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51-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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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1화 12

돌아온다고 약속했기에 (1)

마르셀라는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리운 얼굴이었지만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얼굴이기도 했다.

“······빨리 나가. 빨리.”

있는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굳힌 채 말을 거는 마르셀라.

“······빨리 나가라니까!”

조용히 속삭이듯 말하는 그녀의 어투에서 다급함이 전해져왔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여전히 마르셀라의 볼에 걸려있었다.

블라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래 여기였다.

나의 둥지였던 곳은.

천박한 조명 아래서 애써 눈물을 참으며 눈으로 말을 거는 여인.

“······.”

저기 반짝이는 것이 떨어진다.

사내들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진창 위에서 블라드는 애처롭게 흐르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비록 땅에 떨어져 짓밟힌 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향기를 품고 있다면 그것은 꽃일 것이다.

소년은 오랜만에 느끼는 장미 향을 맡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줘야 할 때다.

※※※※

“······.”

마담은 금발 사내와 마르셀라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그녀 또한 뒷골목에서 살아남은 사람.

이런 돌발상황에 익숙한 마담은 조용히 손짓을 통해 저 멀리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끌어내!’

마담의 신호를 받은 사내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적어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이곳으로 파견 나온 잭의 부하들이었다.

“······값을 드려야 할 텐데.”

그러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도 금발 사내는 태연히 일어나 마담을 바라볼 뿐이었다.

새파란 눈동자 속에 새빨간 핏줄들이 일렁이면서.

“마담에게 100골드를 드리기 전에 나도 미리 셈해야 하는 계산이 있어서 말이지.”

마담은 놀라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귀족 청년 같아 보였던 사내가 지금은 마치 굶주린 늑대 같아 보였으니까.

“······무슨 계산을?”

마담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금발 사내가 뿜어내는 숨 막힐듯한 기세에 욕정에 물든 사내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잭의 부하들이 조용히 자신들의 이빨을 꺼내 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상황에서.

“외팔이 잭.”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자한테 받아야 할 것이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당황한 마담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되묻고 싶었지만.

촤아아악-

갑작스레 자신의 얼굴에 와닿은 핏물을 느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뒤로 몰래 다가오려던 잭의 부하 하나가 힘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블라드의 장식 없는 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만약 이놈들한테서도 모자라면 당신한테도 받아낼 거니까.”

우리에서 풀려나온 늑대가 굶주린 침을 흘려대었다.

오랫동안 참아왔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자신의 앞에 있었기에.

“비켜! 비키라고!”

“저 새끼 뭐야!”

욕망을 내뱉는 장소에서 갑작스레 살육의 현장이 되고만 창관.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이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단 들어가!”

“어디서 허튼 수를 배워가지고!”

도망치는 욕망들.

발악하는 짐승들.

악다구니를 쳐대며 달려드는 잭의 부하들을 보며 블라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게 그리웠던 거 같아.”

블라드는 자신의 발끝이 또다시 더러운 진창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그 예전, 소년이 꿈꾸던 별은 지금 대장간 높은 곳이 아닌 자신의 손안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이 새끼야! 너 누가 보냈어!”

“······누가 보냈냐고?”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대사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그래서 대답해주었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품어왔던 누군가의 이름을.

“호르헤.”

“뭐?”

그 말과 함께 블라드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 한 자루를 뽑았다.

자신을 주워주었던 남자가 언제나 차고 다니라 했던 단검이었다.

“호르헤가 보냈다고.”

장식 없는 검과 함께 호르헤의 단검이 사내들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비록, 그날은 숨죽이며 달아났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소년은 스스로의 이름을 외치기 위해서 많은 강을 해쳐왔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자격을 가지고 돌아왔다.

“너희가 찾던 블라드가 여기 있다!”

마르셀라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터져 나오는 탄성을 억지로 틀어막았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서는 푸른 달빛의 기사 뒤에서 울부짖던 소년을.

“그날처럼 나를 죽이러 와라!”

블라드는 쉼 없이 내려치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에 감싸인 족쇄들을.

“저 새끼 블라드였어!”

“용케도 살아남았었구나!”

소년의 외침을 알아들은 짐승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덤벼 이 새끼들아!”

붉은 핏줄기와 함께 맨 앞에서 달려오던 남자가 소년의 세계에 베어지고 있었다.

검 한 번에 비명 한 번.

비명 한 번에 목숨 하나.

블라드는 시뻘게진 눈으로 잭의 부하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

눈물을 흘리는 마르셀라를 위해서라도.

블라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들을 향해 기사가 알려준 발걸음으로 피하고 뒷골목에서 배운 대로 귀를 물어뜯었다.

난잡했지만 오직 효율만을 추구한 움직임으로.

기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이 지금 이곳에서 날뛰고 있었다.

“히이익!”

소년의 흉폭한 기세에 몸을 돌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들을 위한 배려 따위는 필요 없었다.

블라드는 도망치려 했던 사내의 등을 후려치고는 쓰러져있던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가 창관의 바닥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아니야! 우린 아니야!”

“살려주세요! 제발!”

욕망에 이끌려 이곳으로 온 자들이 벽에 바싹 붙어 울부짖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을지라도 도저히 참아낼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기에.

“끄아아악!”

그 사내들 속에 숨어있던 잭의 부하를 끄집어낸 블라드가 망설임 없이 관자놀이에 호르헤의 단검을 박아넣었다.

사내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흐아아! 흐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문 앞까지 다다른 사내.

부들거리는 손놀림으로 계속해서 손잡이를 돌리고 있었으나 야속하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마치 밖에서 누군가가 막고 있기라도 한 듯이.

“······싸움을 걸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콰아아앙-!

거칠게 내뻗은 소년의 발길질과 함께 문이 터져나갔다.

“커억! 쿨럭!”

형편없이 구르기는 했으나 드디어 원하던 밖으로 나온 마지막 남은 잭의 부하.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일어서려 했으나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창관을 둘러싸고 있던 쇼아라의 경비병들이었다.

“그냥 안에서 끝냈으면 서로가 좋았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목소리.

묘하게 침착해진 목소리였으나 그것을 듣는 사내는 오히려 소름이 돋고 말았다.

“······살려, 살려줘.”

“싫어.”

블라드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잭의 부하를 짓밟고는 목에 단검을 들이대 사정없이 그어버렸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목의 상처를 부여잡는 남자였으나 아무 의미 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너희들도 그날 나를 붙잡았으면 살려주진 않았을 거야.”

그랬을 것이다.

죽이지 못하면 죽고 마는 것이 뒷골목의 법칙 중 하나였으니.

“끄윽······끅.”

오직 침묵만이 가득한 뒷골목에서 호르헤의 단검이 누군가의 마지막 비명을 집어삼켰다.

※※※※

장미의 미소.

쇼아라 뒷골목 상징 중 하나였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돈벌레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곳에서 한 남자가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한잔 더.”

왼쪽 팔에 달린 갈고리로 얼음을 부숴낸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술잔 안으로 차가운 덩어리를 밀어 넣었다.

“보스.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

옆에 있던 부하가 조심스레 그만 마실 것을 권유했지만 외팔이 잭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그가 없어진 후로 쇼아라의 뒷골목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지만, 외팔이 잭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술독에 빠져 지낼 뿐이었다.

점점 망가져 가는 그만큼이나 뒷골목의 생리도 무너져가고 있었다.

“내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밖에 더 있나? 잔말 말고 술이나 따라.”

“······네, 보스.”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술을 보면서 외팔이 잭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저 아래에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녀석들.

저놈들은 알까.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저 저 위에 있는 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개 같은 인생.”

아무리 처량한 뒷골목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외팔이 잭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

나는 이곳에서 멈추지 않을 사람이다.

그렇기에 남의 것을 뺏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적들의 시체를 발판삼아 기꺼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모든 것은 승리해야만 얻을 수 있다 굳게 믿었던 인생이었지만 자신은 패배했음에도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그날 자신은 호르헤에게 졌다.

그러나 결국 죽은 자는 호르헤였다.

“엿 같은 세상.”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테지.

저 위에 있는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고 말 테지.

그날 허무하게 죽어갔던 호르헤처럼.

“결국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말이야.”

외팔이 잭은 쓰디쓴 술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끓어오르는 취기에 몸을 떨었다.

취하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밤이었으니까.

쾅-!

“보스! 보스!”

순간, 이곳에 있던 모두가 돌아볼 정도로 거칠게 문을 연 남자가 있었다.

“보스! 큰일났습니다!”

“뭐야?”

“왜 그래? 뭔 일이라도 생겼어?”

헐레벌떡 4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남자를 보며 잭의 부하들이 한마디씩 물어보았으나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는 그저 숨이 턱 끝에 찰 때까지 계단을 뛰어오를 뿐이었다.

“보스!”

“뭐야.”

잭을 앞에 두고서야 가쁜 숨을 몰아쉰 남자는 간신히 정리한 호흡 안에서 한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포위되었습니다!”

“······뭐?”

예상치 못했던 남자의 말에 잭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여기가?”

“여기뿐만이 아니라······.”

보고하던 남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뒷골목 전체가 포위되었습니다. 병사들이 저희를 둘러쌌어요.”

“······비켜봐.”

심상치 않은 보고에 이제야 술잔을 내려놓은 외팔이 잭이 거칠게 앞에 있던 남자를 밀치고는 일어섰다.

“보스!”

“괜찮으십니까?”

휘청이며 계단을 내려오는 잭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오는 부하들.

“······이런.”

잭은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몽롱한 시선을 통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쇼아라의 뒷골목.

밤이기에 불을 밝힐 수 있는 거리에서 손님들을 유혹하는 빛들이 걸려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형태의 빛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문 열어!”

마침내 1층에 도착한 잭의 외침에 서둘러 문을 여는 부하들.

“······이런.”

“이게 뭐야.”

밖으로 나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수많은 횃불이었다.

그 횃불들 아래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있었다.

“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외팔이 잭은 한숨일지 감탄일지 모르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보스, 포위, 포위되었습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위협적인 광경 앞에서도 외팔이 잭은 태연할 뿐이었다.

“······손님이 오려나 보다.”

“네?”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손님맞을 준비나 하고 있어.”

끝을 가져올 불빛들을 뒤로하며 외팔이 잭은 안심한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불안보다는 바로 앞에 보이는 파멸이 더 마음 놓이는 법이었으니까.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2화 11

돌아온다고 약속했기에 (2)

모든 검에는 각자가 가진 용도가 있다.

큰 검과 작은 검이 서로 쓸 수 있는 상황이 다르며 날카로운 검이 무딘 검보다 항상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언제나 요제프에게 구박받던 보르단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늙고 뚱뚱하며 검조차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기사였지만 요제프는 그를 옆에 두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사용할 수 있는 용도가 확실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른 골목들까지 확실히 봉쇄하셨습니까?”

“물론이지요······. 최선을 다했습니다.”

쇼아라의 시장은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아내며 눈앞에 있는 뚱뚱한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작 일개 기사일 뿐이었으나 어찌나 시정의 뒷사정에 대해 잘 알던지 시장은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도대체 어디서 구르다 온 사람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길래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키우시면 어떡합니까. 백작님이 아실 정도로 말입니다.”

“외팔이 잭이라는 자가 워낙 수완이 좋다 보니······. 그래도 오늘 이후로는 쇼아라의 암 덩어리가 제거될 것 아니겠습니까!”

백작의 권위를 등에 업은 기사를 보며 시장은 연신 곤혹스러운 감정을 드러냈으나 정작 보르단은 시장의 말에 그저 이죽거릴 뿐이었다.

‘암 덩어리는 네놈이겠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외팔이 잭이라는 자가 어떻게 해서 뒷골목이라는 거대한 생태계를 주무를 수 있었겠는가.

전부 다 시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 자의 묵인하에 일어난 일일 테다.

“그나저나 안으로 진입할 기사는 언제 오겠습니까? 바예지드 가문에서 특별히 보냈다는······.”

시장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쇼아라에 파견 나와 있던 모든 기사들을 소집해놓았으나 보르단은 이 일을 따로 맡은 자가 있다며 거부했다.

이 일은 단순히 외팔이 잭이라는 뒷골목 보스를 처단하는 일이 아니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마련한 블라드의 공식적인 데뷔전이기도 했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희미한 빛만이 비추는 뒷골목의 거리.

그곳을 따라 홀로 걸어오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늘어뜨리고 있는 검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명입니까?”

“······.”

시장은 아무리 보아도 한 명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보르단은 그저 침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왔는가?”

“네. 보르단 님.”

두르고 있는 망토에서 짙은 피 냄새가 흐르는 소년.

블라드를 처음 본 시장은 그가 가지고 있는 외모에 한 번 놀랐고 풍기고 있는 분위기에 한 번 더 놀랐다.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곱상하게 생긴 얼굴 안에 짐승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누구나 동경할 법한 금발은 피에 젖어 번들거렸고,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밤에 보아도 새파랄 정도로 기이한 빛을 품고 있었다.

“준비는 해뒀네.”

“감사합니다.”

“그러지말고 지금이라도 병사들과 같이 진입하는 것이 어떤가? 자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정말 요제프 님을 뵐 면목이 없어져.”

블라드는 보르단의 말을 듣고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관된 태도는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갈 정도였다.

“제가 다쳐도 보르단 경에게 피해 안 가게 할게요.”

“······그게 안 된다니까.”

소년의 결심을 확인한 보르단은 자신이 손수 움직여 블라드의 고유깃발을 꺼내 들었다.

아직 두 개의 문장밖에 박혀있지 않은 깃발이었으나 이것을 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개인에게는 큰 영광인 물건이었다.

“저게 배너(Banner)인가?”

“이제는 사라진 전통인 줄 알았더니.”

블라드와 보르단이 걸어가는 옆으로 병사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금부터 보는 광경은 북부의 역사에서 잊혀져 가는 장면의 재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깃발을 땅에 꽂게.”

“네.”

블라드는 보르단에게 넘겨받은 자신의 깃발을 땅바닥에 꽂아 넣었다.

이 땅은 지금부터 나의 영역이다.

나를 보증하는 명예로운 이름들 아래서 지금부터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하겠다.

너희들의 목숨까지도.

“좋아.”

소년의 선언이 제대로 박힌 것을 확인한 보르단은 품속에서 양피지를 꺼내 펼쳐 들었다.

소년은 명예로운 깃발을.

뚱뚱한 기사는 백작의 명령서를.

두 개의 검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다.

“뒷골목의 무뢰배 외팔이 잭은 들어라! 너는 그동안 바예지드가 내건 규칙과 법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왔다!”

예의와 절차에 약한 블라드를 대신하여 보르단이 양피지를 펼치며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읽어내려갔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당당하게 외치는 보르단의 모습을 보며 과연 기사는 다르다 손을 치켜들 모양새였다.

“이에 쇼아라의 정당한 주인인 나 페테르 바예지드는 너의 패악을 더는 지켜볼 수 없음에 나의 대리인인 블라드를 보내니 지금부터 그가 행하는 모든 권한은 쇼아라의 정당한 주인인 나와 신실한 교회가 동시에 증명하는 권리이다!”

요제프가 작성하고 페테르가 승인했으며 바예지드의 기사가 선언한 명령문이 끝나자 병사들의 함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예지드! 바예지드!”

“외팔이 잭을 죽여라!”

“신께서 그를 보호하신다!”

“외팔이 잭과 그의 부하들은 문을 열어라! 정당한 대리자를 받아들여라!”

그러나 보르단의 근엄한 선언이 끝났음에도 장미의 미소는 여전히 굳게 닫혀있을 뿐이었다.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문을 열든 열지 않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저 가혹한 파멸일 뿐일 테니까.

“내 일은 끝났네.”

“감사합니다.”

장식 없는 검의 손질을 마무리한 블라드가 보르단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안에 있는 인원이 50명은 된단 말일세. 그러니······.”

“제가 이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알겠네.”

굳게 결심한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보르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발짝 물러섰다.

자신만의 세계까지 가진 녀석이니 고집도 남다르겠지.

원래 스스로의 길에 확신이 있는 자만이 오러를 다룰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움직일 수 없는 요제프와 자야르를 대신하여 소년을 보좌하기 위해 내려온 보르단의 일은 이제 끝났다.

그는 훌륭히 시장을 겁박했으며 쇼아라의 행정력을 동원해 외팔이 잭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정당한 대리자의 처형식뿐이었다.

“······.”

블라드는 가만히 장식 없는 검을 치켜든 채 눈을 감았다.

마치 기도라도 하는 듯한 블라드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정당한 대리자의 면모에 걸맞은 모습이라 다들 생각하고 있었으나 언제나 그랬듯이 실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미 준비하고 있을 거다.]

‘알고 있어요.’

[시야를 넓혀야 해.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투가 될 거다.]

‘각오했어요.’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데 성공한 블라드.

소년은 더는 소리 내어 목소리와 대화하지 않았다.

세계와 세계의 경계에서 통하는 지평선이 있었으니까.

[시작은 화려하게 해라. 모든 전투에서의 기본은 기선제압이다.]

목소리의 마지막 조언을 들은 블라드는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장식 없는 검에 천천히 빛무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오러다!”

“저 나이에?”

웅성거리는 병사들.

그리고 창가에서 동향을 살피고 있던 잭의 부하들도 화들짝 놀라며 커텐을 닫고 있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금 오러를 빛내고 있는 소년은 의외성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블라드는 생각했다.

그날 자신이 고딘을 불러오지 않았다면 호르헤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외팔이 잭이 호르헤를 위협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고딘을 불러왔을까?

“나는 정당한 대리인이기 이전에 정당한 복수자이기도 하다.”

그동안 수없이 고민했던 만약의 만약이 소년의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지만, 결국 이어지는 결론은 하나였다.

외팔이 잭을 죽여야 한다.

“우리의 항쟁을 마치러 이곳에 왔다.”

그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를 좀먹고 있다.

요제프의 말처럼 너저분한 인연을 끊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돌아왔다. 외팔이 잭!”

외마디 외침과 함께 깨어진 둥지, 장미의 미소를 향해 소년이 달려들었다.

내가 돌아왔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콰아아앙-!

단단히 모아두었던 소년의 세계가 잭의 세계를 갈라내었다.

소년의 강렬한 두들김에 빼앗겼던 장미의 미소가 마침내 품을 열었다.

※※※※

끄아아아-!

뭔 놈의 힘이!

문을 틀어막고 있던 사내들이 뒤로 나자빠지며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일개 조직원들에 불과한 사내들은 자신의 세계를 이룬 소년의 일검을 막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자들이었다.

“못 들어오게 막아!”

“내리쳐라!”

흩날리는 나무 파편 사이에서.

소년의 금발이 흩날렸다.

누군가의 핏방울과 함께.

장미의 미소를 들어서자마자 곳곳에서 번뜩이는 누군가의 칼날들.

문을 부수며 달려드는 소년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밀었으나.

텅-! 텅텅텅텅!

번뜩이는 소년의 반격기가 악의 어린 칼날의 빗속에서 길을 만들어내었다.

너희들의 내려침은 성벽 같았던 기사에 비한다면 미약하기 그지없다.

“끄아아악!”

“이 미친!”

블라드는 더이상 반쪽짜리 반격기를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틈을 만들어냈다면 파고들어야 한다.

파고들기 위해서는 검을 뻗어야 한다.

자야르가 그렇게 말했었다.

고딘은 일검에 모든 호르헤의 단검들을 베어내었지만 블라드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몇 명 정도라면 가능할 것이다.

“흐아아아!”

소년의 검이 순간 빛을 발했다.

순식간에 중심을 잃어버린 잭의 부하들은 그저 아무런 방도 없이 자신들의 여린 몸을 내줬을 뿐이었다.

소년의 검끝에서 그날과 같은 장미꽃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물 던져! 쇠 그물!”

들소처럼 강렬히 전진하는 소년의 움직임에 잭의 부하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소년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블라드가 아니었다.

“빨리!”

이제야 사태를 확실히 파악한 잭의 부하들이 발악해대었지만 블라드는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촤악-!

거대한 로비, 그리고 그 로비를 네모나게 둘러싸고 있는 위층의 복도들.

그곳에서부터 던져지는 쇠그물들이 있었다.

소년이 있던 자리로 빈틈없이 떨어지는 그물들이었으나 블라드는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이미 시야를 넓게 퍼트려 놓았던 상황이었다.

“······!”

악의를 감지한 블라드는 눈을 감아도 걸을 수 있는 익숙한 현관을 따라 재빠르게 몸을 굴려댔다.

언제나 자신이 밀대질을 하던 현관이었다.

“너무 빨라!”

“우리 쪽에서는 안 닿아!”

빠른 움직임으로 그물들을 벗겨내고 교묘하게 기둥 뒤에 숨어 사내들의 사각에서 움직이던 블라드는 어찌할 줄 모르고 서 있는 자들에게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댔다.

“으아아악!”

“저 자식 너무 빨라!”

타고났던 날렵한 기질에 고등의 훈련까지 받은 블라드의 움직임을 잭의 부하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소년은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이었다.

“계단만 막아! 여기 계단 하나야!”

“단단히 틀어막은 다음에 달려들게 만들라고!”

준비했던 수가 막히자 잭의 부하들은 재빠르게 중앙에 있는 계단 쪽으로 몰려들었다.

높고 좁은 곳을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건 전략의 기본 상식 중 하나였다.

‘······!’

그리고 그 상식은 소년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계단으로 몰려드는 잭의 부하들을 보며 블라드가 눈을 빛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전장을 통제하는 데서 나온다.

의외성으로 적을 부수고 전장을 통제해 상대방을 자신의 세계 안에 가둔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상대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다.

“저게 뭐야!”

블라드는 재빨리 입구부분에 있던 창문 쪽으로 달려가 창가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커튼의 끈을 베어내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따라 올라가는 줄을 잡고는 2층을 향해 뛰어올랐다.

키가 작았던 붉은 머리 소녀를 위해 대신 걷어주었던 커튼이었다.

“미친! 날아왔잖아!”

“무기 들어! 달려든다!”

소년의 의도에 갇히고 만 잭의 부하들이 달려오는 블라드를 막기 위해 벽을 세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것밖에 안 되나! 개자식들아!”

블라드가 사납게 외쳐대며 사내들을 베어내었다.

사내들이 들이미는 칼날은 날카롭기 그지없었으나 정작 다가오는 방향은 무딜 뿐이었다.

차라리 자야르와의 대련이 훨씬 위협적이었다.

“으아아악!”

“활! 활 가져와!”

예상보다 너무 빠른 등장이었으나 활을 쏠 줄 아는 몇몇이 3층에서 내려와 블라드에게 시위를 메겼다.

“······!”

1층은 로비, 2층은 창관.

“쏴!”

소년은 재빨리 방의 문을 열어젖히며 화살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

초가 짧다며 억울하게 얻어맞았었던 안나가 있던 방의 문이었다.

타다다당-!

좁은 복도였기에 피할 수 없었던 화살들은 창녀들의 방에 달려 있던 문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었다.

마르셀라가 특별히 주문했던 방문은 지금 잭의 부하들에 의해 걸레짝이 되고 말았지만, 그녀라면 용서해줄 것이다.

“으악!”

블라드는 열려있는 방문들 안으로 아직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잭의 부하들을 난폭하게 집어넣었다.

갑작스레 좁은 곳에 갇혀버린 사내들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죽어!”

“으아아아!”

창녀들 대신 침대에 던져지고 만 사내들이 날카로운 검에 꿰뚫리고 있었다.

한 방에 창녀는 한 명씩.

초팔이인 블라드는 착실하게 장미의 미소의 룰에 따랐다.

타다다당-!

문을 열어젖혀서 화살을 막고.

누군가를 잡아채서 찌르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작업을 반복하며 블라드는 전진하고 있었다.

4층에 있을 외팔이 잭을 향해서.

20실버짜리 짧은 초는 욕정을 토해내기에는 짧은 시간만을 주었으나 이제는 그 누구도 불평하지 못할 것이다.

블라드가 방 안으로 밀어넣은 사내들은 언제까지나 축축한 침대 위에 누워있을 테니까.

“올라가! 올라가!”

“저런 미친 새끼가!”

“저거 블라드 맞아?”

1층에서도 2층에서도 소년을 막지 못한 잭의 부하들이 3층을 향해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초반에 짜놓았던 진형 따위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스무 명은 넘게 벤 것 같군.]

목소리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몸놀림을 보이는 소년을 보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재능과 치열한 노력, 그리고 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까지.

소년은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타고난 존재였다.

“계단 막아!”

“괜찮아! 이번에는 커튼 없어!”

다시 한번 계단을 틀어막은 잭의 부하들은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는지 들고 있던 무기들을 치켜든 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들어와 봐! 개새끼야!”

“······후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던 블라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상황을 판단했다.

아무리 자신만의 세계를 갖췄다 할지라도 저런 좁은 틈을 향해 몸을 내던지는 것은 사양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쯤이었던가?’

블라드는 위를 쳐다보며 시체만이 즐비한 2층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찾아야 하는 흔적들이 있었다.

‘여기다!’

그의 사수이자 선배인 버레이는 요령은 좋았으나 천성이 게으른 자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버레이는 뭐든지 대충 때우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소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어쩌면 후배를 위한 마지막 배려일지 모를 흔적이었다.

콰직-!

“······뭐야?”

“저게 왜 뚫려?”

그저 검 끝만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2층 천장이 뚫리고 있었다.

버레이가 수리한 곳이었다.

멍청히 무기를 들고 있는 잭의 부하들을 향해 블라드가 미소를 지었다.

“들어갈게. 새끼들아.”

“저놈 막아!”

“올라온다. 저 미친놈이 올라온다!”

사내들의 발작 같은 외침을 뒤로한 채 블라드는 검을 집어넣고는 빠르게 복도를 내달렸다.

“막아--!”

거기서부터 얻은 추진력을 이용해 뛰어올라 능숙하게 구멍이 뚫린 바닥에 자신의 손을 얹어놓았다.

자유로워진 양손을 이용해 솟구치듯 구멍을 오른 블라드는 다시금 재빨리 검을 빼 드는 데 성공했다.

“하아······.”

정당한 복수자.

타고난 살육자.

3층으로 올라오는 데 성공한 블라드는 마치 제집에 돌아오기라도 한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창녀들의 방에 놓여있던 물 주전자를 꺼내왔다.

“······.”

그런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잭의 부하들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어야만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잠깐 쉴까? 나는 계속할 수 있긴 한데.”

“이······런 씨발!”

물 주전자의 입구를 들이켜며 웃고 있는 소년.

자신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진해지는 미소를 보며 잭의 부하들은 공황에 빠져들어 갔다.

“그동안 집 빌려준 값은 받아야지. 새끼들아.”

잭의 부하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영역인 줄 알았겠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곳은 장미의 미소.

소년의 둥지였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3화 17

장미꽃을 피운 소년

뒷골목의 밤은 도시의 낮보다 밝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기에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밤에 활동하기 마련이었다.

그중에서도 밀수업을 주업으로 삼는 캡틴 후버의 조직원이라면 두말할 필요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캡틴 후버의 조직원 중 하나인 절름발이 하벤.

그는 지금 서류 하나를 집어 든 채 골머리를 앓는 참이었다.

“외팔이 잭이 미쳐가는구만······.”

지금 그가 들고 있는 장부는 곳곳이 비어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채워 넣어야 하는 하벤은 서류에 무엇을 써넣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뒷골목을 지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외팔이 잭.

창녀들의 기사는 무너졌고 다른 조직들도 심하게 쪼그라들고 만 상황에서 이제 감히 그에게 고개를 들 수 있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밀수업이라는 특별한 업에 종사하고 있던 캡틴 후버 정도나 잭의 견제에서 조금 자유로운 정도였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었다.

“······자꾸 이렇게 대놓고 약탈을 해버리면 어쩌라는 말이냐.”

하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외팔이 잭은 언제나 선을 지키는 자였다.

마른걸레를 쥐어짜 한 방울의 은화를 만드는데 도가 튼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채무자들을 막다른 곳까지 밀어 넣으려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까지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쥐 정도는 되는 사람들의 배를 가르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외팔이 잭은 호르헤가 죽고 난 뒤부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정잡배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로 악랄하게 사람들을 수탈했고 그로 인해 뒷골목의 경제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예 잭이 술독에 빠져 사느라 조직을 관리하고 있지 않다고 했는데 하벤은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견제할 사람이 없어진 돈벌레들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일단 보고를 올려야 되겠네.”

결국, 하벤은 오늘도 잭의 부하들에게 약탈당하고 만 물품들을 적어 후버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역정이야 듣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이 하벤이 맡은 업무였으니까.

끼이이익-

겨우 책상 하나 들어갈 만한 방에서 빠져나온 하벤은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젊은 조직원과 마주쳤다.

“하벤! 들었어?”

“뭐를?”

구역 순찰을 담당하던 조직원은 무언가 큰 것이라도 물고 왔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하벤에게 입을 열었다.

“뒷골목이 봉쇄되었다는데?”

“왜?”

“외팔이 잭을 잡으려고 스투르마에서 사람이 왔대. 쇼아라의 경비병들이 죄다 여기를 둘러쌌다니까.”

“아아······.”

하벤은 그 말을 들으며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외팔이 잭은 결국 선을 넘고야 말았구나.

하벤은 그럴 만도 하지라고 생각하며 짚고 있던 지팡이에 힘을 주었다.

그가 잡혀 나가고 난 뒤에는 정말 많은 일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며.

“그런데 말이야. 너 그 녀석이랑 친하지 않았나?”

“누구 말이야?”

후버의 집무실로 가려던 하벤의 등 뒤로 조직원의 말이 들려왔다.

“블라드 말이야.”

“······블라드는 왜?”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이름이 흘러나오자 하벤은 등을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 녀석은 왜?”

“아니,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말이지······.”

조직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확실하지 않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스투르마에서 온 집행인이 금발이라고 하더라고. 거기다 자기를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했다던데. 그럼 그 녀석 아니야?”

“뭐?”

익숙한 단어들이 들려오자 하벤은 지팡이를 짚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진짜야?”

“그렇다니까. 지금 장미의 미소 앞에다가 깃발을 꽂았다고 하더라니까?”

“······.”

금발, 블라드, 그리고 장미의 미소.

모두가 누군가와 연관이 있는 단어들이었다.

하벤의 가슴이 뛰고 있었다.

“이거 받아.”

“어?”

하벤은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조직원에게 넘겨준 뒤 서둘러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가!”

“가봐야 해. 가서 확인해 봐야 해.”

정보와 소식에 민감했던 하벤은 이미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데어마르의 결투에서 오러를 발휘하고 이번 데스웜 사냥에서 활약했다는 바예지드의 어린 종자.

‘진짜일지도 몰라!’

그러나 들리는 풍문만으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블라드라고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너무나 대단한 일들을 해왔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블라드는 분명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었지만 그렇게 큰일을 했다기에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또 채찍 맞는다고!”

“좀 늦는다고 그래!”

자신이 알고 있는 금발인지 확인하기 위해 봉쇄된 거리를 나서는 하벤.

지팡이를 의지한 채 걷는 그의 절뚝거리는 발걸음은 분명 예전보다 더 비틀어져 있었다.

※※※※

“그동안 이빨이라도 좀 채워 넣지 그랬어.”

“흐으······.”

블라드는 자신의 발밑에서 힘없이 시선을 맞추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호르헤의 초팔이였던 시절 외팔이 잭과 함께 들어와 초 상자를 엎은 녀석이었다.

그때 후려쳤던 녀석의 이빨이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제는 필요 없긴 하겠네.”

블라드는 조용히 쓰러져 있는 남자의 가슴에 천천히 검을 밀어 넣었다.

“끄으으······.”

폐를 찔려서인지 제대로 된 신음 한번 못 지른 남자는 피거품을 문 채로 천천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아······.”

블라드는 잠시 한숨을 쉬며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피로 가득한 복도.

부서져 있는 계단.

침묵하고 있는 창녀들의 방.

50명이 넘었던 외팔이 잭의 부하들 모두가 소년의 검에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모두가 숨죽인 채로.

[이 정도면 됐다.]

“······.”

목소리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장식 없는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었다.

소년은 굳이 스스로를 고난의 길로 몰아넣었다.

푸른 달빛의 기사를 목표로 삼고 있는 이상 블라드도 그가 남겨놓은 발자취에 어떻게든 따라붙어야만 했다.

“그래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는 된 것 같네요.”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는 그날의 광경을 어느정도는 재현해 낼 수 있었다.

곳곳이 소년이 피워낸 장미꽃들로 가득했다.

“······마무리는 지어야지.”

땀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이마에서 훔쳐낸 블라드는 잠시 벽에 기대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1층은 로비. 2,3층은 창관.

그리고 4층은 조직원들의 공간.

그곳에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정해진 식단을 해치우던 창녀들의 기사가 있었다.

“······.”

블라드는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갔다.

끼이이익-

그날의 불길한 소리는 여전히 이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리가 필요한 계단이었으나 반년이나 방치해놓았다는 이야기는 장미의 미소가 그동안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르셀라가 기겁을 하겠는데.’

그리웠던 계단을 오르며 블라드는 무심코 예전과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는 소년은 더 이상 초를 파는 블라드가 아니었다.

“······저 왔습니다. 보스.”

정당한 복수자이자 명예로운 자의 대리인이 마침내 마지막까지 올라왔다.

“오, 그래. 유망주. 어서 와라.”

3층에 모든 부하들을 밀어 넣었는지 4층에는 오직 외팔이 잭 혼자만이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잭은 반갑다는 듯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두들겼지만 블라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재미없게스리.”

블라드가 흉흉한 기세로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외팔이 잭은 고개를 돌려 홀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아마 이것이 잭의 마지막 잔이 될 것이다.

“네가 진짜 쇼아라의 블라드였구나. 소문을 듣긴 했었지.”

“여기까지 퍼졌었나요?”

“재작년에 너를 데려왔어야 하는 거였어. 그때 담당자가 누구였더라.”

외팔이 잭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하다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하긴 그 새끼도 이미 뒤졌겠지.”

들고 있던 잔을 입안으로 털어넣은 잭은 천천히 일어나 소년 앞에 마주 섰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라 다행이구만.”

허리춤을 추켜세우며 복장을 단정히 한 잭은 한 손에는 커틀러스처럼 보이는 짧은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갈고리를 빼든 채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하기 싫어 내버려 두긴 했는데 나는 원래 마무리는 확실히 하는 사람이야.”

너절한 인연.

자신의 세계를 좀 먹는 세계.

“······.”

하지만 직접 마주한 외팔이 잭은 소년이 우러러보았었던 그때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추락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소년의 세계가 넓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팔이 잭의 세계는 더 이상 소년을 가둘 수 없었다.

“갑니다.”

비록 원수와도 같은 자였지만 블라드는 외팔이 잭에게 마지막 예우를 다해주기로 했다.

까아앙-!

비록 뒷골목식 예우라 거칠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크윽!”

잭은 칼과 갈고리를 교차해 블라드의 검을 막아내었다.

이 정도는 해야 막지 않겠나 싶어서 두 손으로 막은 것이었지만 직접 마주한 블라드의 기세는 자신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그래! 이 정도는 했으니까 거기까지 기어 올라갔겠지!”

소년의 성장을 보며 잭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잭도 꿈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또한 형태는 다를지라도 별이라는 것을 품었던 사내였다.

그렇기에 소년이 겪어온 역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훌륭하다!”

“······!”

검과 검의 맞부딪힘 속에서 터져나가는 불꽃들.

자신을 오랫동안 옭아매고 있던 세계를 향해 소년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더는 잭의 세계가 자신을 가둘 수 없음을 알기에.

“끄으응!”

잭은 최선을 다해 소년의 검을 받아주었다.

비틀거릴지라도, 추해 보일지라도.

아마 이것이 자신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자 선택일 것이다.

“호르헤가 봤으면 좋아했겠군!”

“닥쳐!”

감히 원수 주제에 호르헤를 들먹이는 잭을 보며 블라드는 사납게 소리 질렀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호르헤를 죽이는 데 일조하고 깨어진 장미의 미소를 집어삼켰으며 마르셀라를 팔아치운 개자식이었다.

너는 비참하게 죽어야만 한다.

“흐······하하!”

고통과 후회, 허탈함과 담담한 그 사이에서 잭은 왼팔에 있는 갈고리를 휘둘러댔다.

그가 쥐고 있던 커틀러스는 이미 오른팔과 함께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으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다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 거라 믿으며 치열하게 살아왔을 뿐이었다.

‘차라리 이게 낫겠지!’

외팔이 잭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호르헤처럼 거대한 세계에 깔려 죽는 것보다야 자신을 밟고 올라가려는 어린 세계에 밟혀 죽는 것이 나을 테니까.

어차피 자신의 인생이 여기까지라면 스스로의 선택으로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너는 나보다는 높게 올라가겠구나!”

“닥치라니까!”

아직 세월의 깊이를 간직하지 못한 소년은 잭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분노에 찬 일격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심장은 뜨거웠을지라도 들고 있는 검은 차갑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크윽!”

그 서늘함이 잭의 내장을 꿰뚫고는 등 뒤로 튀어나왔다.

피를 머금은 검 끝에서 선홍빛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너절했던 인연을 끊고 진실로 자유로운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할 말은?”

“······.”

형편없이 숨을 헐떡이는 소년.

있는 힘을 다해 이곳까지 기어 올라온 소년을 보며 잭은 조용히 갈고리를 들어 자신이 앉아 있던 곳을 가리켰다.

“······쉬다 가라. 수고했다.”

“······뭐?”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블라드의 검을 빼내는 외팔이 잭.

“흐으윽!”

내장이 뽑혀 나가는 아픔에도 그는 억지로 일어서 난간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이 정도면 됐지.”

잭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을 보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잘했지.”

그는 만족했다.

악하게 살았으나 그의 인생은 치열했다.

비록 마지막은 거대한 세계에 짓눌려 형편없이 구겨지고 말았으나 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

마지막으로 잭은 결국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건물을 향해 큰 소리를 내질렀다.

“잘 놀다 갑니다. 호르헤!”

블라드는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외팔이 잭을 보았다.

난간을 넘어 로비로.

4층에서 1층으로 떨어져 내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쾅-!

그날의 호르헤와 마찬가지로 떨어져 내린 세계.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 속에서 오직 떨어지는 핏방울만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

복수는 달콤한 것.

그렇기에 마땅히 해야 하는 것.

그러나 소년의 혀끝에 맴도는 씁쓸한 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친 블라드는 이제야 지친 발걸음으로 잭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그곳에는 소년을 기다리고 있던 술잔 두 개가 있었다.

블라드는 잭이 비워버린 잔 옆으로 가득 담겨 있는 술잔 하나를 보았다.

방금 잭이 무엇을 말했는지 눈치챈 블라드는 가만히 앉아 자신을 위해 따라놓은 술잔을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소년이 앉아 있는 자리.

비어 있는 술잔 두 개.

“······돌려줄게요. 보스.”

그리고 반짝이는 금화 하나.

소년은 그날 외팔이 잭이 주었던 금화를 다시 돌려주었다.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야만 하므로.

이곳은 장미의 미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고여있는 곳.

오늘 고여있던 물방울 하나가 세상 밖으로 흘러내렸다.

소년의 세계의 작은 파문을 남긴 채.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4화 13

내가 너희들을 찾을 때 (1)

희미하게 밝아오는 여명이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장미의 미소.

소년이 만들어낸 화려한 화원.

화려한 붉은색으로 물든 소년이 힘겨운 걸음걸이를 옮기고 있었다.

자신이 피워낸 수많은 장미꽃을 뒤로 한 채.

“······.”

달콤한 쾌락의 끝에는 언제나 허무함이 깃들고는 하는 법이다.

복수는 달콤했으나 기어이 그것을 먹어 치우고 난 뒤의 허탈함만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쇼아라의 병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피칠갑이 된 채 건물을 빠져나오는 소년을 보고 있었다.

설마 했으나 정말로 50명을 베고 나와버린 소년.

자신들이 감히 다가갈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쌓고 온 소년을 보며 병사들은 경의와 함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기 위해 내려온 보르단마저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처형인이자 복수자는 그렇게 홀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직 장식 없는 검만을 의지하면서.

그 순간.

“블라드! 블라드--!”

병사들의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가 있었다.

“블라드! 여기다! 나 하벤이야!”

아직 자신만의 세계에서 완벽히 빠져나오지 못했던 소년은 그리웠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푸른 눈동자에 맺힌 모습.

볼품없는 지팡이 하나가 병사들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하벤.”

지평선 끝에 서 있던 소년의 시선이 점점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볼품없는 하벤의 지팡이.

그것은 절뚝이며 걷는 하벤을 위해 소년이 직접 깎아준 것이었다.

“하벤?”

블라드는 자신을 애타게 찾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향해 자그맣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재빨리 자신들의 뒤에 있던 갈색 머리 남자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야 임마······.”

시야가 트이고 길이 열리고.

하벤은 그렇게 열린 길 앞에서 정말로 자신이 찾고 있던 소년이 눈앞에 있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보다도 새빨갛게 물들어 처참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년의 모습이 하벤의 가슴을 아프게 뚫고 들어왔다.

“괜찮, 괜찮냐?”

서둘러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병사들 사이로 헤치고 나오는 하벤.

“······아아, 아이고.”

블라드는 기대고 있던 장식 없는 검을 집어넣으며 다가오는 하벤을 껴안았다.

소년을 꽉 조이고 있던 긴장을 풀고 안고 있던 허탈함을 내던진 채 진실로 자유로운 모습으로.

“아······씨. 진짜 아파. 여기저기 막 아파.”

“이게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하벤은 자연스럽게 자신에 안겨 오는 소년을 받쳐주기 위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장식 없는 검에 의지하던 블라드.

볼품없는 지팡이에 의지하던 하벤.

둘은 스스로를 지탱하던 것들을 내려놓은 채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로 그렇게 세상에 서 있었다.

하나의 담요로 서로를 의지하던 그때의 모습처럼.

“······이제야 돌아온 것 같네.”

블라드는 하벤의 품 안에서 두 눈을 감았다.

※※※※

밤하늘의 달이 지고 오늘의 태양이 떠오른 쇼아라의 아침.

어제 있었던 난리는 오간 데 없다는 듯 도시의 뒷골목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밤이 아닌 낮에 활동해야 하는 소년은 점점 번져오는 햇살을 맞으며 눈을 떴다.

‘······적응이 안 되네.’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소년이 눈을 뜬 장소는 뒷골목이 아니었으니까.

쇼아라는 소년의 고향이었으나 뒷골목을 벗어난 지역은 여전히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오오오. 천천히 일어나라고 대장.”

블라드가 눈을 뜨자마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고트가 재빨리 물을 떠다 주었다.

“······삭신이 다 쑤시네.”

“그렇지. 그럴 만도 하지.”

마실 물도 모자라 세숫물까지 준비해 놓은 고트는 마치 자신이 집사라도 되는 양 수건을 팔뚝에 걸치고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왜 이래.”

“왜냐니. 원래 이랬잖아.”

수상쩍은 고트의 행동을 보며 블라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작작 해.”

“······알았어.”

어색하게 웃고 있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했다.

조급할 만도 하겠지.

쇼아라에 남아있던 블라드의 인연들이 하나둘 보이고 있었으니까.

고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들처럼 느껴질 것이다.

“일만 잘하면 적당히 챙겨줄 테니까.”

“······.”

자신의 속셈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는 소년의 말을 들으며 고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직 고트는 소년이 정한 선 안에 들어서지 못했다.

소년이 생존을 위해 쳐 놓은 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이 언제야?”

“벌써 점심이 지났어.”

고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멍하니 창밖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았다.

과연 햇빛의 색깔이 짙은 것이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것이 맞는 모양이었다.

“몸 상태가 괜찮으면 보르단 경이 잠깐 보자고 그러던데.”

“그래야지.”

외팔이 잭은 죽었다.

그의 부하들 또한 소년이 전부 죽여버렸다.

그렇다 할지라도 외팔이 잭의 그림자가 한 번에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뒷골목에서 뿌리내린 자였으며 모든 것을 지배했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보르단 경이 바쁘기는 하겠어.”

블라드는 그동안 조직의 보스들이 패배하거나 밀려나는 과정들을 바로 옆에서 보아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뭐든지 새로운 물결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부산스러워지는 법이었다.

“끄응······. 도와주기는 해야 하겠네.”

블라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모든 일에는 언제나 마무리라는 것이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

“마르셀라라는 여자는 잘 보호해두었다. 좀 시달렸던 모양이야.”

“감사합니다.”

“나중에 알아서 꺼내 가라고.”

“네.”

블라드는 마르셀라의 상태가 괜찮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보르단 앞에 놓인 간식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하나 줄까?”

“······혹시 혼자 다 드셨나요?”

잔뜩 쌓여있는 각설탕들, 흔적조차 남지 않은 디저트들.

뚱뚱한 기사가 해치워버린 달달한 것들의 시체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렇게 먹으면 죽어요.”

“안 먹으면 죽을 거 같아.”

대답을 하면서도 마시고 있던 커피에 각설탕을 집어넣는 보르단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앞으로 어쩔 거냐?”

“······글쎄요.”

자신만의 집무실을 갖춘 보르단의 모습은 정말 그럴싸해 보였으나 그의 본모습을 알고 있던 블라드로서는 그저 신선할 뿐이었다.

“너 때문에 예상보다 일이 빨리 끝났어. 뭐 나야 뒷일을 처리하느라 바쁠 테지만 공식적으로 너의 할 일은 끝났다 볼 수 있지.”

“도와드릴게요.”

보르단은 두툼한 턱살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안 했으면 실망했을 거야.”

“원래 하려고 했어요.”

늙은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랍 안에서 양피지 하나를 꺼냈다.

“이거 들고 다니면서 내가 부탁한 일들을 적당히 처리해 주면 돼.”

“이게 뭔데요?”

글자를 읽을 줄은 알았으나 익숙하지 않았던 소년은 더듬더듬 양피지 안에 쓰여 있는 글자들을 읽어내려갔다.

“경비대······장 권한······대리.”

“체포권이다.”

“음. 체포권.”

“적당히 쥐어패도 된다는 허가증이기도 하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에게서 양피지를 돌려받은 보르단은 재빨리 그 안에 서명을 적어넣었다.

그러나 정작 쓰고 있는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닌 쇼아라 시장의 이름이었다.

“외팔이 잭의 잔재들이 아직 뒷골목에 남아있지. 요제프 님은 이번 기회에 쇼아라의 뒷골목을 손보고 싶어 하신다.”

거대한 잡초가 뿌리뽑혀 나갔으니 빈자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잡초를 뿌리 뽑은 것도 큰 성과이긴 했으나 그 안에 그럴싸한 것들을 채워 넣는다면 더한 성과가 될 것이다.

요제프는 언제나 다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거라면야·········.”

블라드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소년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블라드는 누구보다 뒷골목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요제프 님이 오실 때까지는 너는 공식적으로 대기인 상태야. 가끔 내가 하는 일만 도와주면 되니까 말이지.”

보르단은 옆에 놓여 있던 캐러멜들을 들이밀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당분간은 쉬면서 옛 친구들 찾아가서 회포도 좀 풀고 그래라. 수녀원에 있다던 여자친구도 꺼내오고.”

“······친구라니까요.”

말로는 부정했으나 손으로는 캐러멜 몇 알을 챙긴 블라드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늘은 일단 쉬어라. 나는 할 일이 많아.”

“도와드린다니까요.”

지금 당장이라도 수녀원에 가고 싶은 블라드였으나 그곳은 자신이 가고 싶다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엄연히 세속과 떨어져 있는 경건한 장소였기에 들어갈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고트가 따로 방문을 신청해놓기는 했지만 아마 이번 주 안에는 제미나를 찾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지금 감옥에 외팔이 잭의 자잘한 잔챙이들이 있거든? 적당히 심문하고 와. 잭이 숨겨놓은 재산이라던가 뭐 이런 거.”

“······.”

외팔이 잭의 자잘한 잔챙이들.

그 소리를 들은 블라드는 자신이 쇼아라를 탈출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제나 아쉬움 없이 당당하게 살고자 했던 소년이었으나 삶이란 것은 결국 누구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는 했다.

“잘됐네요.”

보르단이 건네준 양피지를 품에 챙긴 블라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도 그곳에서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요.”

쉽사리 끊기지 않았던 주고받는 관계에서 이번에는 소년이 내주어야 할 차례였다.

※※※※

경비대에 마련되어 있는 지하 감옥.

이번에 잡혀들어온 잭의 끄나풀들은 제대로 빛도 들지 않는 곳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와 함께 서로에게 닿는 체온이 심히 불쾌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거리에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는 자신들에게는 그 어떤 구원도 없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들어오려면 허가가 있어야······.”

“여기. 이거 방금 받은 겁니다.”

“······확인했습니다.”

철컹-

횃불 말고는 빛 한점 없던 공간에 잠시 오후의 햇살이 비치고.

어두운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색 하나가 발을 내디뎠다.

갑작스레 들어온 사내를 보며 창살 안에 갇혀 있던 몇몇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던 몇몇은 지금 들어오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알고 있었으니까.

“······.”

그러나 창살 안에 있던 남자들은 쉽사리 창살 밖을 걷고 있는 소년을 향해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얼굴은 익숙했으나 풍기는 기세는 그렇지 않았다.

같이 뒷골목을 구르던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당당한 기세였다.

“여기 있었네.”

무언가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들을 무시한 채 소년은 창살 안에서 자신이 찾던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가뜩이나 까만 녀석이 수그리기까지 하니까 알아볼 수가 없잖아.”

창살 안에 있던 남자들은 블라드가 시선을 보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소년의 목소리에 검은 피부의 남자가 감옥 안 어두운 곳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검은 사내는 멍한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시궁창에서 살아왔던 인생 중 그 누구도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찾아준 적이 없었으니까.

“오타르. 40실버만 줘봐. 그러면 여기서 꺼내줄게.”

장난스레 창살 안으로 손을 내미는 소년.

그 손을 오타르는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굳이 자신과 다른 피부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외상도 받아준다.”

어두운 감옥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존재.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았던 그때의 소년이었다.

“······고맙다.”

오타르는 그 빛을 따라 난생처음 누군가가 내밀어주는 손을 잡았다.

마주 본 소년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4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5화 45

내가 너희들을 찾을 때 (2)

차가운 겨울날의 수도원.

늙은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다다를 수 있었던 붉은 머리 소녀는 그 앞에서 처량한 모습들을 발견했다.

“원장 수녀님! 열어주세요!”

차가운 겨울날 만큼이나 굳건히 잠겨 있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는 여인.

“저 마르셀라에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흐트러진 검은 머리만큼이나 마르셀라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는 소녀들.

제미나와 같이 데뷔를 앞두고 있던 어린 창녀들이었다.

“······마르셀라?”

굳건히 닫혀있을 것만 같았던 문이 열리고.

한참 늦은 밤에 찾아온 불청객을 늙은 수녀가 불편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밤에 여기는 무슨 일로······.”

“아아! 원장 수녀님!”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라도 찾은 것처럼 마르셀라가 늙은 수녀를 붙잡았다.

“이 아이들을 돌봐주세요. 가엾은 아이들입니다.”

“이게 무슨······.”

원장 수녀는 갑자기 찾아온 것도 모자라 아이들을 맡아달라는 마르셀라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예의를 어긴 것을 넘어 도를 지나치는 행동이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돌아가세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뒷골목에서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나 여유롭게 미소를 짓던 여인이 지금처럼 다급하게 울부짖지는 않을 테니까.

“원장님! 제발!”

“여기는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원장 수녀는 마르셀라의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창녀가 데려온 아이들이었으니 분명 더러운 곳에 몸담는 소녀들일 것이다.

이곳은 신과 가장 가까운 곳 중 하나.

그런 더러운 아이들을 담아둘 수는 없다.

“아니예요!”

서둘러 닫으려는 문틈 사이로 다급히 끼어든 허벅지가 있었다.

“이 아이들은 처녀예요. 주교님께서 지켜보던 아이들입니다!”

“······.”

처녀인 창녀들.

소아성애를 혐오하는 쇼아라의 주교에 의해 생겨난 모순적인 존재들.

원장 수녀 또한 그 아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렇게 갑자기 받아들일 수는······.”

“왜 안돼! 내가 그동안 여기에 바친 돈이 얼마인데!”

야심한 밤. 조용한 수녀원 앞에서 울려 퍼지는 앙칼진 목소리.

방금까지만 해도 가련한 모습이었으나 갑작스레 돌변한 마르셀라를 보며 원장 수녀는 놀라고 말았다.

“그 돈만 해도 여기 애들 10년은 먹이고도 남아! 내가 부탁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마치 새끼를 지키고자 하는 암사자의 눈빛으로 변한 마르셀라를 보며 원장 수녀는 잠시 압도되고 말았다.

“비켜!”

절박하고도 단호한 그녀의 외침에 원장 수녀가 물러나자 마르셀라는 수녀원의 문을 활짝 열고는 뒤에 있는 소녀들을 향해 말했다.

“들어가!”

“마담.”

“마담은 어쩌려고요.”

“너희 걱정이나 해.”

흐느끼며 주저하는 소녀들을 보며 마르셀라는 단호하게 아이들의 어깨를 부여잡고는 수녀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밀린 월급은 이걸로 대신하자.”

한 명 한 명.

창녀의 손길을 통해 신의 품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마르셀라······.”

“그래. 수고했어.”

마르셀라는 차가운 바람에 꽁꽁 언 제미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미소 지었다.

“너나 나나 할 일은 한 거야. 사내놈들은 원래 마무리가 잘 안 되거든.”

주저하는 제미나까지 수녀원 안으로 들여보내자 원장 수녀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앞을 막아섰다.

“당신은 안 돼요.”

신의 품은 넓으나 그곳까지 다다르기에는 자격이 필요했다.

방탕한 창녀인 마르셀라는 신의 품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여자였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았어요.”

신이 아닌 인간이 정한 규칙 앞에서 마르셀라는 멈춰서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의 품 안에 있던 아이들을 무사히 다른 둥지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니 마르셀라는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했다.

“잘 부탁드려요. 다들 일은 잘할 거에요.”

“······.”

어찌할 수 없이 홀로 어둠 속에 남겨지고만 가련한 여인.

탐욕스러운 누군가의 손길은 결국 이곳까지 뻗쳐오고 말았다.

점점 닫혀가는 문틈 사이로 끌려가는 마르셀라의 모습이 있었다.

추운 겨울날의 어둠 속으로 머리채를 잡힌 채.

“마르셀······라.”

그것이 제미나가 본 바깥세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오늘 이곳에서 저희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게 될 겁니다.”

“······예배당이 커서 보기 좋군요.”

블라드는 원장 수녀의 안내에 따라 수녀원을 둘러보는 중에도 계속해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실례인 줄은 알았지만, 혹시라도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견습수녀들 중에서 낯익은 붉은 머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

“그리고 기사님과 같이 기도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과 함께 기도해도 될까요? 은총은 나눌수록 배가 되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찾고 있던 소녀는 보이지 않고 마땅치 않은 손님들만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였구만.’

어쩐지 그동안 수녀원의 방문 일정을 늦추더니 이런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블라드는 진정한 귀족이나 기사들의 세계에서는 아직 한미한 존재일 뿐이었으나 그 밑바닥에서 위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는 충분히 매력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아마 그들이 바예지드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원장 수녀에게 수를 쓴 모양이었다.

“······그렇게 하시죠. 영광입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일단 원장 수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트 이 자식.’

블라드는 고트를 생각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자기가 방문을 신청해두었다고 떵떵거렸었지만 정작 제미나를 꺼내 갈 예정이라고는 말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다 해야 하는구만.’

그렇기에 블라드로서는 지금 원장 수녀에게 최대한 잘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예정되지 않은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테니까.

“······.”

수녀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원장 수녀의 말을 듣던 블라드는 괜스레 허리에 매달려 있는 장식 없는 검을 매만졌다.

이 검을 내어준 소녀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귀찮음쯤이야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여태껏 자신과 함께했던 이 검은 소녀의 눈물로 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

평소와는 다르게 부산스러운 수녀원의 아침.

언제나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보아왔던 풍경을 보며 제미나는 묵묵히 설거지통에 손을 담글 뿐이었다.

‘오늘도 누가 오나 보네.’

가끔 이런 날이 있고는 했다.

외부에 있는 인사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 날이.

“대박이야! 완전 잘생겼어!”

“금발에 푸른 눈이야! 무슨 귀족인 줄!”

외부의 소식이 잘 전해지지 않는 수녀원의 특성상 오늘 방문했다던 사내의 소문은 분명 소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제미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뒷골목에서 자라온 그녀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소녀들이 꿈꾸는 동화와도 같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왜 아직도 밍기적 거리고들 있지? 다들 예배실로 갈 준비를 해라!”

부엌으로 들어온 사감 수녀의 호통에 따라 재빨리 설거지를 마무리하는 견습 수녀들.

그러나 제미나가 속해 있던 곳에서는 여전히 설거지거리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오히려 은근슬쩍 떠넘기기까지 한 결과였다.

“······.”

사감 수녀의 호통에 제미나와 같이 왔던 마르셀라의 아이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미나가 이를 악물고 버텨내듯이 그 아이들 또한 낯선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비록 제미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너는 저거 다 마치고 와.”

“······네.”

사감 수녀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제미나는 홀로 설거지통 앞에 섰다.

아무도 없는 부엌, 들리는 것은 첨벙거리는 물소리뿐.

이곳에서 제미나는 지독히 혼자였다.

“······이젠 습진 걸렸다고 투덜댈 사람도 없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부엌에서 소녀는 조용히 누군가를 추억했다.

소녀에게 있어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때 자신들을 위해 희생했던 마르셀라의 모습과 소년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약속뿐이었다.

※※※※

한 명을 빼고는 모두가 모인 예배당.

화창한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이곳에서 소녀들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속삭임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소문의 기사.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

한창때의 소녀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이곳으로 오게 될 테니까.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오셨으며 사제 안드레아 님이 보증하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소녀들은 원장 수녀가 말한 이름을 되뇌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북부, 그것도 바예지드 백작령에 사는 사람이라면 안드레아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공을 세웠다 한들 종자의 신분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는 없을 터였다.

소녀들은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며 서로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사내는 등 뒤에 훌륭한 기둥들을 세우고 온 사람이었다.

“기도합시다.”

원장 수녀의 진행과 함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는 금발 사내의 모습에 소녀들은 다시 한번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었다.

기도하는 자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잡혀있었기 때문에.

자세만 보아도 얼마나 신실한 자인지를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적어도 검만 추구하며 사는 교양 없는 자는 아닌 것 같은 모습에 소녀들의 가슴은 뛰고 말았다.

‘······빨리 들어가서 서!’

‘죄송해요.’

이제야 겨우 남아있던 설거지를 마치고 온 제미나는 자신을 노려보는 수녀들의 눈치를 받으며 재빨리 구석으로 가 자리 잡았다.

‘······휴.’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다.

이런 일에 너무 늦거나 불참하게 되면 혹독한 질책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미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소녀는 몰랐을 것이다.

저 위에서 기도하는 척하고 있던 금발 사내가 계속해서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늦게 들어온 붉은 머리를 확인했다는 것도.

기도가 끝나고.

예의를 차린 인사들과 웃음소리가 지나고.

점심을 가장한 사람들과의 인맥 쌓기만이 남아있을 때.

‘응?’

기도를 마치고 이제야 고개를 들어 올린 제미나는 제단 앞에 서 있는 금발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느낀 순간부터 제미나는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화려한 머리색이 저절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했지만 제미나는 그것 때문에 금발 사내를 쳐다본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쯧.”

원장 수녀와 그녀가 초대한 손님들과 함께 발맞추어 제단을 내려오던 블라드는 무언가 못마땅한 것이라도 발견했는지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블라드가 혀를 차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자 원장 수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어봤으나.

“······너무 말랐잖아요. 애들 밥은 제대로 먹이는 겁니까.”

“네?”

마치 자신을 타박하는 것만 같은 말투에 원장 수녀는 잠시 놀라고 말았다.

“응?”

“아니······.”

블라드는 그 말 한 마디를 내뱉고는 혼자서 성큼성큼 제단을 걸어 내려갔다.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예의에 어긋난 모습을 보이는 사내의 태도에 이곳에 온 귀빈들과 소녀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제미나 또한 그랬다.

당황의 느낌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어, 어?’

점점 다가오는 금발 사내의 모습.

시야가 명확해질수록 제미나는 자신의 기억 속 누군가가 다가오는 느낌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

블라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소녀의 앞에 섰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소년은 상관하지 않았다.

누가 보든 어떻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야.”

퉁명스러운 블라드의 부름에도 제미나는 큰 눈만 껌뻑이고 있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듯 그렇게 서 있었다.

‘블라드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블라드인가?’

제미나는 블라드였지만 블라드 같지 않은 사내가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 망토, 비싸 보이는 검회색의 가죽 갑옷.

그리고 윤기가 도는 금발과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얼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바짝 말라 있던 소년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제미나가 블라드를 알아보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미나의 머릿속에 있던 블라드는 소년이었으나 지금 눈앞에 있는 블라드는 사내가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넓어진 어깨, 커진 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푸른······.

“여기서는 밥도 제대로 안 주고 옷도 못 빨게 하냐.”

“응?”

제미나는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소년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하. 이 씨.”

블라드는 화가 난 건지 속상한 건지 모를 소리를 내며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제미나 앞섶에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을 닦아내고 있었다.

제미나가 미처 닦아내지 못했던 더러운 물자국이었다.

“······뭐야?”

“아는 사이였어?”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유망한 기사가 볼품없어 보이는 소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곳에 있는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특히 그동안 제미나를 괴롭혔던 소녀들은 숨도 내쉬지 못할 정도였다.

“모지리처럼 이게 뭐야. 야 대답 안 해?”

“······응!”

소년의 따뜻한 어루만짐을 느끼고 나서야 제미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흑! 히익!”

큰 눈 가운데 눈물을 잔뜩 모으고 있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살짝 입술을 찌푸렸다.

“······절차고 나발이고 오늘 바로 나가자.”

제미나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던 블라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의식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느껴봐야 했기 때문이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

좀 더 윤기 났지만, 그때의 소년과 같은 감촉이었다.

“이제 집에 가자.”

“----!”

꾹꾹 참으려 노력했지만 블라드의 마지막 말이 소녀의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흐어어엉-!”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붉은 머리 소녀는 멈추려 해도 멈추지 않는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자.

집이 없던 소녀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이었다.

집이 없고 부모가 없고 먹을 것도 없던 뒷골목의 부랑아들은 서로가 집이었고 부모였다.

하나의 담요로 서로를 감쌌던 그 날의 겨울날을 떠올리며 소녀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예배당에서 오직 소녀의 울음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라 할지라도.

오늘만큼은 신께서도 소녀의 울음소리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녀는 이 세상 그 어떤 사제보다도 신에게 목놓아 감사하고 있었으니까.

쓰레기 더미와 함께 쏟아지던 소년은 그때의 약속을 지켰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약속이었다.

2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6화 27

내가 너희들을 찾을 때 (3)

수녀원에서 나가는 마차 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떨어질 듯 말 듯한 눈물을 그 큰 눈에 매달고는 다소곳이 앉아있는 붉은 머리 소녀가 있었다.

가슴팍에는 한 보따리도 안되는 짐을 껴안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동정심을 자극할만한 모습이었다.

“거기서 많이 힘들었냐?”

“······그냥 그랬어.”

“밥을 잘 안 줬어? 가뜩이나 쪼그만 애가 왜 이렇게 말랐어?”

“······그냥저냥 줬어.”

제미나는 연신 날아오는 질문에 짧게 대답하면서도 계속해서 블라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뭐가······.”

“왜 이렇게 힐끗거리냐고.”

“······.”

제미나는 블라드의 타박에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가 그토록 꿈꿔왔던 광경이었지만 막상 그 상황에 다다르니 그저 어색한 분위기만이 감돌뿐이었다.

“고작 반년 정도 안 본 걸로 어색해하냐.”

블라드는 제미나가 보여주는 미묘한 반응에 나름 섭섭해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너무 달라졌잖아.’

사춘기 소녀의 미묘한 감정은 낳아준 부모도 모르는 법이었으니까.

그 미묘한 감정의 차이는 소녀가 알고 있던 모습에서 제멋대로 벗어나 버린 블라드의 탓도 있었다.

‘진짜 귀족 같네.’

제미나는 자신을 시큰둥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블라드를 흘깃거리며 생각했다.

뒷골목 창녀들에게 인기 있었던 짙은 금발은 지금은 윤기마저 돌아 화려해 보일 정도였고 입고 있는 옷이며 갑옷이며 할 것 없이 전부 부티가 나는 게 누가 보아도 당당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

그 빛나는 모습 앞에 앉아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

제미나는 혹시 블라드의 시선이 닿을까 싶어 끝이 터져있는 소매 끝을 재빨리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런다고 할지라도 초라한 모습이 모두 가려지지는 않겠지만.

뒷골목에서 함께 뒹굴 때는 걸레 같던 담요 하나로 서로를 의지했건만 지금 보이는 소년의 모습은 저 멀리에 있는 것 같아 제미나는 울적해졌다.

이제는 소년의 곁에 서는 것조차도 허락받지 못할 것 같아 그저 안고 있던 짐보따리 속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야!”

“응?”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부름에 고개를 올린 제미나.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으로 갑작스레 날아온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느끼며 제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거 먹고 정신 차려. 아까부터 얼이 빠져서는.”

“······.”

제미나 입속에서 퍼져나가는 단맛을 느끼며 가만히 혀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야?”

“캐러맬. 내가 아는 기사한테서 가져왔어.”

“이 비싼 걸 어떻게 가져왔어? 훔친 거 아냐?”

“······알아서 생각해라.”

그 말과 함께 더는 말하기 귀찮다는 듯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블라드.

제미나는 블라드의 무심한 옆모습을 보며 예전 소년이 가지고 있던 모습을 찾아냈다.

그때도 이랬었다.

배를 주려가며 하루하루 버티던 시절에도 블라드는 소녀를 위한 빵 한 조각을 어디선가 쥐어오고는 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마치 지금처럼.

“흑······.”

흘러내리는 눈물의 짠맛, 처음 맛보는 캐러멜의 단맛.

아스라이 혀끝을 퍼져나가는 재회의 맛을 느끼며 소녀는 매달고 있던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왜 또 우는 거야. 진짜.”

“네가 너무 늦게 왔잖아!”

이제야 참고 있던 눈물들을 내려놓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변해버린 블라드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던 소년의 모습을 찾은 제미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제미나는 그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

뒷골목의 어느 부둣가.

천천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하벤과 블라드는 술병을 곁에 둔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떻게 저 많은 배 중에서 내 거 하나가 없냐.”

“······.”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피해 부둣가로 몰려드는 배들.

작디작은 고기잡이 나룻배부터 쇼아라의 물류 유통을 책임지는 범선들까지.

크기와 순서에 맞춰 정박하는 배들을 보며 하벤은 한탄 아닌 한탄을 하고 있었다.

“너도 알지? 내 원래 꿈이 파수꾼이었다는 거.”

“잘 알지.”

하벤은 본래 하는 말만 하는 깔끔한 사내였지만 입에 술이 들어가거나 눈앞에 배가 있을 때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리고 금발 소년은 그 모습을 가장 많이 보아온 사람이었다.

“이제 파수꾼은 그르긴 했지. 이 발로 어떻게 돛대를 올라가겠어.”

“······.”

블라드는 하벤의 말에 애꿎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강 쪽으로 던졌다.

하벤의 꿈이 좌절된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요즘에는 지도 보는 법이랑 별자리를 배우고 있다 이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파수꾼은 너무 힘들어.”

“······변함이 없으시네.”

블라드는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는 하벤을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목소리, 자야르, 요제프, 그리고 호르헤까지.

소년에게 지식과 기술, 그리고 삶의 방향을 알려준 사람은 많았지만 어쩌면 지금 옆에 앉아있는 갈색머리 남자가 최초의 스승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인생의 돌파구를 찾아내려 하는 하벤의 태도는 분명 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마르셀라랑 제미나는 계속 그곳에 있는 거야? 그 번화가 쪽 여관에?”

“피칠갑 돼 있는 장미의 미소에 둘만 내려놓을 수는 없잖아.”

“하긴 둘 다 당분간은 네가 돌봐야겠지.”

“그렇지.”

외팔이 잭의 재산을 정리하던 보르단은 블라드에게 장미의 미소와 관련된 차용증을 건네주었다.

정당한 복수자인 소년의 권리이기도 했지만, 요제프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차용증은 지금 마르셀라에게 돌아가 있었다.

소년은 그날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므로.

“마르셀라는 계속 창관을 운영한대?”

“글쎄 모르겠네.”

“가끔 네 이름 빌리고 얻어먹는 술이 쏠쏠했는데 말이지.”

하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옛 추억을 들으며 블라드는 손에 쥐고 있던 위스키병을 들이켰다.

술술 넘어가는 블라드의 울대를 보며 하벤이 괜히 입맛을 다셨다.

“······그거 맛있냐? 나랑 바꿔먹을래?”

“······농담이지?”

값비싼 위스키를 싸구려 럼주와 바꿔줄 이유는 전혀 없겠지만 블라드는 굳이 병을 바꿔주었다.

하벤에게도 빚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아-! 좋은 술은 냄새만 맡아도 알지!”

“······나쁜 술도 마찬가지야.”

블라드는 싸구려 럼주에서 풍겨오는 비린내를 맡으며 병마개에 살짝 힘을 주었다.

“······.”

여름에 가까워짐에도 여전히 긴 소매로 자신의 팔뚝을 가리는 하벤.

위스키병을 치켜들 때 보이는 흉터들을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하벤의 팔에 새롭게 자리 잡은 흉터는 소년이 쇼아라를 빠져나가려 할 때 하벤이 몰래 배를 띄운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용케 안 죽었네.”

“반만 죽이더라고.”

황혼 녘과 함께 비치는 하벤의 미소가 블라드는 왜인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서로 내놓을 것이라고는 목숨밖에 없는 뒷골목에서 하벤은 블라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개 조직원 주제에 보스의 배를 탈취해 강에 띄운 하벤.

그 모습을 본 외팔이 잭의 부하들이 부두로 몰려들지 않았다면 소년을 가로막았던 것은 오타르가 아닌 다른 조직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벌기 위해 여기저기 은혜를 빌린 빚쟁이나 다름없었다.

“절름발이가 혼자서 배 띄운 게 신기하대. 우리 보스는 그런 걸 좋아하거든. 그래서 반만 죽은 거야.”

“별걸 다 좋아하네.”

“그래서 살았지 뭐. 덕분에 이렇게 좋은 술도 마시고.”

마치 좋은 약이라도 되는 듯 위스키를 꿀꺽거리며 삼키는 하벤을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스투르마로 돌아가나?”

“당분간은 여기 있을 거야. 일종의 대기 상태거든.”

“아 보기 좋네. 귀족 가의 명령을 받는 사내의 모습이란. 출세하셨어.”

소년은 그렇게 금방 떠나버리면 제미나가 슬퍼할 거라느니 올라갈 때는 데려가야 한다느니 하는 하벤의 말은 취한 사람의 말이라 치부하며 무시했다.

“그동안 여기서 사람들을 좀 찾아보려고.”

“누구?”

강 서쪽으로 조금씩 지는 해를 보며 블라드는 입맛을 다셨다.

누구에게는 하루의 끝을 알리는 모습이겠지만 뒷골목의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으니까.

“외팔이 잭의 숨겨진 재산이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봐야 해. 돈벌레들은 여기저기 구멍을 파고 다니잖아.”“그런 거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는데.”

“흐흐. 그 위스키 공짜 아니야.”

자신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짓는 블라드를 보며 하벤은 지팡이를 어루만졌다.

오늘따라 소년이 깎아준 지팡이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마르셀라가 다른 창녀들을 찾고 싶어 하는 눈치야.”

“다 팔려나갔을 텐데?”

“여기 어디엔가는 있겠지.”

“흐음.”

요제프는 뒷골목에 숨겨져 있는 외팔이 잭의 숨겨진 먼지까지도 털어내길 원했다.

그리고 마담 마르셀라는 자신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버린 창녀들을 찾길 원하고 있었다.

금화와 창녀.

사채업자가 팔아넘긴 창녀들의 발자취 속에는 분명 그녀들의 눈물로 만든 반짝이는 금화들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임무와 부탁 사이에서 바예지드의 대리인이자 마지막 남은 창녀들의 기사인 블라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간파해냈다.

“두 일이 통하는 면이 있겠는데.”

“그래도 골치 아플 것 같아. 대충 찾아봤는데 몇몇은 아예 흔적도 안 보이더라고.”

“누구?”

“안나라고 있어. 그 사람 말고도 몇 명 더.”

블라드는 자신을 용병이라 칭한 사내에게 얻어맞던 창녀를 기억했다.

애초에 가지고 있던 빚이 많은 그녀였기에 더 험한 곳으로 팔려 갔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 몰랐다.

“그러네. 아예 흔적도 없는 건 좀 특이하긴 하네.”

하벤은 블라드의 말이 괜히 하는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외팔이 잭이 뒷골목을 주무르던 시절에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많이 보이고는 했었다.

“도움 필요하면 부르라고. 요즘 조직이 쪼그라들어서 그리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알았어.”

하벤은 지팡이에 힘을 주고는 용케 균형을 잡고는 일어났다.

비록 몸은 불편했지만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해내는 하벤의 모습은 어린 블라드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나 간다.”

“그래.”

블라드는 한 손을 흔들며 일터로 돌아가는 하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황혼이 하벤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욱 비틀거리는 그의 그림자는 단순히 술에 취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테다.

“갚아줘야지.”

요제프는 말했었다.

은혜든 원한이든 갚을 때는 적어도 배로 돌려줘야 한다고.

고작 위스키 한 병으로는 하벤의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번 들러봐야 하겠네.”

블라드는 몸을 돌려 하벤이 나아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애증 어린 뒷골목으로 향하는 소년은 요제프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인생은 갚고 갚음에 연속이다.

그리고 소년은 이제 자신이 갚아야 할 차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뒷골목의 희미한 불빛들과 함께 소년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선명한 색이었다.

※※※※

진창이 가득한 초라한 대장간 앞.

초라한 가게의 모습만큼이나 볼품없어 보이는 늙은 대장장이 하나가 의욕 없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이라고는 뜬 소문을 찾아오는 용병들과 시답지 않은 뒷골목의 무뢰배들 뿐.

“······.”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는 노인은 결국 자신의 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진다는 것에 허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 할지라도 누구나 가슴속에 별 하나쯤은 품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품고 있던 별을 밤하늘에 띄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오늘은 접을까.”

요즘 부쩍 의욕이 없어지고 만 노인은 세월이 느껴지는 끙끙거림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참 집기들을 정리하던 노인은 대장간 가장 높은 곳에 박혀있는 못 하나를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곳에 걸려 있던 검 하나.

그리고 그 검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을 늙은 대장장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담은 장식 없는 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소년과 함께 잘 지내고 있을까.

“잘 하고 있겠지.”

세상의 냉혹함을 잘 알고 있던 노인은 자신의 별이 찬란히 빛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저 진창 같은 이곳보다는 더 나은 밤하늘 위에서 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늘 벌써 닫아요?”

“그래. 나중에 와라.”

“안 되는데, 지금부터 바빠지는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인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네놈들이 바빠 봤자지.

들고 있는 쇠꼬챙이로 상대방을 쑤시는 데는 내가 만들어주는 날카로운 날 따위는 필요 없지 않으냐.

“이 검, 손보긴 해야 해요. 너무 오랫동안 수리를 안 해서.”

“······뭐?”

노인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반응했다.

방금 들려온 말에는 분명 검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다른 대장장이들은 이거 못 고친대요. 영감밖에 못 고쳐요.”

“······.”

늙은 대장장이는 들고 있던 잡기들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린 그의 눈에 빛나는 금발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 자신이 소녀와 함께 세상 밖으로 던져놓았던 그 색이었다.

“안 돼요?”

“아니아니, 되지. 되고말고.”

정말 오랜만에 오는 반가운 손님을 보며 노인은 화로에 풀무질을 해대었다.

언제라도 꺼질 듯 가쁜 숨을 내쉬던 화로 안에서 오랜만에 노인의 열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여기 앉아라.”

소년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준 늙은 대장장이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자신이 만든 장식 없는 검을 받아들었다.

스르르릉-

“그렇지.”

여기저기 상처 입은 검을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미소 지었다.

대장장이로서 언제나 효용을 다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뿌듯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라면 더더욱.

“이 흉터는 어디서 생긴 거냐?”

“그거는 흡고블린을 상대하면서 생긴 건데 그때는 검에 익숙지가 않아 가지고······.”

“그러면 이거는?”

“그거는······그 데스웜을 잡을 때요. 제가 미끼 같은 거였는데 그, 땅을 긁었어요. 끌어내려고.”

블라드는 검에 난 상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늙은 대장장이를 보며 변명하듯 자꾸 말을 늘였지만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흡고블린······데스웜······.”

노인은 소년을 타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검이 행한 업적들을 들으며 감격에 겨워하고 있었으니까.

충실히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었구나.

이곳에서 썩어가는 나와는 다르게.

그날의 대장장이는 하염없이 자신이 만든 검을 쳐다보던 소년을 기억했다.

그러나 오늘의 대장장이는 그 소년이 만들어낸 검의 상흔들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기다려라. 수리해 줄게.”

노인은 재빨리 가게의 문을 닫고서는 오직 소년만을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뒷골목 한 가운데서 노인이 내려치는 망치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들려오는 소년의 말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기서 방패를 내려치더라고요. 제 이름을 말하라면서.”

“그래? 그리고?”

늙은 대장장이는 그 소리들과 함께 꿈을 꾸었다.

소년의 눈이 바라보았고 장식 없는 검이 해냈던 그 광경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튀어 나가는 불꽃들 속에 보이는 풍경들을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미소 지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7화 7

새로운 쇼아라에서 (1)

밤의 색깔로 물든 뒷골목의 어느 거리.

탕-! 탕-!

뼈를 자르고 힘줄을 끊어내는 토막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깨우고 있었다.

그 소리는 가게 곳곳에 걸려있는 정체 모를 뼈들과 함께 이곳의 분위기를 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인장 있어?”

“······뭐야?”

곳곳에 매달려있는 고기들을 치워내며 두 명의 사내들이 정육점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 고기를 잘라내던 정육점의 주인은 가게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두 명의 남자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른한테 반말이야.”

이제야 갓 소년티를 벗어난 것 같은 애송이가 자신에게 반말을 내뱉자 영 마뜩잖았던 주인은 씹고 있던 힘줄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너희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던?”

“여기서 부모 찾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네.”

어깨를 으쓱한 블라드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젖히며 주인 앞으로 자그마한 쪽지를 건네주었다.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의 금발과 깨알같이 글자가 적힌 쪽지를 보고는 주인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 것 같았다.

“뭐, 이 사람들은 왜?”

“아니, 본 적 있나 싶어서.”

“왜 정육점에 와서 사람을 찾아. 여기는 사람 안 팔아.”

“그래?”

블라드는 자신은 본체만체하며 고기를 내려치는 주인을 보고서는 미소 지었다.

여기구나.

“내가 여기 토박이였다가 근래에 돌아와서 그러는데 원래 이곳이 정육점이었었나?”

“그런 건 검은 곰한테 가서 물어봐. 나는 허락받았어.”

돼지도살자 검은 곰.

뒷골목을 아우르는 또 다른 보스의 이름이 튀어나왔지만 블라드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이제 그 정도의 이름값만으로는 소년을 흔들 수 없었다.

“그럼 그건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고.”

블라드는 작업대에 몸을 기울이고는 정육점 주인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칼로 고기를 내려치고 있는 사람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은 분명 위험한 것이었지만 소년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뭐가.”

주인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인 줄 알았더니만 어느새 말 몇 마디만으로 이곳의 분위기를 주무르고 있었다.

“뭐라도 살려면 사던가. 아니면 당장 나가던······.”

“쪽지에 적힌 게 사람 이름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소년의 질문과 함께 내려치려던 칼이 멈추고.

방금 블라드가 장난스레 밀어젖혔던 쇠사슬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기묘한 침묵이 정육점 안을 맴돌고 있었다.

“여기서 글자 배우기가 참 쉽지 않은데.”

“······.”

끼이이익-

주인은 여전히 고기 칼을 치켜든 채로 눈알만을 굴려 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소년의 뒤에 서 있던 검은 피부의 남자를.

그 남자가 방금 가게의 문을 닫았다.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는데 대답 좀 해주지.”

긴장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주인을 보며 블라드의 한쪽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사람 고기 말고 그냥 사람은 파시는지?”

“이런 씨팔!”

주인이 들고 있던 칼을 재빠르게 휘둘렀지만 블라드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젖힐 뿐이었다.

일개 정육점 주인답지 않은 날카로운 일격이었지만 지금의 소년은 기사의 발끝에 다다른 존재였다.

“오늘 여기 장사 끝이래. 오타르.”

“음.”

검은 피부의 남자. 오타르.

공식적으로는 경비대장 권한 대리의 조수인 그가 차고 있던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너희 뭐야! 어디서 왔어!”

“······어디서 왔냐고?”

문이 닫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조명들이 감춰지자 정육점 안에는 오직 주인이 켜놓은 촛불들만이 흔들릴 뿐이었다.

어둠속에서 흔들리는 희미한 빛.

뒷골목의 색깔이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지.”

그 불빛들이 소년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탕-! 탕-!

굳게 닫힌 정육점 안에서는 여전히 고기와 뼈를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섞여 들려왔다는 점이었다.

※※※※

아침이 밝아오기 직전에 뒷골목의 거리.

블라드는 이제 막 장사를 접으려 하는 노점상 앞에 앉아 꼬치 하나를 주워들었다.

“너도 하나 먹어.”

“음.”

자리에 앉은 두 명의 남자가 꼬치를 베어 물며 각자 들고 있던 무기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피가 맺혀있는 오타르의 손도끼.

그리고 이제는 오직 블라드만이 들수 있는 호르헤의 단검.

뒷골목에서 쓰기 알맞은 것들이 오늘의 할 일을 마치고는 주인들의 손에서 피를 벗어내고 있었다.

“언제 저런 놈이 들어왔을까.”

“그동안 외팔이 잭이 관리를 잘 안 했어.”

“그렇게 개판을 쳤어?”

“······그날 이후로 사람이 달라지긴 했지.”

잭의 끄나풀이었던 오타르는 그래도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는 비난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과야 어찌 되었든 피부색이 다른 그를 받아준 사람은 뒷골목에서 오직 잭이 유일했으니까.

“뭐, 자세한 건 윗선에서 알아내겠지.”

정육점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남자는 말했었다.

자신은 그저 중간 모집책일 뿐이며 자세한 것은 노예 상인들이 알고 있을거라고.

안나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결국 그동안 뒷골목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을 팔아넘기기는 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실체는 확인했으니 이걸로 되려나······.”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고 이 정도까지 깊은 뿌리를 가진 사건이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블라드라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뒷골목에서 벌어진 일 중 하나로 치부되어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빛과 어둠, 소외당하는 자들과 빛나는 자들.

소년은 여전히 그 경계를 가르는 선 위에 서 있었다.

“블라드! 형!”

한참 상념에 빠져있던 블라드의 귓가로 낯익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골목 끝에서부터 허겁지겁 뛰어오는 새까만 소년 하나가 있었다.

“헉······헉. 으아.”

“어디 안 도망간다.”

블라드는 열심히 달려온 소년의 입에 꼬치 하나를 물려주었다.

소년이 받아야 하는 정당한 보수였다.

“부탁한 건 알아봤냐?”

“흐······. 본 애들이 있대.”

과연.

블라드와 오타르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이 뒷골목의 뜬 소문들은 어린 부랑자들의 눈과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뭘 봤어.”

“블라드가 찾고 있는 여자. 안나라고 했었지?”

“그랬지.”

네드는 블라드가 쥐여준 꼬치를 베어 물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 달 전쯤에 처음 보는 마차에 그 여자가 올라타는 걸 본 애가 있대.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는 거야.”

“뭐가?”

네드는 대답을 하는 대신 블라드에게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동생 교육 잘 시켰네.”

“음.”

진창 같은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린 것들이라도 영악해져야 하는 법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둘이었기에 딱히 화를 내기보다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줬을 뿐이었다.

“여기 꼬치 하나 더요.”

“이상한 게 뭐였냐면.”

블라드의 주문과 함께 네드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뒷골목의 바닥을 훑고 다니던 작은 쥐는 블라드가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물고 왔다.

“거기 마차에 오르던 여자들이 다 임산부들이었대.”

“뭐?”

네드의 말은 남들이 들으면 그저 이상한 일로 들릴 뿐이었겠지만 블라드에게 있어서만큼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전부 다 임산부라고?”

“마차에 타는 여자들이 다들 배가 부풀어 있었다고 그러더라고. 진짜 이상하지? 일도 못 하는 임산부를 사 가는 사람이 있네.”

“······.”

더 먹어도 되냐는 네드의 말에 블라드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을 뿐이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야.”

점점 심각해지는 표정이 오타르가 물었지만 블라드는 쉽사리 자신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임산부들을 사고판다고?’

안나가 임신했다는 것도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뒷골목의 임산부들을 사고파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되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이 이곳에 있었다.

‘······설마.’

순간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예감.

[언제나 안 좋은 예감은 잘 들어맞는 법이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조언은 겨울날 있었던 어떤 일을 떠올리게 했다.

하얀 눈밭이 펼쳐있던 주둔지 한가운데서 울고 있던 여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아이를 찾고 있었다.

태어나지도 못했던 작은 아이를.

[스스로가 보내는 경고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요제프의 행동에서 항상 눈여겨보던 것이 있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그의 태도였다.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겨울날의 기억은 아직도 블라드의 머릿속에서 생생히 기억되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눈에는 여전히 뒷골목 깊은 곳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

“보르단 님.”

“왜? 뭐 보고할 일이라도 있는가?”

시청에 마련되어 있던 보르단의 집무실.

언제나 그의 책상 위에는 군것질거리들의 시체가 널려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수상한 동향을 발견해서요.”

“아······그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한 번은 귀 기울여줄 법하건만 보르단은 그저 남아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었다.

“쉬라니까······쉬라는 내 말을 허투루 들었나보구만.”

“외팔이 잭을 조사해보라면서요.”

“이렇게 빨리 뭘 물어올 줄은 몰랐지.”

보르단은 투실투실한 턱을 떨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쉬어야 나도 좀 쉴 거 아니냐.”

“······.”

블라드는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요제프가 보르단만 보면 으르렁거리며 갈궈댔는지.

뚱뚱한 기사는 누군가가 떠밀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루, 이틀 정도 미루면 안 되는 일인가? 막 시급을 요하고 그런 일이야?”

“그런 것 같은데요.”

“잘 생각해봐. 막 코앞에 위기가 다가와 있고 그런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

이쯤 되면 알아들을 만하지 않냐며 보르단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이미 충분히 알아듣고 있었다.

“시장님한테 가야 하나요?”

강경해보이는 블라드의 태도에 결국 일을 처리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보르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만들어 낸 소중한 휴가였단 말이다······.”

한참 농땡이를 필 준비를 하고 있던 보르단은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도망친 곳에서는 낙원이 존재할 수 없는 법이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둘 다 나를 쪼러 오는구만······. 한 이틀 후쯤에나 온다더니만.”

블라드는 한숨을 푹 쉬고 있는 보르단에게 다가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시청으로 들어오는 마차와 말을 탄 기사들.

행렬의 한 가운데 매달려 있는 깃발에는 낯익은 문장이 달려있었다.

바예지드의 문장이었다.

※※※※

“오셨습니까?”

“잘들 지냈나.”

행렬을 확인한 보르단과 블라드, 그리고 쇼아라의 시장은 서둘러 시청의 앞으로 나가 요제프를 맞이했다.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한 그의 행보에 시청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겠지?”

“그럼요. 별일 없었습니다. 요제프 님.”

보르단은 접히지 않을 것 같은 뱃살을 용케 구기며 요제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그러나 정작 요제프와 눈을 마주친 블라드는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별일이 있군.”

“······.”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쉰 보르단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요제프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요제프를 맞이하는 사람들.

그리고 행렬과 함께 새롭게 쇼아라로 들어오는 사람들.

하인들이 요제프가 가져온 짐들을 분주하게 내려놓는 가운데 일행은 시장의 안내에 따라 시청의 가장 중앙에 자리 잡은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먼저 확인해보겠습니다.”

혹시라도 호위하는 데 있어 수상한 물건이라도 있는지 자야르가 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상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놓고 다닐 리가 없지 않습니까.”

“······.”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시장의 말에도 자야르는 아무 말 없이 방안을 뒤지고 다닐 뿐이었다.

자야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요제프의 안위뿐.

시장의 체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냉정한 반응에 쇼아라의 시장은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자야르가 방을 뒤지는 동안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수고했고 무엇이 감사한지 아는 두 남자는 그저 한 마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뿐이었다.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입장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말해봐라.”

“······괜히 번거롭게 만드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요제프의 말에 블라드는 주저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동안 바예지드 가문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절차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지원을 받았으면 하는데 아무래도 시장께 직접 말하는 것이······.”

요제프는 고귀한 자였으나 핏줄이 권한까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자리에 걸맞은 직위. 그것이 있어야만 요제프에게도 권한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제프의 바로 옆에는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서 있었다.

비록 요제프가 주는 불편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서 있기는 했지만.

“그래. 좋은 판단이다.”

스스로 때와 상황을 살피며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 소년을 보며 요제프가 미소 지었다.

그동안 자신이 가르친 보람이 있었기에 뿌듯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수상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요제프 님.”

자야르의 끄덕임과 함께 요제프는 자연스럽게 집무실의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

오후의 햇살을 가르며 시장의 책상으로 걸어가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스투르마에 있었던 그의 집무실이 떠올랐다.

언제나 있어야 할 곳에 앉아 블라드를 바라보았던 요제프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기 풍경도 꽤 괜찮군.”

오직 시장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 등을 기댄 요제프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요제프가 내보이는 당당한 기세에 쇼아라의 시장은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아무래도 의자는 새로 바꿔야 하겠어.”

“······아니, 아니. 요제프 님. 혹시.”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전(前) 쇼아라 시장의 입술이 파래져 갔지만 아무도 그를 바라봐주지 않았다.

집무실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요제프가 만들어내는 공기였다.

“이제는 개의치 말고 말해봐라.”

블라드는 멍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와 같이 자리에 앉아 소년을 바라보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내려다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쇼아라의 새로운 시장한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 청년은 지금 핏줄로 보장받은 것이 아닌 스스로 쟁취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시 쇼아라의 새로운 시장.

요제프 바예지드.

창가에서 비치는 빛과 함께 짙은 눈그늘의 남자가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8화 4

새로운 쇼아라에서 (2)

곳곳에 울려 퍼지는 가축들의 울음소리.

어디에서나 느껴지는 피비린내와 끈적하게 달라붙는 진창의 붉은색들을 밟으며 두 사내가 걷고 있었다.

“여긴 언제 와도 버티기가 힘들어.”

“음.”

블라드의 투덜거림에 오타르가 짧게 대답했다.

그 또한 블라드가 하는 말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죽은 것들의 피를 다루는 자들을 탐탁지 않아했다.

그러나 인간들 대부분은 피와 고기를 먹으며 살 수밖에 없는 법.

찬란한 신의 말씀과 어찌할 수 없는 본능과의 불편한 동거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돼지 도살자 검은 곰이 지배하는 골목, 붉은 피가 고이는 거리.

욕정으로 가득한 창관 거리보다, 욕망으로 가득한 도박장보다 더 오래된 골목이 바로 이곳이었다.

“냄새가 아찔하네.”

“······.”

점점 더워지는 날씨와 함께 바닥에 고여있는 피비린내가 역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오래되고 복잡한 골목, 온갖 잡내와 함께 섞여 있는 피비린내, 그리고 죽음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빛.

블라드는 그 사이를 지나 이 거리에서 가장 커다란 건물 앞에 섰다.

곳곳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뼈들로 장식되어 있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시선조차 주기 힘들어할 테지만 뒷골목에서 태어난 소년은 이미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다.

텅-텅-텅!

무언가의 뼈로 만들어진 문고리.

블라드는 마치 악취미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문고리를 세차게 두드리며 자신이 왔음을 기별했다.

“누구야?”

“이미 들었을 거 아냐.”

“······.”

블라드와 오타르는 검은 곰의 골목에 들어선 직후부터 자신들을 지켜보는 시선들을 눈치챘다.

화려한 금발과 함께 자신의 깃발을 들고 다니는 소년의 모습은 분명 뒷골목이 아닌 어느 곳에 있어도 주목받을만한 모습이었다.

“기다려.”

문틈 사이로 눈만이 보일법한 작은 구멍을 세차게 닫은 남자.

“······.”

그러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기별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 싸움을 하는군.]

목소리의 말대로 뒷골목에서 으레 발생하는 전통과도 같은 무시를 받으며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난잡하게 솟아오른 건물들 사이로 한 뼘만한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무시당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작은 하늘을 바라보며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뒷골목의 블라드라면 이런 무시정도야 일상이었겠지만 쇼아라의 블라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명예라는 것을 들어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년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구름이 지나가고.

하늘의 색깔이 조금씩 붉게 물들 때쯤.

겨우 그때가 되어서야.

턱-!

“들어와라.”

검은 곰의 건물이 문을 열어주었다.

“······.”

오랜 기다림 속에 열린 문이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보며 소년은 결정했다.

이건 넘어갈 수 없다.

“안 들어올 거냐.”

“······그래. 안 들어가.”

“그래?”

길밖에서 뻗대고 있는 소년을 보며 문지기가 코웃음을 쳤다.

이곳이 감히 어디라고.

소년이 서 있는 거리는 도살자들의 대장인 검은 곰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그럼 꺼지시던가.”

그러나 문지기는 알아챘어야 했다.

지금 눈앞의 소년이 단순히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소년은 이곳에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이름까지 짊어지고 온 사람이었다.

“지금 그 문 닫으면.”

비웃음과 함께 문을 닫으려던 문지기의 등 뒤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렬한 존재감을 담은 목소리였다.

“너 가지고는 오늘 일 감당 못 할거다.”

“뭐?”

문지기는 왜인지 모르게 섬뜩하게 들리는 말을 들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그 안에는 문지기가 기대하고 있던 분노나 공포 같은 감정들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모습으로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는 소년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시작은 너희가 먼저 한 거다.”

블라드는 문지기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오타르가 들고 있던 자신의 깃발을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곳곳이 비어있는 깃발에는 작긴 해도 분명 바예지드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문지기는 깃발 옆에서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소년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혼자의 힘만으로 돈벌레들을 썰었다는 소문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한 존재감이 소년의 푸른 눈동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들어가라. 내가 사과하지.”

“싫어.”

소년은 뒷골목에서 살았던 16년보다 쇼아라에서 벗어났던 반년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성장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분노나 폭력이 아닌 명분이다.

“직접 나오라 해.”

“······누구를?”

명분과 지위. 그리고 공포를 무기 삼아 휘두르는 청년을 보며 소년은 배웠다.

폭력이 아닌 기세로 사람을 무릎 꿇리는 방법을.

그것은 귀족의 방식이었다.

“검은 곰에게 직접 나와 바예지드의 정당한 대리인을 맞이하라고 전해라.”

바예지드의 정당한 대리인.

마지막 남은 창녀들의 기사.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조직 하나를 부숴낸 소년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가 주는 마지막 기회다.”

뒷골목의 보스들은 더는 소년을 기다리게 할 자격이 없었다.

소년이 진창에 꽂아 넣은 깃발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오직 스스로의 명예를 입증한 자만이 들 수 있는 깃발이었다.

※※※※

쇼아라의 시청 밖으로 도시를 떠나가는 마차 행렬이 늘어서고 있었다.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면 나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

기존에 쇼아라에 배치받았었던 기사와 병사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주군이 있는 도시 스투르마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쇼아라의 전(前) 시장과 함께.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군.”

“스스로가 만든 업보를 짊어진 것뿐입니다. 요제프 님.”

창가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요제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옮겨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안하다는 것은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다는 것에 대한 거야.”

구름조차 없는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았지만, 그 아래 있는 인간들의 도시는 그럴 수 없었다.

신께서 만든 하늘과는 달리 쇼아라라는 도시는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었기에 티 한 점 없이 밝게 빛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도 시간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시정 운영에 있어 온갖 오점들이 드러나게 된 쇼아라의 전 시장은 결국 스투르마로 돌아가 호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잘못들은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뒷골목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한 명의 보스에게 권한을 위임했으며 하찮은 사람들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을 위해 치안력을 집중했고 곳곳에서 들어오는 유력자들의 후원금은 전 시장의 시정 운영을 도왔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제프의 날카로운 견제와 페테르의 암묵적인 동의만 없었다면 말이다.

“검은 곰이라는 보스는 뭐라고 하더냐?”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보고에 요제프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고집과 아집이 있는 자였을 텐데 꽤 쉽게 일이 진행되었군.”

“······아무래도 같은 뒷골목 출신이었던 것이 잘 먹혀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을 요제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았을 일이었을 텐데도 소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블라드를 단순한 칼잡이가 아닌 좀 더 완벽한 기사로 키우기 위한 요제프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수고했다.”

요제프는 뒷짐을 진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요제프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사내들이 있었다.

“경들도 알다시피 나는 아직 쇼아라를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매우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요제프의 뒤에 서 있는 남자들.

다양한 연령대의 사내들이 요제프의 집무실 안에 기립해있었다.

5명의 기사, 1명의 마법사, 10명의 행정인력과 30명의 정예병.

그리고 한 명의 종자까지.

모두가 요제프가 스투르마에서 새롭게 꾸려온 쇼아라의 가신단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요제프는 이들을 이용해 쇼아라의 정치, 행정, 치안, 군사력을 장악해야만 했다.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뭐든지 처음 길을 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법이지.”

요제프의 가신단은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요제프가 다음 대의 가주가 된다면 바예지드 가문에서 영전하게 될 것이며 만약 가주 경쟁에서 탈락하게 된다면 그들 또한 침몰하는 배의 선원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있어 쇼아라라는 도시는 마지막 발판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쇼아라를 원활히 지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갈 것이다. 최선을 다해 진행하겠지만 당분간은 이 일 이외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쇼아라 곳곳에 어둠이 물들고 있었지만, 아직 요제프는 이것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는 없는 법.

이때까지 해온 일이 발버둥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발걸음이어야만 했다.

“그러니 이번 일에 대해서는 그레고리 경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소. 지금 이곳에서 조사단의 일원을 선별하시오.”

요제프의 말과 함께 키는 작지만 단단해보이는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중임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제프 님.”

“임무에 최선을 다할 거라 믿소.”

비록 자신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요제프는 이번 일의 책임질 사람으로 그레고리를 선택했다.

가문 내에서도 언제나 중립에 서 있었던 기사 그레고리는 형제간의 싸움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저 기사 케이드 경을 데려가고 싶습니다. 이번 일은 누군가의 뒤를 쫓아야 하는 상황이 많을 거라 판단합니다. 그러니 추적술에 뛰어난 그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비록 저번 토벌전에서는 저주받은 여인을 상대하다 큰 부상을 입고만 케이드였지만 다시금 기회를 얻었다.

감출 수 없는 기쁨을 느끼며 기사 케이드는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허가하오,”

“그리고······.”

그레고리는 자신의 억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자야르의 귀띔을 통해 미리 생각해놓은 정석적인 조합이 있었지만, 그는 조금은 색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사실 그동안 궁금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자야르 경의 종자인 블라드를 데려가고 싶습니다. 애초에 이 일을 가장 처음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으음.”

그레고리의 선택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요제프였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선택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

그레고리의 지목과 요제프의 허가.

가신단 가장 뒤쪽에 서 있던 소년은 자신을 지목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퉁퉁한 상체와 짧은 다리, 굴리면 구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그의 체형은 블라드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잘 부탁한다. 유망주.”

기사 그레고리.

바예지드 가문에서부터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던 남자.

포틀리 칸노르의 오촌 당숙이자 그의 후견인이기도 한 기사가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9화 9

안개의 마을 (1)

그녀의 긴 머리는 푸른 빛으로 시작되었으나 검은색으로 끝났다.

걸음걸이는 누구보다도 매끄러웠으나 정작 땅에는 닿지 않았다.

굳게 닫고 있는 가슴은 더는 누구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울 뿐이었다.

그녀는 죽음과 함께 찾아왔다.

“······정말 그렇게 하면 내 아들을 살릴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남작님.”

지친 남자, 울고 있는 여인.

그리고 죽어가는 아이.

남자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절망에 물들어있었다.

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하겠소. 부탁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남작님.”

절망이라는 존재는 사고처럼 찾아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는 한다.

그것도 가장 빛나는 부분만을 골라서.

우트만 남작은 본디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절망이라는 존재는 그의 빛나는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의 점점 꺼져가는 숨결과 그의 아내가 내뱉는 고통스러운 울음이 그렇게 만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우트만 남작은 물기 어린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비록 창백했으나 미소만큼은 누구보다 포근한 여인이 남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께서 모든 곳을 바라볼 수 없으시기에 저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절망에 빠진 남자는 구원을 바라고 있었으나 결국 신의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그저 죽음과 함께 찾아온 여자만이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택의 창문을 세찬 비바람이 때리고 있었다.

※※※※

세찬 바람과 함께 빗방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비 가릴 곳 하나 없는 산등성이를 지나고 있던 일행은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구름이 심상치 않은데.”

그레고리의 말대로 아직 시간은 낮이었으나 비구름이 하늘을 가려 깜깜한 밤과도 같았다.

이 비와 어둠을 뚫고 더 나아가는 것은 무리였다.

“케이드!”

“······저곳으로 가시죠!”

눈이 좋은 케이드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저 멀리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름치고는 앙상한 나뭇잎을 가진 나무였지만 아무것도 기대지 않은 채 비를 맞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벼락같은 걸 맞지 않겠지?”

“맞는다 해도 지금은 가셔야 합니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에 그레고리가 한마디 내뱉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가만히 서서 비를 맞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심상치 않은 날씨에 일행은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야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날씨 지랄 같구만.”

비바람을 뚫고 무사히 나무 밑으로 도착한 일행은 재빨리 몸에 묻어있던 물기를 털어내고는 곧바로 타고 왔던 말들을 근처에 묶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어느새 주변을 가린 비구름들이 마치 출렁이는 파도처럼 하늘을 뒤덮고는 굵은 빗방울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마차를 가져와서 다행이군.”

굳이 가져오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마차가 필요한 사람이 일행 중에 있었다.

이번 임무를 생각하면 거추장스러운 짐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일행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야영 준비를 할까요?”

“그래라.”

마부이자 잡부로서 임무에 동행한 고트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마차에 실려있던 야영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마차 지붕을 기둥 삼아 기름 먹인 천을 연결하고 그것을 줄에 연결해 땅에 박아넣으니 금세 그럴싸한 천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지금도 주위에서 세차게 들이치고 있는 빗방울 정도는 충분히 가려줄 만한 천막이었다.

“아쉽네요.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였는데.”

고트를 도와 천막을 친 블라드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저 멀리 보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둠 속을 홀로 밝히고 있는 횃불처럼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인간들의 흔적이 그곳에 있었다.

“인생이라는 게 언제나 계획처럼은 되지 않는 법이지.”

오늘 안에 마을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으나 술을 마시고 말겠다는 계획만큼은 지키고 싶었던 그레고리는 품에 있던 자그마한 술병을 열어젖힌 뒤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조금은 괜찮잖아. 날도 서늘한데.”

“······.”

무리의 대장이 술을 마시겠다는데 일개 조원으로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영의 마지막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나뭇가지라도 좀 주워오겠습니다.”

“젖어서 불이 잘 안 붙을 텐데.”

“그래도 한번 붙여봐야죠.”

마차 반대편으로 천막 하나를 더 세워 임시 마굿간을 만들고 있는 고트와 혹시라도 수상한 것이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는 케이드.

그 사이에서 그레고리처럼 술을 마시며 노닥거릴 수만은 없었던 블라드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들을 모으며 모닥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이 녀석들이라면 될 거다. 속이 비어있거든.”

“감사합니다.”

비를 맞으며 근처를 뒤지던 블라드의 옆으로 어느새 케이드가 다가와 일을 거들어주기 시작했다.

일개 종자의 일을 기사가 거들어주는 모양새였지만 케이드는 그것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그때는 고마웠다.”

“······저도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블라드와 케이드는 비록 정식으로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지난해 겨울, 바르나에서 모집했던 몬스터 토벌 때 둘은 같은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몸은 괜찮으십니까?”

“차라리 어디 하나 잘리는 게 낫겠더군.”

케이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에게 답했다.

자신의 아이를 찾으며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

자야르가 없는 도중 요제프를 지키기 위해 주둔지에 남아있었던 두 명의 기사는 그녀의 공격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만약 그때 소년이 목소리의 세계를 빌리지 않았다면 지금의 케이드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보니까 내가 인원을 잘 선별했어. 기사랍시고 이런 거 안 하고 뻗대는 놈들도 많거든.”

명령도 하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사내들을 보며 그레고리가 술병을 기울였다.

“계속해서 지금처럼만 가자고. 여기서부터 우리는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니까.”

그레고리의 말에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임무였다.

당당히 자신들을 내보이기보다는 몰래 잠입하여 마을 내부를 들여다보는 임무.

만약 지금 일행이 가고자 하는 마을이 바예지드 백작령 안에 속해있는 곳이었다면 당장 병사들을 동원해 조사해보았겠지만, 이곳은 우트만 남작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행적은 찾았으나 확실한 증거를 갖추지 못한 요제프로서는 여기까지가 지원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눈앞에 목적지를 놔두고 야영을 시작한 일행은 내일을 기약하며 체력을 보존하기로 했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 천막을 때리는 빗소리.

겨우 불을 붙인 모닥불을 바라보며 블라드는 망토를 휘감았다.

질 좋은 울로 만들어낸 망토는 모닥불의 열기를 받아들이며 블라드의 몸을 덥혀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별일 아닙니다.”

“쯧, 싱겁기는.”

블라드는 지금 망토를 덮은 채 편히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웃고 말았다.

지금 이 모습을 옥사나가 봤다면 뿌듯해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밤 같은 낮이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아니었으나 그녀가 준 애정만큼은 확실히 이해했던 블라드는 모닥불의 온기를 받으며 몸을 뉘였다.

그 겨울날 들려왔던 슬픈 울음소리가 이곳에 없기를 바라면서.

※※※※

회색빛 돌들로 세워진 마을.

한 차례 비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서는 자욱한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야를 짙게 가리는 안개를 보며 그레고리는 혀를 차고 말았다.

“뭐라도 튀어나올것만 같군.”

“······.”

어쩌면 이곳에 흑마법과 관련된 자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던 일행들은 조심스레 길을 따라 말을 몰 뿐이었다.

아직 아침이어서일까 아니면 날씨가 좋지 않아서일까.

마을의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음에도 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이 점점 더 도시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저 앞에 여관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만.”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어서인지 중심부로 들어와서야 겨우 여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여관이 있는 것 자체가 다행인 일인지도 몰랐다.

“들어가자고.”

말과 마차를 이끌고 여관으로 들어간 4명의 남자들.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와 함께 그레고리가 여관의 문을 열었다.

“주인장 있소?”

“······꽤 일찍 오신 손님들이로군.”

“어제 비 때문에 마을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오지 못했지 뭐요. 따끈한 수프라도 한 접시 주시오.”

그레고리가 용병인 척 여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블라드는 안쪽 부엌과 연결된 통로에서 빼꼼히 고개만을 내놓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었다.

“······.”

자신의 무릎에도 오지 않을 어린아이.

3살일지 4살일지, 아직 한참 귀여울 나이대의 소녀.

마치 제미나의 어렸을 적을 떠올리게 하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살이 통통히 오른 아이의 분홍빛 볼이 조금 더 붉어진 것만 같았다.

“······요즘 근처에서 흉흉한 일이 너무 많아서······.”

“날씨 때문에라도 며칠은 머무를 생각인데 우리를 이렇게 보낼 거요? 식사도 여기서 해결할 생각인데.”

그레고리와 여관 주인이 가격을 가지고 흥정하는 동안 블라드는 천천히 여관을 거닐며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오랜 버릇에서부터 비롯된 행동이었으나 아이는 자신에게서 눈을 뗀 블라드가 영 마땅치 않았는지 조금씩 몸을 기울이며 일행이 있는 곳으로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여관 한가운데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솥 하나.

안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좋은 냄새가 나는 솥을 보며 블라드가 입맛을 다실 때쯤.

[블라드······, 블라드!]

평소에는 조용하던 목소리가 다급하게 소년을 불러세웠다.

‘무슨 일이에요?’

블라드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맞는 것 같다.]

침울한 말투와 함께 목소리는 고개를 돌려 블라드에게 다가오고 있는 소녀를 보라 했다.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조용히 고개를 돌린 블라드.

“······.”

블라드가 서 있는 화로의 반대편에서 어느샌가 밖으로 나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무언가 부끄러웠는지 의자 뒤에서 숨어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는 누가 보아도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내 세계를 빌려주마.]

그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블라드는 긴장된 마음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열었다.

‘······!’

한쪽 눈을 감은 블라드를 보며 자신에게 눈짓이라도 하는 건가 싶어 활짝 미소를 짓는 소녀였지만 블라드는 오히려 그 미소를 보며 등 뒤에서 다가오는 서늘함을 느꼈다.

[저주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본 세계에서 소녀는.

소녀의 목은 마치 시체와도 같은 검은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녀의 목을 비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블라드는 지금의 광경에서 지난 겨울날 들었던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서둘러 목소리의 세계를 감았다.

댕-댕-댕-

시간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축축한 마을 한가운데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경건하게 들려야 하는 종소리였으나 블라드는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끈적한 안개와 같이 느껴졌다.

목소리의 세계를 닫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블라드는 방금까지만 해도 검은 손아귀에 붙들려 있던 소녀의 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교회의 문양이 새겨진 목걸이였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0화 14

안개의 마을 (2)

어린것들은 죄가 없다.

그러나 언제나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어린것들이다.

진창과도 같은 뒷골목에서 블라드는 보아왔었다.

살아남기 위해 혹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어린아이들의 것을 빼앗아가는 어른들을.

빼앗긴 아이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자신들을 버린 엄마를 찾으며 울다 지쳐 죽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블라드는 제미나와 하벤을 껴안으며 결심했다.

저런 어른은 되지 않겠다고.

저런 식으로는 살아가지 않겠다고.

뒷골목의 삶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어린 시절 세웠던 삶의 규칙들은 여전히 블라드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소년이 스스로 만들어 낸 규율이었다.

규율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사는 지키는 자들이다.

지금 이곳에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

블라드는 마을을 둘러싼 축축한 공기를 뚫으며 걷고 있었다.

회색빛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안개와 함께 주변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인 것 같다.]

“······.”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있는 어느 건물보다도 거대한 건물.

마치 뿔처럼 높게 치켜든 종탑이 블라드의 눈에 들어왔다.

교회.

신과 가장 가까운 장소.

어린 자, 약한 자, 늙은 자, 병든 자를 보호하는 성스러운 곳.

그런 곳이어야만 하는 곳.

“갑니다.”

[그래.]

블라드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내리며 회색빛 건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지금 이곳에서 본래의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블라드가 가지고 태어난 금발뿐이었다.

“······.”

아무도 없는 한낮의 교회.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생업에 종사할 시간이었기에 예배실에 발을 들인 사람은 오직 블라드뿐이었다.

‘수상한 거 안 보여요?’

[지금 당장은.]

블라드는 천천히 예배실 주변을 거닐며 목소리가 사특한 징조나 불길한 증거들을 볼 수 있게 움직였다.

목소리의 세계는 색이 진한 세계.

소년의 세계보다 100가지 색은 더 품고 있을 그의 세계는 분명 신성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가 소년의 시선을 통해 사특한 징조를 찾는 동안 블라드는 천천히 교회의 구조를 파악하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2층짜리 건물이었으나 가능하다면 비슷한 구조를 가지려 노력하는 교회 건물의 특성상 분명 지하층도 존재할 것이다.

블라드는 가능하다면 그곳을 찾아보고 싶었다.

[누가 왔다.]

그러나 모든 땅과 건물에는 주인이 있듯이 이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천히 예배당을 둘러보던 블라드는 등 뒤에서부터 자신을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허락받지 않은 손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무겁게 닿아 들어왔다.

“······.”

시선을 눈치챈 블라드는 자연스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곳을 조사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는 해놔야 한다.

이 마을은 불길한 안개에 휩싸여 있었으니까.

저벅- 저벅-

한쪽 무릎은 꿇었으나 두 눈은 부릅뜨고 있던 블라드는 발소리와 자신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검을 뽑을 준비를 하였다.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씩 스스로의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분이시군요.”

그러나 등 뒤에서 다가온 남자는 블라드가 상상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그저 푸근한 목소리로 낯선 이방인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어제 아침에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아아. 그 용병분들이시군요. 들었습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갈색 머리.

소중히 들고 있는 두툼한 성경책.

요제프만큼이나 호리호리해 보이는 그의 체형은 첫인상으로만 본다면 사제라기보다는 학자와도 같은 인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사제님.”

“아닙니다. 신의 품은 언제 어디서나 열려있는 법이니까요.”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사제를 보며 검 손잡이를 살짝 건드렸다.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부정.

소녀의 목걸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이곳에 왔건만 정작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제가 형제님의 기도를 방해한 것이 아닐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차라리 허락을 받는 것이 마음 편하니까요. 기도를 마친후에 바로 나가겠습니다.”

쉽사리 보기 힘든 기도하는 용병을 목격한 사제는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

“이곳은 교회입니다. 신을 찾는 모든 자들의 집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시면 됩니다.”

비록 눈앞의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안심할 수 없었다.

소년은 목소리의 도움을 통해 가려진 세계를 꿰뚫어 보았고 마을에 심상치 않은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블라드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사제의 목을 치고 교회 건물 곳곳을 쑤시고 다닐 것이 아니라면 더는 수상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테니까.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레고리가 당부한 사항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저도 기도를 올려야겠군요.”

다시금 기도하기 위해 자리 잡은 블라드의 옆으로 사제가 소리 없이 다가와 무릎 꿇었다.

용병인 척하는 소년과 사제인지 확신할 수 없는 남자가 신의 앞에 나란히 무릎 꿇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

오직 신 앞에 무릎 꿇은 두 남자만이 있는 이곳.

“부디 이 근방을 휩쓰는 전염병이 형제님의 일행에게 닿지 않도록.”

‘전염병?’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는 블라드를 보며 사제의 입술이 자그마한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사제.

수없이 많은 기도를 통해 정갈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자세는 분명 신실한 사제의 모습 그 자체였다.

“······.”

그러나 블라드는 그 모습 속에서 한 줄기 위화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종탑 위에 새겨져 있어야 할 교회의 문양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가 교회에 들어와 처음으로 마주한 문양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거꾸로 되어 있는 교회의 문양.

사제는 자신이 기도하는 신 앞에서 성경책을 거꾸로 들고 있었다.

※※※※

‘······.’

교회를 빠져나온 블라드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검은 곰의 제보와 잡아들인 사내들의 자백을 통해 조사단은 이곳 우트만 남작령에 있는 마을에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실종된 임산부들의 흔적을 따라 도착한 마을에는 짙은 안개와 함께 흉흉한 소문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만 죽는 병이라니······.’

사제의 기도를 듣고 이상한 점을 느낀 블라드는 재빨리 근처 주민들에게 전염병에 관해 물었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에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쇼아라에서는 여인들이 실종되었다면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전염병과도 같은 양상을 보이는 이 변고는 안개로 뒤덮인 마을뿐만 아니라 우트만 남작령에 속해 있는 대부분 마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불길한 전조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증거를 찾아야 할 텐데. 이거 뭐 보여줄 수도 없고.”

전염병이 아닐 것이다.

강한 확신은 있었지만 정작 확신을 증명해 줄 증거가 없었다.

목소리의 세계에서 보았던 검은 손아귀를 일행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쇼아라에서 챙겨온 성물을 여관의 아이에게 가져다 대보았지만 정작 기대했던 반응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물에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매한 흑마법사가 만든 저주 같다. 적어도 확실히 교육받은 사제가 직접 판별해야 할 거다.]

‘그렇게 대단한 걸 어떻게 알아봤대요?’

[······그건 나도 모르지.]

여전히 뜬구름 잡는 목소리의 대답에 블라드는 머리를 세차게 헤집으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무리 알고 있다 해도 행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이제야 겨우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소년은 또다시 혼자의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영역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응?”

그레고리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이 사태를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골목 모퉁이를 나가려던 블라드는 그곳에서 수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자그마한 광장.

그곳에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 어린 소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건 교회에서 준 거예요.”

누군가의 물음에 자랑스럽다는 듯 저주받은 목걸이를 들이대고 있는 소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소녀의 목걸이를 받아들고는 만지작대고 있었다.

※※※※

블라드는 전직 소매치기였다.

전직 도둑이기도 하고 가끔은 강도였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가장 오래 몸담고 있던 일은 남의 손에서 지갑을 빼 드는 일이었다.

나름의 자부심도 가진 일이었건만.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다.]

‘나도 그른 거 알아요.’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자를 뒤쫓던 블라드는 자신이 점점 마을 외곽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야겠는데.’

블라드는 혀를 빼물며 나아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실력자들을 봐왔기에 자신이 아직 하룻강아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수상한 마을에 있었으니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레고리에게 보고를 해야겠군.’

인상착의는 확인했으니 상관에게 보고하면 될 일이다.

어쩌면 이 사람을 통해 마을의 수상한 점을 알릴 수 있을지도······.

[온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자신의 의도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서서히 뒤로 물러나려는 블라드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로브를 뒤집어쓴 자가 갑작스레 돌격해왔다.

‘이렇게?’

아직 민가가 있는 길목에서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태까지의 조심스러운 행동과는 다르게 정체 모를 자는 블라드에게 저돌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젠장!’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대비할 시간은 있었다.

블라드는 침착하게 검을 뽑아 들고는 정체 모를 자를 받아들였다.

까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예상보다 무겁게 들어오는 검의 무게에 소년이 놀랄 때쯤.

[왼쪽!]

튕겨 나오는 반탄력을 이용해 어느새 하늘 높이 세워진 검이 블라드를 파고들어 왔다.

“······!”

차마 검을 들어 올릴 수 없는 짧은 순간 속에서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유연한 발걸음을 통해 사각에서 빠져나왔다.

애꾸눈의 스승이 소년에게 박아넣듯이 전수한 그 발걸음이었다.

콰앙-!

거칠게 패여지는 땅바닥을 보며 블라드는 확신했다.

‘기사다!’

이제는 검만 맞대어 봐도 알 수 있었다.

소년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춘 자들.

그런 사람들은 오직 기사밖에 없었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자신의 공격을 흘린 소년을 보며 정체 모를 자가 잠시 당황하는 동안.

전직 기사일지 아니면 현직 기사일지 모를 사람을 향해 블라드가 재빨리 한쪽 눈을 감았다.

소년의 세계가 장식 없는 검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소년은 먼저 자신의 패를 공개했으므로 기회는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단 한 번의 기회.

“흐읍!”

짧은 함성과 함께 눈앞에 있는 자를 향해 블라드가 튀어 나갔다.

정체 모를 자가 소년의 의외성에 당황하며 서둘러 검을 치켜들었다.

[······블라드!]

무거운 안개를 밀어내는 밝은 빛이 있었다.

까아아앙-!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소년을 마주하며 정체 모를 자가 다급히 블라드를 막아 세웠다.

그러나 블라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들을 노리는 자들이 곳곳에 숨어있었지만,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소년은 화가 나 있었다.

마치 어린 날의 자신처럼.

더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고 싶지 않다.

스스로의 다짐을 어기고 만 소년의 분노는 더욱 날카로워지고 흉포해져 눈앞의 상대를 향해 날아들었다.

멈추지 않는 연격.

언제나 다음 수를 생각하라던 자야르의 가르침에 따라 블라드는 쉴 새 없이 눈앞의 상대를 몰아치고 있었다.

[멈춰라! 멈춰!]

검과 검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 나가고.

정체 모를 자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들이 잘려 나갔다.

그리하여 마주 본 상대방의 모습은.

[저자는 성기사다!]

푸른 초원에서 보았던 녹색.

옥사나가 떠오르는 녹색의 눈동자.

출렁이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블라드는 내면 안에 있는 자신의 세계를 보기 위해 한쪽 눈을 감았지만, 여인의 두 눈은 오롯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세계는 이미 세상 위에 있었으니까.

신의 말씀 아래서.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1화 19

안개의 마을 (3)

낡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으나 검에는 신성력을 담은 여자.

용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소년.

서로가 가진 배경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둘의 검은 얽혀들어가 있었다.

검은 빠르고 말은 느리다.

한 번의 검 놀림을 택한다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복잡한 상황을 말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녹색 눈동자의 여인은 굳이 확실한 방법을 두고 대화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대응해라!]

자신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어느새 블라드에게 달려드는 여자.

목소리는 할 수 없다는 듯 소년에게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사태는 흘러갔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칫!”

블라드는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으로 그녀의 공격을 받아들였다.

난생처음 접하는 성기사라는 존재가 궁금하기도 했고.

까아앙-!

신의 의지로 가득 찬 그녀의 검을 블라드의 세계가 받아 쳐냈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며 불꽃이 튀어 나가고, 그와 동시에 블라드의 세계는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너무 묵직한데!’

성기사의 검을 처음 맞닥뜨린 블라드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검은 지금과 같은 충격을 주기에는 모자란 무게감과 속도로 다가왔으나 정작 닿았을 때만큼은 자야르와도 비견될만한 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납득 할 수 없는 결과였다.

[저것이 축복이라는 거다. 세계가 그녀를 돕고 있다는 증거지.]

‘······그런 게 어딨어!’

고작 신의 뜻을 받드는 정도만으로 본래의 실력보다 더한 위력을 보정 받는다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블라드는 다시한번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소년의 각오와 함께 천천히 타오르기 시작하는 장식 없는 검.

비록 정체 모를 성기사가 내뿜는 신성력에 비해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 올린 세계에 대해 블라드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었으니까.

‘보인다.’

실전과도 같았던 자야르와의 대련을 통해 이미 수 싸움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있었다.

그런 블라드가 보았을 때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여인은 빈틈투성이였다.

‘끝낼 수 있겠어.’

일격필살의 묘리는 전장을 통제하는 데서 나온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승리로 가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각오를 굳힌 블라드가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어깻죽지를 노리며 파고드는 블라드는 곧이어 날아올 반응에 대비하며 숨을 죽였지만.

‘뭐?’

그러나 대응하는 여인의 움직임은 예상했던 방어가 아닌 공격일 뿐.

신의 뜻을 받드는 기사는 소년이 물어뜯으려 하는 부분은 내버려 둔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블라드는 그녀가 성기사임을 알았기에 큰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방식은 너무나 극단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물러나는 쪽이 큰 피해를 입고만다.

터엉-!

어쩔 수 없이 성기사를 향해 검을 내려친 블라드였으나 로브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녀의 판금 갑옷이 블라드의 검 끝을 미묘하게 흐트러트렸다.

성기사들이 자랑하는 갑주술이었다.

‘······!’

타점이 빗나가고만 블라드의 균형이 순간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순간에 맞춰 여인의 녹색 눈동자가 빛나며 블라드의 발목을 강하게 걷어찼다.

빙글-

세상이 돌고 있었다.

‘이건 뭐야.’

허무하게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블라드는 마지막까지 조금 전 그녀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축복이라는 개념에 난생처음 보는 갑옷을 다루는 기술까지.

생소하고 강렬했기에 패배의 순간에서까지도 쉽게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었다.

콰앙-!

마치 명상과도 같았던 잠깐의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강하게 땅에 꽂히고만 블라드.

“크으!”

곧 널브러져 있던 소년의 목덜미에서 서늘한 검의 감촉이 느껴졌다.

“너는 누구냐.”

블라드는 고개를 올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정체 모를 성기사를 마주했다.

옥사나와 같은 색이었지만 온도만큼은 다른 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블라드는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일부러 빈틈을 내보였구나.

“······저는 쇼아라에서 왔습니다. 이곳에서 조사할 게 있었거든요.”

일격필살의 묘리는 전장의 통제에서 나온다.

그러나 방금 있었던 전장을 통제한 사람은 소년이 아닌 정체 모를 성기사였다.

새로운 대상, 새로운 기술.

오늘, 또 다른 세상을 엿본 소년은 두 손을 들고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상처와도 같은 또 하나의 색깔을 자신의 세계에 새긴 채로.

※※※※

손님이라고는 오직 일행뿐인 여관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저 건너 화로 너머에서 그들을 보고 있던 블라드는 들고 있던 물잔을 들이마셨다.

자신의 패배로 만들어진 상황이어서 그런지 목으로 넘기는 맛이 썼다.

“여기서 쇼아라의 기사님들을 뵙게 된 것은 분명 하늘의 뜻일 겁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스티아 님.”

수상쩍은 안개가 감도는 마을에서 만난 기사들.

서로 등에 지고 있는 명령은 다르겠지만 그들은 분명 수상한 징조를 따라왔다.

“저는 이 근방에서 어린아이들이 죽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음을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염병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조사에 임했었습니다만.”

블라드가 몰래 뒤를 밟았던 그녀는 목소리가 말한 대로 교회에서 보낸 성기사였다.

정확히는 북부 대교구 산(san) 로지노 에서 파견한 인원 중 한 명.

교회는 이미 우트만 남작령에서 벌어지는 변고를 눈치채고 있었다.

“저주더군요. 오래된 옛것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렇군요.”

유스티아의 말에 그레고리는 자신의 억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예상이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 일은 그의 권한과 능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교회는 있는 것으로 보이던데 말입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 고민 끝에 겨우 꺼내든 질문이었으나 정작 들려오는 대답은 냉정하고 차가울 뿐이었다.

“저는 이곳에 있는 교회가 저주의 주체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오.”

신의 뜻을 따르는 기사가 교회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광경을 보며 그레고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이곳은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부디 쇼아라의 새로운 시장님에게 감사하다 전해주십시오.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통해 그것에 대비하려 했던 시장님의 태도는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돌려서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 유스티아의 말은 그레고리에게 더는 접근하지 말라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바예지드의 땅이 아니었고 흑마법과 관련된 일은 교회가 나서야만 하는 일이었다.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쇼아라의 기사들로서는 더는 나아갈 명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두 명의 대화 속에서 선이 그어졌다.

조사대의 일은 여기서 끝이다.

그들은 우트만 남작령에서 불길한 사태를 확인했으며 산 로지노에서 온 성기사의 증언을 확보했다.

비록 실종된 여인들은 찾지 못했으나 더이상 사태에 접근하는 것은 요제프에게 부담을 주는 일일 것이다.

이곳은 자신들의 영지가 아니었으니까.

권한과 책임의 무게 앞에서 기사들은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

블라드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씁쓸한 기분에 괜히 들고 있던 물잔을 튕겨보았다.

아무래도 결국 안나는 찾지 못할 모양이었다.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웃던 여자를 생각하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

유스티아는 이미 전서구를 띄워 지원을 요청했다고 했다.

늦어도 삼일 이내에는 다른 기사들이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기에 그레고리는 그때까지는 유스티아의 옆에서 그녀와 함께하겠다고 했다.

아마 그것이 그레고리가 선택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을 것이다.

“이제 가요?”

“응.”

조용한 여관 안에서 아무도 없는 광장을 내다보며 블라드는 아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왜 벌써가요?”

“일을 다 했거든.”

“······이 세상에 끝나는 일이 어디 있어요.”

의도하며 내뱉은 말은 아니었겠지만 어린 소녀가 하는 말치고는 무언가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 블라드는 괜스레 헛기침을 내뱉었다.

“넌 친구도 없어? 왜 아까부터 여기에만 있어.”

“아빠가 나가지 말래요.”

그 말에 블라드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카운터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을 도끼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여관의 주인이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조금만 더 있으면 교회에서 선물을 준다고 그랬는데.”

“······뭐?”

무심코 흘러나온 소녀의 말에 블라드는 지나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블라드가 주인을 돌아보자 그는 자신의 딸이 한 말을 보충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조만간 교회에서 애들을 모아 축문 성사를 진행한다지 뭡니까. 지금처럼 흉흉한 시절에 아이 가진 부모로서는 참 감사한 일이죠.”

“······그게 언제라 그러던가요?”

“언제라 그랬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여관 주인은 정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3일 후라 그랬나, 4일 후라 그랬나. 뭐 어쨌거나 사제님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모을 테니까 말이오.”

그 양반이 참 훌륭한 사제라 말하는 여관 주인의 말을 뒤로하며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교회의 문양으로 깎아놓은 나무 목걸이.

깎아놓기는 제대로 깎아놓았으나 정작 매다는 부분을 미묘하게 만들어놓아 자꾸만 부정한 형태로 자리 잡는 목걸이를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때까지는 있다가 갈 거예요?”

불길한 상징을 매단 채 순수한 눈빛을 보내는 소녀를 보면서 블라드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을 것이다.

신께서도 알아주시겠지.

“그때까지는 있다 가지 않을까.”

“흐!”

블라드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재빨리 꼬물거리고 있던 것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마 대화를 하면서도 지금의 기회를 엿본 모양이었다.

“이게 뭐야?”

“꽃반지.”

“꽃이 없는데 어떻게 꽃반지야.”

블라드의 말대로 푸른 줄기만 가득한 꽃반지였다.

제대로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벽에 매달린 담쟁이 넝쿨을 따와 만든 모양이었다.

한껏 밖을 뛰놀며 꽃을 따며 뛰놀아야 할 아이였지만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우리 잠깐 밖으로 나가······.”

“마리안.”

블라드와 아이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올라가라. 잠잘 시간이야.”

“하지만······.”

단호한 여관 주인의 표정에 아이는 침울한 표정으로 블라드의 곁에서 일어났다.

온종일 혼자 있어야 하는 아이로서는 블라드와의 대화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진짜 내일도 여기 있을 거죠?”

“아마도.”

그럼 내일도 보자며 자그마한 손을 흔들며 주인을 따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아이.

블라드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따라 손을 흔들어주었다.

“······.”

블라드는 아무도 없는 1층에서 조용히 소녀가 건넨 꽃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축축한 안개로 가득한 현실은 소녀에게 아주 자그마한 꽃 한 송이도 허락하지 않았다.

밖을 감싸고 있는 안개와 소녀의 목에 맺힌 저주와 아이가 건네준 꽃 없는 꽃반지를 보며 블라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마리안! 마리안!”

“······!”

갑작스레 조용한 여관 안에 울려 퍼지는 사내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냐!”

그 소리에 놀란 2층에 있던 일행들이 뛰쳐 내려오고.

홀로 1층에 앉아 있던 블라드는 외마디 욕설과 함께 재빨리 방금 여관 주인과 아이가 사라졌던 안쪽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젠장!”

방금 들려온 비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만 같은 블라드는 재빨리 방금 여관 주인과 아이가 있는 카운터 안쪽을 향해 뛰어 들어갔다.

“안돼! 마리안!”

블라드가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그곳에는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진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여관 주인과 거품을 문 채 꺽꺽대고 있는 소녀의 모습.

[저주가 발동된 것 같다. 우리를 눈치챈 모양이군.]

유스티아와 쇼아라의 조사대가 이곳의 특이점을 눈치챘듯이 상대편 또한 기사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이 마을은 그들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들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보다는 먼저 움직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내 세계를 빌려주마.]

본다 해서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목소리는 소년에게 사태를 파악시키려 했다.

“······.”

울부짖는 아버지와 가쁜 숨을 내쉬는 소녀. 그리고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기사들.

그 사이에서 블라드는 목소리의 세계를 열고는 꺽꺽대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색깔이 짙은 목소리의 세계.

그곳에서 보이는 광경은 소녀의 목을 사정없이 비틀어대는 검은 손아귀와 소녀의 입에서부터 빠져나오는 가느다란 연기의 형상이었다.

[생명력을 뽑아내는 형태의 저주인 것 같다.]

그 연기는 질식하고 있는 소녀에게서부터 빠져나와 여관의 창을 타고 바깥으로 흐르고 있었다.

교회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주가 발동되었군요. 아무래도 저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입니다.”

“유스티아 님.”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유스티아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까 싶어 소녀의 기도를 확보한 뒤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로브를 뒤집어썼다.

그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흉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나중에 도착할 제 동료들에게 사정을 설명해주십시오.”

“······.”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그레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떠나는 기사와 책임과 권한에 묶여 남아있는 기사들.

같은 것을 보았음에도 두 개의 세계가 택하는 선택은 달랐다.

블라드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안개 속으로 떠나가는 유스티아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여관 밖까지 따라나서고 말았다.

“······숨 좀 쉬어봐라!”

“아이가 이상해요!”

“안돼! 안돼!”

소년이 무심코 따라나선 광장에서.

안개 너머 집들에서 하나둘씩 불이 밝혀지고 그와 함께 부모들의 비참한 울음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 안에 오직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2화 10

하늘을 향해서 (1)

짙은 안개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유스티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생각했다.

뒷골목을 빠져나가고자 소망했던 것은 단순히 살아남고자 함이 아니었다.

늙은 대장장이의 검을 바라봤던 것은 단순히 동경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너는 분명 기사가 되겠지.”

그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슴 안에 무언가를 품어야만 한다.

“그러니 이해해야 해. 우리의 검에는 명분과 책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레고리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 하는 소년의 뒷목을 끌어당기고는 진중한 눈초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봐라.”

“무엇을요?”

소년의 질문에 그레고리는 잠시 고민하고 말았다.

아직 너무 이른 것이 아닐까.

하지만 조금 이른 지금이기에 더욱 필요한 말인지도 몰랐다.

“지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다.”

가늘어져 가는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울부짖는 부모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안개 가득 한 자그마한 광장 안에서 억센 수염의 기사가 읊는 오래된 규율 하나가 있었다.

가장 위대한 검사이자 기사들의 기사인 남자가 만든 규율이었다.

오래되었기에 단단한 규율은 소년의 세계 안에 또 하나의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

회색빛 돌로 만든 교회.

유스티아의 초록빛 눈동자가 교회 저 높은 곳에 있는 종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숨결이 부정한 교회 가장 높은 곳을 향해서 모이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이곳은 너희가 기거할 곳이 아니다!”

그녀의 부름에도 굳게 닫힌 교회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아무리 어두운 기운으로 감쌌다 할지라도 눈앞의 교회는 신께서 만들어 낸 땅을 딛고 만들어진 것.

자신의 집에 기거하는 그녀로서는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콰아아앙-!

신의 뜻을 담은 일격이 아무 대답 없는 교회의 나무문을 부수고.

어둠으로 가득 찬 교회로 들어선 유스티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칠해져 있는 붉은색의 문양들 뿐.

“······.”

지독한 신성모독의 흔적들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예배실 가장 깊은 곳, 신에게 가장 가까워야 하는 제단에서 두툼한 성경책을 들고 있는 사제가 서 있었다.

가증스럽게도 사제의 옷을 입은 채 어린아이들의 숨결을 빨아먹는 남자를 보며 유스티아가 검을 치켜들었다.

“왜 혼자만 오셨습니까? 저와 기사님만으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올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

사제의 비웃음 섞인 말에 유스티아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예배실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눈앞의 사내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교회 내부를 감도는 이질적인 기운에 유스티아가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크아아아-!

유스티아가 딛고 있는 바닥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숙한 신음 소리가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고 여럿이었으며.

모두가 가련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댕- 댕- 댕-

교회의 종이 울리고 있었다.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지하에 숨겨두고 있었군.”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유스티아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녀는 각오한 자였으며 예상했고 준비한 사람이었다.

단지 그녀에게 모자란 것은 며칠간의 여유였을 뿐.

그러나 신의 뜻은 좁은 문이며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인내가 필요할 것임을 유스티아는 잘 알고 있었다.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유스티아는 서둘러 어두운 교회 안을 자신의 검으로 밝히고는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혼자가 아닌 여럿.

무거운 것이 아닌 가벼운 것들.

마치 차가운 돌바닥을 맨발로 뛰어오르는 소리 같았다.

타앙-!

마침내 기어 올라온 소리들이 지하를 감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그곳에서부터 검게 물든 손아귀들이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내 아이.

너무 어두워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요!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오직 공허한 어둠만이 가득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이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든 참혹한 광경을 보며 유스티아도 더는 냉정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울부짖는 여인들의 뭉개진 눈보다 더 끔찍한 것은 피로 물들고 만 그녀들의 아랫배였으니까.

“이런 짓을 벌이고도······”

세상은 언제나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법이라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무언가 어긋난 정도로는 이런 일을 만들 수 없다.

오직 선을 넘은 자들만이 가능할 것이다.

“신이 두렵지도 않으냐!”

“신이 두렵다라······.”

유스티아의 일갈에 언제나 미소를 지을것만 같던 사내가 천천히 무표정해지기 시작했다.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고 마치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한 변화였다.

“그분은 분명 두려우신 분이지만 저에게는 큰 상관이 없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더는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사내가 들고 있던 성경책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의 발밑으로.

“저는 더 이상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스티아의 눈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세계를 모욕하는 자를 보며 유스티아는 품고 있던 분노를 터트리며 크게 일갈했다.

“천상 군대의 영광스러운 지휘관이시자 신의 옆에 계신 성(聖) 로지노시여!”

분노어린 목소리로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성인의 이름을 외친 유스티아.

그녀의 검에서부터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악의 압제 속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가련한 영혼들을 구하러 오소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검게 물든 손을 뻗치는 여인들.

누군가에 의해 희생되었고 빼앗긴 여인들이었다.

유스티아는 그녀들의 손을 모두 잡아줄 수 없었기에 어둠 속에서도 통하는 빛의 길을 열려 하고 있었다.

“그 값은 제가 지급하겠나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단 하나의 횃불이 스스로를 불태우며 더욱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어둠 속에 있어도 찾을 수 있는 그런 빛이었다.

장엄구마(莊嚴驅魔).

오직 성스러운 뜻을 받는 성기사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이 부정한 교회 위로 꽂혀 들었다.

“생각보다 대단하신 분이었군.”

스스로를 심지 삼아 불태우는 강렬한 빛에 거짓된 사제는 잠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어떤 물리적인 힘도 갖추지 못한 빛의 물결이었으나 유스티아의 굳건한 의지로 만든 빛의 기둥은 부정한 교회를 격렬히 흔들고 있었다.

아아아아-!

하늘에서 내려온 따뜻하고 영화로운 빛은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의 슬픔과 한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녀들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 주고 있었다.

“크흐흐흐흐!”

그러나 부정한 뜻을 불태우는 빛 속에서도 거짓된 사제는 웃음 지을 뿐이었다.

“아무리 빛나는 횃불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점점 범위를 넓혀가는 빛기둥에 의해 손끝이 타들어 가고 있는 남자였지만 그 끝이 명확함을 알기에 비웃을 수 있었다.

아무런 준비의식 없이 장엄구마를 시행한 그녀의 실력은 높게 살 만했지만 결국 지금의 그녀는 혼자였다.

지금의 어둠을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 더 많은 횃불들이 필요할 것이다.

“······.”

거짓된 사제의 말처럼 눈을 감고 신에게 기도하는 유스티아의 이마에서 한 방울의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반동이 강한 주문이었고 스스로의 수명을 대가로 하는 기적이었다.

이 세계는 신의 뜻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그분은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이었으니까.

가련한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잦아듦과 동시에 유스티아가 행하는 장엄구마의 빛도 서서히 꺼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거짓된 사제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어두운 빛깔의 검이었다.

“······.”

검을 들고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유스티아가 각오를 굳혔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는 성기사로서 적어도 눈앞의 사내 정도는 데려갈 마지막 방안 정도는 준비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성기사라는 존재는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신의 교회가 모든 적을 무너뜨리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검이 아닌 자신의 몸으로 신의 영화로운 불꽃을 불러오기 위해 기도문을 외우려는 유스티아.

그녀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초록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려는 순간.

콰아아앙-!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이미 유스티아에 의해 부서진 교회의 문이 다시 한번 거칠게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밀어!”

“고트! 이제 넌 빠져라!”

거친 함성과 함께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사내들이 있었다.

시뻘겋게 불타는 마차와 함께.

“······!”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심지어 앞이 보이지 않는 여인들조차도.

점점 어둠으로 차오르는 교회 안으로 새로운 횃불 하나가 달려들어 오고 있었다.

“이제 비켜!”

그레고리가 신호하자 같이 불타는 마차를 밀고 있던 사내 두 명이 떨어져 나가고.

“흐아아아!”

당황하던 유스티아가 재빨리 옆으로 구르는 것을 확인한 그레고리는 마차 하나를 집어 던지듯 눈앞의 사내를 향해 밀어버렸다.

“뭐 이런!”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을 보며 거짓된 사제가 들고 있던 검으로 마차를 후려쳤다.

당황한 나머지 뒷일을 생각하지 못한 휘두름이었다.

퍼엉-!

자그마한 폭발과 함께 마차가 터져나가고 사방으로 불꽃들이 튀어 나갔다.

교회의 곳곳이 불에 타오르고 어둠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그레고리가 의도했던 불길들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빛이 있노라.

“지금이다!”

우당탕거리는 움직임 속에서 타오르는 파편들을 헤치며 사제를 향해 파고드는 소년이 있었다.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가라!]

“흐아아아!”

기사들의 유구한 전통 중 하나인 화려한 등장.

왼쪽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세계를 펼친 블라드가 그 자리에 있었다.

장식 없는 검 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콰아아앙-!

방금 마차가 터져나갔던 것만큼이나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두 개의 검.

번져나가는 불길 속에서 검을 마주한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애들 건드리는 건 선 넘었지. 씨발아.”

“······이런.”

으르렁거리는 소년의 눈동자를 보며 거짓된 사제는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이제야 알아보았습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그냥 뒤져!”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거짓된 사제를 담은 채 불타오르는 동안 그레고리와 케이드는 재빨리 유스티아를 둘러싸고는 진형을 구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에 오시면······곤란하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레고리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기사의 검은 날카로운 만큼 무거워야 한다.

명분 없는 휘두름은 그저 폭력일 뿐이며 기사들은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검을 책임 질 수 있는 자들에게 바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요.”

그레고리는 유스티아를 일으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애들이 죽어가는데.”

“······감사합니다.”

그레고리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명분을 만들고 검을 휘둘렀다.

그에 대한 책임은 이제 모두 그레고리가 져야 할 것이다.

기사가 갖춰야 하는 미덕 중 하나인 희생을 보면서 유스티아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상기해냈다.

“종탑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 저주의 근원이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레고리는 어둠 속에서 자신들에게 다가오려 하는 꾸물거리는 형체들을 보며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쾅-

바닥을 향해 힘껏 발을 구르자 곧 단단해 보이는 갈색빛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유스티아의 말이 맞았다.

지금도 아이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저 자식부터 떼어놔야겠군.’

사태가 급박하니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럴 때는 무리를 해서라도 인원을 분리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저 앞에서 기세 좋게 날뛰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흐으읍!”

목을 크게 부풀리며 공기를 잔뜩 집어삼킨 그레고리.

“내가 왔—다!”

곧 큰 함성과 함께 폭발하듯 튀어 나가는 그의 신형이 거짓된 사제를 향해 덮쳐 들어갔다.

작달막한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정체 모를 사내를 밀치고 들어간 그레고리.

마치 성난 들소처럼 돌격해 들어간 그레고리를 보며 순간 놀란 블라드의 눈빛의 그를 스쳐 지나갔다.

콰아아앙-!

거짓된 사제와 함께 벽 끝까지 딸려 들어간 그레고리의 어깨로 돌무더기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레고리 님!”

“크으, 종탑에 뭐가 있단다!”

버둥거리는 거짓된 사제를 억누른 채 그레고리가 크게 소리쳤다.

“뭔지는 모르겠다만 가서 부수고 와라!”

“······알겠습니다!”

명을 받는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야 사제인 척하는 저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가장 우선인 목표는 아이들을 살리는 일일 것이다.

분노로 가득 찼지만 이성은 잃지 않은 블라드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훑기 시작했다.

‘저긴가!’

예배실의 어둠 너머로 나선형의 계단이 보였다.

비록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저것뿐이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어딜······가십니까!”

순간, 거짓된 사제의 입에서 인간은 알아듣지 못할 괴상한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저주였으며 또한 신호이기도 한 것이었다.

저기다!

내 아이가 저기 있어!

아직 승천하지 못한 여인들이 블라드를 향해 새까맣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움직이는 걸음 하나에 아이들의 숨결 하나가 날아간다.

시간이 없음을 잘 알기에 블라드는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의해 소년의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쉴새 없이 달려드는 악의를 막기 위해 흰 뱀의 가호가 빛을 밝혔다.

‘너무 많아!’

그럼에도 블라드를 막으려 드는 가련한 여인들의 손짓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피슉-!

갑자기 눈앞에서 터져나가는 여인의 머리통을 보며 블라드가 고개를 돌렸다.

유스티아의 축복이 깃든 화살을 들고 있는 기사.

케이드였다.

“엄호하마!”

다급히 고갯짓으로 의사를 전하며 다시 시위를 메긴 그가 서둘러 블라드에게 달려드는 또 다른 여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어둠을 가르는 빛나는 화살이었다.

“흐압!”

케이드가 뿌리는 화살에 힘입어 블라드가 재빨리 여인들의 머리통을 짓밟고는 계단을 향해 뛰쳐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곳곳에서 손을 뻗는 검은 손아귀를 뿌리치며 등 뒤에서 쉼 없이 울려 퍼지는 거짓된 사제의 저주를 흘리면서.

소년은 하늘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을 잡아냈다.

[서둘러라!]

어둠으로 가득 찬 예배실을 벗어나 안개에 가려진 하늘을 향해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는 소년은 가슴 속에 품은 별 하나가 있었고 그것을 띄우기 위해서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야만 했다.

아이들의 숨결이 있을 그곳으로.

먼지 가득한 계단의 난간을 붙잡은 소년의 손가락에는 꽃 없는 꽃반지 하나가 끼워져있었다.

“저리 비켜--!”

부정한 교회를 가득 채우는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는 소년의 함성이 있었다.

※※※※

이 세상 모든 세계는 존귀한 것들이나 모두가 스스로를 지킬 수는 없는 법.

그러나 너희는 지키기 위해 맹세한 자들이니.

그러니 너희가 만약 있어야 할 곳에 있다면.

해야 할 순간에 서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스스로를 불태워 어둠을 밝힐 횃불이 되는 것을.

그것이 나의 두 번째 규율이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3화 12

하늘을 향해서 (2)

지쳐버린 유스티아를 뒤에 두고 케이드가 다시 한번 화살에 시위를 매겼다.

피슉-!

날아가는 화살과 함께 그의 손끝이 터져나갔다.

당기는 시위에는 이미 붉은색 핏방울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케이드는 활을 당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레고리에게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어줘야만 했으니까.

금발 아이를 놓쳐버린 여인들이 방향을 돌려 그레고리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유스티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쳐놓은 결계 밖에 있던 그는 교회에 맴도는 악의를 오롯이 혼자서 받아내야만 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레고리는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고 단단한 만큼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여인들의 검은 손아귀는 그의 갈색 오러에 조금의 상처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진짜 너무 엿 같은 걸 많이 봤어. 네놈 면상까지 합해서 말이다.”

여인들의 방해 속에서도 그레고리가 유스티아의 축복이 담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어쨌거나 이것을 내려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부디 내가 보낸 금발 소년이 아이들을 구해냈기를 바란다.

“마지막까지 쪼개는구만.”

“하십시오.”

들소와도 같았던 그레고리의 일격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거짓된 사제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는 죽음으로 끝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어디 대가리가 날아가도 그 말을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그레고리의 말이 웃겼던지 거짓된 사제가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내가 내뱉는 웃음이 뒤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래! 끝까지 웃다가 가라!”

축복으로 빛나는 그레고리의 검이 세차게 휘둘러지고.

스걱-

망설임 없는 휘두름에 웃고 있던 사내의 목이 베어지며 제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저주의 주체였던 남자가 침묵하자 곧 우는 여인들의 움직임도 동시에 멈추고 말았다.

군세를 무너뜨리려면 지휘관을 잡아야 한다.

도박과도 같았던 그레고리의 판단은 성공했다.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사내의 목을 본 그레고리는 긴 한숨을 내쉬며 허물어지듯 제단의 계단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니미럴, 오늘 참 빡빡하구만······.”

지금의 일격을 위해 모든 힘을 소진한 그레고리가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 있던 술병을 꺼내 들었다.

오늘만큼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도 괜찮을 것이다.

그레고리는 지금의 승리를 위해 많은 것을 짊어졌으니까.

쇼아라로 돌아가 책임져야 할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그레고리는 술병을 들이켰다.

방금의 일격으로 기사들은 승리했고 그들은 승리의 순간을 만끽할만한 자격이 있었다.

굴러떨어진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러고 보니 오늘의 미사에서 포도주가 빠진 것 같습니다.”

“······뭐?”

지친 미소로 서로를 마주 보던 일행들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당황하고 말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도 술 한 모금 내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행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굳어버린 듯 멈춰버렸다.

방금 베어낸 사제의 목.

제단 아래 굴러다니던 그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레······고리 님!”

누구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는 기괴한 상황에서 케이드가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레고리의 등 뒤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았기에.

케이드는 서둘러 화살통을 뒤져보았으나 잡히는 것은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그레고리의 등 뒤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는 자.

그는 목이 없었다.

“듀라한······.”

유스티아가 경악한 눈으로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단 밑으로 굴러떨어진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써왔던 얼굴이라 정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목 없이 일어서는 시체와 몸 없이 말하는 머리.

그 기괴한 광경을 보는 유스티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목 없는 기사 듀라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사.

“이제 다 모인 것 같군요.”

몸 없는 머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목 없는 몸이 두 팔을 크게 치켜올렸다.

어느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콰가가강-!

세차게 내리는 비와 무섭게 내려치는 천둥.

발밑에는 자욱한 연기, 머리 위에는 꾸물거리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소년은 미끌거리는 종탑의 장식물을 붙잡고는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곳에 있을 아이들의 숨결을 붙잡고 있는 문양을 떼어내기 위해서.

“크윽!”

잠시 디딜 곳을 놓친 블라드의 발이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다시금 발을 디디고 손을 뻗고.

내리는 비와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감에도 이를 악물고는 저 높은 곳을 향해 팔을 뻗는 소년.

소년은 자격 없는 자였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다면 내가 한다.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한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어느샌가 문양 바로 밑까지 다다른 블라드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무릎 한번을 핀다면.

벽을 잡고 있던 손을 뻗는다면 다다를 수 있는 그런 위치였으나.

그러나 세상은 소년이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움켜잡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것 하나 붙잡기가 그렇게 힘이 들었다.

[피해라!]

“······!”

목소리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흉험한 기세가 있었다.

황급히 몸을 뒤틀며 공중으로 뛰쳐나간 블라드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댕---

마치 선이 그어진 듯 예리하게 잘려 나간 종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지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지는 종탑과 함께.

콰가가강-!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처럼 교회의 가장 높은 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젠장!”

무너지는 종탑을 피해 땅으로 떨어져 내린 소년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며 튀어 오르는 파편을 피해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했지만, 흰 뱀의 가호가 소년을 지켜주었다.

가까스로 위험 범위에서 벗어난 블라드는 재빨리 장식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멀쩡한 건물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을 리가 없었으니까.

“훌륭하군요. 제가 보아도 멋진 착지였습니다.”

몰아치는 먼지 속에서 누군가가 블라드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너 이 새끼.”

어느새 종탑 위에 있던 불길한 문양을 붙잡은 누군가가 보였다.

“사람 새끼 아닐 줄은 알았어.”

마치 조롱하듯 블라드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는 목 없는 사내.

그러나 소년은 눈앞에 남자를 보며 경악하는 대신 검을 치켜들었다.

해야 할 곳에 있었지만, 한 뼘이 모자라 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거 내놔.”

“······.”

그러나 목 없는 사내는 더는 블라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샌가 다가와 새파란 안광을 내뿜고 있는 말에 올라타려 했을 뿐이다.

목 없는 사내.

뼈만 앙상히 남은 말.

그들의 모습은 죽음과도 같았다.

“그거 내놓으라고!”

그러나 소년은 그들을 향해 뛰쳐 드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의외성을 가져오는 속도로 달려든 블라드는 목이 없는 사내를 향해 장식 없는 검을 내질렀다.

카가가강-!

마치 벼락과도 같은 움직임이었으나 목 없는 사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검을 들어 소년의 일격을 막아낼 뿐이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각도로 검을 비틀어 소년을 압박하고 있었다.

“······!”

[관절을 기이하게 비틀고 있다. 각도를 예측하지 마라!]

살아있지 않기에 허락될 수 있는 움직임으로 소년을 후려치는 목 없는 사내.

터엉-! 텅-! 텅-!

그럼에도 블라드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의 일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볼 수는 있었으니까.

소년의 타고난 동체 시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자야르에게 배운 반격기가 작렬하고 있었다.

“흐아아!”

있어야 할 곳에 있다면 해라.

해야 할 자리에 서 있다면 해라.

위대한 기사 소드마스터가 허락했으니.

“······.”

방금까지만 해도 형편없이 뒤로 물러나고 있었으나 어느새 돌격할 자세를 잡는 소년을 보며 목 없는 기사가 두 손으로 검을 잡았다.

진심을 다해야만 눈앞의 소년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너무 달려들지 마십시오. 동류에게 보내는 저의 호의가 언제 사그라질지 모릅니다.”

“내가 왜 네놈의 동류냐!”

“······당신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목 없는 기사였으나 소년은 오직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전진할 뿐이었다.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

“······!”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목 없는 사내의 움직임은 이미 소년의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고 있었다.

반격기로 쳐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 들어오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어깨를 가져다 댔다.

[블라······.]

소년의 판단에 목소리조차 경악하며 소리를 내질렀지만 곧이어 보이는 광경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끄가가각-!

검과 갑옷이 만나며 튀어 오르는 불꽃.

목 없는 사내의 검과 소년의 갑옷이 마주치며 미묘하게 각도를 비틀어내었다.

초록색 눈동자의 여인에게서 본 갑주술이었다.

“흐아!”

오직 단단한 판금 갑옷으로만 시전 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나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는 흰 뱀의 가호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허용할 수 없는 충격을 강요하는 소년의 움직임에 바예지드의 가죽 갑옷이 비명을 질러댔다.

“······!”

목 없는 사내조차도 잠시 멈칫하며 소년의 분전에 놀라고 말았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보는 것만으로 배우고 듣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소년의 재능은 분명 굳혀진 전장을 의외성으로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블라드가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맞닿는 지평선에서 나는 우리가 된다.

지금도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는 소년의 세계는 채울 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바로 맞닿고 있는 목소리의 세계로부터 끌어오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그것을 허락했다.

목소리의 세계는 색이 진한 세계.

몰아치는 폭풍과 뇌우가 가득한 세계.

지금 내려치는 천둥보다도 더욱 굵은 줄기의 번개가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애들은 내버려 두란 말이다!”

방금 탑 위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소년은 그토록 원했던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었다.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부수는 소리와 함께.

콰가가강-!

목소리가 전수했던 일격필살의 묘리가 방금 소년의 손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소년의 검에서부터 하얀 벼락이 내리쳤다.

※※※※

흘러내리는 빗소리만 가득한 교회의 건물 앞.

“끄으으으······.”

온몸을 불태우며 일격을 날렸던 블라드는 입에서 흐르는 가느다란 침방울도 닦아내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으나 할 수 없었다.

필살의 각오로 날렸던 벼락과도 같은 일격은 목 없는 기사의 검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소년은 분명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미 앞서 있는 자에게는 미약한 발걸음일 뿐이었다.

세상은 애써 뒤따라오는 자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동류라 해서 봐주고 있었건만······.”

목 없는 기사의 검에서부터 희미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소년은 성공한 것일지도 몰랐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짓던 목 없는 자의 세계에 분노라는 균열을 만들어내었으니까.

“크악!”

목 없는 사내의 분노와 함께 저주 실린 검이 소년의 몸뚱어리를 후려쳤다.

온 힘을 소진해 비틀거리고 있었을 뿐인 블라드는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힘없이 밖으로 튕겨 나갔을 뿐이었다.

쾅-! 콰앙!

근처에 있던 담장을 무너뜨리며 쉼 없이 굴러가던 블라드.

흰 뱀의 가호가 마지막 빛을 발하며 소년을 지켜내었지만, 이것이 끝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별을 잡기 위해 하늘을 향해 기어올랐지만 결국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시도가 결과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미리 처리하고 가야겠군.”

말에 올라타려다 잠시 멈칫한 목 없는 기사는 이윽고 검을 빼내어 든 채 블라드를 향해 다가갔다.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심상치 않은 소년이었다.

눈 안에 담고 있는 존재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그저 내버려 두기에는 뒤통수가 가려울 것이다.

푸른 달빛의 기사는 그 가능성을 높이 사 소년을 살려주었으나 목 없는 기사는 미리 싹을 잘라두려 하고 있었다.

빛나는 것을 대하는 두 개의 세계는 정반대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길래 적당히 하지 그랬습니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년.

그래도 용케 검을 쥐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목 없는 사내의 결심을 확고하게 했다.

이 녀석은 여기서 죽여야 한다.

아무리 자신과 같은 동류를 품고 있다 하더라도.

저주 어린 검에서 흘러내린 빗방울이 블라드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목 없는 사내의 검이 블라드의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끼기긱-!

“······!”

그 순간 정신을 잃고 있던 블라드의 손이 움직이며 목 없는 자의 검을 비틀어내었다.

“이건······.”

마지막 발악인가?

분명 정신을 잃고 있었으나 저절로 움직이는 손을 보며 목 없는 사내가 당황하는 동안.

[애들은 건들지 말라고 아까 이 녀석이 말했잖냐.]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장식 없는 검에 기대어 일어선 소년.

아니, 소년이 아닌 그가 한쪽 눈을 감은 채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른들끼리 한 번 붙어보자.]

그가 뜨고 있는 왼쪽 눈에서 새하얀 번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4화 14

어둠 속에서 건져낸 작은 별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은 안다.

존재의 기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지켜야 할 의무만은 영혼 속에 깊게 각인되어있었으니.

나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존재해왔다.

※※※※

첫 번째 맞부딪힘까지는 대결이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분노가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겨우 이따위 실력으로 뭐라도 된 듯 날뛰었단 말이냐!]

그저 폭력일 뿐이었다.

쉴새 없이 휘둘러지는 폭력의 정점 속에서 목 없는 사내는 크게 당황하며 뒷걸음질 칠 수밖에는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먹고 살아왔던 목 없는 사내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먹히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쾅-! 콰앙! 쾅!

장식 없는 검을 통해 선명하게 몰아치는 섬광을 보며 목 없는 자는 실로 오랫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감정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두려움.

지금도 터져나가는 사제복과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는 유령마의 존재가 잠시 후에 찾아올 자신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아 그는 두려웠다.

[어린 것들의 피를 빠는 쓰레기 따위에게 해줄 말은 없다.]

목소리의 왼쪽 눈에서 요란하게 몰아치는 폭풍우가 지나치고 있었다.

자비가 없는 뇌우(雷雨)였다.

[그러니까 죽어라.]

순간 세상이 하얘졌다.

목 없는 기사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저기 온다.

하얀색의 괴물이.

사나운 이빨을 치켜뜬 채로.

나를 먹으러 온다.

하얀색의 번개로 만들어진 사나운 짐승이 목 없는 기사를 향해 곧장 달려들고 있었다.

내리는 빗방울들조차도 그를 적시지 못할 것 같은 속도로.

‘왼쪽인가! 아니면?’

목 없는 기사는 찰나의 순간 속에서도 수십 번을 망설이며 몸을 움찔거렸다.

목소리가 내딛는 발걸음에는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담겨있었다.

문제는 그 가능성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파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난폭하게 다가오는 운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오른쪽!’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목소리의 움직임에 목 없는 기사는 최선을 다해 반응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함뿐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느리니 마니 지껄인 거였나?]

“······!”

사나운 짐승이 어느샌가 다가와 목 없는 남자의 등 뒤에서 스산한 입김을 내 불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내가 아끼는 가능성을 조롱하다니.

콰아아앙-!

“끄아악!”

분노를 담은 검으로 사정없이 목 없는 사내를 내려치는 목소리.

너무나 강한 충격에 땅바닥에 꽂히다 못해 튕겨 나와버린 목 없는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쾅-! 쾅-!

공중에 뜬 채로 수십 번은 베어지고 만 목 없는 사내는 죽음보다 더한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커헉!”

죽음에서 자유롭고 고통조차 거부한 목 없는 사내는 지금 육체가 아닌 영혼을 잡아 뜯는듯한 목소리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존재가 세상에 있단 말인가.

여태껏 자신이 상대해왔던 그 어떤 적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목소리를 보며 목 없는 사내는 손을 허우적댈 뿐이었다.

[내놔라!]

비 내린 진창에 형편없이 널브러진 목 없는 사내를 향해 하얀색의 짐승이 입김을 내뿜으며 들이닥쳤다.

[당장 내놓으란 말이다!]

“흐아아악!

조금 전 소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은 목소리는 사정없이 목 없는 사내를 후려치고 있었다.

검과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목 없는 자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메마른 파편들이 힘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뿌드드득-!

“끄아아악!”

목소리는 검으로 비틀고 주먹으로 부숴대며 목 없는 사내의 품 안에서 아이들의 숨결을 찾아내고 있었다.

약한 세계는 먹히기 마련이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죄가 없다.

아이들은 아직 냉혹한 규칙 속으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여기 있었군.]

그리하여 목소리는 기어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아이들의 숨결을 잡아낼 수 있었다.

목소리는 자그마한 탄식과 함께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아이들의 숨결을 소중히 잡았다.

비록 작았으나 무겁게 느껴지는 아이들의 존재들.

지금 붙잡고 있는 작은 반짝임을 키우기 위해 두 명의 세계는 피와 눈물을 흘려야 한다.

부(父)와 모(母)가 새겨넣은 무게를 느끼며 목소리는 다시 한번 목 없는 기사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끄어억!”

비 오는 밤.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기사는 그렇게 목 없는 사내의 어둠 속에서 별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이제 끝내자.]

목소리는 그 별을 소중히 소년의 품에 집어넣고는 다시 한번 장식 없는 검을 붙들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으니까.

[예전에는 네놈 같은 녀석들을 어떻게 죽이는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잊어버린 것 같아.]

“······.”

목 없는 사내는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목소리를 보며 자신의 과오를 질책했다.

동류인 줄 알았더니 동류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과 같이 죽음에서 도망친 자였으나 지니고 있는 기운만큼은 정순하기 그지없는 자였다.

[기억은 못 하지만 그래도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목소리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하얀 번개가 장식 없는 검을 환하게 빛내고 있었다.

[사지를 다 뜯어내서 갈기갈기 찢어놓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지겠지.]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너는 오늘 여기서 뜯겨진다.

목소리가 정한 자비 없는 결말을 들으며 목 없는 사내는 뒷걸음질 치며 손을 뻗어대었다.

마치 외침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라마슈투······라마슈투 님!”

신을 부를 수 없었기에 주인 된 자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목 없는 사내는 그렇게 비척거리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

목소리는 비록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느낄 수는 있었다.

눈앞의 너절한 것이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우드드득-!

[······이런.]

그러나 소년의 육체가 더는 버틸 수 없노라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소년의 육체와 세계는 분명 성장했지만 이제 더이상은 무리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신을 담아준 것에 기특하다 말해줘야 할 것이다.

“여기입니다!”

목소리가 잠시 멈칫한 사이 목 없는 사내는 마치 구원을 바라듯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어대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바라는 구원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듯 새까만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벌리며 목 없는 사내와 유령마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라마슈투 님? 라마슈투 님!”

점점 말라비틀어져 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목 없는 사내가 비통한 절규를 내뱉었지만 이미 그의 주인은 사내에게서 불멸을 회수하고 있었다.

[라마슈투.]

낯설지 않은 울림을 입안에서 굴려보며 목소리는 점점 무너져가는 사내의 마지막을 보고 있었다.

효용을 다한 것은 언젠가는 스러지기 마련이니.

체벌의 의미인지 아니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목 없는 사내는 쪼그라들어가고 있었다.

“안 돼!”

죽음이 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인 된 자에 부름에 따라.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것은 헛되디헛된 비명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비명을 들은 유일한 존재인 목소리는 사내의 마지막을 기억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목소리는 소년의 한계 속에서 아껴둔 마지막 움직임을 행하기 시작했다.

[돌아들 가거라.]

까아아앙-!

죽음이 외치는 마지막 단말마 속에서 목소리는 아껴두었던 마지막 움직임으로 부정한 문양을 내리쳤다.

장식 없는 검 끝에서부터 반짝이는 아이들의 숨결이 퍼져 올랐다.

꺼져가는 죽음과 피어오르는 생명.

비가 그친 마을에서 목소리가 본 광경은 삶과 죽음 그 자체였다.

둘 사이의 경계에 있는 그는 아무 말 없이 모든 광경을 속으로 집어삼킬 뿐이었다.

안개가 가라앉고 있었다.

※※※※

여전히 손님 없는 마을의 여관.

고요한 그곳에서 홀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내가 있었다.

쥐죽은 듯 조용해진 교회에 몰래 돌아와 시체같이 널브러져 있던 기사들을 모아왔던 사람이기도 했다.

“대장. 이제 몸은 좀 어때?”

“······그냥저냥 엿 같아.”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고트를 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숟가락 하나 들어 올리기 힘들어하는 자신의 모습이 영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인 줄 알아. 처음에 들고 왔을 때는 무슨 걸레 조각인 줄 알았다니까.”

“······.”

블라드는 들고 있던 수프를 힘겹게 휘저으며 말을 아꼈다.

이것을 먹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힘을 아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돌봐드려야 할 기사님들이 또 있어서 말이지. 쉬고 있으라고.”

“그래.”

고트는 그 말과 함께 블라드가 있는 방문을 나섰다.

고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블라드는 소리 내어 목소리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리해서인지 속마음으로는 말을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당분간은 이렇게 해야 할 거라고 목소리가 말했었다.

“그래도 다들 살아서 다행이네요.”

[그렇지. 그게 가장 중요한 거지.]

목 없는 자와 대적했던 모든 기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말았으나, 그래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유스티아가 쳐놓은 결계가 끈질기게 버텨내며 기사들을 보호했으며 블라드의 기민한 행동이 목 없는 자를 교회 밖으로 불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기사들은 그 날밤 자신들이 4명뿐인 줄로만 알았겠지만, 사실은 숨겨진 인원이 한 명 더 있었다.

오직 소년과 목소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고마워요.”

[······그래.]

소년은 아직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최선을 다해 말했다.

그 사정을 알고 있던 목소리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소년의 안에서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소년만이 있는 방안에서 오직 그릇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

식사를 마친 블라드는 비록 불편한 몸이었으나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 날밤 숨이 가늘어지던 아이들을 부둥켜안은 채 울던 부모들은 힘겨운 걸음걸이를 옮기는 소년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 그들로서는 그 어떤 영웅보다도 찬사 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며 딱히 대답하지는 않았다.

괜스레 올라오는 간지러운 감정에 그저 코를 쓱 문댔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기도 했고.

“거기서 더는 접근하지 마라.”

“저는 쇼아라에서 온 사람입니다. 유스티아라는 성기사가 절 알 겁니다.”

“······기다려라.”

블라드는 반쯤은 주저앉은 교회 앞에 서서 성기사의 검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스티아가 불러온 성기사들은 조금은 늦게 도착했지만 그래도 일의 마무리는 확실히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부터 퍼진 저주를 확인하고 조사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들어가 봐라.”

이름 모를 성기사의 허락을 받은 블라드는 조심스레 교회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삐걱거리는 바닥 소리와 함께 아직도 그날의 흔적이 가득한 교회는 비록 낮이었음에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만약 바쁘게 이곳저곳을 움직이고 있는 성기사들이 없었다면 블라드는 검을 뽑은 채 움직였을 것이다.

“유스티아 님.”

“······여기는 무슨 일이지 블라드?”

고개를 기웃거리며 초록 눈동자의 여인을 찾던 블라드는 부정한 문양 아래서 성경 같은 책을 들고 있던 유스티아를 찾아내었다.

“지하로 내려가 볼 수 있을까요?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쇼아라에서 실종되었다는 여인들은 이미 그레고리 경이 확인했다.”

쇼아라에서 출발한 조사대는 본래 실종된 여자들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

비록 도중에 일이 커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레고리는 자신의 임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제가 개인적으로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같이 가주마.”

그리고 소년 또한 그랬다.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름 사정을 짐작한 유스티아가 한참 살펴보고 있던 책을 닫았다.

불로 그을린 문을 열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

깊지 않은 지하는 자그맣게 뚫려있는 벽에 의해 약간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직 저주의 잔재가 남아있을지 모른다.”

유스티아의 배려와 함께 지하로 내려간 블라드는 그곳에서부터 느껴지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좀 들춰봐도 될까요?”

“일이 끝나고 내 축복을 받는다면.”

유스티아의 말이 허락의 뜻임을 눈치챈 블라드는 조심스럽게 주위에 널려있는 거적때기를 치워가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

고통 어린 여인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추고, 명복을 빌며 덮어주고.

늘어서 있는 시체들을 하나씩 뒤지던 블라드는 그만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비록 더럽혀졌지만 낯익은 갈색 머리가 그곳에 있었다.

“잠시 나가 있어 주마.”

블라드가 찾는 사람이 이곳에 있는 것을 눈치챈 유스티아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무도 없는 지하.

자그마한 빛만이 비치는 그곳에서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인생이 참 더럽다. 그치?”

같지도 않은 남자에게 얻어맞고 소년에게 계란을 내밀며 자신을 지켜달라고 했던 여인이 그곳에 누워있었다.

차마 닦아내지 못한 검은 눈물 자국과 함께.

그 모습을 보며 소년은 분노보다는 서글픈 감정이 앞서고 말았다.

자신의 검 끝이 조금 더 날카로왔다면, 조금 더 강인했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지금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만족할 수 없었던 소년은 씁쓸한 침을 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다음 생에는 창녀 말고 다른 거로 태어나.”

블라드는 손을 들어 그날처럼 활짝 열려있던 여인의 앞가슴을 닫아주었다.

지금의 손길로 그녀가 조금이나마 따뜻해졌기를 바라면서.

소년이 떠나간 자리에는 조심스럽게 정돈된 여인만이 남아있었다.

그 여인은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검은 눈물 자국이 없었으며.

틈을 통해 자그마한 빛이 비치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꽃 있는 꽃반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1)

숨을 쉬지 않는 여인.

땅을 밟지 않는 여인.

신에게서 자유롭고 세상의 법칙에도 구애받지 않는 존재.

“······.”

여인은 눈을 감고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소년의 왼쪽 눈에 깃들어 있는 누군가의 영혼도.

빛나는 영혼이었으나 새겨진 흔적은 잔혹했으니 그는 분명 오래된 술법 중 하나를 사용한 자였다.

“오래된 옛것들이 기지개를 켜는구나.”

눈을 감은 여인은 생각했다.

그럴 시기가 왔다.

난세. 균열이 생기는 시기.

이런 시기야말로 자신들처럼 경계에 사는 사람들이 자리 잡기 좋은 때일 것이다.

여인은 오랫동안 그 시간을 기다려왔다.

“······나의 기사들은 앞에 놓여 있는 것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가도록 하세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은 어둠 속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여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아직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들이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경악하는 얼굴, 혹은 공포에 질린 얼굴.

우트만 남작가 기사들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당분간은 이 땅에서 신세 지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라크슈마 님.”

어둠 속에서 침묵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목 없는 기사들이 자신들의 주군을 향해 고개 숙였다.

우트만 남작은 대가를 지불했다.

그의 하나뿐인 아들은 죽음에서 돌아왔고 그에 대한 대가로 도시 모시암은 어둠을 품었다.

어둠은 어디서나 스며든다.

그리고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지금 눈을 감고 있는 여인처럼.

오늘 밤 도시 모시암으로 다가온 밤하늘은 조금은 더 어두운 색깔과 함께 찾아왔다.

※※※※

블라드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여인을 보며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까 속눈썹이 길구나.

옥사나와 같은 빛의 눈동자였지만 그려내는 느낌은 전혀 다른 것이 자세히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 이거지?”

“네.”

유스티아에게서 흘러나오는 딱딱한 말투와 표정은 마치 취조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지만 정작 소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배려 깊었다.

자신들이 반쯤 무너진 교회 안에서 희미한 결계를 의지해 쓰러져 있는 동안 목 없는 사내를 상대했던 것은 바로 금발머리 소년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한 소년에게 뭐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

딱딱한 말투로 물어보지만 정작 손으로는 달달한 차를 휘저어 건네주는 유스티아.

첫 만남은 최악이었으나 죽음과도 같은 전장을 같이 넘었으니 이제는 전우라 불러도 괜찮을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종탑에 올라가서 문양을 부쉈거든요. 그랬더니 그놈이 화가 났는지······.”

블라드는 유스티아의 배려에 힘 입어 다시 한번 그날 밤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 없는 사내를 상대한 마지막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소년은 이 사태를 설명할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소년의 증언을 대신할만한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투가 너무 급박했거든요. 저는 그 자가 휘두르는 검을 받아내는 것만도 버거웠어요.”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재현된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한 것이었다.

한 사람의 폭력 앞에서 가련할 정도로 굴러다닌 또 다른 사람의 흔적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지럽게 섞여 있는 발자국들 속에서 누군가의 처참한 사투를 발견한 성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소년을 향한 경의의 박수를 쳐주었다.

그 누구도 종자에 불과한 소년이 목 없는 사내를 압도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더니 갑자기 땅에서부터 뭔지 모를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니까요. 무슨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같이 목 없는 사내를 확-.”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그날의 일을 설명하는 블라드의 증언을 유스티아가 집중하며 받아적고 있었다.

말재주로 먹고사는 창녀들의 옆에서 살아왔던 소년의 입담은 제법 그럴싸한 것이었다.

“그러고 사라졌거든요. 제 나이가 얼마 되진 않지만, 평생 보지 못한 기이한 광경이었습니다.”

“으음.”

유스티아는 마치 횡설수설 같았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블라드의 증언을 들으며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아! 그리고 무슨 이름을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무슨 이름? 어떤 이름?”

조금의 단서도 목말랐던 유스티아는 눈을 크게 뜨며 기억을 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 생각이 안 나네. 머리가 멍해가지고.”

“기다려봐라. 뭐라도 먹으면 생각이 나지 않을까.”

유스티아는 재빨리 근처에 있던 과일을 집어 들고는 빠른 속도로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파고들만한 틈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같은 모습에서는 순진하기 그지없는 그녀를 보며 블라드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라마······뭐랬더라. 라마슈?”

“라마슈트?”

“아 그래요. 라마슈트라고 한 것 같은데.”

블라드의 말을 들은 유스티아가 갑자기 굳은 얼굴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있는지 그녀가 들고 있는 과일에 점점 짙은 손자국이 나고 있었다.

“······그래. 협조에 감사한다.”

유스티아는 깎고 있던 과일을 다시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 로지노는 그날 있었던 너의 분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네.”

“쉬어라.”

자기 할 말만 내뱉고는 바삐 자리를 뜨는 유스티아를 보며 블라드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또 이런 면에서는 단호함이 보이니 블라드는 도통 유스티아라는 사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다행이었다.

무사히 지나갔으니 말이다.

[다행이군. 너를 의심하지 않아서.]

“찍혀있는 발 크기도 같았다잖아요. 나 같아도 헷갈리지.”

상식과 편견을 방패 삼아 신실한 성기사에게 거짓된 증언을 한 소년이 이곳에 있었다.

비록 거짓을 말했으나 안에 담겨 있는 정보들만은 진실이었으니 유스티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깎을 거면 다 깎아주고 가지.”

블라드는 유스티아가 놓고 간 과일을 슬쩍 집어 들고는 한입에 깨물었다.

“······짜.”

반쯤 깎다 만 과일에서는 그녀의 맛이 났다.

※※※※

다음 날 아침.

모든 조사를 성실히 마치고 마을을 떠나가는 일행들을 배웅하며 유스티아와 성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신과 가까우니만큼 고고한 자존심이 있는 자들이었으나 쇼아라의 조사대가 이 마을에서 행한 일은 분명 인정받을만한 일이었다.

지금도 소년을 향해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하는 성기사들이 보일 정도였으니까.

“저희 산 로지노는 여러분들의 용기 있는 결단에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디 말 좀 잘해주시구려. 지금 모시고 있는 시장님이 여간 깐깐한 분이 아니라서.”

유스티아는 그레고리의 농담과도 같은 진담에 그저 침묵으로 대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언제나 신 앞에서는 진실만을 고해야 하는 성기사로서 이번 일에 바예지드의 그레고리라는 이름을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거짓을 고할 수는 없으나 최선을 다해 그레고리님의 입장을 고려하겠습니다.”

“그냥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죄송합니다.”

성기사들의 신성력으로 기력을 회복한 일행은 마지막 점검을 하며 그레고리의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유스티아의 녹색 눈동자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소년이 조심스레 접고 있는 자그마한 깃발이 있었다.

“······블라드가 깃발을 가졌었군요.”

“오랜만에 나타난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입니다. 취급에 주의하고 있죠.”

그레고리의 말을 들은 주위의 성기사들이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만한 의기를 지닌 소년이었으니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범상치 않을 것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디 성 로지노의 은총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성기사들과 인사를 마친 그레고리가 신호를 보내자 고트가 말에 고삐를 잡아챘다.

히이이잉-

자신들이 불태워버린 마차 대신 초라한 달구지를 몰고 가는 일행들.

비록 마차는 잃었지만 대신 그들은 북부 교구 산 로지노의 호의를 손에 얻었다.

언제 쓰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분명 나중에 도움 한 번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으냐?”

“앉아 갈 만합니다.”

“불편하면 말하고, 괜히 상처가 도지면 곤란하니까.”

목소리를 담아낸 여파로 아직도 골골대고 있는 블라드는 마을에서 빌려 온 달구지 끝에 엉덩이를 붙였다.

자꾸 달구지를 타게 되는 현실이 영 불안했지만, 말을 타지 못하니 별수 없는 일이었다.

“안개가 걷히니 보기 좋네요.”

“원래 볕이 좋은 터라고 하더라. 역시 전부 그놈 짓이었어.”

그레고리의 말에 소년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어두운 쇼아라의 뒷골목 어딘가보다는 볕 좋고 탁 트인 마을에 묻히는 것이 안나에게도 좋을 것이다.

안개로 가득했던 마을.

마을 입구에 나온 사람들이 쇼아라로 떠나는 일행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꽃반지를 전해준 아이를 발견한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흔드는 작은 손을 향해 자그맣게 화답해 주었다.

소년은 흔들거리는 달구지 위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은 새파란 푸른색으로 가득했다.

“좋네.”

부디 안나가 이곳에서는 따뜻했으면 좋겠다.

소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성기사들의 축복과 마을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가는 일행은 이곳에 올 때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쇼아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말간 햇빛이 비치는 쇼아라의 시장실.

그곳의 주인인 요제프는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노인을 향해 손수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비록 초라한 차림이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사람이었다.

“이곳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도착한 지는 좀 됐지요. 한 이틀은 되었나.”

“기별을 주셨으면 바로 모셨을 텐데요.”

정갈한 태도로 차를 따르는 요제프를 보며 노인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숨넘어갈 듯 약했던 아이가 이렇게나 장성했다.

이 모습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일조한 것 같아 노인은 뿌듯할 뿐이었다.

“지금의 저는 가장 낮은 자일뿐일진대 어찌 도련님을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요제프를 보고 시장님이 아닌 도련님이라 칭하고 있었으나 듣고 있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던 자야르조차도 별말 없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 차를 마시고 있는 노인은 언제 어디서건 요제프를 도련님이라 부를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놈은 어디 있습니까.”

노인의 성격이 급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마시고 있던 찻잔을 내리기도 전에 본론을 말하는 노인을 보며 요제프는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잠시 임무를 보냈습니다. 우트만 남작령으로 보냈으니 조만간 기별이라도 올 겁니다.”

“오. 종자 주제에 벌써 임무를.”

요제프의 말을 들은 노인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번 녀석은 좀 쓸만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사실 쇼아라로 오기 전에 스투르마에 들려서 가주님을 뵙고 왔지요. 내게 남은 두카트는 이제 한 닢뿐이라 마무리를 짓고 싶어서 그랬는데.”

두카트라는 단어를 들은 요제프와 자야르가 움찔거렸다.

과연 그런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이었나.

“그곳에 있는 종자 놈들은 하나같이 흐리멍덩한 동태눈깔이더이다. 앞으로 바예지드의 이름을 짊어질 녀석들이 어찌 그리 전부 그 모양 그 꼴들인지.”

요즘 젊은것들은 쓸만한 녀석들이 없다며 혀를 쯧쯧 차고는 고개를 돌린 노인은 이번에는 자야르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자네가 키우는 종자도 그러한가.”

“······그 녀석들보다야 낫겠지요.”

“투덜이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쓸 만은 한가 봅니다.”

자신을 투덜이라 말하는 노인을 보며 자야르가 입술을 꽉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한창 젊었을 시절 저 노인에게 보여줄 꼴 못 보여 줄 꼴은 다 보여줬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부디 블라드라는 녀석이 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바닌인지 뭔지 하는 녀석처럼 부모 뒷대만 믿고 잘난 척을 했다가는 아무리 도련님의 종자라도 한 대 후려칠······.”

“제 종자는 부모가 없습니다.”

요제프는 노인의 앞으로 다과를 내밀며 빙긋 웃어 보였다.

“부모 없이 뒷골목에서 자라 여기까지 혼자 힘으로 기어오른 녀석이지요.”

“오······.”

이곳에 온 노인의 의도를 파악한 요제프는 최대한 그의 흥미를 자극하며 발을 붙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자수성가의 전형적인 시작점을 말하는 요제프의 이야기는 분명 어려웠던 옛 시절을 추억하는 노인의 향수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두카트는 주지 않으셔도 좋으니 그 친구에게 한 수 가르쳐만 주시지요.”

“흠흠. 뭐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요제프가 내민 과자를 씹으며 수염을 쓰다듬는 노인.

요제프는 그 노인의 뒤에 꽂혀있는 깃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요즘 봐왔던 젊은 놈들 중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한 명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작고 낡았지만, 소중히 다뤄온 태가 나는 그 깃발은 분명 요제프가 블라드에게 건네준 깃발과 유사한 것이었다.

“도련님의 부탁도 있었으니 제가 한번 잘 살펴보도록 하지요.”

꼿꼿이 세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들먹거리는 노인.

그 노인이 들고 온 낡은 깃발에는 열 개는 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낡은 만큼 오래된 그 깃발은 스스로의 명예를 증명해 온 자의 깃발이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5화 11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2)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

“······.”

블라드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닥불을 보며 생각했다.

마치 지금의 자신과 같다고.

꼿꼿이 서 있고 싶지만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흔들리고 마는 불빛은 마치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고 다니는 소년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뚫어지게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시선은 그곳에 맞추고 있지 않은 소년을 보며 그레고리가 물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이요.”

그레고리의 대답에 블라드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

“그래?”

“그런 사람들 속에서 앞으로도 제가 버틸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 날밤 소년은 졌다.

아마 목소리가 없었다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호르헤가 그랬고 외팔이 잭이 그랬고, 그리고 안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처럼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에 짓눌려 결국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살다 보면 딱 너 같은 고민을 할 때가 오지.”

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던 그레고리는 들고 있던 불쏘시개를 모닥불에 집어 던졌다.

태울 것이 주어진 모닥불은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잘 타지?”

“네.”

그날 어두웠던 교회에서.

소년은 비바람이 치는 종탑을 기어 올라가 아이들의 숨결이 맺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었다.

그레고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소년과 잘 어울리는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밑바닥에서 태어났기에 높은 곳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을 줄 아는 소년은 언젠가 하늘 끝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곳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별 하나를 매달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은 버텨내는 것이 중요한 거야.”

흔들리는 불꽃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그제야 모닥불 너머에 앉아있는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억센 수염의 기사가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계속 타오르기만 하면 돼. 불길이 꺼지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거니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속 불타올라야 한다는 것.

자신이라는 불꽃만 꺼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찬 바람 아래서도 다시 불타오를 수 있다.

그레고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은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네요.”

갑작스레 다가올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신 또한 거대한 불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용히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는 소년의 세계 안에 한줄기 색깔이 깃들기 시작했다.

고민하는 소년과 술병을 넘기는 그레고리와. 그리고 저 멀리 언덕에서 모닥불에 비치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새까만 말까지.

각자가 부족한 무언가를 생각하며 고민거리들을 모닥불에 집어넣는 그런 밤이었다.

쇼아라로 향하는 마지막 야영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수고했다.”

응접실에 앉아 임무에 복귀한 조사대를 맞이하는 요제프.

블라드는 몇 주 만에 마주친 요제프를 보며 눈 밑에 드리워진 그의 눈그늘이 더 짙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햇빛을 등지고 앉아있기에 그런 것만은 아닐 테다.

“성실히 임무에 응한 태도에 대해 칭찬하고 싶군. 게다가 문제의 본질까지 다다른 자네들의 행동력을 높게 산다.”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차분히 조사대가 행한 임무를 평가하는 요제프.

그러나 입으로는 칭찬하고 있었어도 정작 일행을 바라보는 두 눈은 미동조차 없어 조사대 모두가 기묘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다른 영주의 땅에서 바예지드의 검을 뽑은 것에 대해서는 쉽게 넘어갈 수가 없군.”

올 것이 왔다.

그레고리는 상벌에 확실한 기준이 있는 요제프가 이번 일에 대해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예상했다.

“죄송합니다.”

깊게 숨을 들이쉰 그레고리는 여태까지 돌아오면서 정리해두었던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조사대의 책임자로서 가능하다면 자신이 다 끌어안을 수 있게 말이다.

“요즘 때가 어느 땐데 생각도 없이 남의 땅에서 경거망동을 하느냔 말이지.”

그러나 그레고리의 변명을 싹둑 잘라내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있었다.

쌓아온 세월만큼이나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였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이 어찌 흘러가게 될지 뻔히 다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질이 나쁜 행동이었다고 나는 생각하네.”

처음 보는 노인이었지만 내뿜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블라드는 노인의 기세에 압박되고 마는 자신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또다시 저 위에 있는 세계가 소년을 억누르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한참 어수선한 시기에 민감한 문제를 제대로 건드리고 와버렸으니까.”

낯선 노인이 내뱉는 말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고 말았지만, 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던 요제프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각지에서 크고 작은 영지전들이 발발하고 있다. 왕실이 제대로 억제하지 못하니 모두가 그동안 쌓아두고 별렀던 것들을 터트리고 있지. 우리가 있는 북부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노인이 그레고리를 따끔하게 질책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국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초대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인 프라우센의 검 아래 모든 영주들이 검을 모았지만 이미 그 시기는 오래전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시기에 자그마한 명분 하나라도 내주는 것은 마른 짚에 불씨 하나를 떨구는 격이었다.

“지금 같은 때에 저주받을 옛것들까지 보이니 강철공(强鐵公)까지도 지금의 일을 주시하고 있다.”

북부의 또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는 강철공조차도 주시할 만큼의 사건이었으니 요제프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가 좋은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 크게 불을 지르고 왔다는 요제프의 질책에 그레고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빠져나왔어야지. 그곳에 산 로지노의 성기사까지 있었다면서? 그렇다면 그 자에게 넘기는 것이 당연한 절차일 텐데. 쯧쯧.”

“······.”

어째서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았냐며 끌끌대는 노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의 심장이 점점 달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려는 소년의 본능 같은 것이었다.

‘그곳에 있지도 않았으면서!’

단순한 말 몇 마디만으로는 전할 수 없는 아이들의 가뿐 숨결과 부모들의 울부짖음이 그곳에 있었다.

블라드가 보았을 때 그레고리는 정말 최선을 다했고 용기 있는 결정을 했다.

이름 모를 노인이 함부로 깎아내릴 수 있는 그런 결정이 아니었다.

“하여간 요즘 것들은 뒷일을 생각 안 하고 그저······.”

“아이들이 죽었을 겁니다. 저희가 나서지 않았다면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이름 모를 노인을 노려보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

자신의 말을 대차게 자르고 들어오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일렁이고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노인의 기세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레고리 경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산 로지노가 그 최선을 보증했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살짝 흘겨본 블라드는 가슴속에 차마 담아두지 못한 뜨거운 것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저는 그레고리 경이 내린 결정은 질책이 아닌 칭찬을 받아야 하는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미숙하기에 다듬어지지 않은 열기 덩어리였다.

그러나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진심이라는 형태로 다가올 수 있었다.

미사여구 하나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속마음을 쏟아낸 소년을 보며 응접실에 있는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그러나 현실이라는 것은 오직 진심으로만 통할 수는 없는 법.

허락되지 않은 발언을 내뱉는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고 그레고리는 더욱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의도는 좋았으나 소년은 방금 선을 넘고 말았다.

“블라드.”

요제프 바예지드.

누구보다도 소년을 아끼지만 그렇기에 매섭게 다잡아줘야 하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해라. 더 이상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검을 다룰 수 없는 요제프였지만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는 이곳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핏줄 하나만으로는 그런 기세를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네.”

요제프의 엄중한 경고에 블라드는 고개를 숙였다.

더는 나서지 말라는 자야르의 무거운 눈빛도 소년의 들끓는 기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레고리 경도 이해할 거라 생각하네. 소드마스터의 두 번째 규율은 특히나 민감한 부분이니까.”

요제프는 자연스레 대화의 중심을 그레고리로 옮겼으나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그가 억지로 화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목에 닿아있던 단추 하나를 조용히 풀어 내린 요제프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했다.

“맞습니다. 요제프 님.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그레고리는 자신을 변호해주는 소년에게 더는 불똥이 날리지 않게 재빨리 잘못을 인정했다.

“민감한 문제들이 겹쳤어. 그쪽에서 직접적인 항의를 보내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네.”

요제프는 잠시 블라드를 노려보고는 뒷짐을 지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 보이는 쇼아라의 풍경을 보며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기사 그레고리를 무기한 근신에 처한다. 그동안 봉급은 지급되지 않을 것이며 바예지드가 보증하는 그 어떤 기사의 권리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끝나기를 빌며 그레고리는 고개를 숙였다.

“······.”

그러나 말을 마친 요제프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모든 일에는 절차와 규정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은 소년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종자 블라드.”

자신의 부름에 조금은 미묘한 각도로 쳐다보는 소년은 여전히 반항기 넘치는 그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

그동안 그렇게나 먹이고 입히고 잘 대해줬거늘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았다니.

처음 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함이 없는 소년을 보며 요제프도 마음 한구석에서 어찌할 수 없는 서운함이 올라오고 말았다.

“허락되지 않은 발언으로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너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

블라드는 요제프의 깊은 눈빛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자신에게 편안한 얼굴을 보였던 청년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날카로운 군주의 모습일 뿐이었다.

“너에게도 일주일간의 근신을 명한다. 당분간은 내 눈에 띄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자신에게 차가운 명령을 내리는 요제프를 보며 일부러 그의 눈빛을 피했다.

명령을 받아 최선을 다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근신 명령이었으니 소년 또한 서운함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들 나가봐라. 나는 지금부터 우트만 남작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야 하니까.”

보고를 마치고 처분까지 달게 받은 조사대가 요제프에게 인사를 마치고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은 그 와중에도 기세를 잃지 않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웃고 말았다.

네 놈이구나.

굳이 소개해주지 않아도 알겠다.

“네가 블라드라는 놈이냐.”

“······.”

이제 막 방문을 나서려 했던 블라드는 노인의 말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응접실을 휘감고 있었다.

“어른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는구만. 예절 교육은 못 받은 모양이군.”

노인의 빈정거림을 듣는 블라드의 눈빛이 점점 일렁이고 있었다.

예절 교육은 충분히 받았다.

어머니의 눈빛을 지닌 귀부인으로부터.

자신을 함부로 재단하는 노인을 향해 몸을 돌린 블라드는 그 어떤 때보다 정중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맞습니다. 제가 블라드입니다.”

기세를 꾹꾹 눌러 담은 채 똑바르게 인사하는 소년의 모습은 마치 검을 뽑기 전의 기세와도 닮아있었다.

“저 또한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중하지만 흉포한 기세를 내뿜는 블라드를 보며 노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대결을 시작하기 전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 내 이름이 궁금하더냐.”

노인은 요즘 젊은것들에게는 느끼기 힘든,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날것의 느낌을 내뿜는 소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내가 너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이름이 없구나.”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소년을 향해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나는 가장 낮은 길을 걷는 자라서 말이다. 아직 의무를 다하지 못했거든.”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표정이 굳고만 블라드는 이제야 노인의 뒤에 꽂혀있는 낡은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깃발과 비슷하지만 두 개의 문장밖에 새겨져 있지 않은 것과는 달리 노인의 깃발에는 열 개는 넘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다.

죽지 못해 늙고 만 기사들이 있었다.

명예로운 전장에서 은퇴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가장 낮은 곳을 따라다니며 그동안 흘리고 다녔던 명예를 주워야만 했다.

최초의 소드마스터가 보인 마지막 모습과도 같이 말이다.

블라드가 바라보고 있는 이름 모를 노인은 지금 명예로운 은퇴식을 하고 있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6화 15

요즘 젊은것들은 말이야 (3)

야트막한 언덕 위에 뿌리내린 나무.

그 나무가 훤히 보이는 창가를 뒤로한 채 물빛 머리의 여인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가이다르 백작가가 이제 북부로 통하는 교두보를 마련했군요.”

“정확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지역을 가져간 것이지요. 북부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결국 저희를 통과해야 할 테니까요.”

책상 옆으로 잔뜩 쌓여있는 서류 더미들이 들어오는 햇빛을 막으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에게 올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비는 하셔야 합니다.”

알리시아 하이날.

하이날 남작가의 가주이자 데어마르의 주인.

지금 그녀 앞에는 지도 하나가 펼쳐져 있었으며 그 지도위에는 가이다르 백작 가문을 뜻하는 말이 놓여 있었다.

“온다고 생각하는 것이 맘 편하겠네요.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맞습니다.”

가이다르 백작 가문은 이제 데어마르의 바로 밑까지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새로운 서부의 패자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 영향력이 북부와 중부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중부를 틀어막고 있었더니 어느새 서부가 다가오고 있었군요.”

알리시아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정세를 보며 애써 속에 있던 불안을 뱉어내려 애썼다.

귀족의 피는 푸른색이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라도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바예지드 백작가에게 편지를 써야겠어요.”

알리시아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이럴 때를 대비해 들어둔 보험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우리를 도와줄 거예요. 그래야 할 의무도, 이유도 있을 테니까.”

“맞습니다.”

바예지드라면 데어마르를 도와줄 것이다.

위치상 자신들이 뚫리게 된다면 그다음 목표로 삼게 될 곳은 북부의 기둥 중 하나인 바예지드 백작령이 될 테니까.

중부와 북부의 대리전 같았던 명예 결투가 이곳에서 벌어진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손수건을 주길 잘했네요.”

“맞습니다. 요즘 그 소년에 대한 소문이 계속 들려오더군요. 훌륭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던칸의 입에서 블라드에 대한 칭찬이 들려오자 알리시아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산 로지노와 인연을 맺고 온 모양이더라고요. 교회와 가까워져서 나쁠것은 없겠죠.”

던칸은 알리시아의 말을 듣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쇼아라의 조사단이 우트만 남작가에서 불길한 징조를 발견한 것은 요즘 북부에서 가장 크게 회자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주들이라면 흑마법사들의 흔적이나 우트만 남작과 바예지드간의 미묘한 동향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제가 그 소년한테 투자한 게 있잖아요.”

“이해합니다.”

그러나 알리시아는 그런 동향보다는 블라드의 행보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블라드가 데어마르를 떠날 때부터 계속해서 그의 동향을 파악하다 보니 오히려 북부에 뿌려놓은 첩보망이 강화될 지경이었다.

“저도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맞아요. 그의 이름값이 높아질수록 저희한테는 득이 되니까요.”

레이디 알리시아의 손수건을 받은 블라드는 그녀의 부름에 응해야 할 도의가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손수건에 대한 명분과 함께 데어마르로 돌아올 때는 혼자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로 요제프와 약속을 했었으니까.

“정찰 범위를 좀 넓게 가져가도록 하죠. 수상한 동향을 빨리 알아챌 수 있도록. 군사력이 모자란 저희로서는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던칸은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알리시아를 보며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한창 바쁘고 힘들 때이니 잠시라도 숨 쉴만한 틈 하나는 마련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디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이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여태껏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늙은이들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늙은 기사는 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언덕 위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꽃들.

소년이 떠나간 직후부터 피기 시작한 그 꽃들만이 지금 데어마르에 존재하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

까앙- 깡-

요란하게 내려치는 망치 소리를 앞에 두고 블라드가 시근거리며 앉아있었다.

“그 꼰대 같은 늙은이.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한번 들이박고 싶었거든요.”

“······그래?”

자신 앞에서 늙은이를 욕하는 블라드를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그저 묵묵히 망치를 내려칠 뿐이었다.

어린 녀석들도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겠지만 늙은이들도 못 본 척 눈 감아 줘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대체 뭘 베고 온 거냐.”

“이번에는 조금 버거운 놈이었죠.”

손 봐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잔뜩 이가 나가버린 검을 보며 질책 삼아 한 말이었지만 소년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목 없는 사내는 또 뭐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존재를 들으며 늙은 대장장이는 한숨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잔뜩 달궈져 있는 장식 없는 검이 오늘따라 애처로워 보였다.

“너는 가면 갈수록 버거운 놈들이랑 싸우는구나.”

“그런 운명인가 보죠. 뭐.”

어차피 편히 살 팔자는 아니었다며 너스레를 떠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묵묵히 장식 없는 검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때려 넣은 녀석이지만 이런 용도로 만든 검은 아니었다.

“이제 검을 바꿔야 할 때가 된 거 아니냐.”

“네?”

노인이 넌지시 던진 말에 블라드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해 보이는 노인의 태도가 블라드에게는 오히려 더 낯설어 보였다.

“기껏해야 나가서 몬스터나 썰고 다니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녀석이다. 재료도 평범한 철일 뿐이고 만든 사람도 그저 그런 대장장이일 뿐이야.”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써먹다가는 언젠가 부러지고 말 거다.”

소년은 성장해가며 더 많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겠지만 장식 없는 검은 영원히 지금 이 모습에 멈춰있을 것이다.

늙은 대장장이는 자신이 만든 검이 소년의 발목을 붙잡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상처받고 누워있는 이 녀석도 그것을 원하지는 않겠지.

“지금 당장 바꾸라는 건 아니니까 한 번 생각해봐.”

“······주문 제작도 받아요?”

소년의 말에 늙은 대장장이는 그저 웃고 말았다.

평소에는 다 큰 척하다가도 이럴 때는 어린 티가 나는 것이 영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놈이 내 마지막 작품이다. 나 말고 다른 대장장이를 찾아봐.”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은 어리고 젊은 녀석들의 특권이다.

낡고 닮아버린 늙은이들에게는 그저 일상과도 같은 모습일 뿐이었으니까.

“오늘 들고 갈 거냐?”

“좀 이따 써먹어야 할지도 몰라서요.”

“그래.”

물통에 들어가 덥힌 몸을 식히고 나온 장식 없는 검은 다시금 매끈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직까지는 소년의 옆에 있어도 손색 없을 그런 모습이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네.”

노인은 불꽃 때문에 시큰해진 눈을 찌푸리며 대장간을 나서는 소년을 배웅했다.

‘······.’

밖으로 나서는 소년의 발걸음은 예전과는 달리 당당하고도 확실했다.

이제는 저 앞에 있는 진창 정도는 가볍게 빠져나갈 정도로.

“그래야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늙은 대장장이는 쿨럭거리는 잔기침 소리와 함께 대장간의 문을 걸어 잠갔다.

오늘의 장사는 끝이다.

방금 소년의 검에 힘을 전부 다 쏟아 넣었으므로.

※※※※

블라드는 요즈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단순히 요제프에게 근신 처분을 받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

[뒤를 따라붙는 자가 있다.]

목소리의 말대로 어제부터 블라드의 뒤를 따라오는 자가 있었다.

그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던 블라드는 재빨리 익숙한 골목길을 벗어나 일부러 행로를 꼬아가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꼬치집 앞을 빠르게 걸어 거리를 벌리고는 사람 많은 대로를 스쳐서 기척을 감춰버린 블라드.

그리고는 어두운 골목길 앞에서 갑자기 사라진 소년을 보며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눈치가 빠르군.’

노인은 자신의 기척을 알아챈 것도 모자라 어느샌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소년을 느끼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바예지드의 가죽 갑옷을 받은 이유가 있었다.

“왜 따라오는 겁니까.”

“난 내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무슨 소리냐.”

노인의 태연한 대답에 블라드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저를 너무 건드시는 것 같은데.”

‘······날카로운 기세 좋고.’

분노하고 있었으나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소년을 보며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아는 것으로 보아 그릇이 넓은 녀석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반항은 분명 의도한 것이겠지.

고얀 놈 같으니.

“그러길래 처음부터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말았어야지. 그때 내가 뭐 틀린 말 한 게 있느냐.”

“······.”

블라드는 눈앞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노인을 보며 눈치챘다.

노인은 지금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며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그냥 말로 하시지 그래요. 괜히 이리저리 돌리지 말고.”

으르렁거리며 천천히 검 손잡이를 붙잡는 소년을 보며 노인이 미소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날것의 느낌이 소년에게 있었다.

그리운 것이었고 또한 반가운 것이기도 했다.

“꼬우면 덤벼봐라. 이놈아.”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손을 까닥이는 노인을 보며 각오를 굳혔다.

누군지 몰랐으며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지만 노인은 요제프가 보증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분명 의도가 있는 것이겠지.

“······그쪽이 먼저 시작한 겁니다.”

블라드는 의도가 있다면 그 의도조차 깨부술 각오로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숱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은 노인은 분명 자신보다 강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시당하는 것은 곧 죽음인 세상에서 살아온 소년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덤벼들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었다.

채앵-!

일격필살의 묘리에 따라 예측을 뛰어넘는 속도로 검을 뽑아 든 블라드.

‘재주 좀 부릴 줄 아는군!’

피할 공간 따위 없는 좁디좁은 골목길을 날카롭게 가르며 다가오는 검을 보고는 노인의 주름이 펴졌다.

어린 주제에 검 하나에 이렇게 자신의 특징을 담아낸 소년이 나름 기특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자신도 뭐라도 하나 보여줘야겠지.

“어서 빼내 가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냐?”

“······!”

블라드는 당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날린 일격이 허무하게 막혀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으니까.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움직이면 왼쪽으로.

계속해서 따라오며 기묘하게 자신의 검 끝을 누르는 노인의 검을 보며 블라드는 이미 움직임이 읽혀버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젠장!’

신기와도 같은 노인의 검 놀림을 보며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았다.

예상이야 했지만 역시나 뭔가를 잴 대상이 아니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거대한 세계들은 항상 소년을 압박하고 걷어차기 일쑤였다.

이제 그런 취급에 진절머리가 나고만 블라드는 여태까지 쌓아왔던 분노를 터트리며 이름 모를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훌륭하군!’

노인은 자신의 검 아래서 부르르 떨고 있는 소년의 기세를 느끼며 입술 끝을 올렸다.

자신이 활약하던 시절에도 이 나이대에 이토록 선명한 오러를 다루는 자는 몇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까앙-!

비좁은 골목 안에서 소년과 노인의 검이 맞부딪혔다.

이번만큼은 기교만으로 억누를 수 없었던 소년의 기세는 거친 불꽃과 함께 노인에게 달라붙었다.

“기세 좋구나!”

기세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슨 수를 쓰지 못하게 최대한 달라붙으려 애쓰는 소년은 지금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기술이나 경험은 따라잡지는 못하겠지만 젊은 내가 힘 정도는 압도할 수 있겠지.

상대방의 약점을 분석해 물고 늘어지는 소년의 움직임은 분명 승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끼기기긱-!

거친 쇳소리와 함께 벽 끝까지 밀려나는 노인.

과연 세월의 흐름은 가혹해서 자신을 밀쳐내는 젊은 녀석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그럴싸한데.”

“언제까지 웃나 봅시다.”

노인의 여유로운 미소를 보며 바짝 약이 오른 블라드는 장식 없는 검을 힘껏 밀어젖히며 노인의 목을 향해 들이밀고 있었다.

“수는 좋았는데 상대를 잘못 잡았어.”

“······?”

그러나 여전히 여유로운 노인의 미소를 보며 블라드가 불길한 감각을 느낀 순간.

“뭐?”

노인의 검이.

아니 노인의 팔이 빛나고 있었다.

검이 아닌 팔에 오러를 주입하는 노인을 보며 블라드가 기겁하고 말았다.

여태껏 보아왔던 기사 중 무기가 아닌 신체에 오러를 주입하는 기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꽤 쓸만하지? 신체를 강화하는 거다.”

마치 장난감을 소개하듯 너스레를 떨던 노인은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 블라드의 검을 힘껏 밀어젖히기 시작했다.

“으, 으으······.”

아까와는 전혀 다른 힘을 느끼며 블라드의 검이 점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늙은이가 젊은이를 힘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응용하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

기이하게 흘러가는 흐름에 당황할 틈도 없었다.

이번에는 노인의 손바닥이 빛나더니 소년의 검을 거침없이 잡아챘다.

방금 수리를 마치고 나온 검이기에 날카로울 것이었지만 정작 노인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강철보다 단단해진 노인의 손바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게 뭐야!’

블라드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대었다.

여태껏 쌓아왔던 상식 한 조각이 깨어지며 내는 비명이었다.

[······.]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목소리조차 조언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블라드는 본능적인 판단으로 스스로 검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호르헤의 단검을 뽑아 들고는 노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

노인은 블라드의 기민한 판단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상관없다는 듯 검을 버리고 달려드는 소년.

오직 짐승의 심장을 가진 녀석만이 행할 수 있는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타고났다.

“이놈!”

제대로 배운 기사라면 하지 않을 변칙적인 움직임에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오러가 실린 주먹을 강하게 날리고 말았다.

“커억!”

그저 한 방이었을 뿐이다.

나름 치열한 힘겨루기였으나 노인이 안겨주는 한 방에 블라드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나가떨어지지 말았다.

어찌나 강하게 때렸는지 소년의 어깨 쪽에 있던 갑옷 부분이 터져나갈 정도였다.

저번의 전투로 깨져 버린 뱀의 가호는 더는 소년을 지켜주지 못했다.

“······이런!”

그러나 그저 주먹 한 방이었다 할 지라도 하룻강아지 주제에 노인의 진심을 이끌어낸 블라드의 발악은 분명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아마 시청에 있을 요제프나 자야르가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놀라고 말 그런 정도로 말이다.

“괜찮으냐?”

힘 조절을 하지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소년을 향해 외치는 노인이었지만 정작 대답해야 하는 대상은 저 멀리서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아마 너무 강한 충격에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맷집은 좀 떨어지는군.”

이제야 흠결을 하나 잡아낸 노인은 실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쓰러져 있는 소년을 향해 다가갔다.

어쩐지 자야르가 의뭉스럽게 웃은 이유가 있었다.

“······!”

그러나 소년을 일으키기 위해 다가간 노인은 순식간에 달려드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기겁하고 말았다.

그레고리가 말했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꽃이 꺼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리고 소년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뒤져!”

“······이런!”

블라드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노인을 온몸으로 붙잡고는 박치기를 날렸다.

딱 달라붙어 있어 딱히 피할 공간이 없었던 노인은 고스란히 지금의 공격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퍼억-!

아무도 없는 뒷골목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명 블라드의 의도는 성공했다.

“씨······.”

몽롱해지는 정신 속에서 블라드는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정신을 잃기 전 블라드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잡힌 장면은 오러로 인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노인의 주름진 이마였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7화 11

이어지는 옛 모습들 (1)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스투르마.

그곳의 주인인 페테르 바예지드는 앞에 놓인 멋들어진 갑옷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고 있었다.

“요제프 님의 보고에 따르면 라문드 경이 지금 쇼아라에 도착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종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고 하는군요.”

“그렇군.”

기사 라문드가 스투르마에 처음 돌아왔을 때를 생각하며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가주의 기사였던 라문드는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쉽게 대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는 종자들의 상태를 보고서는 한숨을 쉬며 돌아갔으니 페테르로서도 뒷맛이 씁쓸했던 상태였다.

“그나마 면을 세웠다고 해야 하나······아니면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한탄을 해야 하는 건가.”

라그무스는 점점 날카로워지는 페테르의 눈빛을 보며 말을 아꼈다.

본래 바예지드는 기사들뿐만 아니라 유망한 종자들을 키워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었다.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는 라문드는 그 시절 종자에서부터 시작해 기사까지 다다른 인물이었으니 지금 종자들의 수준을 보고는 마치 바예지드의 옛 모습이 무너진듯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보아왔던 바예지드는 이렇지 않았을 테니까.

“시대가 달라졌지 않습니까.”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있지.”

고작 늙은이의 투정으로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라문드의 따끔한 충고는 분명 페테르에게도 와닿는 것이 있었다.

“내가 너무 북부의 유망주들을 소홀히 한 모양이군.”

그동안 외부에서의 영입을 확대했기에 기사들의 질은 높아졌으나 정작 종자들의 수준은 낮아지고 있었다.

이 말은 곧 바예지드의 색깔이 옅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분명 페테르가 고민을 해 봐야 할 부분이었다.

“······.”

햇빛에 반짝이는 갑옷.

고민하고 있던 페테르의 시선이 저절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북부 교구인 산 로지노에서 보낸 갑옷이었다.

그 갑옷과 함께 딸려온 짤막한 편지에는 갑옷을 보내는 사정과 함께 낯익은 소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상 깊었던 모양이군.”

“산 로지노라는 외부의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본래 교차검증이라는 것만큼 신뢰성을 주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페테르는 라그무스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 로지노의 성기사들과 옛 시대의 기사인 라문드 경의 선택까지.

“쇼아라로 보내주어야겠군.”

“그렇습니다.”

바예지드의 옛 전통은 다행히도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페테르는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안심하고 있었다.

스투르마의 단단한 성벽은 그런 전통들과 함께 쌓아 올려진 것이었으니까.

※※※※

“끄으······.”

블라드는 앓는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아직 미묘하게 남아있는 두통에 블라드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고 말았다.

“여긴 어떻게 왔냐.”

이마에 걸쳐져 있던 축축한 수건으로 보아 정신을 잃었던 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간호했던 모양이다.

‘마음에 안 드는 노인이랑 한판 붙었었고······.’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침대에 걸터앉아 어제 일을 떠올려보았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중간중간이 끊겨 있는 기억이었지만 그래도 블라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강렬한 기억들이 있었다.

빛나는 이마.

반짝반짝 빛나던 주제에 흉악한 위력을 가지고 있던 이마였다.

“······그게 되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 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오러로 강화한 노인의 이마는 차라리 벽에 부딪히는 게 나을 정도로 단단했었다.

“그렇게도 쓸 수 있어요?”

[사람의 재능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법이니까.]

끝까지 봤다는 말은 안 하는 것으로 보아 목소리도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억에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말았다거나.

“······뭐 그 정도는 했으니까 지금도 대접받고 사는 거겠죠.”

[그렇지. 분명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일 거다.]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뿐만 아니라 정체도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노인이었지만 블라드도 눈치를 통해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된 바예지드의 기사.

그리고 지금은 은퇴를 한 채로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사람.

아마 기사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의식 중 인 것만 같은데 아직 종자일 뿐인 블라드로서는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좀.”

정신을 차린 블라드가 침대에서 일어서자마자 방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가뜩이나 작은 키에 옷더미를 잔뜩 들고 있어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노크할 손이 있어야 두드릴 거 아냐.”

제미나는 짜증 난다는 듯 들고 있던 옷더미들을 침대 위에 쏟아 넣었다.

전부 블라드가 입고 다니던 옷이었다.

“내버려 두면 내가 알아서 빨아둘 텐데 오지랖은.”

“손님. 이것도 다 저희 여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랍니다.”

제미나는 친절해 보이려 노력하는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하얘 보이는 제미나의 치아가 소년은 괜히 불길해 보였다.

“손님은 비싼 4층에 머물고 계신 귀한 손님이시니까요. 이 정도는 저희가 다 해드려야 하는 부분이죠.”

“······.”

블라드는 제미나가 지금 하는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닌 것을 알았다.

마르셀라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장미의 미소는 그녀의 의지에 따라 창관이 아닌 여관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호르헤의 부재로 생겨나고 만 삶의 분기점에서 마르셀라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 아직 그만한 돈이 없는데.”

“너는 공짜라잖아. 여기 있어 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고.”

마르셀라는 소년에게 안락한 쉴 곳을 내어주고 소년은 마르셀라에게 자신의 이름값을 빌려준다.

“나 하나 가지고 되겠어?”

“그거야 마르셀라가 판단할 부분이지.”

조직 간의 항쟁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블라드로서는 고작 자신 하나로 그들을 억제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마르셀라가 보았을 때는 충분히 통할 만했다.

쇼아라의 시장이자 바예지드 가문의 둘째 아들이 감싸고 도는 인재니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이 도시 안에서만큼은 충분하다 못해 남을 이름값일 테니까.

“식당으로 와. 마르셀라가 점심 준비해뒀다니까.”

바쁜 듯이 방을 나서던 제미나는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돌아오더니 블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걸 빼먹었네. 받아 가세요 기사님.”

“아직 기사 아니라니까. 괜히 어디서 가서 그런······.”

제미나에게 한마디 해주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그녀가 건네주는 손수건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금색 자수로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이었다.

“제가 보기에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님이 확실하신데요.”

“이건······어쩔 수 없었던 거거든.”

블라드는 가능하다면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억지 미소를 짓고있는 제미나를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고 지금은 오해를 풀 만한 상황이 아

니었다.

“머리카락까지 자르면서 검을 쥐여 보낸 보람이 있네요. 아주 출세하셨어요.”

“그건 고맙다고 생각······.”

쾅-!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가버린 제미나를 보며 블라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으쓱거렸다.

“······하고 있었지. 항상.”

블라드는 소녀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미나는 레이디 알리시아라는 존재가 데어마르의 여남작이며 자신이 받은 손수건이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통해 건네진 것까지는 모를 것이다.

어쩌면 알았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반응이 변함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림질까지 했네.”

블라드는 추웠던 겨울날, 소녀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헌신을 기억하며 침대 위에 놓인 옷들을 바라보았다.

귀부인이 전해준 옷 위로 느껴지는 붉은 머리 소녀의 손길이 따뜻했다.

“······.”

블라드는 제미나가 건네준 옷을 갈아입으면서 오랫동안 밖으로 목을 빼내지 않았다.

몸에 닿는 옷감의 느낌은 달랐지만, 소녀가 전해주는 온기만큼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돌아오길 잘했다.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을 빼냈다.

※※※※

“미안하다니까.”

“······.”

“하나 사주마. 그럴싸한 거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것이 있는 법인데······.”

언제나 호르헤가 아침을 먹던 그 식탁에 앉아 스프를 떠먹고 있던 블라드.

그러나 그리워했던 마르셀라의 스프를 먹고 있었음에도 소년은 쉽게 인상을 풀지 못했다.

마치 시위라도 하듯 굳이 입고 있는 망가진 가죽 갑옷이 소년의 인상을 그렇게 만들었다.

“이거 마음에 들었던 거거든요.”

“······그렇지. 훌륭한 갑옷이지.”

소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노인은 그저 앞에 놓인 수프를 휘저을 뿐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유망한 종자에게만 내어주는 가죽 갑옷은 아까 소년의 말처럼 돈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노인 또한 어렸을 적 그 갑옷을 받으며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럼 나랑 같이 이따 시청이라도 가자.”

“왜요.”

퉁명스러운 소년의 대답에 먹고 있던 스프 그릇을 집어던지고 싶은 노인이었지만 꾹 참아내었다.

본인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사실이었고 힘을 제대로 조절 못 해 소년을 상처입혔으며 게다가 바예지드의 갑옷까지 터트리고 말았으니 지은 죄가 크다 할 수 있었다.

“도련님한테 다시 네 쓸모를 보여야 할 거 아니냐. 근신 일주일 끝났다고 개판 쳐놓은 네 평가가 돌아오겠어?”

틱틱대던 블라드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분명 떨어진 평가를 올리는 데는 성과를 들고 가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요제프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극진한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을 따른다 해도 잘했으면 잘했다 했지 못했다 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러니까 나랑 일 하나 같이하자. 보고는 후하게 올려주마.”

“무슨 일이요?”

“자야르나 보르단 녀석한테 달라고 하면 뭐라도 하나 정도는 내주겠지.”

“······빵 썰어드릴까요?”

물러설 때와 나설 때를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 근데 그때는 왜 그랬어?”

“언제요?”

“······빵이나 썰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소년을 보며 노인은 혀를 쯧쯧 찰 뿐이었다.

‘다루기가 쉽지 않겠어.’

영악하기까지 한 소년을 보며 요제프가 썩일 속을 생각하니 가련해지는 노인이었다.

“그래도 터트린 갑옷값은 주셔야 해요.”

“······.”

그러나 지금 당장 그 영악한 소년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으니 노인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

블라드는 근신 명령 때문에 차마 시청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있는 마구간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몸은 괜찮아?”

“좀 쉬니까 나아졌어.”

“여기 올 때까지 하도 골골대서 걱정하고 있었지.”

그곳에서 이제는 쇼아라의 마구간지기가 된 고트가 블라드를 맞이해주었다.

“너는 할 만하냐.”

“나쁠 게 뭐 있나. 돈 많이 줘, 밥 많이 줘, 자는 곳도 좋아. 게다가 이번에는 특별 수당도 나올 거 아냐.”

“······얼마 받는데?”

블라드의 질문에 고트는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 사이라도 그런 거는 물어보는 거 아니야.”

“사기꾼 새끼.”

봉급을 많이 받는다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말았다.

블라드의 정식 신분은 종자였으며 바예지드 가문에서 종자라는 위치는 기사들의 조수이자 수련생 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 블라드는 여태까지 요제프가 따로 쥐여주는 용돈 정도를 제외하고는 따로 봉급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대장은 이거저거 많이 받았잖아. 갑옷이라던가 옷이라던가.”

“······.”

그러나 고트의 말처럼 블라드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옥사나와 요제프가 소년에게 지원해 준 유형, 무형의 지원들은 고작 금화 정도로는 잴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니까.

당장 자야르의 종자라는 위치만 하더라도 어느 가문에서는 수백 개의 금화를 싸 들고 찾아올지도 모를 기회였다.

“요즘 뭐 별일 없어?”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건네진 질문에 대수롭지 않은 듯 솔로 말 등을 쓸던 고트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블라드에게 귓속말을 했다.

“소문이 있긴 있어.”

“······그래?”

악어와 악어새 같은 두 명의 관계는 여전히 유효했다.

고트의 속삭임을 듣는 블라드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밤에 경비를 서던 경비병들이 이상한 걸 봤다는 거야.”

“말해봐.”

확실하지 않은 소문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고트가 전하는 말에는 분명 짚이는 것이 있었다.

“새까만 말이 저 멀리서 자꾸 성문을 보고 있대. 뭔지 싶어 다가가면 어느샌가 사라져 있다는거야.”

“말?”

블라드는 어째서 고트가 귓속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개 짙은 마을에서 보았던 광경 하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목 없는 사내가 유령마 같은 걸 타고 그랬었다며.”

“······그랬지.”

어두운 밤 쇼아라를 지켜보고 있는 새까만 말.

그리고 확인하려 해도 너무 재빨라 다가갈 수 없었다는 말.

고트의 추측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조심하라고. 아직 근신 중이잖아.”

고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신이긴 한데 어쨌거나 일은 할 것 같네.”

“응?”

“너도 준비해 놔.”

“으응?”

블라드는 양손에 허리를 짚으며 저 앞에서 다가오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거의 다 벗겨져 가는 노인의 이마를 빛내고 있었다.

“이놈아 가자!”

“이름 부르시라고요.”

일거리를 하나 잡아 왔다며 웃고 있는 노인.

그 노인이 움켜쥐고 있는 종이에는 새까만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특별 수당 더 받아서 좋겠네.”

“아니······.”

짓궂은 표정을 짓는 소년을 보며 고트는 들고 있던 솔을 양동이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나도 그래.”

고트의 달콤한 휴식을 깨부순 블라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을 타지 못한다면 말을 모는 사람을 타면 된다.

그것이 소년이 내린 결정이었다.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8화 19

이어지는 옛 모습들 (2)

가치 있는 존재는 어디서나 빛나는 법이다.

“저기 있다! 어서 몰아!”

“정말 애먹이는 놈이구만!”

그리고 빛나는 존재는 누구나 탐하기 마련이었다.

“······!”

자신과 닮은 색깔의 밤하늘 아래서 새까만 말 한 마리가 도망치고 있었다.

무리의 대장이라는 의무를 넘겨주고 그날의 기억을 쫓아 소년을 찾아왔으나 빛나는 존재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탐욕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녀석의 길을 막고 있었다.

불길한 주문을 머금은 올가미들이 새까만 말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곳곳에서.

너와 내가 만나는 세계의 지평선에서 우리가 된다.

더 넓어진 세계는 더 높아질 가능성을 보장하겠지만 그날 자신과 같이 데스웜과 대적했던 소년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새까만 녀석은 오직 혼자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힝-

떠오른 달 아래서 새까만 말이 내 짖는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화창한 여름 하늘 아래서 건초를 가득 실은 달구지 하나가 초원을 지나가고 있었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과 그의 옆에서 하품 짓고 있는 소년.

그리고 그들을 달구지에 태운 채 말을 몰고 있는 긴 턱의 청년까지.

자그마한 달구지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들의 모습은 기사라던가 검이라던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어디까지 간대요?”

“바르나까지.”

“그런데 그냥 이렇게 누워있어도 되는 거예요?”

“알아서 찾아온다잖냐.”

일행은 현재 바르나로 향하는 상행의 뒤를 조용히 쫓아가는 중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유령마로 추정되는 말은 재빠를 뿐만 아니라 마차나 달구지에 사람이 타고 있을 때면 항상 멀리서 지켜보며 확인한다고 했었다.

“확실한 의도가 있는 녀석이지. 분명 평범한 말은 아닐 거다.”

“······.”

노인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와 고트의 머릿속에는 저절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안개 낀 마을, 목 없는 사내.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유령마.

어쩌면 불길한 흔적이 자신들을 따라 쇼아라까지 온 게 아닐까 싶어 영 찜찜할 뿐이었다.

“하늘 좋구나. 바람도 불고.”

둘의 걱정과는 별개로 라문드는 유유자적하게 움직이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실려있던 건초 하나를 빼어 물고는 장난스럽게 질겅이기 시작했다.

“오러 쓴지가 얼마나 됐다고?”

“한 석 달 됐나. 아니 넉 달인가······.”

“데어마르에서부터 뽑아낸 거고?”

“네.”

“으음.”

노인은 밀짚모자의 틈 사이로 비치는 소년의 등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이곳으로 나온 목적은 정체 모를 말을 조사하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라문드가 쇼아라에 머무는 가장 큰 이유는 눈앞에 있는 소년이었을 뿐이니까.

말을 찾기 위해 수색하는 며칠 동안 블라드의 옆에 있으면서 살펴보고 판단하고 그리고 기특하면 뭐라도 좀 가르쳐볼 요량이었을 뿐이었다.

“석 달이면 좀 빠르네.”

“뭐가요.”

소년의 물음에 라문드는 밀짚모자를 벗고는 블라드와 눈을 마주쳤다.

“깨우친 시기에 비해 오러가 진해. 정작 그러면서도 본인의 색을 못 찾은 게 신기하긴 하다만.”

“······.”

오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블라드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노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야르와 목소리는 언제나 기본기를 강조할 뿐 소년에게 오러에 대한 가르침은 크게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깨우치며 앞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오러는 곧 심상의 구체적인 구현이지. 색깔을 찾지 못했다는 건 아직 너의 세계가 특정되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고.”

“색깔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요?”

라문드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많이 알려주면 안 되겠지.

자야르가 나름대로 생각해놓은 방향이 있을 테니까.

“좀 더 너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 봐라. 너무 숨기지만 말고.”

“그게 무슨 말인지.”

블라드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라문드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입을 열었다.

“네 안에 세계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장치를 하나 만들어봐라. 기사들은 그걸 열쇠라고 부르는데.”

“열쇠요?”

처음 듣는 단어에 블라드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하나라도 주워들으려는 소년의 모습이 라문드는 기특해 보였다.

“별건 아니고. 너 여태까지 봐왔던 기사들이 오러 쓰는 거 봤냐?”

“봤죠.”

“그 사람들이 그냥 오러를 쓰디?”

“······그럼 다르게 쓰나요?”

“관찰력이 좀 부족하구만.”

라문드는 건초더미에 등을 기대며 소년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봐라.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특정한 행동 같은 걸 취하지는 않든?”

“행동?”

블라드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다른 기사들이 오러를 불러일으킬 때는 언제나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라문드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검이랑 방패를 부딪치고······.”

자신을 오러의 길로 이끌어줬던 기사 파블로.

그는 검과 방패를 부딪치며 소년을 향해 이름을 물었었다.

아직도 그때의 울림이 블라드의 귓가에 생생할 정도였다.

“음 그리고?”

데스웜을 벤 루트거 바예지드.

활화산 같았던 그는 손가락으로 검을 튕겼던 것 같았다.

멀리서 보았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고······.”

그리고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

소년이 맨 처음 보았던 오러의 주인.

“······검에다 입을 맞추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지. 특정한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강렬하게 떠올리는 거지.”

열쇠란 그런 것이었다.

자신의 심상 세계를 크게 열어젖히는 도구이자 의식 같은 것이었다.

“저는 그냥 쓰는데요.”

“그래서 허접하잖아.”

라문드의 대답에 블라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다른 기사들의 오러와 비교해서 자신의 오러는 미약한 빛을 낼 뿐이었으니까.

“때가 되면 자야르가 어련히 알려주었겠지만, 지금 미리 생각해놓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다.”

세계를 크게 열어젖히는 의식.

자신의 세계가 굳건히 자리 잡은 기사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었기에 아직 소년이 사용하기에는 먼일일지도 몰랐다.

저 멀리 보이는 또 다른 기사들의 경지를 느끼며 블라드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손을 올려보았다.

[숙여라!]

“숙여!”

“······응?”

순간 갑작스레 들려오는 경고들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터엉!

“엥?”

멍청한 소리를 내며 들려오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블라드.

그곳에는 파르르 떨리는 화살을 붙잡고 있는 라문드의 모습이 있었다.

“일이 쉽게 풀리지가 않는구만.”

밀짚모자 사이로 비치는 라문드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마적단이다! 모두 경계해라!”

나아가던 행렬이 멈춰서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소리.

그리고 언덕에서 날아드는 화살들이 있었다.

“달구지를 엎어라!”

“어디로요!”

라문드는 재빨리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특정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말 띄워놔! 그놈 도망 못 가게 꼭 붙잡고 있어라. 마부야!”

“네? 네!”

라문드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재빨리 상황을 판단하고는 블라드와 고트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기민한 대처에 블라드와 고트는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들어 갈 수 있었다.

“뭐죠? 마적단인가?”

“······그놈들보다는 더 골치 아픈 녀석들인 것 같다.”

블라드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적어도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이 언덕 위에 말을 타고 서 있었다.

생소한 형태의 가죽옷과 머리 형태, 얼굴까지 꽉 채운 문신.

그리고 쉴 새 없이 질러대는 기묘한 함성까지.

“야만인들이다.”

“야만인들이요?”

예상치 못한 단어가 라문드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콰직-!

순간, 블라드의 옆으로 꽂히는 화살 하나가 있었다.

“······.”

저 멀리 언덕에서 활을 들고 있는 야만인 사내.

블라드는 그 사내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짐승과도 같은 눈빛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매캐한 연기와 함께 타오르는 마차, 목이 터질 듯 외쳐대는 용병들의 고함소리.

“젠장!”

그리고 날아오는 화살들.

땅바닥에 꽂혀 부르르 떨리는 화살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재빨리 달구지를 엄폐물 삼아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야만인이 왜 여기 있어요?”

“······.”

북부의 사람들이라면 북쪽 저 너머에 살고 있다던 야만인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 채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블라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여기는 바예지드 백작령인데요? 아무리 멀리 나왔다 해도 쇼아라에서 고작 하루거리에요.”

“그러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곳은 바예지드 백작령이라는 것이었고 보통 야만인들이 출몰하는 곳에서 훨씬 남쪽에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경험 많은 라문드조차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굳이 바예지드 백작령까지 내려올 이유도 이득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지금은 대책을 강구해야만 할 때다.

스르릉-

“좀 편하게 가나 했더니.”

블라드는 역시 자신의 인생은 뭔가 꼬인 것이 틀림없다며 투덜거리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라문드 역시 검을 뽑아 들고는 고트에게 지시했다.

“마부야. 말에 안장을 앉혀놔라. 저놈들한테 대응하려면 말이 있어야 한다.”

라문드는 이미 어찌하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 생각 중이었다.

그의 이마에 깊게 새겨진 주름들이 지금의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몇몇 전사들을 제외한다면 감히 기사까지는 상대하지는 못할 녀석들이다. 야만인들 특유의 기동력만 죽이면 돼.”

야만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말과 함께한다고 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뛰어난 기병이라 말하는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말과 관련된 영역은 소년이 가지고 있는 뼈아픈 약점 중 하나였으니까.

“잘 들어라! 우리도 너희 모두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한참 화살을 날리며 행렬을 위협하던 야만인들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압박하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

“통행료만 낸다면 목숨은 살려주마!”

“······.”

고요해진 사람들 속에서 상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고는 외쳤다.

그는 이 행렬을 이끌고 있는 상단의 상단주였다.

“통행료를 지불하겠습니다! 공격을 멈춰주시오!”

마치 항복선언과도 같은 상인의 말을 들은 야만인들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원하시······.”

“가지고 있는 짐 전부!”

당황한 표정을 짓는 상단주를 보며 야만인들의 대장이 크게 외쳤다.

“맨몸으로 떠나라! 손에 뭐라도 쥐고 있는 놈들은 그게 저승길 노잣돈이 될 거다!”

행렬을 빙글빙글 돌며 큰소리로 미리 승리를 자축하는 야만인들.

야만인들의 도를 넘는 요구에 상인들은 당황하고 말았고 상행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되었던 몇몇 용병들도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과연 짐을 놓고 떠난다 해도 저들이 얌전히 사람들을 보내줄까?

“······저 새끼들 맘에 안 드네요.”

“나도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봤는데 그게 안 되더라.”

일행 중 그 누구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고 가끔은 태풍처럼 몰아닥치는 시련을 묵묵히 감내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말 잡으러 왔다가 이게 뭐야.”

블라드도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 다가오고 있는 야만인들도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블라드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은 채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준비해라.”

“네.”

은퇴한 기사와 기사가 되고 싶은 소년.

둘 다 현직 기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들고 있는 검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다만 그 힘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말 고삐를 붙잡고는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라문드와 달리 블라드에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저들이 행렬에 다가오는 단 한 순간.

그것이 말을 타지 못하는 소년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일 것이다.

“후우······.”

블라드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남자들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러나 소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단순히 말을 타지 못한다는 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히이이잉-!

뭐가 있다-!

말들이 놀랐어!

“젠장!”

조용히 야만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멈춰서는 그들을 보며 일이 글렀음을 느꼈다.

결국, 그동안 제어하지 못했던 기이한 기세가 소년의 발목을 크게 붙잡고 말았다.

“나가라! 지금!”

“빌어먹을!”

의도한 만큼 다가오지도 못했고 저들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검을 휘두르려면 오직 지금뿐이었다.

비록 늙은 몸이었으나 말을 박차며 번개처럼 뛰쳐나가는 라문드.

그의 온몸은 이미 반짝이는 오러로 뒤덮여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말을 돌려! 거리를 벌려라!”

심상치 않은 기세로 달려드는 두 명을 보며 야만인들이 뒤로 물러나려 하였으나 이미 라문드는 그들의 지척까지 다다랐다.

“네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야만인들을 잡아 세운 라문드가 매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평생을 바쳐 지켜온 땅을 어지럽히는 녀석들이었으니 일말의 자비도 필요 없을 터.

그의 오래된 검 위로 붉은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러다!”

“왜 여기에 기사가!”

반짝이는 라문드를 보며 당황한 야만인들이 고삐를 잡아채고는 서둘러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 이 새끼들아!”

라문드보다는 늦었지만 특유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달려나간 블라드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야만인에게 달라붙었다.

[말을 노려라!]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말의 무릎을 베어내자 그 위에 타고 있던 야만인이 균형을 잃고는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내려와!”

고통과 공포.

블라드가 주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말은 기수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날뛰기 시작했고 소년은 그 틈을 노려 재빨리 위에 타고 있던 야만인을 낚아챘다.

“크억!”

“아까처럼 웃어봐! 새끼야!”

볼품없이 달려오게 만든 값까지 합해 장식 없는 검이 번뜩였다.

울부짖는 말과 터져나가는 핏방울.

갑작스레 뛰쳐나온 두 명에 의해 야만인들의 기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돌아가라 블라드! 가서 사람들을 지켜!”

반쯤은 실패한 기습이었지만 두 명의 사내는 자신들의 능력으로 야만인들에게 한 방을 먹이는 것에 성공했다.

“꺄아아악!”

“안돼! 안돼!”

그러나 행렬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야만인에게 대항하는 사람들은 블라드와 라문드 두 사람뿐이었다.

울부짖는 사람들을 제물 삼아 용병들이 달아나고 있었으니까.

“저 개자식들.”

블라드는 달아나는 용병들을 향해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용병에 불과한 그들은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목숨을 걸 이유가 없었다.

“대장!”

그나마 고트가 검을 들고는 분전하고 있었으나 그는 잡기에 능한 사람이었지 검을 다루는 데는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곳곳에서 피와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천천히 영역을 굳혀라. 여기 있는 모두를 지킬 수는 없다.]

‘빌어먹을······.’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블라드의 검 끝은 쉴 새 없이 치고 빠져나가는 야만인들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차라리 저들과 같이 말을 타고 움직였다면 모르겠으나 블라드는 땅에 붙박혀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내려와서 싸우잔 말이다.

비겁하게 들쑤시고 다니지만 말고.

그러나 마치 소년의 생각을 비웃듯 야만인들은 벌떼처럼 쉴새 없이 행렬 곳곳에 달라붙으며 빼앗고 죽이고 사람들을 상처입히고 있었다.

말과 기동력.

야만인 특유의 전술로 유린당하는 사람들은 그저 단말마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엄마.”

흙바닥에 뒹군 채 엉망이 된 아이를 피투성이의 아버지가 잡고는 감싸 안았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라문드를 찾아보았으나 그 또한 어려운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라문드가 끌고 나간 말은 짐말이었으며 그것만으로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야만인들을 잡아 세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야만인들의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를 뜯어내어 행렬 바깥으로 몰고 나가는 라문드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소년은 또다시 무력하게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보며 분노하고 말았다.

세계의 모습은 다양하다.

높아서 닿을 수 없고 거대해서 감당할 수 없고 빨라서 붙잡을 수 없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다양한 한계들을 느끼며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또다시 이렇게 되었다.

히이이잉-

오롯이 혼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속에서 블라드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

오랫동안 듣지 못했지만 한 번에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뭐야 저건!”

“그놈이다!”

“그때 빠져나가더니!”

저 멀리서 시작된 까만 점 하나.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야만인들을 헤치고 다가오는 존재감이 있었다.

블라드는 지금 달려오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가 자신을 찾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다!”

높게 치켜든 장식 없는 검에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소년과 올가미를 피해야만 했던 말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

스쳐 지나가는 새까만 밤이 재빨리 별 하나를 자신의 위로 태웠다.

블라드는 어느새 높아진 시야를 치켜뜨며 자신도 모르게 그날과 같이 손을 내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이 말하고 있었다.

“가자!”

히이이이힝-

이제는 달릴 수 있노라고.

더 이상 참지 않아도 된다.

갈 곳 잃었던 장식 없는 검이 똑바로 치켜세워졌다.

소년이 감고 있는 왼쪽 눈에 흐르는 세계.

새까만 말 위에 흐르듯 세워지는 하얀색의 뿔 하나.

서로가 가진 한계의 끝에서 두 개의 세계가 맞닿기 시작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9화 11

이어지는 옛 모습들 (3)

기마술을 몰라도, 안장 위에 앉아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크아아악!”

“어서 말에 올라타!”

히이이잉-!

소년이 바라보면 다가가 있었고 검을 휘두른 후에는 어느새 지나가 있었다.

세계와 세계.

오러와 뿔로서 연결된 둘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을지라도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거야!’

블라드는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크게 웃음 지었다.

온몸을 통해 느껴지는 새까만 녀석의 고동 소리.

자신보다 두 배는 거대할 것 같은 격렬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블라드는 검을 휘둘렀다.

이 거대한 심장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피가 필요할 것이다.

“아까처럼 웃어봐라!”

새까만 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야만인들의 피가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전리품에 눈이 멀어 땅으로 내려온 자들은 다시는 말 위에 오르지 못했다.

“저 녀석이 사람을 태웠다!”

“······도련님도 거부한 놈인데!”

한참 상인들을 약탈하던 야만인들은 빠르게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너무나 빨라서, 휘두르고 있는 검의 기세가 흉포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여태껏 자신들이 쫓아왔던 녀석이 사람을 태웠다는 사실이었다.

신령한 핏줄을 타고난 초원의 아들을 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같은 초원의 자식인 자신들뿐.

그러나 굳게 믿고 있던 상식은 지금 새까만 녀석에게 올라타 있는 블라드에 의해 깨져나갔다.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새까만 녀석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고 오직 스스로의 의지로 소년을 선택했다.

“제국의 애송이 따위에게 초원의 자식을 넘겨주지 마라!”

마치 자신들의 것을 빼앗긴 것만 같은 광경에 야만인들은 이를 갈며 말을 몰았다.

자존심을 넘어 영혼까지 짓밟힌듯한 감각에 야만인들은 빛나는 금화도 내버려 둔 채 소년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제국에 의해 밀려나고만 야만인들이었으나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따라온다!’

한참 약탈하던 자들을 베던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에게 몰려오고 있는 자들을 보며 어찌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이 행렬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지만 점점 포위되고 있는 형국은 경험 없는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

블라드가 멈칫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어느새 야만인들이 달리고 있던 블라드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찌르듯이 들어오는 야만인들의 눈빛.

열 명이 넘는 무리 속에 갇혀 버린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다가올 악의를 대비했다.

“당장 그 말에서 내려라. 애송이!”

“감히 네가 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비수처럼 찌르듯이 들어오는 사내들의 눈빛 속에서도 블라드는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이놈을 타든 말든 너희가 뭔 상관이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거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고 너희들 따위가 나를 막을 자격은 없다.

“까고 있네. 새끼들이.”

“죽여!”

푸르게 타오르는 소년의 눈동자를 본 야만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검을 뻗어댔다.

“······!”

블라드는 서둘러 오러를 일으켜 대항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사내들의 검은 저 앞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었다.

“어?”

히이이힝-

블라드는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묘하게 속도를 줄인 새까만 녀석이 순식간에 야만인들이 내뻗는 검을 피해냈다.

쿠웅- 쾅-

그리고는 옆에 달리고 있던 야만인들의 말을 거칠게 밀어내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포위망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새까만 녀석도 이들에게 갚아야 빚이 있었다.

----!

오직 서로 이어져 있는 소년만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하얀색 뿔.

그 뿔과 함께 빛나기 시작하는 새까만 눈동자가 주위의 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압박감을 주기 시작했다.

초식동물이 내뿜었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그런 기세였다.

“워워!”

“젠장! 뒤를 잡혔다!”

거대한 그물 안에 갇힌 형세였던 블라드는 어느새 그물을 찢고 뛰쳐나와서는 야만인들의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직 추격자이자 포식자만이 잡을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올가미를 날려!”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린 위치에서 블라드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 야만인 중 몇몇이 재빨리 들고 있던 올가미를 날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새까만 녀석을 사로잡기 위해 날렸던 주술이 새겨진 올가미였다.

히이이힝-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악의가 담긴 올가미를 보며 새까만 녀석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올가미가 날아들던 그 날의 밤하늘이 떠올랐다.

“어딜 감히!”

그러나 새까만 녀석이 대항할 수 없는 부분을 이번에는 소년이 대응하고 있었다.

블라드가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담아두고 있던 세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자식들이 끝까지 치사하게 구네!”

블라드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올가미들을 시선에 새겨두고는 정확한 순간에 맞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날렸다면 모르겠으나 소년은 이미 그들의 뒤를 잡은 상태였고 다급하게 날린 올가미들은 그저 소년의 정면을 향해 날아올 뿐이었다.

스걱-

빛나는 일섬과 함께 야만인들의 주술이 허무하게 잘려 나갔다.

새까만 녀석이 어찌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악의와 함께.

“이놈도 오러를 쓴다!”

“어린놈도 기사였어!”

당황하는 야만인들을 보며 소년과 말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내 차례냐!”

소년의 손에 들려진 장식 없는 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야만인들보다 빠르며 날카로운 밤하늘이 그들의 뒤에서부터 덮쳐들고 있었다.

※※※※

으아아아-!

말들이 겁먹었어!

“······.”

행렬의 바깥에서 대치하고 있던 또 다른 무리.

그 무리 속에 있던 노인과 야만인들의 대장은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기이한 비명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돌렸다.

“블라드?”

“······이런.”

평생을 누군가를 쫓고 사냥하며 살아왔던 야만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광경에서 그들은 오히려 누군가에게 쫓기는 입장이었다.

새까만 말과 함께 검을 휘두르고 있는 금발 소년에 의해.

“막고 있어봐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야만인들의 대장은 그를 따라 나온 무리에게 라문드를 맡을 것을 명하고는 재빨리 비명이 난무하는 곳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가냐. 이놈아!”

라문드는 그가 블라드를 향해 움직이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서둘러 따라나서려 하였으나 고작 달구지를 몰던 짐말로서는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남아있던 무리들이 라문드의 진로를 방해하며 그를 붙잡아댔다.

“무슨 일이냐!”

도망치고 있던 부하들을 향해 뛰쳐나간 야만인들의 대장.

그곳에서 그가 본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게······아게 님!”

피를 흘리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달려온 아게를 보고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팔을 허우적댔다.

“이런!”

어느새 절반으로 줄어버린 자신의 부하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금발의 소년과 자신이 눈여겨 두고 있던 신령한 피를 이은 말까지.

상상조차 못 한 광경을 보며 무리의 대장인 아게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 자식이 감히!”

보고 있기만 해도 피가 솟구치는 광경을 보며 아게가 화살을 메겼다.

멀리서도 본연의 존재감을 내뿜는 소년을 향해 냉혹한 화살 하나가 쏘아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새까만 녀석의 귀가 쫑긋거렸다.

----!

“으아!”

블라드는 순간 기우뚱하는 새까만 녀석의 갈기를 잡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바짝 붙이고 말았다.

슈육-

순간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 소리.

아게가 쏘아낸 화살이 방금 블라드의 머리가 있던 곳을 꿰뚫고 지나가며 만들어낸 소리였다.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치켜들고는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다른 야만족들과는 다르게 형형색색의 끈으로 머리를 묶어놓은 야만인 사내.

“너 이 자식 아까 그놈이지!”

언덕 위에서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았던 냉정한 눈빛의 사내를 기억하며 블라드가 이를 갈아댔다.

“······!”

아게 또한 자신의 화살을 피해버린 말을 보며 황망할 뿐이었다.

신령한 피를 타고난 말이라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 몰랐었다.

‘여기서 잡아야 한다!’

소년과 신령한 말.

함께 있기에 완벽해지고 어리기에 더욱 강해질 그들을 보며 아게는 등골이 섬찟해 지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 녀석들의 기세를 끊어놔야 한다.

“어서 저 녀석들을 포위해라!”

“하지만 아게 님!”

“마무리는 내가 한다!”

소년을 바라보는 아게의 눈동자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온몸에 새겨져 있는 그의 문신까지도.

야만인들의 주술로 새겨진 아게의 세계가 피부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진형이 좁혀지고.

“그래 와 봐!”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소년과 말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둘은 기다렸다는 듯 사납게 울부짖었다.

“죽어라!”

“뒤져!”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눈과 눈이 서로를 불태우고 있었다.

말들로서 만들어진 움직이는 결투장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젠장.’

검으로서는 할 만하다.

아게와 맞부딪혀 본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태까지 터무니없는 강자들과 싸워온 소년이 보았을 때는 아게라는 초원의 전사는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였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지금 말 위에 올라타 있다는 것.

[너는 안장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

목소리의 말처럼 도구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소년은 지금의 상황이 길어질수록 불리할 뿐이었다.

점점 떨리고 있는 소년의 허벅지를 느낀 새까만 녀석이 최대한 상체를 고정시켜 부담을 줄이려 했으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악의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빠져나가야 한다!]

‘어떻게!’

블라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빠져나갈 곳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것은 야만인들 뿐이었으며 이번에는 새까만 녀석조차 쉽게 포위망을 찢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주제에 신령한 말을 탔단 말이냐!”

바로 옆에 있는 아게의 기세가 소년과 말을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

순간 블라드의 시야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라문드의 모습이 비쳤다.

야만인들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반짝이는 라문드의 이마는 멀리서 스쳐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몇몇 전사들을 제외한다면 감히 기사까지는 상대하지는 못할 녀석들이다. 야만인들 특유의 기동력만 죽이면 돼.’

경험 많은 기사가 전해준 말이 있었다.

야만인들은 말에서만 떨어뜨리면 상대할 수 있다고.

뒤에서 따라오는 라문드와 벗어날 곳 없는 포위망을 보며 블라드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는 말 위에서 태어났다며?”

“뭐?”

아게는 사뭇 달라진 블라드의 기세를 느끼고 있었다.

점점 올라가는 소년의 입꼬리까지도.

“나는 여태까지 저 아래 처박혀 있었거든.”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태어난 소년은 단 한 번도 진창 위에서 벗어나 본적이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해줬으면 너희도 한번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다시 말해 소년은 진흙탕 싸움에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났으니까.

“이런 미······친!”

아게는 말에게서 뛰어올라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사나운 눈동자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내려와 이 새끼야!”

달리는 말 위에서 막무가내로 아게를 붙잡은 블라드.

마치 같이 죽자는 듯 온몸으로 뛰어든 소년의 행동에 아게는 크게 당황하며 몸을 비틀어댈 뿐이었다.

맹세코 살아오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공격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크헉!”

의외성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소년의 행동에 의해 땅으로 추락하고 마는 야만족의 전사.

곧이어 격렬한 통증이 그의 등을 덮쳤다.

“······!”

점점 까맣게 다가오는 땅을 보며 블라드는 빛나던 노인의 이마를 생각했다.

찰나의 순간 속에서 그날 보았던 광경을 떠올린 블라드는 최초로 땅과 맞닿을 어깨를 향해 사정없이 오러를 밀어 넣었다.

배우지는 못했지만 보았고 느꼈었다.

“흐윽!”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땅에 맞닿은 소년의 왼쪽 어깨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

“이놈······이놈!”

뒤늦게 따라온 라문드는 저 앞에서 야만족의 대장을 붙잡고는 땅으로 굴러떨어진 소년을 보고는 기겁하고 말았다.

아무리 튼튼한 몸을 지닌 기사라 할지라도 저렇게 떨어진다면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 터.

그러나 자욱해진 흙먼지가 걷히고 라문드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부다아트 족의 아게다.”

여기저기 흐르는 피와 함께 장식 없는 검을 치켜든 소년.

그리고 그 소년 밑에 깔려 있는 야만족의 전사.

“네놈 따위에게 말해줄 이름은 없어.”

소년은 배웠었다.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명예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깔려 있는 야만족 사내는 바예지드의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인 마적단일 뿐이었다.

“······.”

라문드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소년의 왼쪽 어깨.

이리저리 터져나간 바예지드의 갑옷 속에서 빛나는 오러를 보며 라문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알려주기도 전에 훔쳐 가면 어떡하냐 이놈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소년을 보고 있었다.

야만인들의 옛 전통을 따라 신령한 말을 타고 달린 소년.

바예지드의 옛 전통을 입고는 자신의 오러를 따라 한 소년.

소년 세계 안에서 이어지는 두 개의 옛것들이 있었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0화 12

레이디 제미나 (1)

요제프는 찻잔을 내어주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수녀를 바라보았다.

깔깔해 보이는 옷을 반듯하게 다려 입은 노년의 여인.

수녀원의 원장이 요제프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시장님께서 그 종자를 키워보실 생각이라는 것은 잘 알겠으나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수녀원의 원장은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요제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앉아 있는 자세만으로도 그녀의 고지식함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가 직접 지켜본 바로는 타고난 신분이 천해서 그런지 심성이 급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분명 문제를 일으킬 아이입니다.”

그날 블라드는 제대로 된 절차도 밟지 않은 채 제미나를 수녀원 밖으로 끌어내었다.

조금이라도 후일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됐겠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설 때가 있는 법이었다.

“저는 혹시라도 시장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말씀드린 겁니다.”

“······그렇습니까.”

요제프는 이미 블라드가 수녀원에서 나름의 무례를 범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 그 행동을 문제 삼고 경고한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면이 있었다.

원장 수녀가 사제 안드레아와 산 로지노의 인정을 받은 소년에게 이러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요제프 님.”

“무슨 일이지?”

요제프가 원장 수녀의 뒤에 있을 누군가를 고민하던 찰나 자야르가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는 시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없었으며 손님과 면담 중인 것도 알고 있던 자야르였지만 이렇게 해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문드 경과 함께 보냈던 마구간지기가 돌아왔습니다.”

요제프는 자야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이유는?”

요제프는 자야르의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라.”

바로 앞에 원장 수녀가 앉아 있었지만 자야르의 태도는 긴급을 요하고 있었다.

“요, 요제프 님. 큰일났습니다.”

자야르의 고갯짓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트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걸어들어왔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이 고트가 얼마나 다급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말해 봐라.”

고트는 요제프의 허락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재빨리 생각해놓았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야만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고트의 입에서 야만인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원장 수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오래 살아왔던 그녀이기에 야만인들이 가져오는 공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쇼아라와 바르나를 잇는 가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습니다.”

일어날 리 없는 상황이었으나 고트라는 사내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나름 신뢰를 갖춘 자였다.

그의 보고는 귀 기울여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영감님께서 저보고 사람을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고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다급한 상황 때문에 그러는지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입을 열었다.

“영감님과 블라드가 지금 야만인들의 대장을 인질로 붙잡고는 버티는 중입니다.”

“······.”

고트는 말하고 있었다.

라문드와 블라드가 습격당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야만인들의 대장을 붙잡고 농성하고 있노라고.

오직 단둘이서 말이다.

“······자야르. 지금 당장 기병들을 꾸려 나서게. 자네가 직접.”

“네.”

“고트. 방금 돌아온 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자야르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가 봐라. 신속하게 움직여라.”

둘을 내보낸 요제프는 마치 기도하듯 양손을 이마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기도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었다.

감히 바예지드의 땅을 더럽히는 야만인들과 자신에게 경고를 날리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화를 억누르는 중이었다.

“······참으로 기특하지 않습니까?”

앞에 앉아 있던 원장 수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요제프.

“비록 신분이 비천하고 성정은 급할지라도 신의 뜻을 따라 어린 양들을 지키고 있다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원장 수녀의 눈에 비치는 요제프는 그날 보았던 소년보다 더 위험한 눈빛을 풍기고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다면 소년보다는 오히려 이쪽일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그분께 제 말을 전해주십시오. 원장 수녀님.”

도시 쇼아라는 두 명의 손에 의해 움직인다.

핏줄로서 인정받은 정당한 쇼아라의 시장인 요제프 바예지드와.

“저를 걱정해주셔서 고맙다고.”

신의 말씀에 따라 인간들을 보살피는 쇼아라의 주교. 이 두 사람에 의해서.

“그리고 제가 조만간 찾아뵙겠노라고 말입니다.”

비록 다른 영역에 속해있지만 서로 같은 도시에서 움직이는 두 사람은 결국 한 번은 마주쳐야 할 운명이었다.

인간의 권력과 신의 권력은 결국 모두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시장실의 창밖 너머로 기병들이 뛰쳐나가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

평범한 마적단이었다면 두목이 잡히는 순간 도망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마적단이 아닌 부다야트라는 야만족 부족의 전사들이었고 아게는 부족장의 아들이자 그들의 대장인 사람이었다.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지 않아요?”

“······꽤 많은 수가 남하해 있었군.”

블라드의 말에 라문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인들은 자신들의 대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이끌고 천천히 남하하는 라문드와 블라드를 압박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따라 내려오는 중이었다.

쇼아라의 성벽이 희미하게 보이는 지금까지도.

“고트라는 녀석이 제대로 도착한 모양이군.”

그러나 하루를 넘긴 이 지리한 대치상황은 지금 이 순간부터 끝났다.

라문드는 아게의 목에 검을 들이댄 채로 저 멀리서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바라보았다.

쇼아라의 병사들이었다.

“······우리가 조금 늦었군.”

“이곳이 바예지드의 땅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아게는 쇼아라에서 달려오는 병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데려온 전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모여들었다면 아무리 오러를 쓰는 두 명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켜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풀려날 수는 있었겠지.

“훌륭한 판단이었소. 노인장.”

자신을 붙잡아 압박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이끌고는 쇼아라로 돌아간다는 결정.

혹시라도 따라잡힐까 염려하여 적절한 거리와 시기를 계산해 고트를 쇼아라로 보낸 판단.

둘 중 하나라도 어긋나거나 시도할 수 없었다면 일행은 쇼아라를 보는 대신 낯선 야만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곳에는 왜 온 거냐? 왜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거지?”

이제야 의도를 달성한 라문드는 그동안 품고 있던 의문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아게의 시선은 자신을 위협하는 검 끝보다도 저 앞에서 새까만 말을 탄 채 자신의 동료들을 노려보는 소년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초원의 아들이 필요했소.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었지.”

“말을 따라온 놈들이 사람들을 약탈해?”

“그것은 겸사겸사 용돈 벌이였달까.”

아게는 비록 블라드에 의해 땅으로 굴러떨어졌지만,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초원의 아들이 우리가 아닌 제국의 소년을 택할 줄 몰랐군.”

오직 혼자뿐이었지만 소년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훌륭하게 야만인들의 돌격을 저지해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초원의 아들이 자신보다 소년을 택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거다.”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라문드의 검 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들은 허락도 없이 바예지드의 땅에 들어와서 약탈을 자행한 녀석들이었으니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돌아가라! 모두 돌아가!”

이제 상황이 끝났다는 것을 인지한 아게는 큰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동료들에게 외쳐댔다.

“가만히 있어!”

갑작스러운 아게의 돌발행동에 라문드의 검이 그의 목을 파고들어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고 있었지만 아게는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돌아가!”

아게의 목소리를 들은 야만족 전사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저 멀리서 달려오는 쇼아라의 병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대장은 실패했고 붙잡히고 말았다.

쇼아라의 앞마당에서 병사들과 정면충돌을 할 수는 없으니 후일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봅시다. 대장!”

날카로운 말 울음소리와 함께 고삐를 돌리는 야만인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도망치듯 내달려온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듯 무릎 꿇는 사람들.

이곳에 있던 모두가 목숨을 부지한 채로 쇼아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만큼 야만인들이 주는 압박감은 강렬했고 위협적이었으며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야만인들을 틀어막은 채 자신들을 이곳까지 인도해준 사내들이 있었다.

“······끝났네.”

멀어지는 야만인들을 보며 이제야 끝났다며 조그맣게 혀를 빼무는 소년.

사람들을 돌아보는 블라드의 금발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했다.

※※※※

“뭐가 어찌 된 거냐?”

“모르겠어요. 갑자기 야만인들이 튀어나오더라고요.”

사건의 당사자였으나 내막까지는 모르겠다는 블라드의 말에 자야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수고했다.”

쇼아라로 근접했을 때 아게가 데려온 야만인들의 무리는 거의 40명에 근접해 있었다.

오직 둘만으로 그들을 저지해내고 있었으니 블라드로서는 충분히 진이 빠질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말은 어디서 난 거냐?”

자야르의 시선이 블라드를 태우고 있는 새까만 말에 닿았다.

다른 말들과 비교해 덩치도 커다래 보이는 녀석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 이 녀석이요?”

마치 그 물음을 기다렸다는 듯 블라드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 데스웜을 상대했을 때 봤었던 녀석인데요. 어떻게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제야 말을 탈 수 있게 되었다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소년.

특히 자야르의 앞인지라 더 생색내고 싶어 하는 티가 간절해 보였다.

“잘난 척 그만해.”

“돌아가자마자 안장부터 맞춰야겠어요.”

“······.”

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형편없이 들떠있는 블라드.

그 모습을 보며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은 자야르였으나 지금도 뒤에서 간간이 소년의 이름을 외쳐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일단은 참아주기로 했다.

“이제야 밥값 하는 건 줄 알아라.”

그저 귓속말로 조금 으르렁거려줬을 뿐이었다.

야만인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냈고 그동안 소문이 무성하던 유령마의 정체도 밝혀냈다.

이 정도면 요제프에게 깎인 점수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고개를 까닥이던 블라드였으나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응? 야. 왜 이래.”

히이이힝-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의 말을 잘 따르던 새까만 녀석이었으나 쇼아라의 성문에 가까이 오자마자 투레질을 하며 더는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응? 응?”

갑작스레 보이는 녀석의 이상행동에 블라드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주위의 병사들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안장부터 맞출 거라며.”

“아니, 이거 왜 이러지?”

자야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새까만 말의 이상행동을 파악해보기 시작했다.

어쩐지 병사들이 가까이 붙을 때부터 녀석의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아 보였다.

“······타는 놈은 말들이 싫어하고 태우는 놈은 인간들을 싫어하니 그야말로 끼리끼리 모였구나.”

뒤로 물러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앞발을 들고 발광을 하는 새까만 녀석을 보며 자야르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1화 14

레이디 제미나 (2)

히이이힝-

가지고 있는 세계가 선명할수록 경계는 명확해진다.

새까만 녀석이 가지고 있던 초원의 색깔만큼이나 인간들이 둘러 쳐놓은 성벽의 경계는 명확했다.

“······.”

색깔이 선명한 소년과 말은 여전히 다른 세계들과 섞이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블라드와 새까만 녀석은 인간의 경계 아래 서서 쇼아라의 성벽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

“왔냐.”

라문드는 술잔을 기울이며 저 아래서부터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아직 문을 열지 않는 여관에서 손님이라고는 오직 노인과 소년뿐.

조용히 울려 퍼지는 라문드의 목소리는 작게 말했어도 소년에게 충분히 닿고 있었다.

“효과는 좀 있더냐.”

“조금은요.”

노인의 물음에 블라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 야만인 놈이 허튼 걸 알려주지는 않았나 봐요.”

“뭐, 초원의 일은 야만인 놈들이 제일 잘 알 테니까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술잔을 들이켜는 라문드의 시야로 붉은색의 꽃다발이 비치고 있었다.

장미꽃.

보기만 해도 화사해 보이는 꽃다발 한 묶음이 소년의 손에 들려있었다.

“말 주제에 취향 한 번 확실하지.”

“이거 따라 움직인다잖아요.”

야만인들의 추격을 피해 마침내 쇼아라로 돌아온 그 날, 블라드는 새까만 녀석의 거부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녀석의 행동에 블라드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하고 있을 때, 얼굴에 문신을 가득 새긴 야만인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은 붉은색을 좋아한다고.

자신의 머리를 묶은 붉은색의 끈을 가리키며 말이다.

“야생마들이 덩굴장미를 따라 움직이는지는 몰랐네요.”

“나름 본능에서 찾아낸 방법이겠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테니.”

야생마들은 풀을 뜯고 살아간다.

그렇기에 추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얼어붙은 초원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 야생마들에게 있어 따뜻한 기운에 따라 몸을 펼치는 덩굴장미는 생존과 직결된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요걸로는 모자란 모양이네요.”

블라드는 테이블에 장미 꽃다발을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붉은색이 많을수록 좋겠죠?”

“그렇지.”

“클수록 좋고.”

“대는 소를 겸하는 법이지.”

“······거기에 움직이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말을 마친 블라드는 시선을 돌려 저 아래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붉은색을 바라보았다.

자기 몸보다도 더 큰 이불을 짊어진 채 끙끙거리며 움직이는 붉은 머리 소녀.

블라드가 알고 있는 붉은색 중 가장 화려한 색깔이 저 아래에 있었다.

“저 정도면 충분히 장미라 할 만하지.”

블라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라문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즘 사이 안 좋아 보이던데 말이다.”

“원래 그런 사이예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소년을 보며 라문드는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차댔다.

가끔은 너무 가까이에 있어 소중한 줄 모르는 존재들이 있었다.

“원래 그런 사이가 어디 있어. 이놈아. 다 그렇고 그런 사이뿐이지.”

그러나 블라드의 시선은 여전히 제미나의 붉은 머리에만 닿아있을 뿐 노인의 한탄과도 같은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 볼게요.”

며칠이 지난 지금도 새까만 녀석은 성벽 밖에서 소년을 기다리며 침울하게 서 있었고 그 녀석이 없으면 블라드는 또다시 기약 없는 달구지 생활을 해야만 한다.

자신을 쇼아라 밖으로 내보낸 준 소녀가 이번에는 새까만 녀석을 안으로 들여와 주길 바라면서 블라드는 내려놓은 꽃다발을 들고서 제미나를 향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다급한 몸놀림으로 소녀에게 다가가는 블라드를 보며 라문드는 끌끌 혀를 찰 뿐이었다.

※※※※

“제미나.”

“······뭐야.”

조만간 문을 열 여관의 준비를 하느라 바쁜 제미나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블라드를 보며 세모꼴로 눈을 치켜떴다.

“나 바쁘거든.”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블라드의 다급한 제지에도 제미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오랫동안 허드렛일을 해온 제미나의 손끝에서 커튼은 제자리를 찾고 침대 시트는 칼같이 정리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레이디 알리시아 님께 가서 말씀하세요. 저는 바쁘니까요.”

“······.”

아직도 블라드의 품에서 나온 손수건에 상심해 있던 제미나는 블라드를 무시할 뿐이었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죽을 고생을 다해서 목숨을 구제해줬더니 고작 돌아오는 것이 다른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이라니.

제미나의 입장에서는 크게 토라질 만한 일이었으니까.

“부탁 좀 하자니까.”

“바쁘다니까. 바쁜 거 안 보이냐고!”

자꾸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찰나.

“야.”

“······이게 뭐야.”

갑자기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붉은 꽃다발을 보며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거 들고 나 좀 도와줘.”

“······네 부탁은 레이디 알리시아한테 가서 말하라니까.”

“아니.”

블라드는 꽃다발을 든 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레이디 제미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야.”

“······.”

제미나는 블라드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들으며 그제야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보았다.

붉은 꽃다발을 건네는 푸른 눈동자의 소년.

무엇하나 시선을 떼기 힘든 색깔들 속에서 제미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무슨 일인데.”

레이디 제미나라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도 제미나는 블라드의 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이거 들고 나랑 어디 좀 가자.”

자신이 쥐여준 꽃다발을 든 채 점점 얼굴이 새빨개지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가 웃음 지었다.

붉은 머리, 붉은 꽃다발, 그리고 붉어지는 얼굴.

붉어질수록 좋다.

이 정도면 분명 그 녀석도 좋아할 테지.

그렇게 생각하며 블라드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다 업보지. 쯧쯧.”

4층에 있는 난간에 기대서 술잔을 홀짝이고 있던 라문드는 혀를 끌끌 차며 블라드가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눈앞에 상황에 정신이 팔린 블라드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몰랐겠지만 제 3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라문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꽃을 피워낸 자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라문드의 눈에는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소녀의 얼굴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장미꽃 한 송이가 보였다.

※※※※

간수가 쥐여준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서는 요제프와 자야르.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창살을 앞에 두고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의 세계를 가르고 있는 창살 앞에 선 두 사람.

횃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을 더욱 어둡게 만들어내었다.

“도시의 시장께서 야만인 따위를 보러 오시다니 이것 참 영광이로군.”

“부디 내가 이곳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기를 바란다.”

창살 안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아게였지만 요제프는 그의 도발 따위에는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내뱉었다.

“너희가 말을 따라 내려온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

아게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은 요제프의 눈동자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냉정함이나 위엄을 억지로 내보이려는 자들은 많이 보아왔으나 진실로 속에 그것들을 품고 있는 사람은 몇 보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쇼아라의 시장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그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필요했기 때문이었지.”

“나는 지금 그 필요에 대해 묻고 있다.”

아게의 성의 없는 대답에 횃불을 들고 있던 자야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맨 처음에는 너희 부족의 전통이나 의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니더군.”

요제프는 라문드를 비롯해 야만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었다.

그리고 요제프의 질문에 그들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에게 있어 야생마들을 부리는 것은 오히려 금기시되는 사항이라 들었다. 맞나?”

“······.”

모든 세계는 가장 빛날 수 있는 각자만의 영역이 있다.

검을 든 자는 전장에서, 곡괭이를 든 자는 농토에서.

그리고 달려야만 빛날 수 있는 야생마들은 푸른 초원에 있는 것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야만인들은 그런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금기시되는 사항을 깨고, 강철공의 영역을 넘어서 이곳 바예지드 백작령에까지 이른 진짜 이유를 묻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말을 마친 요제프는 이제는 네 차례라는 듯 입을 다문 채 그저 아게를 바라볼 뿐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기묘한 기세.

아게는 눈앞의 요제프를 바라보며 어쩌면 이 자가 자신의 물음에 답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게 또한 제국의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잡혀 오는 동안 생각했다.”

흔들림 없는 요제프의 눈빛에 여태까지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아게가 천천히 일어서며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이곳으로 잡혀 온 것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지.”

어둠 속에서 다가온 아게는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은 채 요제프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었다.

물려고 하는 개는 짖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숨을 죽이며 기회를 엿볼 뿐.

“나와 나의 부하들이 부족의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초원의 아들을 부리려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아는 가장 빠른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요제프는 문신 가득한 아게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길들여지지 않는 소년의 눈빛과 닮았다고.

“너희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것이 무슨 말이지?”

요제프는 아게의 눈빛에서 천천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자신뿐만 아니라 북부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용이 미쳐 날뛰고 있다.”

“······?”

갑작스레 날아온 말에 요제프가 의아함을 느끼는 사이 창살 안에서 초원의 늑대가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얌전했던 용이 미쳐 날뛰고 있단 말이다!”

창살 안에 갇힌 아게의 눈동자는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오직 아게 혼자만이 쌓아 올린 것은 아니었다.

제국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리고 끊임없이 배척받으며 살아가던 야만인 모두가 쌓아 올린 것이었다.

“너는 이곳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다.”

아게가 내뿜는 기세에 자야르는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그 정도의 기세였다.

“용의 조각들을 어떻게 한 거냐.”

인간의 수장을 보며 으르렁대는 초원의 늑대.

그리고 늑대를 제압하려 한 발 나간 애꾸눈의 기사.

그 둘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짙은 눈그늘의 사내는 아게의 말속에서 숨겨져 있던 불길한 징조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용이 미쳐 날뛴다.

부족장의 아들이 금기를 어기면서까지 미쳐 날뛰는 용을 막기 위해 말을 찾아 내려왔다.

그것도 제국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요제프의 새까만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를 쓰러뜨렸던 금발 소년을 데려와다오.”

“이유는.”

뜨거운 분노를 뱉어낸 아게는 이번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살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장 빠른 용을 따라잡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령한 피를 이어받은 초원의 아들뿐이니까.”

몰락한 용의 잔재들.

세상 곳곳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어떨 때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의 근원이기도 했다.

완벽했던 용의 피라는 것은 그만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영역에서만 끝날 일은 아닐 거다. 그렇지?”

“······.”

흔들리는 횃불 아래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남자.

둘은 어두운 감옥 안에서 더는 말이 없었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2화 16

레이디 제미나 (3)

“블라드 님을 뵈러 왔습니다만.”

“······.”

마르셀라는 아직 개장하지도 않은 여관에 몰려든 사내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한참 장미의 미소를 정비하던 전직 창녀이자 현직 종업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창녀로서 살아왔던 그녀들은 지금처럼 반듯한 손님들을 본 적이 없었다.

“어, 블라드······님은 업무가 있어서 방금 나가셨거든요.”

굳이 님자까지 붙일 필요는 없었지만, 마르셀라는 가능하다면 지금은 블라드라는 존재를 높게 띄워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을 상대하며 평생을 갈고 닦아왔던 그녀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요즘 한참 바쁘시네요. 아무래도 시장님께서 아끼시는 인재다 보니.”

“오오. 그렇지요. 그러실 테죠.”

생긋 웃으며 상황을 설명하는 마르셀라를 보며 여관으로 몰려든 사내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기품있는 자세로 접객하는 마르셀라의 모습은 그저 미소만으로도 사내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실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이름을 남겨드릴까요?”

하루가 넘는 야만인들과의 대치상황에서 늙은 기사는 칼로써 위협했고 어린 종자는 기세로써 틀어막았었다.

바르나로 향하던 상인들과 그곳에있던 사람들은 두 명의 분전을 두 눈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흘러나왔던 블라드에 대한 소문은 이제는 실체 있는 근거가 되어 쇼아라에 사람들에게 퍼지는 중이었다.

“제미나.”

블라드에게 전할 자신들의 이름과 함께 선물들을 놓고 간 사내들.

그들이 떠나자 마르셀라는 2층에서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를 불러내었다.

“네. 마담.”

제미나는 살짝은 기죽은 모습으로 마르셀라의 부름에 답했다.

소년이 빛날수록 제미나는 기가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볼품없는 자신이 계속 블라드의 옆에 있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블라드에게 오는 손님들은 네가 다 담당하도록 해.”

“네?”

그리고 제미나가 기가 죽은 이유를 잘 알고 있던 마르셀라는 소녀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마르셀라는 진심으로 소녀를 응원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며 제미나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셀라의 말에 제미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파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니까 다들 한자리하는 사람들 같던데······그냥 마담이 하시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분명 훌륭한 기회였지만 제미나는 목을 움츠리며 마르셀라의 제안을 거절했다.

자신의 능력을 믿을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실수를 해 블라드에게 폐가 갈까 두려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제미나.”

의기소침해 있는 제미나를 보며 마르셀라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만약 블라드의 손님을 맞이할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너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어. 안 그러니?”

“······.”

마르셀라의 물음에 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무언으로 긍정했다.

붉은 머리의 소녀가 없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블라드는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제미나는 블라드의 성공에 대해 조금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제가······해요?”

“그래. 해.”

“분명 실수할 텐데. 잘 모르기도 하고.”

동그랗게 눈을 뜬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미나를 보며 마르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라고 해서 바로 훌륭히 일을 수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고 제미나는 아직 그런 것들에 익숙지 않았다.

“실수 좀 하면 어때. 블라드가 그 정도는 부담해 줘야지.”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접객에 대해서만큼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여인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말을 끌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며? 이것 봐. 아직 블라드에게는 네가 필요해.”

귓가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마르셀라의 말에 제미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분명 소녀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그것을 요구한다고 할 지라도 전혀 경우 없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소년의 옆에 서기 위한 발버둥이라면 더더욱.

마르셀라는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제미나의 머리를 살며시 들어 올리며 모양을 만들어보았다.

과연 생각처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따가 내 방으로 가자.”

“네?”

마르셀라의 말에 제미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전장에 나가는 것은 남자만이 아니다.

여자도 여자만의 전장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마르셀라는 오늘 제미나에게 여자의 무기를 들려줄 생각이었다.

호르헤가 블라드에게 단검을 쥐여준 것처럼.

※※※※

“가이다르 백작가문이 바로 북부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라문드는 요제프가 내어준 차를 마시며 자신이 경험으로 쌓아 올린 판단을 들려주고 있었다.

“팽창에는 안정이 필요한 법이죠. 비록 뻗어나가는 기세가 매섭지만, 기존의 맹주였던 로마노브 가문의 잔재들이 아직 서부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요제프는 라문드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있었다.

북부의 기사였지만 가장 낮은 자로서 활동할 때는 서부에서 활약했던 라문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뒤에는 드워프 해방 전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 순서가 있다면 북부나 중부로 진출하기보다는 뒤에 있는 근심거리들부터 해결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앞에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하이날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는 편지였다.

“그러나 걱정이 되는군요.”

당분간은 걱정할 것 없다며 요제프를 안심시킨 라문드였지만 정작 본인은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고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요제프의 물음에 라문드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게 남은 두카트는 이제 한 닢뿐이고 그 한 닢을 바예지드의 종자들에게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명예와 의무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기 위한 은퇴식이었건만 가련한 기사는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바예지드를 떠올리고 말았다.

충성했고, 평생을 지켜왔고 또한 사랑한 곳이었으니까.

“서부의 기사들은 이미 북부를 뛰어넘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애정 있는 곳이라 할지라도 평가는 냉정해야만 했다.

라문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바예지드를 위한 일이라 굳게 믿었다.

“그동안 너무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부의 기사들을 본 순간 제가 할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말과 함께 라문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예전의 북부를 떠올려보았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야만인들과 몬스터.

그리고 북풍의 설한보다도 차가운 중앙에서의 차별.

북부의 기사들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항하며 싸워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지역의 기사들보다도 강인하며 명예로운 자들이기도 했다.

“개척지의 기질 때문인지 그곳의 기사들은 언제나 배고파하고 빼앗고 싶어 합니다. 도련님께서는 그들을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는 법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다음 시대를 맞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제국은 헐거워지고 거칠었던 북부는 안정되었으며 그에 반해 서부는 팽창하고 있었다.

지금은 힘의 균형이 바뀌는 시대였다.

“······.”

요제프는 라문드의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멋들어지게 세워져 있는 쇼아라의 정경은 언제나 그의 발걸음을 창가로 인도하고는 했다.

“······그래도 북부는 여전히 강인한 열매를 맺어내지 않습니까.”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요제프의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주고는 했다.

라문드는 조용히 읊조리는 요제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물론이지요.”

창밖 저 멀리 보이는 쇼아라의 성문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록 노인의 시대는 저물었을지라도 새로운 시대는 또다시 떠오르는 법이었다.

※※※※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야.”

[재미있는 볼거리가 왔는데 당연히 나와보겠지.]

겨우겨우 씌운 고삐로 새까만 녀석을 잡아끌던 블라드는 목소리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재밌다구요?”

[그럼 재밌지. 그동안 네가 한 일들을 생각해봐라.]

“······.”

목소리의 말에 며칠간의 행적을 곰곰이 생각하니 과연 그 말이 이해되었다.

블라드는 그동안 새까만 녀석을 쇼아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발악 같은 시도를 해왔었다.

눈도 가려보고, 힘으로 끌어보고, 먹을 것으로도 유도해보고, 제발 부탁한다며 머리도 조아려보고.

심지어는 고트의 제안에 따라 암말을 이용해 유혹까지 해보았으나 새까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한참 이름값을 올리는 소년이 말을 상대로 되지도 않는 기행을 해대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법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몰릴 일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오늘이 그 시도의 방점을 찍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삐뚤어진 관심에 입술을 깨문 블라드는 그래도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 확신하며 새까만 녀석을 성문 앞으로 끌어당겼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결심을 굳힌 블라드의 귓가로 쨍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린 제미나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드레스는 도대체 왜 입은 거야.”

[드레스는 여인의 전투복이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에 나는 감탄했다.]

본인이 부탁했음에도 궁시렁대던 블라드는 고개를 돌리고는 이제 준비가 되었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제미나! 됐어!”

“······.”

블라드의 말에 제미나뿐만 아니라 구경하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좋아.”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던 제미나는 블라드의 신호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새까만 말의 덩치가 생각보다 너무 커다랬지만 제미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뒤집어 쓰고 있던 천을 벗어내었다.

두려움에 망설일 뿐이라면 소년의 옆에 서 있을 자격 따위는 없을 테니까.

“······오오.”

“이야. 과연 꽁꽁 숨길만 했네.”

소녀의 각오와 사람들의 감탄과 함께 내리쬐는 햇살 아래 화려한 붉은 꽃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제미나의 붉은 머리는 과연 의도대로 새까만 녀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귀걸이는 왜 한 거야.”

“드레스랑 세트야!”

반짝이는 귀걸이와 함께 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은 소녀는 그동안 블라드가 보아왔던 제미나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블라드도 제미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는 잠시 멍하니 바라볼 정도였으니까.

“여기야. 여기.”

그러나 제미나는 블라드의 핀잔 따위는 무시한 채 앞에 있는 새까만 녀석을 노려볼 뿐이었다.

블라드는 몰랐겠지만 제미나는 나름의 각오를 하고 나온 상태였다.

“착하지. 이리 온.”

비장한 각오로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장미 꽃다발을 흔드는 붉은 머리 소녀.

자그마한 몸 안에 붉은색 장미꽃들을 가득 채운 소녀를 보며 새까만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인다!”

“이게 되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지금의 상황을 감탄하고 있었다.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인 소년.

누가 보아도 당당해 보이는 새까만 말.

그리고 감히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믿을 수 없는 화려한 빛깔의 소녀까지.

화려한 볼거리들을 가득 담은 세 명의 행진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히이이힝-

고삐를 붙잡은 소년과 함께 마침내 새까만 녀석이 성문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할 일들도 되게 없구만!”

블라드는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에 푸른 눈을 부라리며 윽박을 질러댔지만 이미 상황은 소년의 손을 떠난 뒤였다.

“그래 계속 끌어당겨!”

“잘한다!”

사람들은 이 기이한 광경에 열광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소녀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거대한 말을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

매섭게 치켜뜬 눈으로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붉은색 꽃다발을 치켜든 소녀.

누가 보아도 당당해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검을 빼어든 기사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제미나! 레이디 제미나!”

소녀의 당당한 모습에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붉은색의 레이디! 쇼아라의 장미요!”

목발과 함께 절뚝거리며 걷는 갈색 머리의 청년이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레이디 제미나!”

“제미나! 붉은색의 레이디!”

하벤의 선창과 함께 주위에 몰려나온 사람들이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하벤은 그 모습을 보며 목청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어대었다.

언제 한번 뒷골목 녀석들이 이렇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언제 한번 이렇게 박수받으며 사람들의 열광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그러나 오늘만큼은 쇼아라가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쇼아라의 성문.

이곳은 소녀의 전장.

꽃다발을 무기로 세계의 경계를 허문 레이디 제미나는 자신을 따라오는 새까만 녀석을 보며 화사하게 웃음 지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귀걸이보다도 더욱 빛나는 미소였다.

2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3화 20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1)

눈안개가 가득 핀 설산의 한복판.

검은 머리의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눈앞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 죽었군.”

“딱 봐도 그런 것 같네요.”

루트거의 말에 도로테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산이 내뱉는 차가운 숨결 위에 놓여져 바짝 얼어붙고만 몬스터의 사체들.

비록 참혹한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단말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표정 속에 박혀 있었다.

“순식간에 당했네요. 처음의 녀석은 자기 죽음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

도로테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회색 오크의 사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움직였네요.”

“······.”

루트거는 도로테아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 보았다.

과연 그녀의 말이 맞았다.

처음의 사체는 앞을 보고 있었고.

중간의 사체는 뒤를 돌아보려 하고 있었고.

마지막 사체는 마침내 뒤를 돌아보았으나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주위에 널려있는 오크들의 사체가 어림잡아 50여 구에 가까웠다.

“고개 한 번 돌릴 시간에 전부 다 죽여버렸단 말이로군.”

루트거는 사태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부딪혔는지 산산이 조각나버린 회색 오크들의 사체들.

소리 없이 다가왔으며 손쓸 수 없는 틈에 오크들을 짓밟고 지나간 존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죽음만을 남기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루트거는 여기저기 흩어진 오크들의 사지를 내려다보며 짙은 입김을 내뱉었다.

“······요제프의 보고가 맞았군.”

루트거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들어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봉우리를 가진 설산은 루트거의 시선에도 자신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에 의해 갈가리 찢긴 완벽한 존재는 땅 아래로 추락하며 자신의 피를 세계 곳곳에 흩뿌려대었다.

그리하여 생겨난 몰락한 용의 잔재들.

어떤 용은 날개를 잃고, 어떤 용은 눈을 잃고.

그렇게 용들은 자신이 용이라는 것도 잊은 채 세상 속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완벽한 다리를 지닌 존재 하나가 자신이 용인 것을 깨달았다.

※※※※

“이익!”

넓은 연병장 한가운데서 구슬땀을 흘리며 달리는 금발 소년.

블라드는 양팔, 양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묶어놓은 채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히이이힝-

의지는 앞섰으나 무거운 모래주머니에 의해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웃겼는지 새까만 녀석은 블라드의 옆을 따라다니며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너무 신나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거칠게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거, 이거 언제까지 해요?”

“이제 한계다 싶을 때까지다.”

“아니 왜, 왜 그렇게까지 해요.”

“내가 쓰는 오러를 배우고 싶다며? 그럼 잔말 말고 해라.”

단호한 라문드의 대답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린 채 이를 악물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턱 끝으로 떨어지는 땀방울 하나마다 마음속으로 라문드를 향한 원망을 내뱉으면서.

“······.”

라문드는 블라드가 뛰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태어났고, 화려한 창녀들과 살아왔으며 게다가 쓸데없이 겉모습까지 번지르르한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가지게 되는 편견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눈앞의 소년은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그저 밭 가는 소처럼 묵묵히 뛰어갈 뿐이었다.

‘묘하게 성실하군.’

묵묵히 훈련에 임하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라문드는 안심했다.

적어도 재능 하나만을 믿으며 날뛰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뛰면서도 생각을 해라! 오러를 몸 안으로 집어넣는다는 상상을 하라고!”

헐떡이며 뛰는 블라드를 향해 큰소리로 외치는 늙은 기사.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무작정 뛰어다니게 하는 것은 언뜻 보면 낡은 방식의 훈련법 같아 보였지만 라문드는 단지 오래된 가치를 신봉하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훈련 방식은 엄연히 지금 블라드의 상태를 생각하며 짜 맞춰 넣은 것이었다.

소년은 재능과 의지가 있었으나 그것을 풀어낼 검술과 체력이 부족했다.

오히려 뛰어난 신체 능력이 부단히 키워나가야 할 체력 단련을 소홀히 하게 만들었으니 라문드는 그것을 눈치채고 소년을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했냐! 야만족 녀석을 땅으로 끌어내릴 때 말이다!”

한계에 맞닿는 육체는 계속해서 성장하기 마련이었고 힘이 빠져나간 육체는 자연스레 다른 것을 채워 넣으려 시도하기 마련이었다.

라문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터득한 감각을 이용해 소년의 한계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끄으으으!”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라문드의 고함.

그 고함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왼쪽 눈을 감고는 세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검으로써 표현되지 못하는 소년의 세계가 갈 곳을 잃은 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거 되는 거 맞아?’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연병장을 뛰어다니던 블라드는 목 끝에서부터 피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라문드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고 그 눈빛을 볼 때마다 블라드의 가슴 속에서는 오기와 함께 안도감이라는 것이 퍼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도 되는구나.

내가 아직 할 수 있나 보다.

뚜렷한 목표와 방향이 없는 노력은 헛된 발버둥에 지나지 않겠지만 지금 소년의 옆에는 확고하게 길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블라드가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왼쪽 발을 땅 위에 내딛는 순간.

“······!”

완전히 힘이 빠져버린 육체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소년의 의지를 채우기 위해 세계 안에 있던 한줄기 색깔을 잡아서 붙들어내었다.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던 그때의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와 소년의 허벅지에 닿았고 순간적으로 소년의 근육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마치 화살을 쏘아 보내는 시위와 같이.

“악!”

순간 시야가 앞으로 잡아 당겨졌다.

적어도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갑작스레 자신을 앞질러 나가는 블라드의 도약에 새까만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낙법을 시도해라. 안 그러면 다친다.]

“으으으!”

자신도 예상 못한 움직임에 블라드는 잠시 공중에서 허우적대고는 바닥을 우당탕 굴러대었다.

소년의 추락과 함께 흙먼지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

라문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가슴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허탈함, 그 중간쯤에 있는 한숨이었다.

“······하라고 시킨 거긴 한데 그걸 바로 해버리는구만.”

아끼는 것을 내어줄 때는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라문드에게 있어 평생을 갈고 닦아 만든 강체술(强體術)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으아! 쥐 올라왔어요! 쥐!”

히이이힝-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허벅지를 붙잡고는 바닥을 구르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의 옆으로 다가와 감히 자신을 앞질렀다며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뱉는 새까만 녀석.

그러나 라문드는 그 난리를 보면서도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늙었다 할지라도 쉽사리 놓을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

아무도 없는 테이블에 블라드가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앞에는 마르셀라가 만들어 놓은 저녁이 차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숟가락 하나도 들기 힘든 상태였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아침에는 자야르와의 지도 대련.

점심에는 라문드와의 오러 훈련.

그리고 저녁에는 목소리와 대화하며 오늘의 성과에 대한 토론까지.

한 명의 가르침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상황이었고 블라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육체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블라드가 받아들여야 하는 스승의 가르침은 세 가지였으며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세계들이었으니까.

“여어. 대장. 잘 지냈어?”

“······꺼져.”

블라드는 계단을 올라오며 자신을 향해 웃음 짓는 고트를 항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웬만하면 대장 말을 듣고는 하는데 지금은 꺼질 수가 없어요. 요제프 님이 앞으로 여기서 지내라고 했거든.”

고트는 힘없이 허우적거리는 블라드에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 옆으로 자신이 챙겨온 짐들을 내려놓았다.

“말이 있는 곳에는 마구간지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

“······.”

역시 그때의 녀석과는 뭔가 인연이 느껴졌다며 너스레를 떠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씨익 웃어주었다.

“그래?”

혼자만 개고생하는 것은 억울하다.

그러나 둘이서 같이 한다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겠지.

갑갑한 곳이 싫다며 마구간을 두 번이나 뛰쳐 나간 새까만 녀석을 생각하며 블라드는 어깨를 으쓱대었다.

“힘내라.”

“응? 으응.”

자신을 향해 기묘한 미소를 짓는 블라드를 보며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드는 고트였다.

블라드는 마치 굳어있기라도 한 듯 뻑뻑한 고개를 애써 돌려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미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날아온 선물들을 정리하며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제미나.

비록 며칠 전의 화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귓가에 달린 귀걸이만큼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귀걸이 하나 사줄까?”

“이거 비싼 거야.”

“근데 마르셀라 거잖아.”

“이제는 내 꺼야.”

마르셀라가 내어준 드레스와 장신구들로 새까만 녀석을 끌어왔던 소녀.

간절히 원한 일을 해결해주었기에 뭐라도 하나 해주고 싶은 블라드였지만 제미나는 냉정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제대로 된 봉급도 못 받는 주제에 남의 귀걸이 신경 쓰지 말고 돈이나 열심히 모으시지.”

“용돈은 받고 있거든.”

“하!”

용돈을 받는다며 당당히 지껄이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 알아? 지금 영감님이 여기서 지내는 값은 다 네 앞으로 달리고 있다는 거?”

“······왜?”

생각지도 못한 말이 제미나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몰라. 그 정도는 네가 내야 한대.”

“왜!”

“나도 몰라!”

제미나는 빽하니 소리를 지르고는 블라드를 향해 여태껏 적어놓았던 장부를 퍽 하니 밀쳤다.

“아무튼 지금 너는 빚쟁이야! 그거 알아두라고!”

겨우 용돈 받는 거로 만족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기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의 시선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왜?”

흔들리는 블라드의 시선만큼이나 제미나가 적어넣은 장부에는 삐뚤거리는 글자들이 가득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소년만큼이나 소녀 또한 뒤를 따라가려 애쓰는 중이었다.

※※※※

“흥. 겨우 귀고리 따위로 빚을 갚으려 하다니 어림도 없지.”

히이이힝-

제미나는 1층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으로 내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을 향해 당근을 내밀었다.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오구오구 잘 먹는다.”

제미나가 내어준 새빨간 당근을 씹으며 새까만 녀석이 기분 좋다는 듯 투레질을 해댔다.

“그래. 이거 먹고 나 좀 도와줘. 알았지?”

제미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새까만 녀석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마르셀라는 말했었다.

기사를 잡아 세우려면 기사가 타고 있는 말부터 잡아채라고.

전직 쇼아라의 장미가 해주는 조언을 들으며 제미나는 각오를 다졌다.

그저 소년의 뒤를 지켜만 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4화 18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2)

인생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오직 혼자서 감내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개 같은 명령은 따를 수 없어.”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이 와야만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여태껏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던질 수 있는 순간이 바로 그때이니까.

보름달이 떠 있는 밤하늘 아래, 차마 앞에 있는 나룻배를 타지 못한 채 울먹이는 드워프들.

비쩍 말라버린 얼굴과 엉망이 된 수염이 그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거대한 덩치의 기사.

칼을 빼든 기사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공포에 떨고 있는 드워프들을 자신의 몸으로 가렸다.

“명령을 무시할 셈이냐. 호르헤.”

“너는 나의 주군이 아니야. 지그문드.”

거대한 덩치의 기사. 호르헤.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가이다르 백작님께 충성했고 너는 그분이 아니야.”

“내가 가져온 명령서에는 아버지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지그문드는 호르헤의 앞에서 거칠게 명령서를 흔들어대었다.

달빛 아래 비치는 가이다르 가문의 인장은 한치의 조작도 없는 진실이었다.

“······.”

비록 명령서 안에 담겨있는 진의가 어찌 되었든 지그문드가 들고 있는 절차와 명분은 완벽했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기사는 명령을 불복하게 되는 것이며 이는 기사의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나는 사람이야. 그딴 명령은 따를 수 없어.”

“······.”

그리고 호르헤는 선택했다.

거짓된 명령과 함께 기사의 맹세도 같이 뱉어내기로.

그 말과 함께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르헤의 말에 동조하는 자는 그의 옆으로.

비록 거짓되었다 할지라도 주군의 명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지그문드의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로의 시선 속에서 기사들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고딘은 주저하는 심정으로 호르헤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선배는 언제나와 같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미안합니다.”

“가 봐.”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 속에서 고딘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영광과 명예.

그리고 더욱 빛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고딘은 기사였다.

※※※※

“들어와라.”

블라드는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시장실의 문을 열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창가로 환하게 비치는 오후의 햇살.

그 햇살을 뒤로 한 채 앉아 있는 짙은 눈그늘의 남자와 그의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요제프는 앉은 채로 허리를 세우고는 문을 열고 들어온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근신 명령을 내리고 나서 처음 보는 소년의 모습은 자신에게 대들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조금은 진중해져 보였다.

“그동안 바빴다지?”

“······조금은요.”

우물우물하며 대답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떨 때는 불같이 덤벼들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영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도시에 소문이 자자하더군. 새까만 말도 그렇고.”

소년을 바라보던 요제프의 미소에서 잠깐 장난기가 감돌았다.

“레이디 제미나라던가?”

“······.”

“알리시아 남작이 들으면 가슴을 칠 일이군. 그녀의 손수건은 아직 잘 간직하고 있나?”

제미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블라드는 난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누군가는 장난삼아 부르는 호칭이었겠으나 분명 레이디 제미나라는 이름은 소년이 쌓아 올린 명성과 함께 쇼아라를 떠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일이 뭐가 있나. 나중에 불똥만 안 튀기게 조심해다오.”

요제프는 천천히 기사라는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년의 이름값은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명예를 대신 증명해줄 정도로 가치가 높아졌다.

그러니 여기서 알려줘야 한다.

언제까지나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오늘 너를 부른 이유는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서다.”

“······?”

갑작스레 진지해진 요제프의 어투에 블라드는 고개를 들었다.

“그날 우트만 남작령에 있는 마을에서 너는 나의 명령을 저버리고 아이들을 구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다시금 그때의 일이 요제프의 입에서 나오자 블라드의 자세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요제프는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들먹여 소년을 겁줄 생각이 없었다.

블라드는 이미 근신으로써 자신의 죗값을 치른 상태였으니까.

“또다시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찌할 거냐? 이번에도 내 명령을 무시할 거냐?”

갑작스레 그날의 일을 되물어보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서둘러 시선을 돌려 근처에 있던 다른 기사들을 둘러보았으나 그들 모두 미묘한 표정만을 지을 뿐 딱히 무어라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요제프의 질문에는 오직 블라드 혼자만이 생각하고 대답하고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는 요제프의 물음에 답했다.

또다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은 요제프에게 신의를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하실 거냐고 물으신다면 그렇습니다.”

비록 주춤거리는 몸짓이었으나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같은 선택을 하는구나.

블라드의 대답은 요제프에게 씁쓸한 기분이 들게 했지만,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있었기에 소년을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명예란 남을 비추는 빛이지만 양심은 자신을 비추는 빛이다.”

요제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년을 향해 말했다.

비록 왜소한 육체였으나 흘러나오는 존재감이 자연스레 요제프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게 했다.

“또한, 나아갈 곳을 잃었을 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하지.”

방금의 대답으로 요제프는 소년을 확실히 파악했고 소년 또한 자신이 누군지 알았을 것이다.

블라드는 진창 같은 뒷골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기준을 정해놓았고 그렇기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양심이 될 것이다.

“너는 너의 길을 찾았으니 부디 이 갑옷이 너의 양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옆에 세워져 있던 천을 걷어내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갑옷.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비치는 빛을 보며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건······.”

“산 로지노에서 보낸 갑옷이다. 철제 갑옷을 가장 많이 다루는 집단이니만큼 다양한 기술이 녹아 있는 갑옷이지.”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 터져있는 자신의 가죽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애처롭게 찢어져 있는 흉터 하나하나에 여태껏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제는 소년을 지켜줄 수 없는 갑옷이었다.

“가봐라.”

여태까지 조용히 응접용 테이블에 앉아 있던 라문드가 머뭇거리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언제까지고 깨어진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을 수는 없다.

블라드라는 존재는 더는 바예지드가 주목하는 가능성이라는 말만으로 온전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니까.

“네.”

햇빛이 비치는 갑옷을 향해 소년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고 싶은 일을 했고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소년의 발버둥을 산 로지노가 증언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이 증인 삼아서.

산 로지노가 내어준 갑옷을 입은 소년.

반짝이는 소년의 흉갑 한편에는 성기사들이 증언한 그 날의 문구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문구가.

※※※※

“역시 북부에서는 강철공과 바예지드의 기사들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요즘 들어 우트만 남작가의 기사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이 있긴 한데······.”

촛불을 밝힌 집무실 안.

가이다르의 기사와 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고딘이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말해봐라.”

“네.”

고딘의 지시에 부관이 여태껏 조사해놓았던 기사들의 명단을 읊기 시작했다.

“강철공 바라노프 공작가문의 기사 슈반덴, 미하일, 바스트로······.”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기사 안탈라스, 루트거, 아고스······.”

고딘은 귓가에 들려오는 기사들의 이름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로마노브 가문을 몰아낸 가이다르는 이제는 명실공히 서부의 패자가 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시선은 서부가 아닌 다른 지역을 향해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은 바뀐 이름들이 없군.”

“바예지드 백작의 아들인 루트거를 제외하고는 딱히 눈에 띄는 자들이 없습니다.”

강철공의 가문인 바라노프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속속들이 출현하고 있었지만 바예지드는 몇 년 전 보고받았던 그때의 이름들과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세대교체에 실패한 모양입니다.”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예지드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은 고작 보고서 한 장 따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예전의 자신처럼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기사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바예지드에는 조금 특이한 동향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과연 이것까지 말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부관은 눈빛으로 재촉하는 고딘을 보고는 보고서에는 적혀있지 않은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기사는 아니지만 바예지드의 종자 중 두각을 드러내는 소년이 있다고 합니다.”

“이름은.”

부관은 잠시 머릿속을 헤집어내고는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블라드라고 합니다. 출신지는 바예지드 백작령의 쇼아라입니다.”

“······.”

고딘은 부관의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인데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어마르의 명예 결투에서 맨 처음 등장한 소년인데······영 믿을 수 없는 소문들 뿐이라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관이 블라드의 이름을 내뱉는 것을 주저한 이유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오러를 뿜어냈다고는 하는데······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오러? 종자가?”

부관의 보고를 듣고 있던 다른 기사들이 콧방귀를 뀌며 웃고 말았다.

기사도 아닌 어린 녀석이 벌써 오러를 뿜어냈다는 소문을 믿는 것보다 수집해 온 정보들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더 신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쇼아라······블라드······.”

그러나 고딘은 기사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가만히 눈을 감고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뿐이었다.

낯설지 않은 도시의 이름을 읊조리자 하얀 벌판에서 만났던 금발 소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모닥불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던 소년.

난생처음 오러라는 것을 본 소년의 푸른 눈에는 별과 같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알았다. 다들 지금의 이름들을 숙지하도록.”

지그문드 백작의 새로운 기사단장인 고딘.

그의 명과 함께 가이다르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며 단장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블라드, 블라드라.”

고딘은 의자에 앉아 목을 젖히며 조용히 미소지었다.

당돌한 녀석이었지.

가능하다면 데려오고 싶었지만, 운명과도 같은 인연이 둘을 갈라놓았었다.

비록 오러를 뿜어내었다는 바예지드의 종자가 자신이 보았던 소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고딘은 그저 추억 속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해라.”

소년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 또 한 명의 사람.

고딘은 그날 밤 호르헤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입에서 굴리며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그때 만약 자신이 호르헤를 따라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을 리가 없지.”

고딘은 씁쓸한 미소와 고개를 내저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딘은 호르헤가 아닌 지그문드를 향한 선을 넘었다.

걸음을 옮겨 그 선을 넘는 순간 고딘은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았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까지도.

“그놈은 잘 살고 있나.”

아무도 없는 집무실 안에서 고딘이 부르는 조용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푸른 눈의 소년이 저 멀리서 자신을 불렀을 때 냈던 소리.

끝나가는 여름에 맞는 뻐꾸기 소리였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5화 8

차가운 심장을 가진 용 (1)

하얀 사막의 언덕 위에서 기사들이 모여 한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매서운 북풍의 설한이 그들의 눈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지만, 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저 멀리에 있는 지평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 숨결을 몰고 올 횃불들을.

“보입니다.”

그리고 횃불을 든 강철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저 멀리서부터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냉기의 뭉치.

그리고 안개와도 같은 냉기를 둘러싼 채 달려오고 있는 횃불을 든 기사들.

강철공 바라노프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준비해라.”

“네.”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의 지시가 있자 언덕 위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말 위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각자 냉기에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마법 횃불을 들고서는 거친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오는 몰락한 용의 잔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부관의 수신호와 함께 기사들이 언덕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기사들이 내달림과 함께 말총머리의 사내는 땅 위에 꽂혀 있던 창 중 하나를 뽑아내고는 조용히 왼쪽 눈을 감았다.

기사의 검은 날카롭지만, 상대에게 닿아야만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상대하려는 몰락한 용은 너무나 빠르기에 쉽사리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강철공은 이 일에 가장 적합하다 생각되는 기사를 이곳으로 보냈다.

투창의 볼코프.

그가 들고 있던 창이 새파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브레스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기사들을 보며 포효하던 하얀 용은 심사가 뒤틀렸는지 입을 벌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팍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하얀 비늘들이 곤두서며 다음에 일어날 일을 경고해주고 있었다.

파멸을 감지한 기사들이 재빨리 회피 기동을 시도하고 있었다.

“흐읍!”

숨결을 모으기 위해 잠시 멈춰선 용을 향해 볼코르가 창을 내질렀다.

오러에 가득 물든 창이 탄력적인 움직임과 함께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다.

이 거리에서라면 날아가는 투창을 눈치채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볼코프는 순간 저 멀리서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뭐?”

몰락한 용의 잔재. 린드부름.

차가운 냉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용이 늑대보다도 기민한 움직임으로 재빨리 몸을 뒤틀어대었다.

콰아악-!

그아아아아!

빨랐지만 늦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고 만 창이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갔다

흩날리는 하얀색 비늘들과 함께.

“이런!”

볼코르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어린 탄성을 내질렀다.

빠르다고는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처럼 예민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못 움직이게 해!”

“둘러싸라!”

볼코프의 실패를 눈치챈 기사들이 린드부름의 주위에서 쉴 새 없이 말을 몰며 퇴로를 차단했지만 몰락한 용은 자신이 이미 인간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아아아아-!

분노어린 포효와 함께 린드부름은 재빨리 기사들의 포위망을 벗겨내 고는 눈안개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때와 장소를 판단하는 것은 포식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세였으니까.

“쫓아가!”

“앞을 틀어막아!”

린드부름의 후퇴에 기사들은 말들을 채근했지만 빠른 속도로 가속해나가는 용을 따라잡는 것은 말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용을 몰아오느라 지쳐버린 말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는 하나둘씩 제자리에 멈추기 시작했다.

“젠장!”

포위망이 풀리는 것을 본 볼코프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쥐고 있던 투창을 내질렀지만 린드부름은 이미 새하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저 멀리 뿌연 눈안개에서부터 용이 내지르는 분노어린 포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

장미의 미소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

마담 마르셀라가 특별히 신경 써놓은 그곳에서 블라드는 멍한 눈빛으로 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한 번만. 제발!”

마치 부탁이라도 하듯 두 손까지 모은 고트였지만 새까만 녀석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투레질할 뿐이었다.

“안장 한 번만 차보자!”

히이이잉-

자꾸만 자신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고트를 향해 위협적으로 앞발을 치켜드는 새까만 말.

고트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금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성격 지랄 같네. 진짜!”

자신의 간원에도 들은 척도 않는 새까만 녀석이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씩씩거리던 고트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블라드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지랄 같은 녀석이 한 명 있었다.

“어떻게 좀 해 봐!”

둘 중에서 그나마 말이 통하는 놈을 향해 분노를 터트린 고트였지만 금발 녀석도 말을 안 듣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말도 잘 안 듣더라고.”

“이거 대장 말 아니야?”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고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까만 놈, 금발 놈.

잘들 만났다.

“······때려치우고 싶네.”

각오는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야생마라 할지라도 사람을 따라온 녀석이니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했지만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러나 고트가 열 받는 것은 그저 안장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미나는 잘하던데. 너는 왜 못해? 그냥 실력이 부족한 거 아니야?”

“······!”

옆에서 이죽거리는 블라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트는 이를 악물었다.

‘왜 그 계집애 말은 잘 들으면서······!’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비록 난폭한 녀석이었지만 빨간 머리의 소녀 앞에서는 순진한 양의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분명 얌전하게 길들인 사람이 있었으니 지금의 모습은 마구간지기인 고트의 실력을 의심케 하는 장면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없어서 그런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야생성이 안 죽어서 그래. 이름을 지어줘야 자기 위치를 알지!”

분명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의외로 그럴싸한 전직 사기꾼의 말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자신의 말에 우뚝 멈춰서 고민하는 블라드를 보고는 고트는 맥주라도 한잔하고 와야겠다며 장미의 미소로 들어갔다.

“······이름.”

블라드는 제 발로 마구간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새까만 녀석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렇네. 지어줘야겠네.”

초원을 달리던 녀석은 자신의 의무까지 넘긴 채 소년을 따라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렇다면 녀석을 위해 새로운 이름 하나 정도는 지어줘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기 블라드 님 계십니까?”

새까만 녀석과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고민하던 블라드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요제프 님이 부르십니다.”

시청에서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와서 보자.”

블라드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새까만 녀석.

비록 이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디에서나 당당해질 수 있는 칭호를 준 남자를 위해 블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

요제프는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못 올 곳을 온 사람은 아니었지만, 굳이 자신을 찾아올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역시 어머니의 안목은 대단하시단 말이야. 어딜 가도 이만한 차는 맛보질 못했거든.”

루트거는 요제프에게 들고 있던 찻잔을 치켜들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는 듯, 찻잔을 들이켜고 있는 도로테아의 귀가 쫑긋 세워지고 있었다.

“어머니께 내어달라 하시지 그랬습니까. 크게 비싼 것도 아닐 텐데.”

“······그게 쉽지 않아.”

요제프의 말에 루트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게 있달까. 무슨 말인지 알지?”

요제프는 자신에게 미묘한 표정을 짓는 루트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옥사나가 루트거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을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둘 사이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같은 것을 놓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기에 루트거는 어렸을 적부터 옥사나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

자신이라면 내색하지도 않았을 민감한 부분을 당당히 말하는 루트거를 보며 요제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형제는 참으로 달랐고 또한 서로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형제간에 꼭 이유가 있어야만 찾아오는 건 아니잖아.”

등받이에 양팔을 젖힌 채 요제프를 바라보던 루트거는 미동도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동생을 보고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그렇게 보지는 마라. 이유가 있어서 왔으니까.”

본론에 들어가기 전 잠시 건넨 농담조차도 받아주지 않는 요제프였지만 루트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평생을 보아왔던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네가 보낸 보고를 받은 아버지가 나에게 야만인들의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맡기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특이한 동향을 발견했지.”

요제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루트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용이 내려오고 있어. 아무래도 네가 데리고 있던 야만인 녀석이 하는 말이 맞았던 모양이야.”

“······린드부름.”

요제프는 단어 하나를 내뱉고는 깍지를 낀 채 이마를 기댔다.

결국 아게의 말이 맞았다.

북풍의 설한 속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서 살아가는 용이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오기에는 아직 계절이 이를 텐데······. 게다가 겨울이라고 해서 무조건 움직이는 녀석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서부에 땅을 파고드는 데스웜이 있다면 북부에는 눈보라 속에서 살아간다는 린드부름이 있었다.

가장 차갑고, 그리고 가장 빠른 용.

데스웜이야 거대한 덩치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를 제외하고는 딱히 인간들을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린드부름이라는 용은 달랐다.

몇십 년마다 돌아오는 혹한기를 따라 인간들의 영역으로 내려오고는 하는 린드부름은 그때마다 마을 두 세 개 정도는 작살 내고는 하는 흉악한 녀석이었다.

몰락한 용의 잔재들은 인간들에게 있어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 내려오고 있습니까?”

“몰라.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런지 흔적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어.”

차를 다 마신 루트거는 언제나와 같은 여유로운 미소가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복동생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나로 하여금 린드부름에 대한 방비와 함께 토벌을 명하셨다.”

“쇼아라의 시장으로서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루트거의 말에 요제프는 자세를 단정히 하며 대답했다.

그의 형은 단순한 부탁이 아닌 바예지드 백작의 지엄한 명과 함께 왔다.

다음 대의 가주직을 놓고 경쟁하는 두 형제였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만큼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수단을 위해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형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가주라는 자리가 아닌 강인한 바예지드 그 자체였으니까.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쇼아라의 확실한 정찰과 함께 기사의 차출을 요구한다.”

루트거의 말에 요제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요구사항은 상식적이었을뿐더러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는 몇 명을······.”

“한 명이면 된다.”

루트거의 대답에 옆에 서 있던 자야르조차도 조금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용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검들이 필요할 터.

쇼아라에 있을 모든 기사들을 끌고 나가도 할 말이 없을 일에 루트거는 그저 한 명의 기사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 명만으로 되겠습니까?”

“린드부름은 데스웜과는 달라. 충분히 검이 통하는 상대지.”

루트거의 말이 맞았다.

린드부름은 데스웜처럼 땅으로 숨는 녀석도 아니거니와 분명 토벌에 성공한 적이 있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린드부름의 빠른 움직임에 검이 닿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누구를 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요제프의 물음에 루트거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아끼는 금발 애송이.”

“······블라드 말씀이십니까?”

자야르나 그레고리가 아닌 종자 블라드를 요구하는 루트거를 보며 요제프는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

독특한 장점을 가진 소년이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기사의 초입부에 다다랐을 뿐이었으니까.

“그래. 그 녀석 말이다.”

루트거는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날 초원에서 데스웜을 상대로 당당하게 소리치던 소년을.

“그 녀석은 내가 아는 최고의 용 몰이꾼이니까.”

새까만 말과 함께했던 그 날의 소년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정도의 존재감이라면 분명 얼음과도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 린드부름도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빛나던 소년을 붙잡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땅속에서 튀어나왔던 데스웜이 그랬던 것처럼.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6화 6

차가운 심장을 가진 용 (2)

“이번에는 한 달은 걸릴 거야.”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그마한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벽에 기대어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촛불에 비치는 장식 없는 검은 언제나처럼 소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흐음. 바쁜 게 좋은 거지.”

블라드의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한 제미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깃발을 안아들고는 바느질을 하는 중이었다.

고귀한 귀부인이 박아넣은 문장들의 옆으로 붉은 머리의 소녀가 꿰매어 넣는 문장 하나가 새겨지고 있었다.

“요즘 잘 나가네. 블라드.”

옆에 박혀 있는 문장들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 바느질을 하고 있던 제미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어 앞에 있던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도 이 모습을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블라드는 갑자기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소녀를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제미나는 가끔 이런 식의 맥락 없는 대화로 블라드를 당황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

“아니, 갑자기 생각이 나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블라드의 어머니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몇 없겠지만 제미나는 그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추억을 말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사람.

“나는 우리 엄마는 기억 안 나는데 너희 엄마는 기억이 나더라.”

“······그래?”

소녀가 무심히 내뱉는 말속에서 상처 같은 흔적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블라드의 어머니는 죽음으로 아들을 놓은 것이었지만 제미나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제미나는 뒷골목의 수많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아이였다.

“나도 우리 엄마 기억 잘 안나.”

스스로는 돌볼 수 없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제미나의 말속에서 그 흔적을 발견한 블라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심드렁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이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려 중 하나였으니까.

“다 됐다.”

블라드의 고민 어린 말을 제대로 듣기는 했는지 제미나는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나서는 보란 듯 하얀 깃발을 펄럭일 뿐이었다.

“이 정도면 크게 티 안 나지? 백작 부인의 솜씨가 너무 좋았단 말이야.”

소년이 스스로를 증명하는 하얀 깃발.

그곳에 붉은 머리 소녀가 새롭게 새겨준 문장 하나.

“······멀리서 보면 티 안 나겠네.”

산 로지노의 문장이 촛불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블라드가 무심한 척 제미나를 배려했듯이 제미나 또한 평소와 마찬가지인 모습으로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 블라드를 배려했다.

용이라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위험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옆방에 있는 경험많은 노기사가 단단히 채비할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겨울에나 오겠네. 그럼.”

“아무래도 그렇겠지. 가을은 빨리 지나가는 계절이니까.”

“그럼 이것도 가져가.”

블라드는 제미나가 아무렇지 않게 침대맡으로 툭 던져낸 천 조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야.”

“손수건이야.”

깃발만큼이나 새하얀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블라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걸 여태까지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할 일이 없었나 봐?”

“쓰지도 못하는 손수건 들고 다니는 게 불쌍해서 만들어줬더니만.”

제미나의 말에 블라드는 손수건을 쥐어 들고는 자세히 바라보았다.

알리시아의 손수건은 제미나의 말대로 화려한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어 실제로 사용하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순면이야. 여기저기 쓰기 좋을 거야.”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준 제미나의 흔적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손수건을 손에 쥐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간 제미나.

오직 혼자만 남은 방에서 블라드는 제미나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조심스레 접어 가슴팍에 넣어놓았다.

“······쓰라고 만들었는데 이름은 왜 새겨놔.”

알리시아의 손수건과 함께 잠들 제미나의 손수건은 소녀의 의도대로 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쉽사리 빠지지 않도록 블라드가 흉갑 깊숙한 곳에 박아넣었으니까.

※※※※

하얀 평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설원을 따라 북쪽으로 움직이는 일행들.

일주일이 넘는 전진 끝에 마침내 바예지드 백작령 최북단에 다다른 그들은 목적지인 베른헴 요새에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은 상태였다.

야만인들의 남하를 막고 린드부름에 대한 정찰을 하고 있을 그곳에는 루트거가 미리 배치해 놓았던 기사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 너 하나만 달라고 했거든.”

“······.”

“그런데 분명 하나를 내어달라고 했는데 셋을 주었단 말이야. 이게 무슨 뜻일까?”

“······형님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요?”

루트거는 블라드의 자신 없는 대답에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 요제프 놈이 나한테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게 틀림없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루트거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요제프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저 뒤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내를 보면 그런 오해를 할 법한 상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야만족의 전사와 바예지드의 노기사.

잘 다룬다면 분명 큰 쓸모가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사람을 보며 루트거는 골치가 아플 뿐이었다.

“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이제부터 저 둘은 네가 관리해라.”

“저는 그럴만한 위치가 안 되는데요.”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절이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만큼이나 눈그늘이 내려앉은 루트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게는 제쳐두고라도 라문드는 오랫동안 바예지드에서 일해왔던 기사였기에 루트거로서는 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번 열심히 해볼게요.”

“고맙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차라리 엉겨 붙기라도 할 수 있는 블라드가 더 나은 대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트거가 봤을 때 블라드를 대하는 라문드의 태도는 분명 말랑한 면이 있었으니까.

“용케 감옥에서 안 죽고 기어 나왔구만.”

“영감도 여태까지 용케 안 죽고 살아계시네. 옆에만 있어도 흙냄새가 나는데 말이지.”

“허허허. 가는 건 순서가 없는 법인데 말이지.”

지금도 들려오는 야만인과 노기사의 날 선 소리에 루트거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블라드가 손을 들고는 일행을 제지했다.

“잠깐만요.”

벌써부터 효과가 있구나.

과연 시키길 잘했다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트거였으나 블라드의 제지는 루트거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온 것이었다.

“······저 앞에 뭐가 있는 것 같아요.”

“음?”

그 말을 들은 루트거는 긴장된 눈빛으로 블라드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눈만이 끝없이 이어지는 북쪽의 설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저 너머를 가리킨 블라드는 굳은 표정으로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앞장서봐라.”

북쪽으로 향하는 요 일주일 동안 블라드는 민감한 감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는 했다.

청각, 시각, 후각, 그리고 미묘하게 감도는 날 선 기운까지.

이번에도 그런 감각을 통해 특이사항을 발견했으리라 생각한 루트거는 블라드의 보고를 쉬이 넘기지 않았다.

“요란하게도 날뛰었군.”

“······.”

그리고 블라드의 인도에 따라 설원 한 복판에 다다른 일행은 그곳에서 참혹한 광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곳곳에 널려있는 야만인들의 시체.

끌고 왔던 말이며 양이며 그리고 사람들까지.

따뜻했을 존재들이 눈 바닥에 누워 차갑게 굳어있는 모습을 보며 아게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곳까지 내려왔나 보군.”

루트거는 말에서 내려 엎어져 있던 시체들을 뒤집어 보았다.

가슴을 가르는 처참한 상처.

그 상처를 바라본 루트거는 예상과 빗나가는 현실에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베였군.”

분명 날뛰는 린드부름에 쫒겨 내려온 사람들 같아 보였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상처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우악스럽게 뜯기거나 터져나간 것이 아닌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상처들을 보며 루트거는 아게를 바라보았다.

“너희 부족인가.”

“······그렇진 않소.”

루트거의 물음에 아게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온통 문신이 새겨져 있는 야만인들의 시체는 언뜻 보기에는 아게의 모습과 흡사했으나 그가 속해 있던 부다아트 족은 아니었다.

“우리 부족은 아니지만, 안면 정도는 트고 지냈던 사이지.”

아게의 부족이 아니라 다행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야만인들의 남하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원인에는 린드부름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그런 흐름을 따라온 부다아트 족도 분명 이 근방 어디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북부인들이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루트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라문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증오하는 야만인과 북부인들이었지만 어쨌거나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사이였기에 지금과 같은 극단적인 학살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피로 피를 씻어야만 하는 기나긴 항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두 세력 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베른헴 요새에 있을 루트거의 기사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빠르게 움직이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북부의 경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감지한 루트거는 빠르게 베른헴 요새로 도착해 사태를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

다급하게 말을 재촉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행들.

그러나 블라드는 새까만 녀석의 위에서 가만히 가슴을 붙잡고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두근-

데스웜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때의 심장 박동을 기억하는 블라드는 앞으로 나아갈수록 괴이하게 뛰는 가슴을 붙잡고는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소년의 불편한 기색을 감지한 말만이 조심스레 상체를 고정하며 진동을 줄여주려 노력할 뿐이었다.

※※※※

베른헴 요새.

바예지드 백작령의 최북단의 경계를 짓는 군사시설.

백작령이 지니고 세 개의 도시만큼이나 페테르가 신경 쓰고 있는 곳에 다다른 일행은 의아한 표정으로 요새의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깃발이 두 개인데요?”

가장 사정에 어두운 블라드가 베른헴 요새에 나부끼는 깃발들을 보며 물었다.

하나의 깃발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예지드의 문장이었으나 다른 하나의 깃발은 도통 처음 보는 형태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왜 저 사람들이 이곳에······.”

그러나 깃발을 알아본 루트거와 라문드 역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당황할 뿐이었다.

블라드는 눈을 깜빡이고 있는 라문드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무슨 깃발인데요.”

“······북부의 깃발이 아니다.”

소년의 물음에 라문드는 미간을 좁히며 입맛을 다셨다.

“중앙의 것이지.”

“중앙이요?”

“그래. 중앙.”

중부지역도 아닌 중앙이라고 말하는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올려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불을 뿜고 있는 용의 형상.

“용혈공(龍血公)의 직속 기사단인 용살(龍殺) 기사단의 문장이다.”

깃발에 그려진 불을 뿜고 있는 용의 형상에는 기이한 그어짐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용의 목을 날카롭게 가르는 검로를 형상화한 그어짐이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7화 14

차가운 심장을 가진 용 (3)

까드드득-

“끄어······으어어.”

힘없는 비명과 함께 야만인 사내의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명과 함께 그가 마지막으로 떨군 붉은 눈물조차 차가운 숨결에 의해 얼어붙고 말았다.

새하얀 눈밭 위에 흩뿌려진 강렬한 붉은 색.

그리고 그 위에 펼쳐져 있는 야만인들의 시쳇더미들.

아니, 아직 시체가 되지 못한 그들이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며 하얀 용에게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으나 애처로운 그들의 발버둥은 허무할 뿐이었다.

정작 움직여줘야 할 팔과 다리들이 베어져 나가 눈밭 위를 구르고 있었으니까.

우드득-그득-

입가 가득히 새빨간 핏물들을 그득히 묻힌 용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질긴 맛의 오크들과는 다르다.

누린내 나는 몬스터들과는 다르다.

하얀 용 린드부름.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자신의 혀에 인간의 맛을 새겨버린 용은 크게 입을 벌리고는 포효를 내질렀다.

흩어지는 눈 안개조차도 미처 삼키지 못한 거대한 소리였다.

※※※※

“루트거 님이 오셨다!”

“문을 열어라!”

문지기들의 외침과 함께 굵은 쇠사슬에 매달린 성문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루트거는 눈앞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성문을 바라보며 검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용살 기사단.

여태껏 북부에는 관심도 없던 그들이 갑작스레 최북부에 있는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임자의 허락도 없이 요새 위에 깃발을 올린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루트거 님!”

“보고해라.”

평소와는 달리 굳은 표정과 빠른 걸음걸이로 해자 위 성문을 건너는 루트거.

그런 그에게로 기사 한 명이 다급히 뛰어나와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틀 전쯤 중앙에서 보낸 용살 기사단이 도착했습니다.”

“이유는?”

삽시간에 변한 루트거의 기세에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린드부름의 토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놈들 정보 한번 빠르군.”

루트거는 기사의 대답에 혀를 쯧하고 차고는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타 영지가 있는 곳에 무장집단을 보내는 것은 무례를 넘어 선전포고에 가까운 행위였지만 지금 베른헴 요새에 있는 용살 기사단은 그만한 명분을 갖추고 들어온 자들이었다.

“빨라도 너무 빨라.”

용살(龍殺) 기사단.

이름에 드러나는 것과 같이 용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이들은 제국 황제의 보증과 함께 중앙귀족인 용혈공이 운영하는 집단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용과 관련된 일이라면 황제의 보증과 함께 제국법에 의거해 활동을 보장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깃발과 함께 명분을 세우고 들어온 자들이었으니 요새에 있던 기사들도 어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블라드는 서둘러 나아가는 루트거의 뒤를 따르며 평소의 습관대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주위에 나무가 없어 돌로 쌓아 올려진 베른헴 요새는 계단은 좁고 복도는 구불구불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 알 수 있을 정도의 노골적인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베른헴 요새는 다른 말로 바예지드의 봉화대라고도 하지.”

“이곳 위에 봉화대가 있나 봐요?”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큰 봉화대가 있느냐는 질문에 라문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여기 자체가 봉화대야. 불타오르면 멀리서도 잘 보이거든.”

“······아.”

블라드는 넌지시 건넨 라문드의 말에 다시금 주의 깊게 주위의 벽들을 바라보았다.

석회 반죽으로 애써 가리고 있었으나 곳곳에는 새까맣게 탄 흔적들이 보이고 있었다.

뺏기고 다시 빼앗고.

새까맣게 불타오른 요새를 다시 재건하고.

야만인과 몬스터들에게는 거대한 벽, 그리고 바예지드의 사람들에게는 불굴의 의지와도 같은 곳이 바로 베른헴 요새였다.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

그런 바예지드의 자존심과도 같은 곳에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들의 깃발을 올려놓았으니 루트거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이제야 오셨군. 기다리고 있었소.”

비록 복도는 좁았지만, 기사들이 모여야 하기에 넓게 지은 로비.

한 계단, 한 계단 바예지드의 피로 쌓아 올린 그곳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일행을 맞이하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 뵙겠소. 나는 용살 기사단의 단장인 미르셰아라고 하오.”

반짝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남자는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여유로운 미소로 로비에 다다른 일행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거만해 보였지만 귀족적으로 생긴 외모는 다른 사람이라면 거부감을 일으킬 표정조차 어울리게 만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 귀한 분이 찾아오셨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르셰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루트거의 심장이 거칠게 뛰어올랐다.

감히 주인 된 자에게 기세를 제압하려 하는 미르셰아의 태도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루트거 바예지드. 베른헴 요새의 임시 대장이오.”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루트거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미르셰아의 미소가 깊어졌다.

두근-

그리고 미르셰아라는 남자를 보고 있던 블라드 또한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데스웜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각이 저 위에 있는 사내에게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심장이 뛰는 것은 의지로 조종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은 오직 본능으로서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

억지로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그곳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미르셰아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본능에 의해 움직인 사람은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밖에 있던 야만인들의 시체는 용살 기사단이 만든 것인가?”

“······그렇소. 필요한 일이었지.”

루트거의 물음에 자연스레 표정을 정리한 미르셰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끔찍한 상처와 함께 눈밭을 뒹굴던 야만인들의 시체가 있었고 그들의 죽음은 우악스러운 이빨이 아닌 날카로운 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린드부름은 몰락한 용의 잔재 중 가장 빠른 개체요. 따라잡아서 벨 수가 없다는 뜻이지.”

요제프는 아게를 통해 루트거에게 린드부름에 대한 정보를 전하려 했다.그러나 눈앞에 있는 미르셰아는 아게라는 존재가 없이도 이미 린드부름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건국왕 프라우센의 허가 아래 만들어진 용살 기사단은 몇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자신들만의 경험이 있었으니까.

“따라잡을 수 없으니 불러오는 수밖에. 밖에 있는 시체들은 그것을 위한 미끼들이오.”

“이 개자식이!”

미르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게가 울분의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제국의 개자식들!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아!”

포로의 신분이기에 미리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뽑았을 것이다.

그를 주시하고 있던 라문드가 발을 걸지 않았다면 이미 미르셰아를 향해 뛰쳐 올라갔을 것이다.

“끄으으! 비켜 영감!”

“······한마디만 더 하면 목을 벨 거다.”

아게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동족을 미끼로 삼았다는 말에 울분을 토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분노라 할지라도 합당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했다.

힘없는 야만인들의 분노는 지금의 아게처럼 땅바닥에 뒹구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바예지드의 아들께서는 버릇없는 개를 키우시는군.”

미르셰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아게를 바라보았다.

“고양이도 키우시고 말이지.”

도로테아는 자신에게 와닿는 차가운 눈빛을 보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미르셰아의 눈빛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루트거에게 폐가 될까 봐서였다.

“조련은 잘하셨는지 모르겠군. 비천한 것들은 가끔 제 주제를 잊어버리고는 하지 않소.”

“······.”

미르셰아의 말에 루트거는 조용히 침묵했다.

중앙의 귀족들, 그리고 중부의 영주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는 자들은 이런 식으로 바깥에 있는 자들을 냉소하고는 했었다.

야만인, 수인족 뿐만 아니라 북부의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로.

“······그래도 저들은 자기 자리에 서 있지 않나.”

루트거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내쉬었다.

의도한 것이든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이든 상관없다.

눈앞에 귀족 녀석은 선을 넘었고 루트거는 이곳에 있는 모든 북부인을 대표하는 자였다.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로 숨기고 있던 그의 가슴 깊은 곳 분노들이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루트거의 세계는 활화산과도 같은 뜨거운 붉은색.

바예지드가 있어야 할 곳에 서 있는 미르셰아를 향해 용암과도 같은 진득한 분노가 풀어 헤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당신도 자리를 찾으셔야 하지 않겠소. 미르셰아 단장.”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바예지드가 만든 계단을 밟으며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루트거.

자격 있는 자의 당당한 발걸음으로 미르셰아를 향해 나아갈 때마다 주위에 있던 용살기사단원들이 한 명씩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깃발을 올렸나?”

마침내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루트거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미르셰아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요청했소. 아무도 움직이지 않기에 나의 부하들이 올렸지.”

아게처럼 으르렁거리지도 미르셰아처럼 미소로써 상대방을 압박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 가만히.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자리에 올라왔나?”

“······이런.”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놓고 힘겨루기를 시도하는 루트거를 보며 미르셰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재앙과도 같은 용을 상대하는 용살 기사단은 제국법에 따라 제국령에 있는 모든 시설과 인원들을 합당히 사용할 권리가 있소.”

“주인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마주치는 기세에 따라 천천히 몸을 돌리는 루트거와 미르셰아.

정당한 자격을 갖춘 루트거의 기세는 미르셰아를 계단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협조할 생각이다.”

루트거의 손가락이 저 밑에 있는 로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합당한 절차를 거친다면 말이지.”

루트거의 의도를 이해한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서둘러 로비의 문을 열고는 요새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깃발을 올려달라 부탁하시오. 미르셰아 단장.”

“······.”

요새 가장 높은 곳.

단단한 성벽이 새겨진 바예지드 깃발 옆에서 나부끼던 용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땅에서 용을 잡을 수 있게 협조해 달라 부탁하시오.”

자격 있고 정당하며 충성을 바친 자신들의 주군이 용살자들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이곳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날카로운 경고를 내뱉은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어느새 용살 기사단을 에워싸고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루트거와 미르셰아.

바예지드 기사단과 용살 기사단.

그들이 만들어내는 날카로운 기세가 북풍의 설한보다 더한 차가움으로 로비를 감싸고 있었다.

“저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미르셰아는 고개를 돌려 루트거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로비의 중앙.

루트거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들어올려야 하는 그런 위치.

“후회할 텐데.”

“어차피 인생은 무엇을 선택해도 후회뿐이야.”

미르셰아의 나지막한 협박에 루트거는 나지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할 일은 하고 후회해야지.”

바예지드의 핏줄을 타고 내려온 검은 눈동자가 용암처럼 새어 나오는 진득한 오러와 함께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귀족적인 외모.

살아있는 사람조차 용의 미끼로 쓰는 차가운 심장을 지닌 남자를 향해서.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8화 8

소년이 만들어 낸 선택지 (1)

“얼굴 좀 들어봐.”

블라드는 자신의 얼굴을 억지로 치켜드는 도로테아의 손길에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얼굴에는 그리지 말지.”

“목 없는 시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래서 투구까지 썼잖아.”

“너 내가 반말하지 말라고 그랬지.”

갑옷 빼곡히 새겨진 붉은색의 각인들.

그것만으로 모자라 보였는지 도로테아는 블라드의 얼굴에 자그마한 붓을 가져가 들이대고 있었다.

강철공의 기사들이 마법 횃불을 들고 있듯 린드부름이 뿜어낼 냉기를 막기 위한 도로테아의 방책이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요?”

“네가 가장 나중까지 달릴 거니까.”

옆에서 블라드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루트거의 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별수 없잖냐. 네 말이 제일 빠른걸.”

“바예지드 최고의 용 몰이꾼이시니 이 정도는 감당하셔야지.”

점점 붉게 물드는 소년의 몰골이 우스웠는지 옆에 있던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를 건네왔다.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 지도를 봐라.”

도로테아가 소년의 얼굴에 각인을 새기는 사이 루트거의 부관이 꾸깃한 지도를 펼치며 손가락으로 표시된 지점들을 꾹꾹 눌러대었다.

“강철공의 기사들과 우리는 여기 있는 지점까지 녀석을 몰고 오는 게 한계일 거다. 그러니 이 지점부터는 네가 치고 나간다.”

부관이 가리키는 지도 위에는 수없는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용을 유인하기 위해 고민했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전까지는 기사들의 뒤에서 바람을 피하는 거다. 체력을 유지해.”

“알겠어요.”

계속해서 말해왔던 작전개요였지만 루트거의 부관은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가 여기 있는 이 지점까지만 끌고온다면 숨어있던 루트거님이 달려 나오실 거다. 그와 동시에 위에서 볼코프님의 투창도 날아오겠지.”

부관의 말에 블라드는 시선을 돌려 저 앞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는 짧은 투창들을 가득 짊어진 강철공의 기사. 투창의 볼코프.

오러를 다양한 방법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라문드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아예 투척 무기에 오러를 실어 보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과연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은 법이었다.

“그러니 이 계획에서는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한거다.”

“그 말은 벌써 백번은 더 들은 것 같아요.”

양쪽에 언덕에 의해 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지는 지형.

쉽사리 돌아나갈 수 없는 곳까지 이끌고만 오면 땅에서는 루트거가 린드부름의 전진을 틀어막고 언덕 위에서는 볼코프가 투창을 날린다는 계획이었다.

만약 블라드가 계획한 지점까지 린드부름을 끌고 오기만 하면 토벌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질문.”

“없는데요.”

“뭐라도 해. 그냥.”

작전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대담한 태도를 잃지 않는 소년을 보며 루트거의 부관은 오히려 자신이 애가 닳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성공하면 저 사람들은 안 죽어도 되죠?”

“당연하지. 물론이지.”

블라드의 물음에 부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소년의 시선 끝으로 용살 기사단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땅바닥에 주저앉고 있는 야만인들이 있었다.

미끼란 필요할 때 구해와서 쓰는 것이 아니다.

미리 잡아놓고 가져다 쓰는 것이 미끼의 제대로 된 사용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미르셰아는 린드부름을 유혹할 미끼들을 미리 잡아다 두었다.

블라드는 저 뒤에서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있는 아게를 바라보았다.

신령스러운 말을 쫓아온 부족장의 아들이자 바예지드의 사람들을 습격한 무도한 야만인.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부족원들을 살리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

그리고 지금 용살 기사단에게 붙잡혀 차가운 눈밭 위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미끼들은 자신들을 부다아트 족의 부족원이라 했다.

만약 북부의 사람들이 실패하게 된다면 그들의 피와 비명이 린드부름을 유혹하는 함정이 될 것이다.

크아아아아-!

저 멀리 하얀색으로 물든 지평선 너머로 몰락한 용이 내지르는 포효가 들리기 시작했다.

“좋아. 여기 봐!”

루트거의 부관은 손뼉으로 기사들의 주위를 집중시킨 채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의 신호에 검은 머리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출발 신호와 함께 말머리를 돌리는 용 몰이꾼들.

“······.”

블라드는 각인이 새겨진 투구의 면갑을 내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눈을 맞췄다.

기도하기 시작하는 도로테아.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루트거와 라문드.

그리고 저 멀리서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자신을 보고 있는 용살 기사단의 미르셰아까지.

“가자 누아르.”

히이이잉-

소녀가 지어준 검은색의 이름을 단 말이 발굽을 박차기 시작했다.

새까만 말의 꼬리 뒤로 하얀색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

이틀 전, 베른헴 요새.

흔들리는 촛불이 비추는 하얀색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이름은 블라드. 나이는 17세. 출생지는 바예지드 백작령의 쇼아라입니다. 특이사항으로는 슬럼가 출신이라고 합니다.”

“흐음. 그래?”

수정구를 통해 보고된 사항을 들으며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쇼아라. 쇼아라라.”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보자마자 느낄 수 있었던 심장의 박동.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르셰아는 본능과도 같은 예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소년을 둘러싼 정황들이 미묘하게 그의 판단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너무 낮은 곳에서 태어났어.”

“······.”

될성부른 씨앗은 어디에서나 꽃을 피우기 마련이라지만 소년을 둘러싼 배경은 낮다 못해 가혹해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이런 곳에까지 고귀한 씨앗을 퍼트렸을까?

“모르겠군.”

책상 위 놓여 있는 북부의 지도.

그리고 지도 위에 펼쳐져 있는 종이 한 장.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블라드의 신상명세가 적힌 종이를 똑똑 두들겼다.

그러나 아무리 미르셰아가 손가락으로 재촉해도 잉크로 쓰여진 보고서는 소년에 대한 더 이상의 정보를 내어주지 못했다.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데.”

좀 더 확실한 정보를 원한다는 미르셰아의 말에 부관의 표정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잠시 주저하던 부관은 얼음보다 시린 미르셰아의 눈빛을 보며 주저하던 대답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라는 소년이 외부에서 한 활동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쇼아라 내부에서의 동향은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왜지? 북부에 가장 많은 간자들을 뿌려놓았을 텐데.”

부관의 보고에 미르셰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야 서부 쪽의 인물들이 날뛰는 시기였지만 본래만 하더라도 왕실과 중앙이 가장 신경 쓰던 지역은 북부였었다.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를 중심으로 강렬한 지역색을 통해 똘똘 뭉쳐 있는 북부는 언제라도 제국의 범위에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아라에 새로운 시장이 부임한 후부터는 저희의 눈이 모두 감겼습니다. 최근에 있던 실종사건을 명분 삼아 도시를 확실하게 통제하는 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요제프는 비록 검을 들 수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검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검의 끝은 날카로워야 하며 어디든지 뻗어나갈 수 있도록 유연해야 한다.

하나의 사건을 명분 삼아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요제프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쇼아라를 장악하고 먹어 치우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형제 둘이 아주 유능하군.”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부관을 보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든 미르셰아는 촛불을 당겨 불을 붙였다.

곧 그가 내뿜는 진한 연기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둘 다 유능한데 올라갈 수 있는 곳은 하나뿐이라······.”

똑.똑.똑.

미르셰아가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승자는 원하는 것을 얻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특히나 귀족 간의 계승 경쟁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루트거와 요제프는 태어날 때부터 피할 수 없는 전장에 세워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건 좀 흔들어볼 수 있겠어.”

아무리 똘똘 뭉쳐 있는 북부라 할지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미르셰아에게는 그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후-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북부의 지도가 미르셰아가 내뿜는 담배 연기에 휩싸여 뿌옇게 흐려 보였다.

※※※※

“저희 때도 결국 사람을 내놓긴 한 것이었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전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낸 라문드는 팔짱을 끼고서는 침음을 내뱉고 말았다.

“결국 마을을 습격하고 있던 녀석을 잡은 것이었으니 방식만 놓고 보자면 야만인들을 미끼로 세운 용살기사단과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몇십 년 전, 그때도 혹한기를 따라 내려온 린드부름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당시 젊은 기사였던 라문드와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린드부름이 마을 주민들을 물어뜯느라 정신이 없던 틈을 타 녀석을 토벌하는 데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잡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의 용살 기사단이 취하는 방법과 별 차이는 없을 것이다.

“······따라잡을 수 없으니 결국 우리도 함정을 설치해야 한다는 말인데.”

루트거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만약 저희가 용을 잡지 못한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이곳에 눌러앉을 수도 있어요.”

도로테아는 마법사이자 루트거의 조언자답게 조곤조곤한 말투로 용살 기사단의 행보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처럼 만약 용살 기사단에게 처치 기회를 빼앗긴다면 어떤 식으로 명분이 쌓여나갈지 예측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용살 기사단은 용이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중앙에서의 의도로 움직이는 집단이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함정을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소나 양을 인근의 도시에서 몰아올 생각이라면 그렇습니다.”

고민하는 루트거를 본 부관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야만인들을 잡아 올까요? 아니면 용살 기사단이 잡아온 야만인들을 강탈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빌어먹을.”

부관의 의견에 루트거는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야만인과 북부인들은 어쨌거나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사이이며 그들을 미끼로 삼는다는 발상은 결국 그동안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둘 사이의 평화를 깨뜨리고 말 것이다.

루트거는 어쩌면 이것이 중앙이 의도하는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놓도록 하지.”

그러나 루트거로서는 모든 방안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그것이 책임자가 짊어져야 하는 의무였으니까.

“블라드의 말이 빠르다고 하던데······.”

“그 말은 탈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싶어 넌지시 건넨 말에 라문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녀석이 말을 안 듣는 놈이라는 건 쇼아라의 모두가 알 정도입니다.”

“흐음. 그 정도입니까?”

“무엇을 상상하시던 그 이상일겁니다.”

여차하면 소문이 자자한 블라드의 말을 빌려 단기필마로 린드부름을 베어볼 요량이었던 루트거였지만 라문드의 강력한 제지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데.”

린드부름은 너무나 빠르기에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 린드부름을 잡기 위해서는 따라잡기보다는 불러들여야 하며 그것에 가장 알맞은 방도는 먹이로써 유인하는 것일 테다.

“과연 용살의 이름을 달 만한 자격이 있긴 있군.”

루트거는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용살 기사단은 존재만으로 그에게 난감한 선택지를 강요하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하라는 눈앞에 들이대면서 말이다.

“루트거 님.”

마땅한 방법이 없기에 모두가 조용한 집무실 안으로 순간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허락을 받은 기사는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루트거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지금 요새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 요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인데?”

또 다른 불청객일까 싶어 인상을 찌푸린 루트거였으나 그에게 보고하는 기사의 안색은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

빠르게 해가 저물어가는 북부의 설원 속에서 베른헴 요새의 문을 두들기는 사내들이 있었다.

“신원을 밝혀라!”

문지기의 말과 함께 듣고 있던 깃발을 높게 펴든 남자들.

깃발 속에 새겨진 문양은 무언가를 꽉 쥐고 있는 강철의 건틀렛이었다.

“베른헴 요새의 대장에게 전해다오.”

사내들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말총머리의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문지기에게 말했다.

지니고 있는 기세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남자였다.

“강철공의 기사들이 왔다고 말이다.”

강철공 바라노프 가문의 기사들.

들고 있는 패가 없기에 고민하고 있던 루트거에게로 그들이 찾아왔다.

볼코프가 등에 꽂아둔 창들이 저물어가는 황혼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9화 11

소년이 만들어 낸 선택지 (2)

“너무 어려 보이던데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볼코프는 몰이꾼들의 뒤를 쫓아가는 금발 소년을 보며 루트거에게 물었다.

가진바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미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육체가 소년의 그릇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선이었습니다.”

“저 소년이 말입니까?”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오직 경험과 실력, 그리고 쌓아온 업적만이 임무의 성사를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이미 땅속에 있던 데스웜도 끄집어 내봤던 녀석이죠.”

“······데스웜을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린드부름을 향해 나아가는 몰이꾼 중에서 블라드만한 인재는 없을 것이다.

루트거는 이번 사냥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용 몰이꾼을 데려왔다.

“그렇다면 당연한 결정이겠군요.”

볼코프는 루트거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세대 바예지드 가문에서는 오직 루트거만이 눈여겨볼 만한 인재인 줄 알았더니 한 명이 더 숨겨져 있었다.

“이제 저희도 움직이죠.”

“알겠습니다.”

강철공에게 보고할만한 또 다른 특이사항을 머릿속에 새겨넣은 볼코프는 투창을 들고는 협곡의 위쪽으로 향했다.

“······.”

루트거는 계획한 위치로 움직이기 전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

그의 푸른 눈동자가 떠나가는 북부의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여태껏 머금고 있던 비웃음 대신 진중한 눈빛으로 눈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어린 용 몰이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린드부름의 지금 모습은 폭주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모든 생물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행동 양식이 있으며 그것은 린드부름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러나 구축해놓았던 자신의 영역을 내팽개치고 추위를 따르는 습성까지도 무시한 채 무작정 남하하고 있는 린드부름의 모습은 마치 어떠한 목적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 앞에 있소.”

“뒤로 돌아갑시다.”

이곳에 있는 무리 중 가장 먼저 린드부름의 토벌을 시작한 강철공의 기사들은 그동안 린드부름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루트거 또한 아게를 통해 포로로 잡혀있던 야만인들이 가진 정보를 끄집어내어 린드부름의 위치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두 기사단은 서로가 가진 정보를 통해 린드부름이 있는 위치를 파악해내었고 이제는 그곳에서 하얀 용을 끄집어낼 차례였다.

“다들 준비해라!”

말을 몰고는 크게 돌아가 쉬고 있던 린드부름의 뒤를 잡는 데 성공한 기사들은 큰 소리와 함께 하얀 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르르르-

한참 단잠에 빠져 있던 린드부름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리 몰락한 용의 잔재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본능적인 판단은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반짝이는 갑옷.

그리고 불타오르는 나무 막대기.

크아아아-!

평소에 먹이로 삼던 야만인들이 아닌 아픈 기억을 주었던 반짝이는 인간들임을 파악한 린드부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집요하고 위협적이었으며 결국 자신의 비늘을 떼어내었던 그때의 투창을 기억하고 있던 린드부름은 기사들을 대적하기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지성의 그것을 닮아가는 본능적인 판단이 린드부름을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

“이런.”

블라드는 곧장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상황을 살피는 듯한 린드부름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사람의 기척만 들리면 이빨을 들이대었던 데스웜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두근-

지금 뛰어오르는 심장만큼이나 지능적으로 움직이는 린드부름의 모습은 소년에게 놀람을 안겨주고 있었다.

“움직인다!”

“양옆을 틀어막아!”

이미 한 번 린드부름을 놓친 전적이 있던 강철공의 기사들이 이를 악물고는 재빨리 린드부름의 양옆으로 다가가서는 마법 횃불을 들이대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린드부름을 놓치면 이 흉악한 녀석이 어디로 들이닥칠지 말이다.

바예지드는 몰랐으나 바르노프는 알았기에 강철공의 기사들은 더욱 이를 악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기사들의 오러가 퍼져 나오고 그 기세를 흡수한 횃불의 불꽃이 위협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

또다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기사들을 보며 린드부름은 차가운 숨결을 머금었지만, 그것을 뱉어내기에는 시간도 상황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아아아-!

차가운 숨결을 내뱉기보다는 고르기로 한 린드부름은 일단 빠른 움직임을 통해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충분히 가속만 된다면 여기 있는 기사들 정도야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을 터.

이미 한 번 해본 경험이 있기에 린드부름은 망설임 없이 하얀 설원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뛰쳐나가게 두지 마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기사들 또한 필사적으로 린드부름의 앞을 막아서며 하얀 용에게 도약할 거리를 주지 않으려 애썼다.

공간을 점하려는 기사들과 용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히히히힝-!

“으아악!”

날카로운 이빨을 미처 피하지 못한 기사 하나가 말에게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애처로운 말의 비명과 함께 사방에 흩뿌려지는 붉은 피가 기사들의 갑옷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블라드! 뒤쪽으로 와라!”

이미 데스웜을 통해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던 루트거의 기사들과 블라드는 재빨리 강철공의 기사들이 막아내지 못한 빈자리를 메꾸며 린드부름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까앙-! 깡!

“미친! 이도 안 들어가!”

“무리하지 마!”

걔 중에는 기회를 엿봐 직접 린드부름을 내려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용의 비늘은 쉽사리 기사들에게 상처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아아아-!

데스웜만큼은 아니었지만 린드부름 또한 평범한 몬스터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비늘을 가진 존재.

그것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깊고도 굳건한 세계를 지닌 기사들이 필요했다.

“브레스다!”

이제야 기회를 만들어 낸 린드부름.

심상치 않은 형태로 부풀어 오른 목덜미를 본 기사들이 재빨리 산개하며 내뿜어지는 용의 숨결을 피하고 있었다.

“크아아아!”

루트거의 기사 중 하나가 브레스를 정면으로 얻어맞고는 천천히 제자리에 멈춰서기 시작했다.

비록 도로테아의 각인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매서운 용의 숨결은 더 이상 그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저번보다 더 강해졌소! 더 멀리 피해야 하오!”

“왜 갑자기!”

강철공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상대했던 린드부름의 모습에서 한층 더 강력해진 브레스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영악해지며, 강해진다.

여태껏 잠들어 있던 용의 피가 무언가의 자극을 받아 서서히 흉폭한 가능성을 치켜들고 있었다.

[네가 나서야 한다! 더는 버텨줄 기사들이 없어!]

“쳇!”

그리고 여기, 린드부름과 같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끓는 피를 가진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블라드!”

“거기! 횃불 줘요!”

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왔으나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진 린드부름의 브레스는 말들의 전진을 굼뜨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다!”

얼어붙는 다리와 함께 천천히 린드부름에게서 멀어지는 기사들 사이로 새까만 말 한 마리가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계획보다 빠르며 예상과는 어긋나는 움직임이었으나 실전에서는 지금과 같은 판단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주둥이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모는 순간 협곡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말거다.]

“······미치겠네.”

스스로를 미끼 삼아 협곡의 입구까지 몰아야 한다는 목소리의 말에 블라드는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되나?’

한 손에는 강철공의 기사에게서 넘겨받은 마법 횃불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호르헤의 단검을 쥐어든 블라드는 그것으로 재빨리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 내렸다.

“크으!”

미르셰아는 야만인들을 희생해 린드부름에게 인간의 피 맛을 각인시켰다 들었다.

그리고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면 아게의 부족을 미끼 삼아 자신들의 뜻대로 용을 잡고 북부를 휘젓고 다닐 것이다.

‘엿이나 먹으라 그래!’

당신들이 믿어준 만큼 나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비록 나라는 존재가 미약하기 그지없을지라도.

자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던 루트거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붉게 물든 소년의 손아귀가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소년의 필사적인 손짓 끝으로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여기 네놈이 원하는 피가 있다!”

소년의 손끝에서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

린드부름은 그 핏방울이 방울져 내리며 하얀 눈밭에 붉은 흔적을 남기는 순간을 두 눈을 부릅뜬 채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의 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여태껏 찾던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

하얀 용이 여태껏 보지 못했던 흉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새까만 말을 향해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마치 미친 것처럼.

소년 하나만 뜯어내면 된다는 것처럼.

“너무 효과가 좋잖아!”

[······그것까지는 하지 말지 그랬냐.]

블라드는 고작 손바닥 하나 그었을 뿐인데도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흉폭해진 린드부름을 보며 재빨리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았다.

“달려!”

이미 지치고 얼어붙은 기사들은 저 뒤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이제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눈치챈 누아르는 재빨리 흐르고 있는 소년의 세계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소년의 세계는 아직 색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새까만 밤하늘 위에 별 하나를 띄우는 것에는 충분할 것이다.

히이이잉-

자신조차 아찔할 정도의 속도로 내달리는 누아르의 이마로 새하얀 뿔 하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누아르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것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누아르는 소년을 찾아온 것이었다.

조금 더 빨라지고 조금 더 완벽해지기 위해.

지금, 하얀색의 설원 위를 달리는 것은 오직 두 개의 세계뿐.

가장 빠른 용, 그리고 가장 빠른 말.

그리고 이 두 개의 세계를 온전히 채워 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하나.

“가자!”

불어오는 눈보라에 금발을 휘날리고 있는 소년, 단 한 명뿐이었다.

몰락한 용과 잊혀진 일각수가 내지르는 포효가 새하얀 설원에 가득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옵니다!”

땅에 꽂아둔 창들을 옆에 두고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볼코프의 귀로 부관이 내지르는 보고가 들려왔다.

“얼마나?”

“저 앞에 있으니 앞으로 5분 후면······아니.”

평소와는 다르게 당황하며 보고하는 부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3분, 아니 1분!”

“뭐?”

비명과도 같은 부관의 보고에 재빨리 투창을 뽑아 들고는 오러를 주입하는 볼코프.

치켜뜬 오른쪽 눈으로 본 광경은 과연 부관이 당황할 만한 것이었다.

“바로 앞입니다!

“뭐 이런······.”

하얀 설원을 거칠게 가로지르는 눈보라가 있었다.

너무나 빨라 북부의 삭풍조차도 가로지르는 직선의 눈보라였다.

그 눈보라의 가장 앞에는 튀어 오르는 눈을 맞으며 반짝거리는 새까만 말이 있었고.

그아아아아-!

그리고 그 뒤에는 어느새 푸른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이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로 변한 린드부름이 있었다.

그들이 협곡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라!”

세워놓았던 계획은 온데간데없이 지금 볼코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소년이 치켜든 횃불 하나만이 애처로이 흔들릴 뿐이었다.

“최고의 용 몰이꾼이라더니······.”

한탄과도 같은 감탄을 내뱉은 볼코프는 어깨를 크게 뒤로 젖히며 투창을 치켜들었다.

“과연 그 말이 맞구나!”

계획은 어긋나도 좋다.

결과만 좋다면 모든 것이 옳은 것이다.

감히 의심했던 미안함과 함께 소년에 대한 감탄을 담아 볼코프는 크게 창을 휘둘렀다.

쐐애애액-

소년의 뒤를 쫓느라 정신이 없는 린드부름의 이마로 볼코프가 쏘아내린 투창이 날아들었다.

※※※※

[온다!]

불어오는 맞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블라드는 목소리의 경고와 함께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쐐애애액-

순간, 블라드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있었다.

그 살기 어린 소리는 뒤를 쫓고 있던 린드부름조차도 잠시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였다.

콰악-!

그아아아아-!

닿지 않았다.

그러나 기세만으로 발광하는 용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 정도의 공격이었다.

‘됐다!’

비록 실패한 공격이었으나 블라드는 들고 있던 횃불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비록 몰고 오는 과정은 엉망이었으나 지금부터는 또다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이었으니까.

볼코프의 의도는 좁은 협곡으로 용을 불러들이는 것.

혹시라도 린드부름이 뒤로 돌아나가지 못하게 투창으로 퇴로를 끊는 중이었다.

“어딜 보냐!”

블라드는 들고 있던 횃불을 과감히 집어던지며 다시 한번 린드부름의 주의를 끌어내었다.

이젠 다 왔다.

저 앞에 있는 협곡까지만 이 녀석을 끌고 간다면 루트거의 불꽃 같은 세계가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데스웜의 외피까지 갈라내었던 루트거의 검이니 분명 린드부름의 비늘도 갈라낼 수 있을······.

쿠웅-!

“······억!”

계획이 거의 성사되었음에 기뻐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쿵 하고 내려앉는 심장을 붙잡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블라드! 왜 그러냐!]

“끄으으······.”

목소리의 재촉에도 블라드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소년의 안위를 걱정한 누아르도 그리고 뒤를 쫓아오던 린드부름도 고통에 겨운 듯 고개를 내저으며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헐떡이는 블라드와 린드부름을 보며 협곡의 입구 앞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건 도대체!’

까맣게 좁아지는 시야, 마치 심장이 멈추는 것만 불안과 공포.

본능이 건네오는 강렬한 경고에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더는 뛰지 마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마라.

“이런······씨이발.”

블라드는 심장을 통해 다가오는 경고를 애써 무시하며 끼긱거리는 목을 억지로 치켜들고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리키는 지점이 있었다.

협곡의 저 안쪽, 흐느끼고 있는 야만인들 앞에 서 있는 남자.

그 남자의 푸른 눈동자가 소년을 바라보며 사납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직 용만이 느낄 수 있는 기세가 소년과 하얀 용을 짓누르고 있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0화 15

장식 없는 검

“지금 돌격해라!”

협곡의 바로 앞에서 멈춰버린 하얀 용과 금발 소년.

둘 다 하나같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멈춰있는 것이 마치 공포스러운 무언가라도 본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소년은 이를 악물고 억지로라도 고개를 들려 하고 있다는 것과 린드부름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항과 굴복의 갈림길에서 두 존재의 길이 엇갈리고 있었다.

“앞으로! 기사들은 앞으로 가라!”

루트거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뛰쳐나가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지 않았으니 검을 맞댈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뭐 이런 해괴한 일이!”

경험 많은 라문드조차 성공 바로 직전에서 멈춰버린 린드부름을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이다.’

증거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루트거는 두 눈 가득 분노를 머금고는 뒤쪽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로 소년을 바라보는 미르셰아.

저 멀리 서 있는 그의 입가에는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아아아아-!

가장 빠른 용 린드부름.

자신보다 더 거대한 세계를 피하기 위해 꼬리를 만 용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하얀 설원을 향해 뛰어가려 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가 닿지 않는 자신이 지배하던 그곳으로.

“볼코프 경!”

순간, 협곡에 가득 울려 퍼지는 루트거의 외침이 있었다.

볼코프의 세계는 멀리 보는 세계.

날카로운 것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다듬어낸 그의 세계가 투창에 맺히기 시작했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검이 아닌 창을, 창 중에서도 던지는 무기를 선택한 이단과도 같은 기사의 손끝에서부터 보랏빛 섬광이 뻗어 나왔다.

평범한 기사라면 반응조차 하지 못할 그런 빠르기로.

그아아아-!

그러나 시기가 좋지 못했다.

린드부름은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세계에 의해 공포에 떨고 있는 참이었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유형의 위협에 대해 기민한 감각을 세우고 있는 상태였다.

콰직-!

그렇기에 쏘기 전에 보았고 닿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몰락한 용의 잔재 중 가장 빠른 다리를 이용해서.

“이런 젠장!”

재빨리 땅에 꽂혀 있던 투창을 뽑아낸 볼코프가 제 2격을 준비하고 있는 사이 루트거와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하얀 용에게 다다랐다.

“시간을 벌어라!”

단단한 외피로 유명한 데스웜조차 일검에 베어낸 루트거였다.

다만 그의 가슴 속 깊숙이 있던 세계를 세상 밖으로 터트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소년이 데스웜에게서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버텨라!”

“앞을 틀어막아야 해!”

기사들이 온몸으로 시간을 벌어내는 동안 루트거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검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익숙한 진동에서 오는 울림이 그를 좀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위에서는 쏘아져 내리는 보랏빛 섬광.

밑에서는 질척거리며 달려드는 빛나는 인간들.

그동안은 고귀한 용인 줄 모르고 살았으나 이제는 알게 된 린드부름은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말았다.

그아아아아-!

소년을 향해 달려들 때보다 더한 포효와 함께 숨을 한껏 들이켠 린드부름.

방어조차 도외시한 채 있는 힘껏 분노를 머금은 하얀 용의 목덜미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런!”

잠시 후 닥쳐올 파멸적일 숨결을 눈치를 챈 라문드는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해 소년을 향해 달려갔다.

[블라드! 정신 차려라!]

“이놈아! 여기서 뭐 하는 거냐!”

“······.”

그러나 블라드는 목소리와 라문드의 재촉에도 부들부들 떨 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소년의 세계와 맞닿은 누아르 또한 바로 앞에 있는 푸른 눈동자의 주박에 갇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몰랐겠지만, 소년은 지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세계에 대항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글렀구만.”

두 눈을 부릅뜬 채 뿌리 깊이 박혀버린 소년의 모습을 보며 라문드는 뒤로 돌았다.

최선을 택할 수 없다면 차선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은퇴한 기사의 선(善)은 바로 미래를 책임질 소년이었다.

“늙으면 찬바람이 관절까지 드는데 말이지.”

푸아아와악-

라문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희뿌연 안개같이 다가오는 린드부름의 숨결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영혼까지 얼어붙고 말 용의 숨결.

“흡!”

등 뒤에 소년을 품은 늙은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부디 평생을 다해 쌓아 올린 자신의 세계가 용의 숨결보다 뜨거운 것이기를 빌면서.

검을 드는 대신 양팔을 교차한 라문드의 몸으로 빛나는 오러가 깃들기 시작했다.

※※※※

“······.”

블라드는 차갑게 깔린 희뿌연 안개 속에서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가오는 냉기에 소름이 올라왔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라문드의 오러만큼은 따뜻했다.

[끊어내야 한다!]

“······끄으으.”

사방에서 몰아치는 냉기가 소년의 몸을 굳게 만들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떨리는 손으로 억지로 검을 붙잡았다.

차가운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은 마치 거미줄처럼 얽혀들어가 소년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려면 자신의 세계 또한 넓어져야 한다.

어떻게든 뻗어나갈 곳을 찾아 헤매던 소년의 세계에 라문드의 온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 색을 정하지 못한 블라드의 세계에 또 다른 한 줄기 색깔이 깃들고, 그 빛이 장식 없는 검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영감님.”

“······가 봐라.”

차갑게 굳어버린 입술 사이로 라문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인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이제는 소년의 차례였다.

블라드는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라문드의 말을 들으며 있는 힘껏 장식 없는 검을 휘둘렀다.

소년에게 휘둘러진 보이지 않던 차가운 그물들이 끊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

언제나 여유로웠던 자세를 유지했던 미르셰아였지만 지금만큼은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드부름이 내뱉은 희뿌연 숨결이 바람에 걷혀 날아가고 그 안에 있던 풍경들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풍경.

냉기에 굳어버린 기사들 사이로 눈보라가 만들어 낸 얼음알갱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짝임을 헤치며 빠르게 뛰쳐나가는 검은 말이 있었다.

미르셰아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

비록 색은 같았으나 다른 빛을 간직한 눈동자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대단하군.”

미르셰아는 언제나 짓던 냉소적인 미소를 지운 채 순수한 감탄을 담아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눈동자가 천천히 미르셰아를 떠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의 허락 없이 오직 자신만의 의지로.

소년의 검은 그의 존재감을 끊어냈다.

“가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그것을 요제프에게 배운 블라드는 지금 당장 미르셰아에게 달려들기보다는 저 뒤에 있는 하얀 용을 먼저 해결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깔아뭉개려던 사내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일 수 있을 테니까.

늙은 기사의 방패 아래 다시금 고개를 든 블라드는 검은 말을 이끌고 하얀 용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린드부름의 차가운 숨결에 협곡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방금까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트거는 재빨리 오러를 돌리며 얼어붙어 있는 몸을 녹이려 하였지만, 찰나의 순간만 주어져도 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하얀 용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이런······젠장.”

도로테아의 각인이 냉기에 대항하여 발광하고 있었지만, 기사들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협곡 위에서 홀로 분투하며 린드부름을 저지하는 볼코프의 투창이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실패인가.’

루트거는 저 밑에서부터 차오르는 실패의 기운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국 닿지 못했다.

단 한 발자국의 차이로 실패하는 일도 있는 법이었다.

“음?”

그 순간 루트거의 시야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형상이 있었다.

“막아볼게요!”

“······블라드!”

방금까지만 해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금발 소년이 모는 말이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은 잠시 고개를 숙였으나 금발의 소년은 단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멈춰있는 지금 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라!]

“으아아아!”

블라드는 뽑아 올린 오러를 장식 없는 검에 몰아넣은 채 이제야 막 도약하기 시작하는 린드부름의 오금을 후려쳤다.

까아아앙-!

크아아아아-!

순간 터져 나온 린드부름의 거친 포효에 블라드가 발악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너무 단단하잖아!”

용이라는 존재에게 처음 검을 휘둘러본 블라드는 얼얼해진 손목을 돌리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루트거는 어떻게 이 녀석보다 더 단단한 데스웜을 베어낼 수 있었지?

[안 되면 계속해야지!]

“······이익!”

목소리의 말에 다시 한번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의 검으로 오러가 흐르기 시작했다.

“창을 다오!”

볼코프는 안개속에서 갑작스레 뛰쳐나온 소년의 존재를 보며 다시금 희망을 품었다.

결국 이 작전의 성패는 시간에 달려있다.

린드부름이 가속하기 전에 루트거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토벌에 성공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용살 기사단에게 기회를 넘겨줘야 할 것이다.

“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창을 넘겨주던 부관의 보고에 볼코프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길.”

땅에 꽂아두고 있던 볼코프의 창도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시간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날려야 해!”

소년 혼자만의 발버둥만으로는 린드부름을 막을 수 없다.

비록 루트거가 최고의 용 몰이꾼이라 했지만 그렇다고 끝을 낼 수 있는 용살자는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창을 건네받은 볼코프는 린드부름을 향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너는 오른쪽으로!]

바로 앞에 있을 린드부름을 상대하느라 볼코프의 움직임까지 챙기지 못하는 블라드를 위해 목소리가 지시를 내렸다.

가속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며 결국 소년은 혼자서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간을 점해야 한다.

까앙-!

“······!”

매섭게 휘두르는 검의 끝으로 불길한 파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오러로 감싸고 있다 할지라도 뒷골목에서 태어난 검으로는 용의 비늘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런!”

들고 있기에 알 수 있는 균열을 느끼며 블라드의 안색이 파래져 갔다.

소년이 별처럼 바라보았던 검이 부서지고 있었다.

[멈춰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 녀석과 함께할 수는 없어!]

목소리의 말에 블라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소년이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높은 곳에 걸려있던 장식 없는 검이지만 그동안 상대해왔던 적들은 평범한 철검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들뿐이었다.

오히려 여태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해야 할 일을 하게 해라!]

“······.”

한계 끝에 다다른 존재들은 멈출 수밖에 없다.

늙어 버린 기사가 그랬듯, 평범할 뿐인 장식 없는 검도 이제는 멈춰야만 한다.

“빌어먹을!”

뒷골목의 대장장이는 말했었다.

만약 자신의 검이 소년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라고.

소년은 그 말과 함께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대장장이를 기억했다.

까앙-!

“멈춰!”

까아앙-!

“멈추라고!”

설원을 향해 뛰쳐나가기 시작하는 린드부름의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년이 울부짖고 있었다.

소년의 울부짖음과 함께 장식 없는 검도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이 개자식아!”

흩날리는 눈의 결정들과 함께 하얀 검의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소년의 눈물도 같이.

콰직-!

그아아아아-!

하얀 용이 소년의 기세에 잠시 멈칫한 사이 협곡 위에서 쏘아져 내린 보랏빛 섬광이 있었다.

“됐다!”

블라드의 결사적인 방해에 힘입어 린드부름의 무릎으로 볼코프의 창이 날아와 박혔다.

협곡 위에 있던 볼코프는 그 모습을 보며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마지막 남았던 투창이었다.

“흐으······흐으으.”

아까 그어낸 손아귀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장식 없는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소년의 피를 먹은 검이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마지막이야.”

자신을 마주 보는 린드부름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장식 없는 검을 치켜들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

달리는 말 위에서 소년은 검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이곳까지 다다르게 해준 너에게 감사한다.

“간다!”

점점 느려지는 린드부름을 따라잡은 블라드가 마침내 바로 앞에서 마주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단단한 비늘은 뚫을 수 없지만 너의 눈빛 정도는 뚫을 수 있겠지.

그것이라면 장식 없는 검의 마지막으로 충분할 것이다.

“잘 가라.”

마지막으로 소년의 오러를 머금은 장식 없는 검이 설원 위에서 반짝였다.

소년의 함성과 함께 뒷골목의 별이 푸른 눈동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아아아아-!

하얀 설원 위.

용의 비명과 함께 장식 없는 검이 깨어져 나갔다.

소년의 가능성을 품었던 뒷골목의 검은 마지막 순간 별이 되었다.

※※※※

비록 높디높은 밤하늘은 아니었어도 검은 빛나고 있었다.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했던 소년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뒷골목의 검 또한 별이 될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름은 바로 용살검(龍殺劍)이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1화 13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1)

하얀 설원 위 흩뿌려져 있는 푸른색의 핏자국들.

“······.”

블라드는 멍하니 눈밭 위에 앉아 푸르게 물든 설원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 위에 흩어져 있는 린드부름의 흔적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른 무게로 자신의 손에 들려져 있는 장식 없는 검의 감촉 또한 그랬다.

“수고했다.”

루트거는 허공에 검을 휘두르며 검에 붙어있는 피들을 떨구고는 블라드에게로 걸어왔다.

비록 소년이 치명상을 날리긴 했으나 고통에 겨워 날뛰던 용의 마무리를 지은 것은 루트거의 검이었다.

아직 블라드의 세계는 용의 비늘을 베어 낼 정도로 단단하지는 못했으니까.

“······영감님은 괜찮나요?”

“영감님? 아직도 이름을 안 알려주던?”

블라드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가만히 앉는 루트거의 온기를 느꼈다.

하얀 용의 숨결을 막아주었던 늙은 기사의 온기와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조만간 알려줄 것 같긴 하네.”

“······.”

가장 낮은 자격으로 순례를 떠난 늙은 기사는 자신의 몸을 던져 소년을 구해내었다.

비록 지금 같은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행동은 훌륭한 결과를 낳았다.

선(善)으로서 움직인 행동은 분명 나중에 되돌아오기 마련이었다.

“부러졌구나.”

루트거는 여전히 초점을 맺지 못하는 블라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머무는 곳은 산산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아 있는 장식 없는 검이었다.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루트거는 두서없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던 그때 눈발과 함께 흩날리던 소년의 눈물을 본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

초원의 모닥불 옆에서 검을 손질하던 소년의 모습을 루트거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정성스레 검을 닦던 블라드를 보며 소년이 얼마나 그 검을 아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은 거로 하나 마련해주마.”

뒷골목의 대장장이가 만든 검보다야 루트거가 수배한 장인이 만든 검이 더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가문의 후계자 중 한 명인 루트거가 하사하는 것이니 그 의미 또한 각별할 검일 것이다.

“······.”

그러나 다른 기사들이라면 좋아서 날뛸만한 말이었음에도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장식 없는 검의 손잡이를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루트거를 향했다.

“이런 녀석이 또 있을까요?”

날카롭지 않아도 좋다.

빛나거나 강인하지 않아도 좋다.

소년은 그저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담은 의미 있는 검을 가지고 싶을 뿐이었다.

뒷골목 진창 위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주었었던 장식 없는 검처럼 말이다.

“······글쎄다.”

소년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은 루트거는 그저 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그것까지는 내어줄 자신이 없었으니까.

흩날리는 눈보라.

쓰러져 있는 하얀 용.

북부를 괴롭혔던 린드부름은 토벌되었다.

그리고 그 용은 자신의 시체와 함께 또 하나의 칭호를 남겼다.

용살자(Dragon Slayer). 쇼아라의 블라드.

바예지드가 보유한 이번 세대 두 번째 용살자였으며.

그리고 부서져 내린 장식 없는 검이 그 칭호의 증언자였다.

※※※※

쇼아라의 집무실.

요제프가 창가 가득히 들어오는 햇빛을 조명 삼아 업무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애꾸눈의 사내가 문을 열고는 조용히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요제프 님.”

“무슨 일이지.”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을 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자야르는 들고 있던 서신을 건네주며 말했다.

“데어마르에서 온 편지입니다. 알리시아 남작이 직접 보내온 것입니다.”

“데어마르에서?”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던 요제프는 데어마르라는 말에 하던 업무에서 눈을 떼었다.

요제프에게 있어서 쇼아라의 시장직 만큼이나 데어마르에 관한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동안 가이다르 쪽에서 별다른 동향이 있었나?”

“적어도 군사적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자야르의 보고에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이 어수선한 시절에는 쥐고 있는 정보가 중요하다.

나의 정보는 최대한 감추고 상대의 정보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야만 안전과 성공을 보장할 수 있다.

“별다른 군사적인 위협은 없었는데 직접 편지를 보내온다라······.”

요제프는 근처에 있던 편지칼을 집어 들고는 알리시아가 보내온 봉투를 조심스레 뜯어내었다.

알리시아는 비록 영주로서의 경험은 모자랄지라도 모든 행동에 신중을 가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굳건한 동맹이었으나 사소한 부탁이나 요구로 스스로의 가치를 깎을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

자야르는 알리시아의 편지를 들고 있는 요제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점점 내려앉는 그의 눈썹이 사태가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요제프는 미묘한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블라드가 언제쯤 돌아오지?”

“앞으로 한 달은 더 걸릴 겁니다. 최소한 베른헴 요새까지는 나아갈 테니까요.”

아직 토벌대가 린드부름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요제프는 자야르의 말에 눈썹을 구겼다.

“시간이 모자라군.”

“그 녀석이 필요한 일입니까?”

요제프는 자야르의 물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애매하게 모자라겠어.”

똑.똑.똑.

책상을 두들기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댄 요제프는 편지를 보았을 때보다 배는 넘는 시간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용 토벌대는 임무를 마치면 스투르마로 돌아가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스투르마로 가야겠군.”

자야르는 갑작스레 스투르마로 돌아가겠다는 요제프의 말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생각을 결정지었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망설임은 시간만 낭비할 뿐 결과에 도움을 주지 못하니까.

“부탁하지.”

자야르가 스투르마로 올라갈 채비를 하기 위해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요제프는 두 손을 모아쥐고는 이마에 기댔다.

“이런 식으로 한단 말이지.”

비록 눈에 보이는 위협은 아니었으나 의도가 명확한 움직임이 있었다.

알리시아는 가이다르에서 보인 그 움직임에 놀라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그날의 실수가 최고의 수가 되었군.”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그만 소리죽여 웃고 말았다.

언제나 다음을 생각해야만 했던 요제프의 인생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이 다음의 행보를 결정한 적은 지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빛 머리의 고귀한 레이디에게 실수를 범했던 금발 소년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야 눈앞의 장면을 보며 황망해 했을 뿐인 요제프였으나 그 일이 지금 닥친 문제의 실마리가 되고 말았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준비를 시켜줘야 하겠어.”

그날 소년은 자신의 두 손으로 레이디의 손수건을 받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에 대한 의무와 명분을 가져갔다.

이제는 그 실수에 대해 보답을 해야 할 때다.

의자를 돌려 앉은 요제프는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정경, 굳건한 성문, 그리고 저 멀리에 있을 북부의 설원.

요제프가 바라보는 방향은 금발 소년이 있는 곳이었다.

※※※※

“이놈아. 무슨 송장이라도 옮기는 거냐? 내 머리 위로 뭔 놈의 천 쪼가리들을 이렇게 올려놓는 거야.”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서 투덜대고 있는 라문드를 보며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바람 들어오잖아요.”

“북부의 사내가 겨울바람을 두려워해서야 쓰나.”

“늙으면 관절에 바람이 숭숭 든다면서요.”

“······.”

삐걱거리는 달구지 위.

그 위에 누워 가죽과 천 조각들을 잔뜩 뒤집어쓴 라문드는 소년이 건네온 말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솔직히 지금 모습만 보면 말하는 송장이지 뭐예요.”

“이 나이에 남에게 들으면 민감해지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 법인데 말이지.”

블라드는 자신을 위해 린드부름의 브레스를 막아준 라문드에게 최선을 다해 간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챙겨주는 것도 그리고 챙김 받는 것에도 익숙지 않은 노인과 소년은 서로 투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용을 토벌하고 복귀하는 토벌대.

임시로 맡아놓은 베른헴 요새의 대장직을 원래의 기사에게 이양한 루트거는 토벌대를 이끌고 스투르마로 돌아가고 있었다.

용의 위협에 함께 힘을 합쳤던 강철공의 기사들과.

“이대로 같이 스투르마로 갈 생각은 없으신지? 귀한 곳에서 오신 손님들이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 같은데 말이오.”

그리고 명분을 앞세워 갑작스레 북부로 들이닥쳤던 용살 기사단과도 함께 말이다.

“······바예지드의 가주님을 직접 뵐 기회는 앞으로도 그리 흔치 않을 것 같긴 하군.”

루트거의 정중한 초대에 미르셰아는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과연 내가 그곳에 가서 들뜨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소.”

서로가 귀족의 예법과 대화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시퍼렇게 빛나는 경고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도 서로를 날카롭게 견제하는 북부와 중앙의 기사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헤어져야 하겠군.”

루트거가 내뱉는 명백한 축객령에 미르셰아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용살 기사단의 명분은 린드부름의 토벌.

그러나 소년의 활약으로 그 명분을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더는 주인의 허락 없이 북부의 땅에 서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야만인들은 어찌해드릴까. 우리가 처리해도 되겠소?”

“북부의 일은 북부에게 맡기고 가시오.”

아무리 야만인들이라 하더라도 용살 기사단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루트거의 단호한 거절에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던 아게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시다면.”

미르셰아와 루트거의 손짓에 따라 점점 갈라지는 두 개의 무리.

중앙의 기사들과 북부의 기사들 사이로 더는 좁힐 수 없는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용살자에게 인사 한번 하고 가도 되겠소?”

“······.”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

그렇기에 용살 기사단은 언제나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자들에게 경의와 친애를 보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미르셰아와 루트거가 서로 대적하는 사이만 아니었어도 둘의 관계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잠시라면.”

“고맙군.”

이것만큼은 하고 가야겠다는 미르셰아의 강한 의지에 루트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한 번의 인사를 막기 위해 그와 고개를 뻗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서슬 퍼런 북부의 기사들 사이를 천천히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미르셰아.

사방에서 뻗쳐오는 흉험한 기세와 눈빛들이 매서웠으나 미르셰아는 그런 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스스로에게 당당한 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바예지드의 종자, 쇼아라의 블라드.”

기사들을 헤치고 나아간 그곳에는 노인이 누워 있는 달구지를 가로막듯이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무언가의 기질을 엿본 미르셰아는 미소 지었다.

“꽤 하던데.”

“하고 싶다는 말이나 빨리하시지.”

자신을 억눌렀던 푸른 눈동자.

선의는 아니었을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블라드는 미르셰아에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만약 그의 방해만 아니었어도 라문드는 지금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을 것이다.

“나는 네가 반가운데 너는 그렇지 않나 보군.”

“반가울 이유는 없는데 반갑지 않을 이유는 많거든.”

비록 들고 있는 검은 없었으나 내뿜는 기세만큼은 벨 듯이 날카로웠다.

블라드는 입이 아닌 눈빛과 기세로써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

미르셰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블라드의 주위로 흐르는 기류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던 소년의 머리카락도 바람을 따라 근처를 맴돌던 눈송이들도 모두 멈추고 있었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소년은 미르셰아처럼 기세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이 좀 더 성숙해졌다는 증거였다.

“이거 좀 섭섭하군.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는 나의 의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던 모양이야.”

“지랄하지 마.”

자신의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년을 보며 미르셰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과연 이래야지.

어디서나 당당히 고개를 들 줄 알아야지.

너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몇 가지 질문만 하고 사라져주마.”

그러나 미르셰아에 비한다면 아직은 연약한 세계.

미르셰아는 발걸음 한 번으로 소년의 영역을 찢어발기고는 천천히 블라드의 앞으로 다가섰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푸른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비쳐질 정도로 가까이.

“첫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는 미르셰아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오직 소년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혹시 용을 볼 때마다 심장이 뛰어오르지 않나.”

“······!”

질문과 함께 천천히 기세를 내뿜는 미르셰아.

그때처럼 오직 용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기세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라는 거냐.”

“두 번째 질문.”

대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소년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미르셰아가 미소 지었다.

“린드부름의 피는 푸른색이었지.”

터질 듯이 뛰어오르는 심장 박동 속에서 가까스로 서 있던 블라드는 미르셰아의 다음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이윽고 들려온 그의 질문이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다.

“혹시 그 피를 보고는 목이 말라오지 않았나?”

“뭐?”

질문이 무언가 이상하다.

미르셰아에게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블라드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용의 피를 마시고 싶지 않았냐 묻는 거다.”

소년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웃고 있었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2화 16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2)

커다란 자물쇠, 단단한 쇠사슬.

마법적 술식과 함께 교회의 축문까지 새겨넣어 단단히 봉인된 두 개의 함.

그 함 앞에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보고해봐라.”

백발과 가까운 은색의 머리를 지닌 노년의 기사.

억세게 자란 수염과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은 마치 사자의 갈기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린드부름 토벌에 성공했습니다.”

함을 바라보고 있는 노년의 기사 뒤에는 볼코프가 절도 있는 자세로 서 있었다.

“다행히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마무리를 지었기에 용살 기사단에게 명분을 내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작은 목소리였으나 사방을 울리는 울림이 있었다.

남자는 목소리만으로도 강한 기세를 담아낼 줄 아는 경지에 올라있었다.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는 북부를 떠났습니다.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감시했습니다.”

“그렇군.”

볼코프의 보고를 들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함들을 바라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 공명하며 용의 기세를 퍼트렸던 녀석들이었건만 지금은 마치 잠에라도 빠진 듯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더는 이 녀석들이 날뛸 이유는 없겠군.”

하얀 용 린드부름은 죽었고 용살 기사단의 단장 미르셰아는 북부를 떠났다.

그 말은 더는 이 조각들이 북부에서 불러댈 용은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은 용들은 이제 북부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린드부름이 한 마리만 있는 것은 아닐겁니다. 공작님.”

“그렇겠지.”

강철공(鋼鐵公) 티무르 바라노프.

그는 자신의 옆에서 조언하는 마법사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도 북부의 설원 어딘가에는 숨을 죽이고 있을 어린 용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되찾게 될 때가 오면 또다시 이번 같은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조각 두 개를 한 번에 보관하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군.”

본래 북부에 보관되어 있던 함.

그리고 로마노프가 무너지면서 사제들이 구출하듯 옮겨왔던 서부의 함까지.

서로가 멀리 있을 때는 상관없었으나 가까이 붙어있으니 이런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조각들을 떨어뜨려 놓아야 해.”

서로 반응하는 두 개의 조각을 떨어뜨려놔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함을 맡아 줄 것인가.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필요한 만큼 오직 자기 생각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더 보고할 일이 있나?”

티무르의 말에 볼코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용살자가 탄생했습니다.”

눈이 가득 쌓인 설원 위에서 하얀 용을 뒤쫓았던 소년이 있었다.

가장 강하지는 않았으나 가장 빨랐던 소년은 자신이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름은?”

티무르는 갑작스레 등장한 존재를 들으며 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번 세대 바예지드 가문에서는 오직 루트거만이 주목할만한 대상이라 생각했었거늘.

“블라드라는 소년입니다. 아직은 종자에 불과하지만 가진바 가능성이 매우 빛나 보였습니다.”

“종자······.”

티무르는 볼코프의 보고를 듣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용의 조각이 담긴 함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이라.”

여태까지는 듣지 못했던 이름.

숨겨놓았던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튀어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린 것들은 언제나 예측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어린 녀석들은 금방 자라기 마련이지.”

무엇이 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시간은 흐르고 세대는 변한다.

티무르는 이제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새로운 용이 자신의 가능성을 깨닫기 전에 용의 조각들을 멀리 떨어뜨려 놔야만 했다.

그것이 맹약의 수호자인 자신이 할 일이었으니까.

※※※※

블라드는 식판을 내려놓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들리는 종자들의 식당.

딱히 변한 것은 없어 보였지만 지금 옆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종자들의 시선이 자신의 검에 쏠려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별일 없었냐?”

“별일은 없었지. 적어도 나한테는.”

포틀리는 오랜만에 보는 블라드를 마주하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서 그런지 통통하던 얼굴에 윤기까지 흐르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물어봐도 돼?”

스프에 숟가락을 가져다 대던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내는 환경이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타고난 소심한 성격만큼은 고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질문 하나에 소시지 하나.”

“그런데 그 검은 루트거 님이 주신 거 맞아?”

포틀리는 블라드의 제안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말을 건넸다.

블라드는 포틀리의 반응에 너무 쉽게 거래를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궁금해?”

“나뿐만 아니라 다들 궁금해할 걸?”

블라드는 포틀리의 말과 함께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다들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소년이 차고 있는 검을 정말 루트거가 주었는지 말이다.

“원래 있던 녀석은 임무 중에 깨 먹었으니까. 당연히 받아야지.”

린드부름을 잡기 위해 소년은 최선을 다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검을 깨부수고 말았다.

그리고 루트거는 무리의 책임자로서 그 일에 대해 보상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대단하네.”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포틀리와 주변의 종자들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차기 가주로써 가장 유력한 분이시잖아. 그런 분한테 검을 하사받았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일이지.”

주위의 사람들은 블라드가 루트거의 검을 받은 것을 단순히 보상의 의미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검은 루트거가 소년을 인정했다는 뜻이고 보증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혹시 너한테 선택지를 주신 건 아닐까?”

“······거기까지만 해.”

요제프의 종자였으나 루트거가 인정한 소년.

남들이 보았을 때는 분명 블라드가 복잡한 기류 속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블라드는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제프 님한테는 갚아야 할 것이 있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블라드는 옛일을 생각하며 가만히 빵을 뜯어 스프에 적셨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지금의 행동이 평생의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비록 지금의 모습이 빛나 보인다고 할지라도 블라드는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던 사람인지 잊지 않았다.

뒷골목의 더러운 진창이 아닌 바예지드라는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요제프라는 사람이 소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블라드는 그것에 대해 신의로써 갚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으므로.

“그런데 그거 알아?”

블라드의 안색이 영 불편한 것을 눈치 챈 포틀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뭐?”

포틀리의 노력을 알아챈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종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차갑게 무시했을테지만 블라드는 포틀리와 칸노르 가문에게 이래저래 신세 진 것들이 있었다.

당장 그레고리만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포틀리와 피가 섞인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바예지드의 기사님들이 전부 이곳으로 모이고 있대.”

“전부?”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이는 블라드의 반응에 포틀리는 안심이라도 한 듯 수저를 들며 말했다.

“적어도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모이나 봐.”

“갑자기 왜?”

“그건 나도 몰라.”

스투르마는 바예지드 가문의 주도(主都).

그런 곳으로 기사들이 모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포틀리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한 점이 엿보였다.

“임무 중이던 기사님들까지도 전부 모여들고 있다나 봐. 소문에 의하면 백작님께서 직접 소환하셨다고 하더라고. 혹시 뭐 아는 이야기 없어?”

포틀리는 계속해서 스투르마 안에 있었던 자신보다야 밖에서 활동했던 블라드가 소문에 더 민감하리라 생각했다.

“아니.”

그러나 블라드 또한 갑작스레 기사들을 소환하는 상황에 대해 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란 무력의 상징.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린드부름과 같은 또 다른 위협이 닥쳐온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닥쳐올 일에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년은 언제든지 검을 뽑아 들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식당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식기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종자들은 조용히 블라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블라드는 몰랐겠지만, 소년을 오랜만에 본 종자들은 알 수 있었다.

종자로써 함께했던 금발 소년은 이제 자신들이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행동 하나, 눈빛 하나에 깃든 존재감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소년은 더는 종자라는 위치에 머물기에는 너무나 커져 버렸다.

오직 스프에 집중하고 있는 소년만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

“이제 순례는 그만하려고 합니다.”

“결정하셨습니까?”

가주의 집무실.

라문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한 선택이기는 했으나 참으로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그 말과 함께 페테르는 라문드의 찻잔 옆에 놓인 동전을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낡다 못해 붉게 녹까지 슨 동전은 누군가에게 건네준다고 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물건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두카트는 블라드라는 소년에게 건네주실 생각입니까?”

“그 녀석은 자격이 있으니까요.”

라문드는 페테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첫 만남의 강렬함에서부터 이번 린드부름의 토벌까지.

바로 옆에서 블라드를 지켜봐 온 늙은 기사는 소년이 이 동전을 받을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명예의 값을 받았으니 블라드라는 아이의 어깨가 무겁겠군요.”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라문드는 이제 한시름 내려놓았다는 듯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로써 그리고 바예지드의 가신으로서도 모든 의무를 마무리 지은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귀한 귀족이며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이기도 한 페테르였으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앞에 있는 라문드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존경심을 표했다.

의무와 명예를 다한 늙은 기사는 이제 진정한 은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사들이 꿈에 그리는 그런 마무리였다.

“그래도 며칠간은 더 머물다 가시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라문드는 페테르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아는 페테르라는 사람은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은퇴를 하면 또 누군가는 새로이 등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테르의 말에 라문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는 듯 손바닥으로 무릎을 내려쳤다.

“가주께서도 인정하셨군요.”

“시기가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소년이 이곳에 온지는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예지드의 역사상 1년 만에 인정받은 종자는 없었다.

“이번 임명으로 최연소이자 최단기 기록이 깨지겠군요.”

“그런 전통 따위야 얼마든지 깨져도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전통을 중시하던 늙은 기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문드 님께 직접 그 말을 들으니 더욱 확신이 생기는군요.”

페테르는 그 말과 함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단단한 모습으로 도시를 지켜주던 스투르마의 성벽.

그 성벽의 위로 하얀 겨울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과 함께 바예지드로 찾아왔던 소년을 페테르는 기억하고 있었다.

스투르마로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깃발을 든 채.

모두가 새로운 명예가 탄생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3화 10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3)

“자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옥사나는 자신의 두 손에 머릿기름을 부어놓고는 양손을 비비며 소년에게 이리 오라 손짓했다.

“더 가까이 와야지.”

“······네.”

조용하지만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옥사나의 응접실.

하녀들은 소년의 갑옷을 반짝이게 닦고 옷과 망토를 다림질하느라 분주했지만, 오직 옥사나와 블라드만큼은 고요함 속에 서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예상보다는 빠르긴 하다만.”

옥사나는 보기만 해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의 머리를 단정히 쓸어넘겼다.

기름을 바른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발이 옥사나의 눈에도 꽤나 근사해 보였다.

“그만큼 힘들었겠지.”

“······.”

블라드는 옥사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기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다 이해한다는 듯 깊이 있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옥사나가 버겁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붉은 머리 소녀의 앞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말과는 달리 블라드는 몇 안 되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기억은 촘촘한 빗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금발이 근사하구나. 물려주신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할 만큼.”

‘그래도 칙칙한 내 머리카락 색보다 그 사람의 금발을 물려받아 다행이야.’

어머니와의 오래된 기억을 자극하는 옥사나의 말에 블라드는 무심코 차고 있던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

언제나 자신에게 위안을 주었던 장식 없는 검이 있던 자리.

그러나 그곳에는 낯설고 어색한 검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순간에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존재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소년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에서 같이 봐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됐다.”

블라드는 옥사나의 말과 함께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비쳐오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만큼이나 창밖으로 번져오는 오후의 햇살이 눈부셨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겠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며 뿌듯해하는 옥사나.

블라드는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며 옥사나의 응접실을 눈에 담았다.

소리와 냄새, 그리고 흐르는 공기의 촉감까지 옥사나의 응접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새겨넣은 블라드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소년이 별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등 뒤에 두고 온 존재들은 멀어져만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가끔씩 그들이 그리울 때마다 머릿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기억들을 펼치면 될 테니까.

바로 지금 새겨넣은 기억처럼.

※※※※

“떨리냐?”

“그다지요.”

자야르는 애써 태연한 척하는 블라드의 대답에 그저 입꼬리를 올렸을 뿐이었다.

“센 척은 적 앞에서나 해라. 애송아.”

“······진짠데요.”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야르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문.

데스웜의 사체를 들고 왔을 때 보았던 광경이었지만 그날의 소년은 저 앞으로 나아갈 자격이 없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신호하자 자야르는 기사들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섰다.

오늘만큼은 오직 블라드만을 위해 열릴 문.

그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소년을 위해 가르치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던 기사 자야르 밖에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의 종자 블라드! 그가 백작님의 명을 따라 기사들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자야르는 자신의 종자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큰소리로 외쳤다.

“부디 입장을 허락해주십시오!”

누구보다 당당하기에 커다랗고 누구보다 자랑스럽기에 떨림 없는 자야르의 외침.

크게 울려 퍼지는 그의 말에 굳게 닫혀 있는 문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라.”

목소리에 실려 은은히 풍겨오는 오러.

기사들의 세계가 소년의 입장을 허가했다.

끼이이익-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자야르의 손끝에서부터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자격의 유무로써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열리자 끊겨 있던 붉은색의 융단이 소년이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

블라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모든 것이 반짝이는 공간이었다.

양옆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

창문을 넘어 비치는 햇살이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 환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

블라드는 반짝이는 광경에서 잠시 눈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소년의 뒤를 지켜주고 밀어주었던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을 들 수 없기에 감히 문 앞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사람.

소년의 등 뒤에서 짙은 눈그늘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가봐라.”

평생을 넘지 못할 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요제프는 본인은 아니었을지라도, 자신의 검 하나를 저 안으로 밀어 넣는 데 성공했다.

포기하지 않았던 청년은 그 누구보다 미소 지을 자격이 충분할 것이다.

“축하한다.”

기사들의 전당으로 나아가는 블라드의 등 뒤로 자야르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평소와 다른 자야르의 목소리에 블라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었지만 애써 그것을 억눌렀다.

“바예지드의 종자 블라드는 내 앞으로 올라오라.”

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문을 연 기사들의 세계가 소년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소년을 지켜보고 있던 그 날의 모습과도 같은 눈빛으로.

“네.”

붉은색의 길은 명예의 길.

소년은 그 길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을 지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뒷골목의 진창을 넘어 자신이 꿈꿔왔던 그곳을 향해서.

“이곳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소년은 언제나 별을 꿈꾸었다.

자신의 발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 빠져들지언정 언제나 시선만큼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별에 다다랐다.

“영원히 변치 않을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너의 왼손에 들어라.”

황금색의 양피지.

블라드는 소드마스터의 맹세가 담겨 있는 양피지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저 꿈꾸었을 뿐인 빛나는 별을 드디어 자신의 손에 움켜쥔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무릎을 꿇고 맹세해라. 바예지드의 종자야.”

한쪽 무릎을 꿇은 소년의 어깨로 차가운 페테르의 검이 내려앉았다.

내려앉은 검의 차가움과 날카로움이 블라드의 정신을 명료하게 일깨우고 있었다.

“기사는 언제나 가능성을 품어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첫 번째 규율이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 이름을 만들어 준 기사들이 있었다.

비록 적으로 만난 사이였으나 그들은 소년이 품고 있던 가능성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것이 기사가 행해야 할 마땅한 의무였으니까.

“기사는 언제나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두 번째 규율이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기사 그레고리는 모든 것을 각오한 채 스스로를 불태웠다.

있어야 할 곳에 서 있다면 해야 할 순간에 서 있다면 망설이지 마라.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오직 스스로의 양심일지니.

“기사는 언제나 명예로운 길을 쫓아야 한다. 그것이 소드마스터가 정한 마지막 규율이다.”

기사는 언제나 명예로워야 하며 명예롭기 위해서는 언제나 위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위해.

“나의 검과 기사의 규율 앞에 맹세해라. 쇼아라의 블라드.”

소년은 언제나 장식 없는 검이라는 가능성을 바라보았었다.

진창에 같이 서 있었던 붉은 머리 소녀가 그것을 증언해 줄 것이다.

비록 뒷골목 진창의 인생이었을지라도 소년은 그것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왔다.

장미의 미소를 지키던 창녀들의 기사가 언제나 선을 지키려 노력했던 소년의 양심에 대해 증언해 줄 것이다.

“맹세합니다.”

그리고 소년은 별을 바라보았기에 위를 보았고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쉴 새 없이, 기어서라도.

자신도 몰랐던 규율이었으나 소년은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온 힘을 다해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지키겠노라 맹세합니다.”

그리고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지켜왔던 소드마스터의 마지막 규율은 그동안 함께 발버둥을 쳐왔던 장식 없는 검이 증언해 줄 것이다.

“바예지드의 주인인 나 페테르 바예지드가 명한다.”

소년의 맹세와 함께 이곳의 정당한 주인이 소리높여 선언했다.

“내 앞의 소년은 무릎을 꿇었을 때는 미천한 종자 블라드였으나 다시 일어섰을 때는.”

자신의 검 아래서 새로운 별이 탄생했노라고.

“당당한 기사 블라드로서 일어서리라.”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산 로지노가 축복한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자.

린드부름의 푸른 피가 외친 용살자.

그리고 이제는 바예지드가 인정한 기사인 쇼아라의 블라드.

그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수고했다.]

그 당당함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소년을 지켜봐 왔던 목소리가 인정해주었다.

소년이 왼손에 들고 있는 소드마스터의 맹세와 함께.

뿌리 없는 소년은 오늘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뿌리를 만들어내었다.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후손이 아닌 오직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 아래서.

이곳에 있는 모든 별들이 증언해 줄 뿌리였다.

※※※※

촛불이 일렁이는 어딘가의 집무실.

그곳의 주인인 중년의 남자가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뒤에 있는 드워프 놈들이 영 껄끄럽단 말이지.”

비대해 보이는 몸.

보기에도 굼떠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조금이라도 남자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두툼한 살집 속에 강인한 근육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귀족 놈들처럼 차근차근히 움직여 보기로 했다.”

접시에 놓인 호두를 손에 쥔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것들을 부서 내며 말을 이었다.

“유일한 하이날인 알리시아 남작에게는 아직 부군이 없다 하더군.”

“그렇습니다.”

고귀한 귀족이었음에도 쩝쩝거리는 소리를 거침없이 내는 남자.

그 어떤 것에도 눈치를 보지 않는 개척자이자 정복자.

“그래서야 쓰겠나. 이 험한 세상에 여자 혼자 몸으로 버티기는 힘들 거야.”

먹어도 먹어도 언제나 배고픈 그에게 또 하나의 먹잇감 하나가 눈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러니 네가 이번에 힘을 좀 써줘야겠다.”

“말씀하십시오. 백작님.”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

새로운 서부의 패자가 된 남자.

그가 내리는 명령에 촛불 밖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내 아들 녀석과 같이 데어마르로 가라. 그곳에서 정당한 명분을 얻어와.”

폭력과 전쟁이 아닌 명분을 통해 뻗어나가겠다는 지그문드의 말에 기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다르의 피가 섞인 그의 아들과 함께 라면 적어도 자그마한 명분 하나 정도는 챙겨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믿는다. 고딘.”

지그문드의 말에 고개를 든 기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이다르의 기사 고딘.

창밖에 비치는 푸른 달빛이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3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4화 31

푸른 눈동자의 기사 (1)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요제프는 재빨리 눈을 치켜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점점 명료해지는 시야 속에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페테르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약한 아들을 아버지로서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가주로서 따끔히 혼을 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피곤했던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페테르의 눈동자 속에서 슬그머니 아버지의 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피곤할 만도 할 것이다.

쇼아라에서 출발해 쉴 새 없이 스투르마로 뛰어 올라와서는 블라드를 기사로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으니.

블라드라는 소년이 바예지드 가문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단기만에 기사로 임명된 것은 요제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네가 바란 대로 그 아이의 격은 맞춰주었다.”

“감사합니다.”

요제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재빨리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록 페테르의 모습에 가려 밖의 풍경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창틀에 매달려 있는 눈들이 요제프에게 서늘함을 안겨주었다.

“조만간 북부의 영주들이 모두 모일 회의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굳이 창까지 바라보며 정신을 일깨울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페테르의 말이 요제프에게 있어 놀라움을 안겨주었으니까.

“대회의(大會議)입니까?”

“그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동되지 않았던 북부 대회의.

그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는 말에 요제프의 눈빛이 저절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북부의 모든 영주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곳곳에서 보이는 징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는 그런 낌새들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만큼 강하게 보안을 유지했거나 아니면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급박하게 진행했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데어마르의 영주를 앉히고 싶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한 마디.

요제프가 잠시 당황하며 입을 열지 못하자 페테르는 옆에 있던 술병을 잡아들고는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곧 맑은 갈색빛이 만드는 향기와 흘러내리는 소리만이 집무실에 가득했다.

“알리시아 남작도 알 거다. 데어마르가 더 이상은 북부와 중부 사이를 넘나들 수 없음을.”

평화로운 시절은 끝났다.

이제는 생존을 위해 서로가 뭉쳐야 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은 데어마르 같이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영지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녀가 저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네가 여태껏 애써온 것을 안다.”

페테르는 깊은 눈으로 마주 앉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영민하지만 약한 자신의 둘째 아들 요제프 바예지드.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기에 그만큼 처절하게 발버둥 쳐왔다는 것을 안다.

“최선을 다해 지원하마. 데어마르에 관해서 만큼은 네가 곧 바예지드다.”

그러니 자신 또한 그 발버둥에 보답해주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로서도 그리고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로서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올라왔으니 며칠 쉬다 가도록 해라. 너의 어머니가 만족할 만큼.”

대화가 끝났음을 눈치챈 요제프가 미묘한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나가자 페테르는 짧은 한숨과 함께 옆에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고민이로군······.”

무엇을 택할까 고민하는 것은 오직 데어마르만은 아닐 것이다.

페테르 또한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었으며 앞으로 몇 년 안에는 결정을 지어줘야 할 것이다.

귀족의 피는 냉정한 푸른색이어야 한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실로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의무와 책임이 얹혀 있었으니까.

페테르는 술을 가득 따라낸 잔을 들고는 일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리는 눈과 함께 겨울이 오고 있었다.

조언자 라그무스가 말한 것처럼 이번 겨울은 지난해보다 더 추워질 것만 같았다.

※※※※

윤기 나는 망토, 반짝이는 갑옷.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저택을 나선 블라드는 지금 스투르마의 성벽 위에 서 있었다.

“이런 풍경이었네요.”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황혼의 색깔이 스투르마의 성벽과 함께 북부의 평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너한테 한번은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었지.”

라문드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말했다.

언제나 누추한 차림새로 지내왔던 그였지만 지금의 모습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비록 갑옷까지는 아니었으나 기사들이 즐겨 입는 서코트(Surcoat)와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고개를 숙일 만큼 당당한 한 명의 기사다운 모습이었다.

“스투르마의 성벽은 피를 먹고 자라왔다.”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진중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적들의 피이자, 바예지드의 피.”

그곳에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소년을 마주하는 라문드가 있었다.

“그리고 너도 언젠가 때가 오면 마땅히 너의 피를 내놔야 할 거다.”

“······.”

라문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만 같은 블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피가 필요하다.

그리고 기사라는 존재들은 그때가 오면 기꺼이 자신들의 피를 내놓겠다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오래된 기사는 이제 막 기사가 된 소년에게 기사의 근본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영감님.”

“라문드다.”

이제야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는 가장 낮은 곳을 헤매던 자.

“앞으로는 라문드 경이라 불러라.”

미처 주워 담지 못한 명예들을 찾기 위해 늙은 몸뚱이를 이끌고 헤매었던 그는 이제 명예로운 마지막 한 닢만을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받아라.”

그리고 마침내 노인은 가장 낮은 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소년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던 마지막 동전을 건넴으로써.

“이게 뭔데요?”

“내가 터트린 너의 갑옷 값.”

네게 얻어먹었던 식사, 네게 빌렸던 여관의 숙박료.

그리고 네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가능성에 대한 대가.

그 모든 것들을 지불하는 한 닢의 두카트.

“겨우 이걸로요?”

“겨우 그걸로 되고말고.”

블라드는 형편없이 녹슬어 있는 동전을 보며 인상을 찌푸려대었지만 라문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보며 그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충분하고말고.”

노인은 그동안 소년에게 많은 것을 빚져 왔고 그것은 막돼먹은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철저한 의도에 따른 결과였었다.

그런 라문드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레 가장 낮은 자의 후원자가 되어있었던 소년은 이제야 꺼낸 낡은 동전에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딱히 뭐라 불만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이제 소년의 앞에 있는 노인은 이름 모를 영감님이 아닌 자신의 오랜 선배가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중에 한 번 내 장원으로 놀러 오시게.”

“그러게요. 모자란 값은 거기 가서 받으면 되겠네요.”

라문드는 조용히 투덜거리는 소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자네의 방문은 언제든지 환영하지. 블라드 경(卿).”

“······네?”

블라드는 자신을 경이라 칭하는 라문드를 보며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으니까.

“그동안 즐거웠네.”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미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장식 없는 검은 자신의 용도를 다했기에 소년과 헤어졌다.

늙은 기사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기에 이제 소년과 헤어지려 한다.

“······.”

자신에게 이별을 말하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는 그가 건네준 동전을 어루만질 뿐이었다.

소년에게 있어 아직 이별은 어색한 순간일 뿐이었으니까.

저물어가는 황혼이 스투르마의 성벽과 함께 두 사람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저녁노을만큼이나 라문드의 악수를 받는 블라드의 손도 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

푸른 눈동자의 사내가 저택을 걸어가고 있었다.

반짝이는 갑옷과 함께 흩날리는 금발을 보며 주위에 있던 하인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내가 걷고 있는 저택의 어느 곳 하나에도 빛이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방에 뚫려 있는 창들에서 비치는 햇빛과 그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조각상과 장식품들.

오래된 만큼 고풍스러운 멋을 자랑하는 장식품들은 주인의 안목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아버지.”

당당한 발걸음으로 로비로 걸어들어온 미르셰아가 공손한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는 홀 가장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왔느냐.”

마지막 숨을 토하는 황혼빛이 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비추었다.

마치 바짝 말라버린 고목 나무와도 같은 손이 창밖으로 비치는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보고해봐라.”

쇳소리가 나듯 물기 하나 없이 갈라지는 목소리에서 그의 나이와 기력이 엿보였다.

미르셰아가 아버지라 칭한 남자는 무거워진 세월을 감당하지 못해 그저 얹혀 있듯 간신히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위에서 들려오는 힘겨운 목소리에 미르셰아는 송구스럽다는 듯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북부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하얀 용 린드부름.

자신의 가능성을 깨달았기에 용의 조각들이 꾀어내었던 북부의 용은 용살 기사단이 아닌 바예지드의 기사들에 의해 토벌되고 말았다.

“······야만인 놈들. 제 주제를 모르고.”

북부의 사내들을 야만인이라 한데 뭉쳐 표현한 노인은 실망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앙상한 손가락을 들어 팔걸이를 두들겨 대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북부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노인의 영혼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미르셰아는 자신의 실패가 아버지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실패한 데에는 커다란 변수가 있었으며 그 변수는 분명 지금 실망하고 있는 노인에게 큰 기쁨을 안겨다 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 북부에서 반가운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반가운 소년?”

바짝 메마른 노인은 갑작스러운 미르셰아의 보고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무거운 세월에 의해 육체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탈색되었지만, 지니고 있는 푸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

“혹시 북부에 들리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곳에서 아직 눈뜨지 못한 어린 용을 발견했습니다.”

미르셰아의 말에 노인은 눈을 깊이 감았다.

마치 지나간 옛 기억을 헤집듯 감고 있는 눈꺼풀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북부만 가보았겠느냐. 나는 평생을 걸쳐 이 세상 모든 곳을 눈에 담아온 사람이다.”

씨앗이란 무엇이 될지 모르는 가능성의 존재.

그 가능성들을 뿌리기 위해 노인은 지난 세월 동안 대륙 곳곳을 돌아다녀 왔다.

그것은 노인의 신념이자 소원이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 아이를 보고 심장이 울렸더냐?”

“그렇습니다.”

“색깔은 어떠하더냐?”

노인의 말에 미르셰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드라굴리아 가문의 피가 전해주는 색깔이 그곳에 있었다.

“저희와 같습니다.”

“······그래.”

미르셰아의 말에 메마른 노인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와 함께 간신히 지평선에 매달려 있던 황혼이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래도 용의 조각들이 부르지 않은 것을 보니 너의 말처럼 아직 눈을 뜨지는 못한 모양이구나.”

어느새 촉촉해진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저택 곳곳으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햇빛에 비치던 저택과는 또 다른 모습.

고풍스럽던 조각상들은 어두운 그림자가 스며들자 불길해 보일 뿐이었고 멋진 풍경이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누가 보아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겨대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언제나 고되며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괴롭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 일을 반복하고는 하지.”

마침내 어둠이 가득 내려앉은 로비 안.

그곳 가장 높은 곳에서 여태껏 보지 못한 사내가 일어섰다.

“나 또한 그래왔다.”

풍성한 금발.

명료한 푸른 눈.

그리고 당당한 풍채와 분위기를 가진 중년의 사내.

어둠이 주는 물기를 빨아들인 남자가 로비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 아이를 한번 보고 싶구나.”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

그곳에서도 중심에 있는 저택.

용혈공(龍血公) 드라굴리아 공작이 기거한다는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5화 8

푸른 눈동자의 기사 (2)

“왜 아직도 오지 않죠?”

알리시아는 머리를 감싸 쥐고는 책상 위에 엎드려서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편지를 보낸 지가 오늘로써 한 달째인데 도착은커녕 기별조차 없어요.”

가이다르 백작가에서 불쾌한 연락을 보내온 지 오늘로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미 그쪽에서는 사람을 꾸려 출발했을 테니 조만간 이곳으로 도착하게 될 것이다.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보시죠.”

노기사 던칸은 책상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알리시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가오는 위협이 있으니 혼란스러울 법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야 말로 자신과 같은 가신들이 주군을 바로잡아줘야 할 때라는 것을 던칸은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일에 겸허한 자세로 대처하실 수 있습니다.”

“······그냥 확 그쪽으로 시집가 버릴까.”

입술을 한껏 내민 채 투덜대듯 말하던 알리시아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허탈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렇습니다.”

가이다르 백작인 지그문드는 알리시아에게 자신의 장남과 혼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편지를 보내왔다.

가이다르 가문이라면 요근래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치는 가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데어마르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곳이었으니 알리시아의 입장에서도 한 번 정도는 깊이 고민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편지 안에 하이날 가문에 대한 존중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말 지그문드가 진심으로 가이다르와 하이날의 결합을 원했다면 이런 통보 같은 느낌의 청혼장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편지 안에 쓰여있는 감언이설들은 달콤하였으나 정작 하이날의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았고 지그문드 백작이 그동안 해왔던 거침없던 전쟁은 그의 탐욕스러운 성정을 잘 보여준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지그문드 백작이 보낸 제안은 마셔서는 안 되는 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주위가 온통 도둑놈들뿐이네요.”

“······알리시아 님.”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바예지드 또한 단순한 호의로 자신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힘없는 자에게 조건 없는 우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저희에게도 시간만 있다면 스스로 일어설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힘을 주려는 던칸의 말에 책상 위에 힘없이 엎어져 있던 유일한 하이날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래요. 해볼 때까지는 해봐야죠.”

힘이 없을 때 웅크리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손에 쥔 것이 없다면 어떻게든 빌려와야 하며 알리시아는 그 값을 충분히 치러줄 용의가 있었다.

“그런데 기사도 아니고 종자 한 명 빌려달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야?”

그러나 그녀가 바예지드에게 요청했던 소년은 여전히 연락 하나 없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냥 종자 한 명일 뿐인데.”

그냥 평범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날의 결투에서 하이날의 명예를 지켜주었던 소년.

그리고 자신의 손수건을 받아든 두 손으로 부모님의 묘비를 닦아준 소년이었다.

“알리시아 님. 지금 가이다르 가문에서 온 사람들이 영지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모두가 데어마르라는 영지에 대해 검은 속내를 드러내고 있을 때, 오직 순수한 의무로써 알리시아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이 있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알리시아는 지금도 그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

데어마르의 입구로 들어서는 남자들이 있었다.

대략 잡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이는 사내들은 모두가 훌륭한 무장을 하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촌동네로군.”

일행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무 조용해.”

정리되지 않은 짙은 눈썹, 넓은 어깨.

그리고 웃고 있음에도 호전적으로 보이는 인상.

기세를 전혀 정돈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흘리고 있는 청년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영지가 마뜩잖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데어마르는 원래 이런 곳입니다. 전쟁보다는 외교로, 상공업보다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영지죠.”

“재미없다는 뜻이군.”

우락부락한 몸을 가진 남자는 옆에서 들려오는 데어마르에 대한 설명에 흥미가 식었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댔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지. 고딘?”

“인사는 하셔야죠.”

“인사만 하면 되는 거지?”

“관심 있는 척도 하시고, 이것저것 이야기도 나눠보시고.”

“쓰읍.”

가이다르 가문의 장자 이슈트반.

그는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거침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하기 싫은 것을 거부하는데에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그런 귀찮은 일은 하기 싫은데.”

귀찮다는 생각만 해도 열이 뻗쳐오르는지 갑작스레 사나워지는 이슈트반의 기세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타고난 피에 대한 의무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세를 정면에서 받아내고 있는 고딘은 그저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언제나 웃는듯한 얼굴 뒤에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는 기사.

그렇기에 마주 보고 웃어 줄 수 없는 그런 남자.

“······알았다.”

자신의 기세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고딘의 모습을 보며 이슈트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쉴 뿐이었다.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고딘을 붙여 보냈다는 것은 아버지가 이번 일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고딘은 이슈트반이라는 사람이 오직 억누르는 방법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근방에는 감히 견주어 볼 만한 귀족 여성이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서부의 핏줄.

지그문드의 성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슈트반은 고딘이 대놓고 물린 당근에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이 조금 생기는 군.”

지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임무였으나 그래도 흥미가 동하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슈트반의 시야 끝으로 하이날 가문의 깃발을 매단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

“오오.”

저 위에 앉아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보며 이슈트반이 처음 내뱉은 말은 감탄사였다.

“소문으로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한낱 말로써는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지금 제 앞에 있군요.”

“······.”

우락부락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꽤 세련된 말을 주워섬기는 이슈트반이었으나 알리시아는 이미 그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히 한 영지의 주인을 대하는 데 있어 이슈트반의 태도가 너무나 가벼웠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저는 가이다르 가문의 이슈트반입니다.”

“······환영합니다. 가이다르의 이슈트반 님.”

감히 남작이라는 공식된 명칭이 있음에도 한낱 레이디라는 칭호로 알리시아를 부른 이슈트반.

그녀 옆에 서 있던 던칸은 날카로운 기세를 보내며 이슈트반을 압박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슈트반은 싱글싱글 웃어넘길 뿐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리 온다고 기별을 주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애초에 기세로써 압박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알리시아 하이날은 이곳 데어마르의 온당한 주인.

주인은 주인으로서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들 의무가 있었다.

“이번 청혼에 대한 사전적인 조율도 필요했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조금은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만.”

그녀의 머리 색은 물빛이었으나 혀끝에서 흘러나오는 말의 색깔은 차디찬 푸른색이었다.

알리시아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귀족의 색깔을 입는 데 성공했다.

“가이다르가 저에게 보여주신 태도가 조금은 아쉽군요.”

알리시아의 말처럼 편지 하나 보내놓는다고 해서 귀족 간의 결혼이나 약혼이 성립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이다르는 알리시아의 의중은 듣지조차 않은 채 이미 당사자인 이슈트반을 데어마르로 보낸 상황이었으니 이것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할지라도 알리시아에 대한 무례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 백작님께서는 만남 속에서 시작되는 인연도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귀족 가문 간의 만남이 이렇게 성급하게 진행된다는 말입니까?”

능글거리는 고딘의 말에 발끈한 던칸은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마디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늙은 기사에게 있어 알리시아라는 주군은 자신의 딸과도 다름없이 아끼는 존재였으니까.

“너무 그러지 마시지요. 백작님께서 알리시아 님을 얼마나 아끼셨으면 누구에게 뺏길세라 직접 아드님을 보내셨겠습니까.”

그러나 함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온 것은 분명 의도가 있는 행동일 것이며 그 의도는 나름의 명분을 쌓기 위함일 것이다.

“예의와 절차가 어느 정도 무시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이슈트반 님은 가이다르 가문의 장자이시자 후계자이신 분. 이미 존재만으로 시답지 않은 절차 따위는 대신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고딘의 말처럼 이 자리에 가문의 장자를 보낸 것은 지그문드 백작이 큰 의미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알리시아가 이 자리에서 그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가이다르 가문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십시오. 저희는 좋은 소식을 들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슈트반의 능글맞은 웃음을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의 치마를 꽉 움켜쥐고 말았다.

청혼이라는 까다롭고도 어려운 명분을 들고 온 불청객들.

노리는 것도 명백하며 하고자 하는 일은 불쾌하기 그지없는 사내들을 보며 알리시아는 최선을 다해 인내하려 노력했다.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일단은 마련된 거처에서 쉬고······.”

“쉬는 것보다는 알리시아 님과 돈독한 담소를 먼저 나누고 싶습니다만.”

개척자들은 거침이 없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가지고 싶다 말한다.

“먼저 부모님들께 인사라도 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요.”

그리고 가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제는 죽고 없는 부모까지 들먹거리는 이슈트반을 보며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딜 감히······.”

인내는 누구에게나 귀중한 덕목이었으나 그것 또한 선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선을 넘었음에도 인내할 뿐이라면 그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데어마르의 군주, 유일한 하이날.

그녀가 참아서는 안 되는 모욕을 앞에 두고 분노를 토해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예지드의 기사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알리시아가 인내로써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균형이 깨어지려는 순간, 집사가 큰소리를 외치며 로비를 가로질러 왔다.

감히 고용인의 입장에서 주군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집사는 이미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또한 해야만 했다.

“지금 막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등 뒤에서 쏘아져 오는 기사들의 날카로운 기세에 집사는 창백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삐질거리고 있었으나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든 애쓰고 있었다.

“들라 해라!”

만약을 대비하고 있던 던칸의 준비는 성공했고 가련한 집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

던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데어마르의 로비가 스스로 문을 열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있었다.

북부 특유의 털 달린 망토.

그들이 온 곳과 같이 날카롭고 차가운 기세를 풍기는 북부의 기사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이날 남작님.”

그리고 그들 가장 앞에 서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애꾸눈의 기사.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데어마르의 주인을 뵙습니다.”

서부의 기사들과는 달리 북부의 기사들은 예의로써 데어마르의 주인을 대하고 있었다.

“······.”

알리시아는 홀로 고개 숙이지 않은 채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같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홀로 그녀의 명예를 들고 결투장으로 들어섰던 소년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 있는 기사들과는 조금은 다른 자격으로 로비 앞에 선 소년은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당신의 부름에 답하기 위해 지금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레이디 알리시아.”

이슈트반은 알리시아를 레이디라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나 지금 로비에 들어선 소년은 그녀를 레이디라 부를 자격이 있었다.

그녀가 허락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환영합니다. 바예지드의 기사님들.”

알리시아의 끄덕임과 함께 로비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이제는 입장해야 할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 있었기에.

명분을 가지러 온 자들과 명분을 손에 쥐고 온 자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2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6화 26

푸른 눈동자의 기사 (3)

기사.

뒷골목 진창을 구르던 소년이라도 울림을 느낄 수 있는 단어.

평생을 기어가도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은 기사라는 세계에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있었다.

달빛 아래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았던 그는 푸른색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가 휘두르던 세계에 의해 둥지를 잃었다.

그의 손끝에서 공허하게 흔들리던 호르헤의 눈빛.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너절한 고기 조각들.

구원이자 모욕인 조각들을 소년에게 쏟아내었던 푸른 달빛의 기사는 말했었다.

‘기사는 언제나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 간다.’

소드마스터의 세 번째 규율.

기사는 언제나 명예로워야 한다.

그렇기에 언제나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 가야 한다.

“······저는 당신의 손수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레이디 알리시아.”

그리고 이제는 소년도 그 규율을 안다.

진창을 발버둥 치며 기어 왔던 소년의 발끝은 드디어 푸른 달빛에 닿았으니까.

이제는 당당히 정당한 대가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소년이 고귀한 레이디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대가를 위해 제가 가진 기사의 명예를 걸겠습니다.”

꿈꿔왔던 세계, 동경했던 세계.

그리고 반드시 부수겠노라 맹세했던 세계.

푸른 달빛의 기사가 보는 앞에서 블라드는 조용히 외쳤다.

드디어 당신의 앞에 서 있을 자격을 갖췄노라고.

“바예지드가 보증한 저의 이름과 함께 말입니다.”

바예지드의 기사, 쇼아라의 블라드.

“······.”

“······.”

푸른색과 푸른색이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렁이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는 그의 세계를 닮았다.

※※※※

“블라드. 쇼아라의 블라드라······.”

알리시아가 서부에서 온 손님들을 위해 내어준 응접실.

그곳에서 이슈트반은 의자에 걸터앉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일이 쉽게 진행될 줄 알았더니만 바예지드에서 예상치 못한 수 하나를 가지고 왔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슈트반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고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그러나 오늘만큼은 정돈된 미소가 아닌 무언가 흐트러진 표정으로 웃음 짓고 있는 사내였다.

“아는 사이인가?”

평소의 이슈트반이라면 북부의 기사들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핏줄과 함께 쥐고 태어난 그의 대범한 성격은 사소한 존재들은 금세 기억 밖으로 밀어내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북부에서 왔다던 애송이 녀석은 달랐다.

“굉장히 건방지던데.”

“······그렇습니까.”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마주치지 않았다.

블라드의 눈동자는 이슈트반이 아닌 그의 뒤에 서 있던 고딘만을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자신을 가뿐히 무시해버리는 블라드의 모습에 이슈트반은 호기심과 함께 신선한 모욕감을 느꼈다.

“······안다면 아는 사이라 할 수 있죠.”

고딘은 이슈트반의 물음에 대답은 했으나 여전히 생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이 보내온 강렬한 눈빛은 지금도 고딘을 장미의 미소 속에서 헤매게 만들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만.”

그날, 소년을 살려주었던 것은 단순한 동정심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소년이 지닌 가능성은 빛났던 것이며 또한 응원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비록 나중에 후환이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대견할 지경이군.’

피 묻은 바닥을 기어 오던 소년.

자신의 등 뒤에서 큰소리로 울부짖던 소년.

그러나 이제 그때의 소년은 없다.

오늘 고딘의 눈앞에 있던 소년은 바예지드의 기사,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그놈이 그놈일 줄이야.’

고딘은 자신을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를 떠올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지만 보고로만 들어왔던 쇼아라의 블라드는 정말 자신이 알던 블라드였다.

“이제 어쩔 거야.”

“······.”

퉁명스러운 이슈트반의 물음에 고딘이 눈을 떴다.

이제야 생각 속에서 빠져나온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재빨리 다음에 취해야 할 행동을 계산해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고딘이라는 기사는 주군의 명령만 있다면 소중했던 옛 인연도 잘라올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비록 아까운 가능성이었으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면 주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법칙입니다.”

소년은 고귀한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들고 있었고 그것이 이슈트반의 거짓된 청혼을 막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그 아이에게 결투를 신청하십시오.”

“결투를?”

오직 자격 있는 자들만이 올라설 수 있는 명예로운 결투장.

소년은 이제 기사가 되었으니 누군가의 명예를 빌리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이름으로 그곳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은 가끔씩 고귀한 레이디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싸우고는 하는 법이지 않습니까.”

고딘은 이슈트반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평소와도 같은 표정이었으며 서부의 패자인 지그문드가 신뢰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좋아.”

이슈트반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고딘의 미소를 보며 따라 웃었다.

서부는 가지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슈트반은 자신을 무시하던 푸른 눈동자를 떠올리며 사납게 웃음 지었다.

※※※※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예지드의 기사님들.”

창밖으로 야트막한 언덕 위에 뿌리내린 나무가 보이는 곳.

손님의 자격으로 알리시아의 집무실로 들어온 자야르와 블라드는 그녀의 인사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요제프 님께서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동맹이 굳건함을 증명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분께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야겠군요.”

알리시아는 자야르의 대답을 듣고는 믿음직스럽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는 이번 임무를 위해 자야르와 블라드뿐만 아니라 바예지드에서도 상위를 다투는 기사들을 선별해 하이날로 보냈다.

점점 급박해지는 정세 속에서 데어마르라는 땅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여기 요제프 님이 보내시는 서한입니다.”

알리시아는 요제프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들었다.

“비록 블라드 경이 알리시아 님의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가이다르에서 보내온 청혼을 거절하기 쉽지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요제프는 알리시아가 보낸 편지를 받고는 쇼아라에서의 업무도 치워둔 채 재빨리 스투르마로 올라갔다.

그것은 예전부터 준비해두었던 소년에 대한 준비를 앞당기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이번 일을 위해 조금 더 확실한 수를 준비하기 위한 움직임이기도 했다.

“이것은?”

“읽어보시죠.”

알리시아는 자야르의 말을 듣고는 바예지드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봉투를 뜯어내었다.

그 안에 있는 편지에 적혀 있는 요제프의 전언.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방법도 있었군요.”

“데어마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편지를 다 읽어 내린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아까와는 다른 빛을 지닌 채 바예지드의 기사들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더 차갑고 가라앉아 있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 더 귀족다워진 그런 눈빛이었다.

“저 또한 옥사나 님과 같은 피를 이은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충분히 가능한 방법입니다.”

알리시아의 옆에 서 있던 던칸은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편지를 들어 읽어보았다.

‘······이런.’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역시 데어마르를 순수한 호의로 도와주는 존재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던칸은 편지에 적힌 글귀 속에서 요제프의 의도를 읽어내고는 침통한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놓았다.

여느 귀족들이 그렇듯 알리시아 하이날은 선대에서부터 행해온 혼인 관계를 통해 여러 고귀한 핏줄들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중에서도 알리시아는 그녀의 할머니를 통해 오스카르 가문의 피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피는 요제프의 어머니인 옥사나의 가문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바예지드 백작 부인께서 저의 대모(代母)가 되어주신다면 분명 지금의 청혼은 가뿐히 치워낼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

알리시아가 가진 문제는 부모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가이다르가 들고 온 청혼 문제에 곧바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으나 여기서 옥사나가 그녀의 대모가 되어준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정말 이슈트반이 알리시아와의 혼인을 원한다면 옥사나의 허락을 받아와야 할 테니까 말이다.

“감히 제가 백작 부인께 부담을 지워드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럽군요.”

“옥사나 님께서는 알리시아 님을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대모 혹은 대부.

교회의 공증을 통해 종교적 형태로 얽매이게 되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

핏줄이 위협받는 최악의 경우 아직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아이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법이 되겠지만 어디서나 책임에는 그만큼의 권한이 따르게 되는 법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하나요?”

“아닙니다. 저희 또한 이 일이 알리시아님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유일한 하이날인 알리시아.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후견인이 될 수 있는 옥사나 바예지드.

만약 알리시아가 요제프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하이날에 대한 바예지드의 간섭은 확고한 명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블라드 경.”

순결한 처녀에게 청혼을 빌미 삼아 접근하는 가이다르.

부모 없는 고아에게 보호를 미끼 삼는 바예지드.

힘없는 알리시아와 데어마르에게 있어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이제 몇 없었다.

“어떤가요? 지금 맡은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눈앞에 소년 또한 바예지드의 기사.

그렇기에 자신보다는 바예지드에게 더 충성할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요제프보다는 조금은 더 믿을만할 것이다.

“알리시아 님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겁니다. 그렇게 명령받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알리시아는 흔들림 없이 말하는 블라드의 눈동자를 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소년이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그날의 결투에서 보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꾸밈없이 신실한 자세를 가진 소년이라는 것도 가문의 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모습을 보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너무 감사해요. 블라드 경.”

알리시아는 미소와 함께 블라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제 손수건을 보여주세요. 그동안 들고 다녔으니 나름의 손질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소년이 자신의 손수건을 고이 보관해왔을 것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년이 넘는 기간 동안 들고 다녔을 테니 사람들 앞에 꺼내놓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손질해 놓는 것이 맞을 터였다.

“네.”

알리시아는 정말 소중히 보관해왔다는 듯, 흉갑 깊은 곳에 손을 가져다 대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지금도 데어마르를 둘러싼 두 가문 사이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그녀였지만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조금은 치유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과연 소년이 꺼내든 손수건은 고이 접힌 채 자신이 내주었던 모습 그대로 잘 보관되어 있었다.

같이 딸려 나온 또 하나의 손수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블라드는 딸려 나온 또 한 장의 손수건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집어 들려 했으나 그를 제지하는 알리시아의 손이 더 빨랐다.

때로는 기사보다 여인의 움직임이 더 빠를 때도 있는 법이었다.

“이건 제가 준 손수건은 아닌 것 같은데?”

마치 블라드에게 여기 좀 보라는 듯 처음 보는 손수건을 집어 드는 알리시아.

그 끔찍한 모습에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본 던칸의 목덜미가 붉어졌고 자야르는 자그마한 한탄과 함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말았다.

“별 건 아니고 제 친구가 준 손수건입니다. 실제로 제가 쓰는 손수건이고 하고······.”

블라드는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말이 너저분한 변명같이 들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창관에 간 것을 부인에게 들킨 남자들의 변명과도 비슷한 느낌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

당당하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애초에 사고로 받은 것이지 서로 마음을 확인할 용도로 주고받은 게 아니지 않나?

“그런 별거 아닌 손수건······입니다?”

당당한 속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작아져만 가는 블라드의 목소리.

비록 옥사나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아왔었으나 아직 내밀한 귀족의 세계를 모르는 소년은 그저 멀뚱한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레이디······제미나.”

소년은 별거 아닌 손수건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고운 실로 이름을 새겨놓은 손수건이 그런 물건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알리시아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오늘 그녀는 너무나 힘들었다.

그렇기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잠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여자인가 봐요?”

“네.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왔거든요.”

“아하.”

고개를 끄덕이는 알리시아를 보며 따라 웃음 짓던 블라드.

‘조용히 해라.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린다.’

그러나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자야르의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야르의 갑작스러운 경고에 주위를 둘러보는 소년.

과장된 미소의 여남작.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의 노기사.

창백해진 표정의 자야르.

주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

비록 귀족 세계에 대한 지식은 깊지 않았으나 눈치는 있었던 소년은 깨닫고 말았다.

지금 또 뭔가를 저질러버렸다는 것을.

지금의 실수만큼은 저 밖에서 나무를 부둥켜안고 있는 흰 뱀도 어찌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7화 13

자격 있기에 허락 받은 자 (1)

“나는 멍청한 놈이 싫다.”

알리시아에 의해 특별히 마련된 바예지드의 집무실.

그곳에 앉아 있던 애꾸눈의 기사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너는 네가 본 녀석 중 제일 멍청한 녀석이야.”

이제는 기사가 된 블라드.

그러나 자야르의 앞에서는 언제나 모자란 종자일 수밖에 없는 소년이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요제프 님이 애써 해놓으신 준비들을 단 한 장의 손수건으로 그르쳐놓은 너의 멍청함은 이미 재능의 영역에 달했다고 본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분노어린 질책을 읊조리는 자야르의 앞에서 블라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반성하는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그게.’

이번에는 정말 잘하고 싶었다.

기사가 된 후 처음 맡은 일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자신이 중심이 되는 임무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언제나 의지에 따라서만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되는 일인지 몰랐거든요.”

제미나가 준 손수건도 알리시아가 준 손수건도 모두가 소중했기에 품 안에 넣어놓았던 것뿐이었다.

너무 깊숙이 보관해놓았기에 두 장의 손수건이 착 달라붙고 만 것은 블라드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간에 블라드는 알리시아에게 또 하나의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 셈이었다.

“······나가봐.”

“죄송합니다.”

자야르는 더 이상 소년을 후려치지 않았다.

올해 겨울만 지나면 이제 블라드도 18세가 된다.

이제는 소년이 아닌 어른이 되는 시기였고 가진바 칭호도 기사가 되었으니 자야르로서도 블라드에게 나름의 대우를 해줘야만 했다.

“······.”

그러나 정작 대우받고 있는 블라드는 지금의 모습이 영 어색한지 나가라는 말에도 눈치를 보며 서 있었을 뿐이었다.

“왜 안 나가? 예전처럼 얻어맞고 싶나?”

차라리 그게 편할 것 같다.

블라드는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며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그냥 맞으면 안 될까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흐아.”

자야르는 블라드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으며 침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처음에 주워왔을 때부터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예측불허한 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꺼져. 제발.”

안대를 어루만지며 으르렁거리는 자야르를 보고서는 블라드는 재빨리 집무실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초록색의 세계를 지닌 기사는 블라드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좀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뭘 그렇게들 봐요.”

자야르의 살기 어린 축객령에 서둘러 집무실 밖으로 나온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같이 임무를 나온 바예지드의 기사들이었다.

“대단하신 양반인데 얼굴이라도 봐놔야지.”

“말로만 듣던 북부의 탕아 아니신가. 이것 참 존경합니다.”

“한 손에 여자 둘을 들고 다니다니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풍모라 할 수 있지.”

실실거리며 웃으면서 블라드의 멍청한 행동을 비웃는 기사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멸시가 아닌 나름의 애정이 깃든 행동이었다.

블라드는 그동안 루트거와의 임무를 통해 바예지드의 기사들과 안면을 터놓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언제나 발악하듯 최선을 다해왔던 소년의 모습을 봐왔던 사람들이었고 이제는 기사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막내가 된 블라드에게 어떠한 벽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놀림은 그저 막내 기사를 골려 먹기 위해 하는 것일 뿐이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요.”

“아이고, 그러면 우리가 자리를 비켜줘야 하나.”

“이번에 들어온 막내는 시작부터 남다르네.”

자신을 향해 낄낄거리는 선배 기사들을 보며 블라드는 시근거리며 응접실 밖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자야르의 분노와 선배들의 비웃음을 피해 밖으로 나온 블라드는 복도를 걸으며 마구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자신이 보기에도 할 말이 없는 바보 같은 실수였으니 뭐라 대꾸할만한 방법도 없었다.

“······아.”

순간 복도를 걸어 나가던 블라드의 머릿속으로 익숙했던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기시감 같이 떠오른 기억들은 블라드의 발걸음을 천천히 멈추고 있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서나 비슷하나 보네.”

이제는 기억 속에서밖에 없을 그때의 장미의 미소.

마치 지금의 기사들과 같은 모습으로 소년을 비웃었던 남자들이 있었다.

여전히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버레이와 그때의 선배들이 떠들던 소리 같았다.

천천히 복도 벽에 등을 기댄 블라드는 호르헤가 주었던 단검의 손잡이를 만지작대었다.

그리움이란 기억을 나누며 해소되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나눌만한 대상이 몇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복도 가운데서 오직 소년만이 기억을 곱씹으며 서 있었다.

※※※※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요.”

마치 화가 난 듯 입술을 앙 다물고 있는 알리시아였지만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봐 왔던 던칸은 그녀가 진실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알리시아가 보이는 태도는 그저 자그마한 투정일 뿐이었다.

“아무리 상식이 없어도 그렇지 다른 여자가 준 손수건이랑 내 것이랑 같이 보관할 수 있죠? 남자들은 다 그렇게 해요?”

“······그래도 손수건은 말끔하더군요.”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알리시아는 던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거야 당연한 거죠.”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저 나이대에 소년에게 있어서는요.”

던칸은 헛기침을 한번 내뱉은 뒤 입을 열었다.

어젯밤 자신을 찾아온 애꾸눈의 기사가 소년을 대신해 깊게 고개 숙였기 때문에 하는 말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맡아왔던 임무들이 거칠었다 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잘 보관했다는 것은 분명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뜻이겠죠.”

“······.”

알리시아는 마치 계속해보라는 듯 침묵하며 던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서류는 아까부터 넘어가지 않은 채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무지함에서 비롯된 실수였습니다. 어찌 보면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꿍꿍이는 없어 보이니 다행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기사라는 존재는 언제나 위로 올라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이며 그런 사람들의 입장에서 알리시아의 손수건은 분명 신분 상승의 기회나 다름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녀를 향해 군침을 흘리는 사내들이 곳곳에 있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블라드라는 소년이 한 실수는 나름 기특해 보일 면이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블라드를 위한 던칸의 변명에 알리시아는 그제야 물고 있던 입술을 풀었다.

던칸의 말을 들으니 굳이 자신이 화를 낼 이유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 보시죠.”

던칸은 천천히 냉정을 되찾는 알리시아를 보며 창밖으로 향해 눈짓을 보냈다.

“저런 행동 하나하나에 바예지드가 소년을 아끼는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

알리시아는 던칸의 고갯짓 따라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덕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네요.”

오랫동안 보았던 풍경 속에 소년의 금발이 휘날리고 있었지만 알리시아는 그 모습에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만큼 블라드의 모습은 진실되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저건 누구죠?”

평온함 속에서 기도하는 블라드를 보고 있던 알리시아 시야로 순간 무언가 낯선 모습이 맺히기 시작했다.

언덕 저 아래서부터 마치 자신의 뒷마당인 양 천천히 뒷짐을 지며 올라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처음 보는 뒷모습이 그가 하이날의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알리시아보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 던칸이 서둘러 종을 집어 들고는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시종! 시종 밖에 있느냐!”

급박하게 울리는 던칸의 종소리를 들으며 알리시아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소년은 이곳의 주인에게 언덕 위로 올라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사람은 그녀의 허락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서 자야르 경에게 알려라!”

지금 저택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위험한 존재.

데어마르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허락받지 않은 서부의 기사.

가이다르의 이슈트반.

그가 기도하고 있는 소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서럽다.

스스로를 빛내고 있어도 그 빛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슬플 것이다.

그 처지를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흰 뱀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목소리의 세계를 통해 소년과 눈이 마주친 뱀이 웃고 있었다.

“여전히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어요?”

[글쎄다.]

목소리를 위해 다시금 데어마르의 언덕으로 올라왔건만 여전히 특별히 떠오르는 기억은 없는 모양이었다.

“누아르를 보고서도 몇 개 떠오른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내가 정령들과 연관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블라드의 수고가 영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는 조각처럼 떠오른 기억 속에서 자신이 정령이나 잊혀진 옛것들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집착이 무언가에 대한 의무인지 아니면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누가 온다.]

목소리의 경고와 함께 마치 여기 좀 보라는 듯 당당히 흘려대는 기세를 느끼며 블라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록 뒤돌아보지는 않았으나 누구인지는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 묘지가 있군.”

기도를 마친 척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이 가진 자신감만큼이나 우락부락한 몸집을 지닌 서부의 기사가 서 있었다.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묻혀있나 보지?”

이슈트반 가이다르.

지그문드 백작의 장남이자 알리시아의 청혼자인 사람.

그리고 푸른 달빛의 기사가 데려온 사람.

“이곳은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걸 보니 나도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을 마주 보며 이슈트반이 미소 지었다.

“이제야 나를 보는군.”

“······.”

“그때는 고딘만 쳐다보고 있어서 말이야. 내가 마치 투명해진 느낌이었달까.”

아무렇지도 않게 너스레를 떨며 블라드를 스쳐 지나간 이슈트반은 근처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네가 알리시아 남작의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허락받지 않았으나 당당한 남자.

이슈트반은 저 아래에 보이는 저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고딘이 말하기를 지금 그 손수건을 포기한다면 두 번째 육포의 값으로 쳐준다고 하던데.”

“······!”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너저분한 고기 조각들.

그것을 통해 목숨을 구원받았던 소년이 있었다.

정당하지 않은 대가였기에 비굴하게 살아남을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슈트반은 무심한 눈빛과 함께 블라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놔라.”

마치 자신의 것을 달라는 듯 당당한 자세.

원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가지고 싶다면 빼앗아서라도 손에 넣는다.

오직 탐욕스러운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서부의 세계가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가져가 봐.”

그런 이슈트반의 요구에 블라드는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대답을 얹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북부는 물러서지 않는다.

스투르마의 붉게 물든 성벽이 증언하듯 손에 쥔 것은 내어주지 않는다.

북부의 피가 흐르는 소년은 무례하기 그지없는 서부의 요구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하긴, 말을 안 들을 거라고 하긴 하더군.”

서부는 가지기 위해 이곳에 왔고 북부는 막아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결국, 둘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자그마한 한숨과 함께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 이슈트반.

하이날의 나무 아래서 북부와 서부의 기사가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별수 없지.”

스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슈트반의 검이 검집에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북부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

마치 이빨을 세우듯 날카로운 톱니들이 가득한 이슈트반의 대검.

“나는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북부의 애송아.”

이슈트반의 검이 블라드를 향해 늘어섰다.

“알리시아의 손수건을 걸고 결투를 신청한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이긴 자만이 모든 것을 가져가는 명예로운 결투.

“다시 해.”

그러나 블라드는 이슈트반의 요청에 팔짱을 낄 뿐 그의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

“다시 하라고.”

피 묻은 바닥을 기며 푸른 달빛의 기사를 향해 외치던 소년의 울부짖음은 공허했다.

왜냐면 그날의 소년은 자격이 없었으므로.

“나는 북부의 애송이가 아니야.”

그러나 오늘의 소년은 달랐다.

지금의 자격을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쳐온 소년은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이자,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인 사람이다.”

솟구치는 소년의 기세에 맞추어 나무 아래서 하얀 뱀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허락받은 사람이었고 데어마르의 주인과 수호신이 그것을 인정했다.

“결투를 신청하고 싶다면 내 이름을 똑바로 불러라 서부의 양아치야.”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의 기세 정도는 억누를 수 있다 생각한 이슈트반이었으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의 기세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축복을 받아 하얗게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

그와 동시에 마치 저 위에 있는 나무만큼이나 거대해진 소년의 존재감.

누구보다 자격 있으며 그렇기에 허락받은 기사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8화 11

자격 있기에 허락 받은 자 (2)

고딘은 블라드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기질은 예전에 겪어봐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고딘을 씁쓸하게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배려가 거절당했다는 것보다도 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거짓된 거품들 때문이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컸을 녀석인데.”

지금 고딘이 촛불에 의지해 확인하고 있는 보고서에는 블라드가 여태껏 쌓아 올린 성과들이 적혀져 있었다.

도시의 조직 하나를 궤멸시켰다.

흑마법사의 주구를 몰아내었다.

데스웜을 몰아오고 린드부름은 아예 직접 처단했다.

“바예지드가 다급하긴 했나 보군.”

고딘은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는 옆에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고 어떠한 기준이 상식이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너무 띄워 올렸어.”

고딘이 블라드를 처음 보았을 때 블라드는 분명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마지막의 휘두름은 그럴싸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표출이었을 뿐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용살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만큼의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만들어진 가능성이라······.”

북부에서 뛰어난 명성을 지니고 있는 바예지드 기사단이었으나 이번 시대만큼은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블라드를 위해 평가를 부풀려 줄 만한 동기는 어느 정도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오러를 깨우쳤다는 것만큼은 대견하긴 하지.”

그리고 바예지드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분명 소년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오러의 발현이라는 것이 가르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어린 나이에 오러를 뽑아낸 블라드를 보고 바예지드가 흥분한 것은 충분히 이해될만한 일이었다.

“······.”

어떻게든 데려왔어야 했나.

비록 인연의 방향이 맞지 않아 내버려 두고 왔으나 잘만 회유했다면 어쩌면 지금쯤은 가이다르의 가능성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쉽군.”

살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에 서게 되기 마련이고 그 당시에는 최선을 다해 선택했다 하더라도 돌이켜보면 후회가 남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고딘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소년의 빛나는 가능성이 가려지는 것만 같아 입이 썼다.

※※※※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의 시선이 마구 흐트러지고 있었다.

“다시 또 그럴 건가요?”

“죄송합니다. 많이 반성했습니다.”

그녀의 기세도 기세였지만 동그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음식이 향긋한 냄새와 먹음직스러운 자태로 소년을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세컨대 다시는 알리시아 님의 손수건을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겁니다.”

“좋아요.”

블라드의 진심 어린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알리시아는 방금과는 다르게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 번의 실수 정도는 넘어갈 줄도 알아야겠죠.”

마치 먹이로 유인한듯한 모양새가 되었으나 어쨌거나 블라드에게 확실히 답을 얻어내었으니 됐다.

레이디 제미나에 대해서는 다시 또 말할 기회가 있겠지.

“좋아요. 다들 드시죠.”

알리시아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앞에 있는 식기들을 집어 들었다.

손님의 자격으로 초대된 바예지드의 기사들 모두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훌륭한데. 이정도의 만찬은 얼마 보지 못했어.”

“이번에 레몬의 작황이 엄청났다고 하더니만.”

옆에서 들려오는 선배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블라드는 눈앞에 음식들에 집중할 뿐이었다.

블라드는 예전 데어마르에 왔을 때 이곳의 식단에 대해 불평한 적이 있었다.

요제프는 마음에 들어 했었지만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데어마르의 채식 문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제 레몬 소스를 곁들인 통돼지 바비큐예요.”

‘오오······.’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군침 도는 고기들일 뿐이었다.

성장기 소년에게 있어 단백질이 필요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많이 드세요.”

블라드는 큼지막하게 썰려있는 고기를 한입 베어 물고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상등급의 고기야 칸노르 가문에서 실컷 먹어봤지만 데어마르에서 맛보는 바비큐는 그때와는 차원이 다른 맛을 선보이고 있었다.

[모든 요리의 정점은 소스에서 나오는 법이지.]

이정도야 많이 먹어봤다는 듯 으쓱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블라드는 입안에 감도는 향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앞에 있는 고기들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소년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 알리시아가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결 준비는 잘 되어가십니까?”

던칸은 자신의 아가씨가 보이는 태도가 민망한지 옆에 앉아있는 자야르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 요청하고 싶은 사항들이 있었습니다.”

자야르 또한 블라드 앞에 노골적으로 쏠려있는 음식들을 보며 민망해하던 참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짊어질 대전사를 위해 배려하는 것은 알겠지만 이것은 조금 도를 지나친 것이 아닐까.

“말씀만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며칠 후에 있을 결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소년은 든든하게 먹어둬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은 깊이 고심해야 한다.

이슈트반이라는 기사는 서부의 패자 가이다르 가문의 장남이었으며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 실력을 갈고닦아 온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자야르는 블라드의 승리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고 있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데어마르는 블라드 경을 위해 모든 것을 지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방금 던칸의 말처럼 데어마르는 소년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만약 소년이 지게 된다면 알리시아는 가이다르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인 바예지드의 간섭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데어마르에 있는 모두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명분을 위해, 자립을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지금의 만찬은 그때를 대비하는 폭풍전야와 같은 것임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넉넉한 웃음소리와 함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

결투의 아침.

알리시아가 마련해 놓은 결투장으로 들어선 이슈트반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껄끄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보통 결투는 로비나 전당에서 치러지지 않나.”

“알리시아 남작의 특별 요청이 있었습니다.”

고딘의 말처럼 알리시아는 이번의 결투를 로비나 홀이 아닌 야외에서 치르는 것을 원했다.

청혼에 관련된 일이니만큼 땅에 묻혀 있을 자신의 부모님들도 함께 봐주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그래?”

굳이 납득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었으나 이슈트반은 여전히 꺼림칙할 뿐이었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짧게 다듬어진 잔디의 감촉.

자그마한 자갈마저도 치워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들판.

“아침에 비가 왔었나?”

“아닙니다.”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았음에도 촉촉이 젖어있는 들판의 잔디들.

빠르게 움직이기에는 편하지만, 자신처럼 강하게 디딤발을 짚어야 하는 검사들에게 있어서는 좋지 못한 환경이었다.

“이정도는 감수하셔야 합니다.”

“애를 쓰는군.”

전투에 앞서 전장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것은 지휘관의 기본적인 자세 중 하나.

소년을 위해 어떻게든 자그마한 변수들을 쌓아 올렸을 애꾸눈의 기사를 바라보며 이슈트반이 사나운 미소를 흘렸다.

“준비됐나?”

이슈트반의 의미심장한 미소에도 그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던 자야르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기선제압을 위해 지금도 블라드를 향해 쏟아지고 있는 가이다르 기사들의 무형의 기세.

그리고 소년을 위해 대신 그 기세를 틀어막아 주고 있는 선배들의 뒤로 블라드가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네.”

흔들림 없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자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잘 참아주었다.

너의 원수라 할 수 있는 자들 앞에서도 끝없이 인내했던 것은 요제프 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했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좋아.”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소년의 인내에 보답을 해줘야 할 차례다.

자야르가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던칸에게 보내자 알리시아가 초대한 사제가 결투장으로 올라왔다.

그는 지난 계승권에 관련된 결투에서 소년이 스스로의 세계를 꽃피우는 것을 보았던 사제였다.

“양 측의 대결자들은 올라오시오!”

안면 있는 사제.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전장.

“양측의 참관인들도 올라오시오!”

그리고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규칙.

사제의 지시에 따라 이슈트반과 블라드의 뒤로 두 명의 기사가 결투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과 애꾸눈의 기사 자야르.

가이다르와 바예지드를 대표하는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번 결투는 오러 사용이 가능하오.”

이슈트반과의 순수한 검술 대결은 필패라 생각한 자야르는 변수를 만들기 위해 오러를 선택했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세계의 굳건한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생사를 결정짓는 결투가 아니기에 두 분 중 누구라도 대결자들이 위험에 처하면 난입할 수 있소.”

오러를 사용하는 만큼 그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이며 지금 올라와 있는 두 명의 기사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는 참관인이 될 것이다.

“지금의 규칙에 동의하시오?”

두 기사의 끄덕임을 본 사제는 이제 결투를 위한 마지막 준비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앞으로.”

참관인들이 내려가고 오직 결투의 당사자들만이 남아있는 결투장.

그곳에서 블라드와 이슈트반은 서로를 마주하며 서 있었다.

“손수건은 잘 가지고 있나? 괜한 절차를 거쳐서 손에 쥐기는 귀찮아서 말이지.”

“······.”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있는 사제.

이윽고 다가올 결투의 시작을 기다리며 블라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손수건이라 치면 그럼 너는 뭘 줄 거냐.”

약한 개는 짖기 마련이다.

위협적인 태도로써 자신의 공포를 감추고 상대방의 위협을 주기 위해.

그러나 자신보다 약한 것이 분명한 눈앞의 소년은 짖기는커녕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들고 있는 검 정도는 받아야 하려나.”

“이 개자식이······.”

빼앗는 것이 익숙한 것은 오직 서부의 기질만은 아니었다.

빼앗기는 것이 곧 죽음인 뒷골목에서 살아온 소년 또한 이슈트반에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면 균형이 맞을 것 같네.”

갖고 싶어서 빼앗아 왔다.

살기 위해서 빼앗아 왔다.

빼앗는 것에 익숙한 두 짐승들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오늘의 태양 아래 신께서 보고 계시오!”

사제의 신호와 함께 결투가 시작되었다.

‘······저건 뭐야.’

당장이라도 뛰쳐 들어 블라드를 곤죽 내버리고 싶었던 이슈트반이었으나 블라드가 취하고 있는 생소한 자세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쉽사리 검을 뻗을 수 없고 뻗는다고 해도 닿기 힘든 그런 자세였다.

한 손으로 검을 들고는 최대한 몸을 옆으로 세운 자세.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의 피격면적만을 허용하는 소년의 자세는 분명 레이피어를 사용하는 검사들이 주로 취하는 자세였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보라는 것이 곧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딘은 소년에 대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었음에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지만, 요제프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정보를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만들어냈다.

요제프는 알리시아의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이슈트반과의 결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널 위해 준비한 거거든.”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알리시아가 애가 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데어마르에 도착했다.

그것은 소년이 준비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

결투를 지켜보던 고딘은 블라드가 취하는 꺼림칙한 자세를 보고는 소년의 뒤에 서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준비하고 있었군.’

결투장 밖에서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가 이슈트반과 같은 대검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9화 14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

요제프는 져도 좋다고 말했다.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청년은 이미 블라드가 패배할 경우의 수를 대비하고 있었으니까.소년을 위해 기꺼이 대련할 기회를 내어준 바예지드의 기사들도 블라드가 이슈트반을 꺾을 가능성은 높게 보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아왔을 백작가의 자제를 겨우 자신 따위가 이기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인 자야르도, 명예를 맡긴 알리시아도.

그리고 결투장 밖에서 그때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고딘조차도.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덤벼봐.”

나라는 사람도 기대를 받아보고 싶다.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보자.”

이제는 나도 스스로의 명예를 짊어진 사람이니까.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쳐온 몸부림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으니까.

※※※※

까앙-!

깡-!

검과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 오르는 불꽃.

결투를 지켜보던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좋아. 잘하고 있어.”

“그대로만 가면 된다. 그대로만.”

촉박한 시간에 때려 넣듯 전수한 대검 파훼법이었다.

그럼에도 블라드는 자신들이 가르친 대로 이슈트반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악물고서는.

길이를 이용한 찌르기는 걷어내고 무게를 이용한 내려치기는 피해낸다.

실전에서는 사용하기 힘들 극단적인 자세였던 만큼 블라드가 띄운 승부수는 확실하게 이슈트반을 갉아먹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그리하여 블라드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검 특유의 흉폭한 범위를 가진 횡베기 뿐이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터엉-!

‘뭔 놈의!’

고딘이 말하기를 눈앞의 금발 애송이는 검을 든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했다.

그러나 지금 부리고 있는 반격기는 가진 바 경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고급 기술에 행하는 기교였다.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테냐!”

공격 따위는 포기했다는 듯 철저하게 방어 일변도로 결투에 임하는 블라드.

이슈트반도 언제까지나 블라드가 이렇게 피하고 막아낼 수 없을 것임을 알지만 문제는 그때가 되면 자신 또한 체력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대검이라는 무기는 다른 병기들에 비해서 단단하고 무거운 만큼 소유자로 하여금 훨씬 더 많은 체력의 부담을 짊어지우는 무기였으니까.

‘빌어먹을!’

이슈트반은 지금 마치 진흙탕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예지드가 조성한 전장, 미리 준비해 온 듯한 블라드의 자세, 그리고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질척해지는 땅바닥까지.

들이쉬는 공기까지 무거우니, 마치 데어마르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방해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천한 곳에서 기어 올라와서 그런가? 하는 방식도 더럽기 짝이 없군!”

그런 이유들로 인해 이슈트반은 지금 조급해하고 있었다.

소년은 져도 되지만 이슈트반은 져서는 안 된다.

아니, 무명의 기사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로 이미 수치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널 낳아준 어미도 지금 네 녀석의 추레한 모습을 보면 눈을 돌리고 말 거다!”

이제는 부모까지 거들먹거리며 도발을 일삼는 이슈트반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것마저 참을 거냐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는 이슈트반이었지만 방금의 도발은 뒷골목에서는 인사나 다름없는 말일뿐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설사 이곳에 어머니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 자신을 보며 손가락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불리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분명 블라드는 승리를 향해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

순간, 번뜩이는 은빛의 궤적.

날카롭게 벼려놓은 자세에서 화살처럼 뻗어 나온 일격이 이슈트반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여태껏 보여주지 않았던 움직임이었기에 쉽사리 반응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이 자식······.”

“들어오라며?”

뺨을 따라 주르륵 흐르는 한 줄기의 핏방울.

이슈트반의 볼에 그토록 무시하던 천한 기사의 검 끝이 스쳐 지나갔다.

“······.”

참관인의 자격으로 결투장 밖에 서 있던 고딘도 방금의 일격을 보고는 잠시 움찔거렸을 정도였다.

속도를 추구한 만큼 얕았으나 그만큼 허를 찌른 공격이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군.’

고딘은 이슈트반과 블라드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블라드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를 노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간 소년이 쌓아온 업적들은 모두가 누군가의 손을 빌렸기에 가능한 것들이었고 모두가 나눠야 하는 명예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사라는 작위를 통해 스스로의 명예를 짊어진 자로써 블라드는 오직 자신만의 승리를 가지고 싶어 했다.

“가이다르 백작님이 지금 너의 모습을 보시면 기뻐서 날뛰시겠는데?”

“······!”

도발이란 허무한 메아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실존하는 위협으로 다가와야 하며 상대방에게 굴욕으로 닿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지금 블라드가 하는 것처럼.

“이, 이 자식이······.”

마치 도발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다시 여유롭게 자세를 잡는 블라드를 보며 이슈트반이 눈가에 새빨간 핏발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런.”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이슈트반의 검 끝에서부터 오러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러를 끌어올린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행위.

그만큼의 정신력을 소모하게 되며 소모된 정신력은 체력을 갉아먹게 된다.

고딘은 소년의 의도에 훌륭하게 말려든 이슈트반을 보고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잘 왔다만.”

변화하는 전장의 공기를 느낀 자야르는 재빨리 검 손잡이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지금부터 잘 버텨야 할 텐데.”

참관인의 자격으로 서 있던 자야르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눈앞의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며 언제든지 전장으로 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어라! 이 천한 놈아!”

[온다!]

대검술의 진정한 무서움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강맹한 일격보다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격에 있다.

공수전환이 여의치 않은 무기인 만큼 한 번의 출수로 반드시 결과를 얻어야 하는 무기.

그렇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공격만이 대검의 약점을 상쇄시킬 수 있으니까.

“으윽!”

쾅! 콰앙! 쾅!

사방에서 땅이 울리고 곳곳에 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한 진동에 블라드는 균형을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분노와 함께 휘둘러지는 이슈트반의 오러를 따라 들판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형편없이 잘려 나간 잔디와 흙들이 비처럼 내리며 블라드의 시야를 가려대었다.

[그래도 봐야 한다!]

어지러워지는 블라드의 발놀림을 따라 기다렸다는 듯 이슈트반의 분노어린 검이 짓쳐 들고 있었다.

‘젠장!’

유도했던 상황이었고 의도했던 결과였지만 막상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과연 백작가의 지원을 받아 견실히 쌓아 올린 이슈트반의 세계는 아직 블라드가 범접하기에 힘들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냉철함을 유지하고 있던 평소였다면 말이다.

‘앞으로!’

계속 피해 다닌다면 비길 수는 있을 것이다.

설사 진다고 할지라도 얻을 수 있는 나름의 성과도 있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피하고 도망치고 다음을 기약하는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저 앞에 자신의 둥지를 부순 기사가 있다.

그날 자신은 장미의 미소에서 도망쳤고 쇼아라에서 달아났지만 더는 저 남자 앞에서 뒷걸음질 치고 싶지 않았다.

“으아아!”

똑똑히 봐라.

이제는 당당한 자격이 있는 나를.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자격이었겠으나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투쟁의 산물.

지금의 검 한번을 뻗어내기 위해 소년은 여태껏 멈춰본 적 없었다.

‘보인다!’

보이는 작은 틈이 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연격의 흐름 속에서도 이슈트반에게 닿을 수 있는 작은 틈이.

[왼쪽!]

순간, 어깨로 닿아오는 묵직한 일격.

“큭!”

주인의 의지를 따라 아이들의 숨결을 머금은 갑옷이 필사적으로 이슈트반의 궤적을 비틀어내었다.

신의 뜻을 따르기에 누구보다 당당했던 성기사에게서 훔쳐 온 갑주술이었다.

“어딜 감히!”

길이가 긴 만큼 짧은 거리에는 대항하기 힘든 대검의 특성.

믿기지 않을 속도와 기이한 움직임으로 자신의 검을 벗겨낸 블라드의 돌격이었으나 이슈트반은 이미 약점에 대비할 몇몇 방도들을 익혀두고 있었다.

“커억!”

강하고 단단하다.

핏줄로써 타고난 이슈트반의 강인한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무기였다.

갑작스레 블라드의 복부를 파고드는 이슈트반의 발차기.

게다가 어느새 자유로워진 이슈트반의 왼손이 블라드의 안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로 되겠냐!”

“크억!”

그러나 블라드는 보란 듯 자신의 이마로 이슈트반의 일격을 받아낼 뿐이었다.

“이런 미친!”

라문드의 빛나던 이마는 분명 소년의 기억에 강렬히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는 은퇴해야 하는 늙은 기사는 다음을 책임질 바예지드의 기사에게 가르침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이다!]

한순간, 오직 지금의 한순간.

틈을 노린 단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소년을 최선을 다했다.

고귀한 자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며 부유한 자는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려야 하는 뒷골목의 인생은 한 번 의 기회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바로 지금의 소년처럼.

“죽어! 개자식아!”

이제는 볼 필요가 없다.

바로 앞에 상대가 있으니.

시야를 포기할 수 없기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자신의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세계가 뿜어져 나왔다.

고귀한 세계. 준비된 세계.

그렇기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슈트반의 세계.

그 끝자락으로 뒷골목에서 기어 올라온 소년의 검 끝이 닿았다.

하얗게 터져 나오는 자신의 세계와 함께.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무에 얽혀있는 하얀 뱀이 소년의 세계와 함께 큰 소리를 내질렀다.

※※※※

“······나는, 나는 정당하지?”

이슈트반의 목덜미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파고들어 갔다면 아마 이슈트반은 절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지?”

모두가 침묵하는 결투의 마지막.

소년의 검은 기어이 고귀한 자의 목 끝에 닿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소년을 검을 막아 세웠다.

“대답해-!”

“······그래.”

이제야 너에게 닿았다.

푸른 달빛의 기사.

그토록 염원했던 달빛 아래서의 검이 드디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놔. 너희도.”

그날 나는 나의 둥지를 잃었다.

너저분한 고기 조각으로 나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니 이제는 나도 무언가를 받아 가야 하겠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를 가져간다. 가이다르의 고딘.”

정당한 명분, 정당한 자격.

그리고 정당한 결과.

소년은 지금의 결과를 얻기 위해 지금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러니 승리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쯤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는 이번 결투의 대가로 이슈트반의 검을 요구한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 간다.

그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달빛의 기사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과 목 끝에 닿은 서늘함에 떨고 있는 귀족.

소년의 검을 막고 있는 푸른 달빛의 기사와 소년을 감싸고 있는 애꾸눈의 기사.

당사자와 참관인들의 검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결투장 위에서 신의 뜻을 받드는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승, 승자는 바예지드의 기사. 쇼아라의 블라드요!”

내리쬐는 태양 아래 소년의 금발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듯 오늘만큼은 신도 소년의 승리를 눈여겨 봐주실 것이다.

소년의 검이 드디어 저 위에 있는 세계에 닿은 순간이었으니까.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0화 16

이제는 이름 값을 해라 (1)

요제프는 눈을 좋아했다.

몸이 약한 그에게 있어 추운 날씨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으나 그래도 하얗게 내리는 눈만큼은 좋아했던 이유가 있었다.

“······복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

어릴 적 요제프는 눈에 덮여 고요해진 도시를 보며 안심하고는 했었다.

그때만큼은 혼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약한 몸을 가졌기에 남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홀로 주저앉아 있다는 현실은 언제나 요제프를 힘들게 했었다.

“요제프 님. 저 보르단입니다.”

“들어와라.”

밖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상념에서 깨어난 요제프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데어마르에서 온 전보입니다.”

자신만큼이나 건강을 챙겨야 할 것 같은 뚱뚱한 기사가 전보를 든 채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그의 두툼한 손아귀에 들린 저 작은 쪽지 안에 지금껏 요제프가 기다렸던 결과가 적혀있을 것이다.

“다오.”

“네.”

요제프는 차분한 눈빛으로 보르단이 건네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시켰지만, 소년에게는 버거운 임무였을 것이다.

부디 최악의 결과만은 피했으면 좋겠는데.

“······.”

마법을 통해 보내는 전보였기에 많은 글자를 적어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자야르가 보낸 전보에는 이렇다 할 설명 없이 오직 결과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렇기에 사전설명 없이 단 몇 줄만이 적혀있는 전보는 요제프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이다르의 이슈트반이 쉬운 상대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보르단은 요제프의 어이없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반문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실력만으로 따진다면 현존하는 기사들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힘들겠으나 이슈트반은 이제야 스물 중반의 나이.

그만한 나이에 이슈트반만큼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은 서부에 몇 없었으니 보르단이 보이는 반응이 딱히 과장되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보르단의 말을 들은 요제프는 책상 위에 쪽지를 던져놓고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웃고 싶은데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웃음이었다.

“마법사를 불러와라. 자야르에게 답장을 해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최악은 준비했으나 최선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여태껏 우울함에서 비롯된 그의 심려 깊은 계획들은 소년이 만들어내는 파장과 전혀 다른 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만 보라고 준비시켜놨더니.”

요제프는 소년의 기사 데뷔전의 상대로 서부의 이슈트반을 선택했다.

그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강자라면 설사 블라드가 진다고 하더라도 흠은 아닐 것이며 혹시라도 그를 고전에 빠뜨리기라도 한다면 블라드에 대한 평가는 크게 올라갈 테니까.

거기에 손수건까지 잃어버리게 된다면 알리시아는 별수 없이 바예지드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계산까지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전부 다시 생각해야겠군.”

요제프는 복잡해지는 생각에 차가운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밖에서부터 사각거리며 땅으로 떨어지는 함박눈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반갑지 않은 눈이었다.

※※※※

커다란 응접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기사들.

비록 무기는 검집에 집어넣었으나 두 무리 사이에서 마주치는 눈빛만큼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기사들의 반응이 조금은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털 망토를 뒤집어쓴 북부의 기사들은 묘한 웃음을.

깃을 잔뜩 세워둔 서부의 기사들은 이를 악물고 있다는 것을.

승자는 웃고 패자는 고개를 떨군다.

북부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막내가 가져다준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그렇게 응접실 안에 서 있었다.

“검만큼은 돌려받았으면 합니다만.”

언제나 미소 짓고 있던 고딘은 지금만큼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유연한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고딘이었으나 지금만큼 치욕적인 상황을 마주한 적은 몇 없었다.

“으음.”

고딘의 말을 들은 자야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애써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그래도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이슈트반은 지그문드 백작의 장남.

돌려서 말하고 있었으나 고딘은 그런 남자의 검을 가져가게 되어 불어올 후폭풍을 당할 수 있겠냐고 묻고 있었다.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감당할 문제지 않겠소.”

자야르는 팔짱을 끼고는 고딘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전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그의 모습에서 바예지드가 가이다르에게 취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그래도 일개 결투에서 검까지 빼앗아가는 행위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분명 도를 넘은 처사입니다.”

고딘의 말처럼 일개 결투에서 검까지 빼앗아가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만큼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전리품일 것이다.

“애초에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가이다르가 먼저이지 않은가 싶은데 말이오.”

분명 하이날과 바예지드를 무시한 것은 가이다르가 먼저였으니 지금의 치욕 또한 그들이 자초한 결과일 뿐.

이 모든 것은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결과였다.

“게다가 선도 그쪽이 먼저 넘었지.”

웃고 있으나 웃고 있지 않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자야르의 눈이었으나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만큼은 확고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십시오.”

이미 사태는 파국이다.

본인들이 주도한 상황이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고딘은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슈트반의 검을 회수하기 위해 마지막 제안을 걸어보았다.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안 되지.”

고딘의 물음에 자야르의 눈빛이 깊어졌다.

결투의 승자는 블라드였고 전리품의 소유주도 또한 블라드였다.

그러니 정당한 대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소년의 의중이 중요할 것이다.

“왜 그 녀석이 이슈트반의 검을 가져갔는지는 당신도 잘 알잖아.”

이제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 당기는 자야르.

어제의 결투에서 소년이 그토록 승리를 갈망했던 이유를 두 기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겠군.”

자야르의 말에 고딘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딘은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검은 이슈트반을 향해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지만, 푸른색의 눈동자만큼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는 것을.

마치 여기 좀 보라는 듯, 나 좀 보라는 듯 그렇게.

“······협상은 결렬이로군.”

블라드가 이슈트반의 검을 가지고 간 이유.

그것은 푸른 달빛의 기사를 향한 선전포고를 위함이었다.

이제 승리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고딘만이 아니었으니까.

호르헤에게서 시작된 인연은 꼬이고 꼬여 결국 이곳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흐르고 흘러 데어마르에서 만난 지금의 인연들은 어쩌면 예전의 업보일 수도, 아니면 시대의 흐름일 수도 있는 인연이었다.

“결국, 우리는 나중에 또 보겠군.”

이슈트반과 블라드.

서부와 북부와의 최초의 전초전.

그 전쟁의 승리자는 북부였다.

“나가보시오.”

북부가 말했다.

이제 그만 데어마르에서 나가라고.

“작별 인사는 대신 전해주시길.”

“그 정도야.”

승부에서 패배한 서부의 기사들은 마땅한 권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위해 북부의 기사들이 차디찬 복도를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

알리시아는 그녀의 집무실에서 하녀가 가져온 손수건을 들고는 신중히 수를 놓고 있었다.

“제가 하긴 한 거잖아요.”“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거의 다 완성되어 있는 손수건이었기에 굳이 그녀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언제 어디서나 명분이라는 것은 중요하기 마련이었다.

“이 정도면 제가 다 한 거예요.”

“······맞습니다.”

굳이 하라면 못할 것은 없었겠지만 알리시아는 가주의 업무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찬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알리시아가 한 땀이라도 수를 놓은 것만은 사실이었으니 이 손수건을 받는 소년도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흠흠. 이제는 요제프 님의 제안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죠?”

“그렇습니다.”

이제 됐다는 듯 손수건을 물린 알리시아는 요제프가 전해준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 속에 다시 넣었다.

블라드가 자신의 기사로서 이슈트반의 청혼을 물리쳤으니 이제 옥사나를 대모로 모실 이유는 필요 없게 된 셈이었다.

“천만다행이네요. 아무리 바예지드의 품이 따뜻하다고 해도 그들에게 빌미를 내주는 것은 꺼림칙했으니까요.”

“맞습니다.”

알리시아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이날의 존립과 데어마르의 재건.

아무리 바예지드의 품이 따뜻하다 해도 그들의 목적 또한 결국 이곳을 손에 넣기 위함임을 알고 있던 알리시아는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발악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버둥은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고 있었다.

“······블라드 경 같은 기사는 흔치 않지요?”

“물론입니다. 알리시아 님.”

여자 하나만 얻는다면 하이날과 데어마르에 관한 모든 권리를 얻을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홀로 서 있는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약점이 되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앞으로 그가 어디까지 성장할 거라고 예상하시나요?”

그렇기에 현재보다 후일의 가능성이 더 기대되는 블라드라는 기사는 분명 그녀가 탐낼만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이대로만 커나간다면 아마 다음 세대에는 북부를 대표하게 될 겁니다. 그 정도의 재목입니다.”

던칸은 이미 기사로서는 노쇠했지만, 경험으로 단련된 눈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데어마르에서 있었던 두 번의 결투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던칸은 소년의 가능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으음.”

알리시아는 던칸의 말을 듣고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인상을 쓰는 모습이 어울리는 외모는 아니었으나 그녀는 이제 평범한 레이디가 아닌 한 영지의 주인으로서의 기품이 잡혀가는 중이었다.

“······역시 여자 혼자 몸으로 가주의 역할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또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아름다운 꽃에는 벌레가 꼬이기 마련.

가이다르처럼 쳐들어오듯 청혼하는 자들은 없었으나 이미 그녀의 계승권을 노린 수많은 귀족 남성들이 보낸 편지가 그녀의 집무실에 쌓여있는 참이었다.

이대로는 위험했다.

“차라리 아무 배경 없는 기사라도 한 명 제 옆으로 들여놓는 게 낫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알리시아가 유일한 하이날로서 단단히 기틀을 굳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

다른 가문의 때가 타지 않은 상대를 남편으로 구해오는 방법뿐이었다.

“오오. 알리시아 님.”

던칸은 알리시아가 무엇을 노리는지 알고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소년은 기사가 된 지 아직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였으니까.

“저의 제안을 바예지드도 좋아할 수도 있어요. 어찌 보면 혈맹 같은 느낌 아니겠어요?”“아직은 이르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기사가 준귀족에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더 클 거라면서요.”

던칸은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알리시아가 내놓은 방안 말고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남들이 채가기 전에 미리 선점이라도 해놓는 게 낫겠어요.”

“······.”

던칸은 무언으로 알리시아의 결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성급한 결정은 하지 마시지요.”

“이상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알리시아는 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하이날의 나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하는 짓도 기특하고.”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그곳에서 소년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모님의 묘지가 있는 언덕.

소년은 하이날의 전대 주인들에게 고개를 숙인 채 들고 있던 술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지켜봐 주어서 감사하다는 듯한 모습으로.

다른 남자들은 자신을 갖기 위해 악다구니를 칠 뿐이었지만 오직 금발의 소년 만큼은 자신의 부모님을 위해 술을 뿌려주고 있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1화 14

이제는 이름 값을 해라 (2)

하얀 뱀은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소년은 눈동자 속에 옛 기억을 품고 온 존재였으며 이제는 자신을 기억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향긋한 공물까지 바쳐주고 있으니 소년을 아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진짜 술이 좋은가 보네요.”

[역시 위스키가 정답이었나보다.]

블라드는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위스키를 들고서는 나무 밑에 뿌리고 있었다.

보리로 만든 술인 위스키는 대지의 정령인 하얀 뱀과 궁합이 좋을 거라는 목소리의 말에 눈물을 머금고 땅바닥에 뿌리고 있는 참이었다.

“이거 기사 된 기념으로 요제프 님이 특별히 준거라구요.”[비싼 거니까 비싸게 써먹어야지. 뱀의 가호는 여벌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내주기에 아쉽고 뿌리기에는 비싼 술이었지만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바예지드의 가죽 갑옷에 새겨져 있던 하얀 뱀의 가호는 항상 블라드를 지켜주고는 했었다.

만약 목 없는 사내와의 일전에서 하얀 뱀의 가호가 없었다면 지금 땅바닥에서 누워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온다. 너무 겁먹지 말고.]

“저번에 용을 잡으면서 느낀 건데 나는 비늘이 싫은 것 같아요.”

블라드의 투덜거림과는 상관없이 나무에서 내려온 하얀 뱀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블라드를 둘둘 감싸 안기 시작했다.

한번 경험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목소리의 세계로 보는 하얀 뱀의 위용은 여전히 존재에서 오는 압박감이 있었다.

[결투할 때도 도와주었으니 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다.]

“······안다구요.”

블라드는 자신이 온전한 실력으로 이슈트반을 꺾은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서부의 기사는 오만방자했지만 그럴만한 실력을 갖춘 자였고 아무리 준비했다 할지라도 그 기간은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일 뿐이었다.

결투를 위한 많은 도움이 없었다면 그날의 승부는 결국 블라드의 패배였을 것이다.

“······고마웠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내보이는 것은 곧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자신의 약한 모습도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큼의 그릇을 만들어 놓았다.

-----.

블라드의 솔직한 감사를 받은 하얀 뱀은 목을 높게 쳐들고는 고개를 까닥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위한 공물과 감사를 바쳤으니 너에게 마땅히 나의 가호를 나눠주리라.

목소리의 세계에 비치는 광경에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는 하얀 뱀과 하얗게 빛나는 갑옷을 입은 블라드의 모습이 있었다.

하얀 뱀과 하이날.

어느 세계의 데어마르도 소년을 환영하고 있었다.

※※※※

데어마르에서의 임무는 끝났다.

예상을 뛰어넘은 성과를 보인 블라드와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훌륭히 서부의 불청객들을 쫓아냈고 이제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와 함께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들어오세요.”

자야르와 함께 알리시아의 집무실을 찾아온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기웃거리고 말았다.

낯선 곳을 대하는 오랜 버릇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제프의 집무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안하셨습니까. 알리시아 님.”

“덕분에요.”

자야르와 인사를 나눈 알리시아는 눈을 돌려 그의 옆에 서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

그러자 멀리서 보았을 때는 미처 보지 못한 모습이 알리시아의 눈으로 들어왔다.

얼굴 이곳저곳에 나 있는 잔 상처들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이는 발걸음.

영광된 승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온 소년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어디 불편한 점은 없나요. 블라드 경? 부상이 있다거나?”

“괜찮습니다. 알리시아 님.”

비록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받아들이는 알리시아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짠하게 다가오는 그런 대답이었다.

블라드가 입은 모든 상처의 원인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제 보니까 언덕 위에서 술을 뿌리는 것 같던데요?”

“맞습니다.”

그동안 소년이 보여왔던 행동 하나하나에는 데어마르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을 하녀로 착각했을 때조차도 블라드는 부모님의 묘를 닦아내 줄 정도였으니까.

“그곳에 계신 주인들께 나름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분들의 가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테니까요.”

거기에 고명한 사제인 안드레아가 보장하는 신실함까지.

굳이 기사로서의 가능성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알리시아가 블라드를 높게 평가해 줄 요소는 수없이 많았다.

“데어마르로 올 때마다 빛나는 승리를 얻어가니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들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나 봅니다.”

“······그래요.”

비록 귀족인 자신에 비해 낮은 위치에 있는 블라드였으나 그것마저도 지금의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장점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서로가 가진 단점마저도 훌륭하게 상쇄되니 알리시아는 마치 블라드와 자신의 관계가 깨어진 그릇들이 꼭 들어맞는 형태 같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저도 블라드 경이 저희 데어마르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답니다.”

“······네.”

블라드는 턱을 괴고는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를 보며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꼈다.

처음에 그녀를 마주했을 때는 청량한 느낌이 드는 물빛 눈동자였으나 지금은 끈적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눈빛이었다.

“옥사나 님에게 전해주세요. 실로 오랜만에 핏줄에 대한 따뜻함을 느껴봤다고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자야르는 알리시아가 전하는 편지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비록 이번 일을 계기로 옥사나와의 긴밀한 관계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만 하더라도 요제프는 만족할 것이다.

중부와 서부, 두 곳에서 닥쳐온 시련을 겪으면서 알리시아는 확실히 자신이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저의 명예를 대신 해준 기사 블라드 경.”

요제프에게 내어줄 대가는 이미 정해놓았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을 위해 검을 들어준 소년을 위해 내어줄 차례였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도록 아주 무겁게 들려줘야 할 것이다.

“이곳의 전대 가주님들도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말에 저도 동의합니다.”

알리시아의 말이 끝나자 던칸이 기다렸다는 듯 옆에 준비해 놓았던 상자를 가져왔다.

크지는 않은 나무함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도 귀하게 다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함이었다.

“그러니 제가 이것을 경에게 드리는 것에 대해 선조님들께서도 뭐라 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정당한 하이날인 알리시아를 지켰고 서부로부터 데어마르를 지켜낸 블라드.

그의 앞으로 하이날 가문이 고이 보관하고 있던 나무함이 입을 열었다.

[······.]

“······.”

그곳에서 영롱한 노란빛을 내뿜는 동그란 보석 하나.

바로 앞에서 보석을 보고 있는 블라드와 목소리를 동시에 침묵시킬 정도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보석이었다.

“초대 가주님께서는 엘프들과 친분이 있으셨다고 해요.”

엘프.

인간이 믿는 신과는 또 다른 신을 믿는 자들.

서로 믿는 것이 다르기에 동쪽의 변방으로 밀려나 버린 이종족이 있었다.

“그분들과의 인연을 통해 얻어온 보석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귀한 나무의 송진으로 만든 호박석(琥珀石)이라고 저희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지요.”

알리시아의 말이 끝났음에도 블라드는 신중한 표정으로 던칸이 들고 있는 나무함을 바라볼 뿐이었다.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눈빛보다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걸 본 기억이 있다.]

블라드는 목소리와 약속했다.

[가능하다면 꼭 가져와다오. 부탁한다.]

너는 나에게 검을 주고 나는 너에게 기억을 되찾아주기로.

그 약속으로 발판삼아 둘은 지금 이곳에 서 있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이 호박석을 검의 폼멜(Pommel) 부분에 달아놓으셨었죠. 하지만 저는 검을 들 일이 없으니 이렇게 썩히고 있었답니다.”

알리시아는 어서 가져가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지만 블라드는 그녀의 웃음에도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비싼 물건에는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알리시아가 내어주는 가문의 보물은 분명 자신이 해낸 값보다 더 비싼 것일 테다.

웃음을 감추지 않는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감히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하이날 가문의 보물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기꺼이 저 빛나는 보석을 손에 쥐고 그녀의 속박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고맙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지키고 싶다.

소년이 시궁창 속에서도 별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하게 양보하지 않은 자신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알리시아 님.”

굳이 기사가 아니어도 좋다.

내 자신에게 당당할 수만 있다면.

블라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기에 고민 없이 노란색의 호박석을 손에 쥐었다.

소년은 약속을 지켰다.

[봐라.]

그렇게 손에 든 노란색의 보석.

목소리의 눈으로 본 그 보석 안에는 흩날리는 낙엽들이 가득했다.

그곳은 언제나 가을이었다.

※※※※

데어마르와 쇼아라의 거리는 말을 타고 약 3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비록 눈이 내리는 가도였으나 북부의 계절에 적응된 말들은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은 채 쉴새 없이 주인들을 북쪽으로 이끌었다.

“저놈저놈 야망이 있는 놈이었어.”

“나는 처음부터 알아봤지.”

누아르를 가운데 두고는 쉴 새 없이 블라드에게 말을 걸어오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하긴 남자라면 당연히 높은 곳을 노려봐야지!”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귀족 작위를 노리는 거냐.”

“······.”

블라드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라구요.”

정말 그런 의미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목소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받은 물건이었건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는 정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록 명목상 빌린 물건이었으나 사실상 건네준 것이나 다름없는 하이날의 보물.

그것을 자신의 손수건을 가져간 기사에게 내어주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충분히 오해할만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요제프 님에게는 따로 보고를 해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만약 블라드가 여전히 종자였다면 아마 자야르는 알리시아가 내어주는 물건을 받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당당한 한 명의 기사였으니 그가 대신해서 나서기에도 굉장히 애매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보입니다!”“드디어 도착이로군.”

장난스러운 오해와 헛된 변명 속에서 드디어 저 앞으로 쇼아라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의 고향이었으나 언제나 따뜻하지만은 않았던 도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쇼아라의 성문은 언제나 블라드에게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키고는 했다.

“네가 한번 해봐라.”

순간 저 앞에 보이는 쇼아라의 성벽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블라드를 앞으로 미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요?”

“지금 한 번 해봐.”

블라드는 자신을 앞으로 떠미는 자야르의 명령에 잠시 어색해했다.

어둑한 밤이기에 내려진 성벽은 내일의 아침이 떠오르지 않는 한 문을 열지 않을 테니까.

“흠흠.”

작은 헛기침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쇼아라의 성문 앞으로 소년과 검은 말이 걸어 들어갔다.

어둠 속에 숨어 개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더 익숙했던 블라드는 지금의 상황이 영 어색할 뿐이었다.

“거기 누구냐.”

갑작스레 튀어나온 인영을 보며 경비병이 날카롭게 물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검집 채 검을 들어 올렸을 뿐이었다.

루트거가 내어준 검의 가드 부분에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아직도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성벽 아래 뚫려 있는 개구멍들의 위치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더는 그곳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문을 열어라.”

이제는 들어가고 싶다면 당당히 말하면 될 테니까.

소년은 자신을 증명한 사람이었으며 횃불에 비친 바예지드의 문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블라드 님!”

문양을 확인한 경비병의 외침과 함께 저 앞에서부터 어둠을 뚫고 쇼아라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진짜 열리네.”

기사.

자격이자 명예이며 존재를 증명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명칭.

스스로를 증명한 소년은 더 이상 숨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쇼아라의 성문이 소년을 기다릴 테니까.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2화 12

이제는 이름 값을 해라 (3)

북부의 겨울은 잔혹하지만, 서부의 겨울 또한 그에 못지않다.

가릴 곳 하나 없는 황량한 황무지의 겨울은 칼날 같은 바람으로 서부의 사람들을 가혹하게 대하고는 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처럼.

“······차라리 목을 내주고 왔어야지.”

가이다르의 로비. 기사들의 전당.

그곳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남자는 누가 보아도 위압감이 넘치는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검을 빼앗기다니. 네가 그러고도 기사라 할 수 있는 거냐?”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

로마노프 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서부의 패자는 분노를 숨기지 않은 채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공포에 떨고 있는 이슈트반은 지그문드에게서 흘러나오는 매서운 말에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쾅-!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나 싶었는데 네놈이 이딴 식으로 초를 쳐!”

붉게 충혈된 눈과 떨리는 수염.

쥐여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으스러지고 마는 의자의 팔걸이.

탐욕스러운 서부의 패자는 자신의 아들이 가져온 패전 소식에 온몸이 들끓는듯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 잘났다는 루트거 놈도 아니고 이제야 겨우 기사 작위를 달았다는 새파란 애송이 따위한테?”

져서는 안 되는 결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기리라 확신한 결투였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은 지고 말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검을 넘겨주고 말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검과 함께 데어마르에 대한 모든 영향권을 바예지드에게 넘겨주고 온 셈이었다.

“너는 뭘 했어! 내 아들이 개망신을 당하는 동안 너는 도대체 뭘 한 거야!”

뼈아픈 실책과 손해.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쓰디쓴 패배의 맛에 지그문드의 분노가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면목이 없습니다. 백작님.”

거칠게 날아오는 분노였지만 고딘은 반듯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다.

“네가 아는 놈이었다며!”

“······굳이 따지자면 백작님과도 인연이 있는 녀석일 겁니다.”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비록 악연이었고 이제야 끊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실낱같은 연이 아직 쇼아라에 남아있었다.

“탈주 기사 호르헤가 키우던 녀석입니다. 가진바 재능도 훌륭했고 그 녀석을 둘러싼 기사들의 수준도 뛰어났습니다.”

호르헤라는 이름과 함께 잠시 멈칫한 지그문드.

“무엇보다 본거지의 이점을 잘 살리더군요. 예상외의 난적이었습니다.”

그날의 결투에서 이슈트반은 블라드와 검을 맞대고 있었지만, 참관인의 자격으로 서 있던 고딘은 반대편에 서 있던 자야르와 보이지 않던 힘겨루기를 하던 중이었다.

어째서 북부에서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기묘한 기세를 풍기던 기사였었다.

“호르헤······그 개자식.”

지그문드는 고딘의 말을 들으며 옛 기억을 헤집어냈다.

전대 가주였던 그의 삼촌이 특히나 아끼던 그 기사는 결국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녀석이기도 했다.

그래서 죽여버렸건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에게 엿을 먹이고 가는군.”

골치 아픈 드워프 해방 전선.

그리고 새롭게 고개를 든 북부의 애송이까지.

호르헤라는 기사가 뿌리고 간 잿더미들은 여전히 지그문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가이다르는 빼앗겨서는 안 된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배에 집어넣어라.

그리하여 남은 두 손으로 남의 것도 빼앗아 들고 있어라.

그래야만 이 거친 서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평생을 빼앗고 부수고 무너뜨렸다.

적에게도 남에게도 그리고 피를 섞은 가족에게도.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 온전히 남아있는 단 한 사람.

“어떻게든 내 아들의 검을 되찾아와라. 고딘.”

“알겠습니다.”

그는 패배를 용납할 수 없는 찬탈자. 가이다르 백작이었다.

※※※※

“진짜 안 갈 거야?”

눈이 펑펑 내리는 쇼아라의 아침.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특별히 증축해놓은 마구간 앞에 서서 누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히힝-

나는 오늘 출근 안 할 거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듯한 검은 말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이거 말 아닌 것 같은데.”

[머리가 너무 좋아도 문제로군.]

다섯 필의 말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마구간.

그러나 그 안에서 쉬고 있는 말은 오직 누아르 단 한 마리뿐이었으니.

춥지 말라고 곳곳에 쌓여있는 건초더미와 따끈하게 삶아져 있는 여물은 이 녀석이 장미의 미소에서 어떠한 호강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저놈이 야생마였다고 믿겠냐고.”

소년을 따라와 자유를 포기한 대신 확실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는 누아르.

편안하게 누워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누아르를 보고는 블라드는 그만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말았다.

그나마 임무일 때만큼은 부리나케 달려와 주니 그걸로라도 위안으로 삼아야만 했다.

“아 춥네.”

블라드는 끝까지 말을 안 듣는 누아르를 내버려 둔 채 발목까지 쌓이는 눈을 밟으며 쇼아라의 시청으로 향했다.

기사가 된 이제는 마차 정도는 불러서 타고 다닐 만도 했지만 뼛속까지 배어있던 배고픔의 서러움은 블라드를 언제나 검소한 사람으로 만들고는 했다.

“월급이라는 건 처음 받아보는데.”

블라드는 평생을 정당한 대가를 받아보지 못한 채 살아왔었다.

뒷골목의 부랑아였을 시절부터 호르헤의 단검, 그리고 요제프의 종자였던 때까지.

가끔 주어지는 용돈 정도가 그동안 소년이 연명하던 수단이었지만 오늘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보르단 님. 저입니다.”

“칼 같군. 들어오게.”

검을 들지 못하는 기사.

보르단의 집무실 앞에 선 블라드는 사방에서 퍼지는 달콤한 냄새를 맡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군.”

너저분하게 간식 더미들이 널려 있는 그곳에서는 요제프만큼이나 건강을 돌봐야 할 것 같은 뚱뚱한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운동이라도 좀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많이 움직이면 일찍 죽는 거야.”

보르단은 전혀 기사답지 않은 말과 함께 서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글은 읽을 줄 알았지? 그러면 명세서도 같이 줄 테니 기다려봐라.”

아무리 기사가 준귀족에 있는 위치라지만 글을 모르는 자들은 많았다.

다만 블라드는 비록 더듬거릴지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었으니 말로 전해주는 대신 종이에 적어 주는 것이 절차에 맞을 것이다.

“······.”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명세서를 내려 적는 보르단.

그런 그를 보던 블라드는 재빠른 손짓으로 금화 주머니를 열어 안을 확인했다.

과연 전직 소매치기다운 손놀림이었다.

“4골드다.”

눈은 종이에 가 있었으나 귀는 블라드를 향해 있었던 모양인지 보르단은 시원하게 이번 달 월급의 액수를 말해주었다.

“왜? 실망인가?”“······아니요. 아닙니다.”

비록 입으로는 아니라 말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실망이었다.

‘일 년으로 따지면 50골드는 되는 거니까······.’

요제프를 만나기 전 블라드가 평생 모아왔던 돈이 1골드가 조금 안 됐었다.

지금은 부러지고 없는 장식 없는 검은 5골드였었고.

예전에 비한다면 분명 호강하는 금액이긴 했지만, 기사가 된 지금의 블라드가 만족하기에는 4골드라는 돈은 확실히 부족했다.

“애송이구만.”

보르단은 여전히 어설픈 티를 내는 블라드를 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자야르가 아직도 소년을 끼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으니까.

“기사는 월급으로 돈 모으는 거 아니다.”

“그럼요?”

이제야 명세서를 다 작성했는지 탁하는 소리와 함께 깃털펜을 내려놓은 보르단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명예를 따라야 하고 의무를 져야 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가져야 하지.”

“······그런데요.”

돈 이야기에서 갑자기 기사의 근본으로 넘어가는 보르단의 말에 블라드는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게 다 돈이란 이야기다.”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블라드는 돈이 귀한 줄은 알았으나 정작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어두운 사람이었다.

평생을 굶주리고 산 만큼 열망하고 있었으나 정작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명예의 값은 연말에 한 번에 지급될 거다. 이른바 특별수당이라는 명목이지.”

배부른 고양이는 쥐를 사냥하지 않는다.

돈과 명예를 얻고 싶다면 그만큼의 공을 세워야만 한다.

“너는 좀 기대해봐도 좋을 거다.”

보르단의 말대로 소년은 이번 한 해 동안 바예지드의 이름을 드높인 주인공 중 한 명이었다.

가주인 페테르도 소년을 빌려다 쓴 루트거도, 그리고 본래의 주군인 요제프도 분명히 그 사실을 고려해 줄 것이다.

“그럼 의무와 책임의 값은요?”

이제야 보르단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블라드는 눈을 반짝거리며 다음 금화를 기대했지만 보르단은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이날 가문의 보물을 들고 온 네가 물어볼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제 것 아니에요. 엄연히 빌린 거거든요.”

블라드는 억울한 목소리로 보르단에게 항변했다.

쇼아라로 오는 내내 선배 기사들에게서 받은 놀림이 떠오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 건 줄 알았으면 안 받았을 거라구요.”

“그래. 남들 앞에서도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해. 그게 바로 명분이야.”

“······.”

호박석이 이런 식으로까지 해석되는 물건일 줄은 몰랐다.

그저 알리시아에게 여기저기 부려 먹히는 정도를 각오하고 가져온 호박석이었지 그렇게 의미심장한 뜻을 지닌 물건이었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봤을 것이다.

“나중에 귀족이 되도 나는 잊으면 안 된다.”

기사로써 출세를 노리는 것이 어떻단 말인가.

보르단은 불꽃 같은 야망을 애써 숨기려드는 블라드를 보며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요제프가 찾는다는 말과 함께.

“알고 있었죠?”

[······좋잖아. 귀족.]

복도로 나선 블라드는 들려오는 목소리의 대답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세상에 믿을 자들은 없다.

당하는 놈이 죄인인 세상이었으니 블라드는 잠시나마 말랑해진 자신의 정신 상태를 탓할 뿐이었다.

※※※※

“순찰 구역을 내어주마.”

난로 가까이서 향긋한 냄새와 함께 데워지는 와인병.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애꾸눈의 기사.

그리고 벽 쪽에 세워져 있는 이슈트반의 검까지.

“이제는 너도 기사가 되었으니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져야 한다.”

이제야 서류를 내려놓은 요제프는 난로 옆에 놓여 있던 와인병을 들고는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술 중에서는 위스키를 가장 좋아하는 그였지만 날이 추워지는 겨울만큼은 따끈하게 데운 와인에 기관지에 좋은 향신료를 띄워 마시고는 했다.

“저 혼자 하나요?”“경비병들을 내어주긴 하겠지만 책임자는 오롯이 너 한 사람이겠지.”

블라드는 그동안 잘해왔다.

맡은 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그 이상의 가치를 바예지드에 가져왔다.

그러니 더욱 키워내야 한다.

“용병 시절의 조장과는 전혀 다른 위치일 거다.”

“알겠습니다.”

요제프가 내어준 와인잔을 건네받은 블라드는 두 손으로 올라오는 온기를 받아들였다.

“구역은 역시 뒷골목이 좋겠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골치 아파 할 테지만 너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곳 아니냐.”

“그렇습니다.”

어두운 밤, 말 한마디만으로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블라드는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 어린 블라드에게는 시간과 경험이 약이 되어줄 테니까.

“사람이 모자라긴 할 거다. 경비병들은 순찰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써먹어야 하는 인원들이거든.”

쇼아라에 있는 기사들은 모두 여섯.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는 자야르와 보르단을 제외한 모두는 지금의 블라드처럼 자신들만의 구역을 맡아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임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요제프가 내어주는 병력만이 아닌 자신의 사람들을 고용해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기사로서의 의무였으며 또한 특권이기도 했으니까.

“4명까지는 내가 월급을 지원해주마. 너의 밑에 있을 사람들을 고용해봐라.”

기사란 앞장서는 자.

어디서나 대표가 될 수 있는 사람.

이제 블라드는 기사가 되었으니 자신의 사람들을 고용하고 부릴 자격이 있었다.

“이제는 기사라는 이름값을 해야지.”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의무.

그리고 더 많은 이권.

지금도 장미의 미소에는 블라드를 기다리는 상인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지금의 상황을 예견한 자들이었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3화 18

넓어진 그릇만큼 (1)

호박석(琥珀石)이란 보석은 시간을 담은 보석이라고도 한다.

나무의 수액이 오랜 시간 굳어져서 만들어지는 이 보석은 나뭇잎이나 곤충 등 주변에 있는 환경들과 같이 굳어지고는 하기 때문이다.

“깨끗한데?”

[음.]

그러나 블라드가 들고 있는 호박석에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티끌 하나라도 보일 법도 할 텐데 이게 호박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간 모습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풍나무가 서 있는 들판이라니······. 이거 혹시 마법인가요?”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지라도 알리시아가 내어준 호박석은 확실히 시간을 담았다.

목소리의 세계에서 보는 호박석 안에는 가만히 멈춰 있는 어느 가을날의 풍경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자신이 그곳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생생한 풍경.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갈대밭의 풍경이 보석 안에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데······.”

오른쪽 눈, 왼쪽 눈.

번갈아 가며 눈을 떠보던 블라드는 바라보는 세계마다 확연히 달라지는 호박석의 모습을 보고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엘프들과 관계가 있겠네요.”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경험 없는 소년과 기억 없는 목소리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결국 블라드는 이 보석을 전해줬다는 엘프들에게 가봐야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멀긴 한 데······.”

목소리의 기억을 찾아주겠노라 약속했던 블라드는 이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실마리가 가리키는 곳은 제국의 동쪽, 엘프들의 숲이 있는 곳이었다.

“똑똑똑.”

어떻게 하면 엘프들의 숲으로 가볼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아닌 누군가가 입으로 내는 노크 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서둘러 알리시아에게 받은 호박석을 품 안에 숨긴 블라드는 방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빨래 더미들을 들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가 블라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네?”

복도에 서서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블라드의 방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제미나.

마치 검열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에 블라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빨래 더미들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왜 이래.”

들려오는 물음은 무시한 채 재빨리 복도를 둘러본 제미나는 밖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재빨리 블라드를 안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아걸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말소리가 들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로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흘러나왔던 블라드의 목소리.

그러나 지금 방 안에 두 사람이 아닌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뜬 채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혹시 아직도 귀신이랑 대화하니?”

“······.”

블라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미나의 눈을 본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제미나를 몰랐던 날보다 알았던 날이 더 많았다.

밑바닥을 구르던 둘은 친구였고 동지였으며 때로는 공범자이기도 했었다.

“······귀신은 아니고.”

그렇기에 제미나 앞에서만큼은 무언가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블라드를 가까이서 보아온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 방 옮겨.”

“어디로?”

“복도 끝으로.”

제미나는 그 말과 함께 침대 위에 걸터앉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럼 내가 너 옆방으로 갈게.”

제미나는 블라드를 복도 끝으로 밀어 넣고 그 옆방을 자신이 쓰겠다고 말했다.

불길한 존재와 대화하는 블라드의 모습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제미나는 지금 자신도 기꺼이 공범이 되어주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응.”

걱정을 가득 담은 눈빛이 블라드의 눈동자를 꿰뚫고 들어왔다.

블라드는 말은 하지 않아도 진심으로 와닿는 제미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조심해. 너는 이제 숨어다닐 수 없는 사람이잖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뒷골목의 소년은 얼마든지 어둠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지만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 경은 그럴 수 없다.

이제는 기사가 된 블라드는 어느 곳에 있든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

“교회 꼭 가 봐.”

그러나 추레한 뒷골목의 소년이든 빛나는 기사의 모습이든 블라드는 언제나 소녀의 걱정 속에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제미나.”

“왜?”

블라드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밖으로 나가려는 제미나를 불러세웠다.

인생 처음으로 받은 월급.

보르단에게 그것을 받아든 블라드는 가장 먼저 붉은 머리의 소녀를 떠올렸었다.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하나 사줄게.”

같은 1골드의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부유한 자에게는 쉽게 건네줄 수 있는 돈이었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일 수도 있는 돈 일 테니까.

“가지고 싶은 거?”

그리고 그날 대장간에 서 있던 소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 넣어 블라드에게 장식 없는 검을 쥐여주었었다.

비록 5골드짜리 검이었지만 제미나에게 있어서는 현재와 미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넣은 돈이었을 것이다.

“너나 챙기고 다녀. 이 멍청아.”

그러나 제미나는 블라드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지금 소년에 손에 들려있는 반짝이는 금화들은 모두가 목숨값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것저것 장비라도 챙기던가.”

제미나는 그 말과 함께 빨래 더미들을 돌려받고는 다시 복도로 나섰다.

작은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빨래 더미들이었으나 제미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갈 뿐이었다.

“······.”

누군가는 기대하고 누군가는 요구했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그저 내어주고 걱정해 줄 뿐이었다.

“그냥 말이라도 해보지.”

대가 없는 호의는 너무나 무겁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언제나 제미나에게 빚을 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

떠들썩한 장미의 미소.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마르셀라의 가게에는 예전과 같은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사 잘되네요.”

“지금 시간대에 올 만한 곳이 여기 밖에 없거든.”

예전에는 창관이었으나 지금은 고급스러운 여관이 된 장미의 미소.

마르셀라가 이렇게 과감한 업종 변경을 선택한 것은 나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진하게 놀기 전에 여기서 예열을 하고 가는 거야.”

일찍부터 유흥을 즐기고 싶은 탕아들.

즐기고는 싶으나 너무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샌님들.

마르셀라는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을 엿봤고 자신의 능력을 아낌없이 펼쳐 새로운 장미의 미소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모자라지는 않아요? 누군가 시비를 건다거나.”

“시비?”

마르셀라는 블라드의 순진한 물음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그녀가 조직의 보호 없이도 지금처럼 과감히 사업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다 믿을만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아라의 기사님이 여기에 계신 데 감히 누가 시비를 걸겠어.”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그러니까 여관비는 안 받을게.”

마르셀라는 난간에 팔을 기댄 채 1층을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분명 크리라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처럼 아예 격이 달라지리라고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었다.

“데려가.”

“누구요?”

소년은 남자가 되었고 이제는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뒤를 받쳐줘야만 할 것이다.

“싸움도 안 나는 우리 가게에 데리고 있기에는 덩치가 아깝더라고.”

마르셀라는 턱 끝으로 1층 어딘가를 가리키며 웃었다.

장미의 미소 입구.

그곳에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흑인 한 명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잘 먹이니까 근육이 좀 붙더라.”

“괜찮겠어요?”

아무리 뒷골목 보스들이 건들지 않더라도 건장한 사내의 존재는 필요할 것이다.

이곳은 술을 파는 곳이었고 언제든지 돌발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경비 서고 싶다는 애들은 많아.”

그러나 저기 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만큼 블라드와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은 뒷골목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마르셀라는 오타르를 내어주는 것에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우리 여관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데려가도 좋아.”

“그렇게 하죠.”

아무리 깊은 인연을 가진 사이라도 의지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마르셀라는 블라드라는 연줄을 확실히 잡기 위해 얼마든지 투자할 용의가 있었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마든지 데려와. 4층에 방은 많으니까.”

주고받음의 관계.

마르셀라는 블라드라는 기사의 근거지로 장미의 미소를 제공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괜찮은 조건이네요.”

마지막 남은 창녀들의 기사는 이제는 창녀가 아니게 된 마담을 보며 웃음 지었다.

이제는 검을 들지 않아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

블라드가 기사가 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

도시에서 해가 지는 곳.

미묘하게 달라지는 공기를 느끼며 블라드는 서쪽의 부둣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좀 아까운데.”

[사람에게 쓰는 값은 비쌀수록 좋은 거다.]

요제프가 기사가 된 기념으로 블라드에게 건네준 위스키는 총 3병이었다.

그중 한 병은 이미 하얀 뱀에게 썼으니 남은 위스키는 단 두 병뿐.

블라드는 그중 한 병을 들고 지금 캡틴 후버의 본거지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차가운 강바람과 함께 쏠려오는 비릿한 물의 냄새.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말린 생선들의 냄새.

과히 좋은 냄새라 할 수 없었지만 그 냄새들을 맡으며 블라드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변한 게 없네.”

기댈 수 있는 존재란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그리고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블라드는 항상 이곳을 지나쳐왔었다.

이 거리의 끝에는 언제나 자신을 반겨주는 갈색 머리의 남자가 있었으니까.

“나 좀 들어갑시다.”

“네? 네. 네 그러시죠. 기사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문지기를 지나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를 밟고 좁디좁은 복도로 걸어갔다.

점점 좁아지는 복도의 끝.

그곳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는 문짝 하나가 바로 블라드가 향하는 곳이었다.

“하벤 있어?”

“응?”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이 놀란 듯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쩔뚝쩔뚝.

자그마한 방이었음에도 그곳의 주인은 한달음에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블라드.”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이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별 건 아니고.”

블라드는 볼 때마다 말라가는 것만 같은 하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위스키 병을 흔들어대었다.

“저번에 받았던 캡틴큐나 좀 갚을까 해서.”

“오오.”

하벤은 찰랑거리는 소리만으로 지금 블라드가 들고 있는 위스키가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이 귀한 물건까지 들고 있었으니 거절할 수는 없는 법.

“빨리 들어와. 빨리.”

하벤의 안내로 방 안에 들어선 블라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그의 작업실을 보고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은 하벤의 작업실.

강가에 바로 붙어있어서인지 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장애가 있는 하벤에게는 이만한 곳이 없을 터였다.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더니 그래도 금발이 다르긴 다르구만.”

“뭐라는 거야.”

곳곳에 쌓여 있는 종이 뭉치들을 치워낸 하벤은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술판을 벌일 자리를 만들어냈다.

“일은 다 끝냈어?”

“일은 끝나는 게 아니야. 그냥 계속하는 거지.”

삶의 고단함이 물씬 느껴지는 말과 함께 병의 마개를 뽑아낸 하벤은 구석에 놓여 있던 먼지 쌓인 잔을 꺼내 들었다.

“잠깐만.”

이가 나가버린 나무잔을 자신의 웃옷으로 닦아내는 하벤.

그래도 손님이라고 블라드에게 가장 그럴싸한 잔을 내어준 하벤은 싱글벙글 웃으며 위스키를 따라내었다.

“그래.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야? 돈 빌려달라는 것은 아닐 테고.”

“그건 아니지.”

위스키 한 병에도 기뻐하는 하벤을 보며 블라드는 입안에서부터 쓴맛을 느꼈다.

이곳에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요즘도 그 뭐야. 항해법이나 별자리나 그런 거 보고 있어?”

“아 그거?”

이제야 위스키를 한 입 맛본 하벤은 기분 좋게 인상을 찌푸리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거 그만뒀어.”

“······왜?”

아무리 빛나려 애쓴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블라드처럼 다가오는 기회를 움켜쥘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누가 절름발이를 항해사로 써주겠어. 아무리 봐도 거기까지는 무리지.”

꿈꿀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하벤 또한 이 좁디좁은 방 안에서 그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배를 타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지금도 코끝을 스치는 강의 냄새.

하벤은 언젠가는 이곳에서 벗어나 배를 타고 저 먼 곳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정도면 됐지 뭐.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해.”

그러나 하벤의 꿈은 결국 어두운 복도 끝 좁은 방에 갇히고 말았다.

현실의 무게란 언제나 사람들을 꿈꾸게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

꿈꾼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쥘 수는 없다.

노력한다 해서 무조건 가질 수 없다.

블라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벤을 뭐라 하지 않았다.

이것은 하벤의 잘못이 아니다.

“여기가 잘못이야.”

“응?”

하벤은 술도 마다한 채 갑작스레 일어서는 블라드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그래?”

“······.”

새장 안의 오래 갇힌 새는 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좁고 어두운 곳에 오랫동안 갇혀버린 인생들 또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것을 그들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쾅-! 쾅-!

“블라드!”

하벤의 비명과 함께 블라드가 사방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야. 임마!”

“다 이것들이 잘못이지!”

하벤과 강을 가로막는 같잖은 벽들.

고작 발길질 한 번에 부서지고 말 이 개 같은 것들이 그동안 하벤의 꿈을 갉아먹고 있었다.

“다 이게 잘못이라고!”

검집으로 후려치고 발길질로 부서 내고.

그렇게 블라드는 쉴 새 없이 하벤을 가로막고 있는 벽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지직-!

네가 할 수 없다면 내가 해주마.

너도 나한테 그렇게 해줬으니까.

뒷골목의 어둠에 잡아먹히지 않게 위에 있는 목표라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블라드······!”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벤의 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장애와 현실. 그것들을 벽으로 삼아 가련한 하벤을 가둬두고 있던 벽들을 블라드가 부수고 있었다.

“너 미쳤어! 그만해!”

하벤은 그동안 애써 자리 잡은 현실이 부서지자 당황하며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블라드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절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벤은 노력으로써 블라드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벤이 알려준 세상이 아니었다면 블라드는 기사라는 별을 꿈꾸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야 보이네!”

이곳은 별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하벤의 벽을 부숴 주어야만 했다.

그도 마땅히 꿈꿀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

하벤은 거친 숨을 내뱉는 블라드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빛 한 줄기를 보았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들도 막아내지 못하는 붉은 빛.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붉게 물드는 쇼아라의 강이 그곳에 있었다.

불어오는 강바람.

바람을 따라 사방으로 휘날리는 서류들.

그동안 하벤을 붙잡아두고 있던 현실들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시원하긴 하네.”

강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자신이 꿈꾸는 것을 잊어버렸을 뿐.

하벤은 차가운 겨울의 바람과 함께 들고 있던 위스키를 들이마셨다.

머리는 취해가지만, 영혼은 깨어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2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4화 20

넓어진 그릇만큼 (2)

황금색 공이 굴러간다.

누군가에게는 한순간의 스릴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를 실은 공이.

검정과 빨강의 턱을 넘어 쉴 새 없이 구르는 공 하나가 샹들리에가 비추는 빛에 따라 반짝이고 있었다.

[진작 이곳에 와볼 걸 그랬다.]

그러나 도박장의 떠들썩한 주위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블라드는 눈앞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룰렛에 집중할 뿐이었다.

[동체 시력이나 순발력을 단련하는데 이만한 곳이 없겠군.]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지금도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룰렛 위의 공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빨강이 좋겠는데.”

조금 있으면 18살이 될 붉은 머리의 소녀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18번이라는 숫자 위에 칩 하나를 올려놓았다.

번호 하나에 모든 확률을 거는 스트레이트 배팅.

무엇을 알고 올려놓은 것은 아니었으나 블라드는 행운의 상징이 가리키는 곳을 따랐다.

[시작한다.]

블라드의 목소리와 함께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고는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라문드에게서 배운 강체술은 신체를 강화하는 술법.

룰렛 위에서 힘차게 돌아가던 황금색 공이 블라드의 눈동자 속에서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흠.”

평범한 사람이라면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끊어내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어느 곳으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황금색 공을 보며 블라드의 눈썹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

믿음만큼 얄팍한 것은 없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룰렛만큼은 공정한 운에 따라 움직일 거라 생각했겠지만 현혹되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블라드의 눈에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사기꾼 새끼들.”

결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장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은 통제를 넘어 조작을 감행하고 있었으니 그 어떤 일말의 노력조차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세상이다.

“블라드 경.”

속에서부터 조용히 끓어오르는 감정을 곱씹고 있던 블라드의 귓가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말씀을 하고 오셨다면 저희가 모셨을 텐데요.”

뒷골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양복 차림의 신사.

도박장의 지배인이 하는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블라드가 뒷골목의 부랑아였을 시절에는 가까이 오지도 말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던 그였으나 이제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모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보스는 계십니까?”

“다이스 님은 지금도 위에서 블라드 경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뒷골목의 보스 중 한 명인 도박장의 다이스.

그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예전과는 위치가 달라졌고 격이 달라졌다.

“그런데 왜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네?”

그렇기에 블라드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은 잘못된 곳이며 블라드는 정당한 명분과 자격을 갖춘 당당한 자였다.

그러니 마땅히 찾아와야 할 사람은 쇼아라의 기사가 아닌 도박장의 주인일 것이다.

“보스보고 여기로 내려오라고 해.”

목소리는 말했었다.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누구나 입을 다물지 못하도록 강렬하게 하라고.

“그때까지 도박장은 영업을 중지한다.”

“······그게 무슨.”

잘못된 세상을 담은 테이블 위로 성큼 올라선 기사가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빛나는 금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거기 딜러. 손 떼.”

검 끝으로 파랗게 질린 딜러를 가리키며 성큼성큼 테이블 위를 걸어 나가는 블라드.

발에 걸리는 칩들과 잔들을 거침없이 치우며 걸어가는 블라드의 모습에 이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블라드, 블라드 경!”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보고받은 도박장의 주인이 황급히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늦었다.

이미 블라드의 시선은 룰렛 밑에 감춰진 어두운 진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재미 좋았겠는데?”

뒷골목의 보스. 도박장의 다이스.

그는 자신을 보며 사납게 웃는 사내를 보며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잘못 걸렸군.’

웃고 있는 블라드에게로 도박장의 기도들이 당황하며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곧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오지 마라. 지금 기사님께서 공무집행 중이시잖아.”

“음.”

“이 녀석들은 죽여도 되나? 그래도 될 것 같은데?”

어느새 블라드의 뒤를 가로막고 선 세 명의 사내가 무기를 뽑은 채 사나운 기세로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이런······."

다이스는 그제야 쇼아라의 새로운 시장이 자신을 향해 사나운 개를 풀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 개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뒷골목 이곳저곳을 헤집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었으니까.

※※※※

하벤의 방을 부수고 그를 꺼내온 날. 블라드는 손에 쥔 병을 들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리를 걷고 있었다.

“이거 그거 아냐?”

“그거 맞아.”

하벤은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든 채 블라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보따리에는 하벤이 평생을 모아왔던 모든 것이 들어있었으나 지팡이를 짚고서도 한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얄팍한 짐이기도 했다.

“기사가 좋긴 좋다. 방 때려 부수고 조직원 하나를 데리고 나가는데도 오히려 선물을 안겨주니 말이야.”

“······이건 선물 아니야.”

블라드는 병 안에서 묘하게 끈적거리며 찰랑거리는 술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캡틴Q잖아. 이거.”

“정확히는 캡틴Q3. 보스가 만든 개량판이야.”

뒷골목의 보스 중 한 명인 캡틴 후버.

왕년에는 나름 유명했다던 바다의 선장이었으나 지금은 늙고 몰락하여 쇼아라의 어둠에 몸을 숨긴 사람.

그러나 몰락해버린 그에게도 아직 남아있는 열정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젊었을 적 맛보았다던 인어들의 술을 재현하는 것에 있었다.

“인어들은 혀가 없나 봐.”

“바다에 사니까 우리랑은 신체구조가 좀 다를 수도 있지.”

하벤은 후버가 술을 만드는 솜씨는 형편없지만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호르헤가 있었을 적에도 평판이 나쁜 보스는 아니었던데다 비록 취급이 험하긴 했으나 장애를 가진 자신을 거둬주었던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새로운 쇼아라의 시장도 캡틴은 건들지 않을 거야. 도시를 위해 나름의 가치 창출을 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그래?”

“아무리 벌레라고 해도 익충이 있고 해충이 있는 법이니까.”

하벤은 그동안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주어지는 서류와 작업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간접적으로 보아왔다.

강을 통해 먼 곳까지 나아가는 밀수 조직의 특성이 하벤의 안목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다.

“경험 없는 너를 제일 통제하기 어려운 구역인 뒷골목에다 박아넣었다는 것은 사실 시험의 의미도 있을 거야. 이건 기회이자 위기라고.”

“음.”

블라드는 자연스레 하벤의 보폭에 맞추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그를 배려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하벤의 입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블라드의 걸음을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 앞으로 어쩔까?”

요제프는 경험 없는 블라드에게 세세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조언을 구하는 경험조차도 어린 기사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처럼 보스들한테 알려줘야지.”

밤하늘 사이, 저 멀리 보이는 장미의 미소를 보며 하벤이 미소 지었다.

“네가 왔다는 걸.”

새로운 시장, 새로운 기사.

그리고 새로운 질서.

요제프가 블라드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벤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

마르셀라는 블라드에게 4층의 절반을 내어준다고 했고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고맙다.”

“······나도 아는 놈이잖아.”

이제는 기사의 사역인이 된 오타르는 자신에게 방과 직업을 내어준 블라드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계속 소매치기하다가는 곧 죽을 게 뻔한데 어떡하겠어.”

“······.”

블라드는 4층 난간에 턱을 괴고는 1층에서 열심히 밀대질을 하고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예전 자신이 초팔이였을 시절 했던 업무를 넘겨받은 흑인 소년.

오타르의 동생이자 자신과도 인연이 있는 네드를 위해 블라드는 장미의 미소에 자리 하나를 마련했고 지금 네드는 오타르와 함께 4층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마담이 기뻐해. 그동안 거치적거리던 놈들 다 치워냈다고.”

청소하는 척 블라드에게 다가온 제미나는 조용히 귓속말로 하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르셀라가 그렇게까지 싫어했을 줄은 몰랐네.”

제미나가 가리키는 곳에는 테이블 하나를 둔 채 블라드를 찾아온 사람들을 상대하는 하벤이 있었다.

“달라 보이네. 하벤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

블라드는 제미나의 말에 소리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현했을 뿐이었다.

사람은 능력을 발휘할 자리가 있어야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하벤은 물비린내 나는 어두운 방이 아닌 기사의 대리인이라는 자격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을 솎아내는 중이었다.

아마 그동안 모아두었던 만큼 길었던 오늘의 면담이 끝나면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의 명단을 든 채 블라드를 찾아올 것이다.

‘올 때가 됐는데.’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를 씹으며 자신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제프는 총 4명의 봉급을 지원해 준다고 했었고 블라드도 하벤과 오타르만으로는 뒷골목의 치안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지속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사람이 있었으니 3명까지는 무난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블라드! 블라드!”

“뭐야.”

한참 바닥을 닦고 있던 네드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오르며 블라드를 찾기 시작했다.

“블라드!”

“여기 있잖아.”

과묵한 형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네드를 보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청에서 블라드를 찾아온 손님이 있어. 한 명은 턱이 길고······.”

“올라오라 그래.”

블라드는 고트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예지드의 마구간 지기가 안정된 직장이라 한들 고트가 고작 하인의 위치에서 만족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근데 둘이야.”“음?”

그러나 고트는 혼자가 아닌 다른 한 사람을 더 매달고 이곳으로 찾아왔다.

“누군데?”

블라드의 물음에 네드는 재빨리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오히려 반문하기 시작했다.

“문신 많고 머리 땋고······.”

북부에서 흑인이 가지는 위치는 낮고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피부로 차별받는 흑인조차도 가까이 가기 싫어하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혹시 아니지. 블라드?”

네드의 우려와 함께 장미의 미소로 들어서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어딘가 풀이 죽어 보이는 고트의 뒤에 서 있는 강렬한 인상의 사내.

장사를 준비하던 종업원들과 마르셀라조차도 잠시 고개를 돌릴 만큼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 사람이었다.

“여기는 좀 커서 마음에 드네.”

신령한 정령의 피를 이은 누아르를 쫓아 쇼아라까지 따라 내려온 야만인 사내.

“여기 오면 일자리가 있을 거라고 시장이 그러던데?”

부다아트 족의 아게가 4층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씨익 웃음 짓고 있었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5화 17

넓어진 그릇만큼 (3)

같은 시장직에 임명되었다 할지라도 전임 시장과 요제프의 위치는 엄연히 달랐다.

전임 시장은 쇼아라의 원활한 유지와 세수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면 요제프는 자신만의 확고한 업적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아게라는 녀석이 블라드에게 제대로 머리를 숙일까요?”

“······적어도 지금의 처지에 대해 이해는 했겠지.”

블라드라는 유망한 소년을 키워냈고 데어마르라는 영지에 대해 확고한 지배력을 갖췄다.

그런 성과를 낸 요제프가 다음으로 계획하는 것은 바로 북방 한계선 위쪽에 있는 야만인들에 대한 일이었다.

“내가 내민 제안이 최대한의 성의를 담은 제안이었다는 것을 아게도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동안 바예지드는 많은 가문들에 의해 자신들의 권위를 도전받아 왔으며 이제는 그에 대한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줄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전에 뒤에 있을 불안 요소들을 어떻게든 제거해 놓는 것이 바예지드가 해내야 할 선결과제일 것이다.

“······그러니 내 제안을 걷어찬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잘 알고 있겠지.”

미르셰아에 의해 부족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로 큰 타격을 받고만 부다아트 족은 요제프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제프는 앞으로 이들을 이용해 야만인들을 제어해 볼 생각이었다.

“의도대로 잘 움직여주면 좋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지.”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으나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요제프는 데운 와인을 잔에 따르며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갈라져 있던 것인지 모르겠군.”

같은 북부의 사람들이지만 야만인과 북부인들은 오랫동안 서로 대척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작된 증오의 연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제프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북부에게 이득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와 나의 세계는 맞닿아 있지만 하나가 될 수 없다.

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다름이 서로의 세계를 갈라놓고 있었으니까.

“그 녀석이 이번에도 잘 해줬으면 좋겠군.”

그래도 요제프가 아게를 블라드에게 붙여놓은 이유라고 한다면 소년에게서 아주 자그마한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일 것이다.

야만인들이 신성시하는 검은 말을 타는 소년.

그리고 그 말을 타고 북부의 용을 사냥함으로써 야만인들을 구해낸 소년.

블라드는 여태껏 있던 북부인들과는 다르게 아주 조금은 야만인들에게 동질감을 얻고 있었다.

요제프는 부디 이번에도 블라드가 자신이 예상한 일을 뛰어넘는 결과를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날 저녁 블라드가 헤집고 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다이스의 도박장은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야 내부 시설을 보수하기 위해 닫는다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블라드가 일주일간의 영업 정지를 명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글쎄다. 봐야 알겠지.”

보르단의 집무실에 도착한 블라드는 그의 책상 위로 양손 가득 들고 온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말이라는 게 쓰여 있다는 걸 알아만 봐도 훌륭한 거야.”

블라드가 들고 온 종이들은 전부 다이스의 도박장에서 나온 재무 서류들이었다.

그동안의 기망 행위에 대한 이익을 추산해보겠다고 압류해 온 것이었지만 정작 그 일을 해야 할 보르단은 조용히 서류들을 옆으로 밀어놓았을 뿐이었다.

“······좀 떼어줄까?”

“아니요.”

무엇이 쓰여 있는지는 잘 몰랐으나 아무런 의미 없는 서류라는 것 정도쯤은 블라드도 알고 있었다.

다이스의 도박장이 다시금 문을 열기 위해서는 명명백백한 소명보다는 반짝이는 금화가 답이 되어줄 테니까.

“아직은 뒷돈 같은 거 받지 말래요.”

“누가?”

“제 친구가요.”

보르단은 블라드의 대답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똘똘한 친구구만. 처세술의 기본이 되어있어.”

하벤은 블라드에게 아직은 추수하기보다는 씨를 뿌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바로 앞에 있을 이득에 급급하기보다는 더 높은 곳에 있을 과실을 노리라고 조언한 것이었다.

“이따가 그레고리 경을 한번 찾아가 봐라.”

“왜요?”

보르단은 용케 옳은 길을 찾아간 블라드가 기특해 보였다.

명령문도 제대로 읽지 못해 자신이 대신 읽어줬던 소년이 어느새 그럴싸한 기사의 모습이 되어있었으니까.

그러니 조그마한 도움 정도는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둘이 원하는 게 정확히 들어맞으니까.”

“······?”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을 보내는 블라드를 보며 보르단은 서랍을 뒤져 사탕 하나를 던져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실로 어울리는 디저트였다.

“해줄 말은 다 해줬으니 나가봐.”

묘한 말과 함께 손을 내젓는 보르단을 보며 블라드는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리송한 말과 함께 복도로 나온 블라드는 그저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호르헤는 블라드를 보고 어느 골목에서나 대장을 할 녀석이라 평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발상 자체가 여전히 골목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머리가 좋고 나쁨을 떠나 이제 막 위로 올라온 블라드는 아직 기사들의 세계를 이해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블라드, 블라드.”

그러나 괜찮을 것이다.

“그레고리 님?”

블라드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내고는 했으니까.

“자자, 이거 받아라.”

때마침 복도 끝에서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는 그레고리를 따라간 블라드는 그가 건네준 물건을 받아들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로 싸여있는 물건.

종자 시절 포틀리가 자주 건네주던 칸노르 가문의 염장 고기였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래?”

보르단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이었으나 그레고리는 좀 다르게 해석했는지 크게 기꺼워하기 시작했다.

“잘됐구만. 역시 우리는 마음이 통할 줄 알았어.”

“그런가요?”

그레고리는 포틀리의 외삼촌.

다시 말해 칸노르 가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 곰이라고 했던가? 뒷골목에서 정육업을 하는 조직 말이야.”

“네.”

칸노르 가문은 바예지드 백작령에서 축산업으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스투르마와 근처 마을에 국한된 영역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녀석들 요제프 님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던데 어때? 같이 한번 쓸어볼까?”

“······.”

그런 칸노르 가문이 원활히 다른 지역에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기존에 있던 상권을 차지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 쇼아라에는 때마침 칸노르 가문이 후원하는 어린 기사가 있었다.

“그런 이야기였군요.”

“응?”

기사는 검이고 검은 곧 힘이다.

정당한 명분과 함께 길을 여는 기사들의 뒤로는 언제나 이득을 보려 하는 사람들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좋아요. 어차피 손 보려 하던 참이었으니까.”

블라드는 그레고리가 건네주는 염장 고기를 손에 쥐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빌려주실 거죠?”

“당연하지. 원한다면 직접 나서주마.”

도박장의 다이스와 밀수업의 캡틴 후버는 괜찮지만 검은 곰은 안된다.

그는 선을 넘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기사라는 존재들은 선을 넘은 사람을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었다.

블라드는 이제야 안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마무리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끼익- 끽.

더러운 것들을 잠시나마 덮어놓은 하얀 골목길 위에서 블라드는 가만히 입김을 뿜었다.

하벤에게 가는 부둣가의 길.

그리고 대장간으로 가는 골목길.

블라드는 이 두 개의 길을 걸을 때만큼은 잠깐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비록 처해 있는 현실은 어지러울지라도 이 두 곳으로 가는 길만큼은 똑바른 직선이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지도 몰랐다.

쾅-!

마침내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는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대장간으로 들어섰다.

“······.”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먼지 앉은 작업대와 싸늘하게 식어있는 작은 화로.

대장간이라면 언제나 불을 지피고 있어야 할 화로였지만 지금은 희멀건 잿가루만 가득할 뿐이었다.

“제가 너무 늦게 왔나 보네요.”

오랫동안 치우지 않았던 문밖의 눈은 쌓이고 쌓여 딱딱한 얼음덩어리가 되어있었다.

마치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듯 그렇게 초라한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부탁할 게 있었는데요.”

블라드는 노인에게 부탁할 게 있었고 보여줄 것이 있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늙은 대장장이는 손님이 왔음에도 그저 낡은 침대 위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블라드는 미동도 없는 그를 보며 근처에 있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이걸 폼멜에다 달아달라고 부탁하러 왔거든요.”

블라드는 알리시아에게 받은 노란색 호박석을 손에 쥐고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을 보면 노인이 좋아할 거라 생각했다.

비록 평생을 뒷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바깥세상을 동경했던 노인은 언제나 검의 상처와 함께 들려오는 블라드의 이야기를 좋아했었다.

“······.”

그리고 블라드 또한 망치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노인의 웃음을 좋아했었다.

블라드는 문득 고개를 들어 대장간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의해 깊게 패여 있는 나무 기둥 하나.

언제나 장식 없는 검이 매달려 있던 그 자리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또 낯설게 보이네.”

노인의 꿈은 오랜 시간 동안 뒷골목에 매달려 있었고 소년은 그 꿈을 보며 자신의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쇼아라로 탈출하던 그 날밤 이전부터 노인은 블라드를 구원해주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이거 드리려고 왔어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일어선 블라드는 품 안에서 천으로 곱게 싸놓았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장식 없는 검.

이제는 검이라 부를 수 없는 손잡이만이 남아있는 뒷골목의 검.

블라드는 싸늘하게 누워있는 노인의 품에 장식 없는 검을 들려주었다.

“고마웠어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한 마디일 것이다.

자신을 구해주어서 고마웠다고.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노인의 화로에 불씨를 지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곳에서부터 번져오는 온기가 블라드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좋은 꿈 꾸세요.”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겨울의 찬바람이 들어오고, 곧이어 점점 멀어지는 소년의 등과 함께 문이 닫혔다.

소년은 떠나고 노인은 남는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며 아무도 그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

소년이 떠나고 이제는 아무도 없는 초라한 대장간.

그곳에서 늙은 대장장이는 블라드가 들려준 대로 가만히 장식 없는 검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장식 없는 검과 함께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꿈속에서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얀 설산이 보였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용이 벌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제야 뒷골목을 벗어난 그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감도는 것 같았다.

노인의 꿈에서 시작했으나 소년의 손에서 완성된 장식 없는 검.

하늘을 향해 매달아 놓았던 별은 드디어 노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6화 15

너의 죄를 사하노라 (1)

제미나는 장례식이 끝난 지금도 훌쩍거리며 블라드를 따라 걷는 중이었다.

거칠고 험난한 뒷골목에서 살아왔던 만큼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왔던 제미나였지만 오늘만큼은 눈물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 노인의 죽음은 제미나의 마음속에 파문 하나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이제 네 월급은 1골드 하고도 10실버 밖에 안 남았어.”

“······어쩔 수 없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4골드라는 월급은 결국 노인을 위한 묘비와 비석을 사는 데 쓰였다.

일개 뒷골목 사람을 위한 장례비로는 큰돈이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수도원 근처 최대한 양지바른 곳에 노인을 묻어 주기로 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뒷골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아무도 이름을 모르더라고.”

“그래?”

하벤은 특별히 사람까지 풀어 수소문을 해봤지만 아무도 늙은 대장장이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뒷골목을 이루는 구성품처럼 그저 언제부턴가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렇게 있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별수 없지.”

그래서 비석에도 노인의 이름 대신 블라드가 기억하는 모습을 새겨놓는 수밖에 없었다.

쇼아라 최고의 대장장이.

귀신을 베고 용을 찌른 검을 만든 노인이었으니 아주 틀린 이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쟤들은 왜 저러는 거야.”

“누구? 애들?”

노인을 위한 장례식을 마치고 장미의 미소로 돌아가는 길.

골목길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블라드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있었다.

“요즘 따라 저러던데. 구걸을 하려면 하던가.”

다가올 듯 말 듯 먼발치에서 빼꼼히 블라드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뒷골목 아이들의 태도에 블라드는 위화감과 함께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진짜 모르겠어?”

“왜 저러는데?”

“모르면 됐다.”

하벤은 지금 아이들이 보내는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블라드 또한 어린 시절 저런 눈빛을 가졌었으니까.

“이번 겨울은 작년보다 더 춥네.”

“그러게.”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하나하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던 블라드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많이들 얼어 죽겠네.”

당해본 사람만이 알고, 없어 본 자만이 안다.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금 저 멀리에 서 있는 아이들과 블라드를 한 묶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담요 하나만 있어도 버틸 만하겠지?”

“그건 그렇지.”

블라드는 헛기침과 함께 턱을 긁적이며 하벤을 바라보았다.

“이번 달에 돈 모으기에는 어차피 글렀다고 봐.”

“1골드는 들 거야.”

이미 하벤은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10실버만 있어도 한 달은 넘게 살아.”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노인이 만든 장식 없는 검은 빛나고 있었기에 블라드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라 한다면 바로 금발 머리의 기사일 것이다.

더러운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기사라는 별을 움켜쥔 사람.

이곳에서도 해낸 사람이 있다.

“애들한테 나눠주면서 영감님을 위한 기도 한 번씩만 하라 그래.”

“담요 하나에 기도 한 번이면 수지맞는 장사네.”

장식 없는 검은 늙은 대장장이와 함께 땅에 묻혔지만, 노인이 만든 별은 지금도 뒷골목을 밝히고 있었다.

비록 이름과 형태는 달라졌을지라도.

※※※※

내뱉는 입김마저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날씨였으나 곳곳에서 퍼져나오는 비릿한 피 냄새와 고기 썩은 내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시지 만드는 법을 알면 못 먹는다더니······.”

그레고리는 이런 비위생적인 장소에서 고기를 도축한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검은 곰의 열악한 도축장은 뒷골목 사람들의 삶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오타르, 아게. 너희가 먼저 문을 연다.”

“음.”

언제나 그랬듯이 오타르는 블라드의 지시에 군말 없이 자신의 도끼를 들어주었다.

“할 말 있나?”

“이번에는 어때? 몸 좀 풀어도 되나?”

그러나 아게는 블라드의 지시에도 가만히 되물을 뿐이었다.

자유로운 초원의 영혼인 아게는 아직 북부인들의 명령 체계에 익숙지 않았다.

“임산부와 아기들을 흑마법을 부리는 놈들에게 팔아넘긴 녀석이야. 어떨 것 같아?”

“마음껏 죽여도 되겠네.”

아게는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야만인 특유의 도검을 꺼내 들고는 실실 웃었다.

신령스러운 말을 타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불편한 동거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본 어린 대장은 의외로 초원의 기질과 맞는 성향을 지닌 자였다.

“지금쯤 알아차렸을 거다.”

“들어갈게요.”

그레고리의 말에 블라드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제프가 지원한 병사들과 각자의 고용인들까지 끌고 나온 두 명의 기사들.

하벤이 정해준 길을 따라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으나 40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의 움직임을 검은 곰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좋아.”

선봉은 기사 블라드의 병력이다.

금발의 기사는 이번 작전의 제안자이자 제 일(一) 책임자였으니까.

“지금!”

블라드의 신호와 함께 두 사내가 검은 곰의 근거지로 뛰쳐나갔다.

가장 오래된 뒷골목 보스의 건물답게 문은 크고 단단했다.

“흡!”

기묘한 뼈 장식으로 만들어진 문고리를 도끼로 사정없이 내려치는 오타르.

그러나 뒤에서 사람들이 받치고 있었는지 문은 크게 출렁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다리 준비해.”

흐름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자야르는 말했었다.

공격이 막힌다 해도 언제나 다음의 수를 준비해둬야만 하며 그를 통해 주도권을 가져가야만 한다고 알려주었었다.

“잠깐.”

사다리를 2층 창문으로 붙이려 병사들이 움직였으나 순간 아게가 블라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들고 있는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신 사이로 자그마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한 번은 보여줄 때가 됐지.”

너희들만의 세계가 모든 것이 아니다.

세계의 발현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야만인들에게도 그들만의 방식과 세계가 있었다.

“문 뒤에나 숨는 나약한 놈들.”

선조들에게 바치는 자그마한 읊조림과 함께 아게의 문신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야만인의 세계는 선조들과 함께 쌓아 올린 세계.

생존을 위해 의무를 짊어지고만 가련한 후손을 위해 초원의 영혼들이 힘을 빌려주었다.

콰직-!

넓디넓은 북부의 초원은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와라! 문 뒤에나 숨는 겁쟁이 자식들아!”

거칠 것이 없는 초원의 세계를 끄집어낸 아게의 발길질에 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나무가 부서지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문에 매달려 있던 뼈 장식들이 힘없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저 미친 새끼가!

야만인이다! 야만인이 쳐들어왔다!

“야만인이 아니라 부다아트 족이라니까!”

약하고 어린 것들을 팔아넘긴 놈들이라 했다.

그렇다면 죽여도 된다.

문신 안에 깃든 초원의 영혼들도 아게의 분노에 동의해 주었다.

쾅-! 쾅-!

콰직-!

아게가 부순 틈으로 오타르의 도끼질이 난무했다.

단순한 폭력만으로 단단한 문을 부숴내는 두 사내의 모습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쇼아라의 병사들도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제 진입해도 되겠어.”

단순무식하지만 그만큼 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모습에 그레고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통쾌한 모습도 필요한 법이었다.

“그럼 이제 가 볼······.”

그레고리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보았지만, 자리에 있어야 할 소년은 이미 저 앞으로 뛰쳐 나간 뒤였다.

“비켜!”

굳게 닫은 왼쪽 눈과 함께 블라드의 온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

“이런!”

빠르고 강맹한 기세.

마치 한 줄기의 벼락이 달려오는 듯한 모습에 오타르와 아게는 재빨리 몸을 비키고 말았다.

콰앙!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문이 블라드의 거센 돌격에 기어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문을 부수는 거친 충격에도 라문드의 강체술은 블라드를 확실히 보호해주고 있었다.

“들어왔다!”

“막아! 막으라고!”

곳곳에서 나 뒹구는 뼈 장식들 사이로 블라드의 검이 번뜩였다.

비록 목 없는 사내는 목소리에게 넘겨주고 말았지만, 너희들만큼은 내 손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개자식들!”

안나의 검은 눈물을 닦아 주었던 블라드의 손끝에서부터 빛나는 세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느꼈던 슬픔과 좌절은 소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블라드가 내뿜는 세계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히 자리 잡은 세계였다.

“들어가!”

“전원 진입해라!”

아게와 오타르가 재빨리 블라드의 뒤를 따르고, 그레고리의 지시에 따라 쇼아라의 병사들이 검은 곰의 근거지로 난입하기 시작했다.

넓다면 넓다 할 수 있는 로비 사이로 조직원들과 병사들이 내뿜는 입김과 욕설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들어라!”

가로막은 자들이 있었지만 베어내었다.

그리하여 감히 아무도 달려들지 못하는 영역을 만들어 낸 블라드는 품 안에 들고 있던 명령문을 꺼내고는 크게 외쳤다.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도시의 질서를 어지럽힌 검은 곰을 체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블라드의 손짓 한 번에 밑으로 떨어지는 두루마리.

두루마리의 가장 밑에는 쇼아라의 정당한 지배자 요제프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살인! 사기! 인신매매! 그리고 고귀한 도시의 주인을 기만한 죄까지!”

가장 앞서 있기에 빛난다.

정당하기에 누구보다 당당하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자는 블라드가 외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검은 곰은 내 앞으로 나와라!”

선언과도 같은 블라드의 추상같은 명령에 돌아오는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정당한 명령문과 함께 찾아온 기사에게 변명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빌어먹을.”

“······이런 젠장.”

어차피 잡히면 사형일 것을 안다.

그러나 검은 곰의 수하들은 외팔이 잭의 부하들과는 달리 쉽사리 블라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지금부터 나를 방해하는 자. 모두 참살하겠다.”

감고 있는 블라드의 왼쪽 눈 사이로 자그마한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명령문을 읽을 줄 아는 기사가 이곳에 있었다.

※※※※

으아악!

살려줘! 살려주십시오!

계단을 따라 울려 퍼지는 비명들.

무언가를 죽이고 자르는 데는 능숙한 검은 곰의 부하들이었으나 정작 자신들이 당할 때만큼은 큰 소리를 내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

블라드는 아게와 오타르가 열어 주는 길을 따라 조용히 계단에 올라섰다.

넓어진 그릇만큼이나 무거운 존재감으로 그렇게 질척이는 핏물을 밟고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열어.”

마지막으로 보스의 방을 지키고 있던 사내들이 있었으나 블라드의 고갯짓 한 번에 사시나무 떨듯 몸을 숙일 뿐이었다.

기사의 의무와 본인의 분노, 그 어딘가에 있는 블라드의 기세는 일개 조직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다.

끼이익-

블라드의 명령에 보스의 방이 열리자 그 안에 앉아 있던 검은 곰의 모습이 보였다.

쉼 없이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겨울임에도 젖어있는 그의 이마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블라드 경.”

그러나 블라드의 시선은 검은 곰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자신을 뒤로 한 채 천천히 일어서고 있는 남자.

그는 하얀 법복을 입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블라드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예의를 갖췄다.

만약 저 앞에 있는 자가 보이는 것처럼 신의 뜻을 따르는 사제라면 아무리 기사인 블라드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으니까.

귀족과 사제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배웠었다.

“저는 주교님의 명을 따라 쇼아라의 교회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이곳에 길을 잃은 어린 양이 있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었으나 얼굴에는 윤기가 가득하다.

자신이 아는 가장 고귀한 사제인 안드레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저는 요제프 님의 명을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사제님의 옆에 서 있는 자는 명백한 죄인이며······.”

“이제 죄인은 이곳에 없습니다. 블라드 경.”

실로 안심되는 미소.

인자함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은 사제는 곧 블라드에게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의 죄는 신의 이름 아래 사해졌으니까요.”

검은 곰은 사제의 말에 이제야 됐다는 듯 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블라드는 사제가 들이미는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야 막 찍었는지 선명한 잉크가 마르지도 않은 종이.

그곳의 맨 위에는 면죄부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7화 9

너의 죄를 사하노라 (2)

신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그의 품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닿지 않는다.

높이 있는 자에게 가장 먼저 내려오며, 많이 가진 자에게 더 많이 내어주는 것.

그것이 밑바닥 사람들이 여태껏 보아왔던 신과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럼 이 자는 이제 무죄가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주교께서 직접 발행하신 면죄부이니까요.”

사제는 블라드의 물음에 답하고는 눈을 감으며 경건한 자세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누가 보아도 신실한 그의 모습은 정말로 신의 은총이 이곳에 닿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고 있었다.

‘······고작 이거 하나로.’

블라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사제가 들고 있는 종이 한 장으로 검은 곰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니.

거짓된 교회에서 죽어갔던 그녀들의 눈물이 겨우 이 종이 한 장으로 닦아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안나가 흘렸던 검은 눈물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죄라는 것은 언제든지 신실한 마음으로 사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블라드 경.”

“······.”

분노와 당황, 그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주교가 보냈다는 사제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나는 이제 무죄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블라드는 멍하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신께 용서받았으니까. 이제 된 거 아닙니까.”

“······용서?”

고개를 돌린 곳에는 검은 곰이 이제는 됐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보며 조금씩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그는 교회와 면죄부에 의해 무고해졌으니 마땅히 웃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가 팔아넘긴 여인들은 어두운 곳에 갇혀 공포에 떨며 죽어갔지만 정작 그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는 웃고 있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정말로 신실한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제님?”

“물론입니다. 기사님.”

정말로 신과 교회에게 용서만 받으면 그 어떤 죄를 지어도 결백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군요.”

그렇다면 나도 용서를 구해야겠다.

그날 차마 흘러내리지도 못했던 안나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대신 값을 받아주겠노라고 약속했었으니까.

“블라드 경?”

“저의 죄를 고합니다. 사제님.”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다면.

해야 할 자리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네가 해라.

그것이 소드마스터의 규율이므로.

촤악-

“커억-!”

순간, 사제의 하얀 법복 위로 검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막을 수 없었다.

아니 설사, 예상했다 할지라도 막을 수 없는 단호한 일검이었다.

“끄으으······.”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검은 곰.

억지로 붙잡고 있는 그의 목에서 쉴 새 없이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저는 죄인입니다. 사제님.”

경악하고 있는 사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죄를 고하는 기사가 있었다.

그는 사제 안드레아가 보증하는 신실한 이름을 지닌 자였으며 북부 교구 산 로지노가 선물한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는 자였다.

“그러니 저에게도 죄를 사할 기회를 주십시오.”

신의 뜻은 낮의 태양과 같이 눈부시고 화려하게 다가오지만 때로는 지금과 같이 비스듬히 비춰야 할 때도 있다.

뒷골목과 같은 낮고 추한 곳에 임하실 때는 그조차도 고개를 숙이며 들어와야 할 테니까.

※※※※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할 깊은 밤이었으나 요제프와 기사들은 진중한 표정으로 시장실에 모여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군.”

그레고리의 보고를 들은 요제프는 피곤이 내려오는 듯 눈두덩이를 짓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면죄부를 받은 자를 죽였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요제프 님. 제가 말렸어야 했는데.”

그레고리는 정말로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을 뿐이었다.

비록 이번 작전의 제 일(一) 책임자는 블라드였으나 그레고리 또한 선배로서 해줘야 할 나름의 책임이 있었다.

“검은 곰이라는 자가 면죄부를 받아올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네 말이 맞다.”

깍지를 낀 채 가만히 앉아 있던 요제프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개 뒷골목의 우두머리 따위가 주교가 내리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는 분명······.”

“내어준 것이겠지. 받아낸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에는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다만 명확한 시선은 없었을지라도 요제프의 눈빛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바예지드를 엿으로 보는군.”

요제프의 눈동자는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이 세상 누구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귀족들은 자신의 것을 침범당하는 것에 분노하는 자들이다.

하나씩 내어주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으니까.

“블라드는 지금 어디에 있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비록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나 그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일부러 검은 곰에게 면죄부를 내어준 것으로 보아 주교는 처음부터 블라드를 노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해야 한다.

“지금 당장 기사 블라드를 체포해라.”

갑작스레 집무실에 울려 퍼지는 요제프의 명령.

그 명령을 듣고 있던 그레고리와 보르단은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들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요제프 님, 지금 블라드를······.”

“죄목은 살인죄다.”

단호하기에 냉정한 명령.

이미 결정했다는 듯 요제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떨림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충격적인 명령에 모두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지만, 오직 자야르만큼은 요제프의 명에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자, 자야르 경. 차라리 내가.”

“못나게 키운 것은 내 잘못이니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요제프의 명령만큼이나 자야르의 태도 또한 단호했다.

소년에게 벌을 내리고 매를 들어야 한다면 그가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누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야 스스로 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할 테니까.

“······이런.”

그레고리는 문밖에서 벌어질 상황을 상상하며 한탄을 내지르고 말았다.

스승이 제자를 체포하는 상황이라니.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블라드를 혼자 위로 올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레고리 경.”

“네.”

그러나 그레고리에게는 후회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네도 이번 일의 당사자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맞습니다.”

입으로는 그레고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지만 손으로는 쉴 새 없이 끄적거리며 무언가를 적기 시작하는 요제프.

“그러니 지금 당장 바르나로 가라.”

“네?”

그레고리는 요제프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아들고서는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바라본 편지 봉투에는 사제 안드레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알, 알겠습니다.”

무언가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요제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행동을 취하고 있으니 그레고리로서는 그저 명령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보르단 경은 마법사를 불러와라. 아버지와 산 로지노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막심과 케이드에게도 알려라. 지금부터 그들이 행하는 모든 임무를 취소하고 이곳에 대기 시켜라.”

“네.”

전쟁이라는 것은 오직 칼과 창의 맞부딪힘 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다.

쇼아라의 주교는 지금 블라드를 미끼로 정당한 바예지드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셈이었고 요제프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항복이 아닌 결전을 선택했다.

“······결국, 먼저 움직이시는군.”

알고는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그저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아니면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가주인 페테르가 이곳 쇼아라에 장남인 루트거가 아닌 요제프를 보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의 둘째 아들은 비록 검에 대한 재능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날카로움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잘 됐군.”

아무도 없는 집무실 안에서 짙은 눈그늘의 청년이 까맣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제는 온전히 가질 때가 왔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을 온전한 바예지드의 도시를.

※※※※

높이 솟은 종탑은 하늘에 있을 신과 가까움을 의미하고 넓게 자리 잡은 건물은 그의 품이 넓음을 상징한다.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바르나보다는 작았지만 쇼아라의 교회 역시 이 도시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있어 크기만큼 확실히 와닿는 것은 없을 테니까.

“망설임 없이 베어냈다고?”

“그, 그렇습니다. 주교님.”

검은색과 흰색의 타일들이 반복되어 깔려있는 주교의 알현실.

교회를 지은 장인들이 가장 신경 써 만든 그곳에서 쇼아라의 주교는 자신이 보낸 사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듣던 것 보다 더 화끈한 놈이었군.”

붉은 법복을 입고 있는 사내.

바짝 마른 몸이 볼품없어 보였으나 2m는 되어 보일 듯한 큰 키는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줄 법했다.

“역시 그 녀석을 흔드는 게 맞았던 모양이야.”

검은 곰에게 직접 면죄부를 전달해주었던 하얀 법복의 사제는 감히 주교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조아린 채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

지금이야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였으나 주교가 되기 전 그는 자비 없는 이단심문관으로 유명한 자였으니까.

“그 녀석의 보증인이 사제 안드레아라지?”“그렇습니다.”

주교 피에르는 들려오는 대답에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여태껏 자신이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던 자들 모두가 블라드라는 기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잘하면 한 번에 날려버릴 수도 있겠군.”

고위 성직자가 아님에도 북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로 신실한 사제. 안드레아.

비록 이 도시가 아닌 바르나에 있는 안드레아였으나 피에르는 언제나 그가 불편했었다.

하나의 목적에 따라 뭉쳤다 할지라도 조직이 커지고 넓어질수록 이리저리 이합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들의 습성.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안드레아와 피에르는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다.

“교황청에 계실 양반들이 좋아하겠어.”

신의 뜻은 하나이지만 그 뜻을 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리고 피에르는 자신이 걷는 길만이 진정으로 신의 뜻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었다.

“새로 온 시장에게 사람을 보내라. 나의 면죄부를 무시한 어리석은 기사를 인도받아야겠다고.”

새로운 시장인 요제프는 그동안 나름의 각오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왔겠지만 더이상은 봐줄 수 없다.

이제는 날카로운 경고와 함께 자신의 존재감을 알려줘야 할 때다.

“이단심문관들에게도 준비해 둬라 일러라.”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피에르의 계략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리며, 경험 없고, 그렇기에 어리석을 어린 기사는 예전부터 피에르가 눈여겨보던 자였으니까.

“어디 한 번 얼굴 좀 볼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평생을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하며 뼈저리게 느꼈던 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검은 벼락을 맞았다는 그 녀석 말이지.”

아무리 가진바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고작 1년 만에 오러를 내뿜고 기사가 되었다는 것은 피에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소년이 그동안 만들어 냈던 빛나는 업적에는 피에르가 기대하던 대로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8화 10

너의 죄를 사하노라 (3)

밤의 열기를 불태운 뒷골목에는 오직 비루한 잔재만이 남아있었다.

일했던 자들도, 즐겼던 자들도 모두가 어딘가에 있을 그림자를 찾아 잠들어 있을 시간.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그 시간에 교회의 깃발과 함께 들이닥친 자들이 있었다.

“모두 정지!”

너저분한 뒷골목의 쓰레기를 짓밟으며 움직이는 병사들.

그들이 멈춰선 곳은 마담 마르셀라가 운영하는 여관. 장미의 미소였다.

“우리는 쇼아라의 주교이신 피에르 님이 보낸 사람들이다! 이곳의 주인은 문을 열어라!”

기사 블라드는 주교 피에르가 발행한 면죄부를 무시하였다.

이는 곧 신의 뜻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며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는 엄중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곳 장미의 미소에는 그와 함께 무고한 자를 죽인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문을 열지 않으면 안에 있을 너희 또한 불경한 자들로 취급하겠다!”

조용한 뒷골목 안에 울려 퍼지는 성기사의 목소리.

가장 구원이 필요한 곳에 다다른 신의 뜻이었으나 그 뜻은 따뜻한 미소가 아닌 냉정한 심판이었을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죄인들을 끌어내라!”

성기사의 추상같은 명령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장미의 미소.

신성한 깃발 밑에 서 있던 성기사는 차라리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창-

차장-

주교의 병사들이 각자 무기를 빼 들고는 소년의 둥지를 향해 치켜들었다.

신의 품은 자비로우나 그의 뜻은 냉정하니 인간들은 모두 그분께 고개 숙일지어다.

“문을 부숴라!”

블라드는 빛나는 별 하나를 움켜쥐었으나 아직 그 빛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까지 지키기에는 미약했다.

살면서 닥쳐오는 고난은 태풍과도 같은 것이며 오직 들고 있는 두 손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끼이이익-

그렇기에 사람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야만 한다.

바로 지금처럼.

“성질들 급하시군.”

촛불 하나 밝혀지지 않은 장미의 미소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반삭의 머리 위에 새겨진 흉터가 인상적인 사내는 반짝이는 판금 갑옷을 입은 것이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사람 같아 보였다.

“······누구냐.”

수십의 병사들을 향해 걸어 나옴에도 눈 하나 흔들리지 않는 기세를 가진 남자.

“나는 요제프 님의 기사 막심이다.”

이 도시에서 주교의 명이라는 말을 듣고 길을 비키지 않을 자는 없을 것이다.

오직 쇼아라의 시장인 요제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미안하지만 장미의 미소는 현재 우리가 먼저 조사 중이다.

서로가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동등한 권세라 한다면 결국은 명분이 우선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장미의 미소에 먼저 사법권을 발동한 자는 주교의 성기사가 아닌 요제프의 기사 막심이었다.

“이곳에 있는 인물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의심받고 있다.”

“살인죄로 의심받는 놈들이기도 하지.”

귀족과 교회는 서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그러나 그 선을 먼저 무너뜨린 것은 주교 피에르였으니 요제프 또한 그동안의 암묵적인 규율을 지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장미의 미소는 우리가 봉쇄한다. 들어오고 싶다면 시장님의 허락을 받고 와라.”

막심의 말과 함께 장미의 미소 안에서 요제프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명분에 앞선 요제프의 병사들은 망설임 없이 주교의 병사들을 밀치며 천천히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후회하실 텐데?”

사냥감을 놓친 성기사의 분노는 매서웠지만, 막심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요제프의 기사 막심.

그는 케이드와 함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에게 당했었던 두 기사 중 한 명이었다.

후회도 살아있을 때나 할 수 있다.

만약 그날 블라드가 아니었다면 막심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빚쟁이라 어쩔 수가 없어.”

일개 기사가 감당하기 힘들 교회의 권위였지만 막심은 자신이 하겠노라고 자원했다.

이 정도는 해야 목숨값을 갚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

시청 지하에 있는 감옥.

그래도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의 공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지만 블라드의 표정은 어두울 뿐이었다.

“언제나 다음을 준비하라 했을 텐데?”

“······.”

창살 밖에서 들려오는 자야르의 말에 블라드는 입이 열 개라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국, 네놈의 뒤처리는 모두 요제프 님이 짊어지게 되었다. 이 멍청한 놈.”

결국, 종자였을때와 다름 없게 되었다.

이번 일에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주군인 요제프가 지게 되었으니까.

“죄송합니다.”

“······.”

자야르는 창살 안에서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크게 뭐라 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함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멍청한 놈.’

똑똑한 녀석이니 조금만 더 시야가 넓었다면 이런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아직 소년은 귀족들의 세계는 물론 교회를 비롯한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모자랐다.

피에르 주교는 참으로 적절한 대상을 골랐다.

“······조만간 교회로 나가 증언을 하게 될 거다. 그때를 대비해서 준비하고 있어라.”

명분은 저쪽에 있으니 결국 교회로 나가 해명해야 한다.

이단심문관이었던 피에르는 탁월한 심문 실력으로 주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으니 혹독한 재판이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

블라드는 창살 안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자야르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자책하지 마라. 해야 할 일을 한 거니까.]

목소리의 위로에도 블라드는 쉽게 침울한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분명 옳은 일이었고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제 잘못이 맞아요.”

뒷골목의 세계와 기사의 세계는 다르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서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뒷골목과는 다르게 기사의 분노는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진득한 용암과도 같아야 한다.

검이란 날카롭기에 무거워야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이제야 무거워야 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았다.

※※※※

“이래서 굳이 일주일이나 버틴 건가?”

피에르 주교는 창가에 서서 밑에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손이 묶인 채 저 아래에 있는 광장을 건너 죄인처럼 교회를 향해 걸어오는 금발의 기사가 있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채 블라드를 끌어안고 있던 요제프였으나 더는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명분의 싸움이었고 아무리 요제프라 해도 이 이상의 부담을 짊어지기에는 불가능했을 테니까.

“꽤 그럴싸하군.”

그러나 교회로 호송되는 블라드의 옆에는 그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놈은 죽어도 싸지! 임산부들을 팔아넘겼다는데!”

“할 일을 했는데 어째서 죄인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우리의 기사에게 모욕을 주지 마라!”

쇼아라의 블라드.

도시 쇼아라에서 나고 자랐으며 뒷골목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자수성가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이미 어린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블라드라는 기사는 분명 쇼아라의 시민들에게 있어 자긍심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교황청에서 보낸 주교는 인정할 수 없다! 이곳은 북부다!”

“우리는 북부의 피를 지닌 주교를 원한다!”

블라드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간간이 터져 나오는 피에르에 대한 불만까지.

블라드의 행진이 더뎌질수록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쇼아라의 길목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애를 쓰시는군.”

그 모습을 보던 피에르는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창문에서 돌아섰다.

감히 쇼아라의 민심을 통해 자신을 흔들려 하다니.

역시나 바예지드의 피를 이은 자들은 쉽사리 봐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이단심문관들은 다들 준비됐나?”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썼다고 한들 잔재주에 불과한 일.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진실된 이름 앞에서 꼬리를 내릴 하찮은 잡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

블라드는 긴장된 상황이었음에도 주위를 둘러보고 파악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

그렇게 둘러본 주위의 광경은 앞으로 있을 재판에 대한 부담감이 아니더라도 괜스레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와보네.’

평생을 쇼아라에서 살았음에도 한 번도 와보지 못했던 장소였다.

교회란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높은 문턱을 가진 곳이었으니까.

“기사 블라드는 앞으로 나오시오.”

반원의 형태로 만들어진 교회의 재판장.

재판장인 피에르와 피의자인 블라드가 들어설 곳은 재판장의 가장 중앙에 있었으며 요제프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교회에서 특별히 초대한 도시의 유력자들은 위에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게 되어있었다.

[이단심문관들이군. 들고 있는 수정구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단심문관들을 보았다.

총 8명의 심문관들.

그들 모두가 두 손으로 사람 머리만 한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모두 8명입니다.”

“마녀사냥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도를 지나쳤습니다.”

요제프는 위에서부터 올라오는 쓴맛을 느끼며 눈썹을 찌푸렸다.

‘최악을 감안해야겠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버티며 이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 많은 수단들을 강구했지만 결국 시간이 부족했다.

이제는 최악의 결과를 감안하고 다음 수를 준비할 각오를 해야만 했다.

“신의 말씀이 담긴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말하겠다 대답하시오. 블라드 경.”

신의 이름으로 새워진 교회 안에서 블라드는 성경에 손을 얹었다.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맹세란 입으로 내뱉고 양심으로 지키는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조금은 다르게 표현될 것이다.

재판장 바닥에 복잡한 글자로 채워진 축문들은 블라드가 거짓을 말하는 순간부터 수정구의 빛을 꺼뜨리게 될 테니까.

“······.”

요제프는 조용히 타오르는 눈으로 저 앞에 서 있는 피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피에르에게서는 그저 무표정한 냉기만이 감돌뿐이었다.

“지금부터 바예지드의 기사인 블라드 경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겠소.”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지만 어쩌면 이미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재판은 정해진 결과를 맞히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는 블라드에게 있어 반가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기사 블라드는 면죄부를 든 검은 곰이라는 사내를 살해했다. 이 말이 진실인가?”

주교의 질문을 들은 자신도 모르게 요제프는 두 손을 움켜쥐고 말았다.

지금 피에르는 같잖은 유도 신문을 통해 블라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있었다.

“맞습니다.”

“스스로가 신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걸 인정하는군.“······그게 무슨?”

그저 검은 곰을 죽였다는 대답일 뿐이었으나 피에르의 해석에 따라 소년은 신의 뜻을 무시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신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아니라!”

“다음 질문.”

하나의 질문, 하나의 대답.

블라드의 대답과 함께 심문관 하나가 원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이번의 사건과 같이 사람을 죽일 때마다 언제나 정당하고 올바른 결정을 해 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해야 할 일을 했다.

검은 곰은 임산부들을 팔아넘긴 추악한 자였으며 아무리 면죄부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을 감출 수는 없다.

“거짓이군.”

그러나 블라드의 대답에 심문관이 들고 있던 수정구 하나가 빛을 잃었다.

“······!”

그 누구도 살면서 항상 옳은 결정만을 내릴 수 없다.

그러나 피에르는 언제나, 항상, 최선의 자세 같은 도달하기 힘든 기준을 질문 속에 감춤으로써 블라드에게 거짓을 강요했다.

“이건!”

“다음 질문이다.”

방금의 질문으로 블라드는 거짓을 고한 자가 되었다.

고작 두 번의 질문이었을지언정 노련한 피에르는 블라드의 약점을 확실히 쑤셔대고 있었다.

“1년 전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검은 벼락을 맞았다는 소년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그 소년이 자네인가?”

의도를 왜곡하고 속임수와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블라드라는 사람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단하기 시작하는 피에르.

그의 다음 질문은 헛된 의혹을 던짐으로써 블라드가 쌓아 올린 명성을 깎아내리려는 것이었다.

“······.”

그러나 피에르가 준비한 질문은 예상보다 블라드에게 큰 파문을 주는 질문이었다.

소년의 영혼 속에서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사실입니다.”

“불길한 징조와 함께했군.”

세 번째 대답과 함께 블라드는 불길한 징조가 깃든 기사가 되었다.

지금부터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업적들은 의심받게 될 것이다.

“혹시 그 벼락을 맞고 난 뒤로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떠한 존재의 계시가 있었나?”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아니라 말해도 상관없다.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상처 입고 흠집 난 블라드의 명성은 지금과 같이 밝게 빛나지만은 않을 것이다.

“······.”

들려오는 피에르의 질문에 블라드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태껏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악의의 형태에 블라드는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나?”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주저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모습에 방청석에 있는 사람들까지 조금씩 수군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주교와 뜻을 함께하는 도시의 유력자들에게서부터 시작된 웅성임이었다.

“목소리가 들렸냐고 물어본 것이라면······.”

맞다고 하면 사특한 존재가 될 것이며 아니라 하면 거짓을 고한 것이 된다.

무어라 말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맞다고 해라.]

주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목소리가 말했다.

이 경우에는 거짓을 말하는 게 더 치명적인 것임을 목소리는 눈치채고 있었다.

차라리 벼락을 맞은 후유증으로 정신이 잠깐 나갔었다고 변명이라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말하면 거짓이 된다. 그렇게 되면 변명할 기회조차 없을 거다.]

최악의 상황이라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목소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는 재판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각오한 바가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그렇다 해라. 절대 내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마.]

“······.”

자신을 의심하는 심문관들과 대답을 강요하는 주교.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블라드는 무슨 대답이라도 내놓아야만 했다.

쾅-!

“멈추시오!”

블라드가 입을 열려 하는 순간 재판장의 입구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게 열린 만큼 크게 열린 입구에서부터 겨울의 찬바람이 매섭게 들어치기 시작했다.

“재판을 멈추십시오!”

열려 있는 문에 서 있는 사람들.

헐떡이는 늙은 사제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부제.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레고리까지.

“이 재판은 공정하지 않소이다!”

늦었지만 늦지 않은 사람들이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들어올 수 없다!”

갑작스레 난입한 남자를 보며 경비병들이 가로막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하얀색 법복을 보고서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신실한 신의 종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으니까.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재판의 자격을 운운하는 거냐!”

갑작스러운 방해에 흐름이 끊기고 만 피에르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재판장에 난입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지금 막 들어선 남자는 지금의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할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기사 블라드 경의 이름을 보증한 사람입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무도 모르게 땅바닥에 뒹굴던 그 이름을 고이 주워 신의 이름 앞에 놓아준 사람이 있었다.

“만약 그의 이름 앞에 의혹이 있었다면 당연히 나를 먼저 거쳤어야 합니다!”

블라드는 자신의 보증인이라는 말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려 입구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수염에 붙어있는 눈 덩어리들을 떼지도 못한 채 서둘러 재판장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어린 부제의 부축을 받으면서 지친 발걸음으로 한 걸음씩 그렇게.

“사제님······.”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안드레아는 아직도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블라드의 옆에 섰다.

그의 숨결 하나하나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내가 자네 대신 말해줄 테니.”

공정하지 않은 재판장이었으며 기울어져 있는 재판이었다.

그러나 방금 소년을 위한 추 하나가 올려졌으니 재판은 다시금 새로운 균형을 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로 왔군.”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에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소년의 보증인이자 북부의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신실한 사제였다.

“오랜만입니다. 피에르 주교님.”

기사의 인도를 따라 북풍의 설한을 뚫고 온 남자.

“사제 안드레아. 인사드립니다.”

사제 안드레아.

그는 자신이 보증한 소년을 위해 스스로 저울 위로 올라갈 각오를 한 사람이었다.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9화 19

이제는 스스로 서야 할 때

고아가 되었다는 서러움은 단순히 부모를 잃었다는 슬픔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내가 안 훔쳤다니까!”

이제는 소년을 위해 아니라고 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다는 현실은 어린 블라드를 끊임없이 지치게 했다.

“재수없게스리! 이래서 부모 없는 놈들은 안 돼!”

세상은 편견 안에 블라드를 가둬놨고 결국 어린 소년은 자신을 구겨가며 뒷골목 고아의 삶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블라드는 어딘가가 구겨진 채로 한 치 앞만 바라봐야 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홀로 재판장 위에 서 있는 소년을 위해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블라드 경을 위해 대신 대답할 것입니다.”

대답을 주저하는 소년을 자신의 등 뒤에 감춘 채로 그렇게.

그는 소년의 구겨진 영혼을 펴기에는 조금은 늦었지만 아주 늦지는 않았다 믿는 사람이었다.

※※※※

“당연히 앞으로도 그의 모든 행동은 목소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저 위에 계신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피에르의 질문은 블라드를 불길한 징조가 깃든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안드레아의 대답은 블라드를 축복받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같은 한 사람이었지만 보는 시야에 따라 그렇게 달라 보였다.

“창녀를 어머니로 둔 비천한 태생이오. 신의 축복이란 것이 그리 녹록한 줄 아시오?”

한낱 뒷골목 고아 따위에게 신의 축복이라니.

정말로 신의 축복이 블라드라는 사람에게 깃들었다면 그를 더러운 뒷골목이 아닌 고귀한 핏줄 속에서 태어나게 했을 것이다.

“제국의 건국왕이신 프라우센 님도 몰락한 귀족가의 자식으로서 밑바닥에서 숱한 고난을 겪어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결국 그분은 신의 축복과 함께하셨습니다.”

교회의 주교가 블라드가 태어난 자리를 보는 동안 교회의 사제는 소년이 앞으로 나아갈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비천한 곳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안드레아는 소년이 누구보다 빛나는 가능성이 있다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음 질문.”

오직 쇠붙이로 만든 것만이 날카로운 무기는 아니다.

비록 검은 아니었으나 이곳 쇼아라의 교회에서도 서로 날카로운 무기를 든 채 찌르고 막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쇼아라의 뒷골목에서 자라오며 지금까지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왔다. 이 말이 진실인가?”

훔치고, 빼앗고, 때로는 죽이고.

블라드는 분명 죄를 지으며 살아왔다.

“살아남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의 죄는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한 긴급구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분명 가련한 여인과 아이를 위해 관을 옮겨주고 못을 박아주었다.

저주가 두려워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지만, 오직 소년만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었다.

태어난 심성대로 살지 못했던 것은 분명 블라드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기사 블라드는 검을 잡은 지 고작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사특한 존재를 물리치고 용을 죽였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 가능한 일인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오러를 깨우치고 용을 죽이고 서부의 기사를 물리쳤다.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소년의 성장세는 분명 밖에서 보았을 때는 의구심을 품게 할 만한 것일 테다.

“······.”

안드레아는 피에르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잠시 그날을 기억해보았다.

일개 용병이었음에도 자신의 의무를 위해 새까만 밤길을 달려왔던 소년.

그날, 밤하늘을 가르며 달려왔던 블라드의 세계는 누가 보아도 눈부신 하얀색이었다.

“······블라드 경의 빛나는 세계는 오직 저만 본 것이 아닙니다. 주교님.”

그리고 블라드의 세계를 본 자는 안드레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각 가문에서 모아온 증언서들이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요제프가 전해준 종이들을 움켜쥐고는 높게 들어 올렸다.

종이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고귀한 자들의 문장들.

그곳에 적혀 있는 이름들 모두가 블라드의 가능성을 똑똑히 보아온 사람들이었다.

“하이날의 던칸, 산 로지노의 유스티아, 그리고 바라노프의 볼코프까지! 이들 모두가 그간의 업적이 모두 소년이 한 업적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안드레아는 피에르의 암수 속에서 블라드를 끄집어내고 있었지만, 그가 보내온 한 줄기의 밧줄은 소년이 여태껏 쌓아 올려왔던 사실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블라드는 지옥과도 같은 의심 속에 서 있었지만 결국 스스로를 구해내고 있었다.

“······기사들의 증언서. 확인했소.”

피에르는 안드레아가 전한 기사들의 증언서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신실함에 대한 의심, 출신에 대한 비천함, 떳떳하지 못한 범죄들, 그리고 만들어진 가능성에 대한 의혹까지.

피에르는 블라드를 잡아채기 위해 촘촘한 그물을 만들어 놓았지만, 사제 안드레아의 변호는 그가 만든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안드레아가 들고 있는 진실이라는 단검은 그렇게 날카로운 것이었다.

“······.”

피에르는 블라드를 둘러싸고 있던 심문관들을 바라보았다.

피에르가 던지는 질문 하나마다 밖으로 나갔던 수정구들.

그러나 안드레아가 도착한 이후 빛이 꺼진 수정구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이제 원 안에 남아 있는 수정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결국, 꺼내야 하는가.’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다.

피에르는 단 하나의 질문만으로는 블라드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렇기에 만약을 위해 준비해놓은 방안을 사용하기로 했다.

요제프와 피에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준비했던 것을 들여와라!”

그것은 최악을 준비한다는 것.

피에르의 지시에 따라 성기사들이 재판장 안으로 커다란 봉함[封緘]을 들여오고 있었다.

사제나 잡부가 아닌 성기사들이 직접 들고 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곳곳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나무함은 분명 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범상치 않은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재판의 재판장인 나 피에르는 아직 하나의 질문을 남겨두고 있다.”

피에르의 회백색 눈동자가 안드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주교 앞에서 날뛰는 저 사제 하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번거롭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그의 의혹을 밝혀보기로 했다.”

피에르의 신호와 함께 심문관들이 커다란 나무함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숨죽이는 사람들과 긴장하는 심문관들.

“이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물건을 본 안드레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거울?”

“아니, 갑자기 웬 거울이?”

커다란 봉함 속에서 나온 물건은 거울이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이 거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 대신 기사 블라드에 대한 구마의식을 행할 것을 명하겠다.”

성 마르엘로의 거울.

교황청이 지정한 공식적인 성물인 마르엘로의 거울은 바라보는 사람의 모든 진실을 비춘다고 알려진 보물이었다.

“블라드 경은 진실로 떳떳하다면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이 성물이 쓸 때는 단 한 가지의 경우.

사람의 영혼 안에 숨어 있는 악(惡)의 존재를 발견하고자 할 때였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블라드의 안에 마귀가 있다.

피에르의 구마의식은 그것을 상정한 행위였다.

“여태까지 진실한 대답으로 그의 결백을 증명해 왔는데 어째서 블라드 경에게 구마의식을 진행하려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의 구마의식은 블라드에게 낙인처럼 찍혀 불명예의 상징처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안드레아 사제. 나는 일말의 의심조차 밝혀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피에르가 단순히 블라드의 명예에 흠집을 내기 위해 성 마르엘로의 거울을 꺼내 든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리냐는 질문에 크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던 블라드.

노련한 피에르는 증인이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녕 그의 영혼이 깨끗하다면 그저 앉기만 하면 될 일 아니오.”

틀린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도 아니었다.

지금의 행위 자체가 블라드에게 큰 부담을 짊어지게 하는 것임은 분명했으니까.

“······.”

안드레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있는 소년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피에르의 마지막 수단은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고 최선을 다해 변호하던 안드레아조차도 이것만큼은 막아 줄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게. 그저 안에 깃든 사특한 존재를 찾아내는 물건이니까.”

안드레아는 블라드가 신실한 사람이라 믿었기에 이번 시도만 넘긴다면 무사히 재판이 끝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안드레아는 소년의 진실된 모습을 꿰뚫어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블라드의 면모가 하나 있었다.

소년은 오롯이 홀로 서 있는 자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영혼에는 시련과 고난을 같이 겪어왔던 목소리라는 존재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성 마르엘로의 거울.

그 거울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떨리고 있었고.

“······.”

가만히 깍지를 낀 채 상황을 주시하던 피에르도 흔들리고 있는 블라드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블라드를 바라보는 그의 무기질한 눈동자가 조금씩 번들거리고 있었다.

※※※※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잔잔했다.

이 재판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목소리는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괜찮다. 앞으로 가라.]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에게 검을 내어주었던 늙은 대장장이를.

그는 자신의 볼품 없는 검이 블라드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랐고 비록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은 사이였지만 목소리는 그와 깊은 동질감을 느끼고는 했다.

‘하지만.’

[그동안 너에게 알려줄 것은 다 알려주었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의 대답에 잠시 멈칫하는 블라드의 걸음.

그러나 서슬 퍼런 심문관들의 눈빛은 블라드의 머뭇거림을 용서하지 않았다.

[저 거울에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

목소리는 예전에도 한 번 안드레아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잠시 더 깊은 내면으로 빠져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것은 교황청이 자랑하는 성물.

저 대단한 성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사의 세계는 바다와도 같이 넓고 깊은 것이다. 여태껏 네가 펼쳐온 세계는 그저 발 한쪽을 담근 수준일 뿐이었지,]

루트거는 검을 튕겼고, 그레고리는 발을 굴렀다.

블라드의 세계를 이끌어주었던 기사 파블로는 검과 방패를 맞부딪혔었다.

그 행동들 모두가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세계를 끌어올리기 위한 열쇠와도 같은 행위였었다.

[기본은 닦아 놓았으니 이제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정진할 때가 되었다.]

이제야 막 기사들의 세계에 다다른 블라드였지만 아직도 올라가야 할 계단은 많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알려준다고 해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지금이야말로 소년이 스스로 일어서야 할 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기사 블라드는 눈을 떠라! 그리고 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봐라!”

“······.”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침내 거울 앞에 다다른 블라드였지만 쉽사리 거울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지금 눈을 뜨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있었으니까.

‘저는 아직 그 세계까지 다다르기에는 모자라요.’

[그래도 언젠가는 다다르겠지.]

‘엄청 오래 걸릴 거예요. 평생 못할지도 모른다구요.’

바라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마침내 다다랐을 때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지도.

[이제는 혼자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목소리는 각오했고 이제는 해야 할 순간이었다.

할 일을 마친 장식 없는 검이 깨어졌듯 목소리 또한 지금은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다.

[그때까지 안녕이다.]

웅성거리는 방청석.

점점 커지는 심문관들의 기도문 소리.

그러나 그 와중에도 블라드는 확실히 들었다.

목소리가 보내는 작별 인사를.

“······알겠어요.”

거울 앞에 선 블라드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맞닿아 있는 세계였기에 느낄 수 있었으니까.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었던 세계가 저 깊은 곳으로 무너지듯 침잠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주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피에르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소년 안에 자신이 기대해 마지않았던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눈을 뜨고 앞을 봐라! 블라드!”

이제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저 밑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블라드는 기억했다.

자신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세계였는지를.

목소리의 세계.

그의 세계는 폭풍과 뇌우. 그리고 선명한 하얀색이 가득한 세계였다.

“······!”

마침내 마주친 성 마르엘로의 거울.

그 앞에서 블라드는 당당히 눈을 뜨고는 자신과 맞닿아 있던 세계의 잔재를 보았다.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남겨주고 간 하얀색의 세계였다.

“저건······.”

“거울이······빛난다?”

소년과 마주친 거울이 빛나고 있었다.

새하얗게, 마치 터져나가듯.

“맙소사······.”

일어서는 신실한 사제와 어찌할 줄 몰라하는 심문관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결과에 경악하고 있는 피에르까지.

성 마르엘로의 성물에서부터 시작된 소년의 세계가 재판장이 터져나갈 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게 하나도 안 보이잖아.”

벼락은 구름에서 만들어져 하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얀색은 고결한 색이며 오직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색이다.

소년의 뿌리를 이루고 있던 목소리의 세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건들고 지랄들이야.”

언제나 거대한 세계들은 소년을 짓뭉개고는 했다.

예전에는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 채 구겨지고는 했으나 지금이라면 크게 한 번 정도는 외쳐도 될 것이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잖아!”

콰쾅-! 쾅!

소년의 울분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여든 하얀색의 구름은 거짓된 교회의 가장 높은 곳으로 벼락 한 줄기를 떨구었다.

댕-대앵-댕-

소년은 잘못이 없다.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백을 증명해 준 마지막 증인은 바로 언제나 블라드와 함께 했던 목소리였다.

도시 쇼아라에서 블라드의 결백을 알리는 종소리가 높게 울리기 시작했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0화 18

저 눈이 녹을때면 (1)

전쟁에 패한 기사들이 모여 있다면 이런 분위기일까.

주교의 집무실에 모여 있던 사제들은 마치 자신들이 패장(敗將)이라도 되는 듯 다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복구 가능성은 어떻지?”

그래도 누군가는 지금의 물음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피에르 주교의 차가운 분노가 터져 나오고 말 테니까.

“자세한 것은 교황청으로 보내봐야 알겠지만······.”

피에르 주교의 심복인 하얀 법복의 사제는 차마 말하기를 주저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 것 같습니다.”

“······.”

피에르 주교는 사제의 대답을 듣고는 무거운 침음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던 피에르였지만 그럼에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어쩔 수 없는 한마디가 있었다.

“어이가 없군.”

성 마르엘로의 거울.

교황청이 직접 하사한 성물인 성 마르엘로의 거울은 피에르에게 있어 자부심과도 같은 물건이었지만 어이없게 깨지고 말았다.

고작 애송이 기사의 영혼을 비춰봤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도대체 뭐 하는 놈이냐.’

쇼아라의 블라드.

뒷골목 출신의 기사.

흔치 않은 이력과 어린 나이는 분명 독특한 개성을 자아내고 있었지만 그렇다 할 지라도 지금과 같은 이적(異跡)을 일으킬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의 영혼 안에 비쳤던 것을 본 사람이 있나?”

성 마르엘로의 거울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저 자신의 모습만을 들여다보았겠지만 블라드의 경우에는 차마 쳐다보기 힘든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그 말은 소년의 안에 분명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특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저희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교회의 지붕 위로 벼락이 날아왔다고 합니다. 현실에 영향을 끼칠 만큼의 강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피에르 주교는 사제들의 말을 듣고는 더욱 혼란에 빠질 뿐이었다.

“······도무지 무엇인지를 모르겠군.”

오랜 세월 동안 이단심문관으로 지내왔던 피에르조차도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존재였다.

밝게 빛났으니 악에 속한 것은 아닐 터.

그러나 신의 축복이라고 하기에는 지니고 있는 기운이 너무 매서웠다.

“이건 보고를 해야 하겠어.”

블라드의 안에 깃든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분명 성물 하나를 부숴 먹을 만큼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비록 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특이점이라면 분명 교황청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어쩌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니 다시 한번 재판장에 세워 볼 수도······.

똑똑똑.

“들어와라.”

피에르는 때마침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잠시 상념에서 깨어났다.

“······주교님.”“무슨 일이냐.”

집무실에 있는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명의 사제.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종이쪽지가 들려져 있었다.

“산 로지노에서 보낸 전보입니다.”

“산 로지노에서?”

사제의 말에 피에르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교황청 소속인 자신에게 북부 교구인 산 로지노가 전보를 보내올 일은 드물었으니까.

“줘 봐라.”

피에르는 왜인지는 몰라도 창백한 안색을 짓고 있는 사제의 손에서 쪽지를 빼 들었다.

위기 뒤에는 기회가 온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회 뒤에는 위기가 올 수도 있는 법이다.

피에르는 함정을 통해 블라드를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산 로지노······.”

이제 흐름은 피에르에게서 다시 요제프에게로 넘어갔고 쇼아라의 정당한 시장은 자신에게 넘어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북부 놈들이!”

안개 가득했던 마을에 누워있는 여인들이 눈물로써 증언하고 있었다.

검은 곰이라는 사람은 절대 면죄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산 로지노는 그녀들의 눈물을 받아들였다.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는 검은 곰과 흑마법사들간의 관계에 해명할 것.-

쇼아라의 시장과 산 로지노.

북부에서 쏘아 올린 한 발의 화살이 피에르의 가슴을 싸늘하게 꿰뚫고 있었다.

※※※※

안드레아가 데리고 다니던 어린 부제의 이름은 크리스티앙이었다.

바르나에서 행했던 몬스터 토벌전에서부터 블라드와 나름의 인연을 쌓아왔던 어린 소년은 그가 모시는 안드레아를 따라 이곳 쇼아라까지 온 참이었다.

“사제님은 괜찮으셔?”

“좀 더 누워계셔야 할걸요.”

낑낑거리며 자기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물통을 들고 가는 어린 부제.

블라드는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함을 느끼며 대신 물통을 들어주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바르나에서 편히 지내고 있을 아이였으니까.

“추운 날씨에 움직이는 것도 무리인데 도착하자마자 주교님이랑 한 판 하셨잖아요.”

“······그렇지.”

단순히 어린 부제에게만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사제 안드레아는 지금 침대 위에 누워 골골대는 중이었다.

어린 부제의 설명대로 젊지 않은 나이에 할 수 있는 무리란 다 했으니 탈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 필요한 거는 없어?”“없어요. 이미 요제프 님이 다 신경 써주고 계셔서.”

누군가에게 빚진다는 사실은 한 마디로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져오고는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안드레아를 볼 때마다 항상 그런 감정을 느껴왔다.

이름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안드레아에게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진짜예요?”“뭐가?”

이제 겨우 열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보며 빛나고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으셨다는데?”

“······누가 그래?”

소문이란 퍼지면 퍼질수록 덩치가 커지는 법이다.

직접 재판장에 있던 도시의 유력자들은 차치하고라도 교회로 몰려들던 새하얀 구름은 쇼아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이적 중 하나였다.

“그런 대단한 거 아니야.”

“그래요?”

크리스티앙은 말로는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으나 정작 짓고 있는 표정으로는 아닐텐데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린 부제도 보았기 때문에.

밤하늘 아래서 악몽과도 같았던 여인을 갈라내었던 새하얀 일검을.

“그래도 좋아하셨어요.”

안드레아가 묵고 있는 방 앞에 도착한 크리스티앙은 블라드에게 물통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좋아하셨어?”

“그럼요.”

땅바닥을 굴러다니던 어린 용병이 자신의 보증 아래 어엿한 기사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존재와 함께하고 있었으니 안드레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나중에 제 동기들한테 자랑해도 되요? 블라드 경이랑 같이 기도했었다고.”

“······하고 싶으면 해.”

비록 미적지근한 대답이었지만 크리스티앙의 얼굴에는 이미 커다란 미소가 새겨진 후였다.

신의 축복을 받은 것인지도 모를 기사였다.

그런 기사와 함께한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린 부제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자랑할만한 거리가 될 것이다.

“나중에 봐요.”

“그래.”

인사라도 한번 하고 싶었건만 앓아누워 있다니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을 위해 온 사람이었으니 최대한 배려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뭐 자랑까지 하나.”

문 앞에서 돌아선 블라드는 크리스티앙의 말을 떠올리며 괜스레 뒤통수를 긁적였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의 자랑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

아무도 없는 복도에 멈춰선 블라드는 가만히 멈춰서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조용해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에게 말을 걸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저 대답 없는 자신의 혼잣말뿐.

“이거 적응 안 되네.”

만약 지금 목소리가 함께 하고 있었다면 그도 자신에게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었을까.

그러나 그 말에 대답해 줄 목소리는 자신의 세계에 자그마한 흔적들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만 뒤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혼자라는 감각에 블라드는 가만히 서서 고요한 침묵만을 삼킬 뿐이었다.

※※※※

“산 로지노에서 전보를 보냈다 합니다.”

“빠르군.”

와인잔을 들고는 창밖을 바라보던 요제프는 자야르의 보고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감정이 있던 컸던 모양이지?”“북부 교구에 대한 교황청의 홀대는 이미 유명한 것이지 않습니까.”

대륙의 중심은 중부이며 이들이 그 외에 지역에 보내는 차별과 질시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북부 교구 산 로지노가 중앙에 있는 교황청에게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쁘지 않아.”

시기가 좋았다.

정치적인 사안으로 산 로지노의 지원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급박하게 새로 짜여지는 힘의 균형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북부의 영주들과 산 로지노의 동맹.

이번에 있을 북부 회의에서 확정될 사항이었지만 지금처럼 확실한 기회가 있다면 미리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서로에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보르단. 안드레아 사제님을 잘 모셔라. 가능하다면 바르나로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비록 소년을 핑계로 모시고 왔지만, 안드레아 사제는 존재만으로 피에르 주교를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사제였으며 조만간 어느 곳의 주교직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으니까.

요제프의 머릿속에는 이미 피에르에 대한 다음 계획들이 짜여져 있었다.

“요제프 님. 저 왔습니다.”

“들어와라.”

요제프는 창가에서 몸을 돌려 집무실로 들어오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큰일이 있던 직후였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무어라 할 말이 쉽게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너를 어찌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블라드를 바라보는 요제프의 표정이 실로 미묘했다.

“너는 항상 예측이 불가능하군. 시작부터 끝까지 말이다.”

“······.”

요제프는 철저한 계획으로 결과를 이끌어내는걸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소년은 요제프의 계획을 헝클어뜨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녀석이었다.

궁합으로 따지자면 최악일 둘이었지만 만들어내는 결과는 언제나 예상 이상이었으니 요제프로서도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사제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안에 신의 축복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아닐 겁니다.”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

요제프의 짙은 눈그늘이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동과 날조는 귀족들의 특기이자 필수 교양인 항목이었다.

“······피에르 주교와 그의 뒤에 있는 교황청이 너를 주시하게 될 거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그들의 일을 방해했으니.”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루기 어렵고 키우기는 더 어려운 어린 기사는 여전히 요제프의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받아라.”

“네?”

블라드는 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주머니를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주머니였다.

“······이건.”

“이번 해가 끝나간다.”

내리는 눈과 함께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사고로 마무리되는 한 해였으나 요제프의 인생 중 올해만큼 성과를 거둔 해도 없었다.

어찌 보면 전부 다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의 공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 수당이다. 월급이 아닌 성과에 대한 보상이지.”

보르단이 말했듯이 블라드에게도 특별 수당이 지급되었다.

끝나가는 한 해에 맞춰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확실한 계산을 맞춰주었다.

“300골드는 넘을 거다.”

“······!”

방금까지만 해도 송구한 마음에 고개를 숙이던 블라드였으나 요제프의 입에서 흘러나온 액수에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으나 300골드라면 농사를 지을 땅도 살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왜, 왜······이렇게나.”

“종자였을 시절부터 해왔던 성과들도 계산해두었다. 큰돈이니 계획을 잘 세워봐라.”

소년은 언제나 요제프의 예상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어찌 보면 엉망진창인 과정이었으나 결과만큼은 눈부셨으니 요제프는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줄 의무가 있었다.

“너는 이제 기사다. 마땅히 너의 성과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있다.”

“감사합니다!”

요제프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에게 감사하다 말하는 블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뻐하는 저 모습을 보며 이 말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해야만 한다.

자신은 블라드를 책임지는 사람이었으므로.

“명심해라. 이제 기사가 된 너는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오직 무기와 무력으로만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블라드는 지금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요제프에게서 자신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말을 이해했나?”

“네.”

“좋다.”

17살인 블라드는 이번 해가 지나면 18살이 된다.

소년은 알아야 한다.

이제 올해가 지나가면 더는 소년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사 블라드는 신의 뜻을 담은 면죄부를 무시했다. 이것만큼은 피에르 주교가 확실히 밝힌 너의 과오다.”

어제의 재판에서 블라드는 자신의 입으로 면죄부를 받은 검은 곰을 죽였다 말했다.

이것은 요제프도 인정하는 과오였으며 블라드는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기사 블라드를 쇼아라에서 추방한다.”

“······네?”

마주 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티끌만큼의 과오라도 남아있다면 주교와 교황청에게 명분을 남겨주고 말 테니까.

“기간은 내가 다시 너를 부를 때까지다.”

종자는 뒤에 서 있어도 되지만, 기사는 앞장서야 한다.

소년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어른은 책임져야만 한다.

그리고 블라드는 이제 책임과 의무에 대해 알아야 할 나이이다.

창밖으로 한 해를 덮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눈이 녹을 때가 온다면 블라드도 소년이 아닌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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