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201-2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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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1화 6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 (2)

서부의 도시, 트리노바.

황무지를 떠도는 황량한 모래들을 피해 도시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저택이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도 넓은 저택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색이 감도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래서 서부에 오는 것을 싫어해. 제대로 먹을 것도 없고, 딱히 마실 것도 없고.”

“······.”

“하여튼 재미가 없어. 이 동네는.”

황금공 바르보사는 장화를 벗어내고는 그 안에 있는 모래들을 탁탁 털어내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고급스럽게 치장된 방과도 어울리지 않았고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예의는 아니었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편하게 행동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예전에 봤을 때 보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지셨구먼. 가이다르 백작.”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소.”

지근거리는 모래 위로 다시 장화를 올려놓은 바르보사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가이다르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환히 웃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묘하게 삐뚤어진 고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하긴 5천이나 되는 병사들을 갖다 박아버렸으니 속이 말도 아니실테니지.”

“······.”

“거기다 고딘까지 잃으셨으니 말이야. 그 친구는 진짜 아까웠는데.”

“그만.”

옹골찬 풍채에 억센 눈썹.

충격적인 패배에 조금은 쪼그라들었으나 여전히 재기를 꿈꾸는 그에게는 아직 꺾이지 않은 기세라는 것이 있었다.

“뼈아픈 패배이긴 했지만 한 번의 패배로 주저앉을 나 지그문드가 아니오!”

“작게 말해도 알아듣는데 거참.”

그러나 바르보사는 가이다르 백작의 거친 기세에도 그저 시끄럽다는 듯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파낼 뿐이었다.

“남부 일에 바쁠 사람이 굳이 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요?”

“가져갈 게 있어서.”

“무엇을?”

가이다르 백작의 반문에 여태껏 웃고 있던 바르보사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이라니. 나를 보면 기억나는 게 있으셔야지.”

“······그건.”

“돈 빌렸잖아. 돈. 반짝이는 거. 금화.”

순간 앞으로 쏠린 바르보사의 고개가 백작의 턱 밑까지 불쑥 찾아 들어왔다.

마치 독이 바짝 오른 뱀과 같은 모습이었다.

“5천이나 되는 병사들 먹이고 입히고 무기 쥐여주고. 그거 다 빌린 돈 아니냐 이 말이야. 이 거지 같은 동네에서 그럴 돈이 어디 있었겠어.”

“그 돈은 용혈공 한테서 빌린 거······!”

“정확히는 용혈공이 나한테서 빌린 돈이지.”

사나운 미소로 백작의 말을 틀어막아 버린 바르보사는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가이다르 백작에게 던져주었다.

섬뜩하리만치 새빨간 종이 한 장.

그것은 이른바 최후통첩이라 부르는 것으로 황금공에게 돈을 빌린 자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종이였다.

“그리고 중간다리 건너서 채무자는 바로 당신이고.”

라브노마에서부터 바예지드까지.

가난한 백작 가문이 서부의 패자까지 올라서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원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굶주렸던 만큼 양껏 집어삼켰던 드라굴리아의 지원은 결국 가이다르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냅시다.”

익숙한 손짓으로 새빨간 서류를 들어 올린 바르보사는 그것을 가이다르 백작의 눈앞에 들이대었다.

“도시 하나만 주시면 돼. 셈이 대충 맞거든. 그럼.”

말도 안 되는 억지였으나 빌린 것도 사실.

어렴풋이 지금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던 가이다르 백작은 입술만 부르르 떨 뿐 감히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르보사가 들어오기 전에 받았던 보고에는 새까맣게 몰려고 온 함선들이 자신의 도시 토르체아를 점거하고 있다고 적혀져 있었으니까.

“이웃 좋다는 게 뭐요. 여기에 서명만 하시면 북부 놈들은 내가 물리쳐 드리리다.”

서슬 퍼런 웃음이라는 게 이런 걸까.

웃고 있는 바르보사의 입가에서 흉측한 황금색 이빨이 반짝이고 있었다.

※※※※

끼이이익-

주인이 신경을 쓰지 않은 듯 낡아버린 문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 소리보다도 블라드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가게에 앉아 있는 선원들의 사나운 눈빛이었다.

이질적인 존재를 배척하는 것은 여느 곳에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여기. 브랜디 한 잔.”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여긴 애한테 팔 건 없어.”

“젓지 말고 흔들어서. 값은 이걸로 대신 하지.”

블라드는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고는 일부러 소리 내어 주인장 앞에 가져다 놓았다.

볼품없이 잔뜩 녹슬어 버린 동전은 거저 주어도 갖고 싶지 않게 생겼으나 정작 그 동전을 본 주인의 눈빛에는 이채가 돌았다.

“······어디서 오셨소.”

“북쪽.”

“북쪽? 북쪽 어디서?”

자신을 탐색하려 하는 주인의 얕은수에 블라드는 이죽거리며 답했다.

“나사우 촌놈한테 알려줄 건 없는데.”

“······손님이 왔다고 전해드리지.”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젊어 보이기는 했으나 어디서 꽤 굴러먹은 것만 같은 블라드의 모습에 술집 주인은 테이블에 있는 동전을 받아들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는데.”

“빨리 오는 게 좋을 거야.”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밖으로 나가려는 주인을 보고는 블라드는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등 뒤에서 노려보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거든.”

“조심하라고 이르지.”

주인이 내어준 술잔을 받아든 블라드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불룩한 품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사내들.

언제라도 품 안에 칼을 꺼낼 것만 같은 살벌한 사내들이었지만 블라드는 웃으며 그들에게 술잔을 기울였다.

“이상하게 고향같이 편하네.”

시킨 것은 브랜디였으나 정작 나온 것은 싸구려 럼주를 섞은 정체 모를 액체였다.

그러나 그 술의 껄끄러움마저 익숙했던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입에 털어 넣고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바다라.”

주인도 없고 손님들은 조용한 가게 안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블라드는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 허접하게 그려놓은 그 그림에는 눈길을 잡아끄는 황금색 불빛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

“이게 뭔가요.”

“계시.”

스투르마를 떠난 후의 어느 밤.

야영을 하기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 사이로 바라디스가 다가왔다.

“신녀가 전해주는 걸세. 사실 이걸 전해주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나 마찬가지지.”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 바라디스는 드워프들의 섬으로 향한다던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다.

일행이 향한다던 서쪽이야말로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자리였으며 기회를 찾기 위해 떠나는 요제프로서도 엘프들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말로는 감사하다고는 했으나 그림을 향해 내뻗는 블라드의 손에는 어딘지 모를 주저함이 깃들어 있었다.

“······여전히 그림 실력은 안 늘었나 보네요.”“한결같은 점이 그 아이의 매력이지.”

엘프들의 신녀가 세계수를 구한 기사에게 전해주는 계시.

그러나 받아든 거창한 명분과는 달리, 손에 든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듯 삐뚤빼뚤할 뿐이었다.

“이건 뭐죠? 주위가 왜 이렇게 시꺼멓죠.”

“바다.”

“그러면 여기 떠다니는 것은 뭐죠? 통나무인가?”

“배.”

“······.”

너무나 엉망이라 이제는 물어보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불빛 하나가 있었다.

세계수의 신녀가 배라고 주장하는 갈색 덩어리 위에 빛나고 있는 점 하나.

사람의 형태 따위는 없었지만 너무나도 낯익은 그 빛깔을 보며 블라드는 눈을 좁혔다.

“이건 혹시 저인가요?”

“역시 한눈에 알아보는군.”

여동생이 그린 그림을 알아봐 주어 조금은 신난 바라디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 위를 떠도는 배 위에서 불을 밝히는 기사라······.”

어느새 바짝 붙어 있던 니벨룬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그림을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니 아무래도 신녀가 전해주었다는 계시가 그에게는 큰 흥미를 동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토록이나 이렇게나 명확한 계시는 처음 봅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예언자의 수준이 매우 고매하군요.”

“명확해? 이게?”

허락하지도 않았음에도 어느새 배낭에서 돋보기 하나를 꺼내든 니벨룬은 그림 이곳저곳을 살피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마치 명품을 다루는 것만 같은 그의 조심스러운 모습에 블라드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이렇게나 명확하게 시간의 틈을 짚어내다니. 언젠가 한 번 엘프들의 숲에 꼭 들르고 싶군요.”

“블라드 경과 함께라면.”

“꼭 한번 가고 싶습니다. 같이 갑시다. 제발.”

블라드와 함께여야만 한다는 바라디스의 말에 제발 부탁이라는 듯 양손을 모은 니벨룬.

수인족 특유의 동공이 점점 넓어지며 동그래졌지만 정작 블라드는 니벨룬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행이네.”

“뭐가요?”

새까만 바다 위에서 위태로이 흔들리는 불빛.

자신을 그린 것이 분명한 그 색을 보며 블라드는 타닥이는 모닥불을 뒤적여대었다.

“계시가 가리키는 사람이 나니까.”

도시 모시암에서 나를 위해 대신 쓰러져 준 카나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온통 새카만 밤을 밝히며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빛을 밝히던 새였었다.

유스티아의 죽음을 가슴 속 고이 묻어놓았던 블라드는 이번의 불길함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 도리어 안심하고 말았다.

※※※※

“여기 지도.”

“······.”

“그리고 이것까지.”

노을이 지는 나사우의 항구.

한 달 전, 스투르마를 떠났을 때보다 훨씬 따뜻해진 서쪽의 바다는 지금 막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술집 주인이 연결해 준 비밀스러운 연락책은 어디에서나 있을 것 같은 항구의 노동자였다.

얼굴에 보이는 오랜 세월만큼이나 잔뜩 짐을 짊어졌던 그는, 이제 휘어져 버린 허리를 토닥이며 블라드 앞에 서 있었다.

“소라껍데기일세. 좀 크지?”

“소라가 뭔데요.”

“······북쪽에서 왔다고 했지 참.”

기이하게 끝이 말려 올라간 물건이었다.

감히 생물이었다고는 믿기 힘든 소라껍데기를 보며 블라드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져 갔다.

“어쨌거나 그걸 나팔처럼 쓰면 되는 거야. 나팔은 알지?”

“그럼 온다는 겁니까?”

블라드의 물음에 이름 모를 항구의 노인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거야 나는 모르지.”

“······.”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건 지도에 그려진 곳은 안개가 자욱한 곳이라 경험 많은 선장들도 가기 꺼리는 곳이라는 걸세. 그래서 내가 배까지는 책임 못 져줘.”

들고 있는 것은 불친절하게 그려진 지도 한 장과 예전에는 소라였다는 녀석의 시체뿐.

그러나 이것들만이 드워프들의 섬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기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떡일 수 밖에 없었다.

“배는 괜찮아요. 저희가 구해놨으니까.”

“그럼 다행이구만.”

접선이 끝났다는 것을 알아챈 노인은 들고 왔던 망태기를 힘겹게 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접선책이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영락없는 항구의 노동자.

바예지드의 땅이었으나 아직은 서부의 풍습이 남아있는 나사우.

그곳에서 드워프를 도와주는 일은 아무래도 숨겨야만 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럼 다시는 보지 마세.”

“여기요.”

수고해 준 노인을 위해 금화 하나를 튕겨준 블라드였으나 그는 고개를 내젓고는 조용히 다시 돌려줄 뿐이었다.

“값은 이미 드워프들에게 받았어.”

“······.”

힘겹게 망태기를 짊어지고는 항구를 떠나는 노인을 보며 블라드는 볼을 긁적였다.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노인일지라도 금화로 대신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던 모양이었다.

“다른 배들은 가기 싫어한다라······.”

노인이 떠나간 뒤 홀로 남은 항구에서 블라드는 선착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봄의 냄새까지 느껴지는 서부의 바다.

점점 짙어지는 붉은 노을 속에서 때마침 낯익은 그림자를 발견한 블라드는 품에서 신녀가 주었던 그림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보니까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

무심코 봤을 때는 그저 갈색의 덩어리였을 뿐이지만 이렇게 대비해서 보니 어느정도 닮은 감도 있어 보였다.

자그마한 몸체에 비해 높게 솟은 돛대.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펄럭이는 하얀색 삼각돛까지.

노을을 타고 나사우의 항구로 들어오는 작은 배.

쇼아라에서부터 출발한 낯익은 배를 보며 블라드는 손을 높게 흔들어대었다.

“여기야 하벤!”

드워프 해방 전선 니다벨리르.

그곳까지 일행을 실어줄 배는 캡틴 하벤이 모는 붉은 머리 제미나 호였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2화 14

어린 고로(高爐) (1)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순간에도 심장은 뛰고 있었다.

태어나기는 차갑게 태어났으나 이 세상 가장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는 심장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심장 속에서는 마치 불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거대한 도마뱀이 키하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위대한 고로(高爐).”

위대한 고로 안에 깃들어 있는 영원한 숨결.

그 어떤 불꽃보다도 뜨겁고 순수할 정령의 눈을 마주하며 키하노는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 내리고 말았다.

밖에서는 도시가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오래되고 거대한 존재와 눈을 마주친 지금만큼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깡-! 까앙-!

땅을 울리는 요란한 진동에 천장에서는 돌가루가 떨어지고 매달려 있던 대장간의 장비들은 위태롭게 삐걱대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작품을 내려치는 늙은 드워프의 손길만큼은 곧고도 정확할 뿐이었다.

“······거의 다 됐어.”

이를 악문 채 모루를 향해 망치를 내려치는 늙은 드워프.

그는 지금, 자세마저도 무너뜨릴 정도로 온몸을 내던져 가며 시뻘건 쇳덩이를 내려치고 있었다.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그의 얼굴이 메말라가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야장님! 이제는 시간이 없습니다!”

부단한 망치 소리 속에서 이제는 가까워져 버린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위협이 다가온 것을 느낀 키하노는 다급한 목소리로 늙은 드워프를 불러대었지만, 그는 그저 신중하게 마지막 담금질을 마칠 뿐이었다.

“그래. 너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아무런 의미 없던 궤에서 이제는 형태 있는 검의 모습으로.

마치 이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었다는 듯 매끈한 모습으로 다듬어진 검을 보며 늙은 드워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다 되었네. 젊은 검사.”

오직 최고의 야장만이 올라설 수 있는 대장간의 가장 높은 곳.

그곳에서 선 늙은 드워프는 관을 따라 흐르는 쇳물에 은색의 검을 실어 보냈다.

직접 전해주기에는 너무나 멀었고 늙어버린 육체는 이제 한 방울의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천천히 식어가는 쇳물이 늙은 드워프가 만들어 낸 마지막 작품을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이 대장간의 마지막 작품일세!”

대장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간간이 떨어지던 돌가루들이 이제는 파편의 형태로 주저앉기 시작했다.

“야장님! 어서 나오셔야 합니다!”

“아니야!”

키하노의 외침에 늙은 드워프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

고로 안에 깃들어 있던 신령스러운 도마뱀이 마지막 임무를 다한 드워프에게 수고했다는 듯 주둥이를 가져다 대었다.

“혹시 괜찮다면 이렇게 이름 붙여 주시게. 키하노 프라우센!”

쇠로 만든 핏줄을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늙은 드워프의 손을 거쳐 형체를 가지게 된 은색의 검이 붉은 쇳물과 함께 키하노의 앞에 멈춰 섰다.

“마지막 고로가 만든 ‘은색의 기사’라고.”

“······야장님!”

콰가가가강-!

늙은 드워프의 마지막 말과 함께 무너지는 천장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그러나 늙은 드워프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기어이 천장을 뚫고 들어온 시리고도 푸른 눈동자.

가장 완벽한 용의 시선과 마주친 키하노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당신이 보내 주신 은색의 기사. 확실히 받았습니다.”

깨어져 나가는 고로 속에서 신령스러운 정령의 마지막 숨결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덧없이 번져나가는 그 숨결을 느끼며 키하노는 은색의 기사를 집어 들었다.

고로에서 시작된 쇳물은 차갑게 식고 말았지만, 마주 잡은 은색의 기사에서는 지금도 새빨간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흐으으음······.”

선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갑판 위.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구석에 앉아 있던 블라드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자신의 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얘는 언제 봐도 다듬은 건지 안 다듬은 건지를 모르겠다니까.”

소중한 자신의 검이었지만 블라드의 표정에는 어쩐지 자그마한 불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의 전투 때문에 미묘하게 틀어져 버린 검날의 균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작 숫돌 가지고는 바로잡을 수 없는 녀석이니.]

“그런 것 치고는 묘하게 무르거든요.”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완성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키하노의 말에 블라드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과연 그의 말대로 지금 블라드의 검은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미완의 검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날은 세웠는데 담금질은 제대로 못 했대······. 미안해.’

블라드는 기억 속에서 애써 만든 검을 내어주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어린 신녀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미숙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안개다! 안개가 옵니다!”

[도착했나 보다.]

파수꾼이 외치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바다 저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는 운무(雲霧)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파수꾼이 말하는 대로 저 먼바다에서부터 희뿌연 안개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무슨 안개가 우유를 끼얹은 것처럼 새하얗네.”

바다 위 안개를 보며 검을 집어넣은 블라드는 서둘러 난간에 바짝 붙어섰다.

갑판 위에서 선원들을 닦달하는 오타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있는 돛 다 접어! 지금부터는 암초 지대다!”

“임무가 없는 놈들은 지금부터 난간에 붙어 견시(見視)해라! 뭐라도 보이는 게 있으면 바로 외쳐!”

파도는 잔잔하였으나 갑판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오타르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요란했다.

평소에는 과묵했던 오타르가 이렇게나 큰 목소리를 지녔다는 것에 블라드도 잠시 놀랄 정도였다.

“진입한다! 다들 자리 잡아!”

하벤이 돌려대는 요란한 방향타 소리와 함께 제미나 호가 안개에 먹혀들어 갔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짙은 운무.

시야는 물론이거니와 들리는 소리까지 먹먹해진 것 같은 느낌에 블라드는 신기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댔다.

“요제프 님도 견시하러 오셨어요?”

“아니.”

어찌나 안개가 짙은지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은 요제프였다.

무심히 걸어온 그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며 난간에 팔을 기댔다.

“그래도 요즘은 상태가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다행입니다.”

“그래?”

하얀 안개 속에 있어서인지 평소에 짙기만 했던 요제프의 눈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요즘 따라 부쩍 건강해진 요제프의 모습에 블라드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우에에에엑-

“······음.”

고개를 숙인 요제프에게서 굉장히 노골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광경에 블라드는 그저 멀찌감치 서서 요제프의 등을 쓸어줄 뿐이었다.

‘멀미에 약한 건 아무래도 유전인가 보네.’

보이는 인상은 달랐으나 결국은 닮은 점을 찾게 되는 두 형제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어쩌면 나에게도 이들처럼 피로 이어지는 공통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블라드. 지도에 표시된 지점까지 온 것 같아.”

“그래. 수고했어.”

블라드는 조타석에서 내려오는 하벤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웬만한 선장들은 죄다 꺼릴 정도로 험한 곳인 데다 생전 처음 오는 초행길이었음에도 하벤은 결국 일행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놓는 데 성공했다.

“이제 어떡해? 이거 불면 되는 거야?”

“그렇다고는 하는데.”

“그럼 빨리 불어야지. 닻을 내리긴 했어도 근처에 암초들이 있어서 영 불안하거든.”

어쩌면 이번 여행의 방점을 찍을지도 모를 소라 나팔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분다고 한다면 일행의 책임자인 요제프가 하는 것이 맞았겠지만 지금 그는 난간에 바짝 붙은 채 신물을 쏟아낼 뿐이었다.

“······그냥 네가 해라.”

“그래야겠지?”

여전히 들려오는 토악질 소리에 하벤은 재빨리 소라 나팔을 블라드에게 건네주었다.

귀한 것처럼 보이는 나팔에 괜히 이상한 냄새를 풍기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흠흠.”

블라드는 어색한 손짓으로 하벤에게서 소라 나팔을 받아들었다.

신호를 보내는 나팔일 뿐이었지만 애초에 악기라는 것을 처음 잡아보는 것이기도 했기에.

“여기 작은 구멍에다가······.”

“어 맞아.”

나팔의 숨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 본 블라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방향조차 잡기 힘든 희뿌연 바다 위에서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블라드가 들고 있는 나팔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그의 행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삐우우우-

“너 지금 뭐 하냐?”

“······아이 씨. 처음이라 그래.”

옆에서는 요제프의 토악질 소리.

앞에서는 하벤의 한심하다는 눈빛.

자신이 만든 힘 빠진 휘파람 소리에 민망해진 블라드는 심기일전하는 심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뿌우우우우-

“됐다!”

“오.”

누가 들어도 호쾌하고도 시원한 소리가 바다 너머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안개 사이 사이에서 방금 질러낸 나팔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만 같았다.

“불긴 했는데 이제 어떡하지?”

“······그러게.”

그러나 나팔을 분 뒤 느껴지는 거라고는 오직 잔잔한 파도가 전해주는 적막함 뿐.

하벤과 블라드의 시선에 입가를 닦아내던 요제프도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계속 불어봐야지. 올 때까지.”

“······.”

계속 불라는 게 언제까지 불라는 말일까.

힘이 빠진 얼굴로 난간에 기대앉은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소라 나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응?”

그러나 막 나팔을 불려 하는 순간에 블라드는 바다 위에 떠 오른 기다란 막대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서부터 기이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알아챈 블라드는 서둘러 하벤의 어깨를 잡아챘다.

“하벤 저게 뭐야. 저것도 바다 생물이야?”

“응? 어디?”

하벤은 블라드가 가리킨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하벤이 바라본 곳에는 그저 잔잔한 바다만이 가득할 뿐.

방금 블라드가 보았다던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뭘 말하는 거야.”

“방금 들어갔어.”

“뭐?”

“······방금 뭔가가 쏙 하고 들어갔다니까.”

귀신이라도 본 듯 잔뜩 굳어버린 표정의 블라드를 보며 하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블라드가 절대 허튼일 따위에 과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 있는데.”

잔뜩 좁혀진 눈으로 바다를 살펴보던 블라드는 저 아래에서부터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거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태껏 잔잔하기만 하던 바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징조였다.

“······니벨룬. 혹시 뭐 느껴지는 것 없어?”

“무엇 말씀이십니까?”

“네가 말하는 신비 같은 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거.”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니벨룬은 자신의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호기심이라는 본능이 좇는 신비라는 세계.

그러나 니벨룬은 넓은 바다 어디에서도 딱히 그럴만한 낌새를 찾아내지 못했다.

“글쎄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안개 말고는 딱히 느껴지는 신비는 없습니다만.”

“그래?”

니벨룬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누가 눈치챌까 싶어 조심스레 움직이는 그 모습을 보며 주위에 있던 일행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놈은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겠네.”

잔잔한 수면 위로 올라오던 거품들이 이제는 확연히 보이기 시작했다.

난간에서 주위를 견시하던 선원들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블라드의 시선을 눈치챈 자야르도 안대를 어루만지며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전원······!”

제미나 호가 출렁이고 있었다.

마치 폭풍을 만난 때처럼.

바다의 수면이 점점 거칠어지자 선원들조차도 수면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각자 위치로 가!”

푸아아아아악-!

하벤의 외침과 함께 배가 크게 출렁이기 시작했다.

배 바로 옆에서부터 뛰쳐나온 정체 모를 존재가 만들어 낸 파도 때문이었다.

“바다, 바다에서 관이 튀어나왔다!”

“지옥에서 올라온 관이다! 저기에 우리를 잡아가려고!”

선원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잔잔하던 바다가 요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미신을 믿는 몇몇 선원들은 아예 갑판 위에 엎드려 살려달라 절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나도 처음 보는 녀석이다.]

평생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선원들도 낯설며,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도 알아채지 못한 것.

그리고 경험 많은 키하노조차 정체를 모르는 기이한 녀석을 보며 블라드는 검을 꽉 움켜쥐었다.

마침내 수면 위로 떠 오른 녀석의 이마에는 아까 보았던 막대기 모양의 기이한 더듬이가 달려 있었다.

※※※※

“요놈, 요놈. 오늘따라 왜 이리 신났는고?”

길게 늘어진 눈썹 사이로 늙은 드워프의 웃음이 번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뻘건 쇳물 위에서 헤엄을 치는 어린 도마뱀이 오늘따라 활발히 움직여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리 기분이 좋을꼬. 기다리던 손님이 와서 그런가?”

낡은 고로 안에서 헤엄치던 도마뱀은 야장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뿌우우우-

기분 좋다는 듯 자그마한 입으로 시뻘건 쇳물 분수를 내뿜는 어린 도마뱀.

기이하고도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지만 늙은 야장은 마치 손자의 재롱을 보기라도 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댈 뿐이었다.

어린 도마뱀의 재롱에 잔뜩 굽혀진 허리를 편 늙은 드워프.

고개를 높이 빼든 그는 멀리 보이는 창문을 통해 먼바다를 내다보았다.

“그나저나 녀석들이 손님 안내는 잘하고 있으려나?”

현시대 니다벨리르가 보유한 유일한 장인(匠人)인 노인.

잔뜩 찌푸려진 그의 눈앞에는 섬 주위를 메우고 있는 새하얀 안개가 가득했다.

안내인이 없이는 그 누구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안개였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3화 8

어린 고로(高爐) (2)

“나사우에서 떠난 배가 지금 안개 지역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래?”

어두운 집무실 안. 빨간색 과일을 들고 있던 남자가 들려오는 보고에 미소 지었다.

“드디어 북쪽 놈들이 드워프들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구만.”

남자는 잘라낸 과일을 하나하나 조각내어 어깨에 있던 앵무새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주인이 전해주는 새콤한 맛이 좋았는지 알록달록한 앵무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원 놈은 제대로 매수했지?”

“그렇습니다. 이미 수정구도 배 안에 집어넣은 상태입니다.”

“좋아.”

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탁상 위 방만하게 올려놓은 발을 치운 남자는 앵무새를 손가락에 올리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야 한 번 보겠구만. 드워프의 섬이라는 곳을.”

활짝 열어젖힌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보이는 푸른 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다의 짠 바람을 느끼며 남자는 웃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어.”

그러나 바다는 푸르렀어도 맞닿은 항구는 죽 늘어선 배들로 온통 새까맸다.

그리고 배들의 돛 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문양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된 바르보사 가문의 문장들이었다.

※※※※

잔잔한 파도를 따라 제미나 호가 움직이고 있었다.

안개 속이었기에 어디를 보아도 똑같았고 주변은 암초들 때문인지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가득했지만, 방향타를 잡은 하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드디어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저거 꼭 개복치같이 생겼어.”

“개복치가 뭔데.”

“저렇게 생긴 물고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냐.”

블라드는 의미 없는 하벤의 말을 무시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미나 호는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몸체의 배 한 척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길이는 짧은 것이 높이는 높았으니 문외한인 블라드가 보아도 균형이 매우 불안해 보이는 배였다.

“그나저나 바닷속을 헤엄치는 배라니.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걸?”

“그러게.”

블라드는 하벤의 말에 대답하며 시선을 내려 제미나 호의 선수 부분을 바라보았다.

신비한 것을 찾아다니는 니벨룬은 물론이거니와 요제프와 자야르, 그리고 아우슈린의 엘프들까지.

그들은 여태까지의 어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다들 저런 괴상한 것은 처음 본다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바람 없이도 다니는 배도 있고, 바닷속을 헤엄치는 배도 있고.”

블라드는 손을 눈썹에 가져다 대고는 시선을 멀리했다.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이 방금과는 달리 신선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뭐가 있으려나.”

두 눈 위에 얹은 블라드의 손등 위로 맑은 태양 빛이 와닿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새하얀 안개들이 걷혀나가기 시작했다.

시야를 차단하던 짙은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일행들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가 드워프들의 섬인가 봐.”

“응.”

블라드는 하벤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푸른 바다 위로 떠도는 갈매기 무리 아래 홀로 떠 있는 섬 하나.

수면 위에 부서질 듯 반사되는 태양 빛 너머로 일행이 그토록 찾고 있던 섬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워프들의 섬. 렘노스.

엘프들의 아우슈린이 그러하듯, 드워프들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인 곳이 일행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

“그럼 저희는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반쯤 가라앉은 배 위에서 드워프 사내가 올라와 블라드에게 손을 흔들어대었다.

“그때 구해주신 은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태껏 일행들을 인도했던 기이한 배의 함장은 니다벨리르의 전사인 불카누였다.

나사우의 술집에서 어린 드워프들과 함께 갇혀있던 그는 이번의 임무를 위해 특별히 자원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딱히 구해주러 들어간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해주셨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불카누는 갇혀있던 어린아이들을 보며 순수하게 분노할 줄 알았던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보이는 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니다벨리르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불카누가 굴뚝 안으로 들어가자 개복치를 닮았다는 기이한 배는 다시금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거품만을 남긴 채 사라진 배를 보며 선원 중 몇몇은 놀랐는지 그만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것도 꼭 한번 타보고 싶네.”

가라앉는 배를 아쉽다는 듯 쳐다본 하벤은 여태껏 반개(半開)하고 있던 돛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앞으로 힘껏 나아가기 시작하는 제미나 호.

안개 속에 갇혀있던 여태까지와 다르게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

렘노스 섬의 항구에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북부인들에게 있어 드워프들이 신기했듯이 이곳 렘노스 섬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도 인간과 엘프라는 존재는 영 낯선 손님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분명 환영해줄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원래 타지에 가면 그곳의 관례를 따라줘야 하는 법이다.”

항복이라도 한 듯 요제프와 블라드는 양손을 든 채 시선만을 맞추고 있었다.

이 둘 뿐만 아니라 배에서 내린 일행 모두는 지금 드워프 전사들에 의해 꼼꼼한 검열을 받는 중이었다.

두툼한 사내의 손이 몸을 건들 때마다 블라드의 표정이 찡그려졌지만, 이 섬은 보안이 곧 생명인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조금만 참아주시게. 내가 나중에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해 드릴 테니.”

점점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안면이 있던 시구르손은 애써 일행을 달래려 애쓰고 있었다.

니다벨리르를 구성하는 12명의 부족장 중 한 명인 그라고 할지라도 지금 같은 엄중한 절차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 좀 봐도 되겠소?”

“뭐?”

그러나 그의 달램에도 기어이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푸른 횃대가 돋고 말았다.

“이상한 게 달려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검을······.”

“기사한테 검을 내어달라고. 지금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거냐.”

들리는 것은 사람의 말이었으나 울리는 것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었다.

점점 새파래지는 블라드의 눈빛에 드워프 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럼 차고 있는 단검이라도 내어주시오.”

“단검은 검 아니야?”

기사에게 있어 검이라는 것은 곧 정체성.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으라는 드워프의 말에 블라드 안에 잠자고 있던 흉폭함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한테서 뭐라도 건드려봐라. 바로 네놈의 짤퉁한 목부터 뽑아줄 테니까.”

“······.”

속삭이듯 조용히 말하고 있었으나 뒷골목의 거침과 용의 흉포함이 뒤섞인 목소리이기도 했다.

검문을 맡은 드워프 전사 또한 경험 많은 자이기는 했으나 블라드가 내뱉는 시퍼런 위협 앞에서는 잠시 주춤거리고 말았다.

“이놈아. 애꿎은 사람 괴롭히지 말고 방금 말처럼 단검이나 뽑아봐라.”

“······.”

“눈알만 부라리지 말고 어서 뽑아보래도.”

그 순간, 인파를 뚫고 나온 드워프 노인 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블라드를 불러세웠다.

세월에 의해 잔뜩 굽혀진 허리를 지팡이로 애써 세우는 노인이었다.

“영감님은 누굽니까?”

“그건 알아서 뭐에다 써먹게.”

블라드의 새된 물음에도 늙은 드워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철철 끓어오르는 쇳물 앞에서 평생을 바쳐온 노인에게 있어 어린 용의 위협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멀쩡한 갑옷은 왜 다 깨트리고 왔누.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하는 짓은 거친 놈이로구나.”

“······.”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늙은 드워프의 말대로 블라드의 갑옷은 여기저기 깨져 있는 상태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근거리던 블라드는 그저 눈짓 한 번으로 갑옷의 상태를 알아본 노인을 보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영감님이 그래봤자 검은 안 내어줄 겁니다.”

“나도 필요 없다. 그딴 허접한 검은.”

허접한 검이라는 말에 바라디스의 이마에 한줄기 혈관이 올라왔지만, 노인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노인을 막아 세우지 못하는 참이었다.

“시구르손! 이놈 맞냐!”

노인의 외침에 저 앞에 있던 시구르손이 맞다며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블라드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노인의 태도에 기가 막혔지만, 바로 옆에 있는 요제프의 다급한 눈빛에 꾹 참을 뿐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보자.”

스릉-

남의 손에 의해 내 것이 뽑혀 나가는 아찔한 감각.

그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블라드의 기세가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

“그거 내려놔. 영감. 좋은 말로 할 때.”

갑작스레 달라지는 분위기에 항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블라드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내려놓으라니까.”

“······.”

두 눈을 새파랗게 밝힌 채 단검을 달라 말하는 블라드였지만 야장은 그저 반갑게 웃을 뿐.

뽑아낸 단검에서 자신이 새겨놓았던 옛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맞네. 맞아.”

떨리는 손이었으나 공손한 자세로.

다시금 단검 집에 검을 꽂아 넣은 늙은 드워프는 고개를 들어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나머지는 다 어디 갔나? 내가 한 열 자루는 만들어줬던 거 같은데.”

“뭐?”

“그나저나 호르헤 경은 잘 지내시는가? 못 본 지도 십 년은 족히 넘었군.”

으르렁거리던 블라드는 자신의 옛 보스를 말하는 늙은 드워프를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호르헤?”

그러나 낯선 장소에 익숙한 이름을 들은 당황감보다도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지금 노인의 눈빛은 오래된 기억 어딘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눈빛이었으니까.

※※※※

잔잔한 바다 위, 달빛만이 가득한 텅 빈 백사장이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누군가가 내뱉는 억눌린 신음과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영감. 노망이라도 들었어? 그거 죽 끓이는 솥이야.”

“나도 아네.”

듣기 싫어도 절로 귓가로 와닿는 그 슬픈 소리들을 들으며 늙은 드워프는 신중한 눈빛으로 솥을 달구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헤어져야 할 기사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기 때문이다.

“······.”

모닥불에 달궈낸 솥 안으로 잔뜩 녹슨 철 덩어리들을.

그곳에 비전을 담은 가루들을 뿌려 한 덩어리로 녹여낸 노인은 곧 시뻘건 쇳물을 나무 쪼가리로 만든 거푸집에 옮겨 담았다.

“고맙네. 우리들을 지켜줘서.”

“······그렇게 보지 마.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니까.”

신중히 쇳물을 옮겨 낸 노인은 고개를 들어 달빛 아래 홀로 서 있는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자세히 살펴본 남자는 여기저기 깨어진 갑옷 위로 시뻘건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냥 애새끼들이 자꾸 우니까 한 거지.”

있어야 하는 장소에 있었던 남자.

그렇기에 명령 대신 규율을 따른 호르헤는 지평선에서부터 다가오는 배들을 보며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왔네. 인제 그만 헤어집시다.”

“잠깐만.”

아무런 대가 없이 훌쩍 일어서려는 호르헤를 보며 늙은 드워프는 서둘러 그의 바지춤을 잡았다.

“이거, 이거라도 가져가게.”

“이게 뭔데.”

“단검.”

호르헤는 노인이 애써 들이대는 단검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만드는 과정을 보았기에 딱히 기대되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달빛 아래 비치는 반짝임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확연한 단검들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주지만, 우리가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면······.”

“보긴 무슨.”

뭐라도 보답하고 싶어 하는 노인의 심정을 이해한 호르헤는 붕대 묶인 손으로 그것들을 잡아들었다.

열기가 아닌 온기로 만들어져서인지 막 만들었음에도 그저 따끈할 뿐인 단검들이었다.

“영감이나 나나 다시는 안 보는 게 서로가 좋은 거요.”

무심한 마지막 말과 함께 그저 손 한번 슬쩍 흔들고는 홀로 백사장을 떠나는 가이다르의 기사.

달빛만이 마중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늙은 드워프는 오랫동안 백사장에 서 있을 뿐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4화 6

낯선 조류 (1)

흔들리는 촛불 너머로 꿀꺽거리며 넘어가는 목젖의 움직임이 호쾌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가려진 흐릿한 눈빛 속에도 들끓는 분노가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들을 믿지 않네.”

손님들을 환영하기 위해 펼쳐진 연회였건만 요제프가 앉아있는 테이블에서만큼은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자리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흥겹게 취한 사람들이 가득하였음에도.

마치 공간이 분리된 것만 같은 기이한 분위기를 느끼며 요제프는 조용히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우리가 자네들을 찾은 것은 혹시나 싶은 일말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네.”

도망자이자 생존자, 그리고 이제는 동족들을 해방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 부족 연합체 니다벨리르.

그 니다벨리르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대족장 올무카르는 마주 앉아있는 요제프를 탐색하듯 바라보았다.

“우리가 도와주면 다음 대 바예지드 가주가 될 수 있겠는가?”

“······.”

올무카르는 단순히 어린 드워프들을 구해줘서 요제프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하는 것이 명확한 만큼 예측하기 좋은 상대는 없기 때문이었다.

가주 경쟁에서 탈락했기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요제프의 처지는 니다벨리르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본래 우리가 이 꼴이 된 것은 서부의 영주들을 믿었기 때문이야. 니다벨리르는 선조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걸세.”

스스로가 아닌 남에게 기대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

아픈 세월을 통해 교훈을 얻은 드워프들은 이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가 주도권을 쥐기를 원하고 있었다.

“자네가 바예지드의 가주가 되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거라 약속한다면 지금이라도 최선의 지원을 다해줄 수 있네.”

배도, 기술도, 그리고 군사도 내어 줄 수 있다.

대신 앞으로도 우리의 말을 따라준다면.

바예지드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요제프라는 깃발을 내세워 권력의 균형을 움직이는 정도라면 니다벨리르로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

“호의로 전해주신 말씀. 잘 들었습니다. 대족장 님.”

올무카르는 요제프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모든 기회가 끊겨버린 요제프에게 있어 마지막 동아줄이라고는 오직 니다벨리르 뿐일 테니까.

고작 패배자 따위로 멈추고 싶지 않다면 요제프는 자신의 손을 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조금 오해를 하시는 것 같군요. 제가 니다벨리르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제프는 올무카르에 제안에 고마움을 표할 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술잔을 내려놓은 요제프에게는 몰려 있는 자의 다급함은커녕 오히려 잔잔한 파도와도 같은 평온함만이 엿보일 뿐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함선도 군사도 필요 없다고 말한 요제프는 올무카르의 질문에 조용히 자그마한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온통 새까만 색으로 뒤덮여 있는 편지.

겉으로만 보아도 온갖 불길한 것들이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그런 편지였다.

“그것은······.”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누군가가 보냈던 편지입니다.”

그 불길한 편지를 술잔 밑에 끼워 밀어 보낸 요제프.

이제는 짙은 눈그늘 하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니다벨리르의 대족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대업을 위해 부디 드워프들의 신기(神器)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신기?”

여태껏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 올무카르였으나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

원하는 것이 명확한 상대는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올무카르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청년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쇼아라에서도, 바르나에서도 그리고 스투르마에서도.

도시에 있는 건물 중 가장 높고 커다란 건물이라 한다면 역시 교회였다.

“······엄청나게 크네요. 마치 교회처럼.”

그리고 이곳 렘노스 섬에서도 인간들의 교회와 비견될 만한 건물이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서늘한 분위기의 교회와는 달리 이곳은 온통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여기는 대장간이니까. 드워프들에 있어서는 신앙이자 믿음인 곳이지.]

쉼 없이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

곳곳에서 땀을 흘리며 망치를 내려치는 드워프들을 보며 블라드는 입을 헤 하고 벌리고 말았다.

뒷골목의 대장간과는 사뭇 다른 지금의 광경은 블라드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처음 맞이하는 새로운 세계나 다름없었다.

“어서 와라. 이놈아! 위험한 데서 딴짓하지 말고!”

주위 구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블라드를 보며 늙은 드워프가 카랑카랑한 소리를 질러대었다.

조심하라 이르는 말이었으나 듣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먼저 와닿고 마는 그런 울림이었다.

“불 앞에 있으면 사람이 다 괴팍해지나 보네.”

[장인 정신이라고 하자.]

노인의 이름은 루흐타라고 했다.

오래 살아온 만큼 드워프들의 많은 비전을 알고 있었으며 그만큼 서부의 가이다르에게 혹독한 착취를 당해 온 사람.

그리고 오랜 옛날, 호르헤에 의해 기적과도 같은 구명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갑옷 벗어봐.”

“왜요.”

“왜긴 왜야.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갑옷 달라는 의미가 뭐겠냐.”

오직 장인만이 올라올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업장까지 블라드를 데려온 루흐타.

감히 자신들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간 블라드를 보며 몇몇 드워프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혹시······. 고쳐주시게요?”

“그래.”

조심스러운 블라드의 물음에 루흐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이은 아들도, 그렇다고 뜻을 이은 전인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르헤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라고는 오직 앞에 있는 블라드뿐.

그렇기에 루흐타는 블라드에게 기꺼이 자신의 망치를 빌려줄 참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블라드가 차고 있는 단검은 못다 한 은혜를 갚겠다는 약속의 증표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저 돈 없는데요.”

“······돈 같은 거 안 받을 테니까 제발 내놔나 봐라.”

공짜로 해주겠다는 루흐타의 말에 블라드는 재빨리 망토와 함께 갑옷을 벗겨냈다.

안 그래도 아무도 수리하지 못하는 엘프들의 갑옷 대신 다른 갑옷을 사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기도 했다.

“고로가 여기 있네요.”

“내가 제일 아끼는 놈이지.”

작업장에 매달려 있는 낯익은 고로를 보며 블라드가 입맛을 다셨다.

멀고도 먼 낯선 섬에서 자꾸 쇼아라에서의 흔적을 발견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아마 왼쪽 눈까지 감았다면 자신을 향해 꼬리를 흔들어대는 어린 도마뱀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단검도 내려놓고 가라. 손 봐줄 테니까.”

“그럼 혹시 검은······.”

은근슬쩍 검까지 부탁하려 하는 블라드의 모습에 잔뜩 늙어버린 루흐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이 멍청한 녀석은 저것이 그저 검인 줄로만 아는 모양이었다.

“검은 안 돼.”

“······왜요?”

“저걸 다룰만한 마땅한 재료가 없으니까.”

그저 검날 좀 세워달라 하는 것이었지만 거창하게 재료까지 말하는 루흐타를 보며 블라드는 머쓱한 심정이 들고 말았다.

“무슨 날 하나 세우는 데 재료까지 필요해요?”

“저건 그런 검이야. 아직 미완이니까.”

검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나 사실은 가능성.

무엇이 될지 모르는 세계수의 흔적을 보며 루흐타는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저 검의 날을 세우고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격을 갖춘 금속이 필요할 터였다.

“인제 그만 가 봐. 며칠은 걸릴 테니까.”

“······알겠어요.”

조금이라도 투덜댈 줄 알았더니만 블라드는 그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뒤로 돌아설 뿐이었다.

사실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하는 루흐타를 본다면 누구라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받긴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녀야 저런 검을 차고 다니는 건지. 쯧쯧.”

내려가는 블라드를 확인한 루흐타는 반쯤은 감긴 눈으로 놓고 간 갑옷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호르헤의 인연이 닿게 해준 녀석이었지만 입은 거며 휘두르는 거며 모두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응?”

한참 파손 부위를 살펴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루흐타는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부분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갑옷과는 다르게 일부러 달아놓은 듯 결이 다른 금속 하나가 흉갑에 붙어 있었다.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입고 있는 갑옷과는 전혀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흉갑의 한 부분.

그곳에는 예전의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글귀 하나가 자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그냥. 애새끼들이 자꾸 울잖아.

“······생김새는 몰라도 성격은 똑 닮았구만.”

그리고 하는 행동까지도.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글귀를 손끝으로 쓰다듬어 본 루흐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만들어 준 단검은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간 모양이었다.

※※※※

이제는 슬슬 해가 지려 하는 렘노스 섬의 항구.

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하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하벤만큼은 아니었지만, 같이 따라 나온 오타르와 니벨룬 또한 놀란 표정으로 제미나 호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오타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뭐냐.”

“······.”

“지금 이거 꿈이지?”

제미나 호가 불타고 있었다.

곳곳에서 뿜어지는 화염들로 인해서.

이름을 딴 레이디의 머리색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제미나 호를 보며 하벤의 선장모가 힘없이 땅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팡이를 짚었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속도.

오타르가 말리기도 전에 결국 드워프 사내의 멱살을 후려잡은 하벤은 시뻘건 두 눈으로 비명 같은 포효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미친놈들아! 당장 멈춰!”

“아니, 이건.”

“멈추라고 이놈들아!”

불타는 배 앞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선장이 몇이나 있을까.

작업을 지시하던 드워프는 지금 하벤이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건 불태우는 게 아니라!”

“제미나를 살려내!”

뒤늦게 도착한 마법사는 신기해하고 선장은 미쳐가는 동안 그저 드워프만이 의도가 엇갈렸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렇게 가끔 불로 소독해야 배를 좀 먹는 것들이 사라진단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런 관리 안 합니까?”

“네놈들은 불태우는 거로 관리를 하냐!”

드워프들에게는 상식이었으나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아직 미지(未知).

배 밑에 붙어 있는 따개비나 해초 정도나 떼어낼 줄 알았지 배를 구워 세균을 소독한다는 개념이 없던 하벤으로서는 지금의 광경에 단단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음?”

그렇게 엇갈린 상식 속에서 하벤과 작업반장이 소리를 지르는 사이, 불꽃을 담은 등짐을 진 채 묵묵히 배 밑바닥을 구워대던 드워프 중 하나가 기이한 빛을 내는 진주같은 것을 발견했다..

손으로 떼어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마치 접착제로 붙이기로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거 진주가 아닌데?”

한참 드워프들의 신기한 작업을 바라보던 니벨룬의 코끝이 별안간 찡긋거렸다.

바다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서 낯익은 한 줄기의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직 마법사만이 느낄 수 있는 신비의 낌새.

그제야 반짝이는 진주를 알아본 니벨룬의 눈이 기묘하게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괴이한 진주는 마치 무슨 신호라도 보내는 듯 지금도 계속해서 깜빡이는 중이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5화 8

낯선 조류 (2)

안개 가득한 바다 위로 빼꼼히 솟아오른 막대기 하나가 있었다.

블라드는 더듬이라고 표현했었지만, 사실은 바닷속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잠망경이었다.

“······이런.”

제미나 호를 안내한 후, 다시 본래의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불카누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얼핏 보아도 열 척은 넘을 것만 같은 함선들.

서둘러 잠망경의 각도를 조정해 올려다본 배의 돛에는 황금색 칼이 그려진 화려한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바르보사!”

상대를 확인한 불카누는 그만 이를 꽉 물고 말았다.

여태껏 인간들이 보내왔던 탐색선들이 몇 있었지만, 지금 같은 규모로 함선을 파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들의 방향은?”

옆에 있던 드워프가 불카누의 지시에 서둘러 함선들이 나아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쪽을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서쪽?”

“······정확히 렘노스 섬을 향해서입니다.”

불안감의 실체를 알아차린 불카누는 재빨리 선원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긴급 잠항을 알리는 신호였다.

“최대한 빨리 섬으로 복귀한다!”

“알겠습니다!”

불카누의 다급한 손짓에 개복치를 닮은 배가 급속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선원들이 밟아대는 페달 소리가 긴박하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저놈들보다 일찍 도착해야 한다. 전원 전속 전진!”

태양조차 닿지 않고 밤하늘의 별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

바닷속 지형이 아니라면 도저히 기준 잡을 것이 없는 이곳이었지만 바르보사의 배들은 마치 길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똑바로 렘노스 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함선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물결에 암초에 갇혀 있던 배들의 잔해가 힘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

광란과도 같았던 연회의 다음 날, 블라드는 바라디스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행들 간의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엘프들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블라드 뿐이었다.

“데어마르에서도 그렇고 어딜 가나 애들이 따라다니는군.”

“그래서 영 귀찮네요.”

블라드는 한숨을 내쉬고는 밑을 내려다보았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그곳에는 바라디스의 말처럼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드워프 아이들이 가득했다.

“손이라도 한 번 흔들어주지 그래?”

“경험상 그러면 더 달라붙거든요.”

불퉁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째려보는 블라드였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조차도 흥미를 자아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블라드는 몰랐겠지만, 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는 나사우에서 구한 아이도 몇 섞여 있는 중이었다.

“어때요. 이곳에도 정령들의 흔적이 남아있던가요?”

“흠. 그것에 대해 먼저 말을 해줘야겠군.”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을 쫓아 이곳 렘노스 섬까지 따라온 엘프들.

그들의 대장인 바라디스는 블라드의 질문에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령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네. 굳이 느껴지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대장간에 있는 어린 도마뱀 정도겠지.”

“그런가요.”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네.”

바라디스는 혹시라도 밑에 있는 아이들이 들을까 봐 블라드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섬이 죽어가고 있네.”

“······네?”

“생명의 흐름이 점점 끊겨가고 있어. 마치 질식하는 것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은 블라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바라디스는 저기 좀 보라는 듯 섬 곳곳을 가리킬 뿐이었다.

“무분별한 벌목 때문에 저렇게 된 줄 알았지만, 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식물들도 죽어가고 있네.”

“······.”

“일단 자네만 알고 있게.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하니까.”

과연 바라디스가 가리킨 곳마다 섬 곳곳에는 마치 좀이라도 파먹힌 듯 황량해진 부분들이 가득했다.

얼핏 보았을 때는 몰랐지만 눈여겨보니 확실히 그런 풍경이 한둘이 아니었다.

“블라드.”

블라드가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애꾸눈의 기사 자야르였다.

“잠깐 시간 좀 내다오. 요제프 님이 부르신다.”

“네.”

자야르는 차를 마시고 있던 바라디스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블라드를 불러내었다.

“무슨 일이에요?”

“흠.”

환한 햇살이 가득한 복도였다.

그러나 복도를 걷는 자야르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르게 딱딱히 굳어있을 뿐이었다.

“별 건 아니고.”

“네.”

“선장이랑 마법사가 잡혀들어갔어. 검은 친구도 같이.”

들려오는 말에 블라드가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돌아선 자야르는 기묘하게 굳어진 블라드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의 배려로 별것 아니라 운을 띄우긴 했지만 역시나 놀랄 수밖에 없는 소식이긴 했다.

“······왜요?”

“그걸 지금 요제프 님이 알아보고 계신다.”

“알았어요. 빨리 가죠.”

하벤과 니벨룬, 그리고 오타르까지.

이 셋이 감옥으로 잡혀들어갔다는 말에 잠시 멈춰있던 블라드의 발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 세 명은 바예지드가 아닌 아우레오가 보증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

-함장 불카누의 보고에 따르면······.

-일단 당장 인간들부터 잡아 족쳐봅시다!

-지금이라도 수정구인지 뭔지 하는 거 다른 곳에 떨구고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걸 따라온다면서요?

정숙해야 할 회의였으나 온갖 고성이 넘나들고 있었다.

그 고함과 고성의 한 가운데서 요제프는 홀로 매서운 눈빛들을 받아넘기는 중이었다.

어제의 연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족장들이었지만 지금은 요제프를 조각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그만.”

대족장 올무카르의 제지에 다른 족장이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바예지드의 요제프.”

“······.”

침묵 끝에 다가오는 날카로운 시선들.

손님으로 찾아온 자들에게서 간자의 증거를 찾아냈으니 지금의 험악한 분위기는 당연한 것일테다.

“시간이 없네. 지금의 나는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이거든.”

툭툭거리며 바닥을 울리는 도낏자루 소리가 스산했다.

적은 다가오고 있고 지켜야 할 섬의 위치는 이미 노출된 상황.

더는 안개 속에 숨어 있을 수 없음을 깨달은 올무카르는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손님들을 보며 이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는 중이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입니다!”

순간, 경비병들이 소개하기도 전에 스스로 이름을 외치고 들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담비 털로 만든 망토를 두른 남자.

누구의 허락도 없이 들어온 사내였으나 올무카르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해가 있다 들었습니다.”

“오해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한다. 기사 블라드.”

도시 나사우에서 아이들을 구해주었다는 북부의 기사.

과연 들은 대로 젊고, 보이는 만큼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지금 나를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너희 모두는 감옥으로 간다. 나는 내 등 뒤에 껄끄러운 것들을 남길 생각이 없거든.”

그러나 지금은 은인이 아닌 그저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일 뿐.

오랜 시간 쌓아왔던 인간에 대한 불신에 올무카르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저희에게 증명할 기회를 주시지요. 대족장 님.”

침묵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스스로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많이 가르치기는 하였으나 지금 같은 복잡한 상황에는 면역이 없을 블라드였으니까.

“남부의 바르보사 공작이 용혈공과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바, 북부인인 저희가 굳이 황금공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긴밀히 숨겨놓았던 둥지가 위협받는 상황.

여전히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올무카르를 보며 요제프는 설득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지만, 지금은 오직 이 방법뿐이었다.

“제가 이곳에 남겠습니다.”

“뭐?”

“제가 이곳에 남을 테니 이들을 전장으로 데리고 나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열 마디의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으로.

블라드는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고 말하는 요제프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예지드의 요제프라면 인질로 삼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본래 타지에 가면 그곳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 법.

지금만큼은 귀족의 화법이 아닌 드워프처럼 말하는 요제프를 보며 올무카르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여전히 놀라고 있는 블라드의 표정에는 조금의 거짓도 깃들어 있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

“미안하다. 블라드.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

분주한 항구 한가운데서 블라드는 검집의 끈을 다시 고쳐 맸다.

아무 말 없이 끈을 꽉 조이는 블라드를 보며 그 심정을 이해한 하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자신들 대신 감옥으로 들어간 요제프를 보면서도 블라드는 지금과 같은 표정이었다.

“갑옷은?”

“수리 맡겼어요.”

“그렇다고 갑옷 없이 나가?”

“없는데 어떡해요. 그럼.”

자야르는 갑옷도 없이 그저 망토 하나만을 걸진 채 전장으로 나가려 하는 블라드를 보며 혀를 쯧 하고 차고 말았다.

분한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내 거라도 입고가라. 나는 당장은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가져가.”

검만큼은 아니었겠으나 갑옷을 빌려주는 것 또한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갑옷을 내어주려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내어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블라드 경! 블라드 경 어디 있습니까!”

항구에 있는 배들로 드워프들이 다닥다닥 몰려 있는 상황.

인파의 한 가운데를 뚫으며 다급하게 블라드의 이름을 외치는 드워프 사내가 있었다.

“하악! 하악! 겨우 찾았네! 머리색이 눈에 잘 띄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등 뒤에 잔뜩 짐을 짊어진 대장장이 드워프는 블라드를 보고서는 안심한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겨우 찾아냈다며 너덜대는 것으로 보아 아마 꽤 헤매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야장님께서 전하시는 겁니다. 수리가 다 됐어요.”

“시간 한 번 정확하군.”

갑옷을 가져왔다는 드워프의 말에 자야르는 머쓱한 표정으로 풀던 끈을 묶어 올렸다.

“기존의 갑옷 체형으로 맞췄으니 아마 크기는 맞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시간에 맞춰 돌아온 엘프들의 갑옷.

그러나 블라드는 드워프 사내가 내려놓는 갑옷 뭉치들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거 내 거 아닌 거 같은데?”

“네?”

“아니, 내 갑옷은 은색인데. 애초에 이렇게 생기지도 않았고.”

왜냐하면, 지금 드워프 사내가 들어 올린 갑옷은 예전의 것과는 다르게 온통 은회색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드워프가 내려놓은 갑옷은 그 생김새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였지만 분명 본래 입던 갑옷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아아! 기존의 갑옷이 너무 망가져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죄다 다 뜯어고치느라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겁니다!”

대장장이 드워프는 갑옷을 고치면서도 계속해서 투덜대던 루흐타의 모습을 기억했다.

도대체 뭐랑 상대하면 갑옷이 이렇게 걸레짝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며 계속해서 중얼대던 그였었다.

“아마 새것 같으실 겁니다! 하지만 품질은 정말 보증할 수 있습니다! 야장님께서 직접 손 본 갑옷이니까요.”

어서 입어보라는 듯 갑옷을 들어 올린 대장장이 드워프.

그가 들고 있는 갑옷에 항구에 있던 드워프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쏠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 배를 타고 있던 올무카르도 잠시 시선을 빼앗길 만큼 멋진 갑옷이었다.

“······요제프 님한테 전해주세요.”

“뭐라고?”

갑옷에 시선을 뺏긴 것은 블라드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블라드는 갑옷의 멋짐보다도 그것이 해낼 기능들을 조용히 가늠해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요.”

대장장이에게서 받아든 갑옷은 예전보다 가벼웠다.

생김새도, 무게도, 그리고 비치는 빛깔도 모두 달라진 엘프들의 갑옷.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여전히 흉갑에 새겨져 있는 글귀일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종자였던 시절, 요제프의 기사라는 칭호는 나의 자존심이었고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글귀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두를 새로운 갑옷에 새겨넣은 블라드는 자신을 부르는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의 이름을 증명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은회색의 기사.

선원들과 엘프들, 그리고 배낭을 단단히 멘 마법사 하나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품에서 떠난 나였음에도 또다시 기회를 만들어 준 요제프를 위해 블라드는 낯선 갑옷의 끈을 꽉 조여 맸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6화 9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텅 빈 감옥 안에서 홀로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앉아 있는 곳도, 기대고 있는 곳에도 모두 차가운 냉기가 가득한 감옥이었다.

그러나 살벌한 주변 풍경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왜인지 모르게 평온해 보였다.

“지금쯤 도착했겠군.”

“그럴 겁니다.”

창살밖에 서 있던 자야르는 요제프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지금쯤이라면 블라드가 황금공의 함선들과 조우했을 시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지금 자야르가 전장에 나가 있을 블라드보다도 더 걱정하는 사람은 요제프였다.

겨울의 공기도 힘들어 언제나 마른기침을 내뱉고는 했던 그였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아니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편하군.”

“······.”

조금 창백하기는 하였지만, 창살을 통해 바라본 요제프의 얼굴은 정말 방금 말처럼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자야르는 요제프의 미소에 같이 따라 웃어주지 못했다.

그 웃음이 얼마나 많은 고민 뒤에 나온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작부터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차갑게 내뱉은 요제프의 입김 위로 아침의 태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쫓을 때는 멀리 도망만 치던 빛이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지금에는 오히려 다가와 주는 빛이었다.

※※※※

쿠과가가가각-!

잔잔했던 파도 위로 요란한 물결이 치솟기 시작했다.

바르보사의 함선 중 하나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이게 뭐야.”

얼굴로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마치 꿈인 것 같다.

이번 탐색대의 사령관인 톨빈은 기이한 각도로 치솟은 배를 보며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평생을 바다 위에서 지내온 그조차도 지금의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배가 떨어진다!”

“다들 난간 잡아!”

그러나 떨어지는 것에는 날개가 없으니.

콰아아아앙-!

배 주제에 하늘을 향한 함선은 마치 처박히듯 고꾸라져 산산이 부서질 뿐이었다.

부서지는 배 사이로 암초와 암초 사이에 묶어놓았던 거대한 쇠사슬이 크게 출렁여 대었다.

“함정입니다. 함장님!”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함정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있는 이 해역은.

붉은 장미를 쫓아 들어온 이곳은 사방이 암초였고 게다가 거대한 쇠사슬로 갇혀있는 곳이었다.

오랜 시간 준비하지 않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함정이었다.

-저놈들이 또 나왔다!

-다들 고개 숙여!

푸슉-!

얼이 나가 있는 톨빈의 배를 향해 다시금 날카로운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누가 쏘았는지는 몰라도 무거운 바닷바람을 뚫고 오면서도 전혀 날카로움을 잃지 않은 화살이었다.

“커억!”

“큭!”

갑판 곳곳에서 선원들이 내지르는 단말마가 가득했다.

몇몇 녀석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는지 아예 난간 밑에 납작 엎드려 날아오는 화살비를 피하는 중이었다.

“······일어나라! 일어나! 다들 일어나서 항전해!”

겨우 정신을 차린 톨빈은 선원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탐색대라고 해도 열 척이나 함선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불상의 배! 다시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선미 쪽!”

“······뭐?”

그러나 방금 함정을 통해 큰 타격을 주었음에도 정체 모를 적은 한 번 잡은 기세를 놓을 생각 없어 보였다.

과연 들려오는 말 대로 바로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배 한 척이 있었다.

붉은색 장미 깃발을 내건 배였다.

‘방금까지 앞에 있었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바로 앞에서 자신들을 유인하던 배였으나 어느새 뒤로 돌아와 뒤통수를 노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신출귀몰한 기동력에 톨빈은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함포 준비해!”

“거리가 안 닿습니다!”

마치 바닷속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함대 뒤에서 나타난 배.

톨빈의 선원들은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다시금 나타난 배를 보며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저놈들의 화살은 왜 닿는 거냐!”

톨빈의 외침을 들었는지 정체 모를 배가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똑바로 고개를 쳐든 채 자신들의 옆구리를 향해서.

“적 함선 다가옵니다!”

“뭐?”

적을 유인했고, 함정에 가뒀으며 그럼에도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붉은 장미 깃발의 배.

작은 몸집을 십분 살려 요리조리 움직이는 배를 보며 톨빈의 두 눈이 부릅떠지고 말았다.

몸집은 작았으나 앞에 솟아 있는 충각(衝角)만큼은 여태껏 보아왔던 어떤 배보다도 날카로운 녀석이었다.

콰아아앙-!

※※※※

“다들 꽉 잡아!”

“히으으이이!”

넘어질 듯 잔뜩 젖혀진 제미나 호 위로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균형 감각이 뛰어난 엘프들조차도 난간을 잡은 채 힘겹게 버텨야 할 정도로.

그럼에도 배가 용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방향타를 잡은 선장의 정교한 계산 덕분일 것이다.

“바람 보내 봐! 마법사!”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요!”

적의 선수에서 선미로.

안개를 사이에 둔 채 교묘하게 꺾어나가는 하벤의 조타술은 어디까지나 시야를 가려주는 짙은 안개와 마법사의 신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 더는 힘들어요! 모아놨던 바람을 다 썼다구요!”

“이런 젠장!”

배낭에서 꺼낸 기이한 풀무로 바람을 보내던 니벨룬이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인 모양이었다.

과연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바람에 의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돛이었으나 지금은 푹 주저앉은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블라드. 더는 못해. 속도를 잃어버리면 오히려 우리가 당한다고.”

“알았어.”

짙은 안개를 그늘로 삼아 철저히 적의 사각을 유린했던 제미나 호였지만 이제는 그 시도도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됐어.”

그러나 덕분에 적 함대를 와해시킬 수 있었으니 충분히 성공한 셈이었다.

지금 함정에 갇혀있는 배들 말고 안개 너머로 흩어져버린 함선들은 니다벨리르의 먹이가 되었을 테니까.

“어쩔까? 이제 도망칠까? 유인 임무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아니.”

손바닥을 들어 멀리 내다본 블라드는 10척으로 시작했던 적의 함선이 이제는 4척밖에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흩어진 함선들을 해치웠는지 어느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니다벨리르의 배들과 함께.

이제는 노까지 빼 들어 항로를 이탈하려 하는 적의 함선들을 보며 블라드는 각오를 굳혔다.

“한 척은 잡는다.”

“뭐?”

“무조건 하나는 내 손으로 잡아야 해.”

기선제압은 확실하게.

그리고 기세를 탔으면 멈추지 말 것.

승리를 향하는 일격필살의 묘리는 꼭 적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야 드워프 놈들한테서 사과를 받아내지.”

드워프들을 떠올린 블라드는 이를 으드득 갈고 있었다.

자신들을 오해한 지금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속으로까지 납득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차가운 감옥 안에 갇혀있는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있어 은인이자 세워야 할 자존심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

블라드는 말없이 난간에 서 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궁수라 일컬어지는 아우슈린의 엘프들.

화살 하나에 반드시 적 하나를 꿰뚫었던 그들은 블라드의 곧은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끝까지 한번 해보지. 세계수를 구해준 값. 고작 이 정도로 갚았다고 생각하지 않네.”

“감사합니다.”

바라디스의 말과 동시에 활 대신 검을 빼든 엘프들.

그들을 보며 앞으로의 상황을 짐작한 선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살다 살다 바르보사의 배를 갖다 박게 될 줄은 몰랐네.”

바다에 업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이름. 황금공 카잔 바르보사.

지금부터 그 거대한 이름을 향해 돌격할 생각을 하니 하벤은 그만 머리가 아찔해지고 말았다.

“괜찮아. 제미나가 원래 박치기는 잘했잖아.”

“그건 네 제미나고!”

드드드드득-!

그래. 어차피 밑바닥에서 태어난 인생.

쥐고 태어난 것이 없기에 애초에 손해 볼 것도 없는 뒷골목 인생들이 세찬 바다를 향해 소리쳐대기 시작했다.

“얘는 내 제미나라고!”

이를 악문 하벤의 신호에 따라 다시금 니벨룬의 풀무질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잔뜩 추진력을 머금은 배가 바르보사의 함선들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죽겠다······. 이러다 다 죽겠어!”

제미나 호를 위해 정말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풀무질을 해대는 니벨룬이었다.

그러나 잔뜩 지쳐버린 니벨룬은 자신이 힘껏 밟아대는 풀무가 이미 효용을 다하고 말았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충격에 대비해라!”

모자란 바람을 대신해 다닥다닥 달라붙어 제미나 호의 뒤를 밀어주고 있는 빛무리들이 있었다.

블라드가 빼어든 세계수의 향기를 따라 이곳까지 몰려온 오징어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조류가 바르보사의 함선들을 향해 똑바로 흐르고 있었다.

※※※※

콰지지지직-!

“적 함선······. 충격했습니다!”

나무판자가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딛고 있는 갑판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미처 잡을 것을 확보하지 못한 선원 몇몇은 바다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작았으나 빨랐기에 내뱉은 진동은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왜 대포가 하나도 안 맞은 거냐!”

“적의 기동이······. 속도가 너무 빨랐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경험 많은 선원들조차 가능하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

스쳐 지나가는 포탄들을 뚫고 기어이 톨빈의 배에 충격한 제미나 호는 마치 화살처럼 깊숙이 박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백병전 준비! 기사들은 선창으로 내려가!”

톨빈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호통을 치며 잡고 있던 방향타를 내려치고 말았다.

지금 치고 들어오는 드워프들의 배를 피해도 모자랄 판국에 고작 자그마한 배에 발목이 잡힌 지금의 상황이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죽어. 이 새끼들아!”

“밀어내라! 못 들어오게 해!”

바로 옆에서는 시시각각 들어오는 드워프들. 그리고 밑에서는 물밀 듯 들어오는 적의 선원들.

층고가 낮았기에 갑판이 아닌 선창에 틀어박혀 버린 제미나 호에서부터 순식간에 흉흉한 사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누굴 막아!”

애초에 좁게 난 구멍이었기에 뚫고 나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장 앞장선 자가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라면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크아아악!

-기사다! 오러를 쓰는 기사!

바닷물만큼이나 짠 핏물이 블라드의 갑옷에 덕지덕지 붙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머물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은 아마 드워프 대장장이가 새겨넣은 비전 때문일 것이다.

“오타르! 가서 노잡이들 풀어줘!”

“알았어!”

드워프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서부의 특권만은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노잡이 드워프들이 갑작스레 난입한 블라드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가장 밑에 있는 선창에서부터 위에 있을 갑판까지.

앞을 가로막는 선원들을 베고 가르며 블라드는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내 앞 막지 마! 이 개자식들아!”

좁은 공간 속, 쉴새 없이 달라붙는 검들을 빈틈없이 막아내는 은회색의 갑옷.

유스티아의 갑주술이 적의 검을 튕겨낼 때마다 어김없이 이름 모를 자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네 놈이 바로 소문이 자자한 드라굴리아의 사생아구나!”

“······.”

위를 향해 내딛는 발자국 하나하나에는 결국 누군가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지금도 진창 속에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 누구보고 드라굴리아라고 했냐.”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한 이름을 가진 채 빛날 수 있었으니.

자신을 잘못된 이름으로 부른 상대를 향해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누구보고 드라굴리아라고 했어!”

콰드드드득!

“크아아악!”

검술도 검로도 아닌 그저 흉폭함으로.

계단을 틀어막고 있던 이름 모를 기사는 자신의 세계를 찢어발기며 들어오는 새파란 눈동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

분노를 앞에 매단 블라드의 검은 조금의 기세도 잃지 않았다.

기사를 검에 꿴 채로 그대로 갑판 위를 향해 돌진하는 블라드.

눈가로 와닿는 핏줄기가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콰앙!

요란하게 선창을 부수며 위로 올라가는 블라드.

가슴 속 깊이 새겨넣은 블라드의 황금색이 어두웠던 배 안을 밝히자 그 뒤를 따라가던 일행에게 명확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로 향하는 길이었다.

콰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을 부수며 올라가자 드디어 블라드의 뺨 위로 신선한 공기가 머물기 시작했다.

가고자 했던 갑판이었고, 목표했었던 더 높은 세계였다.

“너는 누, 누구냐!”

요란한 등장이었으나 맞이하는 것은 고요한 침묵뿐.

털어내듯 휘두른 검 앞으로 꿰어져 있던 기사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처참한 균열 속에 보이는 푸른 눈동자.

타고난 포식자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눈빛을 보며 톨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쇼아라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흐르는 핏물을 씻겨 내려주는 비가.

예전의 진창과도 같이 질척이는 핏물 위에서 블라드는 가만히 내리는 비를 느껴보았다.

“······요제프의 기사 블라드다.”

오늘만큼은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나의 이름 대신 다른 이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서 있게 해준 요제프를 위해서 블라드는 황금색 깃발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 예전 차가웠던 겨울날, 빼앗은 남의 이름으로 서 있었음에도 나라는 사람을 알아봐 준 요제프를 위한 검이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7화 8

깃발은 붉은 장미 (1)

마치 넘어갈 듯 위태로이 젖혀지며 바다 위 파도를 가르는 작은 배.

말도 안 되는 기울기로 급선회를 시도하는 제미나 호를 보며 몇몇 드워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배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지금의 기동에 오히려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의 함선! 적 기함에 달려듭니다!”

“······.”

자신보다 배는 더 커 보였음에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적 기함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제미나 호.

날아오는 포탄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돌진하는 제미나 호의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찔한 것이었다.

“충격!”

크콰가가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어이 적의 방해를 뚫고 적의 함선을 들이 받아버린 제미나 호.

몸집은 작았어도 속도에 의해 느껴지는 그 호쾌함에 드워프들은 들고 있던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내가 분명 유인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제 기억에도 그렇습니다. 대족장님.”

올무카르는 적 기함에 올라타는 제미나 호의 선원들을 보고는 버릇처럼 턱을 긁적여대었다.

인간과 엘프들이 한데 섞여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올무카르에게 기이한 감상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했던 모양이로군.’

올무카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서 있는 금발의 기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앞에서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당당히 외쳤던 블라드의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었다.

“어느새 갑판까지 장악했습니다.”

“빠르군.”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조금의 균형도 잃지 않은 채 검을 휘둘러대는 엘프들.

그들이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번뜩이는 황금빛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번뜩임이었다.

“배를 전진시켜라!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올무카르의 눈빛이 서늘했다.

갑작스레 백병전에 돌입한 적 기함을 돕기 위해 주변의 배들이 건널 판자를 얹으려 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함장의 목이 잘렸다!”

“인간들의 기사가 조타석을 점령했어!”

그러나 그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블라드의 검이 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달려드는 장애물들을 베어가며 똑바로 나아가던 블라드의 검은 기어이 타륜을 붙잡고 있던 톨빈의 목을 잘라내고 말았다.

“······사과 한 번 확실히 해야겠군.”

점점 가까워지는 간격을 따라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아직 멀었기에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았으나 올무카르는 분명 저 멀리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높은 돛대 위로 기어 올라가는 은회색의 기사.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배의 망루까지 기어 올라간 블라드는 올무카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냐는 듯 흔들어대는 바르보사의 깃발을 보며 올무카르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

적 전함 총 10척.

그와 맞선 니다벨리르의 함선은 총 7척.

황금공에게 있어서는 그저 탐색대였을 뿐인 함대였지만 그에 맞서야 하는 니다벨리르는 총 전력을 끌고 나와야만 했다.

아마 진작에 설치해 놓은 함정들과 제미나 호의 분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끝나지 못했을 전투였을 것이다.

“선장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미나 호에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어떤 이의 울부짖음만이 가득했다.

바다로 놓인 판자 위에서 위태로이 서 있던 선원 하나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제가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거둬주신 선장님의 은혜도 몰라보고······.”

“진부하네.”

주절대는 허튼 변명에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하벤.

차갑게 가라앉은 하벤의 눈빛에 블라드조차도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선장이었을 때의 하벤은 자신이 알고 있던 하벤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인 모양이었다.

“선장님!”

콰직-!

망설임 없이 돌아선 하벤의 등 뒤로 오타르의 도끼가 번쩍였다.

마치 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바다 위로 새빨간 핏물이 튀어 나갔다.

조직을 배신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뿐.

반쯤은 터져나간 선원의 몸이 힘없이 바다 위로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다. 선장인 내가 좀 더 확실히 확인했어야 했는데.”

“수습했으니 됐어.”

블라드의 위로에도 하벤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축 늘어뜨릴 뿐이었다.

고의였던 실수였던 간에 결국 제미나 호에 붙어 있던 수정구 때문에 렘노스 섬의 위치는 발각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방금의 전투로 명예는 회복했다 할지라도 이미 벌어진 과오만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미나 호의 용골이 휜 것 같아. 대대적인 보수 없이는 지금 같은 격렬한 전투는 무리야.”

“그래?”

하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제미나 호의 선수 부분을 바라보았다.

과연 삐뚤어진 듯 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이 하벤의 말처럼 큰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용골이 나간 거면······. 배를 바꿔야 하려나?”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적 기함에서부터 승리를 거둔 제미나 호였지만 그 승리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는 않았다.

어쩌면 배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하벤의 말에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블라드, 잠시만.”

하벤의 꿈이었고 자신이 선물해 준 첫 배였다.

감출 수 없는 실망감에 묘하게 가라앉은 블라드를 보며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바라디스가 손짓을 해대었다.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찾은 것 같다.”

나름의 위로였을까.

바라디스는 자신이 찾은 정령들의 기척을 블라드에게 알려주었다.

“섬에서는 보이지 않던 정령들의 흔적이 바다에 있더군.”

“바다에요?”

“그래. 바다에. 나중에라도 찬찬히 한번 찾아보고 싶다.”

모자랐던 바람을 대신해 제미나 호를 밀어주던 오징어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바라디스로서는 정확한 실체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니 지금은 그저 자그마한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만든 검에 이끌려 따라온 것 같다. 분명 반응하는 감각이 있었거든.”

“······그렇군요.”

블라드는 들고 있던 검을 세우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다를 풍경 삼아 바라본 미완(未完)의 검,

그 검 안에는 비록 색깔은 옅었으나 바다와 같은 푸르름이 있었다.

“꽤 신기한 검을 들고 다니는군.”

그리고 제미나 호 옆에서 나란히 배를 몰고 있던 올무카르 또한 블라드가 빼 든 검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망가진 배 위에서 흐트러진 검을 들고 있는 기사.

그러나 온통 망가져 있음에도 묘하게 균형이 맞는 그 모습을 보며 올무카르는 도통 감을 못 잡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철컹-!

냉기 가득한 바닥 위에 앉아 있던 요제프는 갑작스레 열린 창살 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요제프 님.”

“······그래. 수고했다.”

조금은 창백해졌으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미소만큼은 여전히 푸근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조금의 긴장도 보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해치우고 왔나.”

“10척 정도였습니다. 비록 탐색대였지만요.”

“역시 황금공 씩이나 되니 그 정도 함대도 탐색대 정도밖에 안 되나 보군.”

포로로 잡은 바르보사의 선원들은 자신들을 그저 탐색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렘노스 섬을 노리는 황금공의 시도는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칭호 앞에 황금이 붙는 자다. 소문은 들었지만 역시 가진바 재력이 대단한가 보군.”

제국에 넷밖에 없는 공작 중 하나인 황금공(黃金公).

날카로운 칼 대신 반짝이는 금화를 휘두르고 다닌다는 그는 요제프에게도 그리고 블라드에게 있어서도 여태껏 맞이한 적 중에서 가장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추우신가 보네요.”

“담요가 너무 얇았어.”

아직 감옥 안의 냉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요제프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자야르조차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 떨림을 보며 블라드는 준비해왔던 천을 넓게 펼쳤다.

“올무카르 대족장 님이 오해에 대한 사과도 할 겸 요제프 님과 대화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그래.”

어깨에 둘러멘 천 위로 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러나 그 거친 냄새에도 요제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님과 블라드 경이 도착하셨습니다!

잠시간 오해가 있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손님의 모습으로.

자신의 기사로 하여금 다시금 명예를 찾아오게 한 요제프를 보며 11명의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황금공 바르보사의 깃발을 전리품 삼아 망토처럼 둘러맨 요제프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저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볼까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요제프를 보며 니다벨리르의 족장들이 느낀 감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요제프는 그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다음의 일을 준비할 뿐이었다.

※※※※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조심하라니까.”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위태로운 판자 소리가 삐걱거렸다.

그러나 바르보사는 그쯤은 익숙하다는 듯한 걸음에 조타석으로 뛰어 올라갈 뿐이었다.

“그냥 먼발치에서만 보고 오래도 그걸 못해서 이리되었나. 쯧쯧.”

톨빈과 눈을 마주친 바르보사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보았으나 아무리 물어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톨빈은 영원히 멈춰서 있을 뿐이었다.

“보낸 배는 열 척인데 돌아온 배는 고작 한 척이니. 이것 참 손해 보는 장사일세.”

조심스레 톨빈의 목을 내려놓은 바르보사는 저 앞에 보이는 안개를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저 짙은 안개 속에는 분명 노다지 같은 드워프들과 그들의 기술이 있을 테지만 굳건히 걸어 잠근 그들의 세계는 침탈자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깃발은 뭐야? 아는 놈들 있나?”

“······저희도 처음 보는 형태의 깃발입니다.”

"남부나 서부 놈들은 아니라는 말이구만."

온통 부서지고 갈라져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함선에서 홀로 제 모습을 간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깃발이 나부끼던 곳을 올려다보던 바르보사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생소한 깃발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럼 북부인가?"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깃발 하나.

붉은 장미를 그려놓은 그 깃발을 보며 바르보사는 실로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도전자의 깃발에 바르보사는 오랫동안 굳어있던 혈관들이 말랑해지는 것만 같았다.

“손님맞이 한번 확실하구만! 아무래도 우리가 길은 맞았나 보다!”

한 명이 내질렀다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목소리.

널따란 바다 위로 그가 외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호탕한 외침 속에 숨어 있는 진득한 분노를 뒤에 있던 모든 함선이 들을 수 있었다.

“전원 안개 속으로! 저 안에 반짝이는 것들이 있으리라!”

바르보사의 외침에 까맣게 늘어서 있던 수십 척의 함선들이 안개 속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북부와 서부에 있는 모든 배를 합쳐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숫자의 배들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바다의 방식을 아는구만. 선전포고가 꽤 고전적이야.”

새로운 땅, 낯선 안개, 그리고 정체 모를 도전자.

렘노스 섬으로 향하는 바르보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그의 옆에는 은색의 쇠사슬로 묶여있는 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8화 11

깃발은 붉은 장미 (2)

단 한 번도 빛이 닿지 못한 것만 같은 깊은 바닷속.

그곳에서부터 올라온 희뿌연 거품들이 있었다.

수면 위에 닿자마자 터져버린 거품들은 간직하고 있던 숨결들을 흩뿌리며 같은 색의 안개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

깊은 바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면 일렁이는 수면이 곧 밤하늘 같아 보일 것이다.

지금 보는 이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황금색 빛무리에 깊은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눈동자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부터 거품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 위에 보이는 빛을 따라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아마도 평소보다 짙어진 안개는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거품들 때문인 모양이었다.

※※※※

“오오오······.”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니다벨리르의 대장간.

쉴 새 없이 김을 내뿜는 황동관들을 보며 니벨룬은 황홀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이것들이 움직이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진정 좀 하지.”

“어떻게 혼자서 움직이는 걸까요. 암만 봐도 신비는 보이지 않거든요.”

블라드와 니벨룬이 황동관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웬만한 배 한 척 크기는 될 것 같은 풀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 없이 혼자서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들은 과연 블라드가 보아도 묘한 압박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옆에 있는 고양이는 도대체 왜 데려온 거냐.”

“······저도 뭐 딱히 데려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니벨룬이 조금은 민망했던 모양인지 블라드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아까부터 눈치를 주는 대장장이들이 조금은 불편했던 참이었다.

“새로 주신 갑옷. 너무 좋던데요. 예전보다 부피가 커져서 거슬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알았어요.”

“흥. 어린놈이 벌써부터 알랑방귀나 배워왔구나. 싹수가 노래.”

“좋아서 좋다고 한 것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시네요.”

루흐타의 작업장에 들어선 블라드는 낡은 고로를 향해 왼쪽 눈을 찡긋거려 보았다.

세계를 통해 바라본 그곳에는 과연 바라디스의 말대로 블라드를 보고 있는 어린 도마뱀이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검은 어떻게 안 되나요? 영감님이 아니고서는 다룰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이놈아. 나한테 뭐 맡겨 놓은 것 있냐? 갑옷으로 만족해라.”

“저는 맡겨 놓은 게 없는데, 호르헤가 맡겨 놓은 건 좀 있지 않나요?”

옛 인연을 들먹이는 것이 좀 치사하기는 했지만 블라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는 여태껏 보아왔던 대장장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인이 있었으니까.

아마 지금이 아니고서는 검날을 세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블라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늙은 드워프가 손을 말없이 내밀자 블라드는 실실 웃어대며 자신의 검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 광경을 보던 어린 도마뱀이 자신이 타고 왔던 검을 알아봤는지 눈을 반짝여 대기 시작했다.

“목숨값이라는 게 참 질긴 거다. 늙어서 송장 될 이 나이까지 멈출 수가 없으니.”

“죄송해요. 그래도 영감님이 아니면 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받아드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블라드의 검을 살펴보던 루흐타는 그만 속으로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래서 그랬구만.’

장인의 눈길로 살펴본 푸른 검은 과연 블라드가 안달을 낼 정도로 검날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태껏 용케 적들을 베어왔다 생각될 정도로 무뎌진 검날이었다.

“그냥 날만 세워주시면 돼요. 예전에 말했던 재료는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 테니까요.”

“······재료가 있어도 이건 날 못 세운다.”

평생을 불 옆에 있었음에도 검날 하나 세우지 못한다고 말하는 대장장이.

그런 루흐타를 보며 블라드는 당황한 듯 가만히 굳고 말았다.

“날도 못 세워요? 운철이라는 게 그렇게 다루기 어려운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관점에서 어렵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수의 신녀가 저승의 문턱 너머에서 늙은 대장장이를 불러와 만들어 낸 검.

재료도, 제작하는 과정도 모두 범상치 않았기에 다루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루흐타마저도 고개를 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 관점이라는 게 뭔데요.”

“기술과 재료의 문제를 떠나 누구라도 날을 세울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가만히 블라드의 검을 내려다보던 루흐타는 손가락으로 검면을 튕겨내었다.

웅웅거리며 대장간에 퍼지는 소리.

주변 가득한 소음에도 명확히 들리는 그런 울림이었다.

“이건 검이 아니니까.”

“······네?”

“처음에 길을 들여놓은 자가 그저 검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란 이야기다.”

천천히 퍼지는 검명(劍鳴)에 어린 도마뱀이 기껍다는 듯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블라드는 그 울림을 따라 자신의 검에서부터 희미한 빛무리들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

“아직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네가 좀 어리지.”

어느새 블라드에게서 돌아선 루흐타는 내려놓았던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새빨간 쇳덩이를 내리치는 드워프 장인.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내려치는 루흐타의 뒷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어린 가능성에게 무조건 형태부터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까앙! 깡!

무심히 내려치는 망치질 속에서 시뻘겋기만 하던 쇳덩이가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돌덩이로 태어났지만 불과 망치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철괴.

그러나 점차 변해가는 그 모습이 정말 본인이 원했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몸조심해라. 어쩌면 오늘이 너와 내가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그 말을 끝으로 루흐타는 묵묵히 작업에 몰두할 뿐이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다 해주었기에.

그 조언을 이해할지 말지는 오직 검의 주인인 블라드에게 달린 일이었다.

“······마지막이라니. 재수 없는 소리 하시긴.”

블라드는 더는 아무 말 없는 루흐타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어왔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면서 보는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아마 다들 다가올 폭풍을 준비하며 쇠에 날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

“바르보사의 함대가 저희 해역에 진입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최소 40척은 넘어가는 함대라 합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족장들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40척이라는 배도 배였지만 그 안에 타고 있을 전투병력만 최소 천 명은 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력들에 대항할 수 있는 니다벨리르의 숫자는 고작 7척의 전함과 수백 명의 드워프들뿐이었으니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두워질 법도 했다.

“······올 게 왔군.”

그러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지금에도 대족장 올무카르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올무카르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그날이 오늘이 아니기를 바라왔을 뿐이지.

“바르보사의 함대가 언제쯤 도착하겠나?”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온다면······. 아마도 3일 이내입니다.”

“3일.”

이렇게나 가까웠었다.

인간들과 드워프들간의 거리는.

아직도 몇몇 족장들은 숨죽이며 태풍이 지나갈 것을 기다리자고 말하고 있었으나 올무카르는 더는 황금공의 위협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바예지드의 요제프. 자네가 말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대족장 님. 저희 북부는 여전히 니다벨리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협에 대해서 북부가 조금이라도 지원해 줄 수 있겠는가?”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간이 문제일 테죠.”

적은 지금 코앞에 있었고 북부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항구는 오직 나사우뿐.

고작 3일이라는 시간 안에 그곳에 있는 함선들을 이곳까지 출항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아네. 아이와 노인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야. 그 정도는 가능하겠는가?”

도망칠 수 없는 배수진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전사들에게나 유효한 개념이었다.

니다벨리르의 지도자로서 언제나 다음을 생각해야 하는 올무카르는 최소한 노약자들만이라도 이 섬에서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대족장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 정도라면 바예지드의 재량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고맙네.”

드워프들의 옛말에 위기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주는 자만이 진정한 친우라 했다.

비록 북부와 바예지드가 자신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긴 했으나 이 정도의 호의라면 서부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들이라 판단해도 될 것이다.

“지금부터 전함을 제외한 모든 배들을 수배해라. 그저 판자를 얹은 고깃배라도 좋다.”

“알겠습니다. 대족장 님.”

가장 완벽한 용의 시대에서부터 지금 제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세계 아래 짓밟히는 존재들은 언제나, 어느 시절에나 있어왔다.

그저 짓밟는 자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에 힘없는 자들은 또다시 고향과도 같았던 섬을 떠나야만 했다.

“분위기가 왜 이러나!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니 오히려 더 좋지 않소!”

쾅-!

먼 옛날의 일처럼 다시 한번 동족들에게 먼 피난길을 준비하라 이른 대족장은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다가오면 치워내면 되고 위협하면 박살 내면 되는 것이지! 오직 그 방법뿐이니 고민할 것도 없소!”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는 올무카르의 입에서 뜨거운 쇳물과도 같은 열변이 토해져 나왔다.

“이 섬이 우리의 마지막이오! 이곳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돌아갈 고향조차 잃은 수인족들처럼 평생을 떠돌며 살겠지!”

예전과 같은 과오를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자는 올무카르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는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

어제와는 달리 렘노스 섬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가올 폭풍을 피해 섬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난 행렬은 난생처음 봐.”

“나는 본 적 있어.”

“어디서?”

“등나무 마을이라고 있어.”

그때와 같은 광경이었다.

노인들은 힘겹게 등짐을 지고, 여인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바삐 움직이는 지금의 광경은.

모두가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는 항구에는 그저 무거운 분위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우리는 몇 명이야.”

“한 50명? 의외로 별로 없어. 제미나 호가 수리가 필요하다는 걸 여기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

하벤은 기대했던 보수는커녕 생각지도 못한 피난민들을 실어 가는 현실이 영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을 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 전부 딴 배로 실어.”

“응?”

“피난민 한 명도 받지 말라고.”

한참 피난민들을 보던 블라드는 저 멀리서 낯익은 고로를 든 채 배를 올라타는 대장장이들의 무리를 보았다.

왼쪽 눈을 감아 바라본 낡은 고로에는 풀이 죽은 듯 시무룩해져 있는 어린 도마뱀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왜? 안 그래도 태울 배가 모자라는데.”

블라드는 배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바라디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마주쳤을 때에야 알아볼 수 있다는 신녀의 계시.

이미 한 번 계시를 경험해 본 적 있던 블라드는 직감이 말해주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거든.”

노을이 지는 항구 뒤로 섬을 떠나가는 쪽배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제미나 호도 천천히 접어놓고 있던 돛을 풀기 시작했다.

부풀어오는 돛 위로 너풀거리는 장미 깃발만이 렘노스 섬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9화 4

황금색 등대 (1)

소리조차 먹어버리는 짙은 해무에 바다는 조용하고 잔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저 배들이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뿐.

그러나 아무리 조용하게 움직인다 해도 43척의 배가 만드는 소음을 모두 감출 수는 없는 법이었다.

“······!”

그리고 여태껏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니다벨리르는 바로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습격이다!”

파수꾼의 애처로운 외침과 함께 안개에서부터 불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부터 시작된 번쩍임은 어느새 바람을 타고 바르보사의 함대를 향해 매섭게 날아오고 있었다.

“포탄이 날아온다!”

“드워프들이다! 다들 일어나!”

콰가가가강-!

시작은 조용하였으나 와닿을 때는 재앙과도 같았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나뭇조각들.

그와 함께 퍼져나가는 선원들의 비명 소리가 짙은 안개를 뚫고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적 타격 성공!”

“쏜 포탄들 대부분이 명중하였습니다!”

틈을 노린 기습이자 선제 타격.

안개라는 변수를 살린 니다벨리르의 공격이 바르보사의 함선들을 사정없이 가격해대었다.

대응 사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적들을 보며 선원들이 오랫동안 쌓아놓았던 함성을 내질러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느린 이유가 있었군.”

그러나 지금의 선전에도 올무카르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을 뿐.

쏘아대는 포탄은 요란했음에도 정작 멈춰서는 바르보사의 함선들은 단 한 척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어?”

“저것들 뭐야.”

환호성과 함께 신나게 포탄을 날리던 선원들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욱했던 포탄의 연기가 걷히고 그제야 보이는 광경은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저 미친놈들이······.”

43척의 배가 마름모꼴의 한 무리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바르보사의 함대.

방금까지의 포격으로 진형 바깥쪽에 있던 함선들은 걸레짝이 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전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겉면은 처참히 피격당했어도 내부의 기능들은 여전히 멀쩡하다는 뜻이었다.

“철갑! 철갑이다!”

“저 미친놈들이 배에다 철갑을 둘렀다!”

바람은 순탄했으나 적들의 움직임은 유난히도 느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르고 있는 갑옷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뭔 놈의 돈 지랄을 저렇게까지 하는 거냐.”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은 배 한 척한 척마다 꼼꼼히 둘러놓은 철갑을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전사이자 작업자인 그들은 저렇게까지 철갑을 두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자원과 금화가 소모될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놀라시기에는 너무 이른데.”

마름모꼴의 진형 한가운데, 눈에 환히 띄는 붉은색 돛 아래서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위에서 휘적이는 깃발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적 함대! 포문을 열었습니다!”

“전 함대 전속 전진! 이대로 빠져나간다.!”

받았으면 갚아주는 것이 남부에서의 도리.

올무카르는 불어오는 바람이 자신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전장을 빠져나갈 것을 명령했다.

“어딜 가시나! 드워프 형씨들!”

쾅! 쾅쾅! 쾅!

바다 위를 떠도는 성벽에서부터 화려한 불길들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서, 정해진 각도를 향해서.

“준 만큼은 가져가셔야지!”

바르보사의 붉은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야성과도 같은 그의 감각이 지금의 공격이 성공할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바다는 알았어도 드워프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뭐야 이건!”

상대와의 간격을 가늠하는 것은 선장이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

그러나 황금공 바르보사는 어느새 미묘하게 흐트러져버린 간격을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뿌우우우우-!

노를 젓지 않는 이상, 아니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지금의 기동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은 어느새 뱃머리를 돌린 채 포격이 닿는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고 있었다.

“물레방아?”

안개를 뿜으며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가는 함선들.

어느새 모습을 감추고만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을 보며 황금공 바르보사는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대로 암초 지대까지 유인하겠다. 잠수함들에게 신호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쏘아도 쏘아도 멈추지 않는 함대와 흐르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함대.

바르보사와 올무카르는 난생처음 맞이하는 낯선 세계를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

-저게 뭐야!

-함선들이다! 바르보사의 깃발이야!

안개 속에서는 매서운 포격 소리가 요란했지만, 북부로 향하는 해역에서는 공포에 질린 비명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피난을 위해 나사우로 향하는 행렬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이거 당했군. 이렇게나 빨리 움직였을 줄이야.”

“······.”

요제프의 탄식을 들은 블라드는 들고 있던 망원경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멀리 본 시야를 통해 저 멀리에서 나사우로 향하는 길목을 정확히 틀어막고 있는 함선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총 5척으로 확인된 함선들에서는 그동안 북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황금색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첩보보다 훨씬 빠르군. 아마도 황금공은 이미 서부 해역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구축한 모양이다.”

“그러면 이제 어떡합니까?”

피난민들을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황금공의 함선들은 이미 북부 해역까지 진출해 있었다.

정확히 길목을 가리고 있는 그 함선들은 혹시라도 있을 북부에서의 지원을 틀어막기 위해 바르보사가 보낸 함선들일 것이다.

“······나라고 언제나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조심스레 입을 연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요제프의 시선이 닿은 그곳에서는 너절한 고깃배 위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딱히 방법은 없지만 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그 말과 동시에 요제프와 블라드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이 배의 주인인 하벤을 향해서.

“······전에도 말했잖아. 배의 상태가 나사우에나 겨우 갈 정도라니까. 아니 그리고 애초에 저쪽은 5척이나 되잖아!”

“저번에도 한 번 해봤잖아.”

“그건 그때고! 이번에는 딱히 지원도 없잖아!”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바르보사의 함선들은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천천히 다가오는 거대한 함선들 앞에 대항할 수 있는 배라고는 오직 제미나 호뿐.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하벤은 그만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말았다.

“딱히 숨을 안개도 없고, 암초 사이에 숨겨놓은 쇠사슬도 없어. 저번처럼 무턱대고 돌격하다가는 붙기도 전에 날아오는 포탄에 가루가 되고 말 거야.”

“······.”

제미나 호가 고민하며 멈춰있는 사이, 홀로 앞서 나가는 기이한 더듬이 하나가 있었다.

바다 밑에 있던 불카누의 잠수함이 앞으로 나아가는 행적이었다.

“불카누가 길을 열어줄 거야. 우리는 그 틈을 노리면 돼.”

“그래. 결국은 하자 이거지?”

평생 피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정면으로 승부해야 할 때가 온다.

지금처럼 등 뒤에 지켜야 할 사람들이 가득할 때는 더더욱.

“······뭐.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선장은커녕 그 좁은 방 안에서 시달리다 죽었겠지.”

블라드를 마주한 하벤의 표정은 여전히 곤란해 보였지만 다시금 다잡은 선장모의 각은 날카로웠다.

“그래. 해야지 뭐 어쩌겠어.”

볼품없던 방의 주인에서 이제는 넓은 바다의 선장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벽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제 하벤도 잘 알고 있었다.

“기사님께서 한 번 더 가자신다! 다들 준비해!”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빌어먹을! 결국, 내가 바다에서 죽게 되는구나!”

함장의 각오를 눈치챈 선원들이 재빨리 각자의 자리를 찾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명령에도 불만 하나 비치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블라드와 하벤이라는 존재는 자부심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진창에서 태어났으나 자부심이 된 그런 사람들.

“마법사! 어서 네 자리로 가!”

“제 자리가 언제부터 저기였습니까?”

한낱 동력원 취급을 받은 니벨룬은 평소답지 않게 툴툴대었으나 배 위에서만큼은 하벤의 말이 곧 법이었다.

그나마 렘노스 섬의 대장간에서 열기를 얻어와 다행이라고 중얼거린 니벨룬은 익숙한 손짓으로 배낭에서 자그마한 풀무를 꺼내 돛대 뒤에 섰다.

“블라드 잠시만.”

각자가 저번에 했던 모습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사이, 선수 쪽으로 움직이려던 블라드를 잡아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무슨 일이죠. 바라디스.”

“느껴진다. 이번에는 확실해.”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곁에 모여있는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아유슈린의 엘프들은 선원들이 뛰어다니는 급박한 지금의 상황에서도 난간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근처를 떠도는 정령들이 있어. 저번보다 더 모여들어 있다.”

바다 쪽을 가리키던 바라디스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블라드 검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니 세계수에서 비롯된 정령들이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아마도 알아보는 것 같아.”

바라디스의 말에 블라드는 서둘러 왼쪽 눈을 감아보았다.

그러자 바라본 세계에서는 과연 그의 말대로 검집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을 감지할 수 있었다.

“돛 줄 풀어! 있는 대로 다 풀어!”

“으아아아!”

바라디스의 손끝을 따라 바라본 바다에는 어느새 넘실대는 빛무리들이 가득했다.

그 빛을 본 블라드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선수 부분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제미나에게 작별 인사나 해 둬라! 이제부터 우리는 지옥으로 갈 테니까!”

인간이 내린 돛 위로 신비가 내뿜는 바람이 와닿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는 제미나 호.

그러나 그 추진력이 자신이 예상한 수준을 훨씬 넘었음을 깨달은 하벤은 놀란 표정으로 니벨룬을 바라보았다.

“이건 저 아니에요!”

“······그럼 뭔데.”

물결 하나 없이 나아가는 제미나 호를 보며 주위에 있던 드워프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기묘해 보이는 움직임도 움직임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바다 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 지금 당장 오러를 풀어라!]

돛대를 타고 오르는 블라드를 향해 키하노가 다급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밑에서 내려다본 세계는 이미 빛나는 오징어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고요!”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가장 앞선 곳이 아닌 가장 높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검을 통해 흐르는 세계수의 흔적을 멀리까지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직 이 방법뿐이었으니까.

“처음부터 피난민들 안 받아놓길 잘했네!”

유스티아는 지키지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라지고 싶었다.

계시라는 것이 맞닥뜨려야 안다지만 그래도 조금은 준비해보고 싶었다.

그런 각오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미나 호는 망설임 없이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후우······.”

아찔하게 높아진 망루 위에 도착한 블라드는 있는 힘껏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밝게 비치는 황금빛 세계.

마치 등대같이 빛나는 그 세계를 따라 바닷속 거품들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거칠어지는 바다 위에서 홀로 빛나는 황금색 불빛.

멀리서 본 그 모습은 마치 세계수의 신녀가 그려준 그림과 똑 닮은 모습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0화 6

황금색 등대 (2)

누군가에게는 지켜야 할 대상이었으나 누군가에는 그저 수확의 대상이었을 뿐.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드워프들을 보며 바르보사의 선원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드워프들은 그저 반짝이는 금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거 다 드워프들 아니야!”

“하하! 이곳이 바로 노다지로구나!”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확에 들떠 있었던 탓일까.

그들은 천천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배 한 척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설사 알아챘다 할지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배는 위협적으로 보이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녀석이었으니까.

“······뭐야?”

들떠 있는 선원들에게로 순간, 반짝이는 빛 하나가 비치기 시작했다.

한낮이었음에도 밝게 빛나는 그 빛은 작긴 했어도 항구에 서 있는 등대라 착각할 정도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반짝이던 그 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볼품없었기에 무시했던 자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며 달려오는 그 배는 똑바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으아아아아!”

“너무! 너무 빨라!”

“오징어, 오징어들이 미쳤나!”

마치 은빛 선반을 타고 있는 것만 같다.

푸르러야 하는 바다였으나 지금 제미나 호가 밟고 있는 수면은 온통 은빛으로 가득했으니까.

발광하는 오징어 떼들이 만들어 내는 빛에 저 멀리 있던 바르보사의 함선들마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끄으으으!”

경험 많은 선원들조차도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의 속도.

부풀어 오른 돛은 이미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고 와닿는 맞바람은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해져 있었다.

“다들 꽉 잡아!”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제미나 호의 전진이었으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선원들이 감내해야 하는 충격은 격렬했다.

균형감각이 뛰어난 엘프들조차 당황할 만큼의 진동에 이미 요제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콰앙! 쾅! 쾅!

“적 함선에서 공격! 포탄입니다!”

뒤늦게 알아챈 바르보사의 함선들에서부터 새까만 점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불길한 폭음에 선장모 아래 가려진 하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흐으읍!”

끄득-! 끄드드득!

억지로 돌려내는 조타륜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제미나 호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펑! 펑! 철썩!

온 힘을 다한 조종에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는 바르보사의 포탄들.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던 바라디스 조차도 바로 옆에서 떨어지는 포탄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하! 하하!”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하벤만큼은 크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두 다리로 뛰어본 적이 도대체 언제였을까.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때의 기억이 찢어질 듯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전원! 충격에 대비해라!”

끼익! 끼이이익!

제미나 호의 곳곳에서 불길한 삐걱거림이 가득했다.

지쳤고 망가졌으며 가진 바 능력에 비해 너무나 큰 임무를 맡은 제미나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러나 하벤은 붉은 장미의 그녀라면 분명히 마지막까지 해줄 것이라 믿었다.

“부딪힌다!”

“으아아아!”

신비가 불어낸 바람과 정령들이 내지른 물결이 마지막으로 제미나 호를 포탄처럼 쏘아 보냈다.

급작스러운 가속에 바르보사의 선원들조차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지지지직-!

터질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맞부딪힌 두 척의 배가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작았으나 단단한 레이디는 기어이 침략자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내고 말았다.

“전원 뛰어들어!”

“으아아아!”

“안 죽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침몰하는 제미나 호 위에서 선원들이 앞을 향해 뛰어들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매달린 충각이 만들어 낸 다리를 타고서.

앞으로 크게 기울어진 각도가 그들의 돌격에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기선제압은 어떻게 하라고 했지?]

그리고 무너지는 망루 위에서 그들의 돌격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쓰러져가는 제미나 호의 흔적을 온몸으로 두른 사내가 보내는 시선이었다.

“······화려하게요!”

충각은 선창에 닿았으나 기울어진 제미나 호의 망루는 적 갑판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천천히 쓰러져가는 그곳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크게 휘둘러지는 검격.

그 검의 길은 정확히 조타륜을 잡고 있던 적 함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올려다보고 있던 함장의 눈으로 빛무리가 가득해지고 있었다.

마주 보는 시선을 통해 가까워진 두 사람이 기어코 서로를 지나가고 말았다.

그어진 검의 길은 하나였고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푸슈슈슉!

세로로 쪼개낸 핏물 아래로 선장이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스쳐 지나간 순간은 찰나였고 닿은 빛은 화려한 황금색이었다.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기어코 쓰러진 제미나 호의 돛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갑판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향해 연민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북부를 침범한 네놈들에게 변명 따위는 듣지 않겠다.”

가져가야 할 것은 비루한 형태가 아닌 오직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붉은 장미의 깃발을 두른 블라드에게서부터 스산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적의 배는 총 5척.

기함에 박혀버린 제미나 호를 보며 당황한 나머지 배들이 서둘러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읍!”

묵직하게 휘둘러대는 도끼에 또 한 명의 선원이 목을 잃고 말았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검은 피부의 남자는 지켜본다고 할지라도 알아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벤!”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

왼쪽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하벤을 보며 오타르가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다들 자리 잡아!”

비좁은 선창 아래서 혼란하게 뒤섞여 있는 적과 선원들.

엘프들과 자야르가 선전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멀리서 날아오는 포격까지는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준비된 사수! 심지 들어!”

지팡이조차 잃어버린 채 힘없이 뒹굴고 있던 하벤이었으나 쓰고 있는 선장모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었다.

배는 잃었으나 선장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벤은 자신의 승객들을 위해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야 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발사!”

“포탄 발사!”

“선장님께서 발사하시란다!”

혼란한 비명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복창들.

적의 대포들을 탈취한 제미나 호의 선원들이 다가오는 함선들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펑! 퍼펑! 펑!

가까이 다가왔기에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거리.

사방에 튀어 오르는 파편들 위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이토록 빠른 시간에 선창이 점령됐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적의 함선들 속수무책으로 측면을 내주고 말았다.

“멈추지 마라! 계속 발사해!”

지금부터는 오직 빠른 손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함이 탈취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함선들에게서 천천히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대포의 끝이 양쪽에서 선원들을 노리고 있었다.

“긴급 부상하라!”

순간 조준을 마친 적의 함선 중 하나가 크게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바다 아래서 튀어오른 개복치 같은 것에 의해 사정없이 밀어 올려졌기 때문이다.

펑! 펑펑! 펑!

각도를 잃어버린 적의 포탄들이 허무하게 하늘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하벤의 명령과 함께 선창에서부터 불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포탄 하나에 누군가의 비명 하나.

갈가리 찢긴 시체들이 바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천천히 가라앉는 시체들 위로 거품이 떠 오르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 빛 한 점 들지 않았던 어둠에서부터 나오는 거품이었다.

누군가의 숨결을 담은 그 뿌연 거품은 지금 수면 위로 비치는 황금빛 등대를 향해 자신의 손을 뻗치고 있었다.

비록 가진바 빛깔은 달랐으나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울림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

“쇠사슬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회해라.”

“불가능합니다! 곳곳에 암초들이 깔려 있습니다!”

바르보사는 들려오는 보고들에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어쩐지 상대가 되지 않았음에도 필사적으로 대항하던 이유가 아마 지금을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거참 대담도 하시지.”

바르보사는 바로 앞에 보이는 함선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기이한 물레방아를 단 채 끊임없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배.

비록 지금의 모습은 포탄들로 인해 초라해졌으나 니다벨리르의 기함은 결국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배 밑에는 철갑이 없다고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이마 위로 파편에 찔려 흐르는 피가 가득했다.

그러나 올무카르는 들리는 보고가 기껍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잠수함들에게 전해라. 저놈들 배 밑에 구멍을 뚫으라고.”

“알겠습니다.”

전투용이 아닌 작업용으로 만들어 놓은 잠수함들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배 밑에 구멍을 뚫기는 수월할 것이다.

애초에 바다 밑에 광석들을 채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잠수함들이었으니까.

쿠웅! 쿵!

“공작님! 지금 배 밑에서!”

“아이구. 이제는 뭐가 튀어나와도 안 놀라련다.”

배 밑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선원들이 불안에 떨어댔지만 황금공 바르보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댈 뿐이었다.

바람 없이 알아서 움직이는 배에 바다 밑을 나다니는 이상한 개복치.

게다가 암초 사이사이에 집요하게 묶어 놓은 쇠사슬들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드워프들의 준비에 바르보사는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드워프 수염만큼 질긴 게 없다고 하더니만······. 암만 봐도 저놈들 미친놈들이야.”

그러나 황금을 향한 바르보사의 집착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운 것.

몸속에 붉은색 피 대신 차가운 금화가 흐르는 그는 드워프들의 선전 하나하나가 빛나는 금화로 보일 뿐이었다.

“아이고. 백작님.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어쩌겠소. 나도 참 안타깝구려.”

마땅히 수가 없음을 인정한 바르보사는 들고 왔던 대비책 하나를 쓰기로 했다.

본래는 용혈공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놈과 바르보사 가문에게 저주가 있기를 빈다.”

“그게 마지막 살바라즈가 남기는 유언이오?”

밧줄에 의해 꽁꽁 묶인 중년인이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황금공 바르보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빼든 단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패배한 개는 누구라도 지금의 남자처럼 짖기 마련이었고 바르보사는 그런 헛된 협박 따위는 숱하게 들어본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말도 별로 감흥이 없어. 감흥이.”

“컥!”

익숙한 손짓으로 가볍게 사내의 목을 그어버린 바르보사.

그가 들고 있는 단검의 끝으로 마지막 살바라즈가 품고 있던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드드드드득-!

살바라즈 백작의 눈이 빛을 잃어갈 때마다 옆에 있던 함에서부터 격렬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은색의 쇠사슬들로 인해 꽁꽁 봉인되어 있던 함이었다.

“······듣던 대로 날뛰기 시작하는군.”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쇠사슬들은 지금 급속하게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피를 통해 이어질 맹약을 잃었기에 더는 고귀한 맹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맹약을 지키고 있던 남부의 핏줄은 결국 무뢰한 해적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상자의 불길한 울림을 따라 바다 밑 그림자가 짙어져 가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여태껏 남부에서부터 용의 파편을 따라온 존재가 품고 있던 것이었다.

※※※※

렘노스 섬의 절벽 끝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있었다.

싸울 수 없는 자들은 피신했고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은 모두 전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섬이었지만 루흐타만큼은 이 대장간을 지키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늙은이라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의무는 있는 것이니까.

“저게 도대체······.”

그렇게 굳은 결심으로 남아 있던 루흐타였지만 지금 보고 있는 광경만큼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바다가 울고 있었다.

자신의 밑에서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떠오르고 있음에.

그 거대한 울부짖음에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이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뒤집힐 것 같은 가련한 나뭇잎처럼.

“······이런 세상에.”

루흐타의 입에서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대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살아왔던 그로서도 감히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아아아아아아-!

바다를 찢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용이 있었다.

뻗어낸 고개가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존재였다.

그것이 울부짖는 소리에 하늘마저도 구름으로 자신을 가릴 정도였다.

“가장 거대한······. 용.”

가장 거대한 용. 레비아탄.

완벽한 용의 흔적 중 제일 거대한 존재가 지금 렘노스 섬의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1화 5

검이 울고 있었다

울부짖는 바다 위에서 하늘을 찢어발길 기세로.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게 솟은 레비아탄의 모습은 감히 우러러보지 않고서는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용의 모습은 전장에 있는 모두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맙소사.”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이 이러했을까.

오래된 만큼 거대했고, 거대한 만큼 경이롭다.

올무카르는 짙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레비아탄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퍼엉-!

그러나 파도마저 숨을 죽인 이 순간, 홀로 침묵을 깨는 날카로운 소음이 있었다.

단 한 발의 포탄이 만들어내는 소음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런 소리였다.

“적, 적 기함에서 포탄 발사!”

“······!”

불길한 붉은 빛이 감도는 포탄이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 삼아 날아가는 포탄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와도 같았으나 바르보사가 쏘아 올린 그 유성우는 오직 한 사람의 소원만을 들어주는 거짓된 별이었다.

“······미끼는 보냈고.”

천천히 렘노스 섬으로 기울어지는 붉은 궤적을 보며 황금공 바르보사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거친 사냥감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을 빼놔야 하는 법.

조각을 날린 것은 아쉽지만 저기 보이는 용이라면 드워프들의 방어선을 처참히 부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아아아아아아아-!

과연 그의 뜻대로 렘노스 섬을 향해 날아가는 용의 조각을 보며 레비아탄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욕망과 염원 따위가 아닌 본능에서 갈구하는 완벽함이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용 씨한테 맡겨보자고.”

저 거대한 몸체에 섬 자체가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괜찮다.

황금색 금화들은 비록 부서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빛나는 것들이었으니까.

자신은 저 용이 부수고 난 조각들을 그저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뱌르보-사!”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울분에 찬 올무카르의 포효가 들려왔다.

붉게 달아오르는 레비아탄의 시선을 보며 지금 바르보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쏴아아아아-!

그러나 그의 분노에도 상관없이, 레비아탄의 몸짓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뱀 같은 몸체가 꿀렁일 때마다 차마 그 거대함을 담을 수 없는 바다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전 함선! 포격 준비! 섬으로부터의 시선을 돌려라!”

그리고 그 비명은 오롯이 드워프들의 둥지인 렘노스 섬을 향하고 있었다.

가장 거대한 존재 앞에 위태로이 놓인 자신들의 섬을 보며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은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

바닷속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그 갈 곳 없는 열기들이 만드는 거친 조류 속에서 위태로이 흔들리는 개복치 한 마리가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흔들려!”

“으아! 으아아!”

드워프 피난민들을 무사히 떠나보내고 다시 렘노스 섬으로 향하는 불카누의 잠수함.

그 안에 앉아있던 블라드와 일행들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잠수함의 흔들림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불카누!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화산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쉴 새 없이 삐걱대는 페달 소리 속에서 불카누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번져 나오는 불안이 가득했다.

“화산? 여기 산이 어디 있는데요?”

“바다 밑에도 산들은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사나운 녀석들이죠.”

바다 밑에 산이라는 말에 니벨룬의 귓가가 쫑긋거렸지만, 차마 고개까지 들지는 못했다.

지금 불카누의 잠수함은 거친 조류에 휘말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제미나 호에서 적응됐다고 생각했던 멀미가 다시 올라올 정도로 격렬한 흔들림이었다.

“저도 화산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두근-!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불카누의 말에 블라드는 가만히 벽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이제는 뛰는 심장 박동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 완벽함의 잔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용이군.’

불카누는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이 사태가 누구로부터 비롯됐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함에 굶주려 있는 몰락한 용의 잔재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등장하고는 했었으니까.

“함장님. 여기 좀.”

“무슨 일인가.”

불카누는 다급히 자신을 불러대는 부하의 부름에 서둘러 잠망경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보이는 바다 위는 처참한 모습 그 자체였다.

“······오징어들이 다 죽었군.”

바다 위 수면에서는 끓어오르는 바다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허옇게 죽어간 오징어들이 가득했다.

여태껏 제미나 호를 밀어주었으며 지금은 잠수함을 따라오던 오징어들의 사체였다.

두근-!

거대한 존재가 쳐대는 몸부림에 갈 곳을 잃은 오징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오징어들은 계속해서 터져나가는 화산들을 피하려 애썼지만 이미 그들의 세계는 처참히 무너지는 와중이었다.

-······.

또다시 거대한 세계 아래 짓밟히고 마는 바다의 정령들.

그 가녀린 몸짓들을 보며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은빛의 물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

여태껏 정령들을 위해 자신의 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가로막고 있던 존재.

죽어가는 정령들을 보며 오래된 옛것 하나가 소리 없는 분노를 내질러대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동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검.

오래된 옛것의 내지르는 분노에 동조한 블라드의 검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던 검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검이었다.

※※※※

“······안 돼! 안돼!”

사납게 세워진 비늘 하나하나가 섬을 감싸고 있다.

거칠게 조여오는 몸통 사이로 사로잡힌 렘노스 섬이 내뱉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안 돼!”

처참히 무너지는 섬을 보며 늙은 드워프가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드워프들의 세계가 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며 루흐타는 굵은 눈물방울을 흘려대었다.

퍼엉! 펑!

저 멀리 바다에서부터 다급한 포탄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은 자신들의 섬을 올라타려는 용을 향해 쉴 새 없이 대포를 쏘아댔지만, 용의 조각을 앞에 둔 레비아탄에게는 한낱 모깃소리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르르르르-!

어서 내놓으라 사납게 외치는 용의 포효에 기어이 터져나가고 마는 렘노스의 섬의 산꼭대기.

그곳에서부터 흐르는 뜨거운 용암은 섬이 흘리는 피였고, 드워프들이 흘리는 비통한 눈물이었다.

“내버려 둬라, 이놈들아! 우리를 그만 좀 내버려 둬!”

쉴 새 없이 불어오는 풍랑을 마주하며 이제는 지치고 만 노인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무리 일어서려 해도 끊임없이 자신들을 꿇어 앉히려는 존재들을 보며 루흐타는 더 이상 대항할 만한 기력조차 잃고 말았다.

그아아아아아-!

그래. 내가 여기 있다.

어서 나를 가져라.

나를 가진 너는 더욱더 완벽에 가까워지리니.

그런 노인을 내려다보며 가장 거대한 용이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옆에 있는 절벽에 박혀 붉게 약동하는 용의 조각을 보면서.

가장 거대한 용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가능성보다는 남의 가능성을 취하기가 더 쉽고 달콤하며 또한 감미롭다는 것을.

-······!

그러나 순간, 레비아탄은 바다 밑에서부터 자신을 감싸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느새 밝게 달아오른 은빛의 바다.

그 위로 떠오른 거대한 촉수들이 레비아탄을 향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건, 저건 또 뭐야.”

레비아탄의 선전에 한껏 웃음 짓고 있던 바르보사는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오징어를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저것도 용인가?”

“아닙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촉수들이 가장 거대한 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의 향연들이 떨어져 내리는 바닷물과 함께 촉수에 붙어 있는 빨판들을 빛내고 있었다.

“저건 크라켄입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비명 같은 외침에 따라 높이 솟은 촉수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가장 거대한 용을 향해서, 남의 가능성을 취하려는 존재를 향해서.

-그아아아아아!

-······!

쩌어어어엉!

인간들의 귀로는 감히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소리.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에 바다 위에 있던 모두가 귀를 움켜잡고 말았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바다마저도 커다란 파도를 내뱉으며 떠 있는 배들을 마구 뒤흔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가장 거대한 용에 이어 가장 거대한 바다의 정령까지.

마치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광경에 인간도, 드워프도 모두가 무력하게 난간을 붙들 뿐이었다.

-그오오오오오!

그리고 지금, 인간들의 바라보는 시선 끝에 있는 레비아탄은 자신을 얽매여 드는 크라켄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었다.

붉게 뛰는 조각을 향해 달려드는 어린 용을 향해서였다.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다! 저것을 넘겨줘서는 안 돼!]

“크흐······!”

뛰는 심장을 억지로 붙잡아가며 용의 조각을 향해 달려드는 황금빛 하나.

진동하는 검에서부터 어린 세계수의 흔적을 휘날리는 블라드였다.

“젠장! 너무 멀어요!”

절벽 한가운데에 아슬아슬하게 박혀 있는 용의 조각을 확인한 블라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시선들을 마주했다.

레비아탄과 크라켄.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무어라 외치는지 알 것만 같은 그들의 눈동자를 보며 블라드는 절벽 밑으로 향하는 바위에 몸을 실었다.

-그아아아아아!

-······!

하지 말라고 외치는 용과 어서 하라고 외치는 크라켄.

그들이 내지르는 소리의 울림만으로도 손으로 붙잡고 있던 돌들이 부스러져 나갔으나 블라드는 조각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푸아아아아악-!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 낸 파도에 힘없이 휩쓸려 나가고 마는 렘노스 섬의 백사장.

붉게 피어오르는 화산재 아래서 힘겹게 절벽을 내려간 블라드는 기어이 붉게 빛나는 용의 조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근-!

어서 나를 잡아라. 어린 용아.

나를 가지면 너는 완벽해질 수 있으니.

나는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다.

“······나는 기사죠. 키하노?”

[그래.]

자신을 유혹하는 붉은 빛에 잠시 망설이던 블라드였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너 자신의 주인이다.]

남의 가능성이 아닌 나의 가능성으로.

옳은 길은 좁고 깊으나 그 길을 선택한 기사의 정신은 언제나 숭고할지니.

무너져내리는 바다 위에서 나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블라드는 손을 뻗어 뛰고 있는 조각을 붙잡았다.

두근-! 두근-! 두근-!

퍼지는 심장 박동을 따라 불길한 붉은 색이 블라드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감각에 블라드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큼은 블라드를 꽉 붙들어주고 있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내가 만난 기사 중 가장 빛나는 기사지.]

가능성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라는 이의 손 위에서는 용이 아닌 검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검이 울고 있었다.

별빛을 담았으나 용이 쥔 검이 울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알고 있었으므로.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2화 6

용을 죽이는 검(Dragon Slayer) (1)

남의 것을 빼앗기는 쉽다.

다른 이의 노력을 비웃는 것은 즐겁다.

누군가의 도전이 산산이 조각날 때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왜냐하면, 너희들의 실패가 곧 나의 완벽함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끄으으······!”

손에 쥔 불길한 조각이 뜨겁게 타올랐다.

거칠게 흐르는 피를 따라 푸르렀던 눈동자는 새파래지고 악물었던 송곳니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본래 너의 모습이라는 듯 그렇게.

“흐아아아!”

이제는 완전히 흡수되어 형태마저 잃어버린 용의 조각.

블라드는 검을 뽑아내며 그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려 애썼다.

“······지랄하고 있네!”

콱!

뒤에서는 용이 울부짖고 밑에서는 새까만 파도가 넘실거리는 절벽 한가운데.

깎아질 듯 위태로운 그곳에서 블라드는 절벽 한가운데 검을 박아넣었다.

위로 향하려는 그 몸짓은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속삭임이 아닌 자신이 했던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웅- 웅웅웅-

그런 블라드를 보며 검이 울고 있었다.

주변의 위협과 내면의 유혹을 짓밟으며 위를 향해 오르려는 자신의 주인을 보면서.

그저 어렸을 뿐인 세계수의 검은 자신이 누군지는 알았으나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몰랐던 존재였다.

그아아아아-!

“나는! 그렇게 살기 싫다고! 이 새끼들아!”

그리고 이제는 알았다.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용들을 향한 블라드의 거친 포효는 미완의 검을 깨웠고, 힘겹게 내뻗는 손짓 하나하나는 완성을 향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내게 맹세한 것처럼 위를 올려다봐라!]

키하노의 외침을 따라 블라드의 심장이 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심장이 아닌 블라드가 그동안 품고 있었던 것에서부터.

“크윽!”

키하노의 외침을 따라 절벽 위를 오르던 블라드는 순간, 흉갑 깊숙한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에 그만 외마디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갑작스레 뜨거워지는 흉갑 근처의 주머니는 노(老)기사들이 건네주었던 동전들을 보관하고 있던 곳이었다.

“······키하노?”

[네 검이 깨어나려나 보다.]

늙은 기사들이 자신들의 명예로 산 녹슨 동전.

비록 잔뜩 녹슨 겉모습은 볼품없었으나 블라드가 몰라봤던 그 안에는 반짝이는 은색의 빛이 깃들어있었다.

늙은 기사들이 블라드에게 건네주려 했던 그 동전의 색깔은 진정한 은빛이었다.

[은색의 기사에 의해서.]

웅웅- 웅웅웅-!

소년이 기사가 되고 싶어 한 것처럼 미완의 검 또한 자신을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블라드가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올바른 방향을 알려준 별빛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 블라드의 가슴에서부터 천천히 옮겨가는 은색의 빛들처럼.

손에 쥔 검이 빛나고 있었다.

태어나기는 별로 태어났으나 주인을 위해 용의 조각을 머금고자 하는 검이.

그 검의 의지를 따라 흘러나온 올바른 진은(眞銀)들이 용의 흉포함에서부터 어린 검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온통 새까매져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인지 모를 그곳에서.

홀로 빛을 발하며 새로이 태어나려는 별이 하나 있었다.

스스로가 원하는 그 별의 이름은 바로 용을 죽이는 검(Dragon Slayer)이었다.

※※※※

“······저놈 왜 저래?”

먼바다에 서서 두 괴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바르보사는 갑작스레 움직임이 굳어진 레비아탄을 보며 의아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크라켄의 공격이 있긴 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기고 있던 놈이 왜 도망가?”

용이란 본래 가장 완벽에 가까운 존재.

그렇기에 물러섬이 없어야 할 녀석이었지만 지금의 레비아탄은 서둘러 빠져나가기라도 하겠다는 듯 섬을 두르고 있던 미끈한 몸뚱이를 풀어내고 있었다.

“절벽 한 번······. 겁나게 높네!”

그리고 당황한 눈빛의 레비아탄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로 렘노스 섬의 절벽 위.

저 밑에서부터 기어이 절벽을 기어 올라오고만 블라드가 있는 곳이었다.

“자식. 가까이서 보니까 더 못생겼네.”

감히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레비아탄이 바로 앞에 있었으나 땀을 닦아내는 블라드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가장 거대한 용과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

마주한 둘의 몸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 났으나 용들의 세계에서만큼은 가장 완벽한 조각을 쥔 블라드가 전혀 밀릴 이유가 없었다.

“조금 모자란가?”

두근-!

자신이 서 있는 절벽과 레비아탄과의 거리를 가늠해보던 블라드.

뛰어야 할 거리가 너무 멀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들고 있던 검에서부터 불길한 붉은 색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용의 조각을 머금고 있던 용살검이 블라드에게 보내주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아니, 안 모자라네.”

검을 따라 흐르는 흉포함을 더해 좀 더 완벽한 육체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고양감을 느끼며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가장 거대한 용을 노려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닿겠어.”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같았으나 속해 있는 세계가 달라졌다.

어느새 한눈에 들어올 듯 가까워져 버린 레비아탄을 보며 블라드는 검을 치켜들었다.

“······후우.”

블라드는 키하노가 알려준 일격필살의 묘리에 따라 몸을 잔뜩 웅크렸다.

마치 쏘아져 나가려는 화살과도 같은 모습으로.

소드마스터에게서 시작된 이 검술은 단 한 번의 일격을 중시하는 검투사의 검술에서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갑니다.”

[그래.]

용의 육체 위에서 펼쳐지는 소드마스터의 검술.

자신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키하노 또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흐읍!”

발을 굴렀던 땅이 움푹 패이자, 방금까지만 해도 그곳에 있던 블라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희미하게 남아있는 황금빛의 잔상과 뒤늦게 휘몰아치는 작은 바람뿐.

그아아아아아-!

절벽 위에서 시작된 황금빛이 어느새 내질러 대는 레비아탄의 포효를 뛰어넘어 그 몸체에 다다르고 있었다.

절벽 밑의 파도도, 바로 앞에 있는 괴수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몸짓이었다.

까드드득-!

“치잇!”

검을 박아넣은 레비아탄의 몸체에서부터 뼈를 가르는듯한 섬찟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정작 블라드는 곤란하다는 듯한 잇소리를 내고 말았다.

스스로가 행했음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속도가 목표한 위치를 뛰어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그러나 꽂힌 것은 자그마한 검이었을지라도 와닿은 것은 존재에 대한 위협 그 자체였다.

구오오오오-!

용살검에 대한 가능성을 파악한 레비아탄은 블라드를 떨쳐내기 위해 커다란 비명과 함께 온몸을 크게 휘둘러대었다.

“젠장!”

웬만한 산봉우리보다 거대한 그 몸짓에 허물어진 렘노스 섬이 위태로이 흔들려 대었다.

그 몸짓에 저 멀리 있는 함선들조차도 제 몸을 못 가눌 정도의 커다란 파도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

레비아탄의 돌발 행동에 크라켄 또한 놀라고 있었지만 오래된 정령은 자신의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크라켄은 다시금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레비아탄을 온몸으로 휘감기 시작했다.

더는 바다에 들어갈 수 없도록, 블라드에게 그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도록.

거대하다 못해 웅장하기까지 한 뱀과 오징어가 서로를 꽉 잡아챈 그 모습에 인간도 드워프들도 그만 할 말을 잃고는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보인다.”

마치 두 개의 밧줄이 엉켜 팽팽하게 당겨진 것만 같은 상황.

딛고 있는 레비아탄의 몸체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낀 블라드는 이미 바다에 들어가고 만 머리가 아닌 섬을 둘러싼 거대한 몸뚱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세워진 용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오귀스트가 알려준 최적의 길이 그려져 있었으니까.

꾸드득-!

꽂아 넣었던 검을 뽑아낸 블라드는 왼쪽 눈을 감고는 스스로의 세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좀 더 깊은 곳을 향해 그리고 좀 더 넓은 면(面)을 모으기 위해서.

그렇게 자신과 맞닿아 있는 세계들을 모아 다시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오오오······.”

무너져 가는 섬 위에서 눈물짓고 있던 루흐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모든 것이 무너져 가는 폐허 위에서 새로이 솟아오르는 거대한 나무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후우.”

나를 받쳐주는 세계는 키하노의 세계.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명예로운 기사.

지금 들고 있는 것은 용을 죽이는 검.

그리고 나의 뒤를 받쳐주는 세계는 바다를 지키던 정령의 세계.

“이걸로 끝내자.”

푸욱-!

기사이며 용살자, 그리고 정령들의 구원자. 블라드 아우레오.

그가 불러낸 세계가 가장 거대한 용의 몸체에 꽂혔다.

마치 산과 같은 모습으로.

그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

레비아탄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블라드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거대한 용의 몸체를 가르면서.

자그마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레비아탄의 상처가 블라드의 전진에 점점 선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세상에.”

천천히 레비아탄의 몸체를 가르는 황금빛 선.

그 경이로운 빛을 보며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아아아아-!

용으로 태어났으나 별을 꿈꾸던 소년.

별로 태어났으나 용의 조각을 품은 검.

그 둘이 만들어내는 빛이 렘노스 섬을 휘감은 레비아탄의 몸체를 따라 어느새 커다란 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웅웅- 웅웅웅-

“음?”

모래만이 가득한 황량한 사막.

모든 것이 조용한 그곳에서 온통 색을 잃어버린 남자가 울고 있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나 보구나.”

손위에서 떨고 있는 은색의 기사.

방금 용의 피륙을 갈랐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침묵하고 있던 검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무언가에 반응하듯 덜덜 떠는 중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아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대답한 프라우센은 조용히 검을 휘둘러 묻어있던 핏물을 떨쳐내었다.

이제는 한 줌의 영광도 없이 그저 의무만이 남아버린 기사.

그런 그의 앞에는 가장 단단한 용이라 불렸던 데스웜이 반으로 갈라진 채 건조한 사막을 온통 제 피로 적시는 중이었다.

두근, 두근······.

데스웜의 온기가 식어갈 때마다 조금씩 멈춰가는 프라우센의 심장.

가만히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 본 프라우센은 점점 작아지는 그 소리를 느끼며 눈을 감아보았다.

“······드디어 멈췄군.”

내 것이 아닌 다른 존재의 심장.

온통 말라버린 육체를 뛰게 해주는 녀석이었으나 정작 그 울림을 느끼던 프라우센의 얼굴에는 희미한 불쾌감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 녀석 정도면 네가 말한 소재로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예전에도 한 번 해본 적이 있었지요. 비록 어린 녀석이긴 했지만.”

“그럼 마무리해라.”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여인을 뒤로한 프라우센은 조용히 데스웜의 사체에서 떠나갔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생각이신지요?”

들려오는 라마슈트의 물음에 프라우센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 서쪽을 바라보던 그는 곧 몸을 돌려 반대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중앙으로.”

제국의 중앙.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곳이며 지금은 가장 오래된 용이 있는 곳.

프라우센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눈으로 자신이 세운 도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웅- 웅웅······.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의 손에서 점점 검명이 잦아들고 있었다.

용의 피가 아니면 더는 뛰지 않는 주인의 심장처럼.

사막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프라우센의 눈동자는 어느새 죽은 자의 것이 되어 조금씩 침잠하고 있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3화 7

용을 죽이는 검(Dragon Slayer) (2)

레비아탄에게 긋고 있는 황금색 선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바다도, 하늘도 모두가 새까맣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그 선은 멀리서 봤을 때는 마치 떠오르는 해를 머금은 수평선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이야. 난 놈은 난 놈이구만. 핏줄이 어딜 가지 않네.”

용을 죽이는 용.

황금공 바르보사는 레비아탄의 몸체를 가르며 달려나가는 블라드를 보고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아아아아-!

그어가는 선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짙어져만 가는 레비아탄의 울부짖음.

바르보사는 마치 전설 속 한 장면을 재현하는 듯한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자그맣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선장님.”

“······.”

“선장님?”

길었던 울부짖음이 끝나고 이제 여명이 터오는 바다.

바르보사의 부관은 점점 잔잔해지는 바다를 보며 뒤늦게 자신의 선장을 찾기 시작했다.

43척 대 7척의 싸움으로 시작된 드워프들과의 전투는 어느새 용과 크라켄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돼버렸고 그 상황마저도 지금은 자신들에게 불리해지는 시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끼익- 끼이익-

“왜?”

그러나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에게 박수를 보내던 바르보사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어느새 난간 구석으로 가 혼자서 조용히 구명용 보트를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뭐 하십니까?”

멍하니 묻는 부관의 물음에 바르보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자네. 이 세상에서 황금보다 비싼 게 뭔지 알아?”

“네?”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며 구명용 보트를 내린 바르보사는 재빨리 난간 위에 올라서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바로 목숨이야. 목숨. 나중에 살아남게 된다면 또 보자고.”

풍덩!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바다로 뛰어내리고만 바르보사.

눈 앞에 펼쳐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잠시 놀란 부관이었지만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가장 거대한 용은 무너지고 이제는 크라켄만이 서 있는 바다 위.

그곳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던 거대한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점점 불길해지는 공기에 바르보사의 선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올려다본 하늘에는 어느새 거대한 촉수 하나가 높게 드리워지고 있었으니까.

“저거, 저거······.”

“설마 아니지?”

그러나 아니라고 믿고 싶은 간절한 염원에도 불길한 느낌은 여지없이 들어맞는 법이었다.

하늘을 향해 기다란 탑처럼 세워져 있던 크라켄의 촉수 하나가 기어이 채찍처럼 휘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도망쳐! 전부 바다로 뛰어들어!”

선원들의 비명에도 전혀 멈춤이 없는 크라켄의 촉수.

거대한 정령의 세계 앞에서 인간들이 가져온 함선들은 그저 나무판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아아아앙-!

“오우······.”

폭죽처럼 솟아오른 물결 위로 온갖 비명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 위로 가벼이 떠 오르고 만 함선들의 잔해를 보며 드워프들은 그 짧은 목들을 움츠리고 말았다.

블라드가 용에게 그어놓은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처참히 무너지고만 렘노스 섬을 뒤로 한 채로.

어느새 용의 피로 붉게 물든 바다에는 바르보사의 황금색 깃발이 힘없이 떠다니는 중이었다.

※※※※

“우엑-.”

피에 물든 새빨간 파도가 치는 바다 위.

삐죽 솟은 암초에 걸터앉은 블라드는 창백한 표정으로 헛구역질을 하는 중이었다.

머리는 빙빙 돌고 손아귀에는 힘이 없는 것이 흡사 예전에 키하노의 힘을 강제로 빌렸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거 문제가 있긴 있네.”

블라드는 입가를 스윽 닦고는 방금까지만 해도 레비아탄을 가르던 검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조각의 힘을 받았을 때는 고양감이 넘쳐 흘렀으나 정작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웅-웅-웅.

처음 쥐었을 때는 푸르렀으나 지금은 은색의 금속으로 감싸져 있는 세계수의 검.

아니, 이제는 용의 조각을 품고 있었으니 용살검(龍殺劍)이라 불러야 할 녀석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시선을 느꼈는지 웅웅거리며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뭐라는 거야.”

그러나 그 웅웅거림은 아직 블라드에게 온전히 닿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와 검은 똑 닮아 있었으나 아직 서로의 세계에 깊숙하게 동화되지는 못했으므로.

아직 서로에게 완벽히 자신을 맡기기 위해서는 조금은 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혹시 지금도 나 보고 있어요?”

[그래.]

“화 난 것 같아 보여요?”

[아니.]

키하노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조심스레 시선을 올려보았다.

올려다본 그곳에는 여전히 블라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눈동자가 있었다.

오래된 바다의 정령. 크라켄.

방금 43척의 배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 존재가 지금 그 큰 눈동자에 오직 블라드만을 담아둔 채 바라보는 중이었다.

“예전에 오징어 몇 마리 잡아먹었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글쎄다.]

크라켄은 용이지만 용이 아닌 젊은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드가 들고 있는 검에는 반가운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안에는 아주 오래전에 마주했던 영광된 기사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너보다는 날 보는 것 같은데.]

그러나 영광된 기사는 아무래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때는 자신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알아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저 반가운 빛에 이끌려 다시금 만난 인연에 크라켄은 만족하기로 했다.

[들어간다.]

“휴우······.”

블라드가 내뱉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크라켄은 다시금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세계수를 대신해야 하는 오래된 바다의 정령은 지금도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화산들의 열기에서 어린 정령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쿠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상처 입은 바다에서부터 거친 핏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뜨겁고도 진득한 그 핏물은 지금도 렘노스 섬 뿐만 아니라 바다 곳곳에 퍼지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블라드 님! 어서 타십시오!”

크라켄이 빠져들어 간 바다.

무너져버린 산꼭대기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용암.

홀로 조용히 바다 위 암초에 앉아 거대하고 강렬한 세계들을 눈에 새기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빠르게 야장님께 들러야 합니다! 섬이 무너지고 있어요!”

“······.”

불카누의 외침을 들은 블라드는 점점 뜨거워지는 바다를 보며 말없이 용살검을 집어넣었다.

계속해서 웅웅거리던 녀석도 지금은 자신이 조용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는지 얌전히 검집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

서쪽의 화산들이 터져 나간 지 일주일이 지났다.

예전 짙은 안개가 가리고 있던 렘노스 섬의 바다는 어느새 화산재들에 의해 꽉 차 있었고 도시 나사우로 피신한 드워프들은 지금도 도시에 마련된 장소에서 지친 몸을 뉘이는 중이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군. 바예지드의 요제프.”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대족장 님.”

올무카르는 요제프가 내어주는 위스키 잔을 들고는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혀끝으로 퍼지는 향은 분명 훌륭했으나 그는 지금 그 향을 느낄만한 여유도 자격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이곳에 빌붙어 있을 수는 없겠지.”

아무리 바예지드가 배려했다고 한들 드워프들이 또다시 고향을 잃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만약 이대로 니다벨리르라는 구심점마저 잃게 된다면 드워프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수인족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로서는 북부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내려놓은 술잔과 함께 기어이 올무카르의 깊은 한숨이 퍼지고 말았다.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 모진 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투쟁해야만 한다.

자신이 선택할 동아줄이 오직 북부 연합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올무카르는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 결정에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뒷짐을 진 채 밖을 내다보던 요제프는 저택을 향해 들어오는 마차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북부에서 익숙히 볼 수 있는 형태의 마차였으나 그 위에 매달려 있는 깃발은 북부의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라브노마가 약속했습니다. 그녀를 도와 가이다르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주시면 도시 토르체아는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겁니다.”

샤를 라브노마가 저택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요제프는 올무카르를 바라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본래는 가이다르의 도시였으나 황금공 바르보사가 빼앗고만 항구 도시 토르체아.

그러나 바르보사는 지금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기에 주인 없는 토르체아는 그 누구의 공습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허울뿐인 라브노마보다는 바예지드를 믿고 싶네.”

올무카르는 창가에 서 있는 요제프를 보며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온통 불길한 검은색으로 가득한 그 편지는 요제프가 처음 렘노스 섬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건네주었던 편지였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우리들이 보관하고 있던 신기(神器)를 내어주겠네. 이것이 부디 동맹의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군.”

“물론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디.”

할 말을 마쳤다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올무카르.

그는 마지막으로 요제프에게 차마 숨길 수 없는 무거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네만 부디 몸조심하시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터전을 잃은 지도자가 보내는 염려.

한참 제 앞길이 바쁜 올무카르조차도 진심 어린 걱정을 보내고 마는 현실에 요제프는 조금은 씁쓸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해야 하니까요."

창가에서 살짝 고개를 돌린 요제프는 책상에 놓인 검은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신을 모독하는 상징이 그려진 그 편지에는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조차도 밝히지 못하는 어둠이 가득했다.

※※※※

깡-! 까앙!

도시 나사우의 항구 어딘가.

평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 후미진 골목이었으나 지금은 온통 사람들이 몰려들어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곳이 있었다.

“지금 누가 내 발 밟았어!”

“줄부터 서라고! 당신 방금까지만 해도 내 뒤 아니었어?”

“그러니까 누가 자리를 뺏기래.”

옥신각신하며 싸워대는 사람들의 앞에는 굴뚝에서 쉴 새 없이 연기를 내뿜는 자그마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무너져 가던 쇠락한 대장간이었으나 지금은 요제프의 지시로 임시로나마 문을 열게 된 곳이었다.

푸우우우-

“늙은이랑 어린 애가 너무 고생하네요.”

블라드는 낡은 고로에서 쉴 새 없이 불을 뿜어대는 어린 도마뱀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뭐라도 돕겠다며 열심히 불을 뿜어대는 그 모습에 아마 가슴이 뭉클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별수 있나. 비빌 곳이 없으니 어린 녀석이라도 땅바닥을 뒹구는 수밖에.”

그러나 정작 그 옆에 있던 루흐타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묵묵히 쇠를 내려치고 있을 뿐이었다.

노예로 부려진 삶 속에서 모질게 살아남은 늙은 드워프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여긴 왜 왔어? 바빠 죽겠는데.”

“떠나려고요.”

무심한 목소리로 떠나겠다고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루흐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로?”

“글쎄요. 뭐 정해진 건 없긴 한데······.”

루흐타의 반문에 블라드는 뒷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해야 할 일은 있었으나 아직 딱히 갈 곳을 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가긴 가야 해요.”

블라드는 키하노의 이름을 찾아주기로 약속한 사람.

그러나 지금 키하노의 이름은 반쪽으로 쪼개져 불길한 어둠과 함께 제국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으니 약속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서는 자신을 프라우센이라 밝힌 남자를 찾아야만 했다.

“······아직 갚지 못한 게 몇 개 있거든요.”

그리고 나를 위해 죽어간 유스티아를 위해서라도.

블라드는 자신을 위해 길을 알려주려 노력했던 작은 카나리아를 영원히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줘 봐.”

“뭘요.”

“네 검 말이다. 이놈아. 검 달라고.”

루흐타는 떠나겠다고 말하는 블라드를 향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못 고친다면서요.”

“그건 그때고.”

자신들을 지켜준 기사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 보은을 해줘야만 했으니까.

루흐타는 자신의 손에 조심스레 얹어지는 용살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다르지.”

이제는 자신이 되고 싶은 형태를 갖춘 검.

주인의 짐을 나눠 들고 싶었던 세계수의 검은 불길한 용의 조각을 받아들여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세계의 경계에 서 있었을 뿐인 어린 검은 이제 블라드를 통해 이 세상으로 온전히 녹아들었으니 루흐타의 망치 또한 충분히 닿을 것이었다.

“이제 검날 정도는 세워줄 수 있을 거다.”

웅-웅웅웅-

울고 있는 검 위로 어린 도마뱀이 내뿜는 불길이 찾아들었다.

달궈지는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용살검은 참아내기로 했다.

나라는 존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금 같은 담금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깨달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봐라. 금방 해줄 테니까.”

깡-! 까앙-!

어린 정령의 숨결을 모아 마지막 남은 드워프들의 장인이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자신들을 지켜준 기사를 위해 지금 내려치는 검이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

블라드는 그 모습을 보며 어째서인지 쇼아라에 있었던 낡은 대장간의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다.

겨울의 끝자락을 달궈주는 대장간의 열기를 느끼며 블라드는 그저 멍하니 앉아 낡은 고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4화 10

어둠 속에 길이 있나니 (1)

이제야 해가 뜨기 시작하려는 이른 아침이었다.

겨울의 끝이었으나 아직은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블라드는 도시 나사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하벤 선장에게는 이득이었던 모양이야.”

옆에서 들려오는 요제프의 목소리에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하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원래 배를 무척 아꼈거든요.”

“그래? 하긴 선장이 배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이긴 했지.”

올라오는 아침 해를 따라 반짝이는 바다.

그 반짝이는 수면을 가르며 커다란 배 한 척이 천천히 나사우의 항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도통 보기 힘들다는 갤리온 급의 함선은 블라드와 선원들이 바르보사의 부하들에게 나포했었던 그때의 함선이었다.

“그나마 깃발이라도 건져서 다행이에요.”

블라드는 홀로 천천히 바다로 나아가는 배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록 본래의 형태는 잃었으나 이름만은 계승할 수 있었던 하벤의 새로운 함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지금 돛대 위 가장 높은 곳에서는 붉은 장미를 새겨놓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침몰해가는 제미나 호에서 블라드가 애써 챙겨나온 유일한 흔적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북부를 향해 떠나가는 새로운 제미나 호를 보며 블라드가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과의 일은 끝났다.

이번 일을 통해 요제프는 본인이 원한 바를 얻었고 블라드는 그동안 못다 했다고 생각했던 계약을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제 요제프와 블라드의 사이에서는 어떠한 의무도 채무도 없는 것이었다.

“중부로 갈 거다. 정확히는 북부 접경지역에 있는 영주들을 만나볼 생각이지.”

“중부요?”

마차의 문을 열어젖힌 요제프는 블라드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북부에서는 더는 나를 지지해주는 세력이 없으니까. 이제는 다른 곳에서 끌어와 봐야지.”

“······그런가요.”

“최종 목적지는 내 외가인 오스카르 백작 가문이다. 그곳에 가면 나한테 무엇이라도 내주시겠지.”

여전히 바예지드의 가주직을 노리겠다고 말하는 요제프였으나 블라드는 그의 말에서 어쩐지 모를 낯선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치열했던 예전의 모습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한 풀 가벼워져 있는 미소.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는 그 미묘한 태도 변화에 블라드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너는 어쩔 생각이냐.”

“저는······.”

요제프의 질문에 블라드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해야 할 일은 확고했으나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용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더군.”

“네?”

“서부에서부터 말이야. 그 사체들이 곳곳에 놓여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요제프는 마치 너의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 흔적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아마 중부를 향해있다지?”

“······.”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마차 안으로 들어간 요제프는 열려있던 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원한다면 가는 길에 네 말이 먹을 여물과 모닥불 정도는 빌려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대신 내 마차는 안돼. 이 녀석은 예전과 비교해서 많이 좁거든.”

이제는 갚아야 할 것이 아닌 서로가 나아갈 방향을 위해서.

블라드는 천천히 움직이는 요제프의 마차를 따라 누아르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제 떠나가는 바다가 기꺼웠는지 초원의 아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잘 따라오는군요.”

“언제나 원하는 것이 명확한 녀석이었으니까.”

요제프는 마주 앉아있던 자야르의 말에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겨울 길.

그러나 조금만 있으면 봄의 기운이 와닿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눈치는 좀 생긴 모양이야.”

그러나 그때까지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요제프는 드워프들이 건네준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젖혔다.

누가 보아도 고풍스러워 보이는 상자 속에 담겨 있던 다기(茶器)들.

그 안에 담겨 있던 찻잔들은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장인이 만든 솜씨가 역력한 물건들이었지만 정작 요제프는 아무런 거리낌 없는 손길로 다기들을 꺼내 차를 우릴 뿐이었다.

“가르친 보람이 있어 다행이군.”

제미나 호도, 블라드도, 요제프도.

이제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자들이 떠나가고 있는 도시 나사우.

그곳 깊은 바다에서 북쪽으로 떠나는 배를 따라 움직이는 은빛의 물결들이 있었다.

감히 인간들이 다가갈 수 없는 깊은 그곳에는 조금 더 차가운 보금자리를 찾아 북쪽으로 향하는 오징어들이 가득했다.

※※※※

화려하게 치장된 홀을 따라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은 금실로 치장되어 있었고 새하얗게 닦여 있는 대리석 벽면에는 온갖 보석과 색색의 꽃들로 치장된 곳이었다.

‘······결국, 받아 가고 마는군.’

화려한 연회장의 모습만큼이나 모여있는 사람들의 면면도 훌륭했다.

고귀한 왕족들, 빛나는 귀족들, 그리고 명예로운 기사들까지.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궁정공 아르망의 얼굴에는 차마 지우기 힘든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제국이 세워진 그 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훌륭히 본인의 의무를 다해 준 용혈공에게 무어라 감사의 인사를 표해야 할까 고민했었습니다.”

온통 고귀하고 빛나는 자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직 젖살도 빠지지 않은 것 같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머리 위에는 그 나이로는 아직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무거운 왕관이 쓰여 있었다.

“그래서 저는 결심했습니다. 제국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웠던 사르누스 공작을 위해 그만한 대가를 주어야겠다고.”

내뱉는 말은 연습이라도 한 듯 유창했으나 정작 목소리는 쉴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 황제는 자신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남자의 분위기에 압도된 모양이었다.

“일어나십시오. 용혈공. 나에게 충성한 당신을 위해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이 상자를 드리겠습니다.”

어리디어린 황제의 지시에 따라 시종들이 기이하게 생긴 함을 들고나오고 있었다.

관처럼 생긴 것도 같은 그 함은 온통 은색의 쇠사슬로 꽁꽁 묶여있는 것이었다.

“······저에게는 너무 과분한 것입니다. 폐하.”

황제에게 무릎 꿇은 채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말하는 사내는 찬란한 금발을 가졌다.

“예전의 과오를 되풀이할까 두렵습니다.”

들어 올린 그의 두 눈은 이곳에 수놓아진 그 어떤 보석들보다도 더 푸르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제국이 저에게 주는 또 다른 의무라 한다면 기꺼이 받들겠나이다.”

그러나 마침내 일어선 그의 존재감만큼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거대한 것이었다.

앞에 서 있는 어린 황제보다도 더욱.

“이, 이제는 이 조각은 당신의 것입니다. 사르누스 공작.”

가장 오래된 용.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건국왕이 쪼갰고 역대 궁정공들이 보관하고 있던 상자를 향해 그가 손을 뻗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궁정공 아르망은 가장 완벽한 조각을 향해 손을 뻗는 가장 오래된 용을 보며 그저 애써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여태까지만 해도 인간의 눈이었으나 어느새 세로로 잔뜩 좁혀진 눈을 통해서.

아주 오랫동안 바라왔던 것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었다.

※※※※

“······공작가 답지 않은 음험한 지하실이로군.”

주위에 머무는 습기가 진하다.

나선형의 돌계단은 미끄러워 한 발자국 내딛기가 어렵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서늘해지는 공기는 지금도 목 주변을 쭈뼛 서게 했다.

“이렇게나 깊게 만들 필요가 있었나?”

수도 브리간테스에는 흐른 세월만큼이나 짙은 그림자를 간직한 저택이 있었다.

곳곳에 새겨진 조각은 화려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곳이었고, 세워진 방향 때문인지 평소에도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런 저택이었다.

용혈공 드라굴리아의 저택.

주인 없던 저택을 몰래 누비던 주교 피에르는 들고 있던 횃불로 계단 아래쪽을 비춰보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군.”

그러자 보이는 것은 의지하던 빛으로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어 보일 정도의 짙은 어둠뿐.

횃불이 비춘 계단 밑에는 신실한 신의 종조차도 감히 가늠하기 힘든 어둠만이 머물고 있었다.

으드득-

끝날 것 같지 않은 계단을 내려와 드디어 바닥에 닿은 피에르는 발끝에 차이는 둔탁한 소리에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꺼림칙한 기분에 서둘러 횃불을 휘둘러 본 피에르는 지금 자신이 거대한 원형의 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택 아래에 또 다른 저택이 있는 것만 같군.’

평범한 저택이었다면 이렇게까지나 지하를 깊게 파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저히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드라굴리아의 비밀스러운 지하실을 보며 피에르는 이단심문관으로서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살, 살려······.”

“······!”

순간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

마치 곧 꺼질 등불처럼 희미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피에르는 서둘러 어둠을 향해 횃불을 들이밀었다.

“누구요?”

빛이 닿은 원형의 홀 주변에는 기이하게 세워진 창살들이 가득했다.

마치 감옥 같아 보이는 그곳들을 보며 주교 피에르는 조용히 가슴 위로 성호를 그어내고는 목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횃불을 들이대었다.

“흐으······.”

그렇게 비춰본 어둠 한가운데는 노인이 있었다.

마치 가을의 낙엽처럼 바싹 말라버린 노인이.

“나 좀, 나 좀 여기서······.”

비치는 빛을 따라 손을 휘적거리던 노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회백색 눈동자를 알아보고는 기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피에르 주교?”

처음 닿은 장소, 처음 보는 노인.

그러나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익숙한 나의 이름을 들은 주교 피에르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애써 노력했다.

“나를 아시오?”

“저, 접니다. 피에르 주교.”

구마사제가 비치는 영롱한 횃불을 보며 희뿌옇던 노인의 눈동자에 이제야 제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저 라두입니다. 라두 드라굴리아.”

“······뭐?”

돌아온 그 빛의 색깔은 푸른색이었다.

온통 구겨진 주름들로 인해 엉망인 얼굴이었으나 돌아온 눈동자의 색깔만큼은 분명 낯익은 것이었다.

“제. 제발 저 좀 꺼내주십시오. 주교님.”

“······라두? 라두 드라굴리아?”

“네네. 그렇습니다. 제발, 제발 주교님!”

주교 피에르는 서럽게 흐느끼는 노인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속 안에서 치밀어오르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더는 다가가지 말라며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부디 저를 굽어살피시고 대답해주소서.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이 눈에 빛을 주소서.”

구마사제가 읊조리는 구절을 따라 들고 있던 횃불이 찬란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둠만이 가득한 드라굴리아의 깊은 곳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러나 신성한 빛이 비춰낸 이곳은 끔찍한 지옥이었다

오직 용들만을 위한 지옥과도 같은 감옥.

왜 이제야 느꼈을까 싶을 정도로 창살 안에서는 온통 끈적한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부디 이 흡혈귀들의 소굴에서 제발 저를 좀 꺼내주십시오······.”

숨겨져 있던 드라굴리아의 깊은 지하에는 용들이 내지르는 억눌린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가장 오래된 가능성을 위해 자신들의 피를 바쳐야만 하는 가련한 제물들이 내는 비명이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5화 11

어둠 속에 길이 있나니 (2)

가야 할 때가 되었으나 아무래도 겨울은 여전히 물러감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창문을 붙들고 늘어지는 모양새가 꼭 그러해 보였으니까.

요제프는 창문을 흔들어대는 겨울의 바람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래. 바예지드의 요제프. 꽤 먼 곳에서부터 나를 찾아와주었구만 그래.”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요제프는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를 등 뒤에 둔 채 웃고 있는 노년의 남자.

꽤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이곳 도시 키시뇨르의 영주인 몰다비르 남작이었다.

“이렇게 직접 뵐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작님.”

“올해의 겨울은 길었고 그만큼 오는 손님은 적었지. 그동안 찾아와주는 사람이 적어 오히려 적적하던 참이었네.”

들려오는 말만으로는 분명 정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남작의 눈을 유심히 보고 있던 요제프는 그가 딱히 자신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만에 온 손님이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딱히 도와줄 수는 없을 것 같군.”

과연 요제프의 생각대로 찻잔을 내려놓은 몰다비르 남작은 어깨를 으쓱이며 거절의 말을 이어갔다.

“아무런 명분 없이 남의 가문 일에 끼어들기가 참 곤혹스럽네. 게다가 자네는 이미 가주 경쟁에서 탈락한 몸이기도 하니.”

남작은 딱히 악의를 가지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날카롭게 다가오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마땅한 자격이 없는 요제프의 제안은 그저 공허한 외침이나 다름없다며 돌려 말하는 중이었으니까.

남작의 말을 알아들은 요제프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비록 내가 큰 힘을 실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부디 이곳에 있는 동안이나마 편하게 쉬다 가시게.”

마주하기에는 껄끄럽고 막상 본다고 해도 딱히 얻어낼 것이 없는 요제프였으나 그럼에도 몰다비르 남작은 그를 모질게 내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형태로든 지금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예지드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내어준 이 차가 꽤 괜찮군.”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이군요.”

“뭐. 찻잎의 생김새는 시꺼먼 것이 영 그렇긴 했지만 말일세.”

방금의 거절 때문인지 방 안의 공기가 조금은 차가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요제프는 딱히 실망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애써 실망감을 감추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가지고 온 다기들도 그렇고, 내어준 차도 그렇고. 젊은 나이치고는 꽤 취향이 고상하군.”

“어머니께서 내어주신 찻잔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언제나 몸을 망치는 술 대신 따뜻한 차를 마시기를 원하셨었죠.”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꺼내놓은 다기들을 정리하던 요제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를 마시는 남작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평범한 녹차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검은색이 깃들어 있던 요제프의 차.

천천히 찻물을 꿀꺽거리는 남작의 울대를 보며 요제프의 눈빛이 점점 깊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

요제프가 몰다비르 남작을 만나는 동안 블라드와 니벨룬은 키시뇨르 곳곳을 뒤지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사라진 프라우센과 검은 여인이 남겼을 소문들을 찾아보는 중이었다.

“하아······. 다시 북부로 돌아가 봐야 하려나.”

그러나 열심히 돌아다닌 것과는 다르게 성과는 영 없던 모양이었다.

근사하게 차려입은 기사가 짜증이 난다는 듯 뒷머리를 헝클어뜨려 대자 근처에 있던 손님들이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뭐 제대로 아는 게 없네.”

천천히 빠져나가는 손님들을 보며 술집 주인이 울상을 지어대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본인의 고민에 빠져들 뿐이었다.

“교회에라도 한 번 가 보시죠. 그쪽이라면 소식을 잘 알 것 같은데.”

“······여기 교회는 교황청 소속이거든.”

블라드는 여기 좀 보라는 듯 왼쪽 흉갑을 툭툭 건드려대었다.

손가락이 두들기는 그곳에는 북부정교회의 교황이 직접 새겨준 글귀가 확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 사람들은 아마 수인족인 너보다도 나를 더 싫어할걸?”

“오. 그러면 안 되죠.”

북부에서는 명예로운 글귀였겠으나 교황청의 세력이 강한 이곳 중부에서는 그저 이단의 증거였을 뿐.

마땅히 도움 청할 곳이 없기에 직접 뛰어본 블라드였으나 들어온 성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먹는 모습이 되게 자연스럽네?”

멋대로 앞에 있던 꼬치를 베어 무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의 표정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조차도 움찔할만한 표정이었으나 정작 니벨룬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블라드의 입가에 다른 꼬치를 물려줄 뿐이었다.

“어쨌거나 빨리 찾아야 할 텐데요. 서부에서 용들이 계속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심상치 않은 징조이기는 합니다.”

“맞아.”

니벨룬의 말을 듣던 블라드는 용에 대해 기이한 집착을 보이던 프라우센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도시 모시암에서 삿된 안개를 뿌리던 검은 여인도.

“또 무슨 일을 벌이기 전에 미리 막았으면 좋겠는데.”

사특한 존재들을 베어내는 것은 기사들이 가져야 할 당연한 의무이기도 했으나 블라드에게만은 조금 더 특별한 동기가 부여되어 있었다.

키하노와 연결되어 있는 프라우센.

그리고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부터 진작에 악연으로 얽혀있던 검은 여인까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되는 그들을 보며 차마 떨쳐내기 힘든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로군. 블라드.”

“······!”

고민에 빠져 있던 탓일까.

블라드는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으나 지금 블라드의 옆자리에는 어느새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 님?”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군.”

얼굴 곳곳에 흉터가 가득한 남자.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이름을 말해주었던 마커스가 앞에 있는 꼬치 하나를 집어 들고는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볼 일이 좀 있어서.”

분명 안면이 있고 반가운 사람이기도 했으나 정작 그를 마주하는 블라드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바예지드의 숨겨진 칼날인 마커스가 아무런 의도 없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임무에 대해서는 말해 줄 수 없다.”

“혹시 요제프 님 때문에 온 겁니까?”

“······.”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하지 않는 마커스는 그저 블라드가 물끄러미 들고 있던 꼬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련님은 건강하신가?”

“요제프 님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은데요.”

계승권은 있지만, 가주 경쟁에서는 탈락하고 만 요제프.

그런 그가 멋대로 중부를 나다니며 다른 영주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은 바예지드에게 영 기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혹시 그런 이유인가 싶어 마커스를 경계하던 블라드였지만 정작 들려오는 대답은 두루뭉술할 뿐이었다.

“모른다. 그저 겉으로만 봐서는.”

“······?”

“그나저나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마커스의 대답에 블라드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화의 주도권은 아직 흉터 가득한 사내에게 있었다.

“예전에 혼자 동쪽으로 여행한 적이 있었지? 엘프들과 만났을 때 말이다.”

“······그건 갑자기 왜.”

“혹시 그때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나?”

이번에 마커스가 나타난 이유는 아무래도 요제프가 아닌 자신인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예전의 일을 물어보는 마커스를 보며 블라드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예를 들어서 누군가의 물건을 빼앗았다거나.”

마커스는 천천히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주위에 퍼지는 존재감은 희미했으나 정작 마주 본 상대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를 보며 블라드는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혹은 아예 죽여버렸다거나.”

“······.”

이해하기 힘든 마커스의 질문에 블라드는 무어라 대답할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블라드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던 마커스는 이내 알겠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역시 아니었군. 부디 오해를 잘 풀길 바란다.”

“네?”

짤랑-

블라드의 물음에도 마커스는 아무 말 없이 동전들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갈 뿐이었다.

다만 그가 내려놓고 간 동전은 자신이 먹은 값뿐만 아니라 블라드와 니벨룬이 먹은 값까지도 치르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중부는 네가 활동하기 좋은 지역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빨리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고 충고해 주고 싶군.”

“······.”

“다음에 보자.”

블라드는 충고와 함께 떠나가는 마커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인파에 섞였다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느새 사라져버린 그를 보며 블라드는 복잡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해가 떨어지고 이제는 성문을 닫아야 할 시간.

히이이잉-!

이제는 행상인들도 딱히 찾지 않을 그 시간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도시로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건장해 보이는 말과 함께 반짝이는 갑옷을 입고 오는 그들을 보며 키시뇨르의 문지기들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정지! 신분을 밝히시오!”

정해진 의무에 따라 사내들을 막은 경비대장이었으나 말 뒤에 달려있는 깃발을 알아보고는 그만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검은색 바탕의 깃발 위로 내려치고 있는 하얀색 번개의 문양.

단출하지만 강렬히 다가오는 깃발의 문양에 경비대장뿐만 아니라 주위의 경비병들까지 서둘러 손을 들어 경례하기 시작했다.

“저희 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북부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가 이 도시에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 말이 사실인가?”

그러나 정작 깍듯한 경례를 받는 사내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차가운 질문을 건넬 뿐이었다.

그러나 그 차가움 속에 차마 숨기기 힘든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경비대장은 재빨리 머릿속에서 블라드라는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블라드······. 블라드 아우레오 경이라면 분명 어제 저희 도시에 방문했었습니다!”

어째서 찾는지는 모르겠으나 블라드가 가지고 있던 화려한 금발은 여전히 경비대장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짙은 눈그늘의 귀족과 함께 찾아온 기사는 차마 세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문양들을 들고 왔던 사람이었다.

“그래?”

깃발 속에 명예를 가득 담고 찾아온 북부의 기사.

그러나 정작 그 대답을 들은 사내들의 표정은 그저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었다.

“황실을 수호하는 궁정공 아르망 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금부터 키시뇨르에 있는 모든 성문을 봉쇄해라.”

“······하, 하지만.”

“반문하지 말고 그렇게 해라.”

사납게 번뜩이는 기사들의 눈빛에 경비대장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궁정공 아르망의 이름도 이름이었지만 마치 철천지원수를 앞에 둔 것만 같은 그의 서늘한 눈빛이 더욱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찾았군.”

주인의 허락이 없었음에도 키시뇨르의 성문으로 낯선 깃발을 든 기사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말을 타고 있는 그들 모두가 허투루 볼 수 없을 정도로 빈틈없는 기운을 지닌 자들이었다.

“드디어 오귀스트 님의 복수를 할 수 있겠어.”

검은색 바탕의 깃발 위로 새겨진 새하얀 번개의 모습.

소드마스터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고 전해지는 그 영광된 깃발을 들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수도 브리간테스의 치안을 책임지는 제국헌병대뿐이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6화 4

어둠 속에 길이 있나니 (3)

겨울의 추위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방 안.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밟고 있는 카펫은 푹신했고 입고 있는 옷은 두툼했으나 그럼에도 노인은 한기가 돈다는 듯 타오르는 벽난로를 향해 연신 등을 숙여대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궁정공(宮廷公) 아르망.

이름 앞에 있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뒤에 있어야 할 성을 버린 남자.

잔뜩 늙어버린 그의 입에서부터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갈라져 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어서도 자네를 볼 면목이 없겠어.”

아르망의 시선은 타오르는 장작을 향해 있었으나 말라버린 그의 손만큼은 닳아버린 쪽지를 붙들고 있었다.

여태껏 소중히 보관해 왔던 그 쪽지는 전 제국헌병대장인 오귀스트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냈었던 전보였다.

“······.”

수없이 펴봤음에도 여전히 아쉬운 쪽지를 내려다보며 궁정공 아르망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검이자 황실의 검. 그리고 자랑스러운 제국 헌병대의 대장이었던 기사 오귀스트.

궁정공 아르망은 이제는 볼 수 없을 그를 떠올리며 들고 있던 쪽지를 꼭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비록 자네가 없다 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하겠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슬픈 노인.

점점 시들어가는 장작의 열기처럼 아르망의 시간 또한 줄어들어 가고 있었지만 늙은 공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가 보낸 마지막 전보에는 아직 불타오를만한 희망이 담겨 있었으니까.

핏줄은 잇지 못했어도 의지는 한 번 이어보리라.

오귀스트가 엘프들의 숲에서 보냈다던 그 쪽지를 쥐어든 아르망의 눈빛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

“과연 듣던 대로 짙은 금발에 푸른 눈이로군.”

“······.”

블라드는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을 보며 들고 있던 술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들이 시답지 않은 시정잡배들이 아닌 만만치 않은 검사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누구신데 이렇게들 붙어 다니실까.”

“나는 제국헌병대의 선임 기사 로드리고다.”

사내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어둠을 꿰뚫는 것만 같은 한 줄기 하얀 번개가 그려져 있었다.

황실 호위대와 쌍벽을 이룬다던 황도 브리간테스의 자랑, 제국 헌병대를 뜻하는 깃발이었다.

“······헌병대면 황도에 있어야 하실 분들 아닙니까?”

“죄인을 체포하러 왔다.”

탕-!

빈틈없이 둘러쌌음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블라드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내는 요란한 소리와 한 장의 종이를 내려놓았다.

여기 좀 보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 종이는 궁정공 아르망의 이름으로 블라드를 체포한다는 명령서였다.

“전 제국헌병대장이신 오귀스트 경을 살해한 죄로 너를 체포하겠다. 블라드.”

“뭐?”

짙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

용의 핏줄을 이은 것이 확실한 북부의 기사를 향해 제국 헌병대가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왜냐하면, 처참히 죽어버린 그들의 대장이 마지막으로 함께 한 이가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 용이라는 것을 알아낸 참이었으니까.

“······"

낯선 사내에게서 들리는 낯익은 이름을 떠올린 블라드는 조금은 떨리는 손길로 내려놓은 체포명령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짧고도 단호한 필체로 적혀 내려간 그 명령서에는 과연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오귀스트라는 이름도 함께 적혀져 있었다.

"돌아가셨습니까. 오귀스트 님이?”

“발뺌하지 마라. 용의 핏줄아.”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오귀스트의 생사를 물어보는 블라드였으나 헌병 대원들은 그저 검을 뽑아낼 뿐이었다.

이 또한 범인들이 보이는 허튼수작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검에는 차마 숨기지 않은 분노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너의 죄는 이미 타고난 금발과 푸른 눈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

어찌할 수 없는 날카로운 오해 속에서 블라드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황도에 오면 한번 찾아오라고 말했었던 늙은 기사.

그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실의 검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대어도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언제? 누구한테?”

“······네 이놈.”

블라드의 이름 안에는 수많은 면면이 내재되어 있다.

키하노가 보았을 때는 하늘을 바라보는 별이며 오귀스트가 보았을 때는 어린 세계수를 지켰던 기사.

“과연 용의 핏줄답게 비겁한 변모만 보이는구나!”

그러나 로드리고가 바라보았을 때는 자신들의 대장을 죽인 한 마리의 용일 뿐.

의뭉을 떨어대는 용의 핏줄을 향해 기사들의 왼쪽 눈에 감춰진 세계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블라드 드라굴리아! 너를 체포하겠다!”

내가 얻어낸 이름이 아닌 그저 태어난 이름으로 부르는 자들.

자신을 기사가 아닌 용으로 보는 사내들을 향해 블라드는 그만 입술을 짓이기고 말았다.

“······나는 아니야.”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오해는 이미 엉킨 실타래처럼 얽혀버렸고 나는 함정처럼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오귀스트 경을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여기 있는 기사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내가 용이 아니며 그들의 대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검을 뽑아내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는 블라드의 세계는 당당히 빛나는 황금빛이었다.

※※※※

콰아아아앙-!

도시 한 가운데서 퍼지는 요란한 소리에 몰다비르 남작과 요제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들고 있던 찻잔이 떨릴 만큼 강렬한 소음이었다.

“뭐지! 무슨 일이냐!”

갑작스레 들린 소음에 몰다비르 남작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뛰쳐나갔다.

요즘 따라 급변하는 중부의 정세 탓에 혹시 영지전이라도 발발한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그러나 눈여겨보던 성벽은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그저 저 멀리 보이는 시장 한복판에서 자욱이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이 있었을 뿐.

그 희뿌연 먼지 속에서 낯익은 황금색의 섬광을 알아본 요제프는 조용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

“이런 젠장!”

“쥐새끼 같은 놈! 이미 알고 있었군!”

요란히 터져나가는 벽면 사이로 기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건물 밖에서 퇴로를 틀어막고 있던 또 다른 헌병 대원들이었다.

‘총 6명!’

술집 안에서 블라드를 둘러쌌던 기사는 4명이었으나 사실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까지 합하면 전부 6명이었다.

예민한 청각을 통해 숨죽이고 있던 그들의 위치까지 파악해낸 블라드는 일부러 로드리고를 몰아붙이고는 그들이 서 있던 벽면을 부수며 혼란을 유도해냈다.

“블라드 님!”

“너는 가만히 있어!”

니벨룬이 다급한 몸짓으로 배낭을 주섬거리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비록 난잡한 시장 바닥일 뿐이었지만 지금 블라드가 서 있는 이곳은 하나의 재판장이나 다름없었다.

저기 앞에 있는 기사들을 통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장.

온전한 결백을 위해서는 오직 나만의 검으로 저들을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

까앙-!

“고작 이런 패악질 따위로 너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겠나? 블라드 드라굴리아.”

“······.”

그러나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과정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로드리고의 왼쪽 눈에서부터 아까 보았던 분노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나 적어도 그가 지닌 분노만큼은 타당할 것이다.

“아까 오귀스트 님이 어떻게 죽었냐 물었었나?”

로드리고의 세계는 단단히 얽힌 쇠사슬의 세계.

차가운 철의 색깔을 담은 로드리고의 세계를 따라 그의 검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

더는 간격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그의 검은 마치 죄인을 감을 밧줄이라도 된다는 양 블라드를 향해 휘어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콰앙-!

보이는 모습은 낭창했으나 닿았을 때는 바닥이 터져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처참히 터져나가는 시장 바닥에 주위에 있던 상인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옭아매!”

마치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온 로드리고의 공격에 놀란 블라드였으나 곧이어 달려드는 다른 기사들의 공격에 숨을 내뱉을 여유조차 없었다.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드라굴리아의 사생아야!”

평생을 믿고 따랐던 대장의 처참한 죽음.

그렇게 물러나서도 죽어서도 안 되었던 고귀한 기사는 결국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고 자신들의 대장을 잃은 기사들은 갈 곳 없는 분노를 블라드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라! 저들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

“칫!”

곧게 뻗어내는 검날보다 기사들이 밟고 들어오는 방향이 더 날카로웠다.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점하며 들어오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앉는 쇠그물같이 블라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까앙! 깡!

‘더 이상 몰리면 안 되는데!’

의도는 알았으나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하나의 검을 막으면 또 하나의 검이 들어오고 그것을 밀쳐낼 빈틈이 보였다 싶으며 어느새 비어 있는 틈 사이로 또 다른 기사가 들어와 있었다.

‘뭔 놈의!’

그 와중에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로드리고의 검까지.

어떻게든 살려서 체포하겠다는 헌병 대원들의 질척이는 악의가 블라드의 발끝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 수를 예측해라! 그래야만 빠져나갈 수 있어!]

“······!”

보이는 틈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들어질 틈을 예측해 빠져나갈 수밖에.

키하노의 조언을 이해한 블라드는 서둘러 발을 굴러 뒤로 빠져나갔다.

콰아앙-!

로드리고의 검날에 또다시 터져나가는 어딘가의 건물.

무너지는 건물이 만드는 자욱한 먼지에 블라드는 숨을 내쉬기조차 힘들었으나 그저 차분한 모습으로 검을 치켜들려 노력했다.

“······저건.”

지친 듯 격하게 어깨를 들썩여대고 있었으나 노려보는 눈빛만은 매섭다.

로드리고는 저 앞에서 검을 치켜든 채 자신들을 노려보는 블라드의 모습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마치 쏘아져 나가는 화살처럼 어깨 위로 검을 치켜든 모습.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숨을 가다듬는 블라드의 자세는 제국 헌병대의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자세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보이나.]

“네.”

놀라고 말았는지 잠시 흐트러진 기사들 사이로 보이는 틈이 있었다.

아직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나 검이 닿을 순간에 비게 될 그 틈을 오귀스트의 눈이 간파하고 있었다.

“보여요.”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들린다.

내뿜어지려는 입김의 잔재가 보인다.

그리하여 앞으로 만들어질 저들의 틈까지도.

[그럼 가라!]

황실의 검 위에 얹힌 전 제국헌병대장의 기술.

아주 잠시였지만 마치 자신들의 대장이 앞에 있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 헌병대의 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흐으으으아!”

오귀스트의 길이 보여주는 약점들을 따라 블라드의 검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점에서 선으로, 마치 붓처럼 이어지는 유려한 일검.

제국헌병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은빛의 검을 보며 가슴 안에서부터 울리는 기묘한 울림을 느끼고 말았다.

웅-웅웅-웅-

블라드가 들고 있는 은빛의 검이 울고 있었다.

기사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진은(眞銀)의 동전들과 함께.

오직 명예로만 살 수 있는 그 동전은 자신을 내려놓은 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금속이었으며 또한 하나의 검에서 비롯된 것들이기도 했다.

“설마!”

로드리고는 기사들을 지나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검을 보며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스스로 울어대는 은빛의 검을 보며 오귀스트가 마지막으로 전한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린. 소드마스터의 검.

뽑히다.

“이 검으로 나의 결백을 증명하겠다!”

오해가 만들어 낸 어둠을 소드마스터의 검술이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검과 함께 천천히 가슴에서 울리는 동전의 울림을 느끼며 로드리고는 깨달을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대장과 있던 드라굴리아의 어린 용은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다른 면에서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은 용이 아닌 누군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기사의 모습이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7화 5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1)

오래된 전승에 따르면 그 검은 찬란한 은색을 띠고 있다고 했다.

의지가 있어 주인을 가리며, 울림을 통해 자기 뜻을 내보일 줄 안다고 했다.

웅-웅웅웅-

마치 지금 나에게 다가오는 저 검과 같이.

까아앙-!

검과 검이 만들어내는 압력을 버텨내지 못한 겨울의 흙바닥이 거친 먼지 폭풍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그 희뿌연 시야 속에서도 맞닿은 은색의 검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건 설마!’

검이 울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 품어놓았던 진은의 동전과 함께.

로드리고는 흉갑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동전의 울림을 느끼며 당황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블라드 드라굴리아! 황실의 검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왔나!”

“······.”

블라드의 근원을 물어보는 로드리고의 물음은 우렁찼으나 정작 질문을 받은 당사자는 다시금 희뿌연 먼지 속으로 자신의 몸을 숨겼을 뿐이었다.

자욱해진 먼지가 블라드의 황금빛을 삼킨 순간, 저 앞에서부터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냐!”

“서로 등을 맞대라! 사각을 줄여!”

“빌어먹을! 저 자식이 너무 빠릅니다!”

콰앙! 쾅! 콰직!

차단된 시야 속에서 황금색 실선이 그어질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주위의 건물들이 무너져내렸고 그와 함께 만들어지는 뿌연 먼지들은 기사들의 눈을 가리기 시작했다.

“······제국헌병대 정도면 똑바로 찾아냈어야지.”

일격필살의 묘리는 전장을 통제하는 데서 나온다.

나보다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한 먼지 폭풍 속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무능한 네놈들 때문에 진범은 지금도 멀쩡히 돌아다닐 것 아니냐.”

상대가 만들어낸 안개에 휘말려 제대로 앞조차 보지 못하는 무능한 녀석들.

블라드는 내가 받은 억울한 오해보다도 풀지 못한 오귀스트의 원한에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이 빈틈투성이 자식들아.”

푸른 눈동자 속에서부터 기이한 시선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귀스트의 세계는 이면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 세계.

몰아치는 먼지 폭풍 속에서도 번뜩이는 블라드의 시야는 분명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에게서 가져온 것이었다.

“······!”

치켜든 칼날만큼이나 잔뜩 숨죽인 블라드의 호흡이 순간 멎어 들어갔다.

내디디는 첫걸음이 어려운 것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블라드가 내딛는 묵직한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스아아아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먼지 속에서부터 기사들을 향한 일검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에게 대적했다던 결투사가 만들어낸 검술.

그러나 기사들에게 다가오는 빛줄기는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커억!”

“크아악!”

누구는 흉갑, 누구는 손목 또 누구는 들고 있는 검에서부터.

오귀스트가 알려준 약점들을 따라 기사들의 핏물이 만들어 낸 선들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래도 내가 아직도 범인 같아 보이나!”

스쳐 지나가는 검술은 오래된 황실의 것이며 푸른 눈동자가 머금고 있는 시선은 제국헌병대장의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울고 있는 것은 바로 찬란히 빛나는 은색의 검.

웅-웅웅-

터져나가는 핏물 속에서도 헌병대의 기사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 어떤 검보다도 가장 정통한 검이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으니까.

“······맙소사.”

로드리고가 내뱉는 탄식과 함께 희뿌연 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먼지가 걷혀나가자 보이는 모습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헌병대의 기사들과 그들을 스쳐 지나간 블라드의 검 끝뿐이었다.

“황실의 검을 어디서 배웠냐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물을 휘둘러낸 블라드는 놀란 듯 멈춰있는 로드리고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저 사람한테서 배웠지.”

내민 검 끝은 매서웠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은 로드리고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저 그의 뒤에서 휘날리고 있는 제국헌병대의 깃발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구?”

블라드의 대답과 함께 천천히 쓰러지기 시작하는 헌병대의 기사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부하들이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로드리고는 블라드가 가리키는 검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깃발?”

흐르는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제국헌병대의 깃발.

황실의 검을 어디서 배웠냐는 로드리고의 질문에 블라드는 그저 깃발 안에 새겨진 하얀 번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

“······!”

황실의 복도를 바삐 움직이는 사내가 있었다.

지긋한 나이와는 다르게 경망스러워 보일 정도의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빠르게 움직이는 발놀림에도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는 그의 모습에는 분명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조심스러움이 배어있었다.

“공작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방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아르망의 목소리.

자그마한 쪽지를 들고 있던 사내는 주변을 살피며 혹시라도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용의 그림자가 가득한 황실이었기에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견을 나갔던 로드리고 경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걸어오는 동안 애써 감춰왔기 때문일까,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여기.”

“······그래.”

아마 평소의 아르망이라면 자신의 심복이 내뱉는 가쁜 숨소리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아르망은 그저 꺼져가는 촛불처럼 힘없이 고개를 기댄 채 벽난로의 불빛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귀스트의 복수는 했다고 하던가.”

“공작님. 그런 소식이 아닙니다.”

아르망의 마법사는 한걸음에 달려와 식어가는 아르망의 손아귀에 쪽지 한 장을 들려주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공작님.”

“······무엇을?”

식어가는 심지처럼 점점 잦아드는 아르망이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에 들고 있는 쪽지를 펼쳐보았다.

“······!”

늙었기에 떨리는 것이 아니라 놀랐기에 떨리는 손끝.

아르망이 받아든 쪽지는 제국헌병대장이었던 오귀스트가 보냈던 쪽지와도 같은 크기의 것이었다.

“······이게, 지금.”

고귀한 황실의 핏줄은 이미 끊어졌으며 지켜야 할 용의 조각은 가장 오래된 용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기에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던 아르망이었으나 지금 들고 있는 쪽지는 그에게서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라 말하고 있었다.

-하얀 번개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황실에 있는 그 누구도 건국왕인 키하노 프라우센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영광된 왕관을 벗어 내리고는 그저 한 자루 은색만을 든 채 황궁 밖으로 떠났으므로.

-그분이 들고 있던 은색의 검과 함께.

“오오!”

늙은 몸에서부터 차마 숨길 수 없는 환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드리고가 보낸 쪽지는 그만큼 아르망이 애타게 기다린 것이었고 거의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소식이었기에.

“흐으······.”

아르망은 혹시라도 자신이 뱉은 환호성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서둘러 소매 끝을 물어버렸다.

악문 입술 사이로 차마 빠져나가지 못한 탄성이 식어버린 아르망의 심장을 조금씩 달궈대기 시작했다.

“······이리, 이리 가까이.”

“네. 공작님.”

조심스레 불러대는 아르망의 손짓에 그의 심복은 기꺼이 귀를 가져다 대었다.

생기를 되찾은 아르망의 눈동자가 어느새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기사들을 모아라. 천천히. 최대한 사르누스가 모르게.”

“알겠습니다. 공작님.”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서는 심복을 본 아르망은 재빨리 들고 있던 두 장의 쪽지를 벽난로로 던져버렸다.

똑같은 크기의 쪽지였으나 쪽지 하나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는지 꾸깃꾸깃하게 접혀져 있던 것이었다.

“고맙네. 오귀스트.”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자신의 기사를 추억하며 들고 있던 쪽지였지만 이제는 필요 없었다.

오귀스트가 전한 그의 의지는 확실하게 받았으므로.

“자네 덕에 다시 이을 수 있겠어.”

가장 오래된 용을 묶고 있던 황실의 맹약은 오직 두 가지로만 이어진다고 했다.

하나는 핏줄로, 또 하나는 의지로.

용혈공의 견제에 처량하게 저버린 오귀스트였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황실을 향한 의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

“이런 빌어먹을!”

쾅-!

분을 못 이겨 외치는 목소리에 희미한 짐승의 소리가 섞여 있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미르셰아는 천천히 쪼개지는 탁자를 보며 서둘러 그 위에 있던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이래서 바닷놈들을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내동댕이치듯 던져버린 편지에는 황금색으로 치장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취향에 따라 달라 보이긴 하겠으나 과하게 치장한 듯한 그 문양에는 차마 숨기기 힘든 무도함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께 드릴 용의 조각은 블라드라는 녀석이 날름해버렸소이다. 과연 타고난 핏줄이 용맹해서인지 그 큰 용을 서걱서걱 잘도 썰어대더이다.

“넘겨줘도 하필이면 용의 핏줄에게 그 조각을 넘겨줘!”

예전보다 한층 젊어진 모습 때문일까.

차마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용혈공의 몸짓에는 들끓는 열기가 가득했다.

“겨우 황실의 것을 받아내 만족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남부 놈이 내 속을 썩이는군.”

거칠게 풀어헤치는 사르누스의 셔츠 위로 희미한 문신들이 가득했다.

그의 목 주위를 둘러싼 가시넝쿨 같은 문신을 보며 미르셰아는 조용히 떨어져 있던 편지를 주워들었다.

“그럼 이제 남은 조각들은 북부에 있는 두 개뿐인가.”

창가로 걸어간 사르누스는 뒷짐을 진 채 저 멀리에 있을 북쪽의 땅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참 잘게도 쪼개놓으셨소. 건국왕.”

창밖을 바라보던 사르누스는 그 옛날, 은색의 기사 아래 쓰러져 있던 가장 완벽한 용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아직 뛰고 있던 가장 완벽한 심장을 다섯 조각으로 갈라내던 키하노의 모습까지도.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는 소드마스터의 기사들과 함께 전설의 순간을 함께한 목격자였으며 아직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어떨 것 같으냐. 미르셰아. 녀석이 아직도 아비의 품을 그리워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근거리던 사르누스였으나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푸근함이 가득해 보였다.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수많은 면면을 지닌 자신의 아버지를 보며 미르셰아는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진창 속에서 피는 가능성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서 뿌려놓았건만 어느새 이렇게까지 커버렸나.”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는 의미는 그만큼 많은 것을 먹어 치웠다는 뜻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뿌린 씨앗들을 수확해가며 가장 완벽한 가능성을 꿈꾸었던 사르누스는 이제는 스스로가 움직여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부를 치겠다. 영주들을 모으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사르누스의 손가락이 미르셰아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가리켰다.

“한 잔 더 가져오도록 해라.”

새빨간 와인을 담고 있던 가느다란 술잔.

미르셰아가 내려다 본 그 잔에는 아직 삼키지 못한 붉은 방울들이 가득 맺혀있었다.

“네.”

방 밖으로 나선 미르셰아는 익숙한 복도를 지나 감춰져 있던 지하의 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와 함께 풍겨오는 용의 냄새들.

횃불 하나 없이 그저 와인잔만을 들고 어둠속으로 들어가는 미르셰아의 발걸음은 그저 익숙할 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창살 앞에 선 미르셰아는 그만 자그마한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거칠게 잘려 있는 쇠사슬과 수갑들.

분명 그곳에 곱게 보관되어 있어야 할 붉은 머리의 와인통이 있던 자리에는 그저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8화 6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2)

이른 아침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떠오르는 아침 해에 지평선에 가까운 하늘은 노랗게 물들었으나 그 위에 있는 하늘은 여전히 어둠을 머금고 있는 그런 아침이었다.

드드득-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요제프가 펜을 끄적여대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는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자들이 가득했고 방금 스쳐 지나간 깃털펜은 그곳에 적혀있던 이름 하나를 그어 내려간 참이었다.

“······몰다비르 남작은 되었고.”

요제프의 펜이 지나간 자리에는 굵고도 검은 세로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가로로 그어버린 그 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요제프의 수첩 안에는 이리저리 그어진 귀족들의 이름이 한가득이었다.

“조금은 더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아쉽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차는 요제프를 보며 마주 앉아 있던 자야르가 입을 열었다.

“블라드 녀석이 키시뇨르의 시장을 거의 반파시키다시피 했으니까요. 몰다비르 남작이 학을 떼며 내쫓을 만도 했습니다.”

저기 좀 보라는 듯 으쓱여댄 자야르의 시선 끝에는 조용히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성격 사나운 검은 말 위에 타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시선에 그저 어색하게 웃어댈 뿐이었다.

“하긴 내가 남작이었어도 내쫓을 만했지.”

그러나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는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깃발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제국헌병대라.”

검게 물든 깃발 안에 새겨진 확연한 하얀색의 번개.

예전보다 위세는 줄었다 하지만 황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제국헌병대는 여전히 대륙의 기사들이 선망하는 기사대 중 하나였다.

“이제는 꽤 근사한 깃발을 뒤에 달고 다니는구나. 블라드.”

저 뒤에서부터 터오는 동을 따라 따라오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온통 우울한 여행길이었지만 블라드가 가져오는 새로운 바람들이 조금은 요제프의 숨통을 트게 해주는 것 같았다.

※※※※

“바예지드 가문은 이미 루트거로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하던데.”

“······.”

“하긴 네가 요제프 바예지드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는 것은 이미 조사해둔 뒤였지.”

묵묵히 걷고 있던 등 뒤에서부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도시 키시뇨르에서부터 지금껏 블라드를 쫓아온 사내의 것이었다.

“······도대체 왜 계속 따라오는 겁니까?”

저 앞에서 마차의 창이 탁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블라드는 곧장 뒤를 돌아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오귀스트 님을 죽인 진범이나 찾으라니까요.”

다른 기사들이라면 안면을 트는 것만으로 영광스러워 할 제국헌병대였으나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사내들일 뿐이었다.

자신을 범인으로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키시뇨르에서 쫓겨나게 한 장본인들이었으니까.

“지금 찾고 있잖나.”

“나 아니라니까.”

“나도 그건 아는데, 수사 절차가 그러하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노만이 가득했던 로드리고였으나 지금은 온통 능글맞은 수사관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오귀스트 님과 가장 마지막까지 있던 목격자니까 말이지. 그런 자네에게 사정 청취 정도는 듣고 가야 면목이 서지 않겠나.”

“하.”

로드리고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짧은 탄식을 내쉬고 말았다.

로드리고가 하는 말에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으나 정작 그가 보이는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오해 하지 마십시오. 이거 소드마스터의 검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내 검입니다.”

웅웅-

블라드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한 기사들에게 슬쩍 검을 보여주며 진실을 토로했으나 정작 밖으로 나온 용살검은 주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눈치 없이 울어댈 뿐이었다.

“오오!”

“과연 은색의 기사!”

같은 금속에서 비롯되었기에 서로가 반가워하는 존재들.

헌병대의 기사들은 공명하는 금속들의 울림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동전들을 꺼내 들고는 감격스럽다는 듯 감탄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 부하들이 그렇게 생각할만하네. 명예로 산 동전은 오직 같은 진은에게만 반응하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습니까. 그냥 당신들이 들고 있는 동전이 녹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진은의 동전은 오직 자신을 내려놓은 기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의 값이었다.

은퇴한 뒤 후진 양성을 위해 대륙을 떠돌았던 라문드나, 맹약의 수호자인 강철공, 혹은 제국헌병대에 입단하기 위해 이름 뒤에 있던 성(姓)을 내려놓은 지금의 기사들 정도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귀하디 귀한 동전이었다.

“아니, 이 동전은 녹을 수가 없는 것이네. 블라드 경.”

그렇게나 희귀한 동전이었기에 블라드도 동전에 대한 내막까지는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지도.

“진은(眞銀)은 변하지 않는 금속이야. 세월에 의해 녹슬지도 않고 강압에 의해 부러지지도 않는 것이지.”

“······.”

로드리고는 아니라 말하며 분통을 터트려대는 블라드를 향해 웃으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물론 열기에 의해 녹지도 않네. 그 옛날 있었다던 드워프들의 마지막 고로조차도 그저 진은을 설득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 이거 대장장이가 날까지 세운 겁니다만.”

“그럼 그 대장장이가 검을 잘 설득한 모양이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진정한 은색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을 아는 고귀한 금속이었다.

“어쨌거나 이 검은 건국왕의 검이 아니라 진짜 제 검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하자고.”

어느새 말을 몰고 옆으로 다가온 로드리고는 지금도 웅웅거리는 용살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자네가 진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말이야.”

이어져야 하는 것은 형태가 아닌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원형에 가까운 황실의 검.

그리고 진은의 가호를 받은 은색의 검까지.

블라드는 한사코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었으나 로드리고는 분명 그분의 의지가 이어졌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엘프들의 숲에 그분의 검이 있기는 했었나? 그곳에서 검을 뽑은 사람이 있다고 오귀스트 경께서 보고 한 적이 있었거든.”

“······그건 진짜 모르겠는데요.”

블라드는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로드리고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망에 휩싸여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 은색의 기사를 뽑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눈동자에 머금은 그 열기가 더해지리라는 것도.

“뭐,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조사해보자고. 이제 다음 도시도 다 와 가니.”

“저기까지 따라올 생각이십니까?”

가장 앞서 있는 요제프의 마차 앞으로 높게 솟아오른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지나왔던 도시 키시뇨르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다.

“저곳까지는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좋을 거야. 도시 발레타는 우리에게는 보급기지와도 같은 곳이거든.”

도시 발레타.

중부에서도 가장 단단한 성벽을 가지고 있는 도시.

그리고 아른슈타인 백작령의 주도이기도 한 도시.

“발레타의 주인인 아른슈타인 백작께서는 궁정공과도 막역한 사이시니까 말이야.”

키시뇨르에서 쫓겨난 대가를 발레타에서 치러주겠다고 말하는 로드리고였으나 블라드는 그의 말에 딱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아른슈타인.”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 발레타는 북부의 스투르마만큼이나 커다란 성벽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블라드는 파고들 곳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는 발레타의 모습이 마치 예전에 마주했던 어떤 기사와 똑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보름달이 환히 뜬 밤, 홀로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마차가 있었다.

목 없는 기사들이 호위하는 그 마차는 밤하늘에 비치는 달빛조차 반갑지 않았는지 새까만 그림자만을 밟으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역시 뛰질 않으시네요.”

시작은 푸르렀으나 끝은 검어진 머리를 지닌 여인은 앞에 앉아 있는 프라우센의 가슴팍을 손을 대고는 빙긋이 웃어대었다.

“용을 마주할 때는 그렇게나 격렬하게 뛰시더니.”

“······.”

여인의 미소는 누구라도 안겨들고 싶을 만큼 자애로운 것이었으나 온통 색이 빠져 버린 프라우센은 그저 시체처럼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미소조차도 프라우센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네가 말하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뿌리내릴 땅을 찾겠다던.”

“부덕한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프라우센은 여인이 붙인 호칭에 잠시 눈썹을 꿈틀대었으나 곧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꽤 쓸만한 인재도 얻었구요.”

타락한 성녀 라마슈트는 프라우센의 관심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대었으나 정작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갈라대고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황제가 뜻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각에 새겨넣은 그녀의 술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녀석이냐?”

“믿을 수 있는지는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검게 굳어버린 핏자국 위로 붉은색 조각이 뛰기 시작했다.

가장 완벽한 용에게서 비롯되었으나 이제는 프라우센의 심장이 된 가장 완벽한 조각이 만드는 박동이었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 해도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 할 것임을 믿습니다.”

“······.”

조금씩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에 프라우센의 초점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바라본 곳은 검은 여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보석함이었다.

“계속 이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의 아이들과 함께할 땅을 찾을 수 있겠지요.”

죽음에서 도망친 여인은 미쳐있었고 죽음에서 돌아온 황제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둘이 마주하고 있는 마차 안에는 그저 고요함만이 감돌 뿐이었다.

“모시암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완수하기를 빈다.”

프라우센이 보고 있던 여인의 보석함 안에는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나무들의 눈물방울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프라우센이 아주 예전, 뛰고 있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을 시절에 본인이 직접 옮겨심었었던 어머니 세계수의 파편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

어른들이 만드는 고통과 번민이 없는, 그리하여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용에 의해 그 어떤 가능성도 짓밟히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

그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프라우센은 울고 있는 보석함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젊은 기사 키하노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으나 늙어버린 황제 프라우센은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만 사람이었다.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신이 만든 세계를 밟지 않는 마차는 지금도 중부의 어느 땅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갈 뿐이었다.

프라우센은 이제는 울지 않는 은색의 기사를 쓰다듬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9화 4

고요한 밤, 거룩한 말 (1)

모두가 잠들어 있을 깊은 밤이었지만 평원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만은 요란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아래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말 한 마리와 그 뒤를 따르는 수십 기의 기병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근사한 한 폭의 그림 같았으나 가까이 다가간다면 사내들의 다급한 고함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호를 보내라! 진로를 틀어막아야 한다!”

그림 같은 장면 한가운데서 커다란 방패를 등에 진 채 지시를 내리는 기사가 있었다.

굳건해 보이는 사각 턱이 인상적인 남자는 들고 있던 횃불조차 내던진 채 앞서 있는 사내를 맹렬히 쫓는 중이었다.

“지금!”

남자의 지시에 따라 등 뒤에서부터 불화살이 올라왔다.

환한 보름달 아래서도 제 존재를 드러낸 붉은 화살은 지금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기사들을 향해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지금이다! 돌격!”

불화살이 보낸 신호에 따라 언덕 끄트머리에서부터 숨어 있던 기병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정련된 기세는 과연 아른슈타인의 정예병들다운 모습이었다.

-······.

빈틈 하나 없이 달려오는 기병들의 모습은 마치 언덕에서부터 내려오는 파도와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홀로 앞서 있던 사내는 자신을 향해 새까맣게 달려오는 기병들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자.

그저 타고 있는 말의 목을 한번 쓰다듬어주었을 뿐.

기수의 손길이 닿자 말의 눈동자 안에서부터 푸른색 귀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빠릅니다!”

“빌어먹을! 방향이라도 틀게 해라!”

기습은 훌륭했으나 상대가 너무 빨랐다.

훌륭한 군마들을 대동한 아른슈타인의 기병대였으나 정작 현실은 한 마리의 말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애써 언덕에서 달려온 기병대장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어버리고 마는 가속.

마치 땅을 밟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그 모습에 경험 많은 기병대장조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진로라도!”

따라잡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몰아보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쏴라!”

검 끝이 닿지 않을 것임을 파악한 기병대장은 서둘러 화살을 쏘라며 명령했지만, 그조차도 이미 늦은 뒤였다.

삭! 솨솨솩!

구름에 닿을 듯 높게 올라간 화살들이었으나 정작 꿰뚫은 것은 정체 모를 남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였을 뿐이었다.

히히히이잉-

기병들의 탄식을 뒤로 한 채 무심히 사라지고 마는 정체 모를 남자.

더는 따라잡을 수 없기에 멈춰서고만 파블로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를 들으며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짓이겨 대었다.

※※※※

“스투르마의 성벽보다 큰 것 같네요.”

“조금은.”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말에 손바닥을 눈썹에 대고는 발레타의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높아져만 가는 발레타의 성벽.

북부에서는 처음 보는 회백색 성벽의 모습에 니벨룬과 블라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양이 좀 특이하네.’

발레타의 성벽은 견고해 보일 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양까지 세련되고 유려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벽돌들이 기묘한 균형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돌을 올린 다음에 석회로 이음새를 이었네요. 그래서 이런 멋진 모양이 된 것 같습니다.”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발레타의 성벽은 커다란 돌들을 얹은 스투르마의 성벽과는 다르게 온통 자그마한 벽돌로 쌓아진 것이었다.

그에 대한 내구도가 어떻게 차이 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성벽의 형태만큼은 원하는 모양으로 쉽게 잡았을 것이다.

“정지! 앞에 있는 일행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러나 멋진 성벽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에는 새파란 날이 서 있었다.

한참 어수선한 중부의 분위기 때문인지 낯선 이들을 대하는 경비병들의 태도는 들고 있는 창만큼이나 날카로울 뿐이었다.

“나는 제국헌병대의 로드리고다.”

서슬 퍼런 그 모습을 본 로드리고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바예지드라면 모르겠으나 중부에서 제국헌병대가 가지는 위치는 특별한 것.

이미 로드리고의 얼굴을 알고 있던 경비병들이 당황한 듯 서둘러 내리고 있던 창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로드리고 님!”

“수고가 많군. 그나저나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우리가 보증하고 싶은데. 정확히······.”

뒤를 돌아본 로드리고는 블라드와 니벨룬까지만 보증할 생각이었으나 그의 의도를 눈치를 챈 블라드가 어느새 요제프의 마차 옆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바예지드라는 이름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중부인 이곳에서만큼은 제국헌병대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나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마차까지.”

“알겠습니다. 로드리고 님.”

경비대장은 예상외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곤혹스러워했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제국헌병대의 위신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려도 할 줄 알고 이제 많이 컸군.”“그냥 여기 그늘이 있어서 서 있는 것뿐이에요.”

블라드는 마차 안에서 실실 웃고 있는 자야르를 보며 턱을 긁어대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는 그 행동은 멋쩍음을 가리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요제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헌병 대원분들은 괜찮겠으나 손님들께서는 부디 밤에는 나다니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일행의 진입은 예상보다 껄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앞서가는 제국헌병대가 성문을 빠져나가자 경비대장이 은근슬쩍 일행의 앞을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혹시 이 또한 북부인에 대한 차별인가?

이미 한번 그에 대한 경험을 겪어본 적 있던 블라드가 험악한 표정을 지어대자 경비대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영지 곳곳에서 실종 사건이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오해 사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실종 사건?”

이 단단해 보이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실종 사건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블라드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북부에서는 존경받는 바예지드였으나 이곳 중부에서는 그저 이방인이었을 뿐.

게다가 북부 연합으로 인해 구도가 더욱 복잡해진 지금에는 아무래도 영지의 내밀한 사정까지 듣기에는 곤란한 감이 있을 터였다.

“들어가시죠. 발레타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멀리서 본 모습은 커다랗고 가까이서 본 모습은 유려한 도시 발레타.

그러나 성문을 넘어서 다가간 그곳에는 어째서인지 꺼림칙한 침묵만이 가득해 보였다.

※※※※

“발레타에 온 것을 환영하네. 바예지드의 요제프.”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집무실이라기에는 차라리 서재라 해야 할 공간에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리고 쇼아라의 블라드.”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자 같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유약해 보이지 않는 것은 내려쓴 안경 뒤로 보이는 형형한 눈빛 때문일 것이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제대로 블라드 아우레오 경이라 불러줬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백작님. 부디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자네도 알다시피 아무래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진 모양이야.”

블라드를 바라본 아른슈타인 백작이 반갑다는 듯 씩 웃어대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으나 아른슈타인 백작과 블라드는 이미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은 기사 파블로가 피워낸 가능성이었으니 그를 보고 있는 백작의 눈빛이 충분히 기꺼울 만도 한 것이었다.

“내 기사의 명예는 곧 나의 명예일세. 그 명예의 증거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반갑군.”

백작의 관심은 오히려 앞에 있는 요제프보다도 블라드에게 더욱 쏠려 있었다.

북부접경지대에 있을 영주들이면 몰라도 중부의 맹주 아른슈타인 백작 정도라면 바예지드의 눈치 따위는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자네들의 어깨 위로 북부의 찬 바람이 느껴지는 것만 같군. 그래 이 먼 곳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늙었음에도 반짝이는 그의 눈에는 이미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눈을 본 블라드는 아무래도 백작과 니벨룬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제가 백작님을 찾아뵙게 된 이유는······.”

가주 경쟁에서 탈락했기에 지금껏 비빌 언덕을 찾고 있던 요제프.

외가인 오스카르 가문의 이름까지 내세우며 이목을 집중시키려 했던 요제프였으나 이미 그를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불쾌한 시선이라기보다는 흥미가 식었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여지를 남기는 말같아 보였으나 귀족의 화법으로 보자면 거부의 의사 표현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네도 같은 뜻으로 나를 찾아왔는가?”

요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백작의 시선에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블라드를 보며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는 용들의 죽음을 따라왔습니다. 백작님.”

블라드에게 있어서 귀족을 대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아른슈타인 백작이나 되는 거물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러나 블라드는 바로 옆에 있는 요제프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큰 부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죽음과 함께 하는 사특한 존재들까지도요.”

“······오호.”

블라드는 백작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흥미가 동할만한 단어들만을 선택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맞았다는 듯 식어 있던 백작의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이기 시작했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꽤 재미있는 소식을 들고 왔구만.”

멀리서 온 손님이 반가운 것은 지금처럼 쉽게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소식을 들고 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사특한 존재를 따라왔다라······.”

그리고 손님이 들고 온 그 소식이 여태껏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일과 연결까지 되어 있다면 주인으로서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 이따 저녁이나 들면서 같이 이야기해보지.”

블라드는 잘 몰랐겠으나 귀족들의 세계에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권유하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인사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말일세.”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리고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말에 숨겨진 의미는 주인이 그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북부의 말들은 다들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혹시 자네가 가져온 말들도 그러한가?”

블라드는 뜬금없는 백작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말하는 백작에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겠으나 듣는 블라드에게는 상당히 맥락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말 말씀이십니까.”

“그래. 말 말일세.”

블라드를 바라보는 백작의 안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자네들이 가져온 말들이 어디에 내세워도 될 만큼 빠르냐고 묻고 있는 걸세.”

자신의 기사인 파블로가 피워낸 명예로운 이름 쇼아라의 블라드.

백작은 반가운 만큼이나 유익한 소식을 들고 온 북부의 기사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까지 되기를 바라는 중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0화 6

고요한 밤, 거룩한 말 (2)

눈 내리는 밤이었다.

내리는 눈송이가 땅에 닿는 소리까지 들리는 그런 조용한 밤이기도 했다.

홀로 마구간 목책 위에 걸터앉아 있던 블라드는 망토를 끌어안고는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눈이 좀 늦게 오네.”

고향인 쇼아라였다면 지금은 눈이 오다 못해 쌓여 있을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중부에서도 내륙에 속해 있는 도시 발레타에서는 이제야 눈이 내리고 있었으니 블라드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멀리까지 왔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맛있냐?”

푸르르륵-

구유통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누아르가 블라드의 말에 푸르륵 거리며 자신의 기꺼움을 표현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이었으나 지금 누아르의 구유통에는 알 굵은 콩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너도 참 운도 좋다. 하필이면 오늘이 해방절(解放節)이라니.”

오늘 누아르가 먹는 먹이가 풍족한 것은 단순히 다가올 임무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방금 블라드가 말한 것처럼 오늘은 인류가 가장 완벽한 용에게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해방절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건국왕이자 교회가 인정하는 성인, 그리고 기사들의 기사이기도 한 소드마스터를 기념하는 오늘은 인간이며 가축이며 할 것 없이 모두가 풍족한 저녁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엄마가 내 생일도 이쯤이라고 그랬었는데.”

[그래?]

그리고 블라드가 태어난 날도 아마 이쯤이라고 했었다.

너무 어렸을 때 들었기에 확실히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뒷골목의 소년은 분명 눈 내리는 겨울에 태어난 아이였다.

“그나저나 또 아이들을 잡아간대요. 그놈들은 애들한테 뭐 원수라도 졌는가.”

하릴없이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어대던 블라드는 아까 백작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크게 입김을 내 불었다.

아른슈타인 백작은 도시와 영지 외곽을 돌며 아이들만을 납치하는 정체 모를 괴인이 있다고 했었고 그 말을 들은 블라드는 자신이 목표하던 곳에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안개 가득한 마을과 모시암에서처럼 이곳 아른슈타인 영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아이들만을 잡아가는 이유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들이 무슨 이유를 대든 간에 절대 이해해 줄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이유를 대도 절대 납득 할 수는 없을 거예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블라드는 문득 고개를 들고는 저 아래에 있는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불이 켜져 있는 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어둠만이 가득한 집들이 있었다.

“특히 저기 불 꺼진 집에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는요.”

모두가 기뻐해야 할 날이었지만 그런 오늘이었기에 더욱 슬퍼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는 블라드는 누아르의 등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깊은 입김을 내뱉었다.

※※※※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이제야 겨우 몇십 가구들이 모여 사는 그런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숨죽이며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단순히 밤이 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콰드드득-!

순간, 고요함만이 가득했던 마을 한 곳에서 침묵을 부수는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자그마한 집 한 채가 무너져 내리며 만드는 소리였다.

그 집은 마을의 유일한 약초꾼이 있는 집이었으며 얼마 전 4번째 생일을 맞은 아이가 있는 집이기도 했다.

“안돼! 아이! 내 아이!”

달 밝은 밤, 아이를 빼앗긴 여인이 정체 모를 사내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지금 그 사내가 들고 있는 아이는 가난한 부부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보물이었으며 다음날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

그러나 울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은 그저 차갑기만 할 뿐.

달빛 때문인지 더욱 시려 보이는 푸른색 귀화는 그저 무심한 모습으로 제 갈 길을 향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사내가 어깨에 메고 있는 낡은 망태에서부터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콰앙-!

“······드디어 찾았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를 따라 찾아온 기사들이 있었다.

요란히 부서지는 문과 함께 달빛을 등진 기사가 웃고 있었다.

“드디어 네 놈의 면상을 볼 수 있겠구나.”

힘껏 달려왔는지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고 있었지만 파블로의 입가에는 차마 감추기 힘든 서늘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동안 닿지 못했기에 차마 막지 못했던 비극이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들고 있는 아이부터 내려놓으실까?”

-······.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감고 있는 그의 왼쪽 눈에서부터 그의 세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랗게 타오르는 그의 세계는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가능성을 이끌어낸 세계이기도 했다.

“그럼 반만 죽여드리도록 하지.”

그 옛날, 기사 중의 기사인 소드마스터가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다는 오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그를 기리기 위해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은 초라한 이 마을에 숨어 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

히이이잉-!

막아! 못 나가게 막아!

몸을 들이대서라도 앞을 막아라!

푸른 귀화를 피워올린 말의 뒷발질이 매섭다.

사내가 타고 있는 말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흉포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파블로는 스스로 그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흐아아!”

콰앙! 쾅!

지축을 흔드는 것만 같은 뒷발질이 있었지만 파블로는 크게 휘청였음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들고 있는 것은 성벽이었으며 그가 원하는 것은 울고 있는 아이였기에.

어린 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파블로의 전진은 데어마르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도 당당할 뿐이었다.

“일단 내려오라니까!”

파블로의 검술은 화려하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오직 기본에 충실한 단조로운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일 수 있는 이유는 상대의 모든 의도를 틀어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걱-!

히이이이잉!

모진 발길질에도 기어이 다가간 파블로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이윽고 번쩍인 검날의 움직임에 놀란 말이 번쩍 몸을 들어 올리자 팽팽했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들어가!”

정체 모를 사내의 검은 하나였고 달려드는 기사들은 그보다 많았다.

오늘 일어날지도 모를 어떤 가족의 비극을 막기 위해 누구는 온몸으로 검로를 틀어막고, 또 누구는 말의 진로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파블로 님!”

“잘했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달려든 기사 하나가 사내의 오른팔을 꺾어가며 애써 울고 있는 아이를 집어 들자 때를 기다리고 있던 파블로가 이를 악물어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타앙!

더이상 거칠 것이 없어진 파블로가 힘껏 검과 방패를 부딪쳤다.

그러자 보이는 파블로의 세계는 단단한 성벽과도 같은 세계.

갓 피워낸 소년의 세계가 아무리 부딪히고 부딪혀도 흠 하나 생기지 않았던 그의 성벽이 거칠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반만 죽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보여주마!”

쾅!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혔으나 들리는 소리는 포탄이 쏘아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비록 말을 타고 있는 상대와 대적하는 파블로였지만 지금처럼 뻗어 나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땅을 디디고 있는 쪽이 유리할 터였다.

-반만 죽인 다라.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정체 모를 사내의 대응은 침착할 뿐이었다.

-우리에게 있어 그만큼 헛된 협박이 있기나 할까.

“뭐?”

파블로는 사내의 말속에서 불길하게 다가오는 징조를 감지했다.

“우리?”

여태껏 홀로 움직이기만 했던 정체 모를 사내.

그러나 낄낄대는 웃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자들은 분명 하나가 아닌 여럿이었다.

-함정은 자네들만 팔 수 있는 게 아니지.

“······!”

당황한 파블로와 기사들을 보며 정체 모를 사내가 웃고 있었다.

인사라도 하듯 정중하게 벗어 내리는 그의 두건 안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파블로를 향해 웃고 있던 그의 머리까지 담겨 있었다.

“이 사특한 놈!”

달을 가린 구름 아래서 정체 모를 사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목을 내려놓은 그들은 땅 위에서 허우적대는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을 보며 세찬 발길질로, 날아드는 검날로 그들을 비웃기 시작했다.

“전원 방진! 아이와 가족들을 중심으로!”

흩뿌려지는 핏물 속에서 기사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사냥감인 줄 알았으나 사냥꾼이었던 그들을 보며 파블로는 다시 한번 깊게 감은 눈으로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키려 했다.

콰직-!

크억!

-······!

순간, 갑작스레 날아든 창대에 목 없는 기사 하나가 거칠게 튕겨 나갔다.

어찌나 강하게 던졌는지 땅에 꽂혀 있는 창대가 아직도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누구냐!

평원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그 마을의 주민들이 겨우 세워놓은 목책 너머에서부터 세찬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른슈타인의 깃발과 제국헌병대의 깃발, 그리고 작았지만 수많은 문양들을 박아넣은 북부의 깃발까지.

점점 다가오는 지평선의 먼지들을 보며 목 없는 사내는 서둘러 부하의 몸에 박혀 있던 투창을 빼낼 수 밖에 없었다.

“맞았나?”

[맞았다. 확실히 맞았어.]

“처음 던져본 건데 저게 되네요. 볼코프 님 걸 미리 한 번 봐두길 잘했네.”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불끈 솟아오른 어깨 근육이 방금 날아간 투창이 누가 던진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쏴아아악-!

콰악!

“보낸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저 멀리서부터 다시 날아온 투창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드는 블라드를 보며 주위의 기사들이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신기중의 신기를 부리고 있었으나 용의 피에서 비롯된 감각은 지금의 상황조차 그저 당연한 듯이 받아들일 뿐이었다.

“적들이 도망갑니다!”

“빌어먹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른슈타인의 기사단장은 자신의 기사들에게서 벗어나는 침입자들을 보며 안심했지만, 그와는 반대로 점점 조급해지는 마음이 있었다.

“달려라! 또다시 놓쳐서는 안 된다!”

지금 저들을 놓치면 또다시 사라지는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장의 간절한 외침과는 다르게 마을을 습격한 침입자들은 어느새 말에 올라타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젠장! 말을 타게 둬서는 안 되는데!”

수십의 기사들이 달려들고 있었으나 결국 저들을 잡지 못할 것을 안다.

아른슈타인의 영지는 비옥한 평원으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저들을 가로막을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

어느새 스쳐 지나가는 마을에서부터 반짝이는 노란빛이 있었다.

블라드는 눈에 익숙한 그 빛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빌린 은혜는 갚아야 하는 법이다.]

“알아요.”

뒤쫓고 있었으나 멀어지기만 하는 목 없는 기사들.

점점 벌어지는 간격에 뒤따르는 기사들이 지쳐갈 때쯤 홀로 진형을 이탈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어차피 내 인생은 평생 갚으면서 사는 인생이었어요.”

노인이 내어준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소녀가 흘려준 눈물에 이르기까지.

갚고 갚고 또 갚으며 걸어온 길 위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걷힌 구름에 푸른 달빛이 너른 평원을 비추며 한 줄기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그곳을 따라 달리면 된다는 듯 밝게 비치는 그 빛을 보며 블라드는 쥐고 있던 말고삐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자!”

히이이이잉-!

일각수의 혈통을 이은 초원의 아들.

맞닿은 세계를 통해 점점 세워지는 누아르의 뿔이 어느새 중부의 깃발들을 지나치기 시작했다.

“저, 저······.”

아른슈타인의 단장뿐만 아니라 로드리고마저 놀라고 마는 그 속도로.

-······!

“우리가 구면인가?”

그렇게 달려나간 블라드를 보며 목 없는 기사들이 크게 놀라고 말았다.

죽음에게서도 도망친 그들이었으나 밝게 뿔을 세운 검은 말 앞에서만큼은 뒤를 내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머리가 있어야 구면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지.”

-너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심장 소리는 온통 색을 잃어버린 자와 닮았다.

바람결을 따라 아스라이 풍기는 차의 향기는 평소 검은 여인이 마시던 것과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보는 그 미소만큼은 둘이 가진 것과는 사뭇 다른 아주 스산한 것이었다.

“네놈들이 떨치곤 간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를 대신해서 왔다.”

검이 울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 울부짖는 용을 죽이는 검이.

“가서 놓고 내린 네 놈들의 목이나 찾아와라!”

오늘만큼은 아무도 울지 않는 그런 고요한 밤이 되기를.

불 꺼진 창들을 눈에 담아두고 있던 블라드는 검을 휘두르며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이 받을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1화 12

머금은 차의 향이 썼다 (1)

푸른 달이 뜬 평원 위로 말 하나가 고꾸라지고 있었다.

힘차게 그어지는 은색의 실선과 함께.

이제야 맞닿은 두 개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서로를 스쳐 지나갔고 뒤처진 자에게 남은 것은 차디찬 지면으로의 추락일 뿐이었다.

쿠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면 위에 있던 하얀 눈송이들이 다시금 하늘 위로 높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달리고 있던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에게는 새하얀 눈의 분수처럼 보이는 그런 장면이었다.

“난 너희들이 싫어.”

-······!

한 마리의 유령마가 달리고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그 자리를 꿰찬 검은 말이 달리고 있었다.

높게 세워진 뿔에는 시린 겨울의 색이 가득한 그런 말이었다.

“없는 네놈들의 목을 다시 잘라내고 싶을 만큼.”

맞닿은 세계는 선택해야만 한다.

같이 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의 세계를 짓밟을지를.

그리고 블라드는 이미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할지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이 건방진 놈!

-어린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블라드의 결심을 파악한 목 없는 기사들이 서둘러 검을 뻗어내었으나 이미 블라드는 그곳에 없었다.

-아니······.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저 검은 말이 남기고 간 그림자였을 뿐.

노련한 기사들조차도 속이고 마는 누아르의 움직임을 타고 어느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히이이잉-!

방금까지만 해도 오른쪽으로 쏠려 있던 무게 중심이었으나 검은 말의 그림자는 어느새 왼쪽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 현란한 움직임에 뻗어낸 검 끝들이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

-크악!

은색의 선이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달리던 말들이 휘청이며 하얀색 눈의 분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밟지 않으려 노력했던 땅이었으나 블라드의 검 끝에는 자비가 없었고 실로 오랜만에 바닥에 누운 목 없는 기사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어디로 데려갔어!”

하나씩 쓰러져 가는 기사들을 짓밟으며 누아르가 점차 가속하기 시작했다.

누아르에게 흐르는 일각수의 피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앞에서 달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피였다.

그 존재가 죽음에서 달아난 것들이라 할지라도.

-네 이놈!

하나를 베고 하나를 짓밟고 또 하나를 부수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따라잡은 목 없는 기사를 향해 누아르가 거칠게 어깨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이라면 옆에 붙어있기도 싫어한 불길한 유령마였으나 초원의 아들인 누아르에게는 그런 것들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쿠웅-!

“······하긴 원래 사람을 찾으려면 아무나 쥐어 패보는 게 정석이었지.”

-뭐?

사내에게 달라붙은 블라드의 손에는 어느새 꽉 잡힌 고삐가 붙들려 있었다.

다만 그 고삐는 누아르의 것이 아니라 목 없는 기사가 붙잡고 있어야 할 낡은 고삐였다.

“그러니까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해 볼까!”

-······!

콰직-!

순간, 갑옷을 부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 없는 기사가 크게 휘청여대기 시작했다.

다만 그 휘청임은 몸을 꿰뚫은 검 때문이 아닌 잔뜩 무게를 실어버린 블라드의 몸짓에 따라 흔들리는 휘청임이었다.

-크으윽!

거침없이 유령마로 뛰어오른 블라드는 목 없는 사내를 붙잡고는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용살검을 밀어 넣은 채로.

새까만 갑옷을 꿰뚫은 은색의 검이 오늘따라 더욱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

그 무엇보다 빠른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고 마는 두 명의 기사.

죽어 있는 자조차도 비명을 내지를 만큼 아찔한 부유감 속이었지만 다만 맥없이 떨어지고 마는 목 없는 기사와는 다르게 블라드에게는 믿고 의지할 만한 단단한 갑옷이 있었다.

쿵! 쿠궁! 쿵!

엘프가 만들어주고 드워프가 제련해 준 갑옷.

비록 요란히 구르고 있었으나 함께 한 세계들과 함께 굴러대는 겨울의 평원은 블라드에게만은 조금은 부드러운 면을 내어주는 것만 같았다.

“······이런 세상에.”

한참 뒤따라오던 로드리고와 아른슈타인의 기사들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요란히 굴러대는 두 명의 기사 사이로 비치는 은색의 빛.

비록 엉망진창인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빛나는 그 반짝임을 본 로드리고는 자신이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아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

“수고했네. 블라드 아우레오 경.”

바깥 날씨는 차가웠지만, 등 뒤로 와닿는 벽난로의 열기만큼은 만족할 만큼 따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밭을 구르던 블라드에게는 꼭 필요한 온기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담요를 잔뜩 두르고 있던 블라드는 조용히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을 보고는 코를 훌쩍였다.

중부의 맹주인 아른슈타인 백작이 직접 내어준 차였으나 정작 그 차를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표정에는 조금은 실망의 기색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구출했습니까?”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그렇군요.”

미지근한 차보다는 뜨거운 술이 필요한 밤일 텐데.

그렇지만 백작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블라드는 얌전히 찻물을 넘기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큰 거물이 뒤에 있을 줄은 몰랐군.”

찻잔을 들이켜는 백작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꾸라뜨린 목 없는 기사들은 많았으나 정작 남아있던 자는 블라드의 검에 꿰뚫려 있던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사내들은 예전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처럼 이미 검은 원 속으로 빠져들어 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참으로 신기한 검이로군. 내 마법사도 자네의 검이 이런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네.”

“그렇습니까.”

아른슈타인 백작은 블라드가 들고 있는 은색의 검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로드리고가 말해주지는 않았으나 만약 블라드의 검이 은색의 기사라 추정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그의 태도 또한 지금같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도시 모시암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백작님.”

머나먼 북부의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은 중부에서는 그저 하나의 풍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른슈타인 백작은 이제는 흘러가는 그 풍문조차도 다급히 구걸해봐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무언가가 내려왔나 보군.”

골치 아프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 백작의 뒤로 파블로가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사태가 사태이기에 차마 반갑다는 티는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파블로는 들고 있던 방패를 삽으로 삼아 눈밭에 파묻혀 있던 블라드를 직접 끄집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도시 하나를 잡아먹은 사특한 존재라······.”

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나 사특한 존재들은 어둠 속에 숨어 암약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사태를 해결해야 했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인 황제와 영주들이었다.

“······골치 아픈 시기에 찾아들어 왔군.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기에 말이야.”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도 권력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기.

영지를 접하고 있는 다른 영주들의 동향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체 모를 사특한 존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아른슈타인 백작으로서는 또 다른 부담이 가중되고 만 셈이었다.

“교황청의 사제들이라도 불러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또 곤란한 일일세.”

블라드는 자신과는 껄끄러운 교황청이라 할지라도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힘을 빌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백작의 답변은 블라드가 모르고 있던 또다른 복잡한 사정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거야 내가 궁정공을 따르는 파벌이기 때문이지.”

궁정공이냐 용혈공이냐.

지금 중부를 들썩이고 있는 수많은 영지전들은 결국 궁정공과 용혈공이 치르는 대리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블라드가 마주하고 있는 아른슈타인 백작은 궁정공을 따르는 파벌에 속해있는 자이기도 했으니 용혈공에게 협조하고 있는 교황청은 아마 제대로 된 지원을 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북부정교회에게라도.”

“그건 더더욱 안 될 말이지.”

찻잔을 내려놓은 백작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귀족의 푸른 피가 비치는 백작의 본모습이었다.

“독립을 선언한 북부 연합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다른 영주들에게 명분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네. 승냥이 떼들에게 내 몸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지.”

“······.”

블라드는 들려오는 백작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침묵할 뿐이었다.

뒤에서는 벽난로의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앞에서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이 가득했으나 블라드는 어째서인지 이 방이 더욱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해합니다. 백작님.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분이시니 행동 또한 진중하셔야겠죠.”

“알아주니 고맙군.”

사특한 존재가 날뛰고 있었으나 권력의 흐름상 손을 내어주지 않는 교황청.

그와 마찬가지로 북부 정교회에 손을 내밀지도 않을 생각인 아른슈타인 백작.

따로 떼어보면 각자의 말은 맞겠으나 결국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누군가들일 뿐일 것이다.

“차가 쓰네요.”

온통 쓴맛이었다.

블라드는 애써 기어 올라온 저 위의 세계도 결국은 어딘가의 뒷골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저 쓴 침만을 삼킬 뿐이었다.

※※※※

떠오르는 동 위로 두 명의 노인이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엉망이라 마치 거지 같아 보이는 노인들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껑충한 키를 가진 노인의 눈에는 여전히 총명한 빛이 담겨 있었다.

“여기가······.”

“발레타요. 당신이 원하던.”

밝아지는 지평선을 따라 천천히 열리는 성문 앞으로 여태껏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연 중부에서도 잘 알려진 대도시답게 오가는 여행자들과 행상인들이 가득해 보였다.

“여기까지 이끌어줘서 고맙군. 자네 이름이 산도르라고 했던가.”

“······.”

여태껏 노인들을 인솔하던 상처 가득한 사내는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노인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흑빵보다도 더 딱딱한 사내의 무미건조함에 말을 건넸던 노인조차도 어색한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북부 연합에 귀의한 것을 환영합니다. 피에르 주교.”

천천히 돌아서는 사내의 뒤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여태껏 쌓아온 그 명성에 맞는 행동을 할 거라 믿겠습니다.”

도시 발레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노인과 사내가 멀어지고 있었다.

상처 가득한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주교 피에르는 가느다란 기침을 내뱉는 노인을 부축하고는 발레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북부 놈들은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여태껏 걸어온 길에는 후회 없으나 앞으로 나아갈 길에는 확신 없던 신실한 신의 종.

주교 피에르는 교황청도 북부 정교회도 아닌 그저 신에게 가는 길을 좇기 위해 지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2화 8

머금은 차의 향이 썼다 (2)

짙게 그려진 용의 목 위로 짙게 그어진 선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있는 수많은 시체보다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보이는 깃발은 지금 잔뜩 피를 머금은 채 무거운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이미 폐에 피가 가득 찼는지 애써 묻는 질문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엉망인 모습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기사는 꼭 질문에 대한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궁··· 정공이 보냈나.”

거짓된 용의 사체로 이 먼 곳까지 유인당하고 만 용살 기사단의 단원들.

그들의 대장이었던 이는 자신이 추론할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이름을 내뱉었지만 정작 듣고 있는 이의 얼굴에는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기사들아. 내가 언제 용의 말을 따르라고 했더냐.”

그저 착잡한 목소리로 들고 있던 은색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을 뿐.

이미 잔뜩 피를 마신 사내의 검은 저 멀리 꺾여있는 용살기사단의 깃발만큼이나 제 색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푸욱-!

“······지켜야 할 것을 지키라 하지 않았더냐.”

검이 내지른 파육음과 함께 잘게 떨리던 기사의 심장이 멈춰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사내가 멈추자 방금까지만 해도 격렬했던 전장은 무덤과도 같은 짙은 침묵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래 살아 그런지 용의 발톱이 너무 길어졌다.”

무심히 검을 뽑는 프라우센의 옆으로 새하얀 손 하나가 손수건을 건네왔다.

입고 있는 옷이 검어서인지 유난히 눈에 띄는 하얀색이었다.

“그 발톱들을 먼저 깎아내야 녀석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겠어.”

받아든 손수건으로 무심히 얼굴에 튄 핏물을 닦아내던 프라우센은 여인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냐.”

“저의 기사 중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왜지?”

점점 시체처럼 식어가는 얼굴 위로 자그마한 의문이 맺히고 있었다.

죽음에서 도망쳤기에 세상의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목 없는 자들이 딱히 귀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온 자들의 말에 의하면 용에게 물렸다고 하더군요.”

“용?”

“당신께서 놓아주신 어린 용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입니다.”

용이라는 말에 다시금 뛰기 시작한 심장이었으나 그 단어가 블라드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프라우센은 곧 기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렇다면 못 돌아올 만도 하겠지. 본래 용이란 존재는 점찍은 사냥감을 놓치는 법이 없으니.”

다른 목 없는 기사들과는 달리 울고 있는 용살검에게 꿰뚫린 기사는 지금껏 라마슈트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격에 의한 차이 때문이었으며 죽음조차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 때문이기도 했다.

“직접 가서 꺼내와야겠군.”

온통 엉망이 된 피비린내 가득한 진창 위에서 프라우센은 저 먼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동안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곳은 돌아오지 못한 목 없는 기사가 있는 곳이었으며 용인지 기사인지 모를 기이한 녀석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

기후가 달라서인지 천장은 높았고, 창문은 넓었다.

게다가 곳곳에 놓여 있는 꽃병이며 벽의 무늬들까지 화사한 것이 북부와는 다른 중부만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방이 참 좋구만. 응접실까지 딸린 것을 보니 나름 대접 받고 있는 것 같고.”

“······.”

지금 앞에서 쩝쩝거리며 음식을 주워 먹는 노인만 없었다면 말이다.

보이는 모습은 초라해 절로 동정심이 일게 하는 노인이었으나 절대로 반가운 손님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블라드는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피에르를 보며 굳이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나저나 저 고양이 녀석과는 계속 같이 다니고 있었군.”

“니벨룬이라니까요. 저 아시잖아요.”

“수인족의 이름 따위 몰라. 나는 신께서 내려 주신 이름만 기억하니까.”

니벨룬은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는 피에르의 태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었다.

안개 가득했던 모시암에서는 전우와도 같았던 사이였으나 신실한 신의 종에게는 여전히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가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찾아온 겁니까.”

식사를 마쳤는지 조심스레 수저를 내려놓는 피에르를 보며 블라드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먹을 때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뒷골목의 불문율에 따라 여태껏 기다려주고 있었지만 이제는 답을 들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데려온 노인은 도대체 누구고.”

“······흠.”

블라드가 까닥인 고개 끝이 침실을 향하고 있었다.

그나마 피에르는 무언가를 먹을 기력이나마 남아있었지만, 처음부터 탈진 상태였던 노인은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진찰한 의사의 말로는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라고 했으니 어쩌면 내일쯤이면 송장 하나를 치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자는 이미 북부 연합이 안전을 보증한 인물일세. 그들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증인과도 같은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까.”

무언가 불길한 기척을 감지했는지 블라드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피에르는 그런 블라드를 보면서도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라두일세. 라두 드라굴리아.”

“······.”

피에르의 혀끝에서 노인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찻잔으로 향하던 블라드의 손가락 끝이 멈칫거렸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워진 것은 아마 니벨룬만이 느낀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마 자네의 이복형이 되는 사람이기도 할 거야.”

피에르가 내뱉은 이름 뒤로 기묘한 침묵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피로 이어진 이름, 라두 드라굴리아.

피에르에게서 노인의 정체를 들은 블라드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할아버지 같던데.”

피에르가 내뱉은 이름 하나가 가슴 속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요제프에게 보고 배웠던 대화의 기술이 지금은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굴리아가 사람 다루는 것이 꽤 거친 모양이네요. 저렇게 바싹 늙은 것을 보니.”

담담히 말을 마친 블라드가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으나 내 앞에서 더는 그 이름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눈빛과 함께.

“원하시는 대로 북부 연합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는 이곳에 있어도 좋습니다. 비록 내 저택은 아니긴 하지만.”

“······고맙군. 내가 자네 덕을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보이는 모습은 금발에 푸른 눈.

그러나 옆에 매고 있는 검의 색깔은 은색인 기사.

이제는 예전의 치기 어린 모습 따위는 찾아보기 힘든 블라드를 보며 피에르는 그만 김이 빠졌다는 듯 혀를 차고 말았다.

※※※※

블라드는 저택의 복도를 지나 로드리고의 응접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비록 다른 이의 땅이었지만 스쳐 지나가는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은 블라드에게 눈으로 인사해주었고 고개를 숙인 고용인들의 태도에는 정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하는 법이다. 이제는 아무도 너를 경험 없는 기사로 봐주지 않을 테니까.]

‘알아요.’

[대신 고개는 더 들고. 기사의 기본은 바로 당당함이라는 걸 잊지 마라.]

‘······알았다니까요.’

로드리고를 만나고 나서부터 부쩍 잔소리가 늘어나는 키하노였지만 블라드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제는 본인도 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까지 신경을 써야 할 시기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냥 넘기기에는 태도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로드리고 님.”

“오. 왔는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이미 제국헌병대의 기사들이 모두 모여 있던 참이었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으나 기사들이 동시에 자신을 쳐다보는 광경은 블라드에게 기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오귀스트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궁정공이 직접 보낸 기사들은 그저 허울뿐인 기사들이 아니었으므로.

“손님들은 잘 맞이했나? 보니까 한 명은 꽤 위태로워 보이던데.”

“이미 다 알면서 뭘 물어보십니까.”

“이미 다 알면서 물어보는 게 바로 내 버릇일세.”

오늘따라 마주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다들 능글맞은지.

유능한 수사관인 로드리고는 이미 노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으나 블라드의 입을 통해 직접 사정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북부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는 제가 보호하고 있으려고 합니다. 저 또한 북부 연합의 기사이니까요.”

“의무는 중요하지. 명예만큼이나.”

로드리고는 블라드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블라드는 불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좋든 나쁘든, 자신을 멋대로 평가하는 듯한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건국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

“들고 있는 검도 그의 검이 아니구요. 그러니까 저에 관한 관심은 그만 꺼주시죠.”

남에게 받는 기대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블라드에게 있어 로드리고가 보내는 끄덕임은 그저 성가신 것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던 블라드는 이번 기회를 빌어 확실하게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저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냥 제멋대로 살길 바라는 인생이니까요.”

“물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네.”

그러나 블라드의 거친 태도에도 로드리고는 딱히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그냥 하던 대로 해. 지난밤 목 없는 자들을 쫓을 때처럼.”

“······.”

왜냐하면, 그는 이미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입으로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누구보다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지켜 내려 노력하는 블라드의 모습은 제국의 기사들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궁정공께 돌아갈 생각일세.”

“그것참 반가운 소식이로군요.”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자네에게 꼭 한마디는 해 주고 싶어 불렀네.”

귀찮은 일행이 떨어져 나가 기쁜 블라드였지만 정작 그를 바라보는 로드리고의 눈빛은 진지할 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를 너무 믿지 말게.”

제국 황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제국헌병대의 선임 기사.

사냥개보다 날카로운 후각으로 감춰진 진실을 찾는 그가 블라드에게 무거운 경고를 남기고 있었다.

“그게 무슨······.”

“그 멀고 먼 동부의 마약을 북부에서 가장 먼저 얻은 이가 바로 요제프이지.”

황실과 궁정 귀족들을 휩쓸었던 녹색 마약이 있었다.

가지고 있는 훌륭한 장점들 속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던 엘프들의 마약이었다.

어찌나 대단한 약이었던지 수도 브리간테스는 아직도 그에 대한 후폭풍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교황청이 요제프를 목표로 삼은 것은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내 말 잊지 말게.”

“······.”

그런 게 아니라고 단호히 외치고 싶었으나 로드리고가 뿜어내는 기세는 절로 블라드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있었다.

평생을 누군가에게 반항하며 살아왔던 블라드였지만 진실을 품은 채 경고하는 로드리고의 말은 쉽게 떨쳐내기 힘든 진득한 것이었다.

※※※※

녹색의 찻물 위로 검은색 가루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다도의 기본에 맞추어 애써 우려낸 맑은 찻물이었으나 이제는 그 노력도 부질없다는 듯 온통 검은색이 되었을 뿐이었다.

“지하에 갇혀있다고 합니다. 영지 내의 사제들이 엄중히 봉인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요제프는 자야르의 보고를 들으며 골치가 아프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치밀한 계획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요제프는 지금 갑작스레 생긴 돌발상황에 언짢음을 느끼고 있었다.

“왜 도망가지 못했을까. 본래 딛고 있는 땅에 구애받는 자들이 아닐 텐데.”

묻고 있었으나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자야르는 기사이지 사특한 존재를 다루는 자가 아니었으니까.

“블라드 때문인가.”

요제프 바예지드가 유일하게 기꺼워하는 변수인 쇼아라의 블라드.

아마 녀석이 무언가를 저지른 모양이라 생각한 요제프는 그저 희미한 웃음과 함께 들고 있던 약봉지를 벽난로로 던져 넣었을 뿐이었다.

“가루도 떨어졌으니 조만간 연락이 오겠군. 기다려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말을 마친 울대를 따라 검은색의 찻물이 흘러 들어갔다.

한 모금을 넘길 때마다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에는 총기가 돌아왔고 또 한 모금을 넘길 때마다 짙었던 눈그늘은 어느새 제 색깔을 찾고 있었다.

“······많은 약을 먹어봤지만, 이 약은 진짜 쓰군.”

찻잔을 다 비워낸 요제프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불평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요제프는 어느 순간부터 얕은 기침을 내뱉지 않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요제프에게는 분명 완연한 병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3화 17

별 밝은 밤 (1)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떠 있는 별빛들이 밝은 밤이었다.

강철공 티무르는 쌓여있는 하얀 눈들을 카펫으로 삼은 채 앞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철로 된 성벽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밤은 오랜만이었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사내를 마주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만의 일이었다.

“앞니는 언제 빠졌나? 누구한테 맞기라도 했어?”

“한 대 맞긴 했지요. 세월이라는 놈한테요.”

빠져 있는 앞니 덕분인지 웃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으나 지금 강철공 앞에서 같이 모닥불을 쬐고 있는 노인은 한때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다녔던 바라노프의 기사였다.

흘러간 세월을 따라 이제는 검을 내려놓고는 은퇴한 그였으나 그럼에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은 노인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추억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래도.”

“옛날이 좋았지요. 젊었을 적에는 이런 술을 통으로 마셔도 다음날 멀쩡했었는데 말이죠.”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통나무로 만들었으나 지금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집은 굉장히 공을 들인 크고도 넓은 벽돌집이었다.

“그래도 그 세월을 지나 저만의 장원을 얻었으니 아주 의미 없는 인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티무르는 세월을 한탄하는 옛 부하를 보며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물었다.

지금 노인이 말하는 장원은 티무르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가 평생 바쳐왔던 충성에 보답하기 위한 명예로운 선물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중부 놈들이랑도 한 판 붙으실 생각이라면서요?”

“해야지. 그놈들이 기어들어 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크으. 오랜만에 전쟁 이야기를 들으니 심장이 뛰는 것 같군요.”

노인은 티무르가 직접 건네준 값비싼 술병을 들며 즐겁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점점 흥취에 젖어가는 노인을 보는 티무르의 입가에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이 걸쳐 있을 뿐이었다.

“한창 바쁘시겠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시니······.”

“잊을 리가 있나.”

티무르는 머금고 있던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지치고 말았는지 고개는 힘없이 숙이고 있었지만 티무르의 눈만큼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잊지 않을 걸세. 나의 충성스러운 자네를.”

“네?”

스르릉-

모닥불이 만드는 불길이 검면에 비쳐 일렁였다.

갑작스레 검을 뽑아 드는 티무르를 보며 당황한 노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해독제까지 가지고 왔는데 전혀 쓸모가 없었어.”

“티무르 님.”

“사실 자네가 마신 건 술이 아니라 독약이었거든.”

평생을 나와 함께 해주었던 충성스러운 기사.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는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비겁한 도망자일 뿐.

커다란 말조차 죽일 수 있는 독약이었으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킨 노인을 보며 티무르는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부디 그곳으로 가지 말고 마지막까지 나의 기사로 있어 주게.”

아마 이것이 내가 자네를 위한 마지막 은퇴 선물이겠지.

신념을 버리고 만 자신의 부하를 위해 티무르는 아무 말 없이 그가 흘린 명예를 다시 돌려주었다.

촤악-!

슬프게 뻗은 검로 위로 둥글게 떠 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위로 떠올랐던 노인의 얼굴은 저 위에 있는 달을 한껏 담았다가 천천히 자신의 주군에게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덤은 깊게 파도록 해라. 아무도 확인하지 못하도록.”

“네 공작님.”

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딛고 있는 땅부터 다져야 하는 법.

티무르는 그 준비가 너무 늦지 않았음에 안도했고, 또한 슬퍼하고 있었다.

“······."

들고 있는 종이에서 이름 하나를 지워낸 티무르는 조금씩 잦아드는 모닥불을 보았다.

여전히 타오르는 그 불 위에 오래된 추억 하나를 던져 넣은 티무르는 마지막 남은 술 한 모금을 들이키고 말았다.

※※※※

‘요제프 바예지드를 너무 믿지 말게.’

‘교황청이 그를 노렸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등진 채 홀로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푸른 달빛에 비치는 금발이 이제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습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나를 흔들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로드리고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곱씹던 블라드는 그의 진짜 전하려던 저의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이것도 뭐, 북부에 대한 견제 그런 건가?”

제국헌병대의 선임 기사는 블라드의 가슴 속에 의심의 씨앗 하나를 남겨두려 했지만 이미 그 씨앗은 흔적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뒤였다.

그만큼 블라드가 요제프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는 굳건한 것이었으니까.

주군이자 은인이었으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요제프를 의심하느니 차라리 로드리고를 의심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 판단일 것이다.

똑똑똑.

“······!”

그러나 너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어서일까.

블라드는 창문을 두들기는 검은 그림자를 너무 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온 그 그림자는 블라드의 예민한 청각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으며 퍼트려 놓은 기감 조차 속일 정도로 능숙한 것이었다.

“밤바람이 춥군. 문 좀 열어주게.”

“마커스?”

창이 넓었기에 발을 디딜만한 공간이 있던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그를 보며 블라드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는 어떻게······.”

“긴히 전해 줄 말이 있어서 말이지.”

바예지드의 까마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창을 타고 넘어와 앞에 있던 손님용 테이블에 앉았다.

데워놓은 찻주전자를 들어 따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 오히려 블라드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여전히 나를 마커스라고 부르는군.”

“또 이름이 바뀌었나요.”

“요즘에는 산도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이제는 침입자에서 손님으로.

본래 모습은 알아볼 수도 없게 얼굴 곳곳에 상처 가득한 남자는 따라놓은 찻물을 마시며 조용히 블라드에게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뭔가요?”

“북부정교회에서 자네에게 보낸 편지일세. 정확히는 북부정교회 제 2기사단장인 귄터 경이 보낸 것이지.”

안개 가득했던 모시암에서 함께 검은 여인을 대적했던 성기사.

귄터의 모습을 떠올린 블라드는 서둘러 마커스가 전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서류인데요?”

“면죄부일세.”

봉투 안에 들어있던 종이는 여러 장이었다.

그중 하나는 귄터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으나 그 뒤에 붙어있는 종이들은 딱딱한 서식만이 가득한 서류들이었을 뿐이었다.

“역시 한 번 찢어본 적이 있어 한 번에 알아보는군.”

“이걸 저한테 왜 주시는 거죠?”

남들은 갖지 못해 안달인 면죄부였지만 정작 블라드에게는 불쾌한 기억만이 가득한 것이었다.

게다가 세속에 물든 교황청과는 다르게 북부정교회에서는 쉽게 면죄부를 내주지 않았으나 그것을 받아든 블라드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서명은 되어 있네. 그것도 교황께서 직접 하신 것이지.”

“그러니까 이걸 왜······.”

“북부정교회는 자네가 사람을 한 명 죽여주길 바라고 있네.”

북부정교회의 기사단장이 작성했으며 고귀한 교황이 서명했고, 바예지드의 숨겨진 칼날이 전달해 준 면죄부.

블라드는 그 면죄부를 통해 대신할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는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누구를 죽여달란 말입니까?”

불길한 예감이 든 블라드는 마커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나 온통 엉망이 된 사내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요제프 바예지드.”

마커스가 내려놓는 찻잔에서 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내려앉는 블라드의 심장 소리와 함께.

“부디 자네의 손으로 사특한 존재와 결탁한 북부의 오점을 죽여주길 바라네.”

들려오는 익숙한 울림에 블라드의 손이 떨려왔다.

요제프 바예지드.

불길한 까마귀가 말하는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나를 알아봐 준 이름이었으며 블라드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것 중 제일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콰아아앙-!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연유라도 물어보고 싶었던 블라드였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굉음에 온몸이 휘청이고 말았다.

“······조금 늦었나 보군.”

-습격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지하 감옥이 털렸어!

저 밖에서부터 보이는 자욱한 연기.

그리고 그 연기를 타고 오르는 병사들의 거친 외침까지.

갑작스러운 굉음에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재빨리 깨어진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오러를 세워라. 블라드. 그가 지금 너를 보고 있다.]

그러나 바라본 밖에는 키하노의 말처럼 블라드를 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저 멀리 종탑 위에 서 있는 사내는 온통 색이 바래 있었으나 지니고 있는 압박감만큼은 그 어떤 기사들의 것보다도 무거운 것이었다.

“······프라우센.”

두근-!

블라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요란한 진동과 함께 그동안 나를 지탱해 준 세계가 온통 흔들리고 있었으나 울고 있는 검만큼은 앞에 있는 자를 상대해야 한다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막아!

-네 이놈들!

“요란하게도 들어오셨군.”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감옥이었으나 이제는 하늘마저 보일 정도로 뻥 뚫린 공간이 되었다.

반쯤은 무너진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자야르는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들을 베고는 뒤에 있는 요제프를 향해 손짓했다.

“가시죠. 요제프 님.”

“······자네까지 이럴 건 없어.”

요제프의 말에 안대 위에 머문 돌가루들을 털어낸 자야르는 곧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옥사나 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검을 바친다.

레이디 옥사나를 위해 오스카르 가문에서 바예지드까지 따라온 외눈의 기사는 이제 그녀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명예까지 바칠 차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디 하고 싶은 일을, 그리고 해야할 일을 하십시오. 저는 요제프 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고집불통인 기사였다.

요제프는 자신의 헛된 설득으로는 자야르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저 목표했던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숨이 차지 않아 좋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들 살았단 말이지?”

날씨는 추웠고 내려가는 길은 험했으며 지금도 곳곳에는 시퍼런 칼날들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요제프의 육체에는 조금의 움츠러듦도 없었다.

어찌 보면 해방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을 느끼며 요제프는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까지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

뛰는 심장은 요제프에게 있어 언제나 벅찬 것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충분히 기꺼운 것이었다.

-너는······.

“라마슈트 님이 보내서 왔다.”

아른슈타인의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는 쇠사슬에 매달려 둥둥 떠 있는 목 없는 기사가 있었다.

감싸인 곳마다 신성한 구절이 적혀 있는 종이가 매어져 있는 그런 쇠사슬이었다.

까앙-!

순간, 자야르가 내지르는 일격에 두꺼운 자물쇠가 잘려 나갔다.

어느 때보다 선명해진 자야르의 세계가 그가 얼마만큼 단호한 결심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지금 꺼내주마.”

죽은 자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독과 같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는 그저 종이 뭉치일 뿐인 부적들.

사특한 자를 위해 손을 뻗는 요제프의 머리 위로 별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오늘은 하늘이 맑군.”

껍질 벗은 나의 본모습은 조악하며 형편없을지라도 그래도 나는 빛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깨어져 있던 돌멩이라 할지라도 빛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요제프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쓰러져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 타오르는 나의 불꽃은 저 위에 있을 별들만큼이나 찬란할 테니까.

찌이익-!

인생의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따라서.

태어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죽음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가져가기로 요제프는 결심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4화 13

별 밝은 밤 (2)

“······분명 닫고 갔었는데.”

늦은 밤, 홀로 집무실에 들어선 요제프는 자그맣게 열려 있는 창문을 보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가 싶어 걸어간 창틀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중이었다.

“불을 지펴야겠군.”

그저 잠시 일을 볼 요량으로 들어온 집무실이었으나 결국 벽난로까지 켜야 하는 수고로움에 요제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쿨럭, 쿨럭.”

새빨갛게 달아오른 성냥이 떨어지고 장작에 불이 붙자 요제프는 점차 올라오는 그을음에 그만 기침을 내고 말았다.

어깨까지 들썩이는 깊은 기침이었으나 요제프는 익숙한 듯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을 뿐이었다.

“음?”

벽난로에 불을 붙인 요제프는 그제야 어른거리는 불빛에 비치는 낯선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바깥의 공기가 가시지 않은 싸늘한 책상 위에 놓인 온통 새까만 편지 한 장.

그 편지는 분명 낮에는 보이지 않았었던 낯선 것이었다.

“······심지어 직인조차 없군.”

마땅한 직인조차 없어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를 보며 요제프는 혹시나 싶어 장갑을 꼈다.

그러나 염려와는 다르게 주인 모를 편지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그저 유려하게 쓰인 글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요제프.

다만 적혀 있는 필체가 고전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몇십 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오래된 필체를 보며 요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란 누구에게는 영원히 머물 것만 같은 잔잔한 호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금세 지나가고 마는 폭포와도 같은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쓴 편지였다.

오래된 신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름 모를 이의 전언은 조금씩 요제프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요제프.

“쿨럭, 쿨럭. 음······.”

집중하고 싶었으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침이 끊임없이 요제프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전히 방 안에 머무는 추위는 독이었고 온기를 통해 전해지는 그을음 또한 독이었다.

그 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요제프는 까맣게 굳어버린 잉크를 애써 더듬어보는 중이었다.

-저는 당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느낍니다. 아마 본인 또한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음?”

어느새 편지의 끄트머리까지 다다른 요제프는 곧이어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가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열기에 요제프는 크게 당황했으나 주인 모를 검은 편지는 마치 아교로 붙이기라도 한 듯 요제프의 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검게 빛나는 연기 아래로 자그마한 직인이 그려지고 있었다.

점차 모습을 갖춰가는 직인은 오랫동안 요제프가 쫓고 있던 것이었으며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불경한 것이기도 했다.

-요제프 바예지드. 태어날 때부터 깨어져 있던 가련한 돌멩이.

그리하여 마침내 그려진 신을 모독하는 사특한 자의 문양.

그 문양을 본 요제프는 지금 들고 있는 검은 편지가 누가 보낸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의 뜻은 가혹하여 어긋남이 없으니 곧 그의 뜻이 당신에게 찾아갈 겁니다.

편지를 다 읽어내린 요제프는 마지막에 쓰인 글귀를 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어머니께서 직접 수놓아 주신 고운 손수건에는 차마 외면하기 힘든 새빨간 토혈이 가득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

본인의 부주의도, 누군가의 저주도 아닌 그저 타고난 수명으로.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을 시간의 흐름이었지만 요제프에게만은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

[온다!]

“······!”

저기 나를 보고 있는 남자가 웃고 있다.

겨울에 어울리는 새하얀 백발을 가진 남자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달을 배경 삼아 어느새 블라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프라우센!”

“그동안 잘 지냈느냐.”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블라드는 서둘러 자신의 세계를 개방했다.

그러나 블라드와는 달리 아른슈타인의 저택은 프라우센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콰아아앙-!

거침없이 그어지는 검격에 오래된 저택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발레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자욱한 돌먼지 속에서 블라드는 필사적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너와 같은 검술을 쓰는 상대다. 정면돌파로는 승산이 없어!]

가까스로 빗겨낸 일격이었지만 블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 너머로 마주한 프라우센을 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잘 됐군.”

“무엇 때문에 나를 찾고 있었지?”

능청스레 되묻는 프라우센의 모습에 블라드의 세계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한시도 잊은 적 없던 이름이었지만 눈앞의 프라우센은 이미 그녀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눈치였으니까.

“······잊고 있었으면 똑바로 알려줘야겠지.”

블라드의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본래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천천히 밀려나는 자신의 검을 보며 프라우센은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유스티아다.”

“누구?”

“그날 네가 죽인 기사의 이름.”

까드드득-

“산 로지노의 유스티아.”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카나리아가 있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살아난 나는 못다 한 복수를 대신해 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늘 너에게서 유스티아의 핏값을 받아낼거다.”

다짐하듯 읊조리는 블라드의 눈빛이 어느새 용의 것과 닮아 있었다.

네가 아닌 오직 나만이 갖추고 있는 개성.

울고 있는 검과 함께 깨어난 용의 개성이 블라드의 피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

콰직-!

믿을 수 없는 완력에 이은 믿을 수 없는 속도.

그저 힘만으로 프라우센을 후려친 블라드는 어느새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빠르구나!”

방금의 외침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듯 블라드의 검이 프라우센의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들이칠 수 있는 모든 각도를 따라 달려드는 용살검의 잔상들이었다.

콰앙! 쾅! 쾅!

검이 닿는 곳마다 벽이 터져나갔고 발을 딛는 곳마다 바닥들이 깨어져 나갔다.

복도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황금빛의 번개는 밖에서 보았을 때는 마치 터져나가는 폭발의 잔향과도 같은 것.

그렇게 휘몰아치는 검의 폭풍우 속에서 프라우센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흐으으아!”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도 블라드는 조금씩 도약할 수 있는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를 창시한 검사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의외성의 순간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오늘 유스티아의 핏값을 갚아주마!”

휘청이던 프라우센을 멀리 밀어낸 블라드는 찰나의 순간을 통해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당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을 필살의 일격을 위해서.

그리하여 치켜뜬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일직선으로 그어진 황금빛 지평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가각-!

뜨고 있는 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뻗는 검압을 이기지 못해 갈라지는 복도의 균열들이 모두 프라우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블라드, 블라드. 볼 때마다 신기한 녀석이로구나.”

흉악한 기세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블라드의 세계였지만 정작 상대하는 프라우센의 표정에는 조금의 당황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데 유스티아라는 기사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

콰아아아앙-!

마침내 블라드가 뻗어낸 일격이 프라우센에게까지 닿았다.

빛처럼 빠르고 떠오르는 해보다도 묵직한 블라드의 일격이.

그러나 그 찬란했던 일격조차도 색을 잃어버린 기사 앞에서는 천천히 숨을 죽일 뿐이었다.

웅-웅웅-

다만 블라드의 일격이 아무런 가치 없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프라우센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린 용살검이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반응하는 두 개의 조각을 느끼며 블라드는 그만 경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용의 조각?”

그는 용을 죽이기 위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품고 있는 것은 용의 조각.

블라드는 온통 모순되어버린 프라우센의 모습에 블라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쩌어엉-!

저택을 관통하는 거친 충격이 있었다.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질 만큼 커다란 진동에 복도를 내달리고 있던 피에르는 그만 사정없이 구르고 말았다.

“······그놈을 만나고 나서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군.”

조용히 분통을 터트린 피에르는 옆에 널브러져 있던 라두를 업어 들고서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런.”

그러나 가고자 하는 옳은 문은 좁았고 내가 뜻하는 바는 너무 멀었다.

어느새 복도 저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피에르는 품에서 자그마한 법봉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내 언젠가는 이렇게 죽을 것 같긴 했지.”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처럼, 사제는 신의 뜻 아래서 죽는 법이었다.

수없이 그려봤던 마지막이었기에 오히려 담담해질 수 있었던 피에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내가 홀로 어두운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지금도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지 저택에 울리는 진동이 요란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목 없는 기사들은 투구 속에서 스산한 귀화만을 내비칠 뿐, 그저 피에르와 라두를 향해 천천히 걸어올 뿐이었다.

-그런 제가 기댈 것은 오직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촤르르륵!

순간, 신의 뜻을 읊조리던 피에르의 뒤에서부터 경망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앙증맞기까지 한 그 소리는 분명 긴장된 복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주교님! 지금입니다!”

“······구슬?”

한참 기도문을 외우던 피에르는 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복도 한가운데로 알록달록한 구슬들이 쏟아져 나가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피에르도 목 없는 기사들도 그만 당황감에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빨리빨리!”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피에르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았다.

기둥 사이에 숨어서 빼꼼히 내밀고 있는 꼬리 하나.

신비를 다루는 꼬락서니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

구슬들을 뒤로 한 채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피에르를 보며 목 없는 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은 허무하게 빗겨나가고 말았다.

우당탕탕!

니벨룬이 손가락을 튕기자 복도에 잔뜩 깔린 구슬들이 살아있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마치 구슬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파도의 움직임에 갈 곳 잃은 발걸음들이 마구 미끄러지고 있었다.

-마법이다!

-모두 경계해라!

작디작은 구슬이었으나 얼마나 매끄러운지 발에 살짝 닿기만 해도 균형을 잃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구슬들이 점점 목 없는 기사들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잘했다!”

“빨리 나가자구요!”

이리저리 나자빠지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피에르와 니벨룬은 기뻐했지만, 몸을 돌리자 보이는 광경에 표정이 잔뜩 굳고 말았다.

몸을 돌린 복도의 반대편에도 어느새 목 없는 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구슬 또 없나?”

“······저래 보여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거거든요. 구슬치기로 애들한테 따와야 하는 거라서.”

“그건 또 뭔 개소리야!”

고양이 주제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니벨룬을 보며 혀를 차고만 피에르는 부축하고 있던 라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법봉을 들이밀고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성경을 읊기 시작했다.

“다음 거, 다른 거······.”

“집중 좀 하게. 좀!”

배낭을 뒤적이는 니벨룬을 보며 목 없는 자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검사에게 있어 금기나 다름없는 것.

-쳐라!

복도를 내달리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니벨룬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급해지는 손길에도 찾으려 하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고 뛰어오는 기사들은 점점 가까워질 뿐이었다.

콰드득-!

순간, 요란한 소리와 달려드는 기사들을 가로막는 나무파편들이 있었다.

요제프가 머물던 방문이 터져 나오며 만든 파편들이었다.

“산도르!”

“마커스 경!”

서로 다른 이름이었으나 뜻하는 이는 같았다.

산도르이자 마커스인 남자는 한 손에는 레이피어, 다른 한 손에는 망고슈를 든 채 가차 없이 목 없는 기사들을 향해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열도록 하지.”

사내가 들고 있는 얇고도 짧은 검들은 갑옷의 틈새를 찔러대며 목 없는 자들을 봉쇄하고 있었다.

그 신기와도 가까운 검술에 피에르와 니벨룬은 급박한 상황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릴 뿐이었다.

“라두 경도 두고 가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아니오.”

목 없는 자들을 온몸으로 틀어막은 마커스는 레이피어를 든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사람은 바로 블라드니까.”

요제프의 방에서 일련의 행위들을 마치고 나온 마커스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임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행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는 라두도 요제프도 아닌 블라드에게 관련된 것이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5화 10

처음과 같은 끝으로

하늘 위의 달빛이 밝을수록 그 밑에 있는 그림자도 짙어졌다.

지금도 계속해서 담을 타고 넘어오는 목 없는 기사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였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목 없는 자들은 이제야 부정한 깃발 아래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아른슈타인이라면 시작을 알리기에 알맞은 장소겠지요.”

까만 상복을 입은 여인은 달을 등지고 있었다.

푸른 달 위에 떠오른 검은 물방울 같은 그 여인을 아른슈타인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야 다들 저를 바라봐주는군요.”

검은 여인 라마슈트는 오랫동안 지금 같은 순간을 기다려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순간을.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타 죽고 자식 잃은 부모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애써 외면하던 세상의 시선들을 지금처럼 모으고 싶었다.

“다들 진작에 이래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을 향한 순종 대신 세상에 대한 거친 저항을 선택한 타락한 성녀 라마슈트.

그녀는 단단히 굳어버린 이 세상에 무언가를 덧칠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색이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색을 갖기 위해 그녀는 순결한 자신의 영혼 위에 새까만 어둠을 덧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콰아아앙-!

그리하여 오늘 밤 그려진 그녀의 세계.

저 앞에서 무너지는 아른슈타인의 저택을 보며 라마슈트가 환히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용의 조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두근-!

검은 울었지만 남자는 웃고 있었다.

맞지도 않는 용의 조각을 심장에 매단 채로.

온통 색이 바랜 채 웃고 있는 프라우센을 보며 블라드는 기괴하기보다는 오히려 서글픈 마음이 먼저 들고 말았다.

“······아니지. 이건.”

그동안 나는 여태껏 당신의 흔적을 쫓아 왔었건만.

그러나 온통 누더기가 되어버린 남자에게서는 블라드가 기대했던 영광된 소드마스터의 흔적 따위는 남아있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당신 소드마스터 아니야?”

오늘 밤은 너무 깊다.

너무 어둡고 짙어서 내가 보는 것들이 전부 이상하게 뒤틀려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믿었던 요제프도, 내가 따라왔던 소드마스터도 전부 제 색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블라드는 다시 자신의 검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어린 가능성,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정당한 대가.”

도시 모시암에서 깨지 못한 잠에 빠져가던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도.

“이거 전부 다 당신이 지키라고 말하던 규율들이었잖아.”

단순히 높았기에 동경하던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옳았기에 우러러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는 여태껏 그가 해왔던 업적과 내가 따라왔던 규율들까지 모욕하고 있었으니 블라드는 여태까지의 자신이 쳐왔던 발버둥이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런데 당신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가까이서 바라본 동경하던 세계는 온통 썩어 짓물러 있었다.

이제야 속속들이 마주하고만 프라우센의 악취에 블라드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건 소드마스터가 아니야.”

이를 악문 블라드가 프라우센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검이라는 붓으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을 소드마스터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추악한 세계를 현실에서 지워내기 위해 자신의 붓을 집어 들었다.

“오늘 여기서 너를 지워주마.”

블라드의 눈동자에서부터 황금빛 지평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의지를 따라 흐르는 그 선은 검을 타고 흘러와 정확히 프라우센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으나 분노로 인해 붉어진 눈동자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 오랜만에 듣는군.”

“그 입 닥쳐라!”

콰아아아앙-!

내가 따라온 길을 비웃는 프라우센을 향해 블라드의 세계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묵직한 일격에 벽까지 밀려나고만 프라우센은 실로 곤란하다는 듯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여태껏 맞붙었던 이 시대의 용과 기사 중에서도 이만큼 프라우센을 몰아붙였던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지키고자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지.”

“그런데 왜 변했어!”

맞닿은 두 개의 검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보이는 색깔은 같은 은색이었으나 품고 있는 의지는 서로 달랐기에 밀어낼 수밖에 없는 검들이었다.

“······본래 사람은 모두가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다. 이 어리고 어설픈 기사야.”

팽팽하던 검의 균형이 조금씩 블라드에게로 밀리기 시작했다.

꿈을 좇았으나 현실을 이해하고만 프라우센이 지닌 무게감 때문이었다.

키하노는 어린 가능성을 위해 검을 들라고 했다.

“아무리 어린 가능성이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희생시킬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키하노는 있어야 자리에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했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더라도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그리고 언제나 정당한 대가만을 받으라고도.

블라드는 고딘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던 정당한 대가의 무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정당한 대가보다도 더욱 욕심부려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지랄하지 마! 이 개자식아!”

그러나 소드마스터의 입에서부터 점점 지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명예로운 규율들.

현실에 굴복하고만 늙은 황제가 내뱉는 말에 그의 길을 따라왔던 어린 기사는 조금씩 상처 입고 있었다.

“너 같은 가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한낱 시체 따위가 내뱉는 말을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프라우센을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상대가 누군지 가벼이 규정해버리는 용의 눈빛처럼.

어설픈 용의 완력을 가지고 노는 소드마스터의 현란한 기교에 안 그래도 분노로 타오르던 블라드의 심장은 더욱 요동치고 있었다.

[안된다! 블라드! 용의 세계로 넘어가지 마라!]

나의 안에 소중히 품고 있던 키하노가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점점 새파래지는 블라드의 눈빛은 지금 나를 흔들려 하는 모든 세계를 거부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믿고 따랐던 신념을 온통 무시해버리는 프라우센의 말에 블라드는 그동안 참아두고 있던 시뻘건 분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블라드!]

“흐아아아아!”

더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과 함께.

꽉 쥐고 있던 블라드의 주먹이 어느새 울고 있는 검을 잡고 있었다.

주인이 내뿜는 빛과 함께 불길해지고만 용살검은 어느새 별로 만들어진 자신의 근본조차 잊을 정도로 시퍼렇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짓밟아주마!”

길어진 송곳니는 날카롭고 푸르렀던 눈동자는 온통 새파래지고 만 기사의 이름은 블라드 드라굴리아.

분노로 인해 기울어진 블라드의 세계는 어느새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용이로군.”

분노로 인해 어느새 돌아가 버린 블라드의 또 다른 면(面)은 타고난 용의 세계.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던 블라드의 세계에서 기어코 용의 흔적을 발견해버리고만 프라우센은 너 또한 변하고 말았냐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용살자고.”

복도를 따라 달려오는 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용의 뒤에 비치는 세계는 아까 보였던 찬란한 황금빛이 아닌 불길한 붉은 핏빛이었을 뿐.

더는 존중할 가치가 없는 불길한 세계를 향해 프라우센이 검을 치켜들었다.

푸욱-!

불길한 용의 세계를 부수고 찢어발기고 마는 가장 완벽한 용을 가른 용살자의 검.

그리하여 기어코 밀어 넣고 만 검 끝으로 바들거리는 어린 용 한 마리가 붙들려 있었다.

“끄으으······.”

한때는 내가 잡을 수도 있던 검이었건만 이제는 나를 꿰뚫고 만 은색의 기사.

블라드의 등 뒤로 삐죽 솟아 나온 은색의 기사는 세계수에서 보았던 어린 기사를 기억하며 오늘따라 밝게 떠오른 달을 향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좋았다. 블라드 아우레오.”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가 프라우센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용의 피가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프라우센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은 어째서일까.

“하지만 용의 모습으로는 안 돼. 그걸로는 나를 멈출 수 없어.”

“······끄으으.”

드드드득-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나올 때의 느낌이 더욱 섬뜩했다.

블라드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검의 차가움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경련하고 말았다.

“유스티아라는 이름은 기억하도록 하마. 적어도 그만한 가치는 있었으니.”

빠져나가는 검을 따라 세상이 반전하고 있었다.

딛고 있던 땅은 가까워졌고 등지고 있던 하늘은 멀어진 채로.

풀썩.

온통 부서진 2층의 벽을 넘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만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아까까지는 보지 못했던 밝고도 맑은 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달을 가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 또한.

“······요제프 님.”

여전히 해보겠다는 듯 꽉 쥔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으나 정작 마주한 요제프의 눈빛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 눈빛을 본 블라드의 손에서부터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니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언제나 밝은 창을 등진 채 나를 바라봐주던 눈동자가 지금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검은 눈동자였으나 오늘만큼은 너무나 낯설어보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해요······. 제발!”

누워 있는 땅은 차가웠지만, 눈으로 와닿은 광경은 더 차가웠다.

블라드는 자신을 내려보는 요제프를 향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말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저 겨울이 불어대는 찬 바람뿐.

온통 반전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제프를 향해 블라드는 그만 자그마한 울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로써 나에게 더는 갚을 것은 없는 거다. 블라드.”

블라드의 간절한 부탁에도 요제프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검은 여인을 따라서,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온 검은 마차를 향해서.

마치 관처럼 생긴 새까만 마차에 요제프가 올라설 때마다 블라드가 세워놓았던 세계 하나가 처참히 깨어지고 있었다.

그 세계는 장식 없는 검만을 든 채 헤매고 있던 겨울날,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요제프가 만들어주었던 세계였다.

“흐으으······.”

빠져나가는 피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내려다보는 요제프의 시선 때문인지는 몰라도 블라드는 사무치는 차가움에 점점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으로 요제프가 사라지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곳이 아닌 여기를 보라고 크게 외치고 있었으나 돌아선 요제프의 뒷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굳건했다.

“아니야, 흐으으······. 쿨럭. 아니잖아요.”

오늘의 밤은 차가웠고 내려앉는 달빛이 무거웠다.

처음 만났었던 그때의 겨울과 마찬가지로.

핏물과 함께 섞여 내리는 블라드의 눈물에 요제프의 뒷모습이 점점 희뿌예지고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6화 10

다시 일어설 때에는 (1)

스투르마에 있는 집무실에서 페테르 바예지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내려놓은 펜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온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미리 약속을 했어야 한다. 아게.”

“일이 급했소. 시급하게 알릴 소식이기도 했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동물의 가죽을 입고 머리 곳곳에 땋아놓은 색색의 띠들이 화려한 남자.

부다아트 족의 아게는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지도 않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다. 말해봐라.”

족장의 아들인 아게는 바예지드의 가주인 페테르와 대화하기에는 분명 손색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페테르는 아게가 짓고 있는 표정의 심각함을 알아챘기에 사소한 부분은 넘어가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소. 우리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도.”

“어째서?”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에 야만인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본래 약탈을 하던 그들의 습성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아게는 단순히 먹을 것이 떨어져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소.”

“겨울에는 원래 그렇지 않았나.”

“그리고 용들도. 당신들이 린드부름이라 부르는 용 말이오.”

북부의 설원 너머 인간들이 닿지 못하는 땅에서부터 몬스터들과 함께 용이 넘어오고 있었다.

페테르의 말처럼 해마다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훨씬 많았고 용살기사단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 야만인들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힘든 숫자이기도 했다.

“용들이? 예전처럼?”

“더 심하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니까.”

용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아게의 말에 페테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브노마의 조각이 움직였을 때야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용들이 동시에 날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소식인가?”

“이미 부족 두 곳의 연락이 끊긴 상태요. 가장 최북단에서 자리 잡은 이들이었고.”

아게의 말에 따르면 지금 야만인들은 난폭해진 용들과 몬스터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는 바예지드에게도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지금 너희를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하다.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해.”

“그러면 피난민들이라도 받아주시오. 그들이 당신들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오.”

“내가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다.”

내뱉는 거절은 차가웠고 또한 단호했다.

북부의 영주들과 야만인들이 맺은 협정은 견고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영역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고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무언가를 돕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가 되어 있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벽 안의 땅은 좁고 내 영지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도 부족하다. 네가 원하는 도움은 이미 협정의 내용을 뛰어넘고 있어.”

“······.”

“그만 가 봐라. 너의 무례를 받아준 나의 배려를 잊지 말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금 펜을 드는 페테르를 보며 아게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울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결국은 똑같아졌군.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졌어.”

“······.”

“헐거워진 우리의 협정은 결국 깨지고 말 거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서로를 겨누게 되겠지.”

나에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말한 남자가 있었다.

켜켜이 쌓아왔던 증오들을 잠시 미뤄놓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손을 맞잡자고 한 남자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리가 마시기 힘든 독을 삼켜야 한다고 말했던 남자였다.

“요제프 바예지드라면 들어오라고 말했을 거요. 쇼아라의 뒷골목에서도 그는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만.”

“이제 북부에서 다른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군. 또다시 겨울이오!”

“그만하라고 했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아게를 바라보는 페테르의 핏발 선 눈 만큼은 여전히 부릅떠 있는 중이었다.

“······그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결국은 착각이었지만.”

흐트러진 페테르를 바라본 아게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더는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기에.

예전과는 달리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봐주는 바예지드를 찾아왔으나 결국 그가 들고 가는 것은 세계 사이에 그어진 차가운 경계선뿐이었다.

“······.”

아게가 나간 뒤에도 페테르는 오랫동안 주먹을 불끈 쉰 채 서 있는 중이었다.

평생을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 인생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으므로.

자신의 불쌍한 아들이 못다 이루고 간 흔적을 보고만 페테르는 오늘만큼은 독한 술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지난밤의 악몽을 지우고 싶다는 듯 돌무더기를 치우는 인부들의 움직임 분주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길에도 곳곳에 뿌려진 핏자국만큼은 여전했고 반쯤 무너져 내린 저택의 모습은 처참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앞에 두고 있던 파블로는 잔뜩 우그러진 방패를 등에 멘 채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저택의 창가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일어나지를 않으시네요.”

“애초에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용한 거지. 아예 가슴팍이 꿰뚫려 버렸는데.”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는 달리 벽면 곳곳에 금이 가 있는 방이었다.

그 초라한 모습은 지금 침대 위에 누워있는 블라드의 모습과도 닮아서 괜스레 처량함을 더하는 것만 같았다.

“악운도 운이라더니. 정말 살아날 줄은 몰랐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꽤 열심히 치료하시던데요.”

“······그거야 병자 앞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했으니까 그러지!”

치솟는 분을 참지 못한 채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피에르였으나 다급했던 그때 블라드에게 보인 손길만큼은 진실했었다.

비록 이단심문관 출신이었기에 치유의 술법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능숙한 그의 처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블라드는 관속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요즘 하인들이 저희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가 않거든요.”

“흠. 그거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의 반파되다시피 한 아른슈타인의 저택은 도시 발레타에 남은 깊은 흉터와도 같은 것이었다.

꺾여진 깃발과 무너진 담벼락, 그리고 그때의 습격으로 죽어 나간 기사와 병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치유될 피해이자 값비싼 손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요제프의 배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저택을 떠나지 못한 일행을 점차 불편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런 낌새도 눈치 못 챘나? 그동안 같이 다녔다면서.”

“전혀요. 적어도 신비에 대한 부분만큼은 감히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수인족이 하는 말이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니벨룬과 함께해 봤던 피에르는 그가 빠져있는 정신머리만큼이나 거짓을 말할 깜냥도 안되는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워낙 머리가 좋은 놈이기는 했지. 북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피에르는 자신과 대적했었던 요제프를 떠올리며 슬며시 턱을 긁어대었다.

오랜 시간 동안 쇼아라에서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을 밀어낼 만큼 수완 또한 좋았던 바예지드의 차남.

그런 그였으니 멍청한 고양이와 애송이 용 정도야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으리라.

“······하긴 난 놈은 난 놈이었지. 그놈도.”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 할지라도 결국은 어두운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으니 역시 세상사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왜? 내가 어디를 갈 때마다 네놈한테 보고라도 해야 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혼자 있기가 눈치 보여 같이 있자고 말한 것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늙은이 특유의 괴팍한 독설일 뿐.

삐걱대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는 홀로 복도로 나선 피에르는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다 늙어서 용놈들 수발이나 들게 될 줄이야.”

정신을 잃은 블라드에게서 이제는 다 늙어버린 라두에게로.

방 밖을 나서 복도를 걷던 피에르는 자신의 인생이 어찌 이리되었는가를 한탄하며 바삐 걷기 시작했다.

온통 불편한 시선들이 가득한 이 저택에서 챙겨줄 사람 하나 없는 드라굴리아의 아들들을 위해 움직여주는 이는 오직 피에르뿐이었다.

※※※※

가을의 풍경이었다.

저 밑에 보이는 밀밭에는 풍요로운 황금빛이 가득하고 지금 앉아 있는 언덕에는 흩날리는 단풍이 가득한 그런 풍경.

키하노의 세계 안에서 보이는 어머니 세계수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미소를 짓게 할 그런 풍경이었지만 블라드만큼은 그저 울적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떠나갔을까요.”

[그건 본인만이 알겠지.]

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언덕이었지만 그곳에는 블라드 혼자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블라드 옆에서 함께 앉아 있었으니까.

[본래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세계와 세계의 만남이란 그런 거야.]

“······.”

들려오는 키하노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나를 위로하려 하는 말인 것은 알았지만 그 말에 위로받기에는 지난밤의 이별이 너무 끔찍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파묻은 블라드는 그저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책망했고, 그동안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던 요제프를 원망할 뿐이었다.

“이제는 지쳤어요.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쉴 수가 없어.”

[······이해한다.]

위로 보며 별을 꿈꾸었던 소망은 푸르렀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었다.

계단을 하나 밟아 올라갈 때마다 블라드는 지쳐갔고 누군가를 한 명씩 쓰러트릴 때마다 블라드의 영혼 어딘가는 깎여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이제는 믿었던 사람마저 잃었으니 블라드의 고개가 숙여질 만도 할 일이었다.

[쉬고 싶으면 쉬어라.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되고. 아무도 너에게 무엇을 하라 강요할 수는 없어.]

그런 블라드에게 키하노는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네가 쉬고 싶은 대로 쉬다 가라고 말해주었을 뿐.

본인의 세계도 바라보기 버거워 자신의 세계로 도망쳐온 블라드를 키하노는 그렇게 보듬어 주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럼.]

블라드의 등을 툭툭 두들겨 준 키하노는 저 멀리 보이는 황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든지 그래도 되지.]

가을의 풍경 한가운데서 흩날리는 붉은 단풍잎들.

이제는 없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서 보는 오늘의 황혼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라도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젊고도 젊은 너의 시간은 여전히 알맞게 흐르고 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넘길 수도 없는 나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너의 시간은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그저 헛되이 지나가는 것만은 아닐 테니까.

“······바람 소리 좋네요.”

[주위가 조용해져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지.]

새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그렇게 키하노와 블라드는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만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나를 배신한 요제프도, 나를 찔러버린 프라우센도 없이 오직 가만히 기다려주는 키하노만이 있을 뿐이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7화 7

다시 일어설 때에는 (2)

어둠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걸려있는 횃불 하나 없어 주위를 분간하기도 힘든 복도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새까만 제 속을 내비치고 있었고 이제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조차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깜깜해진 상태였다.

그런 어둠 속에서 요제프는 눈뜬장님과도 같은 처지였다.

-앞이 보이질 않나?

“······그렇소.”

앞이 보이질 않는다는 요제프의 말에 깜깜한 어둠에서부터 푸른색의 귀화가 떠올랐다.

주위를 밝히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광량이었지만 적어도 불을 밝힌 자의 윤곽만큼은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그런 빛이었다.

-아직 복용이 덜 된 모양이로군.

목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그저 텅 빈 투구만이 올려져 있는 남자.

아른슈타인의 영지에서 아이들을 납치했었던 목 없는 기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서늘한 눈빛을 요제프에게 들이대었다.

-배어 있는 냄새는 이미 짙은데 말이지.

마치 킁킁대는 듯한 그의 모습에 요제프는 절로 긴장하고 말았다.

목 없는 자가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확인하고 있는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얼굴은 없는데 냄새는 맡을 수 있나 보군.”

-코에서 맡는 냄새가 아니니까.

애써 의연한 척하려 노력했지만 떨리는 말끝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요제프를 보며 투구 속에 비치는 푸른색 귀화가 차갑게 휘어 들어갔다.

-죽음에서부터 비롯되는 썩은 내는 육체가 아닌 영혼을 통해 맡는 거다. 바예지드의 요제프.

육체가 썩어서 내는 시취보다 더욱 강렬한 것이 바로 영혼이 썩어 내는 냄새일 것이다.

그런 끔찍한 냄새를 요제프에게서 확인한 목 없는 기사는 다시금 몸을 돌려 좁은 복도를 따라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차는 라마슈트님께서 내어주신 은총이니 부지런히 마시도록 해라. 정말로 죽음에 다다르고 싶지 않다면.

끼이이익-

그 말과 함께 목 없는 기사의 손끝에서부터 어둠이 문을 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았던 문이었으며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저주가 서린 문이기도 했다.

-들어가라. 기다리고 계신다.

“······.”

산 자는 절대 다다를 수 없기에 그동안 교회의 누구도 찾아낼 수 없었다던 타락한 성녀의 흔적.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요제프에게만은 제 모습을 보여주는 그 문을 보며 요제프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블라드 경은 아직 일어나지 못했나?”

“그렇습니다. 백작님.”

어지러운 서재의 모습만큼이나 내쉬는 백작의 한숨이 복잡했다.

무어라 위로하기 힘든 백작의 얼굴에 파블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먼 곳에서 손님들이라 반갑게 맞아주었더니 한 명은 혼수상태고 또 한 명은 아예 영지를 부숴놓고 나가는군.”

넋두리를 내뱉으며 벽난로 앞에 쪼그려 앉은 백작의 뒷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만약 파블로가 지금 백작이 들고 있는 장작이 그동안 아끼던 책상의 잔해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 초라함을 배는 더 크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새해부터 이러니 참 심란하군.”

그러나 어찌하겠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나를 노리는 적은 많으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수밖에.

미련 가득한 손길로 들고 있던 밤나무 잔해를 난로 안에 밀어 넣은 백작은 대충 책으로 쌓아 올린 무더기 앞에 서서 깃털 펜을 집어 들었다.

“산도르라는 자가 말했던 것처럼 요제프 바예지드와 관련된 일은 북부 연합에게 맡기면 되겠지.”“그렇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겁니다.”

“좋아. 보상금은 나중에라도 톡톡히 받아내도록 하고.”

북부의 명문 가문인 바예지드의 차남이 사특한 존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귀족에게 있어 명예는 중요한 것이며 그에 따른 평판은 보증서와도 같은 것이기에 굳이 자신이 독촉하지 않아도 바예지드가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대충이나마 영지 일을 수습했으니 이제부터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블라드 아우레오에 관한 일일세. 내가 말한 대로 조사해왔는가?”

파블로를 바라보는 백작의 눈빛에 다시금 힘이 돌아왔다.

중부의 맹주이자 궁정파의 선두에 서 있는 아른슈타인 백작은 이미 제국헌병대의 로드리고를 통해 블라드라는 기사가 가진 가치를 전해 들은 뒤였다.

“네. 말씀하신 대로 조사해왔습니다.”

그분의 핏줄은 아니었지만, 의지를 이었을지도 모르는 기사.

어찌 보면 허무맹랑한 주장일 수도 있겠으나 궁정공은 확인하고 싶어 했고 이제 그 마지막 과정을 담당해야 하는 이는 바로 궁정공의 눈이라고도 불리는 아른슈타인 백작이었다.

“블라드 경의 자문 마법사 니벨룬은 남부 부르군드 족 출신입니다. 조사해보니 그들 중에서도 유력 씨족의 자제더군요.”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 주변부터 파악하는 것이 기본일 것이다.

들고 있는 검이니 쓰고 있는 검술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제국헌병대가 확인했을 테니 백작이 확인해봐야 하는 것은 블라드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였다.

“부르군드 족이라······. 수인족들 중에서도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 아닌가.”

“그렇습니다. 제국 건국 초기에는 나름의 영역까지 확보했었던 부족입니다.”

대륙 곳곳까지 발을 뻗치기 힘든 북부 연합과는 달리 아른슈타인의 정보망은 이미 남부까지 향해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니벨룬의 출신을 조사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 중에서도 유력 씨족 출신이라고 합니다”

“볼 때는 몰랐었는데 나름 귀한 자제였었군······. 그리고.”

“저희를 들리기 전 블라드 경의 직전 목적지는 드워프 해방 전선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블라드 경의 최측근인 하벤 선장이 최근에 바람 없이 움직이는 배를 건조했다고 하더군요.”

“바람 없이?”

“아무래도 드워프들의 기술을 배워온 것 같습니다.”

스쳐 지나가면 모를 일이나 눈여겨보면 보인다.

그저 유망한 기사인 줄로만 알았던 블라드였지만 아른슈타인 백작은 그의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기이한 흐름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해괴한 배로군. 계속해보게.”

파블로의 보고를 듣는 백작의 손끝이 바빠졌다.

아무리 정보를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없다면 모두가 무용지물인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황실에 있을 궁정공을 위해 최대한 건조한 시각으로 블라드를 판단하려 했던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보고의 내용에는 들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랑 같이?”

“그렇습니다.”

“북부정교회의 교황이 직접 문구를 하사했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압실론 판매로를 끊어놓은 것도······.”

“적어도 제국헌병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백작의 표정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내색이 가득했지만 지금 들려오는 정보는 모두 자신이 직접 뿌린 정보원들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동안 잠시 눈을 돌리고 있었더니 북부에서 이런 일들이 있었군.”

아른슈타인 백작이 그동안 블라드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그저 단순한 불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백작은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격렬했던 황실 내부의 암투를 위해서 중부의 동향 파악에 힘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북부에서는 어느새 자신도 무시하기 힘들 만한 변수 하나가 제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이건 의미가 없겠어.”

한참 고민하던 백작은 쓰고 있던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옆에 있는 난로를 향해 던져버렸다.

오랫동안 백작을 봐왔던 파블로는 버릇과도 같은 지금 행동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떠했나. 자네는 직접 보지 않았었나.”

삐걱대는 의자에서 일어선 아른슈타인 백작은 어느새 창가로 걸어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 가능성의 시작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바로 자네 아닌가.”

객관적인 파악을 끝냈으니 이제는 주관적인 의견을 들어야 할 때.

그리고 지금 백작의 옆에는 그 의견을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는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자리였으나 꽤나 반가운 빛이었습니다.”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그저 뒷골목의 소년이었을 뿐인 블라드를 위해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외쳐준 기사.

파블로는 항상 들고 다니던 방패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제 방패를 내미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그런 빛이었습니다.”

“······그래?”

파블로의 대답까지 들은 백작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저 희미한 가능성이었을 뿐인 점 하나가 어느새 선이 되어 그의 눈앞에 그림 하나를 그려내고 있었으니까.

“마법 전보를 준비해라. 궁정공께 직접 보고하겠다.”

오늘의 태양 아래 비치는 나의 저택은 처참한 모습이었으나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백작의 표정에는 어떠한 불쾌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수확을 얻기 위해 지불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질 정도였다.

※※※※

모두가 잠든 저녁, 아른슈타인의 저택을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잔뜩 굼뜬 움직임이었으나 내디디는 발끝만은 매서운 그런 움직임이었고 내뱉는 호흡 하나하나에는 잘 훈련된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가득했다.

“······.”

자고 있는 하인들의 방을 지나 복도를 거니는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목표에 다다른 그림자.

끼이이익-

경첩의 울림마저도 신중한 자세로 죽여낸 그림자는 조용히 달빛이 스며든 누군가의 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근-!

“······조각이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이는 검 하나가 있었다.

은색의 물결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거칠게 뛰는 심장이 증명해주는 저것은 분명히 용의 조각이었다.

“저거, 저거면 돼.”

피를 빼앗겨 잔뜩 쪼그라든 손가락이 앙상했다.

그러나 손끝으로 바라는 열망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 잔뜩 늙어버린 라두 드라굴리아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용살검을 향해 타는 듯한 갈증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금씩 다가갈수록 뛰어오르는 심장.

비록 낳아준 아비에게 모든 가능성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저것만 있으면 다시 나는 용이 될 수 있다.

“뭐해.”

“······!”

그러나 영혼 가득히 차오른 욕망이라 할지라도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 그토록 두려워했던 아버지의 것과 꼭 닮아 있었으니까.

“예전에 버레이라는 선배가 있었는데 말이야.”

창가에 비치는 달빛이 천천히 일어서는 금발에 부딪혀 반짝여 대었다.

몸을 일으킬 때마다 커지는 블라드의 그림자에 라두는 그저 벌벌 떨며 들어왔던 문을 향해 바닥을 길 뿐이었다.

“그 사람이 내 물건을 그렇게 손대고는 했었거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리고 용으로 태어난 라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블라드가 얼마나 커다란 존재인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블, 블라드 아우레오.”

모두가 잠든 저택에서 홀로 일어서 있는 남자.

달빛을 등진 채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은 방금 라두가 읊조린 대로 블라드 아우레오였다.

“그냥 찔러버렸어. 원래 도벽은 죽어야 낫는 병이거든.”

콰아앙-!

조용한 새벽, 저택에 있는 모두를 깨우는 소리가 있었다.

자고 있던 하인들도 경계하던 경비병들도 화들짝 놀랄 만큼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였다.

“도대체 낳아주신 부모한테 도대체 뭘 배운 거냐 새끼야! 어디서 남의 걸 훔치고 앉아 있어!”

“살려, 살려······.”

그 요란한 소리에 옆 방에 있던 니벨룬과 피에르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뛰쳐나온 복도에서 블라드를 알아본 니벨룬은 손을 들며 반가워했지만 정작 가장 수고했던 피에르는 바닥을 뒹구는 라두를 보며 경악할 뿐이었다.

“아니 이놈아! 내가 어떻게 빼 온 증인인데 때리고 있는 거냐!”

“이거 놔! 내가 오늘 이 새끼 병 낫게 해줄 거니까!”

“이 미친놈이! 일어나자마자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

웅웅웅-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블라드의 검이 울고 있었다.

지금 저 밖에서 형편없이 뒹굴어 대는 두 마리의 용을 보면서.

다만 그 울림에 기꺼움이 깃들어 있는 것은 이제야 잠에서 깬 주인이 반가웠기 때문일 것이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8화 13

그가 갈라진 이유 (1)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듯 백작의 얼굴이 부루퉁했다.

그 옆에 서 있는 파블로도, 서재의 문을 지키고 서 있는 경비병들의 얼굴도 그랬다.

아직 동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끌려 나오고만 아른슈타인의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블라드를 보며 다들 속으로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군. 블라드 경.”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혈기 또한 넘치는 것 같아 더욱 그렇네.”

“······죄송합니다. 백작님”

매우 피곤해 보이는 아른슈타인 백작을 보며 블라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말을 내뱉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제 막 일어났으니 상황 파악이 안 되었겠군.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까.”

“아닙니다. 백작님. 이미 제 마법사로부터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듣고 왔습니다.”

용살검을 훔치려던 라두를 흠씬 두들겨 패던 새벽이었다.

그 요란한 소리에 달려 나온 니벨룬과 피에르게서부터 대강의 상황을 전해 들은 블라드는 이미 요제프의 배신과 실종에 대해 알고 있던 참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도 실감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긴. 2주나 누워있던 참이니 제정신을 차리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겠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나를 스쳐 지나가던 요제프의 모습이었다.

푸른 달 아래서 창백히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현실감이 없어서 여전히 꿈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한번 물어보고는 싶군.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

가까이서 마주한 백작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냉차의 향기와도 닮은 것이었다.

씁쓸한 향기처럼 내 정신을 붙잡는 그의 눈빛에 블라드는 그제야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손님으로 초대받아 주인에게 큰 피해를 드렸으니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깊이 고개를 숙이는 블라드의 모습에는 분명 진심이 담겨 있었다.

예의에 관해서는 까칠하다고 알려진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흡족한 표정으로 보고 마는 그런 자세였다.

“그러니 부디 저에게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이 땅의 주인에게 끼친 피해를 보상할 수 있도록.”

그러나 백작은 모를 것이다.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모든 자세는 전부 요제프의 모습을 따온 것이라는 걸.

약했지만 어디서나 당당했던 짙은 눈그늘의 남자는 블라드가 동경하기에 충분한 존재이기도 했으니까.

“어떤 기회를?”

백작을 올려다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요제프는 말했었다.

기회는 바로 위기 속에 있는 것이라고.

프라우센의 습격으로 온통 흐트러지고만 아른슈타인이었지만 그렇기에 잔뜩 붕 뜬 이때야말로 지금의 말을 꺼내기에 적합한 순간이었다.

“아른슈타인의 문장을 빌려주십시오.”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서재 구석에 꽂혀 있는 아른슈타인 가문의 문장을 바라보았다.

온통 엉망이 된 서재였음에도 홀로 꼿꼿이 서 있는 깃발의 모습은 백작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에게 백작님의 문장을 빌려주신다면 그들의 심장을 꿰뚫을 때 가장 먼저 아른슈타인의 이름을 외치겠습니다.”

나를 당신의 분노를 대신할 검으로 삼아달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을 꿰뚫을 때 가장 먼저 아른슈타인의 이름을 외쳐드릴 테니.

“······.”

똑. 똑.

서재에 서 있는 사람은 셋이었지만 들리는 소리는 하나뿐이었다.

모두의 침묵을 틈 타 들리는 소리는 테이블을 두들겨대는 아른슈타인 백작의 손가락 소리였다.

“꽤 괜찮은 한 수군.”

어느새 의자에 등을 깊게 묻은 아른슈타인 백작이 웃고 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수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쥐어짠 블라드의 의도가 기꺼웠기에 보이는 미소였다.

“그래. 이렇게 해야지. 사람이란 본래 시도라는 걸 해야 하는 거야.”

“······.”

“그 태도 마음에 들었네. 좀 더 신중했다면 좋았겠지만”

본래 사람은 만들어진 것보다는 자라난 것을 보며 더 큰 기쁨을 느끼고는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백작은 비록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기는 해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블라드의 야성적인 발버둥에 큰 점수를 주고 있었다.

“주겠네. 나의 문장.”

백작은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을 때 블라드가 가져왔던 작은 깃발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타고 있던 검은 말에 매달려 있던 그 깃발은 소드마스터의 규율만큼이나 오래된 기사들의 관습이었다.

“받아 간 나의 문장으로 자네와 자네 일행들의 결백을 증명하게.”

중부의 맹주 아른슈타인의 이름은 분명 곳곳에서도 통할 이름이었다.

북부면 몰랐어도 중부에서는 아무런 기반이 없던 블라드였기에 프라우센과 요제프의 뒤를 쫓기 위해서는 그의 협조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부디 잊지 말게. 자네가 나한테 내건 조건을.”

그러나 대가 없는 협조는 없는 법.

백작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눈만큼은 웃고 있지를 않았다.

“요제프의 심장에 반드시 내 문장을 꽂아야 하는 걸세.”

“······.”

뒤돌아선 블라드는 그의 눈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잡고 있는 문고리만큼이나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무시하기 힘든 무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

“나. 나는 라두 드라굴리아요. 제국 귀족인 나에게는 자격이 있소.”

홀쭉 쪼그라든 노인의 얼굴이었으나 나오는 목소리만큼은 젊은 것이었다.

그 기묘한 어긋남이 견디기 힘들었던 듯 니벨룬의 표정이 조금씩 구겨져 가고 있었다.

“정당한 포로의 권리를 주장하겠소.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

드라굴리아 저택의 지하에서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라두였으나 지금은 어느새 제 안위를 챙길 만큼 회복한 상태였다.

비록 그 안위를 내뱉는 경위가 꽤 비루한 것이었으나 이 정도면 북부로 가는 도중에 객사하지는 않을 것 같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까 남의 검을 훔치기는 왜 훔쳐요. 그게 블라드 님이 얼마나 아끼는 검인데.”

“훔친 게 아니다! 그냥 가서 본 건지!”

“그 정도면 훔친걸세. 훔친 거야.”

이른 새벽부터 난리를 겪은 니벨룬과 피에르는 힘이 빠졌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라두를 죽일 듯 후려치는 블라드의 주먹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니까.

빼앗는 인생만을 살아온 전직 소매치기는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피에르 님은 저를 보호해 줄 의무가 있으십니다. 당신께서 신의 이름으로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 아닙니까?”

“······하여간 용놈들 치고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 없구만.”

피에르는 자신에게 달라붙는 피에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목숨을 살려준 일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안전을 보장하라며 소리치는 꼴이라니.

이거야말로 물에 빠진 놈을 건져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으라는 격 아닌가.

“······일단 진정하고.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그 놈은 진짜 죽일 놈이오! 처음 봤지만, 기사의 감각이 말하고 있소이다!”

배다른 동생이자 또 다른 용인 블라드에게 잔뜩 위축된 라두를 보며 일단 진정시키려 한 피에르였지만 그 수고는 그저 헛되게 날아가고 말았다.

콰앙-!

“왜 이렇게 시끄러.”

“으아아아!”

“도대체 문은 왜 박차고 들어오는 거냐! 문고리라는게 붙어 있잖아!”

셋이 모여 있는 방을 뻥 소리와 함께 차버리고 들어온 블라드를 보며 피에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겨우 진정시켜놓았던 라두가 다시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잘 됐다. 너 잠깐 여기 있어 봐.”

“블라드, 블라드 아우레오! 나는 권리가 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아까 덜 맞았어?”

평소에도 까칠한 블라드였으나 오늘따라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라두는 그런 블라드를 보며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판단에 따라 재빨리 입을 닫았다.

“니벨룬. 지금 마법 전보를 사용할 수 있겠어?”

“그럴걸요?”

“그러면 스투르마에 연결해줘. 이미 아른슈타인 백작의 동의는 얻었거든.”

블라드는 니벨룬에게 자그마한 쪽지 한 장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 쪽지는 바예지드의 본가인 스투르마의 저택에 연결된 마법구와 연결할 수 있는 번호가 적힌 쪽지였다.

“루트거 님과 연결해드릴까요?”

“아니.”

“그럼 누구와?”

스투르마라고 하기에 루트거와 연결할 줄 알았던 니벨룬이었지만 정작 블라드는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루트거 님의 마법사인 도로테아랑. 그녀에게 각인술에 관해서 물어볼게 있어.”

루트거의 마법사인 수인족 도로테아는 블라드에게 있어 처음 신비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했다.

블라드는 가장 단단한 용인 데스웜을 상대할 때 장식 없는 검에 진동의 각인을 새겨준 그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검에 뭘 하나 새겨야 할 것 같아. 그래서 그녀가 가진 정보가 필요해.”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활발히 움직이는 모습이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니벨룬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무언가 단서를 찾았다는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까.

“······라두 드라굴리아.”

니벨룬이 나간 방에는 어느새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라두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동자에 무어라 말하기 힘든 기이한 광기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사냥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에 대해 들었다. 용살 기사단 출신이라지?”

“그, 그렇다!”

“사르누스 공작의 심복이기도 했고. 그래서 모시암을 치러 온 군대의 사령관까지 맡았었나?”

니벨룬이 앉아 있던 바짝 끌어당긴 블라드는 라두의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래. 내가 그 당시 총 책임자였지.”

블라드의 말에 예전의 자신을 기억했다는 듯 라두의 허리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잔뜩 비루해진 지금이었지만 예전에는 촉망받는 기사였으며 완벽한 용을 꿈꾸던 드라굴리아였던 적이 있던 라두였다.

“너 그 여자랑 알고 지내는 사이지? 검은 상복 입고 다니는 흑마법사 말이야.”

모시암에 있던 드라굴리아의 군대는 분명 수상한 행적을 보였었다.

같이 종군하던 주교 피에르의 주장을 무시한 채로 그저 포위만을 한 채로 반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북부를 압박하기 위한 늦장이었다고는 하나 그렇게까지 원활한 지연이 가능했던 것은 분명 라마슈트와 드라굴리아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증거였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군.”

“발뺌하지 마라. 이야기만 들어도 구린 냄새가 나는데.”

코앞에서 으르렁대는 블라드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지만 라두는 애써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초에 지금 블라드가 물어보려 하는 질문 자체가 북부정교회가 원하는 답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거래를 걸 수 있는 유일한 가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놈들 만난 적 있지?”

“북부에 가서 말하겠다.”

“본거지 알아 몰라? 접선지 정도는 알 거 아냐.”

“북부에 가서 말하겠다.”

살기 위해서 혹은 재기를 위해서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라두를 보며 블라드가 호르헤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드워프들이 다듬어 더욱 날이 선 단검은 닫혀 있던 입도 열게 할만큼 새파란 것이었으나 곧 피에르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하지 마라. 고문은 안 돼.”

“왜요?”

피에르의 굳은 표정에 블라드가 멈칫하고 말았다.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하더라도 내게 붕대를 감아준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라두 드라굴리아는 제국 귀족이자 신의 보호를 받는 자일세. 그는 제국법과 교회의 섭리를 따라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어.”

“그 보호는 누가 허락했는데요?”

“내가.”

이단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혹독한 고문자인 피에르였지만 라두에게 있어서만큼은 훌륭한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다.

“내 이름으로 신의 가호를 요청했네. 다시 말해 그가 가지는 포로의 권리는 곧 내가 치르는 성전이라는 뜻이지.”

“······.”

새벽의 일이야 급작스러운 사고였지만 알고 있는 지금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에르의 이름 아래 그어진 가호를 무시 할 생각이 아니라면 블라드 또한 라두에게 포로의 권리를 인정해줘야만 했다.

“북부에서 사람들이 언제쯤 온답니까?”

“3일 후일세.”

“시간이 없네요.”

시간이 없다는 블라드의 말에 라두가 더욱 고개를 곧추세웠다.

바로 앞에 있는 위협이었으나 블라드가 정당한 명분으로 자신을 해할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포로로서의 권리만 인정해주면 돼요?”

그런 라두를 보며 블라드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라마슈트와 관련이 있는 라두를 이대로 북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자네는 기사이니까. 라두에 대한 보호는 기사로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지.”

“기사 아니면요?”

“뭐?”

피에르는 서둘러 갑옷을 벗어던지는 블라드는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니벨룬의 도움을 받아 애써 입은 갑옷이었으나 지금 블라드는 그것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있었으니까.

“기사가 아닌 상태에서 때리고 그러는 건 괜찮죠?”

“그게 무슨?”

차마 말릴 사이도 없었다.

민첩한 블라드의 몸짓은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피에르가 건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퍼억!

“형님! 만나서 반갑네!”

“아니, 아니!”

형님을 부르짖는 블라드의 말을 따라 매서운 주먹질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건데 왜 동생이 궁금해하는 건 안 알려주는 거야? 지금 나 무시하는거야!”

“이 미친 새끼가! 돌았어!”

절대로 고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형을 찾는 동생이 부리는 행패일 뿐이지.

라두는 지금 블라드가 부리려는 수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네가 왜 내 동생이야!”

“아비가 같은데 왜 내가 네 동생이 아니야!”

정보를 알아내려 하는 고문이 아닌 그저 형제의 싸움을 본 피에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 있을까?”

“한 시간이면 될 것 같아요.”

"나가지 마! 나가지 마시오!"

제국법도 그리고 교회의 규율도 형제의 사사로운 싸움까지는 제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알아챈 피에르는 볼일 보라며 조용히 방 밖을 나서 줄 뿐이었다.

그리하여 보는 이 없는 방 안에서는 동생과 형이 부리는 싸움만이 격렬할 뿐이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9화 8

그가 갈라진 이유 (2)

붉은 단풍잎이 휘날리는 키하노의 언덕에서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었으나 죄인 된 심정으로 앉아 있던 블라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들끓던 패배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있겠어요?”

[지금은 아니겠지. 먼 훗날이면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 된다는 말은 안 하네요.”

소년이었을 때는 꿈만 꾸어도 좋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대는 높디높은 곳에 있는 소드마스터였고 블라드는 이제 프라우센과 자신의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인정해야만 했다.

“키하노는 어떻게 했었어요?”

[무엇을?]

“가장 완벽한 용이요.”

이제야 무릎에서 고개를 뗀 블라드는 옆에 앉아 있는 키하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죽였어요? 분명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로 옆에 키하노가 있다는 것.

뒷골목의 소년이었을 적과는 달리 이제는 물어볼 대상이 있는 블라드는 나보다 앞서 있는 키하노를 향해 어떻게 그 길을 걸었는지 묻고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 아니에요?”

[······그랬었지.]

블라드의 물음에 키하노는 입맛을 쓴 듯 입술을 훑고 있었다.

바로 나오지 않는 그의 대답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서 맴도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이길 수 없었지.]

“하지만 죽였잖아요.”

[그래. 죽이긴 했지. 이기진 못했어도.]

먼 옛날을 기억하는 키하노의 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열릴 듯 떨어지지 않는 키하노의 입술이 지금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에 휩싸여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키하노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

다시금 고개 숙인 블라드를 바라보는 키하노의 눈빛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알려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지금 고민하는 이 젊은 녀석에게 이 세상에는 옳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전에 보니 프라우센의 심장에 용의 조각이 박혀있더군.]

어린아이들에게는 그저 바르고 옳은 것만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옳은 방법으로만 살아갈 수 없기에 언젠가는 이런 방법도 알려줘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험난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갓 어른이 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어쩌면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연 키하노의 이야기 속에는 고귀한 소드마스터의 위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우리 아침에 보지 않았던가. 블라드 경.”

어느새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창을 넘어 백작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끝에는 아침까지만 해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블라드가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군.”

“죄송합니다. 백작님.”

아른슈타인 백작은 아직도 숨이 차는지 어깨를 들썩여대는 블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노인까지도.

잔뜩 흐트러져 있는 블라드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정작 백작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잔뜩 엉망이 되고만 라두의 몰골이었다.

“······그에게는 포로의 권리가 있었을 텐데?”

라두를 살피는 백작의 얼굴에 조금씩 실망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블라드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던 백작으로서는 지금 보이는 우격다짐이 영 반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을 형이라고 못 부르게 해서.”

“음?”

북부에서 자란 탓일까.

북부인들에게서 보이는 흉폭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블라드를 보며 조금은 실망한 백작이었으나 블라드의 입에서 나오는 변명은 꽤 의외의 것이었다.

“이제야 찾은 혈육이 저를 경원시하기에 그만 서러움이 터져 나왔나 봅니다. 부디 제 실수를 용서하십시오.”

“······오. 그래.”

들려오는 블라드의 말에 과연 그 수가 있었냐는 듯 백작의 눈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의 변명이라면 그 누구라도 블라드의 행동을 질타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을 터였다.

“이 미친 새끼가! 왜 자꾸 나보고······.”

“하긴 형제 싸움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백작님! 어째서 북부의 야만인 따위에게 저희 드라굴리아의 핏줄을 붙이시는 겁니까!”

“······.”

씩씩대는 라두를 보며 백작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둘 다 같은 푸른 눈동자였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백작의 온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뭐 집안 사정이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테고, 나는 그저 드라굴리아 공작의 여성 편력이 화려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지.”

“······.”

백작의 말에 씩씩대던 라두의 입이 닫히고 말았다.

방금 나왔던 말대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 바로 용혈공의 화려한 연애사일 것이다.

그리고 라두 본인 또한 그런 복잡한 사정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니 백작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길이 없었다.

“사실 명분이라는 것이 그렇네. 같은 명분이라도 지금처럼 우선시 되는 것이 있고, 때로는 아예 맞물려 버리는 것들이 있지. 모든 상황에서 딱딱 끊어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야.”

잘했다는 듯 블라드를 향해 눈길을 한 번 준 백작은 이번에는 라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자네는 정말 옆에 있는 블라드 경이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당연하신 말씀을!”

“그렇다면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군.”

라두의 단호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백작은 서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라두를 향해 들어 보였다.

“방금 말했다시피 핏줄만큼이나 우선시 되는 명분이 딱히 없어서 말이지.”

여기 좀 보라는 듯 백작이 흔들어대는 편지에는 라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양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불을 뿜어대는 용의 목 위로 살벌하게 그어진 선 하나.

드라굴리아 가문을 뜻하는 문장을 알아본 라두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드라굴리아가 피에르 주교의 행적을 알아챈 모양일세. 나보고 이곳에 있는 자네를 내어달라더군.”

“저, 저······.”

“참고로 용살기사단은 이미 반나절 거리에 와닿아 있네.”

드라굴리아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라두의 안색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끄는 선봉자가 아마 미르셰아라지?”

“동생아.”

이 땅의 주인조차 보호해주기 힘든 혈육이라는 명분.

게다가 그 명분을 들고 오는 자가 아버지와 가장 닮았다 알려진 미르셰아라니.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라두가 비장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이 형은 어서 빨리 북부로 가고 싶구나. 사실 평소부터 북쪽의 하얀 설원을 동경하고 있었단다.”

“······염병하네. 진짜.”

또다시 와인통에 저며질 것인가 아니면 블라드를 동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너무나 쉬운 판단이었기에 라두의 행동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라두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

수도 브리간테스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제국 가도(街道)를 관통하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제국에 사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깃발을 들고 달려나가는 그들의 이름은 용살 기사단.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 달리는 미르셰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차갑게 서린 분노가 가득해 보였다.

“멈춰라! 여기서부터는 아른슈타인의 영지다!”

성문도 아니었건만 용살 기사단을 막아서는 무리가 있었다.

가도를 틀어막은 관문소의 모습이 엉성한 것으로 보아 누가 보아도 기사단을 막으려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자들이었다.

“내 이름은 미르셰아다.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그리고 미르셰아 또한 그런 의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흩뿌려대는 용의 기세에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이 움찔댈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지금 미르셰아가 보이는 기세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으며 과연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백작께는 이미 기별을 드렸다.”

“무슨 기별을?”

그러나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은 그 흉폭한 기세에 잠시 움찔은 했을지라도 절대 길은 비키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미르셰아의 명성에 비견될 만한 기사가 앞장서 있었기 때문에.

“영지를 방문한 목적을 상세히 설명해라.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방패가 인상적인 기사.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는 가지고 있는 장대한 체구만큼이나 쉽게 빈틈을 보여주지 않은 채 미르셰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가문의 일이다.”

“드라굴리아의 일을 어째서 아른슈타인에서 찾지?”

으르렁대는 용 앞에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성벽 하나.

천천히 방패를 빼 드는 파블로의 모습에서는 미르셰아에 대한 압박감 따위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행방불명 된 내 동생에 관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 동생을 왜 우리 영지에서 찾느냔 말이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마주 보는 둘 사이에서 숨도 쉬기 힘든 만큼의 긴장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대단한 긴장감이었는지 대장들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주위의 기사들이 절로 검을 빼 들 정도였다.

“······나는 피에르의 행적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왔다. 그러니 더이상 나를 자극하지 마라.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증거?"

상속권에 민감한 제국의 관습상 도망친 혈육을 쫓는 추적자에게는 길을 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

그러나 아른슈타인 백작은 그 길을 내어주지 않기로 했다.

“증거가 어찌 되었건 백작님께서는 이 땅 위에 용의 발톱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만 용혈공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기대를 거는 블라드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백작의 확실한 결정만큼 파블로의 태도 또한 단호했고 마주한 미르셰아 또한 그들의 결심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백작께서는 제국의 관습을 무시하시는군.”

“무장한 인원을 무턱대고 남의 땅에 들이대려는 네놈들만큼이나 할까.”

딱히 입 밖으로 내뱉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된 뒤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미르셰아와 파블로는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르셰아!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중부의 모든 영지들이 이어져 있다는 제국 가도.

그 오래된 길 위에서 위험한 불씨 하나가 떨어지려 하는 순간, 아른슈타인의 영지 쪽에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찾는 라두 드라굴리아는 내가 데리고 있다!”

검은 말 위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흔들어대는 자그마한 깃발.

수많은 문양들이 박혀있는 깃발들의 모습은 분명 미르셰아에게 있어서는 낯익은 것이었다.

“······블라드?”

오직 북부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만이 들 수 있는 자신만의 깃발.

그 깃발 아래로 보이는 블라드를 알아본 미르셰아는 그만 낭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동안의 경험상 저 녀석이 보이는 순간부터 일이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두 드라굴리아는 나와 함께 북부로 간다! 그 누구의 명령도 아닌 나 블라드 아우레오의 판단으로!”

아른슈타인도 북부정교회도 아닌 오직 나 아우레오의 이름으로.

“라두를 찾고 싶다면 나를 따라 북부로 와라!”

“······이런.”

굳이 명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블라드를 보며 미르셰아는 당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무리 제국의 관습이 보장하는 미르셰아의 권리라 할지라도 같은 핏줄인 블라드의 앞에서만큼은 무력한 명분이 되고 말테니까.

“이 정도면 되겠어요?”

[훌륭하지. 이 정도면.]

손님으로 환영받았으나 정작 잔뜩 피해만 입히고 말았다.

그러니 가는 자리만큼은 말끔히 치워주고 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감사합니다. 파블로.”

멀리 떨어져 있어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블라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파블로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히이이잉-

고삐를 잡아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누아르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서.

"됐냐? 됐어?"

"친한 척하지 말지?"

다만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방금 블라드가 말했던 북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마법사와 이단 심문관, 그리고 젊고 늙은 용 두 마리.

그들이 향하는 곳은 북쪽이 아닌 그곳의 정반대인 남쪽이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0화 3

무법자들의 도시 (1)

길었던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이었지만 스투르마에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겨울이 쉽게 물러가지 않는 북부의 특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저택 곳곳에 물든 우울함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서류가 많군.”

낮이었지만 볕이 충분하지 않은 어두운 집무실.

그곳에서 펜을 잡고 있던 루트거는 자신의 양옆으로 쌓여 있던 서류 더미들을 돌아보며 다시금 얼굴을 굳혔다.

“끝이 없어. 끝이.”

하룻밤을 새워서 처리했던 일들이었건만 또다시 쌓여버린 오늘의 과업들.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서류들을 보며 루트거는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는 중이었다.

똑똑똑.

“들어와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작고도 경쾌했다.

이미 발걸음 소리로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파악한 루트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루트거 님. 여기 계셨군요.”

“요즘에는 항상 여기 있다. 나에 관한 관심이 줄었나 보군. 도로테아.”

농담 삼아 말하고 있었으나 정작 웃고 있는 입술 끝이 씁쓸해 보였다.

급변하는 정세만큼이나 늘어가는 업무들.

루트거를 마주한 도로테아는 우울해 보이는 듯한 그의 태도에 잠시 입을 오물거리고 말았다.

“전해드릴 전보가 있어요.”

“누구한테?”

“블라드······ 경한테 온 전보에요.”

그렇기에 서둘러 내놓은 블라드라는 이름.

말도 제대로 타지 못했던 녀석에게 경이라는 존칭을 붙이려니 영 어색했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루트거를 보니 조금은 보상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지? 녀석이 나한테 따로 연락할 일이 있었나?”

루트거에게 있어 블라드라는 이름은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그만큼 걱정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저택을 떠도는 우울감이 시작된 곳이 바로 블라드의 옆에서부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제프 때문인가?”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로테아는 들고 왔던 쪽지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태어난 부족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너의 부족?”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트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제프의 일도 아니고 라두와 피에르와 관련한 일도 아닌 뜬금없이 도로테아에 관해서라니.

“그래서 대답해줬나?”

“······뭐. 말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다른 인종들과 달리 본래의 터전을 잃고만 수인족들은 끊임없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배회하고는 했다.

그런 수인족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같은 부족민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에는 도시 나마르카에 있다고 하더군요.”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한 곳에 멈춰서 있었다.

도시 나마르카.

중부에서도 남쪽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그러나 루트거의 시선은 도로테아의 손가락이 아닌 그녀가 내려놓은 블라드의 전보에 쏠려 있었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어도 어련히 잘하겠지.”

짧은 문자만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고작 몇 마디만을 적을 뿐일 마법 전보였다.

그렇기에 치밀하게 적어놓을 수밖에 없는 전보였지만 블라드의 말끝에는 분명 누군가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또한 적혀있었다.

고작 몇 마디뿐일 인사였지만 지금 기력을 잃고 만 옥사나에게는 이만큼 위로가 되는 인사도 없을 것이었다.

※※※※

“나마르카인지 니미르카인지 왜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는 거야.”

잔뜩 얼어있던 땅이 녹아가는지 걷는 길이 온통 진창이었다.

말을 타고 있었음에도 허벅지까지 튀어 오르는 진흙들에 라두는 인상을 구기며 투덜대고 있었다.

“계속 투덜댈 거면 북쪽으로 가든가.”

“······.”

그러나 옆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에 라두는 재빨리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향하는 목적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부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북부인들은 다 이런가?”

“응. 다들 엄청 극단적이야. 그러니까 제발 닥치고 있어.”

극단적일 뿐만 아니라 지랄 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블라드였으니 라두는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북부로 돌아가자니까. 왜 자꾸 용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지 못해 안달인 거냐?”

“늦었잖아요. 갈 수가 없다는데 어떡해요.”

아른슈타인의 영지에서 떠나온 일행은 지금 북쪽이 아닌 오히려 남쪽에 있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피에르도 꿍얼대기 시작했지만 블라드가 이곳으로 향하는 데는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마커스가 말해주기를 이미 북쪽으로 가는 길에 용혈공 파가 쫙 깔려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고작 우리 가지고 그거 다 뚫고 갈 수 있겠어요?”

“빌어먹을. 하여튼 용놈 새끼들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니죠?”

아른슈타인 백작령은 중부에서도 중앙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말은 블라드가 안전한 북부로 향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중부의 영지들을 거쳐 가야 한다는 소리였고 결국은 용살기사단의 포위망을 뚫기 힘들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블라드는 처음부터 북쪽으로 향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른슈타인 백작님께서 직접 적어주신 영지들이 있어요. 앞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알려주신 대로 궁정공 파가 있는 영지들을 따라서 북부로 가게 될 겁니다.”

최대한 믿을 수 있는 길을 따라서 안전한 곳만을 택하겠다는 블라드의 말에 피에르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입니다! 저기 나마르카예요.”

“아아. 오늘은 여관에서 잠들 수 있겠군.”

라두가 내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앞장선 니벨룬의 손끝으로 어지러이 펼쳐진 도시가 보였다.

허접하기 그지없는 목책으로 둘러쳐진 도시는 위태로워 보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바글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온통 분주한 곳이었다.

“······나마르카라.”

누아르와 함께 언덕 위에서 나마르카의 정경을 보고 있던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진하게 느껴지는 고향의 냄새에 사납게 웃기 시작했다.

“저기를 보니까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네.”

도시 나마르카.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영주들이 모두 자신들의 도시라 우겨대는 곳.

그렇기에 오히려 아무도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나마르타를 주변의 사람들은 무법자들의 도시라 부르고는 했다.

※※※※

“어디 가는데?”

“알게나 뭐야.”

“······나 경비병인데?”

“아 그래?”

성문 같지도 않은 목책을 지나가던 블라드는 자신을 붙잡는 사내를 보았다.

이곳저곳 빠진 이빨이 인상적인 경비병은 자신을 무시하는 블라드의 태도가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옆에 있는 놈들이랑 구별이 안 되잖아.”

아무리 정신 나간 영주라 할지라도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만큼은 제대로 된 장비를 채워서 내보내는 법이었다.

그러나 도시 나마르카는 영주는커녕 범죄조직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으니 경비병들의 차림새가 불한당들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신분증.”

“없어.”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블라드였지만 경비병은 그럴 줄 알았다는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전직 뒷골목 출신이 생생하게 재현한 일행의 모습은 지금 성문 앞에 늘어선 사람들과 비교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기에 경비병 또한 딱히 경계심을 보일만 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요즘 통행료 시세가 어떻게 되는데?”

“선제시.”

“아 진짜 이러지 말지.”

과연 불한당들의 도시.

북부에서는 불문율이나 다름없는 선제시를 외치는 그 모습에 블라드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이마를 긁어댔다.

들어 올린 머리 덕에 보이는 훤칠한 얼굴이 인상적이긴 했으나 잔뜩 어두운 때가 묻어있는 미소만큼은 출신을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날 것의 느낌이 가득해 보였다.

“늙은이 둘에 고양이 하나, 그리고 애송이라······.”

거리낌 없는 블라드의 태도에 경계심을 푼 경비병은 뒤에 늘어서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기침해대는 늙은이들과 사시처럼 동공이 흐트러져 있는 수인족 사내를 보니 딱히 뜯어먹을 것도 없어 보이는 한심한 일행이었다.

“은화 세 개. 늙은이들은 그냥 하나로 쳐줬다.”

“장사 잘하시네. 받으셔.”

능숙한 손길로 경비병의 품에 은화를 쑤셔 넣은 블라드는 서둘러 일행들을 관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분노로 인해 부들대는 피에르가 잠시 뻗대고 서 있었으나 경비병의 눈에는 그저 깡말라 있는 키 큰 노인이었을 뿐이었다.

“저, 저 무도한······.”

“참으셔야지 어쩌겠어요. 여기를 지나가야 다음 영지인데.”

애써 피에르를 어르며 들어간 나마르카의 광경은 과연 기대한 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온통 타락한 도시로다. 신께서는 오늘도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니.”

조금의 틈만 보여도 달라붙는 거지들과 벌써부터 웃통을 벗은 채 골목 곳곳에 서 있는 창녀들의 모습.

게다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취객들의 모습은 시체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라두. 이리 와 봐.”

“······나보고 형이라며?”

피를 이은 형을 강아지 부르듯 부르는 블라드였지만 라두는 딱히 불만을 내비치지 못했다.

미르셰아를 따라가면 죽고 북부로 올라가면 평생을 갇히게 될지도 모르니 붙어있을 사람이라고는 오직 블라드뿐이니까.

“이거 주머니에 넣고 잠깐 길거리에 서 있어봐.”

“음?”

도시의 지리는 잘 몰랐지만 뒷골목 때의 경험을 통해 나름의 흐름을 찾아낸 블라드는 이제 인간들보다는 수인족들이 많아 보이는 대로 앞에 서 있었다.

길을 따라 미묘하게 구분 지어진 분위기는 분명 여기서부터가 수인족들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중이었다.

“이건 왜?”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북부인들은 성격도 급하거든.”

“······그래?”

“빨리 가봐.”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돈주머니를 쥐게 된 라두는 영문도 모른 채 대로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다는 듯 길가에 서 있는 라두의 모습은 길을 잃어버린 노인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그냥 육체만 늙어버린 게 아닌 모양이네.”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서서 라두를 지켜보던 블라드는 혀를 쯧하고 차고 말았다.

나름 용살기사단을 이끌기도 한 인물이었으나 지금의 라두는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소매치기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나 보자.”

인파에 섞여 물 흐르듯 걸어가고 있었으나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는 확실히 보고 있었다.

긴장한 듯이 쫑긋 솟은 귀와 함께 잔뜩 흔들려대는 어린 수인족 녀석의 꼬리를 말이다.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던 어린 소매치기는 방금 자신이 라두에게 들려주었던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어두운 골목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어지러운 골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잔뜩 차오른 숨이 녀석이 얼마나 달렸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어린 고양이의 속도는 전혀 줄어듦이 없었다.

“이런 젠장!”

익숙한 골목을 따라 담을 넘고 몸을 숨긴 어린 소매치기였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여기야?”

“······!”

어두운 골목 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

여태껏 달려온 것이 헛수고였다는 듯 소매치기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에는 오히려 장난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멍청하긴! 여기까지 따라 들어오네!”

그런 블라드를 보며 어린 소매치기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까 보인 놀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의 뒤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수인족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이 있다니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돈만 쫓아다니는······.”

“그래. 다 알아. 나 일부러 유인한 거.”

그러나 블라드는 꼬마의 비웃음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더 부를 형들은 없냐? 가능하면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는데.”

호르헤는 말했었다.

자기가 미끼인 줄 모르는 미끼야말로 최고의 미끼라고.

블라드는 자신을 루가족이 머무는 골목 깊숙한 곳까지 인도해 준 어린 소매치기를 보며 히죽 웃어줄 뿐이었다.

블라드가 웃고 있는 이 골목은 수인족들의 영역.

그중에서도 도로테아의 부족인 루가 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1화 6

무법자들의 도시 (2)

도시 나마르카.

정당하고도 적법한 주인이 없어 오직 무법만이 판치고 있는 곳.

그러나 아무도 지배하는 이가 없음에도 저절로 만들어져 가는 혼란 속의 질서는 분명 블라드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너 형들이 꽤 많구나?”

그렇기에 잠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이곳 나마르카의 골목 또한 내가 태어났던 곳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비슷하다 할지라도 정작 속까지 똑같은 건 단 하나도 없는 법이었다.

“보통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모계 사회를 형성하거든요. 그래서 부족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이기도 한 셈이죠.”

굳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설명이 없었어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어린 소매치기의 뒤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인족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고작 어린 소매치기 하나를 위해 거의 백여 명이 튀어나와 버린 지금의 상황은 쇼아라의 뒷골목에서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모두의 아이라는 어감은 좋네.”

그렇지만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

점점 사나워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블라드는 두 손을 들어 올리고는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를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사실 도로테아의 소개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절대로 이분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

그런 마음가짐으로 도로테아의 이름까지 꺼내 본 블라드였지만 그러나 정작 돌아오는 것은 더욱 날카로워지고만 루가 족 사내들의 눈빛뿐이었다.

“······도로테아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부족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

그러나 블라드는 홀로 밖에 떨어져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

검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동료들과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살 안에 갇힌 신세가 반갑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북부로 갈 생각이 없었던 거지?”

“······.”

“영악한 놈. 처음부터 혼자 해 볼 요량이었군.”

블라드의 돌발 행동 덕에 루가 족의 감옥 안에 갇히고 만 피에르는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마른 침을 내뱉고 말았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순리에 어긋나는 일은 결국 어딘가에서라도 탈이 나는 법이거늘.”

블라드에게 속아 온당한 목적지로 향하지 못했던 피에르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블라드가 어째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라두가 필요했으니까.”

블라드는 바로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라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력이 쇠했는지 갇혀 있는 와중에도 잠에 빠져들고만 라두.

드라굴리아의 일원이자 용혈공의 심복이었던 그는 분명 중요한 증인이자 정보원이었지만 북부 연합이 정말 그를 사특한 존재들을 잡기 위한 단서로 쓸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검은 여자를 찾기보다는 용혈공을 상대하기 위한 도구로 쓰겠죠. 이제 전쟁이 다가왔으니까요.”

대의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차가운 푸른 피를 가진 귀족들은 판단의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귀족들에게 있어서 자연재해와도 같은 사특한 무리들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용혈공의 위협에 비한다면 후순위의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라두를 북부 연합으로 보냈다가는 라마슈트와 관련된 조사는 전쟁이 끝난 뒤에나 시작되고 말 거에요.”

직접 습격을 당했었던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라마슈트의 무리를 쫓기 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영주들의 움직임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궁정공 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중부와 직접 맞상대를 하려 하는 강철공의 판단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텅!

순간, 잔뜩 녹슨 창살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창살 밖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가 족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일어나라. 대모(大母)님께서 보자고 하신다.”

행동은 불손하고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블라드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사내가 말한 대모라는 단어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한껏 돌아오고 말았지만 결국 만나고자 하는 대상과 마주할 수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도.”

“저요?”

그러나 루가 족 사내는 블라드만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니벨룬까지 함께였다.

“저는 왜요?”

“나오라면 나오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왜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잔뜩 날이 선 사내들의 재촉에 감옥에서 나온 블라드와 니벨룬은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금 어지러운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가두는 곳과 대모가 있다는 곳은 서로 떨어져 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있던 곳에서 더 남쪽인 것 같은데.’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의 위로 조각나 있는 하늘을 보았다.

힐끔 보이는 해의 위치를 확인한 블라드는 오래된 버릇을 따라 지금 자신이 처음 있던 곳보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들어가라.”

“······흠.”

그리하여 골목 깊숙한 곳에서 마주한 대모의 집은 블라드가 난생처음 보는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주변의 건물들처럼 보잘것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바닥을 띄워 지면 위로 얹어놓은 방식은 북부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모양새였다.

“벌레나 뱀 때문에 이렇게 짓는 거예요.”

“벌레?”

“남부 정글에는 독을 가진 벌레들이 많거든요.”

원래 있던 곳이 아니기에 굳이 이렇게까지 지을 필요는 없었겠으나 가진바 뿌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생소하게 느껴지는 수인족들의 관습에 블라드는 낯설어했으나 그것도 등 뒤를 찔러대는 창끝이 없을 때나 그럴 수 있는 법이었다.

“손님 대접이 거치네.”

“손님이 아니라 암만 봐도 포로 같거든요.”

강요에 의한 재촉에 블라드는 허접한 발판을 밟아 올라갔다.

문대신 달아놓은 넓적한 나뭇잎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는 희뿌연 연기들이 가득했다.

“······.”

“어서 들어와라. 애써 만들어 놓은 연기가 새어나가지 않느냐.”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깔린 연기였다.

코끝으로 맴도는 냄새에 희미한 담배 향이 섞여 있었으나 고작 담배 연기만으로는 이렇게까지 만들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 도로테아의 소개를 받아 왔다고?”

그 연기 한 가운데에는 한껏 늙어버린 노파가 앉아 있었다.

머리띠 한가운데 커다란 새의 깃털을 꽂아 넣은 그녀는 세월에 의해 잔뜩 눌어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는 북부에서 온 낯선 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개까지는 아니고······.”

“고얀 년. 떠날 때도 요란하게 가더니 보내오는 손님 또한 아주 불길한 놈을 보냈구나.”

“그렇게까지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가래가 잔뜩 섞인 목소리는 여느 늙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정작 그 안에 깃든 울림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의지하는 블라드는 몰랐겠으나 같은 신비를 공유하고 있는 니벨룬만큼은 지금 눈앞에 있는 노파가 얼마나 대단한 신비를 품고 있는 존재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사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너는 말하지 마라.”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하려던 블라드였으나 어느새 자신의 입술 앞까지 다다른 노파의 담뱃대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딱히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얼굴은 이미 잔뜩 일그러져 확연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흐르는 대로 찾아왔으니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네놈이 내뱉는 숨결 하나하나가 아주 독하다.”

강제로 블라드의 입을 닫게 한 노파는 이번에는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는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니벨룬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해 봐라.”

“제가요?”

“그래. 네가 해 봐.”

다시금 담뱃대를 가져온 노파가 그곳에 잎을 꾹꾹 밀어 넣고는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용이 입을 열면 용이 듣는다. 그러니 저놈 대신 네가 말해봐라.”

후욱-

"저 멀리에 있는 용이 너희들의 목적지를 알기 전에."

앙상한 담뱃대에서부터 커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한 번의 내쉼이었으나 어느새 크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블라드의 곁을 머물며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

마치 희뿌연 안개처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만 짙고도 고요한 안개 속에서 블라드는 그제야 자신에게 따라붙은 희미한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도 노파가 경계하는 그 시선은 두 눈을 통해서가 아닌 블라드가 품고 있던 용의 세계를 통해 달라붙은 것이었다.

※※※※

“신비로군.”

수도 브리간테스에 있는 드라굴리아의 저택.

왼쪽 눈을 감고 있던 용혈공 사르누스는 아쉽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잔망스러운 고양이 놈들. 그때 다 불태워버렸어야 하는 거였는데.”

수백 년도 더 지난 먼 옛날을 기억하던 사르누스는 그때처럼 또다시 자신을 가로막은 신비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역시 녀석들의 땅만 가라앉힐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어 목을 잘라버렸어야 하는 거였다.

“거기 누구 있느냐.”

“네 공작님.”

“가서 마법사를 불러와라. 미르셰아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

도망친 라두를 잡기 위해 보냈던 미르셰아는 지금 북쪽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던 녀석들은 북쪽이 아닌 바로 코앞으로 기어들어 와 있었으니 그 깜찍한 선택에 사르누스는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야 네가 보이는구나. 아들아.”

다른 세계들과는 다르게 본래 용의 세계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왜냐하면, 용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결국 완벽함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어 있으므로.

그리고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는 그 시선들을 이용할 줄 아는 유일한 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신도.”

취한 듯 손을 휘적여대던 사르누스는 내려 놓았던 와인잔을 든 채 창가로 다가섰다.

저 멀리 지는 해와 함께 물들기 시작하는 수도의 어둠.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 어둠을 바라보던 사르누스는 지금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애써 봤자 소용없을 거요. 이제 당신은 영광스러운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용의 세계를 통해 바라본 다섯 개의 조각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빛을 잃고 있는 조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품고 있던 조각이었으며 이제 다시는 자신에게 금제를 가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들고 있는 조각이기도 했다.

“와인 맛이 좋군.”

이제 더는 나를 막을 자도 없고, 나를 강제할 자도 없다.

흡수한 용의 조각을 통해 상대를 확신한 사르누스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용의 조각이 있기에 이제는 마시지 않아도 되는 와인이었지만 새로 뜯은 와인통에서 나오는 풍미만큼은 여전히 참기 힘든 것이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2화 11

검은 벼락을 타고 온 남자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앉아있는 바닥에서도 어쩐지 새파란 풀 내음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짙은 연기로 인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방 안이었지만 블라드는 어쩐지 자신이 숲속 한가운데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해봐라. 부르군드 족의 아이야. 지금 저 용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

신비로 만들어 낸 연기를 통해 사르누스의 시선을 차단한 대모였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블라드의 발언을 제한했다.

오래 산 만큼 많은 일을 경험했던 그녀는 완벽함을 향한 용들의 집착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블라드 님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말해도 되겠냐는 듯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두와 피에르와는 공유하지 않았지만 니벨룬만큼은 블라드의 대략적인 목표에 대해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참이었다.

“아주 오래된 신비를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루가 족이 오랫동안 품고 있는 신비요.”

“무슨 신비?”

블라드의 사정이었지만 니벨룬의 목적이기도 했다.

잊혀진 신비들을 찾아 방랑하던 마법사는 어느새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강렬하기에 가장 완벽한 존재마저 해치고 만 신비.”

이제는 전설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는 어린아이들이나 들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이었으나 이제 니벨룬은 그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던 신비 말입니다.”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던 신비.

마치 독처럼 발려 소드마스터의 검을 타고 들어가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을 멈추고만 수인족들의 마법.

오래된 그 신비를 물어보는 낯선 손님들을 보며 루가 족의 대모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인제 보니 고작 허무맹랑한 옛이야기를 따라온 아이들이었군. 가장 오래된 용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니벨룬의 눈빛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대모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홀홀 웃어댈 뿐이었다.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웃음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대신 말을 전한 니벨룬 조차 자신의 행동이 머쓱해지고 마는 그런 웃음이었다.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신비라니. 그런 것은 없어. 그런 건 그저 아이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야.”

그러나 니벨룬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어대는 노파의 숨소리가 더욱 부지런해졌다는 것을.

잔뜩 쪼그라든 폐로 애써 신비를 내뱉는 대모의 모습을 보며 뒤에 앉아있던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알고 계시네요.”

“······입 열지 말라고 했잖느냐.”

“그거 동화 아니라는 거.”

“너는 말하지 말라니까!”

촤악-!

블라드가 계속 입을 열자 잔뜩 놀라고만 대모가 타고 있던 장작 위로 물을 흩뿌렸다.

무언가가 두렵다는 듯 서두르는 몸짓으로.

치이익-

요란히 들려오는 물 끓는 소리와 함께 방 안 가득히 수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먹먹해지기까지 한 방 안의 공기에 언제나 태평했던 니벨룬조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고얀 놈. 고작 허튼소리나 찾아와 폐를 끼치는구나.”

“허튼소리 아닙니다. 루가 족의 마법사가 소드마스터의 검에 각인을 새겨준 거 맞잖습니까.”

“감히 네까짓 게 무언데 나의 말이 틀리다 확신하는 게냐. 지금 땅 위를 거닐고 있는 자들 중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오직 용혈공 사르누스 뿐일 텐데!”

루가 족의 대모가 애써 예전의 진실을 부정하려 하는 것은 지금도 밖에서 뛰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는 자신이 그 옛날의 가장 완벽한 용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신비를 루가 족이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도 위태로운 부족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먼 옛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오직 용혈공 뿐만은 아닐 겁니다.”

스르릉-

벼락과도 같은 대모의 호통에 이어지고 마는 깊고도 짙은 침묵.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대모를 보면서도 그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내밀뿐이었다.

날카로움을 통한 위협이 아닌 그저 여기를 봐달라는 듯한 그런 손짓과 함께.

“내 안에 깃든 존재 또한 그 순간을 지켜봤던 사람이니까요.”

자작거리며 타오르는 장작의 빛을 따라 은은하게 비치는 용살검의 은빛.

방 안 가득한 안개조차도 감추지 못한 그 빛의 끝에는 블라드가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길 저의 검에 다시 한번 그때의 각인을 새겨달라고 하십니다.”

세워진 은빛의 길을 따라 블라드가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 안으로.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기에 전혀 흔들림 없는 블라드의 세계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맑아 루가 족의 대모가 들여다보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그리고 대모는 그 호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훤칠한 키에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

너무나 깊은 곳에 있기에 목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들어 올린 은색의 기억에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오래된 루가 족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완벽함을 더럽히기 위해 만들어진 신비.

차라리 저주라 불러야 할 그 마법은 분명 루가 족 역사상 단 한 번만 이루어졌던 술식이기었고 단 한 명에게 그려진 각인이기도 했다.

들고 있는 것은 은색의 검.

품고 있는 자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타고난 피는 용의 피.

푸른 호수 속에서 빠져나와 이제야 현실 속에서 마주한 블라드를 보며 루가 족의 대모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본 대모의 입에서 그녀가 두려워하던 이름 하나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 이름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소드마스터처럼 너무나 오래되어 더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런 이름이었다.

“가장 완벽한 용.”

오롯이 서 있는 완벽함을 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완벽함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세계를 더럽히는 방법뿐이다.

그 순수함을 더럽히기 위해 먼 옛날의 소드마스터는 가장 완벽한 용의 세계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불순물을 하나 집어넣기로 했다.

깊게 꽂혀진 은색의 기사를 따라 루가 족이 새겨넣은 각인을 타고.

그렇게 완벽한 용의 세계로 집어 넣어진 불순물의 이름은 바로 명예로운 기사 키하노였다.

※※※※

그날은 태양이 가려지는 날이었다.

떠오르는 달에 의해 이제는 희미한 금색의 고리만을 남긴 태양은 시들어가는 꽃처럼 자신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키하노. 결국 이곳까지 왔군요.”

심장에 꽂아 넣은 검을 따라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그 피가 아무리 붉다 한들 지금 이곳에 흐르는 수많은 핏물들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두를 희생시킨 건가요.”

“······희생한 게 아니야.”

지금도 언덕 위를 힘없이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있었다.

키하노의 등 뒤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시체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거친 함성을 부르짖던 그의 부하이자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거지.”

인간, 엘프, 드워프, 그리고 수인족들까지.

이제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그들의 희생으로 키하노는 드디어 이 순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이 열어준 길이 있었기에 세상의 명운을 짊어진 결투사는 드디어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에 자신의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완벽하기에 불멸한 존재예요. 당신들의 희생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하룻밤의 꿈일 뿐이에요.”

정작 자신의 심장에 검이 꽂혀 있었음에도 가장 완벽한 용은 오히려 온통 엉망이 되고만 키하노가 안쓰럽다는 듯 그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지워지는 얼굴의 핏물에 여태껏 감추고 있던 키하노의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거야. 지금의 검을.”

웅웅-

꽂아 넣은 은색의 기사가 울고 있었다.

핏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만큼이나 점점 찢겨 가는 자신의 주인을 느끼면서.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세계의 균열은 맞닿아 있는 은색의 기사도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거대하고도 처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이제 더는 완벽해질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먼 훗날까지 따라간 내가 다시 너를 찢어버리고 말 테니까.”

키하노의 말과 함께 검에 새겨진 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검이 가진 은색의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울한 빛과 함께.

각인에 새겨진 검은 번개의 문양이 천천히 빛을 발하며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에 치명적인 독을 주입하고 있었다.

“너에게 보내는 나의 이름은 키하노다. 결투사 키하노.”

완벽한 너의 세계에 나를 보낸다.

네가 다시는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을 향해서.

가장 완벽한 용은 자신의 세계를 파고드는 키하노의 세계를 느끼며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칼끝이 차가워요.”

“······.”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져요.”

“······그만 자 둬.”

힘이 빠져가는지 키하노의 고개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시 깨어날 때 너는 네가 아니게 될 테니까.”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해주세요.”

점점 내려가는 키하노의 고개를 붙잡은 가장 완벽한 용이 물었다.

“당신이 본 나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완벽하기에 이 세상 모든 모습을 품을 수 있는 용.

어떤 이에게는 욕망이며 어떤 이에게는 분노,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공포였던 가장 완벽한 용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키하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였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거다.”

그드득-!

그러나 키하노는 가장 완벽한 용이 원하는 마지막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던 검을 용의 심장을 향해 힘껏 밀어 넣었을 뿐.

그와 함께 떨어져 나간 키하노라는 세계가 은색의 검 끝을 통해 가장 완벽한 용의 세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키하노-! 안 돼!”

가장 완벽한 용의 마지막 떨림을 보며 저 언덕 아래서 목줄 잡힌 사르누스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이루지 못한 꿈처럼 산산이 부서져 아무도 없는 언덕 위를 맴돌았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양이 사그라들어가는 이 언덕을 기어 올라왔음에도 결국 남아있는 자는 단 두 명뿐.

아니, 한 명하고도 반쪽뿐.

이제는 깊이 잠들어버린 가장 완벽한 용을 내려다보며 텅 빈 표정의 프라우센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진창 위에 쓰러져 있는 소년이 있었다.

차가운 길바닥이었으나 아무도 다가가 주지 않는 그 아이의 이름은 블라드였다.

“저놈이 갑자기 왜 쓰러졌대?”

“아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쳤더라고.”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에 감히 다가가지도 못한 채 몸을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벼락의 색깔이 까맣지 않았어?”

“그러니까. 혹시 저주라도 받은 것 아니야.”

그 날, 소년은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고 했다.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벼락이라고 했다.

[······.]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랐는지 아직도 반쯤은 떠져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가 쓰러진 그 순간까지도 담고 있던 것은 뒷골목에서도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장식 없는 검의 모습이었다.

높디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 않았어도 빛나고 있던 장식 없는 검의 모습.

영원히 완벽해지지 않은 소년이 검은 벼락을 맞았던 그 날은 그가 자신의 가슴 속에 자그마한 별을 품었던 날이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3화 3

목줄 죄인 용들 (1)

붉은 단풍잎이 휘날리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에서, 키하노는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앉아있는 블라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세계까지 도망쳐 와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블라드의 뒷모습이 꼭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프라우센의 심장에 용의 조각이 박혀 있더군.]

입을 떼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쉽사리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키하노는 말해주기로 했다.

비록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블라드가 품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잠시라도 좋으니 그 조각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프라우센 또한 눈을 감게 될 거다.]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

비록 비루하게 되살아난 프라우센이었지만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제 더 이상 정석적인 방법만을 추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키하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요?”

[너의 세계를 쪼개.]

되살아난 소드마스터가 아닌 그가 품고 있는 용의 조각을.

이미 완벽함을 훼손해 본 경험이 있던 키하노만이 제시해 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쪼개진 너의 세계를 통해 조각이 가진 완벽함에 흠집을 내는 거다.]

블라드는 평소와는 다른 것 같은 키하노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하노라는 존재는 블라드에게 있어 언제나 옳고 바른 길만을 알려주던 등대와도 같은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사납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의 세계에 상처입히기 위해서는 나 또한 상처를 각오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마주 본 키하노의 눈동자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블라드가 감히 짐작하기 힘든 그 슬픔의 깊이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제는 냉혹한 현실을 헤매야만 하는 어린 기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기사 블라드. 너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상처 입을 각오가 되어 있나?]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 깊은 자가 묻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상처 입을 자를 향해서.

“······.”

‘당신의 눈에는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나요.’

블라드가 보이는 긴 침묵 속에서, 키하노는 그 옛날 자신이 마주했었던 가장 완벽한 용을 떠올렸다.

찬란한 가능성이었기에 어떠한 모습이든 될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용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정작 본인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했던 존재였다.

“······너무 그렇게 배려해줄 필요는 없어요. 키하노.”

그러나 침묵 끝에 나온 블라드의 대답은 그때와는 달랐다.

“저는 애초에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잖아요.”

같은 존재에서 비롯되었지만, 전혀 다른 대답.

블라드가 말하는 지금의 대답에 키하노는 그때 자신이 택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키하노에 앞에 있는 블라드는 그때의 가장 완벽한 용과는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비켜라!”

“경비병들은 성문을 열어라!”

블라드와 대모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그때, 도시 나마르카의 성벽에서는 누군가 만드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대략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말들이 질주하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정작 성문을 지켜야 하는 경비병들은 뛰어드는 말들을 막아서기는커녕, 앞서 보이는 깃발을 보며 서둘러 몸을 피할 뿐이었다.

“용살기사단?”

“아니 이 사람들이 왜······.”

마땅한 주인이 없기에 책임질 사람도 없는 도시.

그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깃발들이 있었다.

앞에 있는 그 누구라도 베어 넘길 듯 서슬 퍼런 기세로 치켜세워진 깃발에는 용의 목을 가르는 긴 선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냐. 블라드.”

이제야 들어선 도시를 바라보며 미르셰아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었기에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블라드라는 존재가 그의 심장을 뛰게 했기 때문이었다.

“······저기로군.”

아버지인 용혈공만큼은 아니었지만 미르셰아 또한 드라굴리아의 피와 교육을 온전히 이어받은 적장자.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용의 세계를 탐색하던 미르셰아는 저 멀리 보이는 골목 끝에서부터 황금색 세계가 일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곳에만 머물러 있구나. 블라드.”

지니고 있는 피는 고귀하고 내뿜고 있는 빛은 화려했음에도 자신의 동생은 여전히 추레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비록 대적해야 할 녀석이긴 했으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아 쥐기 시작했다.

“가자.”

“네. 단장님.”

그 오랜 세월 동안 따뜻한 안식 한번 없이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던 루가 족의 마지막 안식처.

그곳을 향해 움직이는 용의 깃발이 불길하게 까닥거리고 있었다.

지금 용살기사단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미르셰아의 눈빛처럼.

※※※※

“대모님!”

온통 굳어버린 방 안의 공기를 깨뜨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있었다.

열어젖힌 방 안의 분위기는 그 누구라도 쉽사리 방해할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들어선 수인족 사내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살기사단입니다! 용살기사단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

블라드 안에 있는 키하노를.

그리하여 키하노를 품고 있던 블라드가 어떠한 존재인지까지도 간파하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블라드를 바라보는 대모의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눈앞에 있는 블라드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결국 용들은 자신들에게 있어 그저 불길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너희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터전을 짓밟고 마는구나. 아주 오래된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

용들에 의해 짓밟힌 가능성들이 수없이 많다고는 하지만 터전을 잃다 못해 바닷속에 가라앉히고만 수인족들만큼이나 처절하게 당한 자들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원한 때문에 저주와도 같은 신비를 소드마스터에게 전해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밖에 있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네가 아무리 입으로 설명해 봤자 나는 너를 모른다.”

밖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들이 커지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루가 족의 수인들이 내지르는 혼란한 비명이었다.

“그러니 너의 단검을 다오.”

“단검······은 갑자기 왜?

아무리 다르다고 말해도 루가 족의 대모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블라드의 면(面)은 그저 용이었을 뿐.

그것도 보통 용이 아닌 타고난 핏줄을 통해 다시금 이어지고만 가장 완벽한 용의 잔재가 바로 대모가 파악해 낸 블라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주친 사태는 급박하고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없었으니 루가 족의 대모는 결정해야만 했다.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용을 죽일 각인 또한 받아 가고 싶다면 어서 줘야 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루가 족의 대모는 머리띠에 꽂아 넣은 커다란 깃털을 뽑아내고는 옆에 놓여 있던 새까만 염료 통에 담그기 시작했다.

고작 살짝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화려했던 깃털이 새까매지는 것이 아무래도 신비를 통한 술법인 듯싶었다.

“손에 쥔 것은 절대 놓지 않는 탐욕스러운 존재들이 바로 용이지. 왜냐하면, 그들은 모은 것들을 통해 완벽함에 다가가려 하거든.”

루가 족의 대모는 그렇게 물든 깃털을 들고는 블라드의 단검에 무언가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저 잉크를 통해 그려 넣는 그림일 뿐이었으나 어째서인지 호르헤의 단검에는 확고한 무늬로 자리 잡고 마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다르다고 했으니 이것으로 한번 증명해봐라.”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긴박한 외침 속에서 드디어 그려지고 만 호르헤의 단검에는 어느새 새까만 각인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고작 겉에 대고 그렸을 뿐이었으나 망치로 박아넣은 것만 같이 확고히 자리 잡아 버린 그 각인은 마치 삐죽삐죽 튀어나온 올가미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네가 다른 용들과 다른 녀석인지.”

“······.”

단검을 받아든 블라드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루가 족의 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누지 않기에 오직 소유할 뿐인 용이라는 존재들.

그러나 루가 족의 대모는 너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용의 본능조차 잠재워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

“끄으으으······.”

감옥 안에 앉아 있던 라두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오한에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새였다.

“왜 그러는 거냐? 감기라도 걸린게야?”

“흐으으······. 왔소, 왔어.”

옆에 있던 피에르가 벌벌 떨어대는 라두에게 다가갔지만 정작 그가 떨고 있는 오한의 근원은 병이 아닌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근, 근처에 미르셰아, 미르셰아가 왔소.”

“······!”

용혈공 다음으로 가장 용의 피를 진하게 이었다는 드라굴리아의 아들.

아무리 잔뜩 약해지고 말았다지만 라두 또한 같은 용이었기에 미르셰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의 존재감은 라두에게 있어서는 그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해, 나가야······.”

“경비병!”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피에르가 감옥 밖에 있을 간수들을 불러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저 텅 빈 침묵뿐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뛰쳐나간 간수들 탓에 지금 감옥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는 오직 피에르와 벌벌 떨어대고 있는 라두 뿐이었다.

“블라드! 여기다!”

그러나 피에르의 외침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횃불 너머 어둠에서부터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숙한 그 그림자들을 보며 피에르는 여기라는 듯 마구 손을 흔들어댔다.

“열쇠 없어요?”

“애초에 열쇠가 있었으면 갇혀 있었겠느냐!”

“그럼 비켜봐요.”

콰지직-!

멍청한 블라드의 물음에 버럭 화를 내고만 피에르였으나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창살들을 보고서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녹슨 창살이라지만 휘두르는 블라드의 검 앞에서는 마치 수수깡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봐.”

“크윽!”

감옥 안에 들어선 블라드는 미르셰아가 왔다며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라두를 강하게 잡아 세웠다.

안 그래도 잔뜩 늙어버린 라두는 그런 블라드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대롱대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너 피 뺏겨서 이렇게 됐다고 했지?”

“그, 그렇지.”

라두를 노려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용이기에 느낄 수 있는 그 눈빛이 라두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공포의 편린들을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젊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뭐?”

녀석들을 골목 안으로 유인해!

일단 대모님부터 챙겨라!

감옥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고함들이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들려오는 소리만으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용살기사단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고 블라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피 먹으면 돼? 그러면 젊어져?”

“······.”

“그러면 미르셰아는 몰라도 다른 기사들은 막을 수 있겠어?”

라두 드라굴리아.

푸른 눈은 이어받았으나 찬란한 금발까지는 이어받지 못한 반쪽짜리 서자.

비록 지금은 자신의 아비에게 온통 가능성을 빼앗기고 말았다지만 그에게도 찬란히 빛나던 기사로서의 시간이 있었다.

“당연하지. 용살기사단 내에서 나 라두 드라굴리아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아버지와 미르셰아뿐이었다!”

오만하기는 했어도 어느새 제 모습을 되찾은듯한 라두의 호언장담에 블라드의 표정에 아주 잠시 웃음이 감돌았다.

그러나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어느새 블라드의 손에는 깊게 베인 상처가 자리 잡았을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 피를 주는 이유를 잊지 마라.”

“······!”

기괴한 각인이 새겨진 단검을 따라 감옥의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

그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용의 가능성을 알아본 라두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용을 잡아도 얻을 수 없을 진득한 용의 피.

그 피가 지금 처연하게 떨어지며 라두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를 도와 용살기사단을 막는 거다. 라두 드라굴리아.”

“큽! 흡!”

숨 쉴 새도 없다는 듯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들을 향해 입을 벌리는 라두.

작디작은 방울이었지만 그것을 한 방울씩 넘길 때마다 충만해지는 나의 가능성에 라두는 다시금 자신이 용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아!”

울대가 꿈틀거릴 때마다 점점 길어지는 송곳니와 점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온몸의 근육들.

그리고 블라드의 피를 넘길 때마다 목 주위에 자리 잡아가는 기묘한 모양의 문신들까지.

"이런."

자신의 가능성을 나눠주는 블라드와 그것을 게걸스럽게 받아먹는 라두를 보며 피에르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야로 라두의 목 주위에서 점점 퍼져나가는 기묘한 각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각인들은 마치 가시덩쿨로 만들어진 올가미처럼 천천히 라두의 목 주위로 새까맣게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4화 3

목줄 죄인 용들 (2)

더럽고도 그늘진 골목이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발끝에 쓰레기들이 걸리고 마는 그런 골목.

그러나 지금 그 골목을 뛰어가는 이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조용히! 놈들이 근처에 있어!”

사내들이 내뱉는 긴밀한 경고에 사람들의 입에서는 다시금 억눌린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이제야 정들법한 골목을 다시 떠나야 하는 그들이었지만 용살기사단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조금의 아쉬움조차도 사치인 법이었다.

“여기 있었군.”

그러나 애써 숨죽인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골목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흉갑에 새겨진 드라굴리아의 문양을 내세운 사내는 눈앞에 있는 루가 족 피난민들을 보며 고개를 까닥이는 중이었다.

“생긴 것은 고양이인데 하는 짓은 쥐새끼로구나.”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내의 등 뒤에서는 이제야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가 가득했다.

매캐한 담배 향을 머금은 연기들은 조금씩 골목들을 뒤덮고 있었으나 이제 막 튀어나온 기사의 시야까지는 가리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수인족 녀석들은 잠시만 눈을 떼도 이렇게나 새끼들을 낳아대는군.”

칼날과도 같이 스산한 기사의 시선에 수인족 아이들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그 차가운 눈빛에 압도된 듯한 그런 모양새였다.

“······음?”

자신을 막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칼을 빼 든 루가 족 사내들의 행동이 우스웠다.

그러나 용살기사단의 기사는 그들이 보이는 허접한 모습에 웃음 지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기척이었건만 지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시선은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점점 더 짙어지는 중이었다.

“예의가 없는 녀석이로군.”

“······!”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차오르는 연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색깔은.

희뿌연 풍경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그는 사내도 익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남의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본인의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전혀 낯선 곳에서 보는 익숙한 얼굴에 사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라두 드라굴리아는 이미 생기를 빼앗겨 다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 라두 드라굴리아?”

“나를 알아보는 걸 보니 용살기사단은 맞는 모양이군.”

골목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연기를 밟으며 라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기사를 향해서.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 라두의 모습에서는 어째서인지 조금의 쇠약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를 알아봤으면 진작에 도망을 쳤어야지.”

콰드득-!

“크헉!”

오히려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흉악한 기세였다.

그 기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였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섬뜩함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라두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속도였건만 어느새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바로 앞에 다다라 있었기에.

“끄으으······.”

“나 라두 드라굴리아라니까.”

사냥감을 희롱하듯 실실 웃어대는 라두의 표정이 창백했다.

그러나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만큼은 지금 막 피를 삼키기라도 했다는 듯 붉은 기가 머물러 있었다.

“어디 보자.”

“끄으으억!”

라두는 기사를 꿰뚫은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버둥거리는 남자의 몸짓이 애처로웠지만 라두는 그저 미소 지으며 흘러내는 핏물들을 차분히 감상할 뿐이었다.

“······이제 다른 피들은 봐도 별 감흥이 없는데.”

그 어느 때보다 시퍼렇게 빛나는 자신의 눈동자와 함께.

촤악-!

심드렁한 눈빛과 함께 기사를 반쪽으로 갈라버린 라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골목으로 걸어들어갔다.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다스리는 라두의 잔혹한 모습은 그야말로 드라굴리아가 요구하는 용의 모습 그 자체였다.

※※※※

“······.”

미르셰아는 죽어있는 루가 족 사내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마지막까지 담벼락에다 그리려 했던 기이한 문양을 보는 중이었다.

“마법이로군.”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쥐고 있던 백묵을 놓지 않았던 루가 족 사내.

그가 담벼락에 문양을 그려 넣자마자 미르셰아가 있던 골목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기 시작했었다.

마치 담배를 태우면 나는 연기처럼 매캐함을 품고 있는 그 연기에 미르셰아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꽤 고매한 마법사.”

고개를 돌린 미르셰아는 어느새 바뀌어버린 풍경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눈을 깜빡이는 이 짧은 순간에도 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골목길의 모습.

누군가가 방 안에서 담뱃재를 털어댈 때마다, 혹은 폐에 가득 모아두었던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앞에 있는 풍경들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끄아아악-!

이 자식! 넌 누구냐!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익숙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그 비명들의 메아리는 미르셰아의 신경을 자극하고는 곧 사라지기 시작했다.

“꽤 많이 컸군. 훌륭해.”

가만히 서서 사태를 파악해보던 미르셰아는 그 비명들을 끊은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루가 족의 신비는 분명 훌륭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직속 기사들을 가를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비루한 골목길에서 루가 족을 위해 대신 검을 휘둘러 줄 검사라면 역시 그 녀석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 역시 너 일줄 알았다.”

과연 미르셰아의 추측이 맞다는 듯 저 멀리 있는 골목에서부터 희뿌연 인영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걸어 나온 남자는 미르셰아와 마찬가지로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몇 명이나 베었나?”

“대충 6명 정도.”

본인의 부하들을 베었다는 말이었지만 미르셰아는 만족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역시 나와 같은 핏줄이라면 제국의 최정예 기사라도 가를 줄 알아야 한다는 듯 그렇게.

“나머지는 어찌하려고.”

“라두가 알아서 할 거야.”

여전히 검에 맺혀있는 핏방울들을 무심히 휘둘러낸 블라드는 미르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 좀 먹였더니 나름 쓸만하더라고.”

“······하.”

미르셰아는 라두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었다는 블라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도 이제는 용이라는 자각이 있을 텐데?”

피를 통해 이어지는 완벽함은 모든 용들이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본능 같은 것이었다.

애초에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가능성을 나누려 하지 않는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블라드의 대답은 미르셰아가 기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의 피까지 빨면서 살고 싶지는 않거든.”

그드드득-

어느새 잔뜩 힘을 준 디딤발 주변으로 주변의 흙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황금색 선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감처럼 번져 내린 그 선은 지금도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블라드의 곁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너희들처럼은 살지 않으려고.”

안개 가득한 공터 위에서 블라드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물려받은 내 피가 원하는 대로는 살지는 않겠노라고.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씌워진 목줄을 끊어내겠다는 듯 지금 블라드는 단 한 번의 일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

콰아아앙-!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거대한 소리가 도시 나마르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써 만든 결계조차 잡아내지 못한 이 소리는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이런.”

모두가 떠난 방 안에서 신비를 지피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잔뜩 구부러지고 만 담뱃대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루가 족의 대모들이 대를 이어가며 평생 부려왔던 도구였건만 지금 들려오는 단 한 번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가장 완벽한 용이로구나.”

그리고 가장 고귀한 기사.

둘 중의 하나만이어도 세상이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블라드는 그 모두를 품고 있었으니 루가 족의 대모는 그가 가진 잠재력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까아아앙-!

“이번에는 무엇이 될까. 무엇이.”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장 완벽한 용이었다.

그러나 저번 시대의 가장 완벽한 용은 오직 홀로 날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가능성들을 깔고 앉았으니 수인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부디 당신의 결정이 맞길 바랍니다. 고귀한 기사시여.”

그 말과 함께 잠시 망설이던 루가 족의 대모는 떨리는 손길로 담뱃대에 담겨 있는 재들을 털어내었다.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블라드의 꿈틀거림은 이미 저 멀리에 있을 가장 오래된 용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콰가가가각-!

건물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질서가 없기에 온통 난립하고만 나마르카의 뒷골목이 내는 비명이었다.

“많이 컸군!”

비록 상대를 칭찬하고 있었으나 지금 보이는 미르셰아의 표정에는 평소에 부리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피하기에는 너무 빨랐고 흘려내기에도 너무 무거운 블라드의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루트거가 없어도 되겠어!”

강철공의 도시인 바스토폴에서 블라드는 미르셰아의 밑이었다.

루트거와 함께해야만 겨우 자신과 대적해볼 만한 수준의 녀석이었건만 지금의 블라드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수준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콰아아앙-!

블라드가 휘두르는 우악스러운 검세에 미르셰아는 다시금 건물들을 부수며 주욱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지는 건물들이 만드는 자욱한 돌먼지 속에서도 블라드가 만드는 황금빛 실선은 선명했으니, 그것은 마치 지평선에 걸려있는 빛무리처럼 미르셰아의 시선을 잡아끄는 중이었다.

“싸우는 중에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대견해서 그렇지.”

“대견하기는 염병하고 있네.”

그러나 블라드의 세계를 통해 떠오르려는 빛은 어쩐지 오늘만큼은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먹먹해 보였다.

“어차피 나도 잡아먹으려고 만든 거 아니야?”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목소리에는 용혈공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남의 입으로 내 출생의 비밀을 들으니까 그렇게 엿 같을 수가 없더라고.”

블라드가 간직한 분노만큼이나 맞닿은 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힘의 균형에 미르셰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우리 엄마만 불쌍했던 거였지. 돼도 않는 나를 낳느라고.”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딱히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나중에 한 번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술이라도 한잔 건네주지는 않겠는가 생각했을 뿐.

그러나 라두를 통해 마주하고 만 진실은 블라드가 여태껏 품고 있던 기대의 한 가닥조차도 처참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드라굴리아.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북부에 뿌려진 용의 씨앗. 블라드.

그런 나라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가 고작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였다니.

웅웅웅-

검이 울고 있었다.

주인의 분노와 슬픔을 이해하고 있던 용살검이.

나는 그렇게 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금발과 푸른 눈에게 외치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5화 4

가장 오래된 용

골목길에 가득했던 연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용들의 존재감이 대모가 만들어놓은 결계를 찢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됐나.”

그러나 지금 라두의 발밑에는 대모가 만들어 낸 새하얀 연기 대신 시뻘건 핏물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용살기사단원이 흘린 그 핏물은 라두가 블라드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루가 족의 안전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거 영 꺼림칙한데. 나중에는 이게 막 내 목을 조르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바닥에 누워 있는 기사를 보던 라두는 자신의 목에 새겨진 문신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려댔다.

라두는 몰랐겠지만 마치 가시넝쿨로 칭칭 감겨진 듯한 그 불길한 문신은 가장 오래된 용을 묶고 있던 맹약과도 흡사하게 생긴 것이었다.

“음?”

콰아아앙-!

이제는 완전히 찢겨버린 결계 너머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색창연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르셰아의 세계는 흠 하나 없는 보석과도 같은 세계.

그 빛이 누구에서부터 새어 나왔는지를 알아챈 라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랑 다르게 난 놈은 난 놈이었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나 나는 그저 반푼이였고 그는 완벽한 용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미르셰아의 진심 어린 세계를 끌어내지 못했던 라두는 저 멀리서 비치는 화려한 보석빛에 복잡미묘한 심경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쯤 해줬으니 됐겠지.”

블라드와의 약속을 지켰다 생각한 라두는 일행들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슬쩍 빠져나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서슬 퍼런 북부도, 신비를 통해 목줄을 묶어 놓은 블라드도 전부 라두에게 있어서는 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였기에.

“······!”

그러나 홀로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던 라두는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어느새 서늘해진 뒷덜미가 그에게 강렬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본능을 통해 알아본 경고의 주체.

라두는 목덜미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함께 자신이 피를 빨리던 축축한 지하실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라두가 바라보는 다급한 시선의 끝에는 도시 나마르카에 있는 유일한 성문이 있었다.

성벽 밖에서부터 그곳을 향해 다가오는 깃발의 모습은 라두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었다.

※※※※

쾅! 콰앙! 쾅!

“크윽!”

두 개의 검이 맞닿을 때마다 새빨간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 불꽃이 튀어 나갈 때마다 미르셰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 같은 신음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조각의 힘이!’

오색창연한 자신의 세계를 개방한 뒤였지만 블라드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불타오르는 블라드의 검 끝에는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용의 기운이 맺혀있을 뿐이었다.

콰앙!

살벌한 쇳소리와 함께 미르셰아의 신형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블라드의 완력 때문이었고 맞닿을수록 점점 버거워지는 조각의 존재감 때문이기도 했다.

“······조각을 어찌한 거냐. 본래 이런 존재가 아니었을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용의 조각을 휘두르는 본인이었지만 블라드는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미르셰아가 블라드의 검을 감싸고 있는 진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면 지금의 질문은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하다.’

바르고 진실되었기에 옳은 길을 알려주는 명예로운 금속.

블라드의 검을 감싸고 있는 금속 때문에 조각의 영향을 받지 못하게 된 미르셰아는 시간이 갈수록 강인해지는 블라드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이 준비해왔군.”

그리하여 깊게 감은 왼쪽 눈에서 다시금 떠오르는 세계.

쉬운 상대로는 절대 내비치지 않는 미르셰아의 보석빛 세계가 블라드가 그려놓은 황금빛 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

흠 하나 없이 드러난 미르셰아의 세계를 본 블라드는 잠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태껏 진창을 굴러왔던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는데.”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고 싶지 않다.

나를 마음대로 내려다보려는 미르셰아의 세계 따위에게.

이를 악물어낸 블라드는 자신을 애써 밀쳐내려는 미르셰아의 반발력에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잡은 기세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 탐욕스러운 자세는 타고난 본능과 더불어 여태껏 블라드의 스승들이 새겨놓은 가르침이기도 했다.

“아까는 용의 피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싫다고 안 쓰면 그게 병신이지.”

타고난 용의 피는 싫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블라드는 있는 힘껏 팔을 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커온 사람이었으니까.

“난 여유 부리다 뒤지는 그런 놈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끄드드득-

점점 밀려가는 검 끝을 보며 다시금 미르셰아가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것은 뭐라도 휘두르겠다는 블라드의 악다구니가 이제야 새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려받은 이 피라도 마음껏 써야 내 분이 풀릴 것 아냐!”

까가가각-!

나와 닮은 미르셰아의 푸른 눈을 보며 블라드는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슴 속에 들끓는 이 분노를 세상 밖으로 내뱉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

“······!”

쾅! 쾅! 콰앙!

그리하여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연격의 연속.

숨 쉴 틈도 없이 치열하게 맞붙는 둘의 맞부딪힘에 나마르카의 뒷골목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쉴새 없이 만들어지는 강렬한 풍압에 주위의 건물들이 베어지고 내려앉으며 커다란 먼지의 구름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틈을 노려야 한다!’

그 자욱한 먼지의 틈 속에서 미르셰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나를 파고들려는 기세는 강맹했으나 블라드의 자세에는 그만큼 틈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방이면 돼. 한 방이면.”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어 버리는 검회색 견갑에는 이미 칼자국이 가득했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가고자 하는 블라드의 전진은 끊기질 않고 있었다.

견고한 미르셰아의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이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듯 블라드의 두 눈에는 이제 시꺼먼 광기마저 엿보이는 것 같았다.

“흐으으읍!”

그렇기에 지금 끊어내야 한다.

상대에게 더 기세를 내어주었다가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테니까.

블라드가 보인 틈 사이로 끼워 넣은 미르셰아의 검이 예리하게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블라드가 타고 있는 기세의 흐름은 끊어졌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번들거리던 블라드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빛깔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할 줄 알았어.”

"뭐?"

검과 검의 싸움은 간격이 결정한다.

그러나 물러서는 미르셰아와는 다르게 무식한 전진으로 지금의 그림을 설계했던 블라드는 다음의 일격을 위해 재빠르게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펄럭이는 망토와 함께 잔뜩 자세를 낮춰버린 블라드의 자세.

마치 예측하기라도 했다는 듯 물 흐르듯 이어진 그 자세를 보며 미르셰아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골목 가운데 깔린 연기들이 블라드의 검 끝에 몰려들며 기어이 응축된 원 하나를 만들어내었다.

점과도 같이 작은 원이었지만 미르셰아는 곧 그 끝에서부터 커다란 세계 하나가 솟아오를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모자랐지만 나는 오늘 너를 넘을 거다.”

미르셰아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이 순간은 온전히 블라드가 벌어낸 것이었으니 미르셰아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드라굴리아까지도.”

모아낸 원을 통해 찔러낸 일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르셰아는 지금 느끼는 고요함이 폭풍전야와도 같은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콰가가각-!

순간, 블라드가 그려낸 황금빛 지평선을 타고 루가 족의 신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소리보다 빠르게 다가온 날카로운 선풍에 미르셰아는 감히 대처하지 못한 채 온몸에 붉은 핏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블라드!”

자신을 찢어발길 듯 불어오는 선풍에 미르셰아가 기어이 자신의 깊은 세계를 개방해 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잘 깎아놓은 그 세계의 면면은 분명 화려하고도 완벽한 것이었을지라도 마주한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깨뜨려야 할 벽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흐으아!”

본능이라는 목줄을 풀어낸 용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타고난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에 어디에라도 닿을 수 있는 그 용은 밟고 있는 바람과 함께 지금 밑에서 반짝이는 보석 하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까아아앙-!

도시를 들썩이게 만드는 날카로운 검과 검의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된 블라드의 폭풍이 미르셰아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증명해야 할 벽이었기에 자비 없는 블라드의 검 끝은 사정없이 미르셰아를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

“······.”

마치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 같았다.

서 있는 블라드의 옆으로 원래 있던 건물들이 전부 눕혀져 있었으므로.

“누구냐.”

그러나 팽팽히 당겨진 블라드의 검 끝은 아직 미르셰아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그 끝을 가로막는 반짝이는 검이 있었기에.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 묵직한 무게감에 블라드의 등허리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누구야 넌.”

분명 나의 모든 세계를 힘껏 끌어올린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를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검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잔잔해 보였다.

그것은 곧 블라드와 이 검의 주인이 가진 격차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아들아.”

그 말과 함께 마치 검술을 지도하는 듯 가볍게 들어 올려버린 검과 검.

강제로 올려진 검을 따라 치켜세워진 블라드의 고개가 어느덧 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꼭 한번 보고 싶었단다.”

금발에 푸른 눈.

그러나 나보다도 훨씬 짙은 그 색깔들.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본 블라드는 그가 품고 있는 색의 깊이에 그만 자신이 까마득한 절벽 밑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당장 도망쳐라! 블라드!]

키하노의 날카로운 경고와 함께 들고 있는 검이 울고 있었다.

저 앞에 있는 남자가 품고 있는 조각을 알아봤기에.

그러나 그가 품고 있는 조각은 블라드의 것과는 달리 이미 형태를 잃어버린 채 흐르고 있는 혈관에 섞여 완전히 녹아있는 중이었다.

“용······ 혈공.”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나의 아버지.

“······사르누스.”

뛰고 있는 심장이 가리키는 그의 이름은 분명 용혈공 사르누스 드라굴리아였다.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아들을 보며 사르누스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맞다. 내가 바로 사르누스 드라굴리아다.”

검을 집어넣었지만, 그가 가진 존재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도 나의 안에 있는 키하노가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까마득해 보이는 사르누스를 보며 감히 뒤돌아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지난 이야기들은 집에 가서 나눠보는 것은 어떠할까?”

블라드를 향해 웃고 있는 인자한 웃음 뒤로 따라 들어오는 드라굴리아의 깃발이 즐비했다.

고작 너저분한 도시를 점령하기에는 너무 많은 군사들을 보며 블라드의 두 발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블라드-!]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고 마는 사르누스라는 세계.

그의 피에서 비롯되었기에 압도되고 만 자신의 기사를 대신해 블라드의 오른쪽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6화 15

최고의 길잡이 (1)

그는 홀로 5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이였다.

세상을 지배하던 용들의 번영과 몰락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봤으며 새로이 열린 인간들의 시대 아래서 치욕을 맛보며 살아남은 존재이기도 했다.

[사르누스! 나에게 했던 맹세를 기억해라!]

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증명이다.

먹고 먹히고 마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을 위해 소비되지 않았다는 증명.

그렇게 살아남은 사르누스라는 가장 오래된 용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자신만의 격을 쌓아 올린 존재이기도 했다.

“맹세?”

다급히 외친 키하노의 외침에 사르누스의 목덜미에서 기이한 문신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삐죽거리며 튀어나온 새까만 가시들이 주인 된 자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사르누스의 목덜미를 조이는 중이었다.

“······키하노?”

그토록 두려워했던 오래된 맹약이 다시금 자신을 조여 오자 사르누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맺힌 당황은 지금 자신을 조이고 있는 목줄이 아닌 앞에 있는 금발의 기사를 향해 있는 중이었다.

“아아. 이런.”

흐르는 피 혹은 이어받은 의지로만 움직일 수 있는 그 옛날의 맹약.

그 맹약에 의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제국에 충성했고 황실을 지켰었던 사르누스였다.

“당신이군. 당신이었어.”

우드드득-!

그러나 사르누스는 더 이상 그와의 맹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협하는 목줄들을 조용히 잡아 뜯고 있었을 뿐.

“당신이었다면 이 모든게 다 설명이 되지.”

블라드의 안에 있는 키하노를 알아본 사르누스는 그제야 모든 일이 이해가 된다는 듯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용의 영혼 안에 깃들어 있는 가장 고귀한 기사의 흔적.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던 사르누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을 감추지 않은 채 광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태어났군. 가장 완벽한 용이!”

도시 나마르카가 떨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과도 같이 격렬히 진동하는 도시의 울림은 차마 사르누스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대지가 내는 신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목에서부터 번져 온몸에서 튀어나오는 맹약의 가시들을 쉼 없이 뜯고 뜯어내고.

그럼에도 여전히 웃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르누스를 보며 키하노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도망쳐라!]

지금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기에.

자신의 자존심조차 접어둔 채 달아나던 키하노는 뒤늦게 따라온 일행들을 향해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

온통 찢겨지고 만 자신은 더 이상 그의 격(隔)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말이다.

“키하노! 키하노 프라우센!”

올려다보면 볼수록 거대해지고 마는 가장 오래된 용의 존재감이 달아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맹약의 가시로 인해 잠시 우뚝 멈춰서고 말았지만, 어느새 거대해진 사르누스의 그림자는 지금도 키하노의 뒤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네가 나를 보며 달아나는구나!”

광활한 대지를 울리고 마는 가장 오래된 용의 광소.

살아남았기에 증명했고 완벽함을 하나 삼켰기에 높아진 그의 격은 이제는 가장 고귀한 기사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져 있었다.

※※※※

블라드와 아니, 키하노와 합류한 일행들이 어딘가를 다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여태껏 기다리고 있던 루가 족 전사의 도움을 받아 성벽 근처까지 다다른 그들은 가쁜 숨을 감추지 못한 채 자그마한 구멍으로 몸을 들이미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개구멍이야?”

“그냥 빨리 가자구요!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개구멍 앞에서 주저하는 라두를 보며 니벨룬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평소의 그라면 보이지 않을 모습에 라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젠장!”

고개를 들이민 라두는 성벽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피에르를 보며 자그마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을 강철공이 있는 차가운 북쪽으로 데려가려 하는 괴팍한 이단심문관.

그러나 망설이던 예전과는 달리 그에게로 향하는 라두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기민할 뿐이었다.

“온다!”

반푼이 용도, 신비를 좇는 마법사도 그리고 신실한 신의 사제까지도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굳건한 세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을 뒤쫓는 용의 존재감에서만큼은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에 군대가?”

겨우 도시 밖으로 겨우 빠져나온 그들이었지만 안도의 한숨 따위를 내 쉴 시간은 없었다.

성벽을 낀 채 달려오는 군사들의 흙먼지가 바로 저 앞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빨리 타요!”

“이게 뭔데?”

“이놈아! 묻지 말고 그냥 빨리 올라와!”

낡은 양탄자 하나를 바닥에 깐 채 그 위에 오도카니 서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나 피에르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 들어온 라두는 곧 그 양탄자가 둥실 떠오르는 모습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게, 이거 왜 떠?”

“탔다! 빨리 가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라두의 물음을 뒤로 한 채 니벨룬의 양탄자가 황무지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수많은 화살들.

방금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 빼곡히 꽂히고 만 화살들을 보며 라두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왜 이런 곳까지 군대가 들이닥친 거죠? 우리를 잡으려고?”

양탄자의 끝자락을 모아쥐며 운전하고 있던 니벨룬은 저 멀리 보이는 군사들을 뒤돌아 보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우리 때문만은 아니겠지.”

니벨룬의 말처럼 점점 멀어지는 풍경 속에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너저분한 도시였건만 지금 그곳에는 새까맣게 몰려든 중앙의 군사들이 가득했고 그 수는 어렴풋이 짐작해봐도 수만은 되는 병력이었다.

“드디어 준비가 된 거야. 북쪽으로 향할 준비가.”

옆에서 달려오는 기병들을 경계하던 라두는 검을 빼 들고서는 말을 이었다.

까앙-!

이제야 기회를 잡았다는 듯 양탄자로 달려들기 시작하는 기병들.

그런 그들을 거칠게 밀어낸 라두는 아직도 새까맣게 쫓아오는 기병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북쪽이요?”

“북부 연합을 부수겠다는 의미다. 원래는 그놈들이 깃발을 세우기도 전에 와해시킬 생각이었지만.”

용혈공 사르누스와 함께 나마르카로 몰려든 군사들은 황실에서 직접 파견한 중앙의 군세였다.

황실뿐만 아니라 제국에 충성하는 모든 귀족 세력을 모아 북상하는 병력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수도 브리간테스로 모이며 수를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저기서 잘하면 나도 한 자리 차지 할 수 있었을 텐데.”

세차게 지나가는 바람을 향해 마지막 아쉬움을 토로한 라두는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날카로운 검날에 과거의 영광이 아닌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거 더 빨리 못 나는 거냐!”

“사람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도시 모시암에 있었을 때는 하늘을 날았던 양탄자였다.

그러나 지금 타고 있는 인원은 라두와 루가 족의 사내까지 합쳐 두 명이 더 초과하였으니 하늘로 날아오르기는커녕 땅을 달리는 것조차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저 산까지만 가봐! 산까지는 말들이 못 쫓아올 테니까!”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는 듯 라두는 손가락을 들어 저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산은 거친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산맥이기에 그 험세가 남다른 곳이기도 했다.

“빨리!”

일행의 말을 엿듣기라도 했는지 뒤쫓아 오던 기병들의 기세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앞에 보이는 산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양탄자를 멈춰 세우고 말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확연해 보였다.

구르르르릉-!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

멈추게 된다면 꼼짝없이 붙들리게 될 그 상황에서 갑작스레 도시에서부터 천둥과도 같은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학!”

“으아악!”

그 소리와 함께 일행이 타고 있던 양탄자가 힘없이 너풀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뒤따르고 있던 중앙군의 기병들까지도.

이제야 맹약의 족쇄를 풀어낸 사르누스의 거친 포효에 살아있는 말들뿐만 아니라 양탄자에 새겨진 신비까지도 힘을 잃은 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쿠당탕-! 쿵!

여기저기서 얽히며 쓰러지는 기마들 사이로 기어이 니벨룬의 양탄자도 땅을 향해 가라앉고 말았다.

양탄자와 함께 달리던 기세 그대로 땅을 뒹굴고 만 일행은 누구랄 것도 없이 거친 황무지를 구르며 처참하게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흐아아.”

잔뜩 일어난 뿌연 흙먼지 사이로 일행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가 가득했다.

“크헉! 컥!”

그러나 늙은 피에르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워 하는 이는 바로 라두였으니 용의 세계에서 퍼져나온 거대한 포효는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이들보다도 라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잘못했어요.”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는 사르누스의 존재감.

차마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용서를 비는 라두를 보며 키하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빼 들었다.

[너희들의 신비와 신성을 빌려다오. 이제 남은 방법은 그것 뿐이다.]

일행과 마찬가지로 용이 외치는 포효에 놀랐는지 따라왔던 기병들은 저 앞에 쓰러져 있었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깃발들은 여전히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수만의 군세와 함께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용.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절망적인 그림에 키하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던 그때, 등 뒤에 있는 산에서부터 자그마한 고랑이 이어지고 시작했다.

“내가 나 홀로 심연의 골짜기를 걷고 있을 때······.”

“이, 이럴 때는 뭐를 꺼내야.”

일행을 향한 사르누스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는 용이 아닌 니벨룬과 피에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무형의 기세에서 시작한 그의 존재감은 이제 형체를 갖추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으니 주변의 흙들이 뭉개지고 있는 것은 그저 키하노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툭!

이단심문관이 외우는 경전을 따라 당황하고 있는 마법사를 넘어 산에서부터 시작된 고랑이 드디어 키하노의 발끝에 다다랐다.

생각이 복잡했기에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키하노는 발 끝을 툭 치고 마는 작은 기척을 느끼고서야 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음?]

작디작은 녀석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바로 앞에서부터 다가오는 사나운 용의 기세에도 오히려 들고 있던 손가락을 더욱 치켜세웠을 뿐이었다.

뀨-!

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땅이 무너지고 있었다.

두더지가 치켜든 손가락이 신호라도 되었다는 듯 그렇게.

“으아아아아!”

“이건 또 뭐야!”

마치 끝이 없는 동굴과도 같은 깊은 구덩이.

전조도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면을 보며 키하노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뀨뀨-!

자신과 같이 떨어져 내리는 일행들을 보며 이제야 되었다는 듯 두더지가 웃고 있었다.

북부에서부터 이어진 긴 산맥의 줄기를 타고 마침내 이곳까지 내려온 땅의 정령.

여전히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두더지는 도브레치티에서와도 같이 제 색을 지닌 채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7화 4

최고의 길잡이 (2)

드드드득-

기이한 진동이었다.

끊길 듯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진동.

지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오래 이어지는 그 진동에 시체처럼 앉아 있던 남자가 감았던 눈을 조용히 뜨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프라우센은 마치 앞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자연스레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르누스.”

프라우센의 세계는 이미 빛을 잃은 세계였다.

그러나 가슴 속에 박아넣은 조각을 통해 용의 세계는 엿볼 수 있었으니, 지금 프라우센은 감고 있는 그의 왼쪽 눈에서는 서서히 용의 모습을 갖춰가는 사르누스와 그에게서 도망가려는 블라드가 떠오르는 중이었다.

“네가 결국은 나와의 맹약을 깨고 용의 조각을 삼키고 말았구나.”

굳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라우센이 조용히 미소 짓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는 가장 오래된 용의 존재감과 그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가장 완벽한 용의 흔적.

어찌 그렇게 예전의 자신이 예측한 대로 똑같이 움직이는지 프라우센은 오히려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그것이 독인 줄도 모르고.”

마지막 말을 마친 프라우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향하는 문 앞에 섰다.

가장 오래된 용이 기어이 황실의 조각을 삼키고 말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움직여야 할 차례였기 때문에.

“역시 너를 살려두기를 잘했다. 사르누스.”

문을 열어젖힌 그곳에서도 프라우센을 반기는 것은 어둠뿐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바닥에 깔린 그림자들을 밟아나갈 뿐이었다.

이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도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그는 이제 자신이 뿌려놓은 일들의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

치이익-

성냥이 타는 소리와 함께 어두웠던 굴에 불이 밝혀지고 있었다.

어깨를 맞닿아야 할 정도로 좁고도 깊은 굴에서 이제야 서로를 알아볼 수 있게 된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랍니까? 구멍이 왜 생겼죠?”

“나도 모르지. 마법사인 네놈이 모르면.”

“젠장. 지릴 뻔했잖아!”

한참을 떨어져 내렸던 라두는 그 기억을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그러나 그 끔찍했던 부유감과는 달리 자신들은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했고 그 이유는 아마도 지금도 빛나고 있는 작은 두더지 때문일 것이다.

뀨-!

이제야 정신을 차린 일행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블라드를 향해 쏠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블라드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빛나는 두더지를 향해서였다.

“저 쥐새끼는 뭐냐.”

“쥐새끼가 아니라 두더지입니다. 두더지.”

“두더지인데 왜 빛나? 지가 무슨 반딧불이야?”

기이한 모습의 두더지를 보며 일행이 조금씩 웅성대고 있었으나 정작 녀석은 자신을 칭찬하는 줄 아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칭찬이라도 듣고 있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니벨룬은 자신도 모르게 주머니에 있던 빵 조각을 건네줄 정도였다.

“······빵가루 떨어지잖아. 이 자식아.”

이제야 의식이 되돌아온 블라드는 자기 머리 위에서 욤뇸뇸 거리는 두더지를 올려다보며 잔뜩 인상을 찌푸려대었다.

그러나 그런 민폐에도 녀석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지금의 구멍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죠?”

“그거야 파 놓은 놈한테 물어봐야지.”

길은 하나였지만 뻥 뚫린 굴은 앞뒤 방향으로 나 있었다.

그중에서 어느 곳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던 블라드는 손가락을 들고는 퉁명스레 두더지의 옆구리를 찔러대었다.

“이제 어디로 가. 인마.”

뀨-!

블라드가 꾹 지른 손가락에 놀랐다는 듯 자세를 일으킨 두더지는 곧 짧은 팔을 들고서는 어느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온통 깜깜한 굴이었으나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은 아까 달아나려 했던 산 쪽이었고 도시에서 빠져나온 루가 족이 향했던 곳이기도 했다.

“가자.”

나아갈 방향을 정한 블라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들이 떨어졌던 입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장막에 뚫린 구멍처럼 빛나고 있는 저 위에 지면.

그곳에 서 있을 용혈공을 떠올린 블라드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두더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 대신 도망치게 해서 미안해요. 키하노.’

[······괜찮다.]

복잡한 자신의 심정과는 달리 곧게 뻗어 있을 뿐인 두더지의 굴.

블라드는 아무 생각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으며 조용히 자신을 대신해 준 키하노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

굴에서 빠져나온 일행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민 곳은 아까 보았던 산이 있던 곳이었다.

도시 나마르카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이었고 아직도 저 멀리 새까맣게 모여 있는 드라굴리아의 군세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살아남았구나.”

블라드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와 만날 수 있었다.

위치가 노출될 수 있음에도 자그마한 모닥불로 연기를 피우고 있던 그녀는 방금까지도 신비를 부리고 있었다는 듯 땀으로 이마가 축축한 상태였다.

“땅의 정령이구나. 이 녀석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대모는 블라드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두더지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밝히고 있었다.

“대모 님이 부르신 겁니까?”

“내가 부르긴 했는데······. 땅의 정령이 튀어나올 줄은 나도 몰랐지.”

설명할 수 없기에 신비이고 예측할 수 없기에 마법이다.

루가 족의 대모는 분명 자신이 부린 신비이긴 했으나 예측했던 결과는 아니었다는 듯 블라드의 머리 위에 있는 두더지를 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 원래 이 정도의 존재를 부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까.”

어렴풋이 한 짐작이었으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산맥을 따라 도브레치티에서 이곳까지 내려온 빛나는 두더지.

그 먼 곳에서 단숨에 이곳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대모가 뿌린 신비뿐만 아니라 용살검에 맺힌 세계수의 가능성과 함께 블라드와의 인연까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뀨-?

대화를 마친 잠깐의 침묵 사이로 이제는 어떻게 해야 돼 라고 묻는듯한 두더지의 외침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블라드는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 해서 몇 명이죠.”

“대략 300명 정도지.”

“갈 곳은 있나요?”

블라드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루가 족의 피난민들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갈 곳이 있냐고 물어보는 블라드의 대답에 대모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이게 다 고향을 잃어버린 죄지. 뿌리내린 땅이 아닌 다음에야 어디에서 우리를 반가워해 주겠나.”

신비를 부리기에 교회가 배척하고 생긴 모습이 다르기에 사람들이 내쫓고 마는 수인족들.

그들의 역사는 곧 방랑의 역사였으니 그나마 근본 없는 땅인 나마르카에서나마 잠시나마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던 그들은 그 너저분한 골목마저도 용들의 방문으로 인해 또다시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죠. 북쪽으로 움직이다 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블라드는 자신 때문에 터전을 잃어버리고만 루가 족들을 보며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블라드는 머리 위에 있는 두더지를 올려다보았다.

“최대한 북쪽으로 가고 싶은데.”

뀨-?

“여기 사람들 다 데리고 갈 수 있을 만한 장소 없겠어?”

블라드의 말에 고민이라도 한다는 듯 발을 탁탁 치기 시작하는 빛나는 두더지.

블라드는 자신의 머리 위에서 보이는 그 꼴이 영 마뜩잖았지만 길을 제시해 줄 존재는 이 녀석뿐이기에 차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빨리 생각해.”

블라드의 서늘한 재촉에 두더지는 마침내 생각이 났다는 듯 두더지는 머리 위에서 굴러 내려와 자신이 파놓은 굴 앞에 섰다.

뀨뀨-!

마치 이곳으로 가자는 듯 휘둘러대는 짧은 두 팔.

두더지가 보이는 작지만 격렬한 움직임을 보며 블라드와 루가 족의 대모는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

옆에 보이는 창은 넓고 비치는 햇빛은 따사로운 방이었다.

요제프는 그 빛을 따라 보이는 방 안의 장식품들을 눈여겨보며 조용히 앞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엘프들의 양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요제프가 둘러보는 방 안은 온통 엘프들과 관련된 장식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엘프들의 장식품들은 지금 당장 경매에 내놔도 한 몫은 챙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랬던 시절이 있었지. 최대한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려 했었거든.”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비츠카야 백작은 앞에 있는 요제프를 보며 빙긋이 웃어댔다.

방금 마셨던 차를 깊게 들이마셨는지 하얀 수염에 묻어 있는 찻물이 새까맣게 묻어 있었다.

“엘프들이 보내는 물건들이 곧 내 영지의 특산품이었고 숨통이었던 시절이었지. 물론 지금은 처참하게 망가지고 말았지만.”

한때는 엘프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이제는 철저하게 쇠락하고만 도시 타노보.

그곳의 주인인 비츠카야 백작은 지난날의 기억이 쓴 모양인지 혀로 입술을 내두르고는 말을 이었다.

“엘프 놈들은 제멋대로 교역을 끊고 용혈공은 압실론에 대한 의심을 우리에게 모두 몰아버렸으니 아무리 나라도 버틸 재간이 있겠나.”

자신에 대한 한탄을 토로하던 비츠카야 백작은 잠시 요제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백작인 자신이 가문에서 쫓겨난 남자의 눈치 따위를 보는 것이 우스운 광경이기는 했으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때마침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자들이 있으니 사람이 영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지.”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요제프라는 남자는 새까만 어둠이 직접 보낸 전령이었으니까.

용혈공이 보냈던 지원이 모조리 끊어진 지금, 영지의 생존을 도모하고 엘프라는 자원을 온전히 독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비츠카야 백작은 잘 알고 있었다.

“세계수인지 뭔지 엘프의 땅에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가져가도 좋네. 그동안 자네들이 머물 땅도 식량도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걸세.”

“······.”

백작의 말을 듣고 있던 요제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방금 마셨던 찻물의 효과가 돌기 시작했는지 점점 까맣게 빛나기 시작하는 백작의 두 눈.

자신의 욕망을 전혀 숨기지 않는 백작의 눈빛에 요제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본래 어둠이란 사람이 가장 어두운 곳에 있을 때 다가오는 법이었다.

도저히 혼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을 때 조용히 다가와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이 바로 어둠이었다.

“백작님의 굳은 의지. 확실히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다가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내주고 있었으니까.

어린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던 모시암의 남작처럼, 곧 있으면 죽고 말 자신처럼.

시기적절하게 원하는 것을 내미는 라마슈트의 손길은 그 누구라도 쉽게 떨치기 힘든 강렬한 유혹과도 다름없는 것이었다.

"고맙네! 내 이 일이 잘 풀리면 자네에게도 섭섭치 않게 대할 것이야."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비츠카야 백작을 보며 요제프는 내려놓았던 찻잔에 다시 손을 뻗기 시작했다.

새까만 색깔만큼이나 쓰고 비린 차의 맛이 요제프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차가 품고 있는 어두운 향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드드드득-

“음?”

그러나 뻗고 있던 요제프의 손은 미처 찻잔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미묘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건물의 진동에 내뻗던 손을 멈칫했기 때문이었다.

“지진?”

평소에는 지진 한번 없던 비츠카야 백작령의 도시 타노보.

그러나 오늘만큼은 도시의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이 땅 밑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지하에서부터 파내고 있다는 듯 불쑥 솟아오른 흙더미와 함께 시작된 그 진동은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어 엘프들의 숲이 있는 아우슈린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8화 4

재회 (1)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날카롭다.

홀로 가죽 수통에 담긴 술을 넘기고 있던 자야르는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목 없는 자들의 시선을 느끼며 뚜껑을 닫았다.

“왜 한 잔씩들 드릴까?”

따스한 봄날이었건만 목 없는 자들이 서 있는 이곳만큼은 아직도 서리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야르는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차가운 시선들을 향해 이죽거릴 뿐이었다.

“아. 마실 입들이 없으셨지. 내가 그걸 몰랐었네.”

죽은 자들 사이에 서 있는 유일하게 온기 있는 자.

주위의 광경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그 모습이 마치 결이 다른 그림과도 같아 보였지만 자야르는 한 발자국도 밀려서지 않은 채 죽음들 사이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자야르.”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때마침 자야르를 향해 조심스레 부르는 손짓이 있었다.

이제야 비츠카야 백작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요제프가 부르는 손짓이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협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백작은 아우슈린을 자신의 마지막 돌파구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아우슈린을 향한 비츠카야 백작의 집착은 분노와 욕망을 장작 삼아 이미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라마슈트의 명을 받아 백작의 집착을 확인하고 온 요제프는 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백작의 병사들과 함께 움직인다. 아무래도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자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맞겠지.”

지금 요제프의 시야가 닿고 있는 곳에는 온갖 불길한 것들이 가득했다.

죽음에서 되살아 난 목 없는 자들이 있었다.

사지가 온통 뒤틀려버린 저주받은 존재들도.

그림자처럼 떠도는 저주 어린 영체들과 온갖 곳에 사지가 달린 커다란 시체 덩어리까지도.

이 모든 존재들이 라마슈트라는 거대한 어둠에 이끌려 온 흑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사특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로군. 그동안 어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숨어 있었는지.”

마치 인세에 재현된 지옥과도 같은 야영지의 모습에 냉정을 유지하던 요제프조차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그토록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던 존재들이었건만 지금은 눈길 닿는 곳곳마다 있었으니 아무리 요제프라 할지라도 냉정을 유지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이것들을 도대체 누가 치워낼 수 있을까.”

한 눈으로 담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둠이었다.

각오하고 있던 자신조차도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어둠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이 모든 사특한 존재들은 결국 의무를 다해야 하는 자들이 여태껏 무시하고 있던 찌꺼기들이었으니, 결국 누군가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독을 감당해야만 했다.

“가지. 여기에 더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고 말겠군.”

“알겠습니다.”

애써 고개를 돌린 요제프가 죽음이 가득한 야영지를 넘어 비츠카야의 주둔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쌓아왔던 업보일 것이다.

귀족은 권력을 가지는 대신 의무를 지며 신앙은 믿음을 가지는 대신 책임을 져야 하지만 지금의 권력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기에 요제프는 결국 이들이 만들어낸 종기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세대에서 터지고 말 것임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

녹음이 무성한 숲이었다.

위에서 올려다본다면 마치 초록색으로 칠해진 바다가 아닐까 싶을 만큼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숲.

그 숲 한가운데서는 지금도 어린 세계수 한 그루가 빼꼼히 솟아올라 녹색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지금 비츠카야 군의 동향은 어떻지?”

그러나 이 평화로운 광경 속에서도 바라디스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을 뿐이었다.

봄이라는 계절답게 밖에 보이는 풍경이 꽤 그럴싸했지만 정작 바라디스의 얼굴에는 여유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 보였다.

“어림잡아도 천 명은 되는 군사들입니다. 비츠카야 백작이 이번만큼은 사활을 건 것 같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은 모양새입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지금 당장이라도 진격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무겁게 물어본 질문 뒤로 다급한 대답들이 들려왔다.

경험 많은 레인저들조차 긴장할 만큼 지금의 상황은 급박했고 이제 그 시작이 머지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보고를 들은 바라디스는 속으로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천 명에 가까운 인간들의 군대와 더불어 지금도 계속해서 합류하고 있는 되살아난 자들까지.

인간들의 군대야 해볼 만하다 치더라도 세계수의 바로 앞까지 쳐들어왔다던 되살아난 자들의 존재는 조금씩 바라디스의 신경을 갉아 먹는 중이었다.

“결계는 언제 다시 복구된다고 하지?”

“빨리 잡아도 한 달은 더 걸릴 거라고 합니다.”

들려온 보고를 들은 바라디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한 달.”

창밖 너머 보이는 어린 세계수 아래에는 지금도 힘겹게 허리를 굽힌 채 무언가를 끄적이는 노인들이 가득했다.

장수족인 엘프답게 숲에 서 있는 나무들보다 오랜 삶을 살아왔을 장로회의 장로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노쇠한 육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전에 깨어졌던 숲의 보호 결계를 다시 이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상황이 만만치가 않군.’

나이와 직위에는 상관없이 능력 있는 자들이라면 모조리 바삐 움직여야 하는 지금의 상황.

어쩌면 가장 날카로운 용인 니드호그들이 쳐들어왔을 때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어디 하나 도움 구할 곳 마땅치가 않은 것이 지금 엘프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똑똑똑.

“음?”

순간, 바라디스와 레인저들이 있던 집무실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이 시각에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 있던 바라디스는 의아한 눈빛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프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시도 빠짐없이 세계수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엘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이곳에 서서는 바라디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바라디스 님.”

“무엇이?”

세계수를 지키던 엘프였다.

정확히는 세계수와 함께 바라디스의 여동생인 신녀를 지키던 엘프.

그 엘프가 지금 바라디스의 앞에 서서는 면목이 없다는 고개를 떨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신녀님께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전을 중시해야 하는 때였다.

그러나 세계수와 함께 소중히 지켜야 할 신녀가 밖으로 나갔다는 말에 집무실에 있던 엘프들의 안색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러셨지. 이유가 있을 텐데?”

“모르겠습니다. 손님을 마중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막무가내로 나가버리시고 말았습니다.”

“손님?”

자신들이 아무리 앞을 막아서도 끝끝내 밖으로 나서고 말았다는 세계수의 신녀.

손님이 왔다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위험한 밖으로 나가버린 그녀의 행동에 바라디스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말았다.

“손님이라······.”

평생 밖으로 나가본 적 없던 신녀였지만 오늘처럼 고집을 부리며 숲 밖으로 나서려 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이 직접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는 귀한 손님이 온다는 말과 함께.

아마 그때가 블라드라는 인간들의 기사를 처음 만났던 때임을 바라디스는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레인저들을 보내라. 신녀님을 호위해.”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바라디스는 창가로 다가가 밖에 있는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더욱 흔들거리는 것만 같은 녹색의 나뭇잎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움직이는 나뭇잎 사이사이에는 무언가 기쁜 듯 날뛰고 있는 어린 정령들이 가득했다.

※※※※

빼곡히 나무들이 들어선 엘프들의 숲이었지만 가끔은 이렇게 햇빛이 충만한 공터도 있기 마련이었다.

푸르른 토끼풀이 가득한 숲의 한 공터.

뾱-!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들만이 나풀거리고 있는 그곳에서 갑작스레 고개를 내민 녀석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땅 밑을 헤매던 녀석은 머리 위로 비치는 햇빛이 눈 부시다는 듯 그 작은 눈을 잔뜩 찌푸리며 짧은 손을 휘적여대었다.

“됐냐? 이제 나가도 돼?”

뀨뀨-!

“다 왔으면 이제 좀 비키지. 언제까지 내 머리 위에 있을 거야.”

화를 잔뜩 참은 듯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땅 밑에서부터 들려오는 그 스산한 목소리에 꽃잎을 맴돌던 나비들이 놀라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고개를 내밀고 있던 두더지 밑으로 사람 머리 하나가 조심스레 솟아올랐다.

비록 흙더미에 의해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햇빛에 빛나는 금발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어두운 굴속에서 고개를 내민 블라드는 갑작스레 보이는 초록색의 향연에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만 해도 황무지 한가운데 있던 블라드였기에 지금 보이는 광경이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뀨뀨-!

“도대체 어디까지 데려온 거야. 인마.”

물어보는 블라드의 말에도 이제 자신의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축 늘어지고만 빛나는 두더지.

쉴 새 없이 굴을 뚫어 일행들을 이곳까지 이끈 두더지는 잔뜩 지친 몸을 널브러뜨리며 혀를 빼물기 시작했다.

“······그래 쉬어라. 어디든 거기보단 낫겠지.”

지쳐버린 두더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라드는 녀석을 조심스레 땅 위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자세로 귀를 쫑긋거리는 블라드의 모습은 마치 굴속에서 막 빠져나온 늑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숲인데.”

예민한 오감을 동원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파악한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숲 한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화사한 색들이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였다.

“며칠 거리 내에 이만한 숲이 있었나?”

블라드는 주변에 보이는 풍경에 의아해하며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루가 족의 피난민들을 이끌고 빛나는 두더지가 뚫어 준 굴을 통해 걸어온 지가 며칠.

그러나 아무리 중부의 지리에 어두운 블라드라 할지라도 고작 며칠 거리 내에 이만한 숲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던 참이었다.

“그거야 정령이 인도한 길을 따라와서 그렇죠.”

“······!”

당황해하던 블라드의 옆으로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런 기척이 없던 것을 확인했던 블라드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너는?”

“오랜만이에요.”

그러나 정작 블라드를 놀라게 한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낸 그림들은 도움이 되었어요?”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꽃밭 앞에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챙이 긴 넓은 모자를 쓰고 꽃밭 앞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

흔들리는 꽃들과 같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 있는 소녀의 모습은 마치 그곳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전혀 위화감이 없어 보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블라드의 놀란 물음과 함께 땅 밑에 굴에서부터 루가 족의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랄 것도 없이 밝은 빛에 놀라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나온 사람들은 이윽고 보이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여기는.”

더러운 골목도, 황량한 황무지도 아닌 녹색의 물결로 가득한 엘프들의 숲.

이제야 시야를 회복한 루가 족의 아이들은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보며 자신들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나무다!”

“뭐야! 나무가 엄청나게 커!”

정령이 인도해 준 길이 있었기에 다다를 수 있었던 동쪽 끝의 숲. 아우슈린.

그 숲을 내려다보던 어린 세계수는 자신을 보며 놀라는 어린 수인족들을 보며 반갑다는 듯 나뭇잎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9화 4

재회 (2)

평범한 엘프들이라면 쉽게 다가가기도 힘든 곳.

오직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다던 세계수의 뿌리 깊은 곳에서 엘프들의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에는 성공해야 하오.”

“물론입니다. 대장로 님.”

앞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이제는 남아있는 재료도, 버틸만한 시간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지금 보이는 검 한 자루가 결계를 세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기에 그 검을 바라보고 있는 장로들의 표정에는 비장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다들 준비합시다.”

예전에는 소드마스터가 주었던 은색의 기사가 꽂혀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전혀 다른 색의 검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검의 위에는 장로들이 애써 그려놓은 복잡한 술식들이 그림처럼 떠올라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시작하시오.”

까마득한 위에서 비치는 한 줄기의 빛을 따라 공중에 떠올라 있는 마법진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던 대장로 제로니모는 결심했다는 듯 굳은 목소리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구우우웅-

장로들이 외치는 주문과 함께 떠올라 있던 술식들이 천천히 원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맞지 않는 크기로, 제각각의 색깔을 띠어가면서.

주문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각자의 원을 맡은 장로들의 이마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비지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큰 원은 아래로, 작은 원은 위로.

제로니모의 늙은 손가락을 따라 면에서 시작된 원들이 자리를 맞춰가며 점점 거대한 원뿔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

제로미노의 지휘에 따라 장로들이 그려놓은 세계가 천천히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소드마스터의 검이 꽂혀 있던 자리로.

그렇지만 지금은 전혀 낯선 검이 있는 자리를 향해.

구드드드득-!

검을 향해 원뿔이 내려앉을수록 밖에서는 모를 거대한 진동이 세계수의 안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결계식을 구동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계이자 마지막 단계.

마침내 장로들이 그려놓은 세계가 꽂혀 있는 검을 타고 한 줄기의 각인이 되어 새겨지기 시작했다.

“됐······!”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환희의 함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숱한 실패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될 거라는 기대와 함께.

과연 지금 꽂혀 있는 검은 예전의 검들과는 다르게 보이는 빛도, 퍼지는 울림도 전혀 다르게 울리고 있었다.

쩌적! 쩌저적!

지금 들리는 불길한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런.”

무엇이 잘못되고 말았는지 찬란히 빛나던 원뿔의 세계가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밑에서 그 세계를 받치고 있던 한 자루의 검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모두 숙여!”

“대장로 님을 보호하시오!”

실패를 감지한 어느 장로가 외치는 말에 따라 모든 장로들이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대장로들을 껴안기 시작하는 장로들의 모습이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끄드드드득-!

장로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환하게 빛나고 있던 검이 정신없이 깜빡이며 하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이렇게 빛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몸까지 불태우면서.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그 모습에 늙은 제로니모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퍼어어어엉!

엘프들의 세계를 감당하지 못한 검 한 자루가 기어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져나가고 말았다.

마치 별똥별처럼 튀어 나가고 마는 그 모습에 제로니모는 비통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터져나가는 검은 그저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 엘프들이 가져야 하는 희망의 한 조각이었기에.

“······역시 소드마스터의 검이 있었어야 했나.”

세계수가 허락했으며 오래된 엘프들이 자신들의 정수를 쏟아 넣어 만든 숲의 결계.

그 결계는 한 종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만큼 너무나 무겁고도 힘겨운 의무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버티지 못하고 깨어져 버린 것이겠지.

“······.”

제로니모는 자신의 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검의 파편들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그것들을 조심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두워지고 만 세계수의 뿌리 아래서 제로니모는 그렇게 잔뜩 쪼그라든 모습으로 오랫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

기다란 나뭇가지를 쥔 채 너른 언덕길을 걷는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르는 초라한 모습의 피난민들도.

신녀를 호위하던 몇 명의 호위병들은 지금의 상황이 마뜩잖았는지 잔뜩 긴장해대고 있었지만 멀리서 본 그들의 모습은 어째서인지 꽤나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요즘 우리 오빠가······. 아니 바라디스 님이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었거든요.”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괜스레 수풀을 뒤적이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 천진난만함 속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신묘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리디스 님이?”

블라드는 바라디스가 힘들어한다는 소녀의 말에 조금은 놀랐다는 듯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레인저들의 대장 엘프 바라디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는 웬만한 역경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물음에 신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주한 그녀의 모습에서는 방금 보았던 소녀의 모습은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거든요.”

블라드는 갑작스레 변한 소녀의 눈빛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해진 소녀의 눈빛이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됐어요. 블라드가 도와줄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와줘서.”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린 신녀는 다시금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돌아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걷기 시작했다.

팔짝팔짝 뛰는 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꽤 들뜬듯한 모양이었다.

“꿈에서 봤던 것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그때는 지금에 절반도 안 됐었거든요.”

“꿈?”

계속해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는 뒤따라오는 루가 족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응. 꿈이요. 세계수가 보여준 꿈에서 지금 모습을 봤었어요.”

세계수는 신의 뜻에 닿아 있는 가장 높은 나무이며 그 나무의 대리자인 소녀는 꿈이라는 수단을 통해 미래를 본다.

그러나 세계수라는 존재를 통해 그녀가 보는 미래는 이미 여러 단계를 거치고 말았기에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두서가 없을 수밖에 없는 흐릿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더지는 내가 봤던 꿈속에서는 없었는데?”

그렇기에 그녀가 본 미래를 현실에서 맞닥뜨렸을 때는 꿈속에서 본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블라드가 드워프들을 구하기 위해 짙푸른 바다 위에서 검을 들던 때처럼, 그리고 꿈속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던 지금의 두더지처럼.

“얘는 아마 블라드가 데려왔나 봐요. 그래서 사람들도 더 많이 왔나?”

“······.”

소녀의 말투는 발랄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블라드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말은 두더지가 없었다면 루가 족의 피난민들이 절반이나 줄어있었을 거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도시가 이상하다. 블라드.]

의미심장한 말을 말한 소녀의 뒤로 천천히 엘프들의 도시 아우슈린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돌아온 엘프들의 도시는 블라드가 떠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목책을 둘러놓은 것을 보니 아마 전투를 준비 중인 것 같군. 그것도 꽤 큰 규모다.]

블라드는 안에서 들려오는 키하노의 말을 따라 멀리서 보이는 아우슈린의 정경을 훑어보았다.

과연 키하노의 말처럼 지금 보이는 엘프들의 도시는 날카롭게 세워져 있는 목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끼이이익-

루가 족의 피난민들을 봤는지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도시 아우슈린의 목책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성벽만큼이나 웅장해진 그곳에서는 팔짱을 낀 채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군청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역시 너였었군. 블라드 아우레오.”

레인저들의 대장인 바라디스.

가출해버린 동생이 잔뜩 데리고 온 사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익숙한 금발을 향해 손 한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언제나 그렇듯이 예측 못 할 일들을 저지르고 다니는군.”

“문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라디스.”

“너 때문에 연 거다. 수인족들 때문이 아니라.”

루가 족의 피난민들을 잠시 임시 거처에 내려놓은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안내에 따라 장로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안에 만들어진 엘프들의 거주지는 오랜만에 보아도 신기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블라드에게는 엘프들의 양식을 보며 신기해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감사할 것 없어. 내 권한이라 봐야 임시적일 테니까. 저들을 아우슈린의 안에 두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장로회의 동의가 필요해.”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도 쉽사리 접근을 허락지 않는 것이 바로 엘프라는 종족이었다.

그런 배타적인 자세를 통해 여태껏 살아남았던 엘프들에게 있어 갑작스레 찾아온 수백 명의 피난민은 분명 반갑지 않은 존재들일 것이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저 또한 그들의 방랑에 책임이 있고.”

“그런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서 앞으로 볼 장로님들께 설명해야 할 거다.”

한참 복도를 걸어가던 바라디스는 예전에 보았던 커다란 문 앞에 서서는 블라드를 향해 눈짓하고 있었다.

“준비됐나?”

“······네.”

여전히 머리 위에서 졸고 있는 두더지를 조용히 품 안에 넣은 블라드는 장로들이 기다리고 있을 회의장의 문을 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지.”

끼이이익-

바라디스의 손짓과 함께 열린 문틈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에 익숙해지자 보이는 너른 회의장의 모습.

계단처럼 얼기설기 얽혀있는 거대한 나무뿌리 위로 여기저기 앉아 있는 열 명이 넘는 장로들이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그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늙은 엘프가 블라드를 향해 손짓하며 힘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프들의 대장로인 늙은 제로니모는 자신들의 세계수를 구해주었던 어린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다시금 돌아온 블라드의 모습에 기꺼운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고 온 모양이군. 그때보다 훨씬 커졌어.”

가장 날카로운 용인 니드호그를 베었을 때도 빛나던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로니모가 보는 블라드의 모습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니 어느새 훌쩍 성장해버린 어린 가능성에 늙은이의 마음이 조금은 흡족해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대장로 님.”

그러나 아이가 크는 만큼 노인은 늙는 법이었다.

비록 저 위에 앉아 있었어도 블라드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제로니모의 기력은 확연히 떨어져 있었다.

“서로에게 별일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가 가진 슬픈 현실이지.”

잔잔히 떨리는 제로니모의 손가락을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곁에 있는 다른 장로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군.’

제로니모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들 기력이 빠져있는 듯한 장로들의 모습.

블라드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굳이 밖에 둘러쳐진 목책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 아우슈린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도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루가 족을 데리고 떠나길 바라네.”

바라디스도 자신이 여기에 있어 주기를 바라던 눈치였다.

그렇기에 잘하면 루가 족의 일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블라드였지만 제로니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로 단호할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빨리 떠나는 게 좋을 걸세. 그것이 그들을 위해서라도 좋아.”

힙겹게 기침을 내뱉으며 어서 떠나라 말하는 제로니모였지만 그의 태도에서는 귀찮음이나 누군가를 거부하려는 듯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후면 인간들의 영주가 이곳을 향해 쳐들어올걸세.”

“인간들의 영주말입니까?”

“그래. 아마 자네도 알 거야. 비츠카야 백작이라고.”

비츠카야 백작이라면 분명 낯익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되살아난 자들까지 흉측한 모습으로 우리들의 숲을 노리고 있지. 다시 말해 루가 족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말일세.”

그리고 되살아 난 자들이라는 단어 또한 그랬다.

“······되살아난 자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이름들.

프라우센을 상대하기 위해 루가 족을 찾아갔던 블라드는 이곳 아우슈린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지금 이곳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까?”

귀족들도, 성직자들도, 그리고 제국의 주인인 황실까지도.

모든 책임 있는 자들이 외면하던 그들의 존재를 쫓아 도시 나마르카까지 닿았던 블라드였다.

비록 그곳에서도 가장 오래된 용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지만 블라드는 자신이 구겨지는 그 순간에도 본래 하려 했던 목적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렇네. 지금도 이 숲을 검게 물들이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지.”

제로니모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쥐고 말았다.

“······.”

강하게 움켜쥔 손을 따라 블라드의 분노가 전해지고 있었다.

주인과 똑 닮았기에 그 분노를 이해하는 용살검이 꽉 잡은 블라드의 손길을 따라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주인의 고동과 함께 뛰기에 더욱 들썩이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검.

그 들썩임과 함께 조금씩 빠져나오는 용살검의 검면으로 은색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음?”

익숙한 그 빛을 알아본 제로니모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제로니모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던 몇몇 장로들까지도 마치 홀린 듯이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장로님. 부디 루가 족의 사람들에게 잠시 머물 땅을 내어주십시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마주한 이별 뒤에서 성장한 것은 오직 어린 기사만은 아닐 것이다.

블라드의 검 또한 어렸던 푸른 빛이 아닌 이제는 명예로운 은색 빛에 휘감겨 있었으니 그 모습을 알아본 장로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 또한 검으로 보답해드리겠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그것을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들고 있는 검밖에 없으니.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가장 명예로운 검을 들었던 어린 기사가 지금 자신만의 검을 들어올린 채 말하고 있었다.

“······은색의 기사.”

이번에도 그때와 같이 똑같은 색의 검을 들어 보이겠다고.

그날, 어린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들었던 소드마스터의 검처럼 지금 블라드가 들고 있는 검 또한 똑같은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0화 4

계승자 (1)

아주 오랜 옛날.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제국의 첫 시기.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제국의 동부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비옥한 서부와는 달리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척박한 동부의 황무지는 주변의 영주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땅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굶었나 보군.”

메마르고 황량한 땅.

그곳을 둘러보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낯선 이방인이었음에도 따라붙는 아이들의 눈빛이 먹을 것에 대한 기대로 반짝여대었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요.”

“엘프들조차 살릴 수 없는 땅인가?”

남자가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조금씩 남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달라붙는 아이들이 순진한 호기심 때문에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남자는 조금 서글퍼지고 말았다.

“······저희 엘프가 아니라 누가 오더라도 살릴 수 없는 땅입니다. 폐하.”

젊은 제로니모는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남자를 보며 폐하라 불렀다.

오직 대륙의 지존인 한 남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칭호였지만 지금 제로니모가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폐하라는 영광된 칭호를 붙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일 뿐이었다.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이제야 속이 후련하십니까?”

깡마른 몸 위로 휘적여대는 소매의 폭이 넓었다.

제 먹을 것도 나눠주었기에 잔뜩 메말라버린 제로니모의 눈에는 이제는 매서운 독밖에 남지 않은 것만 같았다.

“결국, 인간들의 왕은 인간들만을 생각했을 뿐이지요. 과연 전대 장로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맞았습니다.”

“······.”

별과도 같은 반짝이던 뜻을 품었던 기사가 있었다.

그는 가장 완벽한 용이라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세상 모든 종족의 가능성을 자신의 검 하나로 모은 사람이기도 했다.

“······미안하네.”

그러나 지금 로브를 벗어내는 남자는 그때의 청명했던 기사가 아니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위로 오직 후회만을 쌓아온 노인은 자신이 해주겠다고 말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거짓말쟁이였을 뿐이었다.

“가장 완벽한 존재를 죽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빌렸었네. 그것들을 갚다 보니 결국 자네들까지는 신경 써주지 못했어.”

“돌아가십시오.”

걸음을 멈춘 제로니모는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조용했음에도 명료한 그의 목소리는 프라우센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돌아가셔서 저희가 빌어먹을 식량이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멈춘 그의 발끝에는 아주 자그마한 묘목 하나가 서 있었다.

성인 남성의 허리에도 오지 못할 크기의 묘목은 메마른 땅 위에 서 있어서인지 금방이라도 말라 죽을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부디 당신의 자비로 올해 겨울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로니모.”

식량을 구걸하는 엘프와 제대로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세계수의 묘목.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마주한 프라우센은 자신이 너무 늦게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큰 후회를 하고 말았다.

“······빌어먹지 마시게. 자네들은 당당히 서 있을 자격이 있을 사람이니까.”

가장 완벽한 용을 부수기 위해 어머니 세계수를 희생해야만 했던 엘프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남에게 손을 벌려 구걸하는 삶이었을 뿐.

스르릉-

“폐하?”

이들의 비참함은 결국 나의 잘못일 것이다.

기사로서의 임무는 마쳤지만, 황제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못한 나의 잘못.

“너무 늦게 갚게 되어 미안하네.”

콱-!

자신의 검을 뽑은 프라우센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세계수의 묘목 앞에 은색의 기사를 꽂았다.

비록 주인은 늙고 초라해졌으나 여전히 은색의 빛을 간직하고 있던 그 검을.

“······호수의 여인에게 얻어 신의 축복을 받았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다스린 검이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젊은 제로니모는 프라우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고 말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늙은 황제의 얼굴에는 홀가분한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 검은 뽑지 마시게. 이곳의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을 때까지.”

검을 꽂아 넣은 프라우센은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을 둘러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 세계수가 곧은 뿌리를 내릴 때까지.”

꽂아 넣은 은색의 기사 주위로 새파란 풀들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자 황무지에서 태어나 푸른색을 본 적 없던 어린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작했다.

웅웅웅-

못다한 의무를 짊어지기 위해 스스로 영광된 자리에서 내려온 남자.

조금씩 멀어져 가는 주인의 모습을 보며 은색의 기사가 울어댔지만, 그의 주인은 한 번의 쓰다듬과 함께 다시금 로브를 썼을 뿐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아이들이 굶주리던 땅.

그리고 언젠가는 꽂혀 있던 검이 뽑히게 될 땅.

먼 훗날 그곳을 부르게 될 이름은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이었다.

※※※※

높게 세워진 목책의 모습은 웅장했지만, 숲 밖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불길한 공기까지는 막아주지 못했다.

어른들이 분주히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낯설어져 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며 아우슈린의 어린 엘프들은 불안한 듯 댕그란 눈을 굴려댈 뿐이었다.

[저기 아이들이 모여있구나.]

“······.”

그리고 루가 족의 아이들 또한 그랬다.

생김새는 각기 달랐지만 품고 있는 눈빛은 같은 아이들을 보며 블라드는 말없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인간들의 군대는 약 천 명 정도일세.”

“할 만하겠네요.”

같이 걷고 있는 바라디스의 말에 의하면 비츠카야 백작이 기를 쓰며 모아댄 병사들은 약 천 명 정도라 했다.

그에 대항하는 아우슈린의 엘프들은 약 700명 정도였으니 목책을 끼고 싸운다면 전혀 불리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되살아 난 자들이지.”

그러나 비츠카야 백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라마슈트의 부름에 화답한 흑마법사들이 가득했고 아마 지금도 세를 불려가며 아우슈린을 향한 욕망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3일 전에 확인한 그들의 숫자만 해도 약 2천일세. 인간들의 군대와 합한다면 총 3천에 해당하는 숫자지.”

“······.”

“어쩌면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순간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옆에 있던 횃불에서부터 기름 냄새가 확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시 타노보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우슈린으로 향하는 동남풍은 앞으로의 전투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역전할 결계가 필요해.”

아우슈린을 감싸고 있던 결계는 소드마스터의 검이라는 변하지 않을 약속을 통해 지켜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되살아 난 프라우센이 그 검을 가져가고 말았으니 수백 년의 시간을 걸쳐 엘프들이 쌓아 올린 결계식은 마치 열쇠 잃은 금고처럼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꼭 부탁하네.”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바라디스가 멈춰 섰다.

멈춰선 그의 앞에는 어린 세계수 앞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는 늙은 장로들이 서 있었다.

새로운 은색의 기사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은 방금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만큼이나 간절한 것이었다.

“······저기 바라디스.”

“음?”

그 간절한 눈빛들을 따라 걸어가던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뒤를 돌아 바라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고마웠어요.”

뒤돌아선 블라드는 웃고 있었다.

따라 웃을 만큼 밝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그의 웃음은 바라디스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걸로 한번 갚아 볼게요. 바라디스가 그동안 저를 도와줬던 값이요.”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도시 데어마르에서부터 잊혀져 있던 드워프들의 섬 렘노스까지.

블라드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해줬던 엘프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 받는 법이니까.”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묵묵히 옆에 있어 주었던 엘프를 위해.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이번 기회를 통해 갚겠다는 블라드를 보며 바라디스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그 말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바라디스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비록 커다란 의무를 지러 걸어가는 중이었지만 어린 세계수를 향해가는 블라드의 걸음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들어라! 나의 병사들아!”

짙푸른 숲의 경계선을 따라 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크게 두 개의 진형으로 나뉘어 있던 군사들은 각자의 역할을 따라 서 있는 자리만큼이나 보이는 모습도 다른 자들이었다.

“너희들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를 갑작스레 배신했었던 엘프 녀석들을!”

죽은 자들은 조용했고 산 자들 또한 그들에게 맞춰 숨죽이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있다기에는 기이한 침묵만이 감도는 진형이었지만 오직 비츠카야 백작만큼은 커다란 목소리로 모두에게 외치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받았던 고통 또한 기억할 것이다! 아마 지금도 너희들의 집에서는 식솔들이 굶주리고 있겠지!”

백작의 말대로 지금 그의 영지민들은 한없이 굶주리는 중이었다.

엘프들과의 교역이 끊긴 비츠카야 백작령은 물길이 끊긴 밭과도 같았으니까.

용혈공의 지원마저 끊긴 이때, 타들어 가는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뿐이었다.

“저 앞을 봐라! 저 푸르른 숲을! 너희들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그 간악한 엘프 녀석들은 저곳에서 놀고 먹으며 꿀과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갈 곳 없는 분노는 불태울 대상을 원하고 쌓여있던 불만들은 터져나갈 구멍을 원한다.

옮고 그름을 떠나 그저 쏟아낼 대상만이 필요한 지금, 비츠카야의 영지민들에게 있어 엘프들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훌륭한 장작이었을 뿐이었다.

“옳소! 그놈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 꼴이 나지도 않았지!”

“이 모든 것은 엘프들이 먼저 자초한 것이다! 그놈들이 먼저 시작한 거야!”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외면할 수 있는 용기와 언제라도 다른 이를 물어뜯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명분 하나면 족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설로 그 모든 조건들을 충족한 비츠카야 군에서부터 엘프들을 향한 성난 함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저들도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려 하는군요.”

“······.”

그리고 또 다른 진영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자들이 있었다.

온갖 죽은 자와 불길한 존재들로 가득한 군세 속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당신은 어떠해 보이나요. 요제프.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치 죽음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상복은 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신이 만든 세계를 거부한 채 발끝 하나 땅에 내딛지 않는 여인은 실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요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께서는 참 잔인하시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고리를 만드신 분이니까요.”

“······.”

가까이서 본 그녀는 무척이나 자애로운 여인이었다.

죽어버린 아이들까지 하나하나 품에 안아주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신이 내린 성모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요제프는 그녀의 포근한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섬뜩한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부숴야 해요. 다시는 아무도 죽지 못하게요.”

누군가는 저열한 욕망, 이루지 못한 꿈, 혹은 처절한 사고로.

지금 어둠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온 흑마법사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요제프는 앞에 보이는 라마슈트만큼이나 미친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들어보죠.”

왜냐하면, 그녀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열정으로 신께서 만드신 이 세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요제프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마슈트의 광기 어린 미소에 그저 가만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드드득-

순간,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땅의 진동에 비츠카야 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진동에 살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되살아 난 자들까지도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지진?”

“아니에요.”

살짝 베일을 걷어 올린 라마슈트는 창백한 손가락을 들고는 엘프들의 숲 한가운데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걸려 있었다.

“역시 엘프들도 그냥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나 봐요.”

저 멀리에 보이는 어린 세계수가 빛나고 있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푸르름을 넘어 온갖 빛나는 색깔들로.

“결계식이에요.”

숲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 선명한 빛의 색깔들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깜빡이며 마치 등대처럼 엘프들의 숲을 밝히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1화 4

계승자 (2)

두드드드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세계수의 뿌리 아래서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진동은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세계수가 내지르는 몸짓이었으며 세계와 세계를 이으려는 용살검이 내지르는 거친 함성이기도 했다.

“오오······.”

늙은 장로들은 다시 한번 만들어진 엘프들의 세계를 올려다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어린 세계수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원뿔의 세계.

수많은 세월을 거쳐 쌓아 올린 결계식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그 모습은 극도의 긴장과 더불어 묘한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용살검에게 닿은 엘프들의 결계식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밑면에서부터 녹아내려 빛나는 가루가 되기 시작한 결계식은 그 육중했던 부피와는 상관없이 한 줄기 선이 되어 천천히 검면에 새겨지고 있었다.

“되었다. 되었어!”

그 모습을 확인한 장로들의 입에서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았던 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기에.

다른 검들과는 다르게 터져나가지도, 뭉개지지도 않고 있는 용살검은 지금도 본연의 은빛을 선명하게 내비치며 서 있을 뿐이었다.

웅-웅웅-!

비록 지금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거친 술식들이 고통스러웠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용살검은 지금도 의연하게 서서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려 애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별빛에서 태어난 용살검에게 있어 지금 위기에 처한 이 땅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

그러나 저 뒤에서 용살검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있던 블라드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는 중이었다.

장로들은 잘 몰랐겠지만 용살검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블라드는 지금 자신의 검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연 그 생각이 맞았다는 듯 녹아 내려가던 원뿔의 세계가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영혼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무너져내림으로.

마치 넘어지는 나무처럼 중심을 잃어가는 원뿔의 세계를 보며 방금까지만 해도 환희에 젖어있던 장로들의 얼굴에 흙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이 모습을 지켜보던 늙은 제로니모는 감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탄식 섞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안 된다······. 안 돼.”

그러나 그의 간절한 외침에도 점점 위태로이 기울어져만 가는 엘프들의 세계.

그 밑을 받치고 있던 용살검이 균형을 세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녀석이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는 무거웠고 펼쳐야 하는 세계는 너무나 넓은것이었다.

두드드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어린 세계수가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넘어지려 하는 엘프들의 세계가 안타깝다는 듯.

그러나 아직 연결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가지 하나 뻗을 수 없었던 어린 세계수는 그저 무너지는 엘프들의 세계를 보며 온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

크르르르-!

크아아!

숲에서 울리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땅 밑에서 울리는 진동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도 지면을 짓밟아대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조장님!”

“함정들이 소용이 없습니다!”

푸르른 숲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달려 나가는 시체들이 있었다.

새하얀 흰자를 부릅뜬 채 마구잡이로 달려 나가는 그들은 엘프들이 쏘아대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한 곳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쿠구궁! 콰강!

요란히 무너지는 함정 소리.

깊다란 구덩이에 파묻히고 솟아오른 나무 창에 꿰뚫려 감에도 아우슈린을 향한 검은 파도는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퇴한다!”

굳이 저 앞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침입자들을 막기 위한 제 1선이 뚫렸음을 확인한 조장이 이를 악물고서는 옆에 있던 봉화에 불을 붙였다.

“다들 후퇴해라! 2선으로 합류해!”

들려오는 조장의 명령을 따라 요격을 하기 위해 나온 엘프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숨 쉴 틈 없이 다가오는 시체들의 검은 파도는 엘프들의 기민함조차도 따라잡을 정도로 격렬한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이런! 언제 여기까지!

누군가가 내지르는 비명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있었다.

아우슈린에서도 보이는 그 연기는 바라디스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피어오른 것이었다.

“연기가 보입니다. 바라디스 님.”

“······.”

목책 앞에서 상황을 살피던 바라디스는 옆에서 들리는 보고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제 2선에서 적들과 조우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대장. 1선에서 후퇴한 인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 한 명의 인원도 합류하지 못했다는 보고에 바라디스의 안색이 다시 한번 흔들리고 말았다.

가장 위험한 1선에다 놓았을 만큼 엄격히 선별한 인원들이었건만 적들의 진격 속도는 바라디스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군.’

화살로 교란하고 함정으로 틀어막고.

적들이 아우슈린에 닿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려 했던 바라디스였지만 그의 시도는 처음부터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많아.’

천혜의 성벽과도 같은 숲이었지만 이 빽빽한 숲조차도 사특한 자들이 풀어놓은 수천의 시체들을 모두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어찌 된 것인지 지금 달려오고 있는 시체들은 복잡한 숲길에도 조금의 헤맴도 없이 엘프들이 있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기까지 했다.

“흑마법일세.”

순간 바라디스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가 있었다.

담뱃대를 물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가 내는 목소리였다.

“어두운 곳을 걷고 있기에 굳이 옳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야.”

사특한 존재이긴 하지만 흑마법 또한 신비에서 비롯된 것.

오직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들의 수법에 루가 족의 대모가 언짢다는 듯 담뱃재를 털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들어올 적들이 얼마나 더 되겠습니까?”

“······한 번 봐 드리도록 하지.”

아직은 동료도 전우도 아니었지만, 대모는 바라디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지금 그들이 등지고 있는 아우슈린의 목책 뒤에는 엘프들뿐만 아니라 루가 족의 소중한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후우-

크게 뿜어낸 대모의 숨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바람을 타고 오른 그녀의 숨결은 어느새 숲을 넘어 밖에 있는 인간들의 군세를 향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있었다니.’

신비를 통해 바라본 숲 너머에는 수십은 되어 보이는 흑마법사들이 나란히 서 있는 중이었다.

각자가 쌓아 올린 세계에 맞춰 기이한 주문을 읊고 있는 그들.

그러나 루가 족의 대모는 그들 중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여자인가.’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은 상복의 여인이었다.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자세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새빨간 입술만 보더라도 가진바 미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

그 여인을 눈여겨 보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순간 등 뒤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마치 대모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는 듯 여인이 웃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시체처럼 창백한 미소로 자신과 눈을 마주친 그녀의 미소에 루가 족의 대모는 서둘러 손을 휘저으며 뭉쳐 있던 연기를 흩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레 경기를 일으킨 루가 족의 대모를 보며 바라디스가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을 뿐이었다.

“아주 고매한 마법사야. 저런 존재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군.”

“······.”

“자네나 나나 쉽지 않겠어.”

대모의 말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육중한 소리를 들은 바라디스는 자신이 마련해 놓은 제 2선 조차 얼마 안 가 무너질 것임을 확신하고 말았다.

※※※※

“······자네 지금.”

무너져 가던 자신들의 세계를 보며 탄식을 내지르고만 늙은 제로니모.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 순간, 제로니모는 방금 자신의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끄으으으!”

누가 막을 새도 없이 제단 위로 달려온 남자가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그 바람과 함께 제단 위로 올라간 블라드는 어느새 익숙한 손길로 자신의 검을 붙들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아파!”

마치 이빨을 헤집는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이 곧장 양손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꽉 붙잡은 두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점점 쓰러져 가는 용살검을 밀어내는 블라드의 모습에 크게 놀란 장로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 떨어져라!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독한 술식이야!]

블라드의 돌발 행동에 경악한 키하노조차도 어서 붙든 손을 놓으라 말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여전히 쓰러져 가는 용살검을 세우려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떡하라고요! 이게 마지막이라는데!”

지금 블라드의 말처럼 세계수 안에서 빛나고 있는 원뿔은 엘프들의 희망을 담은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였다.

이 결계식이 실패할 경우 아우슈린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라디스가 세워놓은 급조한 목책뿐일 것이며 그조차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블라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보이는 것은 용살검이었겠지만 그 검이 품으려 하는 본질은 어린 세계수의 세계였다.

엘프들의 술식은 그것을 이으려 하는 시도였으니 지금 블라드가 일으키려 하는 것은 그저 한 자루의 검이 아닌 아우슈린만큼이나 넓고도 깊은 세계였던 것이다.

“인간들의 기사! 당장 떨어지시오!”

“계속 그곳에 있다가는 존재감에 깔려 죽고 맙니다!”

드드드드득-!

장로들의 외침과 함께 땅 밑에서 울리는 진동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세계를 감당하지 못한 지면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끄아아아!”

그러나 블라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검을 붙잡은 채 계속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감고만 블라드의 황금빛 세계가 터질 듯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딛고 있는 블라드의 발끝은 점점 밀려나고 있을 뿐이었다.

[감아라!]

“감았잖아요!”

[오른쪽 눈도 감아!]

육체가 아닌 지니고 있는 세계를 통해 세워야 한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미 자신의 세계를 힘껏 개방하고 있었으니 이제 검을 세우려 하는 블라드의 세계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안에 깃들어 있는 키하노 뿐이었다.

“이익!”

감고 있는 왼쪽 눈으로는 나의 세계를 보고 뜨고 있는 오른쪽 눈으로는 이 세상을 봐야 한다.

그것이 정도를 위한 균형이며 나라는 세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블라드는 배웠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

블라드가 오른쪽 눈을 감으며 현실을 외면하자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현실에 서 있던 장로들은 블라드의 오른쪽 눈을 통해 빠져나오는 누군가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한 그 형상은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블라드의 옆에서 같이 무너지는 검을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잡고 있는 너의 검을 통해 봐라.]

잡고 있는 검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려 하는 어린 세계수의 모습.

세상을 향한 통로라고는 오직 어린 신녀 밖에 없었던 세계수는 뿌리내린 땅의 위기를 막기 위해 용살검이라고 하는 또 다른 통로를 만들어 내려 하는 중이었다.

[이제 보이지?]

제어할 수 없어 깊이 빠져들어 가고 마는 나의 세계였지만 굳건히 자리 잡은 키하노의 목소리는 여전히 위에 있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자신의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그마한 뿌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을 데려와.]

점점 멀어지고 있는 키하노의 목소리였지만 블라드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세계는 세상을 칠하는 붓과 같은 것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하얀 도화지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것.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그리고 싶어하는 초록색의 세계를 보며 블라드는 있는 힘껏 들고 있던 손을 뻗쳐 올렸다.

※※※※

쿠곽! 콱! 콰앙!

목책을 뒤흔들어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아있는 자라면 할 수 없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몸통 박치기에 그 커다랗던 목책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키익! 키이익!

“대장!”

기어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시체 하나가 사납게 이빨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반쯤은 뭉개져 버린 머리였지만 기어이 틈을 만들어내고 말았고 자신의 몸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격렬한 고갯짓에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이곳이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마지막이다!”

애써 만들어놓은 2선도 무너지고 이제는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목책만이 남은 지금, 바라디스가 엘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물러서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후욱-!

힘겹게 내뱉는 대모의 숨을 따라 매캐한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죽어있는 자들조차 괴롭게 만드는 그녀의 연기가 시체들조차 물러나게 했지만, 그 공백 또한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쿵! 쿵! 쿵!

순간 시체들이 빠져나간 틈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연기로 가려져 있어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거대한 몸체.

시체란 시체는 모조리 때려 박아 만들었다는 듯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오는 모양새였지만 그 육중한 몸이 일으킬 충격만큼은 진짜일 것이다.

“저 미친놈이 뛰어온다!”

“다들 목책 받쳐! 무너지면 안 돼!”

조금의 구멍이라도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쏟아질 썩은 물들이 지금 밖에 한가득이었으니까.

“화살 날려!”

“드루이드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누군가의 외침이 신호가 되었다는 듯 흉측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누더기 시체를 향해 숲에서부터 멧돼지 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 떼에 목책을 위협하던 진형이 크게 흔들려대었지만, 체급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강력하던 멧돼지들의 돌격조차도 거대한 누더기 시체의 움직임을 막을 순 없었다.

콰지지직!

차마 감당하지 못할 녀석의 거친 돌격에 엘프들이 애써 세워놓은 목책이 뒤로 크게 물러나고 말았다.

그아아아-!

아니, 뚫리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을 대비해 깊게 박아넣은 목책이었지만 그 어떤 공성병기보다도 흉악한 누더기 시체의 돌진에는 버틸 수 없다는 듯 한 쪽 면이 크게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당장 막아!

뚫려서는 안 된다!

기어코 만들어지려는 그 틈을 막기 위해 모두가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엘프들이고 루가 족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뛰쳐나간 전사들은 들고 있는 무기들을 휘두르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한번 뚫려버린 댐의 구멍은 더 이상 밀려들어 오는 물결을 막지 못했다.

크아아아아!

그동안 목책에 가로막혀 있던 거대한 파도의 물결이 자그맣게 벌어진 구멍을 통해 아우슈린을 향해 기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더는 몸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 거센 물결에 애써 자리를 지키려던 전사들마저도 휩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퍼어엉!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라디스의 왼쪽 눈이 터질 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 눈에 새겨진 그의 오망성만으로는 밀려 들어오는 시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 돼!”

바라디스가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을 따라 엘프들의 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하는 검은 물결들.

스쳐 지나간 곳에는 어떠한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 사특한 자들의 세계가 아우슈린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내려.”

아우슈린을 향한 사특한 자들의 독니가 크게 펼쳐진 그 절체절명의 순간, 조용히 퍼져나가는 녹색의 물결이 있었다.

스아아아악-

마치 밀밭을 스쳐 지나가는 가을의 바람처럼 잔잔히 퍼지기 시작하는 물결.

누군가가 그어낸 검로에서부터 시작한 녹색의 물결은 흐르는 바람을 따라 조용히 시체들을 갈라내며 쓰러져 있던 목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블라드?”

조용한 물결 끝으로 찾아오는 것은 오직 숲이 간직한 청명한 고요함 뿐.

그 물결을 만들어 낸 사람을 알아본 바라디스는 놀란듯 눈을 치켜떴지만 두 눈을 감고 있던 블라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홀로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이제는 나의 세계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세계수의 목소리와 대화하면서.

다시금 세워진 블라드의 검면에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복잡한 술식들이 가득히 그려져 있었다.

“한 번 뿌리 내려 봐.”

쿠구구구구-

블라드의 말과 함께 이 세상을 향한 녹색의 물감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린 신녀가 아닌 블라드의 검을 통해 그려내려는 세계수의 세상은 온통 녹색 빛이었고또한, 온통 푸르른 것이었다.

블라드의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색을 보며 바라디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저 앞에서부터 그려지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목책이 일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잔뜩 뿌리내린 자신들의 몸을 일으키면서.

온통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고만 목책이었지만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녹색의 새싹들이 어느새 나무들의 상처를 메우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체를 일으키는 목책들을 보며 되살아난 자들조차 가만히 멈춘 채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블라드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이런 색이었구나.”

두 눈을 감고 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지금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세계 속에 서 있는 블라드는 자그마한 뿌리를 붙잡은 채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내가 꽂은 검을 뽑지 마라.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을 때까지, 내 앞에 있는 어린나무가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지금 블라드는 검을 뽑았고 세계수가 내린 뿌리를 잡았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들을 보며 굶주리고 있는 저 시체들을 베어내야 할 때였다.

“그럼 이번에는 무엇을 그려줄까?”

그렇게 하기 위해 뜬 블라드의 오른쪽 눈은 온통 초록색의 세계로 가득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2화 15

세계수의 기사

쿠구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다시금 육중한 몸체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아우슈린의 목책들.

하늘에 닿을 듯 점점 높아져만 가는 나무들의 그림자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다시 뿌리가 생겼다고?”

쓰러졌을 때는 그저 잘린 나무들뿐이었지만 다시금 일어섰을 때는 당당히 뿌리 내린 한 그루의 나무로.

이제는 아예 자그마한 숲이 되어버린 아우슈린의 목책을 보며 비츠카야 백작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흑마법사들까지도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나쁜 놈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노려보는 녹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날카롭게 세운 검과 함께 매섭게 불타오르는 블라드의 오른쪽 눈은 찢겨버린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세차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저놈들이 죽였어.]

날카롭게 세운 검 위로 녹색의 기운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치켜뜬 오른쪽 눈에서 또한 마찬가지.

블라드의 검과 육체를 통해 드디어 이 세상에 발을 내디딘 어린 세계수는 자신을 지키려 했던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말았다.

[전부 다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쿠르르르릉-!

잠시 빌린 용의 포효와 함께 터져나가기 시작하는 어린 세계수의 분노.

그 분노를 알아들었다는 듯 아우슈린을 둘러싸고 있던 녹색의 바다가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그 격렬한 움직임을 보며 비츠카야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움직인다!”

왜냐하면,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숲의 주인이 허락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나무들은 어린 세계수의 분노와 동조하여 땅 밑에 박아두었던 뿌리들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느렸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육중함으로.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내리꽂힌 나무들의 채찍에 비츠카야의 군의 진형이 단번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터져나가는 육신들과 울려 퍼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순식간에 푸르른 숲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야 할 나무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이라니.

어찌나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던지 저 멀리에 있던 라마슈트조차도 쓰고 있던 베일을 올린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후우.”

그리고 적들이 당황한 이 순간을 노리고 있던 숨결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잔뜩 기울어져 있던 전장의 기세를 가져올 수 있는 이 순간을.

자신이 나서야 할 최적의 순간을 읽어낸 블라드가 두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흐으읍!”

세차게 휘두르는 블라드의 검격 한 번에 시체들의 머리들이 수도 없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검은 물결이었지만 블라드의 검 끝에 맺힌 녹색의 세계가 더는 그들의 전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아아악-!

검은 바다 위로 뛰어든 금색의 등대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세찬 검격에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허연 눈깔들이 치켜떠지기 시작했지만 세계수와 함께 하는 이 숲은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이미 자신의 세계와도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블라드!”

바라디스는 새까만 시체들에게 뒤덮여 가는 블라드를 보며 다급히 화살을 치켜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 모습도 잠시, 어느새 블라드는 몰려드는 시체들을 발아래에 둔 채 하늘 높이 솟구치는 중이었다.

“······아니?”

뀨-!

빛나는 두더지가 만들어준 계단을 타고 달려 나가는 세계수의 기사.

녀석이 치켜든 엄지손가락처럼 높이 솟아오른 블라드는 어느새 목책을 부숴버린 누더기 시체를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흐아아!”

한 번에 베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세계수의 세계는 그보다 거대한 것이었으니까.

보이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지만 품고 있는 것은 아우슈린 그 자체인 검이 누더기 시체를 향해 순식간에 꽂혀 들어갔다.

콰직! 꽈드드득-!

커다란 바위에 깔린 모습이 마치 이러할까.

블라드의 검에 꽂힌 누더기 시체의 머리가 처참히 뭉개지기 시작했다.

꾸에에에엑!

수백의 시체가 뭉쳐있었음에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검의 무게.

누더기 시체는 그 무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흉측한 두 팔을 마구 내젓고 있었지만 꽂아 넣은 블라드의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요제프.”

왜냐하면, 넘실거리는 시체들 저 너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햇빛이 가득한 방 안에서 언제나 나를 보며 웃어주었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자들과 함께 서 있는 그를 보며 블라드가 거친 포효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요제프 바예지드!”

콰지지직-!

세계수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누더기 시체가 기어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체들 속으로 뛰어드는 블라드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높게 치켜든 검의 빛깔만큼은 너무나 선명한 녹색의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 숲에서 당장 나가!]

“다 비켜! 이 자식들아!”

어린 세계수와 함께 울부짖는 용의 외침.

그 외침을 가득 담은 별과 용의 검이 기어이 푸른 숲을 갈라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마치 산과도 같은 거대한 검이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검이라는 형태만으로는 차마 담지 못한 세계수의 존재감이 하늘을 가리고 땅을 부수며 새까만 바다를 갈라내는 그 모습에 되살아 난 존재들까지도 두렵다는 듯 크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리고 라마슈트는 그 파멸적인 그림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황금빛 지평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라우센이라는 하늘 아래서는 떠오르지 못한 태양이었지만 그가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떠오름이었다.

-막, 막아라!

-저놈이 달려든다!

-라마슈트 님을 보호해!

매섭게 달려드는 블라드를 막기 위해 목 없는 기사들이 서둘러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으려 하는 존재는 한낱 검사가 아닌 숲의 의지 그 자체인 것.

콰득! 콰지지직!

휘둘러진 블라드의 검끝으로 목 없는 기사들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에 얻어맞은 그들은 산산이 조각난 채 이리저리 휘날릴 뿐이었다.

“내 앞을 막지마라!”

목 없는 기사들을 부수고 도망치던 흑마법사들을 베고.

분노 가득한 세계수를 위해 합당한 제물을 바쳐나가던 드디어 블라드는 자신의 앞을 틀어막은 검은 상복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너도 있었지.”

라마슈트를 알아본 블라드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녹색의 세계 위에 서 있는 검은색 동심원은 지금도 불길한 파문을 일으키며 숲을 더럽히는 중이었으니 라마슈트를 보는 블라드와 세계수 안에서는 동시에 같은 감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너의 그 개 같은 술수도 이젠 지겨워!”

콰앙! 쾅! 쾅!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떠오른 불길한 글귀들을 때려 부수며 그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신의 말씀을 거꾸로 늘어놓은 라마슈트의 결계는 불길한 만큼 섬뜩한 것이었지만 이 땅의 주인인 어린 세계수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크흑!”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라마슈트도 블라드의 날 선 검격 앞에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신이 만든 세상 밖에 서 있는 그녀조차도 바로 앞에 있는 바로 앞에서 질러대는 블라드의 존재감만큼은 외면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지랄을 하고 다니는 거야!”

블라드는 검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던 여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직접 눈을 감겨 주었던 불쌍한 창녀 또한.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녀가 행한 행위는 너무나 악독한 것이었고 블라드는 이제 더는 그런 광경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개같은 년아!"

쨍그랑!

험한 욕설과 함께 마지막 결계까지 깨부순 블라드는 드디어 라마슈트라는 세계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세계수의 분노와 함께 한 길 뒤에는 이미 수백의 시체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들 중 아무도 블라드의 전진을 막아 세운 자는 없었으므로.

“······!”

라마슈트는 자신의 베일을 휘젓는 블라드의 거친 손길에 실로 오랜만에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완벽한 조각을 이식한 프라우센조차도 재현할 수 없는 용의 분노가 지금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어서도 사죄해라. 라마슈트!”

“크흑!”

평소라면 닿을 수 없었겠지만, 이곳은 아우슈린.

초록색 도화지 위에서 뛰노는 금색의 용은 이곳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자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블라드!”

라마슈트의 머리채를 쥔 채 검을 치켜드는 블라드의 모습은 분노하는 숲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여태까지 쌓아 올린 분노를 단 하나의 일점으로 꿰뚫으려 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라마슈트의 목으로 세계수의 분노가 떨어지려는 그 순간, 블라드는 자신의 옆을 파고드는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라는 사람을 기사라는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의 기운이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자야르가 차고 있는 안대에서부터 세찬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라드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그의 검은 과연 자신이 배워왔던 대로 전장의 기세를 비틀고자 하는 매서움이 담겨져 있었다.

콰직-!

너무나 분노했고 또한 익숙했기에 차마 눈치 재치 못했었던 자야르의 일격이었다.

그렇기에 차마 방어하지 못한 블라드의 빈틈이었지만 그곳에는 어느새 삐죽 솟아오른 뿌리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자야르!"

“······!”

자신의 검을 막아 세운 뿌리를 보며 자야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찰나의 시간을 다투는 기사들의 순간이었고 다시금 기회를 잡은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 이번에는 본연의 황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불량한 눈빛은 여전하구나.”

잡고 있던 라마슈트의 머리채를 서둘러 휘둘러 낸 블라드가 재빨리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자야르라는 기사는 고작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을만큼 녹록한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왜 막는 거예요!”

달려드는 자야르의 검 끝이 매서웠다.

단 한 발자국의 전진 속에 수많은 의도를 감출 수 있는 그는 아주 잠시였지만 블라드를 막아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직은 안 되니까.”

자야르는 라마슈트를 부축한 채 달아나는 요제프를 확인하고는 다시금 블라드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가 세차게 검을 휘둘러대었지만 자야르라는 사람은 적의 기세를 흘려낼 줄 아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텅! 터엉! 텅! 텅!

“크학!”

비록 그 기세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뭔 놈의 검이······.”

평소처럼 비웃어보려 노력했지만 자야르의 팔 끝은 이미 세차게 떨리는 중이었다.

검 한 자루만으로는 도무지 감당해 낼 수 없는 블라드의 분노였지만 그럼에도 부득이 버텨내려 하는 것은 그 또한 주군의 의지를 받드는 기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키라니까! 제발!”

“안 돼!”

살아남은 몇몇 흑마법사들이 라마슈트와 함께 자욱한 연기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사라지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러대었지만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야르라는 기사는 반격기의 대가이자 신묘한 발걸음을 지닌 검사인 사람이었다.

“아직은 안 된다. 블라드. 아직은······.”

마치 너만 들으라는 듯 조용히 속삭이는 자야르의 목소리가 귀 끝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 있던 블라드에게는 그의 말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아아아!”

저 앞에서 흐릿해져 가는 라마슈트와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가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어린 세계수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틈을 벌린 흑마법사들이 기어이 숲 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발 비키라니까!”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블라드는 자신이 한 맹세를 떠올려야만 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저들이 또다시 앗아갈 어린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라도 베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콰직!

차마 받아치지 못한 블라드의 검끝이 기어이 자야르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고 말았다.

그 육중한 기세에 가누지 못한 몸이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까지 처박히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자야르는 웃고 있었다.

“크흑! 컥!”

아주 잠시이긴 했지만, 온 몸으로 숲의 분노를 막아낸 자야르는 결국 요제프에게 귀중한 시간 한 조각을 벌어줄 수 있었으니까.

“······너 인마. 코피 난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기사의 눈에서는 이제 바로 앞에서 울고 있는 제자가 보일 뿐이었다.

“빨리 눈을 떠라. 모르긴 몰라도 부담이 엄청난 것 같으니까.”

블라드의 검에 꿰뚫려 나무에 매달려버린 자야르의 모습이 처량했다.

그러나 그런 그라 할지라도 모셔야 할 주군 다음에는 유일한 제자였던 모양이었다.

“자야르.”

“결국,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만.”

빠져나가는 피와 함께 점점 창백해지는 자야르를 보며 드디어 블라드가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뜨고 말았다.

일개 인간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었던 세계가 떨어져 나가자 기어이 블라드의 온몸에서 격렬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자야르를 부축하려 애쓰고 있었다.

“건방진 놈. 너무 빨리 컸어······.”

점점 가물거리는 블라드의 시야 속으로 자야르가 웃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블라드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리 용의 육체라 할지라도 세계수라는 존재는 쉽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었잖아요.”

그저 여태껏 품고 있었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한계였을 뿐.

“그래도 나한테는요.”

“미안하다.”

새까맣게 감기는 시야 속에서 블라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는 자야르의 모습이었다.

그런 자야르의 옷깃을 붙잡은 블라드는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가지 말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고마웠어.]

하늘은 맑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한 날이었다.

비록 옆에서 들려오는 성난 엘프들의 함성과 누군가의 비명들이 가득했지만 할 일을 마치고 쓰러진 블라드에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어서 쉬라 말하는 어린 세계수의 속삭임뿐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3화 6

갈라진 틈 사이에서 (1)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늘의 숲은 고요했고 또한 청명했다.

오직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숲속에서 사납게 날뛰던 시체들조차도 이제야 안식을 찾았다는 듯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어났네?”

그러나 영원한 잠이라는 것은 오직 죽어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영원히 누워 있을 그들과는 다르게 이제 막 눈을 뜬 블라드는 귓가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 아저씨 죽지는 않았대. 다행이다. 그쵸?”

세계수를 품은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는 듯 지금도 블라드의 온몸에서는 참기 힘든 격통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어린 신녀는 이미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쉼 없이 재잘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크게 다치기는 해서 한쪽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대요.”

“끄응.”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로 말을 내뱉을 기력까지 전부 소모한 블라드였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신녀가 영 어색한 모양인지 애써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

창가를 뒤로한 신녀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빛나는 것이 이제야 막 눈을 뜬 블라드에게는 버티기 힘든 반짝임이었지만 그럼에도 신녀가 들고 있던 자그마한 화집(畫集)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뭐야. 계시야?”

“아니요.”

그림을 통해 계시를 주고는 했던 신녀였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빙긋 웃고 있었다.

“이제 블라드한테 계시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방금 한 신녀의 말은 왠지 모르게 묘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잠시 정신이 쏠려 있던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손 위에 얹어져 있는 새하얀 도화지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웠대요. 자기 대신 멋진 그림을 그려줘서.”

“······그래?”

들고 있던 화첩에서 북 찢어낸 도화지였다.

충분히 성의 없어 보이는 도화지였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던 블라드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그림을 못 그린다."

"응?"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온통 삐뚤빼뚤한 그림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만 같은 그 그림 위에는 나무임에도 활짝 웃고 있는 어린 녀석과 그 옆에서 검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엘프들의 도시에서도 아주 깊은 곳.

볕이 잘 드는 밖과는 다르게 온통 어둡기만 한 엘프들의 감옥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애처로운 소리가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비츠카야 백작에게서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 같았지만 정작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 보이는 것이 꽤 고단수의 전문가가 취조를 한 모양이었다.

“피에르 주교! 신을 향한 저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소이다! 지금이라도 기도문을 외우라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끄아아아!”

치이이익-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백작이었지만 정작 그의 앞에 있던 사제는 딱히 고해성사를 들어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서 대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있던 주교 피에르는 침착한 표정으로 남은 피부를 마저 벗겨내고는 백작에게 물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내통하고 있었지?”

“끄으! 끄아아아!”

“5년 전? 아니 그보다 오래되었나?”

감옥 안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에 창살 밖에 서 있던 엘프들조차도 차마 지켜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한 피에르만큼은 이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도 진실을 찾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낼 뿐이었다.

“내 앞에서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네는 이미 교황청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불순분자였거든.”

“흐으으!”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던 피에르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주교 피에르. 교황청이 자랑하던 구마사제이자 이단심문관.

죽여버린 사특한 존재들은 수십이며 직접 태워버린 불신자들은 수백이라던 그의 앞에서 비츠카야 백작은 그저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내통, 내통까지는 아니고.”

“이곳의 엘프들이 말하길 애초에 압실론이라는 물건은 자살까지 유도할 물건은 아니라고 하더군.”

피에르는 들고 있던 인두를 내려놓고는 자그마한 집게를 집어 들며 물었다.

누구 하나 해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집게였으나 정작 백작은 뜨거운 인두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집게가 더욱 두려울 뿐이었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은 있을지언정 말이지.”

“······.”

수도 브리간테스를 들썩였었던 엘프들의 마약 압실론.

그 약물을 접하고 자살했던 궁정 귀족의 수만 해도 수십이었으니 이는 보통 악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유통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일까. 엘프들이 가지고 있던 복수심에 새까만 독이 더해진 시점은?”

그러나 정작 이 압실론을 만들었던 엘프들조차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만든 약물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을 천천히 병들게 할 생각이었을지언정 이렇게나 극단적인 결과는 바라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그들이었다.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제국에 의해 아우슈린이 위험해지라는 것을 엘프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봤을 때는 자네의 영지에서부터 이 사달이 난 것 같은데?”

누군가가 제국에 독을 더했다.

엘프들이라는 방패를 앞에 세우고서는.

굳이 남의 이름을 빌려 서로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존재들이 있음을 피에르는 떨리는 백작의 눈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용혈공이 한 짓인가?”

쉼 없이 서로간의 선을 긋고, 가르고.

그렇게 생겨난 깊은 갈등의 골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세계와 세계들이 만나는 면면마다 똬리를 틀고 있는 그들을 향해 신실한 신의 종이 드디어 자그마한 횃불 하나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말, 말하겠소! 그러니 제발!”

내가 믿는 올곧은 길을 위해 성스러운 신의 말씀 대신 분노를 행한 피에르.

그러나 애써 벌린 백작의 입을 통해 들은 독충들의 모습은 피에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추악한 것이었다.

※※※※

축축한 복도를 따라 성난 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기이한 목소리들이었지만 정작 문틈에 숨어 몰래 엿듣고 있던 요제프는 귀를 세운 채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흩어져야 하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줬소.

-겨우 이렇게 뭉쳤는데 다시 흩어지자고? 그렇게 했다가는 몇백 년이 걸릴지 몰라!

요제프가 서 있는 문 너머에서는 지금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이 목에 핏대를 올린 채 격렬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을 흑마법사들까지 합하면 아마 수백은 될 인원들이었지만 정작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도 요제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기회는 없을 거다! 지금만큼 제국이 혼란에 빠졌던 적은 역사상 없었으니까!

블라드에게 얻은 상처로 라마슈트가 잠시 물러난 지금, 그녀가 불러모은 흑마법사들이 천천히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같은 세계에 속해있었어도 꾸는 꿈은 각기 달랐던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기회라는 듯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서서 제국을 지배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위대한 마도 제국의 탄생이지!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에는 관심 없소. 나는 그저 그녀가 원한다던 세계 창조의 술이 궁금할 뿐이지.

-일단 교황청과 북부정교회 놈들부터 칩시다! 그동안 그놈들에게 당한 동료들이 한 둘이오?

누구는 못다 이룬 야망, 누구는 찾지 못한 진리, 또 다른 누군가는 뼈에 사무친 복수를 위해서.

요제프는 그들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마다 세상을 까맣게 물들일 새까만 독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극단에 서 있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말은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그저 공허하게 스러졌을 뿐이었다.

-······일단 지금이 우리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적기라는 것만은 사실이지.

라마슈트라는 여인이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간, 요제프는 문 안쪽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옴을 눈치챌 수 있었다.

라마슈트의 심복인 이름 모를 목 없는 기사.

요제프를 깊은 복도 안으로 안내해주었던 그가 입을 열자 방금까지만 해도 열을 올리던 흑마법사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라마슈트 님의 위업이 먼저 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동의했던 부분이고.

과연 라마슈트는 무슨 위업을 먼저 달성하려 했던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여태껏 어떠한 수작을 펼쳐온 것인가.

그것을 말하려는 목 없는 기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요제프의 귀가 문가에 바짝 다가서기 시작했다.

-비록 용혈공이 배신하긴 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용의 조각이 있소.

도시 모시암을 둘러쌌던 라두의 군대는 분명 수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아마 그때까지는 용혈공과 라마슈트는 한 패였으며 용의 조각이라는 물건을 통해 그녀를 꾀어내었던 모양이었다.

-그와 더불어 이제는 정령들의 정수를 포함해 아이들의 어린 가능성들까지 잔뜩 모아둔 상태지. 이제는 세계수의 뿌리만 있으면 되는 거요.

세상 가장 완벽한 조각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린 가능성.

그리고 하늘 저 끝까지 솟을 수 있는 세계수의 뿌리까지.

-이제 그것만 모은다면 라마슈트 님은 스스로가 창조할 세상의 주인이 되시겠지.

그것들을 통해 라마슈트는 신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의 세상은 그저 외면하고 있을 뿐인 여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마 그녀가 꿈꾸는 세상 속에서는 어떤 아이들도 고통받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여태껏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신성 모독이었을 뿐이었다.

“······!”

이제야 라마슈트의 진정한 목적을 깨달은 요제프는 숨죽인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필멸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장대한 계획에 요제프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숨 한줄기를 내뱉고 말았다

끼이이익-!

그리고 아무도 숨 쉬지 않는 이 공간에서 요제프가 내쉬는 숨결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

그 숨을 알아챈 목 없는 기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누구냐.

문 안 쪽에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오는 목 없는 자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땅히 도망칠 곳 없었던 요제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너밖에 없겠지. 바예지드의 요제프.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목 없는 기사가 띄운 푸른 귀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담았기에 한없이 차갑기만 한 그의 눈빛이 자신을 쓸고 가자 요제프는 그만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말았다.

-······.

그러나 목 없는 기사는 더 이상 요제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요제프의 머리 위를 쳐다보며 얼음장 같이 굳어 있었을 뿐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요제프는 순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심부름을 보내놨더니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로군.”

요제프는 비록 기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기감은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뒤에는 어느새 온통 색을 잃어버린 남자가 서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르겠는 그 남자는 앞에 서 있는 푸른 색의 귀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프라우센 님.

“아 그리고.”

굳어있던 요제프의 어깨를 돌려세운 프라우센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아직 용의 심장은 너희 것이 아니지 않나.”

치켜세운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면서.

“이것의 정당한 소유권을 얻고 싶다면 약속대로 사르누스부터 죽여야 할 거다.”

너는 죽음을, 나는 조각을.

그것이 그날의 숲속에서 우리가 한 계약이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죽음에서 되살아난 남자와 죽음으로 향하는 남자가 어두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벗어나지 못할 복도였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4화 9

갈라진 틈 사이에서 (2)

길고 좁은 복도 위로 쿰쿰한 공기가 가득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습기와 함께 떠오르는 저택의 악취는 숨을 쉬어야만 하는 요제프에게 있어서 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지금만큼은 곳곳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악취조차 잊은 채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죽음을 어설프게 입었군. 숨소리 한 번에 날아갈 정도니.”

온통 색을 잃어버린 남자.

그러나 예전에는 그 누구보다 가장 찬란했던 빛을 지녔던 사람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들려오는 프라우센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차게 뛰고 있는 요제프의 심장은 단순히 위기감에서만 비롯된 박동은 아니었다.

‘건국왕이라니······.’

어렸을 적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동화책 속에 나오던 남자가 지금 요제프의 눈앞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동경해왔던 소드마스터라는 존재는 요제프에게 있어서는 닿을 수 없는 거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를 폐하라고 부르지 마라.”

그러나 지금의 요제프는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그의 앞에 있던 남자 또한 이제는 영광된 기사가 아니었다.

본인들이 꿈꾸었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을 걷고 있던 그들은 묵묵히 습기 찬 복도를 걸어 나갈 뿐이었다.

끼이익-

위기에 빠져 있던 요제프를 프라우센이 데려간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여태껏 보았던 방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잘 정돈되어 있던 방이었고 그나마 이곳에서는 요제프를 괴롭히던 악취가 새어들지 않고 있었다.

“앉아라.”

“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프라우세의 방을 보며 요제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지금 자신은 흑마법사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불려온 참이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예지드의 요제프. 언젠가 너를 한 번 만나볼 생각이었다.”

“······.”

너무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불빛 하나 없는 방이었지만 요제프는 앞에 있는 프라우센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블라드라는 녀석을 처음으로 등용했다지?”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얼굴.

그러나 블라드라는 이름이 나올 때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말해봐라.”

치이익-

그저 장식에 불과한 양초였을 것이다.

살아있지 않기에 조금의 빛도 필요하지 않은 프라우센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천천히. 녀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지금 프라우센은 스스로 성냥을 당겨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마도 앞에 있는 손님을 위함이었겠지만 정작 앞에 있는 요제프는 지금 보이는 불빛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말았다.

“성심성의껏 대답한다면 이것은 못 본 척 해주마.”

그렇게 촛불 너머에서 보는 프라우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차마 그의 웃음을 보며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프라우센이 들고 있는 것은 요제프가 애써 숨겨두고 있던 자그마한 찻잔이었으니까.

여태껏 새까만 찻물을 담고 있었음에도 전혀 물들지 않은 드워프들의 찻잔을 보며 요제프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그 참혹했던 전투가 있은 지도 이제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곳곳에 비어있는 자리들과 그 자리들만큼 생겨난 무덤들은 여전히 슬플 뿐이었지만 그들을 대신해 자리 잡은 푸르른 목책만큼은 엘프들에게 있어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팔은 좀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블라드가 있는 방에서도 아우슈린의 푸르른 목책이 보이고 있었다.

어린 세계수가 그린 그림을 뒤에 한 채 자야르를 내려다보고 있던 블라드는 그의 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며 그만 복잡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팔이야 그렇다 치는데 지금은 다리가 좀 불편하다.”

블라드의 검이 꿰뚫고 간 자야르의 왼팔 부근에는 지금도 새하얀 붕대들이 둘둘 감겨져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지도 모르는 큰 부상이었지만 자야르는 덜렁거리는 본인의 왼팔보다는 발목을 붙들고 있는 사슬들이 더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안 돼요.”

“아직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잖냐.”

“지금은 포로의 신분이라는 걸 잊지 말라구요.”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인연 깊은 스승이었지만 아우슈린의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사특한 존재들과 함께 온 불길한 남자였을 뿐이었다.

이제는 안대조차 풀러낸 채 침대에 누워있던 자야르는 블라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하긴, 지금 당장 죽여도 할 말이 없긴 하지.”

그 말과 함께 실실 웃어대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나 상대방을 기만할 수 있는 자야르 특유의 여유로움.

검술만큼이나 배우고 싶었던 그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말해 봐요. 도대체 왜 그랬던 거예요.”

“······.”

그러나 잠시 풀려 있던 둘의 분위기도 방금의 말로 다시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스승의 부상을 걱정하던 블라드였으나 어느새 자야르를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의 푸른 눈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지금 말하는 거 부탁 아니에요.”

단순한 인정으로 베풀 수 있는 배려는 여기까지라는 듯 블라드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자야르는 이제는 더는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인지 남아있던 한쪽 눈을 감고 말았다.

“미안하다.”

“사과는 됐고. 지금 그 까만 여자는 어디 있어요.”

끼이익-

블라드가 바짝 잡아당긴 의자에서부터 날 선 소리가 들려왔다.

자야르의 귓가를 파고드는 그 소리는 이 자리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블라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여자가 죽인 사람들만 해도 내가 알기로는 수백이 넘어요. 모르는 것까지 합치면 천 단위는 넘겠죠.”

“······.”

“그 빌어먹을 년이 진짜 악질인 건 아이들 같은 약한 사람들만 찾아 죽인다는 거예요. 그냥 전쟁 치르듯이 아무나 죽이는 거였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나서지도 않았어요.”

블라드는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뿐이지.

그 시궁창 같은 뒷골목에서도 블라드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치열하게 지켜왔던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년 지금 어디 있어요.”

그리고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받은 만큼 갚고, 인연 있는 만큼 지켜보겠다는 블라드의 결심은 지금 밖에 보이는 단단한 목책만큼이나 굳건한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자야르.”

“네가 말하는 그 년은 ‘어디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 블라드의 결심을 알아챈 자야르는 이제는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블라드라는 사람은 진실이 알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마슈트라는 여자는 기억 속에 살아. 마법사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는 않았지.”

자야르가 알아본 라마슈트라는 여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허상 속에 자리 잡고는 이따금씩 악몽처럼 솟아오르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다만 그 여자에게 닿을 수 있는 통로 몇 곳은 알려줄 수 있다. 지금도 통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나 책임 있는 자들이 진작에 걷어냈어야 할 그녀의 어두운 거품은 어느새 현실을 위협할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찍어봐요.”

차분히 지도를 들어 올리는 블라드를 향해 자야르가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지도 위를 하나씩 찍어가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대답을 원하는 블라드도, 진실을 말하는 자야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안 물어보냐.”

“뭘요?”

“요제프 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지점까지 찍어낸 자야르는 마른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지만 정작 블라드의 대답은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직접 가서 물어보려구요.”

“······그래.”

자야르는 요제프가 전한 마지막 전언을 전하려 했지만 방금 들린 블라드의 말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둘 사이에서 굳이 전달자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페테르 님. 보고입니다.”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도시 스투르마의 한 집무실.

꽂혀 있는 검만큼이나 책장에 있는 책들도 즐비한 그곳에서 조언자 라그무스가 몇 장의 종이를 들고 페테르를 찾아왔다.

“서부 관문을 향해 가이다르 가문이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

한참 서류들을 들춰보고 있던 페테르는 라그무스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몇 년 전 있던 데어마르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크게 타격을 받고 돌아간 서부의 가이다르 가문.

그러나 이제는 그 피해를 복구했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처들며 협곡을 가로막고 있던 북부의 방패를 치우려 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군.”

“아무래도 황금공의 지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확히는 용혈공의 속셈이었겠지만 말이다.

중앙에서부터 시작한 중앙의 군세와 발맞춰 다시금 북상하는 가이다르 군의 모습은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지시하지 않고서는 일어나기 힘든 교묘한 움직임이었다.

“그곳까지 지키기에는 전선이 너무 길어져. 일단은 후퇴 시켜야 한다.”

“어디까지 군사들을 물릴까요?”

북부의 일곱 가문이 연합해 있는 올랑바르 관문 요새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황금공과 가이다르의 군세를 동시에 막아내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곳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던 페테르는 일단은 길어질 전선을 쳐내기 위해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데어마르까지.”

한참 지도를 지켜보고 있던 페테르는 들고 있던 펜을 쭉 들고서는 데어마르가 그려져 있는 지점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도시인 쇼아라와도 가까운 데어마르는 작기는 했어도 북부의 가문들이 집결하기에 부담이 없는 좋은 지점이었다.

“······그리고 페테르 님.”

“음?”

“여기. 요제프 님의 보고입니다.”

갑작스러운 적들의 진군에 한참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페테르였지만 방금 라그무스가 건넨 쪽지에서만큼은 날카로웠던 표정을 풀고 말았다.

“······오랜만이로군.”

“그만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곱게 접혀져 있기는 했지만 정작 보고가 적혀 있는 종이는 급하게 준비했다는 듯 형편없이 찢겨진 모양새였다.

다급히 그것을 잡아당겼을 아들의 손을 떠올린 페테르는 복잡한 표정과 함께 접혀있던 쪽지를 펴내었다.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

펴낸 쪽지 한가운데는 익숙한 아들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흐릿해져 있는 필체였지만 피를 이은 아들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필체였다.

“전보를 준비해라. 라그무스. 강철공과 정교회에 알려야겠다.”

그 쪽지를 읽어 내린 페테르는 방금 보고 있던 지도를 유심히 보고는 펜을 꺼내 들었다.

“궁정공께는 알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분께는 강철공이 알리시겠지. 우리에게서 너무 많은 전보가 나가서는 안 돼.”

가여운 아들이 보내온 전보 앞에서도 페테르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영주이자 군주인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냉철하게 판단했을 뿐.

“방금의 지시를 취소하지. 북부 연합의 군사들을 쇼아라까지 물리겠다.”

지금 내뱉은 말과 함께 페테르는 데어마르에 쳐져 있던 표시에 굵은 가위표를 치기 시작했다.

데어마르를 넘어 쇼아라까지.

앞으로 고착화할 방어선을 최대한 당겨 그린 페테르를 보며 조언자 라그무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 말과 함께 집무실을 나선 라그무스의 뒷모습을 보며 페테르는 그제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보았던 아들의 전보를 조심히 다시 펴낸 그는 뒤에 있던 책장에서 자그마한 책 하나를 꺼내고서는 그 쪽지를 조심스레 껴 넣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요제프.”

페테르가 꺼내든 책의 표지에는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화려한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의 둘째 아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낡은 동화책에는 커다란 용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5화 5

불타버린 교회 (1)

잔뜩 눌러붙은 눈꺼풀을 치켜뜬 대모의 눈길이 블라드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날카로운 바늘 또한.

치이익-

“큭!”

대모가 내뿜는 담배 연기와 함께 살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뜨거운 바늘이 블라드의 피부를 꿰뚫을 때마다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고 자욱한 연기는 더욱 짙어 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저주야.”

대모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한 땀 한 땀 새겨져 가는 번개의 문양.

블라드의 손등에서부터 시작한 그 문양은 어느새 어깻죽지까지 타고 올라가 블라드의 왼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타인의 세계에 불순물을 넣는 저주. 본래는 우리 마법사들이 기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지.”

태연한 척하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얼굴에는 이미 고통의 기색이 완연히 번지고 있었다.

지금 루가 족의 대모가 새겨주는 문신은 피부가 아닌 영혼 안에 새겨지는 것이었으니까.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렬하게 다가오는 고통에 어느새 블라드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순물이 뭔지는 자네도 이미 알고 있겠지?”

고통 때문인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블라드를 보며 대모가 물고 있던 담뱃대를 탁 하니 털어내었다.

하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미 블라드의 안에는 루가 족의 비술을 경험한 적 있던 이가 머물고 있었으니까.

“부디 이 저주로 다른 이의 세계를 너무 깊이 찌르지 말게나.”

후욱-!

그 말과 함께 대모는 폐 안에 머금고 있던 신비로운 연기를 블라드의 왼팔에 뿜어내었다.

머금고 있던 그녀의 진심과 함께 날아든 연기는 어느새 블라드의 왼팔에 스며들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남을 찌른 만큼 상처 입는 것은 결국 자네의 세계일 테니까.”

선으로 이어졌을 뿐일 문신들에게서 점점 색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더욱 확연해지는 검은 번개의 문양.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을 가를 때 썼었다던 루가 족의 신비는 키하노와 블라드를 처음 만나게 해주었던 번개처럼 온통 새까맸으며 날카로운 것이었다.

※※※※

저 멀리 보이는 황무지를 뒤로 한 채 수많은 군사가 움직이고 있었다.

수도 브리간테스에서부터 집결해 무법자들의 도시 나마르타까지 나아갔었던 황실과 중앙의 군세들이었다.

블라드를 쫓았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수만으로 불어버린 중앙의 군대는 지금도 쉴 새 없이 북부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사령관 님. 가이다르 백작이 방금 서부 관문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그래?”

북부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용혈공 사르누스는 옆에서 들려오는 미르셰아의 보고에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좁은 협곡을 막고 있던 요새였을 텐데. 그곳을 벌써 뚫어내었다고?”

“그것이······.”

사르누스의 말대로 서부를 틀어막고 있던 올랑바르 요새는 좁은 협곡을 따라 지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그런 지형을 뚫기 위해서는 당연히 수많은 희생을 강요해야 했으나 어쩐 일인지 그 반푼이 같던 가이다르 백작은 너무나 수월하게 돌파해버리고 만 것이다.

“가이다르 백작이 공략한 것이 아니라 바예지드 백작이 스스로 군사를 물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이다르 백작의 빛나는 전공은 그저 페테르가 내던진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것.

그 유리했던 진형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미르셰아의 보고에 사르누스의 눈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과연 북부의 여우답군. 만에 하나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있어.”

북부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인 바예지드와 바라노프.

과연 그들은 용혈공이 휘두르는 홑껍데기들과는 달리 결코 만만치 않은 이들이었다.

“여차하면 보급로를 차단해보려 했더니 이제 그 방법은 못 쓰겠군.”

아무리 좋은 지형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룰 능력이 없다면 그저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페테르는 먼 곳에 있는 북부 연합군이 올랑바르 요새를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얻어낼 이득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방향을 틀겠다. 지금부터 우리는 동부 가도를 통해 움직인다.”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물지 않은 페테르 덕분에 쯧쯧 혀를 차고만 용혈공 사르누스는 처음에 계획했던 방향을 틀어 두 번째 안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북부의 마링겐부터. 그곳부터 점령한 후 곧장 위로 나아가겠다.”

바예지드가 있는 북서부가 아닌 강철공 티무르가 있을 북동부를 향해서.

황금공과 가이다르에 의해 바예지드가 꽁꽁 묶여 버리고 말 지금, 용혈공이 이끄는 군세는 곧장 강철공이 있을 북부의 심장 바스토폴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아버님. 아무리 저희가 수가 많다고 해도 군세를 둘로 나누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습니다.”

갑작스레 고개를 튼 드라굴리아의 깃발을 보며 미르셰아가 걱정이 된다는 듯 사르누스에게 간언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계획했던 일 중 하나라지만 하나였던 전선을 둘로 나누는 것은 원정군에게 있어 큰 부담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피해가 클 것입니다.”

“······.”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만큼 짊어져야 할 희생이 클 수밖에 없는 선택.

그러나 수만의 군세를 차디찬 설원 위로 밀어 넣으려는 사르누스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 알고 있다. 아들아.”

그저 사나운 용의 목소리로 자신의 아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을 뿐.

“당연히 인간들이야 많이 죽어 나가겠지.”

지금 북부로 나아가는 이들은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 군세인가.

제국에게 반기를 든 북부를 정벌하기 위한 군세인가 아니면 완벽해지려는 용의 입김을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들인가.

“잊지 말거라. 미르셰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승리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네.”

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사르누스의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깃발이 대신 대답해주고 있었다.

용의 목을 잘라내는 본래의 깃발 대신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새겨져 있는 드라굴리아의 깃발.

“이 아비는 너에게 그 옛날 완벽했었던 용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구나.”

자신의 아들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짓는 사르누스의 머리 뒤로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황실의 깃발보다도 더 앞에서 휘날리고 있는 드라굴리아의 깃발은 예전의 초라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황금빛 용이 활짝 펼쳐낸 거대한 날개로 가득 차 있었다.

※※※※

새하얀 햇빛이 가득한 방이었다.

그저 누워만 있어도 부풀어 오른 솜이불의 감촉이 느껴지는 그런 환한 방.

그러나 정작 그곳에 누워 있어야 할 블라드는 자그마한 책상에 앉은 채 앞에 놓아둔 지도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여기.”

어쩐지 성이 난 것 같은 블라드의 목소리에 잔뜩 늙어버린 손가락 하나가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에 따라 지도에 그려진 동그라미가 늘어갈수록 블라드의 눈썹은 점점 좁혀들고 있었다.

“이번에는 거짓말 아니지?”

“나는 너에게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단다. 동생아.”

“지랄하고 있네.”

옆에서 들려오는 라두의 목소리에 블라드가 사납게 미소 짓기 시작했다.

“그런 놈이 몰래 도망을 치다가 걸려?”

“······.”

창을 넘어 들어오는 오늘의 햇빛이 블라드의 금발에 비쳐 요란하게 반짝여댔다.

그러나 라두는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금발보다도 블라드가 품고 있는 짙푸른 눈동자에 더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때의 전투 이후로 더 깊어진 것만은 같은 블라드의 푸른색은 라두가 두려워했었던 아버지와도 충분히 비견될 정도였으니까.

“갈 거면 얌전히나 갈 것이지. 누아르는 도대체 왜 훔치려고 했던 거야.”

“······빠르니까.”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는 블라드의 옆에는 늙어버린 라두가 힘없이 서 있었다.

잔뜩 주름진 목덜미에는 새까만 가시나무를 하나 그려 넣은 채로.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금제를 새겨넣은 라두를 보며 블라드가 차갑게 웃음 지었다.

“······우리 그때 약속했었잖아. 용살 기사단을 없앨 때까지는 도와주겠다고.”

연기로 가득 찬 무법자들의 마을에서 라두는 블라드의 피를 마시며 약속했었다.

지금 루가 족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는 용살기사단을 막아내겠노라고.

꿀꺽 삼킨 피를 따라 새겨진 그때의 맹약은 여전히 라두의 핏줄을 따라 떠돌고 있었고,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고 있었다.

“내 피가 그렇게 싸지는 않지. 안 그래?”

조용히 웃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라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과연 블라드의 말대로 나마르카에 행했던 둘만의 계약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가장 오래된 용이 이끄는 기사단은 대륙을 누비고 있었고 라두의 정당한 대가는 아직 제대로 치러지지 않은 것이다.

똑- 똑-

단검으로 살짝 그어낸 블라드의 손가락 끝으로 새빨간 핏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놓여 있던 찻잔을 따라 천천히 스며드는 선명한 색깔들을 보며 라두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야?”

“어디?”

“네가 방금 찍은 곳.”

블라드는 자신이 들고 있던 지도 두 장을 펼쳐내며 말했다.

한 장은 자야르가 표시한 지도.

또 한 장은 방금 라두가 표시한 지도.

사특한 존재들과 접촉했던 기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라마슈트의 위치를 추적하던 블라드는 드디어 그들의 증언이 일치하는 장소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치우크.”

살론타 남작 가문의 마을 중 하나인 아치우크.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그 마을은 예전에 들렀던 도시인 도브레치티에서 동쪽으로 일주일만 더 가면 닿을 수 있을 곳이었다.

“그래, 그랬었지. 거기서 흑마법사들과 만났었지.”

용혈공의 아들인 라두 드라굴리아는 예전에는 북부의 도시 모시암에 있었던 드라굴리아의 군세를 지휘할 정도로 위세가 있던 이였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되고 말았지만, 그때 다뤘던 정보들만큼은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서로 협조하기로 약속했었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동맹 관계가 확실했었거든.”

“여기까지 안내할 수 있겠어?”

“물, 물론이지. 그 교회에는 한 번 가본 적이 있으니까.”

교회라는 단어에 순간 블라드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뻘건 피에 목마른 용은 그 눈빛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물어보지도 않은 대답들을 마구 내뱉을 뿐이었다.

“다 무너진 교회. 이제는 전부 다 불타버린 마을에 서 있던 거.”

“······.”

"거의 몇십 년은 비어있던 마을이었어. 길잡이가 없으면 찾, 찾기 힘들거야."

다 불타버린 마을 위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 하나.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 광경을 떠올리며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던 지도를 접었다.

“마셔.”

블라드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찻잔을 들이키는 늙은 라두.

그와 함께 목덜미에 새겨진 맹약의 증거가 옅어지고 있었지만, 방문을 나서는 블라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느낌이 오는군. 아마 그곳이 맞을 것 같다.]

불타버린 마을 아치우크.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된 곳.

그곳에 있을 광경을 떠올리던 블라드는 어쩐지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네. 그런 것 같아요.”

화사한 복도의 창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런 걱정이 없기에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아우슈린의 아이들.

종족을 뛰어넘어 함께 뛰놀고 있는 엘프들과 루가 족의 아이들을 보며 블라드는 잠시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끝을 보자구요.”

아주 오래전 불에 탄 그 교회는 고귀한 수녀 한 명이 세운 교회라고 했다.

갈 곳 없는 고아들을 가득 자신의 품에 안았었던 그 여인의 이름은 교황청이 인정한 성녀. 트라마슈.

블라드는 손등 위에 새겨진 문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6화 11

불타버린 교회 (2)

눈을 떴지만, 여전히 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새까만 어둠뿐이었으므로.

어딘지도 모를 자그마한 방 안에서 눈을 뜬 요제프는 여전히 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공간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자야르가 빠져나갔으니 다행이로군.”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어둠이었지만 그 속에서 요제프는 여전히 눈뜬장님과도 같았다.

그때마다 손을 내밀어주었던 나의 충실한 기사가 있었지만 이제 그는 관짝과도 같은 어둠 속이 아닌 초록빛이 가득한 숲속에 있을 것이다.

끼이익-

비록 자신은 여전히 이 어둠 속에 남아 있었을지라도.

지금 자신의 옆에 자야르가 없음에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던 요제프는 더듬거리는 손길로 옷을 차려입고는 방을 나섰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군.’

방을 나선 요제프가 걷고 있는 복도는 처음에 보았을 때만큼이나 여전히 새까맣고 어두울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주변을 식별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이는 라마슈트라는 여인이 깔아놓은 신비 덕분일 것이다.

“······.”

혼자서 쭉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걷던 요제프는 자신의 앞에 흑마법사들이 나타날 때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렇게 조심스레 벽 쪽으로 비켜선 요제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들의 말을 엿들을 수 있었다.

-지금 북부 연합군이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던데.

-아무래도 북상하는 용혈공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겠지.

-이러다가 괜히 우리한테까지 불똥 튀는 건 아니겠지요?

평소에는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사특한 존재들.

그러나 지금만큼은 숙인 고개를 제대로 펼 수 없을 정도로 잔뜩 모여있는 그들의 모습에 요제프는 목덜미가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많았다니.’

고귀한 귀족인 요제프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특한 존재들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예산을 쏟아붓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자들은 여전히 이렇게나 많았고 바예지드의 고생은 그저 방향키를 잘못 잡은 선장처럼 애먼 바다를 휘두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차하면 또 금화를 뿌리면 되겠지.

-살론타 남작은 뼛속까지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이오. 전처럼 북부에 대한 적대감만 일깨워준다면 무리 없이 우리에게 협조할 테지.

-하긴, 우리 같은 흑마법사보다도 북부인들이 더 밉다는데 어찌하겠소. 가끔 보면 인간들은 헛된 증오심 때문에 자신들까지 불태우고는 한단 말이지.

“······.”

그 말과 함께 점점 등 뒤에서부터 사라져가는 흑마법사들의 기척들.

그 기척들이 멀찍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요제프는 그제야 깊게 숙였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런 식이었군.’

살짝 깨문 입술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한 채로.

여태껏 보였던 자신들의 노력이 그저 헛수고였음을 깨달은 요제프는 조금씩 타오르는 분노를 잠재우려 애쓰고 있었다.

‘이래서 찾을 수 없었던 거야.’

어둠 속에 숨어 사는 흑마법사들.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기에 도저히 찾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특한 존재들이었지만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온 요제프는 이제야 그들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갈라진 틈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자들이 있다.

딛고 있는 땅이 다르며 태어난 피부색이 다르고 믿고 있는 신이 다르기에 그어질 수밖에 없는 세계와 세계의 틈 사이에서.

그 틈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증오와 차별을 키워온 이들은 이제는 새까만 손가락을 치켜든 채 서로를 죽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밖에 있었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스스로가 어둠에 닿았을 때는 알 수 있었다.

저자들이 교묘하게 갈라 세운 세계의 틈 사이에서는 지금도 불길한 독들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새까만 손가락을 든 채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증오와 차별을 보며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자들은 지금도 웃고 있었다.

"이제는 나밖에 없군."

그 말과 함께 요제프는 다시 한번 앞을 향해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

비록 누군가에게 맹세하지는 못한 몸이었지만 그럼에도 요제프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좀 더 깊은 어둠 속을 향해 홀로 나아가고 있었다.

※※※※

“우리 아우슈린은 자네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걸세.”

한층 더 늙어버린 늙은 제로니모가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맞잡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힘찬 손짓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칠 뿐이었다.

“루가 족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장로 님.”

가야 할 곳을 알았으니 이제는 떠나야 할 때.

제로니모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던 블라드는 그의 옆에 서 있는 루가 족의 대모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좋아하더군. 역시 더러운 골목보다야 푸르른 숲이 낫겠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는 듯 루가 족의 대모가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처음에는 악연인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은인이었군. 하긴, 때로는 아무리 복된 것들이라도 흉한 가면을 쓰고 찾아오기도 하는 법이니까.”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떠돌이 인생들이었지만 엘프들의 숲은 넓었고 어린 세계수는 환영해주었다.

빛나는 두더지가 뚫어준 굴을 따라 함께 걸어왔던 어린 루가 족의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그제야 마음속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잠시, 잠깐만요.”

“응?”

순간 장로들의 틈을 뚫고 나오는 여린 몸체가 있었다.

자그마한 두더지를 머리에 얹은 채 걸어나온 신녀의 손가락에는 마디마디마다 둘려 있는 붕대가 선명했다.

“······이런 건 처음 해봐서요. 좀 이상하죠?”

부끄럽다는 듯, 혹은 미안하다는 듯 블라드를 올려다보는 신녀의 눈빛에는 왠지 모르게 물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소녀가 비치는 민망함보다도 그녀가 들고 있는 자그마한 깃발에 더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아니.”

북부의 바예지드에서부터 시작해 중부의 아른슈타인까지.

그동안 블라드가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기 위해 모아왔었던 수많은 가문의 인장들이 어린 신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그 수많은 문장을 보며 블라드는 여태껏 걸어왔던 자신의 여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린 그림보다는 이게 훨씬 나은데.”

“응?”

그리고 이제 그 깃발의 마지막에는 어린 신녀가 새겨넣은 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늘이란 걸 처음 들어본 어린 신녀가 새겨넣은 그 문장은 저 위에 보이는 어린 세계수와 조금은 닮아 있었다.

“빼곡히도 들어찬 문장들이군. 제국의 절반 정도는 이 깃발 안에 있겠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신녀의 머리 위로 바라디스가 손을 건네왔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바라디스.”

나이와 종족을 떠나 그동안 함께 고난을 거쳐 왔던 레인저들의 대장,

그는 앞에 보이는 블라드의 손을 거침없이 잡으며 말을 이었다.

“이어진 고리 속에서 갚고 갚음은 의미가 없는 걸세. 그러니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주게.”

처음 보았을 때는 감히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지만 이제 둘 사이에는 맞닿은 면만 있었을 뿐 불쾌한 골짜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블라드는 더 이상의 멋쩍은 인사는 필요 없다는 듯 누아르의 고삐를 돌릴 뿐이었다.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떠나려 하는 블라드의 등 뒤로 루가 족의 대모가 나지막히 외치는 전언이 있었다.

부디 다른 이의 세계를 너무 깊게 찌르지 말거라.

그렇게 하다가는 분명 너의 세계도 상처 입고 말 테니까.

“······알겠습니다.”

트드드득-

자신을 마지막까지 걱정해주는 대모의 말을 끝으로 숲 사이에서는 자그마한 오솔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뿌리 내린 나무들이 스스로 비켜 만들어 준 그 길은 정확히 블라드가 향하려는 마을을 향해 새겨지고 있었다.

[잘 가라는 인사인가 보다.]

“그러게요.”

이제는 인간들이 만든 도로보다 크게 트여버린 숲의 길을 보며 블라드가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한번 품어본 적 있었기에 들을 수 있었던 어린나무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가자.”

푸르르륵-

이제 떠나자는 블라드의 말에 누아르는 무언가가 아쉬웠던 모양인지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같은 정령의 피를 나누고 있기에 알아볼 수 있는 풍경.

그렇게 뒤를 돌아본 누아르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가지를 흔드는 세계수와 그 위에 앉아 있는 어린 정령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

새까만 어둠 위로 보이는 것은 하늘이 아닌 수면(水面)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잔뜩 일렁이고 있는 거품의 표면일 것이다.

“······저것은.”

자그마한 신임을 빌어 이제야 흑마법사들의 중심부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요제프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중정(中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까지도.

“그녀가 뿌리내린 나무지.”

“······!”

갑작스레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요제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야르도 없는 지금, 요제프에게 말을 걸어줄 존재들이라고는 오직 사특한 흑마법사들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불완전해. 정령수의 핵만으로는 창조의 술이 성립되지 않는 모양이더군.”

그러나 요제프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방금 보았었던 흑마법사들이 아닌 온통 색이 바래 있는 남자였다.

조용히 요제프를 지나 난간에 팔을 기댄 프라우센은 아무 말 없이 밖에 보이는 나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프라우센 님.”

여기까지 몰래 온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요제프는 바로 옆에 있는 그의 모습에 최대한 의연해지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차마 새고 마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네가 요제프 바예지드냐?”

“네?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방금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프라우센이었다.

프라우센은 허락받지 않았음에도 중심부에 서 있는 요제프의 사정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열 뿐이었다.

“그래. 언제 한 번 너를 불러보고 싶었지.”

“······.”

비록 어제 보았을 때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기묘한 위화감에 요제프는 조금씩 잔뜩 굳어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저에게 뭐라도 물어볼 것이 있으십니까? 폐하.”

그러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압박감 때문일까, 아니면 난생처음 보는 나무의 기괴한 모습 때문일까.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려 한 말이었지만 요제프는 방금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자신을 폐하라 부르지 말라고 했던 프라우센의 말을 잠시 잊고 만 것이었다.

“······나를 폐하라 부르지 마라.”

과연 그 말이 실수였다는 듯 프라우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다만 요제프는 그의 기세에 압도되기보다는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품었을 뿐이었다.

“그래. 네가 블라드라는 녀석을 처음으로 등용했다지?”

“······!"

그리고 방금 품었던 의아함은 확신으로.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린 요제프는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 없는 경악을 내뱉고 말았다.

“그 녀석에 대해 성심성의껏 대답해준다면 오늘의 무례는 못 본 척해주겠다.”

어제 나눴던 대화조차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지금 요제프가 마주보고 있는 남자는 이미 잔뜩 깨어져 있는 유리병과도 같은 남자였다.

다른 이의 세계를 너무 깊이 찌르지 마라.

그러면 너 또한 큰 상처를 입고 말 테니까.

잔뜩 부풀어 오른 거품 같은 세계 속에서 요제프는 온통 상처 입고 만 남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조금씩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는 남자.

깨어진 구멍 사이로 기억들을 쏟아내고 있는 남자는 그럼에도 블라드라는 이름만큼은 잊지 않았다는 듯 앞에 있는 요제프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7화 7

불타버린 교회 (3)

불어오는 바람에는 따뜻한 봄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내들이 눌러 쓴 투구 안에는 여전히 북부의 찬 바람이 깃들어 있었을 뿐.

남쪽을 향해 걷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

셀 수도 없이 길게 늘어선 그들의 등 뒤에는 북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일곱 가문의 깃발이 나부끼는 중이었다.

“······적들이 남하하고 있다고?”

북부를 떠나 중앙을 향해 내려오고 있는 북부 연합군.

강철공 티무르가 지휘하는 군세를 확인한 용혈공 사르누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약 4만 정도 되는 병력이 지금 아치우크 근방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4만에 달하는 북부 연합군의 병력.

분명 대규모의 병력이기는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숫자는 아니었다.

다만 사르누스가 당황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유리한 기점인 성을 내버려 둔 채 오히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로군.”

성을 끼고 하는 농성이 아닌 회전(會戰)을 택하다니.

만약 일개 필부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겠지만 지금 4만의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오는 이는 절대 녹록하지 않은 상대, 강철공 티무르였다.

“무슨 속셈이 있긴 있어.”

분명 무슨 이유가 있긴 있을 터.

티무르씩이나 되는 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성을 뛰쳐나왔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사르누스는 그가 그리려고 하는 그림을 쉽사리 알아볼 수 없었다.

“······혹시.”

그렇게 고민하는 사르누스의 천막 위로 한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높은 하늘에 몸을 뉘인 채 봄을 따라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철새들.

그러나 그 새 중에서도 이질적인 색깔을 지닌 새 한 마리가 있었다.

까악- 까아악-

다른 철새들이 날아가는 방향과는 다르게 수도 브리간테스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

그 비둘기의 발목에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티무르의 비밀스러운 쪽지가 묶여 있었다.

※※※※

아무도 없는 동부가도를 따라 내달리는 무리가 있었다.

가장 앞장선 검은 말의 뒤로 휘날리는 깃발과 함께.

고작 며칠 거리 뒤로 중앙의 군세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블라드 일행은 지금 자야르가 알려주었던 사특한 무리의 본거지를 향해 쉴 새 없이 나아가는 중이었다.

“아치우크는 오른쪽 길일세!”

“알아요!”

정확히는 그곳보다 더 북쪽인 곳을 향해서.

그쪽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피에르의 말에 블라드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북부정교회의 본산(本山)으로 갈 겁니다!”

블라드는 지금 아치우크가 아닌 북부정교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요제프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조급했지만 블라드의 머릿속은 그만큼이나 차가운 상태였다.

“거기서 일단 병력부터 얻어오자고요. 흑마법사 놈들이 백 명이 넘는다는데!”

자야르가 말하기를 라마슈트의 저택 안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들은 세 자릿수가 넘어간다고 했었다.

마치 대륙에 있는 모든 흑마법사들을 끌어다 모은 모양새였으니 그토록 어두운 곳에 고작 4명만이 침입하는 것은 그저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컸군. 예전에는 앞뒤도 못 가린 채 면죄부나 찢던 놈이.”

“······뭐라는 거예요.”

세차게 불타오른 듯 보였으나 정작 블라드의 푸른 눈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바로 앞에 들이닥친 일뿐만 아니라 저 뒤에 있는 일까지 생각해보려 하는 북부의 기사.

비록 품고 있는 색깔은 달랐으나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눈빛 속에서 조금이나마 요제프가 떠오르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워워!”

그러나 달려가던 일행 사이에서 날카롭게 들려오는 라두의 외침이 있었다.

“앞에 저 까마귀들 뭐야!”

놀란 듯 하늘을 향해 가리키는 라두의 손끝으로 마치 검은 구름 같은 것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까아악- 까악-

저 위의 하늘에서부터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다가오기 시작하는 까마귀 떼들.

전조도 없이 일행들을 향해 내려앉는 새까만 까마귀들을 보며 블라드는 다급히 달려나가던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거 벌써 눈치챈 거 아니야?”

라두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 까마귀 떼들은 새까만 장막처럼 죽 늘어선 채 일행들의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그 불길한 모습에 블라드가 차고 있는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할 때쯤, 까마귀 떼 너머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일행을 멈춰 세웠던 까마귀 떼가 다시금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까마귀들이 비켜난 곳에는 아까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검은 망토의 사내들이 가득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마커스?”

바예지드의 숨겨진 검들과 그들의 대장인 이름 없는 남자.

북부를 아우르는 정보망의 주체들이 지금 블라드의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북부정교회까지 가려는 판단은 훌륭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이미 우리가 준비해 두었으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갑작스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무리를 보며 블라드는 날 선 태도를 내비쳤지만, 그 또한 마커스가 예상했던 바였다.

“자야르가 알려줬지. 지금 자네가 아우슈린을 떠나서 아치우크로 향하고 있다고.”

“자야르?”

“물론 어떤 방법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는 묻지 말게. 그거야말로 우리 조직의 비전이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 차분히 입을 여는 마커스였지만 그런 그를 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질 뿐이었다.

“자야르랑 진작에 연락하고 있던건가요?”

“그렇지.”

“······그럼 당신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거네요?”

“그래.”

자야르에서부터 마커스까지.

남들은 다 알았지만, 나만은 몰랐다 말하는 요제프의 사정.

무심히 그렇다고 말하는 마커스의 마지막 끄덕임에 블라드의 눈동자가 기어이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꽈악-!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해줬어. 이 개자식아.”

“······!”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마커스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고 말았다.

저 앞에 있었던 블라드가 어느새 자신의 앞에 다다라 멱살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사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건만 블라드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마커스의 앞으로 다가와 버렸다.

챙! 채챙! 챙!

“그 손 놓으시오! 블라드 경!”

“진정하십시오. 저희에게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뒤늦게 반응한 까마귀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검을 빼 들었지만 마커스를 노려보는 블라드의 눈빛에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내가 우스워?”

“······.”

“아무리 보안이 중요하더라도 나한테는 알려줬어야지. 안 그렇냐고?”

그동안 속은 것이 분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블라드가 정말로 분한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요제프의 울타리 밖에 서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딘가 속해 있을 곳이 필요했던 뒷골목의 소년에게 있어서 요제프라는 울타리는 나를 세상에서부터 지켜주는 자랑스러운 경계선이었으니까.

“······너한테만큼은 알려주지 말라고 하시더군.”

“누가?”

“요제프 님이.”

“뭐?”

꽉 잡힌 멱살 사이로 억눌린 마커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에 정작 숨이 막혀가는 것은 마커스가 아닌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블라드였다.

“모두가 널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북부의 우리에서부터, 용혈공, 교황청, 황실······.”

쇼아라의 블라드.

용의 피를 이은 채 북부에서 태어난 소년.

교황청이 제작한 면죄부를 찢었으며 그에 대립하는 북부 정교회의 교황에게 인정을 받은 기사.

“그리고 라마슈트라는 여인까지.”

그리고 소드마스터의 맹세와 함께 하는 그의 유일한 계승자.

대륙에 있는 모두에게 인정받을 자격뿐만 아니라 미움받을 자격까지 마땅히 갖추고 있는 블라드라는 존재는 어쩌면 키하노 프라우센이라는 걸출했던 기사만큼이나 대륙 모두의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네가 요제프 님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그분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

“······하.”

마커스의 말에 블라드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깊은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두운 달을 향해 요제프가 나아갔을 때, 블라드는 그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프라우센에 의해 꿰뚫린 복부를 부여잡은 채 가지 말라고 외쳐대는 블라드의 목소리에는 분명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의 진심 어린 분노가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훌륭히 임무를 완수했군. 블라드.”

“이런 개자식들이!”

자신조차 모르는 임무였다.

그러나 요제프는 자신이 따로 지시하지 않았어도 블라드가 분명 옳게 움직여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요제프가 보아왔던 블라드라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있었어도 언제나 빛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으니까.

“······.”

“가자. 요제프 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높게 든 블라드의 손은 갈 곳 없는 분노에 의해 부들거릴 뿐이었다.

차마 들고 있던 손을 끝까지 내려치지 못한 것은 그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마커스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내해 줘요”

“그래.”

내가 가진 분노에 정당한 대가를 치러줄 사람은 오직 라마슈트와 프라우센 뿐일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멱살을 푸는 블라드를 보며 마커스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안내해 주마. 네가 원하는 그곳까지.”

※※※※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냔 말이다!

-왜 북부 연합군이 아치우크로 들이치는 거요!

거품처럼 일렁여대는 라마슈트의 세계.

아직은 여린 나무 한 그루로 지탱하고 있는 그녀의 세계에서 지금 흑마법사들이 외쳐대는 아우성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가요?”

불안에 가득 찬 그들의 아우성은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라마슈트에게도 들려올 정도였다.

아우슈린에서 큰 힘을 쓰고만 라마슈트는 자신이 정양하는 와중에 발생한 변고를 보며 신경이 크게 날카로워져 있었다.

-지금 아치우크로 북부 연합군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용혈공을 상대하려던 군대가 왜요?”

누가 보아도 분명 북상하는 용혈공을 막기 위한 군대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부연합군의 행보에 라마슈트조차 미려한 눈썹을 구기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희를 둘러싸고 있는 숫자가 범상치 않습니다.

마치 짜 맞추기라도 했다는 듯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그만큼 아무것도 없는 폐허, 아치우크로 들이닥친 북부연합군은 흑마법사들이 어떠한 조처를 하기도 전에 이미 마을을 빈틈없이 감싸버린 뒤였다.

“연결을 끊으세요. 지금부터 아치우크로 향하는 문을 폐쇄하겠어요.”

그저 군사들만 있었다면 별문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치우크라는 마을은 그저 입구였을 뿐이지 이들의 본거지는 아니었으니까.

사특한 신비로 감춰놓은 거품 안의 세계는 간파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라마슈트 님······.

그러나 라마슈트를 바라보는 기사의 푸른 귀화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질 않습니다.

“그게 무슨.”

아치우크와 연결되어 있던 라마슈트의 통로는 끊기질 않고 있었다.

아무리 닫으려 해도 그 문을 끈덕지게 붙잡고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만 온 것이 아닙니다. 북부 정교회 또한 같이 왔습니다.

“······!”

사특한 어둠에는 신의 빛으로 대항해야 하는 법.

오랫동안 키워왔던 암적인 존재들을 향해 드디어 북부 정교회의 칼날이 올바른 곳에 찾아 들고 있었다.

“분명 용혈공을 막기 위해 내려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과 함께 침대에서 내려온 라마슈트의 발이 당황한 듯 허공에 떠돌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가······.”

북부연합군이 내려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했었다.

그렇기에 우리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도.

북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검은 눈동자의 청년은 분명 자신을 향해 안심해도 좋을 일이라고도 했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그 이름을 떠올린 라마슈트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사정없이 입술이 구기고 말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며 자신들을 안심시킨 사내의 이름은 요제프 바예지드.

스스로 마신 죽음을 통해 신임을 내비치던 북부의 청년이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

몇십 년 전에 돈 전염병으로 불타버리고 말았다는 마을, 아치우크.

평소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폐허였지만 지금 그곳에는 수만의 병사들이 만드는 긴장된 침묵이 가득했다.

“까마귀들에게서 전보입니다. 방금 블라드 경과 무사히 접촉했다고 합니다.”

“좋아. 진군을 늦춘 보람이 있군.”

그 보고를 들은 강철공 티무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늦어진 진군이기는 했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되었다.

결국, 모여야 할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블라드가 왔다는 보고를 들은 강철공 티무르는 자신의 옆에 있는 노인을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보이는 인상은 인자한 노인 그 자체였으나 그가 입고 있는 붉은 색 법복만큼은 분명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그래요.”

하늘 같은 강철공의 예우와 함께 일어서는 노인.

북부정교회의 교황인 콘라드는 화려한 법복과는 어울리지 않은 낡은 성서를 집어 들고는 미소 지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혹여나 내 다음 대까지 이 짐을 넘겨줄까 싶어 언제나 고민이었지요.”

격렬한 성전을 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콘라드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맺혀 있었을 뿐이었다.

삶의 끝이 저물어가는 이때, 드디어 다음 대를 위한 빚 하나를 청산하고 갈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안드레아.”

“네. 교황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교황은 옆에 있는 주교 안드레아를 조용히 불렀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말일세. 그때는 내 다음 교황을 맡아 줄 수 있겠는가?”

“······교황님?”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단호했다.

북부정교회의 일곱 주교들과 함께 강철공을 앞에 둔 교황의 말에 주교 안드레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나의 시대는 이제 끝나네.”

잔뜩 주름진 교황의 두 손이 안드레아를 덮고 있었다.

“격렬한 태풍이 몰아치던 세월이었네. 어린싹들은 차마 자리 잡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지.”

그렇게 올려놓은 안드레아의 손끝으로 자그마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검소했던 교황이 언제나 차고 다녔던 낡디낡은 로자리오가 보내는 감촉이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난 뒤에는 양생(養生)의 시간이 필요한 법. 그리고 나는 자네처럼 무언가를 잘 키워내는 사제를 본 적이 없어.”

신께서는 남을 구원함으로써 자신 또한 구원받을 거라 말씀하셨다.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는 북부를 넘어 대륙을 가로지르는 그 이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 이름을 직접 품어준 사람은 바로 사제 안드레아였으니, 그는 자신이 건져 올린 이름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의무인 것 같네.”

그 말과 함께 떠나는 교황을 보며 안드레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온통 불타버린 교회로 걸어 들어가는 늙은 교황의 모습.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등 뒤에서부터 성가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임하시기 옳은 곳이로다.”

자신을 수행하는 고위 사제들과 함께 마침내 어두운 교회 안으로 들어선 콘라드 교황.

그곳에서 온통 거꾸로 된 교회의 문양을 본 콘라드 교황이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단호하게 바른 모습으로.

드드드득-

그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하는 거품과도 같은 세계.

거꾸로 된 문양을 옳게 돌리는 교황의 성호에 따라 그동안 저 밑 수면에 감춰져 있던 세계 하나가 반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곧 그분의 성전이요. 집이니라.”

교황이 외치는 구절에 맞춰 거꾸로 된 문양이 세차게 떨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건물이 돈다! 끌려나간다고!

-왜 여기에 교황이 있는거야!

그와 함께 진동하는 거품 속의 세계에서는 쉴 새 없이 아우성쳐대는 사특한 자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라마슈트가 만든 나무의 거짓된 뿌리조차 차마 잡을 수 없는 세찬 진동이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이곳 또한 그러하리라.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려 한다면.”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장엄한 미사의 뒤에서부터 수백 명의 사제가 외우는 성경 소리가 가득했다.

그들의 기도 소리는 감춰져 있던 세계의 문을 붙잡고 거짓된 뿌리로 서 있던 나무의 고개를 떨구게 하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너희를 멸하시리라.”

그득-! 그드드드득!

그렇게 마치 거꾸로 뒤집히는 한 척의 배처럼.

교황이 힘겹게 흘리는 땀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마다 교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새까만 거품 한 덩어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동안 라마슈트가 숨기고 있던 새까만 저택이자 신을 거부하는 세계 그 자체였다.

“저, 저게 뭐야!”

“으아아!”

병사들의 비명을 타고 땅이 내지르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새로이 등장한 새까만 건물 하나가 있었다.

댕- 대앵-

처량한 종소리와 함께 끄집어내진 그 건물은 마치 누군가가 불태우기라도 한 듯 온통 새까만 그을음으로 가득한 교회였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8화 17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1)

음울한 종소리였다.

기이하게 솟아오른 종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댕- 대앵-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고 마는 불타버린 교회.

그곳을 올려다보는 병사들의 가슴속에는 어느새 막연한 불안감이 까만 먹물처럼 번져 넘실거리고 있었다.

“······흐으.”

너무나 신의 품에 가까이 다가가서일까.

여진이 끝난 교회 안에서는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는 콘라드 교황이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고위 사제들 모두가 탈진하여 쓰러진 가운데 오직 그 혼자만이 서서 제 모습을 드러낸 아치우크의 교회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독하구나.”

그렇게 바라본 교회 내부는 그야말로 참혹한 것이었다.

평생을 신의 뜻과 함께한 교황조차도 말문이 막히고 마는 그런 풍경이었으니까.

“······.”

온통 새까맣게 그을린 예배실 앞으로 내가 모시는 그분의 문양이 있었다.

옳게 세워졌지만 잔뜩 그을린 채로.

그러나 정작 콘라드 교황의 눈길이 닿는 곳은 교회의 문양이 있는 쪽이 아니었다.

“아아.”

바로 그 아래서 새하얗게 찍혀 있는 수많은 손자국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지는 그 손자국들은 불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는 듯 교회의 문양 아래서 아우성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천천히 문양을 향해 걸어간 콘라드 교황은 그곳에 찍혀 있는 손자국 하나를 향해 조심스레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

그렇게 자신과 마주한 손자국은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늙은 손으로도 꼭 감싸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여리디여린 수십 개의 손자국.

그 손자국들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교황은 이곳에 있던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애타게 불렀을 그분의 문양을 바라볼 수 있었다.

“······신이시여.”

콘라드의 탄식과 함께 깨어져 있는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햇빛 한 줄기가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햇볕은 신의 문양 앞에 멈췄을 뿐 그 아래 있는 아이들의 흔적은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꾸륵- 꾸르륵-

이 세상 그 누구도 찾아봐 주지 않았던 차갑고도 어두운 공간.

신의 품 안에도, 따뜻한 햇볕에도 들어서지 못한 아이들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까맣게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교, 교황님.”

그렇게 이제야 가엾은 아이들을 찾아낸 교황은 울고 있었다.

어느새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교회의 문양과 함께.

“교황님!”

끄드드득-!

이름 모를 사제의 비명과 함께 교회 곳곳에서 검은 눈물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까만 재와 섞여 바닥을 흐르는 그 눈물들은 오직 홀로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있었던 여인이 흘려낸 눈물이기도 했다.

“당장 교황님을 밖으로······!”

흐를 곳이 없어 고여있던 그녀의 눈물은 썩고 말았다.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았기에 기어이 피어나고 만 그녀의 분노는 어쩌면 정당한 것일지도 모를 일.

콰아아아앙-!

마치 누군가가 찢어발긴 듯, 요란하게 터져 나간 신의 문양에서부터 거대한 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흉측한 균열과 함께 거품처럼 떠오른 그 문의 뒤에서는 지금도 사납게 외치는 사특한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크아아아!

아아아아악!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콘라드 교황의 머리 위에서부터 새까만 폭포가 흐르기 시작했다.

감히 고귀한 교황의 두 손으로도 주워 담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찬 물결들.

이제야 터져 나올 곳을 찾았다는 듯 뛰쳐나온 망자의 군세들이 지쳐버린 사제들을 짓밟고는 물밀 듯이 교회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

크아아아아!

막아! 밀어내!

이런 젠장! 너무 많단 말이다!

창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 병사들이 내지르는 욕지거리. 그리고 무언가를 꿰뚫는 섬뜩한 소리까지.

마치 전쟁터에서나 날 법한 소음이 언덕 아래에 가득했다.

지축을 뒤흔들어대는 그 요란한 소리에 말을 탄 채 언덕 위를 달리고 있던 일행들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저게 도대체 뭐야!”

라두의 경악성과 함께 저 아래 보이는 아치우크의 광경이 있었다.

새까만 종탑 하나만이 하늘을 꿰뚫을 듯 서 있는 폐허 같은 마을.

그러나 지금 일행이 보고 있는 그곳에는 땅 위의 풍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괴한 모습만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뭔 놈의.”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새까만 물결을 온몸으로 틀어막는 북부연합군의 병사들의 모습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되살아난 시체들을 찔러대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시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찌르기 위해 뒤로 빼낸 창을 다시 밀어 넣을 수 없을 정도로 망자들의 군세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전황이 좋지 않다. 밀리고 있어.]

과연 키하노의 말처럼 강철공의 군대는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마치 둑에서 터져 나온 물결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북상하는 용혈공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의 전력을 구성해 온 강철공의 군대였건만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이 모여있던 흑마법사들의 발악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내려가죠!”

꾸역꾸역 터져 나오는 새까만 물결에 북부의 깃발들이 위태로이 휘청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둘러 블라드가 언덕 아래로 뛰쳐 내려가려 했지만,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마커스의 목소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그곳이 아니다!”

저 아래를 향해 내려가지 말라는 듯 다급하게 누아르의 앞을 막아선 마커스.

블라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저기 있는 놈들은 굳이 너의 검이 아니라도 돼. 병사들의 창으로 상대할 수 있단 말이다.”

“······.”

“너의 검이 닿아야 할 곳은 다른 곳이다. 그곳까지 안내해주마.”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한가운데에는 여전히 시체들을 뱉어내는 새까만 교회가 서 있었다.

강철공의 군대는 그곳을 부수기 위해 묵묵히 시체들을 받아치고 있었지만, 이 모든 저항을 정면으로 돌파하다가는 안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들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고 말 것이다.

“알겠어요.”

마커스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블라드는 묵묵히 빼낸 검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싸우고 있는 병사들을 뒤로 한 채 묵묵히 언덕을 달려나가던 일행은 드디어 야트막한 수풀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나 반갑군. 블라드 아우레오.”

교회의 뒤편에 몰래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성기사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던 사내 한 명이 이제야 도착한 블라드를 알아보며 반갑게 미소 지었다.

“귄터 님.”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일세.”

북부 정교회가 자랑하는 제 2기사단장. 귄터.

도시 모시암에서 함께 검은 여인을 대적했던 그가 지금껏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를 기다려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었지. 역시 상대해 본 사람이 있어야 일이 수월하지 않겠나.”

어깨를 으쓱이는 귄터의 뒤에서는 조용히 기도를 읊조리고 있는 구마사제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어둠 속에 뉜 채 바른길을 찾는 그들은 앞에 보이는 입구가 아닌 흑마법사들 몰래 들어설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는 중이었다.

“지쳤나?”

“아니요.”

“혹시 다친 곳은 있나?”

“아닙니다.”

블라드가 도착했음을 알아챈 구마사제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천천히 일렁이기 시작하는 주위의 공기.

마침내 거품 속의 세계를 향한 또 다른 통로를 찾아냈음에 귄터와 함께 하는 성기사들이 천천히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 귄터가 북부정교회의 이름을 빌어 자네에게 정식으로 부탁하겠네.”

찌직- 찌찌직-

마치 종이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귄터의 등 뒤에서부터 새까만 구멍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어두운 우물과도 같은 그 구멍은 성인 남성 하나가 들어서기에는 벅찰 정도로 작아서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부디 이번에도 우리와 함께해주게.”

그리고 지금 귄터는 아무것도 확답할 수 없는 그 어둠을 향해 같이 들어가자 말하고 있었다.

모시암의 어둠을 베어냈었던 교황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를 향해서.

“······.”

귄터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조용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3명의 남자를 보기 위해서였다.

신비를 쫓는 마법사.

신의 말씀을 행하는 이단 심문관.

그리고 맹약에 묶인 용 한 마리까지.

그들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시죠.”

비록 한 마리의 눈빛이 불량했지만 블라드는 자신의 일행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황님께 받은 글귀를 드디어 보답할 수 있겠군요.”

그 말과 함께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는 조심스레 자신의 왼쪽 가슴을 쓸어보았다.

그 글귀를 손끝으로 느낀 블라드는 세상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해 자신만의 세계를 횃불처럼 들어 보였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해주리라 믿고 있었네. 블라드.”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블라드는 쟝을 구하기 위해 꿈을 통해 들어섰던 모시암의 어둠 속에서 차마 꺼내지 못했었던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능력이 모자랐기에 뒤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지만 블라드는 이번에야말로 그 아이들을 위해 자그마한 빛이라도 비춰줄 생각이었다.

※※※※

“쿨럭! 크윽!”

라마슈트가 만든 거품 안의 세계.

그곳에 있는 어두운 복도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내뱉는 토악질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흐······.”

격렬한 기침이었지만 애써 억누르는 모양새가 가련했다.

누가 들을까 조심스레 기침을 내뱉은 요제프는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아 힘없이 웃고 있었다.

“기어이 퍼지고 말았군.”

들어 올린 요제프의 손끝이 점점 새까매지고 있었다.

마치 지금 저 밖에서 날뛰고 있는 시체들의 무리와도 같이.

이제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요제프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발치에 떨어져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드워프들의 신기로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나.”

요제프의 집어든 가방에서부터 은은한 열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숨결로 구워내었다는 드워프들의 다기(茶器)가 담겨 있는 가방.

품고 있는 숨결이 뜨겁고도 순수하기에 세상 모든 것을 정화한다는 드워프들의 신기였지만 그 역시도 독한 죽음의 찻물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던 모양이었다.

“······역시 돌려주진 못하겠군.”

돌려주겠다고 말한 드워프들의 귀한 보물이었으나 이제는 그럴만한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비록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가 되고 말았지만 요제프는 그만큼의 명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어딜 가는 거냐.”

“······!”

어쩌면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던 사특한 무리들을 들어낼 수 있을지 모를 절호의 기회.

다시는 오지 않을 그 기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려던 요제프였지만 갑작스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움찔하고 말았다.

“······언제나 제 등 뒤에서 나타나시는군요. 프라우센 님.”

등을 찌르고 있던 검 끝이 천천히 올라와 어깨까지.

그 어깨에 놓여 있던 검날이 기어코 자신의 목 옆에 들어서자 요제프는 그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밖에 있는 군대. 네가 불러온 것이냐.”

그러나 요제프에게는 목 옆에 기대고 있는 은색의 검보다도 등 뒤에서 들려오는 프라우센의 목소리가 더욱 서늘할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부인하지도 않는군.”

꿀꺽 침을 삼키는 요제프의 목 주위로 서서히 검은 핏줄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핏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던 프라우센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앞에 있는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군.”

“그렇기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앞에 있는 자가 용이 아니었음에도 점점 제 색을 찾기 시작하는 프라우센.

기만도 거짓도 아닌 오직 덤덤한 태도로 진실만을 말하는 요제프의 목소리는 그동안 잔뜩 깨어져 있던 프라우센의 어딘가를 조금씩 채워주고 있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명예를 좇고 싶은 건가?”

“······.”

들려오는 프라우센의 질문에 요제프가 천천히 돌아서기 시작했다.

뉘어진 검날이 차갑게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명예를 좇는 것은 기사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안타깝게도 저는 당신에게 맹세하지 못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지만 요제프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분노까지 담겨 있는 목소리는 조금씩 프라우센의 눈길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면 어째서냐. 가문을 위해서?”

“······마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셔? 무엇을?”

귀족의 푸른 피는 냉철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가문의 영광과 존속을 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프라우센이었지만 앞에 있는 눈그늘 짙은 청년은 그런 것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분들이 남기고만 독(毒)을요."

가주 경쟁에서 졌기에 귀족의 의무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요제프 바예지드.

그렇기에 그가 자유로이 돌아볼 수 있는 세상은 이미 독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폐하처럼 번영과 영화를 위해 몰두한 윗세대를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돌아보지 못한 곳에는 세대를 걸쳐 남겨지고 만 독들이 가득합니다.”

찬란했던 제국이 있다.

누군가가 세웠고, 누군가가 지켰으며 누군가가 번영시킨 찬란한 제국이.

그러나 지금의 제국은 온통 갈라진 채 신음하고 있었으니, 이는 그동안 빛나는 것만을 쫓아 치워야 할 어둠을 등한시하고 만 책임 있는 자들의 잘못일 것이다.

“저 밖을 보십시오. 결국, 여러분이 남기신 이 사악한 독들은 온전히 저희 세대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깊게 뿌리내리고 만 사악한 독들이 여인이 흘린 검은 눈물과 함께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번영만을 쫓는 모두의 외면 속에서 자라난 어둠의 꽃은 어쩌면 아치우크를 지나 전 대륙을 향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독을 마셔야 하는 겁니다. 그런 세대니까요.”

지금도 갈라진 틈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자들이 있다.

북부를 무시하는 중앙의 귀족들 사이에서.

불신자들을 무시하는 신의 종들 사이에서.

터전을 잃고 만 수인족을, 숲 안에 감춰진 엘프들을, 불을 다루는 드워프들을 탐하는 수많은 욕망들 사이에서.

그렇게 서로 다르기에 구분되고만 수많은 세계 사이에서 사특한 자들은 독을 내뿜으며 그 새까만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독들을 남기지 않겠다?”

그렇게 독이 가득 들어찬 어두운 복도 한가운데서 영광의 시대를 연 황제가 초라해지고 만 지금 시대의 청년을 보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본인들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태어나자마자 독을 집어삼켜야만 하는 세대.

빛나는 것을 좇던 자신들과는 달리 지금의 아이들은 떨어뜨리고 만 별들의 부스러기를 주워 담아야만 하는 그런 세대였다.

“그것참 웃기는 이야기로군.”

툭. 툭. 툭.

방금의 이야기가 웃기다는 듯 프라우센의 검이 요제프의 어깨를 두들기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그 두들김이 반복될 때마다 요제프의 머릿속에서는 못다 한 의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래 한번 해봐라.”

“······네?”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다시 돌아선 은색의 검.

비록 빛은 바랬으나 여전히 프라우센과 함께 하는 그 검은 요제프의 어깨를 떠나 자신의 검집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라. 너의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마주 보고 있는 프라우센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다만 어두운 복도에 서 있는 요제프는 자신을 향한 프라우센의 웃음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짓고 있는지 도통 구분할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어째서 놓아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요제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살리기 위해 돌아섰다.

자그마한 가방을 든 채 어두운 복도 속을 내달리면서.

그런 그의 뒷모습을 점점 색을 잃어가는 프라우센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

자신만의 세계를 갖출 어린 가능성을 위해서.

“저 녀석 혼자밖에 없군.”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해야 할 일을.

“······아마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지불하며 받아가는 자.

그가 지금 홀로 어두운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죽음의 기척을 애써 넘긴 채로.

“마땅한 자격을 갖췄으니 보내줄 수밖에.”

기사가 되고 싶어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책의 기사를 꿈꾸며 기사를 동경했던 검은 눈동자의 소년.

그러나 닿을 수 없는 꿈이라 여겼던 기사의 명예는 지금 요제프의 어깨 위에 있었다.

빛바랜 은색의 검이 두드려 준 그의 어깨 위에.

요제프 바예지드. 되살아난 제국의 초대 황제가 임명한 마지막 기사.

그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독을 마시기 위해 새까만 어둠 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9화 6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2)

열 명이 넘는 사내들이 뛰고 있었으나 좁고도 어두운 복도는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가끔 들려오는 갑옷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그런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죠?”

“나도 모르네.”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몰래 자리 잡고 있었던 라마슈트의 세계.

구마사제들이 열어준 통로를 타고 들어온 일행은 지금 어딘지도 모를 복도를 헤매는 중이었다.

“우리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도무지 시작점을 가늠할 수가 없어. 일단 어디라도 기준을 잡을만한 곳이 필요할 것 같네.”

가장 앞장서 달리는 블라드의 등 뒤로 귄터가 지도 한 장을 펼친 채 고민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동심원을 그려 넣은 듯한 자그마한 지도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은 하나의 원이었다 할 지라도 지도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통로들의 표시는 지금 이곳이 얼마나 복잡한 장소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이곳의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지.”

“중심에 뭐가 있는데요?”

블라드의 질문에 앞을 바라보던 귄터가 말을 꺼내기가 껄끄럽다는 듯 조심스레 마른 입술을 긁적였다.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더군.”

이 세상 그 누구도 몰라보았던 이곳은 세계의 틈 사이에 숨겨두었던 라마슈트의 세계.

그러나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잠시나마 그녀의 세계를 잠시 엿볼 수 있었던 블라드는 지금 귄터가 말하는 나무가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는 아마 익숙한 녀석이지 아닐까 싶은데.”

“······.”

뿌리는 하늘로, 가지는 땅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거꾸로 표현한

나무가 블라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

콰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장작처럼 호쾌하게 쪼개진 시체 한 구가 만들어낸 핏물이었다.

“이런 니미! 암만 죽여도 끝이 없어!”

옹골찬 몸집의 사내가 휘두르는 도끼 끝으로 검붉은 핏방울들이 안개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애써 만들어낸 공백은 또 다른 물결에 밀려 그저 숨 한 번 내쉴 만큼의 여유밖에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 그동안 많이도 모아놨구나!”

사납게 소리를 질러대는 사내의 등 뒤로는 도끼를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하르키타의 카로이.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하나.

강철공의 도시 바스토폴에서 블라드와 함께 미르셰아를 상대했었던 그는 지금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망자들의 군대를 향해 자신의 거친 분노를 쉼 없이 표현하는 중이었다.

“전선이 조금씩 밀리고 있습니다. 공작님.”

“······.”

죽은 자를 죽이고 죽은 자가 죽이고 마는 악몽과도 같은 전장.

그 전장 위를 나부끼는 북부의 일곱 깃발 아래서 강철공 티무르가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미 쏟아져 나온 시체들만 수천입니다.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용혈공의 군대는?”

“······약 이틀하고도 반나절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말하는 볼코프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뭉개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북상하는 용혈공의 군대는 자신들의 사정을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진군 속도를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못하면 끼어버릴 수도 있겠군.”

지금 북부연합군의 앞에는 죽은 자들의 군대가 있었고 뒤에서는 바짝 북상하는 용혈공의 군대가 있었다.

그야말로 불길 속에 뛰어든 나방과도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지만 강철공 티무르에게는 이렇게 움직여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기 전에 이 일을 마쳐야 하겠어.”

쿠오오오오-!

강철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까만 교회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커다란 포효가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거대한 외침이었다.

-저, 저게 뭐야!

-몬스터다! 몬스터!

성벽을 부수는 공성 병기에 비견될 정도로 크고도 육중한 몸체.

치켜세워져 있는 송곳니만큼이나 꿈틀거리는 근육이 흉악해 보이는 녀석은 감히 마주하기 힘든 시뻘건 눈을 부릅뜬 채 앞을 가로막은 병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우거······. 오우거다!

-그런데 머리가 왜 두 개야!

자연재해나 다름없다던 용만큼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라는 오우거.

그러나 지금 녀석의 어깨 위에는 누군가에 의해 거칠게 꿰매어진 또 하나의 머리가 달려 있었다.

크아아아아!

되살아 난 자들 뿐만이 아니었다.

본래 흑마법사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존재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머리 하나 더 달린 오우거를 만들어낸 것쯤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카로이는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

그 흉측한 눈빛과 마주친 하르키타의 기사는 남들과는 다르게 오히려 자신의 도끼를 강하게 움켜쥘 뿐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와 봐라!”

세찬 북풍의 설한을 견디며 살아남은 북부의 사내들은 좀처럼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설사 머리가 두 개 달린 오우거라 할지라도 말이다.

“으아아아!”

죽음과도 같은 포식자를 향해 시체들의 물결을 거슬러 가는 기사.

그 용맹한 모습에 하르키타의 다른 기사들마저도 사기충천 된 모습으로 외마디 고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하늘을 메울 듯 날아오는 거대한 몽둥이를 그 옹골찬 몸으로 구른 카로이는 재빨리 녀석의 허벅지를 베어내었다.

크아아아!

“크힉!”

그로 인해 울려 퍼지는 포효의 압박이 심장을 압박했으나 이미 불타올라버린 카로이에게 있어서는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키 한번 더럽게 크네!”

한 번의 도끼질로 상처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 낸 흉터를 잡고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오우거를 타고 올라가는 카로이.

거대한 거인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그의 용맹은 방금까지만 해도 지쳐있던 병사들의 마음속에 다시 한번 불을 댕기는 것이었다.

“뭘 봐. 자식아.”

흙먼지로 엉망진창이 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기어이 오우거를 타고 오른 카로이는 용케도 저 높은 곳에 있는 머리 하나에 닿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머리통이 카로이를 향해 팔을 뻗어대고 있었지만, 목표를 포착한 나무꾼의 도끼질은 이미 힘껏 휘둘러진 뒤였다.

“죽어! 새끼야!”

힘껏 들어 올린 카로이의 도끼날이 햇빛에 반짝여대었다.

이윽고 느껴질 손맛에 카로이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번져갔지만 크게 휘둘러진 그의 도끼는 그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으잉?”

이미 떨어져 나간 머리 하나가 자신이 타고 왔던 저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단 한 번의 예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데굴데굴.

“수고하셨소. 카로이 경.”

“응?”

멍청한 표정으로 바라본 그곳에는 머리를 바짝 넘긴 훤칠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반대쪽 어깨에 서 있는 그의 이름은 로므니에의 기예르모.

북부를 대표하는 또 다른 기사 하나가 카로이를 보며 히죽 웃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시선을 끌어줄 줄 알았지.”

“······기예르모! 이 개새끼가!”

카로이의 욕설이 크게 울려 퍼졌지만, 기예르모의 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제는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뿐만 아니라 오우거 슬레이어까지 될 자신이었기에.

“머리 하나 정도는 선물로 드리도록 하지.”

그가 휘두르는 검 끝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오우거의 머리를 따라 세차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

-내, 내 평생의 역작이!

어두운 방 안, 몇몇 사내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부터 비통한 절규 하나가 퍼지고 있었다.

-무려 오우거씩이나 되는 건데! 저 미친놈들이!

그들이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 수정구에는 지금 천천히 쓰러져 가는 오우거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잘못 만들었나? 생각보다 너무 힘을 못 쓰는데.

-아니, 그렇진 않았어. 아마도 뒤에서 외쳐대는 사제들의 기도 때문일걸세.

-게다가 상대가 기예르모와 카로이야. 첫 출전치고는 대진운이 너무 나빴어.

누구는 울고 누구는 분석하고.

밖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에 열띤 토론을 벌이는 그들은 모두 새로운 생명 창조에 자신들의 죽음을 바친 흑마법사들이었다.

신비를 다루는 방법에 따라 이곳저곳에 모여 있던 그들은 지금 누군가의 피조물이 무너진 모습을 보며 날카롭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쿠웅! 쿵!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끝까지 수정구에 맺혀 있지 못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쾅! 쾅! 쾅!

무언가를 부셔 대는 요란한 소음.

그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하는 새까만 벽면까지.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그들이 앉아 있던 책상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몇몇 흑마법사들이 서둘러 수인을 짚어대기 시작했다.

콰가강!

-이건 도대체 뭐야!

-벽이 터졌다! 무너졌어!

그러나 짚고 있던 그 수인이 마무리가 되기도 전에 귀를 찢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이들을 덮쳐왔다.

마치 이들이 주문을 외우고 있다는 것을 눈치라도 챈 듯한 그런 폭발이었다.

“······맞게 왔나 보네.”

벽을 부수며 만들어진 자욱한 돌먼지 사이로 기묘한 침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시야를 가리는 그 돌 먼지보다도 그 속에서 빛나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에 더욱 시선이 쏠리는 중이었다.

-쇼, 쇼아라의 블라드!

라마슈트가 만든 세계는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복잡하고 불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만든 길을 거부하기로 한 블라드의 등 뒤에는 지금 구멍이 뚫려 있는 벽들이 가득했다.

“길이 너무 어지럽더라고.”

목표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은 직선.

다른 이의 지갑을 노리며 뒷골목의 지붕을 타고 다녔던 전직 소매치기는 이미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좀 알려줘 봐. 한 명은 살려드릴 테니까.”

너희들이 강요한 규칙 따위는 나에게 있어 지킬 의무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이 뚫어낸 블라드의 길 뒤에는 사특한 나무를 향한 직선의 길이 조금씩 이어지는 중이었다.

※※※※

“······!”

복도를 내달리던 요제프는 저 앞에 보이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재빨리 근처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거의 다 왔는데.’

조용히 숨을 헐떡이던 요제프는 저 앞에 보이는 커다란 정원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동심원의 중심부이자 유일하게 거품을 올려다볼 수 있는 라마슈트의 정원.

그 흉측한 정원에는 지금 기괴한 모습으로 뿌리내린 역천의 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아.’

저것만 해치우면 이곳을 크게 흔들 수 있을 터.

그러나 그곳까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기사들이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검을 다루는 기사도, 그렇다고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도 아닌 요제프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목표를 보며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 비루한 몸이 끝까지······.’

바로 앞에 보이는 목표가 있었다.

그야말로 힘껏 뛰어간다면 숨 몇 번 쉴 정도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요제프는 자신의 허약한 육체로는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 잡힐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하.”

이렇듯 요제프에게 있어 원하는 목표라는 것은 아무리 가까워 보일지라도 언제나 먼 것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언제나 병마와 싸워야 했고 기사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결국은 소드마스터의 검에 맹세할 수 없었던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은 할 만하겠어.”

그러나 지금의 요제프는 저 앞에 보이는 목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왜냐하면 요제프는 그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던 한계 하나를 넘어섰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한 번도 크게 휘둘러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가방에서 자그마한 찻잔을 꺼내든 요제프는 그것에서부터 전해지는 자그마한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후우.”

저 앞에 보이는 역천의 나무를 향해서.

요제프의 들썩이는 어깨 위로는 어느새 새까맣게 퍼진 죽음의 표식이 가득했다.

“미안합니다.”

콰직-!

찻잔을 쥔 요제프의 손끝에서부터 평소라면 내기도 힘들 강한 악력이 들어갔다.

엔간한 성인 남성을 크게 웃도는 그 악력은 비루했던 육체의 한계를 넘어 드워프들이 만든 찻잔을 조금씩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대신 가장 화려하게 태우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는 손가락을 지나 어깨까지 파고들고만 시커먼 죽음의 형상.

그렇기에 육체의 한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요제프의 어깨가 크게 뒤로 젖혀지기 시작했다.

“흐읍!”

죽음에 물들어버린 남자의 손아귀에서 찻잔이 타오르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길로 다듬어진 드워프들의 신기.

모든 사특한 것들을 불태우고 마는 그 찻잔이 어두워져 버린 요제프의 손안에서부터 정화의 불꽃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크으윽!”

저 앞에 보이는 세상을 향해 아주 크게.

이제야 비루한 육체를 넘어선 나의 손끝으로.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힘껏 휘두른 요제프의 돌팔매가 역천의 나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쨍그랑-!

아주 조금이었지만,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주 연약하고 작은 소리였지만.

그렇지만 분명히 힘껏 던져낸 요제프의 세계는 어느새 타오르고 있었다.

거품처럼 떠오른 라마슈트의 세계에 자그마한 구멍을 내면서.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0화 8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 라마슈트 (1)

무언가가 타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새빨간 불길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 불길한 기척들이 그녀의 심장을 불안하게 감싸 쥐고 있었다.

“안 돼, 안돼······.”

저 멀리 보이는 까만 연기를 향해 달려가는 한 명의 수녀.

차오르는 불안감에 목메 하는 그녀의 가슴에는 자그마한 로자리오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게 다듬어진 그것은 어린아이가 만들기라도 한 듯 작고도 앙증맞은 것이었다.

이제 그녀를 위해 꼬물거리던 자그마한 손은 까맣게 불타 사그라들고 말겠지만.

“아, 아아······.”

댕- 대앵-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곳곳에 쌓여있는 시체들과 함께.

그리고 저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 아래에서는 그녀를 찾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안 돼!”

황급히 달려나가는 그녀를 향해 불길에 밀려나고만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지막 숨이 섞여 있던 그 바람은 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저 높이 휘날리고 마는 그녀의 머릿수건.

시뻘겋게 달아오른 문을 밀어젖히는 그녀의 불타버린 손가락.

그리고 잿더미에 섞여 온통 새까맣게 물들어 버린 그녀의 눈물까지.

“······신이시여. 제발!”

그러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문을 연 그녀가 본 그곳은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신의 문양 아래서 간절히 손을 뻗치던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이제는 검게 물들어버린 그녀의 눈물에 담긴 것은 신께서도 외면하고 만 아이들의 마지막 발버둥이었을 뿐이었다.

※※※※

이상하게 생긴 표본들이 잔뜩 늘어서 있는 흑마법사들의 연구실.

평소라면 음울한 목소리들만이 가득할 그곳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검과 피, 그리고 사특한 자들의 비명만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문을 외울 시간을 주지 마라!]

“······!”

머릿속을 울리는 날카로운 경고와 함께 블라드의 검이 흑마법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크헉!”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아예 입에서부터 박아 버린 블라드의 검이 사특한 자의 뒤통수를 꿰뚫고 나와 사납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수인을 짚지 못하게 해라! 마법사를 상대할 때는 시간과 거리가 곧 생명이다!]

“어딜 감히!”

“크아아악!”

바로 앞에 보이는 사특한 손짓에 블라드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은 오직 기민한 움직임뿐.

일격필살의 흐름 속에 갈라진 누군가의 손목이 요란하게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 놈이면 된다!”

시간도 거리도 주지 않은 채 흑마법사들을 베어가는 기사들.

신의 뜻과 자신만의 세계를 앞세운 그들이 날뛸 때마다 사특한 자의 그림자들이 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길을 알려줄 단 한 놈!”

그리고 그 번뜩이는 검날 위에서 포효하는 한 마리의 용까지.

금발과 푸른 눈을 휘날리는 블라드의 모습은 죽음을 피해낸 흑마법사들조차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정도로 흉폭한 것이었다.

“회개해라! 이 사특한 놈들아!”

“네놈들에게 죽은 동료의 복수다!”

기사들이 휘둘러내는 숭고함 속에 진득한 광기 한 줄기가 감춰져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옳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쌓아온 독들을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오늘뿐일 테니까.

그 지난한 세월을 기다려 온 성기사들의 검 끝에 자그마한 사심이 서려 있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살려, 살려······.”

이미 죽어버린 자가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만큼 웃긴 일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제 마지막 남은 흑마법사의 입에서는 삶을 구걸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 가느다란 목소리 앞에서 블라드의 검 끝이 부들거리는 중이었다.

“어디 있어.”

비록 조금은 늦어 그의 몸을 관통하고 말았지만.

방금 휘두른 검이 폐를 관통하기라도 한 듯 그가 내지르는 단말마에는 온통 허튼 공기만이 가득했다.

“끄억······. 끄으으.”

“그 빌어먹을 나무 어디 있어!”

쾅!

벽을 울리는 소리가 크고도 흉악했다.

블라드가 잡아챈 흑마법사의 뒤통수가 벽에 부딪히며 만들어 낸 소리였다.

“중앙, 중앙 정원에······.”

방금의 충격으로 잔뜩 깨어져 버린 뒤통수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끈적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흑마법사는 자신의 목을 적시는 그 불쾌한 감촉보다도 바로 앞에 있는 블라드의 눈빛이 더욱 두렵게만 느껴졌다.

“저, 저쪽으로.”

그렇게 블라드의 기세에 눌려버린 흑마법사의 손끝이 어딘가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온통 이상하게 박제된 시체들 뒤로, 마치 사람처럼 보이는 표본들 옆으로.

그곳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문 하나가 신기루처럼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쿠아아아아아-!

“크으으윽!”

“이게 무슨!”

순간, 문을 찾아낸 일행들에게로 들려오는 괴이한 비명 소리가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소리에 블라드의 검에 새겨져 있던 세계수의 각인이 조용히 반짝여대었다.

“······뭔 놈의 존재감이!”

우르르릉-

그 거대한 소리에 성기사들이 귀를 막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것은 소리였지만 뒤따라오는 것은 진동.

무언가가 질러낸 거대한 비명은 라마슈트의 세계를 마구 뒤흔들며 자신의 고통을 사방으로 전파하는 중이었다.

“블라드!”

“······.”

그리고 여기 그 소리를 들어본 사내들이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귄터와 블라드.

그들은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안개 가득한 도시 모시암에서 들려온 소리와 같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앞장서겠습니다!”

“다들 준비해! 지금 당장 움직이겠다! 주교님과 마법사를 호위해!”

콰앙!

은밀함 따위는 사치라는 듯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찬 블라드의 앞으로 또 다른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복도의 어둠은 새카만 바다를 연상케 했으나 앞을 향해 나아가는 블라드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크으윽······.”

태세를 정비한 성기사들이 뛰쳐나가자 남아있는 것은 오직 벽에 매달린 흑마법사뿐.

그는 신의 뜻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음에 안도했지만, 이곳에 있었던 것은 오직 그분의 뜻만은 아니었다.

푸욱!

“우리한테도 남은 게 있잖아.”

섬찟한 목소리와 함께 찾아든 날카로운 감각.

부릅뜬 흑마법사의 눈으로 새빨간 머리카락이 비치고 있었다.

“이건 아버지한테 피 빠는 방법을 알려준 대가다. 이 개자식아.”

“끄윽, 끄으윽.”

히죽 웃어대는 라두의 얼굴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던 흑마법사의 눈에 차마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샘솟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잠시, 라두의 검에 맺혀 있던 피에르의 축복이 어느새 사특한 자의 심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난 살려준다고 말한 적 없거든.”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흑마법사를 보며 침을 뱉은 라두가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줄 죄인 용마저 떠난 지금, 온통 엉망이 된 방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제야 맞닥뜨린 자신의 업보에 괴로워하는 흑마법사뿐이었다.

※※※※

-침입자다! 여기 침입자가 있다!

-도대체 어디서······! 크윽!

-막아라! 앞으로 못 가게 막아!

또다시 나선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고 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웅- 웅웅-

그러나 앞장선 블라드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니 이는 잡은 손에서부터 전해지는 세계수의 이끔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켜!”

-크아악!

세계의 중심으로 다다를수록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사특한 무리들.

북부 연합군을 막기 위해 쏟아낸 시체들이 이미 한가득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남아있었다는 듯 일행의 앞을 막아대는 녀석들의 기세가 사나웠다.

“이 길이 맞긴 맞나보네요!”

“입만 놀리지 말고 뭐라도 좀 해봐!”

앞으로 나아갈수록 복도가 넓어지고 있었다.

이는 저 앞에 커다란 공간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달라붙을 적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검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기사들의 몸짓.

그 몸짓들이 점점 위태로워지자 니벨룬은 이제야 자신이 나설 차례라는 듯 배낭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게 뭔데!”

“민들레 홀씨요!”

그러나 블라드의 기대와는 달리 니벨룬이 꺼내 든 것은 대단해 보이는 신비가 아니었다.

그저 손가락 한 마디가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민들레 홀씨였을 뿐.

머리에 붙어 있는 앙증맞은 솜털들을 보며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걸로 지금 뭐 어쩌자고!”

“잠깐 길만 열어주세요!”

그러나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홀씨였을지라도 그 안에 품고 있던 신비는 그동안 니벨룬이 특히나 아끼고 아꼈던 것이었다.

“······다들 꽉 잡아요!”

그 말과 함께 숨을 잔뜩 들이쉰 니벨룬.

보이는 모양새는 분명 우스웠지만, 잔뜩 부풀어 오른 볼 위로 비치는 니벨룬의 두 눈에는 결연한 진심만이 가득했다.

“너희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후우욱-

블라드와 기사들이 간신히 열어낸 틈 속에서 니벨룬이 주문과 함께 큰 숨을 내뱉었다.

그와 함께 어지러이 흩어지고 마는 작은 민들레 홀씨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새카만 바다로 퍼져나가는 자그마한 홀씨들은 분명 아무 의미 없는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

그것에 담겨 있는 신비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 가장 높은 산에서 가져온 부르군드 족의 신비.

파란 하늘 아래서 세상 모든 바람을 품고 있던 홀씨들이 지금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휘아아아앙-!

“으악! 으아악!”

“이건 또 뭐야!”

기사들이 내뱉은 비명과 함께 공기마저 무거운 어두운 복도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찢어발길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크아아아!

-키익! 키이익!

막혀 있는 복도에서는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풍량이었다.

그러나 홀씨들이 품고 있던 바람은 그것들이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으니, 니벨룬이 불러낸 바람은 어느새 강렬한 돌풍이 되어 앞에 있는 사특한 무리들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지, 지금이에요!”

“앞이 비었다! 달려!”

그렇게 아주 잠시 만들어진 공백을 타고 블라드가 달리기 시작했다.

마구 휘날리는 바람 덕에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지만, 어차피 이곳은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으아아아!”

웅- 웅웅-

앞으로 나아갈수록 블라드의 검이 울고 있었다.

별에게서 태어났으며 용의 조각을 품었고 그리고 이제는 세계수의 각인과 함께 하는 블라드의 검이.

그 검에 새겨진 각인이 지금 또 다른 나무로 향하는 길을 블라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빛이다!”

“조금만 더! 바로 앞에 출구가 보인다!”

그렇게 쓸려나간 시체들을 짓밟으며 앞으로 뛰쳐나가는 일행들.

그렇게 이들이 나아간 곳에는 여태껏 보았던 광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정원이었네.”

꽉 막혀 있던 통로에서 나오자 일행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하늘이었다.

마치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보랏빛 하늘.

그리고 지금 그 하늘 아래에는 마치 섬처럼 둥실 떠 있는 거대한 정원이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가야 하네!”

여태까지의 끔찍한 광경과는 전혀 다른 그림과도 같은 풍경.

그러나 일행은 앞에 보이는 그 광경에 넋 놓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앞에 보이는 다리로! 어서!”

귄터의 외침과 함께 다시금 기사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섬을 향해서.

라마슈트의 세계에서도 가장 중심인 그곳은 오직 여러 개의 하늘다리로만 드나들 수 있는 비밀스럽고도 귀중한 곳이었다.

-여기까지다. 인간들아!

-더이상 라마슈트 님의 세계를 어지럽히지 마라!

그러나 그 다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목 없는 기사들이 있었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하늘 다리에는 이미 온통 목 없는 기사들이 새까맣게 늘어서 있던 중이었다.

“이런 젠장!”

“다음 다리로! 어서!”

앞을 가로막을 푸른 귀화들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귄터가 서둘러 일행의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목 없는 기사들은 피했을지라도 여전히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체들은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민들레 또 없냐!”

“없어요! 그거 완전 우리 부족의 보물 같은 거였거든요!”

원의 둘레를 따라 헐떡이며 달려나가는 일행의 앞으로 또 다른 하늘다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곳은 아까 보았던 다리보다도 적은 숫자의 기사들이 대기하는 중이었지만 지금 문제는 눈앞에 보이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왜 이렇게 많아!”

“오오. 신이시여!”

마치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오는 망자들의 군세.

목 없는 자들을 뚫고 저 다리로 올라선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힐 것만 같은 사나운 파도들이었다.

“블라드! 앞장서게!”

그 광경을 확인한 귄터가 결연한 눈빛을 내비쳤다.

그 눈빛을 확인한 북부정교회의 성기사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하네!”

“······귄터 님!”

그의 결심을 눈치챈 블라드가 놀란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신의 뜻을 따르는 검들은 이미 자신들의 결심을 굳힌 뒤였다.

“부디 그때처럼 저 나무를 베어주게.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나지막한 그 소리와 함께 귄터가 뒤돌아섰다.

다리에 올라선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크아아아!

아아아악!

스스로 검은 물결을 막는 댐이 되길 자처한 기사들.

그들이 읊고 있는 신의 말씀에서부터 오직 성기사들만이 행할 수 있는 방호태세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빌어먹을!”

블라드의 등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시체들의 함성이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와 일행은 그들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새하얀 다리를 달려나가야만 했다.

“으아아아!”

앞을 가로막는 목 없는 기사들을 부숴가면서.

또다시 나의 능력이 닿지 못해 놓치고 만 세계들을 뒤로하며 황금빛 용 한 마리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죽일 테다! 너희들 전부 다!”

차오르는 분노로 울부짖는 용과 늙은 이단 심문관, 그리고 배낭을 들고 있는 마법사.

새하얀 다리를 밟고 있는 그들이 지금 저 앞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

“흐으······흐으으.”

뿌리는 하늘로, 가지는 땅으로.

온통 비틀려버린 나무 한 그루가 홀로 떠 있는 섬 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흐으으아아······.”

그리고 지금 그 새까만 나무 앞에서는 발을 땅에 디딘 여인 한 명이 춤을 추는 중이었다.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새까만 눈물을 흘리면서.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마치 춤을 추듯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고 있는 라마슈트.

그러나 지금 그녀는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찢는 듯한 고통에 그저 미친 듯이 온몸을 뒤틀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또 내 아이들이······.”

쉼 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앞으로 새까만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을 정화하는 드워프들의 신기.

그것들의 파편이 사특한 나무를 정화하며 만들어내는 불꽃을 보며 라마슈트는 또다시 미쳐가고 있었다.

“불타고 있잖아-!”

우르르르릉-

그녀의 절규와 함께 저 위에 있는 보랏빛 하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울부짖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길은 그저 차근차근 역천의 나무를 불사를 뿐이었다.

“꺄아아아악!”

살아있을 때도 구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구하지 못한 나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며 울부짖는 여인의 머리 위로 뿌리 한 줄기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교회 안에서 신의 문양을 향해 울부짖었던 새까만 아이들의 손자국과 같은 모습처럼.

“······.”

그리고 그 뿌리 끝에 힘없이 매달려 있는 남자가 있었다.

심장을 꿰뚫린 채 부들거리는 그의 머리 색은 그동안 블라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바예지드의 검은색이었다.

서로가 죽이고 죽이겠다 말하는 보랏빛 하늘 아래서 오직 요제프의 검은 머리카락만이 조용히 흩날릴 뿐이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1화 6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 라마슈트 (2)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

내려다본 나의 손바닥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곳.

그러나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이 공간에서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하나 있었다.

“······노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서 있던 요제프는 저 앞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어디인지, 어째서 여기에 오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저 앞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만큼은 분명 선명했으니까.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것만 같은 노랫소리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그 소리에 홀린 듯 걸음을 옮기던 요제프는 곧 저 앞에서 보이는 자그마한 모닥불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르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부르던 모두가 넘어질 때까지.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저 앞에서 흥겨운 노랫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아이들이 모닥불 옆에서 뛰놀고 있었다.

누가 곁에 온 지도 모른 채 흥겹게 뛰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분명 평화로워 보였으나 지금 상황에서만큼은 분명 위화감이 느껴지는 모습이기도 했다.

“······쉬질 않는군.”

그렇기에 요제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먼 곳에서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 도저히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그러나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그 시간 속에서도 조금도 멈추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은 분명 기이한 것이었다.

“······.”

그저 끝없이 끝없이 돌고만 있을 뿐.

나아갈 곳을 찾지 못해 멈춰 있을 뿐인 어린아이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제자리에 머문 채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계속 저러면 안 될 텐데.”

누군가는 멈춰줘야 할 것 같은 그 광경을 향해 요제프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여태껏 아무도 찾지 않았던 아이들을 향해서.

그렇게 요제프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모닥불을 뛰놀던 아이들의 고개가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온다.

-누구지?

비록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온통 공허한 구멍만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 상처와도 같은 시선은 부디 너희들만큼은 세상 어두운 곳을 보지 말라며 검은 여인이 막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저게 뭐야?

-반짝이는데?

그러나 여인이 틀어막은 그 공허한 시선을 통해서도 보이는 빛이 있었다.

온통 빛바랜 것이었지만 이 어두운 곳에만큼은 그 어떠한 것보다 빛나는 것.

오직 라마슈트가 피워놓은 모닥불만 존재하던 이곳에서 새로이 반짝이는 그 빛은 아이들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은색이네. 이쁘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죽음이라는 정당한 대가를 치른 채로.

어둠을 헤치며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는 요제프의 어깨 위에는 누군가가 두드려준 빛바랜 은색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

콰직-!

일렁이는 보랏빛 하늘 아래서 블라드가 달리고 있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목 없는 자들을 사정없이 부수면서.

그렇게 삶과 죽음을 잇는 새하얀 다리 위에서 또 한 명의 거짓된 망자가 쓰러지고 있었다.

-크으으윽!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블라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푸른 귀화가 흔들려 대었으나 삶이란 본래 전진하는 것.

이미 정당한 대가를 치른 블라드는 멈춰 버린 죽음을 뒤로 한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블라드 님! 저 앞에!”

뒤에 있는 기사들의 희생을 밟고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일행들.

그렇게 다리를 건널 대가를 치러낸 일행의 앞으로 어느새 목표했던 나무가 보이고 있었다.

“모시암 때보다도 더 큽니다!”

하늘을 가리키는 니벨룬의 손끝 너머로 높게 솟아 있는 역천의 나무가 있었다.

마치 여기로 오지 말라는 듯 흉측한 뿌리를 휘둘러대는 녀석은 과연 니벨룬의 말처럼 모시암의 나무보다도 크고 높게 자라있었다.

“······!”

그러나 블라드의 눈에는 저 앞에 보이는 나무의 웅장함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두근-!

그저 높이 솟은 뿌리에 꿰뚫려 있는 누군가만이 보이고 있었을 뿐.

멀리 있었음에도 알아볼 수 있는 검은 머리는 분명 여태껏 블라드가 찾고 있던 색이기도 했다.

“으······.”

‘이제 왔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언제나 나를 반겨주던 검은 눈동자의 청년이 있었다.

화사한 햇빛을 등진 채 깍지낀 두 손으로는 항상 턱을 받치고 있던 그런 모습으로.

‘와서 차나 한잔 들지. 내가 이제 위스키는 못 마시거든.’

잔뜩 내려앉은 눈그늘에는 짙은 피로가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반겨주었던 이 세상 몇 안 되는 사람.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의 모습은 블라드에게 있어 몇 안 되는 위안 중 하나였었다.

“으아아아아!”

이제 다시 그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하늘 높이 솟은 뿌리에 꿰뚫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

잔뜩 초라해져 버린 요제프의 모습에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 시뻘건 핏줄들이 올라서기 시작했다.

“라마슈트-!”

지금의 이 그림을 그려놓은 검은 여인을 향해서.

검은 눈물을 흘리던 누군가의 어머니.

숨이 막혀 죽어가던 어린아이들.

내가 직접 눈을 감겨 주었던 불행한 창녀와 길을 알려주었던 성기사.

그리고 이제는 나를 거둬주었던 커다란 울타리까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우르르르릉-!

그 모두를 지키지 못한 용 한 마리가 사납게 울부짖으며 죽음을 향해 뛰쳐들어갔다.

-크으윽!

-막, 막아라!

다리의 끝자락에서부터 가속하기 시작하는 황금색의 지평선.

누군가의 삶을 밟아 새하얀 경계를 넘어 이제는 죽음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오늘의 태양이 기어이 라마슈트의 세계에서부터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블라드! 쇼아라의 블라드!”

지금 내가 달려가는 그녀의 세계를 지우기 위해서.

그 빛을 알아본 검은 눈물의 여인이 나무 아래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야!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야!”

찬란히 빛나는 것이었으나 결국 이 세상 모두는 비치지 못할 빛.

그런 빛들이 만든 그림자에 가려져 허덕이던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던진 채 새까만 손가락을 펼치고 있었다.

콰아아앙-!

죽고, 죽이고. 그렇기에 도저히 한 곳에는 서 있을 수 없는 두 개의 세계.

떠오르려 하는 태양을 짓누르는 새카만 밤하늘에는 빛나는 별 하나, 달 하나 없이 그저 슬픈 비구름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내 아이들 좀 그만 내버려 둬!”

“그놈의 아이들! 아이들! 이젠 지겨워!”

라마슈트를 향해 검을 치켜드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를 향해 다리에서 되돌아온 목 없는 기사들이 뛰어들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런 데까지 끌려와서!”

그러나 목줄 죄인 용이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는 어느새 시뻘건 불길들이 치솟고 있었다.

라두의 세계는 반쪽짜리 열등감이 가득한 세계.

완벽할 수 없기에 끝없이 타오르고 마는 그의 세계는 지금 이단 심문관이 내려치는 법봉과 함께 커다란 불의 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네가 말하는 그 아이들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몇인 줄 알아?”

그렇게 만들어진 삶과 죽음의 경계 사이에서 블라드는 그녀의 멱살을 움켜잡은 채 울고 있었다.

그리고 울고 있는 블라드를 올려다보는 라마슈트의 눈동자에도 짙은 물기가 가득했다.

“너희가 죽였잖아!”

“네가 죽였잖아 요제프를!”

콰앙! 쾅! 쾅!

그러나 같은 슬픔으로 울고 있었을지라도 마주한 두 개의 세계는 도저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잃었으니 너도 잃어야 하고 나도 잃었기에 너 또한 잃어야 하기에.

“살려내!”

그렇기에 맞부딪히고만 블라드와 라마슈트의 세계.

들고 있는 검조차 사치라는 듯 라마슈트를 내려치는 블라드의 주먹에는 그녀에게서 터져 나온 새까만 핏물이 가득했다.

“살려내라고!”

그러나 아무리 내려친다 해도 지금 마주한 둘은 서로가 잃어버린 것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그저 텅 비어버린 가슴 속에 서로가 주고받는 분노만 가득해질 뿐.

“······나는 너희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으아아아아!”

부딪힐수록 망가져만 가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새까만 나무의 가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신호를 보며 라마슈트는 이제야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 죽여버릴 거야.”

[······!]

분노로 가득 찬 블라드는 볼 수 없었던 그녀의 미소.

그러나 키하노 만큼은 눈치를 챈 그녀의 수상한 기척은 어느새 어느새 불길하게 꼬고 있는 손가락을 따라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을 주지 말라고 했잖느냐!]

쿠르르릉-!

이 시대 흑마법사들의 거두.

검은 눈물을 흘리는 라마슈트가 몰래 짚어낸 수인에서부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다리가!”

갑작스러운 진동에 당황한 라두의 뒤에서부터 여태껏 건너왔던 다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원 위로 수없이 걸쳐져 있던 새하얀 다리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던 그 다리들이 무너지자 블라드가 서 있는 이곳은 오로지 죽음만이 가득한 세계가 되었다.

“이익!”

뒤늦게 사태를 알아챈 블라드가 라마슈트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내리꽂았으나 이미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그렇게.

“내가 정말 몰랐을 것 같아?”

어딘지 지쳐 보였으나 라마슈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덫에 빠져들고만 용이 지금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덫의 미끼는 바로 요제프 바예지드.

“요제프 바예지드가 당신들이 보낸 첩자라는 사실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한 미소로 서 있는 라마슈트를 보며 블라드는 섬찟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향해 울부짖던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환하게 웃고 있었으니까.

그 급격한 심정 변화가 그저 미쳤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깊게 새겨져 있던 용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비록 내 귀한 아이들을 태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다리들을 떼어낸 채 둥실 떠오르고 있는 섬 아래에서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새까만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이는 그 호수는 여태껏 라마슈트가 흘려낸 검은 눈물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래도 세 개나 모였으니 이제 됐어.”

“······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용을 보며 잠시 키득거린 라마슈트는 새까만 손가락을 들어 잔뜩 일렁이고 있는 보랏빛 하늘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위를 향해서 하나.

저 뒤를 향해 둘.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블라드를 향해 셋.

“비록 그분이 약속한 조각은 둘 뿐이긴 했지만.”

무엇이라도 될 수 있고, 바라는 대로 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각.

지금 검은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이곳에 모여 있는 세 개의 조각이 보이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내 아이들이 다시 숨 쉴 수 있겠네.”

검은 눈물을 흘리는 라마슈트의 세계는 괴로움 한 점 없는 죽음만의 세계.

하늘높이 그 세계를 띄워올린 라마슈트는 어느새 차분해진 광기 사이로 자신의 덫에 걸린 용들을 바라보고 보고 있었다.

※※※※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아치우크.

그곳을 향해 다급히 들이닥치는 군세가 있었다.

“바로 앞에 북부연합군의 깃발!”

“지금 한참 교전 중인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의 깃발보다도 앞서 있는 황금색 용의 깃발.

이제는 두 날개를 활짝 핀 용의 깃발 아래서 용혈공 사르누스가 웃고 있었다.

“······빨리 달려온 보람이 있군.”

웃고 있는 그의 앞에서는 한참 싸우고 있는 북부연합군의 병사들이 가득했다.

하루가 꼬박 넘게 망자의 군세와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갑작스레 나타난 사르누스의 군대를 보며 크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온갖 잡것들은 다 저기 있구나.”

온통 갈라진 세계 사이에서 쉽게 통하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간 또한 마찬가지.

들어간 일행에게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밖에 있는 북부연합군은 지금까지 꼬박 반나절을 넘게 대치하던 중이었다.

“너무 쉽게 끝나면 곤란한데.”

가혹한 강행군으로 무려 하루만큼의 시간을 벌어낸 사르누스의 군대.

물론 벌어낸 시간만큼이나 이탈하고 만 병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지만 전쟁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사르누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부터 북부연합군의 뒤를 치겠다.”

그저 많은 인간이 죽으면 그만일 뿐.

제국의 시대를 넘어 다시 한번 용의 시대를 노리는 가장 오래된 용의 깃발이 천천히 앞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조금 늦었군. 사르누스.”

“······!”

그러나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용의 깃발은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리키지 못했다.

“하긴, 너는 언제나 약속 시간에 늦고는 했지.”

“······프라우센?”

온통 색이 바래지고만 남자.

아무도 모르게 중앙의 군세 사이에 서 있던 그가 쓰고 있던 두건을 천천히 벗기 시작했으니까.

“그래. 내가 돌아왔다. 이 어리석은 용아.”

그렇게 벗어낸 두건 사이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

오직 가장 오래된 용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은 분명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초대 황제 프라우센이었다.

“제국 황제와의 맹세를 어긴 어리석은 용.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쿠르르르르-!

조용히 내뱉은 건국왕의 말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하는 대지.

산 자도, 죽은 자도 모두 당황하고 마는 그 엄청난 진동 속에서 차분한 자는 오직 되돌아온 황제뿐이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죽는다.”

쿠르르르-!

망자의 군세와 북부연합군.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중앙의 군대까지.

그 모두를 가두려는 거대한 나무뿌리가 있었다.

가지가 아닌 뿌리부터 올라와 아무도 모르게 땅을 파고든 그것은 어느새 거대한 전장을 가두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품은 용의 조각들과 함께.”

새까만 교회를 부수며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나무 한 그루.

라마슈트의 세계에서부터 깨어나 드디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역천의 나무.

그것이 제 모습을 내비치며 전장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프라우센."

이곳에 있는 모든 이의 죽음을 먹어 치우기 위해서.

그들의 죽음과 함께 새로이 떠오를 세계의 이름은 검은 눈물의 세계.

어떠한 아이들도 죽지 않을 그 세계를 위해 흉측한 뿌리들이 제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2화 6

아이들의 노래 (1)

두드드드드-

아찔한 부유감과 함께 라마슈트의 세계가 부상하고 있었다.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려는 거품 방울처럼.

그 거품이 떠오를 때마다 라마슈트의 보랏빛 하늘에는 깊은 균열이 새겨지고 있었고, 그 하늘 아래에 속해 있던 거짓된 동심원들은 바깥에서부터 속절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현실로 부상하고 있어요! 곧 있으면 저희가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무너질 겁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는 라마슈트의 세계에서는 그저 나무가 뿌리 내린 이 섬만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을 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무너져 내리는 바깥의 동심원들을 보며 블라드는 이 모든 광경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 버릴 생각이었어.’

라마슈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아이들의 안위였던 모양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흑마법사들도 그저 수단에 불과했다는 듯 어두운 비명들과 함께 내던지고 있었으니까.

쿠르르르릉-!

“조심하세요! 곧 현실이 옵니다!”

날카롭게 외치는 니벨룬의 경고에 고개를 올린 블라드는 그만 저 위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두 눈을 크게 치켜뜨고 말았다.

“······저게 뭐야?”

내 위에 있는 하늘이 부서져 나가는 그 기이한 광경.

그러나 블라드는 깨어지는 하늘보다도 그 너머에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그림자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종탑?”

이곳에 들어오기 전 본 적이 있던 아치우크의 새까만 교회.

그곳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교회의 종탑이 보랏빛 하늘 너머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창밖에서 비치는 풍경처럼, 무너져 가는 이 세계를 향해서.

“이런 미친!”

댕! 대애앵-!

기어이 맞부딪히고 만 세계의 경계 사이에서 하늘은 무너지고 종탑은 떨어지고 있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귓가로 들려오는 요란한 종소리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세계와 세계의 부딪힘 속에서 블라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일뿐이었다.

쿠과가가강!

“으아아아!”

“빌어먹을! 젠장! 도대체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무지막지하게 부딪혀 버린 현실과 세계의 틈 사이에서부터 들려오는 육중한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같이 할 수 없기에 밀어낼 수밖에 없는 세계들의 거친 고갯짓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밀려난 것은 라마슈트가 흘린 검은 눈물이 아닌, 현실의 세계였다.

“······크윽! 쿨럭, 쿨럭!”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교회의 잔해를 맞으며 블라드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차마 숨쉬기 힘든 자욱한 먼지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교회의 종 뿐.

제 소임을 다했다는 힘없이 누워있는 아치우크의 종을 보며 블라드는 그제야 자신이 현실 세계로 빠져나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블라드! 정신 차려라!]

“어서 일어나라 이 녀석아!”

그렇게 드리워진 자욱한 먼지 속에서 애써 블라드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내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그제야 그곳에서 자신을 불러대는 늙은 사제를 볼 수 있었다.

“저기, 저기를 봐라! 이제 시간이 없어!”

“······!”

전장의 한 가운데서 솟아오른 일행의 앞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북부연합군과 싸우던 새까만 망자의 군세가 가득했다.

그러나 피에르의 손가락은 당장 닥쳐 있는 위협이 아닌 저 위에서 꿈틀대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중이었다.

“······저게 뭐예요?”

솟아오른 나무는 가지요, 떠오른 뿌리는 꽃봉오리니.

그 위에 선 여인이 두 손을 든 채 무어라 크게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거부하려는 그녀의 마지막 발버둥이자 신을 향한 크나큰 반항이었다.

“세계 창조의 술이다!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최악의 술법이지!”

신이 만든 이 세계가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 하는 배교자. 라마슈트.

그런 그녀가 외치는 주문에서부터 떠오르는 검은 물방울이 있었다.

자그마한 점에서부터 시작된 그 새까만 물방울은 라마슈트가 모아놓은 검은 눈물을 먹으며 조금씩 커지는 중이었다.

“······내 평생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죽은 자도, 산 자도 모두 침묵한 채 올려다보게 하는 검은 물방울의 모습.

그러나 이 아득한 광경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주교 피에르의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기이한 미소만이 맺혀 있을 뿐이었다.

“피에르?”

절망의 순간에서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광신도의 그것과도 같았다.

평생을 헤맸던 어둠 끝에서 헤맨 구마 사제이자 이단 심문관. 주교 피에르.

그는 마치 계시처럼 느껴지는 위기 속에서 이제야 자신이 태어난 이유를 찾았다는 듯 그렇게 웃고 있었다.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 서 있는 바로 이 순간. 이런 순간에서 피어오르는 횃불이야말로 진정한 신의 뜻이 아니겠느냐.”

웃는 듯 우는 듯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찡그려져 있는 피에르의 얼굴.

그 얼굴에 떠오른 맹목적인 환희에 방금 보았었던 라마슈트의 미소가 겹쳐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신께서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나라는 사람을 준비하신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블라드?”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는 피에르의 법봉에서부터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에르가 평생을 품어왔던 신앙이자 의지였던 것.

비록 광기가 섞여 번들거리고는 있었으나 지금 보이는 그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 임하시는 신의 뜻이기도 했다.

“이게 아마 신께서 내게 주신 운명인가보다. 가장 밝게 타오르라고 말이야!”

따앙-!

수많은 불신자를 불태우면서도 조금의 흔들림 없었던 피에르의 신성.

그 신성이 지금 용이 들고 있는 검을 통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가서 저 사특한 것들을 베어버리고 오거라. 블라드 아우레오!”

나의 세계를 품은 검 사이로 신비와 신성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검을 움켜쥔 블라드의 얼굴에는 한껏 찌푸린 주름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진짜 끝까지 신만 찾고 있네.”

“뭐?”

신의 뜻을 품었음에도 어쩐지 불경해 보이는 금발의 기사.

한껏 감은 왼쪽 눈으로 피에르를 노려보던 블라드는 천천히 일어서며 역천의 나무가 있는 쪽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위에 있는 신만 보이고 지금 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안 보여요?”

블라드가 가리킨 곳곳에는 온통 시커먼 죽음들이 가득했다.

망자의 군세와 흉측한 뿌리에 의해 죽어가는 병사들.

그리고 나무가 뿌리박은 호수에서부터 떠오르고 있는 여인들의 새하얀 뼛조각들까지.

이 모두가 아무도 봐주지 않는 곳에서 죽어간 반짝이지 못한 세계들이었다.

“······지금 이게 진짜 신의 뜻이라면 둘 다 똑같은 놈들인 거지.”

들고 있는 명분은 모두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극단에 다다른 목적은 결국 수단마저 가리지 않았으니, 블라드의 눈에는 아이들을 위해 여인들을 죽였던 라마슈트나 그런 라마슈트를 신의 뜻을 증명할 기회라 말하는 피에르나 모두가 똑같아 보일 뿐이었다.

“니벨룬. 나 아무래도 저 위까지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그러니 나라도 알아봐 줘야 한다.

여인들이 흘렸던 검은 눈물도, 모닥불 아래서 뛰놀았던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신께서 원하신다니까. 그럼 해드려야지.”

지금도 태양을 가린 채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라마슈트의 검은 물방울.

그 물방울이 어떠한 슬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치켜든 채 자신을 향해 꿈틀거리는 흉악한 뿌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쾅-! 콰앙! 쾅!

“공작님! 땅 밑에서부터 뿌리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

갑작스레 땅을 뚫고 나오는 새까만 뿌리에 연합군의 병사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강철공 티무르는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통 대신 저 위에 보이는 드라굴리아의 깃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진형을 굳혀라.”

“하지만 공작님!”

“진형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했다!”

앞에는 망자들의 군세, 뒤에는 중앙군의 군대.

그사이에 끼고 만 강철공 티무르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지금의 진형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틈을 주지 마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러서야 한다.”

지금도 솟아오르는 뿌리들에 의해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티무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북부를 대표하는 강철의 공작에게는 본인이 짊어져야 하는 크나큰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조금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군대가 와해라도 된다면 북부는 곧 끝장이야.”

누군가가 내지르는 비명보다는 내가 가진 대의를 위해서.

너무나도 타당한 결정이었지만 그 결정에 대한 대가는 지금도 비명을 내지르는 병사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쾅! 쾅! 쾅쾅!

-으아아아!

-뿌리가! 뿌리가!

-살려줘!

“······프라우센.”

드라굴리아의 깃발 위에서 넘실거리는 나무뿌리들.

그 뿌리들이 먹어 치우는 병사들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되살아난 황제와 가장 오래된 용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 시원치 않으시군. 가장 완벽한 용을 가르던 그때의 신위는 어디로 가셨나.”

이제야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프라우센과 사르누스의 등 뒤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뿌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에 굶주려 있던 라마슈트의 뿌리들이었다.

“······기어이 황실의 조각을 삼키고 말았더군. 사르누스.”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니 나에게도 정당성이 있는 것이지.”

맞대고 있는 검과 검 사이로 웃고 있는 사르누스와 굳어 있는 프라우센.

그러나 아무래도 되살아난 황제는 살아남은 만큼 강해지고만 가장 오래된 용을 상대하기가 버거운 모양이었다.

점점 그의 검이 위태롭게 밀려나고 있었으니까.

“그래. 네가 그리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라우센은 점점 불리해지는 균형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아직 남아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황실에 남겨둔 거다. 너보고 삼키라고.”

“뭐?”

일격필살의 검술은 의외성에서부터 시작하는 법.

그러나 의외성이라는 것은 꼭 들고 있는 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는지 잘 기억할 거다. 사르누스.”

맞대고 있는 검을 타고 검붉은 피 한 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제의 피, 맹약을 잇는 증거 중 하나.

그렇게 점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프라우센의 핏방울을 보며 사르누스의 눈이 커졌다.

“······잃어버린 많은 기억 중에서도 아직 그것만큼은 붙들고 있었지.”

이미 부서졌지만, 다시 한번 자신을 부숴버린 황제의 조각이 핏방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프라우센은 용을 향해 스며드는 자신의 핏방울을 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완벽을 꿈꾸는 용에게 퍼질 자신의 세계들을 보면서.

“프라우센-!”

※※※※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여인.

신을 위해 사특한 존재만을 바라보는 사제.

자신의 땅을 위해 희생조차 감수하려는 군주.

가장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용과 그 용을 막기 위해 되살아 난 황제까지.

“달려! 니벨룬! 달리라고!”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 모두가 옳고 정당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면할 수밖에 없는 희생들이 있었다.

지금 죽어가는 병사들처럼, 이미 죽어버린 여인들처럼. 도무지 반짝여 본 적이 없기에 모두가 무시하고 마는 그런 존재들 말이다.

“더 빨리 가라니까!”

“안 된다고요! 이게 한계란 말이에요!”

그렇지만 지금 양탄자를 탄 채 나무를 오르는 블라드만큼은 그들의 슬픔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떨어져 있던 뒷골목의 소년은 그 누구보다도 진창에 서 있는 자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다 죽는다고! 이 속도면!”

용도 아니고, 신의 종도 아니며, 귀족도, 황제의 계승자도 아닌 그저 뒷골목의 소년.

그러나 오직 보잘것없던 그때의 소년만이 모두가 내지르는 고통을 멈추기 위해 하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거 할머니가 아끼시던 양탄자였는데!”

휘날리는 뿌리를 간신히 피해, 감히 올려다보기도 힘든 높디높은 흉측한 나무를 오르면서.

그렇게 엉망이 된 양탄자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별 하나가 있었다.

지금도 달려드는 흉측한 뿌리들을 겨우겨우 베어가며 날아가는 그 별은 저 위에 보이는 어두운 밤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달이다.”

“······.”

그렇게 엉망이 된 양탄자를 타고 올라간 하늘에는 새까만 달 하나가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길한 일식처럼 태양을 가린 채 서 있는 그 달은 전장의 모두를 자신의 그림자로 가린 채 오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난 달이 싫어.”

“네?”

마치 나의 둥지를 부수던 푸른 달의 모습처럼.

색깔은 달랐으나 여전히 떠 있는 달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예전의 광경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곳은 장미의 미소.

온통 핏물로 가득했던 창관.

그리고 소년의 세계가 깨어졌던 곳.

“달이 싫다고.”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의 세계를 집어삼키는 라마슈트의 세계를 보며 블라드의 감은 눈에서부터 그때의 푸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죽이겠다고 외쳤으나 결국은 닿지 못한 나의 푸른 달.

그러나 오늘만큼은 닿을 것만 같은 그 달을 향해 블라드는 자신의 세계를 품은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부수고 만다.”

이곳에 있는 영웅 모두가 외면해버린 아무도 보지 못하는 별들을 위해.

그들을 위해 스스로 떠오른 별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

어두운 밤하늘에서 홀로 반짝이는 블라드의 세계에는 어느새 내가 올려다보았던 푸른 달빛이 섞여 있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3화 8

아이들의 노래 (2)

나무 안의 세계는 너무나 따뜻하고 안락했다.

마치 나를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처럼 정말 떠나고 싶지 않은 그런 세계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그러나 모닥불에 있던 몇몇 아이들은 요제프를 따라나서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고 이곳에 멈춰 있을 수는 없다는 듯이.

-아저씨. 이제 우리 어디로 가요?

-길 아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들이 헤매고 있는 이 세계는 출구 없는 나무의 세계.

자신을 꿰뚫은 뿌리를 통해 본의 아니게 이곳까지 끌려온 요제프는 도대체 어디로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들어온 곳이 있을 테니 어딘가 나갈 곳도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보이는 것은 깜깜한 어둠뿐.

오직 등 뒤의 모닥불만이 비치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주위에 하나둘 요제프의 옷깃을 붙잡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응?”

그렇게 헤매고 있는 요제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편안한 고요함만이 감돌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음.

그 소음과 함께 비치는 머리 위에 빛에 요제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그만하자!

“······블라드?”

마치 메아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누군가의 목소리.

-이제 그만하자고!

그러나 아무리 멀리서 들려도 확연히 알아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는 분명 나와 함께해주었던 기사의 목소리였다.

※※※※

“으아아아! 당했어요!”

니벨룬의 비명과 함께 처참히 뜯겨 나간 양탄자의 조각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이리저리 휘청이고 마는 블라드와 니벨룬.

신비라는 천 쪼가리에 겨우 발을 디디고 있던 그들은 추락하는 양탄자 위에서 위태로이 휘청거릴 뿐이었다.

“수고했다.”

“네?”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이 추락하는 그 순간에도 저 앞에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무 가장 높은 곳에서 주문을 외워대는 여인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망가졌어도 혼자 내려갈 정도는 되지?”

“블라드? 블라드 님?”

“그러면 조심히 가라!”

“아니죠? 설마 아니죠?”

슈아아악-!

지금 블라드의 눈동자에 맺혀 있는 세계는 오귀스트가 알려준 가장 옳은 길을 찾는 세계.

그 세계가 지금 매섭게 날아오는 뿌리 한 줄기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그곳밖에는 길이 없다는 듯이 그렇게.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어!”

뿌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양탄자 위에서부터 블라드가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느껴지는 아찔한 추락감에 날개 없는 용은 이를 악물고 말았지만, 이제는 정말 이 방법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콰득! 콰드득!

추락하고 마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을 틈타 스쳐 지나가는 뿌리에 검을 꽂아 넣은 블라드.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무지막지한 충격감이 고통스러웠지만 블라드는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됐다!”

그렇게 기어이 검을 손잡이 삼아 뿌리 위로 올라선 블라드는 저 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뱀처럼 낭창거리는 흉악한 뿌리를 타고서.

그 뿌리를 타고오는 블라드를 향해 나무 위에 있던 목 없는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놈이 넘어오고 있다!

-쇼아라의 블라드! 저 미친놈!

-막아라! 뿌리를 끊어!

자신을 타고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뿌리가 제 몸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으나 검사란 그 어떠한 순간에도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

언제 어디서나 전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일격필살의 계승자는 그 흔들림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잃지 않고 있었다.

[바로 앞에 놈들이 있다!]

“흐으으······.”

[내가 뭐라고 했었지? 기선제압은 어떻게 하라고 가르쳤었냐!]

“흐아아아!”

키하노의 목소리와 함께 새까만 뿌리를 가르는 블라드의 화려한 지평선.

그 황금빛 지평선의 끝에서부터 빛나는 세계 하나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위에 있는 달보다는 작은 것이었지만 분명 저 아래에 있는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빛이었다.

“내 앞을 막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라!”

목 없는 기사들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황금빛의 세계.

라마슈트의 수족들은 자신들을 뛰어넘어가는 블라드를 그저 멍청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바로 자신들의 앞에서 날아오는 황금빛의 검풍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퍽! 퍼버버퍽!

그 바람이 닿은 곳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검은 장미들의 모습.

썩어버린 검은 물감으로 그려낸 이 화려한 그림은 마치 장미의 미소에서 보았던 푸른 달의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훌륭하다! 완벽히 재현했군!]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내 세계에 깊이 박혀 있는 푸른 달의 빛을 따라.

그렇게 고딘의 검술을 재현해 낸 블라드는 흩날리는 기사들의 파편들을 뒤로 한 채 라마슈트를 향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라마슈트-!”

달에게 닿기 위해서.

이번만큼은 부숴야 할 달에게 닿기 위해서.

그렇게 달려나가는 블라드의 발걸음에는 분명 내가 원하는 길이 새겨져 있었다.

“비켜 이 새끼들아!”

콰직-!

머리 위로 날아드는 뿌리를 피해 구르고, 자신들을 가로막는 목 없는 기사들을 부수고.

어두운 무리로 가득한 나무 위의 공간이었지만 한 번 가속하기 시작한 블라드의 전진은 그보다도 더 매서운 것이었다.

“멈춰라! 라마슈트!”

바닥에 있는 자가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도약할 거리가 필요하다.

비록 내가 뛰고 있는 이곳이 온통 진창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말이다.

“당장 멈추라고 했다!”

웅웅-웅-!

그렇게 블라드는 뛰어오르고 있었다.

발밑에 있는 수많은 칼날을 밟으며 이 모든 비극을 만들어낸 여인을 향해서.

“······블라드 아우레오!”

그녀에게 달려드는 빛은 너무나도 명확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외우던 주문도 멈춘 채 다급히 만들어낸 라마슈트가 결계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유리와도 같이 가볍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을 뿐.

콰직! 콰지직!

“꺄악!”

“크으윽!”

마치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솟아있는 라마슈트의 제단.

그 넓지 않은 제단 위에서 산산이 부서진 결계들의 파편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파편 위에서 굴렀을지라도 블라드의 전진은 멈춤이 없었다.

“이번에는 시간 안 준다!”

“······!”

아까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듯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금발의 기사.

콰득!

“흐으으으······.”

그렇게 조금도 허락되지 않은 거리와 시간 속에서 라마슈트가 휘두르는 손짓은 쉽게 그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쾅! 콰직!

“꺄아아악!”

“멈춰 씨발! 멈추라고!”

그렇게 파고든 간격을 통해 고운 얼굴을 후려치고 가녀린 손가락을 베어내고.

그렇게 흉폭하게 들이미는 용의 이빨 앞에서 라마슈트는 고통 어린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이익!”

치이익-

그래도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는 듯 블라드의 갑옷을 잡아 쥐는 악독한 손길.

그 손길을 통해, 슬픔과 고통, 그리고 온갖 저주들이 블라드에게 달라붙었지만, 어린 도마뱀의 숨결로 만든 드워프의 갑옷은 단 하나의 불순물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사납게 달궈지고 있었다.

“도대체 몇 명이나 더 죽일 셈이냐! 이 미친년아!”

“아이들······. 내 아이들을.”

“그러니까 그 아이들을 위해서 몇 명이나 더 죽일 셈이냐고!”

엉망이 된 라마슈트의 머리채를 잡아 쥔 블라드는 그녀를 질질 끌고서는 저 밑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새까만 나무가 뿌리 내린 저 밑의 세계는 차라리 지옥과도 같은 것.

이제는 딛고 있는 땅조차 믿을 수 없는 그곳에서는 북부와 중앙을 구분하지 않은 채 수많은 비명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저 사람들 보여? 저 사람들 다 죽여서 뭘 어쩔 건데!”

인세의 지옥을 가리키는 기사의 목소리에는 본인조차 감당하기 힘든 분노가 가득했다.

그러나 이미 목적에 매몰되고 만 검은 여인의 눈에는 누군가의 비명이 아닌 나의 세계를 위한 단초로 보일 뿐이었다.

“······너무 더럽죠? 그쵸? 저기는 아무도 못 살려요.”

“라마슈트!”

“저런 흉측한 곳에서 내 아이들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래!”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숨 쉬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여인이 흘리는 눈물은 분명 저 위에 보이는 검은 달과도 같은 빛이었다.

“내 아이들은 저런 데서 안 살아! 저런 더러운 것들이 없는 깨끗한 세상에서 살게 할 거야!”

신을 향한 광기와 아이들을 향한 광기.

그 둘을 보고 있는 블라드는 그 순수한 광기들을 보며 차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본인들의 세계가 아니었기에 도무지 통하지 않는 광신도들.

그런 그들을 보고 있는 이 시대의 기사는 그만 미쳐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 그렇게 지랄들을 해라. 나는 내 할 일을 할 테니까.”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블라드가 간직한 세계는 누구의 세계도 아닌 내가 직접 세운 나만의 세계.

오직 직접 보고 들었으며 배운 것들을 통해서만 채워 넣은 나의 세계는 그 어떠한 광기 속에서도 올곧게 블라드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는 안 미칠 거야. 너희들처럼은 절대 안 미쳐.”

부디 이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내가 처음 품었던 별의 색깔을 잃지 않기를.

광기와 고통이 가득한 아치우크의 한복판에서 블라드는 그렇게 다짐하며 은색의 검을 치켜들었다.

콰직-!

“안 돼!”

라마슈트의 비명과 함께 블라드의 검이 불길한 제단을 파고들었다.

마치 영혼이 깨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었지만 이를 악문 블라드의 손짓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자!”

세차게 상처를 벌려대는 검날의 끝으로 불거져 나오기 시작하는 새까만 눈물들.

그 눈물들을 알아챈 블라드의 눈에서는 차마 감추기 힘든 슬픔이 가득했다.

“애들한테는 미안한데! 이제 그만하자고!”

콰드드득-!

새까만 제단을 가르는 블라드의 검.

그 검이 번뜩일 때마다 저 위에 있는 검은 달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엉망이 되어 울고 있는 여인과 떨어지고 있는 검은 달.

그 가련한 것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듯 역천의 나무가 제 뿌리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블라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콰르르르릉-!

[블라드!]

“으윽!”

발밑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제단이 있었다.

저 밑에 있는 수많은 죽음들을 먹으며 내 머리 위에 있는 검은 달을 띄우기 위한 제단이.

[빠져들면 안 된다! 이 제단은 세계의 연결부야!]

그렇게 내 발밑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무의 세계.

오직 새까만 공간만이 가득한 그 세계에서는 끝도 없는 무저갱만이 그 입을 벌린 채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젠장!”

신비를 알려주는 마법사도 없이 홀로 어두운 세계로 빠져들고 마는 블라드.

아무리 휘저어도 잡을 곳 없는 그 세계 속에서 블라드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블라드!

“······!”

그러나 블라드는 모르고 있었다.

이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는 자신일지라도 밑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빛나는 별과도 같다는 사실을.

-잡았다!

끝없이 추락하는 블라드를 향해 내밀어주는 손이 있었다.

사내답지 않게 새하얗고 비쩍 마르고 만 그 손은 분명 블라드가 잘 알고 있는 이의 손이기도 했다.

“요제프 님?”

그와 함께 수없이 내밀어지는 앙증맞은 손들.

요제프와 함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내밀어진 아이들의 손은 분명 블라드를 위해 내밀어진 것이었다.

※※※※

“······미안하구나.”

어린 부제의 손을 잡으며 저 위에 있던 검은 달을 바라보던 안드레아.

그 달이 머금고 있는 지금의 광경은 분명 어린 소년들에게 있어 가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기에 안드레아는 그저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그렇다 할 지라도 소년들의 노래는 계속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가혹할지라도 너희는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니까.

“너희가 노래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희망을 말할 수 있겠니.”

“······주교님.”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흉측하고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지금의 광경.

그러나 안드레아는 오직 아이들이기에 부를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안고 갈 테니 부디 너희들만큼은 노래를 계속해줬으면 좋겠구나.”

앞서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기 위해,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말하는 안드레아의 로자리오는 빛나고 있었다.

“네.”

저 위에서 떨어지는 달 아래서 여인이 울고 있었다.

더러운 이 세상을 향해 가라앉고 마는 세계가 너무나 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인이 더럽다고 말하는 이 세상에도 울려 퍼지는 노래는 있었다.

“진짜 엄청 찾았잖거든요! 왜 이런 데 있는 거예요!”

-미안하다. 다 사정이 있었어.

소년들이 부르는 노래가 전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올라가는 별 하나도.

“이젠 집에 가자구요.”

누군가가 끌어올려 주는 손길에 구원받은 블라드는 바로 앞에 보이는 요제프를 보며 화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웃고 있는 것처럼.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4화 5

아이들의 노래 (3)

떨어지는 별을 붙잡고자 내민 손들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 작고도 어린 아이들의 손이었다.

누구의 지시도, 강요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의지로 내민 어둠 속의 그 손들은 요제프와 함께 블라드를 붙잡아주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군.

“······그러게요.”

마주 잡은 손 너머로 보이는 요제프의 얼굴은 주위의 어둠 때문인지 그 어느 때보다도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블라드를 보며 지어주는 그 웃음만큼은 햇빛이 스며들던 집무실에서 본 모습에서 조금도 변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끄응!”

한없이 떨어질 것만 같던 거꾸로 된 나무의 세계.

나를 붙잡아 준 손들에 의해 겨우 끌어 올려진 블라드는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너희들이구나.”

드디어 발을 디딘 새까만 어둠 속에는 블라드를 보며 숨죽이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온통 새까맣게 칠해진 눈가가 가련해 보이는 아이들.

그럼에도 눈앞에 있는 자신 만큼은 알아본다는 듯 갸웃거리는 고개들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할 말은 많은데 일단 나중에 하자구요.”

-그래.

우리의 사정은 다음에 이야기 하자는 블라드의 말에 요제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자신이 떨어졌던 곳을 올려다보는 블라드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요제프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닫히기 시작하는군.]

“······.”

어둠이 가린 아이들의 희미한 시선에서는 블라드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빛나는 별빛만이 존재했을 뿐.

그렇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다시금 위를 올려다보자 곁에 있던 아이들도 다 같이 위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다른 길은 없었죠?”

-그렇더군.

그러나 올려다본 곳에서 비치는 빛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어두워만 질 뿐.

점점 닫혀만 가는 바깥 세계와의 통로를 보며 블라드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든 저곳으로 올라가야겠네요.”

-위까지 올라갈 방법이 있나?

웅-웅웅-웅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블라드의 검이 울기 시작했다.

별에서부터 태어나 세계수의 각인을 새긴 검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챈 블라드는 결연한 표정으로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제가 한 번 만들어 볼게요.”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

검이 말하는 울림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신의 왼쪽 눈을 깊게 감았다.

“후우······.”

이 꿈과도 같은 세계에서 헤매는 아이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위해 블라드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아우슈린에서의 감각을 다시 한번 일으키기 시작했다.

“진짜, 한 번만 다시 해보자.”

콰직-!

긴장된 심호흡과 함께 힘차게 꽂아 넣은 검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블라드가 감고 있는 왼쪽 눈과도 같은 색으로.

지금 보이는 그 빛은 어린 세계수가 빌려주었던 그때의 색깔과도 같은 것이었다.

-응? 저게 뭐야?

-초록색인데?

두드드드드-

오직 고요할 뿐인 라마슈트의 세계에서 블라드가 만들어내는 균열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저거 새싹 아니야?

그 균열은 영원히 멈춰 있을 이 세계에 강렬한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이기도 했다.

“흐으아아아!”

소드마스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그릴 줄 아는 자를 뜻한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기사는 유일무이한 소드마스터의 계승자.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블라드!

블라드가 꽂아 넣은 검에서부터 환한 초록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색은 지금 블라드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의 빛.

환하게 새어 나오는 그 빛은 지금 곁에 있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닥불 옆에서 서성이는 아이들에게까지도 닿고 있었다.

“끄으으으아아!”

아무런 색깔도 존재하지 않던 라마슈트의 세계에서부터 블라드가 그려내는 그림이 조금씩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그마한 새싹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어느새 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것이었다.

-저건······.

태어나기는 용으로 태어났으나 그리고 싶어하는 것은 찬란한 꽃 한 송이.

그렇게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는 아이들을 위한 계단 하나를 그려내고 있었다.

드드드드득-!

피어오르는 뿌리는 나를 알아봐 준 초록색.

솟아오르는 줄기는 나와 함께 하는 하얀색.

그리고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꽃잎은 언제나 내가 바라왔던 달의 푸른색.

“타고 가요!”

이 어두운 세계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한 송이가 있었다.

그것은 요제프도 본 적 있었던 소년의 세계였다.

“내가 받치고 있을 테니까!”

언제나 있어야 할 자리에서 피어나는 그 꽃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

어린 가능성을 위해 피어난 이번 세대의 꽃이 어서 자신을 밟고 오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

“크아아아아!”

부들부들 떨리는 눈가에는 이미 시뻘건 핏줄들이 가득했다.

“프라우센-!”

분노와 고통.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용의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 되살아 난 황제. 프라우센이었다.

“······사르누스. 이 어리석은 용아.”

프라우센의 등 뒤에서부터 흉측한 뿌리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프라우센을 무시 한 채 바로 앞에 있는 사르누스를 향해 시꺼먼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끝까지!”

완벽함을 꿈꾸는 세계에 퍼지고 만 독 한 방울.

황실의 조각 속에 숨어 있던 빛바랜 세계 하나가 사르누스의 심장을 사납게 찔러대고 있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죽는다.”

자신을 향해 울부짖는 용을 향해 프라우센은 걷고 있었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밟으며 등 뒤로는 사특한 나무를 부리면서.

지금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년들의 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프라우센은 그저 그렇게 죽음을 그려내며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일 테니까.”

오직 품고 있는 마지막 의무만은 놓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렇게 치켜든 은색의 기사에게는 어느새 빛바랜 색 하나가 맺혀 있었다.

“내가, 내가 이대로 끝날성싶으냐.”

고통에 힘겨워하는 가장 오래된 용의 머리 위로 흉측한 뿌리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검보다도 날카로우며 성보다도 무거운 뿌리들,

그 뿌리들을 보며 사르누스는 분노어린 피거품들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느냔 말이야-!”

“······!”

순간, 꽉 물어버린 사르누스의 입가에서부터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치켜지는 용의 푸른 눈.

그 눈에 비친 완벽함의 잔재에 프라우센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나는 용이다! 완벽함을 꿈꿀 수 있는 용이란 말이다!”

콰가가가강-!

집채와도 같은 뿌리들이 기어이 사르누스를 덮치자 땅 위에 가득 쌓인 시체들이 이리저리 흩날리기 시작했다.

뿌리의 육중함을 이기지 못해 솟아오른 자욱한 먼지들과 함께.

“······사르누스.”

끄득! 그드드득!

그렇게 핏물과 섞인 붉은 안개 속에서 빛나고 있는 눈동자가 있었다.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가장 완벽한 세계를 꿈꾸고 있는 사르누스의 눈동자였다.

“이렇게는 절대 못 끝내지.”

성벽과도 같은 거대한 뿌리를 들어올리는 사르누스의 오른팔에는 온통 황금빛 비늘들이 가득했다.

오직 순혈의 용만이 재현할 수 있는 그 완벽한 모습에 프라우센은 한껏 긴장하기 시작했다.

“겨우 네놈 따위에게 발목 잡히려고 수백 년을 버텨온 게 아니다. 프라우센.”

자신에게 치켜세워진 프라우센의 검을 보며 사르누스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용이 바라보는 시선은 프라우센도, 흉측한 뿌리도 아닌 저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 보석과도 같은 세계였다.

“그리고 너만 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사르누스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치챈 프라우센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 보이는 이 시대의 용 한 마리.

“······!”

사르누스의 의도를 알아챈 프라우센이 다급히 사특한 뿌리들을 향해 손짓했지만 이미 인간의 육신을 벗어던진 사르누스의 돌진은 전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아버지?”

콰직-!

완벽함을 탐하는 굶주린 미소와 함께 핏방울이 솟아올랐다.

드리워진 드라굴리아의 깃발 위로 튀어 오르는 새빨간 용의 피.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이전 세대의 용을 보며 미르셰아의 푸른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지고 있었다.

※※※※

쿠드드드드-!

“으으윽!”

온통 새까만 어두운 공간 위로 껍질과도 같은 잔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잔해들보다 지금 자신을 밟고 오르는 아이들의 세계가 더욱 버거울 뿐이었다.

“꼬맹이들 주제에 뭐가 이렇게 무거운거야!”

꽂아 넣은 검에 의지한 채 잔뜩 굽어진 블라드의 등 뒤에서부터 작디작은 손들이 커다란 꽂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개미와도 같은 그 작은 몸짓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저 위에 보이는 빛을 향해서, 지금 귓가에 들려오는 소년들의 노래를 따라서.

[버텨라! 지금 오르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세계 그 자체니까!]

육체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울지라도 영혼의 무게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저 위를 향해 오르려는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이를 악무는 중이었다.

“······등골 빠지겠네. 진짜!”

솟아오를 날개까지는 달아줄 수 없었지만 밟고 올라갈 계단만큼은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

그러나 지금 블라드가 발휘하고 있는 그 숭고한 의지는 그저 맹세나 맹약 때문에 발휘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이렇게 힘들었나 봐요?”

[······.]

그것은 나라는 사람 또한 누군가의 등을 타고 올라왔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밟아가는 발자국 하나하나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쇼아라의 작은 대장간에서부터 시작한 그 얼굴들은 지금의 블라드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등을 내어준 사람들의 얼굴들이었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텐데.”

뒷골목의 소년에서부터 소드마스터의 계승자로.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용을 죽이는 검까지.

이 모든 성장들은 블라드라는 가능성을 믿고 밀어주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그들의 희생을 통해 피어난 이 시대의 기사는 받은 값을 정당하게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쟤네들은 왜 안 간다는데!”

-잠시만 기다려봐라!

그러나 나의 등을 타고 오르는 아이들의 뒤로는 아직도 모닥불 옆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이들이 가득이었다.

사납게 부서지고 있는 이 세계를 보면서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서운 아이들.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이 세계에서 그저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영원히 이 세계에 갇히고 만다. 정말 그러고 싶은 거냐?

차분히 어르는 요제프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꽉 닫은 눈을 통해서도 보이는 빛바랜 별의 흔들림.

그러나 아이들은 그 빛을 따라 움직이기 싫다는 듯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며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젠장! 빨리 올라가라고!”

이미 꺾여버린 어린 가능성을 위해 검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주세요.”

그 순간 바닥에서부터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뭐?”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검은 눈물과 함께 솟아오른 여인.

그러나 형체 없이 녹아버린 듯 잔뜩 꾸물거리는 그 모습은 도저히 산 자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마슈트.”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쏟아부어 검은 달을 지탱하고 있던 여인.

그 여인이 지금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블라드의 앞에 나타났다.

“부디 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검은 달을 띄울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위해서.

되살아난 황제도, 가장 오래된 용도 봐주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이제야 피어난 꽃 한 송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에게 당신이 가진 조각을 나눠주세요.”

죄악으로 가득한 여인 라마슈트.

그러나 그녀가 품고 있는 아이들만큼은 죄가 없었으니.

“제발.”

“······.”

검은 달이 가라앉고 있었다.

지옥과도 같은 이 전장을 향해서.

그러나 모두가 죽고 죽일 뿐인 이 지옥에서 아이들을 위해 울어주는 여인은 오직 검은 눈물을 흘리는 이 여인뿐이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5화 11

달을 향해, 안녕

쇼아라의 뒷골목은 언제나 어둡고 더러운 곳이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마음속에 항상 그때의 풍경을 담아두고는 했었다.

아마 그것은 뒷골목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괜찮아.”

어린 시절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기억 중 하나.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온 어머니는 얼굴이 잔뜩 부어있었다.

장사 밑천이라 할 수 있는 얼굴이 시퍼렇게 부어오르고만 그녀였으나 적어도 아들에게만큼은 힘껏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어서 먹어. 식겠다.”

그녀가 내미는 수프 그릇에는 두툼한 고기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마담의 호통을 들으니 아마도 자신을 위해 슬쩍한 고기인 모양이었다.

“이거 훔친 거야?”

“응.”

아이를 위해 고기를 훔친 어머니.

그러나 그녀가 내미는 수프에는 따뜻한 온기만이 가득할 뿐.

“뭐 어때. 내가 내 아들 먹이겠다는데.”

누군가에는 더러운 창녀이자 도둑이겠으나 지금 내 앞에서만큼은 오직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

그런 그녀가 내미는 수프를 보며 어린 블라드는 그렇게 작은 방 안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잘 먹을게.”

그녀가 들고 온 수프는 죄로 만든 것이었지만 또한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블라드는 그저 시퍼렇게 물든 어머니의 얼굴이 안쓰러웠을 뿐이었다.

※※※※

“누군가는 나한테 줘야 해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제는 형체조차 잃어가는 여인이 블라드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쩐지 허무해 보이는 그 손짓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주겠다고 약속했단 말이에요.”

눈앞에 있는 용은 아니었지만 앞서 있었던 가장 오래된 용과 되살아난 황제는 그녀에게 약속했었다.

가장 완벽한 존재에서 떨어져 나왔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조각을 주겠노라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한 명 정도는 나한테 줘야 한다구요.”

그러나 지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점점 저물어가는 검은 달 뿐.

살인자이며, 배교자.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독을 퍼트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 속으로 밀어 넣은 악의 창시자.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블라드 아우레오.”

그러나 지금 블라드가 바라보는 라마슈트의 면(面)은 악에 물든 광인이 아닌 아이들을 위한 어머니의 모습일 뿐.

지금도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작디작은 손길들을 보며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 말았다.

-왜 울어요. 수녀님.

-울지 말아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이 어두운 공간에서만큼은 라마슈트는 누군가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미 그녀의 수많은 죄악을 보아온 사람.

“안 돼.”

각자의 세계를 이루는 면(面)들은 모두 다채로운 것이었다.

그 면면마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모습이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라마슈트라는 세계는 이미 너무나 많은 죄를 지어온 세계였다.

“네가 그렇게 울어봤자 나는 흔들리지 않아.”

지금 나의 세계를 밟고 올라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 시대의 기사가 만들어 준 옳고도 바른길을 따라가는 아이들이.

그러나 지금도 이 어두운 곳에서는 갈 곳을 잃은 채 슬퍼하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아마 그 아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울고 있는 그녀와 함께 다시는 꺼내지도 못할 지옥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이곳에 남는다. 라마슈트.”

“······.”

너만은 안 된다고 말하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힘없이 무너져가던 라마슈트의 고개가 멈췄다.

그와 함께 들어 올려진 그녀의 시야에는 어느새 붉게 울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이 비치고 있었다.

“너는 이곳에 남아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웅웅-웅-

검이 울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 안에 깃든 용의 조각을 꺼내면서.

나를 이루는 근본이었으나 이제는 필요 없는 가장 완벽한 세계.

가장 오래된 용도, 되살아난 황제도 내어주지 않았던 그 세계가 어느새 블라드의 손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쿠구구구구-!

비극만이 가득한 마을, 아치우크를 향해 떨어지는 달이 있었다.

애써 모은 눈물로 띄워 올린 그 달은 누군가의 염원에도 부질없이 그저 땅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 흐흐흐!”

그리고 그 달이 만드는 그림자 아래서 가장 오래된 용 하나.

힘없이 널브러진 뿌리들을 뒤로 한 채로 웃고 있는 사르누스의 얼굴에는 수백 년을 기다려왔던 환희가 가득했다.

“그래도 아프긴 아프구나. 과연 최고의 결투사가 준비한 비수다웠어.”

“······쿨럭!”

여전히 고통스럽다는 듯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사르누스였으나 그 얼굴에는 차마 숨기기 힘든 환희가 가득했다.

“이제야 너를 내 밑에 두는군. 프라우센.”

왜냐하면, 지금 내 아래에는 그 시절 가장 증오했었던 기사 프라우센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비록 가장 완벽한 용조차도 가지고 싶어했던 그의 빛은 잔뜩 바래지고 말았지만 이 썩어빠진 육신으로도 줄 수 있는 정복감은 아직 남아 있을 터였다.

“······아들의 피를 빨다니. 용이 아니라 괴물이 되었군.”

“죽었다 살아난 너만 할까.”

콰득!

그 말이 불쾌했다는 듯 사르누스의 검이 프라우센의 복부를 관통했다.

“이것 봐. 아파하지도 않잖아.”

“······.”

그러나 잔뜩 비집어진 프라우센의 상처에서는 그저 썩어가는 진득한 핏물만이 가득했을 뿐.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죽인 용.

돌아오기 위해 신념을 버린 황제.

목적에 무너지고만 그 시대의 기사들이 지금 광기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네 심장에 있는 조각을 빼낼 거다. 그럼 너는 그저 썩어가는 시체가 될 뿐이겠지.”

그러나 아무리 광기에 취해 있었을지라도 지금 사르누스는 프라우센을 짓밟고 서 있었으니, 이 전장의 승리자인 그는 마땅히 전리품을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나서는 바스토폴로 날아갈거다. 그곳에서 같잖은 강철공의 조각을 챙겨야겠지.”

“끄으으!”

“스투르마에 있는 바예지드의 조각도 챙기고. 빌어먹을 라브노마가 빼돌린 그 조각 말이다!”

“크으으으-!”

“그렇게 다 찾고 나서 마지막으로!”

복부를 관통했던 검이 사르누스의 외침과 점점 프라우센의 심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의 서늘함이 죽음을 가린 심장까지 다다르자 사르누스는 그 감촉을 즐기며 웃고 있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가능성도 가져가야겠지.”

가장 오래된 용이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완벽한 가능성에 가까워진 용이.

그 웃음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 프라우센이었으나 용을 용의 조각으로 막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고맙구나. 프라우센. 그동안 내 아들을 잘 키워줘서.”

사르누스가 내뱉은 마지막 말은 프라우센이 아닌 키하노에게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쓰러져 있는 프라우센은 그 말을 정정할 만한 기력조차 남지 않았기에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 높이 드리워진 사르누스의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걸로 우리의 악연을 끝내도록 하지.”

광기 어린 웃음과 프라우센의 심장을 향한 마지막 일격이 치켜 올려졌다.

조용했으나 진득한 사르누스의 웃음은 이 전장에 있는 어떠한 잔해들보다도 검은 것이었다.

쿠르르르릉!

“······윽!”

그러나 갑작스레 느껴지는 진동에 들고 있던 사르누스의 검 끝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건 또 뭐냐!”

갑작스레 뒤엉키는 지면에 사르누스는 프라우센을 노려보았으나 되살아난 황제는 그저 저 위에 있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하.”

어딘지 모르게 허탈한 웃음과 함께.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가리고 싶어했던 붉은 빛줄기가 날아오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졌지만 너 또한 지게 되었군. 사르누스.”

“뭐?”

무너져가는 나무가 마지막으로 쏘아 올린 가장 완벽한 붉은 빛.

아무도 믿지 못했기에 나는 감히 선택할 수 없었던 그 가능성을 보며 프라우센이 웃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릉-!

세상을 가를 것만 같은 천둥소리와 함께 점점 무너져가던 검은 달에게로 쏘아지는 붉은 빛이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쏘아진 그 빛에 땅 위에 있던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저것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떠오르고 나면 영원히 이 세상과 이별하고 말 검은 달.

그 달이 삼킬 완벽한 조각을 보며 프라우센이 웃고 있었다.

※※※※

쿠르르르릉-!

역천의 나무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는 가지에서 빨아들일 눈물이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라마슈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존재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죄악의 증거가 지금 폐허가 된 아치우크를 향해 쓰러지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가자구요!”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위태로운 공간에서 블라드가 기어 나오고 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요제프를 부축한 채 자신의 세계를 밟아가던 블라드는 드디어 저 위에 보이는 빛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로군.

위를 향해 갈수록 창백해지는 요제프의 눈가로 비치는 광경이 있었다.

마치 이곳이 출구라는 듯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반짝여대던 자그마한 반딧불들.

여전히 자신들을 기다려주던 아이들의 영혼이 이제야 왔냐는 듯 둘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노래도 들려오고.

밑에서 올라오는 둘을 확인한 반딧불들은 이제야 안심했다는 듯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년들의 노래를 타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아 들을 수 있는 신의 음성.

그곳을 향해 날아가는 아이들을 보며 요제프가 웃기 시작했다.

턱!

“그래도 마지막에는 신의 품으로 가나······ 보네요!”

점점 희미해지는 세계를 타고 올라온 블라드는 기어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제 집에 가자구요!”

혼자서도 기어오르기 힘든 그 어두운 길을 요제프까지 부축하면서.

그렇게 올라온 블라드의 머리 위에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빛을 보이는 검은 달이 머무르고 있었다.

두드드드드-!

-그래, 가야지.

그러나 죽음을 벗어난 이곳에서도 요제프의 손은 여전히 차갑게만 느껴질 뿐.

그럼에도 짓고 있는 요제프의 미소만큼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찾아준 블라드를 향해 있었다.

-미안하다. 여기까지 불러와서.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니까요.”

쿠르르릉-!

블라드와 말과 함께 둘이 딛고 있는 나무가 무너지고 있었다.

자신이 쌓아 올린 죄악을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나무였다.

-······철이 든 순간부터, 항상 상상해봤었지. 나의 끝은 어떻게 될까 하면서.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이 순간에도 요제프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언제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짙은 눈그늘의 청년은 드디어 온전한 평화를 찾았다는 듯 그렇게 웃고 있었다.

-허약하게 태어난 것도, 이렇게 살아온 것도 모두 나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가 그려보고 싶었다.

“······제발 그런 말은 나중에 말하자니까요.”

그 무너지는 잔해들 속에서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광경이 자신의 옆에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내 삶의 완성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왔었지.

블라드가 걸어갈수록, 죽음의 경계선에서 멀어져 갈수록 요제프는 차가워지고 있었다.

나의 어깨를 감싸 쥔 그의 손도,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미소도.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던 블라드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크게 뚫린 복부의 상처와 함께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는 요제프.

여전히 그의 머리 위에 머무는 몇몇 반딧불들이 이제는 떠나야 할 때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달을 띄웠다. 네가. 아이들을 위해서.

“······같이 띄운 거예요.”

-그래. 같이.

내 생에 마지막에 띄워 올린 검은 달을 보며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맞다. 우리가 같이 했었지.

내가 가지지 못한 검과 내가 가지고 싶은 별을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같이했던 둘은 이제 저 하늘의 달을 향해 이별을 고해야 할 때였다.

-고마웠다. 블라드.

요제프 바예지드.

내가 바라던 삶을 가지지 못했던 남자.

-네가 내 삶의 끝을 완성해주는구나.

그러나 내가 바라던 죽음만큼은 가질 수 있었던 남자가 블라드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으로 들을 수밖에 없는 작별의 인사를 남기면서.

“······저도 고마웠어요. 요제프.”

그 말과 함께 블라드가 점점 굳어가는 요제프를 힘껏 껴안았다.

점점 다가오는 먼지들이 그의 죽음을 더럽히지 않도록 온몸으로 막아가면서.

“그 시궁창 속에서 나를 발견해줘서요.”

만족한 듯 천천히 눈을 감는 요제프의 머리 위로 자그마한 빛 하나가 떠나가고 있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이제야 찾아낸 요제프의 세계는 반짝이는 검은 색.

비록 검었으나 그의 눈그늘만큼이나 반짝였던 그 빛이 지금 하늘을 향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고마웠어요.”

검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과 함께.

이제는 닿지 못할 세계들이 영원한 작별을 고하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렴.”

무너져가는 나무 안에서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인처럼.

외우지도 못한 기도문을 읊조리며 울고 있는 기사처럼.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말 완벽한 조각 하나에 울부짖는 용처럼.

“잘 가요. 요제프.”

이 세상을 떠나는 달을 향해 모두 안녕.

흩날리는 반딧불들과 함께 멀어져 가는 그 달을 향해서 푸르른 별빛 하나가 마지막 인사를 고하고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6화 11

이번에는 우리의 방식으로 (1)

넓디넓은 도로가 군사들로 인해 꽉 메워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수만은 되어 보일 것 같은 군사들.

왼쪽에는 황실의 깃발을, 오른쪽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새겨져 있는 깃발을 들고 있는 그들은 궁정공 아르망이 자신의 마지막 여력을 다해 보낸 군대였다.

“정지! 전군 정지!”

하얀 비둘기가 보냈던 강철공의 신호를 따라 동부 가도를 따라 북상하던 궁정공의 군대,

용혈공 사르누스가 이끈 군대의 뒤를 바짝 쫓으며 북쪽으로 올라가던 그들이었지만 한시가 급한 지금에도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저것이 대체 무엇인가?”

이번 원정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아른슈타인 백작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언제나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상황을 읽고자 하는 그였지만 지금 보이는 광경만큼은 도무지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설마······ 달인가?”

점점 저물어가는 태양 위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치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자그마한 달 하나.

익숙한 광경 위로 떠 오르는 그 이질적인 존재에 아른슈타인 백작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침묵한 채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비록 어두운 곳에서 태어났으나 품고 있는 가능성만큼은 반짝인 채로 떠오르는 달.

마치 누군가가 그려 넣은 것만 같은 그 달이 지금 모두가 보는 하늘 위에서 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처음 떠오른 그 달의 빛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처연했고 또한 슬퍼 보이는 것이었다.

※※※※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달이로군.”

수만 명의 시체가 쌓여 있는 참혹한 전장.

그곳에서 떠오르는 달을 올려다보며 웃음 짓는 남자가 있었다.

“떠오른 저 달과 함께 완벽한 조각 또한 돌아오지 않겠지. 훌륭한 선택이었다.”

“······.”

시체들은 쌓여 있고 그 높던 나무는 무너져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교회의 잔해 밑에서는 교황을 찾으려는 사제들의 손길이 분주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서는 이 땅 위에 서 있는 모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나 훌륭한 선택이었으면 진작에 이렇게 하지 그랬습니까.”

그토록 모두가 지쳐있었다.

지금 블라드의 발아래 누워 있는 남자처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랬다. 그녀는 이미 미쳐버린 여자였으니까.”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멈춰가는 빛바랜 황제 프라우센.

그는 지금 용이 남긴 지독한 상처를 품은 채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도 믿지 못했던 거였지. 그녀도, 너도. 그리고 나까지도.”

점점 허물어져 가는 육신 위로 잠시 검은 달이 비추는 달빛이 머물렀다.

여태껏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그마한 달빛.

그 달빛을 보고 있던 프라우센의 눈길은 어느새 블라드에게 업혀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머물러 있었다.

“지금 시대의 일은 지금의 기사들에게 맡기는 것이 맞는 거였음에도.”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야 프라우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서 있어야 하는 이들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이 아닌 앞으로 이 땅을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이었다는 것을.

“가장 오래된 용은 떠났다. 북쪽에 있는 조각들을 가지기 위해서.”

내가 뿌린 가능성들을 믿지 못한 내가, 과연 어린 가능성들을 탐하던 가장 오래된 용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러나 단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저 기사 안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나만큼은 결국 옳은 길을 걸었다는 것일 테다.

“그는 용의 날개를 가졌다. 그러니 따라잡지는 못할 거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허물어져 가는 육신을 억지로 들어 올린 되살아난 황제.

그의 빛바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강철공의 도시 바스토폴이였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해지겠지. 너는 이제부터 그것을 막아야 한다.”

[······.]

블라드는 프라우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내가 태어난 북부의 땅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이 점점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그 사람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어요.”

그러나 정작 블라드가 바라보는 곳은 프라우센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었다.

“용의 세계만으로는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나마르카에서 사르누스를 만나 본 적 있던 블라드는 이미 용의 세계만으로는 그에게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블라드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저 먼 북쪽에 있는 도시 쇼아라.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의 방식이 아니라 제 방법대로 해결할 겁니다.”

내가 태어난 도시가 있고 나를 믿어준 동료들이 있으며 내가 구해낸 가능성들이 있는 북부의 땅.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수많은 색깔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완벽에 근접한 용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래.”

자신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이 시대의 기사를 보며 프라우센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또 다른 실패로 돌아갈지 모르는 시도이겠지만, 그 실패마저도 이 시대의 주인들이 가져야 하는 마땅한 권리일 것이다.

“달이 밝군.”

달 아래 비치는 프라우센의 손가락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덧없이 흩날리는 가루처럼.

그렇게 여태껏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흩어지고 마는 황제의 육신을 보며 블라드가 조용히 그 속에서 빛바랜 검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

동쪽에서 떠오른 달이 아직 보이지 않는 멀고 먼 서쪽의 바다.

지금 잔잔해야 할 그곳에는 거대한 배들이 만들어대는 파도가 크게 너울 치는 중이었다.

펑! 퍼퍼펑!

요란한 대포 소리와 함께 선원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즐비한 황금색 깃발들 속에서도 붉은 장미 한 송이만큼은 힘차게 나부끼는 중이었다.

“오타르! 제 3탄 준비해!”

“포탄을 장전해라! 정신들 차리라고!”

어느새 회복한 황금공의 선단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북부의 배들이 있었다.

쉴 새 없이 달려드는 황금공의 선박들에 비해 비록 그 수는 적었지만, 양옆에 물레방아가 달린 드워프들의 배는 유려한 회피 기동을 통해 수적 열세를 극복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여전히 쥐새끼처럼 구는구나! 붉은 장미!”

그런 북부의 배들을 보며 황금색 깃발 아래서 크게 웃는 자가 있었다.

“그때처럼 한번 달려들어 보지 그러냐! 이 건방진 애송이들아!”

황금공 카잔 바르보사.

북쪽으로 향한 또 다른 물결 하나가 지금 도시 나사우를 향해 넘실넘실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북부가 가진 마지막 해로를 잠식하기 위해 다가오는 날카로운 파도들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때의 빚을 되받아내겠다! 여기에 가라앉힌 뱃값만 무려 34,564 골드나 되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다!”

이곳 서부의 바다에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고 만 그는 지금 기르고 있는 붉은 수염만큼이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노려보고 있는 곳은 단 하나, 붉은 장미의 깃발.

그러나 그 깃발 아래 서 있는 외발의 선장 또한 바르보사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애송이가 아니라 캡틴 하벤이다!”

어느새 측면으로 돌려버린 자신의 배와 함께.

“그리고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빚은 더 져야 할 것 같은데!”

바람에 의지하는 배로써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극적인 선회에 바르보사마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측면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수많은 대포들.

그러나 바르보사는 자신을 향한 그 대포들보다도 낡은 선장모를 붙잡고 있는 외발의 선장이 더 불길해 보일 뿐이었다.

“······이 거리에서 쏜다고?”

펑! 퍼퍼펑!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바르보사의 앞으로 북부의 대포들이 겨누어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반짝여대는 대포들은 모두 드워프들이 만든 것.

“발사!”

그것들 하나하나에 그간의 분노를 포탄들이 하벤이 찾아낸 바람을 타고 멀리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발사! 발사해!”

“드디어 한 번 쏴보는구만!”

“저 개 같은 남부 놈들! 싸그리 죽여버리고 말겠다!”

이 세상 가장 멀리까지 닿을 수 있는 포탄들.

펑! 펑펑!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이 쏘아올린 포탄들이 바르보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 포탄들의 뒤를 밀어주는 바람만큼은 드워프들의 기술이 아닌 블라드의 잔향을 따라 올라온 바다의 정령들 때문일 것이다.

※※※※

“아버지. 지금 도시 나사우에서부터 출발한 서부 병력들이 근방 마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도시 데어마르에 있는 알리시아의 집무실에는 지금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곳으로 달려드는 가이다르와 황금공의 세력은 고작 데어마르의 성벽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케도 합류했군. 바르보사의 포위망이 두터웠을 텐데.”

가이다르를 따르지 않겠노라 선언한 서부의 영주들이 지금 나사우를 경유해 데어마르 근처에 있는 항구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샤를 라브노마라는 깃발과 함께 북부 전선에 합류한 그들은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소중하게 쓰일 동맹군들이었다.

“북부의 선장들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

앞에서 루트거의 보고에 페테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

아마 단 한 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긴박한 전투가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좋다. 예상치 못했던 병력들까지 합류해주는군.”

고개를 끄덕인 페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작디작은 영지였으나 서 있는 깃발은 수십 개.

그러나 그중에서도 페테르의 눈길을 잡아끄는 자들이 있었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까지 말이야.”

제국민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아닌 색색깔의 실로 자신들을 표현하는 사람들.

비록 모두가 내치려 하였으나 요제프만큼은 품어야만 한다고 했던 북부의 야만인들이 지금 이 전장에 같이 서 있었다.

“용의 조각은 지금 어찌 되었지.”

“마법사 라그무스의 인도에 따라 지금 쇼아라 근방까지 왔다고 합니다.”

“어서 합류해야겠군.”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모였다 할지라도 서부와 남부의 연합군 앞에서 열세인 것은 당연한 사실.

거기에 강철공이 다급히 보낸 전보에 따르면 용혈공 사르누스까지 용의 조각을 노리고 있었으니 이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페테르는 데어마르보다도 더 높은 성벽이 필요했다.

“피난 준비는 어찌 되었습니까. 알리시아 남작.”

“······.”

순간, 페테르의 말에 집무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 여인을 향해 쏠리고 있었다.

이 땅의 정당한 주인이었지만 결국 힘이 없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알리시아 하이날 남작.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자람에 대한 분노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입을 열고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을 위시한 피난 행렬은 이미 보냈습니다.”

“그럼 남작님도 이만 쇼아라로 올라가시는 게······.”

너무나 민감한 사항이었기에 페테르 대신 나선 루트거였지만 이윽고 보이는 알리시아의 핏발 어린 눈동자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는 제일 마지막까지 이곳에 남아있을 겁니다.”

비록 막아줄 힘은 없지만 떠나보낼 수 있는 마지막 의무만큼은 다하겠다고 말하는 알리시아.

그런 그녀의 단호한 기세에 루트거마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의 영지민들이 모두 떠나간 다음에요.”

이제야 희망을 찾은 데어마르였지만 재난과도 같은 전쟁의 물결만큼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 물결은 북부의 기둥인 바예지드조차 버거워하는 것이었으니 내가 지켜야 할 영지를 버려야만 하는 그녀의 선택은 그야말로 팔을 떼어내는 고통과도 같았다.

-······.

그런 그녀의 뒤로 보이는 풍경.

레몬향이 가득한 데어마르의 언덕에서 흰 뱀 하나가 고개를 쭉 내밀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 눈빛은 지금도 저 먼 북부를 날아다니고 있는 황금색 용을 향하고 있었다.

뀨-!

-······?

순간, 이 불안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태평한 그 소리는 흰뱀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올라타 있던 어린 정령들의 시선까지도 한 번에 잡아끌고 말았다.

뀨?

-······??

조그마한 구멍에서부터 슬쩍 제 머리를 들이민 두더지 한 마리.

평범한 두더지와는 다르게 빛나고 있는 그 녀석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흰 뱀을 마주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한 번에 스투르마까지 갔으면 더 좋았는데요.”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새긴 각인은 여기까지였거든. 녀석도 길은 알아야 할 거 아니냐.”

그 두더지가 파놓은 굴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을 처음 알아봐 주었던 금발의 소년과 세계수에서 이곳까지 찾아주었던 바라디스의 목소리였다.

“그래도 잘 도착했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씩 어두운 굴을 해치며 나오는 수많은 사내들.

엘프, 수인족, 그리고 인간들까지.

그렇게 종족에 상관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사내들은 급하게 걸어온 모양인지 모두가 얼굴에 새까만 흙먼지가 가득했다.

“······저기 있겠네요. 페테르 님이.”

데어마르를 지키는 수호신인 흰 뱀은 갑작스러운 이 광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는 듯 작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흰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지금 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자그마한 뿌리 한 줄기였다.

-······!

그리운 뿌리 한 줄기.

나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또 다른 세계수 한 그루.

그 나무를 알아본 흰 뱀의 눈에서 어느새 초롱초롱한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모셔다드릴게요.”

이제야 서로를 찾은 세계들.

그러나 등 뒤에 업혀있는 요제프만큼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집에 갈 수 있겠네요.”

조각을 찾아 헤매는 가장 오래된 용과 북부를 향해 이빨을 들이미는 수많은 군세들.

그러나 지금 검은 달이 내려다보는 데어마르에는 온갖 색이 가득할 뿐이었다.

마치 흐드러진 꽃밭처럼 보이는 그곳은 단 하나의 색도 겹치지 않은 채 다가오는 위협에 맞서 자신들의 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7화 8

이번에는 우리의 방식으로 (2)

그것은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찾아왔다.

번져가는 붉은 노을 속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그렇게 소리 없이 조용히.

“저건······.”

그렇기에 바스토폴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태양 속에 떠오른 작은 점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고 만 뒤였다.

왜냐하면, 점에서부터 시작한 작은 어른거림은 어느새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강철의 도시를 덮치고 있었으니까.

“저, 저게 뭐야?”

크아아아아아-!

감히 눈으로는 가늠하기도 힘든 빠른 속도로.

마치 빛처럼 빠르게 다가온 그것은 이미 붉은 숨결을 가득 들이마신 채 발밑에 있는 성벽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습격이다! 종을 울려라!”

“이런 젠장! 너무 빨라!”

“발리스타가 닿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황금빛과 함께 황급히 깨어나기 시작하는 강철의 도시.

그러나 이제야 막 침입자를 확인한 바스토폴의 대공망은 감히 자신들에게 짓쳐 드는 황금색 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와이번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용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

주인 없는 도시의 성벽만으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

그러나 병사들이 그 세계의 거대함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용이 품고 있던 숨결은 세차게 뿜어져 나온 뒤였다.

“브레스다!”

“도, 도망쳐!”

쿠과가가강-!

뿜어낸 압력만으로도 성벽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강렬한 숨결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한 열기는 저 뒤에 보이는 황혼보다도 더 붉은 것이었으니.

-으아아아아!

-뜨거워! 살려줘!

병사들의 비명과 함께 태양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지는 태양은 서쪽이 아닌 북쪽의 성벽을 따라 천천히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크아아아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이 온갖 시체들과 함께 섞여 녹아내리고 마는 그 참혹한 광경.

그 모습은 마치 오래전, 가장 완벽한 용에게 짓밟히던 수많은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바스토폴! 드디어 내가 이 도시를 불태워보는구나!

제국의 초대 황제와 함께 가장 마지막까지 항전했다던 바스토폴.

그러나 이제 녹슬어 버린 이 도시는 더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줄 수 없었다.

※※※※

“······방금 바스토폴이 함락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지막히 들려오는 페테르의 말에 데어마르의 홀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북부뿐만 아니라 지역과 종족을 뛰어넘은 수많은 기사가 모여 있는 자리였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고작 5일이었다. 사르누스가 아치우크의 전장에서 떠난 지가.”

중부의 마을 아치우크에서 제국 최북단의 도시 바스토폴까지 고작 5일.

아무리 날개 달린 존재라 할지라도 한 달은 넘게 걸릴 그 거리를 고작 5일 만에 주파했다는 소식에 몇몇 기사들은 그만 억눌린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야말로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지.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몰락한 용의 잔재들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제국의 황제이자 검의 정점인 소드마스터가 직접 갈라놓았던 가장 완벽한 용의 잔재들.

그러나 갈가리 찢긴 그것 중에서도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용은 어느새 완벽한 조각들을 모아가며 그때의 악몽을 재현하려 하고 있었다.

“이로써 황제께서 나누신 5개의 조각 중 3개의 조각이 사르누스의 손에 들어갔다.”

황실이 가지고 있던 조각.

프라우센이 은퇴한 자신과 함께 세상 속에 숨겼던 조각.

그리고 방금 빼앗긴 강철공의 조각까지.

“그러니 이제 이 땅 위에 남은 것은 단 하나. 내가 가진 바예지드의 조각뿐이지.”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검은 달이 가진 조각을 제외한다면 이제 사르누스가 노릴 수 있는 조각은 단 하나뿐.

예전에는 라브노마의 조각이었으나 지금은 바예지드가 가진 그 조각뿐이었다.

“그렇다면 백작님이 보관하신 그 조각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누군가가 내뱉은 질문에 기사들 사이로 긴장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인간들에게 있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는 용의 조각.

그 조각의 향방이야 이번 전투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변수일 테니까.

“그 조각은 현재 스투르마를 떠났다.”

바스토폴을 가리키던 페테르의 지휘봉이 천천히 다음 도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설원을 지나 린드부름의 둥지를 넘어.

북부의 동쪽에서부터 서쪽을 가로지른 그의 지휘봉은 어느새 북부의 등대라 불리는 한 도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쇼아라를 지나고 있지.”

바예지드 백작령의 도시 쇼아라.

북서부 물류의 중심 도시이며 불이 꺼지지 않는 뒷골목을 간직한 곳.

그리고 소년이 태어난 그 도시.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가리키는 페테르의 지휘봉을 보며 블라드의 푸른 눈에는 잔잔한 긴장감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조각에 우리보다는 사르누스가 더 가깝게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지금 내려오는 그 조각이 기사들이 있는 이곳 데어마르까지 온전히 닿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왜냐하면, 바스토폴과 쇼아라의 거리는 아치우크 때보다 훨씬 가까웠으니까.

“······그러니 이곳에 있는 누군가가 마중을 나가줘야만 한다.”

그렇기에 내려오는 조각을 안전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가장 오래된 용이 날아오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받아들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는 지금 내려오고 있는 조각을 맞이해야 한다는 말에 기사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에 쏠리기 시작했다.

“······.”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는 대륙의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이름.

자신의 자그마한 깃발 안에 빛나는 이름들을 품고 있는 그 기사를 향해 대륙의 모든 대표가 서로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

길고도 좁은 복도를 홀로 걷는 사내가 있었다.

워낙 많이 드나들었기에 이제는 안내 없이도 위치를 알 수 있는 데어마르의 저택.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이 맨 처음 이 저택에 들어섰을 때는 짙은 눈그늘의 청년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페테르 백작의 판단이 맞다. 지금 북부연합군은 이곳에서 움직여서는 안 돼.]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진 용의 위협은 이미 바로 앞까지 다다랐지만 이미 시작한 전쟁은 아무도 멈출 수 없었다.

쉽게 믿을 수 없기에 차라리 서로를 제거하는 것이 안전할 정도로 이미 그들의 세계는 크게 갈라져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외통수로군. 아마 오래전부터 지금을 준비해왔던 모양이다.]

키하노의 말처럼 지금 갈라진 틈 사이에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자신이 갈라놓은 세계들이 서로를 틀어막으며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기에 정작 막아야 할 용을 막지 못하는 지금 시대의 모습에 오래된 기사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뭐 어쩌겠어요.”

북부로 올라오는 황금의 군대가 있다.

쇼아라로 다가오는 가장 오래된 용 또한.

그러나 둘 중 무엇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북부 연합군은 그들 모두에게 제 몸을 내민 채 날아오는 칼날들을 받아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요.”

좁은 복도를 빠져나온 블라드의 앞으로 자그마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데어마르의 야트막한 언덕으로 나가는 그 출구는 이제 블라드에게 있어서 익숙한 뒷골목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제 왔나.”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선객이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입구에 어깨를 삐딱하게 기댄 그는 블라드에게 있어 낯익고도 그리운 색을 가진 사내였다.

“루트거 님?”

“그래. 나다.”

내가 그리워했던 요제프와 같은 머리 색을 지닌 남자.

비록 생김새는 달랐으나 저 멀리서 웃고 있는 그는 내가 그리워했던 요제프의 미소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진짜 저랑 같이 가실 생각이세요?”

“용을 잡으러 가는 곳에 용살자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지?”

가장 단단한 용을 베어버린 북부의 기사.

용살 기사단의 명부에도 적혀 있는 루트거라는 이름은 이미 북부를 대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일 테다.

“우리 합 좋았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하지만.”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데어마르의 언덕에서 블라드를 기다리는 사람은 루트거 혼자만이 아니었다.

“익숙한 자리에서 또 만나게 되는군.”

“······파블로 님.”

“아른슈타인 백작께서 나를 먼저 보내셨다. 다행히 늦진 않았군”

소년의 세계를 가장 먼저 일깨워 준 남자.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그의 단단하기 그지없는 위용을 보며 굳어있던 블라드의 표정에 조금씩 미소가 번져가기 시작했다.

“건강해 보여 다행이군.”

“로드리고 님.”

“아아. 이제는 제국헌병대장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나 승진했거든.”

지금 블라드를 향해 악수를 보내는 그들은 모두 중앙의 궁정공이 보낸 기사들.

“바스토폴에서 한 번 본 적 있었는데 말이지. 마링겐의 랄프일세.”

“포드밀스의 에른스트입니다.”

그리고 강철의 도시 바스폴에서 함께 싸워본 적 있던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들.

“이거 배에서 내리니 땅 멀미가 옵니다.”

“쇼아라는 나에게도 인연이 있지. 그때 그 술의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구원해주었던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과.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우리 엘프들의 관습이지.”

내가 쥔 검과 같은 곳에서 태어난 아우슈린의 엘프들까지.

“······이렇게까지나 많은 기사가 빠져나가면 데어마르는 도대체 누가 지키는 거죠?”

좁고도 긴 복도를 나온 블라드를 기다리는 것은 데어마르의 언덕을 가득 메울 정도의 수많은 기사였다.

내가 보았고, 도움받았으며, 또한 함께 싸웠던 이들 모두는 블라드와 함께 전설과도 같은 황금색 용을 상대하리라 자원한 기사들이었다.

“아버지께서 오래된 기수들을 소집하셨다.”

“오래된 기수들이요?”

“은퇴한 기사들 말이다.”

연합군의 정예들이 빠져나가는 데어마르는 그야말로 구멍 뚫린 성벽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의 걱정에도 루트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입을 열 뿐이었다.

“윗세대에게 힘을 빌린 거지. 아마 팔다리 멀쩡한 사람들이라면 지금 다들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거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은퇴한 기사들의 몫이었다.

잊힌 영광에 목말라하던 윗세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이 아직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바예지드의 깃발 아래로 집결하는 중이었다.

“라문드 님도 오시겠네요.”

“그렇지. 아마 그 영감이 제일 빨리 달려올 거다.”

홀로 걷던 복도였지만 그 끝에는 자신을 기다리던 수많은 기사가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무 위의 어린 정령들이 여기 좀 보라며 블라드를 향해 짧은 손을 이리저리 휘적여대고 있었다.

“눈이로군.”

“······저거 눈 아니에요.”

언제나 쓸쓸한 모습만이 가득하던 데어마르의 언덕.

그러나 그곳에 가득 메워진 수많은 세계를 보며 그제야 블라드는 한껏 웃을 수 있었다.

“봄에 내리는 눈이 어디 있어요.”

노래를 부르는 흰 뱀과 까닥이는 세계수의 뿌리.

그리고 그 운율에 맞춰 춤추는 어린 정령들의 축복이 하얀 눈송이처럼 내리며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갑옷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봄에 웬 눈이지?

-좋지 뭐. 원래 떠날 때 오는 눈은 행운을 주는 법이라던데.

그러나 감고 있는 왼쪽 눈으로 이 아이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 뿐.

“가죠. 쇼아라로.”

그렇기에 블라드는 저 위에 있는 나무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흔들어주었다.

주위의 기사들이 이상하게 볼 정도로 크게 흔든 블라드의 팔짓은 이곳에 있는 모든 기사를 대신해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었다.

※※※※

“원정대가 출발했습니다. 백작님.”

“······그래.”

뒷짐을 지고 있는 페테르의 등 뒤에서부터 새까만 까마귀 하나가 날아들어 왔다.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이름 없는 까마귀는 페테르가 내려다보는 자그마한 관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은퇴한 기사들과 데어마르의 성벽만으로는 황금공의 군대를 막아 세우기 힘들 겁니다.”

“그래도 해줘야 하네.”

짙은 눈그늘의 사내가 잠들어 있는 관.

그 관을 내려다보던 페테르는 이윽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들의 얼굴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등 뒤를 받쳐주는 사람도 있어야지.”

이제야 고요한 평온에 다다른 요제프 바예지드.

죽고 말 것을 알면서도 보내고만 못난 아비가 이제야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아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그렇게 해낸 나의 아들아.”

귀족의 피는 푸른색이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차갑게 식는 피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아비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가슴을 향해 곱게 모여 있는 요제프의 양손에는 검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 어렸을 적부터 갖고 싶어 했던 기사의 검이었다.

조용히 흘러내리는 아버지의 눈물과 함께 기사들이 떠나고 있었다.

데어마르의 영주와 잠들어 있는 기사, 그리고 춤추고 있는 어린 정령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지역과 종족을 넘어 대륙 모두에서 모인 그들이 향하는 곳은 북부의 도시 쇼아라.

태어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소년의 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8화 4

마지막 조각 (1)

아직 눈조차 제대로 녹지 않은 새하얀 북부의 가도.

대륙에서도 가장 늦게 봄이 찾아온다는 그 길을 마구 내달리는 마차가 있었다.

“이랴! 이랴!”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과 그들이 호위하는 밤색 빛깔의 마차.

척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일행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한다는 듯 황급히 얼어붙은 북부 가도를 내달리는 중이었다.

“그레고리 경! 서둘러야 하네!”

지친 말들이 내뿜는 입김은 짙어지고 차가운 바람에 얼어붙은 사내들의 땀방울들은 이미 수염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강행군에도 그들이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방금 쇼아라에서 용의 그림자가 보였다고 하네!”

그것은 지금 이들의 뒤를 쫓아오는 존재가 바로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용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적도 아니며, 음험한 함정도 아닌 용이라는 존재가 뒤쫓는 그들은 스투르마에서부터 출발한 페테르의 호송대였다.

“이런 젠장! 너무 빠르잖아!”

이번 호송대의 책임자인 기사 그레고리는 마차에서 들려오는 라그무스의 목소리에 입술을 짓이기고 말았다.

쇼아라의 높은 하늘에서 보였다던 가장 오래된 용의 그림자.

그 그림자가 쫓는 것은 아마 이들이 보관하고 있는 용의 조각일 것이다.

“처음부터 안 될 것 같더라고!”

스투르마에 있던 용의 조각을 운반한 지도 오늘로써 2주째.

태어나서 이렇게까지나 내달려본 적 없던 그레고리였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용은 어느새 북부를 가로질러 새하얀 설원까지 다가온 참이었다.

“막심! 데어마르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나!”

“그래도 반나절은 더 가야 합니다!”

“빌어먹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거리.

굳이 계산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는 임무 달성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그레고리는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던 라그무스를 쳐다보았다.

“하시게.”

떠오르는 태양을 막을 수 없듯이, 지금 날아오는 용 또한 인간이 막을 수 없는 존재.

재해와도 같은 용이라는 존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가오는 파멸을 그저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째 안으로 간다!”

준비되었다는 듯 끄덕이는 라그무스의 모습에 기사들을 가리키는 그레고리의 손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막심! 케이드!”

가장 강한 자들이 아닌 가장 빠른 기사들을 뽑아내는 그레고리의 손가락.

그레고리의 손짓이 닿을 때마다 내달리던 기사들이 말을 몰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냥꾼의 아들인 기사 케이드와 기마술에 일가견이 있는 기사 막심까지는 당연한 선택.

그러나 그레고리의 마지막 손가락만큼은 방금과는 다르게 조금은 머뭇거리고 말았다.

“······도와주겠나?”

지금 그레고리의 손가락이 멈춘 곳에는 색색의 천들을 머리에 묶어놓은 야만족 전사가 있었으니까.

자신들을 초원의 아들이라 부르는 부다아트 족의 전사 아게.

예전에는 뺏고 빼앗는 관계에 불과한 그들이었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사내 중 아게만큼 빠른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

“이제야 나를 봐주시는군. 제국의 기사.”

조금은 긴장된 물음이었으나 정작 대답하는 아게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성벽 안쪽을 내주었던 값은 치를 생각이었으니까.”

용살기사단과 린드부름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말았던 부다아트 족.

그러나 짙은 눈그늘의 청년이 내주었던 성벽 덕분에 그들은 죽음과도 같던 설한의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본래 목숨값은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법이지.”

가장 오래된 용이 그어놓은 틈을 따라 갈라져 있던 북부인과 야만족들.

그러나 그레고리가 전하는 용의 조각만큼은 그 틈을 건너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

조금씩 녹아가는 북부 가도를 따라 쇼아라를 향해 올라가던 블라드와 기사들이 있었다.

입고 있는 복색만큼이나 보이는 모습도 천차만별인 그들은 각자가 속한 깃발들을 높이 치켜든 채 북부의 도시 쇼아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보인다! 보여요!”

“뭐가!”

순간, 쉴 새 없이 달려가던 그들 사이로 다급하게 외치는 니벨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색 용이요!”

둥글게 만 손바닥을 양 눈에 대고 있는 니벨룬의 모습이 영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의 손바닥에 그려진 눈알들이 마구 움직여대는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쉽게 니벨룬의 신비를 쉽게 비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기······ 쇼아라. 아니, 초점이 너무 갔다.”

이게 아니라는 듯 다급히 손가락 몇 개를 핀 니벨룬은 이번에야말로 보인다는 듯 저 앞의 광경을 상세하게 읊기 시작했다.

“쇼아라를 이미 지나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저희처럼 가도를 따라 날아오는 것 같습니다!”

크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에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지금 달려가고 있는 우리와 반대쪽에서부터 날아오고 있다는 가장 오래된 용.

조금 있으면 마주치게 될 그 흉폭한 모습을 떠올리며 몇몇 기사들이 침을 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나 가장 앞서 달리던 블라드만큼은 다른 기사들과는 다르게 조금은 안심했다는 눈치였다.

“아직 늦지는 않은 모양이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가장 알맞은 때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있어야 할 용이 도로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은 아직 찾아야 할 것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

“어? 어!”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니벨룬의 다급한 목소리는 블라드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려오는데? 내려와요!”

“어디로!”

오직 자신밖에 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니벨룬은 그것마저 잊었다는 듯 긴장된 숨을 헐떡이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마차로!”

둥글게만 니벨룬의 손바닥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대한 용의 그림자와 그 용이 사납게 잡아채려는 밤색의 마차까지.

“마차가 부서졌어요!”

날아오는 용을 향해 오러를 휘날리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검은 단단한 황금빛 비늘에 막혀 그저 헛된 시도로 끝났을 뿐이었다.

“다들 빠르게! 시간이 없어!”

용의 발톱 끝으로 요란하게 비산하는 마차의 파편들이 있었다.

신비를 통해 보이는 그 처참한 광경에 니벨룬은 여기까지 그들의 비명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끄으으으······.”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붉은 핏물들이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었다.

파편이 되어버린 말들과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기사들의 시체.

그 참혹한 광경과 함께 꺾여져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 아래서, 기사 그레고리는 정신을 잃은 채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꽤 멀리까지 도망치셨더군.”

“······언제 어디서나 길을 찾는 것이 마법사의 도리 아니겠소.”

지붕은 부서지고 이제 형태만이 남은 마차의 잔해 안에서 마법사 라그무스가 힘겹게 웃고 있었다.

“그래 봤자 헛수고인 걸 왜 모르나. 발버둥 칠수록 본인만 고통스러운 것을.”

그러나 용혈공 사르누스는 그 웃음이 반갑지 않다는 듯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냥 태어난 대로 땅에서 기며 살면 될 것을.”

고작 땅을 기는 인간 녀석들 주제에 자신을 고생시킨 북부의 기사들.

그들을 갈가리 찢었음에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사르누스의 푸른 눈동자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분노가 가득했다.

“조각은 어디 있나?”

“쿨럭! 쿨럭! 크으······.”

거친 손길로 라그무스의 멱살을 잡아 올린 사르누스는 여태껏 그가 깔고 앉아있던 새까만 상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피투성이의 노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어주지 않으려 했던 검은 상자였다.

“음?”

그러나 지금 사르누스가 바라보는 그 상자에는 언제나 감겨 있어야 할 은색의 쇠사슬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땅을 기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뜀박질 정도는 할 수 있는 법 아니겠소.”

쇠사슬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피로 그은듯한 수많은 수식이 그려져 있었을 뿐.

용혈공 사르누스는 붉게 물들어있는 라그무스의 손목을 보며 그 핏물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쪽도 이제는 늙으셨나 보오. 늙은이가 가린 용의 흔적도 못 알아보실 정도니.”

자신의 신비로 용의 흔적을 지워내고 또한 유혹해 낸 마법사 라그무스.

잔뜩 늙은 그의 얼굴 위로 인생 마지막 웃음을 그리는 주름들이 가득했다.

“이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이······.”

콰직!

불길한 소리와 함께 목이 꺾여진 라그무스의 육체가 힘없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방해를 해?”

그와 함께 사르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노려보는 곳은 새하얀 숲속.

신비가 사라진 지금에서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조각의 기척이 눈이 가득 내린 숲속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분노어린 용의 포효에 나무 위에 앉아있던 눈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숲마저 공포에 질리게 하는 가장 오래된 용의 분노.

그리고 그 분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지금 세 명의 기사들이 있는 이곳이었다.

“가도로 올라가!”

가도와 숲 사이 어딘가에 나 있는 사냥꾼들의 길.

그 길을 따라 달리고 있던 막심과 케이드, 그리고 아게는 이제 더는 자신들을 숨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서둘러 너른 도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벌써 다들 당한 거야?”

“나도 몰라!”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젓는 케이드의 품속에는 붉은빛을 내는 조각 하나가 들어있었다.

핏빛 술식이 가득한 종이에 싸여있는 그 조각은 마법사 라그무스가 자신의 마지막 신비를 뿌려 이들에게 건넨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제는 우리밖에 없어!”

지금도 계속해서 자신을 취하라 속삭이는 가장 완벽한 가능성의 조각.

그러나 용이 아닌 케이드에게는 그저 성가시게 빛나는 보석 쪼가리에 불과할 뿐.

다만 그 조각의 속삭임은 지금도 저 하늘 위에 있는 가장 오래된 용을 부르고 있을 터였다.

“······저 앞에 보인다!”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기사들의 앞으로 드디어 보이는 푸른 들판이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북부의 가도와 다르게 이제야 올라오는 봄이 가득한 들판이었다.

“온다!”

크아아아!

그러나 그 봄에 닿기도 전에 기사들의 등 뒤에는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가능성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용의 그림자.

그러나 그 거대한 세계 아래에서도 아게는 저 앞에 어른거리는 자그마한 깃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마치 신기루같이 희미하게 보이는 깃발.

그러나 그 깃발은 분명 자신들이 있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각 줘.”

“뭐?”

“조각 달라고 나한테.”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용의 입김이 있었다.

그러나 아게는 그 살벌한 기세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붉게 빛나는 조각을 자신의 투석구에 끼워 넣을 뿐이었다.

“내가 확실히 전해줄 테니까.”

겨울의 길을 지나 이제 봄.

그러나 아직 닿지 못한 그 거리를 계산하며 아게가 투석구를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림자는 점점 새까매지고 있었지만, 저 앞에 있는 검은 말만큼은 아닐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어했던 일각수의 자손.

그러나 나보다는 더 잘 어울려 보이는 금발의 기사를 보며 아게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 녀석은 빨간색을 좋아한다니까.”

크아아아아-!

초원의 아들이 밟는 땅에는 어느새 새파랗게 올라온 새싹들이 가득했다.

그 새싹들이 시작된 방향을 따라 아게가 쏘아 올린 붉은 빛 하나.

그 빛은 용의 발톱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누아르의 새빨간 고삐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쿠과과과광-!

“안 돼!”

용이 만들어낸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북부 가도 위로 커다란 먼지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잔뜩 섞인 그 먼지구름은 서늘한 바람으로 다가와 블라드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정말이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자욱한 먼지 속.

그러나 블라드에게 있어 그것보다 괴로운 것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기사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블라드! 위다!]

그러나 그들이 보낸 조각은 확실히 블라드를 향해 쏘아졌다.

두근-!

“······위?”

뛰는 나의 심장이 가리키는 방향.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희뿌연 먼지 속에서 보이는 낯익은 붉은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아르-!”

-멈춰라!

용과 용의 내지르는 함성 속에서 떠 있는 붉은 빛 하나.

겨울과 봄의 경계 위에 떠 있는 조각을 향해 용과 검은 말이 푸른 초원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푸르르륵-!

앞에 보이는 황금색 용의 위용은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달려가는 누아르의 눈에는 그저 새빨갛게 빛나는 조각만이 가득할 뿐.

히이이잉-!

용의 조각을 향해 달려가는 말의 머리 위로 새하얀 뿔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뿔은 오직 푸른 초원 위에서 태어난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일각수의 세계였다.

[더 빨리!]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용의 발톱과 소년의 손 사이에서 잠시 붉은 빛이 머물렀다.

같은 색을 지닌 비늘과 금발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마지막 남은 용의 조각.

“······잡았다!”

겨울을 지나온 기사들이 쏘아 올린 용의 조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을 붙잡은 것은 봄의 끝자락에서 뻗어낸 소년의 손.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한 블라드의 손끝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용의 조각을 붙들어내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9화 5

마지막 조각 (2)

봄이 만든 푸른 초원 위로 기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앞서 나간 블라드를 뒤쫓지 못해 뒤늦게 도착하고 만 연합군의 기사들.

그런 그들이 이 초원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하늘 높은 곳을 활공하고 있는 거대한 용의 모습이었다.

“······맙소사.”

누가 보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황금빛 몸체.

떠오르는 태양빛 보다도 더 반짝이는 용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께서 만드신 가장 완벽한 모습에 가까운 것이었다.

“블라드.”

몰락한 용의 잔재 따위가 아닌 진실로 고귀한 용. 사르누스.

그러나 루트거의 시선만큼은 용이 내뿜는 위세보다 그 밑에서 달리고 있는 금발의 기사를 먼저 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분노로 가득 찬 포효를 내지르는 용이 있었다.

“누아르-!”

그리고 그 아래서 검은 말과 함께 초원을 달려 나가는 금발의 기사도.

서로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조금도 양보하지 않을 거라는 듯 속도를 줄이지 않는 두 개의 세계.

너무나 진한 그 색들의 향연에 루트거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잡았다!”

그렇게 감은 두 눈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진창에서 태어났음에도 언제나 별을 바라보던 소년의 목소리였다.

“잡았어요!”

그 소리에 이끌리듯 다시금 눈을 뜬 루트거는 저 앞에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블라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조각!”

저 위에서 울부짖는 용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치켜든 손을 불끈 쥐고 있는 블라드.

그 녀석이 이제야 자신에게 다다른 기사들을 향해 크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의 차례라고.

거대한 세계에 의해 수없이 갈라지고 만 우리가 나설 차례라고.

“······다들 깃발을 들어라!”

루트거가 내지르는 함성에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하나둘씩 대륙의 깃발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하는 용살자를 꿈꾸는 무리들.

고작 영지전 따위에서는 볼 수 없는 기사들의 향연에 푸른 초원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

크아아아아-!

“크흑!”

귓가를 스치는 거대한 포효에 블라드가 잠시 휘청이기 시작했다.

-네 이놈! 네놈이 끝까지!

가지고 있는 존재감은 거대하고, 퍼트리는 압박감은 마치 산과도 같다.

그러나 저 위에서 들리는 사르누스의 분노보다도 지금의 블라드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손에 쥐고 있는 조각의 속삭임이었다.

-어서 나를 취해라! 그리하면 너는 완벽해질 수 있어!

강철의 도시 바스토폴에서도 들어본 적 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때보다도 더욱 붉게 빛나는 용의 조각은 지금도 쉴새 없이 블라드의 세계를 파고들려 하고 있었다.

[블라드! 블라드 정신차려라!]

“······끄으으!”

하늘에서 다가오는 위협과 손에서부터 시작된 유혹.

그 강렬한 외침 사이에서 세차게 고개를 내젓는 블라드의 머리 위로 다시금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서 내놓지 못해!

새하얗게 빛나는 일각수의 뿔이 다급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대를 현혹하려는 검은 말의 움직임도 결국은 기수와 함께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

콰지직!

그러나 날카롭게 다가온 용의 발톱은 어설피 움직인 누아르가 아닌 그사이에 끼어든 전혀 다른 대상을 짓이기는 중이었다.

“······파블로!”

“끄으으으!”

그 기사의 세계는 성벽과도 같은 세계.

그러나 가장 오래된 용 앞에서는 단 한 순간밖에 벌어주지 못한 세계가 블라드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어서 가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블로가 타고 온 말이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리기 시작한 누아르는 그들을 뒤로한 채 저 앞에 보이는 기사들을 향해 달려 나갈 뿐이었다.

“수고했다! 블라드!”

“어서 태세 정비해!”

그렇게 도망치는 블라드를 스쳐 지나가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다들 준비한 대로 간다! 진형을 갖춰!”

“제국 헌병대! 드디어 오귀스트 님의 복수를 할 때가 왔다!”

스투르마의 성벽을 두른 바예지드의 깃발과 검은 번개를 상징하는 제국 헌병대의 깃발.

그 깃발을 들고 있는 기수들의 뒤로 각자의 세계를 뽑은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이!

북부와 중앙의 정예들이 가장 오래된 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수만 해도 대략 수십 명.

그 모습을 본 사르누스는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는 이 열등한 종자들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전부 무너져라!】

세차게 달아오르는 조각에서부터 뽑아낸 하나의 문장.

그것은 용의 분노를 실감하지 못하는 이 무지몽매한 기사들을 향한 사르누스의 분노이자 가르침이었다.

쿠르르르릉-!

용이 내뱉은 강력한 의지에 푸른 초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위를 달리는 말들까지도 집어 삼킬 정도로 거대해진 균열은 어느새 용과 기사들의 사이를 가르며 격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용언(龍言)이오!”

공포에 떨며 울부짖는 말들을 억지로 돌려세운 기사들은 다른 길을 찾아 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벌써 이렇게까지 완벽해졌을 줄이야!”

이 세상에 자신만의 진리를 세운다는 용의 언어.

그저 문헌으로만 전해지는 용의 가능성을 보며 제국헌병대장 로드리고는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감히 인간 놈들 따위가!

크아아아아-!

초원을 가득 메우는 용의 울부짖음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무게감이 깃들어 있었다.

공포도, 주저함도 아닌 의지 자체를 꺾어버리고 마는 용의 포효는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들만이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크으으윽!”

“도저히 못 버티겠어!”

그것도 단단히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 올린 자들만.

귓가에서 흘러나오는 시커먼 핏물과 함께 대륙의 정예라 불리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탈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은 너희의 편이 아니며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나의 전장일지니.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자그마한 세계들을 보며 사르누스의 푸른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완벽한 용처럼 고민하지 않아.

그러나 웃고 있는 용의 표정과는 다르게 불룩 솟아오른 목덜미에는 새빨간 열기가 가득 맺혀 있었다.

-그저 다 죽여버리고 싶을 뿐이지.

이 시대 가장 완벽에 가까운 용이 폐 속 가득 분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다는 용의 숨결, 브레스.

바스토폴의 성벽조차 녹여버렸던 용의 분노가 바예지드와 제국헌병대의 깃발을 노려보고 있었다.

※※※※

“빌어먹을! 인간 놈들은 하라고 말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기사들과 용이 날뛰는 전장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곳.

잔뜩 창백해진 블라드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이 잔뜩 모여 하나의 공성 병기를 조립하는 중이었다.

“시간과 예산이 보장하는 완성도야말로 곧 품격이라는 걸 왜들 몰라!”

고함에 가까운 시구르손의 투덜거림이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조립되어가는 병기는 점점 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점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병기의 모습은 바스토폴에서도 본 적 있던 발리스타.

다만 그 거대한 크기가 만들어내는 활의 장력만큼은 와이번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선장! 선장님! 저기 좀 봐요!”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가혹하리만치 짧았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용의 분노가 지금 목구멍을 타고 기사들을 향해 쏘아지려 하고 있었으니까.

“······젠장! 일단 쏴!”

“하지만 아직 조준경이.”

“그냥 쏘라고 자식들아!”

그야말로 처음으로 시도하는 시범운행이자 실전 운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옳을 때가 아닌 가장 필요할 때를 선택하기로 한 시구르손은 제대로 조립되지도 못한 발리스타의 몸체를 억지로 돌리며 저 앞에 있는 용을 조준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금 아니면 쏘지도 못해!”

홀로 조준대에 선 시구르손의 눈앞으로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듯 바예지드와 제국 헌병대를 노려보고 있는 황금색 용.

“선조들의 복수다.”

타아앙-!

그 빛나는 비늘을 향해 니다벨리르가 쏘아 올린 거대한 창 촉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

“전원 산개해-!”

루트거의 외침이 크게 울렸지만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차마 그 명령에 따를 수 없었다.

쿠르르릉!

땅은 여전히 세차게 요동치고 공포에 질린 말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가장 오래된 용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짓눌리고 만 기사들은 지금 저 앞에 보이는 붉디붉은 화염의 씨앗을 보며 차마 내뱉지도 못할 경악성을 삼키는 중이었다.

휘이이이잉-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긴장된 전장.

그저 용이 삼키고 있는 숨 하나의 차이로 삶과 죽음이 갈리고 말 이때, 기사들의 등 뒤에서부터 날아오는 드워프들의 세계가 있었다.

-······!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꺼지지 않을 불꽃에서부터 제작된 창 촉.

가장 완벽한 용이 제일 경계했던 가능성 중 하나가 지금 사르누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됐다!”

억지로 날린 것이긴 하지만 분명 제대로 된 궤적이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위치로 날아가는 드워프들의 창 촉에 사르누스는 품고 있던 숨결을 그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크와아아아!

마치 하늘을 꿰뚫을 듯 쏘아져 나가는 붉은 빛줄기.

과연 그 기세가 헛된 것이 아니라는 듯 용의 숨결에 닿은 구름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살벌하구먼.”

기사들은 구해냈으나 결국 용에게 닿지 못한 드워프들의 창 촉은 흔적도 없이 녹아 저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시구르손은 닿지 못한 자신들의 창 촉을 아쉬워할 겨를도 없었다.

“······어쩐지 창고에 창 촉만 남아있더라고.”

분노한 용의 눈길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있었으니까.

시구르손이 타고 있는 발리스타를 향해 다시 한번 맺히고만 파멸적인 용의 숨결.

지금 그것은 앞에 있는 기사들이 아닌 방금 자신을 크게 위협했던 드워프들의 무기를 향해 있었다.

“가장 완벽한 용 때 다 불탄 거였나 보네!”

콰가가가강-!

서둘러 뛰어내린 시구르손의 등 뒤에서부터 거대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수백 개의 폭탄이 동시에 터진 것만 같은 그 광폭한 열기에 시구르손은 꼼짝없이 자신의 죽음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런 그의 등을 받쳐주는 손길이 있었다.

“생김새는 작달막한데 가지고 노는 것은 크시군.”

“뭐?”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굴러오는 드워프를 잡아주는 군청색 머리의 남자.

치켜뜬 왼쪽 눈에 오망성을 크게 띄워 올린 바라디스의 손끝에서는 어느새 물의 정령들이 그리는 마법진이 떠오르고 있었다.

콰가가가강-!

※※※※

-어서 나를 가져라. 저기 보이는 용처럼 날아보고 싶지 않으냐.

“크으으······.”

-세상을 땅 아래 두는 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너는 모를 거다. 어린 용아. 그저 네가 보고 겪어온 세계만이 전부일 거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급히 도망친 블라드의 손에서는 여전히 붉게 물든 용의 조각이 들려 있었다.

마치 아교로 붙인 듯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것은 그 어떤 조각보다도 블라드에 대한 집착을 내보이고 있었다.

[······마지막 용들이 다 모여 있어서 더 강력해진 모양이군.]

가장 완벽한 용에 가까워진 두 마리의 용.

그들이 보이는 용의 세계에 고무되고만 붉은 조각은 지금이라도 어서 자신을 취하라고 속삭이는 중이었다.

어느 쪽이 자신을 가져가도 결국 하나의 용만이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블라······.]

그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블라드의 왼팔에 새겨두었던 루가 족의 문신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번개를 형상화한 저주와도 같은 신비.

그러나 그 신비를 발동하려 했던 키하노는 갑작스레 휘청거리는 블라드의 모습에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안 보여.”

마치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듯 이리저리 휘적여대는 블라드의 손.

마치 장님과도 같아 보이는 그 행동에 쉼 없이 외치던 용의 조각도, 키하노도 모두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크아아아아-!

그로 인해 나의 내면은 잠시 조용해졌지만 지금도 전장이 된 이곳은 누군가의 고함과 함성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몰아! 몰아내라고!

-날개부터 노려야 해!

가장 오래된 용 아래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륙의 기사들.

-남은 발리스타가 이제 없나!

-예비로 들고 온 부품 말고는 없습니다!

세찬 불길 옆에서 수염이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는 채 쉴 새 없이 부품들을 챙겨오는 드워프들.

-정령들을 깨워내라! 일단 용의 날개부터 봉쇄해야 한다!

그리고 용을 필사적으로 막아세우는 기사들을 방패 삼아 쉼 없이 화살을 쏘고 있는 엘프들까지.

“······하나도 안 보여.”

조각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깊은 세계로 내몰았던 블라드.

그 세계를 통해 블라드가 보는 전장은 가장 빛나는 세계에 짓눌려 빛을 잃어가는 자그마한 별빛들이 가득했다.

“저게 완벽함인가요. 키하노?”

[그래.]

보이진 않지만 들리는 비명들이 있었다.

나와 같이 해주었던 세계들이 내지르는 비명들.

그들이 내지르는 단말마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블라드의 세계가 천천히 푸른 눈동자에 맺히기 시작했다.

“너무 높은 곳에 있네요. 아무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 모든 세계들은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었지만 크나큰 태양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헛된 별빛과도 같은 것.

그렇게 하늘을 활공하는 금빛 태양 아래 차갑게 식어가는 세계들을 보며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황금빛 지평선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벽함을 떨어뜨려야겠어요.”

[어떻게.]

언제나 답을 알려주던 키하노였지만 이번만큼은 반문하고 있었다.

자신만의 길을 찾은 블라드에게 있어서 나의 정답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밤하늘을 불러서요.”

가장 완벽한 가능성은 필요 없다.

저 위에 떠 있는 가장 크나큰 태양 또한.

홀로 빛나기에 모든 별들을 죽이고 마는 그것을 내려 앉히기 위해서는 모두가 빛날 수 있는 고요한 밤하늘이 필요했다.

“이 조각은 무엇이든 될 수 있죠.”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구요.”

[네가 바란다면.]

키하노의 대답을 들으며 블라드가 들고 있던 용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용에서 비롯된 나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의 조각.

또다른 조각을 통해 떠오른 검은 달을 기억한 블라드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도화지를 가져야 할 때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블라드가 무심히 던져버린 조각이 푸른 초원 위를 구르고 있었다.

저 위에 있는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그것은 그 누구라도 탐낼 가장 완벽한 조각.

그러나 이 시대의 용은 완벽함에 굴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만의 세계를 떠올리려 할 뿐이었다.

[네가 원하는 풍경을 강렬하게 떠올려라. 기억 속에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

“······기억 속에서요.”

용의 조각을 재료 삼아 용이 없는 하늘을 만들려 하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의 머릿속에서부터 떠오르는 밤하늘이 하나 있었다.

“나는 용이 없는 세계를 원해.”

이것은 검과의 대화이자 나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는 주문과도 같은 것.

“완벽함도 바라지 않아.”

그렇게 끌어올린 자신만의 세계를 현실 위에 그릴 수 있는 자를 소드마스터라 할지니.

“내가 그린 세계에서는 아무도 남을 내려다보지 못했으면 좋겠어.”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를 띄워올린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별들을 위해 그려내려는 오늘의 밤하늘이었다.

“내가 바라는 세계는 그런 세계야!”

-······!

콰직-!

힘껏 내려친 블라드의 검끝에서부터 붉은 조각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조각.

그러나 마지막 조각이 향하는 곳은 가장 완벽한 세계가 아닌 블라드가 그려내는 검디검은 밤하늘이었다.

-달을 띄웠다. 네가.

-······같이 띄운 거예요.

-그래. 같이.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 못하는 이 시대의 별들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의 완벽함마저 포기한 용이 바란 것은 모두가 빛날 수 있는 밤하늘.

“이게, 이게 도대체!”

아무도 내려다볼 수 없는 세계에서 추락하는 용이 있었다.

그 용이 휘적이는 날개 위로 먼지처럼 떠오르는 붉은 조각들도.

그 먼지들이 향하는 곳은 또 다른 용의 조각이 있는 저 하늘 위.

-맞다. 우리가 같이 했었지.

아무도 날지 못하는 밤하늘에 홀로 떠오른 검은 달이 있었다.

짙은 눈그늘의 남자를 끌어안으며 안녕이라 외쳤던 밤하늘의 달.

그 달빛이 내려앉는 이곳은 블라드가 그린 세계였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0화 9

밤하늘의 별들 (1)

하늘은 푸르렀지만, 그 아래 있는 땅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찬란한 태양은 홀로 고고했지만, 그 밑에 있는 기사들의 비명은 그만큼 고통스러웠을 뿐.

“루, 루트거 님.”

밑에 있는 존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들만의 세계.

그러나 지금, 그 아래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가가는 밤하늘이 있었다.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부관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다급히 고개를 들어 올린 루트거.

그렇게 시선을 맞춘 하늘 위에서는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못한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건······.”

푸르른 초원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그림자는 어느새 태양을 가려버린 검은 달이 만들어 낸 것.

-나는 용이 없는 세계를 원해.

짙은 눈그늘의 청년과 금발의 기사가 허락한 아이들의 달.

그리고 지금 그 달에서부터 시작한 검은색 눈물 한 방울이 푸른 하늘을 향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완벽함도 바라지 않아.

길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등을 내주었던 기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의 부름에 답해 준 아이들의 눈물도.

그 눈물들은 푸르렀던 하늘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며 조금씩 검은 물감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그린 세상에서는 아무도 남을 내려다보지 못했으면 좋겠어.

용이 활공하던 푸르렀던 하늘에서 소년이 올려다보았던 짙푸른 밤하늘로.

그 하늘 아래서는 눈 깜짝할 새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용 한 마리가 거친 포효를 내지르며 추락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이제는 날개를 잃고 인간의 형태로 돌아가고만 사르누스.

그렇게 용을 허락하지 않는 하늘은 이제는 온통 밤이 되어있었다.

“······맙소사.”

마치 누군가가 그려내기라도 한 것 같은 밤하늘.

마치 새까만 비단을 펼쳐놓기라도 한 것처럼 곱고 포근해 보이는 어둠을 보며 기사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신비로도, 신성으로도 해낼 수 없는 기이한 광경.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추고 있던 기사들은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소드······마스터?”

자신만의 세계를 현실에 그려낼 수 있는 존재. 소드마스터.

기사들이 자연스레 돌아본 그곳에는 블라드가 서 있었다.

마치 기도라도 하듯 저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검을 치켜든 블라드가.

[······훌륭하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마지막 조각으로 그려낸 지금의 전장.

그 전장을 그려낸 검 끝에서는 지금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가루들의 향연이 가득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소드마스터라 칭할 만하겠어.]

떠오르는 달과 추락하는 용.

그리고 자신만의 밤하늘을 그려낸 소드마스터.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그린 오늘의 밤하늘은 그 어떤 존재라도 다른 세계를 내려다보는 걸 허락하지 않는 그런 세계였다.

※※※※

“으아아아아-!”

용이 없는 세계로 추락하고만 사르누스에게는 더이상 날개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다시 내 앞을 가로막는 거냐! 키하노 프라우센!”

그러나 날개 없는 사르누스라 할지라도 아직 그에게는 드라굴리아라는 칭호가 남아있었으니.

용혈공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낸 마지막 드라굴리아가 저 앞에 있는 블라드를 향해 분노의 일갈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이번만큼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나의 아들이었지만 영혼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때의 기사.

또다시 마주 서고만 소드마스터를 향해 이 시대 가장 완벽에 근접한 존재가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막아라!”

“바예지드! 모두 내 앞으로!”

비록 소드마스터가 그려낸 세계에 의해 추락하고 말았지만, 사르누스는 여전히 지금 시대 최고의 강자.

아무리 정예들을 모았다 할지라도 한때나마 완벽을 담았던 그의 세계를 감당할만한 기사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이 비천한 것들이!”

완벽을 잃어버린 그가 내딛는 한 걸음은 산처럼 무겁고, 휘두르는 한 번의 검로에는 피처럼 붉은 분노가 가득했다.

그렇게 블라드를 향해 다가가려는 그의 등 뒤로는 어느새 누군가의 피로 만든 길이 새겨져 있었다.

“끝까지 내 앞을 방해해!”

사르누스의 세계는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는 세계.

고귀한 용으로 태어났기에 이 세상 모든 경의와 공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그는, 감히 자신에게 도전하는 기사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숙여라! 이 버러지들아!】

마땅히 지배할 권리가 있는 이 시대의 용이 번뜩이는 검과 함께 지금 시대의 기사들에게 명했다.

어서 고개를 조아려 나를 올려다보라고.

콰드드득-!

“크으윽!”

“이게 도대체!”

권위와 공포, 그리고 타고난 격을 통해 전해지는 용의 명령.

그 명령을 이해한 세상의 질서가 어느새 기사들의 어깨를 힘껏 짓누르기 시작했다.

“······너무 무거워!”

마치 이 세상 자체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은 그런 감각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딛고 있는 땅이 파일 정도로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용언의 무게.

그에 대항해 서둘러 자신만의 세계를 개방하는 기사들이었으나 사르누스의 세계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무겁고 진득한 것이었다.

“이 같잖은 것들. 그때랑 똑같이 발버둥을 치는구나.”

조금씩 고개를 숙여가는 지금 시대의 기사들을 보며 그제야 사르누스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일수록 점점 더 높아져만 가는 나의 세계.

상대를 숙이게 함으로써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나는 그야말로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숙이지 마!”

그러나 지금 기사들이 서 있는 이 세계는 그 누구도 남을 내려다볼 수 없는 세계.

“모두 검을 들어라!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를 생각해!”

순간, 거대한 세계에 짓눌린 기사들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황금빛 오러를 반짝이며 벼락처럼 달려드는 남자.

그 남자가 만들어내는 황금색 지평선의 끝에는 이 시대의 마지막 용, 사르누스 드라굴리아가 서 있었다.

“블라드! 네 이놈!”

콰아아앙!

마치 번개가 내려치는 것만 같은 가공할만한 속도였다.

그 속도와 함께 돌격한 황금빛 세계가 사르누스의 핏빛 오러를 물어뜯으며 사납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용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완벽함을 부수다니!”

“그딴 건 줘도 안 가져!”

밤하늘 아래서 빛나는 두 개의 세계.

드디어 마주한 아버지와 아들이 푸른 눈동자를 통해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끄드드득-!

마주친 검을 통해 서로를 보는 푸른 눈동자.

내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그의 모습에 블라드의 마음속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샘솟기 시작했다.

“······고작 잡아먹기 위해 뿌린 씨앗이었다니.”

고귀한 용의 피를 이었으나 뒷골목에서 자란 소년.

그러나 그가 간직한 출생의 비밀은 어렸을 적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끔찍하고 추악한 것이었다.

“세상에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는 사람은 아마 당신밖에 없을걸?”

뜨거운 사랑도, 한순간의 쾌락도 아닌 그저 차가운 목적에 의해서 뿌려진 나라는 존재.

태어난 순간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존재의 뿌리를 보며 블라드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뭐?”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빛나는 별빛들을 볼 수 없었을 테니까.

“······!”

예상치 못한 블라드의 말에 잠시 굳어버린 사르누스.

그러나 진심을 가득 담은 그 말은 검을 들고 있는 블라드에게 있어서 또 다른 기만이기도 했다.

[비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부터.

그러나 그런 의외성은 검 끝이 아닌 혀끝에서 나올 수도 있는 법.

“이런!”

일순간 멈추는 공기의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잔뜩 움츠린 블라드의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후우우······.”

의외의 움직임으로 선점한 가능성.

자신이 만들어 낸 공간을 노려보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는 어느새 번쩍이는 섬광이 가득했다.

“팔꿈치는 좁혀서.”

이것은 반드시 닿는다.

세상의 의지가 전하는 확실한 결말에 블라드의 검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흐아압!”

검에서부터 시작한 압력이 멈춰있던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찢어질 듯 들려오는 바람의 비명에 사르누스는 자신도 모르게 다급히 왼쪽 눈을 감고 말았다.

콰드드득-!

세차게 그어지는 섬광과 흩뿌려지는 수많은 갑옷 조각들.

그러나 정작 검을 쥐고 있는 블라드의 얼굴에는 낭패함만이 가득했다.

“······젠장!”

검은 뻗었고 분명 사르누스에 닿았다.

산산이 조각난 사르누스의 흉갑이 바로 그에 대한 증거.

그러나 블라드와는 다르게 순수한 혈통만을 타고난 사르누스의 가슴팍에는 어느새 돋아난 황금색 비늘이 가득할 뿐이었다.

“네 이놈!”

갑작스레 자신의 세계를 넘어온 블라드의 검 끝을 보며 사르누스가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 빌어먹을 검술까지!”

그러나 그의 분노는 단순히 블라드가 보였던 기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서 붙어라! 기세를 내줘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블라드의 눈동자.

색은 같았어도 자신을 힘껏 밀어내는 그 눈동자 안에서는 분명 꿈에서도 잊지 못할 키하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키하노······.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가장 완벽한 용의 부활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갈라버린 고귀한 기사가 있었다.

떼어낸 영혼을 통해 시대를 넘어온 그는 과연 본인이 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용의 가능성을 지워내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잘한다! 잘하고 있어!]

그것도 날카로운 검이 아닌 소년을 향한 믿음과 관심을 통해서.

가장 완벽한 용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기어이 그 세계를 그려내는 데 성공한 전(前)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울부짖는 용을 보며 웃고 있었다.

쾅! 콰앙! 쾅!

“으아아아!”

기세를 잡았다면 절대로 놓지 않으려는 흉폭함.

그것만큼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눈치챈 사르누스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내며 잠깐의 시간을 벌었다.

[온다! 대비해라!]

“······!”

쉼 없이 이어진 공방은 분명 치열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사르누스에게 있어서는 숨 한 번 정도는 내 쉴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네놈이 다 망쳐놨구나! 키하노!”

갈라진 키하노와 프라우센.

그중에서도 사르누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자는 황제 프라우센이 아닌 명예로운 결투사 키하노.

그런 그를 향한 흉악한 숨결 하나가 기어이 사르누스의 폐 속에서부터 맺히기 시작했다.

【사라져라!】

언어란 한 치의 혀 놀림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것.

그 언어 위에 용의 권능을 가득 담은 사르누스의 숨결이 짙푸른 밤하늘 아래서 붉게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콰가가가가강-!

비록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사르누스가 내뱉은 것은 분명 용의 숨결.

빠르게 다가오는 그 숨결을 보며 블라드가 잠시 멈칫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내린 판단은 회피가 아닌 방어였다.

“끄으으으!”

사르누스가 뿜어낸 붉디붉은 직선의 숨결이 블라드의 검을 강타하고 있었다.

만약 억지로 빗겨 세우지 않았다면 한 번에 집어 삼켜질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피해라! 더 이상 버텨서는 안 돼!]

과연 키하노의 말이 맞다는 듯 블라드의 검이 시뻘겋게 달궈지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끝까지 사르누스의 숨결을 막으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안 돼요!”

지옥과도 같은 숨결을 막으며 주욱 밀려나는 블라드가 있었다.

“아직 뒤에 기사들이 있어요!”

그런 블라드의 뒤에는 아직도 사르누스의 주박에 묶여 있는 기사들이 가득했다.

거대한 세계에 짓눌린 기사들은 지금이라도 피하라며 블라드에게 외쳤지만 정작 앞에 있는 녀석은 이를 더욱 악물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려라!]

이제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품으려 하는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그런 그를 위해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크게 외쳤다.

[꼭 용이 아니라 할지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니까!]

어린 가능성들이 흘려준 눈물 아래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기사.

그러나 점점 밀려나고 마는 그를 위해 짙푸른 밤하늘이 어서 여기를 보라는 듯 회색빛 별 하나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려라! 네가 품고 있던 세계를!]

“끄으으으!”

내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이 아니라 붓이다.

검이 아닌 세계로 싸우는 자라면 이제는 깨달아야 할 하나의 진리.

그 진리를 깨달은 블라드의 머리 위에서 밤하늘의 별 하나가 빛나기 시작했다.

“······너만큼 단단한 성벽을 나는 본 적이 없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용의 숨결을 막을 수 있는 세계.

그리고 그 세계는 이미 블라드의 영혼 안에 별처럼 박혀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빌려줘!”

이것은 검과의 대화이자 나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는 주문.

블라드가 힘껏 외친 그 주문을 따라 푸른 초원 위에서부터 불쑥 솟아오르는 세계 하나가 있었다.

쿠우우우웅!

별빛에 비쳐 반짝이는 거대한 성채.

그 웅장함에 감탄했던 소년이 자신의 세계 안에 가득 담아두었던 풍경 하나가 지금 밤하늘 아래서 재현되고 있었다.

“······뭐?”

고개를 숙이던 기사들도, 숨결을 내뱉던 용도 모두 고개를 들게 만드는 그런 광경.

어느새 불쑥 솟아오른 성채는 그 웅장함과 함께 강철로 만들어 낸 자신의 성벽을 우뚝 내세우고 있었다.

“바스토폴?”

쿠과가가강!

먼 옛날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와 함께 가장 완벽한 용의 숨결을 틀어막았다던 바스토폴의 성벽.

블라드가 자신의 세계를 통해 그려낸 성벽이 어느새 제 몸을 일으켜서는 사르누스가 내뿜는 숨결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흐으. 허억.”

짙푸른 밤하늘이 있는 이 세계는 내가 그려낸 세계.

별들이 가득한 저 하늘은 오직 나만을 위한 도화지.

그 도화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저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용이 아니야.”

그 별 중 하나가 블라드의 머리 위로 자신의 빛깔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번에 다가오는 별빛은 마치 색유리를 통해 전해지는 것만 같은 오색찬란한 빛.

그 빛은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받았을 때 보았던 그때의 빛과도 같았다.

“쇼아라의 블라드지.”

신실한 사제를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받을 수 있었던 나만의 이름.

그때의 빛을 통해 다시 한번 나의 가능성을 확인한 블라드가 천천히 검을 뻗고는 다음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기사의 명예는 내가 보증한다.”

작고도 오래된 저택.

그러나 블라드에게만큼은 언제나 제 문을 열어주는 그곳에서 한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아까 망가져 버린 방패를 든 채 조용히 결투장 위로 올라서는 중이었다.

“그러니 내게 방패를 다오.”

태어날 때는 자격 없는 곳에서 태어났으나 걷는 곳은 빛나는 곳을 향해 걷는 소년을 위해.

블라드가 새로이 그려낸 데어마르의 결투장에서는 아른슈타인의 파블로가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사르누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1화 9

밤하늘의 별들 (2)

이것은 환상이다.

왜냐하면, 지금 보이는 바스토폴의 성벽은 며칠 전 내가 직접 부수고 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보이는 성벽의 반짝임만큼은 오히려 현실의 것보다 훨씬 영롱한 것이었다.

“······소드마스터.”

현실 위에 덧칠한 누군가의 세계.

나라는 존재를 확고히 자각한 사람이 그린 이 세계는 믿는 만큼 현실이 되는 세계.

그리고 그런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하나. 검의 정점이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뿐.

“방패를 다오.”

저기 결투장 위에서 나의 발톱을 막았었던 기사가 서 있다.

소년을 위해 자신의 명예보다는 의무를 선택했던 그의 이름은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내가 너의 가능성을 지킬 수 있게.”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 존재들은 귀한 것.

그렇기에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한 기사의 방패에서부터 밤하늘의 별빛 하나가 머물기 시작했다.

“덤벼라. 사르누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평소라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존재.

그러나 블라드의 세계에서만큼은 동등한 그가 방패를 까닥이자 더는 참지 못한 사르누스가 뛰쳐 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충격.

현실에서 받아냈다면 사지가 찢겨나갔을 그 충격에 파블로가 뒤로 주욱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으윽!”

방금 와닿은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완벽에 근접한 사르누스의 세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맹세한 의무를 짊어진 파블로의 무게만큼은 그의 세계보다 아주 조금은 더 무거운 것이었다.

“······너는 자격이 있다.”

똑같은 금발과 똑같은 푸른 눈.

그리고 그때와 같은 결투장에 서 있는 파블로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사르누스를 보며 그날의 소년을 떠올렸다.

“이 전장은 충분히 명예롭고.”

쾅! 콰앙! 쾅! 쾅!

사르누스가 내지르는 검격 한 번에 파블로가 들고 있던 방패가 끊임없이 깨어져 나갔다.

그러나 그가 들고 있는 방패는 현실의 것이 아닌 의지로 만들어진 세계.

방패를 들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밤하늘에 떠 있는 저 별은 영원히 파블로의 것이었다.

“······그러니 너는 너의 이름을 말해도 좋다!”

다시 한번 산산이 조각난 방패 사이에서부터 순간, 파블로의 견갑이 밀쳐 들어왔다.

방어를 중시하는 기사가 자신의 방패조차 내던지며 만들어 낸 단 한 번의 순간.

“크윽!”

사르누스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파블로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장 오래된 용조차 놀라게 만드는 기사의 기지(機智).

그러나 사르누스가 내지른 경악은 자신을 밀어내는 파블로가 아닌 그의 등 뒤에서부터 달려드는 사내를 향한 것이었다.

“흐아아압!”

성벽 같은 사내의 뒤에서부터 달려드는 그 기사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

여태껏 파블로가 가리고 있던 그의 오러가 사르누스의 어깨를 벼락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미처 돋아나지도 못한 황금빛 비늘.

그렇기에 새겨지고 만 상처 위에서 붉은 핏줄기 하나가 짙푸른 밤하늘 위로 솟구쳤다.

“블라드! 네 이놈!”

남의 피는 탐했어도 자신의 피는 내놓지 않았었던 탐욕스러운 용.

그 붉은 핏줄기에 분노한 사르누스가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블라드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저건!”

대신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는 어린 세계수.

어느새 데어마르의 결투장이 아닌 엘프들의 숲속에 서 있게 된 사르누스는 저 앞에서 자신에게 시위를 겨누고 있는 군청색 머리의 엘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의 푸르름은 모두 선조들의 눈물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치켜뜬 왼쪽 눈에 오망성을 환히 띄운 바라디스.

“그러니 이제 조금은 받아내도 되겠지.”

어머니 세계수를 잃은 채 불타던 자신들의 숲을 떠나야만 했던 엘프들.

대를 이어 쌓이고 만 그들의 분노가 이 시대의 엘프가 메긴 화살 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은!”

타앙-!

들렸을 때는 쏘았고 보였을 때는 이미 다가와 있었다.

그만큼 빠른 바라디스의 화살은 수백 년을 참아왔던 엘프들의 화살.

그 화살에 머물러 있던 수많은 정령이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은 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크으으윽!”

콰드드득-!

마치 자신이 내뿜었던 용의 숨결과도 같이.

온통 붉고, 푸르고, 짙푸른 녹색인 것들이 찬란히 빛나며 사르누스의 검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블라드-!”

그러나 사르누스는 이 오색찬란한 색깔들의 향연에서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단 하나의 색깔만큼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이 금색으로 빛나는 기사의 머리카락이었다.

“흐으아아아!”

화살처럼 쏘아졌으나 어느새 검의 모습으로 다가온 바라디스의 화살.

그 화살과 함께 쏘아진 이는 세계수의 수호자 블라드였다.

“이 같잖은 술수······!”

가장 날카로운 용을 막고 사특한 존재들을 막아주었던 세계수의 기사.

그를 기억하고 있는 정령들의 별빛이 어느새 블라드의 검 끝에 맺히고 있었다.

“이게 고작 같잖은 술수로 보여?”

끄득! 끄드드득!

세차게 마주한 둘의 검이 점점 사르누스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완력이라면 절대 지지 않을 순혈의 용 사르누스였지만 이미 블라드의 곁에는 수많은 정령들이 그 작은 손을 보태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판단했으니까 당했던 거겠지. 이 일격필살의 검술에!”

의외의 움직임으로 가능성을 선점하고 한발 앞서는 통찰력으로 전장을 통제하는 검술.

명예로운 결투사가 창안한 그 검술이 지금 블라드의 세계 안에서 완벽히 구현되고 있었다.

“지금이에요!”

“뭐?”

티이이잉-

정령들이 붙잡고, 블라드가 검으로 막아 세운 가장 오래된 용.

그 용의 뒤에서부터 맑디맑은 검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로군.”

마치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튕긴 듯한 그 소리.

그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만 해도 숲이었던 곳이 푸르른 목초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역시 너는 최고의 용몰이꾼이다. 블라드.”

지금 떠오르는 별은 활화산과도 같은 세계.

가장 단단한 용조차 갈랐던 루트거의 검이 어느새 깊은 자신의 세계에서부터 거대한 분노 한 줄기를 뽑아내고 있었다.

우르르르릉-!

검을 들어 올릴수록 강해지는 지면의 울림.

그와 함께 새빨갛게 터져 나오는 용암들을 보며 사르누스의 두 눈이 커져갔다.

“내 이름은 바예지드의 루트거다.”

북부를 짓밟았던 용들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 발자국의 끝은 결국 수많은 북부인을 죽음 속으로 내몰고 말았으니.

“북부의 핏값을 받아낼 루트거 바예지드!”

오직 스스로를 깊게 관조할 수 있는 기사만이 쓸 수 있는 세계.

아무리 용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삼킬 것만 같은 시뻘건 용암들이 루트거의 검 끝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이런 빌어먹을!”

날개가 있지만 펼칠 수 없고, 두 발이 있지만, 꽁꽁 묶여버리고만 사르누스.

그런 그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찬란히 타오르는 루트거의 세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용암을 온몸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황금색 용.

칼날보다 매섭고 용암보다 뜨거운 루트거의 세계가 어느새 완벽했던 황금색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이제야 느껴지는 뜨거움 때문일까.

앞에 있는 블라드를 마구잡이로 밀쳐낸 사르누스는 어느새 또 다른 세계에 다다라 있었다.

“여긴 또 어디냐!”

앞에 보이던 세계수도, 뒤에서 날뛰던 활화산도 없는 세계.

이번에 블라드가 그려낸 세계는 온통 새하얀 눈으로 가득한 북부의 설원이었다.

“가장 빠른 용을 죽인 곳.”

가장 빠른 용. 린드부름을 죽인 설원.

“이곳 정도라면 당신 마지막에 어울리지 않겠어?”

“블라드! 네 이노옴!”

그 설원 위에 홀로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사르누스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렷다!”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바예지드의 루트거, 그리고 아우슈린의 바라디스까지.

모두가 훌륭한 기사들이었지만 사르누스에게 덤벼들기에는 역부족인 기사들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를 당장 멈춰주마!”

그러나 블라드의 세계 안에서만큼은 얼마든지 빛날 수 있는 별과도 같은 기사들.

그리고 지금 하얀 설원 위에 있는 밤하늘에서는 또 다른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너를 죽여서!”

블라드를 향해 달려드는 사르누스의 등 뒤로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가장 빠른 용인 린드부름보다 더욱더 빠를 수밖에 없는 완벽에 근접한 용의 돌진.

[······보면서 판단하면 늦는다!]

단단하고, 빠르며, 날카롭고, 거대하다.

몰락한 잔재들을 통해 하나하나 나뉘어 있던 특성들은 본래 가장 완벽한 용이 지니고 있던 것들.

[예측해서 대응해라!]

“······!”

그리고 지금 블라드를 향해 달려드는 용은 이 시대 가장 완벽한 근접한 사르누스였다.

“죽어라!”

분노에 의해 잔뜩 달아오르고 만 그의 세계가 드디어 블라드를 향해 거칠게 포효했다.

콰가가강-!

“크으으으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무엇보다 날카롭게.

그 공격을 겨우 예측해낸 블라드였지만 막았다 해서 물리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용으로 낳아줬더니 소드마스터가 되다니!”

기세를 잡았다면 절대로 놓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사냥감을 대하는 포식자의 자세일 테니.

쾅! 쾅쾅! 쾅!

물러나는 블라드를 향해 쉼 없이 들이치는 거대한 사르누스의 분노.

단단한 그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핏빛 오러가 어느새 블라드의 별빛 어린 검을 잡아 세우며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쓰레기들 속에서 자라면 어찌 될까 뿌려봤더니! 감히 내 발목을 잡아!”

날카로운 검보다 더 아프고 불어오는 설한보다도 더 차갑다.

지금 들려오는 사르누스의 말은 블라드에게 있어 그런 것이었다.

“네까짓 게 도대체 무언데 완벽함을 향한 나의 과업을 막는 거냐!”

내 존재의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내 존재의 의미는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난 소년을 향해 그의 아버지가 어서 죽어버리라 외치고 있었으니까.

“너를 낳는 게 아니었다.”

“크으으······.”

“너는 실패작이야!”

어느새 새하얀 빙벽까지 몰려버린 블라드의 목덜미로 사르누스의 검이 다가왔다.

더는 피할 곳 없는 막다른 곳까지 몰려버린 블라드.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사르누스의 검은 마치 낳아준 것도, 그리고 죽이는 것도 모두 내 권리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였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태어난 소년.

가만히 서 있으면 빠져들고 마는 진창 위에서 자라난 블라드는 어쩌면 실패작일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나를 실패작이라고 하는 거야.”

드드드득-!

그러나 뒷골목에 서 있던 소년은 언제나 별을 바라보던 아이였다.

그 별은 길을 잃은 나를 위한 유일한 이정표.

그리고 함께 그 별을 바라보던 소녀는 나를 지탱해주던 유일한 지팡이.

“너는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잖아!”

힘껏 펼쳐낸 블라드의 왼손에서부터 붉은 실타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그 실타래는 저 위에서 비치는 별빛과 함께 하나의 형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새하얀 설원 위에 빛나는 한줄기의 별빛.

그 별빛은 노인의 꿈으로 만들고 소녀의 눈물로 샀으며.

또한, 소년의 의지로 휘두르는 장식 없는 검이 비치는 별빛이었다.

“여기서 너를 죽이고! 나는 쇼아라로 돌아간다!”

오른손에는 별빛 어린 검을, 왼손에는 장식 없는 검을.

두 개의 검을 휘두르는 블라드의 세계가 기어이 사르누스의 눈을 스치며 푸르른 눈물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크으으악!”

장식 없는 검이 스쳐 간 자리에 생겨난 사르누스의 비명.

그 비명이 시작된 곳은 자신의 한쪽 눈을 잃어버린 사르누스의 세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리겠어!”

콰르르르릉-!

분노에 미쳐 날뛰는 사르누스를 보며 블라드가 재빨리 별빛 어린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이 휘두른 궤적은 하얀 설원 위에 기다란 선을 만들며 또 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죽이고 싶디면 들어와 봐라!”

블라드의 거친 도발에 천천히 선을 넘어가는 가장 오래된 용.

그러나 타오르는 분노에 미쳐버린 그는 모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블라드를 향해 한 발자국씩 걸어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블라드가 품고 있던 세계 중 가장 깊으며 바라보고 있던 별빛 중 가장 빛나는 곳을 향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들어와 보라고-!”

그 세계는 선 하나로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는 세계.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 하나를 경계로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인생이 나뉘고 마는 그런 곳.

“여기 와서 내가 누군지 보란 말이다!”

이곳은 장미의 미소.

붉은색이 가득한 창관.

그리고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한 소년의 둥지.

블라드의 밤하늘 아래서 빛나는 쇼아라의 별빛이 지금 가장 오래된 용을 이끌고 있었다.

2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2화 2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화려한 빛이 맴도는 도시로 들어와 그곳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건너서.

별 하나가 머무른 초라한 대장간을 지나 어느덧 어두컴컴한 뒷골목에 이른 사르누스.

“······그야말로 시궁창에 어울리는 모습이로군.”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추레한 뒷골목에 서 있는 4층짜리 건물이었다.

창녀들의 기사와 쇼아라의 장미가 지은 뒷골목의 등대.

우뚝 솟은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미의 미소를 본 사르누스의 입가에는 진한 비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이런 곳에서 자랐으니 자신이 용인 것도 잊었겠지.”

소년에게는 높고도 안락한 곳이었지만, 그에게는 비루할 뿐인 뒷골목의 창관.

그러나 분노에 눈이 먼 그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 지나온 길에서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던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굶주림에 지쳐 있던 아이.

도둑질을 하다 걸려 얻어맞던 아이.

그리고 죽은 어머니를 얼은 땅에 묻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울고 있던 아이까지.

“그 망가진 가능성. 내가 회수해줘야겠구나 아들아.”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주지 못했기에 생겨나고만 수많은 눈물들.

그러나 사르누스는 이 깊은 내면까지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소년의 슬픔을 봐주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이 원하는 모습만을 찾을 뿐이었다.

끼이이익-

내 피를 이은 아들에게 그저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바랄 뿐인 이 시대의 용.

그 용을 향해 장미의 미소가 자신의 품을 열기 시작했다.

“블라드······.”

“들어오시지.”

이곳은 장미의 미소, 소년의 둥지.

있어야 할 곳에 있어 주지 않았던 아버지를 대신해 블라드를 품어주었던 곳.

“이제 끝을 내자고.”

밤이기에 빛날 수 있는 도시의 뒷골목.

치켜뜬 블라드의 눈동자와 함께 창관의 불빛이 환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다.”

사르누스가 천천히 밟고 오르는 현관의 계단 너머로 블라드가 검을 뽑고 있었다.

장식 하나 없었음에도 별처럼 빛나는 그것은 분명 블라드의 검.

그렇게 검을 뽑아낸 블라드의 등 뒤에는 수많은 양초들이 자신들의 색을 밝히며 블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너의 이름을 말해라.”

“이 빌어먹을 놈이······.”

이곳은 나의 가장 깊은 세계. 내가 창조한 공간.

그곳을 들어오기 전 너는 나에게 존재의 증명을 해야만 한다.

“감히 낳아준 은혜도 모르고 끝까지 기어오르다니.”

용과 인간, 공작과 기사,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그 모든 것들을 떠나 오직 검으로만 대화하자는 블라드의 말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사르누스의 이성 한 줄기가 끊어지고 말았다.

“감히 이 사르누스 드라굴리아에게!”

크아아아아-!

커다란 포효와 함께 가장 오래된 용이 블라드를 향해 뛰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용의 이빨과 함께 세운 핏빛 오러.

그 오러를 통해 마땅히 내려다볼 자를 보는 사르누스의 눈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 여정에서의 마지막 대결이다. 블라드.]

그리고 그 눈을 바라보던 블라드도, 그리고 키하노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가 우리가 함께한 여정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후회 없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봐라.]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결투의 끝은 후회 없이.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음으로 시작된 둘의 결투가 수많은 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시작됐다.

콰아아아앙-!

“크으으윽!”

건물 전체를 울리는 굉음이었다.

아무리 그려낸 나의 세계라 할지라도 잠깐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그런 강력한 울림.

그 울림을 정통으로 받아낸 블라드가 끝도 없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디 또 한 번 지껄여봐라!”

충격에 휘청이고 마는 블라드를 보며 사르누스가 거친 함성을 내질렀지만 검의 대화는 그저 힘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격해라!]

다시금 들어오는 사르누스의 검이 블라드의 시야에 잡혔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한 블라드의 눈동자로.

타앙-!

“······!”

끔찍한 기세로 내려쳐 지던 사르누스의 검이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찰나도 되지 않는 그 순간에 일점의 균형을 비틀어내는 신기(神技).

그 기술을 일개 기사도 아닌 시대의 정점에게 구현해낸 블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끼릭!

튀어 오른 검을 억지로 붙잡아내려는 사르누스의 완력이 완고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이미 흐릿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런!”

점에서 선으로.

멈춰 있던 블라드가 어느새 바닥을, 벽면을 가르는 황금색 선이 되어 사방팔방을 누비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아무리 보아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검의 본질 자체를 속도에 기반했기에 가능한 일격필살만의 움직임.

그 모습은 마치 먼 옛날에 보았었던 소드마스터의 모습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콰지지직-!

“크으으윽!”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가능성을 선점해라.

그 묘리에 충실히 따른 블라드가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사르누스의 옆구리를 강타하며 나타났다.

“치잇!”

“······네 이놈!”

그러나 블라드의 살기는 짙었고 용의 본능은 날카로웠다.

보지는 못했어도 예측할 수 있었던 블라드의 움직임은 어느새 핏빛 오러에 막혀 다시금 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감히 키하노의 검술 따위로 나를 농락해!”

완벽을 추구하는 드라굴리아의 검술은 쉽게 흔들리지 않은 무게를 추구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만 블라드를 향해 무게 어린 사르누스의 검이 찾아들고 있었다.

“내 핏줄을 타고났으면서도 감히!”

거대한 산과 같은 무게로.

그렇게 블라드를 짓누르려는 사르누스의 세계가 머리 위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쾅! 쾅쾅! 쾅!

“으으윽!”

한 번의 검격이 들어올 때마다 블라드의 온몸이 격하게 진동했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감히 감당하기 힘든 무게.

휘두르는 검 한 번에 이리저리 휘청이고 마는 블라드의 모습이 그 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빠져나와야 한다! 기세를 넘겨줘서는 안 돼!]

“끄으으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연격기.

그 사이에서 점점 넘어가기 시작하는 흐름을 눈치챈 블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흐아아아!”

여전히 나를 짓누르려는 거대한 세계.

그 세계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다음을 향한 전진뿐.

“이런!”

스치기만 해도 지워질 것 같은 강맹한 기세를 향해 블라드가 뛰어들어갔다.

분명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결투의 흐름을 비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강제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콰드드득-!

“크윽!”

어깨를 깊게 파고드는 사르누스의 검격에 드워프들의 갑옷이 깨져 나갔다.

유스티아에게 배운 갑주술로도 차마 상쇄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통과 함께.

그러나 지금의 고통과 상실은 분명 블라드를 사르누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각자의 눈동자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

그렇게 바라본 사르누스의 푸른 눈동자 안에서 블라드가 내지르는 일격이 작렬했다.

콰지지직-!

“크으으으!”

터져나가는 흉갑과 함께 황금빛 비늘들이 반짝였다.

그것은 루트거의 세계로 잔뜩 금이 갔었던 용의 비늘이 만들어낸 파편이었다.

“나는 너의 아들도 아니고!”

콰직!

“실패작도 아니야!”

콰드득!

날카롭게 번뜩이는 블라드의 검격이 계속해서 사르누스를 강타하고 있었다.

“네가 부르는 모든 이름에는 내가 없단 말이다!”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강맹하고 내려치는 일검 하나하나는 매섭다.

이미 부상당한 사람이 내지르는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

마치 번개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지금의 공격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오직 상상하기에 가능한 저 먼 곳의 경지를 끌어낸 것이었다.

“으으윽!”

블라드가 만들어 낸 이 세계는 할 수 있다 믿기에 가능한 세계.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할지라도 진창 위에 있던 소년이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소중히 품고 있던 상상력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었다.

“네 이놈!”

아주 잠깐 멈춘 공격에 서둘러 블라드를 떼어낸 사르누스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나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던 이 순간까지도 오롯이 블라드가 선택한 것이었다.

드드드득-!

땅이 울리고 있었다.

아니, 블라드가 만든 세계가 울리는 중이었다.

“너는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조용히 내쉬는 블라드의 입김이 하얗게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곳이 차가워서가 아닌 내뿜고 있는 블라드의 숨결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고작 닿지도 못할 완벽함을 위해서.”

그렇게 달궈진 심장은 내 앞에 있는 사르누스를 향해 똑바로 매겨져 있었으니.

잔뜩 움츠린 블라드의 온몸이 마치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했다.

“그래! 어디 한번 와 봐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기회를 포착하는 일격필살의 검술.

그러나 지금의 블라드는 그 예측마저 뛰어넘는 속도로 사르누스를 가르려 하고 있었다.

[그래. 너의 길을 가 봐라.]

이것은 배운 것이 아닌 내가 터득한 나만의 길.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 길을 블라드가 지금 키하노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너에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사르누스.”

언젠가는 나 또한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일 수 있기를.

별처럼 빛나던 소년의 꿈이 지금 자신을 가로막는 시대의 악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네가 내놔야 할 차례야!”

콰가가가강-!

빛처럼 돌진하는 블라드의 등 뒤에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둥지를 떠나는 새를 위한 장미의 미소의 마지막 배려였다.

“내 시대에 더 이상 용은 없어!”

“끄으으으으!”

한 줄기의 섬전, 뻗어나가는 벼락.어쩌면 10년 후의 내가 되어야만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강맹하고도 올곧은 일격.

“그렇게 하기로 내가 정했다!”

“끄아아아아!”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의무,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모두 끌어모은 블라드의 일격이 조금씩 사르누스의 심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블라드! 이 자식-!”

“그러니까 그만 죽어!”

가장 오래된 용이 품고 있던 완벽한 조각들을 향해.

그러나 그 조각들을 부수기 위해서는 블라드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멈추지 마라!]

“······!”

순간 블라드의 손잡이를 미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이제 조금이면 되니까!]

갈색 머리를 가진 빛나는 기사.

빛바랜 프라우센이 아닌 명예로운 검투사 키하노가 어느새 블라드와 함께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키하노! 이 빌어먹을 놈들이!”

전(前) 시대의 소드마스터와 현(現)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함께 내지르는 일격.

시대를 뛰어넘는 그 일격의 끝에서 완벽함을 향한 용의 욕망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나라면 몰라도 세 개의 조각이라면 힘들 거다.]

이제야 마주 볼 수 있는 키하노의 눈을 보며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 큰 파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운 사람을 드디어 마주했기에 떨릴 수밖에 없는 울림 같은 것이었다.

쩍! 쩌저적!

사르누스의 비명과 함께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하는 용의 조각.

그러나 블라드는 쪼개지는 조각의 감촉보다 자신의 왼팔을 타고오르는 검은 번개의 형상에 더욱 경악하고 있었다.

“키하노?”

가장 완벽한 용을 갈랐던 루가 족의 신비.

그 신비가 지금 이 시대에 현현한 소드마스터에 의해 다시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이런 건 원래 한 번 해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이지.]

완벽한 조각을 부수기 위해 찬란히 빛나는 너의 영혼을 가르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너희를 힘들게 하는 완벽한 조각은 결국 우리의 세대에서 끊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수고했다.]

“키하노-!”

다하지 못한 의무를 위해, 막지 못한 비극을 끊기 위해.

돌아온 소드마스터가 완벽함이 내지르는 비명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내질렀다.

콰지지직-!

별이 부서진다.

내가 바라보던 저 별이 붉게 빛나는 완벽함과 함께.

“안 돼!”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해 찾아주었던 유일한 별.

용으로 태어난 나를 기사라 말해주었던 키하노.

그가 지금 웃는 얼굴과 함께 나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

콰르르릉-!

요란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현실의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넘어가는 검은 달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 밤하늘 뒤로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오늘의 태양.

그렇게 천천히 걷히는 밤하늘 아래로 한 줄기의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빛이 가장 먼저 찾아든 곳은 힘없이 앉아 있는 블라드의 등 뒤였다.

“······잘했다.”

블라드가 앉아 있는 곳에는 심장이 꿰뚫린 채 죽어가는 사르누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본래의 푸른색이 아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맑은 갈색의 빛이었다.

“키하노.”

사르누스가 죽고 만 육체에 자리 잡은 키하노.

그러나 창백해진 그의 안색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정말 훌륭했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키하노.

“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용으로 태어났지만, 너만의 길을 걸은 블라드.”

그리고 지금 그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어쩌면 블라드가 평생동안 듣지 못했을 그런 말이었다.

“······이렇게 다들 떠나가면 어떡해요? 나만 남으면요?”

난생 처음 마주하는 아버지의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년.

그 소년을 보며 키하노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별은 완성이자 또다른 약속이지.”

내리쬐는 햇빛이 비추는 둘의 머리색이 꼭 닮아 있었다.

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러니 이리 와 봐라.”

점점 희미해져 가는 눈동자의 빛.

그러나 웃고 있는 키하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블라드에게 팔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너를 안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태껏 같은 세계 안에 있었지만, 서로의 온기만큼은 나눌 수 없었던 둘.

그러나 지금만큼은 안을 수 있는 키하노와 블라드가 서로를 껴안기 시작했다.

“고마웠어요. 키하노.”

“······그래. 그렇게 보내는 거다.”

겨울 날 시작했던 우리의 여정은 여기까지.

그리고 마주한 끝은 후회가 없도록.

그렇게 껴안은 둘의 머리 위로 밤하늘 사이로 태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이 품은 별.

별이 품은 소년.

그렇기에 둘은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높디높은 밤하늘이 바라보는 둘의 이별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본편 끝-

작가의 말

본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의 휴식을 거친 후에 외전으로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에서 시작해 봄에서 끝난 블라드의 여정을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3화 6

외전- 여름의 시작

그해의 봄은 너무나 가혹한 시절이었다.

와닿는 공기는 따뜻했으나 딛고 있는 땅은 피로 인해 질척였고, 밭을 갈아야 할 농부들은 쟁기 대신 창을 들어야만 하는 그런 계절이었으니까.

가장 오래된 용이 만들어낸 환란(患亂)의 시기.

그러나 피로 물든 대지라 할지라도 자연은 여전히 싹을 틔웠고 이제는 해를 지나 새로운 여름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변함이 없네.”

서부의 도시 트리노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곳의 저택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얻어 입기라도 한 듯 큰 망토를 휘적이며 걸어오는 소녀는 여름의 빛깔을 닮은 초록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3년 만인가?”

떠나기 전보다 부쩍 커진 키는 소녀의 눈높이를 높였다.

그러나 소녀와는 달리 여전히 그때와도 같은 저택의 풍경은 아주 잠시나마 샤를을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하고 있었다.

“······.”

저기 보이는 정원에서는 어머니가 화초를 돌보고 계셨다.

바로 앞에 있는 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빠들이 수련하던 연무장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쭉 따라 걸어가면 아버지가 계셨던 라브노마의 홀이 있었다.

“치워.”

“네.”

이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가 언제나 앉아 계셨을 것만 같던 그런 장소.

그러나 지금 그 홀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빛바랜 가이다르의 문장이었다.

끼이이익-

병사들이 다급히 걷어낸 깃발의 뒤로 저택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화사한 여름과 맞지 않게 온통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굴러다니는 먼지와 함께 비릿하게 퍼져오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제 왔나. 애송이.”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자리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

정오의 태양조차도 차마 비추지 못한 그의 입가에서는 쉼 없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줄기가 가득했다.

“지그문드 가이다르.”

아버지의 원수이자 가문의 원수.

그리고 가장 오래된 용이 일으킨 대륙 전쟁의 마지막 패배자가 될 지그문드 가이다르.

그런 그를 보는 샤를의 눈에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 아들은 죽었나?”

“아직은.”

“흐흐. 그 녀석도 참 내 말을 안 듣는군.”

깊게 뉜 등과 함께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삶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깊고도 무거운 한숨.

아마 그것은 지그문드가 뱉어낼 수 있는 마지막 삶의 흔적일 것이다.

“곱게는 못 죽을 거라고 자살이라도 하라고 했더니만.”

“이슈트반의 신변은 이미 니다벨리르가 확보했다. 지그문드.”

길게 깔린 융단을 걸어 오직 군주만이 오를 수 있는 홀의 계단을 올라가는 샤를 라브노마.

그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렇게 날이 선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너 하나뿐이야.”

마지막 라브노마가 된 소녀가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가이다르에게.

그렇게 뻗어낸 검 끝은 어느새 지그문드의 목덜미에 멈춰서 둘의 세계를 날카롭게 잇고 있었다.

“아버지를 속인 비겁한 찬탈자.”

“쿨럭, 쿨럭!”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당한 대가를 지지 않으려는 겁쟁이.”

거짓된 기습으로 소녀의 저택을 피로 물들인 서부의 찬탈자.

그리고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패배까지도 거부하겠다는 듯 독을 마시고만 지그문드를 보며 샤를의 미간이 구겨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

그러나 그런 그라 할지라도 샤를은 승자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 끝은 지금이라도 당장 지그문드를 찌르고 싶다는 듯 부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의무를 다하려 하는 것은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비굴하게 죽지 않기 위해 독을 삼켰지만 결국 승자의 배려에 만들어지고 만 마지막 순간.

그 순간 속에서 지그문드는 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거대한 풍채 뒤로 겁에 질려 있던 드워프들을 가리던 그 날의 기사를.

“······호르헤.”

이기리라 확신했건만 결국 나는 패배자가 되었고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나의 군사들이 데어마르를 넘지 못했을 때부터? 아니면 라브노마의 깃발을 불태웠을 때부터?

“결국, 네놈이 나를 찌르는구나.”

아니, 그것은 아마 블라드라는 녀석을 만났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차가운 뒷골목에서 태어난 북부의 기사를 만났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네가 키워낸 검으로.”

후회로 가득한 마지막 유언을 뱉어낸 지그문드의 머리 위로 시퍼런 검날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검의 이름은 샤를 라브노마.

저 검을 이곳까지 데려온 기사의 이름은 블라드 아우레오.

그리고 그 검을 키워낸 것은 의무 대신 인의를 선택한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서걱-!

검에서 검으로, 세계에서 세계로.

그렇게 이어진 소녀의 검 끝이 너무나 아팠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내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지그문드의 머리와 함께.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

“아 씨. 이건 뭐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냐.”

넓고도 푸른 밀밭과 그 뒤로 늘어서 있는 오두막집들이 가득한 자그마한 시골 마을의 풍경.

멀리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거 끝은 나는 거예요?”

아직 여물지 못한 여름의 밀밭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그 위로 삐쭉 튀어나온 금발 하나만큼은 잘 익은 밀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이놈아. 입 놀릴 시간에 손을 놀렸으면 진작에 끝났겠다.”

“뭘 벌써 끝나요.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구만.”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등에 검집을 둘러맨 사내.

그것만 빼고는 평범한 농부의 차림을 하고 있던 블라드가 고개를 쑥 들어 올리고는 너른 밀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면은 사람을 써야 한다니까.”

“사람을 쓰면 돈이 나가잖냐.”

“돈 많이 벌었잖아요. 이번에도 한 몫 크게 받은 거 내가 다 알거든요.”

계속해서 투덜대는 블라드의 옆에는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라문드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농부였다는 듯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 모습이었지만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데어마르의 전선에서 쉴 새 없이 적들을 썰어대던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벌었다고 무턱대고 써 대면 거지꼴을 못 면하는 거야.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절약의 미덕이라는 걸 몰라.”

그 말과 함께 쯧쯧하고 혀를 차대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가 질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아낄 걸 아끼셔야지. 그러다가 늙은 몸만 축나는 거예요.”

“거참 시끄럽네! 하여간 누가 도시 놈 아니랄까 봐 입만 살아서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호통을 질러대는 라문드.

그러나 블라드의 말이 맞다는 듯 어느새 그의 등 뒤에는 뉘엿뉘엿 해가 져가고 있었다.

“제가 도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시골의 해가 짧다는 건 알거든요?”

조금씩 넘어가는 해와 함께 노을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라문드의 장원.

그 아래에 서 있는 블라드가 점점 점점 어두워지는 주위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잡초는 인제 그만 뽑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하긴. 너 같은 놈한테 농사일을 도우라고 했던 내가 잘못이었지.”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도 없던 도시 녀석에게 일을 시켰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결국, 정해진 일과는 채우지 못했고 투덜거리던 블라드의 말만을 받아준 채 끝나버린 오늘이었다.

“가자. 빵값은 못했어도 수프 정도는 내주마.”

“흐흐.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라문드는 블라드에게 쟁기를 쥐게 한 것을 딱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잠시나마 검을 내려놓고 있던 블라드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

“너 몇 살이니?”

“4살.”

“······그런데 손가락은 왜 다섯 개를 피고 있는데.”

음식이 가득 놓인 식탁 아래서 어린 소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혹시 조금 있으면 다섯 살이 되는 거야?”

“아니다. 4살이 된 지 이제 한 달도 안 됐어.”

비록 틀린 대답을 했지만 누가 보아도 꼬집고 싶어지는 통통한 볼을 지닌 아이.

라문드는 자신의 가장 어린 손녀를 들어 올리고서는 무릎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아직 어려서 손가락을 마음대로 못 접는 것뿐이야.”

“아하.”

살이 오른 볼만큼이나 쥐고 있는 주먹도 통통해 보였다.

아마 그만큼 잘 먹고 잘 자랐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그마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전쟁이 빨리 끝나서 다행이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수확량을 기대해봐도 좋겠어.”

어느새 식탁에는 라문드의 며느리들이 가져다 놓은 하얀 빵들이 가득했다.

사제 안드레아와 만나고서야 처음으로 맛볼 수 있었던 갓 지은 하얀 빵이었다.

“그러게요. 황금공이 그렇게 빨리 항복을 할 줄은 몰랐어요.”

“의무나 명예보다는 장사치처럼 손익을 우선시하는 자라고 했었지. 아마 이기기 힘들겠다는 계산이 빨리 섰던 모양이다.”

용혈공 사르누스의 발호로 시작된 대륙 전쟁도 2년째가 된 지금, 그 전쟁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개전 초기만 하더라도 북부를 집어삼킬 듯 강맹한 기세를 지니고 있던 중앙군이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진 불처럼 시들해져 가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전쟁 초기에 구심점을 잃어버린 영향도 크긴 하겠지. 너 때문에 말이다.”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하겠죠.”

북부의 강렬한 저항과 함께 곳곳에서 일어서기 시작한 이종족들.

그리고 그동안 중앙의 귀족들에 눌려 지내던 궁정공의 세력까지 합세해 대항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변수였다고 한다면 블라드와 사르누스간의 결투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대륙의 모두를 피로 물들였을지도 모를 전쟁.

그 전쟁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내 때문이었지만 지금 그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어린 소녀에게 잘게 찢은 빵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올해부터는 굶는 애들이 별로 없겠어요. 그렇죠?”

“······그렇지.”

모두가 칭송하는 대륙의 영웅.

건국왕 이후로 새로이 등장한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은 그저 어린 소녀에게 먹일 빵을 건네는 평범해 보이는 청년일 뿐.

“그나저나 루트거 님의 계승식에는 언제 갈 생각이냐? 너 정도라면 미리 가 있어 주길 바랄 텐데.”

“가야죠.”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빵을 한껏 욱여넣은 블라드가 라문드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가서 볼 사람들도 많으니까.”

“어쩔 거냐. 같이 갈까?”

라문드의 장원은 도시 바르나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렇기에 계승식이 있을 스투르마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블라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저는 거기 가기 전에 먼저 쇼아라부터 들러야 해서요.”

“왜? 굳이 내려갈 필요가 있나?”

바예지드 백작령의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쇼아라.

그곳으로 다시 내려가 봐야 한다는 블라드의 말에 라문드가 의아해했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어디 갈 때는 간다고 말을 해야 하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해놔서.”

“쯧쯧쯧. 아주 꽉 잡혀 사는구먼.”

날카롭기만 했던 소년에서 이제는 웃을 줄 아는 청년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떠나야만 하는 작은 둥지가 아닌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둥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지 말고 오도록 해라. 너 정도 이름값이면 한 달 전에는 도착해줘야 준비하는 쪽도 편할 테니까.”

“알겠어요.”

라문드의 말에 끄덕거린 블라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지금의 광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말랑거리는 빵,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수프, 그리고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까지.

“······.”

예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평화로운 풍경들.

그러나 그 풍경들을 눈에 가득 담은 블라드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째서인지 모를 쓸쓸한 심정이 머물고 있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4화 6

외전- 구슬치기

라문드의 장원을 떠나 쇼아라로 향하는 아침.

여름이어도 서늘한 초원의 공기는 초원 곳곳에 희미한 안개들을 뿌려놓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오직 북부의 초원이기에 느낄 수 있을 청량한 여름의 공기.

그러나 누아르는 그저 가만히 선 채 저 앞에 보이는 언덕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꿈쩍도 없이 멈춰 선 누아르를 보며 무슨 일인가 싶었던 블라드는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눈가를 좁혀 보았다.

검은 말과 금발의 기사가 같이 바라보는 초원의 언덕 위.

마치 초록색 파도처럼 솟아오른 그곳에는 어느새 따라왔는지 모를 야생마의 무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거 네 친구들 아니냐.”

-푸르르륵.

블라드의 말을 들은 누아르가 괜스레 딴청을 하며 땅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지금은 검은 말 누아르였지만 블라드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는 초원의 아들이었던 야생마 누아르.

가장 단단한 용인 데스웜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무리가 지금 바르나의 초원을 따라오며 자신들의 옛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따라오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말에 누아르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보이는 야생마들의 무리를 제외한다면 오직 둘 뿐인 초록색 바다 위.

그 위에서 누아르는 자신이 속해있던 예전의 세계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해 보였다.

딸랑, 딸랑.

그렇게 멈춰서 있던 블라드와 누아르의 등 뒤로 자그마한 방울 소리들이 들려왔다.

조금씩 걷혀가는 아침의 안개를 가르며 나타나는 짐을 실은 수많은 수레들.

-워워.

-앞에 계신 분은 누구시오?

길게 이어진 수레의 행렬을 몰고 나타난 이들은 행상인들이었다.

그것도 수십 개의 수레를 한 번에 몰고 다닐 만큼 커다란 상회의 행상인들.

-우리는 칸노르 가문의 사람이오. 딱히 볼일 없다면 비켜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요즘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초원을 누비던 야만인들 때문에 큰 피해를 보고는 했던 행상인들이었으니까.

“······칸노르라.”

그러나 블라드는 행상인들의 날 선 질문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행렬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낯익은 깃발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으려나.”

블라드는 자그마한 혼잣말과 함께 안장 뒤쪽에 꽂혀있던 깃발 하나를 빼 들었다.

새하얀 배경 위에 온갖 문장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그마한 깃발.

그 깃발에서도 오래전에 새겨넣은 듯한 문장 하나를 가리킨 블라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포틀리 칸노르라고 알고 있습니까?”

“네?”

상인들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고용주 아들의 이름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금발의 기사가 들어올린 깃발을 보고 놀란 것이었지만.

“그 친구가 내 종자 시절 동기인데.”

세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가문의 문장들.

그러나 지금 블라드가 가리키고 있는 칸노르의 문장은 그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빨리 새겨졌다는 듯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으면 쇼아라의 블라드가 찾는다고 좀 전해주시죠."

지금은 셀 수도 없을 많은 가문이 그의 이름을 증언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건네주는 소시지 하나에도 감탄했었던 깡마른 소년.

말도 제대로 타지 못했었던 그때의 소년이 지금 옛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우와.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한껏 웃는 얼굴로 마차 밖을 향해 고개를 쏙 내민 청년이 있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양 볼에 윤기가 흐를 정도로 통통한 청년이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스투르마? 아니면 바르나?”

“라문드 님의 장원. 거기서 농사 좀 배우고 왔지.”

평소보다 훨씬 커진 포틀리의 목소리가 행렬 한 가운데서 크게 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기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반가움만큼이나 커진 포틀리의 목소리는 아침의 고요를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너를 한번 보고 싶기는 했었거든. 그런데······.”

한 명은 마차, 다른 한 명은 말에 탄 채 나란히 걷고 있는 둘.

그러나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블라드를 대하는 포틀리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놀러 와. 당분간은 장미의 미소에 있을 거라서.”

그런 포틀리의 태도를 이해라도 한다는 듯 블라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륙의 모두가 아는 소드마스터와 일개 상인 가문의 아들과는 감히 견주기 힘든 큰 간격이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블라드는 종자였던 시절과 다를 바 없다는 듯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너를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거기 주인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얼마든지 놀러 오라고.”

“그래도 돼?”

“······너는 뭐 여전히 변한 게 없는 것 같냐. 요즘도 누가 괴롭히고 그래?”

만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분명 둘은 서로가 필요한 것을 나눈 사이였다.

종자였던 시절과 비교해 훌쩍 커진 블라드의 키는 어쩌면 칸노르 가문이 내어주었던 고기들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야. 쇼아라에서 이렇게나 많이 고기가 필요한가?”

“아아. 이거.”

화제를 돌린 블라드는 길게 이어진 칸노르의 수레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고개를 빼 들어야 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 수레들.

다섯 보스 중 하나인 검은 곰의 영역까지 먹은 칸노르 상회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많은 양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쇼아라라는 도시는 크지 않았다.

“반 정도는 쇼아라에 내려놓고, 또 나머지 반은 배에다 실어서 서부까지 가는 거지.”

“서부까지?”

“응. 서부까지. 정확히는 니다벨리르로 가는 거야.”

드워프 해방전선을 가리키던 이름인 니다벨리르는 이제 조직이 아닌 도시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가장 거대한 용에 의해 가라앉고만 렘노스 섬을 대신해 새로이 드워프들의 보금자리가 된 도시 니다벨리르.

“트리노바 옆에 드워프들의 도시가 새롭게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거기 드워프들이 술이랑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거야.”

“그건 그렇지.”

자신들의 옛터를 찾아 다시금 뿌리 내릴 수 있게 된 드워프들.

다만 여전히 모래만이 가득한 그곳이 예전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거기 드워프들이 자꾸 캡틴큐라는 술을 찾는다 그러더라고. 나는 처음 듣는 술인데. 혹시 뭔지 알아?”

“······아니.”

어두운 뒷골목의 색을 담은듯한 끈적이던 갈색의 술.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들려왔음에도 애써 모른 척하던 블라드의 앞으로 저 멀리 성벽 한 귀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쇼아라입니다!

스투르마에서 쇼아라까지.

그렇게 길게 늘어서 있는 북부의 초원 끝으로 블라드의 고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소년이 태어난 고향이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던 도시.

그러나 저 앞에 보이는 성벽은 익숙했어도 그 아래 있는 성문의 광경만큼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이 새치기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껴들었다고 그래!

북부 물류의 중심지였기에 언제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쇼아라의 성문.

-나 지금 여기서 3일이나 기다렸수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들어갈 수 있는 건데!

-여기에 블라드 경이 있는 건 맞냐고!

그러나 지금은 마치 성문이 시장이라도 된 양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진 채 파고들어 갈 틈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기 왜 저러냐.”

“전쟁이 이제 막 끝났잖아.”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냐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묻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싸울 곳 잃은 기사들이 다음은 어디로 가겠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유명한 소드마스터라도 한번 보고 싶어 할 거 아니겠어.”

반짝이는 금화는 현실이나 소드마스터는 전설.

기사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단어 하나가 드디어 이 시대에 떠올랐으니, 대륙에 있던 기사들이 쇼아라로 몰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나 어떡하냐.”

그러나 정작 모두가 만나고 싶어하는 소드마스터는 눈앞에 보이는 기사들의 향연에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어림잡아 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성문 앞의 기사들.

그들 모두가 그저 악수 한 번 하자고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이래서 황제가 되셨나 보네.”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기에 모든 것에 자유로운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그러나 누리고자 하는 자유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

도시 쇼아라에 있는 높고도 넓은 교회.

그 거대함에 비할 건물이라고는 저기 보이는 시청뿐일 교회였지만 지금 그곳에는 본래 흘러야 할 경건함 대신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가득했다.

“복도에서 뛰지 마라.”

“······네.”

붉은 법복을 입은 주교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게 날뛰던 아이들이었으나 껑충하게 큰 키에 서늘한 회색빛 눈동자까지 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가 봐.”

“네!”

방금까지 알았다고 말했으나 다시금 내달리는 녀석들.

그 아이들을 보는 피에르의 이마 한구석에는 어찌할 수 없는 핏줄 한 줄기가 떠올라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 같으니.”

도시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

이제는 교황청이 아닌 정교회의 주교가 된 그는 고작 몇 년 사이에 엉망이 된 교회를 보며 속으로 분을 삭힐 따름이었다.

쿵-!

“아이고 깜짝이야!”

기다란 다리를 성난 학처럼 놀리며 주교실까지 다다른 피에르.

그렇게 열어젖힌 자신만의 공간에는 허락받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햇빛에 비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강렬한 사내였다.

하지만 개성 강한 머리카락 아래에 입고 있는 정갈한 갑옷은 분명 정교회의 성기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지요. 주교님을요.”

“기다리기는 무슨. 평소처럼 농땡이나 피우던 거겠지.”

들려오는 사내의 말에 짜증이 난다는 듯 거칠게 의자에 앉은 피에르는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왜 이렇게 요즘 따라 교회에 애새끼들이 많은 거냐.”

“그게 다 주교님이 부른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히죽 웃는 라두를 보며 피에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지만, 앞에 있는 사내는 그런 위협 따위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가 태어난 도시에 소아성애를 금지한 주교까지. 근방에 생겨난 전쟁고아들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 이 말입니다.”

“······.”

“나 같아도 당연히 여기로 오겠다 싶죠. 가만히 있으면 무슨 험한 꼴을 볼지 모르는 세상인데.”

어쩌면 방금 라두의 말처럼 부모를 잃고 떠도는 전쟁고아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의탁할 만 곳은 북부의 도시 쇼아라 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마담 마르셀라가 고아원까지 열었으니 이것 참 옳다구나 싶죠.”

“······나가.”

한치도 틀림없는 말이었기에 더욱 골치 아픈 말이기도 했다.

지금도 쉼 없이 쇼아라로 몰려드는 기사들과 고아들.

원하건 원치 않았건 간에 이 도시의 주교가 된 피에르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사고들을 수습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가요?”

“그래 나가.”

“안 돼요. 저 나가면.”

“왜!”

그러나 늙은 주교의 성에도 라두는 실실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제가 나가면 주위에서 대결하자고 달려드는 기사들이 수십이란 말입니다.”

“······.”

“쇼아라의 블라드가 없다면 그다음은 드라굴리아의 라두랄까. 아 물론 이미 성은 버리긴 했는데. 아무튼 제가 나가면 오히려 도시 치안에 치명적인······.”

어디 분통 한 번 터져보라는 듯 계속해서 지껄이는 라두였지만 과연 그의 말은 아까부터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가라니까.”

그러나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바른말은 아닌 법.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이 바쁜 시기에 제 잘난 말만 해대는 라두를 보며 드디어 피에르의 성이 터지고 말았다.

“애새끼들 데리고 다 나가!”

“으악!”

나이에 맞지 않는 웅혼한 외침.

과연 늙은 지금에도 전혀 기세를 잃지 않은 주교의 외침이 문을 뚫고 복도 가득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흐으으으······.”

성문 밖의 상황과는 다르게 침묵만이 가득한 쇼아라의 뒷골목 어딘가.

그곳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땅굴 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가 있었다.

“작긴 작네. 이제는.”

오직 뒷골목의 아이들만이 알아볼 법한 성벽 아래 개구멍.

성벽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서 일어선 블라드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누아르야 알아서 들어올 테고.”

칸노르 상단에 잠시 맡긴 누아르는 포틀리와 함께 도시로 들어올 것이다.

워낙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알아서 장미의 미소로 돌아올 테고.

딱- 따악-

“응?”

밖에 있는 기사들을 피해 몰래 쇼아라로 들어온 블라드.

그곳에 보이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블라드의 귀로 낯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풍경은 익숙했지만 분위기만은 확연히 달라진 쇼아라의 뒷골목.

어둡기만 했던 그때가 아니라는 듯 햇빛이 가득한 길을 따라 걷던 블라드는 저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와! 이 아저씨 진짜 못하네!”

“그래 가지고 어디 한 번 이기겠어요?”

밤이 아닌 낮에 모여 있는 뒷골목의 아이들.

예전이라면 다른 이의 빵을 구걸하고 지갑을 탐내야 할 아이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손아귀 가득 반짝이는 유리구슬들을 쥔 채 웃고 있었다.

“······우리 한 번만 다시 하면 안 될까?”

그리고 그 아이들 가운데서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인족 사내가 있었다.

“구슬치기 한 판만 더.”

한판만 더를 외치며 떠나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는 마법사 니벨룬.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를 보며 블라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5화 9

외전- 장미 전쟁 Ⅱ

익숙한 길을 따라 장미의 미소로 향하는 블라드.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이었음에도 블라드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언짢음이 가득했다.

“······쟤네 좀 못 따라오게 해봐.”

“제가 어떻게요?”

“너 쟤네랑 친한 거 아니었어?”

왜냐하면, 블라드의 등 뒤에는 지금도 뒷골목의 아이들이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에.

수없이 대결을 외칠 기사들을 피해 조용히 장미의 미소로 가고 싶었던 블라드였지만 어느새 잔뜩 따라붙은 아이들의 모습에 그만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나저나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애들이랑 구슬치기를 하고 있어.”

손에 들고 있는 유리구슬만큼이나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

선망이 가득 담긴 그 눈빛들을 향해 차마 꺼지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던 블라드는 그나마 만만한 니벨룬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슬치기를 하고 싶었으면 저 위쪽 골목 애들이랑 해야지. 여기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

“그런가요?”

보호해 줄 이가 없어 너무나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뒷골목의 아이들이었다.

매사를 생존과 연결해 생각하는 아이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으니 니벨룬의 승률이 처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꼭 여기 애들이랑 하고 싶었거든요.”

“왜?”

그러나 신비를 찾는 마법사는 꼭 이곳 아이들의 구슬을 갖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기 애들 구슬이 제일 빛나거든요.”

“응?”

그것은 여태껏 보아왔던 구슬 중 이곳에서 굴러다니는 구슬들이 가장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야말로 니벨룬이 찾는 신비에 걸맞은 것이었다.

“······그래도 못 딴다니까. 너 이미 호구 됐어.”

“그럼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랑 같이 편 먹고 구슬치기 한 번 해주면 안 됩니까?”

“지랄 났네. 진짜.”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에게 같이 구슬치기나 하자고 조르는 마법사.

그 말을 들은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어느새 다다른 건물의 뒷담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애들이 다 없어졌네요?”

“여기서부터는 내 구역이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의 뒤를 바짝 따라붙던 아이들이었으나 지금 골목에서부터는 한 발자국도 들어서지 않은 채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뒷골목에 뿌리내리고 있던 영역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벽은 왜 미세요.”

“이거 벽 아니거든.”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골목의 뒷담.

그중 한 곳을 짚어낸 블라드가 벽을 있는 힘껏 어깨로 밀어젖히기 시작했다.

“······이거 그동안 아무도 안 썼나 보네.”

지금 블라드가 낑낑거리며 밀고 있는 벽은 사실 벽으로 위장된 뒷문이었다.

오직 호르헤의 패거리들만이 알고 있는 장미의 미소로 통하는 뒷문.

“끄응!”

뒷골목이 한창 어두웠을 시기에는 쉼 없이 열어젖혔던 뒷문이었다.

그러나 고딘이 방문한 이후에는 아무도 쓰지 않았던 모양인지 숨겨져 있던 경첩에는 온통 녹이 잔뜩 슬어있었다.

끄드드득-

그동안 자신조차 문이라는 것을 잊었다는 듯 힘겹게 열리는 비밀 문.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오래된 먼지들을 맞으며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를 반기는 것은 놀란 눈을 치켜뜨고 있는 검은 피부의 소년이었다.

“뭐, 뭐야!”

“······.”

돌아온 블라드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커다란 술통에 올라탄 채 술병을 들이대고 있는 네드였다.

그러나 놀라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한 것이 아무래도 보여서는 안 될 짓을 들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블, 블라드야? 언, 언제 왔어?”

“하아.”

설명하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블라드 본인도 소싯적에 자주 해봤던 그런 행동이었으니까.

“빼돌린 술은 알아서 채워놔라. 그 통에서 모자란 양은 네 형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잠깐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빨리 채워놓는 게 좋을 거야. 오타르가 모자란 값만큼 너를 후려치기 전에.”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다급하게 술통에서 내려오는 네드였지만 이미 블라드와 니벨룬은 1층 로비로 향하는 계단 끝에 올라와 있었다.

“도둑질도 머리 좋은 놈이나 해 먹는 거라고 했잖아.”

“블라드! 잠깐만!”

등 뒤에서 간절히 외치는 네드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블라드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갑작스레 눈가로 비치는 휘황찬란한 빛무리들.

저 위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에 블라드는 잠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여기는 언제나 변함이 없네.”

그러나 이윽고 다가오는 가게의 소음과 코끝으로 스며드는 음식 냄새에 찌푸리고 있던 블라드의 눈가가 점점 둥글게 휘어 들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환영해주는 장미의 미소.

이제야 그곳으로 돌아온 블라드가 희미한 웃음과 함께 익숙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이제는 창관이 아닌 북부 유일의 고급 여관으로 변신한 장미의 미소.

예전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그곳의 복도를 블라드와 니벨룬이 걷고 있었다.

“방이 좁네요.”

“이 정도면 큰 거지.”

아무도 모르게 4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블라드는 여태까지 걸어왔던 화려한 복도와는 다른 소박해 보이는 공간에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석에다 방을 마련해 놨어요? 혼자만 쓰는 층 같은데.”

“그때는 들키면 안 됐었거든.”

오직 단 한 명의 손님만 들어올 수 있다는 4층의 복도는 왁자지껄한 아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적막하기까지 했다.

“나 혼잣말하는 거 있잖아. 키하노랑 대화하느라고.”

“아아. 그랬었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4층의 공간.

이제 더는 대화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기에 더 넓어 보이는 4층의 복도를 보며 블라드가 조용히 콧잔등을 긁어대었다.

“이제 왔니?”

“······.”

그러나 내면의 키하노는 없었더라도 이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는 사람은 또 있었다.

“제미나.”

“이번에는 그래도 일찍 돌아왔네.”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조용히 블라드를 바라보는 붉은색의 레이디.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화사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제미나가 블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반년 정도면 준수하지. 전쟁 끝내겠다고 1년 훌쩍 떠난 예전보다야 뭐.”

다만 지금 보이는 제미나의 눈빛에는 블라드조차 무시하기 힘든 날카로운 장미의 가시가 깃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가려고? 한 일주일은 있을 거야?”

“레이디 제미나. 저는 이만 내려가 봐도 될까요?”

“그래. 고양이는 내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니벨룬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는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을 붙잡는 블라드의 손이 있었지만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파악하는 것도 사회인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아 냄새 진짜 좋네요. 저 고기 스튜 진짜 좋아하거든요.”

“저거 감자 스튜야. 너 감자 싫어하잖아.”

“오늘부터 좋아하기로 했어요. 감자 스튜 진짜 맛있겠다.”

블라드의 조용한 만류에도 물 흐르듯 빠져나가는 니벨룬.

그렇게 제미나가 비켜준 틈을 타고 내려가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손님은 계속 몰려드는 데 방은 없어. 이제는 4층도 개방할까 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정교회에서 부탁한 거 너도 알잖아.”

“그래 나도 알아. 안드레아 님 부탁으로 흑마법사들 잡으러 간 거.”

전쟁의 불씨를 잠재우기 위해서, 때로는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그렇게 2년 동안 블라드는 조금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세상을 누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쉬어야 하지 않아? 그때도 거의 몇 달간은 누워 있었으면서.”

“물론 나도 쉬고 싶기는 한데.”

“하아. 지금이야 젊으니까 모르지.”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블라드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슴 속에 뚫려 있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늙으면 그거 다 골병 돼서 돌아오는 거야. 몸 함부로 굴린 용병들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

“이번에는 좀 길게 쉬었다 가. 마침 하벤도 돌아왔다는데.”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칭송하는 주위의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쉬어야 할 때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보며 블라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기······.”

지금이라도 온 것을 봤으니 되었다는 듯 등을 돌리는 제미나를 향해 블라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번에도 바로 어디 가긴 할 거거든.”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떠나야 한다는 블라드의 말에 제미나의 눈동자가 다시금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가든지 말든지. 나 바빠.”

누가 뭐라 해도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 했던 고집 센 소년.

그 소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음을 아는 제미나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갈까? 이번엔.”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말에는 제미나조차도 놀란 채 걸음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그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본 제미나의 앞에는 바예지드의 편지를 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이번 루트거 님의 계승식 때, 나랑 같이 안 갈래?”

“······같이?”

북부의 모든 귀족이 모일 루트거의 가주 계승식.

그곳을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동행의 의미를 넘은 더 큰 의도가 담겨 있는 걸 제미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 가지고 되겠어?”

“당연하지. 너 아니면 딱히 데려갈 사람도 없어.”

“진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제미나의 얼굴을 보며 블라드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윽고 펼쳐든 제미나의 편지 앞에서는 웃고 있던 얼굴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것 같은데.”

“······음.”

제미나가 여기 좀 보라는 듯 품속에서 꺼내든 편지.

그 편지의 겉면에는 블라드도 익숙히 알고 있는 하얀 나무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은 쉬라고 내일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그 편지를 들고 있는 제미나의 웃음이 어째서인지 몰라도 서늘해 보였다.

“결정해야겠네. 블라드. 계승식 때 누구를 데려갈지.”

장미의 미소로 보내진 레몬 향이 가득한 편지.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블라드의 또 다른 레이디인 알리시아 하이날 남작이었다.

※※※※

“올해 작황이 참 좋습니다. 남작님. 다들 풍년이 들었다고 좋아하더군요.”

여름의 향취가 가득한 도시 데어마르.

등 뒤에 비치는 창밖에는 올해 따라 더욱 푸르른 데어마르의 나무가 알리시아를 반기고 있었다.

“······그런가요.”

올해의 작황은 풍년.

엘프들과의 거래로 도시는 풍요롭고,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 하이날의 영지 데어마르.

“그러면 뭐 해.”

“네?”

그러나 정작 이 도시의 주인인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아닌 짙은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그러면 뭐 하냐고요. 이렇게 영지가 잘 돼봤자!”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순간이었으나 알리시아의 마음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영지만 잘 되면 뭐 하겠어요. 정작 하이날 자체가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알리시아 님······.”

그늘진 얼굴이었어도 아름다운 하이날의 영주.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움을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알리시아는 슬퍼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저에게 오는 청혼편지들은 없나요? 귀족도 좋고 아무 기반도 없는 기사라도 괜찮은데.”

“그것이······.”

알리시아의 물음에 노기사 던칸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올해는 한 명도······.”

“한 명도?”

“네. 한 명도.”

왜냐하면, 예전이라면 쉴 새 없이 들어왔을 청혼자들의 연락이 요근래 뚝 끊기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부도 명예도 그리고 영지까지 가지고 있는 알리시아 남작.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알리시아였을지라도 그녀에게 쉽사리 도전하는 청년이 없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익! 이익! 이게 다 블라드 때문이에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꽤나 기괴해 보였다.

그러나 던칸만큼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잘나져서! 남의 혼삿길까지 다 끊어놓는데!”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

이미 손수건까지 주고받은 둘의 관계를 대륙의 모두가 알고 있는 지금, 감히 소드마스터의 레이디에게 청혼을 하는 멍청한 자가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여기서 하이날의 대는 끊어지게 되는 건가요? 나는 천하의 불효녀가 되고 마는 거예요?”

“오오. 알리시아 님.”

이렇게 내버려 둘 거라면 괜히 건들지나 말지.

이 가문의 보물까지 말아먹은 천하의 한량 같으니라고.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지켜온 하이날인데.”

창밖을 내다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귀족의 푸른 피가 만들어 낸 유일한 하이날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씨라도 빼 와야겠어요. 어떻게든 대는 이어야 하니까.”

금발의 푸른 눈. 그리고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보증하는 핏줄.

그것을 꿈꾸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알리시아의 결정을 응원이라도 한다는 듯 저 위에 있는 데어마르의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초록빛 가득한 나무 위에서 춤추고 있는 하얀 뱀과 그 뱀 아래서 몸을 흔들어대는 작은 정령들까지.

“얘네 왜 이래?”

“뭐야? 축제라도 하는 거야?”

파견 나온 엘프들까지 당황할 정도로 기뻐하는 정령들이 어서 빨리 그 씨앗을 데려오라는 듯 있는 힘껏 알리시아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6화 4

외전- 노을빛 술병

녹음이 푸르른 동쪽의 숲. 아우슈린

누군가가 그리기라도 한 듯 성벽처럼 자라난 나무들이 품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게 아닌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기껍다는 듯 살랑이는 세계수 아래, 여름의 햇빛과 함께 앉아 있는 백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흐으음.”

잔뜩 집중한 듯 찡그리고 있는 눈썹에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연필을 세워 각도를 재는 모양새는 흡사 전문가의 그것.

그러나 앞에 놓인 도화지에는 소녀의 진지한 모습과는 다르게 유치한 그림체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입술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슨 그림인가 싶어 슬쩍 몸을 숙여본 세계수조차도 가지를 흔들고 마는 솜씨.

여태껏 맞이한 신녀들 중에서도 가장 감응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소녀였지만 아무래도 그림 솜씨만큼은 가장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신녀님.”

“응?”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참을 고민하는 신녀의 등 뒤에서 바라디스가 나타났다.

숲을 누벼야 하는 레인저답게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어깨 위에 달린 빛나는 휘장만큼은 분명 원로회 소속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오랫동안 바깥에 있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아니, 그게······.”

신녀가 되기 위해 본래의 이름을 내려놓은 소녀는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오빠가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바라디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동생을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으니 소녀는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스투르마로 언제 갈 거예요? 오······. 아니 바라디스 님.”

“스투르마요?”

“계승식이 있잖아요. 거기 이름이 바예지드라고 했던가.”

머리는 영민했으나 아직은 대륙의 정세에까지는 밝지 못한 세계수의 신녀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갑작스레 북부에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바라디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것은 왜······.”

대륙 전쟁의 승자 중 하나인 바예지드 가문.

그곳의 새로운 가주가 즉위하는 이번 계승식은 북부뿐만 아니라 대륙이 주목하는 행사이기도 했기에 아우슈린 또한 사절을 보낼 예정이기는 했었다.

“나는 거기에 바라디스 님이 갔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시죠.”

자그마한 턱을 긁적이는 소녀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말을 꺼내기가 조금은 민망하다는 듯 발을 까닥이던 소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리 가까이 와보라며 바라디스에게 손짓했다.

“나는 오빠가 거기로 갔으면 좋겠어.”

지금만큼은 세계수의 신녀가 아닌 나만의 모습으로.

그렇게 입을 연 소녀가 웃는 얼굴로 바라디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나도 같이 따라갈 수 있잖아.”

“······.”

평생을 세계수와 함께해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바깥나들이를 해보고 싶다는 소녀.

그 소녀가 변명이라도 하듯 여태껏 그리고 있던 그림을 들고는 바라디스에게 펼쳐 들었다.

“그냥 바깥이 궁금해서 가고 싶다는 거 아니야. 이거 블라드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데.”

소녀가 들고 있는 도화지에는 삐뚤빼뚤 그려진 그림이 가득했다.

그 그림은 예전의 계시들처럼 쉽사리 해석하기 힘든 난해한 그림체로 그려진 것이었다.

“계시······입니까?”

그러나 그림체는 같았어도 이번만큼은 어려운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 바라디스 조차도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뜻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거 블라드가 좋아할 거 같아. 그렇지?”

가지고 있는 귀의 형태는 달랐으나 같은 나무 아래서 뛰놀고 있는 수인족과 엘프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뒤에 둔 채 활짝 웃고 있는 소녀를 보며 바라디스는 무엇이 그림이고 현실인지를 잠시 헷갈릴 것만 같았다.

※※※※

도시 쇼아라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언덕.

그 언덕에 자리한 수녀원을 향해 짐을 짊어진 채 걸어가는 남자가 있었다.

“아이고. 이거 뭐 이리 무겁나.”

쿵-

바닥을 울리는 육중한 울림과 함께 선홍색 고기 뭉치들이 제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려놓은 고기 뭉치 하나하나에 칸노르 가문의 문장이 찍혀있는 것이 누가 보아도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고기들이었다.

“······누구세요?”

“마르셀라. 저예요.”

일부러 큰 소리를 낸 덕분인지 여인 한 명이 주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히 동여맨 여인의 머릿수건은 풍성한 흑발을 감추고 있었다.

입고 있는 치마는 방금까지 일을 하다 온 모양인지 잔뜩 얼룩이 져 있었고.

“블라드? 블라드니?”

“오랜만이에요. 반년만인가.”

그러나 블라드를 향해 환히 웃는 그 미소만큼은 초라한 겉모습과는 달리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이거 어디다 놓을까요?”

“어머 이 고기 좀 봐. 안 그래도 오늘 애들한테 뭘 먹여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한때는 쇼아라의 장미라 불렸던 마담 마르셀라.

그러나 화려했던 그 시절보다 품고 있는 미소만큼은 훨씬 영글었으니 블라드는 어쩐지 지금의 마르셀라가 더 편안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끓여 먹기 좋은 고기로 가져왔어요. 하나하나 굽는 것도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역시 너는 이런 배려가 있어서 좋아.”

다시금 고기를 든 블라드가 마르셀라의 손짓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섰다.

한때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울면서 설거지를 했던 그 주방.

“어머. 블라드! 오랜만이다!”

“이게 누구야. 얘 어깨 더 넓어진 거 봐!”

“함부로 만지지 마! 무려 소드마스터 님이신데.”

마르셀라를 따라간 주방에는 수많은 여인이 블라드를 반겨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손길 하나하나가 다들 낯이 익은 것이 아무래도 예전의 장미의 미소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 여기 있었네요.”

“은퇴하고 딱히 갈 곳도 없잖아.”

“사내새끼들보다는 애새끼들 돌보는 게 더 낫지.”

한때는 반짝이는 동전 한 닢에 술과 웃음을 팔았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넉넉한 미소만큼은 돈으로는 만들 수 없는 포근한 것이었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자주 놀러 와 블라드!”

“그래 이제는 집에 좀 붙어있고! 제미나 속 좀 그만 썩여!”

한마디 말을 내어주면 열 마디 말로 화답하는 수다스러운 여인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손님 덕분인지 점점 시끄러워지는 주방 분위기에 마르셀라가 서둘러 블라드의 어깨를 잡아 끌어내었다.

“그런데 용케 수녀원을 가지셨네요. 교황청이 가만히 있었나요?”

“교황청? 나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마르셀라를 따라 예전 제미나를 데리고 나왔었던 예배실을 지나 2층으로 올라온 블라드는 원장실이라 이름 적힌 문 앞에 섰다.

“그냥 나는 어차피 비어 있는 건물이니까 좀 쓰고 싶다고 시장님한테 말한 것뿐이야.”

“여기가 비어 있었어요?”

“응. 언젠가부터 비어 있더라고.”

예전에는 수녀원장실이었으나 지금은 고아원장실이 된 2층의 작은 방.

자신이 수녀원장을 향해 으르렁대었던 그곳을 기억하고 있던 블라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교회의 문양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마 다들 도망간 모양이야. 하긴 그 대단한 소드마스터 님과 척을 졌는데 버티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자리에 앉은 마르셀라는 수녀들도 야반도주를 할 줄은 몰랐다며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뭐라고 하면 어때. 내가 그동안 여기다 바친 기부금만 해도 얼마인데.”

“그건 그렇죠.”

한때는 있는 자들의 여식들을 위해 신의 이름을 팔던 쇼아라의 수녀원.

그러나 이제는 갈 곳 잃은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이 된 이곳을 보며 블라드가 감개가 무량하다는 듯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정말 훌륭해요. 마르셀라. 북부의 어느 도시에서도 교회 아닌 개인이 고아원을 세운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 뭐. 힘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모아놓은 돈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고아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나서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것도 여인 혼자의 몸이었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부 좀 하고 가시죠. 블라드 님.”

그러나 마르셀라는 아무도 하지 못했던 그 일을 해냈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그 어떤 보스도 갖지 못했던 가장 높은 건물을 지어냈던 것처럼.

“멋져요. 마르셀라.”

“그런 빈말 말고 기부를 하라니까.”

웃고 있는 블라드를 향해 어서 뭐라도 내놓으라는 듯 양손을 내밀고 있는 마르셀라.

그들이 앉아 있는 원장실의 창밖에는 혹여나 소드마스터를 볼까 싶어 고개를 빼든 아이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추웠던 그 날의 겨울, 순결했던 소녀들을 이끈 채 수녀원의 문을 두들겼던 방탕한 창녀.

누군가는 그녀에게 신의 품에 들어설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지금 마르셀라가 웃고 있는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신의 뜻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마 이번에 다가올 겨울에는 아무도 수녀원의 문 앞에서 주저앉지 않을 터였다.

※※※※

“왜? 같이 저녁 먹고 가지.”

“아니에요.”

“제미나가 빨리 들어오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저녁을 먹고 가라며 붙잡는 마르셀라의 손이 있었지만 이미 계획이 있던 블라드는 조용히 고아원을 나설 뿐이었다.

“조만간 또 오죠 뭐. 어차피 같은 쇼아라에 있을 텐데.”

“그래. 또 와.”

떠나는 블라드의 뒤로 몰려나온 아이들이 가득했다.

뒷골목의 아이들과도 비슷해 보이는 반짝이는 눈빛들을 보며 블라드가 잠시 턱을 긁적여대었다.

“일단 이 곳은 마음대로 쓰도록 해요. 시장한테는 따로 말해놓을 테니까.”

“알았어.”

“그리고 이거.”

잠시 고민하던 블라드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마르셀라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씨앗이요.”

이게 뭔가 싶어 열어본 주머니 안에는 마르셀라도 처음 보는 열매가 하나 들어있었다.

보석과도 같이 반짝이는 그 열매는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이었다.

“무슨 씨앗.”

“그건 나도 몰라요. 키워봐야 아는 거라.”

씨앗을 건네준 블라드는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 씨앗, 여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래?”

아우슈린에서부터 온 자그마한 씨앗 하나.

마르셀라가 들고 있는 그 씨앗이 무엇이 될지는 블라드도 잘 몰랐지만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도브레치티나 데어마르에 있는 나무들처럼 되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제 가볼게요.”

“그래.”

어린 가능성들을 위해 누군가는 푸르른 씨앗을 심어야 한다.

남몰래 세상을 누볐던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처럼,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처럼 말이다.

“뭘 했다고 벌써 하루가 지났네.”

그렇게 손을 흔들며 떠난 블라드는 언덕 위로 넘어가는 붉은 색의 노을을 보며 발을 옮겼다.

“이쯤이면 올 때가 됐다고 했는데.”

쇼아라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내려와 이제는 비린내로 가득한 부둣가를 향해 걸어가는 블라드.

저녁이 될수록 내려가는 온도 때문인지 어느새 쇼아라의 강가에는 조금씩 물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

“여기도 변한 게 없네.”

드나드는 배가 없어 인부들조차 떠나고 없는 조용한 부둣가.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홀로 서 있던 블라드는 점점 붉어지는 노을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겠네.”

이제는 강바닥 아래로 저물어가는 오늘의 노을.

그 노을을 등진 채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 한 척이 있었다.

선체 양옆으로 기이해 보이는 물레방아를 단 배에는 이제는 누구나 알아보는 붉은 장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조금 늦었어. 하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을 따라 블라드가 부둣가를 걷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자신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배와 함께.

그렇게 걷고 있는 블라드의 오른손에는 친구를 위해 특별히 가져온 술병 하나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7화 8

외전- 어른이 된 소년들은

붉은 노을이 가라앉은 강물 위로 뒷골목에서 비치는 불빛들이 선명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한적해 보이기까지 했던 도시의 가장 어두운 곳.

그러나 지금은 곳곳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로 인해 그 어느 곳보다도 활기찬 분위기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여태까지 바르보사랑 붙다가 온 거야?”

“붙었다기보다는 서로 대치만 하고 있었다고 봐야지.”

블라드와 하벤의 등장으로 그 어느 때보다 손님들이 많이 몰린 장미의 미소였지만 1층의 로비에는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술에 취하러 왔다기에는 너무나 말끔한 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비어있는 술잔을 들고서 괜스레 위쪽만 힐끗거리는 영양가 없는 손님들을 보며 제미나의 입술이 삐죽거리고 있었다.

“정전 협약이 빨리 이뤄져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겨울까지 꼼짝없이 잡혀 있었을 뻔했다니까.”

“그래. 겨울 바다가 춥기는 하더라.”

그 말과 함께 술잔을 집어 드는 하벤을 블라드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소금기가 가득한 선장모와 선원답게 검게 그을린 피부까지.

좁은 방 안에 갇혀 서류만 끄적거리던 샌님의 모습은 지금의 하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여, 여기.”

“오. 고마워 네드.”

때마침 들어온 음식에 하벤이 재빨리 품 안을 뒤져 동전을 꺼냈지만 네드는 그런 것은 되었다는 듯 허둥지둥 계단을 떠나고 있었다.

“쟤 왜 저래? 맨날 팁 달라고 조르던 놈이.”

“그럴만한 일이 있었나 보지.”

갑작스레 변한 동생의 모습에 오타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해줘야 할 말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누군가의 곡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할 일은 다 끝낸 거네? 이제 원래 자리로 복귀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본래 하벤과 그의 선원들은 북부를 떠도는 평범한 상회였을 뿐이었다.

아마 이번 전쟁만 아니었다면 블라드가 가져온 인맥들을 이용해 천천히 세력을 불렸을 그들이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이번에 라브노마 가문에서 교역로를 연결할 상단을 알아봐달라고 했었거든.”

그리고 황금공 바르보사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지금, 이제는 모두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

이제야 함께할 수 있게 된 친구들을 보며 블라드가 신이 난다는 듯 들고 있던 소시지를 한껏 베어 물었다.

“도시 트리노바면 니다벨리르랑도 가깝지. 어쩌면 둘이서 항구를 공유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거래만 트면 앞으로도 계속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올 거야. 그것도 푼돈이 아닌 목돈으로.”

명예를 좇는 소드마스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인 키하노와는 다르게 딱히 자신만의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게 지금 블라드의 현실.

그러나 어디에 묶이지 않은 채 언제나 자유롭고 싶어 하는 블라드였기에 결국 택할 수 있는 것은 상회를 통한 부의 축적 정도였다.

“우리 이번에는 좀 크게 가볼까? 배도 새로 사고 사람도 좀 모으고 말이야.”

그러나 단순히 돈을 벌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블라드의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만 같았다.

“크게?”

“바르보사처럼 함대도 한 번 만들어 볼까? 함장보다는 제독이 더 낫긴 하잖아.”

어렸기에 배고팠던 시절, 뒷골목 어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전의 모습처럼.

지금의 블라드에게 느껴지는 그때의 향수에 어느새 하벤도 조금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기 애들도 좀 먹이고 고아원에 기부도 하고. 아니, 처음부터 애들을 미리 뽑아서 선원으로 키워보는 건 어때?”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아이들끼리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둘만이 나누던 내일을 향한 상상뿐.

그렇게 나누던 이야기 속에서 굶주렸던 두 소년은 힘겨운 오늘을 버틸 이유를 만들고는 했었다.

“저기 블라드.”

“응?”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그러나 형제처럼 담요를 나누던 둘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왜냐하면, 소년이었던 아이들은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마는 법이었으니까.

“내가······. 의뢰를 하나 받았거든.”

“응.”

아이들은 별을 바라보지만, 어른들은 별을 향해 걷는 존재.

각자가 보는 별이 달랐다 할지라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 블라드와 하벤은 서로가 원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른슈타인 백작이 북극 항로를 개척해달라고 하더라고.”

“북극 항로?”

“응. 북극 항로. 북방한계선 너머에 있는 바다 말이야.”

푸른 눈의 소년은 별들이 반짝이던 밤하늘을.

절름발이인 소년은 좁은 강을 넘어 드넓은 바다를.

그때 나눈 이야기를 잊지 않은 소년들이 지금 어른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은 바르보사가 독차지한 남부 항로를 대신할 방법을 찾고 싶은 모양이야.”

들떠 있는 블라드를 배려해서인지 들려오는 하벤의 목소리가 무덤덤해 보였다.

마치 네가 붙잡는다면 억지로는 가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그 의뢰······. 한 번 받아볼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블라드는 태연해 보이는 하벤의 모습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술잔을 흔들어대고 있지만, 하벤의 갈색 눈동자 안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래. 그랬구나.”

강에서 태어난 하벤이 바다를 향해 가고 싶다고 한다.

절름거리는 자신의 발 따위는 상관없는 넓은 바다를 향해서.

이제야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였기에 블라드는 그저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

“아이고 씨. 머리야.”

이제는 떠들썩했던 뒷골목조차도 눈을 감아야 할 시간.

그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던 블라드가 깨질듯한 머리를 쥐어 잡은 채 4층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좀 더 마실 걸 그랬나. 괜히 어설프게 취해 가지고.”

같이 술을 마셨던 하벤과 오타르,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제미나까지 모두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이제야 캡틴큐의 진정한 시음법을 알았다며 온갖 술에다가 그 빌어먹을 것을 섞어대던 하벤 때문이었다.

“응?”

그렇게 계단을 오르던 블라드의 시야로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블라드의 손님들만이 묵을 수 있다는 4층의 복도, 그 방 중에서도 니벨룬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뭐하냐?”

“잉?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평소라면 들르지 않을 방이었지만 취해 있었기에 고개를 든 호기심이 있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다가간 니벨룬의 방은 누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만큼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이게 다 뭐냐.”

어디서 가져왔는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니벨룬의 방.

개중에는 예전에 보았었던 기이한 훈증기며 양탄자도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배낭을 정리하는 중이에요. 한 5년 만에 하는 건가.”

“배낭?”

“네. 제가 평소 들고 다니던 거 있잖아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는 배낭을 향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무언가를 꺼내놓고는 했었던 마법사의 배낭.

언제나 빵빵했던 그 배낭이 지금 홀쭉해진 채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했었는데 그 배낭에는 도대체 짐들이 얼마나 들어가는 거야?”

“짐이요? 그거야 뭐······.”

한참 물건들을 정리하던 니벨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딱히 정해진 양은 없구요. 그냥 제가 기억하는 만큼 담을 수 있어요.”

“기억하는 만큼?”

“네. 만약 제가 여기 넣은 것을 까먹어버리면 이놈이 가차 없이 먹어 치워버리거든요.”

“오······.”

그래서 니벨룬은 머리가 나쁜 자신은 예전 사용자들에 비해 많은 것을 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방을 넘어 복도까지 흘러나온 물건들은 하나하나 기억하기에 이미 벅차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밤 중에 배낭은 왜 정리하는 거야.”

“저도 따라가려고요.”

“어디를?”

반겨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야 많은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수인족들이었다.

거기에 신비를 찾는 마법사이기까지 한 니벨룬은 그야말로 방랑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하벤 님을 좀 따라가 보려고요. 아까 들어보니까 북극 항로를 탐사하신다던데.”

배낭 하나만 꾸리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수인족 마법사.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처 없는 여행이 아닌 확고한 목적이 있는 여정이었다.

“······네가 북극 항로는 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이잖아요.”

블라드를 바라보는 니벨룬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그 눈이 괜히 심술이 날 정도로.

“신비를 찾는다는 목적도 있고, 게다가 요즘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레몬 농사가 잘된다고 했던가.”

용들이 지배하던 시절 가라앉고만 수인족들의 땅이 있었다.

떠오르는 완벽함을 향해 가장 강렬히 저항한 만큼 후대까지 이어질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만 그들이었다.

“어쩌면 얼음이 녹은 만큼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생겼을지도 몰라요.”

“······.”

“그런 곳이 있다면 뿔뿔이 흩어진 부족들도 한 번에 모을 수 있을 텐데요.”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이제는 자신만의 영역을 갖추게 된 지금이었지만 오직 수인족들만이 뿌리 내릴 땅을 찾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루가 족처럼 정착할 곳을 찾은 부족들은 그야말로 행운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애들도 여기 애들처럼 마음껏 뛰고 놀 땅이 있으면 좋잖아요.”

내 인생을 건 신비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몸담은 부족을 위해서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니벨룬.

그런 그의 말에는 조금도 틀린 것이 없었지만 조금은 취하고만 블라드의 마음속에는 그저 서운한 감정이 흐를 뿐이었다.

“그래. 너도 가봐야지 그러면.”

내가 돌아왔기에 모두가 반겨줄 줄 알았지만 이제 어른이 된 소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을 떠났던 수많은 인연처럼 말이다.

“술이나 더 해야겠네.”

“거기서 더 마시게요?”

“오늘은 술이 잘 받네.”

떠날 짐을 꾸리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가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모두가 잠들고 만 계단을 걸어 친구들이 엎어져 있는 테이블을 지나서.

그렇게 어딘가에서 빼 온 술병 하나만을 든 블라드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길을 나서고 있었다.

※※※※

“······누가 여기다가 울타리를 둘러놨네.”

잘 정돈된 수풀을 지나 울타리의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게 더 낫긴 하네.”

온갖 건물들이 난립한 뒷골목에서 유일하게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곳.

예전에 비해 훨씬 잘 정비된 공동묘지를 걷던 블라드가 익숙한 묘비 앞에 섰다.

“잘 지냈어요. 키하노?”

가진 것이 없기에 초라한 묘비들이 가득한 공동묘지였다.

그러나 곳곳에 피어있는 색색의 꽃들만큼은 이미 죽은 자들을 보듬어 주듯 묘비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영감님도 한 잔 드려야지.”

그 꽃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던 블라드는 앞뒤에 있는 묘비들을 향해 조용히 술을 따라주었다.

앞쪽에는 이름 모를 늙은 대장장이가, 뒤쪽에는 이름을 적을 수 없는 고귀한 기사가.

그렇게 그들이 누워있는 사이에 앉은 블라드가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술병을 들어 올렸다.

“다들 간다고 그러네요.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쉽사리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블라드였지만 아무도 없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다들 이렇게 가버리면 내 옆에는 누가 남아주나.”

키하노도, 요제프도, 그리고 그동안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도.

그러나 이제는 이어진 인연보다 헤어진 인연들이 더 많아진 블라드가 가슴 속에 차오르는 공허함을 달래며 다시금 술병을 들었다.

“그래도 잘 가라고 말해줬어요. 잘했죠?”

그래도 잘 가라고 등을 떠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여태껏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 누워있는 사람들처럼 누군가가 나를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 또한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 뭐 대답들이 없으시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이름 없는 묘비들은 대답이 없었다.

이미 고요한 침묵에 다다른 그들은 더 이상 블라드에게 해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오직 조금씩 터 오는 동만이 블라드의 등 뒤를 어루만져 줬을 뿐.

그 따스함이 좋았던 블라드는 원래 가기로 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뒤에 있는 키하노가 자신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8화 7

외전- 이별의 준비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푸르름이 대륙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아직 이곳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 보였다.

바예지드의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어느 방에서는 여전히 겨울에서 비롯된 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괜찮소?”

침대 맡에 밝힌 희미한 촛불이 페테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페테르의 표정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걱정이 되는구려. 시간이 갈수록 기침이 심해져만 가니.”

황금공과 가이다르의 침략을 막아내어 지금은 북부의 성벽이라 칭송받는 페테르 바예지드.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다사다난했던 지난 2년간의 세월이 무거웠다는 듯 얼굴 곳곳에 깊이 자리 잡은 주름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페테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조금씩 색이 바래져 가는 여인 한 명이 누워있었다.

푸석해진 머리만큼이나 갈라진 입술.

병자처럼 힘없이 누워있는 옥사나를 바라보는 페테르의 눈빛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걱정스러움이 맺혀 있었다.

“적어도 루트거의 계승식 때는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미 공허해진 옥사나의 눈동자는 페테르가 아닌 그저 옆에 있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옆으로 돌린 고개를 바로 세울 힘조차 없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페테르는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소.”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점점 시들어가는 와중이었으나 그럼에도 자신의 의무만큼은 다하겠다고 말하는 여인.

그 모습이 마치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보는 것만 같아서 페테르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바람이 춥소? 커튼을 닫아드릴까?”

창문은 닫혀 있었으나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아직도 서늘했다.

만물이 깨어나는 여름의 초입이었으나 북부에서는 아직 차가움을 머금고 있는 밤공기.

그 차가움을 우려한 페테르가 커튼을 닫기 위해 일어섰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옥사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닫지 마세요.”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위해서라면 닫아두는 편이 좋으련만.

그러나 바깥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옥사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던 탓인지 페테르는 쥐고 있던 커튼의 끝을 스르륵 놓고 말았다.

“열어두세요. 바깥을 보지 않으면 답답하거든요.”

“······알겠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는 침묵.

나눌 말이 없어서 생기는 침묵이 아닌, 서로 조심하기에 생기고 마는 고요함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달빛이 밝구려.”

밤이 깊었기에 이제는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그러나 여전히 머물고 있는 페테르의 발걸음은 어느새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향해 마주 서 있었다.

그것은 저 밖에 보이는 풍경 중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창문을 여는 게 낫겠어.”

떨어지는 달빛에 비치는 자그마한 묘비 하나가 있었다.

세워진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그 묘비는 침대에 누워있는 옥사나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

페테르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붙들고 있는 커튼은 아마 한겨울에도 닫힌 적이 없었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깊은 밤, 푸른 달빛 아래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그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시린 것만 같았다.

※※※※

“······차가 너무 달아요.”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쇼아라의 시장실.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있던 블라드가 혀끝이 얼얼한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일부러 네 것은 설탕을 적게 넣었는데.”

“제가 말했잖아요. 이렇게 달게 마시다가는 진짜 일찍 죽는다니까요?”

많은 것이 변한 지난 2년이었지만 쇼아라의 시장실만큼은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비록 더는 이곳에 없는 몇몇 얼굴들이 있었으나 나를 반겨주는 방 안의 공기와 달콤하게 퍼져오는 차의 향기만큼은 여전히 같았으니까.

“일찍 죽는다고? 여기 쌓여 있는 서류들 좀 봐라. 어차피 나는 설탕 없이도 일찍 죽게 되어 있어.”

“······흠.”

단것 좀 그만 먹으라며 타박하는 블라드의 말에 보르단이 여기 좀 보라는 듯 손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과연 방금의 말이 투정이 아니라는 듯 시장석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

그것들과 눈을 마주친 블라드는 아까의 말과는 다르게 슬그머니 찻잔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제 다 치워놨는데 오늘 보니 또 이만큼이나 쌓여 있다. 도대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빡센 거냐!”

전후 처리로도 바빠 죽겠는데 고아들은 쉴 새 없이 몰려들지, 게다가 요새는 소드마스터의 명성을 따라오는 기사들까지.

새로이 쇼아라의 시장으로 부임한 보르단에게 주어진 것은 빛나는 명성보다도 깔려 죽을 정도로 많은 업무뿐이었다.

“내가 명대로 못 죽으면 반은 네가 죽인 거야. 이미 유서에도 그렇게 써놨어.”

“차 드세요. 그러다가 식겠어요.”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뒤죽박죽 뒤섞여가는 쇼아라가 그나마 도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보르단이라는 유능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기사였으나 그럼에도 요제프가 그를 옆에 두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찾아온 거냐.”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

한참 바빠 보이는 그를 상대로 이런 말을 꺼내기가 미안한지 블라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위에 있는 수녀원이요.”

“거기는 왜.”

“거기 소유권이 좀 애매하대요. 그래서 제가 그곳에 대한 보증을 서고 싶거든요.”

아무리 명성 높은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존중해야 하는 바예지드의 땅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하벤이 좀 멀리 떠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배 수리할 인원들이랑 보급 같은 것 좀 미리 지원해줄 수 없을까 싶어서.”

“······끄응.”

블라드의 말에 서류를 뒤적이던 보르단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묘하다 묘해. 진짜 묘하게 선을 타고 들어오는구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보르단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눈가와는 다르게 보르단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애매하게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만 요구하는구나.”

명성 높은 소드마스터의 요구라면 분명 무시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미묘하게 선을 타고 들어오는 블라드의 부탁은 분명 철저하게 계산된 태가 나고 있었다.

아무리 바쁜 보르단이라도, 여력이 없는 쇼아라라도 들어 줄 수밖에 없게 하는 그런 요구였으니까.

“이게 다 여기서 배운 거예요.”

“그래. 잘 배웠다.”

날카롭기만 할 뿐, 세상 물정 모르던 뒷골목의 소년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지금 보르단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은 경험한 만큼 상황을 알아볼 줄 아는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요제프 님도 좋아하시겠어.”

“······그런가요?”

보르단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블라드는 그만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비록 눈그늘은 짙게 내려앉았으나 언제나 나를 위해 자리를 내주었던 남자.

기억 속 깊이 자리 잡은 그의 모습은 아마 블라드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 되는 거로 알고 갑니다.”

“그래 가 봐라.”

자리에서 일어선 블라드는 어느새 서류에 고개를 처박은 보르단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보이는 풍경은 예전과 같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달라져 있는 시장실의 모습.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그렇게 미묘하게 달라진 모습이 더 어색하다는 듯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섭섭할 거야. 사람이라면 안 섭섭할 수가 없어.”

시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블라드를 보며 시청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는지.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다 누구 덕인데 말이야.”

그러나 모두가 황송해하는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지금 블라드의 옆에 있는 이 남자만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쉴새 없이 입을 놀려대는 중이었다.

“······제발 좀 닥쳐주면 안 될까.”

“닥칠까? 물론 그럴 수 있지. 나 고트는 대장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누구는 소스라치게 놀랄 소드마스터의 짜증이었으나 오직 고트만큼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무덤가에서 취해 있던 대장을 부축했던 것처럼 말이야. 역시 기사 블라드의 옆에는 종자 고트가 있어야 한다. 그 잘난 마법사나 선장이 다 떠난다고 말할 때도 이 고트 만큼은 영원히 대장의 옆에서······.”

“닥쳐준다며.”

말을 끊지 않으면 계속해서 입을 놀릴 것만 같은 고트를 향해 블라드가 으르렁거렸으나 가장 명예로운 기사의 종자는 그저 잠시 떨어져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대장, 스투르마로는 언제 올라갈 거야?”

“따라오지 마.”

“안 그래도 내가 미리 다 준비해놓기는 했거든. 시종들이랑 마차랑.”

“마차는 왜?”

능글맞은 모습은 보기 싫었지만 고트는 분명 블라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제미나 양도 같이 가는 거 아닌가? 아니면 그냥 말에 태울 생각이었어?”

“······.”

“레이디가 가는 길에 마차가 없어서야 쓰나. 안 그래도 내가 근사한 걸로 하나 준비해 놨어.”

블라드가 기도하는 리만으로 변장했을 때부터 함께 했던 남자.

쇼아라에서 쫓겨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블라드를 챙겨왔던 고트는 이미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제미나랑 같이 간다고 말한 적이 없거든?”

“어쨌거나 일주일 안에는 출발해야 해. 아무리 습격하는 야만인들이 없어졌다고 해도 북부의 길은 여전히 험하니까.”

방금 한 블라드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일주일 안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고트.

그 기간마저도 자신이 생각했던 시간과 일치했던 모양인지 블라드는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아이구. 누아르도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지?”

푸르르륵-

어느새 마구간까지 다다른 고트는 누아르를 향해 반가운 척을 해대기 시작했다.

사기꾼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바로 친화력.

그 친화력을 맘껏 떨치는 고트를 보며 누아르도 딱히 내치기 힘들다는 듯 푸르륵 거릴 뿐이었다.

“같이 가자고 대장. 대장은 그냥 몸만 오면 돼.”

“지랄 났네. 진짜.”

웃는 얼굴에 차마 침은 못 뱉었지만 그래도 욕지거리는 뱉어낸 블라드.

그러나 블라드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침울해 보였던 그의 표정이 어느새 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뉘엿뉘엿 져가는 해를 따라 장미의 미소로 돌아온 블라드는 곧바로 니벨룬의 방을 찾았다.

“짐은 다 정리했냐?”

“네? 아 네. 다 정리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잔뜩 어질러져 있던 니벨룬의 방이었으나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다만 잔뜩 부풀어 있는 배낭이 조금은 너저분해 보일 뿐이었다.

“그럼 따라 나와.”

“어디를요?”

“말하면 네가 어딘지 아냐.”

술에 취해 섭섭한 표정을 짓던 어제의 블라드를 기억하는 니벨룬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은 요즘 따라 느껴지던 침울한 분위기가 조금은 가신 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챙긴 짐 말고 또 필요한 건 없어? 뭐 비상약이라던가 배 탈 때 필요한 도구 같은 거라던가.”

“그런 거는 이제 제미나 님이 다 챙겨주고 계시죠.”

“왜 나한테 말 안 하고?”

“블라드 님은 이제 돈 별로 없잖아요.”

이제는 바예지드에 속해있지 않기에 딱히 받을 봉급도 없는 블라드였다.

그런 블라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니밸룬은 이미 제미나에게서 나름의 지원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

돈 이야기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블라드는 조용히 뒷골목의 어딘가로 니벨룬을 이끌며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많이 밝아진 뒷골목이라 할지라도 현지인이 아니고서는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복잡한 길을 따라서.

“그나저나 신비는 많이 채워놨어? 북극 항로같이 거친 곳을 가려면 이래저래 쓸 일이 많을 텐데.”

“흐흐. 아직은요. 요 몇 년간 쓸 일이 많았잖아요.”

블라드가 알고 있는 니벨룬이라는 마법사는 도구를 통해 신비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평범해 보일지라도 나름의 의미를 갖춘 물건들을 통해 마법을 부리는 부르군드 족의 방식.

“그래. 다 못 채울 정도로 많이 쓰기는 했지.”

그러나 자신과 만나고 나서부터는 그 신비를 채울 겨를도 없이 써댔다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보았던 도구들만 해도 이미 수십 가지였으니까.

“쟤네야?”

“네?”

“쟤네냐고. 너한테서 구슬 따갔다는 애들이.”

어느새 뒷골목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 니벨룬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뒷골목 사이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들고 있는 아이들.

그 애 중에서도 안면이 익은 아이들을 보며 니벨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친구들이네요.”

“좋아.”

목표를 확인한 블라드가 앞으로 나섰다.

한쪽 손에는 구슬들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들고서.

“여기 대장 나오라고 해.”

손바닥을 통해 만져지는 구슬들의 감촉이 매끄러웠다.

그것은 블라드에게 있어 어렸을 적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운 감각 중 하나였다.

“구슬 한 번 치게.”

먼 곳으로 떠나가는 나의 마법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

이제는 이별을 준비할 줄 아는 소년이 벙쪄있는 아이들을 향해 반짝이는 구슬을 튕겨내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9화 3

외전- 별빛으로 이어진 길

아무리 벗어나려 노력해도 언제나 북부인들을 따라다녔던 차별의 시선들이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혹은 야만인의 피가 섞인 천한 인종들.

이것이 지난 세월 동안 북부인들을 바라보던 대부분의 시선이었다.

“새로운 가주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루트거 바예지드 님.”

그러나 지금 스투르마의 성문에는 그간의 차별이 무색하다는 듯 대륙 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줄 서 있었다.

같은 북부에서 온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저 멀리 남쪽에 있는 가문에서 보낸 자들까지.

처음 보는 문장들로 가득한 깃발들의 모습에 무뚝뚝한 스투르마의 사람들까지도 흘깃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릴 정도였다.

“음?”

아직은 가주가 아니었으나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손님들을 맞이하던 루트거.

그런 그의 앞으로 난생처음 보는 깃발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달마티아 남작 가문의 깃발이에요. 이번에 새롭게 문장을 바꿨다고 하더라구요.”

“으음.”

옆에서 들려오는 도로테아의 설명에 루트거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의 얼굴에는 가시지 않은 당황감 한줄기가 남아있었다.

손님 앞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앞에서 펄럭이는 달마티아의 문장 앞에서는 누구라도 루트거처럼 반응하고 말 것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루트거 님.”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바예지드는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중부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영지. 도브레치티.

그간 빈궁한 사정으로 귀족 세계에 발도 내밀지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 루트거의 계승식을 기회 삼아 자신들의 깃발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손님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하고 주인으로서 해줘야 할 말을 주고받던 루트거와 달마티아의 사신.

그러나 정례적인 인사말이 끝났음에도 루트거는 달마티아에서 온 사신을 붙잡고 있었다.

그 예외적인 모습에 홀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쏠리기 시작했다.

“지금 들고 있는 깃발에 새겨진 문장이······. 혹시?”

“아, 아 이것 말씀이시군요.”

여태껏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듯 달마티아에서 온 사절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의 깃발을 꺼낼 때만큼은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펴고 있었다.

세련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반응이었지만 오히려 그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훈훈한 웃음을 짓게 했다.

“저희 영지의 크나큰 자랑이지요. 무려 이번에 정교회에서 직접 인정한 신수(神獸)를 따와서 만든 것입니다.”

“정교회가?”

정교회가 직접 인정한 신수라는 말에 홀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신을 제외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곧 이단의 행위.

그렇기에 그간 다른 상징들에 대해서는 인색했던 교회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그게?”

“네 맞습니다. 두더지입니다.”

남들은 성벽이니, 창이니 하며 멋진 문양들로 가문의 위신을 드러내었으나 달마티아 남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땅의 정령을 상징하는 문장이지요.”

지금 그들의 깃발에 그려져 있는 것은 앙증맞기까지 해 보이는 두더지 한 마리였으니까.

그것도 짤막한 엄지손가락까지 치켜들고 있었으니 누구라도 그 귀여운 모습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뀨-!

아우슈린에서 데어마르까지.

동부에서 중부, 그리고 북부로까지 통하는 길을 뚫어낸 두더지가 있었다.

소드마스터와 함께하고 정교회가 인정한 그 정령은 지금 본래의 고향인 도브레치티에서 남부럽지 않은 공양을 받고 있다고 했다.

※※※※

“아주 도시에 소문이 다 났어.”

“······.”

“못났다 못났어. 정말.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애들이랑 구슬치기를 해?”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쇼아라의 부둣가.

이제는 완연한 여름의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제미나가 세모눈을 치켜뜬 채 블라드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어렸을 때 많이 못 해봐서 그랬니? 이제 여유 좀 생기니까 한번 해보고 싶었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지 그랬어. 이게 유치하게 뭐 하는 짓이야.”

잔뜩 모여있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블라드에게만 들리게 귓가에 속삭이는 제미나였다.

그렇기에 누가 지금의 둘을 본다면 아마 딱 붙어 있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고 착각할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아니라 니벨룬이 필요하다고 했다니까.”

누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아마 주위에 있는 누구라도 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면 조금은 시무룩해져 있는 블라드의 모습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애들 구슬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고양이가 왜?”

“그게······. 그게 마법이니까?”

보지 않았다면 믿을 수 없으며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는 존재.

그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제미나에게 제대로 설명하기란 지금의 블라드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나 가는 마지막까지 너희들 싸우는 모습을 보는구나.”

그런 블라드와 제미나를 보며 선창에서 내려오는 사내가 있었다.

등 뒤에는 수인족이며 드워프며 할 것 없이 온갖 건장한 사내들을 끌고 다니는 선장.

이제는 뒷골목 아이들에게 있어 또 다른 선망의 대상이 된 하벤이 여전히 투덕거리는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고향의 풍경이란 거지.”

“준비는 다 했어?”

이제는 절름거리는 모습마저 경륜처럼 보이는 남자.

거기다가 제미나가 새롭게 마련해 준 선장모까지 쓰고 있었으니 지금의 하벤은 누가 보아도 근사한 바다 사나이 그 자체였다.

“준비야 다 했지. 선창도 탐험용으로 다 개조해놨고, 선원들 먹일 술도 잔뜩 실어놨고.”

그 말과 함께 하벤이 블라드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누가 신경이라도 써줬나 봐. 한참 바쁠 시기였는데도 조선소에서 금방 자리를 내주더라고.”

오직 북쪽의 빙하가 녹을 시기에서만 떠날 수 있는 것이 지금의 항해였다.

그 시기를 맞추기 위해 어쩌면 1년의 시간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지금 바로 출발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롯이 블라드의 배려 덕분이었다.

“어쩌면 내년 이맘때쯤에는 아우슈린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때 편지할게.”

“그래.”

이번 탐험대의 목적은 새롭게 생겼을지 모를 북극 항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떠나는 하벤의 최종 목적은 대륙을 반 바퀴 돌아 엘프들의 도시인 아우슈린까지 닿는 것이었다.

“그럼 그쪽도 갈길 바쁘실 테니 이만 떠나도록 할까?”

장난스럽게 웃어대는 하벤의 앞으로 하품을 해대는 고트가 있었다.

선장은 바다로, 기사는 북부로.

여기 좀 보라는 듯 아예 마차까지 끌고 온 고트는 우리도 어서 북쪽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조심해.”

“너도.”

잘 가라 말하며 어깨를 부딪치는 둘이었으나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어른이 된 두 명의 소년은 이별이란 담백하게 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훌쩍······. 흑.”

짤막한 이별의 말만 남긴 채 다시금 배로 올라가는 하벤을 조용히 보고 있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의 옆으로 누군가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 하벤 저거. 흑. 뒤도 한 번 안 돌아보는 거 봐. 흐윽.”

“······.”

날씨는 화창하고 머릿결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풍성했다.

아마 오늘만큼 돛을 펼치기 좋을 날이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바람을 따라 제미나가 흘려대는 눈물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 냉정한 새끼.”

“우리도 이만 가자.”

“······이 냉정한 새끼들.”

누군가가 외치는 호령에 맞춰 부두에 묶여 있던 밧줄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천천히 강의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붉은 머리 제미나 호.

“내년에 연락한다잖아. 그때 되면 또 실컷 보겠지.”

저 멀리 떠나가는 배를 향해 쇼아라의 사람들이 힘껏 손을 흔들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뒷골목에서 태어났으나 이 세상 가장 먼 곳으로 향하는 캡틴 하벤을 위해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원하는 꿈을 위해 떠나는 그를 위해 쇼아라의 사람들이 있는 힘껏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

그러나 모두가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순간에도 블라드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드가 바라보는 그곳은 예전에는 캡틴 후버의 본거지가 있었던 부둣가의 어느 건물이었다.

“거기서 나오니까 좋지?”

창백한 얼굴로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있던 그때의 하벤을 향해.

내가 부숴버린 벽 앞에서 웃고 있던 그때의 하벤을 향해 마차에 올라선 블라드가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

-해가 진다! 돛 반개해!

-마지막으로 위치 맞춰봐! 파수꾼은 별자리 확인하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물비린내가 아닌 바다의 짠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져가는 노을을 옆에 두며 천천히 북쪽으로 향하는 하벤의 배.

앞으로 다가올 밤에 대비한 선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지만, 오직 단 한 사람만큼은 하벤의 옆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오직 선장만이 설 수 있다는 조타석이었지만 니벨룬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하벤과 나란히 서서 점점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선원들이 눈치를 줘도, 옆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헛기침 소리에도 그렇게 가만히.

“딱히 할 일이 없는 거면 내가 뭐라도 하나 만들어줄까?”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바다의 왼쪽에서는 아직도 지평선에 닿지 못한 노을이 붉은빛을 내며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는 이미 밤하늘의 별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 눈가에 구슬 하나를 가져다 댄 채 고개를 치켜들고 있을 뿐이었다.

“······됐다.”

그렇게 한참 하늘을 쳐다보던 니베룬은 서서히 펼쳐지는 밤하늘 사이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른 별을 향해 구슬을 가져다 댔다.

니벨룬이 찾아낸 그 별은 밤바다를 누비는 선원들이라면 누구나 의지한다는 북쪽의 별인 북극성(北極星)이었다.

“뭐가 됐는데?”

“방금 봤어요.”

“······뭐를?”

아직 마법사와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다는 듯 하벤이 계속해서 되묻고 있었다.

그러나 하벤도 시간이 지나면 블라드처럼 알게 될 것이다.

신비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북극성이요. 저 별이 우리를 봤어요.”

밤하늘에 있는 별 하나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별을 향해 자신의 빛을 비추고 있었다.

니벨룬이 들고 있는 구슬을 향해서, 그것이 품고 있던 아이들의 반짝임을 따라서.

“역시 이 구슬이라면 별도 알아볼 줄 알았다니까요.”

서로에게 이끌린 두 개의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다에서 밤하늘로, 이들이 향하려는 북쪽의 어딘가를 향해서.

“······이 선은 뭐냐.”

비록 지금은 칠흑 같은 밤바다를 헤매더라도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려는 소년들을 위하여.

그렇게 이어진 두 개의 별빛이 바다를 가르며 하나의 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라는 듯, 아무도 길을 잃지 말라는 듯 그렇게.

“나침반은 필요 없겠어요. 그쵸?”

높디높은 밤하늘은 아니었을지라도 빛나는 별을 위해서.

그렇게 이어진 세계의 경계선을 따라 하벤의 배가 나아가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0화 4

외전- 새로운 시대

높게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를 비추고 있었다.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인 키하노 프라우센이 직접 세운 도시이며 용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상징과도 같은 도시.

그러나 영화로움으로 반짝여야 할 브리간테스에는 지금 숨죽인 침묵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어린 황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소.”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황실의 어느 방에서 궁정공 아르망이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인 듯 방 안은 온통 어두컴컴했지만,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느다란 한 줄기 빛만큼은 그가 보고 있는 찻잔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아이가 제 명까지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

창가에 서서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강철공 티무르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듯 고요한 황실이었다.

그 조용한 곳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저 티무르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궁정에 관한 일은 궁정공께 맡기는 것이 맞겠지요.”

자신의 계획을 암묵적으로 허락하는듯한 티무르의 태도에 궁정공 아르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끝났고, 거짓된 황제는 폐위했소이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비어있는 황실뿐이지.”

세월에 의해 잔뜩 녹슬어 있는 궁정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티무르를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마치 광기와도 같은 형형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정당한 태양을 하늘 위에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이번 대의 궁정공인 내가 해야할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하오.”

황실을 지키고, 궁정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궁정공 아르망은 결국 거짓된 황제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흘렀을 수많은 피들이 제국의 신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빛나는 그의 눈빛은 북쪽에 있는 어느 기사를 향해 있었다.

“부디 도와주시구려. 여기서 제국의 맥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소?”

인간들의 시대를 연 제국은 한 사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라우센으로 이어지는 황가의 핏줄과 은색의 기사를 통해 전해지는 검의 의지뿐이었다.

“그분의 검술뿐만 아니라 소드마스터의 칭호까지 얻었으니 이보다 더한 정통성은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용의 핏줄을 이었음에도 말입니까?”

그러나 잔뜩 늙어버린 아르망을 바라보는 티무르의 눈빛에는 왜인지 모르게 냉소적인 빛이 어려 있었다.

용의 숨결에 의해 제국이 썩어들어갔음에도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던 낡디 낡은 궁정공.

진실하지만 무능한 그를 향한 티무르의 눈빛에 자그마한 멸시가 담겨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인지도 몰랐다.

“······오히려 좋소. 용의 아들이면서도 제국을 위해 아버지를 베어내었으니.”

“제국을 위해서라.”

뒤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목소리에 강철공 티무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날의 결투가 궁정공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셨나 보군.”

같은 그림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 터.

그러나 블라드가 그려낸 그 날의 그림을 오직 자신의 의도로 가두려 하는 궁정공의 행태가 티무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와주시겠소?”

영광스러운 제국은 이어져야 한다.

비록 뿌리는 썩었고, 뻗어낸 가지는 옳지 못한 방향으로 자랐다 할지라도 제국이라는 세계 아래에는 여전히 그곳에 기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싫습니다.”

그러나 강철공 티무르는 아르망의 간곡한 부탁에도 그저 조용히 거절의 대답을 건넸을 뿐이었다.

“······어째서.”

말을 마친 티무르가 천천히 창가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거야 우리 둘만으로는 결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니까요.”

티무르가 창가에서 물러날수록 그동안 가려져 있던 햇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 방 안에서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형체 하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페테르 백작이 아들에게 바예지드 가주직을 넘긴다고 하더군요.”

“그 청년이라면 강철공께서 충분히······.”

“이번에 열릴 제국 회의에는 아우슈린과 니다벨리르의 사람들도 참여할 예정이기도 하고.”

어둠이 걷힌 그곳에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탁자였다.

그것도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마주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있게 만들어진 탁자.

“······그리고 새로운 소드마스터 또한 언젠가는 저 자리에 오겠지요.”

촤악-!

햇빛이 모자란다는 듯 티무르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덕분에 눈을 가리고 만 아르망이었지만 강철공 티무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용의 시대를 넘어 제국의 시대. 그리고 이제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시기입니다. 궁정공.”

이제야 눈을 뜬 아르망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티무르는 문고리를 잡고 난 뒤였다.

“그러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정은 새로운 사람들한테 맡기도록 합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소드마스터.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젖힌 강철공이 조용히 방 밖을 나서고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원탁에는 자신의 자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그렇게.

“······강철공.”

그렇게 북부의 찬 바람이 떠난 자리에는 오직 갈 곳 잃은 아르망만이 남아 있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던 조금씩 방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이제야 날이 풀리기라도 했다는 듯 스투르마로 향하는 길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마부석에 앉은 고트가 조금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거라며 투덜대었지만 밖을 내다보는 제미나는 이 여행이 즐거운 모양인지 그저 싱글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 탑같이 생긴 게 용이라는 거지?”

“응. 정확히는 데스웜이라고. 서부에서 서식하는 녀석인데.”

제미나가 바라보는 저 먼 평원 위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기다란 탑처럼 생긴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커다란 그것은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서부의 용 데스웜이었다.

“아까 지진이 났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나 태어나서 지진 처음 느껴보거든?”

“그래?”

블라드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눈을 반짝여대는 제미나를 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너무 신기하다는 듯 지금까지 조잘대는 그 모습이 몇 년 전 데스웜을 처음 보았던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맘때쯤이면 북부까지 올라와서 햇볕을 쬐고 간다나 봐.”

“그런데 저렇게까지 크면 엄청 많이 먹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안 잡아먹어?”

“쟤는 그런 짓 안 해. 땅속에 있는 광물 같은 걸 먹고 산다던데.”

루트거와 잡았던 녀석을 제외하고는 데스웜이 사람을 습격한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마 그 녀석도 흑마법의 저주가 아니었다면 굳이 북부까지 올라와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똑똑해졌네 블라드. 그런 건 다 어디서 배웠어?”

마차 창턱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던 제미나의 시선이 블라드를 향해 있었다.

무엇이든 물어봐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해주는 블라드의 모습에서 오늘따라 어른의 향기가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뭐 배우나.”

누아르와 함께 마차 옆을 걸어가던 블라드는 감탄했다는 듯한 제미나의 목소리에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냥 오다가다 듣는 거지.”

딱히 배우지는 않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데스웜에 대해 설명해 주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 반짝거리는 제미나의 눈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블라드는 그만 콧잔등을 긁적이고 말았다.

“아 위스키 먹고 싶다.”

“안돼 이건. 선물용으로 특별히 주문한 거란 말이야.”

“한 모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루트거 님도 봐주실 거야.”

“얘가 미쳤나 봐 진짜.”

선물로 가져온 위스키를 먹고 싶다는 블라드의 말에 제미나는 기겁을 했지만 아마 정말 마시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예전에 걸었던 길을 걸으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것 뿐이지.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위스키가 딱 맞는데.”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하늘. 그리고 그사이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데스웜의 모습.

말도 타지 못했었던 그때를 기억하던 블라드는 오늘따라 요제프가 건네주었던 위스키가 그리울 따름이었다.

※※※※

“워워. 와 이거 뭐야.”

“······.”

마차 한 대를 몰며 쇼아라에서 스투르마까지 향하던 블라드 일행.

그러나 목표했던 도시까지 왔음에도 고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 내가 이래서 일찍 오자고 했잖아. 저 마차들 좀 보라고.”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스투르마의 성벽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블라드를 맞아주는 것은 성문 앞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마차들의 행렬이었다.

“······블라드. 저기 좀 봐.”

“뭐?”

“저기 저거. 다들 마차 말고도 수레까지 엄청 가져왔어.”

각 가문당 한 대의 마차만 보냈어도 지금같은 정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몰려드는 사람들은 새로이 계승되는 바예지드의 가주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고작 맨몸으로 왔을 리가 없었으니 지금 스투르마 앞에는 온갖 비싼 물건들을 싣고 온 수레들이 한가득이었다.

“······우리도 선물 좀 많이 가져올 걸 그랬나? 여기서 우리가 제일 초라해.”

“초라하긴 뭐가 초라해.”

으리으리한 마차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런지 제미나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고 있었다.

고트가 신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빌린 마차.

거기다 들고 온 선물도 옆에 있는 이들에 비해 보잘것없었으니 의기소침해 질 만도 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사람들 다 귀족인 거잖아.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당연히 되지. 너 레이디 제미나야.”

이제야 처음으로 경험하는 높은 세계에 제미나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블라드는 어떻게 해야 이 행렬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장, 대장!”

“왜?”

“앞에서부터 누가 오나 봐. 마차들이 웅성거려!”

그러나 잠시 고민할 틈도 없다는 듯 성문에서부터 선 마차들이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높은 사람이 오나?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누구지.”

높은 사람이 온다는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제미나가 재빨리 구석 쪽으로 몸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한 그 모습에 블라드가 입을 다셨지만, 불행히도 제미나가 경계하던 그 높은 사람은 일행이 있던 마차에 볼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내려.”

“응?”

입은 차림새는 고급스러웠으나 마차를 두들기는 모양새는 영 불량스러웠다.

“내리라고. 괜히 여기서 시선 집중시키지 말고.”

거기다가 왼쪽 눈가에 두른 시커먼 안대까지.

충분히 위협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제미나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정작 눈이 마주친 그는 마차 안에 있는 제미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자야르?”

“일찍 좀 올 것이지. 여전히 손 한 번 많이 가는 녀석이군.”

바예지드 가문의 새로운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남자. 기사 자야르.

가장 명예로운 기사를 키워냈다고 명성이 자자한 자야르였지만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1화 9

외전- 변하지 않은 저택

오랜만에 들어서는 저택의 복도는 블라드에게 익숙한 정취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차가웠던 겨울날, 그저 검 한 자루만을 짊어든 채 요제프를 따라왔던 바예지드의 저택.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설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 이곳은 또 다른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이 저택은 변한 게 없네요.”

“딱히 변할 일도 없지. 요즘 조금 번잡해지긴 했어도.”

자야르의 뒤를 따르던 블라드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저택의 정경을 훑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기에 정겨운 풍경들.

블라드는 종자였던 시절, 자신이 걸었던 길들을 밟으며 예전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사단장이 되신 줄은 몰랐어요.”

방금 포틀리와 함께 소시지를 나누었던 식당을 스쳐 지나갔다.

말을 타지 못해 망신을 당했던 연무장이 저 아래 보였고.

그러나 변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도 가장 와닿는 것은 지금 보이는 자야르의 뒷모습이었다.

“귀찮은 건 싫어하시더니 용케도 단장직은 수락하셨네요.”

“······나도 딱히 할 생각은 없었다. 옥사나 님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말이지.”

귀찮은 것은 싫고, 귀찮은 것을 몰고 오는 것들은 더 싫다.

평소 자야르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그가 단장직에 수락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고 있었지만, 자야르에게도 딱히 거절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옥사나 님이요?”

“너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내 이름값이 높아졌어. 아마 옥사나 님은 그걸 좀 이용해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야.”

새로이 등장한 소드마스터의 존재에 지금 대륙은 열광하고 있었다.

건국왕 프라우센 이후로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드마스터.

그것도 가장 오래된 용을 베어냄으로써 전설 속의 한 장면을 재현해 낸 블라드였으니 바예지드로서는 그 명성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제자 잘 둬서 출세하신 거네요.”

“······여전히 제 잘난 맛에 살고 있군.”

자야르의 발걸음이 점점 낯선 복도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종자였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저택의 중심부였다.

“여기는 처음 와보는데요.”

“와봤어도 문제인 곳이지. 종자 주제에 무슨.”

피식 웃는 자야르의 비웃음이 여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자신을 여전히 돌봐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자야르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들어가 봐라.”

“네.”

예전에는 페테르가 쓰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루트거가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그 앞에 선 자야르가 조용히 문을 두들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

이제는 평안에 다다른 라그무스가 걸어놓은 신비.

그 신비를 따라 열리는 이곳은 오직 바예지드의 가주가 허락한 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저택의 가장 깊은 곳.

“생각보다 늦었군. 블라드.”

그러나 온통 낯설 것만 같은 그곳에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미소 하나가 블라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침서부터 까마귀들이 날아들더군. 네가 온다고 말이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 사이에서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들이 가득한 집무실이었으나 루트거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미 눈앞의 공간은 정겨운 곳이 되어 있었다.

“옜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이제는 새로운 바예지드의 가주가 될 루트거 바예지드.

그가 블라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퉁겨내었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겠지?”

“······은근히 뒤끝이 있으시네요.”

루트거의 손을 떠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작은 것.

블라드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땅콩을 보며 실없이 웃고 말았다.

※※※※

“요즘은 뭐랄까. 하루하루가 나의 적성을 알아가는 시간이랄까.”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루트거가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쩍 벌린 다리며 길게 내쉬는 한숨까지.

모두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불편해서는 나오기 힘든 자세였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역시 한 가문을 이끄는 입장이라는 게 영 만만치가 않아.”

“그래 보이네요.”

도로테아가 내어준 찻잔을 든 블라드가 축 늘어진 채 앉아 있는 루트거를 힐긋거렸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창백해진 안색.

그리고 쏟아져 들어오는 격무에 지쳐 짙게 깔린 눈그늘까지.

평소에는 닮지 않은 형제라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보니 루트거의 얼굴에서 요제프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만만치 않은 일 중에서도 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꽤 크단 말이다.”

“제가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여대는 블라드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루트거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일개 가문을 뛰어넘으면서도 정작 살고 있는 곳은 그냥 여관 아니냐. 너 때문에 발생하는 민원이 한 둘인 줄 알아?”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보르단이 시장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걸 막은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강철공께서 땅도 내어주겠다는데 도대체 왜 독립을 안 하는 거야?”

최초의 소드마스터는 제국을 세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 등장한 소드마스터는 나라를 세우기는커녕 가져야 할 영지조차 거들떠보지 않았으니 세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모시암은 어때? 여전히 주인이 없는데”

“연고도 없는 곳인데 싫어요.”

“그냥 뒷골목 일부를 자치구로 떼어줄까?”

“굳이 저 없어도 알아서 잘 돌아가던데요.”

“······.”

마치 여기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는 듯 확실하게 선을 긋는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명예는 가졌으나 권력에 대해서만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블라드를 보며 루트거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제가 쇼아라에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하세요? 오히려 이득이지 않나요?”

“그렇지. 그렇긴 하지······.”

황실의 권위가 추락해버린 지금, 정통한 자격을 갖춘 블라드가 있는 쇼아라만큼 주목을 받는 도시는 없을 터였다.

당연히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을 계산한다면 당연히 블라드가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지만.

“그런데 누구랄 것도 없이 다 나한테 압박을 주니까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골치 아프달까.”

그러나 빛나는 검을 쥐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큰 법.

아예 이렇다 할 대답 자체를 하지 않는 블라드를 대신해 들들 볶이는 사람은 그와 가장 큰 연관이 되어 있는 루트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황제는 안 할거지?”

툭 던진 듯한 말이었지만 순식간에 집무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질문이었다.

옆에 있던 도로테아조차도 잠시 움찔하게 만드는 그런 질문.

루트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무실 안에는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있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게 모두에게 좋지 않겠어요?”

시대에서 시작한 비극을 끊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부숴야만 한다.

용의 시대를 부순 키하노처럼, 제국의 시대를 부술 지금의 블라드처럼.

그래야만 짓눌려 질식해 가는 별들이 다시금 하늘 위로 떠 오를 수 있을 테니까.

“알았다.”

시대의 종언을 가장 가까이서 들은 루트거가 웃고 있었다.

역시 너 다운 대답이라는 듯 그렇게.

“못다 한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피곤할 텐데 이만 쉬도록 해라.”

“그럴까요.”

스투르마에 들어왔을 때는 정오였으나 어느새 기울어진 태양은 조금씩 붉은 기를 머물고 있었다.

“아, 쉬기 전에 너를 찾는 손님들이 있으니까 확인하도록 하고.”

“네.”

“그리고 머무는 동안 한 번이라도 새로 모은 종자들을 봐주면 좋겠는데.”

“······.”

“어떻게 보면 다 네 직속 후배들 아니냐. 애정으로 한 번 봐달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부탁하는 자세가 묘하게 당당해 보였다.

마치 집세 정도는 내야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루트거의 표정에 블라드는 그저 알겠다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또 뭐요.”

다시금 자신을 붙잡는 루트거의 목소리에 블라드가 매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는 그저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한 번 뵙고 가줬으면 하는데. 너라면 분명 기뻐하실 테니까 말이다.”

“······.”

모두가 다가올 축제에 떠들썩한 스투르마였지만 오직 한 여인이 있는 곳만큼은 죽음과도 같은 침묵으로 물들어 있을 뿐이었다.

창밖에 있는 묘비로 슬픔을 달래며 하루하루 시들어가고 있는 여인.

언제나 나에게 어머니처럼 웃어주었던 그녀를 떠올린 블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

“······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이제는 깜깜해진 복도 한가운데서 조용히 열리는 방문 하나가 있었다.

열린 문을 따라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촛불이 밝히는 붉은 머리.

빼꼼히 문을 연 채 복도를 기웃거리던 제미나는 조용해진 복도의 분위기가 무서웠는지 냉큼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레이디라며. 레이디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 둬도 되는 거야?”

새로운 백작을 만나러 간다는 블라드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거기다 알던 사람들을 만나러 간다며 나간 고트도 어디서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지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고 있었으니 지금 방에 있는 사람은 오직 제미나 혼자뿐이었다.

“이것들이······. 너희들 돌아오면 다 각오해.”

말투는 험악했지만 내뱉는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익숙한 쇼아라에서는 몰랐으나 낯선 스투르마에 닿으니 다가오는 어둠이 그렇게나 무서워진 제미나였으니까.

“안녕.”

“꺄아악!”

그렇게 이제나 올까 싶어 복도를 기웃거리던 제미나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가 들어도 청량한 목소리였으나 가뜩이나 움츠리고 있던 제미나에게는 그저 공포스러운 조우였을 뿐이었다.

“저기 나는······.”

“드레스! 하얀색!”

“혹시 블라드······.”

“꺄아악!”

어두컴컴한 복도에 홀로 떠 있는 정체 모를 하얀색 형체가 있다.

거기다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은 이 저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니 제미나의 입장에서는 나름 기겁할 만한 광경이기는 했다.

“······나 다음에 올까?”

“히으으윽!”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제미나를 보며 세계수의 신녀가 당황했다는 듯 멈춰 서 있었다.

꿈에서 본 붉은 머리였기에 반가운 마음에 냉큼 달려간 것이 아무래도 실수였던 모양이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냐고 묻는 제미나의 말에 신녀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딱히 이름이 없는 신녀로서는 자신을 무어라 소개해야 제미나가 안심을 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기······. 나는 그냥 이거 주려고.”

그러나 말재주 없는 소녀의 입장에서 진심을 전할 방법은 딱히 많지 않았다.

그저 원래 주려고 했던 그림을 건네주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수밖에.

“이, 이게 뭔데?”

“내가 꿈에서 본 거예요.”

소녀가 건네주는 종이를 잡아든 제미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안에 그려진 그림을 보려 애썼다.

그러나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만으로는 지금 건넨 그림이 무언지 도무지 확인하기 힘들어 보였다.

“이거 블라드가 보면 좋아할 텐데.”

“블라드?”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그제야 제미나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세계수의 신녀는 어느새 복도를 향해 뒷걸음질 치는 중이었다.

“아직 나를 보고 웃어주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나 봐요.”

“응?”

꿈속에 사는 소녀는 자신을 보며 반갑게 웃어주었던 붉은 머리의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아직 둘의 만남은 서로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

“그럼 또 봐요. 제미나.”

그렇기에 그림 한 장만을 건네며 돌아서는 세계수의 신녀.

어두운 복도를 향해 내달리는 백금발을 보며 제미나는 얼이 빠진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2화 3

외전- 올려다 본 하늘에는

“이 저택에 귀신이 있어.”

이른 아침,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슴푸레한 주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제미나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뭐?”

“여기에 귀신이 있다니까. 내가 어제 봤어.”

이제야 겨우 초점이 잡힌 시야에는 고양이처럼 양손을 말아쥐고 있는 제미나가 있었다.

나름 위협적인 모습을 표현해보려 한 모양이었지만 전후 사정을 모르는 블라드에게는 그저 영문 모를 기행일 뿐이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아침부터 쳐들어와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귀신이라니.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드러눕는 블라드였지만 제미나는 그런 블라드의 이불을 단호한 손길로 치워내고 있었다.

“······진짜 아침부터 왜 이래.”

“이것 봐. 여기 명확한 증거가 있다니까.”

다시 자고 싶다는 듯 눈을 끔뻑끔뻑 뜨고 있는 블라드에게 제미나가 여기 좀 보라는 듯 하얀 종이를 들이밀었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그 종이는 어젯밤 세계수의 신녀가 제미나에게 전해주고 간 것이었다.

“어제 만난 귀신이 놓고 간 그림이야. 어때? 보는 것만으로도 막 서늘함이 느껴지고 그렇지?”

“······.”

“이 정돈되지 않은 그림체를 봐. 누가 봐도 저주가 담긴 그림이라니까?”

과연 제미나가 말한 것처럼 전혀 정돈되지 않은 그림체였다.

다만 그에 비해 색감만큼은 화려했으니 도통 어느 나이대가 그린 그림인지 가늠하기 힘든 그림이었다.

“이걸 귀신이 주고 갔어?”

“그렇다니까.”

“······혹시 그 귀신이 머리는 백금발이고 입고 있는 드레스는 하얀색이고 그래?”

“어머 세상에!”

귀신의 인상착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그만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블라드의 말이 정확하다는 듯 안 그래도 제미나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블라드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제미나가 건넨 그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하는 스투르마의 성벽 위.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방 안에서 신녀의 계시를 해석하던 블라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

지금 손님들이 잔뜩 모인 바예지드의 저택은 그야말로 사교의 장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대륙 곳곳에서 모인 귀족들과 사신들.

평소라면 도저히 만나기 힘든 지금의 기회에 이미 눈치 빠른 몇몇은 새로운 인맥 형성에 여념이 없었다.

“오오. 블라드 아우레오 경······.”

그리고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바로 새로운 소드마스터인 블라드.

그러나 수없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무심히 헤쳐나간 블라드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갈 뿐이었다.

‘어머니를 한 번 보고 가줬으면 좋겠다. 너라면 분명 기뻐하실 테니까.’

“······.”

떠들썩한 1층과 2층을 지나 손님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3층까지.

그곳까지 올라온 블라드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전히 햇빛은 밝네.”

종자였던 시절에는 항시 시종들이 드나들던 복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

킁킁.

계단에서 복도로 발을 내딛기 전, 블라드는 몸 이곳저곳에 코를 대며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자신에게 냄새가 나는지도 몰랐던 뒷골목의 소년.

그러나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다니던 그 소년에게도 이곳의 귀부인은 항상 웃음을 지어주고는 했었다.

“······블라드 님?”

“오랜만이에요.”

조용히 옥사나가 있는 방 앞에 선 블라드는 그곳에 있는 낯익은 하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옥사나 님을 뵈려고 왔습니다.”

“아아.”

옥사나의 친정 가문에서부터 따라왔다던 중년의 하녀는 한눈에 블라드를 알아보며 함박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지 뭐예요. 너무 근사해지셔서요.”

“감사합니다.”

크게 지은 웃음이었으나 조용한 방 안의 분위기가 의식된다는 듯 하녀의 입에서는 조금의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오랫동안 웃지 않았기에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에 기별을 넣어야 하니까.”

오늘 들릴 것이라고 말은 해놨으나 레이디들에게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 사정을 익히 짐작하고 있던 블라드는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서서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본래 방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넓은 방이었으나 보이는 가구나 장식은 소박한 곳.

그러나 이 응접실이 텅 비어 보이지 않는 것은 지금 내 발치까지 와닿는 오렌지빛 햇살이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블라드 님?”

“아······. 네.”

그 빛과 함께 웃어주던 귀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주는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블라드는 곰팡이가 핀 것 같이 눅눅했던 자신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화사해지는 것만 같았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블라드.”

“······.”

그러나 오늘 보이는 그녀의 미소에는 그때 보았던 화사함 대신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듯한 비구름이 걸려 있었다.

툭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짙고도 어두운 비구름이었다.

“······죄송합니다. 진작에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아니다. 아니야. 이리 가까이 오렴.”

침대에 앉아 이리 가까이 오라 손짓하는 옥사나의 손이 마른 나무처럼 메말라 있었다.

먹지 못했고, 병들었고, 그리고 지쳐 있기에 메말라 버린 여인.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았던 마지막 모습처럼 비쩍 말라버린 옥사나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혀를 꺼내 입술을 훑고 말았다.

“다 알고 있단다. 네가 그동안 바빴다는 걸.”

“······.”

“내 아들이 못다 한 일을 하려고 그동안 열심히 해왔다는 것도.”

요제프가 죽은 지 이미 2년이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나 옥사나는 마치 그 일이 어제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 요제프의 이름을 꺼내고 있었다.

“도망쳤던 흑마법사들은 다 해치웠니?”

“······북부는요. 북부는 거의 다요.”

“용혈공 아래서 이간질하며 사람들은 가르던 자들은?”

“이번에 브리간테스에서 원탁회의가 있을 거예요. 거기서 그동안 갈라졌던 사이들을 메꿀 생각이에요.”

각자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있는 법.

어느 시대는 자유, 또 어느 시대는 영광을 위해.

그리고 지금 시대의 우리는 그동안 퍼져 있던 독들을 마셔야 하는 세대라 말한 사내가 있었다.

“그래. 열심히 했구나. 블라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을 태워서 세상에 퍼져 있던 독들을 불태우려 했던 요제프.

그런 그의 유지를 이어가는 블라드를 보며 옥사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행이구나. 다음의 아이들은 너희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다.”

검은 머리도 아니었고 창백한 안색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허약하지도 않은 눈앞의 블라드.

자신의 아들과는 단 하나도 닮은 모습이 없는 블라드였지만 그럼에도 그를 바라보는 옥사나의 눈빛은 요제프를 보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역시 잘 먹여 놓으니 보기가 좋구나. 딱 벌어진 어깨가 아주 사내다워.”

“······감사합니다.”

그러나 침대 맡에 고개를 숙인 블라드는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에게 어머니가 되어줄 수 있었으나 나는 그녀에게 하나뿐인 아들이 되어줄 수 없었으니까.

점점 시들어가는 그녀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기 창밖에 누워 있는 요제프뿐이라는 것을 지금 고개 숙인 블라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이럴 때는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구름이 꾸물거리는 하늘 아래서 블라드가 조용히 위스키병을 열고 있었다.

뒤쪽의 저택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으나 이곳만큼은 전혀 딴 세상이라는 듯 고요할 뿐인 자그마한 정원.

그 정원 안에 있는 요제프의 묘비 앞에서 조용히 술을 따르던 블라드는 저 뒤에 보이는 기사들의 위령탑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간 사람들만 편한 것 같단 말이죠.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힘든데.”

그레고리, 라그무스, 아게······.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그날 사르누스를 향해 함께 싸웠었던 수많은 기사들.

위령탑에 새로이 적힌 그 이름들을 위해서도 위스키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기척에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그들이 못다 한 일을 해주는 것이 남아있는 자들의 소임이겠지.”

“마커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곳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는 온통 흉측한 흉터가 가득한 사내였다.

“그래도 여기 있는 기사들은 운이 좋은 편이지. 이 세상에는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사람들이 훨씬 많으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마커스의 말에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럴 거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안드레아 교황께서 감사하다고 전해달라시더군. 이번에 해치운 녀석들이 꽤 골치를 썩였던 모양이야.”

“그런가요?”

그렇기에 지난 2년간 블라드는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아직 남아있는 잔재들을 해치우는 데 주력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을 현혹하는 흑마법사들을 해치웠으며 또 어떤 때는 아직 남아있는 드라굴리아의 추종자를 베어 내었다.

그렇게 쉴새 없이 움직였던 것은 지금 앞에 있는 이름들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한 블라드만의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또 남아있는 녀석들이 있나요? 이번 계승식이 끝나면 한 번 둘러볼까 하는데.”

“······.”

그러나 다음 목표를 알려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마커스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들고 왔던 술병을 꺼내고서는 조용히 근처에 있던 풀밭에 조용히 뿌렸을 뿐이었다.

“너는 아직 젊고, 그리고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커스?”

자신처럼 이름 없는 자들을 위해 조용히 술을 뿌리던 마커스.

고개를 든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블라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페테르 백작님이 내리신 마지막 명령에 따라 까마귀들은 더 이상 너에게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을 거다.”

“······.”

“이제는 남들 말고 너의 인생을 살아달라는 백작님의 마지막 당부인 셈이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되고 싶은 모습이 있기에 빛나던 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별은 놓아야 할 인연들을 놓지 못한 채 조금씩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으니 이제는 새로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이제 당분간은 못 보겠네요.”

“그렇지.”

“그럼 나 하나만 물어볼게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조금씩 멀어져 가는 마커스의 뒤로 블라드가 물었다.

“원래 이름이 뭐예요?”

“······.”

이름 없는 까마귀.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

그 사람의 정체가 궁금했던 블라드였으나 돌아선 마커스는 조용히 저 뒤에 있는 위령탑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나도 모른다. 예전의 이름은 저곳에 묻었거든.”

본인을 규정하던 이름을 묻었기에 어떠한 어둠에도 녹아들 수 있었던 남자.

그렇게 마커스라 불렸던 남자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어느새 기척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나 백수네.”

그렇게 마커스마저 떠나버린 정원에서 홀로 서 있던 블라드.

갑작스레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블라드는 조용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며 물었다.

“나 이제 뭐 해야 할까요. 요제프?”

세계수의 신녀가 제미나에게 주었던 그림.

오래도록 그 그림을 내려다보던 블라드였지만 이제 그의 옆에는 물어봐도 대답 없는 요제프만이 서 있을 뿐.

쏴아아아-

꾸물거리던 하늘에서부터 기어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블라드는 지금 내리는 비가 마치 자신의 등 뒤를 떠미는 것만 같아 씁쓸한 심정이 들고 말았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3화 8

외전- 이어짐

저물어가는 노을을 등진 채 홀로 밀밭에 서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들고 있는 괭이로 아직 녹지 않은 땅을 내려치면서.

시간을 조금 거슬러 아직 봄이었던 시절, 그때 당시의 블라드는 라문드의 장원에서 한창 농사일을 배우던 중이었다.

“이것 참 신기한 광경이로구만.”

씨앗조차 뿌리지 않아 그저 흙만 일궈놓은 텅 빈 밀밭이었다.

그곳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블라드가 내려치는 괭이 소리뿐.

그러나 요란히 들려오는 소리와는 다르게 지금의 블라드는 그야말로 초보 농사꾼의 어설픔을 여실히 보여주는 중이었다.

“검 대신 고작 괭이로 바꿔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멍청해 보일 수가 있나.”

“······그 정도예요?”

바로 옆에서 핀잔을 날려대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여댔다.

사실 본인도 슬슬 깨달아가던 참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농사꾼의 기질이 없는 것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암만 봐도 너는 농사를 지으면 안 되겠다. 적응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냥 재능 자체가 없어.”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흙과 가깝게 지내본 적 없던 블라드.

그러나 그런 사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블라드의 농사 감각은 도통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

검을 들고 있을 때는 대륙이 칭송하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 괭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뭐든지 어설픈 초보 농사꾼이었으니, 그 간극을 보기가 영 괴로웠던 라문드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왜 갑자기 농사를 짓고 싶어진 게야.”

라문드가 꺼내든 수통에서 전해지는 알싸한 향기가 있었다.

굳이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노골적인 주향(酒香)이었다.

“······지친 거냐? 그래서 좀 쉬고 싶어?”

“그런 건 아니구요.”

블라드는 라문드의 반응에 일이 텄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곧바로 괭이를 내던진 블라드가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생각해 보니까요,”

“생각해보니까?”

“제가 할 줄 아는 게 도둑질, 소매치기, 아니면 칼질 뭐 이런 거밖에 없더라고요.”

옆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라문드가 잠시 움찔하고 말았다.

부모도 없이 홀로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던 소년.

그저 살아남기 위해 걸어왔던 그간의 길에는 온통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만 아는 인생은 조금은 부끄럽달까.”

남에게 상처입히는 기술밖에 모르는 나는 아무래도 부끄럽다.

남들은 영광스러운 소드마스터라고 칭하지만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인 키하노는 그저 검술만으로 나라는 사람을 이끌지 않았다는 것을.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리를. 소드마스터가 검밖에 모르는 게 뭐가 부끄러워?”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조금은 타박하는 듯한 라문드의 말에 블라드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는 항상 소드마스터이고 싶지는 않거든요.”

남들이 보았을 때는 빛나는 소드마스터이겠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일 수 있는 나였다.

누군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친구, 또 누군가에게는 위기에서 구해준 은인.

그리고 지금의 라문드에게는 영 어설퍼 보일 뿐인 농사꾼인 것처럼.

“혹시 또 알아요? 저한테 검 말고 다른 걸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지.”

소드마스터였던 키하노는 그저 그가 가진 모습의 일부였을 뿐.

오히려 블라드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나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던 이름 모를 목소리의 모습이었다.

어쩌면 블라드가 키하노에게 배운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일격필살의 검술이 아닌 세상을 대하는 삶의 자세 그 자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배워두는 거예요. 저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대답해 줄 게 있도록요.”

그리고 블라드도 키하노의 그런 면을 닮고 싶었다.

황제나 기사나 아닌 그저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주었던 키하노의 면을.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의 블라드는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삶의 경험들을 주워 담으며 세계를 넓히는 중이었다.

※※※※

성대하게 열린 계승식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사열해 있고 대륙에서 모인 귀빈들이 축하해 주는 그런 화려한 계승식.

어쩌면 여태껏 북부에서 열린 모임 중 가장 화려한 순간일지 모르는 지금의 모습에 블라드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귀족이 모여있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

“······그래?”

“사실 저 여기는 두 번째거든요. 기사 작위 받을 때랑 그리고 지금.”

묘하게 들뜬 듯한 블라드의 모습에 자야르가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것.

종자였던 시절,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블라드를 기억하는 자야르는 지금 같은 상태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알리시아 남작은 왜 저 자리에 있는 거죠?”

대륙의 주목을 받고 있기에 공들여 준비한 바예지드 가문의 계승식이었다.

그런 계승식에서 귀빈들의 작위와 위치에 따라 앉을 자리를 잡아 놓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그렇기에 지금 블라드는 제미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알리시아를 보며 의아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불안해 보이는군.”

“전혀요.”

“제발 부탁이니까 평정심을 유지해.”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멀쩡한데요.”

“······.”

그럴 리가 있나.

지금 들려오는 숨소리만 해도 잔뜩 긴장한 듯 억눌려 있는데.

그것도 저 앞에 있는 두 여자가 서로 속닥거릴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이 여기까지 들려오는데 말이다.

“루트거 바예지드 님 입장하십니다!”

때마침 들려오는 집사장의 목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스투르마의 성벽을 본떠 만들어 커다랗고도 단단해 보이는 바예지드의 문.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방금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홀이 쥐죽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

훤칠한 키에 곧은 어깨.

거기다 예장용으로 차려입은 화려한 갑옷까지.

문이 열린 그곳에는 평소에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진중한 자세로 서 있는 루트거가 보이고 있었다.

“굉장히 낯설어 보이네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홀의 가장 높은 곳, 오직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그 자리에서 페테르가 조용히 손짓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될 계승식을 알리는 손짓이었다.

“이제 네가 알던 루트거가 아니라 바예지드 백작이 될 테니 말이다.”

어깨 위에는 가문의 이름을 얹고 등 뒤에는 대대로 지켜왔던 영지를 업는다.

그렇기에 무거워진 루트거는 이제 예전에 알던 그 모습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터.

그렇게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려 앞으로 나아가는 루트거를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어쩐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리 올라오도록 해라. 바예지드의 아들아.

루트거가 계단을 밟고 올라갈 때마다 페테르와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하는 페테르 바예지드.

왼손에는 가주의 망토를,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그는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아들을 보며 이리오라는 듯 양팔을 크게 펼치고 있었다.

-망토를 둘러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단을 오르며 닿은 곳.

마침내 올라선 바예지드의 가장 높은 곳에서 루트거는 아버지가 손수 둘러주는 망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두른 이 망토는 의무를 상징하는 것. 이제 너의 등에는 네가 책임져야 할 수많은 영지민들이 올라탔음을 잊지 마라.

영주란 땅을 다스리며 영지민을 돌봐야 하는 존재.

그렇기에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의무는 지금부터 루트거의 등을 무겁게 짓누르게 될 것이다.

-검을 들어라.

이윽고 전해지는 또 하나의 물건을 향해 루트거가 손을 뻗쳤다.

그것은 오직 가주만이 휘두를 수 있다는 바예지드 가문의 보검.

아버지의 아버지서부터 전해져 왔다는 이 검은 바예지드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들 수 있는 물건이기도 했다.

-지금 네가 든 검은 가주로서의 책임을 상징하는 것. 이제부터 너는 너의 명예가 아닌 가문의 명예를 위해 검을 휘둘러야 한다.

루트거라는 개인이 아니라 바예지드라는 가문을 위해서.

이 검을 받아든 루트거는 지금 이 순간부터 본인의 이름 대신 가문의 이름을 앞선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 페테르 바예지드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을 증인 삼아 선언합니다.

건네야 할 모든 것을 건네주었기에 이제는 계승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순간.

이제는 가주의 자리에서 내려가야 하는 페테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귀빈을 향해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루트거 바예지드가 가문을 이을 다음 대의 가주가 되었음을!

여태껏 넓디넓은 홀에서 들려온 소리라고는 오직 페테르가 루트거에게 전하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난 지금만큼은 마치 홀이 터져나갈 듯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짝짝짝짝-!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귀빈들의 박수 소리가 지금도 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세대에서 세대로. 가장 오래된 용이 날뛰던 그 험한 시대에서도 결국 전할 수 있었던 바예지드의 깃발을 축하하는 소리.

그러나 블라드는 이 요란한 박수의 향연 속에서도 저 위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고했다.”

오직 용의 피를 타고난 블라드였기에 들을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아들을 껴안은 아버지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 정말 수고했다.”

영주의 망토도, 가주의 검도 내려놓았기에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페테르 바예지드.

그렇기에 이제야 온전한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그가 루트거를 껴안으며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했노라고.

※※※※

“정말 보기 좋더라고요.”

계승식 끝난 밤,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는 바예지드의 저택.

이곳에 모인 모두가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귀족들이 있는 연회장이 아닌 어둠이 짙게 깔린 텅 빈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물려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요? 도통 상상이 안 되네.”

앞에서 걷고 있는 자야르와 함께.

지금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고 있는 둘은 각자 술병 하나씩을 든 채로 요제프의 집무실이었던 곳을 향해 걷는 중이었다.

“하긴, 드라굴리아의 유산이 상당하긴 할 테지. 못 받아서 아쉽겠군.”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갑작스레 드라굴리아의 이름을 꺼내는 자야르의 말에 산통이 깨졌다는 듯 블라드의 표정이 불손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뭐랄까. 아버지가 아들한테 물려주는 그런 거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 감각에 블라드가 이리저리 손짓하고 있었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야르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 건 부모 멀쩡한 사람도 경험하기 쉽지 않아. 애초에 빚이나 안 물려주면 다행인 세상이다.”

“그런가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고 싶으면 네가 하나 만들면 될 일 아니냐.”

끼익-

살짝 돌린 문고리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조금은 녹이 슨듯한 그런 소리였다.

“물려받는 경험은 못 해도 물려주는 경험은 충분히 할 수 있잖아.”

끼이이익-

어두울 것이라 예상했지만 밤에 보는 요제프의 집무실에는 푸른 달빛이 가득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빛이 머무는 집무실의 모습은 예전에 보았던 광경과는 달리 온통 낯설게 느껴질 뿐이었다.

“······여긴 변한 게 없네요.”

“변한 게 없기는. 가구란 가구는 죄다 천으로 둘러놨는데.”

이제는 주인이 없어 차갑게 먼지만 쌓여가던 요제프의 집무실.

그러나 몰래 찾아든 두 명의 손님 때문인지 지금 이곳에는 훈훈한 예전의 색이 조금이나마 입혀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한잔하는 거예요?”

“······그래. 원래는 나 혼자 하려고 했지만.”

딱히 이렇게 하자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 안에 들어선 블라드와 자야르는 버릇처럼 예전에 있던 위치에 서 있는 중이었다.

블라드는 손님용 테이블 앞에, 그리고 자야르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요제프의 책상 옆에 서서.

그렇게 예전처럼 서 있는 블라드가 우스웠는지 자야르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못 타던 놈이.”

“그때는 제가 용인 줄 몰랐으니까요.”

“맨날 같은 종자들이나 쥐어패고 사고나 치고 다니던 놈이.”

“그거야······.”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린 자야르가 여전히 변명을 주워 담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보아 와서 그런지 아직도 이 녀석이 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애송이였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소드마스터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부러운 게 그렇게 많아?”

“······.”

“옜다. 받아라.”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아직 자야르의 눈에는 블라드가 모자라고 또한 어려 보일 뿐이었다.

“술이요?”

“그거 그래 봬도 비싼 거다. 무려 50년은 더 묵힌 거니까.”

지금 블라드에게 건넨 술은 자야르가 특별히 아끼며 보관해 온 술이었다.

옥사나와 함께 바예지드로 오기 전, 오스카르 가문의 자야르였을 때부터 보관해왔던 그 술은 그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술이기도 했다.

“그렇게 귀한 술을 저한테 줘도 되는 거예요?”

“물려받고 싶다며.”

“아니 그래도······.”

“이제 됐지? 그러니까 술이나 따 봐.”

장식장에 있던 천을 걷어내고 그곳에 있는 술잔을 꺼낸 자야르가 블라드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어서 잔을 따라보라는 손짓이었지만 그러나 블라드는 히죽 웃으며 방금 받았던 술병을 뒤로 돌릴 뿐이었다.

“······이렇게 비싼 술을 지금 마시기는 좀 아깝고.”

은근슬쩍 품 안에 집어넣는 모습이 어쩐지 쉽게 꺼내 들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일단 제가 가져온 술부터 마시면 안 될까요?”

“······나 그 술 마시려고 20년은 기다렸다.”

“앞으로 한 20년 정도 더 묵히면 맛이 더 좋아지겠네요.”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애착이 생겼는지 술병을 숨기는 블라드의 손짓이 단호해 보였다.

“일단 오늘은 제가 가져온 술부터 먹을까요?”

“지금 안 먹을 거면 다시 가져와.”

“이것도 비싼 거예요. 아까 주방에서 몰래 슬쩍한 건데.”

은근슬쩍 술잔을 더 꺼내온 블라드는 자야르에게 술잔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데 자야르. 혹시 낚시할 줄 알아요.”

“낚시? 낚시는 갑자기 왜?”

지금 건네는 술잔은 자야르를 위해서.

다시 따르는 술잔은 나를 위해서.

“아니. 제가 낚시를 할 줄 몰라서요. 라문드 님도 본인이 화전민 출신이라 낚시는 잘 모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지금 따르는 술잔은 요제프를 위해서.

그렇게 세 잔의 술잔을 따른 블라드는 자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낚시 같은 게 어디 가서 마땅히 배울 곳도 없고.”

“낚시는······. 나도 잘 모른다.”

“아 그래요. 이거 아쉽네.”

잘 모른다는 자야르의 말이 아쉬운 듯 블라드가 혀를 내둘렀다.

들어 올린 술잔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자야르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작했다.

“빙어 낚시 정도는 할 줄 알지.”

“빙어 낚시?”

“그런 거 있잖냐. 얼은 호수에다가 구멍 뚫고 하는 거.”

천천히 술잔을 흔들던 자야르가 창가로 걸어갔다.

언제나 환하게 비치던 햇빛 대신 지금은 푸른 달빛이 비치는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

“그거라도 배우고 싶으면 다시 한번 오던가.”

겨울에 다시 오라는 자야르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가 웃고 있었다.

무언가를 물려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한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남아있던 술잔을 경쾌하게 털어 넣기 시작했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4화 12

외전- 소년과 소녀

복도를 수놓았던 붉은 융단이 치워져 있었다.

시든 꽃잎 몇 개만이 남아있는 장식대에는 빈 항아리만이 놓여 있었고.

화려했던 연회가 끝난 바예지드의 저택, 이제는 손님들이 모두 떠나가고 없는 고요한 그곳.

이제는 지저귀는 새소리만 찾아드는 그곳을 블라드가 홀로 걷고 있었다.

“······.”

본인 또한 떠나갈 채비를 마쳤는지 이미 얇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블라드였다.

그렇게 이른 아침,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깔을 밟으며 블라드가 나아간 곳은 이 저택의 안주인인 옥사나 바예지드가 있는 방이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아직 동도 트지 못한 아침이었지만 방의 주인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깊은 기침에 잠들지 못한 채 밤을 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블라드를 맞이하는 옥사나의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이제 가니?”

가만히 누워있어도 괜찮으련만 옥사나는 굳이 베개를 받친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아마 떠나가는 블라드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네. 이제 돌아가 보려구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완연한 그녀의 병색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마치 양초를 바른 듯 하얗게 터 있는 옥사나의 입술을 보며 블라드는 힘없이 웃고 말았다.

“그래. 떠나려면 일찍 가야지. 북부의 날씨는 도통 종잡을 수 없잖니?”

창가를 통해 조금씩 찾아드는 햇빛이 옥사나의 침대를 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봤을 때의 그 빛깔처럼 따뜻한 오렌지 빛이었다.

“······.”

그 빛깔 아래서 블라드를 바라보는 옥사나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아름답다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벽 한쪽에 걸어두고 보고 싶은 그런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림.

“이제 동이 트는구나. 어서 가봐야겠다.”

언제나 보고 싶은 그 그림이 이제는 떠날 때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대 맡에 놓아둔 자그마한 보따리를 두들기면서.

“이제는 계절에 맞춰 옷을 입고 있니?”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고 있던 소년이 있었다.

불어오는 여름의 바람에도 여전히 춥다는 듯 잔뜩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었다.

“원래 보이지 않는 곳에 입는 옷이 더 중요한 법이란다. 본래 사람의 품격이라는 건 그런 곳에서 차이가 나는 법이거든.”

“······.”

아마 옥사나가 들고 있는 저 보따리 안에는 블라드가 입을 속옷이며 양말이 가득할 것이다.

어찌 보면 사소한 선물이겠으나 오직 어머니의 시선으로만 챙길 수 있는 그런 선물이기도 했다.

“그 아가씨 이쁘더구나. 제미나라고 했던가. 둘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보기가 좋았어.”

“감사합니다.”

“······그래.”

서로가 나눌 말은 다 나눴기에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손님을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는 옥사나였지만 정작 배웅을 받는 블라드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제가 겨울쯤에 다시 이곳에 올 예정인데요.”

“응?”

그렇기에 다시 돌아선 블라드가 말하고 있었다.

이미 끊어진 대화를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는 듯 조금은 더듬대는 목소리로.

“낚시를 배우려고요. 빙어 낚시인데, 그게 겨울에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낚시?”

방금의 대화와는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주제였지만 블라드는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옥사나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기 때문에.

가만히 멈춰 있을 그림보다는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녀가 더욱 그리울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거 있잖아요. 원래 아버지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 제가 그런 걸 하나도 몰라서 요즘 배우고 있거든요.”

“······.”

“저번에는 라문드 님한테 농사짓는 법도 배우고, 그리고······.”

블라드의 세계는 실로 다채롭다.

완벽한 용이 되기 보다 빛나는 별이 되는 것을 바라왔던 소년은 그저 하나의 단어만으로 자신이 설명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어요.”

누구에게는 완벽함에서 태어난 용, 또 다른 누구에게는 빛나는 검을 휘두르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 옥사나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말하는 어린아이일 뿐.

지금 그 아이가 어색한 눈빛으로 옥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또 물어보러 와도 될까요?”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움츠려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옥사나에게만큼은 그러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기에 사납게 자란 난초와도 같은 모습.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온통 무채색이 되어버린 옥사나의 세계에 옅은 색깔 하나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

어머니를 잃은 소년과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로 인해 깨어져 버린 둘의 조각은 꼭 들어맞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꼭 붙어있다면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정도는 될 것이다.

“또 오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또 오라고 말하는 옥사나의 말에 앞에 있던 어린 소년이 환히 웃기 시작했다.

본래 입고 있던 낡은 겨울옷 대신 옥사나가 입혀 준 여름옷을 입고 있는 소년이었다.

※※※※

“마지막까지 있어 줘서 고마웠다.”

손님을 배웅하는 것은 주인 된 자의 도리겠으나 그래도 성문 앞까지 따라 나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블라드의 뒤에는 새로이 바예지드의 가주가 된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이 배웅을 하러 따라 나온 참이었다.

“덕분에 내 계승식이 빛났어. 아마 가문의 역사 중에서도 제일 화려한 계승식으로 기록되겠군.”

“그렇게까지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웃고 있는 루트거의 뒤로 낯익은 기사 몇몇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케이드와 막심. 그리고 데스웜과 린드부름을 잡을 때 함께 했었던 루트거의 기사들이었다.

“그럼 이제 쇼아라로 돌아가겠군.”

“그렇죠.”

“그곳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어쩔 생각이냐. 또 저번처럼 여기저기로 불려 다니려나?”

빛나는 명예에는 그만큼 치러야 할 값이 있다.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이름을 이은 블라드이기에 정당히 치러야 할 명예의 값.

그러나 지금 블라드는 루트거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니요. 이번에는 좀 쉴 생각이에요.”

그 말과 함께 블라드가 옆에 있는 마차를 슬쩍 쳐다보았다.

블라드와 함께 쇼아라로 돌아갈 그 마차에는 혹시 자신에게도 말을 걸까 싶어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제미나가 앉아 있었다.

“······그렇군. 하긴 좀 쉬어야 할 때가 되긴 되었지.”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한다는 지 알아챘다는 듯 루트거의 미소가 환해졌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그래.”

짧은 인사말과 함께 누아르의 등 위로 오르는 블라드를 보며 루트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

기사들의 배웅에 어깨가 으쓱해진 소드마스터의 종자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곧 스투르마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날이 좋구나.”

성문 사이로 비치는 아침의 햇빛이 루트거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렇게 터오는 동을 따라 푸른 초원을 향해 나아가는 블라드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향해 루트거가 작게 외쳤다.

“언제든지 와라. 바예지드 최고의 용몰이꾼.”

들으라 말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저 앞에 있는 블라드가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비록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흔드는 손이었지만 그 손에는 분명히 알아들었다는 기꺼움이 담겨 있었다.

※※※※

“······오늘은 몸이 좀 어떠시오.”

하녀들을 물리며 조용히 침대로 다가온 페테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옥사나를 바라보았다.

“몸이 좀 나아져야 할 텐데. 그러려면 먹을 것도 좀 챙겨······.”

언제나 업무에 바빠 옥사나를 챙겨주지 못했던 그였으나 이제는 의무에서 해방된 몸.

그렇기에 아침 일찍 들린 페테르였으나 평소와는 다른 광경 하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드셨군.”

“네.”

이제 막 비웠는지 아직 치워지지 않은 그릇 하나가 옥사나의 옆에 놓여 있었다.

비록 환자를 위해 만든 옅은 수프였으나 그것이 깔끔하게 비어 있는 모습에 오랜만에 페테르의 얼굴에도 기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또 온다고 하더라고요.”

“응?”

창밖을 바라보는 옥사나의 얼굴에 떠오르는 아침 해가 비치고 있었다.

“낚시를 배우러요. 겨울쯤에 온다네요.”

내일을 살 용기가 없어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하루의 시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밖을 내다보는 그녀를 요제프의 묘비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쓸쓸함만이 감돌던 묘비였지만 오늘만큼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머금은 채 옥사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

스투르마를 떠나 쇼아라로.

그렇게 여름의 초원을 따라 달리던 마차는 어느새 저 옆으로 따라붙는 노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장. 아무래도 노숙해야 할 거 같은데.”

“그래.”

넓기로 유명한 북부의 초원에서 고작 하루 만에 마을까지 닿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노숙을 해야겠다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도 그리고 제미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초원은 해가 빨리 지네. 쇼아라에서보다 더 빨리 지는 것 같아.”

근처에서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줍던 제미나가 신기하다는 듯 하늘을 보며 말했다.

“별도 금방 뜨고.”

좁디좁은 쇼아라의 뒷골목.

초라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그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 조각나 있었다.

건물의 처마에 가려, 손님들을 유혹하는 불빛에 먹혀 언제나 희미했을 뿐인 쇼아라의 밤하늘.

그 조각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

“헤에.”

그러나 지금, 제미나가 올려다본 초원의 밤하늘에는 이렇게나 많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별들이 가득 빛나고 있었다.

봐도 봐도 영롱한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는 듯 제미나는 들어 올린 고개를 쉽게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제미나.”

“응?”

“여기 좀 와 봐.”

그렇게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제미나는 옆에 들리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고트가 피운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간 제미나는 누아르의 고삐를 붙들고 있는 블라드를 볼 수 있었다.

“인사하고 싶대.”

“응?”

“누아르가 너한테 떠나기 전에 인사하고 싶대.”

지금 내려앉은 밤하늘과 잘 어울리는 검은 말이었다.

너무나 잘 어울려 저 멀리 보이는 별들 속으로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 말이 지금 제미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인사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자신에게 얼굴을 들이미는 누아르를 어루만지며 제미나가 물었다.

그러나 정작 대답해야 할 블라드는 그저 저 멀리 있는 언덕을 향해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누아르도 이제 돌아가야 할 때라는 뜻이야.”

별빛이 내려앉은 초원의 언덕.

그곳에는 예전에 보았던 야생마의 무리가 서 있었다.

이제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라는 듯 블라드 옆에 있는 누아르를 바라보면서.

“보내? 이렇게 갑자기?”

“지금이 딱 좋은 때야.”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해하는 제미나였지만 블라드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누아르가 차고 있던 마구를 벗기기 시작했다.

내가 앉았던 안장을 벗기고, 얼굴을 감쌌던 고삐를 벗기고, 그리고 대신 들어주었던 짐을 내려놓고.

“그동안 고마웠다.”

그렇게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초원의 아들을 향해 블라드가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인사 다 했어?”

“응? 으응······.”

“그럼 이제 가라.”

너와 내가 맞닿은 세계의 경계에서 우리는 좀 더 넓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네가 발을 디딘 세계는 이곳 초원이고 나의 세계는 저곳에 있는 도시였으니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였다.

“돌아보지 말고.”

슬쩍 떠미는 손이 아쉽다는 듯 자꾸 돌아보는 누아르였으나 블라드는 그저 팔짱을 낀 채 바라볼 뿐이었다.

이별은 담백할수록 좋다.

누군가가 한 그 말을 실천하는 블라드를 보며 누아르가 인사를 건네듯 조심스레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간다.”

떠날 때는 망설임 가득한 걸음이었지만 언덕이 가까워질수록 보폭이 넓어지는 누아르.

그렇게 이제는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향해 뛰어가는 검은 말을 보며 제미나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주인을 닮아서 그런가. 쟤도 뒤 한번을 안 돌아보네.”

이별의 빈자리가 아쉬운지 제미나가 자연스럽게 블라드의 옆으로 붙고 있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그렇게 떠나가는 누아르를 보며 나란히 선 블라드와 제미나.

꼭 붙어있는 그 모습이 마치 예전 대장간 앞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떠나가는 누아르를 보며 블라드가 품 안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들었다.

제미나의 눈에도 익숙한 그 그림은 세계수의 신녀가 주었던 그림이었다.

“지금 보니까 이 해바라기. 이거 꽃잎이 네 머리카락 색이랑 닮은 거 같아.”

“그래?”

어린아이가 그린듯한 그 그림 안에는 금발의 남자와 붉은 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그들 사이에 피어 있는 자그마한 꽃 한 송이까지.

굳이 그 꽃에서도 웃는 얼굴을 그려 넣은 것은 어째서일까.

“고마워. 제미나.”

“응?”

밤바람이 춥다는 듯 다가오는 제미나의 어깨를 블라드가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제미나가 놀란 듯 쳐다보았지만 블라드는 여전히 누아르가 올라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예전처럼. 허름한 대장간 위에 매달려 있던 장식 없는 검을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그때 나를 믿어줘서.”

태어난 겨울을 지나, 이별을 한 봄.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만남을 기다릴 여름까지 이어진 소년의 여행.

그 여행의 시작은 아마 붉은 머리의 소녀가 쥐여 주었던 검에서부터 시작된 것일 테다.

“이제 같이 돌아가자. 쇼아라로.”

발끝은 진창에 있었어도 함께 별을 바라보던 소년과 소녀.

그리고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위로 초원의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떨어져 있더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별이니까.

모두가 빛날 수 있는 별이니까.

그러니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안녕.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完).

※※※※

모두가 깊게 잠든 새벽.

하늘 위에 있는 별들조차도 잠들어 있을 깊은 밤,

그 밤하늘 아래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사내를 깨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님. ······노 님.”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듯한 어린 소년의 목소리.

그렇기에 깊은 잠에 빠진 사내를 깨우기에는 조금은 박력이 모자란 듯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앗! 따거!”

“일어나시라고요!”

아마 벌침이 쏘이면 이런 느낌일까.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화들짝 놀란 사내가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쉬잇-!”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내를 향해 조용히 하라 손짓한 소년이 마구간 밖을 빼꼼히 내다보기 시작했다.

양손에 소중히 감싸 쥐고 있는 자그마한 개구리와 함께.

“한참 찾았잖아요! 아니 왜 멀쩡한 방을 놔두고 마구간에서 자고 있어요?”

“······여기 마구간이야?”

자신이 어디서 누웠는지도 모르는 얼빠진 사내.

아마 잘생긴 얼굴만 아니었다면 누가 보아도 한숨이 나올듯한 그런 한심한 모습이었다.

“어쩐지 따듯하더라.”

다급해 보이는 소년의 모습과는 다르게 아직 잠이 덜 깬 사내는 주위에 있는 짚들을 그러모으며 다시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춥다는 듯 어깨까지 웅크리는 모습에 소년이 들고 있던 개구리마저 어이가 없다는 듯 볼을 부풀려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우리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요!”

“······뭐라는 거야. 그냥 좀 이따가 이야기하면 안 되겠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다시 드러누운 사내의 모습에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쳐대는 소년.

그러나 이윽고 어수선해지는 주위 분위기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어디 숨어 있는 거냐!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어서 나오지 못해!

“음?”

고래고래 지르는 모양새가 누가 들어도 험악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주위 상점들을 부수기라도 하겠다는 듯 있는 힘껏 문을 박차대는 소리까지.

옆에 있는 소년과는 다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그 분위기에 이제 막 드러누운 사내가 두 눈을 끔벅이기 시작했다.

-키하노 프라우센! 이 빌어먹을 난봉꾼 같으니!

“엥?”

기름에 젖은 횃불이 타는 냄새가 매캐하다.

주위에서 짖는 사냥개들의 소리는 매섭고.

그러나 정작 사내를 당황케 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 뒤에 붙어있는 난봉꾼이라는 단어였다.

콰직-!

이제야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서둘러 일어서는 사내였지만 이미 대비할 시간은 늦고 말았다.

“여기 숨어 있었구만.”

이제야 찾은 사내를 보며 누런 이를 힘껏 들이미는 남자.

번들거리는 대머리가 인상적인 그가 이제 막 옷을 추스르는 사내를 보며 웃기 시작했다.

“찾았다. 키하노 프라우센.”

여전히 얼이 빠져 있는 사내와 이제는 다 틀렸다는 듯 울상을 짓고 있는 소년.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모자 쓴 개구리까지.

“······저는 왜 찾으시는지?”

이건 먼 옛날의 이야기.

전설적이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그런 이야기.

그렇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이야기는 바로 이곳, 간판도 제대로 달리지 않은 초라한 여관의 마구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5화 3

키하노 외전-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1)

칙칙한 회색빛 벽돌로 둘러싸인 어느 저택의 감옥.

축축한 바닥의 습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포승줄에 묶인 키하노가 멍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키, 키하노 님.”

“응.”

끌려왔을 때의 취급이 꽤나 험했던 듯 앉아 있는 키하노의 행색이 남루해 보였다.

그러나 그 남루한 행색조차도 지금 힘겨운 목소리로 키하노를 부르는 소년에 비한다면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저만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거죠?”

“그거야······. 그게 이곳 투를레크 가문의 전통이니까?”

“그럼 왜 키하노 님은 멀쩡히 계시는 건데요?”

“그건······. 내가 귀족이니까?”

마치 번데기라도 된 듯 밧줄로 둘둘 묶여있는 소년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에도 키하노는 무언가 불안한 듯 땅만 바라보며 손톱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그, 그럼 저 좀 잠깐 들어 올려주시면 안 돼요? 머리에 피가 쏠려가지고.”

“아 큰일 났네. 이번에는 곱게 안 넘어갈 것 같은데.”

“잠깐이면 되거든요. 진짜 기절할 것 같아요.”

“이게 형들 귀에 들어가면 곱게는 못 죽을 것 같은데.”

“저기 키하노 님? 키하노 님?”

소년의 간절한 부름에도 키하노는 쉽사리 고개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불안함에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거릴 정도였다.

“영감님. 무슨 방법 없어요? 영감님은 마법사잖아.”

“······.”

둘밖에 없는 감옥이었건만 키하노는 여기 누구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듯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충전 안 됐어요? 됐으면 우리 감옥 벽이라도 부수고 나갑시다.”

아무도 없는 감옥 구석을 향해서.

쪼그려 앉은 채로 혼잣말을 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키하노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에잉. 이래서 기사 놈들은 안돼. 어디 마법이라는 게 네놈들처럼 검만 뽑으면 쓸 수 있는 건 줄 아느냐?”

아무도 없는 감옥 구석에서부터 늙수그레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와 함께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하는 어둠 속의 존재.

“그러니까 남작 딸은 왜 건드렸어? 내가 하지 말랬지?”

그것은 개구리.

어린아이 손바닥보다 더 작은 개구리.

등은 초록색이고 배는 하얀색인 개구리 한 마리가 쯧쯧 혀를 차며 구석에서부터 폴짝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하여간 누가 프라우센 놈 아니랄까 봐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구먼.”

“이게 진짜 억울한 거거든요. 우리는 분명히 합의를 했다니까?”

“······저기요. 둘 중에 아무라도 좋으니까요. 저 좀 내려주시면 안 돼요?”

훤칠한 키를 가진 갈색 머리의 남자.

밧줄에 묶인 채 자기 좀 내려달라고 채근하는 주근깨 가득한 소년.

그리고 자그마한 마법사 모자를 쓴 채 담뱃대를 물고 있는 개구리까지.

“아무튼 지금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요. 우리 형들 귀에 들어가기 전에.”

“저기 키, 키하노 님.”

“그러니까 빨리 충전이나 시켜요. 쾅! 하고 여기서 나가게.”

“······그 쾅!이 뭔데?”

“아 저번에 보여준 거 있잖아요. 스으윽 해가지고 샤악하고 내려치는 거.”

“저, 저기 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누가 프라우센 놈 아니랄까 봐 설명도 개떡같이 하는구나.”

감옥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으나 그 누구 하나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대고 있었을 뿐.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소년은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키하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왔다구요!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왔다고!”

“응?”

소년이 고래고래 외쳐대는 소리에 그제야 뒤를 돌아본 키하노.

그렇게 바라본 창살 밖에는 키하노를 노려본 채 후드를 천천히 내리는 낯선 사내가 있었다.

“······형?”

키는 훤칠하고 기름을 먹여 바짝 넘긴 머리에는 윤이 흘렀다.

누가 보아도 품위 있어 보이는 귀족의 모습 그 자체.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내의 인상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형형한 안광이었다.

“······이 망나니 같은 새끼.”

프라우센 가문의 5번째 아들. 페레즈 프라우센.

그가 지금 가문 역사상 최악의 망나니라 불리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찬찬히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형, 형! 그건 쓰지 말자!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감은 눈으로는 나의 세계를 보고 뜨고 있는 눈으로는 딛고 있는 이 세계를 본다.

오직 경지에 이른 기사만이 쓸 수 있다는 그 광경을 보며 키하노가 기겁하며 감옥 벽으로 바짝 붙기 시작했다.

“설명하지 마. 그냥 뒤져.”

“그렇다고 오러까지 쓸 건 없잖아! 형은 오러도 못 쓰는 동생이 불쌍하지도 않아?”

“너 같은 동생을 둔 내가 더 불쌍해.”

끼이이익-

간수가 전해줬는지 열쇠로 문을 연 페드로가 천천히 감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감옥 안을 꽉 채우는 페드로의 기세에 서둘러 자세를 잡기 시작하는 키하노.

그러나 페드로 프라우센은 동생의 허튼 발악을 그저 차갑게 비웃었을 뿐이었다.

“일단 반만 죽을까?”

콰드드득-!

페드로의 미소가 끝나기가 무섭게 벽이 무너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감옥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사내의 비명 소리까지.

문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도 갑자기 쏟아지는 천장 먼지에 당황하기 시작했지만 방금 전해진 사항에 따라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저기······. 도련님들. 저 내려주시긴 하실 거죠?”

페드로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격렬히 진동하는 감옥.

마치 고치처럼 그 진동을 따라 쉴 새 없이 흔들리던 소년이 조용히 프라우센의 사내들을 불렀지만 다들 한창 바쁜지 아무도 소년의 물음에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

“크으으으······.”

떡을 뭉쳐서 던져놓으면 이런 모습이 될까.

잔뜩 웅크린 채 감옥 바닥에 철썩 붙어 있는 키하노를 보며 페드로가 이제는 되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너 떠날 때 뭐라고 하셨는지 말해봐라.”

치이익-

거칠게 그은 성냥 끝으로 페드로가 피운 담배 향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

“얌전히 있으라고 하셨다. 가능하면 남들 눈에 안 띄게.”

깊게 빨아들인 숨을 따라 담뱃대의 불길이 빨개지고 있었다.

깊어진 밤, 어두운 감옥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이제는 나이도 스물이나 되었으니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너를 가문에서 내보냈는지 알 거다.”

“몰라······. 씨.”

아직도 분한 듯 미동도 하지 않는 자신의 동생을 보며 페드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지금의 반항이야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것.

아무리 냉정하다 평가받는 페트로라 할지라도 감당하지 못할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고 만 동생의 심정 정도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날뛰고 싶은 건 이해한다만 아직 드라굴리아 가문의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

드라굴리아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바닥에 누워 있던 키하노가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드로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러니 더 멀리 떠나도록 해. 그들이 너를 잊을 때까지.”

철썩-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페드로가 쓰러져 있는 키하노를 향해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찰랑거리며 떨어지는 주머니.

그것은 언제 들어도 익숙한 동전 소리였다.

“······이런 거 필요 없거든.”

“어머니가 주시는 거니까 받아.”

금화 주머니를 던진 페드로는 이번에는 천장에 꽁꽁 묶여있는 소년의 밧줄 사이에다 자그마한 종이 한 장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합의를 했든 어쨌든 간에 투를레크 가문에 폐를 끼친 것은 사실이니 이건 네가 처리하도록 해라.”

이미 지쳐버렸는지 잠들어버린 소년은 자신을 내려놓는 페드로의 손길에도 전혀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년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아무 말 없이 감옥을 나서는 페드로.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던 키하노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

“이것 참 힘드시겠습니다. 페드로 프라우센 님.”

“······.”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기에 조용히 떠나려는 페드로.

그런 그를 누군가가 불러세우고 있었다.

“과연 프라우센 가문의 자제라 그런지 치고 다니는 사고도 큼직큼직하군요.”

달빛에 비친 사내의 대머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과 함께 웃으며 다가오는 사내는 투를레크 가문의 기사이자 이 자리까지 키하노를 끌고 온 사람이기도 했다.

“뭐지?”

“별 건 아니고······. 키하노 님에 대해 아직 못다 한 계산이 남아있어서.”

그렇게 실실 웃으며 다가온 사내는 페드로에게 슬쩍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프라우센의 피를 이어서 그런지 사고도 크게 치고 다녔다고. 그래서 그런지 동생분께서 저에게 빌린 돈이 조금 큽니다.”

돈을 빌렸다는 사내의 말에 페드로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한 20골드쯤 됩니다.”

“······20골드?”

세간에 알려진 동생의 모습은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그러나 키하노라는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페드로는 자신의 동생이 아무런 이유 없이 20골드나 빌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그게······. 키하노 님이 지금 데리고 다니는 꼬맹이 있지 않습니까. 그놈 이름이 얀이라고 하는데.”

사족을 붙여 길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짧은 이야기였다.

부모도 없이 홀로 농장에서 일하던 소년이 있었다.

다만 농장에서 일하는 다른 일꾼들과 조금 다른 것은 소년의 부모가 그에게 막대한 빚을 남기고 죽었다는 것 정도.

공교롭게도 소년을 부리던 농장주가 그 빚의 주인이라는 것쯤은 사실 놀랄 일도 아니긴 했다.

이래저래 우연의 우연이 겹치면 세상에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고는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내 동생이 20골드를 주고 그 아이를 사 왔다?”

“그렇지요. 그리고 그 돈을 제가 빌려드린 것이고.”

집에서 나설 때는 혼자였으나 어찌 된 게 꼬리가 하나 붙어 있다 했더니 이런 사정이었나.

이제야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소년의 정체를 알게 된 페드로가 자그맣게 웃음을 지으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드려야지. 20골드.”

받은 은혜는 은혜로 그리고 갚아야 할 원한은 원한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프라우센 가문의 철칙이자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가훈.

“페드로 님?”

그렇기에 지금 손을 내밀고 있는 사내에게는 단 한 푼의 금화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오면서 보니까 내 동생을 꽤 험하게 굴렸던 모양인데.”

“······!”

대신 사내의 손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은 페드로의 손아귀.

마치 뼈를 으스러뜨릴 듯 붙잡고 있는 그 손에 대머리 기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들어볼까. 네 놈의 목숨값은 얼마나 되는지.”

“끄으······. 끄어어.”

아무리 가문의 망나니라 할지라도 프라우센은 프라우센.

용들의 세계에서도 빛나고 있는 인간들의 가문은 고작 투를레크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20골드보다는 비싸야 할 거야.”

"끄아아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생의 명예를 위해 다른 이의 손아귀를 비트는 형.

그리고 그 형에 의해 흠씬 두들겨 맞고 만 동생.

그들 사이에 비추는 달빛이 오늘따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콘수에그라.”

어두운 감옥조차 환히 밝히는 오늘의 달빛.

그 빛이 닿은 하얀 종이에는 한 도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투를레크 남작령 중에서도 저 끝에 붙어 있는 곳. 콘수에그라.

터져버린 키하노의 입술 사이로 다음의 행선지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6화 3

키하노 외전-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2)

콘수에그라.

투를레크 남작령에 자리한 어느 곳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마을.

그래도 평범할 뿐인 이 마을에도 특별한 광경 하나 정도는 있었으니 그것은 저 멀리 언덕 위로 늘어서 있는 풍차들의 모습이었다.

“······으으.”

봄이 찾아온 언덕에는 풀을 뜯어 먹으려 돌아다니는 양 떼가 하얀 구름처럼 퍼져 있었다.

거기다 이제야 막 피기 시작한 색색의 꽃들까지.

멀리서 본다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일듯한 평화로운 풍경이었지만 지금 그곳에 서 있는 소녀의 얼굴에는 잔뜩 찌푸린 표정만이 가득했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바람이 사납지?”

마을에 풍차가 있다는 것은 곧 이곳이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라는 뜻.

그러나 예년과 비교해봐도 너무나 날카롭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소녀는 쓰고 있는 모자를 놓치지 않으려 힘껏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응?”

그렇게 세찬 바람이 지나가고 다시금 잠잠해진 콘수에그라의 언덕.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뜬 소녀가 무언가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 저 앞에 있는 풍차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

높게 솟은 풍차의 작은 창으로 촛불처럼 반짝이는 빛이 있었다.

마치 여기 좀 봐달라는 듯 희미하게 깜빡이는 정체 모를 빛.

그러나 소녀가 그 빛을 알아봤을 때는 어느새 언덕에는 다시금 세찬 바람이 몰려오고 있었다.

※※※※

“아니, 이게 지금 걸으라고 만든 길이야?”

숲속에 새겨진 오솔길을 걸어가는 일행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타고 있던 늙은 말과 작은 나귀의 고삐를 붙잡으며 끌고 가면서.

그렇게 낑낑거리며 걸어가는 남자의 이름은 키하노 프라우센.

누구한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얼굴에 온통 시퍼런 멍이 든 키하노는 지금 진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말을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진짜! 이해가! 안 간다니까! 이딴 것도 도로라고 통행세를 받아먹는다고?”

날씨가 봄이어서일까.

불어오는 바람에는 따뜻한 기운이 서려 있었지만 정작 그 날씨 덕에 도로는 죄다 진창이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여행자들이 돌아다니기에는 영 까다로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그런 말이다.

“빌어먹을 용 놈들. 위에서 꺼드럭댈 줄만 알지 정작 이런 건 살펴볼 생각도 안 한다니까.”

“키하노 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바짝 약이 올랐는지 씩씩대는 키하노의 입에서는 용들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얀이 깜짝 놀랐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저희 마을에서도 욕하다가 끌려간 사람이 있다구요.”

“······.”

“진짜라니까요?”

정말로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떠는 얀을 보며 키하노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하긴 이런 세상이긴 했다.

아무도 없는 숲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그들을 욕할 수 없는 용들의 시대.

그런 시대를 탈 없이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묵묵히 고삐나 끌면서 걸어가는 수밖에.

“아무튼 길 좀 시원시원하게 뚫었으면 좋겠다는 말 아냐. 만약에 나였으면 이렇게 수도를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큰 가도를 설치한 다음에······.”

용들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이미 완벽하다.

그런 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곧 용들에 대한 반항을 뜻하는 것.

그러나 이 시대의 젊은이인 키하노에게는 분명 지금보다 더 나은 그림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예끼 이놈! 그딴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니까 가문에서 쫓겨났지.”

그러나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것은 인간이 아닌 오직 용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키하노가 그리는 그림은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말 할 기력이 남아 있으면 하루빨리 마을에 도착할 생각이나 해라!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쯧쯧.”

키하노는 얀의 머리 위에서 파닥거리는 개구리의 말에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꿈꾸는 이상은 높았으나 어차피 지금의 자신은 진창 위에서 늙은 말의 고삐나 잡아당기는 신세.

지금 앞에 보이는 늙은 말처럼 현실이라는 진창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용들이 만든 세상에 순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경치는 나쁘지 않네.”

그렇게 낑낑거리며 올라온 언덕 아래에는 시원하게 펼쳐진 콘수에그라의 목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탁 트이는 초록색의 물결.

방금까지만 해도 들끓기만 했던 가슴을 달래주는 것만 같은 그 광경을 보며 키하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셔 보았다.

※※※※

“이름.”

“······키하노.”

“나이.”

“스물.”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별것 없는 마을이라 생각했으나 앞에서 붙잡는 경비병들의 태도가 꽤나 빡빡했다.

“거기 쓰여 있잖아. 당신네 영주님이 보내서 여기 온 거라니까?”

영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까지 보여줬으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경비병들의 태도.

도저히 답이 없는 그들의 키하노도 슬슬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요즘 여기에 마녀가 나온다며. 그거 잡으려고 왔다고.”

여기저기 진흙이 잔뜩 튄 모습이 영 미덥지는 않았지만 가지고 온 영주의 명령서만큼은 진짜였다.

게다가 나름 기사랍시고 종자까지 데리고 다니는 모습이 그래도 구색은 맞춘 것 같아 경비병들도 더는 붙잡을 이유가 없긴 했다.

비록 애완용이라며 데리고 다니는 개구리가 영 미심쩍어 보이기는 했지만.

“······콘수에그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키하노 경.”

“그럼 나 이제 들어가도 되는 거죠? 아저씨들.”

“네. 들어가시죠.”

앞을 막고 있던 창이 들어 올려지자 콘수에그라로 통하는 목책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다시금 들려오는 경비병들의 소리에 키하노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마을에 들어가시면 곧바로 징수관님께 보고부터 해주시길 바랍니다?”

“······징수관? 촌장이 아니고?”

보통 이런 마을이라면 촌장이 대소사를 처리하는 일이건만 갑자기 징수관이라니.

이 자그마한 마을에 영주가 직접 보낸 관리가 있다는 사실에 키하노의 눈빛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마을에서는 정숙을······.”

“아이고. 참 비싼 마을이네. 들어가기도 어렵고 들어가서 움직이기도 어렵고.”

그 말과 함께 돌아선 키하노가 경비병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기 시작했다.

“진짜 여기에 마녀라는 게 있긴 있나 봐?”

마녀(魔女).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들과는 달리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여태껏 있다고 들어 보기만 했던 그들이 정말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키하노의 표정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

“저기 키하노 님? 여기가 아닌데요.”

차마 막아 세우지는 못하겠다는 듯 뒤에서 달라붙는 얀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경비병들이 바로 징수관한테 가라고 그랬잖아요······.”

"나도 알아."

왜냐하면, 지금 이들이 서 있는 곳은 징수관이 머물고 있다는 곳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도 술집 앞이었으니까.

그러나 마치 이곳이 맞는 길이라는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키하노의 모습에 초보 종자인 얀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얀,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원래 책임자를 만나기 전에는 몸에 묻은 먼지도 좀 털고, 술로 입가심도 좀 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나 찾아가는 게 예의에 맞는 거야.”

“······진짜요?”

“아니면 네가 어쩔 거야. 그냥 따라 들어와야지.”

무언가 의심쩍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는 얀이었으나 키하노는 이미 술집에 문을 열고 들어간 뒤였다.

“흠흠. 꽤 괜찮네.”

척 봐도 전형적인 보통 마을의 술집이었다.

1층에서는 술과 음식을 팔고 그 위에 있는 2층에서는 여관을 겸하는 그런 술집.

풍겨오는 음식 냄새만으로도 그곳의 수준을 점쳐 볼 수 있는 키하노는 이 술집이 그런대로 괜찮을 곳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주문이요.”

“여기서 제일 잘 팔리는 게 뭡니까?”

“어차피 파는 게 하나밖에 없는데.”

“그럼 그거 하나랑 맥주 한 잔.”

“키하노 님······.”

“그거 두 개랑 맥주 한 잔 부탁합니다.”

여관의 안주인인 것 같은 여인에게 주문을 마친 키하노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 많네.”

“그러게요. 여기 음식이 엄청 맛있나 봐요. 저희 마을 술집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요.”

사람이 많은 도시라면 몰라도 이곳은 마을이었다.

그것도 영지 변두리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

그러나 지금 이곳 술집에는 꽤 많은 마을 주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 키하노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도 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한창 일할 시간에도 다들 술집에 있는 걸까.”

고개까지 빼 들며 세어본 숫자는 대략 30명.

그것도 한참 일해야 할 나잇대의 남자들이 가득한 지금의 술집이었다.

“여기요.”

“오. 빠르네.”

“스튜야 뭐 항상 끓고 있으니까요.”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금세 튀어나온 스튜.

고기 스튜인지 야채 스튜인지 하여간 죄다 잡다하게 섞인 스튜를 보며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을 본 얀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키하노 님!”

“응. 많이 먹어. 어차피 그거 다 네가 빚진 20골드에서 더해지는 거야.”

“······네.”

침울해진 얀이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키하노는 스튜를 입에 떠넣을 뿐이었다.

“음. 맛있네.”

오래 끓인 만큼 꾸덕하고 온갖 것이 들어갔기에 진득해진 여관의 스튜.

오직 시골 마을에서만 느낄 수 있을 풍미에 키하노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몰려올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까지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그것도 해야 할 일까지 팽개쳐가며 몰려들 정도는 더욱 아닌 그런 맛.

-······우리 집 양이 아주 난자가 되어있더라니까. 처음에는 양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요즘에는 밤만 되면 애들이 무섭다고 경기를 일으키더라고.

-이게 마녀의 수작이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겠어.

“······.”

영주의 의뢰를 실행하기 전 일부러 들린 마을의 술집.

오직 그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생생한 소리를 들으며 키하노가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

“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어느새 노을이 져가는 한 도시.

콘수에그라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에나레스의 시청에는 지금 무겁게 깔린 긴장감이 가득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희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

누군가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인 시장의 모습이 꽤나 애처로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접히지도 않는 뱃살을 억지로 구기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의 보고를 받고 왔다. 이제 곧 연구가 막바지에 이를 거라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그분들께서 저한테도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러나 그는 숨을 쉬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연신 손을 비벼가며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말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보내신 마법사들이 불편을 겪을까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고 대접하고······. 바라시는 목표에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어찌 보면 비굴해 보일 정도로.

한 도시를 책임지는 시장이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최선을 다해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앞에 있는 남자가 당연히 그렇게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수고했다.”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선 남자의 머릿결이 반짝였다.

점점 짙어지는 붉은 노을에도 제 색을 잃지 않는 화려한 금발이었다.

“이 일이 성공하면 자네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지.”

그렇게 돌아선 남자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오직 순혈의 완벽함만이 표현할 수 있다는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에나레스의 시장이 힘껏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사르누스 님!”

노을과 함께 돌아선 사내의 이름은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이제 막 가문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젊은 용.

그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시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7화 6

키하노 외전- 수상한 마을 (1)

통통하게 튀어나온 아이의 볼이 귀여웠다.

키하노의 손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대는 눈동자까지도.

여기 좀 보라며 눈깔사탕을 흔들며 아이를 유혹하던 키하노 조차도 그 꾸밈없는 모습에 그만 실소를 지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요즘 계속해서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응.”

“어른들은 못 듣는데 너랑 네 친구들만 듣는 그런 소리란 말이지.”

“으응.”

초롱초롱한 눈은 여전히 키하노가 들고 있는 사탕을 향해 있었지만, 어느새 펼친 아이의 손가락은 저 위에 있는 언덕을 향해 있었다.

기다란 팔을 늘어뜨린 채 마을 언덕에 서 있는 풍차를 향해서.

“저 풍차요. 저기서 자꾸 누가 울어요.”

“······울어?”

“응. 울어요. 풍차가 밤마다요.”

풍차가 운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 옆에 있던 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의 말을 듣는 키하노의 눈빛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나 다 말했는데······. 이제 사탕 주시면 안 돼요?”

말을 마친 아이가 어서 사탕을 달라는 듯 키하노를 향해 한껏 양손을 펼치고 있었다.

그 앙증맞은 모습에 들고 있던 눈깔사탕을 놓아준 키하노.

손 위에 놓인 눈깔사탕을 보며 아이가 함박웃음을 짓는 동안 키하노가 조용히 굽힌 허리를 피기 시작했다.

“풍차가 운다라.”

밤마다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풍차에 관한 소문.

그러나 오직 어린아이들만 들었기에 모두가 쉬이 넘어갔던 풍문이었지만 지금 키하노의 눈빛은 진지해져 있었다.

“······지금 5명째 똑같은 말을 하는데.”

그것은 아이들 하는 증언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말을 5번이나 반복해서 듣는다면 귀 기울일 만한 증언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마법사 놈은 풍차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했단 말이지.’

그러나 어제 만났던 그 삭막한 인상의 마법사는 풍차 근처에는 다가가지도 말라고 말했었다.

충고인지 아니면 경고일지 모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때의 일을 떠올린 키하노가 마지막 남은 눈깔사탕을 깨물며 깊은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

“어쨌거나 풍차 근처에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적한 마을치고는 촌장의 집은 꽤 잘 만들어져 있었다.

이만한 집을 짓기 위해서는 아마 인망이 높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만큼 뒤로 해먹은 게 많았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마녀를 위한 조사도 좋지만, 그곳만큼은 좀 피해 주면 좋겠군.”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키하노를 맞이하는 사람은 촌장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로브를 입고 있는 삭막한 인상의 사내.

차림새만 보아도 마법사처럼 보이는 중년인은 이제야 막 도착한 키하노를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하는 게 나름 보안을 요구하는 실험이거든. 그러니 부디 이해해주길 바라네.”

들리는 말투에는 잘 배운듯한 기품이 깃들어있었다.

거기다 평범한 사람이면 쉽게 걸칠 수 없을 것 같은 비싸 보이는 로브까지.

아마 식탁 위에 방만히 걸쳐 놓은 양발만 아니었다면 키하노 조차도 격식 있는 사람이라 착각했을 정도였다.

“뭐······. 그 정도만 해주면 자네가 하는 일에 딱히 신경 쓰지는 않겠네.”

그 예의 없는 행동에 정작 옆에 있던 징수관이 쩔쩔매고 있었으나 키하노를 대하는 사내의 모습은 너무나 태연할 뿐이었다.

고귀한 핏줄인 프라우센의 이름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남자.

자신을 사몬테라고 밝힌 그는 마치 이곳이 자신의 땅이라도 된다는 양 그렇게 키하노를 맞이하고 있었다.

“드라굴리아 가문이 직접 주관하는 실험이라니 어쩔 수 없지요.”

“이해가 빠른 젊은이군.”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사내가 아무리 무례한 행동을 보인다 하더라도 드라굴리아라는 이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긴 했다.

비록 용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름을 수행하는 자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도대체 이 조그마한 마을에 무슨 실험인가 싶긴 하지만 그 정도야 협조해 드려야겠죠.”

“그렇지.”

그러나 지금 사몬테의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소문이 자자한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아마 그동안 앞뒤를 재가며 행동했다면 키하노의 이름 앞에 망나니라는 단어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꽤 공교롭네요. 드라굴리아 가문이 지켜보는 마을에서 그 보기 힘들다는 마녀까지 출몰하다니 말입니다."

“······.”

“이게 다 우연이 겹친 일이라면 참 신기한 일이긴 하겠습니다.”

웃는 척하고 있지만 웃지 않는 프라우센의 아들과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는 드라굴리아의 마법사까지.

그 둘이 만드는 불편한 분위기에 얀은 그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

“키하노 님을 괜히 따라왔나 봐요······.”

촌장의 집을 떠나 아까 왔던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

자그마한 나귀를 끌며 걸어가던 얀은 불안한 목소리로 앞에 있던 키하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저도 찍히는 건 아니겠죠? 무려 드라굴리아의 사람인데요.”

아무래도 얀은 방금 있었던 일이 꽤 불안한 모양이었다.

하긴, 시골 마을에서만 살아왔던 소년에게 있어 방금의 장면은 충격일 수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그래. 드라굴리아지."

“네?”

"그런데 왜 드라굴리아가 파문당한 마법사를 쓰고 있었을까?”

그러나 앞서 걷고 있던 키하노의 귀에는 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을 뿐.

“그것도 남부의 몰락 가문 출신 마법사를 말이야. 그렇게까지 사람이 급했나?”

“······키하노 님?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쉴 새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키하노의 분위기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여태껏 얀이 보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남부 출신, 몰락가문. 이런 게 다 무슨 말이에요?”

“뭐가?”

“아니, 방금 말씀하신 거요. 누가 파문당했다면서요.”

한참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키하노.

그런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얀을 보고서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는 듯 얼굴에 표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파문은 사몬테가 당했지.”

“······네?”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는 키하노.

그런 그의 모습에 얀은 당황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파문을 당했어요? 아까 그런 말이 나왔었나요?”

“그걸 뭐 말해야 아나. 그냥 보면 아는 거지.”

너무나 태연히 대답하는 키하노를 보며 얀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였다.

남부 출신, 몰락가문의 자제, 거기다 파문당한 마법사라는 말까지.

그런 정보야말로 말로 들어야지 어떻게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지금 키하노 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너도 봤잖아. 사몬테가 입고 있던 로브 말이야.”

“로브가 왜요?”

여전히 멀뚱멀뚱 거릴 뿐인 얀을 보며 키하노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왜 그것도 못 알아보느냐며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굉장히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로브였단 말이다. 그런 화려한 형태는 주로 남부에서 유행하는 문양이거든.”

“네.”

“거기다 신고 있는 장화가 반짝거렸지? 그건 이미 방수 처리를 했다는 뜻인데, 그렇게까지 장화를 관리하는 지역은 오직 습지가 많은 남부지역 사람들밖에 없어.”

“아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을 보았으나 담아낸 정보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예리했던 키하노의 관찰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보니 남부 출신인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런데 몰락 귀족이란 건 무슨 뜻이에요?”

“그 사람이 끼고 있던 반지가 귀족들이나 쓰는 가문의 인장 반지였거든. 그런데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양이었으니 적어도 한 세대 전에는 몰락한 가문의 것이라 볼 수 있지.”

도대체 그 짧은 만남의 시간 동안 언제 반지까지 봤단 말인가.

사몬테라는 사람이 만들었던 강압적인 분위기에 그저 움츠리고만 있던 얀이었기에 지금 들려주는 키하노의 말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옷이 낡았잖아. 성격이 예민해서 옷 자체는 꽤 관리를 하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낡은 옷을 입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주머니 사정이 신통치 않다는 뜻이지.”

“······그럼 파문당한 마법사라는 말은요?”

하나하나 들을 때마다 과연 그럴듯하게 들리는 키하노의 추론에 얀의 눈이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파문당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냈을지 궁금하다는 얀의 눈빛에 이번에는 키하노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도 몰랐지.”

“네?”

방금 사몬테라는 마법사가 파문당했다고 말했으나 정작 그 이유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키하노.

그런 키하노를 보며 얀이 어리둥절하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키하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냄새가 고약했단 말이다.”

키하노의 품 안에서부터 노인의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어 있던 안이 답답했던 모양인지 연신 눈을 깜빡거리는 개구리였다.

“그놈 주변에서 부리면 안 되는 신비들이 잔뜩 뭉쳐있었지. 그 썩은 내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머리에는 자그마한 고깔 모양의 모자를 쓴 채 키하노의 어깨까지 기어오르는 개구리 한 마리.

인간이었을 시절에는 앤드류라는 이름을 갖고 있던 개구리가 생각만 해도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뒷다리로 머리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아마 그게 요즘 마법사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흑마법인 것 같긴 한데. 그정도로 신비가 썩었으면 아마 파문도 진작에 당했겠지.”

마법이란 단어는 들어봤어도 정작 흑마법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는 듯 얀의 표정이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에 붙어 있는 흑(黑)이라는 단어가 불길한 것을 뜻한다는 것쯤은 풍겨오는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괜한 일에 말려든 거 아닌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그저 저질렀던 무례를 용서받기 위해 떠난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막상 닿은 이곳은 마녀가 출몰하며 수상한 마법사가 머무는 아주 수상한 마을.

그 마을을 걷고 있던 키하노는 점점 어둑해지는 콘수에그라의 하늘을 보며 작은 소리로 혀를 차기 시작했다.

※※※※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언덕 위의 풍차.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풍차 안에서는 창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과 함께 지금도 십수 명의 마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투를레크 남작이 아무래도 인선을 잘못한 모양인데.”

그리고 풍차에서 가장 높은 곳. 날개가 매달려 있는 자리.

그곳에 있는 마련된 자신의 공방에서 조용히 아까의 일을 곱씹어보던 사몬테는 아직도 키하노라는 청년이 보여줬던 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프라우센 가문이 강제로 밀어 넣은 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자꾸만 자신들을 방해하는 정체 모를 여자 덕에 실험이 지체된 상황.

그 여자를 잡기 위해 쓸만한 기사를 보내 달라고 말했건만 정작 도착한 사람은 투를레크의 기사가 아닌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프라우센의 망나니였으니.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군. 아직도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정말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 사몬테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자그마한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몰락해버린 가문의 재건과 새로운 실험의 성공을 위해 여태껏 드라굴리아의 지원을 받아왔던 사몬테.

그러나 이제는 그 성과를 보여줘야 할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점점 제 모습을 드리우는 중이었다.

“······그러니 어서 울어봐라. 이 고약한 녀석아.”

그런 사몬테가 기대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오직 플라스크 안에 들어가 있는 자그마한 뱀일 뿐.

-······!, ······!

사몬테가 붙잡은 플라스크 안에는 어린 뱀 한 마리가 잡혀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작은지 어른 손바닥에도 못 미칠 것 같은 뱀.

자신을 바라보는 사몬테를 보며 어서 그 손 놓으라는 듯 쉴 새 없이 쉭쉭 거리는 녀석.

아직 채 자라지도 못한 이빨을 날카롭게 세운 어린 뱀은 지금 밤하늘에 떠오른 달처럼 온통 새하얀 색을 지니고 있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8화 5

키하노 외전- 수상한 마을 (2)

하얗게 비치는 달빛 아래, 푸르른 목초지가 끝나는 지점.

푸른 잔디가 우거진 수풀로, 그리고 다시 무성한 나무로 이어지는 숲에서부터 조용히 일어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

환히 비치는 달빛 아래서도 그림자가 머문 어둠은 벗겨지지 않았다.

마치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스스로 가리기라도 한 듯 전혀 빈틈없는 어둠이었다.

그렇기에 빛나는 것은 오직 맹수처럼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일 뿐.

“빌어먹을 인간 놈들.”

자그맣게 내뱉은 목소리에는 차마 감추지 못한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조용히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찻물처럼.

그리고 가녀린 목소리를 따라 흐르는 그 분노는 저 아래 보이는 인간들의 풍차를 향해 있었다.

“······내가 꼭 구해줄게.”

그 말과 함께 정체 모를 인형이 다시금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무성한 숲속, 홀로 나무들이 만들어 낸 어둠 사이에 숨어 마을을 내려다보던 존재.

하늘 위에 떠 있던 달이 이제야 찾아낸 그것은 분명 시리도록 빛나는 백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

“흐음.”

풍차 안에 들어선 키하노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바깥의 모습과는 다르게 정작 안쪽은 깔끔하게 정돈된 사몬테의 공방을 보며 놀란듯한 모습이었다.

파직-! 파지직-!

거기다 아무것도 없는 유리관에 갑자기 번개가 생겨난 모습을 보았으니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는 일.

지금 있는 풍차에서도 가장 높은 곳, 저기 사몬테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갑작스레 흘러나온 번개를 보며 키하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저것도 마법인가.”

기이하게 생긴 톱니바퀴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파이프들이 가득한 사몬테의 공방.

괜스레 그곳에서 어슬렁거리던 키하노는 방금 번개가 생겼던 유리관 같은 것들이 주변에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슨 실험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주 요란하네.”

분명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유리관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것에서는 차가운 이슬이 맺히고, 또 어느 유리관에는 새빨간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마법으로 만든 현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제 조사는 충분히 하셨습니까? 키하노 님.”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키하노의 뒤에서부터 로브를 입은 젊은이가 걸어 나왔다.

위에서 실험에 열중하는 사몬테를 대신해 나온 그의 제자였다.

“아, 조사요? 그렇죠. 볼 건 다 본 셈이죠.”

더 둘러볼 것이 있느냐 말하는 제자의 말에 키하노는 은근슬쩍 자신의 속 주머리를 건드렸다.

툭-

그러자 답하듯이 돌아오는 자그마한 진동.

이제 되었다는 듯 말하는 그 진동에 키하노가 웃으며 사몬테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한데요.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것저것 생기니.”

“하하.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처음 보시면 신기할 수밖에 없겠지요.”

삭막한 인상의 사몬테와는 지금 키하노 앞에 있는 청년은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그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지은 그 미소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키하노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지금 보시는 광경이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요.”

“······네?”

지금도 풍차 안에서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마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바쁜 흐름 속에서도 키하노와 젊은 마법사 사이에서는 기묘한 어색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사실, 저희가 하는 실험이 바로 그런 것들에 관련된 것이거든요. 쓸모없는 것들을 쓸모 있게 만드는 뭐 그런 것 말입니다.”

그렇게 말한 사몬테의 제자는 더 이상 말해봤자 서로가 골치 아프다는 듯 장난스레 손바닥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드라굴리아 가문에서도 특별히 신경쓰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실험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 말과 함께 사몬테의 제자가 저기 좀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

그 고갯짓을 따라 키하노가 걸어가자 창밖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기에 충분히 내려다볼 수 있는 주변의 풍경.

지금 내다보는 풍차의 창가에서는 넓게 펼쳐져 있는 마을의 목초지뿐만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숲까지도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요즘 따라 저희가 쳐놓은 결계가 조금씩 훼손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들짐승들이 그러했나 싶었는데 조사해 보니까 아무래도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 같더군요.”

그 말과 함께 사몬테의 제자가 품속에서부터 자그마한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그냥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돌멩이였지만 그것의 표면에는 복잡하게 새겨진 술식이 가득했다.

“확실히 칼로 부순듯한 모양새군요.”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저희를 방해하려 하고 있어요.”

키하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주변에 출몰하고 있다는 마녀를 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사몬테의 제자가 들이대는 돌멩이에는 그 마녀가 행한듯한 불길한 증거가 남아있었다.

“이 결계석을 부쉈다는 것은 적어도 최소한의 신비를 다룰 줄 아는 자라는 뜻입니다.”

양을 잔인하게 죽였으며 동시에 용의 실험을 방해하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정체 모를 신비를 발현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마녀가 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키하노 님.”

“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또 어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을 잘 해결하면 키하노 님을 향한 드라굴리아의 분노가 풀릴 지도요.”

마을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어차피 마녀라 칭하는 존재만 잡으면 될 일.

그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해 인사를 나눈 키하노였지만 방금 들려온 말에는 잠시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런! 이거 제가 괜한 말까지 꺼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말로는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어쩐지 유쾌해 보이는 태도가 꽤 불손했다.

그 말은 즉 방금 내뱉은 말이 실수가 아니라는 뜻.

아마 방금 내뱉은 말은 어제 키하노가 사몬테에게 보였던 태도에 대한 자그마한 복수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완벽함을 향한 저희의 실험. 프라우센의 일원이신 키하노 님께서 훌륭히 도와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키하노를 보며 사몬테의 제자가 웃고 있었다.

용들의 눈 밖에까지 나고 말았다는 그 소문이 자자한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를 향해서 말이다.

“······물론이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키하노는 자신을 비웃는 사내를 보면서도 마주 웃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완벽함이 가득한 지금의 세상에서는 누구라도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향한 비웃음마저 집어삼킨 키하노의 표정에는 차마 숨기기 힘든 쓴맛이 감돌고 있었다.

※※※※

“키하노 님. 키하노 님?”

“······.”

“이제 일어나셔야죠. 해가 지고 있다고요.”

해가 뉘엿뉘엿 져가는 마을의 언덕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한 폭의 그림 같았을 풍경이었건만 지금 그곳에서는 키하노를 깨우려는 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아이. 저녁때 깨우라니까.”

“지금이 저녁이거든요?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질 시간이라구요.”

옆에서 들려오는 얀의 말에 벌써 그렇게 되었냐는 듯 키하노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과연 초록색이 가득했던 목초지에는 어느새 노을이 만드는 붉은 물결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양 어디 있냐.”

“네?”

“양 떼 어디 갔어. 아까는 저쪽에 있었는데.”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인지 갑작스레 양들을 찾는 키하노였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눈빛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해져 있었다.

“저기까지 가 있군. 그러면 여기서부터 이렇게 움직인 건가.”

그 말과 함께 키하노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무언가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주변부를 그린 것 같은 자그마한 지도.

그러나 지금 그 지도 위에는 그동안 키하노가 그려놓은 정체 모를 표식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키하노 님?”

“목동들이 움직이는 길목.”

“이걸 왜 표시하고 계셨어요?”

“알아보려고. 오늘은 양들이 어느 쪽 목초지로 가는지.”

워낙 꼼꼼하게 그려놓은 표식들이 신기한지 얀이 키하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보여줬던 허술한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목동들은 목초지를 돌아가면서 양들을 풀어놓거든. 안 그러면 목초지가 금방 황폐해지니까.”

“저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하는 거야.”

네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다는 듯 눈을 꿈뻑거리는 얀을 보며 키하노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댔다.

“아무튼 그렇게 목동들이 주변을 돌다 보면 한 곳쯤은 휴식을 취하는 목초지가 생긴단 말이다.”

목동이라는 직업은 본래 양을 치기 위해 있는 것.

그러나 그들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이었으니, 수상한 무리나 몬스터들이 근처에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목동들이 먼저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때마침 이곳이 비거든.”

그렇다면 숲에 머물고 있다던 정체 모를 침입자는 아마 목동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을 터.

그렇기에 양 떼가 움직이는 규칙을 몰래 파악하던 키하노는 오늘이야말로 마녀라 불리는 존재가 움직일 적기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풍차 쪽이네요? 그것도 아까 저희가 갔었던 그 풍차.”

“그래.”

주변을 둘러볼 목동도 없고, 시끄럽게 울어댈 양 떼도 없는 유일한 목초지.

그렇기에 사몬테의 풍차까지 가장 다다르기 편할 그곳을 지금 키하노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저녁때 깨우라고 한 거란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곱게 못 잘 것 같으니까.”

“······.”

말을 마친 키하노가 아직도 잠이 아쉽다는 듯 입을 쩝쩝거렸다.

그러나 얀은 태평하게 하품을 해대는 키하노를 보면서도 딱히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저녁 드실래요? 아까 여관에서 도시락을 좀 싸 왔거든요.”

“오. 좋지. 빨리 풀어봐.”

여자들한테는 쉼 없이 추근대고 형한테는 얻어맞고 사는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모두가 한심하다며 손가락질하는 그였지만 얀은 어째서인지 남들이 아는 모습만이 키하노의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뭐야? 레몬이야?”

“네.”

“······이거 왜 가져왔어? 레몬 같은 건 먹는 거 아니다 너.”

“고기 같은 거에다가 뿌려 드시면 맛있어요. 저희 마을에서는 다들 그렇게 먹는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달도 뜨지 않는 밤이었다.

그러나 곧 있을 밤을 기다리는 얀은 괜스레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만 같았다.

정체 모를 마녀보다도 눈앞에 있는 키하노의 다른 모습이 더 궁금해지고 있었으니까.

※※※※

달마저 가려진 밤하늘을 틈타 은밀히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저 멀리 있는 숲에서부터 드넓은 목초지를 향해 달려 나오는 그림자.

‘쏘아졌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그림자는 그야말로 자그마한 발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조용한 언덕을 내달리는 중이었다.

“······.”

과연 그동안 숲속에 숨어서 유심히 지켜본 보람이 있었다.

지금 그림자가 나아가는 방향에는 눈이 좋은 목동도, 예민한 양 떼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인간들의 풍차뿐.

그 풍차를 노려보는 금색 눈동자는 어느새 사나운 기세로 가득 차 있었다.

-으으으으-!

“······!”

그러나 바람이 전해주는 어린 것들의 비명에 그림자는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아파! 아프다고!

-그만 해요! 흐이잉!

어머니 세계수에서부터 태어난 어린 정령들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다들 웃으며 떠나간 아이들이었지만 지금 저 풍차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가만히 듣고 있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비명들이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왔기에 생생하게 전해지는 비명 소리.

귓가를 뒤흔드는 아이들의 울음에 그녀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빨리 가야 해!’

그렇기에 아까보다 더 다급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정체 모를 존재.

신중히 다가갔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 내딛는 발걸음에는 어찌할 수 없는 조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개굴.

-개굴. 개굴.

‘개구리 소리?’

그렇기에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푸른 들판이었던 곳이 지금 안개가 가득한 연못이 되었다는 것을.

“체형을 보니까 여자인데?”

“······!”

스팟-!

갑작스레 튀어나온 검날에 정체 모를 그림자가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곳은 아까의 들판이 아닌 어느새 습기로 가득차고 만 연못.

방금까지만 해도 발을 받쳐주던 산뜻한 풀들 대신 온통 진창으로 가득한 바닥은 지금도 그녀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누구냐!”

몸을 억지로 꺾어내며 간신히 피해냈으나 워낙 날카로운 일검이었다.

만약 방금 들린 말이 아니었다면 목이 날아갔어도 할 말이 없을 그런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내가 누군지 말해주면, 그쪽도 이름을 알려줄 건가?”

그렇게 바라본 안개 너머에서부터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

그러나 지금 보이는 잘생긴 외형보다도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여유롭다는 듯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이었다.

“내 이름은 키하노다. 프라우센 가문의 키하노.”

그의 스승 중 한 명이 말했었다.

전장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향한 지름길이라고.

그리고 지금 이곳은 늙은 개구리가 만들어 놓은 키하노의 연못.

“내 이름을 밝혔으니 이제 말해주실까.”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바짝 굽힌 자세가 날카롭게 세운 칼날과도 같다.

마치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너를 가르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자세였다.

“너의 이름을 말해라. 내 검이 너의 목에 닿기 전에.”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아들. 키하노 프라우센.

그러나 예전에 그를 가리켰던 이름은 프라우센 가문이 낳은 희대의 천재. 키하노 프라우센이었다.

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9화 2

키하노 외전- 빛을 잃어버린 별들 (1)

옆으로 비켜선 자세는 날카롭게 세워진 칼날과도 같다.

교묘하게 놓아둔 왼발은 상대로 하여금 대응할 방향을 강제하고 있었고.

“나는 프라우센 가문의 키하노다.”

보이는 모습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으나 내뿜는 기세만큼은 검의 대가와도 같은 모습.

빠져나갈 틈도, 그렇다고 파고들 틈도 허락하지 않는 키하노의 기세에 정체 모를 그림자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제 너의 이름을 말해라.”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 만들어진 함정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차분히 고개를 든 침입자가 키하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간들 따위에게 알려줄······.”

어디서도 보기 힘들 금색 눈동자였다.

잠시 그 색에 매료되고만 키하노였으나 어느새 눈동자에서부터 떠오른 오망성이 흉악하게 빛나고 있었다.

“······키하노!”

그 오망성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아챈 앤드류가 경고하려 했으나 이미 뻗어낸 그녀의 손이 더 빨랐다.

“이름 따위는 없다!”

크르르르-!

빠르게 뻗어낸 그녀의 오른손에 키하노가 잠시 움찔했다.

그 기민한 반응 속도는 충분히 칭찬할 만한 것이었으나 정작 쏘아진 것은 키하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었다.

“······늑대?”

까드드득!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어느새 검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하는 푸른색의 늑대.

그야말로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키하노가 당황하자 품에 있던 앤드류가 정신 차리라는 듯 크게 외쳐대었다.

“정신 차려라 이 놈아! 이건 정령이야! 정령!”

나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다.

마법사처럼 신비를 이용할 수도, 기사들처럼 검을 휘둘러서도 그려낼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만의 세계.

그리고 지금 키하노의 검을 물어뜯고 있는 이 늑대 또한 저 앞에 있는 침입자가 그려낸 세계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정령은 또 웬 말이야!”

오직 알븐헤임의 엘프들만이 다룰 수 있다는 정령들.

그 정령이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자 키하노가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조그만 마을에 별의별 게 다 튀어나오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세계뿐이니까.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키하노가 있는 힘껏 늑대를 떼어내고는 재빨리 검 끝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영감님! 잠깐 좀 빌립시다!”

검을 세워 막아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자세를 흐트러뜨린 키하노,

그런 그를 보며 금색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으나 어느새 늘어뜨린 키하노의 검은 연못에 닿아 자그마한 파문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이래서 진작 오러를 깨우쳤어야 하는 건데.”

키하노의 검이 연못에 닿자 시끄럽게 울던 개구리들의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 대신 울리기 시작하는 것은 연못에서부터 퍼지는 자그마한 동심원.

키하노의 검에서부터 시작한 수면의 파문이 어느새 정체 모를 침입자가 있는 곳까지 퍼지고 있었다.

“후우.”

어느새 화살에 시위까지 메긴 그녀의 시선이 날카롭다.

그러나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정당한 계약에 따라 내가 빌려온 세계.

잠시 주어진 찰나의 시간마저도 집중하려는 키하노의 검을 따라 조금씩 연못의 물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스파앗-!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침입자가 더는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힘껏 화살을 쏘아냈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유려한 몸짓으로 다가오는 화살.

그 화살의 움직임을 보며 키하노의 눈이 잔뜩 좁혀지고 있었다.

‘이건 피하면 안 돼.’

지금 날아오는 화살은 그저 나의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견제일 뿐이다.

그 판단이 맞다는 듯 어느새 뒤로 돌아온 늑대의 기척을 느끼며 키하노가 이를 악물었다.

“키하노! 뒤에!”

이 이상 피하면 반드시 몰린다.

막다른 곳까지 몰리면 더는 피할 수 없고.

그렇다면 남는 것은 오직 나를 향해 다가오는 파멸뿐.

“흐아아압!”

그렇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정면돌파일뿐.

날카롭게 날아드는 화살을 향해 키하노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키하노의 움직임에 바로 뒤까지 돌아온 늑대가 그만 목표물을 놓치고 말았다.

“······달려든다고?”

오히려 화살을 향해 달려드는 키하노를 보며 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옆도 뒤도 아닌 오히려 앞을 향해 뛰어들다니.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었던 의외성이었으나 아직 키하노 앞에는 정령의 힘이 가득 실린 화살 한 발이 남아있었다.

“크읍!”

까가각! 까각-!

마치 살아라도 있는 듯 미끈하게 휘어지는 화살을 키하노의 검이 억지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이이익!”

검과 화살이 만난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부려야 했던 키하노의 기교는 그야말로 수십 가지.

검을 아는 검사라면 누구라도 눈이 휘둥그레질 장면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키하노의 진가를 알아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콰직-!

억지로 비틀어 낸 화살이 순간 키하노의 왼쪽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섬뜩한 순간마저 흘려내는 데 성공한 키하노가 이제는 바로 앞에 있는 침입자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 차례인가?”

“······!”

잔잔한 파문에서 시작되어 거친 파도가 된 키하노의 검.

그 검이 어느새 정체 모를 침입자를 향해 휘둘러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쪽이 한번 막아보시던가!”

파아아앙-!

잠잠했던 언덕이 흔들리고 잠들어 있던 양들도 화들짝 깨고 말 정도의 강렬한 울림.

그 울림과 함께 힘껏 퍼져 오른 물보라가 있었다.

저 하늘에 있는 달까지 닿을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그 물보라는 자그마한 우물 하나 없던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촉촉이 적시기 시작했다.

※※※※

“······엘프라. 엘프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저 멀리서 올라오고 있는 횃불들을 보며 키하노가 입에 물고 있는 풀잎을 뱉어내었다.

“정령술사랑 상대해보는 것도 처음이고.”

“······.”

“뭐야. 왜 여기까지 온 거야.”

한밤중에 생긴 갑작스러운 난리에 남작이 보낸 징수관이 병사들을 끌고 오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 힘이 다 빠져버린 키하노로서는 옆에 있는 여인을 들고 내려갈 수도 없었으니 다행인 일이기는 했다.

“너희가 있는 알븐헤임에서 여기 콘수에그라까지는 그야말로 대륙의 끝에서 끝 아닌가? 도대체 이 먼 곳까지 온 이유가 뭐야?”

하얀 달빛 아래 비치는 백금발이 아름다웠다.

이제야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낸 엘프 여인은 여태껏 많은 여자들을 만나봤던 키하노조차도 잠시 움찔했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러나 키하노는 아직 여인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지금 밧줄에 묶여 있는 여인 또한 자신의 이름을 말해줄 생각은 없는 듯 해 보였다.

“······말하기 싫으면 말든가. 어차피 알아봤자 어디 써 먹을데도 없고.”

점점 가까워지는 병사들의 횃불이 고요한 언덕을 요란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키하노가 뿌려댄 물보라 때문인지 올라오는 속도가 꽤나 더뎌지고 있었다.

“키하노 프라우센. 프라우센 가문의 막내 아들.”

“음?”

그렇게 하릴없이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키하노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말할 줄 알았네?”

“······.”

이름은 몰랐으나 마주하는 금안(金眼)은 익숙했다.

어째서인지 모를 그 친밀감은 아마 방금 마주했었던 그녀의 세계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이나 하자니까. 나는 분명히 아까 내 이름을 말했······.”

“그리고 한때나마 용을 꺾었던 기사.”

아직은 둘밖에 없는 언덕.

스쳐 지나가는 바람마저 잔잔한 지금, 키하노는 오랜만에 듣는 예전의 호칭에 잠시 굳은 듯 멈춰버리고 말았다.

“우리에게까지 알려졌던 그 찬란했던 칭호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남의 세계나 빌리고 다니는 비루한 처지가 되었군.”

“······.”

“그야말로 한심해. 용들이 무서워 가진 날개조차 펼치지 못하는 꼴이라니.”

오늘의 승자는 키하노였고, 패자는 이름 모를 저 엘프였다.

그러나 오히려 당당한 사람은 밧줄에 묶여 있는 엘프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아마 키하노가 패배자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는 겁쟁이야. 키하노.”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보고 있으나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나 듣지 않으려 하는 키하노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겁쟁이라.”

이제야 드러난 달을 올려다보며 키하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용조차 뛰어넘는 천재였으나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도 갖추지 못한 비루한 프라우센.

태어날 때부터 가진 날개를 스스로 떼어내고만 키하노에게 있어 겁쟁이라는 말처럼 어울리는 단어는 아마 없을지도 몰랐다.

※※※※

“실험이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시연만 해보면 되는 단계입니다.”

흐릿하게 켜진 수정구를 향해 사몬테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정구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를 향한 공경이자 복종의 표시였다.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아! 네. 그것은 다행히 잘 해결되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깊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존재.

드라굴리아 중에서도 푸른 눈과 찬란한 금발을 가진 사르누스라면 그 어떤 존재라도 지금의 사몬테처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투를레크 영주가 꽤 쓸만한 기사를 보냈지 뭡니까. 아마 사르누스 님도 알고 계실 기사입니다.”

“누구냐.”

마법을 다루는 상대이기에 쉽사리 잡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고작 남작 따위가 보낸 기사가 골칫덩이를 잡았다는 말에 사르누스가 호기심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 있잖습니까. 프라우센 가문의 막내아들 말입니다.”

감히 말하기가 송구하다는 듯 숙이고 있는 사몬테의 허리가 더욱 굽혀들어갔다.

그것은 지금 말하려는 이름 자체가 용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불쾌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키하노 프라우센······. 그 너저분한 망나니 녀석 말입니다.”

“······.”

키하노 프라우센.

귀족부터 평민까지, 대륙의 모두가 아는 프라우센 가문의 망나니 아들.

그러나 용들에게 있어서는 조금은 다른 의미로 기억되는 그 이름을 들으며 사르누스의 눈동자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행히 녹슨 검이라도 마녀를 잡을 정도는 되는 모양이더군요. 그래도 프라우센은 프라우센인건지······.”

“시연 날짜가 언제지?”

그 이름을 들은 사르누스가 스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즐거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웃음을 보며 사몬테의 등 뒤로 자그마한 소름이 돋고 있었다.

“네?”

“직접 보고 싶군. 아무래도 지금 있는 곳이 가깝기도 하고.”

밝게 타올랐던 불은 쉬이 꺼지지 않는다.

아무리 짓밟고 더럽혀도 까맣게 탄 재 안에는 여전히 뜨거운 불씨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확실한 확인을 위해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일주일 안에 닿도록 하겠다. 준비할 수 있도록.”

“네! 네! 사르누스 님께서 직접 와주신다니 그야말로 영광입니다!”

도시 에나레스.

콘수에그라와 가장 가까운 도시.

그곳에 있던 용 하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하노라는 자도 계속 옆에 두고 있도록 하고.”

유리관에 갇힌 하얀 뱀이 울고 있었다.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남자도, 그리고 어린 정령들을 구하지 못한 세계수의 신녀도.

그들 모두가 사나운 용의 발톱 아래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가능성들.

오직 완벽한 가능성만이 추앙받는 지금은 용들의 시대.

그 아래 짓눌린 별들이 여전히 제 빛을 잃은 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80화 4

키하노 외전- 빛을 잃어버린 별들 (2)

오늘은 아주 조용한 날이었다.

원래는 1층에서 떠들고 있을 마을 사람들도 오랜만에 생긴 일거리에 자리를 비운 데다가 지금 2층에는 오직 키하노와 그의 일행뿐이었으니까.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앤드류 님.”

그렇게 자기들만 남은 여관에서 일행은 실로 오랜만에 여유라는 것을 즐기는 참이었다.

지금 세숫대야 안에서 첨벙거리며 헤엄치는 늙은 개구리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개구리 같은데요.”

“······이 무례한 녀석. 당장 그 말 취소하지 못하겠느냐.”

“개구리긴 개구리잖아요.”

“떽! 이 세상에 말하는 개구리가 어디 있어!”

앤드류는 방금 얀의 말이 영 불편하다는 듯 볼을 불룩 불려대며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말에 딱히 반박하기도 힘든 것이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앤드류는 개구리가 맞긴했다.

“키하노 이 놈아! 나를 언제까지 이리 내버려둘 생각이냐!”

“······.”

“그러니까 볼 일 다 봤으면 빨리 뜰 생각을 했었어야지! 네 놈이 미적거리니까 결국 발목을 잡힌 것 아니냐!”

불퉁한 표정으로 세숫대야에서 빠져나온 앤드류는 옆에 있던 고깔모자를 고쳐 쓰고는 키하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앤드류의 성화에도 키하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을 뿐.

왼쪽 눈에는 하얀 붕대를 감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키하노의 모습에 앤드류는 괜스레 조바심이 나는 것만 같았다.

“우리가 했던 계약을 잊은 것 아니겠지? 어서 빨리 내 몸을 찾으러 가야 할 것 아니냐.”

불의의 사고로 개구리가 되어버린 앤드류는 지금도 자신의 몸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도 대신 움직여 줄 키하노가 없다면 이루기 힘든 염원에 불과한 것일 테다.

“······그나저나 눈은 괜찮은 거냐? 검 잡는데 이상 있는 건 아니지?”

아무리 바쁜 여행길이라도 가끔의 휴식은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키하노는 휴식을 취한다고 보기에는 너무 힘이 빠져 있었으니 한시가 바쁜 앤드류로서는 나름대로 안달이 날 만도 했다.

“사실 안 그래도 요즘 따라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러니까 내가 진짜 개구리가 되기 전에 빨리······.”

“안 괜찮아요.”

뒷다리까지 탕탕 내려치며 목청을 높이던 앤드류였지만 나지막히 들려온 키하노의 목소리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뭐라고?”

“괜찮은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까 안 괜찮더라고요.”

그 말과 함께 키하노가 여기 좀 보라는 듯 눈가에 두른 붕대를 잡아 내렸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제 눈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에요.”

오른쪽 눈, 왼쪽 눈.

이렇게 번갈아 눈을 떠보던 키하노가 앤드류를 보며 침울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이게 왼쪽 눈으로 보면 색이 더 짙어 보인다니까요.”

상처 입은 왼쪽 눈으로 본 세상은 어째서인지 색깔이 더 짙어 보였다.

마치 한 폭의 유채화처럼 색이 짙어진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키하노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

감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허접한 어딘가의 지하.

여기저기 놓여져 있는 감자 자루들이 지금 이곳이 평범한 창고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정작 신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어른 팔뚝보다 더 두꺼운 쇠창살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들이 직접 주문을 새겨넣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창살.

그들이 덕지덕지 새겨놓아 정령조차 부를 수 없게 된 신녀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갈색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그림은 뭐지? 직업이 화가신가?”

마치 위험한 짐승이라도 된다는 듯 세계수의 신녀는 지금 커다란 우리 안에 갇혀 있었다.

급조한 것이긴 했으나 성능은 확실한 우리였고 그렇기에 지금 키하노는 안심한 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실력이 꽤 그럴싸한데? 어렸을 때 보던 화가들보다도 훨씬 낫잖아.”

“······.”

“밥벌이 선택을 이걸로 하지 그랬어. 괜히 정령들 불러서 여기저기 때려 부수는 거 말고.”

지금 키하노가 들고 있는 그림에는 언덕 위에 서 있는 풍차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몬테의 풍차인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지만 정작 키하노가 감탄한 것은 그 주위에 그려놓은 콘수에그라의 정경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그려놓은 걸 보니 예전부터 이 마을을 보고 있었나 보지? 사몬테가 하는 실험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나?”

지금 물어보는 키하노의 자세는 취조라고 하기에는 유들했고 그렇다고 단순히 물어본다고 하기에는 영 삐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입 아프게 물어봤자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녀가 이곳에 붙잡힌 지 오늘로써 5일째였지만 그 누구도 신녀의 입을 열게 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키하노는 잘 알고 있던 참이었다.

“······예전부터 보고 있지는 않았어.”

그러나 그 어떤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던 그녀의 입술이 지금 키하노의 앞에서는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뭐라고?”

“예전부터 보고 있지는 않았다고. 당신들이 하던 실험을 멈추려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날 밤에 들었던 표독스러웠던 목소리와는 달리 지금 듣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인간들의 억양과는 다르게 계속 운율을 타는 것이 마치 바로 옆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았달까.

“그럼 여긴 언제 도착한 거지?”

“네 달 전에.”

“네 달 전에 와서 이 그림을 그린 건가.”

“그건 일 년 전에.”

“······응?”

그러나 그 좋은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키하노의 표정은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정작 말은 통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뭐야. 지금 이 그림은 여기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그려놨다는 그런 소리인가?”

“응.”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그린 그림을 보지도 않고 그렸다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지만 신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소리 없는 반응에 키하노의 표정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 말고 취조관들에게 하라고.”

뭐 아무려면 어떠한가. 이제 자신은 받았던 임무에서 해방된 몸인데.

며칠 후면 도착할 드라굴리아의 사람만 대접하면 또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으니 골치 아픈 사정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건 계시야."

"뭐?"

그러나 닿을 듯 닿지 않는 대화 속에서도 신녀는 끈덕지게 키하노를 붙잡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시란 다가오는 그 순간에야 알아볼 수 있다고 했어.”

그것은 잠시나마 너와 나의 세계를 잇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노력.

이제야 알아본 세계수의 계시를 위해 신녀는 돌아서려는 키하노를 붙잡고 있었다.

“지금의 나 처럼.”

그 말과 함께 여기 좀 보라는 듯 치켜세운 신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작스레 보인 그 행동에 키하노는 어째서인지 붕대를 두르고 있던 왼쪽 눈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너는 이제 봐야만 해. 키하노. 계속 그러다간 네 안의 별이 죽어.”

어머니 세계수는 그녀에게 풍차의 마을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 있을 어린아이를 구하라는 말과 함께.

그렇기에 이곳에 도착한 신녀는 그동안 풍차에 잡혀 있던 정령들을 구하려 노력했지만 정작 계시가 말한 어린아이는 사로잡힌 정령들이 아니었다.

“정말로 너만의 세계를 찾고 싶다면 더 이상 외면하지 마. 키하노.”

“······.”

마주한 키하노의 눈을 통해 신녀는 보고 있었다.

점점 꺼져가는 불씨를 애써 주워 담으며 울고 있는 아이를.

그 아이는 찬란히 빛나는 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 빛을 내보일 수 없었던 아이였다.

※※※※

오색 창연한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색색의 햇빛들이 눈이 부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이 부신 것은 지금 결투장 주변에 빼곡히 들어찬 수많은 군중의 모습이었다.

“······.”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어린 소년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이곳은 명예로운 장소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직접 움켜쥔 소중한 무대였으니까.

“대결자들은 앞으로!”

그리고 아마 거기서부터였을 것이다.

지금의 광경에 너무 들뜬 소년이 아버지가 당부했던 말을 잊게 된 때가.

“지금의 결투는 명예를 위한 것임을 두 결투자는 잊지 마시오.”

소년의 바로 앞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어린 용이 마주 서 있었다.

색색의 빛깔 아래 서 있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러나 평소라면 감히 마주치지도 못할 눈동자 앞에서도 키하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준비!”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의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으로 가득 찬 날이.

그리고 어린 키하노에게는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시작하시오!”

보이는 색은 선명하고 들리는 소리는 명확하다.

지금의 광경이 어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지, 눈앞에 있는 어린 용이 어느 곳을 향해 뛰쳐 들어올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까앙-!

그래서 키하노는 검을 뻗었다.

어린 소년이라면 감히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용의 이빨을 틀어막았고 재차 들어오려는 검의 진로를 매끈하게 흘려냈다.

“······!”

검이 마주칠 때마다 주위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탄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어린 용의 눈동자는 당홤감에 흔들렸고.

그리고 어린 키하노는 그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너무나 즐거울 뿐이었다.

“하하!”

절로 나오는 웃음과 함께 소년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었다.

그 웃음과 함께 빛나는 소년의 검을 보며 어린 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건!”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떠한 검사들은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할 그 감각 속에서 어린 키하노는 있는 힘껏 자신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까아아앙-!

검과 검이 맞닿는 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결투장 위로 떠오른 누군가의 검자루.

나의 머리 위로 떠오른 저 찬란한 별을 보며 어린 소년은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아버지!”

승리에 대한 기쁨 때문에 발그레 불을 밝힌 키하노가 서둘러 관중석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저 멀리서 마주친 아버지의 눈동자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당황과 공포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아버지?”

모두가 바라보는 앞에서 완벽한 가능성을 꺾은 프라우센의 아들.

아직도 소년이 들고 있는 검에는 하얗게 불타는 오러 한 줄기가 빛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키하노의 개화를 축하해 줄 수 없었다.

“······.”

색색의 유리가 감싸고 있는 이곳은 소년들의 결투장.

그러나 오늘의 승리자인 키하노를 향한 색깔은 분노로 가득 찬 용들의 푸른 눈동자였을 뿐.

사나운 기세로 일어선 용들 사이에서 어린 소년이 피운 꽃 한 송이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어리고, 찬란히 빛나는 꽃이었으나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 소년의 가능성이었다.

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81화 2

키하노 외전- 어린 가능성들을 위해 (1)

마을에 있는 모두가 잠들어 있을 깊은 밤.

오직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오는 고요한 콘수에그라에서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미안해.”

엉성하게 짜인 판자 사이로 달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땅한 감옥조차 없어 어딘가의 창고 안에 갇혀 있던 세계수의 신녀.

무릎을 모은 채 고개 숙이고 있는 그녀를 푸른 달빛이 위로하듯 감싸고 있었다.

“내가 꼭 구해주려고 했었는데.”

엘프들의 숲, 알브헤임에서부터 이곳 콘수에그라까지 먼 곳을 달려온 신녀였지만 지금 그녀는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우리에 갇히고 만 신세였다.

아마 내일이면 도착할 사르누스에 의해 수도로 끌려가게 될 신녀였지만 정작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불안한 미래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요! 인제 그만 해요!

-잘못했어요. 저 좀 제발 꺼내주세요!

그녀를 정말 괴롭게 하는 것은 지금도 귓가를 통해 들려오는 어린 정령들의 울음소리.

지금도 불을 환히 밝힌 사몬테의 풍차에서는 어린 정령들이 외치는 비명이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왜 저 아이들을 내버려 두시나요. 어머니.”

자신을 이곳까지 홀로 보낸 세계수의 계시를 원망하게 될 정도로 가녀리고 애처로운 소리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녀는 그저 무릎 사이로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을 파묻을 뿐이었다.

힘없이 고개를 숙인 신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마법사들의 실험에 아파하는 어린 정령들은 울고 있었고.

그러나 그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어주는 이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오늘은 오직 상처 입은 자들만이 깨어있는 밤.

그렇기에 여관방에 홀로 깨어있던 기사는 지금도 왼쪽 눈가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사몬테의 풍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

양 떼들이 우는 소리만 들려왔던 콘수에그라였지만 오늘만큼은 어째서인지 떠들썩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의 모습이 그랬고, 빗자루를 든 채 이곳저곳을 쓸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다.

“오늘 드라굴리아 가문에서 아주 귀하신 분이 오신대요.”

“용이라던데. 그것도 순혈을 타고 나신 분.”

“정말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셨대요. 세상에 내가 죽기 전에 용을 다 뵙네.”

마을 사람들은 지금 콘수에그라로 오고 있다는 용의 소식에 한창 들떠있는 중이었다.

완벽함에서 태어났기에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존재들.

그저 한 번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용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신다! 지금 마을 어귀에 도착하셨어!”

“다들 줄부터 서라고! 애들 못 뛰어나가게 단속하고!”

매섭게 외쳐대는 촌장의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재빨리 길 한켠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맞이하게 될 용의 모습에 긴장한 듯 보였지만 가슴을 타고 오르는 흥분만큼은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부터 화려하게 빛나는 황금색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황금색은 오직 완벽함에서 태어난 용들만이 취할 수 있는 색.

그 색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님!”

마을 사람들을 지나친 마차가 멈춰서자 마법사 사몬테가 다급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여태껏 마을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아주 공손해 보이는 자세와 함께.

“이 누추한 곳까지 와주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이윽고 열리는 문에서부터 고귀한 용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햇빛에 비치는 머리는 찬란한 금발이었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서늘한 푸른색.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존재감은 아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완벽함의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수고했다. 사몬테. 이제야 쓸만한 동력원을 찾았다지?”

“그, 그렇습니다. 사르누스 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음껏 내려다볼 수 있는 사르누스의 눈동자가 천천히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로군.”

고귀한 용인 그가 이 한적한 마을까지 온 이유는 사몬테의 실험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사르누스가 주의 깊게 보려 한 것은 예전에 자신들이 짓밟아 놓았던 어린 가능성인 키하노 프라우센.

“그런데 보이질 않는군.”

“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가 찾고 있던 갈색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용들조차 놀랄 정도로 찬란한 가능성을 내보였던 프라우센 가문의 막내아들.

반드시 확인해야 할 가능성의 불씨였건만 그는 지금 있으라고 말한 곳에서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끄으응!”

고귀한 용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만 사몬테의 풍차.

그렇기에 아무도 없을 그곳을 지금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기어오르고 있었다.

“뭘 이렇게 높게 지어놨냐!”

지금 키하노가 기어오르는 풍차는 콘수에그라에 있는 풍차 중에서도 가장 높고 크게 지어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라도 쉽게 오르기 힘든 풍차였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의 키하노는 그 흔한 밧줄 하나 없이도 성큼성큼 잘도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거 진짜 나중에 원래 손으로 돌아오는 거 맞죠?”

“맞다니까!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앤드류가 의심하지 말라는 듯 뒷다리를 땅땅거렸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을 잡고 살아야 하는 검사의 손이 개구리처럼 변해 있다면 누구라도 지금의 키하노처럼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멀쩡한 입구 놔두고 왜 벽을 기어오르느냐 이 말이야. 너 진짜 정신 나간 거 아니냐?”

“사몬테의 공방을 봐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왜?”

“아······. 아까 말했잖아요!”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벽을 기어오르는 모습이 여간 경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 키하노를 밑에 있는 얀이 불안한 듯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가 모시는 기사는 날개가 달린 곳을 지나 사몬테의 공방이 있는 창가까지 다다른 참이었다.

“밤새도록 애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니까!”

아무도 없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숨죽인 키하노의 목소리가 긴박했다.

“안 그래도 이 풍차. 처음 봤을 때부터 엄청 수상했다구요.”

창문을 통해 조심스레 사몬테의 공방을 살피던 키하노가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한눈에 담기도 힘든 풍차의 날개.

“봐봐요. 이 자식들 풍차에다가 바람천도 안 달아 놨다니까.”

그러나 잔뜩 녹이 슬어버린 날개에는 풍차라면 당연히 달아 놨어야 할 바람천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을 받아 날개를 움직이는 것이 본래 풍차가 해야 할 목적이건만 애초에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는 것처럼.

콰직-!

“그러니까 내가 한 번 자세히 봐야겠다는 거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팔꿈치로 창문을 찍어 내린 키하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금이 간 유리들을 뜯어내었다.

레이디들과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위해 배워놓은 기술이었건만 역시나 뭐라도 배워두면 언제라도 쓰게 되는 법이었다.

“······.”

깨어놓은 구멍을 통해 창문의 잠금장치를 제거한 키하노가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사몬테의 공방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앤드류가 딱히 다른 보안장치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조심스러워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방 한번 엄청 더럽네. 마법사들은 다 이런가?”

“나는 안 그랬다 이놈아.”

“서류들도 여기저기 흩어놓고 말이야. 마법사들 이거 안 되겠어.”

“······.”

정식으로 방문했을 때는 허락되지 않았던 사몬테의 공방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처음 보는 사몬테의 공방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갖가지 서류들로 온통 엉망인 모습이었다.

“······이건 뭐야. 설계도인가?”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로 가득했던 서류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키하노의 눈길을 잡아끄는 종이가 한 장 있었다.

골치 아파 보이는 글자와 수식 대신 달랑 그림 하나만 그려져 있는 종이.

마법에는 문외한인 키하노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은 지금 그가 있는 이 풍차의 단면도를 그려낸 것이었다.

“뭐 이렇게 톱니바퀴들이 많은 거야.”

그렇게 살펴보기 시작한 사몬테의 풍차에는 너무나 많은 톱니바퀴들과 파이프들이 매달려 있었다.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이렇게까지 많이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으나 평범한 풍차라면 절대 달려 있지 않을 기계 장치들이 수두룩했다.

“······키하노.”

“왜요. 나 바빠요.”

슥 훑어본 그림에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다시 주변을 살피는 키하노였지만 정작 어깨에 매달려 있던 앤드류는 무언가 놀랐다는 듯 두 눈을 끔벅여대고 있었다.

“이거······.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 아무래도 그냥 풍차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니까요. 내가 아까부터 수상하다고 했잖아요.”

조심스레 말하는 앤드류의 목소리가 긴장된 듯 떨리고 있었지만 지금 키하노는 어제 들렸던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키하노의 시야로 반짝이는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풍차가 아니라니까. 이거······.”

“쉿! 조용히 좀 해 봐요.”

고개를 올려 바라본 공방의 가장 높은 곳에는 저번에 보았던 유리관들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마치 기계장치의 한 부품처럼 단단하게 고정된 유리관들의 모습.

그 광경을 지켜보던 키하노는 어째서인지 상처 입은 왼쪽 눈이 더욱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안 들려요?”

“뭐가?”

“지금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사몬테라는 마법사가 무엇을 하든 간에 솔직히 키하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가 하는 실험은 드라굴리아가 주관하는 것이었으니 키하노가 딱히 끼어들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으니까.

“······저 위에서 들리는 건가.”

그러나 어린 아이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조금은 다를 것이다.

그것도 밤새도록 울부짖을 정도로 아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실험이라면 더더욱.

“끄응!”

위로 올라갈수록 아파오는 왼쪽 눈의 상처에 키하노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기에 벗어젖힌 붕대에는 어느새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지만 위로 올라가려는 키하노의 손길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키하노! 상처가 터졌다!”

"나도 알아요!"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유리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어젯밤 들었던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선명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쉴 새 없이 올라간 공방의 가장 높은 곳.

커다란 톱니바퀴가 평평하게 뉘어져 있는 그곳에는 예전에 보았던 유리관들이 사방에 장식처럼 꽂혀 있었다.

“어딨어?”

눈가에 피를 뚝뚝 흘리며 고개를 돌려대는 키하노의 모습이 다급해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비어 있는 유리관들뿐, 정작 키하노가 찾으려 했던 울고 있는 아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없잖냐. 우리 일단 내려가도록 하자.”

“하지만.”

“이놈아 방금 내가 말했잖아! 여기는 평범한 풍차가 아니라니까!”

-······!

어서 내려가자며 앤드류가 재촉하고 있었지만 키하노는 방금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키하노는 귀로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눈으로 본 소리.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키하노의 왼쪽 눈으로 무언가 희끄무레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만 괴롭히라고!

톱니바퀴 한가운데서 있는 커다란 유리관에서 하얀색 번개 한 줄기가 파직거리고 있었다.

다른 것들보다도 훨씬 큰 유리관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들썩거리기까지 하는 녀석.

그 유리관을 향해 걸어간 키하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내 친구들 그만 괴롭혀!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아!

멀쩡한 오른쪽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상처 입은 왼쪽 눈으로는 보이는 세계.

마치 유채화 속 한 장면처럼 온통 색이 짙어진 그곳에서는 잔뜩 상처 입은 어린 뱀 한 마리가 키하노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

모두가 떠난 텅 빈 결투장에서 어린 소년이 울고 있었다.

소년이 지금 흘리는 눈물은 억울함에서도, 분노에서도 비롯된 눈물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공포에서부터 시작한 눈물이었다.

내가 피워낸 세계를 보며 불같이 화를 내던 드라굴리아의 용들.

그것도 자신들의 어린 용을 제물 삼아 피워낸 키하노의 가능성을 보며 그 시퍼런 눈동자들이 소년의 세계를 마구 헤집어대었으니까.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러나 지금 울먹이고 있는 키하노에게 그 누구 하나 눈을 마주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존경하던 아버지도, 사랑하던 어머니도 모두 분노한 용들을 달래느라 어린 키하노를 바라봐 줄 틈이 없었으니까.

-더이상 외면하지 마. 키하노.

누구 한 사람도 지켜주지 못했던 소년의 세계.

그렇기에 자신조차 외면하고 있었던 어린 소년의 울음은 지금도 계속해서 키하노의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계속 그러다가는 네 안의 별이 죽고 말아.

어쩌면 어젯밤 키하노가 들었던 울음소리는 눈앞의 어린 정령들이 아니라 지금껏 외면하고 있던 소년이 내질렀던 울음일지도 모를 일.

그렇기에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키하노가 앞에 있는 유리관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82화 3

키하노 외전- 어린 가능성들을 위해 (2)

까앙-! 까아앙-!

어두운 풍차 안을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풍차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까지 퍼지는 소리.

갑작스레 들려오는 그 소리에 쓰러져 있던 정령들조차도 고개를 치켜들 정도였다.

파직-!

어찌나 세게 내려치는지 휘두르는 검에는 불꽃마저 튈 정도.

그러나 정작 사몬테의 유리관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고 있었으니 이쯤 되면 키하노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네.”

어린 정령들을 가둬놓은 유리관은 투명했지만, 그 안에는 사몬테가 심어놓은 신비가 가득했다.

아마 그 신비가 세상을 속이며 키하노의 검 끝을 흐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앤드류. 어떻게 방법이 없겠어요?”

“······지금 당장은. 시간을 주면 모르겠다만.”

“지금 가장 없는 게 시간인데.”

앤드류는 고매한 마법사였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모습이었을 때의 이야기.

지금 당장 그에게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다급함에 목이 타는지 키하노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마치 막다른 곳에 몰린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가만히 멈춰 있는 손과는 다르게 키하노의 눈동자만큼은 지금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설마 저것들 전부에다가 신비를 발라놓지는 않았겠죠?”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어린 뱀 위에는 수많은 기계장치 들이 달려 있었다.

도통 무엇을 위해 달아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하나 정도는 정령들을 묶어놓는 데 쓰이는 장치일 것이 분명했다.

“······아까 보니까 설계도 같은 게 굴러다니기는 하던데.”

그 장치들을 보며 아까 보았던 설계도를 떠올린 키하노가 천천히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아무리 복잡한 장치라 할지라도 분해는 조립의 역순.

아니, 꼭 분해 방법을 알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약한 부분 정도는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쿠르르르릉-!

“크윽!”

다시금 시도해 볼 방법을 찾아낸 키하노였으나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뒤였다.

“이게 뭐야!”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갑작스레 느껴지는 진동에 키하노가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래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진인가?”

“아니다! 지진 같은 게 아니야!”

가가가가각-!

밑에서부터 우렁차게 퍼지는 소리에 키하노가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

풍차의 아래서부터 톱니바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수십, 아니 수백, 수천 개에 달하는 톱니바퀴들이.

마치 물결이 퍼져나가듯 서로가 맞물려 우렁차게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의 모습에 키하노는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으아아아!

-이제 그만해!

“······!”

동시에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어린 정령들의 비명 소리.

마치 불이 켜진 촛불처럼 환히 빛나는 유리관 안에서 어린 정령들이 고통에 겨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건 풍차가 아니야!”

쿠르르르릉-!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사몬테의 풍차가 일어서고 있었다.

완벽한 용이 원했으며 몰락한 마법사가 만들어 낸 콘수에그라의 풍차.

“이건 골렘(golem)이란 말이다!”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마도공학의 정수라 불리는 골렘.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할지 모르는 골렘 하나가 어린 정령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

※※※※

쿠르르릉-

고요하던 콘수에그라의 언덕 위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풍차에서부터 시작된 소리.

방금까지만 해도 풍차였던 건물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광경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새 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세상에 저게 뭐야!

-풍, 풍차가 일어서잖아!

바로 앞에 용을 잊고 말 정도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하늘을 꿰뚫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머리를 세우며 잔뜩 녹이 슨 몸을 일으키는 사몬테의 풍차.

난생처음 보는 그 기괴한 모습에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 사르누스 님!”

그러나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 오직 마법사 사몬테만큼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지 두 손을 번쩍 펼쳐 들고 있었다.

내가 있던 가문은 몰락했으며, 몸담고 있던 계파에서는 파문까지 당한 마법사 사몬테.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무시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저 위에서 울부짖는 골렘의 포효는 곧 사몬테가 내지르는 함성이었다.

“보십시오! 저 위풍당당한 모습을!”

쿠오오오오-!

마침내 두 발로 선 거인이 이 세상에 내가 왔다는 듯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 포효와 함께 미친 듯 웃어젖히는 사몬테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기에 물들어버린 마법사 그 자체.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용의 푸른 눈동자에는 오직 서늘한 웃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훌륭하다. 사몬테.”

여태껏 풍차처럼 위장하고 있었지만, 그 실상은 마법사의 광기가 만들어낸 거대한 골렘.

멀리서 보아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흉악함에 냉정한 사르누스조차 짙은 미소를 짓고 말 정도였다.

“······세상에.”

지금 서 있는 언덕마저 무너뜨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대한 크기였다.

그 웅장한 모습에 얼이 빠져 있던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골렘의 모습에 하나둘씩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쿵! 쿵!

“어?”

쿵! 쿵! 쿵!

“어어?”

어찌나 커다란지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는 사몬테의 골렘.

그러나 골렘이 한 발자국 다가올수록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지에 대한 경의 대신 공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저, 저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저 방향이면 마을 쪽인데!”

왜냐하면, 지금 보이는 골렘이 바로 자신들의 마을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그 어떤 존재라도 쉽게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몸체를 이끌고 콘수에그라로 향하는 사몬테의 풍차.

그러나 정작 이 자리에서 제일 당황하고 있는 이는 마을 사람들도 사르누스도 아닌 풍차 골렘을 만든 장본인인 사몬테였다.

“이, 이게!”

들고 있던 손잡이를 마구 휘저어 보았으나 정작 앞에 보이는 골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성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

전혀 예상치 못한 골렘의 반응에 사몬테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사, 사르누스 님.”

“뭐냐.”

“그, 그게.”

쿠오오오오-!

지금껏 걸은 것은 연습이었다는 듯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는 사몬테의 골렘.

잔뜩 화가 났다는 듯 증기를 내뿜어내며 움직이는 그 모습에 이제야 사르누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다 죽여버릴 거야!

고막이 터질 듯 내질러대는 골렘의 포효와 함께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듣지 못할 소리겠지만 여태껏 언덕 위를 떠돌고 있던 어린 정령들의 목소리였다.

-너희들도 아파봐야 해!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기에 상처 입고 만 어린 세계들.

지금 그 세계들이 갈 곳 없는 분노를 쏟아내며 인간들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

“크으으으!”

콰직-! 콰지지직!

등 뒤에서부터 쉼 없이 뻗어 나오는 열기에 키하노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애써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세차게 날뛰는 열기는 아까까지만 해도 어린 정령들이 있던 곳에서부터 나오고 있는 것.

그러나 정작 지금 키하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매섭게 터져 나오는 정령들의 분노가 아니었다.

“이거 너무 높잖아!”

“조용히 해봐요. 좀!”

이제야 돌아가기 시작하는 풍차의 날개 끝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는 키하노가 있었다.

건물이었을 때도 가장 높았던 풍차였지만 움직이고 있는 지금에서는 더 높이 하늘에 닿은 사몬테의 풍차.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열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키하노였지만 정작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는 크고도 녹슨 풍차의 날개였다.

“개구리 같은 거 말고 아예 참새 같은 게 돼야 했었는데!”

“그랬으면 더 귀엽긴 했겠죠!”

공포에 질려 뒷다리를 파닥거리는 앤드류였지만 키하노라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방금 머리가 구름에 닿은 것 같지 않아요?”

높은 언덕, 거대한 골렘, 그리고 날개의 가장 끝에 매달려 있는 자신.

태어나 지금만큼 하늘에 가까워 본 적 없던 키하노는 서늘하게 느껴지는 위쪽 공기에 정신이 나가버린 듯 그만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제 내려간-다!”

“끄으으아!”

그러나 날개 없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추락하기 마련.

가장 고점에 달해 있던 날개가 다시금 땅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하자 키하노는 다시금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부유감에 배꼽 아래쪽이 터질 듯 간지러워졌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방금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수만은 없는 순간이었다.

쿵! 쿵! 쿵!

저 아래서 울리는 골렘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그 말은 즉, 그만큼 지면에 가까워졌다는 소리.

이미 착지에 세 번이나 실패해 아찔한 활공을 느끼고 왔던 키하노는 더는 혓바닥으로 구름을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꽉 잡으라구요!”

날개 끝에 매달려 있던 키하노의 눈이 빛났다.

그 날카로운 눈빛은 오직 적절한 순간을 찾아낸 검사만이 낼 수 있는 눈빛.

“······!”

돌고 있는 날개와 골렘의 무릎이 가장 가까워진 순간, 그 순간을 노린 키하노가 날다람쥐처럼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들려오는 개구리의 비명이 있었지만 키하노의 신형은 이미 다음 착지 지점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윽! 익! 으익!”

웬만한 담력이 있지 않고서야 움직이는 골렘에서 뛰어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난이도는 마치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서 잔해들을 밟고 내려오는 수준과 맞먹을 테니까.

“아직! 땅은 아직이냐!”

“보면 알 거 아니에요!”

“나 지금 눈 감았단 말이다!”

그러나 지금 키하노는 자신이 봐두었던 지점들을 밟아가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땅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유려한지 나귀를 탄 채 따라오던 얀조차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

오직 골렘의 구동 방식을 완벽히 이해했기에 취할 수 있는 유려한 움직임.

그 움직임을 따라 물 흐르듯 내려온 키하노가 어느새 초원을 향한 마지막 도약을 시도하고 있었다.

“으악!”

“꽤액!”

비록 마무리는 좋지 않았지만.

쿵쿵거리며 떠나는 골렘의 뒤로 비탈진 언덕길을 키하노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키하노 님! 괜찮으세요!”

“······.”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기도 힘들 정도로 키하노의 안색은 엉망이었다.

세찬 바람 때문에 사정없이 뻗쳐오른 갈색 머리는 덤.

그러나 자신의 발이 땅에 닿은 것을 확인한 키하노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추스르고는 얀을 향해 손짓했다.

“배낭에서 물약 하나만 꺼내와 봐. 녹색빛 나는 거 있어.”

“이거요?”

“그래. 그거.”

얀이 꺼내온 유리병에는 보기에도 불길한 녹색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을 건네받은 키하노는 망설임 없이 뚜껑을 따고는 입에 흘려 넣을 뿐이었다.

“크으! 콜록콜록!”

진득히 농축된 솔잎의 맛이 키하노의 혀를 괴롭혀댔다.

입에서부터 퍼져나오는 그 향이 어찌나 강했는지 죽은 듯 뒤집혀 있던 앤드류도 감았던 눈을 뜰 정도였다.

“······그런데 쟤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그렇게 약물의 힘으로 정신을 차린 키하노가 본 것은 콘수에그라로 돌진하고 있는 골렘의 모습.

마치 마을을 부술 듯 달려드는 골렘에게서는 지금도 들려오는 정령들의 울음소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거인이 뭔가 화가 났나 봐요. 왠지 눈도 시뻘건 게.”

“눈이 아니라 창문이겠지.”

정령들의 분노어린 소리에 사태를 파악한 키하노가 재빨리 앤드류를 불렀다.

“영감님! 정신 차려요!”

“으으으······. 여기가 어디야.”

“빨리 정신 차리고 아까 말한 대로 준비 하시라구요!”

빨리 정신을 차리라는 듯 앤드류를 흔들어 댄 키하노가 검집을 추켜 매고는 언덕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커다란 발자국이 새겨져 있는 콘수에그라의 언덕.

아까까지만 해도 푸른 풀들이 가득한 곳이었겠지만 골렘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시커먼 흙더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키하노 님? 다시 골렘한테 가는 건 아니시죠?”

다시금 장비를 추스르는 키하노를 보며 얀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미 키하노의 눈빛은 굳게 결심한 듯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나서줘야지.”

“네?”

얀은 들을 수 없었겠지만 지금도 키하노의 귓가에는 어린 정령들이 부르짖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 소리에 깨어나기 시작하는 키하노 안의 어린 소년.

상처를 통해 이어진 정령들의 세계는 이미 키하노에게 있어 나의 세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한 명 정도는 대신 나서줘야 한다고.”

누구라도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어린 가능성을 위해 대신 검을 휘둘러 주기를.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던 그때를 기억하기에 키하노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이거 가지고 있어.”

“키, 키하노 님? 키하노 님!”

새하얀 종이 뭉치를 건네고는 거대한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키하노.

그의 등 뒤로 얀의 애타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미 키하노는 마을이 있는 곳을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다.

“······이게 뭔데요.”

그렇게 언덕 위에 홀로 남은 얀은 키하노가 건네준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았다.

온갖 그림들이 어지러이 적혀져 있는 그것은 사몬테의 풍차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말해주는 설계도.

그 설계도를 내려다보던 얀은 가장 밑 부분에 있는 새빨간 글씨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 급 제동 장치?”

마을을 향해 폭주하고 있는 사몬테의 풍차.

그 풍차를 막기 위해 키하노가 푸르른 언덕을 내달리고 있었다.

들고 있는 검은 작고 상대해야 하는 적은 거대하나 지금 키하노에 왼쪽 눈에 깃든 것은 분명 잊고 있었던 나의 세계.

맞닿은 세계를 통해 스며들어 오는 별빛을 따라 키하노 안에서 울고 있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키하노 외전- 라만차의 키하노

쿵! 쿵! 쿵!

발을 옮길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먼 곳에 있었음에도 느낄 수 있는 발밑의 진동.

그러나 그 진동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새하얀 공포가 새겨지고 있었다.

“저, 저놈이 마을로 간다!”

“······마을에는 아이들도 있는데!”

투를레크 남작령에서도 구석진 곳에 있는 콘수에그라는 한적한 만큼이나 지금 같은 위기를 겪어본 적이 없던 마을이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마을을 향해 뛰어갔지만, 여전히 굼뜰 수밖에 없는 그들의 반응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골렘에 비한다면 너무나도 느린 것이었다.

“사르누스 님! 도와주세요!”

“골렘을 막아주세요! 저 거인이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댈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완벽함에서 태어난 용.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사르누스를 향해 도와달라 간절히 외치기 시작했지만 정작 용의 푸른 눈동자는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조종이 불가능한가?”

“네? 아니 꼭 그렇지는······.”

“솔직히.”

어떻게든 변명을 주워섬겨보려 했던 사몬테였으나 어째서인지 사르누스의 앞에서만큼은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사르누스의 세계는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는 세계.

마땅한 지배자이기에 거칠 것 없는 그의 눈빛은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렇기에 힘없이 내뱉고 만 실패였다.

마지막 남은 기회마저 날려버린 사몬테는 처참한 절망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으나 정작 대답을 들은 사르누스의 표정에는 옅은 미소가 새겨지는 중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네?”

자신을 향해 애원하는 사람들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골렘.

그것이 콘수에그라를 향해 성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사르누스의 실험은 아직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남부 수인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골렘 아닌가. 여기서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

어린 정령들의 비명을 집어삼키며 일어선 골렘은 처음부터 파괴를 위해 태어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사르누스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골렘에 대한 완벽한 제어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짓밟을 수 있느냐였을 뿐.

“그, 그렇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완벽한 용이 지배하는 이 세계는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어야 하는 세계.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마땅히 지워야 할 오점에 불과할 뿐.

그저 앞에 있는 목표만을 내다보는 사르누스의 세계에는 지금 들려오는 마을 사람들의 아우성도, 아프다고 울부짖는 정령들의 비명도 전혀 닿지 않고 있었다.

“음?”

그러나 오직 단 한 사람. 사르누스의 세계까지 닿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용들조차 경계해야 할 정도로 찬란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사내.

그 사내가 지금 언덕 밑을 뛰어 내려가며 골렘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금방 멈춰줄 테니까!

“키하노······. 프라우센.”

용이 있으라 한 자리에 없었던 남자. 키하노 프라우센.

그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 위해 뛰고 있는 그는, 예전에 보았던 소년처럼 빛나고 있었다.

※※※※

쿵! 쿵! 쿵!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만으로도 내장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키하노는 조금도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마을이야!’

굳이 정령들의 원망 어린 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사몬테의 풍차는 마을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분노 어린 외침을 내질러대는 골렘이 마을까지 닿게 된다면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검을 빼든 키하노가 재빨리 골렘의 발치까지 따라 붙었다.

당장이라도 밟힐 듯 위태로운 거리였지만 빛나는 키하노의 눈은 내려오는 골렘의 발등을 침착하게 노려볼 뿐이었다.

쿵!

“하나!”

쿵!

“둘!”

불가능한 목표라도 해낼 수 있다 믿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어떤 적수 앞에서도 두려움에 떤 적 없던 사람이었다.

쿵!

“······셋!”

그러나 현실을 입어버린 나는,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버린 나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사람이 아닌 그저 초라한 키하노일 뿐.

그런 나를 다시 빛내기 위해 키하노가 골렘의 발등 위로 뛰어들었다.

콰앙-!

“끄으으!”

얼굴로 튀어 오르는 흙더미가 매섭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날카로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기조차 힘들 악조건.

그러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은 키하노는 올라가는 골렘의 발등과 함께 점점 부상하고 있었다.

세계 안에서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이 점점 하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긴급제동장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사몬테의 제동장치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왼쪽 무릎에.

두 번째는 허리 중앙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지금도 흉악한 기세로 돌아가고 있는 날개의 회전축에 있었다.

“일단 무릎부터!”

골렘의 발등이 최고점에서 올라서자 키하노가 재빨리 위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을 내딛기 위해 아주 잠깐 멈춰 있는 그 순간.

그러나 오직 이 짧은 순간만이 키하노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크윽!”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멈춰 있었던 나를.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시간은 키하노에게 잠깐의 틈을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이제 마지막 남은 그 순간마저 놓칠 수는 없었다.

“으아아압!”

지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내려가는 왼발에서부터 키하노가 뛰어 올랐다.

그야말로 디딜 공간 없이 모든 것을 걸고 뛰어오른 도약.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도약이었으나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공중에 멈춰 있던 키하노의 앞으로 골렘의 무릎이 내려오고 있었다.

콰앙-!

“큭!”

어디선가 뿌려진 파편들이 키하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선명한 핏줄기를 남겼음에도 키하노가 웃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라왔던 것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찾았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작은 표시.

간신히 무릎에 매달린 키하노의 앞으로 빨간 점으로 표시된 제동장치가 보이고 있었다.

“우리 잠깐 멈춰서 이야기 좀 해볼까?”

역수로 쥔 키하노의 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멀리서 바라보는 사르누스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그런 빛으로.

“흐아압!”

콰직-!

어두운 내부 속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톱니바퀴 하나.

무릎의 움직임을 관장하던 톱니바퀴가 키하노의 검 끝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

쿠르르르릉!

갑작스런 골렘의 주춤거림에 언덕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그 육중한 몸놀림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새까만 흙더미를 내보이고 마는 콘수에그라의 언덕.

바로 옆 언덕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경악에 찬 탄성과 함께 입을 틀어막고 말았지만 걔 중 몇몇 사람들은 골렘에게서 보이는 자그마한 반짝임에 주목하고 있었다.

“저게 뭐야?”

희뿌연 흙먼지 속에서도 반짝이는 이질적인 빛 하나.

날쌘 움직임으로 골렘의 무릎에서부터 허리까지 올라간 그 빛이 지금 크게 외치고 있었다.

-이제 좀 멈춰 봐라!

“······사람, 사람이다.”

“어떻게 저기에 사람이?”

크오오오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왼쪽 다리에 발목이 잡혀버린 골렘이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웅장한 그 울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검을 내려치고 있는 키하노의 모습이었다.

“······키하노! 기사 키하노다!”

“프라우센의 키하노! 우리 여관에 있던 키하노!”

계속해서 마을을 향해 다가오는 파멸이었지만 주위에 있던 호위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그 장면을 바라보는 사르누스의 눈은 서늘할 뿐이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지만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해야할 일을 하는 기사가 아직 남아있었다.

“기사 키하노가 골렘을 부수고 있다!”

“오오. 세상에!”

한낱 인간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적.

그런 골렘을 혼자만의 힘으로 막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꿈이겠으나 지금 마을 사람들 앞에는 그런 꿈을 현실로 실현하는 사내가 있었다.

“······이걸로 두 개째!”

턱 끝으로 흐르는 땀이 앞에 있는 빨간 점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지쳤기에 쥐고 있는 검 끝 조차 흔들리고 있었으나 목표를 향한 키하노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콰직!

크아아아아!

이로써 두 개째.

허리에 있던 제동장치까지 부서진 골렘의 하체가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기사 키하노가 풍차를 부수고 있다!

-프라우센의 아들 키하노!

-도시 라만차의 자랑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

열광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키하노를 향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지켜주는 기사를 위한 존경과 환호였다.

그러나 그 환호의 뒤에서는 지금도 서늘한 눈을 치켜뜬 용 한 마리가 있었다.

“이제 됐습니다! 사르누스 님!”

여기 있는 용이 아닌 기사를 향해 감사하다고 외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보는 사르누스의 심장이 들끓고 있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몬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올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키하노가 제동장치를 건드려서······. 하체는 못 쓰겠지만 이제 상체만큼은!”

“움직일 수 있나?”

사르누스의 감은 왼쪽 눈으로 본 키하노의 세계는 상처 입은 꽃 한 송이.

그러나 상처 입고 좌절한 꽃이라 할지라도 꿈을 꾸는 한 언젠가는 별에 닿을 수 있는 법.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가동해 봐야겠지.”

그 꽃을 보며 고개를 까닥인 사르누스가 사납게 웃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목덜미를 긋고 있는 사르누스의 손가락.

“어떤가?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지.”

“······.”

그러나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은 오직 완벽한 용들만이 닿을 수 있는 것.

짓밟았던 가능성이 다시금 제 색을 찾는 모습을 보며 사르누스가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죽여.”

※※※※

“허억! 헉!”

이미 지쳐버린 몸을 이끌며 키하노가 풍차를 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가만히 멈춘 채 마을을 향해 울고 있을 뿐인 골렘이었으나 아직 키하노에게는 해야할 일이 남아있었다.

-아파요! 너무 아파!

-누가 여기서 우리 좀 꺼내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지금도 풍차의 꼭대기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내 뒤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어린 정령들의 울음 소리.

오직 나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소리를 향해 키하노가 마지막 제동장치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키하노!

“······!”

순간 키하노의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심상을 통해 연결된 마법사가 내지르는 경고였다.

-위를 봐라!

너무나 지쳐있었기에 그랬을까.

평소라면 알아차렸을 날카로운 살기가 지금 키하노의 머리 위에서 사납게 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산처럼 높이 솟은 골렘의 오른팔이 키하노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 위에 운석이 떨어지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그러나 너무나 늦게 알아챈 키하노에게는 더는 도망칠 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뛰어라!

순간, 내 다리를 타고 오르는 기이한 감각이 있었다.

맞닿은 세계를 통해 전해진 마법사의 신비였다.

-어서 개구리처럼 뛰라니까!

“······!”

너와 내가 맞닿는 면을 통해 우리는 더 넓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넓어진 키하노의 세계는 어느새 앤드류의 다리를 닮아 있었다.

콰아앙-!

내 몸이 부서지는 것조차 상관하지 않은 무시무시한 일격.

사방에 튀어 오르는 잔해에 조종기를 들고 있던 사몬테가 손을 치켜들었지만, 그 손보다도 더 높게 떠오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개구리 말고 참새 같은 거나 하라니까!”

폴짝!

개구리의 도약력은 자기 몸체의 20배까지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 뛰어오른 키하노는 그 높아 보이던 풍차조차 내려다볼 기세로 하늘을 향하는 중이었다.

"······내려갈 때는 어떡하라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이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키하노.

그 옛날 내가 꿈꾸었던 하늘을 보며 키하노 안에 있던 어린 소년이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

“위치 좋고!”

하늘까지 뛰어오른 키하노를 보며 앤드류가 재빨리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위치가 좋긴 뭐가 좋아요! 저러다 키하노 님 죽겠어요!”

잔뜩 찌그러진 놋쇠 세숫대야 안에서 앤드류가 가만히 눈을 감기 시작했다.

물이 가득 찬 그곳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그를 보며 얀이 다급히 불러대었으나 이미 신비를 향한 앤드류의 손짓은 저 하늘 너머까지 넘어간 뒤였다.

“······맘브리노의 구름들아. 지금 내가 너희들을 부르노라.”

내가 부릴 수 있는 그 어떤 신비보다 강력한 맘브리노의 구름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마법이었지만 신묘한 황금투구와 함께한다면 아주 잠깐은 힘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고귀한 이상에 어울리는 것은 푸르른 구름.”

쿠르르릉-!

키하노가 솟아오른 하늘 위로 푸른 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꿈에 어울리는 것은 새하얀 번개.”

콰가가강-!

그와 함께 맺히기 시작하는 새하얀 번개.

갑작스레 몰려든 뇌우가 지금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뿌린 색깔들이 세상을 속이리라!”

지금 보이는 모습은 초라한 개구리.

그러나 인간이었을 적 그를 부르던 이름은 위대한 맘브리노의 마법사. 번개를 부르는 앤드류.

“으아아아아!”

정령들이 울고 있는 언덕 위로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쩍이는 하얀 번개.

모든 눈물조차 씻어내릴 비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별을 가져온 키하노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나를 부르는 어린 정령들을 위해 내려온 하얀 번개.

소년이 한껏 품은 그 번개가 키하노의 왼쪽 눈을 불사르며 사몬테의 풍차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콰가가가강-!

꽃이 피고 있었다.

나를 믿었기에 별까지 닿을 수 있었던 소년의 꽃.

용조차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찬란함이 지금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하얗게 물들이며 풍차의 날개를 꺾고 있었다.

※※※※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잘못을 고칠 줄 알며,

순수함과 선의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그리하여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이노라.

소설 돈키호테 中

2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83화 24

키하노 외전- 또 다른 만남을 위해 (完)

하늘을 찌르듯 오연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첨탑이었다.

그리고 그 첨탑을 향해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한 줄기의 벼락.

“흐아아아압!”

콰가가강-!

맹렬한 굉음과 함께 풍차의 머리 부분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마치 폭죽이 터져나가듯 깨어지고 마는 풍차의 파편들.

언덕을 물들이는 수많은 빛의 파편들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놀란 듯 하나둘씩 입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남은 장치는 하나.”

그러나 하늘에서 시작된 낙뢰는 아직 제빛을 잃지 않았다.

부릅뜨고 있는 키하노의 왼쪽 눈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지금도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정령들을 위해 검을 빼 든 기사 키하노.

그가 하늘에서 빌려온 빛을 품은 채 골렘의 어깨를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크으아아아-!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번개의 길이 어깨를 타고 내려와 날개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길의 끝이 어디로 다다를지 직감한 사몬테가 재빨리 조종기를 휘둘렀으나 이미 한껏 예민해진 키하노의 기감은 골렘의 움직임을 포착한 뒤였다.

-키하노! 다시 온다!

저 위에서부터 날아오는 골렘의 주먹을 보며 다시금 경고한 앤드류.

그러나 이윽고 벌어진 상황에는 그조차도 크게 입을 벌린 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저 높은 하늘을 향해 골렘의 팔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잡아채기라도 했다는 듯 거칠게 들어 올려지면서.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따라 올리고 말았다.

“끄으으으!”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골렘의 팔 아래에서는 지금도 검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고 있는 키하노가 있었다.

콰가가가강-!

마치 거대한 산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

주먹과 맞닿은 키하노의 검이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불꽃을 튀겨냈지만, 키하노의 팔목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골렘의 기세를 비틀어내고 있었다.

“흐아아압!”

다가오는 상대의 검을 원으로 그리며 흘려내는 결투사들만의 방어술.

인간과 인간의 대결에서조차 실현하기 힘들다는 그 기술이 지금 사몬테의 풍차를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키하노······. 프라우센. 네놈이 기어이.”

하얗게 타오르는 키하노의 전신이 마치 별과도 같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잘 알고 있는 사르누스의 눈동자가 거센 파도를 만난 듯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콰득! 콰지지직!

멀리 있는 언덕까지 확연히 들려오는 요란한 파열음이 있었다.

그것은 가동 범위를 훌쩍 넘어버린 골렘의 어깨 관절에서부터 시작된 것.

휘두른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해 처참히 꺾이고 만 자신의 팔을 보며 사몬테의 풍차가 비통한 울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그렇게 밀쳐낸 골렘의 팔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천천히 돌아가며 어린 정령들을 쥐어짜고 있는 풍차의 날개였다.

“이제 보인다.”

감히 할 수 있을까 의심하며 상상으로만 그려봤던 나만의 그림.

그러나 지금 보이는 현실은 분명 내가 그려낸 그림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으니.

“······!”

마지막 순간을 찾아낸 키하노로부터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구름에 닿았던 소년이 하늘에서부터 가져온 별빛과도 같은 색.

그 색을 담은 키하노의 왼쪽 눈이 눈앞에 보이는 날개의 축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기에 울고 있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 뛰어든 별빛 하나가 콘수에그라의 언덕을 빛내며 골렘의 가슴팍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콰직-!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몬테의 풍차가 딱딱한 석상처럼 굳어가기 시작했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왼팔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은 채로.

그리고 굳어버린 팔을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색색의 빛들이 있었다.

"됐다."

그 빛을 본 키하노가 기껍다는 듯 미소짓고 있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한 채 떨어져 내리는 별 하나와 이제야 하늘을 향해 떠오르기 시작하는 수많은 별들.

서로가 교차하는 그곳에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찬란한 빛무리가 가득했다.

※※※※

“······저게 오로라라는 건가.”

온갖 잔해들이 널브러진 언덕 위에서 키하노가 힘없이 웃고 있었다.

힘이 다했다는 듯 쓰러져 있는 키하노였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머리 위로 비치는 화려한 빛의 물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광경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네.”

인간들의 손아귀에서부터 해방된 어린 정령들이 기쁘다는 듯 주변을 헤매며 하늘을 자신들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비단이 하늘을 뒤덮는 것만 같은 광경.

외면하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오늘의 하늘을 보며 키하노가 자그맣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잘 가라.”

불을 뿜는 도마뱀, 반짝이는 나비, 손톱만큼 작은 오징어, 그리고 자그마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하얀 뱀까지.

여전히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아이들 많았지만 이미 지쳐버린 키하노는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또 보자.”

그렇기에 그저 나중에 보자고 말해줄 수밖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어린 정령들이 알았다는 듯 하늘에서 물결치는 오로라 속으로 하나둘씩 자신들의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올려다보니까 이렇게 좋네.”

그렇게 떠나가는 정령들을 보며 키하노가 웃고 있었다.

외면하지 않았기에 볼 수 있는 오늘의 하늘.

이제야 마주하는 하늘에서는 수많은 별이 키하노를 향해 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

어느덧 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어느 이름 모를 작은 마을.

콘수에그라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 주점에서는 지금 들려오는 소문 때문인지 한참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랬다니까. 진짜 산만한 골렘을 무너뜨렸다니까!

-사악한 마법사가 부리는 골렘을! 용이 아니라 인간 기사가!

-이름이 뭐랬더라. 라만차의 키하노라 그랬던가.

라만차의 기사 키하노.

사악한 골렘을 상대로 마을 콘수에그라를 지켜낸 사내.

너무나도 거대한 광경이었기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만 소문은 지금도 마을에서 마을로, 그리고 도시로 향하며 매일같이 키하노의 이름을 드높이는 중이었다.

“아주 큰 일을 냈더구나.”

그러나 정작 소문의 주인공인 키하노는 지금 양 볼에 가득 넣은 빵을 삼키지도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는 중이었다.

“너 떠나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었지?

“······.”

“얌전히 있으라고 했다. 가능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콘수에그라를 떠나 처음으로 들른 어느 마을.

그곳에서 오랜만에 따뜻한 빵을 뜯고 있던 키하노는 앞에 있는 페드로 때문에 씹고 있던 빵도 넘기지 못한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골렘을 부쉈다고? 그것도 드라굴리아의 후원을 받는 골렘을?”

“혀엉. 내하 다 서며하수······.”

“그것도 모자라서 가두고 있던 엘프한테는 아예 감옥 열쇠까지 주고 왔다면서.”

꿀꺽.

침묵만이 가득한 식탁 위로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빵을 가득 물고 있던 키하노가 아니라 그 옆에 있던 소년에게서부터 나는 소리.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능청을 떨어대는 키하노와는 달리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대는 얀에게서는 그야말로 숨길 수 없는 불안이 가득하여 있었다.

“거참 이상하네. 분명히 아무도 모르게 건네줬는데.”

“······.”

이제는 아니라고 변명조차 하지 않는 키하노를 보며 페드로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골렘을 부순 것 정도야 명분이 있었으니 충분히 해결해 줄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사르누스의 소관 아래 있던 엘프를 제멋대로 꺼내준 것은 아무리 프라우센이라 할지라도 영 골치가 아파지는 일이었다.

“······너 당분간은 수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짤랑!

그 말과 함께 내려놓는 주머니가 꽤나 묵직해 보였다.

아마 이 안에 들어 있는 금화만큼이나 최대한 멀리, 그리고 오래도록 떠나있으라는 말일 테다.

“최대한 빨리 떠나라. 이미 드라굴리아에서 손을 썼다는 말이 있으니.”

떠나라는 말투는 냉정했으나 덧붙인 말에는 동생에 대한 걱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드라굴리아에게 이미 두 번의 실패를 안겨주고 만 키하노.

거기다 이제는 예전과는 달리 빛나는 가능성까지 드러내고 있었으니 프라우센의 망나니라는 멸칭만으로는 더 이상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터였다.

“하긴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겠지."

어린 새들은 언젠가는 둥지를 떠나야만 한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던 타의가 되었든 간에.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날아오르지 못했던 자신의 동생을 보며 페드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지금 떠나면 언제 보게 될지 모르는 동생이었지만 주점을 나서는 페드로의 뒷모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너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듯 단호하고도 결연한 모습이었지만 아직 이별이 익숙지 않은 키하노는 그저 떠나가는 그의 뒤를 향해 조용히 형이라 읊조릴 뿐이었다.

※※※※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이제는 푸른 나뭇잎이 가득한 여름.

그 계절의 한 가운데를 걷는 기사와 소년, 그리고 한 마리의 개구리는 앞에 놓인 갈림길을 보며 잠시 멈춰 서고 말았다.

“이거 어디로 가지?”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갈라진 갈림길이었기에 목적을 정하지 못한 키하노는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수도로 향하는 북쪽만은 가면 안 되는 것을 알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은 내가 아는 마법사가 있는 동쪽으로 가보는 건 어떻겠냐? 내 몸에 대한 정보도 얻을 겸.”

“저는 가능하다면 남쪽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아까 페드로 님도 그러셨잖아요. 용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

앤드류를 위해 동쪽으로 갈 것이냐. 페드로의 조언을 따라 저 멀리 남쪽으로 갈 것이냐.

각자가 합당한 이유가 있는 조언이었기에 쉽게 정할 수 없는 방향이었지만 이윽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부터 들려오는 새소리에 키하노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어서 날 위해 내릴 곳을 마련하라는 듯 키하노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새 한 마리.

전서구임에는 분명했지만 평범한 전서구와는 다르게 매서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녀석은 서쪽 끝에서나 볼 수 있다는 송골매였다.

“······그림?”

혹시나 싶어 내뻗은 팔목 위로 가볍게 내려앉은 송골매.

과연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두텁게 매달아 놓은 연통 안에는 흔히 있을 편지가 아닌 누가 보냈는지 모를 그림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예요. 키하노 님?”

“나도 모르겠는데.”

나는 모르겠다는 듯 날개를 정돈하는 송골매를 보며 키하노가 머리를 긁적여댔다.

“그래도 낯익은 그림체인데.”

한참을 그림을 내려다보던 키하노는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이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땀 한 땀 그려 넣은 붓질은 그야말로 장인의 손길.

마치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만 같은 생생한 그림 속에는 분명 예전에 한 번 보았던 누군가의 그림과 닮아 있었다.

“콘수에그라······.”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보았지만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던 콘수에그라의 정경.

그 그림을 그렸던 백금발의 여인을 떠올린 키하노는 그제야 지금 들고 있는 그림이 누가 그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앤드류."

"응?"

"엘프들의 도시가 어느 방향에 있죠?"

"알브헤임 말이냐? 그곳은 서쪽에 있지."

오라고 하는 곳도 없고 딱히 갈 곳도 없었던 키하노에게로 찾아든 전서구 한 마리.

인생의 갈림길 앞에 있을 때 계시처럼 다가온 그 그림을 보며 키하노가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우리 서쪽으로 가볼까요.”

“서쪽? 서쪽은 갑자기 왜?"

여태껏 말하고 있던 남쪽도 동쪽도 아닌 갑자기 서쪽으로 가자고 말하는 키하노.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 앤드류와 얀이었지만 이미 키하노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는 듯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잘됐네. 어차피 검도 망가져서 새로 하나 장만하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골렘과의 결투는 격렬했고 그로 인해 키하노의 검은 잔뜩 이가 나가버리고 말았다.

어찌 보면 영광의 상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기사에게 있어 검이란 언제나 함께해야 할 귀중한 동반자와 다름없는 존재.

“들어보니까 드워프들이 그렇게 검을 잘 만든다고 하잖아요. 사실 예전부터 드워프들이 만든 검을 가져보고 싶었거든요.”

엘프들의 숲인 알브헤임을 지나가면 드워프들이 있는 뮈르크헤임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검은 모두 하나같이 명검이 아닌 것이 없다지.

“그런데 키하노 님.”

“음?”

“이 그림 되게 신기하네요. 여기 좀 보세요.”

그렇게 걷기 시작한 서쪽으로 향하는 길.

한참을 그 길을 걷고 있던 얀이 갑작스레 눈을 밝히며 키하노에게 엘프 여인이 그린 그림을 들이대었다.

“처음에는 밤하늘을 그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배낭에 넣으라고 건넨 그림이었지만 아무래도 흥미가 동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히 보면 보이는 또 다른 풍경들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여기, 여기 보시면 뭔가 보이지 않아요?”

마치 새까만 밤하늘을 그린 것만 같은 그림 한 장.

그러나 유심히 바라본 그림에는 밤하늘이 아닌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 보시면 이거 아무래도 도시 같죠?”

“오. 그렇네.”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이 별 주위가 엄청 복잡해 보이는 게 무슨 골목길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아요?”

마치 밤하늘처럼 보이는 그림이었으나 자세히 보면 어두운 도시를 그려놓은 그림.

그곳 구석에 박혀 희미한 빛을 내는 작은 별의 모습에 키하노는 어째서인지 자꾸 시선이 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그림이네. 별을 하늘이 아니라 땅에다가 그려놨어.”

밤하늘에 있지는 않았어도 자기가 별이라 말하는 것 같은 자그마한 별이 그곳에 있었다.

작았지만 가장 빛나고 있는 황금색 별.

어딘가 애쓰는 듯한 그 모습이 가여웠던 키하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녀석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고 말았다.

“이게 뭘까.”

키하노는 몰랐으나 지금 보고 있는 그림은 아주 먼 훗날에 보게 될 광경.

그러나 아직은 닿지 않을 그 인연을 향해 키하노가 천천히 발을 옮기고 있었다.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는 않았어도 홀로 빛날 줄 아는 그 별을 향해서.

그렇기에 지금 내딛는 발걸음은 아마 만남으로 향하는 발걸음일 것이다.

키하노 외전 (完).

작가 후기

독자 여러분. Q10입니다.

오늘 원고를 마지막으로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는 완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블라드와도, 그리고 키하노와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기에 보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유료화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글이었습니다. 그만큼 성장세가 더뎠고 실제로 그만두려고도 했던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무사히 완결을 지었고,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적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독자님들께서 만들어 주신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한 완결이었습니다. 이별로 끝나는 완결이 아닌 또 다른 만남으로 향하는 지금의 마무리가 여러분이 원하는 결말이었기를 바랍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별은 담백할수록 좋은 거겠죠.

키하노가 블라드를 향해 다시금 떠나갔듯이 저 Q10도 다시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여기서 인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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