.
그때 종학의 가족사를 알고 있는 표사가 와서 공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저자는 마교 주위에서 주점을 하는 자입니다.”
“주점을?”
“허름하고 규모가 작은 주점입니다.”
공찬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술이나 파는 주제에 감히 마교를 팔아서 협박을 해?”
공찬은 순간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수치심이 들었다.
“제가 기별하면 그분들이 와주실 겁니다.”
이미 주점 주인장이란 말에 공찬은 더는 조춘배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저자를 끌고 와라!”
그러자 처제인 양선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희 형부가 제 남편을 구하고 싶어서 괜한 말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형부까지 끌려가서 일을 당할까 봐 양선은 공포에 휩싸였다.
결국 조춘배도 끌려 나왔다.
혈도가 제압당한 종학은 고갯짓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참담한 심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혼인하고 정말 좋았던 사람이 바로 조춘배였다. 그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랐는데. 자신 때문에 이런 고초를 겪게 해서 너무 미안했다.
“마교를 앞세워 본 표국을 협박했으니 네 혀를 자르겠다.”
양인과 양선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윤씨가 그 자리에 엎드려 애원했다.
“우리 사위,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이 늙은이를 대신 벌해주시오.”
조춘배가 두려움에 떨며 공찬에게 말했다.
“제 말을 확인할 시간을 주시오. 황룡표국을 위해서라도 서두르지 마시오.”
공찬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끝까지 협박질이구나. 네놈 혀부터 잘라주마.”
“날 건드렸다간 마교 소교주가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거요!”
어떻게든 겁을 먹기를 바랐지만 역효과만 났다.
“마교 소교주? 이거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네 말대로 네가 소교주를 안다고 치자. 정말 마교의 소교주가 여기까지 와서 널 도와줄 거라 믿는 거냐?”
그렇다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표사들이 조춘배의 양쪽 팔을 붙잡았다. 정말 혀를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그때 새하얀 무엇인가가 조춘배의 어깨에 내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눈을 쳐다보았다.
왜 하필 이럴 때 눈이 내리는 걸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더니. 이렇게 황룡표국에서 혀가 잘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저 착한 동서가 억울하게 손이 잘리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혀가 잘리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혈해줘야 살 수 있을 텐데.
저 멀리 울부짖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하네, 이 남편이 힘이 없어서 정말 미안해.
아내 뒤로 윤씨와 양선이 통곡하는 모습이 보였다.
장모님, 죄송합니다. 처제, 미안해.
공찬이 조춘배의 입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이익.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꽈앙!
하늘에서 날아온 무엇인가가 연무장에 패대기치듯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표두와 표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날아온 것은 사람이었다. 그는 연무장 한가운데 대자로 누운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장내에는 그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가 누군지 확인한 조춘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놀라서 어안이 벙벙하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 나가더니 환하게 웃었다.
그러다 이내 가슴이 북받쳐 오르면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소리 내서 울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지만 어흐흐흑,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연무장에 드러누운 사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인장, 첫눈이 옵니다.”
절대회귀 336화
제336회 사위가 만드는 요리를 좋아합니다.
검무극은 내리는 눈을 쳐다보며 잠시 그렇게 누워있었다.
중간에 내공을 채우는 시간을 제외하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이곳까지 달려왔다.
덕분에 쾌속보는 십 성 대성의 한계를 돌파해서 십일 성에 돌입했다. 십이 성 대성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과연 십이 성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얼마나 빠를까?
물론, 그보다 더 기쁜 일은 늦지 않게 도착했다는 사실이었다. 검무극은 하늘에 감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조춘배에게도 감사했다. 잘 버텨주셔서 고맙소.
그 감사에 답하듯 내리던 눈이 검무극의 얼굴과 손과 몸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잠시 누워서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까지도 그곳에 있는 모두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헝클어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생각보다 젊은 얼굴에 모두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검무극이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볼을 지나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내 마도의 기준이다. 저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을 때, 내 마도는 제대로 세워지고 있는 것이리라.’
조춘배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정말이지 검무극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주인장 보러 왔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춘배는 다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술 마시러 갔는데 문을 닫으셨더라고요.”
마교의 소교주가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사실에 조춘배는 감격했다.
‘소교주님!’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눈물이, 그의 표정이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혀를 자르려고 했었던 표두 공찬이 나섰다.
“소협은 누구신가?”
주점 주인과 아는 사이라면 별것 아닌 자일 텐데. 한데 이 젊은 놈의 등장이 너무 요란스러웠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다. 고수라도 크게 다쳤을 충격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대체 어떻게?
문제는 상대가 전혀 무공을 익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반박귀진에 이르렀을 리도 없고.
검무극은 공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조춘배의 장모 윤씨에게로 걸어갔다.
“일어나세요, 어머니. 이제 사위분들은 괜찮을 겁니다.”
검무극이 윤씨를 일으켜 세웠고, 양인과 양선도 일으켜 세웠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입니다.”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공찬은 숨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주위의 표사들도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쨍그랑.
너무 놀란 나머지 표사 중 한 사람이 검을 떨어뜨렸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앞서 조춘배가 마교 소교주가 그냥 두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다들 잘못 들었거나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한데 조춘배가 말한 마교 소교주가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공찬은 믿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마교 소교주가 저런 꼴로 혼자 이곳에 올 리가 없다!”
옷은 흙먼지로 더러웠고 온몸은 땀으로 젖은 데다가 머리카락까지 헝클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마교 소교주라 할 수 없었다.
검무극은 그 설명을 세 여인에게 했다.
“급히 오느라 몰골이 흉한 점 이해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의 가족이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오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라는 듯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신분을 밝힌 것은 조춘배를 위해서였다. 그의 가족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마교 소교주가 그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왔다는 것을. 그의 아내에게, 장모에게, 처제에게, 동서에게.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거다.
이것이 항상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맞아주었던 조춘배에 대한 검무극의 배려이자 예의였다.
그 마음이 전해졌기에 조춘배는 다시 어금니를 꽉 깨물며 치미는 격정을 참았다.
“어머니, 제가 사위분께서 만드는 요리와 술을 제일 좋아합니다. 본교의 천마이신 아버님도 아드님의 술과 요리를 먹으러 가십니다. 제게도, 본교에도 정말 소중한 분이십니다.”
윤씨는 너무 놀라고 감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사위 한 번 봤다가 검무극 한 번 보고. 또 딸 한 번 봤다가 사위 한 번 보고.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귀하신 분이, 이렇게 귀하신 분이란 말만 반복했다. 사실 그녀는 마교 소교주라는 신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귀한 사람인가 보다 라고 느꼈다.
반면 조춘배의 아내 양인은 정말 놀랐다.
남편에게 소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심 과장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주점에 오기는 왔겠지만, 정말 남편과 그렇게 친하다고?
남편이 말했다. 소교주가 자신을 친구처럼 대해준다고. 에이, 설마? 그 설마가 지금 현실이 되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양인이 다시 엎드려 절을 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동생인 양선이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저희 남편이랑 형부, 제발 살려주세요.”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세 여인을 안심시킨 후 조춘배 쪽으로 돌아섰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여러 갈래의 기를 발출해서 등 뒤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완전히 파악하고 있던 검무극이었다.
그때까지 두 표사는 조춘배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고, 공찬의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진짜 소교주인가라는 생각에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가짜 소교주다!”
공찬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종학을 구하기 위해 조춘배와 저 젊은 놈이 꾸민 짓이 틀림없었다. 앞서 연무장에 처박히듯 떨어진 것도 실력이 모자라서 어설프게 떨어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니 다 맞아떨어졌다.
“혀와 손만 잘리고 말 일이었는데, 이젠 모가지가 잘리게 생겼다.”
비수로 당장에라도 조춘배의 목을 찌를 것 같았기에 세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검무극이 양손을 동시에 내질렀다.
우선 왼손이 만들어 낸 놀라운 결과.
후아아아악!
조춘배를 잡고 있던 두 표사가 뒤로 날아갔다. 보이지 않는 거친 힘이 그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냥 홱 날아간 것 같지만, 무의 극의가 펼쳐진 한 수였다. 그 짧은 순간에 조춘배를 붙잡고 있던 그들의 손이 강제적으로 펼쳐졌고, 조춘배는 그 자리에 두고 두 사람만 날려 버린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날아간 두 표사는 아무런 부상도 없이 일어났다.
왼손보다 오른손은 더 놀라운 한 수를 보였다.
티잉!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공찬이 들고 있던 비수로 향했다. 비수가 부러져 있었다.
공찬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부러진 비수를 바닥에 던졌다.
그래, 장력을 발출해 표사들을 날려버릴 수는 있다. 한데 허공섭물로 비수를 부러뜨린다고?
다른 사람들은 암기를 던져서 부러뜨렸겠지 생각하겠지만, 공찬만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날아온 것은 없었다. 비수는 그냥 부러졌다.
부러진 비수에 정신이 팔렸던 공찬이 고개를 들었을 때 검무극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이며 공찬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진짜 마교 소교주구나!’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마교 소교주가 주점 주인을 구하기 위해 직접 왔다고? 이런 몰골로? 혼자서? 대체 왜?
검무극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공찬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으악!”
검무극은 가볍게 그의 마혈을 제압할 뿐이었다. 두들겨 패거나 겁주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의 전말이 밝혀졌을 때 죽을 자와 살 자만이 남을 것이다. 벌써 그가 어느 쪽에 속할지 느낌이 온다.
“못 들으셨소? 나 천마신교 소교주요.”
검무극의 태도는 차분하면서 공손했다. 공찬을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조춘배의 장모인 윤씨와 그의 아내 양인과 처제 양선을 배려해서였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기를 발출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지닌 압도적인 존재감에 표사들의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표사들이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짜 소교주라도 상관없었다. 이런 실력자에게 감히 덤빌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제야 윤씨와 양인, 양선은 정말 마교 소교주가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검무극이 가까이 있던 표사들에게 말했다.
“편한 의자로 다섯 개만 가져다주시오.”
두말없이 표사들은 의자를 가지러 달려갔다.
검무극은 종학의 아혈과 마혈을 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한 종학에게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는 그대 형님에게 하시오.”
종학의 뜨거운 시선이 조춘배를 향했다. 소교주가 오기 전에도 자신을 구하려고 나서준 조춘배였다.
“제가 이 혼인 정말 잘했습니다.”
종학의 말에 조춘배와 가족들이 웃었다.
말을 하고 난 종학이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다.
검무극이 재빨리 종학을 앉힌 후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한줄기 내력을 주입했다.
혹독한 매질에 몸이 많이 상해 있었는데 다행히 불구가 될 부상은 아니었다. 한동안 요양하면 다시 건강해질 것이다.
검무극이 내부를 다독여 준 후, 아내가 서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여보!”
“당신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미안하오.”
“아니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에요.”
가족들이 한곳에서 종학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부러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종학이 누명을 벗는 것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자신은 떠나도 이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그래서 검무극은 이 일의 처리를 신중하게 했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차분하게, 침착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지켜보던 표사들 중에는 쟁자수인 종학의 성품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상하다고 여겼다. 종학이 표물에 손을 댄 것도 이상했고, 또 그렇다고 양손을 자르는 벌을 내리는 것도 너무 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표사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의자를 나란히 놓은 후 조춘배와 그의 가족들을 앉혔다.
“이쪽에 편히 앉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뇨, 편히 앉으셔도 됩니다.”
윤씨를 제일 편한 의자에 앉히고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앉혔다.
조춘배는 의자에 앉으니 또 다른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부인 양인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조춘배는 애써 겁나는 마음을 다스렸다. 지켜야 할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다.
양인이 입을 벙긋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멋져요, 당신.’
조춘배가 그녀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자신의 목숨이 살아난 것도 좋았지만, 가족을 지킬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아내와 처가 가족들에게 인정받은 것도 너무 좋았다.
‘고맙습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이 조춘배에게 말했다.
“자, 이제 무슨 일인지 들어봅시다.”
조춘배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손아래 동서가 이곳 황룡표국의 쟁자수입니다. 이번 표행에서 도둑으로 몰려서 양손이 잘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조춘배는 종학을 만났을 때 들었던 내용까지 말해주었다. 하나를 말해주면 열을 예측하는 검무극이었으니, 대충의 설명에도 핵심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표물에 손을 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동서분이 뭔가를 보는 바람에 이 난리가 난 것이군요.”
검무극이 종학에게 물었다.
“뭘 보신 겁니까?”
종학이 공찬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연히 저기 공 표두가 은밀히 어떤 남자를 만나는 걸 봤습니다. 그때 공 표두가 저를 보던 눈빛이 너무 날카로워서 겁이 났었지요.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표행에서 돌아오고 저는 도둑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명을 쓸만한 이유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저 공 표두가 만난 사람은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뇨, 처음 본 사람이었습니다. 한데 그 사람 이마에 큰 점이 있었습니다.”
그 점이 화근이었으리라. 누군가를 만났다가 아니라 점이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가 되었을 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공찬을 향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종학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고를 위장하고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표국 내 누군가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절대 혼자 처리하지 말고 보고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후 일 처리도 문제였다.
자신은 도적 떼가 침입한 것처럼 해서, 가족들까지 다 죽여버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기왕 죽일 것 표국에 도움이 되게 하자고 했다. 손을 자르고 지혈을 해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 버릴 테니, 표국의 기강도 세우고 놈도 죽이고. 일석이조라 여긴 것이다.
검무극이 공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난 일이 왜 저분의 손을 잘라야 할 일이 되었을까? 대체 누구였기에? 솔직히 말하면 목숨은 살려준다.”
양손과 혀는 자르겠지만.
생략된 말이 뭔지 몰랐기에 공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표국 건물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잠깐 멈추시게.”
등장한 중년인은 장대한 풍채에 눈빛이 강렬했다. 그는 바로 황룡표국의 국주인 우소추(禹消墜)였다. 그는 일개 표국의 국주치고는 대단한 기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국주인 우소추요.”
지금껏 나서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한 것이다.
“귀한 분이 오셨으니 안으로 모시겠소. 들어오시지요.”
검무극은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 내 사람들이 있어서 그건 곤란하오. 여기서 이야기 나눕시다. 눈도 오고, 분위기가 좋소.”
검무극의 거절을 우소추는 억압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리 마교 소교주라도 정파의 표국을 이렇게 억압해서 되겠소?”
“아, 황룡표국이 정파 쪽이었소? 나는 누명을 씌워서 손을 자르려는 걸 보고는 사파인 줄 알았소.”
우소추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우릴 건드리면 무림맹주께서 그댈 용서하지 않을 거요.”
검무극이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무림맹주를 만나본 적이 있소?”
우소추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큰 행사에 참석해서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맹주와 독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소. 아마 없으니까 그런 말을 하시겠지. 죄 없는 사람의 손과 혀를 자르려는 것을 안다면 무림맹주 손에 당신들 머리통은 이미 다 박살이 났을 거요. 자, 그러니 헛된 협박은 그만하시고 이리 내려오시오.”
검무극이 뽀드득뽀드득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한 눈 위를 걸어 조춘배 가족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종학의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 사람을 변호하고, 나는 내 사람을 변호하고. 그래서 이 새하얀 눈 위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려봅시다.”
여전히 우소추는 그 자리에서 검무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의를 갖춰 대하니 당신이 지금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친구를 잃을 뻔한 마교 소교주요. 그러니…….”
내내 정중했던 검무극이 나직하고 차갑게 덧붙였다.
“좋게 말할 때 내려와라, 우소추.”
절대회귀 337화
제337회 내 검은 덜 아플 것 같아서.
우소추라고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그가 망설인 이유는 하나였다.
공찬이 했던 바로 그 고민.
‘이자가 정말 마교의 소교주일까?’
좋다. 백번 양보해서 마교 소교주가 혼자 왔다고 치자. 몰골 또한 엉망일 수도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렇게 달려온 이유가 주점 주인과 그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자신은 서 있고 저 비천한 이들은 의자에 앉힌다고? 심지어 쟁자수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준다고?
우소추의 상식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교 소교주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는 확신했다.
하지만 상대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앞서 공찬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무공만큼은 가짜가 아니었으니까. 건물 안에서 봐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공찬이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당하는 것을 봤다.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소교주께서 내려오라면 내려가야지요.”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를 바라보며 검무극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내려오라고 해서 내려올 것이 아니라 이 아래 생사가 걸려 있는 당신 수하가 있으니까 내려와야지. 그렇게 느긋하게 내려올 게 아니라 훌쩍 뛰어내려서 당신 수하부터 살펴야지.”
우소추는 짜증이 치밀었다.
앞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내려오라 했던 말도 그렇고, 한마디 반박도 못 한 지금 이 말도 그렇고. 수치스러웠다. 표사들이 보고 있었고, 마을 주민들까지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런 마음이기에 검무극 뒤에 앉아 있는 다섯 사람이 더 눈에 거슬렸다.
‘하찮은 것들이!’
아랫것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일이 지나가면 저것들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조춘배와 양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우소추의 시선을 감히 마주 보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저 황룡표국의 국주였다. 한데 지금은 자신들은 앉아 있고, 국주는 서 있다.
“아파.”
양인이 동생에게 말했다. 우소추의 눈빛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언니의 손을 너무 꽉 잡은 것이다.
“미안.”
“선아, 이제 괜찮아.”
양인은 우소추가 듣고 있었지만 당당히 말했다. 몰랐으면 몰랐지, 온 사람이 마교 소교주가 확실했기에 정말 괜찮다고 믿었다.
양인이 조춘배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은 것 맞죠?’
조춘배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부인의 위로에 힘을 실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처제.”
“형부!”
“평생에 다시 없을 순간이니, 이 순간을 즐겨도 돼.”
조춘배는 안다. 지금 자신들 앞을 성벽처럼 막아주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벽은 무너져도 저 등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자신의 그 허름한 풍류주점에 마존들이 와서 벽에 글을 남기게 한 사람이다. 천마를 자신의 주점에 오게 한 사람이다.
그것은 무공의 강함과는 전혀 다른 강함이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한 마교 소교주.
그런 의미에서 조춘배는 오래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소교주가 천마가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소교주가 이끌어가는 천마신교는 어떨까? 그가 천마인 무림은 어떻게 될까? 그 모든 것을 보고 싶었다.
양인은 그런 남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주점 일에 대해선 일절 말을 안 하던 남편이었다. 취객들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녀가 어찌 모를까?
한데 소교주가 주점에 왔다고 한 이후부터 달라졌다. 검무극이나 마존이 다녀간 날이면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날 있었던 일을 신이 나서 말하는 남편이었다. 지금 검무극을 바라보는 눈빛도 그 눈빛이다. 오늘이 가장 밝은 별이었다.
검무극은 다시 정중하고 차분한 태도로 돌아왔다. 이 자리의 제일 목표는 응징에 앞서 종학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이었으니까.
“자, 내려오셨으니 함께 들어봅시다. 국주께서는 궁금하지 않으시오? 공 표두는 왜 죄 없는 쟁자수를 살인멸구 하려고 했는지.”
우소추가 즉시 반박했다.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도적질을 한 손을 자르려 한 거요. 그리고 살인멸구라니? 손목이 잘린다고 죽는 건 아니잖소?”
검무극은 공찬이 종학을 죽이려 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양손이 잘리고 의원까지 살아서 갈 수 있겠소? 그대 양손을 내가 잘랐다고 칩시다. 경공을 쓰지 않고 의원까지 달려가서 살아날 자신 있으시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손이 잘리는 순간 혼절해 버릴 텐데.”
우소추는 반박하지 못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제대로 된 도움이 없다면 자신이라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켜보던 주민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그저 도적질하고 그 벌로 손을 자르려나 보다, 이런 마음으로 소집 당해 나왔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진실이 밝혀지고 있었다.
표사들은 이미 공찬과 우소추의 반응에서 이번 일에 뭔가 음모가 있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일단은 지켜보았다. 상대는 아주 특별한 마인이었으니까.
검무극이 공찬과 우소추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한 남자의 목숨뿐만 아니라 명예까지 죽이려 했소.”
종학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검무극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 말을 해주자 가슴에 꽉 막혀 있었던 뭔가가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이 도둑질한 누명을 쓴 일이었다. 평생 남의 것을 욕심내 본 적이 없었던 삶이라서 더 그랬다.
검무극이 다가오더니 종학의 어깨를 쌓인 눈을 툭툭, 한 번 더 치워주었다.
윤씨는 그런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큰딸에게 나직이 말했다.
“나이는 젊지만 어른 같은 분이시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늙은이의 눈에만 보이는 뭔가가 있었다.
그 사이 검무극은 우소추 앞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우 국주.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소. 저 공 표두란 사람을 보면 성격이 급하고 잔인한데, 왜 표행 중에 이분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인데.”
공찬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검무극과 우소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검무극은 공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며 직접 물었다.
“혹시 돌아와서 누군가에게 보고해야 했던 것 아니었소?”
표두가 보고를 해야 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우소추를 향했다.
“그 사람이 우 국주였소?”
공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라는 말이 곧바로 나오지 않는군.”
그러자 우소추가 재빨리 말했다.
“맞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소. 그대가 죽일 듯 겁박하고 있는데 어찌 온전한 대답을 할 수 있겠소?”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대답하려는 순간 우소추가 공찬에게 전음을 보냈다는 것을.
“당신 국주가 뭐라고 전음을 보냈소? 목숨을 두고 협박했소? 이 고비만 넘기면 거금을 주겠다고 했소? 대표두라도 시켜주겠다 했소? 아니면 셋 다요?”
공찬은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자는 대체 뭐지?’
놀랍게도 셋 다였다.
공찬이 돌아와서 보고했던 사람은 우소추였다. 이번 일은 철저히 국주의 명령하에 움직였던 일이었다.
조금 전 전음이 와서 국주가 협박한 것도 사실이었다. 실토하면 자신의 손에 죽을 거라고 채찍질하면서 동시에 큰돈과 대표두라는 당근을 약속했다.
물론 상대가 검무극이었으니 통할 리가 없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천만금이 아니라 억만금을 준다 해도 소용없소. 이 자리에서 솔직히 말 안 하면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그러자 우소추가 공찬을 설득했다.
“만약 저 사람이 마교 소교주라면 절대 그대를 죽이지 못해. 마인이 정파에 속한 표국의 표두를 죽인다? 그것도 마교의 소교주가? 그랬다간 무림이 발칵 뒤집힐 거네. 나를 믿게.”
결국 공찬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막대한 돈과 대표두 자리까지 얻게 될 것이다.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소추는 자신을 구해줄 테니까.
검무극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마기를 드러냈다.
“하긴. 좋게 말해서 알아들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마기는 다른 사람들 말고 오직 공찬을 향해서 날아들었다.
공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바다에 서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도 잠시. 그는 물 아래로 끌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커먼 심연이 기다리고 있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정말 물에 빠진 것처럼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기도만으로 이럴 수가 있지?
너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의식을 잃었으면 좋겠지만, 검무극의 기도는 검무극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지독한 고통이 계속되었다. 죽음에 이르려면 다시 몇 모금의 공기를 주고 정신을 차리게 한 후 다시 질식의 고통으로 끌고 갔다.
‘제발! 제발! 차라리 죽여줘!’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살려달라는 말 대신 죽여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때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고 싶나?
의지? 충성? 지금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수 있었다.
‘네, 살려주십시오!’
―그럼 솔직히 말해.
숨을 헐떡이던 그가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명령을 내린 사람은 국주님이십니다!”
우소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시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인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게 검무극이 그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한 것이다.
앞서 종학의 손을 자르려고 할 때 아혈과 마혈을 제압해서 마치 죄를 시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 거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우소추는 경악했다. 아무리 상대의 무공이 강하더라도, 자신이 느끼지도 못한 사이에 혈도가 제압당할 수는 없었다.
‘진짜 소교주구나!’
그러는 사이 공찬에게 검무극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럼 이마에 점이 난 남자는 누구냐?”
“저도 모릅니다. 국주가 만나라고 해서 만났습니다. 그에게 다음 표물을 언제 어디에서 받을지 듣고 왔습니다.”
“표물이 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다음 표물은 언제 받기로 했나?”
“사흘 후 청수림(淸水林)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검무극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종 쟁자수의 손을 자르려 한 이유는 뭔가?”
“우리 접선을 종학이 봤다고 보고하자, 국주가 손을 잘라서 처리하자고 했습니다.”
종학이 완벽하게 누명을 벗는 순간이었다.
표사들과 주민들의 시선이 국주에게 향했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일에 개입한 표사는?”
“저뿐입니다. 다른 표사들은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아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주가 명령한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는 모든 책임을 국주에게 떠넘겼다.
“다 말씀드렸으니 저는 살려주시는 거죠?”
어떤 대답이 나올까 긴장한 사람은 공찬만이 아니었다. 검무극 뒤에 있던 조춘배 가족이 더 긴장했다.
특히 종학은 ‘제발 저자는 살려주지 마십시오!’라고 마음으로 빌었다. 공찬을 살려주면 나중에 자신에게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검무극이 되묻자 공찬은 목청을 높였다.
“다 말하면 살려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말하라고 할 때 안 했잖아? 내가 마기로 압박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말한 거잖아? 아니야?”
공찬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검무극에게 욕설과 저주를 내뱉으려던 순간, 어느새 아혈이 제압당해 있었다. 귀신이 곡할, 아니 귀신도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해 꼼짝 못 할 실력이었다.
다음 생에는 착하게 태어나라, 한마디 충고도 없었다. 검무극은 철저히 공찬의 인생을 부정했다.
후우우웅!
검무극의 자비 없는 주먹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꽈르르릉!
동시에 천벌이 내리는 것처럼 천둥소리가 들렸고.
퍼어억.
일격에 늑골이 박살 난 공찬이 저 멀리 건물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벽에 박히기 전에 이미 그는 절명한 후였다.
“죄 없는 사람의 손을 자르려 하고, 나아가 내 친구의 혀까지 자르려 했으니 이미 너는 죽은 목숨이었다.”
주민들과 표사들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이 죽음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들이 정확히 알아야 했으니까. 그래야 종학 일가가 이곳에서 계속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켜보던 표사들과 주민들은 합당한 결과라 생각했다.
종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음이 어떨지 알기에 양선은 남편을 꼭 안아주었다.
양인은 느꼈다. 검무극이 친구란 말을 하는 순간, 잡고 있던 남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조춘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겐 너무 과분하신 친구십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당연하죠. 전 앞으로 천마가 될 사람 아닙니까? 누구에게도 과분한 친구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검무극의 너스레에 조춘배는 기분이 좋았다.
“제가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조춘배는 평생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그러자 검무극은 뜻밖의 말을 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네?”
“오히려 주인장께서 저를 구하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뜬 조춘배에게 검무극은 옅은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나의 마도를 지킬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오, 주인장.
검무극이 우소추 앞으로 걸어왔다.
“다행히 우리가 풀고자 했던 시시비비는 잘 가려진 것 같소.”
풀린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소추의 아혈도 어느새 풀려 있었다.
“당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나? 지금 황룡표국의 표두를 죽였어!”
그가 표사들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건 공찬의 죄와는 별개의 일이다! 마인이 정파 무인을 죽인 거다! 마교의 정파 공격이란 말이다!”
그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종학의 손목을 자르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 이미 황룡표국 국주의 권위는 사라졌다. 자기 이익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 한 위선자에 불과한 것이다.
“날 건들면 정마대전이 일어날 거다! 너 때문에 수많은 희생자가 날 거라고!”
흥분한 그에 비해 검무극은 차분했다.
“당신이 상황 파악 못 하고, 좋은 말로 해선 안 되는 사람인 건 이미 밝혀졌으니 내식대로 하겠소. 아니, 당신 식이겠군.”
그게 무슨 말인가 우소추가 의아해하던 그때.
스으윽.
그의 왼손이 저절로 앞으로 내뻗어졌다. 이미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였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당신이 하려던 짓.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사람들을 불러 모았잖아?”
검무극이 손을 내밀자 저 멀리 시체가 된 공찬의 허리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검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와 검무극의 손에 들어갔다.
“내 검은 너무 예리해서 덜 아플 것 같아서.”
검무극의 의도를 알아차린 우소추는 공포에 질렸다.
“그만! 하지 마! 그만!”
“괜찮아. 당신이 그랬잖아? 손목 잘린다고 안 죽는다고.”
“왜 이러시오, 소교주! 소교주님! 제발!”
“좋아, 그럼 기회를 주지.”
검무극의 입에서 차가운 눈빛만큼이나 무서운 말이 흘러나왔다.
“묻는 말에 셋 셀 동안 대답하지 않으면 일단 왼손부터 자르고 다시 묻겠다.”
당장에라도 벨 듯 검을 높이 들고서 검무극이 물었다.
“이마에 점이 난 그 남자는 누구지? 하나, 둘…….”
절대회귀 338화
제338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에서.
“셋!”
셋을 세고 난 후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검을 내리쳤다.
우소추가 다급히 소리쳤다.
“점이 아니오!”
쉬이이익.
내리치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파앗.
손목이 베이며 피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살갗만 베였을 뿐, 뼈까지 잘리진 않았다.
‘이 미친놈이! 정말 자르려고 했어!’
우소추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태어나서 이렇게 놀란 적이 처음이었으니, 참으로 편한 인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점이 아니라고?”
“이마에 그것, 점이 아니라 문신이오.”
“문신? 어떤 문신이지?”
우소추가 망설였다.
“하나, 둘.”
이번에는 둘을 세었을 때 대답이 나왔다.
“뱀 대가리요.”
“뱀이라고?”
“이마에 뱀 대가리가 새겨져 있소. 검은색이라서 점으로 착각한 모양이오.”
이마에 뱀 대가리를 새기고 다니는 미친놈들이 모인 곳은 무림에 단 한 곳이었다.
“설마 흑사단(黑蛇團)이냐?”
흑사단이 언급되자 표사들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모두 사색이 되었다. 특히 종학은 자신이 본 게 흑사단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흑사단은 사파에 속한 무리로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사파의 악인 중에서도 정말 악명 높은 자들이었다.
“흑사단의 표물을 받은 거냐고!”
우소추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을 못 했다.
표사들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들 중 한 중년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국주, 저 말이 사실이오?”
우소추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지만, 네까짓 게 감히 국주에게 따진단 말이냐?
정말이지 구제 불능인 자였다.
앞서 질문한 사람 말고도 다른 표사들도 차가운 눈빛으로 우소추를 노려보았다. 다른 곳도 아닌 흑사단의 표물을 받았다고?
결국, 참지 못하고 우소추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다 표국을 위해서였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지랄이냐?”
검무극이 검으로 그의 손목을 툭 건드렸다.
표사들에게 큰소리치던 우소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르지 마시오! 제발!”
겁먹은 그 모습에 표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를 국주로 모셨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표물은 무엇이냐?”
“모르오.”
“그럴 리가?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너 같은 자가 표물이 뭔지도 모르고 흑사단과 손을 잡았을 리가 없지.”
검무극이 손을 번쩍 들었다.
“하나, 둘…….”
“모르오, 정말 모른다니까.”
“셋.”
쉬이익.
서걱!
검이 그의 손목을 지나갔다.
툭.
바닥에 떨어지는 손을 보는 순간, 우소추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래도 설마 했었는데.
푸아아아악!
손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면서 우소추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지켜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조춘배와 종학은 똑바로 눈을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무극이 오지 않았다면 바닥에 떨어진 저 손은 종학의 손이었을 것이다.
뿜어져 나오던 피가 멎었다. 검무극이 지풍을 날려 그의 혈도를 눌러준 것이다.
우소추가 검무극에게 원망의 욕설을 내뱉으려던 그때.
스르륵.
그의 오른손이 저절로 허공에 들려졌다.
우소추는 혼비백산했다.
“안 돼! 그만! 이 미친놈아, 그만!”
검무극이 다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우소추가 소리쳤다.
“아이들이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온 것이다.
“아이들이 표물이라고?”
“그렇소.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잠재운 아이들을 상자에 담아서 그들이 원하는 곳에 옮겨주었소.”
귀식대법을 쓰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잠이 들기 때문에, 며칠 동안은 물건처럼 옮길 수 있었다. 아이를 넣은 상자 위에는 다른 부드러운 물건을 채워서 위장했을 것이다. 이러면 눈에 띄지 않게 많은 아이를 빠르게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제발 나를 의원에게 데려가 주시오.”
그가 떨어진 손을 주워 들고 간절히 말했다. 그걸 붙일 수 있는 사람은 마의나 되어야 할 텐데.
검무극의 반응은 차가웠다.
“왜 그 일을 너희에게 맡겼지? 사파 쪽 표국을 이용해도 될 텐데? 아니면 흑사단이 자체적으로 옮겨도 되고. 빨리 대답해야 빨리 갈 수 있을 거야.”
“나도 똑같이 물었소. 그랬더니 무림맹에서 이 일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을 감시 중이라고 했소.”
검무극은 기억이 났다. 흑사단이 무골이 뛰어난 아이들을 납치해서 막대한 돈을 받고 팔아서 부를 축적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지금보다는 훨씬 나중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억하는데.
“무림맹의 멸마대주가 직접 조사에 나섰다고 했소. 그래서 몸을 사리는 중이라고 했소.”
멸마대주는 무림맹주의 손자인 진하군이다. 자신과의 만남으로 진하군의 행보에 변화가 있었다. 그의 운명이 바뀌면서 그 결과 무림의 운명까지 바뀌는 것이리라.
“제발! 제발 데려가 주시오.”
“아직 질문이 남았다.”
“의원에 가서 대답해 드리겠소.”
“안 돼! 여기서 대답해라.”
우소추의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증오와 원망이 가득했다.
“돈을 얼마나 더 받았나?”
“원래 받는 돈의 열 배를 더 받았소.”
대답하고 난 우소추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민들도, 표사들도 모두 가족이 있는 이들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였고,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그랬기에 그 눈빛이 고울 리 없었다.
“너희는 다를 줄…….”
우소추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쉬이이익.
서걱!
이번에는 셋을 세지도 않고 검무극이 그의 오른손도 잘랐다.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양손이 잘린 그는 실성 상태였다.
“이게 네가 저 사람에게 하려던 짓이었다. 너는 죄라도 지었지.”
비명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팔을 지혈하려고 턱으로 혈도를 짚으려는 그였다.
그가 미친놈처럼 날뛰던 그때!
쿠르르! 꽝!
천벌을 알리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퍼억!
검무극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박혔다. 얼굴이 함몰된 우소추는 숨이 끊어진 채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검무극은 그의 마지막 한마디도 허용하지 않았다.
조춘배와 가족들은 놀라고 당황했으며 또 안도했다.
검무극은 주민들부터 먼저 돌려보냈다.
“이만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은 흑사단과 관계된 일이니, 오늘 일은 당분간 함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흑사단과 관련된 이상 소문내라고 떠밀어도 절대 이야기를 퍼뜨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검무극은 표사들에게 물었다.
“표국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면 이제 어느 분과 하면 되겠소?”
그러자 표사들의 시선이 한 사람을 향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그 사람은 앞서 우소추에게 정말 그랬냐고 질문을 던졌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표두 황원(黃源)이오.”
“당분간은 그대가 임시 표국주를 맡으시오.”
“그러겠소.”
원래라면 이제부터는 황룡표국의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겠지만, 종학이 쟁자수로 있는 곳이니 그들의 이후 행보에도 관심을 두려 마음먹었다.
“황룡표국 표사 복장을 십여 벌만 빌려주시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대들도 들어서 알겠지만 사흘 후 청수림에서 표물을 받기로 했다고 했소. 본교 지부 무인들을 데려가서 그 아이들이라도 우선 구하려고 하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할 수 없겠지요. 대신 운이 좋아서 이 소식보다 우리가 먼저 청수림에 간다면 적어도 이번 표물에 실린 아이들은 구할 수 있을 거요.”
황원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구하러 가려는 겁니까? 당신은…….”
마교의 소교주인데. 사파 놈들보다 더 잔인한 사람들이 당신들 아니오?
그런 마음으로 물었는데, 놀라운 대답이 나왔다.
“아이들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이들만큼은 구해야 하지 않겠소?”
만약 검무극이 오늘 보여준 모습이 없었다면 절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표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잠시만 우리끼리 의논 좀 해도 되겠소?”
“그러시오.”
황원이 표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청수림에는 우리가 함께 가겠소. 낯이 익은 사람들이 가지 않으면 놈이 의심할 거요. 애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고.”
표사들 몇이 앞으로 나왔다. 전부는 아니고 몇몇 사람이 자원한 모양이다.
“위험할 수도 있소.”
“알고 있소.”
“한데 왜 가겠다는 거요?”
“우린 정파의 무인들이오. 비록 남의 물건이나 나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우린 정파인들이오. 납치된 아이들을 구할 절호의 기회인데, 모른 척할 수는 없소.”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이 마교의 소교주가 함께라면 이번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들었다.
“표국주가 땅에 떨어뜨린 본 표국의 명성을 되찾게 해주시오.”
“나중에 흑사단이 보복을 할 수도 있소.”
그 부분 역시 생각해둔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청수림에서 아이를 구하는 즉시, 무림맹에 이번 일을 알려서 도움을 청하겠소.”
“좋소. 그럽시다.”
검무극이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함께 가면 분명 일 처리는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황원에게 표사들이 입는 옷을 한 벌 얻어서 갈아입은 후, 사흘 후 청수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검무극은 표국에서 마차를 한 대 빌렸다.
“자, 타시죠. 우린 갈 곳이 있습니다.”
윤씨와 양인, 양선, 조춘배와 종학까지 모두 마차에 태웠다.
“마차는 제가 몰겠습니다.”
쟁자수인 종학이 나섰지만 검무극은 사양했다.
“몸의 상처를 돌보시오. 지금 잘 다스리지 않으면 평생 고생하시오.”
그를 억지로 마차에 태웠다.
조춘배와 가족들이 마차에 마주 앉았다. 이렇게 한 공간에 마주 앉으니 비로소 가족이 무사히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기적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의 목소리가 마부석에서 들려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 * *
마차는 한나절을 쉬지 않고 달렸다.
숲길로 들어선 마차는 길이 없는 곳을 만들면서 내달리다가 어딘가에 멈춰 섰다.
“내려서 잠시 걸으셔야 합니다.”
검무극은 그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가자 안개가 자욱한 곳이 나타났다.
“이제부터는 제가 밟는 곳을 밟고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여인들은 이유를 몰랐지만 보고 들은 것이 많은 조춘배와 종학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진법을 통과하려 한다는 것을.
검무극은 나이든 윤씨를 배려해서 정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안내에 따라 진법을 통과하자 겨울 폭포의 절경이 펼쳐진 그곳에 장원이 있었다.
한 중년인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조춘배는 그가 마교의 고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 내린 장원의 정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렇게 멋진 장원은 처음이에요.”
“나도, 언니.”
양인과 양선이 감탄했다.
조춘배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여긴 어딥니까?”
“이곳은 본교의 안가입니다. 일반 안가가 아니라 마존 이상만이 이용할 수 있는 특별 안가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죠.”
천마신교의 안가라는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설마 검무극이 자신들을 안가로 데려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특별 안가라니?
“흑사단이 개입되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곳에서 편히 쉬고 계십시오.”
검무극은 조춘배 가족의 안위를 절대적으로 챙겼다. 만에 하나에서 그 하나까지 없앴다.
“이렇게 귀한 곳에 어찌 저희가 있겠습니까?”
“천마신교 소교주의 친구니까요.”
“대체 저를 얼마나 감격하게 하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풍류주점에서 공짜 안주 기대하겠습니다.”
조춘배는 송구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생 공짜 안주만 만들어도 다 못 만들 은혜였다.
검무극이 이들을 데려온 이유는 안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여행가신 적이 언제죠?”
생각지 못한 질문에 조춘배는 당황했다. 언제였더라?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조춘배가 아내에게 면목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주인장이 쉬려고 주점을 닫은 적은요?”
“없습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 쉰 적은 있었지만 적어도 자신 때문에 쉰 적은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열었다. 아파도 열었고, 힘들어도 열었다. 어떤 날은 정말 쉬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도 열었다.
“소교주님? 설마?”
“네. 이곳에 여행 오셨다고 생각하시고, 또 오랜만에 휴가라 생각하시고 푹 쉬십시오.”
조춘배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이 너무 감격하니 오히려 멍해졌다.
“제겐 요 입만 놀리면 되는 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 아니니 부담가지지 마세요. 그럼 일 끝나는 대로 모시러 오겠습니다.”
떠나기 전 검무극은 중년 마인에게 몇 가지 사안을 전음으로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령했다.
“이분들을 나를 모시는 것처럼 모시게.”
중년 마인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조춘배와 가족들은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을 관리하는 중년 마인이 친절한 미소로 그들을 안내했다.
“자, 들어가시지요.”
“어이구, 네.”
조춘배와 가족들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융단이며 복도에 놓인 가구며 벽에 걸린 그림 하나하나까지. 하나같이 귀하고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평생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어디 양인뿐이겠는가? 모두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지나다 보니 열려 있는 주방에서는 숙수가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급 요리점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중년 마인은 윤씨 방과 조춘배 부부의 방, 그리고 종학 부부의 방. 방을 세 개나 따로 마련해주었다. 방은 더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우리 이래도 돼요?”
양인의 물음에 조춘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양선이 종학을 새하얗고 푹신한 이불이 깔린 침상에 눕혔다.
“이제 아무 걱정 말고 쉬어요.”
검무극이 갈 때 부탁했는지 안가의 의원이 와서 진맥한 후 약을 주고 갔다.
그 모습에 감격한 양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형부 말이 맞아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에요.”
조춘배와 양인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윤씨는 첫째 사위에게 제일 큰 방을 주게 했다.
두 사람은 침상에 앉아서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정말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갔다. 조춘배는 꿈을 꾼 건가 싶었다.
양인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
“그러게 말이오.”
저 멀리 창밖에서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노을을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여보.”
오늘따라 그 말이 더욱 마음 깊이 들어왔다. 그래,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이 쉬운 한 마디를 못 해줘서 이 값진 고생이 생지옥이 되는 법이니까.
“당신도 고생했소.”
조춘배는 안다. 아내가 아이들 키우며 온갖 힘든 일 다 해가며 얼마나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그때 밖에서 시비가 와서 말했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이 현실감 없는 현실에 두 사람은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조춘배가 먼저 일어나며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 식사하러 가십시다.”
양인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평생 처음 맞는 휴가였다.
“그럼 우리 남이 해준 밥 먹으러 한 번 가볼까요? 저, 많이 먹을 거예요.”
절대회귀 339화
제339회 반박 불가, 살인멸구도 불가.
검무극과 황룡표국의 표사들은 청수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표사 옷을 입은 검무극은 젊은 신입 표사처럼 보였다.
―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는군요.
임시 국주를 맡은 황원의 전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바로 돌아가자는 명령을 내리시오.
―더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뇨, 바로 명령을 내리시오.
황원은 검무극의 조언에 따랐다.
“돌아간다.”
그의 명령에 표사들이 수레를 돌렸다.
그렇게 청수림을 벗어나려던 그때, 한 남자가 표행 앞을 막아섰다.
죽립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그는 흑사단의 흑십삼(黑十三)이었다.
“공 표두는 어디에 있소?”
지금까지 숨어서 지켜보다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등장한 것이다.
흑십삼의 물음에 황원이 대답했다.
“공 표두는 죽었소.”
검무극이 미리 알려줬다. 접선자가 물으면 사실 그대로 죽었다고 대답하라고.
“죽었다고? 왜 죽었소?”
“마교 놈들에게 죽었소.”
혹시라도 그가 어떤 소식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을 생각해서 사실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오. 마교 놈들과 얽혀서 맞아 죽었다는 것밖에.”
흑십삼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만났던 공찬은 그리 오래 살 것 같은 유형이 아니었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졌고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는 눈빛을 가진 자였으니까.
“국주께서 책임자로 나를 대신 보냈소.”
흑십삼이 황원 뒤에 있는 표사들을 쳐다보았다. 신입으로 보이는 젊은 표사만 빼고는 다 지난번에 봤던 표사들이었다.
“표물이나 어서 주시오. 확인은 나중에 국주에게 하시고.”
황원의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 역시 검무극이 시킨 것이다.
흑십삼이 대답하지 않자 검무극은 재빨리 황원에게 전음을 보냈다.
―더 강하게 나가시오.
황원은 표정을 굳히며 검무극이 알려준 말을 꺼냈다.
“나는 솔직히 이런 비밀스러운 표행을 좋아하지 않소. 국주님 명령이니 내키지 않아도 하는 거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겠소. 저쪽에서 표물을 맡기는 것을 거절했다고.”
황원이 돌아서며 표사들에게 말했다.
“돌아간다.”
이쪽은 아쉬울 것이 없다. 이것이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다.
잠시 황원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흑십삼이 의심을 거두었다.
“잠깐. 나를 따라오시오.”
그를 따라가니 숲속 한적한 곳에 짐을 실은 수레와 십여 명의 흑사단 무인이 있었다. 그들은 얼굴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마에 새긴 시커먼 뱀 대가리 문신은 정말 위협적으로 보였다.
상자를 보자마자 검무극은 기를 발출해서 그 속에 생명의 기운이 있는지를 살폈다. 혹시 함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숨결이 느껴졌다. 정말 미세하게 느껴지는 숨결, 아이들이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원이 명령을 내렸다.
“어서 옮겨라.”
표사들이 상자를 자신의 수레에 옮기기 시작했다.
황원이 흑십삼에게 물었다.
“어디로 옮기면 되오?”
“목적지는 이미 말해줬는데?”
이렇게 나왔을 때 검무극이 알려준 말은 이것이었다.
“그 비밀 많던 공 표두가 그걸 말하고 뒈졌겠소?”
이렇게 강하게 나가도 되냐는 황원의 물음에 검무극은 이런 방식이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보게 하는 속임수라고 했다.
과연 흑사단 놈들은 황원의 태도에 집중했다. 흑사단 칼잡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경고했다.
“너! 말 조심해.”
흑십삼은 수하를 제지한 후, 황원에게 말했다.
“표물은 모레 자정까지 유검문(流劍門)으로. 단 일각이라도 늦으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거다.”
목적지가 밝혀지던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날아온 비수가 조금 전 경고를 했던 칼잡이의 목에 박혔다.
그가 꼬꾸라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무인들이 기습했다.
“기습이다! 막아라!”
하지만 기습해온 무인들 실력은 흑사단 칼잡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에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줄줄이 쓰러졌다.
검무극은 표사들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도록 원을 그린 채 뭉쳐 있게 했다.
흑십삼이 뒤쪽 숲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죽립이 벗겨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이마에도 시커먼 뱀 대가리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보니 수하들의 이마에 그려진 뱀과 모양이 달랐다. 직위에 따라 뱀의 생김새가 다른 모양이다.
숲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놀랍게도 흑십삼을 제압한 사람은 바로 멸마대주 진하군이었다.
그는 여유롭게 걸어와서는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흑십삼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다.
그사이 다른 흑사단 칼잡이들도 모두 죽거나 제압당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정리된 것이다.
멸마대 무인들이 표사들을 포위한 채 검을 겨눴다.
그들 중 한 무인이 달려가 상자를 열었다. 위장용 비단을 들어내자 그 안에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있습니다.”
“무사한가?”
“네, 귀식대법으로 잠든 상태입니다.”
진하군은 기뻐하며 직접 또 다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도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멸마대 무인이 다가와서 진하군에게 보고했다.
“저자들은 황룡표국의 표사들입니다.”
그러자 진하군이 버럭 소리쳤다.
“정파의 표사들이 흑사단과 거래를 했다고?”
멸마대는 이곳에 접선하러 온 사람들이 황룡표국인 줄은 모르고 아이들만 추적해온 것이다.
“무기를 내려놓고 모두 꿇어라.”
황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흑사단이 아이를 옮기는 자리에 마교 소교주와 함께 있다? 과연 멸마대 무인들이 자신들의 말을 믿어줄까?
결국 밝혀지기는 할 것이다. 황룡표국에서 있었던 일을 지켜본 눈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싸움이라도 나게 되면, 제대로 진실을 밝히지도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짧은 순간에 황원을 그런 걱정을 했다.
“꿇지 않는 자는 죽여라!”
명령이 떨어지자 황원은 표사들에게 일단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진하군은 아이를 안아주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멸마대 무인이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하군이 아이를 안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무릎을 꿇은 상태였는데 한 젊은 표사만이 서 있었다. 그가 진하군에게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소?”
상대가 검무극임을 확인한 진하군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당신!”
꿈에 나오는 사람이다. 꿈속에서도 항상 자신보다 앞서가는 모습을 보이는 얄미운 사람이다. 그가 표사 옷을 입고 웃고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요?”
“대법 재료로 쓸 아이들을 구하려고 왔소.”
그 말에 무릎을 꿇고 있던 황원은 기겁했다.
정말 믿으면 어쩌려고? 헉! 설마 진짜 그런 것이었나? 자신을 속이고 이리 데려온 건가? 맞다, 마교 소교주가 아이들을 구하러 올 리가 없잖아?
검무극의 너스레에 익숙하지 않은 그였기에 순간 이런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진하군은 검무극의 농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또 보자마자 장난이시오?”
“이야기하자면 긴 이야기요. 결론만 말하자면 아이들 구하러 왔소.”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린 안 왔어도 됐겠군.”
농담처럼 한 말이었지만 검무극에 대한 극찬이었다.
“다들 일어나시오.”
진하군의 말에 무릎을 꿇고 있는 표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놀랐다. 마교 소교주가 비범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멸마대주와 이런 사이인 줄은 몰랐다.
“흑사단 놈들이 아이를 납치해서 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에 착수했소. 드디어 증거를 찾아낸 거요.”
“놈들이 아이들을 판 것은 알아냈지만, 사는 쪽은 어떻게 할 거요?”
“물론 그들도 그냥 두지 않을 거요.”
진하군은 당장이라도 유검문으로 쳐들어가 아이들을 사들인 벌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검문은 사파에 속한 문파였다.
그렇기에 명확한 증거 없이 무작정 치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까닥 잘못해서 사도맹과의 분쟁으로 커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은밀히 유검문을 조사하겠소. 만약 그래서 그들이 납치한 아이를 사들인 증거를 찾으면, 본대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단호한 결의에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멸마대주답소.”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진하군에게서 예전과 다른 기상이 느껴졌다.
“한데 대주의 계획에 문제가 있소. 이번에 약속한 아이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채고 모든 증거를 없앨 것이오. 만만한 수하에게 덮어씌우고 꼬리를 자를 수도 있고.”
진하군도 그 말에 동의하며 검무극의 의견을 물었다.
“그럼 어찌해야겠소?”
“우리 표행을 계속합시다.”
진하군은 물론이고 멸마대 무인들과 표사들도 놀란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아이들은 귀식대법으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억지로 깨울 수 없소. 시간이 되어야만 깨어날 거요.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유검문주가 이번 일에 개입되었다는 증거를 찾읍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사고라도 생기면?”
“당신과 내가 가는데도 사고가 생기면, 그건 천재지변 아니겠소?”
진하군은 고민했다. 만약 이 제안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목숨을 두고 모험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함께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번 일을 제대로 뿌리 뽑지 않으면 아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납치될 테니까.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표사들에게 소리쳤다.
“표행을 계속합시다.”
* * *
황원은 뒤를 돌아보았다.
검무극과 진하군이 나란히 수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표사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수 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마의 아들과 무림맹주의 손자가 나란히 앉아 있는 거다.
평생 다시 없을 광경이었다.
황원과 표사들은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맹주께서는 잘 계시오?”
“여전히 강건하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진하군이 말했다.
“가끔 당신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오.”
“뭐라고요?”
“마인 중에 한 사람을 죽여야 하면 꼭 소교주를 죽여라.”
검무극이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반대겠지요. 마인 중에 한 사람을 살려야 하면 꼭 소교주를 살려라.”
“좋도록 생각하시오.”
황원과 표사들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검무극이 우소추에게 했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무림맹주와도 잘 아는 사이임이 틀림없다.
“진 소저는요?”
“여전히 천방지축이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진하령도 예전과 달라졌다. 철부지 진하령이 아니라 정파 후기지수의 구심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데 당신은 왜 혼자 나와 있소?”
“급하게 나오느라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못하고 나왔소.”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니, 정말 혼자 나와 있는 것이리라.
“내놓은 자식이라 교에서도 안 찾는 모양이군.”
“그런가 보오. 그러니 당신이라도 따뜻하게 대해주시오.”
진하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날 이후 사람을 똑바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소.”
검무극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진하군은 느낀다. 검무극이란 사람의 본질은 이렇게 말이 없을 때 볼 수 있다는 것을. 저 맑고 깊은 눈으로 지금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라는 것을. 그의 수다에 속으면 안 된다.
그렇게 수레는 계속 달리고 달려서 유검문에 도착했다.
* * *
늦은 밤 수레는 유검문 뒷문으로 들어갔다.
유검문의 만홍(滿洪)이 표물을 받았다.
“조심히 옮기시오. 쌓지 말고, 따로 놓으시오.”
황룡표국의 표사들이 싣고 온 상자를 창고에 옮겼다.
상자를 다 옮기자 만홍은 표사들에게 은자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표사들이 떠나자 만홍은 상자를 열어 아이들을 확인했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그는 바로 유검문주 태조(泰早)였다. 그는 유검술(流劍術)로 무림에 일가를 이뤄낸 사파의 절대 고수였다.
“정파 놈들을 꼭 써야 한다더냐?”
“어쩔 수 없답니다. 멸마대에서 흑사단과 관련되었다면 같이 술 한잔 마신 이들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재수 없는 것들! 이번에 들어온 아이는 모두 몇 명이냐?”
“열다섯 명입니다.”
“언제 깨지?”
“세 시진 후면 일어날 겁니다.”
“애들 깨면 부르게.”
태조가 창고를 나가려던 그때였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꽝.
창고 문이 부서지며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왔다. 앞장선 사람은 바로 진하군이었다.
태조 앞으로 걸어온 진하군이 차분히 자신을 소개했다.
“멸마대주 진하군이오.”
“처음 뵙겠소, 그 유명한 멸마대주를 뵙게 되니 영광이외다.”
상대가 왜 왔는지 짐작했음에도 태조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무리 유명한 분이시더라도 이렇게 남의 문파에 함부로 침입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소.”
“그 점은 죄송하오. 일이 다급해서 어쩔 수 없었소.”
“무슨 일이시오?”
“최근 흑사단 놈들이 아이들을 납치해서 팔고 있었소. 본대에서는 그 악행을 감시하고 추적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실린 상자가 이곳 유검문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소.”
진하군의 시선이 상자를 향했다.
“저 상자들인 것 같은데. 확인해 봐도 되겠소?”
“안 된다면 안 하실 거요?”
“그랬다면 여길 들어오지도 않았겠지요.”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멸마대 무인 둘이 상자를 열었다. 무인들이 안에 아이가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증거가 나왔음에도 태조는 딱 잡아뗐다.
“수하와 이야기할 것이 있어 찾아왔던 거요.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을 관리하는 자를 불러서 알아보겠습니다.”
검무극의 말처럼 수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
“그건 거짓말이지 않소?”
태조가 놀라 돌아보니 상자 뒤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 숨어 있던 검무극이었다.
“잡아떼봤자 소용없소. 내가 다 들었으니까.”
물론 순순히 받아들일 태조가 아니었다. 그가 차분히 진하군에게 따졌다.
“저 젊은 무인이 뭘 들었다는 건지 몰라도, 그대가 심어둔 수하 말을 누가 믿겠소?”
“내 수하가 아니오.”
“그걸 믿으라는 거요?”
“나도 저 사람이 내 수하였으면 좋겠지만 세상 그 누구도 수하로 삼을 수 없는 사람이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태조는 의아한 마음으로 진하군과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신 수하든 수하가 아니든 마찬가지요. 복장을 보니 표사인 모양인데 창고에 숨어든 좀도둑에 불과하오. 저런 자를 증인으로 인정할 수 없소.”
두 사람은 모두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 싸움의 승자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진하군이 차분하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당신은 반박할 수도 없고, 우기기도 쉽지 않으며, 살인멸구도 불가능한, 심지어 당신 빼곤 다 저 사람 말을 믿게 될…….”
진하군은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입이 근질근질한 검무극은 내가 말할 차례는 언제지?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할 증인을 만나버렸소.”
절대회귀 340화
제340회 자백하면 무림맹으로, 버티면 마교로.
태조는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살폈다.
저 젊은 놈이 대체 뭐라고?
살인멸구가 불가능하다고? 우스운 소리다.
자신이 마음먹으면 못 죽일 사람이 없다. 실제로도 그런 삶을 살았다.
이길 수 있는 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조롱하며 죽였고, 죽일 수 없는 자는 등을 찔러서라도 죽였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살수 조직에 청부를 넣기도 했고, 죽일 상대의 지인을 포섭해 독을 타기도 했다.
그런 인생을 살아온 자신에게 뭐? 살인멸구가 불가해?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허풍이다. 어떻게든 내 자백을 끌어내려는.’
태조가 여유로운 미소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멸마대주가 소협을 이렇게나 높이 평가하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이겠군. 그대는 대체 누군가?”
검무극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나는 천마신교 소교주요.”
잠시 멍하게 있던 태조가 웃음을 터뜨렸다. 살면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황당하고도 난데없는 대답이었다.
“그래, 그 정도 신분은 되어야 멸마대주가 했던 말이 맞는 말이겠지.”
인정하는 듯 말했지만 전혀 믿지 않았다.
“하면 하나만 물어보세. 마교의 소교주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를 멸하겠다고 만든 무림맹의 멸마대와 뭘 하고 있나?”
검무극이 상자를 열어서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쓰레기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소.”
순간 태조의 표정이 꿈틀했다.
검무극은 불편하게 누워있는 아이를 편하게 눕혀주며 말을 이었다.
“무림인들에게 누가 제일 악하냐 물으면 대부분 우리라고 대답하지. 참 억울한 말이오. 나와보면 이게 사람인가 싶은 징글징글한 놈들이 정말 많거든. 이번 일도 그렇소. 남의 집 애를 납치해서 돈 받고 팔아먹고, 그 애를 사서 뭘 하려는 건지. 이건 우리도 안 하는 쓰레기 짓인데.”
검무극의 시선이 아이에게서 태조를 향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앞서 쓰레기라고 해놓고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태조를 쓰레기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마음 같아선 당장 달려가서 놈을 난도질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가 든 상자가 자신의 창고에서 발견된 이상 어떻게든 이 순간을 모면해야 했다.
그가 재빨리 만홍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가 좀 고생해야겠다. 최대한 빨리 빼내 주마.
―네, 문주님.
만홍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 멸마대주가 직접 치고 들어온 사건인데, 이렇게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주의 명을 거역할 순 없었다. 선택지는 죽음이냐, 끌려가느냐 밖에 없었으니까.
만홍이 나섰다.
“사실 제가 저지른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태조가 깜짝 놀라는 척 그를 꾸짖었다.
“그게 사실이냐?”
“납치한 아이인 줄은 몰랐습니다. 전 아이들이 필요하다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이런 멍청한! 잘 알아보고 일을 진행했어야지.”
“죄송합니다.”
태조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수하도 납치된 아이들인 줄은 몰랐다고 하는군요. 미리 살피지 못한 내 불찰이기도 하오.”
그는 일을 진행하다 벌어진 사소한 실수처럼 몰아갔다.
수하는 납치된 아이들인지 몰랐다고 우기고, 자신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우기고. 자, 이렇다는데 네가 어쩔 거냐?
그들에겐 안타깝게도 상대하는 사람이 진하군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검무극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한 거죠. 증인 여기 있습니다. 내가 다 들었소. 아이가 깨면 부르라고 했던 말까지 다 들었소.”
태조는 검무극을 매섭게 노려보았지만 정말 미친놈처럼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래, 이런 놈이니까 증인 역할을 맡긴 거겠지.
“증인이 있으니 일단 함께 가 주셔야겠소.”
“난 가지 않겠소.”
진하군과 태조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태조는 끌려가는 순간 문제가 골치 아파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야 할 거요.”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죄를 지었다면 협박일 테고, 죄가 없다면 협조가 되겠지요.”
태조는 느낄 수 있었다. 좋게 말해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아이들을 구하겠다는 진 대주의 협의를 높이 사서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고집을 부리시니 도저히 안 되겠소. 지금 진 대주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소?”
“말씀해 보시오.”
“무림맹이 사파를 공격한 거요. 정사대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일이오.”
일부러 정사대전이라는 자극적인 말을 언급했다.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때였다.
태조는 진하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진 대주는 정식 후계자가 되지 않았는데, 사도맹과 이런 큰 분쟁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소? 본인을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하지 않겠소?”
그때 검무극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당신은 괜찮소? 무림맹과 분쟁을 일으키면?”
결국 태조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넌 좀 닥쳐라!”
검무극이 깐족대는 것을 참지 못하고 평정심이 깨진 것이다. 뭘 좀 하려 하면 옆에서 맥을 탁탁 끊고 있었다.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에 진하군은 내심 웃었다. 그래, 화나지. 내가 잘 알지.
도저히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태조가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들어와라.”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검문 무인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멸마대는 전혀 겁을 먹지 않고 검을 겨눈 채 그들과 대치했다. 몰려온 유검문 무인들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았다. 게다가 그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검문이 이렇게나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있다고?’
태조가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였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끌려가진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멸마대라면 우리가 벌벌 떨 줄 아시오?”
이들만이 아니었다. 태조가 결정적으로 믿는 두 사람이 마지막에 들어섰다. 특색있는 복장의 두 노인이었다.
진하군이 한눈에 그들을 알아보았다.
“청백이검(靑白二劍)!”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청색 무복과 백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신발과 검집 역시 한 사람은 청색, 다른 한 사람은 백색이었다.
그들은 사파에서 악명 높은 고수들이었다. 멸마대가 젊은 신진 고수들이라면 이들은 닳고 닳은 노강호.
청백이검의 기세는 멸마대 무인들을 압도했다. 그들과 유검문 고수들이 합세하면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당신들이 유검문에 있을 줄은 몰랐소.”
진하군의 말을 태조가 질책으로 받았다.
“당신들? 두 선배님은 진 대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무림을 종횡하던 분이셨소. 예를 갖추시오.”
그는 진하군에게 무림의 선배 대접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진하군의 반응은 냉담했다. 악명 높은 그들을 존중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두 노인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대화를 나눴다.
“무림맹주가 우리보다 몇 살 어렸지?”
“서너 살 어렸던 것 같네.”
“그 사람 젊어서부터 보통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무림맹주가 될 줄 어찌 알았겠나?”
실제로는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할아버지를 이런 식으로 언급하자 진하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대들이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시오.”
그러자 백검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맞네.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지. 자네 할아버지를 모욕하려는 뜻은 없었네. 그렇듯이 우리 역시 모욕받고 싶지 않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해서 알려줄 테니, 그만 물러가시게.”
“무림맹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자네가 사파의 정통을 잇는 유검문에 와서 이 무슨 실례인가?”
“자네가 이러면 맹주께서도 곤란해지실 거네.”
“이보게, 우린 더는 삶에 미련이 없는 사람들이라네. 자네와 우리가 싸우면 누가 잃을 것이 더 많겠나?”
두 노인이 번갈아 가며 정신없이 진하군을 공략했다.
한마디 한마디 거슬리는 말이 많았지만, 사파인들에게 인정받는 노고수들이었기에 진하군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물론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야 당신들이 잃을 게 더 많겠지.”
끼어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사파의 늙은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진하군은 아직 너무 젊다.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이 욕망이 그득그득한 창고에까지 출몰하셨겠소? 고상하게 금분세수(金盆洗手)나 하시고 병풍 속 옛날이야기처럼 살지, 뭔 욕심이 그리 많아서 병풍을 찢고 나온 거요?”
두 사람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지만 검무극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평생 모아둔 것들이 어딘가 가득 쌓여 있겠지. 아마 서로 믿지 못해 어디에 얼마나 숨겨뒀는지도 말 안 했을 거요? 맞소?”
두 사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청검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내며 물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은 누군가?”
그러자 태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교 소교주라고 하더군요.”
청백이검이 놀란 표정을 짓자 태조가 재빨리 말했다.
“미친 헛소립니다.”
그제야 청백이검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놈이라면 자신들을 이렇게 조롱할 수 있겠는가?
“저놈은 멸마대주가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증인으로 고용한 자입니다.”
태조가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저놈만 없애주십시오.
눈엣가시였던 자인데 고맙게도 이렇게 무례를 범해준 것이다. 이제 놈을 죽일 명분은 충분했다.
청백이검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멸마대 무인들이 일제히 그 앞을 막아섰다.
백검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진 대주도 들었다시피 저놈이 우리에게 무례를 범했네. 정사마를 떠나 무인으로서 지켜야 할 무림의 법도가 있는 법, 자네가 봐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길을 열어주시오. 아까 자신들이 말한 대로 정말 삶에 미련이 없는지 한번 확인해 봅시다.”
멸마대가 진하군을 쳐다보자 그는 검무극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여유가 넘치는 검무극이었다. 그래, 처음 보면 영락없는 미친놈이지. 한데 그를 알고 나면 알 수 있다. 저 여유가 얼마나 철저히 계산된 것인지.
“길을 열어줘라.”
진하군의 명령에 멸마대가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만들었다.
청백이검이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들은 멸마대가 좌우로 있는 길을 걸으면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걷던 그들이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청검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손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백검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
청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갑자기 손이 떨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청검이 놀랐다. 백검의 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네는 왜?”
백검은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청검도 마찬가지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무림에 출도하고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독인가?
―독은 아니네.
―그럼 뭐지?
전음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상자 속 아이를 쳐다보다가 슥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검무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청백이검은 알 수 있었다.
‘저자 때문이다.’
평소 검무극이 발휘하는 심연의 기도가 아니었다.
지금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발출한 기운은 살기(殺氣)였다. 너희를 죽이겠다는 명백한 의지는 지금 멸마대에 의해 열린 이 길이 지옥으로 향하는 길임을 알렸다.
“뭐 하나? 오지 않고.”
청백이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지켜보던 태조는 의아했다. 그 살기는 오직 청백이검에게만 향했기에, 태조는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춘 이유를 알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태조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네 귀한 선배님들, 떨고 계신다.”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문제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진노한 청백이검의 일갈이 나와야 할 순간인데,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검무극이 두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 기세에 눌려 청백이검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더는 삶에 미련이 없다면서?”
검무극의 눈빛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청백이검은 감히 그 눈빛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그사이 실력이 또 늘었구나!’
검무극은 사파의 노고수인 청백이검을 아예 압도하고 있었다.
마지막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 걸음 쫓아가면 열 걸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대협은 누구시오?”
백검의 입에서 소협도 아니고, 대협이란 말이 나왔다.
“아까 저 사람이 말해줬잖아?”
소스라치게 놀란 백검이 재빨리 태조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사람, 정말 마교 소교주냐?”
태조가 놀라 대답했다.
“아닙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순간 태조가 흠칫 놀라며 이번에는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정말 마교 소교주?”
“아까 말했잖아? 천마신교 소교주라고.”
절로 태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교 소교주가 왜 여기 있지?”
“그것도 말했는데? 쓰레기 소탕 중이라고.”
청백이검이 태조를 질책했다.
“우릴 마교 소교주에게 들이 밀은 건가?”
“저도 몰랐습니다.”
청백이검이 서로를 쳐다보고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뒤로 물러났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 소교주께서 이해해 주시오.”
상대의 실력이 자신들을 압도하는 건 둘째치고, 마교 소교주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곱게 죽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존심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태조는 이제야 진하군이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반박할 수도 없고, 우길 수도 없으며, 살인멸구도 불가능하다는 그 말을 뜻을.
“내가 직접 들었다. 내가 증인이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검무극의 선언을 들으며 또한 알 수 있었다. 자신 빼고 모두가 저 말을 믿을 거라는 말의 뜻도.
마교 소교주가 들었다는데 감히 누가 반박할 것인가? 자신을 위해 나서준 청백이검조차 꼬리를 내리고 물러난 상황에서.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순순히 자백하면 무림맹으로 끌려가고, 끝까지 버티면 본교로 끌려갈 거다. 선택은 네가 해라.”
태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림맹이 아니라 천마신교로 끌려간다고? 무림맹과는 대화라도 통하지, 마교로 끌려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소교주만 봐도 알 수 있다. 멸마대주와 어울리며 쓰레기 소탕을 외치는 저놈은 미친놈이다. 미친놈들의 소굴로 끌려갈 수는 없다.
“천마신교와 무림맹 소속인 분들인데, 저는 일개 문파에 불과합니다.”
“일개 문파라고 하기에는 아까 우릴 너무 겁주던데?”
“겁먹은 개가 크게 짖기 마련이지요.”
이런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그는 절박했다. 그리고 살길은 오직 이 방법뿐이었다.
“사도맹의 중재하에 이번 일을 처리해주기를 요구합니다.”
사도맹은 결코 자신과 유검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공헌한 바가 있었으니까. 반드시 자신을 구해주리라 믿었다.
“그게 공평한 일 처리라 생각합니다. 이대로라면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강호에는 우리가 누명을 쓴 걸로 소문날 겁니다.”
“사도맹에서도 네 죄를 인정하면?”
“그땐 저도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가만히 태조를 응시하던 검무극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불러라. 셋이 다 모여서 누가 진짜 악당인지 가려 보자고.”
절대회귀 341화
제341회 저를 믿습니까? 소교주를 믿습니까?
멸마대 무인들이 상자에서 아이들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밖에 대기 중인 마차로 옮겼다.
검무극과 진하군은 나란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오?”
“무슨 뜻이오?”
“왜 사도맹까지 불렀냐는 말이오?”
앞서 청백이검까지 물러나게 한 기세로는 그냥 태조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한데 검무극은 굳이 사도맹을 부른 것이다.
“저렇게 억울하다니까, 공평하게 일 처리를 하려는 거요.”
“당신이 잘도 악인의 마음을 헤아려주겠소.”
진하군은 느끼고 있었다. 검무극이 사도맹을 부른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설마 비사인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짐작될 뿐 검무극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흑사단 놈들은 어떻게 할 작정이오?”
아이들을 납치한 자들은 흑사단이었다. 그 일로 큰돈을 벌었을 테니, 유검문이 아니더라도 계속 납치를 자행할 것이다.
“이번에 유검문주를 통해 증거가 확보되면 확실히 처단할 거요.”
진하군은 단호히 의지를 밝혔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흑사단은 중원 곳곳에 뿌리를 내린 방대한 조직이었다. 온갖 이권에 개입하며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으로 많은 고수를 영입했고, 또 사도맹에도 큰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쉽지 않을 거요.”
“그렇다고 아이들을 납치하는 자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소?”
진하군의 기개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미소임을 느꼈기에 진하군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적에게 인정받을 때의 희열이 있다. 심지어 그 적이 검무극이라면?
“멸마대 이름부터 바꿉시다. 멸사대(滅邪隊)나 멸악대(滅惡隊) 어떻소? 요즘처럼 얌전한 우릴 멸할 필요 있겠소?”
검무극의 너스레에 진하군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내심 그 말에 공감했다. 검무극이 이끄는 마교라면 멸마라는 말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요즘에나 얌전하지, 당신들이 언제 또 난리 칠지 어떻게 알겠소?”
“모르시오? 내가 얼마나 평화를 좋아하는지.”
“모르오. 당신이 가는 곳마다 피가 흘러넘친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내가 가는 곳마다 악인들이 북적대서 그렇고.”
대화를 하면서도 진하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멸마대의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확실히 지금의 마교는 예전과는 달라졌다.
멸마대 무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사이 서너 명의 멸마대만 진하군 옆에 있었다.
반면 유검문 고수들은 여전히 숫자가 많았다. 그들과 멸마대 무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숫자의 열세에도 멸마대 무인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만큼 훈련이 잘돼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태조가 두 사람에게 걸어왔다.
“사도맹에 긴급 전서를 보냈으니, 최대한 빨리 사도맹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아까 사정할 때와는 달리 여유가 느껴지는 태조였다.
진하군이 그에게 말했다.
“그때까지 우리 문주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할 것 같소.”
“달아나라고 등 떠밀어도 가지 않을 거요.”
제발 사도맹을 불러달라고 애원할 때와는 달라진 태도였다.
“사도맹에서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할 테니 그동안 제가 편하게 모시겠소. 같이 들어가셔서 술부터 한잔하시지요.”
그는 사도맹에서 사람이 오면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 확신했다. 이쪽 상황을 밝혔으니, 적어도 단주급 이상이 올 것이다.
사도맹은 절대 자신이 이들에게 끌려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답답하니까 일단 여기서 나갑시다.”
검무극이 창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깥쪽 입구에 모여 있던 유검문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그들 중에는 청백이검도 있었다. 마교 소교주인 줄도 모르고 자신들을 나서게 했다고 태조를 질책했던 그들이었다. 화가 나서 어딘가로 가버렸을 것 같았는데, 그들은 태조 주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돈이든, 혹은 다른 이유든 검무극은 그들이 유검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했다.
청백이검은 검무극이 기세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혹시 어떤 수법에 당한 걸까? 아니면 잠시 착각했던 걸까?
걸어 나가면서 검무극이 그들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청백이검의 온갖 의심이 쏙 들어갔다. 위기 본능이 그들을 혼냈다. 너희 같은 고수들이라면 한 번 느꼈으면 족하지 않으냐고!
그 뒤를 따라 진하군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아이들을 실은 마차가 일부 멸마대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곳을 떠나갔다.
태조가 검무극에게 넌지시 물었다.
“소교주께서는 왜 마인들을 부르지 않으십니까?”
“그야 우리 태 문주 때문이지요.”
“저 때문이라고요?”
“한 사람이라도 적어야, 우리 문주의 선택지가 많아지지 않겠소?”
“선택지라니요?”
“우릴 죽이는 선택지 말이오.”
“제가 아무리 간담이 크다 하더라도,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태조는 내심 놀랐다. 마인들이 왜 오지 않느냐는 물음에 검무극이 말한 의도가 아주 조금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의 경우도 대비해야 하니까.
“지금이 딱 기회인 것 같소만. 아이들 호송한다고 멸마대 무인들도 다수 자리를 비웠고. 어떻소? 우릴 다 죽이고, 마교 소교주와 멸마대주가 서로 싸우다 양패구상했다고 우기면 되지 않겠소? 당신 뻔뻔하게 억지 쓰는 것 소질 있던데.”
청백이검이 검무극의 기세에 눌리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마지막 선택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 날도 추우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진하군이 말했다.
“우린 여기 있겠소.”
“날이 춥습니다, 들어가시죠.”
“괜찮소.”
멸마대는 유검문 연무장에 천막을 치고 숙소를 마련했다.
사파인들에게 접대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적 내부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사방이 뻥 뚫린 곳에 있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소교주께서는 들어가시죠.”
“나도 함께 있겠소.”
진하군은 수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소교주가 쉴 곳도 준비해라.”
멸마대 무인들이 연무장에 모닥불을 피웠다.
자신이 명령을 내렸지만 진하군은 이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사파 문파의 연무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한다? 정말 검무극을 만나 별의별 경험을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이란 사람을 알면 알수록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 것이다. 예전이라면 신경이 곤두서서 잠 한숨 못 잘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이 편한 것은.
그리고 진하군은 이번 야영으로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검무극은 잠시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평소 하는 걸 보면 어슬렁거리며 유검문 무인들을 놀리거나, 자신에게 와서 술 마시자고 조를 것 같았는데, 검무극은 천막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운기조식하며 수련에 빠져들었다.
그의 여유와 자신감은 이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이 사람, 정말이지 쉽지 않다.
* * * 드디어 사도맹에서 사람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태조에게 전해졌다.
“누가 왔나?”
그러자 수족인 만홍이 놀란 얼굴로 보고했다.
“소맹주가 왔습니다.”
“뭐?”
태조는 깜짝 놀랐다. 높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소맹주가 직접 올 줄은 몰랐다.
“왜 소맹주가 온 거지?”
“여기 후계자들이 와 있다는 것을 듣고는 직접 나선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왜?”
세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원래 단주급 인사가 오면 그에게 뇌물 공세를 펼쳐서라도 이 위기를 벗어나려 했었는데.
‘그가 나를 버리려는 건가?’
태조의 마음에 피어오르는 알 수 없는 의구심.
“일단 나가시지요.”
태조가 만홍과 함께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유검문으로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앞장선 사람은 사도맹 후계자 비사인이었고, 그를 따라온 이들은 사도십삼랑이었다.
베이고 뭉개지고 일그러진 비사인의 얼굴 흉터는 감히 마주보기 힘들 정도로 무서웠다. 분위기 역시 어둡고 차가웠다. 변함없는 그의 모습, 다만 검무극과 마지막 만났을 때와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때보다 한결 성숙한 눈빛이었다.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유검문 무인들이 일제히 부복해 엎드리며 예를 갖췄다. 청백이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파 무인들에게 사도맹의 후계자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태조가 함께 부복해 엎드리며 그를 맞았다.
“뵙게 되어서 실로 영광입니다, 소맹주님.”
“만나 뵈어서 반갑소. 일어들 나시오.”
태조와 유검문 무인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후계자가 되셨을 때 사도맹에서 뵈었습니다.”
“기억하오.”
“귀하신 분이 이렇게 직접 와주셔서 너무 영광입니다.”
태조는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숙였다. 생각지 못한 사람이 왔지만, 어쨌든 자신의 생사는 이 비사인에게 달렸다.
비사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이곳에 검무극이 와 있다는 걸 알고 왔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직접 오지 않았겠지. 알고 왔는데도 검무극을 보는 순간, 마음이 격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추운데 여기 와서 불 좀 쬐시오.”
검무극이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이들의 관계를 알 리 없는 태조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도맹 소맹주님이시오. 예를 갖추시오!”
검무극이 비사인을 보며 말했다.
“그쪽 소맹주만 귀한 게 아니라 우리도 귀한 사람들인데.”
장난치고 싶어서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비사인은 또다시 검무극을 만났구나 싶었다.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서 과하게 예를 갖췄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소맹주님!”
허리까지 깊숙이 숙이는 장난에 태조는 큰 착각을 했다.
‘됐다! 겁을 먹었다! 소맹주의 저 더러운 인상이 먹혔다.’
두 사람이 이런 전음을 주고받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면서 말이다.
―골고루 먹고 있소? 편식 안 하고.
첫 전음이 편식 걱정이라고? 정말이지 꼭 한 번은 절벽에서 밀어버릴 거다.
―당신의 지긋지긋한 잔소리가 그대로인 걸 보니, 가짜 소교주는 아니겠군.
―당신은 전보다 멋있어졌소.
―또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 사전포석을 까는 거요?
―당신도 그렇고, 진 대주도 그렇고. 이제 날 너무 잘 알고 있소!
그때 천막 안에서 진하군이 걸어 나왔다. 물론 비사인은 진하군도 와 있는 줄 알았다. 한데 이렇게 천막을 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비사인과 진하군이 말없이 포권으로 예를 갖췄다. 검무극에게처럼 편히 대할 사이는 아니었다. 물론 눈빛으로 이런 대화는 나눴다.
―또 이 사람에게 말려들어서 이러고 있소?
―당신도 알지 않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맞소. 그랬다면 나도 여기 없겠지.
그렇게 눈인사를 마친 후 비사인이 모닥불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주께서도 이리 오시오.”
“네.”
태조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굳이 왜 모닥불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다들 둘러앉았다. 비사인 뒤로 사도십삼랑이 늘어섰고, 진하군 뒤로는 멸마대가 늘어섰다. 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수장들의 관계를 떠나, 숙적과도 같은 관계였으니까.
“어떻게 된 일이오?”
비사인의 물음에 태조가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설명이었다.
“제 수하가 무재가 있는 아이들을 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습니다. 흑사단 놈들이 납치한 아이들을 넘긴 것을 확인하지 못했지요. 저는 모르는 일이었고요. 한데 그 죄를 뒤집어씌워서 저를 끌고 가려 하고 있습니다.”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거짓말이오. 내가 직접 유검문주가 수하와 대화하는 걸 들었소. 저 사람은 아이들을 납치한 것을 알고 있었소.”
태조는 딱 잡아뗐다.
“거짓말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본문을 제거하기 위한 정파와 마교의 음모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정사파의 갈등으로 확대하려고 애썼다.
“소맹주님, 저를 믿습니까? 마교 소교주를 믿습니까?”
“당연히 우리 문주님을 믿지요.”
하지만 비사인의 시선은 검무극을 향했다. 그는 검무극을 믿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요?
검무극이 자신을 불렀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러자 대답 대신 검무극이 지금껏 하지 않았던 질문을 태조에게 던졌다.
“무공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왜 구한 거요?”
“어릴 때부터 본문의 정예로 키우려고 그랬습니다.”
“그럼 앞서 사 왔던 애들 좀 봅시다.”
그 순간 태조는 움찔했다.
“아이를 사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 아니잖소?”
“처음입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문주께서 수하와 대화 나누는 걸 들었으니까.”
그들의 대화는 처음 아이를 사 왔을 때의 대화가 아니었다. 자주 있던 일이 틀림없었다.
“앞서 사 왔던 아이들, 지금 어디에 있소?”
“처음이라지 않소?”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흑사단주와 대질하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흑사단주를 부르겠다는 말이 나오자 태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사인과 진하군도 놀랐다.
“흑사단주가 이 자리에 오겠소?”
질문을 한 진하군도 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가 부르면 절대 안 오겠지요. 한데 그를 불러들일 수 있는 사람이 방금 왔잖소?”
모두의 시선이 비사인을 향했다.
“사도맹 소맹주가 오라는데 과연 무시할 수 있겠소?”
진하군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검무극이 비사인을 이곳에 불러들였는지. 흑사단주를 직접 부르게 하려는 것이다.
직접 불러서 아이들을 납치하는 일을 못 하게 하려는 것이다. 유검문뿐만 아니라 흑사단 일까지 한꺼번에 처리하려는 거다.
한 사람만 설득하면 파는 자와 사는 자를 모두 멈추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정말이지 이 사람은.’
자신의 머릿속에는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비사인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당신, 그 일이 내가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알고 있소?
―당신의 사람들이 아이를 납치해서 사고파는 것이 더 곤란한 일 아니오?
검무극의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이제 그 어떤 장난기도 없었다.
비사인은 기억했다. 지금 저 눈빛은 예전에 이 질문을 할 때의 그 눈빛이라는 것을.
당신의 사도는 무엇이오?
이제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네 사도는 아이를 납치해서 사고파는 것을 허용하는 사도이냐고.
흑사단주까지 소환할 분위기가 되자, 태조는 다급해졌다. 흑사단주까지 와서 지금껏 여러 차례 아이들을 팔았다는 것을 밝히면 자신의 죄는 확정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태조의 다급한 전음이 비사인에게 날아들었다.
―절대 안 됩니다.
이유를 묻는 비사인의 시선에 생각지도 못한 전음이 더해졌다.
―그 아이들, 사도맹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절대회귀 342화
제342회 멋있다는 말을 저리도 길게.
놀람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때다.
지금 비사인의 놀람이 그랬다.
―무슨 소리요?
두 눈을 부릅뜬 그의 전음이 떨리고 있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흑사단에서 산 아이들을 사도맹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개인에 불과합니다.
태조는 정말 이 비밀까지는 밝히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흑사단주까지 부르려는 분위기에서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죗값을 치르러 무림맹이나 마교에 끌려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저는 시키는 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누가 시킨 일이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사인이 아는 한 사도맹 내에서 아이를 사들이는 조직은 없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누군지 말씀하시오.
비사인의 어조가 차갑게 깔렸음에도 태조는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소.
목숨까지 위협했지만 태조에게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태조는 확신했다. 이번 일로 비사인이 자신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를 사서 보낸 일은 결국 사도맹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어.
―지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소?
―어느 안전이라고 제가 거짓말을 고하겠습니까? 우선 저들 두 사람부터 돌려보내셔야 합니다.
태조의 전음에도 비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맹주님,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골치 아파질 겁니다.
비사인은 고민에 빠졌다.
두 사람의 전음 대화가 깊어지자 검무극은 아이들을 사도맹으로 보내고 있음을 짐작했다. 이 상황에서 비사인을 저렇게 고민하게 할 일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아무 조언도 하지 않았다. 이 순간은 비사인이라는 한 무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니까. 그 선택에 따라 비사인 개인의 운명은 물론이고 사도맹의 운명과 나아가 무림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비사인,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해라!
한참을 고민하던 비사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태 문주가 스스로 자백하셨소.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사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태조는 기겁했다. 설마 비사인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예상 밖의 행동은 이제 시작이었다.
“소맹주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드린 말씀 이해 못 하셨습니까?”
“이해했소. 그 아이들을 사도맹으로 보냈다면서요?”
순간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태조는 경악했다. 이 중요한 이야기를 모두가 있는 앞에서 해버릴 줄은 몰랐다. 심지어 멸마대와 사도십삼랑까지 모두 있는 자리였다.
당신 미쳤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정말 하마터면 그 말을 내뱉을 뻔했다.
검무극은 이미 짐작한 내용이지만, 진하군은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사도맹으로 아이들이 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밝혔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도맹은 언제나 사건을 덮고 감추기에 급급한 이들이었다.
존재 자체가 악인이었다. 사실 전음의 대화를 이렇게 예상했다.
―저들은 이깟 아이들 몇 납치한 걸로 이렇게 큰 문제를 만들고 있습니다.
비사인의 생각이라고 많이 다를까? 검무극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이 되는 정도겠지.
한데 지금 비사인의 대응은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렇게 순순히 인정해 버린다고? 이건 자신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비사인이 사실을 밝힌 이유를 말했다.
“하나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는 열 개의 거짓말이 필요한 법이지. 나는 굳이 이 일을 비밀로 감추지 않을 작정이오.”
검무극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래, 어쩌면 저 검무극에게 휘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의 그런 우려를 가슴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괜찮다.
검무극은 기분이 좋았다. 세월이 지나면 오늘의 이 일은 과거의 한순간이 되고 말겠지만, 이 선택은 앞으로 비사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잘했다, 비사인. 이렇게 살아야 너만의 사도를 세울 수 있을 거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교주, 당신은 일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소?
―아이들이 사도맹으로 팔려 간 사실은 몰랐소. 다만 소맹주가 이 일을 묻지 않으리라곤 믿었소.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깊은 눈빛은 비사인을 향해 있었다.
―우린 지금 무림 역사에 남을 훌륭한 차기 사도맹주의 탄생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리고 비사인은 현명하게 이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비사인이 태조에게 물었다.
“본맹에서 아이들을 원했을 때, 아이들을 납치해서 보내라고 했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본맹의 잘못은 아니군. 왜 흑사단에 일을 맡겼소?”
태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돈이 적게 들어서겠지. 이 일은 인재를 찾는 게 어려운 게 아니오. 그 가족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지. 그렇게 긴 시간을 들여 설득에 성공하면 또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까지 해줘야 하지. 한데 흑사단과 손을 잡으면 일은 너무 간단해졌을 거요. 그냥 납치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큰돈을 벌 수 있었지 않소?”
태조는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검무극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온 사람처럼 말했으니까.
비사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는 사리사욕 때문에 본맹의 명예를 실추했소.”
그는 이번 일이 사도맹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이끌어갔다. 태조와 흑사단의 잘못으로 국한한 것이다.
“소맹주께서 이러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사인은 그의 말을 인정했다.
그래, 만약 검무극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겠지.
하지만 검무극을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정적으로 그가 네 사도는 무엇이냐고 묻는 그 순간, 자신의 인생도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당연했을지 모를 일이나, 지금부터는 아니오.”
비사인이 사도십삼랑에게 명령을 내렸다.
“흑사단주에게 지금 당장 전서를 보내 약속을 잡게.”
아이를 납치하는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만약 약속 장소에 안 나오면 무림에서 흑사단이란 이름은 사라지게 될 거라고 전해.”
사도십삼랑 소속 무인이 전서를 보내기 위해 뛰어나갔다.
태조는 자신이 사도맹 소맹주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소맹주가 이런 사람이었나?’
태조는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비사인은 차분한 어조로 그를 압박했다.
“태 문주. 난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오. 내 위엄에 도전하는 사람을 봐주는 도량이 넓은 사람도 아니고.”
비사인이 슬쩍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검무극은 그 눈빛만으로도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태 문주는 우리가 데려가겠소.”
검무극의 말에 태조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마교에 보내겠는가 싶었는데, 비사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비사인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태조가 먼저 소리쳤다.
“안 됩니다. 마교는 절대 안 됩니다.”
검무극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잘 대해주겠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끌려가면 단전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고문을 당한 후 뇌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소맹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애원했지만 비사인은 냉정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에게서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듣는 것이었다.
“보내실 거면 차라리 무림맹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진하군도 두 사람의 합동작전에 가세했다.
“거절하겠소.”
“대체 왜 그러시오? 날 데려가 주시오!”
“싫소. 그러기에는 당신의 죄질이 너무 나쁘오.”
다시 말해 마교에 끌려가서 더 끔찍하게 당해보라는 의미였다.
검무극이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너무 하시오. 누가 보면 본교를 괴물 소굴로 알겠소. 본교 뇌옥도 다 사람 사는 곳이오. 적응하면 살만하오.”
오히려 겁주는 것보다 더 무서웠다. 결국 태조는 더는 버티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교에 끌려가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표단주가 이번 일을 주선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표단주? 어느 표단주?
단주 중에서 표씨는 없었다. 그러다 생각난 한 사람.
―설마? 전대 흑룡단주(黑龍團主)?
―맞습니다.
표기광(豹基光).
사도맹 흑룡단의 단주였던 그는 십여 년 전에 몸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단주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연회장에서 술이나 얻어 마시며 폐인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왜?
―수년 전에 그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사도맹에서 은밀히 비밀조직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 때문에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이 필요하다고요. 절대 극비기 때문에 이 일을 누설하면 죽음이라고 단단히 겁을 줬습니다.
―그 사람은 단주 직에서도 물러난 사람인데. 그 말을 믿었소?
―그래서 상부에서 자신에게 그 일을 맡겼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만들 비밀조직에 사도맹의 맹운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큰돈을 선금으로 줬습니다. 표단주 그 사람 혼자 모았을 리 없는 돈이었죠. 이후에 맹에서 여러 이권을 챙겨준다고도 했고요.
―약속은 지켰소?
―지켰습니다.
덕분에 유검문은 세를 확장할 수 있었고, 청백이검까지 빈객으로 모실 수 있었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단순한 아이들 납치 사건이 아니었다. 사도맹 내부에서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맹주인 자신조차 모르는 일이.
“이 사람의 처벌은 우리가 맡겠소.”
검무극과 진하군은 흔쾌히 비사인의 뜻을 받아들였다.
“태 문주를 본맹으로 호송해라.”
비사인의 명령에 사도십삼랑이 태조의 혈도를 제압한 후 데리고 나갔다. 감히 태조는 저항하지 못했다.
끌려 나가면서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마교로 보내지 않은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살고 싶으면 이제부터 날 도우시오.
이번 일을 파헤치려면 태조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기에 그를 확보한 것이다.
비사인이 사도십삼랑에게 말했다.
“우린 곧장 흑사단주 만나러 간다.”
검무극과 진하군도 자연스럽게 함께 움직였다. 검무극은 비사인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였고, 진하군은 이번 일의 마무리까지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한 대의 마차에 검무극과 비사인, 진하군이 함께 탔다. 사도십삼랑과 멸마대는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했다.
청백이검을 비롯한 유검문의 무인들은 자신의 문주를 휩쓸어간 폭풍이 물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청백이검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대화를 나눴다.
“정사마, 세 후계자가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은 처음이군.”
“아마 무림 역사상 처음일 거네.”
“문주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그건 청백이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한 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켰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불 때는 문단속을 잘하고 외출을 삼가자.
두 사람이 안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문 닫아라.”
* * * 마차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비사인은 그 바람이 검무극의 옷자락을 날리는 것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들과 한 마차를 타고 흑사단주를 만나러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흑사단에 경고하게 될 줄은 더욱 몰랐고.
이 일이 장차 사도맹주가 될 자신에게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알 수 없었기에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로 그때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당신의 사도 잘 보았소.”
그래, 이것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내 사도는 적어도 아이들만큼은 지키는 사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 사도, 어땠소?”
“멋있었소.”
“하도 달콤한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서 믿을 수가 없군.”
멋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은 모양이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멋있었소.”
옆에 있던 진하군도 끌어들였다.
“당신은 어땠소? 소맹주, 정말 멋있지 않았소?”
“나는 사람 면전에서 멋있다는 말, 당신처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오.”
진하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결정이나 흑사단주를 만나러 가는 일은 옳은 일이라 생각하오.”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멋있다는 말을 저리 길게 하고 있소.”
* * * 그날 밤, 별무리가 쏟아지는 초원에 검무극과 비사인, 진하군 세 사람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사도십삼랑과 멸마대는 야영지에 남겨 두고 세 사람만 자리한 것이다.
이제 비사인에게 알려줄 때가 된 것이다.
“모종의 세력이 무림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소.”
“!”
검무극의 입에서 더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본교에도 침투해 있고, 무림맹에도 침투해 있었소. 심지어 새외 풍천교에도 있었소.”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진하군의 진지한 표정으로 볼 때, 농담이 아니었다.
“본교에는 섭혼마존을 노렸고, 무림맹에서는 여기 진 대주를 노렸소. 풍천교에서는 젊은 새 교주를 노렸소.”
“설마?”
“그렇소. 나는 사도맹에도 놈들이 보낸 자가 암약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소.”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 말을 검무극이 한 것이 아니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이런 놈들에겐 당하고 싶지 않소. 놈들은 은밀하게 숨어들어서 우리의 약점을 찾고, 등을 찌르려는 자들이오. 우리가 서로를 의심하는 순간 각개격파 당하게 될 거요. 적어도 이자들을 상대하는 일만큼은 힘을 합칩시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내줄 강호가 아니란 걸 보여줍시다. 앞으로 우리가 이끌어 갈 무림을 위해서라도.”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불쑥 물었다.
“정말 그 이유뿐이오? 그 흑막에 당신이 있는 것은 아니오?”
“이렇게 대놓고 물으면 내가 그 흑막이오라고 잘도 대답하겠소.”
“만약 그렇다면 어차피 우린 망했으니까. 그렇다면 미리 말해주시오. 오늘부터 먹고 싶은 것만 먹고 편식할 거요.”
검무극은 비사인이 확실히 성장했음을 느꼈다. 이런 농담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의미였으니까.
“다른 이유도 있소.”
검무극은 먼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다른 두 사람의 시선도 총총한 별들 사이를 누볐다. 각자의 별은 어떤 것일까, 그렇게 쳐다보고 있을 때 검무극은 담담히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우린 적이지만, 또 친구기도 하니까.”
절대회귀 343화
제343회 오늘은 사도십오랑이다.
별을 바라보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비사인과 진하군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검무극은 그 맑고 깊은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친구란 말이 너무나 생소하게 들렸다. 이 사람이 말한 것이 정말 우리가 아는 그 단어일까?
“우리가 언제부터 친구였소?”
비사인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진하군도 같은 마음으로 검무극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만 친구라 생각했던 거요?”
“당신은 정말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 생각하시오?”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다시 물었다.
“친구인 줄 알았다가 누군가 배신하면?”
동네 친구도 변했니, 배신했니, 난리를 겪는데 정사마 세 후계자가 친구가 된다고? 그 배신은 수천, 수만의 생사가 걸려있는 배신이 될 것이다.
“그땐 이렇게 생각합시다. 참, 우린 적이었지? 섭섭해하지 맙시다.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이미 당신 검이 내 심장을 찌르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나 있을까?”
무서운 얼굴로, 무서운 말을 하고 있었지만 비사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그는 검무극과 친구가 되어 지내는 인생을 상상하고 있었다.
천마가 된 검무극과 사도맹주가 된 자신, 그리고 무림맹주인 진하군이 서로 만나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허연 머리가 되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검무극의 너스레에 어이없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하지만 이상과 현실이 다르듯, 그의 입에서도 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갔다.
“마교 소교주와 친구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면, 소맹주 자리에서 쫓겨나게 될 거요.”
그러자 진하군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오죽하겠소? 마교 후계자와 사도맹 후계자와 친구가 된다? 후계자가 되기는커녕 할아버지께 맞아 죽을 수도 있소.”
검무극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진 대주는 후계자가 안 됐소. 우리가 도와서 후계자로 만듭시다.”
그러자 진하군은 정색하며 말했다.
“당신들이 돕는다고 맹주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오. 내가 맹주가 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그만큼의 그릇이 되었을 때, 비로소 오를 수 있는 거요.”
정파 후계자는 그렇게 쉽게 정할 수 없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역시 우리와 선을 그으시는군.”
검무극이 비사인 옆으로 바짝 붙으며 친한 척했다.
하지만 비사인은 옆으로 한걸음 떨어지며 검무극을 피했다.
“너무 정들이 없으시오!”
이제 세 사람은 원을 그리듯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무림을 꿈꾸는 거요?”
비사인도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다시 검무극의 시선이 밤하늘의 별을 향했다.
“내가 꿈꾸는 무림은 그대의 정도와 그대의 사도와 나의 마도가 잘 어울리는 무림이오. 운명이 우리에게 이런 신분을 주고, 경천동지할 무공까지 준 것은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무림일통을 꿈꾸라고 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서로에 대한 신뢰는 무림일통을 꿈꾸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관계이리라.
“나는 아버지하고도 안 친했었고, 형하고도 안 친했었소. 날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호위의 마음도 모르고 살았소. 그래서 항상 내게 묻소. 네 주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주제에 대체 무림을 일통해서 뭘 하겠다는 거냐고.”
별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을 향했다.
“무림일통보다 당신들하고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하오.”
농담처럼 말했지만, 검무극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무인에게 제일 쉬운 일은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쉬운 인생 말고, 우린 더 어려운 도전을 합시다. 우리 진짜 친구 한번 되어 봅시다.”
“!”
비사인과 진하군은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검무극 말이 옳다. 진짜 친구가 되는 건 싸우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는 죽여야 할 악이 너무 많소. 우리가 아니면 죽이지 못하는 절대악도 있지. 보시오, 심지어 우리까지 잡아먹으려는 악도 있지 않소? 그것들 때려잡으면서 삽시다. 같이 모여서 술 마시고, 우리끼리 수하들 흉이나 보면서. 같이 여행 다니고. 내가 바라는 무림은 그런 무림이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비사인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꿈같은 일이오.”
“그럼 평생 꿈꾸며 삽시다.”
비사인과 진하군이 각자의 생각에 잠기던 바로 그때였다.
밤하늘을 가르며 유성이 떨어졌다.
검무극이 손뼉을 마주치며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무림일통하게 해주세요!”
진하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비사인은 옅게 웃었다.
그들은 이후로도 한참을 그렇게 쏟아지는 별 아래 서 있었다.
* * * 흑사단주 추굉(秋宏)은 창밖을 쳐다보며 인상을 굳혔다.
“이제 아예 대놓고 감시하는군.”
그가 있는 건물의 건너편에 두 명의 무인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바로 무림맹의 멸마대에서 나온 고수들이었다. 몇 달 전부터 자신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대놓고 감시하는 것이다.
추굉은 거구에 다혈질은 무식할 거라는 통념을 깬 사람이었다. 그는 눈치도 빠르고 잔머리에 능했다.
사업에 있어서는 비정하고 잔혹한 성격으로 경쟁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했다.
그런 그였지만 길 건너 감시자들만큼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눈엣가시 이름이 멸마대인 이상 마음대로 뽑을 수는 없었으니까.
“흑십삼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흑사단주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그의 수족인 송충(宋沖)이었다.
납치한 아이들을 황룡표국에 전하러 나간 흑십삼에게서 소식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멸마대 놈들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흑사단주가 인상을 구겼다. 정말이지 멸마대라면 치가 떨렸다.
“아무래도 사도맹에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사도맹에서는 절대 대가 없이 돕지 않는다. 이번 일로 도움을 받게 되면 막대한 돈을 그들에게 후원 명목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사도맹에 들어가는 돈이 많은데.
그때 다른 수하가 와서 전서를 전하고 갔다.
“사도맹에서 온 전서입니다.”
사도맹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런 전서가 왔으니 흑사단주와 송충은 깜짝 놀랐다.
내용을 읽은 흑사단주가 서찰을 신경질적으로 구겨서 송충에게 던졌다.
“건방진 놈!”
송충은 구겨진 서찰을 펼쳐서 읽었다.
놀랍게도 사도맹의 소맹주가 만나자는 기별이었는데, 나오지 않으면 흑사단을 무림에서 없애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송충은 분노한 수장의 마음부터 풀어주었다.
“어린놈이 후계자가 되고 기고만장해진 모양입니다.”
흑사단주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 이만큼 화가 나면 시체가 쌓여야 하는데, 상대가 상대이니 분노만 쌓일 뿐이었다.
“한데 소맹주는 왜 갑자기 날 보자는 거지?”
날아온 전서에는 앞서 저 말과 만날 시간과 장소만 적혀 있을 뿐, 용건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난 흑사단주였다.
“기강을 잡겠다는 속셈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도맹 직속도 아닌데 기강은 무슨.”
“사도맹 놈들이 언제 그런 것 따졌습니까?”
기분이 상한 흑사단주에 비해 송충은 이 연락을 기회로 여겼다.
“이번 기회에 소맹주에게 투자해 두시면 앞으로 여러모로 중원에서 사업을 펼쳐나가기가 쉬울 겁니다. 그리고 만나셨을 때 멸마대 문제도 넌지시 부탁하십시오.”
기분 나쁜 건 나쁜 거고,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사업은 사업이니까.
“올해 농사 헛했군. 결국은 어떻게든 뜯기는구나. 얼마면 될까?”
그가 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이 있었다. 누군가를 구워삶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 만약 실패한다면 돈이 부족해서다.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니 다른 걸 주시지요?”
“어떤 것?”
“일월검(日月劍)을 주시지요.”
“미쳤어?”
버럭 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월검은 자신이 가진 보검 중에서 제일 아끼는 것이었으니까.
“소맹주를 만날 기회가 자주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히 우리 사람으로 만드시죠.”
“그러다 맹주 자리에 못 오르면? 태사의에 오르는 날이 되어야 아는 것 아니야?”
“그래서 투자가 어려운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숙고하던 흑사단주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일월검 내주자.”
멸마대 문제도 그렇고. 아깝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였으니까. 주고 어떻게든 다 뽑아먹는 거다.
“대신 흑일(黑一)부터 흑십(黑十)까지 모두 데려간다. 흑야(黑夜)와 흑견(黑犬)도 부르고.”
송충이 흠칫 놀랐다.
“너무 과합니다.”
“과해야지.”
“흑견 성격 아시잖습니까? 무슨 사고를 칠지 모릅니다. 사도맹 소맹주 앞에서도 지랄발광할 놈입니다.”
“그러라고 데려가는 거야.”
흑사단주는 이 부분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퍼줄 땐 퍼주더라도 호구처럼 보여선 안 돼. 이쪽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긴장해야, 우리가 주는 선물의 가치도 커지는 거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송충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이만 출발하시죠?”
흑사단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야지, 안 가면 우릴 무림에서 지우시겠다는데.”
* * *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을 때, 검무극은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진하군에게 말했다.
“오늘 주인공을 위해 우린 옷을 갈아입읍시다.”
“무슨 말이오?”
“오늘 자리는 사도맹 소맹주가 흑도 문파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자리 아니겠소? 멸마대가 함께할 자리는 아니지요. 멸마대는 대기하게 하고, 우린 사도십삼랑 복식으로 갈아입자는 말씀이오.”
진하군은 비사인과 자신이 함께 가서 그들을 압박하려고 했다. 사도맹 소맹주와 무림맹 멸마대주가 함께 경고하면 효과가 두 배라는 생각에서였다.
한데 검무극은 비사인의 입장에서 그의 권위를 높여주려 하고 있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진하군은 흔쾌히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비사인은 검무극이 자신을 위해주는 마음을 느꼈지만, 모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옷 두 벌만 주시오.”
그러자 사도십삼랑들이 여벌의 옷을 두 사람에게 주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검무극이 말했다.
“오늘은 사도십삼랑이 아니라 사도십오랑이 되겠소. 십사랑, 십오랑 신입 받으시오!”
사실 진하군이 이 옷을 입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다. 스스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누군가 꼬투리를 잡는다면 크게 비난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이 자기는 다리가 길어서 바지가 짧네, 색깔이 자기랑 어울리지 않네, 온갖 너스레를 떨면서 갈아입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반성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짜 중요한 것은 옷 속에 누가 들었느냐라고.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걱정하는 소심한 사람이 들었는지, 상대를 배려해 기꺼이 그들의 복장을 하는 큰 사람이 들었는지.
옷을 다 입은 검무극은 마지막 너스레를 잊지 않았다.
“당신, 십사랑 할거요? 십오랑 할거요?”
* * * 흑사단주는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로 흑사단의 정예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림에서는 흑사단을 들개 같은 이들로 보았다. 온갖 이권에 몰려와서 뜯어먹고, 숫자로 밀어붙이고, 죽여도 죽여도 또 기어 나오는 그런 조직 말이다.
하지만 그건 흑사단을 반만 아는 것이다.
적어도 흑사단주는 개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개 행세를 하는 것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을 아는 영리한 호랑이였다.
흑일부터 흑십도 호랑이였다. 그 열 명을 벗어나면 늑대도 되고, 여우도 되고, 개도 되겠지만. 흑사단주가 아끼는 이들은 인정할만한 고수들이었다.
물론, 가장 든든한 사람은 흑야였다.
무공실력만 따지면 흑사단주 다음으로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살육을 좋아해서 일부러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싸움에도 나서서 피바다를 만드는 걸 즐겼다.
마지막에 등장한 이가 흑견이었다.
그 역시 흑사단주 다음인 인물이었다. 흑야가 무공으로 다음이라면, 흑견은 성질 더럽기로 다음이었다.
살인에 폭행에 겁탈에,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는 흑사단에서도 유명한 악인으로 인간이라면 차마 못 하는 일 담당이 그였다.
“형님, 대체 무슨 일로 우릴 다 부른 거요?”
흑사단주에게 형님이라 칭하는 그였다. 젊은 시절부터 흑사단주를 보필했기에, 유일하게 흑사단주를 어려워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사도맹 소맹주가 나를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자가 왜요?”
“후계자도 되었는데 뭐 없냐, 하는 거겠지.”
흑견의 시선이 흑사단주 옆에 놓인 기다란 상자를 향했다. 상자에 그려진 달과 해 문양을 보고 흑견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설마 일월검입니까?”
“맞다.”
“소맹주에게 주려고요?”
흑사단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흑견은 버럭 소리쳤다.
“안 됩니다. 그 귀한 검을 그놈에게 왜 줍니까? 돈이나 좀 쥐여 줘서 보내십시오.”
흑견은 흑사단주가 이 검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았다. 그가 송충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입만 산 놈이 주라고 했겠지요.”
흑견은 송충을 싫어했다. 원래 자신이 흑검단주의 옆이었는데, 송충에게 밀려난 것이다.
송충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무식한 새끼가 벌써 날뛰는구나.’
이래서 흑견은 부르면 안 된다고 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서던 그때.
“저기 옵니다.”
저 멀리 마차와 호위하는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흑사단주가 수하들에게 말했다.
“귀한 분께 적어도 이건 알려드려야지. 우릴 무림에서 지우려면 손이 얼마나 더러워져야 하는지.”
절대회귀 344화
제344회 내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달려온 마차가 십여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마차를 호위하던 열다섯 명의 무인들도 말에서 내렸다. 그들 중에는 검무극과 진하군도 있었다.
하지만 흑사단주는 오직 마차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도맹 소맹주를 만난다는 생각에 그는 긴장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만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대체 어떤 자지?’
마차 문이 열리고 비사인이 내렸다.
이 순간의 비사인은 검무극에게 놀림 받고, 편식하겠다고 농담하던 그가 아니었다.
냉정하고 차가운 기도에 피냄새 풀풀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사도맹의 소맹주였다.
‘역시! 후계자는 후계자구나!’
지켜보던 이들은 절로 이런 감탄을 했다.
비사인이 흑사단주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도십삼랑, 아니 십오랑이 그 뒤를 따랐다.
비사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흑사단주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더럽게 무섭구나!’
소맹주의 인상이 강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호위하는 무인들 역시 예상했던 실력보다 훨씬 강해 보였다.
그때 흑사단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향했다. 상대가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끝에 서 있는 가장 젊은 무인에게 시선이 빨려 들어간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가 씩 웃었다.
‘미친놈인가?’
이런 상황에서 호위 무인이 웃는 것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흑사단주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지만 비사인은 고개만 까닥 인사했다.
“단주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쌀쌀맞은 반응에 흑사단주는 자신의 예상이 정확하다고 여겼다.
‘역시! 기강을 세워보시겠다?’
사실 비사인의 냉담은 그래서가 아니었다. 원래도 온갖 지저분한 일들로 악명 높은 자들인데, 아이들까지 납치해서 판다는 사실에 좋은 마음이 들지 않아서였다.
“저 아랫마을에 좋은 술과 요리를 준비해 뒀습니다. 함께 가시죠.”
“됐소. 이곳에서 이야기 나눕시다.”
“좋습니다. 오늘 귀한 분이 오신 걸 아는지 날씨도 아주 좋습니다.”
흑사단주가 송충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송충이 일월검이 든 상자를 가져왔다.
“제 작은 성의입니다.”
일월검이 든 상자를 비사인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고도 그렇게 계속 뻣뻣하게 굴 수 있을까?’
저 뻣뻣한 멧돼지 털을 부드러운 양털로 바꾸는 선물이 될 것이다.
사도일랑이 나와서 대신 상자를 받았다. 암기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안전하다는 것이 확인되자 상자에 든 검을 꺼내서 비사인에게 건네주었다.
비사인이 일월검을 뽑아보았다.
예리한 검날을 드러낸 일월검은 검을 쓰는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훌륭한 검이군.”
검무극이 지닌 흑마검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반 보검 중에서는 손에 꼽을 수 있을 명검이었다. 정말 흑사단주가 큰마음을 먹고 주는 선물이었다.
“소맹주님께 잘 어울립니다.”
바로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비사인에게 날아들었다.
-그 검, 내게 주시오.
검이 욕심나서 달랄 사람은 아니었으니.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요?
-십오랑 막내에게 그 정도 선물은 해주셔야지.
비사인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인가 싶었지만 이렇게 봐서 저 심연 같은 속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십오랑!”
“네.”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오자 비사인이 검을 하사했다.
“사도십오랑이 된 환영선물이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소맹주님!”
검무극은 사양하지 않고 검을 받았다.
그 모습에서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흑사단에게 받은 검을 검무극에 줄 리 없으니, 분명 검무극의 의도일 거다.
검을 받아들고 돌아선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전음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기에 십오랑 하라고 하지 않았소? 막내라서 귀여워서 준 거요.
-두 번 귀여웠다간 사도맹도 주겠소.
-그럼 유성 보고 빈 소원이 반은 이뤄지는 건데.
일월검을 수하에게 줘버리자 흑사단주는 물론이고 그가 데려온 흑사단 무인들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흑사단주는 충격에 빠졌다. 아끼고 아끼던 검을 줬는데 그걸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수하에게 줘버린다고?
‘이건 나를 무시하는 거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참지 못한 사람은 흑견이었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맹주님!”
평생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사도맹 소맹주라는 이름조차 그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흑사단주에게는 충성심을, 다른 이들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배짱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줄 기회를.
특히 단주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송충을 확실히 눌러버릴 기회였다.
“그 검은 우리 단주님이 소맹주님께 드린 선물입니다. 그걸 수하에게 줘버리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 아닙니까?”
비사인은 그 무서운 얼굴로 가소롭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흑사단주가 재빨리 나섰다.
“예의에 어긋나다니? 소맹주님께 그 무슨 망발이냐? 어서 사죄드려라!”
물론 흑사단주의 속마음도 흑견과 같았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흑견이 속 시원히 해준 것이다. 애초에 이러려고 데려온 것이기도 했고.
흑사단주의 호통에 흑견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검은 아무나 들 수 있는 검이 아니라 여겨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느껴지는 것은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니라 여전한 불만이었다. 상대가 소맹주가 아니었다면 벌써 욕설이 튀어 나갔을 것이다.
흑견뿐만 아니라 뒤에 서 있는 다른 흑사단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자연 분위기는 딱딱하게 굳었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게 당신이 원한 거요?
그러자 돌아온 뜻밖의 대답.
-아직 미지근하오. 더 펄펄 끓여야지요.
검무극이 흑견에게 말했다.
“아무나 들 수 없다고 했나? 나는 아무나가 아니다.”
검무극이 고압적으로 대하자 흑견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소맹주니까 간신히 참고 있는데, 제일 어려 보이는 놈이 하대하며 나선 것이다.
“소맹주님은 이깟 검보다 나를 더 아끼고 계신다. 그렇지 않습니까? 소맹주님.”
검무극이 직접 묻자 비사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던 진하군은 자신이 저 상황에 부닥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결국 비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봤지? 날 더 아끼신다지 않느냐?”
의기양양한 검무극의 모습을 보며 비사인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벌써부터 귓가에 검무극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 아낀다고 해놓고 왜 이러시오? 날 아낀다고 하지 않았소?
‘이걸로 한동안 날 놀려먹겠구나.’
한편 흑사단주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하에게 검을 줘버리지 않나, 그 수하가 나서서 소맹주에게 자신을 아끼지 않느냐고 묻지를 않나?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러는 거지?’
하지만 상황은 이제부터였다. 검무극은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달굴 새로운 것을 꺼내 들었다. 그가 품에서 꺼낸 것은 몇 장의 종이였다.
“사실 당신들에 대해서 사전에 조사를 했소. 여기 도착하기 전에 받았지.”
종이에 적힌 내용은 은월이 보낸 흑사단에 대한 정보였다. 누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지금껏 어떻게 사업을 펼쳐왔는지 다 적혀 있었다.
흑사단주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표정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비사인은 자신과 비슷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저 어린놈의 손에 들린 내용을 읽지 않은 듯 보였다.
이 반응만으로 볼 때는 짜고 벌이는 짓 같지는 않은데.
‘이것들이 대체?’
아니, 그리고 조사를 했으면 소맹주에게 보여줬어야지, 왜 품에 간직하고 있었던 거냐? 흑사단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검무극은 점점 타오르는 불길에 한 사람을 밀어 넣었다.
“여기 흑견이 누구요? 얼굴 좀 봅시다.”
난데없이 자신이 불리자 흑견은 깜짝 놀랐다.
더구나 부른 사람은 이 자리 내내 거슬렸던 막내 놈이었다.
“나다.”
소맹주에게 표출하지 못한 불만이 분노가 되어 검무극에게로 향했다.
“눈코입 다 붙어 있고. 아무리 봐도 당신도 인간 맞는데, 어떻게 그런 짓들을 저질렀소?”
흑견이 화르르 타올랐다. 소맹주가 아니었다면 벌써 검을 뽑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폭발할 것 같은 흑견의 모습에 흑사단주가 나섰다. 지금 안 말리면 칼부림이 난다.
“귀한 분을 모시는 분이시다. 함부로 굴지 마라!”
그러면서 비사인에게 물었다.
“한데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연속되면서 이제야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묻는다. 예상치 못하기로는 비사인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그대에게 명령할 게 있어서 불렀소.”
명령? 부탁도 아니고 명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흑사단주는 내심 불쾌했지만,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명하시지요.”
비사인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아이들을 납치해서 팔고 있다지?”
너무 놀란 나머지 흑사단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건 또 뭐야?’
이미 알고 온 것 같으니 거짓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가 뭐가 문제가 되겠나?
“맞습니다.”
그러자 비사인이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중단하시오.”
흑사단주는 물론이고 모든 흑사단 무인들도 놀랐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순간이야말로 비사인은 자신이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생에서 없었을 일이었고, 하지 않았을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비사인은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냐? 아니면 검무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냐?
적어도 그 물음의 답은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니까.”
원인은 검무극일지 몰라도 자신은 이 일을 용납할 수 없다. 아이를 납치해서 팔아먹는 사도는 자신의 사도가 아니었으니까.
“이후부터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납치를 하면, 너희 흑사단은 무림에서 사라지게 될 거다.”
마차에서 내린 이후 비사인은 작은 기도도 발출하지 않았다. 이 말도 차분하게 했지만 두렵고도 무거운 침묵이 그곳에 흘렀다.
흑사단주는 한계에 다다랐다.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고,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알겠나?”
흑사단이 자리를 잡은 후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눈알을 뽑고, 팔다리를 잘라 돼지 먹이로 던졌다. 그런 인생이었는데.
흑사단주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비사인이 돌아서서 마차로 걸어가려던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검은 돌려주고 가시오!”
외친 사람은 흑견이었다. 흑사단주는 참아도 흑견은 참지 못했다. 지금까지 참은 것도 평생 쓸 인내심을 다 당겨썼기에 가능했다.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라.”
정말 그러겠다는 듯 흑견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지금 표정이 굳어진 사람들은 검무극도 비사인도, 진하군도 아니었다.
사도십삼랑의 무인들이었다. 비록 검무극이 진짜 사도십삼랑은 아니더라도, 자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한데 흑사단 놈이 감히 도전해왔다. 명백히 자신들을 우습게 본 것이다.
흑사단주가 재빨리 소리쳤다.
“그랬다간 보복을 당할 거다. 물러나라!”
검무극은 흑사단주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었다. 비사인을 보며 말했다.
“제가 죽더라도 절대 복수하지 않기로 하시죠.”
이 모든 것이 검무극의 의도임을 흑사단주나 흑견이 어찌 알겠는가?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맹주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이 대결은 두 사람의 대결로 끝을 낸다.”
흑견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흑야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흑사단에서 세 번째 실력인 그였다.
검무극이 일월검을 꺼냈다.
“검이 얼마나 좋은지 시험해 볼까?”
흑견은 자존심 때문에 그대로 싸울 것임을 알았기에 흑사단주가 대신 끼어들었다.
“그건 공정하지 못한 짓이네. 자네 검을 사용하게.”
검무극이 자신의 흑마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너무 불공평할 텐데?”
무슨 말인지 알 리 없는 흑사단주였다.
“뭐, 원하신다면. 그럽시다.”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흑견은 어떻게든 상대를 이겨서 공을 세울 생각뿐이었다. 일월검을 되찾고 다시 흑사단주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거다.
“바닥부터 올라와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을 보여주마!”
흑견이 검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푸욱!
어느새 검무극의 흑마검이 그의 왼쪽 어깨에 박혀 있었다.
“어?”
너무 빨라서 어떻게 찔렸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게 꿈인가 싶었는데.
다시, 푹!
이번에는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그제야 앞서 찔린 왼쪽 어깨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흑견이 비명을 내지르는 그 순간, 흑마검은 다시 그의 팔꿈치를 연속해서 찔렀다.
보통 단칼에 없애버리는 검무극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가장 아픈 곳의 뼈마디를 차례대로 끊어냈다.
“으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검무극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푹푹 찔릴 때마다 인간이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곳이 잘려 나갔다.
비사인과 진하군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검무극이 이렇게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유 없이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으니, 두 사람은 말없이 검무극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흑사단주는 감히 말리지 못했다. 아니, 말리기도 늦었다. 이미 흑견은 수십 군데 찔린 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찌르는 쪽이 고수라는 의미였다.
더는 찌를 곳이 없자 마지막 남겨둔 곳으로 한 줄기 검선이 가로질렀다.
몸에서 분리된 그의 머리통이 흑사단주 옆으로 굴러갔다. 단주 옆에 있겠다는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흑사단주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흑견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일개 호위의 무공이 이 정도였다고? 그것도 막내가?’
이런 자들을 두고 우릴 지우려면 손이 얼마나 더러워져야 하는지 알려주자고 허세를 떤 것인가? 그의 몸이 절로 떨렸다.
비사인의 전음이 검무극에게 날아들었다.
-당신 원래 이럴 의도였지?
애초부터 흑사단에게 그냥 경고만 하고 떠날 생각이 아니었던 거다.
-맞소. 내 기준에선 이들도 절대악에 속하는 자들이오.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물었다.
-만약 나중에 나도 그 절대악에 속하게 되면 어쩔 거요?
검무극이 그에게 걸어가서 아까 받았던 전서를 그에게 전했다.
-당신이 이런 사람이 될 리가 없지 않소?
내용을 읽는 비사인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흑견을 필두로 이들이 저지른 짓은 단순한 악행이 아니었다. 그들의 악행은 악마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었다. 부모 앞에서 어린 딸을 겁탈하는 것이 대수였고, 무공도 모르는 일가족을 한곳에 가둬 산 채로 불태워버린 적도 있었다.
검무극이 왜 일월검을 달라고 해서 분위기를 이렇게 유도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왜 이렇게 흑견을 고통스럽게 죽였는지도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검무극이 그냥 다 쓸어버렸을 텐데, 그는 자신의 입장과 권위를 생각해서 일부러 판을 만들어서 죽이고, 최대한 참아주고 있는 것이다.
비사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어쨌든 이들도 같은 사파에 속한 자들이었으니까.
비사인이 성큼성큼 흑사단주에게 걸어갔다. 그에게 전서를 내밀며 담담히 물었다.
“이게 다 당신들 짓이오?”
흑사단주가 뭐라 대답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비사인의 두 눈에서는 시퍼렇고 섬뜩한 사기가 흘러나왔다.
“네가 시킨 거냐고 묻잖아.”
절대회귀 345화
제345회 적보다 저 사람을 더 조심하시오.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흑사단주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소맹주를 호위하는 이들의 막내가 흑견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목을 쳤다. 그 과정에서 흑견은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저항할 생각이 들겠는가?
게다가 비사인의 몸에서 발출된 사기가 흑사단주의 몸을 무섭게 옥죄었다.
사파의 무인이니 사기를 많이 접해본 흑사단주였지만 지금의 사기는 여태 느껴본 그 어떤 사기보다 강력했다. 분노한 비사인의 사기에서는 피 냄새가 짙게 났다.
“그럼 수하들이 제멋대로 일을 저질렀다는 뜻인가?”
궁지에 몰리자 흑사단주은 애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흑사단주가 호통친 사람은 송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끌어들인다고? 흑견과 사이가 그렇게 안 좋다는 걸 뻔히 알면서?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지금 흑사단주 탓을 할 상황은 아니었다.
“저도 미처 모르는 일입니다. 흑견은 못 배우고 비천한 자입니다. 단주님의 눈을 피해 못된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 중에 그의 악행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원래 그런 놈이라고 말했다간 왜 안 말렸냐는 불똥이 튈 것이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정보, 얼마나 정확한 거요?
은월의 정보였으니 그 신뢰도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가장 믿고 아끼는 사람이 보내준 정보요. 본교 통천각 정보와 같은 수준이라고 여기면 되오.
정보의 신뢰도를 확인한 비사인이 송충에게 물었다.
“이름이 뭔가?”
“송충입니다.”
비사인은 들고 있던 종이를 뒤적이며 송충의 정보를 찾았다.
송충의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기 시작했다. 저기에 뭐라고 적혔는지에 따라 자신의 생사가 결정될 것이다. 그야말로 저 종이는 사신의 생사부(生死簿)였다.
다행히 검이 날아들지는 않았다. 종이에 적힌 악행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이 한숨 돌린 흑사단주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리며 다짐했다.
“더는 아이들을 납치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수하들의 선 넘는 악행도 제대로 단속하겠습니다.”
비사인은 대답 대신 흑견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흑견의 시체를 보러 간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비사인이 검을 뽑아서 검 끝에 피를 묻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종이에 피로 줄을 세 줄 그었다.
비사인은 그 종이를 흑사단주에게 건넸다.
세 명의 이름에 피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들은 흑사단 내에서도 악행의 정도가 심한 이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흑사단주는 비사인이 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흑야, 잠시만 이리 와서 이걸 보게.”
그때까지도 말없이 서 있던 흑야를 자신에게 불렀다.
흑야가 걸어와서 종이에 적힌 것을 보는 순간.
쉬익!
흑사단주의 검이 기습적으로 뽑혀 나오며 그의 가슴을 베었다.
하지만 흑야는 미리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공격을 피했다.
“그럴 줄 알았소.”
“날 원망하지 마라! 네 악행이 깊어서니.”
두 사람이 혈전을 벌였다.
갑자기 흑사단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이 혈전을 벌이니 흑사단 무인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흑야를 죽여라!”
“단주를 죽여라! 우릴 모두 다 죽이려는 거다!”
“거짓말이다! 흑야를 합공해서 죽여! 명령이다.”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슬쩍 뒤로 빠진 흑삼이 몸을 날려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는 일단 이런 상황에서는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비사인의 명령을 받은 사도일랑이 어느새 그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감히 뚫을 생각을 못 하고 흑삼은 뒤로 물러났다. 흑견이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죽는 모습을 본 이상 오늘 사도십삼랑에게 검을 뽑을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도십삼랑들도 주위를 완벽하게 포위해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비사인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싸움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흑야는 흑사단주보다 무공이 아래였지만, 배신당했다는 분노가 그를 미쳐 날뛰게 했다. 지면 죽는 싸움이기에 검기가 난무했다.
검무극과 진하군은 사도십삼랑 포위망 밖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쉬이익.
진하군이 검무극의 옷자락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멀리서 날아온 눈먼 검기가 검무극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소!”
“잘도 구했겠소. 피해도 열 번은 더 피했을 거면서.”
“진 대주.”
“목소리는 왜 까는 거요?”
“꼭 후계자 되시길 바라오.”
“갑자기 왜 이러시오?”
“문득 그랬으면 좋겠다 싶어서. 생각날 때 말씀드리는 거요.”
장난처럼 말했지만, 진심을 말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어디 내 뜻대로 되겠소?”
그의 할아버지이자 맹주인 진패천은 손자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후계자에서 밀어낼 사람이었다.
“왜 내가 후계자가 되길 바라는 거요?”
만만해서? 이런 대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잘할 것 같아서요.”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친구든 적이든, 잘하는 사람이어야지요. 그래야 놀아도 즐겁고 싸워도 가치가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검무극이 그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쉬이이익.
또다시 날아든 검기가 이번에는 진하군이 서 있던 곳을 지나갔다.
“내가 당신 목숨을 구했소! 절대 잊지 마시오!”
그 너스레를 들으며 진하군은 궁금했다. 과연 이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끝나게 될까?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싸움이 끝났다.
한 사람은 서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이변은 없었다. 승자는 실력대로 흑사단주.
흑야는 많은 싸움을 했지만 이기는 싸움만 했다. 실력과는 무관한 살육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종이에 줄이 그어진 이름은 셋이었기에, 흑사단주는 일삼과 일팔을 기습해서 죽여버렸다. 흑야보다도 낮은 실력의 그들이 흑사단주의 기습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다 끝났습니다.”
흑사단주의 보고에 비사인이 말했다.
“이제 흑사단의 가장 악독한 다섯 사람 중에서 네 사람이 죽었군.”
“다섯 명이라고요? 줄을 친 이름은 셋이었습니다.”
흑견까지 포함시킨다 하더라도 네 명. 자신이 한 명 빠뜨렸나 싶어 흑사단주가 다시 종이를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익.
서걱.
비사인의 검이 흑사단주의 목을 갈랐다.
그 바람에 흑사단주가 들고 있던 종이도 잘렸는데 공교롭게도 흑사단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 잘려 나갔다.
그 아래 보이는 붉은 선.
마치 줄이 그어진 것처럼 보이는 그 선은 흑사단주의 목에 그어진 선이었다.
푸아아아악!
다음 순간 그 선에서 피를 뿜어내며 흑사단주가 쓰러졌다.
비사인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흑사단을 세우기 위해 그가 저지른 악행도 악행이지만, 흑견이나 흑야와 같은 수하의 악행을 그대로 방치한 죄가 가장 컸다.
나머지 흑사단 무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몰살당할 것이 틀림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비사인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어라. 우리 쪽 사람이 갈 때까지 돌아가서 숨도 쉬지 말고 기다려라!”
흑사단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죽다 살아난 그들이 그곳을 떠나갔다.
이 시간 이후로 사파 무림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도가 지나친 악행에 사도맹 소맹주가 직접 나서서 철퇴를 내렸다는 소식이. 반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반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긍정적인 평가든 부정적인 평가든 어제와는 다른 평가를 받게 될 거란 점이었다. 비사인은 또 다른 세상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간 것이다.
비사인이 검무극과 진하군에게로 걸어왔다.
“당신은 이들을 다 죽여버리고 싶었겠지만, 이것이 내 최선이었소.”
“다 죽이고 싶다니? 나를 살인마로 여기고 있었소? 같이 가서 동경을 봅시다. 누가 살인마에 가까운 얼굴인지.”
“당신처럼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알고 보면 무서운 짓을 잘 저지르지.”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소.”
그렇게 한차례 너스레를 떨고 난 후 비사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의 입에서 할까 말까 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이게 우리 사파요.”
자랑스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진하군은 정파에도 나쁜 놈이 있듯, 사파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검무극이 말했다.
“쓰레기 같았소.”
비사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말해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모습에 진하군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은 어찌 저리도 사람 마음을 잘 아는 걸까? 나보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그래도 당신은 우울해할 필요는 없소. 당신의 사파가 아니니까.”
“무슨 뜻이오?”
“당신의 사파는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지 않소?”
무슨 뜻인가 했는데 검무극이 사도십삼랑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이 당신의 사파 아니오? 아직 저들은 당신네 직속 사람들 아니잖소? 심지어 맹주도 아닌 주제에.”
진하군은 속으로 말했다.
‘잘한다.’
그래, 지금 비사인에게 딱 필요한 위로가 이런 것이리라.
쓰레기 같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맹주도 아닌 주제에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검무극이 지금껏 비사인에게 했던 그 많은 일들이 선행되어야겠지.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고, 지치지도 않고 너스레 떨고, 지치지도 않고 배려하고.
그러니까 쓰레기란 말은 보석이 되어 비사인의 가슴에 박히게 되는 거다.
“진 대주도 한 말씀 하시오.”
이 상황에서 자신까지 챙기는 것을 봐라.
“나는 아직 쓰레기란 말을 할 준비가 안 됐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웃었다.
“이래서 당신이 맹주가 돼야 한다는 거요. 재밌는 사람이 돼야 우리의 맹주 생활이 즐겁지.”
“살면서 재밌다는 말 처음 듣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비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검무극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웃게 된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오늘 일 잘 처리하셨소. 난 당신처럼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했을 거요.”
비사인은 안다. 검무극의 양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덕분에 수하들 앞에서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결정적인 말 한마디.
“당신의 사도, 마음에 드오.”
겉으로 표를 내진 않았지만, 비사인은 크게 감격했다. 백 마디 칭찬보다 더 기분 좋은 말이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나는 사람 면전에서 마음에 든다는 말, 당신처럼 쉽게 하는 사람이 아니오.”
진하군이 저 멀리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흑사단 문제는 아주 잘 처리했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을 이리도 길게 하는지 아시겠지요?”
세 사람이 함께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일월검이 든 상자를 비사인에게 돌려주었다.
“자, 이건 가져가시오.”
그러자 비사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건 당신 선물이오.”
“선물이라고요?”
“사도십삼랑 막내로 들어온 기념선물이오.”
일월검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녔는지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잘 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보검, 그랬기에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오늘 밤에 괜히 줬다고 잠 못 들면서 후회할 거요.”
“그럴지도 모르겠소.”
“그래도 괜찮소?”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말 한 적 있소? 선물을 줘서가 아니라 당신 얼굴, 멋있게 생겼소. 권마 사부와 마군주, 그리고 당신. 흉측하고 무섭지만 보면 볼수록 멋지게 생긴 삼대장이오.”
“선물 줘서 하는 칭찬 맞으면서.”
검무극은 일월검이 든 상자를 얼싸안고 좋아했다. 선물 잘 줬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아했다.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그냥 있을 수 없지요. 앞으로 자랑하시오. 그대들의 사도십삼랑에 마교 소교주가 막내로 있다 갔다고. 마음껏 소문내시오.”
사도십삼랑은 이미 검무극을 겪어봤고, 또 어느 정도 알 만큼 알았기에, 너스레는 너스레로 받아들였다.
“그런 소문이 났다가 소교주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겠소?”
비사인의 걱정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럼 당신 찾아갈 테니, 받아주시오. 평생 나랑 놉시다.”
정말 그러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애써 떨치며, 비사인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얼마나 귀찮아질지 들었을 테니, 다들 소문은 내지 않도록.”
“네!”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비사인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본맹으로 돌아갈 작정이오.”
사도맹에 암약하는 자들을 뿌리 뽑을 때가 된 것이다.
검무극이 따라붙었다.
“나도 갑시다.”
이번 일은 단지 사도맹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비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무림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적들이라면, 혼자 해결하겠다고 자존심 세우는 건 어리석은 자들이나 할 짓이리라.
“도움은 고맙게 받겠소.”
이제 진하군의 결정만 남았다.
“나는 이만 무림맹으로 돌아가겠소.”
사실 사도십삼랑 복장을 하고 이곳까지 온 것만 해도 크게 무리한 일이었다. 게다가 멸마대를 데리고 사도맹 본단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비사인이 진하군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웠소.”
“별말씀을. 적보다 저 사람을 더 조심하시오.”
“충고 고맙소.”
듣고 있던 검무극이 말했다.
“속삭이는 척이라도 좀 하시오!”
그렇게 진하군은 그곳을 떠나갔다.
멀리 숨어 있던 멸마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진하군을 맞았다.
떠나기 전에 진하군은 수하들과 함께 능선에 늘어서서 저 멀리 사도맹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함께 가고 싶은 진하군의 마음을 실은 석양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면서 멀어져가는 마차를 빠르게 뒤쫓기 시작했다.
절대회귀 346화
제346회 우리가 먼저 죽입시다.
마차는 사도맹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비사인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며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전 무림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적이라, 거창하군.
무림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몇 세대에 걸쳐 한 번씩은 이런 큰 사고를 치는 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원래라면 계속 음모를 꾸며 나갔을 텐데. 한 사람 때문에 들통이 났다. 하필이면 저 사람이 있는 시대에 음모를 꾸미는 바람에.
비사인의 시선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다가도 조금만 틈이 나면 뭔가 구결을 읊으며 수련에 빠져들곤 했다. 재능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사람인데, 알고 보니 노력으로 똘똘 뭉쳤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 수 있었다.
비사인의 시선이 검무극의 옆자리를 향했다. 자신이 선물로 준 일월검 상자가 옆에 세워져 있었다. 마차 짐칸에 실으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옆에 두고 가겠다고 애처럼 고집을 부렸다.
그때 마차가 덜컹하고 크게 흔들렸다.
사람 엉덩이도 풀쩍, 옆에 놓인 검 상자도 붕 떠 올랐다.
상자가 바닥으로 꽝 하고 떨어질 것 같았는데, 상자는 허공에 떠 있다가 조용히 제자리로 내려왔다.
검무극이 허공섭물로 검 상자를 보호한 것이다. 운기 중이거나 자는 줄 알았는데. 그는 이 와중에도 검 상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내 선물을 소중히 여겨주는 건 고마운데, 상자는 버리고 검만 차는 것이 편하지 않소?”
그러자 검무극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검을 선물로 줄 거라서. 검 상자에 넣어주면 더 좋지 않겠소?”
일월검을 보관하는 정식 상자기에 상자에는 해와 달이 멋있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에게 준다고 이리 신경 쓰시오?”
“내 심장에게 줄 거요.”
그건 또 무슨 장난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검무극이 눈을 떴다.
“내 심장만큼이나 중요한 사람 있소. 이 귀한 검을 아무에게 주겠소?”
누군가를 진심으로 챙겨주는 모습도 어울리지만, 또 한편으로 검무극은 이런 느낌을 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왠지 길 가던 모르는 사람에게도 보검을 내줄 것 같은 사람이라서.”
“그건 나를 잘못 알고 있는 거요. 나는 손해 보는 것 싫어하오. 내가 모르는 사람에게 검을 준다면, 그 사람이 가진 열 배는 더 소중한 뭔가를 노리고 주는 걸 거요.”
“그럼 그 심장에게는 뭘 노리고 주는 거요?”
“심장은 예외요. 내가 뭘 노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게 주려는 사람이라서.”
그 말에 비사인은 자신이라면 누구에게 선물을 줄까 고민해 봤다.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굳이 줘야 한다면 사도십삼랑 중에 일랑에게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는 이런 귀한 선물을 흔쾌히 줄 만한 친구가 아직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 소교주가 유일한 친구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비사인은 다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평소 너스레 떠는 모습이 아니라, 차분하고 깊은 눈빛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사인이 반대쪽 창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나의 마도도, 당신의 사도도, 갈 길이 멀 거요. 잘못 세워지면 다시 세우고. 더 좋은 생각이 나면 무너뜨려서 다시 세우고.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맙시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시오?”
“문득 생각이 나서 했소. 나중에 말해야지 하면 결국 잊고 못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생각날 때 되도록 다 말하려고 노력하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말이 많군.”
“수다쟁이 소교주가 낫지 않소? 뭔 속인지 알 수 없는 과묵한 소교주보다?”
“문제는 수다쟁이임에도 당신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이겠지.”
검무극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비사인은 모를 것이다. 회귀 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외로운 삶이었는지. 이 수다쟁이 삶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유검문주가 뭐라고 실토했소?”
유검문주 태조가 뭔가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검무극은 짐작하고 있었다.
“비검문에 아이들을 구해오라고 일을 주선한 사람은 전대 흑룡단주인 표기광이라고 했소.”
표기광.
검무극의 기억에 없는 인물이다. 아마 누군가에게 소모품으로 이용당하다가 버려진 인물이리라.
“그는 십여 년 전에 몸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흑룡단주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폐인처럼 생활하고 있었소.”
“누군가 그를 포섭한 거군요.”
“그런 것 같소. 비검문에 여러 이권을 챙겨줬다는 걸로 볼 때, 표 단주의 배후에 있는 자는 권력을 가진 인물이 틀림없소.”
검무극은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당신이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을 거요.”
검무극의 말을 비사인은 수긍했다. 사도맹 내 권력자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으니까. 문제는 누구냐는 점이다.
“뭐 때문에 아이들이 필요했다고 했소?”
비사인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만약 이번 일이 앞서 마교와 무림맹에 잠입했다던 모종의 조직과 관련 없고, 진짜 사도맹 내에 비밀조직이라면? 마교 소교주에게 사도맹의 비밀을 밝히는 셈이 될 것이다.
“비밀조직이라도 만든다고 했소?”
비사인이 순간 흠칫했다. 정말이지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그렇소.”
비사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검무극은 비사인의 걱정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혹 내가 말한 그 조직과 이 비밀조직이 관련 없을까 걱정되오?”
“그렇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도 모르게 준비되는 비밀조직이라면, 문제가 있는 조직 아니겠소? 내게 정보를 누출하는 만큼 당신에게 이점이 있을 거요. 그러니 좋게 생각하시오.”
원래라면 도와주겠다고 사도맹까지 따라왔는데, 정보를 숨길 생각이냐면서 검무극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상대인 자신을 배려해서 이번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 마음에 걸리면 그 부분은 은밀히 처리하시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
아직도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 이런 검무극에게 실리를 계산하고 잔머리를 굴릴 요량이었다면 애초에 그를 데려오지 말았어야했다.
“아니오, 모든 정보를 공유할 테니 도와주시오.”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앞서 태조와의 일을 공개적으로 처리했을 때 보여줬던 그 미소였다.
잘하고 있소.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그 미소 말이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이번 일의 배후를 추려가기 시작했다.
“만약 맹 내에서 비밀조직이 실제로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걸 알만한 사람은 누구요?”
“어지간한 정보는 내게도 다 들어오게 되어 있소. 한데 나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면 맹주님과 총군사가 주도한 일이겠지요.”
사도맹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언급되었다.
그들이 배후와 관련이 있다?
검무극은 일단 한 사람을 제외했다.
사도맹주. 그는 회귀 전에 화무기에게 죽은 사람이니까, 같은 편일 리 없다.
“총군사는 어떤 사람이오?”
“맹주님에 대한 충성심이 정말 강한 사람이오. 당신이 총군사를 의심한다면 시간 낭비라 말해주고 싶소. 그는 맹주님뿐만 아니라, 사도맹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깊은 사람이오.”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지만. 일단 비사인의 말대로 총군사까지 제외한다면.
“또 누가 있겠소?”
“또라니요?”
“두 사람 모르게 누군가 일을 진행했을 수도 있지 않소?”
만약 사도맹주나 총군사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면, 이번 일은 반역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검무극이 말한 그자들의 짓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유검문에 이권을 줄 만한 권력이라면 각주나 단주급 인사가 될 수 있을 테고. 장로급 인사일 수도 있을 거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 봅시다.”
“우선 표 단주부터 은밀히 조사해 보겠소.”
비사인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시간이 없소. 우리가 사도맹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번 일의 배후 역시 황룡표국주가 죽고, 유검문주까지 사도맹에 압송된 것을 알게 될 거요. 배후에 있는 자는 더는 아이들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체까지 밝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은밀히 조사하는 것은 상대에게 대비할 시간만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정면돌파 합시다. 천마신교나 무림맹, 풍천교에서 활약하던 자들의 무공실력은 거의 마존급의 실력이었소. 잠입하는 방식 역시 보통이 아니었고. 속전속결로 밀어붙이지 않으면 꼬리를 자르고 사라져 버릴 거요.”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도 동의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표 단주를 붙잡아서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다만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소. 유검문주가 실토할 때 표 단주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소. 자신이 만들 비밀조직에 사도맹의 맹운이 걸렸다고. 그가 진짜 자신이 맹을 위해 비밀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 순순히 실토하지 않을 거요. 어쩌면 자결해 버릴 수도 있을 테고.”
걱정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비사인이 한 가지 걱정을 더 했다.
“이번 일을 시킨 배후가 꼬리를 자르기 위해 표 단주를 죽일지도 모르겠소.”
그 걱정에 대한 검무극의 해결책이 있었다. 상상도 못 할 방법이었지만.
“그럼 우리가 먼저 죽입시다.”
“뭐요?”
비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검무극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만 이어졌다.
“그 꼬리 잘라서 우리가 먼저 가집시다.”
* * *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사실 거요?”
누군가의 외침에 시끄럽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연회장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그래도 한때는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대체 왜 이렇게 망가진 거요?”
표기광은 오늘도 연회장에서 무인들을 모아두고 자신이 단주일 때의 무용담을 자랑하던 중이었다. 술에 취해 너무 신을 낸 탓일까? 누군가 자신을 꾸짖고 나섰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흑룡단에 수하로 있었던 무인이었다. 그의 말처럼 자신의 명령에 잘 따랐던 인물이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뭐가? 술 취해서 옛이야기 좀 한 것이 대체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내가 맹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너희들은 이깟 이야기도 못 들어주냐?’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주위의 눈빛들도 모두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표기광은 비틀거리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그렇게 술에 안 취했는데 일부러 비틀거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비참할 것 같아서였다.
예전에는 진짜 폐인처럼 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예전 폐인이었던 삶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여전히 쓸모없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데 오늘 같은 일을 겪으니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옛 수하에게 이런 질책과 수모를 받을 의도까진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진짜 폐인이었다면 술병이라도 깨고 소리를 지르고 했을 텐데. 지금은 씁쓸한 마음으로 이렇게 돌아서고 있었다.
‘내 무공이 예전과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너희들이 이럴 수 있었을까?’
이 생각이 드는 한, 그의 씁쓸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앞으로 복면인이 앞을 막아섰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복면인이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검을 뽑아서 막으려 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이렇게 죽는구나! 절망이 그를 엄습하던 바로 그 순간.
채앵!
누군가 표기광 앞을 막아서며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기습에 실패한 복면인은 순식간에 그곳에서 달아났다.
공격을 막은 남자가 표기광을 향해 돌아섰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자 표기광은 깜짝 놀랐다.
“소맹주님?”
사도십삼랑의 무인 몇이 달아난 복면인을 뒤쫓아 몸을 날렸다.
“괜찮소?”
“덕분에 살았습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오.”
표기광은 내심 놀라고 의아했다.
“소맹주님이 왜 여기에?”
“나는 우연히 지나다가 표 단주를 구한 것이 아니오. 표 단주를 만나 뵈러 온 길이었소.”
“저를요?”
표기광에게는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복면인을 뒤쫓았던 사도십삼랑들이 돌아왔다.
“놓쳤습니다. 경공술이 대단한 자였습니다.”
하지만 표기광은 알지 못했다. 뒤쫓은 무인들의 숫자가 한 명 더 늘어서 돌아왔음을. 앞서 표기광을 공격한 복면인은 검무극이었다.
달아나는 척했다가 사도십삼랑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그들과 함께 되돌아온 것이다.
물론 지금 표기광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왜 비사인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단주를 죽이려 한 자가 누구요?”
표기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이 틀림없었다. 앞서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검은 제대로 살기를 품고 있었고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으니까. 정말 비사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었다.
“왜 저를 보러 오신 겁니까?”
“흑사단이 아이들을 납치해서 유검문에 넘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표 단주 이름이 나왔소. 유검문주에게 아이들을 구해달라고 했던 일도 이미 들었소. 비밀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표기광은 당황했다. 설마 비사인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서 이런 일을 물어볼지 몰랐으니까. 그야말로 비사인은 검무극이 말한 대로 시간 끌지 않고 정면돌파를 하고 있었다.
“앞서 자객은 이번 일을 내가 알아냈기 때문에 표 단주를 살인멸구 하려고 보낸 것 같소.”
비사인은 일부러 살인멸구라는 말을 강조했다. 검무극의 계획은 그에게 일을 맡긴 이들이 표기광을 죽이려는 것처럼 꾸며, 그의 자백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어떤 비밀조직을 만들고 있소? 나 모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요?”
표기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습격이 소맹주가 꾸민 일이라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가 그런 일을 꾸밀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표기광은 항상 이런 순간을 예상했다.
‘비밀작전이 누설되면 나를 제거하려 들 거다. 드디어 그날이 온 거구나.’
대업을 위한 희생. 그랬기에 그는 오히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표 단주가 본맹을 위해 헌신한 분이라는 것 알고 있소. 이런 대접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니 제가 표 단주님을 지켜드릴 수 있게 해주시오.”
표기광은 사도맹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리라 마음먹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알겠소. 일단은 물러가겠소. 대신 제가 수하 한 명을 호위로 붙여드리겠소.”
“괜히 수하를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그런 걱정이 든다면 수하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주시오.”
비사인은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표 단주님을 잘 지켜드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을 받고 앞으로 걸어 나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자신이 어느 몸통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꼬리를 붙잡고, 그 몸통을 찾아내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절대회귀 347화
제347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저 두 사람은 그냥 둡니까?”
사도맹 본단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랑이 물었다. 비사인은 검무극을 표기광에게 호위로 보내고 더는 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교주가 알아서 하겠지요.”
무관심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검무극이 알아내지 못하면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거란 믿음.
지금까지 묵묵히 지켜보던 일랑이었는데, 참았던 말을 전했다.
“마교 소교주가 대단한 인물이란 것은 저도 알지만, 그렇다고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결국 마인에 불과합니다.”
일랑은 마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었다. 게다가 비사인과 검무극의 관계는 비정상적이라고 해도 될 상황.
“그러겠습니다.”
일랑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기에 비사인은 순순히 그의 걱정을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가져온 편견이 한순간에 바뀔 리도 없었고.
“일랑.”
“네, 소맹주님.”
“일랑은 무인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 언제입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일랑은 당황했다.
“여쭤보신 질문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랑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월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튀어 오른 물방울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던 한순간을 떠올렸다.
“처음 사도십삼랑이 되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그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각이 난다. 이후에도 여러 일이 있었다.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큼 기뻐하진 않았던 것 같다.
“십삼랑 막내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일랑이 되었습니다.”
“사도십삼랑이 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이십구 년이 되었습니다.”
“내년에는 삼십 주년 기념 축하연을 열어야겠군요.”
일랑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한데 왜 그걸 물어보신 겁니까?”
“나는 그때가 지금인 것 같아서요. 앞으로 삼십 년쯤 지나도 내 인생에서 제일 기억나는 순간이 언제일까 돌아보면 지금일 것 같습니다.”
마교의 소교주, 정파의 후계자와 함께 마차를 타고 중원을 달렸던 지금이, 마교의 소교주와 함께 음모를 파헤치던 바로 지금 말이다. 이렇게 흥분되고 이렇게 떨리는 일들이 앞으로 또 있을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애초에 생겨 먹기를 누군가를 진심으로 믿고, 푹 빠지는 성격이 아니니까요.”
일랑은 사람 마음이란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진 않았다. 마교 소교주 때문에 발생할 부정적인 일보다, 스스로 빛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을 가지지 못해 발생할 문제도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때보다 빛나는 모습으로 비사인이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가시죠, 우리도 할 일이 많습니다.”
* * *
표기광은 자신을 따라오는 젊은 청년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청년이 싱긋 웃었다. 물론 그는 검무극이었다.
‘불쌍한 녀석, 자기가 어떤 신세인지도 모르고.’
젊고 잘생긴 얼굴이 죽기에 너무나 아까웠다.
“이름이 뭔가?”
“검연입니다. 연기 연 자를 씁니다. 만남이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거라 해서 검연입니다.”
굳이 묻지 않은 걸 설명하는 모습에서 청년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순진하군.’
자객에게 죽을 뻔해서였을까? 표기광은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말이 오늘따라 깊이 와닿았다.
“자넨, 왜 나를 지켜야 하는지 알고 있나?”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아까 그 자객이 또 나를 죽이러 올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나?”
자신의 실력을 믿는다는 듯 검무극은 자신의 검을 가볍게 툭 쳤다.
피 묻은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검이었다. 물론 표기광은 이 검이 어떤 검인지, 감겨 있는 붕대가 어떤 붕대인지 알지 못했기에 치기 어린 자신감이라 여겼다.
“소맹주 모신지 얼마나 됐나?”
“며칠 됐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사도십삼랑 옷을 입은 지 그렇게 되었으니까.
표기광이 인상을 찌푸렸다.
‘죽더라도 홀로 장엄하게 죽으려 했는데, 신출내기 혹을 달고 죽게 생겼구나.’
표기광의 집은 본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에 있었다. 집 뒤쪽으로 산이 있었고,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경치 좋은 곳에 있지만, 그의 집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언제 빨았는지 모를 이부자리조차 여름에 사용하던 것이었다. 평소 그의 삶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다.
“가끔 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곳이라 아무것도 없네.”
그는 침상에 돌아누웠다.
“날 지킬 필요 없네.”
표기광은 이 청년 혼자서 자신을 지킬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앞서 여러 명의 무인이 뒤쫓아도 잡지 못한 살수였다.
‘소맹주가 날 진정으로 걱정했다면 더 많은 무인들을 남겼겠지.’
한차례 격돌을 하면서 자객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리라. 수하들을 여럿 남겨도 다 죽을 거란 생각에 이 젊은 녀석만 남긴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곧 죽을 자신만큼이나 젊은 녀석이 한심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주무십시오.”
짤막한 인사를 하고는 검무극이 밖으로 나갔다.
표기광은 뒤척이며 잠이 들지 못했다.
아까는 정신없어서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죽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 죽음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끼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맹을 위해 자네가 필요하네.
일을 맡길 때의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래서 자넬 고른 거네. 아무도 이 작전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솔직히 기분 나빴다. 망가졌기 때문에 골랐다는 사실이. 하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충성심 때문에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무시했던 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너희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밀작전이니 말을 하진 못하겠지만, 마음속으로라도 소리치고 싶었다.
‘실컷 나를 무시해라! 나는 너희들보다 백 배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 사람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예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그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비밀이 밝혀졌다고, 이렇게 쉽게 죽여 버리려 들다니.
만약 그가 직접 와서 ‘미안하네, 어쩔 수 없네.’라는 말 한마디 해주면서 죽이려 했다면 이렇게 서글픈 마음이 들지는 않았으리라.
웃으며 기꺼이 죽어줬을 텐데. 한데 그냥 자객을 보내 말 한마디 남길 기회조차 주지 않고 죽여 버리려 들다니? 죽이려는 사실 자체가 화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을 너무 하찮게 여기는 것에 화가 났다.
‘너 때문이 아니다. 맹을 위한 충성심 때문이었지.’
결국 이렇게 스스로 위안해야 할 정도로 섭섭했다.
* * *
표기광은 자객들에게 쫓기는 꿈을 꿨다.
꿈속의 자신은 의연하지도 대범하지도 못했다. 살기 위해 산을 내달렸고, 땅을 파고 숨었으며, 냄새 나는 오물 속에도 몸을 숨겼다.
그러다 새벽에 잠에서 깼다.
언제 덮어줬는지 두꺼운 솜이불이 덮여 있었다. 호위하는 청년이 찾아서 덮어준 모양이다.
표기광은 침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검무극은 마당에 홀로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도 자지 않고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 모습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척을 느낀 검무극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깨셨습니까?”
“춥지 않나?”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하기에 한겨울 새벽바람은 아주 차가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사람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구?”
“한 번쯤은 제 생각을 해줄 것 같은 사람들요.”
표기광이 들으면 까무러치게 놀랄 사람부터 지금 평생 단 한 번 있을 휴가를 즐기고 있을 사람까지.
표기광은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가족이 어떻게 되나?”
“아버지와 형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어려서 일찍이 돌아가셨습니다.”
“부친이 자네들 키운다고 힘드셨겠군. 지금은 어떤가? 사도맹에 들어온 것 좋아하시지?”
집 나와서 내가 사도맹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특유의 비웃음을 짓고 계실 텐데.
“안 좋아하실 겁니다.”
“왜?”
“사도맹 싫어하십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표기광이 옅게 웃었다. 부모님은 사도맹에 들어가는 것을 정말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제발 무림맹에 들어가길 바랐다. 아들이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몰랐으니까.
“새벽바람이 찬데 안으로 들어오게. 거기 있어서 지킬 수 있으면, 여기 있어도 지킬 수 있겠지. 들어오게.”
검무극은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몸만 녹이고 나가겠습니다.”
“몸 녹이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지.”
그가 술을 찾아왔다. 먹을 것 하나 없는 집에 술은 있었다.
“술 좋아하나?”
“좋아합니다.”
일할 때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할 법도 했는데. 요즘 젊은 무인이라 그런가?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표기광은 검무극에게 술을 한 잔 따라주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어쩌면 아침 해를 보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창문으로 암기가 날아들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니까.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아니면 며칠 내로 죽겠지. 이대로라면 이 청년과 함께 죽게 되리라.
표기광이 먼저 술을 비웠고, 검무극도 뒤따라 잔을 비웠다.
“잔소리 같아서 말 안 하고 싶지만, 이렇게 남이 주는 술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순순히 조심하겠다고 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이 당연한 반응이 그리운 그였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누구 하나 자신을 제대로 대해주지 않았으니까. 물론 자신이 자초한 일이긴 했지만.
“내가 다치고 나자 모든 게 변했지. 내 삶도 주변도 모두 다 바뀌었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것들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하더군. 쓰레기 같은 것들이.”
“다 쓰레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쓰레기가 눈과 코를 가리는 바람에, 봐야 할 것을 못 보셨겠지요.”
표기광이 네가 뭘 안다고? 하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저는 칭찬보다는 누군가 제게 욕하고 지랄한 기억이 오래 남아서요.”
표기광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때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줬던 사람들도 있었다. 무시하는 놈들을 미워하고 분노하는 사이 다 사라져 버렸지만.
“솔직히 말하게. 소맹주가 자네에게 무슨 명령을 내렸나? 내게서 한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라고 했지?”
“네.”
검무극은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라고 시치미를 뗄 거라 여겼는데,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이 젊은 녀석은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예상을 빗나가고 있었다.
“내게서 절대 들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 포기하게.”
“단주님께서 숨기시는 이유는 맹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겠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충성하는 거죠.”
충성심이란 말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 이 생각이 자꾸 들어서일 것이다.
‘너나, 나나 버려졌다고.’
사람은 버려지고 충성심만 남아서 귀신처럼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표기광은 그 귀신을 안주 삼아 다시 술잔을 비웠다.
“내가 자네라면 달아났을 거야.”
표기광은 홀로 죽고 싶었다. 저승길에 오르는 배에도 혼자 담담하게 오르고 싶었다. 거기 먼저 올라타 있는 이 젊은 녀석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달아났겠지.”
그러자 검무극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흑룡단의 단주님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그땐 어떠셨습니까?”
“그때는 어땠냐니?”
“예전에 흑룡단이 무림맹과 신야평(莘野平)에서 수적 열세임에도 맞붙어서 크게 이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유명한 이야기잖습니까?”
표기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래, 나도 그곳에 있었다네. 한창 자네처럼 신입이었을 때였지.”
“궁금합니다. 그날의 싸움이.”
아까 연회장에서 한창 자랑하던 이야기도 바로 이 신야평 싸움이었다. 그러다 옛 수하에게 모욕을 당한 것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눈을 반짝이며 그때 이야기를 물어보는 녀석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자넨 실전에서 싸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정말 적과 마주하면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네.”
“그날도 두려우셨습니까?”
“두려웠지. 함께 있는 동기들과 선배들이 없다면 뒤돌아서 달아나 버렸을 거야. 그날은 특히 더 그랬지. 저 평원 끝에서 무림맹 놈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데…….”
그는 그날의 싸움을 들려주었다. 말을 하면서도 아까 연회장에서 자신을 몰아붙이던 수하가 자꾸 떠올랐다. 앞에 앉은 이 녀석도 속으론 지겨워하지 않을까? 속으론 늙은이의 잘난 척으로 생각지 않을까?
그건 기우였고 노파심이었다. 검무극은 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잘 들어주었다.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유심히 들으면서 질문도 했고, 또 맞장구도 쳐주었다.
미화된 활극을 들으며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 순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빛나는 순간이라는 것을.
긴 이야기가 끝났다. 검무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싸움에 함께 했다.
“고맙네. 들어줘서.”
“아뇨, 말씀해주셔서 제가 감사했습니다. 너무 멋있으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표기광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을 다치고 단주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여러 번 반복했던 이야기였다. 한데 한 번도 이런 북받치는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이내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그리고 신나게 들어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다들 지겨워했고, 예의상 들어줬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주 오랫동안 바랐던 것은 누군가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음을 오늘 깨달은 것이다.
다치고 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으니까.
* * *
표기광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침상에 잠들어 있었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이번에도 이불을 덮고 있는 걸 보니, 바깥의 애송이가 자신을 챙겨준 모양이다.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까진 살아남았구나.
침상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니 검무극은 마당에 서 있었다. 밤새 저렇게 서 있었나 보다.
“배고프지 않나?”
“배고픕니다.”
솔직한 대답에 표기광은 부스스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밥 먹으러 가세.”
두 사람이 집을 나서서 저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표기광이 불쑥 말했다.
“우린 어망에 붙잡힌 물고기 신세라네. 언제 어부가 들어 올릴지 모르는 처지지. 자네라도 빠져나가게. 아직 기회는 있어.”
그 어망 보통 어망으론 안 될 겁니다. 마정사 천라지망이 세 겹으로 펼쳐지면 모를까.
“아시잖습니까? 제 어부에게 어망을 들어 올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면 이름을 알려주셔야 한다는 걸요.”
표기광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검무극은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다른 이야기나 좀 더 들려주십시오. 선배님 이야기 더 듣고 싶습니다.”
절대회귀 348화
제348회 충성심이 들어갈 자리는?
사도맹의 저잣거리도 마가촌과 다르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웃고 떠들고 소리치는 상인들. 무인들의 기도를 제외하고 딱 이 장면만 떼놓고 보면 이곳이 무림맹 앞인지 천마신교 앞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모습이다.
“뭘 그리 신기하게 보나?”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여기 나온 지도 오랜만입니다.”
“그리 노력했으니 젊은 나이에 소맹주를 모시는 거겠지.”
표기광은 단골 반점으로 검무극을 데려갔다.
“내가 자주 오는 곳이야. 음식 맛이 괜찮지.”
하지만 그를 대하는 주인장이나 점소이는 전혀 단골을 대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몇 번 싸웠거든.”
이런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는 건 검무극이 편하게 느껴져서였다. 하루 사이에 그럴 수 있냐고? 더구나 고슴도치처럼 가시만 세우고 다니던 자신이었는데.
보다시피 그렇다. 그는 검무극이 편하게 느껴졌다.
“몸을 다친 것이 이곳 주인장에게는 큰 복이 되었군요.”
“무슨 뜻인가?”
“아니었다면 이곳이 다 날아갔을 것 아닙니까?”
자신의 말을 그렇게 열심히 들어주고, 이런 농담까지 해주는 사람인데, 어찌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 않을까?
표기광의 기분을 반영한 주문이 이어졌다. 좋은 술과 이곳 반점에서 제일 비싼 요리를 여러 개 시켰다.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죽으면 다 쓰지도 못할 돈 아닌가?”
“아껴 쓰십시오. 제가 지켜드리는 한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자신감 하난 끝내주는군.”
표기광은 젓가락을 드는 대신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 사람은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배후에 대해 나왔다.
“저는 감당 못 해도 제 어부가 있지 않습니까?”
비사인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물음에 그는 말없이 술을 마셨다.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일의 배후를 비사인이 감당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음을.
“요리가 맛있습니다.”
인근에서 알아주는 맛집이라더니, 정말 맛이 괜찮았다. 조춘배가 함께 있었다면 천마신교 대표로 사도맹 쪽 요리 맛을 평가해 달라고 너스레를 떨었을 텐데.
“술만 드시지 말고 식사도 하십시오.”
“자네나 많이 들게.”
표기광은 입맛이 없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거짓말처럼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입맛을 되돌릴 사람은 솜씨 좋은 숙수가 아니라 검무극이었다.
“흑룡단주에는 어떻게 오르신 겁니까?”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라는 말로 운을 떼면서 표기광은 다시 검무극의 눈치를 살폈다.
예의상 물은 게 아니라는 듯, 검무극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눈빛을 반짝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난 일을 전하며 점점 더 표기광은 신이 났다. 어찌 신이 안 나겠는가? 자기 인생의 가장 큰 업적을 자랑하고 있는데.
“당시 내 경쟁자는 집안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지. 그가 얼마나 정치질을 해댔는지 자넨 상상도 못 할 거네.”
“오직 실력으로 이겨내신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경험과 노력을 뒷배만 믿고 설쳐대는 자가 어찌 이기겠습니까?”
표기광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실력으로 난관을 이겨낸 인생이었다는 말, 그러고 보니 다치기 전에 단주로 있을 때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박복한 인생이어서 그랬을까? 그렇게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었음에도 그 한마디 말을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오늘 이 사람을 만나려고 지난 십 년간 그렇게 박대를 받았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검무극의 말은 그를 기분 좋게 해주었다.
“또 다른 이야기도 해주십시오.”
검무극은 표기광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낭인으로 생활할 때 정말 많이 만나본 사람들이 다쳐서 낭인이 된 무인들이었다. 단전을 다쳐 내공을 쓸 수 없게 되었거나,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린 이들.
조직에서 쫓겨난 후, 평생 칼밥을 먹고 살던 이들이 무슨 다른 일을 하겠는가? 그렇게 그들은 삼류 낭인이 되어 살아갔다.
그들은 술에 취하면 항상 자신들이 잘나가던 시절에 대해 자랑하곤 했다. 그건 자랑이 아니라 한풀이 같은 거였다.
“내 이야기가 재미있나?”
“재미있습니다.”
표기광은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애송이는 계속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자네 첫인상이 어땠는지 아나? 말이 아주 많을 줄 알았네. 인연 연자가 아니라 연기 연자라고 말하는 걸 들었을 때, 말이 많겠구나 싶었지. 한데 자네는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군.”
“아닙니다, 저 말 많습니다. 아직 덜 친해져서 혀를 숨기고 있을 뿐이죠.”
그 말이 우스웠는지 표기광이 웃었다. 죽음이 코앞에 와 있는데 웃음이 나오다니.
“과연 우리가 더 친해질 시간이 있을까?”
자조적인 물음에 검무극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가 지켜드릴 겁니다.”
“그러지 말고 지금 자네 이야기도 들어보세.”
“제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요.”
의미심장한 웃음에 담긴 뜻을 그가 어찌 알겠는가?
“고생이 많았나 보군.”
“말도 마십시오.”
검무극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자네 성격이라면 주위에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외롭죠.”
“더 외롭다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막상 만날 사람이 없다거나. 아무도 저를 챙겨주지 않으면 얼마나 서러운데요. 다들 이런 핑계를 대죠. 다른 사람이 챙겨줄 줄 알았다고. 그래서 저희 같은 사람도 마음속에 시커먼 구멍이 생기게 되죠.”
“시커먼 구멍?”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해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시커먼 구멍이 있다고요. 빠지지도 말고 오래 들여다보지도 말아야 하는 구멍이죠.”
표기광은 어린 녀석이 별소리를 다한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의 구멍을 떠올렸다. 자신에게도 있다. 너무 커서 안 빠지려고 해도 안 빠질 수 없는 깊고도 큰 구멍이.
이 녀석을 좀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을까? 살인멸구 당하는 운명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다 먹었으면 이만 가세.”
“가시죠.”
두 사람은 반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가서 좀 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지켜드려야죠.”
“언제까지 안 자고 지켜줄 수 있을까?”
정말 소맹주를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교대할 사람 정도는 함께 보냈어야지.
“자네, 혹시 소맹주에게 실수한 것 있나?”
있죠. 얼마나 그를 당황하게 하고, 놀려먹었는지 알면 기절할 정도죠.
“소맹주님께 멋진 사도를 기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이게 실수였을까요?”
표기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입 무인이 소맹주에게?”
“그럼 언제 말할 수 있습니까? 선배가 될수록 더 못 할 것 같은데요?”
이래서 눈 밖에 난 것이다. 이 반짝이는 눈빛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자신보다 더 빛나는 모습에.
그렇다고 이렇게 괜찮은 녀석을 버리다니.
그러다 표기광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녀석? 자신의 말을 들어줬다고 벌써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표기광은 그만큼 자신이 외롭게 살아왔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빠진 채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그들 앞으로 네 명의 복면인이 앞을 가로막았다.
비사인과 약속된 일이 아니었으니.
이번 일의 배후가 표기광을 살인멸구 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이다. 드러내는 기도로 볼 때 청부 살수들이었다.
표기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 순간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운명이란 놈은 이렇게 고약하다. 가장 기분 좋은 순간에 죽음을 선사하다니. 며칠만 더 있다가 오지.
그의 시선이 옆에 서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이 녀석 이야기도 좀 듣고 싶었는데. 아직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미안했다.
‘괜히 나 때문에 이 젊은 사람이 죽는구나.’
표기광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어부가 그물을 걷어 올릴 모양일세.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진심 어린 사과에 검무극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제 어부가 당기면 모를까 그쪽 어부 손에는 끌려 올라갈 생각 없습니다.”
동시에 살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두 사람은 검무극에게 다른 둘은 표기광에게 달려들었다.
표기광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에, 어설픈 저항은 하지 않았다. 의연하고 멋있게 삶을 마감하는 거다.
쉬이이익.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푸욱!
자신의 몸이 찔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느새 검무극이 자신을 막아서며 한발 먼저 상대를 찌른 것이다.
또 다른 검이 등 뒤에서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앞서 검무극을 죽이려 달려들었던 자가 목표를 바꿔 공격한 것이다.
‘이번에는 죽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몸이 당겨졌다.
검무극 쪽으로 끌려가면서 날아든 검을 피했다.
푸욱!
검무극의 검이 뒤를 찔러 온 살수의 심장을 꿰뚫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검무극의 동작은 정말 빠르고 깔끔했다.
남은 두 살수가 표기광을 향해 동시에 날아들었다. 자신이 죽더라도 표기광만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동귀어진을 각오한 공격이었다.
‘아! 이번에는 정말 죽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두 공격은 빗나가며 허공만 가로질렀다. 검에 찔리기 직전, 표기광이 알 수 없는 힘에 엎어지면서 공격이 빗나간 것이다.
그 일방적인 공격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왼쪽 살수의 목을 찌른 검무극의 검이 순식간에 뽑혀 나오며 오른쪽 살수의 심장을 찔렀다. 이 연속된 동작은 그야말로 약속 비무를 펼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물론, 쓰러져 있던 표기광은 이 예술 같은 한 수를 보지 못했다.
‘또 살았어?’
표기광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을 막아선 네 복면인은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제가 지켜드린다고 했잖습니까?”
바로 그때였다.
쉭쉭쉭쉭!
나무 위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검을 휘둘러 암기를 쳐내며 표기광에게 소리쳤다.
“저 나무 뒤로 뛰십시오!”
표기광은 검무극과 함께 정신없이 달려서 거목 뒤로 몸을 숨겼다.
검무극은 검을 내밀어서 검날에 비친 적을 확인했다.
“동쪽 나무 위에 셋입니다. 그 아래 수풀 뒤에도 두 명 숨어 있고요.”
물론, 검무극이 원래 실력을 발휘하면 순식간에 이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해치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표기광에게도 적에게도 사도십삼랑의 무인이었으니까. 실력을 감추고 있던 막내, 딱 이 정도로 실력 발휘 중이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날 두고 가게.”
표기광은 어제 만난 풋내기를, 아니 실력은 풋내기가 아니었으니, 하루의 인연도 되지 않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넷이나 해치웠으니 소맹주도 이해해 줄 거네.”
그때 나무 위에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쉬이익!
전혀 생각지 못한 은신이었기에 이번에야말로 표기광은 죽는구나 생각했다.
‘진짜 죽는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자신의 머리에 박히기 직전, 검무극이 살짝 자신을 잡아당겼다.
떨어진 검이 귓가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어깨에 박힐 텐데? 라는 생각이 들던 그때.
푸아악!
뜨거운 피를 뿜어내며 기습한 살수는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대체 어떻게 그를 처리한 것인지 표기광은 이번에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또 살았어? 대체 어떻게?’
뭐라 묻기도 전에 검무극이 다시 그를 잡아끌었다.
“저기 바위 뒤로!”
표기광은 검무극과 함께 달렸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혼자 몸이 아니라 검무극이 있으니, 안 달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피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는데.
팍팍팍팍팍!
달리는 두 사람의 발아래로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아무리 비도술이 뛰어난 살수라도 검무극이 데리고 뛰는데 하나라도 맞출 수 있겠는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두 사람은 무사히 바위 뒤로 몸을 감췄다.
“날 두고 가라니까!”
“상대가 살인멸구 하려는데 왜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자넨 내 마음을 몰라.”
바위에 기댄 채 검무극이 그를 쳐다보았다.
“맹에 대한 충성심 때문입니까?”
당연히 표기광은 그렇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시선이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시체를 향했다.
“저자들은 청부 살수들입니다. 세상에 어떤 맹이 일을 시킨 수하에게 청부 살수를 보냅니까? 대체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충성심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
그때 또 한 명의 살수가 바위를 타고 넘어왔다.
서걱!
검무극의 그의 목을 베고 있을 때.
뒤쪽 나무 뒤에서 튀어나온 살수들이 암기를 던졌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십여 개의 암기를 보며 표기광은 이제 드디어 진짜 끝장이라 생각했다.
‘부디 자네라도 꼭 살게!’
푹푹푹푹푹푹푹!
살이 찢기는 소리에 눈을 뜨자 어느새 검무극은 바위를 타고 넘어온 살수를 죽인 후, 그 시체를 방패 삼아 자신 앞에 서 있었다. 날아든 암기는 모두 그 시체에 박혔다.
‘뭐야, 또 살았어?’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검무극은 그를 잡아당기며 산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뛰십시오!”
그 뒤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살수들이 우르르 추격하기 시작했다.
검무극과 함께 정신없이 내달리며 표기광은 이 생각뿐이었다.
‘나, 왜 자꾸 사냐고?’
절대회귀 349화
제349회 나는 허락한 적 없다.
비사인이 긴 복도로 들어섰다.
맹주전으로 들어가는 길의 좌우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늑대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다.
이 복도를 지날 때면 텁텁하고도 숨 막히는 특유의 사기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침입자가 들어오면 저 강철 늑대들이 움직여 자신의 몸이 갈기갈기 찢길 때까지 상대의 목을 물어뜯는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맹주전 끝에 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평범한 체구였다. 마르지도, 그렇다고 뚱뚱하지도 않은 그 뒷모습은 저자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비사인은 안다. 이 무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이란 것을.
사도맹주 백자강(伯孜强).
사도제일고수이자 사파 무림의 절대자.
비사인은 백자강의 제자였다. 백자강은 따로 혈육을 두지 않았다. 혈육이 있으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자신에게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다는 의미기도 했다.
비사인은 긴장한 채 계단 아래까지 걸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맹주 앞에 서면 마음이 위축되고 긴장된다.
“비가 올 것 같구나.”
백자강의 목소리가 맹주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올겨울 들어 첫 비겠군요.”
평소라면 잘 다녀왔다고 경직된 인사를 했을 비사인이었다. 한데 오늘은 맹주의 말을 받아서 대답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검무극의 영향이었다. 사람을 제대로 보라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맹주를 지금과는 다르게 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다른 반응은 또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올라오너라.”
비사인은 계단을 올라가서 사도맹주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본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자신을 불러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와 나란히 선 후에야 비로소 정중히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맹주님.”
백자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단춧구멍처럼 작았다. 정말 점이 찍힌 것처럼 작은 눈. 비사인은 한 번씩 생각한다. 저 눈이 언젠가 휘둥그레 커질지도 모른다고. 눈을 숨겨뒀을 거라고. 눈은 그만큼 작았다.
그래서 눈을 보고 그의 감정을 읽기가 쉽지 않았지만, 역으로 맹주는 저 작은 눈으로 상대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흑사단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 좋았다. 비사인은 들을 때마다 항상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네, 흑사단주와 수뇌부 일부를 제거했습니다.”
“이유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솔직히 대답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흑사단이 아이를 납치하고 악행을 저질러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정답이 아니다. 비사인은 사도맹주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게 정답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비사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말했다.
“놈이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그나마 보이던 작은 눈이 사라지며 백자강은 큰소리로 웃었다. 눈은 작지만 입은 또 유난히 컸다. 그래서 그가 껄껄 웃으면 정말 크게 웃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설령 맹주가 자신이 왜 그들을 처리했는지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답은 이렇게 해야 한다. 사부는 이런 사람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외부 평판을 살피면서 흑사단을 단계적으로 흡수할 작정입니다.”
백자강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도맹이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근원에는 마교가 있었다.
“검우진 그자는 반드시 무림일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거다. 우린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
그는 당대 천마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릴 먼저 칠 거다.”
“왜 무림맹이 아니라 우리입니까?”
“그 싸움에 무림맹은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
백자강이 예상하는 무림맹의 반응은 이러했다.
“그들은 우리와 마교가 서로 싸우다 몰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절대 끼어들지 않을 거다. 설령 도울 마음이 있다 해도 우리와 손을 잡겠느냐?”
사파를 돕는다는 결정에 수많은 정파 원로가 반대하고 나올 것이고, 무림맹주가 원하더라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릴 줄 알면서도, 절대 우릴 돕지 않을 거다. 나중에 그 이까지 다 뽑혀 나가도, 잇몸을 오물거리며 협의 타령을 할 자들이다.”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백자강의 판단은 냉철했다.
“만에 하나 마교와 무림맹 사이에 전쟁이 나면 반드시 무림맹을 도와야 한다. 마교는 반드시 무림을 독식하려 들 테니까. 네가 맹주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백자강은 천마신교를, 그리고 검우진을 위험하게 여기고 있었다.
맹주의 강함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 데 있다고 비사인은 생각했다. 맹주는 사도맹의 힘을 결코 과대 포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교와 무림맹보다 한 수 아래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비사인은 당대 사도맹의 강함은 맹주의 이 철저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고 믿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맹주가 되었을 때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세대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죠.
현실 인식과는 별개로 백자강 역시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지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작은 눈으로 사도맹이 아니라 무림 전체를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 결정적 한 방을 위해 참고 또 참고 있다는 것을.
“한가지 여쭐 게 있습니다.”
이번 일을 처리하는데 비사인이 선택한 방법은 정면돌파였다.
“본맹에 제가 모르는 비밀조직이 키워지고 있습니까?”
“그건 왜 묻느냐?”
“흑사단이 유검문을 통해 본맹에 납치한 아이들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본맹에서 허가한 조직이 아니라면, 누군가 사조직을 키우고 있는 거라 생각됩니다.”
큰일이라면 큰일인데 백자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비사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비사인은 맹주의 그 작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사기를 피하지 않았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 그는 맹주고 나는 그의 후계자다. 예전이라면 감히 쳐다보지 못했을 그의 눈빛을 최대한 담담히 받아들였다.
“요즘 달라졌구나.”
비사인은 자신의 변화를 숨기지 않았다. 세상에 딱 두 사람에게만큼은 마음을 숨길 자신이 없다. 검무극과 눈앞의 맹주에게는.
“이번에 출맹해서 마교 소교주와 멸마대주를 만났습니다. 그들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지지 않으려면 저도 노력해야지요.”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의 태도가 흡족했을까? 맹주의 큰 입에 큰 미소가 지어졌다.
백자강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그는 몰려드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비로소 첫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그런 조직 허락한 적 없다.”
* * *
쏴아아아아아!
검무극과 표기광은 수풀에 숨어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수들을 피해 정신없이 달리다 잠깐 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네 실력이 뛰어나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지켜드린다고요.”
자신감 하난 끝내준다 여겼는데, 그냥 자신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는 소맹주님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살수들에게 쉽게 당하지 않습니다.”
살수란 말에 새삼 아까 검무극이 한 말이 표기광의 마음에 떠올랐다.
―세상에 어떤 맹이 일을 시킨 수하에게 청부 살수를 보냅니까? 대체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충성심이 들어갈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표기광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에 검무극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자가 비밀을 안 지키면 죽이겠다고 경고했습니까?”
표기광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이 가장 섭섭한 지점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자가 왜 단주님을 골랐는지 짐작이 됩니다.”
“왜지?”
“보통 사람이라면 펄쩍 뛰고 분노할 일인데, 이 살인멸구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계시잖습니까? 그자는 알았던 거죠.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요.”
만약 그래서 자신을 고른 것이라면?
표기광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쉿하고 시늉하더니 표기광의 뒤쪽 우거진 풀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시체가 앞으로 쓰러졌다.
“살수 조직 하나가 통째로 왔습니다. 단주님이 소맹주님과 접선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겁니다. 소맹주께서 몇 사람을 호위로 붙였든 반드시 단주님을 없애겠다는 의지인 거죠.”
다시 말해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는 의미. 직접 나서지 않은 이유는 자신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일 테고. 이 살수 조직을 아무리 족쳐도 그의 흔적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직 하나가 다 동원되었음에도 자네 혼자 지키고 있는 나를 죽이지 못하고 있군.”
“그런 셈이죠. 가시죠, 이동하셔야 합니다.”
두 사람이 다시 산길을 달렸다.
또 다른 살수들이 두 사람을 덮쳐왔다. 표기광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들은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살수들을 의도적으로 찾아내서 그들을 제거하고 있었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훈련을 받은 그들은 두려움을 몰랐다.
하지만 그 어떤 용기도 하늘과 땅보다도 먼 실력 차이를 넘어서진 못했다. 그 어떤 기습도 통하지 않았다.
살수들을 상대하는 검무극의 수법이 너무 평범해서 표기광의 눈에는 오히려 살수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렇게 가볍게 휘두른 것 같은데 왜 못 피하는 걸까? 살수가 저런 단순한 발차기를 허용해서 턱이 돌아간다고?
하지만 자신을 공격해올 때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는 언제나 이런 외침을 불러왔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다!’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외쳤을지 모를 그 말이 또 터져 나왔다.
푸욱!
튀어나온 검이 표기광의 눈앞에 있었다. 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검은 살수의 검이 아니었다. 그의 뒤통수를 뚫고 나온 검무극의 검이었다.
급하게 검을 던져서 그를 죽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 어떤 수법보다 뛰어난 비검술이 발휘된 한 수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이제 살수들은 다 처치한 것 같습니다.”
표기광은 깜짝 놀랐다. 뛰라면 뛰고, 숙이라면 숙이고, 당기면 끌려가고, 밀면 자빠지고. 이러다 보니 싸움이 끝나 있었다.
끝났다고? 그럼 나 살아남은 거야?
실감이 가지 않은 얼굴로 표기광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쏴아아아아아!
검무극은 내리는 비에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있었다.
문득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신나게 맞장구치며 자신의 말을 들어주던 막내 무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덤덤하게 피를 씻어내는 모습이 도산검림을 헤치며 산전수전 다 겪은 진짜 무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어딘지 모르게 그가 외롭게 보였다.
“가시죠.”
“어디로?”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하지만 검무극은 정확히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그놈에게요. 가서 따져야죠. 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냐고요. 마무리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마무리 지어야지, 왜 살수 따위를 보내냐고요. 나를 왜 이렇게 우습게 보느냐고 따져야지요.”
표기광이 하고 싶은 말을 검무극은 대신 말하고 있었다.
“저는 이번 일이 맹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간 흠칫했지만 표기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 없네.”
이제 때가 되었기에 검무극은 아껴두었던 결정적인 말을 건넸다.
“사도맹주가 허가한 일이었다면 절대 청부 살수를 보냈을 리 없습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도맹주가 제일 싫어하는 자들이 청부 살수들이라고요.”
“!”
순간 표기광은 과거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흑룡단주 시절 수하들과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맹주께서 살수들을 정말 싫어해서, 당대 사도맹에서는 살수 출신이 출세하는 경우가 없다고. 심지어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표기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잊고 있던 일이다. 다치고 단에서 물러나고, 폐인처럼 살고. 그러는 중에 다 잊고 살았던 일이었다.
‘그 사람이 맹주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라면, 살수를 동원하지 않았을 텐데?’
강력한 의문에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의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이번 일 맹주님도 알고 계시는 작전이오?
―당연하지요. 그렇기에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이유기도 하오.
그때는 당연히 맹주도 안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이 사람이 나선 것이겠지 하고. 그랬기에 소맹주도 개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소맹주에게도 알리지 않은 비밀작전이었으니까.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
마음에 떠오른 물음의 답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벗어나서 자신을 무시했던 것들에게 ‘나 이렇게 대단한 일 하고 있다, 이 머저리들아!’ 이런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맹주님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면 이 일은 반역입니다.”
표기광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놈은 자신을 반역으로 끌어들였다는 의미였으니까. 표기광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진실인지 저와 함께 확인해 보시죠.”
어제만 해도 진실은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 여겼던 표기광이었다.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렇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겠나?”
“어차피 죽음도 각오하셨잖습니까?”
그래, 맞다. 오늘 몇 번이나 이제 죽는구나, 하고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한 번 더 감아보는 거다.
표기광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부터 우린 물고기가 아닙니다. 어부가 돼서 저와 함께 어망을 던져 보시죠. 그래서 지금껏 어부처럼 행세했던 그 물고기가 뭐라 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
절대회귀 350화
제350회 살인멸구 당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서.
표기광은 이제 이름을 밝힐 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배후의 이름이 나왔다.
“날 찾아왔던 사람은 황석경(黃夕景)이었네.”
“황석경이 누굽니까?”
“사맹관(邪盟關)의 교관이네.”
정말 의외의 사람이 나왔다.
사도맹에 입맹하면 한동안 사맹관이란 곳에 들어가서 맹도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어느 조직으로 들어갈 것인지 배정받게 된다.
그곳에서 본격적인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당연히 실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정예조직으로 간다. 황석경은 바로 그곳의 교관이었다.
정말 뜻밖이었다. 검무극은 배후가 최소 단주급에서 각주, 혹은 장로급 인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무인들을 시험하고 배정하는 교관이라고?
그래서 오히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일개 교관 말을 믿은 겁니까?”
“그는 일개 교관이 아니네. 실력도 좋아서 황 교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네. 그러니 내가 믿었지.”
사실 사맹관 교관이기에 더 믿었던 거였다. 비밀조직을 만드는 일에 사맹관 교관이 왠지 모르게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또 사맹관 교관이니 당연히 맹의 허락을 받았다고 믿은 것이었고.
표기광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름을 알아냈으니 이제 자네는 어망에서 빠져나가게. 가서 배후가 누군지를 소맹주께 전하게. 그리고 나는 벌을 달게 받겠다고도 전하시게.”
반역에 가담한 죄가 인정되면 남은 생은 뇌옥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표기광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세게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다 끝이구나.’
후련하면서도 왠지 화가 났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놀아난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복수할 수도 없다. 자신의 손으로 황 교관을 때려잡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자도 하수인에 불과할 겁니다.”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유검문주가 그랬습니다. 맹에서 이권을 챙겨 받았다고요. 황 교관이 실력 좋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유검문의 이권을 챙겨줄 만한 권력자는 아닙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이 젊은 무인은 어떻게 이렇게 제때 파악해 내는 걸까?
“그를 통해 배후가 누군지를 알아내야죠.”
황 교관의 존재를 아는 것이 대단한 비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 역시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만약 그렇다면 황 교관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게 밝혀지면, 그에게도 살수가 가려나?
“문제는 또 있습니다.”
검무극이 놓치고 있던 부분을 확인했다.
“황 교관이 단주님께 일을 맡겼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직접 쓴 밀서가 있다거나, 누가 있는 자리에서 명령을 내렸다거나.”
표기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이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럼 황 교관은 절대 그런 일을 시킨 적 없다고 딱 잡아뗄 겁니다.”
그럴 것 같았다. 이렇게 살수까지 보내 죽이려 했다. 이미 안면몰수 했는데, 무슨 양심이 있어 솔직히 말하겠는가?
반면 자신은 폐인처럼 살아온 사람이다. 황 교관의 말을 믿겠는가? 자신의 말을 믿겠는가? 겪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그럼 결국 못 잡는 건가?”
“아뇨, 잡아야죠.”
“어떻게?”
“그자 입에서 이번 일을 시켰다는 말이 나오게끔 해야죠. 배후가 누군지도 알아내고요.”
“그러니까 어떻게?”
검무극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소맹주에게 끌려가면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그럴 것이다. 맹의 허락 없이 사적인 조직을 키웠다면 참형에 처할 텐데. 그가 입을 열 까닭이 없다.
검무극은 말없이 표기광을 쳐다보았다.
“자네 설마? 우리 둘이 만나자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죠.”
깜짝 놀랄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단주님 혼자 만나셔야죠.”
표기광은 깜짝 놀랐다.
“혼자 만나지 않으면 그는 절대 사실을 실토하지 않을 겁니다.”
“나를 죽이려 들 텐데?”
“제가 숨어 있다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표기광은 검무극이 이런 제안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말 이 젊은 무인은 한 번도 자기 예상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자네가 황 교관의 눈을 피해 숨어 있다가 그가 나를 죽이려 할 때 나타나서 구해주겠다는 의미인가?”
“그렇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번 일을 시켰다는 말이 나오게 하셔야죠. 배후까지 밝히면 더 좋고요.”
표기광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황 교관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제법 멀리 있어야 할 텐데. 그가 갑자기 자신을 죽이려 할 때 지켜줄 수 있을까?
그러다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설령 황 교관에게 죽으면 어떤가? 어차피 오늘 죽었어야 했을 목숨인데.
그래, 그놈에게 따져 물을 기회가 생긴 거다. 어떻게든 실토하게 해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거다. 나 혼자 가진 않는다.
표기광은 잠시 검무극을 응시했다.
어제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그에게 배후를 밝히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몇 번이나 자기 목숨을 구하게 될 줄도 몰랐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 고마웠다.
“좋네. 그렇게 하세.”
그의 각오를 하늘도 알았는지 내리던 비가 그치고 어느새 해가 비치고 있었다.
“자, 가세.”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내려가는 길은 이쪽입니다.”
표기광이 방향을 바꿔 이쪽으로 걸어왔다.
머쓱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검무극이 활짝 웃었다.
‘그리 밝게 웃지 말게나. 그러니까 죽는 것이 두려워지지 않나?’
* * *
황석경이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표기광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거처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먼저 그를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보면 깜짝 놀라겠지.
휘익.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그는 나무 위에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낚아채서 날아오른 것이다. 그 사이 아혈까지 제압당했다.
자신을 제압해서 나무 위로 올라온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는 쉿, 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그였는데.
‘한데 갑자기 왜?’
곧이어 그곳으로 황석경이 날아올랐다.
두 사람이 있던 나무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석경이 다시 뛰어내린 후 자신의 거처로 걸어갔다.
검무극과 표기광은 이미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황석경의 거처에서 충분히 멀어지고 나서야 검무극은 표기광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왜겠는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검무극은 저 멀리서 걸어오는 황석경을 신안술로 보았다. 그리고 황석경이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는 일개 하수인 따위가 아니다.
십이지왕 중 삼왕(三王).
투왕(鬪王) 천야(千夜).
십이지왕이 무림을 지배하던 시절, 투왕은 싸움의 신이라 불렸다. 싸우는 것을 좋아했고, 지는 것을 싫어했다. 수많은 고수가 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싸움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다. 무공실력이 십이지왕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라고 했다. 누군 첫 번째라 했고 누군 세 번째라 했다. 그의 꿈이 화무기를 이기는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투왕이 황석경이란 이름으로 사도맹에서 일개 교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음모가 진행 중인 것이다.
“저자는 어망으로 잡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표기광의 관심이 향한 곳은 이제 황석경이 아니었다.
“자네, 사도십삼랑 아니지?”
검무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 사람이 누군지 보다 자네가 누군지가 더 궁금해졌네.”
“제 신분을 누설하면 살인멸구 당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살인멸구 당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서.”
한차례 너스레를 주고받은 후 검무극은 솔직한 신분을 밝혔다.
“나는 마교 소교주 검무극입니다.”
순간 표기광은 얼어붙었다. 원래라면 에끼,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않아야 하는데.
“정말 마교 소교주군요.”
그냥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마교 소교주라는 것을. 지금까지의 특별함이 그 한마디 소개로 모두 이해가 되었다. 왜 자신이 죽지 않았는지도.
뒤이어 밀려드는 충격.
자신의 말을 그렇게 잘 들어주었던 사람이 마교 소교주라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마교 소교주라고?
“마교 소교주께서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대 소맹주와 이번 일을 함께 처리하고 있습니다.”
신분을 밝혔음에도 여전히 검무극은 예를 갖춰 그를 대했다.
“이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마교로 끌려가는 건가? 신분을 알게 되면 살인멸구 당한다는 것이 농담이 아니었나?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죽을 생각만 했지 이후 삶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자 표기광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것이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일들을 모두 다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제 죄가 너무 커서…….”
맹에 반역을 한 자들을 도운 셈이었으니까.
검무극이 빤히 그를 쳐다보다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혹시 어깨 잘 주무르십니까?”
* * *
“으아아아아아!”
검무극에게 업힌 채 비명을 지르다 보니 어느새 어딘가에 도착했다.
십성 대성을 넘어 이제 십일 성에 이른 검무극의 쾌속보였다.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주위 풍경을 알아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마치 절벽에서 떨어지는 긴장감이 계속되었다.
‘이건 꿈이야.’
정말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없었으니까. 그것도 사람을 업고.
그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달리는 와중에도 내력을 발출해서 업혀 있는 그가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보통 사람은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장원이었다.
현판에 적혀 있는 이름은 극락원이었다. 장원 원자가 아니라 소원할 때의 원자를 쓴 극락원.
이곳은 바로 예전 서대룡이 다쳤을 때 왔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에서 검무극은 만독불침이 되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건물 안에서 노파가 걸어 나오며 물었다.
“이번에는 또 누굴 업고 온 건가?”
이곳의 주인인 충의였다. 그녀는 여전히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어깨가 아픈지 손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의원님! 보고 싶었습니다.”
검무극이 달려가서 그녀를 번쩍 안았다.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이냐?”
“뭐하긴요. 반가워하는 중이죠.”
오랜만에 보는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안 본 사이 실력이 더 늘었구나.”
무공에도 조예가 깊은 그녀는 검무극의 성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우리 누님 덕분입니다.”
누님이란 너스레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검무극이 너무 반가웠다.
겉으로 표 내진 않았지만, 검무극의 반가움보다 그녀의 반가움이 더욱 컸다.
“저 우울한 중생은 누군가?”
얼굴만 봐도 표기광의 인생이 그녀에게는 보이는 모양이다.
검무극이 표기광을 소개했다.
“사도맹 흑룡단주를 지냈던 표기광이란 분입니다. 자, 인사드리시오. 이 아름다우신 분은 충의십니다.”
표기광도 충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충의시라면? 벌레를 잘 다룬다는 신의 아니십니까? 벌레를 이용해서 온갖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낼 만큼 의술이 뛰어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소문 속의 인물인 줄 알았는데 실제 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데 검무극은 왜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걸까?
“다른 소문도 들었을 텐데요?”
검무극의 물음에 표기광은 충의의 눈치를 보며 차마 말을 못 했다.
대답을 대신한 사람은 당사자인 충의였다.
“돈을 너무 밝혀서 돈벌레라 불린다지?”
검무극이 진실을 말해주었다.
“그 돈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후원하셨습니다. 식량을 보내고 학당에 보내고, 무관에 보내고. 그렇게 살아갈 길을 마련해서 세상에 내보내시죠. 평생을 고아들을 위해 살아오신 분입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표기광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한데 왜 여길 데려온 겁니까?”
“어깨 잘 주무르신다면서요? 충의 어르신이 매번 팔다리가 아프셔서 어깨 주물러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충의의 제자가 되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의미였다.
“수습 기간 거쳐보고 아니다 싶으면 벌레 먹이로 주십시오.”
“젊은 놈으로 안 데리고 오고?”
“요즘 젊은 녀석들이 이런 촌구석에 붙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분 보기보단 젊습니다.”
표기광은 내 얼굴이 어때서! 라고 차마 따지지는 못했다. 살면서 노안이라는 말을 몇 번 들었으니까.
충의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이리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봐라.”
표기광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안쓰러울 정도로 작고 가냘픈 뼈가 만져졌다.
어이구, 시원하다 하면서 충의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나를 잊지 않았군.”
“어떻게 의원님을 잊겠습니까?”
그녀는 벅찬 감격을 느꼈다. 그저 스쳐 간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와준 것이다. 이렇게 제자까지 데리고. 잊히는 것이 왠지 서러운 요즘이었는데.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밥이나 먹고 가.”
“이번 상대가 만만찮아서요. 어쩌면 이번에는 제가 업혀 올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다치지 마라. 충의의 걱정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자네가 그 정도면 상대는 이미 저승길에 올랐겠지.”
“역시! 제 진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은 신의님 뿐이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표기광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루아침에 배후를 실토하고, 또 갑자기 충의의 제자가 되다니. 인생이 이렇게 막 바뀌어도 되는 건가?
그러다 문득 앞에 서 있는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검무극은 맑고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마도든, 사도든 아이들만큼은 지켜줘야겠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표기광은 알 수 있었다. 왜 그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충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데려왔음을.
충의는 평생 고아들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반대로 자신은 흑사단이 납치한 아이들을 사도맹에 보내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이 직접 저지른 죄는 아니지만, 그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곳에 데려온 것이다. 충의를 모시면서 그 죗값을 갚으라고. 이곳에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라고.
어둑하고 깊은 뇌옥에서 남은 생을 보내야 할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어야 할 인생이었는데.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을 휘몰아쳤다. 그 감정이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뚝.
눈물이 떨어진 것이다. 살면서 눈물이라곤 흘려본 적 없는 그였기에 표기광은 당황했다. 다쳐서 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그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울지 않았다.
한데 지금은 눈물이 났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기회를 주나? 남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머저리 같은 내가 뭐라고.
놀란 그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을 때, 눈앞에 서 있던 검무극은 어느새 저 하늘 끝에 점이 되어 있었다. 고맙다는 말도 전하기 전에 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마지막 이 순간 떠올랐다.
저는 만남이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겁니다.
‘고맙습니다, 소교주님.’
앞서 흘렸던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 곳은 충의의 목덜미였다.
그 뜨거움을 느끼며 충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놈아, 벌레 먹이가 되기 싫으면 더 세게 주물러라!”
절대회귀 351화
제351회 숨 쉬는 것 빼곤 다 거짓말.
비사인은 항상 가는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주위는 사도십삼랑이 여기저기 흩어져 비사인을 호위하고 있었다.
무인 하나가 와서 일랑에게 뭔가를 보고하고 떠났다.
일랑이 다시 그 내용을 비사인에게 보고했다.
“소교주 쪽 보고입니다.”
앞서 검무극과 표기광이 살수들에게 공격을 받고 쫓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 보고를 받고도 크게 긴장되지 않은 것은 지키는 사람이 검무극이기 때문일 거다. 과연 결과 역시 예상대로였다.
“살수들은 전멸했습니다.”
일랑이 구체적인 내용을 보고했다.
“시체를 확인해 보니 이번에 동원된 살수 조직은 구천회(九泉會)였습니다. 동원된 살수들이 전원 사망하면서 그들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비사인이 화가 나는 것은 표기광을 죽이려 해서가 아니었다. 표기광을 자신이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려 했다는 점 때문이다.
표기광의 호위를 맡은 검무극은 사도십삼랑의 복장을 입고 있었다. 다시 말해 상대는 엄연히 자신의 수하가 지키는 걸 알면서도 살수를 보낸 것이다.
‘감히 내 수하까지 죽이려 했다?’
이건 소맹주인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고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누가 청부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까?”
일랑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구천회는 청부 대상을 가리지 않을뿐더러 청부자 뒷조사를 안 하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수 쪽 세계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규모를 중원에서 손꼽는 조직으로 크게 키울 수 있었고.
“소교주는요?”
“함께 있던 표기광과 함께 행적을 감췄습니다.”
검무극이 살수들에게 당했을 리는 없으니, 어딘가 안전한 곳에 표기광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을 이용한 조직을 사도맹주가 만들라고 명령한 게 아니란 것이 밝혀졌으니, 이제 검무극이 가져올 정보가 중요해졌다.
“소교주에게만 맡길 게 아니었습니다.”
일랑의 말에 비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을 굳이 일랑에게 설명하는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으니까. 검무극과의 우정은 어쩌면 평생 홀로 마음속에서만 가져가야 할 우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바로 그때 제 말만 하면 나타나는 호랑이가 비사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런 소리 마시라, 난 내 친구 소교주를 믿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셔야지.
비사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런 전음이 날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그였다.
―전음 보내지 말고 이리 오지 그랬소? 당신도 어엿한 사도십삼랑인데.
자주 들을 수 없는 비사인의 농담이었지만, 지금은 농담으로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그러고 싶소만 당분간은 그럴 수 없소. 표기광이 당신과 접촉한 걸 알자 살수를 보냈소. 이제 표기광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으니, 저쪽에선 당신을 주시하고 있을 거요. 혹 비밀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지금도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비사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앞서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벌였던 싸움과는 또 다른 성격의 싸움이다. 상대의 도발에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따 절벽에서 봅시다.
―그럽시다.
―미행 조심해서 오시오.
검무극의 기척이 사라지자 비사인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먹지 않는 반찬들을 깨끗이 다 비운 상태였다.
* * *
사맹관 연무장을 수십 명의 무인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기본 체력에만 의지해서 달렸다.
한계를 넘어선 계속된 달리기에 쓰러지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흑룡단 지원했지? 여기서 포기하면 흑룡단에 못 들어간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헐떡이는 무인을 내려다보며 말한 사람은 교관 황석경이었다.
지망하는 조직에 들어가려면 무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에 걸맞은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도 필요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원하는 조직보다 낮은 곳에 배정받게 되는 것이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황석경이 그의 귓가에 뭔가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다 죽어가던 사내는 다시 일어나서 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인 차 교관이 그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이번에는 뭐라 말해준 건가?”
그러자 황석경이 웃으며 말했다.
“나약하게 굴면 고향에 있던 정혼녀를 딴 놈에게 빼앗기게 될 거라고 했네.”
차 교관이 감탄했다.
“역시. 이번에 입맹한 녀석들 인적 사항도 다 외우고 있구먼.”
황석경이 최고의 교관으로 이름을 날린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점이었다. 그는 달마다 들어오는 수십 명이나 되는 신입 무인들에 대해 다 알고 있었다. 어디 출신이고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며 성격이나 취미, 그리고 어떤 곳을 지원했는지 모두 외우고 있었다.
그가 투왕으로 이름을 날린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였다. 똑똑했기에 그만큼 강한 것이다.
“이보게, 황 교관.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월봉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적당히 해.”
황석경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차 교관은 알지 못했다. 교관으로서의 이런 모습이 그의 본성과 얼마나 다른지, 숨 쉬는 것 빼곤 다 거짓말이고 연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훈련이 끝났을 때 앞서 귓속말을 들은 무인이 달려와서 고마움을 전했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해냈습니다. 감사합니다.”
황석경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출세해서 금의환향해야지.”
“노력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그는 정말 후배를 아끼고 좋아하는 교관처럼 보였다.
하지만 훈련장을 벗어나는 순간 그는 교관이 아니라 투왕이 되었다. 어디선가 전음이 날아들었다.
―살수들이 모두 죽고, 표기광은 사라졌습니다.
의외의 결과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사도십삼랑 하나가 지킨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한데 살수들이 모두 죽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투왕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뭔가 이번에 예감이 좋지 않아서 자신의 사람을 쓰지 않고, 외부 살수를 동원했다.
―소맹주가 함정을 팠다? 만약 그런 거라면 이미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군.
투왕의 판단력은 정확했다.
―그들을 준비시켜라.
―목표는 누굽니까?
그리고 사파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비사인.
* * *
늦은 밤, 비사인이 도착했을 때 검무극은 절벽에 걸터앉아 있었다.
“표기광은 어디에 있소?”
비사인이 검무극 옆에 나란히 앉으며 물었다. 예전에는 항상 옆에 서 있었는데, 이제 자연스럽게 검무극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이의 인생을 사는 것 보고 왔소.”
무슨 말인가 검무극을 쳐다보던 비사인이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표 단주가 떠났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자가 배후를 아는 유일한 사람 아니오?”
이유가 있어 보내줬겠지만, 비사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검무극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곧이어 비사인에게 충격을 안길 이유가 밝혀졌다.
“떠나기 전에 배후가 누군지 알려줬소.”
비사인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그래, 검무극이 배후를 알아낼 거라 믿었다. 그랬기에 표기광을 지키게 한 것이었고.
하지만 그걸 하루 만에 알아내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거짓말이라고 여길 것이다. 뭔가 사술을 부려서 알아냈을 거로 생각할 거다.
하지만 비사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표기광은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어서 말해줬을 거라고. 단 하루 만에 말이다.
“당신은 정말…….”
뭐라 표현해야 할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순간을 놓칠 검무극이 아니었다.
“당신의 멋진 친구요.”
비사인은 제발 이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이 사람을 이길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이제 자존심조차 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의 놀람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배후가 누구요?”
“황석경이라고 아시오?”
이제 비사인은 아예 검무극을 향해 돌아앉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설마 사맹관의 황 교관을 말씀하시는 거요?”
“알고 계시는군요.”
나름대로 배후가 될만한 여러 이름을 예상했지만, 황 교관은 아예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믿기 어려운 말이오. 정말 믿기 어렵소.”
황석경은 평판도 좋고, 실력도 좋고, 심지어 성격까지 좋은 사맹관을 대표하는 교관이었으니까.
검무극은 비사인의 놀람을 이해했다. 자신도 정말 의외라 여겼으니, 비사인이야 얼마나 놀랐겠는가?
하지만 이 상황에서 문제는 사맹관의 교관이 배후라는 것이 아니다. 그 배후가 투왕이란 사실이다.
“오늘 그자를 은밀히 살폈는데, 무공을 숨기고 있었소.”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았다. 단언하듯 말해주었다. 비사인도 정말 조심해야 하는 상대였으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말한 그 암중 세력의 일원이겠군요.”
“그렇다고 생각하오.”
“당장 그자를 붙잡아서 심문하겠소.”
검무극은 당장 일어나려는 비사인을 제지했다.
“그자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소. 절대 혼자 상대하려 해선 안 되오. 당신과 사도십삼랑과 합공해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
비사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농담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검무극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오. 유검문주가 말하길 자신들에게 이권을 줬다고 하니, 황 교관과 손을 잡은 맹 내부 권력자도 있을 거요.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놀랄 필요 없소. 무림맹에 잠입해 있던 자는 장장 십 년의 세월을 투자했소. 이자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비사인은 이번 일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중대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이 음모는 계속 진행되었으리라. 생각하면 할수록 섬뜩했다.
“표기광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지금쯤 그도 알았을 거요. 그럼 달아나 버리지 않겠소?”
다른 인물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투왕은 무공 실력이 압도적으로 좋고, 그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자였다. 문제의 해결책을 달아나는 것으로 삼는 인물이 아니었다.
“사도맹에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거요. 당신이 어떻게 나올지 주목하고 있겠지.”
감히 사도맹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비사인의 가슴 속에서 투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황 교관의 실력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다고 했으니까.
상대가 그 정도 고수라면 사도맹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상책이지만, 감정적으로는 하책인 방법이다.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고 사도맹주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셈이니까.
또 하나의 문제는 그와 손을 잡은 자들이었다. 어떻게든 그들이 누군지 알아내야 한다. 그런 자를 가까이 두고선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없을 테니까.
“만약 그자를 생포한다면 그자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자백하겠소?”
비사인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백 안 할 거요. 아니, 그자 실력으로 볼 때 생포 자체가 불가능할 거요.”
검무극은 또 한 번 투왕의 실력을 강조했다. 그와 직접적으로 비사인이 얽혔기에,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비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날 한 번만 더 도와주실 수 있소?”
“사도맹 소맹주라면 흔쾌히 투자할 수 있소. 나중에 이자까지 두둑이 갚으시오.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소?”
비사인은 정말 뜻밖의 부탁을 했다.
“사맹관 구경 한 번 해보시겠소?”
신입으로 들어가서 황 교관에게 접근하라는 의미였다.
“매달 사맹관에 신입 무인들이 들어가오. 당신이라면 황 교관에게 접근해서 그와 손잡은 사람을 알아낼 수 있지 않겠소?”
보통 사람에게는 결코 할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아니, 멸마대주인 진하군이라도 이런 부탁을 할 수는 없었을 거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를 일에 임무 자체도 극악의 난이도였다. 이건 자신도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단, 하루 만에 표기광의 입을 열게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자는 내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을 거요. 설마 신입 무인으로 접근할 줄 예상 못 할 테니 당신이 안을 파고드는 거지.”
언제나 나만 믿으라며 긍정적인 대답을 했던 검무극이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자신이 없소.”
투왕이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똑똑한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확 띄는 신입 무인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의심부터 하고 볼 것이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비사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시오?”
“당신도 사람이구나 싶어서 그렇소.”
“지금까지는 사람으로 안 본 거요?”
“어디 사람 같은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어야지.”
“지금까지 당신한테 친구하자고 그렇게 매달렸는데, 사람 같지 않다니요! 그거야말로 비인간적인 것 아니오?”
그렇게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난 후 검무극이 거절한 이유를 밝혔다.
“상대가 그럴 시간을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비사인은 궁금했다. 대체 황석경에게서 뭘 봤기에 이렇게 조심하는 걸까? 왜 그리 그를 높이 사는 것일까?
“돌아가시면 호신갑 중에 제일 좋은 것으로 입으시오. 두 겹, 세 겹 껴입어도 좋소.”
오늘 검무극이 여러 차례 자신을 놀라게 했지만 지금 이 말에 가장 놀랐다.
“당신 설마? 그자가 나까지 죽이려 들 거로 생각하는 거요? 그렇게까지 막 나간다고?”
검무극이 경고하고 또 경고한 것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소. 내가 그자라면 당신부터 죽일 거요.”
절대회귀 352화
제352회 죽다 살아나도 너스레는 떨어야.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비사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당신이 그자라면 나는 반드시 죽었겠지.’
황석경이 아무리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도, 당신만큼은 아닐 거야.
적으로 서 있는 검무극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으니까.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호신갑을 두 겹, 세 겹 껴입는다고 살 수 있겠소?”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날 못 만났을 거요. 그러니 최대한 껴입으시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비사인은 느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자신이 죽을까 봐 걱정하고 있음을.
“내가 죽으면 더 좋지 않소? 사도맹이 혼란에 빠질 텐데.”
마음에도 없는 말에 검무극은 현실을 자각시켰다.
“당신에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죽어도 사도맹은 혼란에 빠지지 않을 거요. 그건 내가 죽어도, 우리의 무림맹 친구가 죽어도 마찬가질 거고.”
맞는 말이다. 교주나 맹주가 죽는다면 모를까, 후계자의 죽음이 사도맹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복수와 징벌의 의지로 똘똘 뭉쳐 평소보다 더 강한 사도맹이 될 거요. 어떻소? 사도맹을 위해 희생 한 번 해보겠소?”
“사양하겠소.”
비사인은 잠시 자신이 죽은 후를 떠올려보았다. 사도십삼랑이 비통해하고, 그중에서도 일랑이 가장 슬퍼할 것이다. 맹주님은 어떨까?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 반응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맹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로 떠올린 사람이 검무극이었다.
‘이 사람은 내가 죽으면 슬퍼해 줄까?’
그러다 뭔 이런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나, 싶던 그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당신 죽으면 내가 복수해주겠소. 중원 끝까지 쫓아가서, 이 일에 개입한 자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일 거요.”
정말이지 사람 속마음을 어찌나 잘 알아차리는지.
“말이라도 고맙소.”
비사인의 흉측한 얼굴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왠지 검무극이라면 진짜 복수를 위해 끝까지 파헤쳐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신 딱 그렇게 웃을 때가 멋있어.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한 번씩 그렇게 웃어주라고.”
“또 쓸데없는 소리!”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이런 농담이 오가고 있다. 정말이지 저 검무극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사도맹 소맹주가 된 이후에는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고 있었다.
감히 날 죽이려는 자가 있겠어?
이제 이렇게 생각을 바꿔야 할 때다.
감히 무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방심을 해?
더구나 검무극이 이렇게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상황.
“알겠소. 놈의 암습에 대비하겠소.”
“호신갑 꼭 입으시오.”
“두 겹으로 껴입겠소.”
비사인이 진심으로 받아들였음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안도했다. 물론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매사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사도십삼랑 정식 복장 중에 복면 차림의 복장이 있소?”
“있소.”
큰 조직에 속한 호위 무인들은 대부분 복면 차림의 복장이 있다. 자신들의 신분을 감춘 채 은밀히 대상을 지켜야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거 입게 하고, 내게 한 벌 주시오. 그리고 사도십삼랑 중에 한 사람 빼주시오. 내가 그 자리에 대신하겠소.”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요?”
“할 거요. 왜? 싫소?”
“나야 괜찮소만, 미안해서 그렇소.”
“나중에 이자까지 톡톡히 받아낼 거요.”
비사인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마교 소교주 신분인데, 내 수하 노릇을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당신에게 좋지 않을 거요.”
앞서 진하군과 사도십사랑, 십오랑 했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지켜주려 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마교 소교주가 사도맹 소맹주 밑으로 가는 것이 아니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가는 거요.”
“!”
비사인은 직감했다. 검무극의 이 말은 아주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해줄 만큼 난 당신에게 해준 것이 없는데.”
“사람 사이에 저울을 두면 거래처 상인이지 어디 친구겠소? 사람 관계란 것이 원래 두 사람 중에 한쪽이 더 좋아하는 법이오. 그게 나요, 나.”
이렇게 말해주는 검무극이 정말 고맙고 좋았다.
태어나서 사도맹 후계자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친구가 생기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검무극이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날 위한 거요.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사도맹주로 있으면 속 터져 죽을지도 모를 거요. 그냥 당신 같은 사람이 맹주로 있으면 내 행복도가 높아질 거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오. 다 저 좋아서 하겠거니 하시오.”
이래서 더 좋은 거다. 검무극은 온갖 생색은 다 내는 것 같지만 정작 생색내는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내가 졌다.’
비사인은 인정했다. 그가 자신 밑에 들어왔어도, 자신이 졌다. 인정하니까 마음이 편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람 부는 절벽에 서서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 * *
다음 날, 달라진 것은 두 가지였다.
그를 호위하는 사도십삼랑의 복장이 달라진 것과, 복면을 쓴 그들 중 한 사람이 검무극이란 사실이다.
“복면이 조금 불편하지 않소? 안쪽 천을 조금 더 부드러운 것으로 바꾸면 좋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칠랑이 자신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가 일랑의 질책하는 눈빛에 시선을 돌렸다.
일랑은 검무극이 사도맹 내원까지 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사인의 호위 때문이 아니었다면 절대 허용하지 않았을 일이다.
검무극과 비사인은 틈이 날 때마다 전음을 주고받았다.
―맹 내에서는 당신이 필요 없지 않겠소?
―나는 오히려 이곳이 제일 위험한 것 같소.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곳에서 살행이 이뤄지는 법 아니겠소?
비사인이 창밖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이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편안함을 주던 사도맹의 전경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일랑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가시죠, 단주들과 회합이 있습니다.”
거처를 나서면서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말 회의하는 곳까지 따라갈 거요?
―가야지요.
―당신 알고 보면 본맹의 기밀을 빼내려고 이러는 것 아니오?
―그걸 이제 알았소?
정말 검무극은 온종일 따라다닐 작정이었다. 상대가 투왕이 아니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투왕은 싸움을 정말 좋아했고, 그 좋아하는 마음만큼이나 지는 것을 싫어했다.
사도맹 내에서 진행해온 음모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싸움일 것이다.
그는 이 싸움에서 절대 지지 않으려 할 테고, 지금 상황에서 지지 않으려면 비사인을 없애야 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직 불이 사도맹주에게 번지기 전에 비사인을 없애는 것이 승리를 위한 가장 확실한 선택일 테니까.
일랑이 비사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맹주께서 소교주를 믿는 마음은 알지만, 이렇게 본맹을 속속들이 보여주셔선 안 됩니다. 나중에 맹주님께서 아시게 되면 문제가 될 겁니다.
―일랑께서 무슨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소. 다만 이번만은 내 판단을 믿어주시오.
일랑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검무극에게 휘둘리는 눈빛이 아님을 느꼈기에 일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좀 더 신경 쓸 작정이다. 마인을 완전히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비사인이 회합에 참석했다.
회합장 밖에 사도십삼랑을 배치할 때 일랑은 검무극을 최대한 멀리 세웠다. 안에 대화가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검무극은 순순히 일랑의 말에 따랐다.
회합을 마치고 나온 비사인은 복도 끝에 서 있는 검무극의 모습을 보았다.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이해해 주시오. 일랑이 원체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이해하오.
비사인은 평소대로 움직였다.
하루에 한 끼는 항상 가는 객잔에서 식사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식사하면서 일랑에게 전음을 보냈다.
―황석경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미 그쪽에도 감시의 눈을 보낸 상태였다.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없다면, 황석경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비사인이 힐끗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객잔 입구 쪽에 서 있던 검무극은 분명 바깥을 보고 있었는데.
―또 그런 의심의 눈빛을 보내신다. 날 믿으시라니까.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사람을 수하로 뒀으니 어찌 의심을 안 하겠소?
검무극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복면 위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안 힘드시오?
―힘들어 죽겠소. 아까 선 채로 대충 끼니를 때웠더니. 앞으로 내 호위들에게 더 잘해줘야겠소.
―이리 와서 같이 식사합시다.
―싫소. 계속 고생하고 앞으로 두고두고 생색낼 거요. 만날 때마다 이때 이야기를 할 거요.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아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석경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오늘도 비사인은 항상 가는 객잔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소교주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랑의 전음에 비사인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검무극은 입구 쪽에 서서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 어깨 너머 행인들이 오가고, 호객하는 상인들이 있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저이도 사람인데 완벽할 순 없겠지.’
그렇게 식사를 마친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 객잔을 나섰다.
맹으로 돌아가는데 꽃바구니를 든 소녀가 다가왔다. 평소에는 못 보던 소녀였다.
“꽃 사세요, 꽃 싸게 드려요.”
사도십삼랑이 그녀를 경계했다.
사도십삼랑 중 한 무인이 가서 소녀를 살폈다. 겉으로 봐선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들고 있던 바구니 역시 꽃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범한 꽃 파는 소녀였다.
비사인이 그 앞을 지나갈 때 소녀가 꽃을 한 송이 내밀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비사인이 소녀를 향해 돌아섰다.
“한 송이에 얼마냐?”
“귀하신 분께는 그냥 드릴게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소맹주님이시잖아요? 아버지가 소맹주님을 뵈면 예의 바르게 굴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아프세요. 집에 누워 계신답니다.”
“파는 꽃을 다 다오.”
“정말요?”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오늘 만난 기념으로 특별히 사주마.”
그렇게 돈을 꺼내서 건네주려던 바로 그때였다.
“이 꽃도 함께 드릴게요.”
소녀가 머리에 꽂고 있던 꽃을 꺼내서 꽃바구니에 넣으려던 그 순간.
탁.
일랑이 재빨리 소녀의 마혈을 제압하며 들고 있던 꽃을 빼앗았다.
“음양절독초(陰陽絶毒草)입니다. 이 아이 머리에 꽂혀 있던 음독초와 바구니에 있던 양독초가 합쳐지면 순간 맹독을 품은 향을 발산합니다.”
모두 소녀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소녀는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채 스르륵 쓰러지고 있었다.
이미 절명한 그녀를 살핀 일랑이 굳은 표정으로 보고했다.
“머리에서 꽃을 빼는 순간 극독에 중독되게끔 해둔 모양입니다.”
자의였든, 타의였든 그야말로 목숨을 내던진 지독한 살행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신경이 소녀에게 향하던 그때였다.
“뒤를 조심하시오!”
소리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녀에게 향해 있을 때, 그 찰나의 틈을 타서 비사인의 뒤에 서 있던 행인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꽈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린 원통처럼 생긴 암기에서 강철바늘 같은 암기가 한꺼번에 수십 발 발출되었다.
쉭쉭쉭쉭쉭쉭쉭!
점멸보로 공간을 가로지른 검무극이 검을 휘둘러 암기를 튕겨냈다.
공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건너편 길에서 행상을 구경하던 남자가 돌아서며 암기를 발출했다. 이번에도 폭음과 함께 암기가 발출되었다.
사도십삼랑이 몸을 던지며 검을 휘둘렀다.
반대쪽 지붕에서도 또 다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암기를 발출하려던 그때!
서걱!
암기통을 든 그의 팔이 잘리며 떨어졌다.
어느새 날아오른 검무극의 검이 그의 팔을 잘라낸 것이다.
검무극은 앞서 날아든 암기를 모두 튕겨내고 그 상대까지 죽인 후 지붕 위로 곧장 쇄도했던 것이다. 너무나 빠른 움직임이었기에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막는다고 착각했다.
팔이 잘린 암습자가 다른 손으로 또 다른 암기를 꺼내려 했지만, 두 팔로도 못 해낸 일을 팔 하나로 이룰 수는 없었다.
푸욱!
흑마검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검무극이 바닥에 내려섰을 때 살수들은 모두 제압당한 상태였다. 사도십삼랑이 비사인을 빙 둘러싸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일랑이 외치고 있었다.
“소맹주님!”
그의 가슴에 암기가 박혀 있었다. 모든 암기가 비사인에게 집중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너무나 빠르게 날아드는 바람에 모두 튕겨내지 못한 것이다.
“난 괜찮습니다.”
비사인의 옷섶을 풀자 안에 호신갑을 입고 있었다. 정말 한 겹이 아니라 두 겹을 입고 있었다. 암기는 두 겹의 호신갑을 뚫지 못한 채 박혀 있었다.
암기를 막았던 사도십삼랑 중 세 명이 다쳤다. 하지만 그들 모두 치명상은 피한 상태였다. 그들도 모두 호신갑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검무극과 비사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잘했소.
―당신 잔소리 때문에 사도맹 보고에서 호신갑을 빌려 십삼랑에게도 입혔소.
결과적으로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나는? 나 빼고 다 준 거요? 나도 줬어야지!
―당신이야 알아서 잘 막겠거니 했소. 호신갑이 모자라기도 했고.
―당신은 두 겹이나 껴입었으면서?
―두 겹 입으라면서요!
그렇게 두 사람은 너스레를 떨었다. 죽다 살아나도 너스레는 떨어야 하는 검무극이었다.
이내 검무극이 장난기를 거두고 차분히 말했다.
“꽃 파는 소녀가 시선을 끄는 유인책이었소. 그녀에게 시선이 분산되었을 때 공격하려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상대가 투왕이니까. 그의 명령을 받은 자들이라면 그렇게 어설프지 않았을 테니까.
“느낌이 좋지 않았소.”
비사인은 검무극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정말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다.
‘이 미친놈이! 정말 나를 죽이려 든다고? 그것도 본맹 바로 앞에서?’
조금 전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당했을 수도 있었다. 설령 자신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사도십삼랑의 피해가 컸으리라.
사도십삼랑들도 그런 사실을 알았기에 검무극에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검무극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랑도 함께였다.
비사인은 앞서 했던 생각을 수정했다. 저 사람도 사람이니 완벽하지 않다고? 천만에.
‘이 사람은 완벽하다. 사람 아니다.’
일랑이 놈들이 사용한 암기들을 회수했다.
“이들이 사용한 암기는 혈천폭우(血天暴雨)로 전 무림에서 금용암기로 지정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경로로는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구할 수 있는 혈천폭우가 세 개나 동원되었다.
자신을 죽이는데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금용암기를 사용해서 죽이려 든다? 상대는 무인으로서 일말의 자존심이나 명예도 없는 자다. 오직 살상의 목적만을 이루려는 자.
비사인은 화난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말없이 비사인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마움에 대한 정산은 이번 일이 다 끝나고 한꺼번에 할 생각이니까.
“금용암기나 사용하고 무인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비사인은 맹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쪽 인사를 받았으니 이쪽에서도 인사하러 가야지.
“우리 사맹관에서는 기본을 잘 가르치는지 확인하러 갑시다.”
절대회귀 353화
제353회 당신의 첫 한숨이오.
황석경은 무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교관님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다음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오늘은 이번 기수가 사맹관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각자 사도맹의 여러 조직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사맹관 여러 교관 중에서도 황석경은 단연 인기가 많았다.
“그대들이 사도맹의 기둥임을 잊지 말고. 부디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잘 버티게!”
“네! 교관님!”
그렇게 무인들이 떠나자 동료인 차 교관이 그에게로 왔다.
“역시 이번에도 자네에게 선물이 가장 많군.”
황석경의 품에는 떠나는 무인들이 주고 간 선물이 가득했다. 미처 다 들지 못해 옆에도 가득 놓여 있었다.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곳을 떠난 많은 무인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황석경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그는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나도 자네 같은 교관을 만났으면, 여기서 교관 짓 안 하고 살았을지도 모르지.”
“교관이 어때서?”
“자네는 안 지겹나? 매번 같은 말, 같은 일.”
그러자 황석경이 차 교관에게 물었다.
“자넨 우리를 거쳐 간 무인들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나?”
“엄청나겠지.”
“그래, 정말 많은 이가 우릴 알고 있지. 아마 사도맹 내에서 인지도가 가장 높은 사람이 우리 아니겠나? 그만큼 큰 힘이 어디 있겠나?”
“큰 힘은 무슨. 그래봤자 사맹관 교관이지. 우리가 단주나 각주 자리에 오르면 모를까? 누가 알아준다고.”
“왜 못 오른다고 생각하나? 우리라고 만날 교관만 하라는 법 있겠나?”
“그래, 자네는 출세하게. 단주도 되고, 각주도 되고.”
“후계자도 되고.”
“뭐? 농담이라도 그런 농담은 말게. 그럼 가네. 휴가 잘 보내게.”
다음 기수가 들어올 때까지 교관들은 휴가였다.
그렇게 차 교관이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수하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제 황석경에서 투왕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실패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소맹주는? 얼마나 다쳤나?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럼 사도십삼랑은 몇 명이나 죽었나?
몸을 던져서 소맹주를 구한 결과라 여겼는데.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보고에 점차 투왕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떤 고수가 나선 것이냐?
―아닙니다. 그곳에 사도십삼랑만 있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도십삼랑이 그들의 합공을 막아냈다고? 운이 좋을 수는 있다. 하지만 세 기의 혈천폭우가 동원된 암살은 천운도 막을 수가 없다.
투왕은 앞서 표기광을 죽이지 못하고 살수들이 몰살당한 일을 떠올렸다.
―분명 누군가 개입했다.
그렇지 않고서 이런 결과가 날 리 없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그때, 수하의 다급한 전음이 날아들었다.
―소맹주가 왔습니다.
투왕의 시선이 연무장 건너편에서 수련 도구를 정리하는 사내를 향했다. 조금 전까지 전음을 주고받았던 수하 사혼(沙昏)이 바로 그였다.
사맹관에서 허드렛일하는 그는 삼류 무공을 익힌 것처럼 살았지만, 아무도 참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개 숙인 사혼 옆으로 비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히 걸어오는 그의 뒤로 사도십삼랑이 함께 걸어왔다. 비사인은 무시무시한 인상만큼이나 강렬한 기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뒤따르는 사도십삼랑은 모두 복면을 쓰고 있기에 그들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들이 지나가자 사혼이 슬쩍 고개를 들어 그들의 뒤를 바라보았다. 모두 열셋,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 공격을 막아낸 거지?
바로 그때 맨 뒤에서 걸어가던 사도십삼랑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혼은 다급히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뒤를 돌아보았던 사도십삼랑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었다.
‘뭐지? 내 시선을 느낀 건가?’
그럴 리가 없다. 사도십삼랑이 조금 전 그 은밀한 시선을 느꼈을 리 없었으니까.
사혼은 수레를 끌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소맹주가 왔는데, 허드렛일하는 자가 어슬렁거리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으니까.
투왕은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으며 정중히 비사인을 맞았다.
“소맹주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소맹주의 방문에 놀란 교관의 모습이었다. 정말 이번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오면서 비사인은 황석경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딱 잡아떼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을 맞이할 줄은 몰랐다.
“황 교관, 오랜만이오. 우리가 언제 뵈었었지요?”
“올해 신년 연회에서 잠깐 인사드렸습니다.”
“아, 그랬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와 이렇게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신이 정말 이번 일의 배후라고? 아까 그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당신이라고?
“안으로 드시지요.”
“괜찮소. 지나가다 잠깐 황 교관님 얼굴만 뵙고 가려고 왔소.”
투왕의 시선이 함께 온 사도십삼랑을 향했다. 검무극은 다른 사도십삼랑 뒤쪽에 겹쳐 선 채 자신의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투왕은 검무극과 같은 고수가 사도십삼랑에 합류한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정말 다친 자가 하나도 없다?’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지만, 투왕은 동요하지 않았다. 위험이 주는 짜릿함만큼이나 그를 흥분시키는 일은 없었으니까.
‘소맹주는 내가 배후인 줄 알고 왔다.’
평생 안 오다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의미했으니까.
응수타진인가? 아니면 선전포고인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자신이 파악한 비사인은 이런 성격이나 유형이 아니었는데.
“이것들은 다 무엇이오?”
비사인이 바닥에 놓인 선물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 기수들이 나가면서 주고 간 것들입니다.”
비사인이 그중에 하나를 들었다.
“풀어봐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비사인이 그것을 풀려다가 투왕에게 주었다.
“위험할 것 같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자고로 좋은 훈련 교관이 있겠소? 앙심을 품고 독살하려 하지 않겠소?”
비사인의 농담에 투왕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닐 겁니다. 본래 훈련이 끝나면 교관만큼 기억나는 사람도 없는 법이니까요.”
지금 모습만 볼 때는 황 교관은 정말 음모와는 거리가 먼 호인이었다.
“교관 일 만족하시오?”
“천직이라 여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검무극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필 왜 교관이었을까?’
사도맹에 잠입해서 자리를 잡는 방법에는 여러 길이 있었을 것이다. 투왕의 실력이라면 지금쯤 각주 자리에도 올랐을 텐데. 그냥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사맹관 황 교관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검무극이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비사인과 투왕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오늘 암습을 당했소.”
“네? 암습이라고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투왕은 깜짝 놀랐다.
“다행히 괜찮습니다.”
“감히 어떤 자들이!”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금용암기를 사용한 자들이었소.”
“저런! 무인의 명예도 모르는 파렴치한 자들 같으니! 쓰레기 같은 놈들입니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태연히 말하는 모습에 비사인은 눈앞의 이 사내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소맹주님을 죽이려 들었으니 반드시 붙잡아 참형으로 벌하십시오. 소맹주님은 사도 무림의 기둥이자 미래이십니다.”
사실 비사인은 다른 만남을 기대했다.
뭔가 그에게 수상한 구석이 있고, 뭔가 묘한 말을 남기고, 뭔가 묘한 기도를 드러내고.
감히 나를 죽이려 들어? 일갈을 내지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무슨 말을 할까도 고민했었다.
뭔가 특별한 상황이 있을 줄 알았다. 없더라도 자신이 찾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상대는 어떤 정체도 드러내지 않았다. 완벽하게 황 교관 그 자체였다. 마치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듯이 말이다.
이런 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비사인은 느꼈다. 아직은 역부족이라는 것을. 자신은 네가 그랬지? 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검무극이었다면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 말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달려왔으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검무극이 아니었으니까.
돌격이 잘못되었다면, 후퇴라도 제대로 해야지.
비사인이 미소로 투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내가 살수들의 암기 세례를 받은 날, 우리 교관님은 선물을 한가득 받으셨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 *
검무극과 비사인이 절벽에 나란히 서 있었다.
때가 때인 만큼 조심하라는 일랑의 만류에도 검무극과 단둘이 이곳에 왔다.
장소가 주는 힘이 있을까?
검무극과 이곳에 서면 좀 더 솔직해지는 것을 느낀다. 비사인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져야 할 때임을 느끼고 있었다.
“내 밥그릇 뺏으려는 놈,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요. 놈은 물론이고 개입된 자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일 거요. 내가 달리 사도맹 소맹주겠소?”
진심이었다. 그리고 검무극에게 묻고 싶었다.
“난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이기적이고 악한 사람이오. 그래도 친구 할 거요? 나중에 이렇게 악한 놈인 줄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검무극은 여러 말을 쏟아내는 비사인의 심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황 교관 찾아간 것 후회하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물었다.
“당신이라면 그를 찾아갔겠소?”
비사인이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갈 때 가더라도 적어도 오늘만큼은 안 갔을 거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화가 났을 때 내렸던 결정은 대부분 다 후회했기 때문이오.”
“그럴 줄 알았소.”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확 끓어오르며 그를 찾아갔지만, 막상 가고 나서 후회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기세에 밀린 것이다.
“그럼 왜 말리지 않았소?”
“직접 겪어봐야 제대로 느낄 테니까.”
현실이 얼마나 차가운지. 용암처럼 끓는 이상도 현실 앞에서는 그저 몽상이 되어 얼음물에 떠내려갈 수도 있음을.
비사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자 검무극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첫 한숨이오.”
비단 검무극에게 보인 첫 한숨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 첫 한숨이었다. 비사인은 보란 듯이 한 번 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는 이만큼 가까워졌음을 한숨으로 보였다.
검무극이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괜찮소. 어차피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니까. 싸우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그리고 이번 방문으로 알아낸 것도 있고.”
“그게 뭐요?”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별것 아닌 줄 알았는데.
“놈의 목적이 뭔지 알았소.”
놀란 비사인은 뭐? 이 미친놈아! 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대체 오늘 만남에서 어떻게 놈의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몰래 일기장이라도 훔쳐 읽었단 말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난 거요?”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검무극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부분을 지적했다.
“쌓여 있던 선물을 보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소. 그가 왜 이렇게 평판을 쌓아가고 있을까? 숨어서 일을 꾸미려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더 좋을 텐데. 이렇게 큰 음모를 꾸미는 자가 굳이 심력을 소모하면서 사맹관 무인들에게 잘해주는 것일까?”
듣고 보니 비사인도 이상했다. 뭔가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결론이 나올까 봐 내심 마음이 불안해졌다.
“지난 세월 그가 배출한 무인들이 이제 사도맹의 요직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거요. 조장도 있을 거고, 대주도 있을 거고. 빠르게 승진한 사람은 단주도 되었겠지.”
비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놈의 목적이 뭐요?”
검무극은 빤히 비사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신.”
비사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머릿속을 강타하는 하나의 생각.
“설마 후계자 자리를 노린다는 말이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사도맹주가 되려 하고 있소.”
“!”
설마 이번 일의 배후가, 그 황석경이 사도맹주가 되려 할 줄은 몰랐다. 교관과 맹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당신을 가차 없이 죽이려 한 것도,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겠지.”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냐면서.
“그게 가능한 일이오?”
비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원래라면 이런 계획이었겠지.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후계자인 당신을 죽이고, 사도맹주까지 암살할 거요. 방법은 나도 모르겠소. 어쨌든 맹주 자리가 비게 되면 놈은 압도적인 무위를 드러내며 맹주 자리에 도전할 거요. 그때쯤이면 그를 막을 고수도 거의 없을 거요.”
“무공만 강하다고 맹주가 될 수는 없소. 맹도들이 인정하지 않을 거요.”
“어떤 맹도 말이오? 지금 그자가 손잡고 있는 권력자 말이오? 아니면 그가 배출한 무인들 말이오?”
“!”
“맹 내의 여론이나 분위기는 그를 지지할 거요. 일개 교관이 아니라, 모두의 존경을 받는 교관이 숨겨둔 실력을 드러내며 영웅으로 등극하게 될 거요.”
비사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맹주님을 죽일 수 없을 거요.”
“숨은 칼을 막는 게 쉽지 않다는 것 알고 있지 않소?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벼르고 벼른 칼이라면. 물론 내 예상이요. 틀린 예상일 수도 있소.”
비사인은 검무극의 추측이 허황하다 생각지 않았다. 이미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맹주인 자신을 죽이려는 자였다.
비사인은 한참을 홀로 생각에 잠겼다. 검무극은 아무 조언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가 결정하고 해결할 일이었으니까.
이윽고 비사인이 결론을 내렸다.
“맹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요.”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번 일을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맹주님께 이번 일의 내막을 꼭 전해주시오.”
“그러겠소.”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럴 때는 당신은 죽지 않을 거요, 이런 말 해줘야 하는 것 아니오?”
검무극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이 결정으로 당신 죽을 수도 있소.”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상대가 투왕이었으니까.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마지막 순간 투왕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 것은 정해진 미래였으니까.
“왜 안 말리는 거요?”
직접 이겨내야 당신이 더 강해질 테니까.
“내 목숨 아니니까?”
비사인이 웃었다. 만난 이래 가장 크게 웃었다.
“지금 웃음 좋소. 여자 만나면 꼭 그렇게 웃으시오.”
“그 말도 안 되는 너스레 떨면서,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끝까지 봐줄 거요?”
“싸움 구경이야 언제나 재미있으니까.”
“내 밥그릇 뺏기 위한 그자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적어도 운만큼은 나에게 미치지 못한 것 같소.”
비사인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구경이나 한다는 말과는 달리 검무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자신이 성장하기를 바라며 기다려 주고, 참아주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해결하게끔 밀어주고 있다.
이런 운이 왔는데, 이런 친구가 있는데 놈에게 질 수는 없다.
“갑시다, 나중은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교관이 맹주가 되는 일에 펄쩍 뛸 사람들이 있소.”
절대회귀 354화
제354회 놔둬야 죽는다.
비사인이 돌아가자 수하인 사혼이 수레를 끌고 투왕에게 다가왔다.
“짐을 옮겨드리겠습니다.”
사혼이 무인들이 준 선물을 수레에 싣자 투왕도 걸터앉았다.
그렇게 연무장을 벗어나면서 두 사람의 전음 대화가 시작되었다.
―역시 소맹주가 알아차린 겁니까?
투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살수들이 표기광을 죽이는 것에 실패했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럼 왜 찾아온 겁니까?
―선전포고지. 자랑도 하고 싶고. 네가 보낸 살수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아직 젊군요.
사혼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반면 투왕의 마음에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분명 예전과 달라졌는데.
정확히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암습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알아내셨습니까?
사혼의 물음에 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맹주 쪽에서 돕고 있는 걸까요?
―맹주는 아니다. 맹주가 개입했다면 이런 식으로 일 처리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소맹주는 틀림없이 괴악과 광섬에게 도움을 청할 겁니다.
괴악과 광섬. 그들은 사도칠대고수에 속한 이들로 예전에 정사마가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비사인이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데려왔던 고수들이다.
―그렇겠지.
―시간을 주면 우리가 불리해질 겁니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투왕은 수레에 실린 짐들 사이로 몸을 눕히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전했다.
―놔둬야 소맹주가 죽는다.
* * *
절벽에서 내려온 비사인은 그 길로 곧장 전서를 보낸 후 마부와 마차를 빌렸다. 이목을 피하려고 사도십삼랑은 두고 검무극과 단둘이 목적지로 향한 것이다.
비사인은 말없이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닥쳐올 큰 싸움을 앞두고 마음을 다스렸다. 죽음을 각오했고, 지금까지 있었던 그 어떤 싸움보다 위험했다.
물론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끊임없이 사도맹주에게 달려가라고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벌써 잊었어? 아까 화가 나서 내린 결정, 후회했잖아? 지금도 마찬가지야. 지나고 나면 이 선택 후회할 거야. 지금이라도 가서 맹주님께 알리고 이 일을 해결해.
복잡한 심정으로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언제나처럼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또 후회 중이오?”
“당신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고, 눈꺼풀 위에도 눈이 달린 것 같소.”
“그러니까 괴물 같잖소? 그냥 마음으로 본다고 해주시오.”
검무극이 천천히 눈을 떴다.
“마차만 타면 눈을 감고 뭔가를 읊는 것 같은데, 대체 뭘 수련하는 거요?”
“천마호신공을 수련하오.”
천마의 독문무공이 언급될 줄은 몰랐기에 비사인은 내심 당황했다.
“그런 비밀을 말해줘도 되는 거요?”
“뭐 어떻소? 구결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무공 이름쯤 알려주는 것이 어때서.”
말로 아무리 배워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가 있다. 결국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
“내가 졌소.”
“그렇게 인정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당신에게 질질 끌려다니라고?”
“뭐 어떻소? 끌려다니면서 별도 보고 새도 보고 구름도 보는 거지. 끌고 가는 사람도 처음에는 으스대며 온갖 잘난 척하겠지만, 시간 지나면 그 사람도 힘들 거요. 누가 나 좀 안 끌어주나 하면서.”
비사인은 정말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대에게 져본 적도 없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시오.”
“우리 아버지 있잖소? 어차피 다 읽혀서 아버지 앞에서는 감추려 들지 않소. 어휴, 아버지가 날 비웃는 모습을 당신이 봐야 하는데.”
이런 검무극도 수세로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긴, 이 검무극의 아버지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당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오?”
“나보다 당신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텐데.”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에 비사인이 옅게 웃었다.
“다음에 인사시켜주겠소. 직접 뵙고 판단하시오.”
과연 자신이 천마에게 인사하는 날이 올까?
“또 심각해진다. 사도맹 소맹주가 천마에게 인사하는 게 아니오. 친구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거지.”
친구 아버지.
자신의 인생에서 친구만큼이나 낯선 단어다.
“한데 누굴 만나러 가는지 왜 물어보지 않으시오?”
그야 이미 알고 있으니까. 검무극은 비사인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두 분 중 어느 분을 먼저 만나러 가는 거요?”
비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 그거 아시오? 이럴 때 보면 정말 인간미 없소.”
말을 하고선 미안했다.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돕고 있겠나 싶어서.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오.”
“괴 선배나 광 선배로도 부족하다고 여기시오?”
자신이 황 교관을 봤을 때, 그의 실력은 사맹관 교관의 실력처럼 보였다.
그 말인즉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이라는 뜻.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해주었다.
“두 사람이 합공한다면 모를까, 혼자 싸우면 절대 승산 없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비사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칠대고수 둘이 합공해야 하는 상대라니.
거기에 더 놀라운 말이 덧붙여졌다.
“둘도 합이 맞지 않으면 힘들 거요.”
* * *
마차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소맹주, 어서 오시게.”
“귀한 걸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광섬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네. 자, 들어가세.”
사도칠대고수 중 사도맹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사도맹주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괴악이 힐끔 쳐다보며 수행이 한 명임을 확인했다.
“조용히 왔군.”
예전에 검무극을 만난 적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검무극이 복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게다가 딱 사도십삼랑 정도의 기도만 드러냈다.
설마 마교 소교주가 사도십삼랑이 되어 비사인을 호위하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기에, 괴악은 검무극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검무극도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사도십삼랑은 언제나 소맹주와 함께 움직였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에는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광섬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말이 없는 광섬이기에 그는 그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비사인은 술상에 앉으며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신분을 밝히고 함께 앉겠소?
―괜찮소. 여기 있겠소.
검무극은 비사인의 뒤쪽에 조금 떨어진 채로 시립했다.
“기다리다 먼저 한잔하던 중이었네. 자, 소맹주도 한잔 받으시게.”
술을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그간의 안부부터 사도맹주에 대해서, 또 근래 무림에 있었던 여러 사건까지.
그러다 광섬은 검무극에게도 술을 내렸다. 검무극은 고개를 돌려 복면 아래로 술을 마셨다.
비사인은 내심 감탄했다.
‘소교주는 이들 앞에서도 존재를 감출 정도의 실력이구나.’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을 마시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래, 소맹주께선 어쩐 일로 우릴 보자고 한 건가?”
“두 분 선배님들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비사인은 조심스러웠다.
지금 좋은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저 괴악만 해도 성격이 괴팍하고 잔혹해서 무림에 악명을 떨치는 절대고수였다.
광섬 역시 성격이 과묵해서 악한 느낌이 덜할 뿐이지, 그의 검은 말보다 빠른 사람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예의를 갖춰주는 것은 사도맹주에 대한 예의다. 아직 비사인은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과 신뢰를 쌓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에 본맹을 위협하는 모종의 암중 세력을 알아냈습니다.”
그 말에 괴악과 광섬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들이 누군가?”
“수장은 사맹관 교관 황석경입니다.”
황석경의 이름이 밝혀지자 두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도맹을 위협하는 암중 세력이 있다고 말했을 때보다, 그가 황석경이란 사실에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으면 없애버리면 되지, 왜 우릴 만나자고 한 건가?”
“그자는 실력을 숨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할 정도로 말인가?”
“네, 두 분이 모두 가주셔야 합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비사인은 상대의 실력을 감추지 않고 전했다. 괜히 두 사람의 체면을 살린다고 황석경의 실력을 낮추는 어리석은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괴악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맹주님도 알고 계시나?”
“아직 모르십니다.”
“왜 말씀드리지 않았나?”
설득을 위해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애초에 저와 얽혔고, 심지어 저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자네를 암살하려 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자는 제 손으로 끝장내고 싶습니다.”
괴악이 비사인을 응시했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해서 맹주께 인정받고 싶은 것이군.”
비사인은 이 역시 솔직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괴악이 광섬을 돌아보았다. 광섬은 말없이 술만 마실 뿐이었다.
괴악은 순순히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꽤 위험한 일인데 우리가 도와야 하는 이유는?”
사도맹에 큰 공을 세울 기회라거나, 차기 사도맹주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될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교관 따위가 맹주를 꿈꾼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맹주가 되면 두 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자네가 알고 있나?”
“제가 맹주에 오르는 날 비고에 들어 있는 참격귀영보(斬擊鬼影步)의 비급을 드리겠습니다.”
괴악의 두 눈에서 광채가 흘렀다.
참격귀영보는 괴악이 간절히 원하는 비급이었다. 그의 독문무공인 참격철인과 쌍으로 익혔을 때, 훨씬 강한 효과를 내는데 아쉽게도 그는 참격귀영보를 익히지 못했다.
그간 사도맹주를 위해 여러 일을 해왔던 이유는 바로 참격귀영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양날의 검과 같은 약속이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사도맹주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물심양면 도울 것이다.
대신 비급을 준 이후에는 그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있나?”
“원하시면 문서로 써드리겠습니다.”
그제야 괴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조건으로 받아들이겠네.”
비사인이 이번에는 광섬을 쳐다보았다.
“선배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지 제가 미처 알지 못합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비로소 광섬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대의 목숨을 원하네.”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괴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평소에 말을 아껴야 이런 농담이 통하는 거지.”
비사인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광섬은 웃지 않았다. 평소 하지 않던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까 자네가 소맹주를 맞이하러 나갔을 때, 술에 산공독을 탔네. 흑비를 개량해서 특별히 만든 것이라더니 과연 자네도 알아차리지 못하더군. 만독불침지체가 아닌 이상 앞으로 반 시진 동안 내공을 쓸 수 없을 거야. 물론, 나는 미리 해약을 복용했다네.”
순간 괴악이 내공을 살폈다.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정말 내공이 흩어져 있었다.
“왜 이러는 건가? 어울리지 않게 뭔 이런 장난을 치나?”
광섬은 대답 대신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맹주를 죽인 사람은 자네가 될 거네. 소맹주를 죽인 후 무림에서 종적을 감춘 것처럼 처리될 거야. 큰돈이 자네의 전장에 입금될 거고, 소맹주를 죽여달라는 청부를 받은 정황 증거도 발견되겠지.”
괴악의 입장에서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말을 광섬은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했다.
“이 미친놈이! 뒈지고 싶어 환장했구나? 내공이 없다고 그냥 당할 줄 아느냐?”
내지르는 자신감과는 달리 그는 절망했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광섬과 싸운다? 무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산공독을 쓴 건 미안하네. 자네 실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은 것이니 너무 노여워 말게. 내 자네 시신은 볕이 잘 드는 곳에 묻어주겠네.”
놀라고 당황하기로는 비사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내공이 있어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지만, 문제는 검무극도 술을 마셨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검무극에게 술을 준 사람이 광섬이었다. 저 말 없는 사람이 굳이 자신의 수하에게 술을 줄 때, 의심했어야 했는데.
“황석경과 손을 잡은 거요?”
광섬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그건 긍정의 침묵이었다.
“왜 그자와 손잡은 거요?”
광섬은 잠시 창밖을 쳐다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그분과 싸워서 졌다. 지면 수하가 되기로 약속했고.”
그분이란 말에서 존경심이 느껴졌다.
비사인은 검무극의 말대로 황석경이 정말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비단 약속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황석경의 강함에 매료되었기에 진심으로 수하가 된 모양이다.
그때 뒤에 서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검무극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참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지 않소? 두 사람 중에 배신자는 괴악이라 예상했는데.”
검무극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갑자기 그가 나서자 괴악은 물론이고, 광섬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대화는 수장과 수하의 대화가 아니었다.
“설마 이 상황을 예상했소?”
“당신이 이들을 만나러 갈 것을 황석경도 분명 예상했을 거요. 한데도 막지 않았소. 사도칠대고수 중 두 명이 적이 될 수도 있는데 안 막는다? 뭔가 수상하지 않소?”
비사인은 듣고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그때는 척척 나지 않는 것일까?
“그럼 왜 대비하지 않았소?”
“무슨 대비 말이오?”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먹이려는데 어떻게 안 먹소? 저 사람 앞에서 뱉을까?”
쉬이이익!
광섬의 쾌검이 허공을 갈랐다.
툭.
검에 잘린 복면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피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검을 피하는 것보다,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피하지 않는 것이 더 대단한 담력과 실력을 요구했다.
얼굴을 드러낸 검무극이 턱과 입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복면이 불편해서 힘들었는데, 잘라줘서 고맙소. 이거 안쪽 천 꼭 바꿔야 한다니까.”
절대회귀 355화
제355회 내공 쓸 수 있다고 했잖소?
“천마신교 소교주!”
광섬과 괴악은 동시에 검무극을 알아보았다.
첫 만남에서 검무극이 워낙 강렬한 인상을 줬기에 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대가 여기에 있지?”
검무극이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그들은 크게 놀랐다.
광섬과 괴악의 표정이 상반되게 바뀌었다. 괴악의 마음에 한 가닥 희망이 피어올랐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변수가 생긴 것이다.
반면 광섬은 그야말로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괴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소맹주를 죽이려던 참이었다.
한데 이렇게 되면 마교 소교주까지 죽여야 할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지금 벌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마교 소교주까지 죽으면 무림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생각지 못한 변수에 속이 탄 광섬은 성큼성큼 걸어가서 술을 부어 마셨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당장 이 일을 황석경에게 보고해야 할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보고하고, 답을 들으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계획이 마교 소교주에게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광섬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여유로운 게 자신을 죽이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모양이다.
‘소교주,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그는 이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을 내렸다.
광섬이 괴악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넨 적어도 소맹주를 죽였다는 죄는 쓰지 않아도 되겠네.”
광섬의 뜻을 짐작한 괴악이 차갑게 반응했다.
“미친 새끼.”
그나 자신이나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평생 사람을 믿지 않고 살았지만 그래도 함께 어울렸던 광섬을 믿는 마음은 있었다. 과묵한 성격도 마음에 들었고. 그 과묵함에 속았다. 속인 그보다 속은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그의 무공인 참격철인은 온몸으로 싸우는 체술이다. 내공이 없으면 어떻게 기습조차 시도해볼 수 없다.
소교주, 소맹주, 자신까지 셋이서 달려들면 어떻게 될까? 내공이 없더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광섬의 검이 얼마나 빠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내공 없는 자신의 체술은 안마가 될 거고, 둘의 공격은 애들 칼싸움이 될 거다.
광섬이 내린 결정은 괴악의 예상대로였다.
“소교주와 소맹주,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 양패구상한 것으로 처리될 테니까.”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결국 당신이 걱정했던 일이 벌어지는군요. 우리가 싸우다 서로 죽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시오?”
“친구가 한날한시에 죽으면 그건 그거대로 가치 있는 일 아니겠소.”
비사인은 지금 검무극의 너스레를 받아줄 심정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광섬과 괴악을 믿었다. 그랬으니 아무 의심도 없이 술을 마셨던 것이고. 사도맹주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당연히 믿어도 된다고 여겼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인데.
문득 사람을 똑바로 자세히 보라던 검무극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이것도 결국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한 결과겠지.
자신이 죽고 나면 사도맹은 어떻게 될까? 맹주님은? 광섬까지 끌어들인 자들이니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그의 마지막 걱정은 자신이 아니었다.
“마교 소교주는 죽이면 안 되오. 우린 죽이더라도 저 사람은 보내주시오.”
내가 죽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살려달라는 말을 하다니? 비사인은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소교주는 약속할 거요. 이곳에서 있었던 일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마교 소교주쯤 되는 인물이니 약속을 함부로 저버리지 않을 테고.”
광섬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비사인은 더욱 간절히 그를 설득했다.
“그대가 소교주 입장이라 생각해 보시오. 어차피 사도맹에서 일어난 일들이오. 저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잖소? 그가 굳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해가면서 오늘 일을 밝힐 리가 없소. 소교주를 죽이면 마교에서 당신들을 찾아내서 다 죽일 거요.”
비사인이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이 말해보시오.”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말할 거요.”
“뭐요?”
“내 눈앞에서 당신을 죽인 자인데 그냥 있을 수 없지. 다 말할 뿐만 아니라 복수할 거요.”
비사인은 답답했다. 이 소교주야, 지금 장난칠 때 아니라고. 제발, 이번 한 번만 내 장단에 맞춰줘.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비사인이 차분히 광섬을 설득했다.
“원래 소교주가 마음에 없는 소리 잘하오. 일 크게 벌이지 말고, 소교주는 보내주시오.”
그러면서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나 장난치는 거 아니오. 그러니 당신도 장난치지 마시오.
물론 순순히 그 바람을 들어주면 검무극이 아닐 것이다.
“당신, 지금껏 만난 중에 지금이 제일 멋있소.”
제발 좀! 비사인은 버럭 화를 내려다 말았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자신이 부탁한다고 살려주고 안 한다고 죽이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 살려주려고 애쓰는 사람이 안 멋있으면, 그것도 문제 아니겠소?”
말을 하고선 비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 순간에도 너스레를 떠는구나. 그래, 차라리 저 사람과 웃고 너스레 떨다 죽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검무극이 광섬을 쳐다보았다.
“저 사람 눈을 보시오.”
비사인도 검무극을 따라 광섬의 눈을 쳐다보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는 날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소.”
비사인이라고 어찌 몰랐을까? 다만 이대로 검무극까지 죽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비사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오. 당신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데.”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당신의 두 번째 한숨이오.”
그에게 열 번째, 백 번째 한숨을 보여주고 싶은데. 한숨 두 번 보여주는 관계로 끝이구나.
검무극과 함께라면 어떤 위기도 다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일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라고 검무극이 밀어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를 믿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잊고 있었다. 검무극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고 그의 너스레에 웃는 사이 그도 인간임을 잊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오.”
탄식하듯 뱉어진 그의 사과에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괴악이 광섬에게 말했다.
“저 얼마 되지도 않은 덜 익은 우정도 저리 절절한데, 우린 이게 뭐냐?”
광섬은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광섬에게 말했다.
“당신은 무림 역사에 길이 남을 주인공이 되겠소. 마교 소교주와 사도맹 소맹주, 그리고 사도칠대고수를 한자리에서 죽이게 되니까.”
그러자 괴악이 한마디 보탰다.
“산공독으로 죽였다는 것도 그 기록에 꼭 남겨놔라!”
광섬은 더는 시간을 끌지 않겠다는 듯 검을 뽑으려 했다.
검무극이 재빨리 물었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납치되어 데려간 아이들은 어디에 있소?”
“그건 왜 묻나?”
“그 일 때문에 이번 일에 말려든 거니, 죽어도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 일은 광섬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모른다.”
“그럼 당신이 존경하는 그 사람이 사도맹 내에서 누구와 손을 잡았소?”
검무극은 그를 통해서 뭐라도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번 역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모르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그저 황석경의 칼로 쓰이는 사람이군.”
검무극은 비사인에게 덧붙여 말했다.
“나중에 이 사람이 사도맹주를 죽이기 위한 검으로 쓰였을 거요.”
충분히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신뢰를 쌓아가다 결정적인 순간, 사도맹주를 암습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독도 쓰고, 암기도 쓰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쓰면 사도맹주도 암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에 투왕까지 나선다면?
더욱 걱정되는 상황은 이것이었다. 마교 소교주까지 죽었으니, 마교와 사도맹의 관계가 급속히 나빠질 것이다. 자칫 오해가 쌓이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이번 죽음의 내막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놈들은 어부지리만 노릴 것이고.
비사인은 답답한 마음을 검무극에게 전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소. 사실 나는 내공을 사용할 수 있소. 항상 하는 장난처럼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줬으면 좋겠소. 그래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살아남는다면?”
“사람들 모아두고 춤을 추겠소.”
태어나서 춤이라곤 쳐본 적이 없는 그였다.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느니 죽고 말지, 라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오직 살고 싶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까?
살고 싶었다. 죽어도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직 맹주전 태사의에 앉아 보지도 못했는데. 자신만의 사도를 세워보지도 못했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지도 못했고. 친구네 집 앞 술집에서 함께 술을 마셔보지도 못했고…… 아직 친구 아버지에게 인사도 못 했는데.
검무극이 비사인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나 내공 사용할 수 있소.”
비사인도 웃어주었다. 거칠고 흉한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검무극과는 이렇게 웃으며 죽는 게 어울린다.
‘당신 친구여서 좋았소.’
광섬이 검을 뽑아들며 괴악에게 말했다.
“그래도 당신과의 정이 있으니, 마지막에 죽여주겠소.”
“우리가 안 지 이십 년이고, 함께 다닌 지도 칠팔 년인데, 참 대단한 정이다.”
광섬은 못 들은 척 비사인을 향해 걸어왔다.
“소맹주에게 악감정은 없소.”
심장이 빨리 뛰었지만 비사인은 당당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광섬을 응시했다.
‘하늘이시여, 부디 사도맹을 지켜주십시오!’
광섬의 검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액!
채앵!
비사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검무극의 등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와서 날아드는 검을 흑마검으로 막은 것이다.
“당신!”
말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검을 교차하고 있던 광섬이 곧장 독문무공 추뢰삼검을 발휘한 것이다.
자신을 막은 이 한 수에 광섬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얄팍한 수를 썼다간 그냥 죽을 거라고. 그는 자신의 독문 무공에 모든 내공을 쏟아부었다.
‘내공이 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인간이 어떻게 떨어지는 벼락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 거리에서 추뢰삼검이 펼쳐진다면 반드시 검무극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번쩍!
쉬이이이익!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하지만 벼락을 피하는 인간도 있었다.
‘하나는 피하더라도!’
연속해서 추뢰이검이 발휘되었다. 검광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십여 가닥의 검선이 검무극을 향해 쏟아졌다.
챙챙챙챙챙챙챙챙챙!
하지만 검무극의 흑마검이 공격을 모두 막았다. 이쪽이 벼락이면 저쪽도 벼락이었다.
광섬은 놀라고 당황했다. 지금껏 이 거리에서 발휘된 추뢰이검은 오직 한 사람만이 막아냈었는데.
그래, 마교 소교주니까 막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마지막 삼검만큼은 못 막을 거다.
이곳에 있는 모두를 휩쓸 추뢰삼검이 펼쳐지려던 그때.
푸욱!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멈췄다.
갑자기 흐르는 정적은 이 승부가 한 수로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광섬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을 향했다.
흑마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해 있었다. 이 공격을 놓쳤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보다 더 빠르다고?”
광섬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맑고 깊은 눈빛은 앞서 비사인과 너스레를 떨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었다.
반대로 생기를 잃어가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차갑게 말했다.
“술병에 산공독을 타던 그 순간에 당신이 무인으로 해왔던 모든 일은 다 사라졌소. 이제 넌 아무것도 아니다.”
광섬이 뭐라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쉬이익! 서걱!
그라고 예외는 없었다. 가슴에서 뽑혀 나온 흑마검이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쿵.
사도칠대고수 중 한 명이자 쾌검의 달인이었던 광섬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절명하는 순간이었다.
흑마검에 묻은 피를 시원하게 촤악 털어내며 검무극이 비사인을 향해 돌아서며 씩 웃었다.
“내공 쓸 수 있다고 했잖소?”
살아났다는 기쁨과 함께 비사인의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지옥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순간이었다.
“대체 어떻게?”
“산공독이 내 체질에 안 맞나 보오.”
아! 이 사람은 대체 언제까지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할 작정일까?
“날 어디까지 끌고 다닐 생각이시오?”
“말했잖소? 편하게 끌려다니면서 별도 보고 구름도 보시라고. 언젠가는 그때가 좋았지, 싶은 날도 올 거요. 그러다 내가 지치면 그땐 날 좀 끌어주시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비사인은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마움의 정산은 마지막에 다 하기로 했으니까. 그 고마움에 목숨 빚까지 얹어졌다. 이게 다 정산이 될까?
놀란 것은 비사인만이 아니었다. 괴악은 멍한 표정으로 광섬의 시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의 실력에 놀란 것이다. 산공독이 통하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 그 가까운 거리에서 광섬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그리고 더 빠른 쾌검술로 그를 죽였다.
쾌검술이 검무극의 독문무공이 아닐진대, 그야말로 기본기로 광섬을 이긴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
소교주가 특별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그가 정중히 포권하며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소교주, 자네 덕분에 목숨을 구했네. 앞으로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게.”
“그럽지요. 앞으로 내 친구 잘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정중히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괴악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비사인에게 함부로 굴지 말라고.
괴악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됐나?
―나도 모르겠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저 사람 친구가 되어 있어서.
세 사람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참, 약속은 언제 지킬 거요?”
“무슨 약속 말이오?”
“살아남으면 사람들 앞에서 춤추겠다는 약속 말이오. 맨 앞자리 예약이오.”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소?”
비사인은 딱 잡아뗐다.
“미안하지만 증인도 있소.”
검무극이 괴악을 쳐다보았다.
“소맹주가 한 약속 들으셨지요?”
괴악은 검무극과 비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무슨 약속? 난 들은 적이 없는데?”
“살면서 나보다는 소맹주 만날 일이 많으시다?”
괴악이 멋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한낱 교관 놈이 감히 사도맹주 자리를 노린다고? 자, 어서 가세. 우리가 또 남 잘되는 꼴은 못 보지.”
절대회귀 356화
제356회 그가 누군지 압니다.
마차 안의 세 사람은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우선 검무극은 눈을 감고 천마호신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연마하고 또 하고. 어떤 자투리 시간도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다 보면 느낌이 올 때가 있다. 간질간질 사람을 자극하며, 꽃봉오리를 터뜨릴 것만 같은 순간, 바로 다음 단계에 오르기 직전의 느낌이다. 천마호신공이 딱 그랬다.
‘우리 많이 친해졌잖아? 한 걸음만 더 와라.’
이런 검무극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성을 코앞에 둔 천마호신공은 한 걸음 밖에서 애만 태우고 있었다.
정작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사람은 마차 창밖을 쳐다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자신이었다. 장난으로 넘어가면 검무극에게는 종종 시달리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춤을 출 필요는 없을 거다.
하지만 검무극에게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리 싫어하는 일이라도 약속은 꼭 지키는 모습을.
‘하고 많은 일 중에 하필 춤을 춘다고 해서는.’
대단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사인은 상상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옆자리에 앉은 괴악은 광섬을 떠올리며 한 가지 다짐을 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방심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애초에 인간이란 것들은 믿어서는 안 될 족속이다. 원래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나이를 먹어선지 잠깐 마음이 풀어졌다.
그래서 비사인이 걱정되기도 했다. 검무극을 믿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소맹주, 사람을 함부로 믿었다간 크게 후회할 거요.’
자신은 말이 너무 없는 놈에게 당했고, 지금 비사인은 말이 너무 많은 놈에게 당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비사인에게 전하지 않았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었으니까.
다만 검무극과 비사인의 관계를 내심 주목하곤 있었다. 검무극에게 목숨 빚을 진 것은 진 것이고. 그래도 사도맹과 연을 맺고 있고, 받아야 할 무공도 있었으니까.
그때 눈을 감은 채 검무극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오?”
비사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이 또 자신의 의견부터 물어봐 주고 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는데, 이렇게 먼저 물어봐 주는 게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의 머릿속에 분명 더 나은 계획이 있을 텐데, 이렇게 물어봐 준다. 정말 똑똑한 사람임을 잘 알기에 이런 배려가 더 힘들 거라는 것도 잘 안다.
“날 죽이려 했으니, 나도 죽일 거요.”
이제 남은 건 목숨을 건 싸움뿐이다.
다만 문제는 황석경의 실력이었다. 사도칠대고수인 광섬이 그와 싸워서 지고 그를 존경할 정도의 실력.
그렇다고 검무극에게 죽여주시오,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검무극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건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어쨌거나 이 일은 사도맹의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도움을 청하려고 광섬과 괴악을 만난 건데, 이제 괴악만 남았다. 그 혼자로는 역부족이고.
사도맹 내에서 도움을 줄 만한 고수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중 황석경과 손을 잡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광섬이 포섭되었으니, 이제 누가 포섭되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놈과 손을 잡은 자들까지 다 처리하고 싶은데. 어떻게 알아낼지 고민하고 있었소.”
검무극에게는 해결책을 묻고 싶진 않았기에 괴악에게 정중히 물었다.
“선배님께 고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들을 색출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럴 때 멋진 계획을 말해서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지만, 괴악은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 쓰는 일은 젊은 사람들이 하시게. 그놈 때려잡을 때는 앞장서겠네.”
괴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미 산공독은 모두 사라진 후였지만, 그 찝찝한 기분은 남아 있었다. 광섬을 포섭한 그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해코지한 자는 백 배의 고통으로 갚아주면서 살아왔으니까.
“제가 좀 더 숙고하겠습니다.”
비사인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맹주님을 암살하려 들 수도 있었다. 물론 자신이 아는 사도맹주는 어떤 암습에도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지만, 상대 역시 보통 놈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내게는 방법을 묻지 않소?”
그야 미안하니까. 조금 전에 목숨 빚을 졌는데, 또 물어보기 면목 없으니까.
“별도 보기 싫고, 구름도 보기 싫은가 보오.”
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농담이었다.
“싫으면 마시오. 좋은 생각이 났었는데.”
검무극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비사인이 아무 말을 묻지 않자 검무극이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비사인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좋은 생각이 났다니까!”
“아까 들었소.”
“안 물을 거요?”
“안 물을 거요.”
“똑똑한 척하고 싶소. 제발 기회를 주시오!”
바깥을 바라보던 비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은 이런 사람이다. 생색낼 일인데 오히려 자신이 몸을 낮춘다. 비사인은 새삼 느꼈다. 진짜 자존감은 생색내지 않는다는 것을.
“싫소! 당신 똑똑한 척하는 것 보기 싫소.”
“이번 한 번만 들어주시오.”
“좋소.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지금까지 황석경은 자신과 손을 잡은 자들을 만나지 않고 있었을 거요. 당신이 감시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가정을 했다.
“만약 당신이 죽었다면?”
“!”
깜짝 놀란 것은 비사인만이 아니었다. 함께 듣고 있던 괴악도 놀랐다.
비사인은 검무극이 무슨 의도로 말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황석경에게 내가 죽었다고 속이자는 것이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죽었다고 여기면 놈은 틀림없이 조력자와 접선을 할 거요. 이후 일을 상의해야 할 테니까.”
확실히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방해자가 사라지는 순간의 방심을 이용하자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려면 맹주님께 알려야 하지 않겠소?”
“그건 당신이 판단하시오.”
비사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맹주에게 알린다는 것은 이제부터 맹주가 개입한다는 의미다.
마지막까지 자신이 해결하고 싶었는데.
한데 적이 워낙 강력하니 이제 맹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끼기도 했다.
한 가지 걱정은 아무래도 짜고 움직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알리지 않고 이 일을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사도맹주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자신이 죽었는데도 전혀 슬퍼하지 않으면 어쩌지?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가소롭다. 사도맹의 명운이 달린 일임에도, 자신이 상처받을 걱정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새 소맹주를 임명해 버릴지도 모르오.”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 사도맹주였으니까.
“이 기회에 당신 다음은 누군지 확인하시오.”
농담 반 진담 반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은 옅게 웃었다.
잠시 숙고하던 비사인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부터 맹주님께 알려서 진행하겠소.”
비사인이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실종되면 일랑이 맹주전으로 불려갈 거요.”
“나에 대해서 말할 거다?”
그러자 비사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반대라서 안 되오. 일랑은 당신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충성심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사도맹주가 물어도 비밀을 지킬 거라는 믿음이.
“그 사람이 맹주님께 거짓말을 하게 할 수는 없소.”
맹주에게 거짓을 고하는 것은 이유 불문하고 중죄였으니까.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수하를 아끼는 마음이 훌륭하시오.”
“괜한 소리 마시고, 부탁 하나만 합시다. 황석경을 감시해 주시오. 내가 할 일이지만 보다시피 죽은 몸이라서요.”
상대의 무공 수위를 생각하면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기에 검무극에게 부탁했다. 부탁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검무극이었으니까.
“좋소, 그럽시다.”
이렇게 흔쾌히 대답하는 검무극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드냐고?
언젠가 그를 맨 앞자리에 앉히고 춤 한 번 춰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람에게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 *
―소맹주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사혼의 놀라운 보고에도 투왕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지금 맹주전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개미 떼를 풀었고, 사악대주(邪惡隊主)가 소집되어 들어갔습니다.
개미 떼라고 불리는 혈의군(血蟻軍)은 탐색, 조사에 특화된 사도맹의 정예들이었다.
사악대는 맹주전 직속 조직으로 오직 사도맹주의 명을 따르는 정예들이었다.
―정말 죽은 겁니까?
투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놔둬야 죽는다더니, 정말 소맹주가 죽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처리하신 겁니까?
광섬이 산공독을 써서 처리한 일이었다. 실패하고 싶어도 실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맹주의 죽음을 극비에 부친 채 내막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이미 맹주전이 어수선합니다.
광섬은 이번 일을 끝내고 당분간 연락을 끊고 은신하기로 했으니, 아무리 조사해도 일의 내막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진작 사도맹주에게 보고했어야 했는데, 소맹주가 멍청한 선택을 했습니다.
투왕은 사혼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이라도 마찬가지로 혼자 처리했을 테니까. 물론 이렇게 죽지는 않았겠지. 어떤 싸움에서도 지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가 뵙기를 청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투왕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당분간은 만나자는 연락이 오지 않을 거로 예상했는데. 신중한 사람이니 분명 보자고 한 이유가 있으리라.
―오늘 밤 보자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소맹주의 죽음으로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그날 밤 자정 사도맹 본단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에 투왕이 서 있었다.
사방이 뚫린 그곳은 누군가 숨어서 지켜볼 수 없는 지형이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밤하늘의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곳으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죽립을 눌러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와서 투왕 옆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주군.”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투왕을 주군이라 칭하고 있었는데, 안정적인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차분한 성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벗어도 되네.”
“주군의 무공실력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지요.”
자신의 실력을 믿지 않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투왕은 언짢아하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섭니다.”
“말씀하시게.”
죽립 남자에게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소맹주가 살아있습니다.”
생각지 못한 말에 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소맹주가 직접 일랑을 통해 맹주께 연락해온 것이니까요.”
놀랍게도 남자는 맹주전의 기밀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투왕은 이 중요한 시점에 왜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광섬이 죽었다는 말인데?’
자신이 아는 광섬이 쉽게 당했을 리 없다. 더구나 산공독까지 쓰기로 했던 그였는데.
“하면 소맹주는 왜 죽은 척한 건가?”
놀랍게도 죽립 사내는 비사인의 의도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주군의 배후에서 제 존재를 알아내려는 것이겠지요.”
이 모든 결과는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누군지 몰라도 아주 총명하고 강력한 고수가 소맹주를 돕고 있네.”
그러자 나쁜 소식에 이어 좋은 소식도 전해졌다.
“그자가 누군지 압니다.”
남자는 비로소 자신이 쓰고 있던 죽립을 벗으며 정체를 드러냈다. 그만큼 지금부터 하려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달빛 아래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투왕이 포섭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인 남자.
누구보다 똑똑한 투왕이었다. 하지만 지금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었다.
맹주전의 극비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에 대한 해답은 이 남자의 신분에 있었다.
사도맹 부군사 혁사군(赫師君).
놀랍게도 그는 사도맹의 부군사였던 것이다. 총군사 황서성(黃徐成)이 이 년 전부터 노환을 앓으면서 부군사였던 그가 사도맹의 총군사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기에 이제 곧 정식으로 총군사가 될 일만 남은 그였다.
“소맹주를 돕고 있는 그자는…….”
투왕은 오늘 여러 놀라운 말을 들었지만, 이어진 혁사군의 말이 가장 놀라웠다.
“마교 소교주 검무극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혁사군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실만은 알지 못했다.
지금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투왕의 무공 경지로도 파악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자신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먼 거리에서 검무극은 신안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자가 죽립을 벗었을 때,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검무극은 사도맹의 고수들의 용모파기를 모두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사람이 투왕과 손을 잡았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그는 사도맹 내의 그 어떤 자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투왕이 혁사군과 손을 잡았다고?’
그야말로 검무극과 혁사군, 양쪽 모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절대회귀 357화
제357회 저것들 죽이고 오늘 은퇴한다.
마교 소교주란 말을 듣는 순간, 투왕은 훌쩍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이쪽저쪽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한 후에야 원래 자리로 내려섰다. 그가 얼마나 마교를 신경 쓰고 조심하는지 이 반응만으로 알 수 있었다.
“마교 소교주가 왜?”
투왕에게는 전혀 생각지 못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반면 혁사군은 검무극과 비사인의 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앞서 외부 활동을 하면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투왕은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지난 모든 의문이 풀리기도 했다.
살수들이 몰살당하고,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광섬이 실패하고. 그 모든 의문에 마교 소교주를 대입하니까 답이 쉽게 나왔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특히 이번 마교 소교주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 투왕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본단 인근 안가에 숨어 있습니다.”
그는 총군사 역할을 맡고 있으니 안가의 위치는 물론이고, 누가 와서 머무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마교 소교주도 함께 있나?”
“아뇨, 현재 괴악과 함께 있습니다.”
소맹주는 안가에 숨어서 죽은 사람 행세를 하고 있고, 소교주는 자신의 뒤를 캐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투왕이 유일하게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이 혁사군이었다. 똑똑하고 냉철한 그의 능력을 투왕은 높이 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 뜻을 읽고 거기에 맞춰서 계획을 세웠다.
“소맹주가 죽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니, 죽여줘야겠지요.”
또한 그는 실행력 또한 남달랐다. 확신이 드는 일은 먼저 처리하고 후보고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다.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괴악까지 있어 쉽지 않을 텐데? 누굴 보냈나?”
혁사군은 이 상황을 해결할 이들의 이름을 밝혔다.
“염천쌍검(閻天雙劍)을 보냈습니다.”
마교 소교주만큼이나 의외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아직 살아있었나?”
그들은 사파 무림에서 쟁쟁한 악명을 떨치던 이들이었다.
그들 역시 사도칠대고수에 속해 있던 고수였는데,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무림공적으로 몰려 무림맹의 천라지망에 갇혀 합공당해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죽기 직전에 본맹에서 빼돌렸더군요. 이후 맹에서 비밀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저도 총군사 일을 맡으면서 최근에야 알게 되었지요.”
염천쌍검이라면 괴악과 비사인을 죽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들었다.
“안가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 염천쌍검을 쓰고. 나중에 자네가 개입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나?”
혁사군은 그런 걱정을 한낱 노파심으로 만들었다.
“바쁜 제가 그런 일을 꾸밀 시간이나 있겠습니까?”
의미심장한 그의 미소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뒤집어씌울 다른 사람이 준비되어 있음을. 눈엣가시 같은 정적(政敵)을 함께 없앨 것임을.
혁사군의 일 처리는 소맹주쪽만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에 대한 대비도 이미 마친 상태였다.
“문제는 소교주입니다. 절대 그를 죽이면 안 됩니다. 그랬다간 우리 일이 다 꼬여버릴 테니까요. 그를 신교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투왕도 같은 생각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력으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죽이지 않고 패배시키려면 주군께서 직접 나서야겠지요.”
“끝까지 버티면?”
소교주 쯤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마교를 등에 업고 떠나지 않으려 할 때다.
“설마 그가 소맹주를 진심으로 돕고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뭔가 모종의 목적이 있어서겠죠. 자기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면 발을 뺄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은?”
“사도맹주를 이용해서 돌려보내는 겁니다. 지금 사도맹주는 소맹주가 검무극과 이렇게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게 되면 반드시 소교주를 돌려보낼 겁니다. 소맹주에게는 불호령이 떨어지겠지요.”
일부러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써먹기 위해서.
“자네라면 어느 방법을 택하겠나?”
“두 번째 방법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첫 번째 방법을 먼저 이야기한 이유는?”
“주군께서 바라는 방법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투왕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네와의 미래가 기대되는군.”
그에게 준 것은 총군사 자리였고, 이제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은 사도맹주 자리였다.
투왕이 혁사군을 포섭한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투왕의 물심양면 지원이 아니었으면 그는 결코 부군사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혁사군 인생에서 운명을 가를 결정적인 순간이 몇 번 있었다. 똑똑한 그였지만 어디 군사 중에 똑똑한 사람이 그만 있었겠는가?
투왕은 강력한 경쟁자가 될 사람을 미리 없애주었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도 죽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이뤄진 일이었기에 절대 발각되지 않았다.
“두 번째 방법으로 진행하게.”
“네. 사도맹주를 움직여서 소교주부터 돌려보내겠습니다.”
혁사군이 다시 죽립을 썼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혁사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그곳을 떠나갔다.
혼자 남은 투왕이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소맹주, 그대 뜻대로 오늘 죽겠군. 아니, 이미 죽었으려나?”
달이 지면 해가 떠오를 것이다.
* * *
비사인과 괴악은 안가에 머물러 있었다.
밤이 늦었지만 두 사람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마당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비사인의 마음은 온통 이번 일 생각뿐이었다.
과연 검무극이 배후를 알아낼까? 과연 사도맹주는 자신의 이번 일 처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황석경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했다.
은은한 달빛에 마음이 동했는지 괴악이 팔자 좋은 소리를 했다.
“은퇴하면 이런 곳에 은거하고 싶네.”
괴악은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외부에서 찾기는 어렵고, 내부는 호젓하고 운치가 있었다.
“더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사셔야죠.”
그러자 괴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생 원한을 많이 산 인생이어서 그런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폐쇄적인 곳에 있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네.”
확실히 이곳은 안전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소맹주.”
“네, 선배님.”
“약속 잊지 말게.”
“제가 맹주가 되는 그날 삼격귀영보를 내어드리겠습니다.”
괴악이 목숨을 걸고 비사인을 돕는 이유였다. 비사인이 흔쾌히 대답하자 괴악은 결국 한마디 조언을 해주었다.
“이보게, 소맹주. 상대의 친절함에 속지 말게. 사람은 누구나 흑심이 있는 법이네.”
검무극을 믿지 말라는 말이었다. 목숨 빚은 목숨 빚이고, 의심할 때는 의심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비사인이 어찌 모르겠는가? 검무극은 자신부터가 걱정하는 존재인데.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후 이번에는 비사인이 물었다.
“선배님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게.”
“이미 사도칠대고수에 오르셨는데, 더 강해지고 싶으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천하제일, 혹은 사도제일을 꿈꾸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빈 찻잔을 내려다보는 괴악의 눈빛에 분노가 담겼다.
“죽이고 싶은 자들이 있어서네.”
“그들이 누굽니까?”
괴악이 대답을 망설이던 바로 그때였다.
마당에서 외원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가를 관리하는 무인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비사인과 괴악이 벌떡 일어났다.
후끈한 피 냄새를 풍기던 무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등은 시뻘겋게 피에 물들어 있었다.
시체를 넘어 그곳으로 두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그들을 알아본 괴악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염천쌍검!”
괴악의 말에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염천쌍검은 과거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자들이었다.
염라검(閻羅劍)과 천수검(千手劍).
두 사람을 합쳐 염천쌍검이라 불렀다.
그들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풍기는 기도가 완전히 달랐다.
염라검이 거칠고 강맹한 느낌이라면 천수검은 냉철하고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보였다.
비사인이 놀란 것은 상대가 염천쌍검이라서가 아니었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안 거지?’
이 비밀스러운 곳이 뚫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사도맹의 기밀체계가 뚫렸다는 의미.
염천쌍검도 괴악을 알아보았다.
“십 년만인가?”
염라검의 물음에 괴악이 대답했다.
“십이 년만이지.”
괴악은 마지막 만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옛 인연이 있으니 후배님은 그만 가시게.”
나이는 그들이 더 어렸지만 괴악에게 후배라 칭하고 있었다. 괴악이 사도칠대고수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이미 먼저 사도칠대고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염천쌍검이란 이름으로 칠대고수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들은 각자 칠대고수 자리를 차지해도 될 실력이었다. 둘이 합쳐 하나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칠대고수들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고. 만약 이들의 검이 무뎌지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비사인은 괴악이 갈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염천쌍검의 실력을 괴악의 갈등으로 알 수 있었다.
‘괴악도 이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구나.’
곧이어 내려진 무정한 결정.
“소맹주, 이해해주시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었다. 나는 떠날 테니 너는 여기서 죽어라.
‘비겁하게 이러시기요?’
차갑게 쏘아붙일 수도 있었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사인은 그러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분명 그랬을 것 같은데.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거지?
“제 손으로 비급을 드리지 못하게 돼서 미안합니다. 부디 죽이고 싶은 그자들 무사히 죽이시길 바랍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죽을 상황에서도 멋을 부린다고? 이건 검무극이나 할 말이었는데. 아, 정말 그 사람에게 물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검무극은 이런 여유를 부리고도 멋지게 살아남겠지만, 자신은 죽고 말 텐데.
비사인은 섭섭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깊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서나 느끼는 거였으니까.
예전이라면 이 순간 후회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냥 맹주님께 다 보고 해야 했는데. 그런 후회도 들지 않았다.
‘확실히 내가 변했구나!’
그래서 아쉬웠다. 죽을 위기가 자꾸 오고, 그럴 때마다 아쉬움이 든다. 더 살아서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느끼고 싶은데. 그에게 그 변화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래서 또 바라게 된다.
거짓말처럼 검무극이 저 담장 위에 걸터앉아서 웃으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고.
이번에 살아나면 정말 춤 춥시다.
하지만 오늘이야말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야말로 안전한 안가에 있었으니까. 그가 달려올 이유가 없는 곳이었으니까.
괴악은 잠시 비사인을 쳐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염천쌍검은 말없이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괴악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
쉬이이익!
후아아앙!
괴악과 염천쌍검이 동시에 돌아서며 서로를 향해 일검과 쌍장을 날렸다.
비사인을 버려두고 떠나는 척했지만 괴악은 알고 있었다. 염천쌍검이 자신을 기습해서 손쉽게 죽이기 위해 보내준다고 한 것임을. 그들이 그런 자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꽝!
폭음과 함께 서로 주르륵 밀렸다.
염천쌍검은 세 걸음 물러났고, 두 사람의 내공을 상대한 괴악은 일곱 걸음이나 물러났다.
“비겁한 짓거리는 여전하구나.”
괴악의 조롱에 염라검도 비웃었다.
“쥐새끼처럼 여전히 눈치가 빠르구나.”
괴악은 훌쩍 몸을 날려서 비사인 옆으로 내려섰다.
비사인은 그가 달아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온 것에 놀라고 감동했다.
“왜 이리로 오십니까?”
조금 전 일장을 교환할 때 뒤로 밀리는 기세를 타고 그대로 담을 넘어서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럼 염천쌍검이 각자 흩어져서 한 사람은 괴악을 쫓고, 남은 자는 자신을 죽이려 들었겠지.
아니면 괴악을 보내주고 그냥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고. 어차피 오늘 죽여야 할 목표는 자신일 테니까.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지금보다는 살아날 가능성이 컸다. 괴악이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아까 강해져서 누굴 죽이고 싶냐고 물었지?”
그제야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이고 싶은 자들이 바로 염천쌍검이었다는 것을.
“그럼 더욱더 가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이길 수 없다고 여겼기에 삼격귀영보를 원한 것일 테니까.
괴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말이었다. 조금 전 격돌에서도 알 수 있었듯, 아직 이들을 이길 수 없었다.
비사인과 저들과의 실력 차는 더욱 클 테고. 결국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런데도 왜 남았느냐고? 사도맹 소맹주가 죽게 두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이게 다 광섬 때문이다.’
광섬에게 배신당해서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서 내내 욕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 이대로 달아나 버리면 결국 자신도 같은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비사인이 냉정한 말이나 욕을 했다면 어쩌면 일장을 교환한 후 그길로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말로 자신을 보내주는 모습에 결국 떠나지 못했다. 친절함에 속지 말라고 조언이나 하지 말지.
“비급은 자네에게 받고 싶어서.”
비사인은 알 수 없었다. 죽을 때가 돼서 사람이 변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에 그도 달라진 건지.
사람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훔쳐서라도 그 비급 진작 드릴 걸 그랬습니다.”
괴악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죽음을 각오한 엄청난 기세가 흘러나왔다.
“이제 필요 없네. 저것들 죽이고 오늘부로 은퇴할 거니까.”
비사인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에서 예리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금분세수(金盆洗手) 하시는 날, 강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금대야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날 춤도 추겠습니다.
절대회귀 358화
제358회 내가 두 번 찔리면 너도 한 번은.
비사인은 각오를 다지며 마음을 다스렸다.
‘할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괴악은 그들과 같은 사도칠대고수의 반열에 올랐으니 박빙을 이룬다고 해도 문제는 자신이었다.
내공 그리고 실전경험 모두 부족했다. 게다가 저들은 평생을 함께 무림을 종횡했지만, 자신은 오늘 처음 괴악과 합을 맞춰본다.
그렇지만 두렵지 않다. 좋은 마음으로 괴악을 보내주려 할 때부터 그랬다. 자신은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사도맹의 후계자다.’
죽어도 후회 없는 싸움을!
비사인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그러잖아도 무서운 얼굴이 더욱 무서워 보였다.
―왼쪽에 있는 자를 맡게.
괴악은 비사인에게 염라검을 맡으라고 했다. 차분한 천수검이 상대하기 더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질이나 성격으로 볼 때, 염라검은 비사인을 가지고 놀려고 할 것이다. 비사인이 최대한 버티면, 자신이 어떻게든 천수검을 죽이고 그를 도울 작정이었다.
―오래는 못 버틸 겁니다.
비사인은 사도맹주의 독문무공인 패왕진천검법(覇王振天劍法)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아직 발휘할 수 있는 초식은 제일검 백천식(白天式)뿐이다. 게다가 아직 사 성에 불과한 경지기에 정확히 그를 적중시켜야 한다.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다.’
그 기회를 얻기 위해 비사인은 패왕진천검법을 배우기 전에 익혔던 자신의 독문무공 추혼사검(追魂四劍)을 발휘해서 싸울 생각이었다.
괴악이 천수검을 향해 걸어 나가자 자연스럽게 비사인은 염라검과 마주 섰다.
살기 가득한 염라검의 기도는 대단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언제 어떤 수가 날아와 심장에 박힐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들었다. 비사인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죽었다고 알고 있소.”
“너희가 살려냈지.”
“너희?”
“그래, 너희.”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사도맹이 그들을 구해냈다는 것을.
“당신들을 이곳에 보낸 사람은 누구요?”
“너희라니까.”
사도맹에 대한 적의가 느껴졌다. 결국 이들 역시 사도맹에 의해 이용당하는 칼에 불과했다. 그 칼이 닭 잡는 칼이 아니라 소 잡는 칼일 뿐.
염라검이 검을 뽑아 들며 가볍게 몸을 날렸다.
채앵!
두 사람의 검이 한 차례 격돌했다. 교차한 검 너머로 비사인은 염라검을 노려보았다. 단 한 수 교환했을 뿐인데,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팠다.
‘당신은 얼마나 아프지?’
하지만 염라검의 표정은 평온했다.
챙챙챙챙챙챙!
순식간에 십여 차례 공방이 오갔고, 다시 두 사람의 검이 대치했다.
“역시 소맹주는 소맹주군.”
하지만 비사인의 팔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염라검의 눈빛에는 여유가 흘렀다.
“내 인생에서 소맹주를 죽일 날이 올 줄은 몰랐군.”
“날 죽이면 맹주께서 당신들을 그냥 두겠소?”
“너희가 시킨 일을 했을 뿐인데. 그냥 안 두면?”
대체 너희가 누굴 말하는 걸까? 비사인은 배후가 너무 궁금했다.
“소맹주, 날 탓하지 말게.”
“당신을 왜 탓하겠소? 칼에 찔리면 칼을 든 상대를 탓해야지. 당신이 말한 너희들을 탓하겠소.”
화를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는데, 염라검은 보기보다 침착했다.
“좋지, 우리 둘 다 칼을 쥔 자를 탓해보세.”
“선공을 양보해 주시겠소?”
“소맹주 부탁인데 이 정도는 들어줘야지.”
검을 맞대고 있던 비사인이 훌쩍 뒤로 물러나면서 자신이 먼저 초식을 발휘했다. 비사인은 내공을 아끼지 않았다.
추혼사검 제일검 절혼(切魂).
비사인의 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파도처럼 일어나더니 휘몰아쳐 날아들었다.
꽈앙!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이렇게 강력한 공격을 발휘했음에도 염라검은 검기를 발출해서 날아든 공격을 해소했다.
충격에 서로 뒤로 밀렸지만, 비사인이 몇 걸음이나 더 밀려났다.
“내공이 부족하지 않았다면, 당신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거요.”
그러자 염라검이 코웃음을 치며 비사인의 의도를 꿰뚫어 보았다.
“아까부터 부질없는 노력을 하는군. 내가 그깟 도발에 넘어갈 하류처럼 보이나?”
“그랬다면 이런 도발도 필요 없었겠지요.”
비사인은 그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흥분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난전으로 끌고 가면 불리하다.’
무공 수준 싸움으로 이끌어야 한다. 자신이 익힌 패왕진천검법은 말할 것도 없고, 추혼사검도 염라검이 익힌 검술보다 상급의 무공이라 확신했다. 어떻게든 이 무공의 수준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소맹주, 그대가 어떤 수를 써도 소용없을 거네.”
“수나 다 보고 말하시오.”
추혼사검 제이검 진혼(鎭魂).
무려 다섯 줄기의 검기가 좌우로 휘몰아쳐 날아갔다. 마치 살아 있는 다섯 마리의 용이 그를 덮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염라검의 검에서도 검기가 쏟아져 나왔다. 용을 잡아먹는 늑대들이었다. 아직 다 크지 못한 용은 괴물처럼 큰 늑대들에게 모두 잡아먹히고 말았다.
제삼검 철혼(鐵魂)도, 제사검 광혼(狂魂)도, 염라검에게 통하지 않았다.
염라검은 사도칠대고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실력으로 증명했다. 반대로 비사인은 초조함이 더할수록 검술의 위력이 떨어졌다.
“잠깐! 잠깐만 쉬었다 싸웁시다!”
비사인의 말에 염라검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시간을 끌면 괴악이 너를 도와주러 올 것 같나?”
“그럴 것 같소만?”
“반대로 네가 우리 둘 모두를 상대해야 할 텐데?”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괴악과 천수검의 싸움을 쳐다보았다.
괴악의 참격철인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천수검의 공격을 맨몸으로 피하고 받아내며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날아든 검을 피하며 괴악의 팔꿈치가 천수검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천수검이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의 검이 괴악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날아든 괴악의 주먹 끝에서 강기가 터져나갔다.
퍼엉!
천수검이 몸을 비틀어 피했고, 이번에는 뿜어진 검기가 괴악이 서 있던 곳을 휩쓸었다. 괴악은 멀리 몸을 날려 피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거리를 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한순간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그런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비사인과 염라검은 잠시 서서 그 숨 막히는 공방을 지켜보았다.
“정말 친구를 믿는다면 저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봅시다. 기꺼이 당신들 둘을 모두 상대해 줄 테니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의 싸움이 너무 박빙이었다.
“그런 개수작이 통했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겠나?”
염라검이 검을 내지르며 몰아붙였다.
챙챙챙챙!
내공도 내공이지만 싸움 경험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온갖 싸움을 다 거쳐본 염라검이었기에 비사인은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파악!
비사인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쉬이이익!
잠깐 흠칫했던 그 순간이 위기였다. 뒤이어 날아든 염라검의 공격이 매서웠다.
‘피하기에 늦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몸을 피한 사람은 염라검이었다. 괴악이 비사인을 구하러 왔던 것이다.
후우우웅!
벼락처럼 빠르게 쇄도한 괴악은 등과 어깨를 이용해서 염라검을 날려버리려 했다.
워낙 큰 공격이었기에 염라검은 공격을 거두고 피한 것이다.
퍼엉!
하지만 천수검을 두고 싸움에서 이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날아든 검기가 괴악의 등을 강타했다.
끙, 하는 신음이 터져 나오며 괴악이 쿨컥 피를 토해냈다. 호신강기로 몸이 잘리는 것은 막았지만, 내부가 진탕하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 순간을 노리고 염라검의 검이 괴악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채애앵!
이번에는 비사인이 몸을 날려서 괴악을 구해냈다.
괴악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염라검이 괴악에게 말했다.
“당신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대체 소맹주에게 뭘 받기로 한 건가?”
“소맹주에게 뭔가를 받기로 했을 때는 이렇게 간절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무것도 안 받겠다 마음먹으니 꼭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드는군.”
염라검과 천수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빛을 교환했다.
오직 비사인만이 괴악이 한 말을 이해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죽음을 앞두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좋은 말로 괴악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고.
“미리 감사드립니다. 말씀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패배감이 깃든 비사인의 감사에 괴악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기고 나서 고맙다고 말하게.”
자신을 향한 눈빛에서 비사인은 느꼈다. 그냥 듣기 좋아하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 이기자는 말이었다.
“지금 잘 싸우고 있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싸우고 있어. 자넬 믿게.”
순간 비사인의 마음에서 어떤 불길이 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포기하려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지막 한 수로 백천식을 발휘하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문득 이 싸움의 방향을 잘못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직 한 번의 기회를 노릴 게 아니라 정말 실력 대 실력으로 싸운다면?’
누가 뭐래도 당당히 사도맹의 후계자가 된 자신이었다. 자신에게 뭔가가 있으니 후계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이런 곳에서 쉽게 죽어 버리지 않을 무엇인가가.
‘그래, 나를 과소평가하지 말자. 허풍은 이럴 때 치는 거다!’
포기하려던 마음을 이런 열기로 다 불태우며 비사인이 달려들었다.
수십 개의 검선이 허공을 갈랐고,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싸움의 양산은 아까와 같지만 분명 다른 싸움이었다.
이제 비사인은 회심의 한 수를 노리지 않았다. 그 회심의 한 수를 염두에 두었기에 자신은 싸움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 못했다. 그 차이가 컸다.
비사인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옆구리를 내준 대신 염라검의 어깨를 베었다.
염라검의 첫 부상이었다.
피를 본 염라검의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하지만 비사인은 오히려 기뻤다. 상대의 평정심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비사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 네가 사도칠대고수면 난 사도맹 후계자다. 네가 온갖 싸움 경험을 다했으면 난 사도맹주에게 직접 무공을 배웠다. 내가 두 번 찔리면 너도 한 번은 찔릴 각오를 해라. 난 너보다 젊기에 버틸 거다.
비사인의 팔에서 또 피가 튀었다. 다리가 휘청할 정도로 베였고, 허리도 베였다. 두 번 중 한 번은 염라검이 피를 뿌렸다.
게다가 다행은 입고 있던 호신갑 덕분에 치명상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생각을 바꾼 비사인의 열기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푸욱!
염라검의 팔이 크게 베였다.
다음 순간, 괴악이 소리쳤다.
“조심!”
비사인이 몸을 날려서 날아든 공격을 피했다. 공격을 가한 사람은 놀랍게도 천수검이었다.
염라검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가 이쪽 싸움에 개입한 것이다. 그도 대가를 치러야 했다.
퍼억!
뒤따라 달려든 괴악의 어깨가 그의 몸통에 정확히 적중했다.
천수검이 바닥을 뒹굴었고, 염라검이 검을 휘두르며 물러났다.
오히려 비사인이 놀랐다.
‘염라검을 구하러 왔다!’
그만큼 자신이 잘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다른 쪽 싸움을 신경 쓰고 있었다. 죽으면 안 되니까. 한쪽이 무너지면 이대 일의 싸움이 되니까.
반면 자신은 오직 이 싸움에 미친 놈처럼 빠져들었고. 상대는 팔십밖에 발휘하지 못하는데, 자신은 백이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시 괴악과 천수검이 맞붙었고, 비사인은 염라검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싸웠지만 아쉽게도 열기는 식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백 초, 이백 초, 삼백 초…… 싸움이란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내공 많고 경험 많은 쪽이 유리해지기 마련이니까.
비사인은 아쉬웠다. 그와의 실력 차이가 클 거라 여겼는데, 막상 싸워보니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쉬웠다.
어쩔 수 없는 적에게 죽는 게 아니라, 조금만 나중에 만났어도 죽일 수 있는 적에게 죽는 것이 아쉬웠다.
젊음과 독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피를 너무 흘려서 점점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렇게 비사인은 마지막 궁지에 몰렸다. 벽에 기댄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에게 염라검이 천천히 다가왔다.
‘끝이구나.’
이제 검을 한 번 내지를 힘밖에 남지 않았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였을까?
마치 죽음을 앞두고 주마등이 흘러가는 것처럼, 주변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느리게 움직이는 모습에서도 괴악과 천수검의 싸움이 너무나 격렬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괴악은 자신의 싸움이 너무 급해 이쪽을 도우러 올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걸어오며 염라검이 뭐라고 말을 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입만 벙긋거리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것은 저 멀리 하늘에 박힌 점이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데 그 점만 빠르게 움직였다. 점이 점점 커지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염라검의 얼굴에서 승리를 확신하는 표정을 읽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염라검이 검을 내질렀다.
자신의 목을 노리며 날아드는 검이 똑똑히 보였다. 문제는 자신의 움직임도 느리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도 검을 내질렀다.
서로를 향해 날아드는 두 개의 검.
그 와중에도 앞서 본 그 점은 자신과 염라검의 움직임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새가 날아오는 건가? 아니면 돌이 날아오는 건가? 설마 사람인가?
저 멀리 담장이 무너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그것이 담장을 박차고 다시 날아올랐다.
세찬 도약에 부서진 담장의 먼지가 천천히 사방으로 피어올랐지만, 담을 무너뜨린 그것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염라검의 검은 자신의 목까지 다가와 있었다.
차가운 검이 비사인의 목에 닿던 바로 그때, 누군가 떨어져 내리며 뒤에서 염라검의 팔을 꽉 붙잡았다.
검이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멈췄다.
바로 그 순간, 시간은 원래대로 움직였다.
쉬이이이익!
푸아아아악!
비사인의 검은 멈추지 않고 쭉 뻗어나가 염라검의 살과 뼈와 심장을 꿰뚫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진짜였다. 서서히 무너지는 염라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 서 있는 한 사람.
땀에 흠뻑 젖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검무극이었다.
그가 얼마나 빨리 움직였으면 저 멀리 무너지던 담장이 이제야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스르륵 눈이 감기며 비사인은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검무극의 몸에 쓰러지듯 기대며 마지막 힘을 다해 말했다.
“……괴 선배를 살려주시오.”
절대회귀 360화
제360회 소맹주는 현혹되었습니다.
“함정이오.”
비사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염천쌍검보다 더 화나는 상대가 바로 혁사군이다.
“이건 혁사군이 만든 함정이오. 당신을 끌어들여서 죽이려는.”
검무극은 비사인이 정확히 봤지만 한 가지는 틀렸다고 여겼다.
“함정은 맞지만 나를 죽이려는 것은 아닐 거요. 지금 상황에서 본교까지 적으로 돌리려 하진 않을 테니까요. 지금 저들은 당신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소.”
투왕도 똑똑한 자고, 그 아래 혁사군이 움직이고 있다. 오히려 똑똑하기에 예측이 쉬운 부분도 있다. 적어도 자신을 죽이려는 수작은 아니었다.
“아마 날 본교로 돌려보내려는 걸 거요.”
비사인에게서 떨어뜨린 후, 결국 비사인을 죽이겠다는 의도다.
“그걸 알면서도 맹주님을 만날 거요?”
“만나야 하오.”
“맹주님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요.”
비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원래도 맹주가 이번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걱정했었다. 한데 맹주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혁사군이 배신자였으니.
“나와 맹주님 사이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간질했을 거요.”
과연 혁사군이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했을까?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다르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을 거요.”
비사인이 생각지 못하는 부분을 검무극은 예상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내 당신을 위하는 태도를 보였을 거요. 당신이 나와 어울리면서 뭔가를 캐내려는 거라고, 혁사군은 계속 당신 편을 들어줬을 거요.”
무슨 말인지 눈을 껌벅이는 비사인을 깨우는 한마디.
“그래야 당신이 그를 배신자라고 말했을 때, 제대로 역효과를 낼 테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비사인은 크게 와닿는 바가 있었다.
“오히려 나를 믿지 않으시겠군요.”
“마교 소교주에게 현혹되어서 총군사를 모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비사인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듣고 보니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좋은 것들의 생각은 항상 이렇게 자신의 예상을 넘어선다.
“칭찬이 때론 더 강력한 이간질이 되기도 하는 거요.”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은 물론이고 함께 듣고 있던 괴악까지 감탄했다.
‘정말 무서운 자가 소교주가 되었구나.’
지금 천마만 해도 역대 천마 중에서 손꼽는 재능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천마조차도 젊은 나이에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아닐 거라 확신한다.
“어떻게 할 작정이오?”
“사도맹주님을 만나야겠지요. 지금 혁사군이 암중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소. 내 증언이 유일한 증거요. 내가 맹주를 설득하지 못하면, 당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소맹주 자리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소.”
간신히 살아난 상황에서 또 다른 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물었다.
“혁사군 모르게 맹주께 전서를 전할 수 있소?”
잠시 고민하던 비사인이 한 사람을 언급했다.
“일랑을 통해서 전할 수 있소.”
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들켜선 안 되오.”
“믿어도 되오.”
검무극은 곧장 두 장의 전서를 썼다.
한 장은 조금 전 사도맹에서 날아온 전서에 대한 답이었다. 자신이 직접 사도맹 본단을 찾아가서 사도맹주를 만나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전서를 안가의 마인에게 주면서 사도맹으로 보내라고 했다.
또 다른 전서는 비밀리에 맹주에게 전하는 전서였다.
“이 전서를 혁사군 모르게 맹주께 전해야 하오.”
“여긴 뭐라고 적은 거요?”
“사도맹이 아니라 밖에서 단둘이 따로 만나자고 했소. 안 만나주면 당신을 죽일 거라고 적었소.”
“당신, 정말!”
“농담이오, 농담.”
“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시오. 나 대하듯 장난치다간 맹주님께 죽을 수도 있소.”
“명심하겠소.”
그런 일이야 벌어지지 않겠지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비사인에게서 떼어놓고자 천마신교로 돌려보내려 들 테고.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비사인의 상황은 어려워진다.
“당신, 계획은 있소?”
비사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부터 생각해 볼 거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한마디 하려다 비사인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었다면 아직도 만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미 만나겠다고 결정을 내린 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니 그를 자꾸 믿게 되는 거다. 벌써 모든 계획이 다 서 있을 것 같은 거다.
검무극이 침상으로 다가왔다.
“당신, 괜찮소?”
다친 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혼란 속에서 마음이 괜찮냐는 것이리라.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버텨낼 수 있었을까? 무인으로서, 사도맹의 후계자로서,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신이 있어서 괜찮소.’
차마 말 못 할 비사인의 속마음이다.
‘맹주님은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소. 당신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실 거요. 날 멍청한 놈이라 꾸짖을지도 모르겠소.’
사도맹의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마교 소교주가 좋은 마음으로 접근했을 거로 생각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이 싸움이 어렵다.
‘그래도 난 당신을 의심하지 않을 거요.’
의심하는 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이 의심은 검무극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결국 자신에 대한 의심이 될 테니까. 사람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자책으로 이어질 테니까.
그랬기에 비사인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난 괜찮소.”
물론 이 방에는 괜찮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괴악이 끼어들며 말했다.
“살려줘서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내가 자넬 주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원래라면 자신이 그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비사인을 잘 보살펴 주라고, 내가 주시하고 있다고.
“두 분 다 상처부터 살피십시오. 다시 싸워야 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
* * *
맹주전을 향해 걸어가는 혁사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안가를 기습한 염천쌍검이 비사인을 죽이는 데 실패한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까지 되는군.’
안가에서 비사인이 죽었다면 사도맹주는 반드시 검무극을 의심했을 것이다. 죽기 전까지 함께 어울렸는데, 어찌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마신교와의 위기가 고조되고 관계가 경색되겠지만, 자신과 황석경은 자연스럽게 이번 일의 배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이제는 사도맹주가 검무극을 마교로 돌려보내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충성심까지 시험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대처할 자신은 있었다. 이번 일은 비사인이 검무극의 음모에 빠진 것으로 처리될 테니까.
‘소맹주, 당신은 어차피 끝장날 거요.’
맹주전에 들어가기 전 혁사군은 잠시 복도에 멈춰서서 강철 늑대들을 쳐다보았다.
이 늑대가 침입자를 막아낸다는 것은 전설에 불과하다. 자신이 이렇게 이곳을 들락거려도 그저 이 늑대들은 구경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혁사군은 투왕이 새 맹주가 되면 이 쇳덩이들부터 치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혁사군이 맹주전에 들어섰다.
사도맹주 백자강은 태사의 뒤쪽 본단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 앞에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신교의 소교주가 맹주님을 뵈러 오겠다고 답을 해왔습니다.”
혁사군의 보고에도 백자강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소맹주께서는 소교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자강에게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쓸데없는 짓을 하더니.”
마교 소교주와 어울리며 죽음을 가장하겠다는 기별을 해왔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혁사군이 소맹주를 믿고 맡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혹시?”
혁사군은 사도맹주의 걱정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만약 소맹주가 죽었다면 감히 소교주가 맹주님을 찾아뵙겠다고 답하진 못했을 겁니다.”
백자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혁사군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안가 기습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안가 위치를 아는 이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샅샅이 내사에 들어갔습니다. 곧 누가 정보를 흘렸는지 밝혀질 겁니다.”
이 일에 엮어서 정적을 제거할 작정이다. 이미 조작된 증거까지 다 준비된 상황이었다.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백자강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기밀이 뚫렸고, 누군가 사도맹의 소맹주를 죽이려 했다. 감히 사도맹을 상대로 누군가 검을 뽑아 든 것이다.
더 나쁜 상황은 이것이었다.
“소교주 짓일 가능성은?”
만약 그렇다면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소맹주는 총명한 분이십니다. 절대 호락호락 소교주에게 당하지 않으실 겁니다.”
검무극의 예상대로 그는 비사인을 철저히 믿는 모습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백자강은 혁사군의 이런 모습을 정치적으로 해석했다. 젊은 총군사가 후일을 도모하는 것으로. 비사인이 맹주가 되었을 때, 계속 총군사를 하려는 것이겠지.
“소맹주는 소교주를 이용해서 뭔가 얻어내고 있을 겁니다.”
“그 반대가 아니고?”
잠시 사이를 두고 혁사군이 말했다.
“소맹주를 믿으십시오.”
비사인은 자신을 죽이려 도끼를 휘두르겠지만, 결국 제 발등을 찍고 말 것이다. 이렇게나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붙일 테니까.
“자네가 잘 살피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주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혁사군이 물러간 그곳에서 은신한 이의 보고가 들려왔다.
“일랑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맹주의 호위대주인 인궁(人宮)이었다.
“일랑이? 들게 하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은밀한 독대를 원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난데없는 청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자강은 안다. 일랑이 얼마나 맹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사람인지.
“연무장으로 데려오게.”
* * *
일랑이 사도맹주의 개인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외부인은 허가 없이 절대 출입할 수 없는 이곳은 백자강 이외에는 오직 사도맹주의 호위대주인 인궁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백자강은 연무장에 세워진 철인형을 천으로 닦고 있었다. 일반 철이 아니었다. 만년한철을 섞어 만든 이것은 검기나 검강에도 잘리지 않는, 사도맹주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에 새겨진 셀 수 없이 많은 검상들. 희미하고 옅은 자국들부터, 깊고 진한 흔적들까지.
백자강은 철인형에 나 있는 수많은 검상이 각각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새겨질 때 어떤 초식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것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수련이 지닌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젠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철인형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대로 비사인에게 물려주고 싶어서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는가?”
백자강은 반갑게 그를 맞아주었다. 그는 싫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명확했다. 일랑은 그에게 좋은 사람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다.
“나를 따로 보자고 했다고?”
“네, 소맹주가 오직 맹주님께만 꼭 전해달라고 전서를 보냈습니다.”
일랑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오늘 자칫 잘못했다간 사도맹주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말인즉 혁 군사에게도 전하지 말라는 뜻인가?”
맹으로 들어오는 모든 전서는 총군사를 거쳐서 오기 때문이었다.
“특히 혁 군사 모르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백자강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은밀히 보자고 할 때, 설마 했는데 정말 혁사군 때문이었다.
“이유도 전하던가?”
“아뇨, 그냥 맹주님께 꼭 전해달라고만 했습니다.”
일랑이 품에서 전서를 꺼내 맹주에게 바쳤다.
전서 내용을 확인한 백자강은 깜짝 놀랐다. 일랑은 처음 보았다. 맹주가 이렇게나 놀라는 모습을.
백자강이 고개를 들어 일랑을 쳐다보았다.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아나? 이번 일에 혁 군사가 개입해 있다는군, 안가를 공격한 것도 혁 군사 소행이라네. 소교주가 직접 나를 만나서 설명하겠다는군.”
“!”
예상치 못한 말에 일랑도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이 전한 전서가 그런 내용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백자강이 일랑을 주시했다. 저 작은 눈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지 일랑은 알고 있었다. 맹주는 상대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귀신처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모시는 수장의 말을 부정하느냐, 아니면 사도맹주를 모시는 총군사를 부정하느냐.
“수하가 모시는 분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지켜드릴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랑의 생각해 낸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러자 백자강은 다시 물었다.
“자네가 본 마교 소교주는 어떤 자인자?”
한 번 대답을 회피했으니 이젠 피할 수 없었다.
일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소맹주가 현혹되었다고 생각하나?”
일랑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니라고 해주고 싶었지만.
“네, 소맹주는 현혹되었습니다.”
비사인을 위해 뭐라 말을 덧붙이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소교주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고? 소교주가 비사인을 구했으니 믿어도 될 거라고?
아니다. 자신이 아는 사도맹주에게 그런 대답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저는 소맹주가 현혹된 것이 이해됩니다.”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고, 판단은 사도맹주가 알아서 할 것이다.
“이만 물러가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한 후 일랑이 그곳을 나갔다. 그는 확신이 없었다. 과연 자신이 제대로 대답한 것인지. 비사인에게 해가 되지는 않았는지.
일랑이 물러가고 사도맹주가 허공에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인궁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만나지 않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이번 일을 혁 군사에게 알려야 하겠나?”
인궁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누굴 더 신뢰하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혁 군사가 배신자란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소맹주를 죽이려 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반대로 젊은 소맹주가 마교 소교주에게 넘어갔다? 이 역시 믿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쩌면?
반면 백자강은 아직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작은 눈에서 강렬한 이채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나? 이쪽에서 절대 믿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나를 만나자고 한다? 대체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오랫동안 사도맹주를 모셔왔기에 인궁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백자강은 검무극을 두고 ‘요놈 봐라?’ 흥미가 동했음을. 일랑의 현혹된 것이 이해된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백자강이 만나기로 마음을 굳혔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이었다.
“약속 장소는 제가 새롭게 정해서 기별하겠습니다.”
상대가 아니라 이쪽에서 상황을 조율해야 했으니까.
백자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후 연무장에 세워진 철인형을 쳐다보았다.
철인형 위로 한 사람이 겹쳐졌다. 아무 표정도 없는 이 철인형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그는 바로 천마 검우진이었다.
자신이 가장 인정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오만한 눈빛이 싫었다.
‘자식 농사 어떻게 지었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
절대회귀 361화
제361회 저 같은 아들이 있으면.
비사인은 하루라도 빨리 몸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운기하고 또 운기하고.
그렇게 몇 차례 운기조식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답답해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비사인이 마당으로 걸어 나갔을 때, 검무극은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없이 외로워 보이는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뭘 그리 멍하게 있소?”
검무극이 비사인을 돌아보며 웃었다. 이제 자신을 보면서 저렇게 잘 웃는다. 언제나 그는 한 걸음 앞서간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도.
과연 자신은 저 웃음만큼 환하게 웃어줄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난다는 의심을 완전히 떨칠 수 있을까? 그야말로 믿었다, 의심했다의 반복의 연속이다.
“일부러라도 하늘을 보려고 노력하고 있소. 당신, 하늘 본 지가 언제가 마지막이오?”
“좀 됐소.”
“그럼 이리 와서 같이 좀 봅시다.”
비사인이 검무극 옆에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기도는 바다처럼 느껴지는데, 어찌 하늘을 이렇게 좋아하시오.”
“바다도 좋아하오. 다음에는 우리 바다에 놀러 갑시다. 거기 놀러 온 여협들도 꼬시고.”
검무극이 바닷가에서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겼다. 자신은 또 얼마나 뻘쭘하게 그 옆에 서 있겠는가?
“몸은 좀 괜찮소?”
“이제 많이 나았소.”
“다행이오.”
비사인을 향했던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하늘을 향했다. 비사인도 검무극과 함께 조용히 떠가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사도맹주는 어떤 분이시오?”
검무극은 사도맹주에 대해서 잘 몰랐다. 제대로 알기도 전에 다 죽어버렸으니까. 무림맹주나 사도맹주에 대한 정보는 역사에 기록된 것들뿐이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비사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 말해줘야 할까 고민했는데, 자신도 사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부를 똑바로, 자세히 보려고 노력한 지 얼마 안 돼서, 나도 잘 모르겠소.”
솔직한 대답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요. 아버지를 똑바로 보려고 엄청 노력하는데도, 당신이 물으면 나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아버지나 사부라서 어려운 거요? 아니면 그냥 원래 이렇게 어려운 거요?”
“둘 다 아니겠소?”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옅게 웃었다. 이제 거친 얼굴에 미소가 제법 어울리는 비사인이었다.
“맹주님 만나 뵈려니까 긴장되시오?”
“긴장되오.”
“당신이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소.”
“예전에는 강한 척했던 거고, 이젠 친구니까 솔직히 말하는 거고.”
비사인도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당신에게 맡겨서 미안하오.”
아무리 아파도 자신이 가야 할 일이었다. 수레에 실려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가야 했다. 생각해 보라.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검무극을 대신 보내면 사도맹주가 자신을 뭐라 생각하겠는가?
그래서 자신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까 생각했었다. 함께 가자고 할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본능이 말렸다. 그냥 검무극에게 맡기라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헛된 자존심 내세우지 말라고. 낄 때나 제대로 끼고, 빠질 때는 확실히 빠지라고.
대신 이 말만큼은 하고 싶었다.
“지금은 당신 도움받지만, 나중에는 내가 도울 일도 있을 거요.”
“그래서 내가 미리 부탁하지 않았소? 그땐 나를 좀 끌어달라고. 내게 익숙해지면 질수록 내가 별것 아닌 사람이란 걸 알게 될 거요. 그때 이렇게 생각해주시오. 익숙함이 소중함을 다 잡아먹게는 하지 말자.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너무 무시하지는 말자.”
과연 그럴까? 검무극은 머리가 허옇게 셀 때까지도 자신을 놀라게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늙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 같다. 이제 지칠 때도 되지 않았소? 인제 그만 좀 똑똑하시오. 사람 좀 그만 놀라게 하시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익숙해질수록 더 존중하겠소.’
아직은 속마음을 다 보이지 못하는 비사인이었다.
그때 안가의 마인이 와서 서찰을 전했다. 사도맹에서 은밀히 온 서찰이었다.
“맹주가 따로 보자고 연락이 왔소.”
일랑이 해낸 것이다.
비사인은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만남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다녀오겠소.”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사인도 함께 일어났다. 맹주께 까불다 혼나지나 말라는 너스레를 떨려다 그러지 않았다.
“부디 맹주님께 잘 설명해 주시오.”
그래서 내 본능이 옳았음을 이번에도 증명해 주시오, 친구.
* * * 바람 부는 들판에 검무극이 도착했다.
사방이 뻥 뚫린 그곳에 백자강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검무극을 보는 순간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아들이 확실하구나.’
마기를 드러내지도 않았고, 특별한 기도를 보이지도 않았지만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닮았다.’
검우진의 모습이 검무극과 겹쳐졌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걸어오는 모습을 떠올렸다.
‘일단 외모는 풍년이군.’
검우진의 그 차갑고 강렬한 모습보다는 확실히 잘생겼고 보기도 좋았으니까. 사람 깔보는 그 건방진 눈빛 대신 맑고 깊은 눈빛도 눈길을 끌었고.
“맹주님을 뵙습니다.”
검무극은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상대가 소교주라는 것을 알았지만 백자강은 모른 척했다.
“자네가 마교 소교주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나?”
어떻게 반응할지 보려는 것이다.
검무극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에 감히 사도맹주님 앞에서 사기를 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모래알처럼 많은 고수가 사는 곳이 무림이니, 그런 자가 있을 수도 있겠지. 자네가 날 죽이려고 온 살수가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사도맹주님께 의심을 받으면서도 살행을 성공할 실력이라면, 살수 짓 안 하겠죠.”
검무극의 대답에도 백자강은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결국 검무극은 자신의 얼굴을 한 차례 매만지며 소리쳤다.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살수, 본 적 있으십니까?”
그 너스레에 백자강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평소 자신에게 농담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이런 농에 약한 편이다. 만약 그런 점까지 염두에 두고 대화를 하는 거라면, 젊은 나이치곤 꽤 똑똑한 놈이라 할 수 있으리라.
“솔직히 살수를 본 적이 없네.”
“당연하지요. 어떤 얼빠진 놈이 맹주님을 죽이러 오겠습니까?”
편하게 하는 말속에 사도맹주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말을 담았다. 마존들에게 하듯, 대놓고 아부를 떨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그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다.
백자강의 첫인상은 묘했다. 아버지와도 달랐고, 무림맹주 진패천과도 달랐다. 눈이 작아서였을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저와 조금만 말씀을 나누시다 보면 아, 이놈이 마교 소교주가 맞구나 하실 겁니다. 헤어질 때쯤 되면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같이 맹에 가보지 않겠느냐? 라고 하실 거고요. 한 며칠 지나면 태사의에도 앉아 보라고 하실 겁니다.”
“아주 자신만만하군.”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신감이라도 없으면 제가 감히 어떻게 맹주님을 상대하겠습니까?”
백자강은 애초에 검무극이 사람을 현혹하는 자라는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대화는 신선했다. 자기 앞에서 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실로 오랜만이었으니까.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하는 사람은 더욱이.
“저 같은 아들 하나 있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분명 싫을 거네.”
백자강은 단호히 대답했다.
사실 나도 그렇소.
검무극도 동의했다. 싫다기보단 부담스러운 쪽에 더 가깝겠지. 그런 면에서 보면 어쩌면 이 백자강은 자신과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눈빛을 응시하며 백자강이 물었다.
“자네가 사람을 현혹하길 좋아한다더군.”
“그냥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종종 아부꾼이란 의심을 받곤 하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인은 본 적이 없으니까.”
“오늘 드디어 보시는군요.”
백자강은 빤히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가 거짓말하는 걸 잘 알아낸다는 것은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백자강은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느낌이 왔다. 아,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구나. 귓가에 소름이 쫙 돋았다.
“오늘 저를 한번 봐주십시오. 제가 현혹하는 건지, 그냥 좋아하는 건지 판단해 주십시오.”
아직은 검무극에게서 거짓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자신만만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가 궁금했다. 자신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기가 쉽지 않은데.
“왜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오늘 뵙자고 한 이유는 진실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진실? 총군사 자리에 앉을 본맹의 부군사가 배신자라고?”
“맞습니다.”
“마교의 술책이 깃든 악하고 어두운 진실은 아니고?”
“진실은 악하고 어두운 곳에 있을수록 더 빛나는 법이지요.”
검무극은 안다. 백자강으로선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걸 인정하는 순간, 그와 사도맹이 놈들에게 놀아난 결과가 되니까.
“사인이, 지금 어디에 있나?”
“본교 안가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검무극은 보았다. 백자강의 표정에서 짜증과 걱정이 동시에 스치는 것을.
“얼마나 다쳤나?”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회복 가능한 상처입니다.”
“누구 짓인가?”
“아직 누구 소행인지 보고 안 받으셨습니까? 하긴, 증거를 조작하려면 최대한 늦게 보고하는 것이 유리하겠죠. 소맹주를 기습한 자들은 염천쌍검입니다. 그들을 보낸 사람이 바로 혁사군이죠.”
검무극은 백자강의 반응을 살폈다.
백자강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누가 배신자인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아니면 아예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자네가 보낸 게 아니고?”
“전 그 사람들 초면이었습니다. 그날이 마지막 보는 날이기도 했지만요.”
백자강은 그 작은 눈으로 검무극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받아내려면 담담히 받아냈겠지만, 검무극은 짐짓 두렵다는 듯 시선을 살짝 돌렸다. 한발 물러서는 것, 사도맹주에 대한 예의였다.
“지금은 본교의 안가에서 사도칠대고수 괴악이 지켜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맹주님께서 괴악을 믿지 못하실지도 모르겠군요.”
“적어도 사인이를 해칠 사람은 아니지. 오히려 자네를 믿을 수 없지.”
“저를 마인이라 여기지 마시고 제자의 친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저보다 제자의 안목을 믿어주십시오.”
“친구라. 평생 가져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
역시 상대하기 만만치 않았다. 허심탄회한 듯하면서도 속을 알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혁사군의 다음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누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지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혁사군은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정적을 제거할 겁니다. 이미 증거도 다 심어뒀을 거고요. 그가 누굴 지목하는지 주의 깊게 보십시오.”
검무극은 이 한 번의 만남으로 당장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일을 망치는 건 성급함이다. 크고 중요한 일일수록 더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마음이 언제나 일을 망친다.
지금 헤어졌다가 혁사군이 정적을 처리하고 난 뒤에 다시 만나도 된다. 열 번을 더 만나고 필요하다면 백 번을 더 만난다. 이번 일은 이런 마음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때 다시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네?”
“잘 알겠으니 이만 본맹 일에서 손을 떼게.”
검무극이 가장 우려하고 걱정했던 반응이 바로 이것이었다. 믿든 믿지 않든 손을 떼게 하려는 것.
“마교로 돌아가게.”
검무극이 아무 대답이 없자 백자강이 기도를 발출했다. 그가 뿜어낸 사기가 검무극을 짓누르며 날아들었다.
단숨에 대답을 듣겠다는 듯, 그의 기운은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저절로 천마호신공이 발동하며 검무극의 몸을 지켰다.
원래라면 갑니다, 당장 갑니다, 너스레를 떨며 일단 물러났을 것이다. 굳이 실력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버텼다. 본능이 시킨 일이었다.
‘이건 버텨야 한다.’
오히려 백자강을 도발하듯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백자강의 사기가 더욱 강력해졌다. 그가 내뿜은 기운이 검무극 주위를 회오리쳤다. 기운만으로 바위가 부서져 날아갔다.
백자강의 기세는 정말 강했다. 본능의 외침이 아니었다면 결코 버텨서는 안 될 위험한 기운이었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버티고 또 버텼다.
백자강의 사기가 극에 달하던 그 순간.
검무극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며 소리쳤다.
“해냈다!”
그와 동시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검무극이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제야 백자강이 사기를 거둬들였다.
이놈이 대체 왜 버텼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섰을 때, 검무극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맹주님 덕분에 무공에 성취가 있었습니다.”
백자강의 사기를 버텨내는 과정에서 천마호신공이 대성을 이룬 것이다. 최근 계속된 수련으로 간질간질 검무극을 자극했었는데, 오늘 뜻밖의 결과를 이룬 것이다.
검무극은 이 만남에서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큰 무공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검무극이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 모습에 백자강은 흠칫 놀랐다. 마교 소교주가 자신에게 절을 올릴 거란 생각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맹주님께서는 제가 버티는 이유를 짐작하시고 끝까지 기운을 보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그래서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 아니었다. 검무극의 무공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서 밀어붙였던 것이었다. 건방지게 버텨?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고.
“왜 내게 그 사실을 말하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나?”
“감사드리려면 말씀드려야죠. 맹주님 덕분에 이룬 성과인데요.”
애초에 워낙 경계심을 가진 채 검무극을 만났기에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진 않았다. 말 잘하고, 너스레 잘 떨고, 똑똑하고. 딱 이 정도였다. 이런 녀석에게 뭔 현혹까지 된다고.
한데 망설이지 않고 절을 하고, 이렇게 고마움을 표한다고?
그러고 보니 오늘 한 번도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다.
“자네 아버지가 알게 되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
백자강은 그 건방진 천마의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아들 무공 성취에 도움을 주셨다는 걸 아시면 맹주님께 고마움을 표하셨을 겁니다. 절을 해도 열 번은 하라고 하셨겠죠. 아버진 자존심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천마와의 비교, 백자강이 절대 피할 수 없는 도발이었다.
‘요놈 봐라?’
절대회귀 362화
제362회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다고?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 도발의 핵심은 돌아서 가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대의를 위해 돌려보내지 않겠지만, 당신은 돌려보내는구나.
검무극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제발 불러라, 어서 불러! 간절한 만큼 걸음에 미련이 없었다.
“잠깐.”
백자강의 부름에 검무극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어딜 가려는 건가?”
“그만 본교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백자강의 작은 눈이 옆으로 선을 쭉 그은 것처럼 가늘게 찢어졌다.
이대로 보내면 자존심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검무극의 도발인 것도 안다.
문제는 비교의 대상이 천마 검우진이란 사실이었다.
딴 사람에게는 몰라도 검우진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은 그였다. 검우진은 평생의 숙적이었으니까. 인정하면서도 미워하는 애증의 대상이었으니까.
“자네 아버지가 정말 내게 열 번이라도 절을 하라고 했을까?”
자신의 도발을 백자강이 어찌 모르겠는가? 이젠 솔직할 때다. 검무극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셨을 겁니다.”
검무극이 백자강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치사한 방법을 써서.”
검무극은 자신이 일부러 도발했음을 솔직히 시인했다.
“치사한지는 알고 있나?”
“네.”
거기까지 시인하자 백자강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만큼 절박합니다.”
“절박해도 내가 절박해야지, 자네가 왜 절박해?”
평온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백자강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가가 뚫리고 후계자가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그 배후로 맹의 부군사가 지목당한 상태.
절대 이 사안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다만 마교의 소교주 앞에서 초조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
반면 검무극의 절박함은 지극히 사적이었다.
“소맹주를 진짜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무사히 맹주 자리를 물려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백자강은 여전히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상대에게 통하는 감각이었지만, 이렇게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신이 점쟁이는 아니었으니까.
이 검무극도 예외로 두어야 할 것이다.
마교 소교주가 진실을 말한다?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왜 사인이와 친구가 되고 싶나?”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친구라면 새로운 사도를 열어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어서입니다.”
“새로운 사도? 자네가 말하는 새로운 사도가 뭔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소맹주가 찾아야 할 길이겠지요. 다만 제 마도나, 소맹주의 사도나, 분명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이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검무극은 안다. 백자강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회귀 전 자신도 그러했다. 새파란 누군가가 이상을 이야기하면, 속으론 지금 백자강과 똑같이 생각했을 거다.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
자신은 그 현실을 끝까지 다 살아보았다. 때론 보잘것없고, 때론 놀랍고 위대했던 그 인생을, 온갖 고통과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정답을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살아보았다고 이번 생을 잘살게 되는 것도 아님을 안다. 백 번을 다시 살게 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잘 살 수 없다는 것도. 오히려 살아보았다는 그 사실이 발목을 잡아 인생을 나락으로 내팽개쳐 버리기도 할 거라는 것도.
백자강, 그래서 노력하는 거다. 그냥 두면 너도, 나도 다 죽고 십이지왕이 무림을 지배하는 쓰디쓴 현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저희 아버지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확실히 백자강은 아버지가 언급되면 눈이 반짝인다.
“일단 화부터 나고 싸워서 이기고 싶으시죠? 저는 소맹주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만나서 웃고 떠들고 놀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저희 무림은 서로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바닷가에서 소저들 꼬시며 놀 겁니다.”
“치기 어린 이상에 불과하네.”
“왜 그렇습니까?”
“권력을 가진 인간은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않을 테니까. 자네도, 사인이도 다 변할 테니까.”
검무극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소맹주와 함께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저 하얀 구름처럼 머리가 셀 때를 떠올렸지요. 정말 우리가 변할까요?”
백자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걸 말해야 알겠느냐 하는 표정에 검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게 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최대한 덜 나쁘게 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백자강은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듣게 하는 것만으로도 보통 녀석이 아니라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꿈이라.’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꿈꾸는 사람이 어찌 사도를 지배할 수 있겠는가? 눈만 감아도 죽는 곳이 사도이거늘.
문득 저 검무극의 입에서 ‘맹주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제 생각은 한낱 치기 어린 이상에 불과했습니다.’란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침을 내리고 싶었다. 검우진의 아들에게.
검무극은 그의 흥미를 붙잡을 것은 이상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흥미를 잡아끌 가장 강력한 것은 이것이다.
“아버지가 맹주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백자강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뭐라고 하시던가?”
“실례되는 말이 될 수도 있는데 그대로 옮겨도 되겠습니까?”
“하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사파 놈 주제에 꿈이 큰 자다.”
이번에도 백자강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분이 나빠야 할 말인데, 자신을 인정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래, 검우진이라면. 그라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때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맹주께서 꾸시는 꿈도 우리 아버지 꿈과 같은 꿈입니까?”
백자강은 순간 움찔했다.
그는 안다. 검우진이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음을. 그에 대해서 비사인에게 경고까지 했었다.
이제 마교 소교주가 묻고 있다.
너도 무림일통을 꿈꾸냐고.
감히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고, 당연히 대답한 적 없는 내용이었다.
자네 아버지가 꾸는 꿈이 뭔지 몰라서. 이런 뻔한 말은 생략했다.
이 젊은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확실히 모르겠지만, 적어도 생략할 것은 생략해도 말이 통할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다른 꿈을 꾸시길 부탁드립니다.”
백자강이 분노를 토해내며 버럭 소리쳤다.
“그 꿈, 자네 아버지만 꾸게 하려고?”
강력한 기운이 검무극을 휩쓸었지만,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검무극을 지켜주었다.
“아뇨, 아버지도 깨울 겁니다.”
검무극을 억누르던 기운이 사라지면서 백자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 만난 이후 처음으로 큰 소리로 웃는 순간이었다.
“자넨 나보다도 자네 아버지를 모르는군. 자네 아버지를 깨우려고 몸을 흔드는 순간 자넨 차기 천마가 될 수 없을 거네. 잠결에 자네 머리통을 부숴버릴지도 모르지.”
그게 사도맹주가 보는 아버지의 모습.
검무극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면요.”
백자강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확실히 검무극에게 끌리고 있었다. 시인해야 할 때, 시인하는 모습. 그는 어설프게 똑똑한 사람들이 가지는 괜한 고집이 없다. 그래서 사람 답답하게 만들지 않는다.
거기에 끌리는 점 하나 더, 생각지 못한 말로 잠시도 지겨울 틈이 없게 한다.
“맹주님, 배고픕니다.”
이 역시 사도맹주가 되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감히 자신을 보며 배고프다는 말을 한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저 밥 좀 사주십시오.”
녀석은 잘 안다. 배고프다는 사람 무정하게 돌려보내기 어렵다는걸.
백자강은 다시 검우진을 떠올렸다. 세상 무뚝뚝하고 차가웠던 그의 모습을.
‘그 성격에 용케도 요런 녀석을 키우셨소.’
그래, 보내더라도 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백자강이 허공에 말했다.
“마차를 준비하게.”
그러자 호위대주 인궁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마차를 기다리는 사이 두 사람은 말없이 저 멀리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이곳이 마음에 듭니다. 조용하면서도 경관이 아주 좋습니다.”
“은밀히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이곳으로 부른다네.”
검무극이 발아래를 내려다보다 다시 백자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농담 아니시군요.”
“아니지.”
“혹시 저도 죽을 뻔했습니까?”
“아슬아슬했지.”
백자강은 검무극이 좋다기보단 이런 대화가 즐거웠다. 사도맹주가 되고 평생을 경직된 삶을 살아온 그였으니까.
“요즘도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맹주님쯤 되면 더는 죽일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아직도 많네. 나이만큼 울분도 쌓이는 법이니까.”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나도 다 안다는, 그 웃음을 보며 백자강은 내심 생각했다.
‘젊은 녀석이 뭘 안다고.’
그래서 자꾸 파헤쳐 내고 싶어진다. 아무리 영특해봤자 애잖아? 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진다.
“왜? 자네 아버지는 안 죽일 것 같나? 자넨 고상하고 위엄 있는 모습만 보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매일 시체가 쌓이고 있을 거네. 정파 놈들이라고 다를까? 마인이라는 죄를 씌우고, 사파라고 낙인찍어서 죽여대고 있겠지.”
이 사람이 이상을 믿지 않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저 작은 눈에 오직 차가운 현실만 담으려는 이유일 것이다.
“자네의 이상 속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겠지만 말이야.”
“아뇨. 저는 더 많이 죽일 겁니다.”
“!”
백자강이 의아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마교 소교주가 무슨 말인가 싶으시겠지만, 저는 인간이길 포기한 것들이 싫습니다. 싹 다 죽일 겁니다.”
마교 소교주가 할 말도 아니고, 사도맹주에게 할 말은 더욱 아니었기에, 검무극은 너스레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선이 있으면 악도 존재한다는 말, 아무래도 악 쪽에서 만든 말 같거든요. 어떻게든 버텨보려고요. 혹시 맹주님께서 만드신 말입니까?”
백자강은 느꼈다. 자신이 웃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네가 만들었냐는 물음에 하마터면 또 웃을 뻔했으니까.
“자네 마도에선 우리가 제일 많이 죽겠군.”
“그러지 않으려고 소맹주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거죠.”
백자강은 이 젊은 소교주가 쉽지 않은 상대라는 것을 실감했다.
문득 비사인이 보고 싶었다.
검우진이 아들을 이렇게 잘 키워놨는데, 자신은 안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우진에게 자신이 밀린다고 자식까지 밀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식? 그래, 제자나 자식이나.
자신은 검우진을 넘어설 수 없다는 패배감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비사인을 자식처럼 여겨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는 자식 농사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 죽립을 눌러쓴 인궁이 모는 마차가 도착했다. 이목을 피하려고 사도맹 마차가 아니라 저잣거리에 흔히 돌아다니는 마차를 끌고 왔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 은밀한 행차를 위해 마차 안에도 면사가 달린 죽립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디 가는 겁니까?”
“배고프다면서?”
그렇게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도착한 곳은 저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허름한 반점이었다.
“내가 가끔 오는 곳이라네.”
그렇게 두 사람은 그곳에서 식사했다.
검무극은 새삼 이따금 삶이 던져주는 놀라운 경험에 감탄했다. 사도맹 본단 앞에서 사도맹주와 식사라니? 처음 이곳을 향해 출발했을 때, 상상이나 한 일이겠는가?
“저도 본교 앞에 단골집이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맹주님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백자강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지만 그럴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 여겼다. 전쟁이라도 나서 마교 본단을 정복했다면 모를까. 그땐 밥이나 넘어가겠나? 마교의 소교주여.
밥을 먹으며 검무극이 혁사군 이야기를 꺼냈다.
“혁사군은 지금껏 누구보다 훌륭한 군사 역할을 해왔을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완벽하고, 또 운도 아주 좋았을 것이고요. 이제부턴 그를 배신자라 생각하고 보십시오. 분명 다른 면이 보일 겁니다.”
괜히 그랬다가 들통날 걱정은 하지 않았다. 백자강이란 사람은 쉽게 자신의 속내를 들키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다른 부분까지 살피고 있었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병으로 물러난 총군사도 놈에게 당한 것이겠군.”
“네, 중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나?”
“어차피 맹주님께서 알아차리실 테니까요.”
백자강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 면사 너머에 있는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말이 저렇게나 많은데도 철저히 할 말, 안 할 말 조절하고 있었다.
검무극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데에는 그 중심에 검우진이 있었다.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다고? 그 냉혹한 남자가?’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적어도 이 싸움에서만큼은 지고 싶지 않은데.
“맹에 오겠다고 한 날이 언제인가?”
“이틀 후입니다.”
“그때 보세.”
백자강은 검무극을 돌려보내려는 마음을 철회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가시기 전에 소맹주 야단 좀 쳐주고 가십시오.”
“야단을? 왜?”
“직접 나오지 못해서 많이 죄스러울 겁니다. 맹주님이 야단치셨다는 소릴 들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겠죠.”
백자강은 진심으로 놀랐다.
이런 상황에서 비사인의 마음을 배려한다고? 그것도 저런 놓치기 쉬운 감정을? 이 젊은 녀석이?
왜 현혹이란 말이 나왔는지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익숙해지지 마라.”
백자강의 말에 검무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인이에게 그렇게 전하면 알 거네.”
아마 과거 비사인과 백자강 사이에 나눴던 대화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검무극과 헤어진 백자강은 마차에 올라탔다. 작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는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요놈들 봐라!’
‘요놈’에서 추가된 사람은 놀랍게도 검우진이었다.
비록 마음속 혼자만의 싸움이긴 했지만, 이제 이 싸움은 농부들까지 참전해서 이 대 이 싸움이 되었다.
절대회귀 363화
제363회 무림에서 내 마음이 제일 급했는데.
검무극이 안가로 돌아왔다.
비사인은 그가 언제 돌아오나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소?”
비사인은 검무극과 사도맹주와의 만남이 어땠는지 너무 궁금했다. 빨리 말하라고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숨 좀 돌립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무서운 사도맹주를 만나고 오는 길이오. 물도 좀 마시고.”
“당신이 잘도 무서워했겠소. 어떻게 됐소?”
애가 닳은 비사인은 절뚝거리며 검무극을 따라왔다.
“곧 경공도 쓰시겠소.”
“지금 아파 죽겠소. 그러니 그만 놀리고 갔던 이야기나 해주시오.”
검무극이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비사인에게 돌아섰다.
“보시다시피 두들겨 맞고 오진 않았소.”
“말씀드리니까 맹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소? 우릴 믿으셨소?”
“반신반의하셨소.”
마음 같아선 자신을 완전히 믿어주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훨씬 불리한 상황이었다.
반만이라도 믿어주셨다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 검무극이 갔는데 오죽 잘했겠는가? 믿는다. 이 사람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는가? 자신이 간 것보다 잘 설명하고 왔다고 믿었다.
“맹주님은 어떠셨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셨소?”
비사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의 거친 얼굴에서 사부에 대한 걱정이 느껴졌다.
“맹주께선 무사하시니 걱정마시오.”
그제야 비사인은 안도했다. 혁사군이 명백한 적임을 확인한 상황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맹주 옆을 지켜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고생하셨소, 쉬시오.”
맹주가 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말 없었소, 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섭섭할 거다. 아직 자신의 결백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니 당연한 일인데. 사람 마음이 참 이렇다.
그렇게 비사인이 돌아서려던 그때, 검무극이 너무나 기다렸던 말을 꺼냈다.
“맹주가 당신에게 전하라는 말이 있었소.”
비사인은 깜짝 놀라 돌아섰다. 그의 마음에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였다.
“뭐라고 하셨소?”
검무극은 비사인을 응시하며 사도맹주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익숙해지지 마라.”
처음에 비사인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게 맹주께서 당신에게 전한 말이었소. 말해주면 알 거라고.”
“익숙해지지 마라? 익숙해지지 마라.”
그 말을 되뇌던 순간 비사인은 움찔했다. 언제 들었던 이야기인지를 기억하는 순간 그의 표정에 격정이 피어올랐다.
“맹주께선 당신이 빨리 낫기를 바라고 계셨소.”
‘계셨을 거요’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백자강은 분명 비사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건 느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고맙소.”
비사인은 느낀다. 검무극이 혼자 간 것이 최고의 결과였음을. 사부가 해준 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면 결코 그 말을 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비사인은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선 그는 식혀둔 약부터 먹었다.
맹주가 그 말을 해줬던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은 그날도 이렇게 약 냄새 가득한 방에 있었다.
외부에 맹의 임무를 나갔다가 다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맹주의 제자로 큰 신임을 받았던 무렵의 실패였기에 몸의 부상보다는 마음의 충격이 더 컸다.
맹주가 의방으로 찾아왔다.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 옆에 서서 맹주가 말했다.
―패배에 익숙해지지 마라.
그 순간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부가 자신을 쳐다보며 말하던 그 순간이.
―패배에 익숙해지면 인생은 삼류가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맹주가 자신을 찾아와 줬다는 고마움보다는, 임무를 실패했다는 수치심이 마음을 집어삼켰다. 부끄러움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그땐 그런 나이였으니까.
―분하냐?
―네.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다시 가서 해내겠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때 사부는 다시 자신을 억지로 눕히며 이렇게 말했다.
―누군들 졌을 때 안 분하겠냐? 한데 말이다, 분하다고 설쳐대면 그 또한 삼류다.
―어떻게 해야 일류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계속 이길 수 있습니까?
그때 사부는 대답 대신 옆에 놓여 있던 약을 먹여주었고, 붕대를 새로 갈아줬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몸부터 추슬러야지. 검을 뽑을 것이 아니라 붕대를 갈아야지. 그렇게 차분히 감정을 다스리고 자신을 살필 줄 알 때 일류가 될 수 있다고, 붕대를 감아주는 걸로 대신 대답해 주신 것이다.
“아! 사부님.”
그때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분하고 부끄럽고, 어떻게든 다시 임무를 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어서, 어서, 어서. 어서 가서 놈들을 해치워야지. 어서 가서 맹주님께 내 결백을 증명해야지.
지금 느끼고 있던 감정이 어려서의 그 급했던 감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부님!”
비사인은 울컥 눈물이 흘렀다. 그날은 분해서 울었지만, 지금은 맹주가 그리워서 울었다. 자신은 새까맣게 잊고 있던 그날을 사부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서 울었다. 너무 죄송해서 눈물이 났다.
비사인은 천천히 붕대를 풀고 새로 약을 발랐다. 차분히 상처들을 보고 있으니 그때의 싸움이 떠올랐고, 어떻게 상대했어야 했는지 새로운 생각이 들었다.
분에 못 이겨 미친놈처럼 달려가지 않더라도, 어떻게 하면 일류가 될 수 있는지 이 상처가 말해주고 있었다.
“……사부님.”
비사인은 천천히 상처에 붕대를 감았다.
* * *
백자강은 맹주전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검무극을 만나고 돌아온 후 계속 한 사람이 생각났다.
검우진.
검무극과의 만남은 이런 느낌이었다.
솔직히 검무극을 만난 것이 아니라 검우진을 만난 느낌이었다.
검우진이 검을 내밀며 ‘내 검술 어떤가?’라고 묻지 않고, ‘내 자식 어떤가?’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럽게 검무극의 모습이 떠올랐고.
―저 밥 좀 사주십시오.
이런 황당한 녀석을 과연 비사인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하는데.
물론 이번 일의 배후가 검무극의 말처럼 혁사군이었을 때의 일이겠지만.
그때 허공에서 호위대주 인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 군사가 왔습니다.”
“들게 하게.”
잠시 후, 혁사군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백자강은 작지만 도도한 눈으로 그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자네가 맹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올해로 십칠 년째 됩니다.”
“총군사 역을 대행한 지는?”
“이 년이 다 되어 갑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혁사군은 백자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요즘 상황에서 평소와 똑같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는가?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아까 찾아뵈었을 때, 출맹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바깥 밥 먹고 왔네.”
백자강이 자주 다니는 반점이 있다는 것을 혁사군도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당분간은 조심하십시오.”
맹주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자신이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호위대주만 데리고 은밀히 움직여 버리면 행적을 놓칠 수밖에 없다.
혁사군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하에 착착 굴러가도 모자랄 판에, 의외의 상황이 자꾸 생기면 안 되었으니까.
“안가를 기습하게 지시한 자를 알아냈습니다.”
검무극이 누굴 지목하는지 주시하라고 했던 바로 그 일이었다.
“누군가?”
“극도병단의 번 단주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자강의 몸에서 기도가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어지간한 일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보란 듯이 분노한 것이다.
극도병단.
맹주 직속의 최정예 조직.
원래 극도병단의 단주였던 야율한이 물러나고, 새로 단주가 된 번천(繁天)은 백자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번천을 지목한다고?’
번천이 배후가 되면 자신의 오른팔이 잘려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검무극이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정적을 처리할 기회로 삼을 거라더니.
“증거는?”
“여기 있습니다. 배후에 마교가 있었습니다.”
혁사군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 가져온 서류를 백자강에게 건넸다.
배신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차분한 모습이었다. 귓가에 소름도 돋지 않았다. 거짓말이 아니거나, 이 감각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의미.
증거를 건넨 후 혁사군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소맹주가 아무래도 마교 소교주에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만약 검무극과 미리 만나지 않았다면, 다른 마음으로 그의 보고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증거까지 명확한데 과연 비사인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사인이 마교 소교주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섬뜩했다.
이 혁사군이 배신했다 생각해도 그렇고, 검무극이 이 혁사군을 배신자로 몰았다고 생각해도 그렇고.
물론 백자강은 아직은 중도에 서 있었다. 여전히 이 모든 일이 마교의 큰 계략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나?”
“번 단주의 직위를 해제하고, 극도병단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단, 마교 소교주를 만나본 후에 처리하세.”
“그러시지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 나가려는 그에게 백자강이 말했다.
“믿기지 않네. 사인이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저도 그렇습니다.”
“다음 후계자를 누굴 뽑을지 자네 의견을 정리해서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돌아서 걸어 나오는 혁사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자강의 눈빛은 맹주가 아니라 저울을 들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를 지켜보는 염왕의 눈빛이라는 것을.
* * *
검무극은 천장절벽에 서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가 겁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쉬이이이익.
검무극은 빠르게 추락했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그냥 무방비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 높이에서 무방비로 떨어지면 죽을 게 틀림없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이유는 천마호신공이 이런 경우 어떻게 반응할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호신공아, 나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다. 그냥 두고 볼 거냐?’
검무극은 천마호신공을 믿었다.
하지만 천마호신공은 발동하지 않았다. 나를 믿는 거냐? 설마 진짜 위기가 아닌 걸 알아보는 거냐? 아니면 땅에 추락해서 반죽음이 되어야 내 목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냐?
이제 내공을 일으켜서 경공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참았다.
‘이러다 정말 죽는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순간.
검무극의 몸속 내력이 저절로 움직였다.
휘리리릭.
허공에서 몸을 틀어서 일으켜 세웠고, 저절로 손발을 움직였다.
이미 익혀둔 천마비행술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추락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가볍게 내려섰다.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스스로 해낸 움직임이었다.
“후우우.”
검무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아, 놀라서 죽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검무극은 환호했다. 백자강 앞에서도 기뻐하긴 했지만, 그건 진짜 기쁨의 십 분지 일도 안 되는 기쁨이었다.
검무극은 절벽 아래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이것이 바로 천마의 무공이다!”
쩌렁쩌렁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회귀 전 어떤 인생을 살았든, 검무극도 무인이다.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건 역시 무공의 성취. 게다가 다른 무공도 아닌 천마의 독문무공이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대성을 이뤘으니 이제 더 깊은 잠이 들어도 살기가 느껴지면 저절로 깨울 것이고, 위험한 순간에는 더욱 확실하게 반응해서 자신을 지켜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경험해보지 못한 대성의 효능이 더 있으리라.
“앞으로 잘 부탁한다, 호신공아.”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면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나는 이제 또 하나의 목숨이 생긴 셈이다.
또한 천마호신공의 대성이 구화마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라 믿었다. 두 무공은 근본적으로 매우 가까운 무공이었으니까.
이제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만이 남았다.
천마혼을 내 눈앞에 세울 수만 있다면. 그것도 십성 대성의 천마혼이 아니라 십이성 대성을 이룬 천마혼을.
그 순간을 위해서는 시천비술의 경지를 더욱 끌어올려야 한다. 이대로는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난 이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뤄서였을까? 오늘따라 아버지가 더 보고 싶었다.
대성을 이뤘다고 말씀드리면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라고 하시며 주먹부터 말아쥐실 텐데. 그 엄청난 주먹에 맞아도 좋으니.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 * *
다음날 검무극은 사도맹주를 만나기 위해 안가를 떠났다.
“조심하시오.”
“당신, 눈이 많이 부었소.”
“또 쓸데없는 소리! 혁사군이 무슨 일을 꾸몄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꾸밀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꾸몄을 거요. 당신이 나와 손잡고 이번 음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사도맹주에게 줬을 거요. 그래야 나를 당신에게서 쫓아버릴 수 있으니까.”
비사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 수만 있다면 나도 따라가고 싶소.”
사도맹주가 보고 싶었다. 백자강을 만난 이래 이렇게 보고 싶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서두르지 마시오. 상대는 오랜 세월 공을 들여서 음모를 꾸몄소. 그걸 한 번에 따라잡으려 하지 마시오.”
비사인은 검무극과 백자강이 통하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차분하려는 그들이다. 그들은 외부에서 답을 찾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서 답을 찾아낸다.
“혹시라도 기회가 되면 맹주님께 말씀드려주시오. 해주신 말씀대로 살겠다고.”
“그러겠소.”
그렇게 검무극이 안가를 나섰다.
비사인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괴악이 와서 비사인 옆에 섰다.
“너무 초조해 마시게. 곧 소맹주에게도 기회가 올 거네.”
“기회가 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 무림에서 제 마음이 제일 급했었는데, 이젠 안 급합니다.”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하게 쳐다보는 괴악에게 비사인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검을 뽑을 때가 아니라 붕대를 감아야 하는 시기니까요. 그리고 붕대를 감아본 사람이 뽑는 검은 더 무서울 겁니다.”
절대회귀 364화
제364회 이것이 첫 거짓말.
두 사람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호위대주 인궁이었고, 그 뒤를 검무극이 뒤따랐다.
맹주전에 거의 다다랐을 때, 검무극은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강철 늑대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사도맹의 그 유명한 늑대군요. 위급한 상황이 오면 이 늑대가 살아나서 침입자를 막는다던데. 정말 그렇소?”
검무극의 물음에 인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을 안내하면서도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그였다. 원래 이렇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특별한 경우였다.
“늑대야, 혹시라도 나중에 살아나면, 나는 물지 마라.”
그러면서 검무극이 늑대 입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다 갑자기.
“으아아아악!”
검무극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실감 나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인궁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볼 뿐이었다.
검무극이 입맛을 다시며 늑대 입에서 손을 뺐다.
“하도 말씀이 없으시기에 장난 한 번 쳐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인궁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검무극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늑대 입속에서 느낀 것은 자신 정도의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묘한 기운이었다.
커다란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맹주전으로 들어섰다.
인궁은 자연스럽게 검무극 뒤로 물러서더니 어느새 사라졌다. 아버지의 호위인 휘에게서나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은신술이었다.
저 멀리 태사의에 사도맹주 백자강이 앉아 있었다.
검무극이 그를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본교 교주전에는 여기 이 길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습니다. 다들 그 융단을 피의 길이라고 부르죠. 천마가 되기 위한 길이 너무 험난해서 그렇게 부르는지, 그 융단을 오가는 사람들 손에 수많은 생사가 갈려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백자강이 대답했다.
“그 융단 아래를 들춰보았는가?”
“아뇨.”
“아마 그 아래 고수들도 피할 수 없는 기관장치가 숨겨져 있을 거네.”
그러자 검무극은 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자세히 살폈다.
“여기도 있군요!”
바닥에는 독침이 발출되는 작은 구멍들이 촘촘히 나 있었다. 이 구멍에서 일제히 독침이 발출되면 그 어떤 고수도 살아남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맹주전을 지키는 독인데, 어디 해약 한 모금으로 해결될 독이겠는가?
“사람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지.”
그래, 사도맹주가 사람을 믿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돌아가면 꼭 융단을 들춰보겠습니다.”
검무극은 다시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태사의 아래까지 도착해서 정중히 인사했다.
“제가 사도맹 맹주전에 들어올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마찬가지네. 이곳에서 자넬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네.”
“역시 맹주님들은 태사의에 계실 때 제일 멋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천마신교의 교주전에 들어선 것처럼 편안하게 행동했다.
“자넨 내가 무섭지 않나?”
“무섭죠. 아버지 다음으로 제일 무섭습니다.”
“한데 왜 무섭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나?”
“제 경험상 무섭게 느껴진 사람은 실제로는 제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절 해치려던 사람은 다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죠.”
백자강이 보란 듯이 웃었다.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짧은 초승달이다.
“이렇게 웃던가?”
“그러니까 더 안심됩니다.”
“왜?”
“웃으시니까 맹주님이 더 무섭거든요.”
말로 어찌 검무극을 이기겠는가?
‘검우진 그 과묵한 사람 밑에서 어찌 이런 아들이 태어난 거지?’
그렇게 인사가 끝나고 검무극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혁사군이 누굴 지목했습니까?”
“나를 가장 잘 따르는 사람을 지목했네.”
극도병단주 번천의 배신은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현혹되었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자네들이 배후로 일을 꾸몄다는 증거까지 다 나왔네. 그럼에도 자네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
“저를 믿지 마시고 제자분을 믿으십시오.”
검무극이 비사인의 말을 맹주에게 전했다.
“말씀해주신 대로 살겠답니다. 맹주님이 해주신 말씀에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더군요. 그 얼굴에 눈까지 부으니까. 못생겼다고 놀리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습니다.”
백자강은 검무극의 눈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사인이는 믿네. 자넬 믿지 못하는 거지.”
“만약 제가 사도맹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면 그 많은 계략 중에서 사제지간을 분열해서 뭔가를 얻어내는 일을 꾸미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유는?”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었겠지만 검무극은 가장 감정적인 이유를 들었다.
“너무 멋이 없잖아요.”
엉뚱한 대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지만, 멋이 없어서라고? 백자강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검무극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저라면 결투장을 보냈을 겁니다. 저를 부르셨던 그 들판에서 무인답게 한 판 붙자고 했을 겁니다. 이긴 사람이 이 무림 먹자! 이게 제 방식이죠. 그래서 전 무림일통 같은 꿈, 꾸지 않습니다. 이런 순진한 마음으론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거든요.”
잠시 사이를 두고 백자강이 물었다.
“그래서 이룰 수 있는 꿈 아닌가?”
검무극은 보았다. 찰나의 순간, 백자강의 그 작은 눈동자에서 어떤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한판 붙어서 이긴 쪽이 다 가지자고 하는, 그도 그런 남자였다.
“맹주님은 엄청 차갑고 현실적으로 무림을 바라보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감정적인 부분도 지니고 계셨군요.”
백자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자신이 지닌 양면성을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맹주님도 무림일통, 꿈 깨십시오!”
백자강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놈!”
백자강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감히 내 맹주전에서 할 말이더냐!”
겉으로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백자강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꿈 깨라는 말을 언제 들어볼 것인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말이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더 흥미로운 것은 사죄하면서도 여유로운 검무극의 저 눈빛이었다. 진짜 화를 내지 않았듯, 진짜 사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이제 고작 두 번째 만남인데, 오랫동안 만난 사람처럼 말이다.
“제 말씀을 믿기 힘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정말 누군가 사도맹을 집어삼키려 했다고? 총군사까지 밀어내면서? 그렇죠?”
이제 아껴두었던 검무극의 한 수가 나왔다.
“그거 아십니까? 본교도 무림맹도, 심지어 새외 풍천교까지 비슷한 일을 당했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던 백자강이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만큼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는 감정이 백자강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암중 세력이 있었습니다. 무림 전체를 상대로 동시에 음모를 꾸미고 있는 조직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백자강에게 검무극은 더 큰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맹주님의 문제는 그런 암중 세력이 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더 큰 문제는 맹주님이 그와 관련해서 어떤 사실도 보고 받지 못하셨다는 점이죠. 혁사군은 왜 맹주님께 보고하지 않았을까요?”
“!”
“보고한 세작들이 있을 테니, 분명 내용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저들이 보고한 세작들이나 수하 군사까지 모두 제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면, 본교와 무림맹에 은밀히 협조를 구하십시오. 분명 사실관계를 공식적으로 알려줄 겁니다.”
만약 그 일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혁사군이 이번 일의 배후라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군사가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중죄였으니까.
백자강은 곧장 호위대주 인궁을 불러 전음으로 뭔가를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인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 처리를 하는데 사도맹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검무극의 말을 듣고 조사를 지시했지만, 그렇다고 아직 검무극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일은 자신은 물론이고 사도맹의 운명을 좌우할 일이었으니까.
“만약 자네 말이 맞다고 치면, 머리가 혁사군이라면 몸통은 누군가?”
“사맹관 교관 황석경입니다.”
백자강은 황석경이 누군지 알고 있다. 일개 교관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럼 왜 처음 만났을 때 그 말을 하지 않았나?”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갔어야 할 문제였으니까.
“놈은 매우 위험한 자입니다.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때가 되었을 때 알려드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때가 되었고?”
“적어도 지금은 반신반의는 해주고 계시니까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러니 자넬 의심할 수밖에.”
“이러니 절 믿어주셔야죠. 이런 제가 표나게 일을 꾸몄겠습니까?”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백자강은 검무극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검무극이었다면 더 치밀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제 곧 혁 군사가 도착할 거네.”
드디어 삼자대면의 시간이 된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서 두 사람이 기다리지 않은 것만 해도, 백자강이 비사인을 믿는 마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저도 제 군사를 부르고 싶습니다! 제가 말을 잘해서 똑똑해 보이지만, 저도 이쪽에 가깝거든요.”
그러면서 자신의 허리에 찬 흑마검을 툭툭 건드렸다.
백자강이야 쓸데없는 너스레라 여겼지만, 검무극은 정말 고월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사도맹 부 군사를 상대로 말싸움에서 이겨야 했으니까.
잠시 후, 그곳으로 혁사군이 들어왔다.
차분하게 걸어들어온 혁사군이 백자강에게 예를 갖춘 후 검무극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부 군사를 맡고 있는 혁사군입니다.”
“신교에서 온 검무극이오.”
혁사군은 검무극을 유심히 살폈지만 반박귀진에 이른 검무극을 겉모습으로 뭔가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교주의 재능이 출중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소문은 과장되는 법이지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을 꾸미고서도 이렇게 본맹을 찾아올 정도로 배짱이 두둑하시니까요.”
“내가 어떤 일을 꾸몄다는 거요?”
“그대가 소맹주를 현혹하지 않았소?”
검무극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오.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어서.”
“그럼 이번 일의 배후에 신교가 개입한 것 다 인정하시는 거요?”
“나야 그럼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소? 다만 그러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소맹주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소?”
“안가가 기습당한 것도 자작극이란 것, 알고 있소.”
“당신 말대로 나와 소맹주가 손을 잡은 거라면, 왜 그런 일을 벌였겠소? 조용히 저기 계신 분을 노렸겠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왜 그랬소?”
백자강은 마치 심판처럼 가운데 앉아서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대들이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소.”
“나도 증거가 있소.”
“무슨 증거요?”
“당신이 말한 그 명확한 증거가 내 증거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가 일을 꾸몄다면, 그런 명확한 증거가 나왔을 리 없을 테니까.”
혁사군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통할 것 같소? 그대도 증거를 내놓으시오.”
“좋소, 증거를 내놓겠소.”
그 말에 혁사군은 내심 긴장했다. 설마 증거가 있을까?
한껏 긴장감을 고조시킨 후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내가 봤소.”
“뭐요?”
“당신이 일을 꾸미는 것을 내가 봤소.”
검무극이 자신을 지목할 줄 몰랐기에 혁사군은 내심 크게 놀랐다.
“지금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오?”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번 일을 꾸미는 것을 봤다고 말하는 거요.”
혁사군이 미소를 지으며 백자강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시는 것처럼 소교주가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때 검무극이 그의 허를 찔러왔다.
“왜 묻지 않소? 보통의 경우라면 언제 무슨 일을 꾸미는 걸 봤느냐고 물어야 하지 않소? 보통 결백한 사람은 그것부터 묻지 않소? 혹시 당신은 이미 무슨 일인지 알아서 생략한 거요?”
혁사군은 순간 아차 했다. 검무극의 말처럼 해야 했는데, 마음이 급했다.
“그야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니까.”
지켜보고 있던 백자강이 나직이 말했다.
“자네 증언은 증거가 될 수 없네.”
백자강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혁사군은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옅게 웃었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 이상, 백자강도 자신을 결국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마교 소교주가 현란한 말솜씨를 발휘하면 할수록 의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만 돌아가시오. 지금 당신을 살려두는 것도 소교주이기 때문이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그땐 신교의 소교주라는 직위도 더는 당신을 지켜주지 못할 거요.”
“좋소, 가겠소.”
어쩐 일로 이렇게 쉽게 포기하나 싶었는데.
“갈 때 가더라도 오고 있는 사람은 만나고 가겠소.”
“누가 오기로 했소?”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본교의 마의와 독왕이 오고 있소.”
혁사군이 흠칫했다. 마의는 사도맹이나 무림맹의 신의보다 더 의술이 앞선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거기에 독왕까지?
“그대들 총군사가 노환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나는 독물에 의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오. 독왕과 마의께서 그걸 확인해 줄 거요.”
“!”
이 순간만큼은 혁사군도 동요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찔러 온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당신들과 한편인데 어떻게 믿소?”
“물론 본교 사람이오. 한데 그들은 스스로의 명예를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분들이시오.”
“교주의 명령을 받았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
“그건 맹주께서 판단하실 일이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백자강을 향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혁사군이 아니라 백자강이었다.
검무극이 독왕과 마의가 온다고 말했을 때, 그의 귓가에 소름이 돋았다. 검무극의 거짓말을 알아차린 것이다.
알고 보니 검무극은 자신의 감각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그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의와 독왕으로 혁사군을 궁지에 몰기 위해서겠지.
백자강이 충격을 받은 건 이것이 그의 첫 거짓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소맹주를 진짜 친구로 생각합니다. 그 친구가 무사히 맹주 자리를 물려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깨울 겁니다. 다른 꿈을 꾸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 무림은 서로 싸우지 않고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바닷가에서 소저들 꼬시며 놀 겁니다.
―본교 앞에 단골집이 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맹주님을 꼭 모시고 싶습니다.
검무극이 했던 말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했던 말들이 전부 진심이었다고?’
절대회귀 365화
제365회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데.
백자강은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당대 마교 소교주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진심으로 비사인을 친구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서로 싸우기를 원치 않으며, 진심으로 자신에게 술을 사주고 싶어 한다고?
역대 천마의 후계자 중 최고라고 소문이 자자한 저 검무극이? 소맹주와 일랑까지 현혹해 버린 저 소교주가?
백자강의 눈빛에 담긴 불신을 혁사군이 먼저 읽었다.
‘됐다!’
그는 이 불신을 이렇게 오해해서 해석했다.
어찌 마의나 독왕이 와서 하는 말을 믿겠는가?
‘거절하시오! 어서 안 된다고 하시오!’
혁사군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독왕과 마의 중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 함께 와서 살피면 반드시 독을 쓴 것이 들통날 것이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소. 당신을 위해서라도 거절하시오.’
한편 검무극도 백자강의 눈빛에 담긴 불신을 읽었다. 물론 검무극은 거짓을 감지하는 백자강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백자강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놈들을 궁지로 몰아붙이려고 한 거짓말입니다. 이번만큼은 저를 믿어주십시오. 마의와 독왕을 받아주는 척해주십시오.
이렇게 고백의 전음을 보내지 않더라도 이제 백자강은 검무극을 믿었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았으니까.
이윽고 백자강이 입을 열었다. 물론 혁사군이 함께 있는 자리였기에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만약, 두 사람이 와서 확인했는데도 중독된 것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할 건가?”
검무극은 백자강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오지 않을 이들이었고, 지금 필요한 것은 혁사군도 납득할 조건을 내거는 일이다.
“강서지역에서 본교의 세력을 반으로 줄이겠습니다.”
강서지역은 천마신교가 사도맹을 상대하는 요충지였다.
“공식 문서로 작성해줄 수 있나?”
“있습니다.”
백자강은 다시 귓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감각은 너무나 잘 작동하고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검무극의 전음이 뒤이어 날아들었다.
―이건 못해 드립니다. 아버지 허락도 없이 그랬다간 그날로 쫓겨날 겁니다! 절 양자로 삼아주시면 모를까요.
백자강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하여튼 못 말리는 녀석이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저런 너스레라니.
“좋네. 그럼 두 사람이 도착하면 확인하도록 하지.”
생각지 못한 결정에 혁사군이 불만을 드러냈다.
“설마, 지금 소교주의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백자강은 작은 눈으로 혁사군을 응시했다. 순간 혁사군은 자신이 경솔하게 나섰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자신의 말이 사실이면 흥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검무극이 저런 조건을 걸었다면, 군사로서 오히려 이 결정을 반겨야 할 상황이었다. 강서지역에서 천마신교의 세력이 반으로 줄어드는 일은 사도맹에 큰 이익을 안겨줄 일이었으니까.
“맹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백자강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들은 언제 도착하나?”
“십여 일 걸릴 겁니다.”
일부러 최대한 시간을 길게 잡았다. 비사인이 최대한 부상에서 회복해서 이 싸움을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건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 비사인의 싸움이었고, 또 백자강과 사도맹의 싸움이었으니까.
“좋아, 자네는 그때까지 맹에 머물도록 하게.”
검무극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혁사군을 쳐다보았다.
“그 사이 부군사가 총군사를 죽여서 증거를 없앨 수도 있습니다.”
검무극은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 혁사군은 정말 총군사를 어떻게 없애야 의심을 피할 수 있을지를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총군사는 내게 스승 같은 분이시오.”
“그러니까. 스승 같은 분에게 왜 그러셨소?”
혁사군은 차가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그 똑똑한 군사들도 손쉽게 다루곤 했는데, 그들보다 훨씬 젊은 검무극은 이상하게 껄끄럽고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마교 소교주라는 지위에 눌려서?
아니다. 이자는 사람 마음을 갑갑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객잔 점소이로 만나도 주문 한번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다.
서로를 노려보는 팽팽한 기 싸움을 백자강이 마무리 지었다.
“독왕과 마의가 도착할 때까지 맹 부근에 머물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맹주님.”
혁사군은 흘러가는 판도가 바뀌었음을 느꼈다. 이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혁 군사는 잠시 남게.”
검무극을 내보내고 혁사군을 남긴다? 마치 혁사군을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였다. 이제 적을 안심시키며 다독일 때다.
“어린놈이 객기를 부리는 바람에 우린 큰 이익을 볼 수 있게 되었군.”
검무극을 지칭하는 말이 소교주가 아니라 놈이 되었다.
다시 말해 검무극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다는 의미를 드러내 준 거다.
‘그랬다면 독왕과 마의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지.’
혁사군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사도맹에 대한 걱정처럼 드러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독왕과 마의는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특히 독왕은 이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자입니다. 그자가 본맹에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갈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맹주님의 안위가 걱정됩니다.”
맹주를 걱정하는 마음을 앞세워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보려 했다.
하지만 백자강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 알 리 없는 그의 헛된 노력이었다.
“그들이 오면 철저히 감시하게.”
진짜 그들이 온다고 했으면 백자강도 못 오게 했을 것이다. 독왕을 사도맹에 들인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 이후에는 물 한 잔 마실 때도 마음이 불편할 테니까.
그 점은 혁사군도 생각할 수 있는 점이었다. 그랬기에 백자강은 선수를 쳤다.
“한데 소교주는 왜 저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지?”
혁사군을 떠보는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들었다.
정말 자네가 꾸민 일은 아니지?
원래 자신은 이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무작정 혁사군을 믿으면 오히려 위화감을 느낄 테니까. 의심을 막아주는 의심이었다.
“시간을 벌려는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혁사군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백자강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백자강은 혁사군이 딴생각하지 못하게 정신없이 흔들었다.
이번에는 차가운 사기를 발출하며 검무극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마의와 독왕을 불러 확인한다는 것은 실로 건방진 수작이다. 본맹의 신의를 무시하는 말이지 않나?”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강서지역 일도 문서로 약속해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마음을 바꾸려고 혁사군이 새로운 문제점까지 짚었지만 쉽지 않았다.
“소교주는 자만심 가득한 자네. 자존심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약속은 지킬 거야. 검우진 그 사람이 머리통에서 열불 좀 나겠군.”
혁사군은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독왕과 마의가 와서 총군사가 중독으로 인한 병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자신은 끝장이었다. 황석경에게 독을 받아서 하독한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지금껏 자신의 승승장구를 방해하는 여러 일이 있었다. 앞을 막고, 발을 걸려고 하고. 그때마다 황석경의 도움으로 헤쳐나왔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방해의 크기가 재앙급이다. 지금껏 있었던 나쁜 일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컸으니까.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뒤에서 백자강이 말했다.
“잘 알아보게. 저 어린놈에게 우리가 농락당해서 되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주님.”
혁사군은 든든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돌아섰다.
‘그 어린놈 때문에 이제 맹주가 죽게 생겼소.’
* * *
그날 밤, 혁사군은 예전 투왕을 만났던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멀리 들판에 황석경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도 그는 먼저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석경은 늦는 법이 없다. 그를 보자 오늘 검무극을 보는 내내 느꼈던 갑갑함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앞서 그 갑갑함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본능의 신호였음을. 황석경 정도가 되어야 그 점소이에게 원하는 주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혁사군은 앞뒤 다 자르고 본론부터 말했다.
“소교주가 마의와 독왕을 불렀습니다.”
투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대번에 그들이 왜 오는지를 알아차렸다.
“총군사 때문이군.”
“맞습니다. 소교주 놈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투왕은 먼저 혁사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결정을 내린 상황에서도 언제나 군사에게 먼저 물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이곳에 오면서 이미 혁사군은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왕과 마의를 못 오게 할 방법이 있습니까?”
투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마존과 마의를 함부로 죽일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래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독왕이면 쉽지 않았다.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이쪽은 몰살이다. 그게 독왕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비록 계획했던 것보다 시기가 많이 당겨졌지만, 이 순간을 위해 우린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 결정은 자신과 황석경의 운명을 바꿀 일이었다. 수하들의 운명을 바꿀 것이고, 사도맹의 운명과 나아가 사파 무림을, 그리고 무림 전체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다.
혁사군이 비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비장한 혁사군에 비해 투왕은 편안해 보였다. 인생을 싸움으로 생각하고 살아왔다. 매 순간 지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기에 언제든지 대답할 수 있었다.
환한 달빛 아래서 투왕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네.”
* * *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검무극은 앞서 사도맹주를 만났던 그 들판에 서 있었다.
그곳으로 백자강이 들어섰다.
“이리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내게 거짓말한 건 괜찮네.”
“아뇨, 그 때문이 아닙니다. 제 거짓말 때문에 맹주님이 위험해지셨습니다. 저들은 마의와 독왕이 함께 조사하면 반드시 중독된 사실을 밝혀낼 거로 생각할 겁니다. 결국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이번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할 겁니다.”
“어떻게 마무리 짓는다는 건가?”
“그냥 달아나지는 않을 테니.”
검무극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흘러나왔다.
“맹주님을 죽이려 들 겁니다.”
자신을 죽일 거라는 말에도 백자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죄를 제게 뒤집어씌우겠지요. 그들은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검무극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원래라면 몇 년 후, 혹은 십여 년쯤 후에 일어날 일이었을 겁니다. 한데 제자분과 제가 친구가 되면서 시기가 바뀌게 된 거죠.”
원래라면 ‘제가 등장하면서’라고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비사인과 친구가 되면서라고 말했다. 틈이 날 때마다 친분을 과시하려 했다.
무림일통을 꿈꾸는 건 아버지만으로 충분하다. 아버지를 말리는 것만 해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자넨 이번 싸움에서 빠지게.”
물론 사도맹의 일이니 맹주의 뜻에 따라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투왕이란 것을 알았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일대일로 붙으면 사도맹주가 투왕을 이길 거로 생각한다.
문제는 투왕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다 쓸 거라는 점이었다. 투왕은 승리에 집착한 인물이지, 정정당당을 추구하지는 않았으니까.
“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다치면 자네 부친에게 면목이 서지 않을 거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경공은 또 제대로 배워서, 달아나는 것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백자강은 검무극이 이번 싸움에 끼려 하는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왜 이번 싸움에 끼려는 건가?”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소맹주 때문입니다. 저보다는 더 이 싸움에 끼고 싶을 겁니다. 부상이 다 낫지 않았으니, 제가 옆을 지켜주겠습니다.”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문득 떠올려보았다.
마교주와 사도맹주가 친구인 무림을.
하지만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그런 무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마도나, 소맹주의 사도나, 분명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이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우정은 이뤄지지 않을 거네.”
그러자 검무극은 깜짝 놀랄 말을 꺼냈다.
“저는 맹주님과 우리 아버지의 우정도 믿는 사람입니다.”
“뭐? 자네 아버지와?”
이럴 때면 당황스럽다. 천마와 사도맹주의 우정을 이야기하는 저 눈빛은 순박한 꿈이나 꾸는 순진한 더벅머리의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저 똑똑한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와 제대로 말씀 안 나눠보셨잖아요? 제가 볼 땐 두 분이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어떻게 죽일지 서로를 노리면서 말이지?”
백자강은 검무극을 만나면 만날수록 호감이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고,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있으면 재미있었다. 지금만 해도 세상의 무인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천마와 사도맹주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녀석의 아버지라면?’
어쩌면? 이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을 가소롭게 쳐다보던 그 검우진의 눈빛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데, 친구는 무슨!
“소맹주와 함께 싸우도록 해주십시오!”
“좋도록 하게.”
평소 백자강이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허락이었다. 사도맹의 일 처리를 하는데 누군가를 끼워 넣을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둘의 우정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곧 깨어질 우정, 지금이라도 만끽하게.”
“감사합니다.”
백자강은 사도맹주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도 두지 않은 자신이었다. 그때는 그게 옳다고 믿었는데, 나이를 먹은 지금은 아주 가끔은 다른 인생을 떠올릴 때가 있다.
특히 이번에 검우진의 아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사인아, 앞으로 너 고생 좀 해야겠다.’
검우진 아들에게 질 수는 없지 않으냐?
투왕과 혁사군이 바라보던 달을 검무극과 백자강도 함께 올려다보았다.
“이번 일 끝나면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
“끝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자강의 인생에서 감히 누가 있어 나중에 조건을 말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랬기에 이 순간은 여전히 신선했고, 그랬기에 짜증 대신 호기심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놈들은 지금껏 모아둔 전력을 다 쏟아부을 겁니다.”
“날 상대하려면…….”
백자강은 그 작은 눈에 환한 달빛을 가득 담으며 말했다.
“많이 모아뒀어야 할 텐데.”
절대회귀 366화
제366회 왠지 외로워 보여서요.
검무극이 안가로 돌아왔을 때 비사인은 마당에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오셨소?”
비사인은 편안한 얼굴로 검무극을 맞았다.
그러자 비사인을 유심히 살피던 검무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너, 누구냐?”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가 싶어 비사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너 누구냐니까. 내 친구 소맹주는 이런 편안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다. 내 친구는 기분 좋을 때 표정이 원수에게 비무첩 내밀 때의 표정인 사람이다. 당장 내 친구 몸에서 나와!”
비사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루라도 장난 안 치고 넘어갈 수는 없소?”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많이 쳐둬야지, 당신 사부나 우리 아버지 보시오. 얼마나 무뚝뚝하고 재미없소? 우리도 나이 먹으면 그렇게 될 거요.”
“당신은 그 나이 되어서도 장난칠 거잖소?”
그건 부정하지 못하겠는지 검무극이 씩 웃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소?”
“이야기 잘됐소. 놈들이 맹주님을 암습할 거라는 것 빼곤 별일 없소.”
“뭐요!”
검무극이 또 이런 일로는 장난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비사인이 재빨리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검무극은 갔던 일을 비사인에게 전부 전했다.
“그렇게 놈을 궁지에 몰았소. 이제 놈들이 선택할 방법은 맹주님을 죽여서 사도맹을 차지하는 것뿐이오. 미안하게 됐소. 놈들을 끌어낼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소.”
맹주를 위기에 빠뜨렸다며 화를 낼 법도 했는데, 비사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화를 안 내시오?”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소?”
검무극은 확실히 비사인과의 관계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저 멀리 있던 그는 이제 자신의 앞에 서 있다.
“맹주전에 계실 때는 감히 공격하지 못할 거요.”
맹주전 자체가 하나의 요새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고수가 맹주전 주위를 지키고 있었으니까. 혁사군을 따라 한두 명이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다수의 적이 침입할 수 없었다.
“출맹하셨을 때를 노리겠지. 부군사는 맹주님의 일정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이니까.”
검무극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의님과 독왕님이 열흘 후에 온다고 한 것은 당신이 이 싸움에 참전하기 바라는 마음에서요.”
비사인의 얼굴에 떨림이 있었다. 흉측하고 무서운 얼굴이기에 그 떨림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럴 필요 없소.”
비사인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난 염두에 두지 말고 계획을 세우시오.”
“그래도 괜찮겠소?”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지지 마라.
사부가 전한 그 말을 듣고 난 후, 비사인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붕대를 갈아야 할 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펄펄 끓을 때가 아니라 차갑게 식어야 할 때임을.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비사인이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당신, 많이 변했소.”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됐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그럼 쉬시오.”
검무극이 돌아서 나오려는데 뒤에서 비사인이 말했다.
“고맙소.”
단 한마디 말이었지만 비사인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러면 말로 때우지 말고, 내 부탁 하나 들어주시오.”
백자강에게 했던 부탁을 비사인에게도 하고 있었다.
“말해 보시오.”
“이번 일이 다 끝나면 말하겠소.”
그러자 비사인에게서 나온 놀라운 약속.
“그게 뭐든 꼭 들어주겠소.”
들어보지 않고 뭐든 다 들어준다는 말은, 그것도 반드시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그 어떤 고마움을 전하는 말보다 크고 가치 있었다.
고마움이 가득 차 있던 정산바구니가 비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당신 자리를 원하면 어쩌려고 뭐든 들어준다고 하시오?”
비사인이 돌아서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난 소교주 자리에 도전하겠소.”
그에게 검무극이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 보고 나면 그 말이 쏙 들어갈 거요.”
* * *
다음 날에도 검무극은 맹주전으로 갔다.
복도를 걸어가던 검무극이 오늘도 세워진 강철 늑대 앞에 멈춰 섰다.
“그 늑대가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검무극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안내하던 호위대주 인궁을 쳐다보았다.
오늘도 오면서 인궁에게 온갖 질문을 다 던졌다. 호위하느라 잠은 언제 주무시냐, 은신술은 얼마나 배워야 그런 경지에 오르냐, 맹주전 아래 독침 구멍은 누가 조종하는 거냐. 물론 인궁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인궁이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아십니까? 만난 이후 제게 말 처음으로 거셨습니다.”
“그 늑대를 눈여겨보시는 것 같아서요.”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늑대를 향했다. 저 때문이 아니라 늑대 때문에 말을 거셨군요, 라는 너스레가 나올법했는데, 검무극은 깊어진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왠지 외로워 보여서요.”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아버지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홀로 새하얀 방에 앉아 있는 극악소마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바람 부는 들판을 걸어오던 사도맹주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묵묵히 자신을 안내하는 이 호위대주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회귀 전 삶에서의 자신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인궁의 시선도 늑대를 향했다. 생각지 못한 답이었다. 이곳을 수도 없이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확실히 마교의 소교주는 지금까지 봐왔던 무인들과는 달랐다. 하긴 그래서 그가 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이겠지만.
검무극이 다시 뜻밖의 말을 했다.
“언젠가 이 늑대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
그 말 역시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으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잡아당기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인궁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수하 중에서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안 믿는 걸 당신이 믿는군요.’
검무극이 늑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이놈아, 졸지 말고 잘 지켜라!”
다시 인궁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맹주전 문이 열리기 전에 검무극이 인궁에게 말했다.
“놈은 강합니다.”
사도맹주를 만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인궁이 함께 있었다.
은신한 채 모든 대화를 들었기에 검무극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인궁은 정중히 대답했다.
호위대주만큼은 꼭 알아야 할 일이었기에 투왕의 실력을 상기시킨 것이다.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갔다.
사도맹주 백자강은 태사의에 앉아 눈은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도맹주쯤 되는 고수들의 사색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검무극은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고 걸어갔다.
검무극이 태사의 아래까지 다가갔을 때 비로소 백자강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유롭게 드나들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자네의 계획이었나?”
기척 없이 다가온 것에 대한 백자강의 농담이었다.
“사도맹주님을 죽이려면 이 정도 공은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근데 신법 수련을 더 해야겠습니다. 한 열 걸음은 더 은밀히 다가갈 수 있어야 제 친구를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자강이 눈을 번쩍 떴다. 역시 너스레는 상대가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렇게 막 해야 재미있는 법이다.
“계획은 세우셨습니까?”
“알다시피 본맹에 군사들이 문제가 있어서.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라고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마는.”
말과는 달리 검무극은 한 가지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맹에 계실 때는 놈들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출맹하실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놈들이 의심하지 않겠지요.”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검무극의 말이 이어졌다.
“마의와 독왕을 맞으러 나가는 겁니다. 지금 병환을 얻은 총군사는 외부에 숨겨둔 상태지 않습니까?”
지난번 만남에서 혁사군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그를 죽일 수도 있다고 조처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총군사를 맹주가 은밀한 곳에 데려다 두었다.
“독왕과 마의를 사도맹에 들이기 싫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두 사람을 마중하러 가는 겁니다. 그들을 데리고 곧장 총군사에게 가겠다고 혁사군에게 말하십시오. 놈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죠. 제가 혼자 맹주님을 죽였다는 것은 믿지 않겠지만, 독왕이 독살했다고 하면 믿을 테니까요.”
백자강은 감탄했다. 아마 처음부터 혁사군을 궁지에 몰려고 독왕과 마의가 온다고 거짓말했을 때부터 검무극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지.”
백자강은 검무극의 계획을 받아들였다.
“사인이는 이번 일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소맹주는 자신은 싸우지 않아도 되니, 개의치 말고 계획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백자강은 자신이 전한 말이 제대로 제자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그래도 전 소맹주를 데리고 나올 겁니다.”
“왜?”
“소맹주의 싸움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오늘이 아쉬울 겁니다. 그런 아쉬움을 친구에게 남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지킬 테니까요.”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이 감각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차라리 검무극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이 통했던 거의 모든 관계에서 남은 것은 실망감이었다. 사람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이 감각 때문이기도 했으니까.
‘자네가 그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이 젊은 마교의 소교주가 지금까지 보여준 의외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친구 걱정 말고 자네 걱정이나 하게. 지금 발밑에 독침 구멍이 몇 개나 있는 줄 아는가?”
어이쿠 하며 검무극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냥 땅바닥은 안 봐야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하늘 보는 걸 좋아해서요.”
* * *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맹주가 출맹하기로 한 전날이 되었다.
“어휴, 내일이면 또 징글징글한 싸움이 시작되겠군.”
차 교관의 불평에 함께 수련 도구를 옮기던 황석경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 사맹관에 새로운 기수가 들어오는 날, 짧은 휴가가 끝나면 언제나 연중행사처럼 나오는 차 교관의 불만이었다.
“본맹을 지킬 초석들이라 생각하게.”
“인기 많은 자네에게나 귀한 초석이지. 난 징글징글하네. 또 어떤 녀석이 날 열받게 할지.”
가져온 짐을 내려놓으며 황석경이 차 교관에게 말했다.
“참, 내일은 못 나올 거네.”
“자네가? 무슨 일로? 어디 아픈가?”
차 교관은 깜짝 놀랐다. 사맹관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황석경이었다. 평소에도 빠지는 날 하루 없는 그였는데 새로운 기수를 받는 첫날에 못 나온다고 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어디 다녀올 곳이 있네.”
“어딜?”
황석경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창고 문은 내가 잠그고 돌아갈 테니, 자넨 먼저 가보게.”
“그래 주겠나?”
저만치 가던 차 교관이 돌아서서 물었다.
“혹시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하게.”
그를 보며 황석경은 환하게 웃었다.
“괜찮네.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라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게 차 교관과 헤어진 후 황석경은 수련 도구를 꺼내왔던 창고로 돌아갔다.
창고에 들어간 그가 구석에 쌓여 있는 먼지 가득한 짐을 들어냈다. 그것들은 쓰지 않는 도구들이었다.
그가 벽에 숨겨진 정교한 장치를 조작하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황석경이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야명주 조각들이 벽에 박혀 희미하게 시야를 밝히는 그곳은 작은 밀실이었다.
정면 벽에 보의가 걸려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무인 열에 아홉은 비명을 내지를 신물.
불멸(不滅).
불멸신갑은 그가 가장 아끼는 보의이자 중요한 싸움에만 입는 호신갑이었다.
옷을 완전히 벗은 후 불멸을 입었다. 여러 특별한 천과 천잠사를 섞어 만들어진 그것은 몸에 착 감기듯 밀착했다. 얇으면서도 강력한 그것은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무림의 절대신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황석경은 팔목과 정강이를 보호하는 보호대를 찼다.
쌍혼(雙魂).
쌍혼이라 이름 붙은 이 보호구들은 불멸신갑에는 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강호의 기물들이었다.
다음으로 비수를 꽂는 가죽띠를 둘렀다.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열자 비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앞서 신물들이 그렇듯 이 가죽띠와 비수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황석경은 천천히 정성껏 그것을 가죽띠에 꽂아 넣었다.
싸움을 준비하는 그의 움직임은 차분했으며 진지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착용한 것은 한 벌의 장갑이었다.
투신(鬪神).
역시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져 착용한 듯하지 않은 것 같은 이것은 검기는 물론이고 검강에도 손을 보호했으며 주먹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주는 기보였다.
처음이었다. 이 모든 것을 다 착용하고 싸움에 나가는 것은.
다시 겉옷을 걸친 황석경이 밀실에서 나와 위로 올라왔다.
원래 있던 짐을 밀실 입구 위에 다시 쌓아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검도 함께 세워두었다. 이제 이곳에 들어오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 되리라.
그가 마지막으로 검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는 사맹관의 교관 황석경에서 결전 전야의 투왕이 되었다.
절대회귀 367화
제367회 조금 덜 멋져도 됩니다.
늦은 밤, 비사인은 안가 마당을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내일 드디어 맹주가 출맹하는 날이다.
자신은 빠지겠다고 했지만.
‘간다고 했어야 했나?’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다 낫지 않은 몸으로 괜히 짐이 될까 봐 걱정해서였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맹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을 평생 후회하면서 살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검무극은 걱정되지 않았다. 도망을 가도 알아서 잘 가겠지. 물에 빠져도 물고기들을 설득해서 빠져나갈 사람이니까.
‘나중에 맹주께서 내 마음을 알아주실까? 혹시 겁이 나서 오지 않았다고 오해하지는 않으실까?’
이내 비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걱정이라니.
그때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마음이 심란하니 잠이 안 오지?”
돌아보니 괴악이었다.
“내일이랬나?”
“네.”
비사인은 괴악에게 맹주님을 도우러 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아예 소맹주 명령이니 가시오, 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곳에 자신은 가지 않으면서 괴악에게 가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만약 그가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스스로 먼저 말을 꺼냈을 것이다. 내가 가서 돕겠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게. 맹주가 어떤 분인지 알지 않나?”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걱정되었다. 절대 물러설 분이 아니었으니까. 평소에는 차갑고 현실적인 사람이지만 싸움에 있어서만큼은 불같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최고의 상남자였으니까.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걱정되면 같이 갑시다!”
놀라서 돌아보니 검무극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왜 여기 있소?”
“왜긴. 당신 데려가려고 왔지.”
그러면서 뭔가를 내밀었다. 검무극의 손에 들린 것은 호신갑이었다.
앞서 두 벌을 겹쳐 입은 덕분에 목숨을 구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피에 젖어 있던 그것은 깨끗했다.
“아까 와서 내가 시냇가에 가서 씻었소. 오랜만에 사부 보러 가는데 피 냄새를 흘려서야 되겠소?”
정말 깨끗하게 씻겨 있었고 다 말라 있었다.
“덜 마르면 냄새날까 봐 내가 직접 입고 열양지기를 일으켜서 말렸소.”
“뭐요?”
“밤중에 혼자 난리를 떨었지.”
검무극이 시냇가에 서서 저 호위갑을 씻고, 또 그걸 입어서 열양지기로 말리는 모습을 떠올렸다.
놀라고 당황하고 감격하고.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비사인은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정말이지 이 소교주는 한 치도 예상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기쁨이었다.
비사인의 그 험상궂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갑시다.”
가는 게 맞았다. 이렇게 기쁜 걸 보니, 이게 맞다.
“맞소, 사도맹 일인데 당신이 가야지.”
비사인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 안개가 걷히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사부를 지켜주고 싶은 제자였고, 목숨을 잃어도 두렵지 않은 남자였다.
그래, 한 번 해보자. 한 번 해보는 거다. 죽더라도 거기서 죽는 거다.
“날 도와주시오, 친구.”
덧붙여진 친구란 말에 검무극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오. 나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 아니겠소? 당신이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도와준 유일한 친구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시오! 그리고 나중에 당신과 함께 해변을 누빌 친구도 바로 나요. 소저들, 내가 다 꼬셔 주겠소!”
비사인은 검무극이 뜻밖에도 생색에 약하다는 것을 안다. 고마움 받는 것도 부담스러워하고, 자랑하는 것도 싫어하고.
저 수다로 감춰진 안개 속에는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말이 없고 무뚝뚝한 남자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사인이 호신갑 한 벌을 껴입고 나머지를 검무극에게 내밀었다.
“하나는 당신이 입으시오.”
“난 이미 입었소. 그러니 이번에도 두 겹으로 입으시오.”
흑마검 손잡이에 묶여 있던 극품천잠사는 이미 검무극 몸의 주요 부분에 감겨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괴악이 끼어들며 말했다.
“호신갑 안에 독이 발려있을지도 모르네.”
농담이자 뼈있는 말이었다. 검무극을 완전히 믿지 말라는 의미의 충고.
“선배님이 계시니 적어도 소맹주가 독살당해 죽을 일은 없겠습니다.”
검무극은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잘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비사인아, 네게 달렸다.
비사인이 괴악에게 말했다.
“내일 저를 도와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괴악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소맹주가 가면 나도 가야지.”
맹주를 위해 스스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비사인을 위해 움직이는 마음은 있었던 것이다.
비사인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앞서 그에게 가달라고 강요했다면 지금 이런 흔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을 거다. 그때 참았기에 지금 얻는 것이 있다.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급할 때 우린 상대와의 거리를 잘 잊는다는 것을.
이런 깨달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신 분께서는 어찌나 바쁘신지. 검무극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봅시다. 데리러 오겠소.”
“이 밤에 어디 가시오?”
검무극이 알 수 없는 말을 한 후에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신갑을 입혀야 할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라서.”
* * *
늦은 밤, 백자강은 웃통을 벗은 채 자신의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다.
상대는 만년한철을 섞어 만든 철인형.
철인형은 검우진도 되었다가 황석경도 되었다가, 또 자기 자신도 되었다.
단칼에 잘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철인형에게선 경쾌한 소리만 이어졌다.
한바탕 검을 휘두른 후 백자강이 철인형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조금 전에 새겨진 흔적을 손으로 매만졌다. 너무 많은 선이 그어져, 이제는 선이 면이 되어버린 것 같은 표면이었다.
하지만 백자강은 그 속에서 방금 자신이 남긴 흔적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았다.
만년한철을 자르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였고, 이 위대한 경지를 즐기는 것은 검선을 따라가는 그의 손가락이었다.
선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결코 쉽게 맹주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역시 피의 길을 걸어서 태사의에 도달한 사람이란 것을.
그때 밖에서 호위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교주가 왔습니다.”
* * *
검무극은 오늘도 강철 늑대 앞에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잠이 안 와서 찾아뵈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긴장돼서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검무극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찾아올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안에 들어와 있지 않고?”
“아, 여기가 좋아서요.”
백자강이 검무극과 나란히 섰다.
“이 늑대가 살아날 거라고 했다지?”
호위대주가 그 말을 전한 모양이다.
“왠지 살아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모양입니다.”
“본맹에 위기가 오기를 바라는 건가?”
“아, 그랬나 봅니다. 어쩐지! 너무 강렬하게 살아날 것 같았거든요.”
이래서 검무극과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누구도 감히 못 할 말을 이렇게 편하게 해버리니까.
“강적이라고 했다면서?”
검무극이 허공에다 말했다.
“제 말을 맹주님께 너무 다 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사이에 비밀도 없습니까?”
그렇게 너스레를 떨은 후에야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네, 아마 맹주님이 만나본 적들 중에서는 가장 강할 겁니다.”
“자네 아버지만큼?”
“그 정도는 아니고요.”
백자강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지기 전에 검무극이 먼저 말했다.
“그렇다고 방심할 적도 아닙니다.”
이런 말이 사도맹주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경각심을 주었다.
“자넨 내가 죽을까 봐 두려운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백자강의 귓가에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이 마교소교주가 자신이 죽을까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맹주님을 위한 보갑이 있을 겁니다. 출맹하실 때 입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갑을 왜?”
“상대도 입고 나올 겁니다.”
투왕이 호신갑을 착용한다는 것은 회귀 전 삶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호신갑뿐만 아니라 싸움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온갖 기물과 신물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이 알려진 것은 투왕이 그런 사실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오직 패배뿐이다.
그냥도 마존만큼 강한 실력을 지닌 사람이, 최고의 기물까지 사용하기에 사도맹주를 걱정하는 것이다.
“전에도 느꼈지만, 자넨 이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네, 이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말이 길어질수록 허점이 생기는 법이니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전에 천마신교와 무림맹, 그리고 새외 풍천교에서도 비슷한 음모가 있었다는 말을 해줬으니, 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으로 생각하겠지.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맹주님을 무시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네. 다만 이건 물어보세.”
백자강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만약 자네 아버지라면 입었을까?”
잠시 아버지를 떠올려보던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입으셨을 겁니다.”
백자강은 차가운 기도를 뿜어냈다.
“한데 왜 내겐 입으라는 거지?”
“아버지께도 입으시라고 말씀을 드렸을 테니까요.”
똑같은 상황이라면 아버지에게도 권유는 했을 것이다. 절대 입지 않으셨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무인으로서 맹주님의 자존심과 자부심을요. 상대가 세상의 모든 기보를 다 감고 오더라도 한 자루 검으로 상대하실 분이죠. 아버지도 맹주님도 그런 분이라는 것 잘 압니다. 그래서 교주시고, 그래서 맹주시죠.”
“알면서 왜 입으라는 건가?”
“저는 입을 거기 때문입니다. 제일 좋은 호신갑으로 겹쳐 입고 나갈 겁니다. 제가 교주가 되더라도 그럴 겁니다.”
백자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검무극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이 젊은 소교주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제가 생각하는 교주의 명예는 불리한 조건에서 이기는 멋짐에 있지 않으니까요.”
“그럼 자네의 명예는 어디에 있나?”
“반드시 죽여야 할 자는 죽이는 그 결과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덜 멋져도 됩니다. 무용담 펼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무사히 돌아와서 내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그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적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할 겁니다. 피 묻은 호신갑을 벗어버리고, 웃고 떠들 겁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겠죠. 그래, 교주라면 반드시 죽일 수 있지. 제 명예는 거기에 있습니다.”
백자강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검무극과 있다보면 자신에게 없는 것이 자꾸만 펼쳐진다.
검무극이 앞서 했던 모든 말은 지금의 이 결론을 위해서였다.
“저는 맹주님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맹주님의 명예가 되었으면 합니다.”
검무극의 말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백자강의 귓가에는 털끝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사도맹주를 실은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는 소수의 무인들은 사도맹주의 호위무인들이었다. 이 은밀한 행차에는 호위들 중 가장 실력 좋은 이들만 따라나섰다.
마차에는 백자강과 부군사 혁사군이 타고 있었다.
“긴장되나?”
백자강의 물음에 달리던 마차 창밖을 바라보던 혁사군이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평소와 달리 긴장해 보여서.”
당연히 혁사군은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테니까.
황석경이 이기리라 믿고 있지만, 그곳은 위험천만한 싸움판이 될 것이다. 어떤 변수가 자신을 위협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번 일과 관련해서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게.”
“솔직히 섭섭했습니다. 저를 믿어주신다면 확실히 믿어주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요.”
“총군사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아서 섭섭했군.”
“네.”
이내 혁사군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불충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맹주님.”
“아니네. 자네도 사람인데 당연히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지.”
혁사군은 최선을 다해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맹주는 예리한 사람이다. 저 작은 눈으로 사람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 자신의 흥분을 섭섭함으로 감추는 것이다. 황석경이 기다리는 곳까지는 가야 하니까.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을 때 백자강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오늘 사맹관에 신입을 받는 날이지?”
“맞습니다, 오늘입니다.”
사맹관 이야기를 꺼내자 혁사군은 내심 긴장했다.
“황 교관이 오늘 휴가를 냈다던데?”
“네,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한데 어찌 아십니까?”
“성실하기로 유명한 사람 아닌가? 무슨 일인지 아나?”
“급한 개인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딜 갔는지 알 것 같네.”
어느새 마차는 멈춰 서 있었다.
백자강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그 사람 저기 있네.”
저 앞으로 투왕이 길을 막은 채 서 있었다.
자신의 기도를 고스란히 드러낸 투왕은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무극이 왜 그리 걱정했는지, 지금 드러내는 기도만으로도 설명이 되었으니까.
이미 인궁의 지시를 받은 호위 무인들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았다.
백자강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투왕의 투기가 칼날처럼 휘몰아쳐 날아들었지만, 백자강은 더없이 담담히 말했다.
“자네, 너무 화려한 휴가 아닌가?”
절대회귀 368화
제368회 주면 곱게, 안 주면 고통스럽게.
백자강은 온몸을 휘몰아치는 투왕의 투기를 느꼈다.
살을 파고들고, 당장 달려 나오라고 잡아 뜯는 이 예리한 투기에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제대로 싸워본 놈이다!’
백자강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상대는 확실히 한바탕 다 쓸어버리고 싶은 무인의 원초적인 파괴욕을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투왕이 느끼는 감정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상대의 저 편안한 눈빛과 휴가가 너무 화려하지 않으냐는 한마디 말만으로 온몸의 털이 일제히 섰다.
‘까닥 잘못하면 죽는다!’
가슴 철렁한 이 긴장감이야말로 투왕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사도맹주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졌다. 평생 다시 없을 기쁨을 줄 것이다. 지금까지 싸워서 이겼던 모든 승리의 기쁨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기쁨이리라.
‘반드시 이긴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뜨거운 투기와 열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휘몰아치는 기운을 느끼며 혁사군이 뒤늦게 마차에서 내렸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 중인데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도맹주의 반응이 평온한 것이야 그럴 수 있었다. 워낙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호위 무인들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황석경이 길을 막았음에도, 마치 이 순간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들은 차분하게 투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혁사군이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투왕에게 말했다.
“황 교관, 맹주님이 묻고 있지 않소? 무슨 연유로 감히 맹주님 앞을 막아서는 것이오?”
주군, 드디어 그날이 되었습니다. 부디 대업을 이루시기를!
이윽고 투왕이 투기를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휴가가 화려하다 했소? 괜찮소. 이번 휴가가 끝나면 사도맹에서 가장 화려한 자리로 복귀할 거요.”
상대가 너를 죽이겠다는 명백한 의지를 드러내자 백자강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내 자리는 자네가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화려하지 않을 거네.”
“그 공허함은 직접 느껴보겠소.”
투왕이 오른손 주먹을 왼손바닥에 가볍게 쳤다.
파앙!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큰 파공음을 신호로 숨어 있던 고수들이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사람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찬 중년 고수였다.
신월도(新月刀).
그는 사도칠대고수에 속한 인물이었다. 앞서 비사인을 죽이려 했던 광섬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사도칠대고수가 적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맹주님.”
신월도가 백자강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잘 지냈나?”
“사도 무림을 잘 이끌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다행이군.”
“일이 이렇게 돼서 미리 사죄드립니다.”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백자강은 그가 왜 투왕에게 붙었는지 따져 묻지 않았다. 그를 움직일만한 조건을 제시했겠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백자강이었다.
두 번째로 등장한 사람은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늙은이였다. 어찌나 주름이 많은지 백살도 더 되어 보였지만 실제로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았다.
청살귀(靑殺鬼).
그는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전대고수로 정사마 모두에게 공적으로 몰린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큼 악명이 높은 악인이었는데, 살아서 오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살귀의 등장은 신월도의 등장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내공 역시 당대 고수들보다 훨씬 심후했기에 상대하기가 더 까다로운 인물이었기도 했고.
“네가 어렸을 적 본 적이 있는데, 기억하느냐?”
청살귀가 백자강에게 아는 척하며 물었다.
백자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네가 요만할 때였으니까.”
손바닥을 내려 허리춤 부근에서 꼬마 아이 키를 재는가 싶더니, 그 손바닥이 홱 꺾이며 장력을 발출했다.
쇄애애애애애액!
콰아아앙!
푸른 기운이 넘실대며 날아든 장력을 막은 사람은 호위대주 인궁이었다.
내공에서 밀린 그가 뒤로 주르륵 밀려났고, 다른 호위들이 그 등을 받치며 내공을 지원했다. 뒤에 두 사람이 더 힘을 합치자 비로소 밀려나는 것을 멈췄다.
청살귀가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구먼.”
인궁과 호위들은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 뒤에 서 있는 백자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새롭게 등장하는 이를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등이 굽은 추괴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독패자(毒覇者).
그는 한때 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독인이었다. 무림에서 금지된 대량학살독을 사용하는 바람에 공적으로 몰려 사라진 인물인데, 오늘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총군사에게 하독된 독을 제작한 이도 바로 이 독패자였다.
독패자의 등장에 호위대주 인궁의 표정이 굳어졌다. 독패자는 앞서 등장한 어떤 적들보다 위협적인 인물이었으니까.
“피독!”
인궁의 명령에 호위무인들이 일제히 품에서 피독주를 꺼내 물었다.
독패자가 비웃듯 킬킬댔다.
“너희들이 쓰는 그 하찮은 피독주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
피독주도 독성을 막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난전이 벌어졌을 때 독패자가 기습적으로 하독한다면 자신들의 안위는 둘째치고 맹주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투왕과 신월도, 청살귀검, 그리고 독패자.
하지만 준비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싼 그들은 훗날 투왕을 따르던 투랑(鬪狼)이라 불리던 무인들이었다.
그들 역시 지극히 호전적인 이들로 싸우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에 미친 고수들이었다. 앞서 등장한 고수들이 호랑이라면 그들은 사냥개는 되는 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혁사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이들이었다. 물론 원래라면 더 많은 준비를 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아무리 맹주라도 버티지 못한다.’
팡! 파앙!
다시 주먹과 손바닥을 마주쳐 주위를 환기한 후에 투왕이 모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호위들부터 다 죽이고 싸움에 합류한다.”
투랑들까지 모두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며 살기를 내뿜었다.
투왕은 합공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걸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다면 독패자가 이곳에 없었으리라.
백자강은 어제 검무극이 간청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려 하니,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이기는 것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부탁이었던 거다.
피독주를 문 호위 무인들이 검을 뽑아 들며 백자강의 정면을 제외한 좌우와 뒤쪽을 막아섰다.
적들이 점점 압박해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멀리서 누군가 소리쳤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멀리서 들려온 외침이 그곳까지 또렷하게 날아들었다.
“거기 왼쪽 여섯 번째 키 크신 분! 암기 내려놓고, 잠깐만 기다리시오!”
눈이 어찌나 좋은지 정말 왼쪽 여섯 번째 투랑은 암기를 꺼내고 있었다. 키도 컸다.
모두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저 멀리 한 대의 마차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혁사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저 잔망스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린 것이다.
‘소교주!’
과연 마부석에서 마차를 모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투랑들이 달려들려는 것을 투왕이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냥 두고 보라는 명령이었다.
달려온 마차는 백자강 앞에 멈춰 섰다.
“다행히 아직 시작 안 하셨군요.”
신월도와 청살귀검, 독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투왕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무언의 물음에 투왕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자가 마교 소교주요.”
검무극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말을 이미 들었는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생각보다 어리군.”
검무극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등 굽은 추괴 독인이나 휘어진 칼을 쓰는 고수가 누군지 모를 그가 아니었으니까.
“생각보다 무서운 분들이네요.”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여유가 지나쳐 장난처럼 보이는 검무극의 태도에 그들은 모두 인상을 굳혔다. 물론 장난은 아직 시작도 안 했음을 그들을 알지 못했다.
마차 문이 열리며 비사인이 먼저 내렸다.
그러자 검무극은 마치 비무대회에 무인을 소개하는 사람처럼 큰소리로 그를 소개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불사신처럼 살아 돌아온 사도맹의 후계자이십니다! 저를 부끄러워하지만 분명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 장난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비사인이었다
비사인은 곧장 떨리는 목소리로 백자강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부님.”
제자를 바라보는 사부의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웠다.
“몸은 괜찮으냐?”
“걱정해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펼쳐진 상황을 보니 정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비사인이었다.
다음으로 마차에서 괴악이 내렸다.
“최근 친구의 배신으로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보신 사도칠대고수 괴악님이십니다!”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한다고? 아, 이놈은 정말 미친놈이다! 괴악 역시 못 들은 척 백자강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오랜만이네.”
“소맹주가 맹주님을 위하는 마음이 큽니다.”
이 자리는 소맹주를 위해서 왔다는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비사인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말해주는 괴악이 고마웠다.
비사인은 검무극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올렸다. 그 반만 할 수 있어도, 괴악과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괴악의 시선이 향한 사람은 신월도였다.
“당신이 왜?”
괴악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도칠대고수 중 무림 일에 가장 관심이 없는 사람이 신월도였다. 그런 그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소.”
“당신과 싸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또 몰랐군.”
“사도가 달리 사도겠소.”
“그렇지.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후회 없이 잘 싸워봅시다.”
“그럽시다.”
세 사람의 등장에 가장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혁사군이었다.
원래 계획은 합공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뒤로 빠져 물러나는 것이었다.
호위들은 맹주 지키느라 바쁠 거고, 자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한데 이들이 나타나면서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물러나거나, 아니면 저쪽 황석경 뒤쪽으로 가야 하는데.
저 검무극이 과연 보내줄까?
반면 투왕은 변수가 발생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변수조차 다 때려 부순다, 이것이 그의 마음이었으니까.
“다 죽여라!”
그때 또 다른 이들이 등장했다.
“멈춰라!”
화려한 경공으로 그곳에 내려서는 열세 명의 고수들, 바로 사도십삼랑이었다.
일랑이 투랑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상대는 이쪽이다.”
비사인이 그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도십삼랑의 눈빛에 뜨거움이 가득했다.
소맹주님을 뵙습니다!
비사인의 눈빛도 함께 뜨거워졌다. 그래, 이 위기를 넘긴다면! 정말 앞으로 잘해 낼 수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 이긴다! 꼭 이긴다!
지원군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또다시 들려온 차가운 한마디.
“나를 모함한 자가 누구인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혹한 분위기의 남자는 바로 극도병단의 단주 번천이었다.
번천 뒤로 사도맹 최정예 극도병단의 정예 무인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맹주님을 시해하려 들다니! 한 놈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투랑들이 돌아서서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과 대치했다. 앞서 투왕이 했던 말을 번천이 다시 했다.
“이자들을 모두 해치우고, 맹주님을 돕는다!”
우렁찬 외침에 극도병단의 정예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기세와 사기는 사도맹주 쪽이 더욱 높아졌다.
바로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독패자가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으려는 것을.
검무극은 직감했다. 그가 대량살상용 독을 퍼뜨려서 극도병단의 무인들부터 다 없애려 한다는 것을.
독왕과 오랫동안 있었기에 독을 쓰는 사람들의 심리나 움직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인 독패자만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고.
극도병단의 저 많은 무인이 모두 상급의 피독주를 가졌을 리 없다. 그들이 지닌 중급 피독주로는 독패자의 독을 막을 수 없으리라.
“잠깐만요, 독패자 어르신!”
검무극이 재빨리 소리쳤다.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주머니로 향하던 독패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우리 어르신께서 총군사에게 독을 쓰셨습니까? 사도맹 신의의 눈도 피한 수준 높은 독이라던데요?”
“그래, 노부가 만든 독이다.”
“해약은 있습니까? 본교의 독왕께서 그러더라고요. 진정한 독공의 정수는 하독이 아니라 해독에 있다고요.”
말을 이렇게 하니 없는 해약도 있다고 할 분위기였다.
독패자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다행히 그는 해약이 있었다.
“여기 있네.”
“저 주십시오.”
“내가 왜 줘야 하나?”
“지금 주면 곱게 죽고, 안 주면 고통스럽게 죽게 될 테니까요.”
독패자가 가소롭다는 조소를 지었다.
“그래, 소문은 들었네. 천방지축 소교주가 중원을 떠들썩하게 한다지?”
독패자가 힐끗 투왕을 쳐다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교 소교주를 죽여도 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투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교 소교주는 사도맹주와 싸우다 양패구상한 걸로 처리되어야 했으니까. 독왕의 도움이 있었던 것으로 처리하면 다들 믿을 것이다.
독패자가 주머니를 내밀었다.
“가져갈 자신 있으면 직접 와서 가져가게.”
독패자의 도발에 검무극이 그에게 걸어갔다.
독패자가 어떤 독인인지 잘 알았기에, 호위대주 인궁은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백자강을 돌아보았다.
백자강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검무극이 독패자를 상대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해약을 구하기 위해서? 그래 보이지만, 아니었다.
독패자가 가장 위험한 자였으니까. 무사히 돌아가려면,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자가 독패자였으니까. 자신도 죽이려면 독패자 먼저 죽여야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백자강은 어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생각하는 명예는 반드시 죽여야 할 자를 죽이는 그 결과에 있습니다.
자넨 진정 죽여야 할 자를 죽이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나?
다른 이들도 긴장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무극을 잘 아는 비사인부터 괴악이나 사도십삼랑, 그리고 인궁까지. 각기 경험한 바는 달랐지만 검무극의 놀라운 모습을 다들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과연 그 놀라움과 특별함이 독패자에게도 통할까?
검무극은 겁 없이 독패자 앞까지 걸어갔다.
독패자는 이 용기를 만용이라 여겼다.
‘마교 소교주니까 죽이지 못할 거라 믿겠지?’
그렇지 않다면 강호의 그 누구도 독패자인 자신에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걸어올 수 없을 테니까. 저런 여유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지는 못할 테니까.
‘이 어리석은 마인 놈아, 네 자만이 너를 지옥으로 이끌 것이다.’
검무극이 그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받아들려던 바로 그때.
퍼어억!
두 사람 주위로 독연이 터져나갔다.
“안 돼!”
비사인이 소리쳤다.
달려가서 구하려 했지만 이미 검무극 주위로 독연이 가득 피어오른 상태였다. 설마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당신이라면 무슨 수가 있었어야지? 터뜨리기 전에 죽일 줄 알았다. 검무극이니까.
바로 그때였다.
푹! 푹!
독연 속에서 검광이 번쩍이며 살이 찢기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렸다.
휘이이이잉.
두 사람 주위로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주위에 있던 독들을 끌어모았다.
화르르르륵
독연에서 불이 붙으며 타기 시작했다.
불길이 회오리치며 두 사람 주위를 휘감았다. 모두 놀란 얼굴로 이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독연은 완전히 불에 타서 바람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사라졌다.
그곳에 여전히 검무극과 독패자가 서 있었다.
독패자는 여전히 해약 주머니를 앞으로 내민 상태였다.
검무극이 주머니를 들자, 독패자가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푸아아아악!
목과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며 독패자가 뒤로 쓰러졌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독을 모아서 열양지기로 태워 버리는 고절한 수법이라니? 아니, 그 이전에 독패자의 독을 어떻게 견딘 것일까?
검무극이 두꺼비처럼 불룩하게 입안에 물고 있던 피독주를 두 개나 꺼냈다. 피독주가 없어도 되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굳이 만독불침임을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물고 있었던 거였다.
“천마신교 소교주가 쓰는 극상품 피독주를 무시하면 되겠소? 해약을 줘서 약속대로 곱게 죽여줬소.”
백자강과 투왕은 반신반의했다. 아까 상황에서 독패자는 분명 극상품의 피독주도 통하지 않는 독을 썼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제로 독패자는 어떤 피독주도 통하지 않는 극독을 썼지만, 이들이 그런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사도맹주 쪽 무인들은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끔찍한 독이 퍼부어지기 전에 검무극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것을.
검무극이 총군사를 위한 해약을 품에 넣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물고 계신 피독주 빼시고 편하게 싸웁시다.”
절대회귀 369화
제369회 얼마나 악착같이 주장했으면.
이 순간 가장 감격한 사람은 비사인이었다.
검무극이 독패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얼마나 많은 사도맹 무인들이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무극이 무사해서 기뻤다. 마교 소교주가 무사해서 기쁜 날이 올 줄이야.
호위대주 인궁은 피독주를 뱉어내며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맹주님은 소교주가 해낼 거라 믿으셨군요.’
역시 자신과는 보는 눈이 다르다고 인궁은 감탄했지만, 사실 백자강도 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알 수 없는 기대감은 있었다. 자신에게는 없는 세상을 자꾸만 보여주는 저 소교주가 허망하게 죽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 말이다.
사도십삼랑 역시 큰 고마움을 전하며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석관추와 백망기와의 싸움에서 사도십삼랑은 여럿이 죽고 다쳤으며, 이후 비사인이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세대교체가 되면서 아무래도 처음 검무극을 만났을 때보다는 전력이 약해졌다. 따라서 독패자의 독이 살포되었다면 그들 역시 피해가 컸을 것이다.
일랑의 시선이 비사인을 향했다. 한때는 그도 검무극을 싫어하고, 비사인과 친해지는 걸 경계했지만 이제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소맹주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은 비사인 밑에서 점차 성장해 갈 테고, 오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사도맹을 대표하는 무인은 다시 사도십삼랑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일랑의 전음에 비사인도 기쁜 마음으로 답했다.
―일랑께서 와주셔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를 겁니다.
―앞으로도 이 한 몸 다 바쳐서 모시겠습니다.
극도병단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피해가 가장 컸을 이들이었으니까.
거기에 단주 번천은 한 가지 호의를 더 지니고 있었다. 이번에 검무극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죄를 모두 뒤집어썼을 거란 사실을 맹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검무극에 대한 호의는 더욱 컸다.
사도맹 무인들이 이렇게 놀랐는데 적이라고 놀라지 않았겠는가?
투랑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독패자와 함께 등장했던 신월도와 청살귀도 눈빛을 주고받았다.
자신들이 아는 독패자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죽였다?’
독패자는 자신들도 껄끄럽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이 자리의 누군들 그를 편하게 상대할 수 있겠는가?
신월도와 청살귀가 자연스럽게 투왕을 쳐다보았다.
투왕은 독패자의 죽음에 그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죽은자에 대한 미련은 싸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투왕이 검무극을 차분히 살피고 있었다. 첫 느낌은 독패자가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천마의 혈육에서 오는 자신감이겠거니, 싶은 여유만만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 여유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님이 밝혀졌으니, 그 이면을 깊게 살폈다.
그러자 투왕은 맡을 수 있었다.
‘피 냄새다.’
투왕의 마음에 전장에 홀로 서 있는 검무극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자루 검을 늘어뜨린 채 싸움터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젊음과 장난기로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반드시 죽여야 할 자다.’
투왕은 오늘 싸움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그러는 사이 검무극은 혁사군에게 다가가 있었다.
혁사군은 독패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내심 그가 가장 믿고 있었던 사람이 독패자였으니까.
“한데 당신은 왜 아직 여기 있소? 저쪽 편에 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또 나를 음해하려는 거요?”
혁사군은 검무극이 자신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리라 예감하고 있었다.
당장에 자신의 심기부터 건드렸다. 검무극이 극도병단의 단주 번천에게 일러바친 것이다.
“모함한 사람이 바로 이 부 군사입니다.”
“소교주의 말을 믿지 마시오. 모함이니까.”
혁사군은 말을 하고 나서 적절치 못한 대답임을 깨달았다. 번천이 마교와 손잡았다는 증거가 나왔다고 맹주에게 보고했는데, 모함이라는 말을 하다니. 번천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대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증거가 나왔소.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말실수를 많이 한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 이놈 때문이다.’
오랜 계획이 다 무너지고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놈은 이 순간에도 자신을 흔들어대고 있다.
“당신은 두렵지 않소?”
“뭐가 말이오?”
“당신은 저기 저 사람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을 거요. 한데 저 사람이 사도맹주가 되고 나면 당신을 살려두겠소?”
“무슨 말이오? 또 무슨 억지 누명을 씌우려고 이러는 거요?”
“당신이 맹주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올라선 군사를 원하겠소? 아니면 진짜 실력 있는 총군사를 원하겠소?”
“!”
어찌 혁사군이라고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애써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높으면 높을수록 걱정을 파묻은 구덩이는 깊었다.
황석경을 믿었다. 그는 맹주, 자신은 총군사. 맹주전 창가에 서서 함께 지난 일을 나누는 빛나는 미래만 꿈꾸었다.
그리고 지금 마음속 깊은 곳에 파묻어둔 그것을 검무극이 파헤쳐버린 것이다. 정말 깊이 파묻어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이렇게 툭 건들면 튀어나온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주군과 내 사이를 이간질하지 마라!’
혁사군은 하마터면 이렇게 말할 뻔했다.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아직은 저기 서 있는 황석경과 한편임을 들켜선 안 될 상황이었으니까.
“맹주님과 나를 이간질하지 마시오.”
이 대답이 제대로 된 대답이었다.
또다시 검무극이 정곡을 찔러왔다.
“당신은 여기서 저기 저 사람이 있는 곳까지 그 불과 이십여 걸음을 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너무 속이고 있소.”
“!”
순간 혁사군은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검무극은 쉴 틈 없이 그를 흔들어댔다. 검무극이 투왕에게 소리쳤다.
“물러가지 않으면 여기 당신 군사 죽일 거요.”
하지만 투왕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보시오, 저 사람 반응을. 이래도 토사구팽이 아니란 거요?”
혁사군은 내심 당황했다. 아까 말한 검무극의 말이 떠올랐다. 억지로 올라선 군사를 원하겠소? 진짜 실력 있는 군사를 원하겠소?
“자, 마지막 수로 뭘 숨겼는지 시원하게 고백하고 다시 이쪽 편에 섭시다.”
그러자 지켜보던 투왕이 나섰다.
“정체를 감추려고 애쓰지 말게. 이미 맹주도 알고 있네. 자넬 조롱하고 있는 거네.”
혁사군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황석경이 저런 말을 한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반응해야 하는데, 백자강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알고 있었구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내내 느꼈던 불안감과 위화감의 정체가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왜 배신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비사인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를 죽이려 했으니, 욕설이라도 퍼부어야 했는데 철저히 무시했다.
번천도 사도십삼랑도 주인의 뜻에 따라 일절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마지막 한마디를 해주었다.
“잘 살펴보시오. 저 뒤에 당신을 삶을 커다란 솥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이었다.
투왕이 혁사군에게 말했다.
“이리로 오게.”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누군가 자신을 기습을 해서 죽이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되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혁사군이 천천히 투왕쪽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배신은 더 극적으로 멋지게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죽어가는 백자강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하려고 했었다.
―내가 그대를 배신했었소.
그럼 맹주는 이렇게 탄식하겠지.
―믿을 수가 없군. 자네가 배신자였다니?
맹주를 죽이는 것은 투왕이겠지만, 마지막 주인공은 자신이 되리란 욕심이 있었다. 몇 번이나 맹주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한데 너무 시시하게 정체가 밝혀진 채 투왕에게 가고 있었다.
차라리 누군가 욕설이라도 해주기를 바랐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더 기분 나쁜 일임을 혁사군은 뼈저리게 느꼈다.
최악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투왕이었다.
투왕은 그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열릴 거네.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왔네.
혁사군은 이런 한마디 치하를 간절히 기대했다. 이 철저한 무시를 다 날려버릴 것은 오직 투왕의 한마디뿐이었으니까.
“뒤에 가 있게.”
하지만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투왕의 시선은 다시 백자강을 향했다.
혁사군은 느꼈다. 이 순간의 자신은 싸움에 방해가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투왕을 이해하면서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혁사군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뒤로 걸어갔다. 마음속에 걸린 솥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투왕이 백자강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아셨소?”
“며칠 됐네.”
“증거가 없었을 텐데.”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검무극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혁사군이 자신을 배신했을 거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어떤 자들이 군사를 포섭해서 총군사로 만들고, 소맹주를 죽이고 사도맹주 자리까지 노린다고 생각하겠는가?
백자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악착같이 주장했네. 얼마나 악착같았으면 본맹 부군사가 아니라 마교 소교주 말을 믿었겠나?”
악착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매력적이란 말로 바꿔야 할 것이다. 검무극과 함께 있는 순간이 신선하고 재미있었으니까. 그랬기에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 순간 검무극이 너스레를 빠뜨릴 리가 있겠는가?
“아! 정말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지요. 마교 소교주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당신은 받으라는 신입은 안 받고 여기서 뭐 하시오? 새출발시키는 게 지겨워져서 직접 새 출발 하려는 거요?”
저런 말에 속는 것임을 투왕은 느꼈다. 상대는 피를 뒤집어쓴 채 전장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걸 보지 못했기에 독패자가 죽은 것이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그곳에 괴악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입으로 나눌 대화는 어느 정도 하신 듯하니.”
괴악이 한 사람을 지목했다.
“당신 나 좀 봅시다.”
상대는 바로 사도칠대고수인 신월도였다.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되도록 먼저 싸우는 것이 여러모로 격조 있을 거요.”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난전이 벌어질 거란 의미였다. 그때 싸우지 말고 지금 싸우자는 제안을 신월이 받아들였다.
“맞는 말씀이시오.”
두 사람이 나서자 대치하고 있던 무인들도 뒤로 물러나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싸울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사도칠대고수의 싸움이었기에 모두 숨을 죽였다.
비사인은 괴악이 걱정되었다.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선배님, 조심하십시오.
비사인의 걱정에 괴악은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신월도가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며 선공을 가했다.
하늘에 떠 있을 때 아름다운 초승달은 땅으로 내려오자 흉포해졌다.
쉭쉭쉭쉭쉭쉬이이익!
순식간에 수십 가닥의 도선이 그어졌고, 괴악은 생사를 가르는 선들 사이에서 길을 찾았다. 체술인 참격철인을 익힌 그였기에 가까이 붙어야 했다.
서로의 실력을 익히 잘 알았기에 싸움은 순식간에 격렬해졌다. 도기가 날아들었고, 온몸에서 날아간 강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콰콰콰쾅!
지켜보는 것도 위험천만했다. 그들은 주위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싸웠다.
지켜보던 이들이 검기를 발출해서 뒤로 흘러나온 도기를 막았고, 때론 몸을 날려서 피했다.
쇄애애애애액!
반월 모양의 도기가 연속해서 발출되었다. 스치기만 해도 뼈와 살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런 강력한 공격이었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투랑이 도기에 휩쓸려 날아갔다.
지켜보던 이들이 뒤로 물러났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이들은 더 멀어졌다.
그 난리 속에서 백자강과 투왕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은 쳐다보지 않았다. 오직 상대의 두 눈만 응시했다. 도기가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들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고요했다. 마치 다른 공간에 서 있는 것처럼.
백자강은 상대가 독패자를 데려온 걸 알고 난 순간부터 무인으로 보지 않고 살수로 생각했다. 오직 이기는 것만이 중요한 자라면, 그에 걸맞게 상대해 줄 생각이다. 상대는 언제든 이 싸움에 뛰어들어 합공을 가할 자다.
‘어디 한번 움직여 봐라.’
이렇게 백자강이 강력하게 그를 견제해 주었기에 검무극은 두 사람의 싸움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의 싸움에 자신을 대입했다. 신월도가 되기도 했고, 괴악이 되기도 했다.
신월도가 익힌 무공은 도법이고 자신은 검법이지만, 괴악은 체술이고 자신은 권법이지만, 검무극은 그들의 움직임에 자신의 무공을 완벽하게 대입했다. 나라면 이렇게, 나였다면 또 이렇게.
사도칠대고수의 생사혈전을 지켜보며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검무극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패배로 이어지는, 그들은 정말이지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진 사람은 정말 억울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유일하게 다른 점은 두 사람이 싸움에 임한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괴악 쪽 이유가 더 특별하고 강했던 모양이다.
번쩍이는 도광 사이를 뚫고 괴악의 팔꿈치가 신월도의 어깨를 강타했다.
찰나의 휘청임.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었다면 괴악은 사도칠대고수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테니까.
퍼어억! 꽈직.
괴악이 자신의 등과 어깨로 신월도의 가슴을 강타했다. 뒤로 밀려나며 피를 토해내는 순간, 어느새 괴악은 마혈을 제압한 후 그의 목을 뒤에서 팔로 휘감았다.
“남기실 말이 있소?”
“기분 더럽소.”
“더럽게 살다 더럽게 가는 것이 우리네 사도 아니겠소?”
꽈득!
신월도의 목뼈가 직각으로 부러지며 그대로 즉사했다.
괴악이 천천히 돌아서 걸어왔다. 모두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공을 무리하게 사용하면서 괴악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사인이 달려 나가 그를 맞이했다.
“괜찮으십니까?”
괴악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싸움도 나쁘지 않았네.”
평생 자신을 위해서만 싸웠는데,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싸웠다는 의미였다.
“전 이 순간을 잊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비사인은 검무극이었고, 괴악은 극악소마였다.
절대회귀 370화
제370회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우선 운기부터 하십시오.”
비사인은 괴악이 걱정되었다. 그의 안색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게.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아무 일 없었네.”
자리에 앉기에 앞서 괴악은 신월도의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체 위로 광섬의 시체가 겹쳐 보였다. 염천쌍검 중 천수검의 모습도 보였다. 자신의 손으로 사도칠대고수들을 죽이는 날이 올 줄이야.
인생이 크게 바뀔 때는 자객의 비수 같다. 예고를 하는 법이 없으니까.
괴악은 사도맹의 여러 일을 해주면서도 언제나 한발 물러서 있었다. 여차하면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이었는데.
‘너무 깊이 들어왔군.’
하지만 앞서 비사인에게 말했듯 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이 참 어색하긴 했지만 말이다.
괴악은 한 사람에게 전음을 보냈다.
―원래 이런 기분인가?
그 대상은 검무극이었다. 앞뒤 다 자르고 불쑥 물어본 건데, 검무극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뭘 물었는지 알고 이렇게 대답하는 걸까?
―그럼 나중에는 어떻게 되나?
―후회하겠죠. 내가 왜 이렇게 말려들어서 이 고생을 하나? 어쩌면 그 어울리지 않는 감정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요.
검무극은 무슨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 알고 대답하고 있었다.
―대신 죽을 때는 다를 겁니다.
―어떻게?
―적어도 신월도처럼 기분 더럽다는 말을 남기진 않겠죠. 다른 말을 남기실 겁니다. 제가 끝까지 잘 들어드리겠습니다.
―자네보다 오래 살 거야. 사파의 질긴 목숨을 보여주지.
괴악이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검무극의 시선이 백자강을 향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백자강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환기한 후 검무극은 곧장 투왕을 쳐다보았다.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이제 제가 투왕을 맡을 테니, 잠시 제자분을 보십시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서는 안 될 상대였으니까.
그러면서 검무극이 전음을 보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그마치 맹주님을 상대로 꾸민 음모입니다.
그러면서 검무극은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
―저 뒤쪽 수풀에서 우리 아버지가 걸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위험을 상기시켜도 이렇게 기분 좋게 말할 수가 있다니!
백자강은 다시 검우진에게 강력한 질투심을 느꼈다.
‘자식 농사 대풍년 인정하오.’
풍년이 아니라 대풍년을 인정했다.
‘하지만 농사는 매년 짓는 것 아니겠소?’
희망은 있었다. 괴악이 비사인을 위해 나섰으니까. 저 까다로운 사람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제 진정한 조력자를 얻을 만큼의 그릇이 되었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검무극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털끝 하나도 다치시면 안 됩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앞서 했던 말을 또 반복해서 하는 걸 보니 정말 검무극은 그렇게 이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모양이다.
‘좋소, 올해는 그대의 대풍년을 즐기겠소.’
그래, 검우진과 제대로 자식 농사 붙어보려면.
―그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겠네.
이렇게 사도맹 쪽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투왕 쪽은 좋지 못했다.
독패자가 죽고 신월도마저 죽자 투랑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들이 아무리 싸움을 좋아해도 지는 싸움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그들이었는데, 지금은 그 눈빛이 통하지 않았다. 상대는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아도 이길까 말까 할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의 무인들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투왕을 향했다.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투랑들을 독려하거나 억지로 사기를 올리려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투랑들의 불안을 가라앉혔다.
투왕이 청살귀에게 정중히 말했다.
“선배가 나서서 정리해 주시오.”
투왕은 그의 실력을 믿었다. 다만 다혈질에 지랄 같은 성격은 걱정되었지만, 그도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청살귀가 앞으로 나서며 사도맹 무인들에게 말했다.
“그쪽에서도 한 명 지목했으니 이제 이쪽에서도 지목해도 되겠지? 설마 이 늙은이가 겁나서 사도맹의 정예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지는 않겠지? 이놈들아, 너희 맹주가 보고 있다!”
그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투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렇게만 하시오.
반면 백자강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자리에 일대일로 붙어서 청살귀를 상대할 사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놈은 검무극을 지명하진 않을 거다.
청살귀가 괴악에게 말했다.
“네가 먼저 나서는 게 어떤가? 사도칠대고수를 다 죽이고 사도제일고수라도 되려고 설쳐대는 너 말이다.”
신월도와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었는지 괴악에게 시비를 걸었다.
물론 호락호락한 괴악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있던 괴악이 눈을 떴다.
“그러는 너는 뭘 얻으려고 거기 서 있는 거냐?”
순간 청살귀의 표정이 꿈틀했다.
“본맹의 공적에 오른 자가 설마 선배 대접을 바란 거냐? 대체 얼마나 추잡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정사마 모두에게 공적이 된 거냐?”
청살귀가 살기를 흘리며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비사인이 괴악 앞을 지키듯 막아섰다.
“물러서시오.”
청살귀가 가소로운 눈빛을 보냈다.
“소맹주, 자네의 그 흉측한 얼굴이 무공 실력으로 바뀌면 모를까, 감히 내 앞을 막아서지 말게.”
청살귀는 일부러 비사인을 자극했다. 애초에 목표는 괴악이 아니라 비사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끈끈하다는 것을 알고 비사인을 끌어내기 위해 괴악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흥분한 비사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면, 그를 인질로 잡을 속셈이었다. 저기서 열 걸음만 쇄도해도, 매처럼 낚아채 버릴 생각이었다.
독패자와 신월도가 죽은 이 상황에서 판세를 바꿀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그를 인질로 두면 사도맹에서는 난전을 벌이지 못할 터, 한 놈씩 붙어서 제거하고 마지막에 투왕과 함께 사도맹주를 없앨 계획을 세운 것이다.
“아무도 소맹주인 자네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을 테니, 내가 말해주겠네. 자네 얼굴은 쳐다보기도 역겨워.”
얼굴이 역겹다는 말을 언제 들어봤겠는가? 비사인의 기분은 나빴다. 예전이라면 어쩌면 이 도발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화가 났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비사인은 달라졌다. 검무극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화나는 것은 나는 거고, 적어도 이 감정을 행동에 반영하지는 않겠지?
“이 얼굴이 멋있다고 해준 사람도 있소.”
“대체 누가?”
그러자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농담이었는데.”
비사인이 웃었다. 비사인은 이럴 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했다. 이 변화가 앞으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리라 확신했다.
또한 농담이란 말을 듣고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관계가 되어 준 검무극이 고마웠다. 그 고마운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언제나 섬세히 살펴준다. 너스레 다음에는 잊지 않고 이런 말을 꼭 해줬으니까.
“지금 이렇게 웃을 때는 좀 멋져 보이기도 하오.”
사도맹 무인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검무극은 한 번 더 비사인을 치켜세웠다.
“사람 얼굴 볼 줄 모르는 사람은 그저 당신의 흉터만 보겠지만, 얼굴 볼 줄 아는 사람은 흉터 아래 본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알아볼 거요.”
내면을 본다가 아니었다. 검무극은 이 말이 마법처럼 작용하기를 바랐다.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다시 보니 괜찮기도 해.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를.
“그리고 당신 웃음은 본교의 마존이신 권마님을 많이 닮았소. 아버지 다음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웃음이오.”
모두 앞에서 이렇게 말해주니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검무극을 만나고 자꾸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 오랜 열등감이 옅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 털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고맙고 기뻤다.
“그럼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야겠소.”
“당신 하기 나름 아니겠소?”
대화를 듣고 있던 청살귀는 왠지 말려든 기분이 들었다. 상대를 도발하기는커녕 두 사람의 관계를 좋게 도와준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어쨌든 비사인을 인질로 잡는 데는 실패했고.
청살귀의 시선이 원래 목표를 향했다.
“자네가 나오지.”
그가 지목한 상대는 극도병단의 단주 번천이었다.
“내가 상대해 주겠소.”
번천은 청살귀에게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이것이 번천이란 남자의 기세였다. 그랬기에 맹주 직속의 최정예인 극도병단을 이끄는 것이고.
사도맹에 수많은 각과 단이 있다. 하지만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를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최우선 동원되는 조직이 극도병단이다.
그는 그런 조직의 수장인 것이다. 그러니 상대가 청살귀가 아니라 투왕이 함께 나오더라도, 전혀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백자강은 이 싸움을 말려야 했다. 아무리 번천이라 해도 전대 고수인 청살귀의 내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말리면 저 청살귀는 온갖 모욕적인 말로 번천의 명예와 자존심을 조롱할 것이다. 수하들이 보고 있는 자리였기에 신중하게 대응해야 했다.
백자강은 자신도 모르게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 순간 그를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검무극은 또 한 번 맹주의 기대에 부응하기 시작했다.
검무극이 청살귀에게 정중히 말했다.
“두 분 싸우시기 전에 제가 우리 노고수님께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사실 못생긴 걸로 따지면 소맹주보단 노선배가 더 못생겼습니다.”
“뭐?”
설마 그런 말일 줄 몰랐기에 황당해하던 청살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싸우시다 죽으면 진실을 알지 못하고 돌아가실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번천에게 죽다니? 이 역시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 신경이 쓰이는 말은 이쪽이었다.
“지금 자네 말은 내가 소맹주보다 못생겼다는 뜻인가?”
“맞습니다.”
검무극은 알고 있었다. 청살귀가 지금은 이도 빠지고 주름도 많아서 볼품없지만, 젊어서는 미공자로 불렸다는 것을.
그는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비사인의 외모를 조롱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고.
“젊은 얼굴이라 생각하고 비교해도 확실히 못생기셨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미안해하자 청살귀는 더욱 화가 났다. 차라리 네가 더 못생겼다고 욕설을 퍼부으면 아무 의미 없는 비난이 될 텐데, 이렇게 정중히 사과까지 하자 기분이 정말 나빠졌다.
‘요놈 제법이구나!’
일부러 사람 긁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다. 정말 저 비사인보다 못생겼단 말은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심지어 자신이 역겹다고까지 한 얼굴이었다.
“믿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확인 한 번 해볼까요?”
검무극이 그곳에 있는 이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 그럼 누가 더 못생겼는지 확인해 봅시다. 여기 소맹주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들어주시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기에 모두 당황했다.
백자강도 놀랐고 심지어 투왕도 놀랐다. 거기 있는 사람 중 안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외모 대결을 펼친다고?
당연히 사도맹 쪽에서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고 생각해도 누가 감히 들겠는가? 반대로 갑작스러운 질문에 미처 손을 들지 못한 투랑들도 있었다.
“그럼 우리 노고수님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보시오!”
말을 마친 검무극이 먼저 손을 번쩍 들었고, 사도십삼랑도 따라서 손을 들었다. 뒤이어 극도병단의 무인들도 모두 손을 들었다.
그때 비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자강이 손을 든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사부가 자신을 위해 손을 들어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부님!’
손 한 번 들어준 것에 불과했는데, 너무 감격스러웠다.
그는 알지 못했다. 사부의 저 행동에는 이번에 자신을 의심한 미안함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검무극이 청살귀에게 말했다.
“이보십시오. 우리 노선배가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이놈아, 그건 너희들 숫자가 많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뭐가?”
“우리 선배께서도 나이 많다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배에게 못생겼다고 조롱하고, 그게 다 내공이 많아서 아닙니까?”
“!”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에 청살귀는 순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검무극의 진짜 의도는 이것이었다.
“앞서 괴 선배는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실력인 사람을 지목해서 붙었지요. 한데 노선배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공평한 걸 원하면 이쪽도 선배 나이만큼 나서야겠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
“선배 나이를 합친 숫자만큼 나설 테니, 붙어 보자는 말씀입니다. 아니면 선배께서 더 못생겼다는 것 당당히 인정하시든지요.”
“이런 미친놈이 그걸 말이라고!”
비사인을 도발하려고 꺼낸 외모 비하였는데, 역으로 검무극의 도발에 걸려들고 있었다.
“너희가 합공한다고 나를 이길 거로 생각하고 이깟 수작을 부리는 거냐?”
“그냥 못생겼다고 인정하시고 번 단주님과 겨루십시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냐?”
“아뇨, 제가 괜한 말을 꺼냈습니다. 하시던 대결이나 하십시오.”
“이놈이!”
“남자가 못생겼다고 인정하는 것이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결국 청살귀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좋다! 한꺼번에 다 죽여주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사인이 먼저 나섰다.
“누가 더 못생겼는지 승부를 봅시다.”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이 따라나섰다.
“친구가 가면 나도 갑니다! 아직 우리 쪽 나이가 한참 모자라니, 한 사람과 더 힘을 합치겠습니다.”
검무극이 일랑과 번천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일랑에게 말했다.
“번 단주께서 지목도 당하셨고, 이번에 누명까지 쓰셨으니, 양보하시지요.”
일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무극이 나서고, 번천이 나선다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차피 비사인에게 위기가 발생하면 약속이고 뭐고 그냥 개입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차라리 빠져 있는 게 낫다.
청살귀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욱하는 마음에 버럭 했더니, 눈앞에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여튼 이놈의 욱하는 성질 때문에 정사마 세 곳의 공적이 되었는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다.
상황을 수습한 것은 투왕이었다.
“나이가 맞지 않는군.”
투왕이 차분한 어조로 검무극에게 말했다.
“자네가 빠지고 일랑이 들어와야지.”
검무극은 투왕이 개입할 것을 예상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투왕은 절대 자신이 함께 싸우는 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일랑님.”
그의 자리에 일랑이 대신 섰다.
투왕의 마음에 이런 심상이 떠올랐다. 수많은 말과 너스레와 억지를 부린 검무극이 다시 피가 흐르는 전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그곳에 홀로 서서 한없이 깊은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 저 모습을 보지 못하니 청살귀도 속절없이 당하는 거다.
원래 번천만 서야 할 자리에 비사인과 일랑이 함께 섰다.
뒤로 물러선 검무극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여기까지입니다.’
절대회귀 371화
제371회 멋있게 싸우시오.
백자강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번천이 혼자 싸워야 할 자리에 이제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수하들 앞에서 번천의 명예와 자존심을 훼손하지 않은 채 합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가 있어 저 청살귀를 상대로 이런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는가?
마교 소교주에게 현혹당했다는 말에 내심 코웃음을 쳤던 자신이었다. 이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사람에게 어찌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겠냐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자를 위해 손을 들 기회를 줘서 고마웠다. 자신이 손을 들었을 때 비사인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 거친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런 제자를 한때나마 의심했다는 것이 너무 미안할 정도로.
그래서 검무극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조차 현혹하는 사람임을 알았기에 더 믿지 않을 거다. 아흔아홉 번 진실 끝에 단 한 번의 거짓말로 사도맹이 멸망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고마움은 전해야겠지.
백자강이 검무극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마교 소교주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었다. 나이를 떠나, 신분을 떠나, 백자강이라는 무인이 검무극이라는 무인에게 하는 인사였다. 우리의 명예를, 제자에 대한 믿음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검무극 역시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정중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청살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애초에 검무극이 작정하고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자신을 긁은 것은 알았지만, 처음부터 맹주의 부탁을 받고 일을 진행했을 줄이야.
마음 같아선 검무극에게 ‘더러운 혓바닥을 놀려서’로 시작하는 욕설을 한바탕 내뱉고 싶었지만 누워서 침 뱉기가 될 게 뻔했다.
괜한 불똥이 앞에 선 세 사람에게 튀었다.
“셋이 모이면 결과가 달라질 줄 알았느냐? 그냥 고상하게 죽을 것, 서로 뒤엉켜서 볼썽사납게 죽을 뿐이다.”
청살귀는 어차피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싸움은 어느 한쪽이 모두 죽어야 끝나는 싸움. 순서의 문제고 과정의 차이일 뿐이다.
“누굴 먼저 죽여줄까?”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은밀히 전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비사인이 중심이 되어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가운데서 제가 주도할 테니 두 분은 양쪽에서 지원해 주십시오. 우리는 서로 두 걸음 이상 떨어지면 안 됩니다. 초반 싸움에서 틀림없이 우릴 가지고 놀려 할 테니,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됩니다.
비사인은 반드시 청살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두 사람에게 표를 내진 않았지만, 솔직히 두렵고 떨렸다. 상대는 자신들보다 강한 고수. 게다가 사도맹주와 사도맹 무인들이 지켜보는 자리다.
여러 차례 실전을 겪었지만, 오늘처럼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를 긴장하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하면 일랑과 번 단주가 죽는다.’
이런 걱정이 그를 경직되게 하던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두 사람은 신경 쓰지 마시오.
정말 비사인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거요!’라고 소리칠 뻔했다.
―지키는 싸움을 하면 질 거요. 그들이 죽든 말든, 일대일로 싸운다는 생각으로 싸우시오. 그래야 이길 수 있소.
―!
본능적으로 검무극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을 믿어야 한다. 어설프게 그들을 지켜주려 하다간, 셋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멋있게 싸우시오.
마지막에 덧붙여진 검무극의 조언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란 것도 아니고, 신중하게 싸우라는 조언도 아니었다.
멋있게.
단순히 겉멋을 부리란 뜻이 아님을 잘 안다. 오히려 이 어울리지 않는 말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한 이정표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멋있게.’
비사인이 검을 뽑아 들자 번천과 일랑도 함께 검을 뽑았다.
그들을 응원하는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의 무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에 질세라 투랑들 역시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함성과 함께 선공을 취한 사람은 비사인이었다.
그는 아직 제일식밖에 익히지 못한 사도맹주의 무공이 아닌 대성을 이룬 자신의 무공인 추혼사검을 발휘했다.
추혼사검 제일검 절혼이 발휘되자 비사인의 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청살귀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날아든 검기를 장력을 발출해서 맞받아쳤다.
쾅!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자신의 내공을 자랑하듯 청살귀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공격을 막아냈다.
그와 동시에 번천과 일랑이 좌우에서 검기를 날렸다.
이번에도 청살귀는 제자리에서 좌우로 쌍장을 내지르며 그들의 공격을 해소했다.
연속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어났다.
그렇게 상대를 조롱하며 힘자랑이나 할 줄 알았는데, 흙먼지와 함께 청살귀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쇄애애액!
어느새 청살귀는 비사인의 뒤에서 일장을 내리치고 있었다.
비사인이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했지만, 이어진 일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비사인이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충격에 대비하던 바로 그때!
어느새 쇄도한 일랑이 그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일랑의 검술은 천양칠수(天陽七手).
일곱 초식 중 가장 빠른 수법인 제사수 쾌양식(快陽式)이 발휘되었다.
비사인이 위험에 처하면 대신 몸을 희생할 각오까지 한 그였기에, 일랑의 공격은 필사적이었다.
청살귀는 비사인을 포기하고 일랑의 공격을 피했다. 어차피 유리한 싸움인데 굳이 부상을 당하면서 무리한 공격을 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몸을 피한 그에게 이번에는 번천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쏟아지듯 날아드는 번천의 검은 빨랐다. 그의 무공은 경혼검법(驚魂劍法)으로 쾌와 극음을 바탕으로 한 검술이었다.
쉭쉭쉭쉭쉭!
검 끝에 항상 청살귀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검은 그의 몸을 꿰뚫지 못했다.
청살귀는 저 늙은 몸으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 움직임은 지금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추혼사검 제이검 진혼이 펼쳐지며 다섯 줄기의 검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휘어져 날아가 청살귀를 덮쳤다.
청살귀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피했고, 검기가 방향을 틀어 그를 뒤쫓았다. 마치 여의주를 뒤쫓는 용들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번 승천에서 여의주를 얻을 수는 없었다.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검기를 피한 청살귀가 빛살처럼 빠르게 쏘아져 내려왔다.
이번에 그가 노린 사람은 일랑이었다.
청살귀는 아래로 날아가며 연속해서 장력을 발출했다.
꽝! 꽈아앙!
일랑이 서 있던 공간이 터져 나갔고 땅거죽이 뒤집혔다.
몸을 날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일랑 앞으로 피어오른 흙먼지가 갈라지며 청살귀가 쇄도해왔다.
새하얀 빛을 띠고 날아드는 손바닥!
극음의 기운이 가득한 백골투심장(白骨透心掌)이었다.
적중당하면 큰 부상을 입을 공격.
‘늦었다.’
다치면 오히려 싸움에 짐이 될 터, 일랑은 동귀어진의 마음으로 검을 내질렀다. 목숨을 내주는 대신 팔 하나라도 가져가려는 거였다.
‘죄송합니다, 소맹주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때, 백골투심장이 방향을 틀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콰콰콰콰콱!
청살귀가 있던 곳을 검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추혼사검 제삼검 철혼이었다.
청살귀는 일랑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그도 크게 상할 상황이기에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는 비사인이 일랑을 구한 것이다.
일랑은 고맙다는 말을 전할 여유도 없었다.
청살귀는 이번에는 번천을 공격하고 있었다.
콰아앙!
내공에서 밀린 번천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나갔다. 그에 일랑이 날아가 그를 받아 내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비로소 밀려나던 두 사람이 멈춰 섰다.
비사인은 추가 공격을 하지 못하게 청살귀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 역시 공격에 합세했다. 그들은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청살귀를 상대로 내공을 아끼며 싸운다는 것은 오만이었다. 다 쏟아붓고 내공이 고갈되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확실히 청살귀는 자신들보다 강했다. 그가 내뻗는 손짓은 무조건 죽음으로 이어지는 필살의 연속이었다.
그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비사인은 오히려 희망을 품었다.
‘할만하다!’
우려했던 것보다 손발이 잘 맞았다.
맞추지 않으니까 더 잘 맞았다.
애초에 합을 맞추려고 노력했다면 훨씬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으리라. 혹여 같은 편의 절초를 방해하게 될까 봐, 함부로 끼어들기가 어려웠을 테고. 결국 합공이 아니라 한 명씩 돌아가면서 싸우는 형태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비사인은 일대일을 한다는 마음으로, 설령 자신의 검기가 일랑과 번천을 다치게 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싸우고 있었다.
조금 전 일랑을 구한 공격도 검무극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일랑을 구하기 위한 공격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구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청살귀를 죽이기 위한 공격이었다. 결과는 같았지만, 비사인은 분명 다른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가능한 것은 일랑과 번천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싸워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검무극의 말이 옳았다. 두 사람을 믿고 오직 이 싸움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최선이다.
어느새 청살귀의 얼굴에선 여유가 사라졌다.
생각보다 싸움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목숨을 내놓고 싸우고 있다는 점.
번천은 극도병단 단주의 명예를 위해, 일랑은 비사인을 지키기 위해. 비사인은 맹주와 사도맹을 위해.
싸움이 잘 풀리지 않자, 청살귀는 엉뚱한 곳에 분풀이했다.
비사인을 향해 날릴 것 같았던 장력이 싸움을 지켜보던 극도병단의 무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작정한 공격이기에 그들이 피하기에는 너무 빠르고 강맹한 공격이었다. 그들의 죽음이 비사인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것이고, 무엇보다 그래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앞쪽에 서 있던 이들이 장력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피해!”
어차피 못 피한다면 최대한 장력을 발출해 뒤쪽 동료들이라도 구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꽈아앙!
폭음이 터져 나오고 흙먼지가 일었다.
앞에 서 있던 극도병단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장력에 휩쓸렸어야 할 자신들이 무사했으니까.
공격을 해소한 사람은 백자강이었다.
허공을 향해 손을 내뻗은 그의 시선은 여전히 투왕을 향하고 있었다.
백자강이 천천히 손을 거둬들였다.
극도병단 무인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맹주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투왕이 그 기회를 틈타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검무극이 기운을 일으켜 경고했다.
네가 가면 나도 간다.
투왕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검무극을 없애지 못하면 사도맹주 자리에 오른다 해도, 큰 화근이 되리라 확신했다. 검무극이 제대로 준비해서 돌아온다면, 과연 그걸 막을 수 있을까?
방금 청살귀의 공격이 신호탄이 되었다. 극도병단의 무인들이 투랑들에게 달려들었다.
“죽여!”
양쪽 무인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싸움을 지켜보며 투기가 극에 달했던 그들이었다. 사도십삼랑 역시 싸움에 합류했다.
백자강과 투왕은 그들의 싸움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싸워야 했으니까.
사도십삼랑까지 개입했기에 수적으로나 실력 면에서도 사도맹이 유리한 상황.
그럼에도 투왕은 그냥 지켜만 보았다. 물론 그가 개입하는 순간 사도맹주와 검무극이 뛰어들 것이고, 난전이 펼쳐질 것이다. 뛰어들고 싶어도 쉽지 않은 상황.
그러는 사이 비사인의 싸움은 극에 다다르고 있었다.
쇄애애애액!
비사인을 향해 파고드는 청살귀의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백골투심장과 함께 그의 독문무공인 혈음철조수(血陰鐵爪手)를 쓰려는 것이다. 앞서 두 번이나 그 공격에 죽을 뻔했다.
스치면 그야말로 살과 뼈가 박살이 나는 강력한 혈음철조수가 비사인의 가슴을 뜯어 버리려 날아들었다.
이 순간 비사인은 한 가지 위험한 선택을 했다.
청살귀의 손가락이 미처 피하지 못한 비사인의 가슴을 긁었다.
콰뜨뜨드드득!
그의 가슴이 찢겨 나가던 바로 그 순간!
‘됐다!’
싸움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렇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청살귀가 번천을 향해 돌아서던 그 순간!
가슴이 뜯기고 찢어져 죽었어야 할 비사인의 검이 번쩍였다.
쉬이이이잉!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추혼사검 제사검 광혼이 발휘되었다.
푸아악!
미처 광혼을 피하지 못하고 일격을 허용한 청살귀가 어깨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틀거리던 그때.
좌측에서는 경혼검법의 마지막 절초인 창세경혼(創世驚魂)이 날아들었고, 우측에서는 천양칠수의 마지막 절초인 대양식(大陽式)이 날아들었다.
푸욱!
창세경혼을 피했지만, 대양식은 피하지 못했다.
다시 비틀거리던 그 순간.
푸우우욱!
비사인의 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검에 꽂힌 채 울컥 피를 토해 낸 청살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분명 넌 혈음철조수에 당했는데?”
그때 청살귀의 눈에 비사인의 가슴이 보였다. 두 개의 호신갑이 뜯겨 나가 있었다. 겹쳐 입은 호신갑은 뜯어냈지만, 비사인의 몸까지 파고들지는 못했다. 목숨을 건 모험이 통한 것이다.
비사인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가까이서 봐도 내가 더 잘생겼다.”
“……젠장!”
푹! 푸욱!
뒤이어 일랑과 번천의 검이 날아와 그의 목과 심장에 박혔다.
청살귀는 그대로 절명해서 꼬꾸라졌다.
세 사람이 동시에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합을 맞췄음에도 합공으로 청살귀를 죽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생사를 함께 한 동지들인데.
비사인이 고개를 돌려 먼저 사도맹주를 쳐다보았다.
백자강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부가 자신을 향해 저렇게 활짝 웃어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부와의 관계도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비사인의 시선이 이번에는 검무극을 향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길 수 있던 건 싸움 전 검무극이 보내준 전음 덕분이었다. 지키는 싸움이 아니라, 쏟아붓는 싸움을 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합공이 아니라 일대일이라 생각하고 싸웠기에 이겼다.
‘목숨 빚이 계속 쌓이고 있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환히 웃으며 나를 보고 있구나.’
그리고 날아든 한마디 검무극의 전음.
―당신 싸움 멋있었소.
마치 그 전음에 반응이라도 하듯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의 무인들 모두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의 싸움도 이미 끝나 있었다. 사도십삼랑까지 함께한 싸움이기에 결과에 이변은 없었다. 투랑들은 모두 죽었고 그에 반해 사도맹 쪽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이제 그곳에는 오직 투왕과 부군사 혁사군만이 남았다. 혁사군은 얼어붙은 채 말없이 서 있었고, 투왕은 담담했다.
모두의 시선이 투왕에게 집중되었다.
검무극이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애초에 당신은 이들이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군.”
같은 편의 죽음에 그는 너무 담담했으니까.
그리고 뭔가 다른 수가 남아 있으리라 확신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고 하기에는, 그 상대가 사도맹주였으니까.
“당신, 대체 무슨 패를 숨겨둔 거지?”
투왕이 대답하지 않자 드디어 백자강이 나섰다.
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백자강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의 작은 눈에서는 검날보다 더 서슬 퍼런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대답은 내 검을 통해 듣도록 하지.”
절대회귀 372화
제372회 주먹이 묻고 검이 대답하고.
드디어 사도맹의 운명을 바꿀 결전의 순간이 되었다.
그냥 서 있을 때의 백자강과 검을 뽑은 백자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주위 공기가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백자강은 공기의 흐름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번천과 일랑은 수하들을 멀찌감치 뒤로 물렸다. 어차피 맹주와 투왕의 싸움에는 개입해서도 안 되고, 그럴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비사인 역시 검무극과 나란히 서서 말없이 맹주와 투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부가 누군가와 생사혈전(生死血戰)을 벌이는 걸 처음 지켜보는 자리였다. 당연히 사부가 이길 거라 믿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떨리는 건 맹주의 실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도맹주가 되었을 때, 자신도 이런 날이 올 것이다.
과연 자신은 어떤 사람으로 저기에 서 있을까?
검무극은 천마호신공이 저절로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장악된 공간에 서 있다는 걸 대성에 이른 천마호신공이 경고한 것이다. 이제 마음과 무공이 하나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투왕을 향했다. 자신이 공기의 변화를 느꼈다면 투왕도 느꼈을 터.
자, 어떻게 할 것이냐?
투왕이 천천히 손을 들더니.
파앙!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힘차게 쳤다. 처음 이곳에서 사도맹 무인들과 대립했을 때 저렇게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었다.
두우웅!
투왕의 손에서 뻗어 나간 파동이 백자강이 장악한 공기의 흐름을 흔들었다.
하지만 공간이 깨어지진 않았다.
파아앙!
더 큰 소리와 함께 주위가 진동했다. 어떻게든 틈새를 파고들어 주위를 새롭게 환기하려 했지만, 백자강이 만든 공간은 깨어지지 않았다. 공간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숨도 내 허락을 받고 쉬어라.
그럼에도 투왕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상대의 기세에 맞설 자신만의 비기가 있었으니까. 그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는 백자강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흑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오직 싸울 대상인 백자강만이 원래 색으로 보이고, 나머지는 수묵화처럼 단색으로 변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백 속에서 누군가 검을 뽑거나 내공을 쓰면 그 부분만 붉게 표가 났다. 그랬기에 수백 명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도 누가 가장 위험한 상대인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 훈련을 통해 만들어낸 자신만의 비기였다.
하지만 오늘 그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한 사람에게서 색을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싸울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색이 빠지지 않은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아무리 그의 존재감을 죽이려 해도, 검무극의 색은 없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존재감은 자신의 집중력을 이겨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투왕이 검무극을 바라보자, 사도맹 무인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모두 검무극을 향했다. 그들의 눈빛에 호의가 흘렀다. 오늘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었으니까.
투왕이 수하들의 시체를 둘러본 후 담담히 말했다.
“그대란 변수가 이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들이 죽은 것이 어찌 나 때문이겠소? 사도맹을 집어삼킬 음모를 꾸민 당신 때문이지. 당신과 손을 잡은 그들의 욕심 때문이고. 사도맹과 동료들을 위해 당신들과 목숨 걸고 싸운 여기 이분들의 의지 때문이지.”
검무극은 투왕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차피 아까 죽은 수하들, 사도맹주가 되면 모두 살인멸구할 생각 아니었소?”
그는 사맹관 교관이 사도맹주의 자리에 오르는 영웅담을 계획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과정에 동원되었던 이들을 살려둘 리 없다.
“그래서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거지.”
투왕은 부정하지 못했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사도맹주가 되는 순간,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다 채울 작정이었으니까.
“그러니 괜한 남 탓 말고, 맹주님 손에 잘 가시오.”
검무극이 백자강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치, 오직 맹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듯 정중히 부탁했다.
“이자는 오직 맹주님만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검무극은 최고의 존경과 예의를 갖추었다. 백자강은 문득 이전에 검무극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 명예는 멋짐에 있지 않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내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무사히 돌아와서 그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백자강이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그래, 자신도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검무극이 말을 마치는 순간 투왕은 보았다. 검무극의 몸에서 색이 빠져나가는 것을. 이 싸움을 완전히 사도맹주에게 맡기고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는 모습을.
‘정말 끝내주는구나!’
투왕이 몸을 기지개 켜듯 쭉 뻗었다. 기분 좋았다. 이런 상대들이 있는 한, 미친 듯이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자들을 죽일 때 만끽할 그 큰 희열을 생각하면 어떤 짓을 저질러서라도 이기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팡! 파앙! 파아앙!
손바닥과 주먹이 부딪치는 소리가 투왕의 기세를 올리는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이 싸움에서 백자강은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다.
상대를 무인으로 보지 않고 살수로 보았다. 무슨 짓이라도 할 자이니, 절대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백자강의 신형이 번쩍하는 순간, 투왕 앞에서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쉬이이이익!
투왕의 목을 노린 필살의 공격이었다.
따앙!
투왕이 검날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며 백자강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튕겨 나갔던 백자강의 검이 용수철처럼 돌아와 반원을 그리며 올려 쳤다.
그렇게 두 사람의 공방이 직선과 곡선으로 교차했다.
첫 공방이 끝났을 때, 투왕은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 가볍게 내려섰다.
툭.
투왕의 옷 앞섬이 갈라졌다.
백자강의 검이 더욱 빨랐고, 투왕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몸을 빼낸 것이다.
잘린 옷자락을 내려다보며 투왕의 얼굴에 희열이 스쳤다.
“정말 강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그의 입이 있던 곳에 검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쉬이이익!
그 빠른 공격을 피하며 투왕의 주먹이 백자강의 안면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공격도 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파앙!
백자강의 얼굴이 있던 공간이 터져나갔다. 공기에 형체가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든 산산조각이 났을 그런 강력한 공격이었다.
투왕의 주먹을 피한 백자강의 검이 사선으로 베어갔다. 피할 수 있는 사각을 최소화한 공격이었음에도 투왕은 공격을 피했고 반격까지 더했다.
큰 내공이 드는 독문무공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목숨이 오가는 무시무시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검에, 일권에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서로를 향해 빛처럼 쏘아졌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수십 가닥의 선만 보였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그 한 선이 몸과 닿는 순간, 순식간에 승패가 결정될 그런 죽음의 선이었다.
무인으로서의 기본기를 알 수 있는 공방이기도 했다. 화려한 초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찌르고 베고 피하고 주먹을 날리고, 검과 주먹으로 하는 대화였다. 주먹이 물었고, 검이 대답했다. 그 소리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빗소리 같기도 했다.
퍼억!
그러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떨어졌다.
“후우, 후우.”
투왕의 숨소리가 대번에 거칠어졌다. 조금 전 교환했던 공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반면 백자강의 숨소리는 안정적이었다. 누구의 기본기가 더 뛰어난지 이 숨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백자강은 투왕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번쩍하는 순간 쇄도한 백자강의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 위험천만한 공격을 투왕은 손등으로 쳐내며 막았다.
슈칵! 슈칵!
백자강의 검이 공간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다가는 생명이 도려져 나가는 섬뜩한 공격.
투왕의 첫 뒷걸음질이 나왔다.
그렇게 밀리는가 싶던 그 순간, 투왕의 주먹이 유난히 가볍게 훅, 날아들었다.
원래라면 검으로 가볍게 쳐냈을 텐데. 그럴만한 가벼운 공격이었는데.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백자강은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주먹에서 멀어졌다.
후우우우우웅!
거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콰콰콰콰쾅!
뒤쪽의 땅과 풀이 다 휩쓸리면서 일직선으로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 저 멀리 있던 나무와 바위까지 모두 사라진 엄청난 공격이었다.
가벼운 듯 보이는 그 한 수에 권의 정수가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꽤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지켜보던 비사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라면 저 가벼운 주먹에 담긴 위력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앞서 싸웠던 청살귀와는 차원이 다른 실력이었다.
투왕이 수하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무정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무공은 고강했다.
백자강은 상대의 무공을 알아보았다.
“연환풍운권(連環風雲拳)!”
과거 전장의 신이라 불렸던 막여의 무공.
“역시! 알아보시는군.”
“연환풍운권이라면 인정할 수 있지.”
백자강의 눈에서 강렬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에 맞서 투왕이 제자리에서 진각을 내리쳤다.
꽝!
쩌어어어어어억!
땅바닥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갈라졌다.
검무극과 비사인 사이에도 한 줄기 선이 쩌억 갈라지며 지나갔다.
하필이면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서 비사인은 기분이 찝찝했다. 뭔가 불길한 미래를 예시하는 건가?
그때 검무극이 훌쩍 갈라진 선을 뛰어넘어서 자신 옆으로 섰다. 그리고는 말없이 싸움을 응시했다.
‘아! 이거지.’
그냥 이렇게 넘어오면 되는 걸,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대체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제는 대답할 수 있겠다. 먼저 선을 뛰어넘어 오는 사람이라고.
언제나 아쉬운 건 이쪽이었는데, 저렇게 자신이 먼저 훌쩍 뛰어와 준다. 폴짝 넘어와 친구 하자고 말해준다. 내가 가야 하나, 오라고 해야 하나 자존심을 세우지도 않는다.
비사인은 검무극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싸움에 빠져든 모습은 지금껏 봤던 모습 중에 가장 진지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바로 무인 검무극의 모습.
‘……설령 날 죽이기 위해 접근한 거라 해도.’
비사인의 시선도 싸움을 향했다. 그 사이 수십 수를 놓쳤지만 그래도 괜찮다. 대수롭지 않게 선을 훌쩍 넘어오는 이 모습 하나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자신을 성장시킬 테니까.
지금 저 솟구쳐 오르는 도약보다, 조금 전 폴짝이 자신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백자강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투왕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백자강이 뒤이어 몸을 솟구쳤다.
두 사람은 무서운 속도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직 신안술을 익힌 검무극만이 저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았다.
잠시 후, 누군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더니.
꽝!
땅바닥에 처박혔다.
주위가 움푹 파일 정도의 충격으로 떨어진 사람은 투왕이었다.
하늘을 향해 누워 있던 그가 곧장 옆으로 몸을 뒹굴었다.
촤아아악.
한줄기 검기가 그가 누워 있던 자리를 잘라냈다. 가만히 있었다면 그의 몸이 양단되었을 만큼, 검기가 만들어낸 선은 반듯하면서도 깊었다.
뒤이어 떨어져 내린 백자강은 휘몰아치듯 몰아붙였다.
투왕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백자강은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만약 천마와 싸웠다면 여유롭게 이야기도 나누고, 싸우다 술도 마시고, 또 싸우고. 그렇게 칠주야를 싸웠을 거다.
하지만 백자강은 투왕에게 그럴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검과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너무 빨라서 소리가 움직임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투왕은 위험천만한 수를 구사했다. 생사결에서 모험은 언제나 불리한 쪽에서 하는 법.
쉬이이익.
꽈악!
그가 날아든 검날을 맨손으로 잡았다. 감히 사도맹주의 검날을 맨손으로 잡는 시도를 할 줄은 지켜보던 이들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검날을 잡음과 동시에 그의 팔꿈치가 백자강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파파팍!
백자강이 벼락처럼 빠르게 검날을 틀어서 당기고 밀었음에도, 손바닥은 잘리지 않았다.
쇄애애애애액.
팔꿈치가 백자강을 스치고 지나갔다. 회심의 한 수였지만 백자강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두 사람의 몸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순간, 투왕의 박치기가 백자강의 얼굴을 노렸다. 검을 손으로 잡는 것만큼이나 예상치 못했던 한 수!
퍼억!
어느새 투왕의 손에서 빠져나온 백자강의 검 손잡이가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동시에 벼락처럼 허공을 가른 백자강의 일검.
서걱.
끝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동작이 멈췄다. 사도맹주를 대상으로 검을 손으로 잡고, 박치기까지 시도한 무모함의 대가였다.
투왕의 가슴이 길게 잘려 나가 있었다.
하지만 피는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잘려 나간 것은 옷이었다.
백자강의 시선이 이번에는 투왕의 손을 바라보았다. 가슴을 베기 전에 분명 손바닥을 베었는데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래도 고통이 느껴지는지 투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매만졌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겉옷을 벗었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보의.
“불멸신갑이오. 어떤 검으로도 자를 수 없는 최고의 보의요.”
그리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투신이오. 역시 최고라 할 수 있는 권갑이오. 당신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 주시오.”
검무극이 예상한 대로 보의를 입고 나왔다. 그것도 불멸신갑과 투신을. 무인에 비유하자면 교주와 맹주의 자리에 있는 최고의 보의였다.
“괜찮네. 나를 상대하는데 그쯤은 걸쳐야겠지. 다만 그 보의를 보니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네.”
백자강이 새로운 기도를 뿜어냈다.
한차례 크게 진동한 후 그의 검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싸운 이래 처음으로 검이 검강을 머금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와 다른 기운이 백자강의 몸 주위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작아서 더 무서운, 백자강이 그 작은 눈으로 말했다.
“그 보의, 정말 안 잘려야 할 거야.”
절대회귀 373화
제373회 뜨겁고 차갑고 외로운.
불멸신갑은 지금까지 잘리지 않는 것으로 그 이름을 지켜왔다.
하지만 사도맹주의 검에 안 잘린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투왕은 잠시나마 마음에 떠오른 의구심을 애써 지워 버렸다.
“불멸이 달리 불멸이겠소?”
그러자 백자강이 되물었다.
“이 세상에 불멸이 있다고 믿나? 불멸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음만 있겠지.”
사랑, 꿈, 희망.
백자강은 절대 그런 것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이렇게 냉철한 당신이 소교주는 왜 믿는 거요?”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투왕이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에 의혹을 심어 마음을 흔들려 한다는 것을. 자신과 투왕의 싸움에서는 티끌만큼의 집중력도 흐트러져선 안 되었으니까.
“나는 소교주를 믿지 않네. 소교주를 믿는 건 내 제자지.”
“당신 제자는 마교 소교주에게 속고 있소.”
투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흑백으로 보였는데, 그의 두 눈만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흑백의 몸과 붉은 눈, 그랬기에 검무극은 악귀처럼 보였다.
“저 젊은 소교주의 눈빛을 보시오. 저 눈에 깃든 야욕과 열망이 보이시오?”
다른 말이었다면 무시했겠지만, 검무극을 언급했기에 백자강은 투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자네 눈에는 뜨거운 열기가 보이나 보군. 내 눈에는 얼어붙은 설원의 한기만 느껴지는데.”
투왕은 뜨거움을 보고 있었고 사도맹주는 차가움을 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그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잘들 보셨습니다. 제가 왼쪽 눈은 뜨겁고, 오른쪽 눈은 차갑습니다.”
그러면서 옆에 선 비사인을 쳐다보며 웃었다. 이 긴박함 속에서의 여유는 사도맹주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사인은 솔직히 검무극에게서 열기나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실없는 소릴 할까, 하는 저 장난기 가득한 눈빛뿐.
하지만 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물었다.
“설마 당신 눈에도 뭐가 보이시오?”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히 대답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전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외로워 보이오.”
처음에는 못 느꼈는데, 이제는 느낀다. 검무극이 외로운 사람이란 것을. 그건 아마도 자신 역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역시 친구가 제일 잘 보는구려. 오죽 외로우면 마교 소교주가 사도맹 소맹주에게 와서 친구 하자고 할까?”
“당신의 외로움이 이상한 결말로 이어지진 않았으면 좋겠소.”
“우리 결말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낄낄거리며 웃고 노는 거요.”
두 사람의 대화에 투왕이 끼어들며 차갑게 말했다.
“그것이 뜨겁든 차갑든, 내 눈에는 욕심이 보인다. 그대 욕심이 내 욕심보다 작다고 자신할 수 있나?”
“적어도 당신처럼 남의 걸 뺏고자 하는 욕심은 아니오. 그냥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 해둡시다.”
하지만 그 용무가 내 인생을 집어삼키게 두진 않을 것이다. 내가 뜨겁게도 살고, 차갑게도 사는 건 오직 화무기를 죽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해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다.
이 싸움이 끝나면 투왕은 깨끗하게 잊고 돌아가서 내 사람들을 만날 거다. 안절부절못하며 또 뭐가 올까, 누가 나올까 걱정하고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화무기를 죽이고 나서도 소교주의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이고, 천마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또 무슨 일들이 있을지, 천마가 되고 난 후에도 또 어떤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한 악인에게 모든 걸 다 쏟아붓는 인생은 회귀 전 한 번이면 족하다.
마존과 밥을 먹다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 후에 화무기를 죽이고 올 것이다. 아버지와 사냥하다 잠깐 호랑이 대신 죽이러 갈 것이다.
어딜 다녀왔느냐고 묻는다면, 잠깐 볼일 좀 보고 왔다고 웃으며 대답해야지.
그게 이번 생의 내 인생이 되기를. 그런 인생을 만들기 위해서 죽을 만큼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검무극의 마음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그 마음은 그저 뜨겁고 차갑고 외로운 느낌으로만 전해졌을 뿐.
“그 개인적인 용무가 당신 제자를 현혹하는 거면 어쩔 거요?”
마지막까지 투왕은 백자강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다.
백자강이 힐끗 비사인을 쳐다보던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애액!
투왕의 손바닥에서 기습적으로 장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백자강은 몸을 틀어서 날아든 공격을 피했다. 얼굴 앞으로 장력이 스쳐 지나갔음에도 백자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백자강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그 보의 아래에 있는 자네의 욕심뿐일 거네.”
백자강은 검강이 흐르는 검을 투왕에게 겨누었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네. 내가 직접 그 보의를 찢고,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겠네.”
말이 끝나는 순간, 푸르른 검강이 허공에 뿌려지며 투왕을 향해 날아갔다.
맞받아치는 투왕의 양 주먹에 붉은 강기가 서렸다. 투왕의 주먹에서도 엄청난 강기가 발출되었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는 폭음과 함께 두 개의 서로 다른 색이 뒤섞였다. 허공을 수놓으며 화려하게 번지는 붉고 푸른 강기는 마치 화공의 붓끝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처럼 느껴졌다.
푸아아아앙!
일차 충돌에서 갈라진 푸른 빛무리들이 수십 가닥 뻗어 나왔다. 파괴되어 비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투왕을 향해 날아갔다.
생각지 못한 공격이기에 투왕은 미처 피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불멸이 있으니 버틸 수 있다!’
수십 가닥으로 분리되어 날아가던 강기가 투왕 앞에서 하나로 합쳐지면서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푸른 강기가 만들어낸 것은 늑대였다.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 늑대 형상이 사도맹 맹주전의 그 늑대와 똑같다는 것을. 사도를 지키는 외로운 늑대, 청랑이었다.
패왕진천검법 제사식 청랑식(靑狼式).
귀를 찢는 늑대울음과 함께 거대한 늑대가 그대로 투왕을 집어삼켰다.
그렇게 강기가 투왕을 강타하던 그 순간 사도맹 무인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청랑의 울음과 함께 주위로 퍼져나온 기도에 그들은 온몸을 전율했다. 온몸의 털이 일제히 곤두섰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열망을 느꼈다. 실전에서 처음 본 맹주의 강력한 사기였다.
퍼퍼퍼퍼퍽!
투왕에게서 뭔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가라앉는 흙먼지 너머로 투왕의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 두 손을 교차해 채 강기를 막은 투왕의 입에선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뚜두두둑.
불멸신갑이 잘려 나가며 투왕의 몸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불멸신갑과 투왕의 호신강기를 모두 뚫어버린 백자강의 한 수였다.
투왕은 놀란 눈으로 잘린 불멸신갑을 내려다보았다. 사도맹주가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에 불멸이 있다고 믿나?
불멸신갑이 이 지경이었으니 팔목과 정강이를 보호하는 쌍혼은 아예 너덜너덜 찢겨나간 상태였다.
물론, 그나마 그것들이 있기에 투왕은 서 있을 수 있었다.
투왕이 이를 악물었다.
한 수 정도 밀린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명백한 두 수였고, 아직 숨겨둔 수를 생각하면 세 수, 네 수까지 밀릴 수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구나.’
검무극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도맹주가 무림일통의 꿈을 꾸는 이유기도 했다.
아버지와 사도맹주, 그리고 역대 무림맹주 중 가장 패도적이라는 진패천까지.
한 시대에 패웅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모였다. 어쩌면 화무기의 탄생은 이 세 사람이 끌어낸 필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자강이 불멸신갑 뒤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자네의 욕심이 눈물을 흘리고 있군.”
후회인가, 두려움인가를 묻는 그 작은 눈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에 투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자강이 투왕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강기가 충돌하면서 폭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호신갑들이 손상을 입자, 투왕에게 더욱 큰 충격이 가해졌다.
하지만 투왕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그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투왕이 쇄도해서 주먹을 날렸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팍!
연환풍운권 제삼식 섬전난무(閃電亂舞).
빛처럼 빠른 수십 개의 주먹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 주먹을 백자강은 모두 피해내고 있었다. 너무나 빨라서 지켜보는 이들은 어떤 주먹을 어떻게 피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오직 검무극만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보았다.
“아!”
절로 감탄이 나왔다. 투왕의 한 수는 정말 대단했다. 적이 아니었다면 찬사를 보낼 수였다.
그리고 그 찬사를 모두 피해내는 사도맹주에게는 경외를 느꼈다.
투왕의 공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섬권난무와 이어지는 연환초식이 발휘되었다.
연환풍운권 제사식 적쇄금령(赤鎖禁令).
섬전난무의 마지막 주먹이 쫙 펼쳐졌다. 투왕의 손바닥에서 쇠사슬 모양의 붉은 강기가 발출되었다.
촤르르르르륵!
쇠사슬은 순식간에 백자강을 휘감았다.
‘됐다!’
아무리 사도맹주라 하더라도, 적쇄금령에 걸리면 자신의 다음 수가 들어갈 때까지 꼼짝하지 못할 것이다.
연환풍운권 제오식 풍운개벽(風雲開闢)!
쉬이이익.
필살의 의지가 담긴 투왕의 일격이 백자강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호신강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얼굴에 풍운개벽이 박힌다면!
‘끝이다.’
바로 그때 투왕은 보았다. 쇠사슬에 묶인 백자강의 손에 검이 들리지 않았음을.
“!”
다음 순간!
푸욱!
허공에서 소리 없이 내리꽂힌 백자강의 검이 위에서 자신의 어깨를 뚫으며 박혔다.
패왕진천 제육식 무영식(無影式)이 발휘된 것이다.
검은 투왕의 뼈와 살을 뚫었다.
“으아아악!”
투왕의 진기가 끊어지자.
파파파파팡!
연속된 굉음과 함께 백자강을 옥죄었던 적쇄금령이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졌다.
푸아아악!
그의 어깨에 박혀 있던 검이 저절로 뽑혀 나와 백자강의 손으로 날아갔다.
투왕의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투왕이 서둘러 혈도를 눌러 지혈했지만, 상처가 깊었다. 멀쩡한 몸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데,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다.
투왕이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그가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큰 부상에도 그는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백자강은 더 빠르게 그를 따라붙었다.
퍼어억!
백자강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투왕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꽝!
큰 충격으로 바닥을 굴렀지만, 투왕은 다시 벌떡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구경하던 이들도 두 사람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장을 이동했다.
비사인은 혁사군의 마혈을 제압해서 옆구리에 거칠게 끼고 함께 움직였다.
주인은 달아나고, 자신은 비참하게 끌려가고.
하지만 원망이 가득해야 할 그의 두 눈에서 아직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백자강이 날린 강기가 투왕의 등을 적중했다.
퍼억!
투왕이 그대로 바닥에 꼬꾸라졌다.
더는 달아나는 것을 포기한 채 투왕이 앉은 채 숨을 헐떡였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기로 약속을 해서. 이 싸움은 여기까지 하지.”
백자강이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오히려 투왕은 웃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졌소.”
투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바로 그때.
사방에서 백여 명의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까지 달아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곳에 숨겨둔 마지막 한 수를 위해서.
선두에 선 사람은 투왕의 수족인 사혼이었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채 열 살이 안 된 아이도 있고 열 서넛이 넘은 아이도 있었다. 많으면 열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바로 앞서 납치되었던 아이들이란 것을.
아이들은 눈에 총기가 없었다. 뭔가 특별한 방법으로 세뇌한 것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이상한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이 사방으로 동시에 날아올랐다. 동시에 아이들의 가슴에 매달린 가방이 터지면서 백색 가루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퍼어억! 퍼어억! 퍼억! 퍼억!
가방 하나에서 터져 나온 가루의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데 장장 백여 개의 가방에서 동시에 터졌으니 주위는 순식간에 가루로 뒤덮였다.
“황천(黃泉)이다.”
황천은 대량살상용 독으로 무림에서 가장 엄격하게 금지하는 독이었다. 이 독을 뿜어내는 가방은 죽은 독패자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걸 투왕은 아이들에게 착용하게 했다. 마교의 독왕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계획한 일이었다.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일격에 쓸어버리지 못하게 아이들을 이용했다. 투왕은 이기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이 아니라, 아기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도맹 무인들이 일제히 피독주를 꺼내 물었다.
“피독주로는 막을 수 없다.”
앞서 독패자의 독은 검무극이 회오리를 일으켜 태워 버렸지만, 지금은 불가항력이었다. 너무 많은 양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검무극조차 이 엄청난 독을 어쩌지 못했다.
비사인은 몸을 날려서 맹주부터 보호하려 했다.
“어서 피하십시오.”
하지만 이미 사도맹주도 독에 노출된 상태였다.
“마교의 독왕이 그댈 죽인 게 될 거요!”
해약을 미리 복용한 사람은 이곳에 오직 세 사람, 투왕과 혁사군, 그리고 사혼이었다. 혁사군은 투왕이 사도맹주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투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독된 사도맹주의 공격은 어떻게든 달아나면서 버틸 수 있을 거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었으니까.
이렇게라도 이기면 되는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하는 것,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 투왕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에 사혼이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 들어왔다. 투왕도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대로 서 있었고 독에 노출된 사도맹 무인들도 쓰러지지 않았다. 벌써 다 죽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의 무인들이 멍하게 서 있는 아이들의 마혈부터 제압했다.
투왕은 한 번도 제대로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던 그였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놀라고 당황했다.
‘왜?’
아무도 쓰러지지 않는 거지?
놀라기는 백자강을 비롯해 이곳에 있던 모든 사도맹 무인도 마찬가지였다. 황천이 얼마나 지독한 독인지는 다들 잘 알았으니까. 영문을 모르기는 검무극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주위를 둘러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되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따라갔다.
한 사람이 거목의 나뭇가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리고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십이지간 동물이 그려진 열두 개의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독왕님!”
검무극의 놀란 외침에 남자의 입가에 한줄기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독왕이었다. 마의와 독왕이 온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진짜 독왕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다.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마치 천신이 강림하듯 독왕이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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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 374화
제374회 팔아서 여비라도 하라고.
모두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무림에서 독왕은 온갖 소문으로 둘러싸인 신비한 존재였다.
독왕에게 당하면 독에 당한 줄도 모르고 죽게 된다더라.
눈이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실명하게 된다더라.
수백 명을 한 방울의 독으로 모두 독살했다더라.
잠도 독물이 가득한 통 속에서 잔다더라.
생김새는 꼽추 노괴라더라, 아니 남자가 아니라 중년 여인이라더라.
그야말로 온갖 오해와 와전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오늘 사도십삼랑과 극도병단의 무인들은 독왕을 직접 보고 있었다. 그들은 놀랐다. 독왕이 이렇게 어려 보이는 미소년일 줄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도 독왕은 여유롭고 도도했다.
독왕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잠시 바라보는 그 눈빛이 깊었다.
“소교주를 뵙습니다.”
원래라면 인사도 생략한 채 저기 나무 아래 가서 독초나 캐고 있을 사람인데. 오늘은 검무극을 위해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독왕님을 뵙습니다.”
검무극도 정중히 포권하며 허리를 숙였다.
주위를 압도하는 진중한 분위기의 독왕이라니. 낯설면서도 새로웠다.
독왕은 검무극을 먼저 챙긴 후, 다음으로 사도맹주에게 예를 갖췄다.
“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존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만나서 반갑소.”
독왕은 백자강과도 차분히 인사를 나눴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독왕이지만, 이 순간의 독왕은 자신만의 세상과 바깥세상의 경계에 서 있다.
백자강은 투왕과 싸울 때보다 더 긴장했다. 투왕에게 죽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독왕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었으니까.
독왕을 죽일 수는 있겠지만 결국 자신도 죽게 될 것 같은, 독왕은 그런 두려움을 주는 존재다.
하지만 오늘은 독왕에 대한 경계심 대신 고마움을 전했다.
큰 신세를 졌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누가 황천을 해독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오늘 신세는 갚을 날이 있을 거요.”
“본교 소교주를 위한 일이었으니,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과연 나를 위한 일이었을까?
검무극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독왕은 자신이 만독불침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황천을 해독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혹은 아이들을 위해서였거나.
회귀 전의 독왕과 지금의 독왕은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 있다.
검무극은 안다. 우린 모두가 경계선 위에 서 있음을. 교주가 되려 했던 회귀 전의 검존과 무공수련에 열중하는 지금의 검존이 다른 사람이 아니듯, 운명이 바뀌는 것은 거창한 계기가 필요하지 않다.
독왕과 함께 온 이들이 있었다. 그를 모시는 상선과 다섯 명의 독아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상선의 독주머니가 아홉 개였고, 나머지 독아의 주머니는 일곱 개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천독림의 절세 고수들이 함께 온 것이다.
“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대답은 상선이 대신했다.
“무림에서 사용이 금지된 대량살상독인 황천(黃泉)이 사도맹 쪽으로 대량 이동했다는 기밀을 입수하고는 고 군사가 조사를 부탁했습니다.”
고월의 부탁으로 나온 것이다. 고월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살피고 있었을 테니, 황천을 크나큰 위험 요소로 여겼겠지.
물론, 독왕은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고월은 통천각 소속도 아니고, 검무극의 개인 군사에 불과했으니까. 수하들만 보내서 황천을 조사하게 해도 되었고.
그럼에도 검무극을 위해 이렇게 직접 나선 것이다. 정말 나오기 싫었을 텐데.
‘고맙습니다, 독왕님.’
검무극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독왕은 마혈을 제압당한 아이들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도 여럿이 서 있었는데, 독왕은 굳이 투왕과 가까이 서 있는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투왕이 차갑게 노려보지만, 독왕은 겁을 먹기는커녕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디 날 죽일 수 있으면 시도해 봐라, 아니 제발 시도해라, 이런 느낌이었다.
독왕이 아이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혓바닥을 빼내서 살폈다.
“고독을 쓰진 않았고,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암시를 걸었군.”
그런 후, 아이들이 가슴에 차고 있는 주머니를 살폈다.
“별 요상한 걸 만들었네. 상선, 이것 하나 챙겨 가자. 가져가서 연구해 보게. 한데 아이들이 메기에는 가방이 좀 크지 않나?”
그 말에는 아이들에게 이런 일을 맡긴 것에 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검무극은 안다. 독왕이 이런 대량학살독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이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독공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독을 함부로 사용하는 이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이용했으니.
지금 독왕은 투왕을 죽이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일이 사도맹의 일이 아니었다면, 투왕은 이미 죽었다.
독왕이 투왕 앞을 보란 듯 지나쳐 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까 들으니 괜한 사람 누명도 씌우는 것 같던데.”
이런 말을 하면서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은 무시이자 도발이었다.
어차피 마지막까지 내몰린 투왕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독왕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의 갈등이 느껴졌다. 자신의 일을 망쳐 버린 독왕에게 일격을 날릴까 말까 하는 깊은 갈등이.
하지만 그는 끝내 공격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저 젊디젊은 외모 속에 얼마나 무서운 실력자가 들어있는지. 독패자조차 두려워했던 독왕이었으니까. 아무리 용감한 자신이라도 오장육부가 녹으면서 죽는 것은 피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검무극은 새삼 느꼈다. 무림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왜 독왕인지를. 왜 독왕이 가장 강력한 전쟁억제력을 지녔는지.
투왕의 시선이 이번에는 백자강과 비사인을 향했다.
아쉬웠다. 저 둘을 죽였으면 사도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텐데.
싸움에 진 것도, 이 패배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정말 아쉬웠다.
결국 원망의 눈빛이 향한 곳은 검무극이었다.
‘저놈 때문이다.’
독왕도 저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모든 일이 저 마교 소교주 때문에 틀어졌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놈만은 죽여야겠다는 증오심이 피어올랐다.
“마지막 부탁이 있소. 마교 소교주와 싸우게 해주시오.”
백자강은 단호히 거절했다.
“어림없는 소리.”
투왕이 검무극을 도발하며 자극했다.
“비겁한 소교주로 남을 건가?”
검무극이 그를 보며 웃었다. 옆에 서 있던 비사인도 따라 웃자 검무극이 물었다.
“당신은 왜 웃소?”
“저 사람이 당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웃었소. 아, 당신이 이런 격장지계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좋았을까? 비사인의 머리가 묻고 마음이 대답했다. 아니.
“참 뻔뻔하군. 저 아이들을 보고서도 비겁이란 말을 입에 담는 건가?”
비사인의 조롱에도 투왕은 검무극만을 자극했다.
“검무극, 나와 붙자!”
모두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맑고 깊은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안 되는 게, 여기 계신 독왕님께서 내가 당하면 그냥 있지 않으실 분이라서. 차라리 그냥 맹주님 검에 죽는 게 고통이 덜할 거요. 독왕님 독에 당하면 온몸이 녹는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될 테니까. 그렇죠? 독왕님?”
검무극이 독왕을 돌아봤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저만치 떨어진 극도병단 무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자네 발 좀 치워주게.”
극도병단 무인이 놀라서 발을 치우자, 그 뒤쪽에 풀이 있었다.
“아, 내가 잘 봤네.”
독왕이 조심스럽게 독초를 캤다.
검무극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간 독왕을 보며 옅게 웃었다. 다들 독왕의 행동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겠거니 싶겠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 그는 독초 캐는 일에 진심으로 열중하고 있음을.
그때 투왕이 기습적으로 장력을 내질렀다.
폭음이 터졌다.
투왕의 장력이 향한 곳은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은 한 손을 내밀어 투왕의 장력을 해소한 채 여전히 독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독왕은 여전히 독초를 캐고 있었고, 검무극은 그런 독왕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철저히 투왕을 무시했다.
“이 새끼! 넌 반드시 죽인다!”
투왕의 평정심이 깨어졌다.
그가 차고 있던 비수를 던졌다. 실로 놀라운 비도술을 선보였지만, 비수는 목표한 곳에 닿지 못했다.
비수를 튕겨낸 사람은 백자강이었다. 그는 더는 투왕이 발악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보게. 여기 어디에 자네가 믿었던 불멸 같은 거창한 것이 있나? 그저 욕심과 후회뿐이지.”
독왕까지 등장한 마당에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백자강은 곧장 그를 몰아붙였다.
쇄애애앵!
꽝!
팔에 큰 상처를 입은 투왕은 백자강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속수무책 뒤로 밀려났다. 강하게 두들겨서 진기를 흐트러뜨린 후.
패왕진천 제오식 환멸식(環滅式).
날아가던 백자강의 검기가 투왕을 가운데 두고 사방에서 수십 개로 분열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수가 투왕을 향해 쏘아지려던 그 순간.
슈우우웅.
투왕이 서 있던 발아래 검은 구멍이 생기더니, 그대로 구멍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 깜짝 놀랐다.
바닥에 남은 것은 그가 입고 있던 잘린 불멸신갑과 너덜너덜해진 보호구들, 피에 젖은 옷가지, 그리고 권갑인 투신뿐이었다. 몸에 걸쳐 있던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알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누군가 구해갔다!’
백자강이 기를 끌어올리고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놀라운 사술을 발휘해서 그를 빼내 간 것이다.
백자강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기운이 느껴지는지를 묻는 눈빛이었는데, 검무극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해간 비술이 보통이 아닙니다.”
십이지왕 중에 이런 무공을 쓰는 사람은 없었는데? 환왕이 살아 있었다면 모를까.
‘그럼 대체 누구지?’
어쨌든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이번 일의 배후는 투왕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본교와 무림맹, 풍천교까지 모두 실패했으니까.
‘투왕의 성격을 아는 자다. 끝까지 지켜보다 마지막 순간에 구해갔으니까.’
그게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 시기에 저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투왕이 싸우다 빠져나갔으니 못내 당황하고 찝찝해할 법도 했는데, 백자강은 전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또 나타나면 그때 또 죽이면 되지, 그런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자네에게 원한이 깊으니, 조심하게.”
“그자는 제 손에 죽을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독왕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
―놈을 빨아들인 저 구멍 너머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것이 나았을 거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미 독왕이 그에게 하독했음을. 그것도 끔찍하고 무서운 독을.
―독이 퍼지기 전에 사도맹주에게 죽겠거니 했는데.
독왕은 도저히 투왕을 용서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을 내세워 독을 쓴 그에게 상징적인 징벌을 내렸는데, 결과적으로는 실질적인 징벌이 된 것이다.
독왕이 죽을 거라면, 분명 죽을 거다. 검무극은 독왕의 실력을 믿었으니까. 또한 쓰지 말아야 할 독을 쓰지 말아야 할 방식으로 쓴 죗값에 대한 인과응보를 믿었으니까.
―역시! 우리 독왕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덤벼! 한 놈은 반드시 죽이고 죽는다!”
주인이 사라지자 당황한 사혼이 검을 휘두르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소리 없이 그의 뒤에서 다가선 누군가 그의 목을 휘감았다.
우두둑.
저항할 사이도 없이 사혼의 목이 부러졌다.
짚단처럼 쓰러지는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괴악이었다. 처음 싸움이 벌어졌던 곳에서 운기조식으로 부상을 추스른 후 뒤늦게 도착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비사인의 걱정에 괴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다행입니다.”
비사인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사람 관계에 있어 예전처럼 대충 보고 대충 넘겨짚는 일은 없을 거다.
비사인은 이 순간을 간절히 원했다. 위기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모든 관계를 더욱 잘 맺어나갈 거라 다짐했다.
막상 실천해야 할 순간이 되었을 때 귀찮음과 게으름에 져버리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검무극이다. 그의 노력 반이라도 따라갈 것이다.
혼자 남은 혁사군은 혀를 깨물어 자결하는 것이 유일하게 고통을 피할 길이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투왕이 자신을 구하러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지 않을 걸 예감했지만 죽는 것은 너무 무서웠다.
비사인이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헛된 꿈을 꾼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극도병단 무인들에게 혁사군이 끌려갔다. 아이들도 맹으로 이송했다.
그렇게 투왕과의 긴 싸움이 끝났다.
백자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우선 함께 맹으로 돌아가세.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이별주는 한잔해야지.”
자신들을 구한 검무극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검무극도 흔쾌히 따라나섰다.
“네, 가시죠. 사도맹에서 제일 맛있는 술로 주십시오.”
백자강이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권갑 투신이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백자강이 투신을 검무극에게 주었다.
“그나마 쓸만한 게 이것뿐이군. 이건 자네가 가지게.”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투신은 권갑 중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권갑이었다. 값을 따질 수도 없을 정도로 귀한 기물, 정말 큰 선물이었다.
전혀 아깝지 않았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떤 결과가 되었을지 끔찍했으니까.
“이걸 왜 주시는 겁니까?”
“먼 길 왔으니 팔아서 여비라도 하라고. 왜? 싫은가?”
“그럴 리가요!”
검무극이 재빨리 투신을 챙겼다.
“황금마차 타고 돌아가겠습니다.”
백자강이 이번에는 독왕에게 말했다.
“마존께서도 함께 맹으로 가시죠.”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인사드려야겠습니다.”
독왕은 백자강과 작별을 고했다.
굳이 백자강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독왕과 독인들이 사도맹에 들어오는 것은 그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독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안가에 가 계세요! 제가 곧 찾아뵙겠습니다. 먼저 가지 말고 저랑 같이 돌아가요!
조춘배 가족이 쉬고 있는 안가에 가 있다가 함께 돌아가면 될 것이다.
―갈 때 독초 좀 같이 캐자.
―전속 채집꾼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소교주에게도 안 챙겨주는 식사도 따로 챙겨주시는 그 소중한 분 말씀입니다.
―그 사람 요즘 바쁘다.
독왕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따라가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쪽 일 마치고 곧 가겠습니다.
그렇게 독왕과 헤어진 검무극은 백자강과 함께 사도맹으로 향했다.
함께 걸어가던 백자강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물었다.
“자네 이번 일이 끝나면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지?”
대체 무슨 부탁일지 백자강은 궁금했다. 함께 걷던 비사인 역시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도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으니까.
“본 맹의 보고에 보관된 무공비급이나 기물을 원하는가? 아니면 영약을 원하는가?”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맹주님께서 저와 어딜 좀 가주셨으면 합니다.”
“어디를?”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백자강이 상상도 못 한 말이 흘러나왔다.
“본교 앞 제 단골 주점에서 술 한잔 사드리고 싶습니다.”
절대회귀 375화
제375회 신비감 사라졌다고 무시하기 없기.
검무극은 처음 보았다.
백자강의 눈이 커지는 모습을. 물론 커져도 작긴 했지만.
‘그게 최선입니까? 맹주님!’
비사인도 그렇고, 사도맹주도 그렇고. 각자 특출난 개성이 멋있게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이 작은 눈은 볼수록 매력적이었으니까.
“그 단골 주점이 신교 앞에 있다고 했나?”
“마가촌에 있습니다.”
“나를 데리고 거기에 가고 싶다고?”
“네.”
잠시 검무극을 응시하던 백자강은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맹주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비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심일 겁니다. 원래도 이 정도로 미친 사람입니다.”
그래도 비사인은 ‘놈’이란 말 대신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백자강이 다시 물었다.
“처음부터 이걸 부탁하려고 한 건가?”
“그렇습니다.”
“혹시 이게 목적이었나? 나를 신교로 유인해서 죽이려는 것이?”
검무극이 웃었다. 백자강의 머릿속에는 이미 천마신교 앞 주점에서 팔마존에게 포위된 채 합공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아닙니다. 절대 맹주님을 해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백자강의 귓가에 소름은 돋지 않았다.
그래, 만약 그런 목적이었다면 앞서 독왕이 황천을 해독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를 신교까지 데려가려는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술을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라고요.”
“술은 여기서 사도 되지 않나?”
“거기 주인장 음식 솜씨가 아주 좋습니다. 주점 분위기도 좋고요.”
“솔직히 말하게. 뭐 때문인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대답했다.
“아버지와 만나시길 바라서입니다.”
아무리 비공식적인 일이라지만 사도맹주가 본교 앞까지 왔는데, 천마가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아버지는 틀림없이 사도맹주를 만나러 주점으로 나오실 거다.
“자네 아버지와? 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은 이번 음모 때문입니다. 놈들은 사도맹의 소맹주와 무림맹주의 손자를 노렸고, 본교의 섭혼마존을 노렸지요. 이런 자들이 암중에서 활약하는 상황이라면 두 분이 한 번쯤 회합을 가지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굳이 만날 이유는 없다. 전서를 주고받아도 되고, 군사들 차원에서 정보를 나눠도 되는 일이었으니까. 아마 자신을 데려가려는 이유는 두 번째 이유일 거란 예감이 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자 나오는 검무극의 본심.
“두 분이 만나셔서 서로 친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왠지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요.”
그래서 아버지와 사도맹주가 무림일통의 꿈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두 사람의 건배 한 번에 수많은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까.
백자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무림지보나 천고의 영약보다 더 좋다고?”
“네, 더 좋습니다. 물론 이 일이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란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가볍게 말을 꺼냈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일이다. 사도맹주가 천마신교로 움직이는 일이었으니까. 당장 호위만 생각해도 소수의 고수만 데려갈 건가? 아니면 대규모 병력을 데려갈 건가?
“자네 아버지 허락은 받고 하는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한데 이 일은 허락받을 일은 아니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맹주님을 모시고 술을 대접하는 일이니까요.”
이 일을 공식적으로 처리하면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사도맹을 싫어하고 사도맹주도 싫어했으니까. 하긴 무림맹주인들 좋아하시겠느냐마는.
어쨌든 허락을 받지 못해도, 만남은 성사시킬 수 있다.
백자강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좋네. 만약 내가 간다고 치세. 그럼 무림맹에서 그냥 있겠나? 신교와 본맹이 연합해서 일을 꾸민다고 여길 텐데?”
“그 점은 제가 책임지고 오해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무림맹주께 가서 직접 말씀드려야죠. 이러이러해서 제가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라고.”
백자강은 검무극이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이 녀석이라면?’
무림맹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 젊은 녀석에게 현혹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자신하던 그였는데 말이다.
그때 맹주가 타고 갈 마차가 도착했다.
“이따 맹에서 보세.”
홀로 생각할 것이 있는지 백자강은 두 사람을 태우지 않고 호위들과 함께 먼저 가버렸다. 극도병단의 무인들은 아이들을 호송해서 뒤따라 가버렸고, 괴악도 다음을 기약하며 그곳을 떠났다.
이제 그곳에는 검무극과 비사인, 그리고 사도십삼랑만 남았다.
두 사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사도십삼랑은 멀찌감치 사방에 흩어져 두 사람을 호위하며 함께 걸었다.
비사인은 투왕과 싸웠던 그간의 일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런 지난 악인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듯, 이렇게 새로운 문제를 내던진다.
검무극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기에, 맹주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있었다.
“두 분이 만나서 싸움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아무도 말릴 수도 없을 텐데. 두렵지 않소?”
그러자 대답 대신 검무극이 물었다.
“당신은 사부를 믿으시오?”
“당연히 믿소.”
“나도 우리 아버지를 믿소. 그러니 싸움은 안 날 거요.”
어른들을 믿으란 말이었다. 어디 보통 어른들인가?
설령 싸움이 나더라도 괜찮다. 오히려 검무극은 두 사람이 한바탕 겨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자고로 무인들 사이에서 치고받으며 드는 정을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비사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검무극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 왜 이렇게 순순히 내 말을 다 받아주는 거요? 사람 불안하게.”
“수용 기간이오.”
“그런 기간도 있소?”
“있소. 그것도 다 당신에게 배운 거요. 모르는 게 자존심 상하는 것이 아니라, 고치려고 노력 안 하는 게 자존심 상할 일이라는 것.”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것만 봐도 많이 변한 비사인이었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비사인은 검무극이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 배움과 변화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비사인이 다시 물었다.
“참, 내게 부탁하려는 것은 뭐요? 혹시 나도 주점에 같이 가자는 거요?”
“아니오. 맹주께서 허락하시면 어차피 당신도 따라올 텐데. 굳이 왜 부탁하겠소?”
검무극의 부탁은 백자강에게 했던 것만큼이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사도맹 보고에서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가져갈 수 있게 해주시오.”
비사인이 눈을 크게 뜨며 발걸음을 멈췄다.
“뭘 그리 놀라시오? 목숨값으로 당연히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않소?”
“물론 그렇소.”
“혹시 실망하셨소? 뭔 이런 물욕을 부리냐? 우정을 키울 부탁을 했어야지!”
“그건 아니오.”
“두고두고 미련 가지는 것보다, 지금 잠깐 물욕의 화신이 되려는 거요.”
비사인이 잠시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발걸음을 멈추고 속마음을 밝혔다.
“실망했다기보단 솔직히 당황했소. 다른 부탁을 할 줄 알았거든. 만약 당신이 나라면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할 거요?”
검무극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답을 내놓았다.
“나라면 이렇게 말하겠소. 좋소, 비고에서 선물 주겠소. 그것 말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또 있소?”
원하는 것을 더 들어주겠다고?
“만약 보물을 더 원한다고 대답하면?”
“좋소, 그것도 주겠소. 또 원하는 것이 있소? 이렇게 계속 물을 거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물어볼 거요. 양심이 있으면 말하겠지. 그때까지 보물을 열 개라도 줄 거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소?”
“친구잖소.”
비사인의 눈빛이 가늘어지며 의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지금 본맹의 보물을 열 개나 노리고 있는 거요?”
“눈치챘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비사인의 거친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내가 말했잖소?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라고. 욕심 많고 내 것 먼저 챙기려 하고. 그런 사람이니 선입견이나 환상 같은 것 가지지 마시오.”
비사인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검무극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람 사이에 환상을 깨라, 친구야. 그래야 오래 간다.
사실 비사인은 알 수 없겠지만, 검무극이 보고에 들어가려는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비궤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사도맹 보고에도 비궤가 흡수할 어떤 기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영원히 사도맹 보고에 들어갈 기회는 없을 테니까.
“당신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오.”
“조금만 더 지나면 알게 될 거요. 당신보다 더 알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 그때 신비감 사라졌다고 무시하기 없기요.”
한 줄기 불어온 바람은 차지 않고 따스했다.
“날이 많이 풀렸소. 이러다 어느새 봄이 오겠지.”
그러면서 검무극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사인도 검무극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자주 보려고 노력해도 자꾸 올려다보는 걸 잊게 된다.
“당신 단골집은 어떤 곳이오?”
“좋은 술이 있고, 좋은 주인장이 있고, 좋은 손님들이 있는 곳이오. 당신도 가면 좋아할 거요. 어쩌면 매일 거기 와서 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지.”
“술 마시러 가기에는 너무 멀지 않소?”
“경공 수련 열심히 하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사도십삼랑들도 한참을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 * *
사도맹으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곧장 맹주전으로 갔다.
“맹주님께 허락받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시오.”
아무리 소맹주라도 사도맹 보고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무리해서라도 꼭 허락받고 오시오.”
비사인이 맹주전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이럴 땐 무리하지 마시오, 라고 하는 거요.”
“꼭 들어가 보고 싶소! 꼭 가지고 싶소! 제발! 당신의 우정을 다 발휘해 주시오.”
걸어가던 비사인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비사인을 보낸 후 검무극은 복도에 세워진 강철늑대를 쳐다보았다. 백자강이 무공을 발휘할 때 나타났던 그 청랑과 모습이 똑같았다.
잠시 그렇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 은신을 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또 늑대를 보고 계시네요.”
그는 바로 사도맹 호위대주 인궁이었다.
“이상하게 이놈에게 끌리네요.”
어느 정도로 끌리느냐면 원하는 것이 이 늑대상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이번에 감사했습니다.”
인궁이 검무극에게 감사를 표했다.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별말씀을요. 대주께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번에 제일 힘든 싸움을 한 그들이었다. 은신한 채로 맹주가 위기에 빠지면 몸을 던지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 심력 소모가 엄청났다.
그래서 이번에 검무극과 독왕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느끼는 이들도 인궁과 호위들이었다. 오직 맹주를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때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맹주전 문이 열리며 비사인이 걸어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흔쾌히 허락했거나 단번에 거절했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그럼 전 이만.”
인궁이 소리 없이 모습을 감췄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걸어와서 당당하게 말했다.
“갑시다, 허락받았소.”
“역시!”
“한마디라도 하면 취소할 거요.”
검무극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두 사람이 맹주전을 나섰다. 내원을 나란히 걸어가다 검무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혼났소?”
“혼났소.”
“안대를 주시오. 눈 질끈 가리고 가겠소.”
“그러다 내가 함정에 밀어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밀 거요?”
“밀어도 절벽에서 밀 거요. 만장쯤 되는 절벽에서.”
두 사람이 보고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그들은 삼엄한 관문을 여러 차례 통과했다. 은신한 고수들과 위험천만한 기관, 신묘한 진법을 지나서야 비로소 보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면서 눈은 가리지 않았다. 검무극 정도의 고수라면 눈을 가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비사인도 잘 알았으니까.
“생색내려는 것은 아닌데, 나도 여기서 마음대로 고른 적은 없소.”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당신이 날 귀하게 여겨줘서 이런 기회를 얻은 것도 알고 있고. 아마 평생 이 고마움은 잊지 못할 거요. 한동안은 잠도 못 이룰 거요.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꼭 말해주겠소. 이 아비 친구 비 맹주 알지? 그 사람이 젊었을 때 말이다…….”
“그만! 미안하오. 내가 생색 좀 냈소.”
비사인이 어휴, 말을 말아야지 하는 표정으로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온갖 보물이 다 있었다.
무림에 나가면 혈풍이 불어닥칠 절세비급에, 누구라도 이름을 알만한 보검에, 불멸에 버금가는 호신갑에.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보물이 가득했다.
두 사람이 함께 걸으며 천천히 전시된 것들을 구경했다.
“나중에 맹주가 되면 다 당신 것이잖소? 앞으로 당신에게 더 잘 보여야겠소.”
“누가 들으면 신교에는 보고가 없는 줄 알겠소. 더 큰 보고가 있을 거면서. 우리와 바꾸자고 하면 바꿀 거요 안 바꿀 거요?”
“……안 바꿀 거요.”
“그러면서 엄살은!”
그곳을 둘러보면서 검무극은 뜨겁고 후끈한 열기를 느꼈다.
‘이곳도 전쟁 준비 중이다.’
천마신교와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무인들에게 지급될 무기와 호신갑과 영약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사도맹도 분명 그날을 대비하고 있다.
“맹주님께서 당신이 정말 고마웠나 보오. 절대 이곳에 외인을 들일 분이 아닌데.”
“당신 때문일 거요.”
“왜 나 때문이오?”
“당신이 나와 한 약속을 지켜주고 싶어서.”
정말 그래서일까?
비사인은 확신할 수 없었다. 맹주님의 마음을 아직은 잘 몰랐으니까. 그래도 적어도 그런 이유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검무극은 그런 마음을 헤아려주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젠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 그의 배려임을 알기에.
검무극은 비급과 보검, 호신갑과 영약을 다 그냥 지나쳤다.
검무극은 자신의 욕심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비궤의 욕망에 집중했다.
‘비궤야, 딱 한 번의 기회니 어서 골라라.’
하지만 온갖 진귀한 기물 앞을 지나도 비궤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곳 없소?”
“여기보다 덜 귀한 것들을 모아둔 구역이 있소.”
“거기도 봅시다.”
“혹시 찾고 있는 것이 있소?”
“마음이 확 끌리는 걸 찾고 있소. 그게 여긴 없소.”
그렇게 다른 구역까지 돌아보았다. 확실히 처음 보여준 보고에 비해 덜 귀한 것들이었다.
“나 같으면 여기만 보여줬을 텐데.”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검무극은 두 번째 구역도 차분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무기나 보의, 영약보다는 일반 보석이나 장식품 같은 것이 더 많았다.
구석으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의 끝까지 걸어갔다.
아마 사도맹에는 없겠거니 포기하던 찰나.
우웅!
비궤가 반응했다.
제376회 연회는 취소됐네.
그것은 작은 쇳덩이였다.
처음 비궤가 흡수했던 풍천교의 흑정처럼 둥근 모양도 아니었다. 이번 것은 쇠로 만든 맹수에서 떨어져 나왔을 법한 송곳니 장식품이었다. 목에 걸고 다니기에는 무거운 편이라 세워두고 장식으로만 쓸 수 있었다.
“이걸로 하겠소.”
비사인이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진심이시오?”
“그렇소.”
“내가 좀 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보시오.”
비사인은 장식품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쇳덩이로 된 송곳니였다. 검무극이 그냥 골랐을 리는 없는데?
“이걸 왜 가지겠다는 거요?”
“마음에 확 끌렸소.”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소.”
검무극을 만나고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었겠느냐 마는 지금 이 경우가 제일 모를 일이었다.
“당신에게 일월검도 받고, 맹주님께는 투신을 받지 않았소? 난 이걸로 충분하오.”
“이래 놓고 신비감이 사라질 걱정을 하다니. 왜 이걸 골랐는지 그 궁금증만 해도 평생 갈 거요.”
검무극과 비사인이 함께 보고를 나왔다.
“당신과 이런 일들을 겪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
어디 비사인뿐이겠는가? 회귀하고 이런 삶을 살게 될지 검무극 자신 역시 전혀 생각지 못했다. 대법 재료를 찾아 외롭게 중원을 헤매다 힘들 때면 회귀한 후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 사도맹 소맹주와 사도맹의 보고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앞으로도 생각지 못한 일들이 많을 거요. 평생 이렇게 놀라면서 삽시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언제나 의지가 되는 검무극이다.
그런 검무극에게 이것 하나는 묻고 싶었다.
“당신은 두렵지 않소?”
“뭐가 말이오?”
“우릴 상대로 이런 음모를 꾸미는 자들 말이오. 어둠 속에 숨어서 또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 않소?”
투왕이 살아서 달아났다고 알고 있는 그였기에 어쩌면 이 두려움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정신없던 싸움을 끝내고 이제 숨을 돌리고 나니까 비사인은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했는지 실감이 났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이미 죽어도 여러 번 죽었다.
소교주, 당신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는 거요?
검무극은 차분히 대답했다.
“두려울 게 뭐가 있겠소? 내가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을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당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소? 기꺼이 죽어야지.”
“!”
비사인에게 앞으로의 삶의 이정표가 될 말이었다.
이런 고마운 말을 해주면서도 검무극은 오히려 자신이 고맙다고 전했다.
“약속 지켜줘서 고맙소.”
정산 바구니에 들어 있던 그 많던 고마움을 생각하면, 이 순간이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비사인이 성큼성큼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저녁 연회에 늦지나 마시오.”
* * *
검무극은 사도맹에서 내준 객청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선 후, 문을 잠그고 창문도 닫았다.
탁자 위에 비궤와 보고에서 가져온 쇠로 된 송곳니를 올렸다. 이미 한 번 흑정을 흡수시켜본 경험이 있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너, 모양이 다른 것도 다 흡수하는 모양이구나.
“배고팠지? 자, 맛있게 먹어라!”
하지만 비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먹어, 왜 안 먹어?”
분명 진동했었는데 비궤는 쇳덩이 장식을 흡수하지 않았다.
“그새 얼굴이 다른 쪽으로 바뀐 거야?”
방향을 바꿔서 송곳니 장식을 다른 면에 놓았지만 역시 흡수하지 않았다.
“뭐야? 혹시 이거 아니야? 옆에 있던 다른 거였어?”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분명 이것에 반응했었는데.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검무극은 포기했다.
“네가 배가 불렀구나.”
비궤는 자신이 그려놓은 대로 환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 * *
그날 저녁, 검무극은 인궁의 안내를 받으며 맹주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었다.
인궁이 자연스럽게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역시 검무극은 강철 늑대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못 볼 테니, 잠시 작별 인사를 나누시지요. 맹주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 늑대상을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지금껏 시간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였다. 물론 맹주를 구해준 것에 대한 호의에서 비롯된 배려였고.
“고맙소. 곧 가겠소.”
인궁이 사라지자 검무극이 늑대에게 작별을 고했다.
“너도 이제 못 보겠구나.”
왜 이렇게 이 늑대가 자신의 발걸음을 잡아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회귀 전 지난 삶이 이 외로운 한 마리 늑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이제 볼 일 없을 거다. 잘 지내라.”
늑대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돌아서려던 검무극이 흠칫 동작을 멈췄다. 문득 벼락처럼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검무극이 품에서 송곳니 장식을 꺼냈다.
‘설마? 아니겠지?’
검무극이 송곳니를 강철 늑대의 벌어진 입에 넣었다.
송곳니가 들어갈 자리에 맞춰 넣어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른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렇지.’
그냥 가려다 기왕 시도한 것 윗니에도 넣어보았다.
바로 그 순간, 늑대의 두 눈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아악!
이 순간 늑대가 살아난 것처럼 느껴졌다.
검무극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늑대는 검무극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 입 안에서 뭔가가 굴러 나왔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입에서 나온 것은 푸른빛을 띤 구슬이었다. 앞서 흡수한 것이 검은색 흑정이었다면, 이것은 푸른색 청정이었다. 심지어 크기도 똑같았다.
이 송곳니가 바로 강철 늑대의 몸속에 숨겨져 있던 구슬을 꺼내는 열쇠였던 것이다. 왜 이렇게 이 늑대상이 끌렸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니라 비궤가 이끈 것이다. 아니라면 앞서 먼저 몸속으로 흡수한 흑정의 기운이 끌어당긴 것이었거나.
우우우웅.
품속에 있던 비궤가 진동하며 반응했다.
비궤를 꺼내 그 위에 청정을 올렸다.
스으윽.
기다렸다는 듯 비궤가 청정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딱딱한 구슬이 액체처럼 비궤에 스며들었다.
청정을 모두 흡수한 비궤가 한차례 진동하더니.
스으으으!
비궤에서 푸른 기운을 띤 뭔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흑정 때와 마찬가지였다. 연기도, 액체도, 내공도, 빛도 아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이 검무극의 손과 팔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번에도 천마호신공은 발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량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검무극의 본능은 이렇게 확신했다. 이 기운이 무엇이든 분명 자신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기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진 그 순간, 검무극의 몸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광채였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그 푸른 기운은 몸속으로 모두 흡수된 후였다. 비궤를 통해 두 번째 기운을 흡수한 것이다.
그렇다고 몸에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두 개의 기운이 만나서 섞이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 조용히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었다.
아직 어떤 변화를 이끌 기운을 다 흡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궤가 기운을 다 흡수한 청정을 내뱉었다. 이제 그것은 평범한 돌이 되어 있었다. 비궤와 돌, 그리고 늑대상에 끼워 넣었던 송곳니까지 빼서 품에 보관한 후, 이번에는 늑대상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네가 품고 있던 이것이 적어도 헛되이 쓰이게는 하지 않으마. 고맙다, 청랑.”
늑대는 언제 눈에서 푸른 기운을 내뿜었느냐는 듯, 평소 모습 그대로 늠름하게 서 있었다.
검무극은 천천히 맹주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태사의에 앉은 백자강은 천마 검우진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눈빛, 아직도 생생하다. 그를 두 번 만났는데, 두 번 다 같은 눈빛이었다.
세 번째라고 다를까?
예전이라면 일언지하 거절했을 일이었는데,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이번 음모 때문이 아니었다. 검우진과 친해지기를 바라서도 아니었다. 바로 검무극 때문이었다.
‘저런 아들을 키워냈다고? 그 검우진이?’
믿을 수가 없었다. 직접 만나서 확인하고 싶다. 검우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처럼 저런 아들이 태어나서 자란 것임을. 만약 검우진이 저렇게 키운 거라면? 정말 열받을 것 같았으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그러자 태사의 아래에 서 있던 비사인이 차분히 대답했다.
“저는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유는?”
“맹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어서다?”
“이 세상에서 제가 유일하게 믿는 분이시니까요.”
백자강은 뜻밖이란 표정으로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말을 안 하던 녀석이었는데, 변했다.
“소교주를 만난 후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변해야 이길 수 있으니까?”
당연히 그러리라 여겼는데, 비사인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뇨, 이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길 자신이 없는 게 아니고?”
“꿈 자체를 바꾼 겁니다. 이기려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꿈으로. 어쩌면 이기느냐 지느냐의 싸움보다 제게는 그게 더 힘든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인이 검을 뽑는 것보다 뽑지 않는 것이 더 어렵듯이 말이다.
“그 특출난 사람 옆에서 많이 힘들 겁니다. 비교도 되고, 자존심도 상하고, 자괴감도 많이 들겠죠. 하지만 가보고 싶습니다. 뱀 대가리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용과 뒤엉켜서 승천을 꿈꿔보고 싶습니다. 그러다 떨어져 죽어도 하늘 구경은 하고 죽을 테니, 후회는 없을 겁니다.”
비사인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그가 맹주 앞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백자강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제자의 말이 옳다. 지금은 이기느냐 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기세다.
괜히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꼭 이기겠다고 큰소리치는 것보다 지금처럼 자기 소신을 밝히는 모습이 더 낫다.
평생 자식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그래서 나이 들어 가끔 아쉬울 때도 있었는데.
저기 자식이 서 있구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들 같은 제자는 자신은 못 가본 길을 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뱀은 아무리 커도 뱀일 뿐이지.
그때 검무극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잠시 후 맹주전 문이 열리고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태사의 앞에 도착하자 백자강이 먼저 물었다.
“잘 쉬었나?”
“덕분에 편히 쉬다가 왔습니다.”
보고에서 자신이 뭘 골랐는지 들었을 텐데, 그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번 허락했으면 끝이지. 저 돌아보지 않는 마음이 아버지와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두 분이 잘 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거고.
대신 다른 걸 물었다.
“나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비사인도 검무극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검무극이 침묵을 깼다.
“아직 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솔직히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아버지와 경쟁하시면서도 당당히 사도를 이끄시는 것만 봐도, 대단하신 분이겠지요.”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아버지와 백자강 모두를 높이는 말이었다.
“저 친구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시니 저도 존경할만한 분이실 테고요.”
잠시 비사인을 향했던 검무극의 시선이 백자강을 응시했다.
“한데 앞서 드린 말씀은 남들을 통한 답이었죠. 저는 제가 순수하게 느낀 제 답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맹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알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 주점에 가서 한잔하시지요.”
백자강은 검무극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게 되면 검우진을 만나게 될 거다. 이 결정에 자신은 물론이고, 사도맹의 운명까지 바뀔 수도 있었다.
이윽고 백자강은 마음을 굳혔다.
“오늘 연회는 취소됐네.”
그리고 놀랄만한 이유가 덧붙여졌다.
“술은 자네 단골 주점에서 마시기로 하지.”
백자강의 시원스러운 결정에 검무극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맹주님.”
“대신 자네가 말했던 것처럼, 무림맹 문제는 자네가 직접 해결하게. 그런 다음에 구체적인 일정을 잡아보지. 단, 무림맹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번 결정은 취소네.”
“알겠습니다. 해결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은 안다. 사도맹주의 이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고 적진으로 뛰어들겠는가? 그는 방금 목숨을 걸었다.
“아직 맹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겠습니다.”
“어떤 말을?”
“멋지십니다.”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았으니, 저 소교주는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부는 사양하겠네.”
검무극이 미소와 함께 허리 숙여 예를 갖췄다.
“그럼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검무극이 맹주전을 나섰다.
사도맹주는 회귀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시원시원한 사람이었구나. 마음에 든다, 이 사람.
잠시 맹주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비사인이 따라 나왔다.
“바로 떠나실 거요?”
비사인의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디로 가시오?”
“안가에 들러서 본교로 데려가야 할 사람이 있소. 독왕님도 봬야 하고. 본교에 들렀다가 다시 무림맹으로 갈 거요. 그곳에서 일이 잘 풀리면 곧장 기별하겠소.”
“참 바쁘시오.”
불쑥 와서 불쑥 떠나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검무극과의 헤어짐이 아쉬웠다.
“가면 진 대주도 만나겠군요.”
진하군은 사도맹 일에 따라오지 못해 아쉬워했는데, 이제 비사인이 반대로 그 신세가 되었다.
“당신도 같이 갑시다.”
“우리 셋이 어울리는 걸 무림맹주가 잘도 좋아하겠소. 괜히 가면 무림맹주 심기나 건들겠지. 왜 그렇게 보시오?”
그러자 날아든 검무극의 기습질문.
“춤은 언제 출 거요?”
당황한 비사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설마 사도맹 소맹주가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을 어기지는 않겠지요?”
“지킬 거요, 지킨다고!”
이제 귀까지 빨개졌다. 하여튼 이 검무극과 있으면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다행히 일랑이 와서 그를 구해주었다. 일랑이 보관해두었던 검 상자를 건네준 것이다.
그걸 비사인이 다시 검무극에게 전했다.
“여기 맡아둔 일월검이오.”
“선물 고맙소.”
검무극이 다시 춤에 대해 물으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그때.
“나 지금 검이 두 자루인 상태요.”
“그럼 참겠소, 참아야지.”
이 장난기 많고 집요한 사람은 두고두고 이 일로 자신을 놀릴 텐데. 결국 언젠가 추기는 춰야 할 거다.
그렇게 춤으로 마지막 너스레를 장식한 후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작별했다.
“반드시 무림맹주님을 설득할 테니, 우리 본교에서 봅시다.”
절대회귀 377화
제377회 평화롭던 귀에 아부가.
“뭘 그리 보고 계시오?”
조춘배의 장모 윤씨가 안가 마당 구석에서 뭔가를 쳐다보는 청년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화단에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못 보던 청년이었다.
청년은 여전히 말없이 벌레만 보고 있었기에 윤씨는 미안함을 전했다.
“이 늙은이가 방해됐죠? 죄송해요, 무인님.”
윤씨는 이곳 안가에서 일하는 모두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무인들은 물론이고 시종이나 시비들에게도 예를 갖춰서 대했다. 무서워서라기보단 고마워서였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그녀였는데, 근래 너무 편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끼니마다 온갖 귀한 요리를 차려주었고, 갈아입을 새 옷을 대령했다. 태어나 비단옷을 이번에 처음으로 입어 보았다. 늦잠도 자보고, 평생 안 자본 낮잠도 자봤다. 그러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맙겠는가?
윤씨가 돌아서려는데 청년이 말했다.
“용독벌레라는 겁니다. 이쪽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벌레지요.”
“아, 그렇군요.”
윤씨는 청년 옆으로 가서 함께 쪼그리고 앉았다.
외모는 어려 보였는데 분위기나 목소리는 성숙해 보였다.
벌레가 기어서 풀 사이로 사라졌을 때 윤씨가 청년의 허리춤을 보며 말했다.
“동전 주머니가 참 귀엽소.”
청년은 주머니를 여러 개 차고 있었는데, 십이지간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이렇게 주머니를 여럿 차는데. 물론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니 상인은 아니겠지.
그때 청년이 뜻밖의 말을 했다.
“사위 분 요리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윤씨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요?”
“저도 그곳 근처에 삽니다.”
“아, 그러셨구나. 앞으로도 많이 찾아주세요. 우리 조 서방이 정말 착하고 성실해요.”
사위네 주점 손님이라는 말에 윤씨는 너무 반갑고 좋았다.
“혹시 배고프시오? 주방에 음식이 있는데 좀 챙겨다 드릴까?”
너무 젊은 나이라서 이곳에서 허드렛일한다고 여긴 것이다. 무인이라고 해도 하급 무인일 테고.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한창 먹을 때인데. 잠시만 기다려요.”
윤씨가 건물로 달려갔다.
그녀를 보며 청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한창때는 지났는데.”
잠시 후, 윤씨가 쟁반에 음식을 챙겨 나왔다.
하지만 청년은 그곳에 없었다.
“그새 어딜 가셨대? 조금만 기다리시지.”
그녀가 못내 아쉬워했다.
그때 그곳으로 조춘배가 걸어 나왔다.
“우리 조 서방, 배 안 고프나? 밥 차려줄까?”
자신만 보면 먹을 걸 챙겨주려는 장모님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밥은 제가 챙겨드려야죠.”
“아니네, 평생 남들 챙기느라 바빴는데 이럴 때라도 푹 쉬어야지.”
어디 장모님은 아니십니까? 더 고생을 많이 하셨으면서.
조춘배는 안가에 머물면서 여러 단계의 심리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좋았다. 혼인해서 멀리 사는 자식들도 함께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으니까.
그렇지만 점점 날이 지날수록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렇게 호강해도 될까? 주점을 이렇게 오래 비워도 될까?
그러다 이젠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푹 쉬고 있었다. 무엇보다 장모님과 아내, 처제 내외가 편히 지내는 걸로 됐다. 어차피 돌아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한데 그 음식은 뭡니까?”
“여기 마음이 가는 청년이 있어서 주려고 했는데. 그새 가버렸네.”
“누군데요?”
“귀엽고 잘생긴 청년이 있었네.”
조춘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청년은 없었는데?
“아, 자네 가게에도 갔었다던데?”
“네? 제 주점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 그곳으로 청년이 돌아왔다. 그의 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약초가 한가득 들려있었다.
“어르신 무릎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
“늙으니 안 아픈 곳이 없네요. 한데 무릎 아픈 건 어떻게 아셨소?”
그녀가 고질적으로 아픈 곳이 무릎이었다.
“이걸 달여서 드시면 걷기가 좀 편하실 겁니다.”
“뭘 이런 걸 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윤씨는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 무인님께서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었소. 자, 그거 내려놓고 이거 좀 드시오.”
윤씨가 손주를 대하듯 청년을 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조춘배는 사색이 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 장모가 많이 먹으라며 독왕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요즘에도 이런 고마운 청년이 있다면서 말이다.
“으아아! 안 됩니다!”
조춘배가 소리쳤다.
독왕과 윤씨가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자네 왜 그러나?”
윤씨의 물음에 조춘배가 독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이구! 독왕님!”
주점 벽에 이름도 남겨준 독왕이었는데 어찌 그를 모르겠는가?
뒤늦게 윤씨는 청년이 고귀한 신분임을 알고 당황했다.
“어이구! 귀하신 분을 몰라뵙고. 죽여주십시오!”
독왕은 바닥에 엎드리려는 윤씨를 제지하며 그녀에게 약초를 주었다.
“이런 귀한 건 받지 못합니다.”
“사위 분께 신세를 져서 드리는 거니, 너무 개의치 마시오.”
그 말을 하고는 독왕은 곧장 건물로 들어갔다.
어제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안가를 관리하는 마인에게 조춘배 일가가 와 있음을 들었다. 일부러 편히 지내라고 자신이 왔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제일 좋은 방을 내줬을 텐데, 자신이 온 걸 알면 조춘배가 방을 내놓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방도 방이지만 부담도 많이 느낄 테고.
그래서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채 수하들과 객청에서 이틀을 조용히 보낸 것이다.
그리고 독왕은 검무극이 조춘배를 아끼는 것을 알았기에, 장모 앞에서 위신을 세워준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독왕님!”
그 무서운 독왕이 약초를 주고 가자, 조춘배는 너무 감격했다.
“조 서방, 내가 실수라도 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그랬다면 이런 귀한 걸 주셨겠습니까?”
“정말 고마운 분이시네.”
그녀는 독왕이 들어간 건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자네 덕에 이 무슨 호강인지.”
“약초는 제가 달여드리겠습니다.”
약초를 받아든 조춘배는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독왕이 직접 준 약초라니? 손이 덜덜 떨렸다. 잎 하나라도 떨어뜨릴까 조심했다.
한 사람이 보고 싶었다. 이 모든 행복과 기쁨은 그가 준 선물이었으니까.
“소교주님, 무사히 돌아오세요. 돌아오시면 제가!”
바로 그때였다.
“뭐 해주실 건데요?”
조춘배가 놀라 돌아보니 그곳으로 검무극이 들어서고 있었다. 사도맹을 나선 검무극이 쾌속보로 바람처럼 달려온 것이다.
“소교주님!”
그의 외침에 건물로 들어갔던 독왕이 창을 열고 모습을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독왕님 보고 싶어서 바람처럼 달려왔죠.”
“저기 주인장 보고 싶어서겠지.”
검무극이 조춘배를 보며 웃었다.
“물론 우리 주인장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검무극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자 조춘배는 너무 기뻤다.
그리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꿈을 꾸는 듯한 환상 속을 떠다니다가, 비로소 현실에 발을 딛는 안도감이 든 것이다.
“제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이 있을 겁니다.”
“네?”
“나중에 주점에 귀한 손님이 올 테니, 그때 실력 발휘 좀 해주십시오.”
의미심장한 검무극의 눈빛에 조춘배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마존이 올 때도 저런 말을 안 했는데. 대체 누가 오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그 사이 윤씨를 비롯해 조춘배의 가족이 모두 나와서 검무극을 반겼다.
“덕분에 우리 가족, 죽어도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검무극은 윤씨의 손을 잡아주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어르신.”
다음 날 안가를 떠나는 것으로 결정되자 그날 저녁은 조춘배가 차렸다. 신세 진 이들에게 직접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검무극과 독왕, 독아들은 물론이고 안가의 무인들과 시종, 시비들에게까지 술과 요리를 대접했다.
조춘배가 실력 발휘를 하는 사이 그의 아내는 그동안 자신들을 돌봐준 이들에게 일일이 고마움을 표했다.
독왕은 식사하면서 멍하게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상선이 대신 검무극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검무극을 만나서 독왕은 변하고 있었고, 그 변화는 상선이 오랫동안 바랐던 바였다. 천독림이 아닌 이곳에 있는 것도, 마불과 함께 약초를 캐고 함께 식사하는 것도 예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이번에 함께 와주셔서 큰 위험을 넘겼습니다.”
“돌아가시면 천독림에 한번 놀러 오십시오.”
“다음에요. 아버지께 인사만 드리고 곧장 출교해서 무림맹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무림맹을 뒤집어 놓으시겠군요.”
상선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무림맹주님을 만나 한 가지 양해만 구하면 되는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자 독왕이 불쑥 말했다.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간단할까?”
독왕의 말에 검무극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그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과연 진패천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일은 자신도, 무림맹주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기분 좋은 저녁 자리가 끝났을 때, 검무극이 조춘배에게 말했다.
“이제 돌아가시죠.”
조춘배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휴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천마신교로 돌아온 검무극은 천마전부터 들렀다.
“아버지, 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계시던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셨다.
“사도맹을 휘젓고 왔다면서?”
“오해십니다. 전 나서지도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거든요. 통천각에서 보고를 다 받으셨겠지만.”
검무극은 사도맹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되도록 아버지에게는 이렇게 직접 말씀드렸다.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이라도 상관없다. 이렇게 거짓 없이 말씀드리는 것만으로도, 이건 보고가 아니라 대화였으니까.
“아직 배후가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만 방심하지 않으시면 된다. 세상 사람 다 방심해도 나와 아버지만 방심하지 않으면 된다. 그럼 우린 막아낼 수 있다.
“놈들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릴 수도 있으니 아버지와 제가 잘 살펴야 할 겁니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도 강조했다.
“방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먼저 찾아서 없애겠다는 의미, 아버지 방식이다. 이미 총군사에게 명령을 내려 진행 중이겠지.
“그럴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겠죠.”
하지만 지금까지 놈들의 치밀함으로 볼 때,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거다.
“참, 그리고 풍류주점에 사도맹주를 초대했습니다.”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슬쩍 말했다. 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차마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 사도맹주를 싫어하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만, 막상 만나보면 뜻밖에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또…….”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이 딱 이랬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지?
원래라면 오는 길에 무림맹부터 들러서 그쪽 일까지 처리하고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허락도 받아야 하고, 이렇게 눈치도 봐야 하고, 안 된다고 하시면 설득도 하고 협상도 하고.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과 이렇게 돼버렸습니다는 큰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네 속을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버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비웃음이었다. 그걸 보자 비로소 드는 안도감.
아, 집에 돌아왔구나.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사도맹주를 불렀는지 이미 꿰뚫어 보고 계실 것이다.
과연 아버지는 이유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그래서 제가 무림맹주께 직접 가서 말씀드리려고요.”
“그런다고 진패천 그 사람이 받아들일까?”
독왕이 그랬듯, 아버지도 이번 일을 쉽게 보지 않았다.
물론 나는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무림맹 쪽에도 제 편이 있어서요. 거긴 둘이나 있거든요.”
* * *
“사부님!”
권마는 자신이 무너뜨리려는 그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왔느냐?”
비사인을 데려다 너스레를 떨고 싶다. 보라고, 당신 얼굴은 우리 사부에 비하면 귀여운 얼굴이라고.
“사도맹 일 마치고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뵙고 곧장 사부님께 오는 길입니다.”
그렇게 생색을 낸 후 그와 나란히 서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 절벽, 성장 중입니까?”
무슨 뜻이냐는 권마의 눈빛에 절벽을 다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찌 된 것이 더 크고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자 권마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네가 성장한 것은 아니고?”
그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성장할수록 상대가 가소롭게 느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하류들이나 그러는 거고. 일류들은 성장할수록 상대를 정확히 보겠지.”
진짜 고수들이 겸손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테고.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면서 무학의 경지가 올라간 걸까? 정말 절벽이 더 웅장하게 느껴졌다.
“그럼 사부님께는 이 절벽이 더 어마어마하게 보이겠군요.”
“평화롭던 내 귀에 아부가 들리는 걸 보니, 누가 돌아오긴 돌아왔구나.”
“어디 아부만 돌아왔겠습니까? 여기 선물도 있습니다.”
권마는 내가 준 권갑을 알아보았다.
“투신이구나!”
“알아보시는군요.”
“권법을 익힌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물건이지. 이게 어디서 났느냐?”
“사도맹주에게 선물로 받았습니다.”
권마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너라면 그럴 수 있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준 걸 왜 내게 주느냐?”
“투신이 제 손에 끼어있는 걸 원하겠습니까? 사부님 손을 원하겠습니까?”
항상 맨주먹으로 살아온 그였기에 필요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순순히 받았다.
“그래, 절벽을 무너뜨리려면 필요하겠지.”
그래, 어디 나만 성장 중이겠는가?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흔쾌히 받는 모습으로 알 수 있었다. 권마도 성장하고 있음을.
그리고 투신이 권갑 중에서 왜 최고라는지도 알 수 있었다. 탄력성이 좋아 권마의 그 큰 손에도 잘 맞았다.
“보물마다 제 주인이 있다는 말,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권마는 내 앞에 그 큰 주먹을 꽉 쥐어보이는 것으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래, 이렇게 다 강해져야 한다. 저쪽에서 어둠 속에서 음모를 꾸미면, 우린 햇빛 아래에서 이렇게 강해지는 거다.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 * *
권마와 작별한 후, 일월검을 호위들에게 맡기고 곧장 본교를 나섰다. 어차피 바로 출교 해야 하니, 다른 마존들은 무림맹에 다녀온 후에 인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또 저희는 두고 가실 거죠?”
호위책임자 적연은 이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번에도 그래야겠는데?”
우린 정말 쓸모없는 놈들입니다, 라는 자학적인 눈빛으로 나를 회유하려 했지만 내겐 통하지 않았다.
결국 적연이 소리쳤다.
“대신 이것만 알아주십시오. 소교주님 잘못되시면 우리도 다 죽습니다.”
그래, 내가 잘못되면 어차피 다 죽을 거다.
“따라가고 싶으면 더 강해져! 더! 더!”
마가촌을 지나며 풍류주점을 보았다. 오랜만에 문을 연 그곳에 저잣거리 사람들이 모여 조춘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까?
‘주인장, 아직 하지 마시오. 정말 해야 할 자랑이 남아 있으니까.’
쾌속보를 발휘해서 무림맹을 향해 내달렸다.
세상 속을 빛처럼 흘러가면서도 나는 볼 수 있었다. 길가의 꽃들이 꽃봉오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을.
봄이 오고 있었다.
절대회귀 378화
제378회 우린 같은 무림을 살고 있어.
“진 소저, 제 진심을 받아주시오.”
청년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애원하듯 고백했다.
사랑에 빠진 청년에 비해 진하령은 담담한 반응이었다. 이건 후기지수 모임을 호북일미가 이끌었을 때의 부작용 같은 것이었다.
“임 공자.”
“진 소저.”
네가 나를 얼마나 알기에 고백하느냐, 우린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사랑보단 일이 우선이다. 여러 방법을 써봤는데 지금 하는 이 방법이 제일 빠르고 확실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청년은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말하면 반응은 대충 두 부류로 나눈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과 지금 이 남자처럼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부류.
“그게 누굽니까?”
“알면요? 임 공자가 그 사람에게 가서 막을 건가요?”
이때도 두 부류로 나뉜다. 뒤늦게 자신이 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나는 사람과, 이 사람처럼 끝까지 해보려는 사람.
“할 수만 있다면요. 그렇게라도 해서 제가 얼마나 진 소저를 좋아하는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 사람에게 여인을 차지하려면 패기 있게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살면서 한두 번 정도는 이 방법이 성공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니다.
“지금 누가 와서 임 공자가 좋아하는 걸 막으려 든다면요?”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진하령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여기서도 물러나지 않으면 기도까지 발출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청년은 여기까지였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그제야 진하령도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다음 모임에서 뵈어요.”
청년이 꾸벅 인사를 한 후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멀찌감치 뒤에 서 있던 진하령의 호위무인 추호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모임에 나오지 못하게 조치할까요?”
실컷 무례하게 굴었으면서 이런 사람이 아니라니? 따끔하게 처리하기를 바라는 추호에 비해 진하령은 너그러웠다.
“놔둬라. 그랬다간 저 사람 인생 괜히 우울해지고 어두워질 거다.”
고백을 자주 받다 보니 상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누굴 좋아하는 마음을 거두는 게 마음대로 되겠어? 저 사람에게도 시간을 줘야지. 나오고 안 나오고는 저 사람 선택이 되게 해줘야지.”
추호는 어느 순간부터 진하령이 많이 어른스러워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게 어느 시점인지 알고 있다.
“한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 있으십니까?”
진하령이 그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추호를 쳐다보았다.
“항상 그 말씀으로 거절하셔서요. 핑계로 하시는 말씀인지, 혹시라도?”
“있어.”
짐짓 놀라는 척하는 추호에게 그녀가 되물었다.
“알면서 물었잖아? 우리 사이에 왜 모른 척해?”
“죄송합니다. 전 그냥 아가씨께서 그 사람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씀하고 싶으실 것 같아서요.”
추호는 알고 있었다. 진하령의 마음에 검무극이 자리 잡고 있음을.
그녀는 아무에게도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그 녀석처럼 고백이라도 질러버리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추호는 걱정했다. 이러다 혹시 화병이라도 날까 봐. 그래서 자신에게라도 털어놓기를 바랐다.
“내가 걱정돼?”
“아닙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그냥 가끔 보고 싶고. 이런 날이면 한 번 더 보고 싶고. 아주 가끔 꿈에 나오고. 뭐 그 정도니까.”
그리고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면.
―저기 저 하늘색 보여? 내 검강 색이다.
그 사람 말도 생각나고.
진하령은 검무극이 떠나기 전에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본교 본단 근처에 술맛 좋고, 주인장 좋은 주점이 있다. 다음에 한 번 초대하지.
거짓말쟁이.
하긴 어디 검무극이 거짓말쟁이라서 그렇겠나? 그나 자신이 태어난 장소가 문제겠지.
진하령은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로 좋아하는 겁니다, 그게.’
하지만 추호는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두 사람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진하령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러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서 사람 놀라게 하겠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그날이 오늘인가 보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서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잘 지냈어?”
진하령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지금 막.”
다행히 추호와 나눴던 대화를 들은 것 같진 않았다.
그녀가 추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오라버니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줘.”
“알겠습니다.”
추호는 곧장 명에 따랐다.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을 겸한 명령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만, 검무극은 예외로 뒀다. 어차피 그가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자신이 있어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에 뒤에 와서 서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잔할까?”
“좋지.”
진하령은 기분이 좋아졌다. 검무극을 만났을 때만 느껴지는 그 특유의 설렘이 있다.
두 사람은 예전에 처음 만났던 객잔으로 가서 국수와 술을 시켰다.
검무극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림맹주를 설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녀와의 관계도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녀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너스레를 떨고. 이건 자신의 삶이었으니까. 적들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어떻게 지냈어?”
진하령의 물음에 검무극은 호들갑을 떨었다.
“말도 마. 얼마나 대단한 일이 있었는지 못 믿을걸?”
“말해줘. 싹 다.”
검무극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허풍은! 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정말 다 듣겠다는 기세였다.
“오라버니에게 들었어. 사도맹 소맹주와 함께 사도맹으로 갔다는 것. 우리 맹에서도 얼마나 촉각을 세우고 있었는지 모르지?”
이렇기에 찾아온 것이다. 무림맹에서는 천마신교와 사도맹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에.
“몰랐어? 당신이 움직이면 이제 무림도 같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
“미꾸라지가 흙탕물 만들까 봐 걱정하는 거지.”
이젠 진하령은 안다.
할아버지나 무림맹이 걱정하는 건 눈앞의 이 용이 승천할 때 움켜쥐게 될 여의주가 저 푸른 하늘빛 여의주일지, 핏빛 가득한 여의주일지 그걸 걱정하고 있다고.
“사도맹 쪽은 괜찮아?”
검무극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녀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당신이 갔으니까.’
그녀에게 검무극은 이런 사람이었다.
“내가 명색이 무림맹주 손녀인데, 사도맹이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 안도하다니!”
그녀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친구 일이기도 하니까.”
“친구?”
“친구의 친구는 친구지.”
“할아버지가 들으면 기절하실 거야. 사도맹 소맹주까지 친구가 됐다면. 너 하나로 충분해.”
검무극과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좋았다. 무림의 운명을 이야기해도, 오늘따라 국수가 짜다는 이야기를 나눠도. 무슨 말을 해도 다 이해하고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에게 새로운 견해를 보여 줄 사람이었으니까.
“참, 이안은?”
“요즘 바빠. 일 보러 나가 있어.”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을 귀영대 조장으로 뽑으려고 떠난 이안이었다. 그녀 인생 처음으로 중원에서 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있었다.
“보고 싶다, 이안.”
“보면 되지.”
“말이야 쉽지.”
“어려울 게 뭐가 있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우리가 와도 되고.”
“그건 당신 무림 이야기고. 내 무림에서는 안 돼.”
“우린 같은 무림을 살고 있어.”
진하령은 말없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과연 같은 무림일까? 아직도 그녀에게 검무극은 불쑥 나타났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꿈 같은 사람인데.
“사실 너와 진 대주에게 부탁이 있어서 왔어.”
“어떤 부탁?”
“맹주님을 뵙고 꼭 설득할 일이 있어. 내가 직접 설득하다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두 번째, 세 번째 대비책이 있어야 해.”
“내가 두 번째 대비책이야?”
“진 대주가 세 번째고.”
“대체 무슨 부탁인데?”
“당신 오라버니 만나서 한 번에 이야기하자.”
진하령은 달마다 수십 명의 후기지수를 새롭게 만나지만, 언제나 답답하고 지겨웠다. 하지만 검무극을 만난 지 채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때마침 추호가 객잔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검무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세 번째 대비책을 만나러 가 볼까?”
* * *
진하군은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다.
그의 열기로 연무장은 화끈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요즘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검무극을 상대하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초조함이 있었다. 어디 검무극뿐이겠는가? 현실적인 경쟁자인 비사인의 눈빛에서도 분명 열기를 느꼈다.
변한 것은 수련뿐만이 아니었다.
검무극에게 말했듯 사람을 대할 때도 더 잘 살피려 했다. 예전이라면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갈 일도 한 번 더 생각해 보았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 입장을 헤아려 보았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멸마대 무인 하나가 휴가를 요청했다. 임무와 겹친 휴가였지만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예전이라면 여기까지였을 텐데.
진하군은 그를 따로 불러서 휴가 이유를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집안에 후계자 선정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대부분 명문의 자제들로 이뤄진 멸마대였기에, 이런 문제들이 흔히 발생하는 것이다.
진하군은 이유를 묻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혹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도록.
그는 도움은 거절했지만, 그 말을 해 준 것에 크게 감격했다.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인데, 어찌 그런 생각이 없겠는가? 하지만 직접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진하군은 새삼 느꼈다. 사람 사이에서 말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당연히 내 마음을 아는 줄 알았지.
상황이 다 끝나고서 하는 이런 말은 핑계다.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한가?
아니, 직접 말해줘야 상대는 안다.
그리고 해 보니까 알겠다. 뱉은 말은 꼭 지키려는 자신의 성격은 말을 하기도 쉽지 않다는 걸.
만약 수하가 진짜 도와달라고 하면? 집안사람 중 누군가를 언급하면서 그에게 압력을 가해 물러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면?
거기까지 들어줄 각오가 있어야 애초에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당황하지 않고, 좋아 내게 맡기게. 라고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
문득 검무극이 떠올랐다.
온갖 말을 다 하는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다 책임질 각오를 하고 있을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회피하는 검무극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당신도 참 피곤하게 사는구나.’
해 보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는 그였다. 자신의 무뚝뚝함도 어쩌면 현실 도피였을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그곳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검무극과 진하령이었다.
“오랜만이야.”
마침 검무극을 떠올리고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또 한동안 못 봤다고 그새 서먹서먹해졌네. 나야, 자네 친구.”
너무 반가우니까 오히려 반가움을 잘 드러낼 수가 없었다.
“여긴 왜 온 건가?”
“무뚝뚝하긴! 왜긴 왜야? 자네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러자 옆에 있던 진하령이 일러바쳤다.
“거짓말이야. 우리 도움이 필요해서 왔대.”
진하군은 벌써 신이 난 동생이 걱정되었지만, 흥분되기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인데?”
“사도맹주를 본교 앞 단골 주점으로 초대했네.”
순간 진하군은 초대한 사람을 비사인이라 생각했다. 비사인을 초대했으니 자네도 같이 가세, 그 말을 하러 왔다고 착각한 것이다.
“나는 안 갈 거네.”
진하군이 말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고는 검무극과 진하령이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진하군은 흠칫하며 다시 물었다.
“누굴 초대했다고?”
“사도맹주.”
그제야 진하군이 두 눈을 부릅떴다.
자신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앞서 잘못 들은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에는 사도맹주를 무림맹 본단 앞 주점에 초대하는 일은 아예 없었으니까.
하지만 검무극은 언제나 그 한계선을 훌쩍 넘어선다. 훌쩍 넘어와서, 역시 자신에게는 없는 이유를 말한다.
“그냥 술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이번에 사도맹에 갔을 때 맹주를 초대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준 것이 틀림없다.
어디 진하령이라고 놀라지 않았겠는가?
“오랜만에 만나서 무슨 이런 농담을 해?”
“농담 아닌데.”
그래, 농담 아닌 줄 안다. 참으로 그답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다시 진하군이 물었다.
“사도맹주는 초대에 응했나?”
“무림맹주님이 이 만남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응하겠다고 했네.”
“순수? 마교와 사도맹이 밀담을 벌인다는 데 어찌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나?”
“밀담이라니? 이렇게 다 까발리는 밀담도 있나?”
“그게 뭐든! 맹주님께서는 절대 허용하지 않으실 거네.”
할아버지가 마교와 사도맹을 얼마나 경계하고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나마 검무극과 친분을 쌓은 것은 손자와 손녀들과 깊은 관계가 있었고, 이후에 목숨까지 구해줬기 때문이다. 정말 예외의 경우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온 거야. 두 사람이 나와 함께 설득해 달라고.”
“애초에 우리에겐 알리지 않고 그냥 초대해 버리면 되었을 텐데?”
진하군의 떠보는 물음에 진하령도 같은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건 안 되지.”
“왜?”
“자네들과 난 친구잖아?”
사실 백자강을 초대하려는 이유는 앞으로 있을지 모를 전쟁을 막으려는 목적이다. 한데 이 초대로 무림맹이 천마신교와 사도맹이 뒤로 손을 잡았다고 여긴다면, 득보단 실이 많은 초대가 될 것이다.
“사도맹주가 내건 조건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허락을 구하러 왔을 거야.”
진하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무슨 의도인지 몰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괜한 변수를 만들지 말고 그냥 진행해 버리고, 나중에 ‘미안하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라고 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다. 검무극은 우정이란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데, 자신은 발목만 담그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두 사람이 함께 맹주님을 설득해줘.”
진하군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안 돼!”
진하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못 해. 당신이 우리 할아버지를 잘 몰라서 그래. 그 말 꺼냈다가 우린 맹에서 쫓겨날 거야.”
“쫓겨나면 본교에서 받아줄게!”
“오라버니는 후계자 되지도 못할 거고.”
“이번 기회에 권력욕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때?”
“좋은 말씀이십니다, 천마신교 후계자님!”
그러자 검무극이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아! 친구들에게 버림받을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하군의 마음에 하나의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정말 예상 못 했을까? 저 똑똑한 사람이?’
어쩌면 단순히 할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설마?’
그의 마음에 떠오른 말을 내뱉은 것은 자신보다 눈치는 더 빠른 동생이었다.
“설마 할아버지까지 초대할 생각은 아니지?”
절대회귀 379화
제379회 그대 눈빛은 그대로인가?
검무극은 대답 대신 진하령에게 물었다.
“어느 쪽이 어려울 것 같아? 허락받는 것과 무림맹주님을 초대하는 것.”
그 비교에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둘 다 불가능해. 할아버지가 마교주나 사도맹주와 한자리에서 술을 드실 리는 절대 없으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 난 불가능한 임무 수행하러 맹주님 뵈러 가야겠다. 혼자 쓸쓸히 외롭고 고독하게.”
입구까지 걸어가도 두 사람이 말리지 않자, 검무극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너무들 하네. 친구들 이러기야?”
그때 진하군이 물었다.
“왜 사도맹주를 초대한 건가? 단지 술대접을 하려고 마교까지 부른 것은 아닐 테고. 아니, 설령 자네가 그런 뜻이었다고 해도 사도맹주가 응하지 않았겠지. 사도맹주를 어떻게 설득했나?”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론 두 사람은 이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두 사람에게 아버지나 사도맹주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사도맹주가 천마신교 앞에서 술을 마시면 전쟁이 없어진다고?”
“그럴 거라고 믿어.”
진하령도 믿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대답을. 검무극의 대답이 단호해서가 아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목숨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아까 했던 말 진짜야? 맹에서 쫓겨나면 받아준다는 말?”
“환영식까지 열어주지.”
진하령이 잠시 그 장면을 떠올려 보았다. 맹에서 쫓겨난 자신이 짐보따리를 짊어진 채 호위인 추호와 함께 마교 정문에서 비를 맞고 서 있는 모습을.
그러면 문을 열고 나오며 검무극이 너스레를 떨겠지.
―이제부터 네가 내 시녀다.
그런 장난을 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래, 검무극에 대한 믿음이 단지 목숨 빚 때문만은 아니지.
“좋아, 나는 도울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보니 이 결정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는 끼지 마. 그랬다간 정말 후계자 자리 날아갈 테니까.”
진하군이 동생을 쳐다보았다.
‘어찌 저리 쉬울까?’
자신의 마음에는 이토록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는데. 자신을 둘러싼 한계선이 그어져 있는데.
한 번도 넘어본 적 없는 선이다. 후계자가 안 되는 인생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할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삶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생은 그 선을 훌쩍훌쩍 잘도 뛰어넘는다. 그런 점에서 검무극과 진하령은 닮은 구석이 있다.
진하군은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저 선을 뛰어넘는 것은 객기일까? 아니면 새로운 도전일까?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기에 진하군은 갈등했다.
“오라버니는 고민하지 말라니까. 당신도 오라버니 처지는 이해하지?”
이해한다고 말하는 대신 검무극은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계를 넘어서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신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오?’
진하군의 시선이 진하령을 향했다.
“너 혼자서는 안 돼.”
“뭐?”
“혼자 나섰다간 정말 쫓겨난다고. 둘이 같이 나서야 적어도 쫓겨나는 일은 없겠지.”
“오라버니도 돕겠다고?”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라버니가 이런 결정을 할 줄 몰랐다.
“정말 권력욕을 버리기라도 한 거야?”
“그 반대야.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다.”
진하군이 돕겠다는 이유도 단순했다.
“전쟁은 나도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결국 그도 검무극의 말을 믿는다는 의미였다. 초대할 이유가 있으니 초대하는 것이라고.
검무극은 진하군이 얼마나 큰 결정을 내렸는지 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걸었다.
“자네가 쫓겨나면 내가 무림맹 앞에서 복귀시켜 달라고 항의하겠네.”
조금 전 진하령이 천마신교 정문을 떠올렸다면 진하군은 무림맹 정문을 떠올렸다.
무림맹 정문 앞에 ‘내 친구 진하군을 후계자로 복귀시켜라!’라는 현수막을 펼치고 서 있는 검무극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사람이라면 하고도 남지.’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고맙네. 이 결정에 자네가 뭘 걸었는지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진하군이 배운 것이 이런 점이다.
우리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하냐고? 검무극은 이렇게 말해준다. 고맙다고. 잊지 않겠다고.
이번 일을 돕기로 마음먹자 자연스럽게 진하군과 진하령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래서? 당신 계획은?”
* * *
가장 먼저 진패천을 찾아온 사람은 진하령이었다.
“어쩐 일이냐?”
“할아버지 뵙고 싶어서 찾아뵈었죠.”
패도적인 성격이라지만 손녀 사랑만큼은 확실한 진패천이었다. 게다가 한때는 그렇게 까칠하게 굴던 손녀였는데, 최근에는 확실히 철이 든 느낌이다.
“오늘 후기지수 모임 있었지?”
“네, 잘 마쳤어요.”
“요즘도 너 좋다는 후기지수들이 있느냐?”
“그럼요. 오늘도 있었는걸요?”
“개중에 마음에 드는 녀석 없느냐?”
“할아버지처럼 멋진 남자를 찾기가 어렵네요. 젊어서 여협들에게 인기 많으셨죠?”
진패천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사람은 보기 힘든 손녀 전용 미소였다.
“오늘따라 네 말이 달콤한 걸 보니 내게 부탁할 거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오해세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거든요.”
“나는 너만 좋다면 내 욕심 부리지 않고 받아줄 생각이다. 알지 않느냐? 난 시종도 손주 사윗감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다.”
진패천은 검무극을 언급하면서 손녀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검무극 때문에 마음을 못 잡나 걱정이 되었다.
“그때 그 사람 붙잡을 걸 그랬어요.”
아쉬움이 담긴 말에 진패천은 손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농담이에요, 할아버지.”
“당연히 농담이어야지.”
진패천이라고 아쉽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평범한 마인 출신만 됐어도, 무리해서라도 어떻게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무슨 소리를. 자신의 손녀를 어찌 마인과 혼인시키겠는가? 그만큼 검무극이란 아이가 특출났기에 드는 미련일 뿐.
그때 진하군이 맹주전으로 들어왔다.
진패천에게 정중히 인사를 마치자 진하령이 물었다.
“우리 오라버니, 요즘 얼굴 보기 힘드네.”
두 사람은 서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연기했다.
“요즘 수련 삼매경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너는 어쩐 일이냐?”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왔지. 오라버니는?”
그러자 진하군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밖에 마교 소교주가 와 있습니다. 맹주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왔다고 합니다.”
셋이 몰려오면 작당한 것처럼 보일 것이라, 이렇게 분산해서 모인 것이다.
진하령은 놀라는 모습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저 문밖에 검무극이 서 있을 거란 생각에 괜히 떨렸다. 연기가 필요 없었다.
“그 사람 들이기 전에 맹주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마교 소교주가 무슨 부탁을 할지 모르겠지만, 만약 들어주실 만한 내용이면 제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평소에 하지 않는 부탁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에 멸마대 작전을 펼치면서 아이들 납치 사건을 처리한 것을 아실 겁니다. 오면서 소교주에게 물어보니 그 아이들에게 걸린 세뇌를 풀고,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혹 알고 계셨습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와 관련한 내용을 보고받은 상태였다. 아이들을 무사히 구해냈다는 소식에 진패천은 크게 기뻐했다. 그랬기에 검무극이 왔다는 말에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그 일은 멸마대 일이었으니, 결국 제가 소교주에게 갚아야 할 빚이 생겼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걸 갚고 싶습니다.”
진패천은 흔쾌히 손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마.”
잠시 후 검무극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정중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맹주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어서 오게.”
진패천은 차분한 시선으로 검무극을 살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눈빛은 더 맑고 깊었다.
‘그때보다 무학의 경지가 더 올라섰구나.’
볼수록 탐이 났기에, 그랬기에 더 아쉬웠다.
검무극이 진하령과도 처음 만나는 것처럼 인사했다.
“진 소저, 오랜만이오. 잘 지내셨소?”
“시종이 없어서 불편해요.”
그녀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진 소저라면 언제든지 시종 노릇 해드릴 수 있소.”
너스레인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는 설레는 말이었다.
“사도맹에서 활약은 전해 들었어요. 아이들을 다 구해냈다면서요? 정말 훌륭하세요.”
그녀가 한 번 더 반복해서 검무극의 공을 치켜세웠다. 오늘 이 자리는 할아버지의 허락을 얻는 자리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다행히 운이 좋았을 뿐이오. 사도맹에서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고.”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검무극은 차분한 어조로 오늘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이번에 사도맹 일을 처리하면서 사도맹주님께 신세를 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맹주님을 본교 앞 제 단골 주점으로 초대했습니다.”
진패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기도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겨울 창문을 열어젖힌 것처럼 주위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부드러웠던 맹주의 눈빛이 얼음송곳처럼 날카롭게 날아드는 가운데 검무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사도맹주께서는 맹주님께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가서 오해가 안 생기도록 말씀드리겠다고요. 그래서 찾아뵈었습니다. 별일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고요.”
진패천의 표정은 굳었고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지금 그에게는 마교가 사도맹과 손을 잡는다는 말로 들렸다.
진하군과 진하령은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벌써 호통이 떨어졌을 것이다.
진하령이 할아버지 대신 차갑게 말했다.
“사도맹과 밀담을 나누겠다는 말이군요. 어차피 들킬 일이니, 선수 쳐서 자백하는 건가요?”
“어차피 들킬 일은 맞소. 하지만 이 일은 비밀회담이 아니라 사도맹주와 저와 개인적인 일이오. 모두가 보는 주점에서 만날 테니, 전 무림이 다 알게 되겠지요.”
검무극이 비밀회담이 아님을 강조했다.
“정말 비밀리에 만나려면 마가촌에 있는 주점에서 만나겠소?”
“왜 장소를 그곳으로 정했죠?”
계획에 없던 질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개인적인 궁금함이 담긴 질문이었다. 전에 자신을 초대하고 싶다고 말한 곳이기도 했기에.
“제가 사도맹주를 모시려는 곳이 풍류주점이란 곳이오. 그곳 주인장 이름은 조춘배지요. 사람 좋고, 솜씨 좋고, 분위기도 좋고. 거기 이 층에 앉아서 술 한 잔 마시면서 바깥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소.”
진하령은 궁금했다.
그는 그곳에서 무엇을 볼까?
“그곳 탁자는 튼튼해서 무림인이 와도 부서지지 않소. 그곳에 오는 손님들은 사도맹주가 와도 놀라기는 할지언정 겁을 먹지는 않을 거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검무극의 진심 어린 대답이 나왔다.
“거기 내 마도가 있기 때문이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알 수 없는 말이었기에, 진하령은 더 가보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원래 계획대로 돌아와서 본심과는 다른 냉정함을 드러냈다.
“당신은 그럴듯한 말로 우릴 현혹하려 하지만, 이번 일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에요.”
진하령이 나서서 반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검무극의 의견에 찬성이라도 하는 기색을 보이면, 할아버지는 더 걱정하시고 분노하실 것이다.
반면 진하군은 말없이 서 있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미리 말을 해뒀으니 난감하다는 기색만 살짝 드러냈다.
“사도맹과 손을 잡든 말든 당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적어도 우릴 기만하진 마세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맹주전에 울려 퍼졌다.
“기만이라니요?”
“소교주 당신과 사적인 만남이라지만, 신교의 교주가 사도맹주를 만나러 오지 않을 리 없잖아요?”
진패천 역시 그 점을 걱정했다. 결국 천마와 사도맹주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만나면 전음을 주고받겠죠? 두 사람의 무공이 워낙 고강해서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밖에 안 계시고. 결국 당신들과 사도맹은 은밀히 일을 꾸밀 수도 있겠지.”
그녀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함부로 음모를 꾸밀 수 없다는 것을 은근히 강조했다.
“오해이시오.”
진하령이 진패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절대 허락하시지 마세요.”
진하령이 먼저 흥분해서 분노하자 진패천은 화를 낼 기회를 놓쳤다. 검무극 편을 들 것 같은 그녀가 화를 내자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령아, 너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거라.”
“이건 할아버지와 본맹을 기만하는 짓이에요!”
“그만하래도!”
“죄송해요, 할아버지.”
진패천이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진하군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진하군은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당신 무슨 속셈이오? 사도맹주를 유인해서 죽일 작정이오?”
순간 진패천은 내심 흠칫했다. 마교와 사도맹이 손을 잡고 수작을 부리려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지, 마교가 사도맹주를 죽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 역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의문이었기에 진패천은 검무극의 반응과 대답에 주목했다.
순간 검무극은 당황해서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 이번 기회에 사도맹을 치려는 것 아니냐는 말씀이오.”
“말도 안 되는 오해 마시오.”
“이번 회합에서 어떤 불의의 사고로 사도맹주가 죽게 되면, 사도맹 소맹주가 맹주 자리에 오르겠지. 그 사도맹 소맹주는 당신과 친하지 않소?”
진하군의 말을 진하령이 이어받았다. 오늘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럼 당신들이 사도맹을 손아귀에 넣겠군! 당신이 왜 그렇게 사도맹 소맹주와 친해지려 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군요.”
진패천은 그럴듯한 추측이라 여겼다. 정말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지 않나? 게다가 매사 자신만만하던 검무극이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다소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제 말이 틀렸나요?”
“나는 단지 허락을 받으러 왔을 뿐이오. 허락해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지, 이런 억측까지는 부리지 마시오.”
검무극이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맹주님 뜻도 손녀분과 같으시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더는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물러나려는 모습에서 진패천은 수상함을 느꼈다. 상식을 벗어난 이번 일에는 틀림없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정사마의 균형이 깨어진다?’
문득 진패천은 천마 검우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면 항상 먼저 떠오르는 건 차갑고 건방진 그의 눈빛이다. 절대 마교 교주만으로 끝내지는 않을 거라는 그 야망 가득한 눈빛 말이다.
‘아직도 그대 눈빛은 그대로인가?’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하며 돌아섰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검무극이 황급히 돌아서던 그때.
“잠깐.”
곧이어 흘러나온 진패천의 충격 선언.
“이번 회합에 나도 참석하겠네.”
깜짝 놀란 검무극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뇨, 안 오셔도 됩니다. 그냥 본교와 사도맹 간의 회합에 오해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오실 필요 없습니다!”
검무극의 만류에 진패천은 선언하듯 단호히 말했다.
“나도 간다고 했다!”
절대회귀 380화
제380회 혼자일 때도 다 막아냈는데.
진패천은 참석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다.
검무극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이번 회합에 맹주님도 초대하겠습니다.”
검무극은 마지막까지 연기에 충실했다.
이 결과에 진하령은 놀람을 넘어 경탄하고 있었다. 이 결과를 위해 자신이 큰 역할을 했지만, 정말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결국 저 사람의 계획대로 되었구나.’
이 사람이 적이라면? 나나 오라버니가 당해낼 수 있을까?
이전에도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을 오늘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어쨌든 함께 세운 계획이 성공한 것은 성공한 것이고. 이젠 무림맹주의 천마신교 방문은 현실이 되었다.
진하령은 이제 작전 삼인방의 선봉에서 무림맹주 손녀로 돌아왔다.
“맹주님의 안위는 어떻게 보장할 거죠?”
무림맹주 행차인데 어디 절세고수들이 한둘이 따르겠는가? 하지만 초대를 했으니 그의 안전을 책임질 쪽은 천마신교였다.
“본교가 책임지겠소. 귀한 분을 초대했는데 우리가 어찌 소홀하겠소?”
“당신들로부터는 누가 지키죠?”
농담이라 여기고 검무극이 웃었다. 하지만 진하령은 진지했다.
“당신이 지켜주겠다고 약속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책임지겠다고.”
그녀의 눈빛이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 이 모든 일이 당신 믿고 한 거라는 것.’
그녀는 천마신교보다 검무극을 믿었다. 정말 그랬다. 쫓겨나서 마교 정문 앞에 비 맞고 서 있을 각오까지 하고서 벌인 일이었으니까.
검무극은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약속하겠소.”
그 맑고 깊은 눈에 깃든 진정성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진하령은 안도했다.
‘할아버지, 속여서 죄송해요. 하지만 전 이게 옳다고 믿어요.’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검무극의 말을 믿었다. 이 선택이 결국엔 할아버지를 위한 길이 되리라는 것도.
검무극이 진패천에게 정중히 말했다.
“본교 군사께 말씀드려서 일정을 조율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결정을 내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셋이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진패천의 마음에 백자강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이도 오랜만에 보겠군.’
검우진보다 한 수 아래로 보고 있지만, 백자강 역시 보통 인물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드는 한 가지 걱정.
“한데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도맹주가 마음을 바꾸지 않겠나?”
“제가 가서 말씀드려야죠.”
“자네가 직접 간다고?”
“이런 중요한 변동사항을 전서로 전할 수는 없으니까요.”
무림맹주와 사도맹주를 마교 본단 앞에 앉히는 일이었다. 필요하다면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왔다 갔다 해야 할 것이다.
검무극이 정중히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본교 앞 주점에서 뵙지요.”
“그래. 자네 마도가 어떤지 어디 구경해 보세.”
진패천은 진하군과 진하령에게 검무극을 배웅하라고 함께 내보냈다.
홀로 남은 진패천이 허공에다 말했다.
“군사에게 혼나겠군.”
그러자 허공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교주가 정말 사도맹주를 죽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모르지. 그 사람 속을 내가 어찌 알겠나? 십여 년 전에 봤던 검우진은 적어도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지. 한데 강산이 변한 지금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어떻게 알겠나?”
진패천이 천천히 걸어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맹주전 앞에 검무극과 진하군, 진하령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회합에 가겠다고 결정을 내린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마교와 사도맹이 손을 잡고 수작을 부릴까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고, 저기 저 검무극이란 젊은 무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그 호락호락하지 않은 백자강을 마교 앞까지 끌어냈을까?
게다가 진하군과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검무극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전부였다면 군사와 의논도 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진패천이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천마 검우진을 다시 만나봐야 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 진패천은 검우진에게서 무림일통의 야망을 읽었고 언젠가 한 번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정파 무림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고.
이제 더 나이를 먹기 전에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눈빛이라면.’
그 눈빛이 진하군을 바라보게 할 수는 없다. 손자가 감당할 수 없는 눈빛이니까.
* * *
맹주전을 나오자마자 진하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나? 환호성을 질러도 모자랄 판에.”
진하군은 검무극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며 동생에게 말했다.
“어쩌면 우린 우리 손으로 맹주님을 위기에 빠뜨렸을지도 몰라.”
열기에 휩싸여서 밤새 정신없이 놀다가 아침이 된 느낌이었다. 검무극과 어울리다 보면 항상 이런 느낌을 받는다.
“넌 걱정 안 되냐?”
반면 진하령은 태평했다.
“무슨 걱정?”
“저 사람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러자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제발 그런 대화는 전음으로 해!”
하지만 그 말조차 무시하며 진하군과 진하령은 대화를 계속했다.
“우릴 속였을 수도 있지.”
“그렇지?”
“할아버지와 사도맹주를 한자리에서 해치려는 음모일지도 모르고.”
“그런데 넌 전혀 걱정 없어 보이는데?”
“오라버니가 내 몫까지 걱정하니까. 아니라면 내 성격상 오늘부터 잠도 제대로 못 잤을걸? 그런 의미에서 첫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던 진하군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림맹 맹주전 앞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어떻소?”
“똑같소. 여기서 보나 거기서 보나 하늘은 하늘이지. 그래서 난 여기 욕심 없소.”
검무극의 본심이 깃든 말이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자신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그러니 의심하지 말라고.
하고, 또 하고. 귀찮더라도 계속 말해줄 것이다. 의심은 필연이고, 귀찮음은 선택이니까.
“그래도 그대들하고 같이 보니 더 좋소.”
진하군은 앞서 검무극이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을 떠올렸다. 마음에 그어진 한계선을 넘으라던 그 도발적인 눈빛이.
‘당신 의도대로 넘었소. 당신 의도대로 되었고.’
그래서 자꾸 이런 농담을 하게 된다.
“이제 우릴 다 죽이려는 계획이 완성되었소?”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비슷한 상황에서 사도맹주에게 똑같이 말씀드렸소. 그건 내 방식이 아니라고. 내 방식은 결투장을 보내는 거라고. 한판 붙고, 진 쪽이 깨끗이 물러나자고. 난 뭔가를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검무극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회귀 전 자신을 돌이켜 본다면 이 말이 어울릴 것이다.
사람들이나 세상에 애정이 없소.
어쩌면 그랬기에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것이겠지.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과 세상과 스스로에게조차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그 텅 빈 인생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때문에.
외로움의 끝을 보았기에, 이제는 그 반대 방향으로 끝까지 가볼 작정이다. 설령 더 큰 아쉬움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걸어갈 것이다.
“난 노는 게 더 좋소. 저 높은 태사의에 앉는 것보다 풍류주점 이 층 자리가 더 좋소.”
이제 진하군도 진하령도 이 말을 믿는다. 그랬기에 오늘 함께 일을 꾸몄던 것이고.
떠나기 전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 일을 자신 있게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아시오?”
“뭐 때문이오?”
“아버지를 믿으니까. 내가 어떤 상황을 펼쳐놓아도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지 않으실 것을 믿으니까. 그러니까 날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들 맹주님을 믿으시오.”
“!”
검무극이 두 사람에게 경쾌하게 포권했다.
“이번에 도와준 일, 잊지 않겠소. 그리고 본교에 꼭 함께 오시오.”
진하령은 오지 말라고 명령이 떨어져도, 마차 짐칸에 숨어서라도 따라갈 작정이었다. 풍류주점에 꼭 가보고 싶었으니까.
그랬기에 이 순간의 이별이 너무 아쉬웠다.
“신교로 돌아갈 거야?”
“아니. 사도맹 간댔잖아.”
“아, 그랬지. 당신도 참 바쁘게 산다.”
검무극이 옅게 웃던 그 순간, 번쩍하면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올 때도 그랬듯이 그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버린다고?”
진하령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검무극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았다.
‘벌써 보고 싶네.’
* * *
진하령 말마따나 바쁜 인생이긴 하다.
그길로 잠잘 시간까지 아껴가며 쉴 새 없이 내달려 사도맹 본단에 도착했으니. 정말이지 쾌속보 수련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비사인이 자주 가는 객잔부터 들렀다. 오늘도 그는 그곳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면 요리 자주 먹으면 살찌시오.
날아든 전음에 비사인의 젓가락질이 잠시 멈췄다. 사도맹 소맹주에게 편식한다고 잔소리하는 세상 유일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항상 그렇듯 길 건너 골목길 사이에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 일이오? 당신네 주점에서나 볼 줄 알았는데.
―맹주님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생겼소.
―그럼 직접 가서 보고드리시지?
―의리 없게! 당신이 함께 있어야지.
―나 없이 맹주님께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려서 그런 것 아니오?
기다리고 대기하고 허가받고. 온갖 경계망을 통과해야 비로소 맹주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건 무림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진하군과 비사인은 맹주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눈치챘소?
검무극의 웃음이 전음으로 울려 퍼졌다.
물론, 그래서가 아님을 안다. 항상 일의 중심에 세워주기 위해서 먼저 찾아와 줬다는 것을 안다.
―무슨 일이오?
―맹주님과 함께 들으시오.
―사람을 또 얼마나 놀라게 하려고?
―그런 일 아니오.
―알겠소.
비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검무극이 말렸다.
―천천히 식사 다하시고 일어나시오.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데 밥이 넘어가겠소?
―그럴수록 더 잘 먹어야지. 자고로 무인은 밥심 아니겠소? 네가 백날 기다려봐라, 내가 밥을 안 먹고 일어나나. 네가 아무리 큰 사고를 쳤다고 해 봐라, 내가 안 먹고 일어나나.
비사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신 사고 쳤소?”
* * *
검무극은 비사인과 함께 맹주전에 와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회합에 무림맹주도 오기로 했다?”
“네, 그렇습니다.”
“일이 커졌군.”
“술친구 하나 늘어났다고 생각하시면 되죠.”
“그 술친구가 진패천이라.”
사도맹주 백자강은 검우진도 싫어했지만, 진패천은 더 싫어했다.
“서로 끔찍하게 싫어하는 셋이 모인다?”
두 사람의 사적인 술자리에서 정사마 삼자회담이 된 것이다.
자신이 사도맹주가 된 이후, 세 사람이 한 곳에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게 원래 자네 계획이었나?”
“아닙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맹주님 두 분만 만나 뵙게 하려고 했습니다. 한데 중간에 생각을 바꿔 먹었습니다.”
“무림맹주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보다 초대가 더 쉬워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무슨 이유인가?”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세분이 함께 만날 기회는 당대에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
귓가에 소름이 돋지 않은 걸 봤을 때, 검무극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못 만나는 게 어때서?”
“나중에 돌아봤을 때, 저라면 아쉬울 것 같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는데 셋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없었구나, 하고요.”
그러고 보니 백자강은 삼자회담은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과 다시 만날 때는 누군가는 죽게 될 날이라고 여겼으니까.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던 비사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볼 기회만 되면, 이렇게 내게 달려오는 거요?’
그런 점에서 자신들 시대에서는 셋이 못 볼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저 검무극이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서 만나려 들 테니까.
“이 말을 해주려고 온 건가?”
“이번 회합이 맹주님 덕분에 시작되었는데 당연히 직접 와서 말씀드려야죠.”
“내가 싫다고 한다면? 무림맹 그 늙은이 답답해서 싫다고 한다면?”
“그래도 모시려고 노력해야죠. 원하시는 것,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해내겠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비사인을 눈앞의 검무극보다 멋지게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검우진의 그 건방진 눈에 부러움을 가득 채우는 거다.
“참석하지. 주점에서 보세.”
검무극이 활짝 웃으며 예를 갖췄다.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맹주님은 화끈하신 분이십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백자강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 회합에서 자네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뭔가?”
검무극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사인이와, 무림맹 진 대주. 우리 셋이 모이면 참 재미있습니다.”
듣고 있던 비사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재미있는지 없는지 그건 우리에게도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오?
그렇게 너스레를 떨고 싶었지만 차마 사도맹주 앞에서 말을 꺼내진 못했다.
“세 분도 모이면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제 목적은 이번 만남이 즐거운 만남이 되는 겁니다.”
“즐거운 만남? 분위기가 살벌하지나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겠죠.”
백자강이 한 가지 위험을 경고했다.
“이번에 우릴 노렸던 그자들, 배후가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자들이 이번 기회를 노리면 어쩌려고?”
검무극은 차분히 대답했다.
“괜찮을 겁니다.”
“왜 그렇게 장담하나?”
“혼자일 때도 다 막아냈는데, 이번에는 세 분이 함께시잖습니까?”
백자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은 자식 농사 이 등에 만족해야겠군.’
그 말은 적어도 무림맹 후계자에겐 이기게 하겠다는 백자강의 의지이기도 했다.
자신을 향해 불타오르는 사부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 리 없는 비사인이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비사인이 배웅을 위해 검무극을 따라 나왔다.
“정말 당신은 걱정하지 않는군.”
“내가 왜 걱정하오? 세 분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오.”
너무 뻔뻔하지 않으냐는 눈빛에도 검무극은 굴하지 않았다.
“우린 우리 무림을 살아갑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저 말이 뜬구름처럼 느껴졌는데, 이제 조금은 실체가 느껴진다. 젊은 자신들의 무림이 있다는 것이.
“호위 문제도 그렇고, 일정을 조율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뭐할 거요?”
“낮에는 마존들하고 놀고 밤에는 수련하고. 그렇게 지낼 거요. 나 노는 것 말리지 마시오!”
“좋겠소. 놀 사람도 있고.”
“당신은 나보다 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많지 않소?”
“!”
순간 비사인은 놀랐다. 팔마존보다 다섯이 많으면 열셋, 사도십삼랑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비사인은 단 한 번도 사도십삼랑과 놀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은 저 멀리 하늘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하늘 아래 저만치 사도십삼랑들이 서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도 마존들과 이 상태에서 시작했을 텐데. 아니지, 사도십삼랑은 충성심이라도 있지. 검무극은 이보다 훨씬 어렵고 서먹한 상태에서 마존들과 친해졌을 것이다.
그래, 기왕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
“오늘은 호위 임무 내려놓고 술 사 들고 경치 좋은 곳에 놀러 가세. 서로 밀린 이야기도 나누고. 참, 그대들 중에 춤 좀 추는 사람 있나?”
놀란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가운데 비사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혼자 놀기엔 날씨가 너무 좋아서.”
v
절대회귀 381화
제381회 내게 혈천도마는.
“……그렇게 되어서 이번 회합에 무림맹주도 초대했습니다.”
교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오늘 자리에는 총군사 사마명도 함께였다. 어차피 회합 일정과 호위 문제를 조율할 책임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무림맹주까지 초대했다는 말에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셨고, 사마명은 말없이 나를 응시하기만 했다.
“우리 군사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예상하셨죠?”
그럼요, 당연히 예상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흐름입니다. 이게 내가 기대한 말이었는데.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주점 주인을 구하겠다고 갑자기 출교한 소교주님이 사도맹주를 본교로 초대한 일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무림맹주에게 양해를 구하러 가셨다가 무림맹주까지 초대한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보니 조춘배 부부 구하러 나갔다가 여기까지 왔구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면 이 모든 일은 조춘배의 운명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바쁜 분이신데, 큰일을 안겨드렸습니다.”
“큰일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일을 저지른 사람이 소교주가 아니고, 또 이 자리가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아느냐며 호통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소교주께서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칭찬이시죠?”
사마명의 표정이 말했다. 칭찬이겠습니까! 물론, 아버지 앞이었으니 마음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칭찬이죠.”
그는 ‘다만……’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잔소리를 쏟아붓고 싶은 표정이었다.
사마명을 이해했다. 평생을 군사로 살아온 그는 변수와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이번 일은 그의 군사 생활 중 가장 큰 사건일 테니까.
“준비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특히 삼자회담이 처음인 만큼 여러 혼란도 예상되고요. 그중에 가장 큰 문제는 호위 문제입니다. 무림맹이나 사도맹 측에서는 최대한 많은 고수를 데려오려 할 겁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고가 터질 확률은 높아지겠지요. 발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최소한의 호위만 거느리고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사전 조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양쪽 군사들과 신경전을 벌여야 할 사람이 바로 사마명 본인이었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쩌겠나? 운명이 우릴 이렇게 이끌었는데.
사마명에게서 시선을 돌려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회귀 전이었다면 저 눈빛에 덜덜 떨었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 보지도 못했을 거다. 그랬기에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아가기는커녕 뒷걸음질만 쳤던 거였고.
아버지는 별생각 없이 날 보고 계시는 거다. 사고나 치는 저놈을 어쩌나, 쯧쯧 하시겠지. 괜히 여기서 더 나아가 내게 실망하지 않으셨을까, 날 소교주로 삼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까, 혹시 형 생각을 하실까?
혼자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오해란 놈이 그 날개를 모두 찢어버린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화 많이 나셨습니까?”
“당연히! 누구 마음대로 삼자회담이냐? 군사는 당장 무림맹과 사도맹에 연락해서 취소한다고 전하게!”
아버지의 말소리가 교주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는 짜증이나 분노는 담겨 있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명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대신 화를 내주시고 있음을. 그건 나를 위한 호통이기도 했다.
“안 됩니다, 아버지!”
“안 되긴!”
사마명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고정하십시오, 교주님. 이미 소교주가 약속하고 왔으니 이번 일은 이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마명의 위신도 세워주고 그가 내 편을 들어줄 기회도 주는 것이다.
“군사님,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소교주께는 이미 군사가 있어서요.”
내 군사로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지, 딱 그런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뒤끝 있는 우리 총군사님이시다.
“너무 하십니다!”
이렇게 사마명이 농담을 해줘서 분위기는 다소 풀어졌다.
나는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과연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두 맹주를 보고 싶어 할까? 이렇게 열심히 봐도, 참 알기 어려운 아버지다.
어쨌든 사고 친 건 친 거고. 아버지께 꼭 드릴 말씀이 있었다.
“이번 회합은 세 분의 회합이지만, 우리 세 사람에겐 큰 영향을 끼칠 겁니다. 우리가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인생에서 단 한 번 있을, 교주와 맹주들의 만남이니까요.”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했던 그 말을 전했다.
“아버지 믿고 저질렀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입가에 그 특유의 비웃음이 지어졌다. 오랜만에 봐도 잘 어울리십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는데 뒤통수가 뜨겁다.
그러게 왜 무림일통을 꿈꾸십니까? 저는 끝까지 막을 겁니다, 아버지.
참, 뒤통수를 달구는 시선은 둘이 아니고 셋이겠지?
천마전을 나서기 전에 허공에 소리쳤다.
“휘 아저씨! 죄송합니다.”
호위인 휘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삼자회담에 신경이 곤두설 또 한 사람이 그였으니까.
* * *
“어르신!”
교주전을 나온 후, 곧바로 향한 곳은 혈천도마가 있는 남도종이었다.
정말 헤어진 가족을 상봉하듯 혈천도마의 거처로 달려갔다. 지난번에 권마만 보고 다시 출교했기에, 혈천도마와는 오랜만의 상봉이었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걸어가서 창으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뜻밖의 광경.
혈천도마는 침상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직 주무실 시간이 아닌데.’
그냥 돌아서려다가 흠칫했다. 혈천도마가 낮잠이라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다시 돌아서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깨울까 봐 기척 없이 걸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침상에서 책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앞에 서서 혈천도마가 새로 산 책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나 걱정돼서 들어온 것 아니었냐?”
돌아보니 혈천도마가 눈을 뜬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닌데요?”
아니긴. 순간적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방에 들어섰을 때 혈천도마가 숨을 죽이는 기운을 느꼈기에, 슬쩍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숨소리 확인하러 다가오면 확 놀라게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제가 숨소리 확인을 왜 합니까? 어르신이 어디 침상에서 돌아가실 분이십니까? 전장에서 화려하게 싸우다 멸천대도에 기댄 채 가시겠지요.”
“이놈아! 늙은이에게 죽는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느냐?”
하지만 말과는 달리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꿈꾸는 마지막이기도 했으니까.
“한데 평생 안 주무시던 낮잠을 주무십니까?”
“가끔 잔다. 너도 나이 먹어 봐라.”
기분 탓일까? 평소 꼬장꼬장하던 목소리보다 힘이 빠져 있었다.
“나갔던 일은 잘하고 왔느냐?”
“저 사고 쳤어요.”
“그렇게 싸돌아다니는데 사고 안 치는 게 이상하지. 무슨 사고?”
아직 이번 일은 아버지와 사마명만 알 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극비였다.
“사도맹주를 풍류주점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누굴 초대했다고?”
“사도맹주요.”
“내가 아는 그 사도맹주? 백자강?”
“아십니까?”
“알지.”
참 발도 넓고 아는 사람도 많은 그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의심 많은 사람이 네 초대를 받아들였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혈천도마가 옆에 놓인 다탁에서 식은 차를 부어 마셨다.
“한 명 더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혈천도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도맹주를 초대했는데 감히 누가 문제를 일으키겠느냐? 무림맹주만 아니면 되지.”
잠시 흐르는 정적.
흠칫한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을 껌벅였다.
“아니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혈천도마는 다시 물었다.
“아니잖아?”
“…….”
“설마?”
“왜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짐짓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시늉을 했다.
“저도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너스레를 떨었지만, 혈천도마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날 향한 그의 눈빛이 깊었다.
“무림맹주까지 초대에 응했다고? 대체 어떻게? 아무리 너라도 그렇지.”
“저 때문에 초대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세 분이 한 번쯤은 서로를 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렇지 않으면 이번 일이 이뤄졌겠습니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혈천도마가 차가운 기세를 드러내며 말했다.
“두 맹주가 본교로 온다? 이거 한 번에 양쪽을 정리할 기회군.”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말한 후 혈천도마가 재빨리 덧붙였다.
“교주가 이렇게 생각하면 어쩌려고?”
혈천도마는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
솔직히 확신까진 못 한다. 그냥 아버지를 믿는 거지.
“아들이 초대한 손님이니까요.”
“아들보다 대업을 더 중요시한다면?”
“그땐 어르신이 말려주십시오. 오직 어르신만 말릴 수 있을 겁니다.”
우린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곳으로 서대룡이 들어왔다.
“어? 소교주님!”
나를 본 서대룡이 반갑게 다가왔다.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뭐야? 눈빛이 달라졌는데?”
못 본 사이에 서대룡의 무공에 큰 성취가 있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꾸준히 조금씩 실력이 늘었다면, 오늘 보니 확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
“어제 사부님께서 제 임독양맥을 타통시켜 주셨습니다.”
검무극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는 장난을 친 게 아니라, 진짜 피곤해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임을.
서대룡 손에 약재가 들려 있었다. 마의에게 가서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온 모양이다.
“제가 몸 좀 살펴보겠습니다.”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기에 혈천도마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한줄기 내력을 밀어 넣는 것을 뿌리치지 않았다.
“괜찮다, 나는.”
다행히 괜찮았다. 워낙 무공이 강하고 내공이 심후했기에 선천진기를 쓰지 않고서도 임독양맥을 타통한 것이다.
임독양맥 타통.
일반 고수가 절세고수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 수제자로 삼았으니 언젠가는 서대룡에게 해주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날이 벌써 온 것이다. 그만큼 서대룡이 열심히 수련했기 때문이리라.
검무극이 혈천도마 대신 생색을 내주었다.
“알고는 있지? 임독양맥 타통은 워낙 위험해서 혈육에게나 해주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서대룡의 눈빛이 뜨거웠다. 서대룡 성격에 얼마나 고마워했을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전 달여온 약을 데워오겠습니다. 마의께서 그러시는데 이 약이 제일 효과가 좋다고 했습니다.”
서대룡에게 혈천도마가 잔소리를 했다.
“이놈아, 월봉 얼마나 한다고 약을 사 와?”
“저 이래 봬도 황천각주입니다. 돈 많이 법니다.”
서대룡이 약을 데우려고 밖으로 나갔다.
내가 감격한 눈빛으로 혈천도마를 쳐다보자 그는 괜히 목청을 높였다.
“녀석을 위해 해준 게 아니다. 내 제자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이제 내 제자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전 어르신이 최고로 좋습니다.”
괜히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 혈천도마는 다시 침상에 누웠다.
“됐고. 나는 더 자련다.”
그런다고 그냥 갈 내가 아니다. 침상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사실 큰소리는 쳤지만, 저라고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생각한 회합이 아니라 정말 위험한 상황이 펼쳐지면 어쩌나. 정말 아버지가 양손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통을 들고 나를 보며 웃으시면 어쩌나.”
“하소연을 왜 내게 하느냐?”
“그럼 이런 말을 누구에게 합니까?”
“가면쟁이에게 가서 해. 술쟁이나 독쟁이에게 가든지.”
나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어디 아버지만 겁이 났겠습니까? 어르신이 싫어하시지는 않을까? 혹 알고 보면 어르신이 사도맹주나 무림맹주와 제가 모르는 은원이 있는 건 아닐까? 막상 만나면 참지 못하고 죽이려 들지나 않을까?”
혈천도마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 정도 은원이면 벌써 찾아갔겠지.”
“그렇겠죠?”
“혹시 모르지. 마존 중 누군가 꾹 참고 있던 감정을 그날 터뜨려 버릴지도.”
“안 됩니다, 안 돼요!”
짐짓 괴로워하고 있는데 서대룡이 약을 데워서 들어왔다.
“사부님, 약 드십시오!”
“그 약 내가 먹어야겠다. 불안해서 내가 먼저 죽겠다.”
약을 가로채려 하자, 서대룡이 보법으로 빠져나갔다.
“이건 사부님 겁니다!”
“언제부터 어르신을 이렇게까지 챙겼다고? 서 각주, 나야, 나! 전임 황천각주이자 천마신교 소교주! 자네가 오른팔이 되어 모시는 사람!”
“사부님이 이 약 다 드실 때까지는 외팔이십니다!”
서대룡이 공손히 혈천도마에게 약을 바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귀 전 삶에서는 말 한 번 나누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는데.
지금 모습 위로 처음 만났을 때 그 우울한 표정으로 내 집무실로 들어오던 서대룡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술에 취해 혈천도마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던 모습이 그 위로 또 겹쳐졌다. 대도를 선물 받고 기뻐하던 모습도.
그리고 이 모습 위로는 또 어떤 모습이 겹쳐질까? 그 모든 모습이 겹쳐진 마지막에는 어떤 그림이 되어 남을까?
약을 마신 혈천도마가 다시 눕자 나와 서대룡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때 혈천도마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다 잘 될 거다.”
묵직하면서도 차분한 그 한마디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말 편안해졌다.
회귀했어도, 아무리 완벽해 보이고 아무리 노력하는 삶을 살아도, 나도 이런 한 마디가 필요한 사람이다. 잘하고 있다고, 잘 될 거라고. 내게 혈천도마는 이런 사람이다.
“서 조사관, 오늘 우리 어르신이랑 같이 자자.”
“좋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린 서대룡은 겁도 없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번쩍 눈을 뜨며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가! 잠은 집에 가서 가!”
혈천도마의 외침을 들으니 이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누군가 어떻게 그 험한 길을 갈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돌아올 곳이 있었기 때문이라 대답하리라.
“가라고, 이놈들아!”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았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
난 신난 얼굴로 후다닥 달려 나가며 소리쳤다.
“잠옷 챙겨 올게요! 가자, 오른팔!”
절대회귀 382화
제382회 소마님 얼굴이 크다는.
남이 들으면 믿지 못하겠지만 우린 정말 잠옷을 챙겨서 돌아왔다.
“우리 이래도 되나요?”
“당연히 되지!”
“생각해보니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황천각 일이 남았네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대룡은 한밤의 모험에서 탈주하려 했지만, 순순히 보내줄 내가 아니었다.
“우리가 언제 또 이래 보겠어? 그리고 잘 생각해봐. 말씀은 가라고 하셨지만 진심이시겠어? 이놈들이 왜 안 올까? 녀석들과 놀면 젊어지는 것 같고, 이렇게나 행복한데.”
그러시겠죠? 서대룡은 반신반의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부를 그렇게 무서워하는 그가 오늘 무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가 임독양맥을 타통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서대룡은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사부에 대한 고마움과 걱정, 임독양맥을 타통했다는 설렘, 오랜만에 나를 본 반가움, 이 모든 게 뒤섞여서 흥분한 상태였다. 오늘 사고를 쳐도 제대로 칠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렇게 다시 혈천도마의 거처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잠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잠이 들었다. 침상에 누워 곤히 잠든 그를 창가에 서서 지켜보다가 우린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푹 주무세요, 어르신.’
서대룡과 함께 천마신교 내원을 함께 걸었다.
“오랜만이네요. 소교주님과 이렇게 걷는 것.”
“우리 서 각주님이 바쁘셔서 그렇지.”
“얼굴이나 보여주시고 그런 말씀 하세요.”
내가 멋쩍게 웃었고, 서대룡이 따라 웃었다.
“시간 참 잘 가네요. 하루하루 힘들다가도, 돌아서면 며칠이 지나있고, 또 어느새 한 달이 지나있고. 원래 이런 건가요?”
무심코 물어놓고 서대룡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나이가 많은데, 세월 가는 걸 소교주님에게 묻고 있네요.”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젊은 네 세월은 아직 제 속도의 반의반도 안 내고 있다고. 아직 쾌속보 삼 성밖에 안 된다고. 세월이 대성을 이루면 기억을 모두 휩쓸며 저 멀리 달려가 버린다고.
그런 의미에서 값진 시간을 보내볼까?
“우리 극악소마님께 갈까?”
서대룡은 ‘어이쿠’하며 비명을 내뱉었다.
“차라리 제가 밉다고 하세요. 차라리 비무를 해서 두들겨 패십시오!”
“소마님이 그렇게 무섭냐?”
“그럼 안 무서워요?”
“예전에 함께 지냈던 적도 있었잖아.”
야율한의 수하들을 상대할 때 일이었다.
독왕과 자신이 작전을 펼칠 때, 서대룡은 극악소마와 잠시 지낸 적이 있었다. 직접 저잣거리에서 반찬과 요리 재료를 사서 극악소마에게 밥도 해주었고.
“그때 친해졌잖아?”
“친해지긴요. 눈도 못 마주쳤었다고요! 소교주님 언제 오시나, 언제 오시나. 얼마나 애가 탔었는데요.”
“이야기 나눠보면 좋은 분이란 걸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무서운 분이면 내가 이렇게나 좋아하겠어?”
서대룡이 살짝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 십 년쯤 지나서 오늘을 떠올린다고 생각해봐. 아, 그때 소교주님과 함께 극악소마님께 갔으면 얼마나 즐거웠을까? 그땐 뭘 그리 망설이고 겁을 냈을까?”
말을 마치고 돌아보니 서대룡은 어느새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그는 예전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
그래, 그리 쉬우면 어찌 극악소마겠는가?
“침상은 옮겨주고 가!”
저 멀리서 서대룡이 멈춰 섰다.
“침상요? 무슨 침상요?”
“넌 안 가 봐서 모르겠지만, 소마님 거처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자려면 침상 가져가야 해.”
서대룡이 눈을 껌벅였다.
“그래서 악인곡으로 침상을 가져가신다고요?”
“이 밤에 찾아가면서 침상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맨바닥에서 잘 수도 없고. 내 침상에서 편히 자고 싶어.”
“그렇다고 정말 침상을 가져가요?”
정말 가져갔다.
내 거처에서 있던 침상을 서대룡과 함께 가져갔다. 내가 앞을 잡고 서대룡이 뒤를 잡고.
경계를 서던 마인들이 놀란 눈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는 잘 개어진 깨끗한 침구와 잠옷까지 올려져 있었으니, 시선을 더욱 끌었다.
“이건 혼자서도 옮기실 수 있잖아요?
“무거워.”
“무겁긴요. 허공섭물로 둥둥 띄워서 옮기실 수도 있는 분이. 그냥 제가 들고 옮기겠습니다.”
“황천각주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지.”
“이게 더 부끄럽다고요! 어쨌든 저는 옮겨만 드리고 바로 갈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나중에 딴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악인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대룡이 예전 일을 떠올렸다.
“생각나십니까? 소교주님이 처음 극악소마님을 만나러 오셨을 때,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억나지. 여차하면 나 구하러 뛰어들려고 칼까지 가져왔었지.”
“그랬었는데 이젠 소마님의 거처까지 들어가는군요.”
“칼은 가져왔지?”
“제발 그런 농담은 말아주십시오. 그러시지 않아도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요.”
서대룡은 몇 번이나 심호흡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떨지 마. 자네도 마존이 될 사람이잖아?”
“그런 말씀 하시면 더 떨려요! 제가 마존이 된다는 사실이 아직도 세상에서 제일 놀랍고 떨리는 일이거든요. 아직도 가끔 악몽 꿉니다. 한없이 우울하고 교에 불만만 가득하던 황천각 조사관으로 사는 꿈을요. 소교주님 처음 만나러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이 제 앞에 앉아 있는 꿈을요.”
“그래도 바뀌었을 거야.”
“네?”
“자네 운명은 나 때문에 바뀐 게 아니라 스스로 바꾼 거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대룡은 아무 말이 없었다.
드디어 악인곡으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던 무면객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무면객들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들 우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요. 저기 노란 줄무늬 가면은 방금 웃었어요.
―없애버릴까?
―없애야 할 사람이 계속 늘고 있어요.
그렇게 극악소마의 거처에 도착했다.
* * *
“소마님, 오늘 하루 신세 지러 왔습니다!”
경쾌하게 들어서는 검무극을 보며 뻥 뚫린 백색 가면의 구멍 속에서 극악소마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그에게 와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다고 말할까? 누가 있어 침상에 잠옷까지 들고 찾아오겠는가?
“집에서 쫓겨나신 겁니까?”
“요즘 큰 사고를 쳐서 거의 쫓겨나기 직전입니다.”
“소교주님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러다간 소마님도 함께 쫓겨날 텐데요?”
극악소마가 소리 내서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극악소마의 웃음이었다.
“가면이 바뀌셨네요.”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청면이 떠나고 새롭게 가면을 만드는 무면객이 생긴 모양이다.
“가면은 더 편합니까?”
“청면에게 전해주십시오. 네가 만든 것보다 훨씬 더 편하다고요.”
“꼭 전하겠습니다.”
그게 청면에게 극악소마의 그리움을 전하는 것일 테니까.
이번에는 서대룡이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서대룡은 내심 놀랐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정말 먼지 한 톨 없었다. 아, 눈에 띄는 게 있긴 있었다. 벽에 그어진 기다란 줄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줄과 세로줄. 이 깔끔한 방에 왜 저건 그대로 두었을까?
“눈빛이 더 좋아지셨소.”
극악소마가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이런 말을 하니, 서대룡은 헷갈렸다.
‘칭찬이지? 이거 칭찬 맞지?’
얼마나 극악소마가 무서웠으면 ‘너 눈빛 좋으니 한 번 붙자’는 말처럼 들렸다.
“최근에 사부께서 큰 가르침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덕분입니다.”
극악소마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일 뿐이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침상은 어디에 두면 될까요?”
“편하신 대로.”
“그럼 이쪽에 두겠습니다.”
한쪽 벽에 침상을 놓았다. 극악소마의 빈방에 처음으로 가구가 놓이는 순간이었다.
왜 침상을 가져왔느냐고? 이제 극악소마가 침상에서 잠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벽이 하얀 것은 그가 익힌 무공심법과 관련이 있었지만, 그가 앉아서 잠을 청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회귀 전 극악소마는 자신과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있었다.
―극악이란 이름을 단 자가 편히 잘 수는 없지 않겠나? 내가 가진 최소한이자 유일한 양심이지.
당시에는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내뱉었던 허세라고 여겼다. 따로 화려한 잠방이 있겠거니 했다.
회귀 후 극악소마와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면서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는 말해주지 못했다. 아니, 진심인 줄 알았더라도 하지 않았을 거다. 당시에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으니까.
이제 그에게 말해줄 때가 되었다.
‘이제 편히 주무시오.’
그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다른 삶을 살아갈 터이니.
그랬기에 오늘의 침상은 극악소마와의 관계를 또 한 단계 발전시키려는 첫걸음이었다.
“아예 이쪽 벽면을 제게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매번 옮기기 귀찮을 것 같아서.”
극악소마는 잠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 갑작스러운 요구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감사합니다. 다음에 올 때는 침상 옆에 둘 다탁을 가져올 겁니다. 또 여긴 갈아입을 옷을 넣어둘 작은 옷장을 하나 두고요. 이쪽 벽은 이제 제겁니다.”
서대룡은 놀란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예 살림을 옮긴다고요? 여기 극악소마님 방에다가요?’
원래는 작별을 고하고 가려고 했는데, 검무극이 왜 이러나 궁금증이 들었다.
서대룡이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소교주님의 횡포라고 여겨지시면 황천각에 신고하십시오. 즉시 조사하겠습니다.”
서대룡 일생일대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그가 얼마나 용기를 냈을지 알았기에 검무극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정색했다.
극악소마는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극악소마에게 농담을 해? 서대룡, 너 미쳤어?’
서대룡의 전음이 검무극에게 날아들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수습해 주세요!
물론 이 재미난 상황을 도와줄 리 없는 검무극이었다.
―임독양맥이 타통되면서 배짱까지 커진 모양이다. 차기 황천각주는 또 누굴 세우나?
그렇게 서대룡의 당황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극악소마가 말했다.
“괜찮을 거요. 가구들도 다 흰색으로 칠할 거라서.”
무덤덤한 대답에 서대룡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이 방에는 흰색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서둘러 작별을 고하려는 그 순간.
극악소마가 서대룡에게 다가왔다.
‘왜 오는 거야? 그 농담, 결국 용서할 수 없었나?’
움찔하던 서대룡 옆에 극악소마가 섰다.
“가구 배치상 옷장은 이쪽으로 놓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극악소마가 옆에 서 있을 뿐이었는데 서대룡은 숨이 막혔다.
‘소교주님은 이렇게 무서운 사람하고 어찌 이렇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소교주와 마존들의 사이를 보면 감탄을 넘어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서대룡이 슬쩍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마음 같아선 저 반대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미쳤지, 내가 여길 왜 와서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반은 호기심이었다. 과연 극악소마의 거처는 어떨까? 나머지 반을 채운 것은 허세와 허풍이었다.
황천각주에 임독양맥까지 타통했으니, 이제 한 번쯤 와 봐도 되잖아?
되긴 뭐가 돼? 왜 지옥을 제 발로 들어오느냐고!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할 기회를 엿보던 그때.
극악소마가 힐끗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분명 눈구멍 속 두 눈은 웃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다.
어쨌든 눈이 마주쳤을 이때가 기회였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말을 꺼내려던 바로 그때, 극악소마가 먼저 말했다.
“그땐 신세가 많았소.”
“네?”
벌써 잊었소? 하는 눈빛에 서대룡은 머릿속이 하얘지며 말문이 막혔다.
“입이 짧은 내게 밥해 먹이느라 고생했다는 말이오.”
예전에 밥해 먹일 때의 일이다. 극악소마 없을 때 입이 짧으신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가 들켜서, 그때도 혼이 났던 순간을 말한 것이다. 그걸 또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지요.”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이제 작별 인사를 꺼내려는데, 이번에는 검무극이 출교해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서는 혈천도마의 침상에 걸터앉아서 말해주었는데, 이제는 자신이 가져온 침상에 걸터앉아서 말했다.
사도맹에 잠입했던 자를 어떻게 죽였고, 그리고 어떻게 사도맹주를 초대하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무림맹주까지 초대하게 되었는지를.
서대룡은 앞서 들었던 내용도 있었고 약 데운다고 자세히 못 들은 내용도 있었다. 듣다 보니 흥미로워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은 채 검무극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대화 중에 잠깐 여유가 났을 때 서대룡은 전음을 보내 물었다.
―한데 왜 이렇게까지 자세히 다 말해주시는 겁니까?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건데, 정말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알아서 대처하실 수 있을 테니까. 정보가 힘이다.
혈천도마에게도, 극악소마에게도 수다를 떨고 싶어서 상세히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일어날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이렇게 다 말해주는 것이었다.
암튼 이야기는 잘 들었고. 이제 두 번이나 들었으니 절대 더 들을 일 없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다는 말을 꺼내려던 그때 이번에는 극악소마가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검무극이 천화루주 안부를 물었다.
극악소마를 사랑하는 여인 여정이 중원에 기루 사업을 확대해가는 이야기는 ‘그대는 이만 가시오’라고 할까 봐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러다 무림 정세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다.
서대룡은 처음 알았다. 극악소마가 생각보다 각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고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결국 악인곡 가면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나왔을 때 서대룡의 참지 못했다. 검무극의 너스레에 단련된 자신이 아닌가? 머리와 가슴은 참았는데, 입은 참지 못했다.
“제가 또 보기보단 두상이 작고 얼굴도 작아서, 가면이 잘 어울리죠.”
극악소마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옆에 검무극이 괜히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뇨, 그렇다고 소마님 얼굴이 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건 아니야! 검무극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극악소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대룡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갔어야 했는데.’
서대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극악소마가 서대룡을 지나서 밖으로 나가더니 곧이어 다시 들어왔다.
그의 손에 백색 가면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 새로 만든 신품 가면이었다.
“써보시오.”
서대룡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면이 안 맞으면, 가면 밖으로 나온 부분은 이 손으로 다 뜯어내 버리겠다! 이건가?
다행히 가면은 맞았다. 살짝 끼었지만 억지로 맞는 척했다.
“딱 맞습니다!”
“선물이오.”
“감사합니다.”
서대룡은 얼떨떨했다. 극악소마가 가면을 선물로 줄지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새벽까지 둘의 대화를 듣다가 서대룡은 깜박 잠이 들었다.
설마 극악소마의 방에서 내가 자겠느냐 싶었는데. 바닥에 앉아 침상에 등을 기댄 채 깜박 잠이 든 것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희미하게 밝아오는 여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말없이 함께 서 있을 뿐이었는데.
앞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그 모습보다, 말없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서대룡의 마음에 각인되듯 남았다.
그때 극악소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서대룡은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
‘가야 하는데. 제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잠든 척하고 있다가 서대룡은 정말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눈앞에 극악소마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고함을 지를 뻔했다. 필사적으로 고함을 참고 주위를 돌아보니 검무극은 어느새 가고 없었다.
그래, 그 사람은 악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지옥에 남겨두고 떠나는 악마. 그래, 애초에 이 백색 지옥으로 누가 끌고 왔겠는가?
극악소마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대체 언제 갈 거요?”
서대룡은 선물로 받은 가면을 손에 꼭 쥔 채 밤새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비로소 꺼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절대회귀 383화
제383회 봄나물 두고 한잔할 때.
건물을 나온 서대룡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극악소마의 방에서 잠이 들다니. 여전히 꿈속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 방에서 어떻게 나와서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살았다!’
서대룡이 쏟아지는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전쟁터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를 두고 가시다니.’
그때, 건물 입구를 지키던 무면객이 그에게 말했다.
“소교주께서 거처에 들렀다가 가시라고 말씀 남기셨습니다.”
“고맙네.”
서대룡이 검무극의 거처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오지 말래도 갑니다. 결투 신청합니다. 사부님께서 이 일을 예상하시고 임독양맥을 뚫어주셨나 봅니다!’
그렇게 서대룡은 바람처럼 달려와 검무극의 거처로 들어서며 소리쳤다.
“나랑 한판 붙읍시다!”
순간 서대룡은 흠칫하며 말문을 멈췄다.
마당에서 이쪽을 돌아본 사람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이쿠!”
돌아선 사람은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지금 일화검존에게 한판 붙자고 소리친 것이다.
“서 각주?”
“검존님!”
서대룡이 정중히 포권했고, 일화검존도 각주를 대하는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저와 붙자고요? 저야 좋습니다만.”
무공수련에 푹 빠져 있는 그녀는 비무라면 만 리 길도 달려갈 수 있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검존님께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럼 소교주에게 하신 말씀이시오?”
소교주에게 했다고 대답하기에도 너무 난감했다. 전쟁터를 벗어난 줄 알았는데 여긴 다른 전쟁터였다.
‘아! 이중함정에 빠졌어!’
이런 마음이라 그는 일화검존이 자신을 보며 감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대룡을 처음 봤을 때의 기도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마인이 있었던가?’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삐딱하면서도 살아 있는 눈빛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혈천도마가 딱 이런 느낌이었다. 대도까지 차고 있으니 더 그랬다.
그때, 안에서 검무극이 물이 든 대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서 각주가 많이 컸죠. 이제 검존님과 한판 붙을 때가 됐지요.”
서대룡이 펄쩍 뛰며 손이 보이지 않게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서대룡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눈으로 욕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검무극이 가져나온 물을 일화검존에게 건넸다.
“서 각주와는 허물없는 사이라 장난을 자주 칩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 서대룡이 한판 붙자는 상대가 검무극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눈앞의 이 검무극이야 마가촌 주점 주인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일화검존이 검무극과 작별을 고했다.
“오늘 비무는 고마웠네.”
“별말씀을요.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성장한 것보다 검무극은 더 빠르게 성장했다. 권마가 절벽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을 그녀는 비무를 할 때마다 느꼈으니까.
일화검존이 서대룡과도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봅시다, 서 각주.”
“그때까지 보중하십시오, 검존님.”
떠나려던 일화검존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참, 예전에 소교주께 선물로 드린 꽃 화분을 서 각주께서 키우신다고 들었소.”
갑자기 화분 이야기를 꺼내자 서대룡이 움찔했다.
“아직 살아 있나요?”
“그럼요. 잘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집무실에서 저보다 높다고요. 그 녀석이 일인자라고요!
일화검존은 장난을 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 그 꽃봉오리에서 꽃이 피듯, 서 각주도 활짝 피어날 겁니다.”
괄목상대한 서대룡이 이제부터 한 사람의 무인으로 이름을 날릴 것을 기대한다는 덕담이었다. 이 말을 해주려고 화분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일화검존이 떠나자 서대룡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지금 저 칭찬해주고 가신 거죠?”
“꽃 죽이지 말라는 경고 같았는데?”
“소교주님!”
그제야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존께서 자넬 제대로 인정한 거다.”
눈가에 스치는 감격도 잠시, 서대룡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럼 뭐합니까? 이제 제 인생은 끝장이 났는데요. 눈을 떴는데 극악소마께서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어떤지 아세요? 살면서 한 번이라도 들어나 보셨어요?”
“무슨 말?”
“대체 언제 갈 거냐는 말요.”
“나는 그런 폐를 끼쳐본 적이 없어서.”
“전 어느 분 덕분에 그 말을 극악소마님께 들었다고요. 보통 사람에게 들어도 신경 쓰이고 부담되는 말인데. 아! 제 인생은 이제 망했어요.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절 두고 가시다니요?”
“그럴 생각 없었어.”
“있었잖아요. 아침에 눈 떴을 때 저와 극악소마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기대했잖아요!”
“그럼 창밖에 숨어서 구경이라도 했겠지.”
“어? 그러게요.”
서대룡이 눈을 껌벅였다. 자신이 아는 소교주는 분명 그 자리에서 놀렸을 사람인데.
“아침에 일화검존께서 방문하신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럼 깨워서 데리고 나오셨어야죠.”
그러자 놀랄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극악소마께서 말리셨다.”
“네?”
“자네가 너무 곤히 잠이 든 걸 보고, 두고 가라고 하셨어.”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정말요? 거짓말!”
서대룡은 믿을 수 없었지만 검무극의 표정으로 볼 때 거짓말이 아닌 듯 보였다.
“극악소마님이 왜요?”
“나도 모르지. 자네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대체 왜요?”
“모른다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검무극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일개 조사관이 황천각의 각주가 되고, 혈천도마의 수제자가 되는 서대룡의 삶이 극악소마의 마음에 들어서겠지. 물론 자신이 아끼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서대룡이 들고 있던 백색 가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선물도 호의로 주신 걸까요?”
“다음에 직접 여쭤봐.”
“다음에요?”
다음은 없다고 손사래를 치려다 말았다. 하루를 같이 보내서였을까? 아니면 검무극의 말을 들어서였을까? 극악소마가 어제보단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닐 겁니다…… 제가 뭐라고요.”
고개를 푹 숙인 그에게 검무극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고,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이면서 평화주의자고 객잔에서 한 잔 술과 함께 인생을 바꿀 결정을 내린, 비무대회 우승자에 눈썰미까지 좋은 내 오른팔이지.”
마지막에 붙은 ‘눈썰미까지 좋은’이란 표현은 예전에 서대룡이 숨겨진 만독지극신단을 발견해냈을 때, 검무극과 나눴던 농담이었다.
“이걸 아직까지 다 기억하시는군요.”
“너를 소개하는 말인데, 당연하지.”
서대룡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앞의 이 사람은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우리 관계가 이 정도가 끝은 아니지 않냐고. 조금 더 가보면 또 다른 뭔가가 우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느냐고. 등을 떠밀고 심장을 두드린다. 관계에 지치지 말라고. 권태란 늪에 빠지지 말자고.
항상 너스레를 떨고 자신을 당황하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그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당장 어제,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하룻밤 사이 자신을 두 마존과 깊은 인연을 맺게 해주었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들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었겠는가? 두 마존과 말이라도 걸어볼 기회가 있었겠는가?
이럴 때 생색이나 내면 역으로 너스레를 좀 떨 텐데, 검무극은 또 어딜 가려는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외출을 서둘렀다.
“또 어딜 가시게요?”
“본교가 삼마존쯤 되었으면 이렇게 안 바쁠 텐데.”
마존을 만나는 일 자체가 삼자회담의 준비이자, 동시에 무공수련이기도 했다. 이제 자신의 경지는 마존과의 한마디 농담에서 무학의 새로운 심득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일화검존께도 출교하고 있었던 일을 다 말씀해 주신 겁니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부지런해야지. 여러 번 경험하지 않았는가? 언제나 지키는 쪽이 불리하다는 것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상대는 허점을 찾고,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니까.
“정말 역대 제일 바쁜 소교주실 겁니다.”
“너도 할 일 많잖아?”
“제가요?”
“그들이 왔을 때, 본교의 기강이 갖춰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그 일에 가장 큰 책임자가 자네잖아.”
서대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두 사람 머리 위로 전서응이 연이어 날아갔다.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전서응의 모습도 보였다. 확실히 오가는 날갯짓이 평소보다 많았다.
“시작된 거죠?”
서대룡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땅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금, 삼자회담을 위한 군사들의 대화가 저 하늘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 * *
취마의 반응이 예상과 달랐다.
원래라면 이런 반응이었을 것이다.
―또 제일 마지막에 왔군. 그래, 나야 잡아둔 물고기지. 아니, 난 물고기 축에도 못 끼지. 어항에 장식으로 넣어둔 돌멩이잖아?
한데 오늘의 반응은 달랐다.
“왔어?”
이 편안한 반응은 대체 뭐지? 혹시 맨정신인가? 술 냄새가 풀풀 나고 있는데?
“뭐야? 혹시 형 독문무공 마지막 비기를 쓰려면 이렇게 웃어야 쓸 수 있는 건가?”
“뭔 소리야?”
“늦게 왔다고 왜 화를 안 내냐고?”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 왔는데 화를 왜 내냐?”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너 누구야? 놈들이 섭혼마존만 노렸던 것이 아니었어.”
“앉아.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오늘은 밤새 마시자.”
“이상한데? 정말 이상해.”
그때 삼대 취객인 여빈이 그곳으로 요리를 가져왔다.
그때, 검무극은 보았다. 취마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취마의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둘 사이에 뭔가 있구나!’
여빈이 물러나자 곧장 취마에게 물었다.
“여 무인과 무슨 일 있었지?”
“없어.”
“어차피 말할 거잖아? 그럼 하고 싶은 말부터 해! 실컷.”
“그렇다고 오자마자 말하면 내가 너무 가벼워 보이잖아?”
“걱정하지 마. 세상에서 제일 말 많은 남자가 앞에 앉아 있어. 무슨 일인데?”
그러자 취마가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호수에 배를 띄워두고 혼자 술 마시고 있는데, 배로 날아와서 타더라. 그리고 한잔하자더군.”
“그리고는?”
“나랑 술내기를 하자더라.”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오! 멋있다. 취마에게 술내기하자는 여자.”
흥미로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내가 그랬지.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알고 술내기하자는 거냐? 안다. 그럼 뭐 걸 거냐?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하자. 애도 아니고 무슨 그런 유치한 내기를 하냐? 자신 없으시냐? 그럴 리가! 좋다. 이렇게 되었지.”
취마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그날이 떠오르는지 취마가 깊어진 눈빛으로 잔을 비웠다.
“술 잘 마시더라. 그래, 주객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고수니 잘 마시는 게 당연하지. 한데 작정하고 마시니 내 생각보다 더 잘 마시더라고. 둘이서 여기 전각에 있는 술을 다 마셨다. 모자라서 술 창고를 열어서 아예 거기서 마셨지.”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장관이었을 것 같았다.
“결과는?”
“뭘 물어? 내가 이겼지.”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겼다고? 이 무심한 남자야. 내가 못 산다.”
“다른 내기라면 모를까, 취마가 술내기에서 질 수가 있나?”
“그래서? 소원도 빌었어?”
“빌었지.”
“뭐라고?”
취마는 말없이 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쉽게 여인에게 마음을 내줄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다. 제발 다시는 내게 이러지 마라, 이런 소원이 아니기를!
“다음 술자리에는 안주로 직접 만든 봄나물 요리를 해오라고 했지.”
“!”
내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어?”
“우리 형 멋있어서.”
취마의 술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형 만난 이후에 제일 멋지다. 만날 지지리 궁상 같았는데. 이제야 남자 같다.”
“이제야 날 무시했다는 걸 실토하는군.”
취마가 미소를 지으며 내 잔에 건배했다.
오랫동안 취마를 좋아했던 여빈은 그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었을 거다. 얼마나 떨렸을까?
앞으로 두 사람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취마는 그녀의 마음을 너무나 잘 헤아려주었다.
“요즘은 그냥 친구처럼 가끔 한 잔씩 한다.”
그 술자리가 취마의 여유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왜 나 때문이야?”
“용기를 낸 게 너와 일화검존 때문이라고 하더라. 일화검존은 네가 영향을 많이 끼쳤잖아? 결국 너 때문이지. 내게도 영향을 미쳤고.”
그래, 나 때문일 거다. 인정한다. 내가 회귀한 후에 정말 많은 것이 바뀌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그 많은 변화 중에 정말 기분 좋은 변화였다.
“봄나물 두고 한잔할 때 나도 불러주라.”
“생각해보고.”
으쓱대며 잘난 척하는 모습에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형, 대신 나중에 다른 의미로 ‘너 때문이야!’라고 날 탓하면 안 돼.
* * *
마존들을 만나면서 무공수련에도 열중했다.
내 노력의 중심에는 언제나 피나는 수련이 있었다. 마존을 만나도 수련했고, 만나지 않아도 수련했다.
마존을 만나서 나누는 농담이 무학을 깨우칠 실마리를 주는 것은, 평소 끝도 없이 쌓은 수련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일이었다.
말 한마디가 큰 깨달음이 되는 순간은, 힘들게 높이 쌓은 탑의 마지막 장식을 얹는 순간이다. 탑이 없으면 마지막 장식도 없는 법이니까.
시천비술은 계속 연마해서 더 많은 시간을 얻어내고 있었고, 그 속에서는 구화마공을 사력을 다해 익혔다.
그렇게 이십여 일이 흐르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통천각에서 보낸 군사가 내게 와서 보고했다.
“회담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날짜로 정해졌다. 세 수장이 만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기에, 생각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나는 곧장 마가촌으로 향했다.
마침 저 멀리 풍류주점 앞에서 기지개를 켜던 조춘배가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소교주님, 어서 오십시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환하게 웃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384회 비법 재료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조춘배는 근래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인생에서 최고로 값진 휴가를 보냈고, 멋진 사위 노릇도 했다.
정말 더 바랄 게 없었다.
바로 저 사람 때문에.
“주인장, 잘 지내셨소?”
자신은 마교 소교주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주는 인생을 살고 있다.
“소교주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주인장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소.”
“들어가시죠.”
조춘배가 검무극을 안으로 모셨다.
검무극이 풍류주점 안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변함이 없었다.
“역시!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이 이 층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았다.
“주인장도 앉으시오.”
조춘배는 내심 긴장하며 마주 앉았다.
‘무슨 할 말이 있으셔서 이러시는 걸까?’
검무극이 그에게 회담 날짜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날 하루 풍류주점을 통째로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검무극이었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을 빌려도 좋았다. 주점을 가지겠다고 한들 못 주겠는가?
“한데 누가 오시는데 이렇게?”
지금까지는 그냥 다들 불쑥불쑥 찾아왔다. 천마도 불쑥, 마존들도 불쑥. 한데 누가 온다고 이렇게 미리 알리면서 주점을 통째로 빌리려 할까?
“본교의 회합이 있습니다. 제가 우리 주인장 자랑을 했습니다. 이곳에서 꼭 모시고 싶다고.”
“정말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이때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신교 내부에서 열리는 회합을 이곳에서 열어 술도 팔고 풍류주점의 이름도 널리 알리려는 것이라고.
“술과 요리를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시오. 손님이 누군지 미리 밝힐 수 없는 점은 죄송하오. 또한 이 회합 역시 당일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마시길 당부드리오.”
“아무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춘배는 자신만만하게 껄껄 웃었다.
‘드디어 소교주께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오는구나.’
그의 시선이 뒤쪽 벽면을 향했다.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해도.
‘나는 교주님도 받아본 사람이다!’
어디 그뿐인가? 마존들은 물론이고 마군주와 황천각주의 술 모임도 했었다.
“귀한 손님 받는 일에 있어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저 아닙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주인장, 이번 손님은 주로 공중전을 펼치시는 분들이라오.
극비지만 조춘배에게 누가 오는지 미리 귀띔을 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역효과만 날 거다.
조춘배는 걱정에 밤새 잠도 못 잘 테고, 좋은 재료를 구하려고 절벽을 탈 사람이다. 아니, 그날까지 조춘배의 심장이 못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럼 주인장만 믿겠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선 검무극은 평소처럼 들이닥쳐서 하고 싶었다. 일 층에 손님 있고, 무림맹주가 ‘길 좀 비킵시다’ 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이 층으로 올라오는 거다.
그냥 평소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듯 조춘배는 그들도 잘 받아낼 거니까. 손님들 사이에서 하는 삼자회담!
물론, 차마 거기까지 주장할 수는 없었다. 호위들이 너무 곤혹스러워 할 일이기에.
“조금 있다가 형이랑 식사하러 다시 올 겁니다.”
“즐겨 드시는 것으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주점을 나선 검무극이 길 건너에 죽립을 쓴 채 서 있던 중년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저 때문에 들어오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자 중년 사내가 죽립을 벗었다.
“저를 알아보셨군요.”
놀랍게도 그는 교주전 대표 숙수인 왕 숙수였다.
아마 총군사가 이번 회담을 빈틈없이 하기 위해 왕 숙수를 보낸 모양이다. 검무극을 믿는 것과는 별개로, 대접해야 하는 대상이 무림맹주와 사도맹주였으니까.
“혹시라도 주점에 필요한 것이 있을까 해서 와봤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점검하러 온 것이다. 요리는 어떤지, 위생 상태는 어떤지.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맡은 일을 하십시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이번 회담 장소를 검무극이 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왕 숙수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저 주점은 안 괜찮겠죠.”
“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 숙수님이 살펴보시는데 저 허름한 주점이 어찌 마음에 들겠습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지 않겠죠.”
왕 숙수도 인정했다. 저런 주점에서 이번 회담을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었으니까.
“그렇다면 왜 저곳을 선택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왕 숙수에게 가장 크게 와닿을 이유를 댔다.
“음식이 맛있습니다.”
과연 왕 숙수는 대번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충분하지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검무극은 왕 숙수가 풍류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본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단에서 만난 사람은 형 검무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이번 회담과 관련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어쩐 일이냐?”
“형 얼굴 보러 왔지.”
“바쁘다. 얼굴 봤으면 가봐라.”
괜히 무뚝뚝하게 굴지만, 얼굴에는 반가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같이 밥 먹자. 회합 장소도 둘러볼 겸.”
“바쁘다니까.”
“우리 형이 온갖 나쁜 점은 다 가지고 있지만 설마 탁상공론의 주인공까지 차지할 줄이야! 현장은 둘러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서 일을 결정하니 뭐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주인장 이건 이렇게 고쳐야 하지 않겠소? 동생아, 너도 이건 양보해야 하지 않겠냐?”
검무양이 귀를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두 사람은 나란히 마가촌을 향해 걸었다.
“형도 회담에 참석할 거지?”
“왜? 난 참석 안 했으면 싶냐?”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이 사람 이기고 후계자가 됐다, 무림맹, 사도맹 사람들에게 자랑해야지.”
검무극은 혹시라도 검무양이 참석하지 않겠다고 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지만 검무양은 뜻밖에 당당했다.
“안 가면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 부끄러워서 안 나왔다고 할 것 아니냐? 그 꼴 당하기 싫어서라도 가야지.”
내키는 일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참석하겠다는 형이 고마웠다.
“생각해보니 형 오게 하면 안 되겠다. 저런 괜찮은 장남 두고, 왜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지 다들 쑥덕댈 것 같은데.”
“알면 됐다.”
“이번에 무림맹 진 대주 남매도 올 거야. 우리가 더 멋진 혈육이란 것, 보여줘야지.”
“그거 보여주려고 불렀냐?”
“응, 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자랑하려고 불렀어. 진심이야.”
“유치하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요즘도 꿈꿔?”
“무슨 꿈?”
“형이 후계자 되는 꿈.”
생각해보니 최근에는 그런 꿈을 꾼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자주 꿨었는데.
“매일 꾼다.”
검무양은 드디어 그 꿈이 자신에게서 떠나가 버렸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바쁘다고 잊을 일은 아니었으니까. 왠지 시원하면서도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늙어서 죽기 전날에도 꿀 거다.”
“추하다.”
“무덤에 들어가서도 꿀 거다.”
말해 놓고도 우스웠는지 검무양이 옅게 웃었다.
검무극은 형이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꿈꾸다 보면 언젠가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사람 일 어떻게 알겠어?”
함께 걷던 검무양이 발걸음을 멈추며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넌 꿈도 꾸지 마!”
아주 가끔 떠올릴 때가 있다. 천마 자리를 자신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검무극의 모습을. 동생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장면은 또렷해진다.
“내 꿈을 왜 네가 깨우려는 거냐?”
검무양은 일부러 더 차갑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이 점만큼은 확실히 해야 했으니까.
“한 번 차지했으면 끝까지 가지고 가는 거다. 양보는 내가 용서 못 해. 알았어?”
“알았어. 양보 안 해. 내가 바보냐? 그 좋은 걸 양보하게?”
다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풍류주점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시각 왕 숙수는 감탄하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음식 맛이 좋았다. 무난한 듯하면서도 깊은 맛이 느껴졌다. 호불호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맛이면서도, 또 특유의 맛이 있었다.
“이 육수는 어떻게 만든 거요?”
“돼지 우린 육수에 비법 재료를 넣었지요. 교에서 나오신 분이라도 비법 재료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소.”
이 나이 지긋한 남자는 교에서 나왔다면서 회담 전에 이곳 음식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장사한 조춘배는 신교의 일 처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군가 나와서 점검하는 것은 당연한 일.
또 한 번 국물을 마시고는 왕 숙수는 크게 감동했다.
“처음과 또 다른 맛이 나는구려.”
“어휴, 아닙니다. 아니에요.”
조춘배가 겸손의 손사래를 쳤지만, 올라간 입꼬리만큼이나 어깨도 한껏 올라가 있었다.
“아, 그럼 이것도 한 번 맛보시지요.”
이건 교주님도 드셨던 거요!
왕 숙수가 권한 요리를 먹어 보더니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이것도 좋소. 이게 제일 내 입맛에 맞소.”
그러자 조춘배가 넌지시 말했다.
“좀 싸 드릴까?”
“그래 주시겠소?”
“사실 제가 소싯적부터 손맛을 타고났다는 소릴 곧잘 들었습니다. 혀도 민감해서 맛도 잘 알고. 아시려나 모르겠지만 요리도 무공과 마찬가지라 재능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다음에 언제 신교의 숙수들을 데려와서 맛을 보이고 싶소. 이렇게 흔한 재료로도 깊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어휴, 무슨 말씀을. 아닙니다, 아니에요.”
조춘배가 또 손사래를 쳤다. 어찌나 기분 좋은지 그의 손사래는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갈 것처럼 흥겨웠다.
한창 신이 나 있던 조춘배는 그제야 검무극과 검무양이 입구에 서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 소교주님. 대공자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춘배가 정중히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여기 손님은 본교에서 사전 점검차 나오신 분이시랍니다.”
검무양이 먼저 왕 숙수에게 인사했다.
“왕 숙수님.”
“대공자님.”
왕 숙수란 말에 조춘배가 흠칫 놀랐다. 숙수라고? 이 사람이 숙수였어? 왕 숙수?
오랫동안 이곳에서 장사하던 그가 어찌 왕 숙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겠는가? 설마? 그 왕 숙수?
조춘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설마 이분이? 아니죠?”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분이 교주전 책임 숙수십니다.”
화들짝 놀란 조춘배가 펄쩍 뛰었다. 날아올랐던 나비들이 다 추락했다.
“어이쿠!”
그냥 숙수도 아니고 교주전 책임 숙수에게 양념은 이렇게 만들고, 국물은 이렇게 우리고. 온갖 자랑을 다 했다.
“이 어리석은 놈이 검신 앞에서 막대기를 휘두르며 무학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왕 숙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론 그 막대기가 검신의 검보다 더 예리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정말 맛있는 집은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있다더니, 풍류주점이 그러했다. 검무극이 맛있다고 했을 때도 그래 봤자, 라며 내심 무시했었는데.
왕 숙수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전 음식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주점과 소교주님과의 인연에는 이 맛도 한몫했을 겁니다.”
조춘배가 교주전 숙수에게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잘 먹고 가오.”
“영광이었습니다, 숙수님!”
왕 숙수는 떠나기 전 조춘배가 챙겨준 음식을 모두 챙겼다. 그 모습만으로도 조춘배는 감동했다.
“그 맛있는 요리, 이 층으로 부탁드립니다.”
감격에 젖어 있는 그를 남겨두고 검무극과 검무양은 이 층으로 올라갔다.
검무양이 전음을 보냈다.
―그렇게까지 맛있진 않던데.
―왜 전음으로 보내? 못됐게 소리 내서 주인장 앞에서 말하지.
―지금은 너무 감격해서 말해도 못 들을 것 같아서.
조춘배는 떠난 왕 숙수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아, 형. 여기가 바깥도 잘 보이고 좋다.”
검무극이 좋은 자리를 양보했다.
“태사의는 양보 못 하게 하니까, 이 자리라도 양보해야지.”
형, 그거 알아? 내게 그 자리는 태사의만큼이나 귀한 자리야.
* * *
진하군이 회의실에서 나왔을 때, 진하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걸리네?”
“한창 자존심 싸움 중이야.”
진하군의 말에 진하령이 물었다.
“무슨 자존심?”
“사도맹과 비교해서 호위 숫자 때문에 고민이다.”
“더 많이 데려가려고?”
그러자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명이라도 적게 데려가려고.”
그 말에 진하령은 웃고 말았다. 호위 숫자가 더 많으면 겁을 먹었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별걸 다 신경 쓴다.”
“저 사람들에겐 중요한 문제니까. 한데 왜?”
“회담 명단에서 나를 뺐던데?”
“응, 뺐다더라고.”
“왜?”
“우리 둘 다 갈 수는 없으니까.”
진하령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변고라도 생기면 한 사람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들어가서 설득하세요. 설득 못 하면 오라버니가 남는 거야.”
누구보다 동생 성격을 잘 아는 진하군이었다. 게다가 검무극을 정말 보고 싶어 한다는 것도.
“그러잖아도 설득 중이었어.”
“괜히 왔네. 최고의 오라버니를 못 믿어서.”
“과연 내가 최고일까?”
진하군이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진하령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복도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르는 구름은 멈춘 듯 느렸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출발 직전까지 백자강은 개인 수련장에 있었다.
회합 날짜가 정해진 이후, 그는 마치 전쟁을 앞둔 사람처럼 그곳에만 있었다.
오늘도 그는 철 인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철 인형 위로 검우진이 겹쳐 서 있었다.
여전히 오만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말했다.
“사인입니다. 출발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들어오너라.”
그곳으로 비사인이 들어왔다.
“저기 누가 서 있는지 아느냐?”
비사인이 철 인형을 쳐다보았다. 그 위로 검무극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누가 서 있습니까?”
“마교주가 서 있다. 십 년 전에 만났던 그 모습 그대로. 삼자회담이 결정된 후부터 쭉 서 있었지.”
비사인은 철 인형을 함께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베셨습니까?”
잠시 백자강은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었지만 비사인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분명 사부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
“베지 못했다.”
비사인은 사부의 이런 점을 좋아한다.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진실을 속이지 않는다.
“왜 그를 만나겠다고 마음먹었는지 이곳에서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였습니까?”
“내 마음속에서 그가 너무 컸다.”
비사인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에 만나면 작아질 겁니다.”
백자강의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불안.
“만약 내가 키운 것보다 더 큰 사람이면?”
이렇게 솔직한 사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사부를 변화시킨 것은 검무극인가, 아니면 검우진인가?
“그럼 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시겠네요. 볼 때마다 자꾸 커지는 숙적을 보고 있는 제자의 답답한 심정을요.”
백자강이 소리 없이 웃었다.
비사인은 사부가 웃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한 번 웃으실 때마다 한 걸음씩 다가선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착각이라도 좋았다.
곧이어 시비들이 옷을 가지고 들어왔다. 사도맹주가 외부에 공식 행차할 때 입는 화려한 복장이었다.
하지만 백자강은 그 옷을 모두 물렸다.
그는 처음 사도에 뛰어들었을 그때를 떠올리며 깨끗한 흑의 무복 한 벌을 입었다.
흑의 무복은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고, 앞서 화려한 복장보다 더 위엄이 있었다.
“가자, 마교로.”
제385회 오늘은 단주들이 막내.
드디어 회담 날이 밝았다.
평소보다 일찍 장사 준비를 시작한 조춘배는 종이에 글을 써 입구에 크게 붙여 두었다.
금일휴업(今日休業).
자신이 써붙인 글을 보며 조춘배가 크게 심호흡했다. 드디어 오늘이다! 잘할 수 있다, 춘배야.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포목점 양씨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주점에서 신교의 회합이 있네.”
오늘까지 비밀로 해왔지만, 드디어 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양씨는 깜짝 놀랐다.
“자네 주점에서 신교 회합이 열린다고?”
“그렇다네.”
“축하하네, 축하해.”
조춘배가 소교주와 친분이 깊고, 주점에 신교 마존들은 물론이고 천마까지 다녀갔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기에, 회합이 열린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나중에 구경 가도 되나?”
“그럴 용기가 있다면 자넨 자네가 파는 그 무복을 입는 인생을 살고 있었겠지.”
맞는 말이라며 양씨가 껄껄 웃었다.
“잘하시게.”
“고맙네.”
주방에서 그를 돕는 송이도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오히려 준비할 일은 많지 않았다. 조춘배가 미리 다 준비해뒀기 때문이다. 당장 주문이 들어와도 요리가 나갈 수 있게.
“주인 어르신은 안 무서워요?”
오늘 있을 회합에 송이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무섭긴 뭐가 무서워?”
“오늘 이곳에 마인들이 가득 올 거 아니에요?”
“무서워 마라. 우리에겐 소교주님이 계신다.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분이 우리 편인데 뭐가 무섭냐? 그리고 어쭙잖은 것들이나 사람 괴롭히지, 진짜 고수분들은 점잖으시다.”
송이를 다독인 후 조춘배는 주방 뒷문으로 나왔다.
사실 긴장되긴 조춘배도 마찬가지였다. 불쑥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는 것과 이렇게 준비해서 대접하는 부담감은 천지 차이였으니까.
그때 뒷문으로 한 노인이 들어왔다.
“어르신, 오늘 장사 안 합니다. 그리고 여기로 들어오시면 안 돼요.”
“자네가 이곳 주인장인가?”
“그렇습니다만.”
“물어볼 것도 있고. 다리가 아파 그러니 잠깐만 쉬었다 감세.”
노인이 뒷마당에 있는 작은 평상에 걸터앉았다.
얼굴 주름으로 볼 때 제법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는데 체구는 아주 건장했다.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두 눈은 젊었을 때 한 성질 했겠구나 싶었다.
그것 말고는 평범했다. 오랜 장사 경험으로 쌓인 눈치와 눈썰미로 노인을 살폈지만, 무인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못 보던 분이신데?”
“호북에서 왔네.”
“어이구, 멀리서도 오셨네. 이곳까진 무슨 일로 오셨소?”
“누굴 좀 만나러 왔네.”
“연세도 있으신 분이 고생하셨소. 물이라도 한잔 떠다 드릴까?”
“괜찮네.”
“누굴 만나는데 여기까지 오신 게요?”
“원수라면 원수고. 또 가까운 사이라면 가깝고.”
그러자 조춘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자식 보러 왔소?”
순간, 노인의 얼굴이 굳어지며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조춘배는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식과 헤어져 살다가 죽기 전에 자식 손주 얼굴이라도 보고 죽자는 마음으로 먼 길을 오는 노인네들 말이다.
“얼마 만에 보시는 거요?”
“한 십여 년 넘었나 보네.”
조춘배는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도 이번에 가족과 관련한 큰일을 겪지 않았나?
“어디서 보시기로 했소?”
“이 주점에서 만나기로 했네.”
“저런! 하필 날을 잡아도 오늘로 잡으셨소? 오늘 주점 쉬는 날이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언제요?”
“시간이 남았는데 일찍 와봤네. 무슨 꿍꿍이로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았는지도 궁금하기도 하고.”
꿍꿍이란 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괄괄한 이 늙은이와 자식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이제라도 화해하시오.”
“그래야 할까?”
“여기서 장사하다 보면 별사람 다 봅니다. 죽도록 미워하고 싸우고. 근데 나중에 보면 다 후회합니다. 한순간만 참으면 되고, 조금만 너그러우면 되는데, 뭔 자존심을 그리 세웠을까 하고요. 노인장이나 나나 이제 날 세울 나이는 지나지 않았소? 아니, 날붙이는 내다 버려야 할 나이지요.”
노인은 말없이 조춘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중에 나중에 하다 보면 늦소. 보면 어르신이 먼저 잘못했다 하시오. 그게 어른 아니겠소? 성질 좀 죽이시고.”
“왜 내가 성질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야 딱 얼굴 보면 알지. 소싯적에 한 성깔 하시지 않았소?”
노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했지.”
“내가 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한 사람이오.”
문득 제대로 못 알아본 왕 숙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얼른 지나쳐 보내고.
“암튼 오늘은 장사 안 하니까 저 아래 객잔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혹시라도 노인장 찾는 사람 오면 그쪽으로 가라고 꼭 전하겠소.”
오늘 분위기상 그 말 전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입구를 지키는 마인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할까? 길이 엇갈려 자식과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괜히 신경 쓰였다.
그때, 노인이 불쑥 물었다.
“이 근처에 마교 본단이 있다던데. 자넨 천마를 본 적이 있나?”
이 늙은이가 미쳤나?
“감히 누굴 입에 담는 거요? 마가촌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간 곱게 죽지 못할 거요.”
“미안하네.”
당장 내쫓아 버릴까 하다가 멀리서 자식 만나러 온 늙은이가 또 안 되기도 해서 대답해주었다.
“본 적 있소. 교주님이 우리 주점에도 오셨지요.”
“어떤 사람인가? 무림의 소문처럼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가?”
“정파나 사파에게나 무섭지, 우리에겐 인자하신 분이시오. 그리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외다.”
“정파와 사파인들로부터 자네를 지켜줘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조춘배가 놀라운 이유를 댔다.
“소교주님 아버지라서 좋소.”
조춘배는 처음으로 이런 말을 내뱉었다. 자신도 처음 알았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근데 이 노인네, 뭘 안다는 듯이 날 쳐다봐? 당신이 소교주에 대해 뭘 안다고?’
그때 안에서 송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 손님 왔어요!”
“간다.”
조춘배가 일어났다.
“어서 가시오. 괜히 오늘 이곳에서 어슬렁거리면 큰일 날 수도 있으니, 객잔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알겠소?”
“고맙네. 이따 보세.”
“오늘은 못 본다니까 그러시네!”
조춘배가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주점에 온 손님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어? 군주님.”
그는 바로 마군주 장호였다. 평소 평범한 무복을 입고 술을 마시러 올 때와 달리 오늘은 마군의 정식 복장을 입고 왔다.
가슴에 그려진 무시무시한 악귀 문양을 보자 두려운 마음과 함께 아, 이분이 그 무서운 마군의 수장이셨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장 군주님,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회합 때문에 자리 배치를 좀 하려고 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장호가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그곳 자리를 세 사람이 삼각 구도로 서로를 볼 수 있게 탁자와 의자를 배치했다.
조춘배는 내심 의아했다.
‘오늘 회합에 세 사람이 오는 건가?’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합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한데 겨우 셋이 모이는 회합인데, 왕 숙수가 와서 요리를 점검하고 마군주가 직접 와서 자리를 배치한다고?
‘헉! 설마? 교주님이 오시는 건가?’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자리 배치를 저렇게 할 리가 없다. 교주님이 앉을 자리를 상석에 배치했겠지. 지금은 세 자리가 동등하게 서로를 맞보고 있었다.
“한데 왜 군주님께서 직접 하십니까? 수하들 시키지 않으시고.”
“오늘 이곳에 제 수하들은 안 올 겁니다.”
조춘배는 알지 못했다. 오늘 풍류주점에 단주급 이하 무인은 올 수 없다는 것을. 오늘 이곳에선 단주들이 막내였다.
각 조직의 단주들이 일반 무인처럼 저잣거리 곳곳에 배치되었다.
“주점에 다른 사람은 일체 출입할 수 없을 겁니다.”
조춘배는 노인에 대해 말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이미 다녀간 사람이고. 괜히 말해서 노인이 마인들에게 끌려가서 조사받으면 자식을 못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주점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놀랍게도 그는 바로 권마였다. 그 무서운 얼굴을 보자 조춘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권마님도 회합에 참석하시는 모양이다.’
권마가 장호와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들 두 사람이 나란히 서니 그야말로 객잔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생긴 걸로는 천마신교에서 제일 무섭게 생긴 두 사람이 아닌가? 두 인상파가 만나니 조춘배는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장호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 후 권마가 조춘배에게 다가왔다.
‘아, 아까 주방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권마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음식 준비는 차질 없소?”
권마가 자신에게 음식 준비를 묻는다고?
조춘배가 놀란 얼굴로 권마를 쳐다보았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무서워서 마주 볼 수가 없는 얼굴이다.
“놀랄 것 없소. 본인이 오늘 회담의 안전을 맡았소.”
권마가 안전을 맡았다고? 오늘 회합에 주인공으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음식 준비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언제라도 주문만 하시면 내갈 수 있습니다.”
“음식을 내가기 전에 본교 무인이 와서 독이 들었는지 검사를 할 거요. 그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절차상의 일이니 이해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조춘배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마존이, 그것도 저 무서운 권마가 일개 주점 주인에게 이렇게 일일이 설명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원래는 안 했다. 영원히 안 했을 거고.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조춘배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육수를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였다.
또 다른 마존이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커다란 대도를 등에 찬 혈천도마였다. 그 역시 평소와 복장이 달랐다.
그는 핏빛 하늘을 상징하는 붉은 장삼을 입고 있었다. 지금의 혈천도마는 시화를 읽으며 검무극과 너스레를 떨던 그때의 혈천도마가 아니었다.
꼬장꼬장한 눈빛에 서릿발 같은 한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조춘배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서 얼른 고개를 돌려 다듬지 않아도 될 채소를 다듬었다.
송이가 눈빛으로 물었다.
‘이래도 안 무섭다고요?’
무섭다, 정말 무서워.
차마 자존심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혈천도마가 권마에게 물었다.
“소교주 보셨나?”
“교주전에 들었습니다.”
“알겠네.”
혈천도마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등에 찬 멸천대도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권마에 이어 혈천도마까지 보자, 조춘배는 압박감을 느꼈다. 오늘 마존들의 기세는 평소와 달랐다. 차분히 대화를 주고받고, 그냥 조용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뭔가 느낌이 달랐다.
‘휴, 정신 차리자. 소교주님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려야지.’
그가 주방에서 큰길로 나 있는 작은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스리던 그때 한 사람을 보았다.
누군가 팔짱을 낀 채 건너편 건물의 지붕 위에 서 있었다. 누군지 헷갈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얀 가면이 햇살에 부딪혀 빛나고 있었으니까.
가면 하나에 의지한 채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외로워 보였기 때문일까? 봄바람과 함께 날아와 극악소마를 스치고 지나가는 벚꽃잎이 아름다워서였을까? 조춘배는 홀린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극악소마의 시선이 스윽 조춘배를 향했다.
‘헉!’
소스라치게 놀란 조춘배가 후다닥 창 아래로 몸을 숨겼다. 눈이 마주쳤을까?
다시 고개를 빼꼼히 들어 그곳을 쳐다보았을 때, 극악소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소마님이 독왕님 다음으로 제일 무서운 분이시다.”
송이가 대답이 없자 조춘배가 무심코 돌아섰다.
‘으헉!’
그는 좀 전보다 더 놀랐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독왕이 송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녀가 다듬고 있던 채소 사이를 기어가고 있던 달팽이처럼 생긴 벌레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송이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얼어붙어 있었고.
독왕 역시 정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녹색과 흰색이 세련되게 어우러진 장삼을 차려입자, 그는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미공자가 되어 있었다.
놀란 상황에서도 송이는 독왕의 허리춤에 있는 독주머니의 십이지간 그림들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이 귀여운 동물들의 눈이 시뻘게지면서 괴물이 되어 튀어나올 상상을 하게 될 것이다.
독왕이 벌레를 풀에 올려서 들고 나갔다.
그가 나가자 조춘배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인정하마. 나도 무섭다.”
그러자 송이가 독왕이 떠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안 무서워요.”
“뭐?”
“멋있어요.”
조춘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누군가 주점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춘배가 주방에서 밖으로 난 작은 창으로 살짝 고개를 들어 누가 왔는지를 살폈다.
들어선 이는 새하얀 무복을 차려입은 일화검존이었다. 오늘 같은 날이면 오랜만에 화장을 할 법도 했는데, 그녀는 맨얼굴로 왔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세월의 흔적.
게다가 고된 수련으로 얼굴이 타서, 새하얀 무복과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조춘배는 지금의 그녀 모습이 예전 화려하게 화장했을 때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서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이 더 멋지고 우아하십니다, 라고. 물론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말을 대신해준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본 검존 중에 제일 아름다운데?”
그녀가 돌아서니 취마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역시 오늘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는 만취한 주신(酒神)이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주신이 그려진 여러 옷 중에 오늘이라면 폭주하는 무서운 주신이 그려진 옷을 입을 법도 했는데.
“요즘 취몽루에 봄바람이 분다지?”
“장차 교주가 되실 분인데 어찌나 입이 무거우신지.”
취마가 옅게 웃으며 술병의 마개를 열어 깊게 냄새만 맡고 다시 닫았다.
‘취마께서 술을 참을 정도로 중요한 날인가?’
조춘배가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주점 밖에서 황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작은 거인 마불이 감출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도착한 것이다.
그가 걸친 가사에는 지옥불에 고통받는 인간과 악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그가 내뿜는 황금빛 광채가 불길이 되어 그들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섭혼마존은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스며들 듯, 모습을 드러냈다. 보지 못한 사이 한층 원숙해진 그녀의 두 눈에서는 섬뜩한 귀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인간과 귀신 사이에 난 좁은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조춘배는 처음이었다. 한자리에서 팔마존들을 모두 보는 것은. 그들이 제대로 차려입고 한자리에 모이자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저잣거리에 이렇게 모여 있으니 더욱 잊지 못할 광경이 되었다.
자신이 화공이었다면 이 장면을 꼭 그렸을 것이다.
‘정말 팔마존 회합이었구나!’
그러자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 하나.
조춘배의 시선이 이 층을 향했다. 마존들이 이렇게 다 모였는데, 왜 세 자리뿐이며.
‘왜 저긴 아무도 앉지 않는 겁니까?’
제386회 교주님이 오시는 줄 알았다면.
조춘배는 다시 주점 앞 거리에 서 있는 팔마존을 쳐다보았다.
혈천도마가 중심에서 대도를 찬 채 우뚝 서 있었고, 그 양옆으로 일화검존과 취마가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 독왕이 쪼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고, 마불이 함께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극악소마는 지붕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있길 좋아했고, 높은 곳을 좋아했다.
그런 극악소마를 섭혼마존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가 어려 마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어쩌면 극악소마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눈빛이었다.
오늘의 안전을 책임진 권마는 그 큰 두 주먹을 늘어뜨린 채 저잣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선물로 준 권갑을 낀 채로.
천마신교를 지키는 여덟 명의 마존, 두고두고 손님들에게 자랑할 이 장면은 한 장의 그림처럼 조춘배의 마음에 새겨졌다.
팔마존을 쳐다보는 이들은 조춘배만이 아니었다.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 사이사이에 단주들이 서 있었다.
단주들 역시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모든 단주가 동원되어서 일반 무인들처럼 경계를 서는 일은. 마지막으로 번을 섰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들이었는데.
문득 조춘배의 마음에 그리움이 솟구쳐 올랐다.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게 해준 한 사람.
‘소교주님, 어디 계십니까? 보고 싶습니다.’
* * *
아버지는 이번 회합에서 입을 옷으로 가장 화려한 옷을 고르셨다.
이 옷의 핵심은 등 쪽에 있었다. 그곳에 천마혼이 뒤돌아 서 있는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걸어가면 마치 천마혼도 걷는 것 같은 옷. 그야말로 내가 천마 검우진이다, 라고 할만한 옷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아버지와 동경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오늘 최고로 멋있으십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나도 아니고, 조춘배도 아니고, 무림맹주도 아니고 사도맹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오늘의 주인공은 아버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다.
“자, 네 뜻대로 모두 불러 모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제 뜻이라니요?”
“그럼 내 뜻이더냐?”
“그럼요. 두 맹주님이 왜 오겠습니까? 아버지를 뵙고 싶어서 오는 거죠.”
거울 속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비웃었다. 아버지, 이때의 아버지 표정을 한 번 보십시오. 사람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웃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 나는 이 아버지만의 비웃음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내 너스레가 통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대답이기도 했으니까.
이 비웃음은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어떨 때는 ‘까분다’이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과연 그럴까?’이기도 했으며 ‘웃기지 마라.’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뻔뻔한 녀석 같으니’이기도 하고.
아버지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가자, 손님을 불렀으면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오늘만큼은 너스레를 떨지 않은 채 조용히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등에 그려진 무시무시한 천마혼의 뒷모습.
아버지의 뒷모습을 닮은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나의 천마혼이 궁금해졌다.
구화마공이 대성을 이루는 날, 나의 천마혼은 어떤 모습으로 발현할까?
거처 앞에 형 검무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을 향한 아버지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오늘 같은 날 함께 나서는 것이 대견한 것이리라.
“아버지, 제게도 지금 형을 보는 그런 눈빛으로 봐주십시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와 형이 좌우에서 뒤따라 걸었다.
“장남만 좋아하는 우리 아버지, 너무 하십니다.”
당연히 내 말을 무시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어려서 네 형이 열이 난 적이 있었다.”
나도 형도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이런 말을 꺼낸 적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의는 외부에 일이 있어 나가 있었지. 그때 네 형을 안고 천마비행술로 그 사람에게 달려갔었다.”
그때부터 형이 이상해졌군요! 라고 너스레를 떨고 싶었지만 참았다. 형이 너무 놀라고 긴장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있었으니까. 나도 이렇게 놀라운데, 형은 오죽할까?
“다행히 열은 곧장 내렸지. 마의가 웃더라. 이렇게까지 달려올 정도는 아니었다면서.”
이 완벽한 사람도 서툴렀던 순간이 있었던 거다. 아픈 자식 앞에서는 천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내가 회귀해서 관계를 바꾸지 않았다면 영원히 듣지 못했을 말이다.
아버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자식을 키움에 있어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게 되는 것이 첫째이기도 할 테니까.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아버지 뒤를 따라 걸었다.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오늘 아버지가 해준 이 말을, 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형이 이렇게 잘 버텨주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다.
“저는요? 저는 열 난 적 없었습니까?”
“있었지. 넌 더 펄펄 끓었지.”
“그럼 더 빠르게 달리셨겠군요.”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이 웃음만큼은 비웃음이 아니라 오래전 그때를 떠올리는 그런 미소였다.
“발가벗겨서 미지근한 물로 닦아내며 열을 내렸다.”
“너무 하십니다!”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가 웃은 것일까? 등의 천마혼이 웃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가촌을 향해 걷는 내내 형을 안고 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내 열을 내리기 위해 천에 미지근한 물을 묻혀 내 몸을 닦아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우린 여기까지 왔다. 한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저 멀리 풍류주점이 보였다.
* * *
지붕에 있던 극악소마가 훌쩍 뛰어 땅으로 내려섰다.
쪼그리고 앉아 딴생각에 잠겨 있던 독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 세상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이 먼저 움직였고, 나머지 마존들은 양쪽으로 나눠서 길 끝을 쳐다보았다.
조춘배는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방에서 나와서 바깥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으허헉!’
길 끝에서 검우진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 양옆으로 소교주와 대공자가 날개처럼 펼쳐져서 뒤따르고 있었다.
‘정말 교주님이 참석하시는 자리였어!’
놀란 조춘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누가 석상이 된 자신을 들어서 주방으로 데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교주가 오는 모습을 봤는데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검우진이 가까이 오자 마존들이 일제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바깥에서 구경하던 상인들은 어느새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저잣거리에는 일정 거리를 두고 일렬로 단주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그 선두에는 장호가 있었다.
“다들 편히 쉬게.”
나직하지만 묵직한 검우진의 목소리가 저잣거리 끝까지 울려 퍼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단주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늠름한 모습을 보였다.
“자, 들어가지.”
검우진이 앞장서 들어갔고, 마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입구 옆으로 조춘배가 넙죽 엎드려 있었다.
검우진이 그를 알아보았다.
“일어나게.”
“교주님이 오시는 줄 알았다면, 더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했을 겁니다.”
그때 뒤에서 검무극이 넌지시 말했다.
“그럼 최선을 다 안 했다는 뜻인데? 주인장, 아버지는 한 분이지만, 여긴 여덟 분이시오.”
당황한 조춘배가 습관적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그러다 다시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교주 앞에서 손사래를 치다니. 누군가 저 무례한 손을 잘라야 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짓을 한 것이다.
검우진이 한심하다는 듯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주인장을 놀리고 싶으냐?
그러자 기회다 싶어 마존들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일제히 쏟아지는 비난의 눈빛.
“아니, 전 긴장을 좀 풀어주려고 그랬죠. 너무들 하십니다! 아버지 앞에선 숨도 안 쉬고 절 버리시는군요!”
물론,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내 서릿발 같았던 혈천도마의 눈빛은 ‘어이구 이놈아!’ 하고 있었고, 가면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여빈과의 일 그새 다 소문냈더라?’ 하는 취마의 눈빛, 아버지 앞에서만은 절대 자기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는 독왕의 눈빛, ‘오늘은 장난금지’라는 엄격한 권마의 눈빛, 다음 세대 마존의 첫 주자인 섭혼마존의 눈빛,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일화검존의 눈빛, 나 말고 형을 보는 마불의 꺾이지 않는 눈빛까지.
권마가 검우진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올라가시죠.”
검우진이 이 층의 세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다시 내려오는 권마를 보며 조춘배는 내심 의아했다.
‘왜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 거지? 마존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굴 만나려고?’
그 상대가 무림맹주나 사도맹주라는 것은 애초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 중대한 만남이 자신의 주점에서 열리는 것을.
마존들이 일 층에 섰다. 그 누구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게다가 흩어지지 않고 한쪽에 모였다.
‘대체 누가 오기에?’
바로 그때 주점으로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사람을 보자 조춘배는 깜짝 놀랐다. 아침에 봤던 그 노인이었다.
입구 근처에 있던 그가 다급히 노인에게 달려갔다.
“노인장, 오늘은 안 된다니까 여긴 왜 오셨소? 어서 가시오, 어서.”
놀란 시선이 모두 조춘배를 향했다.
조춘배가 주위 마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오늘 우리 주점에서 약속이 있던 분이신데. 잠시 착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에게 귓속말로 빠르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여기 다 무서운 분들이시오.”
그제서야 조춘배는 보았다. 노인의 뒤에 늘어서 있는 무인들을. 그들은 냉랭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이쿠!”
놀란 조춘배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주점을 하면서 온갖 무인을 다 봤던 조춘배였다. 지금 노인 뒤에 늘어선 사람들은 그냥 고수들이 아니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 마존들을 봤을 때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그들에게 느꼈다.
조춘배가 놀라 노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평범했던 노인의 옷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그 가슴에 적혀 있는 의협(義俠)이란 두 글자를 청룡이 승천하며 휘감고 있었다.
옷만 바뀐 게 아니라 분위기도 달랐다. 노인에게서는 뒤쪽 고수들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위엄과 품격이 느껴졌고 부리부리한 두 눈은 진짜 호랑이 눈이었다.
“나중에 보자고 하지 않았나?”
조춘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회합에 참석하시는 분이시군요.”
지켜보고 있던 검무극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림맹주이십니다.”
조춘배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무림맹주란 단어가 너무 낯설게 들렸다. 무림맹주라고? 정파 무림맹의 맹주? 무림맹주가 여긴 왜? 전쟁이라도 난 건가? 꿈인가?
“제가 맹주님을 풍류주점으로 초대했습니다.”
너무 놀란 조춘배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무극이 천천히 걸어가서 진패천에게 먼저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니네, 이쪽 지역은 오랜만이라 여행이 즐거웠네.”
“이분은 제가 미리 말씀드렸던 이곳 주인장이십니다.”
조춘배는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무림맹주에게 자신을 언급했었다고? 그리고 지금 소개해 준다고?
“주인장.”
무림맹주가 앞에 서 있어도 검무극은 차분한 눈빛으로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몸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퍼져나가 조춘배를 감쌌다. 그러자 조춘배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주점에서 마정회합을 열어준다고?
조춘배는 처음으로 전음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미칠 것 같은 격정적인 고마움을 나중에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실력 발휘 부탁하오, 주인장.”
조춘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패천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아까 주인장을 만났을 때, 자네가 왜 이 주점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지.”
조춘배에게 혼난 무림맹주였다. 날 세우지 말고 어른이 먼저 가서 잘못했다고 하라고.
“술과 음식까지 드시면 완전히 아시게 될 겁니다.”
진패천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권마가 안내하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혼자 올라갔다.
함께 온 무인들 중에 진하군과 진하령도 있었다.
그들과 너스레를 떨고 싶었지만, 공식적인 만남이었으니 말없이 포권만 했다.
특히 진하령은 검무극을 보자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검무극만이 주는 설렘이 있다. 세상에 누가 주점 주인장을 인사시킨다고 무림맹주 앞을 막아설 수 있겠는가?
그 뒤로 무림맹에서 가려 뽑은 일곱 명의 고수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고수도 있었고, 삼십대로 보이는 젊은 고수도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아는 정파의 전대와 당대의 최고수들이었다.
마존 앞에서도 자기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이들, 그중 한 사람이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정협(大正俠) 임상곤(任祥崑).
그는 앞서 무림맹주 앞에서 조춘배를 챙긴 것이 못마땅했다. 애초에 어디 주점 주인장 따위를 소개한단 말인가? 자신들을 무시하지 않고서야.
그가 검무극을 노려봤을 때, 차가운 시선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혈천도마였다. 그의 눈빛에 담긴 명백한 경고.
어디서 감히 소교주님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는가?
그러자 대정협 옆에 있던 노인이 혈천도마를 노려보았다.
태을신검(太乙神劍) 진광(晉光).
검 한 자루로 전대 무림을 종횡했던 검술의 고수.
더러운 마교놈들.
그도 자기감정을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화검존이 그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검술의 극의를 향해 가는 이들이기에 자연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조춘배는 이 소리 없는 신경전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홀린 듯 진패천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이 층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패천이 아무런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그가 이 층에 올라서자 일 층과 이 층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 주점에서 마정회합이 열리다니! 내 주점에서!’
조춘배는 기절할 것처럼 행복했다.
그가 마음을 다스리며 심호흡했다. 이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
주방으로 가려던 조춘배가 홱 돌아서며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띄는 남은 한 자리.
‘어? 그럼 저 자린 뭐야?’
제387회 우리가 웃으면서 볼 사이는 아니지.
계단을 올라왔을 때 저 앞으로 천마 검우진의 모습이 보였다.
진패천은 오랜만에 심장이 격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흥분이 얼마 만인가?’
검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와 정, 정과 마.
오랜 세월 끝없이 싸워온 양쪽 진영 수장들.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십여 년 만의 재회였다. 원래라면 예를 갖추며 인사부터 나눠야 했는데, 그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입에서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나온 진패천의 첫 마디.
“그 눈빛 그대로군.”
검우진을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진패천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이 사람을 싫어했었는지. 자신이 마교를 얼마나 미워하는 사람인지. 상상 속 검우진은 미화된 검우진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미움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로 크나큰 적대감이 밀려들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길러온 자제력도 검우진의 저 차갑고도 도도한 눈빛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자의 눈빛은 그대로다. 무림을 집어삼키려는 야욕도 그대로다.
진패천의 마음이 차가워졌다.
이번에는 검우진이 담담히 말했다.
“당신도 변하지 않았소.”
당신이란 말도 거슬렸고 변하지 않았다는 말도 거슬렸다. 좋은 의미로 ‘하나도 늙지 않았소’라고 해석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진패천은 새삼 느꼈다. 패도적인 성격인 자신이 근래 참 많이 참고 살았다는 것을.
이런 마음을 품으니 자연 주위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은 두 사람 사이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일 층도 마찬가지였다.
정파의 고수와 마존들 간에도 팽팽한 기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쭉 늘어선 마존들 앞에 검무극이 서 있었다.
늘어선 정파 고수들 앞에는 진하군이 서 있었다.
그들 옆에 미처 주방까지 들어가지 못한 조춘배가 있었다. 이 층에 올라가는 무림맹주를 쳐다보다가, 미처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 층에서 기 싸움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데 자신만 움직여서 주방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사람의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기도를 발출하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눈싸움만 했다.
상대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자르는 그런 눈빛이 오가고 있었다.
누군가 싸움의 씨앗이 될 한마디를 내뱉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하령은 보았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검무극이 더없이 여유로운 것을.
―안 말려도 돼?
―이 사람들을 어떻게 말려?
하긴, 이번에 함께 온 이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검무극이라면 어떻게든 말릴 수 있겠지라고 믿고 있는 게 황당한 거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역의 패자가 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으니까.
―괜찮을 거야. 당신 할아버지가 이 자리에서 싸움을 벌일 정도로 무모하고 멍청한 자를 데려왔다고 생각지 않으니까.
진하령은 옆에 서 있는 고수들을 쳐다보았다. 알기야 다 아는 사람들이지만,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래, 할아버지가 알아서 단속시켰겠지.
오히려 저 위가 걱정이다.
다시 그녀의 시선이 이 층을 향했다. 여전히 아무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서 오시게, 그동안 잘 지내셨나, 와주셔서 고맙소. 으레 하는 인사말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요즘 맹은 어떠냐, 교는 잘 돌아가냐? 상대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이 정도 인사는 해야 하지 않냐고.
이 층도 조용하고, 일 층도 조용하고.
그야말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이 층을 올려다보던 조춘배는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보니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한 흑의무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가 마교와 정파의 고수들을 스윽 둘러보았다. 눈은 작았지만, 그 눈빛은 강렬했다.
그냥 한 번 쳐다본 것만으로 끝이었다. 장내의 팽팽한 긴장감을 남자의 존재감이 모두 빨아들여 버렸다.
그 남자 바로 뒤로 흉측하리만큼 무섭게 생긴 젊은 남자가 서 있었고, 다시 그 뒤로 아홉 명의 무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팔마존을 기준으로 무림맹은 한 명을 줄여왔고, 사도맹은 한 명을 더 데려왔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백자강은 더 데려오면 데려오지, 자존심 때문에 숫자를 줄여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춘배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앞서 들어왔던 무림맹 고수들과 비슷한 존재감을 지녔다는 것을.
마존을 바라보는 눈빛도, 무림맹 고수들을 바라보는 눈빛도, 전혀 꿀리는 기색이 없었다.
조춘배의 시선이 다시 흑의무복의 남자를 향했다.
복장만으로는 일개 무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존재감은 뒤에 선 모두를 압도했다. 이 평범한 흑의가 화려한 옷들을 다 잡아먹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크게 외쳤다.
“사도맹주 도착하셨습니다!”
사도맹주란 말에 조춘배는 ‘어흐흑!’하고 신음과도 같은 비명을 내뱉었다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오늘 더 놀랄 일이 있을까 했는데,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백자강은 잠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저 검무극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의 절반을 차지한다. 검우진이 무림일통의 야욕을 여전히 버리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함만큼이나 어떻게 이런 자식을 키웠을까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이 일은 자식 농사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사도맹의 미래와도 관련이 있었다. 눈앞의 저 녀석은 아직 수확되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 수확될지 아직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백자강은 성큼성큼 걸어서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권마가 안내하려 했지만 역시 사양했다.
그렇게 이 층으로 올라가려던 백자강이 계단 근처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조춘배 앞에 멈춰 섰다.
‘오지 마십시오! 제발 그냥 올라가세요!’
조춘배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천마에 이어, 무림맹주, 그리고 사도맹주 앞에 서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대가 이곳 주인장인가?”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조춘배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그렇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자신을 향하던 백자강의 시선이 검무극으로 옮겨갔다.
“소교주가 자네 자랑을 많이 하더군.”
백자강이 저 말을 하는 이유가 자신을 위한 배려임을 알았기에 검무극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백자강도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사람은 자주 봐야 한다. 저 작은 눈이 볼수록 멋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으니까.
검무극이 멍하게 서 있는 조춘배에게 다가갔다.
“맞소. 오늘의 이 회합은 교주님과 무림맹주님, 사도맹주님의 당대 첫 삼자 회합이오.”
드디어 조춘배가 오늘 회합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의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정해지는 순간이기도 했고.
‘마정사 회합이라고? 그 회합을 내 주점에서 개최하기로 한 거였다고? 내 주점 의자에 교주님이, 무림맹주가, 사도맹주가 앉는다고? 우리 의자에!’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조춘배는 흠칫 놀라 고개를 숙였다.
일 층에 있던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평생 눈 한 번 마주칠 일 없었을 그들이 일개 주점 주인인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삼자 회합에 어울리는 그 어떤 장소보다 멋진 곳이라 생각하오.”
검무극의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소교주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겁날 게 뭐가 있겠나?’
검무극은 무림맹주에게도, 사도맹주에게도 자신을 자랑했다고 한다. 조춘배는 힘을 냈다.
“최선을 다해 요리하겠습니다.”
조춘배가 당당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오늘만큼은 주인장이 이 세상 모든 주점의 왕이시오!”
순간 조춘배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하며 쓰러질 뻔했다.
검무극의 말에 진하령이 소리 내서 웃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웃음이 터진 것이다.
옆에 서 있던 무림맹의 노 고수가 그녀를 돌아보았고, 진하령은 애써 웃음기를 지웠다.
‘정말 소교주는 미친놈이다. 저 미친놈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나는 미친년이고.’
반면 검무극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들은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마음으로 검무극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들을 희롱하는 건가?
―저 주점 주인장이란 자를 조심하게.
이런 전음까지 주고받았다. 조춘배를 마교가 준비한 비장의 한 수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한 것이다.
비사인과 진하군, 그리고 진하령은 안다. 저 주점 주인장은 더없이 평범한 사람이란 것을. 이 평범한 사람을 지켜주는 일에 검무극의 마도가 있음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 좁은 주점에 있어도, 그는 결코 저 탁자가 부서지지 않게 할 것임을.
―정말 당신은 이걸 해내는군.
진하군의 전음에 검무극이 답했다.
―우리가 해낸 거요. 물론 이렇게까지 서로 싫어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오.
하긴 원수들이 십 년 만에 만난 거나 다를 바가 없다.
―잘 풀 수 있겠소?
―해봐야지요.
이제 일 층에서의 눈싸움은 두 무리가 아니라 세 무리의 싸움이 되었다.
각각 후계자들을 앞에 세우고 그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정파의 고수들은 마인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사파인들도 싫어했다.
대정협 임상곤이 이번에는 사파 고수를 노려보았다. 특히 그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뇌격도(雷擊刀) 천망(千望).
근래 사파에서 명성을 떨치는 고수였는데, 정파의 고수들이 그와 싸우다 여럿이 죽었다. 언제 한 번 만났으면 했는데,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대정협이 노려보자 뇌격도가 반응했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맞서 노려보았다.
눈으로 욕하던 두 사람의 눈빛이 점차 달아올랐다.
이대로 두면 앞뒤 안 가리고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뇌격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뇌격도가 돌아보자 사도칠대고수인 괴악이 그만하라고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뇌격도와 친분이 있던 괴악이었다. 이렇게 표나게 말려줘야 물러날 명분도 있는 법, 과연 뇌격도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비사인이 괴악을 보며 잘하셨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 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자강이 이 층에 올라왔을 때 검우진과 진패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이했다.
세 사람이 드디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
마, 정, 사.
당대 첫 회합.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이곳에 흐르는 무거운 기운만으로 어떤 분위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우리가 웃으면서 볼 사이는 아니지.
검무극이라는 특별한 변수가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얼굴 한번 못 봤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죽는 그 날 보았거나.
서로 인사할 분위기가 아님을 알았기에 백자강은 남은 자리에 앉았다.
백자강이 앉자, 검우진과 진패천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역시 인사는 생략이었다.
백자강은 검우진부터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검우진은 마지막에 봤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당신도 나이를 먹는구려.’
다만 사람을 깔보는 듯한 그 눈빛은 예전 그대로였다.
백자강이 이번에는 진패천을 쳐다보았다. 그는 두 사람의 시선을 외면한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검우진을 싫어하는 진패천이 백자강이라고 좋아하겠는가?
백자강은 알 수 있었다.
‘벌써 열 좀 받았군.’
검우진의 저 눈빛 때문일 거다. 자신도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저 자존심 강하고 꼬장꼬장한 늙은이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과연 이 회합이 가능한가?’
그러면서 백자강의 마음에 떠오르는 하나의 의구심.
‘이 사람이 저런 아들을 키웠다고?’
이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 저 말 많고 밝은 아들을 키웠다고? 당장 묻고 싶었다.
‘대체 저 아들은 어떻게 키운 거요?’
셋이 모여도 조용했다. 누군가 주도해서 대화를 이끌어야 했는데, 세 사람 모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층의 침묵은 일 층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다 이 층의 누군가의 입에서.
다 쓸어버려!
이 한마디가 나오면 그 순간 이곳은 피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무거운 분위기의 해결사는 검무극이었다.
“사부님.”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그를 아는 마존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소교주가 나섰으니 이제 이 분위기 전환하고 본격적으로 회합이 진행되겠구나.
자신이 지목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녀석이 무슨 장난을 치려고?’
권마는 내심 불안했지만, 나직하고 묵직하게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저기 사도맹 소맹주 말입니다.”
이번에는 비사인이 흠칫했다. 왜 나를? 불길했다.
‘제발 쓸데없는 소리는 마시오!’
애타는 비사인의 바람을 한 방에 부숴버리는 검무극의 질문.
“저 얼굴, 사부님이 선호하시는 얼굴 아닙니까?”
두 사람 모두를 당혹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물론 장내에 침묵이 흐르고 있었으니 검무극의 말은 이 층 세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주방의 조춘배에게까지 다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권마에게 집중되었다.
삼자회합 자리에서 사도맹 소맹주의 얼굴 평가를 하라고?
권마의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울릴 법한 일이었지만, 천둥소리는 마음에서만 울렸다. 천둥은 이런 소리를 내며 울렸다.
‘끝나고 보자.’
이 자리에서 마교 소교주를 호통칠 수도 없고, 무시해 버리는 것은 비사인에 대한 무례가 될 수도 있었기에.
“나는 남자답게 생긴 얼굴을 좋아한다. 그래, 맞다.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다.”
평소의 권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지만 권마는 알고 있었다. 검무극이 이 불안하고 위험천만한 회합을 위해 나서기 시작했음을. 그래서 제자를 위해 나서준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비사인은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다.
이 자식이 나를 놀려?
하지만 인상만으로는 모여 있는 모두를 상대할 수 있는 최강의 인상파 권마가 한 말이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사인은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거기까지면 좋았겠지만.
“우리 사부님 얼굴은 어떻소?”
비사인은 당황했다. 설마 권마의 얼굴에 관해 물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왜 나요? 저기 진 대주를 놀리지 않고!
―그야 당신 놀리는 게 더 재미있으니까.
예전이라면 당황해서 ‘멋지십니다’라거나 ‘더 남자답게 생기셨습니다’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비사인은 먼저 권마를 쳐다보았다. 선입견을 내려두고, 차분히 권마를 응시했다.
“제가 무림에서 뵌 분들 중에 제일 무섭게 생기셨습니다.”
솔직하되 정중하게 말했다.
태도가 거슬리지 않았는지 권마는 부드러운 농담으로 받아주었다.
“다행히 이 얼굴이 내 직업에는 꽤 도움이 된다네.”
그곳에 있던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은 참 의외라 생각했다. 소문으로 들었던 권마와 아주 달랐으니까.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일 층의 터질 것 같았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거기에 마무리 너스레까지.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사실 나도 우리 소맹주 같은 얼굴 좋아하오.”
그러자 비사인이 물었다.
“나와 얼굴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소?”
“…….”
이 대화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의 고수들 앞에서 자신들의 친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 이 층에서 검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극이 올라오너라.”
그러자 진패천이 경쟁하듯 말했다.
“하군이 올라오너라.”
백자강도 그냥 있지 않았다.
“사인이 올라오너라.”
그렇게 세 사람이 이 층으로 올라왔다.
이 층의 세 사람은 알았다. 자신들만으로는 회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서로를 싫어해도 너무 싫어했다. 쳐다보기도 싫은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세 후계자가 각자 교주와 맹주 옆에 섰다.
그때 검우진이 말했다.
“무양이도 올라오너라.”
자신까지 부를지는 몰랐기에 검무양이 놀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검무양이 검무극 반대쪽에 날개를 펼치듯 섰다.
아들이 둘이나 있다, 이거지? 우습군. 손녀 바보 진패천은 참지 못했다.
“하령이 올라오너라.”
진하령이 올라와서 진하군의 반대쪽에 섰다. 진패천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백자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러기야?’
제388회 우리 연합전선을 펼치지 않았소?
생각지도 못한 정파와 마교의 연합작전이었다.
백자강은 뿌듯해하는 진패천을 바라보다가 다시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먼저 검을 뽑아 든 사람은 저 검우진이다. 검무양을 불러올린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천마가 자식 자랑을 한다?
‘변한 건 외모만이 아닌가 보오.’
어쩌면 이런 변화가 검무극을 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순간 백자강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비사인이었다.
다들 둘인데 자신만 혼자라 괜히 자신이 잘못한 것만 같았다. 사부에게 미안했다.
사부를 대신해 소리치고 싶었다.
‘두 분! 정말 유치하십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런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나중에 당신은 자식을 많이 낳으시오! 일곱쯤 낳아서 줄 세웁시다! 그때 복수하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괜히 쳐다봤다 싶었다. 자신을 놀릴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텐데.
사실 이 자리에서 오직 검무극만이 형을 부른 아버지의 속뜻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보여주고 싶으신 거다.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자 싸움을 끝낸 두 아들을. 그래서 좌우로 당당히 서 있는 아들들을 자랑하고 싶으신 거다. 이건 자랑이자 칭찬이었다.
‘그렇죠? 죽여서 얻는 기쁨보다 살려서 얻는 기쁨이 더 크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는 아시잖아요? 이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마음을 먹으면 그 누구도 죽일 수 있으신 분이시니까요.’
어쨌든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형과 자신을 나란히 세우는 이 순간이 아버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자식 자랑이셨다는 것을.
아버지, 마지막 자랑이 아니게 해드릴 겁니다. 계속 자랑하시게 할 겁니다.
그러는 사이 백자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는 법이지요.”
혼자 살아온 세월에 어디 외로움만 있었겠나? 정말 원 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한데 어딜 이 좋은 인생 앞에, 저 고달픈 길을 자랑한단 말인가?
뿌듯해하던 진패천의 얼굴에 살짝 어둠이 스쳤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진패천은 그 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사람이었다. 가지가 부러졌으니까.
그래서 진하군과 진하령만큼은 정말 소중히 잘 키우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은 오직 무림맹과 무림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그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사적인 욕심이었다.
자칫 분위기가 무거워질 수도 있을 그때 검우진이 말했다.
“그 가지에서 꽃도 피고, 새도 지저귀는 법이지요.”
검무극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섰다.
“형이 꽃이고 제가 지저귀는 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검우진이 검무양을 바라보면서는.
“꽃도 피고.”
그리고 검무극을 보고서는.
“바람도 불고 그러지요.”
그렇게 바로잡았다.
검무극은 짐짓 너무 하십니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진하령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의미에서 검무극은 바람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갑자기 불어와 돌풍을 일으키다,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 바람을 찾아 이렇게 직접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회합에서도 여지없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일들이 벌어지는구나.’
자신이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불려 올라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자식 자랑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될 줄은 더욱 몰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천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 사람이 천마다, 라는 생각에 앞서 이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 사람의 아버지다.’
닮은 듯 닮지 않았다.
검우진은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운 위압감을 주었다. 천마임을 몰랐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리가 주는 위엄이 아니다. 권마나 비사인처럼 무섭게 생겨서 느끼는 두려움이 아닌 검우진이란 사람 자체가 주는 강렬한 존재감이 있었다.
원래라면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껴야 했는데.
그렇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붙여보고 싶었다.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검무극의 아버지이기 때문일까? 처음 봤지만 여러 번 본 것 같고,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검무양을 향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마신교의 대공자가 아닌.
‘저 사람이 형이구나.’
검무극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차분하면서도 정리된 느낌이었는데, 자기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닮았다면 검무극이 아니라 오라버니 쪽이었다.
그녀는 검무양과 시선이 마주쳤고,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검무양도 살짝 고개만 숙였다.
‘나와 저 사람은 공통점이 있긴 하네.’
혈육이지만 후계자에서 밀려난 이들이란 점. 물론 그녀는 애초에 후계자가 되려는 욕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누가 당신들과 혼인할지 몰라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시아버지가 기다리고 있겠군요.’
장인 될 사람이 묻는 거지.
‘부친께서는 뭐 하시는 분이신가?’
‘천마십니다.’
그런 상황을 떠올리자 생각만 해도 우스웠다. 하여튼 검무극과 관련된 일은 항상 그녀를 긴장시키고, 설레게 하고, 웃게 만든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비사인을 향했다.
원래라면 마주보기 쉽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리 흉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나 검무극과 함께 어울려서 그런 것이겠지?
진하령이 이번에는 백자강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천마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와도 달랐다.
오히려 세 사람 중 겉모습만 봐서는 어떤 사람인지 가장 알기 어려웠다.
다만 저 흑의 무복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 저런 복장을 입고 나왔다? 원래라면 이런 느낌이 들었을 거다.
나는 외적인 것에 신경 쓰는 사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일이 터지면 가장 싸우기 편한 복장으로 싸우겠다는 의지.
그 의지에 의도가 모두 삼켜진 느낌이었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명분과 체면보단,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사람. 그랬기에 그 역시 정말 강해 보였다.
이 층에 있던 사람을 둘러본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가까이 있던 진패천이 그녀의 한숨을 들었던 것일까?
“우리 손녀가 호북일미라는 건 알고 있으신가?”
아니면 죽은 아들과 며느리가 생각나서였을까?
진패천은 평소 무림맹 무인들이나 정파인들에게 손주 자랑을 한 적이 없다.
맹주가 팔불출처럼 손자, 손녀 자랑을 하더라.
이건 자존심 세고 명예를 중시하는 진패천이 결코 허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랬기에 오늘의 이 자랑은 참으로 오랫동안 참았던 자랑이었다. 눈앞의 두 사람에게 하는 자랑이기도 했고, 모른 척 일 층에 있는 정파의 고수들에게 하는 자랑이기도 했다.
진패천이 진하령을 돌아보았다.
“이 할애비는 네가 천하제일미라 생각하지만.”
모두 앞에서 이렇게 말하자 진하령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안 돼요! 할아버지! 제발!’
그녀가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아름다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른 분들이 놀려요.”
“감히 누가 내 손녀를 놀린단 말이냐?”
그러자 비사인과 진하군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한 사람을 향했다. 심지어 오늘 진패천과 초면인 검무양도 ‘놀릴 사람이 이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하는 표정으로 옆에 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진패천이 시선의 주인공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검무극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진하령은 내심 긴장했다. 너스레로 자신을 놀릴 게 뻔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천하제일미 선발대회를 개최하면 반드시 진 소저가 우승할 겁니다. 맹주님이 심사를 보지 않으셔도 우승합니다!”
진패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의 대답에 후계자들이 옅게 웃었다. 그냥 제일 아름답지요, 하고 대답하면 될 것을 천하제일미 선발대회에 심사까지 언급하다니.
무림맹주의 물음에 저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검무극밖에 없으리라.
진하령은 검무극의 대답이 우스우면서도 동시에 기분이 좋았다. 더 아름다운 이안이 있음에도 할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말해줘서 고마웠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물론, 속마음은 이러했다.
―천하제일미는 이안이라 생각하면서.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내자 대답이 돌아왔다.
―네 할아버지가 심사 보셔도 이안이 일등일걸?
할아버지, 이 사람이 절 놀려요!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쳐야 하는데.
오늘 진패천은 바빴다. 그는 아예 작정했다. 이번에는 진하군을 자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놈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지만, 아들도 아들 나름이지?”
그러면서 뒤에 선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의협심 넘치고 책임감 있고. 어디서 이런 훌륭한 아들을 볼 수 있겠는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물론 그에게는 손자였지만, 다른 후계자들과 비교하기 위해 아들이라 표현한 것이다.
진하군은 당황했다. 평소 진패천은 자신을 이렇게 챙겨주는 분이 아니었다. 당신의 손자라는 걸 이용해서 헛된 짓이라도 할까 오히려 더 엄격하고 무섭게 자신을 대하셨다. 자랑스럽다는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들었기에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오늘 비교 대상이 검무극이고 비사인인데, 어찌 자신이 저 두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겸손을 생략했다.
“할아버지께서 훌륭한 가르침을 내려주시고 잘 인도해 주신 덕분입니다.”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던 적이 언제인가 싶었다. 있기는 있었던가? 놀랍게도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은 적도 오랜만이지만, 자신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제대로 드린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거 아시오? 이전에 할아버지께 감사 말씀을 언제 드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소.
검무극은 어느새 이런 순간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마음 편히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아까 나왔던 그 아들들 아니겠소? 키워봤자 소용없는 그 아들들 말이오.
아마 이래서일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읽고 위로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거기에 나아갈 길까지 제시해주는 그런 사람.
―그래도 우리가 또 한 번 철들면 제대로 들지 않소?
진하군은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새삼 느낀 것만으로도 이번 회담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자강은 비사인이 아직 검무극에게는 부족하다 여겼지만, 저 진하군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 등은 허용해도 삼 등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자랑해도 우리 사인이에겐 안 되지.’
오늘 이 자리가 끝나기 전에 그 점만큼은 확실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어쨌든 세 후계자가 올라오고 나서 이 층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적어도 활발하게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마존들은 검무극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소교주가 가야 해결이 되는구나.
검무극은 이 좋은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
“주인장, 술과 요리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조춘배가 술과 안주를 들고 올라갔다.
수도 없이 이 층을 들락거렸지만, 이 순간만큼 떨린 적은 없었다.
‘쏟으면 내 목숨을 쏟는 거야!’
정말 손이 덜덜 떨렸지만 가진 모든 용기를 다 발휘했다.
그가 각자 자리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장되고 숨 막혔던 순간이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돌아서려는데 진패천이 조춘배에게 물었다.
“자넨 아나? 소교주가 왜 자네 주점에서 이 회합을 개최했는지.”
조춘배는 무림맹주에게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진패천은 하필 이곳 주점에서 만남을 주최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술맛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을 것이며, 주인장 성품이 좋아봤자 뭘 그리 좋겠는가? 설령 최고라 하더라도 왜 여기일까?
그때 뜻밖의 사람이 대답을 대신했다.
“여기에 내 아들의 마도가 있소.”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아버지가 이 말을 해줄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
내 아들의 마도.
검무극은 너무 감격스러웠다. 너무 기쁘니까 사람이 멍해질 정도였다.
진패천은 잠시 말없이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검우진이 대신 대답할지 예상치 못했다. 아들의 마도가 여기에 있다?
다른 말이었으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을 텐데, 자식 문제였으니 예의상 물었다.
“교주께선 자제분의 마도가 어떤 마도인지 알고 있소?”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에게 집중되었다. 일 층에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마존들은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우진이 말했다.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오.”
노력이란 말은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렸다. 대부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으로 이해했지만, 검무극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달랐다.
‘나를 이해해 주시려고 노력하고 계신다.’
애초에 대신 대답해준 것부터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림맹주에게 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 대답은 자신에게 한 대답이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아버지의 등을 향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앞서 질문에 대한 예의였을까? 검우진이 진패천에게 물었다.
“맹주께선 손주분들을 얼마나 이해하시오?”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기에 진패천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른 내용이라면 모를까, 혈육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도 노력하는 중이오.”
이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순간인가 싶었는데.
백자강이 불쑥 진패천에게 물었다.
“하면 맹주께서는 손주분이 꿈꾸는 정도가 뭔지 알고 있소?”
순간 진패천은 당황했다. 이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
“노력하신다더니 말로만 노력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소.”
백자강의 정중한 역습이었다. 자신을 그렇게 어이없고 당혹하게 했는데 그냥 당하고 있을 그가 아니었다. 자식 자랑? 여긴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진패천이 변명하려다 슬쩍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아들의 마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그였으니까, 그가 한마디 거들어 주기를 바라서였다.
자신이 구차하게 변명하는 것보다 검우진이 한마디만 해주면 된다.
‘맹주께선 안 겪어봐서 모르시겠지만, 다 큰 자식과 제대로 대화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소.’
이 말이면 된다. 어리면 어려서 힘들고, 크면 커서 힘들다는 말까지 덧붙여주는 것은 기대도 안 한다.
우리 같이 정마연합전선을 펼치지 않았소? 핏줄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았소?
진패천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며 검우진이 차분히 말했다.
“나는 요즘 자주 대화하고 있소.”
제389회 소교주의 마도는 어디에?
정마연합이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뭐가 어째? 나는 요즘 자주 대화하고 있다고? 내가 그 대답 듣겠다고 쳐다본 게 아닌 줄 알았잖아? 그런데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뒤통수를 쳐?
백자강의 표정이 밝아지며 사마연합이 새롭게 결성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 사마외도 놈들!’
그러든지 말든지 검우진은 자신의 말이 진심이라는 듯 다시 말했다.
“함께 사냥도 하고 낚시도 하고 바둑도 두곤 하지요.”
검무극이 깜짝 놀랐다.
“어? 우리 낚시는 간 적 없잖아요?”
순간 진패천이 차갑게 눈을 반짝였다. 설마 없는 얘기를 지어냈어? 자식들과 대화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향한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검우진은 태연했다.
“아들이 너뿐이냐?”
물론, 검무극은 형과 낚시 갔다는 걸 짐작하고서 물었다. 없는 말을 하는 분이 아니었으니까. 이 자리에서 아버지가 형도 잘 챙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너무 하십니다! 저하고도 낚시 가주십시오!”
검우진은 못 들은 척 진패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들하고 시간도 좋았지만 나 자신에게도 필요한 시간이었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저 건방지고 도도한 눈빛. 그랬기에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저 눈빛은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낄 테니까.
“그래, 자식도 좋고, 자신을 위한 시간도 좋지.”
진패천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럼 자네들은 어쩌고?”
들떠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자식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무림맹주 진패천이 묻는 물음이었다.
백자강 역시 검우진이 어떤 대답을 할지 말없이 주시했다.
검우진은 앞에 놓여 있는 술병을 응시했다. 대답에 따라 저 술병의 술이 첫 잔조차 부어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시간을 아낀다고 우릴 막을 수 있겠소?”
말이 끝나는 순간 순식간에 공기가 달라졌다. 차가워지고 무거워졌다.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진하군과 진하령도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들을 쳐다보는 대신 아버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도, 등에 새겨진 저 천마혼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이다. 오직 앞을 향해서만 가는 이들.
아들 때문에 잠시 뒤돌아보셨던 아버지가 다시 앞을 보고 계신다. 무림 전체를 보고 계신다.
지금 무림맹주에게 물었다. 우릴 막을 수 있겠느냐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일 층의 정파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기세를 드러내며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조금 전 마교주가 한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사파 고수들 역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들은 마교와 정파가 싸우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작전을 세우며 전음을 나눴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앞에 서 있는 정파 고수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싸움이 벌어지면 누굴 먼저 벨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같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우진과 검무극이 저 위에 있는 한, 싸움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지금 서대룡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층의 대화를 들으니 자신 역시 제자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에 따로 봐야겠군.’
이런 자신이 놀라웠다. 그리고 싫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질색했을 거다. 이딴 말랑말랑한 감정은 명을 재촉할 뿐이라고 믿었으니까.
문득 검무극이 예전에 교주에게 들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군.
그래,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자신도 교주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자신이 가진 감정 중에 어쩌면 그게 제일 비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혈천도마가 옆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고개를 돌렸다.
일화검존은 이미 상대를 골라둔 상태였다. 만약 난전이 벌어지면 그녀는 태을신검을 죽일 작정이었다.
태을신검 역시 그녀의 살심을 읽은 상태였기에 오히려 은근히 싸움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마교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싹 쓸어버려야 해.’
언제나 변함없는 그의 마음이었으니까.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취마가 술병의 마개를 열더니 쭈욱 들이켰다.
은은한 주향이 장내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사람은 있었다.
독왕은 창문을 열고 창틀에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건방지다면서 싸늘한 기운이라도 보낼 법도 했는데, 감히 독왕에게는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았다. 죽일 수는 있겠지만, 다 같이 죽어야 하는. 독왕은 언제나 그런 존재였으니까.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던 그때.
검무극이 백자강에게 전음을 보냈다.
―좀 말려주십시오.
―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의외이면서, 또 한편으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누가 말립니까?
―우린 정파와 마교가 싸우면 대환영인데?
―싸우다 정들면요?
―그건 곤란하지.
이곳에 세 사람 중 그래도 제일 유연한 사람이 백자강이었다.
“사인아, 술 한잔 따라라.”
“네, 사부님.”
비사인이 백자강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검우진도 진패천도 그 의도를 잘 알았다. 정말 여기서 생사혈전을 벌일 것이 아니라면.
“무극아, 술 한 잔 따라라.”
“네, 아버지.”
진패천도 지지 않고 말했다.
“하군아, 술 한 잔 따라보아라.”
“네, 할아버지.”
그렇게 세 사람이 각자 한 잔씩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진패천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네의 마도가 이곳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그 마도 어디에 있나?”
진패천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진패천 뿐만 아니라 백자강도 궁금했다. 과연 이 주점 어디에 그의 마도가 있는 것일까?
검무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지금 보고 계시잖습니까?”
“무슨 말인가?”
검무극은 미처 내려가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진패천은 검무극의 마도가 조춘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주인장이 자네 마도라고?”
“그렇습니다.”
당사자인 조춘배가 제일 놀랐다. 요즘 놀라는데 이골이 난 그였지만, 다시 기록 경신이었다.
자네, 소교주의 마도가 돼 본 적 있나? 이 사람 취했군. 그것도 마교주와 무림맹주, 그리고 사도맹주 앞에서 말일세. 허허, 많이 취했어.
이번에는 진패천이 조춘배에게 물었다.
“자네가 소교주의 마도인가?”
“제가 어찌 감히.”
조춘배는 당황해서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 당사자의 생각을 듣고 싶네. 겁박하는 것 아니니, 편하게 대답하게.”
편하게 하란다고 어디 편한 자리겠는가?
당황한 조춘배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문득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 검무극의 눈빛이 말했다. 내가 있으니 겁먹지 마시오.
하찮은 자신에게 이런 큰 의미를 부여해주는 저 사람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이미 목숨으로 갚는 정도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제가…….”
그가 말을 꺼내자 주위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조용해졌다.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휴, 심장아! 그만 좀 뛰어라!’
진패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침에 봤던 그 사람이라 생각하고 말하게. 그땐 말을 잘했잖나?”
어디 말만 잘했나? 맹주를 막 야단도 쳤는데.
조춘배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말은 진패천이 아니라 천마 검우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다. 그에게 말할 기회는 지금뿐일 테니, 조춘배는 용기를 냈다.
“소교주님이 저희 주점 건너편에 황천각 지부를 열어주셨습니다. 억울한 일 있으면 거기 가서 신고하라고요. 평생 무인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는데, 우린 황천각 무인도 직접 보고, 거기서 신고도 해봤습니다. 요즘은 그분들과 친해졌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지부에 계신 분들 드시라고 가져다드리기도 하죠.”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기에 더욱 진실성이 느껴졌다.
“소교주님이 제 주점에 자주 오셔서 술을 마셔주시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마도는 탁자를 부수지 않는다.”
그 말을 처음 듣는 일 층의 고수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잘못 들었나? 뭘 부수지 않는다고?
“그 이후로 점점 술 취해서 사람을 패며 행패 부리던 자들이 사라졌습니다. 이곳 상인들을 종 부리듯 하던 무인들도 사라졌습니다. 사고로 죽는 사람도 줄었고, 실종되는 이들도 줄었습니다. 저는 마도가 무엇인지 정도가 무엇이고 사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조춘배는 아예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힘을 주는 건 오직 검무극을 위한 마음뿐이었다.
“다만 제게 선택권이 있어 세상의 모든 ‘도’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소교주님의 마도를 고를 겁니다. 그게 뭔지 몰라도 고를 겁니다. 장담하건대 저 말고 마가촌에 사는 모두가 그럴 겁니다. 모두가 멀리 계실 때, 오직 소교주님은 저희 옆에 계셔주셨으니까요.”
기왕 말한 것, 조춘배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진심을 드러냈다.
“저는 앞으로 소교주님이 큰일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틀림없이 소교주님은 만나는 사람을 배려하고 모두를 위해 움직이실 테니까요. 그 일들이 너무 힘드실까 봐 걱정됩니다. 지치실까 걱정됩니다.”
홀린 듯 말을 마친 조춘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천한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막상 말을 마치고 나자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해선 안 될 무례를 범한 것은 아닐까?
검무극이 그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맙소, 주인장. 세상 어떤 주인장이 이 자리에서 나를 대변해주겠소?”
“그 반대겠지요. 세상에 어떤 소교주가 주점 주인을 대변해주겠습니까? 저는 소교주님을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검우진도 진패천도 백자강도 말없이 조춘배의 뜨거운 눈빛을 보고 있었다. 검무양과 비사인과 진하군과 진하령도, 일 층에 있던 마존들과 정파 사파의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깊이 이해했고, 누군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속임수고 연기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한심하다고 여기는 이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또로로롱.
맑은 소리를 내며 검우진이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부었다.
“주인장은 와서 내 술 한잔 받게.”
“!”
검우진의 말에 조춘배는 사색이 되었다.
“감히 제가!”
덜덜 떨었지만 그렇다가 누구 명령인데 그냥 있겠는가?
조춘배가 달려가서 정중히 술을 받았다.
“마시고 나 한잔 따라주게.”
조춘배가 술을 마신 후, 검우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손이 너무 덜덜 떨려서 술잔 밖으로 술이 흘러넘쳤다.
하지만 그 술은 거짓말처럼 다시 술잔으로 들어갔다. 검우진이 넘치는 술을 극상승의 허공섭물로 다시 술잔에 넣은 것이다. 술은 한 방울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조춘배는 검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춘배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눈빛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 술도 한잔 받게.”
놀랍게도 말한 사람은 진패천이었다. 검무극을 진심으로 위하는 그의 마음이 맹주의 마음에 전해진 것이다. 그랬기에 이 말은 진심이었다.
“나 역시 소교주의 마도가 아직 이해되지는 않네만, 적어도 왜 이곳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군.”
진패천은 조춘배에게 술을 한잔 내렸다.
백자강도 그냥 있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손짓으로 조춘배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백자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춘배에게 술을 부어준 후, 그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건배했다.
쨍.
잔과 잔이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은은하게 주점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되어 팽팽하던 분위기가 다시 풀어졌다.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맹주님 저희도 한잔하겠습니다.”
검우진과 두 맹주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검무극이 네 사람을 데리고 이 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인장, 여기 술부터 주세요!”
“네, 갑니다!”
조춘배가 술과 잔부터 가져왔다.
그렇게 모두 둘러앉아서 술부터 한잔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려던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뭔가가 붕 날아오르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자리로 천천히 날아왔다.
허공섭물로 날아온 그것은 버섯을 볶은 요리였는데 정확히 비사인 앞에 놓였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백자강의 한마디.
“우리 사인이가 좋아하는 버섯이지.”
비사인이 눈을 크게 떴다. 비사인을 만난 이래 제일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진패천의 탁자에 있던 오리요리가 참지 못했다.
진패천이 보낸 요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진하군 앞에 놓였다.
“하군아, 너 좋아하는 오리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마라.”
그러자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떠오를 것 같았던 탁자에서도 그릇이 떠올랐다.
검우진의 탁자에서 날아온 요리가 검무극 앞에 내렸다.
“이건 제가 싫어하는 요리인데요?”
그러자 검우진이 말했다.
“내가 싫어하는 요리라 보냈다.”
검무극이 앉아 있는 자리에서는 아버지의 등만 보였다. 마치 천마혼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이렇게 입맛이 같군요! 그래도 아버지가 보낸 요리가 최곱니다.”
검무극의 외침에 진하군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맹주님이 보낸 요리가 최곱니다.”
비사인도 지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보낸 요리가 최곱니다.”
이 새로운 경쟁에 진하령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남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라더니, 그래서 남자를 연구하려면 애들을 연구하면 된다더니, 이 남자들이 무림을 지키고 있다.
“왜 그리 웃어?”
검무극의 물음에 그녀가 잔을 높이 들며 말했다.
“너무 든든해서. 자, 우리 다 같이 한잔해요!”
제390회 지금 무림 평화에 필요한 것은.
백자강이 비사인에게 버섯 요리를 보낸 것은 순전히 진패천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제자가 좋아하는 요리까지 다 알고 있다.
한데 진패천은 손자가 좋아하는 요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긴 손자니까 자주 함께 밥을 먹었겠군.’
사실 백자강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늘의 이 회담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쌓였던 것을 풀어내듯 손주 자랑하는 진패천도 예상 밖이었고, 싸늘하고 비정함만을 드러내리라 예상했던 검우진의 새로운 면모도 흥미로웠다.
정말 피는 속일 수 없는 걸까? 검우진의 예상치 못했던 행동들은 검무극의 엉뚱함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검무극의 핏속에는 검우진의 저 차갑고 냉소적인 성격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겠지.
어쨌든 오늘 검무극의 마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았다.
그의 마도는 ‘네 마도가 뭐냐?’는 질문에 ‘대충 이 정도 답이면 그럴듯하지 않을까?’ 하는 답이 아니었다. 마교 소교주는 확고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이 든 자신들보다도 더.
백자강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아들의 마도가 당신의 마도는 아닐진대.’
두 사람의 길은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정반대 방향의 길.
‘그대는 앞으로 어쩔 작정이오?’
차갑기만 한 검우진의 눈빛에서는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쨌든 진패천 역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 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들 부자를.’
하지만 지금 진패천은 다른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 교주.”
진패천은 잠시 검우진을 쳐다보더니.
“내 술 한 잔 받겠소?”
진패천은 조춘배의 말을 들으며 크게 감동했다. 검무극은 정파의 협객도 쉽게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 마교 앞 주점이 아니라 무림맹 앞 주점에서 일어나야 할 일이다.
무림맹주 입장에선 차기 교주가 저런 사람인데,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래서 검무극을 키워낸 그에게 술 한 잔 주고 싶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여전히 마교는 싫고 마교주도 싫다.
큰마음 먹고 한 말이었는데 검우진도 싫은 모양이다.
“싫소이다.”
검우진은 싫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주점 주인의 술은 받아도, 내 술은 받지 않겠다?”
검우진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 없이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진패천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친해지고 싶지 않은 거다. 언젠가 죽일 사람이니까.’
검우진의 두 눈에서 느껴지는 무림일통의 야망은 여전했다.
마주 보고 웃어도, 술을 함께 마셔도, 아무리 자식 자랑을 하며 열띤 경쟁에 휩싸여도, 열 개의 안주를 현란하게 날려 보내도.
주점을 나서는 순간 적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풍류는 환상에 불과하다.
진패천도 홀로 자신의 잔을 채운 후 술을 마셨다.
‘그럼 어찌할 건가? 자네 아들의 길을 막으면서까지 그 길을 갈 건가?’
진패천이 이번에는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백자강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적은 하나가 아니다.
저 작은 눈을 우습게 보면 안 된다. 천마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가 정작 저 백자강의 손에 목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만큼의 실력과 야망을 지닌 자다.
당장 저 흑의 무복만 봐도 알 수 있다. 때가 되면 그가 얼마나 빠르고 단호히 움직일지.
당대의 세 수장이 각각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세 차례 전쟁이 발발했을 거라는 세간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자신의 패도적인 성격을 두고 무림 명숙들이 농담할 때 항상 이 이야기를 꺼내곤 한다.
‘이런 자네들을 두고 손주들과 낚시도 가고 사냥도 가라고?’
문득 진패천의 머릿속에 낚싯대를 들고 멍하니 서서 불타오르는 무림맹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믿어선 안 될 이들이다.’
진패천이 고개를 돌려 그럼에도 오늘의 자리를 만들어낸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자네는 자네 아버지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어른들의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이쪽 젊은이들의 분위기는 밝았다.
물론,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자자, 새 얼굴부터 소개하겠소. 여긴 후계 싸움에서 지고 내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우리 형이오.”
예전이라면 앙칼진 반박을 했을 텐데, 검무양은 이제 헛웃음만 나왔다.
“검무양이오.”
그가 무뚝뚝하게 인사했다. 검무극은 안다. 형의 성격상 이 자리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진하령은 검무양에 대한 이야기를 오라버니를 통해 많이 들었다.
한때는 무림인 모두 이 사람이 후계자가 될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다 마교 후계자 다툼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믿기 어려웠다. 나중에 검무극을 제대로 알고 나서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 일이 어디 한 사람만 잘해서 되는 일이겠는가? 이 검무양도 대단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검무양을 바라보던 진하령의 시선이 옆에 앉아 있는 검무극을 향했다.
‘형제인데도 어찌 이리 다를까?’
그녀의 상념이 검무극에게 전해진 모양이다.
“우리 형 보니까 어때?”
당황하라고 던진 질문이겠지만, 진하령은 태연히 받았다.
“동질감을 느껴.”
“어떤 동질감?”
“내 신세와 비슷하잖아. 결국 후계자에게 제거당하는 비참한 운명 말이야.”
너스레의 마무리는 검무양에게 했다.
“제 목숨도 간당간당하거든요.”
처음 보는 마교 대공자에게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역시 검무극의 힘이 크긴 컸다. 그가 옆에 있으니 이런 너스레가 절로 나왔다.
다행히 검무양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검무양은 예전 일을 떠올렸다.
검무극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나는 언제 죽일 거냐고 묻던 그 순간을.
그랬기에 그녀의 농담은 와닿았다. 후계자와 함께 가는 이의 마음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한잔 받겠소?”
뜻밖이었다. 그가 술을 권할 줄이야.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아요. 동병상련끼리 한잔하죠.”
검무양이 그녀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지켜보던 진하군이 말했다.
“아까 할아버지 말씀 못 들었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천하제일미 손녀를 감히 누가 건드냐?”
술을 받은 진하령이 검무양에게 술을 부어주며 물었다.
“어때요? 교주님이 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시면?”
검무양은 대답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진하령은 거 보라는 표정으로 진하군에게 말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자신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어.”
진하령도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이 자리가 너무 신선했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평생 단 한 번도 마주할 일이 없었을 두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고 술을 마시다니?
진하군은 검무양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솔직히 기분 나빴다. 말이라도 ‘어찌 귀한 분을 죽이겠소?’라고 해줬어야지. 동생과 관련된, 그것도 목숨을 두고 한 농담이기에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해하시오. 원래 우리 형이 무뚝뚝하오. 당신 많이 닮았지.”
나를 닮았다고? 대체 어딜 봐서?
그러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비사인의 잔을 채워주었다. 사람들 챙기는 검무극의 손과 입이 바쁘다.
“당신은 무뚝뚝하지 않아 좋소.”
“내가 무뚝뚝하지 않다는 말은 당신에게 처음 듣소.”
하긴, 처음 듣는 말이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사람 얼굴 볼 줄 아는 사람은 흉터 아래 본 얼굴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를 알아볼 거요.
심지어 잘 생겼다는 말까지 들었으니까.
“소교주.”
“왜 그러시오?”
비사인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우릴 왜 한곳에 모이게 한 거요.”
네 사람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 눈빛들 뭐요? 너라면 뭔가 숨겨진 거창한 의도나 계획이 있겠지, 뭐 이런 거요? 없소. 그냥 다들 너무 경직된 것 같아서 좀 만나서 풀려고 시작한 건데. 일이 이렇게 커져 버렸소.”
“그럼 이 회담을 어떻게 끝낼 거요?”
“그냥 실컷 놀다가 돌아가면 되지 않겠소? 저기 세 분 성격으로 봐서 누구 한 분 벌떡 일어나서 이만 가자, 하면 그때가 끝인 거지.”
어이없어하는 모두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세 분이 오늘만이라도 좀 쉬시고 농담도 좀 하시고. 난 그게 이 회합에서 제일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오. 평생 놀아보지 못한 분들이라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도 모르실 거요.”
사실 그건 검무극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한길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인생은 알아도, 정말 자신을 보살피고 자신을 위해 노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을까?
진하령이 교주와 맹주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각자 생각에 잠겨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 아무리 속삭이듯 말해도 자신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검무극의 말처럼 세 사람이 잠시라도 편히 쉬는 것이 무림 평화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대단한 계획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고.
바로 그때였다.
스릉.
검이 반쯤 뽑히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렸다. 그 소리에 순식간에 그곳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검우진은 조용히 술을 마셨고, 진패천은 살짝 걱정스러운 눈빛을, 백자강은 오히려 옅게 웃었다.
싸움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했기에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검무양이 검무극의 어깨를 잡아 제지하며 먼저 일어났다. 자신이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생각지 못한 모습에 검무극은 놀란 얼굴로 형을 바라보았다.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검우진과 두 맹주도 검무양을 바라보았다.
검무양이 난간으로 걸어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다.
“천마신교 대공자 검무양입니다.”
검무극이 아니라 그가 나선 것에 의아한 눈빛들이었다.
검을 반쯤 뽑은 사람은 태을신검이었다. 일화검존과의 기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자신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가 내내 거슬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시선을 돌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일단 평정심 싸움에서는 졌고, 끝까지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 검을 뽑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검무양은 굳이 태을신검을 지목하지 않고 모두에게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교주님과 맹주님들이 아니라면 거기 서 계실 분들이 아니란 것도 압니다.”
그렇게 좋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분들이니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오늘 이 회담이 얼마나 성사시키기 어려운 일이었을지 말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사람이 제 동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동생을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까지 나서서 막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가 쉬게 해줄 겁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아들의 말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진패천과 백자강 역시 검무양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검을 반쯤 뽑았던 태을신검이 차가운 시선으로 검무양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며 검무양이 말했다. 극히 정중했던 그의 말투가 도발적이고 강렬하게 바뀌었다.
“그대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소?”
그대가 아니라 그대들이라고 했다. 태을신검 한 사람을 겨냥해서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자극했다간, 태을신검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일을 키울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난 멀리까지 갈 수 있소. 후계자도 아닌 주제에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후계자가 아니기에…… 난 끝까지 갈 수 있소.”
날 건들면 끝까지 간다는 협박과도 같은 검무양의 의지였다.
“그러니 그대들도 오늘은 쉬시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평생 지겹도록 싸우시지 않으셨소?”
돌아서려던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주점 주인장을 자신의 마도라 부르는 내 동생 보셨을 거요. 맞소. 보다시피 미친놈이오. 내가 그 미친놈 형이오. 그러니 미친놈들과 끝장 볼 생각이 아니면 오늘은 건들지 마시오.”
주점은 조용했다.
마불의 몸에서 더욱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불은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공자를 위했던 자신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기에.
혈천도마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더니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주인장, 여기 술 가져오시오.”
그는 정파와 사파 고수들을 등지고 앉았다. 어디 덤빌 테면 덤벼 봐라, 하는 자신감의 발로였고, 정파와 사파 놈들 얼굴을 보면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의지기도 했다. 원래 혈천도마란 사람은 이런 사람이었다.
혈천도마가 앉자 마존들도 그 자리와 옆자리에 나눠 앉았다.
철컥.
반쯤 뽑혀 나왔던 태을신검의 검이 다시 검집으로 들어갔다. 원래도 뽑을 생각까진 없었는데, 마교가 저렇게 나오는데 어찌 뽑겠는가?
기세에 밀릴 수 없기에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도 서 있던 자리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자신 있게 등을 돌린 이도 있었고, 여전히 선 채로 상대를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지금 무림 평화에 필요한 것은 맛있는 술과 요리뿐!’
이런 마음으로 조춘배는 부지런히 준비해 둔 술과 안주를 날랐다. 그래, 주점에서 술을 안 마시고 서 있었으니 싸움이 날 수밖에.
검무양이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검무극에게 선수를 쳤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그게 무슨 말이든 하지 마!”
얼마나 당했으면 저럴까? 저 심정 나도 잘 알지,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그 잔에 진하군과 진하령의 잔이 힘차게 부딪쳤다. 공감의 건배였다.
“좋네, 형 덕분에 이렇게 쉬고. 내가 말리러 갔으면 사고 터졌을 거야. 괜히 울컥해서 교주님, 맹주님도 그냥 계신 데 당신이 뭔데 오늘 같은 날 검을 뽑냐, 이리 올라와라. 그럼 또 옆에 있던…….”
검무양이 검무극에게 술이나 마시라고 술잔을 내밀었다.
“그 입 좀 쉬라고.”
쌀쌀맞게 말했지만, 어찌 검무극이 모르겠는가? 자신을 위해주는 형의 마음을. 조금 전 나설 때 얼마나 큰마음을 먹어야 했을지.
검무극이 자세를 풀고 의자에 편하게 기댄 채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래, 좀 쉬자.”
편했다. 이 순간은 시공이환술 내의 그 해변에 누워 있는 것만큼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편안한지도.
진하령은 눈을 감은 채 실실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가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진하군 앞에 놓여 있던 오리 요리 그릇이 슬금슬금 탁자 위를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오리 요리는 검무양 앞으로 갔다.
“드시고 싶으면 말씀을 하시지.”
진하령의 말에 검무양이 당황했다.
“아니오! 내가 한 게 아니오.”
“당연히 아니죠!”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검무극을 향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검무극이 한쪽 눈을 살짝 뜨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형도 오리를 좋아해서.”
제391회 싸워도 우리끼리 싸웁시다.
검무양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오리 요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같은 핏줄이라서 그럴까? 자주 보지 않더라도 동생의 마음이 깊이 들여다보일 때가 있다. 바로 지금 같은 때다.
오리는 장난치듯 자신의 앞으로 헤엄쳐 왔지만, 검무양은 알 수 있었다. 동생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있음을.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는 검무극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렇게 말없이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누가 누굴 보고 무뚝뚝하다고 하는 건지.
한편 진하령은 검무극을 위해 나선 검무양에게 자신을 대입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오라버니를 대신해 저렇게 나설 수 있었을까? 아마도 못했으리라.
설령 나섰다 해도 저렇게 강력하게 분위기를 장악할 수 있었을까? 진정으로 동생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거다. 애초에 검무양은 끝까지 간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으니까.
감동한 사람은 진하령만이 아니었다. 비사인 역시 나직이 말했다.
“형제가 있다는 건 멋진 일인 것 같소.”
비사인은 지금껏 자신이 혼자인 것에 아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부러웠다. 저렇게 대신 나서 줄 형제가 있다는 것에.
그때 눈을 감고 있던 검무극이 말했다.
“아쉬우면 날 형으로 삼으시오.”
“동생이겠지!”
검무극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잠도 안 자면서 눈은 왜 감고 있소?”
“형이 내게 처음으로 준 휴식인데, 쉬어야지요.”
그러자 검무양이 말했다.
“그 입을 좀 쉬라고 했다. 눈은 뜨고, 입은 닫고.”
“너무 기분이 좋아서 입이 쉴 수가 없네.”
비사인이 또 부러운 점은 저들 형제가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 싸움을 마쳤다는 점이다.
자신은 후계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후계 싸움이 다 그렇지. 무인들 삶이 다 그렇지. 다들 그래왔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두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다. 저렇게 너스레를 떨며 정말 사는 게 다 그런 거냐고 묻고 있다.
진하군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묘한 감정에 격동해서일까? 평소보다 술이 잘 넘어갔다.
그 역시 검무양 때문이었다. 검무극이야 워낙 대단한 사람인 것을 알았으니, 그가 어떤 일을 해내도 이상하지 않다.
한데 조금 전 검무양의 모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감탄과 질투심, 그리고 수치심이 뒤섞였다. 자신과 닮았다는 말을 들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뭐가 나와 닮아?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런 마음이 내심 있었는데, 조금 전 보여준 검무양의 모습은 자신의 자만을 부끄럽게 했다.
그때 진하령이 진하군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라버니의 심란한 마음을 이해했다.
“나중이 기대돼.”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미기도 했고, 정말 기대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이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었을 그때는 어떤 무림이 펼쳐질까? 오늘 한자리에서 셋을 모두 보니 더욱 큰 기대감이 들었다. 막연히 생각했을 때와는 또 달랐다.
한편 일 층의 분위기는 완전히 풀어졌다.
삼삼오오, 가까운 이들끼리 모여 술을 마셨다. 허름한 주점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술도 요리도 모두 훌륭했다.
“맛이 괜찮군.”
이런 칭찬을 벌써 두 번이나 들은 조춘배는 주방에 들어와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정파 무인들에게도 듣고, 사파 무인들에게도 들었다. 이걸 단골들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뻤다.
“여기 술 한 병 더!”
“네, 갑니다!”
무림 평화는 내가 지킨다! 조춘배가 부지런히 뛰어다니던 그때, 혈천도마는 일화검존의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죄송해요.”
앞서 태을신검을 자극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냥 먼저 시선을 돌려버렸으면 되었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젊어서 그래.”
“젊긴요. 제 나이가 몇인데.”
“자네 나이면 젊지. 내가 자네 나이면…….”
혈천도마가 뭐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제 나이면 뭘 하려고요?”
“딱 정해둔 것은 없지만.”
사실 있었다.
혈천도마는 그게 뭔지 말해주지 않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
“제 나이라고 여기고 사시면 되잖아요?”
“그 나이가 아닌데 어찌 그렇게 사나?”
일화검존이 탁자를 가법게 세 번 내리치며 선언했다.
“이제부터 혈천도마는 일화검존과 같은 나이다.”
옆에서 술을 마시던 취마가 끼어들었다.
“어지간히 선배께 쌓인 게 많은가 봅니다. 친구 맺고 다 풀려는 거죠.”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그런가 보네.”
혈천도마가 어쩐 일로 취마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주정뱅이 꼴 보기 싫다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자네가 이 사람과 사이에서 여러모로 힘 써준 것 알고 있네.”
자신과 일화검존의 사이를 회복하는데 취마가 큰 역할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까진 아니더라도 취마가 많이 애썼다 정도는 일화검존에게 들은 것이다.
“뭐, 친구들 일인데요.”
은근슬쩍 수작을 부렸지만, 일화검존이 두고 보지 않았다.
“친구들? 꿈도 꾸지 마!”
“선배님도 어려졌다면서?”
“나하고만 동갑이야.”
그렇게 오랜만에 즐거운 분위기인 세 사람 옆에 독왕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창가에 기대서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지나가는 여인들이라도 있었다면 모두 발걸음을 멈췄겠지만, 바깥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마불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뭘 그리 보고 있소?”
“그냥 좀 갑갑해서 보고 있었소. 봄기운도 좋고.”
천독림 내의 자신의 거처에서는 독을 연구하고 제조하니까 답답한 줄 모르지만, 이렇게 다른 곳에 있으면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다. 매번 독초 찾아, 독충 찾아 천독림을 돌아다녀서 그렇기도 했다.
“요즘은 찾고 있는 독초 없으신가?”
“왜 없겠소? 봄에 피는 독초 중에서 필요한 것들이 잔뜩 있소.”
“조만간 한 번 찾아뵙겠소.”
독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불은 정말이지 독초 찾는 데에는 귀신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마불이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함께 가면 좋을 텐데 저리 바빠서야.”
독왕의 시선도 이 층을 향했다. 그 경직되었던 이 층의 분위기가 후계자들이 올라간 후 풀어졌다. 그 중심에 검무극이 있기 때문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독왕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다가 사파의 고수 중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포권하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괴악이었다. 투왕과의 싸움을 함께한 그는 독왕이 사도맹 무인들을 구해준 것을 알고 있었다. 주위 사파 고수들이 그를 쳐다보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독왕도 그에게 포권하며 예를 갖춘 후 창밖을 쳐다보았다.
주점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극악소마에게 섭혼마존이 다가갔다.
“앉아도 되나요?”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술도 요리도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외부 음식은 안 드시는 것을 알지만, 잔만 채워드리겠습니다.”
앞서 지붕에 혼자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혼자 있는 극악소마가 신경이 쓰였다. 이성적인 끌림이라기보다는 어떤 동질감에서 오는 끌림이었다.
백색 가면 속 두 눈이 섭혼마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난 그대가 부럽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극악소마가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 행동 하나로 극악소마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당대 천마를 모시는 사람이지만 너는 젊어서 검무극까지 모시는 마존이지 않느냐는 의미였다.
“소마님께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을 좋아하시는군요.”
검무극을 모시는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의미임을 알고 눈구멍 속의 두 눈이 웃었다.
권마는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오늘의 안전을 책임진 그는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밖의 단주들은 수시로 경계 상황을 알렸고, 권마는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검우진이 그를 가장 신뢰하는 것도 이런 점 때문이었다. 일을 맡기면 확실하게 해냈으니까.
교주와 두 맹주는 여전히 각자 술을 마셨다.
앞서 진패천이 술을 주겠다는 것을 검우진이 거절한 후,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하긴. 서로 싫어하는 그들이 어색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후계자들이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는 것이 더 나았다.
진패천은 앞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평생 놀아보지 못한 분들이라서.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도 모르실 거요.
맞는 말이다. 정말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서 놀아본 기억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최고를 향해 달리기만 했던 인생이었으니까.
‘인제 와서…….’
노는 방법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놀고 싶지도 않았다.
‘일하는 게 노는 거지.’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으니까.
무림맹주의 자리에까지 오른 삶이었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인가? 다만 작은 삶의 여유조차 없었다는 사실만큼은 아쉬웠다.
의식해서 노력했으면 어쩌면 그 여유, 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까? 인생에서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큼 허무한 게 없듯,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검우진의 시선이 진패천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우진의 건방지고 도도한 눈빛이 아주 잠깐 부드러워졌다.
“술 한 잔 주시겠소?”
앞서는 술을 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는데, 이제는 술을 한 잔 달라고 하고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쉽게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왜 마음이 바뀌었소?’
이렇게 묻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해 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거절할 때는 언제고! 내가 그대가 달라면 주고, 말라면 마는 사람인가?’
이렇게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술을 달라고 말을 꺼내는 이 순간, 자존심을 굽힌 사람은 검우진이었으니까.
검무극이 한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이번 회담에서 자신들이 놀고 쉬기를 바란다는. 그래서 마음을 바꾼 걸까?
진패천이 술병을 들고 다가가자 검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패천이 선 채로 술을 따라주었다.
“고맙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자강은 술을 주겠다는 말도,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동떨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깊이 개입하지도 않았다.
정과 마 사이의 사.
그는 항상 적절한 거리에 있었다.
검우진이 이번에는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백자강은 검우진의 눈빛에서 그가 자신들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백자강도 자신의 술잔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세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 섰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
이들의 실력이라면 기습으로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을 거리다. 그랬기에 이 거리는 신뢰의 거리기도 했다.
검우진이 그들을 부른 것은 함께 놀자는 이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제 일 이야기 좀 합시다.”
진패천과 백자강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검우진이 기를 발출해 주위를 둘러쌌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번 일의 배후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거요.”
물론이었다. 진패천의 손자와 손녀가 죽을 뻔했고, 심지어 백자강은 직접 투왕과 싸우기까지 했다.
이윽고 검우진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싸워도 우리끼리 싸웁시다.”
자신들의 싸움에 남을 끼워 넣지 말자는, 다시 말해 힘을 합쳐서 놈들을 없애자는 의미였다.
“본교는 놈들과 관련된 정보 모두를 그대들과 공유하고 놈들을 처단하는 것을 본교 최우선 목표로 삼을 작정이오.”
진패천과 백자강은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검우진이 이렇게 먼저 패를 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자고로 협상에서는 자기 생각을 먼저 밝히는 쪽이 불리한 법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마교주인데. 게다가 누구보다 자존심 강한 그였기에 이쪽에서 먼저 힘을 합치자는 말을 기다릴 법도 했고.
검우진은 이렇게 예상을 모두 깨뜨렸다.
이 사람도 변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계략이 있는 걸까?
진패천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이 마교주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그것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을 지금껏 살아남게 해준 바로 그것, 본능 말이다.
본능은 마교주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멀리 검무극의 모습이 보였다. 본능이 그를 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본능의 속삭임을 들었다. 잘 모르겠으면 저 아이를 믿어. 너와 저 사도맹주를 마교 앞 주점까지 끌고 온 저 아이 말이다.
이윽고 진패천이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솔직히 손주 녀석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소. 맞소. 나는 저 아이가 꿈꾸는 정도가 무엇인지 모르오.”
진하군을 향한 진패천의 두 눈이 깊어졌다.
“저 아이가 걸어가는 정도를 보고 싶소. 정말 아름답고 훌륭한 길일 거요. 그래, 그 길을 보려면 뒤에서 모략질이나 하는 그 야비한 자들은 다 때려잡아야겠지.”
진패천의 시선이 다시 검우진을 향했다.
“좋소이다. 본맹도 놈들과 관련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배후를 처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겠소.”
무림맹이 천마신교와 손을 잡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검우진과 진패천의 시선이 백자강을 향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서 거짓말을 알아내는 감각이 통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검우진과의 대화에서 귓가에 소름이 돋은 적은 없었다.
“정마가 가는데 사가 고집부릴 수 있겠소? 놈들에게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려줍시다.”
그의 작은 눈이 웃었다. 정파나 마교에게 한 수 양보한다는 듯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제 다른 말은 더 필요 없었다.
세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무림 역사상 다시 없을 정사마 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도맹은 배후와 관련해서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며 적들을 추적해 나갈 것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지원까지 있을 것이다.
검무극은 어느새 눈을 뜨고 세 사람이 건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말소리가 차단되는 순간, 세 사람이 매우 중요한 대화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기에 저 건배로 삼자연합이 성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믿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아버지가 내 마도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적어도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시는 분이셨으니까.
그래서 이 회합을 열고도 마음이 편했던 거다. 뒷일은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지 했던 것이고.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다.
“하여튼 놀지 못하시는 분들이시라니까.”
검무극의 말에 모두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요. 저 놀 줄 모르는 분들 대신 우리라도 제대로 축하합시다. 술도 진탕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그리고…….”
검무극이 의미심장하게 씩 웃으며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왜 날 보시오?”
흠칫 놀란 비사인은 보았다. 태풍을 몰고 오는 거대한 먹구름을, 하늘까지 솟아오른 해일을, 불덩이를 분출하는 용암을,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인생 최대의 위기가 자신을 덮쳐오고 있었다.
제392회 더 신나는 곡으로!
“드디어 때가 되었소.”
검무극의 말에 비사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장난기 가득한 눈빛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일단 딱 잡아뗐다. 이 무서운 얼굴이 모르겠다는데 누가 따지고 들겠냐마는, 안타깝게도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약속을 지킬 시간 말이오.”
어떤 약속일까 싶어서 함께 있던 검무양과 진하군, 진하령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동시에 또 이런 생각도 했다.
불쌍한 사람, 또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하지만 지금은 동정심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검우진과 진패천, 백자강도 마찬가지였다.
비사인이 눈빛으로 말했다.
‘설마? 여기서? 아니라고 해주시오.’
그럴 것 같았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으리라.
“그 약속을 지키기에 지금만큼 좋은 시간과 장소는 없을 것 같은데?”
검무극은 그 약속이란 표현을 쓰면서 주위의 호기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비사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첫 비무를 하기 위해 비무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뛰진 않았다.
검무양이 넌지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괜히 소맹주님 난처하게 하지 마라.”
“그 약속을 한 사람은 저 사람이었어.”
비사인이 초조한 얼굴로 술잔을 비웠다.
“당신, 포기 안 할 거지?”
“당신이 나라면 어쩌겠소?”
싫은 건 싫은 거고.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만약 반대의 경우, 검무극을 이렇게 놀려먹을 기회가 왔다면?
“포기 못 하겠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난 아마 평생 오늘을 후회할 거요.”
비사인도 공감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평생 다시 모으기 쉽지 않은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비사인이 다른 이유를 댔다.
“오늘의 이 회담 그 배후 놈들이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럴지도 모르지.”
“이런 상황에서 하라고?”
춤이나 추고 있는 모습을 보여서 되겠냐는 말이었는데.
“오히려 그들이 봤으면 좋겠소.”
“뭐요?”
“너희들이 있어도 우린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 우린 우리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보여 주고 싶소.”
장난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나중에 놈들을 제거하더라도 제대로 이긴 것이 아닐 거요. 놈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맙시다.”
언제나 그렇듯, 검무극이 바라는 것은 이것이다. 아,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다녀왔나? 아, 별일 아니니까 하던 말씀 계속하시죠.
비사인은 또 술을 마셨다. 확 춰버릴까 하는 고민이 엿보였다.
검무극이 작전을 바꿨다.
“소맹주.”
비사인이 고개를 들자 검무극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소. 그냥 당신 놀리려고 해본 소리요.”
“정말이오?”
“아무리 약속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지키기는 곤란하지 않겠소. 아쉽지만 내가 포기해야지. 자자,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술 마십시다.”
춤을 안 추게 되어서 기뻐야 했는데 왠지 기쁘지 않았다.
참다 참다 진하령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넌 몰라도 돼.”
그때 비사인이 불쑥 말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춤추기로 약속했소.”
진하령이 헉, 하는 표정으로 얼어붙었다. 진하군은 물론이고 검무양까지 놀랐다.
일제히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시선에 검무극이 손사래를 쳤다.
“왜 날 봐! 소맹주 혼자 한 약속이었어.”
당연히 진하령은 믿지 않았다.
“그럴 리가! 악마의 유혹이었겠지.”
검무양과 진하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밀어 함정에 빠뜨렸겠지!”
“날 호시탐탐 뒤에서 밀려는 사람은 저 소맹주라고!”
“그럴 리가! 저분이 그럴 리가 없지.”
“언제 봤다고?”
이번에는 검무양이 나섰다.
“내가 동생 대신 사과하겠소.”
오히려 두 사람의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검무극을 돕는 역할을 했다. 비사인의 성격상 저렇게 말하는데 숨길 수도 없는 일.
“아니오, 내가 추겠다고 한 것이 맞소.”
비사인이 술을 연거푸 석 잔을 마시더니.
“추겠소.”
모두가 비사인을 말렸다.
“참으세요!”
진하령을 시작으로.
“내 동생에게 말려들지 마시오.”
검무양도 말렸고.
“무리하지 마시오.”
진하군도 말렸다. 처지를 바꿔서 자신이 비사인이라면? 아, 끔찍한 일이었다.
“약속도 안 지키는 소인배가 될 수는 없소.”
“차라리 소인배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안타깝게 말한 진하령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세요.”
그러자 검무극이 그녀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그래서? 안 보고 싶어?”
“…….”
비사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분위기와 취기에 휩쓸린 상태였다. 언젠가 한 번 해야 한다면? 그래, 차라리 오늘 하자! 이런 젊은 패기도 더해졌고. 검무극에게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국 그는 태풍과 해일, 그리고 용암을 향해 돌격했다.
비사인이 성큼성큼 백자강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껏 비사인 자리에서 오갔던 대화를 다 들은 그들이기에, 백자강은 너 정말 하려고? 하는 표정이었다.
“예전에 제가 스스로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면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요. 오늘 그 약속을 지킬까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알 것 같았다. 그 말에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었다. 그만큼 큰 위기였고, 결국 검무극과 함께 그 위기를 넘어섰다는 것. 그냥 한 약속이 아니었고, 그냥 추는 춤이 아니었다.
백자강이 가만히 제자의 두 눈을 응시했다.
‘네게 이런 면이 있었더냐?’
비사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술기운인지 흥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백자강의 허락이 떨어졌다. 역시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였다.
비사인이 돌아와 검무극에게 부탁했다.
“준비 좀 해주시오.”
“정말 할 거요?”
비사인은 원망 대신 각오가 된 사람의 눈빛을 보였다.
“또 당신에게서 새로운 표정을 보는구려.”
“당신의 그런 말에 속아 여기까지 왔소.”
“아직 갈 길 멀었소. 당신 표정 다 볼 거요.”
비사인의 눈동자가 떨렸다. 놀랍게도 저 말이 진심임을 이제는 안다.
검무극이 난간에서 아래층의 조춘배에게 말했다.
“주인장, 가서 악공들을 불러오시오.”
“알겠습니다.”
조춘배가 달려 나가려는 것을 권마가 제지한 후 단주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주들이 쏜살처럼 달려가서 인근 기루에서 악공들을 데려왔다.
악공들이 도착하자 비사인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이 층에 있던 검우진과 진패천, 그리고 백자강은 난간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비사인과 함께 있던 넷은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일 층에서 술을 마시던 고수들 모두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몇몇은 벌써 술에 취해 있었다.
비사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오늘 역사적인 삼자 회담을 기념하는 의미로 제가 여러분들 앞에서 춤 한 번 추겠습니다.”
그러자 모두 깜짝 놀랐다. 주점 앞에 악공들이 와서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흥을 돋우려고 불렀다고 여겼다. 한데 사도맹 소맹주가 춤을 춘다고?
사도맹 고수들이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난간에 서 있는 백자강은 이미 허락을 내렸다는 듯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다.
사파의 노고수가 물었다.
“하면 천변극살무(千變極殺舞)를 추려는 것인가?”
천변극살무는 그 춤을 보고 살아남는 자가 없다는 사파의 절세신공이었다.
“아닙니다.”
“하면 혼원탈백무(混元奪魄舞)를 추려는 것인가?”
내공이 약한 사람이 혼원탈백무를 보면 미쳐 버린다고 알려진 죽음의 춤이었다.
“아닙니다.”
“그럼 일반 검무를 추겠다고?”
보통 무인들에게 춤이라 하면 검을 들고 펼치는 검무를 의미했다.
“아닙니다. 그냥 보통 사람들이 추는 춤을 출 겁니다. 잔칫날 추는 그런 춤 말입니다.”
질문을 한 노고수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춤을 추겠다는 게 무슨 말이지? 세간에서 일반 사람들이 추는 그런 춤을 춘다고? 자네가? 이 자리에서? 왜?
“우리 소맹주가 취했군.”
노고수의 말에 주위 고수들은 다시 백자강을 올려다보았다. 안 말리실 거냐는 눈빛에 백자강은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파 고수들뿐 아니라 정파 고수들도 의아해했다. 하지만 다들 술도 한 잔 마신 데다가, 사도맹 소맹주가 대체 어떤 춤을 출지 궁금했다.
마존들은 비사인이 아닌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으며 눈빛으로 ‘어휴, 이놈아!’ 야단치자 검무극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존 중에 그 누구도 그 억울함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독왕의 눈빛이 아련했다. ‘아, 내가 저 마수에 걸려 연무장에서 짖었지.’
객잔의 창문이 활짝 열렸다. 자리에 앉아서도 보고 서서도 보고 누군가는 나와서도 봤다.
비사인이 주점 밖 길 가운데 섰다.
“아, 이 일을 어째.”
시작도 하기 전에 진하령의 얼굴이 먼저 붉어졌다. 자신이 더 부끄러웠다.
“앞으로 우린 비 소맹주를 못 보게 되겠죠? 백 년 폐관 수련에 들어가 버릴지도 몰라요.”
검무양과 진하군도 검무극을 합공했다.
“나쁜 놈!”
“이번만큼은 해도 너무 하셨소.”
“저 사람 혼자 약속한 거라니까.”
검무극의 항변이 통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하필 이때 그 약속을 꺼냈잖아?”
검무양이 핵심을 파고들었지만, 검무극의 결정적인 반격이 있었다.
“그래서? 안 볼 거야?”
“…….”
검무양도 진하군도, 진하령도 못 들은 척 각기 다른 방향을 쳐다보았다.
“비 소맹주! 멋지십니다!”
검무극이 환호하며 손뼉을 치자 옆에 있던 세 사람도 함께 박수를 쳤다.
정파와 사파의 노고수들은 그 모습에 살짝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후계자들이 이렇게 어울리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검우진과 진패천, 백자강이 있는 앞에서 대놓고 야단치지는 못했다.
비사인은 눈을 감았다.
홀로 있는 이 기분, 세상에 혼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한 탓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싸움 중이었다면 방금 죽었다.
지켜보던 진하령이 눈을 가렸다.
“아, 난 도저히 못 보겠어.”
“나도.”
검무극도 눈을 가리자 진하령이 따졌다.
“당신은 왜 가려?”
“막상 보려니 나도 차마 못 보겠어.”
“사람 죽여 놓고 피가 무섭지?”
악공들이 다시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 또한 얼마나 놀랐겠는가? 갑자기 연주해야 한다고 왔는데 마교주, 무림맹주, 사도맹주가 있고, 마존들과 정파와 사파의 최고수들이 있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도맹 소맹주가 자신들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려 하고. 악공들도 비사인만큼이나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 단체로 꾸는 꿈이겠지.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번에는 비사인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
진하령이 가렸던 손을 치웠다.
비사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춤을 잘 췄던 것이다.
실눈을 뜨고 쳐다보던 검무극도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시켰지만 부끄럽고 떨리기는 매한가지였는데.
“잘 추는데?”
정말 그럴듯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막 추는 춤이 아니었다. 손과 발이 제법 음률을 타고 있었다.
사실 비사인은 사도십삼랑 중 사도팔랑에게 춤을 배웠다. 한때 항주 뒷골목을 휘저었다는 사도팔랑이 그에게 비장의 춤을 전수해 주었던 것이다.
비사인은 시간 날 때마다 그 춤을 열심히 연습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것을 예상했었다.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연습하고 또 연습했음을.
이런 사람이 비사인이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려 하고, 기왕 하는 것 잘해 내려 노력하는 사람.
하지만 비사인의 춤은 곧 한계에 봉착했다. 애초에 타고난 춤꾼도 아니고, 급조해서 배웠던 춤이었다. 연습도 부족했고.
동작이 반복되면서, 부끄럽다는 생각에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럴수록 뻔뻔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몸이 움츠러들며 본 실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잃은 안타까운 몸짓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검우진은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패천은 헛기침을 했다.
백자강은 그 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혼자 왔었어야 했나?’
정사마 모두가 안타까워하던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훌쩍 춤판으로 뛰어들었다.
“같이 춥시다!”
난입하듯 뛰어든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가 비사인의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추는 춤이 제대로 될 리 없었지만, 검무극은 그 동작을 열심히 따라 했다.
일부러 더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춤을 춰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 너무 재미있는 춤이오!”
그러다 흥취가 더 올랐는지 검무극이 소리쳤다.
“더 빠른 곡으로 부탁하오.”
악공들이 더 빠른 곡을 연주했다.
검무극의 관절이 이리저리 꺾였다. 저런 춤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 란 말이 절로 나오는 괴상망측한 춤이었다.
또다시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번에는 비사인이 그 춤을 따라 췄다.
비사인의 그 흉측한 얼굴이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거다. 검무극이 춤판에 뛰어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죽기 직전, 누군가 구해주러 뛰어들어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을 거다.
“형, 같이 추자!”
검무극이 달려가서 검무양을 억지로 데려가려 했다.
스릉.
검무양의 검이 반쯤 뽑혔다.
검무극이 방향을 바꿔 진하군을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스르릉.
검이 더 많이 뽑혔다.
그때, 스스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진하령이었다.
‘안 돼! 하령아!’
진패천이 말리기도 전에 진하령은 이미 음률을 타고 있었다.
춤을 잘 춰서가 아니었다. 그녀도 이런데 나서는 것을 극도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이 저렇게 친구를 위해 나섰는데, 자신도 나서서 도와주고 싶었다. 그 부끄러움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몸이 충동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녀가 함께하자 분위기는 환해졌다. 그녀는 살랑살랑 춤을 췄고, 검무극은 신나게 췄다. 비사인은 넋이 나간 채 이 춤 저 춤 막 췄다. 악공들은 더욱 신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삼자 회담도 처음이지만, 정사마 무인이 한데 모여 춤을 춘 것도 무림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마불의 몸에서 광채가 더욱 빛났다. 온 중원을 다 돌아다녔던 마불은 한때 나도 좀 놀았다는 듯 발을 까닥거리며 음률에 몸을 싣고 있었다. 보는 눈들이 없었다면 뛰어들었을지도 모를 움직임이었다.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쳐다봤던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도 이제 애들 재롱처럼 느껴지는지 굳은 표정을 풀었다.
백자강은 열심히 춤을 추고 있는 비사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패천은 저런 얼굴을 여러 번 보았다. 남의 자식이 아무리 잘났어도, 내 자식이 최고지 하는 그런 얼굴 말이다.
진패천이 이번에는 반대쪽에 선 검우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검무극이 춤추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들에게 져주길 바라오. 당신의 첫 패배가 아들이라면…… 그나마 괜찮지 않소?’
진패천의 시선이 다시 춤을 추고 있는 아이들을 향했다.
“정사마가 모여도 저렇게 즐거운데.”
젊음이 저렇게나 좋은 건데. 나는 왜 젊었을 때 저렇게 신나게 놀아보지 못했을까? 싸우고 또 싸우고. 이번에는 몇 명을 죽이고, 또 이번에는 누굴 죽이고. 청춘을 그렇게 다 보내버렸을까? 저렇게 한 번 활짝 웃어보지도, 저렇게 한 번 신나게 놀아보지도 못하고.
그러자 백자강이 말했다.
“어쩌면 정사마이기에 더 즐거운 건지도 모르지요.”
진패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령이 이렇게 따라 해보라며 손과 허리를 귀엽게 움직였다. 검무극과 비사인이 그 춤을 따라 췄다. 셋이서 동작을 맞추자 군무를 추는 것처럼 보기 좋았다.
비사인은 자각하지 못했다. 흉측한 얼굴을 드러내기 싫어 제대로 웃어본 적이 없던 그가,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춤 삼매경에 빠진 검무극이 소리쳤다.
“더 신나는 곡으로!”
완연한 봄기운을 품고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땀을 식혀 주었기 때문일까?
세 춤꾼은 지치지 않았다.
제393회 맹주님도 한 말씀 남겨주시죠.
진하군은 동생의 용기가 부러웠다.
어려서부터 동생은 저러했다. 자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일단 뛰어들고 보는 아이였다. 할아버지께 당당히 시종과 혼인하겠다고 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다 옆에 서 있는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그는 세 사람이 춤추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닮았다는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도 나처럼 동생을 부러워하고 있을까?
진하군이 이번에는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동생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저렇게 편안한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를 마교주와 사도맹주 사이에서 보게 되다니.
춤을 추는 동생도, 마교주와 사도맹주와 함께 있는 할아버지도, 마교 대공자와 함께 있는 자신도. 이 모든 것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진하군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 모든 환상 같은 일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그래, 저 사람이라고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친구를 위해서 감수하는 거겠지. 춤판이 아니라 수천의 적이 둘러싼 사지였더라도, 자신이 아는 검무극은 뛰어들었으리라.
이 사람과 함께 무림을 운영해 나가야 한다. 거기에 발맞춰서 가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는 오늘 이 순간을 잊지 않으면 될 것이다.
저 사나운 얼굴로 저렇게 귀여운 춤을 따라 추고 있는 비사인 역시 그 노력 중인 거겠지. 적어도 그는 자신보다 한 걸음 앞서가고 있다.
검무극이 악공들에게 소리쳤다.
“자, 이제 마지막 곡 주십시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인지 세 사람의 몸짓이 더욱 현란해졌다.
처음에는 부끄럽게 시작한 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들은 춤에 푹 빠진 채 그간 쌓였던 화를 다 풀어내고 있었다. 그들이 언제 이렇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출 기회가 있겠는가?
그렇게 마지막 곡이 끝나고, 시끄럽던 그곳에 정적이 찾아왔다.
비사인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검무극이 뛰어들고. 그다음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춤을 어떻게 췄는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해일이 저잣거리를 다 쓸었고, 용암은 심장을 불태웠다.
어색함이 밀려들었다. 주점 안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검무극이 큰 소리로 말했다.
“비 소맹주의 춤 공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나왔고, 세 사람은 포권하며 인사했다. 저자를 지키던 단주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특히 장호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멋지십니다!”
비사인과 진하령에 대한 예의로 한 사람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당연히 그 대상은 검무극이었다. 원래라면 ‘소교주님, 제일 멋지십니다!’가 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장호와 단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하군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하들에게 저렇게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는 수장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인간은 결국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잘해 주는 사람을 배신한다는, 그 서글픈 진실을 그는 알지 못하는 걸까? 그럴 리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알아도 저렇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거다.
춤꾼 삼인방이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어땠어?”
검무극의 물음에 검무양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해. 네가 춤추고 싶었지?”
형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나 춤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검무양이 못 들은 척 돌아섰고, 그 뒤를 따라 모두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입구에 있던 조춘배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가촌 저잣거리에서 숱한 공연이 있었지만, 오늘 공연이 최고였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주점 앞에서 춤을 춘 장면 역시 조춘배의 마음에 한 장의 그림이 되어 남았다. 마존들이 서 있던 모습처럼 이 모습 역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반면, 사파 고수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비웃음이 스쳤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도맹의 후계자가 체통도 없이 춤을 췄으니까.
비사인은 예전이었다면 틀림없이 저 반응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이렇게 터질 듯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저들 때문이라 여겼을 테니까. 춰서는 안 될 춤을 췄기 때문이라 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뛰는 건 저들 때문이 아니다. 이 두근거림은 약속을 지켰다는 기쁨 때문이다. 자신과 부끄러움을 함께한 우정 때문이다.
그랬기에 비사인은 지금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사부님의 사람들이다. 자신이 사도맹주가 되었을 때는 새로운 사람들이 저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내가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그때 저기에 서 있을 사람들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많이 변하고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검무극은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그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검무극은 마존들을 쳐다보며 조금 전에 췄던 춤 동작을 보여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마존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이도 있었고, 시선을 외면하는 이도 있었고, 미소를 짓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비웃거나 한심하게 보는 이는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깊은 친밀감과 유대감.
그 모습을 보며 비사인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바꿔야 하는구나.’
저기 저 마존들도 검무극의 마존들이 아니라 당대 천마의 마존들이다. 그런데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이들이 이럴진대, 나중에 검무극의 마존들은 어떨까? 검무극이 뛰어들면 여덟 명이 다 뛰어들어 함께 춤을 췄을 수도 있다. 저 검무극의 마존들이라면.
‘지금 저 사파 고수들 표정부터 이 마존들처럼 바뀌게끔 노력해야 하는구나.’
비사인이 사파 고수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가 아직 젊어서 그렇습니다’하는 표정을 지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이 한 번의 표현을 하고 안 하고 차이가 뭐 그리 클까마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 속에서 몇몇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중은 없다.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하는 거다.
춤 공연을 마치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이렇게 비사인은 검무극에게 자극을 받고 있었다. 그 자극을 흘려보내지 않고 깨우치고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검우진과 진패천, 백자강이 이쪽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비사인이 그들에게 걸어가서 백자강 앞에 섰다.
“약속 지키고 돌아왔습니다.”
비사인은 내심 긴장했다. 열기에 휩싸여서 춤을 추러 나갔지만, 이제 현실로 돌아온 그였다.
사실 사부에게 춤추러 나가겠다는 말을 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다. 심지어 마교주와 무림맹주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불호령이 떨어질까 긴장했는데.
“춤 연습 좀 더 해야겠더구나.”
비로소 비사인은 안도했다.
“네, 사부님.”
비사인의 감격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오늘 제자를 위해 써주신 크나큰 마음,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진패천은 진하령을 보며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고, 그녀는 애교 섞인 미소로 할아버지의 마음을 녹였다.
검우진은 그 특유의 비웃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의 비웃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아비 앞에서 춤까지 춘다고?’
네, 아버지. 새로움에 반응하시고 즐거워하시는 아버지의 이 비웃음을 볼 수 있다면, 전 뭐든 할 겁니다.
그렇게 후계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술을 마셨다.
비사인은 술을 쭉 들이켰다. 정말 홀가분했다. 살면서 이렇게 홀가분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춤까지 췄는데, 세상에 무엇을 못 하겠는가?
비사인이 진하령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검무극을 위해 뛰어든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합류한 덕분에 좋은 분위기로 마칠 수 있었다. 재미도 있었고.
“함께해 주셔서 고마웠소.”
“저도 즐거웠어요.”
비사인은 일부러 검무극에게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왜 내게는 고맙다고 안 하냐는 너스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본 이래로 제일 멋있었소!”
언제나 이렇게 예상을 깨는 검무극이었다.
비사인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당황스럽던 순간에 뛰어와서 함께 춤을 춘 검무극이다. 절을 하라 해도 할 수 있었다. 한데 이 사람은 먼저 멋있다고 말해준다.
당신 그거 아시오? 나도 당신처럼 멋있게 살 거요. 그래서 요즘 힘들어 죽겠소. 가랑이 안 찢어지고 황새 쫓아가려니 너무 힘드오.
“무인에게 그게 칭찬이오?”
“무인이니까 칭찬이지요. 세상에 어떤 무인이 이럴 수 있겠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하군은 그 말에 공감했다. 아까 검무양이 보여줬던 모습이나, 비사인이 보여준 모습 모두 자신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검무극이 물었다.
“후회하시오? 같이 춤출 걸 하고.”
원래라면 난 죽어도 못 할 일이라고 대답했을 텐데. 진하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할 수만 있었다면,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속마음을 읽은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속 시원하게 한마디 하시오. 내가 다음에 또 같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춤춘다! 멋지게 한마디 하시오.”
진하군이 비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렇게 함정에 빠졌던 거요?”
비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이미 약속을 했더이다.”
그 말에 나머지 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도 그들은 아쉬웠다.
이 순간이 끝나면 이런 자리를 다시 만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 가는 것이 아쉬웠다.
주점을 나서면 이 순간은 추억과 그리움으로만 남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밤새워 마시고 싶었지만, 결국 헤어져야 할 순간이 왔다.
진패천이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만 가자고. 백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한마디 말도 붙이기 싫었는데 이런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진패천과 백자강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해 주셔서 고마웠소.”
검우진이 일어났다.
“먼 길 와주셔서 고마웠소.”
그들은 짤막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여전히 서로가 적이지만, 적어도 이번 배후 세력을 뿌리 뽑을 때까지는 손을 잡을 것이다.
후계자들도 서로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약속 지키는 모습, 멋있었소.”
검무극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용기를 낸 가장 큰 이유도 그에게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고. 어찌나 빈틈이 없으신지. 검무극은 잊지 않고 그 점을 말해주었다.
“그런 말 해봤자, 다시는 그런 약속 안 할 거요.”
이번에는 진하군과 이별했다.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면 또 한 번 뭉칩시다. 축하연 열고 그때는 밤새워 놉시다!”
아직 진하군은 정식으로 소맹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럽시다.”
마지막으로 진하령과 작별했다. 세 사람 중 가장 아쉬운 사람은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 춤춘 거 소문날까?”
“나겠지?”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잘 출걸.”
검무극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진 소저가 아쉬워서 안 되겠소. 우리 다섯이 한 번 더 춥시다.”
검무양과 진하군이 동시에 검을 반쯤 뽑았다.
“저 봐, 둘이 똑같다니까.”
그렇게 그들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지금 마음 같아선 밤새워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일 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진패천이 물었다.
“설마, 저 글귀 검 교주 그대가 쓴 건 아니겠지요?”
벽에 적혀 있던 이름들은 들어왔을 때부터 확인했다. 그때야 취객들의 낙서겠거니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내가 쓴 것이 맞소.”
검우진의 대답에 진패천은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마존들이 남긴 글도 모두 진짜라는 의미.
평생을 살면서 무림의 주점이나 객잔 벽에 고수들이 이름을 남겨둔 것을 처음 보았다. 그것도 어디 평범한 고수들인가?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맹주님도 한 말씀 남겨주시죠?”
돌아보니 검무극이 뒤에 서 있었다.
“내가?”
진패천은 당황했다. 정말 어지간한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인데, 여기 와서 참 많이 놀라고 당황하는 중이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게 보지 않겠나? 자네들의 이름을 남겨둔 곳인데.”
“오히려 대단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무림맹주께서 당당하게 이름을 남겨두고 가셨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에이, 그래도 안 되지.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볼 겁니다. 그런가 보다. 쓰셨나 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패천은 아까 떠올렸던 감정이 생각났다. 지난 청춘 저렇게 환하게 웃어보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한 지난날을 후회하던 순간이.
‘뭐가 그리 생각할 게 많았을까? 뭐가 그리 심각한 인생이었을까?’
그래, 몇 자 남기고 가자.
진패천이 글귀가 적혀 있는 벽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곳에 글귀를 적으려다가 다른 쪽 벽으로 몸을 돌렸다. 천마 글귀 위에다 적기도 그렇고, 아래에다 적기도 그랬다. 자신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진패천의 검이 뽑혀 나왔다. 그는 벽면에 검으로 글귀를 남겼다.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첫 글자부터 막힘 없이 시원하게 써 내려갔다.
무림맹주 진패천, 이곳에서 새로운 마도를 보다.
검무극을 위해 한마디 남겨준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글을 남기지 않았을 거다. 아니, 애초에 오지도 않았겠지.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백자강을 쳐다보았다. 백자강은 고민하지 않았다.
“정과 마가 가면 사도 따라가야지.”
그는 진패천 아래쪽에 글을 남겼다. 위냐, 아래냐로 고민하지 않았다. 진패천의 필체가 힘차고 웅장했다면 백자강의 필체는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사도맹주 백자강, 풍류주점에서 제자의 춤사위를 보다.
풍류주점 벽에 천마와 무림맹주, 사도맹주의 글이 모두 새겨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제394회 나의 회합은 이제 끝났다.
“바깥이 왜 이렇게 조용해졌죠?”
송이의 말에 조춘배가 고개를 돌렸다.
볶고 끓이고, 굽고.
주방에서 요리와 씨름 중인 그였다. 혹시라도 늦을까 봐, 맛이 없을까 봐, 그야말로 온 힘을 기울여 요리하던 중이었다.
조춘배는 조심스럽게 주방에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시끌벅적하던 일 층은 조용해져 있었고, 다들 이 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춘배도 주방에서 나와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사도맹주가 벽에 글을 남기고 있었다.
‘헉!’
조춘배가 입을 틀어막았다.
뭐라고 남겼는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사도맹주가 쓰는 글 위에 또 다른 글이 남겨져 있었다. 무림맹주가 남긴 글이 틀림없었다.
‘아!’
조춘배는 너무 놀라고 흥분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젠 더 놀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오늘 조춘배의 심장은 강해지고 있다.
한편 사부가 벽에 남긴 글을 본 비사인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삼자 회담에서 남긴 글이니 무림에 화제가 될 글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역사가 되어 내려갈 수도 있는 글이었다.
그것을 모르실 리 없을 사부이신데, 자신을 언급해 주신 거다. 사부는 이 순간에도 검무극도, 진하군도 아닌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주고 계셨다.
글을 남긴 후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아래로 내려왔다. 그 뒤로 천마와 후계자들이 함께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그들의 모습이 조춘배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에게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장면이 감동이었다.
아래층에 있던 고수들은 위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검우진이 외부로 말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한 후에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수장의 표정이나 벽에 글까지 남기고 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이 역사적인 회담이 성공리에 끝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진패천이 주방 앞에 서 있던 조춘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도 요리도 맛있었네.”
조춘배의 입에서 ‘어이구,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원래라면 달려가서 절이라도 해야 했지만, 천마가 있는 자리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주방 앞에서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진패천이 걸어 나가자 그 뒤로 진하군과 진하령이, 다시 그 뒤로 정파의 고수들이 좌우로 펼쳐져서 뒤따랐다. 언제 술을 마시고 떠들었나 싶을 정도로, 조용히 절도 있게 맹주의 뒤를 따랐다.
떠나기 전, 당사자들만 아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태을신검은 끝내 일화검존을 한 번 더 노려봤고, 일화검존 역시 마지막까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혈천도마는 일화검존에게 ‘젊다, 젊어’라는 말을 하는 대신 태을신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제 그만 째려봐라.
태을신검이 혈천도마를 노려보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차가운 한마디가 더 날아갔다.
―눈깔 파버리기 전에.
혈천도마가 이렇게 원색적인 욕을 할 줄은 몰랐기에 태을신검은 당황했다. 버럭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저 사나운 기세로 볼 때, 여기에 반응했다가는 당장에 한판 붙자고 소리칠 것 같은 기세였다.
혈천도마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성공적인 회담 끝에 교주와 맹주가 작별 인사까지 했는데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법.
‘그걸 알고 저러는 거다.’
혈천도마를 노려보던 태을신검이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여튼 이 빌어먹을 마교 놈들!’
정말이지 마교라면 징글징글한 그였다.
일화검존이 혈천도마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그만 좀 보시라고 정중히 말씀드렸지.
일화검존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앞서 반응은 정중한 말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으니까.
―고맙다, 친구야.
혈천도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대답했다.
―이제 우리 동갑이잖아요.
혈천도마는 옅게 웃었다. 적어도 조금 전 태을신검에게 했던 대응은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에 적합했으니까. 실제 뱉은 욕설은 한 사십 년은 젊었을 때나 했던 말이었고. 일화검존 일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다.
다음으로 사파가 나갔다.
백자강은 떠나기 전에 검우진과 검무극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디 수확하는 날 한 번 봅시다.’
자식 농사 싸움, 이쪽 씨앗이 비사인이라면 한 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백자강도 밖으로 나갔다. 뒤로는 사파의 고수들이 펼쳐져서 걸음을 옮겼다.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을 모두 배웅하고 검우진이 마지막으로 떠났다. 검무양과 팔마존이 그의 뒤로 날개를 펼치며 뒤따랐다.
그렇게 모두 그곳을 떠나고 풍류주점에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조춘배와 검무극뿐이었다.
아, 한 사람 더 있었다.
“송이야. 오늘 고생했다.”
주방에서 일하던 송이에게 일한 값을 주고 내보냈다. 일이 많았던 오늘은 특별히 돈을 두 배로 챙겨주었고 주방에 남은 음식들을 한가득 싸주었다.
“감사해요! 어르신도 일찍 쉬세요.”
그렇게 송이마저 가자 그곳에는 검무극과 조춘배만 남았다.
검무극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춘배를 쳐다보았다.
“정말 고생하셨소.”
“아, 꿈만 같습니다.”
조춘배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저, 잠깐 이 층에 가봐도 되겠습니까?”
“같이 가시죠.”
조춘배는 이 층 벽 앞에 서서 감격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자신의 주점 벽에 천마와 무림맹주, 사도맹주 세 사람이 글을 남기고 갔다. 아마 세상 어떤 주점도 이런 곳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동시에 조춘배는 두려워졌다.
“저는 겁납니다.”
“뭐가 두렵소?”
“이 벽이 훼손되기라도 하면 어쩌지요?”
그 일을 상상하자 공포에 질렸고, 조춘배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아침에 왔는데 누가 벽에 낙서했다면? 벽을 부순다면? 벽 채로 훔쳐 간다면?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정사 모두의 적이 되는 일인데, 누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저 벽을 떼어내 훔쳐 가더라도 그걸 어디에 팔겠습니까?”
검무극은 이런 말로 조춘배를 완전히 안심시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내내 노심초사 불안해할 것이다.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건 그거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월 모시 누군가 이런저런 이유로 벽을 훼손하고 사라지다. 그 또한 역사의 한순간이 될 거란 말씀입니다. 어쩌면 그게 더 재미있는 역사가 될 수도 있지요.”
조춘배는 검무극이 이렇게 말해줄 줄은 정말 몰랐다.
“주인장이 이 순간을 기억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일은 영원히 남는 거죠. 보십시오. 저 벽에 남아 있는 사람 중 누가 벽이 훼손되었다고 화낼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다시 오셔서 또 적어주고 가시겠지요.”
조춘배의 가슴에 얹혀 있던 무거운 바윗돌이 바닥에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우리 마음속에 이 순간을 잘 기억해 둡시다.”
“네, 소교주님.”
어떻게 이렇게 젊은 사람이 이토록 사려 깊을 수 있을까? 조춘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제가 술 한 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좋지요, 주인장이 주는 술 한 잔 받읍시다.”
조춘배가 검무극에게 정중히 술을 따라주었다.
“역시! 우리 주인장이 주는 술이 제일 맛이 좋소.”
시원하게 마신 후, 검무극이 술병을 들었다.
“제 술도 한 잔 받으시오.”
조춘배에게 술을 가득 부어주었다.
공손히 술을 받은 후 조춘배가 술잔을 비웠다.
그 술을 마시자 비로소 자신의 주점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 끝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춘배는 보았다. 조용히 앉아서 주점 밖 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검무극의 모습을.
웃고 떠들 때의 그와는 다른 조용한 모습을. 조춘배는 이제 안다. 외로움이 느껴지는 저 차분한 모습이 소교주의 본모습이란 것을.
“주인장,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조춘배는 무슨 말로 인사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큰 고마움을 무슨 말로 전해야 할지. 그래서 주점 손님들에게 항상 하는 인사를 했다.
“손님, 또 오십시오!”
검무극이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검무극이 그 마음 장단에 맞춰 단골손님처럼 인사했다.
“많이 파시오, 주인장.”
검무극이 주점을 나서자 그때까지 숨죽이던 저잣거리 사람들이 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오늘은 늦도록 조춘배의 자랑이 이어질 것이다. 그 벽 앞에서는 기침도 못 하게 하겠지. 저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벽도 살아있는 거다.
* * *
본단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교주전으로 향했다.
오늘 회담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서였다. 삼자 회담을 성공으로 이끈 아버지는 교주전에 계시지 않았다.
“소교주님 오시면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호위인 휘가 안내한 곳은 아버지의 거처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교주 전용 온천이었다. 평소에는 이곳까지 나를 들이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이신지 들어오게 하셨다.
아버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계셨다.
“오랜만에 아버지와 함께하는 목욕이라니! 좋죠!”
옷을 벗으려던 그때, 아버지가 손을 내밀었다. 열린 옷자락이 다시 닫혔고, 나는 허공섭물에 밀려 뒤로 밀려났다.
“너무 하십니다! 저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아버지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물에 영약 타셨죠? 거기에 몸 담그면 피부가 강철처럼 강해지고 그런 거죠? 그래서 혼자서만 하시는 거죠?”
아버지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씀하셨다.
“평범한 물이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그럼 영약이라도 좀 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천마께서 몸을 담그는 곳인데.”
“네가 좀 사다가 타주든지.”
“뭐든 자연 그대로가 좋죠.”
그래,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변하셨다고 해도 함께 목욕하고 하는 분은 아니시지. 여기까지 오게 한 것만 해도 큰 변화다.
“그럼 여기서 전 김이라도 좀 쐬겠습니다.”
나는 온천 앞에 앉았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 만나보시니까 어떠셨습니까?”
“여전하더군.”
말씀은 안 하셔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셨을 거다. 아버지에게 그들은 또 다른 의미였을 테니까.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 한마디에 나는 오늘 내내 경직되어 있던 마음이 스르륵 녹는 것 같았다.
역시! 아버지는 알아보시는구나.
피곤했다. 정말 피곤했다.
춤추고 웃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회담의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놈들이 이 회담에서 음모를 꾸밀까 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고,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있어도, 그랬기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다. 원래 음모는 이런 방심을 파고드는 법이었으니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이번 회담이 끝이 났다.
적들이 어설픈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그들이 강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모여 있는데 음모를 꾸미면 결국 자신들이 손해라는 정확한 계산.
마정사가 모두 모여 있는 상황에서 외부의 적을 직접 겪게 된다면 이쪽을 더욱 뭉치게 하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
“알게 모르게 신경이 많이 쓰였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는 말씀 안 해주십니까?”
“고생했다.”
“우리 아버지 옆구리 찔러서 얻어낸 칭찬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좋네요.”
나는 온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여기 들어왔던 기억 납니다.”
순간 아버지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김이 시야를 가렸지만 신안술로 김 너머 아버지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뜨겁다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절 안고 들어가셨죠. 형도 기억납니다. 형은 하나도 안 뜨겁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었죠. 생각해보니 그 어렸을 때도 형은 아버지께 잘 보이고 싶어 했었네요.”
“후계자가 되어서도 형만 없으면 뒤에서 욕을 하는구나.”
“아까 그 멋진 모습 보셨잖아요? 방심하면 안 되는 형이거든요.”
어찌 형을 욕하려는 말이겠는가? 아까 형이 너무 멋있었다고 말하려고 꺼낸 말임을 아버지도 알고 계실 거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정중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뭐가?”
“전부 다요.”
내 마도는 아버지의 마도를 막고 있다. 그걸 오늘 또 한 한번 확인하셨을 테고. 분명 신경 쓰이고 거슬릴 텐데.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신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말했다.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라.”
“네, 아버지. 쉬십시오.”
물론 그냥 가진 않았다.
참방.
아버지에게 장난스럽게 물을 튕긴 후에 달아났다.
물론 날아간 물방울은 한 방울도 아버지에게 닿지 않았겠지만.
다음에는 제가 등을 밀어드리겠습니다, 아버지.
그날이 올지는 모르겠다만 말이다.
* * *
거처로 돌아온 나는 시공이환술로 두 번째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첫 번째 그곳이 푸른 하늘과 바다가 있는 해변이었다면, 이번 공간은 사방에 새하얀 눈이 쌓인 설원이었다. 그곳에 작은 온천을 하나 만들었다. 아버지의 온천을 보자, 흥취가 동한 것이다.
이곳은 오직 두 가지만 있었다.
눈과 별.
새하얀 눈과 밤하늘의 별들만이 보이는 곳이었다.
‘어떻습니까, 아버지? 여기가 더 운치 있지 않습니까?’
옷을 벗어서 잘 개어둔 후, 그 위에 비궤를 올려두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갔다.
“아! 좋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 앉아 있으니 모든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회담이 끝났음을 실감했다. 다른 사람들의 회담은 아까 끝났지만, 나의 회담은 이제 끝났다.
조춘배와 대화하고, 아버지를 만나고, 모두가 무사한 하루가 끝났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의 회담이 끝난 것이다.
기분 좋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함께 느껴진 노곤함이 따스한 물과 섞이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풍덩.
물속으로 머리까지 푹 담그며 빠져들었다.
물 위로 밤하늘의 별들이 춤을 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혼자만의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중한다면 그 사람 혼자 있는 시간을 존중해야 하는 법, 나는 지금 마음껏 나 자신을 존중하고 있다.
아, 난 지금 혼자가 아니지.
물 위로 고개를 내놓은 후 비궤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춥냐? 너도 들어올래?”
녀석 덕분에 벌써 흑정과 청정을 흡수했다. 몇 개를 더 흡수해야 완전한 기운이 되는지 알 수 없다.
정말이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온 신경을 비궤나 몸에 흡수된 기운의 비밀을 캐는 데 썼겠지만, 나는 느긋했다.
시작도 그러했으니 운명이 이끄는 대로 맡겨두었다. 그냥 이렇게 친구처럼 함께 가는 거다. 그래도 가끔은 궁금했기에.
“흡수해야 할 기운이 몇 개나 남았냐?”
대답할 리 없는 비궤였고.
“사실 너도 모르지?”
비궤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395회 우리 앞에서나 착하지.
다음 날 아침, 나는 개인 연무장에 있었다.
오랜만에 푹 잤다. 근래 이렇게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잘 자고 일어났다.
이렇게 잘 자고 일어났을 때, 큰일을 마친 홀가분한 기분으로 나는 미뤄 두었던 한 가지 시도를 하려고 했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연무장의 한가운데서 시공이환술과 시천비술을 연속해서 펼쳤다.
그러자 시공이환술 속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시천비술로 현실보다 세 배만큼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남들보다 세 배나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굉장한 일이지만, 구화마공 십이성 대성을 목표로 하는 상황에서는 아직도 부족했다.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만 수련 시간의 절반은 구화마공을 익혔다. 모든 수련을 시천비술에만 전념하지 않는 이유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시공이환술 속 세상에서 구화마공을 펼쳤다.
제 일식 인멸식.
사아아아아악!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무시무시한 네 악귀의 환영이 동서남북 동시에 나타나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무서운 녀석, 잘생긴 녀석. 묘한 신비감을 주는 녀석, 누구보다 영리해 보이는 녀석까지. 언제봐도 든든한 그들은 하도 자주 봐서 이제 친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사이 변화도 있었다. 동서남북 네 악귀는 이전보다 더 빠르고 강해졌다. 출현 위치나 공격 방향, 사라지는 시간까지. 그들을 좀 더 자유롭게 다룰 수도 있었다.
만약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뤄 천마혼을 출현할 수 있다면, 저들과도 정서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을까? 마치 나와 마존들처럼, 천마혼과 소악귀들이 그런 관계로 내 앞에 서는 것은 아닐까? 그런 괜한 기대감이 들었다.
다음으로 제 이식 대멸식을 발휘했다.
스스스스스스스.
원래는 동서남북 중 무섭게 생긴 악귀가 여섯으로 분열했는데 이제 둘이 더 늘어서 여덟 개로 분열되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여덟 악귀가 전방에 있는 모든 걸 휩쓸며 앞으로 밀고 나갔다. 언제 펼쳐도 대멸식은 속이 후련해진다.
제 삼식 대마벽.
눈앞에 거대한 강기의 벽이 세워졌다. 경지가 오를수록 크기가 작아진다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대마벽도 처음보다 크기가 작아졌다.
마지막 경지에 이르면 사람 몸 하나를 막아주는 방패처럼 작아질 것이다.
하지만 난 이 대마벽에 원대한 계획이 있다. 방패처럼 작아진 그 완성된 대마벽을, 그 위력 그대로 지금 이 크기로 세우는 것이다. 십성 대성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 십이성 대성을 이룰 수 있다면, 어쩌면?
지금까지는 제 삼식까지 반복해서 수련해 왔다.
그리고 오늘 제 사식을 처음으로 발휘할 작정이다. 근래 십이지왕들을 상대하면서 무공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고, 경지도 올라간 지금, 드디어 제 사식을 본격적으로 수련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구화마공 제 사식. 암흑일섬(暗黑一閃).
사식을 발휘하는 순간 주위가 깜박였다.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시작치곤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다시 구결을 읊으며 제 사식을 시도했다.
이번에도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앞서보다 어두워진 시간이 더 길었다. 마치 손으로 등불을 가렸다가 다시 드러낸 것 같았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대부분의 무공이 그렇듯, 구화마공도 후반 으로 갈수록 필요한 내공의 양은 더욱 커진다. 이 제 사식 역시 엄청난 내공이 필요했기에 함부로 쓸 수도 없는 무공이었다.
그랬기에 막대한 내공을 지닌 나도 중간중간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채워야 했다.
그렇게 계속 시도가 이어졌고.
드디어!
훅!
주위에 완전한 암흑이 내려앉았다.
마치 태양 빛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이 세상이 암전되었다.
애초에 빛이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자체. 신안술로도 뚫을 수 없는 칠흑이었다.
쉬이잉.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 가로질렀다.
그 어떤 것이라도 잘라버린다는 한 줄기 빛.
빛이 지나간 후 주위가 밝아졌다.
지금은 가상의 적을 상대한 것이지만, 만약 진짜 누군가를 향해 발휘했다면 그는 몸이 절단된 채 저 앞에 쓰러져 있을 것이다.
‘해냈다!’
다시 한 번 암흑일섬을 발휘했다.
사방에 암흑이 찾아왔고.
쉬이이잉.
이번에는 대각선으로 빛이 그어졌다. 무공을 펼치는 이의 뜻대로 일섬의 방향을 정할 수가 있었다.
제 사식을 성공적으로 발휘했다는 성취감에 나는 시공이환술의 공간에 홀로 서서 큰소리로 웃었다.
쉽게 되려면 이렇게 하루 만에도 되지만, 애를 먹이려면 몇 달,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것이 구화마공과 같은 극상승 무공이었으니까.
물론 다른 초식들이 계속 발전하듯, 제 사식 역시 이게 끝이 아니었다.
수련하면 할수록 어둠은 깊어지고 위력은 강력해질 것이다. 대성을 이룬 암흑일섬은 어떤 호신강기도 막을 수 없다고 전해져 왔으니까.
암흑이 드리우면 상대는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바로 구화마공 제 사식 암흑일섬이다.
* * *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소교주님!”
이제 차고 있는 대도가 너무나 어울리면서 황천각주의 위엄이 절로 느껴지는, 그는 바로 서대룡이었다.
“밥 먹었어?”
“아뇨.”
“배고프다. 같이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시비에게 서대룡과 함께 먹을 점심을 가져오게 했다. 현실에서 흐른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수련했기에 배가 너무 고팠다.
“어제 무사히 회담을 끝내신 것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지금 교내에선 그 이야기뿐입니다.”
“춤 이야기만 하겠지?”
부정할 수 없기에 서대룡이 멋쩍게 웃었다. 그만큼 사도맹 소맹주가 춤을 추고, 신교 소교주와 무림맹주 손녀가 합류해서 춤을 춘 일은 일대 사건이었다. 천마신교뿐만 아니라 곧 전 중원으로 소문이 퍼질 일이었다.
“그 자리에 제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 서대룡이라면 함께 췄을 것이다. 세상 부끄럽다며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그라면 진하령보다도 먼저 뛰어들었을 거다.
“몰래 보러 갈까도 고민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주변 경계를 위해 단주들만 동원되었기에, 각주인 그는 참석하지 못했다.
“딴 사람은 몰라도 진 소저는 다시 보고 싶었는데.”
“오지 그랬어? 주점 문 박차고 들어와서 ‘내가 진 소저를 소룡전 결승 비무에서 이긴 우승자요!’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그랬다간 정파 고수들에게 두들겨 맞았거나. 아니지, 사부님께 먼저 얻어터졌겠네요.”
서대룡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웃었다.
“회담 결과는요? 잘 됐습니까?”
“마정사가 힘을 합쳐서 놈들을 해치우는 걸 최우선으로 삼기로 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서대룡의 감탄에 검무극은 겸손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해내신 일이다.”
서대룡이 가만히 검무극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이럴 때는 잘난 척하셔도 될 것 같아서요. 세상에 두 번 다시 없을 대업을 달성하셨잖아요?”
오늘 온 이유도 이 말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검무극이 항상 자신에게 해줬던 일이었으니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칭찬해주고, 또 칭찬해주고. 그 표현에 힘입어 그 우울하고 비관적이던 일개 조사관이 여기까지 왔다.
“이 겸손이 이미 계산된 잘난 척이야.”
“성공하셨어요. 겸손하셔도 잘나 보이십니다.”
서대룡은 회담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무림맹주는 어땠고, 사도맹주는 또 어땠으며 함께 온 고수들은 누가 왔고. 조춘배는 안 떨었는지. 오만 궁금한 것을 다 물었다.
“섭섭하냐? 함께 못해서?”
“조금요.”
“부탁하지 그랬어? 네 부탁이면 들어줬을 텐데.”
서대룡이었다면 특별히 장호 옆에 세워줬을 수도 있었다.
“그러잖아도 소교주님과 가깝다는 것 다들 아는데.”
괜히 사적인 부탁이 오갔다는 구설에 오르는 게 싫었다. 자신이 욕먹는 것보다 검무극에게 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뭐 어때? 이럴 때 표 내는 거지. 나, 우리 서 각주 이만큼 아낀다, 그러니까 나 말고 아무도 괴롭히지 마라!”
“아무도 괴롭히지 말라니요? 칭찬 아니잖아요!”
농담이라도 서대룡은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밥을 먹고 마당으로 나왔다.
“혼자 산다고 대충 끼니 때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알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떠나려던 서대룡이 발걸음을 멈췄다.
“참, 이 무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아니.”
“어디 있는지도 모르시고요?”
“잘 있겠지, 뭐.”
대수롭지 않다는 대답에 서대룡은 ‘이렇게 무심할 수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기억 못 하시겠지만 소교주님 수하 중에 이안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쁜 심장이라 불렸던 여인이었지요.”
서대룡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하세요! 적어도 이 무인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는 알고 계셔야죠!”
“자넨 알고?”
“저는 알죠. 지금 이 무인 북해(北海)에 있습니다. 그 추운 곳에서 심장이 얼어붙고 있다고요!”
“북해에? 거긴 왜?”
“그야 저도 모르죠.”
이안의 출교 목적은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을 귀영대 이조장으로 영입하기 위해서였다. 혼자서 하는 첫 무림행이니, 서두르지 말고 여기저기 많이 돌아보고 오라고 했는데. 북해까지 간 모양이다.
“걱정도 안 되세요?”
“뭐가 걱정이야? 이번 기회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호를 경험하는 거지. 악당도 만나보고 색마도 만나보고.”
녀석아, 누가 누굴 걱정하냐.
이안이 꼬리가 무려 아홉이다. 비천검술도 구성이고.
우리 앞에서나 착한 이안이지. 굳이 걱정해야 한다면 그녀 앞에 선 적들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검무극은 이안을 믿었다. 그녀의 실력과 총명함을 믿지만, 그보다 더 믿는 것이 있었다.
나를 살려서 이렇게 되돌아오게 해준 그녀다. 나와의 인연을 믿고 그녀의 운명을 믿는다.
하지만 서대룡은 아닌 모양이다.
“아, 우리 이 무인, 순진해서 어디 가서 속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비무대회 때 자네처럼?”
그때 서대룡은 여인에게 홀딱 넘어갈 뻔했었다.
“언제 적 이야기를 또 꺼내십니까? 이제 안 당합니다. 저, 이제 매운 생강입니다.”
“내가 보기엔 아직 아삭아삭한 풋사과처럼 보이는데.”
서대룡은 못 들은 척 이안 걱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음식 먹을 때마다 은침으로 확인 꼭 해야 하는데. 암기는 잘 챙겨서 갔나 모르겠네요. 면사 안 쓰고 다니면 온갖 놈들이 다 꼬여 들 텐데.”
“한데 이안이 북해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귀영대 일조장에게 가서 물어봤죠. 마지막 연락받은 곳이 북해라고 했습니다.”
청면에게 가서 물어본 모양이다.
“북해 가보셨어요?”
“그럼.”
“저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그럼 빙궁도 가보셨어요?”
“당연히.”
“설마 그럼 빙궁주도 만나보셨어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회귀 전 일이었다. 그때 빙궁과 인연이 있었다.
“빙궁 입구에 가면 사람들을 얼려서 쫙 전시해뒀지.”
“에이, 설마요?”
“진짜야. 빙궁에 맞선 자들을 모두 얼려서 전시해뒀어. 우리에게 맞서면 이렇게 된다! 강력한 경고지.”
“그 사람들 다 죽었겠네요?”
“모르지. 얼음이 녹으면서 강시처럼 움직일지.”
생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서대룡이 움찔했다.
“그뿐만이 아니야. 빙궁 뒤쪽 설산에 가면 설인(雪人)들이 살고 있어. 그 설인들이 빙설초(氷雪草)라는 영초를 키우는데, 그 열매를 복용하면 엄청난 내공을 얻을 수 있지.”
“정말요? 저 안 가봤다고 막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믿기 싫으면 믿지 마.”
벌써 솔깃하는 서대룡이었다. 이놈아, 이렇게 잘 속는 녀석이 누굴 걱정한다고.
사람을 산 채로 얼려서 전시한다거나 설인이나 빙설초 역시 전설로 전해오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이안이 걱정되면 찾으러 가봐.”
“황천각은요?”
“휴가 내고 가. 내가 자리 비울 수 있게 해줄게.”
“월봉은요?”
“당연히 못 받지. 개인적인 일인데. 이안을 위해서 그 정도는 희생해야지.”
잠시 눈을 껌벅이며 고민하던 서대룡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또 그 정도까지 친하진 않아서요. 제가 추위도 많이 타고.”
서대룡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웃었다.
“그럼 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서대룡이 떠나고 검무극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 그렇게 기분 좋게 일어났으면서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안아, 북해 하늘은 어떠냐?
* * *
서대룡을 보낸 후 검무극이 향한 곳은 혈천도마 거처였다.
어르신을 외치며 힘차게 들어서려던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혈천도마는 마당 구석에 마련된 화원에 있었다. 예전에 멸천대도로 꽃나무 가지를 치던 바로 그 화원 말이다.
그곳에서 혈천도마는 일화검존과 함께 꽃을 심고 있었다.
어제 정파와 사파 고수들 앞에서 당당히 서 있던 그와 지금 꽃을 심고 있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때 검무극 옆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돌아보니 취마였다. 요즘 여빈과 한참 좋은 분위기인 그가 할 소리는 아니었는데.
“아침 내내 저러고 있다.”
“형은 여기서 뭐 해?”
“검존에게 할 말이 있어서.”
“가서 하면 되지.”
취마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간만에 좋은 분위기 망칠 일 있냐?”
망설일 만했다. 혈천도마는 모를 것이다. 일화검존과 함께 꽃을 심고 있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지.
봄은 혈천도마의 마음에도 온 모양이다.
그때 안에서 혈천도마가 소리쳤다.
“쥐새끼들 마냥 둘이서 뭘 그리 속닥이냐?”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마세요! 행인들입니다! 지나가던 쥐 두 마리입니다!”
취마와 함께 그곳을 걸어 나왔다.
“검존님은 왜 만나려고?”
“약간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상담 좀 하려고 했지.”
“어떤 일인데?”
“됐어. 별일 아니야.”
하지만 검무극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형, 뒷날 생기는 많은 문제는 지금 별일 아니라고 넘기는 바람에 생기는 거잖아? 뭔데? 어서 말해!”
검무극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취마가 무슨 일인지를 밝혔다.
“해마다 내게 술을 보내오는 곳이 있어.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삼월이 되면 술을 보내지. 한데 올해는 술이 오지 않아서.”
평범한 문파였다면 이렇게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가 어딘데?”
취마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북해빙궁(北海氷宮).”
제396회 아니라고요! 이건 여행이라고요!
북해빙궁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안아, 너 보러 가라는 운명인가 보다.’
생각지도 않았던 곳인데 하루에 두 번이나 듣게 되었으니까. 게다가 지나가다 흘려들은 것도 아니다. 이안과 취마 두 사람 모두 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들 아닌가?
“왜 그렇게 놀라?”
“우리 형 빙궁에서 매년 술 선물도 받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내가 너한테나 무시당하지. 나가면 나도 알아주는 사람이야.”
어찌 모르겠는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취마가 정말 술에 취해 폭주하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주정뱅이란 말은 혈천도마나 할 수 있는 말이다.
“한데 빙궁에서 술을 보내지 않은 일이 검존님과 의논까지 할 일이야?”
순간 취마의 눈빛에 당황하는 기색이 살짝 스쳤다.
“거기 빙주(氷酒)가 얼마나 맛있는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러면 말 나온 김에 같이 북해빙궁에 가 볼까?”
“우리 둘이서?”
“술을 안 보내면 직접 가서 마시면 되지. 설마 직접 찾아갔는데 빙주 한 잔 안 내주겠어? 우리 설산 정상에서 빙주 한잔하자.”
매번 자신은 뒷전이라고 탄식하던 취마가 마음에 안 걸린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이번 기회에 취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설산 정상에서 흩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취마와 함께 빙주를 마신다?
아, 생각만 해도 신난다. 정말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거다.
게다가 난 어제 설원에서 온천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래, 이건 북해로 가라는 운명이다.
“같이 가자.”
당연히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취마는 거절했다.
“난 됐어.”
“뭐야? 매일 나랑 놀고 싶다고 해놓고선. 말만 그랬던 거야? 여행 가고 싶어 했잖아?”
“할 일이 있어서 그래.”
눈치로 볼 때 확실히 뭔가 사정이 있어 보였다.
혹시 빙궁과 관련해서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일까? 내심 궁금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마존들 중에서 가장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이 취마였다. 그랬기에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수도 있고, 여빈과 떨어지기 싫어서가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여기까지, 라고 신호를 보낼 땐, 물러서야 한다. 우린 항상 편한 사람에게 실수하고, 편한 사람에게 무례를 범하니까.
편한 사람일수록 더 배려하고 더 챙겨야지. 그 편함에 녹아 있을 상대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형이 볼 때 어제 회담은 어땠어?”
“이번 회담이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뭔지 아냐?”
“뭔데?”
“회담을 주점에서 열었다는 점이야. 네 마도가 술집에 있다는 건 더 마음에 들고.”
취마의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풍류주점에 의미 하나가 더 붙는 순간이었다. 나의 마도(魔道)와 취마의 주도(酒道)가 만나는 곳.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도 나도 끝내 북해로 가는 일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았다.
* * *
취마와 헤어진 검무극은 혈천도마의 거처로 되돌아갔다.
오늘 도마를 찾아온 이유는 회담을 잘 끝내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이제 북해로 떠나는 인사로 방문의 목적이 바뀌었다.
도마와 검존은 마당에서 자신들이 심은 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검무극이 슬그머니 두 사람 옆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꽃이 정말 예쁘네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검무극이 꽃을 바라보는 모습을 일화검존이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보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좋아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꽃을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소교주도 마당에 꽃 심어줄까?”
“아뇨, 워낙 싸돌아다녀서 금방 죽을 겁니다. 이번에도 또 나가봐야 합니다.”
“어딜?”
“북해에 갈 일이 생겨서요.”
북해란 말에 혈천도마가 의외란 표정으로 물었다.
“거긴 왜?”
“제 오른팔 말로는 제 심장이 거기서 얼어붙고 있답니다.”
혈천도마는 검무극의 너스레를 이해하지 못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정사마 회담보다 더 놀라게 할 일이 있겠습니까?”
“너라면.”
혈천도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봄이 왔나 싶었는데, 또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는구나!”
일화검존이 그 말을 받았다.
“새하얀 눈밭에 피가 뿌려지겠군요.”
지금껏 보여준 모습만 봐선 이런 오해를 받아도 싸지만.
“아뇨,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냥 사람 만나러 갑니다! 이안이 만나러 간다고요. 웃고, 떠들고, 구경하고. 북해에서 숙수 솜씨 좋은 반점 찾아다닐 거라고요.”
두 사람은 못 들은 척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죽을지.”
아니라고요! 이건 북해 여행이라고요!
* * *
북해로 떠나기 전에 부지런히 인사를 하러 다녔다. 지난번 조춘배의 가족을 구하러 갈 때는 급하게 가출하듯 출교했지만, 이번에는 모두에게 인사했다. 이번에 나가면 이안과 함께 중원을 돌아보고 올 작정이었다.
아버지는 한 말씀만 하셨다.
“사고 치지 마라!”
사부인 권마는 사고 치지 말라는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빙궁주는 차가운 사람이다.”
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차가운지는. 그래서 빙궁주라는 이름에 너무나 어울리는 성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도.
독왕과 마불은 만나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또 천독림 깊숙한 곳으로 독초를 캐러 간 것이다.
“너무하십니다! 저 빼고 맨날 두 분만 노시기 있습니까?”
꼭 전해달라고 상선에게 남긴 말이 천독림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리면서 그들 모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느낀다.
섭혼마존은 뜻밖에도 속마음을 차분히 드러냈다.
“다음에는 저도 함께 나갈 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마존들과 내가 어울리는 모습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가장 힘이 될 말을 해주었다.
“그대는 다음 세대의 첫 마존이시오. 때가 되면 그럴 기회는 많을 겁니다.”
섭혼아, 지금은 노력에 인생을 묻을 때임을 잊지 마라. 그 시기가 있어야만 지금 네가 바라보는 마존이 될 수 있는 거다. 권마의 그 큰 주먹과 극악소마의 그 빛나는 가면이 어디 그냥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그녀가 멋진 마존으로 잘 커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나를 감동시킨 사람은 극악소마였다.
극악소마의 거처로 들어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방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가져다 둔 침상 반대쪽 벽에 새로운 침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극악소마는 그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항상 빈방 가운데 서 있던 그가 침상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소마님!”
“오셨습니까?”
“드디어 소마님의 침상이 생겼군요.”
“이번 기회에 하나 장만했습니다.”
정말 기뻤다. 그는 내 침상을 그의 방에 옮겨다 둔 내 마음을 알아준 것이다. 이제 편하게 침상에서 자라는 내 마음을.
“침상에서 자니 생각보다 편하고 좋습니다.”
나는 내 침상에 걸터앉아서 반대쪽 자기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자리가 바뀌었기에 그가 바라보는 시야도 바뀔 것이다. 이 변화는 또한 그를 바꿀 것이다. 내가 그렇듯 소마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북해에 다녀올 작정입니다.”
“무슨 일로 가십니까?”
“예쁜 심장 보러 갑니다.”
내가 예쁜 심장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했을 때, 극악소마도 옆에 있었다. 그랬기에 누굴 지칭하는지 알고 있을 거다.
“안 챙겨야 강해지지, 그냥 둬야 강해지지, 이런 마음이었는데 이제 한계가 왔나 봅니다. 보러 가야겠습니다.”
백색 가면 속 두 눈이 매력적으로 웃었다. 그는 예전에 이안을 놀렸던 농담을 떠올리며 말했다.
“말씀하신 심장이 제가 아는 그 못생긴 심장이라면 추운 곳에서도 잘 뛰고 있을 겁니다.”
* * *
그날 밤, 취마가 나를 찾아왔다.
“한잔할까?”
“좋지.”
항상 취마와 술을 마시면 취몽루에서 마셨는데, 오늘은 내 거처 앞마당에 마주 앉았다.
“나 혼자서라도 북해 가려고. 내 호위였던 이안 알지? 지금 거기 있거든. 그런데 마침 형이 빙궁 이야기를 꺼내니까, 가서 보고 싶어졌어.”
“내가 왜 같이 안 간다고 했느냐 하면.”
그게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내내 자신과는 안 놀아준다고 투덜거렸는데, 막상 가자니까 안 간다고 뺀 셈이 되었으니까.
“빙궁 내부에 술을 빚는 곳이 있어. 백주설원(百酒雪院)이라고 불리는 곳이지. 거기 원주하고 내가 아는 사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원주가 여자야?”
취마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 벌써 놀라지 마.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충 짐작이 가니까.
“그분이 형을 좋아하는구나.”
취마는 대답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취마와 북해빙궁에서 술을 빚는 장인과의 애정이라. 취마는 오랫동안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을 거다. 한데 공교롭게도 여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이 시기에 술이 오지 않았으니, 여인이 상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여빈과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안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만약 그런 사적인 마음으로 술을 보냈다면 난 그녀의 술을 받지 않았을 거다.”
취마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원주가 보낸 술은 정말 훌륭해. 술을 만드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으로 교류를 해 온 거다.”
술 담는 명인과 최고의 술꾼.
두 사람은 그런 관계였다.
“그럼 왜 안 가겠다는 거였어?”
그러자 취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주정(酒精)의 술이 또 상했다.”
예전에 취마와 함께 썩어버린 주정을 함께 치웠던 적이 있었다. 마존이 되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에 취마는 불길하다 했고.
그 주정이 다시 상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담고 살펴보는 중이다. 이럴 때 자리를 비우기가 그래서 안 간다고 했던 거야. 아까 말하려다가 괜히 신경 쓸까 봐 안 했던 거고.”
나는 알 수 있었다. 회귀해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아직 화무기가 닥쳐오는 운명까지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을.
“전과 똑같았어?”
“무슨 말이야?”
“그때만큼 썩은 내가 진동했느냐고?”
다행히 취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보다는 덜 상했어. 그땐 지독했었잖아?”
이런 차이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마는, 애초에 의미를 부여했다면 이 차이에 의미를 둬도 되겠지. 상황이 나아졌다고 믿는 거다.
이번에 담은 술은 분명 덜 상할 거다. 이번 회담이 우리들의 운명을 또 조금은 바꾸었을 테니까.
“형, 너무 신경 쓰지 마. 상하면 또 담고, 또 상하면 또 담으면 되지.”
담그고, 또 담그고. 이게 바로 내가 화무기를 상대하고 악을 대하는 자세였으니까. 큰 의미 부여하지 않는 거다.
화무기, 네가 나의 전부가 되게 하지 않을 거다. 너야말로 안절부절못하고 내게 목메라. 왜 안 통하지? 왜 안 먹히지? 불안해하고 속을 태워라.
어쩌면 가장 훌륭한 복수는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일 테니까.
화무기? 누구셨더라?
* * *
다음 날 일찍 본교를 나서려는데 취마가 찾아왔다.
“같이 가자.”
취마는 이미 여행 준비를 갖추고 왔다.
복장부터가 평소와 달랐다. 회담 날 입었던 옷이었는데 그림이 달랐다.
그때는 만취한 주신이 웃고 있는 옷이었는데, 오늘은 주신이 달이 뜬 호숫가에 배를 띄우고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옷 정말 멋있다, 남는 옷 있으면 나도 한 벌 줘.”
“돌아오면 주마.”
왜 마음을 바꿔서 가기로 했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
“북해까진 경공으로 달려서 가자. 내가 형 속도에 맞춰서 달릴게.”
그러자 취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속도에 맞춰준다고?”
“당연히.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 속도에 맞춰줘야지.”
“나와 제대로 안 뛰어봤지?”
“형이야말로.”
“우리 내기할까?”
나와 경공 내기라니? 이건 거의 우리 아버지께 누가 더 잘 비웃는지 내기하자는 건데?
“우린 술 마시고 싸우는 사람들이야. 술 마시고 사고 치면 어떻게 해? 튀어야지? 우린 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취마는 자신만만했다.
“내가 지면 이걸 준다.”
취마가 품에서 작은 술병을 하나 꺼냈다.
“화룡주(火龍酒)다.”
화룡주는 술로 된 영약 중에서는 최고에 속한 술이었다. 정말 귀한 술이었다.
“이 귀한 걸 날 주겠다고?”
“내 내공과 성질이 안 맞아서 보관만 하고 있던 거지.”
“그냥 선물로 주면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이러는 거지?”
“넘어져서 울지나 마라!”
취마가 정말 큰 걸 걸었다. 먼저 화룡주를 걸었다는 것은 내게도 원하는 것이 있다는 의미.
“만약 형이 이기면? 원하는 게 있어?”
취마가 내건 조건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이기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이기면 말해주지.”
“어쩌지? 그 부탁 듣지도 못하겠는데?”
도착 장소를 정한 후 우린 달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취마가 빠르긴 빨랐다. 마존들 중에서 경공으로는 제일 빠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이만큼 빠르면 화룡주를 나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이거 이기려고 한 내기다.
하지만 그에겐 안 된 일이지만 대성을 이룬 쾌속보만큼 빠르진 않았다.
형, 그래도 내가 양심은 있는 사람이니 화룡주 마시면서 부탁이 뭔지 들어줄게.
빠르고, 더 빠르고. 우린 그렇게 북쪽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제397회 예쁜 심장이라더니.
취마의 경공은 빨랐다.
처음 보인 속도는 본래 실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는 달리면 달릴수록 더 빨라졌다.
‘대체 술 마시고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쳤으면 이렇게 빨라진 거야?’
이런 너스레를 떨고 싶을 정도로 빨랐다. 마존들이 이렇다. 함께 술 마시면서 온갖 너스레를 다 떨고, 심지어 호수에 뛰어들어 함께 헤엄도 쳤으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경공이 빠르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른 마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무공에 대해서는 자랑은커녕 언급조차 하는 경우가 없다. 이게 진짜 고수들의 무서운 점이다.
그래서? 예상 밖의 반전이 일어났냐고?
아쉽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취마가 아무리 빨라도 이쪽은 십성 대성을 넘어 십일성에 이른 쾌속보였으니까.
“나 먼저 간다!”
비슷하게 달리다가 도착 장소에 다가왔을 때 검무극은 속도를 높였다. 봐주지도 않았고 방심하지도 않았다. 화룡주가 걸린 내기인데 그럴 수야 없지.
검무극은 극한으로 쾌속보를 발휘해서 먼저 약속한 곳에 도착했다.
잠시 후, 도착한 취마가 숨을 헐떡였다.
“너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마지막 순간을 위해 힘을 아껴두었지.”
취마는 그것 때문에 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숨을 헐떡거렸고, 검무극은 평상시처럼 평온하게 숨을 쉬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상대가 안 된다는 의미.
모르긴 해도 검무극이 처음부터 본 실력을 다 발휘했으면, 아마 가까운 마을에서 안줏거리를 사 와서 펼쳐 놓고 기다렸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경공으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는데.”
“나 천마신교 소교주야.”
검무극이 잘난 척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 우리 화룡이 어디서 마시면 좋을까?”
설마 화룡주를 줄까 싶었는데.
“나 따라와.”
취마가 경공으로 날아서 어딘가로 갔다.
검무극이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에는 틈틈이 연습하는 천마비행술로 뒤따랐다.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팔짱까지 끼고 보란 듯 도도한 자세로 날아갔다.
정말이지 아버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경공이다. 이렇게 도도한 자세로 날아와 허공답보로 천천히 걸어서 내려서면! 아, 이거지!
아무리 쾌속보가 더 빨라도 천마비행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마가 검무극을 데려간 곳은 주위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튀어나온 작은 바위 위였다.
“본교로 돌아오다 가끔 여기서 한잔하곤 한다.”
저 멀리 대천산이 보였고 그 앞으로 흐르는 강물이 햇살에 부서지며 반짝이고 있었다. 다시 강물 주위로 갈대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정말 그림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화룡주를 마시려면 이런 곳에서 마셔야지.”
취마는 품에서 화룡주를 꺼내서 검무극에게 내밀었다.
“정말 준다고?”
“그럼 안 줘? 내기를 했는데?”
“화룡주인데?”
“그래도 줘야지.”
“형이랑 손잡았지? 그래서 여기 무형지독을 탔지?”
“마시기 싫은가 보네. 그럼 말고.”
“그럴 리가!”
취마가 다시 품에 넣으려는 걸 검무극은 재빨리 낚아채듯 화룡주를 받아들었다.
취마가 소맷자락에서 잔을 꺼냈다.
“이 잔으로 정확히 세 잔 나올 거다. 한 번에 마시는 것보다 나눠 마시는 것이 효과적이니 세 번 나눠서 마셔라.”
정말 악착같이 달린 취마였지만, 잔까지 챙겨온 것을 보면 어쩌면 이 술을 선물로 주려고 가져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마는 또 다른 잔을 꺼내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조롱박 모양의 혈루에서 술을 따랐다. 외부에 나왔을 때, 술은 아무 술이나 잘 마시지만 잔 만큼은 되도록 자신의 잔에 마시려는 그였다.
“자, 패배를 인정한다.”
검무극은 취마가 내민 잔에 힘차게 건배한 후 화룡주를 마셨다. 속을 태울 것처럼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왜 세 번 나눠서 마시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검무극은 곧장 운기하며 그 뜨거운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극양 중에서도 극양의 기운이었지만, 검무극은 별다른 무리 없이 온몸 혈맥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의 일주천으로 기운을 모두 녹이자 취마는 깜짝 놀랐다. 검무극의 무공이 고강한 줄이야 알았지만, 화룡주 한 잔을 한 번의 일주천으로 녹여낼 줄은 몰랐다.
두 번째 잔 역시 건배해서 마셨다.
“으으, 좋다!”
두 번째도 불길이 온몸을 불태웠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불같이 타올랐는데, 그렇다고 몸이 못 받아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검무극은 세 번에 걸쳐 화룡주를 모두 마시고 술에 담겨 있던 기운을 모두 녹였다.
전신 혈맥을 돌던 정순하고 웅혼한 기운이 내공이 되어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었다.
이전에도 내공이라면 누구보다 많았지만, 검무극은 내공이 더 필요했다. 시공이환술과 시천비술, 거기에 구화마공까지 익히고 있는 요즘이었으니까.
내공이 많을수록 수련 시간이 줄어들었기에 한 줌의 내공이라도 무조건 환영이다.
진기를 일주천한 검무극의 두 눈에 이전보다 더욱 맑고 깊은 빛이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취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화룡주 부분은 다시 써야겠군.”
“무슨 뜻이야?”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비법서에 화룡주를 모두 흡수하려면 사흘이 걸린다고 했거든.”
취마는 사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루는 이곳에서 운기를 하겠거니 예상했다. 한데 검무극은 채 한 시진도 되기 전에 화룡주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것이다.
“너 뭐냐? 대체 뭔데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냐?”
장난 반, 진담 반 질문에 검무극이 위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은 천마신교 소교주다. 그대는 누구신가?”
검무극의 너스레를 취마가 받아주었다.
“내기에 지고 화룡주를 탈탈 털린 주정뱅이올시다. 후대여! 천마전과 경공 내기는 절대 하지 마라!”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형, 고마워.”
“고맙긴. 내기에 이겨서 얻은 건데.”
“부탁이 뭐야?”
“갑자기 왜?”
“내기가 아니라도 형 부탁은 들어줘야지. 말해! 뭐든 들어 줄 테니까.”
“뭐든?”
“아버지 침상에 형 술을 쏟아놓고 오라고 해도 들어줄게.”
“그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암살이잖아?”
그렇게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지만 취마는 끝내 부탁을 말하지 않았다.
“됐어.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해줄게.”
굳이 지금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검무극은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경공 내기는 다음에 한 번 더 해.”
“그땐 장생주(長生酒)로 부탁해.”
장생주 역시 화룡주 못지않은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희대의 술이었다.
“먼저 빙궁부터 갈까?”
검무극은 취마를 배려했지만, 그것도 받지 않았다.
“너 아니었으면 갈 생각도 없던 곳이었어. 네 심장부터 만나. 그 심장,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가는 거지?”
“어디 있는지 알면 안 가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니까 걱정돼서 가는 거지.”
“어떻게 찾으려고?”
검무극이 저 멀리 햇살에 보석처럼 빛나는 강물을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 그 녀석은…… 오히려 못 찾는 게 어려울 거야.”
* * *
두 사람은 북해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가다가 객잔이 있으면 묵었고, 없으면 야영을 했다.
검무극은 능숙한 야영 실력을 발휘했다. 사냥한 짐승을 잘 손질해서 비법 양념까지 뿌려서 내놓자 취마는 크게 감탄했다.
술안주로 제격이라며 기뻐하는 그를 보자 검무극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마존들에게는 여러 차례 해먹인 요리였고. 심지어 호위들에게는 야영과 요리를 가르쳐주기도 했었으니까.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를 해가며 그들은 북쪽으로 달렸다.
달리고 야영하고, 달리고 술 마시고. 그렇게 쉴 새 없이 달려서 드디어 두 사람은 북해에 도착했다.
“눈이다.”
중원에는 봄이 왔는데, 북해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올해 눈이 많이 안 와서 섭섭했는데, 실컷 구경하고 돌아가자.”
신난 검무극을 보며 취마는 내심 생각했다.
‘과연 즐겁게 놀다가 돌아갈 수 있을까?’
이상하게 검무극과 함께하니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기분 탓이겠지?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이안에게 마지막으로 소식이 온 마을이었다. 이곳은 북해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어서 외부인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털모자에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다녔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와 풀들도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확실히 북해가 주는 특유의 신비로움이 있었다.
‘이안은 왜 이 먼 곳까지 온 것일까?’
분명 이유가 있어서 찾아왔을 텐데.
얇은 무복을 입은 두 사람의 등장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도, 상점의 점원도, 창가에 고개를 내민 사람도, 모두 두 이방인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저기 가자.”
그곳은 특이하게도 동굴을 주점으로 꾸민 곳이었다.
두 사람이 주점에 들어가자 안에서 술을 마시던 몇몇 손님이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검무극과 취마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술과 간단히 요기할 것을 내오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내부를 둘러보던 취마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술도 안 취하겠는데? 머리 위에서 언제 저것들이 떨어질지 몰라서.”
취마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들었다. 동굴의 천장 여기저기 창처럼 길게 뻗은 고드름이 내려와 있었다.
“저거 부숴서 술에 넣어 마시면 시원하겠네.”
검무극의 말에 취마가 그래보자면서 웃었다.
잠시 후, 점소이가 술과 요리를 가져왔다. 굳이 고드름을 부술 필요가 없었다. 잔은 꽝꽝 얼어 있었다.
“여기다 드시면 술이 시원할 겁니다.”
바깥이 추웠음에도 다들 데워서 먹는 술보다 차갑게 먹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보게.”
“네, 손님.”
“뭐 하나 물어보세. 여기 면사를 쓰고 검을 찬 여인이 온 적 있나?”
“아뇨. 그런 분 오신 적 없습니다.”
하지만 검무극은 보았다. 찰나의 순간 점소이가 흠칫하는 것을. 아무리 노련한 점소이라 해도 검무극의 눈썰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우린 그 여협의 친구들이라네. 나쁜 사람 아니니 말해주게.”
취마가 끼어들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 얼굴을 봐. 이 얼굴 어딜 봐서 악인처럼 보이느냐?”
“제 경험상 악인이냐 아니냐는 생긴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요. 암튼 저는 그런 분 뵌 적이 없습니다.”
점소이가 물러가자 취마가 말했다.
“알면서 왜 모른다고 했을까?”
취마도 점소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악인처럼 보여서 숨겨주려 한 거지.”
검무극의 말에 취마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이 얼굴이? 이 잘생긴 얼굴이? 어딜 봐서!”
취마도 잘 생기긴 했다. 어딜 가도 미중년 소릴 들을 얼굴이었으니까.
독왕과 가면을 벗은 극악소마, 취마와 나. 이렇게 넷이 함께 돌아다니면 미남사인방 내지는 사대천왕 소릴 들을 거라 확신한다.
“그게 아니면 입에 담으면 안 되는 위험한 자들과 연관이 되어 있거나.”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안을 봤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을 테니까.
둘이서 몇 잔의 술을 마셨을 때, 점소이가 요리를 가져왔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북해 지역의 요리였다.
점소이가 요리를 내려 놓자 검무극이 탁자에 슬쩍 은자를 올렸다. 점소이는 흠칫 놀랐다. 손님들이 수고했다고 주는 돈치고는 액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적어도 열흘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
눈치 빠른 점소이는 알 수 있었다. 그 여협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가져가라는 것을.
“두 분은 여기 초행이시죠?”
“그렇네.”
“제가 근처에 구경할만한 곳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점소이는 주변에 가 볼 만한 곳을 알려주었다.
“동쪽으로 오리를 가면 눈꽃이 피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죠. 남쪽에 있는 수인사(修仁寺)란 절도 가 볼 만 합니다. 계단 올라가실 때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몇 군데를 더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덧붙였다.
“아, 그리고 서쪽에 있는 장원 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십시오. 거긴 위험한 곳이라서요.”
그걸로 충분했다. 이안이 이곳에 왔었고, 그 장원으로 갔다는 걸 이렇게 알려준 것이다.
점소이가 돈을 챙겨서 주방 쪽으로 갔다. 재치 있는 대답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는 이안에 대해 한마디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주점을 나온 검무극과 취마는 서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점소이가 알려준 대로 가니 정말 그곳에 장원이 하나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선 취마가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가 찾는 사람, 예쁜 심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선.
나무와 마당에 서 있던 석등, 뒤쪽 담벼락까지. 일직선으로 기다랗게 잘려있었다. 자로 재서 정확하게 잘라낸 것처럼, 깔끔한 한 수가 발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예상하건대 저 선에 걸린 자들도 저렇게 잘려 나갔을 것이다.
취마가 춥다는 듯 옷깃을 여미며 말했다.
“예쁜 심장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심장인데?”
제398회 세상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검무극이 잘린 석등의 단면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단면이 매끄럽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검무극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비천검술이 구성을 넘어서려 하고 있구나.’
대성을 이루기 직전 찾아오는 마지막 혼란기 같은 것이었다. 무공을 너무 빠르게 대성에 도달한 이들에게서 주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 상태에서 대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부분 원래 실력보다 더 퇴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무공은 다양한 방법으로 무인을 시험한다.
검무극은 이안을 믿었다. 이 결과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의 노력은 결코 그녀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다음으로는 바닥의 핏자국을 살펴보았다.
‘이안이 화가 났군.’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이안 성격상 불필요한 살생을 할 리는 없으니, 분명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으리라.
주위를 둘러보던 검무극이 남겨진 흔적과 핏자국을 보면서 그날의 싸움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무공 경지가 워낙 높은 데다가 이안의 검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달려들며 그녀를 죽이려 하고, 이안이 검을 뽑아 그들을 베어 넘기는 모습을 떠올렸다. 적들이 쓰러지면서 흩뿌리는 상상 속의 피가 현실에 남겨진 핏자국으로 정확히 떨어지며 합쳐졌다.
검무극이 이안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며 움직였다.
“여기서 둘을 베고, 이쪽에서 달려드는 놈을 찌르고. 다시 돌아서서 공격을 막은 후에 심장을 찌르고.”
이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암기를 날리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검기를 발출하자 암기를 날리려던 이들이 쓰러졌고 그 뒤에 있던 나무와 석등까지 잘려 나갔다. 검무극의 상상 속 석등과 지금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석등이 하나로 합쳐졌다.
취마는 검무극의 설명에 감탄했다.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자신도 짐작이 갔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상황을 떠올리다니?
검무극이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도 싸운 흔적들이 있었다. 복도 바닥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착한 대청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여기서 마지막 싸움이 있었군. 막아서는 놈 둘을 베고. 저기 기둥 뒤에서 날아온 암기를 쳐내서 이쪽에 서 있던 자를 제거했고.”
검무극이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가더니.
“여기서 수장과 맞붙었군.”
검무극이 가만히 의자 주위를 살피더니.
“죽이지 않았어.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놈에게 뭔가를 알아내려 했다는 의미야. 다시 말해 여기 있던 놈이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이지. 아마 북해 쪽 큰 문파 중에서 문제가 생긴 곳이 있을 거야. 거길 찾아야지.”
문제가 더 커졌음을 암시하면서도 검무극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걱정 안 돼?”
“누구? 이안? 아니면 상대?”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에 검무극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애매한 일에 끼어들었으면 걱정했을 거야. 만약 이곳에 별다른 흔적이 없었다면 오히려 걱정되겠지. 한데 지금은 명확한 목표가 느껴져. 이안은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어.”
취마는 감탄을 넘어 내가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검무극은 남다르다.
어디 오늘뿐이겠는가? 이곳까지의 여정 속에서도 이런 남다름을 여러 번 경험했기에, 검무극과 함께 있는 시간은 너무 흥미롭고 즐겁다. 그래서일까? 묘한 안정감마저 든다.
예전에 취몽루에서 함께 술을 마실 때도 이런 안정감을 느끼곤 했는데, 이번에 출교해 보니 그 안정감이 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소교주의 안전을 책임지는 바짝 긴장한 마존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친한 동생과 편히 여행하는 기분. 그래, 검무극은 이 위험천만한 강호행을 여행으로 만들어버린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검무극을 따라 나가며 취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날 너도 있었지? 다 봤지? 그래 놓고선 지금 잘난 척하는 거지?”
* * *
흑선방주(黑扇幫主) 주규(周奎)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두컴컴한 창고 같은 곳에 있었다. 그는 마혈을 제압당해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혈은 제압하지 않아서 말은 할 수 있었다.
‘내가 왜?’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나, 납치당했지?’
납치당한 일이 믿기지 않는다. 죽립을 쓴 여인이 장원에 쳐들어와서 순식간에 수하들을 베고 자신을 제압했다.
죽립에 면사까지 착용하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면사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뭔가 질문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여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자신을 제압해서 여기 던져둔 것이다.
‘뭐 때문이지?’
살아오면서 워낙 여러 악행을 저질렀기에 무슨 원한 때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넌 날 살려둬선 안 됐다.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알게 해주지.’
그에게는 믿을만한 뒷배가 있었다. 특히 최근에 한 곳과 중요한 일을 함께 진행 중이다. 장원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고수들을 풀어서 자신을 찾을 것이다.
북혈문(北血門).
북혈문은 북해삼강(北海三强)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힘을 자랑하는 곳이 북해빙궁이었고, 남은 두 곳이 서로 쌍벽을 이루는 북혈문과 빙검문(氷劍門)이었다.
세 세력은 친구이자 적으로 내부적으로는 패권을 다퉜고, 중원에서 압박을 가하면 서로 손을 잡고 친구가 되었다.
특히 북혈문은 잔인하고 사나운 기질을 지닌 무인들의 집합소로, 북해빙궁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곳이다.
주규가 손잡은 사람이 바로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 양중(楊仲)이었다.
‘양중을 건드리려다가 네년 모가지부터 떨어질 거다.’
그는 양중이 곧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 믿었다. 그에게 자신은 반드시 구해야 할 사업적 동반자였으니까. 둘째인 그가 북혈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이번 사업을 성공시켜야 했고.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
옆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두컴컴한데다가 내공은 쓸 수 없었고, 게다가 자신이 붙잡혀 온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규가 상대를 유심히 살폈다. 상대의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허억!”
상대를 확인한 주규는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양 공자!”
놀랍게도 그는 양중이었다. 자신을 구하러 온 거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도 함께 붙잡혀 와 있었다.
날 구해야 할 당신이 여기 붙잡혀 있으면 어떻게 해?
“정신 차리시오! 양 공자!”
몇 번이나 소리치자 그제야 양중이 잠에서 깼다.
“주규! 네놈이 감히!”
그는 주규가 자신을 붙잡아온 걸로 오해했다. 이제 막 정신이 든 데가 주위는 어두컴컴했기에 주규의 목소리만 알아들은 것이다.
“오해 마시오! 나도 붙잡혀 왔소.”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려고 주규가 소리쳤다.
불신의 침묵에 주규가 빠르게 말했다.
“양 공자를 납치한 사람이 죽립을 쓴 여인이지 않았소?”
죽립을 쓴 여인이란 말에 양중은 자신을 납치한 상대를 떠올렸다.
맞다. 죽립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자신의 호위 무인들을 순식간에 제압했는데, 어찌나 몸놀림이 빨랐는지 어떤 방식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럼 그대도?”
“장원이 다 쓸렸습니다.”
양중은 누구 소행인지 짐작이 아니라 확신을 했다.
“형이오. 그놈 짓이 틀림없다.”
이곳 북해에서 감히 자신을 건들 사람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북해빙궁과 빙검문 정도다.
북해빙궁이라면 자신을 굳이 이런 식으로 납치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언제까지 북해빙궁으로 와라, 이 한마디만 해도 시키는 대로 해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납치는 그들 방식이 아니다.
빙검문일 가능성도 희박하다. 자신들과 손을 잡고 북해빙궁을 견제한 그들이니까. 그들과는 이와 입술과의 관계.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쯤은 서로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규는 이번 일을 저지른 자가 북혈문 대공자라는 사실도 의심스러운 모양이다.
“양 공자를 납치하면 당장 대공자 본인이 의심받는다는 것을 잘 알 텐데. 그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 같진 않습니다. 게다가 대공자 밑에 그런 여고수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 소행이라는 거요?”
잠시 고민하던 주규가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했다.
“공자님과 제가 진행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양중의 인상이 굳혀졌다. 주규와 손잡고 진행하던 일이 있었다. 함께 붙잡혀 왔다면 그 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짓이든 우린 곧 풀려나게 될 거요. 내가 납치되었다는 걸 본문에서 알고 수색에 나섰을 테고. 또 우리에겐 황추가 있으니까.”
주규도 황추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양중의 수족이자 추종술의 달인이었다. 추종술뿐만 아니라 무공실력도 대단해서 이런 일이 생기면 황추가 나서서 일을 해결했다.
“믿을 수 있지요, 황 대협은.”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우릴 살려둔 게 큰 실수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나중에 이곳을 빠져나가면 그년의 뼈를 산채로 다 발라낼 거요.”
바로 그때 뒤에서 누군가 잠에서 깨어나는 신음이 들렸다.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누군가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시기적절한 순간에 한 사람씩 깨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주규는 애원했다.
‘설마? 아니겠지? 제발!’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두 사람이었다. 그들의 놀람은 곧장 탄식으로 이어졌다.
뒤쪽 구석 벽에 마혈이 제압당한 채 기대 있는 사람은 바로 황추였다.
여기 붙잡혀 있는 걸 보니 자신들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이것이겠지만.
그럼 당신은 누가 찾아내냐고?
* * *
검무극과 취마는 북해에서 사람이 많이 오가는 마을의 한 주점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장원이 있던 첫 번째 마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분명 큰 문파들이 있는 이 지역에서 다음 일이 벌어질 거란 예상 때문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원하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북혈문 이 공자가 실종되었다는군.”
“나도 들었네. 그 일로 북혈문이 발칵 뒤집힌 모양이더군.”
검무극과 취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취마가 검무극의 잔에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혼자서 북혈문을 상대하다니. 정말 강심장이군, 강심장이야.”
북혈문에 대해서는 검무극도 취마도 알고 있었다. 북해를 대표하는 세 세력 중 하나였으니까.
“이안이 날 닮아서 겁이 없긴 해.”
“대체 무슨 일이기에 북혈문의 혈육까지 납치한 걸까?”
“첫 강호행을 제대로 하고 싶었나 보지.”
취마가 술을 홀짝이며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이대로 지켜만 볼 거야?”
북혈문주의 혈육을 건든 이상, 그들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수들의 숫자나 전체 규모로 봤을 때, 쉽게 볼 수 있는 상대는 절대 아니다.
“우선은.”
그래도 그녀가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볼 작정이다. 이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거냐?
그때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빙궁의 고수들이다!”
밖을 쳐다보니 저 멀리 하얀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북해빙궁.
무림 신비 세력 중 으뜸이라 불리는 그들이었다. 정사마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온 그들이었다. 그 오랜 역사 속에서도 몰락하지 않은 것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강함을 증명한 셈이다.
빙궁 무인들이 내뿜는 기도는 맑으면서도 차가웠다.
특히 선두에 선 젊은 여인은 차가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검무극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 궁주의 외동딸 한설(寒雪).
당대 빙궁주의 성격을 닮아 무정한 성격을 지녔다는 그녀였다.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알려진 그녀였다. 세상에 그 누구도 믿지 않으며, 심지어 부모조차 믿지 않는다고 소문난 그녀였다. 그녀와 관계된 소문들은 이렇게 다 매섭고 차가운 것들이었다.
그녀를 선두로 뒤쪽에 십여 명의 고수가 뒤따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대단한 기세를 드러내는 빙궁의 고수들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며 걸어가던 그들이 주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은 애초에 주점을 향해 걸어온 것이다. 수하들을 밖에 대기시킨 후에 한설이 홀로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주점 안으로 들어오자 손님들은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한설이 검무극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성정이 소문대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차가운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그녀를 위한 말이었다.
한설은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하며 첫인사 대신 말했다.
“소교주님, 저와 빙주 한잔 어떠세요?”
제399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러 왔는데.
도발적인 첫인사였다.
빙주(氷酒)를 마시자는 말은 원래라면 검무극에게 정식으로 인사하고, 취마에게도 인사한 후에 해야 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첫마디로 그 말을 했다. 취마가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을 거란 계산도 있었을 거다. 술과 관련된 인사였으니까. 다시 말해 함께 있는 사람이 취마인지도 알고 왔다는 의미.
이곳 북해에서 빙궁의 정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신들에 대해 안다면 이안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검무극은 그것이 결코 이안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북해빙궁은 분명 천마신교의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가만히 한설을 응시했다. 소문 속의 그녀와 실제 그녀는 얼마나 차이가 날까?
“술 좋아하시오?”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은 약간 의외란 표정을 짓더니 차분히 대답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좋아해요.”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취마의 입가엔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혼자 술 마시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그였으니까.
“인사하시오, 본교의 마존이신 취마님이십니다.”
한설이 취마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귀한 분을 뵙습니다.”
“빙궁의 천금이 실로 아름답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과찬의 말씀이세요.”
무정하고 차갑다는 소문과 달리 한설은 보통의 또래 여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무극은 안다.
차가움이나 무정함은 외향(外向)이 아니라 결정이나 선택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직 그녀에 대해 어떤 선입견도 가지면 안 된다. 아직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한설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아직 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셨어요.”
검무극은 그 결정을 취마에게 맡겼다.
“한잔하시겠습니까?”
순간 한설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소교주와 마존이 있으면 당연히 소교주가 결정을 내려야지. 바깥에서 대기 중인 고수들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한데 이 소교주는 자기가 결정하는 대신 취마에게 결정을 묻고 있었다.
이번에는 취마가 한설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느꼈다. 이 순간의 취마는 자신에게 구박받던 못난 형 취마가 아니다.
술로 무공과 인생의 극의에 도달한 그가 보는 세상이 있고, 그가 보는 인생이 있다. 지금 그에게 그녀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빙주라면 거절할 수가 없지.”
취마의 대답에 한설이 바깥에 서 있는 무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의 수족인 찬(贊)이 새하얀 술병을 들고 들어와서 그녀에게 건넸다.
“본궁에서 담은 빙주입니다.”
술병의 마개를 열자 사람을 매혹하는 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주점에서 숨죽이던 술꾼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북해의 빙주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단연 북해빙궁에서 빚은 빙주를 으뜸으로 친다. 지금 이 향긋하고 매혹적인 냄새는 바로 그 북해빙궁 빙주의 주향(酒香)이었다.
또르르릉.
한설이 검무극에게 먼저 한 잔 따라주었다.
그녀는 술을 따르면서 어머니인 북해빙궁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소교주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한설도 검무극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 그가 무림의 판도를 바꿔나가고 있다지?
―조심해서 상대해야 한다. 그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어머니는 자신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신보다 소교주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가?’
주향이 어찌 이리 좋냐며 실실 웃고 있는 저 모습은 오히려 가벼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어떻게 봐도 마존을 압도하는 권위도 보이지 않고.
한설이 다음으로 취마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끝으로 그녀의 잔을 채워준 것은 취마였다.
“나도 술은 주로 혼자 마신다네.”
그렇게 세 사람이 건배하며 빙주를 마셨다.
“아, 정말 맛이 좋소.”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회귀 전에도 빙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땐 이렇게 맛이 좋지 않았다. 역시 같은 술이라도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마시냐에 따라 맛이 이렇게나 달라진다.
“독이 들었는지 어찌 의심하지 않는 겁니까?”
한설의 물음에 검무극은 취마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는 만독불침이라서 그렇다고 치고. 형은 그렇게 막 마셔도 되는 거야?
취마가 한설에게 대답했다.
“자네가 음식이나 물에 독을 타면 못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 한데 술에 탄 독은 무형지독이라 해도 알 수 있다네. 냄새만 맡아봐도 알 수 있지.”
“과연 명성이 헛된 분이 아니셨군요.”
이번에는 검무극이 한설의 잔을 채워주었다.
“뵙게 되어서 반갑소.”
이 여인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회귀 전 인생에서 이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검무극이 한설에게 물었다.
“우릴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실 것 같소.”
“네, 있어요.”
한설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북혈문은 워낙 유명한 문파이니 잘 아시리라 믿어요. 그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이 납치되었어요. 혹시 그 소식 들으셨나요?”
“아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소.”
“저는 그 일을 저지른 자가 신교 무인이라 생각해요.”
자연 분위기는 차가워지고 무거워졌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오?”
“납치한 자가 워낙 신출귀몰해서 북혈문 무인들은 전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본궁에서도 나섰지만 쉽게 찾지 못하고 있고요. 굉장히 영리하거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에요.”
물가에 내놓은 아이라서 불안하다고? 아이는 물가에서 둑을 쌓고 낚시를 하고 있다. 이안아, 장하다.
“그렇다고 본교에서 벌인 일이라 할 수는 없지 않소?”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요.”
한설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소교주 당신, 그대가 증거에요.”
이 도발적인 말에도 검무극은 차분했다.
“왜 내가 증거라는 거요?”
“이런 공교로운 시기에 북해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심증적인 증거군요.”
“맞아요. 소교주께서 부정하시면 확인할 수 없는 증거죠.”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한설이 왜 차갑고 무정하다는 평가를 받는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 사실만을 전달할 뿐,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았다.
의심스럽다고 말하면서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이나 눈빛 한 번 보내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처럼 할 말을 다 하면서도 감정을 담지 않으니까,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다.
“맞소, 나도 내 수하가 벌인 일이라 생각하오.”
검무극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말씀드리기가 편하겠군요. 이곳은 엄연히 본궁의 영역입니다. 수하에게 북혈문주의 자제를 풀어주게 하고, 수하를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납치당한 북혈문 자제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저희가 잘 중재한 후에 수하도 돌려보내 드리지요.”
검무극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거절은 단호했다.
“그럴 수 없소.”
“무슨 뜻이죠?”
“내 수하가 북혈문주의 자제를 납치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요.”
“맞아요.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무림은 개인의 이유보단 조직의 명분이 더 중요한 곳이죠.”
“조직의 명분에 희생되어야 하는 게 당신이라도 그럴 수 있소?”
한설이 검무극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하죠. 전 기꺼이 저를 포기할 거예요.”
그녀의 말이 진심임을 느꼈다.
하지만 말에서 느껴진 감정은 조직에 대한 희생정신이나 충성심이 아니었다. 그건 공허함이었다. 젊고 아름다웠기에 더 크게 느껴지는 시커먼 구멍이었다.
이 여자, 삶에 미련이 없다.
* * *
양중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 붙잡혀 온 건가?”
황추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틀 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먼저 붙잡혀 왔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순간 듣고 있던 양중과 주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추종술의 달인인 황추부터 붙잡아 두고 일을 꾸몄다는 의미.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번 일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일입니다.”
“대체 누구 소행이지? 대 북혈문을 상대로 대체 누가!”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누구’가 아니라 ‘왜’ 아닐까?”
여인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듣기 좋은 목소리는 정말 처음이었다.
양중이 버럭 소리쳤다.
“당신 누구야?”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존재조차 느끼지 못했다.
양중이 욕설을 내뱉기 전에 주규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이라도 우릴 풀어준다면 없던 일로 하겠소. 서로 가던 길 갑시다.”
여인의 웃음이 들렸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어둠 속을 걸어온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죽립과 면사를 착용한 그녀는 바로 이안이었다.
“여협께선 누구시오?”
주규가 정중히 묻자 이안이 대답했다.
“나는 한 여인의 부탁을 받고, 그녀의 남편을 구하러 온 사람이야. 정말 멀리서부터 여기까지 왔지. 설마 북해까지 오게 될 줄이야.”
“대체 누굴 구하러 온 거요?”
“왜? 이름을 말하면 알기는 알고?”
주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디 자신들 때문에 붙잡혀 온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는가?
“너흰 중원 곳곳에서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사람들을 데려왔어.”
이안은 그 과정에 많은 조사를 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사람을 속여 납치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들은 특별한 이들만을 데려왔다.
“그 사람들 모두 특이한 체질을 지닌 이들이었지? 대체 어디에 쓰려고 모은 거지? 대법의 재료로 삼은 거냐? 아니면 사술을 부리려는 거냐?”
양중과 주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북혈문에 기별했다. 너희가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면 너희도 풀어주겠다고.”
양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번 일은 극비로 진행된 일이었다. 아버지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풀어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혈육보다 가문을 더 중요시하는 아버지였으니까.
풀려날 수 없다는 불안감에 양중이 발악하듯 말했다.
“네가 우릴 죽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줄까? 결국 본문은 너를 찾아낼 거고 너를 죽일 거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들도 모두 죽일 거야. 사돈에 팔촌까지 모두 다 너 때문에 죽게 되겠지. 그뿐만이 아니야. 이웃들까지 모두 죽일 거다. 너와 단 한마디라도 말을 섞은 자들 모두 찾아내서 죽일 거다. 그래야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어서 죽여 봐!”
이안이 가만히 양중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이 없자 자신의 협박이 먹혔나 싶었는데, 그의 착각이었다.
이안이 죽립을 벗고 면사를 벗었다.
“벗지 마시오!”
주규가 소리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보면 살인멸구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황추도 함께 눈을 감았다.
하지만 양중은 눈을 똑바로 뜬 채 이안을 노려보았다.
뭐라 욕을 하려던 그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납치한 이 망할 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의 입에서 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련님과 주위 분들께 너무 감사해. 이런 협박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분들이라서.”
그녀의 마음에 몇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네가 이안과 제일 가까운 사이라고? 너 누구냐?
―천마신교 소교주시다.
―너는!
―황천각주인데요?
―너는? 술 모임까지 가졌다면서?
―마군주다.
―너는!
―무림맹주 손녀랍니다.
―너는 새 아버지라면서?
―…….
실없는 상상에 그녀가 혼자 웃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감사해.”
이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양중을 차갑게 응시하며 말했다.
“꼭 죽이러 가라고 해. 제발 복수해 달라고 유서까지 꼭 남겨.”
* * *
“나는 수하의 이유를 조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오.”
한설은 믿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그럴싸하게 해도, 결국은 조직이 우선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교주가 저런 말을 하다니. 그걸 믿을 정도로 내가 바보로 보였나?
“내 수하는 자신이 수모를 당했다고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이 아니니까. 누군가 도움을 청했거나 억울한 일을 목격했겠지.”
한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하를 옹호하는 검무극도, 남을 도우려고 이런 일을 벌이는 수하도. 왜들 이렇게 가식적으로 사는 걸까?
“수하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소.”
검무극은 여전히 차분했다.
“내 수하는 천마신교 소교주를 모시느라 평생 힘들고 피곤했소. 이럴 때만이라도 소교주 모시는 보람이라도 있어야지.”
한설이 담담히 말했다.
“북혈문이 본궁에 도움을 청해왔어요. 우리 입장도 있답니다.”
“도우시오.”
“그럼 그 아끼는 수하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검무극이 빤히 한설을 응시했다.
“만약 내 수하가 옳고, 북혈문 자제가 틀렸어도 내 수하를 죽일 거요?”
한설은 무표정하게 검무극을 응시하다가 반대로 물었다.
“그럼 소교주의 수하가 틀렸고, 북혈문 자제가 옳으면요? 그땐 수하를 죽여도 괜찮나요?”
검무극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땐 수하를 구해서 여길 탈출해야겠지요.”
한설이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군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한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이 마인이 저지른 것임을 알아낸 것만 해도 이 만남은 의미가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사실 우리가 북해에 온 다른 이유도 있소. 꼭 뵙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누구죠?”
“백주설원의 원주님이시오. 취마님이 대단하신 분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셔서 전부터 꼭 뵙고 싶었지요.”
취마가 온 이유였기에 미리 이야기를 해두려는 것이다.
그러자 한설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러시오?”
한설은 묘한 표정으로 검무극과 취마를 쳐다보더니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백주설원의 원주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취마가 흠칫 놀랐다. 곧이어 굳은 그의 얼굴로 서글픔이 번져 나갔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러 왔는데 죽었다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언제였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은 대답하지 않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차가운 그녀의 눈빛에 의심의 기색이 흘렀다.
“두 분은 왜 하필 지금 원주님을 찾아온 거죠?”
까닥 잘못 말하면 오해를 살 것이 확실했다. 취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검무극이 대답을 대신했다.
“해마다 원주께서 취마님께 술을 보내셨소. 그게 올해 오지 않았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해서 찾아온 거요.”
잠시 사이를 두고 한설이 나직이 말했다.
“원주께서는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쨍강.
취마가 들고 있던 잔이 깨지며 술이 탁자 위로 흘렀다.
한설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수하에게 북혈문 자제를 돌려보내라고 전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한설은 그곳을 나갔다.
둘만 남은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탁자에 흐르던 술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윽고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취마가 침묵을 깼다.
“자결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녀는 술 만드는 일에 누구보다 자부심이 강했고 그 일에 만족해했다. 자신이 빚은 술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행복해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지. 그럴 리 없어.”
원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취마일 테니. 그렇다면 자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리라.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 있던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좋은 술을 더는 맛볼 수 없다니.”
검무극이 빈 술잔을 두고 두 손을 모아 애도했다.
취마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혈루의 술을 비운 후 남은 빙주를 그곳에 담았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정성껏 담았다.
흘러내리는 투명한 빙주 너머로 취마의 얼굴이 일렁이며 보였다. 그의 눈빛에 흐르는 서글픔과 분노도 술과 함께 혈루에 담기고 있었다.
제400회 만났으면 술주정이나 부렸겠지.
북해빙궁의 궁주전은 탑의 꼭대기에 있었다.
마치, 고드름이 하늘로 치우쳐 솟은 것처럼 생긴 탑은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로웠다.
그 입구에서 한설은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수하의 이유를 조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오.
그녀가 입구까지 뒤따랐던 수족인 찬에게 불쑥 물었다.
“네게도 이유가 있어?”
찬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이유 말씀이십니까?”
“내가 이해해야 할 이유 같은 것이 있냐고.”
일단, 이 질문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없습니다.”
찬은 짤막하게 대답했고 한설은 그를 남겨두고 탑으로 들어섰다.
찬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에 오히려 그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소궁주님, 제가 이해해야 할 뭔가가 생긴 겁니까?’
한설은 얼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얼음처럼 보였다. 얼음이면서 얼음이 아닌, 북해빙궁 고유의 건축술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여러 색으로 반사되며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 환상적인 공간을 올라가고 있지만, 한설은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게 정상이지. 수장과 수하 사이에 대체 ‘이해’라는 말이 왜 필요한 것인가? 부모 자식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탑의 꼭대기에 자신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빙궁주 한서경(寒曙景).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는 철의 여인.
최근 몇 대에 걸친 빙궁주 중에서 가장 무재가 뛰어나다고 알려진 여인이기도 했다. 물론 외부에 무공을 드러낸 적이 없기에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렇듯 빙궁의 강함은 그 힘이 드러나지 않은 은밀함과 신비로움에 있었다.
“궁주님.”
한설에게 그녀는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였고, 어머니가 아니라 빙궁주였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따스하게 안아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걸음 다가서면 어머니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철저하게 소궁주로 키워졌고, 그런 한설에게 그녀는 엄격한 빙궁주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누가 봐도 모녀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지 않았다면, 한설은 친모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으리라.
지금 두 사람은 다섯 걸음이 채 되지 않은 거리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얼마나 깊은 절벽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절벽 끝에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북혈문의 둘째를 납치한 인물은 예상대로 마교의 무인이 맞았습니다.”
마교가 북해의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중요한 보고였음에도 빙궁주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수하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고, 소교주는 오히려 그 일을 감싸는 듯 보였습니다.”
빙궁주가 눈빛으로 이유를 물었지만, 한설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끼는 수하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자 빙궁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북혈문의 혈육이 그들 손에 죽게 해선 안 된다.”
북혈문이 도움을 청했고, 어머니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려 하고 있었다.
한설은 어머니와 북혈문주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 알지 못했다.
“일단 소교주에게 수하의 행방을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네 말대로 아끼는 수하라면, 쉽게 수하를 넘기겠느냐?”
“아니겠지요.”
네가 생각하는 답을 말해 보라는 눈빛이 다시 한설에게 날아들었다.
이럴 때 얼마나 숨 막히는지 어머니는, 아니 궁주님은 알고 있을까?
어려서부터 그랬다.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래야 강해진다고 어머니는 믿었다. 그게 정답이라 여기는 사람처럼.
‘어머니, 그 답은 틀렸어요.’
답을 찾아내라고 재촉하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잠시 쉴 수 있는 품이 엄마이기를 바랐건만. 이 길 끝에는 엄마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건만.
그리고 지금의 한설에게는 예전에 품었던 이런 아쉬움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그녀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소교주가 취마와 함께 온 이유는 죽은 백주설원의 원주 때문이었습니다.”
“취마는 그녀의 죽음에 어떤 반응이더냐?”
“자결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취마가 쉽게 돌아가지 않겠군.”
빙궁주는 취마와 백주설원의 원주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시금 한설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딸이지만 수하들의 보고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을 아쉬워할 법도 했는데, 두 사람은 전혀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뒤에서 빙궁주가 불렀다.
“소궁주.”
한설이 다시 돌아섰다.
“소교주는 정사마 회담을 이뤄낸 인물이에요.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이렇게 정중히 말할 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다.
한설은 검무극이 그런 인물인지 아직 느끼지 못했지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빙궁주는 투명한 얼음 바닥으로 한설이 탑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는 희미한 윤곽을 쳐다보고 있었다.
* * *
눈 쌓인 설원에 검무극과 취마가 서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취마가 불쑥 말했다.
“여기다. 원주가 처음 내게 좋다고 말한 곳이.”
그때는 아직 마존이 되기도 전, 한창 젊은 시절이었다.
“왜 그분의 마음을 안 받아줬어?”
취마가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때의 난, 술 하나만 해도 인생이 벅찰 때였다.”
“무슨 말이야?”
“취마가 되기 위한 경쟁자들은 술에 미쳐 있었거든. 반면에 나는…….”
“그들만큼 술을 좋아하지 않았군.”
취마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취마는 처음부터 누구보다 술을 좋아했을 것 같은데.
그래, 때론 인생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우릴 떠민다.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던 사람이 살수가 되기도 하고, 칼날을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쳐 한 사람이 유명한 검객이 되기도 하니까.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너무나 잘 적응해 버린다.
“지금은 술 좋아하잖아?”
그러자 취마가 피식 웃었다.
“좋아만 하겠어? 내 삶의 전부지.”
검무극이 그를 따라 웃었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그녀 도움이 컸다. 처음에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점차 우린 순수하게 술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서찰로 주고받았다. 그녀가 보내준 술에 관한 이야기며, 중원의 온갖 술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
검무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술로 맺어진 취마의 지기(知己)였음을.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것도, 내 무공이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녀 도움이 컸지.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난 이제야 찾아왔어.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놈이다.”
취마가 분노한 이유다. 지기를 잃은 슬픔과 이젠 돌이킬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
사는 게 다 그렇지.
검무극은 이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 취마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 아닐 테니까.
“나쁜 놈이네!”
취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쁜 놈이지.”
마치, 그 자백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중원에서는 꽃비가 날리는데, 여긴 눈이 내린다.
취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나쁜 놈이다!”
취마의 외침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검무극이 함께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좋은 마존이 어디에 있나? 다 나쁜 놈들이지. 그분도 형 이해할 거다. 형에게 술 보내면서 행복했을 거고. 어쩌면 서로 만나지 않고 교류한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 만났으면 형이 술주정이나 부렸겠지. 잘했어. 그게 그분에게 더 좋았을 거야.”
취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 위로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녀석은 모를 거다.
그 떨리는 눈빛을 보며 검무극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래도 어떤 놈인지는 잡아야겠지?”
취마가 자결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니, 누군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자가 있겠지.
“그 사건을 조사하려면 빙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취마의 걱정에 이미 검무극은 계획을 세운 후였다.
“북혈문의 일에 북해빙궁이 나섰다는 건 그들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이지.”
“그렇겠지.”
“그럼 그 일을 해결해 주면 저쪽에서도 이번 일을 조사할 수 있게 해줄 거야.”
취마는 검무극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북혈문주의 둘째 아들을 돌려보내 주고 이번 일을 조사하게 해달라고 거래를 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그놈을 죽였으면 어쩌려고?”
“죽이고 싶었다면 애초에 납치하지 않고 죽였겠지. 그런데 납치했다는 건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일 거야.”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고?”
역시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벌였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월을 통해 고월에게는 자신의 행방을 알려뒀을 거야. 북혈문과 빙궁의 수색에도 발각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아마도 지금 은월의 북해 안가에 있을 거 같아.”
고월의 일 처리가 얼마나 치밀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검무극이었다. 고월의 안가는 진짜 안가일 테니까.
“수하를 너무 잘 아는 것 아니야?”
“심장이 달리 심장이겠어? 가자.”
검무극과 취마가 점점 심해지는 눈발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약속 시간이 될 때까지 북혈문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안은 설마 북혈문주가 자식을 포기할 줄은 몰랐다.
‘비정강호라더니. 정말 해도 너무하는군.’
자신이라면 자식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버렸을 텐데. 정말 이렇게 나오시겠다?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어 닥쳐오자 양중은 마음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아버지는 북혈문의 명예를 아들의 목숨과 바꾼 것이다.
‘죽여라!’
당당하게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날 죽이면 본문은 반드시 복수한다.”
살려달라는 애원을 그는 여전히 그릇된 방식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 주규와 황추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들 두 사람은 여전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살고 싶은 열망이 강렬했다.
“자, 두 사람도 눈 떠. 이제 다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시간이야.”
결국 주규와 황추도 눈을 떴다. 이안이 어두운 실내에 등불을 밝혀두었기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설마 자신들을 잡아 온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일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미친년아! 너 뭐야?’
이런 말이 튀어나올 뻔했을 정도로, 주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라면 북혈문 혈육을 납치하는 일 말고도 정말 신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텐데.
“협박이 안 먹혔어. 이제 어떻게 할까?”
이안이 그들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아름다웠다.
“손을 잘라서 보낼까?”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던 주규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흠칫 놀랐다.
“누구 손 말입니까?”
그러자 양중이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 손이겠는가? 자기 손이겠지. 뻔히 알면서 묻다니!
“안 통할 거다! 어차피 내 목숨을 포기했는데, 손을 잘라 보낸다고 통하겠나?”
어느새 양중은 양손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이안이 그를 겁주었다.
“허풍일 수도 있잖아?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하고.”
이안이 양중에게 넌지시 속삭였다.
“검 안 쓰는 왼손으로 잘라줄게.”
당장에 베려는 듯 그녀가 검 손잡이를 잡자 양중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안 통할 거라니까!”
이안이 검에서 손을 뗐다.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해? 정말 목을 잘라서 보낼까?”
듣기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섬뜩한 말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적어도 기분은 좀 나아지겠지.”
양중이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주규가 대신 나섰다.
“그럼 당신이 구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거요.”
이안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뭐야? 설마 내가 그런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거로 생각해? 나 아니더라도 어차피 그 사람들 비참하게 죽일 거잖아? 아냐? 정말 돈 벌게 해주려고 데려왔어?”
당연히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 내 답은 내놨으니 너희가 답을 내놔봐. 아니면 그냥 너희 다 죽여서 북혈문에 보내고, 나는 연기처럼 사라질 거다.”
이안이 이들을 겁주는 이유가 있었다.
뭔가 답들을 내놓다 보면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겠지 싶어서. 그 실마리라도 좋다.
‘도련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해 봤지만,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틀림없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존재할 텐데. 그래서 세월이 흘러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그렇게 했었어야지 하며 이불을 걷어찰 명확한 정답이 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불이 얼굴을 덮은 것처럼 답답할 뿐이다.
“저를 풀어주십시오! 제가 가서 문주님을 설득하겠습니다.”
주규는 어떻게든 자신만이라도 살아남으려 애썼다.
함께 설득해도 안 통할 일인데, 양중이 그의 길을 막았다.
“그게 통하겠냐?”
그는 주규의 의견을 무시하며 새로운 계획을 내놓았다.
“형을 납치해 오시오. 그럼 아버지는 항복할 거요.”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아비나 자식이나, 이것들이 정말! 저게 반쯤은 진심일 거다. 남은 반은 이런 이유일 테고.
“지금 네 형 주위에 고수들이 득실할 텐데. 나보고 잡히라는 거지?”
정곡을 찔린 양중은 움찔했다.
“나는 내 생각을 밝혔을 뿐이다.”
“오답이야. 자, 다음 정답?”
붙잡혀 온 세 사람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사실 이안이 시도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제안을 해서 놈들을 회유해야겠지.’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새로운 제안을 하는 순간 주도권을 놈들에게 빼앗기게 될 거다. 자식을 죽이겠다는데도 눈도 깜짝 안 하는 자들인데.
‘그냥 도련님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호위할 때가 좋았지.’
그렇게 답을 찾고 있던 그때였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이안은 물론이고 세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중이 다른 두 사람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규와 황추의 표정도 환해졌다.
‘됐다! 우릴 구하러 왔다!’
‘넌 이제 죽었다!’
그들은 차갑게 웃었다. 주규가 눈짓으로 말했다. 괜히 경거망동 말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자신들을 다 죽여버리고 바깥의 구조대를 상대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필요한 경고였다. 주규만큼이나 양중도 살고 싶었으니까. 양중은 숨도 쉬지 않았다.
이안은 검을 뽑아 든 채 나직이 물었다.
“누구냐?”
그러자 문 너머에서 너무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이요.”
제401회 미안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밖에서 들려온 말에 인질 삼인방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졌다.
정답이라고?
생각이란 걸 할 줄 안다면 자신들을 구출하러 온 구조대가 저렇게 친절하게 문을 두드렸을 리가 없지 않나? 문을 부수고 기습적으로 들어왔겠지.
결정적으로 여인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젠장! 저쪽 사람이구나!’
양중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한데 대체 누구기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끼이익.
문이 열리자 이안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련님!”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검무극에게 와락 안겼다.
“보고 싶었어요!”
예전에도 검무극에게 여러 번 안겼지만, 오늘만큼 반갑고 좋았던 적은 없었다.
그래, 정답이 오셨다!
아니, 오답이면 어떠하랴? 검무극인데. 이런 어려운 상황에 딱 등장해 주는 검무극이 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삼인방은 새로운 이들의 등장에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또 한편으론 남자가 부러웠다.
‘대체 누구기에 이 아름다운 여인이 저리 좋아하는 거지?’
얼굴을 보니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이안은 뒤늦게 검무극 뒤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취마를 발견했다.
“앗! 취마님!”
화들짝 놀라 검무극에게서 떨어진 이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조금 전까지 팔을 자를까, 목을 자를까 하던 여인이 저렇게 수줍은 모습을 보이다니!
한데 지금 세 사람에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취마?’
붙잡혀 있던 세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하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아는 취마는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제발 잘못 들었기를 바라는 그들의 시선이 다시 취마를 향했다.
잘생긴 중년 남자는 특별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왠지 시선을 빨아들이는 존재감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인 느낌과 허무한 눈빛을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허리에 찬 술병을 향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취마의 독문병기가 술병이라는 것을.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마존이 왔다고? 여기에? 대체 왜?’
무림에서 마존이 주는 공포심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취마가 그들을 슥 쳐다보자 세 사람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취마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한테나 구박받지, 나 밖에 나오면 이런 사람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웃어주었다. 겉으론 태연하게 굴어도 마음이 좋지 않음을 알기에 취마에게 많이 웃어주려 한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물었다.
“대체 누굴 구하려고 한 거냐?”
“역시!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는군요.”
이안이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에 우연히 한 아낙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 일을.
“……물 한 잔 얻어먹으며 사연을 듣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 비싼 물 마신 셈이죠.”
검무극은 안다. 이 일이 이안이란 사람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단순히 호위라서, 자신을 구하려고 몸을 날린 게 아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기꺼이 몸을 날린 것이다.
“원래 이런 일 처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나요? 항상 도련님 보면 뚝딱뚝딱 처리하셔서 쉬운 줄 알았어요.”
이안이 납치해 온 세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잡아 올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멋지게 인질 교환하고, 구출한 사람들 데리고 떠나면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찌 알았겠어요? 자기 자식까지 버릴 줄. 그래서 이자들 확 죽이고 그냥 가버릴까 고민 중이었다고요.”
마음에도 없는 저 말은 붙잡혀 온 세 사람 들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어떻게 다루든 공포 분위기는 조성되어야 했으니까.
이제 검무극이 상황을 이어받았다.
“이후 일은 내게 맡겨도 되겠느냐?”
“제발 맡아주세요!”
검무극인데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일을 다 망친들 무슨 상관이랴. 그녀에게 검무극은 그런 존재였다.
검무극이 세 사람에게 다가와서 조용히 속살거렸다.
“너희 정말 내가 안 왔으면 큰일 날뻔했어. 저 예쁜 여자, 싹둑싹둑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뒤에서 이안이 말했다.
“다 들리거든요.”
이때 세 사람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젊은 사내는 대체 누굴까? 취마의 수하인가?’
왠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여인이 도련님이라고 칭한 것으로 볼 때, 신분이 높은 것 같은데….
한데, 아무리 봐도 전혀 무공을 익힌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생김새나 풍기는 느낌은 딱 명문의 자제인데. 명문의 자제가 마존과 어울리며 이런 일을 저지른다고?
어쨌든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양중은 어떻게든 이 변수를 이용해서 살아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놈을 이용해서 살아남는 거다.’
양중이 정중히 물었다.
“소협께선 누구시오?”
넌 또 누구냐며 악다구니 치고 싶은 욕망을 애써 가라앉히며, 그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었다.
“너희를 구할 생명의 은인이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어쨌든 살려 준다고 하니 이때다 싶었다.
“나를 살려주시면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드리겠소.”
“뭐든?”
“그렇소. 돈을 원하면 돈을 드리고, 무공을 원하면 본문의 무공을 전수해주겠소. 명성을 원하시면 명성도 얻게 해드리겠소.”
일단, 될지 안 될지 모를 약속을 마구 남발했다. 지금 목숨이 걸린 일인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뒤에 있던 이안이 옅게 웃었다. 누구에게 돈을 주고, 누구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건지. 게다가 명성은 너희 문파 사람 모두를 다 합쳐도 못 미칠 텐데.
“셋 다 주면 안 돼?”
“셋 다 드리겠소!”
하지만 이내 검무극은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되었다.
“한데 부친이 인질 교환을 거절했다면서? 그런 사람이 돈도 내주고 무공도 전수해줄까?”
“그건……!”
정말이지 이점은 양중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화나는 부분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넌지시 제안했다.
“차라리 이건 어때?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들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말해줘. 그럼 우리가 구할게. 그다음에 너희 풀어주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 목적은 그 사람들 구하는 거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아! 저게 정답이었구나.’
저자를 구슬려서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직접 구해내는 것.
‘왜 이 간단한 생각을 못 했지?’
당연히 이 생각을 먼저 했어야지 싶은 계획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안 했다.
이쪽과 저쪽을 맞바꾼다. 여기에 생각이 꽂히니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상대는 자식도 포기해 버리는 매정한 인물인데, 자신은 정당하게 맞교환하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이러니 상황이 뜻대로 흘러갈 리가 없었지.
만약 검무극이 오지 않았다면, 먼 훗날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라면서 이불을 걷어차고 있었으리라.
‘역시, 소교주님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그때 이안은 취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취마는 ‘나도 그 마음 안다’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은 이렇게 편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지만, 만약 철부지 소교주였다면? 그 철부지가 치는 사고를 따라다니면서 수습해야 한다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일단 살고 봐야 하는 거잖아?”
검무극의 회유는 이안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붙잡혀 온 여인의 남편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꼭 구해내고 싶을 테니까.
문제는 양중을 풀어주더라도 북혈문에서 그들을 절대 풀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들을 풀어줄 것 같았으면 애초에 인질 교환에 응했을 테니까.
이안 말로는 특이한 체질의 사람들을 모았다고 하니, 뭔가 시험을 하는 것 같은데.
분명 외부에 밝혀지면 안 될 일을 꾸미는 중이겠지.
고민하던 양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그 사람들 옮겼을 거요.”
어느덧 반쯤 넘어온 그였다.
“어디로 옮겼을지 알잖아?”
물론, 양중은 대충 짐작 가는 장소들이 있었다.
“설령 말해준다 해도 경계가 삼엄해서 못 구해낼 거요.”
검무극이 취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누군지 못 들었어?”
양중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취마도 무서웠고, 자신이 결국 실토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게다가 우리가 가서 붙잡히면 당신에게 더 좋은 일이잖아? 왜? 배신자 취급을 당할까 봐 두려워? 나중에 그렇게 말하면 되지. 우릴 잡으려고 장소를 알려줬다고.”
검무극은 빠져나갈 길까지 마련해 주었다.
“정말 말해주면 우릴 풀어줄 거요?”
“풀어준다.”
“그걸 어떻게 믿소?”
“내가 풀어줄 거라 약속하고 있으니까.”
저 맑은 눈빛이며 이 선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면 꼭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인상만으로 상대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데.
그렇게 고민이 길어지자 검무극이 냉정히 돌아섰다.
“그럼 그냥 죽어라. 뭐해? 셋 다 죽여!”
검무극의 명령에 이안이 검을 뽑아 들곤 세 사람에게 다가섰다. 망설임 없는 진득한 살기가 훅 뻗쳐오자 양중이 다급히 소리쳤다.
“말하겠소!”
양중은 결국 장소를 실토했다. 한 곳이 아니라 있을 법한 여러 곳을 말했다.
“만약 말한 장소가 맞다면, 다시 눈을 떴을 때 북혈문의 네 방에서 깰 거다.”
휙! 휙! 휙!
세 줄기 지풍이 동시에 날아가 그들의 수혈을 제압했다. 그들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물론, 장소가 맞다고 해서 그냥 풀어줄 생각은 없다. 빙궁과 거래해서 그쪽에서 얻어낼 것부터 얻어내야 했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북혈문이 무슨 짓을 꾸몄는지에 대한 응징도 남아 있다.
이안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전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때는 했어도 안 통했을 거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절대 발설하지 않았을 테니까. 끝까지 잡아뗐을 테고. 그렇다고 네가 사람을 고문할 성격도 아니고.”
“아!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알고 실토한 거군요!”
“그렇지.”
“전 이 부분도 생각 못 했다고요! 왜 답은 절 피해 다니는 걸까요!”
이안은 새삼 감탄한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잘난 척을 잊지 않았다.
“네 존경심이 그득한 눈빛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에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잠시 그쳤던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눈 구경은 정말 원 없이 하는군요.”
이안이 환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무극은 새삼 이안이 겨울과 잘 어울린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이 눈 내리는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신난 강아지처럼 뛰어다니는 이안을 지켜보며 검무극이 취마에게 말했다.
“그 사람들 구출은 형이 알아서 해줘. 나는 소궁주를 만나볼게.”
취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눈 속으로 걸어갔다.
뛰어다니던 이안이 잠시 서서 취마를 지켜보았다. 그의 뒷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일까? 이안은 홀로 눈 속을 걸어가는 취마의 뒷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알아서 해줘’, 이 한마디로 해결되는 문제인가요?”
“마존이 왜 마존이겠느냐?”
“덕분에 저는 이제 해방이에요!”
이안이 눈밭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무극이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 * *
검무극이 만나자는 기별에 한설은 찬과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무극과 함께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설은 예감할 수 있었다. 죽립과 면사를 착용한 저 여인이 이번에 북혈문주의 자제를 납치한 수하임을.
‘수하가 여자였구나.’
두 사람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둘의 관계가 편하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친구 같기도 했고 오누이 같기도 했다.
‘역시 권위가 없어.’
취마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 이 상황도 그렇고.
그러자 자연스럽게 소교주에 관한 소문과 업적이 과장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라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을 테니까.
한설이 그들 앞까지 다가가자 이안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궁주님을 뵙습니다.”
한설은 고개만 살짝 움직여 인사를 받았다. 수하는 어디까지나 수하일 뿐이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태도에서 검무극은 무뚝뚝함이나 권위 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건 공허함이었다.
“왜 만나자고 하셨죠?”
한설의 물음에 검무극도 곧장 본론부터 밝혔다.
“북혈문주의 자제를 돌려주겠소.”
뜻밖에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으며 한설이 차분히 물었다.
“물론, 조건이 있겠지요?”
“당연히.”
“말씀하세요.”
“우선 그들을 납치한 내 수하에게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하오.”
한설의 시선이 슬쩍 이안을 향했다가 다시 검무극에게로 돌아왔다.
“과연 북혈문에서 받아들일지 모르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북혈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불어온 태풍을 탓하고 욕할 수는 있어도 화난다고 정면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좋아요. 받아들이죠. 양 공자는 어디 있죠?”
“조건이 하나 더 있소.”
“뭐죠?”
“우릴 빙궁에 머물게 해주시오. 잠시 머물며 백주설원 원주님의 죽음을 조사하고 싶소.”
한설은 단호히 거절했다.
“본궁은 외인을 머물게 하지 않아요.”
“내 조건은 그 두 가지뿐이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군요. 궁주님과 의논하고 말씀드리지요.”
한설이 돌아서려던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이 정도 일은 직접 결정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대가 결정을 내리고 궁주님을 설득하는 건 어떻소? 소궁주시니 이 정도 권한은 있지 않겠소?”
도발이라면 도발이지만, 한설은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다.
“제겐 그런 권한은 없어요.”
“이번 기회에 가져 보시오.”
한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너무 속 보이는 속셈 아닌가요?”
“소궁주에게 기회라 생각합니다만.”
“어떤 기회죠?”
“마교 소교주와 정식으로 협상할 기회 말이오. 궁주께서도 그 과정과 결과에 주목하실 거요. 오히려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소. 그대가 이번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문득 한설은 그 보고를 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이번 일은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저를 믿고 지지해 주십시오, 궁주님.
과연 이렇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어떻게 나올까?
이게 문제다. 예상이 전혀 안 된다는 점.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는 아직도 잘 모른다.
“다시 연락드리죠.”
그녀가 돌아서려던 그때였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지금껏 잠자코 있던 이안이 나섰다. 그녀가 천천히 죽립과 면사를 벗었다.
한설은 잠시 이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게 아니었다.
한설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구나.
언제 이런 생각을 해봤지? 오래전에 어머니에게 했었나?
동시에 드는 의구심. 왜 마교 소교주의 일개 수하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왜 이런 깊은 울림을 받는 거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차갑고 따스한, 상반된 두 여인의 시선이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제402회 어떤 놈이 대낮부터 술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한설은 물론이고 검무극도 이안의 대답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녀가 나서는 것은 사전에 계획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안은 차분하게 진심을 전했다.
“우리 소교주님 한번 믿어보시라고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한설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소교주의 수하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
“서로 믿음을 가지기 어려운 상황이란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나?”
한설의 차가운 물음에 이안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그 모든 걸 초월하는 뭔가도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설의 예상을 벗어난 대답이었다.
한설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 초월적인 존재가 소교주란 말인가?”
“그래요. 소궁주님께는 미친년 말처럼 들리시겠지만요.”
이안을 쳐다보던 한설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자, 이 미친년에 대해 당신이 설명해 봐, 이런 눈빛이었다.
물론, 순순히 그 의도대로 따라 줄 검무극이 아니었다.
“내가 수하들의 존경을 이렇게 받고 있소.”
한설이 검무극을 꿰뚫듯 노려보았다.
원래도 검무극의 소문 속 신화에 대해 믿지 못했던 그녀였다. 한데 이안의 말을 들으니까 이젠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어쩌면 정말 조작된 것일지도.’
그렇지 않다면 수하가 자신의 수장은 ‘초월적인 존재’이니 믿으라는 말을 할 리가 없다. 세뇌당했거나, 명령을 받았거나, 아니면 정말 미친년이거나. 그게 무엇이든 무림의 판도를 바꿔가고 있는 일대 영웅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시작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어떤 일도 쉬워지지 않소? 그러니 소궁주도 그냥 확 저질러 버리시오!”
검무극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지금 저 아이처럼요.”
이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저렇게 말해주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이런 사고도 칠 수 있겠지.
이안이 용기를 내서 한 번 더 말했다.
“소교주님을 믿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한설은 차갑게 코웃음을 친 후 검무극에게 작별을 고하며 돌아섰다.
“다시 연락하죠.”
그녀가 떠나자, 이안이 탄식했다.
“제가 다 망쳤죠?”
“초월은 좀 과했지.”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와버렸어요. 저 쌀쌀맞은 사람을 왜 도와주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물 한잔 얻어 마시고 여기까지 온 너 아니냐?
검무극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데.
이안은 주위 경치에서 답을 찾았다.
북혈문 일을 처리하는 동안 주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검무극을 만난 이후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설경이 아름다워서 그랬나 봐요.”
* * *
“소교주가 새로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한설은 검무극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북혈문의 자제를 내주는 대신 본궁에 잠시 머물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검무극에게는 빙궁주와 의논하겠다고 했지만, 어머니에게 받아들였다고 통보하듯 말한 것이다. 검무극을 믿어보란 이안의 말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반응이 궁금했다. 자신이 독단으로 결정을 내렸을 때 과연 어떻게 나오실지.
화를 내거나 차갑게 반응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 빙궁주은 차분했다.
그 이유를 묻는 빙궁주의 눈빛에 한설이 대답했다.
“북혈문의 자제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아니, 네가 받아들인 진짜 이유를 말해 보아라. 그건 첫 번째 이유가 아니지 않느냐?”
맞는 말이다. 북혈문주와 밀약을 맺은 건 어머니였으니까. 잡혀간 이들의 생사보다 앞서는 이유가 있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제 독단에 어머니가 어떻게 반응하실지를요.
하지만 그녀는 다른 이유를 댔다.
“제 눈에 비친 소교주는 소문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고 정말 그런 대단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소문은 안 통해, 하는 이유 외에도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정말 그들의 생각처럼 원주가 살해당한 거라면, 궁금하지 않으세요? 누가 그 사람을 죽였는지?”
빙궁주는 말없이 딸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라진 모습에 한마디 할 법도 했는데.
“이번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감사합니다, 궁주님.”
한설이 정중히 인사하고 궁주전을 내려갔다.
빙궁주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쳐다보았다. 눈 덮인 빙궁의 정경은 어제와 똑같은 풍경이지만 오늘은 다른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 *
철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양일(楊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방에 있던 사람이 끌려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던 임씨 역시 끌려 나간 지 며칠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깨끗하고 안락한 곳에서 쉬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이 음습한 뇌옥 같은 곳에 갇혀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현아, 민아.”
양일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평생 눈물이라고는 흘려본 적이 없는 그였는데.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영영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계속 아이들 모습만 떠올랐다.
안 그래도 걱정 많은 아내는 지금쯤 밤잠도 못 자고 있을 거다.
데려올 때는 웃으며 데려온 그들이었는데 잘 왔다는 서찰 한 통 보내는 것도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는 명의가 새로 개발한 약을 시험한다고 해서였다. 마을의 가장 큰 의원에서 사람들을 모아두고 여러 검사를 했다. 검사를 받아보는 것만 해도 며칠 일당이 되는 돈을 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그리고 마을에서 자신과 임씨 두 사람만이 그들이 원하는 체질이었다.
두세 달만 실험에 응하면 큰돈을 준다고 했다. 지금 벌이로는 몇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
아내는 위험하다고 말렸다. 몸이 상할 수도 있었고, 너무 큰돈을 준다는 것도 수상했다. 게다가 외지인들이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양일은 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가고 싶어도 체질이 안 맞아서 못 가는 이들도 있는데.
게다가 몸을 검사한 이들은 너무 예의가 바르고 점잖았다. 경우에 따라선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솔직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신뢰가 갔다.
자신과 아내가 열심히 일해도 돈이 잘 모이지 않았다. 좀 모았다 싶으면 쓸 일이 생기고, 악착같이 모았다 싶으면 또 쓸 일이 생기고.
목돈을 받으면 작은 가게라도 하나 차릴 작정이었다. 자신은 온갖 궂은일을 다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신이 하는 고생을 견뎌낼 수나 있을까? 아내는 아이들을 믿으라고 하지만, 양일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이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네 식구 먹고살 작은 가게 하나만! 제발!
하지만 고향을 떠난 후에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검을 찬 무인들이 자신들을 호송했다.
원래 가야 할 곳이 아니라 북해까지 왔고, 의방이 아니라 은밀한 산장에 갇혔다. 외출은 물론이고, 문밖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에 옮겨진 이곳은 아예 뇌옥처럼 꾸며진 곳이었다.
‘마누라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때, 무인이 철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자.”
양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죽는 건가?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눈앞의 이 무인을 기습해서 달아날까? 박치기라도 해서?
하지만 일반인이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상대는 무인이었다. 아무리 공사 일로 다져진 몸이라지만, 무인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
양일이 끌려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무런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라면 앞방에도 사람이 있었고, 옆방에도, 그 옆방에도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끌려간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이구나!’
그렇게 끌려간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물건이 가득한 곳이었다. 평생 맡아본 적이 없는 괴이한 약 냄새가 났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옥으로 만들어진 침상이 있었다.
데려온 무인이 양일에게 말했다.
“옷을 벗고 침상에 누워라. 남김없이 싹 다 벗어.”
양일이 망설이자, 무인은 두 번 말 안 한다는 듯,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기세에 양일이 옷을 벗었다. 지금이라도 달려들어서 놈을 제압하고 달아 하나! 본능은 그렇게 소리쳤지만, 평생 누군가와 싸워본 적 없는 몸은 본능에 충실하지 못했다.
집 짓고, 길 내고, 둑 쌓고. 평생 거칠고 힘든 일을 하고 살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는 온순한 성격이었다.
양일이 침상에 누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침상은 훨씬 차가웠다. 무인이 양일의 팔과 다리를 침상에 연결된 가죽 줄로 움직이지 못하게 묶었다.
그가 준비되자 문이 열리고 네 사람이 들어왔다.
푸른 장삼을 입은 중년 남자와 그를 호위하는 세 무인이었다. 무인 중 한 사람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푸른 장삼의 중년인보다 더 강렬했다.
중년인이 다가와서 양일을 내려다보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침상의 한기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었다.
양일은 간절히 빌었다. 이들이 어떤 시험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발 자신이 부합하는 사람이기를.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이제 돈도 필요 없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중년인이 본격적으로 시험을 시작했다.
그가 침상 아래를 조작하자 침상이 더욱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
너무 차가워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대로라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양일의 애원에 남자는 차갑게 말했다.
“빙한지체(氷寒之體)를 타고난 이들 천 명 중에서 한 명꼴로 있다는, 네가 만약 극한지체(極寒之體)라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양일은 절망했다. 그 말인즉, 천 명 중 한 명이 아니라면 자신은 죽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방에 있던 중년인이 코를 벌름거렸다.
“한데 이게 무슨 냄새지?”
철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술 냄새입니다.”
중년인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대체 어떤 놈이 대낮부터 술을 처마신단 말이냐?”
서 있던 세 무인 중 하나가 밖으로 나갔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무인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복도 저 앞쪽은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았다.
‘뭐지?’
실내에 이런 안개가 낄 리가 없지 않은가?
뭔지 모를 위험을 감지한 무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순식간에 안개가 밀려들었다. 술 냄새는 이 안개에서 풍기고 있었다.
‘안개에 술 냄새가? 그렇다면 이건!’
주기(酒氣)였다.
술이 약한 사람은 아니, 술에 강한 사람조차 이 기운에 취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술을 모아둔 둑이 무너져서 무릎까지 흘러넘치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렬한 주기였다.
그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안개 속에서 주먹을 쥔 팔이 쑥 튀어나왔다.
주먹은 가볍게 툭 쳤는데, 무인은 날아가 벽에 처박힌 후 정신을 잃었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취마였다.
주기는 마치 호신강기처럼 그의 몸 주위를 휘감고 있었다. 지금은 평범한 안개였지만, 사실 어떤 모습으로도 변하는 취마의 주기였다.
그는 무인이 나온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쉬이이익.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또 다른 무인이 취마를 향해 검을 날렸다.
취마는 날아든 검을 가볍게 피하더니, 이번에는 손날로 무인의 목을 가볍게 쳤다. 툭 쳤는데 쓰러진 무인은 일어나지 못했다.
휘류류류류.
바깥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 같은 주기는 취마에게로 모두 모여들더니 몸 주위를 감싸며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청의 장삼의 중년인은 놀란 얼굴로 취마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두 수하는 이렇게 쉽게 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말은 상대의 무공이 정말 강하다는 의미.
하지만 그는 아직 절망하지 않았다. 세 무인 중 진짜 실력자는 복면인이었다.
취마가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침상에 누워있는 양일을 살폈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에게 신경 쓰다가 복면인이 기습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취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취마가 양일을 보느라 등을 돌렸음에도 복면인은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몸 주위에서 일렁이는 취마의 주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취마가 양일을 묶은 가죽을 풀어준 후, 그의 팔목을 잡았다. 뜨거운 기운이 흘러 들어가자, 양일은 평온한 숨을 내쉬며 정신을 차렸다.
상대의 실력을 확인했음에도 중년인은 나직이 경고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시오? 이대로 물러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요.”
그러자 취마는 순순히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어차피 이번 일에 천마신교가 개입한 것을 북해빙궁이 알고 있기에,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나 취마다.”
“!”
중년인은 얼어붙은 채, 사색이 되었다. 복면인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당신이 왜?”
방금 수하에게 보였던 한 수가 아니었다면, 등을 돌려도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경지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말이다.
하지만 취마가 확실했다. 은은히 풍기는 이 깊은 주기와 주향은 취마가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운일 테니까.
아니,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눈앞의 이 사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일도 그들만큼 놀랐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마교 팔마존의 취마라고? 세상에 그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아이들이 울면 마존이 와서 잡아간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인데.
“혹 끌려온 사람 중에 양일이란 사람이 있나?”
취마가 자신을 찾자 양일은 깜짝 놀랐다.
“제가 양일입니다. 접니다.”
평생 삼류 무인과도 개인적으로 얽힌 적이 없던 그였는데, 마존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다행이군. 자넬 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양일은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존이 나를 구하러 왔다고?’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가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아, 죽기 직전에 꿈을 꾸는 건가?’
진짜 자신은 침상에서 얼어 죽어가고 있고, 마지막 순간 이런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꿈이나 환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지금도 앉아 있는 침상은 엉덩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다.
“저를 구하러 오신 거라고요? 존귀하신 분이 왜 저를?”
양일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다른 일로 왔다가 마침 자신을 구하는 상황인 줄 알았는데.
그러자 취마의 입에서 놀랄만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마 양일이 태어나서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그를 놀라게 한 말이었으리라.
“자네 처가 부탁했네. 남편을 집으로 데려와 달라고.”
“!”
너무 놀란 나머지 양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내가 어떻게 마존에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겠는가?
“제 처가요? 우리 마누라는 저와 혼인한 후에 마을 밖도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인데…….”
이내 양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
‘아, 난 이미 죽었구나. 마누라, 꿈에서라도 날 구해줘서 고맙네. 애들 잘 키우고, 잘 사시게. 끝까지 함께 못 해줘서 미안해.’
그 와중에도 꿈 같은 현실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술을 안 마셔서 신경이 좀 예민하다.”
취마는 원주가 담은 빙주를 혈루에 넣은 후 아직 마시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죽인 자를 죽일 때, 그 빙주를 마시고 죽일 작정이었다. 그녀가 복수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도록.
“내가 술을 마셨을 때가 위험할까? 마시지 않았을 때가 위험할까?”`
제403회 국수 파는 일은 쉬운 줄 아냐?
청의 중년인은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걸 몰라서 묻소? 빌어먹을 취마인데, 둘 다 위험하겠지.’
물론 그럴 수 없었기에 최대한 정중히 말했다.
“이번 일에 마교가 개입해 있는 줄 몰랐소. 만약 알았다면 돕지 않았을 거요.”
진심이었다. 빌어먹을 마교와 얽혀서 좋은 꼴을 볼 리가 없었으니까.
취마가 그에게 물었다.
“자넨 누군가?”
그러자 남자는 복면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수하를 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복면인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중년인이 자신을 밝혔다.
“난 황수(黃洙)라고 하오. 사람의 신체를 연구하는 학자요.”
“학자는 무슨! 도살자겠지.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었지?”
황수는 변명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 숫자조차 알지도 못한다.
“이들에게 무슨 시험을 했나?”
황수가 대답을 망설였다.
그때 침상에 있던 양일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무슨 체질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체질이었더라? 아, 맞습니다. 극한지체. 제가 극한지체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극한지체.
천성적으로 추위에 강하게 태어난 체질이 빙한지체다. 이 체질로 태어나면 평생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살아간다.
그리고 빙한지체 중에서도 특히 더 추위에 특화된 체질이 극한지체다.
극한지체를 타고난 인물은 적어도 추위에는 죽지 않는다. 가령 한겨울에 벌거벗고 얼음물에 들어가 있어도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얼어 죽지는 않는다.
“이 침상이 무섭도록 차가워졌었습니다.”
양일의 말에 취마가 침상을 살폈다. 평범한 침상이 아니었다.
“이게 극한지체를 찾아내는 침상인가 보군.”
취마가 황수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극한지체를 찾고 있지?”
대답하지 않는 황수를 보며 취마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을 텐데. 술을 마시지 않아서 신경이 예민하다고.”
황수가 옆에 있는 복면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취마 역시 처음부터 그가 수하가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수하의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너를 감시하려고 보낸 자로군.”
드디어 복면인이 나섰다.
“마존이라고 우리가 겁을 먹을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리라는 말은 황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으로 두 명의 복면인이 들어섰다.
그들은 앞서 취마에게 당했던 무인들과는 기세가 달랐다. 지금 이야기를 나누던 복면인만큼이나 눈빛이 강렬했다.
애초에 세 사람이 와서 돌아가면서 황수를 감시하며 이번 임무를 도왔다. 실력도 동수였고, 성격도 비슷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황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복면인이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거다.
‘이들 셋이 함께라면!’
상대가 취마라도 한번 해볼 만할 거란 생각이 들던 바로 그때.
주우우우우우.
다음 순간, 취마의 몸 주위로 일렁이던 주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식간에 그곳에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황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발! 취마를 죽여!’
잠시 정적이 흐르던 그때, 황수의 눈에 검날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복면인 중 한 사람의 검날이었다.
다음 순간.
꽈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공에 보였던 검이 한바탕 움찔하더니 이내 빨려 들어가듯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당했다!’
다시 그곳에 정적이 흘렀고.
휘이이잉.
다른 복면인이 검에 내력을 실어 허공에서 내젓자 안개처럼 깔린 주기가 그의 검 주위로 휘감겼다.
내력으로 끌어당겨 시야를 가리는 그것을 밖으로 배출하려는 의도였는데, 취마의 주기는 일반 안개나 연기가 아니었다.
잠깐 그의 검으로 휘감기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지며 더욱 짙어졌다.
그 순간 황수는 보았다. 안개 속을 언뜻 스치는 취마의 모습을.
그는 여유롭게 뒷짐까지 진 채 움직이고 있었고 이쪽을 보며 씩 웃기까지 했다.
‘조심해!’
그 말이 채 나가기도 전에.
꽈직.
취마의 손날에 주기를 해소하려던 복면인의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황수가 본 마지막 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살인멸구!’
혼자 남은 복면인은 취마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부터 죽이려 한 것이다. 애초에 그런 명령을 받고 내려온 모양이다. 이런 순간이 오면 자신을 죽이라는.
날아들던 검이 황수의 심장 앞에서 멈췄다.
꽈드득.
바로 앞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욱하던 안개가 사라지면서 복면인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향해 검을 내질렀던 그는 목이 기이하게 꺾여 있었고, 그의 눈에서는 이미 생기가 빠져나간 후였다.
그가 허물어지듯 쓰러지자 뒤에 취마가 서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실력 차이였다. 허리에 찬 독문병기 혈루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셋이면 해볼 만하다고?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마존들의 실력이구나!’
황수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주기는 취마의 주위를 불꽃처럼 일렁이다가 그의 몸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극한지체를 구하려는 이유가 뭐지?”
이제 황수는 더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나는 극한지체를 구해달라는 일을 맡고 돈을 받았을 뿐이오.”
“누구에게?”
대답을 망설이는 황수에게 취마는 현실을 알려주었다.
“조금 전에 이미 넌 죽었어.”
황수가 쓰러진 복면인의 시체를 바라보더니 이내 누구의 부탁이었는지 밝히기로 결정을 내렸다.
“내게 돈을 준 사람은 바로…….”
바로 그때였다.
후우욱.
황수의 이마 양쪽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퍼억! 퍼어억!
양쪽이 터져나가며 피를 뿜어냈다.
황수는 그대로 즉사했다. 놀랍게도 배후에 대해 언급하려면 이렇게 죽게 만드는 금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취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특정한 대답을 하려 할 때 죽게 만드는 일은 정말 어려운 암시이자 금제였다. 대단한 놈이 배후로 있다는 의미.
취마가 겁에 질린 채 앉아 있던 양일에게 말했다.
“옷 입게.”
그때까지도 벌거벗고 있던 양일이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게 꿈이 아니었구나.’
옷을 다 입은 양일은 취마를 따라 그곳을 나갔다.
양일은 자신을 데려온 무인을 기습하고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무모한 발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복도 모퉁이를 돌자 십여 명의 무인들이 쓰러져 있었다.
건물 밖도 마찬가지였다. 무인들 수십 명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무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자, 양일은 이번 일이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극한지체였다면 대체 뭘 시키려는 거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양일을 태우고 그의 고향으로 갈 천마신교 북해지부의 마차였다.
데려가는 이들이 양일의 고향 쪽 천마신교 지부와 협조해서 이들의 가족을 지켜줄 것이기에,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보복 걱정은 안 해도 되니, 가족들과 잘 살게.”
그게 아니더라도 양일이 고향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쪽 일은 다 끝나 있을 것이다.
양일은 자신이 살아남은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마존께서 저를 구해주시다니요!”
“내가 구한 게 아니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편을 구하고자 하는 자네 처의 간절한 마음이 아니라면 이 먼 북해까지 누굴 보낼 수 있겠는가?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부인에게 듣게.”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양일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볼 수 있다니?
갇혀 있으면서 수도 없이 결심했다. 더는 행복을 한 번에 얻기 위해 욕심내지 않기로.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욕심 대신 아이들이 커나가는 순간순간을 함께해 주겠다고.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가 넙죽 절을 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양일은 해마다 이날 술을 한잔하면서 취마를 떠올릴 작정이었다.
“이 절은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잘 전해주지.”
그렇게 떠나가는 마차의 반대쪽으로 취마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뽀드득, 뽀드득.
새하얀 눈에 첫 흔적을 남기며 걸어가던 취마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더는 눈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 * *
검무극과 이안은 마차를 한 대 빌려서 은월의 안가로 돌아왔다.
수혈을 제압당한 삼인방은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마차에 실었다.
“취마님 돌아오면 바로 빙궁으로 가자.”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취마가 일을 잘 처리하고 돌아오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편한 형처럼 대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마존으로 여기고 있음을.
이안도 취마는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자신들이 만났던 소궁주였다.
“한데 빙궁에서 도련님의 제안을 받아들일까요?”
취마가 붙잡힌 사람을 구해내더라도, 빙궁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문제였으니까.
“받아들일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시죠?”
“네가 소궁주에게 그랬잖아? 초월님이시니 믿으시라!”
“장난치지 마시고요. 왜죠?”
검무극이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 조건은 두 가지였어. 너를 처벌하지 말라는 것과 빙궁에서 원주의 죽음을 조사하게 해 달라는 것.”
“그랬죠.”
“우선 너는 어차피 손을 댈 수가 없어. 내 수족인 너를 함부로 건들 수 없을뿐더러, 그쪽 자제를 납치했어야 할 명분까지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북혈문에서는 이번 일을 숨기려 하는데, 널 벌하겠다고 이번 일을 키울 수는 없지.”
“두 번째 조건은요? 빙궁에서 우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빙궁주는 그쪽 원주와 취마 형과의 관계를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야. 오랜 세월 서찰과 술을 주고받으며 맺어온 관계니까. 그런 사람이 이번 죽음에 관심을 가지는데 거절한다? 만약 그랬다간 취마 형은 더욱 그 죽음을 의심하고 본격적으로 파고들 거다. 그 과정에서 빙궁이 알리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다 알아낼 수도 있고. 빙궁주도 그런 점을 예상할 테니 쉽게 거절할 수 없지.”
이안은 감탄했다. 검무극이 말한 이유를 자신은 하나도 생각지 못했다.
“저는 은퇴할래요. 이런 무림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네요. 은퇴하고 무림인들 안 오는 시골에 가서 국수나 팔면서 살래요.”
“어디 국수 파는 일은 쉬운 줄 아냐? 종일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면, 아! 도련님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검 휘두를 때가 좋았지, 당장 달려오고 싶을 거다.”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 나온 김에 국수 드실래요? 주방에 재료 있던데.”
“할 줄 알아?”
“국수 정도야 하죠.”
“먹자. 그러잖아도 출출하던 참이다.”
“제가 금방 끓여올게요.”
이안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검무극은 마차 지붕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지붕에 내려섰음에도 깃털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곳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마존들도 보고 싶지만, 그래도 언제나 아버지가 제일 먼저 보고 싶다.
천마전 태사의에 무뚝뚝하게 앉아서 일 보고 계실 텐데.
‘아버지,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아버지는 제 생각, 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는 사이 이안이 뚝딱 국수를 만들어왔다.
“어디서 드실래요?”
“여기서 먹자.”
이안이 국수를 들고 훌쩍 몸을 날려 마차 지붕으로 올라왔다. 부드러운 경공술에 국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무공 경지가 올라가고 있는 그녀다.
“드세요.”
금방 만든 것치고는 맛이 훌륭했다.
“맛있다. 이 정도 손맛이면 은퇴해도 굶어 죽진 않겠다. 그 국숫집에 나도 투자하자!”
이안은 기분이 좋았다. 검무극이 맛없다고 할까 봐 내심 걱정했었다.
두 사람이 후루룩 국수를 먹고 있을 그때였다.
취마가 그곳으로 들어섰다.
검무극과 이안이 그를 쳐다보았다. 취마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 고갯짓을 보는 순간 이안은 안도했다. 무사히 구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아쉬운 소식도 있었다.
“그 사람만 구했네.”
이안은 너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좀 더 잘했으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은 하지 않을 거다. 그 분노는 이번 일을 꾸민 자에 대한 응징에 보탤 작정이었으니까.
“국수 남은 것 없나?”
“금방 해드릴 수 있어요. 한데 국수로 되겠어요? 제가 맛있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에 나서준 것이었으니까.
“됐네, 국수면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제가 금방 삶아오겠습니다.”
“나도 한 그릇 더!”
“네!”
이안이 주방으로 달려가자 이번에는 취마가 훌쩍 마차 지붕으로 올라왔다.
“고생했어, 형.”
“고생은 무슨.”
“한데 사람들은 왜 잡아간 거였어?”
“놈들은 극한지체를 찾고 있었다.”
“극한지체?”
사람의 여러 체질 중에서 극한지체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체질이었다.
“누구에게 명령을 받았는지 대답하려는 순간,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 아주 강력한 금제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회귀 전에 알았던 한 조직을 떠올렸다.
혈사맹(血死盟).
피로 뭉쳐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렸다.
모두가 혈사맹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졌다. 그들은 진심 어린 충성심으로 목숨을 바친 게 아니었다. 배신하면 몸이 터져서 죽는 강력한 금제에 걸려 있었다.
그 혈사맹을 이끈 인물.
십이지왕 중 구왕(九王).
혈왕(血王).
십이지왕 중 한 명이 또다시 등장한 것이다.
아래쪽 왕이라고 꼭 위쪽보다 약하다고 볼 수 없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십이지왕이 바로 혈왕이었다. 그는 아홉이란 숫자가 좋다면서 스스로 구왕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혈왕은 강력한 인물이었다. 일단 수없이 많은 수하를 거느렸고, 그 수하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배신도 하지 못하고, 자멸공도 서슴없이 쓰는 자들이었다.
그랬기에 정작 혈왕이 어떤 무공을 쓰는지, 얼마나 강한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혈왕과 관련된 모든 역사는 수하들의 역사였고, 그들의 피의 역사였다.
‘그 혈왕이 극한지체를 찾고 있다고? 왜지?’
검무극이 눈 덮인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 깨끗한 눈에 얼마나 많은 피를 뿌려야 할지.’
국수를 가져온 이안은 검무극의 심각한 표정을 보았다.
그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이번 빙궁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그녀의 가슴이 투지로 끓어올랐다.
그때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전 열심히 국수나 삶겠습니다.”
그녀의 너스레에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그때 취마가 불쑥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검무극이 돌아보자 취마는 취몽루에서 술을 마시는 것처럼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세는 풀어져 있었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도 강렬했다.
“이 형이 다 해결해 주마.”
제405회 자결이 아니라는 증거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검무극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자, 한설은 내심 놀랐다.
검무극이 그 말을 한 이유는 이번 일의 배후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혈왕이 빙궁을 노린다면 힘을 합쳐 막아야 했기 때문에.
물론, 그녀에게 이 말을 해줄 수는 없었으니.
“빙궁주께서 내가 내건 조건을 받아들인 건 북혈문과 일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일 거요. 북혈문주의 둘째를 구해주고,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았겠지요.”
한설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빙궁으로 들어왔소. 어머니는 북혈문 일을 신경 쓰실 테니 당신이 우릴 감당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소.”
정말 그래서 그 말을 했던 걸까? 이것보다는 조금 더 중요한 느낌이었는데.
“소교주께서는 본궁의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어요.”
“그대를 위해서 한 말이었는데.”
한설은 어머니를 제외한 어떤 사람과도 대화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일단 그녀가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데, 누가 감히 소궁주에게 말을 길게 늘이겠는가?
한데 이 소교주는 자꾸 말을 하게 한다. 아니, 안 할 수 없게 만든다.
“왜 나를 위한다는 거죠?”
“그냥 돕고 싶어서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죠.”
단호히 말하고, 그녀가 걸음을 옮겼다.
호의를 받는 것도 싫지만 받았기에 돌려줘야 하는 그 상황은 더 싫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 그 교류는 그녀에겐 독이 발린 암기를 주고받는 느낌이었으니까.
검무극이 그녀 뒤를 따라 걸었다.
“왜 따라오는 거죠?”
“숨어서 내 말을 엿듣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순간 한설이 발끈했다.
“엿듣다니요? 난 그저.”
“그저?”
“나설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가 없듯, 핑계 없는 무덤도 없는 법이지요.”
한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발끈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 약 올리고, 사람 감정을 제 마음대로 휘젓는 이런 사람, 정말 싫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에게 빠져들 거란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들은 그저… 당신이 소교주이기에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당신이 하급 무인이었다면 그들이 당신을 좋아했을까요?”
“아마 하급 무인 주제에 말까지 많다면서 엄청 두들겨 맞았을 거요.”
한설은 장난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버럭 화를 내려다 말았다. 그럼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말로 대응할 테니까.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던 무인들이 정중히 그녀에게 인사했다.
한설은 한결같이 무표정하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검무극이 별걸 다 간섭했다.
“원래 이렇게 수하들에게 딱딱하게 구시오?”
“우린 무인들이에요. 왜 친절을 바라죠?”
결국,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남자와는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사람들 여기 놀러 왔나요? 함께 시시덕거리다가 목숨이 걸린 위험한 임무 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나요? 명령하면 저들이 기꺼이 나갈까요?”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이 없죠?”
“맞는 말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소?”
가만히 검무극을 응시하던 한설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하급 무인이 아니라 소교주여도 당신은 언젠가 흠씬 얻어터질 거예요.”
한설은 따라오지 말라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검무극의 말이 들려왔다.
“우리 언제 한잔합시다! 취마님이 금주 중이셔서 내가 술을 못 마시고 있어요! 이안은 의리 지킨다고 같이 안 마셔 줄 테고.”
끝까지 저런 식이지. 금주하는 취마라니? 그리고 뭐? 그 수하는 의리를 지킨다고 안 마신다면서? 그럼 자신은 의리가 없어 보여서 마시자는 건가? 대체 사람을 얼마나 놀리려는 건지.
그렇게 그녀가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를 바라보던 검무극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있는 그녀에게 평범한 방법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기에 이렇게 파고들고 있었다.
이러는 이유가 그녀의 성격을 밝게 해주고 싶다거나 마음속 구멍을 메워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그녀와 북해빙궁의 안위 때문이다.
만약 혈왕이 빙궁에 개입해 있다면, 분명 한설에게도 암수를 뻗쳤을 것이다. 혹은 뻗치려 들거나. 지금까지 저들의 방식이 그러했으니까.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척박한 땅에 우뚝 솟은 건물들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무인상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혈왕,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 잔혹한 붉은 피를 어디에 감추고 있느냐?
* * *
북해빙궁에서 내어준 방은 총 세 개였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네가 가운데 방에서 묵어라.”
“두 분께서 양쪽에서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요?”
“맛있는 국수 얻어먹으려면 지켜줘야지.”
북해빙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취마는 알아서 자신의 몸은 지킬 것이고, 옆방 정도라면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반응할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은월과 통천각에 기별했어. 가능한 모든 정보력을 북해빙궁과 북혈문에 집중해 달라고.”
두 정보조직이 힘을 합치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난 이번 일의 배후가 무림맹과 사도맹에서 음모를 꾸몄던 자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생각해.”
취마와 이안이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외 풍천교에서도 암약하던 자들이었다. 빙궁에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앞서 당한 게 있으니, 더 위험한 상황이군요. 조심하세요, 도련님!”
“괜찮아, 형이 지켜줄 거야. 그렇지? 왜 대답 안 해? 내가 해결해 주마! 왜 다시 안 하냐고?”
검무극의 재촉에 취마는 딴청을 부렸다.
“아! 술 마시고 싶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안 돼!”
둘의 대화를 지켜보며 이안은 옅게 웃었다.
취마가 이런 사람인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언제나 취해 있어서 말이 통하기나 할까 두려웠던 사람이었는데. 화가 나면 감정에 취해 광기 어린 주사가 터져 나올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슬픔을 술로 이겨내리라 여겼는데.
그는 알고 있는 거다. 술 마시고 슬퍼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가 아니라는 걸.
그는 오히려 술을 끊고 차분히 세상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자신을 위로할 줄 알아야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있음을 아는 거다.
“특히 북혈문을 조심해야 해. 그들이 숨기려던 일을 우리에게 들켰으니까.”
취마의 말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북혈문에서 모든 증거를 없애고 꼬리 자르기를 하려 들지 않을까요?”
“하겠지.”
대답을 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그럼 이렇게 있어도 되나요?”
“괜찮아. 꼬리를 자르려고 벌인 일이 또 다른 꼬리가 될 테니까.”
“그렇군요.”
알겠다는 듯 대답은 했지만, 정확히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기에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싸움, 아직 해본 적이 없다.
배후세력, 북혈문, 북해빙궁.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적들이 둘러싼 적진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다.
“소감이 어때?”
“떨리죠.”
하지만 그녀는 함께 싸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후 그 떨림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분 좋게요.”
* * *
다음 날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원주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한설이 세 사람을 데리러 직접 왔다.
그녀는 어제 언제 발끈했느냐는 듯 담담히 검무극을 대했다.
“먼저 돌아가신 원주님 방부터 안내해 드리죠. 궁주님께서 아직 치우지 말라고 하셔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요.”
이번 사건의 조사를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한데 빙궁주는 왜 치우지 말라고 한 것일까? 그녀와 친해서? 아니면 빙궁주 역시 그녀의 죽음에 의문이 들어서?
“그녀의 사인은 무엇이었나?”
취마의 물음에 한설이 대답했다.
“독주를 드셨습니다.”
독주란 말에 취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독살당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가 없어요. 유서를 남기셨으니까요.”
“내가 볼 수 있겠나?”
취마가 요구하리라 예상했는지 품에서 유서를 꺼내서 건넸다.
삶이 힘들다는 고백과 함께 술을 만들던 백주설원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빙궁주에게 불충을 용서해 달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유서를 읽는 취마의 서글픈 눈빛에 어떤 이채가 스쳤다.
“조사한 결과 원주님의 필체가 확실했습니다.”
“맞아, 그녀의 필체가 확실하네.”
취마도 인정했다. 누구보다 그녀가 쓴 글을 많이 본 그였으니, 적어도 다른 사람이 쓴 유서는 아니라는 의미다.
“독은 어디서 구했다던가?”
“그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자결한 것이 확실했기에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원주의 시신은 어떻게 됐나?”
“본궁의 무인들이 묻히는 무덤에 매장했어요.”
이미 매장했다면 시체에서 어떤 독이 사용되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한설은 세 사람을 원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가족이 안 계셔서 고인의 물건을 찾아갈 사람이 없다고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취마는 원주의 유일한 가족이기도 했다.
그들이 함께 원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취마가 잠시 그녀를 애도했다.
‘당신을 안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이 방에는 처음 들어오네.’
방은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혼자 누우면 딱 맞을 작은 침상이 창가에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당신은 저 책상에 앉아서 내게 서찰을 보냈겠구나.’
그녀가 그곳에 앉아 서찰을 쓰는 모습이 취마의 마음에 떠올랐다.
책상에 꽂혀 있는 책들은 대부분 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양조장에서 쓰는 여러 부품이나 장치들도 구석에 놓여 있었고, 작업하면서 입는 옷들도 잘 개어져 있었다.
모두가 느끼는 감정은 같았다.
정말 그녀는 술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구나.
한쪽 벽에 놓인 장식장에는 수십여 개의 술병이 모여 있었다. 다양한 모양의 술병이었다.
“따로 모아둔 걸 보니 귀한 술이지?”
취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모아둔 술들 사이에는 자신이 보낸 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흔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평범한 술도 많았는데, 그녀가 모아둔 진귀한 술들과 함께 모아둔 것이다.
모아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취마가 그녀의 책상 아래에서 하나의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 자신에게 받았던 서찰들을 고이 모아두었다.
‘이걸 다 모아두었구나!’
취마는 그녀가 보낸 서찰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없어진 것도 있을 테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것들도 있을 테고.
한데 원주는 날짜별로 서찰을 정리해서 보관해두었다.
취마가 그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몇 번이나 읽었는지 손때가 묻어 있었다.
‘아, 이런 일이 있었지.’
정말 오래전 일이 기억났다. 자신이 이런 이야기까지 전했나 싶었던 내용이 서찰에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역사가 서찰에 담겨 있었다.
“나와 주고받았던 서찰은 가져가도 되겠나?”
취마의 말에 한설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세요.”
서찰을 가슴 속에 수북이 넣으면서도 취마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백주설원으로 가세.”
* * *
백주설원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에 원료를 싣고 나르는 이들 뒤로 술을 발효시키는 곳이 보였고, 숙성시키는 곳도 있었다. 또 완성된 술을 병에 담는 이들도 있었다.
잠시 그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백주설원의 임시 원주를 맡은 남자가 불려왔다. 그가 죽은 원주가 가장 신임하던 인물이라 했다.
“전대 원주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시지요.”
“그녀가 죽기 전에 이상한 점은 없었소? 다른 행동을 했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싸웠던 사람은?”
“원주님은 누군가와 싸우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 남자 말고도 몇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눴지만,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취마는 백주설원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서 만들어진 술을 조사했다. 만들어지는 술의 종류며, 제조 일정이며, 그 술이 어디로 나가는지.
그렇게 조사를 마치고 네 사람은 백주설원을 나섰다.
“이렇듯 자결한 것이 명백한데 더 조사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가 자결한 것이 확실하면 세 사람은 더는 빙궁에 머물 명분이 없어진다.
하지만 한설의 확신에 취마는 또 다른 확신을 보였다.
“자결이 아니니 본격적으로 조사해야지. 빙궁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우릴 도와주게.”
한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취마가 자신 있게 말했다.
“난 오늘 조사에서 자결이 아니란 심증과 증거를 세 가지나 발견했네.”
“어떤 부분에서요?”
한설뿐만 아니라 검무극과 이안도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 가지나 된다고?
“우선 자결하더라도 독주를 마시고 죽었을 리 없네.”
“평생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니 마지막 가는 길 역시 술과 함께했을 수 있잖아요?”
취마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 같은 술꾼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술꾼이 아니라 술을 만드는 사람이라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한설에게 취마가 덧붙여 설명했다.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내렸지, 자신이 만든 술에 독이 섞이는 것을 절대 허용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네. 술을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이니까.”
검무극은 그 마음을 이렇게 이해했다.
무인은 자신의 검으로 자기 심장을 찔러 자결할 수 있겠지만, 검을 만드는 장인은 자신이 만든 검에 피를 묻히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 심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다른 이유는 뭐죠?”
“아까 백주설원의 일정을 살펴보았네. 그녀가 죽고 나서 닷새 후에 궁주전으로 들어가는 빙주가 완성되었더군. 이 극상품의 빙주는 이 시기에만 만들 수 있는 술이지. 일 년 중 백주설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한데 그 마지막 술을 완성하지 않고 자결했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네.”
검무극도 이안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 역시 겉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지만, 취마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유서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가린 의문이리라.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뭐죠?”
“그게 결정적인 이유지.”
취마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차분히 말했다.
“내게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네.”
적어도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을 리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 기별을 보낸 거지.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 달라고.”
만약 협박을 당하면서 유서를 썼다면? 죽음을 예상했다면 취마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 것으로 이 죽음이 자결이 아님을 취마에게 알린 것이다. 깊은 신뢰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의 실수가 뭔지 아나? 저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을 죽였다.”
취마는 허리에 매달린 혈루를 천천히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취해서 미쳐 날뛰는 걸 막아줄 사람을.”
제406회 소교주님께 한번 속아보세요.
검무극은 취마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일에 개입된 모두를 죽여버리겠다고 마음먹었음을.
그가 마음을 먹은 이상, 자신은 개입할 수도, 개입해서도 안 될 결정이었다. 이것은 마존의 결정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상기된 채 취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 역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다. 취마가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취하지 않았기에 더욱 무서운 취마의 결심을.
검무극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느끼고 있나?’
한설이라고 어찌 취마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겠는가? 다만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할 관계는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좋아한 여인이라면 떨어져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일 년에 한두 번 서찰과 술을 주고받고. 그게 전부인 관계 아닌가?
두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도 사람을 기만하고 속이는 게 인간인데, 얼굴조차 보지 않았던 관계에 대체 뭐가 있다고.
다만, 한 가지는 공감했다.
“원주의 죽음에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네요.”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빙궁에서 적극적으로 이번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원하시는 게 뭐죠?”
검무극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취마에게 맡길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취마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소교주께서 결정하시게. 더 똑똑한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조금 전에 그렇게 멋지게 추리했으면서요?”
“그건 그 사람을 내가 잘 아니까 그랬던 거고.”
취마가 똑똑한 사람이란 건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취마가 검무극을 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그놈들 앞으로 나를 데려다줘.
검무극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반드시 그럴게.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다른 도움은 필요 없소. 그 하나면 되오.”
한설은 궁금했다.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하나만이라고 할까?
“소궁주께서 우리 조사단에 들어와 주시오.”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한설은 눈을 크게 떴다.
“넷이서 해결합시다!”
취마와 이안은 크게 감탄했다.
한설이 합류하면 앞으로 그녀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녀와 함께 움직이면 빙궁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야말로 ‘네 소원이 뭐냐?’라고 악마가 물으면 ‘널 가지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부탁에는 이안과 취마가 모르는 검무극의 숨은 의도가 하나 더 감춰져 있었다. 혈왕이 그녀를 노릴 수도 있기에 그녀를 가까이 두려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진심이오.”
한설은 거절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사람과 어울리는 일은 본능이 거부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로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원주가 자결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면 빙궁을 위해서라도, 흉수를 찾아내야 한다.
“지금도 돕고 있잖아요?”
“같은 편으로 돕는 건 아니지 않소?”
“!”
맞는 말이다. 이번 제안을 독단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소교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사실 소문이 과장되었다는 걸 자신이 꿰뚫어 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들과 한편이 된다?’
한설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저 지나치게 아름다운 수하는 물 한 잔 내어 준 아낙의 남편을 구하러 이곳 북해까지 왔다.
금주 중이라는 취마는 때때로 술과 서찰을 주고받았던 사람을 위해 복수하겠다 하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칭송을 듣는 저 사기꾼 같은 소교주는 자신에게 함께하자고 하고 있다.
한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은 그 행동과는 반대였다.
“좋아요, 저도 함께하죠. 단,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오.”
“일을 처리하면서 어떤 일도 제게 숨겨선 안 돼요.”
“좋소, 남김없이 다 말씀드리죠. 대신 약속하시오. 듣기 싫다고 피하면 안 되오. 귀 아프다고 하면 안 되오.”
그렇게 한설도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넘어야 할 큰 산은 지금부터였다.
“그럼 당장 거처부터 옮기시오. 이안과 같이 지내시면 될 것 같소.”
“거처를 옮기라고요?”
“왜 그리 놀라시오? 이제부터 한 식구인데 당연히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생각해야지요.”
한 식구라고? 한설은 함께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했다. 같은 일원이 되겠다고 허락한 것만 해도 자신에게는 큰 결정인데.
‘대체 당신, 내게 뭘 원하는 거야?’
그런 반발을 느꼈음에도 검무극은 모른 척 그녀에게 말했다.
“함께 먹고 자는 경험이 주는 힘이 있을 거요. 이번 기회에 한 번 경험해 보시오.”
한설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저 여인과 함께 잠을 자라고? 남과 한방에서 자 본 적이 없는데.
이 상황에서 검무극은 이안을 챙겼다.
“사전에 상의하지 않고 결정해서 미안해.”
“아뇨, 전 괜찮아요.”
이안이 한설에게 말했다.
“제게 소궁주님과 함께할 영광을 주세요.”
취마도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
“내겐 중요한 일이니, 소궁주께서 한 번 양보해주시게.”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한설이 허락했다.
“좋아요, 그러죠.”
두 사람 때문이 아니다. 한설은 이제 막 검무극과 비무를 시작했다. 검무극이 말로 사람을 흔들어서 이용하는 자란 걸 반드시 증명할 거다.
“이제 뭘 해야 하죠?”
질문을 한 한설뿐만 아니라 취마와 이안도 막막했다. 이제 무슨 조사를 하지? 주위 사람들을 더 만나봐야 하나? 아니면 전장 기록이라도 살펴야 하나?
다행히 검무극은 가야 할 길 앞에 서 있었다.
“의문을 가져야죠. 왜 원주였을까? 빙궁의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여야 했을까?”
그리고 검무극은 그 해답을 한 사람에게서 찾았다. 한설 앞이기에 정중히.
“저는 그 답을 이미 마존께서 알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두 여인의 시선이 취마를 향했다. 다들 놀랐지만 취마가 가장 놀랐다.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누가 죽였는지는 몰라도 왜 죽였는지는 알고 계실 겁니다.”
“난 모르는데?”
취마는 마치 흉수로 몰린 것처럼 당황했지만 검무극은 단호했다.
“아뇨, 알고 계십니다.”
검무극이 그렇게 여기는 이유가 있었다.
“원주님은 백주설원 내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렇다고 강한 무공을 익힌 분도 아니십니다. 권력이나 원한, 비밀을 가진 분도 아니시죠. 그렇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왜 취마가 알고 있다고 했는지, 이 마지막 말에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분의 죽음은 분명 술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 * *
마차가 북혈문으로 들어서자 양중은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차는 내원 깊숙한 대전에 도착해서야 멈춰 섰다.
양중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같은 마차를 타고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할 법도 했는데.
화가 나신 거다. 양중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했다. 북혈문이 자식보다 더 소중한 분이셨으니까. 이번 일로 큰 피해를 봤으니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 양중은 막상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옅어졌다.
인질 교환을 요구했을 때는 자신을 버렸지만, 그래도 북해빙궁과 거래해서 자신을 구한 아버지였다. 어쨌든 살아남았으니까 됐다.
아버지는 대전에 홀로 계셨다. 평소 그곳을 지키던 무인들을 모두 물리신 상태였다.
‘내 실수를 질책하실 생각이시다.’
수하들이 있는 앞에서 아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 아버지의 배려를 느끼자 마음은 더욱 풀어졌다.
“아버지.”
아버지는 말없이 등을 돌린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등이 더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양중은 무조건 마교에 책임을 미뤘다.
“마교 놈들이 나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러자 북혈문주는 차갑게 물었다.
“왜 말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실험실 위치 말이다.”
순간, 양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잊고 있었다. 붙잡혀 온 사람들이 있을 만한 장소를 모두 말해줬었다는 사실을.
‘살기 위해서 말했습니다. 인질 교환도 거절하고 저를 버리셔서, 살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하지만 평소 두 사람은 이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양중은 검무극이 알려준 대로 말했다.
“놈들을 그곳으로 유인해 붙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실험실을 옮겼다면 옮긴 곳엔 분명 침입을 대비한 비책을 세우셨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놈이 널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면, 실험실이 아닌 장소를 알려줬어야지. 나는 그곳밖에 모른다. 딱 잡아뗐어야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상황이었다고요, 아버지!’
양중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쯤 야단치고 끝내면 좋았을 테지만, 본격적인 질책은 이제부터였다.
“너 때문에 황수가 죽었다.”
황수는 그곳에서 실험을 진행하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죽은 게 더 중요하다는 겁니까? 이 아들이 살아난 것보다요!’
지금껏 계속 마음속에 쌓아 왔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의 화만 더 돋울 게 틀림없다. 아버지는 공사 구분도 못 하는 유치한 투정으로 치부하실 테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다.
“떠나거라.”
“!”
“절강에 가서 돌아오라고 할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절강은 이곳에서 멀어도 너무 먼 곳이었다. 절강으로 떠나라는 말은 곧 양중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내쫓으려 한다는 사실에 양중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후계 싸움을 시켰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신임을 몰아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양중은 희망을 가졌다. 자신도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정말 온갖 일을 다 했다.
북혈문을 위해서, 또 아버지를 위해서.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들을 다 했는데.
하지만 이제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꿈은 혼자 꾸었다.
“싫습니다. 저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양중은 악을 썼다. 지금껏 아버지가 무서워 제대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이제는 참지 않았다.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은 뭐든 다했습니다. 죽이라면 죽이고, 납치하라면 납치하고. 한데 이제 와서 떠나라고요? 싫습니다!”
‘사냥개처럼 실컷 이용해놓고. 자식이 사냥개면 아버지는 대체 뭡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해버렸어도 되었을 원망이었다.
푸욱!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양중의 말과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오며 가슴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피 묻은 검날을 바라보았다. 너무 놀라서였을까? 아프지 않았다.
검이 사람을 관통하는 모습을 그렇게 많이 봤으면서, 지금 이 모습은 너무나 낯설다.
대체 누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자신을 찌른 사람은 자신이 맨 먼저 떠올린 사람이었다.
북혈문의 장남이자 그의 형인 양석(楊席)이었다.
후계 싸움을 하며 언제나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형이었으니 이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지금 양중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저 아버지가. 형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거다.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죽이라고 한 거다.
“……이럴 거면 왜 구하신 겁니까?”
원망 가득한 물음에 차가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북혈문의 핏줄을 남의 손에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오직 우리 손에만 죽을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랬다면 인질 교환을 해줬어야지. 죽일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절강에라도 보냈어야지. 안 간다면 설득해서 보냈어야지. 수혈이라도 짚어서 보냈어야지. 아버지라면 그렇게…….
양중의 원망은 거기까지였다.
푸우욱!
검이 거칠게 뽑혔고 양중은 가슴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쓰러져 절명했다.
앞서 양중과 같이 납치되었던 주규와 황추도 이미 제거된 후였다.
북혈문주가 양석에게 말했다.
“마교 소교주가 빙궁에 머물며 이번 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연결될 만한 꼬리는 다 자르겠습니다.”
“본문의 사활이 걸린 문제니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맡겨주십시오.”
양석이 나가고 북혈문주는 죽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견딜 만한 아픔이었다. 만약 북혈문이 무너진다면 그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 *
취마는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내 속에 답이 있다.’
검무극의 추측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그녀가 누구에게 원한을 살 사람도 아니고. 음모에 휘말렸다면 분명 술과 관련될 음모일 거다.
그렇게 거닐다가 그녀와 나눴던 서찰을 꺼내서 읽었다. 그러다 또 걷다가 멈춰서서 다른 서찰을 읽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또 걸었다.
그런 취마의 모습을 방 안 창가에서 이안이 쳐다보고 있었다.
“취마님이 고민이 많으시네요.”
한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가져온 짐은 풀지도 않았다.
“후회하세요? 함께하겠다고 결정하신 것?”
한설은 냉랭한 눈빛을 보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안은 더는 말을 걸지 않고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바깥도 심각하고 안도 심각했다. 정작 두 사람에게 이렇게 큰 고민을 안겨준 검무극은 잠시 어딜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때, 뒤에서 한설이 불쑥 말했다.
“그대가 속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이안이 고개를 돌려 한설을 쳐다보았다.
“소교주님께요?”
한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한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에게 속아서 이용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다.
그냥 미소나 한번 지어주고 말까 하다가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괜찮지만, 검무극을 그렇게 여기는 건 또 못 참는 이안이었으니까.
“어쩌면요.”
순순히 인정하듯 말했지만, 그건 ‘검무극 바로 알게 하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속아서 저는 익혔던 무공의 부작용을 고쳤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고민이 많았던 부작용이었지요.”
이안은 부작용의 구체적인 내용까진 밝히지 않았다.
“그렇게 속아서 꿈도 못 꿨을 검술을 익혔고, 원래라면 꿈도 못 꿨을 조직의 수장이 되었어요. 그렇게 속아서 평생 꿈도 못 꿨을 분의 수양딸이 되기도 했죠.”
한설은 그게 어떤 검술인지, 어떤 조직인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평생 꿈도 못 꿨을 아버지가 누군지는 궁금했다.
“누굴 말하는 건가?”
이안은 솔직히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비밀이 아닌 일이었으니까.
“본교 마존이신 권마님이세요.”
이안이 권마의 딸이란 말에 한설은 놀랐다.
‘이 여자가 권마의 딸이라고?’
그래서 소교주가 이 여인을 아낀 것일까? 아니었다. 지금 이안은 소교주를 만났기에 권마의 딸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속아서 황천각주, 마군주와는 술친구가 되었고, 차기 마존이 되려던 분은 제가 이끄는 조직의 조장이 되었죠.”
계속되는 말 어느 하나도 평범한 내용이 없었기에 한설은 이안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감히 자신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할까? 알아보면 밝혀질 일을?
“그리고 지금은 북해빙궁의 소궁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우리 소교주님에게 속지 않았다면 방문 앞이나 지키고 있을 인생이었는데 말이죠.”
이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고요했다.
“이 정도면 속고 사는 인생도 괜찮지 않을까요?”
비단 검무극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한데 이상하게 한설에게는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쌀쌀맞은 소궁주는 자신이 좋아할 만한 성격도 아닌데.
“믿기 어려우시죠? 가끔은 저도 안 믿겨요. 이게 꿈인가 싶을 때가 많죠. 그래서 일전에 말씀드렸던 거였어요. 한 번 믿어보시라고요. 아, 이제는 다르게 말씀드려야겠네요.”
잠시 사이를 두고 이안이 말했다.
“소교주님께 한 번 속아보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한설은 이해할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맑은 눈빛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취마가 방으로 다급히 들어서며 검무극을 찾았다.
“소교주는? 소교주 어딨나?”
“볼일 있으시다고 나가셨어요. 무슨 일이시죠?”
취마는 약간 흥분한 상태였는데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내 속에 답이 있었어!”
제407회 너희들이 대비한다면 나도 대비하겠다.
난 다루에서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눈 덮인 길을 사람들은 미끄러지지도 않고 잘만 걸어갔다. 새외의 모래바람 아래에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처럼, 이곳 북해의 사람들은 눈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던 이들 중 누가 불쑥 다루로 들어와서 내 앞에 앉을지 몰랐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죽립을 눌러 쓴 이유는 나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나려는 상대 때문이었다. 그는 은밀함이 생명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한 중년 남자가 내 앞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어이구, 춥다.”
후덕한 인상의 평범한 남자는 바로 은월의 북해지부 책임자였다.
통천각과 은월의 모든 정보력이 지금 북혈문과 북해빙궁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은월에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멀리서 전음으로 전해도 될 일이었지만, 책임자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따스한 차부터 한잔하시오. 고생 많으시오.”
그의 찻잔에 차를 부어 주었다. 고생하는 수하에게 술은 못 주더라도 따스한 차라도 한 잔 주고 싶어서였다.
술이면 더 좋았겠지만, 약속 장소를 객잔이 아닌 다루로 잡은 이유는 취마 때문이었다. 한설에게는 다음에 술 마시자고 말했지만, 취마가 술을 마실 때까진 나도 술을 마시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차를 따르는 동안 남자는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북혈문 이공자 양중이 죽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소식이었다. 이번 일로 양중이 후계자에서 밀려날 것은 예상했지만.
한데 죽었다고? 날 초대하겠다던 북혈문주의 정중한 모습이 떠올랐다.
‘보기보다 훨씬 비정한 자였군.’
대체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가?
죽은 이유야 얼마든지 붙일 수 있을 거다. 북혈문주 아들의 죽음이니 사인을 나서서 조사할 사람도 없을 테고.
이 보고로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북혈문이 혈왕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렇지 않았다면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이번 일을 이렇게 급히 처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제는 북혈문 장남의 움직임에 주목하시오.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되는 대로 기별하겠습니다.
―고맙소.
남자가 먼저 그곳을 떠났다.
나는 잠시 남아서 남은 차를 마신 후 다루를 나섰다.
다루 문을 열고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혈문이란 이름이 운명적으로 지어졌구나.
혈왕에게 날 안내해 줄 문.
아, 혈왕아. 그거 아느냐? 북쪽 문은 저승으로 가는 문이다.
* * *
검무극이 돌아왔을 때, 취마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 사람을 왜 죽였는지 알아냈다.”
검무극이 돌아오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말하려고 이안과 한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 마존께서 알아내실 줄 알았습니다.”
검무극은 한설 앞에서는 취마를 형이 아닌 마존으로 대했다.
이제 모두가 모이자 취마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를 밝혔다.
“우선 술과 관련한 내용이 확실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최근에 그녀와 주고받은 서찰을 살폈네. 나눈 대화들 대부분이 술과 관련한 이야기들이었지.”
원주가 모아둔 서찰이니 당연히 읽은 것은 자신이 보낸 서찰이었다. 그래서 단서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러다 이런 대목을 발견했지.”
취마가 한 구절을 보여주었다.
―나도 향설빙주(香雪氷酒)를 마셔보고 싶소.
향설빙주는 검무극과 이안은 처음 듣는 술이었다. 반면 한설은 향설빙주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향설빙주는 그냥 평범한 술이 아니라 특별한 효과를 지닌 술이에요.”
“무슨 효과요?”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술이지요. 원래도 술을 마시면 몸이 뜨거워져서 추위를 덜 느끼지만, 이 향설빙주는 그 효과가 대단하죠.”
취마 역시 향설빙주의 효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향설빙주란 말을 보는 순간 떠오른 한 가지 사실.
“이번에 놈들이 찾으려고 한 체질이 극한지체였잖아?”
극한지체와 향설빙주. 둘 다 추위를 버티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교롭지 않나?”
검무극과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설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만으로 원주께서 죽었다고 하기에는 이유가 부족하지 않나요?”
“맞아, 그렇지.”
순순히 인정한 취마는 다른 결정적 이유를 보탰다.
“내가 알기로 향설빙주는 빙궁의 허가를 받아야 만들 수 있는 술로 알고 있네.”
“맞아요. 특별한 효능이 들어간 술은 궁의 허가를 받아야 하죠.”
“한데 아까 백주설원에서 지난 술 제조에 대해 살폈을 때, 향설빙주에 대한 것은 없었네.”
“없었다고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확실히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은밀히 만들어 준 거로군요.”
검무극의 추측에 취마도 동의했다.
“그 사실을 내게 알렸다는 것은 그 술이 나쁜 곳에 쓰일 거란 생각을 전혀 안 했다는 거지. 아마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 부탁했을 거야. 믿을 만한 사람이었겠지.”
그녀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누가 만들어달라고 했는지 그분이 말했습니까?”
취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거기까진 말해주지 않았네. 향설빙주를 처음으로 만들어봤는데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고, 나는 마셔보고 싶다고 답을 했었지.”
“그 구절만으로 답을 찾아내다니. 대단하십니다.”
검무극이 취마를 칭찬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칭찬했다. 확실히 취마는 생각했던 것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술을 안 마시니 머리가 쌩쌩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야!”
취마의 농담에 미소 지으며 검무극은 한설을 바라보았다.
한설은 검무극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보죠, 누가 향설빙주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지.”
대답은 했지만 과연 알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궁의 허락도 없이 만들었다면, 그 과정을 철저히 숨겼을 텐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을까?
“이안과 함께 움직이시오.”
검무극의 제안을 한설은 거절했다.
“혼자 조사하는 게 더 편해요.”
함께 한방에서 자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 낮에도 함께 돌아다니라고? 싫은 일이다.
“알고 있소.”
“한데 왜 이러시죠?”
“그대가 위험할까 그렇소.”
한설은 물론이고 이안과 취마에게도 뜻밖의 이유였다.
“빙궁에서 소궁주인 제 안위를 걱정하는 건가요?”
그러자 검무극이 조금 전에 알아 온 소식을 전했다.
“양중이 죽었소.”
가장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가 죽었다고요? 왜요?”
“북혈문주에겐 그도 꼬리였나 보지.”
그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그 많은 사람을 속여서 데려온 후 실험으로 죽인 자니 죽어 마땅한 자였다. 하지만 그를 죽인 사람이 아버지란 사실은 놀라웠다.
한설도 놀랐지만, 그녀의 놀람은 양중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자신보다 먼저 검무극이 알고 있다는 점 때문에 놀랐다.
‘우리보다 정보력이 더 좋다고?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북해에서? 어머니는 이 소식을 알고 계실까?’
검무극이 잠시 딴생각을 하는 한설에게 경고했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되오. 북혈문주의 자제가 북혈문 내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게 이번 싸움의 본질이니까.”
확대해서 말하면 북해빙궁 내에서 빙궁주의 혈육이 죽을 수도 있는 싸움이란 뜻이었다.
“그러니 이안과 함께 움직이시오.”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에서 한설은 거역할 수 없는 권위를 느꼈다.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강제였다.
“그러죠.”
한설은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빙궁주의 딸로 살아오면서 이런 긴장감을 느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검무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말도, 전음도, 고개를 끄덕일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알아서 잘할 테니까. 눈빛 한 번 마주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두 여인이 방을 나서자 이제 검무극과 취마만 남았다.
“놈들은 극한의 한기를 버틸 방법을 찾고 있어. 왜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공이라도 익히려는 걸까? 아니면 북해빙궁과 관련된 음모를 꾸미려는 걸까?”
취마의 물음에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 곳이 있어. 형은 은밀히 이안과 소궁주를 지켜줘.”
“갑자기 어딜 가려고?”
검무극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추위에 대비하려고.”
“무슨 말이야?”
궁금해하는 취마를 남겨두고 검무극도 방을 나섰다.
“대답해 주고 가! 어서! 나 술 안 마셔서 예민하다고 했지?”
* * *
대답해 주고 싶어도 절대 알려줄 수 없는 일이었다. 회귀 전 인생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러 온 것이니까.
쾌속보로 순식간에 날아온 곳은 설산이었다.
그 넓은 설산 중에서도 가장 춥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곳, 대풍곡(大風谷)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바람이 분다는 이곳.
휘이이이이이이이잉.
골짜기 사이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바람이 불었다. 무공을 익힌 고수조차 통과할 수 없다고 알려진 바람 계곡이었다. 인간의 뼈와 살을 찢어발기는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거기에 바람에 눈까지 휘몰아쳐서 시야까지 잘 보이지 않았다.
북해 사람들은 이곳의 바람을 광살풍(狂殺風)이라고도 불렀다. 말 그대로 정말 미친 바람이었고 죽음의 바람이었다. 어찌나 차갑고 매서운지 내공을 일으켜서 몸을 보호하더라도, 계곡을 통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연이 만들어낸 신비.
놈들이 한기에 대비할 방법을 찾는다는 추리를 듣고 나자 나는 비로소 이곳에 와야 할 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회귀 전, 대법 재료를 찾아 헤맬 때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이런 곳을 만나면 오히려 더 악착같이 들어갔다.
이곳까지도 왔었으니까.
어휴, 정말 그 인생은 다시 살 자신은 없다.
휘이이이이잉.
바람을 뚫고 계곡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면 갈수록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바람은 호신강기조차 찢어발겨 버릴 것처럼 매섭게 불었고,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도 내력을 사용해야 했기에 안으로 들어가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여기쯤이었는데.’
그렇게 들어가다 오른쪽 벽에 난 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바깥의 바람을 피해 아주 잠깐 몸을 숨길 수 있을 공간이었다.
그때의 자신도 이렇게 몸을 숨겼다.
아마 운명이었을 거다. 이 틈의 끝 모서리에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은. 워낙 구석구석 살피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눈으로 봐선 전혀 알 수 없는 곳에 또 다른 틈이 있었다. 굵은 넝쿨로 막힌 곳 뒤에 있는 좁은 틈이었다.
전혀 들어가고 싶지 않게 생겼다. 들어가다 끼여서 딱 죽기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까.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그곳을 계속 들어갔다.
그곳을 모두 통과하자 조금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그곳은 햇살이 들어오고 풀과 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다. 바깥은 칼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곳은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태고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
“오랜만이구나.”
그 가운데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에 열려있는 하얀 열매. 마치 얼음덩어리가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영약.
만년설과(萬年雪果).
만년설삼보다 훨씬 더 많은 내공을 얻을 수 있으면서, 거기에 기가 막힌 효과가 하나 더 있었다.
추위에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차가운 속성의 어떤 기운이라도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극도로 차가운 내공이 실린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빙장(寒氷掌)에 적중당하더라도, 그 한기에 혈맥이 상하는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한빙장을 익히는 것도 누구보다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예전 독왕에게서 얻은 천기단으로 한서불침(寒暑不侵)의 신체가 되었는데, 이 만년설과는 추위를 막는 데 있어서 특화된 영약이었다. 만약 두 영약이 중첩된다면 한계를 넘는 극한의 추위조차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회귀 전 삶에서는 만년설과를 복용하지 못했다.
만년설과에 담긴 한기가 워낙 강했기에 그냥은 복용할 수 없었다. 욕심을 부려 복용하는 즉시 혈맥이 얼어붙을 것이다. 아마 빙한신공(氷寒神功)을 대성한 빙궁주나 복용할 수 있는 영약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만년설과를 두고 가면서 했던 말을.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만나자.
그땐 회귀해서 이곳을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이제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내공을 얻었고, 혈맥은 튼튼해졌으며, 무엇보다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뤘기 때문이다.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이 만년설과가 내뿜는 한기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거라 믿었다.
이 믿음이 조금이라도 모자란다면 만년설과를 복용하면 안 된다. 큰 내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게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회귀 전에 이곳을 발견했고, 천마호신공의 대성을 이루었고, 적은 극한지체를 찾아내서 이용하려 하고 있고.
운명이 내게 말하고 있다.
이제 만년설과를 복용할 때가 되었다고. 아니, 반드시 그걸 복용해야 한다고.
운명과 함께 본능도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극한의 한기에 대비한다면, 나 역시 대비하겠다.
‘천마호신공아, 너만 믿는다.’
만년설과를 손에 잡는 순간, 온몸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가움이 전해져왔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만년설과는 그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먹으면 죽는다고.
난 망설이지 않고 만년설과를 복용했다. 그것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난생처음 느껴보는 한기를 느꼈다. 딱딱해서 쉽게 녹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순식간에 녹으며 극한의 한기가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이미 천마호신공은 발동해서 차가운 한기에 대항하고 있었다.
스스스스스스스슷.
비명이 절로 나올 차가움이었다. 정말 이렇게 차가운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했음에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당장에라도 이 기운을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리고 싶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 들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만년설과의 기운을 녹이는 내내 나는 구화마공의 구결을 외우며 악귀들을 떠올렸다. 동서남북을 떠올렸고, 환상에서 보았던 천마혼들을 떠올렸다.
구화마공, 천마호신공과 관련된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것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나를 보며 비웃는 그 모습을 떠올렸다.
효과는 있었다.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놀랍게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으니까.
참고, 또 참고.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만년설과의 기운을 모두 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많은 양의 내공이 단전에 보태졌고, 무엇보다 내가 원한 바를 이루었다. 만년설과의 차가운 기운이 혈맥 곳곳에 영구적으로 서렸다.
이제 만년설과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내 몸에 침입한다면 모를까, 그 어떤 차가운 기운도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놈들에게 대항할 또 하나의 무기가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기뻤다. 이렇게 점점 더 강해지는 거다.
“이 힘은 반드시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만년설과 나무에게 두 손을 모아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좁은 통로를 지나 광풍이 푸는 계곡으로 다시 나왔다.
휘이이이이이이잉.
엄청난 바람이 나를 엄습했다.
내력을 일으켜 몸을 보호하지 않았음에도 살을 에는 바람이 전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광살풍은 이제 내게 춘풍이자 훈풍이 되었다.
회귀 전에는 이대로 왔던 길을 돌아갔다. 더는 계곡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나는 궁금했다.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렇게 난 바람의 근원을 향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제408회 다음에 만날 때는 꼭 한잔하세.
한설과 이안은 빙궁 내원을 함께 걷고 있었다.
한설은 원주가 향설빙주를 누구에게 만들어 주었는지를 알아내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 막막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지?’
이건 명석함과 우둔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험의 문제였다. 사건을 조사하는 일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역시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우선 백주설원부터 다시 가보죠.”
이안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정중해졌다. 지금까진 소교주의 수하로 대했지만, 이제는 권마의 딸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양딸이라고는 하지만 마존의 딸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좋은 생각이세요.”
“어째서죠?”
“돌아가신 원주님의 방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이분은 정말 술 만드시는 일을 좋아하셨던 분이셨구나. 아마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백주설원에 있던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찾아야 할 답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이안의 말에 한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명석하구나.’
이번에 검무극과 취마, 이안은 마인에 대한 그녀의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쉈다.
마인들은 잔혹하고 폭력적이며 욕망을 감추지 않는 이들이라 여겼는데.
하지만 이들 셋은 기존에 생각했던 소교주도, 마존도, 수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인들에게 질 수는 없지.’
취마가 서찰을 조사해서 단서를 찾아냈으니, 자신도 뭔가 보여줘야 한다. 소교주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들을 압도하는 딸의 모습을. 살면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녀인데, 어머니에게만큼은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다시 오셨군요, 소궁주님.”
백주설원의 임시 원주가 두 사람을 반겼지만, 한설은 그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한설은 그곳에서 술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를 담당하는 인물인 조명(曺銘)을 만났다.
조명은 한설의 방문에 잔뜩 긴장했다.
“그대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바쁘실 테니 돌려 말하지 않겠어요. 죽은 원주께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요구하신 적이 있나요?”
“아뇨, 없으십니다.”
긴장해서인지 조명의 목소리가 떨렸다.
“중요한 일이니 나를 속여선 안 됩니다.”
한설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자, 조명은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이안이 나섰다.
“아마 원주님과 약속했을 거로 생각해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고개 숙인 조명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린 그 술 때문에 원주님이 돌아가신 거로 추측하고 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조명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속을 지키는 것보다 원주님을 죽게 한 자들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조명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기에는 죽은 원주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이리라. 그는 눈도 깜짝 안 하고 사람을 속이는 그런 유형이 아니었다.
조명이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그 술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까?”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안의 말을 소궁주가 받았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게 아니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원주의 죽음을 다시 살필 일은 없을 거네.”
다소 차가운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 말은 효과가 있었다.
조명은 더는 숨기지 않고 사실을 밝혔다.
“조용히 저만 불러서 향설빙주를 만들 재료를 구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귀한 사람이 은밀히 청한 술이라고요. 비밀로 해달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누구에게 보낸다고 했나?”
“그건 저도 모릅니다.”
“평소 원주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있었나?”
“특별히 말씀드릴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 혼자 계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더는 물어볼 것이 없었기에 한설은 질문을 멈췄다.
“술 재료에 손을 대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징계를 받을 거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평소 원주를 존경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랬으니 은밀히 재료를 내어준 것이겠지.
이안은 솔직히 말해준 그를 따스하게 위로했다.
“원주께서도 틀림없이 고마워하실 거예요.”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이안은 그를 벌주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있다가도 괜히 말을 꺼내는 바람에 벌을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마인답지 않게 사람들에게 다정하군요.”
그러자 이안이 물었다.
“이 무림에선 비정한 사람과 다정한 사람, 누가 더 오래 살아남을까요?”
“그야 당연히.”
한설은 말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답은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그녀와 달랐다.
“전 다정한 사람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믿는 쪽이라서요.”
다정함이라? 한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다. 다정함을 받아 본 적도, 남을 다정하게 대한 적도 없다.
어쨌든 한설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비정강호에서 다정함 타령이라니?
그때 조명이 그들에게 뛰어와 말했다.
“조금 전에는 너무 긴장해서 생각이 안 났었는데, 원주님께서 서 장로님과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분과 어울리지 않는 분이셔서, 기억에 남습니다.”
조명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한설에게 말했다.
“이것도 다정함이 만들어 낸 결과죠.”
그녀의 농담에도 한설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서 장로란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음을. 이안이 차분히 그녀에게 말했다.
“절대 숨기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것이 소궁주님의 조건 아니었나요?”
너는 숨기지 마라, 나는 숨길 테니까. 이런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안의 눈빛까지 이렇게 묻자 결국 한설은 망설였던 말을 꺼냈다.
“서 장로는 어머니가 가장 믿는 분이에요.”
서 장로는 빙궁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빙궁주의 가장 큰 조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주가 안심하고 그의 부탁을 들어줬을 수도 있겠네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만들어줬을 거란 조건에 합당한 인물이었다. 서 장로는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향설빙주가 그녀의 죽음과 관련이 있으리라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서 장로라고?
어머니가 아는 일이라도 문제고, 모르는 일이라도 문제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서 장로는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 * *
휘이이이이잉.
바람은 점점 강해졌지만 계속 걸음을 옮겼다.
원래 이곳을 걷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는 바람의 세기도 세기였지만, 바람에 실린 무시무시한 한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차가움이었기에 그것을 막아내기 위해 내공 소모가 엄청났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쓰는 내공, 한기를 막는 데 쓰는 내공. 내공이 이중으로 들어야 했으니까.
반면 지금 나는 한기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바람의 세기만을 신경 쓰면 되었다.
이미 천기단으로 한서불침이 된 상태에서 만년설과까지 복용하자 그 효능은 정말 신비로울 정도로 놀라웠다. 피를 얼려 버릴 정도로 매서운 이 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쉽게 도달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바람은 무지막지해졌다. 걸을 때마다 바람 소리가 달라진다.
장담할 수 있다.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곳을 지나갈 수 없음을.
나도 선택받은 사람이다.
회귀한 후 정말 많은 내공을 얻었고,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을 익혔다. 게다가 만년설과까지 복용한 상태다. 그런 나도 저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대체 누가 이곳을 돌파할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이 극한지체를 왜 찾은 걸까?’
어쩌면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였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었는데, 그래서 가보려고 한 이유도 있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그건 확실히 아니다. 분명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더 나아가자 이제 딴생각을 아예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은 강하게 불었다.
내가 가진 내공과 끝까지의 거리. 점점 강해지는 바람 세기. 이 모든 것을 계산했다. 무작정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내공을 아끼려다간 그냥 날아가 버릴 상황이었다. 거기에 힘이 빠져서 날아가 버릴 때, 몸을 보호할 최소한의 내공까지 계산했다.
그렇게 계산된 내공만을 사용하면서 걸었더니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바람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플 줄이야.
하지만 내공을 더 끌어올려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 고통을 참아내야 저곳까지 갈 수 있었다.
생각지 못한 내공이 더 들었다. 내공을 일으켜 고막을 지켜야 했다. 바람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칠 정도였다. 그렇게 소모된 내공은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후우우우우우우우우웅!
‘굳이 저곳을 왜 가려고? 이러다 내상이라도 입으면?’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끝없이 나를 유혹했다.
아마 회귀 전의 인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게 나아가지 못했을 거다.
그땐 너무나 많은 유혹에 시달렸었다. 포기하자. 인간이 어찌 회귀할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내 인생 살자.
그 끝없는 유혹을 이겨냈고, 그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보았기에.
‘이 길도 걸을 수 있다.’
걷고 또 걷고.
단전 속 그 많던 내공이 어느새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 순간에는 바람 소리가 사라지며 주위가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환각 증상인가? 이러다 주화입마에 빠지면 큰일인데?
만약 그런 전조현상이라면 당장 포기하고 돌아서야 한다.
그것이 마지막 유혹이었다.
나는 꿋꿋이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유혹을 이겨낸 것은 묵묵히 내디딘 그 한 걸음이었으니까.
고오오오오오오오!
유혹을 이겨내는 순간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바람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렇게 난 드디어 바람의 근원에 도달했다. 바람의 세기가 극에 달했다. 아껴둔 내공을 모두 이용해서 호신강기와 천마호신공을 극한으로 발휘했다.
‘다 왔다! 여기만! 제발!’
온몸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이겨내며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바람 계곡을 통과하고 옆으로 몸을 틀어서 피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그 엄청난 바람 속에서 벗어난 것이다.
“해냈다!”
살았구나,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금방 빠져나온 계곡으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불었으면 바람의 물결이 눈으로 보였다.
바람의 근원은 하늘이었다. 저 멀리 비스듬히 하늘에서 내려온 바람이 계곡을 향해 맹렬히 불어닥치고 있었다. 마치 악마가 세상의 모든 공기를 입으로 빨아들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하고 낯설고 두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곳에 도달한 그 자체가 바로 그 어떤 기연보다 더 큰 기연이었음을.
이곳까지 뚫고 들어오면서 내가 가진 모든 내력을 발휘했다.
무인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발휘했다. 잠재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긴 없이 쓰고 나자, 무인으로서의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무학의 경지가 올라간 느낌을 받았다. 나란 사람이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묘한 경험이자 느낌이었다.
평생 처음 느껴본 이 경험은 분명 구화마공에도 영향을 미칠 것임을 확신했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악마의 입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뒤쪽으로는 거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너무 높아서 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설산의 줄기가 반대 방향을 모두 막고 있었다. 마치 저 바람 계곡을 뚫지 못하면 들어올 수 없는 곳처럼.
그 앞으로는 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토끼와 사슴이 나를 봤지만 달아나지 않았다. 인간을 처음 본다는 눈빛이었다.
신비로운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애초에 인간을 들인 적 없는 태초의 신비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 모든 것의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을.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그는 노인이었다. 이런 곳에 노인이라니? 당연히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그분은 아니겠지?
“어르신?”
조심스럽게 노인을 불렀다. 그러자 노인이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놀랍게도 그는 나를 회귀시켜준 바로 그 노인이었다.
“어르신!”
노인이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술병을 흔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술 한잔하자고 했잖나?”
노인이 나를 회귀시키기 직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노인이 다시 한번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었는데. 그게 오늘일 줄이야.
“저 금주 중입니다만. 일부러 이때 온 거죠? 나 놀리려고.”
노인이 껄껄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보다 많이 밝아졌구먼.”
“덕분입니다.”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지? 잘하고 있네.”
노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남들에게는 온갖 표현을 다 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지만.
나도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 노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었나 보다.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그러니 잘하고 있다고 그 한마디만 해달라고. 그 한마디만 들으면 된다고.
“금주 중이니 술은 다음에 하세.”
“벌써 가시려는 거요?”
“알다시피 날 찾는 사람이 많아서 아주 바쁘다네.”
그래도 또다시 만나러 올 수도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기분이 좋았다.
휘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노인은 바람과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주위에 있던 낙원 같았던 풍경도 모두 사라졌다. 나무와 풀과 동물들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주위는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다.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갔기에 꿈만 같았다. 헛것을 봤나?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심력과 내공을 모두 써버린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손길은 너무나도 생생했으니까. 그를 다시 봐서 너무 반갑고 좋았다.
요 며칠 하늘 올려다보는 것을 잊고 지냈더니 이렇게 직접 보러 오셨소? 나도 자주 올려다볼 테니, 부디 끝까지 지켜봐 주시오. 만날 바쁜 척은 그만하시고. 그리고…… 정말 고맙소.
제409회 그가 화를 낸 딱 한 번의 순간.
난 바람 계곡을 그냥 떠나지 않았다.
여길 얼마나 힘들게 들어왔는데 그냥 가나?
우선은 계곡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이렇게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곳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곳을 안가로 삼으면 최고가 될 것이다. 은밀한 건 둘째치고, 설령 적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도 절대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으니까.
물론, 지킬 사람을 이곳에 데리고 들어오려면 지금보다 훨씬 내공이 많아야 하겠지만.
언젠가 이곳을 편하게 들어올 수 있을 경지에 이른다면, 이곳에 별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곧장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구화마공을 한차례 펼친 후에 이곳을 나가려는 것이다. 이곳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내 잠재력을 모두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있었고, 그 성취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임에도 시공이환술을 펼친 이유는 이곳 내부를 보호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시천비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내게 내공은 곧 시간이고, 시간은 곧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목숨이었으니까.
시공이환술 속에서 구화마공을 펼쳤다. 처음부터 익힌 곳까지 한차례 정성껏 초식을 펼쳤다.
제일식 인멸식.
사아아아아악!
적이 보기에는 너무나 섬뜩하고 무시무시하겠지만, 내게는 너무나 친근한 네 악귀의 환영이 동서남북 동시에 나타나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그리고 오늘의 인멸식은 이전과 또 달랐다.
이전의 성취에서 동서남북 네 악귀가 빠르고 강해졌다면 오늘은 다른 측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곧장 사라지지 않고 그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서운 녀석이 잘생긴 녀석을 쳐다보았고, 신비감을 주는 녀석은 영리해 보이는 녀석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진 그저 본능이 느껴졌다면,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이성과 감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정말 일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들 넷이 쑥덕대는 느낌!
그 느낌은 확실했다.
그들 중 영리해 보이는 녀석이 사라지기 전에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녀석의 눈빛에 헤어짐의 아쉬움이 느껴졌으니까.
동서남북 네 악귀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그들에게 말했다.
“반갑다.”
동서남북 네 악귀가 조용히 사라져서 결국 혼잣말이 되었지만, 처음으로 그들에게 한 인사였다. 또다시 천마혼에게 한 걸음 다가선 느낌이었다.
다음으로 제이식 대멸식을 펼쳤다. 대멸식만 봐도 내 구화마공의 경지가 올라갔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스스스스스스스.
원래는 동서남북 중 무섭게 생긴 악귀가 여덟 개로 분열했는데 이제 또 둘이 더 늘어서 열 개로 분열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열 개의 악귀가 전방에 있는 모든 걸 휩쓸며 밀고 나갔다. 언제 펼쳐도 화끈한 대멸식이다.
제삼식 대마벽.
강기의 벽이라고 다르겠는가? 대마벽은 또 작아졌다. 대마벽은 그 크기를 줄이면서 나에게 성취를 축하해 준다.
그리고 제사식.
암흑일섬(暗黑一閃).
훅!
암흑이 내려앉았다. 이전의 암흑보다 더 깊고 무거운 암흑.
쉬이잉.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이 가로질렀다.
이전의 일섬보다 더 빠르고 강력했다. 어둠은 더 깊어졌고, 빛은 더 밝았다.
아직 제오식은 시도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아갈 때가 아니라 얻은 성취를 가다듬을 때임을 본능적으로 느꼈으니까.
나는 이 성취가 노인의 선물이라 여겼다. 회귀하고서도 열심히 잘하고 있다고 내게 준 선물.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것도, 그가 나를 이끈 덕분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소.”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래서 설령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내 최선이었으니 아쉬울 게 없다.
오직 그럴 때만이 복수를 꿈꾸지만,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복수에 잡아먹히지 않고 내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곳을 떠날 땐 힘들게 수련하지 않았다.
바람의 근원에서 극한의 내공으로 버티다가.
“나 이제 간다아아아아아아아아!”
버티는 힘을 풀고 미친 바람에 몸을 싣고 입구 쪽을 향해 날아갔다. 신나게 날아갔다.
바람이 그리워지면 다시 찾아오리라.
* * *
한설은 고민에 빠졌다.
서 장로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순간, 그녀는 심각해졌다.
어머니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자, 빙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니까.
눈치 빠른 이안은 그녀의 고민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 있는지 짐작했다.
‘빙궁주가 개입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믿지 못하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안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존재가 떠올랐다. 있어도 힘들고, 없어도 힘든 그 이름이.
이안은 감정을 다스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빙궁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우선 서 장로님을 만나 뵈어야겠어요. 거긴 저 혼자 다녀올게요.”
“평소에 그분을 자주 찾아뵈었나요?”
한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틀림없이 의심할 거예요.”
“차라리 이러이러해서 조사하러 나왔다고 한다면요?”
그래서 뭔가를 알아내면 다행인데. 이안이 걱정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혹시 상대가 거짓말하면 눈치챌 수 있나요? 저는 자신 없거든요. 더구나 상대가 장로시라고.”
한설이라고 어디 특별히 잘 알아차리겠는가?
“만약 서 장로가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으면 틀림없이 거짓말을 할 텐데, 그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만 들키는 셈이잖아요? 본격적으로 싸워보기도 전에 우리 패만 뒤집히는 거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거죠?”
이안이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제안했다.
“소교주님께 알리죠.”
한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자신들의 힘으로 서 장로까지 알아냈는데 벌써 포기한다고?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이번 일의 전모를 모두 다 밝혀내고 싶었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이안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이번 일에 서 장로가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은 것만으로도 소궁주께서는 큰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해요.”
원래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제안이었다.
“그대 소교주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믿나요?”
“네, 저는 믿어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지금까지 많이 보여주셨거든요.”
한설은 잠시 고민했다.
“좋아요, 일단 돌아가죠.”
서 장로와 관계된 일이기에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거기에 마교 소교주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렇게 기세 좋게 거처로 돌아와 취마에게 검무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자.
“소교주는 외출하셨네.”
이럴 때 좀 계시지. 우리 소교주님만 믿으시라, 하고 거처로 돌아왔는데. 하필 지금 또 없으시네.
이안은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미소를 지었다.
“어디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가셨겠죠.”
그러자 취마가 장난기를 발휘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했다.
“추위에 대비하러 간다던가?”
“네?”
“그 말만 하고 나갔네.”
“옷이라도 사러 가셨나?”
말해 놓고도 자신의 대답이 궁색한 이안이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한설을 돌아보았다.
“지금 바로 서 장로님 만나러 갈까요?”
이안의 농담에 한설이 웃었다.
“어? 지금 웃으셨어요.”
한설이 정색하며 말했다.
“비웃음도 웃음에 들어가나 보죠?”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비웃음도 웃음이지. 심지어 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비웃음을 알고 있소.”
돌아보니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안이 반갑게 소리쳤다.
“소교주님! 어딜 다녀오셨어요?”
“바람 쐬고 왔다.”
정말 평생 쐴 바람 다 쐬고 왔다.
* * *
반 시진 후, 서 장로의 거처에 방문객들이 있었다.
“소궁주가 마교 소교주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예고 없는 방문이었음에도 서낙(徐洛)은 놀라지 않았다.
“어서 모셔라.”
잠시 후, 검무극과 한설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검무극입니다.”
“중원을 진동한 소문의 주인공을 드디어 뵙게 되는구려.”
두 사람이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눴다.
서낙은 인자해 보이는 미소와 말, 그리고 행동에 기품이 있었다.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좋은 말로 용서할 것 같은 따뜻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도 그는 빙궁은 물론이고 북해의 무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백주설원 원주의 죽음을 조사한다고요?”
“네, 궁주님께 허락을 맡았지요. 소교주이기 이전에 무림의 후배이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검무극도 서낙처럼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만남의 시작은 좋았다.
“아쉬운 사람이었네.”
“원주님과 함께 술을 마셔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툭 던진 검무극의 질문에 오히려 한설이 긴장했다. 백주설원의 조명은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술을 마셨다고 했는데. 과연 진실을 말할 것인가?
“몇 번 마신 적이 있지. 그래봤자 술 이야기만 주로 해서, 원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네.”
서낙은 있던 사실을 속이지 않았다.
“원주님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그분께 원한을 살만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서낙은 잠시 대답을 아꼈다.
“혹시, 나를 조사하러 온 건가?”
“그러면 안 됩니까?”
도발적인 되물음에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내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긴장을 풀었다.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원주님 주변 사람들부터 조사해야겠다고 하니, 여기 소궁주가 그랬습니다. 그 주변 사람 중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궁주님이시고, 다음이 서 장로님이시라고요. 그래서 먼저 찾아뵌 겁니다. 먼저 흉수에서 제외하려고요.”
서낙이 사람 좋게 웃으며 한설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한설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나저나 정말 대청을 잘 꾸며두셨군요.”
검무극이 한쪽 벽으로 걸어가더니 그 앞에 놓인 장식장을 구경했다. 그곳에는 갖가지 장식품이 올려져 있었다.
그러는 사이 서낙은 한설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인자한 미소로.
어려서부터 그를 숙부처럼 여기며 커왔다. 어머니가 빙궁주 자리에 오를 때에도 서 장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고. 막상 이곳에 와서 그의 얼굴을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닌데.’
원주가 서 장로와 술자리를 여러 차례 가졌다는 증언을 들은 거지, 그가 술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원래라면 자신은 서낙 옆에 서서 검무극을 보고 있어야 했다.
마인들이 여기서 뭐 하느냐고. 한데 지금은 마인들과 함께 그를 의심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막연히 생각할 때는 서 장로가 의심스러웠는데, 막상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직접 볼 때와 아닐 때, 사람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
“북혈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검무극은 여전히 장식장에 놓인 물건들을 구경하며 물었다. 무례한 태도에 한설이 한마디 하려는 것을 서낙이 손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는 전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무슨 소식 말인가?”
“그쪽 둘째가 사람들을 유인해서 위험한 실험을 했습니다.”
“듣지 못했네.”
“그러시군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어떤 실험인지 안 물어보시는군요?”
“뻔하지. 그 둘째야 워낙 별난 사람이니까.”
“그렇더군요.”
검무극은 대화를 잇지 않고 장식장의 장식품들을 만졌다. 한설은 검무극에게서 이안이 말한 특별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초월적이라고? 무례한 것만큼은 초월적이군.
“더 할 이야기가 남았나?”
“아닙니다, 오늘은 그냥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역시 마교는 마교구먼. 인사만 하는데도 이렇게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걸 보니.”
“죄가 없으신데 긴장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한설이 서둘러 작별을 고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어볼 것이 있으면 또 오게. 언제든지 협조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인사하고 돌아섰다. 한설과 함께 문으로 걷던 검무극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며 불쑥 물었다.
“참, 향설빙주는 어디에 쓰셨습니까? 추운 곳이라도 가셨습니까?”
놀란 사람은 한설이었다. 갑자기 검무극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서낙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향설빙주라니? 그걸 왜 내게 묻나?”
“원주님께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난 받은 적 없네.”
너무 자연스럽게 반응해서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시군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다 검무극이 한 번 더 돌아서며 물었다.
“또 묻지 않으시네요? 향설빙주를 줬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보통 궁금해하지 않나요? 누군가 자신에 대해 없는 말을 하면.”
“그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받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서낙은 묻지 않았지만 검무극이 알려주었다.
“원주께서 취마님께 보낸 서찰에 향설빙주를 서 장로님께 드렸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원주가 왜 그런 말을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향설빙주를 받은 적이 없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이 대청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그곳을 벗어나자 한설이 물었다.
“왜 그런 거죠?”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이것저것 찔러본 거요.”
“거짓말은 당신이 했죠.”
원주가 취마에게 서 장로를 언급한 적은 없었으니까.
“거짓말까지 해서, 서 장로님의 거짓말을 알아냈나요?”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 수 없었소.”
“서 장로께서는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검무극이 순순히 인정한 것은 다음 말을 위해서였다.
“다만, 한 가지는 이상했소.”
“뭐죠?”
“오늘 우리가 만난 후, 서 장로가 화를 낸 순간이 딱 한 번 있었소. 언제인지 아시오?”
“당신이 무례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알 수가 없군요. 그래서? 언제죠?”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장식장 위의 물건들을 움직여 흐트러뜨렸을 때였소.”
한설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또 서낙이 화를 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화 내내 은밀히 기를 발출해서 서낙의 감정을 세심히 살핀 검무극만이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 장식장 보셨소?”
“아뇨.”
“먼지 한 올 없고, 올려진 물건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맞춰서 세워져 있었소. 강박증이 느껴질 정도였지.”
“시비들이 깨끗이 치우나 보죠.”
“그게 더 문제요.”
“무슨 뜻이죠?”
“주인이 얼마나 무서우면 그렇게까지 깨끗이 치우겠소?”
문제는 그게 시비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서 장로가 장식장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내가 장식품들을 흐트러뜨렸을 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
검무극은 그 일로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인자한 모습과 단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신경질적인 모습을.”
한설은 내심 감탄했다. 자신은 그 오랜 세월 봤어도 알지 못한 사실을 검무극은 그 짧은 시간에 파악해 낸 것이다.
왜 이안이 소교주에게 알리자고 했는지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례한 행동도 모두 계산된 것이었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결국 성격일 뿐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상반된 성격이 의외긴 해도, 이번 일의 배후임을 입증할 증거는 아니었으니까.
“맞소. 그래서 조금 더 알아봅시다.”
“어떻게요?”
그 역시 한설은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다.
“이번에는 물건 말고 주위 사람들을 흔들어 보는 거요.”
한설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서낙의 주위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사람은, 살면서 흔들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과연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흔들 수 있을까?’
제410회 더 자주 돌아봐야 한다.
거처로 돌아온 검무극과 한설은 서낙을 만나서 있었던 일을 취마와 이안에게 전해주었다.
검무극의 말이 끝나자 한설이 이안에게 말했다.
“우리가 처리하지 말고 소교주께 맡기자는 의견은 좋은 판단이었어요.”
그녀가 검무극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초월적인 존재까진 아니더라도 분명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장난기를 담은 검무극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수장에게 일거리를 떠넘기는 수하라니?”
“그럴 때는 모른 척 넘어가 주시는 것이 좋은 수장이랍니다.”
“어렵다, 수장으로 살기도.”
“소교주님이 어렵게 사시는 거죠. 다른 수장들은 다들 쉽게 삽니다.”
한설은 여전히 이런 대화가 낯설었다. 수하와 이런 편한 관계는 분명 큰 부작용이 따를 거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서 장로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검무극의 물음에 한설은 솔직히 대답했다.
“가장 가까운 분은 궁주님이시죠.”
“내일 궁주님과의 자리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그러죠.”
“대신 내일 자리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왜죠?”
검무극은 뜻밖의 이유를 댔다.
“자식이 있는 자리에서는 궁주가 아니라 부모가 되기 때문이죠.”
한설은 검무극이 아직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모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자식은 절대 모르는 부모 마음도 있는 법이니까요.”
“소교주는 어떻게 부모 마음을 알죠? 아직 혼인도 안 하신 분이?”
이런 물음에 대답이 궁색할 검무극이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을 부모로 두면, 부모에 관해 열심히 연구하게 되죠. 부모란 무엇인가!”
검무극은 자신의 말에 취마가 웃는 것을 보았다. 다들 아버지를 겁내고 신경 쓰지만 취마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나마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할 거란 오해는 풀어서 다행이지.
검무극이 차를 마시는 취마에게 다가가서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소교주, 뭐 하시는 건가?”
“취마님과 차가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주전자에 차 대신 술이 들어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그 말과 함께 빈 찻잔에 검무극이 차를 부어서 마셨다.
“왠지 취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차 맛이 나는 술 아닙니까?”
“차도 마시다 보니 좋다네.”
“그래도 잘 참으시네요?”
“알잖나? 사람 몸만큼 신비한 놈도 없다는 걸. 언제 술을 그렇게 마셔댔냐는 듯, 벌써 몸이 차에 적응하고 있다네.”
“그거 말고요. 확 가서 다 엎어버리고 싶은 걸 잘 참는다고요.”
취마가 차를 쭉 마시고 말했다.
“오래는 못 버티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취마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이안과 한설은 알 수 있었다. 취마는 술을 참는 게 아니라 분노를 참고 있음을.
검무극이 창밖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지금은 마존이 아니라 형으로 대했다.
“곧 끌어낼 거야. 악인들이 숨어 있기에는 이곳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니까.”
모두 검무극의 시선을 따라 창밖의 새하얀 세상을 잠시 쳐다보았다.
혈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에 검무극은 저 하얀 세상이 피로 덮이는 상상을 잠시 했다.
그래도 괜찮다.
곧 새하얀 눈으로 다시 덮일 테니까.
* * *
빙궁주는 다과로 나를 대접했다.
“천마신교의 후계자와 한자리에 앉는 것은 처음이라네.”
“영광입니다.”
“자, 들지.”
망설이지 않고 차를 마시자 빙궁주는 의외란 눈빛을 보냈다. 소교주인데 어찌 독을 확인하지도 않고 마시느냐는 의미.
“오기 전에 궁주님에 대해 조사도 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난 어떤 사람이던가?”
“총명하고 영민한 분이시더군요. 지금부터 반백 년이 흘러 치매가 와도 적어도 천마신교에서 온 소교주에게 독을 타서 먹이진 않으실 분이시죠.”
빙궁주가 옅게 웃었다. 지금 나이가 이삼십대로 보인다는 칭찬임을 알아들은 거다.
“나도 자네에 관해 공부를 좀 했지.”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를 빤히 쳐다보며 빙궁주가 대답했다.
“그 질문에 답을 쉽게 내릴 수 없는 사람.”
“잘 보셨군요. 제가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빙궁주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웃지 않았다.
“조사에 진전이 있다고?”
“네, 그래서 어제는 서 장로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서 장로를 의심하는 건가?”
난 천천히 차를 마시며 잠시 사이를 두었다.
“궁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도 침착하시네요?”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빙궁주는 서낙을 누구보다 믿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아직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네.”
단도직입적으로 네 생각을 말해 보란 질문이기도 했다.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배후세력이 궁주님을 위협하려면, 서 장로쯤 되는 인물이어야 할 테니까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는 말이군.”
검무극은 미소로 인정했다.
“서 장로가 왜 원주를 죽였겠는가?”
“저도 모르죠.”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네.”
그녀는 다시 한 번 못 박았지만 나는 느낀다. 저 믿음 속에 어떤 불신이 숨어 있음을. 만약 정말 서낙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 조사하는 걸 중단시켰을 거다.
나를 빙궁에 머물게 하며 사건조사를 허락한 이유가 따로 있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뭐요?’
원주를 죽인 흉수를 찾는 것 이상의, 눈 속에 깊이 감춰둔 비밀이 있음을 느낀다.
이번에는 북혈문으로 빙궁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번 일에는 북혈문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혈문이 언급되었음에도 그녀는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예상하셨습니까?”
“그쪽 둘째가 자네들과 얽혔으니까.”
“그가 죽은 건 알고 계시죠?”
당연히 빙궁주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 납치된 일에 충격을 받아서 자결했다고 하더군.”
“그걸 믿으십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차를 마셨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식까지 죽이는 부류를.”
“나도 그런 부류라네. 자식보다 빙궁이 더 중요한 사람이지.”
자조적이면서도 도발적인 그녀의 대답이었다.
“제가 궁주님을 잘못 공부한 모양입니다. 제가 공부한 궁주님은 그 누구보다 따님을 아끼시는 분이신데요.”
빙궁주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으로.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소. 당신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지금껏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오.
“뭐, 그래도 괜찮습니다.”
난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히고, 잘 통하는 분을 끌고 왔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실 거라서요.”
과연 빙궁주가 옅게 웃었다. 당대 천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아버지도 궁주님도 다들 잘못 생각하고 계신 거죠.”
생각지 못한 말에 빙궁주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앞에 있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천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어떤 점에서 말인가?”
언젠가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그녀에게 먼저 했다.
“조직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아무도 없는 인생은 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뒤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 달린 인생인데. 그래서 앞만 보고 뛰었는데. 너희가 이럴 수가 있냐? 그런 탄식하는 인생 말입니다. 뒤돌아보셔야 합니다. 이 정도면 되었지, 싶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주 뒤돌아보셔야 합니다. 야속하게도 열 번 중에 일곱, 여덟 번은 돌아본 줄조차 모르니까요. 그들도 자기 뒤를 돌아봐야 하니까요.”
나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님을 돌아보셔야 할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뒤에 서 있는 것 같으니까요.”
* * *
다음 날, 다시 빙궁주를 찾아갔다.
“오늘은 무슨 일인가?”
“어제 너무 무례하게 군 건 아닌가 해서 오늘 또 찾아뵈었습니다.”
“딸과 대화하라고 하고선 자네가 또 왔군.”
다행히 어제 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딸 문제만큼은 그녀에게도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따님 아직 안 부르셨죠?”
빙궁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보란다고 당장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돌아보면서 살고 있었겠지.
“그런 일은 한 번 말씀드려선 쉽게 되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서? 될 때까지 오겠다는 뜻인가?”
“그럴 생각입니다만.”
“이러는 이유는?”
두 사람을 위한 마음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서낙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빙궁주를 만나는 걸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또 만난다면?
그의 강박증적인 성격으로 볼 때, 사람 관계에서도 어떤 완벽성이나 질서를 추구하리라 추측한다.
자신을 의심하는 기색을 분명히 밝힌 마교 소교주가 매일 빙궁주를 만난다? 이 일은 분명 그의 질서를 흔드는 일이 될 거다.
그가 이번 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빨리 알아내야 한다. 그저 강박증 있는 사람 좋은 장로인지, 아니면 저들의 손발인지, 몸통 그 자체인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소궁주가 잘 되기를 바라서죠. 이번에 소궁주가 아니었다면 여기 와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궁주님을 이렇게 자주 뵙지도 못했을 테고요. 저를 공부하셨다니까, 잘 아시겠네요. 제가 후기지수들하고 어울리는 거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요. 같이 춤도 추는 사람입니다, 저.”
아무리 나를 파악하려 애써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거짓이라 확신하는 것들이 나의 진실인 이상.
“길을 잃는 느낌을 받아보셨습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말을 꺼내나? 빙궁주는 그런 감정을 표정에 고스란히 담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자주 받습니다. 어제 궁주님을 뵙고 나가면서도 그랬습니다. 건방지게 제가 뭐라고 궁주님께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애초에 전 취마님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북해로 따라왔던 거였는데.”
그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어제 건방지게 군 것 죄송합니다.”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물었다.
“금주한다고 했나?”
“네, 의리의 금주죠.”
“언제 끝나나?”
같이 술을 한잔하자는 의미임을 알았다.
“멀지 않았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궁주님이 저를 믿어주신다면요.”
* * *
서낙이 움직인 건 검무극이 삼일 연속 궁주전을 찾아간 그날 저녁이었다.
“어서 오세요, 장로님.”
“지나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빙궁주가 소궁주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낙은 항상 그녀에게 정중했다.
서낙은 곧장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마교 소교주와 자주 만난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흘 내내 저를 찾아왔습니다.”
서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교주쯤 되면 그냥 움직이지는 않을 터, 속셈이 무엇인 것 같았습니까?”
그는 속셈이란 표현을 쓰며 검무극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를 드러냈다.
“딸과 잘 지내보라더군요.”
서낙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마 그게 끝이 아니지 않느냐는 마음이었는데.
“사흘 동안 주로 그런 이야기만 했지요.”
서낙은 믿을 수 없었다.
‘궁주가 나를 속인다?’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대하던 검무극은 나이에 비해 노련했다. 툭툭 찔러 오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가시와 뼈가 있었다.
한데 한설과 잘 지내란 말을 하기 위해 사흘이나 찾아왔다고? 믿기 어려웠다.
“잘 아시겠지만 마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저도 그들을 믿지 않아요.”
믿지 않는데 왜 그들을 불러들인 겁니까?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애써 삼키며 서낙이 말했다.
“소교주의 속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한시라도 빨리 내보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힘주어 덧붙였다.
“빙궁을 위해서라도.”
그러자 빙궁주가 나직이 말했다.
“또 빙궁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서낙이 흠칫하며 무슨 의미로 한 말이냐고 물으려던 그때, 빙궁주는 한발 먼저 말했다.
“옳으신 말씀이세요. 마인들이 궁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죠. 소교주에게 기한을 두고 이번 사건을 처리하라고 전하죠.”
순순히 자신의 뜻에 따랐지만, 서낙은 빙궁주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달랐다.
항상 빙궁주는 자신이 정한 거리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느꼈다. 원래 자리에서 아주 조금은 삐뚤게 서 있다는 것을.
“이게 다 빙궁을 위하는 길입니다.”
서낙은 그 말을 남기고 궁주전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까 빙궁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또 빙궁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군요.
또? 언제 했던 말을 의미한 거였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서 언제 했던 말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궁주전을 내려왔을 때, 서낙은 입구에서 검무극을 만났다.
“서 장로님?”
“소교주.”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눴다.
“궁주님 뵙고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렇다네. 자넨?”
굳이 안 보여도 될 모습을 보였지만, 서낙은 침착했다.
“저도 궁주님을 뵈러 왔습니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함께 뵈었을 텐데. 아쉽네요.”
“요즘 자네가 자주 찾아뵙는다고 하더군.”
“궁주님의 높은 식견을 배울 기회가 흔하지 않아서요.”
“그럼 이야기하다 가시게.”
“궁주님 뵙고 북혈문으로 갈 예정입니다.”
북혈문이 언급되자 돌아서던 서낙의 발걸음이 멈췄다.
“북혈문에는 왜?”
“자제분을 잃었으니 상심이 클 겁니다. 가서 애도해 드려야지요.”
“소교주께서는 참 다정하시군.”
서낙은 애도하기 위해 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검무극은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의 주위를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검무극이 상체를 숙여 포권할 때 서낙은 보았다. 검무극의 품에 툭 튀어나온 한 통의 서찰을.
‘설마? 원주가 내게 향설빙주를 줬다고 적었다던 그 서찰인가?’
검무극은 보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자하게 웃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지는 것을.
그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411회 소교주가 워낙 술수에 능해.
“같이 올라가세!”
이 말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지 서낙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품에서 서찰을 본 이상 그냥 빙궁주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그의 말에 궁주전으로 올라가려던 검무극이 발걸음을 멈췄다.
“금방 궁주님 뵙고 내려오시는 길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한데 조금 전에 자네가 아쉬워하지 않았나? 함께 궁주님을 뵙지 못했다고.”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었습니다만.”
서낙의 미소에 어색함이 더해지자, 검무극은 가벼운 손사래로 농담이었다는 시늉을 했다.
“자, 함께 올라가시지요.”
검무극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는 서낙의 얼굴에서 습관적으로 짓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저 서찰이 만약 향설빙주에 관한 서찰이라면, 궁주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주에게 향설빙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검무극과 한설 앞에서 받지 않았다고 딱 잡아뗐다. 만약 그 자리에 검무극만 있었다면 마교에서 누명을 씌운다고 잡아떼기라도 하겠지만, 그곳에는 한설도 함께였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자신이 한 입으로 두말한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거다.
‘저 서찰을 미리 준비해 온 건가? 아니면 전서로 받은 건가? 그럴 시간적 여유가 되었을까? 혹시 다른 서찰인데 이러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에 서낙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처음 자신을 찾아와서 술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자신을 떠보려는 수작이라 여겼는데.
‘정말 서찰이 있었어? 그리고 저 서찰을 궁주가 보면?’
자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필체를 조사하면 원주가 쓴 것으로 밝혀질 텐데? 그래도 위조라고 잡아떼야겠지? 상대가 마교니 좋은 점도 있다. 이런 완벽한 위조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길 테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궁주전 입구에서 검무극이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긴. 네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서찰을 꺼내 태우는 생각이지.
서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네, 어서 들어가세.”
검무극과 서낙이 궁주전으로 들어갔다.
방금 인사하고 나간 서낙이 다시 돌아오자 빙궁주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아, 입구에서 소교주를 만나서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러셨군요.”
입구에서 만났으면 인사하고 각자 갈 길 가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궁금했다. 저 검무극이 뭔가 수를 써서 서 장로가 따라올 수밖에 없게 한 것 같은데.
‘소교주, 어떤 수를 쓴 건가?’
검무극이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기 위해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좋은 분위기의 미담부터.
“그거 아십니까? 제가 서 장로님이 의심스럽다고 궁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서낙은 떳떳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랬더니 궁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서 장로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단호히 저를 꾸짖으셨지요.”
서낙은 환하게 웃으며 빙궁주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믿는 분이신데요.”
정말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 북해빙궁의 모든 무인도 인정하는 바였고. 지금 검무극은 그 오래된 거목에 톱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다시 말하지만, 서 장로님은 내가 가장 믿는 분이네. 오직 빙궁만을 위해 살아오신 분이지.”
그러자 검무극이 서낙에게 물었다.
“서 장로님도 궁주님을 아끼십니까?”
“당연하지. 나 자신보다 궁주님과 빙궁을 아낀다네.”
검무극이 그를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말인가?”
“왜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겁니까?”
이제 검무극은 한발 더 나아가 서낙을 그녀를 죽인 사람으로 지목했다. 웃으며 시작한 자리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나를 모욕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
추궁하는 쪽도 회피하는 쪽도 모두 당당했다.
빙궁주는 이 순간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봐온 서낙이었다. 평소에 허허 웃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결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다. 특히 자신의 명성과 관련해서는 더욱 예민한 사람이었고.
원주를 죽였다는 게 누명이라면, 자신이 아는 서낙은 이보다는 조금 더 화를 냈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마교 소교주라 하더라도 말이다. 한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위축된 느낌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이 말이 빠져 있다.
―그럼 증거를 내놓게.
그건 서낙이 절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랬다간 검무극은 품에 있던 서찰을 꺼내 들며 ‘증거가 여기 있지 않소?’라고 말할 테니까.
이런 내막을 몰랐기에 빙궁주는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애초에 다시 검무극을 따라 올라온 것도 이상했고.
‘이렇게 젊은 사람에게 서 장로가 휘둘린다고?’
정말 놀랍고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긴 남 말할 상황은 아니었지.
검무극의 뒤를 돌아보며 살라는 말에 자신도 밤잠을 설쳤으니까.
그 말이야 특별한 말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직 한설이 뒤에 서 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잠을 못 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돌아봐야 할 텐데. 검무극의 말처럼 한 번 돌아보고 마는 게 아니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자꾸 돌아봐야 하는데.
하지만 아직 딸아이를 따로 부르지도 못하고 있다.
서낙과 대치하던 검무극이 빙궁주를 향해 돌아섰다.
“참, 오늘 궁주님을 뵈러…….”
동시에 검무극의 손이 서찰이 든 품으로 향했다.
그때 서낙이 재빨리 끼어들며 화제를 돌렸다.
“소교주, 궁주님께 설이 이야기를 했다지?”
이 순간 빙궁주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서낙은 누군가 말을 하는 중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박할 게 있어도 상대 말이 끝나고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 그 끼어든 화제가 설이 이야기라고?
이질감에 이질감이 더해졌다.
어디 서낙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갑자기 검무극이 서찰을 꺼내려 하자 순간적으로 꺼낸 말이었다. 이것이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이 순간을 넘겨야 했다.
‘차라리 서찰을 전하게 하고, 위조된 것이라 우기는 게 더 나은 선택일까?’
잠시 침묵이 흐르던 순간, 빙궁주는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표정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그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잘 보시오, 당신의 서 장로가 어떤 사람인지.
검무극이 서낙을 향해 돌아섰다. 서찰을 꺼내려던 손은 자연스럽게 다시 내려왔다.
“모녀간에 사이좋게 지내시란 말씀을 주로 드렸었지요. 소궁주가 보기보다 여린 성격이라서.”
“소궁주가 여리다고? 후기지수 중에선 보기 드물게 강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서 장로님은 고작 며칠 본 저보다도 소궁주를 모르시는 것 같군요. 사람을 제대로 안 보고 대충 보면 원래 그렇습니다. 선입견까지 쌓여서 상대를 더 모르는 법이지요.”
“자네 자만일세!”
정말 한마디 한마디 사람을 열받게 했지만, 서낙은 무슨 말이라도 자꾸 해서 저 서찰이 나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래서 서찰을 전하는 걸 잊고 이곳을 나가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서찰을 빼돌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다.
물론 이 순간에도 빙궁주가 서낙에게 느끼는 이질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드는 또 하나의 생각.
빙궁주는 조금 전에 검무극이 했던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낙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선입견만 쌓여 있는 상태.
이 이질감은 바로 그 선입견이 만들어낸 찌꺼기들이 아닐까?
자신도 빙궁주라는 자리를 짊어지고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음을 어찌 부정하겠는가?
검무극이 던진 돌멩이는 서낙에게 적중하면서 계속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그 파장은 그녀 자신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북혈문에 간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어서 가세. 너무 늦어도 그쪽에 실례일 테니.”
검무극이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죠.”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인사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낙은 안도했다. 서찰이 전해져도 어떻게든 대비하겠지만, 애초에 안 전해지는 것이 상책이다.
‘북혈문으로 간다고? 어떻게 서찰을 빼내야 할까?’
그렇게 우선은 안도하던 그때, 검무극이 빙궁주를 향해 돌아서며 빠르게 말했다.
“이건 깜짝 선물입니다! 오늘 궁주님께 이걸 드리려고 왔지요.”
비로소 서낙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놀리려고 줄까 말까 하고 있었다고. 잊어버린 척 마지막까지 자신을 희롱했다. 망할 놈! 어디 그걸 준다고 내가 순순히 인정할 거 같으냐?
빙궁주는 검무극이 건네준 서찰을 꺼내 읽었다.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낙은 그 표정에서 그 서찰이라 확신했다. 감정 변화 없는 그녀를 이렇게까지 놀라게 할 내용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조작된 서찰입니다.”
서낙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소교주가 그 조작된 서찰로 나를 협박했습니다. 한데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향설빙주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이제 궁주에게까지 말했으니 물러설 곳은 없었다. 술은 영원히 받은 적이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자 빙궁주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향설빙주라니요?”
순간 서낙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서찰이 아니었구나!’
진짜 농락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있어도 될 일인데, 자신의 입으로 향설빙주에 대해 꺼낸 것이다.
“그 서찰을 제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빙궁주가 서찰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요리와 인근 주점과 반점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이걸 보고 빙궁주가 왜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서찰의 맨 아래 ‘따님이 좋아하는 요리입니다. 오붓한 시간을 보내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제 수하인 이안이 요즘 소궁주와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중이라서 알아낸 거죠. 그 아래 적힌 객잔과 반점들은 이 근처에서 그 요리를 제일 잘하는 집들이고요. 제가 직접 알아 왔습니다. 색다른 분위기에서 따님과 식사하시라고요.”
서낙은 처음으로 표정이 무너졌다. 웃는 것도, 표정이 굳은 것도 아닌, 새로운 표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 감정은 분노였다. 웃음을 지으려 해도 지어지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은 검무극만이 아니었다. 이런 얄팍한 수작에 놀아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실망감이었다. 애초에 아닐 수도 있다고 분명 생각했으면서,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저것이 그 서찰이라 확신해 버렸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오늘의 실수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앞서 검무극에 의해 그의 질서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음을.
그래도 오랫동안 쌓아 온 서낙이란 사람의 벽은 두꺼웠다.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자신을 수습했다.
“저 소교주가 워낙 술수에 능하다는 생각에 제가 과잉 반응을 했습니다. 궁주께서는 이해해 주시기를. 아까 제가 오해한 내용으로 소교주가 저를 음해해 왔습니다.”
다 이해한다는 듯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교주가 어떤 증거를 가져와도, 저는 장로님을 믿어요.”
“감사합니다, 궁주님.”
서낙이 이번에는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졌다. 정말 졌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소교주, 그대가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궁주님과 나와의 신뢰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요.”
그 말을 한 후 서낙은 빙궁주에게 정중히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나갔다. 애초에 올라오지 않았어야 했다. 하지만 저 밉살스러운 놈이 입구에서 자신을 낚아 올리려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꼼짝없이 낚인 것이다.
둘만 남자 빙궁주는 검무극에게 물었다.
“그를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가 뭔가? 저 사람 본모습이 어떤 사람인지 내게 보여주려는 건가?”
그렇다면 너무 위험하고 극단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검무극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뇨.”
“아니라고?”
“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하려는 건 맞지만, 궁주님께 보여주려는 건 아닙니다.”
“그럼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검무극은 대답 대신 작별을 고한 후 그곳을 나갔다.
“거기 적힌 곳에 꼭 가보십시오. 정말 따님이 좋아하는 요리니까요.”
검무극이 궁주전을 내려왔다.
입구를 나서는데 저 앞에서 이안이 다급히 달려왔다. 표정만 봐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냐?”
“백주설원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진 사건이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것이 상책이니까. 쾌속보로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백주설원에 도착했다.
이안이 다급하게 자신을 데리러 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피바다였다. 사방에 쓰러진 여러 구의 시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빙궁의 무인들이 겹겹이 포위한 채 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채 홀로 서 있는 사람은 취마였다.
제412회 드디어 그자가 봤나 봅니다.
“취마님!”
검무극의 부름에 취마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광기와 분노에 휩싸인 상태가 아님을 확인하자 검무극은 안도했다. 그가 맨정신이라면 이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으니까.
“어차피 두 번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좀 기다리죠.”
취마는 검무극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그를 둘러싸고 있던 빙궁 무인들은 검무극의 등장에 더욱 긴장했다. 몇몇 이들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서서 경계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벌인 사람이 취마라고 확신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그곳으로 이안이 도착했고 뒤이어 한설도 도착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랐다. 죽은 사람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이 만났던 백주설원에서 술 재료를 담당하던 조명이었다. 원주가 서 장로와 몇 차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려줬던 바로 그 사람.
서로를 쳐다본 두 여인의 시선이 각기 다른 사람을 향했다. 한설은 취마부터 쳐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이들을 죽인 건가요?’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봐도 취마의 소행처럼 보였다.
반면 이안은 검무극부터 쳐다보았다.
‘어쩌죠? 취마님이 함정에 빠지신 것 같아요.’
정말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이 검무극이 아니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거다.
하지만 검무극의 차분한 눈빛을 보자 그녀의 흥분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세상의 어떤 위험이 와도 해결할 것 같은 눈빛이다. 아니, 해결하지 못해도 좋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방에서 방패와 창을 든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위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오직 빙궁주의 명령을 따르는 북해빙궁 최정예 무인들인 북풍대(北風隊)였다. 갑주와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빙궁 내 어떤 정예조직보다 무공이 뛰어난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범한 눈빛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고수인지 알 수 있었다.
북풍대가 사방을 철통처럼 틀어막았고, 일부 북풍대원이 좌우로 늘어서 방패로 길을 만들었다. 일사불란한 그들 사이로 빙궁주가 걸어들어왔다. 그녀 뒤로 새하얀 무복을 입은 호위 무인들이 뒤따랐다.
지금까지 궁주전에서만 보던 그녀는 얼음성에 홀로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렇게 외부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빙궁주는 말없이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죽은 이들 중 무공을 모르는 이가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제야 검무극이 취마에게 물었다.
“취마님, 어떻게 된 겁니까?”
비로소 취마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취마가 바라본 시체는 바로 이안과 한설이 만났던 조명이었다.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목의 혈맥이 터져 버렸다. 뒤이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들 역시 터졌고.”
그러자 누군가 소리치듯 말했다.
“그대 말을 어찌 믿으란 거요?”
뒤이어 도착한 사람은 바로 서낙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궁주전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물러간 그였는데, 지금의 기세는 그때와 달랐다.
“몸에 피를 그렇게 묻히고서 우리보고 그 말을 믿으란 거요?”
보이는 정황은 취마에게 불리했다. 피를 뒤집어써서 더 흉수처럼 보였으니까.
바로 그때 검무극이 나섰다.
“그래서 믿을 수 있겠지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검무극은 차분히 그들에게 물었다.
“정말 취마께서 저들을 죽였다면 몸에 피를 묻혔겠습니까?”
검무극이 취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로 앞에서 터졌어도, 마음만 먹으면 그 피를 다 피할 수 있었겠지요. 한데도 옷과 손에 저렇게 피가 묻었다는 건…….”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그들을 살리려 했던 거겠지요.”
취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자신이 변명하지 않아도 검무극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마존께서 저 사람들을 진정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죽였을 겁니다. 여기서 피를 뒤집어쓴 채 포위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본교의 마존들이 어떤 분들이신지.”
물론, 빙궁주는 잘 안다. 만약 취마가 마음먹었다면 맨 처음에 포위했던 무인들은 이미 다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러자 서낙이 흥분해서 물었다.
“하면, 왜 저리 서 있는 거요?”
검무극의 시선은 여전히 빙궁주를 향했다.
“궁주님에 대한 예의로 기다려 주신 겁니다. 현명하게 잘 판단 내려주시리라 믿고서. 이곳에서 자리를 이탈한다면 문제는 더 커졌을 테니까요.”
취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래서 차분할 수 있다. 검무극이 있는 한, 쉽게 누명을 쓰진 않을 테니까.
“마인들의 말을 쉽게 믿어선 안 됩니다. 당연히 조사가 끝날 때까진 구금해 두어야 합니다.”
단호한 서낙의 주장에 검무극이 반박했다.
“그건 공평하지 못한 처사요.”
“공평? 그게 무슨 말이오?”
검무극이 주위에 있던 무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우리가 백화설원 원주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계실 거요. 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의심스러운 정황을 알아냈소. 이곳 빙궁의 고수 중 누군가가 죽은 원주에게 은밀히 향설빙주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소.”
순간 서낙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이 자리에서 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 고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속였소. 하지만 우린 그 사실을 밝혔음에도 그를 구금하지 않았소. 왜냐? 북해빙궁과 빙궁주를 존중했기 때문이오.”
주위에 있던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서낙은 뭐라 항변하지 못했다. 말이 길어지면 그 의심스러웠던 사람이 자신임을 이 자리에서 밝힐 것이다.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빙궁에 와서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서릿발 같은 기상을 드러냈다.
“우린 그대들을 존중하는데 그대들은 우릴 존중하지 않겠다는 건가?”
만약 이 자리에 빙궁주가 없었다면 자신의 기도를 발출해서 더 강하게 서낙을 압박했을 거다. 하지만 빙궁주 앞이었기에 예를 갖췄다.
한설은 검무극의 돌변한 모습에 놀랐다. 지금 보이는 모습은 실없는 소리를 하던 검무극이 아니었다. 저 차가운 모습은 오히려 빙궁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윽고 지켜보던 빙궁주가 나섰다.
“소교주의 말씀은 잘 알겠어요.”
잠시 취마와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던 빙궁주가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검을 내려라.”
포위하고 있던 무인들이 검을 내렸다.
서낙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궁주님, 저들 말을 믿어선 안 됩니다.”
“네, 죽은 이들의 사인을 철저히 조사해야지요.”
빙궁주가 취마에게 말했다.
“본궁의 허가 없이 궁을 떠나지 마세요.”
감금하지는 않겠지만 함부로 떠나지도 마라. 거기까지가 빙궁주의 절충안이었다.
거기에 서낙이 말했다.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본궁의 고수들이 저들을 감시하게 해야 합니다.”
빙궁주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대신 검무극을 위해 한 가지 단서를 붙여주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만이에요.”
취마는 검무극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번 일은 검무극의 결정대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절충안을 받아들이라는 의미.
취마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겠소.”
취마가 그곳을 떠나자 그 뒤로 이안이 뒤따랐다.
떠나기 전, 검무극이 빙궁주에게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거냐고 물으셨지요.”
아까 그녀는 검무극에게 물었다. 서낙을 이렇게까지 자극하는 이유가 뭔지. 왜 그의 본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거냐고.
그러자 검무극은 그를 자극하는 건 맞지만 빙궁주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검무극이 그 질문에 답을 했다.
“드디어 그자가 봤나 봅니다.”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의미였다. 서낙을 자극한 건 배후의 그를 자극해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는.
“그럼 나중에 뵙지요.”
빙궁주에게 인사하고 가려던 검무극이 한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하시오, 같이 안 가고. 같은 일원이 되기로 한 것 아니었소? 상황이 좋을 때만 일원인 거요?”
빙궁주와 서낙이 한설을 쳐다보았다.
빙궁주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딸을 쳐다보았고, 서낙은 그 반대였다.
서낙은 절대 따라가지 말라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거역한 적이 없던 그녀였는데.
“같이 가요.”
한설이 검무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떠나자 서낙은 빙궁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궁주가 마교 소교주와 어울리게 해선 안 됩니다.”
빙궁주는 이 순간 그의 모습이 뻔뻔함인지, 진정 빙궁을 위한 마음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와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으니까.
그 오랜 세월을 배신한다고? 이 생각이 냉정한 판단을 흐렸다.
“제가 잘 살펴보지요.”
빙궁주가 돌아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녀가 떠나가자 북풍대와 호위들이 순식간에 그곳에서 물러났다.
시체를 조사하려는 무인들에게 서낙이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잠시 혼자 있게 해주게.”
그곳에 있던 이들은 서낙이 얼마나 빙궁 사람들을 아끼는지 다들 잘 알기에, 모두 조용히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서낙은 홀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글픔이나 안타까움 대신 다른 생각에 잠겼다.
‘그가 나를 돕고 있다.’
향설빙주 때문에 궁지에 몰린 순간,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주르륵.
흥건하던 피 웅덩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피는 서낙의 발이 있는 곳으로 흘렀다. 그럴 수 있는 일이지 싶어 서낙이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피가 방향을 틀어 서낙을 향했다.
흠칫 놀란 서낙이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움직여서 피했다.
그러자 피가 다시 방향을 바꿔서 서낙 쪽으로 흘렀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서낙이 물었다.
“당신이오?”
서낙의 물음에 흘러오던 피가 멈췄다.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 같았다.
서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고맙소. 이제 실수하지 않고 놈들을 처리하겠소.”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잠시 멈춰 있던 피가 천천히 원래 있던 피 웅덩이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피가 흐르던 바닥에는 핏자국이 남지 않았다.
그렇게 피가 원래 있던 웅덩이로 흡수되듯 돌아갔다.
서낙이 천천히 걸어가서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피는 평범한 피로 돌아와 있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자신을 도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경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핏물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이젠 되돌아갈 수 없는 결정을 내린 남자의 비장한 얼굴이었다.
* * *
“화 그만 삭이고 차라리 술을 마셔.”
검무극의 말에도 취마는 차를 마셨다.
“이러니까 더 무섭잖아.”
상대는 취마를 함정에 빠뜨렸다. 다시 말해 마존을 함정에 빠뜨린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텐데, 취마는 여전히 차만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이안도 취마가 정말 화가 많이 났음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건 절제하는 모습이다. 팔마존 중에서 제일 잘 흥분할 것 같았는데. 그는 어떤 마존보다 훌륭히 자신을 잘 제어하고 있었다.
“이래서 취마님이 될 수 있었나 봅니다.”
이안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취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니, 스스로를 잘 조절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자신은 감정적인 사람이다. 이곳에 와서의 냉철함은 한 가지 욕심이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바로 검무극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술 취해서 호수에 몸을 던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검무극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덕분에 우린 확실히 알게 됐어. 서낙이 배후세력과 확실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드디어 혈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낙이 곤경에 처하자 즉시 움직였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한설이었다.
“배후세력이라니요?”
“누군가 그와 손잡고 큰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취마와 이안과는 달리 한설은 그런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죠?”
그녀의 물음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이건 궁주님께 해야 할 질문 같군요.”
“어머니도 알고 계시다고요?”
“그럴 거라 생각하오.”
왠지 소외된 기분에 한설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자 검무극이 말했다.
“비단 궁주님만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무슨 뜻이죠?”
“소궁주께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오.”
빙궁주에게 했던 말을 이제 한설에게도 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대화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나는 내가 먼저 다가갔소.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한데 우리 나이쯤 키워주셨으면, 녀석이 이렇게 컸구나, 그런 말씀 한 번쯤 나오게 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소?”
물론, 한설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두 분의 관계는 멀고 가깝고. 차갑고 따듯하고의 문제는 아닐 거요. 굳어버린 것이 문제지.”
“!”
굳었다는 말이 한설의 가슴에 와닿았다.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섭섭함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는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라는 생각을 해버리니까.
먼 것을 당길 생각도,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바꿀 생각이 없었으니까.
“왜 내게 이런 말들을 해주는 거죠?”
“내가 오지랖이 넓어서 그렇소.”
뭔가 의도가 있을 텐데. 한설은 검무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상대였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놈들이 왜 취마님에게 누명을 씌운 거죠?”
“그만큼 급했던 거지. 다시 말해 서 장로가 꼭 필요한 사람이란 의미기도 하고.”
검무극은 이번 일로 상대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아냈다. 게다가 다음 단계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놈들은 이번 일로 우리 발을 묶었어.”
거처 밖에는 빙궁의 고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딜 가더라도 감시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잘 됐어.”
“잘됐다고요?”
이안은 물론이고 취마와 한설조차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역으로 우리가 무슨 일을 꾸며도 우리 짓이 아닌 것이 되니까.”
“아! 우린 여기에 감시받고 있으니까! 한데 은밀히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린 안 나갈 거야. 우리 대신 그 일을 멋지게 해낼 사람이 있거든.”
검무극이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취마와 이안의 시선도 검무극을 따라 한 사람을 향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한설은 말을 듣기도 전에 소리쳤다.
“거절하겠어요!”
제413회 차만 마시는 취마님을 걱정해!
결론부터 말하면 한설은 거절하지 못했다.
검무극 한 명의 설득도 감당하기 버거운데, 오늘은 조력자도 있었다. 바로 이안이었다.
“아까 그분의 시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우리가 그분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분은 아직 살아계실까?”
한설은 이안이 그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음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설은 이안에게서 이 말을 듣는 순간까지 그 사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곳에서 처음 본 사람인데. 정말 저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만약 가식이라면 이것부터가 가식이겠지. 물 한 잔 얻어 마신 부인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북해까지 왔다는 그것부터가.
“우리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그분은 자신을 죽인 놈 때문에 죽은 거죠.”
이안은 괜한 자책은 하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그렇게 많은 걸 배웠는데, 이 정도 지혜는 발휘해야겠지.
“다만, 그 죽음이 아무 의미 없는 죽음이 되게 하고 싶진 않아요.”
이럴 때면 다정한 사람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이안의 믿음이 흔들리곤 한다. 죽은 그 사람 역시 다정함을 발휘해서 알려줬던 건데.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또 다른 지혜를 발휘했다.
“복수해 주세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느꼈으니까. 이럴 때는 검무극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거다.
“그러마.”
흔쾌히 대답한 후, 이안의 마음까지 살펴 주었다.
“이런 일은 심장에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이라 얕은 상처 같지만, 영원히 남는 상처지. 아마 계속 생각날 거다. 지나가다 양조장만 봐도 생각날 테고.”
검무극은 안다. 때론 자신이 직접 입은 큰 상처보다 이런 상처가 훨씬 더 오래 남아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하지 마라. 그럼 상처가 더 깊어질 거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어지고, 또 그어지고. 그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또 생기고. 그래서 내 심장은 원래 이런 문양이 새겨진 심장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이는 거지. 이번에 네 심장에 새 문양 생긴 것, 축하한다.”
이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픔을 축하해 주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고작 제 심장이 이런데, 도련님 심장은 어떨지 상상이 안 가네요.”
이안은 검무극의 심장을 떠올려보았다. 수십, 수백 개의 상처가 새겨진, 그래서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강렬한 심장일까? 아니면 애초에 만년한철로 만들어져서 그어진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한 심장일까?
“내 심장이 어떤지는 네가 잘 알잖아?”
“네? 제가 어떻게? 아!”
이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검무극이 자신을 심장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다가, 방금 생각이 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설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자책하고, 그걸 위로하는 수장이라.
이전까지는 가식 같았고, 기만적인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저 관계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놀랍게도 아주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으니까.
이번에는 한설의 시선이 취마를 향했다. 그러고 보니 취마는 그들을 구하겠다고 저 피를 뒤집어썼다고 했지?
‘내가 너무 비인간적인 걸까?’
마교에서 온 세 사람 때문에 평생 하지 않았던 생각을 자꾸 하게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인들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검무극이 한설에게 말했다.
“우릴 도와주시오.”
“거절한다니까요.”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소.”
“무슨 이유죠?”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난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당신이나 궁주님이라 생각하오.”
한설은 놀라지 않았다. 서 장로가 음모에 개입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칼날이 향할 곳은 뻔했으니까. 한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가족처럼 지낸 그였는데. 어머니와 나를 노린다고?
“정말 확실한 증거가 있는 건가요?”
한설이 다시 한번 묻자 검무극이 단호히 대답했다.
“이번에 취마님에게 누명을 씌우면서 확실해졌소. 서낙은 저들과 한패요.”
한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취마와 이안의 표정은 검무극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 마음은 금강석이 되었다가도, 어느새 당과처럼 사르르 녹기도 하는 법이오. 그도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거요.”
혈왕이 파고들어서 마음이 변했든, 마음이 변한 그를 혈왕이 파고들었든, 결국 그는 변한 것이다.
괜히 거절하겠다고 소리쳤지만, 한설은 알고 있다. 이번 일은 자신이 나서서 처리해야 할 일임을. 빙궁의 사람이 죽었고, 적은 자신과 어머니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 마인들을 정말 믿어도 되는가?
이 불신이 점점 희미해져 갈수록 반대로 한설은 더 불안해졌다. 마음이 풀어지면 안 되는데.
“나가서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소.”
“뭐죠?”
“북혈문의 장남을 만나주시오. 이번 일에 북혈문도 관련 있다고 생각하오.”
숙부처럼 여긴 서 장로가 모종의 배후세력과 손을 잡은 상황에서 북혈문도 한패라고?
한설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만약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면, 빙궁은 정말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북혈문주나 서 장로는 아직 소궁주가 상대하긴 벅찬 자들이오. 그러니 북혈문의 장남을 공략하는 거요. 분명 그자가 알고 있는 바가 있을 테니까. 그게 뭐든 꼭 알아내시오.”
한설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움직이면서 판단할 문제였다.
“좋아요, 그 사람을 만나죠.”
“피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맛을 보여주시오.”
“그러죠.”
그녀가 방을 나서려고 할 때, 검무극이 말했다.
“가기 전에 꼭 어머니부터 만나세요.”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한설은 말없이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소궁주 혼자 내보내도 될까요?”
“걱정돼?”
“적들이 만만치 않잖아요.”
“걱정하지 마라. 북해에서 빙궁 소궁주 걱정을 왜 하냐? 차라리 저기 차만 마시고 계신 우리 취마님을 걱정해!”
그러자 취마가 불쑥 말했다.
“너도 나갈 작정이지?”
취마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녀에게 저들의 시선을 집중하게 하고선 뒤에서 처리할 생각이지?”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술을 끊으니까 천재가 되고 있어! 앞으로 술 끊자. 이 좋은 머리 너무 아깝다.”
“이미 술에 찌든 머리야.”
이안은 마음속으로 자책했다.
‘전 그 찌든 머리보다 못한 머리고요.’
그녀는 검무극이 은밀히 나갈 생각임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안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나가서는 어쩌려고요?”
“아까 봐서 알겠지만, 이번 일의 배후는 천박하고 무자비한 놈이야.”
취마에게 누명을 씌우려 하고, 무공을 모르는 이들을 죽였다.
“저들이 이렇게 나오면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상대해 줘야지. 네가 쓴 방법을 쓸 거다.”
“제 방법요? 무슨 방법요?”
“서 장로와 북혈문주, 모두 납치할 거다. 양쪽 팔을 다 잘라버리면, 몸통이 모습을 드러내겠지.”
“정말요?”
“당연히 농담이지.”
정말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납치가 아니라 그냥 둘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혈왕은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테니까. 또한 놈은 그 보복으로 수많은 이를 죽일 거다. 둘을 죽이면 이백 명을 죽일 놈이니까.
“술 마시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어서 놈을 데려와!”
취마의 말에 검무극이 대답했다.
“그래, 놈들 싹 다 해치우면 정말 진탕 마시자. 그날은 개가 되는 거야.”
이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개 한 마리, 추가입니다!”
검무극이 침상에 베개와 옷가지 등을 넣어서 자는 것처럼 만들었다. 누가 허락도 없이 감히 이 방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혹시 몰라서 만들어 둔 것이다.
“나 있는 척 잘해줘야 해. 그럼 나, 간다.”
“저 사람들을 뚫고 어떻게 가려고요?”
“일찍도 물어본다.”
아무리 봐도 몰래 나가는 건 힘들어 보이는 숫자가 밖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 전부 고수들이기에, 그저 사람을 감시하는 일반 무인들과는 달랐다.
밖으로 나가려던 검무극이 취마에게 말했다.
“참, 형. 아까는 말 못 했는데.”
호의와 궁금함이 담긴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그 사람들 구하려고 피까지 뒤집어쓴 것, 멋있었어.”
그 말을 남기고 검무극이 밖으로 나갔다.
취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검무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나의 노고를 알아봐 주는 사람.
그리고 그걸 말해주는 사람.
그게 바로 검무극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한잔하고 싶네.’
이안과 취마는 창으로 검무극이 그곳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풍신사보 중 암영보가 발휘되었다.
암영보는 어딘가 잠입할 때 사용하는 보법으로 처음에는 한 사람의 눈을 피하는 정도지만, 경지가 오를수록 피할 수 있는 숫자가 늘어난다. 대성을 이룬 암영보는 뻔히 두 눈을 뜨고 있는 고수들을 뚫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우리가 지금 뭘 본 거죠?”
이안의 감탄에 취마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두 눈 뜨고 코 베이는 빙궁 고수들.”
* * *
한설이 궁주전으로 들어섰다.
“궁주님.”
한설의 방문에 빙궁주는 검무극의 말을 떠올렸다.
―따님을 돌아보셔야 할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뒤에 서 있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난 후 처음 단둘이 만나는 순간이다.
“어쩐 일이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말해 보아라.”
한설은 이렇게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가벼운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언제나 본론부터 말을 꺼냈던 거다.
자연스럽게 한설도 검무극의 말을 떠올렸다.
―두 분의 관계는 멀고 가깝고. 차갑고 따듯하고의 문제는 아닐 거요. 굳어 버린 것이 문제지.
막상 이 자리에 와서 보니 문제는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굳어 버린 관계를 나는 풀고 싶은가?’
그 의지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눈빛에 여러 생각이 스치는 딸을 보면서 빙궁주는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와중에 대화는 이어졌다.
“북혈문의 장남을 만날 생각입니다.”
“그는 왜?”
“소교주는 이번 일에 북혈문이 개입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 제가 확인해 볼까 합니다.”
낯설면서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딸이 먼저 나서서 뭔가를 조사한다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네가 원해서 하는 일이냐?”
말을 하고 빙궁주는 자신의 어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방금 한 말은 ‘혹 소교주가 시켜서 하는 일이냐?’라는 물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원해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해는 말아라, 안 하던 일을 해서 물어본 거니까.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소교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네요.
이런 허심탄회한 대화가 오가거나.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격려와 감사가 오가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이러했다.
“북혈문을 잘못 건드렸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네, 그렇겠지요.”
다시 흐르는 침묵.
원래였다면 빙궁주는 ‘아직은 시기상조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이 이렇게 직접 와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안 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해볼 테냐?”
“네.”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는 몰랐다. 원래 이렇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전혀 이상한 줄 모르고 살았다.
한데 상대에게 마음을 열어볼까, 서로를 의식하며 대화하니 정말 어색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설이 인사하고 돌아섰다.
천천히 걸어서 계단으로 가는데 뒤에서 빙궁주가 말했다.
“차 한잔하고 가거라.”
먼저 용기를 낸 사람은 빙궁주였다. 그래, 고개를 돌려도 엄마인 자신이 먼저 돌려야지.
한설은 내심 놀랐다. 어머니와 함께 앉아서 차를 마셨던 적이 언제였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녀와서 마시겠습니다.”
당황해서 거절했고 빙궁주는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섭섭할 필요는 없다. 검무극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야속하게도 열 번 중에 일곱, 여덟 번은 돌아본 줄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 시도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궁주전 계단을 돌아 내려오며 한설은 후회했으니까.
차를 마시고 나올 걸 그랬나?
* * *
짝!
북혈문의 장남 양석이 시비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급하게 걸어가던 양석이 시비와 부딪칠 뻔했고, 그녀가 들고 있던 물이 쏟아지면서 옷에 몇 방울 튀었다.
“너 때문에 빙궁의 소궁주를 기다리게 해? 아니면 이 젖은 옷으로 소궁주를 만나?”
표가 날 정도로 물이 튄 것도 아니었다. 소궁주를 만나러 가는데 앞을 가로막은 것이 기분이 나빠서였다.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짝! 짜악!
그녀의 사과에도 양석은 사정없이 때렸다. 시비의 입술이 터졌고, 뺨에 벌건 손자국이 났다.
“이러실 시간 없습니다.”
수하의 말에 양석이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공 없이 팼다는 점이다. 빙궁의 소궁주가 자신을 만나러 왔는데 재수 없게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그냥 간 것이었다.
그렇게 양석이 떠나고 잠시 후.
누군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왔다. 그는 양석의 호위 무인인 하결(夏結)이었다. 앞서 시간 없다고 말려준 바로 그다.
“어디 보자.”
하결이 쓰러진 그녀를 일으켜서 상처를 살폈다. 입과 볼의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결이 손으로 피를 닦아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손길이 부담스러웠지만, 감히 하결의 손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앞서 그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두들겨 맞았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이는 안 다친 것 같네.”
시비는 하결의 손길이 정말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지금 자신의 얼굴과 두 눈동자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는지.
“괜히 공자님 눈에 띄면 큰일 날 테니, 오늘은 방에 꼭 있거라.”
“감사합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시비가 동경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맞을 때 느낌상 피가 많이 흘러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피는 남김없이 사라진 후였다.
피가 묻어 있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손으로 대충 닦아주셨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녀는 얼굴을 살피느라 보지 못했다. 자신의 목에 붉은 원이 그려졌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신의 목숨은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었음을, 작은 친절의 대가로 너무 큰 것을 내주었음을 결코 알지 못했다.
제414회 소교주님 주무십니다.
“우리가 세 번이나 만났다고요?”
한설은 북혈문의 장남인 양석을 세 번이나 본 기억이 없다. 예전에 한 번 봤던 기억만 있었는데.
“오늘로 네 번째지요.”
“죄송해요. 제가 기억력이 부족해서.”
“아니오. 워낙 바쁘신 분이니 그럴 수 있소.”
양석은 내심 자존심이 상했지만, 마음이 넓은 척 호탕하게 굴었다.
그는 한설을 좋아하고 있었다. 어디 자신뿐이겠는가? 북해에 사는 젊은 남자치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미인을 얻는 것과 동시에 북해빙궁이라는 최고의 가문까지 얻게 되는데.
하지만 그녀는 얼음 미녀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줬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오신 거요?”
우선 한설은 조의부터 표했다.
“동생 분 소식은 들었어요. 상심이 크시겠군요.”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만,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양석은 내심 의아했다.
‘이 쌀쌀맞은 소궁주가 동생 때문에 왔을 리는 없는데.’
그랬기에 양석이 짐작하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마인들과 백주설원 원주님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소식은 들었소. 잘 되고 있으시오?”
“이것저것 알아보고는 있지만 쉽지 않네요.”
이곳에 오면서 그녀는 여러 생각을 해봤다. 어떻게 해야 이 양석이 의심하지 않게 접근할까. 그래서 그 사건 조사차 방문한 것으로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고맙게도 상대가 먼저 물어봐 주었다.
“혹 그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으신지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아는 게 없소.”
한설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본궁에 마인들이 와 있는 걸 아시나요?”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들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는데.”
물론, 진심을 말하면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 마인들 덕분에 눈엣가시였던 동생을 죽일 수 있었지.
“마교의 소교주가 온갖 횡포를 다 부리고 있어요. 이번 사건도 빨리 증거를 내놓으라고 우릴 압박하고 있지요.”
양석은 한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히려 기회다.’
그렇게 친해지고 싶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녀였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소.”
그렇게 양석이 한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있는 객청의 바깥에는 찬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곳으로 하결이 걸어왔다.
찬은 무심하게 그를 쳐다봤지만, 사실 유심히 하결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지금껏 수많은 호위를 만나 보았다.
처음 하결을 보았을 때, 그는 호위들 특유의 어떤 느낌을 다 가지고 있었다.
사방을 경계하는 발걸음과 빠르게 주위를 살피는 시선 처리, 상대를 살필 때는 숨겨둔 암기까지 파악하려는 집요함에, 만성적인 피로를 드러내는 붉게 충혈된 눈까지. 그는 그야말로 호위 무인 그 자체였다.
‘한데 자리를 비운다고?’
이곳까지 함께 왔다가 양석이 객청으로 들어가자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무리 이곳이 북혈문 내부라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후계자를 호위하는 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였다.
그사이에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소궁주와 갑작스러운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남들은 하지 않는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바로 호위 무인이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호위기에 더 이질감이 드는 행동이었다.
대체 후계자를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찬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왔던 길을 돌아가 시비의 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왔음을.
그때, 하결이 건물 위를 슥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아니오.”
뭔가를 느낀 것이 틀림없었다.
찬도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기를 끌어올려 더욱 적극적으로 살펴도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분명 뭔가를 느낀 것 같았는데?’
자신이 못 느낀 걸 느꼈다면? 자신보다 고수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조금 전에 뭔가를 느꼈다면 자신에게 알려 줘야 한다. 이쪽이 그냥 손님인가? 빙궁의 소궁주 아닌가?
이래저래 신경이 거슬렸지만, 찬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객청에서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물론 주로 말을 하는 쪽은 양석이었고, 듣는 쪽은 한설이었다.
한설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한데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남을 속이는데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동생분은 왜 마교와 얽힌 거죠?”
순간 양석의 표정이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히 말했다.
“소궁주께서도 아시잖소? 마교 놈들은 어떻게든 엮어서 한몫 뜯어가려는 이리떼 같은 자들이라는 것.”
그러니까. 자신도 마인들은 다 그런 줄 알았다.
“맞아요. 거기다 이번에 온 자들은 정말 이상한 자들이에요.”
그에게는 욕처럼 들리겠지만, 칭찬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양석이 솔직히 말해주지 않았음을 알았지만, 한설은 그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 함께 소교주를 만나주시겠어요?”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이안 때문이다.
전에 일을 처리할 때 선택의 순간에 이안이 말했다. 할 만큼 했으니, 다음은 검무극에게 맡기자고.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랄 만큼 좋았다. 이 일도 같은 맥락이었다. 계속 혼자서 만나고 싶은 상대도 아니었고.
양석은 그녀의 제안을 이렇게 해석했다. 소교주를 상대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좀 보태 달라고.
“좋습니다. 북해 문파끼리 힘을 뭉쳐야지요.”
“감사해요.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양석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북해빙궁 소궁주와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마교 놈들 덕분에 동생을 처리했는데, 어쩌면 부인까지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한설은 찬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났다. 찬은 가면서 하결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도 완벽한 호위인데, 자꾸 이질감이 든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자 양석이 하결에게 말했다.
“차가우면서도 매력 있는 여자야.”
“얼음에 혀를 대면 잘 떨어지지 않는 법이지요.”
양석은 차갑게 하결을 쳐다보았다.
그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하결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아버지가 붙여둔 호위였으니까.
한 번씩 그를 보면 기분이 나빠질 때가 있다. 언제나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였는데, 이상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순간이 있다. 지금도 그랬다. 건방진 놈이 어디서 조심하라 마라야. 네놈 혀나 조심해라. 확 잘라버리기 전에.
그때, 무인 하나가 달려와서 양석에게 말했다.
“문주님께서 찾으십니다.”
* * *
“잘하면 소궁주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석이 북혈문주에게 한설과의 일을 보고했다.
“소궁주는 널 통해서 뭔가 알아내려고 온 것이다.”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그녀를 이용해서 저쪽 정보를 알아내겠습니다.”
북혈문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신중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보고 후에 물러나려는데, 북혈문주가 하결을 남겼다.
“자넨 좀 남게.”
양석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이런 순간이 기분 나쁘다. 자신의 보고를 다 들었으면서, 저놈에게 한 번 더 확인하려 들 때.
한설과 관련해서 뭔가 아버지에게 보고를 받겠지. 하여튼 의심 많은 아버지였다.
‘아들을 좀 믿으십시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아들이 나가자 북혈문주는 대청 뒤쪽 비밀 문을 열고 하결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직 둘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엔 작은 대청이 있었다. 사방이 온통 붉은색으로 꾸며진 괴이하고 섬뜩한 곳이었다. 또한, 그곳에서는 짙은 피 냄새가 났다.
대청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 관계는 역전되었다.
하결의 기도는 바깥에 있을 때와는 달랐다. 그의 두 눈과 몸에서는 핏빛 기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렵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아직도 못 구했나?”
하결의 물음에 북혈문주가 공손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좀 전에 기별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극한지체를 지닌 자를 찾아내서 이쪽으로 호송 중이랍니다.”
정말 기다렸던 소식이기에 하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얼마나 걸리지?”
“사흘 후면 도착할 겁니다.”
“사흘 후!”
하결이 이렇게 기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극한지체를 찾는 일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극한지체를 찾아냈으니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순간 하결의 두 눈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으으윽! 그만!”
북혈문주가 두려움 가득한 비명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 양옆에서 붉은 원이 생기더니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것이다.
“살려주십시오!”
북혈문주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조금만 더 부풀면 머리의 혈맥이 터져 죽게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다가, 이윽고 하결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북혈문주의 부풀어 오른 피부도 가라앉았다.
“약속은 극한지체를 내 앞에 데려올 때, 지켜질 거다.”
“알겠습니다.”
북혈문주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과연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그가 순순히 약속을 지켜줄 것인가?
하결에게 당한 건 욕심 때문이었다. 욕심이 허점을 만들었고, 그 허점이 자신의 피에 몹쓸 것을 허용했다.
그래, 망하는 건 언제나 욕심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욕심 때문이었다.
북혈문주는 이조차도 과정이라 여겼다. 지금까지처럼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하결이 차분히 말했다.
“그때까지 마교 놈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교 놈들은 이번 취마 일로 빙궁의 감시하에 발이 묶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하결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마교 소교주가 오늘 이곳에 왔다 갔다. 아주 미세한 느낌이었지만, 내 눈을 피할 정도라면 그자가 틀림없겠지.”
북혈문주가 재빨리 말했다.
“지금 당장 서 장로에게 기별하겠습니다. 어쩌면 놈이 무단으로 나온 이번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단 사흘이니까요.”
북혈문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재빨리 그곳을 나왔다.
돌아선 그의 눈빛에는 운명을 상대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세가 담겨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는 사흘 후에 결정될 것이다.
아니, 이 말이 그의 마음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한 것이리라. 누가 죽고, 누가 사느냐?
한편 홀로 남은 하결은 뒤쪽 벽을 조작했다. 특정한 곳들을 누르고 당기고 또 누르고. 신중하게 장치를 조작하자.
스르르릉.
그러자 문이 열리며 또 다른 공간이 드러났다.
밀실 속의 밀실.
그곳에 거대한 수조가 있었다. 오직 북해에서만 만들 수 있는 얼음으로 만들어져 안이 들여다보이는 특별한 수조였다.
수조 안은 핏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핏물에는 온갖 종류의 약물이 함께 섞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괴이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그 냄새는 오직 취마만이 알 수 있으리라. 이 냄새에 향설빙주의 주향까지 섞여 있다는 것을.
그 수조 안에 한 남자가 잠겨 있었다.
핏물 속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몸은 또렷이 다 보였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긴 팔다리, 환상적인 근육, 그야말로 장인이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남자의 머리카락이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피처럼 붉었다.
피와 만난 그의 육체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결이 수조 속 남자에게 말했다.
“사부님, 드디어 극한지체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핏물 속에 있던 적발의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남자는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결을 압도하는 존재감이었다.
젊어 보였지만 결코 젊지 않은, 이 수조 속 남자가 바로 혈왕이었다.
하결은 혈왕의 무공을 이어받은 유일한 수제자였다.
혈왕이 웃었다. 그가 기뻐하자 핏물도 함께 기뻐하는 것처럼 부글부글 핏방울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갑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돌아오라는 명령이 또 내려왔습니다.”
그러자 혈왕이 말했다. 핏속에서 하는 말이었음에도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똑똑히 들려왔다.
“우린 돌아가지 않는다. 북해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 * *
서낙이 빙궁 무인들을 거느리고 검무극의 거처로 들이닥쳤다.
이안이 문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시죠?”
“소교주 어디에 있나?”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만.”
서낙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소교주가 거처를 벗어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단으로 거처를 떠난 일이 밝혀지면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다.
“잘못 전해진 소식인 것 같네요. 지금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문을 닫으려고 하자 서낙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이안은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 했지만, 서낙은 애초에 작정하고 왔다.
“비켜서게. 궁주님이 내린 명령을 확인하는 일을 방해하면, 그 또한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될 테니까.”
서낙이 고수들과 함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서낙과 싸울 수는 없기에,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서낙이 침상에 불룩하게 올라온 이불을 쳐다보았다.
“보세요, 소교주님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다들 물러가세요.”
이안이 목소리까지 낮춰가며 열심히 연기했지만, 서낙에겐 통하지 않았다.
“목침이 보이지 않는군.”
베개를 넣어서 불룩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미 이곳에 검무극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네가 직접 이불을 걷어내게.”
서낙이 이안에게 명령했다.
이안이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마는 태평한 얼굴로 창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요!’
하긴 이 상황에서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겠지.
“어서! 감히 무엄하게 궁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작정인가?”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침상으로 걸어갔다.
휘리릭.
자포자기한 이안이 이불을 걷었다.
“!”
다음 순간 그곳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검무극이 목침을 안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 추운 북해에서 이불까지 뺏어가시려고 그러시오? 목침까지 끌어안고 자는 걸 보면서 말이오?”
너무 놀란 서낙은 얼굴이 붉어진 채 말까지 더듬었다.
“대, 대체 이게? 자네가 왜?”
다들 놀랐지만, 이 순간 제일 놀란 사람은 이안이었다.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도련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제415회 술자리를 허락하네.
검무극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주 봅니다, 요즘.”
검무극의 말에 서낙은 멍하게 서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
앞서 기세 좋게 밀어붙일 때와 달리 그는 차분했다.
“누군가 그릇된 정보로 서 장로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그게 너잖아!’
서낙은 발끈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
‘나답지 않다.’
소교주에게 말려들면서 요즘 감정조절이 안 되고 있다.
이곳에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그렇다. 더 차분히, 그리고 정중하게 이불 속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또한 침상 속에서 그를 보았더라도 그렇게 놀라선 안 되었다.
“결례를 범해서 미안하네.”
서낙은 예를 갖추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단순히 사과로 끝낼 일이 아니니, 오늘 일은 정식으로 궁주전에 항의하겠소.”
“그러시게.”
서낙은 데려온 무인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들이 떠나자 이안이 검무극에게 소리쳤다.
“대체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네가 서 장로 문 열어줄 때.”
“창문으로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취마를 쳐다보았다.
‘어휴, 누구 형 아니랄까 봐, 오신 걸 아셨으면서 모른 척하셨네요!’
이안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아! 놀랐잖아요! 아까는 심장 터지는 줄 알았어요.”
취마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심장 터뜨리려고 창문에 붙어 있었을 거네. 시기적절하게 들어와서 놀라게 하려고.”
취마의 농담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그럼요, 남을 놀라게 할 수만 있으면 눈바람을 맞으면서도 매달려 있을 분이시죠. 좋아요,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했으니 나가신 성과도 있으셨겠죠?”
검무극을 공격하려고 몰아붙인 말이었는데.
“배후를 찾았다.”
이안은 ‘어이구’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앞서 이불을 걷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정말요?”
“운이 좋았어.”
“정말 사람 놀라게 하는 건 천하제일이시죠!”
검무극은 은밀히 북혈문에 잠입해서 한설이 양석과 만나는 것을 보았다.
다들 그 만남에 집중할 때, 북혈문 내부를 조사할 작정이었다. 한데 양석을 따라왔던 호위 무인이 자리를 비우는 것을 보았다.
평범한 일은 아니기에 그의 뒤를 쫓았고, 그가 시비에게 피를 이용한 혈공(血功)을 거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를 돌봐주는 것처럼 굴다가 순식간에 혈공을 걸었기에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자가 누구죠?”
“북혈문 후계자의 호위 책임자다.”
취마와 이안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놈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럼 일부러 놈에게 정체를 드러내신 건가요?”
아까 서낙은 이곳에 검무극이 없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과연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의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볼 겸, 북혈문과 서 장로가 서로 이어져 있는지도 확인하려 했지.”
“둘 다 확인하셨고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하나 더. 우리가 이곳에 붙잡혀 있는 것도 풀리게 될 거다. 서낙이 신교의 소교주에게 큰 결례를 했으니, 빙궁주에게 우릴 풀어줄 명분이 생긴 셈이지.”
이안은 멍한 얼굴로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럴 때 무슨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어떤 생각이 드는데?”
“아! 도련님과 한편이란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도련님의 적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느냐?
네가 이렇게 밝은 모습으로 내 옆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가?
“어찌나 놀랐는지 덕분에 제 심장이 더 튼튼해졌어요.”
이제 검무극은 취마를 쳐다보았다. 그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술? 아니면 죽은 원주? 아니면 두고 온 여빈?
하지만 다 틀렸다. 지금 취마는 검무극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저리 똑똑할 수 있을까? 어찌 저리 당황하지도 않고 일을 처리할까?
검무극이 없었다면 다 자신이 처리해야 할 일인데, 이런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정말 동생이지만 형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또 하고 있었다.
“형.”
형 아니다. 차라리 동생이라고 해라.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형 같은 동생의 입에서 자신이 너무나도 고대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술판을 벌일 때가 되었어.”
* * *
빙궁으로 돌아온 한설은 궁주전으로 향했다.
“차 마시러 왔어요.”
돌아와서 마시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찾아올 줄 몰랐기에 빙궁주는 당황했다.
“이리 오너라.”
한설이 궁주전에 마련된 다탁에 앉았고, 차는 빙궁주가 직접 탔다.
“제가 탈게요.”
“됐다, 그냥 앉아 있어라.”
빙궁주가 직접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설은 어머니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떤 차인지를 물어볼까? 아니면 북혈문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나? 하다못해 날씨 이야기라도 할까?
공적인 말만 주고받으면서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하는 것도 무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초식이 머릿속에 있어도 몸에 익지 않으면 소용없듯,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말이 입에 붙지 않으니 나오지 않는다.
말은 머리나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하는 것임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사이 빙궁주가 차를 우려 왔다.
“차 맛이 어떠냐?”
“좋습니다.”
말은 이어지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어색하기는 빙궁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딸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빙궁주 역시 평생 안 하던 고민 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냥 조용히 차만 마셨다. 진짜 친한 관계는 침묵할 때 얼마나 어색하지 않은가로 알 수 있다더니, 두 사람은 아직 멀었다. 앞에 놓인 차라도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은 숨 막히는 침묵.
하지만 그렇다고 빙궁주는 아무 말이나 해서 이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어떤 의미에서는 이 어색함이 좋았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한참의 침묵을 깬 사람은 한설이었다.
“궁주님은 비정한 사람과 다정한 사람 중에 누가 오래 살아남을 것 같나요?”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단 질문에 답부터 했다.
“비정한 사람.”
그러자 한설이 옅게 웃었다.
“저와 답이 같으시네요.”
“무인이라면 다 같은 생각 아니겠느냐?”
“소교주와 함께 온 이안이 그러더군요. 자기는 다정한 사람이 오래 살아남을 것 같다고요.”
이안, 왠지 처음 만났을 때 시선이 갔던 아이였는데.
“그냥 궁금했어요. 궁주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 질문 때문이었을까? 빙궁주는 처음으로 마음에 있던 말을 꺼냈다.
“널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휘몰아치는 북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아이로.”
한설이 들고 있던 찻잔 속 차가 한 차례 진동하며 파장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가요? 어머니가 보시기에 그런 아이로 자랐나요?
딸과 대화를 나눠보니 비로소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조금 전에 그 말을 한 것은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 때문이나 검무극 때문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본능은 알고 있었던 거다. 이대로라면 딸을 잃게 되리란 것을. 이미 거의 다 잃었음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이대로라면 자신은 그저 빙궁을 물려주는 궁주일 뿐, 엄마가 아니게 될 것임을.
아마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애써 외면하며.
그러던 차에 검무극이 나타난 거다. 아직 뒤에 서 있을 거란 말이 가슴에 날아와 박히면서, 결국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조금은 민망하지만, 딸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넌 그런 아이로 잘 자라 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냥 한마디 말에 불과했는데. 한설은 마음속에 꽝꽝 얼어붙어 있던 얼음벽 일부가 부서지며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장벽은 거대했지만, 처음으로 깨어졌다는 데 의의가 있으리라.
한설은 들고 있던 차를 다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에는 제가 타드릴게요.”
* * *
남의 집에서 술판을 벌이려면 주인의 허락이 필요한 법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내 말에 빙궁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딸아이가 다녀갔네.”
그 자리가 어땠는지는 빙궁주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자네 덕분이네.”
“저야 말씀만 드렸고, 뒤돌아보신 건 궁주님이시죠.”
빙궁주는 검무극에게 큰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젠 이해한다. 검무극에 관한 보고서 속, 그 믿을 수 없었던 마음의 움직임들을.
“한데 어쩌죠? 궁주님의 이 좋은 기분을 망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검무극이 진지하게 말했다.
“서 장로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충격적인 발언에 빙궁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북혈문에서 혈공을 사용하는 고수를 봤습니다.”
혈공이란 말에 빙궁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자신이 아는 한 북해에 혈기를 사용하는 고수는 없다. 다시 말해 북혈문에서 뭔가 음모가 진행 중이란 의미.
“그가 서 장로와 연결되어 있었지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럼 정황만으로 빙궁의 장로를 죽이겠다는 건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서 장로가 했던 몇 가지 실수와 거짓말까지 보태서 판단해야 하니까요.”
특히 죽은 원주에게 향설빙주를 담아달라고 한 일을 빙궁주에게까지 끝까지 속인 게 결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빙궁주는 서낙의 다른 면을 보기도 했고.
“이들에게서 더 명백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 노회한 자들이죠. 설령 시간을 들여 찾아내더라도 그땐 이미 늦었을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지금 궁주님께서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서 장로가 아닙니다. 그를 안 지 오래돼서 그가 가장 신경 쓰이겠지만, 그는 몸통에 붙은 팔에 불과합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머리와 몸통이죠.”
그녀를 움직인 결정적인 말은 이것이었다.
“이 결정을 내리는 건 제가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궁주님의 나쁜 예감이 우릴 부르신 거죠. 전 궁주님의 그 감이 옳았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이윽고 빙궁주가 결정을 내렸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서 장로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네.”
“물론, 그러셔야죠. 다만 서 장로 문제만큼은 취마님에게 먼저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정황으로 볼 때,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사람이 서 장로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고민이 한 차례 더 있었고, 이번에도 결정은 빨랐다.
“술자리를 허락하겠네. 단, 나도 초대하게.”
* * *
서낙은 대청에서 장식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모든 장식품을 꺼내서 새로 장식하곤 했다.
다시 정확하게 줄을 세웠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줄을 맞춰 세울 때, 그 완벽함이 주는 쾌감이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열중하고 있을 때, 뒤에서 대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원래라면 문이 열리기 전에 누군가 찾아왔다는 수하의 보고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이 저렇게 혼자 열린다는 것은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의미.
밖을 지키던 수하들은 모두 제압되었으리라.
서낙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다 되어 가니까.”
서낙은 마지막 하나까지 완벽하게 줄을 맞춰 세운 후에야 뒤로 돌아섰다.
대청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취마였다.
취마와 눈이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죽이러 왔다.’
서낙이 손님을 맞이하는 탁자에 앉았다.
“기다려 주셔서 고맙소. 자, 앉읍시다.”
취마는 그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서낙은 탁자에 놓여 있던 잔을 하나는 자신 앞에, 다른 하나는 건너편 자리에 놓았다.
“일하느라 힘들어서 그런지 목이 마르오. 한 잔 주시겠소?”
취마는 허리춤에 매달린 혈루를 들어서 마개를 열었다.
향긋한 빙주의 냄새가 퍼져 나왔다. 원주가 죽기 전에 만든 빙주다.
취마가 주향을 깊게 맡더니 자신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부었다.
하지만 서낙에게는 술을 따라주지 않았다.
취마는 혼자 술을 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지자 눈을 지그시 감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빙주를 마시자 원주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났다.
바로 눈앞에서 두 눈까지 감았지만, 서낙은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주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기 때문이다.
천천히 눈을 뜨며 취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죽였소?”
취마는 두 잔째 술도 자신의 잔에만 따랐다.
서낙이 앞에 놓인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술이나 한 잔 주고 묻지. 인정머리 없소.”
이 상황에서도 서낙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자신하겠지?”
취마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다 타성에 젖어서요. 나도 그랬지. 이 북해에서는 나를 긴장시킬 상대가 없었으니까.”
허허실실, 웃고 살았던 서낙이 본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본신의 기도를 드러냈다. 뻗쳐나온 기도는 온 세상을 얼릴 듯 차갑고 강렬했다. 그는 원래 알려진 실력보다도 고수였다.
“타성에 젖는 게 참 무섭지. 당신도 마존이기에 뭐든 이루면서 살았겠지? 원래라면 이길 수 없는 적도 이겼을 테고. 이기고 또 이기고. 알고 보면 상대는 당신이 아니라 마교라는 두려움에 잡아먹힌 건데.”
취마는 서낙의 기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 잔의 술을 또 마셨다.
어느새 그들 주위에는 취마의 주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헛소리는 당신이 지껄이는군.”
취마의 여유에 서낙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는 송곳니를 드러낸 맹수처럼 웃었다.
“그 여자는 나약했지. 몰래 만들어줬으면 끝이지, 그 일을 계속 마음에 걸려 했소.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그러더군. 아무래도 궁주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이제 궁금증이 풀렸소?”
그러자 취마가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소. 우리 같은 인간이 좋은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야 뻔하지 않소? 하찮고 이기적인 이유겠지.”
“그런데 왜 물었소?”
서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바로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궁금하다고 했어요.”
짙은 안개 속을 가르며 걸어와 자리에 앉은 사람은 빙궁주였다.
그녀가 서낙을 응시하며 담담히 물었다.
“그 일도 빙궁을 위한 것이었나요?”
제416회 주정뱅이에겐 손에 잡히는 것이 무기지.
빙궁주의 등장에 서낙은 충격을 받았다.
취마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때보다 더 놀랐다.
“궁주.”
처음에는 조금 전 한 말에 대해 변명을 하려고 했다. 아무리 본색을 드러냈어도 그래도 함께한 세월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빙궁주의 차가운 눈빛에서 어떤 변명도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궁주가 꾸민 일이오?”
“아직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원주를 죽인 것도 빙궁을 위한 일인가요?”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언제나 그렇지. 내 선택은 모두 빙궁을 위한 것이야. 내가 곧 빙궁이니까.”
빙궁주의 두 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빙궁주 앞에서 자신이 곧 빙궁이라는 말은 무례를 넘어 도전이었다.
자연스레 주위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 사이에서 취마는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낙은 이미 술상을 엎었지만 빙궁주는 여전히 예를 갖춰 그를 대했다. 그래도 과거 그가 한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혈공을 쓰는 자들과 손을 잡은 것도 본궁을 위한 일이었나요?”
잠시 사이를 두고 서낙이 나직이 말했다.
“거기까지 다 알고 있었나?”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서낙은 오히려 표정을 굳히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빙궁주는 이런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이 본래의 얼굴을 그렇게 오랫동안 숨기고 살았으리라 생각하니 끔찍하다.
그 여린 원주를 앞에 두고 유서를 쓰게 하는 서낙의 모습을 떠올리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이 왜 그들과 손을 잡았는지 이유는 묻지 않겠어요.”
그녀는 앞서 취마가 서낙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하찮고 이기적인 이유일 테니까요.”
그러자 서낙이 버럭 소리쳤다.
“닥쳐라! 감히 네가!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해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그는 원색적인 분노와 원망을 드러냈다.
“네가 그 자리에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서낙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네가 궁주 자리에 오를 때, 내가 딴마음을 품었다면!”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이 배신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그는 후회하는 거다. 그때 궁주 자리를 찬탈하지 못했음을.
“그래서? 그들이 궁주 자리를 보장해 준다고 하던가요?”
서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빙궁주는 알 수 있었다. 긍정의 침묵이라는 걸. 그런 약속을 받지 않았다면 결코 그들과 손을 잡았을 리 없다.
언제 마음이 바뀌었을까?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기에 여러 의문이 줄지어 나올 것 같았는데, 막상 겪으니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온갖 구질구질한 말들로 서로의 감정만 긁어댈 게 분명했기에. 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는데, 다리 너머를 두고 입씨름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빙궁주가 취마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의 부탁대로 서낙의 처분은 취마에게 맡기려고 마음먹은 그녀였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게 낫다고 여겼고.
취마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래 안 걸릴 겁니다.”
“밖에서 기다리죠.”
빙궁주가 자신이 걸어왔던 안개 속으로 걸어 나갔다.
“다른 사람 마음 따윈 헤아릴 줄 모르는 이기적인 년! 얼음덩어리 같은 년!”
서낙의 악담에 취마는 가소롭게 웃었다.
“왜 웃지?”
“한심해서. 왜 그들이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겠군.”
서낙의 차가운 웃음에 살기가 실렸다. 여전히 그는 겁을 먹지 않았다. 취마와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밖에 빙궁주가 있는데. 대체 뭘 믿기에.
그런 의문을 가지며 취마가 혈루의 마개를 닫았다.
서낙이 혈루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것이 네 독문무기인가?”
다음 순간 취마는, 앞에 있는 탁자를 뒤집었다.
꽝!
서낙의 일장에 탁자가 박살 나던 그 순간.
꽈직.
서낙의 어깨에 의자가 날아와 찍혔다. 취마가 앉아 있던 의자로 그를 내리친 것이다.
서낙은 당황했다. 너무 의외의 공격이었다. 나무 의자에 당할 리 없으니까, 애꿏은 의자만 박살 나서 흩어졌는데, 취마라고 그걸 몰랐겠는가?
취마의 다음 말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주정뱅이의 무기가 달리 뭐가 있겠나? 손에 잡히는 것이 다 무기지.”
취마는 파락호처럼 웃었지만, 서낙은 웃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파락호가 손에 잡힌 의자를 내리쳐 자신을 가격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보검으로 찌른 것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무림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마존을 뽑으라면 독왕이나 극악소마, 섭혼마존 등이 치열한 경쟁을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취마를 첫 번째로 뽑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 서낙에게 그 질문을 한다면?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문제가 되었다.
쇄애애액!
이번에는 서낙이 기습적으로 일장을 내지르며 장력을 발출했다.
취마가 옆으로 가볍게 몸을 틀어서 피했다.
꽈앙!
뒤쪽 대청 벽이 부서지면서 그곳에 놓여 있던 장식장이 박살 났다. 서낙의 시선이 아주 잠깐 부서져서 바닥을 뒹구는 장식품들을 향했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광경이었으니까.
쇄애앵!
두 번째 장력이 날아들었을 때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비명이 들리지 않았으니, 이번 역시 피했으리라.
문득, 서낙은 자신의 몸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안개가 아니라 주기다.’
그랬기에 몸이 알딸딸해지고 나른해졌다. 자연스럽게 경각심이 풀어졌다. 이건 정신력 문제나 내공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몸이 자연스럽게 술기운에 반응했다.
서낙이 내공을 끌어올리자, 양손에서 차가운 한기가 피어올랐다.
‘정신 차려! 취하면 죽는다!’
서낙의 독문무공은 한백신장(寒白神掌)이다.
가볍게 적중당해도 장기에 한기가 들어 평생 고생할 것이고,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온몸이 얼어붙으며 즉사하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이보게, 마존. 비겁하게 안개 속에 숨지 말고 나와서 떳떳하게…….”
쇄애애액!
앞에서 날아든 것을 서낙이 몸을 틀어 피했다.
꽝!
날아가서 뒤쪽 벽을 부순 것은 바닥을 뒹굴던 쇠구슬이었다. 앞서 부서진 장식품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취마는 앞서 말한 것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무기로 사용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서 주운 쓰레기가 무림의 금용 암기보다 더 무섭게 날아든다.
“천하의 마존께서 이렇게 비겁하게…….”
쇄애애애액.
이번에는 등 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돌아서기에는 늦었다. 서낙은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등으로 막았다.
퍼억!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취마의 주먹이었음을.
서낙이 앞으로 내동댕이치듯 날아갔다가 홱 돌아섰다. 등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견딜만했다.
취마는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서 서낙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서낙의 가슴에 섬뜩한 바람이 불었다. 나른하면서도 퇴폐적인 그 눈빛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살기와 광기가 담겨 있었다.
바로 그 순간.
후아아아아아앙!
서낙의 기습적인 장력이 안개를 가르며 휘몰아쳐 날아갔다.
하지만 취마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볍게 피한 뒤,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주기가 넘쳐나는 이곳은 취마의 세상이었다.
고수일수록 더욱 이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작은 차이 하나로 승패가 갈리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연기를 가르며 번쩍이는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쉭! 쉬익!
푹! 푹!
빠르게 날아든 것이 서낙의 어깨와 팔을 찔렀다.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취마의 손에는 비수가 들려 있었다. 너무 빨라서 미처 피하지 못했다.
한발 늦게 일장을 휘둘렀지만 이미 취마는 안개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강하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더 강하다.’
서낙도 빠르게 움직여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안개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몸을 날린 주위의 안개가 흩어지며 그의 모습을 드러냈다.
쇄애액!
꽈아앙!
자신을 향해 날아든 장력을 막아냈지만, 공력에서 밀렸기에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장법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쇄애애애액!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취마의 손가락이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살갗이 뜯겨 나가며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조법(爪法)이다!’
이제 서낙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취마는 온갖 종류의 무공을 다 익히고 있었음을.
주정뱅이의 무공은 이래야 하니까.
치고받고 찌르고 뒹굴고 던지고.
이게 바로 취마의 무공이다.
마구잡이로 싸우는 주정뱅이의 무공이 자신의 뼈를 부수고 살을 뜯어내는 실력인 거다.
취마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앞에서 보란 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더 강해졌다.
서낙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양손에서 피어오른 기운은 푸른색이었는데, 이제 새하얗게 변했다.
한백신장의 초식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초식인 백멸장(白滅掌)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안 피해? 백멸장을 그 자리에서 받는다고? 됐다!’
내심 쾌재를 부르던 바로 그 순간!
서낙은 보았다.
주위에 있던 안개가 순식간에 취마에게 몰려들더니 이내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등을 돌린 채 있는 주신의 뒷모습이었다.
그가 익힌 여러 무공 속에 빛나는 취마의 독문무공이었다.
쇄애애애애액
백멸장이 발출되었다. 바닥을 뒤집고 공기를 찢어발기며 거대한 강기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취마 뒤에 등을 돌리고 있던 주신이 돌아서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취마의 독문무공 주신공(酒神功) 중에서.
네 번째 잔, 주신폭주(酒神暴酒).
주신 모습으로 날아가던 주기가 합쳐지며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콰아아앙!
두 개의 거대한 강기가 충돌하면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으로 대청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취마는 원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반면 서낙은 십여 걸음 뒤로 밀려나 있었다.
주신폭주가 백멸장을 압도하며 완전히 밀어버린 것이다.
서낙의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크에에엑.”
그가 입에서 왈칵 피를 쏟아냈다. 회생 불능의 상처였다.
취마는 독문무기인 혈루을 쓰지 않고서 그를 이긴 것이다. 그도 강했지만, 취마는 더 강했다.
취마가 술을 마셨다. 마지막 한 모금은 원주를 위한 술이었다.
곧 닥쳐올 죽음 앞에서 서낙은 분노했다. 졌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어긴 그들에 대한 분노였다.
“나를 지켜준다고 했는데…….”
서낙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믿었던 건 자신의 실력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때, 그곳으로 새로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약속을 어기진 않았어.”
무엇인가 서낙 앞으로 날아왔다. 그의 앞에 내팽개쳐진 것은 두 구의 시체였다.
들어선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네가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긴 한가 보군.”
두 무인은 이곳 서낙의 거처 은밀한 곳에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무공실력도 실력이지만 은신술과 경공술도 탁월해서 여차하면 서낙을 데리고 달아나려고 준비된 이들이었다.
검무극이 취마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너는?”
검무극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온다!”
안개 너머에서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피이잉!
취마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얼굴을 스치고 무엇인가 지나갔다.
핏방울이었다.
암기처럼 날아온 그것은 분명 핏방울이었다. 평범한 핏방울이 아니었다. 핏방울 모양을 한 혈기였다.
곧이어 핏방울을 날린 상대가 사람을 덮치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동자와 얼굴, 목과 손은 괴이할 정도로 붉었다.
“피해!”
검무극의 외침에 두 사람이 양옆으로 피했다.
콰아아앙!
달려온 남자가 폭발하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튀어나온 피가 무너진 벽을 뚫었다. 자멸공이었다. 죽으면서 발출되는 혈기의 위력이 엄청났다.
이래서다. 검무극이 혈왕을 조심하고, 또 싫어하는 이유가. 그는 수하의 목숨을 이렇게 사용하는 자였으니까.
단지 짧은 시간 자멸공을 익힌 자가 아니다. 이 자멸공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오랜 수련을 통해 키워진 무인이었다. 그 노력 끝에 기다리는 것은 이 한순간의 자멸.
그래서 혈왕과의 싸움은 징글징글한 싸움이 된다.
이번에야말로 물어야 했다.
“괜찮아?”
검무극의 물음에 취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대답하려는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 곳을 향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많다!”
취마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앞에 펼쳐져 있던 안개를 걷어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보았다.
달려오던 십여 명이 일제히 날아오르는가 싶더니.
꽈아앙아앙!
한꺼번에 폭사하며 자멸공을 발휘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키워진 것인지, 그들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예 전방으로만 혈기가 집중되게 만든 자멸공이었다.
피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두 사람을 향해 날아오는 수백 개의 혈기!
그것들은 귀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그 어느 곳으로 피할 수 없이 빼곡하게 날아들었다.
너무 광범위하게 날아들었기에 피할 수 없었다.
취마가 검무극 앞을 막아섰다.
“소교주! 내 뒤로!”
취마는 검무극 앞을 막아서며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두 팔을 교차해서 얼굴을 가렸다.
위기의 순간, 취마는 검무극을 소교주라 칭했다. 이 순간만큼은 동생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천마신교의 소교주였다. 자신은 그를 지켜주는 마존이었고.
취마가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앞서 날아든 핏방울의 위력으로 볼 때, 부상은 불가피했다. 자신은 다치더라도 절대 검무극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이것이 소교주를 모시고 나온 마존의 자존심이었으니까.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날아든 혈기들이 무엇인가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취마가 얼굴 앞에 교차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앞을 올려다보았다. 무서운 기세로 날아든 혈기는 자신에게 닿지 못했다.
눈앞에 무엇인가 세워져 있었다.
햇살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강기의 벽.
혈기는 어느 한 곳 피할 곳 없이 촘촘하게 쏟아져 날아왔지만, 단 한 줄기의 혈기도 이 빛나는 강기의 벽을 뚫지 못했다.
거대한 강기의 벽, 모든 마인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벽.
바로 구화마공 대마벽이 세워져 있었다.
제417회 누군 지옥문도 연다는데.
끝없이 혈기들이 날아와 부딪쳤지만, 대마벽을 뚫지는 못했다.
퍽퍽퍽퍽퍽!
쥐어짜듯 마지막까지 날아든 혈기는 모두 해소되었다.
허공으로 날아올라 자신의 피 대부분을 자멸공으로 쓴 십여 명의 무인은 모두 가슴이 뻥 뚫린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대마벽은 곧장 사라지지 않고 햇살에 반짝이며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취마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등 뒤에 있던 검무극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서서 흑마검을 앞으로 내지른 채 서 있었다.
“저런 공격에 형을 다치게 할 순 없지.”
일반 공격도 아니고, 격렬하게 싸우다 마지막에 쓰는 최후의 절초도 아니고, 이건 보자마자 펼친 자멸공이었다. 뒤에 공(功)이 붙어 있지만 무공이라 할 수 없는 공격이다.
검무극은 이런 공격에 취마의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대마벽을 펼친 것이다.
이 장면은 상징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비열하고 악랄한 악을 더 비열하고 더 악랄하게 없애버릴 수 있는 무림의 유일한 존재, 전 여기서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은 막아낼 수 없는 악을 우린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취마가 대마벽을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였다. 그러자 비로소 대마벽이 서서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그는 검무극을 보며 정중히 말했다.
“고맙소, 소교주.”
구화마공으로 자신을 구해준 이 순간만큼은 형, 동생이 아니라 마존과 소교주의 관계였다. 검무극 역시 고마움을 전했다.
“마존께서 저를 지켜주기 위해서 나서준 일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취마가 몸으로 자멸공을 막으려 했을 때, 검무극은 진심으로 감격했으니까.
그렇게 서로 마음을 나눈 후 검무극은 기를 끌어올려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를 살폈다. 더는 없었다. 이곳 부서진 대청 근처에 은신해 있던 자들은 이들이 전부였다.
그때 바깥으로 향하는 대문이 열리며 빙궁주가 들어왔다.
그녀 뒤쪽 저 멀리 서너 구의 시체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꽝꽝 얼어붙은 시체들이었다.
“몇 놈이 눈에 띄어서 내가 처리했네.”
그녀는 이 싸움에 될 수 있으면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취마에게 우선권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나가 있었던 것이고.
그녀의 시선이 쓰러져 있던 십여 구의 시체를 향했다.
‘한꺼번에 자멸공을 썼구나.’
그녀는 담장 너머로 우뚝 솟아오른 강기의 벽을 보았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경지가 만들어낸 것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소교주는 구화마공을 제대로 배웠구나.’
소교주의 무공이 이러할진대 천마의 무공은 얼마나 대단할지 섬뜩한 경외감이 들었다.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놈들은 북해빙궁의 장로를 포섭하고, 북혈문과도 손을 잡았으며 자멸공까지 서슴없이 쓰는 자들입니다.”
빙궁주는 사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무림 정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그녀였지만, 이런 자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빙궁주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낙에게로 걸어갔다.
취마의 공격에 당한 그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와 손을 잡은 거야?’
빙궁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보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한마디 작별의 말도 해주기 싫었다.
그렇게 돌아서는 그녀에게 서낙이 말했다.
“……한이경(寒梨景)”
순간 빙궁주가 흠칫하며 신형을 멈췄다.
그녀가 다시 천천히 돌아서며 서낙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서낙이 웃었다. 입안에 피가 가득했기에 그 모습은 끔찍해 보였다.
한이경.
빙궁주의 언니였다.
오래전 그녀는 언니와 후계 다툼을 했고, 마음이 여렸던 언니는 자신을 위해 북해를 떠났다. 후계자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이후에 언니를 찾지 않았다.
자신과 얽히는 것이 오히려 언니에게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애써 들춰보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괜히 자신과의 관계가 이어지면 다시 언니가 궁주 자리에 욕심을 부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서였다. 그땐 정말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잊고 지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잊었다.
다시 언니가 생각난 것은 바로 저 검무극 때문이었다.
검무극이 피를 흘리지 않고 후계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잊고 있던 언니 생각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검무극이 해낸 것처럼 평화롭게 후계자 선정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땐, 뭐가 그리 두려웠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언니와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위가 발작했었다.
어쨌든 빙궁주는 언니에 대한 부채감이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이 모든 걸 언니가 누렸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죽어가던 서낙이 그 언니를 언급한 것이다.
‘대체 왜?’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서낙이 말했다.
“난 이경이가 아니라 널 선택했지.”
죽기 직전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회광반조에 든 서낙의 눈은 맑았다.
“보고 싶지 않나?”
더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빙궁주의 손이 하얗게 빛났다.
그를 끝내버리려고 손을 내뻗던 그때.
“가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뭔가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낙이 웃었다. 입안 가득 차 있던 피가 흘러내렸다.
‘이건가? 마지막 복수가?’
뭔가 비밀을 알고 있는데 말해주지 않는 것.
이 순간 언니에 대한 일이 자신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것임을 그는 아는 것이다. 다른 어떤 말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딸이 있으면 어떨까? 이모가 빙궁주라는 사실도 모른 채 평생 살아가겠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어디선가 시비로 고생하면서 살지도 모르지. 아니면 기녀가 되어 웃음을 팔고 있을지도 모르고.”
빙궁주는 그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시비로 살든, 기녀로 살든.”
빙궁주는 서 장로에게 막말하지 않았다. 네 어떤 도발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듯 여전히 정중했다.
“지금껏 잊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궁금해하리라 생각했나요? 이깟 말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낄 줄 알았나요? 당신은 죽을 때까지 어리석군요.”
서낙의 눈가가 꿈틀하며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빙궁주의 손에서 새하얀 기운이 뻗어나가 서낙의 몸을 덮쳤다. 끔찍한 고통이 그의 몸에 퍼져나갔다.
“으아아아아아!”
온몸이 얼어붙으며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죽여달라고 소리쳤다.
“알아도 어디 있는지 말하지 마세요. 괜히 신경 쓰이니까. 입 다무세요!”
그 와중에도 서낙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평생 느꼈던 그 어떤 고통보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
빙궁주는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빛으로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내심 바랐다. 제발 살려달라고, 내가 아는 바를 다 말할 테니 고통을 멈춰달라고 애원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 고통에도 말하지 않고 죽는 걸 보니, 마지막으로 자신을 괴롭히려고 꺼낸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설령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의 농간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으니까.
빙궁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본의 아니게 자네 앞에서 본궁의 치부를 드러냈군.”
“치부라니요? 빙궁주님도 혈육 간에 피를 보지 않고 훌륭하게 후계 다툼을 끝내셨군요.”
“언니가 훌륭했지.”
“그런 현명한 언니시라면,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실 겁니다.”
예의상 하는 말임을 알지만, 그래도 검무극의 이 말이 그녀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빙궁주가 화제를 바꿨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인가?”
“다음은 북혈문을 칠 생각입니다.”
빙궁주는 마음 같아선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북혈문을 확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많은 희생을 낳을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궁주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정찰 삼아 소궁주와 함께 북혈문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딸을 북혈문에 보낸다? 빙궁주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적이 워낙 강력해서 망설여지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게.”
전쟁이 벌어졌을 때, 차라리 검무극 옆에 있는 게 안전하리라는 판단이 든 것이다. 담장 너머 강기의 벽을 보았고, 딸과는 차를 마셨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기에 믿는 거다.
“쓸어버리는 건 궁주님께서 맡아주십시오. 이번에는 궁주님께 우선권을 드리겠습니다.”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마와 소교주가 찾아온 이유는 원주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 죽음을 밝히고 복수까지 했으니, 그들은 돌아가도 그만이었다.
한데, 같이 적과 맞서 싸워주겠다고 하는 거다. 빙궁주는 검무극이 고맙고 든든했다.
“그럼 나중에 보세.”
검무극과 인사한 빙궁주는 취마와도 정중히 작별을 나눴다.
그녀가 떠나자 검무극은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마가 혈루를 검무극에게 건넸다.
“마셔.”
그는 절대 독문병기인 혈루를 남의 손에 넘기지 않았다.
그것을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이 혈루에 든 빙주를 시원하게 마셨다.
“아, 좋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빙주다!”
다시 건네받은 혈루의 술을 취마가 마셨다.
“정말 맛있다!”
일부러 두 사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술을 담은 사람이 저 하늘 어디선가 듣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혈루에 남아 있던 술을 모두 마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취마가 환하게 웃었다.
검무극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저 하늘에서 원주가 그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 *
“걱정하지 마세요.”
뒤에서 들려온 말에 창가에 서 있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말한 사람은 침상에 걸터앉은 한설이었다.
“어머니가 함께 가셨으니까요.”
이안이 창밖을 멍하게 쳐다보자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안은 솔직히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도련님 하시는 일은 걱정 안 해요. 제 걱정만 해도 태산인데, 내일 해가 뜰지 안 뜰지를 왜 걱정하겠어요?”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한설이 말했다.
“초월적 존재니까요?”
이안은 자신을 놀리는 말인 줄 알았다. 하필 저 표현을 해서 두고두고 고통받는구나!
“네, 제겐 초월적 존재니까요.”
언젠가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에 한설이 다시 물었다.
“소교주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나요?”
쉽게 대답하지 못하리라 여긴 질문이지만,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죽을 수 있어요. 지옥문 활짝 열어젖히고 이렇게 말할 거예요. 우리 도련님이 보내서 왔다! 아, 도련님이라면 염왕이랑 친구 돼서 열외 되실 텐데. 저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생하겠죠?”
한설은 고개를 내저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참았다. 며칠 함께 지낸 정도 정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이안이 대신했다.
“미친년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이안의 말에 한설은 ‘알면 됐어요’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환하게 웃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질문은 제일 쉽게 대답할 수 있었어요. 절대 저 보고 죽으라 하실 분이 아니시니까. 죽을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되는 질문이죠.”
한설이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정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렇게 깊은 유대감이 생길 수 있다고?
“당신이 그러면 소교주가 부담스럽지 않겠어요?”
자신이라면 부담스러울 거 같다. 누군가 이렇게 기대하고 쳐다보면, 더 잘해야지, 더 좋은 모습 보여야지. 부담감이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확신하죠?”
“제 그런 말을 부담으로 여기실 만큼 어리석은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냥 좋아하실 거예요. 내가 고생한 보람 있구나, 하고.”
솔직히 한설은 검무극이 부러웠다. 누군가의 절대적인 믿음과 지지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때마침 검무극과 취마가 거처로 돌아왔다. 두 사람을 보자 한설이 다급히 물었다.
“어머니는요?”
“궁주께서는 빙궁으로 가셨소.”
서 장로가 정말 배신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설은 낯설게 느껴졌다. 서 장로의 배신이 낯선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어려서부터 숙부로 대했기에 그녀에게는 큰 어른 같은 존재였다. 한데 그런 사람을 움직이는 사람이 또 있다니. 그렇게나 강해 보였던 사람이었는데.
한설은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그래도 서 장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컸을 텐데.
문득 그녀는 이런 감정이 처음이란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구나.’
놀랍게도 지금껏 어머니를 걱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강한 분이셨고. 이런 걱정을 할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한데 조금 전에 어머니 안부부터 물었고, 또 지금은 어머니가 혹여라도 상처 입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생전 처음 어떤 열기를 느꼈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걸까? 아니,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건가?
이렇게 바뀐다는 것은 더 큰 미움의 감정을 가지게끔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한설은 문득 그런 문제에 관해 검무극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검무극이라면 이러이러하다고 명쾌하게 답을 내려줄 거 같아서였다. 뭐, 그렇다고 묻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죠?”
“우린 서 장로를 죽여서 저들에게 선전포고했소.”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목표는 북혈문이요. 그들을 치기 전에 북혈문에서 왜 극한지체를 구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일 거요. 그들 내부로 들어가면 좋은데.”
그러자 한설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검무극이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말했다.
“일전에 북혈문의 양 공자를 만났을 때, 소교주와 함께 다시 찾아가겠다고 말해두었어요. 함께 가요.”
검무극은 솔직하게 지금의 상황을 전했다.
“굉장히 위험한 일이 될 거요. 방금까지 말을 나누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눈앞에서 자멸공을 쓸 수도 있소.”
마음속에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열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한설은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빙궁의 일이니, 자신이 앞장서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누군 지옥문도 연다는데.”
한설은 미소 짓는 이안을 쳐다보며 힘차게 덧붙였다.
“북혈문은 제가 열죠.”
제418회 취마는 반드시 죽는다.
빙궁주는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마음이 심란한 것을 보면 서낙의 마지막 개수작은 성공했다.
그곳으로 한설이 들어섰다.
“궁주님.”
“왔느냐?”
빙궁주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소교주와 북혈문에 다녀오려고 합니다.”
딸의 말에 빙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상 위험한 일임을 알았지만, 검무극을 믿고 보내기로 이미 마음먹은 그녀였다. 딸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무인으로 성장할 테니까.
사실 한설이 찾아온 건 북혈문에 간다는 보고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혹여라도 서 장로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꼭 말로 표현하시오.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오겠다는 자신에게 검무극이 했던 말이었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그는 자신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자신에게는 생사관의 관문처럼 느껴지는 말이다.
예전이라면 ‘그래, 잘 다녀오너라’라는 어머니의 대답으로 이 만남은 끝이 났으리라. 시선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설은 똑바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느냐?”
잠시 사이를 두고 한설이 말했다.
“괜찮으신가 해서요.”
빙궁주는 느꼈다. 딸이 저 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감정은 서로에게 잘 전달되고 있었다.
“차 한잔하자.”
“오늘은 제가 할게요.”
한설이 직접 차를 우렸다. 빙궁주는 다탁에 앉아 말없이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딸이 우려주는 차는 처음이었다. 그 덕분에 우울했던 마음이 한결 가셨다.
“다 컸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를 우리던 한설의 손이 잠시 멈췄다. 또다시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나이쯤 키워주셨으면, 이렇게나 컸구나, 그런 말씀 한 번쯤 나오게 하는 것도 자식 된 도리 아니겠소?
잠시 후, 한설이 차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처음 마셨을 때보다는 덜 어색했다.
“나는 괜찮다.”
정말 괜찮았다. 서 장로의 배신이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미 그를 의심했기에 마인들을 궁에 받아들였던 거였고.
일부러 상처를 숨기는 기색이 아니기에 한설은 안도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괜히 어색해지기 전에 일어나려 했는데.
“잠깐만 기다려라.”
빙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준비해둔 것을 가져왔다. 그것은 한 벌의 호신갑이었다.
“천궁호갑(天宮護鉀)이다. 입고 가도록 해라.”
천궁호갑은 북해빙궁의 보물로 내려오는 호신갑이었다.
생각지 못한 호신갑에 놀란 한설에게 더 큰 감동이 전해졌다.
“만약 피할 사이도 없이 눈앞에서 자멸공을 쓰면 천궁호갑을 믿고 삭풍빙막(朔風氷膜) 초식으로 얼굴만 보호해라. 그럼 중상은 피할 수 있을 거다.”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한설에게 전해졌다. 그랬기에 인사하는 한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말씀하신 대로 대처하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한설은 천궁호갑을 들고 궁주전을 내려왔다. 제대로 고마움을 전하고 왔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하고 놀라고 감격해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하고 내려왔다.
관계의 변화가 기쁘면서도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봐온 서 장로도 어머니를 배신했다. 앉을 때 마음과 일어설 때 마음이 다른 게 인간인데.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봐 두려웠다. 상처받게 될까도. 너무 오랫동안 상대의 마음을 생각지 않고 살아온 탓이었다.
* * *
하결이 수조가 있는 밀실로 들어섰다.
오직 이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계산된 한기가 오늘도 느껴졌다.
혈왕은 여전히 수조의 핏물 속에 잠겨 있었다. 극한지체를 지닌 이만 도착하면 대법을 마무리 짓고 저곳을 나오게 될 것이다. 이제 불과 이틀 남았는데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한다니.
“서 장로가 죽었습니다.”
하결의 보고에 수조 속에 있던 혈왕이 눈을 번쩍 떴다.
“취마에게 당했습니다.”
그러자 핏물 속에서 들려오는 나직하고 깊은 울림.
“취마는?”
자멸공을 쓰는 혈인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취마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여겼겠지만.
“취마는 무사합니다. 그 자리에 마교 소교주와 빙궁주가 함께 있었습니다. 추측건대 세 사람의 합공으로 자멸공을 막은 듯 보입니다.”
핏물 속에 잠긴 혈왕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자멸공을 쓸 수 있는 혈인 한 명을 키우는데 막대한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게다가 서낙은 빙궁을 온전하게 접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인물이었다. 그랬으니 혈왕의 분노는 당연했다.
수조의 핏물이 더욱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지더니.
잠겨 있던 혈왕이 천천히 수면으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악.
그가 핏물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팔과 몸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혈기는 감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취마를 살려두지 않겠다.”
그가 당장 밖으로 나오려던 그 순간.
하결이 수조 앞에 절을 하듯 엎드렸다.
“참으십시오, 사부님!”
혈왕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하결을 향했다.
“대업을 바로 앞에 두고 계십니다. 이제 이틀만 참으시면 됩니다.”
혈왕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하결은 안다. 이틀이 아니라 한 시진이 남더라도 그는 참지 않을 사람이다. 사부는 피 같은 사람이었다. 그 피는 용암처럼 끓고, 빙하처럼 얼어붙는 피였다.
“부디 이틀만 기다려 주십시오. 저들은 아직 우릴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서낙이 죽은 건 놈들이 백주설원의 원주를 죽인 흉수를 찾는 과정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응징은 이틀 후로 미뤄주십시오.”
하결이 간절히 사부를 말렸다.
혈왕은 하결을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촤아아아아아아.
다시 핏물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이틀 후면 오늘 참았던 분노까지 쌓여서 나올 것이기에, 취마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결이 두 눈에 힘을 주며 각오를 드러냈다.
“북혈문의 모두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틀을 버텨내겠습니다.”
* * *
밀실에서 나온 하결은 곧장 양석의 거처로 돌아왔다.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양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딜 다녀왔나?”
“죄송합니다. 문주님을 뵙고 왔습니다.”
자리를 비울 때면 언제나 문주 핑계를 댔다.
양석은 그런 그가 못마땅했다. 비단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하결을 대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웠고 두 사람은 뭔지 모르게 은밀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찮네. 난 자네 이해하네.”
이제 양석은 작전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자, 이건 그간의 노고를 생각해서 주는 거니 받게.”
양석이 봉투를 건넸다. 하결이 받아서 열어보니 백 냥짜리 전표가 세 장이나 들어있었다. 고생을 한다고 주는 돈치고는 큰돈이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성의니까 받게.”
양석이 억지로 권했고 결국 하결은 못 이기는 척 전표를 받았다.
양석은 하결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역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내는 역할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돈 싫어하는 놈이 어딨다고. 양석은 후회했다. 자신을 감시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는 바람에, 이성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가 천 냥을 주면 자신은 이천 냥을 줄 거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때 수하가 와서 손님이 왔음을 보고했다.
“빙궁의 소궁주께서 오셨습니다.”
“벌써 왔다고?”
다시 오겠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혹시 동행한 사람이 있나?”
“네, 젊은 남자와 같이 왔습니다.”
양석은 그 젊은 남자가 마교 소교주임을 직감했다. 다시 올 때는 마교 소교주를 데려오겠다고 했으니까. 소교주가 안하무인으로 군다더니, 정말 그와의 갈등을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모양이다.
“가세.”
양석이 앞장서 걸었다. 마교 소교주가 어떤 자인지 어서 가서 보고 싶었다.
그를 뒤따르는 하결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교에서 벌써 왔다?’
생각보다 마교의 움직임이 빨랐다. 서 장로를 죽인지 얼마나 되었다고.
‘게다가 양 공자를 공략하겠다?’
제대로 짚었다. 자신이라도 그리했을 테니까.
하결 역시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마교 소교주가 궁금했기에 양석을 따르는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 * *
한설은 검무극과 함께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오늘은 확실한 계획과 작전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 어지간한 일에도 잘 긴장하지 않는 한설이었는데, 오늘은 떨렸다.
그녀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당신은 안 떨려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왜 그렇게 떨리는지 아시오?”
“왜죠?”
“너무 잘하려고 해서요.”
그 말이 맞았다. 완벽한 연기로 계획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좀 못하면 어때. 내가 실수해도 저기 소교주가 알아서 하겠지. 이런 마음을 먹어 보시오. 그럼 하나도 안 떨릴 거요.”
그런 마음을 굳이 먹지 않더라도, 검무극의 말만 들어도 한설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 무인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절대 죽으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을 거라고요. 만약 그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당신이 죽어요. 그래도 내리지 않을 건가요? 마교가 망해도?”
검무극이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맞소. 그래도 안 내릴 거요. 날 그렇게 좋아하는 수하를 죽여야 사는 인생이라면 살아서 뭐 하겠소? 본교도 마찬가지요. 여인 한 명의 생사에 존망이 오간다면, 차라리 망하는 게 낫소.”
한설은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외면했다.
“허풍 아니오!”
알아요. 그래서 더 기분 나빠요.
그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하결은 입구 쪽을 지키고 섰고, 양석이 두 사람에게 걸어오며 밝게 인사했다.
“소궁주, 잘 오셨소.”
“소개해 드릴 귀한 분이 있어서 이렇게 또 찾아뵈었어요.”
그녀가 검무극을 소개했다.
“신교의 소교주이십니다.”
양석이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북혈문의 양석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소, 검무극이오.”
양석은 조심스럽게 검무극을 살폈다.
그는 길 가다 부딪칠 뻔한 시비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성격이었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예의 바르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뭐야, 이놈?’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고 잘생겼다. 우락부락 험악하게 생겼을 줄 알았는데.
“소교주께서 직접 백주설원 원주가 돌아가신 사건을 조사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사건은 조사가 다 끝났소.”
“끝났다고요?”
아직 양석은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흉수는 서 장로였소.”
“설마 서낙 장로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소?”
양석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북혈문주가 모든 정보를 아들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서 장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소.”
양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북해가 발칵 뒤집혔을 텐데.”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우린 소문내면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검무극의 말을 믿을 수 없기에 양석은 한설을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이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서낙의 죽음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검무극이 슬슬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생분이 극한지체를 찾았는데, 왜 찾았는지 아시오?”
검무극이 이렇게 대놓고 물어볼 줄 몰랐기에 양석은 당황했다.
“저는 그 일에 대해 모릅니다.”
“당신은 운이 참 좋은 사람 같소. 후계 다툼을 하던 동생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는데, 후계자가 된 걸 보니.”
비꼬는 말임을 알았기에 양석은 인상을 굳혔지만, 검무극은 계속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긴. 당신은 우리 덕분에 후계자가 되었지.”
양석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나직이 말했다.
“이유가 어쨌든 귀교의 마인 때문에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내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중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다. 사람 죽여놓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우리 때문에 죽은 것 맞소?”
검무극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를 풀어줄 때, 그는 전혀 죽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소. 삶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지. 그런데 고작 납치당한 일로 자결했다? 당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소?”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다 덧붙여 물었다.
“혹시 당신이 죽인 거 아니오?”
자연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설이 검무극을 말렸다.
“증거가 없는 말입니다.”
“원래 흉수를 찾을 때는 그 죽음으로 누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는가부터 살피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심증만으로 처리할 일은 아니지요.”
이 상황에서 한설이 자기 편을 들어 주자 그녀에 대한 양석의 호감이 자연스럽게 커졌다.
이 모든 건 검무극이 미리 계획한 일이었다. 자신은 몰아붙이고, 한설은 그를 두둔하고.
검무극이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객청 입구에 서 있는 하결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검무극은 하결이 시비에게 혈공을 쓰는 모습을 목격했기에, 그가 혈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검무극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하결은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먼발치에서 검무극을 살폈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자신을 압도하는 실력일 리는 없고. 그렇기에 묘한 느낌만 받고 있었다.
검무극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물었다.
“이름이 뭔가?”
“하결입니다.”
검무극이 하결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피 냄새가 짙군.”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하결은 긴장하며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했다.
“호위 무인 전에 낭인 생활을 했지?”
그 물음에 하결은 안도했다. 피 냄새가 난다는 말은 혈공을 익힌 것을 알아차린 게 아니라 호위 무인 같지 않다는 말이었다.
“나는 여러 무인 중에서 호위 무인과 낭인을 정말 좋아한다네. 자넨 그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하결을 맡은 사이, 한설은 오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양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죄송해요, 저 사람을 괜히 데려왔군요.
그 말은 마치 네가 저 마교 소교주를 잘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도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말로 들렸다.
양석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교 소교주에게 욕을 할 수도, 한판 붙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감정이 복잡해졌을 때, 한설이 조심스럽게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몇 번이나 고민했는데…….
―무슨 말이신데 그러시오?
―마교 소교주가 취마와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어요.
앞서 자신을 두둔해준 덕분에 지금 양석의 무의식에는 한설과 한편이란 생각이 있었다.
―말해보시오.
하지만 한설은 계속 망설였다.
―괜찮으니 어서 말해 주시오.
마지막까지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하지만 양석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들에게서 알아낸 정보로는 북혈문주가 후계자를 양 공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어요.
아버지가 후계자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고?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극한지체를 구하는 목적도 새로운 후계자와 관련이 있다고 했죠.
사실과 거짓이 뒤섞이자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 못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였다. 그걸 아버지는 말리지 않고 보고 있었다. 자신의 집안은 그런 집안이었으니까.
―그게 누군지도 말했소?
그러자 한설의 시선이 천천히 객청 입구를 향했다. 검무극에게 붙잡혀 온갖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 사람.
―하결이라고 했어요.
제419회 남의 칼 중에서 제일 무서운.
양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저자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고?’
놀람이 큰 이유는 배신의 충격이 담겨서다. 자연스럽게 그를 엄습하는 한 가지 의심.
‘그래서 저자를 그렇게 자주 불렀던 건가? 나에 관한 보고를 받았던 게 아니라?’
그때 한설이 다시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교의 정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제대로 알아보세요.
검무극이 이렇게 말하라고 했다. 그를 속이려 들지 말고, 함께 공감하고 생각해 주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검무극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마교의 정보는 틀리지 않았을 거요.
양석은 마교의 정보망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북혈문도 마교의 통천각과 같은 정보 조직을 가져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으니까.
물론, 이런 가능성은 있었다.
‘만약 한설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왜 그런 거지? 하결과 자신을 이간질해서 그녀가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또 다른 가능성 하나.
‘마교 쪽에서 의도적으로 소궁주에게 잘못된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다.’
차라리 전자보단 후자이길 바랐다. 한설이 마교와 한편이 아니길 바랐으니까.
정말 그 정보가 사실일 수 있다는 가정까지,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았기에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어떤 수작이고 이유든 간에 나를 얕잡아 봤다. 이깟 술수에는 절대 안 넘어갈 테니까.’
양석의 시선이 검무극과 하결을 향했다.
마침, 검무극이 이쪽을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이 친구, 멋진 친구요. 자, 함께 가세.”
검무극이 하결을 이끌고 한설과 양석이 있는 곳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양석과 하결이 마주 보게 되었다.
하결을 보자 양석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말 너라고? 아버지가 널 후계자로 삼았다고?’
그의 멱살을 틀어쥔 채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결은 양석이 평소와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자신을 후계자로 의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오히려 제멋대로 행동하는 마교 소교주에 대한 반감이라 여겼다. 게다가 저 빙궁의 소궁주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 자리가 쉽지는 않겠지.
검무극은 혼자 신나 목청을 높였다.
“우리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넷이서 다 같이 한잔합시다. 내가 한동안 금주했는데 서 장로가 죽으면서 끝났소. 자,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신나게 마셔봅시다.”
소교주가 마시자는데 양석이 뭐라 하겠는가? 어차피 손님으로 왔으니 접대도 해야 했고. 그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술이 당겼다.
“좋습니다, 술 준비하겠습니다.”
그가 시비를 불러 객청에 술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하결은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문주님을 뵙기로 해서 곤란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검무극과 술자리를 벌이다 자신의 정체를 들킬 수 있다. 대업을 이틀 앞둔 지금, 떨어지는 눈송이도 조심해야 하는데 하물며 상대는 마교 소교주다.
자신 앞에서 동네 아낙처럼 수다 떠는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님을 어찌 모르겠는가?
양석은 그가 물러나는 모습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아까 만났을 때 아버지와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 이후, 쭉 같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그래, 소교주에게 거짓말할 수는 있다. 한데 여긴 자신도 있는 자리가 아닌가?
‘내 눈치 한 번 안 보고 가버린다고?’
검무극이 불꽃이 이는 그의 마음에 불쏘시개를 놓으며 훅훅 불기 시작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재미난 친구라고. 지켜야 할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는 호위 무인이라니? 양 공자가 이해하시오. 이 친구 낭인 출신이라지 않소?”
양석은 오히려 하결을 대변했다.
“본문에서 문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라서요.”
겉으론 웃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자신이 후계자라 여기기 때문에 날 무시하는 건가?’
평소에도 그는 평범한 수하들과 달랐다. 어딘지 모르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묘한 기세가 있었다. 아버지도 그를 다른 수하들과는 다르게 대했고.
‘그 모든 게 정말 그래서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의심하진 않았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기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일을 가장 빠르게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다.
바로, 아버지를 만나 뵙고 확인하는 것.
하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만약 마교에서 알아낸 정보가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어떻게 나올까? 둘째가 눈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아버지인데, 첫째라고 못 죽일까?
양석이 어두운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검무극은 한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말 잘했소.
한설이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정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사람하고 관계는 어려운데,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잘한 것 맞나요? 사람을 이렇게나 잘 속이는데.
―당신이 악녀라서 잘 속이는 게 아니라 똑똑해서 잘 속이는 거요.
―정말 당신은 어떤 말에도 대답이 준비된 사람 같아요.
―나도 똑똑해서 그렇소.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검무극이었다.
그러는 사이 객청에 술상이 차려졌다. 좋은 술과 요리가 준비되었고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양석은 검무극의 잔에 술을 따르며 내심 생각했다.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자는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표를 내지 않고 있다. 역시 만만한 놈이 아니야.’
양석은 두 잔의 술을 연거푸 비웠다.
“오, 양 공자. 술을 잘 하시는구려.”
원래 양석은 주량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술이 물처럼 넘어갔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검무극과 한설이 약속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지금부터 하는 대화가 외부에 흘러나가지 않도록 기를 발출해서 막았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소교주, 신교로는 언제 돌아가시죠?”
“아시다시피 서 장로를 죽여 취마님의 복수를 했으니 우리 일은 끝났소.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빙궁주께서 극한지체에 관해 알아봐 달라고 하셔서 남은 거요.”
검무극은 이런 중요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 이유를 밝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극한지체에 관심 없소.”
검무극이 양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양 공자께서 속 시원하게 극한지체에 대해 알려주시오. 그럼 빙궁주께 전해드리고 나는 이만 교로 돌아갈 테니까. 내게 말하기 싫으면 소궁주에게 말해도 되오.”
“제가 뭘 아는 게 있어야지요.”
양석이 정중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아는 게 없었다.
동생과 함께 극한지체를 지닌 이들을 찾는 일만 했지, 정작 극한지체를 지닌 이를 어디에 쓸 건지 알지 못했다.
문득 아까 한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극한지체를 구하는 목적도 후계자와 관련이 있다고 했죠.
후계자는 나인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렇다는 건 하결과 극한지체가 관계있다는 의미인데?
검무극은 현재 북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 한마디 말로 정리했다.
“하여튼 늙은이들의 노욕(老慾)이란.”
여기서 늙은이들이란 서 장로와 북혈문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이었음에도 양석은 그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반박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명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지금껏 아버지만 믿고 그에 대해 한마디도 묻지 않고 따랐는데.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이 자꾸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했다.
“자, 마십시다.”
검무극은 자꾸 술을 권했다. 어느새 양석의 얼굴은 취기로 붉어져 있었다.
취마의 일로 시작된 북해 일이었는데, 이 순간에도 술은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멸공을 쓰며 달려드는 이상, 이쪽에서도 정당한 방법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한설이 양석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교주에게 그 정보가 사실인지 직접 물어보세요.
―그럼 당신이 내게 그 말을 한 것이 밝혀지지 않겠소?
―난 괜찮아요. 애초에 말을 꺼낸 이상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당신, 이대로 후계자 자리를 수하에게 넘길 건가요?
양석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왜 나를 도우려는 거요?
검무극은 그가 분명 이렇게 물어볼 거라 예상했었다. 이제 그녀가 오늘 해야 할 두 번째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짧지만 강력한 한마디.
―전 당신이 북혈문주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양석은 격정을 느꼈다. 한설에게 호감이 있는 데다가 술까지 취한 상태다 보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희열을 느꼈다.
검무극은 양석의 표정만 봐도 한설이 무슨 전음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른 척 술만 마시고 있는데, 양석이 드디어 칼을 뽑았다.
“소교주, 무인 대 무인으로 묻겠습니다.”
“무섭게 왜 이러시오?”
“정말 아버지가 하결을 후계자로 정하셨습니까?”
검무극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변명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한설을 쳐다보았다.
“당신이군.”
한설은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요. 소교주께서 취마님과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듣고 이 사람에게 알렸어요.”
“우연히 들은 게 아니라 엿들은 거겠지.”
사실 무공 실력으로 볼 때 한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양석에겐 세 사람의 무공 실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었고, 있었다고 해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의 온 신경은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죄송해요. 전 그저 양 공자를 돕고 싶었어요.”
한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는 그녀대로 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천궁호갑까지 입고 온 위험한 임무인데, 놀랍게도 이 순간이 재미있었다. 자신이 이런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양석은 그녀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나섰다.
“괜한 사람 잡지 마시고, 내 문제니 나와 해결합시다.”
그가 술잔을 내밀었다. 남자 대 남자로, 무인 대 무인으로 이야기하자는 표정이었다.
“정말 아버지가 하결을 후계자로 삼은 거요?”
검무극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석을 노려보았다. 앞서 실실 웃으며 말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움이었다.
한설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상반된 반응이 지금부터 그가 하는 말의 신뢰를 높여준다는 것을. 상대를 압도하고 속이는 일은 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에 느낌이 확 달라졌다.
“당신은 몰랐어야 할 사실을 알았소.”
검무극이 이렇게 나오니 양석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인 것만 같았다. 그는 점점 검무극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휩쓸려 갔다.
“내 일입니다. 마땅히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이고.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후계자를 하결로 삼았습니까?”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검무극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소.”
“증거가 있습니까?”
“이번 일에 우리의 모든 정보력을 투입했소. 내 말이 증거요.”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검무극은, 정말이지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양석은 혼란스러웠다. 정말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당신네 문주가 극한지체를 찾으면 당신은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을 거요.”
면전이라 곤란하다고 표현했지만, 그 말은 곧 제거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북혈문주를 찾아가서 확인 못 하게 하려는 의도가 깔린 말이었다.
“그렇기에 본교의 통천각에서도 이번 일을 주시하고 있소. 혈육을 제거하면서까지 다른 누군가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이번에는 혈육을 제거한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썼다. 한마디 한마디에 검무극의 계산이 담겨 있었다.
문득 양석은 왜 아버지가 동생을 제거하는 걸 그리 쉽게 허락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린 극한지체가 아니니까 필요가 없어서?
그의 마음에서 불붙은 의심의 불길은 이제 검은 연기를 내기 시작했다.
“특이한 체질을 찾을 때는 보통 대법을 하려는 것 아니겠소?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대법일지도 몰라, 본교에서는 이래저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소. 덕분에 나만 귀찮아졌지.”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더 기울어졌다. 검무극이 굳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마교 소교주가 뭐가 아쉬워서 이 추운 북해에서 머물겠는가?
“자, 솔직히 말했으니 당신도 극한지체에 관해 아는 대로 솔직히 말해주시오.”
양석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나도 정확히 모르오. 아버지가 중요한 일이니 은밀히 처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오. 아, 이 말씀은 하셨소. 극한지체가 본문을 북해제일문파로 만들어줄 거라고.”
듣고 있던 한설의 마음에 한기가 스쳤다. 저 말은 곧 북해빙궁을 끌어내리겠다는 의미였다. 이들이 지금껏 해온 짓으로 볼 때, 그 방법은 절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럴 계획이라면 너흰 마교가 아니라 우리 손에 지워지게 될 거야.’
검무극이 넌지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당신이 먼저 극한지체를 찾아내면 쉽게 해결될 일이오.”
검무극은 여전히 자신은 크게 관심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덧붙여 말했다.
“알아내면 꼭 연락하시오. 나에게든, 여기 소궁주에게든.”
“그러겠습니다.”
세 사람은 다시 술을 마셨다.
이 순간 양석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극한지체를 가로채고 하결을 없앤다.’
만약 그를 진짜 후계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죽여야 했고, 이 정보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눈엣가시 같았던 수하 하나가 죽는 것이니까. 맞으면 자신을 구하는 거고, 틀렸으면 수하 하나 죽는 일이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자신이 극한지체를 가로채고 하결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그 책임을 피하려면?
양석이 고개를 들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마교 소교주가 극한지체를 가로챈다면? 하결이 마교 소교주 손에 죽는다면?’
검무극을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무림에 존재하는 남의 칼 중에서 제일 무섭고 강한 칼이었으니까.
여기까지가 잔꾀라면, 그는 해서는 안 될 더 무서운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마교 소교주에게 아버지까지 죽는다면?’
이제 그의 마음속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의심과 분노와 욕망이 뒤섞인 불길이었다.
‘이 모든 건 네가 저지르는 일이 될 거다. 그래, 바보처럼 그렇게 웃어라.’
정말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검무극은 환하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대를 보니 북혈문이 활짝 열린 것 같소.”
양석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지 못했지만, 한설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안은 지옥문도 연다는데 북혈문은 자신이 열어보겠다고.
그리고 검무극은 이제 그 문이 열렸다고 그녀에게 말한 것이다.
“자, 북혈문을 위해 건배합시다!”
욕망과 애도가 부딪치는 그 사이로, 감탄의 건배가 더해졌다.
제420회 마교 소교주인데 무서워야지.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검무극은 양석과 오랜 친구처럼 굴고 있었다.
“양 공자, 나와 같이 중원으로 가세.”
“저는 좋습니다. 제 좁디좁은 견문을 넓혀주십시오.”
조금만 더 마시면 호형호제라도 할 기세였다.
술자리 내내 한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애썼다. 양석에게 공감하고 중간중간 편도 들어주고. 그를 이해하려는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에 대해 알 기회였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마음에 없는 말도 할 수 있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떨지 않고, 그 와중에 검무극이 어떤 의도로 저런 말을 할까 살피기도 하고. 참 냉담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른 면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혼자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결론도 혼자 내렸다.
난 이런 사람이야.
하지만 그때 내렸던 결론과 오늘 알게 된 결론은 분명 달랐다.
어쩌면 자신을 알게 된다는 건, 홀로 거울 속을 들여다보면서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그때야말로 진짜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한설이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소궁주는 이만 돌아가시오.”
“소교주께서는요?”
“나는 양 공자와 밤새도록 마셔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석은 검무극의 기에 눌렸다.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지금은 빙궁의 소궁주라도 함께 있지, 대체 뭘 믿고 수하 하나 없이 홀로 이곳에서 술을 마시겠다는 걸까? 독이라도 타면? 술에 취했을 때 암습이라도 하면? 그걸 다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래, 이래야지. 이 정도는 되어야 이 칼로 다 베어버리지.’
양석이 정중히 말했다.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 다음에 또 마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제시키는 양석도 많이 취해 있었다. 스스로는 안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한설이 봤을 때 그는 만취 상태였다. 마교 소교주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자신이 그만큼 취해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을 뿐.
“다음에? 이제 시작인데?”
아쉬움을 표하는 검무극에게 양석은 소리치고 싶었다. 네가 취마냐?
“제가 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아, 이거 아쉬운데. 좋소, 조만간 또 봅시다.”
작별하고 나가려던 검무극이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리고 극한지체 찾으면 꼭 연락하시오.”
“물론입니다.”
검무극은 한설과 함께 북혈문을 나섰다.
술자리에서 가볍게 웃고 떠들던 검무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 밤새워 마실 생각이었어요?”
한설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술도 좋은 사람하고 마셔야 즐겁지. 답답해서 혼났소.”
그러리라 생각했다. 너무 연기를 잘해서 물어본 거였다.
“당신 혼자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소.”
“정말요?”
“지금 상황에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어찌 그대를 혼자 두겠소. 앞으로도 절대 혼자 움직여선 안 되오. 심지어 빙궁에 있는 이안도 취마님과 꼭 붙어 있으라고 했소.”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검무극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혈왕이기에 더 긴장해야 한다.
“북해에서 북해빙궁 궁주 딸을 걱정하다니.”
“그 북해빙궁의 궁주께서는 딸에게 호위갑까지 입히셨지요.”
그 말에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어쨌든 검무극과 함께 걸어가니 왠지 든든했다.
오늘 검무극이 어떻게 양석을 요리하는지 옆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를 속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양석이 검무극을 이용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점이다.
한설이 발걸음을 멈췄다. 검무극도 그녀를 따라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달빛 아래 얽혔다.
“당신, 보면 볼수록 무서워요.”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설령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감정을 감추는 성격이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에게는 솔직해졌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연히 무서워야 하지 않겠소? 마교 소교주인데.”
한설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보며 검무극은 말을 이었다.
“무서워야지. 우리가 상대하는 적을 생각해 보시오. 자신들이 원하는 체질을 찾기 위해 사람을 모아 실험한 후 죽였소. 자멸공을 서슴없이 쓰고, 심지어 혈육까지 죽이는 자들이오. 무섭지 않으면 어찌 그런 자들을 상대할 수 있겠소?”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하는 와중에도 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한설은 역시 적보다 검무극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보다는 차라리 그런 적들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극한지체를 찾으면 그가 연락할까요?”
그러자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연락하지 않을 거요. 극한지체가 자신을 지켜줄 유일한 한 수라고 생각할 테니까. 자신을 더 강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을 테고.”
“그럼 왜 극한지체에 대해 반복해서 말한 거죠?”
“우리에게도 중요한 패라서 그렇소.”
검무극은 양석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고 있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우릴 극한지체로 안내해 줄 거요.”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양석은 문주전으로 향했다.
과음으로 인한 숙취에 시달렸지만,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극한지체를 반드시 빼돌려야 한다.’
아버지가 왜 극한지체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무조건 확보해야 한다. 검무극에게 넘겨서도 안 된다. 극한지체는 자신을 지켜줄 비장의 한 수가 될 테니까.
양석이 문주전으로 들어섰다.
저 앞 태사의에 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런 마음으로 이곳에 들어선 적은 없었는데.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태사의 아래까지 걸어간 양석이 정중히 인사했다.
아버지를 보자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 입이 근질근질했다.
‘정말 후계자를 하결로 정하셨습니까?’
묻고 싶었다. 대체 아들을 버리면서까지 그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원래라면 물어야 할 일이다. 날 어찌 보고 그런 오해를 했느냐, 호통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자신은 그런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다.
사건이 터져서 관계가 망가지는 건 어쩌면 사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사건이 터질 때까지 어떤 관계였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 적어도 이번 경우는 그러했다.
“어제 마교 소교주와 소궁주가 찾아와서 늦게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북혈문주였다.
솔직히 검무극의 방문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이제 하루만 있으면 극한지체가 북혈문에 도착한다. 내일이 지나면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북해의 운명도 바뀌게 될 것이다. 내일이 지나면.
“어떻더냐?”
“소문대로 비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양석은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서 장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혹 우리와 관련된 일이 있는지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북혈문주는 서낙의 죽음을 오히려 내심 반겼다. 혈인들이 손을 잡은 두 사람이 자신과 서낙이었다. 이제 서낙이 죽었으니, 자신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새외 무림이 그렇듯, 북해 무림도 굉장히 보수적인 곳이다.
기존 세력의 도움 없이 새로운 누군가가 자리를 잡는다는 건 중원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게다가 새로운 세력이 크는 것을 마교나 무림맹이 가만히 두고 볼 리도 없었고. 따라서 서낙의 죽음은 북혈문주에겐 기회였다.
양석이 조심스럽게 북혈문주에게 물었다.
“참, 극한지체는 찾으셨습니까?”
“아직이다.”
이 순간 양석은 두 가지 점에서 크게 실망했다.
우선,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아버지가 극한지체를 발견해서 이곳으로 호송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두 번째는 그 거짓말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왔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거짓말한 것보다 그게 더 실망스러웠다.
‘나중에 제 원망은 마십시오.’
양석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단정했다. 어제 검무극이 밤늦도록 쌓아 올린 불신의 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 덕분에 양석은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제 남은 일은 싸워서 살아남는 것이었으니까.
“되도록 소교주와 얽히지 마라. 그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양석이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 나왔다.
오늘 아버지는 솔직히 말해줬어야 했다. 지금 극한지체가 오고 있으니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제야 네게 말하는데 극한지체는 이러이러한 용도로 사용될 거다. 늦게 말해줘서 미안하다.
‘제게 그래선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
양석은 그렇게 앞으로 있을 배신에 차곡차곡 명분을 쌓았다.
* * *
다음 날, 한 대의 마차가 북혈문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매의 마부가 모는 마차 주위로 두 명의 무인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들은 중간중간 말을 교체해 가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목적지인 북혈문이 채 백 리도 남지 않았다.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었다.
천천히 마차가 멈춰 섰고 마부를 포함한 세 무인은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이번 호송의 책임자인 마부석 무인이 두 무인에게 경고했다.
“암습에 대비해라.”
쉭! 쉭!
그 순간 암습에 대비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반대쪽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빠르게 날아든 암기에 두 무인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기습을 감행한 사람은 바로 양석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무림에서 사용이 금지된 금용암기 칠보필살(七步必殺)이었다. 일곱 걸음 내에서 발출하면 반드시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암기였다.
어느새 마부석의 무인은 양석에게 쇄도해 검을 날리고 있었다.
암기 발출이 늦어진 양석은 검으로 맞섰다.
두 사람 사이에 일전이 벌어졌다. 마부석의 무인은 고수였지만 북혈문의 후계자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채 이십여 수가 지나지 않았을 때, 무인은 자신이 양석을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최후의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무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싸우는 와중에 코앞에서 자멸공을 쓰려하자 양석은 크게 당황했다.
피해야 하나, 막아야 하나. 망설이던 바로 그 순간!
퍼억!
무인의 얼굴이 박살 나며 그대로 쓰러졌다. 자멸공을 발휘하기 전에 누군가 강기를 날려 그를 죽인 것이다.
놀란 양석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 하결이 서 있었다.
“너!”
양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이곳에 등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야 호위 역할 제대로 했소.”
하지만 하결이 자멸공을 쓰려는 수하를 죽인 것은 양석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양석을 죽여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북혈문주를 계속 이용하려면 약점이 될 아들을 살려둬야 했으니까.
“여긴 어떻게 온 거냐?”
“그야 나는 양 공자 호위가 아니오? 양 공자 가는 곳에 내가 가야지.”
“헛소리 말고!”
이제 하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양 공자, 마차가 이리로 온다는 건 여긴 어떻게 알았소?”
“그건 내가 물을 말이겠지.”
양석은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들은 놈의 수하들이다.’
아니라면 이곳에 하결이 나타날 리 없었으니까. 자멸공을 쓰는 자를 수하로 쓴다고? 대체 너, 누구냐?
반면 하결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양석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는지.
극한지체를 찾았다는 소식에 급히 호송 임무가 내려졌지만, 그래도 죽은 세 사람은 하결이 믿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을 이용해서 정말 은밀히 극한지체를 호송했는데,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하결은 혹시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양석은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마차의 이동 경로를 알아냈다.
“알다시피 나와 동생은 오랫동안 극한지체를 찾는 일을 맡았다. 그때 주력한 일이 중원 곳곳에서 북해까지 최단 거리의 수송 경로를 만드는 것이었지.”
사람들을 모아서 북해로 데려와 실험해야 했으니까. 실험하고 버리고, 또 실험하고. 정작 실험은 며칠 내로 끝나는데, 데려오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람은 너희 사람을 썼지만, 우리가 만든 수송 경로를 이용했지. 우리가 만든 경로로 달리면서 지역마다 준비해둔 마구간에서 말들을 교체했고.”
그제야 하결은 알 수 있었다. 말을 교체한 기록을 통해 어느 경로로 오고 있는지를 알아낸 것이다. 최대한 일찍 도착해야 했기에 이용한 것인데, 그 점을 알아차릴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똑똑하시오.”
“내가 똑똑했으면 널 진작 제거했겠지.”
하결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 일은 네 아버지도 못 하는 일이야.
“이번 일로 양 공자는 문주께 큰 문책을 받을 거요.”
양석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이번 일을 저지른 건 네가 될 텐데.”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하결과 이들 호송 무인이 싸우다 서로 양패구상한 것으로 처리하려는 것이다. 물론 하결의 숨은 무공실력을 몰랐기에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전에 대체 어떤 자가 극한지체를 지녔는지 보자.”
양석이 마차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하결이 나직이 경고했다.
“그 문을 열면 내 손에 죽을 거요.”
하결의 몸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양석도 기도를 끌어올리며 그에게 몸을 돌렸다. 하결이 숨기고 있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 기도가 대단했다.
아직 기도의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양석은 기가 눌렸다. 하긴, 평범한 놈이었다면 아버지가 선택하지도 않았겠지.
그의 실력에 놀란 양석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음을 또 한 번 실감했다.
‘이 자는 소교주 손에 죽게 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검을 버려야 하나? 앞서 자신을 구해준 걸로 봤을 때,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게 두 사람이 대치하던 그때였다.
두 사람 주위로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에 가끔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하결이 안개 속에서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
양석 역시 안개에 깃든 술 냄새를 맡았다. 안개가 아니라 주기임을 알아차리고는 하결이 소리쳤다.
“취마다!”
하결의 시선이 마차를 향했다. 어느새 마차는 안개 속에 휩싸여 있었다.
“마차를 지켜!”
하결의 외침에 양석이 검을 뽑아 들고 마차로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잉.
마차를 휘감았던 안개는 불어온 바람을 따라 흩어져 사라졌다.
양석이 검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었다. 안을 확인한 양석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검무극이 양석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찾으면 내가 연락하라고 했잖아?”
제421회 추위는 나도 잘 견디는데.
양석의 입에서 ‘어이쿠’하는 외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정말 너무 놀라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마차 안에 검무극이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다.
“왜 연락 안 했냐니까?”
검무극의 물음에 양석이 뒤늦게 변명했다.
“그게… 저도 갑자기 알아낸 것이라서. 연락드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찾아낸 후,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었지요.”
얼마나 당황했으면, 양석은 목소리가 떨렸고 말까지 더듬었다.
“한데 소교주께서는 어떻게 알고 이곳에 오신 겁니까?”
“어떻게 알았을까?”
문제를 내듯 되묻는 검무극을 보며 양석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알긴. 내 뒤를 밟았겠지. 젠장! 날 믿지 못해서 감시한 것이 틀림없다.’
검무극을 극한지체로 안내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던 거다.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이동 경로를 알아냈다는 기쁨에 너무 흥분한 탓이다.
검무극의 등장에 놀란 건 양석만이 아니었다.
뒤쪽에 서 있던 하결은 양석보다 더 놀랐다. 검무극이 마차 안에 있어서가 아니다.
‘극한지체를 지닌 사람을 빼돌렸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앞서 취기가 깔렸을 때 취마가 빼돌린 것이 틀림없다. 지금 당장 취마의 뒤를 쫓아야 한다.
‘이쪽으론 오지 않았으니까. 저 마차 뒤쪽. 반대쪽이다.’
그가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양석을 향해 다가가는 척하다가 단숨에 마차를 넘어 취마를 뒤쫓을 생각이었다.
사람을 안고 빠져나가고 있을 테니, 잘하면 잡을 수도 있다.
소교주고 양석이고, 지금 하결의 머릿속에는 오직 극한지체뿐이었다.
검무극은 그런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어차피 못 간다. 시도도 하지 마라.”
검무극의 경고가 떨어지는 순간, 오히려 하결은 몸을 날렸다.
파앗!
가볍게 땅을 박차고 도약한 하결의 경공은 검무극의 경고를 무시해도 될 만큼 훌륭했다.
순식간에 마차를 뛰어넘어 날아가려던 그때.
파앙!
허공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고, 하결은 원래 있던 자리로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공간을 순간적으로 이동하듯 순식간에 자신 앞을 막아선 검무극이 일장을 날린 것이다.
공격을 막은 하결의 왼팔이 욱신거렸다.
‘강하다.’
이번에는 당한 하결보다 양석이 더 놀랐다. 마차 지붕을 뚫고 올라가서 막았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을 거다.
한데 검무극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졌고, 어느새 마차 위 허공에서 하결을 막은 것이다. 언제 마차에서 내려서 위로 날아올랐단 말인가?
여기 세 사람 중 가장 무공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래도 자신은 북혈문의 후계자가 아닌가? 검무극의 움직임을 두 눈 뜨고 놓쳤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거란 의미다.
하결을 원래 자리로 보낸 검무극은 마차 지붕에 걸터앉아 있었다.
“호위란 자가 모시는 사람 머리 위를 넘어가면 되겠나?”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차 옆에 서 있던 양석을 의미했다.
양석이 일러바치듯 소리쳤다.
“저자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차도살인을 실행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자신이 빼돌리려던 극한지체는 사라졌지만, 저 하결을 죽일 기회가 온 것이다.
“소교주님! 부디 바라옵건대 놈에게 이 무림에는 지엄한 상하(上下)가 존재한다는 엄중한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하결은 차갑게 조소했다. 자멸공에 죽을 걸 살려줬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것이다.
“처음 볼 때부터 내가 피 냄새가 난다고 했지.”
검무극의 여유에 하결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미 늦었다.’
극한지체를 데려간 사람이 일반 무인이라면 모를까, 취마가 데려간 것이라면 이미 추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렸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변수가 발생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검무극과 취마가 원주의 죽음에만 신경 쓴다고 방심한 탓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소교주와 담판을 지어서 극한지체를 되찾아야 한다.’
그 방법은 두 가지였다. 일단, 한발 물러나서 천천히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지만 극한지체를 찾을 가능성은 시간이 갈수록 희박해질 것이다.
문제는 사부다.
‘과연 사부께서 기다려 주실까?’
수조 속에서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사부였다. 극한지체를 검무극에게 빼앗겼다고 보고하면, 당장 수조 속을 나오고 말 것이다.
‘결국 이 자리에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과연 이 소교주를 이길 수 있을까?
조금 전 보여준 한 수는 정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이 마교 소교주를 함부로 죽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랬다간 극한지체를 구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고수가 되면 될수록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인데.
그가 이 골치 아픈 상황에서 갈등하는 사이 검무극은 마차 지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칼자루도 이쪽에서 쥐었고. 먼저 몰아붙일 게 아니라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면서 대응하면 된다.
유리한 국면임에도 일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조급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서다. 유리하기에 이길 것 같고, 더 잘 될 것 같고. 그래서 더 빨리 좋은 결과를 보고 싶은 그 단순한 욕망.
단순하기에 강력한 그 욕망을 참아야 한다.
유리한 상황에서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유리했기에 더 급해지고, 더 아쉽고, 더 화나고. 게다가 상대는 역전의 기세까지 올릴 테고. 결국 다 망쳐버리는 거다.
이럴 때 보라고 하늘이 있는 거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검무극의 모습을 보며 양석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날 보지 말고 하늘을 보시오.”
“아, 네!”
검무극의 말에 양석은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하늘이 눈에 들어올 리 없는 그였다.
‘제발 죽여주시오!’
일단 하결부터 없애고 생각하는 거다. 차도살인지계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지금 검무극을 혈왕에게 데려다주는 안내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때 주위 공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결이 감춰두었던 기도를 드러냈다.
앞서 양석에게는 반의반 정도 드러낸 기도를 완전히 다 개방한 것이다.
뜨거우면서도 무거운 그의 기도가 주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말 그의 기도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이 섬뜩한 기도에 양석은 토할 것 같은 공포심을 느꼈다. 그가 고수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고수일 줄이야.
‘이거 혹시 소교주가 지는 것 아닌가?’
사실 그의 안목으론 누가 더 강한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을 드러낸 하결의 존재감이 그만큼 대단했던 거였다.
양석을 두렵게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하결의 뒤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던 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모두 일곱. 눈빛과 서 있는 자세만 봐도 고수임을 알 수 있는 그들은 모두 자멸공을 쓸 수 있었다.
하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예를 갖췄던 말투도 바뀌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 어디에 있나?”
그는 이곳에서 소교주를 압박해서 극한지체를 찾겠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검무극은 그의 선택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자신의 진면목을 전부 드러내야 할 만큼 극한지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추위는 나도 잘 견디는데, 날 데려가는 건 어때?”
이 상황에서 장난을 쳐? 검무극을 향한 하결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마교 소교주라고 내가 못 죽일 것 같지?”
“아니. 너희는 혈육도 죽이는 자들이잖아? 죽일 수만 있다면 우리 아버지도 죽이려 들겠지.”
그 말에 옆에 서 있던 양석이 내심 움찔했다. 검무극이 말한 혈육도 죽이는 자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하결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원하는 것이 뭐냐?”
마차에 남아 있었다는 건, 원하는 게 있다는 의미. 과연 검무극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네가 모시는 사람 만나게 해줘.”
하결은 겉으로 표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동요했다.
‘사부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양석은 순간 그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오해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이제 그는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서슴없이 했다. 이곳에 하결이 나타나는 순간, 아버지는 완전히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느 쪽에 붙어야 하나?’
하결이 이렇게 대단한 고수라는 사실을 알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하결에게 붙는 것도 최악의 선택은 아니었다. 맨 처음 수하까지 죽이면서 자신을 구한 걸 보면 자신을 죽일 것 같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하결에게 붙어야 하나? 아니야. 그러다 놈이 소교주에게 당하면?’
자신은 소교주를 배신한 셈이 된다.
하지만 이내 양석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싸우지는 않겠지?’
생각해 보라. 마교 소교주라는 귀한 신분인데, 굳이 함부로 목숨을 걸겠는가? 마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도 아닌데.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거절한다면?”
사부를 만나게 해줄 리 없는 하결이었다.
그러자 검무극은 담담히 말했다.
“그럼 널 살려둘 유일한 이유가 사라지겠지.”
하결은 검무극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다.’
그렇다면 죽일 자신이 있다는 의미인데?
하결이 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 취마가 돌아온 것이 아닌지 살펴본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무극 혼자서 자신을 죽이려는 거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마음만은 검무극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천마의 아들이라도, 아직 너무 젊은 그였으니까. 천마의 무공을 이어받고 나이보다 많은 내공이 있더라도, 경험만은 어쩌지 못할 터.
더구나 자신이 익힌 혈공을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해보자.’
마교 소교주가 극한지체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소교주를 제압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극한지체를 내놓을 거다.
만에 하나라도 그 과정에서 검무극이 죽으면? 그땐 어쩔 수 없이 그 책임을 북혈문주에게 뒤집어씌워야겠지. 극한지체를 찾을 수만 있다면 해볼 만하다.
“우리 소교주께서 피 맛을 좀 보셔야겠소.”
일곱 명의 혈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일제히 뽑아 든 검에서 붉은 기운이 흘렀다. 혈기를 검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고수들.
하결은 그들의 합공이라면 검무극을 죽이진 못해도 적어도 상처는 입힐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운이 좋으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검무극을 제압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번쩍하는 순간, 검무극이 점멸보로 왼쪽에 있는 혈인에게 쇄도했다.
쉬익! 서걱!
한 줄기 바람 소리와 목뼈가 잘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막을 수 없었다.
번쩍하고 눈앞에 나타난 검무극의 공격을 본능과 머리에 전하기도 전에 검은 이미 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그와 가장 가까운 혈인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검은 허공만 갈랐다. 하지만 그 빗나감에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심장이 찔린 두 번째 혈인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검무극은 이미 암영보를 발휘하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검무극은 가운데 서 있던 두 혈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푹! 푹! 푹! 푹!
검무극은 좌우에 있는 두 혈인의 목과 심장을 연속해서 찔렀다. 좌측 심장에 한 번, 우측 목에 한 번, 좌측 목 한 번, 우측 심장 한 번.
그 네 번의 공격은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두 혈인이 그대로 쓰러졌고, 다섯 번째 혈인이 자멸공을 쓰기 위해 얼굴과 몸이 붉어지던 바로 그 순간.
퍼어어어엉!
혈기에 쓰러진 사람은 또 다른 혈인이었다.
검무극이 자멸공을 쓰는 혈인을 순식간에 제압하며 인형처럼 돌려서 그의 몸이 다른 혈인을 향하게 한 것이다.
여섯 번째 혈인은 자멸공에 당한 채 쓰러졌다. 자멸공으로 내뿜어지는 혈기는 그들 자신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일곱 번째 혈인도 자멸공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무극이 한 발 더 빨랐다.
푹푹푹푹푹!
흑마검이 그의 전신을 연이어 찔렀다. 순식간에 온몸의 주요 혈맥이 모두 끊어지자, 붉어진 얼굴이 다시 원래 색을 되찾았다. 자멸공을 쓰는 속도보다 검무극의 검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렇게 눈 깜박할 사이에 일곱 모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양석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껏 실전도 여러 번 경험해봤고, 남들 싸움도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했던 싸움은 싸움도 아니었다고.
검무극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촤아아악. 바닥에 일직선으로 피가 뿌려졌다.
“피 맛이 별로인데?”
하결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마교 소교주니 강할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강하다고?
피 맛을 보여주겠다고 자신했지만, 검무극의 피 맛을 자신이 본 셈이었다.
“역시 구화마공이군.”
당연히 천마의 무공이라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구화마공 아닌데? 너희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고작 네 수하들을 상대하는데 구화마공까지 사용할 줄 알았나?”
“독문무공을 쓰지 않은 실력이 이 정도라고?”
하결의 충격은 당연했다. 그냥 수하들이 아니었으니까. 저들 일곱을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저들은 이렇게 죽을 이들이 아니었다.
“구화마공을 보고 싶으면 네 수장에게 안내하라니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검무극을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허풍일 수도 있다. 겁을 먹게 해서 싸움에서 우위에 서려는 수작.
어쨌든 사부에 대해 말해 주지 않는 한, 자신을 그냥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사부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다.
하결이 검을 뽑았다. 그의 검에서 한 줄기 붉은 기운이 날을 따라 흘렀다. 앞서 수하들의 검에 흐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 느껴졌다.
“구화마공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내가 확인하면 되겠지.”
자신을 향한 차가운 눈빛과 주위를 휘감는 뜨거운 혈기로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음을 각오했음을.
“그럼 살짝 맛만 보여주지.”
검무극의 입에서 하결이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동서남북 중 어느 방향을 좋아하나?”
제422회서쪽을 좋아한다고?
생사결전을 앞두고 이런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겠는가?
동서남북 중 어딜 좋아하냐니.
‘이건 심리전이다.’
당연히 하결은 검무극의 물음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이라 여겼다. 그렇다면? 여유 있게 받아주지.
“서쪽을 좋아한다.”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저런. 왜 하필 서쪽을? 잘생긴 녀석도 있고 영리한 녀석도 있고, 신비한 녀석도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결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저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소교주, 헛수작은 거기까지만 부려라. 내겐 안 통하니까.”
겉으론 여유를 부렸지만, 그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앞서 일곱 수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인 건 말로 죽인 게 아니었으니까. 저 입에 현혹되는 순간, 검이 심장을 관통하게 되리라.
‘대체 무슨 수를 쓰려고?’
검무극은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보려고 했다.
구화마공의 인멸식을 발휘하면서 서쪽의 악귀만 등장시키려는 거다. 베지 않고 등장만 딱! 하결을 당장 죽일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살려서 혈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가능할까?’
구화마공의 경지가 상승하면서 이제 제법 악귀들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어서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이내 검무극은 검을 거뒀다.
“마음이 바뀌었다.”
무공과 관련한 본능이 그 선택을 말렸다. 하나의 악귀만 출현하게 하는 것까진 가능한데, 상대를 죽이지 않는 건 악귀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 적을 죽이지 않는데 구화마공의 악귀를 출현시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검무극은 새삼 느꼈다.
‘이제 그들과 유대감을 느끼고 있구나.’
바람 계곡에서 수련하며 그들을 불러냈을 때, 악귀들은 곧장 사라지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들에게 감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 중 영리해 보이는 녀석은 사라지기 전에 헤어짐의 아쉬움까지 보였으니까.
“내가 경솔했다. 미안해.”
하결은 자신에게 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그 말은 검무극이 악귀들에게 한 말이었다.
검무극이 뭐라고 하든 하결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자신의 본성을 끌어올렸다. 북혈문에서 양석의 호위를 하면서 묻어두었던 본성이었다.
그는 거칠고 잔혹한 사람이다. 수하들에게 자멸공을 심고, 수련 중 능력이 부족한 자는 서슴없이 터뜨리며 남은 자들을 공포로 세뇌했다. 목표한 바가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뤘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날 죽일 수 있을 때 죽였어야지!”
하결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자신을 쉽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두 사람의 검이 허공을 부딪쳤다.
교차한 검 너머 검무극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너스레를 떠는 소교주였는데, 싸움이 시작되자 눈빛이 바뀌었다.
부딪친 흑마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에 숨이 막혔다. 그에 저항하며 하결의 검에서는 더욱 강한 혈기가 뻗어 나왔다.
두 사람의 검이 연속해서 맞부딪치면서 불꽃을 일으켰다.
하결은 빠르고 강했다. 그의 무공은 검술과 혈공이 합쳐져 있었는데, 혈공을 빼고 검술만으로도 훌륭한 실력이었다.
“죽어라! 이 마교 놈아!”
하결의 눈이 길게 찢어지며 살기를 뿜어냈다. 마기에 반응하면서 그의 감정이 격렬해졌다. 엄청난 혈기가 검무극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끝없이 뿜어지는 혈기는 대성을 이룬 천마호신공이 지켜주고 있었다. 검술 역시 검무극이 우위에 있었다.
하결은 공격 속도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검을 내질러도 검무극은 다 막아냈다.
한 수, 한 수에 강력한 내공이 깃들어 있기에 검이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하결은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내공에서도 밀린다는 것을 격돌하면 할수록 알 수 있었다.
더는 버티지 못한 하결이 훌쩍 뒤로 물러났다. 빠르게 뒤쫓는 대신 검무극은 차분히 물었다.
“네가 모시는 사람 만나게 해달라니까. 네가 여기서 죽어버리면 그 사람은 누가 지켜주냐?”
검무극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하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단순한 수장이 아니다.’
혈육이거나 사부이거나.
하결의 몸에서 뻗쳐나오는 혈기가 더욱 거칠어졌다. 싸움이 진행될수록 그의 피는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쇄애애애액!
하결의 검에서 혈기가 발출되었다.
검무극 역시 피하지 않고 검기를 발출해서 맞섰다.
콰앙!
검기와 혈기가 충돌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결은 미친 듯이 혈기를 발출했다.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죽어!”
하결이 악을 쓰며 혈기를 쏟아부었다.
지축이 흔들리고 땅거죽이 뒤집힐 위력이었지만 검무극은 그 자리에 서서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혈기를 쏟아붓던 하결은 공격을 멈추고 거친 숨을 헐떡였다. 반면 검무극은 평온한 모습으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결이 검무극에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허용한 이유가 있었다. 이윽고 검무극의 뒤에서 소리 없이 날개가 펼쳐지듯 붉은 기운이 펼쳐지더니.
후우우욱.
그 붉은 기운이 먹이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검무극을 감싸며 덮어버렸다.
하결의 독문무공 만사혈공(萬邪血功)의 비기 결인혈막(結人血膜)이었다.
‘걸렸다!’
결인혈막에 상대를 가두는 데 성공하면 상대는 그 안에서 질식해서 죽게 되는 비장의 한 수였다. 어떤 수를 써도 혈막을 찢고 나올 수는 없었다.
과연 알에 갇힌 것처럼 검무극은 혈막 안에서 꿈틀거렸다.
“거기서 뒈져라! 소교주!”
그는 혈기에 반쯤 지배당한 상태였다. 극한지체를 찾아야 하는 목적과 마교 소교주를 죽였을 때의 후폭풍보다도 그저 상대를 죽이고 싶은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하결이 피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양석을 쳐다보았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결은 당장에라도 달려와서 자신을 죽여버릴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혈막 속에서 푸른색 빛이 빛나는가 싶더니.
푸욱.
푸른빛이 막을 찢고 나왔다. 검강이 서린 흑마검이었다.
막이 찢어지는 순간 하결이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악!”
푸른빛 검강을 머금은 흑마검이 혈막을 옆으로 쭉 찢었다.
찌이이이익.
하결이 비명을 내질렀고, 혈막이 살아있는 것처럼 요동쳤다.
찢어진 혈막 사이로 검무극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나 답답한 것 싫어해.”
그러면서 찢긴 혈막을 거칠게 양손으로 잡아 뜯었다. 한 번 찢긴 혈막은 검무극의 손으로도 찢겨나갔다.
하결의 비명이 극에 달했을 때.
퍽, 하면서 결인혈막이 사라졌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하결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검강으로도 찢을 수 없는 것인데.”
“앞으론 그 무공 전수하면서 꼭 전해라. 마교 소교주에게는 안 통한다고.”
그 말에 하결의 몸에서는 피 냄새가 더 짙어지기 시작했고 두 눈에 핏물이 차올랐다. 붉은 기운이 서리는 게 아니라 정말 핏물이었다.
이제 혈기는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완벽한 혈인이 되지 않으면 검무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서 피 구슬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피 구슬이 떠오르더니, 작은 비수 모양으로 바뀌었다.
쉭쉭쉭쉭쉭쉭쉭쉭!
또 다른 그의 비기.
비도혈우(飛刀血雨).
수십 발의 암기가 검무극을 향해 쏟아졌다. 검무극이 달리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파팍!
쏟아지는 핏빛 비수 사이로 검무극이 놀라운 경공을 발휘했다.
지켜보던 양석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걸 어떻게 피하지? 라는 생각은 이미 검무극이 피한 후에 뒤따랐다.
쏟아지는 핏빛 비수들을 피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렇게 비수를 모두 피하고 내려섰을 때, 새로운 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비도혈우는 이 한 수에 빠뜨리기 위한 수법이었다.
촤악! 착! 촤아악! 촤아아악.
검무극 주위 사방에서 붉은 선들이 생겨났다. 혈선은 검무극을 가두며 거미줄처럼 주위를 포위했다. 마치 뇌옥에 갇힌 것처럼, 붉은 선 안에 갇혔다.
분체혈망(分體血網).
“움직이지 마. 혈선을 건드리면 죽는다.”
“입은 움직여도 되나?”
지켜보던 양석은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이라니?
반면 하결의 눈동자에 서린 핏물은 더욱 새빨개졌다.
스스스스슷!
혈선들이 검무극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수십 가닥으로 잘라 시체조차 못 찾게 해주마!”
사방의 혈선들이 검무극을 절단할 기세로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검무극은 차분했다. 흑마검에 내공을 주입하자 푸른 빛의 검강이 서렸다.
“네 무공이 내 내공과 흑마검을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파파파파파팍!
흑마검이 사방을 베었다.
치치치직! 뚝! 뚜욱!
사방의 혈선들이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이 순간, 하결은 마지막 비기를 발휘했다. 선천진기의 절반을 사용해야만 하는 만사혈공의 마지막 한 수.
그의 손에서 핏방울이 올라오더니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혈선을 잘라내고 나오는 검무극 앞에서.
퍽.
나비가 터졌다.
비접혈독(飛蝶血毒).
사부는 말했다. 비접혈독은 무형지독과 맞먹는 위력을 지닌 독이라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라고. 대신 선천지기의 반을 사용해야 했다.
혈접(血蝶)이 터지면서 검무극 주위는 완전히 붉은 연기에 휩싸였다.
하결은 더는 소교주가 버티지 못할 거로 확신했다. 그랬기에 비로소 그의 시선이 양석을 향했다.
“너 때문에 마교 소교주가 죽었다.”
양석은 억울했다. 자기가 죽였으면서 왜 책임을 이쪽에 지우는 건가? 하지만 감히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아직도 하결의 두 눈은 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존들이 몰려와서 북혈문을 쓸어버리겠지.”
그때 양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예상 못 하고 이번 일을 저지른 거냐?”
하지만 양석이 놀란 이유는 하결이 했던 말 때문이 아니었다. 하결 뒤쪽 붉은 연기 속에서 검무극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하결은 경악했다.
‘혈독에서 살아나온다고? 대체 어떻게?’
사부에게 배웠던 모든 절대적인 진리가 오늘 다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잠깐이라도 검무극이 죽은 후를 걱정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눈앞에 서 있는 검무극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에 이르렀다.
“너는 내가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것, 알고 있지?”
“그래.”
“진작 나를 죽일 수 있었지?”
“그래.”
“왜 위험을 감수한 거지?”
단지 사부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 살려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과연 검무극이 이 싸움을 길게 가져간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혈공에 익숙해지려고. 네 배후도 같은 무공을 쓸 테니까.”
“!”
순간 하결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장난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그래서 잊었다. 이자가 얼마나 치밀하고 무서운 자인지.
“내가 졌소.”
하결이 자포자기하듯 고개를 숙였다. 말투도 공손해졌다.
“살려주시면 배후가 누군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하겠소.”
“진작 그럴 것이지.”
검무극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검무극이 다섯 걸음 앞까지 걸어왔을 때 하결의 표정이 달라졌다.
“멍청한 놈! 내가 순순히 알려주리라 여겼나?”
하결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이 거리에선 내 자멸공을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는 검무극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검무극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는 순순히 네 말을 믿을 줄 알았나?”
“뭐? 그럼 왜 다가온 거지?”
“왜긴. 여전히 연습 중이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네 배후도 이런 수작을 부리겠지?”
“이 새끼야! 뒈지면서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보자!”
순식간에 하결의 얼굴이 붉어졌고, 자멸공을 사용했다. 다른 수하들보다 빨랐다. 위력 역시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리라.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놀란 하결이 자멸공을 중단했다. 억지로 중단하는 바람에 기혈이 얽히면서 피를 토했다.
그러자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공이환술을 열어서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던 거였다.
무공에 있어 상성을 따지자면 그야말로 극과 극에 있는 두 무공이었다.
“네가 아무리 빨리 자멸공을 써도, 나보다 빠르진 않을 거다.”
하결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리 자멸공을 쓰려했다.
하지만 구결을 모두 외웠을 때, 이미 검무극은 사라진 후였다.
“넌 대체…….”
말을 잇지 못하고 하결이 다시 피를 토했다. 이번에도 억지로 자멸공을 멈추는 바람에 아까보다 더 많은 피를 토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아무 의미 없이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큰 부상을 입힌 무공은 자멸공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하결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어느새 검무극은 다시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무인이 졌으면 그냥 죽는 거지, 이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짓이냐?”
검무극이 하결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동자에 가득 찬 핏물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그 심연을 들여다보며 검무극은 차분히 말했다.
“왜 배후를 그렇게 찾는지 아느냐? 너희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패배를 인정할 줄 모르고, 물귀신처럼 남을 끌고 들어가려는 너희가 마음에 안 들어서다.”
서슴없이 자멸공을 쓰는 자들을 이 강호의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더럽고 치사하고 무서워서 피하지, 누가 이렇게 악착같이 뒤쫓아서 막으려 하겠는가?
사람을 더없이 두렵게 만들어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 이들 역시 악이다. 마교란 이름으로 짓밟아서 처단해야 할 절대악.
“……나를 살려야 내 배후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하결은 기회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말해줄 생각 없잖아? 내가 알아서 찾겠다.”
검무극은 그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서쪽을 좋아한다고 했나?”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하결은 옆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본 것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을. 그 무서운 것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휘두르는 일검을.
쉬이이익!
서걱!
하결의 잘린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고인 핏물에 여러 모습이 비쳤다. 하늘이 비쳤고, 무정하게 바라보는 검무극의 모습도 비쳤다.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양석도, 무서운 악귀가 사라지는 모습도 비쳤다.
그러다 땅과 풀, 그리고 하늘이 빠르게 스치다 느려지더니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제424회어쩔 수 없는 일은 없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혈왕이 걸어 나왔다.
피가 가득했던 수조에서 막 나온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몸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양석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렇게 짙은 혈향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술에 주정(酒精)이 있다면 이건 혈정(血精)에서 나는 냄새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반면 북혈문주는 냄새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혈왕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젊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기다란 팔다리에 깎아 놓은 듯한 완벽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시선을 잡아끄는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까지.
그가 풍겨내는 첫인상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무인보다 강렬했다.
‘미친 듯이 강한 자다.’
혈왕이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첫인상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면 양석은 피 냄새에 질려 혈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자가 배후구나.’
그가 문주전 뒤쪽 밀실에 숨어 지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이런 비밀을 감추고 계시다니. 자식인 내게는 말했어야지.’
이 순간에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채우는 그였다.
착착착착!
좌‧우측 문에서 튀어나온 십여 명의 무인들이 북혈문주 앞을 막아섰다. 그들 역시 이 지독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 북혈문주가 비밀문으로 들어갈 때는 항상 수하들을 물린 후에 들어갔다. 하지만 오늘은 밀실 속 사내가 밖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사전에 수하들을 물리지 못했다.
혈왕은 무심한 눈빛으로 무인들을 내려다보았다.
북혈문주는 그 눈빛에서 여러 느낌을 받았다. 감정이 없는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다. 피처럼 뜨겁고, 피처럼 끈적하고, 피처럼 섬뜩한 그런 눈빛이었다.
느낌은 또 있었다. 질서나 논리가 통하지 않을 것 같고, 그저 본능에 따라, 아니, 피의 이끌림에 따라 살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북혈문주는 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만약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면 그 긴 시간을 밀실에서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그에게는 그 모든 걸 압도하는 지독한 인내심이 있다. 그게 가장 무서운 점이다.
바로 그 순간.
혈왕이 천천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촤아아아악!
내뻗은 혈왕의 손가락에서 일제히 붉은 선이 뻗어나갔다.
퍽퍽퍽퍽퍽!
손가락 하나에서 하나의 선, 모두 열 개의 선이 무인들의 이마를 관통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실력이 아니었는데. 그 한 수에 무인들은 일제히 쓰러져 죽었다.
북혈문주도 처음 보는 무공이었다. 지풍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가 날아간 것도 아니었다.
혈왕이 천천히 태사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몸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혈왕은 벌거벗은 채 태사의에 앉았다.
그가 풍겨내는 기도와 존재감은 실로 엄청났다. 거기에 숨이 막혀오는 피 냄새까지.
혈왕이 눈을 지그시 감고 뭔가 구결을 외우더니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상처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르륵.
바닥에 떨어진 피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꽈앙!
혈왕이 일장을 날려 천장을 날려버렸다.
바닥에서 피어오른 붉은 연기는 뚫린 천장 위로 계속 올라갔다. 마치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소란을 듣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북혈문주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모두 물러가라!”
이내 바깥의 소란이 잦아들며 침묵이 찾아왔다.
태사의에 앉은 혈왕은 북혈문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북혈문주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주군을 뵙습니다!”
북혈문주는 문주가 된 후, 아니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부모나 사부가 아닌 남에게 무릎을 꿇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무릎을 꿇지 않으면 그의 손에 죽게 되리란 것을.
엉거주춤 서 있던 양석도 재빨리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정말 놀랐다. 저 벌거벗은 남자가 강하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주군이라고?’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정말 낯설게 들렸다.
그러자 비로소 혈왕이 입을 열었다. 나직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하결이 어떻게 죽었나?”
밀실에서 바깥의 대화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하결과 피로 이어진 것일까? 그는 하결이 죽은 걸 알고 있었다.
“아직 저희도 모릅니다. 방금 소식을 들었습니다.”
북혈문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혈왕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북혈문주와 양석의 심장이 요동쳤다. 산전수전 다 겪은 북혈문주조차 두려움을 느꼈다.
이 남자는 앞선 하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도를 지녔다. 이런 무서운 자가 밀실에 있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혈왕이 다가간 사람은 양석이었다.
가까이서 본 혈왕의 눈동자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고 짙어진 피 냄새에 양석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하결이 죽던 자리에 함께 있었지?”
물음이 아니라 추궁이었다.
양석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공포심이 그를 엄습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잡아뗐다. 솔직히 말했다간 정말 고통스럽게 죽일 것 같아서였다.
“아닙니다.”
하지만 혈왕은 그냥 떠보는 게 아니었다.
“네게서 하결의 피 냄새가 난다.”
“!”
양석은 가슴이 철렁했다. 싸움을 구경했으니 어쩌면 그의 피가 몇 방울 자신에게 튀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피 냄새를 맡는다고? 그게 가능하다고?
혈왕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석을 노려보았다.
“누가 하결을 죽였나? 너냐?”
모른다고 해야 했지만, 혈왕의 안광이 너무 무서워서 양석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이렇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안 죽였습니다.”
“그럼 누구냐?”
양석은 망설이지 않고 사실대로 고했다.
“마교 소교주입니다.”
혈왕은 몸에서 은은한 혈기가 뿜어내며 양석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정수리에 닿자, 양석은 애원하듯 소리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수리에서 이상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다. 저 기운이 머리 안에서 퍽하고 터져버릴까 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제발!”
북혈문주는 아들을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나선다고 멈추지도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 양석에게 몹시 화난 상태였다. 하결이 죽던 자리에 있었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심지어 그의 죽음에 놀라는 연기까지 했으니.
혈왕이 정수리에 대었던 손을 뗐다.
“하아, 하아.”
그 기운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살았다는 생각에 양석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안도했다.
“극한지체를 지닌 자는 어떻게 되었느냐?”
혈왕이 다시 묻자 양석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취마가 데려갔습니다.”
취마란 말에 혈왕의 두 눈이 길게 찢어지며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서낙이 죽었을 때, 그는 수조 속에서 결심했었다. 취마는 반드시 죽인다고. 그 취마가 다시 자신의 앞을 막은 것이다.
수하와 극한지체를 모두 잃은 혈왕은 거침없었다.
“소교주에게 만나자고 해.”
찢어진 눈 사이에 붉은 눈동자는 더없이 무서웠다.
“그사이 취마를 죽이고 극한지체를 되찾겠다.”
* * *
“놈은 형을 노릴 거야.”
검무극의 말에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취마가 고개를 돌렸다.
“서 장로도 죽였고, 극한지체도 빼 갔으니까. 반드시 형에게 복수하려 들 거야.”
“바라는 바다.”
취마는 전혀 겁을 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될 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혈왕의 자멸공은 겁내야 한다. 취마의 주기가 자멸공까지 막아주진 못할 테니까.
“부탁이 하나 있어.”
“무슨 부탁?”
“꼭 들어줘야 해.”
“싫어. 거절이다.”
그러자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데?”
“거절한다면서? 아! 역시 형은 형이야. 이 부탁을 거절하다니.”
결국 궁금해서 못 참는 취마였다.
“일단 들어는 보고.”
취마가 앞에 놓인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술 끊으란 말만 안 하면 돼. 이번에 끊으면서 느꼈다. 술 없으니까 삶의 기쁨이 사라졌어.”
“그것 빼곤 다 되지?”
“출교해서 돌아왔을 때 맨 마지막에 날 찾아오는 것도 안 돼. 그리고 또…….”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라니. 검무극이 웃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흑마검을 검집째 꺼내 들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고…….”
괜히 내키지 않는 마음에 취마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뭔지 모르지만 안 돼! 싫어!”
* * *
저 멀리 걸어오는 검무극을 보며 양석은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최대한 오래 붙잡아둬야 한다. 실패하면 넌 죽는다.
차갑게 경고하던 혈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날 죽일 거다.’
혈왕은 검무극과 다르다.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도와주지도 않을 거다. 혈왕이 명령을 내릴 때, 옆에서 보였던 눈빛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사이 검무극이 그의 앞까지 왔다.
“오셨습니까?”
양석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이제 예전과는 검무극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그였다.
“급히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왜 보자고 한 거요?”
“배후에 관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어떤 정보요?”
“잠시 좀 걸으시죠?”
양석은 검무극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만난 장소는 북혈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인적 드문 들판이었다.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양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렸지요. 아버지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줄 정말 몰랐습니다.”
“배후는 어디에 있소?”
“그자가 빙검문에 있다고 했습니다.”
빙검문은 북해빙궁과 북혈문과 함께 북해삼대세력인 곳이었다.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아버지께 다 뒤집어씌우면 된다.’
혈왕은 정말 무시무시했지만, 여기 이 상대는 마교의 소교주다. 빠져나갈 굴을 파놓아야 한다.
가만히 양석을 쳐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빙검문에 있다는 건 양 공자 생각이오? 아니면 그자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소?”
양석은 애써 태연하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양석은 검무극이 떠보는 것인지, 진짜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걸 눈치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긴. 빙검문쯤 되어야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렇다는 말은 배후가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군.”
정말 놀라지 않으려 해도, 검무극과 있다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한 번 속였으면 됐지, 당신은 또 날 속이는군.”
더는 숨길 수 없음을 느꼈다. 양석은 혈왕이 너무 무서워서 그의 편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검무극을 보니 또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사람, 검무극 앞에서는 자신이 벌거숭이가 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양석이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이 눈치 빠른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난 반드시 살아남는다!’
이쪽에도 무릎 꿇고 저쪽에도 무릎 꿇고. 무릎이 굽혀지지 않을 때까지 꿇고 또 꿇어서라도 살아남을 거다.
“한데 제가 거짓말한 거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같이 걷자고 했을 때.”
“그게 왜?”
“당신이 정보를 알아냈다면 날 보자마자 알아낸 걸로 생색내기 바빴을 거야. 한데 같이 걷자고? 이상하잖아?”
검무극은 양석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자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에 있어? 자기가 잘못 선택한 일만 있지. 오늘도 그래. 날 만나자마자 상황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되었잖아?”
양석은 뭐라 변명할 수 없었다.
“그자가 또 뭐라고 했지?”
“그냥 소교주님을 만나라고만 했습니다.”
검무극이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불쑥 말했다.
“당신이 시간 끄는 사이 취마님을 죽이겠다고 했지?”
검무극은 양석의 눈동자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동요를 보았다.
“결국 취마님을 죽이려고, 이렇게 시간 끌고 있었던 거네.”
놀란 양석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니면?”
“저는 다만…….”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콱 막혔다. 변명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양석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그놈을 보시면 절 이해하실 겁니다. 그놈은 인간이 아닙니다!”
고개를 푹 숙인 그의 속마음은 울부짖는 애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용서해라. 잘난 너희들은 용서에서 쾌감을 얻는 것들이잖아?’
그건 검무극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이미 지은 죄가 커서 죽음은 확정인 그였다.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
“어서 가십시오. 당장 가셔서 취마님을 도와야 하지 않습니까?”
검무극은 전혀 취마를 걱정하지 않았다.
“네가 왜 마존을 걱정하나? 마존을 걱정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사람은 이 무림에 오직 천마뿐이시다.”
마존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이었고, 그만큼 취마를 믿고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검무극의 여유와 믿음은 취마의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으니까.
검무극이 들고 있는 흑마검에 감겨 있던 극품천잠사가 보이지 않았다.
검무극의 부탁은 바로 그 극품천잠사를 취마의 몸에 감으라는 것이었다.
죽어도 안 감겠다는 걸 결국 다 감게 했다. 심장은 물론이고 요혈마다 여러 번 감았다. 혈왕과의 싸움은 언제 어디서 뭐가 터질지 모를 싸움이었으니까.
거기에 믿는 것 하나 더.
늦지 않게 되돌아갈 수 있는 쾌속보가 있었다.
“그만 일어나.”
자리에서 일어난 양석은 어떻게든 검무극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애썼다.
“전 믿습니다. 소교주님이 놈을 없애실 겁니다. 통쾌하게 없애실 겁니다.”
“넌 못 보겠다.”
검무극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양석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과 온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는 것을.
콰아아아아아앙!
그가 자멸공으로 폭발했다. 전방으로 엄청난 위력의 혈기가 휩쓸었지만, 이미 검무극은 시공이환술 속에 들어가 있었다.
검무극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양석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채 죽어 있었다.
놈은 북혈문의 소문주를 가차 없이 자멸공의 도구로 이용했다. 심지어 그 대상이 마교 소교주인데 말이다.
검무극은 드디어 혈왕이 세상으로 나왔음을 실감했다.
하결도 못 죽였는데 양석이 죽일 거라 기대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건 혈왕이 보내는 인사였다.
검무극이 뻥 뚫린 구멍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 나도 반갑다.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