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회귀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201-3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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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절대회귀-201화 16

제201회 가끔 등장하는 미친놈들만 아니면.

“제발 살려주십시오!”

삼선(三仙)이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청년을 일으켜 세웠다.

“이러면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네.”

“갑자기 돈을 갚으라고 하시면 제가 어떻게 갚겠습니까?”

삼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어쩔 수 없어. 알잖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고 집을 팔 수는 없습니다. 집이 없으면 부모님은 어디서 모시겠습니까?”

이 청년의 약점은 효심이었다. 삼선은 그 약점을 계속 찔렀다.

“어디 친척 집이라도 모셔야지.”

“어느 친척이 다 늙은 노인네들을 반기겠습니까?”

삼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내가 돈을 더 빌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청년도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외지에 나가 무공을 배우고 낙향한 청년의 꿈은 고향에 무관을 차리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일하던 그에게 신선채를 빌려준다는 삼선이 접근해왔다.

물론, 청년은 처음에는 의심했다.

하지만 차용증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게다가 삼선은 너무 친절했다. 정말 친형처럼 자신을 대했다.

심지어 끝까지 돈을 빌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빚이 많으면 힘들다고 다음 기회에 빌리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그러고는 신선채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려 하자, 청년의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그날 돈을 빌렸다.

낡은 장원을 사서 무관으로 개조하는 공사를 했다. 한데 그러다가 인부들이 다치는 사고가 터졌다. 공사가 지연되고 인부들에게 치료비를 주느라 돈을 더 빌려야 했다. 이후에는 자재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또 돈을 빌려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무관을 열어서 착실히 운영해서 갚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다 지어진 무관에 불이 났다.

청년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선이 와서 돈을 갚으라는 것이다. 부모가 사는 집을 팔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절대 집을 파는 것은 안 됩니다!”

“무슨 일이라도 하다니? 뭐 살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말은 말게.”

“죄송합니다.”

“내가 어떻게든 계에 사정해 볼 테니, 나와 의논해보세.”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또 보세.”

청년과 헤어져 돌아서는 삼선의 얇은 입술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군.’

한 번만 범죄를 저지르게 하면 끝이었다. 그 첫발을 담그는 순간 놈을 평생 이용해 먹을 수 있다. 특히 이 청년처럼 착하고 순진하고 부모에게 효심까지 깊으면 거저먹기나 다름없다.

패기, 꿈, 희망, 젊음, 가족…….

이 밝고 따스한 것들이 청년들을 지옥으로 이끌 미끼였다. 패기로 밀어붙여! 젊었을 때 꿈을 꿔야지. 희망을 품어! 넌 젊잖아! 가족을 생각해! 피 끓는 젊은 애들이 이걸 어떻게 피한단 말인가?

삼선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마부석의 수하에게 물었다.

“다음은?”

“새로 돈을 빌리려는 자입니다.”

“뭐 하는 자지?”

“정권문(正拳門) 문주의 아들이랍니다.”

들어본 적이 있는 문파였다.

그런 이름있는 문파의 자식이 왜 돈을 빌리려는 거냐 싶겠지만, 지금까지 경험상 정작 돈을 빌려야 할 사람은 안 빌리고, 필요 없는 사람이 돈을 빌렸다.

삼선은 마차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요즘이었다.

암흑상계는 온갖 악행을 자행하던 네 명의 의형제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 일을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버리고 일선(一仙)부터 이선(二仙), 삼선(三仙), 사선(四仙)이 되었다.

처음 암흑상계를 만든 일선은 잔머리를 잘 굴렸으며 무자비했다. 남에 대한 동정심은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큰돈을 구해와서 이번 일을 제안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돈이 생겼는지 그는 말해주지 않았다. 분명 이 막대한 자금을 댄 전주(錢主)가 따로 있을 텐데.

어쨌든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저 무자비한 일선이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자신들은 막대한 돈을 벌게 될 것임을.

비밀 유지를 위해 수하들의 숫자는 최소로 정예화했으며 일은 철저히 분업했다.

사선은 정예 무인들을 이끌며 무력이 필요할 때만 움직였다. 사선이 주먹이라면 이선은 발이었다. 이선은 희생자가 될 놈들을 찾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선은 이 먹잇감들을 어디에 쓸지를 결정했다. 그들에게 온갖 일들을 다 시켰다. 폭행이나 살인은 물론이고, 친척이나 지인의 무공비급을 빼 오게도 했다. 그러다 비밀이 누설될 것 같으면 자결을 위장해서 죽여버렸다.

머리인 일선이 있다면 입 역할을 하는 삼선도 있었다.

삼선이 돌아다니며 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역할을 했다. 조금만 참으면 더 나은 삶이 찾아올 거라고. 그런 점에서 그들이 모이면 삼선 네가 제일 개새끼라는 농담을 곧잘 하곤 했다.

“도착했습니다.”

약속 장소는 객잔이었다.

수하가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입니다.”

삼선이 그에게 걸어갔고 수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했다.

삼선이 청년과 합석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나?”

“괜찮소.”

청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보통의 경우 돈을 빌리러 온 청년들은 긴장하고 경직되기 마련이었다. 한데 이 청년은 긴장했다기보다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름이 뭔가?”

“정양(鄭羊)이오.”

정양이라 소개한 사람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듣기로 정권문의 후계자시라고?”

정권문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문파였다. 그곳 막내도 정양이었고.

물론, 이 문파는 통천각에서 관리하는 천마신교 쪽 문파였다. 만약 누군가 실제로 조사하러 가면 검무극처럼 생긴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번 무림맹 비무대회인 소룡전에 사용했던 서도파처럼 정권문도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위장 문파였다.

“그런 분이 왜 돈이 필요하신가?”

삼선이 떠보듯 물었다.

검무극이 대답 대신 물었다.

“이자를 받지 않고 빌려주신다고 들었소.”

“맞네, 신선채는 이자를 받지 않는다네.”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삼선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평소의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침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굉장히 명문의 자체처럼 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월은 이런 모습으로 상대를 대할 것을 요구했다.

“얼마까지 빌려줄 수 있소?”

“얼마나 필요한가?”

“십만 냥.”

삼선이 깜짝 놀랐다. 한 번에 십만 냥을 빌려달라고 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거금을 어디에 쓰려고?”

검무극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보게. 빌린 돈을 어디에 쓸지는 자네 자유지만, 십만 냥은 정말 큰돈이네. 어디에 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삼선은 내심 생각했다.

‘이거 느낌 안 좋은데?’

빌려주면 안 되겠다 마음먹던 그때였다.

분을 못 참는 사람처럼 검무극이 갑자기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바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직접 부딪치지 않았는데도 객잔 바닥이 움푹 들어갔다.

삼선은 깜짝 놀랐다. 옆자리에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소리가 나지 않은 점은 더 놀라웠다. 나이에 비해 공력이 심후했던 것이다.

“됐소. 없던 일로 합시다.”

괜히 나왔다는 듯 검무극이 그냥 가려 하자 삼선이 그를 말렸다.

“잠깐! 왜 이렇게 성급한가?”

검무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는 듯 행동했다.

“자, 우선 앉게.”

삼선이 검무극을 붙잡은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었다.

‘일선이 찾는 자다!’

일선은 큰 건수에 쓸 고수를 물색하고 있었다. 고수가 걸리면 반드시 잡으라고 명령까지 내려온 상태.

“좋아, 돈 빌려주겠네. 어디에 쓰는지는 자네 개인 일이니 더 묻지 않겠네.”

검무극의 얼굴에 살짝 기쁨이 스쳤다.

“이렇게 큰돈을 빌려준다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는 건가?”

그러자 검무극이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소? 나중에 돈 빌려준 걸로 내게 뭐라도 받아내겠지.”

검무극이 날 속일 수 없다는 그런 눈빛으로 삼선을 노려보았다.

삼선은 지금껏 만나봤던 이들 중에서 이런 느낌을 주는 놈은 처음이었다. 왠지 꺼림칙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잡아당기는 놈이었다. 뭔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은 놈, 그 말은 곧 자신들에게 큰돈을 벌어줄 놈이라는 뜻과도 같았다.

“좋아! 차용증 쓰세.”

검무극이 차용증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말 들었던 대로 상환 날짜가 없군.”

“돈을 벌려고 했다면 상단에 투자했겠지. 우린 자네의 젊음을 믿고 투자하는 거네.”

젊음이란 말에 검무극이 코웃음을 치며 차용증을 계속 살폈다.

“이거 물에 담그면 차용증 내용이 바뀌거나 하는 것 아니오?”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확인해 보게나.”

검무극이 정말 물도 튀겨 보고, 등불을 가져와 열을 가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차용증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번에는 삼선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의심까지 많군.’

이래서 이용하기 어렵지 않냐고? 아니다. 의심 많은 자는 많은 자대로 이용하기 쉬운 면이 있다. 한 번 의심을 넘어서면, 오히려 확신에 찬 믿음을 보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속여 먹으려고 작정하면 상대 성격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차용증을 한참이나 살펴보던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주시면 수인 찍겠소.”

삼선의 명령에 마차를 몰던 수하가 전표를 찾아왔다. 돈을 받고 검무극이 차용증에 수인을 남겼다.

“그럼 또 봅시다.”

돈을 챙긴 검무극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삼선이 수하에게 명령했다.

“감시조를 풀어서 놈이 돈을 어디에 쓰는지 확인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객잔을 나간 후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검무극과 고월은 건너편 건물 골목에서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검무극은 고월이 시키는 대로 최대한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냈다.

“차용증을 확인하신 것은 잘하셨습니다.”

물을 뿌리고 열을 가하고 한 것은 검무극의 즉흥적인 판단이었다. 어떤 나쁜 목적으로 접근한 상대가 차용증 검사를 한다고 그 난리를 떨지는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고 군사, 차라리 저놈을 붙잡아서 고문하면 다른 놈들이 어디 있는지 불지 않을까?”

검무극의 물음에 고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을 계획한 놈은 머리가 좋은 놈입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꼬리를 자르고 잠적할 겁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빌린 십만 냥으로 한 가지 물건을 사십시오.”

“어떤 물건?”

고월이 이미 다 계획이 있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놈들을 깜짝 놀라게 할 물건이지요.”

* * *

사흘 후, 수하가 돌아와서 삼선에게 보고했다.

“정양이 십만 냥으로 이 지역 암상(暗商)을 찾아가서 독을 샀습니다.”

암상은 일명 그림자 상인이라 불리는 이들로 무림맹에서 금지한 암기나 병기, 독을 파는 상인들이었다.

“독을 샀다고? 어떤 독?”

“무형지독을 샀습니다.”

삼선이 깜짝 놀랐다. 무형지독은 값이 매우 비싸서 쉽게 구할 수가 없는 독이었다.

“십만 냥으로 살 수 있어?”

“딱 한 번 사용할 양만큼 산 모양입니다.”

“대체 누굴 죽이려고?”

거기까지 알 수 없다는 수하의 대답에 삼선은 난감했다. 여태껏 돈을 빌려줘서 별의별 곳에 다 쓰였지만, 무형지독을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느꼈던 꺼림칙한 느낌은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이거 예감이 안 좋은데?”

그러려고 산 것은 아니겠지만 그 무형지독을 삼선 자신에게 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대체 암상과는 어떻게 거래한 거야?”

“이 지역에 유능한 정보상이 있습니다. 그쪽을 통해 선이 닿은 모양입니다.”

“젠장! 그놈에게 다시 만나자고 해.”

“네.”

삼선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이 일이 정말 좋았다. 상대를 살살 꼬드겨서 파멸로 이끄는 재미는 여인과의 잠자리보다 더 큰 쾌락을 주었다. 게다가 죽어가면서도 상대는 삼선만을 의지했다.

삼선은 이것보다 더 파괴적이고 말초적인 재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등장하는 이런 미친놈들만 아니면 말이다.

다음날 삼선은 검무극을 다시 만났다.

“왜 보자고 했소?”

독을 샀다는 사실을 알고 보니, 검무극은 더욱 우울하고 어두워 보였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어서네.”

“뭐요?”

“빌려준 십만 냥 어디에 썼나?”

검무극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안 묻기로 하지 않았소?”

“그랬지. 한데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그래. 누가 십만 냥으로 무형지독을 사 갔다고 하더군.”

순간 검무극이 움찔했다. 표가 나서 굳이 추궁하지 않아도 될 반응이었다.

“나는 아니오.”

“그럼 돈을 보여주게. 아니면 어디 썼는지 말해주든지.”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삼선이 좋은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자네가 그걸 사는 순간 우린 한배를 탄 셈이네. 그 독으로 자네가 사고를 치면 우리도 문제가 돼. 그러니 내게는 말해주게.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돕겠네.”

“당신은 도울 수 없소.”

“대체 누굴 죽이려고 그러는 건가? 무형지독을 쓰면 무림맹에서 조사를 나올 거네. 문제가 커진다는 말이지. 누굴 죽이려면 차라리 살수를 고용하거나…….”

그때 상상도 못 할 이름이 나왔다.

“권마를 죽일 수 있는 살수가 있소?”

“!”

삼선은 정말 놀랐다. 최근 이렇게 놀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놀랐다.

“설마 마교의 권마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소? 그 찢어 죽일 놈이지.”

삼선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거 미친놈이군. 그것도 제대로 미친놈이야.’

마교와 일이 잘못 엮였다간 자신들 모두 다 죽게 될 것이다.

“왜 권마를 죽이려는 건가?”

“권마가 내 여자를 건드렸소.”

“권마가 왜 하필 자네 여자를 건드렸단 말인가?”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검무극은 어차피 내친걸음이라는 듯 가문의 비밀을 밝혔다.

“우리 정권문은 마교에 속한 곳이오. 권마가 담당하던 곳이지.”

삼선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이미 마교와 얽힌 것이다. 이 미친놈이 이런 중대한 비밀을 이렇게 까발린다고? 한데 눈이 뒤집힌 이유가 있었다.

“가끔 우리 집에 오가던 권마가 내 약혼녀를 보고는 그녀를 겁탈했소. 빌어먹을! 우리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도 나에게 참으라고 했소.”

검무극이 물불 가리지 않겠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분노를 드러냈다.

“난 권마를 죽일 거요.”

삼선도 같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가 뒤쪽에 떨어져 있는 수하에게 재빨리 전음을 보냈다.

―신선들에게 연락해. 이 미친놈부터 없애고 빨리 빠져야겠다.

16 절대회귀-202화 16

제202회 며칠 금방이죠?

“일단 화를 가라앉히게.”

삼선이 검무극을 달랬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일단은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당신이라면 참을 수 있겠소?”

“나라도 못 참았을 거야. 그래도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면 복수도 못 하지 않겠나? 상대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대가 권마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이 주먹을 부르르 쥐었다.

“나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했는데. 나쁜 놈!”

삼선은 다른 신선들이 오기 전에 검무극이 일을 저지르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런 나쁜 놈은 죽여야지. 내가 도와주겠네.”

“당신이 왜?”

“왜냐니? 그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니까.”

검무극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겠지. 괜히 당신까지 개입될까 봐 겁나는 거지? 걱정하지 마. 당신이 독을 사줬다는 말,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돈을 빌렸다는 말 대신 당신이 독을 사줬다고 표현했다.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말은 오히려 더 위험하게 들렸다. 검무극은 의도적으로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삼선은 ‘내가 독을 사주다니? 너 미쳤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을 꾹 참았다.

“권마를 어떻게 중독시킬 건가?”

“술에 독을 탈 거요.”

“권마는 언제 또 오는데?”

“닷새 후에 이곳에 다시 올 거요.”

닷새 후! 삼선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사이에 어떻게든 신선들이 도착하게 해야 한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당신도 죽소. 그러니 빠지시오.”

“권마를 죽이면 마교에서 자네 집 안을 그냥 두겠나? 멸문당할 거야.”

“당하든지 말든지. 우리 아버지는 자식이 이런 일을 당했는데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소. 이런 집구석이라면 차라리 멸문당하는 게 낫소.”

삼선은 막 나가는 검무극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놈을 잘못 건드렸다!’

그렇다고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일전에 객잔에서 발휘한 실력으로 볼 때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고수였다.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는 날 찾지 마시오. 또 찾아오면 그땐 그 독 당신에게 확 뿌려버릴 테니까.”

검무극이 위협적인 말을 남기고 그곳을 떠나갔다.

* * *

잠시 후, 나는 객잔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고월과 함께 삼선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 전에 놈의 수하가 전서를 날리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협계의 핵심 인원을 모두 불렀을 겁니다. 조사한 바로는 저들의 수뇌부는 모두 네 명으로 이뤄져 있고 일선이란 자가 수장입니다.”

벌써 고월의 정보조직이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돈 들인 보람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고월이었다.

“그들 넷만 처리하면 된다는 의미지?”

“네. 그놈들 중에서 일선이 주모자입니다. 놈은 의심이 많아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인데. 이번 일에 권마님이 개입된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이래서 다들 군사를 두는 거구나. 너무 편하고 좋다.”

“자기보다 더 머리 좋은 수장을 둔 군사는 너무 힘들지요.”

“오해야. 내가 잘하는 건 아부신공 밖에 없다네.”

잠시 사이를 두고 고월이 말했다.

“덕분에 교주와 잘 풀었습니다.”

검무극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처음 교주를 부탁할 때보다 한결 편한 모습이었다.

검무극은 고월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그렇게 붙잡아 둔 풍천교주에게 이렇게 잘하다니.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인연이 참으로 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교주가 자네 걱정하더라. 자네가 요즘 힘들어한다고. 자기 말고 고 군사나 챙기라고.”

“전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들 괜찮다는 말부터 한다더라.”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는 표정으로 고월이 쳐다보자 검무극은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고 군사, 난 안 괜찮아. 마존들 상대하랴, 후계 싸움하랴, 신선채 이 쓰레기 놈들 앞에서 연기하랴, 너무 힘들고 피곤해. 한데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아. 그러니 고 군사도 말해. 힘들면 힘들다고.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내가 듣고 있으니까.”

고월이 뜻깊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힘들다고. 너도 힘들면 이렇게 말하라는 의미로. 그걸 이제 검무극이 자신에게 해주고 있다.

고월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기분이 괜찮아졌다.

* * *

우리 중에 가장 힘들어한 사람은 권마였다.

“……그러해서 권마님이 악당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급해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가 상황 설명을 마치자 권마는 버럭 화를 냈다.

“그냥 악당이 아니라…… 파렴치한 색마잖아?”

“이 정도 악행은 저지르셔야 독을 써서 죽일 동기가 되죠.”

“다른 이유도 많잖나? 자기를 인격적으로 모독했다거나, 아끼던 수하를 죽였다거나!”

“그래도 이보다 더 자극적이진 않을 것 같아서요.”

“추잡스럽다!”

한 번도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던 권마였으니, 그가 펄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권마가 검무극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댔다.

“네 생각인가? 아니면 바둑 못 두는 네 군사 생각인가?”

“당연히 제 군사 생각이죠. 참지 마시고 가셔서…….”

크르르릉.

권마의 움켜쥔 주먹에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태풍이 몰려오는 소리였다.

“네 소행이지, 네 군사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느냐?”

“역시 똑똑하십니다. 당연히 제 생각이었죠.”

“왜 나를 색마로 만들었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가장 강력한 이유 중 하나라서요. 그래서인지 놈들은 제 살의에 대해서는 일절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난 오해받는 것 딱 질색이다.”

“사부님. 어차피 곧 죽을 놈들에게 한 말이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다른 곳에 말이 흘러나갈 일도 없고요.”

그때 문득 권마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한데 그놈이 그 말을 믿었어?”

그가 기대한 말은 ‘권마가 그럴 리가 있겠나?’ 였겠지만.

“네. 너무 잘 믿던데요?”

“한 번에 믿었다고? 그놈 이름 뭐냐? 이름 뭐야!”

괜히 놈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는 권마에게 검무극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며칠만 있으면 끝날 일입니다. 그 며칠은 사부님 인생에서 제일 가치 있는 며칠이 될 겁니다.”

“그건 뭔 소리냐?”

“권마라는 이름이 언급되었기에 놈들의 수뇌부들이 움직일 겁니다. 그 결과 놈들의 마수에 걸린 수많은 청년들이 절망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될 테고요. 앞으로 놈들에게 당할 사람들까지 치면 수백, 수천 명이 될 겁니다. 그 사람들 사부님이 다 살리는 겁니다.”

“내가 무슨 의선이냐? 사람 살렸다고 좋아하게?”

“그럼, 사람 살리는 것 좋아하는 제자를 위해 며칠만 색마로 살아주십시오.”

권마는 검무극을 뚫어지듯 노려보다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을 풀풀 풍기며 홱 돌아섰다.

“며칠도 길다!”

* * *

나흘 후,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사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전쟁이라도 났어?”

삼선이 형이었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냈다.

삼선은 무공의 고수인 사선을 보자 내내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삼선은 있었던 일을 자세히 사선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 미친놈이 권마를 독살하겠다는 거잖아? 그게 뭐가 문제인데? 죽여도 그놈이 죽이는 거잖아?”

“그 독을 우리에게 빌린 돈으로 샀다는 게 문제지.”

“그게 어째서? 마교에서 누구 돈으로 독을 샀는지까지 조사한다고?”

“평범한 독이고 평범한 대상이면 걱정 안 하지. 아, 이놈이 독을 구해서 죽였구나로 끝날 문제니까. 문제는 무형지독을 샀다는 거다. 그 비싼 무형지독을 어떻게 샀지? 그리고 죽은 사람이 권마야. 그럼 당연히 배후가 있는지부터 의심하겠지. 뒤를 파헤치면 결국 우리 존재도 드러날 거다. 마교가 우릴 그냥 둘 것 같냐?”

그제야 사선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다.

“권마는 언제 오는데?”

“내일.”

“그럼 오늘밖에 시간이 없군. 정권문 아들놈은?”

“지금 주점에서 술 마시고 있어.”

“가자, 앞장서.”

사선이 곧바로 가려고 하자 삼선이 말렸다.

“주점에서 그냥 죽였다간 놈의 아비가 아들의 죽음을 조사할 거다. 결국 마교가 개입할 거고. 그럼 우린 더 위험해져.”

“그럼 어쩌자고?”

삼선이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놈을 납치해서 실종상태로 만드는 거다. 약혼녀의 일로 낙담해서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으로 처리하는 거지. 죽여서 화골산으로 녹이기 전에 서찰이라도 짧게 한 장 남기게 하고.”

사선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좋은 생각이야.”

* * *

삼선과 사선이 주점 앞에서 기다린 지 한 시진 후, 검무극이 비틀거리며 주점에서 나왔다.

그가 인적이 드문 곳에 접어들었을 때, 삼선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술에 취한 검무극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뱉었다.

“당신! 또 내 앞에 나타나면 내가 죽여버린다고 했지?”

“이보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검무극은 자기 뒤에 사선이 접근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할 말은 무슨! 또 날 말리러 왔겠지. 이 겁쟁이 같으니라고. 난 겁나지 않아! 내일이면…….”

사선이 검무극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말을 하고 있던 검무극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삼선과 사선이 양쪽에서 팔짱을 끼고 내달렸다.

두 사람은 인적이 없는 숲속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검무극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뭐야? 죽을래?”

술에 취한 검무극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듯 보였다.

삼선이 검무극에게 준비해온 종이와 붓, 미리 갈아온 먹을 건넸다.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어라.”

“뭐야? 이건?”

“아버지, 소자 잠시 떠났다 돌아오겠습니다.”

검무극이 취한 눈으로 적으려다가 이내 붓을 내려놓았다.

“너 이 새끼! 이거 적게 하고 날 죽이려는 거지?”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멍청이들!”

삼선과 사선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일선과 이선이 그곳으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일선은 진작 왔지만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확실하게 안전한 상황이라 판단되었기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떠나는데, 서찰을 왜 남기나? 그게 더 이상하지.”

일선의 말에 삼선이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대형이십니다. 우리와 생각하는 게 다르십니다!”

일선이 검무극에게 다가갔다. 그는 정말 성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악인상이었는데, 눈빛 역시 뱀처럼 차가웠다.

“이 하찮은 놈 때문에 이 난리가 난 거군.”

검무극을 노려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산 채로 묻어버려라.”

산채로 매장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주려는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연기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원래 검무극의 표정이 되었다.

딴 사람처럼 보이는 그 표정 변화에 지켜보던 삼선은 흠칫 놀랐다.

‘정말이지 이 미친놈은 죽을 때까지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그때 검무극이 일선에게 물었다.

“이번 일은 네 머릿속에서 나왔나?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일선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머지 셋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일선이 화가 나면 날수록 볼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가끔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일도 벌어지긴 했지만.

“뒤에 누가 있지? 돈은 누가 댄 거야?”

검무극이 다른 신선들을 쳐다보았다.

“혹시 너희들에게도 안 알려줬어? 그 정도의 믿음도 없이 뭉친 거야?”

순간 일선은 알아차렸다. 어느새 검무극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사라졌음을.

“너? 술 안 취했구나.”

“다 깼어. 산 채로 묻는다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드네.”

검무극의 표정만큼이나 그가 내뱉는 말도 여유로웠다.

뭔지 모를 위화감에 일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매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주위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삼선이 대신 나섰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원래도 미친놈이었습니다.”

얼른 죽여버리고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검무극에게 십만 냥이나 빌려준 것은 자신의 판단이었으니까, 저 미친놈이 일선을 더 화나게 하기 전에 마무리 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제가 처리하고 묻겠습니다.”

품에서 비수를 꺼내는 그를 보며 검무극이 물었다.

“내 젊음에 투자한다면서?”

“말을 잘못 들었나 보네. 내 젊음에 투자한다는 말이었어.”

삼선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그는 이때가 가장 좋았다.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 이 순간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원망의 눈빛을 보내는 이 순간이. 물론 지금 이 미친놈은 자신이 원하는 표정을 지어주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짜증 나긴 했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두고두고 생각날 거야.”

“난 오늘 이후로 너희들 기억 싹 지울 건데.”

“잘 가라! 미친놈아!”

그가 비수로 검무극의 목을 그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차가운 한기가 싹 감돌면서 삼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주위를 장악한 한기를 느낀 것은 자신만이 아니었다. 사선이 검을 뽑아들며 주위를 살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달그림자는 보통 사람보다 크고 넓었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떤지 서릿발 같은 기도로 보여주면서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권마였다.

상대를 확인한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등장한 남자에 비하면 무자비해 보이는 일선은 아기 얼굴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검무극의 뜻 모를 말이 들려왔다.

“너희들이 의심 없이 다 믿어서 지금 화가 많이 나셨다.”

마혈을 제압당한 줄 알았던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에 먼지를 털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권마에게 물었다.

“며칠 금방이죠?”

잠까지 설친 퀭한 얼굴로 권마가 그들 앞에 섰다.

“내겐 억겁처럼 긴 세월이었다!”

15 절대회귀-203화 15

제203회 대체 누굴 건든 거냐!

권마를 보는 순간 일선은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위기본능이 달아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권마의 기도는 싸울 의지도, 달아날 의지도 함께 얼어붙게 했다.

그때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덟 명의 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권마를 포위하며 둘러싸는 모습을 보자 얼어붙었던 일선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귀검팔수(鬼劍八手).

여덟 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한때 무림에서 큰 악명을 떨쳤던 이들이었다. 무림에서의 싸움이란 한 명이 두 명 된다고 두 배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백 명이 덤빈다고 백 배 강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들 귀검팔수는 여덟 배 강해졌다.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만큼 그들은 완벽한 합격술을 구사했다.

그것이 눈앞의 근육질 남자가 내뿜는 이 무시무시한 기도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이유였다.

엄밀히 따지면 귀검팔수는 자신의 수하가 아니다. 맡은 일을 잘해 내라고 전주가 보내준 해결사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호위이자 어떤 명령도 수행하는 수족이면서 동시에 감시자였다.

“죽여!”

일선의 명령이 떨어지자 귀검팔수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권마의 요혈 여덟 군데를 동시에 찔러 갔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권마도 정면 쪽 귀검팔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쾅! 퍼어어억!

천둥소리와 함께 살과 뼈가 박살 나는 격타음이 터져 나왔고 귀검팔수 중 하나가 날아가 나무를 박살 내며 쓰러졌다. 벽력수라권 제일권 흑운수라였다.

한 명이 희생되었지만, 나머지 일곱 개의 검이 권마의 몸에 적중했다.

카아아앙!

검이 사람 몸에 적중했는데 금속음이 터져 나왔다. 제오권 금강수라가 발동하면서 일시적으로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진 것이다.

귀검팔수들이 경악하던 그 순간.

퍼퍼퍼퍼퍼퍽!

권마의 주먹에서 제이권 벽력수라가 발출되었다. 벽력수라는 어찌나 빠른지 마치 팔이 여러 개인 아수라가 동시에 주먹을 내뻗는 것처럼 보였다.

이 한 수에 여섯 명의 귀검팔수가 사방으로 튕겨 날아갔다. 적중당하는 순간 즉사한 그들은 나무와 바위에 처박혔고, 바닥을 뒹굴었다.

마지막 남은 귀검팔수가 권마의 눈을 노리고 달려들려던 그 순간!

권마의 그 큰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제대로 무게가 실린 권마의 한 방.

콰앙!

적중당한 자의 살과 뼈가 회오리치듯 뒤틀렸다.

제삼권 천뢰수라에 적중당한 마지막 귀검팔수는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날아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선들의 눈에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뭔가가 번쩍했고 귀검팔수가 시체가 되어 나뒹굴었다. 마치 하늘에서 천벌이 내리는 그런 모습처럼 느껴졌다.

무겁게 내리는 침묵.

너무나 비현실적이기에 일선을 비롯한 네 사람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일선은 지난 몇 년간 귀검팔수의 실력을 여러 번 확인했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 그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이름난 고수도 완벽한 합격술로 죽였다.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일선이 정한 원칙이 있었다.

만약, 이들 중 네 명이 쓰러지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이들의 완벽한 합격술이 깨어진다면, 그건 달아나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순식간에 다 죽어 버리면?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권마는 자신이 보라고 제일권부터 골고루 다 보여줬음을.

자신의 권법과는 확실히 달랐다. 패도적이면서도 더욱 힘이 있었다. 내공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먹에 담기는 기도가 더 활기차고 강력했다.

“아! 정말 멋지십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이렇게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검무극의 감탄에 일선은 저 정권문의 젊은 놈이 거짓말을 내뱉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먹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는데 뭐가 멋지단 말인가? 대체 누구기에 이런 신위를…… 헉!

‘권마구나! 이런 멍청이! 그걸 이제 알아?’

저 큰 주먹, 지옥문을 직접 열고 나왔을 것 같은 것은 저 두꺼운 팔뚝. 저 사람이 권마가 아니면 대체 누가 권마란 말인가? 권마가 아니라면 누가 귀검팔수를 그렇게 간단히 저세상으로 보내버린단 말인가?

“살려주십시오! 권마님!”

일선이 넙죽 엎드렸다. 권마란 말에 남은 세 사람도 기겁하며 엎드렸다. 상대가 마교의 마존임을 알자 온몸이 덜덜 떨렸다.

바닥에 엎드린 채 일선이 삼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정권문 후계자 놈이 권마를 죽이려 한 것 아니냐?

―맞습니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네 눈에는 저 둘이 원수처럼 보이냐?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병신 같은 놈!

정말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나서 삼선부터 반쯤 죽도록 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평생을 성질대로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한 번도 분노를 참은 적이 없었다. 길에서 째려봤다고 쫓아가서 눈알을 파버리기도 했다. 자기 성질을 건드린 자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 분노가 지금은 잘 조절되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네 사람이 살려달라고 빌었다.

권마가 천천히 그들에게 걸어갔다.

“이놈들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말을 믿었다는 거지?”

권마의 뒤끝에 검무극이 웃었다.

“네, 자기들이 그런 인생을 사니, 남들도 그렇게 사나보다 하는 자들이죠.”

내가 권마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었다.

“다 고개 들어. 허리 펴고.”

그러자 놈들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었다.

“이놈들아! 권마님이 본교에 속한 문파 후계자의 약혼녀를 건들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겠느냐? 너희를 끌어들이려고 내가 지어낸 말이다. 알겠느냐?”

“네! 네.”

신선들이 무조건 알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검무극이 권마에게 물었다.

“어떠십니까? 좀 후련하십니까?”

권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후련할 리가 없지.

검무극은 권마가 다른 이유였다면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누굴 죽였다더라, 무시했다더라. 이런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을 거다.

다만 권마는 여자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다. 그는 절벽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사람이고,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여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권마다.

“농땡이 치러 나왔다가 색마까지 되어 주시고. 감사합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사부님 성격상 이번 일 진짜 싫었다는 것 압니다.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로 고마움을 표했다. 권마와의 사이쯤 되면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않느냐고? 아니! 이렇게 꼭 말로 해야 안다. 말 안 하는데 어찌 알겠나?

권마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이것이었다. 그 싫음을 감춰서 마음에 쌓지 않고 싫다고 다 표현해줘서, 그래서 이렇게 그의 마음을 풀어줄 기회를 줘서.

“지난 며칠 사이에 이 무림에 아무도 모르게 등장했다 사라진 색마가 무림 역사상 싸움을 제일 잘하는 색마였을 겁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드디어 권마가 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달빛을 사이에 두고 얽혔다. 그의 얼굴이 편해졌음을 느낀다. 권마의 울화는 저놈들에게 사실을 밝힐 때 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아줘서 고맙다고, 미안했다는 말을 들을 때 비로소 풀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권마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 일로 젊은 애들 수백, 수천 명 구한다면서? 그럼 한 번쯤 의선이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괜한 말을 했다는 듯 권마가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커다란 등이 이전의 등보다 더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러는 사이 일선은 사선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권마가 우릴 살려둘 리 없다. 기회를 봐서 저 젊은 놈을 인질로 잡아! 우리가 살길은 그것뿐이다.

분위기로 봐서 분명 두 사람은 친한 사이였다. 인질로 삼기만 하면, 적어도 살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때마침 검무극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가 사선을 지나쳐 일선에게로 왔을 때, 사선이 벼락처럼 일어나며 검무극의 목에 검을 겨누는 데 성공했다.

“움직이면 이놈 죽는다!”

일선이 소리쳤다.

“됐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후 권마가 다시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차라리 날 인질로 잡았어야지.”

이해할 수 없는 권마의 말이 끝나는 그 순간, 검무극은 사선을 향해 돌아서 있었다.

‘언제 돌아섰지?’

검을 겨누고 있던 사선이 가져서는 안 될 의문이었다.

검무극의 주먹이 가볍게 툭. 하지만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퍼억!

사선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목이 저렇게 꺾여도 괜찮나? 안 괜찮았다.

사선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목이 부러진 채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검무극이 남은 셋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 너희가 신선이란 이름을 붙인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그 모습에 일선은 깨달았다.

‘아! 이자는 정권문의 후계자가 아니구나!’

정권문의 젊은 후계자가 목에 검을 겨눈 사선을 저렇게 손쉽게 제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젠장! 망할!’

일선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평소에 정말 조심하던 그였다. 이번에도 그냥 마인과 충돌했다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을 거다. 한데 권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까닥 잘못하다간 애써 만든 협계 체계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이미 호랑이에게 물려왔다. 다행히 먹잇감은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되었으니까. 하나 정도는 살려줄 수도 있다.

‘살아남는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지금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앞으로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텐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이 중에서 누가 제일 나쁜 놈이지?”

검무극의 물음에 세 사람은 흠칫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너희도 사람들 골랐잖아? 누굴 협박하면 좋을까? 누굴 등쳐먹을까? 너희도 고르는데 나는 왜 못 골라?”

마치 저지른 죗값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듯 세 사람을 압박했다.

“안 고르면 셋 다 죽인다!”

그러자 일선과 이선이 약속이나 한 듯 삼선을 쳐다보았다. 평소에 네가 제일 나쁜놈이란 농담을 자주 했기에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삼선은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닙니다, 제가 제일 좋은 일을 했습니다. 전 청년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줬습니다.”

“그게 아니란 것은 내가 잘 알지. 아까 그랬잖아? 내 젊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네 젊음을 위해서였다면서?”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 청년들이 이렇게 애원할 때, 단 한 번이라도 살려준 적 있어?”

“…….”

“그럴 줄 알았어.”

퍼어억!

검무극의 주먹에 삼선의 얼굴이 함몰되며 절명했다.

털썩.

아까 그에게 오늘부로 싹 잊는다고 말한 것처럼, 검무극은 그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딱 이 정도 대접이 그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 살려준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누구도 살려줄 생각이 없다.

일선은 마지막 선택을 하려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릴 것이다. 등에 암기를 맞아 죽더라도, 도망가다 죽을 것이다.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경공이라면 자신 있었으니까.

그가 돌아서려던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나란히 섰다.

“못 달아난다. 농담이 아니라 네가 한 시진을 먼저 뛰어도 따라 잡힐 거다. 저 사람 제일 잘하는 게 뜀박질이거든.”

옆에 와서 친한 척하는 중년인은 바로 풍천교주였다.

일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자는 또 누구지?’

기척 없이 접근한 것도 그렇고, 자신이 달아나려 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결국 일선은 참지 못하고 이선에게 버럭 소리쳤다.

“이 병신같은 놈아! 대체 누굴 건든 거냐!”

대상을 고르는 것이 이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한때 나도 나 자신에게 그 말 많이 했다.”

곧이어 고월도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이 있던 안가를 뒤져서 장부를 찾아냈습니다.”

두툼한 장부에는 수백 명의 이름과 그들이 돈을 빌린 액수가 적혀 있었다.

“이 장부는 제가 잘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월이라면 현명하게 잘 판단해서 처리할 것이기에 검무극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체 또 자신의 안가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건만. 그는 현기증이 났다. 이건 천재지변이었다.

검무극이 일선과 이선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다.

“둘 중 한 명만 산다. 내게 더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살겠지? 할 말 있으면 눈을 깜박이도록.”

그러자 일선이 망설이지 않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검무극이 그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남은 자금 팔십만 냥이 중원전장에 있습니다. 도장은 내 품에 있고 돈을 찾는데 필요한 암어도 알려드리겠습니다.”

일선이 고월에게 암어를 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본 이선은 당황했다. 일선이 이렇게 쉽게 돈을 내놓는다? 아니, 이해는 간다. 상대가 권마인데 뭘 어떻게 개길 것인가?

이선이 충격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며 미안한 표정 한 번 안 짓고 이렇게 곧바로 말해버린다고? 고민하는 척도 안 하고 이렇게 죽음의 선고를 내린다고?

검무극이 이선에게 말했다.

“네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첫째 신선께서 우화등선(羽化登仙)할 것 같은데?”

그러자 이선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검무극이 일선의 아혈을 제압한 후, 이선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일선이 저렇게 매정하게 저만 살겠다고 한 이상, 이선 역시 망설일 것은 없었다.

“장부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일선이 두 눈을 부릅떴지만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검무극이 예상했다는 듯 이선에게 말했다.

“전주장부군.”

자금을 대준 자에게 다시 매달 얼마의 돈을 상납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 얼마인지를 적어둔 장부.

“장부는 일선의 허리띠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고월이 일선의 허리띠를 풀어 조사하자 그 안에서 돌돌 말린 종이가 나왔다. 거기에는 상납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만약 배후를 공식적으로 족쳐야 한다면 그때 꼭 필요한 증거였다.

검무극이 일선을 보며 말했다.

“등선은 우리 둘째 신선분께 양보해야겠는데?”

그러자 일선이 빛보다 빠르게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20 절대회귀-204화 20

제204회 너희가 참아라.

검무극이 일선의 아혈을 풀어주자 없던 돈이 생겨났다.

“제가 깜빡했습니다. 대륙전장에 제가 따로 모아둔 돈이 있습니다.”

“얼마나?”

“사십만 냥쯤 됩니다.”

“많이 모았네?”

일선이 대륙전장의 암어도 밝혔다. 고월이 그것 역시 챙겨서 적었다.

앞서 신선채 자금 팔십만 냥에 일선이 따로 모은 돈 사십만 냥. 합쳐서 벌써 백이십만 냥을 얻었다. 그러자 이선이 화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다시 이선으로 교대.

“그동안 우리에겐 고작 오만 냥 챙겨줬으면서 혼자 사십만 냥이나 먹은 거냐?”

미안해하기는커녕 일선은 뭐라 반박하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아혈이 제압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선에게 재산이 더 있소. 금을 사서 숨겨둔 것을 알고 있소.”

일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금만큼은 끝까지 모른 척하려 했던 모양이다.

자기 금으로 이선이 점수를 따자 일선이 신경질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의 눈 깜박이기 전쟁이 시작되었다.

다시 일선 차례.

“금도 말하려고 했습니다. 제 공으로 해주시오!”

“그건 안돼. 억울하면 까먹지 말고 잘 챙겨. 또 둘째 신선이 네 재산으로 생색낼지도 모르니까.”

일선은 재산을 완전히 포기했다.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돈은 얼마든지 모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사둔 땅이 좀 있습니다.”

“몇 평이나?”

“꽤 됩니다.”

사실 재산보다는 정보를 얻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두 사람은 상황을 착각하고 있었다. 검무극 입장에서야 고마운 상황이었다.

한편 일선의 재산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선의 배신감은 너무나 컸다.

“형제라고? 개새끼! 혼자서 다 해 먹고 있었구나.”

사실 해 먹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말도 없이 해 먹은 게 화가 나는 것이다.

다음 차례의 일선이 반박했다.

“애초에 네놈이 오만 냥이라도 번 것도 내 덕분이란 것 모르겠냐? 나 아니었으면 넌 지금 어디 노름방에서 칼 맞고 뒈졌을 거다. 카악, 퉤!”

충성으로 맺어졌던 관계였지만 무너지니까 한순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죽은 삼선과 사선의 재산까지 다 밝혔다. 어떻게든 검무극에게 잘 보여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선은 거기에 꼭 일선을 죽이겠다는 복수심까지 있었고.

더 나올 재산이 없자, 검무극이 두 사람의 수혈을 눌렀다.

자기 차례만 오면 서로에게 욕을 해대던 두 사람이 잠이 들었다.

검무극이 고월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두 사람 데리고 전장부터 돌면서 재산 싹 회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때까지는 두 사람은 그냥 살려둘 생각이었다. 일선이 전장 암어를 틀리게 가르쳐줬을 수도 있으니까.

검무극이 풍천교주에게 부탁했다.

“내일 고 군사를 좀 도와주십시오.”

“알겠네.”

풍천교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욕을 한 바가지 하실 줄 알았는데요? 이렇게 악당 놈들까지 쥐어짜서 돈을 번다고요.”

“그 쥐어짠 돈으로 고월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나?”

“죄송합니다.”

“생색내려고 한 말은 아니고. 그 악당 놈 돈, 가치 있게 잘 쓰이고 있다는 의미였네.”

이번 신선채 자금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정보조직을 구성하는 일이 마무리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고월에게 다 들었네. 저 새끼들 잠은 왜 재워? 거꾸로 매달아 둬!”

“알겠습니다. 깨면 손톱부터 뽑기 시작하겠습니다.”

물론, 농담이었다. 어떤 악이라도 죽음을 선사하는 것으로 끝. 그게 검무극의 정해진 철칙이었다. 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풍천교주와 대화를 마친 검무극이 권마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쪽 일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달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무극이 나란히 서서 함께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뭘 느꼈는지 아나? 내가 너무 무공에만 매몰된 인생을 살았구나. 평생을 수련만 했고, 평생을 싸움만 했구나.”

언젠가 검무극이 이안에게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수련만 하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그 후회를 지금 권마가 하고 있다.

“조금 전에 깨달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달을 올려다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그게 말이 되나? 평생 살면서 일다경도 달을 본 적이 없다니.”

검무극의 시선이 함께 달을 향했다.

“이제부터라도 좀 즐기고 사십시오.”

“그러려고.”

만약 저 말을 지킬 수 있다면, 권마가 오히려 무공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설 수 있다면…… 어쩌면 그는 정말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삶이 바뀌어야 무공도 바뀌는 법이니까.

* * *

다음 날, 고월은 풍천교주와 함께 일선과 이선을 데리고 가서 전장을 돌았다. 알려준 암어는 정확한 것이었다. 돈뿐만 아니라 맡겨둔 금도 찾았고 다른 재산들도 정리해서 회수했다.

이 많은 재산을 일선은 불과 몇 년 만에 모았다. 그만큼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다는 의미기도 했다.

일선과 이선은 어떻게든 고월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말을 늘어놓았지만, 고월은 단 한마디의 말도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말을 건 사람은 풍천교주였다.

물론 그 말이 너희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에 갈 거라거나, 둘 중 누가 살아남을까 내기를 걸었다, 같은 듣기 싫은 말들만 골라서 했기에 그들도 못 들은 척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재산을 다 정리하자 검무극은 다시 두 사람을 앞에 앉혔다.

“자, 이제 전주에 대해 말해봐야겠지?”

일선은 이 대답에서 자신의 생사가 판가름 난다고 생각했다.

‘다 말하면 안 돼! 그렇다고 숨기는 기색을 보여서도 안 돼!’

이게 핵심이었다. 문제는 전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이걸 어떻게 포장해야 살 수 있을까?’

일선이 옆에 있는 이선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저놈은 아예 모르는 이야기니, 여기서 확실히 점수를 따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 수 있다. 재산도 내가 훨씬 많이 바쳤고, 전주에 대한 정보까지 제공하면, 내가 산다!’

일선이 심호흡을 크게 한 후 입을 열었다.

“전주는 딱 한 번 봤습니다.”

“언제?”

“처음 그와 손잡을 때였습니다.”

“그가 누군지 아나?”

“모릅니다. 그자와 저 사이에는 휘장이 내려와 있어서 얼굴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로 추측해볼 때, 그는 나이가 꽤 느껴지는 남자였습니다.”

“이제부터 나이가 꽤 느껴지는 남자를 찾아 나서야겠군.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려나?”

검무극의 조롱에 일선이 당황해서 재빨리 덧붙였다.

“어제 권마님이 죽인 자들이 귀검팔수입니다. 귀검팔수가 돈만 보고 움직일 리는 없으니, 전주는 그냥 돈만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분명 큰 문파의 주인이거나, 큰 권력을 지닌 자입니다.”

그때, 이선이 눈을 깜박거렸다.

일선이 재빨리 말했다.

“아혈을 풀어줄 필요 없습니다. 전주에 관해서는 저놈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렇다는데 어떻게 할까? 더 나은 정보가 자네에게 있을까?”

검무극의 말에 이선이 더욱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검무극이 일선의 아혈을 제압하고 다시 이선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이선에게서 기대 이상의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직접 그 사람과 대화도 나눠봤습니다. 휘장이 없는 데서요.”

그러자 아혈이 제압당한 일선이 눈을 깜박이고 말을 하려고 신음을 냈다. 지금 저 말이 다 거짓말이라는 격렬한 신호였다.

“자세히 말해봐.”

“일선이 그를 만났던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장원의 마당에 세워진 마차의 마부석에서 일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잠시 후, 전주가 먼저 나오더군요. 근데 그가 마차에 올라타면서 마부에게 슬쩍 고개를 숙이는 것을 봤습니다. 분명 예를 갖추는 행동이었습니다.”

일선이 하도 바둥거리며 신음을 내서 그의 아혈도 풀어주었다.

“거짓말입니다! 전주가 마부에게 인사를 왜 합니까?”

“사실입니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할 수 있게 되자 시끄러워졌다.

“지어낸 말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때 제게 말했을 겁니다. 왜 말 안 했지?”

“뭐라고 해? 네가 병신처럼 하수인에게 속은 것 같다고? 진짜 전주는 마부 같다고? 그럼 네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지랄하지 말라면서 날 두들겨 팼겠지. 아냐?”

일선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랬을 테니까.

“이 새끼! 어디서 개수작이냐? 그렇게 비겁하게 살고 싶어?”

“비겁? 그건 어디서 나온 말이냐? 네 더러운 심보에서 만들어진 말이지?”

나는 일선에게 조용히 하라고 시늉한 후, 이선에게 말했다.

“계속 말해봐.”

“심지어 기다리면서 그 마부하고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동글동글 사람이 좋아 보이는 인상에, 아! 가슴에 문신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허리를 숙일 때 우연히 봤습니다.”

“어떤 문신이지?”

“황금색 돼지 문신이었습니다. 사람 몸에 돼지를 새기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아직도 그 문신만큼은 생생합니다!”

뭔가 중요한 정보를 준다고 여겼는지 일선이 나섰다.

“이놈은 거짓말이 특기입니다. 믿지 마십시오. 살려고 별 지랄을…….”

퍼어억!

이선 앞에 있던 일선이 사라졌다. 내 일격에 얼굴이 박살 난 그는 저 멀리 시체가 되어 뒹굴었다.

놀란 이선이 나를 쳐다보았다. 경악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제가 살아남았군요!”

그는 날아갈 듯 좋아했다.

“아무래도 저놈이 더 나쁜 놈이니. 네가 뒤에 죽는 것이 맞다.”

순간 이선이 흠칫 놀랐다. 뒤에 죽는 것이란 뜻이, 나중에 나이 먹고 늙어서, 그 나중을 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차갑기만 했다.

“살려주십시오!”

“애초에 너희 넷은 살아남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냥 곱게 보내주는 거로 만족해라.”

“약속을 지켜라! 이 개새끼야! 너 대체 누구야? 누구길래…….”

퍼어억!

이선이 일선이 있는 곳까지 날아가서 절명했다.

검무극은 이들을 없애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들의 개과천선을 바라지도 않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혀 마교 이공자에게 죽었다는 거창한 의미도 부여해주지 않았다.

돌아섰을 때, 권마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배후 놈들까지 캘 작정 아니었나?”

“맞습니다.”

“한데 다 죽여도 되나?”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동글동글한 체형, 가슴에 황금 돼지 문신. 회귀 전에 내가 잘 아는 사람이다. 때론 마부가 되었다가 공사판의 인부도 되었다가 주점의 점소이도 되었다가. 그는 신분을 숨기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동시에 극도로 탐욕적이었던 인물.

“놈을 죽이려면 아버지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검무극의 말에 권마가 깜짝 놀랐다.

“대체 누구기에?”

검무극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지생(池生)입니다.”

권마가 대번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사도맹의 그 황금돼지?”

“네. 바로 그자입니다.”

“그자가 이번 일의 배후에 있다고?”

권마의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가 지생이라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사도맹 소속이라서가 아니었다. 지생이 한 사람의 충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도맹주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자 오직 사도맹주의 명령만 받는 사도맹 최정예조직 극도병단(極度兵團)의 수장.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耶律韓).

지생은 바로 야율한이 가장 아끼는 네 명의 수족 중 하나였다. 그 수하들은 충성을 맹세하며 각자 가슴에 문신을 새겼는데 지생은 황금돼지를 새기며 평생 마르지 않는 돈을 벌어오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 돈은 결국 야율한에게 들어가는 돈이었습니다.”

검무극은 운명이 자신을 이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이번 일 때문이 아니었다.

야율한.

그는 한 사람의 원수였다. 검무극과도 깊은 인연을 지닌 사람, 바로 마의였다.

마의가 신안술을 해주며 언젠가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부탁한 대상이 바로 야율한이었다. 아직 이름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검무극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야율한은 마의가 보는 앞에서 가족을 몰살했다. 그날 이후 마의는 오직 야율한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마의의 부탁을 들었을 때, 실력이 되면 움직이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마는 내가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을 눈치챘다.

“야율한은 안 돼!”

“왜 안 됩니까?”

“잘못 건드렸다간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

“전쟁은 나지 않을 겁니다. 소동도 나고 난리도 나겠지만요.”

“너 진심이구나.”

과거 마의가 아버지에게 그를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거절했다.

사도맹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야율한은 사파의 악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전 이번 일의 배후가 제일 악질이라 여겼습니다. 자신은 어둠 속에 숨어서 일선 같은 하수인을 이용해서 청년들의 고혈을 죽을 때까지 빨아먹었으니까요. 아마 며칠 후면 지생에게 신선들이 다 죽었다고 보고되겠죠. 그럼 지생은 또 다른 신선들을 만들어서 같은 짓을 반복할 겁니다. 설령 지생이 죽더라도 또 다른 지생이 그 일을 대신하겠죠.”

바로 이런 놈들이다. 검무극이 생각하는 절대악이다.

정파도 건들 수 없고, 보통 사람은 아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악.

예전에 아버지가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마도가 무엇이냐고.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절대악을 때려잡는 본교만의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파조차 어쩔 수 없는 큰 악을 잡아내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마도라고. 마교란 말에 그 악들이 벌벌 떨어야 한다고. 그게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천마신교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물러나야겠죠. 참아야겠죠. 한데 우린 보통 사람 아니잖습니까? 안 참아도 되지 않습니까? 제가 죽도록 수련하고 노력한 이유는 이럴 때 안 참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우리가 참습니까? 그놈들이 참아야지요. 사람들 그만 괴롭히고 그만 좀 지랄하라고.”

권마는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검무극도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권마는 성격으로 볼 때 이 설득이 가장 잘 통할 사람이었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볼 때 가장 안 통할 상대기도 했다.

이윽고 긴 침묵을 깨고 권마가 여행의 끝을 알렸다.

“이만 교로 돌아가자. 농땡이 여행은 여기까지다.”

갑자기 시작된 여행은 갑자기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실망은 일렀다. 권마는 그 큰 등으로 돌아서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덧붙였다.

“교주 허락을 받으려면 마존들이 전부 나서야 할 거다.”

22 절대회귀-205화 22

제205회 허락해 주십시오.

고월은 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신선채와 관련해서 얻은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예산을 꾸리고 있었다. 계산하고,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때 매번 반복되는 이 힘듦을 덜 힘들게 해주는 사람이 다급히 들어왔다.

“이공자와 권마, 교로 돌아간단다.”

풍천교주의 말에 고월의 손에 들린 붓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지금 당장 가려는 것 같던데.”

여전히 일만 하는 고월을 보며 풍천교주가 물었다.

“이공자 간다는데 안 섭섭해?”

“섭섭하긴. 바쁘신 분인데 갈 때 되면 가야지.”

“나도 같이 갈 거야.”

고월은 여전히 일에 열중했다.

“정말 간다니까! 농담 아니야!”

“교주 가면 나도 같이 돌아갈 거다.”

일만 하기에 괜스레 심술부린 거였는데, 고월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정말 함께 돌아가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래. 교주 가면 나도 간다. 혼자서는 안 해.”

풍천교주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빈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됐다, 가긴 어딜 가? 일 마무리해야지.”

“가자니까.”

“괜찮아. 난 이미 갔다 왔다.”

고월의 말 한마디에 천마신교까지 날아갔다 온 풍천교주였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면 정신없을 거야.”

“왜?”

“이공자가 사도맹 이인자를 죽이겠단다.”

고월이 흠칫 놀랐다. 풍천교주가 방에 들어와서 전한 소식 중에 제일 놀라운 소식이었다.

“야율한?”

“그래, 그놈!”

풍천교주는 야율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과거에 만나본 적도 있었고.

“아무리 이공자라도 그놈은 쉽지 않을 텐데.”

고월은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다만 소문만으로도 만만찮은 상대가 아님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교주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풍천교주는 앞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마도에 대해. 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대해.

“이공자가 천마가 되면…… 정말 많이 바뀔 거다.”

고월이 잠시 붓질을 멈추고 말했다.

“이미 많이 변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자신들이 서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들어왔다.

“이미 우리 교주님이 떠난다는 소식은 다 전한 것 같고. 이 길로 떠나야 할 것 같네.”

“조심히 가십시오.”

“또 고생하는 자넬 남겨두고 돌아가는군.”

“이제 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잘 마무리 짓고 돌아가겠습니다.”

“자금은?”

“신선채로부터 거둬들인 돈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됐군. 전서로 계속 연락하자고.”

“네. 부디 보중하십시오, 공자님. 아, 그리고 완성된 지역의 정보망은 언제든 사용하시면 됩니다.”

검무극은 말만 들어도 든든했다. 통천각과 고월의 정보망이 합쳐지면, 무림에서 제일 빠르고 많은 정보를 얻는 사람은 검무극 자신이 될 것이다.

“이 정보조직 이름은 생각해둔 것이 있나?”

“공자께서 정해주십시오.”

“자네 이름을 따서 은월(隱月)로 짓고 싶은데, 어떤가?”

고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굳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만들어주는 검무극의 배려가 고마웠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시작부터 이렇게 힘든 일을 맡겨서 미안하네.”

“시작부터 중책을 맡겨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검무극과 고월이 작별하는 사이 풍천교주와 권마도 짧은 작별을 나눴다.

풍천교주가 먼저 권마에게 인사했다.

“이번에 뵙게 돼서 좋았소.”

“교주께서 내 제자를 위해 이렇게 헌신하고 계신 줄은 몰랐소. 감사드리오.”

사실 풍천교주는 마존들 중에 친한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마불이 친했었는데, 이미 틀어져 버렸고.

이번에 권마와 친해질 기회가 있긴 했지만, 괜히 내외한다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될 때 한잔합시다.”

풍천교주의 진심이었다.

“이봐, 이공자. 꼭 허락받아 내게.”

이 또한 진심이었다.

* * *

권마와 함께 경공으로 달렸다.

올 때는 천천히 즐기면서 농땡이를 쳤지만, 돌아갈 때는 그야말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우린 어두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올 때는 며칠 걸렸던 거리를 한나절 만에 왔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가시죠. 잠시만 앉아 계십시오.”

나는 능숙한 솜씨로 주변을 정리했다. 우선 권마가 편히 쉴 수 있게 나뭇잎을 깔아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그가 고마웠다. 그가 이번 일을 허락해 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가 가장 반대할 마존이었는데, 그는 나와의 관계를 더 우선해준 것이다.

권마가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사냥감을 잡아서 요리했다. 출발하기 전에 객잔에 들러 몇 가지 요리에 필요한 양념을 사 왔기에 제법 맛있는 요리를 대접할 수 있었다.

“양념도 챙겨온 거냐?”

“그럼요. 먼 길을 갈 때는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군.”

“이 양념 비법, 누구 방식인지 아십니까?”

“교주가 해주던 맛이군.”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 요리 드셔보셨습니까?”

“예전에 두어 번 먹어본 적이 있다. 교주와 한창 많이 돌아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정말 많이 싸우고 다녔지.”

나는 잠시 아버지와 권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두 남자, 천마와 권마.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옆에 젊은 권마의 모습도 보인다. 격투장에서 싸우고 있던 소년은 권마가 되었고, 그 소년을 뽑았던 청년은 천마가 되었다.

무뚝뚝하고 남자다운, 그리고 무림에서 가장 호전적인 두 남자가 강호를 종횡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그들은 누구도 겁내지 않았을 거고,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았을 거다.

내가 극악소마와 등을 맞대고 적과 싸웠듯, 두 사람도 서로를 의지한 채 싸웠겠지.

그리고 밤에는 이렇게 모닥불을 피우고 술과 고기를 먹었을 것이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을 거다.

어쩌면 권마는 지금 나와의 야영에서 지난날 젊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술도 있습니다.”

챙겨온 술을 꺼내 따라주었다.

권마와 함께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시는 한 잔의 술은 흥취가 있었다.

“여행은 돌아갈 때가 더 중요한 법이죠.”

“그건 왜 그러냐?”

“여행의 마지막 완성이 언제 되는지 아십니까? 내 방을 열고 들어가면서 ‘아! 드디어 돌아왔다!’ 하면서 침상에 몸을 던질 때입니다. 그러니 우린 지금 그 마지막을 위해 달려가는 중이죠. 오히려 출발할 때의 설렘보다 더 중요한 때입니다.”

권마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넌 어찌 그리 잘 아느냐?”

지난 내 삶은 기나긴 여행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돌아올 내 방이 없었다.

당시의 내 방은 귀령자의 집 마당이었다. 대법 재료를 가져와서 놀란 얼굴의 그를 보면서, 아! 해냈구나! 아주 짧은 안도를 했었으니까.

“사부님과의 이번 여행, 너무 좋았습니다.”

나는 이 우직하고 조용한 사람과 잘 맞다. 지금은 말 많고, 까불고, 웃고, 떠들지만. 원래 나란 사람은 저 권마와 많이 닮아 있었으니까.

“참, 돌아가시면 철권들 수련에 참가하시는 시간부터 줄이시죠.”

권마도 그러려고 했는지 구체적으로 내게 물었다.

“매일 하나씩만 참가할까? 오늘은 백권, 내일은 청권. 이렇게.”

“아뇨. 그럼 사부님은 매일 그들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평소처럼 하루에 네 곳을 다 봐주시되, 오 일에 한 번씩만 참가하십시오.”

“오 일?”

“나머지 사 일은 사부님이 하고 싶으신 것 하십시오. 온전히 사부님 시간으로요.”

“심야수련모임은?”

“그건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오시고 싶으면 오시고, 쉬고 싶으시면 쉬시고.”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농땡이 여행이 권마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그 변화의 결과가 기대된다.

날이 밝자 우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가 내공이 떨어지면 함께 앉아서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회복했다.

그렇게 우린 거침없이 달려서 교로 돌아왔다.

* * *

내가 천마신교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철방에 계셨다.

본교의 철방은 무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거대한 철방 내부에는 웃통을 벗은 수백 명의 사내가 쇳물을 녹이고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후끈한 열기와 땀 냄새, 그리고 쇠 냄새.

카앙! 깡! 까앙!

난 예전부터 이 쇠 두드리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그 위험천만한 치열함이, 저 소리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저 소리는 언제나 뜨겁게 들린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내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나도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그곳을 걸어갔다.

저 멀리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이곳에서도 아버지의 존재감은 확연하다. 모두가 흑백처럼 보이는 그림 속에서 오직 혼자만 붉은 점처럼 뚜렷한 아버지.

아버지는 이곳 철방 책임자이자 신수라 불리는 곽 방주와 함께 서 있었다. 곽 방주는 이번에 새롭게 만든 검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병장기를 만들면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에 반드시 아버지에게 의견을 구했다.

두 사람이 워낙 진지하게 검을 살피며 말씀을 나누고 있었기에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잠시 기다렸다.

세상에 가장 검을 잘 다루는 사람과 세상에서 가장 검을 잘 만드는 사람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 철방에서 이보다 더 감격스런 장면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검이 통과되면 대량생산을 해서 본교 무인들의 검을 교체하는 것이다. 보통 오 년에 한 번 정도, 길면 십 년에 한 번씩 철방에서는 검을 개량한다.

이렇게 개량된 검은 본교의 모든 무인에게 지급된다. 각자 재량으로 다른 검을 사용해도 되지만 대부분의 본교 무인들은 본교 철방이 만들어낸 검을 사용한다. 그만큼 품질이 좋은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왔느냐? 네, 다녀왔습니다. 짧고 간단하지만, 너무나 반가운 눈인사.

나는 쩌렁쩌렁 큰 소리로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소자, 중원에서의 중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중임? 권마와 농땡이를 치러 갔다던데?”

“그런 불미스러운 소문은 대체 누가 퍼뜨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나다. 중원을 나가면 주기적으로 통천각을 통해 내 소식을 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협조를 잘해둬야,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곽 방주가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내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의외였을 것이다.

“이리 와서 새 검을 보거라.”

나는 아버지가 건넨 검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검을 살핀 후 느낀 바를 말했다.

“기존의 검보다 약간 가벼워졌네요. 길이는 아주 조금 길어졌고요.”

내가 대번에 알아차리자 곽의 눈가에 감탄의 기색이 스쳤다.

“미세한 차이인데, 알아보시는군요.”

“그럼요, 어르신 검으로 얼마나 수련을 많이 했었는데요.”

“어떤 것 같습니까?”

“요즘 제가 검술보다는 주먹질만 하고 다녀서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웃으면서 넘겼다. 굳이 말하자면 건의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계신 데 그럴 필요 있겠는가?

아버지가 곽 방주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아주 조금만 더 가볍게 하면 좋을 것 같네. 길이는 지금이 딱 좋고.”

“알겠습니다, 교주님.”

아버지는 내 생각과 같았다. 거기에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 짚어주었다.

“검 손잡이의 결을 조금만 좁혀주게. 이전보다 미끄러운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교주님.”

“고생하셨네.”

“완성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철방을 나왔고, 나도 곽 방주에게 인사한 후 아버지를 따라 나왔다. 아버지가 지나가는 길에 서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두려움은 그들이 다루는 저 뜨거운 불과 같았다.

“언제 왔더냐?”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권마는?”

“반 각쯤 후에 도착할 겁니다.”

“같이 오지 않았더냐?”

“막판에 경공 내기를 하자고 하셔서요.”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 권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예전에 미리 아버지에게는 말씀을 드렸고, 허락까지 받은 일이었지만 왠지 긴장되었다.

과연 아버지는 어떤 기분일까?

불쾌하실까? 아니면 덤덤하실까? 아니면 잘됐다고 생각하실까?

아무리 아버지를 똑똑히 보려고 노력해도, 아버지 마음을 알기는 참 어렵다. 이번 일도 분명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갈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일절 그에 대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권법은?”

“벽력수라권을 육권까지 다 전수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 너의 잔망스러움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마지막 두 권은 하는 걸 봐가면서 전수해줬어야 했는데.”

“아버지. 사부들이 그런 괜한 심술을 부리다가 무공들이 실전되는 겁니다.”

우린 대연무장을 가로질러 천마전을 향해 걸었다. 지나가던 마인들이 아버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버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대연무장 한가운데서 우린 발걸음을 멈췄다. 천마전이 아니라 뻥 뚫린 이곳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서였다. 이건 중원의 일이고, 본교 바깥의 일이었으니까.

“사도맹의 야율한을 죽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호통이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호통 대신 아버지의 입가에 그 특유의 비웃음이 지어졌다.

“절대 불가!”

불가 앞에 절대까지 붙었다. 그 단호한 거절과 함께 아버지가 돌아서서 걸어가셨다.

“허락을 받기 위해 지금부터 노력할 겁니다. 그 말씀 드리려고 한 겁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냥 걸어가셨다. 뒷모습이 말씀하고 계셨다.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아버지에게 선전포고는 했다. 지금부터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해 내야 한다. 어쩌면 야율한을 죽이는 것보다 허락을 받는 일이 더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천마전을 향해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교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 역시 집이 좋구나!”

거대한 악귀상들이 사방에서 검과 도를 휘두르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17 절대회귀-206화 17

제206회 과연 거절하는 사람이.

아버지를 만난 후, 난 곧장 마의의 의방으로 갔다.

마침 그는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심하게 다쳤는지 환자는 물론이고 주위가 온통 피바다였다. 돌아와서 맨 처음 맡은 냄새가 철방의 쇠 냄새였는데, 다음으로 맡은 냄새는 피 냄새가 되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 없습니까?”

“괜찮네.”

나는 멀찌감치 서서 그가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의는 피를 뒤집어쓴 채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철방의 곽 방주나 마의나, 한 분야의 정점에 다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반드시 사람을 살리겠다는 저 노력과 집중력은 반드시 좋은 검을 만들겠다는 곽 방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윽고 한바탕 전쟁 같았던 치료를 마친 마의가 나에게로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아닙니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는 신비를 이렇게 공짜로 봐도 되는 겁니까?”

“원래도 살 사람이었네.”

저렇게 힘들게 구했는데 그럴 리가 있겠나? 마의를 의원으로 둔 행운이 그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마의가 의방 구석에 받아둔 물에 손과 얼굴을 씻었다. 삐쩍 마른 그의 팔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이렇게 한 번씩 보면 되지. 자네 소식은 잘 듣고 있었네. 그때마다 내가 잘 선택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줘서 고맙네.”

“의선님 덕분입니다.”

“눈은 괜찮나?”

“아무 문제 없습니다. 너무 잘 보여서 탈이죠.”

“다행이군.”

야율한을 죽이고자 마음먹자 그를 보고 싶었다.

‘절대불가’란 아버지 말을 듣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자 마의를 찾은 이유도 있다. 마음 같아선 지금부터 야율한을 죽일 작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나서 할 일이다.

“모처럼 왔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게.”

“좋습니다.”

나는 마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밀렸던 이야기를 다 해주려고 했는데, 그새 또 환자가 오는 바람에 그만 일어나야 했다.

“또 찾아뵙겠습니다.”

“바쁜데 그럴 것 없네.”

조만간에 꼭 다시 오게 될 겁니다.

* * *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는 마당에 혈천대도를 꽂아두고 등을 기댄 채 자리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수련의 열기가 주위 공간에 남아 있었다. 내가 권마와 농땡이 치러 나갔던 동안에도 혈천도마는 무공수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어르신! 저 돌아왔습니다.”

금의환향이라도 한 듯 신나게 인사하는 나에 반해 혈천도마는 어제 본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먼 길 다녀왔으면 쉬지, 여긴 왜 왔느냐?”

“왜 오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르신께 인사는 드려야죠. 그리고 보고드려야 할 것도 있고요.”

“무슨 보고?”

나는 혈천도마 앞에 마주 앉았다.

“저 권마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혈천도마는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무미건조한 반응은 뭡니까?”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데?”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덥석 제자가 돼? 버럭 화를 내시거나. 제자가 되려면 내 제자가 되어야지. 질투하시거나.”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했다.

“권마 아니면 널 제자로 삼을 마존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격적으로 말이다.”

“어르신은요?”

“나는 대룡이 같은 제자가 좋아. 마음껏 굴리면서 가르치는 제자.”

“아! 불쌍한 서 조사관.”

“함부로 남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대가지.”

그들 사제지간의 시작이 풍류주점에서 서대룡이 술 취해서 혈천도마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면서 시작되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안다. 혈천도마가 말은 저렇게 해도 서대룡을 많이 아낀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차기 혈천도마로 그를 정하진 않았을 것이다.

“널 제자로 두면 한 달도 안 돼서 화병 걸릴 거다.”

“부정할 수가 없군요.”

“반면 권마는 화병에 걸리지 않지.”

“그건 왜 그렇습니까?”

“애초에 누군가를 굴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니까. 교주나 내가 불이라면 그는 물이다.”

나는 권마가 아버지와 같은 불이라 생각했는데, 혈천도마는 그를 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불과 물이기에 오히려 아버지와 잘 어울렸을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르신께서 섭섭해할까 봐 걱정했었습니다.”

“속 좁은 늙은이 삐질까 봐?”

“속 좁다니요. 그냥 절 위한 애정이 깊으시니 그런 거죠.”

“예전이라면 그랬을 거다. 널 보기 전의 나라면 분명 섭섭해했을 거다.”

“지금은요?”

“지금은 바뀌었지. 너 때문에.”

“저 때문이라고요?”

“그런 속 좁은 늙은이로는 너와 함께 갈 수 없게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느냐?”

“……!”

나는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와 인연을 맺은 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너는 나를 끝없이 자극했지. 처음에는 짜증 나게 했고, 나중에는 놀라게 했고, 지금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수련하시는 것도 그런 측면이십니까?”

“그래. 기존의 내 실력만 믿고 잘난 척 어슬렁거리다간, 비바람에 휩쓸려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 너는 이미 승천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승천하는 용이 비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비유적으로 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혈천도마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고 나는 예전처럼 미꾸라지니 어떻니,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그의 말이 옳다. 가진 실력 믿고 어슬렁거렸다간 우린 다 죽는다.

그랬기에 계속 나아가야 했다.

“제가 쓸 수 있는 서른세 가지 부탁 중 첫 번째를 쓰겠습니다.”

내 말에 혈천도마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다.

“서른세 가지 부탁이라니?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있었나?”

“물론 없죠. 앞으로 살면서 어르신께 서른세 번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임의로 정한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서른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기 전에는 감기도 걸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래 살라는 내 마음도 담겨 있는 억지였기에 혈천도마는 못 말린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무슨 부탁이냐?”

“아버지를 설득해 주십시오.”

“교주를? 어떻게?”

“사도맹의 야율한을 처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혈천도마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왜 놀라지 않으십니까?”

“넌 미친놈이니까 이런 짓도 저지를 수 있겠다 싶어서.”

“승천하는 용의 비바람 아니고요?”

“아니. 이건 그냥 미친 짓이다.”

“그 미친 짓 한 번만 하게 해주십시오.”

“이유나 묻자. 왜 그자를 죽이려는 거냐?”

나는 혈천도마에게 야율한의 수하인 황금돼지 지생이 신선채를 이용해서 무림의 젊은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음을 전했다.

마의의 복수에 대해서는 그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였으니까.

“그런 이유라면 교주는 허락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어르신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물었다.

“허락이 떨어지면…… 죽일 자신은 있고?”

“해봐야죠.”

“놈도 놈이지만 놈을 지키는 수하들 무공도 만만치 않다. 거기에 일이 잘못 풀리면 본교와 사도맹과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어.”

혈천도마 역시 전쟁이 발발할 것을 걱정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젊은이들이 닳고 닳은 저놈들에게 속아 온갖 악행을 강요당하고, 결국 칼받이로 죽거나 자결하고 맙니다. 가치가 있는 일이냐고요? 네,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마의와의 약속이 아니더라도, 야율한의 악행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회귀 전 인생에서야 대법 재료를 구하느라 사도맹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꾸준하게 들려온 소문은 야율한의 수하들과 관련된 악행들이었다.

운명이 이 시점에 나를 그의 앞에 세웠다면, 이번에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왜 너 같은 사람이 본교에서 태어난 건가? 무림맹주 아들로 태어나지 않고.”

“어르신과 싸우지 말라고 그랬겠지요.”

혈천도마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도맹에서 저를 도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사도맹 후계자 비사인입니다.”

지난 은원을 갚기 위해서라도 비사인은 반드시 나를 도울 것이고, 그라면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잠시 숙고하던 혈천도마가 권마가 같은 말을 꺼냈다.

“교주의 마음을 바꾸려면 마존들 여덟이 다 나서야 할 거다. 네가 그 정도 능력을 발휘하면 교주도 스스로 마음을 꺾을 명분이 생길 테니까.”

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두 사람의 의견이기에 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팔마존은 어렵습니다. 당장 마불과 독왕은 형을 지지하는 사람이라 도움을 주지 않을 겁니다.”

혈천도마가 땅에 박힌 도를 뽑으며 말했다.

“과연 거절하는 사람이 그들 두 사람뿐일까?”

그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덧붙였다.

“네 진짜 인간관계는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모르지.”

* * *

과연 혈천도마의 예상대로였다.

일화검존은 일언지하 거절했다. 정말 그녀의 검술처럼 깔끔하게 거절했다.

“그건 안 되겠네.”

거절하는 이유 역시 깔끔했다.

“이공자, 자네니까 솔직히 말하겠네. 난 이런 일로 교주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네.”

이해할 수 있었다. 젊어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누구보다 높은 그녀였다. 아버지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을 굳이 찾아가서 부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해합니다, 선배님.”

솔직히 일화검존이 거절할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다른 마존에 비해 일화검존과는 한 걸음 더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무 이외에는 그녀와 깊은 인간관계를 맺을 기회가 없었으니까.

“섭섭한가?”

괜히 고지식하게 대답하면 진짜 그녀를 섭섭하게 만들 것이다.

“네, 섭섭합니다. 너무 하십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이해해 주게.”

그제야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압니다, 선배님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이해해 주니 고맙네.”

“죄송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시 설득하러 찾아뵐지도 모릅니다.”

“그러게.”

하지만 그녀보다 한 걸음 더 가깝다고 여긴 사람에게도 이번 일의 허락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취마였는데,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는 말에 갑자기 취한 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네.”

취마가 술상에 머리를 박으며 잠든 척했다.

내가 말없이 술을 마시자 그가 엎드린 채로 말했다.

“다른 부탁은 다 들어준다. 뭐 해줄까? 평생 술 사달라면 술 사주고. 돈 빌려줄까? 악인곡에 가서 그놈들 또 패줄까?”

“됐고. 아버지 설득해줘.”

그러자 술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취마가 벌떡 일어나더니 호수로 풍덩 뛰어들었다.

취마는 미친놈처럼 호수 끝에서 끝까지 마구 헤엄치더니 정자로 다시 올라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원래 자리에 앉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내가 술 끊을게.”

술 끊겠다는 취마라니.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정도로 힘들어?”

“내가 찾아가면 교주가 무슨 생각 하겠어? 이 새끼 봐라, 내가 반대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날 찾아와서 설득하려고 해? 그러잖아도 교주는 날 싫어하는데.”

“아버지가 형을 왜 싫어해?”

“싫어해. 교주는 주정뱅이도 싫어하고, 독 쓰는 놈도 싫어해. 교주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다. 나는 못 해! 절대 못 해! 미안해, 동생.”

나는 더는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버지와 관련된 일인데 어찌 이해가 안 되겠는가? 설령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안하면 오늘부터 열흘간 금주해!”

“금주한다! 미안해!”

“형이 왜 미안해. 무리한 일로 조른 내가 미안해야지.”

“이번 일로 우리 사이 나빠지면 안 돼!”

“형, 우리 사이가 나빠지는 건 내가 부탁을 해서도, 형이 그 부탁을 거절해서도 아니야.”

“그럼 왜 나빠지는데?”

“솔직하지 않을 때. 이렇게 솔직히 나 이래서 못 해줘, 하면 되는데 지금 내 기분 맞춰주려고 해주겠다고 대답했다고 상상해봐. 하기 싫은 걸 하려다 보면 짜증에 울화에. 결국 나란 사람까지 미워질걸?”

취마가 그랬을 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거절했어, 형. 난 앞으로도 부탁 많이 할 거야, 누구 좀 패는데 같이 가줘, 외로운데 같이 술 마셔줘, 저 사람 설득해야 하는데 도와줘. 형 그때도 이렇게 솔직히 말해줘야 해. 지난번에 거절했으니 이번에는 억지로라도 해줘야지, 이런 생각 절대 하면 안 돼! 그때 우리 사이가 갈라지는 거야, 알았어?”

날 가만히 응시하던 취마가 말했다.

“오늘부터 네가 형 해라. 진심이다.”

“싫습니다. 우리 형 놀리는 재미로 사는 동생에게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어휴, 세상 부끄러운 형이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버지 무서워하는 건 절대 부끄러워할 일 아니야. 나, 간다. 아마 이 일로 또 올 거야. 그때 봐.”

그렇게 취마의 거처에서 물러났다.

혈천도마 말이 맞았다. 어쩌면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보다 마존들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내 편이라 여긴 일화검존이나 취마도 설득하기 어려운데 여덟 명이 다 가서 이야기해야 아버지가 허락하실 거라고?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지금은 좌절할 때가 아니라 방법을 찾아내야 할 때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나의 싸움 동지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41 절대회귀-207화 41

제207회 예의에 응답하려고 합니다.

극악소마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길게 선이 그어진 벽이 보였다.

극악소마는 그 선을 등진 채 반대쪽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쪽 벽 색깔이 더 마음에 듭니다.”

내 농담에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눈구멍 속의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 눈구멍 속에서 반가움이란 감정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극악소마와 오직 눈구멍 속의 눈빛만으로 소통하지만, 그 어떤 누구보다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가면이 바뀌었습니다.”

“역시 이공자는 대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바뀐 이유가 뜻밖이었다.

“청면이 가면을 여러 개 만들어 왔습니다. 그걸 주면서 말하더군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요. 예쁜 심장에게로 가겠답니다.”

드디어 청면이 귀영대 일조장의 자리를 수락한 것이다.

“그래서 청면의 팔을 자르셨습니까?”

예전에 팔이라도 잘라서 보내지 그냥은 청면을 보내지 않겠다고 말한 그였다.

“안 잘랐습니다.”

“왜요?”

“자르기 전에 꼭 이공자에게 말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데 이공자가 출교 중이니 자를 수가 없었지요.”

어찌 그래서겠는가? 청면이 자신이 원한 삶을 살아가게끔 놓아준 것이다.

잘했다, 소마야. 이대로 갔으면 청면은 마존에 오르지 못하고 늙을 때까지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 거다.

“멋지십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진심으로 멋지십니다.”

“이런 칭찬을 들어버렸으니 앞으로도 팔은 못 자르겠군요.”

눈구멍 속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서 그는 극악이 아니라 소마다.

“권마와 출교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농땡이 치러 나갔는데 권마의 제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권마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에 극악소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더 잘 싸우게 되었겠군요!”

극악소마는 내 사부가 권마이냐 아니냐는 관심도 없었다. 내가 더 강해졌다는 데서 흥분했다.

“네, 저는 조금 더 강해졌습니다!”

나 역시 이런 말을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대상이 극악소마다. 젊어서 아버지와 권마가 어울려 다녔듯, 극악소마와 나의 관계가 그러했다.

“소마님,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내심 떨렸다. 과연 극악소마는 내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도맹 야율한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아버지를 설득해 주십시오.”

극악소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지요.”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그를 죽여야 하는지, 어떻게 죽일 것인지.

내가 어떤 부탁을 했더라도 그냥 들어줬을 거라는 태도에 내 마음이 울컥했다.

그냥 내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이 세상 단 한 사람.

나는 기뻤다. 이런 순수한 기쁨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른 마존들의 거절을 이해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섭섭했었나 보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니까 말이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 주실지 몰랐습니다.

그 말을 꺼내려다가 말았다. 왠지 그 어떤 말도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고마움은 다른 식으로 전했다.

“만약 이번 일의 허락이 떨어지면, 그때 저 좀 도와주십시오.”

소마야, 가자. 나와 또 멋지게 싸우러 가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그리고…… 정말 고맙다.

나의 뜨거운 눈빛을 보며 극악소마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싸움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그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다.

“지금 찬성한 사람은 누굽니까?”

“확실하게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소마님뿐입니다.”

“제가 일 번입니까?”

“그렇습니다. 소마님이 첫 번째입니다.”

아직 혈천도마나 권마가 설득하겠다는 말을 직접 꺼낸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혈천도마는 나서줄 것이다. 권마 역시 나서줄 거고. 지금 확실히 도움을 줄 마존은 셋.

“괜히 기분 좋군요.”

“제 첫 번째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반대쪽 벽에 있는 쭉 그어진 선을 쳐다보았다. 소마의 시선이 나를 따랐다.

저 벽은 오랫동안 두었으면 합니다.

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기에.

나중에 천마가 되면 저 벽을 떼어다 천마전에 걸어둘 작정이다.

* * *

권마를 찾아갔을 때 그는 절벽 아래에 서 있었다.

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눈에 이 절벽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을까?

“극악소마님이 절 위해 나서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권마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소마 그 사람이?”

권마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극악소마란 사실이 뜻밖인 모양이다.

“둘이 친한가?”

“친합니다.”

“친해지기 쉽지 않은 사람인데.”

“그렇게 따지면 사부님은 어디 쉬운 분이십니까?”

내가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 절벽을 한방에 무너뜨리려고 하시는 분인데요.”

권마의 시선이 나를 따라 절벽을 향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벽은 이 절벽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높고 단단한 벽이었다.

“교주는 이번 일을 허락하지 않을 거다. 너에게는 그 젊은 애들을 구하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교주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마찬가지다. 다른 마존들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아버지나 마존들을 이해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지금 보이는 모습들만 해도, 다른 사람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들 변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변화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바뀌어야 무공이 바뀌고, 우리의 운명이 바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 삶처럼 그냥 다 지나쳐버리면.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 이렇게 다 지나쳐버리는 삶을 살면…… 운명처럼 등장한 화무기에게 또다시 쓸려 버릴 것 같아서다.

사부, 당신이란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이 절벽을 무너뜨릴 수 없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설산에서도 이야기를 나눴듯 교주는 무림일통의 꿈을 꾸고 있다. 네가 야율한을 죽이면 교주가 그리는 큰 그림에 변수가 생길 것이다. 교주가 쉽게 허락할 리가 없지.”

“그럼 더더욱 변수를 만들어야겠습니다. 아버지의 무림일통만큼은 반드시 막을 작정이니까요.”

나는 확고했고, 그 고집스러움을 권마는 말없이 응시했다.

“아버지를 설득해 주시겠습니까? 사부님.”

권마는 마지막 고민에 잠겼다. 아버지와 충돌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권마라고 왜 없겠는가? 아니, 권마이기에 그런 마음이 가장 클 것이다.

이윽고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감사합니다, 사부님.”

이래섭니다. 당신을 내 사부로 삼은 것은. 힘들어도 물러서지 않는 남자니까.

혈천도마에겐 대답을 듣지 않았지만, 그것을 재차 확인하러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는 분명 나를 도와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 확신은 정확했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만나러 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 * *

피의 길을 걸어간 혈천도마가 태사의 아래에 멈춰 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혈천도마의 정중한 인사에 천마 검우진이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첫 포문을 여는 건가?”

검우진은 이미 혈천도마가 왜 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어쩌겠습니까? 젊은 사람이 큰일 한 번 해보겠다는데 늙은 입이라도 거들어야죠.”

“젊은 놈이 천방지축 사고를 치려 하면 나이 든 우리가 말려야 하지 않나?”

“맞습니다. 우리 젊었을 때 생각해 보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죠. 한데 또 생각해 보면 그때만큼 열정적이던 때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열정이 없나?”

“타다 남은 이 흔적이 열정이라면, 있긴 있습니다.”

차분하게 말이 오갔지만 천마전에는 팽팽한 기운이 가득했다.

검우진이 태사의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우리 좀 걸을까?”

“좋습니다.”

검우진이 혈천도마와 함께 피의 길을 걸어서 천마전을 나왔다. 두 사람은 천마전 앞마당을 함께 걸었다.

“저기 대연무장 한가운데서 부탁하더군. 야율한을 죽이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선포였네.”

혈천도마가 좀 편한 어조로 물었다.

“자식이 웬수죠?”

검무극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소가 검우진의 입가에 지어졌다.

“자네도 겪어봐야 하는데. 아쉽네.”

“제가 교주님보다 유일하게 더 행복한 부분인데. 농이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두 사람은 이보다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누던 시절도 있었다.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릴 줄 알았다면, 교주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가졌을 텐데. 혈천도마는 새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대체 그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낸 걸까?

“다른 마존들은 몰라도 자네가 이렇게 녀석에게 빠져들 줄은 몰랐네. 대체 뭐가 좋아서 이렇게 넘어갔나?”

“그 생각 저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만, 이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드님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묘한 매력이라.”

이번에는 혈천도마가 말했다.

“못 느끼셨습니까? 교주님도 느끼셨을 것 같은데.”

“나는 그걸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 불렀네.”

검우진은 그 싸구려 감성이란 표현이 순진한 감성으로 바뀌었다는 것까진 말하진 않았다.

“제가 그 싸구려 감성에 푹 빠졌습니다.”

혈천도마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민감하고 중요한 일로 찾아왔지만, 오랜만의 이 대화가 기분 좋았다.

“교주님, 그냥 한 번 져주시지요.”

넌지시 던진 말에 검우진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훗날 비사인이 사도맹주 자리에 오르면, 야율한은 두고두고 사도맹의 화근이 될 자네. 당대 사도맹주가 죽기 전에 야율한을 처리할 수도 있고. 굳이 우리가 없앨 이유가 없지.”

“대신 비사인은 이번 일로 이공자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될 겁니다. 잃는 것만큼 얻는 것도 있겠지요.”

“사파인들은 원한만 오래가져 갈 뿐, 은혜를 기억하는 족속들이 아니지.”

“하지만 이공자는 기억하겠지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큰 양보를 했다는 것을요.”

검우진은 뒷짐을 진 채 말없이 천마신교의 장내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더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천마전으로 오고 있던 권마였다.

“차륜전을 펼치려고 작정한 건가?”

검우진의 농담에 혈천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큰 주먹은 왜 넘어갔는지 궁금하군요.”

그러는 사이 권마가 그들 앞까지 다가왔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권마가 검우진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혈천도마에게도 인사했다.

“먼저 오셨군요.”

“권마께서도 오실 거라 생각했소. 참, 이공자를 제자로 맞은 것 축하드리오.”

그러자 검우진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그게 축하할 일인가? 위로할 일이지.”

권마가 검우진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신뢰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랬기에 권마는 이 자리가 어려웠다. 다행히 혈천도마가 있어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게 이어졌다.

“왜 오셨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 우리 합공을 펼쳐봅시다.”

“합공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강해지는 분이라서.”

그걸 아는 사람이! 라는 표정으로 검우진이 권마에게 물었다.

“자넨 녀석에게 왜 넘어간 건가?”

“평생 안 치던 농땡이를 치다 보니 제가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검우진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를 말해보게.”

권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그동안 제가 외로웠나 봅니다.”

“!”

검우진도 혈천도마도 깜짝 놀랐다. 권마 입에서 외롭다는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오면서 마지막에 경공 내기를 했습니다. 어찌나 빠른지 못 따라잡겠더군요. 혼자서 터벅터벅 걷는데 제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심심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심심하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권마가 검우진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넘어갔나 봅니다.”

권마와 검우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권마는 이곳까지 오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첫 제자인데, 사부로서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서 무례를 범하러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주님.”

권마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천마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그 어떤 마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였기에, 검우진은 아무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때 검우진의 시선이 권마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자네 둘까지는 내가 어찌 이해를 한다 치더라도, 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그곳으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하얀 가면을 쓴 그는 극악소마였다.

극악소마가 천마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혈천도마와 권마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서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제가 일 번이었는데 두 분에게 새치기를 당했군요.”

그가 나선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농담까지?

혈천도마가 먼저 있던 세 사람의 심정을 대표해서 말했다.

“이공자와 얽히면 이렇게 다 미쳐버리는가 봅니다.”

검우진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인가?”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극악소마는 자신의 흘러내리던 가면을 받쳐주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대답하지 않았겠지만 검우진의 물음이었기에 극악소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공자는 예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말에 검우진은 물론이고, 혈천도마와 권마도 깜짝 놀랐다. 극악소마의 입에서 예의란 말이 나온다고? 언제부터 극악소마가 예의를 따졌다고?

세 사람은 느낄 수 있었다. 극악이 말한 예의란 일반적인 예의범절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이공자가 제게 보인 예의에 저도 응답을 하려고 합니다.”

극악소마가 뒤로 돌아서더니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품에 넣어온 새 가면을 쓴 후 천천히 돌아섰다.

지금껏 썼던 새하얀 가면이 아니었다. 악귀가 웃고 있는 섬뜩한 가면이었다. 붉게 칠해진 눈은 귀신처럼 길게 찢어져 있고, 시뻘건 입도 귀밑까지 올라가 웃고 있었다. 이 가면은 전쟁에 나갈 때 극악소마가 쓰는 불사귀면(不死鬼面)이었다.

“이공자의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극악소마는 전쟁터에 나가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는 천마의 분노를 각오했고, 눈 밖에 나는 것도 불사했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교주를 설득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듯, 가면 속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24 절대회귀-208화 24

제208회 검존은 안 오겠다는 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지막 부탁이란 말까지 한 것은 극악소마가 가진 최강수였다.

혈천도마는 극악소마가 이렇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 상황도 아니었다.

권마는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극악소마가 펼친 전쟁터에 자신도 함께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검우진은 말없이 극악소마를 응시했다.

주위의 공기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태산처럼 무거운 검우진의 기도에 극악소마는 질식할 것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온몸이 찢기듯 아팠다. 날카로운 칼날이 사방 벽에 촘촘히 박힌 구멍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을 느끼며 극악소마가 눈을 감았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환상을 느꼈다. 핏물이 냇물처럼 흐르고 사방에서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불길이 치솟았고 암기가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그 전장의 한 가운데 극악소마가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검우진이 아니라 검무극이었다. 가면을 머리 위에 올려 쓴 그가 자신을 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소마님의 세상을 더 구경하고 싶습니다.

검무극이 환하게 웃으며 가면을 내려쓰던 그 순간, 극악소마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검무극이 있던 자리엔 검우진이 서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자신을 짓누르던 엄청난 압박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우진이 준엄하게 말했다.

“불사귀면을 쓴 자네의 뒷모습은 봐줄 수 있어도 그 가면을 쓰고 나를 보진 말게.”

불사귀면은 전쟁터에 나갈 때 쓰는 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칼날을 자신에게 겨누지 말라는 천마의 엄중한 경고였다.

극악소마가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교주님.”

준엄하게 경고하긴 했지만 검우진의 표정에는 어떤 불쾌함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는 용서가 이미 얼굴에 담겨 있었다.

혈천도마와 권마는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검우진이 극악소마에게 호감을 느꼈음을. 그 남자다움에 기분이 좋아졌음을. 천마가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저런 사람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검우진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살다가 또 부탁할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마지막 부탁이라 하는가?”

“부탁할 일이 생기더라도 참겠습니다.”

극악소마는 자신에게 주어질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첫 부탁을 한 것까지만 받아들이지.”

다음에 부탁해도 들어주겠다는 검우진의 배려였다. 무례하다면 무례한 행동이었음에도 검우진은 크나큰 도량으로 극악소마를 감싸 안은 것이다.

극악소마가 감동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다시 돌아서더니 불사귀면을 벗고 원래의 백색가면을 다시 썼다.

혈천도마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저 백색가면이 악귀가 그려진 불사귀면보다 더 무서운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곳에 또 다른 누군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바로 취마와 일화검존이었다.

취마는 잔뜩 술에 취한 상태였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취마와 검존이 나란히 서서 교주에게 인사했다.

“술을 깨고 찾아뵈어야 마땅하나, 맨정신에는 도저히 교주님을 뵐 자신이 없어 한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취마는 곧장 일화검존을 챙겼다.

“아, 검존은 안 오겠다는 거 제가 억지로 데려왔습니다.”

이건 취마의 우정이었다. 천마와의 관계에 부담은 주지 않으면서 혼자만 검무극을 돕지 않은 사람으로 남기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일단 이곳에 온 것과 오지 않은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으니까.

그 설득에 이끌려 따라왔지만, 일화검존은 난감한 심정이었다. 머리는 절대 오면 안 돼! 지만, 마음은 나만 빠져도 되나,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녀에게 천마야 언제나 어렵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한데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이들은 먼저와 있던 세 마존들이었다.

‘왜 다들 검무극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일까? 교주의 불호령이 두렵지도 않았을까?’

자신이 모르는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에 섭섭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저 취마만 해도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 것인지,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검우진이 취마에게 물었다.

“자네도 무극이 때문에 찾아온 겐가?”

취마는 교주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검무극에게 말했지만, 검우진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취마가 뒤늦게 온 것을 변명하듯 말했다.

“교주님을 설득해 달라는 이공자의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한데 왜 온 것인가?”

“부끄러워서 왔습니다. 호형호제하자고 제가 먼저 졸랐는데, 정작 도와야 할 상황에서 뒤로 물러서는 제가 부끄러워서요.”

취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소 말도 잘하고 너스레도 잘 떠는 그를 생각하면 지금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우진은 취마에게는 왜 검무극에게 빠졌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정말 그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을 대신 물은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자넨 어쩌다가 이공자에게 넘어간 건가? 우린 다 말했으니 자네도 말해보게.”

취마가 검우진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공자는 저를 취하게 합니다. 보고 있으면 술 생각이 나죠. 같이 마시면 즐겁고, 없으면 보고 싶어서 또 마시고. 사실 이런 사람은 제 인생에 여러 명 있었습니다. 한데 이공자는 다른 특별함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저를 취하게 함과 동시에 자꾸만 저를 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마치 지금 교주님 앞에 섰을 때처럼요. 취하게 했다가, 깨게 했다가. 또 취하게 하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사람은 이공자가 유일합니다.”

마존들은 각자의 검무극을 떠올리며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때 검우진이 불쑥 물었다.

“그렇게 특별한데 왜 무극이의 부탁을 거절했나?”

“죄송하지만 술 한 잔 마시고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취마기에 가능한 부탁이기도 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취마는 허리에 차고 있던 술을 벌컥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그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취마가 검우진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교주님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으로 다시 주위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 때문이라고?”

“네, 교주님 때문에 저는 동생 하나 챙기지 못한 못난 형이 되었습니다.”

“왜 나 때문인가?”

“교주님이 저를 싫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취마는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했다. 한 번은 교주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를 왜 이렇게 미워하냐고. 그렇게 싫어하지 말라고.

“내가 자네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나?”

“아니십니까?”

분위기는 점점 더 팽팽해졌다.

일화검존의 전음이 재빨리 취마에게 날아들었다.

―미쳤어? 그만해!

취마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죽을 때 후회할 거다.

취마가 다시 술을 꺼내서 쭉 마셨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교주님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교주님은 한 번도 봐주지 않으셨지만요!”

다른 마존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언제나 감정은 이런 순간에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자신의 심정을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검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닥쳐라! 이 주정뱅이야!”

소리친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그녀를 챙긴 것이 취마였듯, 지금 취마를 챙기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이 주정뱅이야! 여기 왜 온 거야? 네 신세타령이나 하려고 온 거야? 동생을 위해서 나서야겠다면서? 교주님에게 밉보여서 쫓겨나더라도 네가 나서겠다면서? 나도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면서? 그래야 나중에 이공자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근데 뭐 하는 짓이야? 왜 할 말은 안 하고 술주정이냐고? 감히 누구 앞에서!”

원래 그녀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더 화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검우진의 노기가 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취마가 버럭 소리쳤다.

“교주님 얼굴 뵈니까, 다 잊었다! 어쩔래!”

“술 취한 척하지 마! 아직 취하려면 멀었잖아!”

그러자 취마가 움찔했다.

“이 주정뱅이야! 나라도 너 싫겠다. 술기운 빌려서 주절주절. 왜 미워하긴! 미운 짓을 하니까 밉지.”

“그래, 너 잘났다! 고고하신 우리 검존님! 아주 잘나셨습니다! 저는요 어차피 찍힌 몸이라서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바로 그때 검우진이 불쑥 말했다.

“난 자넬 미워하지 않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검우진을 향했다.

“자네 사부를 미워했지.”

순간 취마는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사부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검우진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마의 무례를 야단치지도 않았고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사부를 왜 미워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취마는 검우진을 응시하며 물었다.

“정말 저에게 일말의 미움의 감정도 없으셨습니까?”

“없었네.”

취마의 마음에 갑갑하게 막혀 있던 벽의 한쪽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벽 너머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주정을 부릴 걸 그랬습니다.”

앞서 언제 술주정을 부렸냐는 듯, 취마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이런 이유인 줄도 모르고…… 교주님을 뵙고 온 날이면 그날은 과음했습니다. 왜 저렇게 나를 차갑게 보시는 걸까? 내가 무슨 실수를 했던 걸까? 온갖 생각에 잠을 못 이뤘습니다.”

취마는 이제 검우진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는 천마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한 이후부터 검우진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교주님께는 죄송했지만, 오늘 부린 주사가 제 인생 최고의 술주정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검우진이 물었다.

“그래서? 자네도 무극이 일을 부탁할 건가?”

취마가 단호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검우진이 다섯 마존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천마가 된 이래, 한 사람 때문에 마존 다섯이 찾아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녀석이 본교 역사를 새로 쓰는군.”

검우진이 허공에다 말했다.

“무극이를 불러오게.”

* * *

내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다섯 마존이 쭉 늘어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각자 설득할 줄 알았는데 다섯 명이 한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거절했던 취마와 일화검존까지 있었다.

“소자,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다행히 아버지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나는 다섯 마존들과 한 명씩 눈이 마주쳤다.

혈천도마는 상황이 괜찮았다는 신호를 주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는 내게만 표나게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자리가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을 그 행동으로 전했다.

극악소마는 웃고 있었다. 눈빛에 담긴 후련함에서 나는 그가 한바탕 큰일을 치렀음을 알 수 있었다.

취마는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옆에 서서 일화검존이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좋아하는 다섯 분이 다 계셨군요!”

그러자 취마가 여전히 아버지를 쳐다본 채,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교주님은 빼는 거냐? 여섯이지.”

“형을 뺐던 건데.”

“……아.”

취마가 술을 마셨다. 아버지 앞에서 저렇게 대놓고 술을 마시는 것을 보니 정말 난리가 나도 제대로 났던 모양이다. 오늘 일은 나중에 혈천도마나 취마에게 들으면 될 일이고.

나는 아버지 앞에 섰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내심 긴장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극악소마가 천천히 걸어와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이 행동 하나로 나는 그가 오늘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면 속 그의 눈동자가 나를 보며 웃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마님.

우린 눈빛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다음으로 혈천도마가 한숨을 내쉬며 내 옆에 섰다.

“늘그막에 이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구나.”

“죄송합니다.”

다음으로 움직인 사람은 권마였다.

“첫 제자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내 쪽으로 세 명의 마존이 와서 섰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버지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지켜주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다.

그때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던 취마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무극이를 보니까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저도 도와야겠습니다. 혹시 사부도 이랬다, 저랬다 해서 싫어하신 겁니까?”

취마의 물음에 검우진이 대답했다.

“그 반대였네. 술에 취하면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거든.”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귀 얇기론 팔마존 중 첫 번째일 테니까요.”

“그건 그거대로 문제가 아닌가?”

“그럼 다음 취마에게 말해주십시오. 네 사부는 귀가 얇아서 싫었다고.”

천마 앞에서 비로소 취마는 편해졌다. 천마 앞에서도 유일하게 술주정할 수 있는 사람, 그럴 수 있도록 크나큰 신임을 쌓아가는 것.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취마가 나아가야 할 길인 것이다.

그리고 이 관계의 변화가 취마라는 사람을 변화시킬 것임을 나는 예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취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 못난 형이 멋있어질 때까지 기다려주라.”

취마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보다는 덜 멋있어질 거라 약속하면.”

취마가 술병을 내게 건넸다. 취마와의 약속은 술로 하는 거다. 나는 그 술을 마신 후 취마에게 돌려주었다. 취마도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을 마신 후 취마가 일화검존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데려왔다.

“난 교주님 결정이 옳다고 믿어.”

“안다. 그래도 오늘 설 자리는 여기야.”

그녀의 뜻을 교주에게 전했으면 된 거였다.

취마는 이 와중에도 그녀를 혈천도마 옆자리에 세워두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섯 명의 마존이 내 좌우에 늘어섰다. 악인곡을 칠 때는 네 명이었는데, 이제 권마까지 합세해서 다섯 명이 되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나와 마존들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하긴 아버지도 처음 겪어보는 일일 테니까.

날 향한 아버지의 입가에 그 가소로운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이런 상황에서 저 웃음만큼 잘 어울리는 웃음도 없지.

“좋다. 원래라면 여덟 마존이 다 왔어야 허락했겠지만, 오늘 극악이 세 명 몫은 했다.”

극악이 세 명 몫이라면 모두 일곱.

“한 명만 더 내 앞에 세우면 이번 일을 허락하마.”

“누굽니까?”

아버지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회귀 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 마지막 마존의 이름이.

“독왕이다.”

20 절대회귀-209화 20

제209회 교주는 그 내기에 질 생각이 없다.

아버지가 원한 사람은 독왕이었다.

독왕이란 말에 마존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내게만 들리게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쉽지 않다는 의미.

과연 아버지는 마존들의 반응처럼 독왕이 절대 나서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할 수 있겠느냐?”

“해보겠습니다.”

날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눈빛은 도발적이었다.

과연 네가 이것까지 해낼 수 있겠느냐? 정말 이것까지 해내면 인정하겠다.

아버지의 시선이 마존들을 향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이었는데, 나는 그 무덤덤한 눈빛에서 미세한 차이를 느꼈다.

권마를 보는 눈빛과 혈천도마를 보는 눈빛이 달랐고, 또 극악소마를 보는 눈빛이 달랐다.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신다면, 일화검존에게 조금만이라도 따스한 눈빛을 주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 시선이 머무른 곳은 취마였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눈빛으로 취마는 아버지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마존들과 눈빛으로 교감한 후 아버지가 돌아서 천마전을 향해 걸어갔다.

나와 마존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언젠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때 이런 감정이 들었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란 허심탄회한 말씀을 듣게 될 날이 올까?

아버지가 그곳을 떠나자, 나는 마존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화검존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내겐 인사할 필요 없네. 난 취마에게 억지로 끌려왔다네.”

“그것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슨 말인가?”

“다섯 분이 다 밀어붙였으면 아버지도 사람인데 크게 노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한데 취마 형이나 검존 선배님이 완충 역할을 해주셔서 마음이 누그러지셨을 겁니다.”

취마가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난 망했어. 교주님 앞에서 주정이라니!”

그러자 일화검존이 그의 허리에 매달린 술병을 빼앗듯 가져가더니 술을 벌컥 마셨다.

“나야말로 교주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너무 했어.”

취마가 술병을 받아서 마셨다.

“이 못난 친구 때문이다.”

“알면 됐어.”

두 사람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었다.

“아뇨, 저 때문에 모이셨으니 저 때문입니다.”

나는 마존들에게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일은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다섯 분이 계셔서 제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실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모인 김에 제가 한 말씀만…… 아, 잠깐만요! 짧게 하겠습니다. 저 그렇게 말 많은 사람 아닙니다. 우리 다 같이 모여서 독왕을 포섭할 작전도 짜고…….”

이미 다섯 마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각기 다섯 방향으로 그곳을 떠났다.

“너무들 하십니다!”

내 몸이 다섯이 아니니 나는 그중 한 사람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 * *

다섯 마존 중 내가 뒤쫓아 간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그는 내가 뒤쫓아와서 좋았음에도 괜한 심술을 부렸다.

“왜 극악소마를 안 쫓아가고?”

“제겐 언제나 어르신이 최고죠.”

“네게 최고는 극악이던데?”

혈천도마는 아까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아까 극악소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교주도 나도, 권마도. 그가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지.”

극악소마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간 줄은 몰랐다. 소마님, 그 응답 제대로 받았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더 대단했다. 네가 없는데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 그건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거든.”

지금 이 순간의 혈천도마도 대단하다. 나와 극악소마의 관계를 내심 질투할 법도 한데, 있는 그대로 다 전해주고 있었으니까. 대단했다, 대단했다 하면서 말이다. 이러니 내가 이 사람을 안 좋아할 수가 있나?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친해진 거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 나이 차이가 얼만데 친구냐?”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더 많은데요. 전 어르신보다도 더 긴 세월을 살았었는데요.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 대단한 우정에 목이 탄다. 저기 차나 좀 가져와라.”

나는 침상 옆 탁자에 놓인 찻주전자를 가져와서 혈천도마에게 따라주었다. 여전히 깡마른 그의 팔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요즘 식사는 잘 챙겨 드십니까?”

“갑자기 뭔 식사 타령이냐?”

“제겐 어르신 건강이 제일 중요하죠. 독왕이 뭐가 중요하고 그깟 허락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래도 기분이 좋은지 혈천도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오늘 아버지께 제일 먼저 가셨죠?”

“성질이 급해서 그렇다. 먼저 간 것에 의미 두지 마라.”

“의미 둘 겁니다. 저를 위해 제일 먼저 달려간 어르신!”

“그래, 솔직히 제일 먼저 갔다고 생색 좀 내려고 했는데, 오늘은 가면쟁이에게 완패다.”

그 가면쟁이가 오늘 혈천도마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그래봤자 다들 헛수고한 것 같지만.”

독왕 이야기를 꺼낼 때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마존들 표정도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고.

“그 사람 끌어들이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차라리 팔마존을 다 데려와라, 라고 했으면 오히려 더 쉬웠을 거다. 마존 회합을 열어 정치적으로 함께하자고 밀어붙이면 그렇게 처리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독왕을 지목해서 데려오라고 한 건, 그렇게 처리되는 것을 사전에 막은 거지. 교주, 은근히 똑똑하단 말이지.”

“독왕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그냥 내가 봤을 때 자기만의 세상이 확고한 사람이고, 자존심도 세고. 독에 미쳐 있고. 아는 건 이 정도일 뿐이지.”

혈천도마의 걱정은 그런 성격적인 측면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독왕의 독 앞에서도 자네가 자네일 수 있겠나?”

독왕의 독 앞에서 내가 나일 수 있는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독이 주는 근원적 공포가 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죽은 섭혼마존과 함께 독왕은 무림인들이 가장 상대하기 꺼리는 마존이었다.

“네가 아무리 언변이 좋고, 아부도 잘한다지만 과연 독을 쓰는 독왕 앞에서도 거침없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널 표나지 않게 중독시켜 몇 년 후에 병들어 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인데.”

사실 가장 거침없을 수 있다. 독이 통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그는 내게 팔마존 중 가장 약한 인물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래서 걱정이다.

그의 자존심을 잘못 건드는 순간, 아버지 앞에 데려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테니까.

회귀 전 내가 대법 재료를 구하러 본교로 돌아왔을 때, 독왕은 이미 죽은 후였고 차기 독왕이 마존 자리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안다. 그가 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함께 데려갔는지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를 혈천도마가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느냐?”

“있죠. 어떻게든 어르신께 독왕을 내 편으로 만들 비법을 배워야겠다.”

“내 속에 있는 방법을 썼다간 친한 사람과도 멀어지게 될 거다.”

그러면서 혈천도마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굳이 자네에게 조언해주자면 자네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

“그게 뭐죠?”

“교주는 그걸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라 부르더군.”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와 혈천도마가 이런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표현을 남에게 했다는 건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는 증거.

“나와 다른 마존에게 했듯이 그걸 발휘해.”

상대를 똑바로 보고, 할 말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말한다.

나는 이 두 가지 신념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과연 독왕에게도 통할지는 모를 일이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혈천도마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예전에 내가 생일 선물로 준 최상급 피독주였다.

“이것도 챙겨가. 깨끗이 씻어둔 거니, 더럽다 말고.”

나는 잠시 말없이 피독주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바로 혈천도마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요즘 자꾸만 내 마음마저 흔든다.

난 품에서 두 개의 피독주를 꺼내 양 볼에 물었다.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물고 가겠습니다! 이건 가지고 계시다가 제가 독왕에게 당하면 물고 와서 구해주십시오.”

“일없다! 그 지저분한 독 구덩이에 절대 갈 일 없다.”

제일 먼저 달려올 것임을 알기에,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쉬십시오. 이만 가보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지금은 네 운명이 걸린 거창한 일 같지만…… 지나고 보면 다 별것 아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혈천도마의 거처를 나왔을 때는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다들 나를 주목하고, 내가 어떤 길을 갈지 지켜보고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억누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독왕도 잊고, 아버지 허락도 잊고. 안식을 찾는 본능의 이끌림을 따라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안은 오늘도 세월에 노력을 묻고 있었다.

그녀가 펼치는 구 성의 비천검법에서 피나는 노력이 만들어낸 원숙함이 느껴졌다.

촤락.

그녀의 가슴 앞에서 검기가 두 개로 분열했다.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더 많이 나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정확히 유천식을 구사하는 데 성공했다.

쉬이익. 쉬익!

허공을 쏜살같이 가르며 날아온 두 개의 검기가 내 얼굴 좌우에 박혔다. 그녀의 검은 왼쪽에, 검 모양의 검기는 오른쪽에.

만날 수련에 몰두하느라 내가 온 것도 모르던 그녀가 이젠 내게 유천식을 날리고 있다.

“이제 마음 놓고 중원에 내보내도 되겠다. 이만 하산하여라, 이안아. 사람들 너무 죽이고 다니지 말고.”

“싫습니다, 도련님. 전 도련님 옆에 딱 붙어서 평생 이렇게 편히 살 겁니다. 아! 이제 그 편함도 끝나긴 했지만요.”

“축하한다.”

“들으셨죠? 청면 선배가 드디어 귀영대 일조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와 관련된 일을 제외하면 그녀의 인생에서 일대 사건일 것이다. 차기 극악소마가 될 후계자가 자기가 수장으로 있는 조직의 조장이 되었으니까.

“기분이 어때?”

“떨리죠.”

“가장 중요한 건 널 믿는 거다. 사람들은 귀신같이 안다. 아, 저 사람 우릴 이끌 자신 없구나. 조졌다. 우린 결국 개죽음당하겠구나.”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야 절 믿죠. 능력이 따라줄까 그게 걱정이죠.”

“널 못 믿겠으면 네 꼬리를 믿어.”

그러자 이안이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그건 좀 믿을 만하죠.”

“청면하고 의논해서 본격적으로 조직을 꾸리기 시작해라. 원칙은 하나다. 본교 최고의 정예조직을 만든다. 실력도 보고, 인성도 봐. 실력만 좋은 도살자 집단을 만드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정예조직을 만드는 거다. 장호나 서 조사관 같은 사람들로 채워. 알지?”

“네!”

“이제부턴 사람을 보는 안목이 초식보다 더 중요하다. 그게 널 살릴 거다.”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이안의 삶은 지금부터다.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와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올 때까지만 해도 처연해 보였던 달은 창밖 가득 따스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질 때 마지막 장난도 잊지 않았다. 그 부작용을 다 견디고 어렵게 예뻐졌는데 만날 수련만 하고 있으니 나라도 한마디 해줘야지.

“네가 천하제일미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순간 이안이 무슨 말인가 긴장했다.

“너 출교하기 전보다 더 예뻐졌다. 천하제일미라면 더 예뻐지면 안 되잖아?”

얼굴이 붉어지는 그녀를 두고 그곳을 나왔다. 이안,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 * *

다음 날 독왕을 만나러 가면서 마의에게 들렀다.

마침 환자가 없어 한가한 상태의 그가 뜻밖이란 표정을 지었다.

“이공자, 요즘 자주 보네.”

“의선님이 사람 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요.”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을 마의가 어찌 모르겠는가?

“또 언제 환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니 어서 용건을 말하게.”

“의선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게.”

“혹시 독왕과 교류가 있으십니까?”

나는 모른 척 물었지만, 독왕이 유일하게 교류하는 사람이 마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독왕에 관해 알고 있는 몇 가지 정보 중 하나다.

“한 분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고, 한 사람은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 아닙니까? 극과 극은 통한다고, 어쩌면 두 분이 교분을 나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독왕은 왜?”

“제가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독왕을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조건을 거셨습니다.”

마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면 교주께서 그 내기에 질 생각이 없으신 거네.”

마의 역시 독왕이 나에게 설득될 거라 생각지 않았다.

“이공자 자네가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고 있네. 한데 독왕은 쉽지 않을 거네.”

“제게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마의는 잠시 말을 아꼈다. 독왕과의 친분과 나와의 관계 사이에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리라.

“나는 평생 살면서 여러 독인들을 만났지만, 독왕처럼 독에 진심인 사람을 본 적이 없네. 그만큼 자부심도 강하지. 자신의 독으로 못 죽일 사람은 교주님밖에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지.”

함부로 만독불침임을 밝혀선 안 되는 이유기도 했다. 그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잘못 건드는 순간, 일을 그르치게 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게.”

마의가 잠깐 자리를 비우더니 작은 약병을 하나 가져왔다.

“내가 가진 최고의 해약이네. 독왕의 독을 모두 해독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겠지만, 도움이 될 걸세.”

나는 해약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 약은 다른 곳에 요긴하게 쓰십시오.”

“왜 그러나?”

“독왕이 저에게 하독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반란을 도모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는 어떤 해약도 소용없는 독을 쓸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또 찾아뵙겠습니다.”

마의를 찾아온 것은 앞으로 독왕을 설득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절 도와주실 일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은 제 일이 아니라 마의님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마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독왕의 꿈이 뭔지 아나? 이 세상의 모든 독을 집대성해서 책으로 남기는 것이라네. 지금 이 순간에도 홀로 묵묵히 독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지. 그 사람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관건일 걸세. 세상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독왕은 유일하게 교류하는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그의 꿈은 세상의 독을 집대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독으로 무림을 발아래 꿇릴 천하제일독존(天下第一毒尊)을 꿈꾸는 사람이다.

의방을 나온 나는 교의 남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독왕이 사는 천독림(千毒林)이 있었다.

14 절대회귀-210화 14

제210회 대연무장 한가운데서.

천독림 입구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그는 허리에 독주머니를 여러 개 차고 있었다. 이 주머니가 바로 천독림 독인들의 상징이었다.

노인의 주머니의 개수를 세어보니 모두 아홉 개다.

처음 독공을 배우면 하나의 주머니를 차고, 독왕의 주머니는 열두 개다. 그러니 아홉 개를 찬 이 노인이 이곳에서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그 숫자로 짐작할 수 있었다.

“검무극입니다. 독왕님을 뵈러 왔습니다.”

내가 정중히 인사하자 노인이 자신을 밝혔다.

“이 늙은이는 상선(相仙)이라 하네.”

그는 독왕의 오른팔이자 천독림의 사대독인 중 한 명이었다.

“귀한 분께서 나오셨군요.”

“귀한 손님이 왔으니 이 늙은이가 직접 맞아야지.”

내가 간다고 미리 기별은 해두었는데, 이렇게 상선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다.

“조심해서 따라오시게.”

나는 상선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정말 울창했다.

“팔마존의 영역 중 이곳 천독림이 가장 넓다네.”

정말 그가 자랑해도 될 만큼 넓었다.

스스스스.

걸어가던 길에 본 뱀의 모양이 특이했다.

“백혈사(白血蛇)라네. 특이하게도 피가 하얀색 뱀인데, 저놈에게 물렸을 때 해독제를 먹지 못하면 일각도 못 버티고 죽게 되지.”

이곳에는 천 가지 독물이 존재한다고 했다. 온갖 종류의 독초와 독충, 독사들이 가득한 그곳에 잘못 발을 디뎠다간, 시체도 찾지 못하게 되는 곳이 천독림이다.

가는 길에 독초를 채집하는 독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곳의 독인들을 독아(毒牙)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 숫자는 제각각이었다.

그렇게 울창한 숲을 지나 독왕의 처소에 도착했다. 원형으로 이뤄진 건물이었는데, 낮지만 굉장히 넓은 규모의 집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겠네. 이야기 나누고 나오시게.”

“감사합니다.”

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분리되지 않고 커다란 하나의 공간으로 이뤄져 있었다.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수십 개의 책장과 책상,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장치들, 침상과 탁자, 옷장, 장식장, 목욕할 수 있는 나무통까지. 그야말로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 이 공간에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독왕의 방.

독왕은 그 방 가운데에서 온갖 물건을 널어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이것이 나와 독왕과의 첫 만남이었다.

회귀 전 젊은 시절에는 먼발치에서만 그를 한두 번 봤고, 나이가 들어 대법재료를 구하러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그가 죽은 후였으니 그를 이렇게 직접 가까이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의 첫인상을 짧게 표현하자면, 앳되고 학구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흔히들 독왕이라 하면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거나 아니면 독의 부작용으로 인해 피부에 부스럼이 나고 염증이 생기고 껍질이 벗겨진, 그야말로 얼굴과 몸이 성하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만 당대 독왕은 아주 말끔했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정말 어려 보였다. 본교에서 동안을 뽑는 대회를 열면 나는 독왕이 일 등할 거라 확신한다.

나와 다니면 친구라 할 것 같은 젊은 모습에, 게다가 그는 굉장히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는데, 정말 생긴 것만 봐서는 총군사 사마명보다 더 똑똑해 보였다.

만약 짙은 녹의와 허리에 차고 있는 열두 개의 주머니가 아니었다면, 누가 봐도 그를 학사로 보았을 것이다. 아니, 학사에게 글을 배우는 학생이라 해도 될 미소년의 외모였다.

‘아, 독왕이 이렇게나 동안이었구나.’

어쩌면 독 때문에 어느 순간 성장이 멈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런 순수한 얼굴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천하제일독존이 되어 무림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꿈꾸었다고?’

정말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산 독왕이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갔을 때, 독왕이 책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거기 책상 위에 있는 청색 병 좀 가져와.”

독왕의 목소리는 외모만큼이나 젊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가 말한 청색 병을 들고 그에게 걸어갔다.

“조심해. 청독(靑毒)은 한 방울이라도 튀면 죽어.”

안 죽는다! 이 방에 있는 모든 독을 다 들이부어도 안 죽는다!

독왕이 내가 건네준 독을 앞에 놓여 있던 다른 독에 섞었다.

그걸 섞는 그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독연이 피어올랐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두 손을 재빨리 휘저었다. 환영식 한번 요란하구나.

후우우웅.

내력을 발출해서 피어오른 독연을 내 양손 사이에 뭉쳐서 가두었다.

나는 그대로 그것을 몰고 가서 창밖으로 날려버리려 했는데.

“안 돼! 기다려!”

독왕이 달려가서 커다란 자루를 가져왔다.

“여기다 몰아넣어.”

내 앞에 모아두었던 독연을 자루에 몰아넣었다.

독왕이 자루의 입구를 끈으로 야무지게 묶더니 독연이 든 자루를 탁자 옆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또다시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그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내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내부를 살펴보았다. 사방 벽을 둘러싼 장식장에는 수많은 병이 세워져 있었는데, 나는 그것들이 전부 독이거나 해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재에 책 대신 독이 꽂혀 있는 그런 모습이다.

“아! 이게 잘못된 건가? 이봐, 거기 있는 사독초(邪毒草) 가져와 봐.”

나는 책상에 널리고 널린 독초 중에서 사독초를 그에게 가져갔다. 수많은 약초 중에서 내가 그것을 제대로 가져간 것을 보고도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여기 놓고 저기 가서 물 한 바가지만.”

그는 계속 심부름을 시켰다. 이것 가져오고 저거 가져오고. 그야말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 사이 그는 약초를 찧고 갈았다.

그렇게 다시 새로 조합한 독에 청독을 배합하자 이번에는 폭발하지 않았다.

“됐다! 됐어! 사독초가 문제였구나!”

이번에는 제대로 배합이 되었는지 독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나를 발견했다.

“한데 누구?”

우리 독왕님, 참 일찍도 물어보신다.

“누군지 알고 심부름을 그렇게나 시켰습니까?”

“우리 애들인지 알았지. 누구냐고?”

“검무극입니다.”

“아, 참. 오늘 온다고 했지. 너구나. 교내의 화제 검무극. 여긴 어쩐 일이지?”

내 정체를 알았음에도 그의 말투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는 괴짜처럼 행동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저 녹색의 광채는 내가 이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정했다. 감정이 일관되게 조절되고 있다는 의미. 이것만 봐도 마존은 어디까지나 마존이란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아버지를 설득해 주십시오.”

독왕이 내게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피부도 뽀얗고 좋았다. 독을 다루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피부가 좋을 수가 있지?

“싫어.”

독왕은 내용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언지하 거절했다.

“거절해도 되는 거지? 교주 아들의 압박, 이런 것 아니지?”

“아닙니다.”

“그래, 어린놈이 그런 못된 짓부터 배우면 안 돼. 볼일 끝났는데 왜 안 가고 있어?”

독왕은 정신을 쏙 빼놓으면서도 만만하지 않았다.

“아뇨, 갑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나는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걸어 나왔다. 입구에 아까 안내했던 상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절 묻지 않았다.

“내일 또 찾아뵙는다고 기별해 주십시오.”

“그러겠네.”

그를 따라 천독림을 나가며 길을 외웠다.

* * *

나는 다음 날 다시 천독림에 갔다.

오늘도 상선이 나를 독왕의 거처로 안내했는데 어제와 다른 길이었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독왕의 거처로 가는 길을 모르게 하려는 거다.

하지만 그건 내가 기억력과 길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하는 불필요한 시도였다. 오늘 난 독왕의 거처로 가는 길을 하나 더 알았다.

그렇게 독왕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집 근처에서 땅을 파고 있었다.

“분명 여기였는데?”

군데군데 땅이 파여 있었다. 뭔가를 묻어두었는데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이처럼 얼굴과 몸에 흙을 묻힌 그는 귀여워 보였다. 귀여워 보이면 보일수록 미래에 그가 저지른 일과의 괴리감 때문에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훗날 그의 독으로 죽은 무인의 숫자가 수천 명이다. 그야말로 그는 대학살을 일으켰던 것이다.

독왕은 내 인사에도 본 척 만 척 땅을 파는 일에만 몰두했다.

나도 상선에게 삽을 빌려와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상선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반면, 독왕은 오직 자기가 파는 땅에서 찾는 것이 나오느냐 마느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그 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혼자서 막 웃기도 했다. 그냥 봐선 영락없이 미친놈이었다.

마의가 왜 독왕을 연구실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는지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독왕은 설득이 힘들 거라고 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철저히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나도 옆에서 몇 군데 땅을 팠다. 그곳에서 뭔가가 나오면 옆에다 전부 모아두었다. 별의별 게 다 나왔다. 상자도 나왔고, 벌레나 애벌레도 나왔다. 뱀도 나왔고, 쓰레기도 나왔고 이상한 도구도 나왔다.

그렇게 몇 곳을 파고 있던 그때.

“앗! 그게 왜 거기 있어?”

독왕이 소리를 지르며 내가 땅을 파던 곳으로 왔다. 내가 모아둔 것 중에 자신이 찾던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집어 든 상자에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캬! 잘 숙성되었구나!”

“찾으시는 것이 이것이었습니까?”

독왕이 나를 보더니 헛하고 놀랐다.

“언제 왔어?”

이건 연기기도 하고 연기가 아니기도 하다. 나를 인식하기도 했고, 나를 잊기도 했으니까.

“아까 왔습니다. 뭘 찾으시는 것 같아서 저도 땅을 팠죠.”

“잘했어, 잘했다.”

그가 기분 좋게 웃다가 이내 정색했다.

“어제 분명 거절했을 텐데.”

“오늘은 순수하게 독왕님을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어제 보니까 도와드릴 사람이 필요하더군요.”

“내 독공을 훔쳐 배우겠다는 속셈이냐?”

“그렇게 쉽게 독왕의 독공을 훔쳐 배울 수 있습니까?”

“어림없지.”

“그럼 괜찮겠네요.”

독왕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깃든 녹색의 광채가 내 눈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물론 그 빛은 신안술을 익힌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그에 대해서 느꼈다. 이 순간 나는 하나의 심상을 떠올렸다.

독왕이 자기 세계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와서 바깥세상과의 경계선에 서는 모습을.

이 순간 그는 괴짜가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무림독존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저 경계선을 딱 한 번 넘었는데, 그때 수천 명이 죽었다.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볼까?”

그는 표정에 감정이 드러났다. 하루만 해도 힘들어서 두 번 다시 못 오게 해주마!

독왕이 일을 시켰다. 날 쫓아버릴 심산으로 제대로 일을 시켰다.

“저기 있는 독초들을 여기 풀어서 분류해.”

그가 시키는 대로 자루에 쌓여있는 독초를 가져와서 분류했다.

나는 독왕을 설득하겠다는 의도를 버렸다. 그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도 버렸다. 그저 함께 있으면서 그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그를 설득할 수 없을 테니까.

“자, 저기 새로 들어온 독초들도 정리하고.”

하루에도 한 번씩 독아들이 중원에서 구해오는 독물들이 이곳에 들어오고 있었다. 독초만 있으면 다행인데, 온갖 징그러운 독물들도 많았다.

나는 능숙하게 독초와 독물을 다뤘다. 만독불침이 되자 독에 대한 거부감이 아예 사라졌다. 그전에는 독, 하면 인상부터 찌푸려지고 괜히 가까이하기 싫었는데 이제 그런 마음이 없다.

그는 시킨 일을 곧잘 하는 내 모습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귀하게 자란 몸이라고 표를 낼 줄 알았는데, 일 좀 하네?”

원래도 나는 독초에 능통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전 소천동 관문에서도 독초와 관련된 관문은 쉽게 넘겼다.

물론 이곳에서 취급하는 독초는 내 지식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방대했다. 나는 모르는 독초가 들어올 때마다 독왕에게 물었다. 이건 뭡니까? 저건 뭡니까? 그만 좀 물어!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그날 일을 마쳤을 때, 독왕이 자신이 알려준 독초에 관해 물었다. 일로는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으니, 내 기억력을 공격했다.

“내가 이 독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야란초(野蘭草)입니다. 주로 갈아서 매운맛이 나는 음식에 넣는 독입니다. 그럼 표가 전혀 안 나죠.”

그가 설명해준 것까지 정확히 말했다.

“그럼 이 독초는?”

“흑산백일초(黑山百日草)입니다. 중독시키면 백일동안 효과를 지속하는데,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정확히 설명했다.

“너 이 자식! 왜 이렇게 똑똑해?”

내일은 반드시 흠을 잡아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 순간에는 영락없는 내 또래 철부지처럼 보이는데.

“내일 뵙겠습니다!”

* * *

다음 날에도 그를 찾아갔다.

한 며칠 오다 말겠지, 는 독왕의 큰 착각이었다.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목표를 정하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사람인지.

오늘도 독왕이 시키는 일을 하며 하루 일을 마쳤다.

그와 일부러 친해지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고, 잘 보이려 하지도 않았다. 아부신공도 발휘하지 않았다. 오직 묵묵히 시키는 일만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독왕이 이런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바뀌지 않아. 난 한 번 뱉은 말은 절대 번복하지 않거든. 만약 그걸 번복하면 대연무장 한가운데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개다라고 소리치고 다섯 번 짖겠다.”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는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오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나도 각오를 다졌다.

“독왕님이 그런 조건을 걸었으니 저도 걸어야죠. 제가 실패하면 저도 대연무장에 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소리치겠습니다. 호부견자(虎父犬子)라고 소리치고 다섯 번 짖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독왕이 큰소리로 웃었다.

“그때 교주가 어떤 표정일지 기대되는군.”

내가 내기를 걸자 신이 났는지 독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왔다.

“자, 그럼 네가 자주 와야 하니 우리 각서부터 쓰자! 천독림에는 네 뜻으로 온 것이고, 혹시라도 일하다가 사고가 나서 중독되더라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 어때? 쓸 자신 있나?”

신난 그의 눈빛을 쳐다보며 나도 도발했다.

“독왕님도 한 장 쓰신다면요.”

11 절대회귀-211화 11

제211회 무계획 속 하나의 계획

“어떤 각서?”

독왕이 내 의도를 추측했다.

“네가 각서를 쓰는 대신 난 하루에 독공을 하나씩 가르쳐줘야 한다? 뭐 이런 각서?”

“아닙니다.”

“그럼 이공자 네가 이곳에서 내 독을 훔치거나 독공을 훔쳐 배워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

“독왕님. 저는 독왕님의 독과 독공이 무섭습니다. 되도록 좀 멀리 떨어지고 싶습니다.”

“그럼 대체 무슨 각서지?”

내가 쓰고자 하는 각서는 독왕이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번 내기에서 지면 독왕님의 세상에서 나오겠다는 각서요.”

독왕은 흠칫 놀랐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내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혼자서 연구하고, 혼자서 배합하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고. 혼자 땅 파고. 바로 그 세상 말입니다.”

그가 얼굴을 바짝 내게 들이밀었다. 말도 안 되게 젊은 그의 얼굴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이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몸은 다가왔지만, 독왕이란 사람은 내게서 뒤로 물러났음을. 자신의 세계와 바깥세상의 경계선에 서 있던 그는 뒤로 물러나 숨어버렸다.

“넌 나를 데려가서 교주 허락만 받으면 끝이잖아?”

“맞습니다. 그 이유로 온 거죠.”

“그럼 내가 그런 세상에 있든 말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나?”

“상관있습니다.”

“무슨 상관?”

“나는 천마가 될 사람이니까요. 차기 천마는 본교의 독왕이 홀로 외로운 독왕이 아니라, 세상을 돌아다니는 독왕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자, 각서 쓰겠습니까?”

독왕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진의가 궁금할 것이다. 내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이런 조건을 거는지.

하지만 알 수 없을 거다. 미래에 일어날 그 끔찍한 사건을 미리 막을 생각임을 그는 결코 알지 못할 테니까.

“왜 망설이십니까? 어차피 그때는 개가 된 이후의 일인데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내기에 지면이란 단서까지 달아줬으니까.

내기에 질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만큼 이곳을 나간다는 것이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인 모양이다.

나는 더는 그를 밀어붙이지 않고 붓을 들었다.

“암튼 좋습니다. 저는 쓰겠습니다. 독왕님께 배우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각서 써야죠.”

나는 이곳 천독림에서 어떤 독에 중독되더라도 그건 독왕의 책임이 아니라, 이곳에 자진해서 온 나의 책임이라는 각서를 썼다. 거기에 수결까지 찍었다.

독왕은 정말 내가 각서를 쓰자 깜짝 놀랐다. 각서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정말 각서를 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너 멍청이냐? 이제 나는 너를 중독시켜서 고통스럽게 죽여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됐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냐?”

“똑똑한 사람만이 독공을 익힐 수 있으니까요. 독왕님은 마존들 중에 제일 똑똑한 분이니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겁니다.”

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와서 보니 알겠습니다. 독공을 익힌 사람이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걸요. 이 많은 독초와 독물을 다 외워야 하고, 독을 제조하려면 수백, 수천 가지의 조합과 배합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해약까지 만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본격적으로 하독술을 익혀야 하잖습니까? 이런 똑똑한 사람의 정점에 서 계신 분이 그런 짓을 저지른다고요? 그럴 리 없습니다. 혼자 땅을 파며 웃을 수는 있어도 그런 멍청한 짓은 안할 겁니다.”

독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생긴 것처럼 반응도 귀여웠다. 큰 눈이 몇 번 껌벅이더니 놀랍다는 듯 말했다.

“넌 말도 많고 말도 잘하는구나.”

이 순간 독왕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독왕아,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저와 있으면 심심하진 않을 겁니다. 자, 그럼 저는 하던 일 마저 하겠습니다.”

각서를 그에게 건넨 후, 나는 일을 계속했다. 독초 자루를 가져와서 풀어헤쳤다. 내가 독초를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독왕이 내게 불쑥 말했다.

“난 뭐라고 쓰면 돼? 넌 쓰고, 난 안 쓰고. 그럼 나만 옹졸한 사람이 되잖아?”

결국 각서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아, 별 내용 없습니다. 그냥 열흘에 한 번 천독문을 나간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거면 된다고?”

“네.”

“천독문 입구 앞에 서 있다가 들어와도 돼?”

“상관없습니다. 이곳에서 나가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 보는 풍경과 대문 앞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를 테니까요.”

독왕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뭔가 싶지? 네가 미친놈이라면 나도 미친놈 소리 듣는 사람이다. 어디 한 번 해보자, 독왕아. 누가 더 미친놈인지 승부를 보자.

독왕이 각서를 쓰고 수결을 찍었다.

“이공자, 네가 졌다. 난 절대 설득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 각서도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내 의지가 이런데 어떻게 꺾을 거냐?”

사실 그를 설득할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혈천도마가 말했듯, 지금껏 해왔던 방식대로 그를 대할 뿐이다.

“최선을 다해봐야죠.”

“정말 넌 내가 연무장에서 짖을 사람처럼 보이냐?”

“인생에서 한 번쯤은요.”

“어떻게 이렇게 허술한 너에게 다른 마존들이 넘어간 거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독왕의 눈빛에는 자신감과 총기가 가득했다. 지금은 얼굴에 흙을 잔뜩 묻히고 땅을 파던 독왕과는 다른 사람이다.

“조심해. 이제부터 네가 죽어도 난 책임 없으니까.”

* * *

다음날 나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독왕은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의도된 것이라 여겼다. 내가 말만 하면 습관적으로 이 말을 했다.

“그래봤자 내게 잘 보이려고 하는 수작인 것 다 알아. 헛수고다!”

하지만 나는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무계획 속에 하나의 계획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고 일에 집중하자.

일을 진심으로 배웠다. 독을 배워서 어디에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하는 것은 내가 처음 해보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첫 경험이 주는 가르침이 있다.

“제가 언제 독초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날라서 그것을 분류하는 삶을 살아보겠습니까? 제겐 값진 경험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몸을 쓴다.

이것이 내 인생이나 무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 어떤 생각을 떠올리려고 아무리 집중해도 잘 안될 때가 있다. 한데 목욕하다가 갑자기, 혹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퍼뜩 떠오를 때가 있다.

마찬가지다. 나는 천독림에서의 이 생소한 일이 내 삶과 무공에 신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독초를 분류하다 풍신사보가 십이성 대성하길 바랐다. 독을 배합하다 삶의 새로운 면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에서의 모든 일이 초조하지 않았고, 재미있었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독왕의 마음을 움직일 기회가 올 거로 생각했다. 그 기회는 내가 진심으로 독공에 빠져들 때 찾아올 것이다.

“조심해! 이번에는 딱 절반만 부어야 해!”

내가 살면서 언제 단혼산(斷魂酸)의 열다섯 가지 재료를 배합해 볼 기회가 있겠는가?

“됐어! 됐다!”

그가 시키는 대로 나는 정확하게 따랐다. 내 무공 경지로 어찌 하는 일이 정확하지 않겠는가? 아마 이곳 천독문의 누구보다 그의 마음에 들게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평소에도 이 일을 혼자서 다 하시는 겁니까?”

“그래.”

“힘드시겠습니다.”

함부로 이곳에 독인들을 들이지 않는 이유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의 거처에는 워낙 치명적인 독이 많은데, 만약 제자들을 잘못 들였다가 사고라도 치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도 통천각의 강력한 감시와 조사를 받는 곳이 천독림이었다. 독이 사용되면 반드시 보고해야 했고, 그 재고량도 항상 조사했다.

단혼산 배합을 끝내고 난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 소감을 솔직히 밝혔다.

“재미있습니다! 다음은 무슨 독 배합을 하실 겁니까?”

물론, 그는 나를 믿지 않았다.

“넌 천마보다는 저잣거리의 배우를 하는 게 더 잘할 것 같은데?”

“다음에 저와 중원에 나가면 연희단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떻습니까? 독왕님 외모면 주연 자리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독왕이 질색했다. 그의 표정이 딱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는 것도 싫은데, 뭐? 연극의 주연을 맡으라고?

“방금 독왕님 상상 속에서 무대 위 배우들과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싹 다 독살당해 죽었군요.”

“과연 이공자 너는 살아남았을까?”

홱, 하고 돌아서는 그에게 내가 소리쳤다.

“공연은 취소합니다!”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 * *

독왕은 다른 사람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로 찾아온 나에게 이 정도 관심이라면, 평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을지 예상이 된다. 그에게는 사람들은 독초 저 아래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다 충동적으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독왕이 독초를 빻다가 불쑥 물었다.

“이봐, 이공자 솔직히 말해. 여기서 독공을 훔쳐 배워서 자네 형을 독살하려는 거지?”

나는 큰 통에 옮겨 물을 담으며 대답했다.

“독왕님께 이렇게 와 있는 걸 뻔히 아는데, 형이 독살당해 죽으면 누구부터 의심하겠습니까? 저는 오히려 형이 독살당해 죽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죠.”

쿵쿵! 반박 대신 독왕의 독초 빻는 소리가 더 커졌다.

“전 독살에는 관심 없습니다. 굳이 독왕님께 한가지라도 배울 수 있다면 다른 걸 배우고 싶습니다.”

“어떤 것?”

여전히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독초를 빻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저러다 언제 또 자기만의 세상으로 갈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 내 대답은 그를 이쪽으로 확실하게 끌어내는 말이었다.

“해독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독공의 꽃은 하독이 아니라 해독 아닙니까?”

순간 독초 빻는 소리가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난 후 가장 놀란 얼굴이었다. 그가 품고 있는 생각을 내가 정확히 말했으니까.

“며칠 안 되었지만 제가 와서 느낀 점은 독을 만드는 것보다 그것을 완벽하게 해독할 해약을 만드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만든 독을 확실하게 해독할 수 있는 해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대가 독을 뿌렸을 때 순식간에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독공의 고수가 아닐까?”

하독만이 아니라 해독까지 완벽할 때 비로소 독공의 극의를 깨우치게 된다는 의미.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나?”

당신에게 독공을 배운 차기 독왕에게서요.

“그냥 제 생각입니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무공도 그렇거든요.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게 더 힘들죠.”

나는 그에게 승부수를 던졌다. 만독불침인 내게 가장 유리한 승부.

“독 하나를 정해서 제게 해독술을 가르쳐주십시오. 저는 해독하고, 독왕님은 하독하고. 어떻습니까? 한판 붙으시죠!”

평생 독공을 익히신 분인데, 저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자존심 문제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도발하지 않았다. 섣부른 도발은 역효과만 낼 게 분명했기에.

독왕아, 하자고 해. 한판 붙자고 말해!

그렇다고만 하면 이번 내기는 내 승리였다.

하지만 독왕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오지 않았다.

“싫다.”

단호한 독왕의 거절에 내가 물었다.

“왜 싫으십니까?”

“내가 네 수작을 모를 줄 아는가? 내게 이런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거겠지. 만약 네가 내 독을 해독할 수 있으면 내기에서 진 것으로 하겠다. 그렇지? 이 말이 듣고 싶은 거지?”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내 일이 아니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내기에서 이기면 되잖습니까?”

“어떻게 내가 이긴다고 장담하나? 해독술도 내 해독술인데.”

독왕이 다시 독초를 빻기 시작했다.

“가서 짖는 연습이나 해, 이공자.”

* * *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독왕을 알면 알수록 나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는 각오를 다지게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적합한 분이 아버지다.

주무시기 직전에 찾아뵙는 바람에, 나는 또 한 번 아버지의 잠옷을 보게 되었다.

“그때 봤던 것과 다른 꽃무늬군요. 이건 무림에서 제일가는 호신갑일 겁니다. 적들이 보고서 ‘에이, 설마 천마가 이런 잠옷을 입겠어?’ 하고 그냥 다 지나갈 테니까요. 그 옷이 제일 안전한 옷입니다!”

아버지는 언제까지 헛소리할 거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셨는데, 내가 한 번은 찾아올 줄 알고 계신 눈치였다.

“아버지는 알고 계셨죠? 독왕이 내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요.”

“벌써 포기했느냐?”

“그럴 리가요? 다만 그렇게나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아버지의 입가에 그 특유의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오늘 찾아온 것은 저 웃음을 보려고 온 것이었다.

그 웃음을 보니 힘이 났다.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지금 실컷 즐거워하십시오. 저는 꼭 독왕을 이 앞으로 데려옵니다.

진작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아버지 독왕 싫어하시죠?”

아버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무를 진정 사랑하시는 아버지였으니 독공이나 섭혼술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싫어하시는데 왜 살려두십니까? 죽여버리시지요.”

“적들에게는 가장 위협적이니까.”

“반란을 일으키거나, 미쳐서 본교 사람들을 중독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독왕을 본교의 무기로 삼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 과정에서 형이나 제가 죽으면요?”

“역시 감수해야지.”

“그런 말씀은 어디 숨겨둔 자식이 한 열 명쯤 있을 때나 하시는 말씀이죠.”

“왜 없다고 생각하느냐?”

“없어야죠. 형 하나만 해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 사마명이나 혈천도마가 말했으면 껄껄 웃으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뭔가 꽉 막힌 벽 앞에 서면, 아버지 생각부터 납니다. 이렇게 얼굴 뵈었으니 됐습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참,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에 대연무장에서 불효 아닌 불효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 돌아서려는데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독왕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느냐?”

11 절대회귀-212화 11

제212회 어느 주머니에 든 독이.

독왕이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아닙니까?”

당연히 그렇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아버지가 생각하는 독왕은 어떤 사람일까?

한데 아버지는 독왕이 어떤 사람인지, 독왕의 세상이 어떤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네 세상은 얼마나 열려 있어서?”

아버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말없이 거처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가 한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한 말에 담긴 뜻을.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새로운 마도를 외치는 네 모습이나 독왕이나 뭐가 다르냐? 다른 사람이 보면 너 또한 너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것 아니더냐?

물론, 내가 사람과 만나기 싫어하고 혼자 있길 좋아하는 독왕과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독왕에 대한 접근방식이 틀렸다는 의미였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절대 독왕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거라는 말씀.

독왕은 느꼈을 것이다. 내가 그를 보며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고 있다는 것을. 지금껏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러했을 테니까.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거다. 천독림 밖으로 나오라는 각서부터가 실수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역시 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집안에서 불이 꺼졌다.

“…… 냉정하시고요.”

나는 아버지의 거처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거처로 돌아섰다.

내게 실마리를 주면 아버지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깨우쳐 주었다. 내기를 떠나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자식에 대한 애정이었다.

* * *

다음 날, 천독림에 갔을 때 독왕은 거처에 없었다.

그를 찾아 주위 숲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찾다 숲 깊은 곳에서 독왕을 찾았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뱀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독왕은 대화를 나눌 때는 잘 나누다가 한 번 뭔가에 몰입하면 옆에서 누가 죽어도 모를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내가 근처에 온 줄도 모르고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이런 모습에서 나는 그가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괴짜라고 여겼고 나도 모르게 내가 그보다 우위에 있다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아버지가 깨우쳐 주신 것이 이것이다. 그러지 말라고. 그는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보통 뱀이 아니었다.

독 중에서도 극독을 지닌 화왕칠보사(花王七步蛇)로 영물에 속하는 뱀이었다. 꽃을 좋아해서 화왕이었고, 물리면 내공이 심후한 무인조차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죽는다고 칠보사였다.

그때 독왕이 뱀에게 말했다.

“야, 요즘 너 컸다고 건방져졌어. 언제부터 내게 그렇게 대가리를 빳빳하게 들고 대들었지?”

그러자 혀를 날름거리던 화왕칠보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너 그리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귀화초 열매는 함부로 먹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 화주(火酒)에 담겨봐야 정신 차릴래?”

화왕칠보사가 똬리를 틀며 그 속에 대가리를 넣었다. 정말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고? 우연이겠지?

평생 온갖 것들을 다 본 나이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때, 또 다른 뱀이 그 옆을 지나갔다. 이번 뱀은 화왕칠보사 못지않게 강력한 독을 지닌 음양혈독사(陰陽血毒蛇)였다. 이 역시 쉽게 보기 힘든 뱀이었다.

“월아!”

그러자 음양혈독사가 멈춰서 독왕을 쳐다보았다. 혀를 날름거리는 녀석을 보며 독왕이 말했다.

“왕이 이놈 바람둥이인 거 알지?”

음양혈독사가 화왕칠보사를 보며 쉬쉬 혀를 날름거렸다.

“왕이가 괴롭히면 와서 말해. 알았지?”

정말 말을 알아듣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 끝나자 음양혈독사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너도 이만 가봐!”

그러자 화왕칠보사가 숲으로 사라졌다.

정말이지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독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날 보며 깜짝 놀랐다.

“어이쿠! 깜짝이야!”

“제가 더 놀랐습니다. 세상에 무슨 독왕이 만날 옆에 누가 있다고 이렇게 놀랍니까?”

물론, 누군가 살기나 악의를 가지고 접근했다면 독왕은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마존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결코 무공으로 무시해선 안 된다. 마존은 어디까지나 마존이다. 그들이 미쳐 날뛰면 누가 누굴 어떻게 이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들은 본신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살수들 보고 팔마존들 중 누구 죽일래 하면 전부 독왕님 팻말 뒤에 전부 줄 설 겁니다! 첫 살행 나온 살수도 성공하고 갈 겁니다.”

“그랬다간 왕이에게 물려 죽겠지.”

“설마, 뱀에게 이름도 붙여준 겁니까?”

“뱀에게 이름 붙여준 독왕 처음 보나?”

독왕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연히 처음 보지! 그를 뒤따라 붙으며 내가 말했다.

“뱀들과는 언제부터 친해지신 겁니까?”

“뱀을 잡으러 돌아다닌 게 일곱 살 때다. 왕이와 월이는 그때도 있었고.”

“어렸네요.”

“우리 때는 그 나이 때 다들 시작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독왕의 눈빛에 애환이 담겼다. 그가 왜 이곳을 떠나는 것을 싫어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곱 살부터 이곳에 계셨다면 이곳이 독왕님의 세상이군요.”

독왕이 발걸음을 멈추고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넌 나를 이 세상에서 데리고 나가고 싶다면서?”

“아뇨. 지금은 그 말씀 드린 것,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바깥세상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똑같지만, 그런 방식으로 말씀드려선 안 되었습니다. 건방지게 굴었던 것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미안할 때는 진심으로 사과하는 거다. 사과에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이유는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에 붙이는 거니까.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어느새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붙은 독충을 쳐다보고 있었다.

독왕이 또 뭔가에 빠져드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저 독충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여긴 그의 세상이고, 여긴 열린 세상이다.

* * *

다시 며칠이 지났다.

나는 묵묵히 일에 열중했고 독왕은 여전히 자기만의 세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다.

며칠 동안 달라진 것은 독왕의 세상을 대하는 내 마음이었다. 이제는 그의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일곱 살 꼬마 아이가 독사를 잡으러 다니던 그 세상 말이다.

오늘도 독왕은 나무 상자에서 자라고 있는 독버섯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던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소리쳤다.

“깜짝이야!”

내가 조용히 그의 옆에서 그가 바라보고 있던 나무상자를 함께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꾸 놀라게 할래?”

“저 독버섯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이거 저도 독인 다 된 것 아닙니까?”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독인 타령이냐?”

“저도 그냥 여기서 살까 봅니다. 이제 천독림이 제집 같습니다.”

“이렇게 친한 척한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안 바뀌는 게 좋습니다. 지금 독왕님 모습이 딱 좋거든요.”

“뭐?”

독왕이 날 보며 소리쳤다.

“안 통해! 이깟 수작 안 통한다고!”

날 부정하는 그의 목청이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 그만큼 내가 더 그에게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는 증거였다.

* * *

항상 천독림 입구에서부터 독왕의 거처까지 상선이 나를 안내했다.

“이제 혼자 들어가도 됩니다.”

“그래도 위험한 독물이 나올 수가 있네.”

꼭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여전히 여러 길로 헷갈리게 나를 안내했고,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독왕에 대한 깊은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충성하는 사람의 눈빛은 어떤 식으로든 표가 나기 마련이다.

“어르신께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말하게.”

“독왕님을 언제부터 보셨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봤지.”

“어린 시절의 그분은 어떠하셨습니까?”

상선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건 왜 물으시나?”

“궁금해서요.”

“지금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네. 총명하고 사려 깊고 쾌활하고 밝고. 수장으로서 자질도 있었지.”

나는 ‘지금하고 너무 다르잖습니까?’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상선이 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다. 그의 독왕에 대한 애정은 단순한 충성심이 아니라 숙부 같고, 부모 같은 면이다.

그를 보면 혈천도마가 생각난다.

* * *

독왕이 총명하고 사려 깊고 쾌활하고 밝고 수장으로서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귀여웠다. 풋풋한 생김새 때문만은 아니다. 가령 이런 부분.

독왕은 허리에 열두 개의 주머니를 차고 있는데, 그 주머니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십이지신을 나타내는 열두 마리 동물인데, 어린아이들의 옷에 그려질 법한 화려하고 귀여운 화풍의 의인화된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지금 보니 알 수 있었다.

“이거 직접 고르신 거죠?”

“내가 그린 거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걸 다 직접 그린 것이라고?

“세상에 누구도 모를 겁니다. 이렇게 귀여운 주머니에 독왕의 극독이 들어있을 줄은.”

무릇 독왕의 독주머니라 하면 악귀들이 그려져 있거나, 글귀가 새겨져 있어도 마(魔), 살(殺), 악(惡), 사(死) 따위의 무서운 글자들이 있어야 어울리지 않겠나? 저 주머니가 모두 열리면 지옥이 펼쳐질 텐데. 사실 그래서 더 기이하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어느 주머니에 든 독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까? 설마 저 귀여운 토끼 주머니 속은 아니겠지요?”

“한 번 확인해 볼까?”

그가 토끼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다.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독왕이 웃음을 짓다가 이내 정색했다. 나를 보고 처음으로 활짝 웃은 것이다. 웃어 놓고 자신도 놀란 모양이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해주었다.

* * *

다음날, 중요한 독의 배합이 있었다.

독왕은 평소와는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오늘의 독 제조를 설명했다.

“여기 이 천심독(天心毒)이 내가 사용하는 극독 중 하나인 암혼절독(暗魂絶毒)의 재료가 되는 독이다. 이 천심독 한 방울로 능히 수십 명을 죽일 수 있지. 자, 넌 저기 멀리…… 이미 물러서 있군.”

나는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문 옆에 서 있었다.

독왕이 책상에서 뭔가를 찾았다.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

“뭘 찾으십니까?”

“내 장갑.”

독을 다룰 때 쓰는 녹피장갑을 찾는 것이다.

“혹시 이것 말씀이십니까?”

내가 끼고 있던 장갑을 들어 보였다.

“그걸 왜 네가 끼고 있나?”

“하도 위험한 독이라고 하셔서요.”

“그럼 나는?”

“독왕이 장갑이 왜 필요하십니까?”

“당장 안 가져와?”

나는 얼른 벗어서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입에는 뭐야?”

나는 양 볼에 물고 있던 피독주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피독주를 두 개나 물고 있는 모습에 독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면 나도 못 죽이겠는걸?”

물론, 그의 농담이었다. 독왕이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피독주를 백 개를 물고 있어도 그의 독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에게 하는 장난이었다. 그와 친해지기 위한 내 노력이기도 했다. 정말 당신이 어려서 밝고 쾌활했던 사람이라면, 그 마음속 어딘가에 그것들이 잠들어 있을 테니까.

독왕이 장갑을 끼고 본격적으로 독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양이 틀리면, 푸른 연기가 올라올 거야. 그럼 실패지. 정말 조심해서 집중해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제조법이다.”

독왕은 천심독을 배합해서 암흔절독을 만드는 법을 내게 보여주었다. 어차피 다른 배합물이 뭔지 알 수 없었으니, 암흔절독을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기보다 이 과정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는 셈이었다.

나를 내보내고 혼자 해도 되는데, 내게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잘 봤느냐? 얼마나 신중하고 조심히 다뤄야 하는지.”

“네.”

그때 뒤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왕님!”

“넌 어서 나가!”

나는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독왕이 품에서 해약을 마신 후 연기가 나는 곳에 옆에 놓여 있던 액체를 부었다.

치이이이익!

연기는 더욱 피어올랐다.

“독왕님! 독왕님!”

빨리 안 나와서 내가 뛰어 들어가서 구해야 하나 망설였다.

그때 독왕이 독연을 휘휘 저으며 그가 밖으로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그럼.”

입에서 나온 한 줌의 독연을 그가 손부채로 흩어버렸다.

“독공의 길이란 정말 쉽지 않은 길이네요.”

“일부러 실패했다. 네게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해 주려고.”

“…….”

“…….”

“당연히 일부러 실패하셨겠죠. 설마 무림에서 독을 가장 잘 다루시는 독왕께서 매번 쓰시는 독 제조에 실패하셨을…….”

“그만.”

“네.”

나는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독왕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독왕아, 아직은 모른다. 누가 연무장에 서게 될지는.

바로 그때였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상선이 달려와서 재빨리 보고했다.

“황천각의 서대룡이라는 조사관이 긴급한 일이라고 이공자를 찾아왔습니다.”

19 절대회귀-213화 19

제213회 우리가 마인이기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황급히 독왕에게 말했다.

독왕 역시 내 수하가 찾아온 경우는 처음이기에 상선에게 어서 서대룡을 데려오라고 했다.

잠시 후, 상선이 서대룡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각주님, 급히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가? 서 조사관.”

“마가촌에서 큰 사고가 터졌습니다. 멀쩡히 술을 마시던 무인이 갑자기 검을 휘둘러 수십여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어디서?”

“양화루입니다.”

양화루는 마가촌에 있는 여러 기루 중 하나였다.

“술 먹고 싸운 거냐?”

“아닙니다. 살육을 벌인 자의 눈과 코에서 갑자기 피가 흘러내리더니 갑자기 미쳐 날뛰었다고 합니다. 이자 무공 실력이 뛰어나서 피해가 더 컸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회귀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나는 곧장 독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독왕님, 오늘은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나는 서대룡과 함께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서대룡과 함께 마가촌의 양화루에 도착했을 때, 집행무인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피 냄새가 후끈 났다.

주위에 서 있던 구경꾼 중 한 소년이 눈에 띄었다.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집행무인들에게 소리쳤다

“우리 엄마와 동생이 있어요! 제발 가서 봐주세요. 주방에서 일하고 계세요! 엄마! 수야!”

나는 아이를 뒤로하고 서대룡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피바다였다.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집행무인들이 생존자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다들 취한 상태라서 피해가 더 컸습니다.”

죽은 사람은 무인만이 아니었다. 기녀를 비롯한 음식을 하는 숙수까지 죽었다.

주방 구석에 어린 소녀를 안은 채 함께 죽어 있는 중년 여인이 있었다. 아이는 밖에서 소리치던 소년과 똑 닮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모녀의 시신을 내려다보다 탄식을 내뱉었다. 주방에서 엄마를 도와 뛰어다녔을 아이였다.

옆에 있던 서대룡은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딴 곳을 쳐다보았다.

“놈은 어디에 있나?”

“삼 층에 있습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까지 가는 내내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놈은 삼 층 복도 끝 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까지 내려와 말라붙어 있었다. 눈을 까뒤집고 죽어 있었는데 흰 눈자위 부분이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뒤따라온 서대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은 처음 봅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

‘광폭(狂暴)!’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내공을 늘려주는 내공증폭제가 바로 광폭이었다.

내공증폭제는 복용하는 양에 따라 일다경에서부터 반 시진 정도까지 일시적으로 내공을 늘릴 수 있다. 늘어나는 내공 양은 보통 일 할에서 이 할 정도. 물론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광폭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건 늘려주는 내공의 양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광폭은 삼 할에서 많게는 오 할까지 늘려줬다.

하지만 좋은 효과만큼 부작용도 치명적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결과가 그 부작용이었다.

이 광폭을 판매하는 자들이 바로 사도맹이었다. 내가 회귀하고 비무대회에서 당했던 산공독 흑비 역시 그들이 판매하는 것이다. 광폭과 흑비, 사도맹이 주력으로 판매하는 두 가지였다.

“이자의 신원은?”

“북천검가 소속의 마검 중 한 명입니다. 평소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던 자라고 합니다. 작년에 진급까지 했고요.”

그게 문제였을 것이다. 그 진급을 위해 몰래 광폭을 복용했을 터.

“이자 시체는 지금 당장 마의께 보내고. 여기 뒷수습 부탁한다.”

“각주님.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몰라도, 꼭 밝혀내고 싶습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서대룡의 눈빛은 처음 황천각 조사관으로 만났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선배의 죽음을 반드시 밝혀내고 싶어 하던 그 서대룡의 눈빛.

나는 서대룡을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까 밖에 있던 그 아이는 자네가 잘 챙기게.”

서대룡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마의가 검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체를 이리저리 살피며 마의가 사인을 예측했다.

“단전이 크게 부풀어서 상한 것으로 봐서, 강력한 내공증폭제가 사용된 것 같네. 이지를 상실해서 칼부림을 일으킨 것은 그 부작용 때문인 것 같고.”

마의는 정확하게 시체의 상태를 밝혀냈다.

“사실 이런 시체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네. 지난해 말에 이런 상태로 들어온 시체가 있었지. 그때는 혼자 날뛰다가 죽었는데. 이번에는 참사를 저질렀군.”

광폭이 아직 무림에 완전히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엔 쉬쉬 넘어가던 부작용이 사용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고를 저질렀을 땐,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야. 이 사람아, 수련해서 내공을 늘려야지 뭔 욕심을 부렸나?”

그가 질책하듯 시신에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이 광폭이 계속 퍼져나갔던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애초에 복용하지 말았어야지. 책임이 일차적으로 약을 먹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기에, 사도맹은 더욱 그런 기조에 편승하며 돈을 벌어들였다.

마의가 흰 천으로 시체를 덮어준 후, 피 묻은 손을 씻었다. 죄 없는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의도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마의가 내게 물었다.

“독왕과는 어떻게 되었나?”

“그날 이후 매일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의가 깜짝 놀랐다.

“매일 만난다고? 정말인가?”

“천독림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역시. 자넨 다르긴 다르군. 그래, 만나보니 독왕이 어떻든가?”

“생각보다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 밝은 부분만큼은 느꼈던 모양이다.

“나는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는데, 자넨 벌써 알아차렸군.”

“요즘은 거의 온종일 붙어 있거든요.”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교주와의 내기를 이기고 싶은 건가?”

나는 천 덮인 시체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제 꼭 이겨야 하는 이유가 더 늘었습니다.”

* * *

천마전에서 아버지와 총군사 사마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성큼성큼 피의 길을 걸어가서 두 사람에게 보고했다.

“마의께서 이번 사건의 원인을 내공증폭제의 부작용으로 밝혀냈습니다.”

내 보고에 두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부작용 증상과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미 알고 계셨죠?”

내 물음에 사마명이 대답했다.

“네, 중원에서 몇 차례 크고 작은 사건이 보고되었습니다.”

“사도맹 소행이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난 신마쟁투에서 제가 산공독에 당했습니다. 그때 조사해 보니 사도맹이 만든 흑비라는 산공독이었습니다. 이번 것도 그들 짓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맹에서 판매한 광폭이란 내공증폭제입니다.”

역시 사마명은 광폭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시 그에게 물었다.

“광폭을 제조하는 사도맹의 책임자가 누굽니까? 군사님께서는 알고 계시죠?”

사마명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잠시 나를 쳐다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로소 사마명이 그가 누군지를 밝혔다.

“애차(哀侘)입니다.”

나는 애차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검은뱀이군요.”

“맞습니다.”

야율한의 네 수하 중 하나였다. 앞서 신선채를 만든 지생이 황금돼지 문신을 새겼다면 애차는 검은 뱀 문신을 새기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건 말을 할 기회였다.

보시다시피 온갖 나쁜 짓은 야율한이 다 하고 있습니다. 놈은 절대 악입니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독왕을 설득해서 아버지 앞에 데려오는 내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검은뱀 역시 처리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침묵했다. 침묵으로 내 분노를 드러냈고, 침묵으로 내 의지에 힘을 더했다.

“사건과 관련해서 본각에서 상세한 보고서가 올라갈 겁니다. 다른 내용이 확인되면 보고드리겠습니다.”

피의 길을 걸어서 천마전을 나왔다.

아마 두 사람을 만나서 한 마디 너스레도 떨지 않고 돌아선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신선채라는 분노 위에 광폭이라는 분노를 조용히 쌓아 올렸다.

아버지와 사마명은 그런 나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번에 아버지가 깨우쳐 준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내 세상도 닫힌 세상이다.

그래, 인정한다. 새로운 마도를 세워서 절대악을 없애는 것은 아직은 나만의 세상 속 일이라는 것을.

* * *

그날 밤, 나는 권마의 절벽 앞에 혼자 서 있었다.

권마가 절벽을 올려다봤던 것처럼 나도 절벽을 쳐다보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내공을 주입했다.

휘우우웅!

주먹 주위에서 기류가 휘돌며 비구름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이익!

절벽을 향해 한 방 날리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멈췄다.

아직은 무너뜨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절벽에 진짜 주먹을 날리는 건 내 인생에서 딱 한 번뿐일 것이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아직은 그 아기 손으로 쳐봤자 네 손만 아프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이곳으로 권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부님!”

오랜만에 그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독왕의 풋풋한 얼굴을 보다가 이 무서운 얼굴과 거대한 몸통을 보자 이곳이 마교라는 것이 실감 났다.

권마의 시선이 꽉 쥐고 있는 내 주먹을 향했다.

내 분노를 읽은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제자야.”

“네, 사부님.”

“정말 화가 났을 때는 쥐었던 주먹을 이렇게 쫙 펴라.”

권마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앞에 펼쳐졌다. 내 얼굴보다 큰 손바닥이었다.

“그리고!”

짝!

권마가 박수를 크게 쳤다.

“박수 한 번 치고 다시 쥐어라. 그럼 그 주먹이 더 아플 거다.”

“다시 쥘 필요 없을 겁니다. 그 손뼉 사이에 적이 있으면 주먹으로 맞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권마가 나에게 주먹을 펴라고 한다. 이 깊고도 큰 가르침을 나는 가슴속에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와 사마명 앞에서 떨지 못했던 너스레는 권마에게 대신했다.

“사부님이 여기 서 계실 때, 오직 절벽을 무너뜨리겠다는 일념으로 서 계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화가 날 때마다 서 계셨던 것 아닙니까? 맞죠?”

부정하지 못하고 권마가 웃었다.

그에게 인사하고 그곳을 걸어 나왔다. 꽉 쥐었던 두 주먹은 활짝 펴고 걸었다.

* * *

다음 날에도 변함없이 천독림으로 갔다.

독왕은 채집통을 들고 집 근처 숲을 거닐고 있었다.

“어제 벌어진 사건을 말씀드리자면…….”

그때 독왕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광폭이지?”

독왕도 어제 부작용만 듣고 그것이 광폭 때문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당연히 알지. 너도 알다시피 독아들이 전 중원을 돌며 독초와 독물을 구하러 다닌다. 사도맹 놈들도 약을 만들기 위한 약초를 구하러 다니고. 그래서 놈들의 동태는 우리가 제일 잘 알지.”

독왕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심지어 경고도 했다. 그딴 약 만들지 말라고.”

“누가 만드는지 아십니까?”

“알지. 진독거사(眞毒居士)라는 머저리 같은 놈 하나 있다.”

진독거사. 그는 사파에서 독으로 유명한 독공고수였다. 독왕은 그를 떠올리는 것도 싫은지 갖은 인상을 다 썼다.

“독을 쓰는 사람들이라도 금하는 게 있는데, 이 자식은 너무 삼류로 놀고 있어.”

“그 삼류 놀음에 무고한 이가 많이 죽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죽은 여인도 있었죠. 본교 보고서에는 그런 사실은 올라가지도 않을 겁니다. 전체 사망자 몇 명! 이 한 줄의 보고에 모녀의 죽음이 묻히겠죠. 모녀가 원혼이 돼서 이 세상을 지켜보면 아이는 엄마에게 묻겠죠. 왜 아무도 우리 죽음을 신경 쓰지 않아요?”

독왕은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나무에 붙은 독충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젠 화내지 않았다. 내가 내 세상을 살아가듯 그도 그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니까.

“저 독충 이름은 뭡니까?”

나는 그의 세상을 물었고, 그는 나의 세상으로 답했다.

“그들의 복수를 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청살독에 들어가는 재료로 기억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위선이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에서 얻는 자기만족이지.”

우린 상대의 말은 듣지 않고 각자의 말만 했다.

“아, 뭐였더라? 이름이 생각날 듯 말 듯 한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그걸로 끝이지.”

독왕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도 그를 보았다. 우린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를 만난 이후, 독왕이 가장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수입니다. 오늘 엄마 품에서 죽은 여자애 이름이.”

“저 독충 이름은 백점충(白點蟲)이다. 청살독 재료가 아니라 오독향(五毒香)에 들어가는 재료고.”

독왕은 나를 만난 이래 가장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말해봐라. 네가 이러는 진짜 이유를.”

“제가 말하면 다들 그럽니다. 네가 정파냐고. 네가 정의의 협객이냐고. 그럴 때면 원혼이 된 아이처럼 저도 질문을 하게 됩니다. 힘없는 여자가 죽고, 아이가 죽고,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데. 우린 마교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요? 그게 정파 놈들 생각이면 그럼 대체 우린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독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는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난 박수를 한 번 치면서 힘차게 말했다.

“가시죠. 오늘 잡아야 하는 독충이 많잖습니까?”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할 수 없이 나도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독왕은 발아래 지나가는 독개미들을 쳐다보았고, 나는 기왕 앉은 것 그가 듣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했다.

“죽은 아이에게 오라버니가 있습니다. 피바다가 된 기루 밖에서 엄마와 동생이 무사한지 소리치고 있었죠. 그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네 가족을 죽인 자들을 싹 다 죽이고 돌아왔다고. 원래는 아무도 못 죽이는 자들인데, 우리가 마인이기에 죽일 수 있었다고.”

여전히 시선을 개미들에게 둔 채 독왕이 말했다.

“넌 참 이해할 수 없다.”

“절대 저를 지지하지 마십시오. 까닥하다간 이런 사람이 차기 천마입니다.”

“죽어도 지지 안 한다.”

하지만 정작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독왕이었다. 그가 이렇게 덧붙였으니까.

“꼭 다섯 번 짖어야 하나?”


32 절대회귀-214화 32

제214회 우린 지옥개다.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놀람의 침묵이고 기쁨의 침묵이었다. 저 말은 내기에 졌다는 의미였으니까.

“조심해! 개미 밟는다!”

나는 움찔하다가 하마터면 개미를 밟을 뻔했다.

그가 왜 져주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쌓인 나와의 관계 때문인지,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도맹의 진독거사 때문인지, 아니면 가족을 잃은 그 소년 때문인지. 아니면 일렬로 지나가는 저 독개미들 때문인지.

아무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왕님!”

나는 와락 독왕을 껴안았다. 정말 힘차게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독왕이 어느새 허리에 있던 독주머니 하나를 내 얼굴 옆에서 흔들었다.

“죽을래? 안 떨어져?”

“네!”

나는 후다닥 물러났다.

독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자. 가서 짖고, 교주에게 가자.”

그것도 당장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독왕님, 제가 대신 짖겠습니다.”

“네가?”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셨는데, 저도 보답을 해야지요. 지금까지 독왕님께 배우기만 했잖습니까?”

“정말 대신 짖어준다고?”

“네.”

진심 가득한 내 대답에 독왕이 웃었다.

“너무 환하게 웃으시는 것 아닙니까?”

“개에서 인간이 되었는데, 기뻐해야지.”

“가시죠.”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어서 움직여야 한다.

우린 그 길로 대연무장으로 갔다.

“여기 멀찌감치 기다리고 계십시오. 제가 가서 시원하게 짖고 오겠습니다.”

연무장으로 가려는 나를 독왕이 붙잡았다.

“너나 있어. 내가 짖을 거다. 나 약속 어기는 사람 아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너는 괜찮냐? 너는 천마가 될 수도 있는 몸이다.”

“죽어도 절 지지하지 않는다면서요?”

“안 하지.”

나와 독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여전히 어리게만 보이는 그의 얼굴이지만 눈빛은 깊었다. 날 지지하진 않지만, 내가 천마가 되었을 때를 걱정해주는 어른스러움, 이게 독왕이란 사람의 본모습이다.

“내가 짖는다. 넌 있어.”

천독문 대문 밖도 나가기 싫어하는 그 독왕이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새로운 삶의 원칙을 추가했다.

그 누구의 세상도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

사람을 똑바로 보고, 해야 할 말이 있을 때는 미루지 않고 하며, 어떤 누구도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다. 나는 삶의 원칙을 하나씩 추가하고 있었다.

독왕이 등장하자 일단 주위를 오가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특별한 기도를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 마존의 존재감이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인들은 놀랐다. 좀처럼 얼굴 보기 힘든 독왕이 대연무장 한가운데 나타난 것이다.

발걸음을 멈춘 것은 물론이고 건물의 창가로도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점점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는 독왕을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독왕이었어? 저렇게 젊다고? 이런 식으로 다가섰다가 뒤늦게 코와 입을 가리고 저 멀리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독왕은 사람들이 최대한 모이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별로 없을 때 얼른 짖고 약속 지켰다 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도 남자 중의 남자였다.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남자일 뿐.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마군주 장호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호는 언제나처럼 듬직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눈인사를 보냈고, 멀리서 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식을 들은 서대룡과 황천각 조사관들, 그리고 집행무인까지 우르르 달려 나왔다.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내게 전음을 보냈다.

―각주님, 무슨 일입니까?

―배후를 밝히러 가는 중이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자네가 사고가 난 기루에서 그랬잖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밝혀내고 싶다고.

―그랬죠.

―밝혀내러 가는 중이다.

―연무장에서요?

―그래, 여기서 출발이다.

서대룡이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더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연무장 주위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모두의 시선이 독왕에게 집중되었다. 앳된 얼굴로 뱀과 대화하던 독왕은, 독충을 보며 상념에 빠져드는 독왕은, 독주머니에 귀여운 그림을 그려 넣는 독왕은, 이 많은 마인의 시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했다.

모두들 안다. 지금 독왕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허리에 차고 있던 저 열두 개의 독주머니가 열리게 되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몰살당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일 만큼 모였다고 생각되자 독왕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이 많은 사람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던 그때.

독왕이 큰소리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

다들 깜짝 놀랐다. 설마 독왕이 사람들을 모아두고 개 짖는 소리를 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라서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독왕이 미쳐서 독을 풀 거라 생각한 것이다.

바로 그때 그곳에 울려 퍼진 또 하나의 외침.

“호부에 견자 있다!”

소리친 사람은 물론 나였다. 나도 독왕에게 걸어가며 크게 개 짖는 소리를 냈다.

독왕이 뭐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찌 그가 혼자만 짖게 할 수 있겠는가?

“같이 짖죠.”

“안 돼! 자넨…….”

“괜찮습니다.”

나는 자신에 찬 미소를 지어주었다. 고작 이런 일이 천마가 된 나의 존엄을 결코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자존감의 미소였다.

그리고 이건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왕과의 우정이었고, 고마움의 표시였다. 홀로 그를 짖게 두진 않을 거다.

두 번째는 내가 먼저 짖었다.

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독왕이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는 감출 수 없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독왕과 더 가까워질 거다. 그래서 나중에 ‘나 만독불침!’이라고 밝혔을 때, 그의 얼굴에서 다른 감정이 아닌 기쁨을 보는 것. 그게 내 목표다. 결코 쉽지 않은 목표다. 독왕과 만독불침은 상극의 관계였으니까.

우린 함께 짖었다.

기왕 짖는 것 늑대 울음처럼 길게 아주 길게, 멋있게 짖었다. 개라고 다 개냐, 우린 동네 똥개가 아니라 천마신교에 충성하는 멋진 개다! 악을 물어뜯는 지옥개다.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감히 우릴 보고 비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에 누군가 우릴 따라 짖었다.

그는 바로 서대룡이었다. 서대룡이 짖자 황천각 조사관들이 짖었고, 집행무인들이 짖었다. 독아들이 짖기 시작했고, 장호도 짖었다. 마군주가 짖자 모두들 놀랐고, 충성스러운 마군들도 짖기 시작했다.

다른 마인들도 따라 짖었다. 순식간에 대연무장은 개판이 되었다.

우린 그 아수라장에서 다섯 번 사이좋게 짖었다.

독왕이 내기에서 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이렇게 함께 짖는 이 순간이 훨씬 더 통쾌했다.

* * *

한바탕 개판을 만든 후에 독왕과 함께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천마전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독왕은 약을 몇 개나 꺼내 먹었다.

“무슨 약을 드시는 겁니까?”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이다.”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짖으실 때는 안 드시더니요?”

“이게 연무장에 서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떨리는 일이니까. 지금 난 교주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니야. 교주에게 반항하러 가는 거지.”

아버지는 독왕은 절대 내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 확신하셨다. 한데 이렇게 홀랑 넘어갔으니 반항을 넘어서 싸우자는 거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교주님은 날 싫어해.”

“아버지가 워낙 뼛속까지 무인이셔서 정통이 아니면 좀 박대하시긴 하죠. 한데 독공을 싫어하는 거지 독왕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아버지가 이런 일로 오해를 잘 사십니다.”

“위로는 사절이다.”

“위로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독왕님이 싫었다면 이번 내기를 걸어주셨겠습니까? 독왕님이라면 진짜 싫은 사람과 이런 중요한 내기를 하게 뒀겠습니까?”

그건 좀 일리가 있게 들렸는지 독왕은 뭐라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좀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미움 좀 받고 사는 거죠.”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간다.”

“걱정 마십시오. 다른 마존들은 다 솥에 넣고 삶아도 독왕님은 안 삶습니다.”

“독 때문에 못 먹을까 봐?”

“아뇨. 독왕님 안 계시면 무림맹이 당장 쳐들어올 테니까요.”

“이제 잘 보이려고 아부 안 해도 된다. 어차피 약속은 지킬 테니까.”

“싫습니다. 계속 아부할 겁니다. 오늘 제 감동 영원할 겁니다.”

“내가 오늘 못 살아남는 거 알고 그러는 거지?”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우린 피의 길을 나란히 걸어서 아버지에게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이미 우리가 대연무장에서 짖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분위기는 엄숙하면서도 싸늘했다.

정중히 예를 표한 뒤 독왕이 아버지를 응시하며 정중히 말했다.

“교주님. 이공자의 부탁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무섭게 독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만은 믿었는데.”

독왕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대체 뭐에 넘어간 건가?”

아버지가 진정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독왕이 잠시 대답을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공자의 애도(哀悼)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아버지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이번 사건으로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그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이공자의 애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독왕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닌 듯 있었지만, 그는 다 듣고 있었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모습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앞에서는 벌벌 떨던 독왕이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말도 잘했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기분 좋냐?”

“날아갈 것 같습니다. 마존들이 함께 저를 지지해줘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뤘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겁니다.”

내 기쁨을 솔직하게 전했다.

사실 이 모든 건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따끔한 일침.

네 세상은 얼마나 열려 있어서?

이 한마디로 나는 독왕의 세상을 닫힌 세상이 아님을 깨달았으니까. 실제로도 닫힌 세상이 아니었다. 진짜 닫힌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연무장에서 짖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닫힌 시선으로 그를 봤을 뿐이다.

아버지 덕분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씀은 드리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가 화를 내실 기회를 줘야 하는 순간이니까.

나는 믿는다. 적어도 아버지의 마음 절반은 내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이셨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좋아. 네 부탁을 허락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쉬운 결정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 이번 일을 잘 처리해야 한다는 것도.

“네가 이런 부탁을 했다면 우리가 처리했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을 자신도 있어서겠지?”

“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 안 돼. 우리가 죽였다는 것을 절대 표 내지 않고 처리해야 한다.”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과 수족 사인방을 우리 소행인지 모르게 처리한다.

이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였지만, 나는 힘차게 대답했다.

“네! 그러겠습니다.”

이 허락을 받기 위해 마존들이 모두 나섰고, 극악소마는 목숨까지 걸었으며, 독왕은 연무장에서 짖었다.

그럼 해내야지, 완벽하게.

아버지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계셨다. 아버지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뒤끝이 없는 성격이었다.

“누구와 함께 갈 거냐?”

“극악소마와 함께 갈 겁니다.”

“둘이서는 역부족일 수 있다. 셋이라면 안심할 수 있겠지.”

독왕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짓던 그 순간.

아버지의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자네가 따라가서 돕도록.”

“안 됩니다! 교주님!”

독왕이 질색하며 펄쩍 뛰었다.

“안 된다고?”

아버지의 나직한 물음에 독왕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됩니다.”

아버지는 그걸 홀랑 넘어가? 맛 좀 봐라, 이런 표정이었다. 정정한다. 아버지는 뒤끝이 있으신 분이시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왕은 들어라.”

아버지가 천마의 기도를 드러내자 독왕은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네, 교주님.”

“이 시간부터 십이극독(十二劇毒) 사용을 허락한다.”

“지엄하신 명을 받듭니다.”

독왕의 주독인 십이극독만큼은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독왕의 독이 무서운 것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독왕과 나는 천마전을 나왔다.

“긴장된다고 하시더니 말을 저보다도 더 잘하십니다.”

“그게 다 약빨이다.”

독왕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천독림 밖도 나가기 싫어하는 그였는데 중원에 나가게 된 것이다.

“천독림 밖은 위험해!”

“사실 독왕님이 제일 위험한 존재죠.”

독왕이 다 네 탓이라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난 안 갈 거다. 싫다.”

“네. 소마님과 다녀오겠습니다. 천독림에 잘 숨어 계십시오.”

“그랬다간 정말 끌려간다.”

독왕이 괜한 곳에다 신경질을 부렸다.

“나가면 다 죽여버릴 거다. 마을마다 다 들러서 몰살시켜 버릴 거다. 내가 못 할 것 같지?”

정말 어지간히도 나가기 싫은 모양이다.

“상대가 상대니 제가 걱정되셨나 봅니다. 본교 제일 비장의 무기까지 내보내는 것 보면요.”

“그 정도론 위로가 안 된다, 안 돼!”

독왕이 푹 처진 어깨로 천독림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그에게 소리쳤다.

“최대한 빨리 출발할 거니 준비하십시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독왕이 짖으면서 걸어갔다. 화가 많이 난 개였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짓던 나는 악인곡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21 절대회귀-215화 21

제215회 시작부터 참여하십시오.

극악소마는 오늘도 하얀 방에 홀로 앉아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하얀 벽이 그의 무공 수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혹시라도 그가 미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사라졌다.

그의 방에 들어간 내 첫 마디는 이거였다.

“소마님, 싸우러 가시죠.”

내가 허락을 받아냈다는 사실에 가면 속 소마의 눈이 활짝 웃었다. 나를 돕기 위해 불사귀면까지 쓰고 아버지를 만났던 극악소마였다.

“좋습니다.”

극악소마는 흔쾌히 대답했다. 상대가 야율한이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와 함께 싸우러 가는 것을 기뻐할 뿐이었다.

“야율한뿐만 아니라 그가 거느린 수하 사인방들도 함께 처리할 겁니다.”

가면의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눈이 웃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기뻐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만에 빠져 있거나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야율한은 강한 자입니다. 우리가 앞서 싸웠던 싸움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극악소마는 결코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이번 일의 위험성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고맙다. 이런 일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나서줬던 것이니까.

“문제는 우리가 죽였다는 증거를 남기지 않고 해치워야 합니다.”

“이공자는 똑똑하니까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소마님이 도와주셔야죠.”

“저는 죽이는 것만 맡죠.”

말은 쉽게 했지만 극악소마의 눈빛이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상대다. 극악소마가 담담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싸우다 보면 내가 누군지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죠. 내가 본 이공자는 자신이 누군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전 소마님이 계셔서 걱정 안 되는데.”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좋은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상대의 호의에 고마워하고.

그에게 막 너스레를 떨고 싶어진다. 농담도 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실수는 딱 이럴 때 나오는 법이니까. 가깝기에 지켜야 하는데 가까울수록 못 지키게 되는 것이 예의이기에, 나는 예전보다 더 깊은 존경심으로 그를 대했다.

“참, 그리고 이번 일에 다른 마존이 한 분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누굽니까?”

“아버지 명령으로 독왕께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독왕이란 말에 극악소마는 살짝 난처한 눈빛을 보냈다.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데.”

누군들 있겠는가? 그건 독왕도, 극악소마에게도 다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번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독왕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극악소마는 여전히 껄끄러운 모양이다. 나를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마존들과의 관계는 또 별개였으니까.

극악소마가 반대쪽 벽으로 걸어가서 그어둔 선 앞에 섰다.

“독왕 그 사람과는 이쯤에 있을 겁니다.”

극악소마는 줄의 시작 지점을 가리켰다.

“그래도 줄 위에 있긴 하네요.”

내 말에 극악소마가 웃었다. 어차피 정해진 일, 그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독왕의 독이 실수로 우릴 죽이지 않길 바라야죠.”

나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마존들의 조합은 여간해서는 맞추기 어렵다. 어느 둘이 있을 때 가장 잘 어울릴까?

“언제 출발이 가능하십니까?”

“전 언제라도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발하시죠.”

“좋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다가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소마님 덕분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덕분이란 말 대신에 책임이란 말을 써야 할 겁니다. 인사는 일이 끝나고 하시죠.”

말을 마친 소마는 다시 벽을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그 하얀 벽을 함께 쳐다보다가 작별을 고하고 방을 나섰다.

악인곡을 걸어 나오는데 마주치는 무면객들의 눈빛에 이전보다 더 큰 호의가 담겼다. 아까 좋았다면서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연무장에서 짖고 난 후, 인기가 더욱 올라간 것이다. 하여튼 이상한 짓을 더 좋아하는 그들이었다.

* * *

악인곡을 나온 후 곧장 천독림으로 갔다.

독왕은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내일 아침 출발이라고 알려주러 왔는데, 이미 예상했는지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일 아침 출발이란 것.”

“그 난리를 치고 얻어낸 기회인데, 당연히 바로 출발하겠지.”

“역시 똑똑하십니다.”

“똑똑했음 이 위기에 빠졌겠어?”

그에게 위기는 야율한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천독림을 나가는 일이 위기인 것이다.

독왕은 어깨에 멜 수 있는 가방에 독을 챙겼다. 주머니에 든 것, 통에 든 것, 병에 든 것. 다양한 독들을 모두 챙겼다.

“독을 이렇게 많이 가져갈 필요가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독왕이 몸에 지닌 독만 해도 엄청난 수의 무인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독왕은 예비 독을 많다 싶을 정도로 챙겼다.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죽어도 가기 싫은 것과 별개로 준비성은 철저했다. 그의 성격이었다. 이런 철두철미한 성격이 아니면, 그 많은 독과 해약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독왕은 허리에 찬 독주머니를 감출 수 있도록 얇은 장삼을 입었다. 그 장삼 안쪽에도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렸는데, 거기에도 독을 챙겨 넣었다.

“제가 혁낭을 하나 메고 갈 텐데, 챙겨주시면 저도 들겠습니다.”

“사도맹 멸망시킬 일 있냐? 됐다.”

“지금도 충분히 그럴 기세입니다만.”

그는 못 들은 척 또 다른 것을 챙겼다. 이번에는 독이 발린 비수가 이십여 개나 꽂힌 가죽 띠를 둘렀다.

“비수도 던지십니까?”

“너보단 잘 던질 거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독왕이 비수를 사용한다는 것에 놀랐다.

거기에 독왕이 부채도 챙겼다.

무간선(無間扇)이라 불리는 독왕의 독문병기로 하독할 때 주로 사용했다. 독을 뿌려 모두를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십 명이 있는 방에서 딱 한 명만 독으로 죽이는 것이 어렵지.

독왕이 무간선을 살랑살랑 흔들 때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지옥으로 이끌 바람이 어디를 향할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훗날 차기 독왕은 자신의 사부인 지금의 이 독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삼백 년 이내 최고의 독공 고수라고.

“나는 미리 말하지만 야율한 안 죽여. 난 그냥 따라만 가는 거야. 구경만 할 거야!”

“구경만 하신다면서 무슨 독을 이렇게 많이 챙겨가십니까?”

“마음 편히 구경하려고 그런다.”

이건 그의 성격이다. 철두철미한 것도, 이 불안증도.

“얼마나 걸릴까?”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고는 하지만 갔을 때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자. 알지?”

“도와주시면 더 빠르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진독거사 그놈은 내가 손 좀 봐야겠다.”

독왕은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짜증이 난 듯 보였다.

“약을 팔아먹으려면 제대로 만들고서 팔든지. 이러니 우리가 욕을 먹는 거다. 교주가 날 싫어하는 이유고.”

“한데 독왕님이 독공을 쓰신 것을 남기면 안 됩니다.”

“시체 남겨서 전시할 일 있나?”

시체조차 흔적도 없이 녹여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독왕이 진독거사를 처리해준다면 내가 만독불침인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빠뜨린 독을 챙긴다고 바쁜 그를 뒤로하고 천독림을 나섰다.

나를 데리고 천독림 밖으로 나가면서 상선이 말했다.

“독왕님을 잘 부탁하네.”

상선이 독왕을 얼마나 걱정하고 아끼는지 잘 안다. 오랜만의 출교니 더욱 신경이 쓰일 테고.

“제가 독왕님께 드려야 하는 부탁인 것 같습니다만, 네. 잘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안내네. 앞으로는 혼자 오시게.”

항상 다른 길, 헷갈리는 길로 안내하던 그는 오늘은 가장 편하고 좋은 길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 * *

천독문을 나온 후 들른 곳은 의방이었다.

나는 드디어 마의에게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야율한을 죽이러 떠납니다.”

충격을 받은 마의가 멍하게 서 있다가 몸을 휘청거렸다. 내가 내력을 발출해서 그의 몸을 감쌌다. 그를 자리에 앉히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마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자인 걸 알았지?”

한 사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직 그 이름을 말하진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마의는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예전에 이 일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 당연히 아버지에게 들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교주가 허락한 건가?”

“네. 여섯 마존들이 이번 일을 위해 저를 도왔습니다. 이번에 독왕에게 갔던 것도 그 일을 허락받기 위해서였고요.”

“왜 말하지 않았나?”

“허락을 받고 말씀드리려고 그랬습니다.”

마의의 얼굴에 격정이 차올랐다.

“나는 오직 이날만을 위해 살아왔었다네.”

눈앞에서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괴로움에, 복수를 꿈꾸며 자신을 학대하듯 환자를 치료하면서 살아온 그의 인생이었다. 평생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만약 눈앞에서 자식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그 슬픔과 원한이 얼마나 크고 깊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놈을 죽이고 돌아와서 결과를 알려드려도 되겠지만, 떠날 때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 일이 마의님께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작부터 알려드리는 겁니다. 이제 시작한다고요. 이 시작부터 마의님도 참여하시라고요.”

마의는 내가 돌아오는 날까지 떨리고 긴장되고 걱정될 것이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알리는 것이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의가 너무나 잊고 싶은,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이었지. 내가 위중한 환자를 치료하고 있을 때 야율한이 들이닥쳤다네. 당장 자기가 데려온 사람을 치료하라고 했지. 나는 안 된다고 했네. 지금 치료를 중단하면 이 사람 죽는다고. 목에 칼을 들이댔어도 의원으로서 내 신념을 지켰다네. 그리고 그날 난 두 사람을 다 살렸다네. 치료하고 있던 사람도 살렸고, 놈이 데려온 사람도 살렸지.”

“한데 왜?”

“놈은 자기 명령을 거역한 사람을 살려둔 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게 자신만의 원칙이라고. 앞으로도 꼭 지킬 거라고. 내가 자기 수하를 살려줬으니, 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대신에…….”

마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후회하네. 그냥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할걸.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후회한다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그자의 말을 따를 거네. 내가 치료하던 환자가 죽더라도 나는 그자의 말을 따를 거라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의방에 있는 자신의 침소로 데려갔다. 마의의 방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은 좁고 초라했다. 딱딱한 침상 하나. 작은 책상과 의자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다. 책상에 놓인 몇 권의 책과 낡은 등잔 하나가 그의 인생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 방에 비밀문이 있었다. 벽에 숨겨진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숨겨진 공간에는 예전 마의의 집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가 요리를 하던 곳도, 아들이 뛰어놀던 곳도, 세 식구가 잠을 자던 방도.

그는 아직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단 한 순간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어린 아들놈은 항상 나와 놀고 싶어 했지. 그때마다 아빠가 바빠서. 아빠가 환자를 구해야 해서. 아빠가 약초를 사러 가야 해서. 그렇게 미루고 또 미뤘지. 그런데도 아들놈은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네. 그 어린놈이 내게 그러더군. 안 바빠지면 나랑 놀아줄 거잖아? 그치? 우릴 위해서 이렇게 일하는 거지? 그날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 그럴 때면 아내가 말했지.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당신 건강부터 챙기시라고. 내 자식, 내 아내도 살리지 못한 주제에 내가 무슨 의원이라고!”

결국 마의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물은 더 많이 흘러내렸다. 처음 보는 마의의 눈물이었다.

나는 다가가서 마의를 안아주었다. 꼭 안고 그의 삐쩍 마른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숨죽여 울었다. 이공자로 안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던 회귀 전의 내가, 이 힘들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동생을 안아주는 거였다. 마의야, 이제 그만 힘들어해라. 내가 끝내주마.

잠시 후, 마의가 마음을 진정했다.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한편으로 후련한 얼굴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서만 삭혀온 아픔이었기에.

“……자네에게 미안하네. 내 복수를 위해 그 위험한 일을 하게 해서.”

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제가 반드시 죽이고 돌아오겠습니다.”

눈물 젖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놈은 나의 존재조차 잊었을 거네.”

그 사실이 그를 더 미치도록 화나게 할 것이다.

“제가 기억나게 해주겠습니다.”

난 악인의 죽음에 어떤 의미도 두려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다.

“그래서 죽어가는 놈의 귓가에 말하겠습니다. 이 죽음이 너의 그 같잖은 원칙에 대한 마의님의 대답이라고요.”


16 절대회귀-216화 16

제216회 극악소마가 무섭습니까?

다음 날 새벽, 한 대의 마차가 은밀히 천마신교를 빠져나갔다.

검무극과 극악소마, 독왕이 탄 마차였다.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천마 검우진과 총군사 사마명이었다.

“저는 이만 총군사 자리를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검우진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사마명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이공자가 독왕을 대연무장에서 짖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공자가 비범하다는 것은 알지만, 독왕마저 무너뜨릴 줄은 몰랐습니다.”

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거기에 한 가지 더 충격이 있지요. 그렇다고 설마 교주님께서 이번 일을 허락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겠나? 약속했는데.”

검우진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임을 사마명은 안다. 그랬기에 애초에 딱 잘랐어야 했는데, 독왕이라는 여지를 줬다.

‘혹시 교주님은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셨던 것은 아닙니까?’

사마명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과 관련해서는 검우진의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진행되는 동안 둘째에게 정보를 완전히 공개하게.”

“네, 통천각에서 확실하게 지원하겠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도 대비하고.”

혹시 모를 상황 중 가장 심각한 상황은 두 가지다. 임무는 성공했지만 야율한을 처리한 것이 천마신교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 혹은 검무극과 두 마존이 그를 죽이는 데 실패해서 위험에 처하는 것.

두 경우 모두 여파는 심각할 것이다. 사도맹이 천마신교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진 못하겠지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무림맹과 손을 잡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검무극이나 마존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문제였고.

검우진이 어찌 그런 사실을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허락을 해준 것이다.

‘혹시 이번 일로 무림 정세가 불안해지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검우진이 언젠가 무림을 향해 검을 뽑아 들 것임을 사마명은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 시작을 이번 일로 잡으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마존들만 변한 것이 아니다. 천마도 뭐라 콕 찍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도 분명 변했다. 원래라면 떠나지 않았을 저 마차를 이곳에서 함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으니까.

‘이공자, 꼭 성공하고 돌아오시오.’

그리고 그 변화의 바람은 천마신교 내부뿐만 아니라 무림을 향해서도 불고 있었다.

* * *

마차를 모는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어젯밤 서대룡에게 가서 내일 함께 출발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는 엄살부터 부렸다.

“싫습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위험한 곳에 저를 데려가시려고요?”

“별일 아니야. 그냥 마차나 좀 몰아주면 돼. 나중에 잔심부름이나 좀 하고.”

“그러시니까 더 수상한데요? 위험한 냄새가 풀풀 풍겨요.”

“모험의 냄새겠지. 성장의 냄새고, 추억의 냄새기도 하고.”

“그게 다 합쳐지니까 위험한 냄새가 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전 안 갑니다! 소룡전 우승으로 평생 제 모험은 다 끝났습니다. 남은 생 그것만 자랑하고 살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너 아니면 안 돼.”

“본교에 이렇게 수많은 마인이 있는데요?”

“이번 일은 나와 본교와 무림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까.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적어도 널 유혹하려는 악녀는 없을 거야.”

“또 아픈 곳 찌르신다.”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일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그 사건 처리하러 간다.”

그러자 서대룡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싹 사라졌다.

“그럼 가야죠.”

그렇게 서대룡은 반드시 이번 사건의 배후에게 응징을 가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늘 아침 마차로 왔다.

“한데 왜 마차를 타시려고요? 둘이 경공으로 가시죠?”

“우리 둘만 가는 게 아니니까.”

“네?”

슬쩍 마차 안을 쳐다본 서대룡이 화들짝 놀랐다. 그가 나를 끌고 마차에서 멀어진 후 속삭이며 말했다.

“저 두 분이 왜 마차에 있어요?”

“그야 날 돕기 위해서 함께 가기 때문이지.”

“제가 몰아야 하는 마차가 극악소마님과 독왕님이 탄 마차라고는 안 하셨잖아요! 어서 다 말해요. 대체 적이 누군데요?”

“야율한.”

잠시 눈을 껌벅이던 서대룡이 물었다.

“제가 아는 야율한은 한 사람뿐인데… 아니죠? 에이, 뭔 농담을 이렇게 과격하게 하세요? 어서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그가 후다닥 돌아서서 달아나려는 순간 내가 말했다.

“그 아이에겐 네가 직접 전해줘라. 네 가족의 복수는 우리가 하고 왔다고.”

서대룡이 다시 돌아섰다. 그가 축 처진 어깨로 마부석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서대룡이 괜한 너스레를 떤 것을 나는 안다. 무섭기도 하겠지만 이런 일에서 빠질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아이의 복수를 해주고 싶어질 테고, 무엇보다 나와 함께 하는 여정이었으니까. 지난번 나와의 출교에서 그는 혈천도마의 제자가 되었고, 소룡전의 우승자가 되었다.

이번 일에 서대룡은 필요했다. 당장 이 마차만 해도 그렇다. 내가 마차를 몰았으면 극악소마와 독왕이 탄 마차 안은 정말이지 질식할 것 같은 침묵만 감돌았을 거다.

극악소마와 독왕은 처음 마차에 탈 때 인사한 이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안 친하긴 안 친한 두 사람이었다.

애초에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나는 일부러 두 사람을 친하게 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계기가 있으면 친해지는 거고, 아니면 돌아갈 때도 이렇게 썰렁하게 가게 되겠지.

“현재 놈들에 대한 정보는 통천각에서 모두 받았고, 추가 정보도 받을 예정입니다.”

두 사람에게 말은 안 했지만, 고월과 풍천교주가 이끄는 은월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 적극적인 정보를 얻고 있었다. 두 사람도 현장에서 합류해서 이번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현재 우리가 가는 곳은 신선채를 만든 황금돼지 지생이 있는 곳입니다. 계획은 그곳에 도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계획은 이공자 뜻에 따르겠습니다.”

극악소마의 정중한 대답에 독왕이 슬쩍 이쪽을 쳐다보았다.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극악소마가 있어서 참는 눈치였다.

―하나만 묻자. 극악소마는 왜 이렇게 널 좋아하는 거야?

―한데 말씀으로 안 하시고 왜 전음을 보내십니까?

―저 사람하고 친하지도 않은데, 그걸 어떻게 물어? 당신 약점이라도 잡혔어? 왜 이렇게 잘해줘?

―전음으로 말씀하시면 대답 안 할 겁니다. 남자답게 그냥 물으십시오!

독왕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극악소마는 독왕이 내게 전음을 보낸 것을 눈치채고 나를 쳐다보았다. 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었다. 이렇게 눈빛만 주고받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놀랍게도 그랬다.

독왕은 극악소마와 관련된 내용 말고 다른 것을 물었다.

“지금 없는 계획이 도착하면 생기나?”

“지금 없는 군사가 도착하면 있거든요.”

“군사? 사마군사?”

독왕은 고월과 풍천교주가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뇨, 저도 군사가 있습니다.”

“벌써 군사가 있다고?”

“이 험난한 무림을 살아가려면 군사가 있어야죠. 다들 바둑 못 두는 군사 한 명쯤은 있잖아요?”

독왕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라면 험한 말이 한마디 나올 법한 순간이었는데, 극악소마가 있어서 참는 눈치다. 이 두 사람이 함께 있으니 이렇게 좋은 점도 있다.

―소마님이 무섭습니까?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럼 안 무섭냐? 저 가면만 봐도 심장 떨린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독왕이 이렇게 극악소마를 두려워할 줄이야.

―지금 소마님은 독왕님 독주머니를 보면서 떨고 있을 겁니다.

―그럴 리가. 저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아니다.

극악소마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을 줄도 몰랐다.

―독왕님은요?

―난 죽는 게 무섭다. 너무 무서워서 천독림 밖에도 안 나온 사람 아니냐?

죽는 게 무서운 겁니까? 아니면 죽이는 게 무서운 겁니까?

묻고 싶은 말 대신 다른 것을 독왕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출교하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독왕의 시선이 달리는 마차 밖을 향했다.

“소감은 무슨. 나도 한때는 지겹도록 중원을 쏘다녔었다.”

“독왕님이요?”

“그럼 독왕 자리를 천독림에서 얻어냈겠느냐? 젊은 시절 독물을 구하러 전 중원을 다녔었지.”

그랬던 그가 왜 천독림에 틀어박혔을까?

하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언젠가 마음을 나눌 사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만독불침이란 것을 밝히는 그날 듣자.

그때였다.

다급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급히 멈췄다.

보통 사람들이었다면 앞으로 날아와서 처박혔겠지만, 마존은 마존이었다. 두 사람은 평온하게 자기 자리를 지켰다.

마부석의 서대룡이 다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길가 수풀에서 사슴이 튀어나왔습니다.”

“기왕 세운 것, 좀 쉬었다 가자. 말도 놀란 것 같은데.”

나는 두 마존들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서대룡이 두 마존에게 허리를 숙여 다시금 죄송함을 표했다.

그가 제일 무서워했던 극악소마가 하마터면 마차 앞자리로 날아와 부딪쳤을 수도 있었다. 그 충격으로 가면 귀퉁이라도 부서졌다면?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지 서대룡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긴장을 풀어주는 의미로 나는 정식으로 서대룡을 소개했다.

“도마 어르신의 수제자입니다. 현재 어르신의 독문무공을 전수받고 있지요.”

극악소마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놀라지 않았고, 독왕은 깜짝 놀랐다.

“도마의 제자라고?”

이 작고 왜소한 남자가 차기 혈천도마라는 사실이 의외였던 모양이다.

서대룡에게 힘을 더 실어주었다.

“제 오른팔이기도 하고요.”

독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심지어 네 오른팔이라고? 라는 눈빛에 나는 힘차게 말했다.

“저 친구가 있어서 많이 든든합니다.”

그러자 독왕의 시선이 다시 서대룡을 향했다. 당연히 서대룡은 부담 백배였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서대룡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전음.

―하지 마세요! 제발 마존들 눈에 절 띄게 하지 말라고요! 저 없는 사람 취급해 주세요!

서대룡이 고개를 들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정파 최고의 후기지수들이 벌이는 소룡전에서 우승도 했습니다.”

서대룡이 그만하라고 눈으로 욕하는 것을 보며 마무리까지 확실히 했다.

“두 분과는 먼 훗날 마존회합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서대룡은 해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다 놀렸으니 이제 가야지.

“자, 출발하시죠.”

우린 다시 마차에 올라탔다.

좀 전까지 신나게 마차를 몰던 서대룡은 조심조심 초보 마부처럼 마차를 몰았다. 좀 전처럼 또 급하게 멈추게 될까 봐 겁을 먹은 것이다.

난 마부석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천천히 달리면 나와 자리 바꿔야 해. 여기 들어와 있을래?”

다음 순간, 마차는 맹렬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마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마을에 들르지 않고 야영을 했다. 준비해온 술과 요리가 떨어지자 나는 사냥을 하고 직접 요리를 해서 마존들을 대접했다.

내 요리를 처음 맛본 독왕은 별걸 다 잘한다며 감탄했다.

그렇게 우린 계속 마차를 달려서 황금돼지 지생이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곳 안가에서 고월과 풍천교주가 우릴 맞았다.

독왕은 고월과 함께 풍천교주까지 있는 것을 보고 내게 물었다.

―풍천교주는 왜 여기 있나?

―제 군사와 각별한 사이입니다.

―풍천교주가 교주 자리를 떠났다더니, 그게 너 때문이었구나.

―아니 근데 자꾸 전음을 보내십니까? 당당하게 말씀하십시오. 풍천교주, 여기서 뭐 하시는 거요? 천하의 독왕께서 뭐가 겁나서 이러십니까?

―겁나서 이러냐? 어색해서 그래.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짖는 건 괜찮고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한 것은 괜찮고요.

―그건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렇고. 난 이 사람들이 다 불편하다.

그래도 독왕과의 관계가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저런 감정을 내게 솔직히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두 마존을 각자 방에서 여장을 풀게 한 후 나는 고월과 따로 자리를 가졌다.

“대단하십니다. 독왕의 마음까지 움직이시다니요.”

“저 사람들이 움직인 것은 나에 대한 충성심이라기보다는 나에 대한 호의나 호기심에 가깝네.”

“저는 그 호의가 충성심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나는 마존들과의 관계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그 친해진 관계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신선함과 흥미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반드시 권태와 실망이 파고들기 마련이니까. 마존들과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이번 일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공자님이나 마존분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수하 사인방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죽음에 본교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고, 또 그로 인해 야율한을 긴장하게 하지 않게 하는 점이겠지요.”

이미 고월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 듯 보였다.

“자네 계획대로 하겠네.”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철저히 고월의 말에 따를 생각이다. 좋은 군사를 키우는 법? 간단하다. 그의 계획대로 하고, 그 계획을 성공시키는 거다. 군사의 자신감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다음 계획은 더욱 뛰어난 것이 나올 테니까. 그의 계획에서 틀어지는 부분만 내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될 것이다.

“우리의 첫 목표인 지생이 새 신선채를 만들려 하는 중입니다. 그 일을 맡길 자를 최근에 구한 상태지요.”

이래서 아랫놈들은 백날 처단해봤자 소용없는 거다. 신선채로 돈맛을 본 지생을 없애야만 신선채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계획이 섰다는 표정으로 고월이 말했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결국 자신의 탐욕이 될 겁니다.”

나는 그의 계획을 짐작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선 좋아하는 놈에게 신선 중에는 악선(惡仙)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겠군.”


21 절대회귀-217화 21

제217회 내가 나서도 되겠소?

“양 장주, 내가 말했지? 사람이 어떻게 이득만 보고 사냐고. 때론 손해도 보고 사는 거라고. 한데 뭐? 그깟 돈 몇 푼 손해 봤다고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해? 무림맹이 당신 인생의 해결사야? 걸핏하면 무림맹에 일러바친대. 무림맹도 바빠. 그것들도 지네들 해 먹기 바쁘다고. 그러니 두 번 다시 이러지 마. 알았어?”

하지만 앞에 쓰러져 있던 양 장주라 불린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상대가 죽은 줄 알면서도 잔소리를 한 사람은 황금돼지 지생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생겼다. 황금돼지라는 별칭과는 전혀 다르게 삐쩍 마른 데다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기에 수하들은 그의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자의 집을 뒤져서 돈 될만한 것들 다 정리해. 후환이 될만한 자들은 싹 다 없애버리고.”

“네!”

명령을 받은 수하가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낭인들의 약탈을 받은 것처럼 처리하고 불을 질러버릴 것이다.

당분간은 이렇게라도 주위를 쥐어짜야 했다. 이유는 그 빌어먹을 신선채 때문이었다.

지생이 다른 수하를 닦달했다.

“그놈들은 찾았어?”

“아직 못 찾았습니다. 추가로 사람들을 풀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신선채를 맡았던 놈들이 재산을 모두 찾아서 튀는 바람에 자금 사정에 큰 지장이 생겼다.

조사한 바로는 신선채를 맡았던 일선과 이선이 직접 전장에 와서 돈을 찾아갔다고 했다. 놈들은 심지어 다른 재산까지 모두 처분하고 사라졌다. 그놈들만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멍청한 놈들!’

계속 자기 밑에서 일했으면 훨씬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놈은 몰라도 일선은 똑똑하고 신중한 자라서 이런 소탐대실(小貪大失)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다. 자기들끼리 싸웠거나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딴 놈들에게 당한 것일 수도 있다.

돈 냄새는 피 냄새와 같아서 승냥이 떼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니까. 암튼 이유가 뭐든 붙잡기만 하면 산채로 찢어 죽일 작정이다. 딴 놈들에게 당했어도 한 번 더 죽일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들을 찾아내! 못 찾아내면 너희가 죽는다.”

“네! 알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에 수하는 사색이 되어 뛰어나갔다.

그때 다른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서장원에서 대호(大虎)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철검사호(鐵劍四虎)

지생은 사파에서 제법 악명을 떨치던 이들을 끌어들였다. 신선채를 이들에게 맡기려는 것이다.

자신의 직속 수하를 시켜서 일을 진행하면 좋겠지만, 신선채의 성격상 그럴 수 없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사도맹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어야 했다. 특히 무림맹에서 이 일을 문제 삼으면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한다.

지생이 건물에서 나와 마차로 걸어갔다. 마부석에 동글동글한 얼굴을 한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생이 나오자 마부가 정중히 그에게 인사했다.

“서호관으로 가자.”

마차가 출발했고 수하들이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랐다.

지생이 마부석의 마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철검사호가 적당한지 어르신께서 봐주십시오.

더없이 공손하고 정중한 어조였다.

바로 이 마부 행세를 하는 사람이 진짜 황금돼지 지생이었다.

예전에 이선이 검무극에게 지생의 마부에게서 문신을 봤다고 말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마부였다.

―이제 자네도 사람을 잘 보지 않나?

―어르신의 안목을 백분지 일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겸손이 과하면 그건 아첨이네.

―죄송합니다, 어르신.

―자네 눈을 믿고 판단하게.

남자는 벌써 십여 년 이상을 가짜 지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지생처럼 생각하고, 지생처럼 살았다. 가끔은 자신이 진짜 지생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세월 동안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그럼 이제 몸을 드러내고 살아도 되겠구나, 란 생각을 할 법도 한데 진짜 지생은 철저히 자신을 감추고 살았다.

남자는 지생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것만 해도 지생은 평생 다 쓰지 못할 엄청난 부를 쌓았다. 자신이라면 절대 저 허름한 옷을 입고 마부 노릇이나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달 자금 사정은 어떤가?

―아직 상부에 보내야 할 돈이 이만 냥이 모자랍니다.

상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번 달은 상납금이 못 올라갑니다, 라는 보고를 할 수 없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언제나 이게 상부의 입장이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든 상부와 어르신께 지장이 가지 않도록 처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진짜 지생은 한 번도 이번 달은 내 돈으로 해결하지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부분을 보면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돈을 밝혀야 하나?

하긴 어떤 의미에선 이조차도 대단한 일이다. 그는 돈에 있어서 확고한 인생관을 지닌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돈 벌고 모으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돈이 전부인 사람이다.

그래서 예전에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독립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진짜 지생의 머리라면 어딜 가더라도 엄청난 부를 쌓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은 번 돈의 삼분지 이 이상을 야율한에게 상납한다.

그때 진짜 지생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결국, 나 같은 자에게 다 뜯겨 버리고 말 거네.”

강력한 뒷배를 가진 누군가에게 결국 빼앗긴다는 뜻이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가 되는 법이라네.”

자신이 아는 가장 욕심 많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가짜 지생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욕심이 과해서 화가 된다면, 그는 화(禍) 그 자체일 것이다.

마차가 서호관에 도착했다.

가짜 지생과 수하들이 안으로 먼저 들어가고, 진짜 지생은 마차에서 내렸다. 사실, 이 순간이 그가 돈 버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정체를 숨긴 채 세상을 훔쳐보는 것.

아무도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묘한 쾌감. 마치 신이 되어 인간들을 장기판의 기물처럼 조종할 때의 기쁨.

진짜 지생은 뒷짐을 진 채 마당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 * *

객청에서 지생을 기다리고 있던 자는 철검사호 중 첫째인 대호(大虎)였다.

그들 사이엔 수하들이 쳐놓은 발이 내려와 있었는데, 지생 쪽에서는 저쪽이 보이지만 반대쪽에서는 지생을 볼 수 없게 만든 특수한 발이었다.

“귀한 분을 뵙습니다.”

가짜 지생이 진짜 지생이 되어야 하는 순간.

이 가짜 역시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의 사인방 중 지생, 이라는 거창한 인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구든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렸고, 그는 권력이 주는 쾌락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랐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어르신께서 불러주셨는데 만 리 길도 단숨에 달려와야지요.”

지생은 앞에 앉은 그를 보며 내심 마음에 들었다.

‘딱 좋아.’

애초에 여러 후보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자였다. 지생의 눈에는 그가 호랑이는커녕 들개로 보였다. 그래서 딱 좋았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놈은 신선채 같은 일을 해내지 못한다. 사람의 영혼을 파괴해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여 호랑이가 할 일이 아니라 들개들이 할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철검사호는 여러모로 적격자였다. 지난 삶이 그것을 말해줬다. 그들은 정말 입에 담기도 힘든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자들이었으니까.

“자네에게 솔직히 말하지. 이전에 이 일을 맡았던 자들이 딴마음을 품어서 내가 직접 처리했네.”

놈들이 돈을 들고 튄 사실은 절대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다.

“배신은 곧 죽음이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된 후엔 본맹을 입에 담아도 죽음이네.”

“명심하겠습니다.”

“그 두 가지만 지킨다면 자네들은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네.”

“소처럼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대호가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결코 감출 수 없는 천박함이 드러났다.

“그리고 조만간에 자네 형제들도 한 번 봤으면 하는데.”

“함께 와 있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연락주십시오.”

“조만간 기별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중히 인사하고 대호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서호관을 떠나고 건물에서 가짜 지생이 나와서 마차에 올라탔다.

―어떻습니까?

―관상을 보니 욕심과 옹졸함이 가득하지만 적어도 쉽게 배신할 상은 아니니 이번 일에 적합해 보이네.

―그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차도 그곳을 떠났다.

* * *

대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날 때부터 악인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자신이지만, 이젠 그 악행도 지겨워지던 참이었다. 크게 한 건 하고 은퇴해야지 하던 참에, 지생이 자신들을 뽑은 것이다.

“이놈들아! 됐다!”

대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바로 그 순간, 그는 흠칫 놀랐다.

이호, 삼호, 사호가 나란히 늘어선 의자에 앉아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못 보던 청년이 함께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우들이 부른 청년이라 생각했다.

‘외지인 불러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하지만 곧바로 드는 한 가지 생각. 사람을 불러놓고 잠을 자고 있다고? 아니면 나를 놀리려는 건가? 평생 안 하던 짓을 한다고?

이런 생각들이 찰나에 스쳐 지나갔고.

대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벼락처럼 빠르게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바로 그때였다.

대호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언제 왔는지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가면 속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와 눈빛이 마주친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온갖 악당을 많이 만나봤지만 이렇게 무서운 눈빛은 처음이었다.

극악소마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가볍게 대호의 내공을 제압했다. 무림에서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은 대호였지만, 상대가 자신의 단전 혈도에 손을 대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극악소마 뒤로 두 남자가 더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독왕과 서대룡이었다.

“나는 참견하지 않고 구경만 할 거야.”

독왕이 대호를 지나쳐 들어가 책상에 걸터앉았고, 서대룡은 문을 닫았다.

검무극이 대호를 불렀다.

“이리 가까이 와.”

대호가 천천히 검무극에게 걸어갔다.

‘정신차려야 산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가 검무극에게 가까이 갔을 때, 비로소 나머지 이호와 삼호, 사호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이미 그들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다 죽었다!’

대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에 상처도 없었는데, 그들은 검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당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이자들은 누구기에?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요?”

“철검사호. 넌 첫째인 대호고.”

정확히 그들을 말하자 대호가 재빨리 말했다.

“우린 중요한 일을 맡았소. 당신은 큰 실수를 했소.”

“사도맹으로부터 신선채 일 맡은 것?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검무극의 말에 대호는 깜짝 놀랐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요?”

그때 극악소마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대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반 각만 내게 시간을 주십시오. 말 잘 듣는 개로 만들어 드리지요.”

대호는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서며 온몸이 떨렸다.

그때 독왕이 정중히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내가 좀 나서도 되겠소?”

극악소마가 독왕을 쳐다보았다. 독왕은 극악소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극악소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시지요.”

본교를 나선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이 교감을 나누는 순간이었다.

독왕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약병을 꺼내며 검무극에게 말했다.

“저런 인간을 뭘 믿고 일을 진행하려고. 대신 고독(蠱毒)은 확실히 믿을 수 있지.”

약병에는 흉물스러운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뇌에 자리를 잡으면 제 팔을 자르라고 해도 자를 거다.”

그 말에 대호는 사색이 되었다. 저 징그러운 것이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구역질이 났다.

검무극이 웃으며 독왕에게 물었다.

“안 나서신다더니요?”

“막상 저놈 보니까 시험해 보고 싶어서. 사람에게 시험해 본 지 꽤 됐거든.”

“아쉽지만 고독을 시험해 볼 시간은 없습니다.”

“그럼 이거라도 먹여.”

독왕이 가방에서 다른 독병을 꺼냈다.

“매일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온몸의 장기가 녹아내리면서 죽게 되는 독약이다. 배신하고 싶으면 한번 해보라고 해.”

“나중에 독을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누구 독인데 그런 걱정을 하나?”

“그럼 이게 딱 좋습니다!”

다음 순간 대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네 사람의 시선이 대호를 향했다. 대호는 온몸이 덜덜 떨렸다. 악인도, 그렇다고 협객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괴이한 조합이었다.

지금껏 온갖 악인들을 다 경험했지만 이렇게 원초적인 두려움을 자아내게 하는 자들은 처음이었다.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절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상대들.

검무극이 그를 향해 다가가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대형,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대호는 알 수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형제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세 아우를 이미 다 죽여버린 것도 그런 의도였던 것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독왕의 독약을 내밀었다.

“대형, 이것부터 마시고 해야 할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안 마셔도 됩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시키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부모님을 걸고, 아니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안 지키면 천벌을 받아 죽을 겁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의 입을 벌려서 약을 부었다.

“안 믿어요. 자, 쭈욱!”


11 절대회귀-218화 11

제218회 사람을 불러놓고 싸구려 술이라니.

화끈한 액체가 대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맛, 그것을 삼킨 순간 대호는 느꼈다. 절대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었다고.

독왕이 다가와서 검은 알약 하나를 건넸다.

“꼭꼭 씹어 삼켜. 아니면 내장 다 녹는다.”

놀란 대호가 서둘러 알약을 먹었다. 해약이 작용하면서 속에서 느껴지는 화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완전히 해독시켜 주기 전까진 이 해약을 하루에 한 번씩 꼭 먹어야 한다. 한 시진이 늦을 때마다 내장이 하나씩 녹을 거야. 마지막에 녹는 것이 심장이다.”

대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실낱같은 희망도 있었다. 뭔가 이용 가치가 있으니 살려두는 것이리라.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우릴 데리고 지생에게 가야지. 저기 저 사람이 이호, 내가 삼호, 저기 저분이 사호다.”

대호의 말에 검무극이 처음 가리킨 사람이 서대룡이었고, 마지막 가리킨 사람은 독왕이었다.

독왕이 놀란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왜?”

“세 명이 필요한데, 보시다시피 가면을 쓰고 계셔서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일부러 대호 앞에서 소마라는 호칭은 하지 않았다.

독왕과 극악소마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사정이 이러니 부탁하오.”

극악소마가 부탁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독왕에게 정중히 말했다.

앞서 흔쾌히 극악소마가 물러나 준 것처럼 독왕도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지요. 내가 하겠소.”

그때 대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들 너무 어려 보여서,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번 일의 핵심이다.”

대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독까지 먹었으니 한 가지만 물읍시다. 당신들 대체 누구요?”

“누구긴요. 우리 대형께서 아끼는 동생들이지요.”

검무극이 그의 수혈을 누르자 대호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를 재운 후 검무극이 두 마존들에게 말했다.

“고 군사가 일을 진행 중이니, 며칠 내로 지생에게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반짝반짝 눈부신 미끼를 던졌거든요.”

이번 일은 철저히 고월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검무극은 고월에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계획을 세우라고 전했다.

고월의 적은 사도맹이나 지생이 아니다. 군사로서 제대로 일을 처리하려는, 그래서 검무극에게 잘 보이려는 부담감이었다.

서대룡이 죽은 철검사호의 시체를 양 옆구리에 꼈다.

“시체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도와줄게.”

검무극이 남은 시체를 옆구리에 끼고 밖으로 따라나섰다.

서대룡과 함께 뒷마당에 깊이 구덩이를 파고 세 놈을 묻었다. 이들이 저지른 악행을 생각하면 야산에 던져서 짐승들 먹이가 되게 해야 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이들의 행세를 해야 했으니 그럴 수는 없었다.

“역시 각주님과 나오니 시체가 쏟아지는군요.”

“자네 때문일지도 몰라.”

“저 때문이라고요?”

“날 처음 만났을 때, 본교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자네 말. 그것 때문에 각오를 다졌거든. 꼭 변하게 만들겠다고.”

서대룡이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다가 나직이 말했다.

“저는 고작 하나를 드렸는데 각주님은 열 개로 갚아주시는군요.”

그만큼 고맙고 힘이 되는 말이란 뜻이었다.

이렇게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십이 아니라 백이라도 줄 수 있지. 이것이 검무극의 마음이었고.

서대룡이 구덩이 속 시체를 보며 말했다.

“미안. 나 때문에 너희가 죽었다는구나.”

서대룡이 흙을 덮은 후 바닥을 발로 다졌다. 표나지 않게 처리한 후에 서대룡이 내게 말했다.

“안 들어가십니까?”

“있다 들어가자. 두 사람 친해질 시간 좀 주게.”

서대룡이 건물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본교에서 제일 무서운 두 분이 계시네요.”

서대룡은 내심 궁금했다. 검무극에게는 어떤 두 사람으로 표현될까?

* * *

극악소마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고, 독왕은 괜히 자신의 가방 속 독을 정리했다.

그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독왕께선…….”

“소마께선…….”

“아, 먼저 말씀하시오.”

“아니오, 먼저 말씀하시오.”

그러다 침묵으로 이어졌다가 독왕이 먼저 말했다.

“그대와 이런 곳에 와 있게 될 줄은 몰랐소.”

“나 역시 그렇소.”

“그거 아시오? 이공자가 마존들을 이야기할 때, 소마 그대를 언급할 때 가장 눈이 반짝이는 거. 신나 한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소.”

기분 좋은 말을 들어서였을까? 극악소마의 눈구멍 속 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그렇소. 나도 이공자와 함께 있으면 신이 나는 것 같소.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소.”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검무극의 회귀 전 인생에서 자신이 검무극을 친구로 삼고 싶어 했다는 것을. 검무극의 검에 죽었고 얼굴을 보여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인연은 회귀 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그는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반면 독왕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난 이공자를 보면 불안하오. 마치, 해약이 없는 독 같아서.”

한 번 중독되면 대책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런 관계에 빠지기 싫다는 의미가 깃든 말이기도 했다.

“우린 독을 만들 때 해약이 없는 독은 실패작으로 간주해서 말이오.”

극악소마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저 멀리 마당에서 해약 없는 독이 서대룡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극악소마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상관없소.”

* * *

며칠 후, 지생은 수하로부터 한 가지 보고를 받았다.

“철검사호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슨 소문?”

“이곳에 오기 한 달 전쯤에 놈들이 표행을 강탈해 최상급의 야명주를 세 개나 얻었다고 합니다.”

최상급 야명주란 말에 지생은 깜짝 놀랐다. 비싸기도 엄청나게 비쌀뿐더러, 워낙 희귀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강호의 거부들이 나오는 족족 사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세 개나 얻었다고?

“그 과정에서 철검사호들이 여럿 죽었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사전에 놈들을 조사했을 때는 그런 일 없었잖아?”

신선채를 맡길 후보가 여럿 있었다. 그들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자들이 철검사호였다.

“아마 최근에 있었던 일이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대호는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이 형제들 얼굴 한번 보자고 하니까 언제든지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고작 넷 중에 여럿이 죽었다면 대호 빼고 다 죽었다는 뜻인데.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지. 어차피 한 번 만나야 했으니. 가서 철검사호에게 만나자고 전해.”

반 시진 후, 지난번 만났던 장원에서 지생은 철검사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지생 앞에는 그쪽에서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발이 내려와 있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여긴 제 아우들입니다. 자, 인사드려라.”

대호의 말에 세 사람이 죽립을 벗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지생은 흠칫 놀랐다.

대호의 왼쪽에 있던 청년은 잘생긴 청년이었다. 눈빛이 맑고 깊었기에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온 철검사호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른 쪽 남자는 몸집이 왜소했는데, 그 역시 철검사호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지막 남자는 철검사호는커녕 너무 어려 보여서 이제 막 강호에 나온 것처럼 보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젊군.”

“젊으니 더 열정적으로 일하지 않겠습니까?”

검무극과 독왕, 서대룡은 그 흔한 변장조차 하지 않았다. 가짜 수염이라도 달고 나왔다면 의심을 피했겠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고월의 작전이었다.

지생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철검사호가 되었나?”

검무극이 대호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꽤 되었습니다.”

말을 흐리며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 모습에 지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구나.’

표행을 털다가 형제들이 죽고 새로 사람들을 구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호는 감추는 것이 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최근에 아우들이 다치거나 떠나서 새로 아우들을 받았습니다. 전부 믿을만한 자들이니 신선채 일은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생이 사나운 속마음을 감추고 좋은 어조로 말했다.

“젊고 늠름한 호랑이들을 보니 믿음이 가는군. 부디 대의를 위해 헌신해주게. 자네들에게는 부귀영화로 보답하겠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지생과 철검사호와의 첫 만남이 끝났다.

* * *

사흘 후. 달려가는 마차에서 지생은 진짜 지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철검사호 중 대호란 자에게 최상품 야명주가 있습니다.

진짜 지생이 마차를 멈춰 세웠다.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라도 마차를 몰면서 전음을 주고받던 그였는데, 지금은 아예 마차를 세웠다.

―정말이냐?

―네.

진짜 지생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최상품 야명주는 지생이 가장 좋아하는 보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으고 있었다.

보물 중에서도 가격이 오르면 오르지 절대 떨어지지 않는 두 보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야명주와 피독주였다.

지생은 돈이 모이는 족족 야명주를 샀다. 싸구려 야명주는 사지 않았다. 최상품 야명주만 구했다.

그는 전장에 돈을 넣지 않았다. 야율한이나 사도맹이 어느 날 자신의 전장을 뒤져서 그간 모았던 돈을 모두 가져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힘을 지녔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전장에는 일부의 돈만 넣어두었고, 나머지는 모두 야명주로 바꿨다. 금도 아니고 그림이나 예술품이 아닌 야명주인 이유는 부피가 작고 가벼워서 보관이 쉽고 손쉽게 옮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군가 수작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고?

의심스러운 물음에 가짜 지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래서 정보상인을 통해 재차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놈들이 표물을 덮쳤고, 그 과정에서 철검사호 셋이 죽었답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소문을 퍼뜨린 것도, 이 지역의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것도, 모두 고월이라는 것을.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렇게 큰돈을 벌었는데도 이번 일을 맡았다는 점입니다.

―언제 욕심이란 놈이 만족하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그건 지생이 진짜 지생을 보면서 매번 느끼는 바였다.

―어쩌면 놈은 어르신의 그늘에 숨어들려고 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개나 가지고 있다고?

―세 개라고 합니다.

한 개도 아닌 세 개. 일말의 고민도 필요 없었다.

―최대한 빨리 없애버리고 야명주 회수하게. 신선채를 맡길 다른 자들을 구하고.

―중원에는 철검사호와 같은 쓰레기들이 널렸습니다. 곧 구하겠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만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그였다.

―사슴 고기를 얻으려다 호랑이 가죽을 얻게 되었구나!

지생이 껄껄 웃으며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를 이렇게 호탕하게 웃게 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 * *

철검사호가 지생의 초대를 받았다.

도착했을 때 방에는 요리와 술이 차려져 있었다. 안주는 부실했고 술은 입에 대기도 힘들 정도의 싸구려였다.

이 술상이 뜻하는 바를 짐작한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한 식구가 되었는데 가로막은 발은 치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르신의 존안을 뵙고 싶습니다.”

발 너머 지생이 웃었다.

“역시 젊으니까 패기가 있군. 좋네.”

지생과 철검사호 사이에 있던 발이 치워졌다. 지생은 어차피 모두 죽일 작정이었기에 편하게 얼굴을 보인 것이다.

검무극이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같이 한잔하시죠!”

하지만 지생은 술잔을 들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감정을 드러냈고 당연히 분위기도 식었다.

“대호, 자네와 관련해서 소문이 하나 있던데.”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큰 건수를 잡았다면서?”

“무슨 말씀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같은 식구끼리인데. 구경이나 하세.”

“정말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호는 딱 잡아뗐다.

지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는 게 당연하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해하네.”

그 말이 떨어지자 그곳으로 네 명의 무인이 들어섰다. 살기 가득한 그들은 철검사호보다 뛰어난 무공실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지생이 가장 아끼는 수족들이었다. 주로 은밀히 사람을 죽여야 할 때 이용했다.

“어차피 새로 들어온 세 놈은 모르니, 저들부터 먼저 죽여라.”

그러자 검무극이 대호에게 말했다.

“불쌍한 우리 대형은 또 아우들을 다 잃겠구려.”

검무극의 말에 대호는 한숨을 내쉬며 지생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랬다.

‘너도 이제 큰일 났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지생의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죽여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네 사내들이 스르륵 허물어지듯 일제히 쓰러졌다.

지생은 너무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네 수하가 모두 죽은 것이다. 내린 명령은 ‘죽어라’가 아니라 ‘죽여라’였는데, 대체 너희가 왜?

“독!”

독왕은 어느새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독문병기인 무간선이었다.

넷이 동시에 독살을 당했음에도 한 공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다.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이 한 수는 오직 독왕만이 펼칠 수 있는 독공이었다. 독을 쓸 때의 그에게서 귀여움이나 풋풋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차갑고 비정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지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그가 소리를 질러 밖에 있던 진짜 지생과 다른 수하들에게 알리려던 그 순간. 검무극이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조용히 하라는 시늉만 했는데 어느새 지생의 아혈은 제압당한 상태였다.

“사람을 불러놓고 이런 싸구려 술이라니. 차라리 이게 나을 거야.”

자신을 향해 내민 작은 독병을 쳐다보며 지생은 느꼈다. 사도맹을 등에 업고 신나게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음을.

찾아와도 너무 큰 위기가 찾아왔다.


24 절대회귀-219화 24

제219회 이런 꼴 안 당하려고.

지생이 억지로 독을 삼키는 모습을 보며 대호는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자기와 같은 신세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것이다.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의 수하를 이렇게 다룬다고?’

정말이지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또 궁금해진다. 대체 이들이 누구길래?

검무극이 지생에게 말했다.

“매일 해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녹아서 죽게 될 거다. 아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겪겠지. 그러니까 소리치고 싶으면 소리 질러봐.”

검무극이 지생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조개처럼 다물어진 지생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지생은 너무나 놀라고 당황해서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 역시 대호와 같은 생각뿐이었다.

‘대체 이자들은 누구기에 나를?’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앗! 혹시 충성심 시험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의 기밀을 불어라, 고문하고 자신의 충성심을 시험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시선이 싸늘하게 죽어있는 네 명의 수하들을 향했다.

‘저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시험한다고?’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때 검무극이 다가와서 생각지도 못한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봐.”

지생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최상품 야명주 세 개가 들어 있었다. 이 야명주는 과거 검무극이 황금장주와 그의 딸과 손자를 구하고 받았던 그 야명주였다.

지생은 이게 뭔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가져다줘. 진짜 지생에게. 네 마부가 진짜 지생인 것 알고 있다.”

가짜 지생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릴 죽이고 이걸 뺏으려고 한 거잖아?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그걸 이렇게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그냥 이걸 가져다주든지, 아니면 이걸 주면서 지금 있었던 일을 다 밝히든지. 선택은 네가 해.”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왜 자신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일까?

“이건 알고 선택해. 네가 먹은 독은 그 어디서도 해약을 구할 수 없다. 해약은 오직 저분만이 가지고 계신다.”

독왕은 원래 자리에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그는 이쪽 일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 또 한 가지, 과연 사실을 밝히면 네 주인이 어떻게 나올지를 생각해 봐. 과연 널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우릴 찾아와서 협상을 할까? 이 세 개의 야명주를 되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것들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할 텐데.”

지생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가 제일 잘 안다. 진짜 지생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충성을 바치고 죽거나, 야명주를 주고 살거나. 그를 죽이라는 게 아니야. 그냥 야명주만 주라는 거야.”

“어르신을 해치려는 것 아니오?”

“그럼 네게 더 좋은 일 아닐까? 아마 상부에서는 널 지생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앉힐 테니까.”

“!”

이런 상황을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온 기회이기 때문일까? 그 말이 더욱 솔깃하게 들렸다.

“고민은 돌아가면서 해.”

검무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날 살려준다고? 야명주를 어르신에게 준다고? 대체 왜?’

당황한 지금은 그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생이 내쫓기듯 건물로 나와서 마당에 있는 마차로 걸어갔다. 진짜 지생은 언제나처럼 마부석에 앉아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짜 지생이 마차에 올라탔다.

“가자!”

마차가 출발했다. 진짜 지생은 평소 따라다니던 직속 수하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남아서 철검사호의 시체를 처리한다고 여겼다.

진짜 지생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어떻게 되었나?

-잘 해결되었습니다.

지생이 마부석으로 통한 작은 창으로 상자를 주었다.

지생은 안다. 진짜 지생은 결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재산을 손해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백 년을 그의 밑에서 일해도 그건 바뀌지 않는 진실이리라.

마부석의 지생이 야명주가 든 상자를 열어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두 눈이 야명주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짜 지생은 고민하고 있었다.

‘대체 저들의 의도가 뭘까?’

야명주를 이렇게 줘버린다고? 대체 왜?

하지만 잘 해결되었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뒤늦게 진실을 밝혀봤자, 아주 잠깐이라도 배신할 마음을 먹었다는 이유로 자신은 죽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두 지생의 상반된 마음을 싣고 마차는 그들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지생이 마부에서 진짜 지생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있다.

야율한을 만났을 때가 그렇고 바로 지금이 그렇다.

마구간 지하에 마련된 비밀 장소.

십여 평 남짓한 공간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었다.

방 가운데 작은 의자가 있었고, 사방 장식장에 수십여 개에 달하는 최고급 야명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가 평생 모은 재산이었다.

지생이 그 수집품에 세 개의 야명주를 더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모았으면 이제 무덤덤할 만도 했는데, 그는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하나의 야명주가 더해질 때마다 그는 살아있다는 희열을 느꼈다. 그 어떤 일도 자신에게 이만큼의 기쁨을 주지 않았다. 특히 등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명주를 볼 때면, 그는 미친놈처럼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 기쁨을 위해 그는 무자비한 삶을 살았다. 야율한에게 돈을 바쳐야 했기에 더 지독하고 잔인해져야만 했다. 양심의 가책?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 같다. 누가 가책을 말하면 이 생각부터 들었다. 누가 그렇게 병신처럼 살라고 했나? 억울하면 너도 이렇게 살든지.

오늘도 황홀한 기쁨에 빠져들고 있던 그때 지생은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놀란 그가 벼락처럼 빠르게 돌아섰을 때,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가짜 지생이었다.

가짜 지생은 이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왜 야명주를 진짜 지생에게 준 것인지. 그 야명주를 이곳에 가져오는 순간을 노린 것이다. 이 비밀창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대체 야명주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진짜 지생은 지생대로 너무 놀랐다.

낡고 허름한 마구간 아래 이 비밀 공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세상 누가 이런 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짐작이나 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에 들어오려면 마구간 곳곳에 은밀히 설치된 비밀장치를 연속해서 올바르게 작동해야만 문이 열렸다.

물론 지생은 들어오기 전에 몇 번이고 주위를 살피고 또 살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저 가짜 지생의 실력으로 그렇게 가깝게 접근할 수 없었을 텐데. 밤눈이 짐승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본다고 해도 뭘 하는지 알 수 없었을 텐데.

‘젠장! 빌어먹을!’

너무 오랜 세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게 방심했다는 자책감이 휘몰아쳤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배신!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오랫동안 준비했다면 어쩌면 이 비밀스러운 곳에 침입할 수도 있었겠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느냐, 왜 들어왔느냐는 질문 대신.

쉭!

지생의 손에서 기습적으로 비수가 날았다. 그는 비도술의 고수였다. 검이나 도를 차지 않아도 되었기에 마부 행세가 더 쉬웠던 그였다.

가짜 지생의 목을 노리고 날아간 비수가 허공에 멈췄다.

누군가 그의 뒤에서 손을 내밀어 날아든 비수를 붙잡은 것이다.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가짜 지생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십수 년을 그를 위해서 충성을 다 바쳤는데. 한마디 질문조차 없이 죽이려 하다니. 하다못해 왜 나를 배신했냐는 질문은 하고 죽여야지.

가짜 지생의 뒤에서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 서대룡과 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쳐죽일 놈들이!”

대호를 보자 지생은 등장한 이들이 철검사호라고 착각했다. 이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짜 지생과 철검사호가 짜고 자신의 재산을 훔치러 왔다고.

쉭쉭쉭쉭쉭쉭!

다시 그의 손에서 비수들이 날았다.

하지만 백발백중을 자랑하던 그의 비수는 전부 검무극의 손에 잡혔다.

지생은 경악했다. 철검사호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는데.

검무극은 그가 다음 비수를 날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명왕보로 파고들면서 지생의 마혈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번쩍하는 순간 몸이 굳었고, 지생은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검무극을 보며 공포에 휩싸였다.

“철검사호가 아니구나!”

“당연히 아니지. 철검사호 따위가 당신을 어떻게 상대하나?”

검무극이 그를 지나쳐서 뒤쪽 장식장을 구경했다.

“많이도 모았구나.”

“너 누구냐? 누구냐고!”

검무극이 대답하지 않자 분노의 불똥이 가짜 지생에게 튀었다.

“이 병신 같은 놈! 머저리 같은 놈!”

가짜 지생도 맞받아 소리쳤다.

“십오 년을 널 위해서 개처럼 충성했다! 한데 이유도 묻지 않고 비수를 날려? 먼저 물었어야지. 너 협박받고 끌려왔냐고, 이…… 이 개 같은 놈아!”

평소 그렇게 좋았던 관계는 한순간에 박살 났다. 어르신으로서 품위와 여유도 사라졌다.

“넌 이곳에 있으면 안 되니까!”

“왜 안 되는데? 뺏고 속이고 죽여서 모아온 더러운 재산인데. 내가 이깟 곳에 왜 못 오냐고!”

“그 짓을 내가 했냐? 다 네가 저질렀지.”

“그걸 말이라고!”

두 사람이 목에 핏대를 높였다.

“이 한심한 놈아. 저들이 너를 살려줄 것 같으냐?”

“나는 당신 자리를 대신하게 될 거야.”

“본맹이 그렇게 어수룩할 줄 알고? 저들이 널 살려둘 리도 없지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본맹에서 너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내가 죽은 마당에 왜 굳이 찝찝하게 널 남겨서 일을 계속하게 하겠느냐? 싹 정리하고 새롭게 판을 깔면 되는데. 우리가 신선채를 새로 만들 듯이.”

가짜 지생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애써 모른 척 묻어두었던 두려움을 끄집어낸 것이다.

“결국 잡아먹히고 마는구나. 이런 꼴 안 당하려고 그렇게 조심했는데.”

지생의 탄식에 이제 검무극이 나섰다.

“정말 불안했다면 조심성을 늘릴 게 아니라 욕심을 줄였어야지.”

검무극이 연속해서 지풍을 날렸다. 이제 가짜 지생과 대호까지 모두 마혈과 아혈을 제압했다. 이제부터 모두 닥치고 들으라는 의미였다.

“오늘 이곳에선 이런 일이 벌어질 거야. 넌 신선채를 위해 철검사호를 고용했어. 한데 이놈들이 배신해 버린 거지. 애초에 네 재산을 노린 놈들이었던 거지.”

검무극이 지생과 대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물론 너희들 간에는 무공 차이가 나지. 한데 그 문제는 이걸로 해결할 수가 있어.”

검무극이 지생의 코앞에서 작은 병을 열었다.

스스스스.

병에서 나온 연기가 강제로 지생의 코로 들어갔다.

“넌 마비산(痲痹散)에 당한 거야. 알지? 너희 사파들이 주로 쓰는 거잖아. 나중에 검시하면 몸에 남는 독이기도 하고. 중독된 너는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검무극이 마혈이 제압당한 그를 인형 움직이듯 움직였다.

“이때 대호가 등에 검을 찔러.”

서대룡도 마찬가지로 대호의 몸을 움직였다. 대호의 손에 검을 쥐여준 후, 그의 몸을 움직였다. 대호의 검이 지생의 등을 찔렀다.

지생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혈을 제압당했기에 비명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중독되고 검에도 찔렸지만, 그냥 당할 네가 아니지. 비수를 던져서 반격하지.”

이번에는 검무극이 지생의 품에서 비수를 꺼내 던졌다.

비수는 대호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그가 그대로 절명해서 쓰러졌다.

“넌 대호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등을 찔린 상처가 치명적이었어. 결국 여기 쓰러져서 죽음을 맞이하지. 누군가 네가 평생 모은 재산을 훔쳐 가는 것을 보면서 말이지.”

실제로 서대룡이 그곳에 있는 모든 야명주를 가져온 자루에 챙기기 시작했다.

“네겐 죽는 것보다 더 싫은 일이겠지?”

지생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러지 말라며 그가 고개를 내저으려고 애썼다.

“다들 네게 이렇게 빼앗겼다.”

이것으로 신선채로 고통당한 수많은 젊은이의 원한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괴로움을 주려 했다.

“네 죽음에 야율한이 사람을 보내겠지. 결국 흉수는 철검사호라고 밝혀질 거다. 그들을 고용하려 했었다는 수하들의 증언이 있을 거고 대호의 시체를 여기 남겨둘 거니까.”

지생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검무극은 아혈을 풀어주지 않았다.

“네가 평생 모았던 것은 우리가 가져간다. 너 대신 우리가 잘 쓸게! 고마워!”

지생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어가는 그는 분노와 억울함만이 가득했다. 검무극은 그가 그렇게 죽기를 바랐다.

이제 검무극의 시선이 가짜 지생을 향했다. 그는 절대 오늘 일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살 수 있다는 희망과 진짜 지생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 기대를 산산이 부수었다.

“한데 이 계획에는 문제가 하나 있어. 사도맹에서는 지생이 철검사호 따위에게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란 점이야. 그래서 그럴듯한 배후가 필요해. 그의 정체를 알면서, 마비산으로 중독시킬 수도 있고, 비밀창고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그런 배후가. 어떻게 생각해? 십오 년을 함께 한 오른팔님은?”

가짜 지생의 얼굴에 당혹감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에게 더욱 절망적인 말이었다.

“그래, 맞아. 이 야명주를 들고 튄 사람은 네가 될 거다. 그리고 그들은 널 영원히 못 찾을 거야.”

검무극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고, 일격에 그의 내부가 박살 나며 절명했다. 검무극은 애초에 갖은 악행을 저질러 온 그를 살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곳에 묻히게 될 것이다.

죽어가던 지생이 꼴 좋다는 표정으로 가짜 지생의 시체를 보며 웃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기괴했다. 하지만 그는 웃으면서 죽을 운명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 야명주를 다 회수한 후 한쪽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서대룡이 짐짓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른팔의 최후는 언제나 이런 건가요?”

“내 오른팔은 똑똑해서 이렇게 안 당할 것 같은데?”

“이렇게 자꾸 기분 좋은 말을 해주시면 이 위험천만한 오른팔을 그만둘 수가 없잖아요?”

“거기에 넘어가서 다들 이렇게 당하지.”

그렇게 너스레를 떤 후 서대룡이 죽어가는 지생에게로 다가갔다.

“근데 너는 왜 자꾸 저길 쳐다봤냐? 이렇게 죽기도 바쁜 마당에?”

순간 지생이 당황했다. 그가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냈다.

“이러니까 진짜 수상한데?”

그냥 봤다면 별생각 안 했을 것이다. 한데 지생은 너무 아쉬운 눈빛으로 벽을 쳐다보았다. 마침 그 모습이 서대룡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검무극과 서대룡이 서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천히 벽을 살피던 검무극의 손끝에 무엇인가 걸리는 순간, 철컥하는 경쾌한 쇳소리가 들렸다.

순간 지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했다. 앞서 야명주를 빼앗길 때보다 더 큰 절망이었다.

아혈을 제압당해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입 모양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만은 안 돼.’

지이이이잉.

벽 앞쪽 바닥이 열리면서 무엇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12 절대회귀-220화 12

제220회 너는 너처럼 해야지.

바닥에서 올라온 것은 단상이었다.

그 위에 녹색 천이 깔린 납작한 상자가 있었다.

상자에 놓인 눈부신 그것에 나와 서대룡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야명주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챙긴 야명주와 달랐다. 최상급 야명주보다 더 컸고,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극품야명주(極品夜明珠)다!”

야명주의 왕이라 불리는 최고의 야명주가 바로 이것이었다.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그것을 보자 서대룡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했다.

“정말 이것이 존재했었군요!”

그때 바닥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생의 두 눈은 시뻘겠다. 너무나 큰 충격에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머지 모든 야명주를 다 합쳐도 이것 하나를 살 수 없었다. 그만큼 밝게 빛나서가 아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생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고통은 아직 모자라다. 그는 죗값을 치르는 거지만, 그에게 당한 사람들은 잘살던 인생에서 날벼락을 맞은 거였으니까. 수백, 수천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으면 이 정도 고통은 겪어야지.

그로서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다행일 텐데, 회광반조 현상까지 찾아왔다. 그는 생의 마지막 고통을 맑은 정신으로 겪어야 했다.

난 조심스럽게 극품야명주를 손에 들었다.

“지금 각주님은 값으로 따져서 세상에서 제일 비싼 물건을 들고 계실 겁니다. 저도 한 번만 만져보게 해주세요. 아, 아닙니다. 저 떨어뜨릴지도 몰라요. 그냥 눈으로만 보겠습니다.”

바로 그때 황홀한 빛을 응시하던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꽈득.

극품야명주에 쩍 금이 갔다.

죽어가던 지생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도 남을 일이었다. 지생은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고 비명은 서대룡이 대신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칼에 찔려도 이런 비명은 안 질렀을 거다.

“안 만져도 돼요! 왜 이러세요!”

조금 더 힘을 주자.

꽈드드드득.

극품야명주가 내 손에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서대룡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서대룡이 이 정도니 지생은 어떻겠는가? 지생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서대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저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으시다지만, 극품야명주를 깨뜨리시다니요?”

서대룡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하는 표정이었다.

“어서 옷 벗어!”

“이러면 정말 미치신 것 같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둘러 서대룡이 상의를 벗었다.

“앞에 펼쳐!”

후두두두둑.

서대룡의 옷 위로 부서진 야명주 조각이 떨어졌다.

난 조각들 사이에서 뭔가를 찾았다.

‘여기 있다!’

조각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들었다.

흑진주처럼 검고 영롱한 그것은 바로 하나의 단약이었다.

만독지극신단(萬毒至極神丹).

온갖 극독을 배합해서 만들어낸 독 중의 최고 영약이 바로 만독지극신단이었다.

“이 극품야명주는 가짜다. 이 만독지극신단을 숨기기 위해서 만들어졌지.”

회귀 전에 만독지극신단이 극품야명주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사파 무인들 사이에서 극품야명주 쟁탈전이 벌어졌다가 우연히 발견된 사실이었다.

진짜 극품야명주를 누가 가졌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 가짜 극품야명주가 지생의 손에 보관되고 있었다는 것은 나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게 감출 수 있지. 그 누구도 이걸 깰 수 있는 용기는 없을 테니까.”

서대룡도 지생도 크게 놀란 듯 보였다. 그들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일 것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란 서대룡의 물음에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더냐?”

언제나처럼 서대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

“다른 영약이면 너와 나눠 먹겠지만, 이건 나 말고 아무도 못 먹는 거다. 오직 만독불침만이 복용할 수 있어.”

내가 만독불침이란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서대룡이다.

“제가 복용할 수 있는 거라도 각주님이 드셔야 합니다.”

서대룡의 시선이 시체가 된 가짜 지생을 향했다.

“저자처럼 협박을 받으면 저는 당장 각주님께 달려와서 다 말씀드릴 겁니다. 저 살려달라고요. 책임지시라고요. 그때 저 살려주시려면 각주님이 강해지셔야지요.”

아마 일반 영약이라 해도 이런 말로 내게 양보했을 서대룡이었다. 내가 한 개를 주면 열 개를 되돌려주는 사람이라고? 그러는 너는?

“이 영약은 네가 아니었으면 얻지 못했을 거다. 고맙다, 서 조사관.”

지생이 아쉬운 눈빛으로 벽을 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영원히 이곳 지하에 묻혀 있었으리라.

“그 영약 이름을 오른팔의 눈썰미라고 이름 붙이시죠.”

“너를 소개하는 말에 ‘눈썰미까지 좋은’이란 말은 붙여주마.”

“제 소개가 너무 길어서 이제 외우지도 못하겠습니다.”

서대룡이 기분 좋게 웃었다. 누군가 자신이란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붙여주는 일이 어찌 싫겠는가? 단 하나의 의미를 얻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 우리 인생인데.

“제가 호법을 서 드릴 테니 어서 복용하십시오, 각주님.”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지생은 다시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달궈진 쇠로 살을 지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하늘은 그를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만독지극신단을 꿀꺽 삼켰다.

만독불침이 되고, 이곳에서 이 영험한 독단을 얻은 것은 운명이라 여겼다.

지금까지 복용했던 그 어떤 영약보다 화끈하고 강렬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약의 기운이 어찌나 독한지 오장육부가 다 타버릴 것 같았다.

나는 운기조식으로 몸을 다스리며 만독지극신단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기운이 혈맥을 내달리며 온몸 구석구석의 작은 혈맥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단계를 이뤄낸 천맥강화술과 만독불침지체가 아니었다면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그렇게 만독지극신단의 기운을 모두 녹이고 진기를 일주천하자 더없이 웅혼하고 정순한 내공이 단전에 더해졌다.

기존에 영약을 복용했을 때와는 단전에서 느껴지는 충만감이 달랐다. 단순히 ‘아, 내가 내공이 많구나’가 아니라 한 계단 위로 올라서면서 다음 단계의 내공에 도달한 느낌이 들었다.

내공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맞을 준비가 됐다고.

“감축드립니다, 각주님.”

“다시 말하지만 네 덕분이다. 고맙다, 오른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모두를 지킬 수 있다.

나는 더욱 맑고 깊어진 눈빛을 갈무리하며 극품야명주를 싸고 있던 상자 속의 녹색 천을 곱게 접어서 품에 간직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역시 매우 중요한 기물이었다.

그때 죽은 줄 알았던 지생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끈질기게 살아 있었고 애타는 눈빛으로 애원했다.

한 번만 아혈을 풀어달라고.

너무 궁금한 것도 많고, 너무 하고 싶은 말도 많은 그였다. 하지만 나는 단호했다.

“너는 단 한 번이라도 애원하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준 적 있느냐?”

아쉬움과 원망이 극에 달하더니 이내 지생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다 내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욕심의 덧없음을 깨닫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정리할 법도 했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죽으면서까지 야명주를 모두 짊어지고, 만독지극신단을 씹어 삼키며 저승으로 가는 나룻배에 올라탄 것이다.

이래서다. 정파는 결코 이 지독한 열망과 그 속에 담긴 악의를 감당할 수 없다. 누군가는 저 애절한 눈빛에 속아, 또 기회를 주고 말 테니까. 저렇게까지 애원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까, 그래도 인간이니까.

악은 그냥 자라지 않는다. 상대의 선의를 잡아먹으면서 자란다. 죽어가면서도 선의를 베푼 자의 마음에 악의의 씨를 뿌리고 죽으려는 것이 절대악인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신선채와 관련된 모든 악인이 죽음을 맞이했다.

“저는 각주님처럼 못할 것 같습니다. 악인들을 이렇게 단호히 응징할 수 있을지.”

“나처럼 하면 안 되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너는 너처럼 해야지.”

서대룡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네, 저는 저처럼 하겠습니다.”

서대룡이 야명주가 든 자루를 챙겼고 나는 가짜 지생의 시체를 옆구리에 꼈다.

진짜 지생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죽음은 시작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악인들의 목숨, 탐욕, 그들의 얕은 믿음, 배신, 미련, 평생 모은 재산, 그리고 서대룡과 나까지. 얽히고설켰던 그 모두가 사라졌다.

* * *

“워낙 이공자가 뛰어나니 우리가 필요 없겠소.”

독왕의 말에 극악소마가 힐끗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한마디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던 두 사람인데, 한번 말문이 트이자 이제 곧잘 대화를 나눴다.

“그렇지 않소?”

검무극이 마무리는 자신이 하겠다며 서대룡만 데리고 간 것이다.

“따라가고 싶었소?”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사실 독왕은 따라가고 싶었다. 가서 어떻게 일을 처리하나 구경하고 싶었는데, 둘만 가니 괜히 섭섭했다.

“앞으로 우리가 나서줘야 할 일들이 많을 거요. 특히 야율한은 이공자 혼자서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자니까.”

극악소마의 눈빛에 걱정이 스쳤다. 독왕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더라도 마존으로서 보고 듣는 것들이 있다.

“야율한은 맹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극독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극악소마의 걱정은 야율한에 그치지 않았다.

“사인방과 별개로 야율한을 지키는 절대고수들이 따로 있다고 들었소. 야율한도 강하지만, 그 고수들도 무시 못 할 자들일 거요. 그때는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소.”

상대는 사도맹의 이인자였다. 숨겨둔 칼은 반드시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또 몇 자루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왕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정말 이공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소?”

극악소마는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나는 이공자와 함께 싸우는 것이 즐겁소.”

독왕은 저 말이 이공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고 들렸다.

독왕은 부러웠다. 자신은 없다. 목숨을 걸어줄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줄 사람도.

그래서 괜히 이런 말이 나왔다.

“나야 교주 명령을 받아서 어쩔 수 없이 나와서…….”

극악소마는 말없이 독왕을 응시했다. 눈빛이 물었다. 정말 그런 거냐고.

독왕은 정말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이공자의 애도에, 이공자의 노력에, 이공자와의 만남이 즐거웠기에.

어쩌면 다른 이유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날이 덥소.”

독왕이 괜히 애꿎은 부채를 펼쳐서 살랑살랑 부치기 시작했다.

* * *

검무극과 서대룡이 거처로 돌아왔다.

“일은 잘 마무리했습니다.”

검무극이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얻은 것들을 마존들에게 그대로 알려주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지만, 하나도 빼놓지 않고 솔직히 다 말해주었다.

딱 한 가지, 극품야명주와 만독지극신단에 관한 것은 제외했다. 극품야명주 속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를 설명하는 것도 문제지만, 만독불침을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겁니다.”

내 말에 독왕이 물었다.

“다음 목표는 누군가?”

“검은뱀 문신을 한 애차입니다. 독왕님께서 꼭 보고 싶어 하는 진독거사의 수장이기도 하죠.”

“그 삼류 독쟁이 놈을 드디어 만나겠군.”

독왕이니까 할 수 있는 폄하였다. 진독거사는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는 사파를 대표하는 독공고수였으니까.

애차는 그 진독거사와 손을 잡고 광폭과 흑비 등의 약을 팔고 있었다.

“독왕께서는 진독거사를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

내 물음에 독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이군요. 얼굴을 알면 은밀히 접근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이번에는 독왕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번 일만큼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을 제조해서 시중에 파는 진독거사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것을 떠나 이건 독인의 자존심 문제였다.

“고 군사의 정보에 따르면 애차의 처소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진독거사가 광폭과 흑비를 생산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곳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철통같은 경계가 펼쳐져 있고요.”

그때 서대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광폭도 광폭이지만 애차를 없애도 됩니까? 지생이 죽었는데, 연이어 애차가 죽으면 야율한이 의심할 텐데요.”

“의심할 수 없는 죽음을 선사해야지. 우연이 겹쳤다고 여기게끔.”

“어떻게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광폭으로 시작된 일이니, 광폭으로 끝낼까 합니다.”


11 절대회귀-221화 11

제221회 자신이 누군지 말하고 싶은 사람?

그날 저녁.

나는 거처에서 떨어진 산속에서 무공수련을 했다. 출교한 후에도 틈이 날 때마다 수련에 열중했다.

그런 나를 보며 독왕은 처음에는 보여주기식 수련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사이사이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나를 보며 독하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내가 하는 수련이 보통 수련이었겠는가?

사람이 바뀌어야 무공도 바뀐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무학의 극의 중 하나이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람이 바뀌려고 노력하는 그 와중에도 죽도록 무공수련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만 앞서고 수련이 따르지 않으면, 설령 사람이 변한다 해도 무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가장 먼저 벽력수라권을 수련했고, 다음은 풍신사보를 연마했으며 비천검법도 빠뜨리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이 세 가지 무공을 섞어서 수련했다. 진짜 강적을 만나게 되면 이 세 가지 무공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발휘하느냐가 승패의 관건이 될 것이다.

만독지극신단으로 내공이 상승하면서 그 질도 달라졌다. 내공이 더욱 깊고 정순해진 느낌. 그 결과 같은 양의 내공을 사용해서 초식을 발휘해도, 위력이 더 강해졌다.

끝으로 높은 바위에 서서 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수련을 마무리했다.

* * *

한바탕 수련을 마친 검무극이 저잣거리에 들렀다.

그가 들어선 곳은 이 고을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다는 노파의 집이었다.

“다 됐습니까?”

“여기 다 되었네. 어떤가?”

노파가 내민 것을 확인한 검무극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약속한 값을 치르고 검무극이 그곳을 나왔다,

거처로 돌아온 그가 향한 곳은 독왕의 방이었다.

독왕은 홀로 방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책상으로 달려가서 붓을 들었다.

생각난 것을 열심히 쓰다가 또 막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거닐었다. 그러다 또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달려가서 뭔가를 적고.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검무극이 들어서자 그는 적고 있던 책자를 덮었다.

“밤이 늦었는데 어쩐 일이냐?”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검무극이 저자에서 만들어온 것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한 쌍의 장갑이었다.

“이게 뭐냐?”

한눈에 딱 봐도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풍기는 장갑이었다.

“피독천잠사(避毒天蠶絲)로 만든 장갑입니다.”

독왕이 깜짝 놀랐다.

“피독천잠사라고?”

피독천잠사는 독을 막아주는 일반적인 녹피장갑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효과를 내는 천이었다. 극품천잠사가 외부의 충격에 강하다면, 이 피독천잠사는 독에 강한 기물이었다.

“이 귀한 걸 어디서 구했나?”

“지생의 비밀창고에서 발견했습니다. 저자에서 제일 손재주가 좋은 노파에게 맡겨서 장갑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껴보십시오. 천독림에서 끼시던 장갑과 같은 크기로 만들어서 아마 잘 맞을 겁니다.”

가짜 극품야명주를 싸고 있던 녹색 천이 피독천잠사였던 것이다. 야명주 속에 있는 만독지극신단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피독천잠사로 그것을 싸두었던 것이다. 만독지극신단을 야명주에 숨겼던 고인은 독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이 틀림없었다.

“이 귀한 것을 왜 나를 주나?”

“귀한 거니까요. 독왕님이 지금까지 이런 것 하나 없다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만.”

“명필이 붓 가리는 것 봤나?”

“붓이 사람을 죽이진 않으니까요. 앞으로 독한 독 다루실 때는 꼭 이걸로 쓰십시오.”

그리고 남은 천도 그에게 주었다.

“남은 건 독왕님이 따로 쓰실 때가 있을 거로 생각해서 따로 챙겨왔습니다.”

검무극이 아낌없이 남은 피독천잠사를 그에게 건넨 후 돌아섰다.

“그럼 주무십시오. 내일 일찍 출발할 겁니다.”

검무극이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너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 독왕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가 장갑과 천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뭔가가 눈에 띄었다. 장갑에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한쪽 장갑의 손등에는.

천상천하(天上天下).

다른 쪽 장갑에는.

유아독존(唯我毒尊).

원래의 홀로 독(獨)자를 독 독(毒)자로 바꾼 유아독존이었다.

독왕의 얼굴에 감격이 스쳤다.

독존이 되는 게 자신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을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자신을 지극히 보필하는 상선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결국, 독왕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다들 이래서 알면서도 당한 것이군. 정말이지 해약이 없는 독이야.”

하지만 그는 결코 눈가에 스치는 기분 좋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 * *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뱀 문신은 목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긴 꼬리가 목을 한 바퀴 휘돌아 있었다.

뱀이 목을 감은 남자.

그가 바로 야율한의 사인방 중 일인인 애차였다. 그가 많은 동물 중 하필이면 뱀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뱀눈을 지니고 있었다. 딱 눈만 떼어놓고 보면 뱀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눈이었다. 게다가 그의 차갑고 흉포한 기도가 더욱 그를 뱀처럼 느껴지게 했다.

애차가 전서를 읽으며 말했다.

“지생이 죽었다는군요.”

앞에서 깜짝 놀란 사람은 진독거사였다.

“어떻게요?”

진독거사는 학자처럼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검고 쭈글쭈글해서 그가 원한 학자풍의 면모는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듣기에 좋지 않은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오랫동안 가짜를 앞세웠소. 한데 그 가짜 놈이 지생을 죽이고 재산을 들고 튀었다는군요.”

차분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지만, 어떤 애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감정이 아닌 사실만을 전했다.

“그 사람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닌데.”

지생의 죽음은 실로 의외였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그는 쉽게 죽지 않을 사람이었는데.

하지만 맹의 조사 결과 가짜 놈의 짓임이 확실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죽은 사람이 지생이니만큼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독거사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소.”

그는 애차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었다.

“그 사람은 마부 흉내를 내면서 자신이 무슨 대단한 신비인이나 되는 것처럼 굴었지만 내가 볼 때는 겁쟁이에 불과했소. 겁쟁이의 말로가 좋을 수가 없지요.”

과연 애차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사람이 죽고 나니 밀렸던 평가가 나오는군요.”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냐는 질책이 담긴 조롱이었다.

순간 진독거사는 짜증이 치솟았다.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줬으면 맞장구는 안 치더라도, 침은 뱉지 말아야지.’

항상 이런 식이다. 애차는 이런 상황이면 꼭 저렇게 기분 나쁜 말을 하곤 했다.

진독거사는 그게 삐뚤어진 지배 욕구라 여겼다.

부정적인 말로 상대방을 옭아매어 관계의 우위에 서려는 자. 그는 이런 방식으로 수하들을 다루는 사람인 것이다.

진독거사는 불편한 속내를 감춘 채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죽은 자만 불쌍한 법 아니겠소?”

애차는 워낙 잔혹한 성품을 지녀서, 한 번 눈 밖에 나면 결국 죽게 되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화르륵. 애차가 들고 있던 전서를 등불에 불태웠다. 끝까지 한마디 애도도 없었다.

전서가 재가 되어 사라졌을 때, 애차가 불쑥 물었다.

“부작용은 아직도 못 잡았소?”

순간 진독거사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렇게 꾸준하게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기도 쉽지 않은데. 이놈은 목숨이 세 개쯤 된다 생각하고 사는 놈이 틀림없다.

“노력 중이오.”

“어서 잡아야 하오. 일전에는 마교 쪽에서 사건이 터졌소. 마교나 무림맹의 주요 인사 가족이 당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질 거요.”

사실 애차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교나 무림맹이 아니었다. 그 여파로 인한 야율한의 질책이었다.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야율한이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겠소.”

“언제까지 할 수 있겠소?”

“여섯 달만 주시오.”

“한 달 드리겠소.”

진독거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렇게 기간을 줄일 것 예상하고 여섯 달을 불렀다. 그럼 석 달 내로 끝내라고 할 줄 알았는데, 한 달이라니. 이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진독거사는 확 저 얼굴에 독을 풀어버리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대체 무슨 배짱인지 애차는 자신의 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긴 이런 사람이니 야율한이 자신을 통제시키려고 붙여둔 것이겠지만.

“최대한 빨리 해결하겠소.”

“그럽시다.”

일단 진독거사는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알아야 할 거다. 이렇게 물러나 주는 것은 그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야율한 때문이란 것을.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

“거사만 믿소.”

진독거사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뱀눈으로 노려보았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높아서는.’

광폭의 부작용을 잡지 못하면 광폭은 포기해야 할 상황. 하지만 대부분의 수입이 광폭에서 나오고 있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늙은이야, 먼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 아니냐?’

진독거사는 아직 한 번도 자기가 잘못 만들었다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애차는 애차대로 쌓인 것이 있었다.

밖으로 나온 진독거사가 대기하고 있던 수하에게 물었다.

“실험에 쓰일 놈들이 몇이나 남았지?”

“일곱 남았습니다.”

“다음 실험체는?”

“오고 있습니다.”

사도맹에서는 진독거사를 위해 실험에 쓰일 무인들을 보내주었다. 그들은 모두 사도맹의 뇌옥에 갇혀 있던 자들이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그래서 사도맹조차 뇌옥에 가두는, 그야말로 천하의 망종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도착 예정은?”

“이십 일쯤 걸릴 겁니다.”

“너무 늦다! 네가 가서 최대한 빨리 데려오도록. 무슨 수를 쓰더라도 열흘 내로 와!”

“알겠습니다.”

수하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명령을 받은 수하는 충실히 맡은 임무를 다했다. 단 하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는 것만 빼고는 말이다.

* * *

그로부터 열흘 후.

“으아아아아!”

한 남자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독거사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남아있던 일곱 명의 실험체 중 마지막 한 명까지 실패했다. 아무리 약초의 배합을 달리해도 부작용을 막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내성이었다.

처음에는 한 알이면 충분한 효과를 얻었는데, 복용하면 할수록 내성이 붙어 더 많은 양을 먹어야 했다. 양이 늘어나면서 부작용도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은 과다복용한 자들 수백 명 중 한 명꼴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데, 점차 내성이 생기는 자들이 늘어나면 수십 명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무림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때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새로 실험에 쓰일 자들이 도착했습니다.”

“몇 명이지?”

“스무 명입니다.”

진독거사가 수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대형 마차가 두 대 서 있었고, 죄수들이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마차는 창문이 없었다. 아예 짐짝처럼 실려 온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머리에 검은 자루까지 쓰고 있었다. 내공까지 제압당한 상태였으니, 그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리라.

무인들이 가서 그들의 머리에 씌워진 자루를 벗겼다. 죄수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을 둘러싼 무인들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지만, 누구 하나 겁을 먹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스무 명쯤 되는 막장 인생이 모여 있으니, 당연히 겁 없이 튀어나오는 이도 있었다.

“이 새끼들아! 난 혈사(血蛇) 양굉이다!”

한때 사파무림에서 악명을 떨쳤던 악인이었다.

“아무리 강호에 도의가 떨어졌다지만 선배를 이렇게 대접해도 되는 일이냐!”

짐짝처럼 실려 온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다. 게다가 원래 이십 일 걸릴 거리를 열흘 만에 주파했으니 그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험에 쓸 사람들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이런 정도의 불평은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운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나쁜 운이 여러 개가 겹쳤다.

우선 진독거사는 또 실험에 실패해서 기분이 나쁜 참이었고, 마침 애차가 이 모습을 반대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나쁜 운은 그의 별호에 뱀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진독거사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선배가 그 유명한 혈사시군요.”

“그래, 나다. 너는 누구냐?”

“나는 이런 사람이오.”

진독거사가 손을 슥 휘저었다.

다들 뭐 하는 건가 쳐다보고 있던 그때.

“으아아아아악!”

갑자기 혈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인간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던 대부분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던 자였음에도 누군가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몸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죽여줘…… 제발!”

혈사의 입에서 죽여달라는 말이 나왔다.

진독거사가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혈사가 애원했다.

“……죽여주십시오!”

진독거사가 다시 손을 슥 내저었다.

그러자 혈사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사람이 핏물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파 제일의 독공고수의 실력이었다.

감히 그곳에는 숨조차 크게 쉬는 사람이 없었다.

진독거사가 저 멀리 애차를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담긴 뜻은 명백했다. 까불면 너도 이렇게 된다.

그러자 애차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자신의 거처로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진독거사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자신이 누군지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감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진독거사는 결코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누군지 밝히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 것을.

무인들이 죄수들을 건물로 데려갔다.

겁을 먹고 끌려가는 사람 중에는 검무극과 독왕도 있었다.

12 절대회귀-222화 12

제222회 널 보면 왜 기분이 나쁘지?

지하는 뇌옥처럼 꾸며져 있었다.

죄수들은 각자 한 명씩 독방에 갇혔다. 검무극은 독왕과 붙어 있었기에 맞은편 방을 배정받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봤을 거다.”

그렇게 겁을 준 후 무인들이 그곳을 나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철문에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창문이 있어서 서로 얼굴을 볼 수도 있고 대화도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빌어먹을! 뇌옥에서 나왔는데 또 뇌옥에 갇히다니!”

“우리가 있던 곳보다 더 더러운 곳이다.”

“간수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죄수들을 빼내서 비밀 실험을 하는 곳으로 보낸다고.”

“젠장! 이러다간 개죽음이야!”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해!”

죄수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욕설을 해댔다.

검무극은 건너편 창문에 얼굴을 보인 독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뇌옥에 갇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다.

-죄송합니다. 이런 고초를 겪게 해드려서요.

-괜찮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나는 신경 쓰지 마라.

정말 독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런 일을 당하는 걸 싫어할 것 같은 사람인데, 지금 저 담담한 얼굴을 보면 어떤 마존보다 이런 일을 잘 겪어낼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까 보니 그 삼류 독쟁이 놈의 하독 실력이 제법이었다.

처음으로 진독거사를 칭찬했다. 아마 독왕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니 해도 사파 제일의 독공 고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저런 실력을 지녔으면 제대로 된 약을 만들었어야지.

그렇게 한 시진쯤 지나고 식사가 나왔다.

죽음을 앞둔 만찬처럼 아주 잘 나왔다.

다들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오면서 일부러 굶기기도 했고, 배가 부르더라도 젓가락이 갈 만큼 음식이 훌륭했던 것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한 이유는 간단했다.

-음식에 광폭이 들어 있다.

-벌써 광폭을 먹이는 겁니까?

-광폭뿐만 아니라 이 약, 저 약 다 집어넣었다.

-오자마자 시작하는 걸 보니, 야율한이나 애차가 빨리 진행하라고 명령을 내린 모양입니다.

그것은 이십일 거리에서 오는 죄수들을 열흘 만에 이곳에 데려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에겐 잘 되었습니다. 이 갑갑한 곳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미리 준 약을 먹으면 광폭은 즉시 해독될 거다.

-네.

물론, 먹지 않아도 애초부터 자신을 중독시킬 수는 없었다. 무형지독도 통하지 않는데, 이런 잡다한 약들이 통할 리 없었다.

사육당하듯 그곳에서 주는 음식만 먹었다.

첫 식사 전까지 불만을 터뜨리던 이들이 이젠 은근히 다음 식사를 기다렸다. 최고급 객잔에서나 볼 수 있는 훌륭한 요리와 술까지 나왔으니, 뇌옥에서 쓰레기 같은 음식만 먹던 그들은 환장하고 먹고 마셨다.

-계획은 확실히 세워둔 것 맞지?

-제게 다 맡기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너무 태평해 보여서 그런다. 여기서 무공수련이라니?

나는 틈이 나는 대로 뇌옥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던 것이다.

이렇게 온종일 방해받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기회도 드물었다. 천마호신공은 아직 대성을 이루지 못했기에 기회가 생겼을 때 집중해서 연마했던 것이다.

독왕은 그런 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무슨 무공을 연마하는 중이냐?

천마호신공을 익힌 사실은 솔직히 말해줄 수가 없었다.

-심법수련 중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마하는 이유가 뭐지?

-강해져야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하지 않나?

-제가 원하는 자유를 누릴 정도는 아니라서요.

-네가 원하는 자유가 뭔데?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있는 삶입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독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들리는 말이지만,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가는 길은…… 자네 뜻대로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길이네.

-그래서 노력 중입니다. 제가 원할 때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려고요.

생사고락을 같이한 가까운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얽매지 않는 삶. 그게 바로 검무극이 원하는 자유였다.

독왕은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독왕님은 꿈이 있으십니까?

지금 독왕은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이 나이에 꿈은 무슨.

독왕은 대답하기 싫었는지 작은 창문에서 모습을 감췄다.

‘독왕아,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만난 이상 이전의 운명을 살게 하진 않을 거다.’

그래서 검무극은 장갑에 독존이란 글자를 새겨주었다.

그의 꿈이 어두운 열망이 되지 않게 하려고. 밝은 곳에서 진짜 유아독존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검무극은 자리에 앉아 천마호신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 * *

“식사하십시오!”

서대룡이 극악소마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몇 가지 정갈한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사 온 것도 있었고, 직접 한 요리도 있었다.

태어난 이래 이렇게 긴장한 적이 있었을까? 소룡전 결승 비무에 오를 때도 이렇게 떨진 않았을 것이다.

“고맙네.”

나직하지만 부드러운 말이었다. 검무극에 대한 호의가 서대룡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서대룡은 허리가 접히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극악소마가 말했다.

“그렇게 과한 예를 차릴 것 없네. 자네도 언젠가 마존이 될 사람인데.”

마존이란 말에 서대룡은 다시 심장이 뛰었다. 정말 이 무서운 극악소마와 동급의 마존이 될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냥 나가려다가 서대룡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제가 그럴만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이성이 소리쳤다.

어, 너 뭐해? 그 입 막아!

머리가 다급히 말렸지만 가슴에게 포섭된 입에서는 이미 말이 쏟아져 나가고 있었다.

“엉겁결에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정말 제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각주님 때문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맞는 운명인지, 이렇게 까불고 설치다가 가랑이가 찢어져 죽을지. 지금은 막 떠밀려서 흘러가는 느낌입니다. 이런 제가 마존이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소마님이 될 수 있는 겁니까?”

말을 마친 서대룡은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세상에 그 많은 사람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극악소마에게 신세 한탄을 해? 소마가 될 수 있냐고? 도전이냐?’

서대룡이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그가 후다닥 돌아서는데 극악소마가 말했다.

“이공자가 자넬 많이 아끼더군.”

순간 흠칫한 서대룡이 그를 돌아보았다.

극악소마의 눈구멍 속 두 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말하고 나서 서대룡은 아차했다.

‘알고 있다니! 알긴 뭘 알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어야지.’

너무 긴장하니까 말이 막 헛나가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조금 전 제 말씀은…….”

그러자 극악소마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네.”

마치, 지금 네가 어떤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극악소마의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이 웃고 있었다. 서대룡이 처음으로 소마의 웃음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 웃는 눈을 보니 두려웠다.

“오늘 실수가 많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극악소마가 담담히 말했다.

“내 앞에서 실수가 없다면, 오히려 그게 진짜 실수 아닌가?”

방을 나온 서대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인사는 하고 나왔겠지? 그야말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극악소마와 단둘이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누다니! 감격스러우면서도 무서웠다.

‘각주님! 어서 돌아오세요! 아끼시는 오른팔, 이러다 사고 쳐요!’

* * *

뇌옥에 갇힌지 사흘이 지났을 때.

죄수 중 하나가 증세를 보였다.

“으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문을 두드려댔지만, 보통 철문이 아닌지 부서지지 않았다. 작은 창으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었다.

죄수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이유가 광폭 때문임을 알지 못했기에, 단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 날뛴다고 생각했다.

“이 미친놈아! 그만해!”

“시끄러! 죽고 싶으냐?”

하지만 그는 더욱 미쳐서 날뛰었다.

그 모습을 본 독왕이 화를 냈다.

-삼류 독쟁이 놈이 이딴 약을 돈 받고 팔았단 말이지?

양반은 못 되는지, 곧장 진독거사가 와서 미쳐 날뛰는 남자의 모습을 작은 창구멍으로 지켜보았다. 남자가 달려와서 창구멍으로 얼굴을 들이박았다. 남자의 살심이 폭발하고 있었다.

꽝! 꽝!

머리로 철문을 박았다.

눈과 코, 이마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모습이 끔찍했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독거사의 눈빛은 냉담하기만 했다.

결국 스스로 벽에 머리를 박고 죄수가 즉사해서 쓰러졌다.

따라온 수하들이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듯 능숙하게 시체를 내갔다.

진독거사는 다른 뇌옥도 둘러보았다. 죄수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가 검무극이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어떤 특별한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다.

검무극 다음으로 그는 독왕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독왕은 방 가운데 앉아 있다가 힐끗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독거사는 다른 죄수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비웃어?’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왕이 고개를 숙여 눈을 내리깔았고 진독거사는 다음 방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모든 방을 다 보고 돌아서 나가던 진독거사가 독왕의 방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독왕은 돌아앉은 채 멍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독거사가 수하들과 그곳을 나가자 곧장 검무극이 독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떻게 됐습니까?

-뭘 묻나? 당연히 성공이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독왕이 이 짧은 순간의 만남에서 진독거사에게 광폭을 하독한 것이다. 나중에 사도맹에서 검시를 하게 되면, 그가 광폭에 중독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잠입한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사파제일의 독공 고수를 마주 보면서 중독시키기! 무림에서 감히 누가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독존이십니다!

-아직은 표나지 않게 미세한 양만 하독했다. 조금씩 양을 늘려가야지.

독왕은 말은 겸손했지만 표정은 ‘이 정도쯤이야’였다.

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느꼈기에 검무극은 찬사를 보탰다.

-그것도 뇌옥 안에서 바깥에 있는 상대를 말입니다. 제가 돌아가면 모두에게 자랑할 겁니다! 아버지에게 이 멋진 모습을 말씀드릴 겁니다. 독왕님의 독공은 예술이었습니다, 아버지!

-뭘 또 교주님에게까지.

아버지에게 말한다니까 독왕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였을까? 독왕은 더 자신 있고 당당했다.

-놈이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중독시킬 거다.

진독거사는 자신이 실험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실험 대상은 그 자신이었다.

* * *

두 번째, 세 번째 희생자가 연속으로 발생하자 죄수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뭔가를 탔음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죄수들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러자 진독거사가 다시 등장했다. 그는 뇌옥의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밥을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가 내려오면 찢어 죽이겠다고 온갖 욕들이 오갔지만, 지금은 감히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혈사가 핏물이 되어 녹았던 모습이 너무 충격적으로 머릿속에 각인된 탓이다.

“음식을 남기면 내 독에 의해 죽을 거다. 죽여달라고 애원해도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을 거다.”

그는 무자비한 채찍을 휘두른 후 썩은 당근도 하나 던져주었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면 뇌옥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냥 풀어주겠다. 한두 사람은 살아남을지도 모르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효과가 있는 말이었다. 하나둘씩 죽어 나가는 절망 속에서는 결국 이 썩은 당근이 유일한 위안이 될 테니 말이다.

그때 진독거사가 독왕의 뇌옥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작은 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던 그가 수하에게 말했다.

“여기 문 열어.”

수하가 독왕의 뇌옥 철문을 열었다.

“나와.”

독왕이 뇌옥을 걸어 나왔다. 검무극도 독왕도 생각지도 못한 돌발상황이었다.

진독거사가 독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널 보면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그 역시 사도의 절대고수. 독왕과의 만남에서 어떤 불길한 운명을 느낀 모양이다.

진독거사가 손가락으로 독왕의 턱을 기분 나쁘게 위로 쳐들었다.

“이상하게 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독왕은 전혀 겁을 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독왕님, 겁먹은 표정을 지으세요! 라고 전음을 보낸들 평생 안 짓던 표정이 지어질 리 없다. 그것도 이미 기분이 나쁠 대로 나빠진 상황에서.

진독거사가 뺨을 한 대 갈기려고 손을 천천히 들었다. 독왕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하지 마, 뒈지기 싫으면. 이런 말이 나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검무극이 작은 창문으로 소리쳤다.

“두 분이 닮아서 그렇습니다.”

독왕과 진독거사가 동시에 검무극 쪽을 쳐다보았다. 한 사람은 말로, 한 사람은 과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우리가 닮았다고?”


15 절대회귀-223화 15

제223회 원래 독쟁이 상대하는 일이.

두 사람이 닮았냐고?

독왕이 펄쩍 뛰어도 좋을 정도로 닮은 구석이라곤 없었다.

진독거사의 관심을 내게 돌리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던진 말이었으니까.

목적은 달성했다. 진독거사의 관심이 독왕에게서 내게로 바뀌었다. 그래, 날 상대해라.

“자기와 닮은 사람을 보면 괜히 기분이 나쁘잖아요?”

이 말을 들은 독왕의 눈빛이 이랬다.

이 못생긴 놈과 내가?

그 의문은 진독거사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냐?”

자기가 생각해도 전혀 닮지 않았을 테니까.

“제 눈에는 많이 닮아 보입니다. 심지어 눈빛이나 분위기가 똑같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반항적이고,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고.”

진독거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딴 말을 한다고? 반항적? 깊이?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지하뇌옥에서?

“젊었을 때, 저렇게 잘 생기지 않으셨습니까?”

잘생긴 사람 닮았다는데 기분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문제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이자를 구하려고 나선 이유를 말해라.”

진독거사가 노골적으로 살기를 드러냈다. 정말 헛소리를 했다간 본보기로 하독하겠다는 기세였다.

“뇌옥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받았기에 목숨을 걸어?”

내 시선이 독왕을 향했다.

“개처럼 싸우고 있을 때 저 사람이 같이 개가 되어 싸워줬습니다.”

내가 그 이유를 댈지 몰랐기에 독왕의 얼굴에 놀람과 격정이 스쳤다.

다른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다행히 그 말은 진독거사에게 먹혔다.

“죄수들 주제에 무슨 의리 타령이냐? 한 번만 더 건방지게 나서면 그땐 한 줌 핏물로 사라질 줄 알아라.”

“네! 조심하겠습니다.”

진독거사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와 독왕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일을 더 키우진 않았다. 한 명 한 명이 중요한 실험체였으니까.

진독거사는 독왕을 다시 뇌옥에 가둔 후 그곳을 나갔다.

내가 독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잘 참으셨습니다.

―왜 나서?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는데.

―알죠.

―내가 사고 칠까 봐 그런 거지?

―아뇨.

―아니긴!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 말했다.

―오히려 참으실까 봐 그랬습니다.

―!

독왕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참으실까 봐요. 그래서 뺨도 맞고, 놈에게 수모를 당해도 참으실까 봐요. 독왕님은 아마 우리 계획을 위해 참으셨을 겁니다.

독왕의 그 맑고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날 닮았다는 네 아부가 안 통해서 저놈이 널 죽이려 들었으면?

―그럼 판 뒤집어엎어야죠. 저놈이 광폭 부작용으로 여기 사람들 다 죽이고 죽은 것처럼 꾸미고 떠나야죠.

―그럼 애차는? 제 소굴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도 않는 놈이잖아?

―고민해보면 수가 생기겠죠.

―이런 위험까지 감수한 이유가…… 고작 내가 당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라고?

―고작이라뇨? 정말 중요한 이유죠. 다 엎고 돌아가도 될 만큼 큰일입니다.

또 아부냐 하는 눈빛에 나는 내 본심을 밝혔다.

“아부와 진심의 비중에서 진심의 비중이 자꾸 커지고 있습니다.”

나를 응시하던 독왕이 작은 창문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매일 죄수들이 죽어 나갔다.

그때마다 진독거사는 뇌옥으로 와서 그들의 죽음을 확인했고 독왕을 노려보고 갔다. 독왕의 존재는 여전히 그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본능을 좀 더 믿었어야 했다. 저 맑은 눈빛이 왜 자신의 기분을 그토록 거스르는지.

하지만 그는 계속된 연구 실패에 피곤한 상태였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위기의식을 잘 살피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매일 같이 광폭에 중독되고 있었다. 독왕이 워낙 정교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하독했고, 평소에 내공을 격하게 사용할 일이 없기에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나자 독왕이 내게 물었다.

―만약 우리 계획대로 된다면 애차가 이곳에 나타날까?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고 군사의 조사에 의하면 애차와 진독거사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실험에 성공했다고 하면 직접 와서 확인하려 들 겁니다.

―지금까지 추세로 보면 대략 열흘 안에는 결론이 날 거다.

이제 끝이 보이고 있었다.

* * *

열흘 동안 난 천마호신공에만 몰두했다.

오히려 주위가 어수선할 때, 우린 뜻밖의 집중력을 발휘하곤 한다. 내가 그랬다. 매일 죄수들이 죽어 나가는 이 좁고 열악한 뇌옥에서 그 어느 때보다 수련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마호신공에 진전이 있었다.

최근 내공의 상승으로 인한 내 몸의 변화와 이곳에서의 수련이 합쳐진 결과였다. 느리지만 차근차근 천마호신공은 대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 단계 올라서자 천마호신공은 확실히 이전과 달라졌다. 좀 더 빠르고 민감하게 위기에 반응했고, 나와 더욱 밀착된 느낌을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죄수는 죽어 나갔다.

뇌옥에 밥을 주러 오가는 무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번에 실패하면 일반 무인들을 납치해 와서라도 실험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자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목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남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절대악이다. 이런 곳에서, 진독거사와 애차같은 고수들이 비밀리에 실험을 하는데, 누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런 악행을 막는 것이 제 마도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꺼낸 이후 처음으로 다음 세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독왕이 내게 물었다.

―네가 죽고 나서는? 과연 차기 천마가 그 마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 너 같은 사람이 또 나올 수 있겠냐는 말이다.

―저 죽고 나서 일을 제가 왜 걱정합니까?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이렇게 고생해서 새 마도를 세웠는데, 후대가 망쳐 버리면 아깝잖아?

그래,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관여하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어디 후대에 명령한다고 되겠습니까? 부탁한다고 듣겠습니까? 그냥 우리 사는 것 보고, 멋있어 보이면 따라 할 거고, 별로다 싶으면 바꾸겠지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 * *

독왕이 예상한 대로 열흘이 되던 날, 이곳에 온 모든 죄수가 죽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오직 검무극과 독왕뿐이었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 음식이 제공되었고, 당연히 두 사람은 죽지 않았다.

다시 그로부터 며칠 후.

두 사람이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드디어 애차가 진독거사와 함께 지하 뇌옥을 찾아온 것이다. 자신의 소굴에서 칩거하던 애차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성공했소?”

“그렇소! 직접 보시오. 성공한 배합이 두 개나 나왔소. 좀 더 연구해서 더 안정적인 배합으로 만들면 될 거요.”

“어디 한 번 봅시다!”

애차가 검무극과 독왕이 있던 뇌옥의 철문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기뻐하던 그의 눈이 뱀눈이 되었다.

“둘 다 너무 젊은데 젊은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은 아니오?”

순간 진독거사는 욕을 내뱉을 뻔했다. 매번 이런 식이지만, 적어도 오늘까지 이 지랄을 할 줄은 몰랐다.

“당신 날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오?”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일었다.

“그냥 해본 소리니 그리 날 세울 필요 없소.”

얄밉게 한마디 하고서 애차가 다시 뇌옥 속 검무극과 독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너무 어려 보이는데?’

그때 애차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위기의식이 맹렬히 작동했다. 뭐지? 이 불길함은?

도귀(賭鬼)가 보는 앞에서 패를 바꾸는 도신(賭神)처럼, 사파제일의 독공 고수가 있는 자리에서 독왕 무공의 극의가 발휘되었다. 작은 구멍 하나면 충분했다.

‘!’

순간 애차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애써 웃으며 진독거사에게 다가섰다.

“정말 고생하셨소!”

가까이 다가서던 그 순간.

쉬익!

애차가 벼락처럼 빠르게 검을 뽑으며 진독거사의 팔을 찔렀다.

이 기습에 진독거사는 속절없이 당했다.

진독거사가 반사적으로 독을 뿌리려는 순간, 한발 먼저 애차가 그의 마혈을 제압했다.

“당신 미쳤어?”

진독거사의 외침에 애차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당신 뭐야? 광폭을 복용한 거야?”

진독거사는 애차가 광폭에 미쳐 날뛴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갑자기 자신을 죽이려 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험에 성공했다고 토사구팽할 수도 없다. 이런 일을 대비해서, 광폭을 만드는 방법은 오직 자신만이 알았으니까. 어디 적어두지도 않았다. 오직 그의 머릿속에만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데 자신을 죽일 이유가 없다.

“해약! 해약을 내놔!”

애차가 왈칵 피를 토했다.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제야 진독거사는 그가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중독시킨 거라 오해하고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 새끼! 언젠가 이렇게 배신할 줄 알았다!”

“나 아니오! 아니라고!”

두 사람이 평소에 사이가 좋았다면 좀 더 차분하게 주위를 살폈을 것이다. 하지만 원수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당장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 그곳으로 밖에서 대기하던 애차와 진독거사의 수하들이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진독이 배신했다! 다 죽여!”

애차의 수하들이 검을 뽑아 진독거사의 수하들을 찔러 죽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데다가 자신의 수장이 배신했다는 말에 놀라 진독거사의 수하들은 곧장 독을 뿌려서 반격하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죽고, 애차의 수하들이 애차 쪽으로 뛰어오다가 줄줄이 쓰러졌다.

애차는 진독거사의 수하들이 독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검무극이 지풍을 날려 그들의 수혈을 눌러서 재운 것이다. 그들은 이 상황을 말해줄 가장 훌륭한 증인들이었다.

앞선 하독도, 지금 수혈을 누른 것도 모두 뇌옥 안에서 작은 창을 통해 표나지 않게 해낸 일이었다.

자신의 수하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애차의 눈이 돌아갔다.

“이 배신자 새끼! 죽여버리기 전에 해약 내놔!”

애차가 진독거사의 목을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질 상황이었다. 진독거사는 숨을 쉬지 못해 켁켁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진짜 당신을 죽이려고 했으면 당신은 이미 죽었어.”

그것만은 사실이기에 애차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래, 죽이려고 했으면 더 독한 독으로 즉사시켰을 텐데? 이렇게 반격을 허용하지도 않았을 테고.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쓰러져 있던 진독거사 수하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열쇠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먼저 본 진독거사가 눈을 크게 떴다.

열쇠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오더니 독왕의 철문을 열었다.

철컥!

그 소리에 놀라 애차도 그쪽을 쳐다보았다.

열쇠는 다시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와 검무극의 철문을 열었다.

철컥하는 소리에 애차와 진독거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면서 검무극과 독왕이 뇌옥을 걸어 나왔다.

애차는 잠시 멍했다. 독 때문에 헛것을 보나?

검무극과 독왕이 나란히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먼저 상황을 파악한 것은 진독거사였다.

“죽여! 저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순간 정신을 차린 애차가 검무극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벼르고 기습했어도 통하지 않았을 공격이 지금 어찌 통하겠는가? 내지른 애차의 검은 허무하게 허공만 찔렀고, 염왕보로 파고든 검무극은 애차의 마혈을 제압했다.

애차는 놀란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제야 실감했다.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진독거사를 제압하고 그의 팔을 찌를 게 아니었다는 것을.

독왕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진독거사의 허리춤에 찬 독주머니를 열었다. 그 순간 진독거사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내 독주머니를 함부로 만져? 그래, 어서 뒈져라!

당연히 죽을 것이다. 함부로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진독거사의 독주머니이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더 능숙하게 그 독을 다뤘다.

한 줄기 바람을 타고 진독거사의 독이 애차의 얼굴로 날아갔다.

“안 돼!”

애차의 애절한 외침은 곧 끔찍한 비명으로 바뀌었다.

“으아아아아아악!”

자신만이 사용하는 독문독이기에 애차를 죽인 것은 진독거사가 될 것이다.

그럼 진독거사를 죽이는 것은?

검을 든 애차의 손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저절로 움직이더니.

푹!

진독거사의 가슴에 박혔다.

“으아아아아악!”

“으으으으으윽!”

두 사람이 동시에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검무극이 가서 진독거사의 눈 아래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고, 코를 튕겼다.

코와 눈에서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몸에는 독왕이 중독시킨 충분한 양의 광폭이 들어 있기에, 광폭 부작용을 진독거사가 날뛰고 결국 두 사람이 양패구상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

“……대체 왜?”

진독거사의 힘겨운 물음에 독왕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약을 개같이 만들어서.”

검무극은 거기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네 약 때문에 칼부림이 나고 여러 사람이 무고하게 죽었다는 말은, 그래서 가족을 잃은 아이가 혼자 남게 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에겐 씨도 안 먹힐 말이었으니까. 그의 양심에 작은 생채기도 내지 못할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부심 넘치는 그에게 독왕의 저 말은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독에 얼굴이 반쯤 녹아버린 애차가 힘겹게 검무극에게 물었다.

“……누구냐? 너희들?”

검무극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저분은 광폭이시고, 나는 흑비이시다.”

그들이 파는 대표적인 두 약의 이름을 댔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애차의 목숨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불과 반 각 전만 해도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애차의 고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진독거사가 독왕에게 말했다.

“……할 말이 있다.”

독왕이 그의 옆에 가까이 가줬다.

진독거사가 입 안 볼을 깨물어 피를 내뿜었다. 극독이 섞인 피였다.

촤르르륵!

독왕이 무간선을 펼쳐서 막았다.

부채에 피가 흘러내렸다. 진독거사의 피 이외에도 부채에는 많은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독왕은 그 흔적을 없애거나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모양이었다.

“안 통해, 삼류 독쟁이 독은.”

마지막까지 철저히 농락당한 진독거사는 괴로움과 수치심에 부르르 떨다가 이내 고개를 툭 하고 떨구었다.

검무극은 죽은 두 사람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야율한의 네 명의 수하 중 한 명을 죽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광폭으로 죽어갈 수많은 목숨을 살리는 순간이었고, 엄마와 동생을 잃은 소년의 복수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서대룡에게 가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서 소년에게 말해주라고. 네 복수가 이뤄졌다고. 본교 앞에서는 그 어떤 악도 안 통한다고. 그러니 이제 너만이라도 행복하게 살라고. 이들의 죽음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검무극이 독왕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이 좁고 갑갑한 곳에서 정말 고생 많았다. 검무극 자신이야 남는 시간 내내 수련했다지만, 천독림의 자연 속에서 지내던 독왕은 정말 답답했을 것이다.

“원래 독쟁이 상대하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추잡스럽다.”

“저는 좋았습니다. 독왕님과 함께해서.”

“독은 그만 풀어라. 이미 충분하니까.”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검무극을 두고 독왕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검무극은 그곳을 빠져나가기 직전 지풍을 날려 아까 재워둔 애차 수하들의 수혈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뒤쪽에서 진독거사가 미쳤다, 배신했다, 상부에 알려라, 한바탕 난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소리 없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21 절대회귀-224화 21

제224회 이번에는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극악소마는 지붕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나 하얀 벽만 쳐다보고 있던 그가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매우 낯선 일이었다.

그때 누군가 옆에서 말했다.

“하늘을 봐도 하얀 구름만 골라 보시죠?”

반가운 목소리에 가면 속 극악소마의 눈이 환하게 웃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극악소마가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마당으로 독왕이 들어섰다. 독왕의 외모는 언제나 맑고 푸른 느낌을 준다.

하지만 검무극은 이번에 확실히 경험했다. 저 해맑은 풋풋한 외모와는 달리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그의 하독은 예술이었고,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사파제일 독공고수의 독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 시선을 느낀 독왕이 촤아악 부채를 펼친 후 살랑살랑 흔들면서 들어왔다.

극악소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포권하며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는 계획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계획이 훌륭했습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독왕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번 일을 못 해냈을 겁니다.”

아버지가 왜 독왕을 중시하는지, 왜 무림이 독왕을 두려워하는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독왕이 검무극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말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할 거냐?”

검무극은 그가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말이 듣고 싶은 것이리라.

“네.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때까지요.”

듣고 싶은 말을 들은 만족감이 독왕의 눈가에 스쳤다.

촤르륵. 부채를 소리 내서 접은 후, 독왕이 안으로 들어갔다.

“아. 뇌옥에 있다가 하늘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검무극은 앉아서 극악소마는 그 자리에서 선 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는데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오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서대룡이 저자에서 요리를 사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양손과 품에는 요리를 만들 식자재들이 가득 안겨 있었다.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땅을 보고 이야기하는 서대룡.

기다란 파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래서 이쪽을 못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극악소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신선한 재료가 많더라고요. 지금까지 안 해드렸던 요리를 하나 객잔 숙수에게 배워왔습니다. 제가 맛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시선도 못 마주치며 저렇게 주절주절하는 서대룡을 검무극은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는 검무극이 함께 있는 것도 몰랐다.

“매번 고맙네.”

극악소마의 말에 서대룡의 시선이 아예 땅을 파고 들어갔다.

“당연히 제가 할 일인데요. 아, 그리고 어제 꿈에 각주님이 돌아오시는 꿈을 꿨습니다. 우리 각주님, 은근히 보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셔서.”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격렬하게 보고 싶을 때까지 오지 말 걸 그랬다.”

서대룡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각주님!”

눈이 휘둥그레진 서대룡의 품에서 식재료들이 떨어졌다.

휘이익.

떨어지던 재료들이 검무극의 허공섭물로 허공에 떴다. 뇌옥에서는 열쇠가 떴고, 이제는 파와 채소와 고기가 떴다.

서대룡이 서둘러 그것들을 수습했다.

음식 재료를 가득 든 서대룡은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정말 옆에 극악소마가 아니었다면 그는 당장 지붕으로 날아올라서 자신을 와락 껴안았을 것이다. 파 속에 파묻혔을 것이다.

“그 소년에게 가서 전해라. 복수는 우리가 했으니, 네 삶을 살아가라고.”

말을 하는 순간 서대룡이 울컥했다. 이번 여정 내내 서대룡은 그 소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 이것이 차기 천마님의 마도라고 꼭 전하겠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형 귀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그러자 서대룡이 재빨리 다시 말했다.

“이것이 이공자님의 마도라고 꼭 전하겠습니다.”

검무극이 훌쩍 뛰어내렸다.

“밥 먹자, 배고프다. 근데, 우냐?”

“울긴요. 양파가 너무 매워서죠.”

까지도 않은 양파와 함께 서대룡이 안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은 따라 들어가기 전에 지붕에 서 있는 극악소마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서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극악소마와는 항상 따로 밥을 먹었지만, 검무극은 항상 식사 전에 이렇게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러면 그와 함께 밥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 * *

저녁에 고월과 풍천교주가 합류했다.

“공자님!”

“이공자!”

언제나 변함없는 두 사람이다.

“이제 추잡스럽고 위험한 약이 돌아다니지는 않겠군.”

풍천교주는 나와 독왕의 노고를 치하했다.

“독왕께서도 고생하셨소.”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재미있었겠구려.”

내심 부러워하는 풍천교주였다. 날 위해 그렇게 헌신해준 그인데, 언제 그와도 따로 시간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우린 모두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우리가 애차와 진독거사를 해치우는 사이, 고월은 다음 목표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다음 목표는 여불개(呂不改)입니다.”

그의 설명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을 물었다.

“두 사람이나 연이어 죽었으니, 야율한이 의심하지 않겠나?”

“당연히 의심이 들겠죠. 한데 어쩌겠습니까? 둘이서 칼부림하며 싸운 것을 목격한 수하들이 가득한데요. 게다가 한 사람은 광폭에 중독되어 있고요. 결국 불운이 겹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남은 두 사람을 불러들일 일은 없다?”

“네. 게다가 야율한의 성격은 외부의 압력에 꺾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새로 그 자리를 채울 사람을 물색하겠지요. 그는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야 많겠지. 사도맹 이인자와 손을 잡기 위해 사파 고수들이 줄을 서 있을 테니까.”

그때 풍천교주가 나서서 한마디 했다.

“여불개까지 죽으면 그땐 생각이 달라질 거네. 우연이 세 번이나 겹친다고 믿지는 않을 테니까.”

그 말에 고월이 이후 작전 계획을 내놓았다.

“그래서 여불개의 죽음이 야율한에게 알려지기 전에, 야율한을 처치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울까 합니다.”

“사인방 중 남은 하나는?”

“그는 항상 야율한 옆에 붙어 있습니다. 어차피 같이 처리해야 할 자입니다.”

여불개를 죽이고, 그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에, 야율한과 마지막 수족을 해치운다. 다시 말해서 거의 동시에 셋을 다 처리하자는 말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나는 고민하지 않고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곧 세부 계획 올리겠습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독왕이 불쑥 물었다.

“야율한까지 죽이고 나면, 사도맹에서는 우리 소행으로 의심할 텐데?”

그 점은 고월 대신 내가 답했다.

“그 문제는 제게 한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통할지 안 통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독왕이 정말 거기까지 해낼 수 있는 거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그건 나도 모른다.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으니까.

“우선은 여불개에 대해 말해보게.”

고월이 여불개에 대해 설명했다.

“여불개는 가슴에 쥐 문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중원에 수백 개의 기루를 관리하는 그야말로 밤의 제왕으로 불리는 자입니다. 쥐 문신을 한 이유도 잠을 자지 않고 밤에 돈을 벌겠다는 의지를 보인 겁니다.”

“성격은 어떠한가?”

“이자 역시 악랄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여인들을 납치하고, 염왕채에 내몰린 집안의 딸을 빼앗고, 온갖 추악한 수단을 다 부려서 지금의 불야성(不夜城)을 이뤄냈습니다. 게다가 색욕도 엄청 강해서 수많은 여인이 놈에게 당했습니다. 나이 든 기녀는 괴이한 사공을 익히는 자들에게 육체를 팔아넘긴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지생이 신선채로 인해 죽어야 했고, 애차와 진독거사가 광폭으로 죽어야 했다면, 이자 역시 죽어 마땅한 자였다.

아버지에게 야율한과 사인방을 모두 처리하고 오겠다고 허락을 받은 이상, 한 놈도 빼지 않고 다 처리할 작정이다. 나와 마존들이 아니라면, 밤의 제왕의 자리에 오른 자를 누가 없앨 수 있겠는가? 그것도 사도맹 이인자의 비호를 받는 자를 말이다.

“중원 전역으로 기루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데, 최근 귀주로 새롭게 영역을 확장하려는 중입니다.”

바로 그때였다.

극악소마가 입을 열었다.

“귀주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귀주에 천화루가 있었다. 극악소마를 좋아하는 여인 천화루주 여정도 그곳에 있었고.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소마님을 보필하겠습니다.”

극악소마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모두 무슨 일인가 나를 쳐다봤지만, 내가 말할 사안은 아니었다.

“내일 일찍 귀주로 출발할 겁니다. 다들 준비하십시오.”

* * *

회합을 마친 후 고월과 따로 차를 한잔했다.

“이번 일은 더욱 신경을 써야 하네.”

나는 고월에게 천화루와 천화루주 여정, 그리고 극악소마와의 관계까지 모두 말해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사만큼은 알고 있어야 했으니까.

“정말 하늘이 펼친 그물은 빠뜨리는 것이 없군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극악소마가 천화루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자 고월은 걱정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우리 쪽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소마님도 잘 알고 계시니까. 큰 걱정할 필요는 없네.”

“좋아하는 사람이 개입되면 생각지 못한 변수도 있는 법입니다.”

“변수는 없어. 믿어도 돼.”

내 확신에 고월은 미소를 지었다.

“왜 웃나?”

“공자님께서 이렇게 믿으시는 분이 계셨나 해서요.”

“자네 있잖아? 서 조사관도 있고. 이안도 있고. 장 군주도 있고. 다 똑같이 믿는다.”

그럼에도 극악소마를 생각하는 다른 특별함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가?”

“방금 말씀하신 사람들이 배신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워낙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나가는 모습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작정한 배신은 흔하지 않잖아? 누군가에 회유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살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배신감을 느끼는 정도 아니겠나?”

고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배신감도 각자 입장에서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상대에게 실망감을 느껴서 떠나는 건데, 떠난다는 이유만으로 배신자로 몰릴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떠나보내는 사람이 배신자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사람과의 이별에 관한 내 신념을 고월에게 밝혔다.

“누군가가 나를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난 만날 때보다 더 예의를 갖춰 보내줄 거야. 떠나는 사람을 배신자로 만들지는 않을 거다.”

고월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럴 때 보면 저보다도 형님 같으십니다.”

“애늙은이라서 그래.”

고월하고는 진솔한 대화를 많이 나눠야 한다.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면 알수록, 그는 더 훌륭한 군사가 될 테니까. 이런 노력이 없이 좋은 군사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배신자는 그때 만들어지는 걸 테니까.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끼어도 되나?”

그는 바로 풍천교주였다.

“물론입니다.”

그가 함께 자리했다.

“그러고 보니 살이 좀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는 듯, 풍천교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누가 어찌나 잔소리하는지. 어쩔 수 없이 빼고 있네. 자고로 남자란 듬직한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내 앞에서 진지하던 고월이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교주는 뚱뚱했다고.”

“안다고. 그래서 열심히 수련 중이잖아!”

풍천교주의 무공 특성상 많이 움직이지 않아서 더 살이 많이 붙기도 했다.

“더 빼야 해. 아직 멀었어.”

“잔소리는! 술이랑 고기 가져와! 오늘 다 먹어 치울 거다!”

이 대화만 듣는다면 세상에 누가 이 남자를 풍천교주라 생각하겠는가? 누가 이 남자를 그때 묶여 있던 족쇄 사내라고 생각하겠는가?

그곳에 서대룡도 합류했다.

“어땠나? 소마님과는?”

“무서웠죠.”

“무섭기만 한 건 아닌 것 같던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자에서 음식 사서 들어올 때, 말 많이 하던데?”

“무서우면 말 많아지는 것 모르십니까?”

하지만 무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아쉽기도 합니다. 소마님에게 밥을 가져다줄 때마다 심장이 쿵쿵 귓가에 들릴 정도로 뛰었거든요. 그때의 묘한 긴장감, 그거 중독성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또 누가 말했다.

“중독은 내 전문인데?”

돌아보니 독왕이었다.

“남자들이 넷이나 모여 무슨 차를 마시고 있나?”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면서 괜히 한마디 하면서 앉았다.

“우리 서 조사관이 소마님에게 중독되는 이야기를 한창 하던 중이었습니다.”

“소마 그 사람 비위 맞추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서대룡이 기회다 싶어 우리에게 일러바쳤다.

“이런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소마님이 또 보기보다 입이 짧으시더라고요. 같은 음식은 연속해서는 잘 안 드시고. 그래서 제가 매번 저잣거리를 비 맞은 늑대처럼 쓸쓸하게 헤매면서 오늘은 무슨 반찬을 사나, 또 내일은 무슨 요리를 해드리나…….”

그때 서대룡은 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음을.

서대룡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극악소마가 서대룡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가 귀하게 자라서 입이 좀 짧네.”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저는 입이 싸고요. 죽여주십시오.”

“내 입이 짧아진 만큼 자네 명줄도 짧아졌으니, 괜찮네.”

극악소마의 농담에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고 모두 그를 보며 웃었다.

극악소마는 전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유쾌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여불개야, 너 큰일 났다.’


16 절대회귀-225화 16

제225회 오늘 귀한 손님이 올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출발 전에 극악소마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천화루는 소마님과 저만 가시죠.”

극악소마가 천화루주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지켜줘야 할 비밀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자 극악소마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다 같이 가셔서 원래 계획대로 일 진행하시죠.”

“굳이 내키지 않는 일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 군사와 다른 사람들은 외부에서 협력하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가 아닙니다.”

같이 가자는 것에는 뜻밖의 이유가 있었다.

“천화루주에게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독왕과 서대룡, 고월과 풍천교주까지.

“천화루주는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한데 저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많이 참고 있었죠. 이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극악소마가 진심으로 천화루주를 아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히 아끼는 것 이상의 큰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공자가 믿는 사람들이잖습니까? 그러니 괜찮습니다.”

극악소마의 결정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잘 숨겨두어서 좋을 때가 있고, 세상으로 나가서 좋을 때가 있다. 이 경우는 후자일 것이다. 적어도 천화루주에게 해가 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린 마주 보며 웃는 것으로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극악소마의 거처를 나와서 마당으로 갔을 때, 마차에 짐을 실으며 고월이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얼굴에 고민이 많아 보였다.

“고 군사. 너무 고심하지 말고 즐겨. 군사로 살아가면서 평생 수많은 계획을 세워야 할 텐데, 나와 소마님, 독왕님이 그 계획을 수행하는 경우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야. 그러니 이 상황을 즐기라고.”

고월이 감사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풍천교주가 질투의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내가 백 마디로 따는 점수, 언제나 한마디로 따는구나.”

“고 군사를 믿으십시오. 제겐 일 점 주고 교주님께는 백 점 드릴 겁니다.”

그렇게 내 하나밖에 없는 군사와 교주의 마음까지 다독여 준 후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출발입니다!”

* * *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었다.

특별히 제작된 침상은 열 명이 누워도 남을 크기였고, 이 큰 방을 채운 가구들은 명장들이 만든 비싸고 귀한 것들이었다. 곳곳에 장식된 도자기나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문고리 하나까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비싼 것들이었다.

이 크고 화려한 방에 십여 명의 여인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녀들은 속살이 보이는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도 제각각, 미모도 제각각이었다. 다만 그녀들의 표정은 하나였다.

절망.

세상의 모든 절망이 담긴 눈빛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좌우로 늘어서 앉은 그녀들의 중앙에 여불개가 앉아 있었다. 머리는 허옇고 주름은 쭈글쭈글했지만, 눈빛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정열을 뿜어냈다.

여불개는 전서를 읽고 있었다.

지생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애차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쭈글쭈글 주름진 손이 전서를 꽉 움켜쥐며 구겨서 여인 중 하나의 머리에 던졌다. 머리를 맞고 떨어진 전서를 여인이 주워서 등잔에다 태웠다.

“이거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물음에 정면에 앉은 황염(黃染)이 정중히 대답했다.

“겉으로 표는 안 냈지만, 우리가 여자 장사한다고 은근히 무시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잘 죽었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 말하는 것이다. 황염은 여불개의 오른팔로 누구보다 주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과연 여불개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죽은 지생과 애차는 별것도 아닌 것들이 자존심만 강해서 사람 무시하기 일쑤였다. 한 번도 자신에게 먼저 인사하는 꼴을 못 봤으니까. 그러니 그들의 죽음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이것이었다.

“어디 외부에서 치고 들어온 것 아니냐 이 말이야.”

“그럴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

“조사 결과 내부 갈등으로 죽은 것이 확실하다고 나왔습니다. 상부에서도 촉각을 세워서 조사했을 텐데, 그들을 속일 실력이면 우리라고 살겠습니까?”

여불개의 이마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불안하십니까?”

“다음 목표는 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는 알지 못했다. 양옆으로 고개 숙인 여인들의 눈빛에 하나의 염원이 담겼다는 것을. 제발 다음은 그가 되기를!

“만에 하나의 경우를 생각해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고수들을 다 불러들이겠습니다.”

여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그는 이런 농담을 했다.

지옥의 염왕도 날 받지는 않을 거다. 지옥 더러워진다고.

한데 그건 죽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을 때나 하던 농담이었다. 막상 위험을 느끼니 누구보다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혹시 모르니…… 음양귀(陰陽鬼)들에게도 연락하고.”

음양귀란 말에 황염이 흠칫했지만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예전이라면 몇 마디 오갔을 사안이다. 그자들을 움직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괜히 무림에 풀었다가 사고를 칠 수도 있다. 그럼 상부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이젠 그런 과정은 생략할 수 있어서 좋다.

이제 황염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몸이 하나 더 있는 느낌을 받게 한다. 단적으로 그는 자신의 눈빛만 봐도 수십 명의 여자 중에서 자신이 고른 여자를 딱 골라낸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아직 꿈을 다 못 이뤘다.”

여불개는 전 중원에 빠짐없이 자신의 기루를 세우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까지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해서 중원에 기루를 확장해 왔다. 직접 세우기도 했고 남의 기루를 빼앗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방법이 다 동원되었다. 진상을 보내 난장을 부리는 방법부터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음식에 약을 타서 손님들을 탈 나게 하거나, 심지어는 기루에 불까지 질렀다.

이런 무식한 방법이 통할까 싶겠지만, 의외로 가장 잘 통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평판을 떨어뜨려서 경쟁 기루를 없애거나, 그곳을 헐값에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자결하는 기루 주인을 볼 때면 여불개는 쾌감을 느꼈다.

“악착같이 살아서 꿈을 이루셔야죠. 자, 여기 루주님이 꾸실 새로운 꿈입니다.”

황염이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는 천화루에 관한 자료였다. 자신들이 진출하려는 귀주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가 천화루였기에 그곳부터 차지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내용을 살피던 여불개가 탐욕 가득한 눈빛을 발했다.

“추정되는 수익이 어마어마하군.”

“우리가 가진 중원의 어느 곳보다 돈을 많이 버는 곳입니다.”

“기녀들이 미녀들인가?”

“그렇기도 하고, 천화루주의 수완이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천화루주가 여인이랬지?”

“맞습니다. 기녀들도 잘 다루고, 손님들도 잘 다루고. 수하로 부리는 무인들도 그녀를 존경하고 있답니다.”

“그래봤자 하찮은 계집년이지.”

여인을 무시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어찌나 멸시하고 싫어하는지 황염은 여불개가 어려서 모친이나 혹은 다른 어떤 여인에게 모진 학대를 받은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분명 그의 병적인 색욕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모는?”

“상당히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여불개가 눈을 나른하게 뜨며 색심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이 여인들을 향했다. 이 여인들이 모두 한때 기루의 루주들이었다. 세상에는 실종되거나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그들이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여불개에게 기루를 넘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여인들. 가족들과 친구들이 아무리 찾았어도 결국 찾지 못한 여인들.

여불개는 자신이 뺏은 기루의 루주들 중 미모가 뛰어난 여인을 납치해서 수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짓이었지만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설령 누군가 알았다 하더라도 감히 여불개를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제야 균형이 맞겠군.”

여인은 모두 아홉 명이었는데 천화루주가 오면 열 명이 될 거란 의미였다.

황염이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났을 때, 천화루주를 여불개의 침소에 들여주겠다는 신호였다.

“이미 흑백쌍도(黑白雙刀)가 갔습니다.”

흑백쌍도는 여불개의 수족으로 무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무공 실력도 실력이지만, 어려서부터 철저히 명령만을 수행하는 비정한 칼잡이로 키웠기에, 사람의 감정을 지니지 않은 자들이었다.

이번 천화루 같은 경우는 어설픈 수작이 통하지 않을 곳이었기에 곧장 흑백쌍도를 투입했다.

직접 루주를 납치해서 강제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드는 방법을 쓰려는 것이다. 여기 있는 이 아홉 명의 여인들도 그렇게 당한 여인들이었다.

“손끝 하나 건들지 말고 잘 데려오라고 해!”

언제나 변함없는 색골 늙은이의 걱정이었다.

* * *

“오늘 귀한 손님이 올 거예요.”

천화루주 여정은 아침부터 자신의 거처와 내원을 청소하게 했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시비들과 시종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들은 천화루주가 귀한 손님이 온다면 그날 반드시 손님이 온다는 것을 매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온다고 기별을 받아서 알겠거니 했지만,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모두 천화루주가 특별한 사람임을 알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도 틀린 것 같았다.

내원으로 들어선 사람은 귀한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들이었다.

백색과 흑색의 장삼을 입은 흑백쌍도가 들이닥친 것이다.

천화루주는 시종과 시비들을 안으로 들어가게 했고, 그와 동시에 그녀를 지키는 내원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 숫자가 많았지만, 흑백쌍도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둘의 기세가 전체를 압도했기에 천화루 무인들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았다.

천화루주가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가요?”

그러자 흑백쌍도 중 흑의를 입은 흑도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주인이 그대를 보고 싶어 한다. 가자.”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갑고 무뚝뚝한 어조였다. 어떻게 보면 아이 같기도 했고, 목석이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대들의 주인이 누구신데요?”

“가보면 안다.”

“죄송하지만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라서,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네요.”

물론 흑백쌍도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우리 주인보다 더 귀한 분은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 앞을 막아선 천화루의 여덟 무인 중 네 사람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나머지 넷은 천화루주를 감쌌다.

검과 도가 빠르게 부딪쳤다.

지금껏 천화루를 지켜온 고수들이었지만, 흑백쌍도의 실력은 그들보다 위였다.

채 십여 수도 버티지 못하고 달려 나간 네 사람 중 두 사람이 팔과 허리를 길게 베이면서 쓰러졌다.

흑백쌍도가 그들의 목숨을 끊으려고 도를 치켜들던 바로 그 순간, 천화루주가 몸을 날려 그들 앞을 막았다.

“이 사람들을 죽이려면 나도 죽여야 할 거예요.”

그녀를 데려가는 것이 임무였기에 흑백쌍도는 도를 거두었다.

그녀가 다친 사람들의 혈도를 눌러 지혈했다.

“치료하고 기다리세요, 다녀오겠어요.”

“안 됩니다, 루주님!”

다른 무인들이 나서서 막아서려고 했지만 천화루주는 단호히 그들을 제지했다.

“모두 멈추세요!”

그녀의 명령에 무인들이 동작을 멈추었다. 이대로 싸웠다간 모두 개죽음당할 것을 모두가 알았다. 천화루가 생긴 이래, 이런 고수가 침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대들이 여기서 헛되이 목숨을 잃는다면 나는 평생 한이 되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물러나서 본루를 지키세요.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 그분에게 이 일을 전하시면 됩니다.”

무인들을 강제로 물리고 그녀가 흑백쌍도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흑백쌍도는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껏 여러 여인을 납치해 갔지만, 한 번도 이런 침착한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천화루주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사람의 앞날을 잘 봅니다. 한데 두 분의 앞날은 칠흑처럼 캄캄해서 잘 보이지가 않네요.”

흑백쌍도가 차갑게 웃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걸어갔다.

흑도가 그녀의 마혈을 제압하려고 손을 뻗던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지풍이 빛처럼 빠르게 날아들었다.

피이잉! 퍼억!

날아든 공격에 흑도의 손등이 뚫리며 그의 손에 구멍이 났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흑도가 부상을 지혈하려던 그 순간.

피이잉! 퍼억!

이번에는 지혈하려던 다른 쪽 팔의 팔꿈치가 꿰뚫렸다.

“으윽!”

흑도가 본능적으로 몸을 수그리던 순간.

피잉! 퍽!

이번에는 어깨가 뚫렸다. 너무 빠르게 날아들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지풍이 날아든 곳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연속해서 지풍이 날아들었다.

배와 허리와 무릎이 연이어 꿰뚫렸다. 비처럼 쏟아진 지풍은 그의 몸을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악!”

흑도는 평생 참았던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피이잉! 퍼억!

마지막으로 그의 이마가 꿰뚫리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지풍이 워낙 빠르게 연속으로 날아들었기에 모두 그가 죽는 모습만 보았다. 심지어 백도조차 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흑도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제야 모두의 시선이 지풍이 날아든 곳을 향했다. 천화루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얀 가면을 쓴 극악소마가 그들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19 절대회귀-226화 19

제226회 기녀를 구하러 오는 남자는.

천화루주의 눈에 오직 극악소마만 보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얀 배경에 극악소마가 걸어오는 모습만 보였다.

“오셨어요, 오라버니?”

천화루 무인들이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은 극악소마의 진정한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천화루주가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쓰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때 백도가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여 천화루주 뒤로 숨었다. 그가 재빨리 도를 뽑아서 천화루주의 목을 겨눴다.

“멈춰! 더 다가오면 이 년은 죽는다!”

극악소마는 발걸음을 멈췄다.

백도가 천화루주를 방패 삼아 살짝 고개를 내밀고 극악소마를 노려보았다. 가면 속 두 눈은 웃고 있었다.

천화루주의 목을 겨누고 있는 백도의 도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까지 여불개의 명령으로 수많은 납치와 살인을 자행했지만, 그 과정에서 한 번도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살인병기로 자란 그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이 감정이 낯설었다.

“당신 누구지?”

그러자 극악소마가 대답 대신 천화루주를 바라보았다. 괜찮냐는 눈빛에 그녀는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기녀를 구하러 오는 남자가 누구겠어요? 제 기둥서방님이시죠.”

기둥서방 소리를 들었지만, 극악소마의 눈은 웃고 있었다.

반면 백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루의 기둥서방 따위에게 흑도가 죽었다고? 자신이 인질극까지 벌여야 한다고? 태어나 처음으로 공포를 느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극악소마가 나직이 말했다.

“눈 감게.”

천화루주가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눈을 감는 순간!

피잉!

노출되어 있던 백도의 귀가 퍽하면서 날아갔다.

백도가 망설이지 않고 천화루주의 목을 베려던 바로 그 순간.

퍽!

그의 팔꿈치가 뚫렸다. 지풍은 그의 몸을 관통해도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을 곳을 향해 정확히 날아들었다.

이를 악물고 그녀의 목을 베려 했지만.

퍼억!

이번에는 도를 든 손의 손등이 뚫렸다. 손등을 뚫은 지풍은 도의 손잡이에 적중했기에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정확하고 정교하게 공격을 가해올 줄은 정말 몰랐다.

백도가 손에서 떨어지는 도를 다른 손으로 받아쥐려고 하던 그 찰나의 순간 그의 몸이 노출되었고.

피이잉! 퍼어억!

그의 왼쪽 눈이 뚫렸다. 휘청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던 그 순간 이번에는 오른쪽 눈이 뚫렸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가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피잉! 퍼억!

이번에는 입이 뚫렸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천화루주에게 도를 겨눈 그 손을, 그녀에게 이년을 죽이겠다고 협박한 그 입을 응징하고 있음을.

죽어가는 이 순간에도 백도는 믿을 수 없었다. 인질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과감하게 공격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공격이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고 정교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지풍을 저렇게 연속해서 쏠 수 있는지.

피이잉! 퍼억!

백도의 이마가 꿰뚫리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그는 온갖 의구심을 가진 채 숨을 거뒀다. 정말 기둥서방이라고?

천화루주의 얼굴에 감격이 스쳤다. 무뚝뚝한 극악소마는 자신의 분노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의 분노를 보여주었다. 언제나 그랬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자였다.

천화루주가 흑백쌍도의 시체와 주위를 흐르는 피를 내려다보며 아쉽게 말했다.

“오실 것 같아서 깨끗이 치웠었는데.”

“괜찮네. 피 냄새 좋아해서.”

천화루주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극악소마의 품에 안겼다. 극악소마는 함께 안아주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지만 천화루주는 전혀 섭섭해하지 않았다.

극악소마의 성격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은 자신을 꽉 껴안아 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천화루의 무인들도 일제히 절을 올리며 주인을 구해준 고마움을 전했다.

극악소마가 천화루주에게 말했다.

“함께 온 손님들이 있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천화루주가 장내를 정리했다.

다친 무인들은 의원에게 보냈고, 흑백쌍도의 시체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무인들은 모두 외원으로 내보내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곳으로 검무극을 비롯한 일행들이 들어섰다.

천화루주는 가장 먼저 검무극과 인사를 나눴다.

“이공자님, 그간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이 무인은 함께 안 왔네요?”

“우리 예쁜 심장은 누가 데려갈까 겁나서 본교에 꼭꼭 숨겨뒀습니다.”

천화루주가 웃으며 말했다.

“귀하게 될 분이에요. 세상에 내보내도 잘 헤쳐 나갈 거예요.”

검무극은 그녀가 비범한 여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뚱뚱했을 시절 이안의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증명했었다.

“제 말은 안 믿어도, 이 무인은 믿으세요.”

“아뇨, 루주님 말씀 믿고 내보낼 겁니다.”

귀영대 때문에라도 그녀는 세상에 나가게 될 것이다. 비천검법이 구 성에 이르렀으니, 내보내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이젠 청면도 함께 있었고.

검무극은 다음으로 독왕을 그녀에게 소개했다.

“여긴 본교 독왕님이십니다.”

한낱 기루 주인에게 자신을 소개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독왕은 전혀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극악소마에게 오라버니라 칭하는 여인이라면, 단순한 기루 주인이 아니었으니까.

천화루주는 독왕에게 정중한 예를 갖췄다. 그 자리에서 절을 올리려는 것을 독왕이 부드러운 내력을 발출해서 말렸다.

“그렇게 과한 예를 차리실 필요 없소.”

그러면서 오히려 독왕이 정중히 포권하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소.”

극악소마를 배려한 마음이었다.

“귀하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천화루주 여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독왕이 이렇게 동안이었다는 사실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안의 겉모습 속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보았듯, 어쩌면 그녀는 독왕의 저 외모 속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대하는 모습에 독왕을 향한 극악소마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아직도 서먹한 관계지만, 처음 출교했을 때는 며칠 동안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죽마고우다.

다음으로는 서대룡을 소개했다.

“여긴 제 오른팔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서대룡입니다.”

천화루주가 서대룡을 빤히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영혼이 맑으신 분은 참 오랜만에 뵙네요.”

천화루주는 서대룡의 착함을 한눈에 알아본 모양이다. 서대룡은 감격했다. 영혼이 맑아 보인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을 거다.

서대룡이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 표정으로 검무극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절 소개하는 말에 맑은 영혼, 이건 꼭 넣어주십시오! 다른 건 다 빼시더라도요.”

“어디 가서 손해 잘 보고, 여자에게 잘 속고, 사기당하기 좋게 생겼다를 저렇게 말해주신 것 아닐까?”

서대룡은 에이, 설마하는 마음으로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아니라고 말해주셔야죠, 하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고월을 소개했다.

“저기가 오른팔이라면 여긴 제 머리인 사람입니다.”

천화루주가 고월을 보는 눈빛은 이안을 볼 때와 비슷했다. 큰일을 하게 될 사람을 보는 경외와 응원의 눈빛, 하지만 그걸 드러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풍천교주는 검무극이 자기를 뭐로 소개할까 눈을 반짝였다.

“제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풍천교주가 말했다.

“더 가져갈 게 있어야 후원자지.”

“가져갈 게 많이 남았죠.”

“남았다고?”

“부자 망하고 아직 삼 년 안 지났잖아요?”

검무극이 숨겨둔 것들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자, 풍천교주는 괜히 고월에게 한마디 했다.

“나에 대해서 말하고 다니면 안 돼!”

더 챙겨갈 거라는 말에도 풍천교주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검무극이 농담으로 말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 슬픈 건 누군가에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순간일 테니까.

그렇게 검무극은 자기 사람을 모두 소개했다.

극악소마와 독왕, 서대룡, 고월과 풍천교주가 검무극의 좌우에 있는 모습을 천화루주는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그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천화루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천화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검무극 일행도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천화루주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머무실 방부터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 방 옆으로 주게.”

“네.”

그 말에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우리의 방문이 천화루의 안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가 먼저 말하기 전에 묻지 않았다. 그녀는 차분하면서도 신중했다.

각자 여장을 푸는 사이, 나는 극악소마와 함께 천화루주를 먼저 만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에 찾아뵌 것은 저와 소마님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기루를 운영하는 자인데 귀주를 목표로 했다는 정보를 들어서입니다.”

“혹 그 사람이 여불개인가요?”

과연 그녀는 이미 여불개에 관해 알고 있었다. 천화루는 극악소마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기도 했으니,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그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여불개가 중원 곳곳으로 기루를 넓혀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는 소문이 매우 좋지 못하죠.”

“그 소문의 대가를 치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천화루주의 눈빛에 기쁨이 스쳤다. 기루 사업을 하는 그녀였으니, 여불개와 관련한 악행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여불개가 귀주로 진출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소마님이 어떤 눈빛이었는지 루주님은 모르실 겁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저는 알 것 같은데요?”

그녀는 깊은 신뢰에서만 나올 수 있는 눈빛으로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한편 극악소마는 흑백쌍도를 죽였지만 여전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만약 자신이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랬기에 여불개에 대한 분노는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여불개에게 달려가고 싶은 분노가 느껴졌다.

반면 천화루주는 죽을 위기를 겪었음에도 너무나 밝고 차분했다.

검무극은 이 차분함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는 여인이라 생각했기에, 우리가 제시간에 오지 못했다면 애초에 다른 선택을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부럽습니다!”

괜히 극악소마 쑥스러워하라고 한 말이지만, 그는 말없이 천화루주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고월이 이후 일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오늘 사건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곳에 와서 천천히 놈을 상대하려 했는데, 여불개가 생각보다 빨리 천화루를 친 것이다.

“흑백쌍도가 죽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놈이 천화루를 본격적으로 칠 수도 있습니다. 이곳을 비우지 않으면 부상자가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막아내더라도 문제는 발생하겠지요. 여불개가 천화루를 치다가 당했다는 사실을 사도맹이 확실히 알게 될 테니까요.”

더는 이곳이 극악소마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네 생각은?”

내 물음에 고월은 극악소마와 천화루주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세운 계획은 소마님과 루주님이 허락을 해주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한 후, 고월이 자신이 세운 계획을 밝혔다.

“놈이 루주님을 원하니, 가셔야죠. 공자님과 소마님이 흑백쌍도 역할을 해서 루주님을 놈의 거처로 데려가십시오. 평소 특색 있는 옷을 입는 자들이니까, 두 분이서 흑백의 옷을 입으시고 죽립까지 눌러 쓰시면, 최대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놀랍고도 파격적인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번 계획의 핵심은 은밀함이었다.

“놈의 죽음이 최대한 늦게 알려져야 합니다.”

놈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에 야율한까지 치고 들어갈 계획이었으니까.

물론, 고월은 이번 계획에서 가장 신경 쓰고 조심스러웠던 부분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함께 가시는 분이 공자님과 소마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 위험한 곳에 루주님을 보내는 계획을 세우진 않았을 겁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천화루주가 함께 가야 하는 일이니, 극악소마의 결정에 따를 작정이었다.

천화루주가 먼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갈게요.”

극악소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 일을 허락했다.

고월이 고개를 숙여 이번 계획을 받아준 것에 대해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독왕에게 말했다.

“독왕님께도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여불개를 제거한 이후,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루주님을 지켜주십시오.”

내키지 않는 부탁일 수도 있었는데, 독왕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겠네.”

촤르륵!

독왕이 부채를 펼치며 살랑살랑 부쳤다. 그가 허락한 이상, 세상에 누가 있어 천화루주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극악소마와 독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두 사람은 부탁한다, 걱정마라, 이 순간에 할법한 말을 하지 않았다. 생색내는 사람도 아니었고, 신세를 말로 갚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고월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저는 먼저 가서 야율한을 상대할 준비 하고 있겠습니다.”

둘이 성공하고 오리라는 확신이 깃든 말이었다.

천화루주가 극악소마와 검무극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멋있는 흑백쌍도가 왔었다면 제가 먼저 따라갔을 거예요.”

그녀의 농담에 모두들 함께 웃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에게 물었다.

“백도 하시겠습니까? 흑도 하시겠습니까?”

극악소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는 흰색이 잘 어울려서.”


12 절대회귀-227화 12

제227회 난 기둥서방 친구다.

“안 비켜? 이 망할 년아!”

여불개가 미쳐 날뛰며 매타작을 시작했다. 중년 여인은 매를 맞으면서도 다른 여인을 감싸 안았다. 단순히 성욕을 푸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너무나 변태적으로 괴롭혀서 참지 못하고 여인을 돕고자 나선 것이다. 자신도 당했던 일이라,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수치스러운지 너무나 잘 알았다.

여불개가 여인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뒤로 내팽개쳤다. 밤의 제왕이라 불리는 그였지만, 화가 났을 때는 그저 한 마리 파락호에 불과했다. 아니, 차라리 그냥 파락호처럼 패기만 하면 다행인데, 여불개는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혔다.

“훌륭하다, 훌륭해. 늙은 년이 이런 역할이라도 해야 너희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지?”

여불개가 여인의 몸에 고통을 주려고 내력을 주입했다.

“으아아아아악!”

여인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참아야지! 희생하려고 나선 거잖아? 말리는 척만 한 거냐?”

그녀가 지켜주려 했던 젊은 여인이 나서서 애원했다.

“할게요! 제가 할게요! 제발 그만 하세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켜보던 여인들도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그녀들이 여불개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은 단지 붙잡혀 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불개는 그녀들 가족의 목숨을 두고 협박했다. 아이도 있었고, 형제도 있었고, 부모도 있었다. 반항해도, 달아나도, 자결해도. 가족을 찾아가서 죽일 거라고 협박했고, 실제로 달아났던 여인의 가족을 데려와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죽였다.

그녀들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이 치욕적이고 짐승 같은 현실에 적응한다는 점이었다.

“너희는 그냥 날 위해 존재하는 살덩어리에 불과해. 살덩어리 주제에 누가 누굴 지켜준다는 거냐?”

중년 여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하지만, 아들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자결하면 본보기로 아들을 데려와서 여인들 앞에서 죽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제발! 우릴 좀 구해주세요!’

여인의 간절한 눈빛이 창밖 저 멀리 새파란 하늘을 향했다.

‘제발!’

그녀의 간절함이 하늘 끝까지 닿았을 그때, 밖에서 수하가 보고했다.

“흑백쌍도와 천화루주 도착했습니다.”

여불개가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마당으로 천화루주가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 뒤로 죽립을 눌러 쓴 흑백쌍도가 들어섰다. 물론, 그들은 검무극과 극악소마였다.

들어오는데 여러 난관을 예상했었다. 검무극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일은 너무 쉬웠다.

입구를 지키던 무인 중 하나가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듯 이곳까지 안내한 것이다. 흑백쌍도가 여인을 데리고 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아무도 이 흑백쌍도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또한 평소에 흑백쌍도가 얼마나 무섭게 굴었으면, 조사는커녕 감히 눈을 마주치려는 자도 없었다.

그렇게 편하게 여불개 앞까지 온 것이다.

천화루주를 보는 순간 여불개는 감탄했다.

“오! 죽여주는구나!”

그는 천화루주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고상하면서도 도도했다. 저런 도도함을 꺾어서 자신의 노예로 삼는 재미야말로 세상에서 제일가는 쾌락이 아니던가?

그가 방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앞서 중년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정없이 내팽개쳤다.

“봐라, 저런 미모를 가진 년이 오는 자리다. 온종일 내 발가락을 핥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냐?”

여불개는 천화루주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다.

그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에게는 아방궁이고, 여인들에게는 지옥인 그곳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 꿇은 여인, 구석에 널브러진 여인, 침상에 누워 있던 여인, 모두 고개를 들어 천화루주를 보았다.

“너처럼 기루를 운영하던 이들이다.”

그녀들을 보는 순간 천화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평소 화를 내지 않던 그녀였지만 정말 화난 표정을 지었다.

“당신! 기루를 뺏은 것도 모자라 저들의 영혼까지 뺏으려 드는군요.”

여불개가 기분 좋게 웃었다.

“말하는 것도 고상해! 너, 마음에 든다. 널 가장 사랑해주마!”

방에 있던 여인들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천화루주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사람 앞날을 잘 본답니다.”

사람이 정말 화가 나면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내 앞날도 보이느냐?”

“몸 가죽이 벗겨진 채 쇠꼬챙이에 끼워져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있어요.”

지옥 중에서도 제일 고통스럽다는 무간지옥에 빠진 모습을 말한 것이다.

순간 표정을 굳혔지만 이내 여불개가 여유롭게 웃었다.

“지옥의 염왕도 날 받지는 않을 거다. 지옥 더러워진다고.”

그는 매번 하는 말을 하고서는 천화루주를 비웃었다.

“약자들이나 지옥 타령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는 상상을 하니 기분 좋냐?”

“당신은 겁쟁이예요. 겉으로는 대범한 척 굴어도 죽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는 겁쟁이.”

“저기 있는 년들도 처음에는 다 너처럼 그랬지. 자존심 세우고, 큰소리치고. 불과 한 시진 후에 내가 어떤 꼴이 될지, 내게 어떤 애원을 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내가 설마 저런 신세가 될까 싶지? 누가 와서 널 구해줄 것 같지? 그래, 사람의 마음이 다 그런 법이지.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말이다.”

바로 그때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곳으로 황염이 고수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여불개 앞을 막아서며 그를 호위하듯 지켰다.

“너희들 누구냐?”

황염이 천화루주에게 차갑게 물었다.

그제야 여불개는 저들이 가짜 흑백쌍도임을 알아차렸다. 천화루주의 외모에 빠져들면서 그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탓이었다.

“가짜라고? 이런 미친 새끼들이!”

까닥했으면 낭패를 당했다는 생각에 여불개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내 그가 마음을 다스렸다.

여불개가 손가락을 튕기자 방안에 있던 여인들이 우르르 나와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가슴을 붙인 채 엎드렸다.

여불개가 그녀들을 의자 삼아서 앉았다. 의자가 필요해서도,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그녀들을 인질로 쓰기 위해서였다. 여불개는 이런 자였다.

“저자들이 가짜라면 당연히 저년도 가짜겠군.”

“내가 천화루주인지 아닌지가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그냥 아름다운 여인들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내가 차지한 곳의 주인은 한 명뿐이니까.”

“나는 진짜 천화루주에요.”

여불개는 그 말이 사실이라 생각했다. 저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여자는 흔하지 않을 테니까.

“병신 같은 흑백쌍도는 이미 뒈졌을 테고.”

“제 기둥서방께서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서요.”

말을 하고도 우스웠는지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에 여불개는 후끈 달아올랐다. 자기 취향이었다. 정말 수많은 여자를 봤지만, 이렇게 끌리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여불개의 시선이 흑백쌍도를 향했다.

‘저것들을 믿고 찾아왔다는 말인데.’

그냥 봐선 별것 없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네가 진짜 천화루주라면 여긴 왜 온 거냐?”

“당신이 나를 찾는다고 들었어요.”

“어떤가?”

“못 생기고, 보잘것없고, 한심하고. 괜히 왔어요.”

순간 여불개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뭘 믿고 나를 찾아와서 이 지랄인지 모르겠지만 흑백쌍도가 내 수하의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큰 실수다.”

여불개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아니, 불안하고 싶어도 불안할 수 없었다.

우선 자신의 좌측 앞에 서 있는 세 수하는 흑야삼오(黑夜三烏)였다. 그들은 자신의 오랜 수족으로 흑백쌍도보다 한 수 위의 고수들이었다. 그 옆에 기다란 창을 든 남자 역시 수족인 창술고수 혈명창(血鳴槍)이었다. 이들 넷에 흑백쌍도까지. 이 여섯 고수가 있었기에 밤의 제왕이 될 수 있었다.

한데 오늘은 더 있었다. 지생과 애차가 죽는 바람에 외부에서 데려온 고수들도 있었다. 이번에 큰돈을 주고 데려온 악영오사(惡影五士)는 사파에서도 악명 높은 고수들이었다. 직접 싸우는 것을 보진 못했어도 명성이 높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든든한 이들이 있었다.

화원 앞 바위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남녀. 두 사람은 모두 괴이한 화장을 하고 있어서 누가 남자인지, 누가 여자인지 쉽게 구별되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음양귀였다.

괴이한 사술을 사용하며 상대의 내공을 빨아먹는 마귀들이었다. 당연히 남자인 양귀는 여인의 음기를 흡수하고, 여자인 음귀는 남자의 양기를 흡수하는 사공을 익혔다.

정기를 흡수하는 것만큼이나 싸우는 것을 좋아했는데, 워낙 내공이 막강해서 어지간한 고수는 그들에게 실컷 유린당하다가 정기를 쪽 빨린 채 죽었다.

게다가 성격 또한 잔인하고 포악해서 저희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족이나 일행까지 모두 몰살해 버리는 그야말로 미친 연놈들이었다. 사도맹에서조차 그들을 쓰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문제를 잘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믿을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대체 누굴 두려워할 것인가? 여불개는 여유만만이었다.

“그러니까 널 데려오려는 것에 화가 나서, 내게 복수하러 직접 찾아왔다 이 말이지?”

여불개는 성적으로 더 흥분했다. 반면 황염은 알지 못할 불안감을 느꼈지만, 여자에게 빠져 있을 때 끼어들었다가 진짜 죽을 뻔한 적이 있었던 후로는 절대 끼어들지 않았다. 다른 사안은 몰라도 여자 문제만큼은 절대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이었다.

천화루주는 대답 대신 바닥에 엎드린 여인들에게 말했다.

“다들 눈을 감으세요.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대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여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화루주의 차분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보고 있으니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녀들이 모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늘에 빌었다. 제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 모습에 늙은 색골은 더욱 색심이 가득 차올랐다.

“고년 정말 매력이 넘치는 년이구나.”

여불개가 악영오사에게 말했다.

“다섯 영웅께서는 저자들을 죽이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시지요.”

쉽게 말해서 돈값을 하란 뜻이었다.

악영오사가 앞으로 나서자 검무극이 나섰다. 이미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천화루주가 여불개와 대화하며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전음으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지, 천화루주는 어떻게 지키고 저 여인들은 어떻게 구할 것인지.

여불개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저기가 기둥서방이면, 너는 뭐냐?”

그러자 검무극이 대답했다.

“난 기둥서방 친구다.”

그 말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중 누구 하나 긴장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그렇지, 지옥까지 따라오면 쓰나?”

“저 기둥을 나도 좋아해서 말이지. 내 삶의 기둥이기도 하고.”

죽립 아래 있어 남들에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극악소마의 눈이 맑은 빛을 냈다.

검무극의 여유에 여불개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서 더 힘차고 강하게 명령을 내렸다.

“저 빌어먹을 기둥들 다 부러뜨려!”

여불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악영오사가 일제히 검을 뽑았다.

검무극은 그들을 향해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갔다.

가장 먼저 날아든 삼사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그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넣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삼사가 주저앉았고, 몸을 틀어서 옆에서 검을 찌르던 이사의 얼굴에도 주먹을 박아넣었다.

가볍게 피하고, 가볍게 툭 치고.

보는 사람들은 ‘이게 뭐지?’라는 의구심이 드는 싸움.

뒤쪽에서 공격하던 사사는 주저앉은 삼사 때문에 뛰어오르며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검무극의 계산에 들어 있었다.

뒤로 허리를 눕힌 검무극이 그의 심장을 비수로 가볍게 푹 찔렀다.

허공에서 비수에 찔린 그는 쇄도한 채로 앞으로 날아갔다. 방패가 된 사사 때문에 일사는 공격을 포기하고 몸을 틀어 피했다.

하지만 그쪽으로 피할 것을 예상한 검무극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강타했다. 일사가 주저앉고, 검무극이 뒤로 돌아서는 순간, 오사는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날아왔는지 모를 비수가 박혀 있었다.

검무극은 권마의 권법과 풍신사보와 비도술을 합쳐서 그들을 상대한 것이다. 너무나 극상승의 무의가 발휘되었기에 오히려 그것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복잡한 동작도 없었고, 현란한 보법도 없었다. 그냥 빠르고 정확했을 뿐이었다.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움직임.

그랬기에 모두의 눈에는 일부러 짜고 쓰러지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주먹으로 가볍게 맞은 것 같았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불개는 혼란스러웠다. 악영오사가 너무 하수처럼 보이기도 했고, 상대가 너무 고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으니까.

상대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오히려 음양귀들이었다.

그들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검무극이 강적임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다. 강적일수록 내공이 많을 테니, 음귀는 어서 빨리 그 맛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바로 그때였다.

꽝! 꽈르르릉!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은 먹구름이 주위를 어둡게 했다.

극악소마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검무극 옆에 나란히 섰다. 번쩍이는 섬광에 죽립 아래 극악소마의 하얀 가면이 밝게 빛났다. 검무극은 알았다. 극악소마가 여불개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비루한 늙은 색골.”

극악소마가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불개와는 한마디 말도 섞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이어진 말은 다음 말이 불필요한 마지막 말이었다.

“넌 입만 열면 지옥 타령이던데, 진짜 지옥으로 보내주마.”


24 절대회귀-228화 24

제228회 내 여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극악소마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세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흑야삼오(黑夜三烏)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말에 담긴 살의가 명백했기에,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상대가 여불개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자신들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으니까.

흑야삼오가 세 방향에서 달려들었다.

왼쪽에서는 어깨를, 오른쪽에서는 옆구리를, 정면에서는 목을 노렸다.

지금껏 이 합공을 버텨낸 자는 없었다. 확실히 이 밤까마귀들은 여불개를 밤의 제왕에 올려줄 만큼 고수였다. 상대가 극악소마란 점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완벽한 공격이었다.

딱 한 걸음을 움직여 극악소마가 합공을 피했다. 세 자루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가면 속 눈빛은 평온했다. 차분하고 정확하게 피잉!

바로 코앞에서 날아든 혈앙지를 일오는 피하지 못했다.

일오의 목이 꿰뚫리며 죽는 모습에, 이오가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분노가 만들어낸 허점은 한줄기 지풍이 뚫고 들어가기에 충분했다.

퍽!

마지막 남은 삼오의 검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수를 날렸지만, 상대의 죽립 끝을 잘라내는 데 그쳤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면 그것만 해도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되었겠지만, 여불개 밑에서 악행을 저질러 온 그의 인생은 한마디 자랑조차 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역시 이마에 구멍이 뚫려 절명했다.

바로 그때였다!

쇄애애애애애애앵!

엄청난 위력으로 무엇인가가 극악소마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것은 혈명창의 창이었다.

촤아아아악.

무서운 속도로 날아든 창이 극악소마의 등 뒤에서 멈췄다.

창을 손으로 잡은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혈명창은 경악했다. 자신의 창은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맨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면 어찌 자신이 사파에서 이름난 창술 고수가 되었겠는가?

검무극이 창을 바닥에 꽂았다.

극악소마가 돌아서며 바닥에 꽂힌 창대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채앵!

울려 퍼지는 맑은소리는 극악소마가 전하는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 소리를 출발신호로 삼은 검무극이 혈명창을 향해 쇄도했다.

혈명창은 양쪽 허리에 차고 있던 두 개의 단창을 빠르게 합쳤다. 거리상 창을 합치기에는 시간이 충분했다. 검무극이 명왕보로 쇄도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걱!

이제 막 연결된 창은 주인의 몸과 함께 양단되었다. 검무극의 손에는 흑마검이 아닌 흑백쌍도가 사용하던 도가 들려 있었지만, 검무극은 붓을 가리지 않는 명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스으으으으!

땅에서 솟아오른 덩굴이 검무극의 온몸을 휘감았다. 짧은 순간 상대의 몸을 묶는 사술이었다.

화원 앞에 앉아 있던 음양귀는 어느새 검무극의 좌우에서 검무극의 손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콰콰콰콰콰콰!

검무극의 양 손목을 통해 음양귀의 내공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무공은 파심흡성공(破心吸星功).

자신들의 막강한 내공을 투입해서 상대의 심장을 터뜨려서 죽인 후, 모든 내공과 정기를 거둬들이는 극악무도한 사공이었다.

혼자서도 어지간한 고수는 손쉽게 죽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둘이 달라붙은 지금 상대가 절대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공에 있어서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착각이었다.

내공이 계속 쏟아져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내상을 입어야 하는데, 검무극은 멀쩡했다.

양귀가 음귀에게 심각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추자는 신호였는데 음귀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내공과 양기는 더욱 맛있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금방이라도 검무극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았다.

주입된 내공이 반이 넘고, 삼분지 이가 넘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포기하지 못했다. 이미 들어간 내공이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양귀가 괴영술(怪影術)을 시도했다.

내공을 흡수하는 동안에는 절대 다른 무공을 사용해선 안 되었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검무극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원래라면 그림자가 검무극의 정신을 파고들면서 내상을 입혀야 했는데.

스스스스스!

그림자는 검무극과 합쳐진 후, 다시 얌전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사술이 안 통한다!’

양귀가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두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검무극이 실력을 드러냈다. 죽기는커녕 여유롭게 그들에게 말했다.

“어쩌지? 사술과 내공은 내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인데?”

음양귀는 검무극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의도적으로 손목을 내준 것이다. 이젠 멈추려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내력은 심연에 빠진 것처럼 끝없이 빨려가기만 했다.

그렇게 내공이 완전히 고갈된 채 혈맥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음양귀가 털썩 쓰러졌다. 그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두 사람의 내공은 검무극의 단전에 합쳐졌다. 애초에 타고난 천무지체인데다가 새로운 경지에 이른 검무극의 내공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순하게 그들의 내공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바다에 아무리 강물이 합쳐져도 여전히 바다는 드넓은 바다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희망이던 음양귀마저 죽는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여불개가 멍하게 장내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황염을 제외한 모든 고수가 죽었다.

‘꿈이었으면.’

놀랍게도 그는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야율한을 등에 업고 온갖 말초적인 욕망을 다 이루며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포기할 수 없다!’

여불개가 이를 악물었다.

―저년을 인질로 잡아!

여불개의 전음에 황염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해? 어서 인질로 잡으라고!

하지만 황염은 이미 아혈과 마혈이 제압당한 상태였다. 대체 이 난전 상황에서 언제 그를 제압했단 말인가?

원래라면 황염에게 천화루주를 인질로 잡게 하고 자신은 여기 여인들을 인질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여불개는 천화루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저년만 인질로 삼으면 살 수 있다.’

그가 천화루주를 제압하려던 바로 그 순간, 한발 먼저 극악소마가 그를 막아섰다.

여불개가 모든 힘을 다해 장력을 내질렀다. 하지만 평생을 수련만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극악소마를 여색이나 밝히던 늙은이가 어찌 감당하겠는가?

극악소마가 날아든 장력을 역시 장력으로 가볍게 해소했다.

바로 그때 비로소 여불개는 죽립 아래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백색 가면을 보며 멍하게 있던 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신은!”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혈앙지가 발출되었다.

핑! 퍼억!

도착해서 지금까지 참았던 한 줄기 빛과 같은 지풍이 그의 입을 뚫었다. 여불개가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때 천화루주가 여인들에게 말했다.

“자, 모두 눈을 뜨고 보세요.”

여인들이 눈을 떴다. 그녀들은 장내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간절히 이런 상황이길 바랐지만, 정말 여불개의 그 강한 수하들이 시체가 되어 널려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방에 널린 시체들 가운데서 여불개의 몸에 구멍이 늘어나고 있었다.

피잉! 퍽!

어깨가 뚫렸다. 어깨를 움켜쥐려던 손등이 뚫렸다.

상대가 마교의 극악소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여불개는 전의를 상실하고 허우적댔다.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첫 지풍에 입이 꿰뚫렸기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바닥을 기어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검무극은 알았다. 저 간절함이 나중에 무엇이 되어 돌아오는지. 한순간의 자비와 용서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지.

다행히 오늘 그의 상대는 극악소마였다.

빠악!

극악소마가 사정없이 그의 하물을 걷어찼다. 평생 그를 악행으로 이끌었던 욕망이 박살나며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반드시 복수할 거다!’

여불개가 다시 극악소마에게 기어갔다.

‘개 같은 놈! 쳐죽일 놈! 이 고통의 백배, 천배로 갚아주마!’

피를 뒤집어쓴 여불개가 애써 웃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발음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가 개과천선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팔다리의 관절이 꿰뚫렸다. 고통을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곳만을 골라 지풍을 쏘았다. 다음 생에서는 착하게 살라는, 한마디 충고조차 하지 않았다. 극악소마는 철저히 그를 무시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꽂혀 있던 창을 뽑아서 버둥거리고 있는 그의 배에 창을 내리꽂았다.

천화루주가 말한 그의 앞날은 지옥이 아니라 이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극악소마는 죽어가는 그를 차갑게 응시하더니 그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천화루주가 말한 불구덩이는 바로 극악소마의 마극광폭장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그의 몸이 통째로 날아갔다.

털썩.

그는 피떡이 되어 사라졌고, 부러진 창만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것이 바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극악소마의 대답이었다.

그 모습에 어떤 여인은 환호를 내질렀고, 어떤 여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으며 또 다른 여인은 그 참혹한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지만 느끼는 감정은 하나였다. 이제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기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꽈르르르, 꽝!

이 순간을 지켜보기라도 했다는 듯,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여인들이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화루주가 그녀들에게 걸어갔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물론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진 천화루주가 그녀들을 데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천화루주가 지금 그녀들에게 도움이 될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그녀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것이다.

여인들이 세 사람에게 절을 올렸다.

“구해주신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가족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들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은 얼마나 자신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얼마나 찾아 헤매고 있을까?

천화루주가 그녀들을 일으켜 세웠다.

앞서 젊은 여인을 구하려 했던 중년 여인이 눈물 젖은 얼굴로 물었다.

“은공의 성함이라도 알려주세요.”

그러자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서 들으셨다시피 여기 이분은 기루 주인이시고 저분은 기둥서방이시고 저는 기둥서방 친구입니다.”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는 뜻임을 알고 여인은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들의 마음을 밝혔다.

“앞으로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검무극은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채 혼자 살아남은 황염에게 다가갔다.

황염의 아혈을 풀어주며 물었다.

“살고 싶나?”

“네!”

황염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주인에 어울리는 수하였다. 주인이 죽은 마당에 충성심은 무슨 충성심이란 말인가? 대체 세상에 누가 있어 여불개와 그의 수하들을 이렇게 쉽게 해치워버릴 수 있단 말인가?

검무극은 검강을 이용해서 빠르게 땅을 판 후 허공섭물로 시체들을 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곳을 메웠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핏물을 모두 씻어내렸다.

그 사이 여인들은 장내를 깨끗이 정리했고, 극악소마는 뒷마당에 세워진 대형마차를 가져왔다.

검무극이 황염에게 말했다.

“나가면서 수하에게 말해라. 여불개와 한동안 다녀올 곳이 있다고. 개수작 부리고 싶으면 부려봐. 널 죽을 때까지 고문실에 처넣을 거다. 내 목숨처럼 살려서 평생 데려갈 거다.”

“그럴 일 없습니다.”

여인들을 마차에 태웠다. 황염이 직접 고삐를 잡았고 검무극이 그 옆에 앉았다.

그렇게 마차는 여불개의 거처를 달려 나갔다. 황염은 내원 출입을 금하며 시킨 것 이상으로 잘 연기했다. 이 정도면 야율한에게 도착하기 전까지 여불개의 죽음이 알려지진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독왕과 서대룡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대룡이 고삐를 잡았고, 이제 천화루주와 여인들은 독왕이 맡았다.

“저는 약속대로 살려주십시오!”

“약속한 적은 없었고 네게 물어는 봤지. 살고 싶냐고.”

황염이 뭐라 따지려던 그 순간.

퍼억!

검무극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도와준 대가는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 사실 여불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이놈도 고통스럽게 죽여야 했는데 지금 그럴 시간이 없었다.

검무극은 근처 숲에 깊이 땅을 파서 시체를 처리했다.

그사이 독왕과 서대룡은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검무극이 독왕에게 여인들을 부탁하자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돌아가면 일전에 실패했던 독 제조 다시 하자.”

또다시 천독림으로 놀러 오라는 이야기였다. 무사히 이번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한 것이다.

“이번에도 제가 멀리 문 옆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요.”

천화루주도 심각하게 검무극과 극악소마를 보내지 않았다.

“우리 서방님 잘 부탁드려요.”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소마님께 저를 부탁해야 한다니까요.”

제일 걱정이 태산인 사람은 서대룡이었다. 보관하고 있던 흑마검을 건네주며 그는 몇 번이나 말했다.

“각주님 실력이야 제가 잘 알지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여차하면 튀십시오! 괜히 객기 부리지 마시고!”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따라가고.”

그러자 서대룡이 움찔하며 한걸음 물러났다.

“아쉽지만 마차를 몰 사람이 없어서요.”

옆에서 독왕이 넌지시 말했다.

“마차는 내가 몰면 되는데. 오랜만에 한 번 몰아볼까?”

서대룡은 못 들은 척 검무극에게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언제나처럼.”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었다. 계속 성장해라, 서대룡. 언젠가는 너와 함께 싸우게 될 날도 올 거다.

그렇게 작별을 끝내고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고월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야율한을 상대해야 했지만 검무극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등을 지켜줄 사람이 극악소마였으니까.

쏴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비를 헤치며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달려갔다.

12 절대회귀-229화 12

제229회 목숨빚 받으러 왔소?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잘 빠진 몸매에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표현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는 섬뜩하면서도 정갈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활짝 열린 장원으로 들어섰다. 장원의 입구에는 대야방(大夜幇)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펼쳐진 참혹한 광경.

백여 구가 넘는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대야방의 방도들이 몰살당한 모습이었다. 시체들 사이사이에 붉은 무복으로 통일한 무인들이 살아남은 이들을 찾아서 죽이고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남자는 눈도 까닥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흐르는 피가 튀어서 그의 신발과 바지를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피바다를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는 걸음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누구도 앞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무서운 존재감이었다.

남자는 바로 사도맹 이인자 야율한이었다.

이곳을 몰살한 붉은 무복의 무인들은 바로 극도병단의 무인들이었다.

극도병단. 야율한이 이끄는 사도맹 최정예 조직.

극도병단 무인들은 야율한이 지나갈 때마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야율한이 대청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큰 의자에 대야방주 종심(從審)이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큰 부상을 당한 그는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주위에는 극도병단 무인들의 시체도 널려 있었다.

“네 이놈!”

대야방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내부가 진탕하며 왈칵 피를 토했다.

“네가 어찌! 네가 어찌 이런 짓을!”

흥분한 대야방주에 반해 야율한은 너무나 차분했다.

그가 어디론가 걸어갔다. 구석 자리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극도병단의 무인이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부상이 너무 심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야율한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이내 무인은 잠이 들 듯 숨을 거뒀다. 뒤에서 대야방주의 말이 들려왔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네 얼굴을 보면 항상 소름 끼치고 기분이 나빴다.”

야율한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넌 항상 감정을 숨겼지.”

대야방주는 한 번도 야율한에게서 어떤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뻐한 적도, 슬퍼한 적도, 화를 내는 것을 본 적도 없다.

“그 몸 안에 인간의 감정이 들어있기는 한가?”

그러자 야율한이 차분하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있어야 하오?”

굵직하면서도 듣기 좋은 그의 목소리가 대청에 울려 퍼졌다.

“뭐?”

“당신이 말한 그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 꼭 있어야 하냐고.”

너무 당당하게 묻자 대야방주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당혹스럽소. 당신도 그리 인간답게 살아오진 않았던 사람인데.”

“닥쳐라!”

노인이 버럭 소리를 쳤다가 또다시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그렇다고 누명을 씌워 한 방파를 몰살시키는 삶을 살진 않았다.”

무림맹과 결탁해 반란을 도모한 죄로 오늘 멸문을 당한 것이다. 증거는 명백했다. 대야방주 자신이 쓰지도 않은 서찰이 나왔는데, 자신과 필체가 같았다. 무림맹에서 받은 자신도 모르는 거액이 전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도맹의 기밀을 빼돌린 정황도 있었고, 증언도 나왔으며 무림맹 쪽 사람들과의 밀담을 목격한 증인도 있었다. 자신이 봐도 명백한 배신자였다.

“이유나 알자. 왜냐?”

대야방주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자가 야율한이란 것을 확신했다.

“당신은 잊어버렸군.”

야율한의 말에 대야방주는 흠칫 놀랐다. 마치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듯한 말이었다.

“뭘 말이냐?”

“예전에 당신이 내게 그랬소. 사람이 너무 그러면 상대방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대야방주는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없었다. 내가 그랬던가? 가물가물했다.

“당신은 하고 싶은 말을 참지를 못하더군. 무림을 살아가면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사람은 혐오하오.”

“그래서?”

야율한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순간 대야방주는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가 전부란 말이냐?”

“혐오하는 사람을 죽인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오?”

대야방주가 버럭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흥분한 대야방주에 비해 야율한은 차분했다.

“세상에 사람들은 모래알처럼 많은데, 굳이 싫은 사람과 같이 갈 필요가 있겠소?”

그래, 대야방주는 거기까진 이해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나만 죽였어야지!”

“그러기에는 내 기분이 너무 나빴소.”

“아무리 그랬어도…… 고작 그런 일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인단 말이냐?”

대야방주가 괴로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대단한 원한으로 이런 일을 당했다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식구들에게, 방파의 무인들에게 덜 미안했을 것이다. 기억나지도 않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문이 멸문을 당한다고?

대야방주가 자조적인 어조로 말했다.

“이게 다 운명이겠지.”

“운명 탓을 하고 싶겠지만, 이건 당신 탓이오. 남의 감정에 ‘고작’이란 말이나 붙이는 무신경한 당신 때문이지.”

대야방주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죽기 전에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네.”

죽음을 느꼈을까? 대야방주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야율한이 그에게 다가갔다.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대야방주가 힘겹게 손짓했다.

야율한은 순순히 마지막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쉬이이익!

대야방주가 마지막 남은 모든 내력을 동원해서 일장을 내질렀다. 조금 전 그 힘겹던 손짓은 이 한 수를 위한 연기였다.

번쩍! 서걱!

하지만 그보다 야율한의 검이 먼저였다. 그의 검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데루르르르.

목이 잘린 대야방주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야율한이 머리통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 늙은이야, 내가 설마 그런 이유로 이랬겠나?”

대야방주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말을 남긴 후, 야율한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야율한은 잠시 처마 아래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으로 한 남자가 비를 맞으며 뛰어와서 피풍의를 건넸다. 그는 온몸에 용문신을 한 차환(車煥)이었다. 사인방 중 살아있는 마지막 사내.

그는 온몸 가득 용문신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연상되는 동물은 흑표범이었다. 까만 피부에 날렵한 몸매. 검은 피부 때문에 유난히 드러나는 하얀 눈자위까지.

하지만 그는 표범보다는 한 마리의 용이 되고 싶은 남자였다. 그는 사인방 중 자신의 충성심이 가장 높다고 자부했다. 야율한이 자신만을 곁에 두는 이유 또한 그러한 자신의 충성심을 알아주기 때문이라 믿었고.

“됐다. 오랜만에 비 좀 맞자.”

야율한이 빗속을 걸어갔고, 차환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다시 그 뒤를 극도병단의 무인들이 늘어서서 뒤따라 걸었다.

* * *

나는 극악소마와 안가에 도착했다.

고월은 새로운 소식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맹 내부에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최근에 대야방이 멸문당했습니다.”

“누구에게?”

“대야방이 무림맹과 결탁하는 반란죄를 저질렀습니다. 증거는 명백했고 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야율한이 이끄는 극도병단에게 전멸했지요. 저는 이 일이 야율한의 소행이라 생각합니다.”

고월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야율한에 의해 대야방이 멸문을 당했으니까. 한데 그 시기가 달라졌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지만, 시기나 원인이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제가 파악하고 있는 대야방주는 결코 사도맹주를 배신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월이 의심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따로 있었다.

“시기가 공교롭습니다. 이번 일의 제보를 받고 사도맹이 대야방을 조사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언제인가?”

“애차가 죽었을 때입니다.”

정말 공교로운 시점이었다.

그에 대해 고월은 이렇게 판단했다.

“사인방 중 두 수족이 죽었을 때 야율한은 누군가 개입했다고 확신한 것 같습니다.”

“설마?”

“네, 그 일의 배후에 사도맹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복수로 대야방을 쳤다?”

“대야방주는 친맹주파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야율한이 자기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한 거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야율한이 맹주 자리를 욕심내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금은 사도맹주가 강력해서 감히 그 자리를 탐내지 못하지만, 비사인이 그 자리에 앉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사도맹주가 비사인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면 야율한을 죽여야 한다는 공공연한 말들이 세간을 떠돌기까지 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팽팽한 권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야율한은 사도맹주가 비사인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서 자신의 손발을 자르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우리 움직임 때문에 일찍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상황을 잘 이용할 수만 있다면, 우린 야율한을 죽인 후의 뒷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야율한을 죽이고, 그를 죽인 사람이 비사인이 되게 하자는 말이지?”

“맞습니다. 비사인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후계자로 확실히 자리 잡을 거고, 우린 이번 작전을 성공하게 되겠죠.”

나는 함께 듣고 있던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극악소마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내 뜻에 따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우선은 친구부터 만나봐야겠군. 아직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 * *

비사인은 자주 가는 고급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흉측했다. 베이고 뭉개지고 일그러지고.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지는 외모. 하지만 후계자가 되기 전의 그 어둡고 무거운 기운보다는 좀 밝아진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로 사도십삼랑들이 함께 밥을 먹으며 호위하고 있었다.

비사인에게 한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잘 지냈소?

비사인의 젓가락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였다.

―정말 당신은 겁이 없군. 본맹의 본단까지 찾아오다니.

말의 내용은 퉁명스러웠지만, 그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그는 내게 목숨 빚을 지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후계자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당신과 조용히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소.

―여기서 하시오. 사도맹 후계자가 혼자 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하는 말이오?

―나중에는 말만 하면 그게 다 이뤄지는 삶을 살 거요. 그러니 지금은 어려운 일도 좀 하시오. 자정에 사도맹 뒷산 정상에서 봅시다.

객잔을 나서기 전 나는 보았다. 비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음을. 친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적은 아닌 미소였다.

* * *

나는 사도맹 본단이 내려다보이는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회귀 전 대법재료를 찾아 헤매던 과정에서 이곳에 서서 저 사도맹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다. 회귀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때 뒤에서 비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 중요한 얘기가 있어 이 밤에 사람을 불러내는 거요? 객잔에서 전음으로 하면 되지.”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밥상을 엎을까 봐 그랬지.”

“내 성질 더러운지 모두가 아니까 괜찮았을 거요.”

비사인이 내 옆에 섰다.

“뒤에서 밀면 어쩌려고 돌아보지도 않소?”

“우린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정도로 친해진 것 아니었소?”

내가 그를 쳐다보자 비사인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아니겠지. 떨어져도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내려설 수 있으니까 여유를 부리는 거겠지.”

“그것도 맞소.”

내가 웃는 얼굴로 그를 보자 비사인은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사도맹 건물을 바라보았다.

“목숨빚 받으러 왔소?”

“어디 목숨빚 뿐이겠소? 후계자빚도 받아야지.”

“원하는게 뭐요?”

“뭐든 들어줄 거요?”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비사인도 나를 보았다.

“우리 야율한 죽입시다.”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이상한 사람인 것은 진작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미친놈인 줄은 몰랐소.”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가 물었다.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그랬다면 당신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겠지. 난 야율한을 죽이러 왔소.”

“왜 그를 죽이려는 거요?”

“그가 핏물을 부어 키운 은원이 돌고 돌아 내게로 왔소.”

야율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기에 비사인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와 원수진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당신이 맹주 자리에 오르면 야율한은 반드시 당신 자리를 노릴 거요. 그래서 지금 사도맹주는 고민 중일 테고. 언제 야율한을 없앨지. 만약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사도맹주는 후계자를 야율한으로 삼은 거요. 당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맹주 자리를 물려주는 셈이니까.”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야율한은 맹주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이지만, 동시에 사도맹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으니까.

“이번에 대야방을 친 것은 당신을 치기에 앞선 전초전에 불과하오.”

비사인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대야방주의 죽음은 사도맹주나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테니까.

“기억나시오? 언젠가 내가 천마가 되고, 당신이 사도맹주가 되어 다시 만났을 때, 그때를 추억하며 악수나 한 번 하자고 했던 일.”

나는 갈등에 휩싸인 비사인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일에 내 성패도 달려 있다.

“나는 야율한이 아니라 당신과 악수하고 싶소.”

15 절대회귀-230화 15

제230회 처음에 떠오른 결정이 뭐였소?

새로운 운명이 다가왔음을 알리며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비사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스쳤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자신들을 잡아먹기 위한 마교의 술책이라면?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은 지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자신이 경험한 검무극은 그런 수작을 부릴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은 직접 개입할 필요 없소. 한 가지만 해주면 되오.”

“뭘 해달라는 거요?”

“내가 야율한을 없애면, 당신이 없앤 것으로 처리해 주시오.”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설마 도와달라는 것이 그런 일인 줄은 몰랐다.

“왜 그런 부탁을 하는 거요?”

“당연히 본교와 귀맹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기를 바라서요.”

마교와 사도맹과의 전쟁.

비사인은 무림맹과의 전쟁은 상상해 봤어도, 마교와의 전쟁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전력으로 따졌을 때, 사도맹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물론 마교 역시 크나큰 피해를 보게 될 테고. 무림맹은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야율한을 마교의 손에 맡겨서 죽인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기쁨보다 숙적을 내 손으로 처단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맡긴다는 찝찝함이 더 컸다. 자존심이 상했다. 죽이더라도 자신이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마음을 감춘 채 비사인이 다른 이유로 곤란함을 표했다.

“맹주님은 내가 죽였다는 걸 믿지 않을 거요.”

“당신이라면 믿게 할 수 있을 거요. 적어도 이번 일을 잘 무마할 수 있을 거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비사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믿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물었다.

“야율한을 없앨 수는 있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검무극의 시선이 사도맹을 향했다. 빈틈없이 밝혀진 횃불들이 사도맹의 밤을 지켜내고 있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저곳을 차지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오. 이미 저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고, 우리를 믿지 않소. 아무 노력 없이 차지할 수는 없소. 쉽게 차지하면 쉽게 빼앗길 거요.”

잠시 고민하던 비사인이 단호히 말했다.

“거절하겠소. 만약 그를 없애더라도 내가 없앨 거요.”

비사인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검무극이 뒤에서 말했다.

“마음이 바뀌면 자정에 이곳으로 오시오. 나는 매일 올 테니까.”

비사인은 말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맹주전 반응은 어떤가?”

야율한의 물음에 차환이 대답했다.

“조용합니다.”

야율한은 군사를 두지 않았다. 모든 일을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했다. 누군가 그에게 왜 군사를 두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사 없이도 잘해왔는데, 굳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오만한 말이었지만, 저 말이 알려지면서 사도맹 내부에서 그를 따르는 이들이 더욱 늘었다.

“지생과 애차가 죽으면서 수입에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지생이 하던 신선채는 다른 자가 이어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애차와 진독거사가 만들어 팔던 광폭입니다. 진독거사가 죽는 바람에 광폭 제작이 중단되었습니다. 왜 진독거사에게서 광폭 제작법을 미리 얻어내지 않으셨습니까?”

차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차라면 모르겠지만, 야율한이라면 진작 얻어냈을 것이다. 진독거사는 야율한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자넨 어떤 생각이 들었겠나?”

“철두철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야율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차환을 응시했다. 차환은 자신의 대답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수하가 가진 것을 뺏는 수장은 결코 최고의 수장이 될 수 없네.”

차환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야율한을 존경하는지 표정으로 드러냈지만, 야율한은 그것을 습관적 감격이라 여겼다.

쉽게 감격하고. 쉽게 존경하고. 야율한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적어도 차환의 이 습관적인 감격에 기만은 들어있지 않았기에 그를 옆에 두는 것이다. 두 사람이 상대를 보는 마음에는 확실한 온도 차가 존재했다.

“소탐대실하면 안 돼! 우린 먼 길을 가야 하니까!”

“네!”

그때 밖에서 수하가 보고했다.

“비 공자가 찾아왔습니다.”

야율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왠지 그가 올 것 같았는데, 예상이 맞은 것이다.

“모셔라!”

그리고 차환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했다.

“소인은 물러가겠습니다.”

차환이 나가고 잠시 후 비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비 공자.”

“단주님, 잘 지내셨습니까?”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두 사람은 모두가 인정하는 숙적이었다. 다들 둘 중 한 사람은 상대에게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바쁘신 분 시간 뺏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쁘기는 우리 비 공자가 더 바쁘지 않소. 자, 앉으시지요.”

두 사람이 탁자에 마주 앉았다. 시비가 차를 내왔지만 비사인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대야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항이 너무 거세서 어쩔 수 없었소.”

“너무 거세게 몰아붙이신 것은 아니고요?”

부드러운 질문 속에 질책이 실렸다.

“극도병단이 좀 거칠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일부러 살생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니지요.”

야율한이 극도병단을 앞세웠다. 이제부터 말을 잘못했다간 극도병단을 모욕하는 것이 되기에, 이 말로 비사인의 입을 막은 것이다.

비사인이 가만히 야율한을 응시했다. 얼굴만 따져서는 비사인이 험악했지만,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야율한의 두 눈은 그 험악함을 압도했다.

비사인은 인정해야 했다. 지금까지 야율한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저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몰랐기에 더 두려웠다.

“사람 속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본맹을 위해 헌신해온 대야방주께서 무림맹과 손을 잡다니. 솔직히 두렵습니다. 제가 맹주가 되었을 때, 또 저런 배신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비공자는 인품이 훌륭해서 본맹을 잘 이끌어 나갈 거요.”

“맹주님이 인품이 훌륭하지 못해 배신을 당한 건 아니지요.”

야율한은 비사인에게서 어떤 도발과 자신감을 읽었다. 평소와는 다른 이 모습에서 야율한의 오해가 깊어졌다.

‘사도맹주가 그에게 언질을 준 모양이군.’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그에게 말했으리라.

야율한은 평소와 다른 이 태도가 사도맹주가 아니라 검무극 때문임을 알지 못했다.

‘과연 너 같은 애송이가 사도무림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내가 당신 나이가 되었을 때는 당신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어 있을 거요.’

‘애송이는 자라서도 애송이일 뿐이다. 결코 넌 맹주 자리에 앉을 수 없다.’

두 사람 눈빛에 담긴 진심은 이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마음과는 다른 부드러운 말들이 흘러나왔다.

“내가 오해를 일으킬 실언을 했소이다.”

“아닙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제가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중히 사과한 후 비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실수하기 전에 일어나야겠군요.”

떠나기 전에 비사인은 한마디 말을 남겼다.

“저는 단주님만 믿습니다.”

야율한이 든든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비사인이 방을 나왔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야율한을 한 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야율한을 보면 결정이 쉬워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여전히 어려웠다.

자신이 사도맹주가 되려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금일까? 그것도 마교의 칼을 빌려서?

석관추의 손자를 해치우고 후계자가 되었을 때, 앞으로 어떤 일도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는데.

여전히 자신은 인생을 바꿀 큰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밖으로 나온 비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다시 전음이 날아들었다.

-만날 같은 곳에서 밥 먹으면 암살당하기 딱 좋은데.

검무극의 전음이었다.

-하루도 못 참고 이렇게 찾아올 거였으면, 그 절벽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은 왜 한 거요?

-기다리는 것은 기다리는 거고. 지금은 그대를 설득하러 온 거요. 이번 일에 우리 운명이 달려있으니까.

잠시 비사인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가 반주로 술을 한잔 마셨다. 지켜보던 사도십삼랑의 일랑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랑.”

“네, 공자님.”

“제가 사도맹주가 될 것 같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차기 맹주는 공자님이시지요.”

“맹주가 되고 십 년 후에도 내가 맹주 자리에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순간 일랑은 일찰나 대답을 망설였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을 망설이게 한 존재가 바로 야율한이란 것을.

일랑이 대답했다.

“저희가 평생 안전하게 지켜드릴 겁니다.”

비사인이 미소를 지은 후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다시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저 사람들도 다 죽을 거요.

-날 설득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소.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말하는 거요. 당장 나만 해도 마찬가지요.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사람,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 내 실패는 그들의 실패가 될 거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오.

비사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검무극은 더는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한번 더 보기를 청했다.

-할 말이 있소. 이따 절벽에서 봅시다.

* * *

“왜 보자고 한 거요?”

자정이 되었을 때 비사인은 절벽에 나왔다.

먼저 와 있던 검무극은 밤하늘에 총총한 별을 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날이 흐려 별을 볼 수 없었는데, 오늘은 너무 잘 보이오.”

비사인이 검무극의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검무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있소. 내 마도는 탁자를 부수지 않는다.”

비사인이 고개를 돌려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검무극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꼴을 못 보겠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게 본교 사람이든, 정파든, 사파든 참을 수가 없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야율한의 수하들이 신선채란 것을 만들어서 젊은이들을 농락하고 파멸로 이끌고 있었소. 광폭이란 약을 만들어서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음으로 이끌었소. 그 지랄을 두고 볼 수가 없는 것이 내 마도요.”

검무극의 시선이 천천히 하늘에서 비사인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검무극이 물었다.

“당신의 사도는 무엇이오?”

비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사도맹을 잘 다스려야지 하는 각오와 야망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통치 이념은 아직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사인은 아직 젊었으니까.

“그 대답을 찾으면 이번 결정이 쉬워질지도 모르겠소.”

오늘은 검무극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비사인은 밤이 늦도록 한참을 더 서 있었다.

* * *

다음날 절벽에 비사인이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을 보자마자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고는 있소?”

나직했지만 미처 어제 내지 못한 분노가 담긴 말이었다.

“그를 죽이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가 이렇게 참고 있었겠소?”

“어렵다는 것 알고 있소.”

“아니, 당신은 모르오. 내가 왜 모르는지 알려주겠소. 예전에 맹주님에게 들은 말이 있소. 야율한은 절대고수들을 거느리고 있으니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요. 그중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해주겠소.”

“그게 누구요?”

“오뢰신검(五雷神劍) 백행(伯杏).”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그자가 아직도 살아있었소?”

사파 출신의 전대인으로 당시 사도무림을 씹어먹던 그야말로 날고 기던 고수였다.

“그러니 좋게 보내줄 때 떠나시오. 그 두 다리 멀쩡할 때 돌아가라고.”

그러자 검무극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본교도 한 사람을 파악하고 있소.”

“당신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혈륜겁(血輪劫) 다말(多末).”

이번에는 비사인이 놀랐다. 그는 한자리에서 수백 명의 정파 무인들을 죽이며 혈겁을 일으킨 그야말로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무공실력은 오뢰신검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 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였다.

“이들 두 사람이 끝이 아닐 수도 있소. 그래도 하겠다는 거요?”

비사인이 물음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거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비사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하게 미친 것 맞소.”

“내가 실패하더라도 당신은 손해 볼 것 없소. 그런데 왜 망설이는 거요? 혹시 날 걱정하는 거요? 그래서 오뢰신검을 말해준 거요?”

비사인이 살짝 당황했다.

“무슨 소리요? 내가 당신을 왜 걱정해?”

“왜 화를 내시오? 그냥 물어본 건데.”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까 그렇지.”

검무극은 부드러운 어조로 설득을 이어나갔다.

“이 결정이 쉬운 결정 아니란 것 알고 있소.”

“그런데도 당신은 나를 밀어붙이고 있지.”

“당신도 경험해 봐서 알지 않소? 이런 큰 결정일수록 처음에 딱 떠오른 그 결정이 맞을 때가 많다는 것 말이오. 그 원초적인 감을 무시하면 결국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거고. 처음에 떠오른 결정이 뭐였소?”

잠시 사이를 두고 비사인이 대답했다.

“하자는 쪽이었소.”

“그럼 합시다.”

비사인은 알았다. 이 일의 고민은 끝이 없다는 것을.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민이 될 거라는 것을. 그냥 확 질러버려야 한다.

그리고 비사인은 질러버리고 말았다.

“좋소. 합시다.”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지금의 자신은 없었으니까.

목숨 빚 내놓으라고 왔으니, 그 큰 빚 이렇게 갚자고.

“합시다!”

적어도 자신을 나쁜 쪽으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 같은 사람, 검무극은 그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검무극은 기뻐했다. 그리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준 비사인이 고마웠다.

“고맙소. 정말 잘 생각하셨소. 나도 당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 일을 진행할 생각을 못 했을 거요.”

“나중에 이 순간을 돌아봤을 때, 왜 그런 한심한 결정을 내렸지, 라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검무극이 고마움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지금은 돌아보지 맙시다. 나중에 우리가 천마가 되고 사도맹주가 된 후에, 돌아보는 건 그때 합시다.”

18 절대회귀-231화 18

제231회 잘못된 인생보다 더 나쁜 건.

“야율한을 죽일 계획은 있소?”

비사인의 물음에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없소.”

어이없어하는 비사인을 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당신 허락이 떨어져야 본격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겠소?”

“내 허락이 떨어지면 없던 계획이 생기기라도 한단 말이오?”

“생길 거요.”

“정말 당신은 대책 없는 사람이오.”

말은 그렇게 해도 비사인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결정을 내리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것만은 지켜주시오.”

비사인이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이미 허락을 하고 말하는 것이니 조건보다는 부탁에 가까웠다.

“오뢰신검이나 혈륜겁은 죽여도 되지만, 극도병단은 건들면 안 되오. 그들은 야율한의 개인 수족이 아니오. 본맹의 최정예들이지.”

천마신교로 따지면 마군들은 그냥 두고 마군주만 죽여달라는 말이다. 야율한을 잃는 것만으로도 큰 손실이지만, 그래도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알겠소.”

검무극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비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소. 이번 일이 잘못되면 야율한에게 죽는 건 둘째치고, 당장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소.”

“쫓겨나면 내게 오시오. 내가 받아주겠소.”

“죽으면 죽었지, 거기로는 안 갈 거요.”

비사인의 흉측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는 것을. 그를 정말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그의 감정이었다.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하시오. 당분간은 그 객잔에서 점심을 먹을 테니까.”

“고맙소.”

그렇게 비사인이 먼저 그곳을 떠났다.

검무극은 그곳에 머무르며 사도맹의 밤 전경과 밤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본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 * *

안가로 돌아온 나는 곧장 고월과 극악소마, 풍천교주를 한자리에 모았다.

“사도맹 후계자 비사인이 뒷마무리를 책임져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제 우린 야율한을 죽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그 사람의 마음을 바꾼 건가?”

질문을 던진 풍천교주는 물론이고 극악소마와 고월마저 놀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득하더라도 시간이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너무 빨리 설득에 성공한 것이다.

“젊은 후계자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자네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풍천교주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비사인이 부탁을 들어준 것은 희소식이지만,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야율한의 수하를 추가로 알게 되었습니다.”

혈륜겁이 야율한의 수하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새로 알게 된 사람은 바로 오뢰신검입니다.”

오뢰신검이란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새외의 풍천교주도 그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무림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자 아닌가? 무림공적으로까지 몰렸고.”

“맞습니다. 바로 그자입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야율한의 그늘에 숨어 있었군.”

혈륜겁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인데, 오뢰신검은 그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닌 자였다.

그때 풍천교주가 불쑥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그들은 두고 야율한이 오직 혼자 있을 때 죽이면 되지 않나? 그들도 사람인데 언제나 붙어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세 사람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데,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야율한이 죽고 나면 그를 죽인 것은 비사인이 될 겁니다.”

가장 먼저 고월이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들이 비사인에게 복수할 것을 걱정하시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어. 복수해줄 관계인지, 그냥 떠나버릴 관계인지도. 다만 만에 하나라도 복수를 마음먹는다면, 비사인은 반드시 죽고 말 거네.”

“비사인이 공자님을 돕겠다고 나선 이유를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를 생각해주는 마음을 비사인도 알아차렸을 거란 말이었다.

다시 풍천교주가 나섰다.

“이번 일 나도 돕겠네.”

그가 이번 일을 돕겠다고 나설지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말이십니까?”

“부끄러워서라도 도와줘야겠네.”

비사인이 복수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지 못하고 야율한만 죽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이 부끄럽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건 핑계고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이서 상대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 아닌가? 왜? 내 실력이 못 미덥나?”

“교주님의 실력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다만 교주께서는 더 중요한 일을 해주셔야 해서요.”

“무슨 일?”

“지금까지처럼 고 군사를 지켜주십시오.”

내 시선이 고월을 향했다.

“만에 하나라도 우리 쪽이 노출되면 고 군사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교주님이 지켜주셔야지요. 지금까지 교주님이 계셔서 고 군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습니다.”

“자네는 괜찮겠나?”

“저는 소마님이 계시니까요.”

내 시선이 지금껏 조용히 듣고만 있던 극악소마를 향했다.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네. 소마님만 믿겠습니다.”

이 순간 진짜 내 마음은 이것이었다.

소마야, 나만 믿어라. 어떤 상황에서도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거다.

이것이 그가 내게 베푼 호의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 * *

총군사 사마명은 작전지휘실에 있었다.

천마전보다 더 안전하다고 알려진 이곳에서 검무극과 관련한 극비 작전이 진행 중이었다.

사마명은 검무극이 출교한 후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사건이 터지면 재빨리 검무극을 지원해야 했고, 사도맹과의 관계가 전쟁으로 치닫지 않게 조종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을 사도맹 측에 들키지 않아야 했다.

지금까지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지생을 없애고 애차를 없애고 여불개까지 이쪽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없앴을 때, 통천각의 수석 군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야율한의 군사였다면…… 저도 꼼짝없이 당했을 겁니다.”

사마명은 아닐 거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자신이라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고월의 능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중원에 구축한 정보망도 우리 통천각과 겹치지 않고 상호보완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공자가 천마가 된 후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는 정말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새로운 마도를 밀어붙이듯, 고월이 자신의 자리에 앉으면 통천각 역시 새로운 통천각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보고가 날아들었다.

수석 군사가 심각한 얼굴로 사마명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공자 쪽에서 한 사람에 관한 정보를 요청해왔습니다.”

“누구인가?”

수석 군사가 심호흡을 크게 한 후에 보고했다.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미리 표현한 것이다.

“오뢰신검입니다.”

사마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율한이 오뢰신검까지 데리고 있답니다.”

혈륜겁이 야율한의 수하로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한데 오뢰신검까지 있었다고?

“야율한에 혈륜겁에, 오뢰신검까지. 두 사람이 그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전의 성공 확률이 어떻게 되나?”

“오뢰신검의 존재를 몰랐을 때 사 할로 예상했습니다.”

통천각에서 분석한 확률이었다. 정확한 검무극의 무공수위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껏 그가 해낸 여러 일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였다.

“한데 오뢰신검이 야율한을 돕는다고 가정하면 이 할대로 떨어질 거로 예상합니다. 자세한 분석은 마치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이 할이라.”

통천각의 작전 성공률 분석은 거의 정확했다. 이 할이라는 수치는 실패로 봐야 한다.

“만에 하나 오뢰신검 말고 다른 고수가 등장한다면, 일 할도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사마명은 새삼 이번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다시금 실감했다.

“오뢰신검과 관련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를 다 보내게.”

“알겠습니다.”

사마명이 돌아서 나가려는 수석 군사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네?”

“자네는 성공 확률을 얼마로 생각하냐는 말이네.”

“저는…….”

그는 수하 군사들 중 검무극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군사였다. 대답을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가 생각지도 못한 수치를 내놓았다.

“저는 반반으로 봅니다.”

사마명은 깜짝 놀랐다.

“이 할과 오 할, 차이가 너무 나는군.”

“제 감정적인 분석입니다.”

“본 각의 분석력이 엉망이란 뜻 아니고?”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 감입니다.”

당황한 수석 군사를 사마명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왜 오 할인가?”

수석 군사가 말했다.

“세상에는 분석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공자가 그런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질문 공세가 있기 전에 수석 군사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사마명은 천마에게 보고하기 위해 보고서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봐 온 검무극은 수치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번 일을 허락한 천마 검우진도 마찬가지고. 어쩌면 분석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 점이 두 사람의 가장 닮은 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마명은 천마전으로 향했다.

* * *

고월은 작전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이번에는 그에게 이 상황을 즐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제대로 계획을 세워야 했고, 확실하게 그 계획을 따라야 했으니까.

고월이 작전을 세우는 동안 우린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극악소마는 방에 하얀 벽지를 바른 후, 그것을 바라보며 수련에 들어갔고, 나는 뒷마당에서 무공수련에 빠져들었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가진 실력을 다 발휘해야 할 것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만, 반드시 야율한을 없앨 것이다. 죽어가는 그의 귓가에 해줄 말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오랜 세월 복수에 붙잡혀 한 번도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 사람에게, 남은 생이라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해줘야 했으니까.

뒷마당에서 무공수련 중이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자네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내가 농땡이를 칠 수가 없지 않는가?”

돌아보니 풍천교주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월이 하도 잔소리를 해서 쫓겨나왔네. 공자님은 지금도 땀을 흘리고 계신데, 뭐하냐고.”

“기왕 나오신 것, 같이 수련하시죠. 요즘 살이 빠지니 교주님 인물이 훤칠해지고 있으십니다.”

“그래?”

풍천교주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내친김에 한마디 더 기분 좋은 말을 해주었다.

“젊어서 여인들이 꽤 따라다녔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그야 뭐, 나 따라다니는 줄이 좀 길었지.”

풍천교주가 으스대는 표정으로 턱을 치켰다. 턱 아래 두툼한 살을 보니 아직 멀었다.

“그때의 인기를 되찾으셔야지요.”

“나이 먹고 그게 어디 쉽겠나?”

“수련하셔서 육체 나이를 십 년 젊게 하시면, 십 년 전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이십 년 젊게 하면 이십 년 전으로 가는 거고요.”

풍천교주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넨 아무것도 아닌 말로 괜히 사람 설레게 한단 말이지.”

“젊음을 되찾는 일인데 어찌 아무것도 아닌 말이겠습니까? 꼭 보여주십시오! 앞날을 어찌 압니까? 교주님이 이십 년쯤 젊어진 모습으로 변신하실지요. 처음 교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이곳에서 이런 대화를 할 줄 알았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자네가 내 단조로웠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었지.”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풍천교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조금만 더 젊었어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네. 한데 이젠 알지. 잘못된 인생보다 더 나쁜 건 후회하면서 사는 인생이라는 걸.”

항상 나와는 너스레를 주로 떨었기에 그와 이런 진지한 대화는 오랜만이었다.

“내가 교주일 때는 그 자리가 어마어마한 자리라고 생각했었다네.”

휘이이이이잉.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풍천교주가 시공이환술을 열어서 새외의 풍경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저 멀리 풍천교의 웅장한 모습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곳의 꼭대기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다네. 내가 새외의 왕이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부러워할 거다. 그땐 입에 씹히는 모래조차 당과처럼 달콤했었지.”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는 더는 후회하지 않는다네.”

“멋지십니다.”

“멋지긴.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닌데.”

“낫습니다.”

“낫다고? 어떤 점에서?”

“교주님을 똑바로 봐주는 사람들이 생겼잖습니까?”

허공에서 풍천교주와 시선이 얽혔다.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이 눈빛과 저걸 바꾸다니! 난 무림 역사상 가장 바보로 남을 거야.”

“무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택을 한 사람으로 남을 겁니다.”

풍천교주가 웃었다. 나는 자꾸 말해줄 생각이다. 그의 결정이 값진 것이었음을.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 결정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다.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지.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선 그런 상실감을 느끼게 하진 않을 것이다.

풍천교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를 따라서 모래바람이 부는 황무지를 걸었다.

“예전에 그걸 물어본 적 있지?”

오늘 풍천교주가 굳이 시공이환술을 연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풍천교주가 그간 잊고 있었던 말을 다시 꺼냈다.

“시공이환술에서 흐르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다르게 할 수 있냐고.”

23 절대회귀-232화 23

제232회 나중에 또 후회하시려고요?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불어온 모래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예전 그에게 했던 질문은 내겐 아주 중요했다.

“제가 시공이환술 내에서 시간을 느리게 갈 수 있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죠. 에끼 이놈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나는 정확히 그가 했던 말을 기억했다.

“실제로 교주님이나 전대 교주님들이 시도해 보셨지만 불가능하다고 하셨고요.”

“기억력도 좋군.”

잠시 사이를 두고 풍천교주가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제로 아무리 연구하고 수련해도 불가능했지. 여전히 같은 마음이네. 에끼 이놈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럼 거짓은 무엇입니까?”

“자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사실 교주들에게 은밀히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이 있었다네. 시천비술(時天祕術)이라 하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격동했다. 내 감정을 읽은 풍천교주가 재빨리 말했다.

“너무 기대하지 말게. 시천비술을 실제로 익혀 낸 교주는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리 연구하고 수련해도 시간 낭비에 불과했어. 이게 제대로 된 비법인지도 회의적이라네.”

그럼에도 나는 격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이 일은 내게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풍천교주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시천비술은 이백 년 전 당시 교주였던 연명덕(燕銘德)이 자리에서 물러나 은거 생활을 하던 중 시공이환술의 내부와 외부의 시간을 다르게 가게 하는 데 성공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하네. 내부의 시간은 한 시진이 흘렀는데, 나왔을 때는 채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고 했지.”

풍천교주가 다시 한번 이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연 교주 이후로는 아무도 이루지 못했지.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시 연 교주는 풍천교 역사상 가장 내공이 심후했고, 천무지체를 타고 태어나 무학의 경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거든. 그러니 보통 사람은 그가 남긴 비법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 아니면 그가 남긴 비법이 엉터리이거나.”

“한데 왜 이런 말씀을 제게 해주시는 겁니까?”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전에 내가 먼저 물어보세. 자넨 왜 이 불가능한 일에 관심을 가지나? 아, 물론 누구나 그런 공간을 꿈꾸겠지만, 자넨 막연한 바람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이유는 있었다. 구화마공 때문이었다.

구화마공을 전수받으면 나는 반드시 대성을 이뤄야 한다. 게다가 내 목표는 십성 대성이 아니라 십이성 대성.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다른 무공이라면 모를까, 구화마공의 십이성 대성.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원 없이 수련해서 두들겨 패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지금 자네 실력에 수련까지 더해서 패겠다고? 누군지 몰라도 잘못 걸렸군.”

그래, 교주 말처럼 잘못 걸렸다. 화무기든, 나든. 우리 둘 중 하나는 제대로 잘못 걸렸다.

“처음 자네가 그걸 물었을 때만 해도, 이런 순간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네.”

곧이어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시천비술을 자네에게 전수해 주겠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비록 아무도 이루지 못한 비기라고는 하지만, 절대 남에게 내주고 싶은 비기는 아닐진대.

“나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네라면 성공할지도 모르지.”

왜 이런 호의를 베푸냐는 떨리는 내 눈빛에 풍천교주가 호탕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혔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이 안에서는 나를 사부로 삼겠다고.”

“!”

“사부가 제자에게 비법을 전수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안다. 인간적인 만큼 욕심도 많고, 지금까지 내게 준 것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한데 그는 또 주려 한다. 자신이 가진 비기를 또 내어주려 한다.

“나중에 또 후회하시려고요?”

“후회하면 하지 뭐. 내가 또 후회라면 일가견이 있는 사람 아닌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그는 진정으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있었다. 서대룡이 날 보고 말했다. 한 개를 주면 열 개로 되돌려주는 사람이라고. 그건 내가 풍천교주에게 할 말이었다. 한 개를 줬는데, 그는 열 개로 갚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넙죽 절을 올렸다.

“심술도 부리고 생색도 내십시오. 제가 평생 다 받아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히려 풍천교주가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게 감사받을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네. 오히려 성공도 못 한 비기를 전수해 자네의 심력과 시간을 뺏을까 걱정돼.”

“이후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자, 지금부터 잘 듣게.”

풍천교주가 시천비술의 구결을 전수해 주었다. 내가 잘 외웠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사람에 따라 느리게 하는 시간도 차이가 나겠지요?”

“그렇겠지?”

“그럼 언젠가 시천비술의 경지가 극에 다다르면 그곳의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걸음마도 못 하면서 날아다닐 꿈을 꾸는가?”

“제가 무공 욕심은 많아서요.”

우린 마주 보며 웃었다.

“그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일이겠지.”

“제가 한번 넘어서 보겠습니다.”

“안 되겠거니 싶으면서도 자네라서 한편으론 기대되기도 해. 자네가 이걸로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할지.”

그는 모를 것이다. 이 순간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반드시 시천비술을 갈고 닦아 그를 경악하게 만들 것이다.

* * *

나는 홀로 시공이환술로 공간을 열고 그곳에서 다시 시천비술을 발휘했다.

휘이이이이익.

주위를 휘도는 바람 소리가 신묘하게 들렸다. 아직은 구결의 초입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요구하는 내공이 엄청났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왜 다들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포기했는지.

비술이 난해한 것도 문제지만, 요구하는 내공의 양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되면 비법에 성공하더라도,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짧아져서 비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이곳에서 무공수련을 한다고 치면 추가로 내공이 들어갈 테니 더욱 엄두가 나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내겐 의미가 있다.

나의 내공은 이 무림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하고 웅혼했으니까.

더불어 확실한 믿음도 있었다. 다른 최상급의 무공이 그러하듯, 시천비술 역시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내공의 효율성이 급속하게 좋아질 것이다. 당장 풍신사보만 해도 그랬다. 경지가 올라가면 갈수록 속도는 더 빨라지고 요구되는 내공은 적어졌으니까.

나는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천비술을 익혔다. 나를 믿었다. 나 역시 천무지체였고, 연명덕이 이 비법을 만들 당시의 무공 수준보다 지금의 내 무공 수준이 더 높을 거라 자신했기 때문이다.

* * *

다음날 고월과 마당에서 마주쳤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월의 물음에 내 시선이 옆에 서 있던 풍천교주를 향했다.

“좋은 일이 있었다.”

눈치 빠른 고월은 그것이 풍천교주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만날 이공자 싫다 싫다 하시면서, 또 뭘 가져다주신 겁니까?”

고월의 물음에 풍천교주는 저 멀리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내가 웃으며 고월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머리를 쓸 때가 아니라 눈을 쓸 때라서요.”

상대를 감시하고 관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야율한의 일상에서 허점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는 종일 바빴다. 전서를 받고 보내고, 정보를 전하는 이들을 만났다 돌아오고. 물론 풍천교주가 함께 하니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시간은 걸려도 좋아. 신중하게 처리하게.”

“네!”

“맛난 거 사 올 테니, 저녁은 같이 먹자고.”

오늘 저녁은 정말 특별한 것을 먹일 작정이다.

* * *

그날 전장에 맡겨둔 야명주 일부를 팔아서 천년설삼(千年雪蔘) 네 뿌리를 샀다.

회귀 전 중원 곳곳 다 돌아다니며 온갖 일들을 다 겪은 나는 사도맹 본단 인근에서 영약을 파는 암상을 잘 알고 있었다.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취급하는 만큼 값이 매우 비쌌지만, 나는 그것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천년설삼을 사서 안가로 돌아온 나는 극악소마와 고월, 풍천교주를 모두 불렀다. 그들 앞에 천년설삼을 내려놓고 못을 박듯 단호히 말했다.

“자, 지금부터 한 뿌리씩 합니다. 사양은 사양합니다. 무조건 지금 내 앞에서 복용해야 합니다.”

나는 극악소마와 영약을 나눠 먹을 때 말했듯, 누군가와 영약을 나눠 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들과 영약을 나눠 먹고 싶었다.

싸움을 앞둔 극악소마를 위한 응원이었고, 마지막 비기까지 내준 풍천교주를 위한 선물이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고생한 고월을 위한 보약이기도 했다.

풍천교주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 좋은 것을 왜 사양하나? 사양할 사람은 내게 하게!”

고월이야말로 ‘전 필요 없으니 공자님 드십시오’란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그는 알았다. 사양하지 말라는 말을 자신에게 했다는 것을.

고월이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극악소마는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게 우린 넷이서 함께 천년설삼을 복용했다.

나는 워낙 내공이 심후해서 이제 천년설삼으론 간에 기별이 안 간다는 표현을 써도 될 만큼의 경지였지만 다른 세 사람에게는 그래도 나름 꽤 도움이 될 영약이었다. 특히 내공이 가장 적은 고월에겐 내공뿐만 아니라 지친 몸의 기력 회복에 최고의 효과를 낼 것이다.

-건강 잘 챙겨라, 고 군사.

특별히 그에게는 전음까지 보냈다.

고월은 깊어진 눈빛으로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 * *

드디어 고월이 방법을 찾아냈다.

“그간 저는 야율한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습니다. 그의 거처는 사도맹 내원에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련하고 식사하고, 극도병단의 단주로 일과를 보내고, 그러다 맹주전에서 부르면 들어가고. 그는 모든 시간을 사도맹 내부에서 보냈습니다. 지생과 애차의 죽음 이후에 일절 외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사도맹주가 자신을 노린다고 오해한 야율한은 철저히 몸을 사리고 있었고, 그 덕분에 그를 칠 기회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쉽지 않겠군.”

“네. 맹에 있는 그를 치는 것은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설령 어렵지 않더라도, 사도맹 내부에서 그를 죽이는 것만큼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비사인이 이번 일을 허락해 주었으니 사도맹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겠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과연 오뢰신검과 혈륜겁도 야율한과 같이 사도맹 내부에서 살고 있을까.”

고월이 나를 쳐다보며 의견을 물었다.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요?”

“둘 다 무림공적에 오른 자들이기 때문이다. 무림맹과 사도맹 사이에 맺은 협약이 있다. 무림공적에 오른 자는 절대 숨겨줘선 안 된다는 협약이지.”

풍천교주가 끼어들며 말했다.

“사파 놈들이 그런 협약을 지키겠나?”

“이 협약을 지키려는 사람은 야율한일 겁니다.”

“그놈이 왜?”

“사도맹주에게 약점이 잡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만약 사도맹주가 자신을 치고 들어올 때, 이보다 더 좋은 구실은 없을 겁니다.”

풍천교주는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월이 다시 나섰다.

“정확하게 파악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오뢰신검과 혈륜겁은 사도맹 내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두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분명 본단 근처에 거처가 있겠지?”

“네. 한데 어찌나 꽁꽁 숨겨 두었는지 쉽게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죠. 그곳을 찾아갈 만한 사람을 감시했습니다.”

“누구? 야율한?”

“아뇨. 차환입니다.”

사인방 중 마지막 생존자 차환.

“놈은 야율한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 오뢰신검 같은 노고수를 누군가 대접하고 보필해야 할 텐데, 아무에게나 맡기진 않았겠지요.”

나는 제대로 된 접근이라 판단했다. 역시 고월은 똑똑하게 잘 판단했다.

“그렇게 차환을 감시하던 중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 꼭 산서분주(山西汾酒)를 산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고월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덧붙여 말했다.

“오뢰신검의 고향이 산서입니다. 통천각에서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그가 가장 좋아했던 술이 분주였고요.”

“그 술을 오뢰신검에게 가져가는 것이구나.”

“그렇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차환을 미행한 결과 오뢰신검의 거처를 파악했습니다.”

“잘했다!”

“문제는 야율한입니다. 이번 일로 일절 외부출입을 삼가는 동시에 오뢰신검과도 만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한데 통천각에서 보내온 자료를 보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보십시오.”

그가 건넨 자료를 보다가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월을 쳐다보았다.

“곧 오뢰신검의 생일이구나!”

“그것도 아흔 살 생일입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이날만큼은 야율한과 혈륜겁이 그를 축하해 주러 갈 겁니다.”

고월이 눈빛을 반짝였다.

“이날 해치우는 겁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놈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필요는 없겠지요. 시차를 두고 하나씩 해치우는 겁니다. 먼저 오뢰신검부터 죽이고, 차례차례 그곳을 방문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는 겁니다. 차례대로 하나씩.”

나는 고월의 어깨를 힘차게 한 번 두드려 주었다.

“알아내느라 정말 고생했다.”

“천년설삼 덕분입니다.”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고월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극악소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늙은이 생일이라는데 우리도 축하해 주러 가야겠지요?”

극악소마의 눈구멍 속 두 눈이 시퍼런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겨라!”

15 절대회귀-233화 15

제233회 쉽다면 그게 이상하겠지.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던 비사인에게 전음이 날아들었다.

―골고루 드시오. 항상 그 요리만 드시는 것 같소.

검무극의 전음에 비사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제 내 입맛까지 간섭하려는 거요?

―당신 건강 챙겨주려는 거지. 내가 원래 오지랖이 좀 넓소.

―당신이 사파가 아닌 게 정말 다행이오.

―걱정 마시오. 다들 정파 같다고 하지, 사파 같다고는 안 하니까.

그렇게 가벼운 농담을 나눈 후, 검무극은 오늘 그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이틀 후가 오뢰신검의 생일날이오. 그날 모두 처리할 작정이오.

순간 젓가락질이 멈추며 비사인의 얼굴에 격정이 스쳤다. 드디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렇게 다 알려주셔도 되오?

―적어도 이번 일에는 당신도 같은 편이니까.

―내가 변심해서 야율한에게 다 알릴 수도 있지 않소? 실수로 누군가에게 말을 해버리거나.

―난 나를 믿소. 그런 바보와는 애초에 손을 잡지 않았을 거요.

비사인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누가 보면 음식 맛이 없어서 인상을 쓰는 것 같겠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따 밤에 절벽에서 좀 봅시다.

―그럽시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 * *

그날 밤, 나는 절벽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오늘 밤이 지나면 결전전야가 된다. 이번만큼은 나도 긴장되고 떨렸다.

“당신 등만 보면 왜 이렇게 밀어버리고 싶은지 모르겠소.”

뒤에서 들려온 비사인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돌아섰다.

“평소에 화가 많이 쌓여서 그렇소.”

“화를 쌓지 않고 사도맹 후계자로 살아가는 방법 있소?”

“그럴 때는 취마와 술을 진탕 마시고 호수를 헤엄치고 다니면 좀 풀리긴 하는데. 술 마실 사람 있소?”

“술 별로 안 좋아하오.”

“도마와 같이 책을 읽어도 괜찮은데.”

“책은 더 안 좋아하오. 한데 도마가 책도 읽소?”

“아니면 검존과 비무를 하기도 하오.”

“비무를 이용해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소?”

“소마와 함께하는 여행은 어떻소?”

“같이 여행 갈 사람 없소.”

“권마와 함께하는 심야 무공 수련은 어떻소?”

“당신 말을 들으니 화가 더 쌓이오! 마존들과 친하다고 자랑하는 거요?”

“내 말을 믿는 거요? 다 지어냈다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비사인이 대답했다.

“당신이라면…… 다 친할 것 같소.”

놀랍게도 그는 내 말을 다 믿었다.

“당신 화를 풀 방법이 있소.”

궁금해하는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나와 놉시다!”

“!”

“이번 일 끝나고, 화가 정말 너무 쌓여서 못 참겠다 싶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나와 놀러 갑시다.”

비사인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예전이라면 미쳤냐는 말부터 나왔을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비사인은 ‘그럽시다!’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그에게서 외로움이 느껴졌으니.

“싫소.”

단번에 거절한 비사인이 품에서 여러 장의 종이를 꺼냈다.

“당신 보자고 한 건 이것 때문이오.”

그가 건넨 것은 오뢰신검과 관련한 비밀문서였다.

그의 무공은 물론이고 어디서 태어나서 어떤 성장 과정을 겪었으며, 누구와 어디서 무슨 일로 싸웠는지가 모두 적혀 있었다.

“이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모르니 읽어보시오.”

“고맙소. 큰 도움 될 거요.”

비사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스치더니, 결국 그가 내게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미리 말하겠소. 요즘…… 내 사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소.”

당신의 사도가 무엇이냐는 내 물음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던 모양이다. 어쩌면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는 저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을 듣기 전에 그가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신의 사도에 대해 들을 날을 기대하겠소.”

비사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대답했다.

“그 전에 죽지나 마시오.”

* * *

오뢰신검의 생일 전날 검무극은 그의 거처를 정찰했다.

아직 저 장원 안에 몇 명이 있는지, 누가 사는지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의 작전을 무사히 치르려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준비해도 끝없이 생기는 것이 변수다.

장원은 작고 아담했다.

사도맹 본단에서 직선거리로는 순식간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지만, 걸어서나 마차를 타고 가려면 한참을 숲속을 돌고 돌아서 찾아가야 하는 절묘한 곳에 있었다.

또한 숲속 깊은 곳에 있어 누군가 이곳에 길이 있고 집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으면, 근처를 매일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기에 집이 있었어?’라며 놀랄만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검무극이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거목으로 올라섰다.

그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나뭇가지에 내려섰는데, 작은 바람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가볍게 흔들릴 뿐, 부러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검무극이 기발출을 시작했다.

몇 가닥의 기가 담을 넘어 들어갔다. 첫 사냥을 갔을 때 아버지에게 배운 기발출은 이런 순간에 빛을 발했다. 상대가 기척을 알아차릴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이렇게 가늘고 기다란 기를 정찰병처럼 보낼 수 있었으니까.

장원의 마당에서 한 사람이 포착되었다.

검무극은 신안술을 발휘해서 그를 확인했다. 장원에서 오뢰신검을 보필하며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또 다른 기운은 주방 쪽에서 포착되었다. 느껴지는 기운이나 움직임으로 볼 때 이 사람 역시 무공을 익히지 않았고, 나이가 많은 이였다. 아마 밥을 차려주는 노파처럼 보였다.

검무극의 기가 장원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을 보니, 그들 두 사람이 오뢰신검을 모시고 있는 모양이다.

검무극의 기가 건물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가장 안방에 들어갔을 때, 강력한 기운을 감지했다.

‘오뢰신검이다!’

검무극은 무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존재만을 확인했으면 되었다. 조용히 발출한 기를 회수했다.

기를 모두 회수하던 그 순간.

천마호신공이 발동되며 위기를 감지했다.

다음 순간!

탁.

다음 순간 검무극이 서 있던 나뭇가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는 허공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내려섰다. 그야말로 경지에 다다른 경공술이었다. 그곳에 있던 검무극은 어느새 나무 아래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가 나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무극은 거목 반대쪽에 있어서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빠르게 몸을 돌려 뒤쪽 나무 아래도 살폈다.

다시 검무극은 반대쪽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절묘한 경신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남자가 살짝 고개를 갸웃하더니 훌쩍 몸을 날려 저 멀리 있는 장원에 내려섰다.

그리고 오뢰신검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검무극의 눈빛이 깊어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이 남자는 자신이 기를 회수할 때 그 기운을 느끼고 기의 원천지가 되는 이곳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탁월한 감각은 물론이고 수준 높은 경공술까지.

‘보통 실력이 아니다.’

아쉽지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만큼 상대의 움직임이 빨랐다.

검무극도 조용히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그 시각 야율한은 넓은 대청에서 커다란 탁자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차환이 상자를 들고 들어섰다.

“오뢰신검에게 줄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야율한이 손짓으로 가까이 가져오라고 했다. 차환이 상자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그가 야율한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자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만년설삼(萬年雪蔘)입니다.”

천금을 줘도 구하기 어렵다는 만년설삼이었다.

차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든 것을 말했다.

“이걸 선물로 주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해마다 생일이 되면 값진 선물을 오뢰신검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번 만년설삼만큼 귀한 선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의 불만에도 야율한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차환의 이런 솔직함 때문에 그를 옆에 두었다.

“특별한 생일이니 특별한 선물을 줘야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는 돈값을 하는 사람이다.”

“네.”

차환이 더는 불만을 말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닫아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그 늙은이가 백세 생일이 되면 대체 무엇을 줄 겁니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내일 직접 가실 겁니까?”

야율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선물만 보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잠시 고민하던 야율한이 차환에게 말했다.

“가야지. 안 가면 만년설삼을 투자하고 욕을 듣게 될 거다. 대신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시간에 가도록 하지.”

차환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삼악(三惡)도 부르고.”

차환이 흠칫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들은 이름만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그럼 안심이 됩니다.”

차환이 나가고, 야율한이 만년설삼이 담긴 상자를 다시 열었다.

그는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무공을 배운 사람이라면, 어찌 만년설삼을 눈앞에 두고 참을 수 있겠는가?

야율한이 그것을 들더니 자신의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한입에 먹어버리는 시늉만 하고는 다시 만년설삼을 상자에 넣고 닫았다.

자신은 만년설삼이 아니라, 참고 또 참아서 더 큰 것을 먹을 것이다.

* * *

나는 곧장 거처로 돌아왔다.

극악소마와 고월, 풍천교주는 내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셨습니까?”

고월의 물음에 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들킬뻔했다.”

내 말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풍천교주가 내게 말했다.

“늙은 악인 놈이 그저 놀고먹으면서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놈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었다고?”

“방문한 자인지 원래 지키던 자인지 확실하진 않았는데, 그자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풍천교주가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혹 야율한 아닌가?”

그러자 고월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야율한은 현재 사도맹 내부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야율한이 아니라고? 그럼 혈륜겁인가?”

풍천교주의 물음에 이번에도 고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혈륜겁은 오뢰신검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진 사람입니다. 단둘이 회합을 가졌을 가능성이 작습니다.”

그 의견에 나도 동의했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혈륜겁만큼 나이 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고수가 생일 축하를 위해 방문한 것이라면, 내일도 장원에 함께 있을 것이다. 상대해야 할 고수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당연히 고월의 얼굴에 걱정이 피어올랐다.

“애초에 또 다른 자가 있을 거라 예상하지 않았나?”

“네, 그렇긴 합니다만. 오늘 왔다면 내일도 새로운 고수가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걱정이 됩니다.”

“고 군사. 군사들이 훌륭한 작전을 세워주지만, 현장에서는 이렇게 돌발적인 상황이 생긴다. 이것도 자네에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야율한과 오뢰신검을 상대로 하는 작전에서는 그런 경험 안 하고 싶습니다.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 공자님이라면 더욱이요. 적어도 그자가 누군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말없이 듣고만 있던 극악소마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누군지 안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극악소마란 남자의 본성이었다. 오늘 내가 발견한 고수가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이라도 그는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극악소마의 이 말이 지금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나를 웃게 한 것은 극악소마의 눈빛에 깃들어 있는 그것과 같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투지가 끓어올랐다. 그래, 그곳에 누가 있든, 몇 명이 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우웅!

내 마음을 읽은 흑마검이 길게 울었다. 검이 스스로 울자 모두의 시선이 흑마검을 향했다. 내가 검 손잡이를 잡자, 흑마검이 울음을 그쳤다.

“오뢰신검의 생일날을 제삿날로 만드는 일인데, 심지어 그 저승 가는 배에 야율한까지 함께 태워 보내는 일인데…… 이 일이 쉽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겠지요.”

나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합니다.”

* * *

다음 날 새벽, 출발 전에 나는 극악소마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검 손잡이에 매여 있던 극품천잠사를 풀어 반을 그에게 주었다. 극악소마는 이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심장에 감으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둘이 감아도 충분히 남습니다.”

“그럼 두 겹으로 감으십시오!”

“몸이 둔해져서 안 됩니다. 전 그 위에 귀호의까지 입습니다.”

내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극악소마가 그것을 받았다.

“싸움이 끝나면 돌려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돌려주셔야죠. 그거 귀한 겁니다.”

극악소마가 맑게 웃었다.

우린 그 자리에서 극품천잠사를 심장과 배에 감았다.

그렇게 준비를 모두 끝낸 후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극악소마가 손가락으로 흑마검의 검날을 가볍게 튕겼다.

티잉!

결전의 시작을 알리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그 맑은소리를 들으며 우린 조용히 방을 나섰다.

17 절대회귀-234화 17

제234회 단 하나라도 놓치면.

“사부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정중히 절을 올리는 남자는 오뢰신검의 제자 사효(沙效)였다. 어제 검무극이 봤던 남자가 바로 이 사효다.

그의 앞에 오뢰신검이 앉아 있었다.

오뢰신검의 첫인상은 ‘참 기괴하다’였다. 구십 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얼굴은 젊은 사람의 피부처럼 팽팽했다. 하지만 팔이나 손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해서 이 불균형이 너무나 괴이했다.

“생신 선물입니다.”

사효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바쳤다.

“이번에는 특별히 열다섯이 넘지 않은 여자애들의 정기를 뽑아 만든 회춘단(回春丹)입니다.”

회춘단이란 말에 오뢰신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몇 명의 것이냐?”

“아흔 명입니다.”

아흔 명이나 되는 귀한 생명이 이 작은 단환에 들어 있다는 말이었음에도 오뢰신검의 얼굴에는 환한 기쁨이 번졌다. 웃으니까 그의 피부가 더 팽팽히 당겨지며 더욱 괴이해 보였다.

“쉽지 않았을 텐데?”

아흔 명의 정기를 모았다면 수년은 걸쳐서 제작되었을 터. 정말 귀하고 귀한 약이었다.

“사부님께서 구순을 맞으셨는데 제자 된 도리로 이 정도 정성은 들여야죠.”

오뢰신검이 흡족하게 웃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젊음에 집착했다. 그 집착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사효의 손에는 더 많은 피가 묻었다.

“내 너를 위해 다음 구결을 전수해주마. 이번에는 특별히 세 구절을 전수하마.”

그러자 사효가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하지만 고개를 숙인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망할 늙은이, 고작 세 구절이라니!’

그는 이렇게 충성을 바칠 때마다 무공을 전수받았다.

이제 마지막 다섯 번째 제 오식만 물려받으면 오뢰검법을 모두 배우게 되는데, 그 마지막을 배우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

사효는 무공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특히 경공술이 뛰어났고 오감은 물론 육감마저 타고났다. 게다가 기억력 또한 좋아서 한 번 보고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문제는 사부가 오뢰신검이란 점이었다. 제자가 된 지 이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무공전수를 다 받지 못한 것이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구나.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혔는데.’

그를 내려다보는 오뢰신검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웠다.

‘네놈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아냐?’

무공을 다 전수하면 자신을 죽이려 들 수도 있는 악독한 심성을 지닌 제자였다. 그때부턴 독이 들었을까 봐 마음 놓고 회춘단도 먹지 못하리라.

‘마지막 구결은 내가 죽는 순간에 알려주마!’

사효가 고개를 들었을 때 두 사람의 표정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회춘단을 복용할 테니, 잠시 나가 있거라.”

“네.”

사효가 밖으로 나가자 오뢰신검은 흡족한 얼굴로 회춘단을 복용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 * *

검무극은 조용히 장원의 담을 넘었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고 있는 별채였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수혈을 눌렀다. 그들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은 끝나 있을 것이다.

별채를 나온 검무극이 다시 본채를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바로 그때.

스윽!

누군가 검무극의 목에 검을 겨눴다.

“움직이면 죽는다.”

뒤에서 검을 겨눈 사람은 바로 사효였다. 그는 이제 막 사부의 방에서 나오다가 검무극을 발견한 것이다.

“어제도 너였지?”

검무극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 나다.”

“겁이 없으면 실력이라도 있어야지. 천천히 돌아서.”

검무극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침입이 걸렸음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누가 시켜서 온 거냐?”

“그게 중요한가? 사효.”

순간 사효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사부 이외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몰랐다. 비사인이 준 오뢰신검의 극비문서에 이십여 년 전 사효라는 제자를 들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음을.

“어떻게 내 이름을!”

그의 평정심이 깨어진 그 순간.

피잉!

등 뒤에서 혈앙지가 날아들었다.

사효는 확실히 타고난 고수였다. 그는 몸을 비틀어 지풍을 피하면서 동시에 앞에 있던 검무극을 베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몸을 비트는 그 찰나의 사이에 검무극의 주먹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꽝!

그의 신형이 주르륵 밀렸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오장육부가 터져 죽었을 공격이었다.

“이런 썅!”

그는 욕설이나 내뱉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핑! 피잉!

다시 두 줄기의 혈앙지가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피해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효가 돌아서서 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발출되며 날아든 지풍을 해소했다.

그 순간 뒤에서 날아든 검무극의 검이 그의 머리를 가르며 떨어졌다.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했지만,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사효는 너무 오랜만에 검에 베이는 거라 큰 충격을 받았지만, 상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피잉!

날아든 지풍이 그의 옆구리를 찢었다. 이번 역시 순간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배가 꿰뚫렸을 공격이었다.

생각할 틈은 고사하고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앞뒤에서 공격이 날아들었다. 검무극의 실력을 보면서 사효는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들켰구나!’

양쪽에서 덫을 놓고 자신을 끌어들인 것이다.

앞뒤로 정신없이 날아든 공격을 그는 막아내지 못했다.

“사부님! 살려주십시오!”

결국 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 한마디 외침을 하는 동안 또다시 그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사부! 이 개새끼야!”

애타는 그의 외침에도 사부는 나오지 않았다. 사효는 알 수 있었다. 사부는 지금 회춘단을 복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지금 운기를 멈추면 약의 효능을 일부만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죽여? 평생 개처럼 희생한 자신을?

“으아아아아아아!”

분노의 공격이 쏟아졌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오뢰검법의 일식과 이식, 삼식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검기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상처 입은 맹수의 발악은 그저 빈 곳을 치며 흩어질 뿐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무재라지만 완성되지 못한 그였다. 그랬기에 앞뒤에서 쏟아지는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합공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서걱!

흑마검이 그의 등을 사선으로 크게 베던 그 순간!

퍽!

마지막 지풍이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절명해 쓰러지면서 사효는 아주 짧은 순간 주마등을 보았다. 자신의 인생을 본 것이 아니라, 회춘단을 만들면서 죽였던 소녀들의 얼굴이 빠르게 지나갔다.

털썩.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미 사효가 사부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란 것을 비사인의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검무극은 그를 없애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비사인이 준 자료는 확실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쇄애애애애액!

두 사람이 몸을 돌려 피했고, 그 사이로 한 줄기 검기가 지나갔다. 정말 강력하고 빠른 검기였다.

검기를 날린 사람은 오뢰신검이었다.

그는 제자가 도와달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약효를 녹이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찢어 죽일 새끼들이!”

바깥의 싸움에 신경을 쓰느라 회춘단의 효능을 전부 다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제자가 죽은 것보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당분간 회춘단을 구할 수 없다는 것에 화가 났다. 젊음에 대한 열망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했다.

요즘 야율한이 사도맹주와 날 선 갈등을 벌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거처를 이렇게 치고 들어 온다?

‘일처리를 어떻게 했기에!’

분노의 대상은 야율한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때 사파 무림을 씹어먹던 그였다.

오뢰신검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한 놈은 새파랗게 어린놈이고, 한 놈은 가면을 썼다?’

이런 놈들에게 사효가 당했다고? 의아한 마음이 들던 바로 그 순간.

그의 시선이 다시 극악소마에게 박혔다.

“설마?”

구십 살이나 먹은 그가 어찌 극악소마의 백색 가면에 대해 모르겠는가? 사효가 죽지 않았다면, 그저 가면을 쓴 놈이겠구나 했겠지만, 이 짧은 시간에 사효를 죽였다면 마교의 마존이어야 말이 되었다.

“마교의 잡졸들이 왜 나를?”

극악소마의 눈이 차갑게 웃었다.

대답은 검무극이 대신했다.

“정말 괴물 같은 얼굴이구나. 그깟 괴물이 되려고 그 많은 어린애를 죽이다니!”

비사인이 구해준 극비문서에 회춘단에 대한 것들도 있었다.

“네가 죽고 나서 널 파먹을 구더기들도 더럽다고 침을 뱉고 돌아설 거다!”

구십 년 인생을 사파에서 굴러먹은 오뢰신검이 이런 도발에 넘어가겠냐 마는, 그는 넘어갔다.

번쩍!

오뢰신검의 검이 뽑혀 나왔다.

꽝!

검무극이 서 있던 자리에 검기가 내리꽂혔다. 벼락처럼 빠른 검기였다.

검무극은 그곳에서 한걸음 옆으로 피한 상태였다.

“못 생기고 추한 늙은이! 더럽고 추잡하고 사악한 추괴!”

꽝! 콰쾅!

다시 두 줄기 검기가 내리쳤지만, 점멸보로 그것을 피했다.

오뢰신검은 오랜만에 듣는 욕에 화가 났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청년에게 들은 모욕이었다. 게다가 구더기가 침을 뱉는다는 욕은 구십 평생 처음 들었다.

“그 주둥이를 찢어……!”

흥분한 상태에서 말을 꺼내려던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이 그의 호흡을 끊으며 쇄도했다. 흥분한 데다가 말까지 하던 이 순간이 그의 기혈이 가장 흐트러지던 순간이었다.

명왕보로 파고들면서 펼쳐진 비천검법 제일식 균천식.

쉬이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그를 가로로 양단하는 순간.

카앙!

오뢰신검이 검으로 흑마검을 막았다. 그는 검무극의 공격 속도에 경악했다. 쉽게 찢을 수 있는 주둥이가 아니었다.

피잉!

오뢰신검을 향해 극악소마의 혈앙지가 날아들었다. 오늘 싸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합공으로 시작해서 합공으로 끝낼 것이다. 상대는 죽어 마땅한 악행을 저질렀던 이들이기에 무인으로서의 예는 생략이다.

이어지는 합공에 오뢰신검이 당황했다.

극악소마의 혈앙지는 그야말로 가장 까다로운 곳을 향해 날아들었기에 안 막을 수 없었고, 검무극은 등 뒤에 둬선 안 될 상대였다.

몇 수 지나지 않아 지풍이 왼쪽 어깨를 스치자 오뢰신검은 아끼지 않고 자신의 절기를 발출했다. 시간을 끌었다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고수다운 판단을 내린 것이다.

콱! 콰콰! 콱!

벼락이 내리치듯 그의 검기가 휘어져 꽂혔다. 오뢰검법의 검기는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공격이기에 이런 공격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일격에 죽음이었다.

앞서 사효는 제대로 검술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오뢰검법은 벼락의 모양을 본떠 만든 극상승의 검법으로 거의 마존들이 익힌 무공과 쌍벽을 이루는 무공이었다.

콰식! 콰식! 콱콱!

괴이한 소리와 함께 검기가 더욱 강해졌다.

제일식의 벼락보다 이식이 더 강했고, 삼식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오랜만에 강적을 만나 절기를 쏟아내는 오뢰신검은 흥분했다. 그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연속해서 검식을 발휘했다.

우수수 쏟아지는 검기에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보법을 발휘하며 피했다.

두 사람은 반대로 멀어지기도 했고, 교차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여러 번 함께 싸워본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오뢰신검은 마지막 오식을 극악소마에게 쏟아부었다.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에서 검무극의 보법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한 극악소마를 먼저 죽이고 검무극을 상대하겠다는 결정.

가장 강력한 무공이 펼쳐지려는 그 순간!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입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도 승부를 걸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과격한 검기가 극악소마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적이 발휘하는 무공이지만 감탄이 나올만한 장관이었다.

하지만 극악소마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검기를 막는 대신 오뢰신검을 향해 마극광폭장을 발출했다.

콰아아아아!

오뢰신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동귀어진!’

하지만 동귀어진이 아니었다. 극악소마를 향해 날아든 검기들을 향해 서른여섯 개의 검기가 날아들었다.

내공이 늘어 검기의 숫자도 늘어난 비천검법 제칠식 유천식이었다. 검무극은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숫자의 검기를 발출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콱!

쉭쉭쉭쉭쉭쉭쉭쉭쉭!

단 하나라도 놓치면 극악소마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극악소마는 검무극이 반드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주리라 믿고, 마극광폭장을 발출한 것이다.

퍼퍼퍼퍼퍼퍼퍼퍼펑!

극악소마의 머리 위에서 유천식의 검기에 오뢰검법 제 오식의 검기가 모두 해소되어 사라졌다.

심혈을 다한 유천식은 단 한 줄기의 검기도 놓치지 않았다.

검기가 해소되던 그 순간!

콰아아앙!

마극광폭장이 오뢰신검의 몸에 적중했다. 제오식을 쏟아내느라 피하지 못했고, 오뢰신검은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마극광폭장에 휘말려 날아간 그가 담벼락에 처박혔다.

후우우우!

피어오른 먼지가 가라앉았다.

담에 기댄 오뢰신검이 분노를 표출했다.

두 놈 다 찢어 죽이겠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뢰신검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귀를 다친 것인가?

게다가 이 급박한 상황에서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나를 보지 않는 거지?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오뢰신검의 시선이 무심코 아래로 향했다.

‘!’

그의 가슴 아래가 통째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오뢰신검의 몸통이 담벼락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마지막 순간 그가 본 것은 바닥에 고여 있는 핏물에 비친 괴이한 자신의 얼굴이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소마는 이 순간 웃음이 너무나 매력적인 진정한 소마(笑魔)가 되어 있었다.

검무극은 그와 함께 싸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그와 함께라면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우고 싶었다.

특히 마지막 한 수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절대 시도할 수 없었던 공격이었다. 싸움이 계속될수록 서로에 대한 신뢰는 깊어지고 있었다.

“일단 내력부터 회복하시죠.”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와르르르륵.

오뢰신검이 날아가 죽은 담벼락이 무너져 내렸다.

“아! 안 돼!”

검무극이 안타깝게 소리쳤다. 담이 무너져 있으면 놈들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고, 차례대로 하나씩 죽이려는 계획이 틀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무너진 담장 너머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도착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바로 야율한과 삼악, 혈륜겁과 차환이었다.

그들 중 가운데에 서 있던 야율한이 부서진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그는 반 토막이 된 오뢰신검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한기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지만, 무심한 눈빛과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차환아, 네 바람대로 선물은 필요 없게 되었다.”

18 절대회귀-235화 18

제235회 세상이 못 죽이면.

야율한의 뒤로 다섯 사람이 부서진 담을 넘어 들어왔다.

곧바로 들어와서 야율한의 옆에 선 사람은 용문신 가득한 차환이었다. 그는 처참하게 죽은 오뢰신검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에게 주는 만년설삼이 아깝다고 했지만, 이 오뢰신검이 어떤 고수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오뢰신검을 이렇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시체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제자인 사효 역시 죽어있었다. 정말이지 이 자리가 야율한과 삼악, 그리고 혈륜겁이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당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을 것이다.

차환이 야율한의 눈치를 살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혈륜겁의 모습이 보였다.

혈륜겁은 해골처럼 삐쩍 마른 노인이었는데 톱니 칼날이 붙은 커다란 철원반을 등에 메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이는 원반이었는데, 저 원반이 바로 어떤 병장기도 다 박살 낸다고 알려진 혈륜겁의 독문병기 혈륜이었다.

마지막으로 차환의 시선이 삼악을 향했다.

그들은 세쌍둥이였다. 얼굴도 같았고 복장도 똑같았다. 어찌나 똑같은지 마치 한 사람이 셋으로 분열된 것처럼 보였다.

삼악이 저지른 짓들을 아는 차환은 언제나 그들을 보면 몸서리를 쳤다. 인간이라면 결코 할 수 없을 엽기적인 악행들.

그럼에도 삼악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악행과 관련된 사람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면 악인 셋이 모인 느낌이 아니라, 세 배로 지독한 악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저들까지 있으니 오늘 상대는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차환이 모두를 대신해서 나섰다.

“네놈들은 누구냐?”

그러자 삼악이 그를 알아보고 동시에 대답했다.

“극악소마.”

세 사람이 정확히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맞춰 대답하자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야율한 역시 극악소마를 진작 알아보았다는 듯, 차분하게 물었다.

“교주의 허락이 나지 않았을 텐데. 독자적인 행동인가?”

극악소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대화는 검무극 담당이었다.

“하얀 가면만 쓰면 다 극악소마인가? 우린 마교에서 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럼 누구냐?”

“구십 살이나 처먹은 놈이 젊어지려고 지랄발광을 하니 지옥에 계신 염왕께서 데려오라 하셨다. 저놈은 앞으로 구만 년은 고생해야 할 거다.”

검무극이 그들을 쭉 둘러보더니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기 있는 중생들도 죄 많이 지은 관상인데, 어때? 같이 지옥 가는 배에 타자. 마침 여섯 자리 남는다.”

야율한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눈빛은 더 차가워졌다.

“그래, 오뢰신검을 죽일 실력이라면 이 정도 오만은 떨어도 되지.”

야율한은 수하들을 하나씩 내보내서 죽게 만들지 않았다. 상대는 오뢰신검과 그 제자를 죽인 놈들이었다.

그가 앞장서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합공해서 죽인다!”

여섯 고수가 일제히 진형을 갖췄다.

검무극은 예감했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싸움이 될 것임을.

검무극이 흑마검을 시원하게 뽑으며 말했다.

“그래, 세상이 못 죽이면 우리가 죽여 주마.”

극악소마의 눈이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미치는 사람이 소마였으니까. 극악소마가 검무극을 보며 말했다.

“한 번 더!”

검무극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기에 두말없이 흑마검을 내밀었다.

따앙!

이번 소리는 평소의 경쾌한 소리와 달랐다. 적이 달라졌고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듯, 더 깊은 울림이 번져나갔다.

양쪽이 서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적어도 이 순간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두려워하는 이가 없었다.

* * *

밥을 먹던 고월이 달려 나가서 먹은 것을 게워냈다.

풍천교주가 따라 나와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억지로 먹게 한 내 잘못이다.”

어제부터 잔뜩 긴장한 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는 고월에게 억지로 밥을 먹인 것이다.

“교주, 나 음뢰종 소리가 듣고 싶어.”

고월의 말에 풍천교주가 괜히 버럭했다.

“지겹지도 않냐? 그 종에 그렇게 묶여 있었으면서!”

그 일을 생각하면 찔리는 것이 많은 풍천교주였다.

“교주 미안해하라고 하는 말 아니야. 정말 그 종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래. 음뢰종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거든.”

“종에 새겨진 마귀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걔들도 좀 보고 싶고.”

“꿈 깨. 영원히 보고 들을 일 없다.”

스스스슥.

주위가 바뀌자 두 사람은 들판에 서 있었다. 시공이환술을 펼쳐서 고월이 좋아하던 들판으로 온 것이다.

“여긴 이제 안 오려고 했는데.”

“그런데 왜 열었어?”

“네가 너무 초조해하는 것 같아서.”

풍천교주가 저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쯤 한창 싸우고 있겠지?”

“그렇겠지.”

“나라도 가서 도울까?”

고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에게 맡겨둬. 이건 두 분의 싸움이니까.”

풍천교주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 사람 싸움이지.”

“무슨 뜻이야?”

“너도 지금 싸우고 있잖아? 밥까지 굶어가면서.”

“그렇게 따지면 교주는 아닌가? 독왕도, 천화루주도, 서 조사관도. 천마신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다 함께 싸우고 있지.”

그러자 풍천교주가 불쑥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내 제자는 안 질 거다.”

“제자?”

“그런 게 있어.”

풍천교주가 눈앞에 검무극이 있는 것처럼 소리쳐 말했다.

“이놈아! 내걸 그렇게 가져갔는데 지면 안 되지! 어딜 죽으려고!”

심지어 시천비술까지 전수해줬는데 말이다.

고월의 기분을 좀 풀어주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여전히 고월은 근심이 가득했다.

고월이 창창하게 맑은 하늘과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처럼 무림에 평화로운 날이 올까?”

“그럼 안 돼!”

“왜?”

“너부터 일자리를 잃을 테니까.”

결국, 고월은 웃고 말았다. 물조차 삼킬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자신을 웃게 했으니. 그래, 교주 당신이 이겼다.

“오늘은 하루가 길겠구나.”

* * *

야율한은 합공하되 난전을 벌이진 않았다.

똘똘 뭉쳐서 한 명이 싸우는 것처럼 싸웠다. 자신들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굳이 변수가 나올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검무극은 야율한을 먼저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들 중에서 제일 똑똑한 자였고, 그 수장을 꺾으면 나머지도 자연히 사기가 꺾일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검무극 자신이 야율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을 때, 나머지 다섯이 야율한을 돕지 않고 극악소마를 합공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극악소마는 저들 다섯의 합공을 버텨낼 수 있을까? 버틴다면 얼마나 버틸까? 문제는 저 세쌍둥이의 실력을 정확히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휘류류류류류류!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한 사람은 혈륜겁이었다. 그가 날린 혈륜이 엄청난 기세로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크기도 큰데 속도까지 빨랐다.

혈륜에 실린 위력이 대단해서 검이나 내력으로 쳐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흑마검이 부러지진 않겠지만, 검으로 저 무거운 혈륜을 상대하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휘리리리리!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혈륜이 돌아서 다시 공격을 해왔다.

검무극이 좌측으로 피하자 혈륜이 방향을 틀어 피한 쪽으로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다급히 반대로 몸을 틀자, 혈륜이 검무극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혈륜에 붙은 칼날은 더없이 날카로워서 사람 몸은 싹둑 잘려 나갈 것 같았다.

혈륜을 회수한 혈륜겁이 비웃듯 말했다.

“이제 곧 혈륜과 함께 춤을 추게 될 거다.”

혈륜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

이럴 때는 혈륜을 피하느라 애쓸 것이 아니라 저 혈륜겁을 죽여야 한다.

문제는 저들도 그걸 예상한다는 점이었다.

피잉!

혈륜겁을 향해 쏘아진 혈앙지를 막아낸 건 일악이었다. 이악과 삼악 역시 함께 뭉쳐서 혈륜겁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합공을 해올 것이다.

일악의 움직임을 보자 검무극은 오뢰신검의 제자 사효를 떠올렸다. 실력이 사효급, 그렇다면 사효가 셋. 게다가 쌍둥이니 합공술이 뛰어날 테고. 보통 적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누굴 먼저 죽이느냐에 대한 본능적인 결정을 내렸다.

야율한이 안 된다면, 저들이 적어도 자신이 첫 번째 목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쌍둥이들을 먼저 죽이시죠.

―알겠습니다.

극악소마는 두말없이 검무극의 결정을 따랐다.

휘류류류류류!

두 번째 혈륜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것이 스쳐 지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던 그 순간, 검무극은 일악을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극악소마의 마극광폭장이 발출되었다.

목표는 일악을 향해 쇄도하는 검무극의 등이었다!

마치, 검무극이 마극광폭장을 등 뒤에 군사처럼 몰고 달려드는 기세였다.

이런 변칙적인 공격을 할 줄 몰랐기에 일악은 당황했다. 더구나 검무극의 몸이 시야를 가렸기에 순간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챙!

한차례 검을 주고받던 그 순간, 마극광폭장이 그곳을 덮쳤다.

검무극이 점멸보로 빠져나가며 우측에 있던 이악을 향해 쇄도했다.

검무극을 상대하던 일악은 한발 늦게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흑마검이 이악을 베었다.

번쩍!

비천검법의 쾌검식인 제오식 창천식이었다.

카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

창천식을 막은 것은 야율한이었다. 그는 일악을 상대하다 이악을 죽이려 한 검무극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맞부딪친 검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한기가 야율한의 검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익힌 검술은 극음의 내공을 바탕으로 한 혼원분광검술(混元分光劍術).

챙챙챙챙챙챙!

두 사람의 검이 만들어낸 검광이 허공을 번쩍였다.

“크윽!”

그때,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꼬꾸라진 사람은 일악이었다.

야율한이 막는 바람에 검무극이 이악을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극악소마가 일악을 죽인 것이다.

앞서 검무극이 점멸보로 피해버리고, 한발 늦게 피한 일악은 마극광폭장에 한쪽 팔이 쓸려 날아갔다. 극악소마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공격해서 끝내 죽인 것이다.

그가 죽자 이악과 삼악이 미쳐 날뛰었다.

쉬이익! 쉬이이익!

극악소마를 향해 검기가 연속해서 날았다.

안정된 진형은 무너졌고 검무극이 원하던 난전이 벌어진 것이다.

충성심이 높은 차환은 야율한을 돕겠다고 싸움에 뛰어들었다.

그가 검무극의 등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지만, 오히려 검무극은 그 공격을 기회로 삼았다. 뒤쪽의 공격을 피하며 세 사람의 검이 일순간 얽혔을 때.

이번에는 암영보를 발휘했다. 순간 검무극은 야율한과 차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성을 이룬 풍신사보의 위력이었다.

야율한이 자신을 공격하는지 알고 신경을 곤두세우던 그 순간!

검무극은 다른 사람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극악소마를 죽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던 이악이었다.

이 한 수를 위해 암영보와 명왕보가 연속해서 발휘되었고, 이 순간 검무극은 바람의 신이 되어 있었다.

쉬이이이이이익!

다시 한번 창천식이 발휘되었다.

이번에는 야율한이 그 공격을 막아주지 못했다.

서걱!

이악의 등이 양단되며 그대로 절명했다.

그때 극악소마는 삼악에게 연속해서 지풍을 날리고 있었다.

핑! 피잉!

극악소마의 혈앙지에 검무극의 강맹한 검기까지 보태졌다.

검기 발출식인 비천검법 제사식 염천식이었다.

검기를 날린 검무극이 뒤를 돌며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날아든 혈륜이 그의 가슴에 적중했다.

콰아아앙!

주르르륵!

검무극이 날아든 혈륜과 함께 뒤로 밀리더니 이내 튕겨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해치웠다!”

혈륜겁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망할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설쳐대!”

극악소마가 몸을 날려 검무극 앞에 내려섰다.

혈륜겁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이미 뒈졌다. 혈륜겁에 적중하고 살아남은…….”

순간 혈륜겁이 말을 멈췄다.

검무극이 귀신처럼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 여기 있네.”

극악소마가 고개를 돌려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검무극이 가슴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터져나갈 듯 뻐근했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내상은 피한 상태였다. 천마호신공과 귀호의, 극품천잠사와 호신강기까지 발휘되었으니, 아무리 혈륜이라도 검무극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극악소마의 팔에 피가 흥건히 배여 있었다. 삼악을 상대하는 중에 야율한이 날린 검기에 팔이 잘릴 뻔한 것이다. 흘러나온 피로 볼 때 상처가 얕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빛으로 검무극이 괜찮냐고 물었고, 이번에는 극악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두 사람이 위험을 감수한 덕분에 삼악도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함께 날아든 혈앙지와 염천식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비록 부상을 입긴했지만 이 싸움에서 가장 큰 변수를 제거한 것이다.

지금 가장 놀란 사람은 혈륜겁이었다. 그는 자신의 혈륜에 정통으로 적중당하고 멀쩡한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 누구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놀란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차환 역시 경악한 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과 야율한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보법도 보법이거니와, 그토록 믿고 있었던 삼악이 죽은 게 믿기지 않았다.

‘삼악이 죽었다고? 그 무서운 삼악이? 그 악마 같은 삼악이?’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삼악이란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가 펼친 수법은, 삼악이 아니라 십악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을 그런 공격이었다.

처음으로 야율한의 표정에 감정이 생겼다.

자기 뜻대로 싸움이 풀리지 않자 그의 입가가 말려 올라가며 자책의 조소를 지은 것이다.

검무극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흑마검을 늘어뜨린 채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하루에도 몇 번씩 쓴웃음을 지어야 하는 게 인생인데, 넌 지금까지 너무 편하게 살았지?”

21 절대회귀-236화 21

제236회 그래서 이 싸움이 어렵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져 그릇이 깨어졌다.

천화루주는 말없이 깨진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엌으로 음식 재료를 가져오던 서대룡이 놀라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녀가 깨진 조각을 주우려 하자 서대룡이 나서서 그녀를 말렸다.

“그냥 두십시오. 제가 치우겠습니다.”

이곳은 천마신교의 안가였다. 여불개로부터 구해온 기루의 주인들을 잠시 이곳에 데리고 있던 중이었다. 천화루주의 보살핌으로 그녀들은 많이 안정되었다.

내내 밝았던 천화루주였는데, 오늘따라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그녀가 대답했다.

“나쁜 꿈을 꿨어요.”

서대룡은 그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검무극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의 꿈을 개꿈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 그녀에게 말했다.

“꿈은 반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녀가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어두웠다. 어쩌면 그 불길한 꿈은 언제나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자 서대룡이 불쑥 말했다.

“안 통할 겁니다.”

“네?”

“루주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란 것, 각주님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가 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나쁜 꿈, 우리 각주님께는 안 통할 겁니다. 각주님께 안 통하면 소마님께도 안 통할 겁니다.”

서대룡이 쪼그리고 앉아 깨진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공자님을 만나기 전의 제 인생도 이런 깨진 그릇 같은 거였습니다. 볼품없는 외모에 어둡고 삐뚤어진 성격이었죠.”

주워든 깨진 그릇에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쳤다. 서대룡은 형체만 어렴풋이 보이는 저 일그러진 모습이 과거 자신의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저를 중요하게 여겨주지 않았고, 스스로도 저를 하찮게 여겼죠. 한데 각주님을 만나고 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눈에는 제가 깨진 그릇에 불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스스로는 어딘가에 반드시 쓸모있는 그릇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대룡은 깨진 그릇을 마저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겸손하게 말씀드린 거고 그 이상이라 생각합니다. 이공자님이 깨진 그릇을 붙여주셔서, 절 값비싼 도자기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혈천도마의 제자가 되었고, 어쩌면 차기 황천각주가 될지도 모를 그였다.

“저 같은 인생도 이렇게 만들어 주시는 분인데요. 그러니까 이공자님에게는 나쁜 꿈 같은 것 안 통합니다.”

천화루주의 표정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네. 안 통하겠네요.”

서대룡이 그릇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독왕이 마당 구석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독특하게 생긴 꽃 주위를 파헤치는 걸 보니, 저 꽃 주위에 독뱀이나 독충 같은 것이 사는 모양이다.

독왕이 무서워 평소 말을 걸지 않았지만, 오늘은 그에게 다가갔다.

“루주님께서 나쁜 꿈을 꾸셨답니다. 꿈이 잘 맞으시는 분인데.”

그러자 독왕이 서대룡을 쳐다보지 않으면서 말했다.

“교로 돌아갈 때 마차는 내가 몰 테니, 도와주러 가봐도 된다.”

“아, 꿈이 언제나 맞지는 않겠죠.”

서대룡은 한 가지가 의아했다.

왜 애초에 검무극은 독왕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하지 않은 걸까?

천화루주와 구출한 여인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야율한과의 싸움은 목숨이 걸린 일인데.

바로 그때였다. 독왕이 서대룡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사람처럼 불쑥 말했다.

“궁금하지? 왜 이공자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지?”

“네, 솔직히 궁금합니다.”

독왕이 땅속에 있는 벌레를 유심히 살피며 대답했다.

“오직 야율한을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대룡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른 목적이 또 있습니까?”

독왕이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그 맑은 눈빛을 서대룡은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오른팔이라면서? 그럼 알아야지.”

“머리가 나쁜 오른팔이라서요.”

“황천각 수석 입학했다던데?”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각주님이 그것까지 말씀했었나요?”

“자네 각주, 말이 좀 많아야지.”

서대룡은 괜히 기분이 좋아지면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잠시 사이를 두고 서대룡이 말했다.

“매번 각주님이 하시는 일에 놀라기만 하는 저인데, 어찌 그 속을 제가 알겠습니까? 다만 각주님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려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강해지시려는 걸까?”

서대룡이 여전히 뭔가를 파내는 독왕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후계자가 되는 것 이상의 뭔가를 바라보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을 간혹 받을 때가 있습니다. 대체 각주님은 어딜 보고 계신 걸까요?”

독왕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걸 왜 내게 묻나?”

“아! 그러게요. 죄송합니다.”

서대룡이 정중히 고개를 숙인 후 후다닥 물러났다.

“저는 루주님 식사 준비 도와드리러 가겠습니다.”

서대룡이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독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 * *

야율한은 혼란스러웠다.

처음 오뢰신검의 시체를 봤을 때만 해도 사도맹주가 보낸 칼에 의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극악소마의 짓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고수와 함께.

‘맹주가 마교와 손을 잡았다?’

그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사도맹주는 아무리 자신을 없애기 위해서라지만, 그렇다고 마교와 손을 잡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면 맹주와 상관없이 마교만 개입했다는 건데? 대체 왜지?’

무림에서 여러 사업을 하다 보면 마교와 충돌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싸울 정도의 갈등은 없었다.

야율한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앞서 삼악을 해치우면서 보여준 상대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대단한 신위였다. 이렇게 젊은데 극악소마보다 움직임이 더 좋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마교에 너 같은 자가 있다는 소릴 듣지 못했다.”

야율한은 검무극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물론 사도맹 이인자이니 맹으로 올라오는 세작들의 여러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보에는 마교 이공자가 최근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청년이 마교 이공자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선 나이에 비해 무공이 너무 뛰어났고, 천마의 아들이 이 위험한 일을 직접 할 리도 없었으니까.

마교에서 키운 비밀병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반로환동한 마교의 고수이거나.

“마교 아니라니까 그러네. 우린 염왕께서 특별히 보낸 저승사자시다.”

검무극의 조롱에 야율한의 온몸에서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듯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이것이 바로 야율한의 기도였다. 추워서 온몸이 얼어붙게 만드는, 이 기도에 공포까지 더해지면 상대는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만다.

물론 검무극은 그를 자극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차가움이면 지옥 불구덩이에 들어갈 때 좀 덜 뜨거우려나?”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계속 도발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야율한의 기도만 봐도 실력을 알 수 있었다. 단 한 순간의 선택으로, 단 한 번의 실수로 승패가 갈릴 것이다.

그러자 야율한이 말했다.

“널 데려가야겠다. 너처럼 짜증 나는 자가 있으면 불구덩이도 꺼버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해 뒤에 물러나 있던 차환은 깜짝 놀랐다.

처음 보았다. 야율한이 상대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을. 저 새파란 놈이 강자라는 것은 자신도 봐서 알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팽팽한 싸움이라면?

‘내가 큰 역할을 해내야 한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그를 지배했다. 기회를 봐서 뛰어들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번에는 혈륜겁이 껄껄 웃으며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혈륜이 극악소마의 피 맛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극악소마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이 철저한 무시에 혈륜겁은 다소 무안해졌다.

“하여튼 건방진 마교 놈들 같으니라고.”

그는 극악소마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앞서 야율한의 기습에 당한 극악소마의 상처가 깊다는 것을 그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원래 실력이라면 마존보다 한 수 아래인 그였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승산 있었다.

게다가 극악소마의 내력 소모가 더 심했다. 앞서 오뢰신검과 그의 제자를 상대하면서도 내공을 썼기 때문이다.

검무극의 시선이 붉게 젖은 극악소마의 팔을 향했다. 혈도를 눌러 지혈했음에도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상처가 깊다는 의미.

‘이 싸움,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싸웠다간 야율한에게 죽게 될 것이다. 마음이 급하지만 표를 내지 않아야 하고, 혼신을 다해야 하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는 싸움. 그래서 이 싸움이 어렵다.

“그나저나 천마신교를 건들면 당신네 맹주가 싫어할 텐데, 괜찮겠어?”

검무극은 적들의 마음을 뒤흔들 말을 던졌다.

그러자 야율한이 물었다.

“마교 아니라면서?”

“아니긴. 우리가 아니면 누가 있어 당신을 없애려 들겠어.”

“마교가 왜 나를 죽이려는 거냐?”

“죽을 때 알려주마.”

“너부터 죽는다. 그러니 지금 말해.”

“싫은데?”

야율한은 정말 오랜만에 짜증이란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감히 자신을 짜증 나게 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있었다 하더라도 벌써 시체가 되어 누워있었을 것이고.

하지만 이내 야율한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래, 죽을 때 듣도록 하지.”

차분한 눈빛을 보며 검무극도 마음을 다스렸다. 야율한에게는 격장지계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오직 실력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휘류류류류류류류!

혈륜이 허공을 가르며 극악소마와 혈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빠르게 허공을 날아간 혈륜을 극악소마가 가볍게 피했다.

동시에 극악소마가 혈륜겁을 향해 몸을 날렸다.

쇙애액!

쉬이잉!

그때 두 줄기의 검기가 동시에 허공을 찢어발겼다.

극악소마의 접근을 막으려는 야율한의 검기와, 그 검기를 해소하려는 검무극의 검기였다.

꽝!

검기끼리 허공에서 충돌하던 그 순간!

피잉!

극악소마의 지풍이 발출되었고, 되돌아온 혈륜이 극악소마의 뒤통수를 강타하려 했다.

극악소마가 몸을 틀어 혈륜을 피했고, 혈륜겁 역시 몸을 던져 혈앙지를 피했다.

팽팽한 첫 공방이 끝나고, 순간 그곳에는 긴장이 흘렀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박빙의 승부.

검무극은 판단을 내렸다.

‘이런 식의 싸움은 불리하다.’

왜냐하면 야율한은 언제든 혈륜겁을 버릴 수 있지만, 자신은 절대 극악소마를 버릴 수 없으니까.

그렇게 판단 내린 순간, 검무극이 야율한을 향해 날아들었다.

극악소마의 부상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그를 걱정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극악소마를 위한다면, 어설픈 걱정 대신 내 싸움에 집중해서 최대한 빨리 야율한을 죽여야 했다. 감히 극악소마에게 검기를 날리는 일은 이제 없게 만들 것이다.

챙챙챙챙챙챙!

검무극와 야율한이 만들어낸 검광이 허공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번쩍였다.

두 사람은 정말 빨랐다. 왼쪽에서 맞부딪쳤던 두 사람은 어느새 오른쪽에서 검을 나누고 있었다. 마치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검무극의 새하얀 검광과 야율한의 새파란 검광이 수없이 맞부딪쳤다.

카카카카캉캉캉!

두 사람이 검과 검을 맞부딪치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검광은 마치 이 기막힌 싸움에 폭죽을 터뜨려 주는 것만 같았다.

허공에서 아래로 뛰어내려 지붕 위를 달리면서 싸웠다. 달리는 중에도 끝없이 검과 검이 부딪쳤다.

지붕에서 다시 담벼락 위에 떨어질 때까지도 계속 검광이 번뜩였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과 십이성 대성을 이룬 혼원분광검술의 대결은 그야말로 용호상박이었다.

격전이 이어지고 있을 때, 순간적으로 검무극이 흑마검에 내력을 더 주입했다.

생각지 못한 내력에 야율한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핏방울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그것을 가르며 검이 날아들었다.

파악!

검무극의 옆구리에서 피가 튀었다.

그 빠른 격전 와중에 내공을 더 주입한 것은 무리였고, 무리한 공격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랐다. 과연 사도맹 이인자다운 실력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놀라지도 않았고 감동하지도 않았다. 오직 싸움에만 집중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리는 순간, 죽게 된다는 것을 조금 전의 싸움으로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잠시 벌어지던 바로 그 순간!

야율한의 첫 번째 비기가 발휘되었다.

슷슷슷슷슷슷슷!

야율한의 신형이 열 개로 갈라지면서 검무극을 둘러쌌다. 이 분신술은 혼원분광검술의 정수 중 하나인 십환분혼술(十幻分魂術)이었다.

촤르르르르르르륵.

그와 동시에 검무극의 주위를 서른여섯 개의 검 모양의 검기가 둘러쌌다.

비천검법 제칠식 유천식이었다. 기존의 유천식이 아니었다. 원래는 가슴 앞에서 분열되었던 그것이 이제 검무극의 몸 주위로 둥글게 만들어 세운 것이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무공은 점점 더 무르익으며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환영들이 일제히 달려들던 그 순간, 떠 있던 검기들 중 열 개의 검기가 사방으로 날았다.

쉭쉭쉭쉭쉭쉭쉭쉭!

퍼퍼퍼퍼퍼퍼퍼퍽!

검기와 환영이 충돌하며 사라졌고, 진짜 야율한이 검을 휘둘러 날아든 검기를 해소했다.

환영을 없애고 남은 스물여섯 개의 검기!

마치 기관장치에서 암기가 날아가듯, 검기는 야율한을 향해 일제히 쏘아져 날아갔다.

쉭쉭쉭쉭쉭쉭쉭쉭쉭!

지켜보고 있던 차환의 입이 쩍 벌어졌다. 태어나 이런 신위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리고 신위를 받아낸 것은 또 다른 신위였다.

쾅쾅쾅콰콰쾅콰쾅!

날아든 검기가 무엇인가에 막혀 충돌했다.

검벽(劍壁)이었다. 그냥 검벽이 아니었다. 얼음벽처럼 차가운 검기의 벽, 혼원분광검술의 또 다른 정수 청한빙벽(靑寒氷壁)이었다.

스르르르르.

검기의 벽이 눈 녹듯 사라지면서 그 뒤로 야율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악귀처럼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고 지독한 사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제부터 진짜라는 그의 기세에 흑마검이 길게 울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

검무극은 흑마검을 꽉 움켜쥐며 그 지독한 사기를 향해 걸어갔다.

‘친구야, 조금만 더 버티자!’

두 친구 모두에게 한 말이었다.

24 절대회귀-237화 24

제237회 날 보낸 사람은.

야율한은 자신의 모든 기도를 개방했다.

휘이이이이잉!

실제로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숨을 들이켜면 폐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에 깃든 것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기였다. 이 거대한 사기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감히 나에게 덤비려 드는가?

하지만 검무극은 야율한의 두 눈을 응시한 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에게 통했겠지만, 내겐 안 통한다.”

검무극 역시 기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개방했다.

두 사람의 기도가 맞부딪쳤다.

검무극의 기도에 야율한은 충격을 받았다.

기도란 단지 내공이 많다고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기도란 그 무인이 지닌 본성과 자질, 성격과 가치관, 배운 무공. 그 모든 것의 집합체와 관련이 있다. 그렇기에 기도는 그 무인의 본질과도 닿아있다.

그리고 지금 야율한이 느끼는 검무극의 기도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처음 느낀 검무극의 기도는 부드럽고 상쾌했다. 끝없이 넓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

실제로 야율한은 푸르름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주위가 온통 푸른 하늘이었다. 하늘도, 벽도, 바닥도.

그가 손을 내밀었다. 첨벙. 그 순간 깨달았다. 그것은 하늘이 아니라 너무나도 맑은 물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물에 비친 하늘이었다.

보이지 않는 기운이 야율한을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계속 가라앉았다. 야율한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심해의 공포가 야율한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만 같았다.

‘저렇게 젊은 놈이 이런 기도를 가졌다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검무극이 거인처럼 느껴졌다.

검무극은 검무극대로 엄청난 기도에 맞서고 있었다.

그는 세찬 눈보라가 치는 눈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고,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 설원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느낌.

하지만 검무극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외로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걸어본 길이었다. 이 지독하게 외로운 길은 자신이 평생을 걸었던 길이다.

세찬 눈바람을 지나자 맑은 하늘 아래 야율한이 서 있었다.

야율한 역시 끝도 없는 심해에서 간신히 헤엄쳐 올라와서 검무극 앞에 섰다.

야율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나는…….”

검무극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네가 죽을 때 말해준다고 했잖아?”

쇄애애애액!

검무극의 검이 기습적으로 허공을 갈랐다.

카아앙!

야율한이 가까스로 막았다. 검무극의 기도에 심취한 나머지 하마터면 목이 떨어질 뻔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야율한은 흥분했다. 분노보다 기쁨이 앞섰다. 이런 미칠 것 같은 싸움은 처음이었으니까.

카카카카캉!

두 사람의 검이 다시 검광을 일으키며 격돌하기 시작했다.

앞서보다 더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두 사람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검무극은 그의 강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사인방을 내세워 악착같이 긁어모은 돈으로 사들인 영약,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온갖 악행의 결과물이 그의 단전에 쌓여 있는 것이다.

카아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검 너머에서 야율한이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대체 누가 너 같은 괴물을 키워낸 것이냐!”

“너다!”

“뭐?”

“난 너 같은 놈을 잡아먹으려고 태어났거든.”

검무극의 눈빛에 살의가 깃들었다.

야율한은 순간 환상을 보았다. 그림자처럼 시커먼 형체 속에서 오직 시뻘건 눈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쥔 야율한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잡아먹을 수 있으면 먹어봐라!”

이제 야율한의 얼굴에는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분노, 두려움, 흥분…….

막아두었던 감정의 둑이 무너지자 온갖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그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콰콰콰콰르르릉!

야율한의 거대한 살기가 눈사태가 되어 검무극을 덮쳐왔다.

검무극의 천마호신공이 발동되며 날아든 살기에 몸이 움츠러들지 않게 막아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날아드는 이 공격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쇄애애애애애액!

야율한의 검기였다. 지금까지 검기와는 달랐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악귀가 검을 들고 날아오는 것 같은 환영이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검무극은 피하지 않고 비천검법 제사식 염천식을 발휘했다.

야율한의 공격이 살아 있는 것처럼 역동적인 검기였기에 섣불리 피하면 끝까지 따라와서 적중할 것 같아서였다.

거칠고 패도적인 두 검기가 허공을 찢어발기며 날아와 충돌했다.

콰아아앙!

그 충격에 두 사람이 주르륵 뒤로 밀렸다.

야율한은 표정에 놀람이 담겼다. 이 공격조차 막아낸다고?

검무극 역시 표정으로 답했다. 안 통한다고 했잖아!

휘류류류류류류!

피잉!

잠시 멀어진 두 사람 사이로 혈륜과 지풍이 교차해서 지나갔다. 극악소마와 혈륜겁과의 대결도 계속되고 있었다.

혈륜의 위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검무극은 기뻐할 수 없었다. 혈륜에 피가 묻은 것을 본 것이다.

검무극은 극악소마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를 의식하고 걱정하는 걸 들키는 순간, 치명적인 약점이 잡힐 테니까.

그랬기에 싸움을 시작한 이래 단 한 번도 그들의 싸움을 쳐다보지 않았다. 쳐다보고 있을 여유도 없었지만 말이다.

차환이 뛰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검무극과 야율한이 큰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뒤로 주르륵 밀린 이 순간, 공격의 기회는 이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지켜보던 내내 이 한순간만을 기다렸다.

쉬이이익!

그가 검무극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기습하던 바로 그 순간.

푸아아악!

차환의 가슴이 갈라지며 무엇인가 빛처럼 날아들었다. 마치 가슴에 품었던 암기를 발출하는 것만 같았다.

검무극의 팔에서 피가 튀었다. 점멸보로 가까스로 피하지 못했다면 하마터면 가슴이 꿰뚫릴 뻔한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차환이 멍하니 자신의 뻥 뚫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뒤에서 야율한이 발출한 검기가 자신의 가슴을 뚫고 검무극에게 날아갔던 것이다.

야율한은 비정했다. 순간 차환으로 시야가 가려졌던 그 순간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차환은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이 그토록 충성을 바쳤던 사람이, 자신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버릴 줄은.

‘이게 뭐야?’

차환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남들은 가슴에 작게 한 문신을 자신은 온몸에 했는데. 하루도 쉬지 않고 그를 모셨는데. 하다못해 전음으로 네가 희생해라, 한마디라도 해줬다면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도 있었는데.

‘이건 아니잖아?’

그래, 이용해 먹는 자들은 항상 이런 식이지.

그래도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면 몸에 새긴 용에게 쪽팔리잖아? 정말이지 구석에 세워둔 빗자루를 이용해도 이렇게 하찮게 이용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을 끝으로 차환의 숨이 끊어졌다.

차환의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 또 다른 승부가 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극악소마와 혈륜겁은 전력으로 싸우고 있었다.

처음에 혈륜겁은 장기전을 선택했다. 내공도 우세했고, 상대는 부상까지 당한 상태였으니까.

‘버티면 이긴다!’

혈륜을 마구잡이로 날리지 않고, 혈앙지를 막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싸움이 진행되면 될수록 자신도 모르게 싸움에 빠져들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알 수 없는 열기 때문이었다.

가면 속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눈빛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이 솟구쳤고, 피가 빨리 흘렀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극악소마를 향해 혈륜을 날리고 있었다.

두 번째는 명백한 실력 차 때문이었다.

극악소마는 결코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장기전? 누구 마음대로?

극악소마가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력 운영이 원활하지 못했다.

혈륜겁은 분명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싸움이 계속될수록 두려운 마음이 커져만 갔다.

‘제발 좀 죽어라! 이 마귀 새끼야!’

혈륜겁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극악소마를 몰아붙였다.

휘류류류류류류류류!

숨겨둔 비기를 발휘하며 혈륜이 죽음의 춤을 췄고 극악소마의 움직임은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됐다! 조금만 더!’

혈륜겁은 마지막 비기까지 동원했다.

휘류류! 휘류류!

표창처럼 쓰는 작은 혈륜들이 허공을 가르며 공격에 가세했다.

혼잡하고 어지럽고 거친 혈륜들이 극악소마를 궁지로 몰아넣던 바로 그 순간!

피잉!

퍼억!

오랫동안 극악소마가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

콰콰콰콰콰콰콰!

살아 있던 것처럼 허공을 수놓았던 혈륜이 바닥을 파헤치며 날아가더니 담을 박살 낸 후 멈췄다. 작은 혈륜들 역시 여기저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혈륜겁은 놀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왜 갑자기 조종이 안 되는 거지?’

그때 그의 얼굴로 뭔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혈륜겁이 무심코 손으로 그것을 닦았다.

피였다.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혈륜겁이 들고 있던 작은 혈륜을 들어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 이마에 구멍이 뚫린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대체 언제?’

그 의문을 끝으로 절명한 혈륜겁의 신형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놀랍게도 극악소마는 미친 듯이 움직이던 그 혈륜의 중앙에 난 아주 작은 구멍으로 혈앙지를 날렸다. 그 구멍과 혈륜겁의 이마가 정확히 일치하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이런 공격을 할 줄 몰랐고, 자신의 혈륜이 시야를 가렸기에 혈륜겁은 결코 그 공격을 막지 못했다.

검무극과 야율한의 싸움도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차환을 이용한 한 수까지 빗나가자 야율한의 눈이 달라졌다. 검은 눈동자가 완전히 사라졌고, 눈동자와 흰자위까지 모두 파랗게 변했다. 푸른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파랗게 변해버린 것이다.

검무극은 직감했다. 그가 마지막 비기를 발휘하려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신위를 생각한다면, 자신 역시 마지막 한 수를 날려야 할 때였다.

비천검법의 마지막 검식이 발휘되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루고도 지금껏 실전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제팔식 귀천식(歸天式)이었다.

귀천식은 사십사연격술이었다.

강력하지만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내공 소모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는데, 지닌 내공의 거의 전부를 사용해야 하는 무공이었다.

그랬기에 만에 하나라도 상대를 죽이는 데 실패하면, 자신이 위험해지는 그야말로 최후의 초식이었다.

이제 눈뿐만 아니라 야율한의 몸 전체가 파랗게 변하기 시작했다.

혼원극한(混元劇寒)!

몸의 모든 기운을 다 끌어올려 상대를 격살하는 혼원분광검술의 마지막 비기였다. 원래 가진 능력보다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비기로, 이 역시 실패했을 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최후 비기였다.

검무극이 비천검법 제팔식 귀천식을 발휘했다.

스윽! 스으윽! 스윽!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나면서 야율한의 몸 위로 검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극한의 한기를 내뿜으며 야율한이 검을 휘둘러 막아내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귀천식을 모두 막아낸다면, 검무극은 죽게 될 것이다.

사아악! 사악! 사아아악!

검선이 그어지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야율한의 검도 밀리지 않고 공격을 막았다.

징―

흑마검이 울었다.

공격하는 도중에 흑마검이 운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흑마검이 자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야율한이 내뿜는 지독한 사기로부터 마기를 발출하며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우리가 끝장내자!’

검무극이 모든 심력을 쏟아부었다.

사사사사사삭!

차차차차차창!

십오 수, 십육 수, 십칠 수…….

야율한은 악착같이 막아냈다.

이십삼 수, 이십사 수, 이십오 수…….

“고작 이 정도냐!”

야율한은 소리까지 질렀다.

검선이 더 빠르게 그어졌다.

삼십사 수, 삼십오 수, 삼십육 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을 야율한은 혼원극한의 비기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사십사 수가 되면 검무극은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불안해하지 않고 자신을 믿었다. 그래, 너도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노력했겠지. 하지만 나보다 노력하진 않았을 거다!

삼십칠 수, 삼십팔 수, 삼십구 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그 순간!

푸우욱!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번쩍이던 검광이 멈췄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멈췄다. 사십이 수째였다.

검무극의 검이 야율한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야율한은 끝내 검무극의 귀천식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시퍼렇게 변했던 야율한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놀람과 분노, 두려움이 가득 찬 야율한의 눈을 바라보며 검무극이 말했다.

“날 보낸 사람은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봐야 했던 한 아버지다.”

야율한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도맹주의 음모나, 마교의 음모. 이런 거창한 이유로 자신이 죽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이 그에게 더 큰 징벌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이유로 내가 죽는다고? 더 억울하게 느껴질 테니까. 더 분노하면서 죽게 될 테니까.

“수하를 살려줬는데도, 살리던 환자를 계속 치료했다는 이유로 의원의 가족들을 모두 죽였지.”

순간 야율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억을 하는 것도 같았고, 기억도 나지 않는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죽는 거냐고 따지고 묻는 것도 같았다.

“명령을 어긴 사람은 반드시 죽이는 원칙이 있었다지? 이것이 너의 그 같잖은 원칙에 대한 마의님의 대답이다. 아내를 잃은 남편의 대답이고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대답이다! 지옥으로 꺼져라!”

푸우우욱!

흑마검이 뽑혀 나오자 그의 심장에서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촤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야율한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면서 피를 뿜어냈다.

그의 피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검무극은 피하지 않았다. 피의 비를 맞으며 천천히 극악소마 쪽으로 돌아섰다.

싸움을 끝낸 극악소마가 이쪽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다 끝났습니다, 소마님.”

그에게 한 걸음 걸어가던 그 순간!

극악소마가 허물어지듯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26 절대회귀-238화 26

제238회 이제 내 차례다.

“소마님!”

나는 점멸보로 극악소마에게 몸을 날렸다.

다행히 쓰러지기 전에 그의 신형을 안을 수 있었다.

편하게 자리에 눕힌 후, 그의 가슴으로 한 줄기 내력을 주입해 내부를 살폈다. 기혈이 막히고 뒤틀리면서 큰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처치를 위해 몸에 내력을 주입하려던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귀천식을 사용하느라 내공이 바닥나 있었던 것이다.

몸에 남아 있는 내공을 쥐어짜듯 모았다. 다시 약간의 내력이 극악소마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막힌 곳을 뚫으려 했지만 내공이 부족했다. 이대로 뒀다간 기혈이 날뛰기 시작해 돌이킬 수 없다.

어느새 내 마음이 쿵쾅거리며 급해지기 시작했다. 하여, 마지막 남은 모든 내공을 끌어올리자 울컥 목구멍으로 핏물이 올라왔다. 야율한과 싸우다가 입은 부상과 심력 소모로 내 몸도 정상이 아니지만, 지금은 내 몸을 보살필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그의 내부를 다스리자, 극악소마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나는 평소처럼 밝은 어조로 말했다.

“이번 싸움 끝내줬지요?”

가면 속 두 눈이 웃었다. 극악소마가 아니었다면 이런 멋진 싸움도, 이런 멋진 결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네, 정말 끝내줬습니다.”

평소와 다른 힘없는 목소리. 그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이공자.”

“네, 소마님.”

“……이공자와 만나서 좋았습니다.”

그의 눈이 스르륵 감기려는 그 순간, 나는 짜낼 수 있는 극한의 내력까지 쥐어짜 주입했다. 사막에서의 물 한 방울처럼, 한 줌의 내력이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붙잡았다.

“내가 천마가 되면 나를 지켜줘야지요.”

극악소마의 눈동자가 떨렸다. 안타까움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가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천마가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서.

“내 성질 알죠? 절대 소마님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 나까지 데려갈 것 아니면 힘내십시오. 이대론 못 보냅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십시오.”

극악소마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어떻게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죽으면 나는 평생 자책할 겁니다. 그러니 죽지 마십시오!”

순간, 그가 큭하고 피를 내뱉었다. 기혈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걸 가라앉히지 못하면 그는 죽게 될 것이다.

“안 돼!”

정말 극악소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 소마님! 버티십시오!”

내력을 쥐어짜고 또 쥐어짰다. 어떻게든 소마를 살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서 회귀한 것인데…… 이렇게 소마를 잃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력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극악소마는 더욱 심하게 경련했다.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것이다.

내가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 극악소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알았을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도 이제 알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극악소마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가면으로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내게 얼굴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눈구멍 속 소마의 눈은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였던 그 어떤 웃음보다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아 가면을 못 벗게 했다.

“안 봅니다! 나보다 더 잘 생겼을 것 같아서 그 얼굴 안 봅니다! 오십 년 후에나 보여 주십시오!”

극악소마가 웃었고 다시 피를 토해냈다.

그가 마지막으로 힘을 내서 말을 남겼다.

“이공자는…… 좋은 천마가 될 겁니다.”

생기가 사라져 가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웃고 있었다.

“이공자와 함께했던 시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 빌었다.

살려주십시오!

대법 재료를 구하지 못해 온 중원을 헤맬 때도,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만 죽어 버리고 싶을 때도, 위기에 처해 내가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도…… 나는 하늘에 빌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인생 처음으로 빌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딱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바로 그때였다.

툭.

고개를 떨구고 앉은 채, 죽은 야율한의 품에서 뭔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상자였다.

열린 상자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것을 보고 나는 그것을 향해 달려갔다.

놀랍게도 그것은 만년설삼이었다. 아마도 오뢰신검의 생일선물로 가져왔던 모양이다.

‘이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가져와서 극악소마를 일으켜 앉혔다. 그리고 만년설삼을 입에 넣어주었다.

“만년설삼의 기운으로 버티십시오! 제가 일주천할 때까지만 버티십시오!”

원래라면 해선 안 될 선택이었다. 내상이 극심한 상태에서 만년설삼처럼 약효가 강한 영약을 복용했다간 오히려 몸을 더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만년설삼을 믿었고, 또 극악소마를 믿었다.

“소마님, 마지막 힘을 다해 씹어 삼키십시오!”

나와 소마의 눈빛이 마주쳤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극악소마가 애써 만년설삼을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진기를 일주천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다급한 운기였다.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제발! 제발!’

내가 평생 했던 ‘제발’이란 말을 오늘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른 진기의 일주천을 마치고 다시 극악소마에게 내력을 주입해서 몸을 살폈다.

다행이었다. 극악소마는 만년설삼의 기운으로 기혈이 날뛰는 것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만년설삼의 기운을 내공으로 녹인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기운으로 임시로 눌러둔 것에 불과했다.

언제 또 기혈이 날뛸지 모를 일. 한시 빨리 마의에게 데려가야 한다.

“고맙습니다, 소마님.”

내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그가 고마웠다. 버텨줘서 고마웠다. 누군가에게 만년설삼을 주고서,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서 정말 고마웠다.

극악소마의 눈빛이 내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공자.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그와 내 가슴에 묶여 있던 극품천잠사를 풀었다.

그리고 극악소마를 등에 업고서는 극품천잠사로 단단히 동여맸다.

그가 해냈으니 이제 내 차례다.

소마야, 누구 마음대로 가겠다는 거냐? 야율한 따위가 저승 가는 배에 오른 날, 내가 널 그 배에 태워 보낼 것 같으냐?

극악소마의 몸이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게끔 내 기운으로 감싼 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을 위해서 쾌속보를 익혔다는 생각이 들 만큼, 혼신을 다해 달렸다.

* * *

비사인은 장원의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곳으로 일랑 백철기가 도착했다.

“혼자 이렇게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비사인은 일랑만 이곳에 오게 했다. 그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일랑이었다.

일랑의 시선이 뒤쪽 장원을 향했다. 부서진 담벼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피 냄새로 볼 때, 이곳에서 한바탕 격전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안에서 무엇을 보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한두 사람의 피 냄새가 아닙니다. 대체 여긴 어딥니까?”

그러자 비사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제 미래가 결정될 곳입니다.”

그러자 일랑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럼 제 미래도 결정되겠군요.”

피바다가 된 그곳은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일랑이 야율한의 시체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야율한!’

너무 놀란 나머지 일랑은 잠시 멍하니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야율한이 죽었다고? 그 야율한이?

정말이지 야율한은 이 한마디 표현이면 충분했다. 그 야율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랑의 눈에 다른 시체가 눈에 띄었다.

‘오뢰신검까지!’

오뢰신검.

그가 야율한과 한패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야율한보다 강한지 약한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강함을 비교하려면 야율한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가 몸통이 양단되어서 죽었다고?’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어디 놀랄 일이 그뿐이겠는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혈륜을 보며 깜짝 놀랐다.

‘저 병기는 혈륜이다. 혈륜을 사용하는 자는 혈륜겁밖에 없는데?’

혈륜겁에 이어 일랑은 삼악도 알아보았다.

‘이들과 어울릴 만한 세쌍둥이는 삼악이다!’

이 정도면 차환의 죽음은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일랑이 다시 장원을 나왔다. 여전히 비사인은 정문 앞에 앉아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앉으세요.”

일랑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도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라면 무림맹에 선전포고를 했어도 되었을 겁니다.”

물론 과장된 말이었지만, 허풍은 아닌 말이다.

이들이 누군가를 친다면 과연 어떤 무림 문파가 막아낼 수 있을까?

처음 이 광경을 봤을 때, 비사인도 일랑만큼 놀랐다.

검무극이 야율한을 죽인다고 했을 때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는 ‘정말 죽일 수 있다고?’라는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한데 정말 해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은 골고루 밥을 먹으라고 잔소리하던 사람이 해낸 일이었다.

‘당신은 정말!’

새삼 그가 천마의 아들이란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그는 역대 어떤 후계자도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

“대체 누구 짓입니까?”

일랑의 물음에 비사인이 대답했다.

“접니다.”

“네?”

일랑은 깜짝 놀랐다.

“이 일을 제가 한 것으로 처리할 겁니다.”

“진심이십니까?”

“네, 제가 뒤처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대체 누가 죽인 겁니까?”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일랑을 위해서도 모르는 것이 낫습니다.”

일랑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시지요. 한데 야율한을 죽인 것을 맹주님이 믿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일랑을 부른 겁니다.”

“네?”

“이제부터 뒤처리해야지요. 어떻게 하면 제가 야율한을 처리했다고 믿게 할지요.”

일랑은 알 수 있었다. 아까 비사인이 했던 말처럼 이 일에 비사인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있음을.

“제 일생의 숙적이 죽었지만, 제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비사인은 언젠가 마교가 쳐들어오는 상상을 해보았다. 검무극이 천마인 마교를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란, 이 근거 없는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비사인은 검무극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나 무서운 자였지만, 그가 보고 싶었다. 그의 실없는 너스레가 듣고 싶었다.

어때? 이 일은 내게 맡기라고 했지? 이제 당신 차례야. 당신은 잘 해낼 거라 믿어. 밥 골고루 먹고!

그의 말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사도맹주가 되면 꼭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사도가 어떤 것인지를.

‘그러니 당신도 꼭 천마가 되어야 해.’

* * *

밤이 되어도 검무극과 극악소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대룡은 초조한 마음에 마당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그곳으로 천화루주가 나왔다.

“두 분, 야율한을 죽인 기념으로 한잔하고 오시려나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서대룡의 농담에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보네요.”

그녀는 오히려 서대룡보다 편한 얼굴이었다.

“혹시 새로운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뇨.”

“그런데 얼굴이 편해 보이십니다.”

“서 조사관께서 안 통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서대룡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그랬었죠.”

천화루주가 서대룡에게 물었다.

“걱정되세요?”

“각주님은 한 번도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은 적이 없으시거든요. 언제나 문을 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큼성큼 돌아오시는 분이니까요.”

하필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대룡과 천화루주가 깜짝 놀라 쳐다봤는데, 아쉽게도 안가를 관리하는 마교의 무인이었다.

“통천각에서 보내온 긴급전서입니다.”

깜짝 놀란 서대룡이 다급히 전서를 받아 읽었다.

“각주님은 소마님께서 다치셔서 본교로 먼저 가셨답니다.”

순간 천화루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대룡이 그녀를 보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소마님이 얼마나 다치셨는지는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뒤에서 독왕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많이 다쳤을 겁니다. 본교로 곧장 간 것을 보면.”

독왕은 그녀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넨 곧장 떠날 채비 하게.”

“네.”

서대룡은 천화루주가 걱정되었지만, 독왕의 명령을 받았기에 서둘러 움직였다.

걱정 가득한 천화루주를 보고 독왕이 불쑥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함께 갑시다.”

독왕의 말에 천화루주는 깜짝 놀랐다.

“본교 한 번도 안 가보셨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구경 한 번 해보시죠.”

천화루주는 알 수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독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가서 보십시오.’

천화루주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귀하신 분의 말씀 따르겠습니다. 크나크신 배려,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소마 그 사람도 깨어났을 때, 루주가 계시면 좋아할 겁니다.”

“감히 어딜 왔냐고 혼이나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그럴 리 없다는 것, 루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독왕은 부채를 소리 나게 착 펼친 후 살랑살랑 흔들며 짐을 챙기러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화루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서 구출한 여인들과 작별을 고했다. 그녀들은 이곳 안가의 무인들이 잘 데려다줄 것이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마차에 올랐다.

마부석의 서대룡이 소리쳤다.

“자, 출발하겠습니다.”

마차 밖을 바라보는 천화루주의 눈빛이 깊어졌다. 극악소마가 걱정되었다.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그녀였지만, 극악소마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때면 화가 난다. 다른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잘 보면서 정작 자신의 운명은 보지 못할 때가 많았으니까.

마교에 가는 것이 무섭냐고? 그럴 리가. 극악소마를 볼 수만 있다면 지옥으로 향하는 마차였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올라탔을 것이다.

‘오라버니, 죽지 마요.’

그리고 언제나 검무극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을 이제 진심으로 했다.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해요.’

고삐를 쥔 사람은 누구보다 그녀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마차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천마신교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31 절대회귀-239화 31

제239회 둘이서 무림 전체와 싸웠답니까?

마의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환자가 적었다. 이런 날이 있다. 저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구름처럼, 하루쯤은 너도 편히 쉬어라, 하는 날이.

하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방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극악소마를 업고 있는 검무극이었다. 그에게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훅 느껴졌다.

“……살려주십시오!”

그 말을 하고 검무극은 그대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마의가 극악소마부터 안아서 침상에 눕혔다.

다시 검무극을 침상에 눕히려는데 정신을 차린 검무극이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소마님을 치료해 주십시오.”

“자네 안 괜찮네.”

마의는 검무극이 완전히 탈진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말하고 움직이는 것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소마님부터요.”

급한 쪽은 극악소마였기에 마의는 서둘러 그를 진맥했다. 어떤 강대한 기운으로 혈맥이 날뛰는 것을 눌러두었음을 알아차렸다.

“이 기운은 뭔가?”

“만년설삼입니다.”

검무극이 일어나서 침상으로 왔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걷기도 힘들었지만, 극악소마가 걱정되어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의가 극악소마의 상의를 벗기며 말했다.

“만년설삼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네.”

극악소마의 몸 상태는 여전히 위태로웠다.

마의는 서둘러 자신의 침술 가방을 열었다. 가죽으로 된 가방에 크고 작은 침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마의가 침을 놓기 시작했다. 마의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그 어떤 의원도 흉내 낼 수 없는 의술의 정수가 한 침, 한 침마다 깃들어 있었다.

침을 놓고 난 후 마의는 극악소마의 단전 위에 알 수 없는 약초로 뜸을 뜨기 시작했다. 독특한 약향이 의방을 가득 채웠다.

“으으으으.”

극악소마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마의가 이번에는 붉은색으로 된 장침을 꺼내 하침했다. 저렇게 긴 침이 저리 깊숙이 들어가도 될까 싶을 만큼 찔러넣었다.

그러자 극악소마의 표정이 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경련을 일으켰다.

마의는 재빨리 침을 거두어들인 후, 새로운 혈 자리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자 극악소마의 경련이 멈췄다.

지금까지는 만년설삼의 기운이 극악소마를 살렸지만, 이제는 그것이 치료를 방해하는 가장 큰 위험으로 다가온다. 어떻게든 한곳에 그것을 몰아둔 후 치료를 마쳐야 했다.

위기는 계속 찾아왔고, 마의는 능숙하게 위기를 넘기며 자신이 왜 신의인지를 증명했다. 마의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치료를 시도조차 못 할 몸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심력 소모가 엄청났기에 마의의 이마와 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검무극은 긴장한 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정말 미친 듯이 달려왔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야율한과 싸울 때보다 더 힘들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전쟁과도 같았던 치료가 끝나고, 극악소마가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우선 첫 고비는 넘겼네.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워낙 강단 있는 사람이라 잘 버텨낼 거라 생각하네.”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린 이유는 기다리는 사람이 마의였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살려도 마의는 살릴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마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네.”

“감사합니다.”

그제야 검무극의 긴장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의가 검무극을 진맥해서 몸 상태를 확인했다. 검무극 역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대체 이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가?”

마의는 놀랐다. 이런 몸이라면 누군가를 업고 뛰는 것은 고사하고, 제 한 몸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자, 이것부터 먹게.”

마의가 단약을 건네주었다. 탈진했을 때 기력을 보충해 주는 약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네. 어서 복용하게.”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약을 먹었다.

마의가 검무극의 상처에도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검무극과 극악소마의 상처를 봤을 때, 정말 대격전을 펼쳤던 것이 분명했다.

그때 무인이 들어와서 전서를 전했다.

전서 내용을 확인한 마의가 깜짝 놀라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네, 대체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가?”

전서 내용은 검무극이 부상당한 극악소마를 데리고 출발했으니 미리 준비하란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검무극은 전서보다 더 빨리 달려온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심지어 극악소마까지 업고서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착오가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검무극의 상태를 보니, 정말 전서보다 빠르게 달려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마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야율한을 죽이러 떠난 그였으니까.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결과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다쳐서 돌아왔으니.

두 사람에게 미안했다. 쉽게 이룰 수 없는 복수임을 알면서도 욕심이 너무 과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마의가 극악소마의 상태를 살피려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야율한에게 마의님의 말씀 전했습니다.”

“!”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벽에 기대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야율한의 두 눈을 보며 똑똑히 전했습니다. 이것이 마의님의 뜻이라고요.”

마의는 너무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의가 물었다.

“야율한을 죽인 건가?”

“네, 죽였습니다.”

“정말…… 죽였나?”

마의의 목소리가 떨렸고, 이내 온몸이 떨렸다.

“네, 죽였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마의가 검무극 앞에 마주 앉으며 손을 맞잡았다.

“이제 남은 생은 마음 편하게 사십시오. 가족분들도 그걸 원할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의는 울컥 격정이 치밀어올랐다. 마의는 검무극의 손을 잡은 채 그 앞에 엎드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수천, 수만 번 이 순간을 떠올렸었다.

문득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 우릴 위해서 바쁜 거잖아. 안 바쁘면 나랑 놀아 줄 거지?

마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 있었다면 중년이 되었을 나이인데…… 마의에게는 아들은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었다.

‘더 많이 놀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더 많이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마의의 마음속에서 아들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눈물은 더욱 쏟아져 내렸다.

‘그래, 나중에 만나면 많이 놀아주마.’

마의가 평생 가슴에 올려두었던 무거운 돌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던 마의가 고개를 들었을 때, 검무극은 벽에 기대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지금껏 쌓였던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다.

‘고맙네, 이공자. 내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네.’

바로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도착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들어선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그는 검무극이 도착해서 의방으로 곧장 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침상에 누워서 치료를 받는 극악소마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혈천도마는 검무극부터 챙겼다.

“괜찮나?”

“저 사람을 업고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어찌 괜찮겠나?”

하지만 마의의 표정에 여유가 있었다. 검무극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혈천도마가 괜한 심술을 부렸다.

“저깟 가면쟁이가 뭘 그리 귀하다고!”

혈천도마가 검무극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자신이 준 귀호의가 보였다. 피가 가득 묻어 있었다.

“말년에 속 썩이는군.”

혈천도마가 침상 옆에 떨어져 있던 피에 젖은 극품천잠사를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아주었다. 그리고 검을 검무극 옆에 세워주었다.

“속 썩는 것 맞나?”

“무슨 말인가?”

“저기 동경에 비친 자네 얼굴을 보게.”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았다.

“뭘 보라는 거냐?”

마의는 뜻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확실히 느낀다. 근래 혈천도마가 변했다는 것을. 그 변화의 시작이 무엇인지도 안다.

그때 그곳에 권마가 도착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커다란 덩치의 그가 들어오자 의방이 가득 차는 것만 같았다.

권마는 두 사람과 인사한 후, 침상에 누워있는 극악소마의 안위부터 물었다.

“소마께서는 괜찮소?”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고비는 넘긴 듯합니다.”

괜히 소마를 챙기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마의는 알 수 있었다. 제자의 안위가 걱정되서 찾아왔다는 것을.

“제자분은 탈진한 것뿐입니다. 며칠 푹 쉬고 나면 괜찮아 질 겁니다.”

권마의 무서운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마의는 권마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저 안도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낼 정도로 검무극에 대한 마음이 깊다는 것도 지금 알게 되었다. 이 무서운 마존들을 이렇게 변화시키다니.

‘이공자, 대단하시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이 몰골들은 뭡니까? 둘이서 무림 전체와 싸웠답니까?”

술 냄새 풀풀 풍기며 들어선 사람은 취마였다.

그가 인사도 생략하고, 검무극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잠시 말없이 검무극을 응시하던 취마가 다른 두 마존에게 말했다.

“깨고 나면 무용담을 자랑하러 다닐 테니, 한동안 피해 다녀야 할 겁니다.”

그 말을 혈천도마가 거들었다.

“일장연설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그때 또 다른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왔다.

“아픈 사람 옆에 두고 뭣들 하세요?”

마지막으로 도착한 사람은 일화검존이었다. 나이를 잊은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한 그녀였다.

마의는 내심 놀랐다. 검무극이 마존들과 어울리는 거야 이미 아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존들이 모두 찾아올 줄은 몰랐다.

취마가 검무극을 보며 혀를 찼다.

“동생, 이게 뭔가? 예쁜 여자는 안 오고.”

“여기 왔잖아.”

일화검존의 말에 취마가 다시 말했다.

“동생, 예쁘고 젊은 여자는 안 오고 이렇게 나이 든 사람들만 와서 될 일인가? 내 소싯적엔 말이지…….”

그때 이안과 천소희가 그곳에 도착했다.

마존들이 모여 있는 것에 놀란 이안이 눈을 크게 떴다.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혈천도마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마존들이 길을 열어주자 그녀가 검무극 앞에 앉았다.

“잠든 것뿐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혈천도마의 말에 이안이 눈물을 흘렸다. 검무극이 무사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다쳐서 쓰러진 것보다, 너무 지쳐서 잠든 모습이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쳤으면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깨지 못하고 있는 걸까?

자신이 옆에 없었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미안했다. 마존들이나 마의가 없었다면 어쩌면 막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귀영대주 그만두고 이제부터 따라다닐 거라고. 나 좀 데리고 다니라고.

그녀는 검무극이 편히 잘 수 있게 어깨를 내줘서 기대게 하고 싶었다. 물론, 마존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천소희도 뒤에서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권마가 있는 자리였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나서진 않았다.

그리고 오늘 방문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방문을 향했다.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누가 도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도를 발출하지 않아도, 그 존재감만으로도 등장을 알 수 있는 사람.

천마 검우진이 그곳에 등장한 것이다.

마존들과 이안, 천소희가 좌우로 늘어서며 정중히 예를 갖췄다.

“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검우진은 극악소마의 안위부터 물었다.

“소마의 상태는 어떠한가?”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워낙 강건한 사람이라, 이른 시일 안에 원래 모습을 찾을 겁니다.”

“약을 아끼지 말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몸속에 만년설삼의 기운이 녹지 않고 있어서, 회복한 후에 그것을 흡수하면 훨씬 강해질 겁니다.”

만년설삼이란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가 검무극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 욕심쟁이가 만년설삼까지 양보했나 보군.”

그제야 검우진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아들을 향한 눈빛은 무덤덤했다. 잠시 잠든 검무극을 내려다보던 검우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여기 둬봤자 자네 치료에 방해만 될 테니, 저 녀석은 내가 데려가겠네.”

검우진이 성큼성큼 걸어가서 검무극을 안아 들었다.

그 모습에 모두 깜짝 놀랐다. 검우진이 누군가를 안는 모습은 그야말로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설령 안는다 하더라도 허공섭물로 들어서 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검우진은 허리를 숙여 직접 검무극을 안아 들었다.

마존들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고, 충격적이었다.

마존들이 놀라거나 말거나 검우진은 아들을 안고 그곳을 걸어 나가버렸다.

“아직도 부러워?”

일화검존의 물음에 취마가 대답했다. 당연히 ‘교주에게 안기는 것? 싫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라는 답이 나올 줄 알았다.

“모르겠네. 아버지에게 안겨본 적이 없어서.”

일화검존이 취마를 돌아보았다.

“취했어?”

취마는 실실 웃으며 술을 마셨다.

혈천도마도 괜한 심술을 부렸다.

“고얀 놈! 내 영약은 악착같이 챙겼으면서 만년설삼을 양보해?”

그러자 마의가 검무극 편을 들어주었다.

“양보 안 했으면 저 사람은 죽었네.”

“죽으라지!”

혈천도마가 나가자, 마존들도 모두 마의와 작별을 고한 후 의방을 떠났다. 이안과 천소희도 마의에게 인사를 한 후 의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마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려왔다 지나간 것만 같았다.

마의가 극악소마가 잠들어 있는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를 내려다보는 마의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검무극과 함께 싸운 그였다.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갚겠는가? 그를 살리는 것으로 갚을 것이다.

“난 당신을 꼭 살릴 작정이니 그대도 힘내시오, 당신을 업고 그 먼 길을 달려온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힘내야 하지 않겠소?”

마의가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까 봤던 하늘은 이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저 하늘에 유유히 흐르는 구름처럼, 남은 인생 마음 편히 살아가거라.

28 절대회귀-240화 28

제240회 드디어 눈을 떴다.

눈을 떴다.

낯선 곳에서 깨어났음에도 몸이 너무 개운해서 잠시 침상에 누운 채로 그대로 있었다. 보통 오래 자면 온갖 꿈을 다 꾸었는데, 이번에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얼마나 잔 것일까?

하루? 이틀? 배가 이렇게나 고픈 걸 보니 어쩌면 내리 열흘을 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한 사람이 생각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마님!”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의방이 아니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낯선 침소. 깨끗한 침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고, 침상이나 가구들은 낡았다는 느낌 대신 고가구의 품격이 느껴졌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저것은…!

놀랍게도 이곳은 아버지의 침소였다.

마지막 기억이 의방이었는데, 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걸까?

침상 옆에 깨끗한 무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는 얼떨떨한 마음으로 침소를 둘러보았다. 아들이지만 처음 들어와 보는 방.

‘아버지가 내게 방을 내주셨다고?’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너무 감격스러웠다. 나는 다시 아버지의 침상에 누웠다.

아버지가 여기서 주무신다고 생각하니 괜히 더 누워있고 싶었다. 다시 없을 기회일 수도 있다.

그때, 창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나오너라.”

나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마당에 돌로 만들어진 다탁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계셨다.

“천마의 침소인 것을 알아차리려면 보통 천마혼의 상징을 보거나, 천마검을 보거나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한데 꽃무늬 잠옷으로 알아내다니요!”

벽에 걸려 있던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꽃무늬 잠옷이었다.

내 너스레에 아버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살만한가 보구나.”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도 몸은 멀쩡히 치료되어 있었다.

“제가 왜 아버지 침소에 있는 겁니까?”

“내가 데려왔으니까.”

“의방에 오셨습니까?”

깜짝 놀란 내 물음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간 것이 아니다. 몇 되지 않는 네 인맥들이 다 왔더구나.”

대충 누가 왔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 몇 사람이 결국 일당백 아니겠습니까?”

어디 일당백만 되겠는가? 일당천이고 일당만이지.

“소마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마시며 ‘소마는 죽었다’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셨으니까.

“마의가 계속 치료 중이다.”

그 말에 안도했다. ‘마의’라는 한마디 말이 주는 힘이 이렇게나 크다.

그때, 천마전 시비들이 와서 내게 죽을 가져다주었다. 며칠을 굶었다가 먹는 식사니, 가볍게 먹으라는 의미였다. 이건 아버지의 배려다.

“식사하셨습니까?”

“난 했으니 들 거라.”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죽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그렇게 깨끗하게 그릇을 비우고 차까지 한잔 마시고 나자, 여전히 배는 고팠지만 좀 살 것 같았다.

“만년설삼은 어디서 난 거냐?”

“야율한이 오뢰신검의 구십 세 생일선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 뒤처리는?”

“비사인이 알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네, 저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너는 그 아이를 차기 사도맹주로 낙점했구나.”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천마전 무인이 뭔가를 가져와서 내 앞에 내려놓고 갔다.

“이게 뭡니까?”

“열어봐라.”

상자를 열어보니 만년설삼이 들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디서 난 겁니까?”

“왜? 소마의 배라도 갈라서 꺼내 온 것 같으냐?”

천마보고(天魔寶庫)에 있던 영약을 가져온 것이리라.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오직 천마만이 알지만, 나도 대충은 알고 있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래.”

“이 귀한 것을 왜 주시는 겁니까?”

“내 마존을 위해 기꺼이 만년설삼을 내어주었으니, 당연히 돌려줘야지.”

내 마존이란 말을 강조했다. 아직은 네 마존이 아니라는 뜻.

“혹시 극악소마를 제게 빼앗길까 봐 겁나십니까?”

그러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지어지는 그 특유의 비웃음 말이다.

“먹기 싫으냐? 싫으면 말고.”

“그럴 리가요!”

도로 가져가시려는 것을 재빨리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지금껏 먹은 어떤 영약보다 향긋하고 맛이 좋았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만년설삼의 기운을 완전히 녹여 내공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단계에 오른 내공 경지에 만년설삼의 내공이 더해지자, 내공은 더욱 정순해지고 웅혼해졌다.

내가 운기하던 사이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저 멀리 대천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감사 인사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먼저 드렸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위험에 빠지는 아들은 그것만으로도 불효자니까.

“알면 됐다.”

“만년설삼을 내려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어디 극악소마에게 양보해 줬다고 이 귀한 것을 내게 줬겠는가? 아버지가 만년설삼을 내려준 데에는 다른 뜻이 있다. 그리고 그 뜻은 내가 짐작한 것이었다.

“네가 말했지. 피를 흘리지 않는 후계싸움을 하겠다고.”

“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느냐?”

“변함없습니다.”

아버지는 더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조만간에 아버지는 후계자를 결정하실 것임을. 만년설삼은 그 후계싸움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에서 내리는 선물이었다. 그런 사실을 짐작했기에 만년설삼을 씹을 때마다 귓가에 이런 말이 들렸다.

‘이거 먹고 잘해라!’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시겠다면, 나 역시 형과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한다.

“형제끼리 손잡고 조만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원하는 바였다. 후계자 선정의 마지막 시험.

형 성격을 잘 알았기에, 어쩌면 이 일은 야율한을 죽이는 일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으론 이제 내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마존들이 내 사람이 되었기에,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든 일이었다. 형이 어떤 무리수를 두려 할지 모를 일이었기에.

“밥 다 먹었으면 이만 가거라.”

“침소에 들어가서 아버지 잠옷 입고 딱 한 시진만 더 자고 가도 됩니까? 너무 푹신푹신하고 좋아서 가기가 싫습니다.”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려던 그때, 천마전 무인이 와서 보고했다.

“독왕이 돌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넙죽 인사하고 달려갔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실 아버지의 시선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후계싸움은 이번에 끝내겠습니다. 저도 가야 할 길이 머니까요.

* * *

독왕과 천화루주가 탄 마차가 천마신교로 들어섰다.

“저길 보십시오!”

서대룡이 가리킨 곳에 거대한 악귀상이 서 있었다.

“저기 반대쪽을 보십시오.”

반대쪽에도 석상들이 서로 검과 도를 겨누고 있었다. 역대 천마를 재현한 석상도 있었고, 천마혼의 모습을 한 석상도 있었다.

“대단하네요.”

감탄한 듯 대답했지만 지금 천화루주 눈에는 석상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이제 곧 극악소마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극악소마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독왕은 극악소마의 생사에 대해서는 일절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 위로도 하지 않았다.

서대룡은 독왕의 그런 모습에서 그가 보기와는 참 다른 사람이란 것을 느꼈다.

어려 보이는 저 풋풋한 외모로 판단해선 안 될 사람이다. 멍하게 독초를 바라보고 있거나, 흙이나 파는 모습은 그의 일부분일 뿐이다.

삼엄한 경계 속에 외원을 통과한 마차가 내원으로 들어섰다. 경계는 몇 배로 더 삼엄해졌다.

이제 일행들이 모두 마차에서 내렸다.

천화루주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딱 멈췄다.

저 멀리서 검무극이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천화루주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과연 검무극이 무슨 소식을 전할지. 제발 극악소마가 무사하기를.

가까이 다가온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소마님은 아직 치료 중이십니다.”

검무극은 솔직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본교의 신의께서도 최선을 다하셨고요. 이제 소마님에게 달렸습니다.”

그러자 천화루주가 활짝 웃었다.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극악소마를 하늘처럼 믿고 있는 그녀였다.

다른 사람이 아닌 검무극이 말해주니까 안심되었다. 검무극이 최선을 다했다면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일 테니까.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좀 쉬십시오. 소마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본교의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천화루주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함께 따라왔던 시비들이 그녀를 별채로 안내했다.

그녀가 떠나자 서대룡이 달려가 검무극에게 안기려 했다.

“징그럽게 왜 이래?”

“반가워서 그러는데, 이게 보법까지 써서 피할 일이냐고요. 이 무인이 달려왔어도 이랬겠냐고요.”

서대룡이 다시 달려들었다. 검무극은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순순히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정말 걱정 많이 했습니다.”

“그럼 그때 달려왔어야지. 야율한이 분신술로 나를 포위했을 때 네가 와서 분신 셋은 맡아줬어야지.”

“헛! 놈이 분신술도 썼나요?”

“어디 그뿐이겠어? 악귀 모양의 검기가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었지.”

서대룡이 슬그머니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아시다시피 저는 조사관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수석 입학을 엉뚱한 데 쓰지 마십시오!”

그런 말을 하려거든 그 눈이 그렇게 이글거리면 안 되지.

“저는 사부님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서대룡마저 그곳을 떠나자 이제 남은 사람은 독왕이었다.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어 일부러 나서지 않은 그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독왕님.”

“나야 고생이랄 게 있나? 자네들이 고생했지.”

독왕이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번 싸움으로 자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나?”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네, 얻은 것 같습니다.”

더욱 깊어진 검무극의 눈빛을 빤히 쳐다보던 독왕이 천독림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시간 날 때 천독림에 놀러 와.”

걸어가는 그의 허리춤엔 검무극이 선물로 준 피독천잠사 장갑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 *

드디어 극악소마가 눈을 떴다.

특유의 약향이 코를 찔러오는 것으로 자신이 의방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검무극의 등이었다. 정말 무섭게 내달리는 데 왜 이리 몸이 편하지,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몸속을 살피자 전쟁터 같았던 몸속이 평온했다. 종전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휴전 상태는 되어 있었다.

몸 상태로 알 수 있었다. 본교에 무사히 도착했고 마의가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을. 그 몸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의밖에 없을 테니까.

극악소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걸터앉아 동경을 쳐다보았다. 백색 가면엔 싸웠을 때 묻었던 피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치료하면서도 가면은 손도 대지 않은 것이다.

극악소마는 문득 한순간을 떠올렸다.

죽음을 예감하고 가면을 벗으려고 했을 때, 검무극이 자신의 팔을 잡던 그 순간을.

―나보다 더 잘 생겼을 것 같아서 그 얼굴 안 봅니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누군가 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깨어나셨소?”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의였다.

그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극악소마는 인사를 생략하고 검무극에 대해서 먼저 물었다.

“이공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의원으로 살면서 그렇게 탈진한 상태는 처음이었지요. 그 상태로 마존을 업고 왔으니…….”

극악소마의 눈빛에 살짝 걱정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마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되오. 지금은 마존을 다시 업고 왔던 길을 더 빨리 돌아갈 거요.”

그제야 극악소마가 안도했다.

“이공자도 며칠 내내 잠만 잤다고 들었소. 하긴, 전서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지칠 만도 했지요.”

전서보다 빨랐다고? 그래, 기억난다. 검무극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달렸는지. 그 와중에도 기운을 나눠 자신의 몸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게 얼마나 심력 소모가 큰일인지는 극악소마는 잘 알고 있다.

검무극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극악소마는 마의에게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마의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감사를 표할 사람은 나외다.”

마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 평생의 한을 풀어 주셔서 감사하오.”

마의의 마음속에 있던 아들은 이제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자, 우선 몸에 있던 만년설삼의 기운부터 녹이시오. 이공자가 그걸 복용시키지 않았다면, 마존께서는 지금까지 살아계시지 못했을 거요.”

이번에는 극악소마는 검무극이 만년설삼을 자신에게 복용시키던 순간이 기억났다. 자신이 죽을까 봐 오열하던 검무극의 모습도 떠올랐다.

검무극에게 고마워할 일이 너무 많음을 느끼며 극악소마는 눈을 감고 만년설삼의 기운을 녹이기 시작했다.

극악소마가 운기 하는 동안 마의는 사람을 보내 검무극에게 극악소마가 깨어났음을 알렸다.

극악소마가 내력을 모두 녹였을 때, 가면 속 그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깊어졌다.

잠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검무극이 가면을 쓰고 있는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얼굴에 화색이 더 좋아 보이십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검무극의 너스레였던가? 가면에 묻은 피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얼굴에 홍조까지 띠셨습니다.”

극악소마가 소리 내서 웃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다 막 살아난 극악소마의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중에 또 싸우러 가시죠.”

“좋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참, 본교에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검무극이 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천화루주였다. 극악소마가 너무 걱정돼서 천마신교 본단까지 왔지만 와서는 안 될 곳을 온 것은 아닌가, 내내 걱정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극악소마를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를 봐서 이렇게 기쁜데.

더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극악소마가 화를 내더라도 잘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극악소마는 너무나도 잘 그녀의 마음에 부응했다.

“예전부터 내 방 구경하고 싶다고 했었지?”

15 절대회귀-241화 15

제241회 그만 좀 강해져요!

천화루주는 크게 감격했다.

극악소마는 화를 내기는커녕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 것이다.

“네, 오라버니 방 정말 보고 싶어요.”

그녀는 애써 눈물이 나려는 것을 참았다. 천화루의 주인으로 살아오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그래도 울지 않았던 그녀였다. 한데 극악소마의 저 한마디에 눈물이 나려는 것이다.

그녀는 극악소마와 쌓아 왔던 관계가, 그와의 애정이 이 순간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사랑에 대해 단 한 번도 대화를 나눈 적이 없지만, 조금 전 극악소마의 말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로 들렸다. 단지 방을 보여주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천화루주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공자님.”

극악소마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서대룡에게 들었다. 검무극이 극악소마를 업고 먼 길을 달려왔다는 것을. 거기다 무인이라면 누구라도 원하는 만년설삼까지 양보했다는 것을.

“저야 업고 달린 것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제가 아니라 마의님께 드려야지요.”

천화루주가 마의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의선님.”

“아닙니다, 부인. 마존께서 워낙 강건하셔서 별일 없었던 것이니, 제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드실 약은 제가 악인곡으로 보내드릴 테니, 두 분은 이만 가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먼저 의방을 나섰다.

마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아내를 떠올렸다. 우리도 저런 적이 있었지, 하면서.

그리고 놀랍게도 아내를 떠올렸음에도 이전과는 달리 마음이 편해졌음을 느꼈다.

마의가 검무극에게 말했다.

“복수를 마치면 허망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네.”

“허망하십니까?”

마의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마음이 너무 편하고 좋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더 통쾌해하셔도 됩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네.”

마의가 검무극을 데리고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마의는 비밀 문을 지나 예전에 보여주었던 곳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예전에 살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뒀었는데, 이제 바뀌어 있었다.

사방에 책장을 두고 편히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서재로 만들어 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변하는 중이었다.

“오, 분위기 좋습니다. 도마 어르신도 책을 무척 좋아하시는데.”

“알고 있네. 그 친구와는 종종 책 이야기도 나누곤 한다네.”

마의에게는 유일하게 친구라고 할 사람이 혈천도마였다.

그때, 검무극이 구석에 놓인 나무들을 발견했다.

“저건 뭡니까?”

나무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듬고 조각할 수 있는 도구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목수셨네. 아버지를 떠올리면 기억나는 건 마당에서 나무를 깎으시던 모습이지. 이제 나도 취미로라도 좀 해보려고.”

마의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불효자도 이런 불효자가 없네. 아들이 내 마음에서 편해지니까, 이제야 아버지 생각이 나다니.”

“아버님도 마찬가지셨을 겁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은 고마웠다. 이렇게 바뀌려고 노력하고, 무엇보다 그 바뀐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려는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자네 때문에 나는 이렇게 행복해지고 있네.

마의는 지금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해주니까 비로소 나도 아는 것이니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고맙습니다, 마의님.

제가 목숨을 걸었던 보람을 느끼게 해주셔서요.

그리고 부디 행복하십시오.

* * *

천화루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마교의 내원을 걷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마주친 마인들이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들은 온갖 흉포하게 생긴 마인들이었다. 출도하면 무림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 그 무서운 마인들이 극악소마에게는 새색시처럼 얌전하게 인사했다.

그녀가 극악소마에게만 들리게 속삭여 말했다.

“우리 오라버니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있었어요. 이렇게 대단한 분이셨는데.”

극악소마도 남자였기에 싫지만은 않은 말이었다.

“앞으로 천화루 앞에 오라버니 가면을 걸어둬야겠어요. 이것들아, 어디 술 먹고 진상 부려 봐라!”

그녀의 농담에 극악소마는 그저 말없이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평소에도 말이 별로 없는 극악소마였기에 그녀는 대답이 없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 너무 떨려요, 저 건물은 정말 특이하네요, 저기 무인들이 매복해 있나요? 온갖 말을 재잘거리던 그녀가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였다.

“죄송해요. 멋대로 와서.”

다른 말은 듣고만 있었는데, 이 말만큼은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괜찮아.”

거기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언젠가 한 번은 데려오려고 했었다.”

극악소마가 평소 워낙 과묵했기에 이런 한마디, 한마디에 그녀는 크게 감격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악인곡에 도착했다.

입구에 펼쳐진 광경에 천화루주는 깜짝 놀랐다.

그곳에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면객이 도열해 있었다.

극악소마가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온다는 소식에 모두 집합한 것이다. 모두 백색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면은 모두 웃고 있었다. 무섭고도 웅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극악소마에게 이렇게 많은 수하가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두 사람이 지나가면 근처에 있던 무면객들이 고개를 숙였다. 무면객들의 인사가 파도처럼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극악소마의 무사 귀환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었다.

천화루주는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어떤 흥분을 느꼈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는 수장의 여인이라는 존경심과 호기심이 공존했다.

한 번도 여인을 데리고 온 적이 없던 극악소마가 처음으로 여인을 데리고 악인곡으로 온 순간이었으니까.

그녀는 이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도, 또한 극악소마와의 관계도 달라질 것임을 느꼈다.

천화루주가 속삭이며 물었다.

“한데 서로 어떻게 알아봐요? 저렇게 가면을 쓰고 있는데.”

“자네는 못 알아보지만 우리는 다 알아본다.”

“신기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가면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른 것 같기도 했다. 독특한 문양이나, 이런저런 색들이 칠해져 있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 거처에 도착했다.

극악소마의 방에 들어간 천화루주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사방이 하얀 벽으로 된 방 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가 하얀 벽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너무 깨끗한 방이네요.”

“자네가 지내기는 불편할 거야.”

극악소마와 함께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을 그녀였지만, 가구 하나 없는 방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주무시나요?”

설마 했는데 극악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상이 없는데요?”

“내가 누워서 자는 건 천화루에 갔을 때뿐이다.”

“아!”

자신의 무릎에 누워있기를 좋아하는 극악소마였는데. 마교에 있을 때는 이런 곳에서 지내다니. 정말 크고 화려한 침상에서 잘 줄 알았는데.

그때 극악소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번 기회에 본격적으로 자네 꿈을 이뤄보지?”

그 말에 천화루주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꿈은 밤의 여제가 되는 것이다. 중원 전역에 자신의 기루를 세우는 것.

“여불개가 죽고 세력의 공백이 생긴 지금이 기회일 거야.”

극악소마가 뒤를 봐주겠다는 의미였다. 분명 기회는 기회였다. 그리고 천화루주는 이런 기회를 놓칠 여인이 아니었다.

“네, 한 번 해보겠어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다. 극악소마가 일과 관련해서는 철저하고 이성적이라는 것을.

천화루주가 꿈을 이루는 건 극악소마에게도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밤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보를 지배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술과 미녀 앞에서 비밀은 힘을 잃기 마련이니까.

이번에는 천화루주가 벽에 그어진 선에 대해 물었다.

“저기 저 선은 뭔가요?”

검무극과 함께 그어둔 선이었다. 하얀 방에 눈에 띄는 것은 그것뿐이었기에, 그녀는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참고 있었다.

“내 인생 선이다.”

절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지만, 선을 바라보는 극악소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아 보였다.

천화루주는 극악소마 옆에 나란히 서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서 저렇게 멋지게 그어졌나 보네요.”

* * *

거처로 돌아왔을 때, 마당에서 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뭐하긴요. 잠꾸러기 도련님 기다리고 있었지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요.”

의방에서 잠이 들었을 때, 그녀가 와서 펑펑 울었다는 것을 마의를 통해 들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지금은 왜 왔는지 그녀 얼굴에 다 드러났다.

“굶었어? 얼굴이 핼쑥하다.”

게다가 이후에 또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좀 예뻐졌나 했더니 다시 못난이 됐네.”

“백배는 더 못난이로도 잘만 살았거든요.”

“가자, 맛있는 것 사 줄게. 오늘 우리 둘이서 풍류주점 거덜 내자!”

“저 말씀 드릴 것이 있어요.”

“가면서 해. 나 배고프다.”

먼저 앞장서 걷자 이안이 뒤를 따랐다.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오던 그녀가 불쑥 말했다.

“이제부터 저 데리고 다니세요. 저, 다시 호위할 거예요.”

나는 계속 걸어가며 대답했다.

“그래.”

“농담 아니라 진심이에요.”

“알아.”

너무 순순히 대답하자 이안이 후다닥 뛰어나와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요?”

“응.”

펄쩍 뛰며 기뻐하려던 찰나 그녀가 흠칫하며 물었다.

“조건이 있겠죠?”

“당연히.”

“무슨 조건이죠?”

“비천검법을 십이성 대성을 이루면 호위해.”

이안이 실망하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대성도 아직 못 이뤘는데, 십이성 대성을 언제 이루라고요? 늙어 죽을 때까지 못 이룰 수도 있어요.”

“아니면 너까지 업고 와야 하잖아?”

“!”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그녀는 계속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극악소마가 죽을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라면 십이성 대성을 이뤘다 해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만 좀 강해져요!”

“제가 더 강해지겠습니다! 가 정답입니다, 우리 귀영대주님.”

그렇게 우린 마가촌의 풍류주점에 도착했다.

“각주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춘배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주인장, 잘 지내셨소?”

“저야 늘 똑같습죠. 요즘 많이 바쁘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우리 주인장 요리 먹고 싶어서 혼났소.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싹 다 해주시오.”

신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조춘배를 뒤로 하고 이 층 우리 자리로 올라갔다.

“그거 아세요? 주인장이 이 자리는 항상 비워둔 데요.”

“우릴 위해서?”

“네. 언제라도 우리가 오면 앉게 해주시려고요.”

“가끔 오는데 뭘 그렇게까지? 손해가 날 텐데.”

“아뇨, 여기 교주님과 마존들이 앉으셨던 자리라고 소문이 나서, 구경하러 오는 손님들 때문에 장사가 더 잘된다네요.”

이안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주인장이 노린 걸까요?”

“워낙 노련한 양반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이안과 동시에 웃었다. 걱정할 때의 그녀 모습과 이렇게 활짝 웃을 때의 모습은 딴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어쨌든 이안의 웃는 얼굴을 보니 교로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귀영대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청면님이 몇 사람을 만나고 있어요. 믿을만한 이들이 있다고 해서요. 일이 착착 진행되니 너무 걱정돼요.”

“뭐가?”

“대주지만 사람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잖아요? 아는 사람이라곤 도련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제가 과연 대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나를 상대했는데 누굴 상대 못 하겠냐?”

“아, 또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때 조춘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올라왔다.

“주인장, 간만에 제 술 한잔 받으시오.”

“아닙니다, 두 분 말씀 나누십시오.”

언제나처럼 조춘배가 사양했지만 나는 그의 소맷자락을 끌어 앉혔다.

“한 잔만 받으시오.”

“어휴, 이러면 안 되는데. 감사합니다, 각주님.”

조춘배가 내 술을 받았다.

“이 자리가 명소가 되었다고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각주님 덕분이지요.”

“다음에 아버지나 마존들이 오면 벽에 무공 흔적을 남겨두시라고 하겠습니다.”

“무공 흔적요?”

“그래야 여기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볼거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남긴 흔적 옆에 극악소마님이 혈앙지로 구멍을 뚫어두는 거죠. 여기 탁자에는 도마 어르신께 시 한 수 적어달라고 하고요.”

조춘배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귀하신 분들께 그런 부탁을 어떻게 드리겠습니까? 그리고 그랬다가 누가 벽이라도 뜯어갈까 봐, 탁자라도 훼손할까, 저 잠도 못 잡니다. 자,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조춘배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곤 했지만,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일 층으로 내려가는 그의 표정이 흐뭇했다.

이안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사람 관계에 대해 잘 모르겠다 싶으면 여기 주인장께 물어보면 도움이 될 거다.”

온갖 인간 군상을 겪으며 살아온 조춘배만큼, 사람 관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럴게요.”

이안과 함께 술을 마시고 요리를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조춘배의 요리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맛이었다.

“청면과 함께 출교해라. 가서 고 군사와 풍천교주도 만나보고 오고. 귀영대에 들일 무인들도 구해 오고.”

이제 그녀를 온실에서 내보낼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에 아버지가 후계자를 선정하실 거다.”

내 말에 이안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일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내가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지.

“작전은 있으세요?”

“생각해 둔 바는 있지. 뜻대로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작전이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나는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황금대작전쯤 되겠지?”

18 절대회귀-242화 18

제242회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대공자 검무양은 대천산 절벽 끝에 홀로 서 있었다.

저 멀리 천마신교 건물들이 작게 보였다.

검무양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잡으면 한 손에 들어오는 천마신교인데.

그는 허공에서 쥐었던 빈 주먹을 다시 펼치며 예전에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권력 투쟁에 형제간의 공존은 없다고? 결국 서로 죽이고 만다고? 대체 누가 정한 거야? 왜 그런 제 욕망도 주체하지 못하는 병신 같은 놈들의 전례와 의심에 우리가 휘둘려야 해? 그러니 휘둘릴 생각 꿈도 꾸지 마. 내가 형을 죽일 것 같은 불안증이 들면 날 찾아와.

그럼 찾아갔어도 열 번은 찾아갔어야 했다. 최근에 악몽을 자주 꿨다. 매번 꿈속에서 검무극은 웃으면서 자신을 죽였다.

―형은 참 순진해. 내 말을 다 믿었어? 하긴, 그러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겠지. 권력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것도 무림 제일의 권력을? 이렇게 순진해서 고맙긴 한데. 참 한심하다, 한심해.

그러면 녀석에게 욕을 하면서 잠에서 깨곤 한다. 온갖 욕을 다했지만, 매번 지는 것은 자신이다. 그리고 검무양은 안다. 검무극이 내뱉는 저 말은 결국 자신의 생각임을.

요즘 검무양도 바쁘게 살았다.

교내 일을 처리하고, 여러 직위의 마인들도 만나고. 외부 일도 처리하러 다녀오고. 잠잘 시간까지 아껴가며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의 거침없는 행보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면 권마의 제자가 되어 있고, 눈을 떠보면 천독림에서 독충을 찾아 헤매고 있고, 눈을 떠보면 극악소마와 출교해 있고. 또 눈을 떠보면…….

자신은 연무장에서 짖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극악소마를 업고 죽기 직전까지 달릴 수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와아아아아아!

검무극을 향한 사람들의 열광이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속 좁고 치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 미칠 것 같은 질투를 참기가 어렵다.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일 때, 그곳에 마불이 도착했다. 작은 키에 황금빛 광채는 여전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마불이 그와 나란히 절벽에 섰다.

“극악소마가 깨어났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검무양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마존들이 하나둘씩 검무극에게 돌아서고 있었으니 당연히 좋을 수가 없다.

마불은 누구보다 검무양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권마는 여전히 대공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검무양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제자는 무극이지만요.”

그는 권마의 지지 역시 오래가지 않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권마는 공사 구분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뱉은 말을 함부로 바꾸지 않을 겁니다.”

마불이 재빨리 덧붙여 말했다.

“독왕 역시 공자님을 지지할 겁니다.”

“무극이와 함께 연무장에서 짖으면서요?”

“그래서 이공자는 후계자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천마가 될 사람이 그래선 안 되었죠.”

“그날 이후 교내에서 무극이의 인기가 더 올라간 것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중요한 것은 인기보단 교주님의 뜻입니다. 대공자님은 엄연한 교주님의 장남이시고 어려서부터 후계자가 될 거란 믿음을 줬습니다.”

마불은 그에게 힘을 주려 했지만 검무양은 힘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저와 마불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패배주의자와 근거 없는 낙관론자.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패배주의자입니까?”

마불의 물음에 검무양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검무양은 알려나 모르겠다. 마불은 그와의 관계에서 몇 번이나 좌절하고 실망해서 정말 패배주의에 빠질 뻔했다는 것을. 몇 번이나 마음을 가다듬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마불이 차분히 물었다.

“제가 낙관한 적은 없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왜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제가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마불이 검무양의 눈을 응시하며 단호히 대답했다.

“믿습니다.”

“그래서 문젭니다. 정세를 판단하는 눈이 이렇게 어두우시니까요. 우리가 고여서 썩고 있던 와중에 무극이는 폭포처럼 터져서 바다로 흘러나갔습니다.”

“이공자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우린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되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마불은 사람들이 산 정상에서 외치듯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교주 자리에는 대공자가 더 어울린다!”

그의 외침이 메아리쳐 여러 번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사라졌을 때 마불이 말했다.

“그것만 모두에게 설득하면 되는 겁니다. 이공자가 마존들의 마음을 가져갔다고 자존심 상할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대공자께선 오직 그것만 해내면 됩니다.”

검무양이 다소 억양된 어조로 분통을 터뜨렸다.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마불께서는 정말 제가 교주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불은 확신하듯 말했다.

“네, 더 잘 어울립니다.”

“이래서 근거 없는 확신이라는 겁니다. 마불님은 무극이의 선택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제게 남은 것 아닙니까?”

검무양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마불에게 큰 상처가 될 말을 여과 없이 내뱉었다.

뜻밖에 마불은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저 말이 비명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검무양은 속마음을 숨기면서 자신을 대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다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그 말이야말로 근거가 없는 말이군요.”

마불이 담담히 대답하자 검무양은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십니까?”

“뭐가 들었습니까?”

“무형지독입니다.”

무형지독이란 말에 마불은 깜짝 놀랐다.

“그걸로 이공자를 죽이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검무양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못 죽일 것도 없죠.”

마불이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왜 여기서 꺼냅니까? 이공자와 술 한잔하자고 해서, 타 먹이십시오! 죽여버리십시오!”

한바탕 그렇게 몰아붙인 후, 마불은 진심을 다해 그를 달랬다.

“그러시면 안 되는 것 알지 않습니까? 이공자는 피를 보지 않고 후계 싸움을 하겠다고 선포했는데, 이공자를 독살하면 그 누구도 대공자를 따르지 않을 겁니다. 마존들도, 그 아래 마인들도요.”

검무양이 약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제게 쓸까 고민 중입니다.”

짝!

검무양의 고개가 돌아갔다.

마불이 훌쩍 뛰어올라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린 것이다.

놀란 검무양이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마불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댈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놀라도 너무 놀랐다.

마불이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마불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와 더불어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검무양은 처음 봤다. 마불이 자기 앞에서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을.

“주십시오!”

그의 박력에 검무양은 약병을 그에게 주었다.

마불이 마개를 열더니 그대로 절벽 아래에 부었다. 그리고 병도 던져버렸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저, 처음 맞아봤습니다.”

“저도 교주 혈육은 처음 때려 봤습니다.”

자존심 강한 검무양이 미쳐 날뛸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는 차분했다. 검무극을 죽인다고 했을 때 때렸으면 어쩌면 폭발했을지도 모르겠다.

“비싸게 주고 산 독인데, 아깝습니다.”

“아까운 건 그런 헛된 생각을 한 시간입니다.”

내내 말려 올라가 있던 검무양의 입꼬리가 제자리를 찾았다. 검무양이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마불을 내려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눈높이를 맞췄다.

“대공자, 하늘 한 번 쳐다보시오.”

마불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 천마신교만을 쳐다보던 검무양의 시선도 하늘을 향했다.

원래 마불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검무양은 느꼈다. 자신도, 그리고 마불도 많이 변했다는 것을. 검무극과 얽히면서 모두가 변해가고 있다.

“불안함을 이겨내야 후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공자가 태풍처럼 불어닥쳤다면 대공자께서는 바위가 되십시오. 태풍에도 굳건한 바위가 되십시오.”

검무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불 이 사람, 진심이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마존.

그러고 보니 마불은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남아준 마존이었다.

“저는 바위가 아니라 태풍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에 불과합니다. 어르신도 무극이에게 가십시오! 무극이가 더 어르신의 마음을 알아줄 겁니다. 저보다 말도 더 잘할 거고, 배려심도 깊을 겁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그건 제 역할인데, 왜 이공자가 합니까? 나이 많은 제가 배려하고 제가 이해해야지요. 지금 제가 대공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요.”

검무양은 울컥했다.

지난번 만났을 때 검무극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존들이 네 앞에서 웃고 있다고 네 사람이라 생각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그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할 거야.

지금껏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었는데.

“왜 저를 선택하셨습니까?”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저는 이공자보다 대공자가 더 좋은가 봅니다.”

마불은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지만, 검무양은 웃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절벽 끝까지 몰렸을 때, 그 절벽 앞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

어른 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마불이 거인처럼 자신의 앞을 막아서 주고 있었다.

“그럼 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마불이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마불님.”

“네?”

“사실 아까 그 약, 무형지독 아니었습니다. 마의가 만든 내상치료제입니다. 제가 마실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요.”

“알고 있습니다.”

검무양이 깜짝 놀랐다.

“알고 있었다고요?”

마불이 품에서 똑같은 약병을 꺼냈다.

“저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알면서도 저를 때린 겁니까?”

마불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대공자님을 때려 보겠습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마불은 재빨리 돌아서 산에서 내려갔다.

그 모습을 쳐다보며 검무양은 결국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검무양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저 멀리 보이는 천마신교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가면 결국 지고 말겠지만.”

이미 져버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질 수는 없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오늘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 * *

“자꾸 신경 거슬리게 할래?”

책을 읽던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혈천도마의 방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중요한 고민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고민을 왜 여기서 하냐는 말이지.”

“여기 책이 많아서 그런지 똑똑해지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럼 천마서각에 들어가서 고민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해질 테니까.”

“거긴 어르신이 안 계시잖아요?”

나는 슬그머니 혈천도마에게 다가갔다.

“위기에 처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어르신인데 어찌합니까?”

“네가 좋아하는 가면쟁이 있지 않으냐? 만년설삼도 양보해 줄 사이인데. 거기 가서 알아봐.”

나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 꼬장꼬장한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질투를 한 번씩 한단 말이지. 특히 소마에게 질투를 많이 하는 혈천도마였다.

“누굴 우리 어르신과 비교하겠습니까? 소마는 저기 악인곡에서 벽이나 보고 있으라 하십시오.”

“그게 아니겠지. 함께 온 여인이랑 좋은 시간 보내라고 방해하지 않는 거겠지.”

“천화루주 온 것도 다 알고 계시는군요.”

“알고 싶지 않아도 종일 온갖 보고가 날아온다.”

혈천도마가 책을 읽었다.

“그러니까 그 황금대작전인지 뭔지, 가면쟁이나 주정뱅이에게 가서 의논해.”

나는 혈천도마가 책을 읽고 있는 창가 자리 옆 바닥에 앉았다.

“작전명은 거창하게 지었는데, 세부 계획은 하나도 못 세웠습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셨으니, 그 책 안에 방법도 있을 것 아닙니까?”

“이놈아, 책은 그 말도 안 되는 작전들 피해서 쉬러 오는 곳이다. 답은 거기서 찾아.”

“좋습니다. 답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합숙하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침상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밀어냈다.

“밖에서 입던 옷 입고 침상에 눕지 마라!”

혈천도마가 허공섭물로 나를 문 앞으로 데려갔다.

나는 문 옆에 난 창가에 기댄 채 고민했다.

“대체 뭐가 고민이냐?”

“이번 작전이 마불을 무작정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서 어렵습니다.”

“네 사람으로 만들면 왜 안 되는데?”

혈천도마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없는데?

“그야 마불까지 뺏어오면 형을 너무 궁지에 모는 것이 되니까요.”

그래서 형이 둬서는 안 될 수를 둘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혈천도마는 나와는 다른 관점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아닙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마불마저 돌아서면 대공자도 깔끔하게 포기하지 않을까? 나는 대공자가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

나는 혈천도마보다도 형을 믿지 않았나 보다. 어려서 나를 괴롭혔던 일 때문일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야비하고 치사한 짓을 저지르고 말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별개로 형과 마존들과의 관계도 존재하는 법. 마존들에게 형은 물러날 때 물러나는 사람인 것이다.

“대공자에게 제대로 패배를 인정할 기회를 줘야지. 지금 네가 걱정하는 일들은 오히려 미련이 남았을 때 터질 거다.”

지금껏 책을 내려다보며 말하던 혈천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밟을 때는 확실하게 밟는 거다. 대공자를 위해서라도.”

나는 말없이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어르신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까 해서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가면쟁이와 만년설삼 나눠 먹으며 잘 살겠지.”

“집요하시군요.”

“그래, 이쪽 앙심이나 걱정해라. 네가 왜 그 사람들 관계를 걱정하나? 건방지게.”

나는 혈천도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답을 찾았습니다.”

혈천도마의 말이 옳다.

내가 전력으로 상대했을 때 비로소 형은 허탈하게 웃으며 패배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어설픈 배려는 형의 자존심에 상처만 입힐 뿐이다. 마불을 확실하게 내 사람으로 만든다. 오히려 그럴 때 형과 마불의 관계 역시 새로운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도마의 거처를 나선 나는 곧장 광승들이 북적대는 마불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20 절대회귀-243화 20

제243회 내가 힘든 만큼 마불도.

마불이 기거하는 곳은 황금불사(黃金佛寺)라 불리는 거대한 절이었다.

이곳은 수십 채의 크고 작은 건물로 이뤄져 있었는데 대부분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곳곳에 세워진 탑도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악귀를 막기 위해 입구에 세워둔 사천상은 기존 절의 그것과는 모습이 달랐다. 너무 무섭게 생긴 그것은 마귀 그 자체였다.

절 한가운데 황금대불이 세워져 있었다. 천마신교 곳곳에 세워진 거대석상들만큼이나 큰 불상이었는데, 마불이 익힌 황금대라마공이 극성에 이르면 무공을 펼쳤을 때 황금대불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원래 마교에 속한 승려들을 마승(魔僧)이라 부르는데, 황금불사의 승려들은 미칠 광(狂)자를 써서 광승이라 불렀다.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 거대한 덩치의 광승이 마중을 나왔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이 광승이 누군지 안다. 마불의 오른팔인 대광(大狂)이었다. 덩치도 대, 미친 정도도 대.

갑자기 내게 덤벼서 저 염주로 내 목을 졸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자였다.

덩치 큰 그가 마불과 함께 서 있으면 마불은 더욱 작아 보인다. 그럼에도 마불은 이렇게 덩치 큰 그를 오른팔로 삼았다.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해서 전혀 열등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광을 골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던 광승들이 내게 합장하며 인사했다. 지난번 연무장에서 짖은 후, 미친 중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내 인기가 꽤 높아졌다고 들었다. 물론 마불이 형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이니, 이들 역시 공식적으로는 형을 지지했지만.

마불은 대법당에서 염불을 외고 있었다.

항상 형과 함께 다니던 모습만 보다가 승복과 가사를 걸치고 불경을 읊고 있는 이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나마 저 사람이 마불이다 싶은 것은, 일반 불상보다 훨씬 무섭게 생긴 황금 불상 때문이었다.

나는 불상에 예를 갖춘 후, 조용히 마불 뒤에 앉았다.

염불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요즘 무공 수련은 두 가지에 집중했다. 주위를 의식해야 하면 천마호신공, 아무도 없으면 시천비술.

내가 익힌 모든 무공이 중요하지만, 이 두 무공 역시 너무나 중요했다.

천마호신공은 또 하나의 목숨과도 같은 무공이었고, 시천비술은 제시간에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기 위한, 어쩌면 지금부터는 구화마공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시천비술은 아직 구결을 연구 중이다. 워낙 난해한 구결이라 무공을 펼치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불이 외우던 염불 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마기가 내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천마호신공이 발동하며 내 몸을 보호했다.

내 머릿속에서 염불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환상이 보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저 멀리서 황금빛 광채가 나더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불이었다. 이 환상 속에서 보는 마불은 키가 컸다.

그는 내 앞까지 걸어와서 멈춰 섰다. 그의 당황한 얼굴이 보인다.

마불이 손을 내밀었다. 넘어오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손. 그와 나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있어서 넘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마불은 막 너머의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마불이 황금대라마공으로 내 마음을 읽기 위해 침입하려다 막혔다는 것을. 천마호신공이 발동해서 침입을 막은 것이다. 구화마공과 더불어 내가 익힌 천마호신공은 그 어떤 마공에도 우선하는 절대마공이었으니까.

마불이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걸어서 돌아갔다. 황금빛이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왜 저리 큰 키로 내 앞에 모습을 보였을까?

어쩌면 이 짧은 순간, 마음을 들여다본 것은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던 염불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마불은 나를 향해 돌아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공이 통하지 않은 것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불이 합장하며 말했다.

“이공자. 이번에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걱정해 주신 덕분입니다.”

나도 합장하며 예를 갖췄다.

“한데 제가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어야 다행이지 않았습니까?”

마불이 천천히 염주를 굴리며 말했다.

“부처께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하셨네.”

저 염주 알이 암기처럼 날아올까 봐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의 입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듣게 되다니.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뒤에 있는 황금불상 쪽 쳐다보았다. 불상 뒤에 그려진 불화(佛畫)를 보며 말했다.

“저기서는 마승들이 사람을 마구 찢어 죽이고 있는데요?”

생각지 못한 내 말에 마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어이없는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왜 나를 찾아온 것인가? 혹 불가에 귀의하겠다면 내 친히 머리를 깎아주겠네. 그거 좋겠군. 자네가 원하는 대로 형제간에 피를 흘릴 일도 없을 테고.”

“저는 노는 것을 좋아해서 금방 파계당하고 말 겁니다. 형은 진득하고 과묵하니 더 어울릴 겁니다. 두상도 더 예쁘고요.”

농담처럼 오가는 말이었지만 우린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제가 찾아뵌 이유는…….”

잠시 사이를 두고 그에게 말했다.

“황금대작전 때문입니다.”

그에게 작전명을 알려주는 것으로 나는 이번 작전을 개시했다.

마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황금대작전? 그게 뭔가?”

“마불님을 제 사람으로 만드는 작전입니다. 오늘이 그 시작 날입니다.”

결국 마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이지 자네가 특이한 사람이란 것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인정하네, 인정해.”

“전에는 미친 놈이라고 하셨는데, 저도 발전했습니다.”

마불이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말했다.

“대공자를 무시하지 말게. 후계자는 대공자가 될 거네.”

“전 마존들을 찾아뵐 때 어르신부터 찾아뵈었어야 했습니다. 그럼 지금 마존께서는 어딘가에서 이공자를 무시하지 말게, 후계자는 이공자가 될 거네.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을 텐데요.”

마불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자네에게 넘어갔을 줄 아나?”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지.”

형에 대한 이 변함없는 충성심을 볼 때면, 권력을 차지하려는 탐욕 가득한 정치승이라는 첫인상은 그가 억울해해도 좋을 만큼 안타깝다.

“왜 그렇게 형을 좋아하십니까?”

“자네 형은…….”

어떤 이유가 있는 눈치였는데, 그는 말해주지 않았다. 저 이유는 마불이 내 사람이 되어야만 들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공자가 더 천마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같은 생각이란 뜻인가?”

“형이 더 꼼꼼하게 잘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인정합니다.”

“그럼 양보하게.”

대답 대신 그에게 물었다.

“형을 상대하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까?”

“나와 대공자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건가? 안 통할 거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불님은 작은 거인이십니다. 마불님을 얻은 것은 형의 가장 큰 행운이죠.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왜 감사하나?”

마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에, 나는 차분히 내 마음을 전했다.

“제가 예전에 후계 싸움에서 서로 죽이는 일은 이번 대에서 끊어낼 작정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형은 자존심이 강해 그 조절이 힘드니 어르신이 옆에서 도와주십사 하고요. 혹 기억나십니까?”

“기억나네.”

“지금껏 형이 폭주하지 않은 것은 다 마불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공자가 폭주하면 나는 거기에 기름을 부을 거라고 했네.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라고 부추길 거라고. 한데 왜 내가 대공자를 말린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를 응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형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마불님이 옆에 없었다면 이렇게 버텨내지 못했을 겁니다.”

내 진심이었다. 그를 내 사람으로 끌어들이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내가 이렇게 찾아올 때까지 형의 옆을 꿋꿋이 지켜줘서.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공손히 합장하며 작별을 고했다.

마불은 말없이 돌아앉아 다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몸집은 가장 작은 사람이지만, 얻기에 가장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다음 날, 황금불사에서 나오는 마불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식사하셨습니까?”

“안 했네.”

“함께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세.”

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마불이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나?”

“이렇게 쉽게 허락하실 줄 몰랐습니다.”

“자네가 한 가지 착각하는 것이 있네. 나는 아주 온건하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네.”

온건과 자비? 세상 뻔뻔한 말을 저렇게 태연히 하고 있다.

“다행입니다. 매일 졸졸 따라다닐 작정이었는데.”

마불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난 그 뒤를 따랐다.

“뭐 좋아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지나가던 마인들이 우릴 쳐다보았다. 이제 마불까지 이공자와 어울리는 건가? 이런 마음이 담긴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마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형에게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어가서 오해하게 되는 것이 불편할 그였는데.

단호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는 마불은…… 분명 변했다.

* * *

그날 저녁 다시 혈천도마를 찾아갔다.

일과를 마치고 온 서대룡이 무공을 전수받고 있었다.

황천각 일에, 무공수련에, 언제나 제일 바쁜 사람이 서대룡이다.

“저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왜 또 왔어?”

“답을 찾을 때까지 합숙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혈천도마가 소리쳤다.

“안 씻고 침상에 눕지 마라!”

“여인이 오는 침상도 아닌데, 너무 깔끔한 척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서대룡이 사부를 위해 나서며 목청을 높였다.

“누가 그래요? 여인 안 온다고.”

혈천도마와 내가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저 말에 더 흠칫한 사람은 혈천도마였다.

“우리 사부님 무시하지 마시라고요!”

무겁게 흐르는 침묵.

내가 눈빛으로 말했다. 대룡아, 이거 아닌 것 같다!

서대룡이 눈빛으로 말했다. 각주님, 어쩌죠?

“소싯적에 여인들이 줄을 섰던 분이시라고요. 지금도 정정하시고요.”

나는 눈빛으로 탄식했고 결국 서대룡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라고요.”

결국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내일부터 지옥훈련 준비하겠습니다.”

혈천도마가 나직이 말했다.

“내일? 지금부터다!”

* * *

서대룡의 수련은 밤이 늦어서야 끝났다.

제자를 보낸 후 혈천도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까지 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무공서가 아닌 책을 얼마 만에 읽어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늦게까지 가르치십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녀석이 총명해서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래 봬도 황천각 수석 입학한 녀석 아닙니까?”

혈천도마가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한데 대작전을 펼치고 계셔야 할 분이 여긴 왜 오셨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인생에 위기가 왔다 싶으면 어르신만 생각난다고요.”

“쉽지가 않지?”

“난공불락입니다. 형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습니다. 마치 어르신과 저와의 관계 같다고 할까요?”

“그럼 만년설삼 한 뿌리면 해결되잖아?”

나는 못 들은 척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가 않네요.”

그러자 혈천도마가 웃으며 지난 일을 말해주었다.

“예전에 마불과 풍류주점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마불에게 똑같은 말을 물었었다. 쉽지가 않지?”

“그랬더니요?”

“마불도 너처럼 쉽지가 않다고 대답했었다. 둘이 내 앞에서 쉽지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우습구나.”

나는 두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마불이 많이 답답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혈천도마와 술을 마셨다는 것만 봐도.

내게 보이는 그 단호한 모습 뒤에 혈천도마에게 쉽지 않다고 고백하는 마불의 고뇌가 숨겨져 있다.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달을 쳐다보며 한 번 더 반복했다.

“쉽지가 않습니다, 정말.”

사람 마음을 얻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을 또 새삼 느낀다. 여러 마존들과의 경험 때문에라도 이제는 쉬워질 법도 한데, 사람 관계만큼은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어렵다.

혈천도마가 함께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천마의 후계자가 되는 일인데, 그게 어찌 쉽겠냐?”

혈천도마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

그때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무극아.”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른 것이다.

난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혈천도마는 여전히 달을 올려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우리 늙은이들 마음 얻겠다고 지금껏 노력 많이 한 것 안다. 힘들 땐 쉬어 가도 된다.”

나는 감격한 채 혈천도마를 바라보았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던 사람이 이제 내 안식처가 되어 주고 있다.

어르신 없으면 저 어쩌죠? 너스레를 떨려고 했는데 혈천도마가 선수를 쳤다.

“나 없으면 너 못 산다.”

혈천도마가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환하게 웃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좀 쉬어 가면서…….”

바로 그때였다. 뭔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도 쉽지가 않고, 마불도 쉽지가 않다면?

“아! 제가 힘든 만큼 마불도 힘들겠죠? 겉으로 표는 내지 않고 있지만 제 급한 마음만큼이나 마불의 마음도 급하겠죠?”

지금 상황에서 마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나를 설득하는 일이다. 오늘 순순히 나와 식사를 한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일 테고.

“제가 급했습니다. 지금은 힘껏 밀어붙일 때가 아니라 슬슬 제 쪽으로 당길 때인데.”

황금대작전의 첫 번째 세부 계획이 드디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13 절대회귀-244화 13

제244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마불이 대법당을 나왔다.

식사 시간이 되었으니, 검무극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검무극과 함께 식사한 지 오늘로 닷새째.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없는 너스레 몇 마디 주고받다가 밥만 먹고 헤어졌다. 마치 비무에서 서로 허초를 던져 탐색전을 펼치는 것과 비슷했다.

검무극은 이러면서 점점 자신과 친해질 거라 여기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황금대작전? 자신의 황금을 가져다가 왜 남이 작전을 펼치는데?

‘미안하지만 그 작전은 내 작전이다.’

그래, 친해질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검무극을 설득해서 천마 자리를 포기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마불의 계획이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마존들을 회유할 필요도 없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물론 검무극이 쉽게 포기할 리 없지만, 마불이 가능성을 본 것은 검무극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공자는 기분파다.’

자신이 본 그 어떤 사람보다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다른 마존들이 넘어간 것이겠지. 거기에 한 가지 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려는 사람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후계싸움을 평화적으로 끝내려 한다.

‘기회는 분명 있다.’

법당에서 염불만 외운 인생이 아니다. 권력에 눈이 멀었다는 소릴 듣는다는 건 그만큼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는 의미. 그 경험을 살려서 검무극을 상대할 것이다.

‘난 다른 마존들과는 다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황금불사를 나왔을 때!

휘이잉.

입구엔 아무도 없었다. 매일 자신을 기다리던 검무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왜 안 왔지?’

지금까지 봐온 검무극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마불은 잠시 그곳에서 검무극을 기다렸다.

이렇게 바깥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 적이 있었던가?

그 귀한 인내를 다 쓸 때까지 검무극은 오지 않았다.

검무극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결국 참지 못하고 마불은 검무극의 거처로 가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마불은 그곳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검무극이 마당에 있는 넓적한 바위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놀란 마불이 달려가서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검무극이 눈을 떴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죽은 줄 알았네.”

“잠깐이나마 좋으셨겠습니다.”

마불이 바위에 걸터앉았다.

“여기 편합니다. 등도 시원하고. 누워 보시죠?”

“난 됐네.”

검무극은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매일 오다가 나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찾아왔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무극이 나직이 말했다.

“사흘 전에 마불님께 가려다가 문득 하늘을 봤습니다.”

마불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하늘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새가 한 마리 날아가고 있었지요. 그 새를 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럽다.”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왜 부럽지? 난 경공이 있어 저렇게 날 수 있는데? 심지어 더 높이, 더 빨리 날 수도 있는데.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힘들어하고 있구나.”

작전은 작전이되, 검무극의 진심이 담긴 작전이었다.

“내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회귀 전의 인생은 말할 것도 없고, 회귀 후에도 정신없이 달려온 그였다. 그래서 지금 한 말은 그의 진심이었다.

마불은 검무극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야말로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었다.

작은 키로 태어나 놀림만 받다 죽고 싶지 않았다. 동정심이나 도움은 더 싫었다. 정말 죽을 고생을 하며 이 자리까지 왔다.

‘이공자, 자넨 앞만 보고 달린다는 게 뭔지 모를 거네.’

지금 이 바위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두 남자를 태우고 있었다.

“그날부터 사나흘 뒹굴뒹굴한 겁니다. 기별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마불의 눈에 검무극이 다른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얻는 게 있어야 수작인데, 여기 폐인처럼 누워서 뭘 얻겠는가?

‘하긴, 이 젊은 나이에 그 많은 일을 해냈으니 힘들기도 하겠지.’

이 힘듦을 이용하면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후계자를 포기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불이 넌지시 제안했다.

“이참에 한동안 쉬는 건 어떤가? 후계자가 되어야지 하는 부담감은 내려놓고.”

마불은 내심 기도했다. 이런 답이 나오기를.

―네, 그냥 후계자고 뭐고 다 집어치울까 합니다.

하지만 검무극은 대답 대신 마불에게 불쑥 물었다.

“마불님은 안 힘드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마불은 자신의 심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자네 때문에 힘들지. 후계자 경쟁에서 물러나 주면 힘이 펄펄 날 텐데.”

검무극이 옅게 웃다가 갑자기 소리쳤다.

“앗! 저 새입니다. 마불님과 저의 식사를 망친 새가!”

작은 새 한 마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어찌 저 새인 줄 아나?”

“나는 모습이 딱 그놈입니다. 저기 보십시오, 나 자유롭지? 부럽지?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내 눈에는…… 그저 앞만 보고 나니까 날개가 너무 아프다, 고달프다, 이러는 것 같은데.”

검무극이 마불을 쳐다보았다.

마불은 여전히 새를 쳐다보고 있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저 새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날개를 쉴 새 없이 파닥거리며 날아가는 게 마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항상 바빴다. 대공자와 함께 움직이랴, 사람들 만나랴, 광승들 다스리랴, 무공수련하랴.

약해서 힘든 거다. 정신이 썩어빠진 것들이 힘들다고 하는 거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다. 그 와중에도 세월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그래서 더 초조하고. 그래서 더 바빴던 인생인데.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은…….’

한참을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그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자신을 옆에 두고 잠을 자는 모습에 마불은 내심 놀랐다.

‘나를 이렇게나 믿는다고?’

연기라고 생각했다. 워낙 여우 같은 이공자이니, 이렇게나 믿고 있다고 속이기 위한 연기.

‘내게는 안 통해, 이공자.’

마불이 기척 없이 바위에서 일어났다.

‘내게는 안 통한다고…….’

마불이 저 멀리 집 밖으로 걸어 나가자 검무극은 눈을 감은 채 나직이 말했다.

“마불아, 후계자고 뭐고 다 내려놓고. 우리 좀 쉬자.”

살살 당길 테니, 살살 끌려와라.

* * *

다음 날에도 검무극은 찾아오지 않았다.

마불은 자연스럽게 검무극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검무극은 집에 없었는데 때마침 시비가 건물에서 나왔다.

“이공자는 어디에 가셨나?”

“천독림에서 기별을 받고 거길 가셨습니다.”

“천독림?”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려던 마불이 천독림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대공자 편이라 생각하지만 독왕은 아직 공식적으로 대공자를 지지한다고 발표하진 않았다.

그런 독왕이 검무극을 불렀다니 가서 보려는 것이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천독림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졌다.

* * *

오랜만에 천독림에 왔다.

가는 길에 여러 독인을 만났다. 독왕과 함께 연무장에서 짖은 후 나를 향한 그들의 눈빛이 다채롭다. ‘우린 이공자를 적극 지지합니다’ 부터, ‘우리 독왕님을 개로 만들다니!’ 까지.

그렇게 거처에 도착했을 때, 독왕은 뭔가를 제조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기존에 만들었던 독이 아니었다.

“뭔가 범상치 않은 독 같습니다.”

독왕은 독 제조에 빠져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자기만의 세상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

나는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예전 그대로였다. 가구는 물론이고 올려진 약병들과 도구들까지. 정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띈 하나의 광경.

“헉! 이건!”

내가 너무 놀라자 독왕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제가 먹다가 남겨둔 건데.”

그게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어휴, 제발 좀 치우고 사세요! 라는 잔소리 대신 이 게으름을 잘 포장해 주었다.

“위험한 것을 다룰수록 모든 것이 익숙한 곳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그런 거죠?”

그러자 독왕이 다시 만들던 독으로 시선을 주며 대답했다.

“아니. 돌아와서 이것 만드느라 청소를 못 했어. 다음에 누가 더럽다고 하면 그렇게 대답해야겠네.”

예전부터 이 공간은 상선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 청소도 독왕이 직접 했다. 생각해 보면 오직 그만의 공간에 나를 들여준 거다.

내가 대충 청소하는 사이 독왕이 단약을 완성했다.

“다 됐다!”

그의 얼굴에 희열이 스치는 것을 보니 만들기가 쉽지 않은 독이 분명했다.

그것은 꽃처럼 알록달록 화려한 색을 지니고 있었다.

“독해 보이는데요? 대체 누굴 죽이려고 만드신 겁니까? 무림맹주입니까? 사도맹주입니까?”

그러자 독왕이 그것을 내게 불쑥 내밀었다.

“먹어.”

“이렇게 대놓고 천마신교 이공자를 독살하신다고요?”

“안되나?”

“그럼 저 휘장 뒤에 형이 숨어 있겠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단약을 받아들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천기단(天氣丹)이다.”

천기단이란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천기단은 독을 사용하는 이들 사이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희대의 독이자 동시에 영약이었다. 영약이지만 내공을 늘려주는 약이 아니었다.

“안가 구석에서 기령초(奇靈草)를 발견했다. 그 귀한 것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더군.”

“아! 서 조사관이 말해줬습니다. 독왕님이 온 안가를 다 파헤치셨다고요.”

“근처에 있을 화령사(花寧蛇)를 찾으려고 그랬지. 기령초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화령사가 있다. 천기단은 기령초의 열매와 화령사의 내단을 합쳐 만들지.”

“이 무서운 것을 왜 제게 주십니까?”

“왜 이 귀한 것을 주냐고 물어야지.”

독왕이 천기단의 효능을 자랑하듯 말했다.

“천기단을 복용하면 어떤 더위와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체질이 된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도 벌거벗겨서 사막에 던져둬도, 벌거벗겨 설산에 던져둬도 살아남는 체질이 되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다. 극양이나 극음의 무공을 상대할 때 훨씬 더 유리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독성이 강해서 먹으면 죽지 않습니까?”

“맞아. 천기단의 효능을 욕심내서 버텨보려다가 여럿 녹았지.”

독왕이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며 덧붙여 물었다.

“한데 넌 살 수 있잖아?”

“!”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의 표정과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알고 계셨군요.”

“그래. 네가 만독불침지체라는 것,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 함께 있었는데, 내가 몰랐다고 생각했나?”

과연 독왕은 독왕이었다.

“아쉽습니다. 언젠가 이 사실을 극적인 순간에 밝히려고 했었는데.”

“나야말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밝히려 했었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저 많이 놀랐습니다.”

독왕은 내가 만독불침임을 알았음에도 생각보다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아시면 많이 기분 나빠 하실 줄 알았습니다.”

“기분이 왜 나쁘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인데.”

“만독불침을요?”

독왕이 눈을 반짝였다.

“여러 가지 독을 시험할 수 있잖아. 자, 우선 이것부터 복용하고 다 말해줘. 맛은 어떤지, 얼마나 독한지. 뭘 더 추가하면 좋을지.”

나는 장난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저 이공잡니다. 천마가 될 사람이라고요. 함께 연무장을 누빈 지옥개입니다. 저 실험체 아니라고요.”

내 너스레에 독왕이 웃었다. 독왕이니까 당연히 만독불침을 싫어하겠지, 그게 편견이고 선입견일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두 번째 인생을 살고서야 알게 된다.

“그럼 복용하겠습니다.”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기단을 복용했다. 정말 극독이었다. 만독불침이 아니었다면, 이 독한 기운을 온전히 녹일 수 없었을 것이다.

맛 또한 지금까지 복용했던 그 어떤 영약보다 쓰고 독했다. 쓰고 독한 걸로 기록 갱신이다.

“일부러 저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 쓰게 만들었죠?”

정말이지 안 할 수 없는 불만이었다.

그렇게 천기단의 기운을 모두 녹였다. 다른 영약과는 다르게 천기단은 단전이 아니라 온몸 혈맥 곳곳에 기운이 스며들었다.

이제 얼음장 같은 물에 빠져도 추워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어지간한 불길은 모닥불 쬐듯 쬘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왕에게 넙죽 절을 올렸다.

“귀한 영약을 내려주신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됐고. 질문에 대답 하나 할 수 있나?”

“백 개라도 좋습니다.”

“자네가 상대하려는 자가 누군가?”

독왕은 느낀 것이다. 내가 끝없이 나아가려는 데에는 어떤 강력한 목표가 있음을.

“기령초를 발견하면 곧장 기별 드리겠습니다.”

말해줄 수 없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절반의 대답은 해준 것이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가 아니었으니까.

나를 향한 독왕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그가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상선이 와서 보고했다.

“마불께서 오셨습니다.”

“마불이 여길 왜 와?”

깜짝 놀란 독왕이 나를 노려보았다.

“하다 하다 마불을 천독림에 오게 하다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냐?”

아마 마불은 한 번도 천독림에 와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무슨 수를 썼다면 그는 결코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여길 오네요.”

“무슨 말인지 난 모르겠고.”

독왕이 재빨리 뒷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 없다고 해. 마불 그 사람 불편해.”

내가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섰다.

“부탁이 있습니다.”

“다음에.”

“부탁 들어주시면 독 실험 필요하실 때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독왕이 한숨을 내쉰 후 상선에게 마불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안 들어주면 그날 바쁜 척할 거 아냐? 뒷문으로 도망가거나.”

“안 그럴 거 아시잖습니까?”

“그러니까 들어주는 거지. 그래, 무슨 부탁인데? 대공자 버리고 네 쪽으로 오라고 마불 설득해 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독살해서 천독림에 묻어 줄까?”

“어쩌면 그것보다 어려운 일일 겁니다.”

내 부탁은 독왕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오늘 하루만 우리와 놀아주십시오.”

15 절대회귀-245화 15

제245회 피바람과 같이 놀 겁니다.

독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을 껌벅이던 그가 물었다.

“지금 나와 놀아달라는 부탁을 한 거냐? 그것도 마불까지 함께?”

“그렇습니다.”

독왕이 검무극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면서 열이 있는지 살폈다.

“이거 천기단 부작용이다.”

독왕이 손목을 잡아 진맥까지 했다.

“하루 노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드십니까?”

독왕이 뒷문으로 달아나려는 것을 검무극이 막아섰다.

“너무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같이 있으니까요.”

“차라리 연무장에 가서 또 짖자고 해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하루 쉬고 싶어서요. 독왕님과 놀고 싶기도 하고요. 겸사겸사 하루 저랑 노시죠.”

독왕이 한숨을 내쉬던 그때 밖에서 상선이 마불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독왕이 표정으로 검무극을 욕하며 밖으로 나갔다.

“귀한 분이 오셨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두 사람이 정중히 인사했다. 그렇게 마불이 불편하다고 도망치려 했던 모습과 달리, 독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마존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잘 대했다.

“천독림은 처음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오면서 보니 곳곳이 절경이더군요.”

“더 좋은 곳도 많습니다.”

사실 독왕 역시 마불이 있는 황금불사에는 가보지 않았다. 워낙 천독림 칩거를 좋아하는 독왕이기에 다른 마존들의 거처에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인사를 마친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공자, 여기 있었군.”

마치, 검무극이 여기 있는 줄 모르고 왔다는 듯 말했다. 제법 연기가 좋았다. 검무극 역시 자신 때문에 찾아온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연기에는 연기로 맞아주었다.

“역시! 마불님과 저는 인연이 있나 봅니다. 이런 곳에서도 만나는 걸 보면요.”

“그런가 보네.”

“이렇게 반가운 걸 보니, 근래 마불님과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나 봅니다.”

옆에 독왕이 있어도 검무극은 거침없이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면 독왕께서 섭섭해하지 않으시겠나?”

독왕이 끼어들며 물었다.

“제가 왜 섭섭합니까?”

“두 분의 특별한 우정을 본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연무장에서 같이 짖은 것을 의미했다.

독왕이 검무극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공자 만난 후로 별의별 일 다 겪고 있습니다.”

곧장 검무극에게 이어진 독왕의 전음.

―지금이 제일 큰 별일이다!

검무극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자 독왕은 천독문의 객청으로 마불을 안내했다.

“자, 이리로 오르시지요.”

그곳은 원두막 같은 곳이었는데, 주위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어서 평소 안 쓰는 곳이지만 상선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젊어 보이고, 한 사람은 비정상적으로 작고. 거기에 검무극까지 있으니 이 자리는 정말 특별해 보였다.

“이번에 출교하신 일은 잘 처리하셨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 잘 처리했습니다.”

대화가 끊기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니는 마불이었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도 어색했다. 평소 독왕과는 교류가 거의 없던 데다가, 저 어린 외모는 정말 적응이 안 되었다. 물론, 상대도 자신을 보면 그럴 수 있겠지만 말이다.

독왕의 전음이 검무극에게 날아들었다.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데 놀자고? 차라리 생사비무를 하는 게 더 재미있겠다.

다행히 상선이 차를 가져오면서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차 맛이 좋습니다!”

검무극은 편하게 차를 마셨지만 마불은 찻잔을 만지작거렸을 뿐 입에 대지는 않았다. 자신의 수하가 이곳에서 검무극처럼 편히 차를 마셨다면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독왕이 내준 차를 마셔?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차라리 내 손에 죽어라! 그렇게 독왕은 모두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오늘 찾아뵌 것은 이공자 때문입니다.”

마불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공자가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요즘 제가 이공자와 교류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검무극은 확실히 마불이 예전의 마불이 아님을 느꼈다. 이번에 자신과의 일에 모든 것을 건 사람처럼,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런 허심탄회함은 마불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궁금하네요. 독왕께서는 평소에 이공자를 만나면 무슨 대화를 나누시는지.”

그러자 독왕이 말했다.

“오늘은 불러서 청소 좀 시켰습니다.”

그 말에 마불이 흠칫 놀랐다. 마불은 자신의 질문에 독왕이 불쾌감을 표했다고 생각했다.

“괜히 제가 실례되는 말씀을 드렸나 봅니다.”

그때 검무극이 끼어들었다.

“저 정말 청소했습니다.”

놀란 마불에게 검무극이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럼 제가 입만 나불거려서 마존님들과 친해진 줄 알았습니까? 저도 엄청나게 노력합니다.”

정말 청소까지 했다면 검무극이 힘들다고 한 말이 수작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은 가려서 하게.”

천마가 될 수도 있는 몸인데, 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천마가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그 말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바꿔 말하면 독왕이 일을 가리지 않고 시킨 것이 되니까.

그렇다고 독왕은 마불에게 불쾌감을 표하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대신하면 되니까.

―들었지? 사람 불편하게 하는 저 말. 그런데 어떻게 놀아줘?

―악의는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나 혼자서도 못 노는데, 어찌 같이 놀라고.

어디 그만 그렇겠는가? 검무극도, 마불도 평생 놀아본 적이라곤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검무극은 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니었으니까.

―우선 천독림 구경 좀 시켜주시죠?

검무극의 전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왕이 마불에게 말했다.

“모처럼 오셨으니, 천독림을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마불은 다음에 와서 보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검무극이 한발 먼저 벌떡 일어났다.

“가시죠. 재미있을 겁니다.”

그렇게 독왕이 그들을 천독림으로 안내했다.

천독림은 넓고 울창했는데, 일각쯤 걸어가니 산책로가 조성된 멋진 대숲이 나왔다.

“오, 이런 곳이 있었군요.”

검무극도 안 와본 방향이었다. 대숲을 지나자 천년은 살았을 거목이 있었고, 그 뒤로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한 들판이 있었다.

세 사람은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던 마불도 점차 천독림의 경관에 빠져들었다. 그의 입에서 연신 좋구나, 라는 탄성이 나오기도 했다.

“조심하시오.”

화려한 뱀이 나무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백점사(百點蛇)입니다. 해약이 없으면 고수도 하루를 버티지 못하는 맹독을 가진 놈이지요.”

검무극은 저 뱀 역시 독왕이 이름을 붙여줬을 거라 생각했다.

검무극은 가는 길에 보이는 독초와 독충, 독사들에 대해 물었고, 독왕은 신이 나서 설명해 주었다.

마불은 검무극의 저 행동이 독왕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거로 생각했다.

‘부지런한 것만큼은 인정해야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검무극은 온갖 것을 다 물어보았다. 독왕 역시 자신이 아는 바를 전부 말해주었고 검무극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들었다.

그때, 마불이 한마디 했다.

“이공자가 호기심이 많군.”

“사람이 살면서 독과 관련된 것에 대해 독왕님께 직접 설명 들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습니까?”

검무극은 실제로도 독왕이 말하는 것은 최대한 다 기억을 해두었다.

자신이야 만독불침이니 상관없지만, 누가 중독될지 모를 일 아니겠는가?

마불도 옆에서 함께 설명을 들었다. 항상 가르치기만 하던 그였는데, 오랜만에 여러 가지를 배웠다.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폭포가 쏟아지는 계곡에 도착했다.

쏴아아아아아.

그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저는 더워서 헤엄 좀 치겠습니다.”

검무극이 상의를 훌훌 벗어 던지더니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이공자와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좋습니다.”

마불의 말에 독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검무극이 없어 심심한 정도면 다행인데, 지금 독왕에게는 고역이었다.

독왕은 자신도 물에 뛰어들어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마불이 후계자와 관련된 말을 꺼냈다.

“이공자에게 기세가 기울고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그래서 대공자는 독왕님의 지지가 꼭 필요한 상황이죠.”

마불은 이번 기회에 독왕에게서 대공자에 대한 공식 지지를 받아내려고 했다.

“대공자가 더 좋은 교주가 될지, 이공자가 더 좋은 교주가 될지 그건 모를 일 아니겠습니까?”

독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마불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공자를 보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공자의 저 이상한 열기가 무림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그러자 듣고만 있던 독왕이 불쑥 말했다.

“그러면 안 됩니까?”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이 열기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색해하던 독왕이었지만 할 말은 확실히 했다.

반면 마불은 정곡을 찔린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대공자에게 검무극과 같은 열기가 조금만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독왕이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헤엄을 치던 검무극은 폭포 아래로 들어가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좋다는 건지, 아프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는 이공자가 천마로 더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독왕의 말에 마불은 당황했다. 독왕이 검무극을 선택한 것이다.

“무공이 강하다고, 말주변이 더 좋다고 더 좋은 천마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가 아닙니다. 저는 이공자에게서 봅니다.”

“뭘 보신다는 겁니까?”

독왕은 호들갑을 떨며 폭포 아래에 앉아 있는 검무극을 보며 말했다.

“우리들의 운명을 봅니다.”

독왕은 자신만의 세계를 좋아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느꼈다. 검무극을 보면 볼수록 어떤 거대한 운명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오히려 많은 시간을 혼자만의 세상에 있었기에 느끼는 것이라 여겼다. 수많은 관계 속에 얽혀 있는 마불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이공자의 의도에 넘어가신 겁니다. 수작과 계략에 당하신 겁니다.”

“이공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오늘 제게 한 부탁은 마불님을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겠지요.”

“그럼 뭘 부탁했습니까?”

“오늘 셋이서 재미있게 놀자고 하더군요.”

“!”

순간 마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공자를 이기기는 쉽지 않겠구나. 이런 미친놈을 어떻게 이기나?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자신감이 확 쪼그라들었다.

“이공자가 천마가 되면 오히려 피바람이 불 수도 있습니다.”

“이공자는 그 피바람과 같이 놀고 있을 겁니다.”

마불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독왕의 결심이 확고함을 느낀 것이다.

‘쉽지 않겠구나.’

독왕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대공자를 지지하는 마존은 자신과 권마 뿐이다. 그것도 권마는 반쪽 지지.

그때 폭포 아래에서 수련자 흉내를 내던 검무극이 이쪽으로 헤엄쳐 왔다.

“제 폭포 수련 보셨습니까? 마치 극한의 수련을 통해 복수를 꿈꾸는 무인이 된 듯한…….”

말을 다 듣지 않고 독왕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볼 게 남았습니다. 가시죠.”

마불도 벌떡 일어나더니 그 뒤를 따랐다.

검무극이 물 밖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왜요? 제가 뭐 잘못한 것 있습니까? 같이 가요! 저, 옷 좀 말리고 가자고요!”

좀 쉬라니까. 그새 중요한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그래, 평생 놀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쉽게 놀 수 있을까?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화아아아아아!

검무극이 걸어가면서 열양지기를 발출했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옷은 순식간에 마르기 시작했다.

* * *

나는 독왕이 고마웠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제안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우리 내기 한 번 합시다.”

내기란 말에 마불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 내기인지 궁금도 했고, 그는 승부욕도 강하고 내기 자체를 좋아했다.

“무슨 내기요?”

“여기 숲에 일곱 갈래로 갈라진 입과 자색 열매를 가진 칠생초(七生草)라는 독초가 있습니다. 누가 먼저 찾는지 내기하시죠.”

“그건 우리에게 너무 불리하지 않소? 독왕께서는 이곳 지리에 훤하실 텐데.”

“저도 칠생초가 있는 곳은 알지 못합니다. 분명 있다는 건 아는데, 저와 인연이 안 되는지 찾질 못하고 있습니다.”

굳이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기에 마불이 다시 물었다.

“내기라면 보상이 있어야 할 텐데요.”

두 사람이 고민하기에 내가 말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진 사람들이 먼저 찾은 사람에게 풍류주점에서 거하게 술사는 걸로 하시죠.”

독왕과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불의 눈에서 승부욕이 타올랐다. 적어도 마불에게는 술 내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좋소. 해봅시다.”

그렇게 우린 칠생초를 찾아 헤맸다.

한참을 뒤져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신안술까지 발휘해서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찾았소!”

칠생초를 찾은 사람은 작은 몸으로 숲을 종횡무진한 마불이었다.

나와 독왕이 그에게 경공으로 달려갔다.

“이거 맞소?”

“오! 맞소! 이게 칠생초요.”

독왕은 진심으로 감격한 모습이었다.

“이 귀한 것을 발견하시다니. 영초 채집에 정말 소질이 있으시오. 우리 나중에는 저쪽 숲으로도 가봅시다.”

그러면서 독왕이 칠생초를 조심스럽게 캤다. 그 모습이 너무 정성 가득해서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칠생초가 필요해서 내기를 한 건 아니죠?”

순간 칠생초를 캐던 독왕의 등이 움찔했다.

독왕이 칠생초를 소중히 품에 넣으며 마불에게 말했다.

“다음에 오시면 우리 또 놀러 나옵시다. 마불께서는 언제든지 오시오!”

마치 작별을 고하듯 인사하더니 독왕이 몸을 날렸다.

그는 그 길로 가버렸다.

저 멀리 사라지는 독왕의 모습에 마불이 나를 쳐다보며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라는 눈빛을 보냈다.

“우리가 당했습니다! 우릴 채집꾼으로 동원했습니다!”

마불은 진담일 수도 있는 내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이 자리가 많이 불편했나 보네.”

저 멀리서 독왕이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했다. 난 잘 놀다 간다.

그리고…….

내 노력은 여기까지니 이제 네 차례다.

19 절대회귀-246화 19

제246회 이제 그만 그 좁고 답답한 곳에서.

“저는 더 놀고 싶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노세.”

마불은 검무극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 모든 기대를 걸었다.

“대신 여기선 나가세.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독왕 없이 돌아다니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시죠.”

검무극과 마불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독왕이 가고 나자 마불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마불도 독왕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뭐가?”

“저를 찾아 이곳까지 와주셨잖습니까?”

“자네가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오랜만에 헤엄도 치고, 산책도 하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마불님은 어떠십니까?”

“나도 좋았네.”

하지만 마불의 기분은 그렇게 좋진 않았다. 독왕까지 검무극을 지지한다고 밝히자 마음이 더 급해진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당사자인 검무극의 마음을 바꾸는 것.

“놀아본 놈이 논다고, 오늘 마불님과 신나게 놀려고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검무극의 솔직한 말에 마불이 대답했다.

“자네야 젊어서 뭘 해야 노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나이 들면 쉬는 게 노는 거라네.”

마불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쉬어본 적도 오랜만이네.”

마불이 항상 긴장한 채 사는 사람이란 것은 이 잠깐 하늘을 보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었다. 깊은 바다에서 올라와 잠시 숨을 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형 옆에서 악담을 내뱉을 때는 그저 그런 악독한 마존으로만 보였는데…….

“도마님이 항상 제게 말씀하십니다. 힘들면 쉬었다 가라고요.”

마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힘들어 보이나?”

그러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마불님을 볼 때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부신공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마불은 아부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검무극이 요즘 지키려고 애쓰는 게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미루지 않고 말해주는 것.

마불도 자신의 고생을 누군가 진정으로 알아주길 바랄 테니, 검무극이 이렇게 표현해준 것이다.

고생이 많다, 마불아.

마불은 느꼈다. 검무극의 눈빛에 담긴 것이 진심임을.

마불은 애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눈빛에 격정이 스쳤다.

‘젠장!’

어떻게 저리 젊은데 저런 깊은 눈빛으로 사람을 쳐다볼 수 있지?

마불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검무극은 조용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다 경치 좋은 곳에 잠시 멈췄다.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 가시죠.”

“그러세.”

검무극이 흐르는 맑은 냇물에 발을 담갔다.

“시원하니 너무 좋습니다. 마불님도 발 담가보시지요.”

“자넨 겁나지도 않나?”

“뭐가요?”

“천독림에는 온갖 독물이 다 있다지 않은가? 그 냇물에 어떤 독물이 있을 줄 알고?”

“예전에 독왕님께 들었습니다. 흐르는 냇물에는 독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난 됐네.”

“냇물에 마지막으로 발 담그신 게 언제십니까?”

마불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주 어려서 말고는 언제 발을 담갔지? 설마 한 번도 없었나?

“제 소원입니다! 한 번만 같이 담가 보시죠.”

“소원 빌 것이 그렇게 없나?”

“나중에 자랑하려고 그럽니다. 내가 소싯적에 말이야 마불님과 냇가에서 발도 담그고, 산책도 하고, 독초 찾는 내기도 하고. 다 했어.”

마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피가 흐르는 곳이나 첨벙거리던 발인데, 가끔은 이런 호강도 해야죠.”

검무극이 억지로 잡아끌자 그가 못 이기는 척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갔다. 작고 빛나는 발이었다.

“살면서 별일 다 해보네.”

그건 독왕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왕님은 별일 중의 별일이라 하셨죠.

“시원하니 좋죠?”

마불이 검무극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이럴 때 보면 젊은이 안 같아서.”

“어려서부터 아버지 눈치만 보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아시잖아요? 우리 아버지 어떤 분인지.”

“쉽지 않으신 분이지.”

아버지가 만병통치약이긴 하다. 설명하기 어려우면 아버지 핑계를 대면 어느 정도는 이해하니까.

“마불님은 살면서 언제가 제일 즐거우셨습니까?”

검무극의 질문에 마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였더라?

마불의 머릿속에 지난 세월이 발을 담그고 있는 냇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즐거웠던 기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있었을 텐데.

마불이 대답 대신 검무극에게 되물었다.

“자네는?”

“저는 최근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워낙 설치고 다녔으니까요. 그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아버지와 사냥 갔을 때가 즐거웠습니다.”

어디 즐거웠던 적이 그뿐이겠는가? 다만 마불에게 마존들과의 일은 전하지 않았다.

“사냥 갔을 때 교주님이 뭐라고 하시던가?”

“제가 이야기만 하면 만날 비웃으시죠. 아시잖아요?”

검무극이 아버지 비웃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러자 마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네.”

“워낙 많이 당해서 이제 흉내 잘 냅니다.”

여전히 마불은 자신이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지 못했기에 검무극이 또 다른 즐거움들을 생각해 냈다.

“출교해서 다른 사람 행세할 때도 즐거웠고. 아, 제 오른팔인 서 조사관이라고 있습니다. 그 사람 놀릴 때도 즐겁죠.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놀리면 다 받아주는 사람. 바보라서 받아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커서 받아주는 사람. 아, 또 있습니다. 이안이라고 중원에서 제일 예쁜 수하가 있습니다. 얼굴도 예쁜데 똑똑하고 심성까지 착하죠. 그 친구는 생각만 해도 즐겁죠. 또… 혼자 조용히 있을 때도 즐겁고.”

그러는 사이에도 마불은 생각해 내지 못했다.

“마불님은요?”

“난 됐네.”

“아무리 행복했어도 기억 못 하면 그냥 지나가 버리는 거잖아요?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니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만 생각해 보시죠.”

검무극은 집요했다.

“저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아무것이나 하나 대답해주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마불이 불쑥 내뱉었다.

“동굴.”

마불은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려서 자주 올라가던 뒷산이 있었다네. 거기 작은 동굴이 있었지. 그 동굴에 들어가 있을 때 기분이 좋았다네.”

마불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려서부터 작았던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친구들이 놀리고 따돌리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들조차 남들과 다르지 않게 자신을 대했다는 것은 마불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처음 동굴을 발견했던 그날은 처음으로 동생에게 맞은 날이었다. 몸집이 너무 작아서 몇 살이나 어린 동생에게도 힘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두들겨 맞은 것보다 더 화나고 억울했던 것은 지켜보던 형들이 말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울면서 혼자 산을 헤매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그 동굴이었다. 작은 몸집이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가 너무 좁아서 아이들도 들어가기 힘들었지만, 마불은 들어갈 수 있었다.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안에는 어린 마불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틈이 있어서 바깥이 보였다.

그곳에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심이 되었다.

그날부터 그곳은 마불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 동굴에 있을 때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네.”

검무극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즐거웠던 순간을 물었는데, 그 어린 시절까지 가야 한다고?

“그 동굴이랑 주위 경관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건 왜?”

“그냥요.”

마불이 대충 설명하자, 검무극은 묻고 또 물어서 자세한 내용을 들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듣고 난 다음에야 질문을 그쳤다.

“대체 왜 물은 건가?”

“놀라지 마십시오.”

딱!

검무극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두 사람은 동굴 앞에 서 있었다.

마불이 깜짝 놀랐다. 어려서의 그 동굴이었다. 자신이 기어들어 가서 세상으로부터 숨었던, 자신만의 안식처였다.

“환술인가?”

마불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무극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았지만 환술까지 부릴 줄은 몰랐다.

“시공이환술이라는 무공입니다.”

검무극이 솔직히 대답하자 마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풍천교주의 무공인가?”

“그렇습니다.”

“아!”

한때 풍천교주와 가장 가까운 그였으니, 무공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이걸 자네에게 전수해줬다고?”

“네, 제가 환술을 배운 것은 풍천교주님 이외에는 딱 한 분의 마존만이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도 모르는 비밀이죠.”

“!”

마불은 깜짝 놀랐다.

“이런 비밀을 왜 내게 알려주나?”

“마불님을 이 동굴로 데리고 오려면 알려드려야 하니까요.”

그러자 마불이 냇물에서 발을 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자!”

그는 정말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네. 자네의 이런 감정적인 모습! 적인 나에게 이런 비밀을 알려주는 자네의 이 즉흥적인 감정 말이야!”

검무극이 여전히 냇물을 응시하며 말했다.

“마불님이 왜 적입니까?”

“!”

“마불님은 제 마존이 될 겁니다. 다른 마존과 마찬가지로.”

검무극의 시선이 천천히 마불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앉아 있는 검무극과 서 있는 그의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래서 마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검무극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렬하다는 것을. 너스레를 떠는 검무극은 사라지고, 차기 천마가 되려는 검무극이 있었다.

“제 마존이 되어 주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불의 가슴이 울컥했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저 말을 부정하는 감정이 뒤섞였다.

검무극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제가 더 좋아하는 마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사부님처럼 따르고, 형이나 친구처럼 여겨지는 분들입니다. 당장 아까 독왕님만 해도 개가 되어 함께 짖어도 좋았던 분이죠.”

“그래, 그런데 왜? 자네 말대로 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네가 아끼는 마존들 중에 내가 마지막 줄에 서 있을 텐데. 왜 내게 비밀을 알려준 건가?”

검무극의 시선이 다시 냇물에 잠겨 있는 두 발을 향했다.

참방, 참방.

물장구를 치듯 발을 놀리던 검무극이 차분히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불님께 ‘이건 제 승부수입니다!’라고 멋지게 말해야 하는 건지, 마불님이 말씀하신 대로 즉흥적인 감정에 불과한지, 아니면 형을 향한 마불님의 그 충성심에 대한 존경인지.”

검무극의 발장구가 멈췄다.

“아니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불이 나직이 말했다.

“언젠가 이런 감정 때문에 큰 실수를 하게 될 거네.”

“그럼 그때 마불님이 저를 말려주십시오.”

“!”

“마불님과 그런 사이가 되기 위해서 저도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독왕님의 거처를 청소했다니까 일을 가려서 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뇨, 저는 천마가 되어서도 필요하다면 마존들의 방을 치워줄 겁니다. 저는 그런 천마가 될 겁니다. 그런 감정적인 천마 옆에서 말려주십시오. 그러면 안 된다, 이 감정적인 천마 놈아! 하고요.”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거절했다.

“싫네.”

여전히 일편단심 대공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마불이 불쑥 말했다.

“동굴 입구를 키워주게. 한 번 들어가 보게. 참, 그리고 동굴 앞에 작은 틈이 있어서 저 아래 마을이 보였지.”

검무극은 마불이 말한 대로 동굴을 바꿨다.

마불이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좋으십니까?”

“별로다. 좁고 답답해서 숨이 턱턱 막혀.”

이런 답답한 동굴이 뭐가 좋아서 매일 와서 여기 있었을까?

잠시 그곳에서 마을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이 어찌나 세심하게 만들었는지 저 멀리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러고 있다가 동굴을 나가 지금 검무극이 서 있는 저곳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곤 했다. 혹시라도 엄마나 형이 밥 먹으라고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말이다. 물론, 단 한 번도 그 기대감이 충족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을 내려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하산한 후 고향을 떠났다. 이후로 고향은 가본 적이 없다.

마불이 좁은 틈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돌아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시면 즐거웠던 적 많을 겁니다. 이런 옛 추억이 제일 좋아서 되겠습니까?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라든지, 마존이 되던 날이라든지. 누군가 마불님을 진짜 인정해 주던 날도 있었을 거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더 행복했던 날이 많았을 겁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즐겁지 않으셨습니까?”

동굴의 좁은 틈 사이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자네는 대체 누군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검무극이 말했다.

“그대의 천마가 될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좁고 답답한 곳에서 나오십시오.”

‘에끼, 이공자야!’로 시작하는 말이 나올 법도 했는데, 마불은 말없이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검무극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그때 그 새입니다. 이놈아, 이제는 하나도 안 부럽다!”

검무극의 외침에 마불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미친놈 말고 표현할 거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고.

검무극이 벌러덩 뒤로 누웠다.

“저는 좀 눕겠습니다.”

파란 하늘에 커다란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저 구름 좀 보십시오. 제가 만든 거지만 정말 끝내주지 않습니까? 아, 좋다.”

최근에 마불과 여러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바로 지금이 제일 여유롭게 느껴졌다. 항상 팽팽하게 느껴지는 마불의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거면 됐다. 그 느슨함이면 됐다.

검무극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마불 역시 자신의 마존이 될 사람이기에 아끼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바로 그때였다.

마불도 천천히 뒤로 누웠다.

두 팔로 머리를 받친 후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눈을 감았다.

어려서 이곳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등을 간질이던 풀들의 감촉, 그때 들었던 새 소리, 시냇물 소리. 발을 간질이던 개미. 그 기억들이 현재의 감각과 합쳐지면서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검무극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잠이 솔솔 왔다.

17 절대회귀-247화 17

제247회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마불이 눈을 떴다.

깜짝 놀란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으나, 여전히 시공이환술 속 세상이었고, 옆에서는 검무극이 자고 있었다.

‘내가 잠이 들었다고?’

검무극이 바위에 누워 잠든 모습을 보고 연기한다고 여겼던 자신이?

마존이 된 이후, 아니 마존이 되기 훨씬 전에도 이렇게 무방비로 잠이 든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불이 말없이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제 알겠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왜 다른 마존들이 이공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내 마존이 되어 달라는데 어찌 거부할 수가 있겠는가?

마불의 기척을 느낀 검무극도 잠에서 깨어났다.

“괜히 내가 깨운 건 아닌가?”

“아닙니다. 잠깐이지만 푹 잤습니다.”

“이만 나가세.”

“그러지요.”

나가기 전에 마불은 뒤에 있던 동굴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이 동굴을 그리워할 일은 없을 것 같네.”

어린 시절 저곳에 숨어 있던 마불은 이제 저 동굴에서 나왔다. 문득, 어른이 된 자신이야말로 동굴에서 나와야 할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공이환술 풀겠습니다.”

시공이환술이 사라지자 두 사람은 다시 천독림의 냇가에 서 있었다.

“그만 돌아가세.”

“벌써요?”

“벌써라니?”

“저는 더 놀고 싶습니다.”

“나이 든 나와 노는 게 뭐가 재미있다고?”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술 얻어 마셔야죠.”

“술이라니?”

“우릴 채집꾼으로 이용한 독왕님께 술 얻어 마셔야죠.”

칠생초를 먼저 찾는 사람에게 술 사주기로 약속했었다.

“오늘? 당장?”

“다음에 여기 오셔서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이보시오, 독왕. 지난번 내기에서 진 사람이 술 사기로 하지 않았소? 이런 요구하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다가다 만나더라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실 검무극이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조차 잊고 지나갔을 것이다.

“오늘이 넘어가면 독왕님 응징은 못 합니다.”

“정말 끝까지 가자고?”

“벌써 지치시면 어찌합니까? 우리가 많이 논 것 같지만 고작 한나절 놀았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마존들과는 수십 일씩 출교도 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비교 맞구먼.”

“자자, 가시죠. 벌써 노는 것에 질릴 나이까진 아니시잖아요!”

못 이기는 척 끌려갔지만, 독왕의 거처로 향하는 마불의 발걸음은 빠르고 경쾌했다.

* * *

풍류주점 주인장 조춘배는 주점으로 들어서는 앳된 청년에게 정중히 말했다.

“오늘은 더는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했다간 큰일 난다. 오히려 어릴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장사하는 처지에서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휘둘러 대는 철부지 칼이 제일 무서웠으니까.

그때, 주점의 이 층 난간에 서서 검무극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장께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요.”

그는 마불과 함께 반 시진 전쯤에 이곳에 와 있었다.

“벌써 가십니까?”

“아니, 앞으로 주인장 못 뵐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시죠?”

의아해하는 조춘배에게 검무극이 스산하게 말했다.

“방금 본교의 독왕님께 술을 안 팔 테니, 돌아가라고 했거든요.”

조춘배의 시선이 젊은 청년을 향했다. 이내 조춘배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이쿠! 몰라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춘배가 넙죽 절을 하려는 것을 독왕이 말렸다.

“부산떨 것 없네.”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부산떨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주인장은 마존들 중에서 독왕님을 제일 무서워할 겁니다.”

독왕이 조춘배를 쳐다보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내가 제일 무섭나?”

“원래는 그랬습니다만, 너무 젊고 잘 생기셔서 놀랐습니다. 중원제일미남이십니다.”

지켜보던 검무극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주인장, 나는 어쩌고요?”

“각주님은 고금제일미남이시죠.”

그러자 독왕이 차갑게 물었다.

“내가 제일이 아니란 말이지?”

“어이쿠! 그게 아닙니다. 제 말씀은…….”

당황한 그를 두고 독왕이 이 층으로 올라왔다.

조춘배가 이 층에 있던 검무극을 올려다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각주님 덕분에 독왕님까지 모셔봅니다.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눈빛으로 말했다.

‘아직 모릅니다. 또 누가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독왕까지 이 층 자리에 합류했다.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이런 걸 남겼는데 어찌 안 오나?”

그가 꺼낸 서찰은 검무극이 적은 것이었다. 마불과 함께 독왕의 거처로 갔을 때, 당연히 독왕은 뒷문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상선에게 서찰을 남겼고 독왕이 서찰을 읽었다.

“술 사주시지 않으면 술 사 들고 독왕님 거처로 쳐들어갈 겁니다. 마불님은 물론이고 서 조사관과 이안, 마군주와 천소희까지 다 데리고 갈 겁니다!”

독왕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러는데 어떻게 안 오냐고!”

만약 독왕이 내기에 지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소문을 내겠다고 적었으면 그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한데 많은 사람이 몰려가서 천독림에서 술 마시고 떠들어 대면? 그건 독왕이 절대 못 참을 일이다.

물론 그래서 온 것만은 아니었다. 이 서찰을 또다시 검무극의 도움 요청으로 받아들였다. 오늘 우리와 놀아주십시오, 의 연장선인 것이다.

“죄송합니다. 오죽 독왕님과 놀고 싶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실컷 놀았잖아?”

“칠 주야는 놀아야 어디 가서 좀 놀다 왔다 하죠. 저는 오늘 밤샐 준비 되어 있습니다.”

독왕은 자정을 넘겨 자면 아침에 힘들어서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제일 젊어 보이시는 분이 엄살을 떠십니까!”

“너도 내 나이 돼봐라!”

마불은 독왕이 와서 다시 불편해졌지만, 한편으론 아주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마불은 알았다. 독왕이 어디 저 서찰 때문에 왔겠는가? 검무극과의 관계가 그만큼 깊다는 의미다.

취마와 친해진 것까진 이해가 간다. 술 마시다 친해질 수 있겠지. 한데 저 혼자만의 세상을 사는 독왕과 이렇게까지 친해질 수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마불에게는 세상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이 독왕인데.

“자, 한잔하시죠.”

세 사람이 건배하고 술을 마셨다. 이들과 마시는 술은 처음이었다.

시원하게 술잔을 비우는 마불의 모습에 검무극이 물었다.

“원래 독왕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음식은 일절 드시지 않는 게 원칙 아니셨습니까?”

“맞네.”

“한데 편하게 드시네요.”

“독왕께서 중독시키려 마음먹는다면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래, 그게 맞는 말이지 하는 표정으로 독왕이 옅게 웃었다.

그래서 독왕이 무서운 거다. 그가 하독을 마음먹으면 마존조차 막을 수 없다.

독왕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꽤 늦게 나왔던데. 둘이서 뭐 하다가 나왔느냐?

―냇가에 발 담그고 쉬었습니다.

―마불도?

―네.

―상상이 안 가는군.

옆에서 나란히 잠들었다는 이야기는 절대 믿지 못할 것이다.

우린 술을 한잔 더 마셨다. 조춘배가 아껴둔 좋은 술에 맛있는 요리를 먹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 맛에 풍류주점에 옵니다.”

조춘배가 새 요리를 가져왔을 때 검무극이 마불에게 말했다.

“저기 저 벽에다가 다녀가셨다는 의미로 글귀나 무공 흔적 남겨주시죠.”

“왜?”

“여기 대부분의 마존이 이 자리에 왔었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오셨던 자리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분씩 오실 때마다 흔적을 남겨두려고요. 좋잖습니까? 그 첫 번째가 마불님이십니다!”

첫 번째란 말에 마불의 마음이 동했다. 어차피 다들 적게 될 거라면, 기왕이면 첫 번째가 낫지 않겠나 하는 괜한 승부욕이 발동한 것이다.

“그럼 어디 한 번…….”

그때 뒤에서 들리는 소리.

슥슥슥슥.

검무극과 마불이 돌아봤다.

독왕이 어느새 젓가락으로 벽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멋진 필체로 적힌 한 줄의 글.

독왕 다녀가다.

독왕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이렇게 하라는 거지?”

“네, 한데 마불님에게 첫 번째 기회를 드리겠다고 하던 중이었는데요.”

“그랬어? 못 들었는데.”

검무극이야 독왕이 또 자기 세상에 빠져 대화를 끝까지 안 들었다는 것을 믿지만, 마불은 이걸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마불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더니 그의 손에서 수인이 잡혔다.

번쩍!

벽에 황금대라마공의 흔적이 남았다. 황금빛 용이 입을 벌려 독왕이 남긴 글을 잡아먹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첫 번째를 빼앗긴 마불의 소심한 복수이자 벽을 뚫지 않고 흔적만 남긴 최상승 무학의 발현이었다.

“와아아아!”

어느새 주점에 있던 사람들이 올라와서 벽에 남겨진 것을 보며 감탄했다.

독왕의 글과 마불의 무공 흔적이 마치 일부러 그렇게 맞춘 것처럼, 너무나 잘 어우러졌다. 구경하는 이들이 상상이나 하겠는가? 저 용이 저 글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중인 줄.

사람들이 환호에 마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았지만,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독왕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런 걸로 삐지다니. 애다, 애.

―그새를 못 참고 홀랑 먼저 적은 누구는요? 둘이 친구 하십시오!

―싫다, 저 사람 세상 불편해!

검무극이 돌아보자 저 멀리 조춘배가 너무 좋아서 입이 찢어지게 웃고 있었다.

우린 또 술을 마셨다. 자유롭게 마셨다. 굳이 권하지도 않았고,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침묵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면 또 그것대로. 편하게 술을 마셨다.

검무극은 술을 마시다가 이 층에 난 창으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늦은 밤이 아니기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그렇게 멍하니 머리를 비우고 사람 구경을 하고 있는데, 독왕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술값 계산까지 다 하고 인사도 없이 떠난 것이다.

그때 뒤에서 마불이 물었다.

“자넬 어떻게 믿나? 자네가 천마가 되었을 때 마음이 바뀌지 않으리란 것을.”

다 내려놓고 편하게 술이나 마시며 놀자고 했더니.

검무극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모르죠.”

하루 쉬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운 사람들이다.

* * *

마불이 거처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검무양이었다.

“공자님!”

마불은 술에 취해 있었고, 손에는 술병이 한 병 들려 있었다.

“한잔하셨습니까?”

“네, 오랜만에 한잔했습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그러시죠. 제가 잔을 가져오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냥 주십시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이상했다.

마불은 술을 사서 들고 오는 사람도 아니고, 검무양은 술을 병째 마시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오늘 이공자와 독왕을 만나고 왔습니다. 술도 그들 두 사람과 마시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셨군요.”

한 모금씩 술을 마신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밤하늘을 향했다.

마불은 오늘 참 하늘을 많이 올려다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는 검무극과 밤에는 이렇게 검무양과.

검무양이 힐끗 마불을 쳐다보았다. 취기가 오른 붉은 볼이 황금빛과 어우러져 독특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단지 빛깔이 달라서가 아니다. 오늘 마불은 평소와 달랐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했을지 짐작되었기에 검무양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마불만큼은 자신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는데.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있었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혈천도마나 혹은 다른 마존이 자신의 오른팔이 되어 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마불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인지 몰랐을 때였지만.

“독왕은 이공자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 같았습니다.”

마불은 솔직히 말했다.

이제 그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해줘야 한다. 잘될 겁니다,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이제는 그런 말들이 검무양을 더욱더 절벽 끝으로 몰아붙이게 될 테니까.

이제는 그와 함께 절벽 끝에서 걸어 나와야 할 때다.

여기 까진 것 같습니다, 대공자.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불이 검무양을 쳐다보았다.

독왕이 돌아섰다는 말에도 검무양은 차분했다. 예전이었다면 괜찮은 척하다가 갑자기 한 마디 차가운 말을 내뱉거나, 아니면 그 책임을 마불에게 미룬다거나. 앙칼진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양은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차분했다.

“이제 권마 한 분만 남았군요.”

마불님과 권마가 아니라, 권마 한 사람이라고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적어도 자신은 열외로 두고 변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는 말이었으니까.

이번 과정을 겪으면서 검무양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고 또 참고. 하루에도 몇 번씩 검무극을 죽이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일단 죽이고 보자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륭하게 그것을 견뎌냈다. 그게 천마의 눈치를 봐서이든, 검무극과의 관계 때문이든, 원래 천성이 그런 악인은 아니든. 어쨌든 잘 참아냈다.

그래서 정말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끝까지 해보시죠! 제가 일당백의 역할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대공자를 기만하는 말이었으니까.

이공자는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자신의 눈빛에 담긴 이 체념을 검무양은 읽어냈을까?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해보니 알겠다.

왜 자신이 왜 마지막까지 남았는지. 그건 검무극이 마지막에 접근해서가 아니었다. 처음 접근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자신은 대공자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불에게 대공자는 자식이자, 동시에 자기 자신이었다.

대공자가 후계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자신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존께서 보시기에 무극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사이를 두고 마불이 말했다.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으로 검무양은 확신했다. 마불조차 검무극에게 흔들렸다는 것을. 술을 사 들고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불 손에 들린 술병이라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 무극이는 저보단 아버지를 더 닮았습니다.”

검무양이 마불에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섰다.

저만치 걸어가는 그에게 마불이 말했다.

“대공자님!”

“왜 그러십니까?”

“교주님을 닮은 쪽은 대공자님이십니다.”

“그런가요?”

“네, 확실합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검무양이 뒤를 돌아보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마불이 술병 채로 술을 마셨다. 한참을 쉬지 않고 마셨다.

검무양은 이제 자신이 결정을 내릴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39 절대회귀-248화 39

제248회 나는 언제 죽일 거냐?

마불의 거처에서 나온 검무양은 천마신교 내원을 천천히 걸었다.

내원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쳐다보며 걸었다. 한 번도 이 건물들을 자세히 쳐다본 적이 없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들이 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검무양이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자 무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한 눈빛을 교환했다. 언제나 바쁘게 지나갔던 검무양이기에, 제대로 인사를 받아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원을 걸어 검무양이 도착한 곳은 동권문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권마는 깨어 있었다.

검무양이 안내 무인을 따라 절벽 앞에 도착했다.

절벽 앞에 서 있던 권마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절벽을 일격에 무너뜨릴 작정이네. 그게 내 꿈이지.”

검무양이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절벽은 단호하게 불가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검무양은 아무리 권마라도 이건 어렵다란 생각이 들었다.

“권마님이시라면 반드시 그 꿈 이루실 겁니다.”

그제야 권마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권마님을 뵙습니다.”

“대공자, 어서 오게.”

천마신교의 악귀상들조차 착해 보이게 만드는 권마의 무서운 얼굴을 볼 때마다 검무양은 절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늦은 밤에 찾아뵈어서 죄송합니다.”

“아니네. 심야 수련이 있어 깨어 있었다네.”

놀랍게도 권마는 요즘도 심야수련모임에 나가고 있었다. 출교했다가 돌아온 지금까지 검무극은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안과 천소희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권마는 나갈 것처럼 하고선 검무극이 없다고 나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나갔던 것인데 요즘은 천소희 때문에 빠지지 않았다.

검무극이 말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점차 지내다 보니 그녀의 재능과 성품이 차기 권마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수련하는 중간중간 그녀에게 따로 가르침을 내렸다.

권마는 이 심야수련이 재미있었다.

솔직히 젊고 아름다운 두 여인과 함께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권마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을 지닌 천소희 때문일 수도 있고, 한 번씩 생각지도 못한 농담으로 웃겨주는 이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평생 가르치는 것이 진심이었던 그에게 이 심야수련모임은 아주 값지고 재미있는 시간이 되고 있었다.

“그래, 어쩐 일인가?”

야심한 밤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권마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양이 뭔가 큰 결심을 앞두고 있음을.

“저를 공식적으로 지지해 준다고 발표해 주신 분은 권마님 뿐이십니다.”

“나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네.”

“만약 무극이와 만난 후였다면 그 약속을 하셨을까요?”

권마가 뚫어질 듯 검무양을 노려보았다. 아직 권마의 얼굴에는 적응이 되지 않는 검무양이었기에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그랬다면 이공자를 지지한다고 발표했을 거네.”

검무양은 권마가 솔직하게 대답해 줘서 오히려 좋았다. 권마가 이런 남자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그를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무극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형인 자네가 더 잘 알지 않겠나?”

“아뇨,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권마의 시선이 다시 절벽을 향했다.

“아까 자네에게 했던 말을 이공자에게도 했네. 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었지.”

검무양은 궁금했다. 검무극이 어떻게 대답했을지.

“자신도 무너뜨리고 싶어 하더군.”

검무양은 순간 느꼈다. 적어도 권마에게는 그 말이 정답이었음을.

“언젠가 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이공자가 될지도 모르지. 자네 동생은 그런 사람이라네.”

이런 작은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작은 차이가 모이고 모여, 지금 검무극과 자신과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권마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궁색한 말이지만, 검무양은 작정한 듯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한데 왜 믿으신 겁니까?”

권마는 검무양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했다. 자신들도 휘감아 버리는 검무극인데, 젊은 검무양이 그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테니까.

“이공자는 행동으로 보여줬으니까. 동권문에 나와서 백권부터 흑권까지 올라왔으니까.”

“무극이 무공실력이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격앙된 검무양에게 권마는 차분하게 물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라면 자넨 왜 하지 않았나?”

“!”

검무양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권마가 말하는 것이 단지 무공실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행동이 따를 때, 믿음에도 힘이 실린다는 것을.

권마의 시선이 다시 절벽을 향했다.

잠시 시간을 두고 검무양이 물었다.

“끝으로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게.”

“무극이가 천마가 되는 것이 본교를 위해서도 나은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그걸 왜 내게 묻나?”

“마존분들 중에 가장 솔직히 대답해 주실 것 같아서입니다.”

잠시 권마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대답이 검무양에게 어떤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권마는 솔직히 말했다.

“대답에 앞서 이것 한 가지는 말해주겠네. 내 대답과는 별개로 자넬 지지하는 공식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을 거네.”

“감사합니다.”

권마가 검무양을 응시하며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말했다.

“나는 이공자의 천마신교가 더 기대되네.”

검무양에게는 잔인한 대답이지만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그 말이 검무양의 가슴에 무겁게 날아와 박혔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무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떠나기 전에 그는 마지막으로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쳐다봐도 자신은 무너뜨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권마는 심야수련에 가기 위해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위로나 응원의 말은 해주지 않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절벽은 각자가 넘어서야 했으니까.

* * *

형이 찾아왔다.

무복을 잘 차려입고 검을 찬 채 달빛 아래 서 있는 형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형이 대뜸 내게 말했다.

“한판 붙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승부의 결과로 후계자를 결정짓자는 것임을. 질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것을.

“좋아. 예전부터 패주고 싶었어.”

“농담 아니다.”

“나도 농담 아니야. 무인이 될 동생에게 무림에 대한 공포심을 심으려 한 악독한 형인데, 좀 맞아도 되잖아?”

“그게 그렇게 한이 되었다면, 얼마든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다.”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후계자를 두고 싸운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옛 은원을 푸는 것처럼 굴었다.

형이 검을 뽑았고, 나도 검을 뽑았다. 어려서 비무를 했을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 서로에게 검을 겨눈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천검법 대 비천검법.

형은 십 성 대성을 이룬 상태였고, 나는 십이 성 대성을 이뤘다. 단지 그 차이가 아니더라도 경험이나 실력, 내공 차이가 너무나 커서 형이 나를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단번에 제압하지 않고 형이 할 수 있는 모든 초식을 다 사용하게 했다.

“조심해라, 진짜로 간다.”

진지하게 경고한 형이 제일식 균천식을 펼쳤다.

쉬이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나를 양단하러 날아들었지만, 내 균천식이 더 빠르고 강력했다.

꽈아앙!

허공에서 허무하게 해소된 제일식을 보며 형은 충격을 받았다.

놀란 얼굴로 제이식을 발출했지만, 이번 역시 더 강력한 제이식이 그것을 해소해 버렸다.

제삼식, 제사식…….

수가 계속될수록 형의 절망감은 더욱 커졌다. 내가 더 강한 줄이야 알았겠지만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으리라.

혈천도마가 그랬다.

밟을 때 확실히 밟는 것이 형을 위한 길일 것이라고. 그 말에 동의한다.

난 형이 절망을 느낄 정도로 내 모든 실력을 다 드러냈다.

그게 형을 위한 길이었다. 앞으로 절대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임을 받아들이게끔.

형은 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권마가 보고 있던 그 절벽보다도 더 높고 큰 벽을.

비천검법이 통하지 않자 형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질 줄 알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패배가 현실로 다가오자 형은 절박해졌다.

‘내가 후계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그 간절함이 우리의 실력 차를 메울 수는 없었다.

따아앙.

형의 손아귀에서 날아간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멍한 눈빛으로 검을 쳐다보던 형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실 이 주먹으로 패주려고 했다.”

“그럼! 남자는 주먹이지!”

나는 흑마검을 검집에 넣으며 형에게 말했다.

“한데 어쩌지? 난 권마님의 제자인데?”

“……초식은 쓰지 말고.”

형의 말에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한다는 건 좋은 징조다.

그래, 형. 확실히 패줄게.

우리 둘은 주먹으로 맞붙었다. 검술을 하든, 권법을 하든, 주먹질하든. 어찌 형이 나를 이길 수 있겠는가?

퍽! 퍼억!

형의 얼굴과 몸에 내 주먹이 박혔다.

이건 자기 욕심 때문에 동생에게 공포를 주입한 벌이다. 은원을 풀고 가야지.

퍽! 퍼어억!

형을 용서하기 위한 주먹이었다.

흠씬 얻어터져도 형은 절대 내공을 쓰지 않았다. 기회를 틈타 나를 죽이려 들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래서야. 형. 형을 살려서 데려가려 한 이유가. 아마 아버지가 먼저 보셨겠지. 형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힘이 빠진 형이 쓰러지기 직전!

퍼억!

형의 주먹이 내 얼굴에 적중했다.

제대로 한 대 맞아주었다. 내 마음속에 형에 대해 미안함도 있었나 보다. 내가 회귀하지 않았으면 후계자는 형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형, 내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 형을 위한 일이기도 해. 이번 생만큼은 살아보자고. 친해지든, 지지고 볶든 살아남자고.

그렇게 한바탕 싸움 아닌 싸움이 끝났다.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데 성공한 형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후우, 후우, 후우.

형의 거친 숨소리, 그 숨소리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숨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때까지 나도 형 옆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운 채로 형이 물었다.

“너 잘할 수 있겠냐?”

아니라는 말을 기대했겠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형이 해, 라는 말을 기대했겠지만.

“역대 천마들 중에 제일 잘할 수 있어.”

“젠장!”

형이 누운 채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발악하듯 소리쳤다. 본교의 많은 사람이 이 고함을 듣고 있을 것이다. 형과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고함을.

고함을 멈춘 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남은 미련까지 그 호흡에 모두 내보냈다.

“정말 잘해야 한다.”

“잘할게.”

“천마신교의 후계자가 까불고 너스레나 떨고. 그러면 안 돼!”

“내가 진지할 때를 안 봐서 그래. 제발 농담 좀 해달라고 사정할걸?”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알았어.”

형은 완벽하게 후계자를 포기했다. 그랬기에 이 물음도 진심이었다.

“나는 언제 죽일 거냐? 죽이기 전에 꼭 신변정리할 시간은 다오.”

“형 머릿속에는 왜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만 가득한 거야? 내 어둠은 형이 주입했다고 치고, 형에게는 누가 심은 거야?”

“네가 이상한 거다.”

형은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나는 형이 필요했으니까.

“앞으로 형이 날 도와줘야 해.”

“괜한 소리 마라.”

“진심이야. 꼭두각시 형은 필요 없어. 상처 입고 우울한 형도 필요 없어. 난 진짜 형이 필요해.”

내가 먼저 일어나서 누워 있던 형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무기를 없애고 나면, 어쩌면 그 자리 형에게 줄지도 몰라. 그때의 우린 또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르니까. 형, 그러니까 내 손 잡아.

형이 내 손을 잡지 않고 혼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가 앉은 채로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쪽팔린다.”

“자랑스러워해. 죽이는 동생 뒀잖아?”

“죽이고 싶다. 진정.”

그리고 다음 순간.

형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서 일으켜 달라고 내미는 손이었다.

그 내민 손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이 울컥했다. 너무나 할 말이 많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손을 꽉 잡았다. 형도 내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힘차게 형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나를 응시하던 형이 내 앞에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제대로 후계자 노릇 못하면 또 내게 맞는다!”

나는 형을 보고 웃었다. 그가 좋아서 웃는 첫 웃음이었다.

“누가 나 괴롭히면 형 불러도 돼?”

“미친놈.”

형이 먼저 천마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에게 형을 데려간다고 했는데, 형이 나를 데려가고 있다.

경계를 서던 마인들이 깜짝 놀랐다. 야심한 밤에 형제가 나란히, 그것도 얼굴이 터진 상태로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아버지 보려면 좀 씻고 가야 하는 거 아냐?”

“이대로 가야 네가 형을 패는 극악무도한 동생임을 알리지.”

그리고 형은 말했다.

“나 죽일 때 꼭 미리 말하고…… 누가 괴롭혀도 꼭 말하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서 우리의 옷자락을 휘날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바람이었다.

29 절대회귀-249화 29

제249회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형과 함께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아버지는 총군사 사마명과 함께 천마전에 계셨다.

주무실 시간인데 이렇게 나와 계신다는 건 우리가 한바탕 싸우고 천마전을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다는 의미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곳을 형과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아버지는 다가오는 우리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항상 아버지에게 ‘교주님’이라 칭하던 형이 ‘아버지’라 불렀다. 아버지를 쳐다보는 것을 어려워하던 형이 오늘은 똑바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형 인생에서 가장 하기 힘들고,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후계자 경쟁에서 빠지겠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셨지만, 이 순간만큼은 고요한 격정을 드러냈다. 기쁨과 연민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번 결정을 내리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형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아우가 이끄는 천마신교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주 오랫동안 오늘 이 순간이 형을 괴롭힐 것이다. 후회하고 또 후회할 것이다.

고마워, 형. 내가 비록 그 후회를 막아주진 못하겠지만, 그 후회가 형 인생에서 가장 값진 감정이 되게 해줄게.

형이 다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제 간곡한 부탁입니다, 아버지.”

나는 형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다. 회귀 전의 형이 아니다.

내가 회귀한 후, 형 역시 여러 감정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변한 것이다. 형은 성장했다. 이제 아버지를 저렇게 쳐다볼 수 있기에, 아버지와의 관계도 변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말 멋진 모습으로 형을 데려왔지요?

―원래도 멋진 아이였다.

―장남이라고 차별하십니까?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아버지, 저는 평생 그 비웃음 보려고 너스레 떨 겁니다. 제발 그 웃음, 옅어지지 마십시오!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형을 향했다.

아버지는 알고 계실 거다. 형이 얼마나 어려운 결심을 했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형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것도 지금 당장에.

아버지가 사마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팔마소집령(八魔召集令)을 발동하게.”

팔마소집령.

팔마존은 물론이고 그들이 거느리는 모든 마인을 불러들이는 지존령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야심한 밤, 실로 이례적인 명령이 떨어졌다.

* * *

혈천도마는 밤늦도록 서대룡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대룡이 발휘한 초식에 혈천도마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했다!”

사부의 칭찬에 서대룡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칭찬에 인색한 사부였기에 그 감동은 더욱 컸다.

“감사합니다!”

검무극과 있을 때는 온갖 너스레를 다 떠는 서대룡이었지만, 사부와 있을 때만큼은 예를 다 갖췄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천마보다 더 귀한 사람이 사부였다.

그렇게 수련을 마쳤을 때, 서대룡이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외부에 나가 있는 조사관에게 부탁해서 구해온 겁니다.”

책을 본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읽고 싶어 하던 책이었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습니다.”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희귀본이라 구하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을 것이다.

“아직 홀몸이라 월봉 받는 것이 고스란히 남습니다.”

“흥청망청한 죄로 내일부터 또 지옥수련이다.”

“아! 지옥수련 오늘 끝나는 날이었는데요.”

괜히 심술을 부렸지만 혈천도마는 내심 감격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데에에에엥! 데에엥!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밤에 무슨 종소리일까요?”

평범한 종소리가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맑고 깊은 종소리였다.

서대룡의 물음에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팔마소집령을 알리는 종소리다.”

그 말에 서대룡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일까요?”

저 멀리 천마전 쪽을 바라보던 혈천도마가 나직이 말했다.

“전쟁이 났거나…….”

전쟁이란 말에 서대룡은 바짝 긴장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거나.”

물론 전쟁은 나지 않았을 터이니, 후자일 것이다.

“만약 그런 거라면 너는 무공수련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 오른팔 노릇 계속하려면.”

오른팔이란 말에 검무극과 관련된 일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서대룡은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일 끝에 있는 옷장을 열어서 혈의(血衣)를 꺼내오너라!”

집으로 들어간 서대룡이 맨 끝의 옷장을 열자 안에는 피처럼 붉은 예복(禮服)이 걸려 있었다.

* * *

그 시각 취마는 취몽루에서 일화검존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삼대취객 여빈이 안주를 내려놓으며 돌아서려던 그때, 일화검존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 술 한잔 받으시게.”

여빈이 공손히 그녀의 술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일화검존에게 술을 따라준 후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멀리 떠나자 일화검존이 말했다.

“좋다고 해줄 때 받아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취마가 들고 있던 술을 마셨다.

“술 좋아하는 남자 만나면 여자가 고생이야.”

“저 애도 삼대 취객이잖아?”

“그러니까. 둘 다 주정뱅이면 돈 벌어서 술값에 다 쓰라고?”

일화검존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취마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구지만 너는 참 이해가…….”

데에에에에엥!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비스듬히 기대있던 취마가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일화검존은 하얀 무복을 휘날리며 호수를 날아서 건너가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취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교주 명이라면 지옥도 그렇게 빨리 뛰어들 거지?”

여빈이 취몽루로 달려왔다.

취마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들 술 깨워라!”

* * *

독왕은 독을 제조하고 있었다.

천독림에서 마불이 발견한 칠생초가 주재료인 칠생극락(七生極樂)이라는 독이었다. 중독된 자는 칠 일 동안 쾌락을 느끼다가 마지막 칠 일째 그동안 겪은 쾌락에 반하는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되는 신비독이었다.

그는 검무극이 선물한 피독천잠사 장갑을 낀 채 작업하고 있었다.

데에에엥!

종이야 울리든지 말든지 독왕은 자신의 일에만 집중했다.

그때 상선이 의복을 들고 들어왔다. 독왕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

“못 간다고 전해주게.”

“팔마소집령을 거부하시고 그 독으로 감당이 되겠습니까?”

상선이 그에게 가서 옷을 내밀었다.

억지로 옷을 받아 든 독왕이 불만을 터뜨렸다.

“막상 가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닐 텐데.”

“어서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독아들은 준비 중입니다.”

상선이 벽에 걸려 있던 독주머니를 챙겨왔을 때, 독왕은 또 독을 배합하고 있었다. 상선이 억지로 잡아끌어서 옷을 입게 했다.

독왕이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열두 개의 독주머니까지 허리에 차자, 그야말로 훤칠하고 멋있는 무림공자가 되었다.

독왕이 거처를 나서며 말했다.

“이제 이공자에게 청소는 다 시켰네.”

그는 오늘의 소집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짐작하고 있었다. 함께 놀아준 보람이 있었다.

* * *

종소리를 듣는 순간, 염주를 돌리던 마불의 손이 멈췄다.

대공자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음을 알 수 있었다.

기다렸던 순간이지만, 또 한편으론 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던 순간이기도 했다.

‘……대공자.’

그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격한 감정을 보여주듯,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빛이었다.

대공자를 위해 기도한 후에야 마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자, 운명이 우릴 어디로 이끄는지 어디 한 번 가봅시다.’

* * *

극악소마는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이제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했고 만년설삼을 복용한 덕분에 내공이 더욱 심후하고 웅혼해졌다. 몸이 근질근질한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검무극과 함께 싸우고 싶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천화루주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밤 나들이를 가시는 꿈을 꿨답니다.”

그녀는 신교에 부는 운명의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극악소마가 눈을 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꿈이 그렇다면 준비를 해야겠군.”

극악소마가 하얀 벽 속에 감춰진 벽장을 열었다.

스르르륵.

그곳에 십여 개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닌 가면들이었다.

“자네가 골라주게.”

“축하의 자리가 될 것 같으니, 저 가면은 어떨까요?”

그녀가 가리킨 오색찬란 화려한 그것은 교내의 큰 행사나 연회가 있을 때 쓰는 환락귀면(歡樂鬼面)이었다.

극악소마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환락귀면을 꺼냈다.

천화루주는 몸을 돌려서 가면을 바꿔 쓰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하는 운명의 길을 가는 중이었다.

극악소마가 가면을 바꿔 썼을 때, 그제야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심야수련모임 중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련을 멈춘 권마가 이안에게 말했다.

“축하선물을 준비해야 할 거야.”

대공자가 다녀갔기에 이 야밤의 소집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권마는 짐작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이안은 권마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드디어!”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쩌면 이 순간을 당사자보다 더 기다렸던 그녀였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그리고 천소희에게 내려진 명령.

“네가 먼저 가서 철권들을 준비시켜라!”

이런 큰일에 그녀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천소희는 감격한 얼굴로 명을 받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소희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졌다.

권마는 떠나기 전에 이안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이공자는 자넬 보고 싶어 할 거야. 어서 가서 준비하게.”

“네! 감사합니다.”

이안이 자신의 거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데, 늦을 수 없다.

아껴둔 옷도 꺼내 입고, 화장도 하고. 이 중요한 순간 최고로 예쁘고 멋진 모습으로 검무극을 축하해 줄 것이다.

* * *

대연무장 사방으로 횃불이 피어올랐다.

중앙 단상 위에 검우진이 앉아 있었고, 그를 향해 검무극이 서 있었다.

검무양은 옆으로 물러나 사마명 옆에 서 있었다.

마군을 비롯한 천마신교의 정예 마인들이 대연무장 주변을 철통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이제 그곳으로 팔마존과 그들의 수하 마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은 혈천도마였다.

거대한 멸천대도를 비스듬히 등에 차고 연무장으로 들어서는 그의 뒤로 남도종의 도귀들이 뒤따라 들어섰다.

척척척척척척!

사납고 거칠기로 유명한 그들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열을 맞춰서 들어섰다.

다음으로 들어선 이는 새하얀 무복을 갖춰 입은 일화검존이었다.

그녀 뒤로 북천검가의 마검들이 뒤따라 들어섰다. 평소 도귀들과 만나면 서로 아웅다웅 사나운 눈길과 욕설을 주고받는 그들이지만, 오늘만큼은 그 누구도 상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도귀들과 경쟁이라도 하듯 그들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화검존의 뒤로 도열했다.

다음으로 도착한 사람은 권마였다.

그 뒤를 따른 이들은 오직 맨주먹으로 무림에 뛰어든 동권문의 철권들이었다. 제대로 격식을 차리고 나선 그들은 손목에 보호구를 차고 있었는데, 천마신교를 상징하는 악귀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맨주먹이지만 기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그들이었다. 언제나 모이면 마존들보다 오히려 그들의 기싸움이 치열했다.

다음으로 섭혼마존이 들어섰다.

아직 젊고 상대적으로 무공도 낮지만, 그녀 뒤를 따르는 서환진의 귀술사들은 다른 어떤 마인들에 비해서도 기세가 밀리지 않았다. 연무장을 꽉 채운 마기에도 그들의 귀기는 자신들이 누군지를 요사스럽게 알렸다.

행렬은 계속되었다.

다음으로 들어선 마존은 취마였다.

취한 듯, 취하지 않은 걸음으로 취마가 걸어왔고, 그 뒤를 주객들이 뒤따랐다. 취해 있었지만 그들 역시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내뿜고 있는 취기는 장내를 장악하고 있던 마기와 귀기마저 취하게 했다.

다음으로 마불이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한 표정의 마불.

하지만 그를 따르는 광승들은 달랐다. 황금빛 가사를 걸친 그들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염불을 외우며 들어서자 장내는 또 다른 기운들로 휘몰아쳤다.

이번에는 독왕이 들어섰다.

독왕의 뒤를 따르는 독아들은 이곳에 있는 그 어떤 마인들보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이 가득한 그들이었다. 우리가 마음먹으면 너희는 다 죽는다, 이런 자신감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마존은 극악소마였다.

환락귀면을 착용한 극악소마의 두 눈에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뒤로 백색 가면을 쓴 무면객들이 따라 들어왔다. 하얀 가면에는 저마다 피를 묻힌 것 같은 붉은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섬뜩함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들이 누군지를 알렸다.

천마신교의 정예 마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그곳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열기에 휩싸였다.

그 열기를 한순간에 식힐 수 있는 한 사람.

천마 검우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이 수많은 마인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일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천마지존 신교불패(天魔至尊 神敎不敗)!”

그야말로 천지를 진동하는 우렁찬 외침이었다.

계속된 외침이 끝나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검우진이 말했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함이다.”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박히듯 날아들었다.

긴장감이 흐르며 그곳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극은 들으라.”

검무극이 예를 갖추며 큰 소리로 말했다.

“지엄하신 명을 받듭니다.”

검우진이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차고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 시간부터 무극을 차기 천마신교 교주로 삼겠다.”

검무극이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검무극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지금은 예를 갖춰 천명에 따라야 할 때.

“신교의 앞날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교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다.”

검우진이 검무극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버지의 눈빛과 손길에 담긴 격려는 진심이었다.

―잘했다, 아들아.

그 한 마디 전음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힘들었던 지난 모든 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검무극이 천천히 그곳에 모인 마인들을 향해 뒤로 돌아섰다.

마인들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무극이 기도를 발출했다. 감추지 않고 자신의 모든 기도를 개방했다.

검무극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모두 그의 존재감과 강력한 기도에 압도되었다. 흑백의 그림에서 아버지가 피처럼 붉은 점이었다면, 검무극은 하늘처럼 푸른 점이었다. 아버지가 큰 점이었다면 검무극은 작은 점이었다.

여덟 마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소교주를 뵙습니다.”

뒤에 서 있던 팔마의 마인들과, 주위를 둘러싼 마인들까지 일제히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교주를 뵙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공자와 소교주는 하늘과 땅 차이의 신분, 본교의 마인들은 물론이고 이제 무림의 그 누구도 함부로 검무극을 대할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천지를 진동하는 함성이 이어졌다.

검무극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껏 달려왔다. 이제 검무극 개인은 물론이고 천마신교에게도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끝없이 계속되던 함성이 잦아들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검무극은 마존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자신의 마존들을 향해서.

소교주로서의 첫 발걸음이었다.

20 절대회귀-250화 20

제250회 열기의 한가운데서.

여덟 명의 마존이 일렬로 선 채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마인이 그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검무극은 가장 먼저 혈천도마에게로 걸어갔다.

“도마님.”

“소교주.”

혈천도마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이 뜨거웠다.

“제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르신 덕분입니다.”

검무극은 모든 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큰소리로 혈천도마의 공을 세워주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도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마기를 발출했다. 천마가 없는 자리였다면 그들은 ‘혈천! 혈천!’을 외쳤을 것이다.

검무극이 그들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이 과격하고 거친 녀석들 덕분에 천맥강화술의 마지막 단계를 이룰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만독불침을 이룰 수 있었다.

‘고맙다, 도귀들아!’

남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말이겠지만 검무극은 그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검무극이 혈천도마에게 예를 갖춰 마음을 전했다.

“존경합니다, 어르신!”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사람이 되어 준 마존이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사람이다.

“소교주께서 역량이 뛰어난 덕분이지 이 늙은이가 한 일이 뭐가 있겠나?”

“앞으로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공식적인 자리였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를 갖췄다.

물론, 이대로 지나갈 검무극이 아니었다. 지금의 이 차분하고 나직한 어조와는 전혀 다른 평소 말투로 전음을 날렸다.

―어르신, 나중에 술 마셔요! 축하연 거하게 열자고요! 참, 소교주는 안 씻고 침상에 누워도 되죠?

변함없는 검무극의 너스레가 혈천도마는 너무 반가웠다.

그래, 소교주가 아니라 천마가 되더라도 이럴 사람임을 혈천도마는 알고 있다. 그런 성품이었기에 이렇게 깊이 검무극이란 사람에게 빠져든 것일 테고.

―까불다 교주에게 혼나려고. 집중해!

다음으로 옆에 서 있는 일화검존 앞으로 걸어갔다.

“검존님.”

“소교주.”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검존님 덕분에 검술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일화검존은 내심 당황했다. 검무극과 나눴던 비무는 이렇게까지 평가받을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비무에서 졌다. 수하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는 것이다.

과연 마검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며 그들 역시 함성을 지르며 마기를 발출했다.

앞서 도귀들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려 했고 더 큰 마기를 발출하려 했다.

도귀들과 마검들은 오늘 이런 자리에서도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학에 관한 소교주의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이니, 내 도움은 보잘것없었을 거네.”

“너무나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앞으로도 잘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세.”

다음으로 권마 앞에 섰다.

무서운 얼굴에 담긴 깊은 정을 검무극은 안다. 그랬기에 저 사람의 우직한 한 방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안다.

검무극은 자신이 절벽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한 것도 진심이지만, 권마가 절벽을 무너뜨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다.

“사부님.”

“소교주, 이제 귀한 몸이 되었으니 나는 사부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네.”

“사부님의 주먹에서 저는 인생을 배웠습니다. 제가 어떤 자리에 오르더라도 사부님은 제 사부님이십니다.”

천마가 되더라도 사부로 모시겠다는 뜻이기에 권마의 무서운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러자 철권들도 함성을 내질렀다. 특히 그들은 검무극과 함께 권법을 배웠던 이들이다.

수련 과정에서 검무극에게 호감을 느꼈던 그들이기에 그들은 진심으로 소교주가 된 검무극을 축하해 주었다. 맨 앞에 선 흑권 중엔 천소희도 있었다.

이번에는 섭혼마존 앞에 섰다.

다른 마존들을 챙기랴, 출교해서 적들 상대하랴, 청선을 따로 챙기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존.”

“소교주님.”

다행히 그녀의 표정엔 섭섭함은 없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마존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풍천교주 역시 검무극 때문에 인연이 된 것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강해져서 그 빚을 갚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검무극은 앞선 마존들과 똑같이 제대로 예를 갖췄다.

“무림인들은 말합니다. 본교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섭혼마존이시라고요. 앞으로도 본교의 가장 무서운 칼이 되어 주십시오!”

“소교주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귀술사들이 일제히 귀기를 발출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귀기에 마인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흔들렸다. 정말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음으로 취마 앞에 섰다.

취마는 발그스레 달아오른 얼굴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취마님.”

“소교주.”

“취마님께 술을 배우고 강호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검무극이 전음을 보냈다.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우야, 라고 부르고 싶다.

―확 해버릴까요?

―아서라. 그랬다가 나, 교주님께 제대로 찍힌다.

주고받던 장난스러운 전음과는 달리 취마는 차분하고 준엄하게 말했다.

“언제든 오시게. 소교주를 위한 술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까. 자, 이 술은 소교주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시는 것이네.”

취마가 허리춤에 있던 술을 마시자 뒤에 서 있던 주객들이 일제히 술을 마셨다. 그들이 내뿜은 취기가 마기, 귀기와 뒤섞여 주위를 휘몰아쳤다. 분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다음은 마불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일 미안한 마음이 드는 마존이 그였다.

“축하하오, 소교주.”

그는 차분했다. 대공자가 소교주가 못되었다고 그 책임을 검무극에게 미룰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소교주에게 본교의 미래가 달렸으니, 그 점을 항상 잊지 않기를 바라오.”

“명심하겠습니다.”

마불의 시선이 검무극의 어깨 너머 저 멀리 검무양을 향했다. 검무양을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소교주의 앞날을 위해 본승들이 기도드리겠소.”

마불의 말이 떨어지자 광승들이 일제히 염불을 외우며 검무극의 앞날을 기원했다.

검무극은 알았다. 적어도 마불만큼은 검무양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거라고.

‘끝까지 형을 잘 지켜주시오, 마불.’

그게 검무극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검무극이 이번에는 독왕 앞에 섰다. 독왕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독왕은 자신에게 이런 기분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독왕님.”

“소교주.”

“천독림에서의 가르침 덕분에 앞으로 독살의 위험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독에 강한 체질이시니, 내 말만 명심하면 독으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네.”

곧장 독왕에게 전음이 날아갔다.

―그날 놀아주신 덕분에 이렇게 소교주가 되었습니다.

―고마우면 또 독초 찾기 내기하자.

검무극이 짐짓 목소리를 깔았지만.

―나 소교주요. 채집꾼 이공자와는 다른 사람이오.

―와서 청소도 좀 해주고.

당연히 독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검무극을 바라보는 독왕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

‘이것으로 네가 상대할 사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겠구나.’

드디어 검무극은 마지막 마존 앞에 섰다.

극악소마는 오색찬란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소마님.”

“소교주.”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면 속 극악소마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너무나 큰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면이 멋집니다.”

“축하연에 참가할 때 쓰는 가면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딱 어울리는 가면이지요.”

눈구멍 속 극악소마의 두 눈이 웃고 있었다.

검무극은 이제 그의 웃음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살필 필요가 없어졌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보이는 그것이 다였으니까.

“다시 싸우러 나갈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저 역시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무면객들이 일제히 따라 웃었다. 괴기스러운 웃음이었다. 소교주에 등극한 것을 축하해 주는 무면객들만의 방식이었다.

그곳에는 무면객들의 웃음이 퍼져나갔고, 귀술사들의 귀기가 사방을 휘돌았으며, 사나운 마기들과 함께 염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무극이 챙긴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검무극의 시선이 팔마의 마인들이 아닌 천마전에 속한 무인들로 향했다.

저 멀리 마군주 장호의 모습이 보였다. 천마 직속의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앞장서서 몸을 날릴 것이다.

장호를 향해 정중히 포권해주었다. 마군들의 함성에 열기가 더해졌다.

황천각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에게도 포권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들 역시 큰 함성으로 축하해 주었다. 조사관들 사이에 서대룡이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각주님! 아니, 소교주님!

―오른팔만 믿고 간다!

―제발 다른 신체 부위도 좀 믿으시라고요!

기분 좋게 웃으며 다른 조직의 수장들에게도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함성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끝으로 검무극은 한 사람을 찾았다.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 있어도 감춰지지 않는 한 사람. 마인들 속에 서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마인들 다 모이는 자리니, 젊고 잘생긴 사람 있으면 꼬셔 보려고요.

―여기 있는 녀석들 다 합쳐도 안 돼.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뭐라고.

―아니, 너 말고. 내게 안 된다고.

그녀가 웃었다. 소교주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검무극이 너무나 좋았다.

―축하드려요, 소교주님.

―네가 지켜준 덕분이다.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정말 그녀가 자신을 위해 몸을 던져 주었기에, 오늘 이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렇게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검무극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아직 감사를 전할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총군사 사마명에게 가서 인사했다.

“군사님.”

“축하하네, 소교주.”

사마명은 검무극이 이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너무 뛰어났기에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그리고 예측 불가했기에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이런 말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소교주가 되었으니 아버지 몰래 바둑 좀 가르쳐 주십시오.”

검무극의 말에 사마명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곤란하겠네.”

“군사님께서는 제가 이기기를 바라지 않으시는군요!”

“본교의 평화를 바랄 뿐이네. 바둑만 아니라면 통천각은 언제나 소교주를 도울 것이네.”

그렇게 사마명과도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눈 검무극이 덩그러니 서 있는 검무양에게 갔다.

이 자리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그 아니겠는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는데. 얼마나 아쉽겠는가?

“형, 난 형만 믿는다.”

단둘이었다면 이 미친놈아, 그만해! 라고 소리쳤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본교를 부탁한다.”

검무극이 갑자기 검무양을 와락 안았다.

―미쳤어?

―미친 건 형이지. 이 좋은 자리를 내게 양보해 줬으니까.

―미친놈아, 떨어져!

두 사람의 모습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피를 보지 않고 후계싸움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검무극은 마지막으로 아버지 앞에 섰다.

“아버지.”

검우진은 검무극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란히 두 사람이 서자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함께 서 준 것만으로도 검무극에게는 엄청난 힘이 실렸다. 천마가 확실하게 인정하는 소교주인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함성 속에서 심야의 후계자 발표는 끝이 났다.

* * *

검무양이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온통 시끌벅적 교내 분위기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마음 같아선 사람 좋은 얼굴로 분위기에 휩쓸려 주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에게 안기는 조연의 역할.

땅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무양아.”

돌아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

검우진이 부드러운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같이 밥 먹자.”

그 말을 듣는 순간, 검무양은 울컥했다.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눈앞이 흐려졌다. 검무양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았다. 오늘 같은 날, 아버지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러잖아도 배가 고팠습니다.”

“가자. 오늘은 숙수들도 안 자고 있을 테니, 네가 좋아하는 것 해달라고 하자.”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천마전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이렇게 함께 걸으니 검무양의 마음에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

그는 장남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아버지의 칭찬을 받고 싶었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 가장 확실한 방법이 후계자가 되는 길이었다. 후계자가 되지 못하면 비참하게 버려질 거로 생각했었는데…….

“아쉬우냐?”

“아뇨, 차라리 홀가분합니다.”

이제 검우진도 장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고 있었다. 검무양에게 검우진은 교주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검우진은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무양은 그 어떤 위로보다 밥 같이 먹자는 아버지의 한마디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너무 감사했다.

검우진이 앞서 걸어갔고, 검무양은 몇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달빛은 말없이 걷는 부자의 앞길을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 * *

나는 멀리 지붕 위에서 아버지와 형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는 형과 술 한잔하려고 했다.

한데 아버지가 형을 챙기는 모습을 보고 뒤로 빠졌다. 우리야 다음에 마시면 되지만, 오늘 같은 날 아버지와의 식사는 형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될 거다.

내가 회귀하면서 어쩌면 아버지에게 형은 아픈 손가락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형을 챙겨주는 아버지가 고마웠다. 아버지는 아버지다.

나는 훌쩍 몸을 날려 교내에서 제일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 섰다.

그곳에 팔짱을 낀 채 서서 천마신교를 돌아보았다. 축제 분위기인 천마신교는 온통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즐겁고 신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열기의 한가운데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내 마음은 차분했으며 앞날을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열기가 가라앉고 여명이 떠오를 때까지 나는 그렇게 꼭대기에 홀로 서 있었다.

18 절대회귀-251화 18

제251회 이제는 모두가 강해져야 할 때.

소교주가 되었다고 달라진 건 없다.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고,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다.

강해져서 화무기를 죽이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가장 먼저 닥쳐온 변화는 내 거처의 마당에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상징으로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방패에 그려진 악귀상.

“천마전 호위대에서 나왔습니다.”

소교주가 되자 천마전에서 호위 무인이 파견된 것이다.

“저는 앞으로 소교주님의 안위를 책임질 적연(赤燕)입니다.”

그는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호위 무인이 독안(獨眼)인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아주 특별해 보였다.

뒤에 선 호위 무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인사했다.

숫자는 모두 열둘.

여섯 명씩 주야로 교대하며 나를 지켜줄 거라고 설명했다.

나는 이 적연과 나머지 호위 무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적연. 그는 불꽃처럼 빛나다가 사라진 운명을 살았다.

이들은 소교주였던 형의 호위무인이었고, 화무기가 공격해 온 날 모두 형과 함께 죽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달아나지 않았고, 목숨으로 충성을 바친 이들이었다.

‘고맙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제 저희가 소교주님을 지켜드릴 겁니다.”

그 충성심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바꿔야 할 또 다른 운명들.

다만, 문제는 이들이 내게 필요 없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할 텐데, 나는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일이 많다. 게다가 이들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보도 꽤 많을 테고.

어떻게든 내게서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

소교주가 된 첫날부터 이런 과제가 주어질 줄이야.

이들에게 ‘그대들은 필요 없으니 그만 물러가게.’ 이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다고 돌아갈 이들도 아니었고, 이 일은 그렇게 풀 문제가 아니었다.

호위대의 수장이자 아버지의 수신호위인 휘를 만나서 풀어야 할 문제.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정사마 어디라도 가장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이들이 호위무인들이다. 보수적이지 않으면 대상을 지켜내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수일수록 자기 실력을 과신하기 마련이고, 성격 또한 제멋대로인 무인들을 지켜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지 않나? 어떻게든 이들을 돌려보낼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잠시 쉬고 있게.”

휘를 만나서 담판을 지으려는데 적연은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모양이다.

“호위대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교주께서 너희를 돌려보내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희가 돌아올 곳은 없다. 혹시라도 저희를 돌려보내시면 저희는 호위대에서 나와야 합니다.”

내가 돌려보낼 걸 짐작하고 휘가 선수를 친 것이다. 그만큼 내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호위를 물리는 일은 절대 안 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들을 데리고 있으라는 뜻.

“그럼 그대들은 이제 완전히 내 사람이 된 건가?”

“공식적인 소속은 천마전 호위대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셈입니다.”

나는 적연에게 말했다.

“안대를 풀어보게.”

내 명령에 적연이 흠칫했지만 이내 망설이지 않고 안대를 풀었다. 눈을 다쳐서 안대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가려져 있던 그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귀안술(鬼眼術)을 익혔군.”

귀안술은 은신한 자를 찾아내는 안법으로 호위무인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익히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러운 데다가, 평소에는 이렇게 한쪽 눈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그 한순간의 위기를 위해 평생 한쪽 눈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지 않나?”

“참을만합니다.”

“가만히 있게.”

나는 그의 눈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한줄기 미세한 내력이 흘러 들어가서 그의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손을 떼자 적연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날 향한 적연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내가 이렇게 자신의 고통을 다스려 줄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임시처방일 뿐이네.”

이안도 그랬고, 지금 적연도 그렇고.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일은 너무나 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본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본교가 호위 무인들에게 짊어지게 하는 짐이 너무 가혹하다.

“귀안술의 대성을 이루면 평상시에도 이 눈을 쓸 수 있다고 알고 있네.”

“맞습니다. 다만 대성을 이루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서요.”

“내가 도와주겠네.”

적연의 붉은 눈은 마치 나를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놀란 눈빛이었다.

“나이가 몇 살인가?”

“스물아홉입니다.”

그는 젊었다. 함께 온 호위들도 그보다 젊거나 비슷한 연배였다.

“제가 나이가 젊지만, 호위대에 들어온 지 십이 년 차입니다.”

열일곱에 호위대에 합격했다는 의미. 천마전 호위대는 보통 실력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적연의 재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의미기도 했다.

“함께 온 후배들도 나이는 젊지만, 실력은 자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소교주를 호위하라고 보낸 이들이니까. 휘는 다음 세대를 책임질 젊은 고수들을 내게 보냈을 것이다. 실력과 충성심을 모두 갖춘 젊은 고수들을.

휘 아저씨, 정말 잘 뽑으셨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죽음으로 증명한 이들이었으니까.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근래 벌어진 일들은 거의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성격도 어느 정도는 알겠군.”

“아주 조금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말해보게.”

뭐라 대답할까 잠시 망설이던 적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시기 쉽지 않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들이 하나만 내려놓으면 누구보다 나와 잘 지낼 수 있네.”

“어떤 것입니까?”

“조급함. 지금 당장 내 호위가 되겠다는 조급함만 내려놓으면 된다는 말이네.”

적연을 비롯한 호위무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이미 호위로 발령받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의아한 것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자네들 궁극적인 꿈이 뭔가?”

“최고의 호위가 되는 겁니다.”

“하면 소교주의 호위가 꿈인가? 교주의 호위가 꿈인가?”

잠시 사이를 두고 적연이 대답했다.

“당연히 교주님의 호위가 되는 것이 최종 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호위들도 같은 목표일 것이다.

“그러려면 조급함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네.”

여전히 그들은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목검 열세 자루를 가져오게.”

내가 실력을 시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연은 즉시 수하에게 목검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후, 우린 목검을 한 자루씩 들었다. 나는 목검 끝에 하얀 분가루를 묻혔다.

“자, 저기 끝에 있는 친구를 나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지키게.”

내가 지목한 사람을 중심에 두고 그들은 즉각 진형을 갖췄다.

바짝 긴장한 그들.

“내가 다칠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막게. 자, 가네.”

나는 그들에게 쇄도했다.

어떻게든 나를 막으려고 했지만 작정하고 덤비는 나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풍신사보를 아낌없이 발휘하며 그들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떠밀렸고 당겨졌으며, 휘두르는 검은 빗나갔다. 절대 파고들 수 없을 곳을 내어줬고, 다리에 걸려 넘어졌으며 일순간 나를 시야에서 놓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한 번씩 스쳤을 때, 나는 훌쩍 몸을 날려서 원래 자리로 내려섰다.

열두 명의 호위들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뭘 하고 간 겁니까?

그들은 아무도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누구도 얻어맞지 않았다.

그때 그들 중 누군가 깜짝 놀랐다.

“헛!”

그제야 그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팔이 찔리고 배가 찔린 것보다 더 경악했다. 어느새 모두의 심장에 분가루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수장인 적연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묻었는지도 모르게 묻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모두 죽었다.

“지금 이 실력으로 나를 호위할 수 있겠나?”

적연은 물론이고 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력 차이를 떠나 호위 무인으로서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것이 너무나 수치스러웠을 테니까.

“자네들에게 수모를 주려는 것이 아니야. 현실을 보여주는 거다. 나를 지키려면 훨씬 더 강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앞으로 내가 상대할 자들은 이런 고수들일 테니까.”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은 못 막았지만, 다음에는 막아내야 한다. 혼자서는 못 막지만 열둘이나 모였는데 막아내야지. 밥 먹는 나를 지킨다고, 잠자는 나를 지킨다고 시간 낭비하지 마라. 그런 의미 없는 경계를 서고 있는 시간에 무공수련을 한다.”

지금 나를 호위한다고 따라다니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었으니까.

“그럼 계속 무공수련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적연의 물음에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들 입장도 있는데 그럴 수는 없지. 내부나 외부의 공식행사에는 함께 움직여야지. 한데 내가 일상생활을 하고, 마존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럴 때까지 호위한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사실 그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이기도 했다. 힘든 호위 임무에서 수련 시간을 내기 위해 잠을 줄이는 그들이었으니까.

“호위대의 규칙이 이러하니까. 원칙에 어긋나니까. 이제부터 그런 생각은 버린다. 우린 새로운 규칙과 원칙을 세워나간다. 내가 물러가 쉬라고 하면 무조건 내 명령을 받아들여. 내가 따로 부르지 않으면 그 시간은 수련 시간이다. 무림 제일의 호위 무인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수련한다.”

뜻밖의 말에 적연과 무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그런 호위 무인이 필요해.”

난 천천히 다가가 적연의 심장에 묻은 분가루를 털어주었다. 그 아래 보이는 호위대의 상징.

“난 자네들 가슴에 그려진 이 방패가 필요해. 아무도 뚫지 못하는 만년한철 방패가.”

적연이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젊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내 말에 동요했다. 최고의 호위무인이 되려는 것은 그들의 꿈이기도 할 테니까.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면 나도 하나는 약속하지. 나는 자네들을 데리고 끝까지 간다. 내가 천마가 되었을 때, 내 호위는 자네들이 맡을 거다.”

적연과 호위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보통 천마가 되면 천마를 호위하는 무인들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선언한 것이다. 너희 모두를 데려가겠다고.

“만약 이런 방식에 문제가 생겨 호위대에서 쫓겨나면 내가 책임지고 받아들이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적연은 이렇게 해서 될 일인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을 많이 주는 대신 내가 수시로 실력을 점검할 거야. 게으름을 피운 사람은 즉시 내보낼 거고. 어쩌면 이 일이 날 호위하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어.”

이제는 모두가 강해져야 할 때다. 특히 내 호위 무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적연이 주위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빠르게 전음이 오가는 것을 느꼈다. 일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귀신을 보라고 귀안술을 익혔는데…… 지금은 귀신에 홀린 기분입니다.”

이런 큰일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그런 표정으로 적연은 덧붙여 말했다.

“저희는 소교주님 말씀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뒤에 있던 호위 무인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강해지겠습니다. 소교주님께 저희의 미래를 걸겠습니다.”

그들의 의지가 느껴졌다.

“강해지게. 그래서 훗날 무림 제일의 천마수호대가 되기를 바라네.”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너희를 도울 테니까.

그리고 살기 위해서라도 우린 해내야 한다.

“숙소는 어딘가?”

“근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최고 시설로 다시 지어주겠네. 수련장도 함께 딸린 곳으로.”

모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래도 오늘은 첫날이니까 다 함께 갈까?”

* * *

호위들을 거느리고 천마전을 향했다.

늠름하게 뒤따르는 호위들은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냉철하면서도 당당한 눈빛으로 마인들을 대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벨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호위 임무 중에는 마존에게도 인사를 생략해도 되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었다. 내게 혼쭐이 났을 뿐, 어디 가서 빠지는 이들이 아니다.

우리가 걸어가자 물이 갈라지듯 마인들이 갈라졌다.

그들은 감히 앞을 막는 것은 고사하고 나를 대하는 눈빛까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었다. 응원하는 눈빛이든, 지지하지 않는다는 눈빛이든. 어느 정도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소교주가 된 나에게 감히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보면 절대적인 존경심을 표하며 공손히 인사했다. 내가 마음에 들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차기 천마에게 찍혔다간 죽음이란 생각뿐이었다.

호위들은 입구에서 대기하고 홀로 천마전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태사의에 앉아 계셨다.

피의 길을 걸어가 계단 아래에 섰다.

“기체후 일향만강하시옵고, 별래무양하옵시고 옥체금안 하셨습니까?”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

“무릇 소교주라면 이 정도 문안 인사는 드려야지요.”

아버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평소처럼 해라.”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형이랑 제 험담은 실컷 하셨습니까?”

“못했다. 네 형이 누구처럼 뒤에서 욕하고 그러질 않아서.”

아버지, 어제 형을 챙겨주시는 모습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손잡고 오는 것까진 제가 약속을 지켰으니, 이후에는 아버지도 좀 도와주십시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형 문제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실 거라 믿었다.

“네가 후계자, 후계자 노래를 불렀다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부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참가해야 할 행사며, 특히 외부에 아버지 대신 참가해야 할 행사가 줄줄이 있는 것이다.

“아버지 닮아 잘생긴 이 얼굴, 세상에 자랑 좀 하겠습니다.”

사실 믿는 것은 시천비술이었다. 어떻게든 시천비술을 연마해서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불쑥 물었다.

“준비되었느냐?”

나는 직감했다.

드디어 고대했던 그 순간이 왔음을.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차분한 내 대답에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너라.”

내겐 후계자 자리보다 더 중요한 그것을 위해, 아버지를 뒤따랐다.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심장은 질주하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30 절대회귀-252화 30

제252회 그것이 곧 구화마공이니라.

아버지를 따라 낯선 길을 걸었다.

천마전 뒤쪽은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었다. 회귀 전 대법 재료를 구하러 본교로 돌아왔을 때도 이곳만큼은 와보지 못했다.

아름답게 꾸며진 화원에 도달하자 아버지는 이곳에 진법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내 발자국을 정확히 밟고 따라와라.”

화원에 펼쳐진 진법은 구천악령미로진(九泉惡靈迷路陣). 정확한 생문을 찾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악령들에게 쫓기게 된다는 끔찍한 절진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밟은 곳을 그대로 밟으며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그렇게 구천악령미로진을 벗어나자 전방의 시야가 확 바뀌었다. 화원을 걸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그곳에 성처럼 솟은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천마신교에 있는 그 어떤 곳보다 은밀한 곳, 이곳은 바로 구화마궁(九禍魔宮)이었다.

아버지가 문 옆에 있는 작은 판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곳으로 내력을 주입하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오직 구화마공을 익힌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들어서는 순간 나를 압도하는 하나의 광경.

정면에 천마혼의 모습을 한 거대한 석상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아버지가 태사의에 앉아 계시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천마혼은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손바닥 위가 천마를 위한 자리라는 것을.

천마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저 내민 손 위에 올라가 우쭉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내 천마혼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정말 오늘만큼은 평정심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내 심장을 더욱 떨리게 한 아버지의 한마디.

“나도 이곳에서 아버지에게 구화마공을 전수받았다.”

그날이 생각나시는지 아버지의 눈빛엔 지난날의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어떤 분이셨습니까?’

아버지는 한 번도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자식들에게 해줄 말이 많이 생겼는데 말입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드넓은 그곳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했다.

한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는 태초 마교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무섭고 기괴하고 원초적인 모습이었는데, 그림과 석상들이 너무나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움직일 것만 같았다.

그 옆으로 또 다른 마교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마교도 바뀌어 갔다. 마인들도, 마귀들도 다르게 묘사되었다.

“구화마공은 유구한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오면서 조금씩 바뀌고 개선되고, 때론 실전되었다가 다시 이어지기도 했다.”

구화마공에 대해서도 벽에 자세히 적혀 있었다.

구화마공이 탄생했을 때의 기록도 있었고, 아홉 개의 초식이었던 시절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러다 구화마검식과 구화마도식, 구화마권식으로 나뉘어 전후반 각 칠초식의 마공이 되었던 시절도 있었고, 실전되어 암흑 속에 묻혀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 다시 아홉 개의 초식이 될 때까지 그 모든 과정이 벽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구화마공은 계속 변해 왔군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시대마다 멍청이와 천재들은 계속 나왔을 테니까.”

그러면서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천마혼 석상을 향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오직 변하지 않았던 것은 천마혼이다.”

시대에 따라 초식은 변해도 천마혼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었을 때, 불러낼 수 있는 궁극의 존재.

나는 이 자리에 오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천마혼의 심상을 보았다. 만사종주의 동굴에서 천마혼이 나를 쳐다보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무림맹주의 패도적인 기도를 버티면서 보기도 했다.

그때 천마혼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나를 가소롭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고,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가엽게 여기는 것도 같았던 그 눈빛을.

“천마혼을 불러보셨습니까?”

내 물음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어 천마혼을 불러낼 수 있다는 뜻.

아버지, 천마혼을 불러내고도 화무기에게 지신 겁니까? 아니면 불러내지 않으시고 싸우신 겁니까? 대체 그날 어떤 싸움이 벌어졌던 겁니까?

이 순간에도 너무나 굳건해 보이는 아버지의 옆모습에서 패배는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을 알게 될지, 영원히 모를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두 번 다시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면 아버지와 제가 각각 천마혼을 불러낼 수도 있는 겁니까?”

“그렇다. 천마혼은 그것을 불러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불러내는 천마혼과 네가 불러내는 천마혼은 다를 거다.”

아버지와는 다른 천마혼. 그 두 천마혼이 우뚝 서서 서로를 마주 본다고 상상하자, 너무나 그 순간이 기대되었다.

“제 천마혼은…… 말이 많을지도요.”

아버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저 정도면 박장대소라 볼 수 있는 반응이다.

“내 생전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를 놀리는 말이지만, 그만큼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훌쩍 몸을 날려서 천마혼 석상의 손바닥 위로 올라갔다.

“이리 올라오너라.”

나도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려 그곳에 올라섰다.

손을 내밀어 석상의 손을 만져보았다. 차가운 석상의 감촉.

손바닥 중앙에는 천마혼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고, 거기에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아마 아버지도 이곳에서 구화마공을 전수받으신 모양이다.

아버지는 나를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준비되었느냐?”

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천마혼의 실제 감촉을 느끼고 싶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위엄에 찬 기도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아버지의 입에서 내가 간절히 바랐던 그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구화마공을 전수하겠다.”

큰 운명 앞에서 내 몸은 절로 떨렸다.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허리를 곱게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적으로 호흡했다. 호흡과 의식이 하나가 되었고, 드디어 나는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이 손바닥 위는 평범한 장소가 아니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내력과 마기의 움직임이 더욱 원활했다.

“초식이란 오직 살상이라는 하나의 결과를 위한 과정이며 그 과정을 최적화하는 움직임이다. 이것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네 성취가 달라질 것이다.”

무학의 깊은 무리를 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아버지는 구화마공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구화마공의 구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그 어떤 무공보다 어려웠다. 보통의 경우 듣는 순간 대충 이해라도 하는데, 구화마공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 이뤄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외우기만 했다. 뜻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건 나중 일이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외웠다.

“……신궐은 차가워야 하고, 수분은 뜨거워야 한다. 하완이 잎이라면 건리는 뿌리가 돼야 하고, 혼돈이 질서가 되고, 굉음이 무음이 될 때만이 중완은 생으로, 거궐은 사로 바뀔 것이다. 중정이 맑고 고요할 때 단중은…….”

이해할 수 없는 구결이 끝도 없이 지나갔다. 한참동안 계속된 구화마공의 마지막 구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 세상 홀로 우뚝 서니 그것이 곧 구화마공이니라.”

아버지의 구결이 끝나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내가 얼마나 이해하느냐 마느냐는 나중 문제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구화마공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를. 절대마공이 주는 위엄과 격조는 벅찬 감동이 되어 내 몸을 휘감았다.

“얼마만큼 외웠느냐?”

“구결 자체는 다 외웠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랐다. 보통 때였다면 그럼 가자,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구결을 반복했다.

“자, 다시 들어라.”

구화마공을 가르치는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셨다. 구화마공은 비급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르치는 것이 원칙이기에, 단 한 글자도 잘못 외우거나 잘못 해석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세 번이나 구결을 반복해서 전수해 주신 후, 내게 외워보라고 하셨다.

나는 구화마공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외우자 아버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다.”

나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말 너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정이 북받쳐서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나는 이렇게 무공전수가 끝날 줄 알았다. 가르쳐줬으니 이제 네가 알아서 익혀라.

하지만 아니었다.

아버지는 구화마공의 몇 가지 요결과 핵심을 전수해 주었다. 전체를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헷갈릴 수 있는 특정 부분만 정확히 짚어주셨다.

“이 내용도 다 외웠느냐?”

“네, 외웠습니다.”

“불필요하게 길을 헤매지 말라는 뜻에서 알려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천마혼의 손가락 끝에 걸터앉았다. 나도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는 내게 구화마공의 전체 요결을 강론하셨다. 구결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수련해야 하는지 모두 알려주셨지. 그럼에도 대성을 이루는 데 아주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네게 전체 요결은 알려주지 않을 거다.”

아버지답다는 생각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하시려는 이유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같은 무공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난 이후에 가장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네가 해석한 구화마공을 보고 싶다.”

“!”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놀랐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방금 저 말은 아버지가 나를 무인 대 무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이었음을. 아니, 그 이상이라는 것을.

“보여다오, 네 구화마공을.”

아버지가 익힌 구화마공보다 더 뛰어난 구화마공을 보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저 자존심 강하신 아버지가 지금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거다.

“그래서 이곳에 네 역사를 새겨라!”

가슴이 울컥했다. 이 순간만큼은 구화마공을 전수받은 기쁨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쁨이 더 컸다. 그때 나지 않았던 눈물이 지금 나려 했으니까.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원래의 무뚝뚝한 아버지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보여드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말 보여드릴 거니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저, 정말 잘 돌아온 것 같습니다.

* * *

천마신궁을 나온 나는 대천산 꼭대기에 올랐다.

그곳에 홀로 서서 구화마공의 구결을 외우고 또 외웠다. 영원히 내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 내 인생이 걸려 있었다. 여기에 모두의 인생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알려주신 요결과 깨달음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이 요결을 몰랐다면 구화마공을 익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배고픔도 잊고 그곳에서 오직 구화마공에만 빠져들었다. 내 정신은 맑고 깨끗했으며 환희를 느꼈다.

나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종국에는 구화마공까지 없어졌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구화마공을 완벽히 각인했다.

* * *

대천산을 내려와서 처음 간 곳은 풍류주점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조춘배가 달려 나와 나를 반겼다.

“소교주님! 정말 감축드리옵니다! 소교주가 되셨다는 소식 듣고 교내로 찾아 뵙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는 나를 안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와락 그를 안아주었다. 조춘배가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미천한 제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미천하다, 이런 말씀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친구에게 이런 말씀은 실례잖아요?”

친구란 말에 조춘배는 ‘어이쿠’하며 손사래를 쳤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조춘배의 주름진 얼굴에 감격이 가득했다.

“소교주님 같은 분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겁니다.”

“그 감동, 요리로 보여주십시오! 배고파 죽겠습니다!”

나는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마불과 독왕이 남겨둔 벽을 보는데, 그 옆에 한 사람이 더 남겨두었다.

혈천, 제자와 한잔하고 가다.

놀랍게도 혈천도마가 서대룡과 함께 와서 남긴 글귀였다.

함께 술 마시러 온 것도 대단한데, 남긴 글에 제자까지 언급한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잠시 후, 조춘배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가 벽에 새로 남겨진 혈천도마의 글을 보며 말했다.

“도마 어르신이 얼마 전에 오셨다가 남겨주셨습니다. 다 소교주님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제 덕분인지 몰라도, 이제는 우리 주인장의 술맛과 요리 실력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이 얼마나 입이 까다로운데요?”

그러면서 조춘배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와 술 한잔 합시다.”

“네, 제가 축하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그거 아시오? 첫 축하주 받는 겁니다.”

“어이쿠! 미천…… 아니, 첫 잔을 제게 받아서 됩니까?”

“그러게요. 마존들 다 제치고 주인장이 먼저 생각났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러자 조춘배가 재치 있게 대답했다.

“배가 고파서 아닐까요?”

“사실 며칠 굶기는 했소.”

우린 함께 웃었다.

이전과는 다른 나다.

이공자에서 소교주가 된 나였고, 구화마공까지 배운 나다.

하지만 나는 변함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조춘배와 술잔을 나누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구화마공의 십성 대성은 수련장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십이성 대성은 수련장에서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십이성에 이르는 길은 조춘배와의 술자리에서, 극악소마의 벽에 긋는 한 줄의 줄에서, 이안과 걷는 달밤의 산책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나는 믿는다.

언제나 변함없는 무학에 대한 나의 절대 원칙.

사람이 변해야 무공도 변한다.

그리고 또 나는 안다.

탁자를 부수는 마도보다 부수지 않는 마도가 열 배는 더 힘든 마도라는 것을. 조춘배는 내가 지켜낼 마도의 이정표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때, 나의 마도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리라.

그래서 나의 축하연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와 둘이 성대하게.

“자, 한잔합시다. 주인장!”

14 절대회귀-253화 14

제253회 부둥켜안기보다 어려운 일은.

소교주가 되면서 바뀐 것은 또 있었다.

내원 깊숙한 곳에 있는 새 거처로 옮기게 된 것이다. 집도 크고 연무장도 크고, 주위의 화원이며 산책로까지. 기존 거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집이었다. 나를 시중드는 시비의 숫자도 훨씬 늘었다.

새 거처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내 취향대로 내부를 바꾸는 일이었다.

사실 회귀 전부터 야영을 워낙 많이 해서 아무 곳에서나 잘 잤다. 하지만 이젠 나의 잠자리는 중요해졌다.

소교주로서 바쁠 것이고, 수련한다고 바쁠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공간은 더 소중하다. 그 바쁜 와중에 내 휴식처가 되어줄 곳이기 때문에.

큰 침상으로 바꿨고 푹신하고 아늑한 새하얀 침구를 깔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엔 책상을 놓았다. 편안히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의자도 놓았다.

책장에는 혈천도마에게 추천받아 사 온 책들로 꽂아두었다. 올해 안에 다 읽는 것이 목표지만 반이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책을 한 권 뽑아서 창가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 책을 들고 침상에 몸을 던졌다. 폭신하면서도 기분 좋은 새하얀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그래, 이거지.”

그러다 누워서 책을 읽었다.

시화집을 읽는 것이 무공수련에 도움이 되냐고? 되고말고. 어지간한 수준까지는 오직 무공에만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만, 나 정도의 수준에 오르면…….

툭!

“아야!”

졸다가 책이 얼굴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 고수의 검은 피해도, 이건 못 피하지.

나는 잠시 침상에 누워서 잠시간의 평온함을 만끽했다. 침상에서 나가면 미친 듯이 수련하고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이 정말 고마웠다. 당연한 걸 고마워하면 인생이 행복해지는 법이다.

바뀐 것은 나의 거처만이 아니었다.

호위들에게 약속한 대로 그들에게 주어진 낡고 좁은 숙소를 허물고 연무장이 딸린 크고 넓은 숙소를 지어주었다. 호위들이 다 달라붙어서 인부들을 돕자, 숙소는 금방 완성되었다.

내부의 침상이나 가구들도 최대한 좋은 것으로 신경 써 주었다. 그런 것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니 당연히 다들 좋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장인 적연이 모두를 대표해서 내게 인사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나도 수련에 매진할 테니까, 중요한 일 아니면 찾지 마.”

나는 그 길로 개인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내 연무장은 모두 두 개였는데, 외부에 큰 연무장이 있었고 그보다는 작지만, 실내에 마련된 개인 연무장이 있었다.

나는 실내에 있는 연무장에서 수련했다.

외부보단 좁다지만, 그 어떤 실내 연무장보다 넓었다. 아버지 연무장 다음으로 크고 잘 꾸며진 곳이리라.

하나만 봐도 안다고, 벽에 세워진 십팔반 무기들은 훈련용치고는 너무 훌륭한 품질의 것들이었다.

벽과 천장, 바닥 역시 어떤 충격에도 무너지지 않게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다. 정말이지 소교주가 되니 다 달라졌다.

그래,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무공은 새 연무장에서!

구화마공을 본격적으로 수련하려니 마음이 떨렸다.

어떤 사기도 마기도 통하지 않는 절대마공.

드디어 꿈에서도 바랐던 구화마공의 수련이 시작된 것이다.

구화마공은 모두 아홉 개의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람이 사용하는 초식이 여섯, 천마혼이 사용하는 초식이 셋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초식만 완벽하게 익히더라도 대성은 가능하다.

다만, 그런 경우에는 천마혼은 초식을 발휘하지 못한다.

천마혼은 그 자체로도 강하지만, 초식을 사용할 때 더욱더 강하다.

마왕처럼 거대한 그것이 사람이 공격하는 것처럼 빠르게 초식을 사용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러니 아홉 초식을 완벽하게 익혀서 대성을 이뤄야 한다.

구화마공은 비천검법과는 완전히 다른 무공이었다. 비천검법이 검술이라면 구화마공은 말 그대로 마공이었다.

한 초식, 한 초식 사용하는데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었고, 당연히 그 위력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심법부터 차분히 수련을 시작했다.

구화마공의 수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에 나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진기를 움직였다.

내 인생 이렇게 조심하고 집중한 심법 수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행히 구결대로 진기를 일주천 하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요결이 아니었다면 심법부터 막혔을 것이다.

아직은 초식 수련은 하지 않았다. 우선은 심법부터 편하게 운기할 수 있을 때, 그때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할 것이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이주천하고, 삼주천하고.

그렇게 운기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세 시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구화마공의 심법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운기를 할 때마다 단전의 내공 반응이 달랐다. 정순하고 웅혼한 내공이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몰입할 무공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다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배고프니 일단 밥부터 먹자.”

오늘은 직접 요리를 했다.

장작을 패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손질했다.

대충 때우고 어서 수련해야지, 이러면 안 된다. 이런 중요한 수련을 할 때일수록 더 잘 먹고, 더 잘 쉬면서 최고의 몸과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넉넉히 고기를 구워 호위무인들을 불러서 함께 먹었다.

그들은 내가 직접 요리를 한 것에도 놀랐고, 그것을 이렇게 함께 먹자고 부른 것에도 놀랐다. 심지어 요리들이 먹을 만하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다음에 또 해준다. 기대해라.”

그들이 돌아가기 전에 수장인 적연을 따로 불렀다.

“수련은?”

“다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만간에 내가 한 번 봐줄 테니까, 더 열심히 하라고 해.”

“다들 좋아할 겁니다.”

“잠깐. 자네 눈 좀 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적연이 안대를 벗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더 붉었다. 고통이 상당할 텐데.

“힘든 거 자꾸 참으면 성격 나빠진다.”

나는 그의 눈에 손바닥을 대고 내력을 주입해서 다스려주었다. 그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면 되겠지만, 아직 그의 무공실력으론 이런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눈이라서 굉장히 섬세하게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해주셨을 때보다 더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구화마공을 익히기 전과 익힌 후에 나도 모르는 차이가 생겼을지도 모르니까.

적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내겐 별것 아닌 한 수였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쫓아낸 옛 호위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호위무인에게 정 쌓는 것은 나 대신 죽어달라고 점수 쌓는 거라고. 야비한 짓이라고.”

그가 뭐라 대답 하나 궁금해서 말한 것인데.

적연이 다시 안대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정이 있든 정이 없든, 제 사명을 다할 뿐입니다.”

정 없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누가 좋아서 지킨다기보단, 누군가를 지키는 자신이 좋은 거다. 그래, 이게 맞지. 이안이 특별했던 거고.

“고기 맛있었습니다.”

적연이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무뚝뚝하고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누군가를 볼 때는 자세히 봐야 한다. 안대까지 벗겨가며 자세히.

* * *

저녁에는 시천비술 수련을 했다.

문제는 시천비술이었다. 구화마공은 어떻게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떼는 느낌인데, 시천비술은 도통 암흑 속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계속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나도 이렇게 어려우니, 풍천교주가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을 만도 하다.

누가 ‘아, 그건 이거잖아!’ 딱 이 한마디만 해주면 되는데. 하긴, 그 한마디를 못 들어서 지금껏 해낸 사람이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구화마공을 십이성 대성하려면 반드시 시천비술을 익혀야 한다. 그것도 시간 차이가 확실히 날 수 있는 단계까지.

“어휴, 나도 모르겠다!”

딱!

손가락을 튕겨서 내가 좋아하는 공간을 열었다.

투명한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푸른 하늘과 잎 넓은 나무, 그 아래 편안한 의자와 옆을 기어가는 게 한 마리까지.

“좋다, 좋아!”

나는 그곳에 벌러덩 누웠다. 이곳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여기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잠이 솔솔 온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구화마공을 익힌 후부터, 시천비술의 막막함이 체감상 조금 쉬워진 느낌이 들고 있었다.

적연이 눈이 더 편해졌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나도 모르게 구화마공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일까?

* * *

검무극의 거처에 적연이 찾아왔다.

“소교주님!”

연무장 안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대답.

“들어와.”

적연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자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연무장 중앙에는 향이 피워져 있었다.

‘분명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때 뒤에서 갑자기 검무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향을 하나 들고 서 있었다.

“어디 계셨습니까?”

은신술 수련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검무극이 알 수 없는 대답을 했다.

“자네와 다른 시간에 있었기를 바랐지.”

“네?”

검무극이 걸어가서 연무장에 있던 향과 자신이 들고 있던 향을 비교했다. 향의 길이가 같은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천비술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가 싶어 향을 쳐다보던 적연이 재빨리 보고했다.

“악인곡에서 기별을 해왔습니다. 오늘 천화루주께서 떠난다고요.”

* * *

악인곡에 도착했을 때 마당에는 천화루주를 호위할 무면객들이 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쁘신데 오시라고 한 것은 아닙니까?”

“루주님이 가시는데 당연히 와서 인사드려야죠.”

아직 천화루주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고 극악소마만 먼저 마당에 나와 있었다.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섭섭하죠.”

나는 깜짝 놀랐다. 소마 입에서 ‘몸도 나았으니 이제 각자 인생 살아야죠.’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왜 보내십니까? 더 있다 가라고 하시죠?”

“꿈이 큰 여자입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극악소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극악소마가 뭐라 말하려고 할 때, 건물 안에서 천화루주가 나왔다.

떠나기 전, 극악소마에게 마지막 모습을 잘 보이려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온 그녀였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작별을 고하는 그녀에게 내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루주님이 계셔서 음침하던 본교가 밝게 빛났었는데, 다시 암흑천지가 되겠군요.”

내 말에 천화루주가 활짝 웃었다.

“아닌 줄 알면서도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저도 나이를 먹나 보네요.”

“더 놀다 가십시오.”

그녀가 극악소마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몸도 다 회복하셨고, 일도 바쁘실 텐데. 이만 가야죠.”

극악소마의 대답을 바라는 그녀의 눈빛.

이건 또 시험이었다!

그리고 극악소마는 여러 오답들을 피해 정답을 골랐다.

“더 있다 가게. 일은 미뤄도 되네.”

천화루주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바쁘다고 했으면 짐 다시 풀었을 거예요.”

그녀가 극악소마를 응시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전했다.

말없이 바라보는 두 사람.

그래서 더 애틋한 이별이었다.

그녀가 내게도 작별을 고했다.

“이공자께서는 훌륭한 소교주가 되실 거예요.”

“혹시 제 앞날도 보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마 말 못 할 미래라서 말씀 안 해주시는 것은 아니고요?”

“그럼 오히려 말씀해 드려야죠. 제겐 은인이신데요.”

극악소마를 구해준 순간, 나는 그녀의 은인이 되었다.

“너무 큰 운명을 지니신 분들은 제가 볼 수가 없답니다. 소교주께서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신 거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해요.”

언제나처럼 같은 인사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라고요!”

그렇게 천화루주가 떠났다.

모처럼 왔는데 그냥 떠나기 싫어 극악소마와 함께 악인곡을 걸었다.

나는 극악소마에게 하소연했다.

“요즘 무공수련이 꽉 막혔습니다.”

“소교주께서 막힐 정도면 대단한 무공이겠군요.”

아마 구화마공이라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시천비술이었다.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극악소마가 갑자기 천화루주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까 천화루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하다고 하셨죠.”

“그런 마음으로 지켜봐 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린 부둥켜안고 있지 않으니까요.”

우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극악소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도 제 이득을 위해서였습니다. 기루를 통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천하의 기루를 모두 장악하면 그 모든 정보를 제가 가지게 될 테니까요. 이기적인 목적이 있죠.”

“그렇게 따지면 루주님도 마찬가지겠지요.”

극악소마가 밀어주지 않으면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두 사람은 이상적인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면서 더불어 사업적으로 원하는 바도 뚜렷했으니까.

“저와 천화루주는 한 걸음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부둥켜안고 있을 때보다 서로를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극악소마가 맑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소교주께서도 잠시 그 무공에서 한 걸음만 떨어져 보십시오. 딱 한 걸음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마음이 급해 시천비술을 부둥켜안고 있었다는 것을.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아야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부둥켜안는 것보다 한걸음 떨어지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와 난 한 걸음 떨어져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잘 보이는 모양이다. 가면 속 맑은 눈빛은 물론이고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는 소마의 마음마저 보이는 것을 보니.

나는 감사의 마음을 표정에 가득 담으며 그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저를 부탁해야 하는 게 맞다니까요.”

25 절대회귀-254화 25

제254회 어제가 오늘 같고.

나는 극악소마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시천비술에서 한 발짝 물러나기.

물론 그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린 무인이고, 언제나 앞을 향해 달려 나가던 사람이니까.

우선 내가 선택한 것은 시천비술의 수련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에 구화마공을 연마하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 다른 무공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이런 마음으로 구화마공에 집중했다.

솔직히 시천비술이 아니라면 온종일 구화마공만 익히고 싶었다.

구화마공은 실로 난해하면서도 수준 높은 무공이었고, 어려운 만큼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심법만 해도 다른 무공과 비교할 수 없었다. 심법수련으로 모이는 내공도 기존 심법보다 훨씬 많았다.

아버지가 앞에 계셨다면 이 너스레를 반드시 떨었을 것이다.

―이 좋은 무공을 혼자만 익히고 계셨단 말씀이시죠!

나는 구화마공 수련에 푹 빠졌다.

아직은 초식수련 보다는 몸이 구화마공의 호흡법에 완전히 익숙해지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시천비술에서 완전히 관심을 뗀 것은 아니었다. 구화마공을 익히면 익힐수록 시천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또 깨달았다.

수련 시간을 줄이는 것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방법의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이 방법은 틀렸다.

* * *

내가 남도종 혈천도마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혈천도마가 창가에 앉아서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이 차분해진다. 책을 읽고는 싶은데 많이 읽지 못해서, 혹시 대리만족이라도 하는 걸까?

그때 혈천도마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그만 훔쳐보고 와라.

―전음을 멀리도 보내십니다. 천리전음술도 하시는 것 아닙니까?

―누가 할 소리!

나는 혈천도마에게로 걸어갔다.

“안 바쁘냐? 이렇게 한가한 소교주 처음 봤다.”

“바쁘죠.”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제가 있을 곳은 여기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르신 바로 옆에!”

나는 창틀에 팔을 대고 기대섰다.

“솔직히 요즘 한가합니다.”

“소교주면 일을 찾아서 해야지.”

“싫습니다. 이러다 갑자기 한꺼번에 일들이 몰려올 텐데요. 그냥 쉴 수 있을 때 쉬렵니다.”

“그럼 쉬지 여긴 왜 왔어?”

“어르신과 있는 것이 제일 마음이 편하거든요. 저 쉬러 온 겁니다.”

혈천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분명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난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아, 좋다! 어찌 나이 드셔도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납니까?”

“잡은 고기 먹이 안 줘도 된다.”

“아부가 아니라 정말이라니까요.”

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은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사서 책장에 꽂아둘 생각이다. 사두면 언젠가는 읽겠지.

“이 책은 다 읽어보신 겁니까?”

“누구처럼 사서 장식으로 쓰지는 않지.”

“누가 그랬습니다. 책은 사는 것부터 독서 시작이라고요.”

“너는 읽는 것보다 책 꽂혀 있는 것 보는 게 더 좋지?”

“저도 언젠가는 다 읽을 겁니다! 어르신보다 더 많이 읽을 겁니다.”

“내가 읽은 게 그게 다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깜짝 놀라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아니, 명색이 마존이신데. 비밀 창고를 열면 병장기나 영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책이 쌓여 있을 것 같으면 어찌합니까?”

“검이 날아들면 책으로 막아보지.”

처음에는 참 안 어울렸는데, 이젠 멸천대도보다 책을 든 모습이 더 어울린다.

“거기 방금 끓여둔 차 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그러잖아도 차 한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나는 다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같은 차인데도, 왜 어르신이 끓여주신 차가 더 맛있을까요?”

“그야 늙은이 부려 먹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나는 못 들은 척 다탁을 매만졌다.

“이 다탁도 똑같은 걸로 제 방에 놔야겠습니다.”

그때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고민 있냐?”

역시 그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한걸음 물러서 본 적 있습니까?”

내 물음에 혈천도마의 시선이 책에서 나를 향했다.

“무엇에서?”

“어르신이 가장 원하는 것에서요.”

질문의 의도가 뭔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혈천도마는 단호히 대답했다.

“없다.”

마치 내 인생은 오직 직진뿐이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혈천도마는 그런 사람처럼 보인다. 꼬장꼬장한 저 늙은이가 어디 물러설 사람처럼 보이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나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직진한 것은 나였다. 그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 나는 혈천도마에게 직진했고, 그는 나를 받아들이면서 뒤로 물러나 주었다.

만약 그도 내게 직진만 했다면 우리 관계는 또 달랐을 것이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냐?”

“어떻게 하면 딱 한 걸음만 물러날 수 있을까 해서요.”

산전수전 다 겪은 혈천도마는 내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하는지 짐작할 것이다.

“혹시 읽으신 책 중에 한 걸음만 물러나는 법, 이런 책 없습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혈천도마의 시선이 읽고 있던 책으로 향하려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역시 궁금한 것이다.

“너처럼 똑똑한 아이가 고민하는 걸 보니, 그 대상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구나.”

“무공입니다.”

혈천도마는 그 무공이 구화마공이라 생각하겠지. 소교주가 되고 난 후의 고민이었으니까.

“근데 왜 물러나려고?”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서 꽉 막혔는데, 조금 떨어져서 무공을 보려고요. 너무 간절히 원해서 오히려 잘 안 풀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덜 간절한 것은 아니고?”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노력만큼은 자신 있거든요.”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물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방법을 찾기 위해 그 무공에서 물러나려는 것은…… 오히려 그 무공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아니냐?”

“!”

순간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참지 못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습니다! 저는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맹렬히 부둥켜안고 있었습니다.”

나는 혈천도마에게 달려갔다.

“안으려면 어르신을 안아야 하는데! 어르신!”

“오지 마, 징그러워!”

혈천도마가 허공섭물로 나를 뒤로 밀어붙여 다시 다탁에 앉혔다.

그리고는 짐짓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소교주님, 체통을 지키시지요.”

나는 남아 있던 차를 후루룩 소리 나게 마시며 대답했다.

“아뇨, 더 버릴 겁니다. 답을 찾았습니다.”

* * *

“돌아온 탕아! 다시 합류했습니다!”

심야수련모임의 세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동안 바빠서 통 참가하지 못하다가 오늘 갑자기 참석한 것이다.

이안이 내게 말했다.

“소교주가 되셨는데도 심야 모임을 하시려고요?”

“응. 교주가 돼도 할 건데?”

“그건 저희가 싫고요.”

혈천도마 덕분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

시천비술에서 한걸음 물러나기 위해 무공연마 시간을 줄이기도 했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냥 예전처럼 하자였다.

구화마공이나 시천비술을 익히기 전처럼.

그때도 무공수련은 열심히 했다. 지금과 다른 점은 수련에 부담이 없었다. 마존들과 열심히 부딪치고, 자투리 시간을 아껴서 수련했다. 당연히 하는 거였고, 언제까지 반드시 이걸 이뤄야지 하는 부담이 없었다.

그러는 과정에도 나는 계속 강해졌고 발전했었다.

나는 물러나야 한다. 무공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부담감에서 물러나야 하고, 조급함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냥 예전처럼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이뤄지게끔.

“오랜만에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제대로 해보자는 듯 권마가 웃통을 벗었다. 무서운 얼굴에 완벽한 근육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나도 함께 웃통을 벗었다. 그에게 비하면 아기손이고 아기몸이다.

그동안 권법수련에 소홀했던 것이 권마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제자가 되겠다고 졸라놓고서 말이다.

나는 권마와 함께 벽력수라권을 펼쳤다. 원래라면 시천비술 고민에 권마의 무공을 펼칠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이안과 천소희도 옆에서 수련에 매진했다. 이안은 그사이 또 실력이 늘어 있었다. 얼마나 수련에 매진하고 있는지, 이 짧은 순간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초식을 펼치다 나와 잠깐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이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천소희는 ‘처녀 염장 지르는 모습, 방금 보셨습니까? 권마님!’ 이런 표정으로 권마를 봤다가 스스로 흠칫 놀랐다. 그 어려운 권마에게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의사표시를 한 것에 놀란 것이다.

권마는 모른 척 수련을 계속했다.

그렇게 수련하던 그때.

콰르릉!

내지른 내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물론이고 옆에서 수련하던 이안과 천소희도 깜짝 놀랐다.

“혹시 제 소리였습니까?”

“그래, 네 주먹에서 난 소리였다.”

다들 놀랐지만 내가 제일 놀랐다.

“어떻게 된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 근래 권법에 소홀했습니다. 오늘도 오랜만에 권을 펼친 건데. 대체 왜 천둥소리가 난 겁니까?”

권마는 내가 어찌 알겠느냐는 표정을 지은 후 다시 묵묵히 수련을 계속했다.

그사이 내가 더 강해진 것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법에서 한 걸음 떨어졌기 때문일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구화마공을 익힌 후 내 무공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꽈르르릉!

이번에는 권마의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내 주먹에서 난 소리보다 더 큰 천둥이었다.

“아니, 왜 지금껏 안 내시다가 소리를 내십니까? 수련할 때는 안 내셨잖아요?”

내 항의에 권마는 못 들은 척 계속 수련했다.

“아니, 왜 하필 제가 처음 천둥소리를 낸 날 내시냐고요! 혹시 질투하시…….”

꽈르릉!

내 말은 권마의 천둥소리에 묻혀 버렸다.

“해도 너무 하…….”

꽈르르르르릉!

* * *

피곤한 몸으로 거처를 향하다가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나서 발길을 돌렸다.

이 늦은 시간에도 깨어있을 것 같은 사람, 과연 그는 깨어있었다.

“별들이 형보고 뭐래?”

그러자 호수에 배를 띄워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취마가 대답했다.

“별들이 이런다. 무림에서 네 팔자가 제일 좋구나!”

취마가 나를 돌아보며 반갑게 웃었다.

“왔냐?”

호숫가에 서 있던 나는 수상비로 단숨에 물 위를 건너서 배 위에 올라섰다.

“이제 마음껏 실력 발휘 하는구나.”

후계자로 결정되던 그 날, 모든 마인들 앞에서 기도를 펼쳐 보였다. 이제 소교주까지 되었으니 굳이 실력을 감출 이유가 없어졌다.

“나 원래 감추고 그런 사람 아니야. 나서서 주목받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지.”

“사실 나도 그런데.”

“우리가 호형호제를 달리했겠어? 다음에 중원에 주목 한 번 받으러 가자!”

“나 좋은 곳 많이 안다. 가자!”

어디 나만큼 많이 알겠는가? 술맛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같이 한잔해야겠다.

우린 서로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소교주 된 것 축하해.”

“형 도움이 컸다. 고마워.”

“한 다섯 번째쯤 컸겠지?”

“취했네, 우리형. 또 자학하는 걸 보니.”

함께 건배한 후 술잔을 비웠다.

“캬, 좋다!”

“역시! 술은 우리 형님과 마셔야 해.”

오랜만에 그와 술을 마시니 너무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무공 막혀 힘들다는 이야기도 그에게 편하게 했다.

해결책은 취마다웠다.

“마셔라! 술에 답이 있다. 취하면 다 풀릴 거다.”

“정말 세상 제일 팔자 좋은 사람은 형 맞아.”

“마셔. 술에 인생도 있고, 강호도 있고, 다 있다.”

우린 또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취마와 마시니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

취마는 온갖 이야기를 다 했다. 마존들 뒷담화도 하고. 젊어서 만났던 여자 이야기도 하고. 무공 이야기도 하고.

술 취해서 말을 막 하는 것 같지만, 그는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취마가 실수하는 순간은 술에서 깨어있을 때라고.

풍덩!

결국 취마가 물에 뛰어들었고, 나도 함께 뛰어들었다.

호수를 여기저기 헤엄치다 우린 밤하늘을 보며 둥둥 떠다녔다.

“여긴 여전히 좋네.”

“여기서 신선놀음을 하다 보면 시간이 멈춘 기분이 든다. 한 시진 전이 지금 같고, 지금이 한 시진 후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다.”

형. 그 시간, 내가 멈춰야 해.

시간 이야기를 해서인지 시천비술 생각이 났다.

밤하늘 위로 내 몸속 혈맥이 겹쳐 떠올랐다. 지금껏 여러 방법을 다했다. 진기를 이 혈맥에서 저리로 보냈다가, 또 여기서 저렇게 보내고. 아직도 시도해 봐야 할 경우가 너무 많이 남았다.

‘말자, 이런 좋은 순간에 왜 그 생각이냐?’

시천비술에서 한걸음 물러나려고 이렇게 취마와 놀고 있는데.

풍덩!

나는 다시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별들 위로 혈맥을 상상해서 겹쳐보았다.

여긴 아니고, 저기도 아니고. 아까 어디였지?

그러다 떠올린 혈맥과 별이 딱 맞아떨어지는 자리가 있었다.

‘찾았다!’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저 별자리들 순서대로 진기를 운영한다면? 뭔가 될 것도 같았다.

설마 시천비술이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만든 비술이었나?

“형!”

“왜 그래?”

“아까 말한 그 문제 푼 것 같아.”

취마가 깜짝 놀랐다. 이내 그가 껄껄 웃으며 기뻐했다.

“내가 말했지? 술 마시면 다 해결된다니까!”

“나 먼저 간다! 형, 고마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물 속에서 그대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에서 다시 방향을 바꾼 나는, 호숫가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취마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형은 언제나 여기 있다.”

물 위를 떠다니는 취마에게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 * *

연무장으로 돌아온 나는 향 두 개를 준비했다.

두 개의 향에 동시에 불을 붙인 후, 하나는 향로에 꽂아두고 시공이환술을 펼쳤다.

만들어진 공간은 집중력을 높이고 사용되는 내공을 최소화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천비술의 구결을 외웠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앞서 별자리를 보고 깨달은 순서대로 진기를 움직였다.

되었을까?

아직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경지에서는 이곳에서 나가서 시간을 비교했을 때 알 수 있었다. 작은 차이라도 나면 된다. 시천비술이 시작만 되면!

제발!

어떻게든 구화마공을 십이성 대성을 이루려는 나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향이 탔을 때, 나는 시공이환술을 풀었다.

스스스슷

시공이환술의 세상이 사라지고 그 속에서 나온 나는 천천히 피워둔 향으로 걸어갔다.

향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똑같은 깊이로 향을 꽂았다.

물끄러미 그것을 쳐다보는 눈빛만큼이나 내 심장도 떨렸다.

두 향의 길이가 다르게 타고 있었다.

15 절대회귀-255화 15

제255회 네가 정해라.

“됐다!”

나는 환호했다. 정말 기뻤다.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드디어 시천비술의 첫발을 뗀 것이다.

아직은 의미 있는 시간 차이는 아니었지만 해낸 것에 의미가 있었다.

시천비술을 계속 연마해서 시간 차이를 두 배로 낼 수 있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수련 시간을 두 배 더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세 배, 네 배…… 만약 시천비술이 극성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될까?

중요한 것은 내공이었다. 시간 차이가 크게 날수록 더 많은 내공을 요구할 것이다.

내공은 더 끌어모으고, 시천비술의 경지는 더 올리고.

오직 내 노력에 달렸다.

* * *

다음 날, 나는 전장에 남아 있는 돈을 모두 찾았다.

남아 있던 야명주까지 모두 팔았다.

그 돈을 가지고 향한 곳은 천독림이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오늘 상선이 직접 나와서 안내했다. 아마 소교주가 된 나에게 인사하려고 나온 모양이다.

“평소처럼 대해주시면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지나가다 만나는 독인들도 예전과는 달리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대공자와 골육상쟁을 벌이지 않으신 것은 정말 잘하신 일이십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독왕의 거처에 도착하고 상선이 물러갔다.

독왕은 집에 없었다. 주위를 찾아보니 그는 근처 숲에서 독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독왕이 독공 수련하는 옆에 독사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독왕이 이름을 붙여줬던 그 독사들이었다.

독왕의 손끝에서 검은 연기가 훅하고 피어오르더니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냈다. 놀랍게도 연기가 만든 모양은 토끼였다.

토끼 모양의 연기가 앞으로 날아가자, 독사들이 그 뒤를 쫓아갔다. 마치 주인이 던진 공을 향해 강아지가 신나서 뛰어가는 모습 같았다.

독사가 토끼를 덮치자, 검은 연기는 퍽하고 사라졌다.

독왕의 손끝에서 새로운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나비가 펄럭거리며 날아갔다. 다시 독사들이 나비를 쫓아 신나게 기어갔다. 일반 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날렵했다. 다시 연기가 사라졌다.

독사들은 이번에는 뭘 보낼까 기대하는 듯 고개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그때 독왕의 손에서 크고 거대한 연기가 날아갔다. 호랑이 모양의 연기가 독사들에게 달려가자, 녀석들이 놀라 숲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온 것을 알고 뱀을 쫓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독왕은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면서 뭔가를 고민했다. 수련을 해도 자기 세상에서 하는 그였다.

그러다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언제 왔어?”

“토끼가 뛸 때부터요. 설마 그거 진짜 독입니까?”

“그랬다간 애들 다 죽지.”

자신의 극독을 하독하면 영물 독사들도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

“연습할 때 쓰는 무해한 거다. 수련 때마다 진짜 독을 썼다간 숲이 어떻게 되겠나?”

독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천독림을 아끼는 그였다.

“한데 독왕님도 수련하시는군요?”

“무림인들이 나를 제일 무서워한다면서?”

혈천도마도 그렇고, 벽을 보고 수련하는 극악소마도 그렇고. 마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수련하고 있었다. 수면 아래 백조의 발은 이렇게나 바쁘다.

독왕이 바위에 걸터앉아 땀을 닦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독왕님 보고 싶어서 왔죠.”

“보고 싶었으면 진작 왔겠지.”

“바빴습니다.”

“취마와 술 마실 시간은 있고?”

“그게 벌써 소문이 났습니까? 어찌나 입들이 무거운지.”

나도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소교주가 된 소감이 어때?”

“신나죠. 새 무공에, 새 집에. 사람들은 공손하고, 더는 신경 곤두세워서 형과 안 싸워도 되고.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이군. 너는 왠지 신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

“저, 주목받는 것 좋아합니다. 제가 달리 말이 많겠습니까?”

대화하다 독왕은 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에 대해 생각하는지, 아니면 앞서 펼쳤던 독공에 관해 생각하는지, 혹은 사라져 버린 독사들에 대해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젠 이런 순간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나도 그의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잠시 후, 독왕은 내가 들고 있던 작은 혁낭에 시선을 주었다.

“그건 뭐냐?”

난 전표가 가득 든 혁낭을 독왕에게 건넸다.

액수를 확인한 독왕이 깜짝 놀랐다.

“액수가 꽤 큰데?”

“이 돈으로 독성이 강한 영약을 구해주십시오.”

시중에서 유통되는 영약은 너무 비쌌다. 너무 비싸서 가격 대비 효과가 적었다.

대신 독초나 독물의 영단으로 만들어진 영약은 상대적으로 값이 쌌다. 아무래도 특별한 경우에 사용되거나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그러했다.

덕분에 만독불침인 나에게는 싼값에 영약을 구할 기회였다. 내공은 충분했기에 일부러 돈까지 들여서 영약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시천비술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이다.

“영약은 왜? 지금도 내공은 많잖아?”

“제가 내공 욕심이 많습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독왕이 물었다.

“무림정복이라도 하게?”

“네, 하려고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돈 나 줘. 내가 다 죽여줄게.”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그럼 돈 내가 가진다.”

“영약은 더 든든하고요.”

독왕의 손끝에서 한 마리의 용이 만들어졌다.

허공에서 한바탕 용트림하더니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퍽!

내 얼굴과 충돌해서 사라지는 연기 뒤에서 독왕이 말했다.

“이십 일 후에 와.”

독왕은 내가 사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돈을 써줄 것이다.

물론, 나는 확인을 잊지 않았다.

“딴생각하다가 영약 사는 것 잊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저 보세요, 제 눈 똑바로 보시고. 잊어버리시면 독 실험 안 해드립니다.”

독왕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멀리서 돌아보니 이번에는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사방에서 퍽퍽 터져나가는 검은 연기를 보며 저게 진짜 독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다들 독왕을 제일 무서워할 만하다.

* * *

수련 시간을 다시 나눴다.

오 할을 시천비술, 사 할을 구화마공, 나머지 일 할은 천마호신공과 권마의 권법을 돌아가면서 익혔다.

중심이 되는 무공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보조해주는 무공도 매우 중요하다. 풍신사보가 구화마공과 어우러질 것이고, 검이 손에서 떨어진 위급한 순간에는 벽력수라권이, 최후의 순간에는 천마호신공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무공들의 균형이다.

본격적인 구화마공 수련을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

심법은 이제 제법 몸에 익숙해졌다. 구화마공의 심법 수련으로 쌓이는 선천진기의 양은 기존 심법과 비교할 수 없었고, 사용한 내공을 회복하는 속도 역시 훨씬 빨랐다.

수련을 마치고 창가에 앉아 차 한 잔 마시고 있는데, 천마전에서 찾는다는 기별이 왔다.

* * *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사마명이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명이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임무가 내려왔는데.

나는 긴장감이 흐르는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와 사마명에게 인사한 후 기세 좋게 말했다.

“아버지 닮아 잘생긴 이 얼굴, 드디어 세상에 보여줄 때가 된 겁니까?”

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너의 너스레는 지치지도 않는구나.”

“기왕이면 웃기려 노력해야죠. 세상이 아무리 심각해도 웃고 살아야죠. 어딥니까? 제가 싹 다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자 사마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교주님의 잘생긴 얼굴은 다음 기회에 보여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모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나를 부른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일 때문이었다.

“이제 소교주가 되셨으니 황천각주 자리에서 내려오시고 새 황천각주를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각주 업무 대부분을 서대룡에게 맡겼었다. 워낙 바쁘기도 했고. 다른 의도도 있었고.

“새 황천각주는 누굴 앉히실 생각이십니까?”

내 물음에 사마명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뜻밖의 말씀이 흘러나왔다.

“네가 정해라.”

나는 깜짝 놀랐다. 차기 황천각주를 나보고 정하라고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소교주가 되었으니 그만한 권한은 있어야지.”

정말이지 감격스러운 말이었다. 아버지는 지금 아버지로 나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천마가 후계자를 보고 있었다. 교주가 소교주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황천각주에 있어서 내 생각은 확고했다.

“다른 자리라면 모르겠습니다만, 황천각은 본교의 기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직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사람이 앉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추천하는 사람은 바로!

“저는 차기 황천각주로 황천각 특별조사관 서대룡을 삼고 싶습니다.”

아버지도 사마명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일 잘하고. 책임감 강하고. 심지어 배경도 좋습니다. 혈천도마 수제자니까요. 아, 맞다. 황천각에는 수석으로 들어왔고요.”

사마명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서 조사관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한데 아직 각주를 맡기기에는 경력이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그 부족한 경력, 정작 황천각 내부에서는 별문제가 안 될 겁니다. 제 일을 대신 맡으면서 능력은 충분히 보여줬으니까요.”

서대룡에게 내 일을 맡긴 이유기도 했다. 충분히 각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조직의 수장은 경력보다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더 중요합니다. 예전 마군과 지금 마군을 보십시오. 장호가 수장이 되자 완전히 다른 조직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부분은 아버지도 사마명도 부정할 수 없는 일, 나는 내 진심을 담아 아버지와 사마명에게 힘차게 말했다.

“서대룡을 추천합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함부로 보증 서지 마라.”

천마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셨다.

* * *

그날 오후, 한창 수련하고 있는데 서대룡이 나를 찾아왔다.

서대룡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천마전에서 오는 길입니다.”

아마 아버지와 사마명은 직접 서대룡을 면담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숨이 잘 안 쉬어집니다.”

서대룡이 휘청거리며 걸어가더니 구석에 세워진 목각 인형에 기대섰다.

“총군사님께 들었습니다. 소교주님이 저, 차기 황천각주 자리에 추천했다고요.”

서대룡이 머리를 싸매었다.

“제가 각주라니요? 그것도 황천각주라니요! 아, 또 생각하니까 숨이 안 쉬어집니다.”

누가 보면 천라지망이라도 뚫고 나온 사람처럼, 서대룡이 숨을 헐떡거렸다.

“그렇게까지 힘들면 안 해도 돼. 다음에 해도 돼.”

“그렇죠? 맞죠. 아니지. 아닙니다. 세상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온다고! 아! 내가 각주라니.”

서대룡이 미친놈처럼 연무장 여기저기를 서성대며 헤매었다.

그러다 세워둔 병장기에 발이 걸려 자빠진 후,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못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온 거냐?”

그러자 서대룡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뭔지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게 뭔데?”

“새 이인자입니다.”

“무슨 말이야?”

“황천각 집무실의 이인자는 지금까지 일화검존께서 선물로 가져오신 화분이었거든요. 이제 이것이 새 이인자입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걸어와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그것은 신분패였다. 천마전의 상징이 새겨진 화려한 그것에 힘찬 필체로 적혀 있는 네 글자.

황천각주(黃泉閣主).

“정식 임명식은 나중에 하신답니다.”

서대룡에게 황천각주 자리가 내려진 것이다. 아버지와 사마명은 소교주로서의 내 첫 결정을 인정해 주셨다.

나를 향한 서대룡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가 뭐라고 거절합니까? 보증까지 서가면서 밀어주시는데, 제까짓 게 뭐라고 사양합니까?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하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소리친 다음 일은 잘 기억나지 않고요. 천마전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교주님께 인사는 제대로 하고 나온 건지. 나와서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이 신분패가 손에 들려 있더라고요.”

나는 서대룡을 힘차게 안아주며 말했다.

“축하한다, 오른팔. 축하합니다, 황천각주님.”

나를 향한 서대룡의 얼굴에 격정이 가득했다. 일개 조사관이 혈천도마의 수제자가 되고, 이제 황천각주까지 되었다. 그의 마음이 어떨지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우리라.

“나중에 살 떨리는 적 앞에서 날 원망할 수도 있어. 그냥 평범한 조사관으로 살게 하시지! 하면서.”

“그 원망 들어주실 거죠?”

“얼마든지.”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황천각주까지 하면서 무공 배우려면 더 힘들 거다. 그래도 죽어라 해라. 나중에 나이 들면 죽어라 하고 싶어도 몸이 안 따라와서 힘들다.”

“꼭 해보신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나야 모르는 게 없는 소교주잖아?”

우린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손자에게 해줄 말이 또 늘었군요.”

“널 추천한 건 널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아니야.”

“그럼요?”

“앞으로 네가 이끄는 황천각이 지켜줄 그 사람들 때문이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냥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서대룡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둡고 칙칙했던 과거의 그는 이제 없다. 뭐든 맡겨도 잘 해낼 것 같은 현재의 그가 있을 뿐.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던 서대룡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제가 키운 이인자, 아니 삼인자 화분에 열매도 맺었습니다.”

그래, 대룡아. 그 화분처럼 황천각도 잘 키워봐라.

* * *

독왕과 약속한 날, 난 기대에 찬 마음으로 천독림으로 향했다.

그동안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밥 먹고 수련만 했다. 자고 수련하고, 먹고 수련하고. 새 침상에서 푹 잘 자고 일어나서 하루 중 한 끼는 직접 요리해서 먹었다. 가끔은 호위들도 데려와서 함께 먹었다.

그리고 온종일 수련했다. 지금이 마지막 수련이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다. 적어도 내 실패가 열심히 하지 않은 것 때문은 아니어야 했으니까.

“독왕님은 잘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상선이 대답했다.

“그동안 바쁘셨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외출하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괜히 미안하고 울컥했다. 밖에 나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독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평소와는 다른 향이 코를 찔러왔다.

25 절대회귀-256화 25

제256회 무림이 긴장할 겁니다.

기다란 탁자에 영약들이 올려져 있었다.

마치, 영약을 파는 상점에 온 것 같았다. 그 각각의 영약은 저마다의 향이 있었고, 그것들이 뒤섞여 독특한 향을 내고 있었다.

독왕은 그 옆의 다른 탁자에서 약을 배합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독왕이 하던 일을 마치기를 기다리며 탁자에 전시된 영약을 구경했다.

아는 영약도 있었는데 대부분 모르는 영약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다.

이윽고 독왕이 약의 배합을 끝내고,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왔어?”

“뭘 하신 겁니까?”

“섞어야 더 효과가 좋은 것들은 섞었다.”

이 독성 강한 영약을 합쳐서 효과를 더 낸다고? 정말이지 독왕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직접 중원에 나가셨다면서요?”

“안 나가면? 이런 상품들을 어찌 이십일만에 구해? 오랜만에 내 인맥을 총동원했다.”

천독림에 틀어박혀 사는 독왕의 입에서 나온 인맥이란 말이 어색하게 들렸다. 그만큼 귀하고 확실한 관계일 것이다. 그리고 인맥을 동원했다는 말은 곧 누군가에게 신세 졌다는 의미.

“제가 큰 신세를 졌습니다.”

독왕이 내 앞에 다가와 눈을 반짝였다. 마치 그래서 어떻게 갚을 건데, 하는 눈빛이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저야 독왕님 자주 뵈면 좋죠.”

독왕이 탁자 끝으로 가서 첫 번째 영약을 들어서 내게 건넸다.

“자, 이것부터 순서대로 복용해.”

아마 복용하는 순서까지 정해둔 모양이다.

“한꺼번에 복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만독불침이니 죽진 않겠지만 속에서 난리가 날 거다. 주는 대로 복용해.”

먹기 전에 독왕에게 물었다.

“이거 각각 얼마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왜? 날 못 믿어?”

“못 믿었으면 안 묻죠.”

절대 속였을 리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물어주는 것이 오히려 예의다.

독왕이 각 영약 값을 말해주었다. 그 액수를 다 합쳐 보니.

“제가 드렸던 돈을 넘겼는데요?”

“마지막 영약은 놓치기 아까워서 내가 좀 보탰다.”

“좀이 아니라 천독림 기둥뿌리 하나 빼신 것 같습니다만.”

“천독림에 기둥이 몇 개인 줄 알고나 하는 소리냐? 어서 먹기나 해.”

나가기 죽도록 싫어하는 그가 직접 나가고, 게다가 거금까지 보태고. 이러니 내가 독왕을 안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첫 번째 그것은 흑양단(黑洋丹)이다. 복용하고 진기를 일주천 해.”

흑양단을 입에 넣는 순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으아아! 씁니다. 뭐가 이리 씁니까?”

“그럼 독인데 달겠냐?”

흑양단의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다. 이제 구화마공의 심법을 사용해서 녹였다. 내공을 쌓는 양도 많으니, 약효를 흡수하는 양 역시 많을 것이다.

“다음은 자미일독(紫微一毒)이다. 흑양단과는 궁합이 잘 맞는 약이니 내기가 충돌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약효가 적은 것부터 주는 것이 아니었다. 각각의 영약들의 상성과 성질에 맞춰서 주는 것이었다.

“다음은 탈백환(奪魄丸)을 복용하고.”

자미일독에서 좀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으으.”

입 안에 있던 것을 뱉으려 하자 독왕이 입을 막아서 못 뱉게 했다.

억지로 삼킨 후 그에게 말했다.

“제가 영약 사달라고 했다고 지금 복수하시는 거죠?”

“은은하고 향긋한 영약으로 이 내력을 채우려면 돈을 몇 배는 더 줘야 할 거다.”

오직 만독불침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 쓴 약은 나오지도 않았어.”

난 벌떡 일어나서 포권을 취하며 작별을 고했다.

“내공 없이도 잘 싸워야죠. 그게 진정한 고수죠.”

내가 달아나려고 하자, 독왕이 나를 억지로 앉혔다.

반은 너스레고, 반은 진짜였다. 과장 좀 보태서 혀와 내장이 녹아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영약들이 몸에서 녹고, 그 약효가 전신혈맥으로 퍼져나갈 때, 다시 새로운 영약을 복용했다.

“그럴 줄 알고 이번에는 좀 단 걸로 준비했어. 마셔라.”

만혈독수(萬血毒水)가 그중 단 약이라니!

그 이후에도 계속 영약을 복용했다.

마령신단(魔靈神丹), 백령정화산(百靈淨化散), 천갈정혈액(千蠍精血液), 현음단(玄陰丹), 음양이독초(陰陽二毒草), 천외극락향(天外極樂香)에…….

그야말로 이름만 들었거나 혹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영약들이었다. 어떤 건 여러 개가 있었고, 또 어떤 것은 한 개만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영약을 연이어 복용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강호의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이거 다 먹어도 되는 건 맞죠?”

“나도 모르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까.”

독왕은 신난 얼굴이었다. 이렇게 많은 독을 한 번에 녹이는 모습을 그 역시 본 적이 없었을 테니. 오히려 나보다 더 흥분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집대성한 책에는 오늘 이 순간도 적힐 것이다. 어떤 제목이 될까?

만독불침과 독성영약과의 상관관계?

아니다. 이런 제목일 거다.

독왕은 어떻게 만독불침을 괴롭혔는가?

오늘 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제목을 짓고도 남을 사람이다.

준비한 영약을 복용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복용하고 진기를 일주천하고, 또 복용하고 진기를 일주천하고. 정성껏 약효를 녹여나갔다. 구화마공의 심법으로 약을 녹이니,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효를 흡수했다.

중간에 너무 독하고 써서 정말 죽을 것 같은 고비도 몇 번 있었다. 같은 독이라도 그 독에 중독되는 것과, 이렇게 그 독을 먹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었으니까.

“자, 이건 마지막 만독신단(萬毒神丹)이다.”

독왕이 거금을 보태서 사준 약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껏 복용한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독이었다.

만독신단의 약효까지 구화마공의 심법으로 녹였다.

전신혈맥으로 약효가 휘몰아치다가 계곡의 물이 강으로 흐르고, 종국에는 바다로 흘러가듯, 약효는 내공이 되어 단전에 모여들었다.

모든 영약을 복용한 후에도 몇 차례나 운기하며 몸속의 내공을 다스렸다.

그렇게 모든 약효가 정순한 내공이 되었음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엄청난 양의 내공이 단전에 더해졌다.

독왕이 아니었다면 그 돈으로 이 내공의 반의반도 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품질의 약을 싸게 샀을 테고, 복용순서까지 완벽했으니.

이제 내공으로는 무림의 그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비단 양이 많아져서가 아니었다. 내공의 정순함 역시 이전과는 또다시 비교할 수 없이 깊어졌다. 강해진 것도 강해진 것이지만, 시천비술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내 눈빛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는 독왕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독왕은 더욱 놀랐다. 반박귀진으로 그 깊은 눈빛이 어느새 평범한 눈빛이 되었으니까.

“얼마만큼 강해질 거냐?”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모두를 다 지켜낼 수 있을 때까지 강해질 겁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에게 독왕이 말했다.

“우리가 너를 지키는 거다. 마존이 소교주를 지키는 거지.”

나는 독왕을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독왕.”

순간 독왕이 흠칫했다. 나는 평소의 공손했던 태도가 아닌, 묵직한 위엄을 드러냈다.

“그럼 더 강해져라!”

“!”

그 말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나가자마자 곧바로 열린 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여전히 독왕은 멍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 안 나셨죠?”

“벌써부터 천마 행세냐?”

“독왕님 아니면 어디 가서 이 장난을 치겠습니까?”

“많잖아? 소마, 도마, 취마!”

나는 다시 목소리를 준엄하게 낮췄다.

“본좌가 이 장난을 치고 싶었던 사람은 독왕이었느니라.”

그 너스레 끝에 진심을 덧붙였다.

“독왕님, 오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 *

검무극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독왕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부름을 받고 도착한 상선에게 독왕은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천독림의 독 제조양을 두 배로 올린다고 천마전에 보고하게.”

상선은 깜짝 놀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인들 수련 강도도 높이고. 애들 가르치면서 자네도 수련하시고.”

“그러면 무림이 긴장할 겁니다.”

특히 무림맹에서는 비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천독림으로 들어오는 독에 대해서는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번에 독성이 강한 영약을 끌어모은 것 역시 무림맹이나 사도맹에 보고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독에 있어서는 민감했다.

독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독왕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 발출하는 천살독기(天殺毒氣)였다.

독왕이 검은 안개에 휩싸이며 나직이 말했다.

“긴장하라고 해.”

* * *

황천각주 부임식 날 서대룡의 거처로 황천각 조사관과 집행 무인들이 그를 호위하기 위해 찾아왔다.

예전 검무극이 부임하던 날 서대룡이 집행무인들과 함께 찾아갔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오늘 찾아온 조사관은 최고참 특별조사관 곡명이었다.

“각주님, 가시지요.”

한참 후배가 각주가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좋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곡 조사관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황천각에 들어와서 선배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선배님께 배운 것, 지금부터 쓰겠습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곡명의 모습에 서대룡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상대방과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던 사람인데. 부정적인 생각부터 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저 사람 웃어도 속으로 욕하고 있겠지? 이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한데 이제 상대에게 진심을 전하려 노력하고 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곡명과 집행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대룡이 황천각에 도착했을 때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각주님을 뵙습니다!”

서대룡이 각주 자리에 오른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들 중에는 내심 못마땅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 가지는 같은 마음이었다. 서대룡이 워낙 열심히 일했기에 다들 능력만큼은 인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온 사람이 있었다.

“각주님, 축하드립니다.”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돌아보니 마군주 장호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이 자리에 올 줄은 몰랐기에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군주님! 친히 와주셨군요.”

“당연히 와야지요.”

이안이 없을 때 둘이서 풍류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그들이었다.

이제 마군주와 황천각주로 마주 서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저는 항상 장군주님 같은 무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지요.”

장호가 특유의 남자다운 웃음으로 씩 웃었다. 서대룡은 장호를 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선 산과 같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꼭 그런 무인이 될 것이다.

마군주가 직접 축하해 주러 오자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그곳에 등장했다.

이안이 그를 축하해 주러 온 것이다. 아름다운 그녀의 등장에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무공실력이 경지에 이르면서 진짜 고수의 반열에 올랐기에 그곳에 있던 집행 무인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고, 그녀의 기도에 또 한 번 놀랐다.

“축하드려요, 황천각주님.”

“이 무인, 감사합니다.”

“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답니다.”

이안의 말에 서대룡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몰랐다고요!”

장호와 이안이 함께 웃었다.

그때 그곳에 또 다른 사람이 도착했다. 등장한 이를 보고 조사관들과 집행 무인들이 일제히 한 동작으로 허리를 굽히며 예를 갖췄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서대룡과 장호, 이안도 함께 정중히 인사했다.

검무극이 걸어와서 정중히 예를 갖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황천각주님.”

“감사합니다, 소교주님.”

서대룡이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울컥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서대룡에게 검무극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곡명이 와서 서대룡에게 말했다.

“다들 모였는데 한 말씀 하시죠.”

서대룡이 떨리는 마음으로 모두의 앞에 섰다. 한마디 할 것 같아서 미리 집에서 연습까지 하고 왔는데, 그래도 너무 떨렸다.

“인간의 한계를 넘으신 분이 전임 각주님셨는데, 이제 비로소 인간이 황천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전임 각주께서 부임하던 날 이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더 행복해질지 불행해질지는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전보다 심장은 더 빨리 뛸 거다. 각주님은 그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제 심장은 이전보다 더 빨리 뛰고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의 심장도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합니다.”

모두 공감한다는 표정이었다. 검무극의 황천각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조직이었으니까. 억울함을 면한 수많은 이들의 감사를 그들 모두 받았으니까.

“저는 소교주님보다 더 빨리 심장을 뛰게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이 정도는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저는 소교주님 덕분에 뜨거워진 우리 심장이 식지 않게끔 노력하겠습니다.”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축하해 주기 위해 온 마지막 사람이 도착했다.

그의 등장에 서대룡은 물론이고 검무극과 이안, 장호까지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혈천도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멸천대도를 등에 메고 도도하게 걸어왔다. 압도적인 기세를 드러내며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황천각 무인들은 모두 긴장했다.

“사부님!”

혈천도마는 축하의 말 대신 등에 멸천대도와 함께 차고 온 대도를 뽑았다. 대도이긴 하지만 멸천대도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았다.

혈천도마가 그것을 서대룡에게 주었다.

“이제부터 이걸 쓰도록.”

한눈에 봐도 보통 도가 아니었다.

“내가 젊어서 쓰던 칼이다.”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무뚝뚝한 사부의 선물이라니? 게다가 그가 젊어서 쓰던 칼이라면,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다. 감격한 서대룡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혈천도마는 도를 준 후에 두말없이 걸어서 돌아갔다.

서대룡은 돌아서 걸어가는 사부에게 큰절을 올리며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혈천도마는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은 놀란 눈빛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무극이야 워낙 서대룡과 친하고 붙어 다녔으니 올 수도 있다지만, 혈천도마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도 서대룡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소교주가 오고, 마존이 오고, 마군주가 오고, 천하제일미가 와서 축하해 주는데 감히 누가 그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서대룡이 검무극과 장호, 이안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돌아섰다.

돌아선 그가 대도를 혈천도마처럼 등에 찼다.

그리고 조사관들과 집행무인들을 거느리고 황천각으로 들어갔다.

검무극은 대도를 차고 당당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혈천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21 절대회귀-257화 21

제257회 사람이라면 반드시 죽는다.

“서 조사관 멋있었어요.”

내 거처로 함께 돌아오며 이안이 말했다. 소교주가 된 후 옮긴 거처를 구경시켜 주려고 데려가는 중이다.

“처음 봤을 때와는 완전 다른 사람 같아요.”

“그사이 노력을 많이 했으니까.”

노력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안이기에 한 마디 덧붙여주었다.

“그렇다고 나도 더 노력해야지 이런 생각은 하지 마. 너는 지금도 충분히 노력 과잉이니까.”

“싫어요. 어중간하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콸콸 넘치게 노력할 거예요.”

지금 이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간다. 다들 앞질러 가고 있는데, 혼자 뒤처지는 느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죄송해요.”

“뭐가?”

“새로 옮긴 거처를 오늘에서야 가보네요. 예전이었다면 옮긴 첫날에 찾아뵈었을 텐데.”

너무 늦은 방문이 미안한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쳐져 있던 어깨가 더 처졌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다. 새집에 와서 초대도 안 한 거잖아?”

“도련님은 바쁘셨잖아요.”

“바쁘긴 네가 더 바빴지. 방 구경이 중요하냐, 우리 일이 중요하냐? 답은 나와 있잖아. 그러니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다.”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 정말 크군요.”

“이 몸이 본교의 소교주님이시다!”

지나가던 시비들이 공손히 나와 이안에게 인사했다. 이안은 그녀들의 인사를 미소로 받아주었다.

그녀가 내 방에 들어서자 더 놀랐다.

“제가 예상했던 방과 너무 달라요.”

벽을 채운 책장이며 커다란 침상에 새하얀 이부자리,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놓인 책상과 의자. 그녀의 예상과 다른 모양이다.

“도련님 취향이 아니잖아요?”

“이게 내 취향이야.”

“전 몰랐어요. 이렇다고 말씀을 하시죠.”

회귀 전의 나는 취향이란 것이 없었다.

침상이 크든 작든, 책장이 있든 옷장이 있든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내 관심은 후계자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난 후계자에서 멀어진 거다. 아무것도 보지 않았기에. 사람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내 방에 무엇이 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당시의 난 열정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열정으로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엄청 많아요.”

그녀가 책장부터 관심을 가졌다.

“소교주가 되었으니 유식해 보여야지.”

“이 책은 엄청 두껍네요.”

“꺼내지 마! 그건 장식용이야. 다시 넣으려면 힘들어.”

“꺼내고 싶어도 빠지지도 않아요. 내공을 써야 뺄 수 있는 책이라니!”

그녀가 또 다른 책장을 살폈다.

“여긴 도마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책이 많네요?”

한때, 혈천도마에게 책을 빌려 읽던 그녀였다.

“응. 거기 있는 책 다 적어와서 똑같이 채워 넣었다. 책에 대해서는 어르신이 잘 아시니까.”

그녀가 다른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서 유심히 보았다.

“이런 책도 있네요.”

그녀가 든 책은 ‘천라지망 탈출’이라는 책이었다.

“읽어보셨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읽어봤지.”

“이대로 하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던가요?”

“탈출하려고 읽은 것 아니다. 탈출 못 하게 하려고 읽었지.”

내 말에 그녀가 웃었다.

“도련님이야 천라지망을 펼쳐라!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저는 무림맹의 천라지망에 갇힐 수도 있으니 이 책 빌려주세요.”

“얼마든지.”

“이거랑 이것도 빌려주세요.”

그녀가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시화집을 주로 읽던 그녀였는데, 지금 고른 책들은 다 무림에서 생존하기 위한 비법을 적은 책이었다.

“요즘도 책 읽어?”

“자기 전에 최소 일각이라도 꼭 읽으려고 노력해요. 이렇게라도 간접 경험을 쌓아야지요.”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될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이안아.”

“네.”

그녀를 나를 향해 돌아섰다.

“세상 경험이 많은 게 더 좋다고 생각하지?”

“당연히요. 아닌가요?”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지.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멋있고 든든하지. 통찰력도 있고, 주위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나 경험도 선사하고. 한데 그렇게 되기까지 온갖 더러운 일을 다 겪고 당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럽고 치사한 일 다 겪고, 사람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고. 심지어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까지 지니게 되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런 경험이 좋기만 한 일이겠느냐?”

회귀 전,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그래, 그 덕분에 강해졌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호위무인이라는 길만 묵묵히 걸어온 이안보다 내 인생이 더 나은 인생이라 할 수 있을까? 어딘가에 내던져졌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클지는 몰라도 그게 더 나은 인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길을 걸으며 묵묵히 살아온 네 인생을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경험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온갖 잡다한 상처와 아픔을 굳이 안 가져도 된다. 없어도 싸울 수 있고, 없어도 이길 수 있다. 나는 믿는다. 노력하며 살아온 너의 그 인생이 다른 어떤 경험보다 강력하게 너를 지켜주는 순간이 올 거라고.”

내가 손을 뻗자 꽂혀 있던 시화집 한 권이 뽑혀 나왔다.

허공으로 둥둥 날아간 시화집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러니 읽고 싶은 것도 함께 읽어.”

그녀가 두 번이나 그 책에 시선을 준 것을 보았다.

이안이 슬금슬금 내게 다가와서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혈통이란 것이 있나 봐요.”

나는 그 말에 어울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괜히 부끄러웠는지 이안은 내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침상 정말 넓고 좋아요. 푹신하죠?”

“궁금하면 누워봐.”

“소교주님 침상에 감히 어떻게 누워요! 라고 할 줄 알았죠?”

그녀가 침상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그녀의 신형이 침상 위에 둥둥 떴다.

“밖에서 입던 옷으로 안 돼! 도마 어르신이 왜 못 눕게 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가네.”

둥둥 띄워서 그녀를 다시 원래 자리에 데려다 뒀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 전에 귀영대에 다섯 명을 뽑았어요. 인성도 보고, 실력도 보고. 말씀하신 대로 숫자보단 정예화된 조직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잘하고 있다.”

“참, 그리고 저 내일 청면님과 수하들 데리고 출교할 거예요. 귀영대에 합류시킬 사람들 찾으러 갑니다. 진작 나갔어야 했는데 황천각주 부임식 보고 나가려고 출교를 미뤘었어요. 나간 김에 고 군사님과 풍천교주님도 뵙고 올게요.”

그녀가 본격적으로 강호에 발을 내디디고 있다.

내 시선에 걱정이 담겼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겐 꼬리가 아홉 개나 있잖아요?”

“강해져서 돌아와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네, 소교주님!”

* * *

나는 무공수련에 열중했다.

회귀 전후를 통틀어 요즘이 가장 열심히 무공수련하는 시기였다.

내가 무공 삼매경 중임을 아셨는지, 아버지는 교내의 여러 행사를 모두 미루셨다.

구화마공과 시천비술.

열실히 하지 않을 수 없는 무공이기도 하다.

우선 시천비술은 수련하면 할수록 시공이환술 외부와 내부 사이의 시간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그 차이가 미세해서 시천비술을 이용해 실제 수련을 할 단계는 아니었다.

시공이환술을 쓰고 다시 시천비술을 쓴 후, 그곳에서 다시 무공수련.

내공이 세 번이나 중복해서 들어간다.

그에 비해 외부와 내부의 시간 차이는 아직 의미 있는 차이가 아니기에 내공을 회복하는 시간이 더 드는 상황이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이룰 무공도 아니었고, 수련은 꾸준함이 생명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음 단계에 올라서 있으리라.

다음으로 구화마공.

구화마공의 심법이 익숙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제일초식부터 수련에 돌입했다. 난해하면서도 심오한 무공이었지만, 나는 차분히 구결을 분석하면서 조금씩 나아갔다.

오늘 처음으로 제일초식을 발휘할 생각이다.

구화마공 제일초식 인멸식(人滅式)

첫 초식부터 그냥 인멸이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

나는 정면에 세워둔 나무 인형을 응시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몸과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되었을 때, 흑마검이 뽑혀 나왔다.

사아아악.

단번에 인형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비천검법의 쾌검식인 창천식보다 더 빠른 검식이었다.

그래서 제일초식 성공이냐고? 실패였다.

천천히 다가가서 목이 떨어진 나무 인형을 살폈다.

등에 희미하게 검선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좌측과 우측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인멸식은 초식을 발출하는 순간, 상대의 전방과 후방, 좌측과 우측에서 네 개의 검기가 동시에 날아드는 초식이었다.

생각해보라.

번쩍하는 순간 한 군데도 아니고 네 군데서 동시에 검기가 날아든다면? 그것도 같은 곳을 노리는 검기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곳을 노리며 네 방향에서 날아든다.

정면의 검기가 목을, 뒤에서는 등을, 좌측 검기가 허리를, 우측 검기는 다리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면에서만 제대로 검기가 날아들고, 나머지 세 방향의 검기는 제대로 날아들지 못했다.

잠시 눈을 감은 채 구결을 떠올렸다.

구결을 정리한 후 새로운 나무 인형을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다시 나무 인형을 살폈다. 이번에는 등이 잘려 나갔고 목은 그대로 있었다.

반복하고 반복했지만, 제일초식은 뜻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뭔가를 빠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해석한 구화마공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이래서야 어디 내 구화마공이 아버지의 것을 능가할 수 있을까? 믿을 것은 천무지체인데, 과연 아버지를 능가하는 구화마공을 구사할 수 있을지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며 고심하던 중에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보다 더 강한 구화마공을 익히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내 발목을 잡고 있음을. 그 욕심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까지 더해져 더욱 무겁게 내 발목을 잡아끌고 있음을.

이건 내 방식이 아니지.

나는 곧장 수련장을 나섰다.

* * *

천마전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 올라오너라.”

“네.”

피의 길을 걷고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 옆에 나란히 섰다. 아버지와 여기서 나란히 교내 정경을 바라보면 항상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 소교주가 되어 나란히 섰다.

“천독림에서 독 제조 양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왜 그런 답니까?”

모른 척 묻자 아버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근래 독왕과 왕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 결정에 내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짐작하고 계실 것이다.

아버지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잠시 침묵하던 아버지가 나직이 말했다.

“독왕을 자극하지 마라. 그는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는 의미. 무인들은 독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평생의 수련이 단 한 번의 하독으로 끝장나 버릴 수도 있기에.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은 왜 왔느냐?”

“아버지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무슨 부탁?”

“인멸식을 제게 써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에 아버지가 흠칫 놀랐다.

“기껏 후계자가 되더니 죽고 싶은 거냐?”

“그럴 리가요.”

나는 가슴을 풀어헤쳤다.

“극품천잠사에 귀호의까지 입었습니다. 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발휘해 주십사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유는?”

“직접 경험해서 감을 잡고 싶습니다.”

원래라면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웠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해석한 구화마공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해석만 해주신 상태니, 들어주실만한 부탁이었다.

“좋다.”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뒤로 물러나서 거리를 벌렸다.

준비됐느냐, 간다. 이런 말들은 다 생략되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곧장 천마검이 뽑혀 나왔다.

쉭.

정말 짧고 가벼운 바람 소리.

그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네 명의 악귀가 동시에 사방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다.

아버지의 인멸식은 그냥 네 줄기의 검기가 날아드는 것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얼어붙을 무시무시한 네 악귀의 환영이 동서남북 동시에 나타나서 검을 휘두르는 그런 검기였다.

카아앙! 카앙!

두 개는 막았고, 하나는 얕게, 다른 하나는 정통으로 내 몸에 적중했다.

팍! 파악!

검기가 호신강기와 충돌하자 난 붕 날아서 바닥을 뒹굴었다.

“으으윽!”

정말 아팠다. 극품천잠사에 귀호갑에 호신강기까지 써서 막았는데, 정말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아버지가 내공을 조절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극한으로 발휘하셨다면, 나는 이 한 수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죽지 않았더라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고.

구화마공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느껴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었다.

“혹시 제 구화마공의 경지가 올라가면 제 인멸식에도 이 악귀들이 발현하는 겁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만 다른 악귀가 나오겠지.”

비슷하지만 다른.

구화마공을 다르게 해석해서 무공을 완성해 나갈 것이기에 다른 악귀가 나온다는 말씀이신 거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천마혼을 보는 것은 아직도 멀고 먼일이니 인멸식에서라도 나의 작은 악귀들을 보고 싶었다.

“이것으로 되었느냐?”

“충분합니다.”

허리를 매만지며 인사하고 돌아서려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혹시 그 악귀들에게 이름 붙이셨습니까?”

아버지의 입가에 그 조소가 지어졌다.

“독왕이 이름 붙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요즘 자주 어울렸더니, 저도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정중히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돌아섰다.

내 무공의 성취는 비단 나만의 성취가 아니다. 아버지와 다른 인멸식이 나온다면, 아버지 역시 내 구화마공에서 어떤 감흥을 받게 될 것이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우린 더 강해질 것이다.

피의 길 끝에서 아버지에게 말했다.

“다시 찾아뵐 때는 친구 넷 데리고 오겠습니다.”

18 절대회귀-258화 18

제258회 검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천마전을 나선 후, 북천검가로 향했다.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는데 혼자 끙끙거릴 필요 있겠는가?

그래, 이게 내 방식이다. 모르면 묻고, 딴 이야기 하다 깨닫고. 정 모르겠으면 에라 모르겠다 놀아버리고.

그동안 다른 마존들 때문에, 여러 사건으로 바빠서 일화검존에게 소홀했던 걸 이번에 만회할 작정이다.

집 나간 비무친구의 귀환이다.

그사이 내게도 변화가 있었듯 일화검존도 변화가 있었다.

북천검가의 일화검존 모옥에 도착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모옥이 바뀌어 있었다. 예전의 그 아담한 모옥은 이제 큰 저택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당도 넓어졌고, 그녀가 키우는 화원도 넓어졌다.

변하지 않는 건 여전히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화검존의 고운 외모뿐이었다. 그녀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소교주, 어서 오시게.”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언제나 똑같지.”

“집이 달라졌습니다.”

일화검존도 나를 따라 주위를 돌아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를 바꿔 봤네.”

예전의 모옥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집이었다. 나는 이렇게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 무의 길만을 걸어가는 고고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제 그녀는 가식을 벗어 버리고 솔직한 욕망을 내보이고 있다. 왜 마음이 바뀐 것일까?

“요즘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신가?”

“검존님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잘 왔네, 어서 들어가세.”

일화검존을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집 내부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구경 좀 해도 되겠습니까? 요즘 저도 방 꾸미고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서요.”

“편히 보시게.”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가구며 꾸며진 장식들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실내를 꾸미는 데 돈을 들인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정말 멋집니다.”

그러던 내 눈에 뭔가가 눈에 띄었다.

‘이건?’

탁자에 올려진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혈천도마의 책장에 꽂혀 있던 시화집이었다.

물론, 같은 책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이렇게 시선을 끄는 건 도마와 검존이기 때문이리라.

“저기 저 장식장은 제 방에도 들여야겠습니다. 너무 마음에 듭니다.”

“소교주에게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그렇게 방을 둘러보고 다탁에 마주 앉았다.

차를 마시는데 아는 맛이었다. 혈천도마 집에 갔을 때 마셨던 그 차였다.

“도마 어르신도 이 차를 드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가?”

일화검존이 순간 흠칫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책도 그렇고 차도 그렇고.

‘이 사람들이!’

나는 내심 웃음이 나왔다. 책과 차가 우연이 아니라면 두 사람 관계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집을 왜 바꿨는지 궁금하지?”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겁니까?”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나는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방이 예전보다 더 선배님과 잘 어울립니다. 화려하고 아름답고.”

“그런가?”

일화검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나와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아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감. 한걸음보다는 확실히 멀다. 그렇다고 불편할 정도로 멀지는 않다.

다섯 걸음 정도. 내가 생각하는 일화검존과 나의 거리다.

“오늘 이렇게 찾아뵌 것은 비무친구로 온 겁니다.”

그녀에게 비무를 신청했다. 다행히 그녀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야 좋지. 다만 나와의 비무가 자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선배님이 검 뽑는 모습만 봐도 저는 많이 배웁니다.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비무하자는 말씀을 안 드렸겠지요?”

“자네의 그 입만 두고 갈 수 없나?”

“제 입이 필요한 곳이 많아서 그건 곤란합니다.”

우린 연무장으로 나갔다.

십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마주 보고 섰다. 앞서 언제 농담을 주고받았냐는 듯 그녀의 기도가 바뀌었다.

변한 것은 집 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도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동안 수련에 매진했구나!’

그녀는 한 자루의 보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마존들의 노력을 백조의 발에 비유한 적이 있었는데, 가장 그 비유에 어울리는 사람이 일화검존이었다.

백조처럼 우아한 그녀의 모습 뒤에는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했을까?

나도 본연의 기도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나를 향한 일화검존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며 그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화검존이 먼저 몸을 날렸다.

쉬이이익!

날아드는 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검 뒤에 몸을 완전히 숨긴 그녀는, 검과 몸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일화검과 흑마검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충돌했다. 두 검이 만들어낸 수십 가닥의 검선이 순식간에 허공을 수놓았다가 사라졌다.

예전 비무에서 내게 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검존은 검존이었다. 게다가 근래 갈고 닦은 그녀의 수련이 빛을 발하며 이 비무를 한층 더 수준 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검광을 번뜩이며 우린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허공에서 빛나는 검광을 북천검가의 마검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검광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차아앙!

마지막 긴 쇳소리를 내며 우린 바닥으로 내려섰다.

검을 손에서 날리지 않아도, 검을 상대의 목에 겨누지 않아도. 검존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자네는 끝도 없이 성장하는군.”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수련이 나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녀의 자존심은 내가 챙겨주었다.

“선배님께서 양보해 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밑천을 드러냈지만, 선배님께서는 마지막 수가 남아 있지 않으십니까?”

마존들은 모두 최후에 사용할 한 수를 숨기고 있다.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

“평생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수지.”

다시 말해 자신의 목숨도 걸어야 하는 비장의 수라는 의미였다.

“들어가시죠.”

안으로 다시 들어온 우린 식은 차로 목을 축인 후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펼쳤던 비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일전에 비천검법을 십이성 대성을 이루고 느꼈던 바에 대해서 일화검존에게 전해주었다.

일화검존은 내 말을 경청하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었다.

검존쯤 되는 실력이면 당연히 알 것이다.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말해주고 있는지. 아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해주지 않을 무학의 정수라는 것을.

일화검존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었다.

내 말이 끝났을 때 그녀는 연무장으로 뛰쳐나갔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주게.”

그녀는 연무장 가운데서 홀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갑자기 검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또다시 검을 휘두르다가 멈추고.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혼자만의 수련으로는 넘을 수 없었던 벽을, 나와의 대화에서 넘어갈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마존이 되고 아주 오랫동안 혼자 수련을 해왔을 것이다. 그리고 홀로 외롭게 걸어와 막혀 버린 길 끝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그녀가 상기된 채 돌아왔다.

“자네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내게서 검술에 관한 깨달음을 얻고 싶어서가 아닌가?”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제 검술이 막힌 상태거든요.”

“한데 왜 나에게 무학을 전하는 것인가?”

나는 기도를 차분히 가라앉히며 위엄있게 말했다.

“앞으로 제 마존이 되실 분이니까요.”

말없이 나를 응시하는 그녀에게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 이유 말고도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두 가지나?”

“우선은 검존님이 한계를 뚫으시면 다시 그 깨달음이 제게 되돌아올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린 비무친구지 않습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선배님은 마존분들 중에 검을 쓰는 유일한 분이시잖습니까? 검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검존님이 유일합니다. 아버지 성격은 잘 아실 테고. 제가 누구에게 검술을 배우겠습니까? 제가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제겐 검존님 밖에 없습니다.”

세 이유 중에서 이것이 그녀에게 가장 와 닿은 모양이다. 그녀에게서 격정이 스쳤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뵙고, 제일 자주 찾아뵀어야 했는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검존님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계셔줄 것 같았습니다. 이기적이고 나쁜 마음이죠. 좋은 사람부터 챙겨야 하는데.”

그러자 일화검존이 다소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네. 어쩌면 제대로 순서에 맞게 챙겨준 것일지도…….”

그녀의 눈빛에서 어떤 회한이 스쳤다.

우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각자 상념에 잠겼다.

굳이 이 상황에서 아닙니다, 검존님은 좋은 분이십니다. 이런 뻔한 위로는 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말은 이것이었다.

“내일 또 와도 되겠습니까?”

일화검존은 내일이 아니라 평생 와도 좋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언제부터 꽃을 좋아했다고 그러느냐?”

혈천도마의 말에도 나는 창가에 놓인 화분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엉큼한 꽃처럼 생겨서요.”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혈천도마에게 들렀는데, 못 보던 것이 창가에 놓여 있었다. 꽃이 심어진 화분이었다. 만약 내가 여기부터 먼저 왔다면 그냥 혈천도마가 산 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대체 꽃을 보고 엉큼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엔 뭐가 든 거냐?”

“어디서 난 꽃입니까?”

“누가 줬다.”

일화검존에게 책과 차를 선물로 주자, 일화검존이 화분을 선물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

‘취마형, 대단해!’

두 사람을 화해시키겠다는 취마의 노력이 결국 결실을 본 모양이다.

“누가요?”

“아는 사람이 줬다.”

“그러니까 누가요?”

“책 읽는 데 시끄럽다.”

혈천도마는 끝까지 일화검존이 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너스레도 애써 참았다.

지금 얼마나 좋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화검존인데. 지난 오해와 갈등을 풀면서, 선물도 주고받고.

참자, 놀려도 나중에 놀리자.

“자꾸 보지 마! 기라도 잘못 발출하면 꽃 죽는다.”

그랬다간 내게 살초를 날릴지도 모른다.

대룡아, 집무실 화분보다 여기 화분이 더 소중하다. 수련하다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적어도 일 년은 지옥 수련을 받아야 할 거다.

“저 갑니다.”

“왜 벌써 가?”

“요즘 저 지옥 수련 중입니다. 아마 본교 내에서 제가 제일 열심히 할걸요?”

“소교주까지 되었는데. 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리 열심히냐?”

회귀 전과는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내가 죽으면 마존들도 다 죽을 것이다. 내가 죽어가는데 혈천도마가 그냥 보고 있겠는가?

그래서입니다. 다 살리기 위해서.

‘지옥에 뛰어들어도 내가 뛰어들려고 이러는 겁니다.’

그 부귀영화는 우리 어르신이 누리십시오. 말년에 행복하게 검존과 오순도순, 중원 여행이나 다니면서요.

* * *

다음 날 일화검존과 또 비무를 나눴다.

밤새 자지 못했는지 그녀의 눈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 수련하느라 잠을 좀 설쳤다네.”

어제의 깨달음을 실력으로 만드는 노력을 밤새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와 또 비무를 나눴다. 서로의 수를 알기에 우리는 점점 더 강력한 수를 쓰기 시작했고, 마지막 즈음에는 거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들이 오갔다.

비무를 마치고서는 오늘 싸웠던 내용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싸움의 양상이 비슷했기에 어제 했던 이야기와 대부분 중복되었지만,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로 번져가기도 했다. 어린 시절 검술 수련 이야기며, 심지어 꽃 키우는 방법도 배웠다.

나는 다음 날에도 가고, 그다음 날에도 갔다. 지금껏 자주 못 본 것을 이번에 다 보자, 하는 마음으로 갔다. 지겨워서 이제 그만 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가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비무의 양상은 비슷했지만, 우린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같은 초식이라도 속도가 다르고 들어간 내력이 달랐다. 어떤 날은 빨랐고 또 어떤 날은 느렸다. 이렇게 마음껏 자신의 검법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정말 쉽게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구화마공 제일초식 인멸식을 사용했는데.

사아아아아악!

소리가 달랐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놀라 달려가 보니 나무 인형은 정확히 네 조각 나 있었다.

“됐다!”

드디어 네 방향에서 검기가 동시에 날아들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검존와의 비무와 대화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된 모양이다.

그날 이후 나는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내겐 열망이 있었다. 인멸식에서 소악귀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그 열망이 나를 극한의 노력으로 이끌었다.

하루에 한 번씩 꼭 검존에게 들러 비무를 했고, 무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누군가 우릴 지켜본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같지 않았다.

반복이 주는 힘 속에서 우린 성장했다.

검존이 성장할수록 나도 성장했다. 내 영향을 받아 검존이 성장했고, 성장한 검존의 영향을 내가 되돌려 받았다. 우린 검을 쓰는 사람들만의 열기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관계도 변화가 있었다.

“집을 바꾼 것은 도마 선배 때문이네.”

그녀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요즘 도마 선배와 지난 앙금은 잊고 잘 지내려는 중이네. 그 과정에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나더군. 그때의 나는 화려하고 예쁜 걸 좋아했는데. 그게 나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즉흥적으로 바꿔버렸네. 부끄럽지만 대단한 고민을 하고 바꾼 것이 아니었지.”

지난 젊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너무나도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 말이다.

“잘하셨습니다. 나중에 모옥이 그리우면 또 바꾸는 거죠.”

“그럼 너무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나?”

“저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신 분으로 보일 것 같은데요?”

그래, 이제 남 눈치 보고 살 나이는 아니지, 하면서 일화검존이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의 거리가 다섯 걸음에서 어느새 세 걸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수련은 계속되었다.

밤낮없이 수련했다. 수없이 인멸식을 반복하던 어느 날.

사아악!

인멸식의 소리가 또 달라졌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나무 인형의 목을 베는 시커먼 존재를.

‘드디어!’

네 악귀 중 하나가 출현했다.

16 절대회귀-259화 16

제259회 아버지가 보고 싶으셨던 것이.

아쉽게도 악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필이면 처음 출현한 악귀가 나무 인형의 정면에 있는 악귀였다.

그래서 내게는 악귀의 등만 보였다.

나무 인형의 네 곳이 잘려 나갔고 곧이어 악귀가 사라졌다.

악귀가 출현해서 잘리는 것과 그냥 검기로만 잘리는 것의 차이가 있었다. 악귀가 나타나니 속도와 위력이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악귀들이 뿜어내는 마기와 시각적, 심리적인 효과까지 생각한다면, 악귀가 출현해야만 진정한 인멸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인멸식을 발휘했다.

사아악!

악귀는 다시 출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등만 보였다.

드디어 해냈다는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단 말이다! 네 얼굴 보려고 그렇게 노력한 거지, 네 등판 보려던 건 아니라고!’

그러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

‘아! 동경(銅鏡)을 가져다 두면 되지!’

동경을 가지러 가려다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까지 해서 보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무공이 발현한 순서를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네가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그래 좋다.

‘다른 악귀들 얼굴부터 본다.’

* * *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일화검존은 검무극의 표정이 오늘따라 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막혀 있던 검술에 성취가 있었습니다.”

“아! 다행이네.”

일화검존은 기뻤다. 자신은 검무극과 함께 비무하고 무공에 관해 이야길 나누면서 큰 성취가 있었다. 마존급 실력에서 성취를 얻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데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다음 단계로 오르는 성취가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도 못 했다.

“자네란 사람은 정말 예측할 수가 없네.”

처음 검무극이 찾아왔을 때, 하루 이틀 오다가 말 줄 알았다. 소교주가 되었으니 일종의 인맥 관리차 왔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첫날 검무극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검술을 말할 사람이 선배님밖에 없습니다.

검무극은 진심으로 자신과 검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무학의 깊은 뜻을 가르쳐주려 했고, 또 배우려 했다.

평생 검술을 익혀온 그녀였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검술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고 논검(論劍)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기회에 그녀는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이런 시간을 갈망해 왔는지.

비무친구.

검무극은 진정한 비무친구로 자신에게 다가선 것이다. 이제 저 말은 그녀에게 그 어떤 관계보다 더 깊은 의미로 남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녀의 진심이었다.

“소교주,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나도 자네밖에 없네.”

검무극이 웃으며 검을 뽑았다.

“그럼 나눠볼까요?”

그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을 때, 모든 마검이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워낙 높이 올라가서 싸웠기에 그들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수없이 빠른 검광이 번뜩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검들은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비무를 마치고 떠날 때면 검무극은 항상 만나는 마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검존께 많이 배우고 가네. 자네들이 부럽네.”

이 말을 전해 들은 일화검존은 행복했다. 아부든, 진심이든. 다른 사람도 아닌 검무극에게 저런 극찬을 듣는 것은 너무나도 기쁜 일이었다.

아낌없이 무학의 깨달음을 전해주고, 수하들에게 저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면…… 어찌 넘어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

나의 수련은 계속되었다.

소교주가 가야 할 외부 행사는 계속 밀리고 있었다. 수련에 미쳐 있다는 내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배려였다.

마존들도 나를 찾지 않았다. 취마가 와서 술 마시자고 할 법도 했지만, 그 역시 찾아오지 않았다.

교내에서는 무공에 미친 소교주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오직 검존과 비무를 했고, 비무를 마치고 돌아와선 미친놈처럼 인멸식을 연마했다.

너무 많은 나무 인형이 잘려 나가는 바람에 금속으로 된 인형이 내 연무장으로 도착했다. 만년한철과 강철을 섞어 만든 것으로 검기에 잘리지 않는 특별한 강철인형이었다.

카아앙! 캉! 카앙! 카앙!

시원한 금속음이 반복해서 들렸다.

악귀의 등을 얼마나 많이 봤으면 너, 한 번쯤 고개를 돌려줄 수 없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그리고 오늘, 그 지겨운 반복이 주는 선물이 도착했다.

사아아악!

다시 인멸식의 소리가 달라졌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강철인형의 뒤로 또 다른 악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을.

두 번째 악귀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악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무섭게 생기지 않았다. 놀랍게도 내 첫인상은 이러했다.

‘잘 생겼다!’

놀랍게도 내가 불러낸 악귀는 잘생긴 악귀였다.

화공에게 독왕의 얼굴을 보여주고 이 얼굴을 바탕으로 악귀를 그려봐라, 했을 때 나올 법한 얼굴이었다.

‘이래도 되나?’

정말 나도 놀랐다.

혹시 이 악귀는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일까?

나는 악귀의 얼굴이 상대에게 공포를 안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악귀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서일까? 무서운 악귀가 아니라 이런 악귀가 나온 것은?

이렇게 되니 등을 보이는 악귀의 생김새가 궁금해졌다. 똑같이 생겼을까? 아니면 다르게 생겼을까?

어쨌든 얼굴이 다 다른지 확인하려면, 좌측이나 우측의 악귀도 발현시켜야 한다.

호기심이 내 열망을 이끌고 있었다.

* * *

“수련은 오늘까지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화검존은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관수련을 할 작정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직감이라네. 근래 자네 열기가 점점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네. 마지막으로 쏟아부어야 할 순간이 온 거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나를 향한 검존의 눈빛은 이번에 비무를 하자고 찾아왔을 때와 또 달랐다.

“소교주, 정말 고마웠네.”

“저도 감사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그녀와 친해졌다. 이제 그녀와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녀의 성격에서 오는 거리였다. 아무리 더 친해져도, 한 걸음까지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무공이 막히면 또 찾아옵니다.”

“자넬 맞을 준비를 해두겠네.”

그녀의 눈빛에서 의지를 읽었다. 여기서 한 번 더 성장한다면, 본교는 새로운 일화검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검무극이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이제 당분간은 여기도 끝이었다.

“다음에 왔을 때는 다시 모옥의 좁은 마당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자유로운 영혼과의 더 박진감 넘치는 비무가 되겠군요.”

일화검존이 미소를 지으며 함께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날이니 오늘은 제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사실 오늘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 있었다.

“황천각주가 된 서대룡은 제 오른팔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조촐한 축하연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시간 내야지.”

“혈천도마님도 함께 모셨습니다. 서대룡의 사부이시니 모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일화검존은 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혈천도마와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자신을 데려가려 한다는 것을.

“잠시 기다려 주겠나? 옷 갈아입고 나오겠네.”

“네, 천천히 준비하셔도 됩니다.”

오늘따라 씻고 화장하고 옷을 고르는 시간이 더 걸린 그녀였다.

* * *

검무극과 일화검존이 도착한 곳은 대천산 아래 푸른 들판이 있는 언덕이었다. 그곳에 술과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미리 숙수들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만찬이었다.

일화검존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본교 주위에 이런 곳이 있었나?”

“구석구석 찾아보면 멋진 곳이 많습니다. 앞으론 여행도 다니고 쉬십시오.”

“혼자 무슨 재미로.”

그때, 그곳으로 혈천도마와 서대룡이 도착했다. 대도를 둘러맨 두 사람은 이제 누가 봐도 사제지간으로 보였다.

혈천도마는 평소에 입지 않는 깔끔한 장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도 평소보다 깔끔했다.

검무극은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오셨습니까?”

“번거롭게 뭔 축하연이냐?”

혈천도마가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자가 큰 자리에 올랐는데 왜 심술이세요?”

일화검존의 말에 혈천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대룡이 일화검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서대룡이 모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나는 서대룡과 산책을 나섰다. 일부러 두 사람만 남기고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서대룡보다는 혈천도마를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미리 서대룡에게 귀띔도 했었고.

“각주 일은 어때?”

“아직은 적응한다고 정신없습니다.”

서대룡이 발걸음을 멈추고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요즘 악몽을 꿉니다. 위급한 상황에 소교주님 찾아서 헤매는 꿈요. 제가 처리해야 하는 일인데, 꿈에서는 소교주님만 찾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찾으면 저를 차갑게 쳐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시죠. 능력도 안 되면서 그 자리를 왜 맡았지?”

“과연 꿈에서만 그럴까?”

“어휴, 저 심각하다고요.”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평생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심력 소모하지 마라.”

“만약 일어난다면요?”

“이걸로 해결해야지.”

검무극이 서대룡이 매고 있는 대도의 손잡이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서대룡이 사부의 손때가 묻어 있는 손잡이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이 지옥 수련이 되어야 하는 이유겠죠.”

두 사람이 다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좀 더 있다 가자.”

저 멀리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밝았다.

“좋을 때다!”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이 웃었다.

“아까 함께 오려고 찾아뵈었는데, 단장을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옷도 여러 벌 갈아입어 보시는 것 같고요. 사부님 그런 모습, 처음이었습니다.”

혈천도마가 웃는 모습을 보니 검무극의 기분도 좋았다.

그래요, 이제 지난 일들은 다 잊으십시오. 과거로 가는 문도 잠그고, 미래를 엿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네게도 봄바람이 불어야 할 텐데.”

“전 틀렸습니다. 절 두고 먼저 가십시오. 이제 더 바빠져서. 전 일만 하고 수련만 하는 인생입니다!”

서대룡은 부러운 눈빛으로 저 멀리 나이를 잊은 풋풋함을 쳐다보았다.

“정말 먼저 가도 돼?”

“데려가셔야죠! 저 오른팔이라고요!”

* * *

시간은 금방 흘렀다.

언제 나오나 하고 들어갔는데, 어느새 나는 백일 폐관수련을 마치고 수련장을 나오고 있었다.

수염도 깎지 않은 채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천마전이었다.

아버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천마전을 지키고 계셨다.

“몰골이 그게 뭐냐?”

“아버지 뵙고 싶어서 곧장 달려왔습니다. 이래야 고생한 표를 내죠.”

반가운 마음에 너스레부터 떨었다.

“맛있는 것 먹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벽곡단이나 육포 말고 폐관수련에 쓸 수 있는 음식 좀 개발해주십시오!”

아버지는 변함없는 그 미소로 나를 맞아주었다.

“게으름뱅이가 백일이나 수련하다니, 대단하구나.”

“녀석들이 어찌나 부끄럼이 많은지, 정말 보기가 힘들더라고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부담감이 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서다.

그럼에도 이 순간 가슴이 떨렸다. 다 못 버렸나 보다. 아버지에게 무공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제 친구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후 제일초식을 발휘했다.

사악!

경쾌한 바람 소리.

네 줄기의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모습을 드러낸 네 악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나의 악귀들이었다.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악귀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놀랍게도 나의 악귀들은 서로 생김새나 느낌이 달랐다.

무서운 녀석도 있었고, 잘생긴 녀석도 있었다. 묘한 신비감을 주기도 했고, 영리해 보이는 녀석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각기 다른 모습에 놀랐다. 당연히 같은 모습이라 생각하셨을 테니까. 사실 나도 놀랐다. 이렇게 다 다른 느낌의 악귀들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네 악귀는 아버지의 그것처럼 곧장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나와 교감이라도 하려는 듯 찰나 간 나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슷.

다음 순간 악귀들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버지는 태사의에서 일어나 계셨다. 아버지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가 보고 싶으셨던 것이 이것이었습니까?”

나의 해석으로 완성되는, 아버지의 것과는 다른 구화마공.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것이었다.”

구화마공을 전수해주시던 날 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구화마공은 계속 변해 왔군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시대마다 멍청이들과 천재들은 계속 나왔을 테니까.

나는 그 천재가 되어 더 발전된 구화마공을 펼칠 것이다.

아버지의 기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적어도 무공에 있어서 만큼은, 아버지는 그냥 감탄만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만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실 거다. 나와 경쟁해서 이기려 하시겠지. 진심으로 도울 건 돕고, 이길 건 이기고. 아버지는 아버지다.

“그동안 소교주가 처리해야 할 외부 일들을 미뤄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니까.”

구화마공 제일초식을 제대로 익히라는 아버지의 배려였다. 덕분에 첫 단추를 잘 끼웠으니 이제 시천비술을 익혀가며 차분히 하나씩 끼워가면 될 것이다.

“곧장 출교해서 다 처리하겠습니다.”

“가기 전에…….”

아버지가 태사의에서 내려오시며 내게 말했다.

“같이 밥 먹자. 고생했다.”

아버지는 그 싫어하신다는 사술까지 직접 부리신다. 백 일 간의 힘듦이 저 한마디 말에 모두 사라져 버렸으니까.

20 절대회귀-260화 20

제260회 너희들의 이름은.

오랜만에 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바둑을 두거나 식사를 하거나. 조용히 아버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이 순간 말이다.

평소 너스레를 많이 떨지만, 사실은 이 순간이야말로 나의 본질과 가장 닿아있기 때문일 거다. 거의 한평생을 조용히 살아왔었으니까.

“수련은 힘들지 않았냐?”

“몸은 힘들지 않았는데, 반복의 지겨움을 참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어찌 참았느냐?”

“나중에는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 반복은 평생 나의 과제일 텐데, 이 지겨움을 벗어나면 어차피 또 다른 지겨움이 기다릴 텐데, 그냥 하자. 그러다 보니 반복도 지겨움도 저와 하나가 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미소를 지었다. 조소가 아니었다. 길을 잘 찾아냈다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웃음이었다.

아버지에게 내가 제일초식을 어떻게 해석했고, 또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어떻게 반복해서 수련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신나서 자랑하듯이 말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 정보를 주고 있었다.

참고하시라고.

아버지는 내 해석과 아버지의 해석을 비교해서 더 나은 초식을 만들어내려 노력하실 것이다. 제발 해내시기를.

나는 아버지보다 강해지려고, 혹은 아버지를 이기려고 회귀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 온 것이다.

“밥 다 먹었으면 소화나 시키러 가자.”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저 멀리 보이는 대천산 꼭대기를 보며 말씀하셨다.

“저기까지 누가 먼저 가는지 시합하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버지가 경공 시합을 제안했다.

“제가 쾌속보 대성을 이루면 한판 붙자고 했던 것을 잊지 않고 계셨군요.”

“어떠냐? 자신 있느냐?”

“당연히 자신 있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마존들도 제게 다 나가떨어졌습니다.”

“먼저 출발해라!”

“그럼 제 등만 보고 달리셔야 할 텐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먼저 달려 나갔다. 이렇게 해야 혹시라도 내가 이겨도 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을 테니까.

쾌속보로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과연 아버지라도 이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빨랐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세찬 바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렸을 때 옆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는 허공에 꼿꼿이 선 채 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멋있다!’

나는 죽을 둥 살 둥 달리고 있었다면 아버지는 도도하고 고고하게 날고 계셨다. 대성을 이룬 천마비행술은 마치 아버지를 위한 경공인 것처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래, 멋도 없는데 속도까지 느리면 안 되지.

나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정말 빛처럼 빠르게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정상에 먼저 도착한 것은 아버지였다.

“졌습니다. 멋에도 지고, 속도도 지고. 바람의 신도 천마에게는 안 되는군요.”

고개를 푹 숙이자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쾌속보도 빠르구나.”

다른 무공을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풍신사보만큼은 아버지도 인정하는 무공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천마비행술의 대성을 이루면 마찬가지 결과를 낼 것이다.”

나를 인정하는 말씀이었는데, 아버지가 경공 시합을 하자고 한 것도 방금 저 말씀을 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네게 천마비행술을 전수하겠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앞서 제일초식에 관해 말해준 것 때문이었다. 하나 배웠으니 나도 하나 알려줘야지. 이런 마음이시다. 아버지는 절대 그냥 받는 법이 없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나는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경공술의 극의를 깨달은 지금의 네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익히고, 대성 역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자, 지금부터 잘 들어라.”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천마비행술의 구결을 전수했다. 내가 잘 외웠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구결 전수가 끝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너무 기쁩니다, 아버지.”

이렇게 기뻐하는 이유가 천마비행술이 무림 최고의 경공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천마비행술과 풍신사보를 결합해서 좀 더 빠른 경공술을 펼칠 가능성 때문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독문무공을 모두 이어받는 순간이라서 기뻤다. 구화마공과 천마호신공, 그리고 천마비행술까지. 아버지가 익힌 핵심 무공을 모두 배우는 순간인 것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만 일어나거라.”

“네.”

아버지와 함께 대천산 꼭대기 절벽에 나란히 섰다.

저 멀리 천마신교의 전경이 보였다.

“내가 소교주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올라왔었다.”

옆에 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고, 그 옆에 할아버지가 서 계신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버지의 꿈은 무림일통이셨지.”

그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다. 아버지가 무림일통을 꿈꾸고 계신다는 것을. 아버지도 아신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꺼내기 어려운 말을 꺼냈다. 언젠가 한 번은 해야 할 말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무림일통이라는 대업을 이루셔서 세상 사람 모두의 칭송과 존경을 받게 되더라도…… 제 존경은 받지 못할 겁니다.”

버럭 화를 내실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이제는 잘 알고 계셨으니까.

우린 말없이 저 멀리 있는 천마신교를, 다시 그 너머 펼쳐진 지평선과 하늘을 쳐다보았다.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 제 친구들 이름 좀 지어주십시오. 저도 멋진 이름 뭐 없나 고민을 좀 해봤는데요. 귀신을 주제로 해서 야귀(夜鬼), 혈귀(血鬼), 백귀(白鬼), 천귀(天鬼) 이렇게 지을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음침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고상하게 달을 주제로 해서 명월(明月), 잔월(殘月), 은월(隱月), 혜월(暳月)로 하거나, 그게 아니면 색을 주제로 해서…….”

바로 그때였다.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동서남북.”

순간 움찔했다.

“농담이시죠?”

아버지는 전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다못해 매란국죽도 아니고, 청풍명월도 아니고, 동서남북이라고요?

악귀에 쓸데없이 이름 짓지 말란 뜻인지, 아까 무림일통에 대해 말씀드린 것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동서남북이 좋다고 생각해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동서남북!”

다시 한번 확정 짓듯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이렇게 나오시는데 어쩌겠는가?

아, 미안하다. 나의 악귀들아!

“오, 듣고 보니 좋습니다. 동귀, 서귀, 남귀, 북귀. 외우기도 쉽고. 딱 좋네요. 누가 물으면 우리 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자랑도 하고요.”

아버지 작명인 것, 다 까발린다니까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결국 네 악귀의 이름은 동서남북으로 확정!

* * *

대천산을 내려 온 나는 곧장 통천각으로 향했다.

총군사 사마명에게 이후 내가 해야 할 일을 듣기 위해서였다.

통천각에 들어서는데 마주친 군사들이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호의적인 눈빛들이다. 일의 성격상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니, 이들의 눈빛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엄중한 경계를 몇 차례나 거쳐 통천각 작전실에 들어섰을 때, 사마명은 회의실에서 군사들과 회의 중이었다.

나를 맞은 군사가 사마명에게 기별하겠다는 것을 그냥 두라고 한 후, 나는 작전실에서 회의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곳은 정말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쪽 벽에 설치된 지역별로 나뉜 십여 개의 구멍을 통해 계속 전서가 도착하고 있었고, 군사들은 그것을 사안에 따라 분류했다.

어떤 군사는 서류를 들고 이리저리 뛰고 있었고, 어떤 군사는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또 다른 군사는 중원지형도에 꽂혀 있는 수십 가지 색의 깃발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안 바쁜 사람이 없었다.

무림은 평화로웠지만, 이곳은 전쟁터였다. 아니, 이곳이 전쟁터이기에 무림이 평화로운 것이겠지.

잠시 후 회의를 마치고 나온 사마명이 날 보고 깜짝 놀랐다.

“소교주님, 언제 오셨습니까?”

“조금 전에 왔습니다. 제가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릴 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집무실로 가시죠.”

“여기서 말씀하시죠. 군사들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폐관 수련에서 막 나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십니다. 이제 좀 쉬십시오.”

“제게 내릴 임무를 한가득 가지고 계신 분이 하실 말씀도 아니시지요.”

사마명과 마주 보며 웃었다.

“수련은 어떠셨습니까?”

“나오자마자 수염도 안 깎고 아버지께 자랑하러 달려갔습니다.”

자랑이란 말에 모든 결과가 다 담겨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군사님께서 외부 일정들을 조율해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밀렸을 텐데, 무슨 일부터 해야 합니까?”

“우선 하셔야 할 일이 호남지단과 강서지단을 방문하셔야 합니다. 호남지단은 무림맹과 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충돌하는 곳이고, 강서는 사도맹을 상대하는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두 지단을 방문하셔서 그곳 지단주를 만나고 오시는 것이 첫 번째로 소교주께서 하셔야 할 일이십니다.”

“알겠습니다.”

“공식 임무서는 내일 아침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사마명이 말했다.

“앞으로 소교주께서 본교의 운명에 많은 영향을 끼치실 겁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군사님을 자주 찾아뵈려고요.”

* * *

통천각에서 나와서 거처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한적한 길에서 복면을 쓴 남자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천마전 호위대주 휘였다.

“아저씨!”

“소교주님.”

“그냥 어려서 부르시던 것처럼 극아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지요.”

오랜만에 보는 그가 감격스러웠다.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아저씨 머리에 흰머리가 많아지셨습니다.”

“저도 나이 먹는 거죠.”

“우리 아버지 모시느라 힘들어서 그렇죠. 엄청 까다롭게 굴죠? 아저씨 막 괴롭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정말 내가 아는 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직 호위 임무가 전부인 사람. 아버지가 전부인 사람.

“눈 오는 날 저 업어주셨었는데.”

휘가 웃자 복면 속 두 눈이 달처럼 휘었다.

“그걸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그때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후, 휘가 나를 찾은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출교하실 때 호위들을 데려가십시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혼자 다녀오려고 했었다. 그럴 줄 예상하고 그가 내게 온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소교주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호위가 오히려 짐이 될 정도의 실력이라는 것, 저도 알고 있습니다.”

휘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제 후배들을 위해섭니다. 그 아이들 소교주님과 함께 있으면 훌륭한 호위로 성장할 겁니다. 근래 소교주님의 행보를 지켜봤습니다. 제가 본 소교주님은 바다였습니다. 제 후배들을 전부 품어주실 수 있을 만큼 큰 바다였지요.”

그의 성격상 내게 와서 이런 말 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천마호위대를, 그리고 후배들을 아꼈다.

그날 이들은 우리와 함께 모두 죽었다.

평생 아버지를 위해 헌신한 휘의 부탁이라면 그래, 열둘이 아니라 천이백 명이라도 데려가야지.

“함께 가겠습니다.”

휘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저씨.”

나도 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휘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말로 신세를 갚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언젠가 오늘의 신세를 갚으려 들 것이다.

휘 아저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저씨와 후배분들은 이미 목숨으로 갚았습니다.

* * *

내 호위들은 연무장에서 수련 중이었다.

잠시 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수련을 멈추고 일제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인사에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지난 백 일 동안 계속 수련한 건가?”

적연이 나서서 대답했다.

“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련했습니다.”

“한데 왜 여섯 명뿐인가?”

“언제 호위 임무에 투입될지 모르니, 주간조와 야간조로 나눠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주야를 바꿉니다.”

다시 말해서 야간조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수련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봤기에 적연의 눈부터 봐주었다.

거절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적연이 순순히 안대를 벗었다.

새빨간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귀안술의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갔군.”

그러자 적연이 깜짝 놀랐다.

“맞습니다. 설마 제 눈 색깔만 보고 그걸 알아보신 겁니까?”

“색이 이전과 달라졌어.”

“정작 저는 매일 동경을 봐도 못 알아봤습니다.”

신안술로 차이를 구분해낸 것이다.

그의 눈에 자꾸 마음이 가는 것은 신안술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신안술을 익혔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귀안술을 익혔다. 그 다른 사람은 결국 내가 되었고.

그 모든 게 자신의 선택이고 운명이라지만, 남을 위해 눈을 희생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의 눈에 진기를 투입해서 다스려주었다.

“느낌이 다릅니다.”

“어떻게?”

“훨씬 더 고통이 줄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공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훨씬 웅혼하고 정순해졌으니까.

“내일 나와 함께 출교한다. 아침 일찍 통천각에서 공식 임무서가 올 거야.”

적연과 호위 무인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드디어 첫 임무를 하게 된 것이다.

감출 수 없는 흥분과 기쁨이 전해져왔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두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저희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나 잘 지켜줘. 자네들만 믿고 간다.”

우렁찬 대답과 함께 적연과 호위 무인들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래, 기왕 나가는 것 더 성장해서 돌아오자.

다음 날 아침 두 대의 마차가 교를 나섰다.

정식으로 호위까지 거느린 소교주로서의 첫 출교였다.

15 절대회귀-261화 15

제261회 내 무림은 멀리 있지 않다.

마차는 평소에 타던 마차와 달랐다.

천마전 호위대가 사용하는 전용 마차로 재질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했다. 어지간한 외부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았으며, 힘 좋은 말들이 끌고 있었다. 위급 시에는 말에게 채울 마갑까지 갖추고 있는 마차였다.

주간조가 말을 타고 마차를 호위하는 가운데, 적연은 마차에 함께 타고서 호위 임무에 관해 설명했다.

“야간조는 뒤따르는 마차에 타고 있습니다.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하고 저녁에 우리와 임무를 교대합니다.”

주간 호위도 마찬가지지만 내겐 야간 호위도 필요 없었다. 자고 있는데 누군가 접근해 오면 천마호신공이 나를 깨웠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대로 그대로 두었다. 휘가 원하는 것은 이들이 훌륭한 호위무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경험이었으니까.

물론, 그 시기를 당기기 위해서 해야 할 것도 있었다.

“마차 잠시 세우게.”

적연이 마부석의 수하에게 마차를 세우게 했다.

야간조 마차까지 합류하게 한 다음 모두 내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 마차로 걸어갔다. 원래 마차 외부에 천마전 상징까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부분을 가려두었다.

촤아아아아악.

가려둔 것을 시원하게 벗겨냈다. 무서운 악귀의 형상이 드러났다.

“앞으로 정체를 숨겨서 이동하지 않는다. 자네들 복장도 천마전 호위대 정식 복장으로 다 갈아입도록.”

호위들은 평범한 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적연이 놀라 말했다.

“규정상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규정은 우리가 만들어 간다. 내 명령대로 해.”

나를 향한 적연의 눈빛에 갈등이 스쳤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를 호위하면서 기존의 틀에서 이미 벗어날 대로 벗어난 그들이었으니까.

그가 수하들에게 옷을 갈아입도록 명령했다.

적연과 호위들이 모두 옷을 갈아입었다. 천마전 호위대의 정식 복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했다. 흑의무복의 왼쪽 가슴에는 방패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 천마전을 상징하는 악귀가 그려져 있었다. 또한 그들이 착용한 검은 복면에는 마(魔)라는 한 글자가 힘 있는 필체로 수 놓아져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식 복장을 착용하자 그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했다.

“멋있다. 본교의 여러 복식 중에서 난 자네들 복장이 제일 멋있는 것 같아.”

그러자 그들이 옅게 웃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움직이면 자네들이 훨씬 더 힘들 거라는 것 안다. 더 위험해질 테고,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기겠지. 자네들이 일반 호위라면 굳이 이러지 않았을 거야. 한데 자네들은 앞으로 천마를 호위할 사람들이다.”

천마란 말에 그들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지가 공식적으로 움직이실 때, 신분을 감추고 움직인 적 있나? 그래서다. 자네들도 지금부터 경험하고 연습하는 거다. 자네들은 대놓고 천마신교 소교주를 호위하고 있는 거다.”

“네! 목숨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은 바치지 말고 지켜줘. 알았나?”

내 농담에 살짝 분위기가 풀어졌다.

적연이 다 모여 있는 지금이 기회라 여겼는지 각자 부여받은 숫자를 알려주었다.

“호위 작전을 하면 서로를 일호부터 십이호로 부릅니다. 소교주님께서도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적연이 일호였고, 호위대 경력에 따라 숫자가 붙었다. 막내가 십이호였다. 딱 봐도 앳되어 보이는 막내는 이제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십이호 앞에 가서 섰다. 남을 지키다 죽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막내라고 선배들이 괴롭히지 않나?”

“막내라고 너무 잘해주셔서 괴롭습니다!”

정답을 잘 말한 막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후 마차에 올랐다.

“출발하자!”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적연은 나와 함께 타고 가도 괜찮았을 텐데, 말을 타고 호위들과 함께 달렸다. 앞서 마차에 탔던 이유는 호위 임무에 관해 설명하려고 탔던 모양이다.

그는 수장이지만 수하들과 동등하게 일했다. 오히려 솔선수범해서 더 많이 일했다. 어쩌면 휘가 이런 적연의 모습을 높이 샀기에 나를 직접 만나러 왔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좋은 호위무인이 될 가능성을 보았기에.

우리의 첫 목적지는 천마신교 호남지단이었다.

마차로 그곳까지 가려면 제법 시간이 걸렸기에 마음을 느긋이 먹었다.

천마호신공을 수련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마차가 워낙 좋아서 흔들림도 거의 없었다. 편안하게 천마호신공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천마호신공은 이제 두 단계를 남겨두고 있다. 이번 출교에서, 한 단계 올리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밖에서 적연이 소리쳤다.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마차가 멈춰 섰다.

말을 쉬게 해주는 사이에 나도 마차에서 내려 바위에 걸터앉아 쉬었다.

나를 중심으로 호위들이 사방을 지켰다. 그야말로 그들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주위를 살폈다.

솔직한 내 심정은?

그렇게 사방에 늘어서 있으면 내가 어떻게 지켜주냐?

“적연.”

“네, 소교주님.”

정면을 지키며 서 있던 적연이 내게 다가왔다.

“자네가 익힌 무공을 한 번 펼쳐보게.”

내 말에 적연은 깜짝 놀랐다. 그는 내가 자신의 무공을 봐주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자주 오는 기회 아니니까, 어서!”

“네! 소교주님!”

임무도 임무지만, 그는 이런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익힌 무공은 밀영검법(密影劍法)입니다.”

자신이 익힌 검법을 밝힌 후,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원래 다른 사람의 독문무공은 지켜보지 않는 것이 예의였기에 호위들은 등을 돌렸다.

적연이 밀영검법의 초식을 모두 펼쳤다.

“좋은 검법이다.”

나는 그에게 잘못된 습관과 자세를 고쳐주었고, 앞으로 어떻게 수련할지에 대해 말해주었다. 여러 가지를 말하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 하나! 딱 하나만 짚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적연이 감격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고, 다른 호위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부러워할 필요 없다. 이호, 앞으로!”

모두의 무공을 다 봐주려 하자 이호가 당황해서 말했다.

“바쁘신데 저희는 나중에 봐주셔도 됩니다.”

“바쁜 건 자네들이야.”

“네?”

“지단주는 천천히 봐도 돼. 인사차 방문이잖아? 한데 자네들 무공은 한시라도 빨리 끌어올려야지. 지금 자네 등 뒤로 검기가 날아들면 막을 수 있어? 그러니까 자, 무공!”

더는 시간 끌지 않고 이호가 무공을 펼쳤고, 적연에게 한 것처럼 그에게도 꼭 고쳐야 할 점과 앞으로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다른 호위들도 돌아가며 봐주었다.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았다. 한 번 보면 딱 답이 나왔으니까.

그들의 흥분이 느껴졌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수준 높은 가르침이었으니까.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이들이기에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마디 할 때마다 강해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하고 증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죽지 말자고 알려주는 거다.

밤에는 야간조 무인들도 똑같이 고쳐야 할 점들을 지적해주었다.

* * *

교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콰르르릉!

천둥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너무 와서 마차를 몰 수 없을 정도였다.

“잠깐 쉬어가야겠습니다.”

적연은 마차를 거목 아래에 세웠다.

호위들은 비를 맞으며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다.

“청승맞게 비 맞고 서 있지 말고 다들 마차 안으로 들어와.”

“저희는 괜찮습니다.”

“명령이다.”

적연은 안 된다고 버텼지만, 결국 내 뜻을 꺾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섯 명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대형마차였기에 마주 보면서 전부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닦을 것을 그들에게 내주며 말했다.

“괜히 어려워할 것 없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밖에 비나 구경들 해.”

나는 주전자에 담긴 물을 삼매진화(三昧眞火)로 데워서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타 주었다. 그 모습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마시겠습니다!”

아직은 경직되고, 나를 대하는 것이 어려운 그들이었다. 당장 창밖을 보는 시선만 해도 전부 다 나와 반대쪽 창문을 쳐다보았으니까.

우린 말없이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쏴아아아아아아!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차를 홀짝이며 비 구경을 하니까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나이 든 마존들을 상대하다가 이렇게 젊은 녀석들과 있으니 신선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적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소교주님을 보호해 드려야 하는데, 왠지 저희가 보호를 받는 기분입니다.”

나는 옅게 웃으며 적연에게 물었다.

“천마전 호위대에 들어갈 실력이라면, 다른 조직에도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왜 호위무인에 지원했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어려서부터 호위무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호위 무인들을 보면 멋있어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이 명예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적연의 대답은 처음 물었을 때만큼 빠르게 나오지 않았다.

“같은 생각입니다.”

눈의 고통 때문에 어쩌면 그는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잖아도 힘든 일인데, 눈까지 죽을 정도로 아플 테니까.

그때 삼호와 눈이 마주쳤다. 주간조 중에서 제일 순한 인상을 지닌 그다.

“자네는?”

“저는 죽이는 쪽보다는 지키는 쪽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키는 재능이 뭔가?”

“누군가를 지키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내성적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구호가 묻지도 않았는데 슬쩍 대답했다.

“저는 호위 임무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

동료들은 이미 들었던 말인지 다들 미소를 지었다. 느낌상 그는 동료들을 웃기고 너스레를 떠는 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다.

어쨌든 휘에게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헌신의 시대를 살았고 현재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젊은 무인들은 확실히 선배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나는 이들이 휘에 비해서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들의 이성적이고 개인적인 태도에 비해 휘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앉아 있다 보니 쏟아지던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적연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그들이 내리기 전에 물었다.

“호남성이 고향인 사람?”

갑자기 묻자 어리둥절한 표정들을 지었다.

“없나?”

그러자 앞서 지키는 쪽이 적성이 맞다고 대답했던 삼호가 나섰다.

“제 고향이 이곳 호남입니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나?”

“네, 어머니가 홀로 계십니다.”

“언제 뵙고 못 뵈었나?”

“삼 년쯤 된 것 같습니다.”

“들렀다 가자.”

그러자 삼호는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임무 중인데 그럴 수 없습니다.”

“며칠 늦어도 돼. 호남지단주는 내가 뭐 그리 보고 싶겠나? 하지만 자네 모친께서는 자네가 얼마나 보고 싶으시겠나?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부탁 아니고 명령이니까 출발!”

그렇게 마차는 삼호의 고향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중원 구석구석 온갖 사람이 살고 있고, 온갖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잘 안다. 온갖 음모와 계략, 인간이 어디까지 추락하고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나는 잘 안다. 그 도산검림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인이 길을 잃고 헤매는지도.

내 무림은 멀리 있지 않다. 풍류주점의 조춘배가 내 무림이고, 나를 호위하는 삼호의 고향집이 내 무림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무림에서 길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언제 그렇게 비가 내렸느냐는 듯, 창창한 하늘을 가르며 마차는 계속 달렸다.

* * *

고향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달리던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휘장을 걷고 밖을 쳐다보니 길옆에 마차가 박살 나서 뒹굴고 있었다. 군데군데 바닥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치열한 싸움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적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이호가 가서 인근 주민에게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왔다.

“며칠 전 호남제일표국(湖南第一鏢局)의 표물이 습격을 당해 강탈당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표두와 표사, 쟁자수가 여럿 죽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호남제일표국이 제일 규모가 큰 표국 아닌가?”

“맞습니다.”

보통 그 지역의 가장 큰 표국의 표행은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호남제일표국 정도 되는 곳이라면 무림의 여러 방파와 깊은 관계가 있어서, 함부로 건드렸다간 보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는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개입할 일은 아니었기에 곧장 적연에게 말했다.

“자, 속도를 더 올리지.”

“네!”

마차는 더욱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 * *

마차가 삼호의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저깁니다.”

삼호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객잔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도현객잔이었다. 오면서 듣기로는 삼호가 본교에 투신한 후 번 돈으로 차려드린 객잔이라고 했다.

“객잔을 운영하시는 것이 어머니 꿈이셨습니다.”

마인이라고 어디 효자가 없겠나?

마차를 객잔 앞에 세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도 주인도 아무도 없었다. 삼호가 놀라 큰소리로 모친을 불렀다.

“어머니!”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객잔이 문을 닫는 일은 잘 없었기에 삼호의 얼굴에 걱정이 스쳤다.

나는 주방에 들어가서 아궁이에서 불을 땐 흔적을 살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장사를 한 주방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그때 객잔 안으로 똘똘하게 생긴 아이가 들어왔다.

“오늘 장사 안 해요. 주인아줌마와 숙수분은 풍수산장(風水山莊)에 가 있어요.”

아이는 바쁠 때면 와서 점소이 일을 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내가 친근하게 아이에게 물었다.

“거기 왜 갔는지 아니?”

“아침에 풍수산장에서 나온 무인들이 와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데려갔어요.”

만약 그래서 문을 닫은 것이라면 오히려 다행이었다. 무림문파에서 숙수가 필요하면 이렇게 객잔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니까.

“풍수산장은 어디에 있니?”

“저기 서쪽 길 끝에 있어요.”

“고맙다.”

아이에게 동전을 하나 쥐여주자 아이는 좋다고 인사하고 돌아갔다.

나는 이번에는 삼호에게 물었다.

“풍수산장에 대해 아나?”

“잘 모릅니다. 무공수련을 위해 어려서 고향을 떠난 후, 이삼 년에 한 번씩만 어머니를 뵈어서요.”

그가 고개를 푹 숙였지만,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바쁜 와중에도 이삼 년에 한 번이라도 꼬박꼬박 어머니를 뵈러 오는 그가 제일 효자였다.

“소교주님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객방부터 청소해드리겠습니다.”

삼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굴었지만, 그의 속마음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을 것이다. 무림 문파에서 데려갔다니 이래저래 걱정도 되었을 거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는데 젊은 우리가 놀고 있을 순 없잖아? 가서 도와드리고 일찍 모셔와야지.”

생각지 못한 말에 삼호는 괜찮다면서 손사래까지 쳤지만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호위들이 모두 말에 올라탔고 삼호도 말에 올랐다. 안된다고 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스치고 있었다.

“가자, 풍수산장으로!”

마차는 풍수산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20 절대회귀-262화 20

제262회 맛이 없으면 죽는다.

화순(和順)은 두려운 마음에 손이 떨렸다.

“맛이 없으면 네년도 죽은 목숨이다!”

자신을 데려왔던 무인이 주방을 떠나면서 했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풍수산장에 처음 끌려올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무가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것이 장사하는 사람들의 인생이라지만 이런 살벌한 분위기일 줄이야.

그리고 그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조심하세요. 오늘 이 주방에서 둘이나 죽어 나갔어요.”

주방에 음식 재료를 가져다주면서 시비가 몰래 알려준 말이었다. 그녀는 화순과 친분이 있었다. 장 보러 나올 때면 가끔 객잔에 들러 국수나 만두를 사 먹고 가던 시비였다. 그때마다 더 먹으라고 양을 많이 챙겨줬었다.

“산장에 무서운 고수가 한 명 왔는데, 그 사람 입맛이 까다로워서 산장 숙수의 혀를 뽑아서 죽여 버렸어요. 뒤에 끌려왔던 북화촌 숙수는 더 끔찍하게 죽었고요. 어떡해요!”

시비가 잔뜩 겁을 먹은 채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마치 남의 일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화순은 요리하다가 자꾸만 실수했다. 다른 양념을 넣기도 했고, 손이 떨려서 그릇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북화촌 숙수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 그의 실력이 안 통했다면 자신도 마찬가지일 텐데. 정말 그를 죽였을까?

만약 자신이 죽게 된다면?

그녀의 가슴이 먹먹해지며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이제 한 번 올 때가 되었는데.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아들이 주방 입구에 서 있었다.

“현아! 현이냐? 현아!”

그녀가 어찌나 놀랐는지 쓰러지지 않으실까 걱정이 될 정도로 놀랐다.

삼호가 달려가서 어머니를 껴안았다.

“어머니!”

“현아!”

아들을 부둥켜안은 그녀는 너무 감격해서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왔어? 어서 가! 가서 객잔에 가서 기다려!”

“어머니, 왜 그러세요.”

“어서 가! 나중에 얘기해 줄 테니까 어서 가라고.”

화순은 어떻게든 아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급한 그녀와는 달리 삼호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지난 삼 년 사이 어머니는 너무 늙으셨다.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들과 손을 잡자 화순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아들이 너무 반갑고 좋았다. 너무 기뻐서 계속 눈물이 흘렀다.

모친의 눈물을 보자 삼호도 눈물을 보였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일하느라 힘들 텐데. 괜찮다, 괜찮아. 자, 이제 인사했으니 가서 기다려.”

그녀의 마음은 급했다. 괜히 여기 있다가 산장 사람들 눈에 띄었다간 큰일이다.

“가! 이따 엄마가 밥해줄게.”

화순은 아들을 억지로 밀어내려고 했다. 이렇게 얼굴 봤으면 됐다.

그녀는 아들이 마교에 투신한 것까진 알아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자리 잡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겠지.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 또 다른 사람들이 주방으로 들어섰다. 바로 검무극과 주간조 동료들이었다.

화순은 산장 무인이 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제 아들이 잠깐 왔네요. 곧 갈 거예요. 갑니다.”

그러자 검무극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머니.”

놀란 화순에게 삼호가 검무극을 소개했다.

“제가 모시는 분이에요.”

생각지 못한 상황에 화순은 깜짝 놀랐다. 이내 그녀가 검무극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 했다. 검무극이 재빨리 그녀를 만류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무극이라 합니다. 아들처럼 편히 대해주십시오.”

화순이 검무극을 보는 순간 전쟁통 같았던 그녀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눈빛 때문이었으리라. 장사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봤지만 이렇게 맑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편안함과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들을 믿고 맡겨도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귀한 분을 뵙습니다.”

그녀는 검무극의 신분을 알지 못했기에 아들이 모시는 공자님이라 여겼다.

“우리 아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아드님 덕분에 제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훌륭하신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공자님이 잘 보살펴 주신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삼호가 다른 동료들을 소개했다.

“여긴 제 동료들입니다.”

이번에는 적연과 호위 무인들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적연이 대표로 그녀에게 말했다.

“현이가 워낙 잘해서 우리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그녀는 안타까웠다. 이런 상황이 아닐 때 만났더라면? 자신이 직접 밥도 해주고 맛있는 음식도 대접했을 텐데. 아들이 동료를 데려온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

‘어서 내보내야 해.’

여럿이 있는 걸 들키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아들도 아들이지만, 남의 집 귀한 아들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이다.

다들 너무 젊었다. 풍수산장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무인이 있었고, 더구나 무서운 고수가 왔다고 하지 않는가?

“너는 어서 공자님 모시고 객잔으로 내려가 있어라. 주방에 보면 대접해 드릴 음식들이 있으니 잘 챙겨드리고. 어서 가! 어서!”

그때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리는 다 완성했나? 내 분명히 말했다. 맛이 없으면 네년 목숨은…….”

주방으로 들어서던 무인이 흠칫했다.

안에 남자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너희들 뭐야?”

남자는 검부터 뽑으려고 했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마혈이 제압당한 것이다.

‘대체 언제?’

검무극이 그에게 다가가서 친근하게 어깨에 손을 둘렀다.

“요리가 맛이 없으면 죽어야 한다고? 왜?”

친근하게 물었지만, 검무극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그, 그게…….”

“아니다. 가서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검무극이 화순에게로 와서 말했다.

“어머니, 요리는 다 됐습니까?”

“한데 식어서 다시 데워야 할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제가 또 데우는 데는 소질이 있거든요. 오늘은 아주 뜨겁게 데울 겁니다.”

검무극은 그녀가 만든 요리를 쟁반에 담아서 들었다.

그리고 호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너희 임무는 어머니 호위다. 각자 부모님을 지키는 마음으로 지킨다.”

삼호를 비롯한 호위들이 화순의 주위에 도열해서 섰다. 여섯 명이 한 사람을 호위할 때의 정식 대형이었다.

검무극이 마혈이 제압당해 있던 무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가자.”

어느새 무인은 마혈이 풀려 있었다. 무인은 검무극의 놀라운 무위에 겁을 먹은 채로 앞장섰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나가기만 하면!’

무인이 앞장섰고 그 뒤를 쟁반을 든 검무극이 뒤따랐다.

다시 그 뒤를 여섯 명의 호위 무인이 화순을 에워싼 채 걸음을 옮겼다.

화순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지만, 아들은 옆에서 든든한 표정으로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들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너무 좋았다. 오늘 일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그녀는 빌고 또 빌었다.

너른 앞마당에는 산장의 무인이 많이 있었다.

앞장선 무인이 그들을 보며 눈짓을 보냈다.

‘뭐해? 어서 와서 이놈들 제압해!’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나가던 무인들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무인들도, 모두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들도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한 것이다.

앞장선 무인은 경악했다.

‘쟁반을 들고 가면서 이들을 제압한다고? 어떻게?’

마치, 공기 속으로 독이 퍼지는 것 같았다. 검무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혈과 아혈이 제압당했다. 멀리 있는 무인도 가까이 있는 무인도, 고수도 하수도,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광경에 적연을 비롯한 호위 무인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소교주의 무공이 마존을 넘어섰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그들은 건물로 들어가서 풍수산장 장주의 거처로 향했다.

그의 방문 앞을 지키던 무인들도 순간 멈췄다. 한 놈은 ‘너희들 뭐냐?’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추는 바람에 입을 벌리고 있었고, 그 옆의 무인은 눈을 치켜뜨다가 멈추는 바람에 이상한 몰골이 되었다.

방에서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상석에는 혈수검(血手劍)이 앉아 있었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그는 이미 무림맹에 무림 공적으로 올라간 인물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풍수산장의 장주 이엄(李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 요구십니다.”

“호남제일표국 뿐만 아니라 중원의 모든 표사놈들이 나를 원수처럼 생각할 텐데. 내 몫이 더 많아야 하지 않겠나?”

“애초에 삼등분하기로 약속하지 않았소?”

“생각해보니 공평하지 않더라고. 자네나 그자는 방구석에 앉아서 각자 삼분지 일씩 챙겨가지 않나?”

“이번 일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 나요.”

“그럼 그자 몫을 줄이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시오?”

“그럼 나는 누군지 모르고 이러나?”

이엄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이런 놈들과 손을 잡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극구 반대했는데, 그 사람이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결국 이렇게 됐다. 어쩌면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기 몫은 안 빼앗길 테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지.

그때, 문이 열리며 검무극이 안으로 들어섰다.

검무극은 아무런 기도도 드러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요리를 가져온 시종쯤으로 여겼다.

검무극이 요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혈수검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잠깐 대기하도록.”

혈수검이 젓가락을 들어 요리를 한 입 먹더니.

“퉤!”

곧장 입에 든 것을 바닥에 뱉었다.

그 모습에 이엄이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숙수를 둘이나 잔혹하게 죽인 것은 음식 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수틀리면 너도 이렇게 죽여버릴 수 있다고. 돈 더 내놓으라고.

무공실력은 혈수검이 한 수 위였기에 이엄은 어쩔 수 없이 이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놈이 함부로 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래도 양보할 수는 없다. 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이 위험천만한 일에 가담하고서도 남는 것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이번 표행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큰 건수임을 알아낸 사람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

“화부인께서 만든 요리입니다.”

“그년 지금 어디에 있냐?”

“문밖에 있습니다.”

“당장 들어오라고 해!”

“왜 그러십니까?”

“이런 맛없는 요리를 만들었으니, 혀를 뽑아야지. 그런 쓸모없는 혀를 가지고 있으면 뭐 하겠느냐?”

검무극이 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문 앞 복도에 화순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 양쪽 옆으로 세 사람씩 호위들이 서 있었다. 선두에 선 사람은 적연과 삼호였다.

혈수검은 그들이 풍수산장의 무인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엄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오?”

이엄은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저 여인을 보호하란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그리고 가만 보니 저들은 자기네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이엄은 적연의 가슴에 있는 문양을 보았다.

‘저 문양은? 설마 아니겠지?’

이엄은 내심 긴장했다. 악귀를 상징으로 쓰는 조직은 이 무림에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일반 마인들은 저 문양을 쓰지 못하고 정예들만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 사람이 보낸 건가? 한데 왜 저 여자를 보호하고 있는 거지?’

이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를 놀라게 할 일은 지금부터였다.

검무극이 새 젓가락을 들어서 요리를 먹었다.

“너무 맛있는데? 네 혀가 문제 같은데?”

혈수검은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갑자기 미치지는 않을 테니, 이 역시 이엄이 시킨 일이라 생각했다.

“뭐 하는 짓이냐고!”

혈수검이 버럭 이엄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엄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검무극이 혈수검을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다시 먹어봐.”

“어휴, 이 미친놈의 새끼가!”

혈수검이 일단 검무극부터 베어버리려던 바로 그때.

검무극이 본격적으로 마기를 드러냈다. 거대한 마기가 이엄을 짓눌렀다.

‘윽!’

혈수검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뭐야, 이거? 으으으윽!’

이렇게 지독한 마기는 처음이었다. 태산이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정말 이러다가 질식할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자신쯤 되는 고수가 기도만으로 죽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지금 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생 두려울 것 없이 살아온 그였는데, 이 순간만큼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상대가 마인이라도 기가 꺾일 자신이 아닌데. 지금은 감히 이 젊은 상대를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때 짓누르던 마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다시 먹으라고.”

감히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혈수검이 요리를 먹었다.

“……맛있습니다.”

“그걸 왜 내게 말하나? 요리해주신 분에게 말해야지.”

혈수검이 고개를 돌려 화순을 쳐다보았다.

“맛있었네.”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다시!”

이번에는 정중히 말했다.

“맛있습니다, 화부인.”

검무극이 웃으며 화순에게 말했다.

“맛있었답니다.”

화순은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저는 잠깐 이 사람들하고 이야기 좀 하고 나가겠습니다.”

방문이 닫히고 호위들이 화순을 데리고 복도 끝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던 바로 그 순간.

콰악!

검무극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혈수검의 이마에 박아 버렸다.

혈수검이 그대로 꼬꾸라져 탁자에 머리를 박고 절명했다.

이엄은 너무 놀라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혈수검을 단 한 수에 죽여 버릴지도,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심지어 옆에 앉아 있던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박아넣었다.

지금껏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도 살아남은 혈수검이었는데. 그런 그를 한마디 말도 없이 젓가락으로 죽여 버린 것은 충격이었다.

“훔친 표물을 삼등분하기로 했다지?”

“나는 다 포기하겠소! 내 몫까지 가져가시오!”

“남은 한 사람은 누구지?”

이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보낸 것 아니오? 이번 건을 독식하려고?”

“그 사람 누구냐고 물었다.”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이엄이 대답을 망설이자 검무극이 남은 젓가락을 들었다. 볼이나 이마를 쿡쿡 찌르며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혈수검의 이마에서 사라지는 것을 본 이상, 젓가락만큼은 버티지 못했다.

“여 단주입니다!”

검무극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왜 그가 자신을 보냈다고 오해했는지.

“천마신교 호남지단주 여소광(呂昭光)입니다!”

24 절대회귀-263화 24

제263회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마교의 지단주가 표행 약탈의 배후에 있다?”

나와서는 안 될 이름이 나오자 검무극의 기도가 차가워졌다.

“여 단주가 이번 일이 커지지 않도록 뒤처리를 맡아주기로 했습니다.”

천마신교의 호남지단주인 그는 그런 약속을 할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에서는 큰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이런 일에 증거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제가 증인입니다.”

여소광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이엄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여소광을 버리고 자신이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했다.

“네가 지단주를 모략하는 거라면?”

“그럼 절 죽이셔도 좋습니다.”

지금껏 보였던 태도나 간절한 저 눈빛으로 볼 때, 그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충격적이거나 놀라운 일은 아니다.

처음 회귀했을 때, 마군주를 생각하면 쉬운 일이다. 그는 마군을 사적으로 이용해서 부를 챙겼으니까. 지금까지는 내부를 단속했다면, 이제 외부도 단속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이번 호남제일표국의 표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지?”

“그쪽 표두 중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양대남입니다.”

한 번 열린 이엄의 입은 망설임이 없었다.

“이번 표행에서 약탈한 것부터 보자.”

“자, 따라오십시오.”

이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무거웠다. 어느새 단전의 내공이 제압된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압당했다.’

이엄은 그야말로 상대의 무공이 일반적인 고수의 경지를 훨씬 넘었음을 알아차렸다. 젓가락으로 일격에 혈수검을 죽인 것은 결코 혈수검이 방심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나 쑤시면 될 작은 나무꼬챙이로도 혈수검을 죽일 수 있었으리라.

‘여 단주보다도 훨씬 강한 고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여소광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마교의 지단주라면 큰 권력을 지닌 인물인데, 대체 이자는 누구기에?

이엄이 책장에 숨겨진 장치를 움직이자 벽이 돌아가며 비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제법 큰 상자가 세 개 있었는데 안에는 금붙이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막상 그들이 강탈한 재물을 보자 검무극은 이엄과 여소광에게 화가 났다. 이번 일은 돈이 없는 자들이 한탕을 노리고 일을 저지른 것보다 더 나쁜 경우다.

두 사람 모두 가진 재산도 이미 많을 것이고, 이런 짓이 아니더라도 돈을 벌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여소광쯤 되면 여기저기서 상납받는 돈도 꽤 많을 테고.

그런데도 이런 짓을 저질러?

검무극은 치미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물었다.

“이번 일을 혈수검 혼자서 해냈나?”

“양표두가 이동 경로를 미리 빼돌려주는 바람에 일이 쉬웠습니다. 미리 함정을 파고 기습을 가할 수 있었지요.”

“방법까지 치사했군.”

신나게 일러바치던 이엄이 입을 다물고 검무극의 눈치를 살폈다.

“너는 돈도 많으면서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냐?”

“…….”

“대답 안 해?”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네가 번 돈이라면 그렇겠지.”

이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무림에서 뺏기는 놈이 병신 아니냐고. 너도 같은 생각이잖아? 이 위선자 새끼야!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검무극이 그곳을 나와서 복도에서 대기하던 적연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이 지역 황천각, 통천각 책임자들 들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엄은 깜짝 놀랐다. 여소광과 교류하면서 황천각이나 통천각이 마교의 핵심 조직이란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핵심 조직의 책임자들을 이렇게 막 부른다고?

그때 이엄의 시선이 적연의 가슴을 향했다. 처음 볼 때는 악귀만 보았다. 한데 이제 악귀를 둘러싸고 있는 방패도 보였다.

‘설마?’

이 상징 역시 언젠가 술자리에서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천마전 호위대?’

이엄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렇다면 이자는? 서, 설마… 마교의 소교주? 으허허헉!’

이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못 걸려도 정말 잘못 걸린 것이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아무리 엎드려 빌어도 그를 향한 검무극의 눈빛은 차가울 뿐이었다.

이엄의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정말 이곳을 담당하는 황천각과 통천각 마인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검무극의 일 처리는 거침이 없었다.

먼저 책임자들에게 이번 사건을 설명했다. 그리고 호남지단 단주가 개입된 일이라 그쪽 마인들을 쓸 수 없어서 황천각과 통천각이 나서야 하는 상황임을 알렸다.

설명을 마친 후, 검무극은 황천각 특별조사관에게 먼저 명령을 내렸다.

“우선 약탈당한 표물과 혈수검의 시체를 호남제일표국에 돌려주고 상황 설명을 하게. 이번 표행의 정보를 빼돌린 양대남이란 표두도 처리하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이엄은 그 과정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검무극이 자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자는 본교로 보내서 뇌옥에 가둬.”

천마신교의 뇌옥에 갇힌다고? 이엄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안 됩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검무극이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설마 이런 큰일을 저지르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그래서 제가 다 실토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안 죽였잖아?”

이엄은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뇌물인데. 표물을 되돌려주라는 걸 보니 그것도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검무극이 선택권을 주었다.

“좋아, 그럼 선택해! 우리 뇌옥에 갈래? 아니면 호남제일표국으로 갈래?”

이엄은 두 선택 모두 죽은 목숨임을 알았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계획만 세웠을 뿐입니다!”

“너, 이런 일이 처음 아니지?”

“처음입니다.”

이엄의 목소리가 떨렸고 검무극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했다.

처음일 리가 있겠나? 혈수검이 끌려온 숙수들을 잔인하게 죽이는데도 그냥 지켜만 봤는데. 그 하나만 봐도 그의 삶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볼 때 셋 중에 네가 제일 악질이다.”

검무극이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퍼어억! 꽈직!

이엄은 가슴이 박살 나서 절명했다.

쿠르르릉!

주먹에서 들린 천둥소리에 그곳에 있던 모두는 깜짝 놀랐다. 마치 하늘에서 벌을 내린 것 같았다.

검무극이 명령을 계속했다.

“풍수산장은 해체하고, 거기서 나온 돈은 이번에 죽은 이들의 가족에게 모두 나눠주도록!”

“알겠습니다.”

희생된 이들의 가족을 위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꼭 그렇게 처리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호남제일표국이 정파쪽 문파지?”

“네, 그렇습니다.”

지역마다 천마신교의 세가 강한 곳이 있고, 무림맹이나 사도맹의 세가 강한 곳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본단에서 가까운 지역일수록 세력이 강하고 멀수록 약해진다.

호남성은 천마신교의 위세가 강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의 모든 문파가 마교를 따르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을 뿐 정파나 사파를 따르는 문파도 많았다. 이곳 호남성에도 엄연히 무림맹의 지단과 지부들이 있고, 사도맹도 마찬가지다.

“오해 없도록 무림맹에 기별하고. 여소광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처리한다고 전하게.”

무림맹과 교류를 많이 하는 통천각이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당분간 이 마을은 특별히 관리하도록. 내 호위의 모친께서 살고 계신 곳이니까.”

적연은 옆에서 검무극의 거침없으면서도 꼼꼼한 일 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소교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일 처리를 끝낸 검무극은 객방에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던 화순에게로 갔다.

“다 끝났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죠.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싶습니다.”

그 말에 화순은 안도했다. 검무극의 밝은 표정에서 일이 잘 해결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했던 심장이 이제야 가라앉았다.

“해드려야죠, 당연히 해드려야죠.”

“말씀 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이게 편합니다, 공자님.”

밖으로 나올 때도 호위 무인들은 화순을 보호하는 대열로 나왔다.

그렇게 마차에 도착했을 때 검무극이 삼호와 화순에게 말했다.

“마차엔 두 분만 타십시오.”

화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아드님과 오붓하게 이야기 좀 나누시라고요. 자, 타세요. 출발합니다.”

검무극이 마부석에 올랐다. 삼호가 안 된다고 했지만 ‘명령이야’라는 한마디 말로 해결했다.

화순과 삼호를 태운 마차가 마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차의 객실에서 화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출교하고 들은 소리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소리였다.

검무극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워낙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날이면 어머니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어머니, 아들들 안 싸우고 잘살고 있습니다.’

형과 피를 흘리지 않았던 후계싸움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마음이기도 했다.

마차가 화순의 객잔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화순은 자신의 객잔을 보자 비로소 무사히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검무극은 마치 아들처럼 그녀를 친근하게 대했다.

“어머니, 저희 배고픕니다!”

화순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검무극과 호위 무인들은 오랜만에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집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녀의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화순은 아들이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 위로 어려서 동네 친구들과 집에 몰려와서 밥을 먹던 모습이 겹쳤다.

‘언제 이렇게 커서.’

그 꼬맹이였던 아들은 어느새 장정이 되어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다. 그녀의 마음이 뿌듯해지며 감격스러웠다.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본교에 모시고 가서 매일 해주시는 밥을 먹고 싶습니다.”

그녀는 안도했다. 이런 좋은 상관을 모시고 있으니 아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새로 밥과 반찬을 더 가져다주었다.

“공자님은 특별히 한 그릇 더 드세요! 고기도 더 넣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환하게 웃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아드님을 제일 아껴주겠습니다!”

검무극의 농담에 그녀도 웃었고 호위들도 함께 웃었다.

화순은 검무극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산장에서의 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검무극 때문에 해결되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공자.’

* * *

검무극 일행은 그곳에서 나흘을 더 머물렀다.

원래라면 다음 날 떠나야 했지만 삼 년 만에 상봉한 화순과 삼호에게 시간을 더 주고 싶어서였다.

삼호는 밀린 효도를 실컷 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까운 절에 다녀오기도 했다. 오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절경도 구경했다. 다리가 아픈 어머니를 삼호가 업고 걸었다.

마가촌에 가서 살지 않겠냐는 아들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평생 살아온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흘 후, 검무극 일행은 화순과 아쉬운 이별을 하고 호남지단을 향해 마차를 달렸다.

잠시 쉬는 시간에 삼호가 검무극에게 왔다.

“고향 마을을 특별관리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말씀 들었습니다.”

적연이 그에게 말해준 모양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는 어머니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이것도 명령이야.”

삼호는 이번에 실감했다.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어머니께 너무 무심했었다는 것을.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베풀어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덕분에 어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봤다. 내가 더 감사하지.”

그렇게 휴식이 끝나자 적연이 직접 마차를 몰겠다고 마부석에 앉았다.

“최대한 빨리 달리겠습니다.”

“천천히 가자. 안 바쁘다.”

적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빨리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혹시라도 놈이 자신의 비리가 들통 난 걸 알아차리면 달아나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황천각과 통천각의 일 처리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처리될 것이다.

“이번 일 때문에 지단주에서 물러난다고? 그럴 리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거대로 벌이 되겠지. 평생 후회하고 한탄하면서 살 테니까. 한데 그럴 리 없다.”

이엄은 여소광이 이번 일에 개입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지레 겁먹고 달아날 리가 없다.

“다들 욕심이 그득한 인간들이라서 탐욕이라는 이 덩어리에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렇게 마차는 천마신교 호남지단을 향해 느긋하게 달려갔다.

* * *

여소광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편안하고 사람 좋은 인상이었기에 전혀 마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장주에게는 아직도 연락이 없느냐?”

여소광의 물음에 그의 수족인 황표(黃票)가 대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물건을 보냈다고 기별이 와야 하는데, 이엄에게선 감감무소식이었다.

“설마, 놈이 딴마음을 품은 것 아닐까요?”

여소광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위인이 못 된다.”

게다가 이번에 사용한 칼이 혈수검이었다. 그 욕심 많은 놈을 쓴 것도 만에 하나 있을 우려 때문이다. 그놈 상대하기도 쉽지 않아 감히 딴마음을 품지 못할 것이다.

“소교주는?”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습니다.”

“기 싸움을 하자는 거다. 어려서 못된 것부터 배웠구나.”

“소문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후계자가 된 이공자가 정말 비범하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당연히 비범하겠지.”

그럼에도 여소광은 여유로웠다.

“그래봤자…….”

아직 혈기 왕성한 젊은이일 뿐이다. 아무리 아닌 척 감추려 해도, 나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치기가 있는 법. 달콤한 말로 그를 살살 녹여 버릴 작정이다.

일반 무인에서 지단주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그러니 어서 오시오, 소교주.”

31 절대회귀-264화 31

제264회 내 명성은 네게 달렸다.

검무극은 좌우로 호위들을 거느린 채 위풍당당하게 호남지단으로 들어섰다.

여소광 역시 수하들을 모두 거느린 채 소교주를 맞이했다.

좌우로 늘어선 호남지단의 마인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여소광은 검무극을 맞이하러 걸어 나갔다. 그는 오늘 검무극을 처음 봤다.

‘정말 잘 생겼군.’

그냥 잘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시원하게 잘 생겼다. 게다가 저 자신감 넘치는 눈빛까지. 오히려 잘 됐다. 이용하기 좋은 부류는 자부심이 높거나 반대로 열등감이 강한 이들이다.

특히 여소광은 자부심 강한 이들에게 강했다. 그들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맞춰줬기에, 지단주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교주님.”

여소광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의 허리는 평생을 닦아온 정치력만큼 유연했다.

검무극이 빤히 여소광을 쳐다보았다.

“인상이 참 좋으시오.”

“그런 말 가끔 듣습니다.”

“강호에서 이런 얼굴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하던데?”

검무극이 첫인사부터 도발했음에도 여소광은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다른 놈들은 다 조심해야죠. 그런데 이 무림에서 딱 두 분만큼은 제외죠. 그중 한 분이 소교주님이십니다. 자, 들어가시죠.”

여소광이 검무극과 함께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연회가 마련되어 있었다.

검무극이 들어서자 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했고 무희들이 춤을 췄다. 숙수들은 요리를 데우고 나르기 시작했다.

“자, 상석으로 가시죠.”

보통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첫날은 쉬게 하고 다음 날 저녁에 연회를 가지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소교주니 어차피 편하게 왔을 테고, 아직 한창 젊은 나이였다.

시작부터 보여주는 거다. 호남지단주와 함께 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것을.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하면 내일 또 열면 되는 거고. 여소광은 사람을 대접하는 일만큼은 강호의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검무극이 상석에 앉고 여소광이 그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적연이 은침을 뽑아서 일일이 요리에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했다. 다른 호위들은 검무극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호위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과 있을 때는 그저 애들 같았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달랐다.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호위들이 젊군요.”

“젊은데도 소교주 호위에 뽑혔으니 오죽 실력이 좋겠소? 본교의 어떤 정예 조직에 가더라도 손색없는 사람들이오.”

검무극은 호위들이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여소광은 착각했다.

‘역시! 젊은애들 특유의 허세가 있군.’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정말 검무극이 수하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려고 칭찬해준 것임을.

“정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세가 보통이 아닙니다.”

여소광도 검무극의 칭찬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인사치레를 했다.

“호남지단은 무림맹을 견제하는 본교의 요충지 아니겠소? 다른 지단보다 이곳을 먼저 방문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부족한 사람에게 막중한 임무를 맡겨주셔서 어깨가 무겁습니다.”

“다른 것 짊어지느라 무겁지만 않으면 되겠지요.”

의미심장한 말에도 여소광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직 교를 위해 충성할 뿐입니다.”

“역시! 본단에서 여 단주를 신임할만하오. 한잔합시다.”

두 사람이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여소광이 넌지시 말했다.

“소교주님의 위명이 이곳 호남까지 쟁쟁하게 들려왔습니다.”

“어떤 소문이었소?”

“역대 후계자 중 최고의 인재라는 소문이었지요.”

검무극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너무 잘 생기셨습니다. 무림의 후기지수 중에서 제일 잘 생기셨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여 단주께서 못난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수하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저는 거짓말 못 하는 사람입니다.”

여소광은 오른팔인 황표를 불러 물었다.

“네가 보기에 어떠하냐?”

“후기지수가 아니라 전 무림인 중에서 제일 잘 생기셨습니다.”

그의 말에 여소광이 큰소리로 웃었다.

“이거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후기지수가 아니라 전 무림인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었다. 여소광이 칭찬하면, 황표가 나와서 더 큰 칭찬을 하고. 허허 웃으며 다시 칭찬을 반복하고.

그야말로 사람을 접대할 때 사용하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자고로 외모 칭찬만큼 효과가 큰 칭찬은 없는 법이다. 더구나 상대가 이렇게 젊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검무극은 기분 좋게 웃었다.

여소광은 잘 생겼다는 말 때문에 기분 좋아 웃는 줄 알지만, 사실 검무극은 다른 이유로 웃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군요. 다들 기분이 좋았겠는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니오. 또 한잔합시다.”

“좋습니다. 새로운 무림 영웅의 탄생을 위하여!”

여소광은 검무극의 말을 잘 받아주었다. 말만 하면 옳다며 맞장구를 쳐주었고, 자신은 미처 그런 생각을 못 했다면서 검무극을 높여주었다. 그는 정말이지 납작 엎드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소광은 아부를 잘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아부에 실실 웃고 있는 상대야말로 진정한 아부신공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우리 여 단주, 한잔 받으시오!”

자신을 부르는 말 앞에 ‘우리’라는 말이 붙는 것을 들으며 여소광은 내심 웃었다.

이제 술자리에 화룡점정을 찍을 차례다.

취기가 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여소광은 한 여인을 손짓해 불렀다.

그녀는 앞서 춤을 추던 무희 중 한 사람이었다. 무희 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웠던 그녀가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왔다.

여소광이 여인을 소개했다.

“소교주님이 오시면 꼭 인사드리고 싶다고 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술 한 잔 내려주시지요.”

여인이 와서 검무극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약란(葯蘭)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정말 마음먹고 유혹하면 안 넘어가는 남자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미색이 뛰어났다.

약란이 다가와서 술병을 들었다.

“귀하신 분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때 검무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 깜짝 놀랐다.

“자, 술은 나중에 마시고. 여 단주, 거기 기다리고 계시오.”

검무극이 그녀를 안은 채 대청 밖으로 뛰어 들어갔다. 호위들이 당황해서 그 뒤를 따라 뛰었다.

여소광도 당황했지만 이내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영웅은 미녀를 좋아하는 법이지요! 침소는 나가서 왼쪽 건물에 있습니다!”

여소광은 일이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술과 미녀, 언제나 잘 통하지.’

물론 이렇게까지 화끈하고 쉽게 통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한편 약란은 너무 놀랐다.

처음에는 소교주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랐고, 다음으론 이곳 침소로 달려오는 동안 자신이 허공에 둥둥 떠서 날아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소교주는 자신을 안는 척했지만, 몸에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방에 들어와서도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방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올 때만 해도 침상에 내던질 것만 같았는데, 검무극은 그녀를 부드럽게 의자에 앉혔다. 아니, 정확히는 보이지 않는 기운이 그녀를 앉혔다.

그때 그녀는 보았다. 소교주의 잘생긴 외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빛. 너무나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인의 눈이 이렇게 맑아도 되는 걸까?

눈빛만큼이나 부드러운 어조로 검무극이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지?”

“네.”

말은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를 분위기에 압도되었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전에도 여소광이 이런 식으로 접대를 강요했을 거잖아?”

약란은 깜짝 놀랐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것에도 놀랐고, 소교주가 여소광의 뒤를 캐려 한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권력 싸움에 휘말리면 죽게 될 거다.

“내 신분으로도 네 입을 열 수 없구나.”

감히 누구 앞이라고 대답을 거부하겠는가?

“아니에요. 다만 제가 말한 것을 여 단주가 알게 되면…… 고향에 있는 제 가족까지 죽일 거예요.”

“그자가 가족까지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나?”

“네.”

“그때 기분이 어땠지?”

“무서웠어요. 그리고 화가 났어요.”

상대가 지엄한 마교의 소교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저 깊은 눈빛 때문일까? 고민했어야 할 대답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그래, 화내야지.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놈에게는 화를 내야 하는 법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소광에게 협박을 받았다. 술자리에 나오라면 나오고, 술을 따르라면 따르고. 잠자리까지 강요받았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여소광은 그녀의 목숨이 아니라 그녀 가족의 목숨을 담보로 잡았다. 아픈 아버지에 어린 동생들을.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놈은 어린 소녀를 협박하고 세뇌했다. 세상이 원래 이런 거라고. 권력 옆에 붙어 있으면 돈을 더 벌 수 있는 거라고. 약값을 더 보내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다고.

그녀는 싫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의 술 시중을 드는 일은 정말 죽도록 싫었다. 몇 번이나 자결을 생각했지만, 가족들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이제 멈춰달라고 여소광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애초에 순수한 어린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검무극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응시하던 검무극이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치밀어 올랐다.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더 나올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한 번 눈물이 흘러내리니까 계속 나왔다.

눈물을 그치려 했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검무극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왜 이제 왔냐고? 왜 이제 왔냐고.

어린 시절의 그녀였다면 그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때의 어린 소녀는 없다.

“……죄송해요.”

피해자이지만 사과하는 그녀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 순간 그녀의 고개가 저절로 들리며 부드러운 기운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부드러운 기운에 그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왜 제가 억지로 끌려 나왔다고 생각하셨나요?”

분명 여소광은 소교주를 보고 싶어 한 무희로 자신을 소개했었는데.

“내 앞으로 걸어와서 나를 바라보던 네 눈빛 때문이다.”

“제 눈빛 때문이라고요?”

“네 눈에 담긴 분노를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부드럽게 바라본다고 봤는데. 그 속에 담긴 자신의 마음을 읽었단 말인가?

“내 오른팔도 처음에 그런 눈빛으로 나를 봤다. 조직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분노와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지.”

약란은 이제 앞서 두려움에 떨던 얼굴이 아니었다.

“여 단주에 관해 말씀드리지 않으면 저는 어떻게 되나요?”

“그냥 풀어줄 거다.”

“정말요?”

“그래.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지. 어차피 뒤가 구린 자라서 결국 죗값을 치르게 할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거다.”

약란은 여전히 망설였고, 검무극은 더는 그녀를 밀어붙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이 대화를 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된다. 놈의 죗값은 꼭 치르도록 해주마.”

검무극이 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검무극이 돌아보자 그녀가 물었다.

“저와 같은 눈빛이었다던 분, 그분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황천각주 자리까지 올라갔다.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을 벌하는 자리지.”

약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놀랄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기다리세요, 지금 나가시면 소교주님의 정력을 의심할 거예요.”

이런 농담을 할 줄 몰랐기에 검무극은 눈을 크게 떴다. 검무극 성격에 이런 농담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넌 천마신교 소교주의 가장 중요한 명성을 챙겨준 최초의 여자다.”

검무극의 농담에 약란도 웃었다.

“저는 춤을 추다 무대에서 죽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런 미친 짓을 하다 죽게 되겠네요.”

그녀가 탁자로 걸어가 그곳에 있던 종이와 붓으로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 사람부터 적는데 거기 검무극도 알만한 이름이 있었다.

혈수검.

그를 접대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소광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물론 그는 온갖 핑계를 다 대겠지만, 상대가 검무극인 이상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혈수검 이외에도 여러 유력한 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당한 일도 상세히 적었다. 자기 일을 적는다는 것은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다.

약란이 종이를 검무극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제 목숨이에요.”

“아니다. 이건 네 새 목숨이다.”

이제부터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검무극은 삼호를 들어오게 했다.

“소저를 모시고 통천각으로 가라. 그쪽 무인들에게 소저를 고향으로 모시게 하고. 아프신 아버지도 치료할 방도를 찾도록.”

약란은 너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라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저분이 저를 따라가서 우리 가족까지 다 죽이는 것은 아니겠죠?”

농담 반, 두려움 반 질문에 검무극이 차갑게 삼호에게 말했다.

“자, 이 소저 집안을 몰살시키고 돌아오도록!”

그러자 삼호가 무뚝뚝한 어조로 약란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삼 년 만에 어머니를 찾아뵈었소.”

약란이 놀라 삼호를 쳐다보았다.

“그사이 많이 연로해지셨더군요. 돈도 중요하지만… 더 늦기 전에 찾아뵈시길.”

검무극이 삼호를 보며 옅게 웃었다. 삼호란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들여다본 순간이었다.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 약란에게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을 했다면, 애초에 이걸 써주지 않았어야지. 그리고 본교가 네가 알려주지 않으면 고향 집을 못 찾아낼 것 같으냐?”

약란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를 벌할 건가요?”

“그래.”

“저도 보고 싶어요. 그자가 죽는 모습을요.”

그가 죽더라도 그녀의 상처는 평생 남을 것이다. 어차피 남는다면.

“그럼 나도 보고 싶은 게 있다. 그자가 죽으면 네 춤을 보여다오.”

약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교주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 시체 앞에서 잘 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검무극과 약란이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호위들이 경외의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처음 그녀를 안고 뛰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방안의 대화를 들은 그들은 또다시 감탄했다. 검무극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들의 충성심은 깊어지고 있었다.

검무극이 약란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네 표정에 내 정력의 명성이 달렸다.”

약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저는 무대에 서는 사람이랍니다.”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검무극은 당당히 가슴을 펴고 걸었고 약란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뒤따랐다.

여소광이 검무극 옆에 바짝 붙으며 넌지시 물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검무극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싱긋 웃었다.

“오늘 내 인생에서 제일 멋진 춤을 보게 될 거라서요.”

21 절대회귀-265화 21

제265회 마인인데 사람 좀 죽이면 어때?

검무극은 다시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소광이 그 옆에 앉으려고 하자, 검무극은 그 자리에 약란을 앉혔다.

원래 자리에서 밀려났음에도 여소광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검무극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여인을 안고 방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옆자리에 앉힌다? 자신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무튼 자기가 의도한 대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다 넘어왔다.’

이렇게 독특하고 즉흥적인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번에 본단 진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여소광은 더욱 좋은 말로 검무극을 구워삶으려 했다.

“무희의 표정 보십시오. 행복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하긴 여인이라면 우리 소교주님의 남자다움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소광의 시선이 약란을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자신을 보면 항상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당당했다.

‘멍청한 년, 잠자리 한번 했다고 소교주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구나.’

소교주와 얽혔으니 명줄이 짧아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중에 소교주가 관계를 정리할 때 그녀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소교주가 아니더라도, 저 호위들 중 누군가가 처리하겠지.

그때 검무극이 여소광에게 물었다.

“우리 여 단주는 뭐가 제일 싫소?”

여소광은 소교주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뭔가 뻔한 것 같으면서도 소교주는 예측 불가한 면이 있었다.

“저는…….”

싫은 일? 물론 있다. 자신의 출세를 방해하는 모든 것이 싫다. 돈을 모으는 데 방해되는 것들이 싫다. 자신의 이중성을 누군가 꿰뚫어 볼 때는 더 싫다.

하나같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본교를 무너뜨리려는 정파 놈들이 싫습니다. 그자들의 위선이 싫습니다.”

“역시! 우리 여 단주가 있으니 든든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감사합니다.”

검무극이 여소광에게 술을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여 단주, 돈은 많이 벌어두셨소?”

여소광은 내심 흠칫했지만 이내 앓는 소리를 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시다시피 거느린 수하들이 한둘도 아닌데다가. 돈과 인연이 없는지 들어오는 족족 다 새어나갑니다.”

“여 단주, 엄살 부리지 마시고 나 돈 좀 빌려주시오.”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뇌물을 달라는 건가? 아니면 술자리 장난인가?

그 진의를 파악하려 했지만, 도무지 이 소교주의 속마음은 알아낼 수가 없다.

여소광이 웃으며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우리 소교주님이 돈이 필요하시다는데, 쌈짓돈이라도 풀어야죠.”

전낭을 열어보더니 그가 말했다.

“팔십 냥 있습니다. 이거라도 빌려드리죠.”

검무극이 돈을 받아들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정말 뇌물을 원하는 건가?

지금껏 많은 뇌물을 바치며 이 자리까지 올라온 여소광이었다. 대충 상대가 말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원하는지, 아니 말하지 않아도 대충 얼마를 주면 되겠다 계산이 나왔다.

한데 소교주가 뇌물을 원한다? 그것도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기에 아무리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해도 속셈을 알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여소광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소광이 대청을 나갔다.

옆에 앉아 있던 약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호위들 역시 서로 눈빛을 교환했지만, 아무도 검무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여소광이 작은 상자를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다녀오면서 여소광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약란을 안고 달려가는 것도 그렇고. 지금 이 일도 그렇고.

‘소교주는 주위 시선을 즐기고 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튀는 걸 좋아하는 자구나.’

소교주니 뭐가 두렵겠는가? 봐라, 나는 뇌물을 이렇게 대놓고 챙긴다. 이걸 멋이라 생각하는 거지.

‘이 어리석은 소교주야. 이건 약점을 남겨두는 일이다. 나중에 문제가 되면 이 많은 사람을 다 살인멸구라도 하겠다는 거냐?’

검무극이 상자 속을 살폈다.

“오, 돈 많이 모으셨소.”

“제가 모은 돈을 다 드리는 겁니다.”

검무극이 상자를 닫으며 다시 말했다.

“여 단주.”

“네, 소교주님.”

“더 주시오.”

순간 여소광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찌푸려진 것보다 더 빠르게 원래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표정을 이렇게 굳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그게 제가 모아둔 전 재산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따로 모아둔 재산이 있는 것 아오.”

“없습니다.”

여소광이 웃으며 손사래를 치던 바로 그 순간.

“천화문주(天和門主)와 손잡고 번 돈 있잖소?”

검무극의 말에 여소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정말 너무 놀라서 ‘그걸 어떻게 아셨소?’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물론 닳고 닳은 여소광은 놀란 내색 없이 대처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시오? 나는 다 이해하오. 박봉에 수하들 챙기고 하려면 따로 부수입도 챙겨야지. 그렇지 않소?”

그렇다고 하기에는 천화문 건으로 얻은 액수가 너무 컸다. 게다가 비밀을 묻기 위해 이십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다. 절대 밝혀져선 안 될 일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하는 소리지?’

여소광은 일단 딱 잡아뗐다.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분명 천화문과 교류한 적은 있지만 그건 지단의 일을 처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가짜 장부가 있었다. 들어온 돈을 지단을 위해 사용한 것처럼 꾸민 장부였다.

그러자 검무극이 얼굴을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여소광이 내심 긴장한 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들까 두려웠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주먹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날아들었다.

“그럼 소야방주(素夜幫主)에게는 얼마나 받아 챙기셨소?”

“!”

“기억 안 나시오? 그럼 서창문(西槍門) 부문주에게 받은 돈은 생각나시오?”

그 이외에도 몇 명의 이름이 줄줄이 더 나왔다.

듣고 있던 약란은 내심 놀랐다. 자신이 적어준 이름들이었다. 종이를 줬을 때 대충 보는 것 같았는데, 그걸 정확하게 다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소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평정심이 깨어졌다.

‘뭐야? 대체 어떻게 알아차렸지?’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나느냐였다.

“우리 여 단주 표정이 굳으셨소. 항상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는데.”

여소광이 애써 억지로 웃었다. 임기응변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너무 많은 이름이 나오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인생 최대의 위기가 갑자기 불쑥 들이닥친 것이다.

“이제 알겠소. 우리 여 단주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 뭔지. 자기 돈을 내놓는 거요. 맞지요?”

갈 곳 잃은 여소광의 시선이 검무극 옆에 앉은 약란을 향했다.

그때 여소광은 약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당당한 눈빛을 보는 순간.

‘젠장! 저 망할 년이 다 불었구나!’

오랜 세월 시키는 대로 잘해 왔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혹시 저 무희가 저를 음해하는 말을 했습니까?”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오? 혹 여 단주께서 이 여인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소?”

순간 여소광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달았다. 무조건 딱 잡아뗐어야 했다. 특히 약란과는 절대 얽히면 안 된다.

하지만 그를 죄어오는 것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호남제일표국의 표물은 어디에 있소?”

여소광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교주는 자신의 비리를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음해입니다. 누군가 저를 무너뜨리기 위한 모략입니다!”

“누가요?”

여소광의 시선이 다시 약란을 향했다.

“이 무희 짓이오?”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전에 그녀에게 접대를 시켰던 일들이 모두 밝혀질 테고, 무엇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여인을 소교주에게 소개했다는 점이다. 차라리 부패 무인이 되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았다.

‘이미 알고 왔다. 날 잡으러 온 거다. 그렇다면?’

여소광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곳에 울려 퍼지던 음악은 멈췄고, 모두 숨을 죽였다. 이곳 호남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여소광이 무릎을 꿇는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순간 눈이 멀어서 욕심을 부렸습니다.”

소교주의 즉흥적인 면과 저 독특한 성격이 발휘되기만을 바랐다. 껄껄 웃으며 그깟 일쯤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 말이 나오기를 빌었다. 남에게 튀고 싶은 그가 아닌가? 제발! 나를 용서하면서 튀어라! 잘난 척하라고!

하지만 튀어야 할 순간에 검무극은 오히려 차분해졌고 차가워졌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어디에 있나?”

“……전장에 있습니다.”

“그거 말고. 황천각 감사에 대비해 보여주기식으로 모아둔 돈 말고. 네가 악착같이 긁어모은 돈 말이야.”

여소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살기 위해선 당장 돈부터 내놔야 했지만, 그게 어떤 돈인데?

검무극은 저 멀리 서 있는 황표를 손짓해서 불렀다.

황표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달려와서 여소광 옆에 무릎을 꿇었다.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알고 있지?”

검무극이 그에게 살기를 발출했다. 그러자 황표의 온몸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온몸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오싹함이 그를 엄습했다.

“솔직히 말하면 살려주지.”

황표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언제나 여소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진짜 죽을 상황이 되자, 겁이 났다. 정말 대신 죽어도 좋을 만큼 그가 자신에게 잘해줬나?

검무극은 흔들리는 마음을 정확히 읽었다.

“네 주인이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을 지켜봤을 거다. 네겐 뭘 줬나?”

부스러기를 줬다. 그것도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황표가 옆에 무릎을 꿇은 여소광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초췌한 그를 보면서 황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충성심은 여소광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을 때만 유효했다는 것을.

“……재산은 양호사라는 사찰에 은닉해 뒀습니다.”

검무극이 적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당장 통천각에 기별해서 전부 회수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황표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솔직히 실토했으니 저는 살려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푸아악!

여소광이 검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뿜어진 피가 여소광의 몸과 얼굴에 뿌려졌다.

여소광이 얼굴에 묻은 피를 슥슥 닦아냈다. 황표에 대한 원망보다 후회가 앞섰다. 믿지 않았어야 했는데. 끝까지 믿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놈도, 저년도. 몇 년 쓰면 없애버리고 또 새로운 것들을 구했어야 했는데.

여소광이 황표의 시체에 침을 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누굴 병신 머저리로 아나? 옆에서 그딴 말을 지껄이고 살 줄 알았냐?”

항상 웃던 표정은 마치 가면을 벗은 것처럼 달라졌다. 이게 그의 본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면이 이렇게 쉽게 벗겨질 줄 몰랐다.

바로 저 이상한 소교주 때문이다.

“소교주, 당신은 애초에 이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지?”

“평생 아부하면서 남 눈치만 보고 살았을 텐데, 마지막 순간까지 남의 생각을 읽으려는 거냐?”

움켜쥔 여소광의 검이 떨렸다. 그가 탄식하듯 말했다.

“억울하다. 평생 모은 돈을 써보지도 못했는데.”

“돈을 버는 것에 중독된 거다. 돈을 쓰면서 사람도 보고 세상도 봤어야 했는데. 너는 오직 돈만 본 거지.”

여소광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쓸 때보다 벌 때 더욱 큰 희열을 느꼈으니까.

“나는…….”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 잘하기로 소문났던 자신이었는데, 저 망할 소교주 앞에서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쌓아온 삶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진다고? 정말 그렇다고? 정말 꿈만 같았다.

여소광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럴 수도 있지! 마인인데 그깟 하찮은 놈들 좀 죽이면 어때?”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류배들이나 할 말인데.

차라리 검무극이 ‘그래, 나도 마인인데. 너 같은 놈 죽이면 어때?’라고 맞장구라도 쳐줬으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무극은 그저 무덤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소광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

약란이 그를 감당할 수 없었듯, 그도 검무극을 감당할 수 없었다.

여소광이 몸을 날렸다. 검무극을 죽일 듯 날아들었던 그의 검이 방향을 바꾸었다. 검이 향한 곳은 약란의 심장이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의 책임을 그녀에게 돌렸다.

푸욱!

살이 찢기며 검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여소광의 검은 약란의 심장 앞에 멈춰 있었다. 대신 검무극의 흑마검이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검무극이 약란에게 말했다.

“너를 괴롭히던 망령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검을 뽑자 여소광이 뒤로 넘어가며 절명했다.

“네 마음속의 망령도 지금 같이 보내라.”

약란은 검무극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남은 인생은 여소광 때문에 얻은 상처로 힘들어하지 말라는 의미.

여소광의 시체를 바라보던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춤출게요.”

그녀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말했다.

“춤은 여기 말고 나중에 무대에서 춰. 춤은 더러운 피가 흐르는 이런 곳이 아니라, 무대에서 춰야지.”

“하지만 약속했잖아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에서 약란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이 말을 해주려고 그런 약속을 했다는 것을.

“한풀이할 필요 없다. 그럴 가치도 없는 자다. 최고의 춤은 네 무대에서 춰라.”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찮은 저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

검무극이 그녀 앞에 마주 섰다.

“천마신교가 너에게 잘못했기 때문이다.”

검무극이 그녀를 응시하며 정중히 말했다.

“내가 대신 사과하마. 미안하다.”

약란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교의 소교주가 사과하고 있다. 손가락 까닥하면 떨어질 하찮은 목숨을 향해. 이러할진대 어찌 지난 상처에 연연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검무극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제 춤을 보러 와주세요.”

그곳에 있던 무희들과 악공들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적연은 느낄 수 있었다. 삼호의 모친이 지어준 밥에 머물렀던 검무극의 마도가 오늘은 저 여인의 춤에 머물렀음을.

그리고 이제 아주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눈이 빠지도록 아프던 눈동자가 덜 아팠다.

31 절대회귀-266화 31

제266회 누가 뭐래도 소교주님이.

연회가 끝난 그곳에 검무극과 호위무인들만 남았다.

시체만 치우게 한 후, 일부러 모두 다 내보냈다. 호위들과 한잔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탁자에 걸터앉은 채 술병을 들었다.

“곧 교대지? 자, 다들 한잔해.”

적연과 호위들은 묵묵히 술을 받았다. 이제 내 명령에 ‘호위 임무 중에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만의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 많다.”

내가 잔을 높이 들자, 다들 잔을 든 후 술을 비웠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텅 빈 연회장에서 마시는 한 잔의 술은 묘한 흥취가 있었다.

‘이럴 때라도 좀 쉬어라.’

누군가는 호위무인이 멋있다고 하지만, 사명감이 없다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주연도 조연도, 심지어 단역도 아니다. 그들은 배경이 되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잠들기 전에 술을 마시기도 하나?”

내 물음에 적연이 대답했다.

“가끔 마실 때도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이라면 마셨겠지요.”

“오늘 같은 날?”

적연은 대답 대신 내게 물었다.

“악을 벌하는 일, 안 지치십니까?”

“그래서 지는 거다. 지쳐서. 저쪽은 돌아서면 어느새 자라 있는 잡초지만, 이쪽은 하나하나 그걸 다 뽑아야 하는 농부니까.”

적연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이내 그의 시선이 여소광의 시체가 있던 자리에 남은 핏자국을 향했다.

“여 단주를 처음 봤을 때, 그런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첫인상에 속으면 안 돼. 소인배들이 위장에 능하거든. 딱 봤는데 뭔가 과하게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그럼 일단 조심하고 봐야지.”

“그런 의미에서 저는 다행이군요.”

독안이라서 첫인상이 강한 그였다. 권마에는 비할 수 없고, 장호의 좀 순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자네도 안대 풀면 꽤 잘생긴 얼굴이잖아? 남자답고.”

“제가요? 처음 듣습니다.”

적연의 기분이 살짝 좋아지려던 그때, 재빨리 덧붙였다.

“이런 거 조심하라고. 괜히 기분 좋게 하는 것!”

적연과 호위들이 함께 웃었다.

“내일 강서지단으로 출발하실 겁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이곳 일을 마무리하고 가야지.”

누군가를 베어서 없애는 건 어렵지 않다. 언제나 그 뒤처리가 어려운 법이지. 놈이 저질러 놓은 것을 치워야 하고, 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 한다.

“안 바쁘다. 천천히 가자.”

거기라고 다르겠냐? 좋은 사람, 나쁜놈 뒤섞여서 살고 있겠지.

* * *

다음 날 아침, 지단주가 죽었다는 소문이 호남지단에 퍼져나갔다.

여소광이 죽는 자리에 워낙 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가 왜 죽었는지도 상세히 알려졌다. 오늘은 지단 내부의 소문이지만, 며칠 내로 호남 일대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이제 중원의 모든 지단주와 지부장은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짝 쫄아서 긴장하는 마음이 있어야 기강이 제대로 설 테니까.

그날 오후 통천각 호남지역 책임자가 또 찾아왔다.

“여소광이 양호사에 은닉한 재산은 모두 회수했습니다. 이 돈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돈은 모두 본단에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아버지, 아들이 밖에서 열심히 돈 벌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너스레를 한 번 떨어줘야 하는데.

“상부에서 임시 지단주를 정할 때까지만이라도 소교주께서 당분간 이곳 지단에 계셔주셔야겠습니다.”

후임을 정하지도 않고 지단주를 베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통천각 무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남아서 뒷일 수습을 도울 생각이었다.

황천각주 선정을 내게 맡겼듯, 이곳 지단주 후임도 내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었다.

“돌아가시면 곧바로 지단주 아래 간부급 인사들에 관한 정보를 보내주시오. 가능한 모든 정보를 보내시오.”

“알겠습니다.”

황천각에서도 정보를 받은 후 나는 곧장 차기 지단주가 될만한 무인들과 면담했다.

한 번의 면담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의 지난 행적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추측하게 해주었다.

각 인물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일일이 기록한 후, 그 내용을 통천각에 보냈다. 새 인물을 내려보내든, 내가 면담한 이들 중에서 뽑든 이후 일은 아버지와 통천각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할 일을 마친 후에는 수련장에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근래 천마호신공을 연마할 때면 뭔가 간질간질한 것이 단계를 넘어설 때가 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과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수련을 시작하고 사흘째 되던 날, 천마호신공이 다음 단계에 도달했다. 이제 대성을 한 단계 앞두게 된 것이다. 이제 한 단계만 넘어서면 나는 두 개의 목숨을 가지게 된다.

보통 이런 심오한 무공의 상승은 그 이유를 알기 어렵지만, 이번만큼은 알 수 있었다.

구화마공 때문이다. 구화마공을 익힌 것이 천마호신공 수련에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곧장 구화마공 제일식을 펼쳐보았다. 천마호신공이 한 단계 오르면서 반대로 구화마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했던 것이다.

제일초식 인멸식.

동귀, 서귀, 남귀, 북귀가 일제히 출현하며 동시에 공간을 찢어발겼다.

무서운 녀석, 잘생긴 녀석, 신비감을 주는 녀석, 영리해 보이는 녀석. 넷 모두 여전했다.

그리고 달라진 것도 있었다.

그것들이 머무르는 시간이 이전보다 아주 조금 더 길어졌다. 천마호신공이 한 단계 오르면서 구화마공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나의 일방적인 구애 단계.

동서남북,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언젠가 저 악귀들이 나의 이 감정에 화답하는 순간이 올까?

지금도 다르긴 하지만, 그날이야말로 내 구화마공은 아버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구화마공이 될 것이다.

* * *

연무장에서 수련을 마치고 나온 그날, 검무극을 찾아온 두 남자가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충식(充植)이라는 사람입니다. 소교주님께 간곡히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긴장했는지 충식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검무극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날 연회장에서 연주하던 분이시군요.”

검무극이 자신을 알아보자, 충식은 깜짝 놀랐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렇소. 나는 한 번 본 사람은 쉽게 잊지 않소. 악공께서 무슨 일이시오?”

그러자 충식이 함께 온 중년 남자를 돌아보았다.

“여기 친구는 제 친구입니다.”

함께 온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곳 저자에서 채소를 파는 해송(亥松)입니다.”

해송은 충식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반갑소, 검무극이라 하오.”

“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셨소?”

해송은 선뜻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말할지 연습까지 하고 왔음에도, 막상 말을 하려니 심장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충식이 대신 말했다.

“소교주께서 이곳에 오시기 전에 이 친구의 아들이 억울한 폭행을 당했습니다. 너무 심하게 다쳐 의원이 불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해송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못한 이유였다. 아들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졌고, 마음이 울컥해서 눈물이 나려 했다.

“누구 소행이오?”

“호남지역의 젊은 무인들로 이뤄진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신회(武神會)라고 부른답니다.”

“폭행을 주도한 자가 누구요?”

“천화문주의 아들과 소야방주의 아들입니다.”

천화문과 소야방. 죽은 여소광과 손을 잡았던 문파들이었다. 그들 역시 이번 일로 조사를 받아야 하는 문파였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이 그들 문파가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게 두지 않는 것을 보니, 어쩌면 그들의 악행은 보이는 것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천한 저희가 소교주님을 찾아뵙고 이런 부탁드리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짓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날 약란이를 위해 나서주시는 소교주님의 모습을 봤습니다. 소교주님이시라면, 이 친구의 억울한 일도 해결해 주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식의 시선이 해송을 향했다.

“저는 평생 연주만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가난한 제게 악기를 사주고, 연주를 배우게 해준 사람도 이 친구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해송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자에서 채소 파는 장사치에 불과한 자신이지만 마교 소교주에게 찾아오는 일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인지 잘 안다. 자신을 위해 친구는 목숨을 걸고 온 것이다. 사실 자신도 함께 목숨을 걸었다. 다른 일이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해송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잣거리 장사치에 불과한 제가 어떻게 천화문과 소야방을 상대하겠습니까? 한데 이 친구가 그랬습니다. 이 시기에 소교주님이 오신 것은 하늘이 저를 위해 기회를 내려주신 거라고요.”

해송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내 떨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 * *

해송의 아내는 깜짝 놀랐다. 악공이 찾아와서 남편에게 소교주를 만나러 가자는 말을 할 때만 해도 헛수고라 여겼다. 마교의 소교주가 일개 악공을 만나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갔다가 치도곤만 당하고 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한데 소교주가 직접 오고, 호위들이 집 주위를 지키고 서자, 그녀는 놀라서 정신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해송의 아들 해진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었다.

한눈에 봐도 부상이 심각했다. 의원이 와서 치료했지만, 아직 누워서 꼼짝도 못 했다. 지금 상태로 봐선 무인은 고사하고 일반인으로 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해진이 애써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어머니, 저 괜찮아요. 한결 나아졌어요.”

모친이 걱정할까 봐 애써 고통을 참는 해진이었다. 해송의 아내가 눈물을 참으며 아들 옆에 앉았다.

“진아, 귀하신 분이 널 보러 오셨다.”

그제야 해진이 눈을 떴다.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제가 잠깐 보겠소.”

검무극이 해진의 몸을 옆으로 돌린 후에 등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잠시 진기를 주입해서 몸의 기혈을 다스리자 거칠었던 해진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모습에 충식과 해송, 그의 아내가 안도하며 크게 기뻐했다. 다친 이후 이렇게 평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검무극은 막혀 있던 기혈을 뚫어주고 부러진 뼈를 제대로 다시 맞춰주었다. 그 어려운 치료를 최소한의 고통으로 순식간에 해냈다. 두둑, 두둑 소리가 아니었다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

이제 해진은 편안해진 얼굴로 지난 일을 대답했다.

“연회장에 일하러 갔습니다. 명문가 연회에서 술과 음식을 나르면 객잔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받을 수 있거든요.”

해송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은 저렇게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무관을 다녔다. 자신이 돈이 많았다면 아들이 그런 일을 하러 가지 않았을 거다. 충식은 자책하지 말라고 했지만, 부모로서 어찌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 꿈은 무인이 되는 겁니다.”

“타고난 근골이 좋아서 좋은 무인이 될 수 있을 거다. 부모님께 감사드려라.”

“정말요?”

이제 좀 제정신으로 부모를 쳐다보는 해진이었다. 부부는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다시 물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연회에서 쓰일 술을 한참 나르고, 휴식 시간이 생겨 배웠던 보법을 연습했습니다. 연습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해진이 후회 가득한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지나가던 서 공자가 그 모습을 보고 무공을 익혔냐고 물었지요. 그래서 무관에 다닌다고 했더니, 함께 어울리는 석 공자와 비무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한사코 싫다고 했지만…….”

해진은 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두려운 눈빛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죽을 정도로 얻어맞은 두려움 역시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겼고.

이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비무를 핑계 삼아 폭행을 가한 거니,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한두 번 저지른 일이 아닐 것이다.

“제 몸은 어떤가요?”

“다행히 중요한 혈맥은 다치지 않았다. 부상으로 막혀 있던 혈맥은 방금 뚫었고. 네 꿈은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정말 감사합니다.”

해진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충식과 해송, 해송의 아내도 크게 기뻐했다. 불구만 되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아들이 다시 무인을 꿈꿀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아들보다 그들이 더 기뻐했다.

“연회는 자주 열리나?”

“사나흘에 한 번씩 열립니다.”

“이제 한숨 푹 자거라.”

검무극이 해진의 수혈을 짚자 편안하게 잠들었다.

“뒷일은 내게 맡기시고, 아드님 치료에만 신경 쓰시오.”

세 사람이 검무극에게 큰절을 올렸다. 정말 이렇게까지 소교주가 흔쾌히 도와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꿈만 같았다.

떠나기 전 검무극은 해송에게 말했다.

“그대 눈빛 보고 온 거요. 아들은 그대가 살렸소.”

검무극이 밖으로 나오자 안에서 참고 참았던 해송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울음과 친구의 울음이 더해졌다.

검무극이 기다리고 있던 적연에게 말했다.

“다시 통천각에 기별해서 천화문과 소야방에 관한 자료 보내라고 하고, 연회가 언제 열리는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함께 마차를 향해 걸어가던 적연이 덧붙여 말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가?”

“이런 일들을 일일이 다 챙기시는 것 말씀입니다.”

“너희가 태워주는 마차 타고 와서, 한줄기 진기로 치료해주고, 또 너희가 태워다주는 마차 타고 연회장에 가서 똥오줌 못 가리는 놈들 혼내주고. 자, 여기 어디에 대단한 일이 있나? 대단한 건 친구를 위해 소교주를 찾아가자고 한 저 악공의 용기다. 아들의 정의를 위해 거대 문파의 자제에게 죗값을 치르게 해달라는 아비의 용기고. 모친을 위해 안 아픈 척하는 아들의 인내고. 대단하다는 말은 이런 곳에 붙이는 거다.”

하지만 적연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소교주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적연이 마차 문을 열었다. 검무극이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고집도 부리고. 자네 달라지고 있어. 뭔가 반항적이야.”

적연이 마차 문을 닫으며 말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창밖으로 적연을 보며 검무극은 미소를 지었다. 회색빛 배경이었던 그들에게 조금씩 색이 채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마차는 대단하면서도 대단하지 않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16 절대회귀-267화 16

제267회 나하고는 급이 안 맞지.

다음 날, 통천각 무인이 곧장 달려왔다.

“여기 부탁하신 천화문과 소야방에 관한 자료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내게 빠르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아예 호남지단 근처에 통천각 임시 지부를 열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소교주의 위력이다.

나는 통천각 무인이 내민 자료를 살펴보았다.

“천화문의 규모가 상당하군요.”

원래 큰 문파인 줄은 알았지만, 그 규모와 내실이 상당했다.

“네, 명실공히 호남제일문파입니다. 본교에 사(四), 사도맹에 사(四), 무림맹에 이(二). 이 정도 비중으로 교류하며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천화문 뿐만 아니라 이렇게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며 자신들의 힘을 키워나가는 문파들이 있었다. 주로 천화문처럼 덩치가 큰 문파들이 그러했다.

“여소광과 함께 추진했던 사업이 뭐였소?”

“그쪽 관련해서 조사 중입니다만,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 단주도 그렇고 천화문주도 그렇고, 일을 굉장히 은밀하게 처리했습니다.”

통천각의 정보력으로 알아내지 못했다면 외부 조사로 알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알겠소. 그 조사는 잠시 멈추고 두 문파의 후계 구도를 조사해 주시오. 현 문주가 내려오게 되면, 누가 가문을 이어받는지, 또 우리에게 유리한 후계자가 누군지 상세히 조사하시오.”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통천각 무인이 돌아가고 나는 곧장 적연을 불렀다.

“연회는?”

“오늘 저녁에 있습니다.”

“호남지단 무인 중 실력 좋은 이들로 오십 명만 추려서 연회장 근처에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적연이 나가고 나는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대들이 완벽한 거래를 하고 있을 때, 가장 완벽해야 할 자식들은 최악이 되고 있었소.’

* * *

오늘도 무신회 소속의 젊은 남녀들은 연회장에서 웃고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천화문의 서청(徐淸)이 있었다.

이 모임은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해 유지되는 모임이었다.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집안이었고 다음이 개인의 무공실력이었다.

서청은 그 두 가지 모두 최상위에 속한 포식자로 무신회의 회주였다.

무신회의 이인자는 소야방의 석풍(席豊)이었다.

하지만 이인자 석풍은 서청의 옆자리가 아닌 구석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잘 어울렸는데 근래 자신을 대하는 서청의 태도가 달라졌다. 왠지 모르게 차갑게 대하면서 자연 서청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였다.

“오라버니, 저도 한 잔 줘요.”

“네가 따라 마셔.”

서청의 주위에는 미녀들도 많았는데, 그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요즘 들어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여자와 놀아도 재미가 없었다. 화끈하고 자극적인 뭔가가 필요했다. 솔직히 그는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몇 달 전, 용화방 무인들과 시비가 붙었다. 그때 서청은 참지 못하고 놈들을 베었다. 그때 죽인 사람이 셋, 그것이 서청의 첫 살인이었다.

함께 있던 석풍과 놈들의 시체를 은밀히 묻었다.

그날 이후였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진 것이. 사람을 찌르던 그 순간의 짜릿함이 잊히지 않았다. 이후에 두 사람을 더 죽였다.

처음은 밤길을 가던 중년 여인이었다. 무공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죽이고 싶다는 열망을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베어버렸다. 여인의 품을 뒤져 도적들에게 당한 것처럼 꾸미고 그곳을 떠났다.

처음 죽였을 때보다 심장이 빨리 뛰진 않았다. 그래서 며칠 후 한 사람을 더 죽였다. 이번에는 천마신교 호남지단의 하급 무인이었다. 죽여선 안 될 사람을 죽여서였을까? 이번에는 첫 살인 때보다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한 번 피 맛을 보자, 걷잡을 수 없는 살육의 욕망이 깨어났다.

서청이 술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나가면서 석풍을 툭 치고 갔다. 그냥 부딪친 건지 일부러 그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석풍은 기분이 나빴다.

석풍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태도가 바뀌었는지. 자신의 말실수 때문이었다. 술에 취해서 서청이 죽인 용화방 무인들 이야기를 무심코 꺼낸 것이다. 그때 그 새끼들, 하면서 가볍게 꺼낸 이야기인데 그때 서청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보며 아차 했었다. 젠장! 그 뒤끝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서청이 뒷간에서 소피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누군가 구석진 곳에서 보법 수련을 하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얼마 전에 똑같이 보법 수련하던 놈이 있었다. 술이나 나르는 놈이 건방지게 무공수련을 해? 그래서 석풍과 비무를 시켜서 박살을 냈는데.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는 생각에 서청은 함께 있던 이들을 손짓해 불렀다. 우르르 몰려온 그들이 보법 수련하는 청년을 보며 놀잇감을 찾았다는 짓궂은 눈빛을 교환했다.

“이봐.”

서청이 부르자 보법 수련을 하던 청년이 돌아섰다.

그를 보자 서청은 흠칫 놀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어리숙하면서 순진한 얼굴을 기대했는데, 잘생긴 미공자였다. 그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너 누구냐?”

술이나 나르는 놈이라 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기품이 있었다. 과연 반응도 일하는 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는 너는 누구냐?”

검무극이 되묻자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청의 신경을 건드린 상대가 어떻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되는 표정이었다.

“자존심이 강하시다? 하긴 무인에겐 자존심이 생명이지.”

서청이 자존심을 언급했다. 언제나 그가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자존심으로 살살 불을 피우면 상대는 언제나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지금처럼 보는 눈이 많을수록 잘 통한다.

“남자답게 나왔으니 실력 발휘 한 번 해야지. 비무 한 번 어때?”

“누구와? 너와?”

그러자 주변에서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남의 후기지수 중에서 서청을 이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하고는 급이 안 맞지.”

서청이 석풍에게 네가 상대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석풍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저런 애송이와 자신은 급이 맞겠나? 그런데도 굳이 저런 놈을 상대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려는 거다.

“나는 지난번에 했으니 이번에는…….”

“네가 해!”

서청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기에 석풍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실력 때문이 아니라, 천화문의 위세 때문이었다.

그때 검무극이 석풍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누구냐?”

“소야방의 석풍이다.”

그러자 검무극이 과장되게 감탄했다.

“오! 소야방의 후계자가 뛰어난 기재라고 들었는데. 실력으론 호남에서 제일가는 후기지수라고! 너였구나! 영광이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석풍은 얼떨떨했다. 이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누군가에게 칭찬받은 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더욱더.

그러다 검무극이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아, 아닌가? 호남제일의 실력인데, 남의 명령을 들을 리가 없잖아?”

순간 석풍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든, 의도적으로 자신을 놀리는 것이든, 제대로 그를 도발하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서청에게 말했다.

“네가 대단하구나. 소야방의 후계자를 수하로 부리고. 너는 누구냐?”

자신에게 왔던 찬사가 한순간에 서청에게 넘어가자 석풍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청이 실실 웃는 모습에 화가 더 치밀어올랐다.

“닥쳐라!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대는 거냐?”

석풍이 검무극에게 달려들려던 바로 그 순간.

“이렇게 날 공격하면 정말 저 사람 수하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인데.”

석풍이 흠칫 동작을 멈췄다.

검무극은 그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자존심이 활활 타는 장작불로 뛰어드는 사람은 석풍이었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 그런가 보네. 다들 널 저 친구의 수하로 여기는 눈빛인데?”

석풍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나서서 상하 관계가 아니라 친구라고 해줘야 할 상황이었는데, 다들 서청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서청이 나섰다.

“뭘 저깟 놈의 이간질에 휘둘리냐?”

석풍은 휘둘린다는 표현을 써가며 말리는 서청이 더 짜증 났다. 이어지는 말은 더 짜증 났고.

“계집애처럼 그만 짜증 내고 저 이상한 놈과 비무부터 하자.”

이런 말이 사람을 얼마나 화나게 하는지 잘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그때 검무극이 석풍에게 물었다.

“근데 너, 진짜로 싸우면 저놈 이기지?”

“!”

누군가는 이렇게 물어봐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말이었고, 절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소야방이 천화문보다 약하니까 참는 거잖아?”

사실이었다. 제대로 붙으면 서청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체격도 석풍이 더 좋았고, 무공도 절대 밀린다고 생각지 않았다.

순간 그곳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침묵을 깬 사람은 서청이었다.

“왜 아니라고 안 하지?”

하지만 석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청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끝까지 말 안 할 거야?”

여전히 석풍은 말이 없었다.

서청의 입에서 막말이 흘러나왔다.

“이 새끼 봐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보네?”

사실 지금 석풍은 말은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아혈이 제압당한 것은 분명 아니었는데, 뭔가 보이지 않는 기운이 자신의 턱과 정수리를 아래와 위에서 꾹 누르는 것만 같았다. 서청에게 너무 화가 나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서청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고?”

퍽!

서청의 주먹에 석풍의 턱이 돌아갔다. 순간 자신을 누르던 힘이 사라졌다.

“그, 그게 아니라…….”

퍽! 퍽!

주먹이 석풍의 얼굴을 연속해서 때렸다. 설마 자신을 때릴 줄 몰랐던 석풍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네 번째 주먹을 피하며 석풍도 주먹을 날렸다.

퍽!

설마 석풍이 반격할 줄 몰랐기에 서청은 붕 날아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채 서청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감히! 너 돌았어?”

더 놀라고 당황한 사람은 석풍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간 것이다. 이번 역시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는데, 석풍은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고 여겼다.

석풍이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야! 사람 좀 그만 무시해!”

지금껏 참아왔던 말이 터져 나왔다.

서청이 살기를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석 공자께서 지금껏 불만이 많으셨던 모양이군.”

석풍은 두려움과 후련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젠장! 미친놈아!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서청이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라도 놈은 끝장을 보려 덤벼들 텐데.

그때였다. 그에게 한줄기 전음이 날아들었다.

―도와줄까?

전음을 보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석풍은 놈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일은 저놈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얄밉게도 놈은 팔짱을 낀 채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놈이 비무를 핑계로 널 불구로 만들어 버릴 거다. 너희가 자주 쓴 그 수법으로.

―너 뭐야?

―도움받기 싫어? 그럼 말든지.

서청이 주위를 물리고 공간을 만들었다.

“석 공자, 비무를 신청하오. 설마 겁쟁이처럼 피하는 것은 아니겠지?”

석풍의 마음이 급했다.

―어떻게 돕는다는 거지?

―서청이 저지른 악행을 밝혀! 그럼 도와주지.

―그럼 날 진짜 죽이려 들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석풍은 서청의 눈에 피어오른 살기를 느꼈다. 정말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에 살고 죽는 놈인데, 사람들 앞에서 얻어맞았으니. 적어도 팔다리 하나쯤은 자를 놈이다.

반대로 싸우다 그를 죽이거나 다치게 해도 문제였다. 천화문의 후계자를 잘못 건드렸다간 그들이 그냥 있지 않을 테니까.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린 석풍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저놈 때문에 시작된 일인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악마 같은 놈이었다. 그랬기에 믿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서청이 다가서던 그때, 석풍이 큰 소리로 말했다.

“넌 얼마 전에는 시비가 붙은 용화방 무인들을 살해하고 시체를 파묻었지.”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는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 정도였는데, 이제 사태가 심각해졌다.

석풍이 다시 소리쳤다.

“길가는 행인도 찔러 죽이고, 심지어 마인까지 죽였지.”

한창 친할 때 해줬던 말이 다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서청은 반드시 석풍을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하면서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헛소리를 믿는 놈 없지?”

그곳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서청과 눈이 마주친 몇몇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안 믿지!”

“안 믿는다고.”

서청은 의기양양했다. 설령 믿는다 한들 감히 오늘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내는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때 연회장을 울려 퍼지는 한마디.

“나는 믿어.”

말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서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네가 저 헛소리를 믿는다고 치자.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서청의 물음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거?”

검무극이 문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먼저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적연이었다.

호위 무인들이 뒤따라 들어왔고, 그 뒤로 호남지단 마인 오십 명이 줄줄이 들어섰다.

“이 새끼들 뭐야?”

가까이 있던 놈들이 막아서려다 적연과 호위들에게 사정없이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누군가 적연의 가슴에 박힌 문양을 알아보았다.

“마교다! 마인들이다!”

그의 외침에 모두 얼어붙었다.

그제야 모두 상대의 가슴에 새겨진 악귀 문양을 보았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덜덜 떠는 놈부터 무릎부터 꿇고 보는 놈, 창문으로 달아나려다 붙잡히는 놈, 탁자 아래로 숨는 놈.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서청마저도 깜짝 놀랐다.

‘정말 마인들이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그였지만, 마교 앞에서 큰소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검무극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석풍이 죄를 모두 밝혔으니, 서청을 뇌옥에 가두고 조사 시작하도록.”

서청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누구 마음대로! 이 새끼야!”

그러자 적연이 차가운 마기를 드러내며 버럭 소리쳤다.

“말조심해라! 천마신교 소교주님이시다!”

그 말에 서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석풍과 다른 사람들도 기겁했다.

누군가 잽싸게 무릎을 꿇었고 다른 이들 역시 모두 무릎을 꿇었다.

“살려주십시오!”

다들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 아우성 속에 서청은 멍하게 선 채로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천마신교 소교주라고? 왜? 소교주가 왜 여길 와?”

검무극이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급은 안 맞지만, 특별히 비무 한 번 할까?”

14 절대회귀-268화 14

제268회 다들 잘 모르더라고요.

비무를 하자는 말에도 서청은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는 성격이었다. 석풍이 보고 있고, 다른 녀석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과 같이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검무극은 처음 만났을 때 서청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자존심이 강하시다? 하긴 무인에겐 자존심이 생명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청은 살심이 솟구쳤다. 눈앞의 검무극을 검으로 찔러 죽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려드는 마인들까지 모두 베어버리는 상상이었다. 모두가 놀라고 감탄하는 가운데 피를 뒤집어쓴 채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런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검무극의 저 맑고도 깊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어찌 감히 마교의 소교주와 검을 나누겠소?”

그는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마교의 소교주에게 달려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누군가 이렇게 애원했을 때, 그의 부탁은 들어줬나?”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서청은 기억해냈다. 얼마 전, 비무를 시켜 박살 낸 놈이 똑같이 애원했음을. 자신은 상대가 안 된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요?”

“이유는 아까 저 친구가 다 말하지 않았나?”

“저놈 말은 다 거짓이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석풍이 소리쳤다.

“시체를 어디 묻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그를 보며 서청은 이를 갈았다.

“저 머저리 새끼가!”

두 사람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서청의 시선이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그냥 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소. 하급 무인이었고, 지나가던 행인이었소. 내가 다 보상하겠소.”

검무극이 기도를 개방하며 마기를 발출했다.

그 순간 서청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물 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순식간에 온몸을 죄어오는 압박에 서청은 숨이 막혔다.

저항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려서부터 익힌 내공심법도, 검법도,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그 무엇도 소용없었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압살당해 죽거나,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새끼야! 대체 나한테 왜 지랄이냐고! 너도 온갖 것들 다 죽였을 거잖아!’

서청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제발 그만!”

그러자 거짓말처럼 자신을 짓누르던 마기가 사라졌다.

서청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앞에 검무극의 다리가 보였다. 마기를 버티는 중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그가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서청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억울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마교 소교주라면 오히려 자신을 더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에게는 더 하찮은 것들일 텐데.

“보상하겠다니까. 그 가족들이 평생 만져보지 못할 돈으로 보상하겠소. 그럼 그들의 죽음이 오히려 더 값진 것이 되지 않겠소?”

검무극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서청은 그 웃음을 오해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미 죽음으로, 혹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으로 결정지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 이거지. 아무리 마교라 해도, 우리 천화문은 못 건들지.’

언젠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있었다. 우리 천화문은 마교에서도 사도맹에서도, 그리고 무림맹조차도 원하는 자랑스러운 문파라고.

“아버지를 불러주시오.”

“그래, 불러주지.”

흔쾌한 검무극의 대답에 서청은 안도했다.

‘됐다, 난 괜찮아. 별일 아니야. 그 하찮은 것들 몇 죽였다고 내가 어떻게 되진 않을 거야. 마인 놈 역시 하급 무인이었으니까.’

중요 인물을 죽이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서청은 두려움을 떨쳐냈다. 언제나 그랬듯 아버지가 오시기만 하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다음으로 검무극은 석풍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석풍은 검무극이 다가가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이 소교주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서청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소교주 때문에 넘기게 된 것인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넌 가서 아까 말한 그대로 진술하면 돼.”

그러자 석풍의 시선이 저 앞에 서 있는 서청을 향했다.

검무극은 석풍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그래, 천화문이 겁나서 진술을 번복할 수도 있겠지. 자, 그때부터는 누굴 겁내야 할까?”

검무극이 그의 얼굴 앞에서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주먹이 꽉 쥐어지는 순간!

콰쾅!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눈앞에서 터진 천둥소리에 석풍은 혼비백산했다. 진짜 천둥소리였다.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난다고? 저 주먹에 맞으면 온몸이 가루가 될 것이다.

“아닙니다, 솔직히 다 말하겠습니다. 놈이 저지른 악행이 더 있습니다.”

그는 서청의 죄를 다 일러바치면 자신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체를 같이 묻고, 이곳에서 일하던 청년을 일방적으로 패서 불구로 만들뻔하고. 이런 일 정도는 죄로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다. 검무극은 굳이 그 착각을 깨지 않았다.

“역시. 너는 처음 볼 때부터 똑똑해 보였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청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봤자 나는 못 건든다. 건드릴 수 있었다면 벌써 건드렸지.’

겁주고 건들 수 있는 것은 소야방 같은 곳이다. 천둥소리에 그는 더 확신을 가졌다.

검무극이 신호를 보내자 호남지단 마인들이 와서 그곳에 있던 서청과 석풍, 다른 녀석들까지 모두 내공을 제압한 후 데리고 나갔다.

서청이 자신의 양팔을 붙잡으려는 무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내 발로 걷겠다!”

서청은 끝까지 당당했다.

그가 너무 당당하니까 함께 끌려가던 녀석들의 표정도 다소 풀어졌다. 잔뜩 겁을 먹었다가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끌려가게 되니까 ‘이거 별것 아니잖아?’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텅 빈 연회장에 또 검무극과 호위무인들만 남았다.

적연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해결하셨군요.”

“내가 말했잖아? 이 일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비무를 해서 서청을 박살 내버리실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보러 올 텐데, 그러면 쓰나?”

검무극은 이 순간 두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이곳에서 폭행을 당한 해진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그를 폭행한 서청의 아버지로 끝나게 될 것이다.

“이 아버지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

* * *

천화문주 서백중(徐伯仲)은 한창 회의 중이었다.

강렬한 눈빛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는 호남의 작은 문파에 불과했던 천화문을 호남제일문파로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평생을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그는 오늘도 천화문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수족인 유맹(柳孟)이 급하게 들어와서 전음으로 보고했다.

―공자께서 천마신교 호남지단에 붙잡혀 가셨습니다.

유맹의 보고에 서백중은 아무 동요도 하지 않았다.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서백중은 아들이 붙잡혀 갔다는 보고에도 차분했다. 그는 하던 회의를 끝까지 마쳤다. 유맹의 보고를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함께 있던 이들을 모두 내보낸 후, 비로소 그가 물었다.

“소교주가 잡아간 거냐?”

“네, 그렇다고 합니다.”

여소광이 죽고 천마신교의 소교주가 지단에 와 있다는 소문이 호남지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내 자식인 것을 알고 잡아갔느냐?”

“그렇습니다.”

순간, 서백중의 눈가에 감출 수 없는 언짢음이 스쳤다.

“어쩌다가?”

유맹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공자께서 살인을 저지른 모양입니다.”

서백중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깟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누굴 죽였나?”

“여럿인데, 문제는 그중 마교 호남지단 무인도 포함된 모양입니다.”

“멍청한!”

죽여서 멍청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죽이고 확실하게 뒤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모두가 있는 곳에서 밝혀진 사실이라 이번 일을 무마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데 왜 마교에 붙잡혀 간 건가?”

“그 자리에 소교주가 있었답니다.”

“우리 애가 초대한 건가?”

“거기까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인된 바로는 연회에서 소야방의 석 공자와 싸움이 났는데, 그 과정에서 석 공자가 다 누설해 버린 모양입니다.”

유맹은 서백중의 평정심에 언제나 놀라곤 한다. 자식이 마교에 붙잡혀 간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석풍에 대한 분노와 살기를 드러낼 법도 한데,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이 평정심 속에 파묻혀 잊힐 것 같은 일들을 반드시 기억해서 보복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석풍은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마차 준비하게.”

* * *

“소교주를 뵙습니다.”

서백중은 정중히 검무극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문주님.”

검무극의 외모에 서백중은 내심 놀랐다. 우선 이렇게 젊다는 사실에 놀랐고,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을 외모에도 놀랐다.

“소교주께서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습니다.”

“다행히 아버지를 닮지 않는 덕분에 그런 소리 자주 듣습니다.”

천마를 언급하자 서백중은 내심 긴장했다.

“교주께서 들으시면 섭섭하다 하시겠습니다.”

“사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살기에는 더 편할 겁니다. 우리 문주께서 이렇게 편하게 저를 대하지도 못할 테고요.”

“제가 초면에 무례를 범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저는 편한 것 좋아합니다.”

검무극이 활짝 웃었다.

서백중은 내심 소교주가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느꼈다. 대화에 앞서 저런 말을 던지면 상대는 불편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채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제법이군.’

하긴 아무리 젊다고 마교의 소교주를 쉽게 생각해선 안 될 일이지.

“제 자식놈이 사고를 쳤다고 들었습니다.”

“더 좋은 일로 우리 문주님을 뵈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일이 바빠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서백중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히 포권했다.

같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젊을 때 그럴 수 있다고 해주기를 바라는 사과였는데, 검무극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그렇더군요.”

서백중이 다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요놈 봐라.’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의 말투는 더욱 공손해졌다.

“아시겠지만 우리 천화문은 호남에서 제일가는 문파입니다. 문도의 숫자도 제일 많고, 지닌 고수도 가장 많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세를 과시한 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집안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고 선처를 바랍니다.”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곤란합니다.”

“본문에서 귀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겁니다. 그 일을 해나가면서 평생 죗값을 갚겠습니다.”

돌려 말했지만, 돈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은 대부분 돈과 칼로 해결했기에, 이번 역시 돈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마교 소교주를 칼로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결국 원하는 게 돈 아니냐? 얼마를 원하는 거냐? 이십만 냥? 삼십만 냥?’

그러자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 일은 여 단주와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죽은 여소광이 언급되자 서백중은 흠칫 놀랐다.

‘이거였구나.’

이제 서백중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죄지은 놈이 어디 자기 자식뿐이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자기 아들을 붙잡은 것은 여소광과 벌인 일을 밝히라는 압박이었다.

‘십만 냥, 이십만 냥이 아니라 수백만 냥을 뱉어내란 말이구나!’

그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말해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에 술을 나르는 아이를 위해서 시작된 일이고, 여소광과 관련한 일은 천마신교 지단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본보기라는 것을. 설령 말해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속뜻이 있을 거로 의심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한결같이…….”

검무극은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다들 잘 모르더라고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백중은 이렇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상대는 자신이 내어줄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바쁘신 분 시간을 제가 너무 뺏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백중이 정중히 포권한 후,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그곳에 적연이 들어왔다.

검무극이 적연에게 말했다.

“서청 그놈, 흠씬 패 버릴 걸 그랬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들 얼굴도 안 보고 돌아가잖아?”

“화가 나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아니. 아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아무리 화가 나고 미워도, 마교에 붙잡혀 왔다면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얼굴 정도는 보고 가야 마땅한 일이다.

한데 지금 서백중은 이제부터 나를 어떻게 상대할지에 모든 정신이 팔려 있다. 당신들도 서로를 안 보고 있구나. 정말 지독하게도 안 보고 있구나.

저 멀리 걸어가는 서백중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로 왔으면 내 싸움은 더 힘들었을 텐데.”

그때 잠시 발걸음을 멈춘 서백중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검무극이 창가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백중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이 의미 없는 인사 대신 아들을 만났어야지.”

야단을 치든 두들겨 패든, 구해주겠다고 약속을 하든. 아들을 만났어야지.

하긴 그런 부자지간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 * *

늦은 밤 서백중은 홀로 강가에 앉아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일정한 보폭으로, 마치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걸을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누군가 다가왔다.

한 남자가 안개를 걷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삿갓을 깊게 눌러써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묘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낚싯대가 드리워진 호수를 바라보며 서백중이 말했다.

“아들이 마교의 소교주에게 잡혀갔소.”

마교란 말이 나왔고 소교주란 말이 나왔다. 두 단어가 합쳐져서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말이 되었음에도 삿갓을 쓴 남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해결해 주겠소.”

남자는 왔을 때와 똑같은 발걸음 소리를 내며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15 절대회귀-269화 15

제269회 네 아버지 다시 봤다.

저벅저벅.

일정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삿갓 사내가 도착한 곳은 작은 공방(工房)이었다.

남자가 삿갓을 벗어 벽으로 던졌다.

삿갓이 벽에 걸린 황의 장삼 위에 가볍게 걸렸다.

남자는 가늘고 긴 눈을 가진 중년인이었다. 신묘한 기운을 드러내는 눈빛은 온갖 권모술수를 이겨냈으며,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은 여러 풍파를 겪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작은 의자에 앉아서 목각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작은 공간엔 조각칼이 나무를 잘라내는 소리만 들렸다. 남자의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나무를 조각했는데 손가락 크기의 목각인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때 그곳으로 한 청년이 소리 없이 들어섰다. 눈빛에 정기가 서린 그는 호방하면서도 시원하게 생긴 미남자였다.

그가 나무를 깎고 있는 중년 남자의 등 뒤로 접근했다. 그의 보법은 예사롭지 않았는데 검을 뽑고, 걸음을 걷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쉬이이익.

뽑혀 나온 청년의 검이 중년인의 목 옆에 닿았다.

사각거리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목에 겨눠진 검 때문이 아니었다. 중년인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조각칼은 어느새 검을 휘두른 청년의 눈앞에 떠 있었다.

청년은 검을 거두고 허공에 있는 조각칼을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조각칼은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청년이 내력까지 써서 움직여 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이윽고 청년이 조각칼을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을 때, 중년 남자가 말했다.

“고수는 뒤에서 날아든 공격에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수라 불리는 거지. 고수를 죽일 때는 눈을 보고 죽여야 한다.”

그 말에 청년이 물었다.

“그게 더 어렵지 않습니까?”

“그게 더 쉽다. 그걸 깨달아야 고수를 죽일 수 있는 진짜 고수가 되는 거다.”

사각사각.

다시 조각칼이 나무를 깎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허공에 떠 있던 조각칼은 중년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애초에 조각칼은 중년 남자의 손에서 떠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청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다.

창밖으로 공방 주위에 서 있는 무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글자는 청년의 가슴에 새겨진 것과 마찬가지로 멸마(滅魔)였다.

이들은 바로 무림맹 최정예인 멸마대의 무인들이었다.

청년은 현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멸마대주인 진하군(秦夏君)이었다. 검무극과 인연이 있었던 진하령의 오라비가 바로 이 청년이었다. 그는 멸마대에 들어간 이후, 오직 실력만으로 멸마대주의 자리에 올랐다.

중년 남자는 그의 사부인 백천경(伯千鏡)이었다.

“요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구나.”

아직 진하군은 할아버지이자 무림맹주인 진패천의 무공을 전수받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제 실력으로 당당히 후계자가 되기를 바랐다.

자신의 손자라고 어떤 특혜도 주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잠을 줄여가며 수련하고 있습니다.”

진하군이 공방 중앙에 놓여 있는 장식대로 걸어갔다. 장식대 위에는 백천경이 손수 깎은 무인 인형들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진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의를 입은 무인과 흑의를 입은 무인들의 싸움. 마치 흑과 백의 싸움을 묘사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진하군이 말했다.

“근래 마교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습니다.”

백천경은 말없이 조각에만 열중했다.

“새로 소교주가 된 검무극이 마존을 모두 장악하면서 세를 키워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도 백천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이 깎고 있던 나무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잘 깎였는지를 살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자가 신경 쓰입니다.”

그러자 백천경의 손놀림이 멈췄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장식대에 있는 제자에게로 걸어갔다.

“여기 이 싸움이 어떻게 보이느냐?”

“백의를 입은 무인들이 불리해 보입니다.”

“백의 무인들의 숫자가 더 많은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이자 때문입니다.”

진하군은 싸움을 주도하며 검을 휘두르는 흑의 무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잘 봤다. 이자 때문이다. 이자가 판을 장악한 채 싸움을 주도하고 있지.”

백천경이 몸을 낮춰서 작고 기다란 눈으로 그 나무인형을 바라보았다.

“이 역할을 하고 싶으냐?”

“네, 저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아니, 반드시 설 겁니다.”

“그래, 어려서부터 너는 그래왔지. 언제나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지.”

진하경은 사부가 이런 칭찬을 해줄 때마다 가슴이 벅찼다. 그래서 매사에 더 열심히 수련했고,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 백천경을 아버지로 생각하며 살아온 그였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는 검무극이다.”

진하군은 반박하지 못했다. 검무극은 역대 후계자 중 가장 화려하게 소교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반면에 자신은? 아직 정식으로 후계자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다.

백천경이 그 인형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만졌다.

“어떻게 이 기세를 꺾을 거냐?”

진하군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검무극이 현재 호남지역에 와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천화문주의 자식을 억류한 채 천화문을 압박하고 있다더군요.”

그는 마음속으로 경쟁자라 여기는 검무극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천화문은 막강한 힘을 갖춘 문파이지만, 홀로 마교를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만약 네가 그들을 마교의 손아귀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

백천경의 시선이 영웅 인형을 향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네가 주도할 수 있을 거다.”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 천화문은 본래 마교와 사도맹 사이를 오가던 문파가 아닙니까?”

외부에 알려진 천화문은 마교가 사, 사도맹이 사, 무림맹과는 이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천경의 시선이 다시 인형을 향했다.

“쉬운 일을 해서 저 자리에 설 수 있겠느냐?”

진하군은 매사 자신만만한 사람이지만, 이번 일만은 큰소리를 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선 멸마대를 이끌고 호남지단을 쳐서 천화문주의 아들을 구해내고 싶습니다만…….”

그랬다간 마교와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영웅은 고사하고 천고의 죄인이 될 수도 있는 일.

잠시 고민하던 진하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교를 상대함에 있어서 멸마대주가 임기 중 사용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이 있습니다. 제 특별권한을 맹주께서 받아들여 주신다면 무림맹의 이름으로 마교에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천화문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문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천화문은 그 자체로도 큰 문파지만 그를 따르는 수십 개의 중소방파가 있다. 천화문을 정파로 돌려세운다면, 이보다 큰 공은 없을 것이다.”

“천화문주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껏 정사마 사이에서 얄밉도록 줄타기를 잘해 낸 것도 그렇고, 나중에 사도맹과 결탁해서 우리가 도와준 것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진하군은 여기저기 발을 걸친 천화문주를 여우 같은 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백천경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한 마디.

“그 점은 내가 해결하겠다.”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강호정세에 밝은 사부였지만, 무림의 일에 직접 나선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진하군이 감동할 만한 것이었다.

“이번 일을 해내면 네가 무림맹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될 거다. 그게 내가 나서는 이유지.”

진하군이 정중히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부가 이렇게 나서준 이상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 당장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진하군이 영웅 인형을 손가락으로 툭 쳐서 눕혔다.

진하군이 나가고 백천경은 계속 인형을 깎았다.

사각사각.

얼마나 인형을 깎았을까?

백천경은 장식대로 와서 쓰러진 인형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새로 깎은 인형을 판세의 중앙에 내려놓았다. 자신인지, 진하군인지 알 수 없는 인형은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 * *

천화문주 서백중이 다녀가고 며칠이 지났다.

그는 아들을 구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이대로 아들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검무극은 조용히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를 기다리며 시천비술을 연마했다.

시천비술은 수련하면 할수록 아주 조금씩 시간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천비술을 펼쳐서 내공 회복 시간과 얻어내는 시간 차이를 비교해서 시간적인 이득을 보게 되는 순간, 수련은 무조건 시천비술을 펼쳐서 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비술인 만큼 쉽지 않았지만,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시천비술 수련을 마치고 대청에서 잠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적연이 서청을 데리고 들어섰다. 자신을 만나고 싶다고 간청해서 데려오라고 한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청이 항의하듯 소리쳤다.

“왜 아버지께 연락하지 않는 거요?”

그는 지단의 뇌옥에 갇혀 있었다. 뇌옥에 갇혀 있었지만,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연락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연락했다면 아직 안 오셨을 리가 없지. 소교주,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면 소교주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거요.”

뇌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마교가 이러는 것은 천화문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자신을 가둘 리가 없었다. 행인이나 하급무사, 그깟 하찮은 것들 몇 죽였다고, 천화문의 후계자를 가둘 리는 없지 않나?

“네 아버지는 이미 다녀갔다.”

검무극의 말에 서청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오? 설마 다녀갔는데 나를 만나지 않고 가셨다는 거요?”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청은 놀라고 당황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잠시 멍하게 서 있던 그가 이리저리 오가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이간질을 하려면 제대로 하시오. 마교 소교주면 소교주답게 약속대로 아버지에게 연락하시고.”

그가 탁자로 걸어가서 떨리는 손으로 차를 따라 마시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다시 돌아섰다.

아버지가 다녀간 사실을 믿지 않았다가 또 믿기도 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제 큰일 났소. 아버지가 나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갔다는 것은 정말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니까.”

그때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너는 네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순간 서청은 움찔했다.

“소교주,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알고 있소?”

검무극은 그의 모습이 회귀 전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그가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너는 뭘 그리 잘 안다고 잘난 척이냐면서 더욱 거칠게 대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해 대답할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였을 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지단의 수하가 와서 통천각에서 날아온 긴급전서를 전했다.

호남지단 단주를 누구로 정했는지에 대한 연락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청을 풀어주라는 기별이었다.

이런 전서가 날아들 줄 몰랐기에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통천각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아버지의 허락도 있었다는 의미. 그렇다는 것은 막대한 권력이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상세한 사정을 적어서 보내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자, 이제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소교주가 된 이후에도 아버지의 시험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서 공자를 풀어줘.”

풀어주란 말에 적연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적연이 서청의 내공을 풀어주었다.

서청은 날아갈 듯 기쁜 얼굴로 큰소리를 쳤다.

“내가 뭐랬소? 이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소?”

그가 성큼성큼 탁자로 걸어와서 차를 부어 마셨다.

“같이 한잔하겠소?”

서청이 껄껄 웃으며 차를 마셨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본성을 되찾았다.

그가 적연을 노려보며 협박조로 말했다.

“난 이곳에서 본 얼굴들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소.”

적연이 독안으로 더 무섭게 그를 노려보자 서청은 시선을 검무극에게로 돌렸다.

검무극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왜 웃소?”

“재미있어서. 지금까지 맥이 풀려 있었거든. 우리 서 공자 잡으면 끝이 아니잖아? 양 공자, 진 공자, 천 공자…… 온갖 공자들이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날 텐데. 한데 본교를 움직였다고? 소교주인 내가 처리하고 있는 일인데, 그 일을 틀었다고?”

검무극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이건 이곳에 쳐들어와서 널 구해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굉장한 일이다. 네 아버지 다시 봤다.”

“그걸 이제 알았소? 내가 바로 천화문의 후계자요!”

그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큰소리를 쳤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요.”

“조만간에 또 보게 될 거다.”

서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자 적연이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천화문주가 무림맹이나 사도맹을 움직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천마전에서 이런 결정을 내릴 리 없다.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본교 통천각을 막았으니, 내 것을 써야지.”

적연은 오히려 검무극이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흥분은 강적을 만났을 때 느끼는 기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호위인 자신은 더없이 이성적이어야 한다. 한데 자신도 똑같이 흥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은근히 기대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호위무인인데.

적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검무극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 가십니까? 제가 모시겠습니다.”

“못 모신다. 기다리고 있어.”

“따라갈 수…….”

없었다. 검무극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리는 순간 순식간에 점이 되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없겠군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때 마당에 있던 삼호가 적연에게 말했다.

“쉽지 않죠?”

적연이 통증이 있는 눈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검무극은 지키기 가장 쉬우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수장이었다.

적연이 검무극이 사라져버린 하늘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대신 적들도 쉽지 않을 거다.”

25 절대회귀-270화 25

제270회 감당할 수 있겠소?

“안 돌아갈 거야?”

풍천교주의 말에도 고월은 바둑판과 들고 있는 책자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제 일도 다 끝났잖아? 돌아가자!”

드디어 중원에 정보조직을 만드는 일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검무극이 지어준 조직의 이름은 은월. 고월은 거기에 단이나 대를 붙이지 않았다. 순수하게 검무극이 지어준 이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가자!”

“안 간다.”

“왜?”

“총군사에게 바둑 이길 수 있을 때 돌아갈 거다.”

물론 풍천교주는 그 말의 이면에 깔린 고월의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총군사가 이끄는 통천각보다 은월이 더 나은 조직이 되도록 관리한 후에 돌아가겠다는 의미였다. 아무리 잘 만든 조직이라 해도, 수장이 직접 뛰면서 관리하는 조직과 아닌 조직의 차이는 엄연히 나기 마련이니까. 특히 조직을 만든 직후라면 더욱 수장의 부지런함이 필요한 시기다.

“이런다고 이공자가 알아주기라도 하겠느냐?”

“이공자 아니고 소교주님.”

“그놈이 그놈이지. 이제 목적한 바도 이뤘으니, 너도 마존들도 다 찬밥 신세가 될 거다. 구석에 처박아 두고 있다가 만나면 이러겠지. 누구시더라? 이젠 그때 그 군사란 말도 안 할걸? 아마 이러겠지.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라, 소교주 나가신다. 안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되는 게 인생이다. 누군들 안 챙기고 살고 싶겠냐?”

고월은 여전히 바둑판과 손에 들린 바둑책을 보면서 말했다.

“그런 말 이제 안 지겹냐?”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죽을 때까지 할 거다. 듣고 또 듣고. 그렇게 들어주는 것이 친한 사이다.”

“그럼 우린 너무 친한 것 아니냐?”

풍천교주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가로 걸어갔다.

“안 통해! 삐친 척.”

창가로 걸어가던 풍천교주가 그쪽으로 가려던 것이 아닌 척 자연스럽게 돌아서더니 이번에는 침상으로 걸어갔다. 열이 나는 시늉을 하며 이마를 매만지던 그때, 고월이 한발 먼저 말했다.

“아픈 척도 그만!”

그러자 결국 풍천교주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냥 이공자 욕이나 하자. 그나마 이게 제일 속이 풀린다. 아까 어디까지 했지?”

“비켜라, 소교주 나가신다.”

지겹다면서도 제대로 다 들어주고 있는 고월이었다.

“이제 소교주도 되었고, 은월도 다 완성되었으니 너는 뒷전으로 밀려날 거다. 조만간에 은월을 통천각과 합치면 어떨지 넌지시 물어볼 거다. 그러면 너는 어쩔 건데?”

“합치자고 하시면 합쳐야지.”

“이러니 이공자가 널 보면 얼마나 맛있게 보이겠어? 네 살점 다 뜯고 뼈까지 삭삭 다 핥을 거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말소리.

“정말 만날 때마다 제 험담을 하시는군요.”

깜짝 놀라 돌아보니 검무극이 웃으며 서 있었다.

“자넨 정말 놀랍도록 험담할 때만 찾아오는 재주가 있네.”

“하루 대부분을 제 험담하시는 건 아니고요?”

“가끔은 온종일 험담하고 잠꼬대까지 할 때도 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풍천교주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런 풍천교주에게 검무극이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교주님.”

“갑자기 왜 이러나? 미운 놈 떡 주기 신공인가?”

“은월이 완성되었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교주님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진 못했을 겁니다.”

“그새 또 둘이서 연락을 주고받았구먼. 나 빼고!”

이번에는 고월이 검무극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드리네요. 소교주가 되신 것, 감축드립니다.”

“자네 공이 크네.”

“제 자리에 빗자루를 세워두셨어도 대세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끼어들었다.

“그런 겸손 떨지 말라고. 그럼 진짜 그런 줄 안다. 죽도록 고생했다고 말해. 아무리 말해도 지 인생 힘든 것만 생각하는 게 인간들인데.”

고월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교주께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알아주시고, 칭찬해주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자 풍천교주가 언성을 높였다.

“그런 착한 척 말고, 네 진심을 말하라고!”

검무극과 고월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때 검무극의 시선이 뒤쪽에 놓인 바둑판을 향했다.

“이제 드디어 바둑까지 잘 두는 완벽한 군사가 되는 건가?”

검무극이 바둑판 쪽으로 걸어갔다.

고월이 함께 바둑판 앞에 섰다.

“나랑 한 판 둘까?”

“이제 막 배워서 아직 멀었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펼쳐진 형국은 초보의 단계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이쪽 싸움이 치열하군.”

검무극의 말에 고월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이번 일과 닮지 않았습니까?”

그 물음을 듣는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이미 고월은 호남지단에서 일어난 일을 다 파악하고 있음을. 어쩌면 그 문제를 고민하면서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석이 될 돌을 구하기 위해 이 수가 던져졌습니다. 응수타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사석을 구출하기 위한 수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모한 수죠.”

고월의 시선이 바둑판에서 검무극을 향했다.

“천화문을 구하기 위해 무림맹에서 둔 수죠.”

과연 고월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아가 검무극이 모르는 일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무림맹주의 손자이자 멸마대주인 진하군이 고유 권한을 발동해서 무림맹을 움직였습니다. 교주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셨고요. 물론 이렇게 저들의 요구를 받아주면 나중에 본교에서 요구하는 것을 무림맹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관례로 알고 있습니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아들을 시험까지 하는 셈이니, 아버지는 흥미롭게 이번 행보를 주시하고 계실 것이다.

“한데 저들은 서청이 저지른 짓에 대해 알고 있을까?”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로 생각합니다.”

주범인 서청과 그 죄를 까발린 석풍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신회 놈들은 모두 석방했다. 그들을 통해 연회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한데도 밀어붙인다?”

“비난을 감수할 정도로 큰 이득이니까요.”

검무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본 무림맹주는 패도적이지만 공명정대했던 인물이었다.

“어쩌면 저쪽 손자도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고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이 대답을 듣기 위해 검무극은 이곳까지 달려왔다.

달려온 보람은 있었다. 고월은 이미 작전을 세워둔 상태였으니까.

“천화문이 지금까지 본교와 무림맹, 사도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체의 힘도 힘이지만, 그들을 따르는 삼십여 개의 중소 방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정파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라 본교와 사도맹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천화문이 정파와 손을 잡은 것에 불만이 있겠군.”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들 방파를 모두 흡수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림맹은 요란만 떨고 내실을 거두지 못하는 꼴이 될 겁니다.”

“정말 좋은 계획이네!”

검무극은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고월은 자신의 계획에 문제점도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했을 때 무림맹이나 천화문의 반응입니다. 분명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에 대해 대비를 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들이 그런 상황을 그냥 지켜볼 리는 없었으니까.

갈등이 고조되면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는 법. 아버지가 서청을 풀어주라고 명령을 내린 이상, 그들과 힘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검무극이 백돌을 하나 주워들었다.

“죽은 돌을 무리해서 살리려 하니 응징해야지. 다만…….”

딱!

검무극이 싸움이 펼쳐진 곳과 다른 곳에 돌을 내려놓았다.

“노골적으로 잡겠다고 달려들면 필사적으로 살려고 발버둥 칠 테니, 잡으려는 반대쪽에서 수를 내볼까 한다.”

“성동격서군요.”

고월의 말에 검무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도 그 사람은 우리 동쪽에 있지.”

* * *

검무극은 동쪽을 향해 내달렸다.

십성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그의 중원을 좁게 만들었다.

새보다도 빠르게 달려온 그곳에서 검무극은 그를 만났다. 만나고자 한 반가운 이는 오늘도 객잔에서 식사하고 있었다.

―골고루 먹으라고 했더니, 여전히 편식하는군.

날아든 전음에 비사인은 피식 웃었다.

주위에 서 있던 일랑이 그에게 말했다.

“왜 웃으십니까?”

“그냥 실없는 사람 생각이 났소.”

야율한이 죽은 후 비사인은 완전히 실권을 장악했다. 그는 명실공히 사도맹의 든든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 그 모든 결과가 검무극 덕분이라 해도 무방했다.

―오늘 밤 절벽에서 봅시다.

―이제 그만 좀 봅시다.

* * *

그날 밤, 비사인이 절벽에 도착했을 때 검무극은 절벽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당신 등만 보면 왜 이렇게 밀어버리고 싶은지 모르겠소.”

“오늘 한 번 확 밀어버리시오.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이 안 들 테니까.”

비사인이 검무극 옆에 와서 섰다.

“왜 또 온 거요?”

“왜겠소? 당신 도움이 필요하니까 왔지.”

“무슨 마교가 만날 사도맹의 도움을 바라는 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사인의 마음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하다고 느낄 때쯤, 검무극은 이렇게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난다.

검무극이 앉은 채로 비사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 이 각도에서 보니까 당신 얼굴 꽤 잘생겼소. 여기선 당신 흉터도 멋있어 보이고. 사모하는 여인이 생기면 꼭 여기 앉혀두고 거기 서시오.”

“실없는 소리 마시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시오.”

“나와 일 하나만 합시다.”

“무슨 일을 하잔 거요?”

“근래 무림맹이 욕심을 부리고 있소. 한데 욕심이라면 우리도 빠지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소?”

비사인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천화문 일 말이오?”

역시 비사인도 천화문과 관련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천화문의 후계자가 검무극에게 잡혀간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거라 예상했는데, 뜻밖에 그들은 무림맹과 손을 잡았다. 그 일로 사도맹과 비사인은 촉각을 곤두세우던 참이었다.

“역시, 그대는 다 알고 있었구려.”

“당신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데 어찌 모른단 말이오? 동네에서 뛰노는 꼬마들도 다 알고 있을 거요.”

“알다시피 내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해서.”

“그래서? 왜 찾아온 거요?”

검무극에 대한 호의와는 별개로 이 일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하나의 큰 중립 세력이 어느 한쪽 편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소?”

“당신이라면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검무극이 얼마나 뛰어난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으니까. 그랬기에 비사인은 검무극을 의심했다.

“물론 나 혼자 해결할 수도 있었지. 우리 아버지만 아니면 말이오.”

“무슨 뜻이오?”

“공식적인 명령이 내려왔소. 천화문 후계자를 풀어주라고. 다시 말해서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말라는 의미요.”

“그래서? 나를 대신 이용하겠다?”

“뭐 그런 셈이오.”

비사인이 단호히 말했다.

“거절하겠소.”

돌아서려는 그에게 검무극이 말했다.

“셋으로 나눕시다.”

순간 비사인이 멈춰 섰다. 저 말을 듣고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는가?

“무슨 뜻이오?”

“천화문을 따르는 중소 방파들은 대부분 본교와 귀맹을 추종하는 이들이오. 이번 천화문의 독단적인 결정에 그들은 불만이 많을 것이오. 우리가 그들 모두를 흡수합시다.”

비사인은 흠칫 놀랐다. 천화문에만 집중하고 있느라고 거기까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이 다 흡수하지 않고, 왜 내게도 기회를 주는 거요?”

검무극은 솔직히 대답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오. 첫째는 아까 말했듯이 나 혼자 독단적으로 움직여서 그들과 충돌하기 곤란한 상황이오. 한데 당신들이 개입하면 상황은 달라지지.”

“두 번째 이유는?”

“당신들 밑으로 가고 싶은 이들을 억지로 끌어들여서 뭐 하겠소? 나중에 배신이나 하겠지. 우리가 급박한 상황이면 물불 가리지 않겠지만, 나는 굳이 보여주기식 세 불리기를 하고 싶지 않소. 그건 예전 방식이지.”

비사인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검무극에게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을지 고민했지만, 알 수 없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오히려 그 의중을 파악하기 쉬울 텐데, 검무극이기에 참 어렵다.

“마지막 이유는 뭐요?”

“궁금해서요. 당신도 알다시피 천화문은 본교와 그대들과 주로 교류했소. 한데 위기가 닥치자 무림맹과 손을 잡았소. 원래라면 당신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오? 자신들의 목숨과 운명이 걸린 일인데 상식 밖으로 움직였다? 대체 무슨 내막이 있기에 이러는 걸까? 그 일을 주도한 자가 누굴까? 당신은 안 궁금하오?”

비사인도 솔직히 대답했다.

“나도 궁금하오. 아니, 내가 더 궁금하오.”

“사실 그 이유만으로도 당신이 나설 이유는 충분하다고 보오.”

잠시 고민하던 비사인이 불쑥 말했다.

“그러다 내가 욕심을 내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천화문까지 흡수하려 들면?”

천화문은 사도맹과도 마교만큼의 교류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사도맹과 손을 잡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욕심내시오.”

“뭐요?”

“할 수 있으면 천화문과 손을 잡으시오.”

“그 정도로 정파 놈들이 미운 거요?”

“그래서가 아니오. 나도 천화문을 흡수할 작정이라 그렇소. 나도 이렇게 바라는데 당신 바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지. 경쟁합시다. 누가 천화문을 가질지.”

비사인은 말없이 검무극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만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벽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벽은 아니었다. 넘어서고 싶은 벽이다. 이대로 그냥 있지 말라고 자극하는 벽이다.

비사인이 불쑥 말했다.

“또 당신을 밀어버리고 싶어졌소.”

그러자 검무극이 일으켜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사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은 정말 의선에게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소.”

“본교 마의도 내게 푹 빠져서 불가능하오. 안 잡아주면 혼자 일어나야지, 어이구. 허리야.”

검무극이 엄살을 부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사인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호남에서 봅시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이었다.

검무극이 그에게 말했다.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할 고수들을 데려오시오. 저쪽에서 어떤 게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또, 나도 움직일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자 비사인이 도발적으로 말했다.

“감당할 수 있겠소?”

“내가 왜 감당하오? 나도 부를 거요. 당신들보다 더 무서운 마존들로.”

“정말 한 번을 안 지지.”

비사인이 돌아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당신 갈수록 멋있소!”

뒤에서 들려온 말에 비사인은 결국 실소하고 말았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뒤돌아봤을 때, 이미 검무극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저 멀리 밤하늘의 별들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검무극과, 그 총총한 별들을 올려다보며 비사인이 나직이 말했다.

“난 당신을 감당할 거요. 꼭 그런 사람이 될 거요.”

29 절대회귀-271화 29

제271회 우리도 왔다.

천화문주 서백중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인들이 웃으며 연무장을 지나가는 평소와 다름없는 광경.

아들이 풀려나고 한참이 지났음에도 마교는 조용했다.

‘역시! 대단하구나.’

서백중은 삿갓 사내를 떠올렸다. 그가 해내리라 믿었기에 부탁한 것이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해낼 줄은 몰랐다.

이제 정사마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시절은 끝났다. 정파에게 신세를 진 이상, 그들과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천화문에 최대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손을 잡아야겠지.

그때 수족인 유맹이 그곳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서백중은 그에게 은밀한 명령을 내렸다.

“이 초대장을 멸마대주에게 보내고 우릴 따르는 방파들에게도 소식을 전해라.”

그는 비밀 연회를 개최할 생각이었다.

이번에 정파와 손을 잡은 일로 자신을 따르던 문파의 수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끌어모으는 것은 하세월이지만, 와해는 한순간이니까.

그 일은 자신의 설득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멸마대주이자 향후 무림맹주가 될 진하군이 직접 와서 그들을 다독여야 한다.

‘자, 사람들은 내가 모을 테니 그대의 역량을 보여주시오.’

* * *

소검방주(小劍幫主) 종염(宗染)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호남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방파의 수장인 그가 오늘처럼 긴장한 적은 처음이었다. 대청을 오락가락, 물을 마셨다가 차를 마셨다가, 앉았다가 섰다가, 뒷간을 들락날락, 마당을 산책하다 다시 들어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들인 종태(宗泰)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항상 늠름한 모습을 보이던 아버지가 이렇게 긴장하다니. 심지어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대체 오늘 오는 손님이 누굽니까?”

아버지는 방도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외부로 내보냈다. 현재 소수의 믿을만한 무인들만이 방 내에 남아 있었다. 손님을 비밀리에 맞이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중요한 사람이 오는 게 확실한데, 아버지는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다.

“미리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 나중에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더라도 절대 동요해선 안 된다. 그저 조용히 내 지시에 따르기만 해라.”

그때 밖에서 수족의 보고가 들렸다.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대청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종태는 얼어붙었다. 젊은 남자의 얼굴에는 무시무시한 흉터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은은한 사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파 고수다!’

들어선 이는 바로 사도맹 후계자 비사인이었다. 그를 뒤따라 열세 명의 무인이 들어섰다. 비사인을 지키는 사도십삼랑이었다.

그들이 대청 사방으로 흩어지며 공간을 장악했다.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가 대단했다.

그들만으로도 종태는 숨이 막혔는데, 정작 제일 무서운 사람들은 맨 마지막에 들어왔다.

끝에 들어선 두 사람은 정말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었는데 종태의 오금이 저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은 바로 사도칠대고수(邪道七大高手) 속해 있는 절대고수들이었다.

괴악(怪惡).

온몸으로 싸우는 체술(體術)의 일종인 참격철인(斬擊鐵人)을 극한으로 익힌 그는 맨손으로 철검을 종잇장처럼 구겨버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잔혹해서 무림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는데, 자신의 신경을 건드린 상대에게 지독한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것으로 유명해서 꿈에서라도 만나기 싫어하는 사파고수였다.

광섬(光閃).

그는 사파에서 제일가는 쾌검술의 달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익힌 추뢰삼검(追雷三劍)은 사도의 쾌검 중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성격은 과묵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빠르지만 입은 느린 남자로, 그 역시 사파에서 일곱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였다.

비사인은 검무극의 조언을 받아들여 정말 무시무시한 두 고수를 데리고 온 것이다.

“소지존을 뵙습니다. 소검방을 이끄는 종염입니다.”

“반갑소. 종 방주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인사를 나눈 비사인이 괴악과 광섬을 소개했다.

그들의 정체를 알자 종염과 종태는 사색이 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말로만 듣던 사파의 절대고수들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종태는 비로소 아버지가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왜 상대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미리 알았다면 아버지 옆에서 덜덜 떨고 있었을 거다.

“여긴 제 아들입니다.”

종태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어렵고 위험한 자리였지만 일부러 아들을 동석시켰다. 이런 거물들과의 자리가 무인으로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경험이 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자제분이 아주 훤칠하고 총명해 보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아입니다. 너는 가서 차를 타오너라.”

종태가 잔뜩 긴장한 채 차를 타왔다.

들고 가는 찻잔이 떨렸다. 그 떨림을 비사인도 봤고, 종염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도맹의 후계자에게, 괴악과 광섬에게 차를 내주면서 떨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테니까.

그는 차를 가져다준 후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아버지와 비사인의 대화를 들었다.

“상석으로 앉으십시오.”

종염이 상석을 양보했지만 비사인은 상석에 앉지 않았다.

“상석은 종 방주께서 앉으시오.”

비사인은 마치 나는 네 자리를 차지하러 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종염이 조심스럽게 자기 자리에 앉자 비사인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천화문이 무림맹과 손을 잡은 일은 알고 계실 거요.”

“네, 알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종방주께서는 정파를 따르고 싶으시오?”

대답을 듣기에 앞서 비사인이 재빨리 덧붙였다.

“혹여 두 절세고수분을 모셔 온 것이 종 방주를 압박하기 위해서라고 오해하진 마시오. 이제부터 소검방을 지켜줄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모셔 온 거니까요.”

과연 사전에 비사인의 언질을 받았는지 괴악과 광섬은 어떤 기운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가만있었기에 비사인이 더 대단해 보였다. 무섭게 협박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그들을 조용히 차나 마시게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어떤 대답을 해도 본맹은 소검방에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을 거요.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그러니 편히 말씀하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종염은 자신의 대답에 따라 소검방의 운명이 바뀌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본 방은 정파를 따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정파라면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사람입니다. 지금껏 천화문을 따른 것은 그들이 사도맹과 깊은 교분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종염은 자신의 우려를 침착하게 전했다.

“이곳 호남은 대대로 마교의 힘이 강한 지역입니다. 본방이 천화문의 그늘에 있던 것도 마교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러자 비사인이 눈빛에 신뢰를 담아 단호히 말했다.

“그 칼날은 앞으로 우리가 막아주겠소.”

그러자 더해지는 종염의 걱정.

“천화문 역시 우릴 좋게 보지 않을 겁니다.”

비사인은 더욱 단호히 대답했다.

“그럼 사도맹도 천화문을 좋게 보지 않을 거요.”

종염이 비사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아들인 종태는 내심 놀라고 감탄했다. 그렇게 덜덜 떨던 아버지가 저런 당당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약속받아야 할 것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약속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사도맹 소맹주의 이름으로 약속하겠소.”

종염은 더는 끌지 않았다. 그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소검방은 앞으로 사도맹과 운명을 함께 하겠습니다.”

비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사도맹은 소검방과 운명을 함께 하겠소.”

소검방의 새로운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비사인은 곧장 작별을 고했다. 가야 할 문파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떠나기 전 비사인이 종염에게 말했다.

“많은 문파가 소검방과 뜻을 같이할 거요. 그러니 당당한 행보를 하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비사인과 사도십삼랑, 그리고 괴악과 광섬이 그곳을 나갔다.

그들이 떠나자 비로소 종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놀라 죽는 꼴을 보시려고 그러신 겁니까?”

“앞으로 무림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을 거다. 그때도 오늘처럼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는 아들이 잘 대처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잔망스러운 아들이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동석시키지도 않았을 터.

“한데 계약서라도 써서 약속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들이 약속을 어기려 들면, 그깟 계약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종태는 아버지의 새로운 면을 보고 있었다. 평소 천화문주에게 굽신굽신, 항상 웃으며 껄껄. 그런 아버지인 줄 알았는데.

“이런 결정을 단번에 하시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단번에 한 것 아니다.”

“네?”

“저들이 은밀히 보자고 기별 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다.”

종염이 아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어찌 그냥 결정을 내렸겠느냐?”

새삼 아버지의 뛰어난 면모를 확인한 종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순간이 이렇게 감격스러운 것을 보니, 지금껏 진심으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감격의 순간에도 한 가지 걱정은 뭐니 뭐니해도 마교였다.

“정말 마교가 그냥 있을까요?”

“당연히 그냥 있지 않겠지. 사도맹이 움직인 이상, 그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거다.”

종염의 시선이 비사인이 걸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마교 소교주가 중원에 나오면서 잠자고 있던 무림이 용트림을 시작했다.”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대나무처럼 유연하게 대처하겠습니다.”

아버지가 항상 했던 말이었다. 한데 이제 아버지의 생각이 바뀌었다. 오늘 이 자리에 사도맹의 후계자가 온 것처럼, 앞으로의 소검방은 아들이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다.

종염은 아들이 무림의 영웅이 되기보다는 안전하게 제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자신이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아비는 대나무처럼 처신해서 살아남았다. 하나 큰바람에는 결국 대나무도 꺾이기 마련, 너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라.”

이것이 변화의 물결 앞에서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 * *

천마신교 호남지단 수문장은 오늘도 변함없이 지단의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온종일 번을 서다 보면 제일 견디기 힘든 게 지루함이었다. 그래서 함께 근무하던 이들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곤 하는데, 오늘도 함께 번을 서던 수하가 소문을 전했다.

“천화문이 은밀히 연회를 개최하려는 모양입니다.”

“연회를? 어디서 들었나?”

“천화문의 연회에 음식을 대는 자를 알고 있습니다. 무림맹에서 굉장한 고수들이 올 거라는 소문도 있고요.”

소문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도맹 쪽 고수들이 호남에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뭔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소문 모두 마교 입장에서는 탐탁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수문장이 수하에게 말했다.

“요즘 분위기 안 좋으니까 괜히 입방정 떨지 마라.”

“한데 정파놈들에게 이대로 물러서는 겁니까?”

“그만!”

“네.”

수문장이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내가 봤을 때, 소교주님은 그냥 물러설 분이 아니시다.”

수하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호남지단주를 처리하고, 천화문의 후계자를 잡아들이는 과정을 직접 겪은 그들이었으니까. 분명 소교주는 자신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인물이었다.

그때 무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누가 옵니다.”

저 멀리 두 사람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냥 천천히 걸어오는데 느낌이 섬뜩했다. 수문장은 혹시 자신만 그렇게 느끼나 해서 수하들을 쳐다보았는데, 그들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떤 수하는 이미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수문장의 시선이 다시 그들을 향했다.

그냥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점차 그들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수하 중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상을 걸까요?”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군가 지단을 방문하는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상을 건다? 마인이 겁을 먹어? 이건 정말 비상을 걸자고 말한 수하를 몽둥이질로 다스릴 일이었다.

한데 수문장은 고민했다. 비상 걸어야 하나?

그사이 두 사람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두려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이제 수하들 전원이 검을 움켜쥐었다. 세상에 이런 존재감을 주는 무인들이라니. 적이라면 자신들은 다 죽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비상 걸어!”

마인 하나가 뛰어 들어갔고, 곧이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뎅! 데엥!

비상종이 울려 퍼지는데도 두 사람은 걷던 걸음 그대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두 사람이 정문 앞까지 다가왔다.

깡마른 외모에 차가운 눈빛을 가진 노인은 거대한 대도를 등에 차고 있었다. 다른 남자는 근육질의 거구였는데 감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운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마기임을 느끼자, 그제야 수문장은 안도했다. 그럼에도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몸은 떨렸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존재감에 수문장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마존들이다!’

그제야 정문을 지키던 마인들은 두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수없이 들었던 마존들 아닌가? 저 커다란 대도와 저 커다란 주먹, 그리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강력한 마기와 존재감.

그들은 바로 혈천도마와 권마였다.

정문 무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들은 기뻐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우리도 왔다!’

혈천도마는 그 작고 매서운 눈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소교주 어디 계시나?”

24 절대회귀-272화 24

제272회 왜 하필 우리냐?

마차로 걸어가는 진하군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여동생인 진하령이었다.

“연회에 참석한다고?”

“네가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긴. 우리 오라버니 잘 가라고 배웅나왔지.”

“왜 안 하던 짓 하냐고.”

일찍 부모를 여의고 두 사람은 서로를 의지하며 자랐다. 그래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진하령이 이렇게 자신을 배웅하러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검무극 그자 때문이냐?”

“무슨 뜻이야?”

“그자가 걱정돼서 나온 거냐고?”

진하군은 지난번 소룡전 때 검무극과 동생이 인연이 닿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검무극의 도움을 받아서 동생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도.

진하령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고, 맞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라버니가 걱정된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할 것이고, 검무극이 걱정된다고 하면 괜한 오해를 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절대 방심하지 말라고. 그 말을 해주려고 왔어.”

“나도 그자의 비범함은 알고 있다. 조심하마.”

진하령이 마차에 타려는 오라비의 팔을 잡았다.

“그를 대할 때 선입견을 버리고 봐야 해. 마인이니까 이러하겠지, 이런 생각 하지 말라고. 그는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진하군은 동생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아직 검무극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검무극 그자는 너무 컸다. 지금 그 기세를 꺾지 못하면 나중에는 손을 쓸 수도 없을 거다.”

진하령도 검무극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식은 놀라운 것들이었다. 처음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때가 생각났다.

―검연입니다. 인연 연(緣)자가 아니라 연기 연(煙)자입니다. 저는 이렇게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질 겁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그는 검무극이 아니라 검연이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정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으니까. 그래서일 거다. 한 번씩 그가 생각나는 이유는. 소교주가 되었다는데, 축하한다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었기에 진하군은 검무극을 적으로 여겼다.

“나는 믿는다. 그 어떤 악의도 협의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자 진하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저쪽이 마협(魔俠)이면 어떡하려고?”

마인이면서 협의를 갖춘 무인. 검무극을 봤을 때는 몰랐는데, 헤어지고 그를 떠올릴 때면 문득문득 마협이란 말이 떠올랐다. 구태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반드시 지키는, 그래서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망설이는 답답한 협이 아니라 거침없이 박살 내버리는 그런 마협 말이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있겠느냐? 그런 건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협의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강자존에 미쳐 있는 마인들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야.”

그렇게 진하군을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그를 수행하는 무인들이 말을 타고 뒤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진하령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선입견을 버리라는 말이었어.”

그녀는 오라비도 믿었고,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진하군의 오늘 행보는 무림의 패권을 다투는 일이었다. 야망이 충돌하고 욕망이 미쳐 날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저 멀리 달려가는 마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걱정을 하는 걸 보니, 어느새 자신은 어른이 되었고 무림은 새로운 시대를 향해 격변하고 있었다.

* * *

“왜 하필 우리냐?”

만나자마자 혈천도마가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도마가 신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마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 처음 불려 나왔으니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어서죠.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는데, 호남지단에 비상이 걸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권마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렇다면 잘 골랐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마 앞에서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세상에 몇 안 되는 사람이 혈천도마다.

“하면 나는 왜?”

당연히 공포 분위기는 권마 몫이라 여긴 혈천도마였다.

“어르신이 공포 담당인데요?”

“뭐?”

놀란 혈천도마가 다시 권마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 사람은 왜 불렀는데?”

“똑똑한 사람도 필요해서요.”

“이놈이!”

혈천도마가 버럭 화를 내기 전에 안으려 달려들었다.

“어르신!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얼굴 담당은 권마, 매운 생강 담당이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가 보법으로 내가 안으려는 것을 피했다.

“저 호남에 와서 완전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고요! 두 분이 와주시길 얼마나 바랐다고요!”

“네가 잘도 당했겠다. 누굴 괴롭히고 있었더냐?”

“오해십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럽게 혈천도마와 해후한 후 이번에는 권마와 인사했다.

“사부님, 뵙고 싶었습니다.”

권마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슨 도움이 필요한 거냐?”

정말이지 ‘무림을 정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해도 다른 말 없이 ‘가자!’라고 할 것 같은 권마였다. 그만큼 든든했다. 저 무뚝뚝함 속에서 느껴지는 반가움은 그래서 더 기분 좋았고.

다시 뵈니 너무 좋습니다, 사부님.

정말 혈천도마와 권마가 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았다.

“자, 이제 두 분도 오셨으니 무림 전체와 한판 붙어볼까요?”

두 사람에게 현재 벌어진 상황을 설명했다.

“……사도맹이 들어왔기에 우리가 움직일 명분은 충분합니다.”

“이미 사도맹과는 서로 흡수할 문파를 정했겠군.”

역시 노련한 혈천도마는 말하지 않아도 이번 합작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역시! 어르신입니다.”

사도맹을 지지하는 문파와 본교를 지지하는 문파는 확실히 나뉘어 있었으니까. 굳이 이 부분으로 비사인과 다툴 필요는 없었다.

“사도맹은?”

“지금 문파들을 흡수 중입니다.”

그러자 권마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우리도 가자. 시간 끌 것 없다.”

권마의 얼굴만 보여줘도, 이번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 * *

천화문에 연회가 준비되었다.

연회는 밤에 열렸고, 믿을 수 있는 무인들로 배치되었다.

서청은 무림맹주가 될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후계자가 젊다고 했으니, 내가 잘 구슬려봐야겠다. 이번 기회에 무림맹으로 진출하는 것도 괜찮고.’

호남의 젊은 후기지수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젊은 놈들은 잘 다룰 자신이 있었다.

반면 서백중은 초조한 듯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천화문을 따르는 방파의 수장들이 아무도 오지 않고 있었다. 이러다가 그들보다 진하군이 먼저 오면 낭패였다.

초조해진 서백중이 심복인 유맹을 닦달했다.

“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냐?”

유맹이라고 어찌 그 이유를 알겠는가?

그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자 서백중이 추궁하듯 물었다.

“제대로 기별한 게 맞느냐?”

“맞습니다.”

“혹 날짜를 잘못 전한 것 아니냐?”

“아닙니다. 이 일이 어떤 일인데 소홀히 전했겠습니까?”

“하면 왜 오지 않는 거냐? 어서 가서 확인해 봐라.”

“네.”

유맹을 보내고도 서백중은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눈치를 봐서라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와야 정상인데.

그때 수하가 달려와서 보고했다.

“멸마대주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말에 서백중은 깜짝 놀랐다. 진하군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것이다.

문이 열리고 멸마대 무인들이 우르르 들어와서 주위를 장악했다.

지켜보던 서청은 깜짝 놀랐다. 첫 멸마대 무인이 들어섰을 때, 그 무인이 멸마대주인 줄 알았다. 그런 착각이 들 만큼 멸마대 무인들의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가까이 선 멸마대 무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서청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같이 어울리던 후기지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기세였다.

곧이어 진하군이 그곳으로 들어섰다. 대주인 그의 기도는 멸마대 무인들과는 또 달랐다. 진하군은 감히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어떤 위엄이 있었다.

원래 서청의 계획은 능글능글 다가가서 ‘젊은 무인들끼리 앞으로 잘해보시죠?’를 거쳐서 ‘제가 멋진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까지가 목표였는데, 서청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진하군의 뒤를 따라 한 명의 노인이 들어왔다.

새하얀 백의에 한 자루의 검을 가슴에 품듯이 들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실로 신선이 내려온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모두를 압도하는 존재감, 서백중은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검선(劍仙)이다!’

예전에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수많은 고수에게 둘러싸여 환대받던 그였는데, 정말이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기도를 지닌 절세고수였다.

검선 이학신(李學信).

정파의 절대고수이자 무림에서 손꼽는 검술의 고수인 그는 무림맹주 진패천의 친구이기도 했다. 진패천은 이번 손자의 호남행을 보좌해주길 그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서백중이 달려 나가 진하군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주님.”

“반갑습니다, 문주님.”

“이번에 도움을 주셔서 제 아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진하군은 고개를 끄덕일 뿐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학신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번에 특별히 검선 어르신께서 함께 출도하셨습니다.”

서백중의 허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갔다.

“검선 어르신을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반갑네.”

검선은 그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는 천화문을 흡수하는 일이 탐탁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도의 길을 걷지 않았던 자들을 정치적인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나온 것이다.

“자, 이리로 앉으시지요.”

진하군이 상석에 앉았고, 검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배분으로 따지면 마땅히 그가 상석에 앉아야 하지만, 이번만큼은 철저히 진하군을 지켜주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미 그 부분은 진하군과도 이야기가 끝났기에, 진하군은 오늘 방문한 목적에 집중했다.

멸마대 무인들이 연회장에 차려진 술과 음식에 은침을 찔러 일일이 독이 들었는지를 확인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군요.”

진하군의 말에 서백중은 뜨끔했다. 원래라면 다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서백중이 애써 태연하게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대주님과 따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에 그들을 좀 늦게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본문을 따르는 문파가 서른 곳이 넘습니다. 그들을 모두 흡수한다면, 호남의 패권을 무림맹이 쥘 수도 있을 겁니다.”

아들을 구해줘서 이쪽이 저자세로 나가야 할 것 같지만, 이번 일의 본질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칼자루를 쥔 쪽은 자신이었다.

아들을 구해준 일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천화문이 얼마나 필요했으면 마교와의 충돌을 감수하고서 개입했겠느냐고. 게다가 어디 천화문만 흡수되는 일인가? 천화문을 따르는 삼십여 개의 방파까지 덤으로 주어진다.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해.’

반면 진하군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 같은 자다. 그런 자를 상대할 때는 일단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말만 해야 한다. 말이 많아지면 노련한 상대는 그것에서 약점을 찾아내기 마련이니까.

“짐작하시겠지만 그들 대부분은 천마신교와 사도맹을 추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무림맹으로 흡수하기 위해선 대주님이 강력한 힘을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진하군은 반드시 그들의 마음을 돌릴 작정이었다. 그들을 얻지 못하면 자신의 고유권한까지 쓴 일이 반쪽짜리 성과가 될 것이다.

“힘을 보여주고 싶어도 오지를 않는군요.”

진하군이 웃으며 말하자 서백중도 농담으로 받았다.

“감히 멸마대주님을 뵙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이후에도 서백중은 이런저런 말로 시간을 끌어 보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백중은 애가 닳았고 손이 떨렸다. 자신은 가문을 걸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고 있는데, 정작 나타나야 할 사람들이 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진하군은 처음에는 서백중이 기싸움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뭔가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그러던 중에 드디어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왔습니다!”

서백중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치며 문 쪽을 쳐다보았다. 우르르 다들 들어오기를 바랐는데, 열린 문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던 그 순간, 멸마대들이 몸을 날려서 진하군을 보호하며 막아섰다.

채앵.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사기를 감추지 않고 들어선 사람은 비사인이었다.

사도십삼랑 역시 일제히 검을 뽑아서 앞으로 나섰다.

멸마대와 사도십삼랑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며 대치했다.

비사인 뒤로 괴악과 광섬이 들어섰다. 멸마대 무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눈에도 자신들의 실력을 넘어서는 고수인데다 그들이 뿜어내는 사기가 워낙 짙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휘이이이이이이!

한줄기 청량한 기운이 바람처럼 불어와 잠식해 들어오던 사기를 밀어냈다. 검선이 내뿜은 기도였다. 사기를 뒤로 밀어내자 멸마대 무인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러자 괴악과 광섬이 내공을 더욱 끌어올리며 사기를 발출했다. 검선은 둘의 공세에도 밀리지 않았다.

그들 간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벌어지자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누군가 실수로 비수라도 떨어뜨리는 순간에는 혈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지고 있을 때, 비사인이 돌아서며 괴악과 광섬에게 정중히 말했다.

“지금은 잠시 저쪽 대주와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선배님들의 회포는 조금 나중에 푸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괴악과 광섬이 뿜어내던 사기가 사그라졌다.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맹주의 명령만큼은 확실하게 따랐다. 검선 역시 발출한 기도를 회수하며 두 명의 사파 고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들은 서로가 누군지 잘 알았다. 눈빛들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직 살아계셨소?

―세상에 악들이 넘쳐나니 죽을 시간도 없다네.

하지만 그들은 귀한 사람들을 모시고 왔기에 더는 감정싸움을 하지 않았다.

비사인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사도맹 소맹주 비사인이오.”

그가 신분을 밝히자 장내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특히 서백중은 두려움에 떨었다.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수장들이 오지 않는지를.

‘이것들이 다 돌아섰구나!’

서청은 비사인의 등장에 멀찌감치 물러나서 언제라도 달아날 준비를 했다.

진하군이 앞으로 나서서 인사했다.

“나는 무림맹 멸마대주 진하군이오.”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서로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나중에 무림맹주가 되고 사도맹주가 되면 평생의 숙적이 될 상대였다.

“어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셨소.”

진하군의 질책을 비사인은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왔소. 우리에게 와야 할 초대장이 왜 그쪽에 갔는지. 실수였으리라 생각되오만.”

“그대에겐 아쉽게도 실수가 아니었소. 이미 서 문주께서는 무림맹과 뜻을 함께하기로 하셨으니까.”

그러자 비사인이 서백중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말이 사실이오?”

서백중이 어찌 감히 그렇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난처한 그를 대신해 진하군이 나섰다.

“이보시오, 지금 남의 구역에 와서 뭐 하자는 거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진하군은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그건 비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멸마대도, 사도십삼랑도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난전이 펼쳐진다면 큰 희생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천천히 문이 열리며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서백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사인의 등장만으로도 낭패였는데, 절대 와서는 안 될 사람이 또 온 것이다.

검무극이 마기를 풀풀 풍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함께 열두 명의 호위들이 전원 따라 들어왔다.

대치하고 있던 멸마대와 사도십삼랑이 반씩 나눠지며 천마전 호위대와도 대치했다.

검무극 뒤로 혈천도마와 권마가 뒤따라 들어왔다.

두 마존의 등장에 검선과 괴악, 광섬도 흠칫 놀랐다.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그곳을 마기로 뒤덮으면서 검무극이 차갑게 말했다.

“구역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우리 말은 똑바로 합시다. 여긴 우리 구역이오.”

16 절대회귀-273화 16

제273회 이 술자리의 정사대전이.

검무극의 등장에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비사인이야 검무극이 올 것을 예상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저자가 검무극이구나!’

앞서 들어왔던 무인들의 가슴에 방패와 악귀가 그려져 있었다. 천마전 호위들이란 의미. 그렇다면 따라 들어온 범상치 않은 기도의 두 마인은 마존이 틀림없었다.

몸통보다 더 큰 대도를 차고 있는 저 노인은 혈천도마일 것이고, 강철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저 남자는 권마일 것이다. 특히 권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렇게 무섭게 생긴 얼굴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마교까지 등장했다 이 말이지?’

진하군은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이해가 갔다. 애초에 천화문을 집어삼키려 했던 이들이 마교였으니, 당연히 그냥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검무극의 등장에 가장 경악한 사람은 서백중이었다. 무림맹의 힘을 이용해서 아들을 빼냈으니 마교 소교주는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존들까지 거느리고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산전수전 다 겪은 서백중이었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까닥 잘못하면 죽는다.’

만약 사도맹 소맹주나 저 마교의 소교주가 자신을 죽이려 들 때, 진하군이 목숨 걸고 막아주겠는가? 이 일을 공론화해서 문제 삼기야 하겠지만, 그건 자신이 죽고 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정사마 사이의 줄을 잘 탔었는데, 지금은 진짜 잘 타야 한다. 그 줄은 자신의 생명줄이었다.

한편 서청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앞서 비사인이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두려운 마음이 가득했는데, 검무극까지 등장하자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검무극과 눈이 마주쳤다. 검무극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조만간에 또 볼 거라고 했지? 너는 딱 거기 있어.

그러자 서청은 내심 발끈했다.

‘웃기지 마!’

구석으로 물러났던 서청이 오히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래봤자 날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위기가 찾아올 때면 ‘어찌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오히려 정사마가 다 모이니 안심이 되었다. 그의 본능이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누군가는 자신을 지켜주겠지.

그는 알지 못했다. 이 많은 사람이 다 천화문을 잡아먹기 위해 왔다는 것을. 이번만큼은 어찌 안 된다는 것을.

검무극은 진하군 앞으로 걸어갔다. 멸마대가 긴장한 채 검을 겨눴다. 천마전 호위대들도 함께 그들에게 검을 겨눴다. 검무극과 진하군보다 수하들이 더 긴장하는 상황이었다.

검무극이 호위무인들 사이를 가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천마신교 소교주 검무극이오.”

진하군이 멸마대 무인들을 가르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림맹 멸마대주 진하군이오.”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확실한 차기 천마와 유력한 차기 무림맹주와의 역사적인 만남의 순간!

진하군은 내심 놀랐다. 검무극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젊고 잘생긴 것은 둘째치고, 눈빛이 맑고 깊었다. 악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문득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협이면 어떻게 하려고?

이내 진하군은 동생의 말을 부정했다. 외모가 주는 선입견이다. 절대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검무극은 진하군이 진하령과 똑 닮았음을 느꼈다. 젊은 나이임에도 눈빛에 협의와 정기가 깃들어 있었다. 무림을 위한다면 진하군이 차기 맹주가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이고, 무림일통을 꿈꾼다면 진하군이 맹주가 되지 않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뒤쪽에 늘어선 멸마대와 호위대 사이에 신경전이 치열했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말했다.

“서서 이럴 게 아니라, 앉아서 구역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눠볼까요?”

그러자 진하군이 뒤로 돌아서 술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좌우로 앉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검무극이 옅게 웃었다. 제법인데? 검무극에게 진하군의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만약 무림맹주의 손자라고 만났는데 서청 같은 녀석이 나왔다면 정말 기분이 별로였을 것이다. 한데 진하군은 눈빛도 좋고, 기세도 좋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비사인이었다. 비사인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하군이 앉으라고 손을 내민 자리가 아니라 그의 정면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진하군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기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 모습에 검무극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래, 비사인이 호락호락 진하군이 하자는 대로 할 리가 없지.

진하군은 평생 주인공으로 살아왔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조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검무극은 진하군이 앉으라고 한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진하군과 비사인이 대치하는 사이에 앉게 되었다.

“세상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인데, 정파와 사파 후계자의 싸움이라니? 난 명당자리 잡았소.”

검무극의 너스레에도 장내의 긴장감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세 사람이 가까이 자리하자 일촉즉발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멸마대와 사도십삼랑, 천마전 호위대가 각자 주인의 뒤쪽에 늘어선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함께 온 이들이 워낙 고수라 그렇지, 이들만 해도 정말 잘 싸우는 정예 무인들이다. 싸움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피바다가 될 것이다.

적연은 함께 늘어선 호위들에게 전음을 보내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우린 소교주님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

―겁먹지 마라.

계속 전음을 보내며 그들을 다독였다.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검무극을 호위해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이지 다시 실감하는 바이지만 무림에서 제일 호위하기 어려운 수장이다.

혈천도마와 권마, 검선, 괴악과 광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처음의 긴장감과 마존들이 합류한 이후의 긴장감은 완전히 달랐다. 서로 표는 내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혈천도마와 검선의 시선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소.”

혈천도마가 검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검선이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 십 년 만인가?”

“더 넘은 것 같소.”

사파나 마교라면 질색하는 검선이었는데, 혈천도마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과거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는군.”

검선의 말에 혈천도마가 대답했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오.”

“자넨 더 말랐군.”

그때 괴악이 나섰다.

“친하지도 않으면서 뭐 그리 친한 척들을 하시오?”

혈천도마가 그에게 말했다.

“함부로 끼어드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선배는 사람 무시하는 버릇 여전하시구려.”

괴악은 혈천도마에게 선배라고 칭했다.

“내가 여전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잠자코 있는 게 좋을 거다.”

괴악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뭐라 따지고 들진 못했다. 무공 고하를 떠나 검선보다 더 어려운 쪽이 혈천도마였다. 과연 무림의 매운 생강 혈천도마는 왜 이번에 자신을 불러야 했는지에 대한 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권마는 두 주먹을 늘어뜨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곳에 있는 모두를 긴장시켰다. 얼굴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세가 엄청났다. 그냥 볼 때의 권마와 적들을 앞에 둔 권마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진하군이 술병을 들어서 잔을 채웠다. 마치 서백중을 대신해 이곳의 주인처럼 행세했다. 그는 마교와 사도맹 모두를 상대해야 했고,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교주 소문은 많이 들었소.”

진하군은 특히 검무극을 경계했다. 상대는 마인이다. 그것도 마존들까지 모두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며 역대 최고의 후계자 소리를 듣는 마교 소교주다. 상대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극도로 긴장했다.

“어떤 소문이었소?”

“대부분 믿기 어려운 소문이었소.”

“그럼 실제로 보니 어떻소?”

솔직히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진하군은 대답 대신 잔을 높이 들었다. 잘 모를 때는 침묵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한잔합시다!”

세 사람이 건배한 후 술을 비웠다. 그야말로 강호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세 사람의 첫 술자리였다.

두 번째 잔을 채우며 진하군이 물었다.

“두 분은 초면이 아닌 것 같소.”

검무극과 비사인이 따로 인사하지 않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맞소. 우린 구면이오.”

검무극이 비사인을 보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소?”

이번 일을 함께 꾸몄다는 것은 밝히지 않겠지만, 굳이 초면인 것처럼 속이지 않았다.

비사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진 잘 지냈소.”

진하군이 보고 있어서 괜히 무뚝뚝하게 반응했지만, 검무극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호남에 있는 열다섯 개의 중소방파를 사도맹에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천화문을 양보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정당한 경쟁을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양보 안 할 거요.

비사인의 전음에 검무극이 답했다.

―나는 양보할 작정인데.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하시오?

―티 났소?

비사인이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진하군과 팽팽했던 긴장감이 검무극과 전음을 주고받자 대번에 풀려버렸다.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면 저런 모습에 실없는 자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여기 있는 그 어떤 고수들보다 제일 상대하기 힘든 사람은 검무극이다.

그러는 사이 진하군과 서백중 사이에도 전음이 오가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는 들리는 말보다 들리지 않는 말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절대 기죽지 마시오.

―대주님만 믿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서백중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사파와 마교가 작정하고 달려든 이상,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배를 갈아타야 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검무극이 옆에 서 있는 서백중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서 문주께서도 함께 한잔하시지요.”

서백중이 진하군 옆에 나란히 앉아 술을 받았다.

비사인이 앞서 검무극이 등장하기 전에 하던 말을 이어서 했다.

“서 문주, 정말 무림맹과 한길을 가실 거요?”

여전히 서백중은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무림맹을 선택한 것은 삿갓 사내이자 진하군의 사부인 백천경 때문이었다. 쉽게 배신할 수 없는 관계지만,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사도맹 후계자에게 ‘그래, 우린 너희를 배신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서백중이 슬쩍 구원군인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진하군은 저 사람들 눈치 볼 것 없소. 당당히 말씀하시오. 이런 눈빛을 보였다.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던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물었다.

“서 문주와는 초면이시오?”

“그렇소.”

그는 서백중에게 자신이 검무극과 비사인 앞에서 당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검무극에게 또 다른 의문을 주었다.

“참 이상한 일이오. 두 분이 초면인데, 서 문주께서는 대체 뭘 믿고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 거요?”

검무극과 비사인의 시선이 서백중을 향했다.

원래라면 그는 ‘나는 원래부터 정파를 동경했었소.’ 따위의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마교나 사파에 붙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말조심하는 것이다. 이러다 진하군이 화를 내면 어쩌냐고? 화를 내도 상관없다. 어차피 세 사람 모두 천화문을 원하고 있으니까. 아슬아슬하지만 여전히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때 검무극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두 분 사이에 다리가 되어 준 사람이 누굽니까?”

이번 일에서 검무극이 가장 관심 있는 바로 그 지점, 이번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냐를 물은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검무극의 질문에 서백중과 진하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 없다는 말이 나왔어야 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러지 못했다.

‘분명 누군가 있군.’

검무극의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진하군과 서백중 두 사람 모두를 아는 사람이 선을 이어주었다.’

그자를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단지 진하군과 서백중을 이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천마신교와 맞설 배짱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체 누구기에?

진하군은 서백중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곧장 전음을 보냈다.

―문주께선 우릴 믿으셔야 하오.

―믿고 있습니다. 한데 보시다시피 저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기세입니다.

―우리도 포기하지 않을 거요.

―확신을 주십시오.

서백중이 진하군에게 요구했다.

진하군은 천화문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선포하듯 단호히 말했다.

“천화문과 본맹이 손을 잡은 이상, 우린 반드시 천화문을 지켜줄 거요. 천화문을 겁박하는 것은 본맹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소.”

그 대답에 화답이라도 하듯, 멸마대 무인들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비사인이 차갑게 말했다.

“그건 당신들 생각이고. 난 아직 천화문주의 대답을 듣지 못했소.”

기다렸다는 듯 사도십삼랑들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비사인이 서백중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대를 따르던 문파들이 모두 돌아섰소. 이제 호남에서 문제가 생기면 누가 천화문을 돕겠소? 저 멸마대주가 평생 이곳에서 그대를 지켜줄 것 같소? 이건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거요.

어찌 서백중이 그런 현실을 모르겠는가?

―우리와 가는 길이 최선이오.

서백중은 현실적으로는 그게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줄은 세 개인데, 두 개의 줄은 자신의 앞에서 잡아달라고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줄은 저 멀리 있었다.

너는 왜 내게 제시하지 않는 거냐?

그런 마음을 읽었다는 듯,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 술자리의 정사대전이 재미있어졌소. 그러니 절대 본교를 따르겠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다들 검무극이 천화문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혈천도마와 권마의 입가에 실소가 지어졌다.

비사인은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면 저 서백중이 마교를 선택하겠다고 말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싫다는 데도 마교를 따르겠다고 할 것 같은 그런 예감 말이다.

그리고 그 예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검무극의 첫 번째 은밀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검무극이 진하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 대주, 하나만 물어봅시다.

진하군은 어떤 수작도 통하지 않을 거란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하지만 정말 상상도 못 한 말이 날아들었다.

―무림맹주가 되고 싶으시오?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눈을 크게 뜬 진하군에게 앞서보다 더 강력하게 그를 뒤흔들 말이 날아들었다.

―그것 알고 있소? 그대는 지금 스스로 무림맹주를 포기하고 있소.

14 절대회귀-274화 14

제274회 정사대전이 아니라 정마대전.

무림맹주가 되는 것은 진하군의 오랜 꿈이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은 이 말이다.

네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야지.

당연히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무림맹주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능력과 자질이 되는 사람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무림맹주가 되는 일은 진하군의 인생 그 자체였으니까. 무림맹주가 되지 못하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한데 뭐? 스스로 무림맹주를 포기하고 있다고?

진하군이 태어나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진하군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혈천도마와 권마가 슬쩍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검무극이 뭔가 전음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도 당해봤기에 지금 진하군이 어떤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지 예상이 되었다.

비사인 역시 마주 앉아 있었기에 그 표정을 보았다.

‘안 돼!’

물론,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대화를 방해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급한 서백중에게는 그런 예의가 없었다.

서백중이 진하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슨 말씀을 그리 나누시는 겁니까?

이렇게 끼어들어선 안 되었지만, 진하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잠시 기다리시오.

짤막한 대답에 서백중은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진하군이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혹시 마교 소교주가 어떤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면 절대 넘어가선 안 됩니다!

서백중의 전음에 진하군이 차갑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림맹의 정예조직인 멸마대를 이끄는 그의 기도는 서백중을 압도했다.

날 선 반응에 서백중은 더는 끼어들지 못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진하군이 과연 저자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서백중은 변수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진하군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스스로 맹주 자리를 포기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천화문을 얻으면 무림맹주 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뜻이오.

애써 가라앉혔던 진하군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무림맹주란 단어는 그에게 약점과도 같은 말이다.

이건 개수작이다.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진하군이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린 후에 차분하게 물었다.

―이유를 말해보시오.

검무극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주위의 모두가 두 사람에게 집중했다. 모두 느꼈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한 대화가 오가고 있음을.

검선이 혈천도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가 있는 한 헛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네.

검선이 뭔가 불안함을 느낀 모양이다. 워낙 고수들이니 흐르는 공기의 기류만 바뀌어도 감정변화를 눈치채는 그들이었다.

―늙은이들은 참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시대요.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혈천도마의 대답에 검선이 꼬장꼬장한 어조로 말했다.

―참견해야 할 때는 참견해야지.

두 사람의 성격은 분명 닮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본교가 정파를 못 치는 것 아니겠소?

그가 있어 못 친다는, 그를 높이 산 칭찬이었기에 검선이 옅게 웃었다.

―후배들이 뭘 그리 고마워한다고 이렇게까지 희생하시는 거요?

―희생이 아니라 옳은 삶을 사는 거네.

―자기 삶도 사시면서 하시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말이었다. 하지만 혈천도마만큼은 예외였다.

―이제와서 무슨…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어디 그 삶이 쉽게 바뀌겠는가?

―바뀔 수도 있더이다.

혈천도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무극을 향했다. 혈천도마의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하며 검선의 시선도 검무극과 진하군을 향했다.

이 순간 진하군은 검무극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유를 말해보라니까!

그러자 검무극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유는 당신도 알고 있잖소?

그 말을 듣는 순간 진하군은 가슴이 철렁했다. 검무극은 그가 애써 모른 척 묻어두었던 그것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다.

진하군의 시선이 검무극을 지나 저 멀리 자리한 이에게 향했다. 그는 바로 서청이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그다.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진하군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 서백중이 아들을 소개할 때도, 그에게 친근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것도 그런 고민 때문이었다.

―무슨 뜻이오?

묻고 나서 진하군은 후회했다. 혹시라도 다른 이유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모른 척한 것이었는데.

‘젠장.’

설령 다른 이유였어도 묻지 말았어야 했다. 무림맹주를 꿈꾸는 자신이었는데 진실을 피하려고 모른 척하다니?

그래서 다른 이유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검무극은 정확히 그의 약점을 찌르고 들어왔다.

―서청 말이오.

진하군이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정신 차려! 놈에게 말리면 안 돼. 아쉽지만 그런 각오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다 알고 오지 않았소?

―나는…….

진하군이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천화문 일을 마무리 지으면 그의 처분에 대해 고민하려 했소.

―나중에 벌하겠다?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물었다.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오?

검무극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이었다.

너희 마교, 너희 사파,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냐?

검무극은 진하군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희망적이다. 아직 젊은 그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경험해야 할 것이 많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젊은 시절에 걷어차는 이불은 괜찮다.

검무극의 전음이 계속 이어졌다.

―그대가 천화문을 얻는 그 순간, 당신은 무림맹주께서 내린 시험에서 떨어지게 될 거요.

―시험이라고?

시험이란 말에 진하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소. 이건 맹주님의 시험이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그대 맹주님을 만나봤으니까.

―지금 손자인 나한테 맹주님을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안다고 말하는 건가?

―맞소, 만난 횟수는 당신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았겠지. 한데 진 대주.

검무극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지금껏 당신은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었소?

순간 진하군은 흠칫했다.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냐고?

당연히 보고 있었지.

그 말이 곧장 나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너무나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진하군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다. 평정심은 이미 깨어졌고,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히려 더 못 보지 않냐는 말이오. 적어도 나는 그랬소.

검무극은 자신이 느꼈던 바를 솔직하게 전했다. 온갖 말의 기교를 다 부려도 결국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전까지는 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소. 겁이 나서 못 봤고, 언제라도 볼 수 있는 사람이라 못 봤지.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보려고 노력 중이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요. 백 번, 천 번을 봐도, 제대로 보지 않으면 한 번 본 사람보다 모를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진하군은 검무극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믿을 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계시는데, 검무극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혼란스러웠다.

―당신이 의심스럽소. 이런 말들이 천화문을 차지하기 위한 수작이 아니라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소?

그러자 검무극이 다시 그의 정곡을 찔렀다.

―그렇다면 왜 나를 보시오?

―무슨 뜻이오?

―의심이 들면 당신 할아버지를 봐야지. 답은 거기서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니오?

―!

문득 진하군은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는 천화문에 대해 단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천화문을 우리가 꼭 얻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처신하라거나.

그저 잘 다녀오라고만 하셨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

그 눈빛은 과연 불의한 자를 벌하지 않으면서 천화문을 얻은 것을 기뻐할 눈빛인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모른 척했을 뿐. 사부가 자신을 위해 제안한 일이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사부가 대신했던 것은 아닐까?

큰 공을 세워서 후계자가 되자!

진하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모른 척 해봤자, 사부 핑계를 대봤자, 본인은 알고 있었다. 자기가 원해서 그랬다는 것을.

―당신과 저 천화문주를 연결해준 사람은 당신이 맹주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소.

진하군의 표정이 순간 확 굳어졌다.

검무극은 그 반응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하군과 가까운 사람이다.’

서백중이 아니라 진하군과 더 가까운 사람이 틀림없었다.

진하군은 사부를 믿고 있었다.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르고.

사부가 이 일을 제안한 것 역시 자신이 맹주가 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사부를 믿어야 한다! 이간질에 넘어가선 안 돼!’

비사인은 진하군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떤 말을 했기에 처음 본 진하군을 저렇게 격정에 빠뜨리는 것일까?

하긴 자신을 생각해보면 답은 나왔다. 검무극을 만나고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생각한다면. 정작 이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것은 정사대전이 아니라 정마대전이었다.

비사인이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냈다.

―당신이야말로 이 무림에서 제일가는 악당이오!

―전음 얽히니까 나중에 전음하시오!

―싫소! 제발 얽혀서 엉터리로 알아들으시오.

비사인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자신이란 사람이 누군가와 이런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곤 정말 몰랐다. 이 흉측한 흉터로는 누구와도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러는 와중에 서청이 서백중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죠?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언젠가 저 마교 소교주에게 복수할 겁니다. 아버지, 복수해 주십시오!

서백중은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아들이 한심했다. 심지어 복수하겠다도 아니고, 복수해 주십시오라니. 저들 후계자 셋과 비교하니, 더욱더 한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키운 것도 결국 자신의 책임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큰 자리를 만들어서 물려주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리라 생각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천화문을 키운 노력의 일부라도, 아니 자식을 키우는 것은 그 노력 전부보다 더 큰 노력이 드는 일이었다.

그 책임을 회피한 대가가 지금 눈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 저 조용히 달아날까요?

서백중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이미 늦었다. 그러니 얌전히 있어라.

그러는 사이 검무극과 진하군의 전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좋소, 당신 말이 맞다고 칩시다. 하면 내게 왜 이런 말을 해주는 거요? 천화문을 차지하기 위해서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소.

―뭐요?

―당신이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었으면 해서요.

진하군의 몸에서 차가운 기도가 뿜어져 나왔다. 마인에게 원칙 운운하는 소리까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기세를 불러일으키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멸마대가 내공을 끌어올렸고, 천마전 호위대와 사도십삼랑 역시 기세를 끌어올리며 반격에 대비했다.

반면 검무극은 더없이 차분했다.

―나중에 나나 그대가 교주가 되고 맹주가 되었을 때, 우리의 결정으로 수천, 수만 명의 생사가 갈릴 것이오. 그때 우리가 그릇된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하오. 당신도, 나도. 저기 저 비 소맹주도. 원칙을 지켜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소.

뻗쳐나온 진하군의 기도가 사그라들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검무극이 진심으로 말하고 있음을.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좋은 맹주가 되라고. 그래서 우리 시대에 전쟁은 벌이지 말자고.

‘졌다.’

진하군의 마음에 떠오른 한 마디 말이었다.

검무극의 말이 거짓이든 진심이든 자신의 완패였다. 인정해야 했다. 검무극이 사기꾼이든, 진짜 마협이든, 적어도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더 노력해야겠구나. 지금보다 열 배, 백 배 더!’

언젠가 자신이 맹주가 되었을 때, 눈앞의 저 검무극에게 무림맹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말이다.

진하군이 차분히 말했다.

―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될 거요. 당신이 그걸 바라서가 아니오. 난 원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그런 사람이 되리라 믿소.

―조롱하는 거요?

―조롱은 저기 저 서청 같은 놈에게 해야지. 저런 놈을 아들이라고 지키려는 서백중에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아니라면 저 천화문과 같은 거대 문파의 자식을 누가 제지할 수 있겠소?

―당신은 정말이지…….

끝까지 완패였다.

진하군의 시선이 문득 맞은편에 앉은 비사인을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검무극에게 빠져 있느라 그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사인은 말없이 진하군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처음에 도발적으로 자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와 지금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진하군은 비사인이 따라준 술을 마셨다. 사파 후계자가 따라준 술이 이렇게 위로가 될 줄이야.

느낌이 달라진 것은 비사인만이 아니었다.

서백중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눈빛이 이렇게 물었다.

‘설마 마교 놈에게 넘어가서 우리에게서 손을 떼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바로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천화문주와의 약속이 걱정되시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그래, 걱정되었다. 조금 전까지도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었소, 라고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둘만 있는 것도 아니라, 이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어서 더 힘들었다.

―당신이 곤란하지 않게 내가 해결해 주겠소. 괜찮겠소?

진하군은 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기세상 더는 검무극에게 휘둘리기 싫었다. 하지만 천화문에게는 손을 떼야 한다. 그래야 돌아가서 할아버지께 할 말이 생긴다.

대체 곤란하지 않게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말인가? 그 해결 방법이 너무 궁금했다.

진하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지던 그 순간, 검무극은 긴 전음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자자, 우리 한잔하면서 긴장을 풉시다.”

다 같이 술을 마셨다. 다들 검무극과 진하군의 전음 대화가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궁금해했다.

검무극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원래 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일은 아니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이번 일의 시작이 우리 서 문주께서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지른 자제분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일이오. 천륜이니 이해는 합니다. 다만 죽은 이들이 무고한 사람이란 점에서…….”

그때 누군가 검무극의 말을 끊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평생을 선행과 협의를 위해 살아온 사람, 바로 검선이었다.

11 절대회귀-275화 11

제275회 본교는 선택하지 말라니까.

당연히 검선이 들으라고 꺼낸 말이었다.

검무극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선에게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앞서는 정식으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검선은 예리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살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새삼 검무극의 눈빛과 기도에 감탄했다.

‘마공을 익혔음에도 이렇게 맑은 눈빛이라니? 실로 놀랍구나.’

검선의 시선이 검무극 뒤에 서 있는 혈천도마를 향했다. 앞서 혈천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뀔 수도 있더이다.

그가 인생을 바꾼 것처럼 말한 것이 이 소교주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검선이 나직하면서도 엄중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앞서 했던 말을 다시 해보게.”

“모르고 계셨으리라 예상했었습니다. 알고 계셨다면 묵인하고 계셨을 리 없겠지요.”

검선은 무림맹주 진패천의 부탁으로 진하군을 지켜주기 위해 따라나섰을 뿐, 그가 무슨 일로 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앞서 했던 말이 사실이란 뜻인가?”

“그렇습니다. 저기 서청은 살육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지나가던 행인을 살해하고, 본교 무인도 죽였지요. 그 외 다른 희생자들도 있습니다. 마침 호남에 와 있던 제가 서청을 벌주려 했을 때, 무림맹이 그 일을 막고 나선 겁니다.”

검선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하군에게 물었다.

“진 대주, 저 말이 사실인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검선의 성격상 무림맹주의 손자가 아니라, 무림맹주라 할지라도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진하군은 검무극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검선을 이용해서 빠져나가라는 뜻.

“사실입니다.”

순간 검선에게서 노기가 솟구쳤다.

진하군이 빠르게 덧붙였다.

“다만 한 가지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진하군이 서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서청의 죄에 대해서는 저도 합당한 벌을 주려 하고 있었습니다.”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천화문과 손을 떼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란 것을.

“어떤 벌인가?”

“뇌옥에 가둘 작정이었습니다. 평생 갇혀 있어야겠지요.”

검선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나서자 급하게 핑계를 대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진하군은 당당하게 검선의 시선을 받았다.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을 믿기로 했다. 어떻게든 벌을 주었을 거라고.

비로소 검선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

검선은 진하군을 믿었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어려서부터 봐온 진하군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바른 아이였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더욱 증진하겠습니다.”

진하군은 천화문을 흡수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욕심에 눈이 멀어도 제대로 멀었다.

물론, 그렇다고 검선의 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

검선의 시선이 서청을 향했다. 쳐다보면 눈치껏 검선에게로 달려와야 하는데, 서청은 겁에 질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백중이 큰 소리로 불렀다.

“어서 오지 않고 뭘 하는 게냐?”

그러잖아도 화가 나 있는 검선이었다. 그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간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어서 오라니까!”

서백중이 버럭 소리치며 전음을 보냈다.

―검선께서 시키는 대로 해라. 와서 나 죽었다고 용서를 빌어!

―살려주십시오, 아버지! 저 뇌옥에 못 가요! 가면 저 죽어요.

―닥쳐라! 지금 어리광 받아줄 상황이 아니다!

서백중이 버럭 화를 내자 서청은 잔뜩 겁을 먹은 얼굴로 검선에게로 걸어왔다.

서백중의 다급한 전음이 진하군에게 날아들었다.

―말려주시오!

―검선께서 나선 이상 나도 어쩔 수가 없소. 문주도 알다시피 검선께선 맹주님의 친우이시자 평생 협행을 해오신 분이시지 않소?

―정말 이럴 거요? 그 사람이 이 일을 그냥 넘어가겠소?

서백중이 진하군의 사부를 언급했다.

확실히 사부는 진하군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검선이 나선 데다가, 진하군은 천화문에게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사부는 분명 자신의 결정을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그분도 검선 어르신의 뜻을 거스르진 못하시오.

그러는 사이 서청이 검선 앞에 섰다.

검선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까 마교 소교주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이더냐?”

서청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시 서백중이었다.

죄가 없다면 아니라고 대답한 후 억울함을 하소연했을 터, 이 행동 하나만 봐도 그가 저지른 짓을 모두 인정하는 셈이었다.

서백중이 대신 나섰다.

“아직 조사 중인 사건으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순간을 모면하려 했다. 진하군은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 테니 그가 그렇다고 대답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검선이 물어본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소교주,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죄악이 다 밝혀진 상태입니다.”

그러자 검선이 차가운 눈빛으로 서백중을 야단쳤다.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는 건가?”

뇌옥에 가두는 것도 못마땅한 검선이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인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해온 것이 그의 삶이었으니까.

서백중이 잘못했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전음을 보냈다.

―어서 꿇고 빌어라!

그제야 서청이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뇌옥만은 안 돼!’

서청이 검선에게 애원했다.

“제가 술에 취해서 실수했습니다. 그날 일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순간 검선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실수했다는 말이 먼저 나온 것이다. 게다가 술 핑계까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검선은 서청이 어떤 사람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실수였다?”

“네, 실수였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왜 죽였느냐?”

“그건…….”

뭐라 변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들어 애원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왜 죽였느냐고 묻고 있다.”

서릿발 같은 질책에 서청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온통 백지장 같은 멍한 상태에서 서청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살면서 남에게 가장 많이 사용했던 그것, 바로 분노였다.

서청은 화가 났다. 지금껏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몰아세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그가 소리쳤다.

“죽이고 싶었으니까!”

순간 그곳에 정적이 흘렀다.

“사람을 죽였을 때 짜릿했으니까.”

서청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더욱 크게 소리쳤다.

“당신들도 그 기분 알잖아? 당신들은 더 많이 죽였잖아? 왜 나만 가지고 그래!”

그곳에 있던 모두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 달려간 사람은 서백중이었다.

짝!

서백중이 사정없이 서청의 뺨을 후려쳤다.

“닥쳐라!”

“왜 때려요?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때렸다는 것을 알 법도 했는데, 흥분한 서청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저 어르신은 왜 저를 벌주려는 겁니까? 이곳은 무림맹의 영역이 아니라 마교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벌을 받더라도 저 사람들에게 받아야지요!”

짝! 짝!

서백중이 서청을 사정없이 때렸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자식을 이렇게 키운 자신 탓이지.

서백중은 느낄 수 있었다. 검선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을. 이대로라면 검선이 서청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재빨리 비사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린 사도맹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절박한 그의 전음에 비사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칼자루는 자신이 쥐었기 때문이다.

비사인은 검무극에게 감탄했다. 검선을 끌어들여서 일을 이렇게 끌고 가다니? 결과만 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 같지만, 이 일은 아무나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백중이 사도맹을 끌어들이려고 잠시 전음을 하는 사이, 그새를 못 참고 서청이 일을 벌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어떻게든 자신을 구해줘야 할 사람이 혼자 살겠다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자신을 때리기나 하고 말이다.

평소 혈육 간에 애정과 믿음이 없으니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결국 극단적인 생각만 들었다.

서청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는 오해와 공포심에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도 사람들 죽였잖아요?”

당황한 서백중이 재빨리 검선에게 말했다.

“겁을 먹어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서백중이 서청을 돌아보며 인상을 썼다.

―닥쳐라! 정말 이 애비까지 죽이고 싶으냐?

급한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실언이었다. 서청은 저 말을 ‘죽으려면 너만 죽어라!’라는 말로 해석했다. 서청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사독검(邪毒劍)을 독살해서 뒷산 대숲에 묻었잖아? 호남삼랑(湖南三狼)도 죽였고, 멸절검(滅絶劍)도 죽였잖아!”

순간 찾아온 정적.

나와선 안 될 이름이 나왔다. 호남삼랑과 멸절검까지는 정사지간의 인물이라지만, 사독검은 사도맹 소속의 무인이다.

서백중이 당황한 얼굴로 비사인을 쳐다보았다.

―실종된 사독검이 우리 서 문주 뒷산에 묻혀 있었군요.

―오해십니다.

―변명할 것 없소. 어차피 사독검은 내 쪽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럼 손을 잡아주시는 겁니까?

―아쉽지만 그건 곤란하겠소. 아무리 사파라도 우리에게도 자존심이 있지 않겠소?

사파 무인을 죽인 것을 알고서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이 자신에게 호박을 넝쿨째 굴려줬는데, 데굴데굴 굴러서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서백중은 자신에게서 제일 멀리 있던 줄에 매달렸다.

“우린 천마신교와 손을 잡겠습니다. 우릴 받아들여 주십시오.”

서백중은 전음을 보내지도 않았다. 지금 전음으로 상황을 조율할 여유가 없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이제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진 것이다. 믿을 곳은 마교뿐이다.

그 모습에 비사인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처음에 검무극이 마교는 절대 선택하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을 때, 비사인은 결국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예감했다.

그리고 정말 그 일 일어났다.

“내가 분명 싫다고 말하지 않았소? 본교는 선택하지 말라니까.”

“제발 받아주시오.”

“싫다니까! 저기 당신 좋아하는 무림맹으로 가시오.”

“제발!”

“저기 사도맹 소맹주가 얼굴이 무섭게 생겨서 그렇지 사람은 좋소. 저리로 가시오.”

“신교에서 받아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서백중이 검무극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

“이거 곤란한데.”

정말 비사인의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결국, 못이기는 척 검무극이 넌지시 말했다.

“좋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자제분은 뇌옥행이오. 천화문의 충성심이 변하지 않는 한 참형은 미뤄주겠소.”

용서가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뇌옥 생활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줄 테니까.

그 말에 서청이 기겁하며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살려달라고! 내가 왜! 그깟 하찮은 것들 몇 죽였다고 내가 왜! 아버지, 살려주세요!”

평생을 안하무인으로 살아왔던 그였지만, 이제 진짜 세상의 무서움을 맛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마구 죽이면서 왜 나는 죽이면 안 되는 거냐고!”

서백중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놈은 사신이 귓가에 속삭이는 대로 소리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서청은 서백중에게도 악담을 퍼부었다.

“자식 버린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에 있냐고! 그런 주제에 무슨 문파를 이끄냐고! 이 나쁜 놈아!”

두 사람 사이의 연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서백중은 천화문을 위해서라면 이게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천화문은 앞으로도 잘 돌아갈 테고, 어쨌거나 아들은 살아 있고. 그럼 됐다.

서백중은 그렇게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지금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광섬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서백중을 불렀다.

“서 문주.”

서백중이 무심코 그를 향해 돌아서던 그 순간.

쇄애애애액!

서걱.

광섬이 단칼에 그를 베어버렸다. 워낙 쾌검이어서 그의 검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가 서백중을 죽일 거라 생각지 못했기에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아들인 서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는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까 봐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광섬이 비사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짤막하게 말했다.

“사독검은 제 의제(義弟)였습니다. 명을 받지 않고 움직인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검무극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심한 하늘이 세상에 관심을 둘 때면, 이렇듯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법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검선이 혈천도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 상황, 자네가 만들었나?

오늘 자리 내내 혈천도마가 전음을 보내고, 작전을 세웠다고 생각한 것이다. 검선에게 혈천도마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런 일로 혈천도마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

검선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내가 오래 살아야겠군.

자신조차 검무극의 뜻대로 움직였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참견하면 젊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 못 듣소.

―괜찮네.

이렇게 천화문이 정리되었다.

서백중이 죽고 서청이 뇌옥에 갇히게 되면서 이제 천화문의 새로운 수장은 천마신교를 따르는 이가 올라서게 될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무극에게 집중되었다.

오늘 검무극은 다 이뤄냈다. 천화문을 흡수했고, 서청의 죗값을 받아냈으니까. 실실 웃으며 긴장감 없이 서 있는 그가 이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소문은 열에 아홉 과장되기 마련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남은 하나가 검무극이라고.

진하군과 비사인이 천천히 검무극에게 걸어와 원을 그리듯 마주 보고 섰다.

만남이 그러했듯,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세 후계자의 첫 작별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21 절대회귀-276화 21

제276회 그 입도 좀 쉬어라.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진하군과 비사인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을 향한 진하군의 눈빛은 첫인사를 했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문득 떠나기 전 동생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그를 대할 때 선입견을 버리고 봐야 해. 마인이니까 이러하겠지, 이런 생각 하지 말라고. 그는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왜 동생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상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진하군은 평생의 숙적이 될지도 모를 눈앞의 이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바로 그때 누군가 말했다.

“……억울해.”

모두의 시선이 말한 사람을 향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청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백중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엉덩이를 적시고 있지만, 그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난 억울하다고.”

아까 마구 소리칠 때까진 좋았다. 속이 후련했다. 이 위선자들! 너희는 안 죽였냐고!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순간이 끝나자 찾아온 것은 지독한 허무였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소리친 사실 자체가 없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항상 주인공으로 살아왔는데.

지금은 이 연회장에 모인 그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에 분노하고 평생 뇌옥에 갇혀야 하는 사실에 공포를 느껴야 하는 지금, 그는 무시당하고 버려졌다는 피해의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살려줘.”

검무극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만약 아비의 시체라도 끌어안은 채 이쪽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면,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생겼으리라.

하지만 서청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자였다.

검무극이 눈짓을 보내자 호위 무인 두 사람이 그의 내공을 제압한 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소리치려는 것을 아혈까지 제압해 버렸기에 무기력하게 끌려 나갔다. 그는 곧 호남지단 마인들을 통해 천마신교 본단의 그 지옥 같은 뇌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검무극은 서청에게 한마디 말도 걸어주지 않았고, 그의 말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눈곱만치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지옥으로 던질 뿐 아무 의미도 두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죽어 마땅한 악인을 대하는 검무극의 한결같은 태도였다.

그 모습에서 진하군은 검무극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었다면 분명 한마디 했을 것이다. 너 때문에 아비가 죽었으니 평생 반성하고 살라고. 하지만 검무극은 냉담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철저히 무시했다. 그것이 더 무섭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진하군은 오늘 하루 무림의 맛을 제대로 본 기분이 들었다. 아주 매운 맛이었지만, 그렇다고 불쾌한 맛은 아니었다. 또 맛보고 싶은 맛.

동시에 이런 열망도 들었다. 다음에는 자신이 요리해서 제대로 맛을 보여주고 싶다는.

“오늘 일은 잊지 않겠소.”

복수하겠다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표한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났을 테니까.

검무극은 부드러운 눈빛과 미소로 대답했다.

“좋은 맹주가 되시오.”

진하군은 저 눈빛에 담긴 진심을 반만 믿기로 했다. 좋은 맹주가 되라고 충고하는 마교 후계자는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들 뒤에 서 있던 멸마대와 천마전 호위들, 그리고 사도십삼랑들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만남이 끝이 아님을 느꼈다. 또 어떤 순간에 다시 만나게 될까?

마지막 작별의 순간 검무극의 너스레도 빠지지 않았다.

“헤어지기 아쉬운데 우리 술 마시러 갑시다.”

하지만 진하군은 못 들은 척 비사인과 작별했다.

아까 비사인이 말없이 따라준 한 잔의 술이 큰 위로가 되었다.

“다음에는 내가 한잔 따라주겠소.”

그의 말에 비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정파의 후계자에게 술을 받을 날이 올까? 어쩌면 올지도 모르겠다. 저 검무극을 만난 이후 상상도 못 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또 봅시다.”

진하군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멸마대가 뒤따라 나가려는데 검무극이 그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당신네 대주는 보내고 우리끼리라도 마십시다. 우리 호위들하고 술 마시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월봉은 얼마나 받는지, 제때 잘 나오는지, 임무 환경은 어떤지. 서로 궁금하지 않소?”

진하군을 뒤따라 나가며 멸마대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픽 하고 웃었다가 황급히 정색했다. 멸마대와 사도십삼랑, 천마전 호위대가 한자리에서 술을 마신다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정파에서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은 검선이었다.

혈천도마가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봅시다. 보중하시오.”

“걱정 말게.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후배들 일에 참견하면 싫어한다니까요.”

“자넨 살이나 좀 찌우게.”

검선은 오래 살아야 할 이유를 스윽 쳐다본 후에 그곳을 떠났다.

검무극이 비사인에게 말했다.

“고리타분한 정파인들 다 떠났으니 우리 남자들끼리 한잔합시다!”

하지만 비사인도 못 들은 척 걸어 나갔다.

비사인은 알았다. 검무극이 천화문을 자신에게 주려 했다는 것을. 마지막에 서청이 돌발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래, 운 좋은 놈을 어찌 이기겠나?

그래도 이번에 출도해서 호남지역에서 열다섯 문파를 얻었으니 맹에 큰 공을 세웠다.

“거참 한잔하고 가자니까. 무정하시오!”

뒤에서 들려오는 검무극의 외침에도 비사인은 성큼성큼 그곳을 걸어 나갔다. 고맙다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 또 검무극은 자신의 앞에 나타날 테니까. 확 밀어버리고 싶은 등을 보인 채, 그 절벽에 앉아서 또 자신을 놀라게 하겠지. 비사인은 그 순간이 기대되기도 했다. 이번 빚은 그때 갚겠소.

그 뒤로 사도십삼랑이 뒤따랐고, 괴악과 광섬이 걸어 나갔다. 두 고수 역시 혈천도마나 권마가 아니라 검무극을 유심히 보고 떠나갔다. 다들 느끼는 것이다.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이 검무극임을.

그들마저 떠나자 검무극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게는 우리 마존님들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혈천도마와 권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일 끝났으니 가야지.”

“아니 다들 짰습니까? 제게 왜들 이래요?”

검무극이 후다닥 뛰어가서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호위들도 따라서 움직여 진열을 갖췄다. 삼호가 적연을 쳐다보며 일전에 했던 그 말을 눈빛으로 했다.

―정말 모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연도 눈빛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재미있지 않나?

다른 후계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검선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을 보이다가도 또 저렇게 너스레를 떨 때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검무극이 두 마존에게 말했다.

“어휴, 어찌나 말을 많이 했는지 입 아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이지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난 마정대전이었다.

권마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입 덕분에 이 주먹을 쓸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무뚝뚝한 권마의 눈빛에는 ‘잘 처리했다’라는 칭찬이 담겨 있었다.

“그 주먹 믿고 마음껏 조잘거린 거죠.”

혈천도마가 문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제 그 입도 좀 쉬어라. 우린 간다.”

“아니, 세상 한가하신 분이 왜 자꾸 가려고 하세요?”

“대룡이도 가르쳐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나도 바쁘다.”

그러자 권마도 이유를 보탰다.

“난 심야수련도 해야 하고.”

검무극이 두 사람을 붙잡았다.

“정 없게 뭘 바로 가세요! 먼 걸음 하셨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죠. 혹시 압니까? 그 주먹 시원하게 쓸 일이 생길지?”

의미심장한 말에 권마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가시죠, 가서 말씀드릴게요.”

검무극이 어디 못 가게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팔짱을 끼며 함께 걸어 나갔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부지런히 돌아다녀야지, 벌써 집이 좋으면 어찌합니까? 나중에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녀요!”

마주보기도 무서운 두 마존들을 양쪽에 끼고 걸어 나가는 희귀한 모습을 보면서 호위들도 그곳을 나갔다.

* * *

우린 호남지단으로 돌아왔다.

나는 곧장 호위들을 모두 물러가서 쉬게 했다.

호남지단에서 혈천도마와 권마와 함께 있는데도 죽는다면, 어차피 호위들이 있어도 죽을 것이다.

호위들은 물러나 오랜만에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잘 사람은 자고, 술 마실 사람은 마시고, 무공수련할 사람은 하고.

나는 두 마존들과 함께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여도 은근히 합이 잘 맞았다. 혈천도마가 깐깐한 늙은이처럼 보여도 상남자다운 기질이 있었고, 그것이 권마의 성격과 잘 맞았던 것이다.

두 마존과 함께 첫 잔을 시원하게 비웠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정말이지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들이다. 이제는 뭐든 말할 수 있고,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그들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작정이냐?”

술잔을 내려놓으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강서지단으로 가야죠.”

호남지단과 강서지단주를 만나는 것이 이번 출교의 목적이었으니까.

“강서지단주는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있겠군.”

호남지단주도 죽었고, 이곳의 대표 문파인 천화문주도 죽었으니까.

“지은 죄가 없다면 불안할 이유가 없죠.”

“그래도 불안할걸?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누가 찾아온다고 하니.”

“억울합니다. 저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다시 두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한데 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서 남아주시기를 바란 거고요.”

나는 이번 일의 배후에 대해 두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죽은 천화문주와 진하군을 이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천화문주가 그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는 곧장 무림맹을 움직였죠.”

“그렇다면 힘이 있는 자겠군.”

직감적으로 발톱을 숨긴 자임을 느꼈기에 혈천도마가 눈에 이채를 발했다. 이번 일이 호남지단주의 비리에서 시작된 단순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아까 진하군을 떠봤을 때 그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무림맹 내부인사일 가능성이 크겠군.”

“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혈천도마는 단번에 내 의중을 알아차렸다.

“놈을 잡을 작정이군.”

“적어도 누군지는 알아내야지요. 제게 위협이 되어서만이 아닙니다. 그런 자가 진하군 주위에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다시 말해 미래에 무림맹주가 될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다는 의미니까요.”

혈천도마와 권마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아낼 생각인가?”

“그건 어르신이 말씀해주셔야죠. 제가 왜 이 먼 곳까지 어르신을 모셨겠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들으려고 모셨죠.”

“늙은이를 부려 먹으려고. 잘하는 짓이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혈천도마는 기분 좋아 보였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받는 순간은 언제나 즐겁지 않은가?

잠시 고민하던 혈천도마는 한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한데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무슨 말씀이시죠?”

“왜 이번 일에 진하군까지 동원하며 나섰을까? 천화문주와 그만큼 친해서?”

“통천각 조사 결과 그렇게까지 친한 무림맹 인사는 없었습니다.”

“그럼 왜? 어차피 자신의 공이 아니라 진하군의 공이 될 텐데. 그 이득은 무림맹이 다 가질 테고.”

혈천도마의 지적은 예리했다. 나는 누구냐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혈천도마는 ‘왜?’에 집중한 것이다.

“진하군에게 공을 세워주려는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반드시 천화문주가 필요했다는 의미겠지요.”

내 말에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번 일로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다. 넌 그 반응을 기회로 삼아 놈을 잡아내면 되고.”

“역시! 어르신이 최고입니다. 어르신 없으면 저 어떻게 살까요?”

“가면쟁이, 독쟁이, 술쟁이, 비무쟁이…….”

혈천도마가 옆에 앉은 권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주먹쟁이라고 하셔야죠.”

“네 사부와 잘 살겠지.”

그래도 옆에 있다고 권마에게는 예의를 차려주었다.

“옆에 없었으면 주먹쟁이였겠죠?”

혈천도마는 대답 대신 술을 마셨고, 잘 웃지 않는 권마가 미소를 지었다.

“통천각에도 기별하고, 제 정보조직에도 모든 정보망을 이번 일과 관련해서 집중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이때까지 대화를 듣고만 있던 권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보고 돌아가마.”

권마는 혹시라도 도울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역시! 우리 사부님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죠?”

권마의 입에서 나오는 ‘독서쟁이’를 듣고 싶었지만, 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나도 함께 술잔을 비웠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 * *

진하군이 사부의 집을 찾아갔을 때 백천경은 나무 인형을 조각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사부님.”

백천경은 인사를 받아주지 않고 나무 깎는 데에만 집중했다.

사각사각.

진하군은 사부의 눈치를 봤다. 아직 호남에서의 소식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돌아와서 할아버지를 뵙고, 곧장 사부를 만나러 온 길이다.

할아버지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천화문 후계자의 악행을 용서할 수 없어서 결국 포기했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할아버지의 얼굴에 지어진 표정은 분명 기쁨이었다.

만약 천화문을 얻고 돌아왔다면 저 표정에 어떤 감정이 드리워졌을지 끔찍했다. 다시금 검무극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언젠가 꼭 갚겠소.’

문제는 사부였다. 사부가 제안했던 일을 결국 실패한 셈이니까.

‘그래도 이해하시겠지?’

이번 일을 권한 목적 역시 자신을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었을 테니까.

사각사각.

사부의 등을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껏 당신은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었소?

할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사부도 똑바로 보지 않고 있었다.

할아버지니까. 사부니까.

이제 똑바로 볼 것이다. 상대에게 어떤 선입견도 없이 똑바로.

여전히 사부는 조각에 집중했기에, 진하군은 평소처럼 공방을 둘러보다가 인형들이 세워진 장식대로 갔다.

싸움을 주도하던 영웅 인형 앞에 작은 인형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떠날 때는 못 보던 인형이었다.

진하군이 쓰러져 있던 인형을 일으켜 세우던 바로 그때, 뒤에서 사부가 말했다.

“그대로 눕혀두어라.”

17 절대회귀-277화 17

제277회 감당할 수 있어?

진하군은 일으켜 세우려던 인형에서 손을 뗐다.

사각사각.

다시 나무를 조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인형을 세우든 눕히든 상관하지 않았을 사부였다.

이 인형이 누구길래?

진하군은 다시 쓰러진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갔다. 결국 진하군은 감히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지만, 등을 돌린 채 엎드려 있던 인형을 슬쩍 뒤집어보았다.

순간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그 나무 인형은 자신이었다. 손가락 크기였지만, 분명 자신임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옷도 그렇고 머리카락도 그렇고.

“접니까?”

나직한 물음에 나무 깎던 소리가 멈췄다.

“그래, 너다.”

진하군은 의아한 마음으로 사부를 쳐다보았다.

‘나라고 하시면서 그대로 눕혀두라고?’

진하군은 알 수 있었다. 사부가 호남에서의 일을 알고 있음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차라리 그냥 화를 내시지. 호통을 당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대체 사부는 이 인형을 깎으면서, 그리고 이 앞에 눕혀두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섭섭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 그날의 사정을 모르셔서 이러는 것이리라.

“천화문주 아들이 무고한 이들을 살해했습니다.”

사부는 말없이 조각에 열중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하라는 뜻이었다.

진하군은 그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할 수 없었다. 천화문을 포기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시험임을 깨달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애초에 사부가 할아버지의 시험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 되지 않는가?

“검선께서 나서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핑계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사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안절부절못하며 사부에게 용서부터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하군은 가만히 사부를 쳐다보았다.

‘검무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돌아오는 내내 검무극 생각을 해서 그랬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활짝 웃으며 자신을 보던 그의 얼굴이.

―한잔합시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검무극이라면 이런 순간에도 웃으면서 대처했을 것이다.

그래, 흥분하면 지는 거다.

진하군이 차분히 말했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순간, 나무 깎던 소리가 멈췄다.

백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심장이 터질 듯 뛰었을 텐데, 이상하게 겁나지 않았다.

백천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제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백천경이 들고 있던 인형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진하군에게 걸어왔다.

진하군은 가만히 사부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눈보다 머리가 먼저 움직였을 것이다.

사부님의 기분이 지금 이렇겠지. 뭐라고 해야 사부님의 화가 풀리실까?

하지만 지금의 진하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박혀버린 검무극의 그 말.

―지금껏 당신은 똑바로 보고 있었소?

진하군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사부를 쳐다보았다.

사부의 눈빛, 발걸음, 손의 움직임, 그리고 표정까지.

‘낯설다.’

제자를 응시하던 백천경의 시선이 장식대에 쓰러져 있던 인형을 향했다.

“네 인형이 쓰러져 있어서 섭섭했더냐?”

진하군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부께서 만들어주신 제 첫 인형이니까요.”

백천경이 인형을 제자리에 세웠다.

“됐느냐?”

진하군은 잠시 인형을 내려다보더니 그걸 다시 눕혔다.

“아뇨, 이번에는 검무극에게 패배했습니다. 쓰러져 있어야죠.”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백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든 천화문을 네 손에 넣고, 그들을 살렸어야 했다.”

진하군은 말없이 백천경을 쳐다보았다. 역시 낯설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옆에서, 그것도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본 적이 없었구나. 사부를 볼 때도 슥, 할아버지를 볼 때도 슥. 그렇게 사람을 보고 살았구나.

“언젠가 전쟁이 벌어졌을 때, 천화문에 의해 수백 명의 정파인이 죽게 될 수도 있겠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예전이었다면 곧장 엎드려서 사부에게 용서를 구했을 것이다. 지금 사부가 하는 말이 와닿았을 테니까. 아니, 와닿지 않았어도 사부의 말씀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마음이 들었다.

‘왜 일어나지 않은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걸까?’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과 저 천화문주를 연결해준 사람은 당신이 맹주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소.

그때는 헛소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마음에 작은 의구심이 되어 자라나기 시작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 말에 백천경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래, 알면 됐다. 이제라도 천화문을 되찾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고민해보겠습니다.”

백천경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조각을 다시 하기에 앞서 그가 한마디 내뱉었다.

“맹주께서도 그걸 바라셨을 거다.”

사각사각.

끝까지 진하군의 생각과는 어긋나고 있었다.

‘과연 그러셨을까요?’

할아버지는 자신이 천화문을 포기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셨다. 할아버지를 똑똑히 보려 노력했기에 그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지금 저 말에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을 거다. 할아버지를 제대로 보지 않았으니까.

오늘 비로소 진하군은 검무극이 말한 똑똑히 보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우린 서청 같은 자를 용서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린 정파니까요. 정파 중에서도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고, 그 맹주의 사부니까요.’

검무극을 만나고 돌아오니 사부가 달리 보였다.

아니, 어쩌면 사부는 자신이 인지한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단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 * *

그날 밤 진하군은 악몽을 꾸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게 밤새도록 쫓겨 다녔다. 아무리 도망가도 상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추적해왔다.

지금도 저 멀리 뒤에서 놈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뛰기도 힘들었다.

자포자기 상태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데 길가에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 아는 얼굴도 있었다. 어려서 같이 무공수련을 했던 이들도 있었고, 시비도 있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 왜 하필 이들이 나오는 걸까? 악몽은 항상 잊고 있었던 이들을 불러낸다.

그들을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뒤쫓아 오는 그림자는 점점 더 가까이 왔다.

이제 죽겠구나 싶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진 대주!

고개를 들어보니 주점의 이 층 난간에서 기댄 채 검무극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올라와서 한잔합시다.

그는 마지막 헤어질 그때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홀린 듯 주점의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가 반가웠다.

이 층 난간에 검무극과 함께 섰다. 자신을 뒤쫓아 오던 시커먼 그림자는 주점 입구에서 자신을 올려다볼 뿐, 그곳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 무섭던 그림자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함께 서 있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연회장에서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소? 우리가 아니라면 누가 저런 놈을 제지할 수 있겠소?

검무극을 쳐다보던 그 순간, 진하군은 꿈에서 깨어났다.

“후우.”

땀에 흠뻑 젖은 채 진하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극이 꿈에 나온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를 만난 후 지금까지 계속 그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오늘 꿈속에서 했던 선택들은 너무 어리석었다. 그저 무기력하게 쫓기기만 했다. 직접 싸우든, 멸마대를 이끌고 싸우든,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든. 적극적인 노력과 선택을 해야 했었는데. 그냥 쫓기기만 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점이었다. 자포자기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악몽을 떨쳐내며 그가 벌떡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진하령은 진하군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안 하던 짓은 오라버니도 하네?”

근래 진하군이 자신의 처소를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변하기도 하는 거지.”

“너무 바뀌지는 마, 무서우니까.”

방을 둘러보던 진하군이 자리에 앉았다. 오라버니가 그냥 자신을 찾아왔을 리 없었기에 진하령은 내심 긴장하며 물었다.

“갔던 일은?”

“실패했어.”

“그런 것 치고 얼굴이 좋은데?”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이었거든.”

진하령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진하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지금 뭐가 맞는지, 뭐가 틀렸는지.

“검무극, 그 사람은 어땠어?”

“몰라.”

“그러지 말고 말해줘.”

“모르겠다고. 그 사람을 모르겠다고.”

진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봤네. 그 사람.”

그녀 역시 검무극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저 대답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진하군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하령아, 너는 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봤어?”

진하령은 놀란 마음으로 진하군을 쳐다보았다.

“지금.”

진하군이 옅게 웃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가? 아, 있었다.

“검무극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때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어.”

“어떻게 넘겼지?”

“내가 넘긴 게 아니지. 검무극 그 사람에게 휩쓸려서 지나간 거지.”

이제는 진하군도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진하령은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의 인생에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쳤음을. 검무극 때문이냐고 묻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때 진하군이 뜻밖의 일에 대해 물었다.

“후기지수 모임 아직도 해?”

“하지.”

“많이들 오겠군.”

“어디 나 보러 오나? 할아버지에게 잘 보이려고 오는 거지.”

진하령은 정파의 후기지수들을 돌아가면서 초대했다. 개인적인 모임이라기보다 맹 차원에서 후기지수들을 관리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 일을 그녀가 맡고 있었고.

“초대할 사람이 있다.”

“누구?”

그러자 진하군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나왔다.

“선입견 없이 봐야 하는 사람.”

진하령이 깜짝 놀랐다. 지금 검무극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

진하군이 대답했다.

“그 사람 도움이 필요해. 네 손님으로 부르고, 우연을 가장해서 나를 만나게 해줘.”

직접 그를 부를 수는 없었다. 무림맹주가 될 사람이 마교 소교주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으니까.

“진심이야?”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저렇게 놀랄만하다. 자신조차도 이건 미친 짓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사부에게서 느낀 이질감은 그의 위기 본능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처럼 모르고 산다면 모를까, 마음에 피어난 의구심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다.

미룰 일도 아니고 자존심을 챙길 때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해관계가 얽힌 내부 사람이 아닌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외부 사람이 필요했다. 꿈속에서처럼 무기력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몰라도 돼.”

“다시 물어. 지금 멸마대주가 마교 소교주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야?”

진하군이 대답했다.

“네 오라버니가 네 친구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하자.”

자신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본능이 꿈까지 동원하며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그가 필요하다고.

진하령은 망설였다. 철들고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하는 첫 부탁이었음에도 망설였다.

그녀에게도 검무극은 좋은 기억이었다. 이 핑계로 그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와 얽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무림맹 후계자가 될 사람과 마교 후계자의 관계였으니까.

그래서 불안했다. 오라버니의 일에 마인을 끌어들여도 되는지.

“감당할 수 있어?”

잠시 사이를 두고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무극? 못 해. 감당 못 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도움이 필요한 거고.”

정확하게 상대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진하령이 안도했다.

“그럼 됐어.”

* * *

나는 시공이환술 속에서 시천비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회귀한 후 지금까지 온갖 사람을 만나고 온갖 일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공수련이란 것을 잊은 적은 없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되면 언제나 수련에 몰두했다.

시천비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다. 정말 거북이처럼 더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확 경지가 올라가 버리는 일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있어야 할 때면 잠시 눈을 감고 천마호신술을 연마했다. 대성을 한 단계 남겨뒀기에, 최선을 다해 수련했다.

구화마공은 틈이 날 때마다 제일초식만 반복해서 수련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으로 죽이지 못할 상대도 거의 없겠지만, 만약 나타난다면 제일초식으로 죽일 작정이다. 그래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수련했다. 네 악귀들과는 이젠 친밀감이 들 정도로 보고 또 보았다. 그들이 머무는 시간도 미세하게 늘고 있었고.

그렇게 수련을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창밖으로 권마가 산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권마는 마당 끝에 우뚝 서서 담장 너머 저 멀리 산을 바라보았다.

“사부님.”

나는 권마 옆에 나란히 섰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계셨는지 맞혀볼까요?”

그러자 권마가 흥미를 보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절벽 떠올리고 계셨죠?”

“누가 들으면 내가 절벽 부수는 데 미친 것으로 오해하겠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사부님 등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권마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등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버지가 그렇고 권마가 그렇다.

그의 등을 볼 때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저 등이 얼마나 우직한 등인지 알기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명령이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천, 수만의 적을 향해 홀로 걸어갈 등이기에.

“사부님, 절벽은 무너뜨리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그거 다 언제 치우겠어요? 그리고 거기 절벽이 있어야 멋있잖아요?”

권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이 남자의 웃음, 자주 보지 못하는 이 웃음을 나는 좋아한다.

그때 호남지단 무인이 와서 전서를 전했다. 뜻밖에도 진하령이 보낸 전서였다.

―살면서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해 달라고 했지? 바로 지금이야.

13 절대회귀-278화 13

제278회 오랜만에 호북일미 보니까 떨려?

권마와 함께 혈천도마의 거처로 찾아갔을 때,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뭔 책을 여기까지 와서 읽으십니까?”

내 말에 혈천도마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집에 안 보내주니까 여기서라도 읽어야지.”

“그 책은 어디서 난 책인데요?”

“지단 무인들을 위해 마련된 서고가 있더구나.”

무인들이 책을 읽기나 하겠는가? 형식적으로 갖춰둔 그곳까지 뒤져서 기어코 읽을거리를 찾아낸 그였다. 이런 점을 보면 그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만 읽으시고, 이거부터 읽어보세요.”

그제야 혈천도마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무림맹주의 손녀에게서 전서가 왔습니다.”

“무림맹주 손녀가 왜?”

“도움을 청하는 내용과 함께 후기지수 모임에 초대장을 보내왔습니다. 틀림없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쪽에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구나.”

혈천도마는 이 반응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고 조언을 해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기별이 왔다.

“짐작하건대 천화문주와 진하군을 연결해준 자가 이번 일의 실패로 진하군을 압박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시기에 진하령이 나를 보자는 것은 오라버니인 진하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번에는 권마가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

“친구가 도움을 청했는데 가야지요.”

권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무림맹에 가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예전 내가 그들과 접촉할 때와 소교주가 된 지금 접촉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으니까. 나의 행동이 본교의 공식 입장이 될 수 있었다.

“신중히 움직이겠습니다.”

그러자 권마가 단호히 말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혈천도마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진 나와 함께 움직이자고 이야기를 끝낸 모양이다.

“두 분이 참석하면 무림맹 전체에 비상이 걸리겠죠. 본교 호남지단에도 비상을 거시는 분들인데.”

두 마존들이 옅게 웃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호남지단에 비상이 걸렸던 일은 우습겠지.

독왕이나 취마였다면 함께 연회에 참석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두 사람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한다.

“무림맹에서 가장 가까운 안가에 계셔 주십시오. 도움이 필요하면 곧장 기별하겠습니다.”

두 마존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적연이 와서 누군가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생각지 못한 전서에 이어 생각지 못한 사람의 방문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여인이었다.

“이 무인이 왔습니다.”

* * *

이안이 호남지단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복면을 착용한 그녀는 평소와 다른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지단 무인들 모두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복면으로 감출 수 없는 미모도 미모지만 그녀가 풍기는 기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걸음걸이만으로도 일반 무인들을 압도하는 고수의 기세가 느껴졌다.

그녀는 흑의 무복과 복면을 착용했고, 검은 복면에는 하얀색으로 귀영(鬼影)이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 뒤로 청면이 십여 명의 무인과 함께 뒤따라 들어왔다. 모두 같은 복장이었는데 하나 같이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안!”

내 부름에 이안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원래라면 오랜만에 본 나에게 도련님! 하면서 달려올 그녀였는데,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왔다.

―무복 새로 맞췄네? 멋지다!

내 전음에 이안이 빠르게 답했다.

―말 시키지 마세요! 멋있게 인사할 거예요.

―지금 너, 같은 쪽 팔과 다리를 들고 있어.

―하지 마요! 장난치지 마요! 도련님에게 첫인사 하는 자리인데 멋있게 인사할 거란 말이에요.

내 앞까지 걸어온 그녀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이 가식이라니!

―참아요!

그녀 뒤로 함께 온 무인들이 일렬로 늘어섰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우렁찬 인사에 이안이 그들을 소개했다.

“귀영대 제일조에요.”

그러자 청면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일조 조장 청면입니다. 소교주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귀영대 제일조가 완성된 것이다. 청면은 여전히 푸른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가면 속 두 눈이 더없이 믿음직해 보였다. 마존이 될 자리를 뿌리치고 조장을 선택한 남자다. 그가 이끄는 일조는 무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조직의 일조보다 뛰어날 것이라 믿는다.

“지금은 제일조뿐이지만, 점점 늘어날 거예요.”

이안에게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거기에 청면이 충성심을 더했다.

“우린 오직 소교주님의 명령만 수행합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네, 그렇습니다.”

“지금 가서 무림맹주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할 텐가?”

자살 임무였음에도 청면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곧바로 명령을 수행할 겁니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명령을 내리시면? 그리고 그 명령이 내 것과 상충하는 명령이라면?”

순간 청면은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히 대답했다.

“우린 오직 소교주님의 명령만 받듭니다.”

“나에 대한 충성심은 고마운 일이나 아버지 명령만큼은 예외로 둔다. 우리 아버지 명령은 내 명령이라 생각하고 따르도록.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깊은 신뢰를 담아 청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진짜 당부는 전음으로 했다.

―나보단 자네 대주를 잘 챙겨주게.

청면이 가면 속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어떤 말보다 믿음이 가는 눈빛이었다.

청면을 지나 천천히 일조원들 앞으로 걸어갔다. 다들 젊었다. 이안과 청면이 엄선한 이들이니, 믿어도 될 무인들이었다.

내가 지나갈 때마다 복면을 벗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일일이 눈을 맞춰준 다음에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대주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라고. 자기 행복을 위해 살라고.”

다들 들어본 말이라는 표정이었다. 아마 이안이 그들에게 나에 대해 설명한 것이 있으리라.

귀영대 무인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왜 귀영대라 이름을 붙였는지 아나?”

“소교주님의 그림자가 되겠다는 의지로 지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맞다. 너희는 내 그림자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적연이 살짝 긴장하고 동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귀영대 무인들의 기세가 호위들 못지않은 데다, 내 그림자라 이름 붙은 걸 보고서 묘한 경쟁심이 생기는 모양이다. 그림자는 자신들이라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

모른 척 귀영대 무인들에게 말을 이었다.

“본체는 행복한데 그림자가 불행하면 그건 이상하겠지? 그러니 나 나쁜 놈 만들지 말고, 본체보다 그림자가 더 행복해지도록. 난 너희가 행복해야 이 조직은 더 강해질 거라 믿는 사람이다. 자, 따라 한다. 행복한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그림자가 되겠습니다.”

따라 하면서도 일조원들은 어색해했다. 독특한 소교주란 것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외침을 복창하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행복.

지금까지 마교의 어떤 조직에서도 강조한 적 없던 말이리라. 아니, 정파와 사파에서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이안이 끼어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저 말씀이 너희가 비겁해지란 뜻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지?”

“물론입니다!”

우렁찬 대답이 흘러나왔다.

“오느라 수고했다. 적연, 귀영대에게 식사와 방을 내주도록. 그리고 이 대주는 나 좀 보고.”

그렇게 귀영대를 쉬게 하고 이안과 둘이 화원을 걸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도련님 계시다는 것 들어서 본교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어요. 지나가는 길이라서요.”

“일조원들 자랑하러 온 건 아니고?”

“표났어요?”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당장 내게로 달려온 것이다.

“도련님께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때요? 제 수하들.”

잠시 대답을 아꼈다. 잔뜩 긴장한 그녀를 어떻게 놀릴까 고민할 때 그녀가 선수를 쳤다.

“다행이에요. 잘 뽑았다고 해주셔서.”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놀리려고 고민하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망쳤으면 놀릴 생각도 안 하셨을 텐데.”

눈치 빠른 이안의 말에 장난 대신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었다.

“그래, 다 괜찮아 보이더라. 뽑느라 고생했다.”

이안이 활짝 웃었다. 이 한마디에 지난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으리라.

“넌 어땠어?”

“이번에 중원을 돌아다니면서 제가 우물 안에만 있었다는 걸 몇 번이나 실감했어요. 경험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고요.”

“그런 의미에서 나랑 경험 하나 더 하러 가자. 너 도착한 날 초대장이 왔으니, 함께 가라는 운명인가 보다.”

진하령에게 전서가 날아온 날, 이안이 도착했다. 두 여인을 만나게 해주라는 운명이라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워낙 총명한 여인들이니, 이 만남이 그녀들을 어떤 식으로든 성장시켜 줄 거라 믿는다.

거기에 또 하나의 이유.

진하령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고향에 여자 있어? 좋아하는 여자?

―너보다 더 예쁜 여자가 있다.

―나보다? 그럼 당신 말의 신뢰도가 확 떨어지는데?

―너는 호북일미잖아? 저쪽은 천하제일미야.

―다음에 꼭 보여주세요, 그 천하제일미!

기회가 되면 소개해 주려 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누가 보낸 초대장인데요?”

난 옅게 웃으며 말했다.

“있어. 내 신뢰도를 추락시킨 사람이.”

* * *

진하령은 평소와 다름없이 모임을 개최했다.

이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후기지수들은 저마다 온갖 노력을 했다. 각 지역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후기지수가 되어야 초대장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은 다른 문파의 자제들과 인맥을 쌓을 기회라는 점이다. 특히 진하령에게 눈도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 모임은 의미가 있었다.

젊은 후기지수들은 내심 진하령과의 혼인을 꿈꾸며 모임에 참가했다. 대부분 자기 고을에서는 최고로 잘 나가는 그들이었기에 큰 꿈을 꾸었다.

상대는 무림맹주의 손녀에 호북제일미에 무공 또한 뛰어난 그녀였으니, 혼인할 상대로는 정파 무림에서 최고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직접 진하령을 만나게 되면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녀는 모임 자체는 훌륭하게 잘 이끌었지만, 절대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지난 소룡전 사건 이후에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진하령의 호위인 추호가 다소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따라 유독 그녀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

검무극이 당연히 올 거로 생각하진 않았다. 지난번 만났을 때와 달리 이제는 신분 차가 확실히 났으니까. 무림맹에 온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니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괜한 기대가 들었다. 검무극이라면 왠지 와줄 것 같았다. 그는 그런 기대감을 주는 남자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속속 연회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신이 누군지를 알리기 위해 다들 애쓰고 있었다.

휘장 뒤에서 바깥을 쳐다보았지만, 검무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오려나?’

섭섭함이나 자존심 상하는 것은 둘째치고, 오라버니에게 그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가실 시간입니다.”

추호의 말에 그녀가 마음을 다스렸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나오자 모두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녀를 처음 본 사람은 호북일미의 미모에 크게 감탄했다.

보통 귀한 걸음 해주신 동도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반갑다, 친구들아.”

농담으로 운을 떼자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대번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할아버지가 연설 시작하시면 아무리 지겨워도 다들 눈도 깜짝 못하죠? 자, 지금은 졸아도 괜찮아요.”

다시 이어진 웃음소리. 원래 진하령은 이렇게까지 시원시원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검무극을 만나고 난 이후, 그녀는 바뀌었다. 바뀌려고 노력 중이었다. 왜 그러는지는 그녀 자신도 몰랐다.

“근래 심상찮은 소식들을 들었을 거예요. 마교에서 들려온 소식, 사도맹에서 들려온 소식 말이에요.”

마교와 사도맹이 언급되자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모인 이들 대부분은 명문의 자제들이었기에 마교와 사도맹 후계자에 대한 소문을 여러 경로로 듣고 있었다. 특히 마교의 후계자에 대한 소문은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다.

“우리가 왜 모여야 하고, 우리가 왜 똘똘 뭉쳐야 하는지 그 소문이 말해주고 있죠. 역대 그 어떤 후계자보다 굉장한 사람이 나타났으니까요. 그리고 그를 상대할 사람은 할아버지나 부모님이 아니에요. 미래에 우리가 상대해야 하죠.”

장내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

잠시 연설을 멈추고 진하령은 말없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젊은 무인들이 각성해야 한다. 그를 상대하려면, 진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바로 그때였다. 진하령은 후기지수들 사이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상대를 보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대체 언제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 사이에 검무극이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아! 왔구나!’

울컥 반가움이 솟구쳤다. 맑고 깊으면서도 금방이라도 장난칠 것 같은 순수한 눈빛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가 고마웠다.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거부하지 않고 이렇게 달려와 주었으니까. 마교 소교주이면서 저렇게 정파 사람들 속에 홀로 서 있다. 와달라는 자신의 부탁에 말이다.

검무극을 응시하며 그녀는 연설을 이어갔다.

“소문 속 마교 소교주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똑똑하고 또 용감하다고 했어요. 심지어 약속도 잘 지킨다죠?”

검무극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니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실력을 쌓아야 해요. 방심하고 있다간 언젠가 마교 소교주의 검이 우리의 심장을 찌를 거예요. 그러니 우리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노력합시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졸고 있을 시간 없어요.”

후기지수들이 열광하며 환호했다.

시끄러운 장내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 * *

연설을 마친 진하령은 곧장 후원에서 검무극과 따로 만났다.

“정말 와줬군요.”

“우리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잖아?”

“오랜만에 보니까 어색해서.”

“편하게 대해도 돼. 난 친구로 온 거니까.”

가까이서 검무극을 보니 진하령은 괜히 긴장되고 떨렸다. 오라버니 문제까지 있다 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정말 친구로서 와준 것이겠지? 혹시 이 사람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고마움과 두려움이 뒤섞였다.

그래서 그녀는 괜히 너스레를 떨며 긴장을 풀었다.

“어때, 오랜만에 호북일미 보니까 떨려?”

“나야 천하제일미를 만날 보는 사람이라서.”

“또 허세를 떠신다?”

“그럴 줄 알고 데려왔지.”

“그럼 어디 보여주시죠, 그 천하제일미.”

이때까지만 해도 진하령은 검무극이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검무극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건물 뒤에서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여인과 함께 온 것을 알자 진하령은 깜짝 놀랐다.

이안이 천천히 건물 그림자에서 나와 두 사람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26 절대회귀-279화 26

제279회 세상일 모르는 거죠.

이안은 면사가 달린 죽립을 쓰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다가오자 진하령의 두 눈은 점점 커졌다. 늘씬하면서도 관능적인, 정말이지 쉽게 볼 수 없는 몸매였다.

그래도 아직까진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 앞까지 걸어온 이안이 천천히 죽립을 벗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진하령은 충격을 받았다.

외모라면 자신 있는 그녀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해도 자신 앞에 오면 평범해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이 상대는 다르다. 또렷하고 시원한 이목구비에, 맑은 눈빛, 탄력 있는 피부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렇게 매력적으로 아름다워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놀라고 감탄한 이유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진하령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비교도 많이 당해보고 예쁜 여자도 많이 만나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다. 저렇게 아름답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거기에 한 가지 더.

이안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안의 기도였다. 기도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니, 마치 눈 내리는 날 핀 한 송이 매화꽃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수다!’

지금껏 봐온 어떤 후기지수도 이런 기도를 보여주진 못했다. 그들은 물론이고 자신마저 압도하는 기도였다.

‘나보다 더 고수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무공까지 강하다고? 설마 성격까지 좋진 않겠지? 목소리가 이상하겠지? 정말이지 이런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어요. 이안이에요.”

쟁반 위에서 옥구슬이 굴렀다. 성격은 아직 알 수 없으니, 일단 외적인 요소만 따졌을 때는 완벽했다.

“진하령이에요.”

진하령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까 그 많은 후기지수 앞에서 연설해도 떨지 않았는데, 이 순간만큼은 떨렸다.

반면 이안은 무림맹주의 손녀를 대하고 있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감이 넘쳤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귀한 분을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뵈어요.”

진하령의 마음에 떠오른 한 마디!

‘누가 할 소리!’

자신이 외모에서 밀리는 날이 올 줄이야?

그녀의 놀란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검무극이 얄밉도록 뿌듯한 표정으로 으스댔다.

“나 이런 사람이야.”

진하령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확인했다.

“정말 당신 여자친구야?”

여자친구란 말에 이번에는 이안이 놀라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여자친구가 없다고 무시해서, 있다고 했거든.”

진하령은 진하령대로, 이안은 이안대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여자친구 맞냐고.”

검무극이 뭐라 대답하려던 그때, 이안이 대답했다.

“아니에요.”

진하령이 뜻 모를 안도감을 느끼던 바로 그때.

“여자친구보다 훨씬 더 가까운 사이에요.”

진하령이 흠칫 놀랐다.

짧은 반응이지만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진 소저가 도련님을 좋아하고 있구나.’

같은 여자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이었다.

마교의 소교주와 무림맹주의 손녀라.

‘세상 남자 모두가 바라는 조건이 적어도 도련님과의 만남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되었겠군요.’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려서부터 제가 호위로 모셨어요. 오랜 시간 뵈어서 드린 말씀이었죠.”

그러자 진하령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힘들었겠어요, 저 사람 모시는 일.”

“쉽진 않았죠.”

두 여인이 동시에 쳐다보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공동의 적이 있으면 더 빨리 친해지는 법이지.”

그러자 진하령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공동의 적이긴 해?”

“무슨 뜻이야?”

진하령이 이안에게 말했다.

“그대를 수하로 여겼다면 저 사람 입에서 절대 여자친구란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 같아서요.”

괜히 떠보는 그 말에 이안은 단호히 말했다.

“오해세요. 제겐 존귀하신 소교주님이시고, 언감생심 그런 마음 가진 적은 없어요.”

검무극을 좋아하는 마음이야 누구보다 깊은 그녀였다. 하지만 자신은 일개 호위였고, 검무극은 천마의 혈육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부모조차 누군지 모르는 혈혈단신이다.

“세상일 모르는 거죠.”

진하령의 그 말은 이안에게 한 말이기도 했고, 또 어쩌면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안이 검무극에 대한 진하령의 호감을 느꼈듯, 진하령 역시 이안이 검무극을 좋아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주 잠깐 두 여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아무튼 허풍쟁이 취급한 것 취소할게.”

“그럼 됐어. 나의 신뢰도 회복 끝.”

이윽고 검무극은 이안을 데려온 이유를 밝혔다.

“이안을 데려온 건, 둘이 미모 싸움을 시키려는 게 아니야.”

“그러면?”

이유는 아주 뜻밖이었다.

“내 친구를 또 다른 친구에게 소개해 주려고 데려온 거지. 둘이 잘 맞을 것 같아서.”

‘또 다른 친구’란 말이 진하령의 마음에 날아들었다.

‘정말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은 섭섭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두 여인을 서로에게 소개한 후 검무극이 본론을 꺼냈다.

“진 대주는 어디에 있어?”

“오라버니는 왜?”

“진 대주 때문에 부른 것 아니었어?”

“어떻게 알았어?”

하여튼 이 사람, 이젠 놀랍지도 않다.

“네 오라버니가 우연히 만나게 해달라고 네게 부탁했겠지.”

“그건 또 어떻게 알았고? 설마? 우리 감시해? 내 주위에 사람 심었어?”

농담이 아닌 진심이기에 오히려 검무극을 웃긴 말이었다.

“정말 그 정도로 뛰어난 세작들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세작을 안 하는 게 문제지.”

그렇다는 말은 검무극이 추측으로 알아냈다는 의미. 그래, 이런 사람이니 오라버니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겠지.

“나 친구로 생각해?”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약속 하나 해. 우리 오라버니 해치면 안 돼. 그럴 거면 차라리 날 죽여. 알았지?”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들었어? 내가 진 대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면, 여기 이 사람 죽이면 돼.”

“친구하라고 소개해 주고선 너무 가혹한 명령 아니세요?”

이안의 말에 진하령이 옅게 웃었다.

“오라버니는 저기 후원 끝에 있는 객방에 있어. 내가 기별하면 당신을 만나러 나오려고 대기 중이지.”

“내가 가서 만날게.”

“오라버니가 자존심 상해할 텐데.”

“자존심 지키려고 했으면 애초에 날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그럼 나중에 봐.”

말을 마친 검무극이 진하령이 알려준 곳을 향해 걸어갔다.

둘만 남자 그녀들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진하령이 이안에게 물었다.

“연회에 같이 갈래요?”

아름다운 두 여인이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간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날 것이다.

이안이 정중히 거절했다.

“다음에 초대해 주세요. 오늘은 제가 갈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네, 그럼 다음에 봬요.”

서로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진하령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우리 또 볼 수 있을까요?”

진하령은 이안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여인인지 궁금했고, 그녀가 아는 검무극과 자신이 아는 검무극이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다. 이안이 아름다워서 더 끌리기도 했고.

“물론이죠. 저는 도련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겁니다. 저를 보고 싶으시면 도련님을 찾아주세요.”

“그러죠.”

진하령은 연회장으로 돌아갔고, 이안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진하군은 객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생이 연락을 주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가서 검무극을 만날 작정이다. 후기지수 모임에 자신이 참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미친 짓이야.’

사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다. 할아버지가 아시면? 역시 크게 실망하시겠지. 문제가 생겼는데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 마인을 끌어들였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검무극을 끌어들였다. 그만큼 큰 위기의식을 느꼈던 거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창가를 지나다 발걸음을 멈추고 안을 쳐다보았다.

진하군과 눈이 마주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진 대주! 당신 왜 여기 있소? 난 그대 동생이 초청해서 회합에 참석한 길이었소. 뒷간이 어디 있나 찾던 중이었는데, 이런 우연이 있소? 역시 우린 운명이 이어진 관계인가 봅니다.”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던 진하군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연기 그만하고, 들어오시오.”

검무극이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알았소?”

“그야 동생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당신과 여기서 만날 리가 없으니까. 당신 뒷간 못 찾아서 헤매고 다니는 사람 아니잖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사람은 더욱 아니고.”

“역시! 우리 진 대주, 똑똑하시오. 나중에 무림맹 치려면 우리도 머리 엄청나게 굴려야겠소.”

“지금 당신 장난 받아줄 마음 아니오. 그러니 그만하시오.”

진하군은 이 순간이 자기 인생에서 어떻게 회고될지 걱정되었다. 정말 멍청한 선택이었다로 시작될지, 아니면 그때 그 선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로 시작될지, 그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부른 것은 어떻게 알았소?”

“당신에게 무림맹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맹주가 되기 위해 천화문도 포기한 당신이지 않소? 그 사실 하나만 봐도 당신이 얼마나 무림맹주가 되고 싶은지 알 수 있지.”

진하군은 침묵으로 그 말을 수긍했다.

“혹시 나를 부른 것이 마음에 걸리시오?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진하군이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검무극에게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아직 후계자가 아니지 않소? 후계자가 후계자를 불렀다면 그건 확실히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멸마대주가 동생 친구를 부른 거요. 도움을 바라서 부른 것이 아니라, 조사할 것이 있어서 부른 거요.”

“그럼 당신은 후계자도 아닌 일개 무림맹 대주가 불러서 온 것이지 않소? 마교 소교주가 말이오.”

“나는 괜찮소. 나는 통이 큰 사람이니까.”

“그걸 잘도 자기 입으로 말하는군.”

“말 안 해주면 당신은 내가 통이 이렇게 큰 걸 모를 거 아니오?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세상 이목을 걱정하느라 말이오.”

“정말이지 당신은…….”

“자기 자랑과 상대방 욕을 동시에 할 줄 아는 사람이지.”

어떻게 말로 검무극을 상대하겠는가? 결국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진하군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검무극이 일어나 구석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차를 부으며 물었다.

“나는 왜 부른 거요?”

막상 대답하려니 진하군은 망설여졌다. 사부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 해야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닌 사부에 관한 이야기를.

검무극이 차를 두 잔 가져왔다. 그 모습이 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검무극이 진하군을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당신이 왜 나를 불렀는지 내가 알아맞혀 보겠소.”

잠시 찻잔을 내려다보던 검무극이 불쑥 말했다.

“당신은 그 사람을 당신 손으로 죽이게 될까 봐 두려운 거요.”

“!”

순간 진하군은 두 눈을 부릅떴다.

“차마 당신이 죽이지 못해서 나를 부른 거요. 당신의 칼로 쓰기 위해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지만, 동시에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진하군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검무극이 했던 말을 떠올렸음을 인정했다. 결국 사부를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 번 떠오른 그 예감은 내내 자신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맹주께 말하지 않은 거요?”

검무극의 진지한 눈빛에 진하군은 이제 모든 것을 밝혀야 할 때임을 느꼈다.

“믿지 않으실 테니까. 설령 믿으셔도 이번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먼저 알아차릴 거로 생각했소. 맹 내부에 그의 눈과 귀가 되는 사람이 여럿 있을 테니까.”

“그 사람이 누구요?”

진하군은 드디어 그 존재를 밝혔다.

“내 사부요.”

사부의 존재는 검무극도 처음 알았다.

“당신에게 사부가 있었소?”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아서 모를 거요. 사부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화무기에게 무림맹 맹주전이 밀리고 무림맹주와 그의 혈육이 모두 죽었을 때, 그의 사부는 그 희생자들 속에 없었다. 적어도 제자를 지켜주다 죽는 사람은 아니라는 거다.

“이번 일을 통해 알았소. 우리 사부가 이상하다는 걸.”

“맞소. 사부들은 항상 이상하오. 내 사부는 절벽을 주먹으로 무너뜨리려 하고 있으니까.”

검무극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이런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런 쪽으로 이상한 사부였으면 좋겠소.”

“어떻게 이상했소? 자세히 말해보시오.”

“확실한 증거가 없소. 그냥 느낌이오. 그런데도 당신을 불렀으니…… 정작 이상한 사람은 나일지도 모르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그렇소.”

검무극의 말에 진하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오?”

“이번 일은 내가 봐도 확실히 이상했소. 애초에 천화문주가 당신네 쪽에 도움을 바란 것부터 이상했지.”

“우리 사부가 천화문주와 친한 사이였을 수도 있지 않소?”

“그럼 하나 묻겠소? 당신 사부가 복수를 언급했소?”

진하군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사부의 위화감에 집중하느라 그 점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진하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놓치고 있었던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화문주의 죽음을 애도했소? 아니, 누가 죽였는지 묻기는 했소?”

애도도 없었고, 누가 죽였는지 묻지도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정말이지 너무나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문득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까운 사람이라서 오히려 더 못 보지 않냐는 말이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이런 객관적인 판단보단 수많은 지난 추억들과 그와의 관계부터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당신 사부가 뭐라고 했소?”

“천화문을 되찾자고 했소. 나보고 방법을 찾아내라고.”

“고작 이런 사이인데 천화문주는 왜 당신 사부에게 도움을 청했을까? 대체 어떤 사이이기에? 객관적으로 봐도 이상하지 않소? 무림맹주 손자의 사부가, 천마신교의 세력에 있는 천화문주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신 본능은 잘 작동했소. 나를 부른 선택도 아주 훌륭했고.”

검무극의 칭찬 공세는 계속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맹주가 되었을 때가 기대되오. 당신 같은 현명한 사람과 함께 하고 싶소.”

검무극은 끝없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사람을 뒤흔드는 사람이었으니, 위기의 순간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겠지. 꿈속까지 찾아와 자신에게 믿음을 줬던 것이리라.

진하군은 더는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마지막까지 검무극은 진하군의 마음속 대변인이었다.

“저쪽이 당신을 가지고 놀려고 했으니, 위험한 장난감이 되어줘야 하지 않겠소?”

16 절대회귀-280화 16

제280회 내가 직접 봐야겠소.

진하령의 몸은 연회장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후기지수들과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계속 검무극과 이안이 생각났다. 이안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고, 그녀의 기도가 느껴졌다. 그 옆에 서 있던 검무극의 모습도 떠올랐다.

‘오라버니는 잘하고 있을까?’

이런 상황이니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후기지수들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들 중에는 잘생긴 이도 있었고, 무공이 강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검무극을 생각하면 다 애들처럼 보였다. 검무극을 알게 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그렇게 오늘따라 길고 길었던 회합을 끝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을 때, 진하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이렇게 오라버니가 반가울 줄이야.

“그러잖아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됐어?”

진하군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 이야기는 잘 끝난 모양이다.

진하군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물었다.

“회합은?”

“이름 외우고 얼굴 외우고, 온갖 자랑 들어주며 친한 척하다가 타도하자, 마교! 이기자 사도맹! 지겹도록 똑같지.”

“그 지겨운 일이 언젠가 정파 무림을 지킬 거다.”

“무림은 오라버니가 지켜. 내 역할은 여기까지만.”

“마교가 무림을 장악하면 몸을 피할 곳이 있을 거라 생각하냐?”

오라버니도 부작용을 겪고 있다. 맹주 손자로 살아온 삶에서 오는 부작용이다. 마교와 사도맹이 쳐들어올 수도 있다는 공포심은 어려서부터 오라버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으니까.

“오라버니는 정말 검무극이 무림일통을 꿈꾸는 사람 같아? 우릴 다 몰살시키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산처럼 쌓인 시체 무더기의 꼭대기에 서 있는 검무극의 모습은.

“모르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림일통을 꿈꾸면 막기가 쉽지 않을 거다.”

할아버지가 막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진하군과 진하령 세대의 일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은 과정에서는 절대 알 수 없다. 그 믿음이 증명될 때는 오직 결과가 나왔을 때지. 아직 우린 과정에 있는 거고.”

사부와의 관계도, 검무극과의 관계도 다 해당하는 이야기다. 백번 잘하면 뭐 하나? 마지막 순간에 본색 드러내면 파국인데.

“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대단한데? 우리 오라버니!”

잠시 사이를 두고 진하군이 말했다.

“검무극이 한 말이다.”

“아!”

그녀는 잠시 숙연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큰소리로 웃었다.

“잘 나가던 우리 오라버니, 드디어 임자 만났네.”

진하군은 이런 말을 들어도 전혀 화를 내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였으니까. 이런 민감한 대화도 편히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라버니는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해?”

진하령은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검무극이 궁금했다.

그녀만큼이나 진하군도 검무극을 생각하면 할 말이 많았다. 분명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사람.

그럼에도 진하군은 상대를 인정했다.

“나와는 크기가 다른 사람이다.”

진하군이 한 손을 내밀어 공을 잡은 것처럼 손을 오므렸다.

“내가 이만한 크기의 사람이라면.”

이번에는 두 손으로 가슴 앞에 커다란 공을 잡는 시늉을 했다.

“검무극은 이만한 사람이다. 그를 상대해서 이기려면 이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거다.”

검무극을 만난 후 오라버니는 확실히 변했다. 자존심 강한 오라버니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부터 달라졌다는 의미였으니까.

진하령은 그 변화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검무극에게 너무 빠져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감당할 수 있지?”

“감당하려고 노력해야지.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 할 테니까.”

진하군의 눈빛은 단호했다. 지금은 비록 도움을 받고 있지만, 결코 검무극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봐라, 내가 어떻게 넘어서는지.”

진하령이 믿는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이번에는 진하군이 물었다.

“너는 어땠어? 검무극 오랜만에 봤잖아?”

불끈 쥔 주먹이 힘없이 펴졌다.

“거긴 더 반복이지. 만날 놀라고 허둥대고. 한데 오늘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어.”

이번에는 진하령이 진하군의 흉내를 냈다.

“내가 이만큼 아름답다면, 이번에 이만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거든.”

이해할 수 없다는 오라비를 보며 진하령은 미소를 지었다.

“호북이 광활한 우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 * *

진하군이 백천경의 공방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 검무극이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눈치 보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시오. 잘 보이려는 것보다 오히려 이번 일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시오. 그래야 그가 의심하지 않을 거요.

하지만 백천경은 공방에 없었다.

그냥 나가려다 문득 장식대를 쳐다보았다. 인형들이 놓여 있던 장식대는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가끔 이렇게 덮어둘 때도 있었다. 한데 이제 덮어둔 천이 달라 보인다.

진하군이 천천히 걸어가서 천을 열어보려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진하군이 돌아보니 백천경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부님.”

“왔느냐?”

천 아래 내용이 궁금했지만, 진하군은 그대로 둔 채 사부에게로 걸어갔다.

백천경이 그를 지나쳐 자기 자리에 앉으며 조각을 시작했다.

사각사각.

요즘 들어 사부가 조각하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 예전에는 취미 정도로만 했던 것 같은데.

장식장도 천으로 덮어 버렸으면서 뭘 저리 깎는 걸까?

“그래, 어떻게 하면 천화문을 되찾을지 생각해봤느냐?”

여전히 사부의 시선은 자신이 깎고 있는 인형을 향해 있었다.

“천화문의 고수 중에서 정파를 지지하는 이들을 회유할까 합니다. 천화문은 오랫동안 중립을 지켜온 문파인 만큼 마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지 않습니다. 물론, 본맹이나 사도맹에게도 마찬가지죠. 문주와 수뇌부에 따라 문파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만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천화문 내 정파 성향의 고수를 우리 편으로 회유할 수 있다면…….”

진하군은 말을 하면서도 백천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살폈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사부는 자신이 방법을 찾아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는 듯, 백천경이 진하군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너는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느냐?”

그는 차분한 어조로 진하군을 자극했다.

“정사마 세 후계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두 사람은 푸짐한 선물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너만 빈손으로 돌아왔지.”

자존심을 언급하며 다른 후계자들과 비교를 한다고? 진하군은 화가 났지만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자존심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호남은 그들의 영역이었습니다. 천화문주의 아들은 인면수심이었고요. 애초에 그곳엔 제 선물은 없었습니다.”

진하군은 검무극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무조건 잘못했다며 사부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다.

“사부님께 천화문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겁니까?”

“너는 내가 천화문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

“아닙니까?”

“아니다.”

“그럼 뭐 때문입니까?”

그러자 백천경의 입에서 놀라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다.”

전쟁이란 말에 진하군이 얼어붙었다.

“무슨 뜻입니까?”

“호남은 무림맹 본단이 있는 호북과 접경으로 대대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한데 그곳에서 중립을 유지하던 대형 문파가 마교의 손에 넘어갔다. 균형이 깨어졌다는 의미지.”

“그렇다고 전쟁이 난다는 것은 너무 비약적인 말씀이지 않으십니까?”

“본맹이 왜 존재하느냐? 그 희박한 확률을 없애려고 존재하는 거다. 전쟁은 사소한 작은 사건으로도 벌어지는 법이니까. 이번에 넌 전쟁이 일어날 확률을 크게 올린 거다. 맹주가 되고 싶은 네 욕심 때문에 말이다.”

순간 진하군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만약 검무극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사부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자신이 욕심을 부렸다는 자책까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려도 나중에 판단할 일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감춘 채 진하군은 짐짓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부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걸 왜 내게 묻느냐? 네가 저지른 일이니 답도 네가 찾아야지.”

사각사각.

백천경이 다시 조각을 시작했다. 무언의 축객령임을 알았기에 진하군은 조용히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그곳을 나왔다. 아직도 사부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 * *

“팔을 조금 더 내리고, 왼쪽 다리에 힘을 더 줘.”

검무극은 이안의 초식을 살펴봐 주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이안의 비천검법은 한층 더 발전해 있었다. 물론, 아직도 대성에 이르려면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구성에서 수련하고 또 수련해서 무르익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꽃봉오리가 팍, 하고 터져 나오듯 대성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허리에 힘을 더 줘.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자세가 다 무너진다.”

두 사람의 수련은 진하군이 마련해준 안가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집중해!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죄송해요.”

오늘따라 무공 수련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닌데. 집중하자!’

이안은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차례 무공 수련이 끝나자, 이안이 다시 사과했다.

“죄송해요, 도련님.”

한바탕 야단칠 줄 알았는데, 검무극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좋았다. 너 보면 가끔 사람 같지 않거든. 사람이 이렇게 집중 못 할 때도 있고, 실수도 하고. 이래야지.”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지만, 그래도 아쉬워요. 오랜만에 도련님이 직접 무공을 가르쳐 주셨는데.”

“대성을 이룰 때까진 자주 가르쳐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이안이 좋다고 살랑살랑 춤을 추듯 몸을 흔들었다. 처음 회귀했을 때의 경직된 그녀와 비교하면 한층 자유로워진 느낌이 든다.

그래, 조금씩 그렇게 변해가는 거다. 이 변화가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다른 삶이 되겠지. 이안아, 이번 생에서는 네가 피 웅덩이에서 죽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지금처럼 춤추며 살아가게 해주마.

내 주위를 아이처럼 왔다 갔다 하며 이안이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 정말 저 진 소저 소개시켜 주려고 데려온 건가요?”

“아니.”

“그럼 왜 데려온 거죠?”

“왜긴. 오랜만에 너랑 놀러 나오고 싶어서 핑계 댄 거지.”

그러자 이안이 자신의 엉덩이 쪽을 돌아보았다.

“제 꼬리 몇 개 없어졌어요. 도련님이 가져갔죠?”

너무 훌륭한 대답이라는 뜻임을 알고 검무극이 자신의 꼬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사실 처음부터 내 꼬리가 더 많았지.”

그렇게 함께 웃고 있는데 그곳으로 진하군이 찾아왔다.

검무극만 있을 줄 알고 왔는데 여인이 함께 있자, 진하군은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기다렸다.

“어서 오시오.”

검무극이 부르자 비로소 진하군은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 이안은 복면을 착용한 후였다. 물론 그 복면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고.

“소교주님을 모시는 이안이에요.”

“멸마대주 진하군이오.”

“그럼 말씀 나누세요.”

“다음에 봅시다.”

이안이 공손히 인사하고 거처로 들어갔다.

진하군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동생이 말한 큰 아름다움이 누굴 말했던 것인지.

검무극에 옆에 와서 넌지시 물었다.

“반했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진하군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소. 남자가 미녀에게 반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니겠소? 다 이해하오.”

“당신은 처음 만난 여인에게도 금방 반하오?”

이렇게 나오면 또 그냥 넘어갈 수 없지. 검무극 앞에서 검을 뽑은 격이었다.

“첫눈에 반할 수도 있지.”

“나는 아니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 마음을 주지 않소.”

거의 진심일 게 뻔했기에, 검무극은 딴 쪽을 공략했다.

“아, 이안아. 너 더 분발해야겠다. 이 철벽같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덜 아름다웠던 거지. 그녀에게 전해주겠소. 그대 마음을 움직이기에 덜 아름다웠다고.”

그러자 진하군이 당황했다.

“그게 무슨! 괜히 그런 말 전하지 마시오!”

“맞잖소? 어딜 감히 미모 따위로 나를! 나를 움직이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미모다!”

“아니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답소.”

“그럼 반했소?”

결국 진하군이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검무극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한바탕 너스레를 떤 후에 진하군은 사부에게 다녀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부를 뵙고 왔소.”

진하군은 사부와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전했다.

검무극은 잠시 숙고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진하군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조금 전 장난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검무극의 얼굴.

잠시 후, 검무극의 입에서 나올 말이 자신의 입에서도 나와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검무극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혹시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셨소?”

“사부가 진짜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지 않소?”

“헛소리요. 만약 무림의 평화를 위했다면, 애초에 천화문주의 아들을 구하려 해선 안 되었지. 생각해 보시오. 마교 소교주가 벌을 주기 위해 잡아간 자를 무림맹에서 압박해서 빼내 갔소. 아버지가 나를 시험한다고 그냥 넘어가서 그랬지, 만약 그 일로 우리가 거칠게 반응했다면 어떻게 됐겠소? 그때야말로 전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결과가 되었을 거요.”

진하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을 그 자리에서 사부에게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사부를 내가 직접 봐야겠소.”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하군을 통해서 그의 진면목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 판단되었다. 상대는 너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어떻게 말이오? 사부는 절대 당신을 만나려 하지 않을 거요.”

지금까지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온 그였다. 제아무리 검무극이라도 사부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곳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들어섰다. 바로 진하령이었다.

“오라버니도 있었네.”

“여긴 어쩐 일이냐?”

“두 사람에겐 볼일 없네요. 이 무인 만나러 왔어.”

검무극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안은 방에 있어. 복도 끝 방. 참, 가서 이안에게 전해줘. 아직 네 오라버니 마음을 움직이기에…….”

“그만!”

진하군이 다급히 말을 끊었다. 딱 봐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한 진하령이 검무극에게 말했다.

“가지고 놀더라도, 꼭 제자리에 가져다 둬.”

“당연히. 무림에서 제일 위험한 장난감인데.”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진하령에게 진하군이 상대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들어가자 진하군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 중요한 때 자꾸 장난칠 거요?”

“당신 사부와 만날 방법을 생각해냈소.”

놀라고 당황해하는 진하군에게 검무극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 동생 덕분에 생각해냈소.”

26 절대회귀-281화 26

제281회 길을 잃은 사람은.

“재회가 너무 빨랐나요?”

문 앞에 선 진하령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안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공 수련을 마치고 들어온 이안은 이제 막 씻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반가운 사람과의 재회는 빠를수록 좋겠죠? 들어오세요.”

진하령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마디를 해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아마 그래서 그녀를 보러 온 것이겠지만.

자리에 앉으면서 보니 탁자에 술이 한 병 놓여 있었다.

“한잔하시려고요?”

“아, 찾아보니 술이 있더라고요.”

안가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둔 술인 모양이었다.

“저도 한 잔 주실래요?”

“물론이죠.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냥 간단히 마시려고 안주를 준비 안 해서.”

“괜찮아요. 그냥 마셔요.”

“괜찮으시겠어요?”

“맹주 손녀라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이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술을 따라준 후 건배했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왜 물으시죠?”

“술도 그렇고, 이 무인 표정도 밝아 보이고.”

좋은 일? 물론 있었다. 오랜만에 검무극에게 무공지도도 받았고, 그보다 더 기분 좋았던 것은 그가 해준 말 때문이었다.

―그럼 왜 데려온 거죠?

―왜긴. 오랜만에 너랑 놀러 나오고 싶어서 핑계 댄 거지.

천마의 혈육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전수해 준 사람에게, 언제나 네 행복이 우선이라 말해주는 사람에게, 그리고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충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진하령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 좋아 보이는 기분이 검무극과 관련 있다는 것을.

이안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안 힘들어요? 무림맹주 손녀로 사는 것요?”

“이 무인은 반대로 묻네요.”

“네?”

“다들 무림맹주 손녀라서 얼마나 좋냐라고 묻거든요.”

“제가 부정적인가 봐요.”

“부정적인 사람이 스스로 부정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죠.”

진하령이 술잔을 비운 후 이안에게 말했다.

“힘들어요. 생각보다 많이.”

“그럴 것 같았어요.”

“이 무인도 힘들 것 같은데요? 모시기 쉽지 않은 사람 모시는 일이.”

질문과는 별개로 진하령은 오랫동안 검무극과 함께 해온 그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힘들어요. 그분과 함께 있으면 평생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나거든요. 가끔은 무림맹주 손녀와 술을 마시기도 하고요.”

농담 섞인 이안의 말을 진하령은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렇죠?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어요.”

검무극과의 관계도, 지금 이 자리도.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무림맹에서의 삶과 마교에서의 삶,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서로의 삶이 술잔이 빌 때마다 오갔다.

그러다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고 검무극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무공 이야기를 했고, 다시 검무극 이야기를 했다.

진하령은 솔직한 심정으로 이안에게서 부족한 부분들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 여자 괜찮다. 이런 생각만 들었다.

술병이 다 비워졌을 때 진하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마시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이안을 깜짝 놀라게 할 제안을 했다.

“이 무인, 우리 친구 할까요?”

“이렇게 즉흥적으로요? 우린 이제 두 번째 보는 건데요?”

“뭐 어때요? 처음 본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곳이 무림인데.”

친구 하자는 말, 진하령이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해본 말이었다.

자신과 친구가 되려고 줄을 선다. 하지만 그들 누구에게도 친구 하자고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두 번 만난 이안에게 먼저 친구 하자고 제안하다니. 진하령은 알 수 없는 세상일만큼이나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마인과 친구 하는 것이?”

“전 괜찮아요. 이 무인은요?”

잠시 진하령을 말없이 응시하던 이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멋진 친구가 생기는 일인데, 어찌 싫을 수 있겠어?”

괜히 말했나, 하는 진하령의 후회가 싹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 *

진하군이 다시 사부를 찾았다.

사각사각.

“방법을 찾은 거냐?”

사부는 계속 방법을 묻고 있다. 이제 진하군은 안다. 사부는 방법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몰아붙이려는 것이 목적이다. 자신을 틀어쥐기 위해서. 사람을 옭아매는 방법 중 가장 빠르고 확실한 것이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아뇨. 오늘은 다른 이유로 찾아뵈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단호한 대답에 백천경은 나무를 깎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진하군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밝혔다.

“요즘 제게 많이 실망하셨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 변명도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백천경의 표정은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사부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백천경의 눈가에 살짝 의아함이 스쳤다. 진하군의 말처럼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뭔가를 부탁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만큼 중요한 부탁이란 뜻이기도 했다.

“말해봐라.”

“일전의 소룡전 때 마교 소교주인 검무극과 하령이 사이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진하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여 말했다.

“하령이가 그때 그자에게 호감을 가진 모양입니다.”

백천경은 말없이 진하군의 말을 들었다.

“이 철부지가 이번 후기지수 회합에 마교 소교주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교주가 비밀리에 본맹에 와 있습니다.”

“본맹에 마교 소교주가 와 있다고?”

백천경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저도 조금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 검무극이 하령이를 보러 왔다는 말을 하는 것이냐?”

“네, 그자 역시 동생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백천경은 믿지 않았다.

“소문으로 들은 마교 소교주는 절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다. 너는 직접 놈을 보고 당하기까지 했으니 잘 알 것 아니냐? 그런 자가 고작 여자 때문에 본맹을 왔다고?”

“맞습니다. 그자는 보통 놈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서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겠지요.”

“그건 무슨 뜻이냐?”

“그렇게 똑똑한 자가 홀로 무림맹에 오는 선택을 했겠습니까? 똑똑한 남자가 바보가 될 때는 이유가 하나뿐이지요.”

진하군이 하는 말들 중 몇 마디는 검무극이 알려준 말이었다.

―이것이 사부에게 통하겠소?

―동생 일이기에 통할 거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혈육의 일이니까.

백천경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래서? 네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은 백천경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탁이었다.

“검무극을 만나주십시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그였는데, 이번만큼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말이냐?”

“놈을 만나서 경고해 주십시오. 제 동생에게서 물러나라고요.”

백천경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천화문을 빼앗기고 와서 이제는 동생을 빼앗기지 않게 해달라는 거냐?”

뼈아픈 말로 질책했지만, 진하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천화문은 빼앗겨도 동생은 절대 안 됩니다.”

“그럼 오라비인 네가 경고하면 되지 않느냐?”

“제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천화문 일 처리를 하면서 그는 철저히 저를 무시하고 농락했습니다. 오히려 저 보란 듯이 더 접근할 자입니다. 제가 본 검무극은 그런 집요한 자였습니다.”

“네가 못하겠다면 맹주님께 부탁해야지.”

“할아버지 성격을 모르십니까? 할아버지께서는 당장 그자를 내쫓아 버릴 겁니다. 화가 나서 그자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으면 다행일 테고요. 쫓겨나면 놈은 틀림없이 앙심을 품을 겁니다. 동생을 보러 단신으로 무림맹까지 오는 미친놈입니다.”

“내가 나설 일이 아니다. 맹주님과 네가 못 하는 일을 내가 어찌 처리하겠느냐?”

백천경은 단호히 거절했다.

진하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동생이 제게 어떤 존재인지는 사부님이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지금껏 저는 사부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모셨습니다.”

사실이었기에 지금이 진하군에게는 더없이 아프고 답답한 순간이리라.

“부디 이 부족한 제자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사각사각.

백천경은 나무를 깎으며 생각에 잠겼다.

진하군은 물러가지 않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슨 생각이었을까? 깎고 있던 조각을 완성한 백천경이 말했다.

“내일 데려와라.”

* * *

“사부가 허락했소.”

진하군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검무극이 그런 결과를 예상했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라면 해낼 줄 알았소.”

지금은 칭찬이 중요하지 않았다.

“만나서는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오?”

“결정해야겠지요.”

“무엇을 말이오?”

“살려도 될 사람인지, 죽여야 할 사람인지.”

검무극이 진하군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내 결정을 믿을 거요?”

“장난이나 치길 좋아하는 당신을 어찌 믿겠소? 나는 내 판단만 믿을 거요.”

진하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가려던 그가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소?”

요즘 드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일을 진행하면서도 마음속 또 다른 한편에서는 ‘사부는 좋은 사람인데 넌 지금 검무극에게 이용당하고 있어.’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없소. 나는 길눈이 아주 좋소.”

또 장난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진하군이 돌아서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검무극이 말했다.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은 거 아니오?”

“그게 그거 아니오?”

“세상에 길은 다 통한다고 하지 않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안다면 길을 잃을 리 없겠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잊었다면?”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야지.”

“농담하지 마시고.”

검무극은 대법 재료를 찾아서 온 중원을 헤매던 시절이 떠올랐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펑펑 울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만나는 사람에게 물어도 보고, 사람이 없으면 하늘의 별자리라도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신발이라도 던져 운에 맡겨도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야겠지.”

“두렵지 않소?”

“뭐가 두렵소? 어차피 길을 잃었는데.”

“!”

진하군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오.”

“역시 당신들은 점잖소. 본교 사람들은 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했는데.”

“그럼 당신은 이상하게 미친놈이겠군. 내일 아침에 봅시다.”

그 말을 하고 진하군이 그곳을 나갔다.

검무극은 잠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진하군은 아직 젊어서 모른다. 진짜 길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진짜 길을 잃은 사람은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을.

* * *

다음 날 검무극은 진하군과 함께 사부의 공방에 도착했다.

“사부님, 저 왔습니다. 신교의 소교주와 함께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진하군은 흠칫 놀랐다. 평소의 사부와 모습이 달랐다. 사부는 화려한 붉은 장삼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긴 장검을 차고 있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이런 화려한 복장이었다고 기억한다.

검무극과 백천경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검무극의 맑고 깊은 눈도 그렇고, 백천경의 가늘고 긴 눈도 그렇고, 서로의 감정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속에 검무극은 자신의 기도를 개방했다. 상대의 무공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깊은 심연이 백천경을 끌고 들어갔다.

이에 맞서는 백천경의 기도는 독특했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자신은 울창한 숲속에 서 있었다. 끝도 없이 솟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끝도 없이 광경에 홀로 세상 밖에 뚝 떨어진 고독이 엄습해왔다.

백천경이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동안 검무극은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살이 비치고 새가 지저귀었다. 이렇게 밝은 기도를 지닌 사람이라고? 아니다.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면 진하군이 자신을 불렀을 리 없다.

검무극은 계속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은 똑같은 광경을 끝없이 펼쳐 보이며 더는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유혹했다. 검무극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자신을 이끄는 것은 자신의 의지도, 상대의 기도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이끄는 것은 놀랍게도 구화마공이었다.

‘저기에 뭔가가 있다.’

구화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은 깊이 숨겨져 있었다. 그만큼 상대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의미기도 했다.

이윽고 검무극은 그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사람 형상의 목상(木像)을 발견했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목상은 너무나 생생하게 만들어져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얼굴만은 깎지 않아서 평평했다. 금방이라도 나무가 튀어나오고 들어가며 사람의 얼굴을 만들 것 같은 신묘한 느낌이 흘렀다.

검무극이 목상으로 다가서려는데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줄기를 뻗쳐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나뭇가지들이 목상 앞을 가로막았고 자신의 주위를 위협적으로 둘러쌌다.

그 순간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목형천혼술(木形千魂術)!’

세상의 모든 나무를 이용해서 펼쳐내는 극강의 비술.

순간 검무극은 놀람과 격정에 휩싸였다. 이 비술이 온갖 나무가 뜻대로 움직이고, 작은 나무 인형이 크기가 커져 고수처럼 달려드는 그야말로 신묘한 무공이어서가 아니다.

이 무공을 누가 사용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화무기가 은거한 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만든 것이 천하맹이었다.

그 천하맹을 다스린 열두 명의 절대고수.

세상이 십이지왕(十二支王)이라 불렀던 그들!

그들은 지난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십이지왕으로 활약했다. 어쩌면 훗날 있을지 모를 정사마의 복수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 십이지왕 중 여덟 번째 팔왕(八王)이 바로 이 목형천혼술을 사용했다.

검무극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목왕(木王)이다!’

회귀한 후 처음으로 화무기의 추종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24 절대회귀-282화 24

제282회 자네는 어떤 사람인가?

근래에 이렇게 흥분한 적이 있던가?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화무기.

드디어 너의 파편을 보게 되는 순간이구나.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지금의 너는 얼마나 강한 것이냐?

그를 떠올리자 온몸의 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그 격렬한 감정을 느낀 것일까?

스스스스슷.

사방에서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검무극을 압박하듯 다가왔다. 수백, 수천 개의 가지였기에 피할 수도, 다 베어버릴 수도 없을 공세였다.

바로 그 순간!

착! 착! 착! 착!

검무극을 중심으로 전후좌우 네 방향으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것은 구화마공 제일초식 인멸식의 네 악귀들이었다.

방패처럼 악귀들이 막아서자 나뭇가지들은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악귀들이 내뿜는 험악한 기세에 겁을 먹은 것이다.

검무극은 목왕의 기도 속에서 네 악귀가 출현해서 자신을 지켜줄 거라곤 정말 몰랐다. 무섭고 잘 생기고 신비롭고 영리한 그들이 말이다. 이들이 이 정도일진대 천마혼은 과연 어떠할까?

같은 시각 백천경은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이런 기도라니?’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었다. 검무극이 끝없이 숲속을 걸어 들어갔듯, 그는 끝없는 심연 속으로 헤엄쳐 내려갔다.

저 어둠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본능이 그를 말렸다. 더 내려가면 위험하다고.

하지만 백천경은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저 어둠 속 깊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숨이 막혀 왔고, 점점 강해진 압력이 몸을 터뜨릴 것만 같았지만, 백천경은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포기하려던 바로 그 순간.

팟, 하고 세상이 꺼졌다 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백천경은 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피가 강처럼 흐르고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시체는 사람도 있었고 악귀도 있었고 마귀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뒤로 돌아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가.

검무극인가?

하지만 남자의 등은 세상의 온갖 고난을 다 이겨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런 등이었다. 제아무리 마교의 소교주라도 젊은 그가 이런 세월이 느껴지는 등을 가질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럼 누굴까?

고개를 갸웃하던 그 순간,

그 공간이 사라지며 백천경은 다시 깊은 심연에 있었다.

솨아아아아아악.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수면을 향해 끌려 올라갔다. 심연이 순식간에 그를 뱉어내던 순간, 검무극의 기도가 사라졌다.

동시에 백천경의 기도도 사라졌다.

숲속에 있던 검무극도, 물속에 있던 백천경도 모두 현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검무극은 여전히 가슴이 격동하고 있었다.

화무기를 추종했던 자여.

너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물어선 안 되었다.

그를 죽이든 살리든, 뒤를 캐든, 화무기와 관련이 된 이상 신중해야 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여유로운 미소로 바꾸며 검무극이 먼저 인사했다.

“신교에서 온 검무극이오.”

“백천경이네.”

그는 아무런 설명 없이 이름만 밝혔다.

“오면서 제자분께 말씀 들었소.”

그러자 백천경의 시선이 진하군을 향했다. 이 순간 진하군은 내심 긴장했다. 검무극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된 것이다.

“뭐라고 하던가?”

“자기가 가장 믿고 있는 분이라고 하더이다.”

백천경의 시선이 진하군에서 다시 검무극을 향했다.

“하령이를 보러 왔다고?”

“사모하는 정인을 찾아 먼 길을 왔소.”

백천경에게는 그 말이 장난처럼 들렸기에, 작고 긴 눈으로 검무극의 눈을 응시했다. 그 깊은 눈을 보고 있자니, 앞서 기도 속에서 보았던 남자의 등이 검무극과 겹쳐 보였다.

이 젊고 밝은 모습과 기도 속 남자의 모습은 너무나 달라 보였다.

‘그 남자는 누구지?’

백천경은 손님을 맞이하는 탁자로 걸어갔다.

“앉게. 손님이 왔으니 차를 대접해야지.”

“제가 타겠습니다, 사부님.”

“내가 하겠다. 자리에 앉아 있거라.”

“네, 사부님.”

진하군이 검무극과 함께 앉았다. 검무극과는 일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오늘의 역할에 집중하면서 검무극과 사부 사이에 오가는 기류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백천경이 차를 타왔다.

“감사하오.”

검무극은 그가 타온 차를 맛보았다. 독이 들었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마시는 모습에 백천경이 물었다.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넣었소?”

그러면서 다시 홀짝 마셨다.

진하군은 느낄 수 있었다. 이 별것 아닌 대화 속에 묘한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음을.

검무극이 차를 마시며 공방을 둘러보았다.

“나무공예를 좋아하시는군요.”

공방 곳곳에 백천경이 깎아 만든 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구화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현기가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나무로 깎아 만든 저 호랑이가 어떻게 변해 달려들지는 싸워봐야 알 수 있으리라.

그때 검무극의 시선이 검은 천으로 덮인 장식대를 향했다.

“저 아래에는 뭐가 있소? 열어봐도 되오?”

백천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말리지 않았으니 열어봐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검무극은 장식대에 덮인 천을 걷어냈다.

여전히 인형들은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진하군이 변화를 알아차렸다.

‘인형의 위치가 바뀌었다!’

사부가 검무극이라 칭했던 영웅 인형이 반대쪽에 있었다. 쓰러져 있던 진하군 인형 바로 옆이었다.

원래 영웅 인형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인형이 서 있었다. 생김새나 특징으로 볼 때 그 인형은 분명 백천경 자신이 틀림없었다.

결국 백천경은 인형으로 말하고 있었다. 검무극과 진하군이 한편이라 믿고 있다고.

천이 들춰지자 백천경은 속마음을 드러냈다.

“소교주, 나를 죽이러 왔나?”

백천경은 진하령 때문에 검무극이 왔음을 믿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할 수 있는 질문.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검무극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왜 만남을 허락하셨소?”

“마교에서 나를 죽이려 든다면 이 강호 어디에 숨을 곳이 있겠나?”

백천경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진하군은 억울함을 드러냈다.

“저를 끝까지 믿지 못하시는군요.”

검무극의 장식대의 인형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당신 사부께서 여인을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분이라 그럴 거요.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진 소저를 보러 무림맹에 온 것일 뿐이오. 만약 내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면 이런 불필요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겠소? 내가 어디 소교주인지 잊지 마시오.”

그랬기에 오늘의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이기도 했다. 검무극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그나저나 인형들 정말 잘 만드셨소.”

검무극이 몸을 낮춰서 인형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살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소.”

검무극은 안다. 이 방에 있는 그 어떤 공예품보다 이 작은 나무 인형들이 가장 무서운 존재들임을. 그는 인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하들을 깎고 있다. 평생 그가 깎은 것들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그때 검무극이 하나의 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인형은 누구요?”

이 장식대 위의 인형들을 처음 본 검무극이 가리킨 것은 영웅 인형도 아니고, 진하군 인형도 아니었으며, 대적하고 있는 백천경 인형도 아니었다. 주위에 수없이 세워진 인형 중 하나!

“이 인형만 얼굴을 새겨넣지 않았군요.”

검무극이 백천경의 기도 속에서 보았던 그 얼굴 없는 인형이었다. 분명 어떤 의미가 있는 인형이 틀림없었다.

“누굴 만든 거요? 당신이오?”

백천경의 얼굴에 놀람이 스쳤다. 그 많은 인형 중에 딱 그 인형에 주시한 것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누구라도 될 수 있지.”

백천경의 대답에 검무극이 몸을 숙여서 그 인형을 더 자세히 쳐다보았다.

“오직 이자만이 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있는 것 같소.”

표정이 없었음에도 인형에게서 여유가 느껴졌다.

뒤에서 백천경이 물었다.

“싸우는 이들이 있다면 저렇게 지켜보는 이들도 있는 법이지. 자네는 싸우는 사람인가, 지켜보는 사람인가?”

잠시 인형들을 지켜보던 검무극이 그중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것은 바로 영웅 인형 옆에 쓰러져 있던 진하군 인형이었다.

검무극이 인형과 진하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진하군을 두고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은 진하군 인형을 영웅 인형 옆에 나란히 세웠다.

싸우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아닌 이렇게 일으켜 세워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진하군은 세워진 자신의 인형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괜히 마음이 울컥했다.

아니, 애초에 아무 일도 아니지 않았다. 십 년 동안 자신을 가르쳐준 사부가 자신의 인형을 만들고는 그것을 쓰러뜨려 둔 일이었으니까.

“잘 봤소.”

검무극은 원래 덮여 있던 천으로 장식장을 덮은 후 백천경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 찾아온 이유는 여기 멸마대주께서 진 소저를 만나려면 꼭 당신을 만나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요. 자, 하실 말씀 어서 하시오. 나는 진 소저 만나러 가야겠소.”

진하군이 백천경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부님, 놈이 겁먹게끔 딱 부러지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의 전음에도 백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난 이만 가보겠소.”

검무극이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하군은 남아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따지려 했는데, 백천경은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가라는 축객령이었기에 진하군도 조용히 그곳을 나왔다.

밖으로 나온 진하군이 검무극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공방에서 멀어졌을 때 이윽고 진하군이 물었다.

“죽여야 할 사람이오, 살려야 할 사람이오?”

진하군은 검무극이 사부를 어떻게 봤는지가 궁금했다.

“내 말은 믿지 않는다더니?”

“참고만 하겠소.”

물론,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대답 대신 진하군에게 손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걸 언제 가지고 나오셨소?”

진하군이 깜짝 놀란 이유는 검무극이 가져 나온 것이 바로 장식장에 있던 인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얼굴이 없던 그 인형이었다.

“왜 가져 나온 거요?”

검무극이 인형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소? 이 인형을 누굴 염두에 두고 만들었는지.”

“궁금했으면 그걸 거기 두고 나왔어야지.”

“이 얼굴은 내가 새겨넣을까 하오.”

“뭐요?”

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진하군에게 검무극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신 사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적어도 무림맹주 손자의 사부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란 것은 확실히 느꼈소.”

“혹 사부와 전음을 나눴소?”

검무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대체 사부의 어떤 모습에서 그런 생각을 했소?”

“솔직히 이렇게 한 번 봐서는 그가 악인인지, 그래서 죽여야 할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겠소.”

물론, 그는 자신의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일 뿐.

“한데 당신에 대한 태도만큼은 문제가 있었소.”

검무극은 진하군이 가장 쉽게 납득할 부분을 짚었다.

“당신을 대하는 눈빛과 태도는 사제 간이라 볼 수 없었소. 차갑고 냉정했지. 설령 큰 잘못을 했어도 타인이 있을 때는 그 허물을 덮어줘야 하는데, 당신 사부는 나에게만 집중했소. 아니, 그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겠지. 그 사람은 당신을 제자로 여기지 않고 있소.”

진하군은 어떤 식이든 결론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검무극이 물었다.

“당신이 본 사부는 어땠소? 당신도 생각이 많았을 텐데.”

진하군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나는 잘 모르겠소. 여전히 사부도 의심스럽고, 당신도 의심스럽소.”

길을 잃은 느낌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었다. 사부가 변했다고 느끼고 위기 본능이 발동했지만, 그렇다고 사부가 나쁜 사람이란 증거도 없이 검무극을 불렀다. 혹시라도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지, 혹시라도 잘못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그 생각이 자꾸만 그를 안갯속에 가두는 것이다.

검무극은 그를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애매한 친구보단 확실한 적이 나은 법이지.”

진하군은 자신이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몰라 힘들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신을 일깨워 주는 사람이 왜 하필 마교 소교주란 말인가?

검무극이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먼저 가시오. 나는 잠시 다녀올 데가 있소.”

“어딜 가시오?”

그러자 검무극은 대답 대신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길눈이 좋아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말, 거짓말이오.”

진하군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허둥대고 헤매고, 나도 길을 잃을 때가 많소. 내가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이 틀림없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그냥 갑자기 생각났소.”

말을 마친 검무극이 경공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진하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무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길을 찾기 위해 사람에게 물어보고, 하늘도 올려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건 미친 짓이야, 생각하면서 그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는 위로 던졌다. 떨어진 신발이 가리키는 방향은 방금 검무극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하필이면.’

우연까지도 검무극을 따르는 것이 맞다고 한다고? 어림없다. 첫판은 연습 판인 법.

진하군이 다시 한번 더 신발을 던졌다. 앞서보다 더 높이 던졌다. 하지만 우연은 또 겹쳤다. 또 던지고, 또 던지고.

그렇게 기어코 자신이 가려는 방향이 나왔을 때, 신발을 신었다.

“당신이 잘도 허둥대고 헤맸겠다. 괜히 위로하지 마시오. 나는 내 힘으로 길을 찾아낼 거요.”

진하군은 힘차게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누워 있다 일어난 자신의 인형이 떠올랐다.

17 절대회귀-283화 17

제283회 여긴 누구 자리요?

천마신교 안가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혈천도마는 멸천대도를 마당에 꽂아두고 거기에 기댄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술은 멸천대도에 기대서 마실 때가 제일 흥취가 좋았으니까.

그때,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항상 손에 책이 들려 있었는데 오늘은 어찌 술잔입니까?”

술을 마시던 혈천도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검무극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처음엔 항상 마주 앉았는데, 이제 그와 나란히 앉는 것이 더 편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검무극은 혈천도마가 건넨 술을 마셨다.

“캬, 좋습니다.”

“그쪽 일 바쁠 텐데?”

“아무리 바빠도 보고 싶은 사람은 봐야죠. 저 없어서 심심하셨죠?”

“심심하면 책 읽으면 되고, 그래도 심심하면 술 마시면 되고.”

“사부님은요?”

“그 사람은 뒷마당에서 수련 중이다.”

심야수련모임을 못 가니 혼자 수련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천소희 혼자 수련 중이겠구나. 아니지,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며 놀고 있을지도.

“무슨 고민이냐?”

어찌나 눈치가 빠르신지.

“천기라도 읽으시는 겁니까?”

“늙은이가 눈치라도 있어야지. 왜? 너 잡으려고 정파 무림이 총동원하기라도 했느냐? 천라지망이라도 펼친다더냐?”

“차라리 그랬으면 고민거리도 안 되죠. 튀어요, 어르신! 한마디면 되니까요.”

마음이 복잡해지면 찾게 되는 사람이 혈천도마다.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와 이렇게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답을 찾을 때도 많고.

혈천도마가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라.”

“그래 보입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게 경직된 모양이다. 화무기와 관련되어 있으니 정말 조심스러웠다.

“나중에 너 죽을 때 그때 더 잘할걸, 그런 생각 하면서 죽을 거 같냐? 천만에. 그 사람 한 번이라도 더 볼걸. 한마디라도 더 좋은 말 해 줄걸. 그러면서 죽는 게 인생이다.”

혈천도마에 대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일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나를 만나서 변한 부분도 있지만, 이런 말을 하는 건 책을 많이 읽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럼 전 잘하고 있네요. 후회 안 하려고 이렇게 어르신 뵈러 왔으니.”

속으론 좋으면서도 혈천도마는 매번 하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내 생각 잘도 하겠다. 가면쟁이, 술쟁이, 주먹쟁이, 비무쟁이 생각이나 하겠지.”

검무극이 웃으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 큰 칼에 가려서 안 보이시나 본데, 그 맨 앞에 항상 어르신이 계십니다.”

혈천도마도 웃으며 함께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르신은 뭐가 제일 후회되실 것 같습니까?”

그의 눈빛이 살짝 깊어졌다. 일화검존과 잘 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말 못 할 미련을 떠올리는 걸까?

“난 후회도 미련도 없다.”

검무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그가 후회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말로만 후회 없는 인생이 아니라, 진짜 후회 없는 인생이 되기를.

“오늘 진하군 사부를 만나봤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혈천도마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백천경이 이번 일의 열쇠를 쥔 자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더냐?”

“보통이 아닌 자였습니다. 심계도 그렇고, 무공도 그렇고.”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와 있을 이유가 없지.”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하든,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거다. 넌 신중해도 상대가 신중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혈천도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너를 적으로 삼으면 어쩔 수 없이 초조해지고 두려워질 거다.”

“오랜만에 어르신 칭찬 들으니까 기분 좋은데요? 칭찬 더해주세요! 자만 같은 건 안 하니까 걱정 마시고요.”

“넌 좀 해라.”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고, 혈천도마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이 술을 마셨다.

이렇게 기분 좋게 술만 마시면 좋겠지만, 오늘 검무극이 찾아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검무극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혹시 이것 본 적 있으십니까?”

그것은 백천경의 공방에서 가져온 인형이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 나쁘게 생긴 놈이군.”

몸은 완벽하게 깎여 있는데 얼굴은 비어 있으니 더욱 그렇게 보일 것이다.

“혹시 목형천혼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목형천혼술이란 말을 듣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대번에 그의 시선이 나무 인형을 향했다.

“설마 이 인형이 그 무공에 쓰이는 것이냐?”

역시 혈천도마는 목형천혼술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무림의 여러 문파나 무공에 대해서 정보나 식견이 워낙 뛰어난 그였으니까.

“백천경 그자가 익히고 있었습니다. 이 인형도 그자가 깎은 것이고요.”

“그럴 리가!”

혈천도마의 놀람에는 이유가 있었다.

“목형천혼술은 목천가(木天家)라는 신비 문파의 무공이었다. 한데 목천가는 이미 멸문했는데, 그 무공을 익힌 자가 살아 있다고?”

“멸문했다고요?”

검무극은 목형천혼술에 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들 가문이 멸문한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십수 년 전에 멸문했지.”

“어떻게 멸문했습니까?”

혈천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신비 문파답게 최후도 비밀에 싸인 채 끝이 났지.”

백천경이 멸문한 목천가의 후예다? 생각지 못한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림맹주 손자의 사부가 멸문한 목천가의 후예다? 확실히 심상치 않다.”

“그런 사실을 진하군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 무림맹주도 모르고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목천가의 비술은 숲의 기운처럼 은밀하고 비밀스럽다고 들었다. 작정하고 숨겼다면 모를 수도 있었겠지. 한데 너는 어떻게 알아낸 거냐?”

“구화마공이 반응했습니다. 아마 목형천혼술의 무학적 근원이 마공에서 비롯된 모양입니다.”

어떤 마공에도 우선하는 절대마공이자, 마공의 정점에 있는 구화마공이었으니까.

멸문한 신비 문파의 후예가 무림맹에 잠입해 있다? 평범한 신분도 아닌 맹주 손자의 사부, 게다가 배후에 화무기까지 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을 주십시오, 어르신!”

아무리 엄살 아닌 엄살을 부려도 혈천도마가 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나는 모르지. 나야 뒷일 생각하지 않고 다 죽이고 살아온 인생이었으니까.”

혈천도마가 술잔을 기울이며 덧붙여 말했다.

“그래서 하수는 죽이는 것이 어렵고, 고수는 살리는 것이 어려운 법이지.”

* * *

같은 시각, 진하령은 진하군을 만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동생의 물음에 진하군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사부가 제자로 생각지 않고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검무극이 했던 말의 일부분만 전했다.

“첫 만남이라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

진하령은 오라비의 표정에서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분노와 희망. 그 각각의 대상이 누군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왜?”

오라버니를 믿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만 그녀는 진하군의 성격을 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은 자존심을 상하게 할 뿐, 역효과라는 것을.

“역시 오라버니도 무인은 무인인가 보다.”

“무슨 뜻이야?”

“위기가 오니 눈이 반짝반짝해.”

진하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짝반짝하는 건 동생의 눈빛이었다. 동경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눈빛일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에 그 위기 너무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혼자서 해내야 멋있다, 난 그거 허세라고 봐.”

만날 업어 달라고 울던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

“혹시라도 오라버니가 힘들다면, 믿음이 어중간해서 그런 것 아닐까?”

“무슨 뜻이냐?”

“검무극을 믿으려면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차라리 확 믿어버리면 어때? 어차피 믿으니까 도움을 청한 거잖아?”

“그러다 다 빼앗겨 버리면?”

“그래서 빼앗길 거면 믿지 않아도 빼앗기지 않겠어?”

“!”

“검무극 그 사람을 볼 때, 한 번도 문이 닫혀 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 활짝 열려 있으니까 오히려 함부로 못 들어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지. 어차피 상대가 열 수 있다면 어설픈 자물쇠는 치워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아, 괜히 말이 많았네. 그럼 쉬어.”

그녀가 나오려는데 진하군이 말했다.

“고맙다.”

진하령은 오라버니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발끈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는다. 예전이었다면… 하긴 그때였다면 이런 말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겠지만.

진하령은 이전 진하군이 검무극과 스스로를 비교할 때 했던 것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큰 공을 가슴에 안고 있는 것처럼 시늉했다.

“내겐 오라버니가 이렇게 큰 사람이야!”

* * *

다음 날, 백천경을 찾아갔다.

그는 내 방문을 예상했다는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소교주는 한가하군.”

그가 멸문한 목천가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어제 봤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이다.

백천경, 그대는 여기서 뭘 하는 거냐?

같은 질문이라도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에게 듣지 않을 것이다. 어젯밤 혈천도마의 거처에서 나온 후 곧장 고월에게 긴급 전서를 보냈다. 통천각과 합심해서 목천가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알아내서 보내라는 전서였다. 대답은 고월에게 들을 것이다.

“당신들하고 전쟁이라도 나면 모를까, 소교주가 바쁠 게 뭐 있겠소?”

“나 볼 시간이 있나? 하령이 만나기도 바쁠 텐데?”

“진 대주가 악을 쓰고 막더이다. 사부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 동생을 만날 수 없다고. 그녀와 접촉하는 순간 전쟁이 벌어질 거라고.”

“마교 소교주 신분으로 무림맹을 활보하면서 전쟁이 발발하는 건 무서운가 보군.”

“그 뻔한 협박이 무서웠던 게 아니오. 여동생을 지키려는 진 대주를 같은 남자로서 이해해 주는 거지.”

백천경이 돌아서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안으로 들어오라는 의미였기에 뒤따라 들어가며 괜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러면 안 되지. 엄연히 초대는 자기 동생이 했는데.”

백천경은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아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내가 온 이후, 그는 오직 나무를 깎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순간이 얼마나 무서운 순간인지를. 그는 만날 때마다 수하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니까.

그가 나무를 깎으면서 물었다.

“내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돌아갈 텐가?”

나는 어슬렁어슬렁 공방을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은 듯 되물었다.

“그럴 거요?”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를 이용하려 들 거다.

“당연히. 제자의 뜻을 받아들여 줘야지.”

“제자를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백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과연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하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실컷 이용이나 하다 버리려는 걸까? 아니면 진짜 제자로 여기는 마음이 있을까?

“그녀와 만나게 해 줄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거요. 내가 또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면서 장식대에 덮여 있던 천을 걷었다. 인형들의 위치가 어제와 또 바뀌어 있었다.

모든 인형이 원을 그린 채 누군가를 포위한 진형으로 서 있었다. 병장기를 뽑아 공격하는 모습들, 분명 상대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는 아무런 인형도 없었다.

“여긴 누구 자리요?”

“그건 자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자네가 설 수도 있고, 하군이가 설 수도 있지.”

“왜 당신은 빼는 거요?”

백천경이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어제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맞소. 그랬지.”

“그렇다면 자네가 될 가능성이 크겠군.”

나는 품에서 인형을 꺼냈다. 어제 가져갔던 그 얼굴 없는 인형이었다.

“아니면 이 사람일 수도 있겠지.”

내가 가져간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그는 그에 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 인형 얼굴 내가 새겨보고 싶소.”

하지만 이 말에는 곧장 반응했다. 백천경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누굴 새길 건가?”

“애초에 이걸 만든 사람이 당신이니, 누군지는 당신이 알겠지.”

그와 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누구라도 될 수 있네.”

“내게 조각하는 법 좀 가르쳐 주시겠소? 내가 완성해 보겠소.”

그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나는 얼굴 없는 인형을 품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작업대 위에서 다른 조각칼과 나무를 가져와서 그가 하는 대로 흉내 내서 따라 했다.

“이 조각칼도 결국 칼 아니겠소? 내가 칼로 하는 건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서.”

대충 그가 하는 대로 따라서 만들었다.

내가 만든 것도 그가 움직일 수 있을까? 그렇겠지? 이것도 결국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아니면 그가 직접 만들지 않았기에 이건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보기보다 어렵소.”

그렇게 한참을 인형을 깎았다. 대충 사람 형상이 만들어지자 그에게 보였다.

“어떻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해 보이지 않소?”

백천경은 이런 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자네의 진짜 목적이 뭔가?”

“진 소저의 마음을 얻는 것이오.”

그는 반신반의했다. 믿자니 믿기지 않을 것이고 안 믿자니 그럼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할 것이고.

“그녀와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내가 보답하겠소.”

“보답?”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마인의 것은 천금을 줘도 받고 싶지 않네.”

“천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준다면?”

백천경의 얼굴에 호기심이 스쳤다.

“가령 천화문이라면?”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놀람이 백천경의 눈가를 스쳤다.

“당신이 천화문주와 진 대주를 이어줬다는 것을 알고 있소. 왜 천화문주를 위해 움직였던 거요?”

예상치 못한 시점에 천화문을 언급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자네 손아귀에서 천화문주의 아들을 구하려 했을 뿐이네.”

“그 아들이 악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당신은 정파지 않소?”

“선악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솔직히 자네가 더 악인이지 않나?”

“맞소. 확실히 상대적인가 보오. 나는 당신이 나보다 더 악인이라는 느낌이 들거든.”

그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지어졌다. 부정하는 비웃음 같기도 했고, 인정한다는 웃음 같기도 했다.

여기까지의 대화를 끝으로 백천경의 시선은 다시 깎고 있던 목각인형을 향했다.

사각사각.

그는 끝도 없이 수하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 많은 인형을 어디에다 쓰려고?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내일 또 배우러 오겠소.”

* * *

검무극이 그곳을 떠난 후 백천경은 이윽고 깎고 있던 인형을 완성했다.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장식대로 걸어갔다.

“그 인형은 누구라도 될 수 있고…….”

백천경은 자신이 만든 인형을 포위된 중앙에 내려놓으며 눈빛만큼이나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여긴 누구라도 올 수 있지.”

완성된 인형은 젊은 여인이었다.

14 절대회귀-284화 14

제284회 응수타진이 아니라 일격을.

깊은 밤, 백천경은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을 밝혀주는 것은 반딧불이였다. 반딧불이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며 길을 인도했다.

그가 지날 때마다 나무와 풀들이 스스로 움직여서 길을 만들었다. 아무도 그곳에 길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한 곳에 길이 생겨났다. 그가 지나가자 풀과 나무들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백천경은 숲속 깊숙한 곳에 멈춰 섰다.

스스스스슷.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풀들이 흔들렸고, 나뭇가지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풀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다. 옷 색깔은 물론이고 피부색까지 숲과 하나가 된 듯한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풀처럼 느껴지는 이 남자의 이름은 초림(草林), 백천경의 진짜 제자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목왕의 제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하군이 검술을 배웠다면, 초림은 백천경의 진짜 독문무공인 목형천혼술을 익혔으니까.

백천경이 초림에게 말했다.

“때가 되었다.”

그러자 초림의 눈빛에서 은은한 녹광이 흘러나왔다.

“원래 계획보다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변수가 생겼다.”

“저흰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

“어쩔 수 없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백천경은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을 방문했던 검무극을 떠올렸다.

검무극은 옆에 앉아서 나무 깎는 것을 흉내 내었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진하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술과 안주를 사 와서 함께 먹자고 조르기도 했고, 가늘고 긴 눈이 너무 매력적이라면서 뜬금없이 외모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림에서 있었던 여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아는 것도 많았고, 재치와 통찰력도 있었다. 녀석의 입은 쉬지 않았다. 검무극과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흘째 되던 날 문득 이런 재미난 놈이 수하나 제자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백천경은 깨달았다.

‘이놈은 독이구나.’

그냥 독이 아니었다. 독인지도 모르게 서서히 중독되어 어느새 죽음에 이르게 되는, 어쩌면 단숨에 상대를 죽이는 맹독보다 더 무서운 독이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되는 독이었으니까.

그의 본능이 이렇게 말했다.

‘이자는 뭔가 알고 있다.’

어떻게? 나는 잘 숨어 있었는데? 그 긴 세월 맹주까지 속였는데?

하지만 그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검무극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본능이 다시 말했다.

‘실실 웃고 있는 저자는 널 잡아먹기 위해 온 사신이다.’

백천경은 그때 결심했다.

‘운명이 이자를 내게 보냈다면,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그래, 장장 십 년을 기다렸으면 됐다. 이제 움직여야 할 때다.

백천경은 초림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앞서 만들었던 여인 인형이었다.

* * *

이안과 진하령이 들판에 마주 서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리했다.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들은 비무를 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 만남에서 친구가 되자고 한 것도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세 번째 만남에서 비무는 더욱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에 이안은 진하령의 의도를 의심했다. 무림맹주 손녀가 뭐가 아쉬워서 굳이 자신과 친해지려고 할까?

‘도련님 때문이겠지.’

검무극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혹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하지만 두 번째 만남에서 이안은 느꼈다. 진하령이 진심으로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 세 번째 만남에서의 비무는 그런 마음을 알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라면 비무를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했을 테니까.

두 여인이 검을 뽑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둘의 실력 차이는 명백했다.

채 이십 수가 지나기도 전에 진하령의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놀란 진하령이 물었다.

“무슨 무공이야?”

묻고서 진하령은 아차 했다. 비무에 졌다고 대뜸 네 무공이 뭐냐고 묻는 것은 더없이 실례였으니까.

“아, 미안.”

그녀가 정중히 포권하며 인사했다.

“한 수 잘 배웠어.”

이안은 미안한 표정으로 함께 포권했다.

검술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비천검술을 전수받은 사실은, 설령 천마가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될 일이었으니까.

“나보다 강한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어.”

“친구라면 실력을 숨기지 않는 게 예의라 생각했어.”

무공만큼은 반드시 이기고 싶었는데.

예전 소룡전에서 서대룡에게 지고, 오늘 또 이안에게 졌다. 젊은 마인들에게 계속 지고 있는 것이다.

‘이 싸움,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었다면 나는 죽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그들 두 사람 모두 검무극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점. 그랬기에 서대룡도 이안도 특별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애써 패배감을 떨쳐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서 검집에 넣었다. 쓸데없는 질투로 그 검을 주워서 자신의 자존심을 찌르지 않았다. 그래, 검은 검집에 넣는 거고, 자존심은 남이 지켜주는 거고.

“얼굴 예뻐, 성격도 좋아, 무공도 강해. 이거 반칙 아니야?”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하령의 진담이었다.

그러자 이안이 그 말을 되돌려주었다.

“너야말로 평생 들어온 이야기잖아?”

이안은 진심으로 진하령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이 본 여인 중에서 진하령이 제일 예뻤으니까.

진하령은 이안의 말이 승자의 위로가 아니라, 진심임을 느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더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랬기에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 이 길 정말 예쁘다.”

“가끔 답답할 때 오는 곳이야. 내 비밀 산책로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오다가 진하령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솔직히 오라버니가 걱정돼.”

“걱정하지 마. 도련님을 부른 것,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저 말이 듣고 싶어서 꺼낸 말이기는 했지만.

“너는 네 소교주를 정말 믿는구나.”

“나보다도 더 믿지.”

“살면서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말 큰 축복이야.”

“너도 믿으면 되잖아?”

“뭐?”

“도련님하고도 친구하기로 했다면서? 그럼 믿어.”

진하령이 오라버니에게 했던 말이었다.

검무극을 어중간하게 믿지 말고 확 믿으라고. 그 말을 이안에게 듣고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 믿음이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차례대로 잡아먹는 그런 엉뚱한 상상이 스쳤다.

이안의 믿음에 진하령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만약 이 모든 일이 결과적으로 마인들에게 당하는 것이라면, 남녀 사기꾼에게 당하는 꼴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직 완전히 다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나중에 당해도 싸다.

“내일 또 보자. 너 돌아가면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르잖아?”

“좋아, 내일 봐.”

이안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평생 못 볼 수도 있을 거다. 아니면 서로 죽여야 할 전장에서 만나야 할 수도 있고. 진하령과의 관계는 그런 관계였으니까.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좋아.”

검무극은 알았을까? 친구하라고 소개해 주면서, 진짜 이런 친구가 될 줄.

진하령과 헤어지고 얼마나 걸었을까? 이안은 왠지 모를 서늘함에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어느새 진하령은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사라지고 난 후였다.

조금 전과 변함없는 그 길을 잠시 쳐다보던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오늘도 어김없이 백천경을 찾아갔다.

한데 그는 공방에 없었다. 지난 며칠 매번 있었는데, 어딜 간 것일까?

암튼 그 덕분에 오늘은 종일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주된 수련은 시천비술.

목왕의 등장 때문이었을까?

집중력이 평소와 달랐고 그 결과 시천비술 역시 평소 수련의 효과보다 더 나은 결과를 보였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지겨워서 온몸이 거부해도 하고 또 했다.

수련한다는 것은 커다란 통에 매일 물을 한 방울씩 넣어서 통을 가득 채워야 하는 과정과도 같다.

지겨워도 참아야 한다. 표가 나지도 않는 그곳에 종일 힘들게 만들어낸 물 한 방울을 채워 넣어야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아무 변화가 없는 그 큰 통을 들여다보며 한숨 쉬지 말아야 하고, 이거 채우다 인생을 끝낼 거냐고, 이제 그만하고 다른 즐거움을 찾자는 유혹도 참아야 한다.

참아내야만 그 수많은 한 방울 중에서 특별한 한 방울을 만날 수 있으니까.

오늘 그 특별한 한 방울은 바로 무아지경으로 찾아왔다.

지금 수련 중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 온전한 나의 모든 정신이 시천비술에 빠져든 것이다.

무아지경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

이번 무아지경의 계기는 화무기였다. 그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의 집중력을 더욱 높였고, 그것이 무아지경으로 이끈 것이다. 물통에 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갔다.

그렇게 일각 같았던 열 시진이 지났을 때.

‘드디어!’

시천비술은 현실에서의 무공 수련보다 더 효과적인 단계에 올라섰다.

소모된 내공을 회복하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이제는 시천비술 속에서 무공 수련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난 드디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정말 날아갈 듯 기뻤다. 아버지에게 구화마공을 전수받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너무 기뻐서 시공이환술 속을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이제 본격적인 수련의 시작이었다. 내 시간은 점점 많아질 거다. 난 시천비술 안에서 시천비술을 익히고 있었으니까.

* * *

검무극이 시공이환술에서 나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이안이 방으로 들어왔다.

“어? 언제 돌아오셨어요?”

검무극은 내내 시공이환술 속에서 수련 중이었기에 외출했다가 돌아온 줄 알았던 모양이다.

“도련님. 혹시 진 소저 만나셨어요?”

“아니. 왜?”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나오지 않았더라고요.”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따로 사람을 보내 기별도 안 했고?”

“네. 그래서 좀 걱정되고 신경이 쓰이네요.”

백천경이 공방을 비운 사실을 떠올렸다.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고, 공방을 비울 상황이 아니고. 공교롭게도 두 상황이 동시에 일어났다.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지?”

“어제 낮에요.”

“어디서?”

“서쪽에 있는 들판에서 만나서 비무했어요.”

“그리고는 헤어졌어?”

“오솔길을 같이 산책하다가 헤어졌죠.”

“그때 이상한 점은 없었고?”

그러자 이안이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마음에 걸렸던 점을 전했다.

“돌아오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보긴 했어요.”

의심스러운 상황이 한 가지 더 보태어졌다. 이안의 경지에서 뭔가를 느꼈다면, 분명 어떤 일이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리고 이 불안의 마지막을 완성할 일이 벌어졌다.

멀리서부터 안가 주위로 수많은 무인이 포위하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인원이 안가를 포위한다면 무림맹 무인들일 테고. 검무극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오솔길이었다면 주위에 나무들이 많았겠지?”

숲에서 백천경이라면 이안의 눈을 속이고 그녀를 납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를 납치할 사람은 오직 백천경뿐이었으니까.

‘응수타진 정도가 아니라 일격을 날렸다.’

검무극의 심각한 표정에 이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진 소저, 괜찮겠죠?”

“아직은.”

무림맹주 손녀를 납치한 후, 이 일을 원만하게 끝낼 방법은 없다. 그렇다는 말은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겠다는 의미.

그나마 다행은 백천경이 신중한 자라는 점이다. 그녀를 죽일 때 죽이더라도, 시작부터 죽일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때 구해내지 못하면 그녀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다.

‘놈이 원하는 것이 뭐지? 나를 죽이려고? 아니면?’

대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곧 무림맹 무인들이 들이닥칠 거다.”

“저도 방금 느꼈어요.”

검무극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이안이 복면을 올려 얼굴을 가린 후, 죽립을 눌러쓰고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사방에서 수십 명의 고수가 그곳을 겹겹이 에워쌌다. 느껴지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중원에 나온 이안이 처음으로 맞는 위기였지만 그녀는 침착했다. 검무극과 함께 있으니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었다.

잠시 후, 마당으로 일단의 무인들이 들어섰다.

선두에 선 사람은 무림맹주 진패천이었다. 그의 주위로 무림맹주를 호위하는 고수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자 진패천은 인사 대신 대뜸 물었다.

“하령이 지금 어디에 있나?”

언제 왔고, 왜 왔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진패천은 진하령이 우선이었다.

“저도 모릅니다.”

“다시 묻겠네. 하령이 지금 어디에 있나?”

금방이라도 진패천의 분노한 기도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예전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이미 출수해서 검무극을 제압하려 들었을 것이다.

검무극은 진패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맹주님.

―왜 말로 하지 않고 전음을 보내는 건가?

―이곳에 그자의 눈과 귀가 있을지도 몰라서입니다.

―누구?

―백천경입니다.

순간 진패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누군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네, 진 공자가 십 년을 배운 사부죠. 그 사부에게 진 공자는 위험을 느끼고 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진패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찌 믿겠는가? 자신의 손자가 사부에게 위험을 느끼고, 마교의 소교주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지금 진 공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멸마대 일을 처리하러 외부에 나가 있네.

―진 공자가 자리를 비운 시기까지 맞췄군요. 이 자리에서 맹주님과 저와 충돌이 벌어지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령이가 사라졌을 시간, 백천경 그 사람은 나와 함께 있었네.

왜 그가 공방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람과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를 납치할 실력을 지닌 수하가 있다는 의미.

―제법 계획을 잘 세웠지만, 백천경은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놓쳤습니다.

―어떤 것을?

―맹주님이 저를 믿고 계신다는 점 말이죠.

진패천이 차갑게 물었다.

―왜 내가 자네를 믿는다고 생각하나?

―제가 일을 꾸몄다면 절대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을 것임을 맹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니까요.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믿어주셔야 합니다.

검무극은 더없이 맑은 눈빛으로 진패천을 바라보며 차분히 덧붙였다.

―이번에도 오직 저만이 진 소저를 구할 수 있습니다.

12 절대회귀-285화 12

제285회 믿음에는 믿음으로.

무림맹주 진패천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검무극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천경이 자신의 손녀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던 사람인데.

“일단, 주위를 물려주시죠. 어차피 맹주님 계시는데 달아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운 좋게 달아나 봤자 어디로 갔는지 뻔히 알 수 있으시고요.”

맞는 말이었다. 마교 소교주 자리를 버리고 산속에 숨을 리도 없으니, 검무극은 갈 곳이 확실히 정해진 사람이다.

진패천이 측근에 두는 호위들만 남기고 모두 물렸다.

검무극은 남은 호위들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진패천은 검무극이 정말 자신의 주위에 백천경의 사람이 있을 거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이 사람들도 의심스럽나?”

“아뇨, 맹주님의 안목을 믿습니다. 이제 편히 말씀드리죠. 저는 진 공자의 부탁을 받아 백천경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진 소저 핑계를 댔습니다. 애초에 진 공자가 도움을 청할 때 진 소저가 초대해서 온 것처럼 꾸몄거든요.”

이후,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진패천은 여전히 이 상황을 믿지 못했다.

“십 년간 무탈하게 손자를 가르친 사람을 믿느냐, 마교의 소교주를 믿느냐? 자네라면 이 상황에서 누굴 믿겠나?”

“그럼 왜 저를 그냥 두고 계시는 겁니까?”

그건 검무극이 했던 마지막 말에 답이 있었다.

―제가 일을 꾸몄다면 절대 이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진패천은 예전에 검무극을 겪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다. 이후 들려온 소문 속 검무극은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올 일들을 해내고 있었고.

게다가 마교가 자신의 손녀를 납치했다는 것은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미인데, 지금 마교에 전쟁 징후는 전혀 없었다.

“정말 백천경 그 사람 소행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과 대질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만, 그는 자기 거처에 없을 겁니다.”

진패천은 가장 발이 빠른 수하에게 전음을 보내 백천경을 이곳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만약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하군이는 왜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가?”

“믿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도 믿지 못하시잖습니까?”

“하군이가 말했다면!”

“더 믿지 못했을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겼구나, 어림짐작하셨겠지요.”

진패천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검무극이 항상 하는 말에 해당하는 경우다. 가깝기에 오히려 제대로 못 보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진 공자는 무림맹 내부에 백천경의 눈과 귀가 있을 거로 의심했습니다. 아까 제가 전음으로 말씀드린 것도 같은 이유죠.”

진패천은 검무극을 믿는 쪽에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미 한 번 손녀를 구해준 그가 인제 와서 해치려 들 이유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럼 좋네. 백천경 그 사람이 왜 하령이를 납치한 건가?”

“처음에는 저를 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제가 눈엣가시라 하더라도, 저를 쫓아내기 위해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벌일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는 맹주님과 저와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질 거라 예상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검무극과 진패천의 문제가 아니라 천마신교와 무림맹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렇게 될 것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검무극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이유가 분명 있으리라 여겼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진 소저도 구하고 그 이유도 알아 오겠습니다.”

진패천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어쩔 수 없이 검무극에게 손녀의 안위를 맡겼었다. 한데 또 맡겨야 한다고?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백천경의 거처로 보냈던 수하가 돌아와서 검무극의 말처럼 그가 자리를 비웠다고 보고했다.

“왜 자네여야 하지?”

“저를 노린 일이니까요. 맹주님이 나서면 그는 어떻게든 모든 사실을 부정할 테고, 그렇게 되면 영원히 진 소저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자 진패천이 버럭 소리쳤다.

“어디서 협박이냐? 내 손녀는 내가 찾겠다.”

진패천이 기습적으로 지풍을 날려 검무극과 이안의 마혈을 제압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안은 깜짝 놀랐지만 검무극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손녀분이 제 혈육도 아니고, 제가 뭘 더 어쩌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진패천이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자들을 맹으로 호송해라.”

“나를 건드렸다간 뒷일을 감당 못 할 겁니다.”

“닥쳐라!”

맹주의 외침에 멀리 있던 무인들이 장내의 상황을 쳐다보았다.

가까이 있던 호위들이 와서 두 사람을 마차로 데려갔다. 끌려가면서 이안이 다급히 말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어떻게 해요?”

“그렇다고 무림맹주와 싸울 수는 없잖아?”

속삭이는 그녀와는 달리 검무극도 맹주처럼 화가 났다는 듯, 모두가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진 소저는요?”

“자기 손녀니 알아서 찾겠지.”

“그래도 부탁드려야죠! 설득해야죠. 이렇게 끌려가면 어떻게 해요?”

“너도 봤잖아? 꽉 막혀서 어쩔 수 없는 것.”

호위들이 두 사람을 태우자 마차는 곧장 출발했다.

이안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맹주가 답답하게 군다고 이렇게 쉽게 진하령을 포기한다고? 이렇게 짜증스럽게 반응한다고? 검무극답지 않았다.

달리는 마차에서 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죠?”

마차 안에 둘만 있게 되자 검무극의 얼굴에서 짜증이 사라지면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아니지.”

그제야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당연히 아니지.

잠시 후, 마차가 인적이 없는 곳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리니 그곳에 진패천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데려온 이들 중에서 백천경이 심어둔 이가 있을까 봐, 연기를 했다. 만약 있었다면 검무극이 무림맹으로 호송되어 갔다는 것이 보고되겠지.

진패천은 검무극의 말을 확실히 믿어준 것이다.

진패천은 다시 지풍을 날려서 제압한 혈도를 풀어주었다.

검무극이 애초에 지풍을 피하지 않고 당해준 것 역시 맹주를 믿었기 때문이다.

믿음에는 믿음으로. 진패천은 어떤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하령이를 구해주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검무극은 안다. 무림맹주의 신분으로 손녀의 생사를 마교 소교주에게 부탁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그것도 두 번이나.

검무극도 두말하지 않았다.

“제가 구해오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검무극의 눈빛에 진패천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마차에 올라탔다.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번 일을 검무극에게 맡기긴 했지만, 자신도 손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일 작정이다.

떠나는 마차를 지켜보던 검무극이 이안에게 말했다.

“너는 곧장 본교의 안가로 가서 두 분 마존께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드려라.”

“다른 기별은요?”

“이후 일은 마존들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혈천도마와 권마에 대한 믿음이 이런 것이었다.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판단해서 움직이리라는 믿음. 이안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잘 전할 거라는 믿음.

이안이 그곳을 떠나자 검무극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맹주부터 이안까지, 모두 믿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 * *

진하령이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그곳은 통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다. 방에 있는 모든 것이 나무였다. 누워 있던 침상 역시 나무를 통째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고 모든 가구와 집기 역시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그러자 마지막 순간이 기억났다.

이안과 헤어지고 걸어오는데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이 우수수 자신에게 떨어져 내렸다. 나뭇잎이 자신의 몸에 달라붙고 스치던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 나뭇잎에 미혼약(迷魂藥)이 섞여 있었거나, 아니면 나뭇잎으로 어떤 사술을 부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우선 몸 상태부터 살폈다. 내공이 제압당해 있었을 뿐, 다른 부상은 없었다.

곧장 일어나서 문부터 살폈다. 내공을 못 쓰더라도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힌 그녀다. 이깟 나무 문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힘껏 힘을 주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통 문이 아니구나.’

그냥 일반적인 통나무 문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벽과 바닥, 천장까지 세세히 살펴봤지만, 감금된 방에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있을 리 없었다.

‘백천경 짓일까?’

지금 상황에서 자신을 납치할 사람은 그가 유력했다. 하지만 당하고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오라버니와 갈등 중이라지만, 나를 납치한다고?’

그때 문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하령은 다시 누워서 자는 척을 했다. 저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백천경이 아니길 바랐다. 자신에게 얼굴을 내보인다는 것은 결국 죽이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제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곧이어 들려온 남자의 말소리.

“깼으면 일어나시오.”

상대는 이미 그녀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하령이 몸을 일으켜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는 백천경의 제자인 초림이었다.

진하령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초림이 물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오?”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이라면 상대를 이런 취급 하지 않았겠지?”

그녀는 내공이 제압당해 있어도 당당했다. 애초에 죽이려 했다면 이미 죽였을 터. 살려서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소?”

진하령은 자신을 납치한 자가 눈앞의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뭇잎이 날아들 때 맡은 냄새가 그에게서 나고 있었다.

“네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아. 내가 궁금한 건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는 거야. 제대로 목숨은 걸었어?”

초림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 전혀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다.

“목마를 텐데, 차를 드시오.”

목이 말랐지만 진하령은 옆에 놓인 주전자에 손을 대지 않았다.

“왜 나를 납치했지?”

초림은 대답 대신 자신이 직접 주전자를 부어 잔에 따랐다.

“몸에 좋은 차니 마셔도 되오.”

독이 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자신이 먼저 차를 마셨다.

그리고 다른 잔에 차를 부은 후 내밀었다.

하지만 진하령은 잔을 받는 대신 상대의 얼굴과 손, 옷 등을 자세히 살폈다. 단서든, 약점이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을 찾으려 애썼다.

초림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후 돌아섰다.

“곧 식사 준비해 드리겠소.”

그가 나가고 나서야 진하령은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냥 물이 아니라 약초가 섞인 차였다.

갈증이 나서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지만, 뚜껑을 다시 닫았다. 무슨 약초인지도 모르는데 마실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물이나 음식을 거부한 채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무림맹 본단 주위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안과 비무를 한다고 호위인 추호를 멀리 대기시켰다. 아마 지금쯤 난리가 나서 자신을 찾고 있을 텐데.

위기의 순간에서 그녀는 가장 먼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은 할아버지도 아니었고, 오라버니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진하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탈출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기 위해 방 내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이 주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살길을 찾는 사람일 테니까.

* * *

내가 도착한 곳은 백천경의 공방이었다.

그곳은 비어 있었는데, 가장 먼저 장식대에 덮여 있던 천부터 걷어냈다.

모든 인형은 치워졌고 단 하나의 인형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바닥에 눕혀져 있는 그것은 백천경이 검무극이라 했던 그 영웅 인형이었다. 나머지 인형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 남겨둔 인형이 틀림없다. 이건 인형이 아니라 여유와 조롱이다.

나는 그 인형을 챙긴 후 곧장 그곳을 나섰다.

백천경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찾느냐고?

우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무림맹에서 그렇게 먼 곳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하령이 납치될 때 무림맹주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것, 다시 말해 무림맹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백천경은 분명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있겠지. 바로 숲이다.

“넌 내가 쾌속보로 찾는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서 가까운 숲에 내려섰다. 내려선 후 기를 발출했다.

찾는 것은 백천경이 아니었다. 찾는 것은 바로 그가 만든 나무 인형이었다.

처음 그의 공방을 찾아갔을 때, 그때 한 가지 기운을 느꼈다. 구화마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현기가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나무 인형들에게 흘렀던 기운을 찾으려는 거다. 인형이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다시 쾌속보로 달려서 장소를 이동했다. 또 기를 발출해서 기운을 찾았고, 또 장소를 이동했다. 번쩍하는 순간 나는 십 리 밖에서 기운을 발출하고 있었다.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오늘 제대로 진가를 발휘했다.

그렇게 얼마나 뒤졌을까?

‘찾았다!’

공방에서 느꼈던 기운을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나는 천천히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울창한 숲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나무와 풀이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말 이런 곳에 길이 있을까 싶은 곳을 파고들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갈수록 현기는 더욱 강력해졌다. 그 길 끝에 광장처럼 너른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선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치 원형 비무장처럼 꾸며진 그곳의 사방에는 작은 나무 인형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백천경이 지난 십 년간 공방에서 깎은 나무 인형들이었다. 그 수천 개의 인형은 금방이라도 몸집이 커지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가져온 영웅 인형을 광장의 가운데 내려놓았다. 그러자 수천 개의 인형이 영웅 인형을 공격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때 들려온 말소리.

“내가 그랬지, 그 자리는 네 자리라고.”

백천경이 모습을 드러내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나는 그를 보는 대신 외롭게 서 있는 영웅 인형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나도 나일 줄 알았소. 내가 원체 관심받는 것을 좋아해서 말이지.”

15 절대회귀-286화 15

제286회 복수라는 말을 들으면.

“여기였어요, 진 소저와 헤어진 곳이.”

이안이 오솔길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진 소저는 저쪽으로 걸어갔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혈천도마와 권마였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봐 그들은 죽립을 눌러 쓰고 있었다. 멸천대도 역시 흰 천으로 둘둘 감아둔 상태였다. 다행히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만난 사람은 없었다.

이안이 안가에 와서 있었던 일을 전하자, 혈천도마가 처음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녀석을 혼자 두는 것이 돕는 거다.

이것이 검무극에 대한 혈천도마의 평가였다. 하지만 행동은 말이나 평가와는 달랐다.

―도움 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바람이나 쐬러 갈까.

권마는 무뚝뚝한 평소의 모습 그대로, 혈천도마의 뜻을 따랐다.

권마가 오솔길 여기저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혈천도마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왜 그에게만 수색을 맡기나 이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붙잡혀 간 것 같습니다.”

이안이 권마에게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라면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일 사람이지만, 심야수련을 함께한 후 조금은 권마가 편해진 그녀였다.

아! 마존들 중 제일 편한 사람을 고르라면 제일 무섭게 생긴 권마를 고르는 상황이라니!

“여기 발자국을 봐라.”

바닥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권마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발자국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아보신 거죠?”

“소싯적에 추종술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그를 치켜세워주었다.

“마존이 안 되었다면 천하제일의 추종술을 지닌 사람이 되었을 거다.”

저 무섭고 큰 사람이 추종술을 익혔다니 참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마존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해보면 마인들 중에서 천마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여덟 사람이다. 검무극이 워낙 출중해서 마존들이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떼어 놓고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무림을 진동할 사람들이다.

“다행히 납치한 자는 아무도 쫓지 않을 거라 방심했습니다. 이쪽입니다.”

“앞장서시게.”

혈천도마와 이안이 그의 뒤를 따랐다.

갈수록 속도가 느려졌다. 젊은 시절 추종술을 익혔다 하더라도, 지금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

포기해야 하나 하던 순간, 권마는 길을 찾아냈다.

누군가 숲을 헤치고 나아간 흔적이 발견된 것이다.

“무극이다.”

검무극이 일부러 남겨둔 흔적이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늙은이 부려 먹으려고!”

말과는 달리 그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스치고 있었다. 이안은 알 수 있었다. 혼자 두는 것이 돕는 거라고는 했지만, 검무극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저 무뚝뚝한 권마가 소싯적 실력을 발휘해서라도 검무극을 찾고자 한다는 것을.

이안은 검무극을 위하는 그들의 마음에 기분이 좋으면서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나도 내 인생에 이런 사람들을 만들고 싶다.’

검무극은 무공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까지도 이렇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안이 옅게 웃으며 혈천도마에게 말했다.

“야단치러 어서 가시죠!”

그렇게 세 사람은 숲을 가로질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냐?”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백천경은 검무극의 등장에 내심 크게 놀랐다. 이곳은 지금껏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던 자신만의 은신처였다. 물론 지난 십 년 사이 우연히 이곳에 발을 디뎠다가 죽은 약초꾼이 한둘 있었지만, 누군가 작정하고 이곳을 찾아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신발을 던져서 어디로 갔나 점을 쳐보니 여길 딱 가리키더이다.”

“그래, 너는 항상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였지.”

검무극이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여자를 납치해서 일을 꾸미는 자요?”

“잘 봤다. 난 여자를 납치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루는 사람이지.”

수천 개의 인형에서 나오는 기운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백천경의 감정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진 소저는 어디에 있소?”

“하령이는 잘 있다.”

“하령이? 당신이 진 소저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소?”

“자격? 자격을 논하는 자치고 자격이 있는 자를 보지 못했는데, 넌 어떠냐? 내게 자격을 물을 자격이 있나?”

“나야 자격이라면 넘치는 사람이지. 무림맹주의 손녀를 구하러 온 마교 소교주, 어떻소? 본 적 있소? 이런 사람인데 어떤 자격에 못 미치겠소?”

백천경의 입가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지금처럼 감언이설로 맹주를 홀려서 빠져나온 것이겠지?”

쉽게 함정에 빠져들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단 며칠 만에 자신의 계획을 앞당기게 한 그였으니까.

“대체 뭐 때문이오? 이쯤 되었으면 내게 말해줄 수도 있지 않소? 말해보시오. 당신이 왜 이러는지.”

“네가 자격 이야기를 꺼냈으니 어디 내 이야기를 들을만한 자격이 있는지부터 보자.”

백천경이 손을 내밀자 검무극과 가까이 있던 인형들의 눈에서 짙은 녹음의 푸르름이 쏟아져 나오는가 싶더니.

스스스슷!

인형 열 개의 크기가 커졌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나무 인형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기괴하면서도 섬뜩했다.

그들의 병장기 역시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날이 있는 부분만 달랐다. 쇠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었는데 그 어떤 날카로운 병장기보다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목형천혼술을 직접 접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검무극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백천경은 의아함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전혀 놀라지 않는구나.’

작은 나무 인형이 사람처럼 커져서 움직이는데 저렇게 담담할 수가 있을까? 어려서부터 온갖 마공을 다 겪은 자라서 그럴까?

물론, 그렇다고 검무극이 목형천혼술을 이겨낼 거로 생각지 않았다. 아무리 잘 나가는 마교 소교주라 하더라도, 저 젊음이 자신의 연륜을 이겨낼 수는 없을 테니까.

검무극은 이 무공을 깨버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저 백천경을 직접 죽여버리는 것이다. 물론 온갖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겠지만, 적어도 이 모든 인형을 다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검무극은 백천경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다. 주된 목적은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진하령을 구하고, 화무기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었으니까.

그랬기에 그의 첫수를 정중히 받았다.

검무극이 검을 뽑는 순간 열 개의 나무 인형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검무극이 풍신사보를 펼치자 아무리 빠른 인형들이라 할지라도 그 신묘한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검무극은 비천검법을 쓰지 않고 그것들을 베어 넘겼다.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 생각하고 확실히 베어 넘겼다.

평범한 일반 고수 열 명이 어찌 검무극을 죽일 수 있겠는가? 물론 사람과는 다른 무서운 점도 있었다. 우선 그것들은 감정이 없었다. 두려움도 없고, 상대에 대한 자비도 없다. 상대가 누구든 오직 명령에만 따랐으니까.

그보다 더 무서운 점은 그것들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재생 능력까지 있었다. 검을 든 한쪽 팔이 잘리면 다른 팔에서 검이 자라나서 공격했다.

양쪽 팔이 잘리면 몸통으로 박치기를 하며 달려들었다.

결국, 몸통을 양단하거나 머리통을 잘라내야만 동작을 멈췄다. 그렇게 무력화된 인형들은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검무극은 이 열 개의 인형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특성이나 움직임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했다. 단 한 수도 허투루 쓰지 않는 모습을 보며 백천경은 내심 감탄했다.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열 개의 인형을 모두 제거한 후 검무극은 엄살을 부렸다.

“이러다 나 죽으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죽으면 죽는 거지. 왜? 내가 못 죽일 것 같나?”

“나 마교 소교주요, 소교주.”

“네가 무림에서는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도, 내게는 그저 내 인생에 갑자기 튀어나온 훼방꾼에 불과해.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달려드는 마차 같은 거라고.”

“마차 아니고, 마교고요. 이러다 전쟁 납니다, 전쟁 나요.”

전쟁이란 말로 슬쩍 떠봤지만, 백천경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바라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맹주와 충돌시킨 것도 천마신교와 무림맹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으니까.

“자격을 보였으니 내 물음에 답해주시오.”

“방금 대답해 주지 않았나? 다시 나와 대화하고 싶으면 또 자격을 보이게.”

이번에는 스무 개의 나무 인형들이 커졌다.

수천 개 중 스무 개의 인형,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숫자였다. 스무 개의 인형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남은 인형들이 두려운 상황.

물론, 검무극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목형천혼술을 쓰려면 그 역시 내공이 들어갈 것이다. 무한정 인형을 움직일 수는 없을 테고, 내공 싸움은 세상 누구와 붙어도 자신 있었다.

그리고 검무극은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했다.

쇄애애애애애액!

그들이 달려들기 전에 검무극의 검기가 먼저 그들을 휩쓸었다. 십이성 대성에 이른 비천검법 제일식 균천식이었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검기가 아니었다. 너무나 빠르고 강력했기에 스무 개의 인형은 동시에 잘려 나갔다.

“큭.”

백천경이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만들어낸 목형천혼술이 이렇게 한 번에 잘려 나가자 몸에 충격이 간 것이다.

‘일 수에 스무 기를?’

백천경은 믿을 수 없었다. 목형천혼술을 사용한 이래,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적은 처음이었다.

놀라운 한 수를 보였지만 오히려 검무극은 담담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서 방금 공격하러 나왔던 인형들이 있던 곳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인형을 들었다. 언제 커져서 공격할지도 모를 그것을 겁도 없이 만지작거렸다.

“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장난기가 빠진 검무극은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맑고 깊은 눈빛은 어떤 이야기도 다 들어줄 것만 같았다. 적이지만 어떤 아군에게서 듣지 못했던 위안을 해줄 것 같았다.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백천경의 마음에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시체만이 가득했던 그날의 그곳이, 화인(火印)처럼 가슴에 남겨진 그날의 일이.

그때 검무극이 불쑥 물었다.

“복수하려는 거요?”

백천경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절대 자신의 사연은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검무극을 보고 있으니 말하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었다. 저 말 잘하고 이상한 검무극은 대체 뭐라고 하는지.

“그러는 너는 뭘 하려는 거냐? 무림맹주 손자사위라도 노리는 건가? 아니면 맹주에게 잘 보였다가 그를 죽이려고?”

검무극이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나도 복수하려는 거요.”

백천경은 깜짝 놀랐다. 검무극을 만난 이래 가장 놀랐다. 그의 입에서 복수란 말이 나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으니까.

“누구에게?”

“그것 보시오. 복수라는 말을 들으면 당장 누구에게 하려는지가 궁금하지 않소?”

검무극이 들고 있던 인형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순서상 나부터 들어야 하지 않겠소?”

그 순간 검무극 주위에 있던 네 개의 인형이 갑자기 커지면서 공격을 가해왔다.

쉬이이익!

네 인형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검무극은 마치 그 공격을 알고 있었다는 듯 반응했다. 이미 그의 무공수준은 인형의 공격을 압도하고 있었다.

백천경은 알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론 검무극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음을. 비장의 수법을 써야만 승부를 볼 수 있음을.

툭툭.

인형들이 원래 크기로 돌아가며 잘린 채 떨어졌다.

기습에도 그에 대해 욕하지 않고, 검무극은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서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두었다.

“날 조롱하는 거냐?”

“조롱했다면 이걸 짓밟았거나 여기다 오줌을 쌌겠지요. 적어도 나는 알고 있지 않소? 이것 하나하나를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깎았는지. 내가 따라 해봐서 아오. 이것 깎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란 것을.”

“아무리 그래봤자 오늘 넌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을 거다.”

“그럼 말해줄 수 있지 않소?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까. 반대로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요. 어차피 죽을 텐데, 말 못 할 이유가 있소? 뭔 걱정이 그리 많아서 죽은 후의 일까지도 그리 짊어지고 있으시오?”

그 말이 백천경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그래, 자신은 온갖 미련과 걱정을 안고 있었다. 정작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궤변을 잘도 늘어놓는구나.”

“말해주시오, 당신의 일을 알고 싶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백천경은 검무극이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고, 그 이유가 이번 싸움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윽고 백천경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검무극과 조금 떨어져 있던 인형들이 사람처럼 커졌다. 그것들은 검무극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광장의 중앙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백천경이 겪었던 일을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려 한다는 것을. 이제 광장은 그의 과거를 보여주는 무대가 되었다.

복면을 쓴 인형 하나가 다른 인형들을 베어버리고 있었다. 남자 인형도 여자 인형도, 모두 그의 검에 베여 쓰러졌다. 속수무책이었다. 무대에서도 목형천혼술이 발휘되었다. 작은 인형들이 커지는 모습을 보였다. 목형천혼술까지 써서 그를 막으려 하는 모습을.

‘목천가다.’

지금 목천가가 멸문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가문의 모두가 죽어 나가는 모습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검무극이 분노할 장면이었다. 쓰러지는 인형들 위로 아는 얼굴들이 겹쳐졌다.

복면 인형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두 베어버렸다. 이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의 멸문은 단 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것을.

“내가 왜 십 년이나 무림맹에서 이것들을 깎고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내가 왜 전쟁 따윈 일어나든지 말든지 걱정을 안 하냐고? 내가 왜 맹주 손녀를 겁 없이 납치했냐고? 내가 왜 완벽한 복수의 순간만을 기다렸는지 똑똑히 봐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학살을 벌인 인형이 검무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보는 순간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저 날카롭고 강렬한 눈빛이 누구의 눈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무림맹주 진패천이었다.

14 절대회귀-287화 14

제287회 그 일은 누가 처리한 거요?

정적이 흘렀다.

나무로 만들어진 진패천이 검무극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기에 오히려 더 섬뜩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스스슷.

나무 인형은 막이 내린 무대에서 퇴장하듯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검무극이 바닥에 떨어진 나무 인형 너머 백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림맹주가 당신 가문을 멸문시켰소?”

검무극의 목소리가 떨렸다. 온갖 경험을 다 한 그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충격적이었다.

반면 백천경은 그런 검무극의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자, 세상 똑똑한 마교 소교주여! 이제 너는 뭐라고 말할 것이냐?

“왜? 무림맹주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나?”

검무극은 단호히 말했다.

“맞소. 믿기지 않소. 내가 봤던 맹주는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분명 진패천은 패도적인 사람이지만 한 가문을 몰살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람 속 모르는 일이라지만, 그 진패천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좋소, 그럼 맹주가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가 뭐요?”

백천경은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내가 할 이야기는 충분히 했다.”

다음 대화는 이 공격을 막아내야만 가능하다는 듯, 백천경이 다시 목형천혼술을 발휘했다.

스스슷.

이번에는 세 개의 인형이 커졌다.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것들은 앞의 인형들과는 움직임이나 기세가 달랐다.

검무극은 알 수 있었다. 인형 중에서도 특별한 인형이라는 것을. 사람으로 치면 그냥 고수가 아니라 특별한 고수.

오히려 더 강한 적이었음에도 검무극은 검을 검집에 회수했다.

백천경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던 그 순간.

쉬이이익.

검무극이 먼저 명왕보로 쇄도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하는 순간, 공간을 이동한 검무극이 주먹을 내질렀다.

꽝!

콰르릉!

폭음과 함께 천둥소리가 울렸다. 제대로 공격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가운데 서 있던 인형의 머리통이 통째로 날아갔다.

권마의 무공인 벽력수라권 제일권 흑운수라라 발휘된 것이다.

나머지 두 인형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공격을 가해왔다.

쉬이익! 쉬익!

두 개의 검이 검무극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죽였다!’

백천경이 이런 착각을 했을 정도로 그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다.

두 개의 검이 검무극의 몸을 관통하던 바로 그 순간!

검무극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형환위!’

동시에 백천경의 놀람을 묻어버리는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콰르르릉!

두 번째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느새 좌측 인형의 머리통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 날아든 파편에도 마지막 인형은 전혀 멈칫하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미 검무극은 그 자리에 없었다. 이번에 발휘된 것은 암영보였다.

콰르르르르릉!

세 번째 천둥이 더욱 크게 울렸고, 마지막 인형의 머리통도 박살 났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사냥개라도 호랑이를 잡을 수는 없는 법, 셋 모두 한 방에 끝장이 났다.

세 인형도 원래 크기로 돌아가며 바닥에 떨어졌다.

백천경의 온몸이 떨렸다. 이곳에서 이런 두려움을 느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른 곳도 아닌 숲과 인형이 가득한 이곳에서 말이다.

검무극은 다시 잘린 인형을 주워들었다.

“다르군요, 이 인형들은.”

“달랐지. 네가 평범하게 만들었지만.”

“괜히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소.”

“너는 내 십 년의 시간을 헛수고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러자 검무극이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진 소저의 시간은? 그녀의 지난 시간과 그녀의 남은 날들을 생각해보셨소?”

분명 진하령을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분노가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내 가족들의 시간은! 형님과 형수님과 조카들의 시간은! 조카가 낳은 아이들의 시간은? 너는 상상이나 할 수 있느냐? 자식을 지키려고 아이를 안고 죽은 부모의 마음을! 그 피 묻은 강보를 펼칠 때의 내 심정을! 그 강보에서! 그 강보에서 내가 뭘 봤는지 너는 아느냔 말이다!”

백천경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스스스슷.

다시 커지는 인형에 그의 분노가 담겼다.

이번에는 두 개의 인형이었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더욱 특별한 기도를 드러냈다.

이번에는 두 인형이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그것들은 정말 빨랐는데 쾌검의 고수를 모방해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찌나 빠르면 두 인형을 만들어낸 백천경조차 싸우는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없었다.

움직임을 볼 수 없었으니 소리가 전부였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려오더니,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각기 다른 세 소리였다.

쉬이이익! 서걱! 철컥!

검무극의 검이 다시 검집에 들어가는 순간!

툭, 투욱!

동시에 두 인형의 머리통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비천검법 쾌검식 제오식 창천식이 발휘된 것이다.

오랜만에 발휘한 창천식이었는데,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같은 십이성 대성이라도, 그 경지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더욱 강력한 초식으로 발휘된 것이다.

백천경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마교 소교주라도, 이 쾌검 인형의 공격을 이렇게 빠르게 무력화 시킬 수는 없다. 최소한 오백 수는 공방이 오고 갈 줄 알았다. 이 싸움만큼은 검무극도 당해내지 못하고 크게 다칠 거라 예상했다.

검무극의 반응이 더 놀라웠다. 자신의 무공을 자랑할 법도 했는데,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싸움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삶이었다.

“앞서 물었던 질문에 답해주시오. 왜 맹주가 그대의 가문을 멸문시킨 거요?”

“그것이 네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 맹주가 노망나서 했든, 심심해서 했든 왜 중요하냐고? 무림맹주가 위선자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다고! 어차피 너희 마교 놈들은 다 없애고 이 무림을 통째로 먹을 생각뿐이잖아?”

“먹어도 썩은 부위는 도려내고 먹을 거요. 그러니 말해주시오.”

일부러 썩었다고 표현했다. 이번 일의 진실이 무엇이든 백천경은 그렇게 믿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직접 봤소?”

“직접 보지 않았기에 무림맹주 소행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분노일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검무극은 차분히 그의 감정을 달랬다.

“난 무림맹 편이 아니오. 그저 진실이 궁금할 뿐이오.”

“네가 무림맹 편이 아니라면 왜 내 앞에 있는 거냐?”

화무기 때문이다. 화무기와 연관된 것을 몰랐다면 그에게 이렇게까지 접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진 소저 때문이오.”

백천경이 한차례 코웃음을 쳤지만 결국 그는 대답해 주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이미…….”

그 순간이 떠오르는지 백천경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한데 왜 맹주의 소행이라 확신하는 거요?”

“그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

“누구요?”

“우리 집안의 총관이다.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가고 있었지.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흉수는 무림맹주라고.”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죽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 속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아닐 가능성을 앞서 염두에 두는 것은 백천경이 훗날 화무기를 추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맹주가 당신 집안을 멸문시킬 이유가…….”

그 순간 검무극의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

검무극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맹주가 그들을 멸문할 이유가 하나 있었다.

“당신들이 맹주의 아들과 며느리를 죽였구나!”

표정이 굳어진 채 백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군.”

“내가 알고 있었다면 그의 죗값이 가벼워지나? 복수하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게만 해야지, 왜 모두를 다 죽인 거냐고?”

그의 항변은 정당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상대 가문을 멸문을 시킨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한데 한 가지 의문이 있소. 그렇다면 맹주는 왜 당신은 살려뒀을까? 이렇게 복수하려 들 것이 뻔한데.”

“그 일 이후에 나도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으니까.”

무림맹에는 새 신분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 일들 누가 처리한 거요? 당신이 직접 했소?”

죽음을 위장하고 새 신분으로 무림맹주 손자의 사부가 되는 일이다. 본교 통천각이 신경 써서 작업해도 쉽지 않을 일.

“당연히.”

그의 대답은 망설임 후에 나왔다. 거짓말이란 의미. 검무극은 분명 누군가 그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검무극이 놀랄만한 말을 꺼냈다.

“그 일이 맹주의 소행이 아니라면?”

“!”

“누군가 제삼자가 개입해 있다면 어쩌겠소? 당신을 속이고 맹주도 속였다면?”

한껏 표정을 찌푸리는 백천경을 향해 더 놀랄만한 말이 덧붙여졌다. 화무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 이런 가정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맹주의 성품과 화무기의 존재는 이런 가정을 불러왔다.

“애초에 맹주 아들 부부의 죽음부터 다 계획된 것이라면?”

백천경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멍하게 있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헛소리다.

“그래서 무엇을 얻으려고?”

검무극이 내놓은 마지막 결론.

“당신.”

“!”

“복수에 미쳐 십 년을 참아내며 무림맹 깊숙이 박혀 있는 당신. 언제가 맹주를 죽일 결정적인 비수가 될 바로 당신.”

백천경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했다. 아니,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검무극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난 십 년간 자신이 깎은 것은 어리석음이었으니까. 인형이 인형을 깎은 것이었으니까.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나불대는 주둥이로 아무 말이나 하면 그게 다 말인 줄 아느냐? 네가 뭘 안다고!”

당혹감에서 나온 분노였다. 혹시라도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 깊은 불안이 그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뒤흔들려고 지어낸 말이라고 일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검무극의 말이었다. 자신의 계획을 앞당기게 할 정도로 비범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놀람과 공포와 불안을 먹고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주위로 바닥에서 나뭇가지들이 자라났다.

보통 나무가 아니었다. 도검으로도 잘리지 않는 나무들, 목형천혼술의 비기가 발휘되고 있었다. 자라난 나무들이 벽을 만들고 천장을 만들었다. 달아날 곳은 없었다. 사방이 나무로 이뤄진 밀폐된 공간에서 두 사람이 대치했다.

또 다른 나뭇가지들은 백천경의 몸 주위를 감싸며 갑옷을 만들어주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검기와 검강으로도 이 갑옷을 자를 수 없다.

“네가 다 망쳤다, 너 때문에 진하령도 죽는 거다.”

검무극은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아까 내게 뭐라고 했소? 왜 당사자를 죽이지 않고 가족까지 죽였냐고 소리치지 않았소? 한데 지금 당신은 뭐 하는 거요?”

“그들이 먼저 저지른 일이니까!”

“일의 시작은 당신들이잖소?”

아니, 어쩌면 화무기일지도 모른다.

“진 소저는 풀어주시오. 원래 그녀는 죽일 계획이 없었다는 것, 알고 있소.”

땅에서 올라온 덩굴이 검무극의 발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곤 꼼짝도 못 하게 서서히 온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당신이 무림맹에 잠입하는 것을 도운 그 사람, 이 모든 일은 그 사람이 꾸민 짓이오.”

검무극은 보았다. 백천경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몸을 타고 오르던 나뭇가지들이 잠시 멈췄다.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누군지 내게 말해주시오.”

“없다! 그런 자는 없다! 날 멍청이로 보는 거냐!”

검무극의 주위에서 또 다른 나무들이 자라나더니 기다란 창이 되었다. 문어발처럼 겨눠진 그것들은 전갈 꼬리처럼 빠르게 검무극을 사방에서 찔러왔다.

검무극은 호신강기를 일으켜 공격을 막았다.

텅! 터엉! 텅!

나무창이 호신강기와 부딪치며 쇳소리를 냈다.

검으로 잘라내도 다시 자라났고, 호신강기와 부딪쳐서 깨져도 또 다른 나무가 자라나서 공격을 가했다. 그것들은 호신강기를 찢기 위해 끝없이 공격을 가해왔다. 이 공격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갑옷 속에 숨은 백천경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텅! 터어엉! 터엉!

공간 안에서의 공격. 외부보다 몇 배는 더 강한 공격이 가해지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소. 나와 함께 그자를 상대합시다!”

검무극의 진심을 느꼈기에 백천경은 고민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제발! 당신을 죽이게 하지 마시오.”

하지만 그는 끝내 검무극을 믿지 않았다.

백천경이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십여 개의 창이 오직 한 곳, 검무극의 심장만 공격했다.

텅! 터엉! 텅!

이러다가는 결국 호신강기는 뚫릴 것이다.

“네가 죽으면 마교와 전쟁이 발발할 거다. 내가 죽이지 못하더라도, 천마가 그를 죽일 거다.”

나무 창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더욱 짙은 색으로 바뀐 그것은 백천경이 지닌 모든 내공을 쏟아부을 마지막 공격이었다. 적어도 이 공간에서, 더는 저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쇄애애애애액!

그것이 검무극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

번쩍!

날아들던 나무창이 검무극의 심장 앞에 멈춰 있었다. 곧이어 창의 예기가 사라지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저 멀리 검무극 앞에 서 있는 것은 모두 다섯이었다.

백천경 주위로 네 명의 악귀들이 서 있었다. 구화마공 제일초식 인멸식이 발휘된 것이다.

검기에도 잘리지 않는 나무 갑옷이 잘리면서 땅으로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공에 근원을 둔 그의 무공은 구화마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악귀들이 사라졌을 때, 백천경의 온몸은 피에 젖어 있었다.

백천경이 멍한 눈빛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검무극이 품에서 인형을 꺼냈다. 그것은 일전에 얼굴을 직접 깎겠다고 했던 바로 그 인형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인형에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그의 공방을 오가면서 검무극이 화무기의 얼굴을 새긴 것이다.

“그자가 이 사람이었소?”

12 절대회귀-288화 12

제288회 너는 나에게 지옥을 선사했는데.

백천경이 인형을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그의 표정 변화에 집중했다. 인형이 원인이 되었던 것일까? 멍하던 그의 눈빛이 맑아졌다. 죽기 직전 정신이 맑아지는 회광반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백천경의 반응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인형을 보고 웃은 것이다.

“왜 웃으시오?”

백천경의 시선이 인형에서 검무극을 향했다.

“조각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 가르칠 걸 그랬군.”

그만큼 엉터리로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검무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첫 작품치고 훌륭하지 않소?”

“어디 가서 내가 가르쳤다고만 하지 말게.”

또렷하게 말을 하면서도 그의 입에선 연신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무극은 안타까웠다.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었는데.

“어지럽군.”

백천경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자 주위를 가득 메웠던 나무들이 다시 땅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 비기로 만들어진 밀폐된 공간에서 해방되었고 햇살이 창백한 백천경의 얼굴을 비췄다.

“그 사람인지만 말해주시오!”

백천경은 무릎을 꿇은 채 주위의 풀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생명이 꺼져가면서 주위 풀과 나무도 죽어가고 있었다.

“너는 나에게 지옥을 선사했는데… 내가 왜 말을 해줘야 하나?”

단지 자신을 죽여서 하는 원망이 아니었다. 지난 십 년간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은 채 죽게 되는 것이 지옥이리라.

그가 고개를 들어 사방에 세워진 나무 인형들을 보았다. 그 인형들 역시 현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깎은 저 인형이 자신을 위해 깎은 것이 아니었다고?

“……헛소리하지 마라.”

그는 검무극의 말을 부정했다.

주위의 풀과 나무들이 마치 바람이 불어온 것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그의 분노가 실렸기 때문이지만, 마치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검무극은 천천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복수를 하겠소. 당신 복수까지 하겠소. 그러니 말해주시오!”

검무극은 알았다. 자신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백천경은 분노할 것임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느냐 마느냐는 너무나 중요했으니까.

백천경의 눈이 감기려 했다.

“안 돼! 죽지 마시오!”

검무극이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내력을 주입했다. 백천경이 기침을 하는 바람에 피가 검무극의 얼굴과 몸에 튀었지만, 내력을 주입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백천경이 다시 눈을 떴다.

“그래… 너도 복수를 원한다고 했지?”

검무극이 그의 앞으로 인형을 다시 내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백천경은 알 수 있었다. 인형에 새겨진 얼굴이 검무극의 원수라는 것을.

드디어 백천경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네 복수는 나와는 상관없다. 내게 접근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검무극은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럼 누구요? 그 사람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하지만 백천경은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은 진하령이었다.

“……하령이에게 미안하군.”

그의 얼굴에 깊은 후회가 담겼다.

“내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으면 죽이라고 했거든.”

깜짝 놀란 검무극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설마, 그녀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

“어디냐고!”

백천경이 마지막 힘을 다해 한쪽을 쳐다보았다. 동시에 검무극이 번쩍하며 그쪽을 향해 쾌속보로 날아갔다.

“……그 아이에게는 저승에서 내가 사죄하지.”

그 말을 끝으로 백천경은 머리를 떨구었다.

그가 죽자 주위의 모든 나무가 시들면서 함께 죽었다.

이제 완전히 현기가 사라진 나무 인형들만이 그의 죽음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 * *

방으로 들어선 초림을 보는 순간 진하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초림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차라리 살기가 담겼으면 다행일 텐데, 그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담겼다.

“나를 죽이러 왔군.”

초림은 순순히 인정했다. 사부의 엄명이 내려진 이상, 그녀를 죽여야 했다.

“그대에게 사적인 유감은 없소.”

진하령은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다. 내가 죽는다고? 실감이 가지 않았다.

“이런 갑갑한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죽기 전에 하늘 한 번만 보게 해줘.”

초림이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가 다시 부탁했다.

“부탁이야.”

“좋소.”

초림이 돌아서서 방문을 여는 그 순간 진하령이 달려들었다.

쉬이익! 파앗!

진하령은 손에 든 것을 휘둘러 초림의 목을 찔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침상에 박혀 있던 나무못이었다.

초림이 피하면서 빗나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녀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을 구른 후 벌떡 일어나서 달려가려던 그녀가 동작을 멈췄다.

뒤쪽 오두막에서 초림이 목을 매만지며 걸어 나왔다.

“이해합니다.”

그의 목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상처는 깊지 않았다. 초림은 고수였고, 아무리 기습이었다 해도 내공 없는 몸으로 그를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뒤에서 걸어 나오는데도 진하령은 달아나지 않았다. 아니, 달아날 수 없었다.

문 앞에 수십여 명의 무인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하령이 초림에게 돌아섰다.

“네가 대체 뭘 이해한단 말이냐? 죽는 건 네가 아니고 난데. 그렇게 점잖게 굴어서 양심의 가책을 덜겠다고? 야비한 파락호보다 네가 더 나쁜 놈이다.”

“다 이해합니다.”

“좋아, 네 말대로 정말 날 이해한다면…….”

진하령이 나무못을 들었다. 내공이 제압당한 상태라서 어차피 상대가 안 되겠지만, 하늘이나 쳐다보면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설마 내공을 제압한 채로 죽일 건 아니지? 풀어줘, 정식으로 한판 붙자.”

내공을 풀더라도 적들이 너무 많아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수를 내려 노력했다.

“내공 풀어주면 무기는 이걸로 싸울게. 수하들도 보고 있는데, 수장답게 굴어야지.”

자존심을 자극해서 내공을 풀어주길 바랐는데, 초림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호북 제일의 후기지수신데, 함부로 내공을 풀어줘서 제가 감당할 수 있겠소?”

“그래서? 겁쟁이처럼 내공이 제압당한 채 나무못 들고 저항하는 여자를 죽이겠다고?”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죽지 않을 거다. 자존심을 긁고 마음에 상처라도 줘야지.

초림이 살짝 짜증 나는 어조로 말했다.

“이래 주니 내 마음이 조금 낫소.”

진하령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내공이 제압당했어도 소룡전 결승까지 가는 실력이었다. 손에 들린 나무못이 허공을 날카롭게 찔렀다. 자연 그녀가 노리는 곳은 눈과 목과 같은 단번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급소였다.

십여 수 공방이 오가던 중 초림의 주먹이 진하령의 얼굴에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퍽!

진하령이 나가떨어졌다.

“미안하오. 호북일미의 얼굴을 때렸구려.”

지켜보던 수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초림도 그렇고 수하들도 그렇고, 다들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얼굴을 매만지며 진하령이 땅바닥에서 일어났다.

“앞으론 솔직하게 살아. 지금 이 모습이 너야. 납치하고 때리고 죽이고, 희희낙락 희롱하고.”

초림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자신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죄를 짓고 쫓기던 이들이었다. 무림맹에 깊은 원한을 지닌 이들이었고, 밝은 곳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난 십 년간 이곳에 숨어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백천경은 약속했다. 무림맹주를 죽이고 나면, 모두의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쉬이익! 쉭!

진하령의 공격이 허공만을 스쳤다.

지켜보던 이들의 웃음 속에서 진하령은 오직 한 수만을 노렸다.

행운의 한 수.

하지만 초림은 행운이 통할 실력이 아니었다.

퍽!

이번에는 배를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너무 아파서 일어나기도 힘들었지만,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다시 달려들었다.

몇 차례 더 그녀를 가지고 놀던 초림은 끝을 보려 했다. 바닥에서 나무줄기가 자라나서 그녀의 다리와 팔을 옭아매며 꼼짝 못 하게 제압한 것이다.

초림이 손을 들자 어디선가 날아온 나뭇잎이 그의 손에 들렸다.

날아올 때는 평범한 나뭇잎이었는데, 그의 손에 들리자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 죽음이 헛되지 않을 거요. 죽어서 이 나무들의 거름이 될 테니까.”

진하령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왜? 추잡스러운 너흰 거름도 안 돼서?”

그 말에 초림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그가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네년에게 공손하고 절대 건들지 말란 명령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으면서 죽었을 거다.”

초림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진하령은 태어나 가장 큰 살의를 느꼈다. 정말 죽이고 싶었다. 이런 자에게 죽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초림이 나뭇잎 검으로 그녀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손을 번쩍 들었다.

진하령은 죽는 그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고 똑바로 그를 노려보았다. 겁을 먹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녀의 마음에 절망이 가득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자신의 최후가 이럴 줄은 몰랐다. 적어도 이것보다는 멋있게 죽을 줄 알았는데.

죽을 때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고상하게 죽기를 바랐는데. 할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슬퍼할 것을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자식에 이어 이제 손녀까지 잃으면 할아버지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라버니 역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유일한 사람을 잃게 되고.

자신에게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그들에게도 해를 끼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떠오른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믿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네.’

마지막 순간 그를 떠올리며 죽음을 맞을 줄이야.

나뭇잎 검이 그녀의 목을 베려고 날아들려던 바로 그 순간!

쇄애애애애애액!

귀를 찢는 바람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퍼퍼퍼퍼퍼퍽!

거대한 대도가 무인들을 휩쓸며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초림이 수하들을 베면서 날아든 대도를 뒤로 물러나며 피했다.

쾅!

대도가 뒤쪽 돌벽에 박혔다.

놀란 초림이 대도가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하들 사이에 길이 나 있었고, 좌우로 십여 명의 수하가 피떡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철목방벽(鐵木防壁)을 세워라!”

츠르르르르륵!

도가 날아온 방향으로 바닥에서 나무가 올라오면서 방패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초림 앞에 세워진 벽은 가장 크고 두꺼웠다. 벽을 세운 그가 다시 진하령에게 다가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년은 죽인다!”

바로 그때 진하령은 보았다.

초림 뒤쪽에 박혀 있던 대도의 반대쪽에서 누군가 훌쩍 이쪽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너무나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이었기에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초림의 바로 뒤에 내려섰을 때, 비로소 인기척을 느낀 초림은 뒤로 돌아섰다.

그가 본 것은 하나의 선이었다.

쉬이이이이익!

서걱.

빠르게 그어진 검이 그의 목을 쳐서 날려버렸다.

초림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머리통이 떨어졌다.

쓰러진 초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이안이었다.

날아든 대도는 혈천도마의 멸천대도였다.

대도 뒤쪽에 이안이 매달려 함께 날아왔던 것이다. 사람보다 더 큰 대도였기에 그녀가 도신 건너편에 붙어서 함께 날아온 것을 놓친 것이다.

혈천도마의 내공이기에 가능했고, 비천검법 구성에 이른 이안의 실력이기에 가능한 절기였다.

초림의 죽음에 무인 중 누군가 발작하듯 소리쳤다.

“저년들부터 죽여!”

진하령과 이안을 향해 그들이 달려들었다. 이안은 진하령의 내공을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이안이 달려들던 무인들을 베어 넘겼다. 그녀가 네 명을 연속해서 베어 넘겼을 때, 놈들이 작전을 바꿨다. 그녀가 진하령을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약점으로 삼았다.

“검기를 날려라!”

검기를 날릴 수 있는 무인들이 일제히 검기를 날렸다.

이안이 진하령에게 소리쳤다.

“내 등 뒤로!”

피해선 안 된다. 진하령을 살리려면 날아드는 검기를 모두 해소해야 한다.

쇄애애애애애액!

동시에 십여 줄기의 검기가 이안을 향해 휘몰아쳐 날아들었다. 이안은 저 많은 검기를 한 번에 막을 자신이 없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진하령을 죽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 절체절명의 순간!

쉬이이익!

푸우우욱!

두 여인 앞으로 무엇인가 내려와 꽂히면서 날아드는 검기를 막았다.

쾅! 콰앙! 콰콰! 콰아앙!

검기가 연이어 강타했지만, 그것을 뚫거나 부수지 못하고 모두 해소되어 사라졌다.

이안은 보았다. 앞을 막아선 거대한 대도를. 그리고 그것을 박아넣은 한 사람을.

놀랍게도 그것은 멸천대도였다.

어느새 그곳으로 날아온 혈천도마가 벽에 박혀 있던 대도를 뽑아 두 사람 앞에 우뚝 내려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천둥소리와 함께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우르르르릉! 꽈아앙!

그들이 세운 뒤쪽 철목방벽이 박살 나며 근처에 있던 이들도 함께 휩쓸려 날아갔다. 절대 부서지지 않을 거라 자신한 철목방벽을 주먹 한 방에 무너뜨린 사람은 바로 권마였다.

앞은 혈천도마, 뒤는 권마였다.

놈들 중 누군가 권마를 보며 소리쳤다.

“저 괴물부터 죽여!”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혈천도마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저런.”

혈천도마는 멸천대도 밖으로 몸이 나가 있던 이안과 진하령을 잡아당겨서 멸천대도 뒤로 몸을 숨기게 했다.

다음 순간.

귀를 찢는 천둥소리가 들렸다.

쿠르르르콰콰쾅!

이안과 진하령은 이렇게 크고 무서운 천둥소리는 태어나 처음이었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

다음 순간!

후아아아아아아앙!

세워진 멸천대도 옆으로 엄청난 위력의 강기가 휘몰아쳐 지나갔다. 혈천도마가 멸천대도를 양손으로 받친 채 내력을 주입하지 않았다면, 멸천대도도 뽑혀서 날아갔을 위력이었다.

단 한 번의 천둥.

그리고 찾아온 침묵.

이안과 진하령이 조심스럽게 멸천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밖에 펼쳐진 광경에 두 여인은 깜짝 놀랐다.

그곳에 아무도 살아남은 자는 없었다. 단 한방에 그곳에 있던 자들은 모두 주먹에서 발출된 강기에 휩쓸려 시체가 되어 있었다.

권마는 그 큰 주먹을 늘어뜨린 채 홀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같은 편인 이안조차 두려움을 느꼈다. 함께 수련할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실전에서의 권마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었다. 천마가 왜 마존들 중 가장 신뢰하는지, 이안은 오늘 똑똑히 보았다.

혈천도마가 바닥에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뽑아 등에 찼고, 권마는 그들을 향해 시체 사이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18 절대회귀-289화 18

제289회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두 마존의 존재감이 더해지자 진하령의 심장은 점점 더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대도를 차고 옆에 서 있는 혈천도마나 천천히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권마나, 두 사람 모두 정말 무서웠다.

‘이 사람들이 마존들이구나!’

지금까지 그녀에게 마교는 막연했었다. 무섭고 잔인하다고 말만 들었지 실제로 그녀가 접한 마교는 검무극이었다. 젊고 잘생기고, 농담 잘하고.

하지만 오늘 그녀는 진짜 마교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권마의 얼굴은 정말 무서웠지만 진하령은 최대한 차분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두 마존과 이안 모두에게 전하는 고마움이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녀는 마존들이 두려웠지만, 자신을 구해준 두 사람이 싫지는 않았다.

마존들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 목숨을 구해줬다는 생색을 내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들으면 미쳤냐고 야단치겠지만, 그녀는 이 마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졌다.

두 사람에게 인사한 후 진하령이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도에 매달려 날아오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적들을 죽이면서 날아온 도였다.

그 마존에 그 이안이라고, 그녀 역시 목숨을 구해줬다는 한마디 생색도 내지 않았다.

이안은 진하령의 내공을 풀어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친구! 만나기로 해 놓고 약속 어기기 있어?”

진하령은 자신이 살면서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지금의 저 ‘친구’란 말이 깊이 와닿았다. 두 여인의 우정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진하령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이 꼴이잖아? 볼 게 얼굴밖에 없는데.”

농담 반 자조 반 그녀의 대답에 이안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 오늘부터 다른 걸 보여줘야지.”

진하령은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자신의 저 아름다운 외모를 무기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저렇게 강한 것이고, 그래서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해주고 있다. 우리에게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래, 오늘부터 호북일미는 없다. 호북제일검이 될 거고, 천하제일검을 향해 나아갈 거다. 앞으로 초림과 같은 자에게 죽을 위기를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오늘 큰 교훈을 얻었다.

정말 간발의 차로 생사가 갈렸다. 만약 자신이 그냥 포기하고 죽으려 했다면, 이안과 마존들이 도착하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살아날 수 있었다. 천운도 누군가를 정할 때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 뽑는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것이다.

바로 그때 빛처럼 빠른 무엇인가가 그들을 향해 쇄도해 날아왔다.

쇄애애애액.

검무극이 쾌속보로 그곳에 내려섰다. 어찌나 내려서는 자세가 자연스러웠는지, 애초에 이곳에 함께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검무극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존들과 이안이 제때 도착해서 진하령을 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참 빨리도 온다. 이분들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었어.”

진하령의 농담에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분들과 친한 거야.”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권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자신의 믿음은 정확했다. 믿음을 믿음으로 보답한 두 사람이었다.

“어깨에 힘 더 주셔도 됩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어디서 미적거리다 이제 오느냐? 늙은이 고생이나 시키고.”

하지만 혈천도마의 걱정스러운 시선은 검무극의 옷에 묻은 피에 가 있었다.

“늙은이 고생시킨 보람이 있는데요?”

“에끼 이놈아!”

그때 권마가 검무극에게 물었다.

“다쳤느냐?”

“제 피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권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며 비로소 진하령은 검무극이 마교의 소교주임을 실감했다. 마존들을 장악했다는 소문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검무극을 향한 두 사람의 눈빛은 자신을 향한 할아버지의 눈빛이었고, 또 오라버니의 눈빛이기도 했으니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살려준 사람은 이안과 두 마존들이지만, 결국 검무극 덕분에 살아났다는 것을.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마인에게 두 번이나 목숨 빚을 지는 무림맹주 손녀라니! 난 완전히 망했어.”

그녀의 너스레에 검무극과 이안이 함께 웃었다.

검무극이 두 마존들에게 말했다.

“이안과 함께 안가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전 무림맹에 진 소저 데려다주고 가겠습니다.”

“이제 다 끝났느냐?”

“아뇨, 가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남았습니다.”

무림맹주가 정말 목천가를 멸문시켰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패천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누군가의 음모에 빠졌다면 또 모를 일이다.

검무극은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무림맹을 바라보며 일전에 했던 농담을 진담처럼 했다.

“이번에는 정말 튀어요, 어르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 *

맹주전으로 진하군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창가에 서서 밖을 응시하고 있던 진패천이 다급히 돌아섰다.

“어떻게 되었느냐?”

“멸마대를 동원해서 동호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청룡단에서는 아직 연락 없었습니까?”

진패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호단(飛虎團)은요?”

여전히 가로젓는 고갯짓. 무림맹의 정예들을 모두 풀어 사방팔방 아무리 찾아도 진하령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납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천경에게서 어떤 요구 사항도 없었다. 그야말로 걱정에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차라리 무림에 공개하시죠.”

지금은 비밀리에 찾고 있어서 수색에 제한이 있는 상황, 차라리 공개 수색을 해버리면 목격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패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림맹주 손녀를 납치할 정도로 간이 큰 놈들이다.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리도 없었고, 괜히 섣부르게 공개했다가 사도맹이나 다른 악인들까지 개입할 수도 있었다.

진하군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이게 다 너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속 좁은 네 기우에 불과하다는 듯, 진패천은 일절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궁지에 몰렸다고 그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검무극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진패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점점 검무극이 마지막 희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하군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정말 내가 속은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검무극의 음모였다면?

검무극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는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동생을 잡아간 후, 언젠가 결정적일 때 자신을 협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을 잃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세상 유일하게 자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 동생인데.

살면서 한 번도 동생을 잃을 거란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현실이 되니까, 두려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동생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자신의 인생 또한 크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진패천은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만이 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진하군은 할아버지가 검무극을 믿고 있음을 느꼈다.

멸마대 임무 중에 동생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을 때, 그때의 할아버지는 검무극을 믿지 않았다.

누구 소행이냐고 물었을 때, 그때 이렇게 대답했었으니까.

―검무극이거나, 백천경이거나.

그리고 자신을 빤히 응시하며 할아버지는 물었다.

―너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때만 해도 검무극을 완전히 믿지 않았고 무림맹 무인들이 찾아낼 거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지는 검무극을 믿고 있었다. 믿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기에 믿는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강한 분이지만, 손녀의 생사가 걸리자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었음을 느꼈다.

“저는 다시 찾아보고 오겠습니다.”

진하군이 나가려던 그때, 맹주전 무인이 달려와서 보고했다.

“하령 아가씨가 돌아왔습니다.”

진패천과 진하군은 깜짝 놀랐다.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난 진패천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곧이어 그곳으로 진하령이 들어왔다.

그녀가 먼저 걸어왔고, 그 뒤를 검무극이 뒤따라 들어왔다.

“할아버지!”

진하령이 달려가서 진패천에게 안겼다. 할아버지를 보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이번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자신의 인생에서 할아버지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새삼 실감했다.

“다친 곳은 없느냐?”

“전 괜찮아요.”

얼굴과 몸이 상했지만 내상을 입지는 않았다.

“잘 왔다, 잘 돌아왔어.”

진패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철의 심장을 가진 그였지만, 무사히 돌아온 손녀를 보자 마음이 울컥했다. 얼마 만에 흘리는 눈물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하령은 진하군과도 재회했다.

“오라버니.”

진하군이 동생을 꼭 안아주었다.

“미안하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사부를 의심하면서 시작된 일이었으니까.

“오라버니가 왜 미안해? 칠칠치 못하게 붙잡혀간 내 잘못이지.”

“그런 말 말아라.”

그렇게 서로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제대로 알려준 재회가 끝이 나자, 진패천과 진하군의 뜨거운 눈빛이 검무극을 향했다.

진하령을 구한 일은 두 사람에게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보다 더 큰 일이었다.

“하령이를 구해줘서 정말 고맙네.”

진패천이 정식으로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검무극도 정중히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진 소저는 맹주님의 손녀분이기도 하지만 제 친구기도 합니다.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목숨 빚은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갚는 법, 진패천은 언젠가 한 번은 검무극의 목숨을 구해주리라 마음먹었다.

한편 진하군은 잠시라도 검무극을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아직 멀었다.’

예전이라면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끝났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더 노력하고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무극은 이 순간에도 자신을 자극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이지 존재 자체가 자극이라 할 사람이었다.

“우선 가서 치료부터 받고, 쉬어라. 밀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그리고 자넨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하고.”

진하군과 진하령은 할아버지가 검무극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검무극과의 대화는 나중에 나눠도 되었기에 두 사람은 순순히 물러났다.

“네, 할아버지.”

진하군과 함께 걸어가다가 진하령이 돌아서며 말했다.

“할아버지를 다시 봬서 정말 기뻐요.”

진패천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를 다시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맹주전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백천경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

“죽었습니다.”

손녀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었으리라 예상했지만 검무극에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왜 하령이를 납치했다고 하던가?”

그러자 검무극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백천경은 목천가주의 동생입니다.”

순간 진패천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가 어찌 목천가에 대해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모두 죽었네.”

“아닙니다. 단 한 사람, 가주의 동생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도 죽은 걸로 알고 있네.”

“죽음을 위장했습니다.”

진패천은 이제야 백천경의 이중적인 모습이 이해되었다. 설마 이 모든 일이 아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니?

그리고 오늘의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나왔다.

“맹주님께 여쭙겠습니다. 목천가를 멸문시킨 것이 맹주님이십니까?”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검무극은 이 침묵이 그 일을 시인하는 침묵이 아니라 생각했다. 만약 진짜 그 일을 저질렀다면, 이런 의심받을 만한 침묵에 빠질 리가 없다. 이 침묵은 사연이 있는 침묵이다.

이윽고 진패천은 짤막한 탄식을 내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복수를 위해 그들을 찾아갔다네. 가족의 복수였으니, 홀로 갔지.”

마치 그날의 광경이 생생히 떠오르는 듯 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모두 죽은 후였네.”

진패천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죽은 내 아들과 며느리를 두고 맹세하네. 나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네.”

명예를 중시하는 그가 아들을 걸었다는 것은 그의 말이 사실이란 의미다. 그만큼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은 진패천에게 하나의 큰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군. 복수를 위해 미친놈처럼 달려왔던 내가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나?”

잠시 사이를 두고 진패천이 긴 한숨에 그날의 감정을 실었다.

“다행이라 생각했네.”

검무극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무림맹주인 내가 다행이라 생각했다고. 만약 이 일이 먼저 벌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 수도 있었겠구나, 정말 그런 생각을 했었다네. 무고한 죽음을 애도하고 분노했어야 할 내가!”

진패천이 인상을 굳혔다. 괴로움이 그의 표정에서 묻어났다.

“맹주님은 그들을 멸문시키지 않으셨을 겁니다.”

진패천이 빤히 검무극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 모를 일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어디까지 갈지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검무극은 단호히 말했다.

“네, 맹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까요.”

진패천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패도적인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 일은 그의 인생에서 큰 상처로 남은 일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멸문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그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 생각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그는 내내 괴로워했을 것이다. 평생을 협의로 살아온 그였기에 그 상처는 남들보다 더욱 깊었으리라.

검무극이 다시 한번 앞의 말을 반복했다.

“맹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을 겁니다.”

진패천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서 이 말을 듣고 싶었다고. 그래서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그래,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거네.’

진패천은 깊어진 눈빛으로 검무극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이렇게까지 믿는 건가?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네, 맹주님에 대해서 잘 모르죠.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검무극이 차분히 덧붙였다.

“맹주님이 그러지 않았을 분이셨기에 제가 홀로 무림맹 한가운데 서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26 절대회귀-290화 26

제290회 마교가 우리보다 멋있으면.

진패천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어떤 울림이 있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림맹주로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온갖 경험을 다 한 그였다.

그리고 이제 화석처럼 메마른 감정은 습관적으로 작동할 뿐이다. 습관적으로 웃고, 습관적으로 화내고, 습관적으로 슬퍼하고.

하지만 지금 이 감정의 울림은 진짜였다.

깊게 상처 난 그곳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 상처를 도려내고 싶었지만, 도려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상처가 남았다. 그래서 덮고 살았다. 안에서 곪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어차피 그 정도 상처는 누구나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했으니까. 해야 할 일이 많은 자신이었으니까. 자신은 무림맹주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진패천은 느꼈다. 상처의 고름이 씻겨 내려가며 아물기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수십, 수백 번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한데 남이 그 말을 해주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이제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런 느낌을 받다니.

원래라면 자존심이 상했을 거다. 애써 부정했을 거다.

한데 맑고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검무극을 보고 있자니 꿈틀대며 깨어나려던 자존심은 다시 조용히 잠들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검무극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맹주는 이 순간 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저 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정말 중요하다. 상처의 마지막 치료는 언제나 당사자의 몫이었으니까. 맹주는 지금 상처에 마지막 붕대까지 잘 감았다.

“맹주님과는 달리 백천경은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죠.”

검무극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하던 이야기로 돌렸다.

“나는 지금껏 그들을 멸문시킨 자가 목천가 문주의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네. 그날 멸문했을 때 그는 그곳에 없었고, 얼마 후 자결한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

“결론적으로 그 시체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목천가와 관련된 일이니, 당시 진패천은 얼마나 신경 써서 그 일을 조사했겠는가? 한데도 속아 넘어갔다.

“그럼 누가 그들을 멸문한 건가?”

“누군가 백천경의 복수심을 이용한 자가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위장하는 것을 도왔고, 새 신분으로 무림맹에 잠입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아마 그가 목천가를 멸문시켰다고 짐작합니다.”

진패천은 생각이 깊어졌다. 시체를 조작하고, 맹에 잠입하고. 이건 단순한 사적인 적의(敵意)나 악의(惡意)가 아니다. 이건 전쟁이었다.

상대는 계략만 부리는 인물이 아니다. 목천가를 멸문시킨 것으로 자신의 무력까지 증명했으니까.

“누군가 무림맹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혹여라도 마교 쪽 인물이 아닐까 괜한 심력 소모는 피하도록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 저까지 죽여 본교와의 전쟁까지 획책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놈은 본교의 적이기도 합니다.”

검무극은 애초에 맹주의 아들 내외를 죽인 것부터 그자의 음모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거기까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배후를 찾아내기 위해 철저히 조사하겠네.”

“저도 놈을 찾아낼 겁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적어도 이 배후 놈을 잡는 일만큼은 저도 돕고 싶습니다.”

검무극은 천마신교의 도움 대신 자신으로 한정했다. 마교와 손을 잡을 필요까진 없고, 자신과 손을 잡자는 말로 맹주의 부담을 줄여준 것이다.

진패천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지.”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진 공자와 진 소저만 만나고 곧장 떠날 겁니다.”

“잠깐.”

돌아서 나가려는 검무극을 불러세우더니 진패천이 천천히 다가왔다.

진패천과 같은 고수가 다가서자 검무극의 천마호신공이 스스로 발동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순간만은 천마호신공이 헛수고를 했다.

진패천은 검무극을 와락 안았다.

“무림맹주가 아니라 하령이 할아비로서 자네에게 정말 고맙네.”

검무극도 함께 그를 안아주었다.

“다시 뵐 때까지 보중하십시오.”

물론 한마디 너스레도 잊지 않았다.

“무림맹주가 안아준 마교 소교주 있었으면 나와보라고 하십시오!”

진패천이 호탕하게 웃은 후 솔직히 말했다.

“안아주는 걸로 때운 거네. 마음 같아선 자네에게 뭔가 거창하게 보답해주고 싶었지. 본맹 보물창고에는 온갖 영약과 신병이기들이 쌓여 있거든.”

“그럼 주십시오. 제발 주십시오!”

검무극이 사양하지 않고 말하자 진패천은 웃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해야겠네. 그랬다가 그 힘까지 보태서 우릴 칠까 봐 두렵다네.”

“마음의 빚을 남겨놓는 것이 더 두렵지 않으시고요?”

“!”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물질적인 보상은 제가 사양합니다.”

정중히 예를 표하고 돌아서 나가는 검무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패천은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다.

마교 소교주가 아니었다면?

예전에 진하령이 시종과 혼인하겠다고 검무극을 데려왔을 때가 떠올랐다.

‘차라리 시종이었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진패천의 진심이었다.

* * *

진하령이 비명을 지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의방이었다.

“괜찮아?”

놀라 뛰어 들어온 진하군이었다.

“죽는 꿈 꿨어.”

초림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마존들이 도착하는 꿈이었다.

대성통곡까진 아니더라도 한 방울 눈물은 흘려주리라 여겼는데, 이안은 마존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자신이 죽은 것에는 신경도 안 썼다. 죽은 것보다 그게 더 악몽이었다.

제대로 본 건 이제 겨우 세 번인데 뭐가 섭섭하냐고?

그게 어디 보통 세 번인가? 첫 번째는 친구하고, 두 번째는 비무하고, 마지막은 구출하고. 정말 이런 인연도 쉽지 않다.

“이제 그럴 일 없다.”

“어떻게 장담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야지.”

웃고 있었지만 진하령의 눈빛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진하군은 이번 일을 통해 동생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잤어?”

“반 시진쯤.”

진하령이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자고 있을 때 검무극이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인사는 하고 보내야지.

“검무극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너 깨면 인사하고 간다고.”

검무극이 기다려줬다는 말에 진하령은 내심 감격했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에게 진하군이 말했다.

“알지?”

“뭘?”

“안 되는 것. 애초에 마음 주지 마.”

“왜? 걱정돼? 하나 있는 동생이 마교 소교주에게 마음이라도 빼앗길까 봐?”

그러자 놀랍게도 진하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까 걱정돼.”

“이럴 때는 내 동생 믿는다, 그런 걱정 안 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걱정돼.”

상대가 검무극이 아니었다면 기분 나빴겠지만, 진하령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검무극과 짝을 짓느냐 마느냐의 일이었으니까.

“오라버니, 나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만큼 순진하지 않아.”

“그럼 됐어.”

밖으로 나가려던 진하령은 오히려 진하군을 걱정했다.

“오라버니야말로 괜찮아?”

“무슨 뜻이야?”

“그 사람에게 말려들지 말라고.”

그러자 진하군은 뜻밖의 생각을 밝혔다.

“억지로 말려들지 않으려 하는 게 더 안 좋다. 말려들어도 이기적으로 말려들면 돼.”

“이기적으로?”

“그가 주는 좋은 영향은 다 받아먹고, 내 심지는 안 흔들리고.”

진하령은 과연 그게 잘될까 싶었다. 인간관계가 그의 말처럼 무 자르듯 할 수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순진하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 정도로 검무극을 버텨낼 수 있을까?

“우리가 피가 같긴 한가 보네. 오라버니도 순진과는 거리가 멀어.”

그렇게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검무극은 의원의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하령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뭘 그렇게 봐?”

“저기 저 하늘색 보여? 내 검강 색이다.”

“칙칙한 색보단 좋겠네. 저렇게 아름다운 색에 맞아 죽으면.”

그녀의 말에 검무극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몸은 괜찮아?”

“덕분에.”

“얼굴 보고 가려고 기다렸다. 다음에 보자.”

진하령은 검무극과의 이별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조금만 더 놀다 가. 며칠이라도.

하지만 이런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이 검무극과 자신의 관계이자 운명이었다.

“가기 전에 이건 말해주고 가.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어?”

“죽도록 수련하는 거지.”

“만날 노는 것만 같은데?”

“원래 수련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거야.”

그때 진하군이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왔다.

“할아버지께 배후에 대해 말씀 들었소.”

자신의 사부를 조종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검무극이 공을 그에게 돌렸다.

“이번 일을 밝혀낸 것은 당신 덕분이오. 사부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화를 당했을 수도 있었소.”

진하군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모르고 지나갔다면 백천경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을 파멸로 몰고 갔을 것이다.

진하군은 자신에게 온 공을 다시 검무극에게 되돌려주었다.

“당신 덕분이오. 상대를 대충 보지 말고, 똑바로 보라는 그 말 덕분에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도 진하군은 상대가 누구든 똑바로 보고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멸마대는 물론이고 무림맹 조직도 쇄신할 거고.

검무극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매사 조심하시오.”

“당신도.”

진하군은 마지막으로 감사를 전했다.

“동생 구해줘서 고맙소.”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꼭 갚으시오.”

검무극다운 대답이란 생각에 진하군은 옅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검무극이 진하령과도 작별했다.

진하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우린 친구지?”

진하령의 말에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교 본단 근처에 술맛 좋고, 주인장 좋은 주점이 있다. 다음에 한번 초대하지.”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진하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검무극은 땅을 박차며 날아올라 순간 시야에서 멀어졌다.

“오라버니, 우리 힘내야 할 것 같아. 마교가 우리보다 멋있으면 안 되잖아?”

진하군은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라버니 성격 누구보다 잘 안다. 지지 않을 거다, 우리 오라버니.

그 뒤를 따라 걸어가던 진하령이 검무극이 사라진 곳을 향해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도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깨달음을 얻은 것이 오라버니뿐이겠는가?

호북일미가 아니라 호북제일검이 되기 위한 그녀의 첫걸음이었다.

* * *

안가 주방에서 이안은 한창 요리 중이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도 두 마존에게 직접 요리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서너 개 있었는데 그중 제일 자신 있는 요리를 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너도 같이 먹자.”

“저는 괜찮아요.”

권마가 손짓까지 하며 권하는 바람에 이안도 함께 식사했다.

혈천도마, 권마와 한자리에서 식사하기?

이건 누가 봐도 벌칙 아니겠는가? 잔뜩 긴장해 있는데 음식을 먹으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싱겁다.”

혈천도마는 만든 사람 배려해서 대충 맛있다 해주고 그런 것 없었다.

“아! 죄송해요. 간을 좀 약하게 했어요. 제가 가서 다시 해오겠습니다.”

그때 권마가 이안이 가져가려는 그릇을 붙잡았다.

“싱겁게 먹어야 건강하다고 했소.”

“누가?”

“마의가 그랬소.”

이안은 권마가 그런 말을 해줄지 몰랐기에 내심 감격했다.

마존들은 겉으로 보는 모습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모습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자신도 겉으로 보는 느낌과 실제 성격은 완전히 달랐으니까.

혈천도마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요리를 해준 거냐?”

물론 이유는 있었다.

싸움에서 보았던 두 마존의 모습에 감동하고 존경심이 들어서였다. 그들이 보여줬던 그 강함, 그 강렬함은 이제 귀영대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에게 큰 감흥을 주었다. 그래서 정성껏 지어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다.

“자주 오는 기회도 아니고.”

거기에 서대룡이 술자리에서 항상 하는 말을 덧붙였다.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말해주려고요. 이 엄마가 젊은 시절 혈천도마님과 권마님에게 직접 밥도 해드렸다.”

“싱거웠다는 말도 꼭 해.”

혈천도마의 말에 이안이 멋쩍게 웃었다.

그때 권마가 불쑥 말했다.

“무극이와 자넬 닮은 자식이면 굉장할 거야.”

그 말에 이안은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황한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제가 어떻게 소교주님과 혼인을 해요. 대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개 평무인이었는데요.”

“무슨 상관이냐? 교주나 무극이나 그런 것 따지는 사람 아니다.”

권마의 말에 혈천도마도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말해주는 권마가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항상 걸리는 것이 있었다. 혼인이란 말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

원래라면 안 꺼낼 말인데, 이 무서운 두 사람 앞에서 왠지 하고 싶었다. 아니,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저는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르는걸요.”

그러자 혈천도마가 위로의 한마디를 던졌다.

“가족이 원수다. 몰라도 돼.”

이렇게 말해주는 혈천도마도 고마웠다.

그때 권마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게 정 마음에 걸리면 내가 아버지가 되어 주마.”

그 말에 혈천도마까지 깜짝 놀랐다. 그랬으니 당사자인 이안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녀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쳤다.

권마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심야수련모임에서 자신을 좋게 본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농담인가?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그곳으로 검무극이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검무극은 대번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파악했다.

“마교 소교주가 무림맹 맹주전에서도 아무 일이 없었는데, 안가의 밥상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르던 침묵을 깬 것은 혈천도마였다.

“음식이 싱거워서 그렇다.”

38 절대회귀-291화 38

제291회 저 무서운 사람이 장인이라면?

“이안이 원한다면 내가 아버지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권마의 폭탄선언에 모두 검무극을 주시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뜻밖에 그는 눈만 껌벅거렸을 뿐 놀라지 않았다.

“안 놀라네?”

혈천도마의 물음에 검무극도 자신의 반응이 의외인 모양이었다.

“그러게요. 저 왜 안 놀라죠?”

왜기는? 권마를 놀리려고 그런 거지.

검무극이 권마과 이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극과 극인 아버지와 딸이라니? 그래서 안 놀라는 것 아닐까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간 또 멸천대도 방패가 필요했을지 모르겠지만, 검무극의 놀림에도 권마는 순순히 수긍했다. 자기가 생각해도 극과 극의 외모였으니까.

“아무도 안 믿으려나?”

“사부님은 믿으시겠습니까?”

혈천도마가 슬쩍 끼어들며 진담을 농담처럼 했다.

“납치당했다고 생각하겠지.”

그 말 역시 권마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이안이 불쑥 말했다.

“아버지!”

놀란 시선들이 이안에게 모였다. 세 사람 중 가장 놀란 사람은 권마였다. 이안이 권마를 응시하며 말했다.

“저 같은 딸도 괜찮으시다면, 저를 딸로 삼아주세요.”

권마가 눈을 크게 떴다. 권마를 만난 후 그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 같은 아버지라도 괜찮겠나?”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권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만 명의 적이 앞에 늘어서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권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제겐 너무 과분하신 분이십니다.”

이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준다고 하니까, 너무 감격스러웠다. 정말이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안이 검무극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저, 이래도 되나요?

그녀도 우발적인 결정이었다. 어쩌면 자기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결정일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정말 순식간에 결정했다.

정말 이래도 되나요?

그 대답은 환하게 웃는 검무극의 표정이 대신했다.

“축하한다, 이안.”

이안이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다시 권마에게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왜 저를 딸로 삼겠다고 하셨죠?”

권마의 대답은 단순했다.

“너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그 어떤 말보다 이안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권마에게 절을 올렸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버지.”

‘아버지’란 말을 하면서 그녀는 울컥했다.

“아버지란 말…… 태어나서 오늘 처음 했어요.”

한 번도 아빠, 엄마란 말을 해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무슨 사연이 있겠지 이해하기도 하고, 그리워도 하고, 미워도 하고, 잊으려고도 했었다. 나는 절대 그런 부모가 되진 말아야지, 아니 나는 부모도 되지 말아야지. 그냥 홀로 살아가다가 조용히 죽어야지.

쌓였던 감정이 북받치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는 모습을 검무극과 혈천도마, 그리고 권마가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실컷 울게 두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 그녀를 지켜주며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때, 권마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보며 혈천도마가 농담을 던졌다.

“못 생겨지니까 이제야 좀 부녀지간 같네.”

검무극이 큰소리로 웃었다. 원래 남 일에 잘 참견 안 하는 혈천도마였다. 한데 유독 권마의 일에는 농담도 잘하고 너스레도 잘 떨었다. 그만큼 권마와 잘 맞고, 그를 좋아한다는 의미다. 마존들 모임에 가면 따돌림받는다고 그렇게 엄살을 피워놓고선.

이안을 바라보는 권마의 몸에서 박력 있는 기세가 뻗어 나왔다.

“교에 돌아가면 공식적으로 네가 내 딸이 되었음을 발표하겠다.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한 무림의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권마의 선언에 다시 이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우는 거예요. 앞으론 울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서 애써 웃어 보였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부모란 존재 자체가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였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고, 오직 검무극에게만 했었다. 이제 앞으로 아버지 자랑 실컷 하면서 살 거다. 너희 아버지 뭐하시냐? 우리 아버지 권마이시다!

혈천도마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만 해도 장난인 줄 알았는데.”

검무극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이런 일로 장난치실 분이 아니시잖아요?”

“저 무서운 사람이 장인이라?”

“그러게요. 대체 어떤 사위가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러자 혈천도마는 ‘널 두고 한 말이야!’라는 표정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은 이안을 놀렸다.

“이안아, 너 어쩌냐? 혼인은 다 했다.”

그러자 권마가 불쑥 말했다.

“너랑 하면 되지 않느냐?”

권마의 말에 이안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씀 마세요. 도련님, 신경 쓰지 마세요.”

권마는 대답을 기다리며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저는 음식 짜게 먹는데요?”

“이제부터 싱겁게 먹는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검무극이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그에게 말했다.

“천마 사돈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권마가 움찔했다. 이안만 생각했지 거기까진 또 생각지 못했던 그였다. 세상 유일하게 자신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사람인데, 사돈이라고? 교주와 사돈이라고?

“여기요! 저 여기 있어요! 혼인할 생각 전혀 없는 신부 여기 있어요!”

이 혼돈 속에서 혈천도마가 턱을 매만지며 그날을 상상했다.

“진짜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난리가 나겠군.”

* * *

그날 밤, 권마는 안가의 뒷마당에 홀로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아마 이래저래 복잡한 마음을 무공수련으로 달래고 있는 모양이다.

웃통을 벗은 그의 근육은 마치 화공이 그린 것처럼 완벽했다.

“저는 언제 사부님 몸처럼 될까요?”

나도 웃통을 벗고 그의 옆에 서서 벽력수라권을 내질렀다. 권법 수련을 할 때 옷을 벗고 하는 이유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살피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그와 함께 수련하니 기분이 상쾌했다.

권마는 제오권 금강수라를 집중적으로 반복하게 했다. 일시적으로 몸을 강철처럼 만들어서 보호하는 초식으로 위기의 순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금강수라와 천마호신공을 함께 쓴다면, 일시적으로 금강불괴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되는 초식이기도 하다.

“왜 금강수라를 집중적으로 가르치시는 겁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네 몸부터 지켜야 할 것 같아서다.”

무림맹주를 노린 배후자가 나타났으니, 마교 소교주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권마는 금강수라의 요결을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예전에 들었던 내용도 있었고, 새로운 부분도 있었다.

이해가 안 되면 즉시 질문했고, 권마는 성심껏 알려주었다.

“자, 버텨봐라!”

“설마 그 주먹으로 절 치실 것은 아니죠?”

“왜 아니겠느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권마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후아아아아앙!

콰아앙!

공격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뒤로 밀려났고, 그 와중에 천마호신공과 금강수라가 함께 발동하면서 충격을 해소했다.

내가 멀쩡하게 걸어오자 권마는 크게 기뻐했다.

“잘했다. 금강수라는 언젠가 네 목숨을 살릴 거다. 절대 소홀히 하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수련이 끝나고 우린 나란히 앉아서 잠시 숨을 돌렸다.

“이유를 여쭤봐도 됩니까?”

다짜고짜 질문에도 권마는 내가 뭘 물었는지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이안 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짜 이유 말입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권마가 말했다.

“나도 부모 얼굴을 모른다. 그래서 누구보다 저 아이의 심정이 어떤지 알지.”

처음으로 듣는 그의 개인사였다.

“어려서는 이를 악물고 그들을 부정했다. 복수하겠다는 생각조차 안 하려고 했지. 복수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들을 인정한다는 것이니까. 철저히 그들을 내 인생에서 지우려 애썼다.”

“지금은요? 부모님을 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들 없어도 이렇게 잘살아 왔다. 말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권마는 고개를 내저으며 허탈함을 드러냈다.

“내 마음에 그런 시시한 복수심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겠군.”

그런 감정조차 없이 삭막해졌다는 의미로 들렸다.

“이런 내가 누군가를 가족으로 삼으려 하다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 주는 권마가 고마웠다. 그만큼 나를 믿는다는 의미였으니까.

“아뇨, 잘하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저는 이안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부님의 딸이 된 것은 이안에게 최고의 행복이 될 거라 믿습니다. 이안을 위해서도, 사부님을 위해서도 잘한 선택입니다.”

권마의 무서운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한다. 무서움 속에 지어지는 미소, 이때의 권마는 꽤 멋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권마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평소 권마는 거의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말을 해야 할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다.

“앞으로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왜?”

“아버지가 돼보신 적 없으시잖아요? 딸이 반항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권마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안 통할까?”

“그게 통했으면 자식 키우는 게 검신이 되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권마가 장난스럽게 들었던 주먹을 내려놓았다. 저 귀한 주먹이 저렇게 힘없이 내려가게 해선 안 될 일이다.

“대신 다른 데는 통하겠지요.”

“어디?”

“천하제일미 딸이 생기는 일입니다. 주먹 쓸 때가 아주 많아질 겁니다.”

어떤 의미인지 알고는 권마가 그 큰 주먹을 다시 쥐었다.

“재미있겠군.”

“사부님은 재미있으시겠죠. 상대들의 명복은 제가 미리 빌겠습니다.”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한 치 앞도 모른다. 이안이 권마의 딸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사부님께서는 정말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검무극의 말에 권마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 반대가 아니고?”

이렇게 무르고 정에 약해서 어떻게 절벽을 무너뜨리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었으리라.

“사람이 변해야 무공도 변한다.”

내 말을 권마가 곱씹었다.

“내가 변해야 부술 수 있다?”

“누군가를 수양딸로 삼는다는 것, 상상이나 하신 일이십니까?”

권마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부님은 변하셨습니다. 아마 그 변화가 사부님의 한계를 뚫어줄 거라 믿습니다.”

권마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어쩌면 주먹에서 천둥소리가 나지 않을 때, 절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천둥소리가 나지 않는 벽력수라권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귀를 찢는 천둥보다 더 무서운 상상도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날아와 천지를 뒤집는 주먹!

그 모습을 떠올리니 나와 권마는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우린 벌떡 일어나서 주먹을 내질렀다. 새벽까지 우리의 수련은 쉬지 않았다.

* * *

다음 날 모두와 작별했다.

“저는 강서지단으로 가겠습니다.”

원래 이번 출교 목적이 호남지단과 강서지단에 들렀다 돌아가는 것이었다.

화무기와 관련해서 새로운 단서가 나오기 전까진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 휘둘리지 말고 묵묵히.

“혼자 가겠다고요?”

“응. 두 분 모시고 교로 돌아가. 아, 돌아가는 길에 대기하고 있는 호위들도 모두 돌아가라 전하고.”

“호위까지 두고 혼자 가려고요?”

“이번에는 암행 감찰이야.”

호남지단에는 호위들 거느리고 당당히 갔으니, 이번에는 은밀히 방문할 생각이다. 부디 강서지단주는 호남지단주처럼 부패한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먼저 가마. 앞으론 이 늙은이 부려 먹을 생각 말고.”

혈천도마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문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부려 먹어서 얻어낸 결과를 생각하면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라도 마존들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번에는 다른 마존들을 부를 겁니다.

다음으론 권마와 이별했다.

“어제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조심해라.”

권마도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 큰 등이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났음에도, 문을 꽉 채우며 나가는 저 등은 더 기분 좋아 보였다.

그렇게 혈천도마와 권마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비로소 이안이 속마음을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그런 중요한 일을 미리 의논도 안 드리고 결정해서요.”

“너도 미리 결심한 거 아니잖아?”

“결정의 순간에 전음으로라도 여쭤봤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밤새 그게 마음이 걸려 잠을 설쳤을 그녀다. 그래, 이렇게 착한 그녀이기에 권마의 딸이 되어야 하는 거다.

“그런 중요한 일이니까 그렇게 결정짓는 거야. 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잘못된 선택이라면요?”

“감수해야지.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는 거지.”

그때를 상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안이 머리를 싸매는 시늉을 했다.

“그냥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아버지잖아요.”

“두 번째니까 안심해. 네 앞에 첫 번째 아버지를 둔 불쌍한 자식이 있다.”

내 농담에 이안이 웃었다.

“네 본능을 믿어라. 네 무공도, 네 마음도.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본능은 올바르게 작동할 거다.”

“명심할게요, 도련님.”

“나중에 본교에서 보자.”

“조심하세요.”

걸어 나가려던 이안이 문 앞에서 돌아섰다.

“권마님의 딸이 되다니. 도련님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안아, 우리 여정은 아직 시작도 안 했을 수도 있어.”

놀란 이안은 그 너머가 상상조차 안 되는 모양이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요?”

“그건 나도 모르지.”

“이젠 농담처럼 안 들려요.”

“농담이 아니니까.”

오직 화무기를 죽이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이번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 화무기를 죽여야 하는 것일 뿐. 화무기를 죽인 후에도 내 인생은 계속될 테니까. 나도, 내 사람들도.

“도련님, 저한테 그러셨죠? 힘들면 쉬었다 가라고요.”

“그랬지.”

“지금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비단 새벽까지의 수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근래 화무기를 생각하면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아무리 감춰도 이안만은 내 감정을 느끼고 읽어낸다.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쉬어가마.”

그렇게 그녀마저 떠났다.

나는 잠시 안가의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틈날 때마다 보려고 노력한다. 볼 때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 아무리 바빠도 나 좀 보면서 살자.

삶에 떠밀리기 시작하면 고개 한 번 들기도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회귀 전의 내 삶처럼.

그땐 하늘이 아니라 땅만 보고 다녔다. 주머니에 채울 재료만 보고 다녔다. 적을 어떻게 죽일까만 보고 다녔다. 그때도 하늘은 저렇게 푸르렀을 텐데…….

이번 강서행은 좀 편안하고 평화로운 여정이 되기를 바라며 안가를 나섰다.

그러니 악인들이여, 너희들도 좀 쉬어라! 제발!

16 절대회귀-292화 16

제292회 이런 손님만 있으면.

편중(扁仲)은 운이 좋았다.

강서에서 호북까지 마부로 왔다가 이틀째 돌아가는 마차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강서로 가는 마차를 잡은 것이다

마차를 빌려주는 곳에서는 이렇게 마부들을 고용해서 일을 연결해주고 마부가 받는 돈 일부를 떼어갔다.

편중이 마차를 빌려주는 관리인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는 손님입니까?”

“천마신교 강서지단까지.”

편중이 목소리를 낮춰 나직이 물었다.

“혹시 마인입니까?”

“겉으로 봐선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 해도 편중은 긴장되고 겁이 났다. 사파인이나 마인들 싸움에 휘말려 죽은 마부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편중이 마차를 청소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이윽고 손님이 도착했다. 젊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편중이라고 합니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잘 부탁하오. 그리 급한 일 아니니, 너무 달릴 것 없소.”

“알겠습니다.”

청년이 인사하는 것을 보고 편중은 알 수 있었다.

‘마인이 아니다.’

지금까지 마인을 여러 명 태워봤지만, 이렇게 정중한 마인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편중의 착각이었다. 상대는 마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마인이었으니까. 청년은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은 마차를 빌려 타고 강서로 가려는 것이다. 마차에서 천마호신공 수련을 하다가,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멈춰서 구경하다 가고. 그렇게 유유자적 쉬면서 가려는 것이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그렇게 마차가 출발했다.

한참을 달리던 편중이 마부석과 연결된 창으로 슬쩍 돌아봤을 때, 검무극은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잠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 이런 손님이 최고지.’

마차에 탄 검무극은 천마호신공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동할 땐 오히려 집중이 잘 되기도 했다. 마차에 스치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떠드는 행인들 소리. 때론 이런 소리가 집중력을 더욱 높여주었다.

그러다 수련이 지겨워지면 지금처럼 창밖 경치도 쳐다보고.

‘이게 쉬는 거지.’

이안이 말한 휴식은 천마호신공을 익히며 잠깐잠깐 쉬는 걸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처지에는 이런 휴식도 호사였다.

그렇게 바깥 경치를 쳐다보던 검무극이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나 지겨운 천마호신공의 구결을, 처음 익히는 마음으로 정성껏 읊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물통에 물 한 방울이 더해졌다.

* * *

그날 저녁 마차가 한 객잔에 멈췄다. 마부마다 쉬는 장소들이 달랐는데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마부들이 쉬는 객잔이 음식 솜씨가 좋은 곳이라 들었소.”

“맞습니다. 우리야 워낙 자주 다니니 어느 객잔이 맛있는지 꿰고 있지요.”

그렇게 두 사람이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럼 쉬십시오.”

“같이 식사합시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부는 손님과 따로 식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밥을 사주는 손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출발 전까지는 각자 알아서 먹고, 잤다.

“혼자 먹기 싫어서 그렇소. 같이 합시다.”

편중이 못 이기는 척 함께 자리에 앉았다. 한 끼라도 얻어먹으면 그만큼 돈을 아낄 수 있으니, 편중의 입장에서야 좋은 일이다.

“잘 아실 테니 추천해주시오.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가 어떤 거요?”

편중이 몇 가지 요리를 추천했다. 검무극은 그가 말한 요리를 다 시켰다.

“자, 배도 고픈데 많이 먹읍시다.”

검무극은 마부에게 최고의 손님이었다.

같이 먹자고 불러 앉혀 놓고 이것저것 물어보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있다. 호의를 베풀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내는 사람들, 귀가 아플 정도로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들, 마부의 수입을 묻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충고하는 사람들까지.

하지만 검무극은 그저 객잔 밖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오히려 편중이 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소협은 뭐 하시는 분이냐고, 마교 지단에는 왜 가는 거냐고.

물론, 편중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림인과 얽혀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잠시 후 요리가 나왔고 검무극은 술도 시켰다.

편중에게도 술을 따라주었다.

“마차를 몰아야 하니 딱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편중은 오랜만에 술을 마시고 맛있는 요리를 먹으니 정말 살 것 같았다. 만날 돈을 아낀다고 간신히 허기만 때우던 요즘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손님만 있으면 마부도 할만한 직업인데.’

오늘처럼 운수 좋은 날보다는 조마조마한 날들의 연속이 마부의 삶이었다.

밥까지 사주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염치없어서 한마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강서는 초행이십니까?”

“아니오.”

“그러시군요.”

마교 지단에는 왜 가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잘 먹었습니다.”

검무극은 그가 불편할까 봐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낭인 생활을 할 때, 충분히 경험했다. 이럴 땐 그냥 조용히 있어 주는 게 상대를 위하는 것임을.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객방으로 올라가던 검무극이 편중에게 물었다.

“왜 안 가시오?”

“저는 마차에서 자면 됩니다. 가서 편히 주무십시오.”

편중은 평소에도 마차에서 쪽잠을 잤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검무극이 자신의 돈으로 그의 방도 잡아주었다.

“전 괜찮습니다.”

“나는 편히 잘 잔 사람이 모는 마차를 타고 싶소.”

이렇게 말하는데 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이런 손님만 있으면!

객방에 들어선 편중은 기분이 좋았다.

‘이 얼마 만에 침상에서 자는 잠인가?’

그날은 아주 편하게 잠을 잤다. 무림맹주도 부럽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검무극의 호의는 계속되었다.

함께 식사를 권했고, 방도 잡아주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말고삐를 잡은 사람을 챙기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챙기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함께 밥을 먹었고, 좋은 침상에서 잠을 잤다.

첫날은 좋다고 기분 좋게 먹고 잤지만, 둘째 날은 요리를 먹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라서 그랬다. 첫째 작년 생일날 사준 요리였다. 아니, 재작년이었나?

이걸 싸갈 수만 있다면.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싸가고 싶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는데 검무극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자식이 있는지 물었다.

“아이가 있으시오?”

“둘 있습니다.”

“몇 살이오?”

“일곱 살, 아홉 살입니다.”

“보고 싶으시겠소.”

편중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다 뿐이겠는가? 어떨 때는 당장이라도 마차를 몰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다.

그리고 그날 밤 꿈에 아이들이 나왔다.

* * *

가끔 검무극은 경치가 좋은 곳에서 마차를 세우게 했다.

저 멀리 강 너머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반짝이는 강물 위로 퍼져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검무극은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덕분에 편중도 오랜만에 노을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해지는 모습을 본 적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해가 질 때면 어서 어두워지기 전에 객잔에 도착해야지, 이런 마음으로 마차를 달리기에 급급했으니까. 오히려 노을은 그를 불안하게 하는 신호였다. 오늘 새삼 느꼈다.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내 심장이 그랬소. 피곤해 보이니 좀 쉬어가라고. 그래서 심장 말을 들으려고 하오.”

“아, 그러시군요.”

아는 척 말을 받았지만, 편중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이? 무슨 말이지? 어쩌면 심장이 아픈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오해만 불러왔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목적지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편중은 객잔 주인에게 빌린 방을 환불하고 돈을 돌려받다가 검무극에게 걸렸다. 마침 바람 쐬러 나온 검무극이 그 모습을 본 것이다. 검무극은 못 본 척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

편중은 탄식했다. 상대방 성의를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상대가 이해해 준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다음 날 마차를 몰던 내내 마음이 걸렸던 편중은 들판에서 말을 잠시 쉬게 할 때, 검무극에게 다가갔다.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괜찮소.”

그냥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질 더러운 사람에게는 무서워서 일일이 변명했을 거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변명이라도 제대로 하자.

“작년에 둘째 놈이 지독한 열병을 앓았습니다. 그때 약을 짓는다고 돈을 빌렸습니다. 빠듯하게 살던 처지라 급한 마음에 빌려서는 안 될 돈을 빌렸습니다.”

“염왕채를 빌리셨구려.”

“맞습니다.”

편중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빌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치료비로 열 냥을 빌렸는데…… 일 년이 지난 지금 일흔 냥이 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갚은 이자가 스무 냥이 넘는데도 말입니다.”

그가 마차에서 쪽잠을 자는 이유였다. 이자를 갚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빚은 늘어만 갔다.

“제 잘못입니다. 애초에 이자가 그렇게 비싸다는 것을 듣고서도 빌렸으니까요.”

후회는 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그 돈을 빌리지 않았다면, 둘째 녀석은 죽었거나 불구가 되었을 테니까.

그러자 검무극이 말했다.

“그게 어찌 편 선생의 잘못이겠소. 상식을 벗어난 이자로 염왕채를 놓는 자들 잘못이지.”

편 선생이란 말에 편중의 마음이 울컥했다. 아무도 마부를 이렇게 높이 불러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돈 빌린 일을 말하면 다들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왜 애초에 거기서 돈을 빌렸냐고?

“돈 빌린 곳 이름이 뭐요?”

“통전소(通錢所)라는 곳입니다.”

“거기부터 들립시다.”

“안 됩니다. 그자들은 난폭하고 사나운 자들입니다.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고, 무서운 사람들이 배후에 있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지역에서 염왕채를 놓았지만, 아직도 건재한 자들입니다.”

편중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이 좋은 사람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검무극은 그를 멀뚱히 쳐다보며 말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난 돈이 필요해서 가는 거요.”

순간 편중은 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오는 도중에 그렇게 돈을 잘 썼던 사람인데, 염왕채를 빌린다고? 갑자기?

“어서 갑시다.”

손님이 가자는데 어찌하겠는가? 마차는 원래 가야 할 곳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 * *

놀랍게도 통전소에 도착한 검무극은 정말 돈을 빌렸다.

“얼마나 빌려줄 수 있소?”

돈을 빌려주는 담당자인 주양(周洋)은 검무극의 아래위 행색을 훑었다.

“우린 외지인에게는 돈을 잘 빌려주지 않는데…….”

단정해서 말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다. 빌려주긴 빌려준다는 의미였다.

“담보가 있으시오?”

“없소. 이 검이라도 맡길까?”

“검 그까짓게 얼마나 한다고. 검은 담보로 받지 않소.”

무인들이 담보로 맡기려는 검은 대부분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어디 싸구려 검을 사 와서는 명검 행세를 하는 것들이 한둘이었겠는가?

“내 검이 들으면 섭섭하겠소.”

주양이 검을 쳐다보았다. 피 묻은 천이 칭칭 감겨 있는 검을 보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있어 보이게 잘도 꾸몄군.

“담보가 없으면 보증 서 줄 사람이 있으면 되오.”

주양의 말에 검무극은 함께 온 편중을 돌아보았다.

“보증 좀 서주시겠소?”

편중이 화들짝 놀랐다.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설마 자신보고 보증서 달라고 데려온 건가 싶었다.

“농담이오. 우리 아버지가 보증은 가족에게도 서는 것이 아니라고 했소.”

긴장했던 편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담보도 없고, 보증도 없으면 얼마나 빌릴 수 있소?”

“열 냥까지는 빌려줄 수 있소.”

“좋소, 열 냥 빌립시다.”

“자, 여기 차용증에 인적 사항 적으시고 수인 찍으시오.”

검무극은 시키는 대로 적고 수인까지 찍었다. 빌려줄 때는 편하게,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빌려주었다.

“만약 제때 안 갚으면 이자가 붙소. 나중에 이자가 비싸니 어쩌니 하면서 지랄하는 것들이 꼭 있소. 제 발로 찾아와서 빌려놓고 그딴 소릴 해대는 파렴치한 것들이지.”

편중이 고개를 숙였다. 주양은 편중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때 검무극이 편중 편을 들어주었다.

“오죽 급하면 이 비싼 이자에도 돈을 빌렸겠소. 절박한 사람 마음을 이용하는 것들이 파렴치한 것들이지.”

순간 주양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닳고 닳은 주양은 화내지 않았다. 이렇게 까부는 놈들의 최후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 병신같은 놈아. 나중에도 그런 소리 하나 두고 보자. 돈을 갚고 싶어도 못 갚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주양이 차용증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고향이 광서시구먼. 멀리서도 오셨소. 주소는 똑바로 적으셨으리라 믿소. 아버지 이름이 검우진, 이름이 멋지시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각 성마다 지부가 있소. 당신이 적은 내용 곧 확인해서 연락이 올 거요.”

“그러시오.”

“미리 말하지만, 돈을 갚지 않고 달아날 생각 마시오. 가족들이 대신 갚아야 하오. 당신 아버지 찾아간다는 소리요.”

“우리 아버지 돈 많소.”

그렇게 편중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마당 곳곳에 칼 찬 자들이 많이 오가고 있었다. 제법 규모를 크게 하는 염왕채였다.

그곳을 나오자 편중이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대체 이곳에는 왜 오신 겁니까?”

한바탕 칼부림이라도 날까 봐 걱정했다. 걱정도 했고, 기대도 했다.

이 소협이 검을 뽑아 다 쓸어버리고 이제부터 빚 없소, 라고 해주기를 기대했다. 이기적이고 속물 같은 마음이지만, 솔직히 그랬다.

“돈 빌리러 왔다고 하지 않았소?”

“겨우 열 냥 빌리러 오신 겁니까? 소협께서는…… 그 돈 필요 없지 않으십니까?”

오면서 경험했던 검무극의 씀씀이를 생각하면 열 냥을 빌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꼭 필요하오.”

비단 염왕채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강서지단 암행 감찰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려는 것이다. 부패는 언제나 돈과 연관이 있으니까.

검무극 뒤로 저 멀리 사내놈들 둘이 따라붙었다. 감시하고 있으니 딴짓할 생각 말라는 대놓고 하는 미행이었다.

“열 냥 빌려주고 사람을 둘이나 써서 감시하면 오히려 손해 아닙니까?”

검무극이 손바닥에 들린 열 냥을 보여주며 되물었다.

“이게 열 냥이 아니지 않소?”

편중은 탄성을 내질렀다. 검무극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저들은 이 열 냥을 시작으로 평생 대롱을 꽂아 피를 빨아 먹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빌린 돈은 열 냥이 아니다. 수백, 수천 냥을 빌린 것이다.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이 이 열 냥을 어떻게 받아내는지 한 번 봅시다.”

25 절대회귀-293화 25

제293회 검우진이란 사람 어디에 사는지.

“같이 밥이나 먹고 헤어집시다.”

검무극의 권유에 편중은 그럴 필요 없다고 뒤로 물러났다.

“괜찮습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매일 같이 밥을 먹었는데, 마지막 날 안 먹으면 이상하잖소?”

이상할 것까지야. 하지만 이미 검무극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곳 객잔은 어디가 맛이 좋소? 거기로 갑시다.”

그렇게 검무극에게 이끌려 두 사람은 저잣거리를 걸었다. 좋은 손님 만나서 마지막 날까지 입이 호강이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사납게 생긴 남자 하나가 편중을 막아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편중은 이번에 벌어온 돈에서 삼분지 이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돈을 받아든 남자는 그대로 가버렸다. 인사도 없고, 욕설이나 협박도 없었다. 검무극은 오히려 이것이 더 비정하게 느껴졌다. 분노나 슬픔, 그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힘들게 번 돈이 사라져버렸으니까.

다시 몇 걸음 걸어가던 편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처음에는 부당하다고 항의도 하고, 저항도 했습니다.”

힘겨웠던 그의 과거가 이어졌다.

“처자식 앞에서 얻어터지기도 했었죠. 거기까지도 참았습니다. 한데 저놈이 아들 목에 칼을 대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더 아끼고 더 일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편중이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검무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깁니다. 저기가 제일 솜씨가 좋습니다.”

객잔에 들어간 검무극은 한동안 묵을 방을 잡은 후, 일 층에서 편중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 객잔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를 시켜서 함께 먹었다.

‘이렇게 돈이 많으면서 왜 열 냥을 빌린 걸까? 괜히 복잡한 일만 겪을 텐데.’

편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통전소를 어떻게 할 생각이면 그러지 마십시오. 그들은 평범한 파락호 놈들이 아닙니다. 조직의 규모도 크고요. 중원 곳곳 없는 곳이 없습니다.”

검무극은 그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검무극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없이 술과 요리를 먹었고, 편중 역시 조용히 음식을 먹었다.

밥을 다 먹자 검무극이 작별을 고했다.

“피곤하실 텐데 가서 쉬시오. 이곳까지 마차 몰고 오느라 수고하셨소.”

검무극이 객잔 주인을 불렀다. 굳이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객잔 주인이 포장된 요리를 가져왔다.

“애들이 잘 먹을만한 요리로 부탁했으니 가져가서 먹이시오.”

검무극은 편중이 요리를 먹을 때마다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며 자식 생각을 한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자식까지 챙겨주자 편중의 마음이 울컥했다.

“제게 왜 이렇게까지 잘해주시는 겁니까?”

“나를 무사히 잘 데려와 준 보답이오.”

편중은 목이 멨다. 살다 보면 좋은 사람도 만나고, 운 좋은 날도 있다지만, 이렇게 호의를 베푼 사람은 처음이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한 편중은 양손 가득 요리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거란 생각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편중은 마부와 손님으로 시작한 이 관계가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아직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검무극이 품에서 열 냥을 꺼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 *

덕출(德出)은 긴장하고 있었다.

통전소 수습 조사관으로 석 달을 보낸 그가 드디어 첫 정식 조사를 나선 것이다.

‘멋지게 해내서 인정받자.’

조사관이 하는 일은 채무자의 주소지에 가서 부모나 가족이 정말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돈을 회수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가족이 볼모로 잡혀 있어야 달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소지에 가까워질수록 덕출은 바짝 긴장했다.

‘이 지역에 마교 본단이 있다더니, 여긴 정말 마굴이구나.’

이곳까지 오면서 마기를 풀풀 풍기는 마인을 몇 명이나 만났는지 모른다.

무서웠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 일을 잘 해내야 정식 조사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덕출은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괜히 마인들 영역에서 잘못했다간 살아나가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 이곳에 자주 오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덕출이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저자를 지나가는데 행상들이 여러 물건을 팔고 있었다.

“좋은 물건 많습니다, 보고 가세요!”

염소수염 행상의 호객에 덕출은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싫다고 하면 갑자기 저 간사해 보이는 염소수염을 꼬며 ‘너 내가 누군지 아느냐?’라며 은퇴한 마인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진열대에 온갖 물건들이 다 있었는데 천마혼을 깎아 만든 인형부터 마존들 관련한 상품들이었다. 극악소마의 백색 가면도 걸려있었다.

‘정말 마교 놈들은 미친놈들이다. 이런 걸 다 팔고 있으니.’

천마혼 인형은 정말 무서웠다. 잠결에 봤다간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거 만든 사람은 천마혼을 본 적이나 있을까? 생각해보니 인형이나 만들어 파는 자가 봤을 리가 없잖아?

그 옆에 팔마존 인형들이 세워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단연 권마 인형이었다. 남들 두 배의 체구에 얼굴은 천마혼과 맞먹는 인상이었다.

염소수염이 재빨리 설명했다.

“권마님이십니다. 실제 비율대로 정말 잘 만들어졌죠.”

주먹이 사람 머리통만 한데 실제라고? 누굴 바보로 아나?

덕출이 권마 인형을 내려놓고 옆에 있던 다른 인형을 살펴보았다. 권마와는 너무나 상반된 생김새라서 눈에 띈 인형이었다.

“그분은 독왕님이십니다. 정말 잘생기셨죠? 거기 열두 개의 독주머니를 보십시오. 주름 하나하나까지 정말 꼼꼼히 만들었지요.”

염소수염이 침을 튀겨가며 소개했지만, 덕출은 내심 의심했다.

‘독왕이 이렇게 어리고 잘생겼다고? 아무리 실물 볼 일 없다지만 이렇게 사기 쳐도 되는 거냐?’

거기에 일화검존 인형은 어떤가? 새하얀 무복에 중년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하고 있었다. 검존이 여자인 줄도 모르는 덕출이 어찌 검존이라 믿겠는가?

‘이것들이 막 만들었구먼.’

결정적으로 덕출의 불신에 기름을 확 부은 인형은 마불 인형이었다. 다른 인형의 절반쯤 되는 크기에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가를 줄이려고 반 토막으로 만들었고.’

게다가 사람 몸에서 어떻게 이런 황금빛이 나겠는가?

덕출이 이번에는 꼬장꼬장한 눈빛을 잘 살린 혈천도마를 들고서 등에 차고 있는 멸천대도를 뽑아보았다. 오, 이건 멋있네.

백색 가면을 쓴 채 도도하게 팔짱을 낀 극악소마 인형을 보자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괜히 걸려있는 가면을 얼굴에 써보게 되었다.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섭혼마존 인형이라거나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술을 마시고 있는 취마 인형도 멋은 있었다. 다 제멋대로 만든 거라 그렇지.

“팔마존을 한꺼번에 다 사시면 삼 할 깎아드립죠.”

“다음에 사겠소.”

그냥 가려는데 염소수염이 그를 막아섰다. 이미 덕출이 외지에서 온 풋내기임을 눈치챈 그였다.

염소수염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 구경하고 그냥 간다고? 멸천대도까지 뽑아보고 안 산다고? 가면까지 써봤으면서? 정말?

뭐라도 안 사면 안 될 것 같은 기세에 덕출은 혈천도마 인형을 들었다.

“이걸 사겠소.”

그제야 염소수염이 활짝 웃었다.

그렇게 덕출이 강매로 혈천도마 인형을 사서 돌아서던 바로 그때였다.

저 앞에서 황금빛 광채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덕출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진짜 마불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덕출이 다시 가판의 인형을 보았다.

‘똑같다!’

마불이 걸어오면서 힐끗 덕출을 쳐다보았다. 덕출의 손에 들린 혈천도마 인형이 덜덜 떨렸다.

‘마불 인형을 샀어야 했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설마 다른 인형 샀다고 죽이진 않겠지?

그때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

“어서 오십시오.”

덕출이 돌아보니 한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바로 대공자 검무양이었다.

“대공자.”

덕출은 숨을 멈췄다.

‘대공자? 설마 지금 천마신교 대공자와 마불이 만나는 자리에 내가 서 있다고?’

검무양이 마불에게 말했다.

“지난번에는 마존께서 사셨으니 오늘 술은 제가 사겠습니다.”

“좋습니다.”

마불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갔다. 오히려 검무극이 소교주가 되고 나자 관계가 더 좋아진 두 사람이었다.

마불은 소교주가 되지 못한 검무양을 끝까지 지켜주었다. 권력에서 벗어나자 새로운 우정이 시작된 두 사람이었다.

마불이 덕출 앞을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보았다. 어느새 덕출의 손에는 염소수염이 꼭 쥐여준 마불 인형도 들려 있었다.

그렇게 마불 인형까지 산 덕출은 후다닥 그곳을 빠져나왔다.

마교 근처에서 어물쩍대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거지. 자, 얼른 확인하고 돌아가자.

“마가촌 지나서 서쪽으로 오백 보 걸어가서 돌산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도착한 덕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가 다시 들고 있던 종이를 확인했다.

‘분명 여기인데?’

덕출이 고개를 들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쳐다보았다.

웅장한 건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거대한 악귀상들이 우뚝 서 있는 그곳은 천마신교 본단이었다. 자신도 여긴 처음 와봤다. 그가 종이에 적힌 주소를 다시 확인했지만 역시 이곳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어떤 미친놈이 돈을 빌린 후에 주소를 이곳으로 적는단 말인가?

‘아! 아니지. 설마 마교 본단에서 일하는 자인가?’

그렇다면 가서 여기 적힌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정문에 가서 ‘여기 검우진이란 사람이 살고 있소?’라고 물어봐? 그랬다가 ‘여기 사는 사람이 몇인데 그딴 것을 묻느냐?’라며 단칼에 목을 자르면?

‘아, 어떻게 하지? 첫 정식 임무인데!’

그렇게 덕출이 머리를 싸맨 채 거대한 천마신교의 담벼락 아래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인상 좋은 사람이면 저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하지만 그가 영원히 물어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막 본단으로 돌아온 권마와 이안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몸집이 다가올수록 덕출은 상대 남자가 어디서 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저 덩치를 어디서 봤더라? 하는 순간 행상이 팔던 인형이 떠올랐다. 주먹이 머리통만 한 그 인형이.

‘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은 걸어오면서 계속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두 사람이 부녀지간이라고? 그럴 리가! 아! 납치된 거구나. 빌어먹을 마인 같으니.

“그냥 불러봤어요.”

“싱겁긴.”

“아버지!”

“장난 그만!”

저 무서운 사람이 진짜 좋아서 부르는 것은 아닐 테니. 혹시 내게 구조 요청을 하는 걸까?

죄송합니다, 소저! 권마에게서 그대를 구할 사람은 이 무림 전체에서도 몇 사람 없을 겁니다!

여인을 한 번 더 보려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권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이지 이렇게 무서운 얼굴을 태어나 처음이었다. 오금이 저리고 온몸의 털이 일제히 곤두섰다.

행상이 팔던 그 무서웠던 인형은 실제 권마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 인형보다 실물이 훨씬 더 무서웠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인형은 혈천도마와 마불 인형.

‘권마 인형을 샀어야 했어!’

그러는 사이 덕출 앞으로 두 사람이 지나갔다.

덕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던 그때, 이번에는 거대한 칼을 든 노인이 그를 향해 걸어왔다.

덕출이 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자신의 손에 들린 인형을 쳐다보았다. 똑같았다.

‘혈천도마?’

덕출은 정말이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혈천도마가 꼬장꼬장한 눈빛으로 덕출을 쳐다보더니 불쑥 말했다.

“거기서 뭐 하나?”

혈천도마의 물음에 덕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설마 혈천도마가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덕출이 들고 있던 혈천도마 인형을 앞으로 들어 보였다.

‘살려주십시오! 저 인형도 샀어요.’

그때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술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소.”

돌아보니 높은 담장 위에 한 남자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덕출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 아니라 담장 위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을.

지붕 위 남자는 취마였다.

“두 분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에 달려 나왔는데, 보고 싶은 사람은 오질 않았군요.”

혈천도마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알지 않나? 온갖 세상일에 다 끼어드는 녀석인 것을.”

그러자 취마가 저 멀리 혈천도마가 걸어온 곳을 쳐다보았다.

“알죠, 그래서 더 그리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고 싶으면 술 그만 마시고 찾으러 가보든지.”

예전 같으면 주정뱅이 짓 그만하라고 말했을 텐데, 일화검존과 셋이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취마에게 많이 너그러워진 혈천도마였다.

혈천도마는 천마신교 정문을 향해 걸어갔고 취마는 다시 술을 마셨다.

덕출은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몰랐다. 달리고 또 달려서 마가촌에 있는 아무 주점이나 뛰어 들어갔다.

“술 좀 주시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시켰다. 목이 마르고 다리가 떨리고. 그렇다고 그냥 갈 수도 없었다. 첫 정식 임무를 확인도 못 하고 돌아가면, 수습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술을 가져온 사람은 조춘배였다. 그가 달려 들어온 주점은 풍류주점이었다.

그가 술을 내주며 나직이 말했다.

“상황이 급하신 것 같아 받았지만, 지금 귀한 손님이 와 계셔서 조용히 술을 드셔야 하오.”

덕출이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손님이고 나발이고, 일단 자신부터 살고 봐야지. 정말 가슴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

조춘배가 돌아서 가려는데 덕출이 물었다.

“주인장, 이 근처에 검우진이란 사람 어디에 사는지 아시오?”

순간 주점에 정적이 흘렀다.

모두의 시선이 덕출을 향했다가 다시 주점 이 층으로 향했다. 그곳에 한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위의 반응에 덕출이 재빨리 물었다.

“저 사람이오?”

조춘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긴 하지만…… 손님이 찾는 분은 아닐 거요.”

“다들 아니라고 하지요.”

수습 기간에 맨날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 내 자식 아니다. 연락 끊어진 지 오래됐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말릴 사이도 없이 덕출이 이 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여기서 검우진을 만나다니.

‘정식 조사관이 되라는 하늘의 뜻이다!’

덕출은 이 층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검우진에게 종이를 내밀며 물었다.

“이 주소에 사시는 분 맞으시오?”

20 절대회귀-294화 20

제294회 왜 내 인형은 안 샀나?

검우진이 고개를 들어 덕출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내 집이 맞네.”

“아, 제가 잘 찾아왔군요.”

덕출이 웃으며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일반인 최초로 천마와 독대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이 순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지 못했다.

“아드님이 검무극 맞죠?”

이제부터 덕출의 임무는 이것이었다. 좋은 말로 어르고 구슬려서 내가 그 아이 부모라고 확인받고 보증을 서겠다는 서명을 받아야 한다.

“아드님이 돈을 빌렸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보증을 서주셔야겠습니다.”

순간 주점 내에는 침묵이 흘렀다. 조춘배도, 일 층의 손님들도, 주위에 은신한 호위들도 이 놀라운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검우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래층에 있던 조춘배는 깜짝 놀랐다. 교주가 웃는 모습을 오늘 처음 봤다.

은신해 있던 수신호위 휘조차 천마가 이렇게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검우진이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를 남긴 채 말했다.

“난 애비를 빚보증 세우는 자식을 둔 적 없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덕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슬그머니 검우진 옆으로 가서 앉았다.

지켜보던 조춘배가 놀라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손님들도 이후에 벌어질 일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제발 떨어진 목이 일 층으로 굴러오지 않기를!

모두가 다 알았지만 정작 본인만은 몰랐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순간인지를.

덕출은 검우진에게 술을 따라주며 위로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한데 어쩌겠습니까? 원수 같은 놈이지만, 그래도 대신 갚아줘야지요.”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검우진의 어깨를 토닥이진 않았다는 점이다.

몸에는 손대면 안 돼!

조춘배는 간절히 바랐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아드님이 돈을 못 갚으면 아버님께 사람들이 찾아올 겁니다. 돈 회수하는 사람들 무서운 사람들이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검우진은 태어나 처음 겪는 이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네.”

“그럼 이것부터 한 번 읽어보시지요. 천천히 읽어보시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서류를 검우진 앞에 내려놓은 후, 잠시 읽어볼 시간을 주겠다는 듯 덕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의 눈에 벽면에 적힌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존들이 글귀와 서명을 남겨둔 벽이었다.

“유명한 분들이 많이 다녀갔네요.”

독왕 다녀가다, 에서부터 마불이 남긴 황금대라마공의 흔적에, 그 옆에 혈천도마의 글귀도 남아 있었다.

혈천, 제자와 한잔하고 가다.

“오오오! 혈천도마도 남겼네요!”

그가 허리에 찬 혈천도마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직접 얼굴도 보고, 인형까지 샀기에 정말 아는 사람이 글을 남겨둔 것 같은 친밀감이 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하나의 서명이 눈에 띄었다. 이곳의 그 어떤 글보다 힘 있는 필체.

천마, 검우진.

덕출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오오! 여기 마교주도 다녀갔어요. 우아아아! 이거 보셨어요?”

덕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 층에 있던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주목받은 적이 언제였던가? 덕출은 괜히 떨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 숙수가 솜씨가 좋나 봅니다.”

아래쪽에 큰 소리로 말한 후, 검우진에게만 들리게 덧붙였다.

“하긴. 원래 맛집은 이런 허름한 집들이죠?”

그리고는 다시 일층의 조춘배를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마교주가 방문한 집이라니! 이 주점 이름을 천마가 다녀간 주점이라고 바꿔도 되겠어요. 저라면 당장 바꿉니다!”

조춘배는 제발 그만! 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다 덕출이 흠칫 놀라 글이 적혀 있는 벽을 돌아보았다.

“어? 그러고 보니 마교주 이름도 검우진이네요.”

덕출이 검우진을 한 번 쳐다보고, 또 벽을 쳐다보았다.

조춘배는 물론이고 일 층에 있던 사람들이 기대했다.

드디어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는구나! 어서 잘못했다고 빌어!

덕출이 검우진을 응시하는가 싶더니.

“마교주와 이름이 같아서 불편하시겠어요.”

일 층에서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소리 없는 탄식.

덕출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천마일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자, 이제 서명해 주십시오. 어차피 하셔야 해요. 어디 자식 이기는 부모 있습니까?”

“그런 아들 없다.”

“안 해주시면 아드님이 무서운 사람들에게 끌려간다니까요.”

“그러려면 벽에 적힌 저 사람들보다 더 무서워야 할 거야.”

물론, 덕출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다 저기 있는데, 더 무서운 사람은 죽어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해합니다. 맞죠. 자식 놈들 키워봤자 다 제가 혼자 큰 줄 알죠. 자자, 이 붓 잡으시고.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저도 자식 낳아서 똑같이 당해봐야 아, 우리 부모님 심정이 이러셨겠구나, 하는 거죠. 고민하지 마시고, 자 이름 석 자만 쓰십시오.”

그러자 검우진이 못이기는 척 서류에 서명해주었다.

“잘하셨습니다, 이게 다 아드님을 위한 길이지요.”

서류를 내려다보던 덕출이 또 흠칫 놀랐다.

조춘배와 일 층의 손님들이 다시 기대했다.

그래, 벽의 글씨와 비교를 해봐! 고개를 돌려! 제발!

모두의 염원이 통한 것일까? 덕출이 서서히 돌아보더니 벽을 쳐다보았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천마의 존재를 알아내는가 싶었는데.

“이름만 똑같은 게 아니라 필체도 똑같아요! 이야, 신기하네요!”

조춘배의 입에서 ‘어이구’란 말이 절로 나왔다. 옆자리 손님은 손에 힘이 빠져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그 옆자리 손님은 머리를 싸매며 탄식하다 술을 쏟았다.

“설마, 얼굴까지 닮은 것은 아니겠지요?”

덕출의 머릿속에 천마를 이런 곳에서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없었다.

“조심하세요. 이러다 천마 사칭했다고 오해받기 쉽겠네요.”

바로 그때 누군가 주점으로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일 층에 있던 모두가 숨을 멈췄다.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이 층으로 올라왔다.

무심코 그쪽을 본 덕출은 상대를 보며 반갑게 꾸벅 인사했다.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했다가 화들짝 놀라며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알긴 아는 사람이었다. 올라온 사람은 바로 권마였으니까.

권마는 앞서 본단 담벼락 아래에서 덕출을 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권마의 눈빛이 딱 이랬다.

너 뭔데 자꾸 내 눈에 띄지?

지켜보던 조춘배와 손님들은 다시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제 위험이 두 배가 된 것이다.

권마가 검우진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이곳에 계신다고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방금 복귀했습니다.”

“잘 다녀왔는가?”

“네, 교주님.”

교주란 말에 덕출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그분은 교주님이 아니라 닮으신 분이세요!”

다시 일 층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검우진은 웃었고, 권마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주위의 반응에 눈을 껌벅이던 덕출의 표정이 점점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권마가 교주도 못 알아보고 닮은 사람에게 찾아와서 교주라고 부를 리 없지 않나?

닮은 사람 반응도 그렇다. 잘 다녀왔는가?

왜 그런 말을 하지? 왜기는? 닮은 사람이 아니라 진짜니까 그렇지.

덕출의 사고가 거기까지 진행되었을 때, 이미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권마가 검우진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굽니까?”

“아들 빚보증을 서야 한다고 찾아왔네.”

권마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덕출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가 넙죽 엎드렸다. 상대가 진짜 천마였음이 밝혀진 이 순간, 그는 하루에 마존을 넷이나 보고 천마까지 보는 신기록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검우진이 불쑥 물었다.

“왜 내 인형은 안 샀나?”

교주 인형은 원래 없으니 왜 천마혼 인형을 안 샀냐는 질문이었다. 그야말로 오늘 덕출이 겪은 수난 중에서 가장 큰 수난이었다. 조춘배와 일 층 손님들이 다시 긴장했다.

거기에 권마까지 끼어들었다.

“내 인형은?”

덕출은 자신의 허리에 꽂힌 혈천도마와 마불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이 커다란 도와 황금빛 광채는 눈에 너무 잘 띄었다.

‘아! 결론적으로 오늘 천마혼 인형과 권마 인형을 샀어야 했구나!’

한순간의 선택으로 죽게 되는 건가? 염소수염,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덕출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가 풀죽은 어조로 말했다.

“두 분 인형은 너무 무서워서 못 샀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한 그의 선택은 훌륭했다. 검우진이 웃었고, 권마도 따라 웃었다. 오랜만에 천마를 실컷 웃게 한 보상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검우진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날렸다. 천천히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간 그것이 덕출의 손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것은 천 냥짜리 전표였다.

“가면서 내 인형도 하나 사고 이 친구 인형도 하나 사게.”

너무 놀란 덕출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일 층에서도 소리 없는 놀람이 퍼져나갔다.

“싫나?”

“네? 아닙니다! 사겠습니다! 당장 사겠습니다.”

오늘 온종일 착각 속에서 헤맸던 덕출은 이 마지막 순간만큼은 상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당장 이 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서 착하게 살겠습니다! 내려주신 돈으로 땅 사서 농사지으면서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살겠습니다.”

정답을 말한 덕출은 하늘을 날았다. 마음이 날아간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정말 날았다.

검우진이 손을 한 번 내젓자 덕출이 붕 날아서 일 층으로 가볍게 내려선 것이다.

일 층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늘 내내 안타까운 탄식만을 받았던 그였는데, 마지막에는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조춘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서명도 받아야겠소.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서요.”

“나를 손님으로 받아주셔서 정말 고맙소. 언젠가 꼭 다시 찾아오겠소!”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덕출이 이 층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한 후에 그곳을 떠났다.

내가 소싯적에 통전소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 그때 첫 임무를 갔는데 말이야…… 아무도 믿지 못할 하루를 보낸 그였다.

조춘배도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덕출이 여러 번 무례를 저질렀지만, 교주는 자비를 베풀어주었다. 나아가 그에게 새로운 삶까지 열어주었다. 조춘배는 교주에게 진심 어린 존경심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천마가 큰소리로 웃은 것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조춘배가 계산대 뒤쪽 벽에다 오늘 날짜를 적은 후 글을 남겼다.

교주님께서 크게 웃으신 날.

평생 술장사하면서 오늘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었다.

이 층에서는 천마신교에서 가장 남자다운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검우진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권마였기에, 대화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내 평생 빚쟁이 신세가 될 일이 있겠나?”

“무극이와 있다 보면 상상도 못 했던 일을 겪게 되지요. 가령 생각지도 못한 수양딸이 생긴다거나요.”

권마는 가장 먼저 천마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무극이의 호위였던 이안을 제 수양딸로 삼기로 했습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검우진이었는데, 이 소식만큼은 놀랐다.

검우진이 권마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축하하네.”

권마가 받은 술을 시원하게 비웠다.

이번에는 권마가 검우진의 잔을 채워주었다.

“제자도 얻고, 딸도 얻고. 제가 느지막이 복이 많습니다.”

“아들보단 딸이 좋아. 아들놈 키워 봤자…….”

검우진의 시선이 저 멀리 창밖을 향했다.

그래도 오늘은 아비 빚보증이나 세우려는 아들이 조금은…… 보고 싶었다.

* * *

검무극은 객방에 틀어박혀서 오직 시천비술 수련에만 몰두했다.

이제 모든 수련은 무조건 시천비술 속에서 했다. 당연히 더 많은 시간을 수련할 수 있었다. 얻어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수록 수련을 더 많이 할 수 있었고, 다시 얻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수련하고 있는데 돈을 빌려준 통전소의 주양이 찾아왔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온갖 미친놈들을 많이 봤지만, 마교주 이름을 아버지로 적은 사람은 처음 봤소.”

덕출은 통전소를 떠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조사의 결과를 마교주 이름을 쓴 미친놈이라고 보고했다. 당연히 천마 아들이 염왕채를 썼을 리는 없었으니까.

“마교주를 만나보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사칭이라 하는 거요?”

“당신은 그 점을 노렸겠지만 우린 만났소.”

“우리 아버지를?”

“허름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던데?”

이번에는 검무극이 소리 내서 웃었다. 풍류주점에서 검우진이 웃었던 웃음과 똑 닮은 웃음이었다.

“왜 웃소?”

“아버지 생각이 나서 웃었소.”

풍류주점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계셨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진 아버지의 등을 떠올리자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당신 정말 마교에 끌려가서 피부가 벗겨진 채 소금통에 던져져 봐야 정신을 차릴 거요?”

“날 마교로 데려갈 용기는 있소?”

주양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당신은 우릴 한낱 염왕채나 굴리는 파락호로 여기는군.”

“그럼 아니오?”

주양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지어졌다.

‘요즘 무료했는데, 이런 재미난 놈이 등장하는군.’

요놈을 어떻게 조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지만, 주양은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중하게 지옥으로 안내하는 재미가 최고였으니까.

“난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래서 밝혔고, 주소를 적으래서 적었을 뿐인데.”

끝까지 우기는 모습에도 주양은 화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벌하는 것은 차용증에 적힌 문구가 될 테니까.

“젊은 치기에 그럴 수 있소. 이해하오. 주소를 엉터리로 하는 경우 많으니까. 대신에 이제부터는 백 냥이오.”

“백 냥? 나는 열 냥 빌리지 않았소?”

주용이 품에서 차용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여기 보시오. 차용증 아래에 적혀 있지 않소? 만약 주소나 가족관계를 엉터리로 적을 시에는 빌린 돈의 열 배를 갚아야 한다.”

“너무 작은 글씨라 보이지도 않소. 말도 너무 어렵게 써뒀고.”

“차용증에 제대로 된 정보를 적는 건 기본 아니겠소? 암튼 당신이 빌린 돈은 이제부터 백 냥이오. 당연히 이자도 백 냥을 빌린 것으로 계산될 거요.”

“왜 자꾸 거짓으로 적었다는 거요. 난 분명히 적었다니까.”

주양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진짜 마인을 데려오면 어쩌려고 자꾸 그러시오?”

분명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치였다.

그냥 물어선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올 테니. 검무극은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염왕채나 놓는 주제에 마인은 무슨.”

16 절대회귀-295화 16

제295회 내 이자 감당할 수 있겠소?

그 말은 주양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염왕채나 놓는 주제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얕잡아 볼 때 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은 다 그렇게 말해도 단 한 사람만은 그 말을 하면 안 된다. 염왕채를 빌리러 온 당사자 말이다.

“마인 있으면 불러와 보라니까?”

검무극은 한 번 더 그를 도발했다.

이 순간, 검무극은 주양의 감정을 읽었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드러난 감정은 이것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그냥!

분명 마교 쪽에 믿는 구석이 있다. 강서지단주인가? 아니면 다른 마인인가? 말해! 네가 믿는 자가 누구인가?

하지만 오랫동안 온갖 채무자들을 상대해온 주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괴롭히는 것에 있어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마교 소교주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허풍이나 내뱉는 놈을 칼잡이들 데려와서 패봤자 뭐하겠는가? 이런 뺀질거리는 놈들을 지옥에 빠뜨리는 건 폭력이나 협박이 아니다. 돈을 갚기 위해 평생 일해야 하는, 일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을 선사하는 것이다.

“마교주를 아버지로 두셨으니, 이런 배짱도 부릴 수 있겠지요.”

비꼬는 말이었는데 검무극은 순수하게 받았다.

“우리 아버지 찾아간 당신들 배짱이 더 대단해.”

“정말 마교주 아들이라고 끝까지 주장하시겠다?”

“맞소. 내가 마교 소교주요. 난 분명히 말했으니 나중에 엉뚱 소리 마시오. 그걸 어찌 믿었겠느냐, 너라면 믿었겠느냐. 내 분명히 말하겠소. 나라면 믿었을 거요.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물론, 주양은 믿지 않았다. 이미 그쪽 조사관의 기별을 받고 오늘 방문한 것이었으니까. 이놈은 마교주를 아버지라 사칭한 역대급으로 뻔뻔한 놈이었다.

“좋소, 우리 소교주님.”

“이제야 믿는구려.”

“내일부터 매일 이자를 받을 사람을 보내겠소.”

“매일? 원래 한 달에 한 번 받는 것 아니었소?”

“규칙이 바뀌었소.”

내일부터 이 얄미운 놈의 인생살이는 뻔뻔함에서 팍팍함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게 함부로 바꿔도 되는 거요?”

“차용증에 보면 적혀 있소. 이자를 받는 방식은 우리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차용증에 눈곱만하게 적힌 구절을 확인한 검무극이 고개를 내저었다.

“개미한테 돈 빌려줬소? 정말 너무하는군.”

“우린 정해진 법대로 하는 거요. 그러게 잘 읽어보고 서명을 했어야지.”

독소 조항들은 정말 기가 막히게 숨겨두었다. 이자들은 이런 식으로 돈 없는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은 거다.

“명색이 소교주님이신데 이 정도 돈이야 마음먹으면 금방 갚지 않겠소?”

“정말 내 이자 감당할 수 있겠소?”

그러자 주양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되물었다.

“돈 싫다는 사람 봤소?”

* * *

다음 날 검무극이 객잔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사납게 생긴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대뜸 손을 내밀었다.

“이자 받으러 왔다.”

고개를 들고 보니 일전에 편중에게 돈을 받아 갔던 바로 그자였다.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편중을 때리고, 아이 목에 비수까지 겨눴다던 바로 그놈.

주위에서 밥을 먹고 있던 손님 중 몇 사람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용히 계산하고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이것만 봐도 이놈이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별명이 미친개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 거다. 내가 멀리서 걸어오면 미리 이자 꺼내둔다. 알았나?”

사람 괴롭힐 줄 알고, 사람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이 미친개는 주양이 선사한 고난이었다.

검무극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근데 당신, 상대가 이렇게 검을 찬 무인인데 안 무섭소?”

미친개는 칼을 차고는 있었지만, 내공을 가진 무인은 아니었다.

“왜? 꼴에 무인이라고 그 검 뽑아서 날 죽이게? 죽여 봐! 그럼 너도 네 가족도 그날로 끝장이야. 우리 조직이 널 살려둘 것 같아? 우린 가족부터 갈기갈기 찢고 시작해.”

겁을 주려는 의도가 무색하게도 검무극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도 못 하겠네.”

미친개가 잔뜩 인상을 굳혔다. 그러자 그의 얼굴은 정말 사나운 개처럼 보였다.

“마교 소교주라는 망상에 빠진 놈이라더니, 정말인가 보군.”

미친개가 검무극이 먹고 있던 음식 그릇을 바닥에 던져서 깨뜨렸다. 그곳에는 당장 싸움이 벌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흘렀다.

지켜보던 객잔의 주인장과 점소이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아무리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도 통전소에 한 번 엮이면 두 번 다시 원래 인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미친개가 담당이라니? 마을 사람 중 저 미친개에게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놈은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소교주님.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 소교주 밥그릇을 깨뜨렸으니 벌을 받아야지. 이제 신호를 보내면 저기 밖에서 마존들이 딱 등장할 거다.”

마존이란 말에 미친개는 물론이고 객잔에 있던 이들도 모두 흠칫 놀랐다. 마존이란 말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심이 있었다.

“거기 아니고, 저길 봐.”

검무극이 향하는 곳으로 미친개도 시선을 함께했다. 객잔 손님들도 함께 그쪽을 쳐다보았다.

“하나, 둘…….”

검무극이 숫자를 세며 신호를 보내려 했다. 그러자 미친개는 순간 긴장했다. 설마 정말 나타나지는 않겠지?

누군가 나타날 것만 같았던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셋!”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그걸 믿냐? 고귀한 마존들이 너희 같은 놈들 상대하러 오겠어?”

긴장이 풀린 미친개는 어이가 없었다. 순간이나마 긴장했다는 사실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가 욕설을 퍼부으려던 그때, 검무극이 품에서 돈을 꺼냈다.

“자, 이자 여기 있습니다!”

공손한 태도에 미친개는 버럭 화를 내려던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상대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 너 내게 찍혔다.

“진작 그럴 것이지. 어린 놈의 새끼가 돈 무서운 줄 모르고 말이야.”

검무극이 동전을 그의 손바닥 위로 떨어뜨렸다.

동전이 가볍게 떨어지는가 싶었는데.

후아아아앙.

꽝!

동전이 손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너무 무거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동전은 그의 손을 짓누르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으아아아!”

그 충격에 미친개의 손뼈가 박살 나며 으스러졌다.

그가 다른 손으로 동전을 들어서 치우려고 힘을 썼지만, 동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파, 아파! 누가 이거 좀 치워줘! 아아아악!”

손이 너무 아팠다.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져서 이러다가 정말 손바닥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아직 이자 남았다. 다른 손 내놔.”

미친개가 엎드린 채 검무극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동전이 이렇게 무거울 리 없으니 검무극이 어떤 수를 썼다는 것을.

미친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주세요.”

방금까지 사납기 그지없던 개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강아지가 되었다.

“안 돼! 이자 안 주면 우리 아버지 찾아간댔어. 받아.”

미친개가 달아나려 했지만, 동전을 들고 있는 손 때문에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다른 손을 앞으로 강제로 내밀게 했다.

“으으으! 살려주십시오!”

“뭔 소리냐? 이자 받아 가라는데.”

다른 손에 동전을 가볍게 올렸다.

후아아아앙!

꽝!

이번에도 동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손은 바닥에 처박혔다. 미친개의 입에서 더 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미친개는 두 손바닥을 땅바닥에 붙인 채 절을 하듯 납작 엎드린 몰골이 되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스쳤다. 정말이지 행패를 부려도 너무 부렸던 놈이었다.

“으으으윽. 너무 아파.”

검무극은 그의 비명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 돈 무서운 줄 알아야지.”

* * *

소식을 전해 들은 주양이 칼잡이들을 데리고 객잔으로 달려왔다.

고분고분 돈을 주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첫 이자부터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동전 두 개 받으러 이렇게 몰려오면, 당신들 적자 아니오?”

검무극의 말을 못 들은 척 주양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미친개부터 발로 툭툭 걷어차서 깨웠다.

“너 뭐해?”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손바닥 위의 동전은 가벼워져 있었다.

“으으으. 손이 너무 아픕니다.”

주양이 미친개의 손을 살폈다. 양쪽 손뼈는 으스러져서 이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제 손부터 치료해 주십시오.”

“틀렸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한다.”

그러자 미친개가 괴성을 내질렀다.

주양이 사정없이 미친개의 뺨을 때렸다.

“정신 차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돌로 찍힌 거냐? 아니면 발로 짓밟힌 거냐?”

“그게 동전이 너무 무거워서 들 수가 없었습니다.”

“뭐라는 거야? 꿈꿨어?”

그냥 두들겨 맞았다면 모를까, 동전이 무거워졌다는 말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주양이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요?”

“수작이라니? 이자 받으러 왔기에 줬을 뿐인데. 그랬더니 혼자서 바닥을 뒹굴면서 아프다고 생난리를 부렸소.”

거기에 검무극은 한술 더 떴다.

“당신들, 공갈 협박도 하시오? 이런 짓으로 돈 뜯어내려고? 이번에는 백 냥에서 얼마로 올리시게?”

주양은 침착하게 객잔 주인장과 점소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그러자 검무극이 했던 말 그대로 했다.

“동전을 주니까 바닥을 뒹굴면서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한두 명이 본 것이 아니었다.

주양은 검무극이 뭔가 동전으로 수작을 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동전이 무거워져서 꼼짝도 못 하게 만든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었으니까.

“당신,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요?”

주양이 목소리를 깔자 검무극도 그를 흉내 냈다.

“그러는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아시오?”

하지만 이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 참 알지? 마교 소교주라는 것.”

주양이 인상을 굳혔다. 망상에 빠진 미친놈이라 여겼는데.

‘뭔가 한 수가 있는 놈이다, 이거지?’

칼잡이들이 미친개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검무극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이자 가져가야지.”

검무극은 미친개가 흘린 동전 두 개를 다시 내밀었다.

주양은 들은 것이 있기에 감히 손을 내밀지 못했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이자잖아? 안 받을 거요?”

주위에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통전소의 위신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특히 통전소의 수장은 빚진 놈에게 우습게 보이면 이 사업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이였다. 불벼락이 자신에게 떨어질 것은 자명한 일.

주양이 옆에 있던 칼잡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지목당한 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자, 여기 이자 나가십니다!”

검무극이 동전을 떨어뜨리던 바로 그 순간.

후아아아앙!

꽝!

그의 손도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 역시 동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진 고통에 칼잡이는 비명을 내질렀다. 다른 칼잡이가 달려들어서 동전을 들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동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직접 보자 주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어나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단순한 수작이 아니었다.

‘고수였구나!’

칼잡이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서 반사적으로 뽑아 든 것이다.

주양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상대가 저런 고수인데, 통전소 칼잡이들 따위가 그를 당해낼 리가 없다.

검무극이 남은 동전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자 받으러 왔으면 돈을 받아야지, 왜 검을 뽑는 거요?”

주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우리에게 접근한 목적이 뭐요?”

이런 고수가 열 냥이 없어 자신들에게 돈을 빌렸을 리가 없다.

“목적이라니? 난 그저 돈이 필요해서 빌렸을 뿐이잖소? 돈을 백 냥으로 늘린 것도 당신이고, 또 이자를 매일 받겠다고 한 것도 당신이잖소? 당신이 규칙을 바꾸지 않았으면 오늘 만날 일도 없었겠지.”

주양은 반박할 수 없었다. 분명 이 상황을 만든 것은 자신이었다.

“자, 여기 이자 받아 가시오.”

검무극이 남은 동전을 내밀었다.

앞서 동전을 받았던 칼잡이는 바닥에 손을 붙인 채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기에, 감히 누구도 나서서 그 돈을 받지 못했다.

주양이 칼잡이들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 그의 눈길을 피했다.

주양은 결국 쓰러져 비명을 지르고 있는 칼잡이에게 떠넘겼다.

“저 사람이 받기로 했으니 저 사람에게 주시오.”

“그럽시다.”

검무극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으아아악! 제발! 안 돼!”

동전이 떨어졌고 반대쪽 손도 으스러졌다. 비명을 질러대던 그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 망설임 없고 무자비한 모습에 모두 겁을 먹었다.

“칼 차고 다니면서 돈이나 뜯어내는 너희가 어찌 알겠나? 일해서 버는 돈이 이렇게 무겁다.”

주양은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검무극은 그의 손바닥에 있던 동전을 들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 없다더니, 왜들 돈을 안 받으려는 거냐?”

검무극은 다시 주양 앞에 동전을 내밀었다.

“이자 받아 가야지.”

검무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껏 온갖 놈들을 다 상대했었는데, 이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손 내밀어라.”

검무극은 지금까지의 태도와 완전히 달라졌다.

주양은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거부하면 죽을 거란 공포심이 그를 지배했다.

앞으로 내민 주양의 손이 덜덜 떨렸다.

동전이 주양의 손에 떨어졌다. 주양은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무겁지 않았다.

눈을 뜬 주양이 다급히 말했다.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도 받지 않겠소. 다 갚은 것으로 칩시다.”

서둘러 돌아서는 그의 뒤에서 검무극이 차갑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주양이 돌아섰을 때, 검무극은 탁자 위에 동전 두 개를 새로 올렸다.

“내일도 이자 받으러 와. 안 오면 내가 찾아간다.”

10 절대회귀-296화 10

제296회 대체 누구에게 돈을 빌려준 거냐?

통전소로 돌아가던 주양이 발걸음을 멈췄다.

심장은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계속 뛰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검무극의 눈빛이 떠올랐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동전이 자신의 손바닥을 뚫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함께 돌아가던 칼잡이 중 하나가 물었다.

“안 가십니까?”

“먼저 가. 오늘 일 절대 함구하고.”

“네!”

주양은 칼잡이들을 먼저 보내고 길가에 잠시 앉았다.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기에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겁도 났다.

통전소 일은 자신의 천직이었다.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돈을 빌리는 모습에서 절대고수가 된 쾌감을 느꼈다. 그들을 좋은 말로 꼬드길 때면 정말 이보다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이자 몇 푼 못 내서 울고 불며 사정하는 꼴은 또 어떤가? 남의 불행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인생을 조종하고 좌지우지하는 이 일은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한데 처음으로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삶이 흔들리는 위기감을 느꼈다. 손이 뚫리는 두려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일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

통전소 수장인 적패(赤狽)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적패가 알게 되면… 주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적패는 손해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지우는 사람이었다.

검무극에게는 손이 뚫리겠지만, 적패에게는 목이 뚫릴 거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걸음을 빨리했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저 바쁜 걸음에서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며 살아온 악행에 드디어 벌이 내려진 것일까?

하지만 주양은 이런 반성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이자를 해치워야 한다.’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을 떠올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오늘따라 더 신경질적인 눈빛을 날리면서 말이다.

* * *

다음 날 주양은 돈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안 오면 찾아간다고 했거늘.”

검무극은 곧장 통전소로 찾아갔다. 오늘은 주양이 있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나와서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주양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몸이 아파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검무극은 연무장으로 나와서 소리쳤다.

“주양! 이자 주러 왔으니 어서 나오시오! 주양! 주 선생! 주 대협!”

그 소동에 통전소 칼잡이들이 구경하러 나왔다. 이자를 주러 왔다고? 만날 도망 다니기 급급한 빚쟁이가?

통전소가 생기고 이런 소동은 없었기에 다들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주양! 어서 나오시오!”

소식을 들은 주양이 허겁지겁 건물에서 나왔다.

“당신!”

차갑게 대했던 어제와는 달리 검무극은 반갑게 그를 보며 웃었다.

“아프다더니 멀쩡하시네.”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이시오?”

“안 오면 찾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서 소동을 부릴 줄은 몰랐다. 여기 누가 있을 줄 알고. 그 큰돈을 다루는 곳인데, 널 죽일 고수 하나 없을까.

그래서 주양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얼마나 고수고, 무슨 의도고. 이런 것을 다 떠나서.

‘이놈은 미친놈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자 받으시오.”

그렇지 않다면 이럴 수가 없다.

지켜보던 칼잡이들이 웅성거렸다. 어제 객잔에 있던 자들은 긴장한 채 한발 물러서 있었고, 다른 이들은 킬킬대며 재미난 구경에 신나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자인가?”

묵직한 목소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한 손으로 질질 끌고 나오고 있었다.

그가 등장하자 칼잡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는 이곳 통전소의 진짜 칼잡이라 할 수 있는 잔학(棧鶴)이었다.

잔학은 무인들과 문제가 생기면 나서는 인물로, 어제 주양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만나러 갔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 한 가지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모두 그의 이름이 잔학무도(殘虐無道)를 줄인 말이라 농담했다. 실제로 그런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그만큼 잔학은 잔혹한 인물이었다. 통전소의 악행을 고발하고 대항한 사람은 모두 잔학에게 죽었으니까.

“네, 저자입니다.”

주양의 대답에 잔학은 끌고 나온 사람을 앞으로 내던졌다.

남자가 무기력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검무극이 다가가 그를 살폈다. 온몸이 만신창이인 그가 간신히 눈을 떴다.

“……죽여주시오.”

그의 첫마디였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저 말을 첫마디로 할까.

반면 남자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 잔학은 여유로웠다.

“처음에 저놈도 너처럼 기세등등했다. 저 담을 붕 날듯 넘어와서 마당 가운데로 떨어져 내렸지. 정말 영웅 납셨네였지.”

그러자 지켜보던 칼잡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 서서 저놈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더군. 정의가 어떻고, 협의가 어떻고. 우릴 돈벌레, 쓰레기로 취급하더라고. 누가 쓰레기인지도 모르고.”

그때 남자가 쓰레기라는 말에 반응했다.

“……제가 쓰레기입니다, 제가 쓰레기입니다.”

잔학이 강제로 주입한 말이었다. 남자는 모진 고문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검무극이 그의 몸을 살폈다.

단전은 깨어졌고 사지근맥이 다 끊어져서 평생 누워서 보내야 했다. 마의가 와도 회복할 수 없는 몸, 놈은 인간이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검무극이 그를 살피고 있을 때, 잔학이 소리 없이 다가섰다. 어제 주양에게 상대가 동전으로 해낸 일을 이미 들었다.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상당한 고수라는 뜻.

일단 기습으로 제압해서, 당분간 저놈을 대신 가지고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다 죽어가는 쓰레기에게 신경을 쓰느라 무방비 상태일 때 말이다.

‘병신이! 그깟 정이 뭐고, 도의가 뭐라고. 내가 그 정신머리 싹 고쳐주마!’

잔학이 몸을 날려 일장을 내리치려던 바로 그 순간.

피이잉!

퍽.

한 줄기 바람 소리와 뭔가가 꿰뚫리는 소리에 이어.

꽝!

뒤쪽 건물 벽에 무엇인가 박혔다.

쩌어어어어억.

날아든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박힌 것 주위엔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박힌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주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벽에 박혀 있는 것은 동전이었다.

동전에서 흘러내린 피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피? 왜 피가? 설마?’

주양은 반사적으로 잔학을 쳐다보았다.

잔학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이마가 간지러운지 만지고 있었다. 뭐라 말을 하려는 것 같았는데, 중얼중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곧이어 그의 몸이 서서히 쓰러졌다.

쿵!

이미 절명한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동전이 잔학의 이마를 뚫고 뒤통수를 관통한 후 벽에 날아와 박혔던 것이다.

그의 죽음에 모두 경악했다.

지금까지 잔학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가? 그가 얼마나 많은 무인을 죽이고 희롱해 왔는지.

한데 검 한 번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동전에 이마가 꿰뚫려 죽는다고? 저 청년과 짜고 연기를 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잔학의 죽음에 고문을 당했던 남자는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언젠가 탈출하면 놈을 죽여야지, 그 일념으로 버텼다.

“똑같은 고문으로 갚아주고 싶겠지만 그럴 가치도 없소. 그러면 저놈을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 아니겠소?”

언제나처럼 검무극은 악인의 죽음에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야 끝도 없는 악인을 다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길을 막은 돌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가치를 부여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고 이름조차 몰랐지만, 그가 했던 행동으로 남자를 이해했다.

“아무도 남을 위해 저 담을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천마신교도, 사도맹도, 심지어 정도맹조차도요. 다들 관심이 없거나 손을 잡았거나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 하겠지요.”

검무극이 남자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대는 훌륭한 삶을 살았소. 당신 덕분에 많은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날 거요.”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눈빛으로 죽여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했고, 검무극은 그 부탁을 받아주었다. 그를 위한 존경의 표시였다.

“부디 잘 가시오, 대협.”

검무극이 그의 정수리에 손을 대었다.

그 손길에는 어떤 고통도 없었다. 남자는 편안한 얼굴로 숨을 거뒀다.

그를 그대로 눕힌 후 검무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킬킬대던 자들이 모두 숨을 죽인 채 서 있었다.

폭풍처럼 분노해서 다 쓸어버릴 것만 같았는데, 검무극은 차분했다. 그래서 주양은 더 무서웠다.

검무극이 주양에게 남은 동전을 내밀며 말했다.

“하나 더 남았다. 내가 줄까? 와서 받아 갈래?”

주양은 상대가 주겠다는 말이 벽에 동전이 하나 더 박힌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받겠습니다.”

주양이 달려가서 손을 내밀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현기증이 났다.

모두가 지켜보는 긴장된 상황에서 검무극은 천천히 동전을 올렸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손이 박살 날지도…….

하지만 오늘도 동전은 가볍게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뭐요?”

너 따위에겐 말해줄 일이 아니라는 듯 검무극은 남자의 시체를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이자 받으러 내일은 꼭 와라.”

* * *

주양은 곧장 수장인 적패를 찾아갔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보고가 올라가기 전에 자신이 가서 보고 해야 한다. 먼저 맞는 매를 맞지 않으면, 나중 매는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테니까.

적패는 통전소에 기거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그곳을 안전하다고 여기지 않아서였다.

그는 외진 곳에 요새처럼 지어진 장원에서 살았다. 고수들이 겹겹이 그를 지키고 있었고, 내원 깊은 곳에는 미녀들의 아방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을 확실하게 쓸 줄 아는 인물이었다.

주양은 적패의 거처 앞에서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난 십여 년간 적패 밑에서 일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이기적인 인물이었다. 남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다. 그랬기에 이 사업을 번창시킬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마교 소교주라 주장하는 미친놈이 알고 보니 고수였더라.

이 보고를 하면 적패는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나 자신을 향해 던질 것이다. 만약 사과를 깎아 먹던 중이면 과도가 날아올 것이고, 그림을 그리던 중이면 벼루가 날아올 것이다. 그는 벼루를 던지는 사람이지 붓을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적패는 장부를 보며 주판을 튕기고 있었다. 난폭한 이리처럼 생긴 그인데, 계산할 때만큼은 여우가 된다.

그가 돈 계산할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현명했다.

주판알 굴러가는 소리가 잠깐 멈췄다.

“고수가 개입하면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적패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통전소 일을 하면서 무림 고수가 끼어든 일이 어디 한두 번이든가? 어떻게든 다 해결했고, 위기를 넘겨왔다.

“젊은 놈이 열 냥을 빌렸는데.”

“열 냥?”

적패가 고개를 들어 주양을 이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고작 열 냥짜리 문제로 자신을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그 일로 잔학이 죽었습니다.”

쉬익. 퍼억!

주판이 날아와 주양의 머리통을 강타했다. 하필이면 주판 모서리에 찍혀 이마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애초에 문제가 될 놈들 잘 구별하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염왕채 밥을 그렇게 오래 먹은 놈이 그것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주양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놈인데?”

“마교 소교주라고 주장하는 미친놈입니다.”

퍽!

또 다른 뭔가가 날아와서 주양의 얼굴을 강타했다.

“미친놈이 어떻게 잔학을 죽여?”

주양이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마교 소교주가 죽인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켰다.

“어떻게 책임질래?”

“문책은 달게 받겠습니다.”

“마교 놈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

“조사관이 아니라고 기별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봐도 마인은 아닙니다.”

적패가 꼴 보기 싫다는 듯 주양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그나마 요즘 실수 없이 통전소를 잘 이끌고 있기에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리라.

혼자 남은 적패가 나직이 말했다.

“자네가 직접 알아보고 처리해.”

그러자 벽 뒤에서 네, 하는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적패는 책상 서랍에서 새 주판을 꺼내서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뭐가 이리 안 맞아?”

장부를 쓰다 보면 유난히 계산이 안 맞는 날이 있다. 틀리고 또 틀리고. 그게 오늘이었다.

* * *

다음 날 주양은 적패의 부름에 다시 그의 거처로 달려갔다.

마당 한가운데 심각한 표정으로 적패가 서 있었다.

그 앞에 시체가 한 구 누워 있었다. 그는 바로 어제 적패의 명령을 받고 나간 그의 수족이었다.

주양은 그가 얼마나 고수인지 잘 알았다. 잔학 정도는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적패가 막대한 돈을 들여서 데리고 있는 오른팔과도 같은 수하였다.

그리고 또 알 수 있었다. 그를 누가 죽였는지도.

시체의 이마에 동전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마치 동전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이자도 갚았다.

주양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까지 느꼈던 두려움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주양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원초적 공포를 느꼈다.

주양의 시선은 동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 동전은 뭐냐?”

이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되어 버린 동전 두 개.

“오늘치 이자입니다.”

적패가 주양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대체 누구에게 돈을 빌려준 거냐?”

주양은 적패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예상했다. 그는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책임질 사람을 찾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를 죽이러 사람을 보낸 건 당신이잖아!

하고 싶은 말을 또 삼키며 주양이 말했다.

“제가 가서 놈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오겠습니다.”

“이걸 보고도 모르겠나? 놈이 원하는 건 우리 돈이다. 이런 고수가 우리와 달리 무슨 볼일이 있겠느냐?”

적패는 자신과 적대하는 이들은 자신의 돈을 노리는 자라고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이 단정론은 뜻밖에 잘 맞았다.

“놈이 마인이라고 했다고?”

“마교 소교주라고 허풍을 쳤습니다.”

“아닌 것은 확실하지?”

“절대 아닙니다.”

일이 이쯤 되니까 주양은 조사관 보고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절대’란 말까지 붙여서 대답했다. 절대 아니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적패의 해결책은 정해져 있었다.

“가짜는 진짜가 해결하게 해야지.”

오늘 같은 날을 위해서 돈을 그렇게 들였으니까.

“진짜 마교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줘야지.”

18 절대회귀-297화 18

제297회 왜 나요?

수족을 잃은 적패는 슬퍼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오른팔을 잃어도 이러할진대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을지는 안 물어봐도 뻔한 일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놈을 붙잡아 둬야 한다.”

적패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주양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을 놓치면 죽는다는 것을. 이미 자신은 삶과 죽음에 걸쳐 있다.

일단 충실히 해야 할 일은 이자를 받으러 가는 것.

다음 날 이자를 받으러 간 칼잡이는 손이 망가져서 돌아왔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날은 봐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검무극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이틀 연속으로 손이 망가져서 돌아오자 통전소 칼잡이들은 동요했다. 몇몇은 갑자기 아파서 드러누웠고, 몇몇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며 종적을 감추기까지 했다.

칼잡이들 사이에서 검무극을 비정하다고 욕했지만 주양은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다. 상대는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 그가 비정했다면 이미 통전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날 왜 다 죽여버리지 않은 걸까?’

잔학에게 고문당했던 사람의 눈을 감겨 줄 때, 주양은 ‘아, 우린 이제 몰살당하겠구나’라고 절망했었다. 하지만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분명 자신들을 살려둔 이유가 있다.

어쨌든 오늘도 이자는 받으러 가야 했다.

“오늘은 내가 직접 간다.”

주양의 말에 자신이 걸릴까 봐 조마조마하던 칼잡이들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관리자로서 무작정 칼잡이들을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기에 직접 나선 것이다.

호위하겠다고 누구 하나 따라오지 않는 걸 보며 씁쓸하게 통전소를 나섰다. 그래,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따라오지 않았을 거다.

오히려 수하들보다 더 반가운 얼굴로 검무극이 맞아주었다.

“왜 당신이 왔소? 벌써 수하들이 다 떨어진 거요?”

“다들 두려워하고 있소.”

“그렇다고 당신이 수하들 걱정하는 사람은 아닐 텐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검무극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감이 넘치시오. 어디 대단한 고수라도 부르러 갔소?”

정곡을 찔렸지만 주양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눈치가 어찌나 빠른지.’

겁먹은 연기를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그때 날 죽이기 위해 보낸 사람보다 더 고수는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주양은 검무극이 말하는 사람이 적패의 오른팔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마교에 도움을 청하러 간 거고.

주양이 대답 대신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돌렸다.

“왜 내 손은 망가뜨리지 않은 거요?”

제일 궁금한 점이다. 딱히 그에게 잘한 것도 없었는데.

검무극이 동전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당신의 그 손이 필요할 수도 있어서요.”

그 뜻밖의 말에 주양은 의아해했지만 검무극은 더는 말해주지 않고 자신의 객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주양이 탁자에 놓인 동전을 들었다.

그냥 나가려다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이 필요하다고? 대체 왜?

* * *

“지단주가 대주님 뒤를 캐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집채만 한 바위 아래에서 끙하는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사람이 그 큰 바위를 짊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내공을 사용했다지만, 이렇게 큰 바위를 어떻게? 란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쿵.

바위가 땅에 떨어지고 그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며 걸어 나왔다.

다부진 체력에 날카로운 인상을 지녔는데, 굳이 동물로 비유하자면 그는 호랑이였다.

마검대주(魔劍隊主) 중악(仲岳).

이 한 줄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사내다.

마검대는 천마신교의 최정예로 전쟁을 대비해서 최전선인 강서지단에 배치된 무력 조직이었다.

중악은 정예조직을 이끄는 책임자답게 강력한 무공을 지닌 고수인데다 실전경험까지 풍부했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있을 때, 그딴 보고를 하는 건 날 죽이겠다는 의도지?”

보고를 했던 수하는 중악의 수족인 마검대 일조장 차회(車淮)였다.

“저도 대주 한번 해 먹고 은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워낙 성격이 차갑고 단호해서 마검대 무인들조차 두려워하는 중악이었는데, 유일하게 격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차회였다. 그만큼 충성심이 깊어서 비밀이 없는 사이였다.

“그 인간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다고?”

“네, 은밀히 사람을 풀었습니다.”

직급상으로는 단주가 대주보다 더 높았다. 하지만 마검대와 같은 정예조직은 직급을 넘어서는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존중하는 모양새를 갖춘다.

한데 강서지단에서는 그게 잘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 적 만드는 걸 참 좋아한단 말이지. 정작 싸움은 우리가 다 하고 다녔는데.”

중악이 땀에 젖은 옷을 벗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었다. 그의 온몸은 흉터가 가득했다. 마검대 대주가 되려면 어떤 역사가 있어야 하는지를 느끼게 하는 몸이었다.

몸을 씻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좋게 좋게 살면 얼마나 좋아? 적도, 친구도 아닌 사람들 속에서 편안하게.”

“강직한 척하는 이면에 무슨 속셈이 있는지 모르죠.”

“아냐, 그 사람은 그냥 병이야. 그렇게 잘난 척 안 하면 못 견디는 사람이야.”

다 씻은 그가 미리 준비된 새 옷을 입었다.

“그래서? 문제 될 것 있나?”

“제가 일단은 입단속을 시켜두었습니다.”

중악은 지단주의 의심처럼 부패무인이었다. 강서 내의 여러 문파들에게서 은밀히 뇌물을 챙기고 있었다.

반면 작년에 새로 온 지단주는 강직한 성격이어서 절대 뇌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뇌물은 더욱 많이 중악에게 바쳐졌다. 중악은 주는 족족 다 받아 챙겼다.

“넘쳐나는 돈 나눠주겠다는데, 왜 그리 어렵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주는 돈, 잘 받아 챙기고 결정은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뇌물을 받았다고 상대 요구를 다 받아주지 않았다. 자기가 생각해서 아니다 싶은 것은 무시했고, 이건 해줘도 되겠다 싶은 것은 해주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네 글자, 마검대주.

물론 그들이 바친 뇌물의 대부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우리가 불안과 싸워주는 거잖아? 얼마나 좋아?”

중악의 농담에 차회가 옅게 웃었다.

문제는 이번 일이 이렇게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란 점이었다.

“아시다시피 보통 깐깐한 자가 아니라서 이렇게 파고들기 시작하면 결국 알아내고 말 겁니다.”

중악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자신의 뒷조사를 결심했다는 것은 그도 모든 것을 걸었다는 뜻. 처음에는 꽤 관계가 괜찮았는데. 대체 어디서 어긋나버린 걸까?

중악이 천천히 바위로 걸어가더니 검을 뽑았다.

나뭇가지를 베듯 가볍게 휙 휘둘렀는데.

쩌어어어억.

그 큰 바위가 반으로 갈라졌다.

이 놀라운 한 수에 차회는 존경을 담아 포권했다.

“무림평화를 위해서라도…….”

중악이 매끈한 바위의 단면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지단주는 바뀌어도 우린 그대로 있어야지.”

그리고 바로 이때 운명처럼 방문자가 있었다.

다른 수하가 와서 보고했다.

“손님이 왔습니다.”

* * *

밀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적패였다.

이곳은 중악이 은밀한 만남을 가질 때 사용하는 곳이었다.

적패 역시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죽립을 쓰고 허름한 장삼을 입고 있었다.

중악이 안으로 들어오자 적패가 벌떡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중악의 반응이 차가웠다. 원래도 그는 염왕채를 운영하는 적패를 대놓고 무시했다.

‘그럼 내 돈도 무시했어야지.’

적패는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넙죽 엎드렸다.

“오죽 다급했으면 이렇게 찾아뵈었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마인을 사칭한 자가 끼어들었는데 우리가 손을 댈 수 없는 고수입니다.”

마교소교주라고 사칭한 부분은 일부러 뺐다. 그랬다간 중악의 성격상 그런 미친놈을 우리에게 상대하라는 거냐면서, 그 핑계로 뒤로 빠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본교를 사칭하는 죄는 중죄인데? 얼마나 대단한 실력인데?”

“이곳으로 달려와야 할 만큼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지단주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래라면 무조건 거절했을 것이다. 한데 중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알았다. 내가 처리해주지.”

“감사합니다.”

너무 흔쾌히 허락해서 오히려 적패는 당황스러웠다.

“대신 한 가지 해줘야 할 것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마인을 사칭한 자가 있다고 지단주의 귀에 들어가도록 해라. 이런 일은 나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다.”

적패는 알 수 있었다.

‘상대가 고수라니까 제가 움직이지 않고 지단주를 이용해서 없애려는 거구나. 하여튼 잔머리는.’

어쨌든 상관없었다. 놈을 없애기만 하면 되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실 중악은 적패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비정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교를 사칭한 놈을 잡으러 갔다가 강서지단주가 죽는다? 그 복수는 마검대가 하고?

그게 될까? 의심하는 인생을 살았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거다.

되게 해야지.

이것이 중악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 * *

다음 날에도 주양이 찾아왔다.

“우리 주 선생, 이제 겁 없이 혼자 잘 오는군.”

“적어도 내 손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내 손은 지킬 수 있지 않겠소?”

주양은 궁금해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체 왜 내 손이 필요한 거요?”

그러자 주양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말이 검무극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신을 새 통전소의 수장으로 삼을까 해서요.”

주양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반면 검무극은 침착했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오?”

“그야…….”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거나 말로 꺼낸 적이 없던 이유였다.

“날 죽일 것 아니었소?”

자신이 느낀 검무극은 악인을 그냥 두는 자가 아니었다.

“맞소. 원래는 죽이려고 했는데 악인이 하나 필요해졌소.”

검무극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어차피 당신들이 필요악이라면, 정말 제대로 된 필요악으로 만들려고 하오. 앞으로 중원의 통전소는 상식적인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줄 거요. 지금은 통전소뿐이지만, 언젠가는 중원의 모든 염왕채를 놓는 곳을 그렇게 다 바꿀 거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을 살려뒀는지. 왜 손을 멀쩡히 남겨두었는지. 이 손으로 앞으로도 계속 주판을 튕기라는 의미였다.

눈앞의 이 남자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절로 이 말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대체 뭔데?”

몇 번이나 들었던 대답이 다시 나왔다.

“마교 소교주.”

“당신은 그저 미친놈이오!”

사람 이마에 구멍을 뚫고 칼잡이들 손을 박살 낸 자인데,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든다. 자꾸 경계심을 풀게 만든다.

“결국 사채꾼에도 그 말을 듣고 마는구려. 마존들이 당신 말을 들었으면 껄껄 넘어갔을 거요. 한동안 나 놀린다고 정신없겠지.”

주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제대로 미친놈이거나…… 자신이 진짜 마교 소교주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거나.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요?”

“나는 모르지. 당신이 맡아서 해나가야 하니까.”

이러는데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당신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어차피 당신은 죽을 거요.”

“그럼 당신이 날 도와주시오.”

“무슨 마교 소교주가 사채꾼에게 도움을 바라시오?”

자기가 생각해도 농담이 우스웠는지 주양이 혼자 웃었다가 빠르게 정색했다. 미친놈하고 어울리니 함께 미쳐가는 거다.

“좋소, 그렇다고 치고. 왜 나요? 그에 걸맞은 사람을 세우면 될 텐데? 나 같은 놈 말고, 돈 욕심 없는 사람 말이오.”

개인적으로 주양이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워낙 큰돈을 다루는 곳이니 그 사람도 돈 때문에 타락하게 될 거요. 반면 당신은 더는 타락할 일이 없지.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헛짓거리를 하면 아무 가책 없이 죽이기도 쉽고.”

설마 이런 이유일 줄이야.

“사람 앞에 두고 너무 하는군.”

“당신을 살려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당신에게 쉽지 않은 일이 될 거요. 조직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할 거고, 단 한 푼의 돈도 허투루 빼돌릴 수는 없을 거요.”

검무극이 그에게 내린 응징은 이것이었다.

“당신에게 이자를 갚았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죽는 날까지 뼈 빠지게 일해야 할거요. 잘못 받았던 이자를 평생 제대로 받으면서.”

“만약 거절한다면?”

“적패가 죽는 날 함께 죽겠지.”

검무극이 동전 두 개를 차례대로 꺼내 탁자에 올렸다. 그 행동이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이 동전은 적패 것, 이건 당신 것.

동전을 보자 주양의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저 동전에 이마가 꿰뚫리기 전에 심장이 터져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두려워서인지, 통전소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허영심 때문인지, 평생 재미없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 갑갑함 때문인지. 이자와 함께 있으면 자꾸 이렇게 심장이 날뛰게 된다.

검무극은 마치 주양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처럼 차분히 물었다.

“두렵소?”

“그럼 안 두렵겠소?”

“바다에 빠졌어도 코와 입을 내밀 요만큼의 공간만 있으면 살 수 있소. 바다가 아무리 넓어도 딱 이만큼만 있으면.”

검무극이 손을 얼굴 앞에 원통처럼 말았다.

“당신에게 요만큼의 숨구멍이 나인지, 당신 수장인지 잘 생각하시오. 빨리 결정해야 할 거요. 곧 큰 파도가 덮쳐올 테니까.”

주양이 탁자에 올려진 동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두 개의 동전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어떤 심정이냐고? 살고 싶었다. 평생 속죄하며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소. 자신에게는 그런 기백이나 용기가 없다.

이제 곧 진짜 마교가 나서면 갈가리 찢겨 죽을 사람인데. 왜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것일까? 왜 지금이라도 ‘당신의 뜻을 따를 테니 살려주시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왜 그래야만 할 것 같을까?

주양이 동전을 챙겨나가며 말했다.

“그 파도, 당신부터 덮치고 있소. 그러니 당신 숨구멍이나 잘 찾으시오.”

19 절대회귀-298화 19

제298회 이놈들아! 여기 이분은.

천마신교 강서지단주 호경(護景)은 책상에 쌓인 서류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었다.

호경이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각 지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꼼꼼히 살피는 일이었다.

그때 그의 집무실로 마검대주 중악이 방문했다.

“바쁘십니까?”

“어서 오세요,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시오?”

“단주님 뵙고 싶어서 들렀지요.”

“잘 오셨소.”

한쪽은 뒤를 캐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평소보다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중악이 책상에 쌓인 서류뭉치를 보며 말했다.

“이래서 원성이 자자했군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단주님께서 워낙 꼼꼼히 일 처리를 하시니, 아래에서 실무를 보는 자들이 힘들어한다는 불평이 있습니다. 수하들 사기도 좀 챙겨주시지요.”

중악은 웃으면서 농담처럼 말했고 호경은 담담히 대답했다.

“화를 당하는 이유 대부분이 작은 일을 살피지 못해서가 아니겠소?”

“우리 단주님께서 계시는 한 사도맹 놈들은 감히 도발할 생각도 못 할 겁니다.”

“그게 어디 저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대주님과 마검대 덕분이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두 사람 모두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참, 요즘 본교를 사칭하고 돌아다닌다는 자에 대해 소문 들으셨습니까?”

“나도 들었소. 그 일을 조사해 보라 명령을 내린 상태요.”

“저도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인 모양입니다.”

호경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신교 사칭은 본단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안이었다.

“혹 그자가 누군지 아시오?”

“정체는 모르지만, 그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정보를 주시면 수하들을 보내 붙잡아오겠소.”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게 아닙니다. 놈이 상당한 고수라고 합니다.”

호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수가 본교를 사칭한다? 이상한 일이군요.”

“붙잡아와서 조사해 보면 알겠지요. 한데 지단에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호경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교묘한 화법이었다. 너희가 감당할 수 없으면 우리가 해결하겠다.

“우리가 처리하겠소.”

도발에 넘어가서가 아니라 원래 강서지단주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지단에서 해결이 안 될 때, 마검대에 도움을 청해야 하고.

“수하들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중악이 직접 방문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직접 나서지 않고 수하들만 보내서 처리할까 봐.

“내가 직접 수하들을 데리고 움직이겠소.”

“아, 단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신다면야 안심입니다.”

중악은 내심 생각했다.

‘당신 약점이야. 그 헛된 자존심 말이야.’

만약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이런 위험한 일을 처리하라고 마검대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제 비선을 통해 놈을 끌어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밖으로 나가려던 중악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이번 일 마치면 한잔하시지요.”

“좋습니다.”

호경도 좋은 얼굴로 중악과 작별했다.

‘그 술자리가 당신 마지막 자리가 될 거다.’

중악이 뇌물을 챙긴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어쩌다 한두 번 정도였다면 눈감아줬을 수도 있다. 마검대는 이곳 강서지단에 꼭 필요한 중요한 정예조직이었으니까.

하지만 주기적으로 상납받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그 액수도 너무 컸고. 어느 정도여야 눈을 감아주지.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내가 부정을 저질렀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다고 나를 자를 거야?

‘당신 모가지 내가 잘라주지.’

돌아서 나가는 중악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진짜 목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 * *

“드디어 마교에서 움직이기로 결정 났다.”

적패의 말에 주양은 흠칫 놀랐다.

검무극이 죽게 되었으니 속이 후련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는 내일 놈을 서쪽에 있는 폐사찰로 데려와라.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한데 저는 괜찮은 겁니까?”

“내가 잘 말해뒀으니 그곳에 도착하면 그들이 너를 챙겨줄 거다.”

“알겠습니다.”

“실수하면 우린 다 죽는다. 명심하도록!”

그날 밤 주양은 꿈을 꿨다.

바다에 누워 둥둥 떠 있는 꿈이었다. 따스한 햇볕에 행복하게 잘 떠 있었는데.

문득 검무극이 마인들에게 난도질당하는 상상을 하는 순간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가라앉았다.

허우적거리다 침상에서 떨어졌고 아침까지 잠들지 못했다.

* * *

주양이 검무극을 찾아갔을 때, 그는 객잔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이곳 객잔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주양은 유심히 그들을 살폈다. 상대방 남자가 검무극에게 서찰 같은 것을 건넸다.

검무극이 내용을 유심히 살피더니 상대에게 몇 마디 건넸다. 이럴 때 보면 너무 진지해 보여서 정말 마교 소교주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서찰을 건넨 상대가 객잔을 나섰다. 입구에 서 있던 주양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주양이 검무극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통천각에서 나온 사람이오.”

“통천각?”

“천마신교 최고의 정보조직이지.”

“당신은 또 만나자마자 허풍이군!”

주양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 최고라는 정보원과는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거요?”

“강서지단에 대해 알아본 거요. 지단주에 대해서도, 마검대주도 알아보고.”

두 사람이 언급되자 주양은 움찔했다.

“진짜면 그 서찰 나도 한 번 봅시다.”

검무극이 서찰을 든 손을 내밀었다. 주양이 그것을 받아 들려는 순간.

화르르륵.

서찰은 검무극의 손에서 불길이 오르면서 타버렸다.

“본교 기밀을 봤다간 당신은 살아남을 수 없소.”

놀란 주양은 재가 되어 날아가는 종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들어본 적 있다. 진짜 고수들이 삼매진화로 이렇게 종이를 태워버린다는 말을.

“이제 내 진정한 신분이 믿어지오?”

그렇다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이렇게 고수면서 왜 미친 거요?”

검무극은 날아오른 재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웃었다.

“당신을 믿게 하려면 마존들을 내 뒤에 줄 세워야겠소.”

주양은 말없이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그럴 기회는 없을 거요. 오늘 당신은 죽으니까.’

검무극도 주양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잠을 잘 못 주무신 것 같소. 고민이라도 있소?”

이제 주양은 귀신같이 알아맞히는 검무극이 놀랍지도 않았다.

“오늘 나와 갈 곳이 있소.”

“갑시다.”

검무극이 흔쾌히 따라나서자 오히려 주양이 당황했다.

“어디 가는 줄 알고 가자는 거요?”

“가보면 알겠지.”

“내가 함정이라도 파뒀으면 어쩌려고? 나 무시하는 거요? 네 함정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오. 날 죽이면 내 이자를 못 받지 않소? 당신은 돈을 받아내는 사람이지, 목숨을 받아 가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뜻밖의 대답에 주양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정말 말이나 못 하면.”

주양이 앞장서 걸었고 검무극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주양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 이상한 사람과의 관계도 조금 있으면 끝이다. 이제 영원히 이 미친놈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주양이 힐끗 검무극을 돌아보았다. 죽으러 가는 줄도 모르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따라오고 있었다.

“저기 저 옷,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소. 한 벌 사드릴까?”

“그 돈으로 이자나 잘 갚으시오. 젠장! 헛소리 말고 따라오기나 하시오.”

왜 이렇게 신경질이 나는 거지?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검무극을 죽이고 싶지 않은 거다. 실없이 웃고 있는 저놈이 뭐가 불쌍하다고!

주양은 문득 동전이 떠올랐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던 그 동전이. 그래, 자신의 손을 망가뜨리지 않은 고마움에서 비롯된 감정이겠지.

저잣거리를 벗어나 갈림길에 도착하자 주양이 발걸음을 멈추고 길가 바위에 앉았다.

“쉬었다 갑시다.”

“당신도 체력단련 좀 해야겠소. 만날 앉아서 돈이나 세고 있으니, 몸이 그 모양이지.”

검무극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말없이 앉아 있던 주양이 불쑥 물었다.

“당신이 진짜 마교 소교주면… 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요?”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말했다.

“보다시피 사람들을 만나고 있소. 자식 치료비로 빌린 열 냥 때문에 평생 당신들에게 붙잡혀 사는 마부도 만나고, 그 사람에게 대롱을 꽂고 피를 빠는 당신도 만나고, 그 사람 구하려고 담을 넘어 뛰어든 이름 모를 협객도 만나고.”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주양의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떨릴 말이 전혀 아닌데, 검무극과 함께 있다 보면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마인이 왜 염왕채를 바로 잡으려 하오? 정파인들도 두고 보는걸. 당신은 마인이잖아!”

“정파인 중에 인면수심이 있을 수 있고, 마인 중에서 그런 꼴 못 보겠다 하는 마인이 있을 수도 있고. 뭐 그런 거 아니겠소? 그리고 어차피 염왕채 일은 내가 아니라 앞으로 당신이 해나갈 일이오.”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한단 말이오. 당신 말마따나 평생 앉아서 돈이나 세고, 상대가 불행해지는 모습이나 즐기던 인생인데. 그런 거창한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오?”

“거창한 일 아니오. 정상적인 일이지.”

검무극은 차분히 그를 응시했다.

“송충이 같은 인생을 살아봤으면, 이제 훨훨 나는 인생도 살아보시오. 나비는 못 되더라도, 나방은 될 수 있지 않겠소?”

이 순간 주양은 그가 진짜 마교 소교주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일지라도,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단 한 번 오는 기회일진대.

그랬기에 더 화가 났다. 그는 마교 소교주가 아니었으니까. 마교 소교주가 한낱 사채꾼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진 않을 테니까.

“미친 소리 이젠 듣기 싫소! 이 길로 여길 떠나시오!”

주양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길로 떠나서 두 번 다시 강서성에는 오지 마시오. 다시 오면 당신은 죽어.”

주양은 이 미친 고수를 살려주려고 마음먹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 평생 이기적으로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온 인생이었다. 왜 하필 딱 한 번 베푸는 호의의 대상이 이런 미친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가는 걸 어쩌겠나?

“당신 죽일 사람들 기다리고 있소. 그러니 가시오. 당신이 함정임을 눈치채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고 할 거요. 믿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한 적은 또 있었던가? 단연코 없다.

“왜 알려주는 거요?”

“당신처럼 이상하게 미친 사람을 처음 봐서 그런 것 같소.”

그러자 검무극이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가 아닐 거요.”

검무극은 주양의 속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정말 이기적이면서도 생존력이 강한 사람이라 그렇소. 당신 본능이 아는 거요. 이래야 산다는 것을.”

“당신은 정말! 호의를 베풀어도! 진짜 마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알고 있소.”

“알고 있다고?”

“아까 보고 받는 거 보지 않았소? 현재 강서지단 움직임은 내가 훤히 들여다보고 있소.”

주양은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렇지. 이래야 진짜 미친놈이지. 완벽하오, 당신.”

“그리고 당신 혼자 가면 죽어.”

검무극이 먼저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왠지 그 말이 섬뜩하게 들렸기에 주양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무리한 호의였으니까. 언젠가 오늘을 돌아보겠지. 그때 그 미친놈은 내가 살면서 유일하게 살려주고 싶었던 자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회상이리라.

그렇게 두 사람이 약속 장소인 사찰에 도착했다.

그들이 사찰 앞마당에 들어서자 매복해 있던 수십 명의 강서지단 마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으며 마기를 드러냈다.

마인들 사이에서 지단주 호경이 걸어 나왔다.

“그대는 무슨 이유로 마인이라 사칭하고 다닌 것인가?”

호경은 검무극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지만, 검무극이 어렸을 시절, 오래전 일이었다. 이후 호경은 중원의 여러 지단을 돌았기에 다시 검무극을 볼 기회가 없었다.

“사칭하고 다닌 적 없소.”

호경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미 증인이 있거늘.”

호경은 검무극과 함께 있던 주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자가 본교를 사칭했나?”

싸늘한 질문에 주양은 당황했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적패가 그랬다. 자신이 도착하면 알아서 챙겨줄 거라고.

저 질문도 그렇고 날아드는 마기도 그렇고, 어디에도 자신을 위한 배려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마인을 사칭하는 자의 동료쯤으로 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분노의 대상은 적패였다. 그는 자신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 검무극과 너무 가깝게 어울리는 것을 보면서, 그냥 함께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 뒤에 딱 붙어 있으시오. 눈먼 칼에라도 맞으면 억울하지 않겠소?”

이곳에서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검무극 밖에 없었다.

“본교를 사칭한 자가 저자가 맞느냐고 물었다!”

호경이 재차 묻자 주양은 대답 대신 검무극에게 말했다.

“통전소와 결탁한 마인은 저 사람이 아니오.”

그 말에 호경까지 긴장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통전소와 결탁한 사람은 바로…….”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지붕 너머에서 이쪽으로 훌쩍 날아와 내려섰다.

그는 바로 마검대주 중악이었다. 건물 지붕과 사방 담벼락 위로 마검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호경까지 놀랐지만, 중악은 차가운 마기를 흘리며 주양에게 집중했다.

“통전소와 결탁한 마인이 누구냐?”

주양은 중악이라고 밝히는 순간 자신은 무조건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여기서 밝히지 않더라도 결국 죽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공포에 질려 있던 그때 검무극이 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치 이자를 주지 않았소. 받으시오.”

동전 두 개가 주양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말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던 주양이 동전을 다시 검무극에게 건넸다.

“이자가 너무 많소. 이미 낸 이자만 해도 원금을 다 갚고도 남았소.”

검무극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주양은 일평생 발휘하지 않고 고이 모아두었던 용기에, 죽을 때까지 발휘할 모든 용기까지 다 발휘했다.

“통전소 수장인 적패에게 뇌물을 받고, 당신을 죽여주겠다고 한 사람은 바로 저 사람 마검대주요.”

중악의 몸에서 차가운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곳을 둘러싼 마검대의 마인들 역시 마기를 뿜어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주양은 폭주하는 마차처럼 목청껏 소리쳤다.

“이놈들아! 여기 이분은 천마신교 소교주님이시다! 모두 무릎을 꿇고 숭배하라!”

아, 난 이렇게 미친놈으로 죽는구나!

12 절대회귀-299화 12

제299회 너흰 오지 않고 우린 기다리지 않겠지.

숭배는커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의 주인공은 중악이었다. 그는 뇌물을 받았다고 지목받은 상황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설마 소교주를 사칭하고 다닌 거냐?”

심각하게 듣고 있던 호경까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호경은 앞서 주양이 했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적패에게 뇌물을 받고, 당신을 죽여주겠다고 한 사람이 바로 저 사람 마검대주요.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저 주양은 자신이 지켜줘야 할 사람이 된 것이다.

호경이 중악에게 물었다.

“대주께선 이곳에는 어쩐 일이시오?”

“상대가 고수인 만큼 지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호경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애초에 자신이 마검대를 이끌고 가겠다고 생색을 냈을 것이다.

그는 주양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려는 순간에 등장했다. 이름을 불지 못하게 압박하려고 등장한 것이 분명했다.

“대주께서도 들으셨다시피 저자가 대주를 지목했소. 그러니 대주께서는 일단 물러가시는 것이 좋겠소.”

“설마, 저자의 말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다만 모두 앞에서 증언했으니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조사는 해봐야지요.”

“저자는 염왕채를 놓는 자입니다.”

그러자 호경이 주양에게 물었다.

“저 말이 사실인가?”

차가운 질문에 주양은 주눅이 들었다.

“그렇습니다만 제가 드린 말씀은 사실입니다.”

호경은 염왕채를 놓는 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며 주양은 검무극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알 수 있었다. 다들 저렇게 인상 쓰고, 무시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때 검무극이 슬쩍 끼어들며 말했다.

“내용을 반박하지 못하면, 전하는 사람을 공격하기 마련이지요.”

그말에 중악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호경이 중악을 달랬다.

“만약 사실이 아니면 무고죄로 엄중히 다스리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중악은 겉으론 여유로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주양을 없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만약 지단으로 돌아가서 본격적인 취조를 하게 되면 자신이 뇌물을 받은 게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버린다. 다른 뇌물까지 다 밝혀지면 대주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이고 뇌옥에 갇혀야 할 것이다.

중악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다.

“우리 소교주님은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저자 역시 내가 직접 처리하겠소.”

“그건 반역이지 않습니까?”

그의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와중에 주양은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다 비웃어도 주양은 비웃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그였다.

“소교주님, 이제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그래, 기왕 시작한 것 마지막까지 소교주다.

그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중악이 칼을 뽑아 들었다.

“감히 소교주를 입에 담다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주양을 베어버리려던 바로 그때.

그 앞을 호경이 막아섰다.

“멈추시게.”

“비켜주십시오. 감히 무엄하게 소교주를 사칭하는 자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럴 수 없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감춰왔던 갈등의 골이 깊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실 호경이 자신을 막아서리란 것은 중악도 예상했다.

―저놈을 죽여!

자신의 수족인 차회에게 전음이 날아갔다. 호경이 자신을 막고 있을 이때가 기회였던 것이다.

차회가 기습적으로 검기를 날렸다.

쉬이이이익!

한줄기 거친 검기가 주양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있던 검무극까지 모두 휩쓸어버린 강력한 검기였다.

꽝!

폭음에 놀란 주양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검무극의 등이 보였다. 날아든 검기를 검무극은 제자리에 선 채로 검을 휘둘러 가볍게 해소한 것이다.

“합공해서 죽여라!”

일조장 차회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검대 마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호경도 소리쳤다.

“막아라!”

지단에 속한 마인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서로에게 검을 겨눈 두 조직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대로 붙으면 지단 무인이 정예인 마검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검무극이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자신의 기도를 발출했다.

쏴아아아아아아악!

검무극의 기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거대한 파도가 그들을 향해 덮쳐왔다.

피할 곳도, 피할 수도 없었다.

마인들 모두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심연은 그들을 끝없이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들은 저항했다. 어떻게든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검무극의 기도는 어떤 저항도 허용하지 않았다.

온몸이 터질 것 같았고, 숨이 막혀 왔다.

‘으아아아아아아!’

비명을 내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심연의 끝에서 그들은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빛을 내며 서 있는 검무극의 모습을.

그 순간 검무극의 기도가 사라졌다.

심연의 검무극이 현실의 검무극으로 바뀌면서 자신들의 앞에 서 있었다.

힘겹게 숨을 내쉬며 모두 경악했다. 굳이 검을 뽑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의 무공이 자신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라는 것을. 또한 자신들을 옥죄어 온 그것이 마기였다는 사실을.

검무극이 호경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지단주 축하연 때, 그렇게 인사하셨죠. 작은 것들을 꼼꼼히 살펴 큰 화를 막겠다고요.”

호경은 생생히 기억했다. 첫 지단주를 발령받고 축하연에서 했던 인사였다. 그때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대도 그 자리에 있었소?”

검무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협은 누구시오?”

그때,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등장했다.

등장한 사람을 본 호경은 깜짝 놀랐다.

“임 지단주!”

그는 통천각 강서지단주 임정(林情)이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긴 어쩐 일이시오?”

이곳에 오기 전에 검무극은 통천각 무인을 만났고, 그를 통해 임정에게 이 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강서지단에 속한 모든 무인은 소교주님을 성심껏 모시라는 명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소교주가 언급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가짜 소교주를 놀리고 있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설마!”

모두의 시선이 검무극을 향했고 임정이 큰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이분이 소교주님이십니다.”

경악과 놀람에 정적이 흘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호경이었다. 그가 예를 갖추며 부복해 엎드렸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지단의 마인들은 물론이고 중악과 마검대도 일제히 예를 갖췄다. 어떤 경우에서도 교주와 소교주에 대한 존경은 절대적이었다.

“소교주님을 뵙습니다!”

마인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실 임정이 확인시켜 주지 않았더라도 이미 보여준 장대한 기도만으로도 충분히 소교주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곳에 멍하니 서 있는 사람은 주양뿐이었다.

검무극이 그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마존들이 내 뒤에 서지 않아도 이제 믿겠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주양이 비명까지 내지르며 넙죽 엎드렸다.

“귀한 분을 몰라뵙고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무례라니? 소교주라고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 자네잖아.”

주양은 울컥 감격했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마교 소교주와 만나고, 그에게 이자를 받고,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에게 미친놈이라고까지 했다.

“앞으로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의 정체를.

마교 소교주의 명인데 어찌 통전소 일을 소홀히 하겠는가?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하겠습니다.”

목숨을 구했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조금 전까지 그는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편안하게 뜨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었다.

반대로 중악의 마음에는 커다란 파도가 치고 있었다.

‘대체 이곳에 왜 소교주가 와 있는 거지?’

자신을 노린 것은 저 호경이었는데? 혹시 호경과 손을 잡고 자신을 노린 것인가? 하지만 놀란 호경의 반응으로 볼 때, 그 역시 소교주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 모두 일어나도록!”

그곳에 있던 모든 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여전히 놀람과 경외의 눈빛으로 검무극을 응시했다. 앞으로 교주가 될 사람이었다. 그가 ‘죽어!’라고 명하면 당장 죽어야 한다.

검무극이 중악을 향해 걸어왔다.

“중 대주, 뇌물을 꽤 많이 받았더군.”

중악이 발뺌하기 전에 임정이 먼저 말했다.

“통전소에서 나온 황금이 중 대주 이름으로 여러 전장에 나뉘어 보관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계속 조사 중이니 다른 증거들도 곧 나올 거로 예상됩니다. 또한 통전소 이외 곳들도 조사가 들어갔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조작이라고 우길 수 있겠지만 통천각 지단주의 말이었다.

그럼에도 중악은 당당히 고개를 들고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제가 강제로 뜯어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겁니다.”

“자네가 마검대주가 아니라도 돈을 줬겠나?”

“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수하들이 보고 있기에 그는 당당했다. 만약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수하들의 존경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돈 수하들에게 나눠줬나?”

순간 흐르는 정적. 돈을 나눠준 사람은 수족인 차회뿐이었다.

“나눠주려고 했습니다.”

차라리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구차한 변명에 마검대 수하들의 시선이 냉랭해졌다.

“이런 사소한 일로 마검대의 권위가 타격을 입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악은 어떻게든 이 순간을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검무극이었다.

“그래서다.”

검무극이 마검대 마인들을 쳐다보았다.

“자네들이 마검대라서. 무림맹이나 사도맹에게 본단까지 밀렸어도 자네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린 희망을 잃지 않을 거다. 자네들이 적들을 뚫고 우릴 구하러 올 거라는 믿음이 있지. 그게 마검대 자네들에게 가지는 본교의 믿음이다.”

마검대 마인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그렇기에 자네들은 다른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 뇌물을 준다고 덥석 받으면 안 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안 괜찮다. 만약 자네들이 뇌물을 받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린 마검대를 기다리지 않을 테니까. 적들을 뚫는 선택이 아니라 그보다 쉬운 것과 타협해 버렸을 거로 생각할 테니까. 너흰 오지 않고, 우린 기다리지 않겠지.”

중악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마검대 마인들은 검무극의 말에 공감하고 있었다.

중악이 항변하듯 소리쳤다.

“왜 일어나지도 않은 나중 일을 미리 걱정하시는 겁니까?”

“나는 너희의 교주가 될 사람이니까.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해야지, 그 걱정.”

중악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거기에 죄가 더해졌다.

“내가 자넬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뇌물 때문이 아니야. 자넨 오늘 여기서 호 지단주가 죽거나 다치기를 바랐다.”

그 말에 주위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여기 왜 왔겠습니까?”

“어차피 지단주를 해친 자를 찾는 임무는 자네에게 떨어질 테니까. 여기서 다 마무리 지으려고 했겠지. 호 지단주도 죽이고 복수도 하고.”

“내가 왜 그랬겠습니까?”

대답을 한 사람은 호경이었다.

“내가 당신 뒷조사한 것을 알아내서겠지.”

이제야 호경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를 찾아와서 직접 임무에 나가게끔 유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구나.”

누명 씌우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중악이 수하들과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두려워하던 그 눈빛에는 불신과 실망감이 가득했다. 존경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날 잃으면 본교 전력에 타격이 큰 거요.”

“돈 때문에 그 검이 우릴 겨눌 가능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득일 수도 있지.”

“절대 그런 일은 없었을 거요.”

“그건 모르지. 거절하기에 너무 큰 돈을 받으면 어찌 될지.”

원망 가득한 중악에게 검무극은 담담히 말했다.

“이래서다. 이래서 애초에 받으면 안 되는 거다. 자네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돼버리거든. 돈 몇 푼에 날 팔 것 같은 사람이 되거든.”

검무극이 진심으로 말했다.

“죗값을 치르고 다시 시작하게. 그때 내가 기회를 다시 주지.”

중악이 처음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뇌옥에서 몇 년을 살게 될까? 오 년? 십 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소.”

중악이 선택한 것은 호경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했고, 그 원망의 대상은 자신이 아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그에게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번쩍!

그의 쾌검이 호경의 몸을 가르려는 순간.

거대한 바위도 잘라내던 그의 검이 무엇인가에 막히더니 검이 부러졌다.

쨍강!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중악은 두 눈을 부릅떴다.

푸아이이악!

자신의 검을 부러뜨리며 다시 가슴을 베어버리는 상대는 무시무시한 악귀였다.

서걱! 서걱! 서걱!

좌측과 우측, 그리고 등 뒤에서 악귀들의 검이 날아들었다. 온몸이 잘려 나가며 중악은 절명했다.

지켜본 이들은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악귀가 나오는 소교주의 마공은 구화마공 뿐임을 알았기에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이번에는 검무극에 대해서가 아니라 구화마공에 대한 예의였다.

그때를 노려 중악의 수족이었던 차회가 죽은 수장의 뜻을 이루려 했지만, 호경의 검에 절명해 쓰러졌다.

호경의 실력에 지단 무인들은 놀랐다. 꼼꼼한 성격에 책상에서 매번 서류나 뒤적이던 모습만 보았는데, 호경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수였다. 한 번도 실력을 과시하지 않았기에 감동은 더욱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이 많아졌다고 덜 투덜거렸을 텐데.

사기가 오른 지단 무인들과는 달리 마검대 쪽은 우울함만이 감돌았다. 비록 부패한 무인들이었지만 수장과 일조장을 잃은 것이다.

검무극이 그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이 시간쯤, 내가 자주 가는 마가촌 주점에서는 다들 술을 마시고 있을 거다. 돈 걱정, 자식 걱정, 일 걱정, 사람 걱정. 온갖 걱정이 많겠지만 적어도 사도맹 무인들이 주점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신들을 죽일 걱정은 안 할 거다. 왜? 자네들이 이곳 강서지단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검무극은 진심을 담아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최고 대우를 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부족하다는 것 알고 있다. 그대들 실력이면 나가서 열 배는 더 벌 수도 있을 거다. 대신 천마신교 최정예 마검대라는 명예는 얻지 못하겠지. 명예가 밥 먹여주냐고 하겠지만, 그대들은 명예를 먹고 살아야 한다. 그 명예로 남들 편히 밥 먹여주는 사람들이 그대들이니까.”

잠시 사이를 두고 검무극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알아주마.”

마검대 무인들의 눈빛에 자부심과 결의가 들어갔다. 말로만 하는 위로인들 어떠하랴? 다른 사람도 아닌 교주가 될 사람이 해주는 위로인데.

“이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그들을 위한 위로는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자, 모두 나를 따르도록.”

마검대와 지단 무인 모두 검무극 뒤를 따랐다.

검무극이 주양에게도 말했다.

“앞장서게.”

“제가요?”

“자네가 주인공이 될 자리인데, 가야지.”

주양은 알 수 있었다. 이들 모두를 데리고 적패의 장원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적패를 높이 사서가 아니었다.

검무극이 통천각의 임정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사도맹 쪽에 기별을 넣어주시오. 강서지단 단합회 날이니 오늘 하루는 우릴 건들지 말라고.”

17 절대회귀-300화 17

제300회 오늘은 세상만사 다 잊고.

강호를 살면서 이런 경험해 본 적 있는가?

바로 옆에는 마교 소교주가, 뒤로는 마교의 지단주가, 그 뒤로 마교 최정예라는 마검대가, 다시 지단의 마인들까지.

이들을 거느리고 걸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주양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괜스레 자신이 뿌듯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저들 중 아무나 한 명 골라도 일반 무인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날 사람들인데.

무서운 생각이 들자 주양은 함께 걷고 있는 검무극을 힐끗 쳐다보았다. 처음 돈을 빌리러 왔을 때나, 소교주로 밝혀진 지금이나 그는 똑같았다.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무섭게 굴지도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감히 그에게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좋았는데. 검무극이 빚쟁이일 때가 좋았는데.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적패의 장원에 도착했다.

주양은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말했다.

“제가 문을 열게 하겠습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꽝!

마검대 마인이 나서서 문을 부수자 마인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사방에서 칼잡이들이 튀어나왔다가 흠칫 놀랐다. 마검대 마인들은 마기를 발출하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다.

“죽기 싫으면 모두 떠나도록.”

칼잡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망설이던 그때.

그들에게 경고했던 마검대 마인이 검을 휘둘렀다. 한줄기 검기가 칼잡이들 사이를 지나쳐 뒤쪽 화원 앞에 세워진 돌탑을 잘랐다.

돌탑 하나가 모두를 살렸다. 우르르 입구 쪽으로 달아나는 그들을 마인들은 엉덩이를 걷어차 모두 내쫓아 버렸다. 그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달아났다.

마검대 마인들은 거침이 없었다. 두 번째 문을 박살 내고 들어서자 사방 지붕 위에서 암기가 쏟아져 내렸다.

앞장선 마인들이 가볍게 검을 휘둘러 암기를 쳐냈다.

“이제부터 암기 하나만 더 던지면 죽는다.”

지붕 위에서 암기를 던진 자들이 얼어붙었다. 그제야 상대가 마인들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놈들아, 누군지는 보고 던져야지.”

검무극이 한마디 하며 지나갔고, 그 뒤를 마인들이 뒤따랐다. 암기를 던졌던 이들은 반대 방향으로 달아났다.

지켜보던 주양은 이 낯선 광경에 당황했다.

마인들이 무서운 사람인 줄이야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곳을 지날 때마다 얼마나 무서웠는데. 적패의 요새는 마인들의 산책로였다.

다음 문 너머에서는 십여 명의 무인이 앞을 막아섰다.

합공술의 달인이라고 적패가 그렇게 자랑하던 그들이었다. 달에 들어가는 돈만 수백 냥이라면서 탄식인지 자랑인지 모를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고혈을 짜서 모은 돈으로 제 목숨을 지키는 데에는 아낌없이 썼던 적패였다.

그들이 검진을 갖추고 맞서자 마검대가 우르르 걸어 나갔다.

“진짜 합공이 뭔지 보여줄까?”

마검대가 검진을 짜서 겁을 줄 필요도 없었다. 뭉쳐 있던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주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달에 수백 냥은 대체 왜 쓴 거냐?’

물론, 이해는 한다. 침입자로 마검대가 밀고 들어왔을 때의 공포가 어떨지.

마구잡이로 겁을 주면서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마인들은 질서가 있었다. 그냥 걷는 것 같지만 주위를 철저히 살폈고, 한 사람이 이동하면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채우며 진형을 갖췄다. 지형과 상대에 따라 그들의 진형과 대처가 달랐다. 오랜 훈련을 통한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마지막 관문에서의 세 사내는 수백 냥이 아니라 수천 냥은 들었을 것 같은 고수들이었다.

“우린 강서삼귀(江西三鬼)다. 감히 누가!”

순간 삼귀 중 첫째가 지단주 호경을 알아보았다.

“당신이 왜?”

그러자 호경이 그에게 쉿, 하는 시늉을 하더니, 지금은 너희가 나설 때가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한 경고가 되었다.

“보내줘서 고맙소.”

삼귀가 아니라 백귀가 있어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려준 것에 감사하며 삼귀도 그곳을 떠났다.

그렇게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내원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마지막 문은 열려 있었고 적패는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귀한 분들을 뵙습니다.”

적패가 달아나지 않은 이유는 지금 이 상황을 착각했기 때문이다.

마인을 사칭한 자를 해치우고 진짜 마인들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양이 함께 왔으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미리 기별을 주셨으면 이런 실수가 없었을 텐데. 제 수하들이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적패는 방문한 이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지단주 호경이 왔음을 확인했고. 마검대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했다.

지난번 중악에게 이번 일의 처리를 부탁했을 때 지단주를 이용할 것 같더니만. 역시 오늘 일에 지단주를 이용한 모양이다.

‘돈은 저 혼자서 다 챙기면서!’

적패는 지금의 상황이 조금 의아했다. 자신이 파악한 호경은 뇌물을 받는 자가 아니었는데. 이자는 여길 왜 온 거지?

적패가 슬쩍 주양을 쳐다보았다. 내심 같이 죽으라고 보낸 건데.

‘명줄이 질긴 놈이구나. 그래, 넌 일이나 하다가 죽어라.’

적패가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냐고. 주양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때 검무극이 적패에게 동전을 내밀었다.

“자, 받아라.”

“이게 뭡니까?”

“이자다.”

순간 적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족의 시체 위에 놓여 있던 동전 두 개가 떠오르면서 불길한 예감이 휘몰아쳤다.

“받으라니까.”

적패가 무심코 그것을 받아든 순간.

후아아아아앙.

꽝!

무거워진 동전 때문에 손이 바닥에 처박혔다.

“으아아아악!”

그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그를 구해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하나 더 남았다. 이것도 받아라.”

적패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검무극을 올려다보았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긴? 돈을 빌렸으니 이자를 갚는 거지.”

“안 받아도 됩니다.”

“아방궁도 있다면서? 이자를 받아야 유지할 수 있지 않느냐?”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그가 받기 싫다고 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다른 손이 펼쳐졌고.

후아아아앙!

꽝!

결국 다른 손도 으스러졌다.

손바닥을 위로한 채 엎드린 모습이 마치 하늘에 절을 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생 고통을 모르고 살았던 그였기에 아프다고 난리를 쳤다.

주양은 알 수 있었다.

적패를 바로 죽이지 않고 이렇게 동전을 받게 한 것은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임을. 앞으로 네가 받을 이자에 담겨 있는 각자의 사연이 이만큼 무겁다는 것을.

주양이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검무극이 가볍게 일장을 내질렀다.

퍼억!

적패는 그대로 머리가 깨어지며 절명했다. 평생 수많은 이의 삶을 파멸로 이끌며 오직 돈을 위해 살아온 그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외로운 죽음이기도 했다.

검무극은 통전소 쪽 수하들을 모두 불러오게 했다.

그들을 모두 세운 후 주양을 소개했다.

“이제부터 통전소의 주인은 여기 있는 주양이다. 불만 있는 자는 지금 당장 떠나라. 살려서 보내준다.”

모여 있던 이들 중에서 주양과 사이가 좋지 못한 몇몇이 그곳을 떠났다.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다 싶은 이들도 함께 떠났다. 그렇게 떠날 사람 떠나고.

검무극은 남은 이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앞으로 새 수장의 말을 잘 따르도록.”

“네!”

그렇게 하루아침에 통전소의 주인이 바뀌었다.

호경은 거침없는 검무극의 행보에 내심 감탄했다. 이런 일들은 단지 무공이 높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보였다.

“자, 오늘 다 같이 한잔하시지요.”

호경도 즐겁고 좋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이 자리에 본교 강서지단의 핵심이 여기 다 있습니다. 일부 병력이라도 돌려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맹이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되십니까?”

“따로 기별까지 했으니 그렇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요.”

그는 부임한 이후 매일 사도맹을 신경 쓰며 살았을 테니, 이런 상황에서 긴장하고 예민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도맹도 옛날 사도맹이 아니거든요.”

검무극의 자신감은 비사인을 믿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자신도 수하들을 데리고 주점으로 달려가면 가지, 병기창을 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연무장에 큰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적패가 모아둔 좋은 술을 모두 가져왔고, 저자의 유명한 객잔과 주점에서 온갖 요리를 사 오게 했다.

이렇게 모두 모여서 술을 마셔본 적은 거의 없었다. 특히 지단의 마인들과 마검대가 함께 어울린 적은 더군다나 처음이었고.

모두의 잔이 채워지자 검무극이 큰소리로 잔을 높이 들었다.

“자, 오늘은 세상만사 다 잊고, 실컷 마시자!”

모두 시원스럽게 술을 마셨다.

검무극을 향한 마검대 마인들의 시선은 더없이 호의적이었다. 앞서 해준 위로도 그렇고, 모두를 압도하는 무공실력도 그렇고.

검무극은 그들과 편하게 어울렸다.

본단 이야기도 해줬고, 마존들 이야기도 해줬다. 특히 마검대가 경쟁자로 여기는 마군 이야기에는 다들 눈을 반짝였다.

어디 그뿐인가? 중원이며 새외며, 그 폭넓은 경험과 특유의 너스레에 마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검무극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도 주양은 꼼짝하지 않고 검무극 옆에 앉아 있었다. 오줌이 마려워도 누러 가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다른 누가 앉아서, 만약 마인들 사이에 앉아야 한다면? 차라리 싸고 만다! 그는 필사적으로 검무극 옆자리를 사수했다.

그렇게 마인들과 한참 떠들고 놀던 검무극이 홀로 조용히 술을 마시던 호경에게 왔다. 뒤따라오려는 주양을 두고 오자, 그는 지옥에 홀로 남겨진 표정을 지었다.

“애들하고 노니 지칩니다.”

그 말에 호경이 웃자 검무극도 웃으며 덧붙였다.

“나이로 보면 제일 애면서 이런 말을 하죠?”

“말씀만 들으면 제일 나이가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대체 언제 그런 경험을 하신 겁니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이죠.”

두 사람이 술을 비웠다. 호경이 검무극에게 술을 부어주며 물었다.

“한데 어찌 제 예전 일을 기억하신 겁니까?”

“지단주님을 뵙는 순간, 그날 연회장 때가 기억났습니다. 인상적인 말씀이기도 했고, 그때 그 얼굴 그대로시기도 하고.”

“무슨 말씀을요. 저야 많이 늙었지요.”

이번에는 검무극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꼼꼼히 다 챙기시려니 힘드시죠?”

“제 성격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냥 두면 잠이 오지 않는걸요.”

원칙주의자인 그가 느끼는 비애가 있을 것이다. 자신은 다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남들에게는 비난을 받게 되는 당사자만의 힘듦이. 그라고 어찌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검무극이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힘든 일도 오래 하다 보면 그 힘듦이 힘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회귀 전 대법 재료를 구할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그땐 이런 기대를 하며 잠이 들었다. 내일은 나아지겠지.

시간이 지나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일도 힘들 거다. 힘듦을 피하려니까 더 힘든 거다. 내일도 힘들고 모레도 힘들 거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들 힘들 거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났을 때 깨달았다. 결국 자신을 가장 많이 성장시킨 것이 그 힘듦이었음을. 지긋지긋한 적이자 유일한 친구였음을.

“그래서 지단주님은 강해 보이십니다.”

호경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검무극의 깊은 눈빛을 보며, 그 역시 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느꼈다. 그래, 소교주가 되기까지 후계자 다툼을 하며 온갖 일들을 겪었으리라.

“힘내십시오, 소교주님!”

“우리 힘냅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늦게까지 강서지단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검무극은 묵묵히 그의 말을 다 들어주었다.

* * *

뒷마당에서 주양을 찾았다.

마인들을 피해 다니던 그는 모닥불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뭐해?”

“아, 그냥 있었습니다.”

검무극이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다들 술 잘 마시네요.”

“네가 취마를 못 봐서 그래.”

취마도, 지치지 않고 술을 마셔대는 저 마인들도, 딴 세상 사람들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만큼은 그리울 것 같다. 딴 세상 속에서도 제일 멀리 있는 사람인데.

“소교주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겠다. 자주 볼 수도 있고, 죽을 때까지 못 볼 수도 있고.”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테니까, 강서에 오시면 꼭 들러주십시오. 일과 관련한 보고서는 빠지지 않고 잘 보내겠습니다.”

“주양아.”

“네.”

불빛 때문인지, 긴장해서인지 주양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위기가 올 거다. 그 위기는 이 말을 하며 널 유혹하겠지. 에잇,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 주양아, 너는 이미 지은 죄가 커 헛짓거리하면 용서해 줄 수가 없다. 그러니 그런 유혹이 들면 날 찾아와라.”

“마교 본단으로 오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와서 정문에서 날 찾으면 된다.”

주양은 잠시 그 광경을 떠올려보았다. 마교 본단 정문에 서서 ‘소교주님을 뵈러 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럼 정문의 마인들이 ‘너는 누구냐?’라고 묻겠지. 아니지, 소교주 손님이니 ‘당신은 누구시오?’ 그럼 ‘난 저기 멀리 강서 땅에서 온 사채꾼이오.’ 아, 다음 상상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악착같이 노력해서 찾아뵐 일 없이 살아야겠습니다.”

주양의 농담에 검무극도 함께 웃었다. 이렇게 웃어주는 소교주라니.

“자, 이건 마지막 선물이다.”

검무극이 그에게 두 냥을 건네주었다.

주양은 공손히 그 돈을 받아들었다. 검무극을 만나고 계속 받았던 동전 두 개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받는구나.

동전을 꽉 쥐면서 주양이 물었다.

“한낱 사채꾼에 불과한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그 말 자주 듣는다.”

검무극이 모닥불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마 나는 그런 사람인가 보지.”

주양이 벌떡 일어나 검무극에게 큰절을 올렸다.

“새 인생을 주신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제가 송충이인지 구더기인지 애벌레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되었든 꼭 날개 한 번 펼쳐보겠습니다.”

검무극은 말없이 모닥불에서 튀어 오른 불씨가 춤을 추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 * *

이틀 후 검무극은 호경을 비롯한 강서지단 마인들과 작별을 고했다.

“본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더 있어봤자 일하시는 데 방해만 되지요.”

호경이 말이 없자 검무극이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 봅니다.”

“제가 부려 먹을 상대는 아니니까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조만간 본단에서 새 마검대주를 정할 겁니다.”

“저는 또 힘든 싸움을 해야겠군요.”

힘듦이 힘이 될 날이 올 겁니다.

검무극은 그날 했던 말을 눈빛으로 전했다.

호경이 있는 한, 강서지단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 강서지단 감찰 완료.

* * *

강서지단과 작별하고 검무극이 찾아간 곳은 마부 편중의 집이었다.

“솜씨 좋은 마부를 구하고 있소.”

편중은 조금 전에 통전소로부터 자신이 더는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들은 상태였다. 원금보다 더 낸 돈은 적정 이자를 계산한 후 돌려준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아내와 끌어 앉고 펑펑 울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아이들도 따라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은 편중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눈앞의 이 남자가 그 일을 해낸 것이라고.

편중이 고개를 숙이며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전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러자 편중의 마부 역사상 가장 위험천만한 목적지가 흘러나왔다.

“천마신교 본단.”

처음에 천마신교 강서지단에 가자고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던 편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활짝 웃으며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로 보답했다.

“도착지까지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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