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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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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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의 소년 (1)

어두운 밤 속에서 조심스레 빛을 밝히는 것들이 있었다.

밤이기에 빛날 수 있는 도시의 뒷골목.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로 하나를 경계로 한쪽은 잠이 들고 다른 한쪽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섞일 수 없는 인생을 사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오직 지금만이 찬란한 도시의 빛에 가려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상인들의 호객행위와 술꾼들의 고함이 가득한 골목.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누추한 것들 속에서 홀로 멈춰 있는 금발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멋지네.”

소년이 멈춰 있는 곳은 대장간의 앞이었고 그곳에는 멋들어진 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늘씬한 검신을 뽐내며 반짝이는 검.

그것은 더러운 골목에서 오직 스스로 빛을 내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검에서부터 시작된 빛은 눈을 통해 가슴으로 들어와 소년의 영혼 안에 있는 무언가를 비추기에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

오랫동안 한자리에 서서 검을 바라보았기에 발은 도로의 진창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또또또. 정신 못 차리고 있네.”

망부석처럼 하염없이 검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블라드. 요즘 너 정신줄 놓고 다니는 거 알아? 주변에서 이래저래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니까.”

낡아빠진 옷을 입고 있었으나 풍성한 붉은 머리를 지닌 소녀는 더러운 것이 가득 찬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깔 있는 존재였다.

소년은 멍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소녀를 바라보았다.

“뭐 어때. 어차피 오늘은 할 일도 없는데.”

“할 일이 왜 없지? 마담하고 호르헤가 시키는 일만 일인가?”

붉은 머리의 소녀는 자신의 양 손바닥을 치켜들며 소년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이거 보여? 설거지 때문에 하도 물속에 손을 담그고 있었더니 습진이 생기려고 하잖아. 미모가 재산인 사람한테 습진이 말이나 되기나 해?”

“어딜 들이대는 거야. 방해되잖아.”

블라드라 불린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녀가 펼친 손바닥을 치워냈다.

“시끄러웠던 내 하루에 몇 안 되는 안식이야. 건들지 말라고.”

“흐음~.”

매몰차다 생각할 수 있는 소년의 반응이었지만 붉은 머리의 소녀는 개의치 않아 했다.

겨우 이 정도의 냉대에 상처 입기에는 험난한 뒷골목에 자리 잡고 살 수는 없을 테니까.

오히려 소녀는 블라드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된다는 투로 조심스레 소년의 귀에 대고는 속삭였다.

“······그래서 여전히 막대기 같은 것만 붙잡으면 목소리가 들려오고 막 그래?”

“······.”

무언의 긍정을 보며 소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얻어맞아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얻어맞고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언제나 떠들썩한 도시의 뒷골목이라 할지라도 돌고 도는 소문이라는 것은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요즘 이곳에서 회자되고 있는 소문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던 금발 소년에 관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벼락을 맞아도 하필이면 검은색 벼락을 맞아서 이 모양일까.”

“방해할 거면 좀 꺼져주지.”

“······.”

소년의 매몰찬 거절에 서운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참아야지.”

이해하고 있었기에.

거칠고 험한 곳에서 살아갈수록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도 이제 그만 돌아가지?”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괜히 서성대지 말고 당분간은 가게에 틀어박혀서 가만히 있으라고. 너도 주교가 그런 것에 민감하다는 거 알잖아.”

“어떤 것에?”

이제야 검이 아닌 자신을 바라봐주는 소년을 보며 소녀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징조.”

누가 들을까 경계한다는 듯 블라드의 귓가에 다가선 소녀는 조용히 읊조렸다.

귓가에 맴도는 소녀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이단심문관에서 승진한 사람이라 사특한 징조만 보이면 툭하면 화형시키잖아.”

“에이 씨.”

블라드는 서둘러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소녀를 밀쳐내었다.

“침 뱉었냐?”

“어이가 없네. 진짜.”

자신의 호의를 더럽다는 듯 밀쳐내는 블라드를 보며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렸다.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는데 여기서 괜히 넋 나간 채 서 있지 말라는 소리야. 그러다 찍혀서 교회에라도 끌려가면 어쩔 생각이야?”

“······.”

블라드는 이번만큼은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소녀가 하는 말은 단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조금만 더 보고······.”

“진짜 답답하네. 그냥 외상으로 확 사버려! 저게 얼만데!”

여전히 뭉그적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소녀가 짜증을 냈다.

“뒷골목 대장간에서 파는 게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저거 5골드.”

“······헐, 조금만 더 봐.”

붉은 머리의 소녀는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금액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저거 하나면 일 년은 아무것도 안 해도 놀고먹을 수 있겠네.”

눈앞에 있는 검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식견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5골드가 가지는 가치는 잘 알고 있었기에.

5골드.

평생 일해서 못 벌 돈은 아니겠지만 이 어두운 뒷골목은 그만한 돈을 모으도록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애써 모아도 누군가가 훔치거나 빼앗을 테니까.

그것이 이곳을 살아가는 자들의 방식이었으니까.

“그 돈이면 씨······.”

그렇게 소년과 소녀가 검이 내뿜는 빛에 잠시 취해있는 순간.

“이놈들이 장사 안되게 남의 가게 앞을 틀어막고 뭐 하는 거야!”

대장간의 주인이 뛰쳐나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이건 너희 같은 뒷골목 놈들이 노릴 물건이 아니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린 구경꾼들을 쫓아내는 늙은 대장장이.

오랫동안 불길을 보아와서인지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눈이 시린 그는 언제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본인이 뒷골목에서 장사하면서 뒷골목 놈들한테 안 파는 건 뭐람?”

곱슬곱슬한 붉은 머리의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둘 합쳐도 영감보다는 여기에 오래 안 있었거든요! 뒷골목 놈들이라는 말은 오히려 영감한테 더 어울리는 말이지!”

“이······이 아직 몸도 팔지 못하는 어린 창년이 입만 살아서는!”

인상을 찌푸린 늙은 대장장이는 말대꾸를 하는 소녀를 알아보고는 땅바닥에 가래를 뱉었다.

“니네 가게로 돌아가서 설거지나 해! 이 되다 만 것아!”

“되다 만 것? 되다 만 것이라니! 다 큰 숙녀한테!”

체구가 작은 것에 자격지심이 있던 소녀는 차라리 잘 됐다는 듯 소년에게 받은 불만까지 대장장이에게 터트렸다.

“그래도 내년에는 데뷔하거든! 내 처녀 값만 받으면 저딴 칼은 맥주 한 잔 정도밖에 안 돼!”

소녀는 자신의 자랑인 붉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늙은 대장장이를 향해 교태롭고 싶어 하는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를 유혹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지만, 노력만은 가상한 미소였다.

“그때 사서 확 소시지 자르는 용도로나 써버릴까 보다.”

“이······이 미친년이.”

공들여 만든 자신의 검을 고작 소세지나 자르는 용도로 쓰겠다는 소녀를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뒷골목 놈들한테! 안 팔아!”

“뒷골목에 걸어놔서 뒷골목 출신밖에 못 보는데 왜 안 팔아! 영감 노망났어!”

“아이 진짜 왜들 이래.”

하루 중 가장 평온했을 시간이 난장판이 되어버리자 소년의 표정이 구겨지고 말았다.

“이만 가자 제미나. 영감 우리 갈게요.”

“저 되다 만 년 데리고 어서 내 가게 앞에서 꺼져!”

“평소처럼 만들던 거나 만들지 왜 기사들이나 쓰는 검을 만들어서 이 난리를 만들어! 죽을 때가 다 된 거 아냐!”

“이······이!”

서로가 굽히지 않을 것을 눈치챈 블라드는 서둘러 씩씩거리는 제미나의 뒷목을 붙잡은 채 골목의 끝자락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렇다 이 년아!”

솟아오르는 혈압에 부들거리던 노인은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손을 떨었다.

“썩을 년······용케 안 굶어 뒤져서 그런가 독만 가득 차서는······.”

노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담요 하나를 둘둘 메고 떠돌던 어린아이들을.

하나의 담요로 세 명의 온기를 나누던 어린 부랑자들은 누군가의 동정 대신 더러운 뒷골목의 독기를 먹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때 준 먹을게 얼마인데 빌어먹을 년.”

자신을 열 받게 하는 붉은 머리카락이 골목에서 사라지자마자 다시 한번 가래를 내뱉은 노인은 문득 자신의 눈길에 들어오는 것이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애처로운 것이었다.

“멍청한 놈. 그냥 먹고 살 생각이나 하지······.”

더러운 진창 속에 깊게 파여 있는 발자국 하나.

이곳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발자국은 늙은 대장장이로 하여금 소녀에 대한 분노 말고 다른 감정을 일깨우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자신의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대장장이는 누군가를 위한 한숨을 내쉬었다.

“니미······. 어린 새끼들이 늙은이를 너무 귀찮게 해.”

늙은 대장장이는 부들거리는 손을 높게 뻗어 매달려 있던 자신의 검을 내리고는 낡은 천에 기름을 먹였다.

“······애송아. 괜히 이런 곳에서 꿈을 가지면 고달퍼.”

말은 그리했을지라도 늙은 대장장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검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

“내가 잘 알지.”

검을 닦는 노인의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들이 꿈틀거렸다.

꿈이 있던 젊은 대장장이는 현실에 찌그러지고 뒷골목에 발목이 잡혀 이곳에 눌러앉고 말았다.

검은 머리가 흰색이 되어가도록.

뒷골목에서 태어난 것들은 평생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늙은 대장장이가 그랬고 이곳에 서 있던 소년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낸 마지막 역작까지도.

그러나 늙은 대장장이는 여전히 꿈을 꾸었다.

“내 마지막 작품을 이런 곳에서 썩힐 수는 없지.”

노인이 집어 든 검의 끝에서 영롱한 빛이 비쳤다.

“······그러니 이것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녀석한테만 팔거다.”

사방이 더러운 독으로 가득 찬 어두운 골목에서 늙은 대장장이는 다시 한번 자신의 검을 높게 매달았다.

어두운 뒷골목을 밤하늘로 삼아 빛나는 별 하나를 매달아 놓았다.

노인의 못다 이룬 꿈으로 닦아낸 검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두 발은 진창 속에 있었지만, 눈만은 반짝이는 것을 쫓는 소년을 위해서.

노인의 검을 바라보던 소년의 눈은 별을 닮았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화 8

뒷골목의 소년 (2)

도시 쇼아라.

바예지드 백작 가문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도시 중 하나인 쇼아라는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었다.

두 개의 강이 맞닿는 북부 물류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북부의 명문가인 바예지드 가문의 위세까지 합쳐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도시였기에.

때문에 사람들은 도시 쇼아라를 가리켜 밤에도 마치 낮과 같이 빛나는 도시라 하며 북부의 등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찬란함 아래에는 언제나 빛에 의해 가려진 그림자가 숨어 있기 마련이니.

도시의 찬란한 불빛 아래에 숨겨져 있는 모두가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는 구역이 하나 있었다.

쇼아라의 온갖 더럽고 추잡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구역 안에 때려놓은 슬럼가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2층 초는 20실버, 3층 초는 30실버.”

“······한 번에 많이 사면 더 얹어주는 건 없냐?”

“20실버, 30실버.”

“블라드 임마, 내가 너 구걸하고 다녔을 때 쥐여준 빵이 몇 개인데 좀 더 챙겨봐!”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뚱한 중년인이 혀가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외쳤지만 금발의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낼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마누라 엉덩이나 주무르시든가.”

“어허~! 이 눔 쉬키 보게. 애미애비가 없어서 배우지 못해 이러는가? 그러지 말고······.”

욕망과 욕정으로 축축해진 공기.

끊이지 않는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고함은 화려하게 치장된 4층짜리 건물에 울려 퍼지고 있었으나.

“······눈, 눈깔 새꺄!”

얼큰하게 취한 중년인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을 잡아두고 있는 것은 앞에 앉아 있는 금발 소년의 푸른 눈빛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16살이 된 소년이 내뿜는 기세라고 하기에는 기이하게 무게감이 있는 눈빛이었다.

“······애비는 누군지 모르고 애미는 예전에 죽어서 배우질 못해 그런가 봐.”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쪽 집안 자제도 애비가 건강히 오래 살아야 나처럼 안 될 텐데.”

“2층 초! 3개!”

블라드의 눈을 피하자마자 정신을 차린 중년인은 재빨리 초를 움켜쥐고는 은화를 던지듯 떨궜다.

“손님 이거 100실버짜리 동전인데?”

“너 다 가져 새끼야!”

“좋은 밤 보내십쇼. 손님!”

“재수 없는 파란 눈깔 새끼!”

아까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한 눈빛을 부라렸던 블라드였으나 의도하지 않은 팁이 들어오자 허리를 깊이 숙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짭짤하네.”

블라드는 손에 든 100실버짜리 은화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쇼아라는 발전한 도시인만큼 수많은 창관들이 있었으나 이곳 ‘장미의 미소’만큼 이름을 날리는 곳은 몇 없었다.

이곳의 주인이자 마담인 마르셀라의 뛰어난 미모도 미모였거니와 술이나 여자들, 중간중간 제공되는 서비스의 질 또한 훌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제나 성황인 이곳에서 얌전히 앉아 초를 팔기만 하는 블라드라도 팁의 명목으로 한푼 두푼 모으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은 험난한 것이기도 했다.

“꺄아아아악!”

“이 걸레 같은 년이! 얌전히 몸만 팔 것이지 어디서 사기까지 치고 있어!”

2층 복도에서 창녀 하나가 머리채를 붙잡힌 채 손님에게 끌려 나와 얻어맞고 있었다.

“내가 무슨 사기를 쳤다 그래!”

“내가 용병 생활만 20년이야! 어디서 되지도 않는 약을 팔고 있어!”

갈색 머리의 창녀는 훤히 드러난 젖가슴으로 인한 수치심보다도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남자의 주먹이 더 두려운 듯 두 팔을 앞으로 내젓고 있었다.

“조용할 날이 없군.”

블라드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앞에 있는 초들을 챙긴 채 2층으로 올라갔다.

“손님. 무슨 일입니까?”

“블라드! 나 좀 살려줘!”

“웬 꼬맹이가 와서 지랄이야! 여기 마담 불러와 새꺄!”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던 초 상자를 복도에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마담을 만나려면 은화가 아니라 금화가 필요할 텐데.”

“장사를 엿같이 하는데 무슨 금화야! 이 새끼야! 마담이 없으면 니네 애미라도 불러오든가!”

2층 복도에서부터 시작된 소란이 건물 곳곳에 울려퍼지자 1층 로비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몇몇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교태를 부리는 창녀들이.

왼손에는 맥주, 오른손에는 담배를 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을 바라보기 위해서.

“······말이나 들어볼까?”

블라드는 애써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자신을 20년 동안 용병생활을 해왔다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이 초!”

남자는 분하다는 블라드에게 초를 집어던지며 외쳤다.

“이거 7분짜리 아니지? 뭔 놈의 초가 바지만 벗었는데 다 타!”

블라드는 자신의 발치로 굴러오는 타다만 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을 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장미초.

한 초가 다 탈 때마다 7분이 걸리는 이 초는 손님과 창녀들의 시간을 잴 때 쓰는 기준이자 거래 수단이기도 했다.

“좋아 그럼.”

블라드는 내려놓은 상자를 뒤져 2층에서 사용하는 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 앞에 시계 보이지? 지금부터 내가 초에 불을 붙여서 이게 7분이 되나 보자고.”

흥청망청 놀아야 하는 1층 로비에는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시계가 달려 있지 않았지만, 시간에 민감해야 하는 2층과 3층에는 시계가 달려있었다.

“내가 왜 사기꾼들 말을 들어야 하지?”

자신을 용병이라 말한 사내는 팔짱을 끼며 블라드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하자고.”

“······.”

눈앞에 보이는 푸른 눈동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눈빛.

조직의 보스인 호르헤는 그런 블라드의 눈빛을 보며 어느 골목에 가도 대장을 할 녀석이라 평하고는 했었다.

“만약 7분이 안 되면 손에 쥔 여자는 계속 패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시고.”

블라드는 신발 밑창에 성냥을 죽 그으며 말했다.

“대신 이게 진짜 7분짜리면 손님은 여기서 나한테 뒤지게 맞는 거야.”

“······뭐?”

용병이 말릴 새도 없이 초에 불을 붙인 블라드는 복도 한가운데 초를 내려놓고는 고개를 까닥였다.

“블라드······.”

그저 불안한 듯 어깨를 떠는 가련한 창녀만이 초가 아닌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1분, 2분, 3분.

시간이 지나고 창관에 모인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할 즈음.

“어?”

여전히 창녀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용병의 눈이 커지는 순간.

“7분 됐다 새끼야!”

블라드는 전광석화와 같은 몸놀림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빠악-!

매서운 일격에 용병의 머리 위로 시뻘건 피가 튀어 올랐다.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일격으로 틈이 생기자 여태껏 붙잡혀있던 창녀가 빠져나오고.

“너는 오늘 뒤졌어!”

블라드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용병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방금 그들이 나왔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찰칵-

“사기는 네가 먼저 쳤지! 20년 묵은 용병 새끼가 이렇게 뱃살이 늘어졌어?”

빠악-! 빠악-!

“끄아아악!”

“그리고 오늘따라 왜 이리 우리 엄마를 찾는 사람이 많아? 부모 없는 하늘 아래서 서러워서 살겠냐!”

잠겨진 방문.

그 속에서 쉴새 없이 들려오는 타격음과 남자의 비명 소리.

블라드는 아까 참았던 분노까지 더해 눈앞에 있는 사내를 내려치는 데 집중했다.

“아······잖아!

“입 닥쳐 새끼야!”

술에 취한 구경꾼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싸움이 보이지 않자 입맛을 다시며 다시 무릎에 앉아 있던 창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빠악-!

몽둥이 소리와 남자의 비명소리.

4층에 앉아 있던 검은 머리의 여성이 아래를 향해 손짓하자 악단의 음악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분노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힌 채 그저 조용히 흘러갈 뿐이었다.

이곳은 쇼아라.

이곳은 장미의 미소.

흘러 지나가는 인생들이 모여 잠시 고여있는 곳일 뿐이었다.

※※※※

떠들썩한 밤이 지나고 고요한 아침 햇살이 적막과 함께 장미의 여관에 내려앉았다.

고풍스러운 장식들로 치장한 아침의 장미의 미소는 분위기만으로는 어느 귀족의 별장과도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화려한 문양 하나마다 검은 머리 여인의 한과 눈물이 담겨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봐주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블라드.”

“오. 안나.”

마지막 남은 고객까지 정중하게 골목 바닥에 모셔두고 온 블라드를 부르는 여자가 있었다.

“눈가가 시퍼레졌네. 며칠은 쉬어야겠어.”

“그렇긴 하지. 그래도 어디 안 부러진 게 어디야.”

그녀는 어젯밤 용병의 폭력에 시달리던 갈색 머리의 창녀였다.

“고맙다고.”

시퍼렇게 멍이 든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무언가를 건네는 여자.

블라드는 물끄러미 그녀가 내미는 것을 바라보았다.

“잘 먹을게.”

그것은 달걀이었다.

“지금 여기서 먹어. 그거 날달걀이거든.”

“흐음······.”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안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손가락으로 달걀의 밑부분을 깨고 죽 들이키는 블라드.

안나라 불린 여자는 블라드의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요즘 남자들이 거칠어져서 걱정이야. 이럴때일수록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내가 필요한데······.”

“잘 먹었어.”

안나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달걀 껍질을 보며 씁쓸히 웃었다.

“······언제든 생각 바뀌면 말해. 수수깡 같이 생긴 붉은 머리 꼬맹이보다야 내가 더 벌지 않겠어?”

“그럴지도.”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아 참. 안나!”

“응? 왜?”

혹시나 싶은 기대감에 안나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블라드를 바라보았으나.

“앞섶을 너무 열어놓은 거 아냐? 아직 겨울인데 몸조리는 잘해야지.”

“······이것도 감사의 표시야.”

블라드의 지적이 있고 나서야 안나는 자신의 앙가슴을 가렸다.

다시 고개를 들자 어느새 자신의 앞에 있던 블라드는 복도의 끝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팔아먹을 수 있는 게 몸뚱아리 뿐인데 요걸로는 영 넘어오질 않네······.”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 서글프게 미소 지었다.

※※※※

“호르헤. 누가 초에 장난을 쳐놨어요.”

1층은 술과 음식을 파는 로비.

2층과 3층은 창관.

그리고 4층은 창녀들과 직원들의 거주공간.

블라드는 4층에 마련되어 있는 식당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 사내에게 보고했다.

“7분이 아니더라고요.”

“그래?”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호르헤라 불린 남자는 블라드의 보고에도 별로 개의치 않아 하고 있었다.

“7분이 아니었다니까요.”

“응. 그래. 그렇다더라.”

구운 소세지, 블랙 푸딩, 해시브라운에 하얀 밀빵.

언제나 호르헤가 먹는 아침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먹는 식단만큼이나 호르헤라는 남자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 말 이해했어요? 누가 우리 밥줄에 초를 쳐놨다니까요?”

“아니 감히 누가 그랬어!”

호르헤의 앞에서 직접 아침을 만들어주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을 가로챘다.

“누가 그랬는지는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당연히 찾아야지!”

“내가 찾아요?”

“네가 찾아봐!”

“내가 뭐라고 찾아요?”

“사실은 내가 이미 찾았어!”

“그게 누군데요? 마르셀라.”

장미의 미소의 주인 마르셀라.

쇼아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

30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여전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그녀는 농염한 여인의 모습과 함께 천진난만한 소녀의 미소도 같이 가진 사람이었다.

“나야. 내가 장난쳤어. 술 취한 놈들 등쳐먹으면서 쉽게 꿀 좀 빨고 싶었거든.”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탐낼 도톰한 붉은 입술에서 쓰레기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하······.”

블라드는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애꿎은 놈만 조져놨구만······.”

주인이 그랬다는데 직원의 입장에서 무어라 할 수 있으랴.

“······복도 바닥이 아니라 난간에다 초를 박아넣었으면 난리 날 뻔했네.”

혹시나 싶어 일부러 바닥에다 놓기는 했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1층에 있던 구경꾼들도 초가 7분짜리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아봤을 것이다.

마담의 이실직고를 들은 블라드는 힘없는 자세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밥 먹고 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요.”

“왜?”

“······방금 내다 버린 놈한테 담요라도 덮어주게요.”

“착하네!”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블라드.

죄 없는 남자의 머리통을 터트렸다고 해도 양심의 가책이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블라드의 신념중 하나였다.

그런 신념들이 굳건하게 서 있지 않으면 어두운 물결에 금방 휩쓸려가는 것이 이곳 뒷골목의 생리였으까.

“여어! 나의 자랑스러운 후배!”

그렇게 터덜거리며 1층으로 내려오는 블라드를 잡아채는 목소리가 있었다.

“건들지 마. 오늘 나 피곤해.”

“어제 한 건 했다며? 역시 나의 자랑스러운 후배!”

그는 호르헤 패밀리에 속해있는 버레이라는 자였다.

“혹시 어제 초 팔면서 팁 좀 챙겨놨어? 너의 선배들이 오늘 좀 쓸 일이 생겨서 말이야.”

블라드의 시선 끝으로 호르헤 패밀리의 인원들이 보였다.

“엿 먹어.”

“아니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우리는 억지로 후배 돈이나 뜯고 그러는 쓰레기들이 아니야.”

버레이는 블라드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가까이 붙었다.

“뭔 개수작이야.”

“주고받자는 거지. 네가 돈을 주면 우리도 줄 게 있다. 이런 말이지.”

“그게 뭔데?”

이제야 말이 통했다는 듯 버레이가 눈을 찡긋거렸다.

“따라와 봐.”

버레이가 고갯짓을 하자 다른 호르헤 패밀리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지하에 있어.”

블라드는 버레이의 안내에 따라 그와 함께 장미의 미소 지하로 걸어 들어갔다.

술과 식자재를 보관하는 이곳은 장미의 미소를 운영하는데 중요한 곳이기에 특별히 호르헤가 아끼는 버레이가 관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곳은 버레이의 영역이었고.

“니미······.”

“어때? 낯익은 얼굴이지?”

아직 호르헤 패밀리에서 막내 격에 속하는 블라드가 이곳에 있는 것을 가져가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40실버만 주면 내어줄게. 이 정도면 진짜 싼 거야. 이런 착한 선배가 또 어디 있느냔 말이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는 버레이의 뒤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애처롭게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

검은색의 피부를 가진 아이였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화 11

뒷골목의 소년 (3)

“소매치기야.”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블라드의 뒤로 버레이가 말했다.

“어색했고 멍청했고 능력 없었지. 그래서 걸렸어.”

“······.”

블라드는 버레이의 말에 대답하기 보다는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손가락 잘랐어?”

“아니.”

“발목은 그었어?”

“아니.”

어린 소매치기의 상태를 물어보는 블라드를 보며 버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귀여운 후배가 반드시 은화를 넘겨줄 것이라 확신했기에.

“엄청 싱싱한거야. 그냥 적당히 손질만 했어. 가서 날로 먹어도 될걸?”

“하하하하!”

“그럼! 맛 좋으라고 적당히 두들기기까지 했는데!”

뒤에 있던 호르헤 패밀리들이 버레이의 말이 웃기다는 듯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블라드는 한숨을 내쉬며 품 안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꺼냈다.

“역시! 우리의 자랑스러운 후배라면 거래에 응할거라고 확신했지.”

“다음부터는 나 부르지 말고 그냥 죽여버려.”

“왜 이러실까. 우리는 조직원이지 살인마가 아니라고.”

“같은 패밀리 등쳐먹는 놈들 주제에.”

막내 격인 블라드가 험한 말을 내뱉어도 호르헤 패밀리에 속해있는 조직원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험한 뒷골목에서 살아남은 블라드를 인정했기에.

어린 동생의 험한 투정 정도야 사나이의 배포로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 것이었다.

“형님들은 한잔하러 가신다!”

“가서 성병이나 걸려라.”

“역시 유망주! 몽둥이는 맵고 혀는 날카로운 블라드!”

“가운데 몽둥이도 매운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

게다가 블라드는 어린 나이임에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어디에 있든 간에 날카로운 송곳들은 주머니를 튀어나오기 마련이니.

멀쩡히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뒷골목 어린 부랑자들을 휘어잡았던 블라드는 이미 슬럼가에서 활동하는 여러 조직들의 관심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었다.

아직 조직의 부름을 받지 못한 뒷골목의 어린 부랑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며.

인재가 필요한 조직들에게는 1순위 영입대상인 소년.

그것이 블라드라는 16살짜리 소년이 가지고 있는 가치였다.

“일어나. 죽여버리기 전에.”

“읍읍······.”

블라드는 발끝으로 결박되어 있는 소년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방금 나 돈 뜯긴 거 봤지? 분위기 파악해.”

“응······.”

살벌한 블라드의 경고에 양손은 결박되고 재갈까지 물려있던 검은 피부색의 아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안간힘을 다해 어떻게든 스스로 일어서는데 성공했다.

“푸하! 블라드 미안. 적당히 하고 빠지려고 했는데.”

소매치기 한 것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잡혀버린 것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블라드는 눈앞의 흑인 소년이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빡-!

“악!”

“열 받네 진짜.”

흑인 소년의 뒤통수를 호쾌하게 때린 블라드는 피곤한 듯 양 손바닥으로 눈을 비벼댔다.

“5골드는 또 멀어져 가는구만.”

“돈 필요해? 그럼 빌려. 외팔이 잭한테.”

“그 사람한테 돈을 빌리느니. 차라리 쥐약을 먹고 말지”

호르헤와 같이 뒷골목을 휘어잡는 또 다른 보스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블라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 부러졌어?”

“아니.”

“그럼 당장 꺼져 새꺄.”

“······형한테 말할 거야?”

자신이 방금 반병신이 될뻔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흑인 소년은 그저 지금의 일이 자신의 형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40실버는 네 형한테 받을 거다.”

“안돼! 블라드 제발!”

“그럼 네 형은 나한테 40실버를 건네주고 병신같은 너는 400대는 후려치겠지.”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림 없는 것을 본 흑인 소년은 두려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미래를 예측했다.

“다음에는 걸리지 말아야지······.”

“멍청해서 그런지 전혀 발전이 없구나.”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음의 성공을 다짐하는 어린 소매치기를 가게 밖으로 내보낸 블라드.

뒷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흑인 소년을 지켜본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장미의 미소를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불빛이 없는 장미의 미소는 고요함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날이야.”

죄 없는 애꿎은 손님 하나를 작살내고 해맑은 마담의 비리를 들었으며 선배들한테 돈까지 뜯긴 오늘.

원래대로라면 장미의 미소로 들어가 잠을 청해야 할 테지만 오늘만큼은 밝은 햇살을 맞아보기로 했다.

흑인 소년이 움직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블라드.

그의 코끝으로 물안개와 함께 짙게 깔린 비린내가 느껴지고 있었다.

※※※※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돈벌레 외팔이 잭.

돼지도살자 검은 곰.

도박장의 다이스.

그리고 고래사냥꾼 캡틴 후버.

이 다섯이 현재 쇼아라의 슬럼가를 지배하고 있는 보스들이었다.

“그래서 날 찾아오셨다?”

“돈 좀 있어?”

그리고 블라드가 찾아온 하벤이라는 남자는 고래사냥꾼 후버의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보자마자 하는 말이 돈을 달라?”

“5골드면 되는데.”

“돈 뜯긴 놈한테 돈을 빌려주면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나?”

“별수 없었어.”

“안 돼. 넌 신용이 없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하벤.

블라드처럼 화려한 금발이 아닌 특색 없는 갈색 머리의 하벤이었으나 그가 가진 인상만큼은 블라드만큼이나 강렬했다.

“너도 참 너무하다. 어떻게 몸도 성치 않은 장애인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하지?”

작은 방이었다.

두 사람이 앉아 있으면 꽉 찰 정도의 작은 방.

그렇기에 한쪽 발을 저는 하벤이라도 지팡이에 의지해 찬장에 있는 병 하나를 꺼내 들 수 있었다.

손가락이 세 개뿐인 왼손으로도 말이다.

“그거 먹고 꺼져. 형아는 바쁘다.”

“먹어도 되는 거냐 이거.”

병을 열어본 블라드는 술에서 나는 수상한 냄새를 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캡틴 후버의 역작 캡틴Q야. 둘이 먹으면 셋이 죽는 술이지.”

“나중에 독약으로 쓰면 되겠군.”

블라드는 수상한 술을 먹는 것을 포기한 채 하벤의 앞에 앉아 그가 하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작은 방 볼품없는 책상에 가득 찬 종이뭉치와 그 안에 빽빽이 적힌 숫자와 글자들.

그리고 그것을 쉼 없이 넘기는 하벤.

“분명 나는 글자를 읽고 쓸 수 있는데도 거기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내가 알려준 거지.”

“숫자는 읽을 줄만 알긴 하지만.”

“그것도 내가 알려준 거지.”

툴툴거리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하벤의 눈가에 웃음이 머물렀다.

하벤은 제미나와 블라드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뒷골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제미나와 블라드에게 자신의 담요를 나눠준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내어준 온기가 아니었다면 제미나와 블라드는 진작에 얼어 죽었을 것이며 그가 훔쳐 온 빵들이 아니었다면 예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꼬맹이가 운이 좋았네. 소매치기를 걸려놓고 나처럼 여기 썰리고 저기 안 썰려서 말이야.”

“흐음. 시절이 좋은 것도 있긴 하지.”

뒷골목을 헤매고 다닐 때는 소매치기로 연명하던 세 명이었으나 그것도 하벤이 반병신이 되고 나서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게 저번에 있던 주교와는 다르게 이번 주교는 소매치기보다는 다른 데에 관심이 많으니까.”

하벤은 운이 좋지 않았었다.

하필 그때 쇼아라에 있었던 주교는 도둑질과 소매치기에 민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두들겨 맞고 끝날 일이었으나 하벤은 주교의 성향을 보여주는 시범으로 손가락이 잘리고 왼쪽 발목이 그어졌다.

하벤의 애처로운 비명이 뒷골목에 울려 퍼졌지만 도시의 찌꺼기와도 같은 어린 부랑자를 감싸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하벤이 밥벌이를 못하는 시기에는 블라드가 세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는 성장한 후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블라드, 제미나, 하벤은 서로를 먹여 살리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번 주교는 뭐에 민감하다고 했지?”

“소아성애.”

“아 그랬지 참. 하하하! 제미나가 볼멘소리를 내던 게 기억나네.”

도시에 있는 각 주교의 성향에 따라 교회에서 내 거는 교칙은 조금씩 달라졌다.

저번 주교와는 달리 5년 전 쇼아라에 새로 부임한 주교는 도둑질과 소매치기보다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자였다.

“제미나의 데뷔일이 그래서 강제로 늦춰졌었지?”

“마담이 조심하고 있어. 아무래도 가게가 유명한 만큼 교회의 관심을 받게 되니까.”

팔아먹을게 몸 밖에 없는 뒷골목 어린 소녀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매춘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5년 전 새로이 부임한 주교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금지되고 말았다.

성인이 아닌 소녀와 관계하는 자는 파문.

이것이 이번 주교가 내건 주요 교칙이었으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그로 인해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제미나는 지금도 설거지나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아마 나이를 채우기 전까지 제미나는 교회와 마담의 보호 아래서 처녀로 있을 수밖에 없는 신세일 것이다.

“순결한 창녀지망생이라니! 무슨 임신한 처녀 같은 말이야! 하하하!”

“게다가 여전히 몸은 하나도 안 컸어. 제미나가 성인이 된다 해도 그 녀석이랑 자는 놈은 반드시 파문당할걸?”

“흐흐흐! 걔는 죽을 때까지 안 크긴 할 거야?”

한참을 제미나의 관한 이야기로 키득거리던 하벤은 웃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방.

먼지와 종이 냄새를 걷어치우고 집중하고 있다 보면 느껴지는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강의 냄새였다.

밀수를 주로 하는 캡틴 후버의 근거지는 부둣가에 마련되어 있었고 하벤이 바라보는 벽 너머에는 도시 쇼아라를 먹여 살리는 강이 있었다.

넓고 푸르며 어디든지 나아갈 수 있는 강.

여기에 묶여버린 하벤과는 다르게 말이다.

“뭐. 제미나가 죽을 때까지 못 크는 것처럼 나도 죽을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갈 것 같기는 한데.”

“······.”

블라드는 하벤의 읊조림에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서글퍼졌다.

“참 블라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응?”

명석한 하벤은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고 숫자를 깨우쳤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들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 행동이었다.

그런 명석한 하벤이었기에 몸이 불편하다 할지라도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런 명석한 하벤이었기에 몸은 좁은 방 안에 있어도 서류에 쓰여진 글자들과 숫자들과 쇼아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조심해.”

“뭘?”

“이번에 장미의 미소에서 초 가지고 장난친 사람이 있다며?”

“······그게 벌써 여기까지 퍼졌나?”

블라드의 임기응변으로 어찌어찌 무마되기는 했지만, 아마 선수들은 다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초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마담 마르셀라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르셀라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렇지.”

“그럴 사람이 아닌데 했다면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겠지.”

“이유?”

블라드는 흔들거리는 술병 너머로 하벤을 바라보았다.

“돈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마르셀라가. 그것도 급하게.”

끈적한 갈색의 액체 너머로 보는 하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조직이 급하게 돈을 끌어모을 때는 단 한 가지 경우뿐이야. 블라드.”

하벤은 진지한 목소리로 블라드를 향해 말했다.

“타 조직과 전쟁을 할 때뿐이지.”

“······.”

블라드는 하벤의 말을 듣고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애꿎은 술병만 흔들었을 뿐이었다.

※※※※

“조심하라고.”

술병을 챙기고 일어나는 블라드를 향해 하벤이 마지막으로 해 준 말이었다.

그러나 경고를 들었다 한들 블라드에게 조심할 방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와······술맛 진짜 더럽네.”

살려면 누군가의 것을 뺏고 뺏으려면 누군가를 상처입혀야만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 와중에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진짜 둘이 먹다 셋이 죽을 맛이야.”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불나방 같은 존재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 뒷골목이었다.

그리고 블라드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덧없는 불나방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빛나네······.”

독한 술로 인해 희미해져 가는 시야였지만 블라드의 눈으로 비치는 빛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소년은 그 앞에 서서 하염없이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5골드도 아깝지 않을 빛이야.”

헤어나오기 힘든 어두운 뒷골목에서 싸구려 독주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불을 쫒아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오래된 대장간 앞에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화 13

창녀들의 기사 (1)

사고는 경고 없이.

파멸은 예고 없이.

인생에 깃드는 어두운 것들은 언제나 그림자에 숨어 우리의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법이다.

마치 지금처럼.

“어이 애송이. 너희 보스는 어디 계시냐?”

초를 팔고 있던 블라드의 앞으로 기이한 형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거대했으나 왼팔은 기괴하게 구부러진 모습.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 대신 이질적인 갈고리가 달린 사람의 모습이었다.

말을 건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블라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당황하고 말았으나.

“······나는 초 파는 사람이라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요.”

특유의 담대함으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자신이 해야 할 대답을 내뱉었다.

쾅-!

그 말과 동시에 외팔이 잭의 옆에 있던 부하 중 하나가 블라드가 앉아있던 책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보스가 말씀하시는데!”

“······.”

사내의 고함과 함께 흩날리는 색색의 장미초들.

갑작스럽게 펼쳐진 험악한 분위기에 장미의 미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굳어지는 분위기.

찾아드는 적막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붉은 머리의 소녀가 그 모습을 보고는 4층으로 서둘러 내달렸다.

“아이고······.”

그러나 모두가 굳어 있는 이 상황에서도 천연덕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내들의 위압감 속에서도 말이다.

“초가 다 떨어져 버렸네. 이거 비싼건데.”

“이 미친 새끼가······.”

자신의 경고는 귓등으로 들은 채 태연하게 바닥에 떨어진 초를 주워 담는 블라드를 보며 외팔이 잭의 부하가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나 블라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툭툭.

부들거리며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남자의 발밑을 블라드가 툭툭 건들며 말했다.

“형 씨.발 좀 치워봐요.”

“······이 개새끼가!”

교묘하게 도발하는 블라드의 말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발밑의 소년을 걷어차려는 남자.

“······!”

싸움은 전쟁의 축소판이다.

의도한 전장, 계획한 상황. 그리고 과감한 결단만이 승리를 약속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블라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위협적인 상황이었으나 블라드는 오히려 그 모습을 기다렸다는 듯 번개같이 몽둥이를 빼 들어 남자의 디딤발목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었다.

빠악-!

“컥!”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을 내지르는 사내.

예상치 못한 공격에 중심을 잃어 잠시 흔들린 순간.

“······!”

기회를 포착한 푸른 눈동자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조금의 낭비도 없이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일어선 블라드.

퍽-!

재빨리 상체를 핀 블라드가 들고 있던 몽둥이로 신속하게 그의 턱을 후려치자 새하얀 이빨들이 흐트러져 튀어나왔다.

머릿속으로 계획한 행동이었다.

“흡!”

그와 동시에 블라드는 날렵한 뒤돌려차기로 가슴팍을 후려치며 사내에게 타격을 줌과 동시에 안전하게 거리를 벌렸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두 개의 이득을 가져간 일타이득의 몸놀림.

“여기가 니네 집 안방이야!”

확실히 우위를 점한 블라드는 가슴 속에서부터 시작된 말을 외치며 들고 있던 몽둥이를 집어 던져 정확히.

빠악-!

이미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져 가는 사내의 이마에 꽂아버렸다.

과감한 행동이었다.

“크악!”

쾅-!

눈 깜짝할 새 블라드가 내지른 연타에 썩은 나무처럼 힘없이 쓰러지는 덩치 큰 사내.

“······뭐야.”

동료가 쓰러졌음에도 외팔이 잭의 부하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만 있을 뿐 아무도 쉬이 움직이지 못했다.

허를 찌른 일격.

그만큼 소년이 휘두른 폭력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후욱······후욱······.”

“끄으으으······.”

그리하여 둘 중 서 있는 자는 사나운 눈빛을 흘리며 호흡을 조절하는 금발의 소년뿐이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밑에.

뒷골목의 변하지 않는 법칙 중 하나를 재현하면서.

“······.”

“······.”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넋 놓고 있던 외팔이 잭의 부하들.

시간만으로 따진다면 과장을 보태 호흡 한 번 할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새끼가!”

“누구 앞에서 감히!”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덩치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블라드에게 달려들려 하였으나.

“그만.”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말 잘 듣는 개처럼 멈춰서고 말았다.

“······이놈 진짜 맘에 드는데.”

자신의 부하가 주먹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채 넘어졌으나 외팔이 잭은 오히려 즐겁다는 박수를 쳐댔다.

비록 손바닥과 차가운 갈고리가 만나는 작은 소리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팔이 한쪽밖에 없어서 소리가 나지 않는 건 이해해달라고.”

“······나는 장애인 차별 안 해요.”

“크하하하! 이 미친 새끼!”

감히 자신의 앞에서도 턱을 당당히 든 어린 조직원을 보며 외팔이 잭은 크게 웃음지었다.

“너는 나중에 따로 한번 보자.”

“······.”

블라드는 여기까지가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팔이 잭이 너그러이 허용해준 이 선을 넘는 순간 그의 권위를 무시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어찌 될 것인지까지도.

“돈벌레! 여기는 무슨 일인가!”

다행히 그 순간 계단에서 내려오는 덩치 큰 남자가 있었다.

뒤를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마치 기사처럼 번쩍이는 흉갑을 입은 채 걸어 내려오는 반백의 남자.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호르헤의 발걸음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누군가를 압도하는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미리 기별했으면 자네 고기까지 구워놨을 텐데!”

보스와 보스.

조직과 조직이 맞닥뜨리는 일촉즉발의 상황.

장미의 미소를 지키는 기사가 갑작스러운 불청객을 맞이하며 사나운 웃음을 지었다.

“아니 뭐······우리가 그렇게 내밀하게 왕래하던 사이도 아니고 말이지.”

갈고리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외팔이 잭.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각자의 검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는 두 명의 보스들.

장미의 미소에 방문한 손님들은 옆에 있는 헐벗은 여자들보다도 지금의 광경이 더 중요하다는 듯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들도 있으니 일단 올라오는 게 어떨지?”

“고기는 있소?”

“마르셀라는 손님 대접을 섭섭하게 하지 않는 여자지.”

“뭐 그렇다면.”

호르헤 조직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4층으로 향하면서도 외팔이 잭의 행동은 대담하기 그지없었다.

도시 쇼아라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자의 배포란 그런 것이었다.

“저 꼬맹이 좀 맘에 드는데?”

외팔이 잭의 고갯짓에 호르헤는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발치에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잭의 부하가 널부러져 있었다.

“우리 조직 유망주니까.”

“내가 작년에 저놈 대신 누굴 데려갔었지? 기억도 안 나는 걸 보니 일찍 뒤져버린 모양인데.”

호르헤는 외팔이 잭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블라드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초팔이이자 장미의 미소라는 성의 문지기였던 소년의 임무가 훌륭히 달성되었다는 표시였다.

“······뒤질 뻔했네.”

호르헤의 신호를 보고 그제야 긴장을 푼 블라드.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오르는 두 조직의 수장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블라드는 쓰러져 있는 덩치를 툭툭 찼다.

“형씨. 2층 초는 20실버고 3층 초는 30실버야. 당신이 부러트린 값은 내고 가라고.”

“끄으으응······.”

“자는 척 하지 마. 한 번 더 몽둥이 집어 던지기 전에.”

쓰러져 있던 외팔이 잭의 수하는 그 소리를 듣고는 그저 가느다란 신음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

“어머 블라드. 여기 상처 난 것 좀 봐.”

“이런 건 미리미리 치료해놔야 해.”

“맞아. 덧나면 큰일 난다고. 마침 나한테 상처에 좋은 약이 있는데······.”

짧은 전투였지만 혹시나 모를 부상을 점검하고 있던 블라드.

“······갑자기 왜들 이래.”

그런 블라드의 곁으로 여자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우리가 얼마나 너를 걱정했는데.”

“그동안 먹여주고 챙겨준 게 얼마인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 블라드.”

“······.”

되도 않는 연기를 하며 블라드의 곁으로 모여드는 창녀들.

몸을 팔아 먹고사는 그녀들로서는 힘 좀 쓰는 사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장사가 훨씬 수월해지는 법이었다.

거기다 그 사내가 젊다 못해 어려 유망하고.

스윽-

“꺄아-! 얘 근육 좀 봐!”

“언제 이렇게 컸대? 사내가 다 됐네!”

“다들 꺼져 제발.”

누구나 선호하는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미남자라면 더욱더.

방금의 싸움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실하게 증명해낸 블라드는 창녀들이 보기에 놓치기 힘든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들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쫒아내는 블라드였으나 특유의 반항적인 모습까지도 창녀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블라드가 말은 험하게 해도 여자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이미 누구 때문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으니까.

“비켜! 비키라니까!”

“이 년이! 선배들을 뭘로 알고.”

“선배는 무슨! 남의 거 뺏으려는 불여시들 주제에!”

그런 창녀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소녀가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그녀들과는 다르게 제미나는 블라드를 보자마자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했다.

“너는 또 왜 지랄이야!”

“지랄은 네가 먼저 했지! 네가 뭔데 덩치한테 들이밀어!”

“할만하니까 했지!”

“할만하기는! 체급 차이가 얼만데! 너 병신이야? 눈깔 삐었어?”

자신을 때리고 윽박지르는 제미나였으나 블라드는 인상만 찌푸릴 뿐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자신을 걱정하기에 나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설거지나 하지. 여긴 왜 왔어?”

“······병신 새끼.”

다만 험한 곳에서 자라 험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르헤가 오래. 이 병신 새끼야.”

“욕하지 마라.”

“호르헤가 오래. 이 병신 새끼야.”

“······.”

자신의 잘못된 반응으로 인해 제미나가 단단히 꼬인 것을 알았지만 블라드는 일단 일어서기로 했다.

제미나의 토라짐보다는 호르헤의 부름이 더 중요했으니까.

장미의 미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계단.

그곳을 통해 올라가려는 블라드의 눈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외팔이 잭과 그의 부하들이 보였다.

“이봐 유망주!”

“······네.”

비록 자신이 모시는 보스는 아니었지만 블라드는 그에게 예의를 갖췄다.

“너 마음에 들었어. 나중에 일자리 잃으면 내 밑으로 와라.”

외팔이 잭은 자신의 갈고리로 블라드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여기도 복리후생은 좋은데요. 밥도 주고 돈도 주고. 잠도 재워주고.”

“흐흐흐! 그 정도는 우리도 해주지.”

웃으며 지나가는 외팔이 잭을 배웅하며 블라드는 고개를 숙였다.

“아 참!”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돌아선 외팔이 잭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튕겨 날려 보냈다.

팅-

반짝이는 것이었다.

“이건······.”

“내 부하가 초를 부쉈지? 그거 값이다.”

블라드는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금화였다.

“······너무 많습니다.”

“나한테 오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주마. 나 돈벌레야.”

블라드와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외팔이 잭은 뒤도 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잘 먹다 갑니다! 호르헤!”

그 말과 함께 낄낄거리며 장미의 미소를 나서는 잭의 부하들.

마치 폭풍과도 같이 들이닥쳐 썰물과도 같이 빠져나간 그들.

그들은 장미의 미소에 큰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

“······.”

외팔이 잭이 가게를 나간 것을 확인한 블라드는 금화를 품 안에 고이 넣고는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호르헤가 자리 잡고 있는 4층.

올라간 그곳에는 호르헤 뿐만 아니라 버레이 그리고 다른 부하들까지 정렬해 있었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과 기름진 음식 냄새가 나던 4층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저 숨 막히는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호르헤. 저 왔어요.”

“어. 앉아라.”

외팔이 잭이 얼마 먹지 않아서인지 호르헤의 앞에는 마르셀라가 구운 고기들이 가득했다.

“잭이 뭐래요?”

“······.”

호르헤는 블라드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고기를 썰고 있던 칼을 내주었다.

“이건 뭐예요? 나 이제 칼 주는 거예요?”

“그래. 너 가져. 방금 썰어보니까 괜찮더라.”

블라드에게는 아직 칼이 없었다.

호르헤 패밀리의 막내인 블라드는 아직 칼을 쥘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와······.”

비록 대장간에 걸려 있는 검만큼 멋진 것은 아니었지만 호르헤가 건네준 칼은 여태껏 블라드가 쥔 그 어떤 날붙이보다도 긴 것이었다.

“원래 주려고 했는데 상황상 좀 일찍 건네줬다.”

“고마워요!”

호르헤가 건네준 단검은 단순히 실용적인 용도로 쓰라고 준 것이 아니었다.

보스가 직접 건네준 칼.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보스의 신임까지도 얻었다는 증거였다.

“앞으로 계속 차고 다니도록 해. 단검집은 버레이한테 부탁하고.”

“알았어요.”

눈을 반짝거리며 즐거워하는 블라드를 보며 호르헤는 쓴웃음을 지었다.

“블라드.”

“네.”

“언제나 차고 다녀야 해.”

“······네.”

평소와는 다르게 무거워진 호르헤의 눈빛.

단검을 받아 즐거워하던 블라드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미묘하게 굳은 표정의 조직원들.

“꼭 차고 다닐게요.”

조직의 막내에게까지 칼을 건네준 보스.

흐르는 공기를 통해 블라드는 눈치챌 수 있었다.

호르헤와 외팔이 잭과의 대화는 파국이었다는 것을.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화 16

창녀들의 기사 (2)

도시의 뒷골목에서도 깊숙이 들어가야만 나오는 어느 공터.

그곳에서 나무막대기를 휘두르며 구슬땀을 흘리는 소년이 있었다.

“흡!”

작고 볼품없는 곳이었으나 이곳은 블라드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낸 최초의 영역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두 손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소년이 투쟁이라는 것을 통해 처음으로 얻어낸 자신만의 것이었으며.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블라드와 제미나 그리고 하벤을 품어주었던 움막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굳이 고칠 필요는 없겠지.’

자신의 집이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사람의 손을 타지 못해 주저앉아 버린 움막.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라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막대기 끝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스러지기 마련.

보기에는 안쓰러워졌으나 효용을 다한 것이니 그저 추억해주면 될 일이다.

이제 자신은 저곳으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부웅-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호르헤가 넌지시 알려준 기본기들을 쉼 없이 반복하는 금발의 소년.

추운 겨울이었으나 소년의 등허리에는 이미 땀으로 가득하였다.

블라드는 자존심이라는 가시로 둘둘 두른 고슴도치와도 같은 소년이었지만 언제나 배우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는 어린 것이기도 했다.

하벤이 보여줬었다.

그는 명석한 두뇌를 통해 스스로 글과 숫자를 깨우쳤고 그것을 이용해 지금 캡틴 후버 밑에서 일하고 있다.

손가락이 잘리고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장애인인 하벤.

만약 그가 배우는 것에 소홀히 했다면 아마 지금쯤 뒷골목 어느 곳에서 배를 곯으며 구걸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흡!”

노력을 통해 배우고 배움을 통해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경험.

아무런 희망없이 살아가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가지기 힘든 경험이었지만 블라드는 그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증인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하루일과를 마치고 난 뒤 나무막대기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슬땀을 흘리며 기본기를 반복하고 있던 블라드의 표정이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

“······젠장. 뭐만 휘두르면 지랄이네 진짜.”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터였지만 블라드에게만은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음성이.

블라드는 그것을 무시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댔지만.

[소년은 내려치는 팔꿈치의 각도를 좀 더 좁혀야.]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블라드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귀를 막아도, 조용히 하라 윽박을 질러도 검과 비슷한 것을 들고만 있으면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번에 얻은 돈으로 성수부터 사야겠어.”

조언인지 방해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수련을 할 때마다 들려오는 그것의 말소리는 소년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때 벼락이 나한테 떨어져서는.”

블라드는 짜증과 분노를 담아 나무막대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소년에게 지금의 상황은 울분을 토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 달 전부터였다.

지금처럼 블라드의 머릿속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 뒷골목을 걷고 있던 블라드에게 갑작스레 떨어져 내린 벼락 한 줄기가 있었다.

아무리 경계심 가득한 소년이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벼락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그것만 해도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자연현상이었지만 문제는 떨어져 내린 번개가 시커먼 검은색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가 보아도 설명하기 힘들었으며 기이하고 불길했던 그 날의 일은 지금까지도 소문이라는 형태로 블라드의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블라드가 악마에 붙들렸다는 소문으로.

“그래서 없는 돈에 교회에 가서 헌금까지 하고 왔는데.”

그리고 소문이 품고 있던 불길한 내용은 얼추 사실이기도 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던 블라드는 서둘러 교회에 나가 헌금을 하고 허드렛일을 돕는 등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으나.

“그냥 애꿎은 돈만 버린거였네!”

블라드의 노력에도 목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여태까지 한 모든 것들이 허사였다는 것을 안 소년은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교회에다 자신의 머릿속에 말을 걸어오는 존재가 있다 말하면 그저 뒷골목의 소년일 뿐일 블라드는 바로 잡혀 화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럴 것이다.

세상은 약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한 법이었으니까.

“후우.”

한참 성을 내며 씨근거리던 블라드는 자신에게 말을 걸던 존재가 잠잠해진 것을 느꼈다.

‘무시해! 대답하면 할수록 더 달라붙는다고 그러더라고!’

자신에게 경고하던 제미나의 말을 기억하며 블라드는 평온을 되찾으려 노력했으나.

“블라드! 호르헤가 오래!”

“······.”

방금까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소녀가 바로 옆에서 튀어나오자 인상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구만.”

블라드는 어디 귀족가의 자제들처럼 맘 편히 수련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하루를 일하지 않으면 이틀은 굶어야 하는 뒷골목의 사람일 뿐이었다.

“알았어.”

“빨리 와! 내가 너 연습하는 거 알고 일부러 시간 벌어준 거란 말이야.”

“······알았다니까.”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허름한 현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제미나의 부름에 대답하기 전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막대기를 휘두르기로 했다.

“후우······.”

마지막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모든 정신과 힘을 집중해서.

내려친다.

[좁혀!]

“······!”

그 순간 머릿속에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놀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팔꿈치의 각도를 좁혔고.

부웅-!

아까와는 다르게 맹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강렬하게 내리쳐지는 나무막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우와.”

어찌나 깔끔하게 떨어져 내렸던지 옆에서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던 제미나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젠장.”

그제야 블라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팔꿈치의 각도를 좁히는 것이 맞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검을 쓰는 법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아까까지 했던 것이 그저 휘두름이었다면.

방금 목소리를 따라 내려그었던 것은 하나의 검로(劍路).였으니까.

※※※※

뒷골목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이곳 또한 엄연히 도시의 한 구역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거대한 쇼아라의 크기만큼이나 뒷골목이라 불리는 곳의 영역도 큰 편이었고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뒷골목에서도 번화가라 불릴만한 구역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뒷골목을 지배하는 다섯 보스들의 영역이 구분되고는 했기에 각 조직원들은 번화가에서만큼은 큰 소란이나 행패를 부리는 것을 자제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언제나 술꾼들과 상인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

“······.”

뒷골목의 번화가를 걷고 있던 블라드와 제미나.

언제나 티격태격하며 말을 주고받고는 했던 둘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골목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조용한데.”

“다들 아는 거지.”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가며 번화가에 있는 가게들을 살펴보았다.

몇몇 가게들은 아예 문을 닫았으며 그나마 연 가게들도 가판대는 모두 안으로 들여놓은 상태였다.

마치 언제든지 문을 닫을 준비를 한 모양새 같았다.

“다들 이번에는 크게 터질 거라 생각하나 봐.”

“······.”

그동안 자잘하게 조직원들끼리 부딪쳤던 때는 몇 번 있었으나 이번만큼 살벌한 전조를 보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마 번화가의 상인들은 오랫동안 묵힌 만큼 큰 폭풍이 불 거라 예상한 모양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무심하게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어쩌면 지금 다가오는 폭풍에 가장 앞장서 나서야 할지도 모르는 블라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제미나는 그동안 한 몸처럼 붙어 다니던 소년이 무자비한 폭력 속으로 뛰어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에 대해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블라드라는 소년은 친구이자 가족 같은 사람이었으며 또한 소녀에게 몇 안 되는 기댈 수 있는 존재였기에.

“······너 당분간은 혼자 다니지 마라. 아니, 그냥 가게 밖을 안 나오는 게 낫겠다.”

그러나 블라드는 제미나의 물음에 대답하기보다는 번화가 저 끝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남자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쓰러뜨렸었던 외팔이 잭의 부하가 두 눈을 부릅뜨며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어.”

제미나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뒤로 둔 채 누군가와 살벌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블라드를 보며 대답했다.

언제나 이래왔다.

블라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와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제미나는 언제나 그것이 고마웠으나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쩌면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번화가를 지나 장미의 미소에 다다른 블라드와 제미나.

가게 문을 열며 두 명이 들어서자 로비에 앉아있던 종업원들의 시선이 잠시 몰렸다가 흩어졌다.

“뭐해 다들? 일 안 해?”

블라드가 소리 내 물었으나 그의 말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미의 미소를 열기 전 마지막 점검 시간.

종업원들은 바삐 움직이며 집기들을 배치하고 여자들은 화장을 고치며 분주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짜증 나네.”

거리에서의 긴장감이 이곳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뭐 전쟁이라도 났어?”

그 모습을 마뜩잖게 여긴 블라드는 투덜거리며 호르헤가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벌어질 일은 벌어진다.

그때를 두려워하며 토끼처럼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천성이 대범했던 소년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런 모습들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

“불렀어요. 호르헤?”

“어. 그래.”

그리고 그런 모습이 호르헤가 소년에게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블라드가 4층으로 올라오니 여느 때와 같이 음식을 늘어놓고 있는 호르헤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호르헤는 자신과 같은 과의 사람이었다.

“부르셨다면서요?”

“응. 너 오늘부터 초 팔지 마라.”

호르헤의 말을 들은 블라드의 입술이 올라갔다.

누구는 좋다고 했지만 블라드는 초 파는 일이 영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앞으로 무얼 하죠? 가게들 수금? 아니면 구역 순찰?”

“흐음······.”

호르헤는 눈을 빛내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어린 소년은 조직의 보스를 대함에도 주눅 들지 않는 강인한 심장을 지니고 있었기에.

만약 자신이 여전히 기사였다면 블라드라는 소년을 종자로 삼는데 전혀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팔이 잭이 외부에서 사람을 끌어온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기사 출신의 용병이라더라고.”

“호르헤처럼요?”

“······그래. 나처럼.”

호르헤는 씁쓸히 미소지으며 남아 있는 맥주들을 마저 들이마셨다.

미처 넘기지 못한 맥주들이 그의 거친 수염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놈이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해보려는 것 같다.”

“······.”

블라드는 호르헤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돈벌레 외팔이 잭.

사채업을 주로 하는 그는 넘치는 재력을 통해 조직원들을 끌어모아 뒷골목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자였다.

그러나 외팔이 잭은 언제나 장미의 미소에 있는 호르헤 만큼은 껄끄러워 했으니 그것은 호르헤가 가지고 있는 기사로서의 역량 때문이었다.

머릿수를 불린다고 할지라도 양 떼로는 늑대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법.

게다가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실력 있는 자들은 뒷골목 보스 따위에게 자신들의 검을 쉽게 빌려주지 않았다.

때문에 실제 호르헤라는 존재는 외팔이 잭으로서는 넘기 힘든 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외팔이 잭은 조직원의 수로 호르헤는 자신이라는 존재로.

기묘하게 세력의 균형을 맞추며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던 둘이었으나.

외팔이 잭이 호르헤에게 대항할만한 검사를 초빙하는데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불리한 것은 사실이지.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야.”

“제가요?”

블라드는 자신의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르헤를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 조직에서 전직 애송이였던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호르헤는 웃고 있었다.

“조직의 보스로서 너에게 첫 번째 임무를 내려주마.”

티끌의 긴장이나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 실로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기에.

가능성 있는 어린것들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6화 7

검에 묻은 핏방울 (1)

갑옷을 입은 남자가 바위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지나가던 몬스터라도 잡았는지 그의 검에는 시뻘건 피가 묻어있었다.

“나이는 못 속여. 이젠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오는데.”

늙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얼굴에 새겨진 흉터와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과 환경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음?”

묵묵히 검에 묻은 피를 닦던 남자는 고개를 멈추고는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꽤 그럴싸한걸.”

저 멀리에서부터 들리는 자그마한 소리.

그것은 뻐꾸기 소리였다.

만들어진 길 너머 앙상하게 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멍청한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쯧쯧 혀를 찬 중년의 남자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을 벗어나 뻐꾸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뻐꾹-뻐꾹-

사람이 다가감에도 뻐꾸기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계속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지 몰라도 이제 그만해라. 내가 왔으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갑옷을 입은 남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스탕가 님이십니까?”

그러자 아무도 없던 것만 같은 숲속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래. 내가 스탕가이기는 하지.”

스탕가라 불린 남자는 마뜩잖다는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네가 블라드라는 놈이냐?”

“네.”

블라드가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스탕가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안내자가 뒷골목 출신이라고 하더니 꼴에 머리는 금발에 눈은 푸른색이구나. 누가 보면 귀족 출신인 줄 알겠어.”

“······여기 보스가 보낸 편지요.”

스탕가의 말을 들은 블라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디 보자······.”

천천히 편지를 읽어내리는 스탕가의 흉터가 기묘하게 일그러져 갔다.

블라드는 그런 스탕가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웃는 것 같기도 다르게 보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좋아.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께서 눈앞에 꼬맹이를 따라가라고 하시는군.”

“맞아요.”

예측할 수 없는 남자다.

뒷골목에서 태어나 사람을 보는 감각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던 블라드는 스탕가를 그렇게 평가했다.

“따라오세요.”

블라드가 스탕가를 평가하는 동안 스탕가 역시 눈앞의 애송이를 평가하고 있었다.

일부러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음에도 자신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기는 금발의 애송이.

‘호르헤가 좋아할 만한 놈이로군.’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다듬어 볼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이는 애송이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기사가 아닌 그저 목적지에 일찍 도착하고 싶을 뿐인 여행자였다.

‘여기서 한 방 먹여야겠군.’

앞으로 길을 편히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앞이라고 괜히 뻗대고 있는 어린놈의 머리통을 적당히 주물러 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내 앞에 있는 놈이 아무래도 멍청한 놈인 것 같은데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길 안내할 정도는 돼요.”

“아닌 것 같은데?”

볼멘소리로 불만을 표시하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겨울에 여름 철새 소리를 내는 놈이 머리가 좋을 리가 있나.”

“······아.”

블라드는 스탕가의 말을 들으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가던 중간에 여기가 아닌가 봐 하면 죽여버린다. 멍청아.”

당황해하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는 자신의 한 방이 유효했음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

기사.

뒷골목의 소년이라도 울림을 느낄 수 있는 단어.

자격이자 명예이며 존재를 증명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기사라는 명칭을 가졌던 존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뭘 자꾸 힐끗힐끗 쳐다봐.”

“······뭐 보면 닳아요?”

“길이나 잃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눈 감고도 아는 길이예요.”

“눈 감아 봐 그럼.”

“······그 정도로 잘 안다는 이야기죠.”

방금 핀잔을 들었음에도 스탕가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호르헤가 전직 기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미 그에게는 기사보다는 조직의 보스로서의 분위기가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옆에 있는 스탕가는 자신이 꿈꿔 왔던 기사로서의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

긴 장검, 가죽을 덧댄 흉갑, 단단히 동여맨 건틀렛과 절그럭거리는 갑옷 소리.

“은퇴한 기사 처음 봐? 왜 이렇게 자꾸 쳐다봐.”

“이렇게 가까이서는요.”

“촌놈이네.”

“어디서 오셨는데요?”

“다키아에서.”

“거기 완전 촌동네인데.”

“······.”

방금 한 방 먹여놨음에도 자신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 블라드를 보며 스탕가는 험악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차라리 네가 길을 잃었으면 좋겠어. 한방에 썰어버리게.”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게요.”

“도시 출신들은 원래 이렇게 싸가지가 없냐?”

스탕가는 툴툴거렸으나 지금 야영을 하겠다는 소년의 판단에는 찬성했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숲속을 헤매고 있었고 해는 숲속에서 더 빨리 지는 법이었으니까.

“능숙하네? 도시 사람 주제에?”

“집다운 집을 못 가져봐서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야영지를 만드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스탕가가 미소지었다.

“기특하게도 내 자리까지도 만들어주는 거냐?”

“호르헤의 손님이니까요.”

“흐음.”

어느새 자리를 깔고는 용케 장작들을 주워와 불까지 피우고 있는 블라드였다.

“먹을 건 없냐?”

“제건 있어요.”

“내 거는?”

“그것까지는 안 챙겨주던데요.”

“······.”

한숨을 내쉰 스탕가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포를 꺼내 들었다.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자가 가지고 있다기에는 빈약해 보이는 것이었다.

모닥불이 피워 올려지자 블라드는 거기에 육포를 걸어놓았다.

“몰래 움직인다면서 불 피워도 되는 거야?”

“그래서 멀리 돌아온 거예요.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게 걸려도 제가 기사 나리를 데리고 온다는 사실만 안 들키면 그만이니까.”

행적을 들켜도 의도만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선배가 많이 힘든가보구만.”

그리고 스탕가는 블라드의 말을 통해 호르헤의 사정을 짐작해냈다.

“검을 숨긴다는 것은 오직 찌를 때를 위한 것이니까.”

블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을 통해 긍정했을 뿐이었다.

“······최악의 경우 들켜도 좋으니 무사히 데려오라고만 했어요.”

날카로운 기사의 감각을 처음으로 느낀 블라드는 내심 놀라고야 말았다.

스탕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굳이 숨어가며 쇼아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호르헤가 굳이 스탕가라는 검사를 숨긴 이유는 아마 그 또한 이번의 싸움으로 외팔이 잭의 목숨을 확실히 끊을 생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사는 검이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검은 그야말로 훌륭한 무기나 다름없을 것이니까.

지금은 은퇴했지만 기사 출신이었던 스탕가는 충분히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진짜 혼자만 먹을 거냐?”

스탕가는 자신의 육포와 블라드가 들고 온 육포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네.”

“쓰벌······.”

블라드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쩝.”

스탕가는 점점 익어가는 육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근데 되게 못 생기게 만들었네.”

“만든 사람이 솜씨가 없어요.”

특이한 육포였다.

포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기를 어설프게 뭉쳐놓은 형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입맛을 돌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냄새까지 죽이네.’

불에 구워지며 내는 향기는 고기가 구워지며 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흐······흐음. 나한테 뭐 궁금한 것 없냐?”

“갑자기요?”

“네가 들고 있는 육포 하나당 내가 질문 하나를 답해주마. 이건 그냥 오는 기회가 아니야.”

“······.”

블라드는 제미나가 만들어 준 육포를 우물거리며 가만히 스탕가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왜 이럴까?

“먹고 싶으면 그냥 하나 달라 그래요.”

“기사 체면이 있지 임마. 본래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 받는거야.”

“은퇴했잖아요.”

“그래도 여태까지 해온······.”

“이름.”

“······스탕가.”

“나이.”

“42세······야 임마.”

“왜 여기까지 왔어요?”

블라드에게 날아오는 두 개의 육포를 붙잡은 스탕가는 곧바로 날아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허(虛) 속에 실(實).

영특한 놈이라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나름 날카롭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뭐 성공하지 못한 기사의 말로랄까······.”

스탕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뭇가지에 육포를 꿰며 대답했다.

“성공?”

“육포 하나 더.”

이번에는 블라드가 표정을 구기며 들고 있던 육포를 건네주었다.

“땅이란 중요한 거야. 디딜 수 있는 기반이며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버팀목이지.”

“장원을 말하는 거예요?”

“······뭐 그렇지.”

블라드도 알고 있었다.

기사들의 최종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장원이라는 것을.

기사를 평민이 아닌 그 무언가로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장원이었으니까.

“귀족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기사가 귀족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는 발판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귀족이 되고 싶냐고?”

그러나 블라드의 질문을 들은 스탕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불 속으로 육포를 집어넣을 뿐이었다.

“그냥······나는 나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었을 뿐이야.”

일렁이는 모닥불의 불빛이 스탕가의 얼굴에 기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

미묘하게 굳어지는 스탕가의 표정을 보며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넘어서는 안 될 선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누구나 침범받기 싫은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법이니까.

“알았어요. 그럼.”

분위기를 환기하고 스탕가의 표정도 풀어줄 겸 블라드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을 연기해보기로 했다.

“오러를 다룰 줄 알아요?”

“흐흐. 인제 보니 겉멋만 든 놈이었구만.”

블라드의 질문에 스탕가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모든 기사라고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리고······.”

“그리고?”

“다룰 수 있다 해도 실전에서 쓰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거든.”

“그래서 쓸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블라드는 자신이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소년은 진심이었다.

기사. 오러.

소년이 꿈꾸는 것이 두 단어에 깃들어있었으니까.

“다 가져가요.”

“뭘?”

“육포요.”

블라드는 스탕가가 다른 말을 할까 서둘러 육포가 담겨있는 주머니를 넘겨주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 애송아.”

“그럼 좀 뺄까요?”

블라드의 말에 스탕가가 재빨리 주머니를 낚아챘다.

“가끔은 기분 낼 필요도 있지.”

씩 웃는 스탕가를 보며 블라드는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볼 수 있다.

기사들의 정수인 오러를.

그것을 보기 위해서라면 제미나가 손수 만든 육포 따위는 아깝지 않다.

반짝거리는 블라드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스탕가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좋아 잘 봐라.”

블라드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탕가가 굽고 있던 육포를 받아들었다.

스르르릉-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스탕가가 검을 빼 들었다.

잘 손질되어 있는 검은 매끈했고 또한 조용히 뽑혀 나왔다.

마치 정숙한 여인이 수줍게 내미는 손과도 같았다.

“왜 왼쪽 눈을 감아요?”

“영혼 속에 있는 나만의 세계를 끌어올려야 하거든.”

“······?”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블라드는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스탕가가 일어서고 있었기에.

모닥불을 앞에 두고 달빛 아래 선 기사.

그러나 두 개의 빛 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의 존재감은 가려지지 않았다.

기사 스탕가.

그는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봐라. 애송아.”

스탕가가 그의 검에 입을 맞추며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과의 대화였으며 또한 자신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오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와.”

그러자 곧 그의 검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희미하고 옅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블라드라 할지라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스탕가만의 세계였으며.

또한 오러라 불리는 것이었다.

“진짜 멋진데요.”

세계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무언가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7화 10

검에 묻은 핏방울 (2)

어두운 밤. 도시 쇼아라의 성벽 밑.

성벽의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는 두 명의 인영이 있었다.

“여기요.”

“······내가 통과 할 수 있긴 한 거야?”

블라드는 스탕가를 쳐다보는 대신 주위를 경계하며 대답했다.

“갑옷을 벗으면 될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왜 이 지랄까지 하면서 몰래 들어가야 하지?”

잠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스탕가는 별수 없다는 듯 갑옷을 벗고는 자그마한 땅굴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여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제가 2년 전까지 썼던 굴이에요.”

“2년 전?”

상업도시인 쇼아라는 많은 상인과 물자들이 오고 가는 도시였고 그만큼 검문검색도 심한 곳이었다.

자격 없는 자들에게 관세를 메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예지드 백작에게 허가받은 상인들의 경우는 아니었지만 평범한 행상인들은 꼼짝없이 관세를 내야만 했다.

그 과정 중에 경비병들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것은 이제는 하나의 관행처럼 되어 있을 정도.

그래서 몇몇 행상인들은 이리저리 뜯기지 않고 쇼아라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뒷골목의 어린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블라드는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적어도 제가 써먹을 때는 걸리지는 않은 곳이니 안심하셔도 돼요.”

“퍽이나 안심되겠다.”

블라드의 태연한 말과는 다르게 손만 가져다 대도 흙이 바스러지는 땅굴을 보며 스탕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도시에서 나올 때도 여기로 나왔거든요. 보기와는 다르게 겁이 많으시네.”

“······좋아.”

이미 한번 써봤다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용기를 낸 스탕가가 땅굴 속으로 사라졌다.

가 다시 고개를 빼꼼히 쳐들었다.

“갑옷 가져가면 죽여버린다. 애송이.”

“여태까지의 여정으로 신뢰감을 주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네요.”

전혀 안타깝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블라드가 어깨를 으쓱하자 스탕가는 인상을 구기며 땅굴로 들어갔다.

“······.”

스탕가가 땅굴로 들어가자 블라드는 재빨리 몸을 숙여 땅에 귀를 가져다 댔다.

남들보다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블라드는 땅으로부터 울리는 발자국 소리를 통해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송이였던 시절 밀수를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좋아.’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오직 스탕가의 나지막한 욕지거리뿐인 것을 확인한 블라드는 벗어놓은 갑옷들을 가죽 포대에 넣고는 땅굴로 몸을 옮겼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블라드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스탕가가 들어갔어도 무너지지 않았으니 안전하리라 생각하며 땅굴로 기어들어 갔다.

블라드가 땅굴을 빠져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스탕가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기분 더러워. 거지같아.”

“이제 다 왔잖아요.”

“뭔가······뭔가야. 기분이 그래.”

“여기 갑옷이요.”

스탕가에게 갑옷을 건네준 블라드는 재빨리 길목을 살피며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했다.

도시 밖에서 외팔이 잭의 눈을 속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가 아무리 뒷골목을 지배하는 보스 중 하나라 해도 쇼아라라는 도시 전체로 본다면 그리 큰 존재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장미의 미소로 향해야 하는 지금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적당히 더럽혀진 편이 더 좋아요. 기사보다는 거지같아 보이는 것이 더 그럴싸하잖아요.”

“아니 내 모습이 아니라 기분이 거지 같다니까.”

뒤에서 스탕가가 툴툴대든 말든 블라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움직이죠.”

“그래.”

스탕가는 더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블라드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어두운 쇼아라의 뒷골목.

두 보스가 만들어내는 폭풍을 피하기 위해 골목 전체가 숨죽이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빛 한점 없는 어두운 골목이었으나 블라드는 마치 눈에 훤히 보인다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스탕가를 인도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러나 블라드가 걷고 있는 골목길은 예전에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어지러진 번화가의 골목.

곳곳에 부서진 담벼락들과 그 위에 흩뿌려진 핏자국들.

“원래 이런 곳이냐?”

“아니요.”

불길한 흔적들.

그것들을 본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흔적은 확신으로, 확신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크게 한 번 붙은 모양이군.”

스탕가의 말처럼 장미의 미소로 나아갈수록 엉망이 되어가는 길목은 그 누가 보더라도 방금 큰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젠장.”

험악한 뒷골목에서 나고 자라 웬만한 돌발상황에는 익숙한 블라드였지만 그래봤자 아직 16살밖에 안 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냉정해지려 애쓰고 있었지만, 시야가 좁아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서둘러 나아가려는 블라드의 귓가로 스탕가의 말이 꿰뚫고 들어왔다.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지금 네가 어디 서 있는지부터 확인해라.”

무거웠으나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블라드의 좁혀진 시야를 넓혔고 뿌연 안개 속에 있던 판단력을 밝혔다.

“후우.”

블라드는 스탕가의 조언에 따라 길모퉁이에 등을 기대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보았다.

‘감시하는 놈들이 있어.’

냉정을 되찾은 블라드의 눈에 새로이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서성이는 남자들.

걔 중 몇몇은 낯이 익은 자들이었다.

“장미의 미소를 감시하는 자들이 있어요.”

외팔이 잭의 부하들이었다.

엉망이 된 골목.

굳게 닫혀 있는 장미의 미소.

그리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곳을 노려보고 있는 잭의 부하들.

주어진 조각들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맞춰지기 시작했다.

“습격이 있었지만, 아직 넘어가진 않았나 보네요.”

“좋아.”

블라드의 말을 들은 스탕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검에 재능이 있고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실전에서 그것을 써먹지 못한다면 벽에 걸려 있는 장식품과 다름없는 것.

그러나 눈앞의 애송이는 그저 한마디 말로 주의를 환기시켜줬을 뿐임에도 침착하게 자신을 가다듬었다.

‘가능성이 있는 애송이다.’

기사는 소년을 제대로 키워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지금 맡은 임무로 인해 데려갈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었다.

“따로 움직이죠. 우리 조직원들만 아는 뒷문을 알려드릴게요.”

“너는?”

“정문으로 갈게요. 지금은 시선을 분산시키는 게 맞을 테니까.”

블라드는 침착하게 다음의 행동을 결정했다.

기사 출신의 스탕가가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낫겠지만 장미의 미소로 그를 데려가는 것은 온전히 블라드의 몫이었다.

“그럼 이따 봬요.”

“······그래.”

스탕가에게 뒷문의 위치를 설명해 준 블라드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길 건너에 있을 잭의 부하들을 생각하며 블라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언제나 숨어 사는 것에 익숙한 인생이었으나 지금 순간만큼은 자신을 드러내야 했다.

누군가의 앞에 당당히 나서 자신을 보인다.

그런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던 소년은 모르고 있었다.

“해봐야지 뭐.”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그런 것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빛나는 것에.

뿜어져 나오는 입김과 함께 블라드가 모퉁이를 돌았다.

후드를 벗자 가려져 있던 화려한 금발이 뒷골목의 희미한 불빛들 사이로 너풀거렸다.

‘저기 봐!’

‘호르헤의 애송이다.’

‘어디를 다녀온 거지?’

황금은 영원하며 또한 고귀한 것.

뒷골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 장미의 미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당당하다 생각할 것이고 아는 사람이 본다면 대담하다 말할 발걸음이었다.

장미의 미소를 지켜보고 있던 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블라드에게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다.

어둠을 틈타 장미의 미소 뒤편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후우······.”

어둠 속에 서 있던 외팔이 잭의 부하들이 잠시 부산스러워지는 틈을 타 블라드는 무사히 장미의 미소 앞에 멈춰 섰다.

그을리고 여기저기 부서졌으나 굳게 닫혀 있는 문 앞에.

확신했으나 확인하지는 못한 상황.

문고리를 붙잡은 블라드의 손길이 살짝 떨렸지만 망설이지는 않았다.

끼이익-

어긋난 경첩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고 장미의 미소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블라드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여어. 후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머리에 붕대를 둘둘 두른 버레이의 모습이었다.

※※※※

부서진 탁자, 피가 흥건한 바닥.

그리고 곳곳에 늘어져 있는 시체들.

비록 창관이었으나 고풍스러운 멋까지 풍기고 있던 장미의 미소는 지금은 마치 전쟁터라도 된 듯 엉망이 된 상태였다.

‘마르셀라가 기절하겠군.’

참혹한 현장을 뒤로 한 채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너의 레이디께서는 안전하시니 걱정 마시고.”

“보스 찾은 거야.”

“보스야 언제나 4층에 있는데 뭘.”

전부 다 안다는 듯 빙그레 웃는 버레이를 보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리통에 무언가가 어긋났는지 끼이익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오르자 저 앞에서 물씬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이자.

“호르헤. 저 왔어요.”

“어. 그래. 수고했다.”

또한 승리의 증거와도 같은 것이었다.

4층에 오르자 수많은 시체들 사이에서 웃통을 벗고 있는 호르헤의 모습이 보였다.

시뻘겋게 물든 그의 등이 마치 거대한 산 같아 보였다.

비록 상처 입었으나 멀쩡해 보이는 호르헤를 보며 블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아냐. 각자가 할 일을 한 것뿐이지.”

입으로는 사람 좋게 말하고 있었지만, 호르헤의 상체에 둘러진 붕대들은 이미 시뻘겋게 변해있었다.

격렬했을 전투가 블라드의 눈에 선했다.

“괜찮으세요?”

“오랜만에 기사급을 상대하려니 이렇게 됐지. 뭐 그래도 할 일은 했다.”

호르헤의 등 너머 검에 의해 벽에 꽂혀 있는 시체가 하나 있었다.

호르헤처럼 멋진 흉갑을 입은 시체였으나 머리만은 어디로 갔는지 목에서 쉴 새 없이 피를 꿀럭거리며 뱉어내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경련하는 시체의 발끝이 이 난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돈벌레가 먼저 선수를 쳤어. 역시 돈을 버는 놈들은 행동력이 남달라.”

시체들을 보며 혀를 끌끌 거리는 호르헤에게 마르셀라가 다가와 수건으로 정성스레 피를 닦아주었다.

영역을 지켜준 수사자에게 이 정도의 대접은 당연한 것이었다.

“데려왔어?”

아직 살기가 가시지 않은 눈이 블라드에게로 꽂혀 내렸다.

다행히 블라드는 그 살벌한 질문에 당당히 답할 자격이 있었다.

“네. 모셔왔어요. 지금쯤 뒷문에 와 있을 거예요.”

“좋아!”

언제나 무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호르헤였으나 지금만큼은 달랐다.

“내일 돈벌레 놈을 친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야겠어.”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과 누군가에게 쏟아내야 할 분노를 간직한 호르헤의 눈은 블라드가 여태껏 보아온 것 중에서도 가장 흉폭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때 보였어? 검은 잘 쓸 것 같더냐? 어디 하나 날아가지는 않았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변수를 걱정하는 호르헤.

과연 기사 출신은 다르다.

타오르는 자신을 다잡으며 내일을 걱정하는 호르헤를 보며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멀쩡해요. 비록 이틀뿐이었지만 사람은 괜찮아 보였고.”

“스탕가가 호탕한 면이 있지.”

“몸도 날렵해 보이고.”

“살을 뺐나? 하긴 오래 살려면 관리를 해야지.”

“네 그리고.”

달빛 아래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며 소년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오러까지 쓸 줄 아는 기사니까요. 분명 내일은 우리의 날이 될 거예요.”

외팔이 잭은 승부수를 띄웠고 그것에 실패했다.

흐름이란 것은 파도와도 같아서 밀려왔을 때 잡지 못하면 다시 쓸려나가는 법이었다.

게다가 호르헤가 비록 부상을 당했어도 아직 강건했고 거기에 예전의 인연이었던 기사 출신의 검사까지 데려왔으니 누가 보아도 호르헤의 승리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말이다.

“올라오나 보네요.”

“뭐?”

끼이익-

블라드의 말이 끝남과 아래에서 누군가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긋난 계단의 판자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금 뭐라 그랬지. 블라드?”

“네?”

계단으로 내려가 스탕가를 안내하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호르헤의 질문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일그러져 있는 호르헤의 표정이 블라드를 붙잡아 두게 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올라온다고요.”

“아니 그 전에.”

질문을 하는 호르헤의 표정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오러를 쓰는 기사니까······내일은 우리의 날이 될 거라고······.”

블라드의 말을 들은 호르헤의 표정에 낭패함이 찾아들고.

끼이이익-

그와 동시에 불길한 삐걱거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뒤로 와라. 블라드.”

호르헤는 시체와 함께 꽂아두었던 검을 빼내며 말했다.

호르헤의 발밑으로 기사였던 자의 시체가 허물어져 내려왔다.

“하지만 안내를······.”

“정말 오러였어?”

블라드는 호르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4층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계단으로 아무도 모르는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조직원들만이 아는 뒷문으로 들어온 자였으며

손에 들고 있는 검에는 채 마르지 않은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사내였다.

“그럼 네가 데려온 놈은 스탕가가 아니겠군.”

호르헤의 시선 끝에서.

블라드의 믿음 끝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자가 올라왔다.

“스탕가는 오러를 쓸 줄 모르니까.”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8화 10

깨어진 둥지 (1)

갑옷을 입은 남자가 바위에 앉아 검을 닦고 있었다.

“나이는 못 속여. 이젠 겨울바람이 뼛속까지 들어오는데.”

투덜거리는 그의 검에는 시뻘건 피가 묻어있었고.

“······.”

그가 앉아 있는 바위의 뒤편에는 내리는 눈으로도 다 가려지지 못한 시체 한 구가 누워있었다.

차마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채.

“그동안 꽤 먼 곳까지 흘러가셨군요. 선배.”

검을 닦으며 피 묻은 편지를 읽고 있던 남자.

그의 귀로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꽤 그럴싸한걸.”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가녀리게 울려 퍼지는 소리.

그것은 뻐꾸기 소리였다.

※※※※

“오랜만입니다. 호르헤.”

“······.”

호르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남자의 검 끝에 매달려 있는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누굴 죽였지?”

“여전히 보안은 철저히 하시더군요.”

블라드는 침을 크게 삼키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사내가 그런 블라드를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쓸만한 애송이였습니다.”

“왜 지금에서야 찾아왔지?”

호르헤의 뒤에 서 있는 블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여태껏 블라드가 보아온 사람 중 가장 거대하고 강한 사람은 당연히 호르헤였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눈앞의 호르헤보다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가 술병을 집어 드는 남자가 더 거대해 보였다.

“가이다르 백작님께서 작고하셨습니다.”

“······!”

남자의 말을 듣는 호르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말은 듣지······.”

“복잡한 사정이 있어 아직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이제 곧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

술이 가득한 술잔을 빙빙 돌리며 남자가 말했다.

호르헤를 바라보면서.

“가엾으셨던 가이다르 백작님을 위하여.”

“이 개자식!”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르헤가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집에서 나왔다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쨍강-!

호르헤의 매서운 일격에 술잔이 갈라지고 그 안에 있는 술이 쏟아져 내렸으나.

“새로운 가이다르 백작이신 지그문드 님을 위하여.”

정작 호르헤가 검을 내지른 상대는 어느샌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고--딘!”

“새로운 백작이 되신 지그문드 님의 첫 번째 명입니다.”

폐에서부터 비집고 나오는 웅혼한 외침과 함께 호르헤의 상체가 단단한 돌산과 같이 딱딱해졌다.

“탈영 기사 호르헤는 복귀하라.”

“지그문드는 나의 주군이 아니야!”

여태껏 살 속에 숨겨져 있던 근육들이 제 모습을 찾고.

제 모습을 찾은 만큼 다시 터져나간 상처들에서 핏물들이 흘러내렸다.

“물론 백작님께서도 얌전히 돌아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호르헤의 위협적인 모습에도 고딘이라 불린 남자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그것을 바라지도 않으시고.”

“이 개자식들아-!”

콰아아앙-!

7할은 내보이되 3할은 숨겨라.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꺄아아악-!”

“마르셀라!”

그리고 이 순간. 자신의 본모습을 아낌없이 내보인 호르헤의 일격은 그야말로 파괴적이었다.

비록 오러는 없었지만, 호르헤가 휘두른 검 놀림 한 번에 4층 바닥의 반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장미의 미소 전체가 일순간 출렁거렸을 정도로 강맹한 일격.

그것은 호르헤가 여태껏 숨기고 있던 기사로서의 일격이었으며 상처를 드러낸 짐승의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흐으으읍!”

블라드는 휘청거리는 마르셀라를 들쳐 업은 채 무너지는 바닥을 피해가며 재빨리 위험 지역을 빠져나왔다.

기민하였으나 그만큼 다급한 몸놀림으로.

그리고 겨우 빠져나왔다 생각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뭐야······.”

비현실적인 광경이 그곳에 있었다.

“크허억!”

흩날리는 핏방울들과 부서져 내리는 난간.

소년이 보아왔던 자 중 가장 강했던 사람이 추락하고 있었다.

아래로. 아래로.

“여전히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군요. 호르헤.”

왼쪽 눈을 감은 기사에 의해서.

호르헤의 추락과 함께 소년의 상식과 믿음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콰아아앙-!

육중한 몸체가 만들어낸 강렬한 소음.

그 소리에 장미의 미소에 있던 모두가 놀라 달려 나왔다.

“호르헤!”

블라드는 서둘러 난간을 붙잡고는 로비를 내려다보았다.

“쿨럭······.”

그곳에는 처참히 깨져버린 소년의 세계가 꿈틀거리며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뒷골목을 굴러다니던 소년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으며.

가장 먼저 인정해주었고.

그리고 소년이 보아왔던 사람 중 가장 강하다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보스!”

“이게 무슨!”

그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해하는 조직원들과 어떻게든 일어서려 애쓰는 피투성이의 호르헤.

“끄으으······.”

1층에 있던 조직원들이 당황해하며 몰려들었지만, 호르헤는 거친 신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오직 모든 광경을 보았던 블라드만이 다음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감았던 왼쪽 눈을 뜬 기사가 1층을 향해 뛰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검에는 달빛을 닮은 푸른 오러를 두른 채로.

“호르헤!”

“······!”

그 모습을 본 블라드는 호르헤에게 경고하며 지니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딱히 비도술을 배운 적은 없었으나 돌팔매질에는 능숙했던 소년이 날린 일격.

까앙-!

아주 잠시였지만 블라드의 행동은 1층으로 향하는 기사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데 성공하였고.

“흐아아아!”

간신히 일어선 호르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

스쳐 내려가는 기사의 눈빛이 블라드의 눈을 서늘하게 뚫고 들어왔다.

콰아아앙-!

고딘이 품고 있던 오러가 호르헤의 검과 맞닿자 마치 달빛과도 같은 푸른색의 잔상들이 장미의 미소를 감쌌다.

바람과도 같았고 안개와도 같은 것이었다.

“끄으으으!”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호르헤는 오러를 실은 기사의 일격을 흘려내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단 한 번뿐일지 모르는 성공이었다.

“고딘······.”

간신히 공격을 받아낸 호르헤의 눈에서는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내는 고딘은 그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명령을 따르셨어야죠.”

“······나는 사람이야. 그런 개같은 명령은 따르지 않아.”

“아니요.”

고딘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은 기사입니다.”

단 몇 마디뿐인 짧은 대화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로 맞대고 있는 두 개의 검이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게 있어 오늘 밤은 너무 길었습니다. 호르헤. 이제 그만 쉬고 싶군요.”

“뭐?”

그러나 고딘은 더는 호르헤와 나누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저 조용한 안식만을 원할 뿐이었다.

※※※※

“위험해 블라드. 내려가지 마!”

아무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그 순간, 블라드는 위험하다 말하며 자신을 붙잡는 마르셀라를 떨쳐내고는 1층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데려왔어!’

책임감, 자책, 당황,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분노.

16살의 소년의 영혼 속에서 온갖 종류의 감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소년의 잘못은 없었지만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년이 가지고 태어난 그릇의 크기가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치 날아가듯 삐걱거리는 계단을 통해 로비로 내려가는 블라드의 눈으로 숨죽이고 있던 조직원들이 서서히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안돼!”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블라드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고딘이라 불린 남자는 기사다.

그것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

고작 뒷골목에서 구르는 사내들로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마!”

그들을 말리기 위해 아예 난간을 붙잡고는 2층에서 뛰어내리려던 블라드는 순간 자신의 뒷목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예민한 감각이 잡아냈으며 타고난 본능이 맡은 불길한 낌새였다.

[숙여!]

“······!”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서걱-

미처 피하지 못한 달빛에 몇 올의 머리카락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조용하게 다가온 푸른색의 달빛.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수십 개의 장미꽃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외마디의 비명들과 함께.

“······!”

“어억!”

달빛이 불러온 장미들이 곳곳에서 붉은색을 펼쳐내었다.

심장에서 태어나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붉은색들이 아낌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르셀라가 아꼈던 고풍스러운 장식품들의 위로.

“으아아악!”

블라드가 앉아 초를 팔던 테이블을 적시며.

“커억!”

장미의 미소에 아낌없이 붉은색들을 칠해냈다.

“커어어억······.”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장미의 미소에 끔찍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허억······허억······.”

블라드는 잔뜩 웅크린 채로 숨을 몰아쉬며 방금 일어난 광경을 되새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검 놀림이었다.

적어도 블라드가 봤을 때는 그랬다.

특별할 것 없던 한 번의 휘두름이었으나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고요해져 버린 장미의 미소.

“이······이익.”

블라드는 떨리는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는 1층으로 기어가듯 내려갔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눈물과 침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씨발······씨발!”

마침내 내려간 1층에서 가장 먼저 블라드를 반겨준 것은 버레이였다.

생명을 모조리 쏟아내고 차갑게 굳어가는 버레이의 시체였다.

“으윽!”

블라드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핏발 어린 눈으로 사방을 부라렸다.

끼이익-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로비 한 가운데서 부서진 나무바닥을 밟으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호르헤였다.

“이 개자식아!”

고딘의 손에 들린 호르헤의 머리가 시선을 잃은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더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공허한 눈빛이었다.

“으아아아아!”

[하지 마라!]

이성을 잃어버린 소년은 시체들 사이에서 검 하나를 쥐어 들고는 달빛을 불러낸 기사에게 돌진했다.

기민하고 날렵했으며 마치 상처를 입은 짐승이 내지르는 일격과 같이 강렬한 돌진이었다.

아까의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죽—어!”

이성이 아닌 분노로 움직이는 블라드였지만 육체에 각인된 단 하나의 검로가 있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모든 정신과 힘을 집중해서.

내려친다.

팔꿈치를 좁혀서!

“······!”

순간, 소년의 검에 묻은 핏방울들이 가느다란 선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곡선의 궤적.

그것은 검로(劍路)였다.

칼잡이가 아닌 검사가 되는 최초의 관문이었으며 보통의 노력과 실력으로는 펼쳐 낼 수 없는 영역인 검의 길.

그것을 시궁창에서 처박혀 있던 소년이 재현해내고 있었다.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훌륭하군.”

소년의 노력과 분노를 가득 담은 내려치기가 기사에게로 쏘아져 들어갔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조차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훌륭한 내려치기다.”

그러나 소년이 만들어 낸 길은 기사가 만들어 낸 세계에 닿기에는 미약한 것이었다.

퍼억-!

고딘은 블라드의 검을 받아내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의 움직임으로 피한 후 발차기를 내질렀을 뿐이었다.

아직 소년의 일격은 고딘에게 검을 뽑게 만들 정도의 가치에 다다르지 못했기에.

콰강-! 콰다다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은 창녀들의 기사가 피로 질척한 바닥을 사정없이 굴렀다.

“크으으윽!”

[숨을 쉬어라. 소년! 정신을 잃어서는 안 돼!]

숨을 쉴 수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서 왱왱대는 목소리조차도 블라드의 희미한 정신을 일깨우기에는 부족했다.

그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타고났군.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어.”

고딘은 소년이 보여준 몸놀림에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갈비뼈를 부러뜨릴 만큼의 위력이 담긴 발차기였으나 눈앞의 소년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그것을 비껴내는 데 성공했다.

“개자식아······.”

완벽히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지막히 욕을 내뱉는 소년을 보며 고딘은 검을 든 채 고민에 빠졌다.

“죽여······.”

자신을 죽이라 말하고 있지만, 눈빛만은 살아있는 소년을 보며 고딘은 결정을 내렸다.

지금 자르기에는 너무 아까운 싹이다.

그것이 나중에 자신에게 날카로운 검으로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

이제는 자신의 왼손에 들려있는 선배가 말했었다.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라고.

······예전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주었었다.

“나를 안내한 소년아.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

고딘은 선배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툭-

몸을 일으키기 위해 버둥대고 있던 블라드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검은색의 무언가.

“······?”

블라드는 떨어져 내린 것의 정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육포였다.

제미나가 만들어 주었던 육포.

“나의 이름은 스탕가가 아니었고.”

블라드의 머리 위로 또 한 조각의 고깃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내 나이는 42살이 아니었지.”

“······이게 무슨 짓이냐!”

고딘의 굴욕적인 처사에 블라드의 눈에서 푸른색의 횃대가 감돌았다.

“이것은 나의 정당한 대가니 가져가겠다.”

고딘은 호르헤의 목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러나 너에게는 잘못된 대가를 받았으니 돌려주마.”

블라드는 고딘의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였으니까.

고딘이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너의 목숨으로.”

고딘의 왼손에서 시선을 잃은 호르헤의 눈빛이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번째 육포의 대가는 받을 생각도 하지 마라. 그거 맛이 없었거든.”

흔들거리는 호르헤를 바라보던 소년의 눈에서 피 섞인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네놈을 죽여버릴 거다······반드시!”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푸른 달빛의 기사가 떠나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굳건히 존재했던 소년의 세계를 깨뜨린 채.

피로 물든 바닥을 기며 소년이 나지막히 외쳤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는 사람은 이미 떠나간 뒤였다.

“반드시! 고-딘!”

이제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아는 기사를 향해 소년의 분노어린 외침이 울려 퍼졌다.

오직 숨죽여 우는 창녀들만이 그 외침의 증인이었다.

이곳은 장미의 미소.

붉은색으로 가득한 창관.

그리고 소년의 세계가 깨어진 곳.

더는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둥지에는 그저 숨죽인 울음들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9화 9

깨어진 둥지 (2)

모든 것이 부서진 둥지라 할지라도 그녀는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있었다.

“일어나!”

바닥을 구르고 있던 블라드를 거칠게 일으키는 손이 있었다.

“······마, 마르셀라.”

“정신 차려. 여기서 죽을 셈이야?”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그는 장미의 미소를 본거지로 삼은 뒷골목의 보스였지만 정작 장미의 미소라는 창관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여기를 지키는 자들은 다 죽었어. 곧 있으면 외팔이 잭이 들이닥칠 거야.”

마담 마르셀라.

도시 쇼아라의 꽃 중 한 명이자 장미의 미소의 주인인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마르셀라는요?”

“나보다는 너를 걱정해. 너는 호르헤의 단검이었어. 잭의 부하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하지만.”

방금까지 모든 감정을 쏟아내었던 소년은 이제 남은 것이 얼마 없었다.

분노도, 슬픔도, 그리고 영민한 판단력도.

“외팔이 잭은 나를 살려줄지도 몰라요. 그는 나를 마음에······.”

짜악-!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눈물짓던 창녀들이 모두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손을 들어 올린 마르셀라와 뺨을 어루만지며 당황해하는 블라드가 있었다.

“정신 차려. 애송이!”

“······.”

마담 마르셀라는 녹록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친 뒷골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장미의 미소라는 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가 그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마담 마르셀라가 그를 선택한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이거 들어.”

마르셀라는 바닥에 뒹굴고 있던 단검 하나를 쥐여주며 말했다.

그것은 호르헤가 주었으며 블라드가 고딘을 막기 위해 날린 단검이었다.

“우리 같은 뒷골목 인생들과 길 너머에서 사는 놈들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

“마르셀라······.”

블라드는 단검을 내려다보며 가만히 마르셀라의 외침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머리 잃은 호르헤의 시체보다도 자신을 먼저 찾아와 주었기에.

“잘 들어. 그놈들과 우리의 차이는 바로 기회야.”

“기회······.”

“길 너머에 사는 놈들은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어. 그럴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마르셀라는 손가락을 빼내어 가리켰다.

그곳에는 죽어있는 조직원들의 시체가 가득하였다.

“봐봐. 우리는 어떻지? 그저 단 한 번의 실패였을 뿐이야.”

블라드를 향해 소리치는 마르셀라의 눈에 뿌연 방울이 맺혔다.

“우리는 한 번만 실패해도 죽어. 그렇게 태어났어. 그러니까.”

마르셀라는 블라드의 옷깃을 당기며 말했다.

“너의 단 한 번뿐인 기회를 남의 손에 맡기지 마.”

수많은 시체들을 뒤로 한 채 마르셀라가 소년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마르셀라가 블라드에게 하는 말은 천만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조언이었다.

한 여자의 일생을 바쳐 얻어낸 귀중한 인생의 교훈이었기에.

“알았어요.”

그 조언은 마르셀라의 눈물과 함께 소년의 영혼 안으로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살고 싶으면 쇼아라를 떠나. 지금 당장.”

그리고 마담의 다급한 외침과 눈물이 다시금 블라드를 현실로 끌어왔다.

“맞아요. 마담의 말이 맞아요.”

“그래······.”

마르셀라는 소년의 눈에 다시금 빛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떠날게요. 지금 당장.”

비척거리며 일어서는 소년의 옆으로 붉은 머리의 소녀가 달라붙었다.

“제미나.”

“부축만 해줄게. 발목 안 붙잡아.”

“당장 떨어져.”

“지금도 비틀거리잖아. 적당한 곳까지만 옮겨주고 나는 빠질 테니까.”

“······.”

위험한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억지로 떼어놓으려 했지만, 소녀의 고집은 그 정도로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제미나가 절대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축해주고 와. 제미나. 그리고 동이 트기전에 수녀원으로 오렴.”

“알았어요. 마담.”

“같이 가고 싶어도 돌아와야 해. 너까지 함께 움직이면 도시 밖으로 탈출한다 해도 금방 붙잡혀버릴 테니까.”

“······알겠어요.”

이별을 하라 말하는 마르셀라의 말에 제미나는 그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외팔이 잭의 부하들은 이미 장미의 미소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내부의 사정까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알아채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호르헤가 없는 장미의 미소는 주인 없는 고깃덩이일 뿐.

외팔이 잭은 언제나 굶주린 자였다.

“꼭 돌아올게요.”

“블라드······.”

자신을 보며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소년을 보며 마르셀라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그 말을 한 사내들이 몇 명인지 아니?”

“저는 다를 거예요.”

돌아오겠다 말하는 소년의 다짐을 들으며 마르셀라는 기억해냈다.

호르헤가 꾀죄죄한 강아지 한 마리를 들고 왔던 그때를.

색을 잃어버린 그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겼었다.

그래서 다시금 황금색을 찾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보내야 할 때였다.

“어서 가렴.”

조금은 더 데리고 있고 싶었건만.

마르셀라는 블라드에게 주머니를 건네주며 말했다.

짤랑거리는 주머니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마르셀라의 걱정만큼은 가득 담겨 있었다.

“조심해요 마담.”

“수녀원에서 봬요!”

금발 소년과 붉은 머리 소녀가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그곳에 있는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좋아.”

호르헤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내보내는 데 성공한 마르셀라는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물 가득한 시선들.

가엾은 인생들이 그곳에 있었다.

의지할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녀들이.

“여러분.”

이제 마르셀라는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것이 주인 된 자의 마지막 의무였으니까.

“오늘로써 장미의 미소는 문을 닫습니다.”

사내 없이도 당당할 수 있는 창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퇴직금을 드리겠어요. 남을 자들은 남고 떠날 사람들은 떠나세요. 그리고.”

마르셀라의 눈은 대로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처녀인 아이들은 나에게로 오도록.”

모두가 흐느끼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은 다시는 갖지 못할 것이다.

마르셀라와 같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마담을.

자신들을 위해 검을 들어주던 창녀들의 기사를.

다시금 누군가의 손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도.

둥지는 깨어졌다.

이제는 아무리 어린 새라도 스스로 날아올라야 할 시간이었다.

※※※※

“다 죽었어.”

“······.”

뒷문을 지키던 조직원들이 모두 갈라져 있었다.

깔끔했지만 자비 없는 검 놀림에 의해서.

“크으······!”

“괜찮아. 블라드?”

비틀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제미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급박한 상황이었으나 블라드는 이미 체력의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5일이 넘는 시간을 차가운 밖에서 보냈으며 충격적인 상황을 겪음과 동시에 기사에게 달려들어 자그마한 부상까지 입고 만 상황이었다.

“······가자.”

그러나 몸 안의 기력은 떨어졌을지라도 눈빛의 기세만큼은 죽지 않았다.

소년은 맹세했다.

고딘이라는 기사를 반드시 죽이겠노라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맞아! 움직이자!”

제미나는 블라드를 부축하며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익숙한 지역을 넘어 외팔이 잭의 눈을 피해 도시의 바깥쪽으로.

여태까지 그래왔듯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제 뜻대로 만은 되지 않는 법이었다.

“찾았다!”

“저기 호르헤의 애송이다!”

외팔이 잭의 굶주린 시선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다.

블라드와 제미나는 뒷골목 출신임을 살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나 그것은 외팔이 잭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탐욕스러운 하이에나들이 무리를 빠져나온 어린 사자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축을 받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었으나 이것은 그저 발악과도 같은 움직임일 뿐이었다.

파멸이 다가오고 있었다.

“블라드!”

“돌아가.”

“싫어!”

“약속했잖아! 수녀원으로 가! 아니면 하벤한테라도!”

“싫다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한사코 고개를 내젓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겁나게 말을 안 쳐 듣네!”

이럴 줄 알았다.

“이 멍청한 년아! 적당히 바래다 만 준다며!”

“흐으으······흐끅!”

눈물을 흘리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위태롭게 벽에 기댄 어린 인생들.

서로를 부축하고 지켜주며 여기까지 왔건만 질척한 뒷골목은 쉽게 아이들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늘만큼은 짊어져야만 하는 소녀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웠다.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무게가.

“······.”

그러니 빠져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물고 물리는 생각들 속에서 블라드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익숙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일단은 아무 곳에라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래야 골목길에 깔린 잭의 부하들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영감! 문 좀 열어봐요!”

소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장간 앞이었다.

언제나 한참을 서서 바라보던 검이 있던 곳.

“어떡해······없나 봐.”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늙은 대장장이는 답이 없었다.

대답 없는 낡은 문을 보며 제미나의 커다란 눈 속에 공포가 가득했다.

블라드는 그 공포를 보며 다가올 미래를 예감했다.

외팔이 잭은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물어뜯고 지쳐 쓰러진 자들을 주저앉혀 자신의 디딤돌로 쓰는 사람.

“그럴 순 없지.”

제미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비켜!”

블라드의 푸른 눈에 다시금 빛이 찾아들었다.

“으,응!”

제미나를 밀쳐낸 블라드는 단검을 빼내어 필사적으로 대장간의 잠금장치를 비틀어댔다.

장인이 만들어 단단하고 견고했으나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방법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오직 힘만이 유일한 방법인 순간이 있는 법이었다.

“열려라!”

소년의 간절함을 담은 단검이 비명을 지르며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비틀어내고 있었다.

끼이이익-

그리고 그 간절함에 답을 해주었다.

서서히 잭의 부하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쯤 블라드는 겨우 입을 벌린 잠금장치를 단검의 손잡이로 내려쳤다.

딱--!

틈이 보였다.

어두운 대장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틈이.

“이익!”

벌려진 틈 사이로 작은 체구의 제미나가 먼저 들어가고.

“후우.”

그 뒤를 따라 블라드가 움직였다.

다급한 손놀림으로 땅에 떨어진 잠금장치의 잔해들을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그렇게 대답 없던 대장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괜찮아?”

“조용히.”

체력을 다 소모한 블라드였으나 감각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들린다.”

스탕가를 아니, 고딘을 몰래 들여보냈을 때처럼 소리에 집중하며 잭의 부하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들이 뒷골목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못 나가겠는데.”

사방을 메운 소리들이 블라드의 귓가에 들려왔다.

“흡!”

“······.”

그리고 소녀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제미나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것들 어디 갔어!”

“분명 이쪽으로 왔는데.”

블라드는 단검을 빼 들고는 문 옆에 바짝 기대어 섰다.

숨죽인 아이들과 하이에나들의 거리는 그저 얇은 나무판자 하나의 간격뿐이었다.

“어린놈들이라 날쌔네. 혹시 다른 골목으로 빠진 거 아냐?”

“빨리 찾아봐! 금발 머리 놈을 찾아오면 빌리가 따로 포상한다니까.”

“부러진 이빨의 복수라도 하려 그러나?”

덜덜 떨리는 제미나의 어깨와는 반대로 블라드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저놈들이 눈치채면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테니.

비록 호르헤가 남겨준 단검은 볼품없이 비틀렸으나 저놈들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소년은 집중했다.

자신의 어깨에는 소녀의 미래까지도 매달려 있었으니까.

“가자. 다른 놈들한테 빼앗기기 전에.”

“하아······이 연놈들이 다 어디로 내뺀 거야.”

블라드는 점점 멀어져가는 남자들의 기척을 쫓는데 귀를 기울였다.

그렇기에 알아채지 못했다.

“거기 누구요?”

조용히 대장간 안에서 일어나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

아직 잭의 부하들이 멀리 가지 않은 상황.

블라드가 낭패한 심정으로 서둘러 움직이려 하였으나.

“우, 움직이지 마. 영감.”

블라드의 곁에는 그를 부축하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지, 진짜 찔러버릴 거야.”

대장간에 굴러다니는 쇠붙이를 든 채 늙은 대장장이를 협박하는 소녀.

“너······왜 여기 있냐?”

낡은 대장간의 틈 사이로 겨울의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제야 늙은 대장장이는 볼 수 있었다.

달빛에 비친 소녀의 눈물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것을.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화 19

그것은 별일것이다

“그거 내려놔. 되다 만 것아.”

“영, 영감이 입 닥치고 있으면요.”

어린아이의 것만큼이나 작은 손이었지만 그 손에 쥐고 있는 간절함 만큼은 진짜였다.

“흑······흐윽.”

위협적으로 보이게 노력하고 있었으나 공포에 질려 있는 작은 소녀는 손을 벌벌 떨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

그것이 노인이 본 광경이었다.

다가오는 위협에 잔뜩 긴장해 있는 소년과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울고 있는 소녀.

세상에 버림받은 어린 것들이 자신의 앞에 초라하게 서 있었다.

“진, 진짜 찌를 수 있어. 히끅.”

“알았으니까 좀 닥쳐봐라. 이 되다만 것아.”

노인은 울고 있는 소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월만이 읽을 수 있는 안목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눈물들에는 공포가 깃들어 있었으나 눈동자 속에는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

이 아이는 진짜 찌를 수도 있다.

옆에 서 있는 소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 거냐. 말해 봐.”

두런거리던 사내들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늙은 대장장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소년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내뱉기가 힘들다는 듯이.

“졌구만.”

그저 입안에서 맴돌고 있을 뿐인 말이었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뒷골목에서 살아온 사람이었으니까.

“호르헤가 죽었어요.”

“······괜찮은 보스였었지.”

“히이끅! 흐읍!”

호르헤의 이름이 나오자 제미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사정은 알겠다. 그러니 일단 흉한 거부터 내려놔 봐라 되다만 것아.”

“히끅! 안돼!”

그러나 감정이 허물어졌을지언정 제미나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검 줘요!”

“뭐?”

블라드를 내보내야 한다.

이 도시 밖으로.

“매달려 있던 거 그거 줘요! 도시 밖으로 무사히 나가도 몬스터들한테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아니 근데 이 년이······.”

횡설수설하고 있었으나 제미나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외팔이 잭의 눈을 벗어나 쇼아라를 벗어난다 할 지라도 지금은 깜깜한 새벽이었고 추운 겨울날이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다음 마을로 이동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이었다.

“농담 아냐! 블라드가 죽어버리면 나도 콱 죽어버릴 거니까! 그러니까 그거 내놔!”

소녀의 손에 들려있는 날붙이가 노인의 턱밑까지 들어왔다.

“이, 이 년이!”

앙증맞은 손에 들려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날카로운 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눈물로 뒤덮인 소녀의 눈에는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너 미쳤냐!”

“검이나 꺼내!”

검을 내놓으라 말하며 자신을 위협하는 제미나를 보며 늙은 대장장이는 짙은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

이것이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본성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본성.

자신 또한 그랬었고 눈앞의 어린 것들도 그럴 때가 된 것뿐이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미나! 내려놔!”

블라드의 숨죽인 외침이 들려왔으나 제미나의 손끝은 여전히 위태롭게 흔들렸다.

소녀는 결심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휘두르기로.

소년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었으니까.

“제미나!”

소년의 숨죽인 외침과 함께 단검의 날이 번뜩였다.

“······!”

늙은 대장장이는 곧 자신의 목을 파고들 날카로운 것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갚을게요.”

그러나 소녀가 들고 있던 날이 향한 곳은 늙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이걸로는 모자라겠지만 나중에 꼭 갚을게요. 맹세해요!”

눈을 뜬 노인은 자신의 앞에 나풀거리는 것을 보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곱슬거리는 붉은색.

그것은 어린 소녀가 유일하게 자랑스러워했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이 되다만 년이······.”

“제발 주세요. 제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내어준 소녀.

간절함이 가득한 소녀의 눈은 아직 뒷골목에 물들지 않았다.

눈물로 가득한 소녀의 눈은 그 시절 자신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

앞에 있는 눈부신 불꽃에 시려오는 눈을 돌린 노인은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떠날 거냐.”

“네.”

자신이 평생 꿈꿔왔으나 하지 못했던 일들을 눈앞의 어린것들이 하려 하는 중이었다.

아직 채 여물지 못한 날갯짓으로.

“어린 것들이 날 너무 귀찮게 해.”

노인은 어른이었다.

어른이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도 어린아이들에게 해줘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도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라면 더욱더.

“따라와라.”

노인은 오늘만큼은 고개를 들어 별을 보기로 했다.

평생을 원했지만 하지 못했었던 일이었다.

※※※※

늦은 밤.

겉보기에는 고요했으나 굶주린 눈빛들이 가득한 뒷골목.

그곳으로 늙은 대장장이와 작달막한 체구를 가진 소년이 수레를 밀고 있었다.

“겁나 무겁네.”

“잔말 말고 밀어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뒷골목에 수레가 내는 삐걱거림만이 울리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쇼아라의 외곽 중에서도 외곽인 곳이었다.

도시의 넘쳐나는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었으며 뒷골목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만이 자리를 잡은 곳.

그래서 쉽사리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

“여긴 올 때마다 적응이 안되는구만.”

한겨울이었음에도 코끝을 감도는 악취가 느껴졌다.

‘여기마저 틀어막고 있으면······.’

이곳이 마지막이었다.

외팔이 잭의 부하들은 이미 뒷골목 곳곳에 포진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혹시라도 살아있을 호르헤의 조직원들을 잡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학살자를 찾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외팔이 잭은 자신의 눈을 피해 달아나려는 모든 것들을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늙은 대장장이와 제미나는 이곳까지 밀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영감.”

그러나 둘의 염원과는 다르게 이곳에는 이미 잭의 부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이 야밤에 여긴 왜 왔어?”

“보면 몰라?”

“······쓰레기버려?”

“그 나이에 벌써 눈이 맛이 갔어? 그럼 이게 뭐로 보이냐. 이놈들아.”

독이 잔뜩 오른 하이에나들을 상대로 노인은 당당해지려 애썼다.

“근데 왜 지금 버려?”

뒷골목에서 오래 살아왔기에 늙은 대장장이를 대우해 주고 있었으나 잭의 부하들은 지금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럼 지금 버려야지. 그동안 네놈들이 싸우느니 마느니 하면서 골목을 틀어막았었잖아! 그동안 못 버린 것들로 대장간이 터지겠다!”

“······쟤는 뭐야?”

잭의 부하 중 한 명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노인 옆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그들이 알기로는 늙은 대장장이는 언제나 혼자 일해왔었기 때문에.

“늙으니까 기력이 딸려서 빵 하나 준다고 하고 데려왔다. 아니면 네놈들이 대신 밀어주던가!”

“잠깐.”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으나 지금 시기에는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다.

“움직이지 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수레를 밀고 있던 소년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 오늘은 주먹 대신 칼이 나갈 수도 있는 날이거든.”

“······.”

결국, 우악스러운 손길에 후드가 잡혀 올라간 소년.

“왜 이래요. 빌어먹기 힘드네. 진짜.”

“······통과.”

붉은 머리의 소년이었다.

얼굴에는 꾀죄죄한 숯덩이가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대장간에서 꽤 험하게 구른 모양이었다.

“뭘 찾는데 이 지랄들이야?”

“호르헤의 금발 애송이. 그놈만 시체가 없더라고. 그리고······쯧.”

검문하는 사내는 혀를 차며 말을 줄였다.

“그리고 뭐! 말 안 해줄 거면 이제 가도 되냐!”

“하나만 더.”

사내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명령했다.

“어이, 깜둥이. 이 수레 확인해 봐.”

사내가 하는 말에 숨죽이고 있던 세 명이 침을 꿀꺽 삼켰다.

“먼지 날리게 여기서 하지 말고.”

“네.”

제미나는 떨리는 눈으로 수레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낡은 옷을 입은 거대한 덩치의 남자.

그 남자의 피부는 검은색이었다.

“저놈한테 가보쇼.”

“니미······.”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내뱉은 채 수레를 밀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으나 노인의 등에는 이미 땀이 흥건했다.

‘다른 곳으로 갔어야 했나.’

그러나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곳 말고는 달리 갈 곳 조차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아왔건만, 외팔의 잭은 눈은 도시의 가장 더러운 곳까지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많이도 가져오셨네.”

“그동안 많이 쌓여있어서.”

검은 피부의 사내에게 노인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인 좀······해봅시다.”

순간, 수레를 들추려던 검은 피부의 남자와 제미나의 눈이 마주쳤다.

“······.”

“······!”

서둘러 고개를 내린 제미나였지만 자기를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제미나를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대장간에서 나온 쓰레기라 그런지 먼지가 많네. 좀 더 앞으로 옮겨야겠어.”

검은 피부의 사내가 혼잣말을 하며 수레를 앞으로 밀어댔다.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는 두 사람.

“그런데 머리는 왜 잘랐어?”

“······!”

주위에 사람들이 멀어지자 남자는 무심한 목소리로 제미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 무슨 소리야.”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으나 제미나는 사내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낭패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

그와 동시에 수레 안에 담겨 있던 쓰레기 더미들이 미묘하게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딱 검 하나가 튀어나올 만한 틈을 만들어내면서.

“앞뒤가 평평해서 그런지 머리를 자르니 영락없는 사내놈인데.”

검은 피부의 남자는 제미나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눈만큼은 쓰레기 더미 안쪽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아무도 못 알아보겠어.”

덩치를 가진 사내가 밀어서인지 노인이 가져온 수레는 거침없이 잭의 부하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적당히 검문하는 사내들과 멀어지자 검은 피부의 남자는 꼬챙이를 꺼냈다.

볼품없이 녹이 슨 꼬챙이였으나 제미나의 눈에는 그 어떤 명검보다도 날카로워 보이는 것이었다.

“이게 내 일이라.”

푸욱-

그리고 그것을 사정없이 수레 더미 안에다 찔러대었다.

사내가 꼬챙이로 쓰레기 더미 여기저기를 찌르기 시작하자 제미나는 차마 바라보기 힘들다는 듯 눈을 감고 말았다.

제미나가 눈을 감든 말든 검은 피부의 사내는 계속해서 수레에 실려있는 쓰레기더미를 향해 꼬챙이를 찔러대고 있었다.

“하벤이 강에 배를 띄웠다던데.”

“······.”

교묘하게 사람 하나 앉아있을 공간만을 피해 가면서.

“지금 그쪽으로 잭의 부하들이 죄다 몰려갔어. 반병신이 된 놈이 강에 배를 띄운 이유가 있을 거라면서.”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제미나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며 모르는 척하였으나 수레 안쪽에 숨어있던 블라드는 지금 검은 피부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냥 알아두라고. 좋아. 통과.”

“······고맙다. 오타르.”

자그마한 말소리가 수레 안쪽에서 흘러나왔으나 오타르라 불린 사내는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가봐.”

통과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노인과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재빨리 수레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했다.

“내 동생이 빚진 40실버는 이걸로 갚은 거다.”

스쳐 지나가는 수레의 뒤로 검은 피부의 사내가 말을 건넸다.

목숨값은 오직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법.

빚을 갚은 남자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수레는 다시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시의 성벽, 그곳에 뚫려 있는 밖으로 통하는 구멍 하나를 향해서.

그 구멍이 가까워질수록 소녀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차올랐다.

이제는 이별의 시간이었다.

“잘 가. 블라드.”

그 구멍 밑에 있을 쓰레기 산을 향해 노인과 소녀가 수레를 밀어 올렸다.

“건강해야 해.”

제미나는 울먹거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년의 안위를 생각했다.

쏴아아아악-

수레의 손잡이가 끝까지 올라감과 동시에 소녀의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 보러와야 해?”

이제는 붉은 머리 소녀가 흘린 눈물과 함께.

밤하늘의 달 아래서 도시의 밖으로 떨어지는 쓰레기들이 있었다.

도시의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 초라한 것들이었으나.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해도 빛나는 것을 고이 품고서.

“······하아.”

성벽 밖, 쓰레기로 만들어진 산더미 위에서 소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물로 뿌예진 시야였으나 밤하늘의 반짝이는 것들만은 여전했다.

밤하늘의 별들.

그러나 오늘만큼은 별 하나가 땅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소년이 꽉 쥐고 있는 그 별은 노인의 꿈으로 만든 것이었고 소녀의 눈물로 산 것이었다.

“반드시 돌아올게.”

비록 높디높은 밤하늘에 있지 않더라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시궁창 속에 처박혀 있더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여전히 가슴 속에 빛을 품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별일 것이다.

소년의 가슴 속에서 빛나는 것처럼.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화 8

기도하는 용병 (1)

매서운 겨울바람이 파고드는 숲속에서 용병처럼 보이는 세 명의 남자가 모닥불을 지피며 앉아 있었다.

우물우물-

솥에 코를 박은 채 스프를 들이마시는 소년을 쳐다보면서.

“운이 좋았어. 저 멀리서 토끼 한 마리가 빌빌대며 서 있더라고.”

“좋아. 잘했어.”

사내들이 이미 먹어 얼마 남지 않은 토끼 스프였으나 소년은 그것마저 감지덕지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 마시고 있었다.

지금은 소년에게 말을 걸 시기가 아님을 파악한 용병들은 자기들끼리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사람들을 모은다던데.”

“몬스터 토벌에?”

“이번에는 바예지드 백작의 아들이 직접 나서는 모양이더라고. 둘째라던가.”

“바르나의 주교도 함께한다던데. 규모가 클 것 같아.”

“제 아비의 눈에 들려고 발악을 하는군.”

용병답게 입으로는 몬스터 토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사내들의 정신은 온통 금발 머리의 소년에게 쏠려있었다.

‘비싼 놈 같지?’

‘들고 있는 검을 봐. 적어도 사는 집 집안 놈이야.’

‘금발에 푸른 눈이니 그냥 팔아도 돈깨나 받을걸?’

떨어져 있는 소년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눈빛과 속삭임으로 의견을 주고받은 사내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묘히 소년이 빠져나갈 퇴로를 틀어막으면서.

“하······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하기는 돕고 살아야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솥을 내려놓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소년을 보며 용병들은 검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정 고마우면 갚는 방법이 있지.”

“제가 어떻게 하면······.”

“네 몸으로 갚으면 되지!”

소년의 뒤에서 밧줄로 만든 올가미가 날아들어 왔다.

“어? 어어?”

“야 임마! 뭐해!”

그러나 올가미 안에는 정작 잡아채야 할 소년 대신 애꿎은 용병이 낚였을 뿐이었다.

“쥐새끼같이 재빠르기는!”

올가미를 피해낸 소년을 향해 남은 두 명의 용병이 재빨리 무기를 빼 들었다.

“우리 도련님이 아비가 붙여준 사범한테 검술 한 자락 배운 모양인데 세상은 실전이거든?”

“좋은 말 할 때 검 내려놔라. 한 대 쥐어팰 거 열대로 만들기 전에.”

올가미에 묶인 용병이 재빨리 밧줄을 푸는 동안 두 명의 용병이 소년을 가로막고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맞아. 인생은 실전이지.”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번쩍이지만, 사용감은 없어 보이는 검 한 자루.

누가 보아도 부유한 집에서 가출한 자제의 모습이었건만 지금 소년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사나운 늑대의 그것이었다.

“뭐?”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생각했어. 정말 이 사람들이 나에게 진심으로 친절을 베푼다면 어떻게 갚아야 하지?”

스르르릉-

용병들이 거칠게 위협하고 있었음에도 소년의 기세는 전혀 죽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검을 빼 드는 소년의 모습에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검과 함께 하는 소년에게는 사나운 기세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여태껏 괜한 고민을 했지 뭐야.”

소년은 웃고 있었다.

“이런 니미.”

동류다.

저놈은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 따위가 아니다.

“임마 뭐해! 빨리 일어나!”

“밧줄 하루 종일 푸냐!”

그렇다 할지라도 괜찮다.

저 어린놈은 하나고 자신들은 셋이었으니까.

검술에 자신이 있어 보이지만 실전을 겪은 자신들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으······으으으!”

그럴 것으로 생각했으나 뒤에서 흘러나오는 동료의 신음이 심상치 않았다.

“뭐해!”

“으으! 으!”

올가미에 묶여 있던 동료가 묘하게 굳어버린 모습으로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정상적인 몸놀림이 아니었다.

‘당했다!’

무언가에 중독된 듯 굳어가는 동료를 보며 두 명의 용병은 심한 낭패감을 느꼈다.

‘도대체 언제!’

누가 한 지는 알 수 있었다.

굳어가는 동료의 모습을 보며 소년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 독을 넣었는지는······.

‘토끼!’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용병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참 쉬운 일이 없어. 그치?”

“이 개자식이 처음부터!”

의외의 행운이라 생각했던 비틀거리던 토끼가 사실은 덫이었다니.

“너도, 너도······!”

용병들은 서서히 굳어가는 자신들의 몸을 느끼며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 나도 먹었지.”

블라드는 혀 밑에 숨겨두었던 나뭇잎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해독제랑 같이.”

“으! 으으으!”

서서히 굳어가는 육체들이 차디찬 눈바닥 위로 쓰러졌다.

“언제 누가 먹힐지 모르는 게 바로 실전이지. 안 그래 선배님들?”

굳어가는 세 마리 토끼들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가 지닌 푸른 눈빛이 그들이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

타닥- 타닥-

해가 저물어가는 겨울 숲속에서 용병처럼 보이는 금발 소년이 홀로 앉아 있었다.

몸에 꼭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차려입은 갑옷과 안에 챙겨 입은 옷들로 보아 겨울날 동사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차림새였다.

“이게 진짜 되네.”

블라드는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운이 좋았다. 노란 줄무늬 버섯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니었거든.]

“사람을 마비시키는 버섯이랑 그걸 해독하는 나뭇잎도 알고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모른다 그건.]

소년은 혼잣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검을 쥐어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향해 말을 거는 것이었다.

“잡다한 건 알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이 누군지를 모르다니.”

[······.]

소년의 투덜거림에 목소리는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뭐 상관없어요.”

스르르릉-

소년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나한테 있어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니까.”

그동안은 그저 지켜만 봐왔던 검이었지만 지금은 소년의 손안에 들려있었다.

이것을 가지기 위해 흘려주었던 눈물을 소년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도와줄게요, 도와주세요.”

[내가 무섭지 않나?]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목소리를 향해 소년은 검을 알려달라 말했었다.

“당신이 악마라 해도 상관없어요. 내가 정말 두려운 것은.”

소년의 검으로 푸른 달빛이 내려앉았다.

영롱하게 비치는 그 빛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제일 두려우니까.”

푸른 달빛처럼 보이는 오러.

그 오러 앞에서 소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생을 진창 속에 있어도 빛나는 것을 좇아 온 소년에게 있어 푸른 오러가 가져오는 무력감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처럼 웅크려서 평생 시궁창에서 썩어갈 인생일 뿐이야.

푸른 달빛을 담은 오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하면 뭐라도 되겠죠. 하다못해 악마추종자라도.”

[······그래. 알려주마.]

그렇기에 소년은 발버둥 치기로 했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무게가 손에 들려있었으니까.

달빛과 모닥불.

최초로 오러를 보았던 그 날과 같은 밤에 무엇이라도 되고 싶은 소년과 자신을 모르는 목소리는 서로를 돕기로 했다.

오직 그 둘만이 내걸 수 있는 계약이었고.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것의 증인이었다.

※※※※

이제는 한겨울로 입성하는 시기.

빽빽한 침엽수림을 앞에 두고 눈이 내려앉은 하얀 들판 사이로 천막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중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 안.

“무난하군.”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올리며 책상 앞에 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젊어 보였으나 눈 밑은 검게 변해있어 남자의 인상을 병약해 보이게 만들었다.

“너무 무난해.”

검은 머리의 사내는 무엇이 맘에 들지 않는지 서류를 들춰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도련님.”

그 순간, 천막을 열어젖히며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애꾸눈의 사내가 들어왔다.

“왔는가 자야르?”

“네. 요제프님 지금 복귀했습니다.”

자야르라 불린 남자는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대며 병약해 보이는 사내에게 다가왔다.

“무슨 고민이라도······.”

평생을 모셔왔던 요제프의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자 자야르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너무 무난해서 말이야.”

요제프는 눈앞에 서류들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몬스터 토벌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상자도 그리 없고 그것 또한 전부 용병들에게서 발생한 것입니다.”

“실종자들이 있지 않나.”

요제프는 식어버린 찻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탈영병이라 봐도 무관하겠지만 말이야.”

요제프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몬스터 토벌 중 부상자나 사망자가 나오는 것이 더 나았다.

탈영병이 생겼다는 것은 규율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특별할 것 없는 결과에 탈영병들까지. 내 지휘 능력에 다들 의구심을 품겠군. 아버지도 그럴 것이고.”

순간 요제프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안광이 깃들었다.

“나의 배다른 형님 또한 말이지.”

요제프.

요제프 바예지드.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둘째 아들인 그는 지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형님의 방해를 피해 겨우 일으킨 병력들이야. 지금이 아니라면 나의 군사적 능력을 가신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을 거야.”

요제프는 야망이 있는 사내였다.

그는 바예지드 가문의 적통으로서 같은 피를 물려받은 루트거를 밀어내고 다음 대의 바예지드 백작이 되고자 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파멸이야.”

“······.”

다음 대 바예지드 백작이 되겠다는 것은 단순히 야망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만약 자신이 바예지드 백작이 되지 못한다면 배다른 형인 루트거가 어찌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잘하면 평생 수도원에서 사는 거고,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죽고 말겠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부터 피를 섞은 형제들을 짓밟으며 올라온 자였으니까.

“쓸만한 검이 부족해. 자야르 자네를 제외하고는 말이야.”

요제프가 다음 대 바예지드 백작이 되기 위해서는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가신들의 지지 또한 필요했다.

그러나 태생을 병약하게 태어난 요제프로서는 아무리 어머니와 외가의 도움이 있다 할지라도 가신들의 지지를 얻어내기는 힘들었다.

바예지드 가문은 무(武)를 숭상하는 가문이었기에.

“······도련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는 요제프를 향해 자야르가 잠시 주저하며 말을 건넸다.

“수상한 용병이 있습니다.”

“수상한 용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들려오자 요제프의 눈이 가느다랗게 떠졌다.

“형님이 보낸 첩자인가?”

“그런 의미로 수상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의미인가?”

자야르는 기사였다.

그것도 굳건한 기사.

그러나 지금 요제프 앞에서 말을 주저하는 자야르의 모습은 평소에 보아왔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해봐라. 자야르.”

생각보다 심각한 일임을 눈치챈 요제프가 대답을 재촉했다.

“직접 보셔야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뭔가 일이 나긴 났나 보군.”

자신의 기사가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자 요제프는 지금 자야르가 말하려는 일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안내해라.”

요제프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거기에 목도리와 장갑까지 둘둘 둘렀다.

“이곳입니다.”

병약한 도련님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마시지 않게 하도록 자야르는 기사의 체면 따위는 내던진 채 최대한 잰걸음으로 그를 안내했다.

더러운 천막이었다.

“여기는 도축장 아닌가?”

“그렇습니다. 토벌한 몬스터들의 중요 부위를 발골하는 곳입니다.”

요제프는 재빨리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달려 있는 사체들과 풍겨오는 피 냄새가 역겨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의 정신은 그 어떤 기사보다 강인하였으나 그의 육체는 천막 안에 떠돌고 있는 오염된 공기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연약했기 때문이다.

“여기로.”

자야르는 그런 요제프를 도축장의 좀 더 깊은 곳으로 안내했다.

도축장 가장 깊은 곳에는 잡다한 종류의 몬스터 사체가 매달려 있었다.

어림잡아 여섯 구는 되는 사체들이었다.

“보십시오.”

자야르는 직접 매달려 있는 사체들을 돌려 요제프에게 보여주었다.

“상처를 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매달린 지 오래되었는지 단단히 굳어버린 고블린의 등짝에는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삐뚤삐뚤하군.”

요제프는 별 감흥 없는 말투로 감상을 내뱉었다.

방금 보여준 검흔은 이제 갓 검을 잡았을 법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였기에.

요제프의 말이 끝나자 자야르는 그 옆에 매달려 있는 몬스터의 사체를 가리켰다.

상처들.

등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새겨진 검흔들이 사체에 가득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래된 사체에서 지금 막 들어온 오크의 사체까지.

모든 사체들을 살펴본 요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을 입에서 떼었다.

“설마 모두 한 사람이 만든 것인가?”

“그렇습니다. 도련님.”

자야르의 대답을 듣자마자 요제프는 다시 최초의 사체가 있던 곳으로 움직였다.

언제나 천천히 걷는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뛰어간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 사체가 얼마나 되었지?”

“한 달이 좀 넘었습니다.”

“겨우 한 달······.”

자야르의 대답에 요제프는 경악하며 다시 한번 몬스터들의 사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검흔.

삐뚤삐뚤하고 허접한 상처들.

그러나 새로운 몬스터들의 사체에 다가갈수록 누군가가 만들었다던 상처는 또렷하고 깊어지며 또한.

“누군가?”

굳건한 하나의 선을 이루고 있었다.

“리만이라는 자입니다. 금발의 젊은이인데.”

“리만?”

자야르는 요제프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용병들은 그를 ‘기도하는 리만’이라 부르더군요.”

“기도하는 리만이라······.”

요제프는 가만히 자야르가 말하는 칭호를 되새겼다.

“지금 당장 리만이라는 자에 대해 자세히 조사해봐라.”

“네 도련님.”

요제프의 명을 받은 자야르가 도축장을 벗어났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홀로 남은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몬스터들의 사체를 살펴보았다.

검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볼 수는 있었다.

요제프는 무를 숭상하는 바예지드 가문의 적통이었으며 그의 주위에는 뛰어난 기사들이 즐비했으니까.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천재로군.”

기본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삐뚤삐뚤한 일격에서.

방금 새겨진 검로로 한 달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이 내려준 인재만이 가능한 것임을.

어제 들어왔다던 오크의 사체는 아직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화 11

기도하는 용병 (2)

“앞으로 몰아!”

“포위망 좁혀! 빠져나가게 하면 안 돼!”

고요해야 할 겨울 숲속.

모든 생명이 조용히 잠들어 있어야 할 시기였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한 소음이 가득했다.

끼이이익 끼익-!

“겁나 못생겼네 새끼들.”

퍼억-

무장한 사내들의 입에서 가쁜 입김이 올라올 때마다 어김없이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전진해라!”

고블린 부락 주위로 용병들이 촘촘히 포위망을 굳힌 채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부락이었기에 용병들은 신중히, 그러나 과감하게 진격하는 중이었다.

고블린은 뛰어난 번식력으로 유명한 몬스터.

여기서 몇 마리라도 놓친다면 다음 해 겨울에는 이와 비슷한 규모의 부락이 또다시 생기리라.

그렇게 된다면 바르나에 있을 고용주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뒤져! 새끼들아!”

“키키기익-!”

이족 보행형 몬스터 중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고블린이었기에 용병들은 능숙하게 그것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의 연속이다.

“이런 젠장······.”

어제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용병 사내는 오늘 자신의 머리가 터져나갈지 몰랐을 것이다.

퍼억-!

그것도 보기 힘들다는 홉고블린에 의해서.

크아아아아-!

눈으로 뒤덮인 겨울 숲 위로 흉포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5조가 뚫렸다!”

“홉고블린이다! 홉고블린!”

한참 고블린들을 베어 넘기던 용병들에게 고블린이라고 하기에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끈적해 보이는 갈색 피부 위에 웅장하게 갈라진 근육들이 위협적인 그것.

크아아아아-!

이 부락의 대장처럼 보이는 홉고블린 한 마리가 동족을 죽인 인간들에게 아낌없는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저게 여기서 왜 튀어나와!”

홉고블린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등장하자 용병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태세를 가다듬었다.

“뭐 하는 거냐! 당장 앞으로 나서지 못해!”

“홉고블린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이딴 식으로 하고 보수를 받을 생각이냐!”

“그럼 기사님이 직접 나서시던가!”

용병 중에서도 드센 자가 내뱉는 일갈에 지휘를 맡고 있던 기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이놈이!”

기사는 두툼한 볼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검을 뽑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젊었을 적에도 실력이 그리 신통하지 않던 그는 이제는 늙기까지 해 이미 기사의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으니까.

“빌어먹을! 여러 명이 달려들면 되잖아!”

감히 직접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기사의 말대로 합이 잘 맞는 자들끼리 뭉친다면 홉고블린에게 대항 정도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어느 한 용병단에서 집단으로 파견 나온 자들이 아니었다.

“그럼 비싼 용병들을 부르셨어야지!”

합이 맞을 정도로 오래 같이 한 사람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용병단에서 눈여겨 볼만큼 실력 있는 자도 없는 상황이었다.

스르르릉-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번엔 한다.”

분노에 가득 찬 홉고블린이 다음 사냥감을 찾고 있을 때.

파앗-

홉고블린의 등 뒤에서 하얀 눈발이 튀어 올랐다.

크으?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린 홉고블린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누군가가 만들어 낸 눈보라뿐이었다.

“흡!”

교묘하게 사각에서 쇄도하여 순식간에 홉고블린에게 다가간 사내.

장식 없는 검이 만들어 낸 반짝임이 순식간에 홉고블린의 발꿈치를 베고 지나갔다.

크아아아아!

[위에.]

“봤어요.”

이제야 자신에게 달려든 사내를 본 홉고블린은 분노어린 함성과 함께 거대한 몽둥이를 내리쳤다.

퍼엉-!

“으악!”

“뭔 놈의 힘이!”

가공할만한 힘이었다.

같은 고블린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완력을 가지고 있는 홉고블린.

그것이 내려친 여파가 눈으로 만든 벼락이 되어 주위에 있던 자들에게 튀어 올랐다.

“물러나라!”

“아무것도 안 보여!”

눈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장막이 주위의 모든 것을 덮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리고 지금이었다.

사내가 노리고 있던 순간은.

잔뜩 힘을 주어 지면을 내려친 홉고블린.

모든 힘을 쏟아낸 그것이 잠시 경직된 순간.

“이번엔 진짜 하고 만다.”

금발 사내의 푸른 눈동자가 기이한 안광을 토해내었다.

크으?

홉고블린은 보았다.

눈안개 속에서도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서늘한 눈빛을.

그것은 여태껏 보아왔던 인간들의 눈빛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

순간, 눈보다 시린 섬광이 홉고블린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튀어 오른 눈들이 땅으로 낙하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깔끔한 횡베기.

모두가 멈춰있는 순간에 홀로 움직인 것이었으며 그저 휘두름이 아닌 의도를 가진 검의 길이었다.

너를 베겠다.

크아아아아-!

단단한 쇠의 감촉이 자신의 가죽을 뚫고 들어오자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던 홉고블린은 그만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젠장!”

[빠져라!]

훌륭했으나.

얕았다.

귓가를 울리는 홉고블린의 비명을 들으며 금발 사내는 자신이 목표했던 것을 일격에 베어내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또 실패야!”

크아아아-!

아직 블라드의 검은 홉고블린의 질긴 가죽을 가르고 단단한 뼈를 부술 만큼 여물지 못했다.

퍼엉!

방금 블라드가 굴러나간 지면 위로 스산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멍청하긴. 알려줘도 못해?]

머릿속에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이를 앙다물었다.

‘알려준다고 다 하면 그게 천재지.’

목소리가 내미는 핀잔과는 별개로 방금 블라드가 휘두른 일격은 검을 본격적으로 잡은 지 한 달 만에 만들어낸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었다.

다만 일격에 숨을 끊지 못했을 뿐.

“좀 돌아가는 것 뿐이라구요.”

다급히 자신의 옆구리를 붙잡은 채 이리저리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홉고블린을 보며 블라드는 눈을 빛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내려치면 되지.”

[실전에서 두 번째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네가 애송이라는 증거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블라드는 다리 근육에 힘을 주었다.

목소리조차 인정하는 탁월한 신체 능력을 이용하여 다시금 눈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아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매섭게 다가오는 은빛 섬광에 홉고블린은 몽둥이를 내저었지만, 그것은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기도하는 리만······.”

하얀 장막이 걷힌 뒤의 광경.

눈 앞에 펼쳐지는 믿기 힘든 그 모습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보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며 두려워하는 이 구역의 지배자를.

그리고 그것을 망설임 없이 반으로 갈라내는 검로(劍路)를.

하얀 눈밭 위로 새빨간 핏자국들이 퍼져나갔다.

※※※※

토벌이 막 끝난 겨울 숲속.

빛나는 것을 모으는 고블린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용병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부락 이곳저곳에 만들어져 있는 고블린들의 천막을 뒤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몇몇 용병들만.

다른 용병들은 자신들도 약탈의 현장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눈치가 가득했지만,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인에게 허락받지 못했으니까.

이곳의 주인이었던 것은 지금 엉망이 된 채로 누워 있는 홉고블린이었으며 그것을 눕힌 사람은 지금 눈을 모아 피 묻은 손을 비벼 씻는 금발 사내였으니까.

지금부터 이곳은 그의 땅이었다.

쓰러뜨린 자의 것을 갖는 것은 어느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승자만의 고유한 권리였다.

“대장. 이번에도 대단하잖아!”

피를 닦아내는 블라드에게로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가서 내가 벤 것들이나 챙겨놔.”

“그건 이미 다 해놨지. 애초에 대장걸 건드리는 간 큰놈은 없을걸?”

“내 옆에 하나 있던데.”

기도하는 리만.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토벌대의 용병 속에서도 눈에 띄는 남자.

“이 일 끝나고 나랑 같이 일 하나 같이 해볼 생각 없어?”

“사기꾼이랑은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게 내 신조야.”

“그러지 말고.”

갈색 머리의 남자는 블라드의 매몰찬 말에도 그저 빙글빙글 웃을 뿐이었다.

“용병패.”

조용히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블라드가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거 계속 쓸 수는 없잖아.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위조를 기가 막히게 해.”

“······입이 가벼우면 모가지도 가벼워지는 법이야 고트.”

“너무 섭섭하네. 내가 언제 대장한테 피해준 적 있었나?”

협박인가 제안인가.

누가 볼까 속삭이듯 말하는 긴 턱을 가진 사내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했다.

협박이면 죽이고.

제안이면 경고한다.

어떤 의도로든 나의 약점을 건든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고.

블라드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고트는 휘파람을 휘휘 불며 시선을 피했다.

“천천히 생각해봐. 나는 그냥 대장을 생각해서······.”

고트는 블라드가 눈빛으로 하는 경고에 자연스레 뒷걸음질 쳤다.

이 경고를 무시한 몇몇이 어찌 되었는지는 여태껏 블라드의 옆에 붙어 있던 고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현재 블라드가 토벌대에서 맡고 있는 직위는 십인장이었지만 그가 이끄는 용병들은 7명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다들 챙길 거 챙겼냐!”

더는 고트의 말을 듣기 싫다는 듯 블라드는 큰소리로 조원들에게 외쳤다.

“얼마 없어 대장!”

“홉고블린이 있기에 뭐 쓸만한 게 있나 했는데. 젠장!”

말은 그렇게 해도 사내들의 두 손에는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들려있었다.

“괜히 허튼 말 걸지 말고 저것들이나 모아서 기사 나리한테 전부 가져다줘.”

“전부 다 가져다줘? 적당히 떼먹어야지.”

고트의 대답에 블라드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빼먹을 게 있어야 빼먹지. 멍청한 놈아.”

“그래도······.”

“그리고 어차피 빼먹을 거면 큰 거로 해 먹어야 할 거 아냐. 괜히 이런 하찮은 거 가지고 서로 힘 뺄 일 있어?”

고트라는 사내의 말은 딱히 틀린 것이 없었다.

어차피 전리품을 받아 가는 기사도 용병들이 이것저것 꿍칠 것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평범한 용병들의 행동이었으며 자연스러운 관행 같은 것이니까.

“좀 멀리 보자 이거야.”

그러나 블라드는 평범한 용병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으나 그의 주위에는 배울만한 어른들이 있었다.

하벤이 그랬고, 호르헤가 그랬으며 마르셀라 또한 배울 점이 많은 여자였다.

“역시 대가리들은 다르네. 진짜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니까. 대장의 검이랑 나의 계획만 있으면······”

“머리만 달랑 떨어져 있기 싫으면 뛰어가라.”

말귀를 못 알아 먹는 것들은 피곤하다.

“지금 당장.”

그리고 블라드는 피곤한 것이 싫었다.

“알, 알았어. 지금 간다고.”

아까부터 블라드가 내뿜는 기세에 압도되고 있던 고트는 서둘러 잡동사니들을 모아 두툼한 볼을 가진 기사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내 주위에서 보초 좀 서봐.”

“기도하게?”

“어.”

“참으로 꾸준하시네.”

자신의 조에 속해있는 용병 하나를 붙잡은 블라드는 용병들이 모여 있는 전장을 떠나 근처의 양지바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너무 가까이 오지는 말고.”

곧게 뻗어 있는 침엽수들을 뚫고 오후의 태양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후우.”

블라드는 검을 꽂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주여······. 오늘도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트러진 금발 위로 황금색 태양 빛이 머물렀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주변에 있는 모든 용병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 죽이네.”

“진짜 귀족 아냐?”

“최소한 우리 같은 태생은 아닐걸?”

황금빛과 함께 하는 블라드의 모습은 마치 신실한 신자가 하는 기도의 모양새와 같았으며 손에 들고 있는 검과 함께 보면 한 명의 성기사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누구는 그런 블라드를 보며 가문에서 가출한 도련님이라 수군거렸고 누구는 어느 귀족의 사생아가 아니겠느냐 말했었다.

그런 말이 나올 만큼 기도하는 사내에게는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신비함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내에게 조금만 더 다가가 보면 누구나 그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싯팔. 그게 안 되네 근데.”

[멍청하긴. 일격필살의 묘리는 언제나 의외성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리만이라는 사람은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신실함으로 위장한 그의 기도문 속에는 그야말로 수상한 대화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화 12

무엇을 원하는가 (1)

진창으로 엉망이 된 뒷골목 거리에서 꾀죄죄한 모습의 어린아이가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꺼멓게 죽어만 가는 이 거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색을 가진 아이였다.

“저 새끼가······.”

“가만둬라. 배가 고픈가 보다.”

거리 위 가판대에서 팔던 꼬치를 뜯고 있던 남자는 손을 까닥거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소년을 불렀다.

“이리 와봐. 그래 거기 너 파란 눈깔.”

“······.”

남자의 손짓을 따라 가까이 다가온 소년은 과연 뒷골목에서 빌어먹고 사는 아이답게 엉망진창이었다.

“어디서 줘 터지고 왔어?”

방금 어디서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겨우 몸이나 가릴법한 누추한 옷은 여기저기 뜯어져 있는 상태였다.

“좋네. 눈빛.”

비록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아이의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

남자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 꼬치 하나 더 주쇼.”

거대한 덩치의 남자는 주인에게 꼬치 하나를 받아들고는 거지 같아 보이는 꼬맹이에게 건네주었다.

“먹어.”

단순한 동정심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골목에 사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자아내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밥값은 했다는 뜻이었으니.

“뭐해. 가져가.”

“······.”

풍겨오는 고기 냄새에 거지 소년의 입에 침이 가득 고여가는 것이 보였다.

“받으라니까.”

아이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꼬치를 잡는 대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 잘할 수 있는데요.”

“뭘?”

“뭐든지요.”

아이는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건네주는 꼬치가 아닌.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요. 시켜만 주면.”

꼬치를 건네주는 사람을.

소년이 보았을 때 그 사람은 뒷골목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존재였다.

“······너 이름이 뭐냐.”

아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문득 궁금해졌다.

뒷골목 거지 자식 주제에 하루를 버티게 해줄 음식을 붙잡는 대신 자신에게 당당히 말을 거는 녀석이 누구인지.

진창에서 구른 듯 성한 곳이 없어 보였지만 눈동자에서만큼은 빛을 간직한 녀석의 이름을.

“블라드요.”

이제야 마주친 소년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남자는 그 색 또한 마음에 들었다.

“너, 우리 집에 갈 테냐?”

그래서 주워가기로 했다.

오래전에 두고 갔던 누군가가 생각나는 색깔이었기에.

아이의 푸른 눈은 별을 닮았다.

※※※※

“허억, 허억.”

모두가 잠들어 있는 한밤중에 블라드는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었다.

“······잠은 다 잤구만.”

오래전의 꿈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도 버거웠던 그런 때였다.

잠에서 깨어난 블라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사내들의 쿰쿰한 냄새와 코골이가 가득한 천막이었다.

“장미의 미소에서는 분 냄새라도 났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임을 안 블라드는 검을 집어 들고는 밖을 나섰다.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또한 검사의 기본소양이다. 블라드.]

“······.”

블라드는 목소리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냐?”

“리만.”

“이 밤중에 어딜 가려고?”

“기도.”

“······용병보다는 사제가 어울리겠어 리만.”

불침번을 서던 인원에게 행적을 밝힌 블라드는 달빛 아래 비치는 언덕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고는 검을 쥐고는 눈을 감았다.

[어렵게 살았더군.]

“봤어요?”

목소리는 블라드의 꿈을 엿봤다 했다.

[꿈은 강렬한 소망의 발현이니까.]

“내가 무엇을 소망했는데요.”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고 싶긴 하네요.”

아무도 없는 달빛 아래에서 기도하는 사내가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금발 머리가 처연한 사내였다.

“······그런데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미친놈처럼 혼잣말해야 해요?”

[네가 너의 영혼 안에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 때까지]

“세계를 만들라니, 내가 무슨 신인가?”

[생각만으로 뜻을 통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다. 오직 굳건한 의지만이 너의 세계를 밖으로 표현하게 만들 수 있는 거다.]

그렇게 보이는 척하는 사내였다.

“오랫동안 이 미친 짓을 해야겠구만.”

[그건 너에게 달린 일이지.]

기도하는 리만.

남들 앞에서 혼잣말하며 중얼거릴 수는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방법이었다.

“기사들은 다 그래요? 막 영혼 안에 세계가 있어요?”

[오러를 다루는 자들은.]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 방법은 꽤 효과적이었다.

기도라는 행위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블라드에게 다른 용병들과는 다른 특별함을 연출해주기도 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함.

그것은 귀중한 것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표현법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알려준 대로 했는데 제대로 안 되잖아요.”

[그게 왜 안 되지?]

그러나 지금, 소년은 후회하고 있었다.

[검을 딱 들고 몸을 기울이면 상대가 슥 하잖아. 그때 슉 하면 된다니까. 몇 번이나 말을 해줘도 왜 모르는 거냐.]

“······그게 말이야. 지금?”

정작 기도로 연출하며 얻고자 했던 것이 실패하고 있었기에.

그런 말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검사라 할지라도 그들 모두가 훌륭한 스승은 될 수 없다는 말.

그 말이 정답이었다.

목소리가 훌륭한 검사였는지조차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게 지금 사람이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냐고요.”

[······아니, 기우뚱할 때 슈슉- 하라니까.]

“신이시여. 여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쓰레기 같은 악마를 잡아가소서.”

같지도 않은 설명을 듣는 블라드의 이마에 한 줄기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걸 죽여, 살려.”

[다 들린다.]

목소리도 자신이 설명을 끔찍이 못 하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모양인지 묘하게 움츠러든 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지금 한 번 보여줘요.”

[녹초가 돼버릴 텐데 괜찮겠어?]

“어차피 내일은 토벌 안 나간댔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년과 목소리에는 배움을 주고받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좋아. 오른쪽 눈을 감아봐.]

블라드는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았다.

“으음······.”

그러자 순간 시야가 멀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세상을 보는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잘 느껴봐라.]

“······.”

오른쪽 눈을 감은 블라드가 달빛 아래 조용히 검을 빼 들었다.

방금과는 다른 기세, 다른 분위기.

지금만큼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블라드는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과 딛고 있는 대지도.

[의외의 움직임으로 가능성을 선점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감각이 있었다.

[한발 앞서는 통찰력으로 전장을 통제해라.]

그리고 휘두름.

[그것이 일격필살의 묘리다.]

오직 홀로 빛나야만 하는 달빛 아래 번쩍이는 섬광이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을 일섬이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일순간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을.

찢어지며 내짖는 바람의 비명을.

[눈을 떠라. 블라드.]

다시금 오른쪽 눈을 뜬 블라드는 휘청거리며 제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으아. 겁나 빡세네.”

블라드는 경련이 일어난 종아리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잠시였음에도 한계를 뛰어넘어 과부하가 걸린 근육들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느꼈냐?]

그러나 통증 속에서도 블라드는 미소 짓고 있었다.

“대충은요.”

보았고, 느꼈으며, 또한 엿볼 수 있었으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잠시 빌린 블라드의 육체 위에 생생한 경험을 때려 박아 넣었다.

그리고 영민한 소년은 자신에게 남겨진 흔적을 더듬으며 배울 수 있었다.

“다음에는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말로 알려주고 시범으로 보여줌으로써 보여주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가르침이었다.

직접 경험한다는 것.

그것만큼 강하게 남는 가르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타고난 재능과 생생한 가르침을 통해 블라드는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원래 이렇게 될 것이라고 정해져 있다는 듯이.

“오늘은 달이 참 밝네요.”

블라드는 경련하는 다리를 붙잡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달만 보면 그놈 생각이 나네.”

[······.]

푸른 달빛을 닮은 기사가 있었다.

그는 소년이 최초로 본 또 다른 세계였으며 자신의 세계였던 호르헤를 부순 자였다.

“······나는 언젠가 달을 부술 거예요.”

[할 수 있을 거다.]

블라드는 언제나 빛나는 별을 바라보던 소년이었다.

늙은 대장장이가 만든 별을 바라보기 전에도 말이다.

“호르헤의 복수도 할 겸 말이죠.”

그 별은 뒷골목에서 가장 당당하고 거대한 별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동경했던 부서진 별을 가슴에 품었다.

“오늘은 이만하죠.”

[좋아.]

그리고 소녀의 눈물로 산 별을 어깨에 걸쳤다.

별들을 짊어지고 언덕을 내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푸른 달빛이 지켜보고 있었다.

※※※※

“······그래서 저의 임기응변을 통해 홉고블린에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늦은 밤.

요제프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신에게 보고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두툼한 볼과 갑옷으로도 가려지지 못한 비대한 몸.

그리고 당당하지 못한 눈빛까지.

과연 검을 들고 살아가는 자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보르단 경.”

“네. 요제프 님.”

요제프는 흘러나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병신으로 보이는가?”

“······.”

요제프는 지금 자신이 불같이 화를 내야 할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화보다는 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보고를 이딴 식으로 하는 거지?”

“요, 요제프님······.”

눈앞에 있는 기사는 자신을 능멸하고 있다.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인지 아니면 공을 부풀리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거나 토벌대의 지휘관인 자신 앞에서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자네를 따라간 용병만 스무 명이 넘어. 그들이 하는 말 하나가 나의 귀로 들어오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단 말인가?”

“······.”

유구무언이었다.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는 보르단을 보며 요제프 옆에 서 있던 자야르의 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요제프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죽이라 말만 한다면 저 보기 싫은 면상이 바닥에 구르게 될 것임을.

“······오늘 나의 말을 유념하게.”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제프 님!”

그러나 요제프는 보르단이라 불리는 기사를 죽이라 말할 수 없었다.

무능하고 멍청하며 나이까지 많은 이 빌어먹을 자식은 가문 내에서 자신을 따르는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쓰레기······.”

보르단이 천막에서 나가자마자 요제프는 머리를 짚으며 탄식하듯 말을 내뱉었다.

무를 숭상하는 바예지드 가문이라 할지라도 모든 기사들이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란 검을 다루는 자를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칭호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저놈 가문이 차라리 폭삭 망하기라도 했으면 좋겠군. 그러면 망설임 없이 베었을 텐데.”

바예지드 가문의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있는 돈과 인맥이 있다면 보르단 같은 경우의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힘이자 실력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버지는 나를 쓰레기통으로 보시는가? 그래서 내 앞으로 쓰레기들만을 밀어 넣으시는 건가?”

이제야 분이 차오른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덜덜 떨리는 입술로 말을 내뱉었다.

“진정하시지요.”

“······나는 검이 필요해. 저런 쓰레기 같은 검이 아닌 아주 날카로운 검이.”

그늘 가득한 요제프의 눈가에서 불꽃과도 같은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것만 있다면 내가 형님에게 뒤처질 이유는 없을 테니.”

원통하였다.

실력이 모자란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지 못한 것으로 결정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여태껏 바예지드 가문을 이었던 가주들은 모두 그 시대를 대표하는 기사들의 반열에 있는 자들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가 그랬으며 자신의 형인 루트거 바예지드 또한 다음 대를 대표할 기사가 될 재능이 있는 자였다.

“신께서는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요제프 님은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이 훨씬 많으신 분입니다.”

자야르의 말이 맞았다.

요제프는 건강한 몸을 타고 나지 못했을 뿐, 루트거가 가지지 못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영민한 머리, 침착한 심성, 강인한 정신.

그리고 훌륭한 외가의 지원까지.

물론, 그 모든 것들은 무를 숭상하는 바예지드 가문에 있어 후순위로 평가되는 것들이기도 했다.

“알아봤나?”

“네.”

요제프는 생각했다.

스스로가 검이 될 수 없다면 그 대신 검을 드는 자가 될 것이며.

“귀족인가?”

“아닙니다.”

“아니면 어느 검술길드의 유망주인가?”

“어디에 묶여 있는 자가 아닙니다.”

자야르의 보고에 요제프의 입술이 올라갔다.

“주인이 없는 자로군.”

“그렇습니다. 쇼아라의 뒷골목 출신이라 합니다.”

주위에 내가 들 검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들 것이라고.

그것으로 완벽해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좋아.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보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자야르가 조용히 천막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요제프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오직 혼자만 존재하는 천막 안에서 가만히 숨을 고른 채 생각했다.

“너는 무엇을 원할까. 블라드.”

요제프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을 내어줘야 네가 나를 거부할 수 없을까. 블라드.”

그는 언제나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자였다.

흔들리는 촛불 속에서 기이한 열망을 가진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화 13

무엇을 원하는가 (2)

아침은 괴롭다.

일어나는 것이 괴로우며 눈뜨는 것이 괴롭고 밖의 공기가 차갑다면 더더욱 그렇다.

“고트. 오늘 아침은 뭐야?”

“이상한 고기 넣은 스튜.”

“······기분 나빠졌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블라드는 아침 식단마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오늘 아침 안 먹는다.”

“또 사제님한테 가게?”

이 나간 막그릇을 들고는 배식하는 곳으로 가려 했던 고트는 부럽다는 눈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나도 기도나 할까?”

“기도나 라는 단어에서 너는 이미 글러 먹었다.”

블라드가 천막을 젖히자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보였다.

“춥다.”

멋진 광경이었으나 겨울 들판에서 한 달 정도 야영을 하다 보면 이제는 지겨워지는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먼저 왔어!”

“아니 왜 우리 솥은 아직 끓지도 않는데!”

짜기만 한 괴상한 맛이었으나 고용주가 식사를 제공해 준다는 것 자체가 이곳이 훌륭한 근무환경을 가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크흠.”

블라드는 스튜 한 그릇을 위해 악다구니 치는 용병들을 지나 어느 천막 앞에 섰다.

그 천막은 토벌대의 지휘관인 요제프 바예지드가 있는 천막보다는 작았으나 대신 정갈하고 깔끔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사제님. 저 왔습니다.”

블라드가 천막을 젖히자 안에서부터 훈훈한 열기가 다가왔다.

“오오. 리만! 어서 오게. 마침 아침을 먹으려 하는 참이었지.”

천막의 주인인 안드레아 사제가 블라드의 모습을 보고는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사제님 간밤에 평안하셨습니까?”

“나야 늘 평안하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들어온 사내를 안드레아 사제는 손수 이끌어 탁자 앞에 앉혔다.

“여기 앉으시게나.”

안드레아 사제는 자신을 따르는 어린 부제에게 한 사람 몫의 아침을 더 준비하라 말했다.

“어젯밤에도 기도를 하러 갔다면서?”

“잠이 오질 않아 그랬습니다.”

“추웠을 텐데.”

“주님의 품에 안겨 있는데 추위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하! 나보다 자네가 더 사제같구만.”

안드레아 사제와 안부를 주고받고 있었으나 블라드의 눈길은 어린 소년이 들고 오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밀빵!’

그것도 딱딱한 흑빵이 아닌 말랑말랑한 하얀 밀빵이었다.

토벌대의 지휘관인 요제프가 신실한 신자라 하더니만 과연 사제에게 쏟는 정성이 갸륵했다.

“기도하지.”

“저는 식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제님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러······.”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신께 감사하며······.”

겉으로는 아니라 말하고 있었으나 50대가 넘은 안드레아 사제는 블라드의 얕은 수 정도는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며 블라드의 자존심을 챙겨줄 뿐이었다.

“이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선한 사업을 하는데 더욱더 힘쓰게 하시고······.”

안드레아는 슬쩍 눈을 떠 앞에서 기도하는 금발 사내를 바라보았다.

‘실로 훌륭한 젊은이다.’

사제 안드레아는 요제프가 고개를 숙이며 모셔올 만큼 명망 있는 자였다.

그의 명성은 설교나 인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스스로 행함에 있어 나오는 것이었다.

50대가 넘는 나이임에도 곳곳에서 펼쳐지는 몬스터 토벌을 따라다니며 삿된 존재들을 물리치고 병사들을 축복하는 그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그런 안드레아 신부에게 있어 리만이라는 사내의 존재는 자그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험한 인생을 사는 용병임에도 언제나 신의 뜻을 찾는 젊은이.

막돼먹은 자들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돌보며 언제나 신에게 고개 숙이는 리만의 존재는 안드레아에게 있어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것이었다.

‘이 또한 신께서 내리신 인연일지니.’

그동안 어쭙잖게 기도를 한답시고 머리를 들이밀던 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던 자들이었다.

“먹게나.”

“네 사제님.”

그러나 눈앞의 리만이라는 사내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기도를 하며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자였다.

밥을 먹다가도 기도하고 잠을 자다가도 기도하며 심지어는 몬스터와 싸우는 순간에도 기도했다.

누가 보아도 진실된 자였다.

그런 자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따뜻한 아침 식사 정도였으니.

‘여기 있기에는 아까운 젊은이야.’

그러니 자신이 이끌어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피 묻은 전장을 찾아다닐 이 젊은이를.

“밀빵······이 귀한 것을.”

“많이 들게나.”

“넵.”

빵 한 조각에도 감사하며 눈물을 머금는 겸손한 젊은이를 보며 안드레아 사제는 미소를 지었다.

“참 그런데.”

“네. 사제님.”

저 밖에서 괴상한 스튜를 먹고 있을 용병들을 비웃으며 스프에 빵을 적시고 있던 블라드.

“자네 검 솜씨가 괜찮다는 것을 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요제프 님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야.”

“네?”

그런 블라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안드레아 신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 자야르 경이 나에게로 찾아와서 자네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군. 그래서 내가 참으로 신실한 젊은이다.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말해주었지.”

“······.”

볼이 터지도록 밀빵을 쑤셔 넣던 블라드는 안드레아 사제의 말에 잠시 가만히 멈추고 말았다.

“그래. 내가 자네를 추천했네.”

“오, 오오······.”

실로 괴상한 반응이었지만 안드레아 사제는 블라드가 기뻐하는 모습이라 착각하였다.

지금도 자신을 추천해 달라며 연락을 보내는 귀족 자제들이 있었지만, 안드레아는 쉽게 추천장을 써주지 않았다.

그는 세태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한 사제였으며 어느 도시의 주교직을 거절할 정도로 오직 신의 뜻만을 찾는 자였으니까.

“요제프 님이 계신 바예지드 가문은 북부에서도 명망 있는 귀족 가문이지. 그곳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보다 훨씬 나은 환경일 거야.”

“감, 감사합니다. 사제님.”

안드레아 신부는 블라드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꿀꺽-

양 볼에 가득 담아둔 빵조각이 넘어가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리고 있었다.

※※※※

안드레아 사제와의 아침 식사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블라드는 또다시 기도하는 중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짓을 하고 다녔나 봐요.”

[별수 없었다. 나의 검술은 실전을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는것이니.]

블라드가 도시 바르나에서 일으킨 몬스터 토벌대에 자원한 것은 당장 의탁할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목소리가 검술 수련을 하는데 이만한 곳이 없다며 추천한 결과이기도 했다.

[사제와 친하게 지낸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확인해 봐야 했다니까요.”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안드레아 사제와 연을 맺은 블라드는 그를 통해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 내가 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확신하는 건가.]

검은 벼락과 함께 블라드의 영혼에 깃든 존재.

스스로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말하는 목소리가 정말 악(惡)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앞으로의 행보를 정하는데 심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안드레아 사제는 주교직을 권유받을 정도로 명망 있고 신성력이 강한 자라 했어요.”

그런 자가 자신의 영혼 속에 있는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적어도 블라드 안에 깃들어 있는 목소리가 악(惡)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거나.

“뭐 안 걸렸으니 된 거죠.”

주교급의 사제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고매한 악(惡)이라는 소리였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안드레아 사제를 만난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적당히 치고 빠질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도망갈까요?”

[음······그래도 너 정도 실력이면 용병패 위조 정도는 눈감아 주지 않을까?]

“눈을 안 감아주면 목을 뎅강 할 텐데?”

명성 있는 사제와의 인연.

그리고 백작 가문 자제와 대면.

모두가 일개 용병으로서는 꿈꿀 수도 없는 호재였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거짓된 이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결국 사람 죽인 것까지 들통날 텐데요. 그러면 신분위조에다가 살인죄까지.”

[이제 보니 너 꽤 극악무도하구나.]

“당신도 공범이잖아.”

[음. 도망치는 게 낫겠다.]

너무 눈에 띄었다.

언제나 뒷골목에서 숨죽이며 살아와 몰랐겠지만 블라드는 자신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남들에게 주목받는 존재였다.

“그럼 오늘 저녁쯤에 튀는 거로.”

이번 몬스터 토벌 임무는 한 달에 한 번 보수를 받기로 되어있었다.

다행히 며칠 전 한 달 치 보수를 받았으니 떠난다고 하더라도 그리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꼬드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고트를 데리고 도망친다면 제대로 위조된 신분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지.

근무 조건이 좋아 아쉽긴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다.

[그런데 도망치기는 힘들겠는데.]

“왜요?”

한참 기도하는 척하며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던 블라드에게 목소리가 곤란하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뒤에서 뭔가 다가오고 있어. 기세로 보아 최소한 상급의 기사다.]

“응?”

목소리의 경고에 블라드를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내 기척을 읽었나? 생각보다 훨씬 쓸만하군.”

빛나는 흉갑에 등에는 작은 방패를 진 애꾸눈의 기사.

“요제프 님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자야르의 눈을 본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흐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어제 그냥 튈걸.’

속으로는 낭패한 심정이었으나 블라드는 의연한 표정으로 일어서며 말했다.

“요제프 님께서 저를 찾아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아무리 궁지에 몰려있을 때라도 무언가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카드 게임에서 흔들리지 않는 표정은 엄연한 기술 중 하나라고 호르헤가 그랬었다.

“안드레아 사제님께서 저를 추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기대하고 있었죠.”

“흐음.”

새파랗게 어린 용병 주제에 의연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야르는 한쪽 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눈을 가늘게 떴다.

“따라와라.”

그리고 언제까지 저 당당한 모습이 유지될지도 궁금했다.

앞서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도?’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블라드는 일단 따라가기로 했다.

[혹여나 달아날 생각은 하지 마라. 저 정도 수준의 기사라면 너의 발악은 헛된 발버둥에 지나지 않을 테니.]

‘······제길.’

목소리에게 마음을 읽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동이 예측 가능한 범위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고 있는 자야르 또한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의 왼손은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에 걸쳐있었으니까.

‘별수 없군.’

겉으로 보기에는 당당하지만, 목줄 걸린 개의 심정으로 블라드는 주둔지에 세워져 있는 천막 중 가장 커다란 천막 앞에 섰다.

“요제프 님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여라.”

“언제까지 숙입니까?”

“허락이 있기 전까지.”

요제프를 보기 전 간단한 유의 사항을 전해 들은 블라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자야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예상외로군.’

겉으로 봤을 때는 크고 화려하기에 안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있을 것만 갖춰져 있으며 그것들 또한 과하지 않을 정도로 배치된 공간.

요제프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는 광경이었다.

“요제프 님.”

“그래. 왔는가 자야르 경.”

천막 안에서 요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블라드는 배운 대로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긴장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거물인데.’

뒷골목에 있었다면 평생 보지도 못했을 인물이었다.

바예지드 백작의 둘째 아들인 요제프 바예지드.

그는 비록 작위는 없었으나 바예지드 백작령에서만큼은 일국의 왕자와도 같은 지위를 지닌 자였다.

“드디어 보게 되는군. 만나게 되어 반갑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제프 님.”

저 앞에서 요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다운 강인한 힘은 없었으나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래 임무 중 불편한 점은 없나?”

“요제프 님의 배려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감사하고 있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으나 막힘없이 대답하는 용병을 보며 요제프는 미소를 지었다.

‘대담해 보이는군.’

그러나 정말 대담한 인물일지는 지금부터 시험해 봐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이름이 리만이라고?”

“······네.”

“성은 없나?”

“그렇습니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 어디 몰락한 귀족가의 자제인 줄 알았지.”

평생을 그런 오해 속에 살아온 블라드였기에 이번 질문만큼은 별 동요 없이 대답할 수 있었으나.

“그래 어디 보자. 올해로 나이가······.”

그러나 다음에 들려온 요제프의 질문에는 그만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블라드가 만드는 묘한 침묵 속에 천막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져 갔다.

“올해로······31살입니다.”

독을 마시는 심정이었지만 블라드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용병패에 그렇게 적혀 있었으니까.

자신이 독을 먹여 죽인 리만이라는 용병은 나이가 31살이었다고.

널브러져 있던 세 명의 용병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젊은 남자가 바로 그였었다.

“오호?”

요제프가 내뱉은 기묘한 감탄사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올리고 말았다.

짙은 눈그늘을 지닌 검은 머리의 남자.

“이것 참 동안이로군!”

그는 비록 병약해 보였으나 검은 눈그늘 속에 형형한 안광을 숨기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 안광은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차가운 비웃음과 함께.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5화 11

무엇을 원하는가 (3)

일렁이는 촛불들 사이에서.

블라드가 바라본 요제프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승자의 미소와도 같은 것이었으며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걸렸구만.’

뒷골목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한 블라드였다.

그런 블라드가 영주의 이름으로 모집하는 몬스터 토벌대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가짜 신분이 필요했다.

자신이 죽였던 자가 지닌 용병패 같은 것 말이다.

“그 얼굴에 31살이라. 역시 동안이란 타고나는 것인가.”

“저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지요.”

희미한 미소를 짓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야르.”

“네,”

그러나 요제프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짜악-!

“큭!”

매서운 따귀가 블라드에게로 내려쳐졌다.

피할 수 있었으나 피해서는 안 되는 그런 따귀였다.

“한 번은 이해하지. 뒷골목에서 나고 자랐으니 귀족을 대하는 예의를 알 리가 있겠나.”

“······!”

코피를 흘리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미소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말하고 있는 미소였다.

“나는 거짓말을 아주 싫어하네. 이걸 미리 말해줄 것을 그랬군.”

새까맣게 물든 요제프의 눈그늘 위로 기이한 열망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이름.”

“······블라드라고 합니다.”

“나이.”

“16살입니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17살이 됩니다.”

“하핫!”

블라드의 대답에 요제프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훌륭하다.”

“······.”

무엇이 훌륭한지는 알 수 없었으나 블라드는 그저 잠자코 있기로 했다.

뒤에서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기사가 있었으니까.

“그래. 쇼아라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다 알고 계셨군요.”

이번에는 괜히 거짓말을 섞지 않기를 잘했다.

눈앞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는 이미 자신을 완벽히 파악한 뒤였으니까.

“자네의 어머니가 창녀였던 것은 확인되었으나 아버지는 알 수가 없더군. 혹시 아버지가 누군지 아나?”

“창녀의 자식에게 아비를 묻다니 꽤나 재밌는 농담이군요.”

억눌리는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대답이 나가자 블라드에게 곧장 응징이 들어왔다.

“큭!”

“공손해라. 애송이.”

오금으로 들어온 일격에 버티지 못한 블라드는 그만 한 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냐. 꽤 재밌는 농담이었어.”

요제프는 자신에게 무릎 꿇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뭐 용병패야 어디서 하나 죽이고 가져왔을 테고 왜 쇼아라에서 도망쳤는지는 이미 파악이 되었고.”

요제프는 생각했다.

자신의 손에는 이미 신상명세가 들려있었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금발 사내는 정말이지 알고 싶은 것 투성이라고.

“검술은 어디서 배웠나?”

평생을 뒷골목에서 숨죽여 살던 애송이가 어디서 이런 기가 막힌 실력을 갖추게 되었을까.

누구한테 배웠을까, 무슨 연유로 배웠을까.

그리고 무엇에서 태어났기에 이런 재능을 지니고 있을까.

빛나는 검들과 함께하는 바예지드 가문의 둘째가 눈여겨볼 정도로 말이다.

요제프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속에 감춰진 것들이 너무나 궁금했다.

“······.”

그러나 정작 그 물음에 답해야 하는 당사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스르르릉-

블라드의 등 뒤에서 조용히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해라.”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중얼거리던 블라드는 결심했다는 듯 요제프와 눈을 맞췄다.

“벼락처럼 다가와 바람처럼 사라진 스승이었습니다.”

요제프는 블라드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그만큼 블라드가 하는 말은 누군가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것이었기에.

“누군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분께서 말씀하시길.”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

“누구에게도 알려줘서는 안 되는 일인전승의 비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아.”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구심이 가는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 비밀로 쌓인 매듭들을 모두 풀어낼 수는 없을 터였다.

“취급을 험하게 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알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꽤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거든.”

그 매듭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일 것이다.

“내가 자네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네.”

“말씀하십시오. 요제프 님.”

블라드는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비록 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오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자네를 후원하고 싶네.”

“······네?”

갑작스러운 요제프의 제안에 블라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사람을 죽이고 신분을 속인 채 들어왔다.

그런데도 요제프는 블라드를 후원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은가? 쇼아라의 블라드?”

블라드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카드를 흔들면서.

기사.

권력.

자유.

생존.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두 남자는 서로의 눈 속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

따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주둔지의 아침.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용병들이 모두 몰려나와 있었다.

감히 보지 못할 귀한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나름 버티는데?”

“상대가 자야르 경이야. 봐주는 거지 당연히.”

애꾸눈의 기사와 금발 소년이 서로 목검을 맞대고 있었다.

“종자가 된 건가?”

“확실히 남다른 실력이기는 했지.”

“30은 넘었다고 들었는데?”

“그걸 믿는 사람이 여기 있었네.”

기사급의 인물이 검술을 펼치는 모습은 일개 용병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그 검술을 받아내는 상대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던 사람인 상황이었다.

“크억!”

“건방진 놈.”

그렇다면 이보다 더한 구경거리는 없을 것이다.

정작 검을 받아내야 하는 당사자의 생각이 어쨌든 간에 말이다.

“이 정도 실력으로 감히 네놈 따위가 요제프 님에게 고개를 뻣뻣이 들었단 말이냐?”

묵직한 목검의 느낌과 함께 블라드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

블라드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자야르의 눈빛은 어찌어찌 받아넘기고 있었으나 그가 휘두르는 검만큼은 그렇게 하질 못했다.

“크악!”

“그야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놈이로군!”

아무리 대련이라고 하지만 자야르라는 기사는 바예지드 가문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그런 기사의 휘두름 안에는 일개 애송이의 입장에서는 감히 받아내기 힘든 기세가 담겨있었다.

따악-!

쉴 새 없이 번뜩이는 목검.

끊임없이 빈틈을 찾아 움직이는 몸놀림.

한 번의 발걸음만으로도 수십개의 약점을 노출시켜버리는 자야르의 움직임에 블라드는 심히 당황하고 있었다.

자야르는 철저히 노리고 있었다.

재능은 있었으나 경험이 미천한 블라드의 약한 곳을.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아픈 곳이었으며 목소리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적절한 곳이었다.

‘젠장!’

뒷골목에 있을 때는 호르헤에게 기본기를 배웠었고 쇼아라를 탈출한 후에는 목소리에게 검술을 배웠었다.

그것들을 이용해 홉고블린까지 베어내었던 블라드였으나 지금은 연병장에 세워진 허수아비처럼 이리저리 얻어맞고 있을 뿐이었다.

‘수준이······너무 달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목소리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애송이에 불과한 것이 맞았노라고.

“이번 건 안 피하면 죽을 수도 있을 거다.”

“······제가 죽으면 요제프 님이 슬퍼하실 겁니다.”

“아직 입이 살아있는 걸 보니 충분히 피하겠군.”

수준이 다르고 격이 다르다.

애초에 딛고 있는 세계가 달랐다.

‘이것이 기사!’

호르헤와는 비교할 수 없고 고딘과는 또 다른 검이었다.

“흐으!”

지금 자신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쳐 지는 저 검은.

‘피할까?’

따라올 것이다.

‘막을까?’

그렇기에는 너무 강하다.

‘그렇다면!’

스으으윽-!

강맹한 기세를 가진 목검과 목검이 마주쳤다기에는 너무나도 미끈한 소리에 주위에 있던 용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야 말았다.

“히야.”

“역시 리만이야. 한 수가 있었어.”

너무나 다른 수준이었으나 용병들 또한 검을 다루는 사람들.

그렇기에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뒤바뀐 검과 검의 위치.

“흘렸네.”

누군가의 말대로 블라드는 자야르의 검을 비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정확히는 흘려내는 것을 허락받은 것일 테다.

“허억, 허억······.”

블라드의 턱 끝에 매달린 땀방울이 애처롭게 맺혀 있었다.

“진짜 죽일 생각이었어요?”

“기사들이 검술을 사사할 때 죽어 나가는 종자들이 없는 건 아니거든.”

애꾸눈의 기사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바라보는 블라드는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 하나?’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대련을 한다.”

“······조금만 살살해주시면 안 됩니까?”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풀리고 말았는지 스르륵 주저앉는 블라드에게 자야르가 웃으며 답했다.

“왜? 충분히 할만해 보이는데.”

“눈이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이게 할만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블라드의 작은 투덜거림에 자야르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한쪽 눈이 없긴 하지만 보는 눈은 정확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아침 대련이 끝났다는 말과 함께 공터를 떠나는 자야르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의리없게시리 조언 한 번을 안 해주네.”

[맞으면서 배우는 것도 있는 법이거든.]

자그마한 중얼거림으로 불만을 표출해봤지만, 목소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할 뿐이었다.

[훌륭한 대련이었다. 네 몸에 잡혀 있는 군더더기들을 가차 없이 깎아내리더군.]

목소리의 판단이 정확했다.

목소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전수함으로써 블라드의 실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지만 자야르는 실전과도 같은 대련으로 블라드라는 원석을 깎아내는 중이었다.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빛날 수 있도록.

그것은 목소리로서는 해줄 수 없는 가르침의 영역이었다.

“······어디서나 내 편이 없구만.”

그 말과 동시에 눈을 감아버린 블라드였기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을 떠나가는 자야르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아침 일찍부터 블라드를 두들겨 놓은 자야르는 자신의 주군이 있는 천막을 향해 들어갔다.

“요제프 님.”

“들어오시게.”

그곳에는 아침조차 거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요제프가 앉아있었다.

“직접 보니 어떤가?”

“쓸만합니다.”

“어느 정도로?”

“······만약 귀족가의 자제였다면  백작님도 눈여겨보셨을 겁니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군.”

블라드에게 대해 보고하는 자야르를 보며 요제프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주제를 모르고 건방진 것이 문제입니다.”

“예절이야 천천히 알려주면 될 일이지. 지금 내 앞에 그 일에 알맞은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지난밤의 대화로 블라드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대신 자야르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충성하지 않는 검은 믿을 수도 없는 법입니다.”

“어차피 나를 보자마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어도 믿지 않았을 거야.”

요제프는 어젯밤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눈을 빛냈다.

“차라리 속내를 드러냈기에 다행이었지.”

어젯밤 블라드라는 녀석은 감히 자신에게 고개를 뻣뻣이 들며 말했었다.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있노라고.

“차라리 잘 됐어.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내주는 관계가 더 알맞을지도 모르지.”

“······.”

요제프의 말에 자야르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튼튼한 몸과 검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못했으나 요제프에게는 그보다 못지 않은 재능이 깃들어 있었다.

군주의 자질이라는 재능이.

“건방지고 믿을 수 없으며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모양새가 꼭 늑대와도 같지 않나?”

“······.”

자야르는 알 수 있었다.

요제프가 지금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으나 실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 늑대라 할지라도 잘 먹이다 보면 언젠가는 길들여질 날도 오겠지.”

늑대는 자유로운 존재다.

그렇기에 더더욱 갖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나 자야르 경?”

“요제프 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요제프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늑대가 자유롭다 느낄 만큼 착각할 정도의 커다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6화 7

우는 여인 (1)

도시 바르나에서 일으킨 토벌대의 임무도 이제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용병들을 동원해 숲에 있는 몬스터 수를 줄여놓았으니 내년 봄에는 안심하고 들판에 양과 소들을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토벌대의 지휘관인 요제프의 성에는 차지 않을 결과였지만 말이다.

“니미······블라드한테는 한마디도 못 했던 놈들이.”

블라드가 자야르의 종자가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용병들에게서 이탈하자 고트는 새롭게 4조의 십인장이 되었다.

이제는 본인 포함 6명밖에 남지 않은 조였지만 말이다.

“거의 다 끝나가니까 참는다.”

보통 십인장이라는 자리는 가장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맡는 것이 옳겠지만 이제는 토벌이 곧 끝나가고 있는 시점이니 사실상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맡는 자리밖에는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고트는 귀찮은 일에 떠밀리고 만 것이다.

“겨울인데 안개는 왜 이렇게 끼는 거야.”

그런 이유로 고트는 한 조의 조장이었음에도 한밤중에 나와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마지막 토벌에 마지막 야영.

고트는 찾아오는 잠과 차가운 날씨, 그리고 주변에 자욱이 낀 안개를 바라보며 주둔지에 있을 자신의 침낭이 그리워졌다.

“별일 없나?”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한참 하품을 하고 있던 고트에게로 안개 속에서 불쑥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를 짧게 친 선이 굵은 남자였다.

“정신 차리고 계속 수고하도록.”

“네. 로드릭 님.”

기사 로드릭.

자신에게 충성하는 기사가 몇 없는 요제프에게 있어 자야르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명함을 내밀 수 있을 만한 기사가 바로 그였다.

그리고 성실과는 거리가 먼 고트가 불침번 역할에 집중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쯧.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이 딱딱하기는.”

로드릭이 지나가자 고트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 어디서나 규율과 규칙을 중요시하는 로드릭의 존재는 용병들에게 있어서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이제 눈 좀 붙여볼까.”

방금 순찰이 지나갔으니 당분간은 한숨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트가 눈을 감으려는 순간.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

자욱한 안개 너머로 로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갔나?’

고트는 감았던 눈을 바짝 뜨고는 여기저기 놓여 있는 횃불에 의지해 로드릭을 찾으려 했다.

“아이를 찾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지?’

어두운 밤. 자욱한 안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분명 로드릭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로드릭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지만, 그와 대화하는 상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인제 보니 미친 여자였군. 나는 너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

무언가 맥락이 맞지 않는 기묘한 대화에 고트는 자신도 모르게 로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

그러나 안개 속에서 들려오던 로드릭의 목소리는 마치 끊어진 듯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고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는 맡고 있던 자리를 이탈해 조용히 소리가 들려오던 곳으로 나아갔다.

검을 다루는 실력은 별로였지만 사기꾼답게 은밀히 움직이는 기술 정도는 가지고 있던 고트였다.

사박- 사박-

들리는 것이라고는 눈을 밟고 있는 자신의 발소리뿐, 방금까지만 해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던 로드릭의 기척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래도 제대로 찾아왔는지 저 멀리 횃불이 밝히는 끝자락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로드릭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뭐야.’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숲을 향해 걸어가는 로드릭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도는 것이었다.

그것이 뭔지 알기 위해 눈을 찌푸리며 집중하던 고트.

‘······!’

그것의 정체를 어렴풋이 확인한 순간 고트는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말았다.

‘저게 뭐야!’

자욱한 안개 속 희미하게 보이는 형체.

그것은 긴 머리의 여인이었다.

여인의 머리가 로드릭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고 있었다.

마치 달려 있는 몸 따위는 없다는 듯이.

※※※※

“그래서 이번 토벌대가 복귀하는 대로 바르나로 돌아갈 생각이니······.”

요제프는 말을 늘이며 주위에 있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기묘한 분위기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무언가 민망하다는 듯 쉽사리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기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과는 정반대로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야르까지.

“경들은 그에 맞춰 준비해주길 바라오.”

“······네.”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크흠. 그래야지요.”

요제프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빙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기사들의 뒤에 서 있는 종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 기사들의 뒤로 그들을 보좌하는 종자들이 서 있었다.

“······.”

다들 어딘가가 엉망진창이 된 모양새로 말이다.

눈이 시퍼렇게 부어오른 보르단의 종자는 그나마 상태가 나은 편이었다.

시퍼런 눈, 터진 입술, 무언가 겁먹은 눈초리까지.

오직 자야르의 뒤에 서 있는 블라드만이 말끔한 얼굴과 함께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럼 해산하시오.”

“크흠. 흠!”

“저렇게 사나워서야.”

“역시 뒷골목 출신들은 쯧쯧.”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그맣게 한마디씩을 내뱉고는 천막 밖으로 나가는 기사들.

자야르를 제외한 모든 기사가 천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요제프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때렸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나는 거짓말을 싫어한다니까.”

“······어젯밤 잠깐의 신고식이 있었습니다.”

“신고식?”

옆에 있던 자야르의 손이 올라가려 하자 블라드는 망설이지 않고 재빠르게 대답했다.

“선배 대접을 받고 싶어 하더라고요.”

현재 블라드의 공식적인 위치는 자야르의 종자였다.

비록 이것저것 복잡한 이야기들이 있긴 했었으나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원래 신고식이라는 게 신입이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보여준 것뿐입니다.”

본래 기사의 종자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귀족의 자제들이나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부유한 가문의 자제들이 맡게 되는 법이었다.

애초에 기사가 되기 위해 거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으니 아무리 종자라는 자리가 허드렛일을 하는 위치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들로는 꿈도 꾸지 못할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귀한 도련님들이 모여있는 세계에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잡스러운 녀석이 하나 껴들어 왔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을 것이다.

“뭐······어디서 얻어맞고 오는 것보다야 백번 낫습니다.”

요제프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자야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원래 저 나이대 소년들이란 서로 싸우면서 크는 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집에서 기르던 개라도 다른 집 개보다는 낫기를 바라는 법 아니겠습니까.”

졸지에 개가 되어버린 블라드였으나 감히 불만을 표출하기에는 이곳에 있는 두 사람의 존재가 너무 커다랬다.

“뭐······나로서도 그렇긴 하겠군.”

자야르의 말에 요제프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빠악-!

“크으!”

그 순간 블라드의 뒤통수로 자야르의 손바닥이 날아들어 왔다.

“그래. 지금처럼 어디 가서 나 말고는 얻어맞고 오지 마라.”

“이거 칭찬입니까?”

“기사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실전과도 같이 긴장해야 한다. 너는 방금 한번 죽었어.”

시비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자야르의 행동에 블라드는 그저 뒤통수를 쓰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을 쓰실 일은······.”

“지금은 없군.”

“들었지? 나가봐라.”

보통의 기사와는 다르게 자야르는 요제프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기사였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 말은 다른 종자들과 같이 온종일 자야르의 옆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막을 나선 블라드는 아무도 듣지 못할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루에 두 번 대련 해주는 거로 되게 생색내네.”

[애송아. 그것이야말로 천금 같은 기회라는 것이다.]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조용히 불만을 내뱉는 블라드에게 목소리가 말했다.

[남들 같으면 돈을 들고 와서라도 자야르와의 대련을 원할 거다. 그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기사야.]

“그냥 나를 때리고 싶어 할 뿐인 것 같던데요.”

[그렇기에 대련의 질이 더욱 높아진 것이지. 어디서나 의욕이라는 게 중요한 법이니까.]

“······.”

아침과 저녁. 자야르와 함께하는 대련이 블라드에게 유일하게 정해진 일과였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블라드에게는 모조리 자유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용병이 아니게 되었으니 숲속으로 토벌을 나갈 일도 없었고 직접 허드렛일을 하기에는 시켜 먹을 용병들이 주위에 가득했으니까.

“안드레아 님한테 가봐야겠네.”

[영향력 있는 자와 친분을 쌓아놓는 것이 이래저래 편하겠지.]

리만이라는 가면이 벗겨지고 본모습이 드러난 직후,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앞에서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자신의 죄를 고해했다.

“솔직한 게 답이 될 때가 있긴 하네요.”

[정면돌파가 제일 깔끔한 방법이긴 하지.]

명망 있는 사제와의 인연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신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네. 자네가 하는 말을 듣기 위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블라드가 자신을 속였다 할지라도 안드레아 사제는 블라드의 고백을 모두 들어주고 용서해주었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와 모든 죄를 고한 것에 대해 고맙다고까지 말해주었었다.

그는 실로 존경받을만한 사제였다.

[꾸준히 얼굴을 비춰두면 나중에 그의 호의를 얻을 날이 있을 거다.]

요 며칠간 이래저래 위기는 있었으나 결국 기사의 종자가 되었고 사제 안드레아와의 관계도 다시 돈독해졌으니 블라드로서는 이번 몬스터 토벌대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가져간 셈이었다.

“그럼 장작이라도 패볼까.”

블라드는 안드레아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기 위해 그가 쓸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대장! 리만······아니. 대장!”

순간 장작을 내려치려는 블라드에게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언제 복귀했냐.”

모아놓은 나무들 사이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고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토벌대도 도착하지 않은 것 같던데?”

블라드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고트는 주위를 돌아보며 다급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대장.”

“내가 왜 네 대장이야. 나 이제 십인장 아니야.”

“그럼, 블라드.”

“친한 척 하지 마라.”

“아니, 그럼 뭐라고 불러······.”

뭔가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하는 고트였으나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장작을 패고 있는 블라드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왜?”

“나 오늘 밤에 여기서 도망칠 거야.”

“왜?”

“내가 이 말을 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호의라는 걸 잊지 마. 나중에 웃으면서 보자는 호의라고.”

사기꾼이 보내는 호의에 블라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내 말 허투루 들으면 안 돼. 직접 보고 온 거란 말이야.”

평소와는 전혀 다른 고트의 분위기에 블라드는 그제야 장작을 패던 도끼를 내려놨다.

“뭔데 그래.”

이제야 자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된 블라드를 보며 고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숲. 우리가 토벌하는 숲.”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눈빛.

“저 숲은 저주받은 숲이야.”

“뭐?”

그것들이 사기꾼이 하는 말에 진심을 더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탈영병들이 좀 있었잖아. 여기가 보수도 좋고 근무환경도 나쁘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그랬지.”

점차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블라드를 보며 고트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전부 숲이 데려간 거야. 탈영병이 아니라 진짜 실종자들이라고.”

“뭐 숲속에 사람 잡아가는 귀신이라도 있다 이거야?”

확실히 괜찮은 근무환경에서도 탈영병들이 있긴 했었다.

그러나 용병들의 생리라는 것이 원래 자유롭길 바라며 자기하고 싶은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태반이었기에 블라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뿐이었다.

“귀신이 있어. 진짜 내가 봤다니까.”

“미친놈이. 그냥 가라.”

뭐 그럴싸한 이야기라도 하나 싶어 들었었지만 영 허무맹랑한 말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급속도로 관심을 잃고 말았다.

“이번 토벌에서 기사까지 실종됐단 말이야! 거짓이 아니라고!”

고트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뭐?”

“그리고 내가 복귀하면서 한번 알아봤거든?”

기사가 실종되었다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감지했다.

“여태까지 실종된 놈들 말이야.”

사기꾼은 언제 거짓을 말하는가.

그것은 오직 자신이 이득을 보는 순간일 뿐이다.

“전부 검은 머리더라고.”

“뭐?”

그러나 고트에게 있어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었다.

블라드는 다시 한번 고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짜 이상하지? 다들 하나같이 검은 머리였다니까?”

그 속에는 진실된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7화 8

우는 여인 (2)

하얀 눈길을 밟으며 움직이는 남자들이 있었다.

약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은 모두 흉흉한 무기를 든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며 길을 걷는 중이었다.

“믿을 수 있는 놈이냐?”

자야르는 말 위에 앉아 옆에서 걷고 있던 블라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믿을 수 없습니다. 사기꾼이거든요.”

“으음.”

블라드는 가장 앞장서서 걸어가는 용병 사내를 보며 대답했다.

그곳에는 힐끔힐끔 고개를 돌리며 블라드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고트가 있었다.

어떻게 나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을 수 있냐 말하는 억울한 눈빛이었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신 나간 놈은 아닙니다.”

“그리고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하지.”

기사 로드릭이 실종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요제프는 모든 복귀 준비를 중단하고 실종자를 찾을 수색대를 편성했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용병이 실종된 것과 가문의 기사가 실종된 것이 가지는 무게는 달랐다.

이것은 요제프의 능력에 강한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사고였으며 심한 질책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자신의 책임하에서 벌어진 사고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어쭙잖은 토벌 실적보다 지금처럼 특이한 동향을 발견하는 것이 더 이득일지 모르지.”

갑작스러운 사고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위기의 순간에도 기회를 찾아 움직이는 남자.

그것이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라는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라······.”

자신의 주군인 요제프와 같은 머리 색깔의 남자들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에 자야르는 영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하긴 하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언제나 요제프를 지키는 것이 최우선 임무인 자야르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기사 로드릭이 실종된 이상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강한 사람이 나서야만 했으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로드릭을 불러내었다는 여인의 존재까지 감안해봐야 했다.

그렇다면 현재 있는 인원 중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인 자야르 뿐이었다.

“주둔지에 기사가 셋이나 남아있는데 크게 걱정할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놈들이 하나도 없으니 그렇지.”

“저라도 남아있을 걸 그랬나요?”

“그래도 너보다는 낫겠지.”

“······.”

자야르의 판단이 맞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검을 잡은 지 이제야 한 달이 넘은 블라드보다야 그래도 정식으로 검술을 다룬 지 십 년은 족히 넘은 기사들이 훨씬 나은 수준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직 돈으로 기사 작위를 산 보르단 정도만이 블라드보다 못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자야르의 냉혹한 평가에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 블라드라는 사람이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수색대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저, 저기 앞입니다.”

제일 앞장서서 수색대를 이끌던 고트가 떨리는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직 토벌대가 야영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자리.

그곳에서도 고트가 불침번을 섰던 장소이며 로드릭이 실종된 장소에 도착한 수색대는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숲속을 뒤져봤는데 흔적조차 없었다고?”

“네, 네. 그렇습니다. 사냥꾼 출신인 용병이 뒤져봤는데도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로드릭의 부재로 지휘권이 붕 뜬 상태에서 그나마 잠깐이라도 그를 수색하고 토벌대를 이끌고 온 것은 로드릭의 종자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괜찮은 초동조치이긴 했으나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고트가 토벌대에서 탈영해 누구보다 빨리 주둔지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종자의 느슨했던 지휘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좋아.”

자야르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며 근처에 세워진 말뚝에 타고 온 말을 묶었다.

지금부터는 직접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지금부터 세 명씩 조를 지어 주위를 수색한다. 서로의 시선이 닿는 곳까지만 퍼져 있도록.”

“네!”

기사의 실종이라는 심각한 사태와 자야르라는 지휘관, 그리고 용병들을 휘어잡고 있던 블라드의 존재까지.

비록 여기저기서 모아온 용병들에 불과했으나 지금만큼은 잘 훈련된 병사들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희는 나와 함께 간다.”

세 명씩 모인 인원들.

그 중 자야르와 함께하는 것은 종자인 블라드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고트였다.

“대장.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사람이,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나중에 뭐라도 좀 챙겨줄게.”

“이건 사기야. 사람의 호의를 이용한 사기라고.”

고트는 비록 자야르를 의식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고 있었으나 점점 목소리에 울분이 차오르는 중이었다.

“미안하다니까.”

사기꾼에게 사기를 쳤다며 원망을 듣고 있는 블라드였지만 눈만큼은 날카롭게 누군가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솔직히 고트의 말을 듣고 있지도 않았다.

“뭔가 보이나?”

“······아니요.”

열심히 수상한 흔적을 찾아보고 있었으나 눈으로 덮인 산길은 블라드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다.

“쓸모없군.”

“도시 출신이라서요.”

“뒷골목에서는 사람이 실종될 때 어떻게 찾지?”

“일단 아무나 붙잡고 때려보는데요.”

“······정말 쓸모없군.”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왔던 블라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이나 피울 줄 알았지 흔적을 찾아내는 추적술 같은 것은 배워본 적도 없는 블라드였다.

자야르는 그런 블라드를 보며 이것저것 가르칠 게 많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지겠군.”

자야르는 점점 뒤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수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지금 수색대가 있는 이곳은 주둔지에서 걸으면 반나절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을 감안하여 해가 뜨기 전에 출발했으나 산속에서의 해는 빨리 지기 마련이었다.

“음?”

언제쯤 수색을 멈춰야 할까 고민하던 자야르의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다.

얼어붙은 강.

그 너머로 보이는 숲이 있었다.

“저 강 너머까지 수색했었나?”

“제가 알기로는 강은 안 넘었던 것 같습니다. 기사님.”

“······.”

고트의 대답에 자야르는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찾을 수 없겠어.’

이미 한 차례 수색한 숲에서는 전투의 흔적은커녕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약 로드릭을 발견한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머리만 둥둥 떠다녔다는 정체 모를 여인 또한.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곳에서보다 더 멀고 한 번도 수색하지 않은 곳.

“강을 건넌다.”

강 너머로 넘어가야 흔적을 찾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짧은 휘파람 소리로 용병들을 통제한 자야르는 손짓으로 강을 가리키며 저곳으로 모이라 지시했다.

“완전히 얼지 않았군.”

“겨울의 끝자락이니까요. 요즘 따뜻하기도 했고.”

용병들과 함께 강에 다다른 자야르는 자신들이 건널 강이 완벽히 얼어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래도 건널 수는 있겠어요.”

“흩어져서 건너가면 될 것도 같군.”

비록 발을 디딜 때마다 쩌적 거리는 불길한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성인 남성의 몸무게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듯싶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인원이 먼저 건넌다.”

혹시라도 얼음이 깨질까 싶어 자야르는 인원을 분산시켜 강 너머로 보내기로 했다.

“으으······.”

“왜 그래?”

블라드는 자신의 뒤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고트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강을 건너는 용병들을 보는 고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감이 안 좋아 감이······.”

“그냥 겁먹은 게 아니고?”

“당연히 겁도 먹었지! 나는 대장같이 잘난 사람들이랑은 다르다고.”

고트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며 블라드에게 말했다.

“원래 뭐든지 촉이 좋아야 돈을 벌 수 있단 말이야.”

“그래. 사기를 치려면 촉이 좋아야 하겠지.”

“······어쨌거나 그래, 내 감이 저 강을 건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니까.”

“그럼 네가 자야르 경을 설득해보던가. 감이 안 좋으니 건너지 말자고.”

“······.”

느낌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뒤로 내빼려는 고트를 블라드가 억지로 붙잡아 세웠다.

“나는 감이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예측하건대 너 여기서 도망이라도 쳤다가는 곱게는 못 죽을 거다. 유일한 목격자가 사건 현장에서 냅다 도망간다? 나 같아도 잡아서 족쳐보지.”

“그러니까 나를 왜 붙잡아뒀어!”

“그러니까 귀신을 왜 봤어. 네가 귀신 본 게 내 잘못이야?”

뻔뻔하게 응수하는 블라드를 보며 고트는 입술을 찡그릴 뿐이었다.

“다음!”

첫 번째로 지목된 용병들이 무사히 건너자 자야르는 남은 인원들을 이끌고 강을 향해 나아갔다.

쩌적-

“대장, 대장! 이거 깨질 수도 있지?”

“물론이지. 네가 한마디만 더하면 내가 깨부순 다음 처넣어버릴 거니까.”

“흐으으으······.”

처음 봤을 때 감히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 하길래 대담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는 겁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내새끼가 왜 이리 겁이 많아!”

자꾸 뒷걸음질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 고트를 끌어오느라 블라드는 자연스레 일행과 멀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로 건너는 인원들이 강의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조차 아직 고트와 블라드는 초입부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히이익! 못 가! 나는 못 간다!”

“봐주는데도 한도가 있다. 당장 일어나 이 개자······.”

“히에에엑! 끄에에에에엑!”

아예 강바닥에 엎어져 버린 고트를 향해 윽박지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오히려 차례를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고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블라드를 향해 소리 질렀다.

자세히 보면 입에 거품도 맺혀있는 듯싶었다.

“대, 대장! 밑에! 밑에!”

“안 깨진다니까! 그냥 한 대 맞고 기절한 다음에 넘을래?”

“아니 밑, 강 밑에 시······.”

이제는 아예 발광을 해버리는 고트를 보며 분노를 터트리려는 블라드였으나.

그 전에 고트가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하고 싶은 말을 외쳤다.

“시체! 시체가 있다니까!”

“뭐?”

더듬거리던 고트의 말을 이제야 알아들은 블라드는 자신이 딛고 있는 얼음 밑을 내려다보았다.

물고기들조차 얼어있을 것 같은 어두운 강바닥 밑에서.

뽀글-

자그마한 기포가 올라오고.

“······?”

그 아래에서 천천히 부유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시발.”

아니, 무언가들이었다.

희끄무레한 형상과 함께 점점 다가오는 것들.

그것들이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새하얀 손을 내뻗고 있었다.

“자야르 경!”

한참 강을 건너고 있던 자야르는 저 멀리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저기인가.”

농땡이라도 피우는가 싶어 한마디 내지르려 하는 순간.

“강 밑에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뭐?”

마침내 그것들의 존재가 표면으로 다다랐다.

쾅쾅쾅쾅쾅쾅쾅!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기어 올라온 것들이.

쩌저저저적!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구분 짓던 얼음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여기서 꺼내 달라며.

이곳은 너무 춥다며.

“으아아아아!”

“얼음이 갈라진다!”

“시체다! 강 밑에 시체가 있다!”

꽈악-!

“······!”

자야르는 강 밑에서 올라온 무언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서늘한 감각이었다.

끄아아아아-!

발밑을 내려다본 자야르는 경악하고 말았다.

시체였다.

그것도 검은 머리를 가진 사내의 시체.

“이런 빌어먹을!”

강 깊숙한 곳에서부터 조용하게 올라와 기사인 자야르의 감각마저 속인 것들이었다.

용병들의 애처로운 비명과 함께 강에 서린 얼음들이 갈라지고 있었다.

“살려줘!”

“잡아당기지 마! 으아아!”

그것들은 숨을 쉬지 않는 것들이었으며 너무나 차가운 곳에 갇혀 있던 것들이었다.

크아아아-!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손을 내뻗고 있었다.

따뜻한 숨을 내뿜는 자들을 향해서.

“어서 강을 건너라!”

자야르는 재빨리 검을 뽑아 들어 자신을 붙잡은 것을 베어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저 앞에서 자야르가 용병들을 향해 강을 건너라 소리치는 동안 블라드의 옆에서 강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자가 있었다.

“으아! 으아! 대장!”

“빌어먹을!”

어느새 강 밑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시체들.

“흐읍!”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내뻗는 손들을 검으로 후려치며 여전히 자빠져 있는 고트의 뒷목을 붙잡았다.

“이런 씨······!”

[당황하지 마라! 움직이기 전에 나아갈 방향을 정해라!]

목소리의 조언을 따라 블라드는 재빨리 주변을 파악했다.

‘앞으로는 못 가!’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은 단 한 곳뿐이었다.

나아갈 방향을 정한 블라드는 한 손으로 고트를 질질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왔던 방향을 향해 되돌아나가기 시작했다.

블라드가 내뿜는 하얀 입김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일어나! 이 새끼야!”

“흐아아아아!”

갈라지는 얼음. 무너지는 강.

그 위에서 하염없이 비명을 지르는 자들.

그것이 산 너머로 넘어가는 붉은 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색대의 등 뒤로 점점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 그리고 어둠.

그것들은 살아있는 자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8화 5

우는 여인 (3)

“오늘도 저의 하루를 돌봐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늦은 밤.

주둔지에 있던 사제 안드레아는 신께 드리는 기도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짓는 중이었다.

항상 데리고 다니는 어린 부제 또한 그와 함께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하고 있었다.

“언제나 제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빛으로서 저를······.”

안드레아가 하는 말을 따라 하느라 정신없던 어린 부제는 들려오던 기도문이 갑자기 끊기자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제님?”

어린 부제의 부름에도 안드레아는 기도문을 읊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뜨며 은빛 잔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신이시여······.”

순결한 은빛 잔에 담겨 있던 정화수.

그것이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며 울고 있었다.

무언가 경고라도 하려는 듯.

해가 져 가는 겨울의 들판.

토벌대의 주둔지로 강변에서나 볼법한 짙은 물안개가 퍼지고 있었다.

애타게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아가, 내 아가.

자욱한 안개와 함께 찾아온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 아가 어디 있니?

※※※※

크아아아아-!

“흡!”

자야르는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이것은 함정이라고.

강을 건너는 판단을 내리도록 주위 상황을 배치했으며 해가 지는 시기에 맞춰 시작되었다.

이 함정은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모두 나를 봐라! 나를 중심으로 방진을 이뤄라!”

자야르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야르가 들고 있는 검에서 초록빛 은하수와 같은 오러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어두운 하늘 아래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모여! 여기로 뭉쳐라!”

“우리에게는 기사가 있다!”

자야르의 지시에 따라 강을 건너온 용병들이 방진을 이루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본능을 따라 자야르의 곁으로 모인 용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침착히 살펴볼 수 있었다.

크아아아-

아아아아아-

죽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모두 검은 머리를 가진 자들이었다.

‘당했군.’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머리의 죽은 자들을 보며 자야르는 속으로 침음을 내질렀다.

함정이란 의도를 가진 것.

누군가를 상처입히기 위해 제작된 사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자야르는 이 함정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향해 겨냥된 것인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

‘요제프 님!’

강의 얼음은 무너졌고 자신은 용병들과 함께 고립되었다.

이것들은 자신과 요제프를 떨어뜨리기 위한 함정이었다.

“블라드! 내 말 들리나!”

누구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함정은 성공했다.

여기서 자신이 기를 쓰고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요제프에게 닿기까지는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크아아아-!

아니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몰랐다.

“자야르 님-!”

강 건너에서 금발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햇빛 사이에서 죽은 자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소년이었다.

흩날리는 소년의 금발이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하나의 검이라도 더 필요할 터!’

만약을 대비하여 안드레아 사제와 함께 기사 셋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주둔지에는 용병 5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영민한 요제프라면 어떤 위협에서도 버텨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기를 바란다.

“쇼아라의 블라드! 계약을 이행해라!”

자야르는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들 속에서도 요제프를 위한 최선을 생각했다.

“제가 어찌하면-!”

“지금 당장 주둔지로 돌아가라! 신 앞에서 행한 계약에 따라 요제프 님을 지켜라!”

오러와 함께 섞여나온 우렁찬 외침이 강을 가로질렀다.

저 너머에 있는 건방진 소년은 감히 자신의 도련님에게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건 계약을 이행해야 할 때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자야르의 시선 끝에서 검을 거두고 서둘러 뒤로 돌아가는 블라드와 고트의 모습이 보였다.

‘신이시여.’

점점 멀어져 가는 두 명을 보며 자야르는 부디 신께서 요제프를 구원해 주길 빌었다.

자신의 뜻을 담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가기를 빌 뿐이다.

“기사님! 숲속에서!”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돌봐야 할 때다.

“크으으으······.”

숲속에서 걸어 나오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지는 않았으나 역시나 차가운 자들이었다.

“하아······.”

자야르는 씁쓸한 심정으로 숲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는 자를 향해서.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로드릭.”

우그러진 흉갑과 함께 흉악한 흰자위를 부릅뜬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크으으으.”

추운 겨울날이었음에도 로드릭의 입가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

“히이이익!”

“흡!”

갑작스레 고트의 앞을 가로막으며 뛰쳐나온 것을 블라드의 검이 갈라내었다.

푸확-!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꺼먼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대장!”

“말 어딨어!”

블라드의 외침에 고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가며 위치를 가늠했다.

블라드와 고트의 상황은 어쩌면 자야르가 있는 강 건너보다 안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적어도 열 명 이상은 모여 있었으며 무력의 상징인 기사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자야르 경이 저쪽에 묶어놨었어!”

“가자!”

그러나 블라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오직 고트 하나뿐이었다.

‘도망가야 해!’

블라드에게는 고민할 선택지 같은 것은 없었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그저 있는 힘을 다해 주둔지를 향해 도망치는 방법뿐이었다.

피해가며 베어가며.

블라드와 고트는 강둑을 따라 자야르가 말을 묶었던 장소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히이이잉-!

“저기!”

다행히 죽은 자들의 마수가 아직 자야르의 말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줄 풀어!”

블라드는 뒤로 돌아 점점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베며 고트에게 말의 줄을 풀 시간을 벌었다.

“히익! 헤엑! 임마! 착하지!”

푸르르르-

말이란 겁이 많은 동물이다.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가 타고 다닐 만큼 훌륭한 말이겠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겁을 먹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히이이잉-!

“빨리!”

“됐다! 됐어! 블라드!”

용케 말뚝에 묶어놓은 줄을 풀고는 블라드를 부르는 고트.

“진정해라 제발! 같이 좀 살자!”

그러나 고트로서는 공포에 의해 마구 날뛰는 말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어서 타!”

블라드의 푸른 눈빛이 말에게 닿기 전까지는.

마치 날아오르듯 말 등에 탄 블라드는 서둘러 고트의 손을 붙잡고는 그를 잡아 올렸다.

“······.”

“뭐해 대장! 어서 가!”

“······근데 이거 어떻게 움직이냐.”

“이런 미친!”

블라드의 맥빠진 소리에 고트는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처음부터 말을 탈 줄 모른다고 말을 하던가!”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뒷골목에서 살아온 소년이었다.

말은커녕 짐을 싣고 다니는 당나귀도 못 타는 것이 블라드의 현실이었다.

말을 움직이게 하려면 고삐를 잡아당기면 되는 건가?

“내려 새꺄!”

점점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보며 고트가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죽으면 다 너 때문이다! 이 개자식아!”

당장 떠나도 모자랄 판에 허둥지둥 자리를 바꿔 타는 자신을 보며 고트는 무엇인지 모를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

“흡!”

말에게로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블라드의 검이 휘둘러졌다.

“타! 이 병신아!”

“······.”

악에 받친 고트가 내지르는 소리를 블라드는 그저 못 들은 척 할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잉-!

이제야 제대로 된 기수를 앉힌 자야르의 말이 앞발굽을 높게 쳐들고는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과연 기사가 선택한 말답게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짓밟으며 길을 만들어내었다.

크아아아-!

카아아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죽은 자들을 향해 블라드의 마지막 휘두름이 번뜩였다.

“달려!”

블라드의 외침과 함께 산 너머에 걸려있던 태양이 마지막 한숨을 내쉬며 꺼져 들어갔다.

크아아아!

블라드와 고트는 자신들의 뒤에서 울려 퍼지는 망자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양은 졌으나 아직 달이 닿지 않은 밤.

소년의 뒤를 쫓아오는 어스름한 저녁은 죽음을 머금고 있었다.

※※※※

어딘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밤안개가 천막들 사이로 가득했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사내들의 비명이 밤안개를 뚫고 주둔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요제프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제프 님!”

“이 무슨 소란이지?”

“그, 그것이!”

헐떡거리며 천막으로 들어온 보르단은 두툼한 볼을 떨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지만, 도저히 내뱉을 말이 없었다.

“상황 파악도 안 하고 나에게 왔는가?”

“일단 요제프 님의 안전이 중요하기에!”

“그런 자가 검도 들지 않고 왔단 말인가?”

요제프의 지적에 보르단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벨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허무한 검집만이 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형님이 부럽군. 그라면 당장 자네의 목을 매달았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요제프는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는 천막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울림.

비명과 울부짖음.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소리가 요제프의 귓가에 가득했다.

“요제프 님!”

“안드레아 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막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 요제프의 앞으로 안드레와 그의 어린 부제가 들어왔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악(惡)한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요제프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성경을 펼쳐 보여주었다.

“으음.”

안드레아 정도 되는 사제에게는 여러 성물들이 주어지고는 했다.

그중 하나가 성스러운 잉크로 적은 성경이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촛불이 만드는 빛 아래로 성경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비록 글자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마치 무언가 겁에 질린듯한 모습이었다.

“보통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제님께서는 믿음이 강하신 분입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제프는 지금 자신의 주둔지로 의도를 가진 어떤 사악한 것이 침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기사들이 숨을 헐떡이며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행히 보르단과는 달리 검과 갑옷을 챙겨온 모습이었다.

사제 안드레아는 짙은 눈그늘의 사내를 향해 대답했다.

“저는 구마사제(驅魔司祭)가 아닙니다.”

신의 뜻은 하나지만 신에게 다가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것은 타고나는 적성과 발현하는 재능에 달린 것이었다.

“축복과 치유라면 자신 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안드레아는 훌륭한 사제였지만 지금과 같은 악한 존재가 찾아오는 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몬스터 토벌을 따라다니며 스스로 신의 뜻을 행하는 자였으며 그런 안드레아 사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능력과 전사들의 힘을 북돋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대한 신성력을 펼쳐보겠으나 이 정도의 악한 존재라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요제프는 안드레아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눈을 맞췄다.

“움직이지.”

각오를 굳힌 일행이 천막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들에게 보인 것은.

“크아······크아아!”

“아니에요! 난 당신의 아이가 아니에요!”

자욱한 밤안개.

그리고 그 속에서 공포에 질식해 쓰러져 가는 용병들의 모습이었다.

“착란을 일으키는 안개입니까?”

“적어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겠지요.”

요제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연약한 육체였기에.

그나마 심지가 굳은 몇몇 용병들은 정체 모를 여인이 내뱉는 목소리에 홀리지 않은 채 안개를 피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당했군.’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엉망이 되어가는 주둔지를 보며 요제프는 확신했다.

누군가의 사악한 의도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아가야. 나의 아가야.

요제프가 낭패감을 느끼며 입술을 씹는 순간, 용병들의 비명과 어두운 밤안개를 헤치며 서서히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신이시여······.”

희미한 인영이었다.

그러나 존재감만큼은 강렬한 것이었다.

빙글- 빙글-

그것이 한 걸음씩 걸어올 때 마다 일행은 뒷목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 있니?

일행을 향해 창백한 얼굴로 소리 없이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눈가에는 쉼 없이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드디어 찾았구나. 나의 아가.

정작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곳에는 오직 공허한 어둠만이 자리 잡은 여인이었다.

“······.”

요제프는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눈가에 자리 잡은 어둠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9화 16

하얀색의 세계

주둔지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는 반나절은 되는 거리였으나 말을 타고서는 몇 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이랴! 이랴!”

비록 깜깜한 어둠 속에서, 고르지 않은 산길을 달리고 있다 할지라도 자야르의 말은 길을 잃지 않았다.

주인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 최선을 다해 검을 든 소년과 겁많은 사기꾼을 주둔지로 안내해냈다.

“저게 뭐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주둔지에 가까운 언덕 아래에서.

달빛 아래 비친 그곳의 모습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에 갇혀있었다.

“저랬다니까! 그날이 꼭 이랬다고!”

“······.”

블라드는 말에서 내려 안개가 자욱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안개가 너무 짙어 희끗희끗한 형상만 보일 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자! 설마 저기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지?”

“조용히.”

블라드는 손가락을 들어 고트의 말을 막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주변을 파악하는 블라드의 예민한 청력은 이미 호르헤가 인정한 것이었다.

‘비명.’

블라드의 귓가로 용병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두서없는 병장기 소리와 의미 없는 고함들과 함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일이었으나 블라드는 소리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움직이기 전에 네가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부터 확인해라.’

푸른 달빛을 닮은 기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당황하지 마라. 움직이기 전에 나아갈 방향부터 정해라.]

자신의 안에 깃든 목소리 또한 그랬다.

블라드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트 넌 가라.”

“응?”

인생의 모든 것은 방향성의 문제다.

오직 올바른 방향을 아는 자만이 목표를 쟁취할 수 있다.

“대장은? 내려가려고?”

“······.”

그리고 블라드는 목표를 찾아내었다.

안개 속 어느 곳에서 누군가가 가냘프게 부르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끊길 듯 끊기지 않았지만, 너무나 연약해 언제든 무너질 것만 같은 소리였다.

“별 의미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다.”

“······응?”

블라드는 약속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충성 대신 신의를 바치겠노라고.

달빛조차 밝히지 못하는 안개 속으로 소년은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이날 밤 걸은 한 걸음은 여태껏 살아왔던 발걸음 중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계약을 지키고 신의를 다한다.

그것은 명예로운 것을 좇는 행위였기에.

그날 밤, 요제프와 한 계약은 블라드의 가슴 속에 빛나는 별로서 남아있는 것이었다.

“갑니다.”

[그래.]

블라드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위태롭게 반짝이는 별을 향해 걸어갔다.

※※※※

“간신히 용병들을 수습한 것도 의미가 없게 되었군.”

요제프는 안드레아의 힘겹게 더듬거리는 설명에도 사태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자야르 경이 아닌 이상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로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안드레아의 뒤에서 어린 부제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찬송가였다.

비록 공포에 얼룩진 목소리였으나 신을 부르는 그 찬란한 음률은 안드레아의 신성력과 섞여 자욱한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가! 내 아가!

자신을 향해 새까만 손을 애타게 내미는 여인 또한 함께.

요제프는 고개를 내려 거품을 문 채 꺽꺽거리고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방법이 없는가.’

도망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었겠으나 빌어먹을 안개는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로 나아가든 여인의 앞으로 당도하게 만드는 안개였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사제 안드레아가 방도를 마련할 때까지 스스로를 방패 삼아 요제프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안드레아 사제의 출중한 축복을 받고 덤벼들었으나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스스로의 세계로 저주받을 것을 내려칠 자격이.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공포에 먹힌 용병들은 와해되었고 자신을 지키던 기사들은 저기 누워 거품을 물고는 쓰러져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렇게 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인가.’

아무리 영민한 요제프라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버티십시오. 요제프 님. 내일의 태양은 반드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너무 멀리 있지만 말입니다.”

비록 안드레아의 신성력에 밀려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여인은 요제프를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요제프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저 여인이 지닌 공허한 어둠과 눈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자신 또한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기사들과 같은 모양새가 되리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나.’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손에는 나무빗이 들려있었다.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 들고 있는 그 나무빗은 예전에 자신이 쓰던 것이었다.

‘누구냐.’

이것은 저주였다.

자신을 목표로 삼은 지독한 저주.

그러나 요제프의 물음에 대답해 줄 자는 이곳에 없었다.

이제 요제프를 지켜줄 기사들은 없으며 가엾은 어린 부제의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기에는 오늘의 밤이 너무 버거웠다.

다가올 결과를 짐작한 요제프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어린 부제의 찬송가가 끝나는 순간 죽음이 달려들 것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돌파할 방법을 찾을 수 없자 요제프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

마음속으로 각오를 굳힌 채 침통한 표정과 함께 눈을 뜬 요제프.

“음?”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이는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꺄아아아악!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뒤에서 시작된 빛이었다.

“너는······.”

여인의 몸을 반으로 가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줄기의 검로.

그 검로의 끝에는 달빛 없이도 빛나는 금발 소년이 있었다.

오른쪽 눈을 감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흐아아압!]

장식 없는 검 끝에서 시작된 하얀색의 뇌격이 안개를 가르며 밤하늘을 밝혔다.

※※※※

[저건 저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평범한 검으로는 가를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혹시 지금 오러를 쓸 수 있겠나?]

“장난해요?”

목소리는 안개 속에서 요제프를 노려보는 여인을 보며 대략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혹은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만이 저주로 만들어진 것을 깰 수 있다.]

“안드레아 사제님은요?”

[그는 신실하지만 구마사제는 아니야. 차라리 평범한 이단심문관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젠장.”

여인의 눈이 닿지 않는 천막의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블라드는 방법이 없다는 목소리의 말에 자그맣게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어째요?”

비장한 각오로 요제프를 위해 안개를 헤치고 왔건만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다니.

이것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뭔데요?”

블라드의 물음에 목소리는 자신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잠깐 너의 몸을 빌리는 거다.]

“······되겠어요?”

언제나 수련의 일환으로 블라드의 몸을 빌리고는 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감각을 알려주기 위해 잠시 몸을 빌리는 것과 오러를 담은 검을 휘두르기 위해 몸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 몸을 빌려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겠어요? 설사 성공한다 해도 잠깐은 움직이지도 못 할텐데.”

[네 몸이니 네가 결정해라. 솔직히 추천은 안 한다.]

목소리는 자신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몸으로 구현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다만 방법이 있다면 오직 이것뿐이라 말해줄 뿐이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 거네요.”

[그것이 검의 길이기도 하지.]

블라드는 잠시동안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것을 각오할 이유가 있는가?

“하죠.”

[괜찮겠나?]

블라드는 가죽 갑옷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요제프가 내주는 기회는 다시는 내 인생에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블라드는 각오했다.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기로.

“여기서 도망치면 또다시 뒷골목의 블라드가 되고 말 테니까.”

[······.]

눈앞의 정체 모를 여인보다도.

실패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도.

블라드는 그것들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제일 무서워요.”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소년은 그중 어떤 것에도 대답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죠.”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이를 악문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곳에는 달이 떠 있을 터였다.

언젠가는 부숴야 할 푸른 달이.

[바로 앞에서.]

“알았어요.”

소녀의 눈물로 산 검을 치켜든 블라드는 가만히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의외성이란 예측을 뛰어넘고 예상을 깨부수는 움직임에서 나온다.

‘나를 못 봤어.’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은 블라드를 눈치채지 못했으며.

‘흐읍!’

눈치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내지르는 일격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블라드는 안개 속을 헤치며 뛰쳐나갔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돌파해나가는 블라드의 움직임은 마치 활에서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아가?

순간, 블라드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여인의 목이 기묘하게 꺾여 돌아갔다.

살아있는 자라면 돌릴 수 없는 그런 각도였다.

[지금!]

“큭!”

순간적으로 맞닥뜨린 여인의 눈동자는 너무나 깊고 어두워서 마치 물에 잠겨버린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흐으으!”

신의를 맡긴 대상에게 자신이 한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소년은 최선을 다해 오른쪽 눈을 감았다.

[으아압!]

그리고 지금부터는 이름 모를 자의 세계였다.

그의 세계는 폭풍과 번개.

그리고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뇌우(雷雨)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한 줄기의 뇌격이 여인이 흘리는 검은 눈물을 갈랐다.

하얀색의 세계가 검은색의 세계를 갈라내었다.

※※※※

단 한 순간의 번쩍임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혔다.

요제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블라드!”

휘몰아치는 번개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가르며.

“크흡!”

블라드는 무너지듯 땅바닥을 굴렀다.

각오한 것이지만 찾아오는 고통은 블라드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끄아······끄아아.”

블라드는 뒤늦게 찾아오는 격통에 온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빌린 몸으로 오러를 사용한다는 것.

그것은 육체의 주인인 블라드에게 엄청난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젠장!”

요제프는 지금 블라드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번쩍인 것은 분명 오러의 흔적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큰 대가를 치른 것이 분명했다.

“요제프 님!”

“찬송가를 멈추지 마십시오!”

-아가, 아가!

저주받은 여인은 갈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땅을 기며 공허한 눈빛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기어가고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블라드가 있는 방향이었다.

“끄으으으!”

“눈을 감아라! 저 여인을 보지 마!”

요제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음하고 있는 블라드를 향해 뛰어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블라드가 방금 보여준 번쩍임은 지금 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가능성이었으니까.

찬란한 그것을 차가운 죽음 앞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를 잡아라!”

바로 뒤에서 여인이 내뿜는 한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요제프는 멈추지 않았다.

“크으!”

“젠장!”

힘이 약해 블라드를 온전히 들 수는 없었으나 어떻게든 잡아끌어 신성력이 미치는 범위까지 가야만 했다.

“끄으으!”

순간, 여인의 새까만 손이 발목을 스쳐 지나갔지만, 요제프는 타오르는 격통에도 블라드를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다.

“요제프 님!”

갑작스레 튀어 나간 요제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보르단이 재빨리 둘을 잡아당기며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크아! 젠장!”

“컥, 커억!”

두 명의 젊은이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바닥을 굴러댔다.

-아아아아!

둘을 놓친 여인은 마치 아이를 잃은 어미처럼 양손을 크게 펼치며 격렬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디 있니! 어디 있어!

몸이 반으로 갈라진 여인이었으나 죽은 자에서 비롯된 존재여서 그런지 쉽사리 자신의 존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아가. 제발, 제발, 제발.

어쩌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파요. 내 아이. 찾아주세요. 제발.

“흐윽. 흐으으윽.”

옆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놀란 요제프는 자신의 옆에서 뒹굴고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블라드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치 대여섯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오염되었나!’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요제프는 블라드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었다.

“사, 사제님.”

“블라드! 정신 차려라!”

착란 상태에 빠진 것인지 블라드는 요제프의 부축을 뿌리친 채 떨리는 몸으로 안드레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힘겹게 무릎 꿇었다.

“제, 제 검에 축복을 주세요. 저 여인을 보내야 해요. 보내줘야 합니다.”

“······알겠네.”

안드레아 사제 또한 블라드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이었지만 소년의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기에.

“검을 주게.”

안드레아 사제는 기도를 멈추고는 블라드의 검을 바라보았다.

장식 없는 검.

그 검의 날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확실한 축복일세.”

“······감사합니다.”

신실한 사제의 피가 장식 없는 검을 타고 내려갔다.

고요한 밤.

어린 부제의 찬송곡도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안타까움 외침도 잦아든 밤.

오직 소년이 만드는 힘겨운 발걸음만이 이곳에 울려 퍼지는 전부였다.

“미안합니다.”

-찾······아주세요.

달려드는 도중 아주 잠깐이었지만 블라드는 여인의 공허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는 끔찍한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어두운 감옥 아래 갇혀있는 여인들.

하나씩 죽어가는 그녀들의 어리고 여린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이의 어머니는 울면서 외쳐대었다.

-아가, 내 아가.

창살 밖 차가운 바닥 아래서 천천히 죽어가는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하아······흐으······.”

흐르는 눈물과 함께 여인의 앞에 무릎 꿇은 소년.

아이를 찾는 어머니를 향해 소년은 검을 치켜들었다.

비록 격통에 벌벌 떨리고 꼬인 근육에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육체였지만 해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기에.

“이제 그만 쉬어요.”

푸욱-

여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보며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어디 있니.

소년의 검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녀의 흐르는 눈물이 차가운 땅을 적시고 고여갔다.

끝내 아이를 찾지 못한 어머니는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0화 6

바예지드 가문으로 (1)

어두운 밤.

강 너머에서.

충직한 기사는 최선을 다했다.

미약한 가능성이나마 보태기 위해 블라드를 보냈고 자신을 옭아매려는 옛 동료를 가차 없이 베어낸 후.

“끄으으윽! 커억!”

그 뒤에서 죽음을 조종하는 자를 찾아 심장을 끄집어냈다.

“······.”

너무나 쉽게 무너진 죽음을 조종하는 자를 보며 그 또한 누군가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자야르는 고민하는 대신 주군을 위해 뛰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얼음이 부서진 강을 헤엄치고 왔던 길을 다시 달리며.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이 자신의 얼굴을 세차게 때려도 자야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기사님!”

도중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돌아온 고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말을 집어 타고 달려오길 몇 시간.

마침내 주둔지에 도착한 자야르의 눈에 비친 광경은 예상했다시피 습격으로 인해 엉망이 된 주둔지와.

“왔는가?”

바위 위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모습이었다.

요제프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한 자야르는 그제야 비로소 안심하고는 이제껏 쌓아왔던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험한 일을 겪어서인지 안 그래도 짙게 드리워진 요제프의 눈그늘은 얼굴의 반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지.”

요제프는 자야르를 향해 기운 없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고는 다시 먼 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번 토벌은 완전히 망했네.”

“······면목이 없습니다.”

자야르는 고개를 숙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떨궜다.

낯선 사내의 머리통과 그가 들고 있던 검은색의 나무함이었다.

“그놈인가?”

“아마도 그렇습니다.”

많은 것이 생략된 물음과 대답이었으나,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요제프와 자야르에게는 충분한 대화였다.

“망하긴 했는데······.”

요제프는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겠군.”

“그 녀석은 쓸만했습니까?”

“쓸만했냐고?”

요제프는 자야르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찾은 것 같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야르는 웃고 있는 요제프의 얼굴을 보았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미소 짓는 그 웃음은 마치 어렸을 적 요제프를 떠올리게 했다.

“나 대신 검이 되어줄 사람을.”

어느새 짙은 눈그늘을 지닌 청년이 된 요제프는 자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애송이는 어떤 검보다 빛나는 검일세.”

그 말과 함께 요제프는 아무런 근심하나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버거웠던 어젯밤, 그토록 바랐던 내일의 태양이었다.

“춥군. 이만 돌아가지.”

“네.”

쟈아르는 한쪽 발을 절뚝거리는 요제프를 부축하며 천막으로 안내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등지며 두 명의 남자가 걸어갔다.

토벌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요제프는 미소 짓고 있었다.

비록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

“끄응.”

블라드는 꼬박 3일을 누워있었다.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구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이 정도로 반동이 클 줄은 나도 몰랐다.]

자격 없는 소년은 남의 세계를 억지로 빌려와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어쩔 수 없죠. 뭐.”

그로 인한 대가로 이 정도의 반동은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바닥에 누워 차갑게 굳어가고 있을 테니까.

“마차에 실려서 데굴데굴 굴러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요제프란 자가 너를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다.]

요제프는 앓고 있던 블라드를 위해 떠나려는 용병들을 붙잡고는 주둔지를 유지시켰다.

감당하기 힘든 습격이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으나 요제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바르나로 복귀하는 도중에라도 다시 들이닥칠 터.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움직이는 것이 낫다.”

그렇게 벌어낸 3일의 시간 동안 요제프는 최선을 다해 주둔지를 수습하고 현장 조사를 마쳤다.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

그 결과 요제프는 자신의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보고할 만한 여러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기존에 맡은 몬스터 토벌 임무보다 지금 요제프가 들고 가려는 보고서가 더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춥다.”

코를 훌쩍거리며 밖으로 나선 블라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쩍 적어진 천막의 수와 휑해진 주둔지. 그리고 묘한 침묵이 감도는 용병들의 모습은 마치 패잔병들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대장!”

조용한 주둔지 사이에서 블라드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긴 턱의 남자.

“도망가자는 놈이 제일 오래 붙어 있네.”

“당연하지. 바르나로 복귀할 때까지 남아있으면 보수를 올려주겠다는데.”

겁이 많은 사기꾼은 그날 밤 도망치지 않았다.

혼자 위험을 등지고 달아나는 대신 말을 돌려 자야르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었다.

“내가 대장 살리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기사 나리가 있는 곳까지 찾아간 거 알지? 나중에 진짜 말 잘해줘야 해.”

“······알았어.”

고트는 사기꾼답게 영리한 자였다.

자야르가 서둘러 블라드라도 주둔지로 보낸 것은 자신이 갈 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의도였다.

이것을 눈치채고 있던 고트는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야르의 빠른 복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다시 말을 타고 달려간 것이다.

비록 죽은 자들이 가득했던 강가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 길에서 서성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나의 호의를 무시하고 짓밟지는 않겠지? 아무리 밑바닥에는 끝이 없다지만 그 정도로 인성 파탄이 난 것은 아니겠지?”

“알았다니까.”

이미 지은 죄도 있고 고트가 자신을 위해 힘써준 것도 사실이었기에 아무리 뻔뻔한 블라드라 할지라도 지금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말이라도 해볼게. 뭐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고트는 블라드가 명망 높은 바예지드 가문의 자제에게 자신의 공을 말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가서 볼일 보라고.”

“하. 여전히 매정하시네.”

고트는 자신을 떠나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돈 냄새가 난다.’

고트가 봤을 때 블라드는 가능성의 덩어리 같은 사람이었다.

젊고 능력 있으며 권력자의 관심을 받는 사람.

다시 말해 난 놈이었다.

‘이건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다.’

돈을 벌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가치를 알아보는 것.

고트는 블라드라는 소년이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빚도 지워뒀으니까.”

그 말과 함께 고트는 몸을 돌렸다.

지난밤 만들어진 용병들의 시체를 묻기에는 아직 파야 할 구덩이들이 더 필요했기에.

“음?”

고트와 헤어져 주둔지를 걷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누군가를 보았다.

“사제님.”

안드레아 사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제님?”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일세.”

안드레아 사제는 곤란한 듯 웃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관을 가리켰다.

“아무도 관을 옮겨주려 하질 않네.”

“······.”

지난 밤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기사 로드릭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사망자들이 있었다.

그나마 시신을 수습해 줄 자가 있는 사람은 마차 위에 실려 묘지에 묻힐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이곳에 묻혀 쓸쓸히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관이 또 하나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오오. 역시 자네라면 해줄 줄 알았지.”

안드레아 사제가 가리킨 관은 그날 밤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던 여인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심상치 않은 저주였네. 그래서 바르나로 데려가 조사도 해봐야 하고.”

꺼림칙한 일을 부탁해 미안해서인지 안드레아 사제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너무 딱하지 않은가?”

“압니다.”

블라드는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어린 부제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런 일은 힘쓰는 사람이 하는 게 맞죠.”

“그래도······.”

아직 목이 낫지 않았는지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던 어린 부제는 블라드의 만류에 뒤로 물러났다.

“그날 밤 부른 노래로 부제님은 이미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블라드의 말에 어린 부제는 겸연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끄응!”

블라드는 성치 않은 몸이었지만 혼자 힘으로 관을 이리저리 밀어 수레 위로 올렸다.

가엾은 여인이었다.

누군지도 몰랐고 어찌하여 그런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블라드는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다.

“이리 오게. 혹시 모르니 내가 축복해줌세.”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를 저주의 잔재를 걱정하며 안드레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블라드가 말했다.

“잠시만요. 사제님.”

어차피 더럽혀진 손.

한 번 정도는 더 써먹어도 상관없겠지.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하얀천으로 곱게 둘러놓았던 검은색의 나무함을 들었다.

모두가 시선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불길해 보이는 나무함.

그 나무함은 끔찍한 저주의 주체였으며 지난 밤 여인이 간절히 찾던 것이었다.

“블라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끼이익-

제대로 봉인되지 않은 관 뚜껑이 힘없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렇게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반으로 갈라진 여인의 시체.

그리고 검은색 눈물 자국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사제님?”

“하시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블라드는 딱딱히 굳은 여인의 손등 위로 검은색의 나무함을 올려놓았다.

죽음을 조종하던 자가 들고 있던 나무함 안에는 자그마한 시체가 들어있었다.

“여기 있어요. 당신의 아기.”

저주를 위한 영매로서 살해당한 여인과 아이.

비록 죽어서였지만 여인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자신의 아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굳어있던 여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못까지 박아드릴까요?”

“그래 주면야 고맙지. 내 확실하게 축복해주겠네.”

안드레아는 아직 불편한 몸임에도 가련한 여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블라드를 보며 속으로 그를 위한 기도문을 읊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여인을 위해 신실한 사제와 신의를 지킨 소년이 마지막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따악- 따악-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종소리처럼.

주둔지 한가운데서 블라드가 내려치는 망치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저 왔습니다.”

주둔지를 떠나는 마지막 밤에 요제프는 조용히 블라드를 불렀다.

“앉지.”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자야르를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술 마실 줄 아나?”

“제가 예전에 일하던 곳이 창관 겸 술집이었거든요.”

“마실 줄 안다는 말이군.”

요제프는 블라드의 앞에 놓인 잔에 맑은 갈색빛이 나는 술을 따라주었다.

“위스키인가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지.”

블라드는 술에서 퍼져나오는 달콤한 바닐라 향을 맡으며 보통 비싼 술이 아닌 것을 확신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요제프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충성 대신 신의를 바치기로 나와 계약을 했었지.”

요제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비록 말뿐인 계약이었지만 말이야.”

요제프는 블라드의 실력뿐만 아니라 소년이 가지고 있는 곧은 심지에도 놀라고 있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인재다.’

쓸만한 인재라 평가했지만 지난 밤 보인 블라드의 행동은 그 평가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어이없게도 검을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녀석이 오러를 뿜어내었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휘둘렀다.

죽음과도 같았던 저주 어린 여인을 향해서.

블라드라는 소년은 쓸만한 녀석이 아닌 반드시 가져야 하는 인재였다.

“······.”

블라드는 귀한 술을 앞에 두고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런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자야르는 약 올리듯 비싸 보이는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그 계약을 이행할 차례겠군.”

왕과 귀족 간의 봉신 관계도.

주군과 기사와의 충성 관계도 결국은 무언가 주고받음의 관계였다.

그리고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목숨을 구명 받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교육받았네.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말이지.”

요제프는 들고 있던 술잔을 블라드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를 바예지드 가문으로 초대하고 싶군. 그곳에서 이번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네.”

“······.”

블라드는 요제프가 건네는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조금의 각오가 필요했다.

“영광입니다. 요제프님.”

“마시지.”

그리고 소년은 언제나 지금의 각오를 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뒷골목이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리라.

요제프의 허락이 떨어지자 블라드는 양손으로 잔을 들고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뒷골목에서 파는 싸구려 럼주로 나의 일생을 마치지는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던 지난날이 있었고 그 다짐은 오늘 이루어졌다.

“맛있네요.”

“귀족의 술이지.”

제대로 숙성시켜 향이 나는 위스키는 블라드가 여태껏 먹어 본 술 중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처음 맛보는 위스키의 맛만큼 소년의 세계 또한 넓어지고 있었다.

2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1화 26

바예지드 가문으로 (2)

도시 바르나로 돌아가는 귀환길.

요제프는 블라드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한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토벌대를 이동시켰다.

비록 휘하의 있는 기사 2명은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들은 하루 이틀의 요양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단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했다.

“내 생각은 이렇네. 이것은 직접적으로 나를 죽이기 위한 의도보다는 무언가를 보여주려 함이 아니었을까.”

“······.”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블라드는 가만히 요제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요제프가 타고 다니는 마차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자신의 기사들에게 내어주었기에 남은 마차는 단 하나뿐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간단하지. 들인 품에 비해서 마무리가 너무 허술한 것이야. 자야르를 떼어놓고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데 성공했다면 당연히 빠르게 나를 해치웠어야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그렇죠.”

그 결과 블라드는 귀족이자 상관이며 지휘관인 요제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말이 많은 사람이로군.’

지난밤의 사투로 블라드와 한 단계 가까워진 요제프는 기꺼이 자신의 본모습을 내비쳐주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본모습을 전부 보여준 것은 아니겠지만 남들이 본다면 블라드는 분명 요제프의 총애를 받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도 엄청 많은 사람이야.’

제미나도 말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버틸 만은 했었다.

닥치라고 말하면 닥치기는 했었으니까.

그러나 요제프에게는 감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살고 있나.’

사내의 수다를 들으며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괜시리 울적해진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마차에 나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 바라본 그곳에는 평안한 풍경은커녕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자야르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상대해 드려라.’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종자 주제에 모시는 기사는 말을 타게 만들고 본인은 편안하게 마차를 타고 가고 있었으니 블라드로는 할 말이 없었다.

‘젠장.’

자야르의 눈빛에 괜히 찔렸던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반대쪽 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식을 위해 도망친 그곳에서도 블라드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요란한 손짓과 발짓으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긴 턱의 남자.

‘내 얘기를 해! 내 말을 하라고 대장!’

반대쪽 창에는 어서 자신의 공을 요제프에게 말하라며 닦달하는 고트가 있었다.

‘······진짜 개 같다.’

앞에서는 시끄럽게 떠들고 양옆에서는 매섭게 쪼고 있으니 블라드는 차라리 이곳에서 나가 맘 편히 걷고 싶을 뿐이었다.

“생각해 봐라. 왜 그럴까?”

“······술 한잔하면 생각이 날 것도 같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 이야기야.”

요제프는 블라드가 자신의 위스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술병을 빼내 자신의 뒤로 두었다.

“나도 용돈을 받고 사는 처지라.”

“사람 사는 게 어디서나 다 똑같군요.”

“어서 스스로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물음 때문인지 어떻게든 대답을 하려 머리를 쥐어짜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고는 요제프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스스로 빛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검을 다루는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 지식, 예의 등등.

그리고 눈앞에 있는 금발 소년은 분명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 모든 것에 있어 부족한 편이었다.

‘직접 검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말이지.’

허약한 몸이기에 직접 검을 알려줄 수는 없겠지만 대신 다른 것을 가르쳐줄 수는 있을 것이다.

요제프란 사람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뭐······경고 같은 거 아닐까요? 요제프님을 죽여서 바예지드 가문에게 보내려는 경고? 뭐 못 죽여도 상관은 없다?”

“계속해봐.”

“죽인다, 상관없다 이런 말 해서 화나신 건 아니죠?”

“그다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혼자 술병을 열어 마시는 요제프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울상을 지었다.

“당연히 제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한 번 생각해봐.”

비록 마차에 앉아 가고 있었음에도 블라드는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

“생각해 보라니까.”

요제프는 괜스레 블라드의 눈앞에서 위스키 병을 흔들며 말했다.

생각해라.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지만 말고 너의 것으로 걸러 판단이라는 것을 해라.

원인과 결과, 주변의 단서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논리적인 추론.

그것들을 통해 요제프는 블라드를 자야르 못지않은 훌륭한 판단력을 가진 기사로 키워보고 싶었다.

소년의 가능성은 빛나고 있었으므로.

“모르겠는데······.”

블라드가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바르나로 향하는 귀환길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마치 요제프가 생각한 것처럼 진짜 노리는 대상은 그가 아니라는 것처럼.

※※※※

도시 바르나.

바예지드 백작령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도시 중 하나.

그리고 몬스터 토벌대를 모집한 도시이기도 한 곳이었기에 이곳에 도착한 요제프는 용병들을 해산시키고 그곳의 시장에게 토벌에 관한 보고를 해야만 했다.

임명직인 시장보다 백작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절차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바예지드 백작은 아무리 자기 아들이라 할지라도 경우를 넘어서는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하고는 했다.

“하루 정도는 여기서 묵어야겠군.”

요제프는 바르나에 속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행정적인 절차를 마친 후 바예지드 가문의 본가가 있는 스투르마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금의 실패를 만회할 만한 새로운 계책을 구상해야 할 것이었다.

“바르나는 처음인가?”

“어느 곳에 가도 처음일 겁니다.”

“이제 보니 촌놈이었군.”

평생을 쇼아라 근처에서만 활동했다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는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럼 오늘 하루는 휴가를 줄 테니 도시 구경이라도 하고 오지.”

“길 잃어버리지 마라. 애송이.”

“······.”

블라드는 자야르의 비웃음을 보며 발끈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이래저래 경험과 식견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자야르는 네가 마음에 드나 보다.]

‘조금만 더 마음에 들면 죽이려 들겠네.’

목소리의 어이없는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짤랑거리는 주머니를 흔들었다.

“이 도시에는 뭐가 있나~?”

자야르의 태도가 어쨌건 간에 돈을 쥔 블라드의 말에는 자연스레 운율이 실렸다.

요제프가 준 것은 일종의 금일봉이었다.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블라드가 바르나라는 도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활동비가 필요할 테니까.

“역시 길거리 거지보다 부잣집 개가 더 호강한다더니만.”

[흥청망청 쓰기보다 다음을 기약할 것들을 사놔라.]

“엥?”

오랜만에 뭣 좀 잔뜩 집어 먹어볼까 했던 블라드였지만 목소리는 그런 의도를 간파했는지 미리 경고했다.

[만반의 준비는 여벌의 목숨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것을 잊지 말도록.]

“사방에서 잔소리들 뿐이네.”

비록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에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었다.

간신히 쇼아라를 빠져나와 그저 검 하나만을 짊어 든 채 겨울 숲을 헤맸던 지난날.

만약 주변을 서성거리던 세 명의 용병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블라드는 얼어 죽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갖춰놓는 것이 좋을 거다.]

“그러면 뭘 사야 하나~.”

목소리의 조언을 곱씹으며 이제 막 시청을 빠져나가려는 블라드였으나.

“응?”

조심스레 그의 옷깃을 잡아끄는 누군가가 있었다.

“블라드 님.”

주근깨가 가득한 안드레아의 어린 부제였다.

“부제님 무슨 부탁하실 일이라도?”

어린아이를 귀찮아하는 블라드였지만 지금 자신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어린 부제만은 예외였다.

아직 입고 있는 부제의 복장이 어색할 정도로 작은 아이는 지난 밤 공포에 맞서 자신의 의무를 다한 아이였기에.

“오늘 딱히 갈 곳이 없으시면 사제님께서 초대하고 싶으시답니다.”

“오.”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부제의 뒤에서 웃음 짓고 있는 안드레아 사제를 확인했다.

“왜 부제님을 통해 저를 찾으셨는지 알겠군요.”

“······죄송합니다.”

어린 부제의 뒤에 숨어 겸연쩍게 웃고 있는 안드레아 사제.

그의 옆에는 낯익은 관 하나가 뉘어 있었다.

“여전히 들어줄 사람이 없답니까?”

“이 여인도 자네가 배웅해주기를 원하지 않을까?”

허허 웃는 안드레아 사제를 보며 블라드는 더는 뭐라 내뱉을 말도 없었다.

“당나귀나 모시죠. 제가 뒤에서 받치면서 갈 테니.”

안드레아 사제와 블라드, 그리고 어린 부제는 그렇게 바르나의 대로를 따라 수레를 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쇼아라와는 많이 다르군.’

비록 뒷골목에서 생활했던 블라드였으나 쇼아라라는 도시 자체가 주는 분위기 정도는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르나라는 도시는 쇼아라에 비해서 무언가 많이 가라앉은 듯한 모습이었다.

조용하다, 차분하다, 큰 소리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치 새벽녘 거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교회 쪽으로 다가갈수록 이런 분위기가 더 짙어질걸세. 바르나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도시거든.”

“그렇군요.”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쇼아라에서도 교회가 있는 곳 근처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조용히 다니고는 했으니까.

“다 왔네.”

“우와.”

블라드는 눈앞에 있는 건물을 보며 안드레아가 말했듯이 바르나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도시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쇼아라에 있는 교회와 비교해서 두 배 정도는 커 보이는 건물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꽤 크네요. 쇼아라의 교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바예지드 백작령의 주도는 스투르마이지만 종교적 중심지는 이곳 바르나이기 때문이지.”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온 김에 저녁이라도 들고 가지.”

“그렇다면 사양 않고······.”

“그런 김에 지하까지 내려다 주면 더 고맙고.”

“······온 김에 마무리는 짓고 가는 게 낫겠죠.”

어린 부제에 손에 붙들렸을 때부터 안드레아 사제의 손아귀에 있던 블라드는 별수 없이 낑낑거리며 사원 앞에 관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을 텐데.”

‘그걸 아는 사람이.’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으나 블라드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주둔지에서 얻어먹은 값을 해야지요.”

“내가 사람을 참 잘 봤네.”

어쩌면 지금의 상황에서 불만을 가지는 것조차 배부른 투정일지도 몰랐다.

안드레아 사제 정도나 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특권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에.

“가엾은 여인.”

“······.”

이제야 안식을 얻을 자리에 다다른 관을 쓰다듬으며 안드레아 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와도 같아서 무거우며 또한 깊은 것이지. 누군지 알 수 없는 자는 그것을 이용했네.”

아직 완벽히 조사해낸 것은 아니었지만 정황상 안드레아는 이 여인이 사악한 흑마술에 의해 희생이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가엾은 모성애를 이용한 지독한 저주야. 여기서부터는 내 영역이 아니긴 하지만 바르나의 교회는 최선을 다해 배후를 밝힐걸세.”

“사제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안드레아 사제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전에 기도라도 하고 가시게.”

“저같이 근본도 없는 놈이 감히 교회에서 기도를 드려도 될까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은 교회나 시청, 혹은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건물들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생을 뒷골목에서 살아왔던 블라드 또한 그랬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이곳이 어색하고 불편했으며 무엇 보다 허락받지 못한 곳에 있다는 생각에 주눅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런 블라드의 손을 붙들고는 굳이 예배실까지 안내하기 시작했다.

“잠시 기도하고 있게나, 내 잠시 들릴 곳이 있어서.”

그리고는 자신의 어린 부제와 함께 블라드를 내버려 두고는 홀로 자리를 벗어났다.

“······.”

“기도할까요?”

안드레아의 갑작스러운 방치에 괜히 자신이 미안해지는지 어린 부제는 콧등을 찡그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식으로 예배하는 것은 처음이라······.”

“제가 알려드릴게요.”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지고 싶었던 블라드였으나 이제는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지금은 기도하는 리만으로 행세했던 업보를 갚아야 할 때였다.

[참으로 알찬 휴가군.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했다고 말하면 요제프가 아주 좋아할 것이다.]

‘온종일 남 좋은 일만 하는구만.’

잠깐 잡았던 검을 통해 목소리는 실로 흡족하다는 말투로 블라드에게 말을 걸었다.

“흐, 흐음.”

하는 수 없이 블라드는 무릎을 꿇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 채 어린 부제의 낭랑한 기도문을 더듬거리며 따라 했다.

그러기를 한 시간여쯤.

꿇고 있던 무릎이 서서히 저려올 때쯤 뒤에 있던 예배실의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렸나?”

“······아닙니다. 처음 하는 예배라 모든 것이 새롭던데요.”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아직 나도 지루하기 그지없는데.”

“······.”

기도를 지루하다고 말하며 사람 좋게 웃고 있는 사제를 보며 블라드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것 때문에 늦었네. 받아 가게.”

“무엇입니까?”

블라드는 안드레아 사제가 내어주는 자그마한 나뭇조각을 받아들었다.

“신분패일세.”

“네?”

안드레아의 말에 멍하니 서 있던 블라드는 서둘러 쥐고 있던 패를 살펴보았다.

손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나뭇조각.

검은빛을 내는 그 나무패는 단단해 보였으며 안에는 자그마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블라드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손에 들려있는 신분패를 읽기 시작했다.

“출생······지 쇼······아라.”

알고는 있었지만 익숙지 않은 글자를 더듬거리며 읽어내려가며.

“이······름 블라드.”

자신의 이름을 읊조린 순간 블라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자그마한 나뭇조각에 존재의 증명이 들어있었다.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한 뒷골목의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요제프 님이 알아서 해주셨을 테지만 사실 신분 증명은 교회에서 하는 것이 가장 효력이 좋네. 주님의 은총은 전 대륙에 펼쳐져 있으니까.”

안드레아 사제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신분패를 돌려 뒷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오직 단 한 곳에서만 쓸 수 있는 문장이 크게 박혀 있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신. 그분의 이름을 사역하는 교회의 문장이.

그리고 그 밑에 쓰여 있는 누군가의 이름.

“보증······인. 사제 안······드레아.”

블라드는 자신의 신분패에 쓰여 있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읽었다.

자신을 보증하는 사람.

자신의 잘못을 함께 해줄 사람.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안드레아 사제를 바라보았다.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나는 자네의 보증인이니.”

“······사제님.”

“이제 기도하지. 마침 신께 가장 가까운 자리로군.”

블라드는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저 안드레아를 따라 신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여기 오늘 새롭게 소개해 드릴 어린 양이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넓은 품으로 안아주시길 바라옵고······.”

뒷골목의 쓰레기.

누가 죽어도 쳐다보지도 않고 기억조차 해주지 않을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 새롭게 태어난 당신의 어린 양인 쇼아라의 블라드를 가엾게 여기시어······.”

오늘 블라드는 소중한 보증인을 앞에 두고 주님의 아래에서 자신의 증명을 고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거대한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했다.

오늘부터 그는.

뒷골목의 블라드가 아닌.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당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블라드는 오늘 세상을 향해 당당히 디딜 수 있는 뿌리를 가졌다.

오색 창연한 색유리를 통해 내려오는 황혼의 빛이 소년의 금발을 따사롭게 감싸고 있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2화 13

바예지드 가문으로 (3)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다가오는 시점.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에 겨울내 얼어있던 눈이 녹고 여태껏 잠들어 있던 것들이 빼꼼히 고개를 드는 시기.

“젠장.”

다시 말해 길은 진창이 되고 마차 바퀴는 툭하면 빠지는 그런 계절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뭐해?”

“······.”

말 위에서 고개를 까닥이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터덜터덜 마차의 뒷바퀴 부분으로 걸어갔다.

자야르는 블라드의 몸 상태가 정상이 된 것을 확인한 후부터는 틈만 나면 대련이나 잔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칠게.

마치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귀족이 타는 마차라 무겁기도 엄청 무겁네.”

“그래도 이번에는 크게 안 빠졌어. 대장.”

“나를 언제까지 대장이라 부를 셈이야?”

“이름을 못 부르게 하니까 그렇지.”

몇몇 하인들과 함께 온몸에 진흙을 묻혀가며 마차 바퀴를 빼고 있었지만 고트는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좋냐?”

“그럼 당연히 좋지.”

고트는 웃음 지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고트의 판단은 맞았다.

블라드는 될 놈이었고 그런 녀석 옆에 있으면 뭐라도 먹을 것이 떨어지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너도 따라와라.’

바르나에 묵었던 마지막 밤에 블라드는 고트가 기대하고 고대하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너에게 보상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빈털터리거든.’

‘영광입니다. 요제프 님!’

말을 타지 못하는 블라드를 주둔지로 시기적절하게 데려왔으며 사태의 해결을 위해 자야르까지 데려온 고트의 이야기를 들은 요제프는 그 또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주겠노라 말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 고트는 스투르마로 향하는 행렬에 합류해있는 것이다.

“감히 올려다보기도 힘들 백작가, 그것도 북부의 실세라 말하는 바예지드 백작 가문에 가는 건데 당연히 좋지.”

고트는 요제프가 내주는 보상만을 바라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기꾼이었으며 그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거기서 내 쓸모를 내보이면 요제프 님이 나를 써주시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용병으로 살면서 불안한 삶을 이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냥 닥치고 밀면 안 되냐.”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사용인! 이 정도만 해도 평민으로서는 출세했다 할 수 있지.”

“그만 닥치고 마차나 밀라니까. 줘 패버리기 전에 제발.”

블라드만큼이나 기회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고트였기에 힘겹게 마차를 밀고 있었어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기 힘든 것이 세상이었으니까.

아무리 실력이 있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운이라는 끈 한 자락이 모자라 주저앉고 마는 이들이 한 무더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블라드와 고트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기회를 잡을 대가를 확실하게 치러냈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날 밤 블라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얀색의 세계를 불러냈으며.

고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야르를 데려오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었다.

모두가 지금을 위해서였다.

“굼벵이들아! 오늘 여기서 온종일 뻗댈 셈이냐!”

그렇기에 둘은 지금 자야르의 욕을 들어가며 진창에서 마차를 밀고 있는 것이다.

“크흐흐흐!”

‘미쳐버리겠네. 진짜.’

뒤에서 욕을 하며 재촉하는 자야르와 옆에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나도 알긴 하는데!’

목소리의 조언에도 블라드는 들끓는 화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씨발.”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냐.”

“아뇨.”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나지막한 욕설에 자야르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만 블라드는 눈치를 보고서는 곧바로 옆에 있는 고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

“지금 웃음이 나와?”

블라드는 한참 피가 끓는 17살이었으며 평생을 뒷골목에서 난폭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웃지 말고 밀라고. 난 더 얻어맞기 싫으니까.”

“밀고 있잖아······.”

아직 블라드는 기사가 되기에는 먼 소년일 뿐이었다.

아직은.

※※※※

바예지드 백작령.

3개의 도시와 12개의 마을을 포함하고 있는 바예지드 가문의 영지.

블라드가 태어난 도시인 쇼아라.

이번 몬스터 토벌을 주도한 도시인 바르나.

“이곳이 스투르마인가요?”

“그렇지. 나의 본가가 있는 곳이지.”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곳이 바로 바예지드 백작령의 주도(主都)인 도시 스투르마였다.

“오.”

블라드는 새롭게 보는 도시의 전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고도 거대한 성벽이었다.

“진짜 크네.”

쇼아라도 성벽이 있긴 했지만, 이곳만큼 크고 높지는 않았다.

“음.”

블라드는 뒷골목 출신답게 자연스레 저 도시의 어느 곳을 뚫어야 기가 막힌 개구멍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성벽이 저렇게 클만한 이유가 있지.”

블라드가 생각에 빠진 눈으로 스투르마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자 요제프는 옆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오해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식견이 부족한 블라드에게는 모든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저 성벽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바예지드 가문의 굳건함을 보이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지.”

바예지드 가문의 역사는 투쟁의 연속이라 할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때가 되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과 야만인들.

그리고 거친 북부의 풍토답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다른 영지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을 감내한 성벽의 모습이 저기에 있었다.

“바르나랑은 또 다른 모습이네요”

“그곳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도시지. 아버지가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블라드도 나름 도시 출신이기는 했지만 여태껏 보아온 도시마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어린 새는 무엇을 봐도 신기할 수밖에는 없었다.

“입 좀 다물지. 애송이.”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림도 없지.”

“······.”

입을 헤 벌리고 스투르마를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는 비웃음을 날렸다.

“앞으로도 넌 그냥 애송이다.”

“안드레아 사제님이 들으면 슬퍼하실 겁니다.”

“너는 내 종자지 사제님의 부제가 아니잖아. 뭐라 부르든 내 맘이다.”

“······.”

자신이 가진 첫 번째 종자인 블라드에게 자야르가 쏟는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에 가서 애먼 짓이라도 하면 얻어맞을 줄 알아라.”

“어차피 매일 얻어맞는데요.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자신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당돌한 종자를 보며 자야르는 미소를 지으며 안대를 어루만졌다.

‘기세 하나만큼은 쓸만한 녀석인 것은 확실하지.’

자신의 주군인 요제프는 언제나 쓸만한 기사가 모자란 것에 고통받고 있었고 눈앞의 애송이는 분명 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조각 중 하나였다.

‘게다가 오러까지.’

비록 일인전승의 비밀이라 하며 상세한 것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요제프의 말에 의하면 분명 블라드는 일순간 오러를 내뿜었었다.

그 결과 앓아눕기는 했지만, 일단은 해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가서 혹독하게 굴려봐야겠군.’

오러를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오러를 완벽하게 체득하여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기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재능을 그리고 가능성을 훌륭하게 증명한 녀석이었다.

“가지.”

요제프의 말과 함께 일행은 스투르마의 성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오셨다!”

“길 열어!”

높고 견고한 성벽이었지만 요제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긴 행렬이 있었지만, 요제프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파도가 갈라지듯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오.”

고트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평생을 기다리고 밀려나는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 있어 지금과 같은 경험은 난생처음이었기에.

블라드 또한 눈앞의 광경을 보며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곳과는 다른 곳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확인했다.

“스투마르에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요제프 님!”

“이렇게 든든히 성문을 지키는 바예지드의 병사들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감사합니다!”

요제프의 관례적인 칭찬에도 성문 대장은 큰소리로 답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전원 경례!”

요제프의 마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경비병들은 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결한 바예지드 가문의 핏줄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으며 이 도시를 지배하는 자에 대한 당연한 예식이었다.

그리고 그사이를 블라드 또한 지나가는 중이었다.

“멍청한 녀석! 당장 그거 안 집어넣을 테냐? 애초에 요제프 님의 존재 자체가 통행증이란 말이다.”

“······.”

말 위에서 자야르가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기에.

“넌 들어가서 보자.”

자야르가 뭐라 하건 말건 블라드는 당당히 걷고 있었다.

요제프를 향해 경례하는 경비병들 앞에 자그마한 나뭇조각을 들이대면서.

그 나뭇조각은 사제 안드레아가 만들어 주었으며 블라드의 존재를 상징하는 신분패였다.

“검문 안 해요?”

이제는 개구멍을 드나들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어디서나 당당해도 되는 소년의 작은 반항이었다.

※※※※

자야르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블라드와 고트는 바예지드 가문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허······.”

“대단하긴 대단하네.”

스투르마의 가장 높은 곳.

도시의 모든 곳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져 있던 회색빛의 거대한 저택.

두 명의 평민은 상상 속에서도 보지 못한 진짜 귀족의 저택을 걸어가며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지금부터 너희는 요제프 님의 손님이다. 멍청한 짓이라도 했다가는 요제프 님의 명예에 누가 된다.”

“네.”

“그냥 눈도 내리깔고 걸어라. 촌놈처럼 두리번대지 말고.”

요제프만 걸린 일이라면 진심이 되는 자야르의 경고를 들으며 블라드는 벌어져 있던 입도 닫고 고개도 숙인 채 얌전히 걸어갔다.

‘융단인가? 비단이야?’

물론 바닥만 걷고 있다 할지라도 볼거리는 충분했다.

하얀색 대리석 위에 깔린 푹신한 융단을 밟는 것은 감히 뒷골목의 소년이 꿈도 꾸지 못한 호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블라드는 감히 자신이 이런 비싸 보이는 것들을 밟고 다녀도 되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자야르는 두 명의 촌놈들에게 응접실을 내주며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터 요제프는 이 저택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자신의 무사 귀환과 함께 주둔지에서 있었던 저주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했다.

“시녀들이 다과를 내줄 거다. 그거······아니 그냥 아무것도 먹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괜히 추잡하게 먹다가는 안 좋은 소문 퍼질라.”

“그래도 조금은······.”

“닥쳐.”

그리고 그 보고의 순간에 블라드와 고트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감히 바예지드 백작을 마주할 자격 따위는 없었으며 오직 요제프의 보증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

“······.”

으름장을 놓은 자야르가 사라졌지만 블라드와 고트는 쉽게 긴장을 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너무 깨끗했고 커다랬으며 무엇보다 조용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자 풍경이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옆에 있는 하얀색의 커튼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보는 녀석들이군. 너희는 누구냐?”

“······!”

그리고 이 응접실 안에 자신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아래, 하얗게 널려 있는 커튼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여기서 몰래 농땡이 좀 치려고 했더니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명에게 다가오는 남자.

강인한 기세.

당당한 자세.

그리고 숨길 수 없는 무거운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마치 동부 정글에서 산다는 흑표범이 사람이 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저, 저는 고트라는 놈인데 이번에 요제, 요제프 님이 저한테······.”

“······.”

그리고 블라드는 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보아왔던 또 다른 검은 머리의 사내와 매우 닮은 모습이었기에.

“그래. 너는 고트고.”

검은 머리의 사내가 블라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가 가진 날카로운 눈빛은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을 것만 같았으나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남자의 기세에 대항했다.

뒷골목에서 살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눈빛을 피하면 얕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얕보인 자는 사정 없이 뜯어먹히는 곳이 바로 쇼아라의 뒷골목이었다.

누군가의 기세에 대항하는 것은 블라드에게 있어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는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이름이군.”

검은 머리의 사내는 감히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히 대답하는 금발 소년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눈빛이 살아있고 자신의 기세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요제프가 어디서 쓸만한 녀석을 구해왔나 보군.’

천성이 호쾌한 루트거는 이런 당당한 자세를 지닌 사내를 좋아했다.

“땅콩 줄까?”

그리고 루트거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넉넉한 사람이었다.

루트거는 주머니에서 땅콩 한 주먹을 꺼내어 블라드에게 건넸다.

그러나.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응?”

블라드는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 긴장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해 루트거의 기세에 대항하는 중이었다.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으며 머리는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

감히 자신의 호의를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루트거도 블라드의 반응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거 맛있는 건데······.”

“······.”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트는 지금의 사태가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가 바예지드 가문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바로 백작의 첫째 아들인 루트거의 호의 어린 땅콩을 거절한 일이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3화 13

바예지드 가문으로 (4)

사각- 사각-

깃털펜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집무실 안.

그곳에 있는 집기들은 하나같이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으나 화려하게 치장되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블라드라고?”

“네. 아버지.”

조용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동안은 너의 어머니가 내어준 자야르 말고는 신통한 녀석이 없었지.”

“······.”

선 굵은 눈썹, 굳게 닫힌 입술, 그리고 반백이 되어버린 꼿꼿한 검은 머리.

그러나 형형하게 빛나는 백작의 눈빛이 점점 늘어가는 흰머리를 노화의 상징이 아닌 경험의 증거로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그 녀석을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로 손색없이 키운다면 상을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너의 장점이 검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곳이 바예지드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마라.”

“······네.”

상을 준다 말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제대로 된 기사를 만들거나 영입하지 못한 요제프를 책망하는 말이기도 했다.

“······몸은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가는 길에 너의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거라. 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

“네.”

요제프는 모든 보고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는 아버지를 보고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요제프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바예지드 백작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가보거라.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편히 쉬십시오.”

요제프가 예를 갖추며 나가는 동안.

“······.”

페테르는 자신의 아들이 살짝 발을 절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약이라도 지어줘야겠군.”

“그렇게 하시면 기뻐할 겁니다. 옥사나 님께서도요.”

“제 아들이라면 끔찍이 챙기는 여자지. 요제프가 용케 자립심을 갖춘 것은 오직 그 녀석의 심지가 굳기 때문일 거야.”

페테르 바예지드.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5대 가주이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지고 있기에 아들의 앞에서도 쉽사리 아버지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제프의 보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깊이 받아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것들의 연속입니다.”

“음.”

페테르는 다시 한번 요제프가 작성한 보고서를 들어 읽어내렸다.

떨리는 촛불 아래 비치는 내용들은 불길한 것이었고 또한 쉽게 넘길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감히 나의 땅에서 바예지드 가문의 적자를 건들다니. 배후를 찾아야겠어.”

“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기사의 검은 빛나는 것이지만 깊은 어둠을 비출 때는 교회의 은총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조언에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나의 교회에서는 별 보고가 없는가?”

페테르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법구를 통해 일차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긴 로브를 뒤집어쓴 하얀 수염의 노인.

그는 바예지드 가문의 유일한 마법사이자 페테르의 조언자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사자소생(死者甦生)과 저주의 술식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고매한 흑마법사이거나 아니면 둘 이상의 흑마법사들이 합작한 결과일 거라 합니다.”

“으음.”

페테르는 조언자인 마법사 라그무스의 말을 듣고는 이번에는 조금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둘 이상이라면 조직이나 단체일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페테르는 요제프가 가져온 보고서를 곱게 접고서는 책상 밑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변하는 건 없을 테지.”

끼익-

고요하기만 했던 집무실에 의자가 밀려나며 만드는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바예지드 가문은 언제나 이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이고.”

바예지드 가문의 주인이 어둠속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한쪽 벽면에는 책이 가득한 책장이.

다른 쪽 벽면에는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검이.

페테르는 그 중 검이 놓여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감히 내 아들을 위협하고 나의 영지를 어지럽힌 녀석들을 속히 찾아내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백작님.”

자신의 검을 어루만지는 바예지드 백작의 눈에 서슬퍼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

“오래 기다렸나? 밤이 늦었군.”

“괜찮습니다.”

응접실에서 하염없이 요제프만을 기다리고 있던 블라드와 고트는 그의 입장에 서둘러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 한 보고가 길어졌고······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으셔서 말이야.”

요제프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졸린가?”

“아닙니다.”

옆에 서 있던 자야르는 블라드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비록 아니라 말하고 있었으나 소년의 푸른 눈동자 안에는 쉽게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가득했기에.

“끄응.”

요제프는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트라고 했나?”

“네. 요제프 님.”

고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큰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방을 마련해두었으니 그곳에 묵도록. 너에 대한 보상은 내일 이야기 하겠다.”

“······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건조한 축객령뿐이었다.

요제프의 말에 고트는 뼈다귀를 잃은 개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해볼까.”

요제프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고트가 나가자 응접실에 있는 사람은 요제프와 자야르, 그리고 블라드 뿐이었다.

“나는 너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블라드는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방금까지도 편히 미소 짓고 있던 요제프였으나 지금은 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했고 또한 앞으로 나에게 검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다. 맞나?”

“그렇습니다.”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한 요제프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자유로워야 한다고 이해했다. 맞나?”

“맞습니다.”

“나에게 검을 바치기로 했지만 자유롭고 싶다는 너의 이야기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블라드가 내건 시건방진 조건들을 다시 듣게 된 자야르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은 요제프와 블라드의 협상장이었으며 금발 애송이는 요제프의 목숨을 구명함으로써 여기에 앉아 있을 만한 정당한 자격을 얻어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은 이유가 뭐냐? 정확히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지? 이것을 말해준다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을 명확히 계산할 수 있을 거다.”

“······.”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생각했다.

다 털어놔도 될까?

요제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블라드는 촛불 너머에 비치는 요제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블라드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

요제프의 등 뒤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창문 너머 그곳에 달이 있었고.

그날과 같은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고딘이라는 기사를 아십니까? 그는 가이다르 백작의 밑에 있는 자입니다.”

그날 이후로 단 한시도 잊어본 적 없다.

그는 자신의 은인을 죽인 자였고 딛고 있던 세계를 부순 자였으며 또한 동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딘은 여태까지 보아온 자 중 가장 강하며 또한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소년은 여태껏 달을 따라 달려왔다.

“······.”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요제프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요제프뿐만이 아니었다.

블라드의 입에서 감히 생각지도 못한 거물들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자야르 또한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고딘······가이다르······.”

요제프는 실로 감당하기 힘든 당혹감에 헤매는 중이었다.

그저 쓸만한 애송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지금 보니 비범한 배경까지 가지고 있었다.

비록 원한에서 비롯되는 비범함이었지만 말이다.

“······장미의 미소를 부순 정체 모를 자가 기사 고딘이었나.”

요제프는 마른 입술에 혀를 두르고서는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그렇군.”

그리고 결정했다.

“도와줄 수 없다. 그들은 내가 손 쓸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으니.”

“······그렇습니까.”

블라드는 쓴 침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귀족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요제프는 백작의 아들일 뿐이었고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수두룩할 것이었다.

어찌 보면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블라드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해준 요제프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계약을 수정하지.”

블라드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적당한 것을 요구하고는 일어날 생각이었으나 요제프는 블라드를 쉽게 놓아 줄 마음이 없었다.

소년의 빛나는 가능성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 바로 요제프였기에.

“7년 계약을 제시한다. 쇼아라의 블라드.”

“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블라드 뿐만 아니라 자야르까지도 놀라고 말았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 행동이 매우 큰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명심하도록.”

“······.”

귀족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은 맞았지만 이 또한 치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판단이었다.

요제프는 지금 자신이 준비한 2안을 내놓는 중이었다.

블라드는 지금 요제프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 매우 이례적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 뒤에 서 있는 자야르의 기세가 흉포해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7년 동안 너를 입히고 먹이고 훈련시켜 어디에도 꿇리지 않을 훌륭한 기사로 만들 생각이다. 나를 구원한 너에게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겠다.”

“기사······.”

블라드는 요제프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가지는 울림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를 따라 하고 말았다.

“그래. 기사. 기사가 되고 싶지 않나?”

요제프는 블라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소년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너는 이 기간 동안 나에게 충성한다. 내가 시키는 일만을 하며 허락한 일만을 한다. 당연히 고딘과 가이다르 백작가에 대한 일은 할 수 없겠지.”

“······하지만.”

훌륭한 제안이었으나 블라드의 마음속에는 고딘 말고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그리운 곳에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쇼아라의 뒷골목에 관련된 일이라면 허가하지.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

“제미나라는 아이는 지금 수녀원에 있다더군.”

“······!”

블라드의 부릅뜬 눈을 보며 요제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요제프는 그동안 블라드라는 소년을 낱낱이 분석했다.

살아온 과거와 지금 처해 있는 현재, 그리고 되고 싶은 미래까지.

정말이지 탐나는 녀석이었으니까.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돌아가봤자 네가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는 자를 처단할 수 있을까?”

요제프는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날카로운 것은 오직 검만이 아니다. 나도 나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 도와주마.”

블라드는 눈앞에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쩔 테냐 블라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

요제프의 눈동자는 무엇이든 빨아들일 듯이 강렬한 것이었다.

※※※※

블라드가 응접실에서 나간 직후.

“목표가 대단한 애송이였군.”

“굳이 이렇게 매달리실 이유가 있습니까? 저 녀석 말고 쓸만한 애송이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요제프는 위스키 병을 기울여 마지막 남은 한 잔을 따라내었다.

“어린 것들은 모두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개화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야.”

“저 녀석이 요제프 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물론이지.”

요제프는 창밖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곳에는 푸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7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야. 충분히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고 어르고 달랠 수 있는 기간이지.”

“하지만······.”

“그리고 저 녀석은 보통 늑대가 아니거든.”

요제프는 떠오르는 달을 보며 마지막 한 잔을 들이켰다.

“달을 쫓는 늑대였어.”

요제프가 바라본 술잔 안에는 푸른 달이 담겨 있었다.

“심지가 굳고 가능성이 있으며 목표 또한 높으니 저 녀석은 무조건 크게 될 것이다.”

잔 안에 담긴 푸른 달을 보며 요제프는 그것을 한 번에 털어 넘겼다.

“그런 녀석을 쉽게 내줄 수는 없지.”

푸른 달빛의 기사를 목표로 삼은 소년.

그 소년이 정말 달을 부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밤하늘에 떠오를 별 하나는 될 것이라 요제프는 확신했다.

소년의 눈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저 녀석은 이제 내 것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늑대가 자유롭다 느낄 만큼 큰 우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4화 14

포기하지 않았기에 (1)

블라드와의 계약을 마무리 짓고 난 다음 날 아침.

요제프는 아침만큼은 가족들과 같이해야 한다는 바예지드 가문의 규율을 따라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로로 긴 식탁, 깔끔하게 깔린 새하얀 테이블 보.

그러나 그 위에 올려 있는 것들은 권세 높은 귀족 집안의 아침이라기에는 단출한 것들이었다.

“먹자.”

식전기도와 함께 시작된 바예지드 가문의 아침식사.

가주인 페테르를 시작으로.

장남인 루트거.

차남인 요제프와 그의 어머니이자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인 옥사나가 함께하는 식사 자리.

가족 모두가 모여 있었지만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성물들을 들여왔다. 사제의 축복이 가득한 것들이지.”

식탁에 내려앉은 적막함을 뚫고 페테르 백작은 장남인 루트거에게 말했다.

“이번 임무 때 가져가도록 해라.”

“저는 누군가의 축복보다는 제 검을 믿습니다. 아버지.”

“두말 안 하겠다.”

검사로서의 자신감이 넘치는 루트거의 발언에 요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고 말았다.

루트거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음에도.

“······.”

그리고 자연스레 움츠러들고 만 요제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요제프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약을 받아 가도록 해라. 발목에 좋은 약이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형에게는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성물을.

그리고 자신에게는 상처에 필요한 약을.

“······.”

언제나 대범하고자 노력하는 요제프였지만 오랜 세월 동안 깊숙이 박혀있던 열등감이란 존재는 언제나 그의 영혼을 조여오고 있었다.

자식을 배려하려는 아버지와.

움츠러드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그리고 끊임없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 아들들.

오직 차가운 적막만이 이들의 복잡한 심정을 가려줄 뿐이었다.

※※※※

길고 적막했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요제프는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도중에 어머니가 차라도 한 잔 들고 가라 하였지만, 그녀의 품은 너무나 따뜻하고 안락한 것이었기에 한번 발을 들이밀면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다.

요제프는 멈춰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모자란 만큼 뛰어야만 했기에.

하얀 대리석 복도로 스며드는 아침의 햇빛.

하지만 그것들이 복도의 모든 곳을 밝혀주지는 않았다.

“······.”

햇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을 지나갈 때마다 요제프의 표정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해지고 있었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독들이 자연스레 그의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집무실 앞에 다다랐을 때.

“응?”

요제프는 딱딱함 대신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이 있었기에.

“뭐지?”

요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의 손잡이를 돌린 순간.

집무실 안에서는 화사한 아침 햇살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요제프 님.”

“크으······. 오셨습니까?”

그곳에는 한참 자야르에게 머리를 쥐어박히고 있는 블라드와 그 살벌한 광경을 보며 거북이처럼 움츠려 있는 고트의 모습이 있었다.

“왜 또 쥐어박히고 있지?”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요제프는 자신의 안에서 들끓고 있던 묘한 감정들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평온함.

그리고 자신감.

그것들을 주는 존재들이 이곳에 있었다.

“하아······.”

자야르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다는 듯 긴 한숨과 함께 요제프의 책상 위에 놓인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이 상자······루트거 님이 보내신 건데.”

“형님이?”

루트거와 요제프는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가진바 성향도 정반대인 데다 서로 다음 대의 바예지드 백작 자리를 노리는 사이기도 했으니 같은 핏줄이라 할지라도 선물을 주고 보낼 만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침 식사 도중에도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고.

‘무슨 일이지?’

요제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자 위에 놓인 루트거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그에 따라 블라드의 고개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요제프는 조심스럽게 루트거가 보낸 편지를 갈무리했다.

“네 것이로군. 많이 먹도록 해라.”

“······죄송합니다.”

“십 분이면 되겠나?”

루트거가 보낸 것은 땅콩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였다.

요제프가 자야르를 향해 물어보자 그의 충직한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바퀴 돌고 오도록 하지.”

요제프가 왔던 길을 돌아나가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하란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하는 놈이 어디 있냐!”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그곳에서부터 누군가의 포효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해서 안 먹은 것뿐입니다.”

“내가 한 말이 그 말이냐!”

“하라는 대로 한 거라고요!”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었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요제프는 조용히 걸어 나갔다.

“이제 꽃이 필 시기인가.”

햇빛이 밝히지 못한 어둠 속에 서 있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요제프는 의연하게 웃을 수 있었다.

※※※※

“너는 오늘부터 마구간지기다. 내 기사들의 말을 다룰 것이며 나의 어머니인 옥사나 백작 부인의 사용인으로 소속된다.”

“감사합니다! 요제프 님!”

고트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적지 않은 금화를 받음과 함께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사용인으로 고용된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가 봐라.”

안정되고 편안하며 또한 보수도 후한 직업을 가지게 된 고트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아마 요제프가 직접 고용했기에 딱히 괴롭히거나 하는 녀석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여전히 배가 고팠던 고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금발 소년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끝날 놈이 아니야.’

비록 지금은 어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분명 블라드라는 녀석은 더 높이 날아오를 녀석이었다.

고트는 그때를 기약하며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블라드 너는······.”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시근거리고 있는 자야르와 어느새 땅콩을 한주먹 쥐어 먹었는지 볼이 불룩한 블라드가 서 있었다.

어쩌면 불룩한 볼 한쪽은 자야르에게 얻어맞아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지금부터 블라드 너는 공식적으로 자야르의 종자가 된다. 그동안은 너를 배려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눈을 감아줬다만 이제부터는 그래서는 안 된다. 알겠나?”

“넵.”

“입만 살아서 말 만 잘하지. 꼴통 같은 놈.”

“······넵.”

“······상세한 저택에서의 생활은 자야르가 알려줄 거다. 나가봐라.”

블라드까지 집무실 밖을 나서자 요제프는 자신의 충실한 기사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역시 다루기 쉽지 않겠군. 모든 것에 있어 예측불허야.”

“게다가 거칠게 살아와서인지 반항심도 가득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요제프는 방금 블라드가 밀고 나간 집무실의 문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해야만 해. 내가 키워낸 나만의 기사라는 실적이 없다면 아버지에게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요제프가 키워낸 본인만의 기사.

비록 요제프의 옆에는 자야르라는 훌륭한 기사가 있었으나 그는 어머니인 옥사나 백작 부인이 붙여준 사람이었다.

기사 자야르.

옥사나가 결혼할 적 들고 왔던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딸려온 기사.

옥사나 백작 부인의 친정인 오스카르 가문에서 키워진 기사인 그는 요제프의 탄생과 함께 자연스레 그에게로 붙여졌다.

이런 사정으로 자야르는 소속만 따지자면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였으나 오직 요제프와 옥사나에게만 충성하는 기사였으니 엄밀하게 따진다면 자야르를 순수한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라 볼 수는 없었다.

“잘 부탁하네.”

그렇기에 요제프는 필요한 것이다.

어머니가 준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 낸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자야르는 모시는 주군 앞에서 성공하겠노라 다짐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

집무실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쭈뼛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금발 소년이 있었다.

“쯧.”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고 지금부터 자신이 키워야 할 녀석이기도 했다.

“따라와라.”

“네.”

요제프는 이 녀석을 선택했고 자신은 주군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주군의 명에 따르는 것.

그것이 기사도(騎士道)다.

“여기는 식당이다. 기사들이 먹는 식당은 따로 있고 종자들은 하인들과 같은 식당을 쓴다.”

“네.”

비록 다루기 어려운 녀석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빛나는 결과를 가져올 녀석이라는 것을 자야르도 잘 알고 있었다.

“여기는 훈련장이다. 검보다는 신체를 단련하는 곳이지. 기구를 어떻게 쓰는지는 옆에 있는 녀석들에게 물어봐라.”

그렇기에 자야르는 직접 블라드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바예지드 가문의 시설들을 안내해주었다.

비록 험하게 다루고 있었으나 안에 들어 있는 정성만큼은 다른 기사들이 종자에게 쏟는 것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쓸 방이다. 나름 1인실이지.”

“오.”

그리고 방금의 반응으로 자야르는 블라드라는 녀석이 바예지드 가문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좋은데요?”

“그래?”

겨우 침대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방이었지만 블라드는 그조차도 감지덕지하며 웃고 있었다.

“흙바닥도 아니고 침대까지 있네요. 이 정도면 궁전이죠.”

“아까의 충격적인 일 때문에 네가 뒷골목 출신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곱게 자란 집안의 자제들이었으나 이곳에 종자로 들어온 순간부터 소년들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건강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어도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이나 처우에 적응하지 못하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러나 잡초처럼 살아왔던 블라드에게 있어 이곳 정도의 환경이라면 천국과도 같은 것이었다.

‘음.’

적응하는 데는 문제가 없겠다.

실수하는 것만 막아준다면.

“따라와라.”

블라드는 자야르의 뒤를 따라가며 최대한 이곳의 분위기를 익히려 애를 쓰고 있었다.

비록 어제는 루트거의 기세에 눌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만 블라드 같은 뒷골목 출신에게 있어서 빠른 눈치는 생존과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음?’

그런 블라드의 눈으로 하녀들과 함께 움직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녹색 머리를 정갈하게 틀어 올린 귀부인이었다.

“옥사나 님이시다. 요제프 님의 어머니이시지. 아까 배운 대로 예를 갖추도록.”

“네.”

얼굴을 볼 때마다 서로 욕이나 내뱉던 뒷골목에서 살아왔기에 블라드로서는 이런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예의를 갖춘다.

귀족을 대한다.

고개를 숙인다.

모두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곳의 규율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어차피 7년 동안 의탁해야 하는 곳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최선일 거라 블라드는 생각했다.

“······.”

하루 만에 배운 것이지만 최대한 기억해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블라드.

그러나 그저 스쳐 지나가리라 생각했던 옥사나의 행렬은 점차 자야르와 블라드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자야르. 나의 충직한 기사. 좋은 아침이에요.”

“평안하셨습니까?”

자야르가 고개를 들며 안부 인사를 건네자 눈치를 보고 있던 블라드도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이 아이인가요?”

“그렇습니다. 요제프 님이 직접 데려온 녀석입니다.”

“그렇군요.”

거친 사내들, 웃음을 파는 창녀들, 빈틈만 노리는 사기꾼들.

그런 사람들만 상대해 봤던 블라드에게 있어서 귀부인인 옥사나는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고맙구나. 요제프에게 들었다. 내 아이를 위기에서 구원해 주었다지?”

“제······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아마 블라드가 고개를 옆으로 조금만 돌렸다면 자신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자야르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상을 주어야겠구나.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한 거야.”

“감사합······.”

머리 숙여 감사하다 말하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갑작스레 다가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옥사나를 보며 얼어붙고 말았다.

“좋은 색깔이구나. 푸른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기도 하고.”

“······.”

뭐라도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경직되어 있었다.

옥사나에게는 향기가 났다.

그리운 향기였다.

“마른 것에 비해서 어깨도 넓구나. 살을 좀 붙이면 보기 좋겠다.”

그동안 블라드는 창녀들의 곁에서 생활해왔다.

여자에 대한 면역이 있었고 그녀들을 다룰 수 있는 넉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옥사나의 눈빛은 여태껏 겪어왔던 여자들이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기에.

“조만간 옷 한 벌을 지어주마. 내가 눈짐작이 좋으니 잘 맞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녀는 지금 어머니의 눈길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예전에 보았던 그 눈길 속에서 고슴도치 같던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헤매고 있었다.

가시를 세워서는 안 되는 대상은 난생처음이었다.

“수고하세요. 자야르 경.”

“네. 옥사나 님.”

그렇기에 그저 감사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녀가 떠나간 다음에도 한참을 굳어 있던 블라드는 자신과 같이 바짝 긴장하고 있던 자야르와 눈이 마주쳤다.

“······저 잘했어요?”

“······그 정도면.”

가슴 깊은 곳에부터 올라오는 멋쩍은 느낌에 소년은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5화 18

포기하지 않았기에 (2)

정적이 휩싸인 식당 한가운데서 고트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대, 대장.”

그와 동시에 식당에 있던 수많은 시선이 갖가지의 비웃음을 품은 채 블라드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들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

블라드가 먹고 있던 스프 위로 노란 덩어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침 덩어리였다.

“이거 미안하네. 나는 쓰레기 냄새가 나기에 여기가 쓰레기통인 줄 알았지 뭐야.”

“하하하하!”

블라드의 뒤에서 크게 웃으며 서 있는 세 명의 종자가 있었다.

‘생각보다는 이르네.’

블라드는 자신을 도발하는 종자들을 향해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은 북부에서도 명망 높은 가문.

그런 곳에 잠깐 발을 담갔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경력이 되는 것이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종자들은 하나같이 괜찮은 집안에서 보내온 자제들이었다.

귀족은 아니더라도 나름 귀한 도련님들이 모여 있던 곳에 뒷골목 출신 녀석이 들어왔으니 당연히 반발이 있을 터.

주둔지에서도 한 번 겪어본 일이었기에 블라드는 일단은 참아 넘기기로 했다.

‘익숙하기도 하고.’

멸시와 모멸, 그리고 무시는 언제나 익숙한 것이었다.

물론 익숙하다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블라드는 이번만큼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서.

“대장······.”

수프에 떠 있는 침들을 떠내어 바닥에 흩뿌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수저를 들어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

“······.”

계획되어 있던 괴롭힘에 식당에 있던 종자들이 키득거리며 바라보고 있었지만 방금 블라드가 한 의연한 태도에 모두가 웃음을 멈추고 말았다.

기묘한 침묵이었다.

“······뭐야. 저놈.”

여태 들어온 신입 중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는 녀석은 없었다.

화를 내거나, 겁을 먹거나 아니면 넉살 좋게 웃음이라도 짓거나.

그러나 뒷골목에서 왔다는 저 녀석은 자신들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고요해진 식당 안에서 블라드는 자야르가 한 말을 생각했다.

‘지금부터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은 전부 요제프 님의 명성과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둬라.’

블라드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던 자야르는 신신당부하며 행동을 조심하라 일렀었다.

‘받은 것이 있으니 이 정도는 참아야겠지.’

블라드는 자신이 분에 넘치는 기회를 받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참을 수만 있다면 요제프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넘길 생각이었다.

‘어떻게 조져야 하나.’

다만 뒷골목 출신으로서 꿈틀거리는 흉악함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의연히 스프를 넘기고 있을지라도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것이 있었다.

야생과도 같았던 뒷골목에서도 블라드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주었던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가 시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시비를 걸던 종자가 으르렁거리며 블라드에게로 다가왔다.

“너는 나중에 보자. 신고식 한번 화려하게 해줄······.”

“이름이 뭐냐.”

으름장을 놔서 겁을 줄 생각이었으나 금발 머리 녀석은 소바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뭐?”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돌아가는 블라드의 고개.

“이름이 뭐냐고.”

파랗게 타오르는 소년의 눈동자를 마주친 종자는 순간 주위가 깜깜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모시고 있는 기사보다도 더욱 위압감을 풍기는 눈빛이 그곳에 있었다.

“소, 소바닌이다.”

자신도 모르게 소바닌은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런 기세였다.

“소바닌.”

블라드는 스프를 씹어 넘기며 조용히 소바닌의 이름을 읊조렸다.

물려고 하는 개는 짖지 않는다.

죽이려 하는 자는 화내지 않는다.

“기억해 뒀다.”

그저 조용히 노려볼 뿐.

어느새 식사를 마쳤는지 비어있는 식판을 들고 블라드가 일어났다.

“신고식 기대하고 있으마.”

소바닌은 스쳐 지나가는 블라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라고 뒷골목에서나 굴러먹던 천한 고아 새끼가.”

마지막까지 구겨지는 자존심을 지켜보려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조용히 식판을 반납하고는 식당을 떠날 뿐이었다.

고트가 눈치를 보며 블라드의 뒤를 따라 나갔어도 식당 안에는 묘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

“대장 괜찮아?”

“속이 안 좋아.”

“이제 어쩔 거야? 하인들한테 물어보니까 소바닌이라는 그 녀석 종자들 사이에서는 대장 격인 모양이던데.”

“대가리가 그놈이야?”

블라드의 물음에 고트는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알았어.”

“조심하라구.”

종자와 하인.

서로가 갈라져야 하는 길목에서 블라드는 고트에게 손 한 번을 휘적거리고는 자신이 갈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난 놈이긴 해.”

수십 명이 둘러싸고 있던 식당에서도 블라드는 마치 자기 집에서 밥을 먹듯 태연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귀신같은 것도 갈라대고 그랬겠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눈에 담기에도 힘든 두려운 존재들을 베어대던 녀석이었으니 동년배들의 협박 따위가 대수일까.

“이래서 사람은 큰 데서 놀아야 해.”

저 멀리 복도 끝 갈림길에서 블라드의 모습이 사라지자 고트도 발길을 옮겼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저 녀석은 이런 곳에서 멈출 사람이 아니니.

고트와 헤어진 블라드는 정해진 일과에 따라 자야르가 있을 수련장으로 향했다.

“별일 없었냐?”

“네.”

“그럼 검 들어.”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자야르와의 짧은 대련 시간이 있었다.

기사가 자신의 종자를 위해 매일 대련을 해주는 경우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맡고 있는 종자가 귀한 집 자식이거나 그 부모가 넉넉히 돈을 안겨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말해봐라.”

블라드는 코를 쓱 훔치며 자야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여러 명한테 둘러싸였어요. 그럴 때는 어떡하죠?”

“도망가.”

“도망 못가면요.”

“상대방의 무장을 어디까지 설정한 질문이냐.”

자야르의 물음에 블라드는 수련장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뭐, 목검 정도? 작은 방패를 들고 있는 녀석도 좀 섞여 있다 치면요.”

“······그래?”

블라드의 대답에 뭔가 눈치챘다는 듯 자야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긴 네가 쓰는 검술은 확실히 다인(多人) 전투에 적합하진 않았지.”

“그래요?”

처음 들어보는 검술 평가에 블라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는 목검으로 바닥에 선을 그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너는 네 스승이라는 사람이 무슨 검술을 쓰는지도 모르고 배웠냐.”

‘······가르쳐주는 사람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잠시 속으로 투덜거리던 블라드는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솔직히 뭐 하나 가르쳐준다고 하면 그냥 감사하게 배워야 하는 처지였거든요.”

“그랬겠지.”

십자 형태로 바닥에 길게 선을 그은 자야르는 목검을 휘둘러 묻어 있는 모래를 털어냈다.

“너의 스승은 아마 결투사(Duelist)일거다. 너의 검술은 다인 전투가 아닌 단기접전(單騎接戰)에 특화되어 있거든.”

[오!]

뜻하지도 않은 곳에서 자신에 대한 단서를 얻은 목소리가 흥분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더 물어봐라!]

“결투사요?”

왜인지 흥분되어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에 이 녀석이 이런 걸 좋아하나 싶었던 자야르는 좀 더 설명해주기로 했다.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는 아니다. 나같이 가문에 종속된 기사(House-hold knight)도 있고 아니면 기사 작위만을 얻고 떠돌아다니는 편력기사(Knight-errant)들도 있다. 결투사는 편력 기사 중 한 종류라 할 수 있지.”

자야르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보통 명예 결투시에 대리자 자격으로 출전하는 기사들을 결투사라고 한다. 더 궁금하냐?”

“그러면 결투사 중 유명한 사람은 누가 있나요? 아니면 예전에는 유명했는데 지금은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라거나?”

자야르는 블라드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여기서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년들의 호기심은 무궁무진하지만, 오늘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하루에 하나씩만 배우는 거다. 유명한 결투사들을 알려줄까 아니면 다인(多人) 전투의 기본을 알려줄까?”

[유명한 결투사들!]

“다인 전투요.”

방금 내뱉은 대답에 목소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간청했지만,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당장 닥쳐올 일이 중요했다.

“좋아. 들어와.”

자야르의 손짓을 따라 블라드는 십자가의 중심에 섰다.

“다인(多人) 전투의 기본은 각도다. 지금 너는 동서남북 네 방향에 노출되어 있지. 이렇게 되면 최소 4명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어떡하죠. 그럼?”

“지형지물을 이용해야지.”

자야르는 블라드의 어깨를 붙잡고는 십자가의 끝 쪽으로 세웠다.

“한 곳을 등지면 이제 남은 각도는 세 곳이지? 이렇게 되면 한 명은 막은 거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막힌 곳이 없는 곳에서 싸우면요?”

“굉장히 가혹한 상황에서 싸우게 되겠지. 가능하면 최대한 유리한 장소에서 싸워라.”

“진짜 그런 장소가 없으면요?”

블라드의 집요한 물음에 자야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네가 장애물을 만들어야지.”

“뭘로요?”

블라드의 물음에 자야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상대방의 시체로.”

자야르가 짓고 있는 웃음에는 왠지 모를 무게감이 담겨있었다.

“사람의 사체는 꽤 좋은 장애물이 될 수 있지. 무겁고 부피가 나가며 죽은 뒤 시간이 지나면 단단해지거든.”

자야르의 실전적인 가르침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지금 말했듯이 기본은 각도를 주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상대방을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요지다.”

스윽-

그렇게 말하며 자야르는 십자 표시 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응?”

블라드는 자야르의 움직임을 보며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마치 오른쪽으로 움직일 것 같았다가도 눈을 뜨고 보면 왼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와 눈빛, 그리고 발의 위치로 상대방을 현혹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그것을 만들어내려면 네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의도해야 한다.”

[너의 움직임으로 상대방을 제어하라는 이야기다.]

자야르의 설명과 목소리의 해설을 들은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움직임으로 상대방의 움직임을 의도하라는 말인가요?”

“······두 번 말하지 않아 좋군.”

자야르는 자세한 설명 없이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블라드를 보며 머리 또한 영특한 녀석이라 생각했다.

실상은 영혼 속에 깃든 목소리가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요?”

“모든 검술은 발걸음에서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너의 요청대로 다인 전투를 위한 발걸음을 배울 거다.”

자신을 보며 눈을 빛내는 소년을 향해 자야르는 씨익 웃었다.

소년의 눈빛 안에는 열정이 있었고 그보다 더한 절박함이 있었다.

배움에 배고파하는 한 마리의 짐승이 그 안에 있었다.

“따라 해봐라.”

점심부터 시작된 훈련은 황혼 녘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능성을 가졌고.

해야 하는 이유도 가졌으며.

스승 또한 두 명을 가진 소년이 있었다.

붉게 물든 황혼 아래서 소년은 춤을 추고 있었다.

“때려치워 임마.”

“······.”

“그딴 식으로 할 거면 그냥 도망이나 쳐라. 그것까지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오늘 처음 배웠는데 못 따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비록 그 춤이 보기 괴로울 정도로 민망한 것이긴 했지만 말이다.

비록 타박받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실로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칠기는 했지만 자야르는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고, 요제프는 믿어주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그날 밤. 쓰레기 더미 위에서 눈물 지었을 때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문득, 블라드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보며 쇼아라에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보고 싶었다.

※※※※

“뭔 가게 앞에 이렇게 진창이 심해?”

황혼이 물드는 도시의 뒷골목.

그곳에 있는 유일한 대장간으로 들어오는 용병 사내가 있었다.

“뉘쇼?”

“뭣 좀 물어봅시다. 영감.”

늙은 대장장이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었다.

정말 그럴싸한 물건을 원하는 자들은 쇼아라에서도 유명한 대장간을 찾아갈 테니 결국 이곳에는 돈도 별로 없고 대충 써먹을 만한 물건이나 찾는 녀석들이 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검을 바라보던 금발 소년만은 유일한 예외였지만.

“이런 곳에 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이곳에 뭘 사러 온 건 아니고.”

그러나 노인의 앞에 있는 용병 사내는 나름 실력이 있어 보이는 자였다.

가지고 다니는 무기나 갑옷들, 그리고 곳곳에 쑤셔 넣은 물품들이 그가 경험 많은 용병임을 알게 해줬으니까.

“쇼아라의 뒷골목,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인데.”

“그렇게 보이오만.”

“뒷골목에 대장간이 이곳밖에 없소?”

“그렇지.”

“여기서 검도 만들어주고 그러나?”

“······이제는 못 만들지.”

늙은 대장장이의 대답에 용병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라하고 작은 화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도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뒷골목에서 평생 썩었을 것 같은 볼품없는 노인까지.

가게 이곳저곳을 흘려보는 사내의 눈초리에 노인은 괜스레 멋쩍어졌다.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런 걸 물어보시는데?”

“검 하나를 만들고 싶어서 말이지.”

“대충 아무 대장간이나 골라서 하나 만들면 될 일이지 왜 이런 곳까지 와서 검을 찾는지.”

쯧쯧 혀를 차는 노인을 보며 용병 사내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웃고 말았다.

“좀 특별한 검을 만들고 싶어서 그랬수다.”

“무슨 특별한 검?”

사내의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로에 불을 지피던 노인이었다.

“그······귀신도 벨 수 있는 검을 만들고 싶은데.”

“귀신?”

멀쩡하게 생긴 양반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지 노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귀신이면 여기 말고 교회나 가보시지.”

“아니, 아니 영감. 그럼 혹시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들어는 봤소? 듣자 하니 여기 출신이라 그러더라고.”

“블라드?”

낯익은 이름이 낯선 사내에게서 흘러나오자 노인은 화로에 던져넣던 석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놈은 왜······혹시 죽기라도 했는가?”

“아시나 보네! 그러면 여기 출신은 맞는 거요?”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용병 사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친구한테 슬쩍 물어보니까 쇼아라 뒷골목에 있던 대장간에서 맞췄다고 하더라고.”

“무엇을.”

살아있구나.

노인은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사내의 말은 도저히 믿기 힘든 것뿐이었다.

“그 애송이가 귀신을 베었소.”

“귀신?”

“그렇다니까. 저주받은 여자였는데 검에서 광채가 나더니 반으로 갈라버렸다니까.”

지금 낡은 대장간에 들어온 용병 사내는 토벌대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돌아온 용병 중 하나였다.

죽음의 위기, 그 순간 빛났던 하얀색의 일섬(一閃).

용병 사내에게 있어 자욱한 안개 속 번쩍였던 그 빛은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것보다 빛나는 것이었다.

“그 어린놈이 오러를 다뤘을 리가 없잖소. 그래서 검이 특별할 거라 생각한 거요. 그놈이 검을 엄청 애지중지 하기도 했고.”

“······.”

용병 사내는 나름 높은 가능성을 생각해 쇼아라의 뒷골목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귀신도 벨 수 있는 검. 그걸 만들 줄 아는 신묘한 대장장이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게 내 결론이지. 혹시 아는 짚이는 곳이 있소? 말해주면 적잖이 사례하겠수다.”

“하······.”

용병 사내의 말에 늙은 대장장이는 많은 것이 담겨있는 한숨을 내뱉었다.

애송아 무슨 짓을 한 거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나 같은 놈을 귀신도 베는 검을 만드는 대장장이로 만든 거냐.

“못 들어보셨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그러지 마시고······.”

“물어봐도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니, 믿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쓰레기들과 함께 떨어져 내린 소년이 귀신도 베어낼 빛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검이 그 빛을 머금었다는 것도.

“아무도 모를 거라고.”

“······.”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태어난 소년과 초라한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검이 빛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사내가 떠나가고.

노인은 하던 일도 멈춘 채 자리에 앉아 멍하니 가게 앞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가게 앞은 진창으로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노인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별을 바라보던 소년이 만들어냈던 슬픈 발자국이.

언제나 서성이던 그 녀석의 모습이.

1권 끝.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6화 11

별들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1)

“대련 중인가 보군.”

저택을 걷던 페테르는 바로 아래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내밀었다.

“종자들인가.”

“그런 듯싶습니다.”

그곳에서는 교관의 지도하에 종자들이 서로 모여 목검으로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페테르는 종종 이런 식으로 기사들이나 종자들이 하는 훈련을 몰래 지켜보고는 했었다.

가문의 가주일 뿐만 아니라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하나인 페테르 바예지드.

그 정도로 명망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 언제 어디서나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곳에 있는 종자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고는 했다.

“잠시 지켜보지.”

“네.”

게다가 훈련 중에서 특출난 점을 보이는 사람은 나름의 보상을 통해 사기를 진작시켜주고는 했기에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와 종자들은 언제나 실전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훈련하고는 했다.

모두가 페테르의 의도대로였다.

“저 녀석인가.”

“금발 머리라고 듣긴 했었습니다.”

“처음 보는 녀석이기도 하니 맞겠군.”

평소에도 훈련상황을 확인하던 페테르였지만 오늘은 특별히 한 명의 종자에게 더욱 눈길이 가고 있었다.

“멀끔하게 생겼군.”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금발 머리의 종자.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던 자신의 둘째 아들이 데려온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가주님. 저곳에.”

블라드를 보기 위해 집중하던 페테르에게 조언자 라그무스가 페테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자야르로군.”

“아무래도 저희처럼 몰래 지켜보는 듯싶습니다.”

라그무스가 가리킨 곳에는 애꾸눈의 기사 자야르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금발 소년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뭐든지 처음은 신경 쓰이기 마련이지.”

자야르가 처음으로 종자를 들인 것을 알고 있던 페테르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디 볼까.”

요제프가 데려왔으며 자야르가 신경 쓰는 녀석.

“······.”

“매서워 보이는군요.”

그 녀석이 지금 저 아래에서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종자를 상대로 매섭게 검을 휘날리고 있었다.

“어설프군.”

“그렇습니까?”

마법사인 라그무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페테르는 한 번의 검놀림만으로도 블라드의 수준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번뜩이는 것이 있군. 요제프가 매료될 만하겠어.”

“확실히 덩치 큰 녀석보다는 무언가 남달라 보이는 면이 있군요.”

매섭다.

빠르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는다.

“기특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 같은 것들보다도 페테르는 블라드의 다른 면을 더 높이 사고 있었다.

“어설프게나마 배운 것을 써먹어 보려 하는 것이.”

살벌하게 벌어지는 공방 속에서도 금발 소년은 주눅 들지 않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의도해내려 하고 있었다.

시도하고 도전한다.

저 아래의 소년은 더 나아지고자 하는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엉망이야.”

누군가의 발놀림을 닮은 그 움직임은 비록 너무나 어설퍼 웃음마저 나올 정도였지만 페테르는 어떻게든 해보려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게 만드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좋다.”

덩치 큰 종자의 목검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마치 마무리를 지으려 하는 동작이었으나 이 모든 것은 금발 소년이 의도한 것이었다.

“끝났군.”

페테르의 말대로 금발 소년은 어느새 상대방을 깔고 앉아 안면을 후려치고 있었다.

큰 동작을 유도한 뒤 재빨리 복부를 후려쳐버린 것이다.

비록 진행은 어설펐지만, 결과만큼은 명쾌한 움직임이었다.

“훈련인데 저렇게 두들겨도 되는 건지······.”

“내버려 두게. 기사가 되려면 저 정도의 의기는 있어야지.”

페테르는 멈췄던 발걸음을 움직이며 저 멀리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종자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던 애꾸눈의 기사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

블라드는 언제나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발견하고 움직여야만 오늘의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 그만!”

교관의 부름에도 블라드는 대련을 가장한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크으으······.”

“한 번만 더 그때처럼 내 눈앞에서 실실 쪼개봐라.”

그렇기에 이번에도 먼저 움직이기로 했다.

조만간 신고식을 가장한 구타행위가 있을 것은 뻔한 일.

녀석들에게 둘러싸여 가만히 얻어맞느니 미리 기세를 꺾어 놓겠다는 것이 블라드의 판단이었다.

위협이 다가오고 있는데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블라드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대답해. 씨발아.”

“알, 알았어.”

도를 뛰어넘는 블라드의 난폭한 행동에 덩치 큰 녀석은 겁먹은 눈빛으로 알았다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두들겨 맞고 있는 녀석은 그날 식당에서 침을 뱉었던 소바닌의 옆에서 함께 낄낄대던 녀석이었다.

뒷골목 식으로 표현하자면 소바닌이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랄까.

“그만 하라니까! 내 말이 우습나!”

“죄송합니다. 너무 몰입하다 보니까.”

블라드는 교관의 호통이 있고서야 떨어져 나갔지만 쓰러져 있던 녀석은 쉽사리 일어서질 못했다.

‘뭔 놈의 눈빛이!’

방금 자신에게 으르렁대던 블라드의 눈에 흐르고 있던 것은 분명 살기였다.

일개 대련에서는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며 또한 난생처음 맞닥뜨린 날 것의 느낌이기도 했다.

눈을 감아도 바로 앞에 있는 것만 같은 그 시퍼런 눈빛에 쓰러진 종자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

“······.”

그리고 그 모습을 이곳에 있는 모든 종자들이 보고 있었다.

그날 식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새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블라드는 소바닌의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 녀석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내가 한번 몰입하면 정신을 못 차리고 그러거든.”

“이 미친 새끼가.”

블라드가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기에 겉으로만 봤을 때는 가벼운 농담을 나누는 것만 같아 보였지만 둘이 나누는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한테도 미리 사과할게.”

소바닌은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블라드를 노려보았다.

비록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눈만큼은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너는 저 정도로는 안 끝낼 거니까.”

“뭐?”

소바닌은 긴장하고 있었다.

여태껏 이런 놈은 없었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부친이 꽤 큰 상단을 운영하는 소바닌이었기에 겁을 주기도 전에 미리 숙이고 들어오는 녀석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자식은······.

“기대해도 좋아.”

이 새끼는 진짜 미친 새끼다.

실실 웃으며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소바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요제프 님은 뒷골목에서 미친개를 데려왔다.

“스프 간이 심심하면 부를 테니까 그때와서 침 좀 뱉어달라고.”

소바닌의 눈앞에서 미친개가 웃고 있었다.

소바닌은 블라드의 미소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미친개는 사람을 무는 데 주저하지 않으니까.

※※※※

“대장, 괜찮아? 다른 놈들이 해코지하고 그러지는 않았어?”

“요즘 아주 좋아. 다들 나만 보면 설설 피해서 목욕할 때도 넓게 쓰고 그래.”

“······좋은 게 아닌 것 같은데?”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하긴 그렇게 종자들을 쥐어패고 다녔으니.”

고트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하루에 세 명씩은 작살내고 다니니 다들 대장을 피해 다니지······.”

“싸울 때는 먼저 치는 게 낫다는 주의라서.”

과연 뒷골목 출신답다.

블라드를 보며 고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식당에서의 사건 직후, 블라드는 고트가 놀랄 정도로 빠른 행동력을 보여주었었다.

블라드는 종자 중에서도 소바닌과 친하게 지내며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을 추려낸 후, 마치 양을 노리는 늑대처럼 한 명씩 따라가 녀석들을 짓패버리고는 했다.

화장실에서, 목욕탕에서, 저택의 으슥한 복도에서.

혼자 떨어져 있던 녀석들은 누구나 블라드의 시퍼런 눈빛을 봐야만 했다.

호르헤는 말했었다.

적당히 패면 기어오른다고.

“그건 범죄야. 그 정도로 패면 범죄라니까.”

“나는 원래가 범죄자야. 폭행 정도면 오히려 양호한 편이지. 그리고 티 안 나게 때려서 괜찮아.”

“아, 그랬었지.”

고트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또래 녀석들과 엉켜 다니기에 블라드를 잠시 평범한 소년으로 착각했었지만 블라드는 17살도 안 된 나이에 거친 용병들 사이에서도 십인장을 했던 녀석이었다.

“너무 위화감 느껴질 때까지 패지 말라고.”

“그거야 저놈들 하기 나름이지.”

둘은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블라드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 하인들과 이미 얻어맞아 감히 쳐다보기 힘들어하는 종자들이 앉아 있었다.

“봐봐. 안 건드니 편하고 좋잖아.”

“······.”

“오늘 점심은 소시지로군.”

고기를 봐서 기분이 좋은지 블라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판을 들었다.

그리고 웃으며 걸어가는 블라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하나만 더······.”

배식대 앞에서 넉살 좋게 웃으며 소시지를 더 요구했던 블라드였으나 앞에 있는 하녀는 바예지드 가문에서 잔뼈가 굵은 중년의 하녀였다.

“그러면 뒤에 사람이 못 먹어.”

“그러지 마시고······.”

“······.”

단호히 눈짓으로 거부하는 중년의 하녀를 보며 블라드는 별수 없이 배식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요제프 님만 아니었어도 드러누웠을 텐데.’

마른 생김새와는 다르게 블라드는 식탐이 있는 편이었다.

태어난 장소가 장소인지라 자연스레 박혀있는 본능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협상에 실패한 후 조금은 실망한 얼굴로 식탁에 앉은 블라드와 고트.

“그래도 이게 어디야.”

“용병 때보다야 호강이지. 안 그래 대장?”

그들이 식기를 집고 이제 막 음식을 입에 넣으려 하는 순간.

“아, 안녕.”

누군가가 블라드의 앞에서 어색한 인사를 건네왔다.

“······넌 뭐야.”

이번에도 시비를 걸까 싶어 살짝 인상을 찌푸린 블라드였지만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은 시비를 걸만한 녀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볼, 그리고 살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 눈까지.

“나는······포틀리라고 해. 포틀리 칸노르.”

입 밖으로 꺼내기에 미안하지만 굴리면 굴러갈 것 같이 생긴 녀석이었다.

“그래. 포틀리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그······.”

블라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 녀석이 자신의 앞에서 식판을 들고 주저하는 모양새가 영 보기 좋지 않았던데다 우물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말을 꺼내기에도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으니까.

“앉던가 꺼지던가.”

“응?”

“위장 곤두서게 내 앞에서 서성대지 말라고.”

엄연한 축객령이었으나 블라드의 말을 앉아도 된다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포틀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앉으라고 해줘서 고마워.”

“······.”

뭐 이런 놈이 있어 하는 표정으로 포틀리를 바라보던 블라드였지만 수줍게 웃으며 앉아 있는 녀석을 내쫓기에도 뭐 했기에 일단은 점심 식사에 주력하기로 했다.

“계속 혼자 먹고 있었거든. 사실 화장실에서 혼자 먹고 그랬었어.”

“······나 지금 밥 먹잖아.”

방금의 대화를 통해 블라드는 괴롭힘의 대상이 자기 이전에는 이 녀석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소시지 맛있지?”

“닥치고 먹어 그냥.”

그렇다 할지라도 신경 써 줄 이유는 없었지만.

“······이것도 먹어.”

하나밖에 없는 소시지를 한입에 욱여넣고는 아쉬운 듯 쩝쩝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소시지를 블라드의 식판으로 밀어 넣었다.

“너 지금 뭐 하냐.”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것을 갈망하는 블라드였지만 헛된 동정과 수상한 호의만큼은 예외였다.

그러나 블라드의 날카로운 눈빛에도 포틀리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마치 날 선 손님을 상대하는 점원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네가 이런다고 내가······.”

“이 소시지는 우리 아버지가 납품하시는 거거든.”

“······뭐?”

그동안 괴롭힘을 당해서인지 의기소침한 태도였던 포틀리였지만 아버지를 말할 때만큼은 당당한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으로 들여오는 고기들은 모두 우리 칸노르 가문이 제공하고 있어. 우리 집은 대대로 축산업과 목축업을 하고 있거든.”

“······계속해봐.”

블라드는 잠시 잊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좋은 집안에서 온 도련님들이었다는 것을.

눈앞에 있는 통통한 녀석도 자신이 뒷골목에 있을 때라면 말도 못 붙여봤을 녀석이었을 것이다.

“아까보니까 소시지를 더 달라고 하던데.”

“그랬지.”

“그거 알아? 소시지는 보존식품이라 육포만큼은 아니더라도 돈 있는 용병들은 자주 찾는 물품이거든?”

“그런데?”

뭔가 초점이 맞지 않는 대화에 블라드가 슬슬 짜증이 나려 하고 있을 때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나 먹으라고 이것저것 많이 보내주셨거든.”

자기 방에 아버지가 준 소시지나 염장 고기들이 많다며 웃는 포틀리였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아서······ 좀 나눠줄까?”

“······.”

블라드는 생각했다.

안드레아 사제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인맥 하나 정도는 쌓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척 진 놈들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곳에서 한 명 정도 알아두고 나면 나중에 내 인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래.”

백작 가문에 납품할 정도로 규모 있는 가문의 고깃집 아들이라면 분명 쓸데가 있을 것이다.

꼭 소시지 때문에 포틀리의 방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고 블라드는 생각했다.

※※※※

포틀리의 방 앞에서.

블라드와 고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너 여기 왜 왔냐?”

“종자가 되려고.”

“······기사도 아니고 그냥 종자면 돼?”

“응. 내가 무슨 기사가 되겠어. 아버지도 별 기대 안 하셨어. 그냥 여기서 적당히 인맥이라도 만들고 오라는 게 아버지의 뜻이긴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며 쑥스럽게 웃는 포틀리였지만 블라드와 고트의 눈에는 포틀리의 웃음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방 안 가득 널려있는 붉은색의 소시지와 염장 고기들.

기사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방을 보며 블라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놈이구나.

“내일부터······밥 같이 먹을까?”

“진짜? 그래 줄 거야?”

그렇다면 딱히 배척할 필요도 없겠다.

블라드는 마치 장식품이라도 된 듯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 소시지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대신 소시지만 가져와.”

포틀리의 소시지는 먹어도 탈이 날 물건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7화 8

별들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2)

뚜벅- 뚜벅-

애꾸눈의 기사가 생각에 잠긴 채 저택의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자야르의 찌푸린 표정을 보며 시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지나치고 있었다.

평소에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특히나 더 그랬으니까.

‘누구 손이라도 좀 빌렸으면 좋겠군.’

자야르는 요즘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래 수행하고 있던 요제프의 호위 임무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블라드의 검술 및 각종 훈련을 담당해야 했으며 가끔씩은 옥사나에게 불려가 요제프와 블라드의 상태도 보고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본래 요제프가 부리던 기사 다섯 명 중 로드릭은 저번 토벌전에서 사망했으며 다른 두 명의 기사들은 요제프를 지키다 부상을 입고 말았다.

남은 기사라고는 보르단 뿐인데 그에게 블라드의 훈련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은 자야르가 움직여야만 했다.

‘사람 하나 키우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로군.’

자야르는 블라드를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새로이 맡게 된 금발 소년은 애초에 다루기 편한 녀석이 아니었던데다 최대한 신경 써서 키워야 하는 녀석이기도 했다.

바쁜 것을 떠나 어떻게든 관심을 쏟아야 하는 녀석이었다는 뜻이다.

‘뭐 종자를 키워봤어야 알지.’

복도를 걷는 자야르는 굳은 목을 풀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동안 종자를 한 명이라도 키워 볼 걸 그랬다고.

그러나 자야르는 딱히 불평을 내뱉지는 않았다.

애초에 성격이 그랬으며, 바쁘기로 치자면 자신의 주군인 요제프가 제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누구라도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위해서는 발버둥을 쳐야 하는 법이었다.

그렇게 바쁜 만큼 빠르게 걷고 있는 자야르였지만 저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야르 경. 어딜 그리 바쁘게 가십니까?”

“······이런.”

자야르는 복도 저 끝에서부터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를 알아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너무 싫은 티를 표정에 드러내시는 게 아니신지?”

“솔직히 좀 바쁜 상태라.”

“하긴 요제프 님의 일들을 도맡아 하려면 이래저래 바쁘기도 하시겠지.”

바쁘다 말하며 빨리 대화를 끝내기를 종용하고 있었지만 자야르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 그레고리는 쉽게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그래도 얼굴은 좋아 보이시네.”

“바쁘다니까.”

한창 바쁜 와중에 길을 가로막은 그레고리를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 자야르였으나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중립에 서 있는 기사 중 하나였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의 모든 기사들은 가주인 페테르의 명을 가장 우선시했지만, 정치적인 노선만큼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첫째 아들 루트거인가.

둘째 아들 요제프인가.

다음 대의 가주가 될 사람은 누구일지, 그리고 누구의 뒤에 서야 할지 결정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기사로서 제대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주군을 잘 선택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었으니까.

“자야르 경 정도 되는 기사라면 당연히 종자를 받아서 키웠어야지. 사실 지금도 조금 늦은 감이 있다. 나 그레고리는 그렇게 생각하오.”

“······.”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 그레고리는 둘 중 누군가를 선택하기 위해 가운데에 서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저 기사들 사이에서도 괴짜라 불릴 만큼 자유분방했기에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네 종자나 잘 키우지.”

“우리 포틀리는 이미 컸지, 너무 커졌지. 고놈 살 좀 빼야 하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점점 날카로워 지는 자야르의 눈빛을 보며 그레고리는 손을 살살 비비며 입을 열었다.

“블라드라고 했던가? 그 녀석 꽤 쓸만해 보이던데.”

“요제프 님이 직접 선택한 녀석이지.”

“성품도 남자답고 기세도 단단하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니까.”

그레고리는 짜증을 내려 하는 자야르의 말을 재빨리 막아 세웠다.

“알다시피 종자들 사이의 일은 기사가 끼어들기가 좀 그렇잖소. 이래저래 서로 면이 안 서는 일이지.”

“그렇지.”

이제야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는 듯 자야르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레고리를 바라보았다.

“블라드 고 녀석이 요즘 우리 포틀리와 친하게 지낸다는······.”

“그 녀석은 친구 같은 거 안 키워.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거든.”

“그냥 같이 다녀만 달라고 좀······.”

아무리 당당한 기사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그 녀석이 내 사촌 조카인데 여기서 얻어만 맞고 다니게 할 수는 없지 않소. 다른 녀석들에게 부탁을 해봐도 영 신통치도 않았고.”

“공짜로?”

자야르의 물음에 어느 정도 통했다 생각한 그레고리는 웃음과 함께 손을 건네며 말했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나 한번 가져다 쓰십시오. 너무 위험하거나 힘든 일에는 말고.”

“······흠.”

어차피 지금 그레고리가 부탁하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바쁜 이유 중 하나가 그 녀석 때문이기도 했으니.

“말은 해보지.”

한참 일손이 부족했던 자야르는 큰 고민 없이 그레고리의 손을 잡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그런데 그놈이 내 말을 잘 안 듣는데.”

“오. 크게 될 놈이로군.”

자야르의 말에 과장된 표정으로 웃음 짓던 그레고리였다.

“정말로 안 듣는다니까.”

“어허. 진짜로 크게 될 놈이로군.”

종자 주제에 자야르 정도 되는 실력과 괴팍함을 가진 기사 밑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다는 말에 그레고리도 살짝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크게 될 기사라면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춰야 하는 법이니까.”

“그냥 고집 센 녀석일 뿐이야.”

방금 잡은 손으로 고민을 나눈 기사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지나쳤다.

‘그래도 듣는 척은 하겠지?’

그레고리와 헤어진 후 자야르는 생각했다.

‘안 들으면 듣게 하면 되겠지.’

듣지 않으면 후려치리라.

어쨌거나 녀석은 요제프에게 7년간은 충성을 바쳐야 하는 몸이었으니까.

※※※※

“크힉!”

이제 막 고삐를 붙잡고 올라타려던 블라드가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푸히히히-

블라드를 바닥으로 떨어낸 말은 고개를 흔들며 마구 투레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워워-!

진정해! 진정해 이 녀석아!

이번 수업을 위해 동원된 마구간지기들이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무엇에 놀라도 크게 놀랐는지 말은 마구 몸을 흔들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런 씨!”

위협적으로 앞발을 치켜들며 날뛰는 말을 피해 블라드는 재빨리 구르듯 빠져나왔다.

엉망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지만 말발굽에 치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히이이잉-

블라드가 근처에서 떨어지자마자 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찾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평소에는 얌전하지만, 자신이 고삐만 잡으면 발광을 해대는 말을 보며 블라드는 약이 바짝 오르고 말았다.

“블라드! 넌 빠져라!”

“교관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안돼. 말이 놀랐어. 게다가 너는 말은 타본 적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은 너무 위험해.”

말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교관을 보며 블라드는 분한 마음에 속으로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젠장! 위에는 올라타 봐야 할 거 아냐!’

지금 자신의 모습이 한탄스럽다 못해 한심스러운 블라드였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 교육받고 있는 1분 1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종자들을 위해 시행하는 수업들은 하나같이 고급 기술들뿐이었으니까.

어디서 배우려고 해도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것들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귀중한 기회를 시도조차 못 해보고 나가떨어졌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그것도 몇 번이나, 며칠이나.

‘젠장!’

말이란 놈들은 아니, 웬만한 동물들은 도무지 블라드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말도 못 타는 녀석이 기사가 되겠다고 나선단 말이야?”

“진작에 기마술 정도는 배워놨어야지.”

그런 블라드에게 기름을 끼얹는 몇몇 녀석들이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비웃음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평소 소바닌에게 바짝 붙어 다니는 몇몇 종자들이 있었다.

워낙 뭉쳐 다녀서 아직 손봐주지 못한 녀석들이었다.

“······.”

성질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깔아뭉개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저 녀석들의 말처럼 자신이 말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는 요제프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의 뒷배를 봐주는 유일한 사람인 요제프에게 이런 사소한 일로 부담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빨리 조져놓든가 해야지.’

대신 기회를 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고 가 흠씬 두들겨 패 줄 생각이었다.

주먹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의도를 전할 수 있으며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깨닫게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 괜히 딴청을 하며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하는 종자들처럼 말이다.

‘아 근데 왜 안 되지.’

블라드는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흩뜨리며 종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 철퍼덕 앉아버리고 말았다.

“소바닌!”

“역시!”

자신이 앉자마자 멋지게 말을 타며 장애물을 넘는 소바닌의 모습이 보였다.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레 눈이 마주치고만 소바닌을 보며 블라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말았다.

‘니미, 어릴 때부터 말을 탔으니 당연히 잘 타겠지······.’

블라드는 재능이 있는 녀석이었고 용병 중에서도 십인장을 맡을 정도로 기개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종자들은 블라드와는 다르게 다들 하나같이 준비되어 있던 녀석들 뿐이었다.

이 녀석들에게 부족한 것은 그저 실전에 대한 경험일 뿐, 그것만 갖춰진다면 어중간한 용병들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포틀리 같은 몇몇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괜찮아 블라드?”

“말 걸지 마. 혼자 있고 싶으니까.”

“으, 으응.”

블라드를 위로해주려 다가온 포틀리였으나 그의 날 선 반응에 쩔쩔매며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꼭 타고 만다.’

블라드는 자신을 떨어뜨렸던 말을 보며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었다.

히이이잉-

그런 모습이 오히려 말을 더 겁먹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

“문제는 대장이 아니야.”

“뭐?”

기마술 수업이 끝난 뒤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지는 종자들.

“대장 잘못이 아니라니까, 아예 올라타지도 못했잖아.”

“그랬지.”

블라드는 혹시 한 번이라도 더 얻어탈 수 있을까 하며 말을 몰고 가는 마구간지기들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내가 뭐 전문적인 말 관리사는 아니지만 말이야, 애초에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시비 거는 건 아니지?”

“아니지. 들어봐.”

고트는 들고 있던 양동이를 추슬러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바예지드 가문의 말들은 다들 훈련이 잘되어 있단 말이야. 사람 피하는 녀석들이 아니라고.”

“그런데?”

“그런데 대장이 다가가기만 하면 아예 기겁하고 도망쳤단 말이야. 이건 능숙하다 아니다를 떠나서 이상한 일이라고.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다 그랬다니까.”

“······젠장.”

고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네 발로 다니는 것들은 죄다 나를 싫어하니까.’

예전부터 그랬었다.

강아지, 고양이, 새.

딱히 뭐라 할 것도 없이 웬만한 동물들은 다들 하나같이 블라드가 근처에 가기만 하면 기겁을 해댔다.

얼마나 싫어했냐 하면 제미나가 너는 전생에 뭔가 잘못을 해도 크게 잘못했을 인간이라며 비웃을 정도였다.

애초에 고양이 같은 것을 한번 만져볼라치면 함정을 설치해 붙잡은 뒤 다가가야 할 정도였으니 딱히 반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말도 마찬가지인가.”

말 또한 자기를 피하는가 싶어 갑갑해진 블라드였다.

이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자야르 경의 말은 탔었는데?”

죽은 자들을 피해 도망치던 밤, 블라드는 분명 자야르의 말을 탔었다.

비록 고트가 모는 것이긴 했지만.

“자야르 경이 타는 말은 엄청 비싼 녀석이잖아.”

혈통이 워낙 좋은 녀석이라 쉽게 겁을 먹지 않았을 거라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저는 비싼 말만 탈 수 있습니다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되지도 않은 일을 한탄해 봤자 해결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오늘은 텄다.

“가라.”

“안 타보게?”

“마음이 꺾였어.”

되지도 않을 말을 타느니 차라리 자야르와의 대련을 준비하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블라드는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가려는 블라드의 귀로 누군가의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흠.”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으나 블라드는 일단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주위에 특이한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예전에 호르헤가 강조한 일이기도 했다.

위험과 위협은 언제나 근처에서 다가오는 법이었으니까.

소리가 이끄는 곳을 향해 블라드는 저택의 으슥한 곳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퍽-!

퍼억-!

그리고 그곳에는 예전 뒷골목에서 살았을 때 수없이 많이 보아왔던 광경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이 돼지 새끼가 요즘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만!”

“오랜만에 친구가 생기니까 좋냐?”

“하여튼 더러운 새끼들끼리 놀아요. 끼리끼리 모이게 돼 있다니까.”

그곳에는 소바닌과 그의 애송이들이 있었다.

서럽게 울고 있는 포틀리를 둘러싼 채로.

‘저렇게 얻어맞고 다녔구만.’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얻어맞고 있는 포틀리를 보며 블라드는 쓴 입맛을 다셨다.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네.”

잘 사는 놈들도 못사는 놈들도.

결국,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을 뜯어먹고 사는 놈들일 뿐이었다.

블라드는 가만히 저택의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

나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뒷골목에 있을 적에는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제미나나 하벤, 혹은 호르헤 패밀리에 속해있는 사람이 얻어맞고 있었다면 블라드는 생각도 않고 행동에 나섰을 것이다.

마음으로 묶여있든 혹은 조직으로 묶여있든 같은 형제로 묶여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움직여야 하는 것이 뒷골목의 법칙이었으니까.

그러나 저기서 얻어맞고 있는 녀석은 같이 묶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밥을 같이 먹는 사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엿 같네.”

평소라면 고민도 않은 채 떠났을 일이었지만 지금 블라드는 가만히 멈춰선 채 고민하고 있었다.

남을 위해 나서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어디까지가 남이고 나인가.

그리고 나는 남을 위해 나서도 되는 사람인가.

“······애매하네.”

소년은 자신의 세계가 넓어진 만큼 더 많은 것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포틀리의 울음소리와 함께 블라드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8화 10

별들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3)

창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무겁다.

주위를 둘러싼 공기가 왜인지 모르게 모자란 것만 같다.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숨을 들이마셔도 여전히 내뱉기가 힘들었다.

“이건 좀 큰가?”

자신이 보기에는 별반 달라 보이지도 않는 옷의 크기였건만 옥사나는 심각한 일이라도 된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며 시녀들에게 뭐라 지시했다.

“가슴을 내미셔야 해요.”

“······.”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시녀들이 블라드에게 달라붙어 시침질을 시작했다.

웃음 파는 창녀들의 짓궂은 어루만짐은 익숙했으나 옷을 다잡는 시녀들의 손길은 영 생소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거 얼마짜리지?’

그래서 블라드의 생각은 자꾸 다른 곳으로 겉돌고만 있었다.

살로 와닿는 옷감의 감촉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평생을 거친 옷만 입고 살아왔던 블라드로서는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질 정도의 편안함이었다.

“너무 딱 맞추면 안 되겠지?”

“17살이면 아직 성장기니까요.”

“하긴 요제프도 이때쯤 많이 크긴 했어.”

차가웠던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새로운 시기, 새로운 기회. 그리고 새로운 옷.

“이 정도면 되겠다.”

그리고 난생처음 겪어보는 사람.

블라드의 품에 맞춘 옷을 본 옥사나는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가까이 다가와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그녀를 보며 블라드는 자연스레 숨을 멈추고 말았다.

자신이 내뱉는 숨결에 혹시라도 이상한 냄새가 섞여 들어갈까 봐서였다.

“이번 여름이 오면 다른 옷도 맞춰주마. 지금은 일단 거지같은 차림새만 면해보자꾸나.”

“죄송합니다.”

여태껏 블라드는 주둔지에서부터 입었던 옷으로 버텨왔다.

비록 하녀들이 열심히 빨아대어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몸에도 맞지 않고 계절에도 맞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죽은 리만의 것을 뺏어 입은 옷이었다.

사내인 요제프와 자야르가 신경 써 주지 못한 부분을 지금 옥사나가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지금의 너를 보고 뒷골목에서 자랐다 할까. 근사한 귀족 청년 같구나.”

“······.”

옥사나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블라드는 누가 보아도 당당한 사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마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입은 옷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내 받아낸 옷을 입고 있어 그런 것일 테다.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옥사나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옥사나 님.”

옥사나의 미소를 마주 보기 힘든 소년은 괜스레 애꿎은 바닥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오히려 내가 고맙지.”

옥사나는 블라드의 금발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정말 짙은 금발이구나. 귀족들도 부러워할 만한 색이야. 우리 아이와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블라드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수련에 한창 바쁠 너를 불러 미안하구나. 이제 가보도록 하렴. 남은 옷들은 수선해서 너의 방으로 보내놓을 테니.”

“정말 감사합니다.”

옥사나가 준 옷들을 한 무더기 챙기고 방을 나서려는 블라드.

“저기 놓은 것들도 가져가렴.”

“······네.”

옥사나는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손으로 문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옷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예의를 차릴 줄 알아야 진짜 사내라 할 수 있는 거니까.”

“······.”

블라드는 옥사나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귓불이 빨개지고 말았다.

옥사나가 따로 챙겨놓은 것들은 속옷들이었다.

가끔 어머니들의 배려는 너무 깊은 곳까지 불쑥 들어오고 한다는 것을 소년은 잘 모르고 있었다.

※※※※

저물어가는 황혼을 따라 복도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늘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다 느낀 블라드였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무엇인지 모를 불편함이 번져오고 있었다.

‘적응이 안 돼.’

바예지드 가문의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자신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살이 찌는 느낌이었다.

영혼에 붙어 있는 살들이.

“······.”

방에 도착한 블라드는 그제야 깊숙한 곳에 묵혀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아니야.”

비좁아 터진 방을 보며 블라드는 그제야 안심하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있을 자리다.

아직까지는.

들고 온 옷들을 침대에 내려놓은 소년은 옥사나가 준 옷을 벗어 내렸다.

그리고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용병들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덜미를 따끔하게 찌르는 거친 천을 느끼며 블라드는 웃음 지었다.

옥사나가 준 멋진 옷을 입기에는 아직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니 오늘 밤은 이 옷이 어울릴 테다.

“가볼까.”

방에 들어섰을 때는 쇼아라의 블라드였으나 나설 때의 모습은 뒷골목의 블라드였다.

오늘은 그 모습이 필요했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어둠이 번져 가는 복도를 향해 블라드가 걸어갔다.

익숙한 곳을 향해 들어가는 소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

똑똑똑.

하루 일과가 끝나고 각자 방에서 개인 정비를 할 시간에 누군가가 포틀리의 방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블라드의 방보다는 크지만 많은 소시지를 보관하기에는 좁은 방을 열고는 포틀리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블라드?”

“별일 없었냐?”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아직 친구라 하기에는 모자라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람 취급이라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너한테 받아 갈 게 있어서.”

“받아 갈 거?”

블라드는 포틀리의 방을 기웃기웃 바라보다가 이윽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저거, 저거 나 줘.”

“저거? 하몽?”

블라드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제대로 숙성시킨 하몽이 있었다.

비싼 것이었고 포틀리도 아껴먹는 그런 염장 고기였다.

“저걸 달라고? 통째로?”

“응.”

일과 시간이 끝난 밤에 갑작스레 찾아와 하몽을 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포틀리는 의아함과 함께 씁쓸함을 느끼고 말았다.

“······알았어.”

친구는 될 수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웃음 정도는 주고받는 관계는 되고 싶었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왔다는 소년은 자신을 그 정도로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고기나 뜯어 먹을 정도의 사람이었나 보다.

아무리 부유한 집에서 온 포틀리라 할 지라도 5년 동안 숙성시킨 하몽 덩어리를 통째로 내주는 것은 이래저래 부담되는 일이었다.

“······.”

그래도 포틀리는 군말 없이 하몽 덩어리를 내주었다.

내일도 혼자 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혼자라는 외로움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는 소외감은 아직 이 시기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들 뿐이었다.

“······내가 아는 기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뭘?”

원했던 것을 가져갔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갈 줄 알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어두운 복도에 서서 포틀리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고.”

“응?”

“이건 내가 가질 정당한 대가야. 그러니 너무 억울해 마라.”

“으응?”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에 다른 놈들이 와서 문 두들겨도 열어주지 마. 따라나서지도 말고.”

“무슨 말이야?”

“그냥 그런 줄 알아.”

포틀리는 블라드가 한 말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디서나 자유롭고 싶어 하는 소년은 이미 복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해.”

포틀리는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블라드를 향해 조심하라 말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한 번의 휘적임 뿐.

점점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포틀리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방문을 잠글 뿐이었다.

철컥-

블라드가 한 말을 되새기면서.

※※※※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었고 바람 또한 잔잔했다.

게다가 보름달이 뜬 밤이었기에 밤에도 그리 어둡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빛 밝은 밤 아래서 누군가가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끄아······끄아아아.”

“그냥 누워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머리통을 깨부술 줄 알아.”

위에서 들려오는 으름장에 땅바닥에 쓰러진 종자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저놈은 정말 머리통을 부술 녀석이었으니까.

“사람 하나 잡는데 14명은 너무하잖아. 뒷골목 양아치들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

“입 닥쳐!”

보름달이 환히 밝히는 저택 내 자그마한 공터에서.

소바닌은 등에 벽을 지고 서 있는 금발 소년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 기세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새끼야.”

“무서워서 오줌 싸겠네.”

사방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블라드는 여유로운 미소만 흘릴 뿐이었다.

“들어와. 내가 얌전히 여기까지 나와줬는데 너희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비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손바닥을 까닥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이곳에 있는 모든 종자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둘러싸고 있었으나 오히려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단 한 명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대치였으나 기묘하게도 기세는 홀로 서 있는 블라드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다들 알고 있었다.

한 번에 뛰어 들어가면 아무리 잘난 척하는 저 녀석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으으으······.”

“소바닌······.”

그러나 지금 땅바닥에 누워있는 다른 녀석들의 모습이 그것을 주저하게 했다.

모양새가 처참하기도 했고 쓰러져 있는 위치가 심히 어지러워 한 번에 달려들기도 애매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시체로 쌓은 성벽 같은 모습이었다.

“씨이-발!”

자기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자 소바닌은 거친 함성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더 많잖아!”

더 많은 숫자.

더 좋은 환경.

그리고 더 좋은 조건에서 자라난 도련님들이 뒷골목에서 올라온 개 한 마리를 둘러싼 채 애처롭게 짖고 있었다.

“저 새끼가 계속 날뛰도록 내버려 둘 거야?”

“그, 그치만.”

“내버려 둘거냐고!”

소바닌이 아무리 눈을 부라리며 소리쳐도 종자들은 누구도 쉽게 앞으로 나서려 하지 못했다.

옆에 있는 소바닌의 기세보다도 앞에 있는 녀석의 기세가 더 강렬했으니까.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

달빛도 비춰주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환히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저 새끼가······.”

그 눈동자는 종자들이 무리와 홀로 떨어져 있을 때 찾아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댄 것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소바닌의 애송이들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간다 새끼들아! 따라 들어와!”

겁먹은 양 떼처럼 쉽사리 움직이려 하지 않는 동료들을 보며 소바닌은 별수 없이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들어가!”

소바닌이 앞장서 달려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종자들이 허겁지겁 뒤따르며 블라드에게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 피 좀 터지겠는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종자들을 보며 블라드는 옷을 갈아입고 오기를 잘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옥사나가 준 옷은 이런 녀석들 따위에게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었으니까.

“이 새끼 진짜 죽여버린다!”

웃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약이 바짝 오른 소바닌은 있는 힘껏 달려들기 시작했다.

“······!”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흐르지 않는다.

분노에 휩싸여 맹렬히 뛰어들고 있는 소바닌에게는 단 한 순간일 뿐이었겠으나 그의 뒤를 따라가는 종자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하는 순간이었다.

블라드의 푸른 눈을 마주 본 순간 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그렇지.”

누군가가 의도했던 대로 종자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달려드는 소바닌과 멈춰서는 종자들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한 번만 걸리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소바닌은 블라드의 비웃음을 보며 더욱 분노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힘을 잔뜩 실은 목검.

그것에 한 번만 걸리면 아무리 저 녀석이라도······.

“······!”

그러나 블라드에게 달려들던 소바닌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그저 한번 휘청였을 뿐인데 블라드의 신형이 어느새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출렁이는 물결과 같은 몸놀림이었다.

파악-!

목표를 잃은 목검이 매섭게 땅바닥을 파헤치고.

튀어 오른 흙들이 얼굴을 매섭게 때릴 때.

“너 사람은 죽여보고 그런 말을 하냐?”

소바닌의 귓가에 속삭이는 섬뜩한 목소리가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웃고 있었다.

“이 새······.”

빠악-!

“컥!”

순간의 번뜩임.

거칠게 폐를 파고드는 딱딱한 느낌에 소바닌은 제대로 소리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곧이어 턱을 향해 매서운 일격이 날아들어 왔다.

“흡!”

겨우겨우 막아낸 일격이었으나 블라드는 그것마저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계속해서 파고들어 오고 있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연격.

그러나 그 속에는 블라드라는 사람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날카로운 기세가 가득했다.

한 번만 베여도 온몸 가득 독기가 퍼질 것만 같은 그런 기세였다.

‘미친!’

소바닌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고작 검 잡은 지 두 달도 안 되었다는 놈이!’

대련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블라드를 보며 소바닌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지. 상대방을 네가 만든 간격 안에 가두는 거다.]

“······.”

토벌대에서의 블라드는 그저 잔뜩 힘을 모은 일격을 날리는 데 그친 수준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야르와 목소리의 훈련을 거치면서 점차 성숙된 블라드는 이제 전투에서 조금이나마 자신만의 흐름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겉보기에는 그리 티가 나지 않는 차이였겠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있는 사람이라면 블라드가 또 다른 단계로 올라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커억!”

지금 얻어맞고 있는 멧돼지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그런 경지로.

‘이대로는!’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공격에 소바닌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흐름을 뒤틀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블라드에게 목검을 들이밀려는 순간.

‘어?’

그저 블라드가 들고 있는 목검이 번뜩였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세상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땅이 달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블라드의 검은 이미 일개 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의외성이란 예측할 수 없는 저 너머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이.

쿵-

큰 소리와 함께 소바닌의 육체가 끈 떨어진 연처럼 넘어가 버렸다.

“으······으!”

쓰러진 채 몸을 추스르려 애쓰는 소바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 하나와.

“이 꽉 물어.”

그리고 그 달을 가리며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

달빛이 만드는 역광에 가려져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으나 소바닌은 블라드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

퍼억-!

끄아아-!

목검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누군가의 피가 튀어 올랐다.

차마 삼킬 수 없는 구슬픈 비명과 함께.

광기마저 느껴지는 블라드의 매타작에 주위에 있던 종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크으······히이이······.”

“······너는 앞으로 나랑 눈 마주치지 마라.”

아픔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바닥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바닌을 향해 블라드가 침을 내뱉었다.

떨어져 내리는 침이 소바닌의 뺨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통통이도 건들지 말고.”

“으으······.”

굴욕적인 처사였음에도 소바닌은 그저 본능적으로 블라드의 눈빛을 피하려고만 했다.

‘정말 죽이려고 했어!’

난생처음 맞닥뜨린 짙은 살기에 소바닌은 그저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정말 사람을 죽여본 적 있는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그런 살기였으니까.

“후······.”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굳은 목을 풀었다.

소바닌에 대한 복수는 방금 끝났다.

그리고 받아 간 하몽의 대가 또한.

소소한 것들이었지만 해야만 했고 또한 하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다음 누구야.”

해야 할 것들을 했으니 이제는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

블라드가 고개를 들자 땀에 전 금발이 보름달을 받아 반짝였다.

“누구냐니까.”

“······.”

피 묻은 목검을 든 블라드의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러나 블라드의 물음에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럴 거면서 나한테 왜 그랬어.”

대장을 잃고 기세마저 꺾여버린 종자들은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안 들어오면 내가 가지 뭐.”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블라드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삶이란 투쟁의 연속이다.

뺏어야만 먹을 수 있고 이겨야만 숨 쉴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난 소년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오늘도 어둠 속에서 헤매며 지치지도 않을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해야만 하는 또 다른 복수들을 위해서.

“······훌륭하군.”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종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피가 터져나가는 전장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마찬가지로.

달빛을 받은 소년의 목검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29화 14

데어마르에서 온 초대장 (1)

“이런······.”

교관은 비록 기사는 아니었으나 다양한 방면에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병사로서 바예지드 가문에서 복무해왔으며 숱한 전투를 치렀고 또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페테르는 그런 그의 경험을 높이 사 종자들을 교육하는 교관의 지위를 맡겼고, 그런 이유로 교관은 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바예지드 가문의 종자들을 교육해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종자들을 교육해 온 그에게도 오늘 같은 경우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왜 이것밖에 안 왔지?”

연병장에 모여있는 종자들을 보며 교관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보다 절반도 모여있지 않은 종자들을 보며 교관은 의아해하고 있었다.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식중독인가?

아니면 나에 대한 반항?

많은 생각들이 교관의 머릿속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나? 내게 대답해 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나?”

교관의 외침에 종자들은 자연스레 한 곳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블라드 말해봐라.”

그곳에는 입술은 터지고 군데군데 시퍼런 멍이 들어 있는 금발 소년이 서 있었다.

“아픈가 보던데요.”

“뭐?”

이제야 튀어나온 성의없는 대답에 교관은 눈썹을 찡그렸다.

“어디가 아픈가 봐요. 당분간은 못 나올 것 같더라고요.”

“······.”

교관은 블라드의 대답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프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어제만 하더라도 날뛰던 녀석들이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 넘게 갑자기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

블라드의 대답에 무언가 석연치 않은 것을 느낀 교관은 다시 한번 모여있는 종자들을 쳐다보았다.

‘없군.’

소바닌.

그리고 그 녀석과 뭉쳐 다니던 종자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 모여있는 종자들은 소바닌과 친하지 않은 녀석들과 저번 몬스터 토벌전에 기사들을 따라 나갔었던 종자들뿐이었다.

‘싸웠나?’

간혹 그런 경우는 있었다.

한참 혈기 넘치는 소년들을 모아놨으니 이래저래 투닥거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패싸움이라 할 만큼 싸움이 크게 번지는 경우도 있었다.

‘다들 멀끔한데?’

그러나 지금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남아 있는 녀석들은 딱히 패를 지어 다니는 녀석들도 아니었거니와 패싸움을 벌였다기에는 다들 멀끔해 보일 뿐이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상처 입은 녀석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종자인 블라드 뿐.

‘설마.’

순간, 교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의 사태를 온전히 설명해 줄 가능성이라고는 오직 이것 뿐이기도 했다.

“······너 혼자 했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결론을 입 밖으로 내뱉은 교관이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해맑은 것일 뿐이었다.

“오늘은 사람도 별로 없는데 말 타는 것 좀 더 연습해봐도 됩니까?”

“······.”

교관은 자연스레 자신의 질문을 뭉개는 블라드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이구나.

‘그것도 열 명이 넘는 녀석들을 혼자서.’

여태껏 이런 경우는 없었다.

교관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자서 열 명이 넘는 패거리를 정리한 종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이 녀석은 규격 외다.

교관은 뒷덜미를 스치는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래.”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소년을 향해 교관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

한 달에 한 번 있는 기사들 간의 정례회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페테르를 중심으로 기사들은 넓게 깔린 붉은 융단을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딱히 의도한 아니었지만, 한쪽에는 루트거를 지지하는 기사들이, 다른 한쪽에는 중립을 지키는 기사들과 함께 요제프를 따르는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는 중이었다.

“······조만간 임무를 나설 루트거 님과 기사들의 부재를 대비해 근무표를 재조정하였다.”

페테르의 바로 한 단 밑에 서 있는 노년의 기사.

머리뿐만 아니라 수염까지도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어버린 남자였으나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또렷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기사들은 그가 보내는 눈빛 하나하나에 맞춰 반응하는 중이었다.

페테르의 허락 아래 바예지드 가문의 모든 기사를 쥐락펴락하는 사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

“그러니 경들은 본인들의 임무를 다시 한번 확인하길 바란다.”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단장 안탈라스.

그의 진행에 따라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안건은 교회에서 보낸 성물들을 배분하는 건이다.”

안탈라스는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해냈다.

‘좋을 만도 하겠지.’

그러나 그것을 굳이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었다.

“······.”

“······흠.”

왜인지 여유로워 보이는 자야르와 미묘하게 표정이 굳어 있는 루트거를 지지하는 기사들.

안탈라스는 그 미묘한 신경전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동안 위축되어 있던 요제프 쪽 기사들의 기를 한 번 정도는 살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서 있는 요제프 쪽 기사라고는 자야르와 보르단 단 둘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무언가 건의할 사항이 있는 자는 발언해도 좋다.”

“······.”

짧은 침묵을 통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기사들을 보며 안탈라스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페테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할 것은 다 전했습니다.”

“수고하셨소.”

회의는 끝났다.

이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가주의 해산명령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러나 이어져야 할 명령 대신 미묘한 침묵이 흐르고만 있었다.

“······?”

기사들이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즈음.

그 순간 자야르는 페테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

“자야르 경!”

우르르 빠져나오는 기사들 사이로 누군가가 자야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가왔다.

“뭔가.”

“다 알면서 그러십니까.”

그레고리는 얼굴 가득 난 수염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었다.

“이미 소문 다 퍼졌습니다.”

“무슨 소문 말인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모른 척하는 자야르를 보며 그레고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야르 경의 종자가 푸닥거리를 크게 했다면서요? 그것도 혼자서 다 쓸어버렸다는데.”

“······그런가?”

알면서도 의뭉스럽게 행동하는 자야르였지만 그레고리는 딱히 불쾌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번 정도는 생색낼 만도 하지.’

그동안 요제프를 따르던 기사들은 마땅히 가슴을 펴고 다닐만한 일이 없었다.

그들이 모시고 있는 요제프라는 사람은 루트거처럼 빛나는 사람이 아니었던데다 5명밖에 안 되는 적은 수의 기사로는 무언가 일을 도모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세력 판도에 그저 안간힘을 내며 버티고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실로 오랜만에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쯧.”

“누굴 물지 모르는 사나운 개를 데려왔군.”

혀를 차며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자야르는 그저 심드렁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주 조금의 비웃음만을 머금은 채로.

“햐- 제가 역시 사람 보는 눈은 있습니다. 뭐라 했습니까? 고놈이 참 남자답고 기세도 단단하고······.”

“밥 정도는 같이 먹으라 말해 두었네.”

“모시는 기사를 따라 성품 또한 훌륭하고.”

“내친김에 다른 녀석들도 소개해주고 그러는가 본데.”

“······저 한 번 가져다 쓰십시오. 조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됩니다.”

그레고리의 말을 들으며 자야르는 괜히 안대를 어루만졌다.

자야르는 다른 감정들은 몰라도 기쁜 마음만큼은 크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속으로는 그도 블라드를 기특하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14명이나 되는 녀석들을 혼자서 쓸어버렸으니 이 정도 무용이라면 요제프 또한 미소 지을 만한 일이었다.

‘이 정도는 해줘야지.’

자신 정도 되는 기사가 그만큼 정성을 쏟았는데 이 정도는 상환해주는 것이 맞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야르는 요제프의 집무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

저택 조용한 곳에 있는 요제프의 집무실.

그곳에 다다른 자야르는 조용히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들어오게.”

방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자야르는 손잡이를 잡아 돌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살 만은 해.”

그곳에는 눈그늘이 더욱 짙어진 요제프가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상자와 함께.

“아버님이 블라드에게 선물을 보내오셨네.”

자야르의 시선을 눈치챈 요제프는 상자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또 땅콩 같은 것은 아니겠죠?”

“······강렬한 기억이기는 했지.”

이미 블라드에게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던 자야르는 자연스레 경계의 눈초리로 페테르가 보냈다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블라드는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확인해 봤네. 안심해도 좋아.”

요제프의 말에 그제야 안심한 자야르는 집무실 한 가운데 놓여있는 상자를 열었다.

“호······.”

자야르가 상자를 열자 옆에 서 있던 보르단은 자신도 모르게 자그마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갑옷이군요.”

그곳에는 누가 보아도 잘 손질된 갑옷 한 벌이 들어있었다.

흉갑, 견갑, 손목과 무릎을 보호하는 관절 보호대 그리고 신발까지.

일개 종자에게 보냈다기에는 너무나 근사한 가죽 갑옷이었다.

“······.”

그러나 감탄사를 내뱉는 보르단과는 다르게 자야르는 진지한 눈빛으로 갑옷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검회색 가죽 갑옷에 비치는 햇빛이 페테르가 자신에게 보냈던 눈빛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오크 가죽이군요.”

“최상급 가죽은 아니지만, 충분히 쓸만한 것이지.”

“그것도 회색 오크의 가죽입니다.”

“······그렇지.”

자야르는 조심스레 회색빛의 갑옷을 꺼내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비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자야르는 단순히 새로운 갑옷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역시 그런 의미였나.”

페테르가 보낸 것은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회색 오크의 갑옷이었다.

그렇기에 회색 오크 가죽으로 만든 갑옷은 북부의 전사들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야르는 깊은 눈빛으로 회색 갑옷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녀석이 어디서 페테르 님의 눈에 띄었을까요?”

“그것은 나도 모르지. 잡아서 고문이라도 해볼까?”

“아!”

이제야 둘의 대화를 따라잡은 보르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회색 오크의 갑옷이었군요!”

보르단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내려치며 자야르가 들고 있는 갑옷으로 다가갔다.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전대 가주님 때는 자주 봤던 것이었는데요.”

“지금 있는 종자들은 그때보다 못한 녀석들 뿐이니까.”

지금에야 대륙 각지에서 바예지드 가문의 명성을 듣고 기사들이 찾아오고는 했지만, 전(前)대까지만 하더라도 바예지드 가문은 스스로 키워낸 기사들을 통해 세력을 불려왔었다.

지금 기사단장인 안탈라스도 그 당시 바예지드 가문에서 종자부터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때 활동했던 기사들을 일컬어 북부 사람들은 바예지드 가문의 황금세대라고 불렀었다.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이곳에 오자마자 한 달 만에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녀석이야. 투자할 가치는 이미 증명했다고 봐야지.”

“그렇습니다.”

자야르는 조심스레 갑옷을 상자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지금 있는 종자 중에서는 그 녀석과 비견될 만한 녀석은 없어 보입니다.”

“그 이야기는 들었네. 이미 소문이 쫙 퍼졌더군.”

요제프는 힐끗 눈을 돌리며 자야르를 바라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둘은 자연스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좋아.”

요제프는 책상 밑 서랍을 열어 한 장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비록 뼈아픈 손실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요제프는 편지의 봉투를 열어 자야르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뭡니까.”

“다음 걸음.”

편지를 넘겨준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한낮의 태양이 눈부신 자리에서 요제프는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둥실 떠 있는 푸른 하늘이 보기가 좋았다.

“가능하겠나.”

“음······.”

편지를 확인한 자야르는 요제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그 녀석 뒤치다꺼리하느라 쌓여있던 참이었는데 잘 됐습니다.”

자야르의 말을 들은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보르단을 향해 말했다.

“준비해주게.”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바예지드 저택에 온 금발 소년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온몸을 비틀 동안 짙은 눈그늘을 지닌 청년 또한 다시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얻어낸 편지 한 장.

그것은 초대장이었으며 또한 요제프에게 있어서는 기회를 향한 한 걸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데어마르로 가네.”

푸른 하늘 속 뭉게구름은 남쪽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0화 10

데어마르에서 온 초대장 (2)

숲으로 둘러싸인 하얀색의 저택.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저택의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와 비석들.

불어오는 봄바람이 여인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

자그마한 비석 옆에 앉아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조용히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어났으며 자라온 곳.

앞으로도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

그리고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곳이었다.

여인은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맺히고 시야는 점점 뿌예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저택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여인의 눈물은 밑으로 흐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숨겼을 뿐이었다.

흘렸어야 할 슬픔과 함께.

슬퍼해야 할 시간은 끝났다.

누구에게나 그런 때는 온다.

※※※※

“아 요즘 따라 심장이 자꾸 제멋대로 뛰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고 있는 블라드의 옆에서 고트가 괜스레 나뭇잎을 씹으며 대답했다.

“병 아냐?”

“모르겠네. 갑자기 그러네. 이상하게 집중도 잘 안 되고.”

“봄바람이라도 들었나.”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 걸지도.”

성의 없는 물음에 성의 없는 대답.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둘은 그저 입을 움직이고 싶어서 대화하는 것뿐이었으니까.

“얼마나 남았냐.”

“마부 말로는 3일은 더 가야 한다는데.”

“너는 마부 아니야?”

“나는 마부 조수.”

비록 마차에 앉은 채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한창 혈기 넘치는 소년에게는 지루한 것일 수밖에 없는 여행길이었다.

“이제 출발한다!”

“출발한대. 대장”

“어이구-우.”

블라드는 노인이나 낼법한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그거 하몽인지 뭔지 나도 한 조각만 주면 안 돼?”

“그거 이제 내 거 아냐.”

블라드를 향해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 고트였지만 블라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니까 네 거일 때 한 입 줬으면 얼마나 좋았냐······.”

고트는 블라드의 대답에 씹던 나뭇잎과 함께 가슴 속 서운함을 내뱉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했고 날씨는 화창했다.

일행은 봄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

도시 데어마르.

하이날 남작 가문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도시.

위치는 중부에서도 북쪽에 속해있어 바예지드 가문이 있는 스투르마에서도 날씨만 좋다면 마차를 타고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역시 레몬이 유명하지.”

“레몬은 남쪽에서 자라는 과일 아닌가요?”

“그래서 수요가 있는 거야.”

레몬을 생산할 수 있는 최북단 기후에 걸쳐 있는 이 도시는 주된 사업으로는 레몬 생산이 있었으며 그것을 2차 가공하여 만드는 제품들이 나름 알려진 곳이었다.

“남들이 레몬을 팔 시기쯤에 수확해서 시장에 물량이 없을 때쯤 팔아치우거든. 비록 기후 때문에 많은 양을 수확하지는 못하지만, 시기를 노리는 그 안목만큼은 훌륭했다 할 수 있지.”

“오오.”

그렇게 해서 팔 수도 있구나.

같은 품목이라도 그렇게 해서 가치를 높일 수가 있구나.

하몽을 저며내던 블라드는 요제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말이 많은 요제프와 같이 있는 것은 가끔은 곤혹이기는 했지만, 그가 말로 내뱉는 지식과 견문들은 블라드에게 있어서 훌륭한 자양분이 되고 있었다.

“과일을 맛보기 힘든 북부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마운 도시이지. 게다가 모든 것의 중심인 중부 지역으로 나아가는 관문 중 하나이기도 하고.”

하몽을 잘라내는 블라드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는 요제프.

“북부인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도시라는 거다.”

“······.”

블라드는 그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붉은색의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빨리 잘라라.”

“이게 얇게 발라내야 하거든요.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쯧.”

요제프는 블라드의 설명에 혀를 쯧 하고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자야르 경이 움직이는 건가요?”

“그렇지.”

현재 일행은 하이날 남작가의 도시인 데어마르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곳의 정통한 후계자인 알리시아 하이날에게 초대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지. 그것도 내가 겪는 위기가 아닐 경우는 더더욱.”

그러나 그녀의 초대장은 겉으로는 초대장의 형식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구원요청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세계는 정말 복잡하네요.”

“복잡하게 보면 복잡하고 간단하게 보면 간단하지.”

자야르는 이제야 건네지는 하몽 조각을 낼름 받아들고는 우물거렸다.

“결국 데어마르라는 땅을 가지기 위한 싸움일 뿐이야.”

“그것도 피를 섞은 가족끼리 말이죠.”

“······피 섞인 자들과의 반목은 귀족들의 유구한 전통이지.”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얼굴에는 차마 감추기 힘든 씁쓸함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

그 표정을 본 블라드는 그저 얌전히 다음 하몽 조각을 저미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누구나 혼자서 짊어져야만 하는 무게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요제프를 영지로 초대한 알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현재 계승권 분쟁 중에 있었다.

여느 싸움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하이날 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승권 분쟁은 현재 끝도 없는 진흙탕 싸움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는 흔치 않지. 그야말로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는 상황이니.”

알리시아의 삼촌인 엔드레 하이날은 자신의 조카가 형님의 피를 이은 자식이 아닌 부정한 관계를 통해 태어난 사람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부정한 관계를 통해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리시아만 사라진다면 다음 대 하이날 남작은 그가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전(前) 하이날 남작의 유일한 자식이지만 여자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는 알리시아.

그녀가 눈앞에 있는 곤경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교회에서 주관하는 명예로운 결투를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결국 엔드레가 원하는 방향일 뿐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하이날 가문에 빚을 지워둔다. 아버지도 동의하신 생각이지.”

“그렇군요.”

블라드는 마차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자야르를 바라보았다.

알리시아 하이날이 자신의 명예를 맡기기 위해 특별히 초빙할 정도로 뛰어난 기사.

‘대단하네.’

명성과 실력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대외 활동을 많이 하는 기사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많겠지만 자야르처럼 가문 내부의 일을 중시하는 기사라면 그럴 기회가 별로 없을 것이다.

“뭘 보냐. 눈빛이 무례한데?”

“······.”

자야르는 자신의 종자가 보내오는 수상한 눈빛에 또다시 심사가 뒤틀리고 말았다.

“종자 주제에 모시는 기사는 말을 태우고 본인은 마차에서 편하게 앉아 가는 기분이 어때?”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지금 블라드의 심정이 딱 그것이었다.

괜히 바라봤다.

“수치스럽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지.”

“······.”

다른 종자들을 작살내고 다니기에 어깨 좀 펴고 다녔더니 사실은 말에 올라타지도 못하는 반푼이 녀석이었다니.

아직도 자신을 향해 낄낄거리던 누군가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은 자야르였다.

“······말들이 저를 싫어합니다.”

“왜 말들만 너를 싫어할 거라 생각하지?”

“······.”

말을 타지 못하는 기사는 없다.

말을 타지 못하는 종자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앞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고트조차도 말은 탈 줄 알았다.

“······비싼 말은 탈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비싼 말은 네가 태우고 다녀야지. 너보다 귀한 몸이니까.”

그것도 변명이냐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볼 면목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자꾸 왜 이러지.’

마치 뜀박질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심장이 마구 날뛰고 있었다.

요 며칠 자주 느껴지는 그런 감각이었다.

‘갈굼을 받아서 그런가?’

앞에서는 요제프가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옆에서는 자야르가 틈만 나면 갈구는 상황이었기에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만한 이유였다.

정신적인 압박감은 만병의 근원과도 같은 것이니까.

두근- 두근-

블라드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응?”

그리고 이상한 울림을 보이는 것은 블라드의 심장 박동만이 아니었다.

“······땅이 울리는군.”

블라드뿐만 아니라 요제프도 흔들리는 진동을 느끼며 점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움직이기에 느껴지는 그런 진동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전원 정지!”

밖에 있던 자야르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행렬을 정지시키고는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나무가 흔들린다.’

블라드는 창을 통해서 주위에 있는 나무들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긴장하고 있을 때.

드드드드드득-!

굉음과 함께 땅이 마구 울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모두 말에서 내려!”

히이이이잉-

발밑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울림에 예민한 말들이 크게 날뛰기 시작했다.

“젠장!”

땅에서 오는 진동과 더불어 말들의 날뜀으로 마차가 마구 들썩이자 블라드는 재빨리 요제프를 감싼 채 마차의 문을 발로 열어젖혔다.

블라드는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상황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지만, 본능적인 움직임에 따라 요제프를 마차에서 하차시켰다.

“으아아아!”

“······.”

그리고는 그를 감싸고는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정작 보호받고 있는 요제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성은 갸륵하다만 너무 당황하지 마라.”

“이거! 지진입니까?”

“아니다. 이건 아마도······.”

드드드드드득-!

요제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땅의 진동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울리는지 가만히 있어도 땅바닥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지진은 난생처음인데!’

아무리 산전수전을 겪어봤던 블라드라 할지라도 처음 겪는 재해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끝났군.”

“······히이.”

고작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진이 빠져버린 블라드는 구르듯 옆으로 움직여 요제프에게서 떨어졌다.

“지진은 처음 겪어보는데요.”

“이건 지진이 아니다.”

“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몸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벙찐 목소리를 내었다.

“봐라.”

블라드는 요제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저 멀리 보이는 평원에서 땅이 들썩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두더지가 땅을 파며 움직이면 저렇지 않을까 싶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실제로 두더지로 할지라도 엄청나게 큰 녀석일 것이다.

“자이언트 데스웜이다. 서부에서 서식하는 몬스터지만 이맘때쯤에는 먹이를 찾아 중부까지 다다르지.”

“자이언트 데스웜?”

그게 뭐냐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설명을 해줘야 함을 자각했다.

가능성의 덩어리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소년은 아무리 부어도 부어도 모자란 그릇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용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이 손 쓰기 힘들다는 점에서는 지진과도 같지.”

“용······.”

"정확히는 몰락해 버린 용의 잔재지만 말이지."

마지막 말과 함께 요제프가 떠나가고 일행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장비들을 점검하는 동안.

“······.”

소년은 그저 가만히 앉아 땅을 들썩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흙먼지들에 자연스레 눈가가 부예졌으나 소년은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멋지네.”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것.

뒷골목에만 박혀있었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것.

그것이 멀리 떨어져 가는 만큼 블라드의 심장 박동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소년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었다.

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1화 3

기억 속의 나무 (1)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준비되었소.”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 요제프와 기사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종자인 블라드는 그들과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

요제프의 흩날리는 망토와 함께 닫히는 홀의 문.

아직 저곳은 블라드에게 허락된 장소가 아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에게 허락된 것은 그저 자그마한 것들 뿐이었다.

‘지루함의 연속이네.’

저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눌지 알 수 없었으나 블라드는 이곳에서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자신의 시간을 본인의 의지대로 쓸 수 없는 것.

그것이 어딘가에 묶인 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슬픔이기도 했다.

‘둘러라도 볼까.’

잠시 처량한 감상에 젖을뻔한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대신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묶인 몸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곳을 살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한 열 걸음 정도쯤은?

낯선 곳, 낯선 장소에 들어서면 블라드는 항상 주위를 기웃거리고는 했다.

정확히는 탈출구를 찾아놓는 습관 때문이었는데 언제 어디서나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뒷골목 부랑아의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바예지드 저택보다는 작네,’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데어마르의 저택은 작았으며 또한 오래되어 보였다.

어쩌면 권세 높은 백작 가문의 저택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뒷골목에서 살아왔던 블라드의 판단으로도 이곳은 그리 큰 저택은 아니었다.

비록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그런 느낌은 덜하긴 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금세 멋진 폐가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그런 곳이었다.

‘꼭 그렇지도 않나 보네.’

그러나 블라드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복도 구석구석 쌓여가는 먼지들이.

한참 어지러운 시기임을 말해주듯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조금씩 균열이 번져가고 있었다.

“흠흠.”

“······.”

같이 대기하고 있는 시종의 헛기침 소리로 대략 움직여도 되는 반경을 잡아낸 블라드는 그때부터 자신에게 허락된 공간을 거닐며 이곳의 분위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복도는 좁고 구불구불한 것이 길을 잃기 딱 좋으며.

곳곳에 색이 다른 벽지들을 보아하니 가까운 시일에 액자 같은 것을 떼어낸 것으로 보이고.

늙은 하녀가 낑낑대며 양동이를 드는 것으로 보아 최근에 사용인들을 해고한 것 같다.

‘돈이 없나 보네.’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그런 것들을 통해 블라드는 이곳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레몬으로 유명한 영지인 이곳은 지금 자금상의 문제가 있다.

‘허탕 치는 거 아냐?’

자세히 말해주지 않아 속사정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요제프가 이곳까지 직접 왔다는 이야기는 무언가를 얻어가기 위함일 것이다.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보고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실적을 쌓을 수 있을 만한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블라드가 봤을 때는 적어도 반짝이는 금화는 구하기 힘들 것 같아 보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자신은 종자일 뿐.

같은 배를 타고 있으나 엄연히 역할이 다르니 거기까지는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경 쓸 자격도 없긴 했지만.

그렇게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을 때쯤.

[웅-웅웅웅-]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짧은 검명을 내며 블라드를 부르고 있었다.

“흠.”

누가 보았을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시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검을 잡아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블라드가 장식 없는 검을 잡은 순간.

[내가 여기 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

“······오.”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요제프 바예지드 님.”

“피의 부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정당한 혈족의 위기라면 당연히 응해야지요.”

이곳 가장 높은 곳에 앉아있는 여인.

“······.”

처연한 물빛 머리를 가진 젊은 여인이 오직 가주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요제프를 응대하고 있었다.

젊고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입고 있는 옷이 무거워 보였고 앉아있는 자리가 버거워 보이는 것은 요제프만이 느낀 감상은 아닐 것이다.

“부디 옥사나 님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서로 피를 섞은 사이.

모계의 핏줄을 따라 8촌을 훌쩍 넘은 사이이기는 했지만 알리시아와 요제프는 그런 관계였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해도 그리 가깝지는 않은 그런 관계였으나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일치하고 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은 사실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저의 아버지이신 바예지드 백작님은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남은 것은 알리시아 님의 결정뿐입니다.”

짧은 예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요제프를 보며 알리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오늘따라 짙어 보였다.

“······.”

책임감,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

그것들에 밀려 알리시아가 서서히 흔들리고 있을 때쯤 옆에 있던 노(老)기사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저는 이미 결정했습니다.”

모두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검을 바쳐준 늙은 기사를 보며 알리시아는 결심을 다잡았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

나는 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알리시아의 말에 요제프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자신이 계획한 일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결투에서의 승리가 저에게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물빛 머리의 여인은 당당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약속뿐인 이 상황에서 그녀는 아직 대가를 받지 못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알리시아의 발작과도 같은 발언에 요제프는 그저 여유 있는 미소로 화답할 뿐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검은 언제나 승리를 약속해왔습니다. 알리시아 님.”

요제프의 말과 함께 애꾸눈의 기사가 조용히 검을 손에 가져다 댔다.

“······.”

여인을 지키는 늙은 기사를 바라보면서.

비록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눈이었으나 그 안에 담겨있는 기운은 수백 개의 눈빛을 부술 수 있는 그런 기세를 품고 있었다.

기사는 기세로서 자신의 승리를 약속했다.

지키려는 기사와 가져가려는 기사.

내어줘야 하는 여인과 약속해야 하는 청년.

이 저택 가장 넓은 홀 안에서, 네 사람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갔다.

※※※※

“그녀를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군.”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래도 중심은 잡고 있었습니다. 여장부로서의 기질이 보입니다.”

“내가 봐도 그렇다.”

요제프는 복도를 걸으면서 알리시아와의 대면을 생각했다.

다급한 구원요청으로 보아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한 줌의 주도권은 놓지 않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요제프는 아무 말 없이 따라걷는 보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획했던 대로 만약을 준비해두시오.”

“네. 요제프 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맞는 쓰임새가 있다.

그것이 요제프가 검으로서는 반푼이조차 안되는 보르단을 데리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야르가 요제프에게 마련된 응접실의 문을 열자 그곳에는 블라드가 홀로 일행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지루했겠군.”

요제프는 응접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그렇게 말하는 요제프의 눈가에는 시커먼 눈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일주일이 넘는 여행이었고 거기에 쉴 틈도 없이 알리시아와의 기싸움을 벌였다.

몸이 약한 요제프로서는 꽤나 무리한 상황이었기에 지금부터는 안정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블라드.”

“네 요제프 님.”

그러나 스투르마에서 이곳 데어마르까지 온 것은 어디까지나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방금의 대화로 본래 의도했던 이득을 확정 지었으니 이제는 소소한 이득도 돌봐야 할 차례였다.

“너는 지금부터 자유롭게 움직여라.”

“혼자요?”

“그래. 고트라는 녀석을 데리고 다녀도 좋다.”

요제프는 블라드를 향해 허락된 만큼 자유롭게 다니며 많은 것을 봐두라 지시했다.

“물론 결투 당일에는 자야르를 보조해야겠지.”

“저야······뭐 그래 주시면 좋죠.”

요제프는 자신의 명령이 잘 이해되지 않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소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머니가 주신 옷 위에 아버지가 주신 갑옷을 입은 소년.

바예지드 가문의 주인들이 기대를 걸기에 주저하지 않는 소년을 보며 요제프는 입을 열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을수록 좋다. 이곳에는 내가 알아둬야 할 만한 격조 높은 귀족도 없을뿐더러 모두가 날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지.”

이곳 데어마르는 하이날 가문의 도시였지만 단순히 위상만을 따진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바예지드 가문의 적자인 요제프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모든 자는 알리시아보다도 요제프와 안면을 트기 위해 침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몸이 약한 요제프의 입장에서는 실리가 없을뿐더러 귀찮기도 한 일이었다.

“내가 왜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을지 생각해봐라. 아직 말도 타지 못하는 너를.”

“······.”

요제프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블라드를 굳이 훈련 중에 빼 온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명예 결투라는 것은 찾아가서 보지 않으면 구경하기 힘든 볼거리다. 게다가 이번 데어마르에서 벌어지는 명예 결투는 단판 결투가 아닌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결투지.”

보통의 명예 결투란 각 대리인이 정한 두 명의 검사가 서로 맞붙는 것을 뜻하지만 지금의 경우와 같이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가문 내부에서 벌어졌으며 확실한 증거 없이 오직 의혹만이 가득한 재판.

게다가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결투이니만큼 이 복잡한 상황을 아우르기 위해 두 명의 하이날은 지금과 같은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만큼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사들이 지금 이곳 데어마르에 있다. 너는 그들을 보며 느낄 것을 느끼고 와라.”

“알겠습니다.”

열 번 일러주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더욱 가슴에 남을 것임은 당연한 일.

어차피 제대로 키워보기로 한 녀석이었으니 가능하다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블라드의 세계를 넓혀주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요제프는 생각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몸도 풀 겸 대련을 해야 하니까 어디 가서 멍청하게 얻어터지지 말고.”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거든요.”

요제프가 당근이라면 자야르는 채찍이었다.

혹시라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었지만 자야르의 입에서는 언제나 가시 하나가 박혀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넌 이미 나에게 신뢰를 잃었어.”

“······.”

방금 날린 일침에 블라드는 고개를 숙이며 풀죽은 모습을 보였으나 정작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자야르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기가 막히게 숙이는군, 더는 할 말도 없게 말이야.’

자야르는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녀석이 비록 겁먹은 척 행동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다른 종자들이라면 눈물이라도 터트렸을 자야르의 기세였지만 블라드는 그 기세를 머리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이었다.

거짓된 위협은 이 소년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었다.

“좋아. 저녁마다 나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하고 특이동향이 발생한다면 그것 또한 지체없이 말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블라드의 행동방침을 지정해 준 요제프는 저녁이 늦었으니 방으로 돌아가 쉬라 말해주었다.

“······.”

자신을 못마땅하게 노려보는 자야르의 눈빛을 뒤로 한 채 방을 나선 블라드.

익숙하지 않은 복도를 지나 하인들의 방을 향해 걷던 블라드는 잠시 멈춰 섰다.

복도 사이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환한 달빛이 비쳐들었다.

빛을 따라 바라본 그곳에는 저택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고.

[저 나무가 기억난다.]

그 언덕 위에는 앙상하게 마른 가지를 가진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가엾은 목소리는 달빛 아래 서 있는 저 나무가 기억에 있다 말하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으나 아직 저녁만큼은 쌀쌀한 날씨.

그러나 블라드는 어째서인지 저기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가지들이 마치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것만 같아 보였다.

“오랜만에 기도할 곳이 필요하겠는데.”

소년은 그날의 달을 증인 삼아 계약했다.

너는 나에게 검을 주고.

나는 너에게 기억을 준다.

그동안은 받아왔으니 이제는 돌려줘야 할 차례였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2화 18

기억 속의 나무 (2)

이어지는 것은 결국 기억뿐이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흔적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상처처럼 남겨진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들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의 이름을 담은 기억 하나를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자꾸 잊어만 가나 보다.

“우리 엄마도 이런 거 하나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

저택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

목소리가 기억난다 했던 나무의 아래에는 하이날 가문의 가족묘가 안치되어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곳 같았지만, 소년은 와야만 했다.

그것이 계약이었으므로.

“······.”

늘어서 있는 하얀색의 비석들을 보며 소년은 어머니를 생각했다.

뒷골목의 독기 속에서 홀로 어린 소년을 보호했던 여인은 결국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예정된 파멸이었으며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비극은 차마 넘기지 못한 독을 자식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현실일 것이다.

별을 품은 소년은 어머니의 눈물로도 삭히지 못한 독을 먹고 자라왔다.

“관리가 잘 안 되나 보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하얀색의 비석.

이곳에 있는 비석 중에서도 가장 새것 같아 보이는 비석에는 땅바닥에 나뒹굴던 나뭇잎들이 가득했다.

“······.”

소년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손바닥을 들어 비석을 쓸어내렸다.

한 번의 관심이 닿을 때마다 비석은 제 모습을 찾고 잊혀져 가는 이름을 드러내었다.

“땅 주인들한테 인사하는 건 당연한 예의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괜히 멋쩍어진 블라드는 방금 한 행동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누구나 문득 낯선 행동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 법이었다.

“그럼 기도합니다.”

[음.]

“실컷 봐두시라고요. 보라는 기사들도 안 보고 이곳에 온 거니까.”

[고맙다.]

블라드는 기도하는 리만 때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고는 언덕 위 나무를 향해 곧추세웠다.

살랑이는 봄바람이 소년의 금발을 흐트러뜨리고.

하얀색의 비석들이 물끄러미 소년의 기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묵묵히 기도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혹시라도 모를 남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이었으나 블라드는 속으로 어린 부제에게 배웠던 기도문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는 중이었다.

이곳을 보니 생각나는 사람을 위한 기도였다.

[······.]

블라드의 배려 아래 목소리는 기억 속에 있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거품처럼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때는 저 나무가 좀 더 작았던 것 같다.

그때는 언제였지.

누군가와 함께 왔던 것만 같다.

누구였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목소리는 마치 지금 자신이 자욱한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다다르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억의 끝자락을 찾기 위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잠시만 몸을 빌려도 될까?]

“잠시라면요.”

그리고 목소리는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대신 희미한 안개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

블라드는 평소 해왔던 대로 온몸에 힘을 풀고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을 열었다.

그러자 곧 시야가 멀어지기 시작하며 마치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

[흠.]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야로 보는 세계.

“······저게 뭐야.”

[나를 알아보는 모양이다.]

그곳을 통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비석들을 감싸고 있는 나무.

쉬이이익-

그리고 그 나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것이 있었다.

영롱한 빛깔을 뿜어내는 새하얀 색의 뱀이었다.

[정령이다.]

“······.”

나무만큼이나 커다란 하얀색의 뱀을 보며 블라드는 그저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요새 신기한 걸 너무 많이 보는데.’

데스웜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블라드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정령이라는 존재.

그것을 지금 목소리의 세계를 통해 보고 있었다.

블라드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요제프의 의도는 어쩌면 지금 가장 잘 들어맞고 있는지도 몰랐다.

“절 보는 거 같은데요.”

[네 안에 있는 나를 보고 있다.]

나무를 감싸 안은 채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얀색의 뱀.

뿌리 내린 나무만큼이나 거대한 모습이 오히려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

그러나 블라드는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는 뱀을 보면서도 어떠한 압박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아마 하얀 뱀이 그렇게 의도한 것일 테다.

“내려오는데요?”

[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천천히 나무를 타고 내려와 비석들을 스쳐 지나가며.

쉬이이익-

뱀은 천천히 블라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낯선 것이면서도 거대한 것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있었다.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뱀의 영롱한 두 눈은 그것을 확신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둥글게 휘어진 뱀의 눈동자는 반가운 누군가를 맞는 집주인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하얀 색의 뱀이 다가오고.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비석들을 감싸 안은 나무가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봄기운처럼 따뜻한 기운이 언덕에 가득 흐르고 있었다.

멋진 세계였다.

“누구세요?”

그러나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응?”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블라드는 그만 오른쪽 눈을 뜨고 말았다.

쉬이이익-

그렇게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어?”

방금까지도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하얀색의 뱀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한 번의 깜빡임으로 목소리의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블라드는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느낌이었다.

“누구신가요? 이곳은 하이날 가문의 사람이 아니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

블라드는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는 왼쪽 눈을 비비며 뒤를 돌아봤다.

“음.”

[흠.]

겨우 초점이 잡힌 시야의 끄트머리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물빛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평생 화려한 창녀들을 보아왔던 블라드조차 작은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이었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아 저는 그······.”

블라드는 아직 완벽히 돌아오지 않은 정신을 다잡으며 다음 할 말을 생각해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청산유수와도 같이 변명을 내뱉었을 테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본 직후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

그리고 그 모습은 자연스럽게 블라드를 세상 물정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연출하게 했다.

근사한 머리 색과 호감 가는 얼굴,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진해 보이는 행동은 물빛 머리 여인의 경계심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었다.

“······기도를 하러 왔습니다.”

“기도?”

“기도를 올리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여전히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여인을 보며 블라드는 재빨리 품을 뒤져 자신의 신분패를 꺼냈다.

“그리고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사 자야르 님의 종자거든요.”

“흐음.”

여인은 블라드가 건네는 신분패를 받아 들어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조작의 흔적이 없어 보이는 교회의 신분패.

새로 만든 것 같아 보였지만 정교하게 새겨진 교회의 문양은 확실히 정상적으로 발급받은 신분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무심코 돌려본 신분패의 뒷면.

‘응?’

여인은 그곳에서 특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분 보증인이······사제 안드레아?’

신분패의 뒷면에 적혀있는 이름은 근방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제 안드레아였다.

주교로 임명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세속의 명예 대신 고난의 현장을 찾아다닌다는 명망 높은 사제.

그리고 그가 보증하는 소년.

물빛 머리의 여인은 당황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이 신분패는 귀족의 핏줄보다도 귀한 것이었으니까.

“······좋아요. 수상한 사람은 아니군요.”

“아.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여인이 돌려주는 신분패를 다시 소중히 품에 넣었다.

소중한 것을 귀하게 대하는 그 모습이 소년의 순진해 보이는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블라드는 생각했다.

귀족들의 무덤가에 서 있는 지금의 행동은 분명 무례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 있는 이 여자가 괜히 잘못 입이라도 열었다가는 요제프가 곤란해질지도 몰랐다.

왜 그랬냐 물어보면 뭐라 대답하기도 마땅치 않을 테고.

“도와드릴까요?”

“네?”

“이곳의 하녀 아닌가요? 무덤가를 돌보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래서 블라드는 이 여인의 입을 막아보기로 했다.

작은 호의를 베풂으로써.

블라드의 말에 알리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충격이었다.

난생처음이기도 했고.

‘감히!’

귀족가의 영애이자 이제는 가주의 위치에 있는 그녀에게 있어 지금 블라드가 하는 행동은 분명 무례하다 못해 경을 칠 행동이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블라드가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눈치가 너무 좋았기에 지금과 같은 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알리시아는 지금 하녀들이나 입을 법한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양손에는 비석을 닦을만한 양동이와 도구들이 들려있는 중이었다.

실제로 블라드의 말처럼 부모님의 비석을 관리할 요량으로 이곳에 올라온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곳 없는 알리시아가 유일하게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누가 봐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차림새였다.

“사실, 제가 미리 좀 치우긴 했어요. 나뭇잎들이 쌓여있어서.”

“······치웠다구요?”

부모님의 비석을 조금이나마 치웠다는 블라드의 말에 알리시아는 잠시 분노를 가라앉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이 왜 남의 부모님 비석을 치워준단 말인가?

“땅 주인분들께 인사하는 게 예의인 것 같기도 해서.”

“아······.”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일단 소년이 풍기는 분위기가 꽤나 그럴싸한 데다 지니고 있는 신분패의 존재가 신뢰를 더 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따라 언덕의 느낌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 느낌이 소년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게요.”

“응?”

알리시아는 자신의 양동이를 뺏어 들어 비석을 향해 올라가는 블라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일해본 모양인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잡초를 뜯고 비석을 닦는 금발 소년.

마치 자기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과장된 몸짓을 보며 알리시아는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서 부탁인데, 오늘 일은 그냥 조용히 넘어가면 안 될까요? 자야르 경이 오늘 일을 알면 나는 얻어맞고 말 거에요.”

“······닦는 거 봐서요.”

새초롬히 고개를 돌리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쁜 것들은 꼭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단 말이지.’

화려한 창녀들과 함께 살아왔으며 마담 마르셀라라는 유명한 미인을 매일 보아왔던 블라드였기에 바로 옆에 알리시아가 있었음에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요제프와 자야르에게 오늘 일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렇기에 그저 열심히 비석들을 닦아낼 뿐이었다.

뒷골목에서 쓰던 방법들은 더는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적어도 낮의 태양이 떠오른 시간에는 말이다.

“말 안 할게요.”

“진짜 고맙습니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블라드와는 다르게 알리시아는 블라드를 굉장히 신선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체의 호의나 호감을 표시하지 않는 모습.

하녀로 착각 받았던 방금의 충격적인 일까지.

블라드라는 사람은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태어나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의 비석을 닦아내는 낯선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풀리고 있었다.

안식을 얻기 위해 올라온 언덕에서 알리시아는 실로 오랜만에 그동안 쌓여있던 불안감을 풀어낼 수 있었다.

소년의 금발이 조금씩 물드는 황혼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멋진 색이었다.

※※※※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알리시아와 언덕을 내려가던 블라드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

그러나 그곳에는 말끔히 닦인 비석들과 언제나 그곳에 있었을 것만 같은 나무가 서 있었을 뿐이었다.

만약 블라드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목소리의 세계를 통해 그곳을 바라봤다면 조금은 다른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기억들이 여전히 가슴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쉬이이익-

나무를 감싸 안은 하얀색의 뱀.

그리고 점점 어두워져 가는 언덕을 밝히며 뱀을 향해 다가오는 반짝이는 반딧불들.

오늘 누군가의 세계에서는 밤하늘이 아닌 야트막한 언덕에서도 자그마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3화 7

명예로운 결투 (1)

블라드는 손으로 벽을 따라 훑으며 걷고 있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벽돌을 느끼며 블라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들으려는 듯 쫑긋 귀를 세웠다.

“······.”

예민한 청각.

블라드는 호르헤도 인정했던 그 청각을 이용해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창- 차창-

상대편 기사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몸을 풀고 있는지.

“여기 있었네.”

알리시아 하이날이 자신의 명예를 대신해 줄 세 명의 기사들을 모았듯이 그녀를 부정한 출생이라 고발한 엔드레 또한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기사들을 모았다.

인맥과 영향력을 이용한 명예 결투의 전초전.

그리고 가로막힌 벽 저편, 서로가 닿지 않는 곳에 모든 것을 결정지을 그들이 있었다.

“흡!”

블라드는 손을 통해 파악한 벽의 모난 곳을 붙잡으며 날렵하게 위로 튀어 올랐다.

3m는 가뿐히 뛰어넘을 것만 같은 벽의 높이였으나 블라드에게 이 정도의 벽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남의 것을 훔치던 그때 그 느낌으로.

마치 도둑고양이 같은 몸놀림으로 벽을 뛰어넘은 블라드는 옷을 툭툭 털어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누가 보았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사람인 줄 알 정도로 태연한 모습이었다.

챙- 채챙-

‘저기군.’

블라드는 병장기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면면을 보아두라 지시했었다.

비록 목소리의 요청을 먼저 따랐던 블라드였으나 요제프의 명령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보고 싶기도 했었으니까.

여태껏 블라드가 보아온 기사라고 해봤자 한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일 뿐이었다.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푸른 달빛의 기사 고딘.

애꾸눈의 자야르.

‘보르단 경도 기사긴 하지.’

그리고 기사 같지 않은 기사 보르단까지.

여러 가지 의미로 기사들과 인연이 깊었던 블라드로서는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를 엿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빛나는 것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소년의 오랜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음.’

기사들의 감각을 속일 자신까지는 없었기에 블라드는 너무 가까이는 다가가지 않기로 했다.

다만 타고난 시력을 통해 먼발치에서 훔쳐보고 있을 뿐이었다.

요제프의 말처럼 무언가를 보고 느끼기에는 그 정도면 충분할 테니까.

저 앞에서 두 명의 기사가 서로 검을 맞대고 있었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몸을 충분히 풀 수 있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내일 있을 결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대검.’

블라드에게 가장 먼저 보인 기사는 거대한 덩치와 함께 그 덩치에 맞먹을 정도로 큰 대검을 휘두르는 기사였다.

비록 오타르만큼은 아니었으나 검은 피부를 지닌 것으로 보아 적어도 흑인 계열의 혼혈 같아 보이는 기사였다.

멀리서 보고 있었음에도 느껴지는 대검의 기세가 매서웠다.

‘검과 방패.’

그리고 그와 상대하는 기사.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는 검은 피부의 기사와는 다르게 단단하게 방어태세를 굳힌 기사는 착실하게 대검을 흘려내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경험 없는 블라드가 보더라도 방패술 쪽에 장점이 있는 기사 같았다.

“쉽게 뚫기 어려워 보이지?”

“······!”

블라드는 옆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

“쉿!”

재빨리 블라드의 입을 틀어막는 누군가.

반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입을 틀어 잡힌 블라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와서 들킬 생각이야?”

익살스러운 카이저 콧수염을 가진 남자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였으나 블라드는 오히려 식은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방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제압당해버렸다.

“특등석을 찾은 걸 보니 감은 있어 보이는데 우리 그냥 조용히 바라보자고.”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자야르 경의 종자씨.”

“······누구십니까.”

남자는 블라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품 안에서 자그마한 말린 과일을 꺼내 건네주었다.

“먹으면서 보자고. 원래 좋은 볼거리에는 음식이 필요한 법이지.”

“······.”

블라드는 별수 없이 남자가 주는 말린 과일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자에게서 벗어날 만한 방법이.

교묘하게 퇴로를 모두 틀어막은 남자를 보며 블라드는 쉽사리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의 허락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기세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기운을 다루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는 뜻이지. 경거망동하지 마라.]

목소리가 말하기를 쉽사리 수준을 가늠하기 힘든 자라 할 정도였으니 블라드는 일단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비싼 것 좀 드시지.”

“흐흐. 돈이란 게 쓰면 쓰는 대로 써지는 거라.”

제압당해 있으면서도 대담하게 자신에게 농을 거는 블라드를 보며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맘에 들었다는 듯 말린 과일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역시 들은 대로 힘이 좋아.”

“콜린 경 말인가요?”

실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간단한 신상명세 정도는 이미 요제프를 통해 파악해 둔 블라드였다.

“괜히 흙멧돼지라 불리는 게 아니야. 저기에 걸리면 뼈도 갈라질걸?”

“동의합니다.”

어차피 도망도 못 치는 거 맞장구나 쳐주기로 한 블라드였다.

자신을 어찌할 생각이었다면 진작에 하고도 남을 실력의 사람이었으니까.

“저는 상대하고 있는 기사가 더 대단해 보이네요.”

“아. 파블로 말인가.”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말린 과일을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중부지역의 유망가문인 아른슈타인의 기사지.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기사야.”

“왜요?”

어느새 스스럼없어진 블라드를 보며 남자는 웃음 지었다.

“재미없거든. 방어 일변도라.”

“아아.”

기사들로 단단히 진형을 굳혀 벽을 만드는 것이 특징인 아른슈타인 가문답게 기사 파블로는 그런 특징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다.

“방패술은 인정하지. 엔간한 것들은 다 흘려낼 줄 알거든.”

“음.”

누군지는 몰라도 견문이 넓다.

어쩌면 행운일지도.

“그럼 나머지 기사는 어떻게 보세요? 한 명이 더 있잖아요.”

내심 그를 통해 나머지 한 명에 대한 정보도 알아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

어느새 카이저 콧수염의 남자는 사라지고 만 뒤였다.

[사람이 오는 것 같다.]

“젠장.”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척도 내비치지 않은 채 바람과 같이 튀어버렸다.

아무런 기척 없이 사라진 남자만큼은 아니었지만, 위험을 감지한 블라드는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높은 벽을 뛰어넘어서 알리시아가 지정한 구역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한 블라드.

“세상에 왜 이렇게 괴물들이 많아······.”

간신히 돌아오는 데 성공한 블라드는 벽에 기대어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걸리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지만, 또다시 맞닥뜨린 거대한 벽에 대한 한숨이기도 했다.

“기사였겠죠?”

[그랬겠지. 마법사는 아니었으니까.]

아마 기사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실력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 기사가 되는 거예요?”

[보르단 경도 기사이기는 하지.]

“아니······.”

왜인지 힘이 빠져버린 블라드는 목소리가 내뱉은 어처구니없는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그저 가만히 뒷머리를 벽에 기댈 뿐이었다.

“기사라고 다 같은 기사가 아니잖아요.”

보르단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소년은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푸른 달빛의 기사.

쇼아라에서 막 뛰어나온 우물 안 개구리였을 시절에는 반드시 뛰어넘고야 말겠다는 목표였으나 넓은 세상으로 나온 순간부터 블라드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에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 어려운 목표를 생각하며 블라드는 괜스레 발로 땅을 찰 뿐이었다.

아직 입속에 남아 있는 마른 과일의 단맛이 괜히 껄끄러웠다.

※※※※

다음날 정오.

비록 크기 자체는 작았으나 중앙에 마련된 홀 만큼은 여느 귀족 저택에 있는 것에 꿀리지 않는 하이날 저택.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검을 든 기사, 기사를 수행하는 종자, 신을 모시는 사제.

그리고 두 명의 하이날.

알리시아 하이날과 엔데르 하이날.

한때는 삼촌이며 조카였던 두 명이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두 명의 하이날을 중심으로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는 무리들 사이에서 정갈하지만 매서운 기세가 오가고 있었다.

명예롭지만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결투.

그 결투의 대전사들이 만들어내는 기세였다.

“더 꽉 조여라.”

“네.”

자야르의 종자로서 그를 수행하는 데 여념이 없던 블라드조차 난생처음 느끼는 저릿저릿한 긴장감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눈빛이 사나워지는 중이었다.

“잘 봐둬라. 진심을 담은 기사들의 결투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니까.”

“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요제프와 알리시아의 이름을 건 채 결투에 나서야 하는 자야르였지만 한쪽밖에 남지 않은 그의 눈에서는 그저 평온함만이 감돌 뿐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만 너 자신이 애송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

“애송이는 걷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다. 뛸 자격 없어.”

세상은 넓고 자신은 작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강자들을 보고 느끼고 또한 겪고 왔던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재능은 있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고.

목표가 높은 만큼 가야 할 길이 먼 블라드로서는 방금 자야르가 한 말이 가슴 깊은 곳까지 박혀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는 법이다.”

비록 짧지만 블라드에게 있어 지금 가장 필요한 말을 해준 자야르는 마지막으로 안대를 고쳐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봐.”

“네.”

종자로서의 모든 할 일을 마친 블라드가 자야르의 뒤에 서서 대기하려 하는 순간.

“알리시아 하이날 님 입장하십니다!”

시종인지 집사인지 알 수 없는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네.’

지체 높은 귀족인 요제프와 함께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어디까지나 종자의 신분일 뿐.

아직 자신이 몸담고 있는 바예지드 가문의 가주인 페테르조차 만나보지 못했으니 데어마르의 주인인 알리시아 하이날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젊다고 하던데.’

젊고 아름다우며 또한 여자이면서 남작인 사람.

그녀를 수식하는 모든 것들은 한참 호기심이 많을 나이인 블라드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이번에 자야르와 같이 명예 결투에 임할 노(老)기사 던칸의 안내를 받으며 화려한 예복을 입은 여인이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엔데르가 서 있는 쪽에 인물들은 간단히 고개만 숙이거나 아예 예를 취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를 위해 서 있는 자들은 마땅히 이 땅의 주인인 그녀를 보고 예를 갖춰야 할 터.

블라드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려 했으나.

“······이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물빛 머리의 그녀와.

던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

딱딱하고 냉정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은 그날 보았던 사람이라 믿기에는 너무 낯설어 보이는 것이었다.

[이제는 귀족 모욕죄까지 추가로군.]

“······.”

차마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굳어있는 블라드를 향해서 알리시아 하이날의 눈길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갔다.

그 큰 눈동자에 잠시 금발 소년의 모습을 담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홀 안에 놓인 의자를 향해.

이곳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된 단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가주의 자리를 향해서.

블라드의 당황한 시선과.

엔데르의 사나운 눈빛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심을 담담히 받아내며 물빛 머리의 여인은 있어야 할 자리에 올라서고 있었다.

“결투의 당사자들이 모두 도착했으니 지금부터 절차를 진행하겠소!”

이번 결투를 위해 특별히 중앙에서 초빙한 사제의 말을 시작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신이 증명하시며 떠오른 오늘의 태양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홀의 문이 닫히고.

모든 것을 건 결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명예롭지만 잔혹한 결투가.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4화 15

명예로운 결투 (2)

귀족의 피는 창백한 푸른색이다.

따뜻한 붉은색으로는 짊어질 수 없는 책임과 의무 그리고 업보가 있으므로.

“······.”

그러나 알리시아는 아직 차갑게 식기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의 시선.

그리고 저 앞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엔데르의 사나운 눈빛까지.

‘숨쉬기가 힘들어.’

아무리 단단히 각오했다 할지라도 아직 스무살도 안 된 처녀인 알리시아로서는 산전수전을 겪어 온 엔데르의 기세를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눈빛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고개를 돌린 곳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날 보았던 푸른 눈동자였다.

“······?”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 소년.

그 소년이 시야에 들어오자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멍했던 초점을 다잡을 수 있었다.

쿵쾅거렸던 심장이 가라앉고 어지러웠던 시야가 돌아오며 쉴새 없이 흐르던 식은땀이 멈추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셨던 언덕에서 느꼈던 편안함이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 드디어 숨을 내쉴 수 있었다.

※※※※

블라드는 자야르의 옆에 서 있는 기사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우리 편이었네.’

그는 어제 자신과 같이 상대편의 기사들을 염탐했던 정체 모를 남자였다.

샤자드 가문에서 보내온 기사 주베르.

장난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보내는 주베르를 보며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삐딱한 자세가 되려 하고 있었다.

‘어쩐지 나를 알더라.’

자신을 제압했고 허락 없이 친한 척했으며 마지막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난 사람.

[알리시아라는 여자가 확실히 좋은 패들을 구해왔군. 이길 가능성이 클 것 같다.]

‘그렇겠죠.’

많은 사람이 있는 앞이라 소리 내어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블라드도 이번 결투의 승자는 알리시아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비록 엔데르의 옆에 바짝 붙어 있던 기사까지는 살펴보지 못했지만, 콜린과 파블로라는 기사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자야르와 주베르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샤자드 가문이 보낸 기사 주베르는 목소리도 쉽게 기운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경지에 올라 있는 자였으니까.

3판 2선승제로 치러지는 이번 결투의 규칙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만한 결과였다.

비록 한 명을 내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

“그만! 그만 하세요! 항복하겠습니다!”

알리시아의 다급한 요청과 함께 사제의 개입이 들어왔다.

“멈추시오! 결투는 끝났소!”

“······아직!”

“던칸 경. 그대의 주군이 손수건을 흔들었소이다. 패배를 인정하시오.”

“······.”

치열했지만 또한 서글픈 결투이기도 했다.

노(老)기사 던칸.

오랫동안 하이날 가문을 지켜왔으며 비록 60이 넘는 나이임에도 아직 기량을 유지하고 있던 그였지만 결국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분전했으나 세상은 결국 결과만을 받아들여 주는 법이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단장님.”

“······내가 아직도 자네의 단장인가?”

던칸을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젊은 기사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엔드레에게 검을 바친 하이날 가문의 기사 샤를드.

“······필요 없다.”

분명 하이날 가문의 미래가 되어주리라 생각하며 키워왔건만 지금 그의 모습은 주인을 베는 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오판이었으며 그것이 알리시아에게 독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던칸의 처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상처로 인해 비틀거렸으나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그의 손을 후려친 던칸은 차마 감출 수 없는 죄책감을 안은 채 알리시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비록 흔들리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알리시아의 눈에는 깊은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모습으로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늙은 기사.

그는 알리시아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기둥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던칸이 흘리는 피는 알리시아에게 눈물로 돌아왔다.

“이번 결투는 엔데르 님의 기사 샤를드 경의 승리요!”

사제의 선언과 함께 엔데르와 함께 하는 자들이 큰 함성을 쏟아내었다.

엔데르가 하이날 가문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듯이 그들 또한 엔데르를 위해 많은 것을 걸었을 것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세계의 법칙 아래서 승리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그들은 분명 함성을 지를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음 대리자들은 나오시오!”

블라드는 다음 결투자들을 부르는 나오라는 사제의 말을 듣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3판 2선승제의 결투.

그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아마 두 번째 자리에 임하는 자일 것이다.

첫 번째 사람이 이길 경우에는 승부를 결정 낼 수 있으며, 혹시나 질 경우에는 필승을 다짐하며 세 번째 사람에게 결투를 넘겨줘야 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알리시아 님 측의 두 번째 기사는 앞으로 나오시오!”

그리고 그 중요한 임무를 맡은 기사는 바로 바예지드 가문의 자야르였다.

애꾸눈의 자야르.

비록 화려한 호칭을 가진 기사는 아니었으나 던칸과 주베르는 만장일치로 자야르를 두 번째 자리에 놓기로 결정했다.

바예지드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은 그 정도의 신뢰는 보증하는 것이었으니까.

“자야르요.”

“콜린.”

기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군의 명령이 첫 번째요, 자신의 명예가 두 번째니.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명예 결투라는 자리는 주군의 명령과 자신의 명예를 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마주쳤으나 자연스레 날이 세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

붉은색 핏방울들이 흩뿌려진 바닥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기사는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깔 하나는 어디다 팔아먹으셨소?”

“배고파서 먹었어.”

“크!”

머리 하나는 차이 날 정도로 커다란 콜린이었으나 자야르는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물러서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냥 귀찮은 듯 무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다 밑으로 나오셨겠구만. 다시는 못 찾으시겠네.”

“그러게.”

“둘은 지정된 자리로 움직이시오!”

나름 도발을 유도하려 했던 것 같았으나 자야르는 그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개처럼 무시하는 자야르의 태도에 콜린의 이마에는 짙은 힘줄 하나가 깊게 새겨들어갔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리다. 승부는 대리인 혹은 본인이 항복 의사를 표현할 때, 그리고 결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 끝나오. 그리고 오러는 사용 금지요.”

“알겠소.”

“남은 눈깔 하나도 파내주마. 애꾸눈.”

“······부디 명예로운 결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으르렁거리는 콜린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사제는 결투의 시작을 위해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규칙이 있는 명예 결투라 할지라도 검을 들고 싸우는 것이었으니 가끔은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오기도 했으니까.

“오늘의 태양 아래 신께서 허락하셨소이다!”

“크아아아!”

사제의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콜린은 괴성을 지르며 자야르를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덩치에서 나왔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속도였으나 그 덩치에서 나올만한 강맹한 일격이었다.

과연 중부에서 흙멧돼지라 불릴 만큼의 실력을 단 한 번의 검 놀림으로 보여주고 있었으나.

정작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는 자야르는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홀의 바닥을 깨부수는 콜린의 검.

사방으로 바닥의 파편들이 튀어져 나갔다.

“오오!”

“듣던 대로 힘이 대단하군!”

홀을 크게 울리는 콜린의 일격에 알리시아는 가슴을 움켜쥐었고 블라드는 어제 주베르가 주었던 말린 과일을 꺼내물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

한 발자국 차이로 일격을 피해낸 자야르를 보며 충분히 승산이 있다 파악한 콜린이었다.

좀 더 빠르면 되겠다.

좀 더 강하게 내려치면 되겠다.

그러면 저 아슬아슬한 한 발자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쾅-! 쾅-! 쾅-!

승리의 냄새를 맡은 콜린은 사기충천한 모습으로 자야르의 잔상을 쫓아 검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한 번의 내려침마다 홀이 들썩이고 사람들의 탄성과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런.”

그러나 엔데르 측에 서 있던 기사들은 싸움의 기세가 기묘하게 꼬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콜린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때쯤.

“올레(¡Olé).”

“너 이 자식······.”

이제야 자야르의 얼굴을 마주한 콜린은 그동안 헛수고를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자신과는 다르게 자야르는 말끔한 얼굴로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

결투를 보고 있던 블라드는 자야르가 자신을 향해 눈을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안대를 쓰지 않은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블라드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잘 봐둬라.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뛰려 하는 애송아.

“이 새끼가!”

약이 바짝 오른 콜린은 검을 다잡으며 자야르를 향해 휘둘렀으나 그의 검은 목표를 찾지 못한 채 허무한 공기만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

“······!”

콜린은 두 눈을 부릅뜨며 경악하고 있었다.

자야르의 신형이 기묘하게 갈라지고 있었기에.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놀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뒤로 피하는 것인가 앞으로 나서는 것인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익!”

콜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현혹하는 자야르의 움직임을 애써 무시하며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렀다.

뾰족한 수는 아니었으나 어찌 보면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확실한 대안을 세울 수 없을 때는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행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야르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자는 콜린 하나뿐이 아니었다.

[잘 봐둬라. 너에게 보여주려 저러는 것이니.]

‘······.’

어젯밤, 자야르는 초조해하는 자신의 종자에게 날카로운 일침으로 경고했다.

뛸 생각을 하기 전에 제대로 걸을 생각부터 하라고.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기술 중 하나를 보여주며 칭얼대는 블라드에게 사탕 하나를 물려주었다.

‘제대로 된 기본기를 갖춰야 지금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크아아압!”

콜린이 괴성을 지르며 쉴 새 없이 대검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의 어깨와 팔뚝에 새겨진 굵은 핏줄들이 검에 담겨 있는 힘이 얼마나 강맹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텅-!

맥없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튕겨 나갈 뿐이었다.

텅! 텅! 터엉-!

콜린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자야르는 그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받아치고 있었다.

아니, 끊어내고 있었다.

[저거다. 틈이 생기지?]

자야르가 검을 한 번 받아칠 때마다 콜린의 기세가 미묘하게 주춤거리고 있었다.

타점이 강제로 어긋남에 따라 생길 수밖에 없는 틈이었다.

[반격기다.]

반격기.

선공을 막으면서 생기는 틈을 따라 후공을 날리는 기술.

상대방이 날리는 수를 읽고 거기에 맞춰 대응하는 고급 기술이며 후공으로 선공을 제압한다는 기묘한 방식의 접근법이 만든 기술이었다.

시도하기는 어렵지만, 성공만 한다면 필살을 약속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

블라드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자야르가 보여주는 신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억지로 치켜뜬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였으나 모든 것에 목마른 소년은 지금의 광경을 눈으로 담아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로.

자야르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비록 거칠고 또한 꼬인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오늘의 수업은 반격기.

교보재는 중부의 흙멧돼지였다.

※※※※

“끝났소.”

자야르는 안대를 매만지며 사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 승자는 알리시아 님의 대리자인 기사 자야르 경이오!”

분명 자야르의 승리가 선언되었지만 알리시아 측 사람들은 함성은커녕 쥐죽은 듯 있을 뿐이었다.

정적만이 가득한 결투장.

자야르가 내뿜는 기묘한 분위기에 엔드레 측 사람들은 기가 죽어버렸고 알리시아 측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

그러나 그들보다 더한 침묵을 가진 자는 지금 무릎을 꿇은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콜린이었다.

그는 오늘 벽을 만났다.

그리고 격을 느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것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봐뒀냐.”

자신을 위해 일부러 장면까지 연출한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감사하오. 자야르 경.”

“요제프 님의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승리를 취하고 온 자야르를 향해 던칸이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붉게 물든 붕대로 감싸인 그의 모습이 여간 처량한 것이 아니었으나 자야르는 최대한 예를 갖춰주었다.

“다음 결투자들은 앞으로 나오시오!”

던칸은 지고, 자야르는 이겼다.

선봉전과 중견전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대장전 뿐.

“내 차례인가.”

사제의 부름과 함께 잘 관리된 카이저 콧수염을 어루만지며 주베르가 결투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결투면 된다.

이것만 이기면 알리시아는 신의 이름 아래 인정받은 정당한 하이날의 남작이 될 것이다.

알리시아와 던칸,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간절한 시선이 주베르의 등 뒤로 맺혀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주베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가득 머금을 뿐이었다.

자야르가 만들어낸 침묵을 걸으며 두 명의 기사가 결투장 안으로 들어섰다.

“아른슈타인의 파블로요.”

“새삼스레. 우리 본 사이잖소.”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샤자드의 주베르.”

농담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은 주베르.

그는 고개를 돌려 알리시아를 향해 인사를 했다.

제대로 배운 멋들어진 인사였다.

“응?”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 결투를 지켜보던 요제프는 방금 주베르가 보인 인사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음을 눈치챘다.

지금 상황에서 쓰일만한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리다. 승부는 대리인이 항복 의사를 표현할 때, 그리고 결투를 속행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제가 열심히 결투 규칙을 일러주고 있었으나 주베르는 그저 시큰둥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기권하겠소.”

“······큰 부상이 생기면. 지금 뭐라 하셨소?”

사제는 주베르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귀로 듣기는 했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올 리가 없는 말이었으며 나와서도 안 되는 말이었으니까.

“기권하겠소.”

마치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처럼 주베르는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샤자드 가문이 보낸 대리자인 나 주베르는 이번 결투에서 기권하겠소이다.”

“······.”

“······.”

정작 말을 내뱉은 주베르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으나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천둥과도 같은 선언이었다.

홀 안에 끔찍한 침묵이 내려앉고 있었다.

“이, 이······이게.”

이제야 정신을 차린 던칸은 이럴 리가 없다는 듯 상처 입은 손을 허우적거렸고.

“······!”

결투의 당사자인 알리시아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창백한 푸른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을 때.

짝- 짝- 짝-

침묵이 가득한 홀 안으로 누군가의 손뼉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기권이라!”

엔데르 하이날.

“그럼 결투는 끝이 났군!”

하이날 가문의 두 번째 계승자인 남자가 드디어 숨기고 있던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의 침묵 속에서 홀로 당당히 외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고발자이자 찬탈자였으며.

또한, 결투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4개의 패를 들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젠장.”

고약한 상황에 말려든 것을 눈치챈 요제프는 재빨리 손짓으로 보르단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신 앞에서 인정해주십시오. 사제님!”

주베르가 과장된 몸짓으로 알리시아에게 한 인사.

그것은 작별 인사였다.

“오직 저만이 유일하고도 정당한 하이날이라는 것을!”

이 결투는 처음부터 조작되었다.

명예를 모르는 자들에 의해.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5화 9

명예로운 결투 (3)

알리시아 하이날.

전대 가주의 딸이며 첩에게서 태어난 엔데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당성을 부여받은 사람.

또한, 그녀의 피는 중부의 가문인 샤자드와 연결된 것이기도 했다.

알리시아의 조모에서부터 시작된 샤자드의 피는 두 가문 사이의 이어진 굳건한 신뢰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귀족들이 행하는 정치라는 개념은 인간성 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피는 푸른색이었으니까.

“선언해 주십시오!”

샤자드는 저 멀리에 있는 핏줄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이득이 더 중요하다 판단했다.

엔데르가 그것을 약속했기에.

미래를 내다보는 가주라면 감히 약속할 수 없는 것들까지 내어주겠노라 말했기 때문이었다.

샤자드는 그 대답을 받아들였고 명예를 모르는 기사를 알리시아에게 내주었다.

알리시아는 속았으며, 바예지드는 농락당했다.

이 승부는 명예롭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명예롭지 못한 전장 안에서 조용히 일어서는 자가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

중부의 가문들이 더럽힌 이 결투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북부의 대표자가 되어버린 청년.

그가 무겁게 일어섰다.

“이 상황에 관해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잠시간의 말미를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비록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침묵으로 가득한 홀 안에 퍼지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요제프의 말속에 담긴 분노를 알아들은 사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사제님.”

새까맣게 타오르는 요제프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저 아래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엔데르 하이날.

“알리시아 측 기사가 기권했소! 요제프 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 결투는 끝났소이다!”

“지금 이게 명예로운 결투가 맞습니까?”

잿불은 식어있지만, 그 안에 뜨거운 것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요제프의 목소리가 그랬다.

“당신들이 정한 결과를 그저 받아들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습니다.”

비록 검은 들지 못했지만, 요제프의 몸 안에도 바예지드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흉폭한 바예지드의 피가.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납득하기 전까지는 결투는 끝낼 수 없습니다.”

“······.”

요제프의 단호한 선언에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동안 심상치 않았던 중부와 북부가 격돌하는 시작점인 것을.

“어떻게 납득을······시켜드리면 되겠소이까?”

승리를 바로 눈앞에 둔 엔데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점차 잦아들고 말았다.

짙은 눈그늘을 가진 남자의 눈에서 새까맣게 타오르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바예지드······.’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새까만 눈을 보며 엔데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북부는 반드시 갚는다.

그것이 명예든 혹은 치욕이든 간에.

“결투를 속행하게 해주시오.”

요제프는 생각했다.

최선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최악만은 피해야 한다고.

“알리시아 님의 명예를 기권패로 더럽힐 수는 없소.”

증명조차 못한 명예.

그것은 불명예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요제프는 어떤 식으로든 이 자리에서 결투를 끝맺음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설픈 중지는 치명적인 명분을 내주게 될 것이며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결투는 알리시아를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오직 확실한 패배만이 차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주베르 경을 대리할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요청을 받아들이겠소이다.”

요제프는 엔데르의 말을 들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너구리 같은 자는 이미 자신과 알리시아가 마땅한 기사를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노렸군.’

알리시아는 더는 기사를 내놓을 수 없으며 자신은 오직 두 명의 기사만을 데려왔다.

다른 영지에 초대받아 올 때는 너무 많은 기사나 병사들을 데려오지 않는 것이 귀족 간의 불문율이었으니까.

그것을 노린 뼈아픈 외통수였다.

“······엔데르 님의 말처럼 대리할 자를 세우신다면 결투를 속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의 말을 듣고 있던 사제는 옳다구나 하는 마음으로 엔데르가 하는 말을 주워섬겼다.

결투를 속행하려면 당연히 대리자가 있어야 할 터.

그것이 없다면 애초에 성립되지도 않을 제안이었다.

“······.”

요제프는 사제의 말에 고개를 돌려 알리시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뛰어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알리시아는 방금의 일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대로 끝나고 만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증명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있습니다.”

요제프는 넋이 나가버린 알리시아를 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잘 됐다.

내가 짠 판은 아니지만, 기꺼이 올라주리라.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다.”

결투는 명예로운 것.

그렇기에 스스로 자격을 증명한 자 이거나 혹은 명예로운 자에게 자격을 위임받은 사람만이 명예로운 전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누구입니까?”

명예는 내가 대신한다.

그렇다면 검을 대신 들어줄 자는 누구인가?

“······.”

요제프는 가만히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검인 자야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예지드는 기권을 선택한 샤자드 가문의 주베르를 대신하여 새로운 결투자를 올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요제프의 발언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

“나,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는 알리시아 님의 명예를 대신할 대전사로.”

알리시아 대신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요제프.

그의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를 세우겠소.”

“······!”

고요한 침묵과 함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요제프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으며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인물.

그렇기에 명예로운 전장에 뛰어들 수 있는 오직 단 한 사람.

기사 자야르의 종자인 쇼아라의 블라드.

“어······.”

요제프의 손가락 끝에 서 있는 금발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눈을 깜빡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부와 북부가 맞부딪히는 최초이자 최전방인 곳에 소년이 서 있었다.

※※※※

블라드의 정체를 확인한 엔데르는 입에 거품을 물며 부당함을 항의했다.

“그는 기사가 아니오! 자격이 없습니다!”

“명예 결투는 꼭 기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을 들고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상대는 기사요! 기사를 상대로 종자를 올리는 것은 아른슈타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

“당신들은!”

엔데르의 말을 끊으며 요제프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분노로 타오르는 불덩이를 입에서 내뱉었다.

“당신들은 바예지드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인가!”

주인 된 자는 고개를 숙이고 찬탈자는 굶주린 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얕은수로 바예지드를 농락해!”

오직 홀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뿐이었다.

요제프는 이곳에 있는 자 중 가장 명예로운 피를 품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의 명예는 내가 보증하오!”

그리고 누군가의 명예를 보증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리자를 교체하겠습니다. 받아들여 주십시오.”

“어, 음······.”

요제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가 보증한다면 종자가 아니라 한낱 마구간지기라도 결투에 응할 수 있을 테니까.

“동의, 동의하십니까?”

그러나 명예 결투라는 장은 어디까지나 서로 간의 동의가 있어야 만 성립이 가능한 것이었다.

엔데르는 잠시 뒤에 있던 기사들과 눈을 맞추고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하셔야겠다면 알겠소이다.”

한낱 종자 따위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설마 저기 있는 애송이 녀석이 종자가 아닌 기사라 할지라도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는 쉽게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저희 측은 요제프 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럼 결투를 진행하지.”

애초에 기울어진 판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방금 그 판을 비틀었다.

비록 블라드라는 쐐기로 만든 자그마한 비틂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애초에 승리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시간만 벌면 돼.’

요제프는 이곳 데어마르에 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 왔다.

그리고 바예지드의 요제프라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소년이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다.

“음. 흠. 으음.”

[진정해라 블라드.]

갑작스레 맞닥뜨린 상황 앞에서 블라드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제가, 지금, 결투해요?”

“그렇다.”

“그것도 기사랑?”

“그렇다니까. 숨 들이쉬어라.”

자야르는 블라드의 가죽 갑옷을 조이며 최대한 단단히 무장시키는 중이었다.

기사가 종자를 수행하는 진귀한 모습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블라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죽진 않겠죠?”

“최악의 최악이라면 내가 난입하마.”

“그냥 최악은요?”

“······.”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갑옷의 끈을 조이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검을 다잡았다.

언제나 그래왔었지만 결국 믿을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블라드.”

“요제프 님.”

어느새 귀빈석에서 뛰어 내려온 요제프는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참으며 블라드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하실 필요까지는······.”

“십 분만 버텨다오.”

“······오.”

남들이 보기에는 가혹한 전장으로 올라서는 종자를 격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둘 사이에는 긴밀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준비한 것이 있다. 네가 버텨주면 할 수 있다.”

“······십 분이면 되겠습니까?”

블라드는 알고 있었다.

요제프가 그저 분노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닌 것을.

“더 버텨주면 좋지.”

요제프의 대답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늙고 뚱뚱하며 언제나 욕을 먹던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빚진 것도 있으니까요.”

“누구한테?”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앉아 있는 여인에게 눈을 맞췄다.

쉴 새없이 흔들리는 물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십 분 정도는 최선을 다해 버텨보겠습니다. 가능하다면요.”

“조심해라.”

맥락이 맞지 않는 대답이었으나 블라드가 평소에도 혼잣말을 자주 하는 것을 알고 있던 요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이 녀석이 짊어지기에는 과도한 무게다.

충분히 긴장할 만도 하다.

블라드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하녀라 착각했던 것도 미안했고 부모님 묘에 몰래 들어갔던 것도 미안하다.

그리고 말 안 해줘서 고맙다.

그러니 최선을 다하겠다.

“양측의 대리자는 올라오시오!”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주군의 명령이 첫 번째요 자신의 명예가 두 번째니.

블라드는 요제프의 명령과 알리시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버거운 짐을 지는 것에 동의했다.

“······후.”

비록 빌린 것이었지만 빛나는 명예를 짊어진 소년은 떨리는 발걸음과 함께 전장으로 올라섰다.

그 모습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지켜보고 있었다.

아군도 적군도 그리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조차도.

세계가 소년을 지켜보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입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신실한 사제가 신의 허락 아래 세계에 적어준 그 이름.

소년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고했다.

오늘, 소년은 빛날 자격을 갖췄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검을 들었기에.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6화 16

명예로운 결투 (4)

“어이 후배. 너무 쳐다보지 마.”

버레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힘 빠진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말했다.

“저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거든.”

“······.”

소년 또한 알고 있었다.

버레이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겨우 길 하나 차이지만 우리는 자격이 없다 이거지.”

“무슨 자격?”

벽에 기댄 채 단검으로 나뭇조각을 조각하던 버레이는 한쪽 입술을 치켜들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자그마한 분노와 함께 어찌할 수 없는 처량함이 깃들어있었다.

“뭐든지 다 모자라잖아.”

“······우리가 뭐가 모자란 데.”

버레이는 블라드의 대답에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뭐, 부족만 한가, 자격도 없지, 태어날 때부터 그랬잖냐. 다 알면서 그래.”

“······.”

소년은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길 너머에 있는 번듯한 건물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곳에는 반짝임과 웃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뒷골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소년은 언제나 그것이 고팠다.

※※※※

터엉-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블라드의 귓가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자격이 없다.”

아른슈타인의 기사 파블로.

방패술로 유명한 기사인 그가 자신의 방패를 내던지는 소리였다.

“너는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어.”

“······.”

파블로는 자신의 방패를 내던지며 선언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겠노라고.

“자격 없는 네놈이 올라온 순간부터 이것은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다.”

종자와 기사의 싸움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일이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일의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사제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든 다 무시해도 좋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써서 있는 힘껏 덤벼봐라. 죽이려 들어도 좋다.”

요제프는 알리시아의 명예와 자신의 기회를 살리기 위해 파블로의 명예를 짓밟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노는 모두 블라드가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

사제조차도 감히 제재하기 힘든 스산한 기운에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뭐가 부족한데?”

“······뭐?”

당돌하다 못해 당당한 블라드의 태도에 파블로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기사 대 종자의 싸움임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녀석의 푸른 눈동자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명예롭고 고귀하며 또한 빛나는 것을 손에 쥔 남자.

너에게 묻고 싶다.

“내가 너희랑 다른 게 뭔데.”

왜 항상 좋고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은 너희같이 잘난 놈들만 독차지하는 거냐.

나는 그것이 싫다.

“······양쪽은 자, 자리로 돌아가서······.”

사제의 제지에도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눈으로 통하는 대화.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동등한 기세를 갖춰야 하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해내고 있었다.

자격 없는 곳에서 태어났을지언정, 아무것도 아닌 채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당신이 먼저 말했어. 뭘 해도 된다고.”

“······바예지드가 격이 떨어졌군.”

저놈은 미쳤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다.

“싹을 잘라주마.”

저런 녀석이 커봤자 기사의 명예에 누만 끼칠 것이 뻔하다.

그러니 이곳에서 확실히 밟아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서······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시오. 제발.”

오늘 너무나 버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제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간절한 부탁에 두 사람은 전장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신실한 녀석이로군.”

“기본은 갖췄어.”

그곳에서 검을 든 채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블라드가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라면 신의 은총을 빌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은 신에게 기대지 않았다.

[버티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는 도울 수 없다. 몸을 빌리면 10분은커녕 10초도 안 되어서 쓰러질 테니.]

‘······.’

블라드에게는 목소리라는 비장의 수가 있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십 분이 지난 후에는 무리하지 말고 기권해야 한다. 저번에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으니.]

“어차피 도움 바랄 생각 같은 거 없었어요.”

[······그래.]

목소리의 도움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빛나기 위해서는 오직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요?”

[해봐야 알겠지.]

블라드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목소리 또한 긴장하고 있었다.

소년은 가능성이 충만했으나 그것을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최선을 다해 지도했으나 실전을 겪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소년의 앞에 있는 것은 기사.

“준비되었나? 쇼아라의 블라드?”

그것도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진정한 기사였다.

“······네.”

준비 자세로 끌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다했다.

남은 것은 검과 검의 맞부딪힘 뿐.

“좋다.”

사제는 양측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하고는 뒤로 물러나 양손을 치켜들었다.

“오늘의 태양 아래 신께서 허락하셨소이다!”

사람들은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흥미진진한 눈으로 결투장을 바라보았으나.

“······!”

어느새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단기접전에 특화된 결투사의 검술.

그것은 언제나 선공을 가져가는 것을 즐겨하는 소년의 성정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흐압!”

패도적임과 동시에 직선적인 움직임.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당당한 움직임.

그렇기에 마치 벼락같이 달려드는 블라드의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 같은 것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의도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까앙-!

소년은 의도대로 선공을 가져갔다.

내준 것이든 가져온 것이든 어쨌거나 블라드의 의도는 성공했다.

“······.”

평범한 사람들의 시야에는 잡히지도 않았을 빠른 쇄도였지만 파블로는 어렵지 않게 블라드의 검을 막아내었다.

‘언제나 다음 수를 생각해라. 한 번 공격하고 죽고 싶지 않으면.’

“······!”

공격이 막혔음에도 블라드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자야르에게 배운 것처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연격이 파블로에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검들의 울림이 정확한 간격으로 홀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공격을 주도하는 소년의 흐름에 따라 결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은 것이었다.

“······.”

비록 선공을 내주고만 파블로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당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감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타고났군.’

한 번의 부딪힘일 뿐이었지만 파블로는 어째서 요제프가 자신의 상대로 여기 있는 애송이를 내보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방패를 들었던 왼쪽을 노려라.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니.]

“흐아아!”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강렬한 외침과 함께 파블로의 약점을 파고드는 블라드.

분명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었으나 파블로는 블라드의 검 속에 담긴 번뜩이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소년의 검은 굶주린 늑대와도 같았다.

피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자신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고 있었다.

굶주림.

그리고 타고난 잔인함.

소년의 검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끊어야겠군.’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선공을 내주었지만 이쯤에서 기세를 끊어야 함을 느낀 파블로였다.

그만큼 소년의 기세는 매서웠다.

“뭐 저런······!”

“저 녀석 지치지도 않는군!”

빠르며 급작스러운 블라드의 움직임은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금발과 마찬가지로 화려함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매료되었다.

블라드라는 소년이 내뿜는 기세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캉-! 캉! 카-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만드는 불꽃들이 요란하게 튀어 나갔다.

“······.”

폭풍같이 몰아치는 블라드를 보며 파블로는 가만히 기회를 기다렸다.

기세는 훌륭했으나 아직 숙성되지 못한 블라드의 빈틈을 노리면서.

“흐읍!”

그리고 틈을 파고들어 내리쳤다.

작은 폭풍 따위는 가뿐히 누를 수 있는 바위 같은 단단함으로.

“······!”

쉴 새 없이 파블로를 후려치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다가오는 무게감에 본능적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콰앙-!

“끄억!”

그와 동시에 땅바닥에 내려꽂히고 말았다.

얼마나 센 기세로 얻어맞았는지 넘어지자마자 몸뚱이가 바로 튀어 오를 정도였다.

‘끄아!’

분명 검으로 막았으나 마치 단단한 돌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은 얼얼함에 블라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막았으나 막지 못한 일격.

흘려내지 못했기에 모든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하고만 블라드였으나 몸에 익힌 감각으로 재빨리 낙법을 시도한 후 서둘러 뒤로 물러나 간격을 벌렸다.

“끄으으······.”

생각한 것이 아닌 몸이 반응하는 몸놀림.

자야르와의 실전과도 같은 연습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정신 차려라!]

‘······으으.’

연습 중 자야르가 내질렀던 검들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파블로는 분명 그와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돌로 얻어맞은 것 같아.’

고작 한 번 막았을 뿐인데 온몸이 욱신거리고 있었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무겁기 그지없는 일격에 블라드는 자연스레 위축되고 말았다.

“재주는 다 부렸나?”

“······.”

앞에 있는 파블로의 기세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명예롭지 못한 결투에 선 것도 모자라 볼거리까지 제공하고만 파블로는 더는 시간을 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온다.]

비록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지만 파블로의 기세는 산과도 같았다.

‘······어디로!’

[간격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 어디로든 움직여야 한다!]

검 하나만으로도 단단한 방어태세를 만들어 낸 파블로는 언제나 그래왔듯 태산과도 같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블라드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진심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블라드에게는 영광인 일이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난감한 전진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흘려야 한다.]

‘그게 말이 쉽지!’

단기접전과 일격필살로 정의할 수 있는 목소리의 검술은 지금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발놀림.’

지금은 또 다른 스승인 자야르의 물결 같은 움직임이 필요했다.

소년은 머릿속으로 자야르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다가오는 파블로의 공격에 대비했다.

쾅-!

“끄아!”

그러나 대비한다 할지라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검을 든 지 얼마 안 되는 블라드로서는 파블로라는 거대한 벽을 흘릴만한 경험도 실력도 없었다.

쾅-!

콰앙-!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블라드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이어지는 위태로운 후퇴에 알리시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소년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정신 차려라!]

목소리가 계속해서 정신을 일깨우고 있었지만, 너무나 큰 충격에 블라드는 거의 제정신을 놓고 만 상태였다.

만약 이것이 결투가 아닌 대련이었다면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한 선전이었으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러나 소년은 이곳에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었다.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안 돼!’

블라드는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어떻게든 다가오는 검을 향해 장식 없는 검을 들이밀었다.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콰앙-!

그러나 희미한 의지로 내뻗은 검은 소년에게 어떤 기회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끼이이익-

방금의 부딪힘으로 블라드는 결투장의 끝까지 주욱 밀려나고 말았다.

“커억!”

블라드의 입에서 선홍빛의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억지로 검을 붙잡은 손아귀는 이미 찢어진 지 오래였고 입술을 따라 흘러내리는 침방울이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과 섞이고 있었다.

“훌륭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명예를 무시한 요제프에게 잔뜩 화가 나 있던 파블로였으나 블라드와 검을 맞대고 나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훌륭한 녀석이었다.

감히 자신에게 대들만한 자격을 갖춘 애송이었다.

정식으로 결투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긴 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와라.”

파블로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블라드는 진이 다 빠져버린 흐리멍덩한 눈으로 파블로의 일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했다.]

목소리도, 블라드를 준비시킨 자야르도 그리고 소년에게 명령한 요제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쉬어도 좋을 것이다.

홀 안에 있는 모두가 비록 패배하였으나 분전한 소년을 위해 박수를 보내려 하는 순간.

텅-

소년을 향해 내려치던 파블로의 검이 기이하게 꺾여 들어갔다.

무언가 맥없는 소리와 함께.

“······?”

모두가 지금 눈앞에서 발생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

맥없이 앉아 있던 콜린이 악몽에서나 들릴법한 소리에 기함하며 일어섰다.

“난 놈이네.”

소년의 분전을 보며 말린 과일을 씹어먹고 있던 주베르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

파블로는 콜린의 비명과도 같은 침묵을 보고 나서야 어째서 자신의 검이 튕겨 나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경험 많은 기사인 파블로조차도 단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상식 밖의 일이었으니까.

“······왜, 너희들만······.”

나지막히 들리는 블라드의 목소리에 파블로는 가만히 검을 치우며 눈앞에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반쯤은 풀린 몽롱한 눈동자.

마치 기억 속 어딘가를 꿈꾸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도······.”

자격 없는 소년은 언제나 빛나는 것을 갈구해왔다.

능력을 원했고 기회를 바랐으며 자격을 갖추는 것을 꿈꿨다.

빛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소년은 지금 자신이 빛날 자격을 갖춘 사람임을 증명했다.

아른슈타인의 기사 파블로의 검을 끊어낸 쇼아라의 블라드.

그는 스승이 보여준 검의 행로대로 반격기를 재현해냈다.

“······나도 거기 있고 싶다고.”

소년의 간절함이 기회와 가르침과 그리고 위기를 만나 천천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화려한 꽃이.

소년의 검이 울고 있었다.

5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7화 50

쇼아라의 블라드

“······.”

야트막한 언덕 위 홀로 나무를 감싸고 있는 하얀색의 뱀.

소년의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텅-

영롱한 빛을 뿜어내는 하얀 뱀은 저택에서부터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텅-

분명 낯선 소리였지만 그 소리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누군가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뱀은 그 소리에 기꺼워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늘 높이 저 하늘 높이.

“-----!”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는 이제는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를 내질렀다.

외롭디외로운 그 소리는 비록 땅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오직 하늘만이 알아주는 것이었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뱀이 내지른 목소리에 화답한 것들이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뱀은 만족했다.

그 옛날 자신이 나무에 내려앉았을 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뱀이 부른 자그마한 구름들은 뭉치고 뭉쳐 오늘의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태양을 머금은 구름에서 내리는 비는 봄날에 어울리는 따뜻한 비였다.

오직 소년만을 위한 비였다.

※※※※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텅-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허억!”

새빨간 핏방울이 흩뿌려졌다.

그것은 소년이 억지로 쥔 손아귀에서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절대 놓지 않을 듯 단단히 붙잡아놓은 장식 없는 검.

그것을 따라 붉은빛이 흐르고 있었다.

선명한 소년의 의지가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지금 보이는 광경에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종자인 주제에 기사의 검을 끊어내는 금발 소년의 움직임.

웅-우웅-웅웅

그리고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울고 있는 검의 소리까지.

[······.]

이것은 소년의 영혼 속에 있는 목소리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노인의 꿈으로 만들고 소녀의 눈물로 샀으며 소년의 의지로 휘두르는 장식 없는 검이 내는 소리였다.

소년의 검이 울고 있었다.

‘하라고 보여준 것이 아닌데!’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자야르는 자신도 모르게 안대를 매만지며 당황한 모습을 내비치고 말았다.

블라드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싶으면 어느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강자들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에.

아직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아가도 나아가도 보이지 않는 끝을 보고 싶어 소년은 어서 빨리 뛰고 싶어 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강한 도약은 오직 단단히 밟아놓은 땅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블라드의 조급증을 잠시 가라앉힐 요량으로 보여준 것이었건만.

‘기본기에 충실 하라고 보여줬건만 벌써부터 써재끼다니!’

저놈은 어느새 자신의 것을 훔쳐 사용하고 있었다.

가르치지도 않은 것을 마음대로 배워 써먹고 있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당황하는 스승, 경악하는 군중, 걱정하는 여인.

“······.”

그리고 차악의 결과를 위해 확실한 패배를 선택했던 요제프까지.

각자의 이유가 가진 타당한 침묵 속에서 홀 안에 들리는 것은 오직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뿐.

까앙-!

가느다란 실처럼 가냘프게 이어지는 소년의 검에는 분명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대신 굳건히 다잡은 의지가 들어차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겠다.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저 빛나는 것들이 있는 곳으로.

“······.”

그렇게 자신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소년을 보며 파블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끝내려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소년이 보여주는 비틀거림에는 아직 의도라는 것이 섞여 있었으며.

웅-우웅-웅-

그리고 검이 울고 있었기에.

가까이 있기에 더 선명한 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파블로는 소년의 검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설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것은 전조(前兆)였다.

설마 지금 같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가끔 어린 씨앗들은 자리를 잡으면 안 될 곳 같은 곳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는 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흡!”

파블로는 기사로서의 의무를 행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기에.

결심을 굳힌 파블로는 있는 힘을 다해 블라드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그것은 소년을 제압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내려침이 아니었다.

끌어내려는 것이었다.

꽃을 피우려는 소년의 세계를.

검의 울음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파블로의 머릿속에는 결투라는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기사의 의무였으며 또한 영광인 것이니까.

“막아봐라!”

기사가 내지르는 한 번의 내려침마다 소년의 검이 울었고.

소년이 내뻗는 한 번의 반격마다 반짝임이 새어 나왔다.

“······저게 뭐야?”

“검이 빛나고 있는데?”

소년의 검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빛을 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빛나는 검.

그것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는 기사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스승인 자야르도.

피투성이의 늙은 기사 던칸도.

방금 패배를 맛본 콜린도.

“······보통 난 놈이 아니었구만.”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주베르조차도.

적과 아군의 구분 없이 모두가.

그들 모두가 기사였기에.

끼이익-

기사들이 밀어내며 만드는 의자의 끌림 소리가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섞이고 있었다.

소년의 검이 빛나고 있었다.

자신만의 색깔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그 순간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기사이므로.

“방패! 방패를 다오!”

마침내 소년에게서 퍼져나오는 빛을 보며 파블로는 다급하게 외쳤다.

파블로의 다급한 외침을 따라 그의 종자가 방패를 들어 결투장 안으로 던져주었다.

“와라!”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타앙-!

그가 자신의 검과 방패를 맞부딪히며 크게 소리를 내었다.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시작된 선명한 노란빛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다!”

파블로의 외침이 홀 안에 가득 울렸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그는 소년을 보며 자격이 없다 했다.

이 전장은 명예롭지 않으며 이것은 결투가 아니라 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했다.

“너의 이름을 말해라! 소년아!”

그러나 지금의 그는 방패를 든 채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자격을 갖췄으며 충분히 명예로워진 소년을 향해서.

“나는······.”

점차 꺼져가는 정신 속에서 블라드는 희미해지는 기억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두운 뒷골목을 지나 빛나는 별이 달려 있던 대장간을 앞을 걸어서.

지금은 부서진 자신의 둥지를 건너 빛나는 것들이 가득했던 그곳으로.

길 하나의 차이.

그것을 따라 빛과 어둠이 갈리고.

손에 쥘 수 있는 기회의 유무가 갈리며.

태어난 곳에 따라 인생이 선택되고 마는 그런 갈림길.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여태껏 가보지 않았던 곳을 향해 소년이 발을 내디뎠다.

반짝이는 곳을 향해.

태어날 때는 자격 없는 곳에서 태어났으나 걷는 곳은 빛나는 곳을 향해 걷는 소년아.

너는 너의 자격을 증명했다.

그러니 외쳐라.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소년의 자그마한 외침과 함께 장식 없는 검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검을 든 세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꽃이 피고 있었다.

“----!”

하늘에서 소년을 위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록 어린 씨앗은 독이 가득 찬 더러운 진창 아래 뿌리내렸으나 위를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별을 품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에서 빛을 피워낼 수 있었다.

“와라!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 막 피어난 세계와 단단한 세계가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강렬한 빛이 홀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 빛과 함께 마침내 피어난 한 송이의 꽃.

소년이 만들어 낸 꽃의 뿌리는 강렬한 하얀색.

소년이 만들어 낸 꽃의 줄기는 유연한 초록색.

그리고 소년이 피워낸 꽃잎의 색깔은.

“흐아아아아!”

처연한 달의 푸른색.

파블로가 만든 성벽으로 푸른 달빛이 안겨 들어왔다.

명예를 빌린 소년은 오늘 달을 띄웠다.

쇼아라의 블라드.

오늘 새로운 세계가 꽃을 피웠다.

※※※※

“······수고했다.”

파블로는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소년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비록 눈은 하얗게 돌아가 있었으나 끝내 자신의 검을 놓지 않은 소년을 향해서.

끝까지 부여잡은 소년의 검 끝을 따라 붉은 피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자들은 이제 막 세계를 일깨워낸 소년에 대한 경의를.

모르는 자들은 갑작스레 환히 빛난 소년의 검에 대해 조금씩 입을 열고 있을 때쯤.

“오러······오러다!”

오직 눈앞에 고깃덩이에 심취해 있는 찬탈자가 큰소리로 외치며 홀의 중앙으로 뛰쳐나왔다.

“결투에서 오러 사용은 금지요! 쇼아라의 블라드는 실격입니다!”

이익에 급급한 자들은 눈앞에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도 그 꽃이 지면 맺힐 열매를 생각한다.

엔데르의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엔데르의 외침에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몇몇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 오러였구만.”

“종자가 오러를?”

“바예지드의 종자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입고 있는 갑옷 색깔도······.”

소년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빛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며 방금 봤던 광경에 대해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

조용히 귀빈석에서부터 내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비록 아무런 말 없이 내려오는 그였으나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만한 존재감이었으며 마땅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의 요제프.

고귀한 피를 지닌 자가 자신의 종자를 안고 있는 기사 앞에 섰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저의 종자를 위해 기사의 의무를 행한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제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따라 올라온 자야르에게 블라드를 넘긴 파블로는 요제프와 맞춰 고개를 숙였다.

“사제님.”

블라드의 껍질을 깨는데 최선을 다해 준 파블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한 요제프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사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러였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사제의 대답에 요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실격이다.

이번 결투의 규칙은 살상을 피하기 위해 오러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요제프는 차가운 눈동자로 저 앞에서 침을 흘리고 앉아있는 찬탈자를 보며 물었다.

“신성한 결투의 규칙과 소드마스터의 규율 중 어느 것이 더 상위의 개념입니까?”

“······아아, 역시.”

요제프의 물음에 올 것이 왔다는 듯 사제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질렀다.

소드마스터.

검의 주인.

오직 시대가 인정한 단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명예로운 칭호.

그리고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만이 지녔다는 그 명예로운 칭호가 달린 규율이 있었다.

기사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저 따위가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결투를 주관하던 사제는 마치 항복 표시라도 한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은 명예이자 의무이며 또한 왕권과 관련된 것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저로서는 감히 결정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렇습니까.”

사제의 대답에 요제프는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되었다.

“엔데르 하이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어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엔데르는 요제프의 부름에 대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요제프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엔데르를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벌어달라 했더니 기회를 만들어 왔구나.

차악을 선택하고자 했으나 차선의 결과를 들고 왔구나.

그러니 나는 네가 준 이 기회를 꼭 살려보겠다.

“결투는 유보(留保)요.”

요제프의 대답에 엔데르의 얼굴에 말라가는 진흙처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보(留保).

실격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권도 아닌 단어.

요제프는 지금 결투에 관한 결과를 미루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규율과 규칙이 맞물렸소.”

짙은 눈그늘의 남자가 그림자만큼이나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무엇이 우선한다 말할 수 없으니 나는 지금의 일을 교황청과 왕실이 있는 수도에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파블로는 기사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방패를 들었다.

그가 방패를 든 순간부터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명예로운 결투가 아니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

기사가 되기 위해 그 규율을 따르겠다 맹세한 파블로는 오늘 그 옛날 누군가의 의도대로 새로운 세계를 깨우는 데 이바지했다.

명예가 우선인가 의무가 우선인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는 고귀한 자들은 이곳이 아닌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에 있었다.

“그곳에서 명확한 결정이 날 때까지 오늘의 결과는 유보할 것을 제안합니다.”

멍청하게 벌어지는 엔데르의 입.

지금부터 그 입에서 어떤 말이 쏟아져 나온다 해도 상관없다.

요제프는 입에 물고 있는 명분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예측하지 못했던 소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기회였으니까.

※※※※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명예로운 검을 든 모든 자는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인 나 프라우센의 이름 아래 맹세하라.

너희들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그것이 나의 첫 번째 규율이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8화 13

주어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들 (1)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죽겠네······.”

사실 어제부터 보아 온 천장이었다.

그러나 천장에 박혀있는 화려한 무늬들은 아무리 보아도 낯설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뒷골목에서 온 소년에게 있어 귀족들의 미적 감각은 아직 따라가기 어려운 영역에 있었다.

“으아······.”

옆에 놓여있는 주전자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려 했던 블라드였지만 마치 심한 몸살이라도 걸린 듯 뼈마디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중요 외상은 없었지만, 온몸이 욱신거린다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지금 블라드의 몸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을 부숴냈으니.

“······고트.”

“왜 대장? 어디가 불편해? 누구 불러줄까?”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고트가 블라드의 부름에 퍼뜩 깨서는 과도한 반응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고트의 반응이 영 마뜩잖은 블라드였으나 이제는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그가 왜 자신의 옆에 있는지 잘 알고 있기도 했으니까.

“물 좀 줘라.”

“알았어! 응?”

블라드는 주전자에 물이 없다며 부리나케 방을 나서는 고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저 정도면 데리고 있을 만하지.

의도가 투명하고 목적이 확실하니 믿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옆에 두고 미리 조심은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살다 보면 앞에서는 웃으면서 다가와도 등 뒤에는 시퍼런 칼날을 감추고 있는 녀석들이 수두룩했다.

그런 녀석들에게 대비도 못 한 채 찔리느니 차라리 고트 같은 녀석을 옆에 두고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일을 잘하기도 하고.”

전직 용병 출신이면서도 바예지드 가문의 마구간지기로서의 할 일을 다 한다는 것은 적어도 고트라는 녀석이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정도로 무능한 녀석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래저래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야 주워 먹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달라붙으려 하는 고트의 심정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찰칵-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문이 열리고 고트가 들어왔다.

“물 좀 따라봐.”

“······.”

멍한 눈빛으로 여전히 낯선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블라드는 자연스럽게 고트에게 물을 따르라고 지시했다.

자신을 대장이라 부르고 싶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또르르륵-

고트가 조용히 컵에 물을 따르는 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람 빠지는 소리로 비명을 대신했다.

“흐으으······”

“잘 쉬고 있었나?”

자신의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물을 따르고 있던 사람.

“기력을 찾은 것 같아 보여 다행이로군.”

평소와는 다르게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물을 따르고 있는 남자는 자신이 신의를 다하기로 맹세한 대상인 요제프였다.

블라드는 자신이 큰 불경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죄, 죄송······.”

“됐다. 편히 있어라.”

몸이 쑤시든 말든 서둘러 요제프가 건네준 물컵을 받은 블라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물을 들이마셨다.

미처 넘기지 못한 물들이 이불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이 있나?”

“······없습니다.”

그래도 찬 기운이 들어와 정신을 차린 모양인지 블라드는 그동안 자야르에게 숱하게 얻어맞으며 배워왔던 예의 바른 자세로 대답했다.

“그래.”

요제프는 방금까지만 해도 고트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고마웠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까지 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

그 날 블라드가 보였던 선전을 생각하며 요제프는 진심을 담아 자신의 종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요제프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을 알아챈 블라드는 괜스레 자신의 양 주먹을 움켜잡아보며 그날의 느낌을 되살려보았다.

희미하지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향기가 다 빠져버린 말린 꽃과도 같은 기억이었으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기억이었다.

“그런데 결투는······.”

평범한 귀족과 종자의 관계였다면 지금 같은 질문은 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이 이 정도 선까지는 와도 되리라 판단했다.

자신은 요제프라는 큰 배에 탄 몇 안 되는 선원 중 하나였으며 그가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쇼아라의 블라드는 요제프에게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그렇지. 결투. 그것을 말해줘야겠군.”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블라드는 결투에 관한 결과에 대해 궁금해했다.

처량하게 눈물짓던 물빛 머리의 여인은 어찌 되었을까.

십 분만 버텨달라 했던 요제프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이루었을까.

궁금한 것이 많았던 블라드였으나 옆에서 수발을 드는 고트는 고작 마구간지기였을 뿐이며 가끔씩 드나드는 사람이라고는 상처를 돌봐주러 오는 하녀들뿐이었기에 지금까지 마땅히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자네는 결투의 당사자니 당연히 결과에 대해 자세히 들을만한 자격이 있지.”

그리고 지금 블라드의 눈앞에는 결투에 대한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요제프는 블라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결투는 유보(留保)가 되었어.”

“유보라면······.”

“결과를 내지 못한 채 미뤄졌다는 이야기지.”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신성한 결투의 규칙과 소드마스터의 규율이 얽혀 꽤 복잡한 상황이 되었다 말해주었다.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의 규율.

비록 결투의 제대로 된 결과를 말해주지는 못했으나 소드마스터의 규율이 무엇인지 확실히 설명해 준 목소리가 있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소드마스터의 규율에 따라 맹세를 해야 하지. 블라드, 만약 너도 일이 잘 풀린다면 그 맹세를 할 날이 올 것이다.”

요제프의 입에서 기사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절차가 흘러나오자 블라드는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간지러운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기사.

그저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해도 특별한 느낌을 주는 그 단어를 언제나 동경해왔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제 기사가 되기 위한 길에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꿈이 목표가 되는 순간이었다.

“몸조리 잘하고 있으면 좋겠군.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 곤란하거든.”

“지금 당장이라도······.”

“그럴 수는 없지.”

요제프는 자리에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아껴야 할 것은 아낄 줄 아는 사람이니까.”

요제프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포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편히 쉬도록 해라.”

결과에 대한 설명과 진심을 담은 한마디와 그리고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이곳에 와 오직 해야 할 말만을 한 요제프가 조용히 문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

블라드는 가만히 요제프가 했던 말들을 곱씹은 채로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놓아두었던 검 한 자루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지려 하는 태양의 붉은 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장식 없는 검에 매달리고 있었다.

“포상이라.”

해야 할 것을 했으니 마땅한 것을 주겠다는 요제프의 말은 사실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소년이 살아왔던 뒷골목에서는 말이다.

보상이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나 따라오는 것은 아니었으며 가끔은 결과가 있음에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운이 좋았다.

요제프라는 사람을 만난 것은.

블라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쇼아라를 빠져나왔을 때부터 자신과 함께한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실력 없는 늙은 대장장이가 온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검.

노력이나 결과가 어찌 되었건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저 그때 괜찮게 했죠?”

블라드의 질문에 검이 울고 있었다.

이번에는 장식 없는 검이 아닌 영혼 속 목소리가 내는 소리였다.

※※※※

황혼의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텅 빈 복도.

아무도 걷지 않을 것만 같은 복도를 따라 걷는 남자가 있었다.

명예를 모르는 기사.

샤자드 가문의 주베르는 하이날 가문에서의 모든 임무를 마친 채 떠나려 하고 있었다.

실패했다면 실패했다 할 수 있는 임무였으나 자신의 주군도 지금의 상황을 들으면 이해할 것이었다.

파도가 친다 해서 바다를 원망할 수 없으며 바람이 분다 해서 하늘을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날의 일은 아무리 주베르라 할지라도 어찌 손 쓸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일이었다.

일종의 재해(災害)였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군.’

그 상황이 그렇게 맞아떨어지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던 결투장에서의 일을 기억하며 주베르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복도를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허······인사가 과격하시네.”

복도 끝 그림자 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검 하나가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

“나는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서 말이야.”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애꾸눈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바예지드의 기사 자야르.

그가 안대로 가려진 왼쪽 눈에 분노를 감춘 채 어둠 속에서 명예를 모르는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고 계셨소? 할 일이 없으신가.”

“오늘 휴가야.”

“휴가를 이런 식으로 쓰기에는 아깝지 않소?”

목에 차가운 검날이 와닿아 있었음에도 주베르는 얼굴에 미소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미소 지으며 죽어갈 남자 같았다.

“휴가 때는 언제나 밀린 일들을 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나 성격이 꼬인 것으로 본다면 자야르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된 웃음과 냉막한 인상 속에서 두 명의 기사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유감이 있으신 것은 알겠지만 나 또한 어쩔 수 없었소.”

“어쩔 수 없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주베르의 목을 억누르고 있는 자야르의 검 끝에서부터 새빨간 피 한 방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피 한 방울이 복도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으로 스며들었다.

“나를 죽이시려고?”

“······.”

목에서 피가 흐르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주베르의 물음에 자야르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섭섭하구만. 서로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정도는 이해해 주셔야지.”

입으로는 섭섭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주베르는 손가락 두 개를 모아 자야르의 검 끝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그의 손가락 끝에 어려 있었다.

“뭐 어쩌겠소. 주인이 짖으라면 짖어야지.”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주군의 명령이 첫 번째요 자신의 명예가 두 번째니.

그렇기에 명예를 모르는 기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단 하나. 주군의 명령뿐이었다.

“당신도 주군이 물라고 할 때만 무는 개 아니오. 남들은 우리를 검이라 표현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지.”

자야르는 자신의 앞에서 이죽거리는 남자에게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퍼억-!

“크윽!”

대신 분노를 담은 주먹을 날렸을 뿐이었다.

주베르의 안면에서 선홍빛 피가 튀어 올랐다.

“우리 주군은 성격이 좋으셔서 살짝 무는 정도는 괜찮아.”

“크으······상팔자 시구만.”

엉망이 된 입안에서 비릿한 것을 뱉어내며 주베르가 웃음 지었다.

“이 정도면?”

“한 방 더.”

주베르의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롭게 세운 자야르의 무릎이 주베르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쿨럭- 쿨럭-.”

“동종업계니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

“쿨럭- 음. 실로······적당하오.”

얻어맞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주베르의 모습을 보며 자야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 결투장에서 명예를 모르는 기사는 알리시아를 속였으며 요제프를 농락했다.

주군의 명예를 농락당한 자야르로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만은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눈앞의 기사를 죽이기에는 자신으로서는 아니, 요제프라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이미 관계라 할 것도 없이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였으나 이곳에서 자신들은 그저 초청받아 온 손님들일 뿐이었으며.

게다가 어느 가문의 기사를 죽인다는 행위는 곧 선전포고와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니.

비록 샤자드와의 관계는 파탄이 났으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지 결정하는 것은 요제프의 권한을 벗어나는 영역이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사람. 바예지드 가문의 주인인 페테르 바예지드 뿐이었다.

“다음에 꼭 봤으면 좋겠군.”

“뭐, 조만간 보게 되지 않겠나 싶긴 한데.”

그런 사정들을 알고 있던 두 기사는 약소하게나마 내줘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을 서로 주고받았다.

“제국이 헐거워지고 뜻에 따라 사람들이 뭉치는 시기 아닙니까.”

비록 얻어맞았음에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미소 짓는 주베르를 보며 자야르조차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다음에 또 봅시다.”

머리 위로 손을 휘적거리며 걸어가는 주베르의 뒷모습을 보며 자야르는 조용히 검을 집어넣었다.

아마 주베르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 시기가 오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검이 필요한 시기가.

2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39화 22

주어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들 (2)

한 번의 한숨과 한 번의 바라봄.

“손님들은 다들 떠났나요?”

알리시아는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보며 간신히 또 하나의 한숨을 삼킬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그 나무는 언제나 알리시아에게 위안을 주고는 했으니까.

“바예지드 가문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떠났습니다.”

“······떠나간 그들에게 경고 한마디조차 제대로 못 한 것이 너무나 원통하네요.”

명예로운 결투는 끝났다.

명예롭게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무리만큼은 화려하게 빛났으니 명예로운 결투라 해도 괜찮을 것이다.

“엔데르도 빠져나갔나요?”

“······유보니까요. 사제를 통해 교회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엔데르는 결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명시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함과 동시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그 요청이 정당하다 교회가 판단함에 따라 알리시아는 엔데르가 데어마르를 빠져나갈 때 까지 어떠한 보복도 감행할 수 없었다.

“마음이 구겨지는 것만 같아요.”

“······.”

알리시아는 엔데르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같이 자신을 몰락으로 밀어 넣으려 했던 기사들까지도 고이 보내주어야만 했다.

자존심을 넘어서 영혼에까지 상처가 생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같은 어지러운 시기에 명분이라는 것은 창이자 방패가 되는 것이었으며 게다가 알리시아는 아직 데어마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뭐든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후일을 기약하시죠. 알리시아 님.”

“요 며칠간 제 몸속에 따뜻한 피 대신 뜨거운 분노가 흐르는 것만 같아요. 던칸 경.”

그렇기에 쓰린 독을 삼키는 심정으로 다들 고이 보내주어야만 했다.

정당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어야만 했기 때문에.

군림하는 자는 권한만큼의 책임과 의무를 져야만 하는 법이었으니까.

“레몬의 작황은 어떤가요?”

“그리 좋지 못합니다.”

비록 근래 큰 시련을 맞아 쉼 없이 흔들려왔던 알리시아였으나 그녀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녀는 데어마르의 내정을 돌보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비록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갈수록 생산량이 떨어지는군요······.”

알리시아는 인상을 쓴 채 다시 한번 창밖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다.

증조부 시절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나무.

그 나무는 하이날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나무였으며 알리시아의 아버지가 계실 적에는 매년 봄마다 흐드러지게 꽃이 폈던 나무였었다.

비록 지금은 점점 앙상해져만 가고 있어 꽃을 피우기는커녕 죽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데어마르를 감싸는 기후가 점점 차가워지고 레몬의 생산량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레몬 산지로 유명한 데어마르의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차라리 보리밭을 더 늘릴까요?”

“······조금 더 지켜보시는 것은 어떠실지.”

한 영지의 경제를 지탱하고 있던 산업구조를 바꾼다는 것은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게다가 내부의 항쟁으로 힘을 소모한 하이날 가문에 있어서는 매우 부담되는 결정임이 틀림없었다.

“후······.”

산과도 같은 시련을 치워냈더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알리시아는 답답한 심정에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응?”

순간, 그녀의 눈에 반짝이는 화려한 금색빛이 맺혔다.

창 너머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던칸 경.”

“네. 알리시아 님.”

창밖의 모습을 살피며 알리시아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보통 기사들은 다들 말을 탈 줄 알아야 하지 않나요?”

“말을 타지 못하면 기사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검만큼이나 중요한 덕목이기에.”

“아······.”

안타까운 한숨인지 아니면 짓궂은 감탄사인지 모를 소리가 알리시아의 얇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역시 신께서는 모든 것을 나눠주지는 않으시네요.”

“······자야르 경의 고민이 느껴지는군요.”

잠시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앞에 수많은 고민거리를 잠시 외면한 알리시아는 실로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저택의 정원에서 마치 로데오를 하듯 휘청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그녀에게 안식을 주고 있었기에.

용케 버티고는 있었으나 기어이 소년이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

“······비싼 말이면 된다며?”

“저번에는 분명히 탔는데······.”

지친 말과 땅바닥에 굴러 엉망이 된 소년과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마구간지기.

그들 모두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기사를 보며 주눅 들어있었다.

“비싼 말이면 할 수 있다며?”

“좀 더 비싼 녀석이어야 하나······.”

뻔뻔한 블라드의 대답에 참고 있던 분통이 터지고만 자야르는 지체 없이 자신의 종자를 후려갈겼다.

“컥!”

“말을 내뱉을 때는 언제나 생각이라는 것을 해라!”

자야르의 일격에 다시 한번 땅바닥을 구르는 블라드였으나 이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해진 낙법으로 곧장 자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분명히 저번에는 탔거든요. 고트가 몰긴 했는데.”

“네, 네. 자야르 님. 분명히 탔었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는 양, 앵무새처럼 옹알거리는 두 녀석을 보며 자야르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붙잡은 채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이건 심각하다.’

말을 타지 못한다길래 직접 가르치면 될 줄 알았더니 문제는 이 녀석이 아니었다.

히이이잉-

소년의 말처럼 정말 말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말들이 블라드만 보면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마치 두려운 것을 앞에 두고 있다는 듯이.

심지어 자신의 말조차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합니까?”

“······내일도 하지 말고.”

자야르의 대답에 블라드는 불만스러운 눈빛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뭐?”

“······.”

타고난 성정인지 아니면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가지고 있는 향상심과 승부욕이 강한 소년은 얻어맞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기마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대로는 도저히 면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아는데 말은 타지 못한다?

이것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란 말인가.

“그러면 말 타는 것은 언제 배웁니까.”

“일단은 유보다.”

“여기에 와서 참 많이 듣는 단어네요.”

“불만이냐?”

“조금은요.”

도저히 자신의 앞에서 겁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종자를 보며 자야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라 생각하면서.

“스투르마에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오늘은 이만한다.”

제 할 말을 내뱉고 단호히 돌아가는 자야르를 보며 소년과 마구간지기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말들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을 보며 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블라드도 마찬가지였다.

“얘로도 안되면 어떡하냐?”

“······소 같은 걸 타보는 건 어때? 걔네는 말보다는 둔감한 녀석들이라.”

이 새끼가.

고트의 어이없는 대답에 블라드가 푸른 눈알을 부라렸다.

“입이 뚫려있다고 지껄이면 그게 다 말이야?”

자신에게 소를 타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말할 때는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방금 어디서 들어본 말 같기는 한데.”

자야르에게 받은 화를 자신에게 풀어내는 흉악한 녀석을 보며 고트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주고 받아주마.

나는 너한테 크게 걸었으니까.

······참을 수밖에 없기도 하고.

“대장, 나는 그럼 마구간으로 갈게. 너한테는 불친절해도 이 말께서는 굉장히 귀한 분이시거든.”

“둘 다 꺼져버려. 내 앞에서 사라져.”

히이이잉-

이제야 블라드에게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자 자야르의 말은 기뻐하며 이빨을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

비록 스승의 말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얄미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간다! 몸조리 잘하고!”

푸히히힝-

뒤에서 블라드가 이를 갈거나 말거나 자야르의 말과 바예지드의 마구간지기는 매우 기쁜 발걸음으로 블라드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야!”

블라드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며 땅을 걷어차고 말았다.

꾸중을 들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야르에게 부탁했건만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기세가 너무 드센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부분은 인간들보다는 동물들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는 하지.]

목소리의 대답에 블라드는 검을 짚으며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기세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지.]

“알려줘요.”

[심상 세계를 다루는 방법의 하나기에 결국은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아야 기세도 제어할 수 있을 거다.]

“······.”

목소리의 대답에 블라드는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비록 그날의 결투장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워낸 블라드였지만 의식적으로 오러를 사용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제대로 불러내기도 힘들었을뿐더러 설사 불러냈다 할지라도 미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숙달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걷기도 전에 뛰지 말라 했던 자야르의 말을 생각해라. 모든 일은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

“알았다구요.”

검술이나 오러나 결국 기본기를 다져야 한다는 두 스승의 말을 곱씹으며 블라드는 먼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더는 여기서 뭘 할 수가 없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기나 해야겠네.”

한참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는 소년은 꼭 자야르와 목소리에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고귀한 피로써 군주의 자질을 보장받은 청년 또한 블라드에게 훌륭한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최악을 생각하며 최선의 것을 탐하려는 그의 움직임은 블라드에게 있어 많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기회와 가능성을 소중히 대하는 요제프의 태도는 분명 소년의 시야를 넓혀주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챙길 건 챙겨보자고요.”

[고맙다.]

요제프에게 배운 대로 블라드는 마지막 남은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다시 한번 언덕 위 나무로 향하기로 했다.

소년의 세계에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덕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기운 정도는 느낄 수 있었기에.

※※※※

“알리시아 님과 또 마주치지는 않겠죠?”

[집무실에서 이곳이 있는 쪽으로 창이 달린 것 같기는 하던데.]

“빨리 가죠.”

알리시아와의 불편한 만남을 피하기위해 블라드는 발을 바삐 움직이며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임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래도 내가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그리고 설사 발각된다고 할지라도 조금은 뻗대볼 요량인 블라드였다.

소년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알리시아는 차갑게 누워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는 들켜도 봐주지 않을까.

그녀의 집무실에서 이곳이 보인다는 말을 들은 블라드는 다시 한번 기도하는 모양새로 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몸에 익고만 자세였다.

“옛 친구인 것 같던데 말 좀 잘해봐요.”

[음. 뱀이 알아보다니. 솔직히 나도 충격적이었다.]

목소리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면서도 솔직히 자신이 기억을 떠올릴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얀색 뱀이 주는 기운은 분명 낯익은 것이었으나 강렬하게 와닿지 않았기는 때문이었다.

[······그래도 인연은 있었겠지.]

그러나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으니.

목소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년이 뜬 왼쪽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펼쳤다.

다채로운 색깔로 화려하게 꽃을 피운 소년의 세계가 저물고 강렬하게 요동치는 하얀색의 세계가 의식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그 세계는 소년의 세계에 뿌리를 이루고 있는 색깔과 같은 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얀색의 세계가 온전히 소년의 눈 안에 자리 잡은 순간.

[······!]

“······!”

소년과 목소리. 둘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목소리의 세계로 바라본 언덕 위의 나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쉬이이익-

어느새 나무에서 내려와 자신들의 바로 앞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숨결마저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거리였다.

“······친구 맞죠?”

[······그랬으면 좋겠는데.]

마치 자신들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나무에서 내려온 뱀은 조금씩 몸을 비틀며 블라드가 서 있는 곳을 감싸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신난다는 듯한 느낌으로 블라드의 몸을 돌돌 마는 중이었다.

“이건 반갑다는 인사죠?”

[······그래야만 할 것 같은데.]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존재하는 뱀은 어느새 소년을 빈틈없이 감싸 안은 채 꼬리를 흔들어댔다.

만약 이 상태에서 조금만 힘을 준다면 블라드는 아마 형체도 찾기 힘든 곤죽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년과 목소리는 놀랐을지언정 위협은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을 대하는 뱀의 모든 것이 따뜻했으니까.

말로는 통하지 않을 어떠한 감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

소년을 감싸 안은 데 성공한 뱀이 고개를 높게 빼 들고는 이리저리 까딱이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는 모습 같았으나 그 큰 몸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전혀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이건?”

[정령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저것들은 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니까.]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잣대로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지만 필멸자의 가녀린 영혼만으로는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신이라는 존재에 의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소년조차도 지금 상황에서만큼은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쉬이이익-

춤추는 뱀의 움직임에 맞춰 언덕 위에서부터 무언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환한 낮이었음에도 떠오르는 푸른 빛들은 마치 밤에나 볼법한 반딧불과도 유사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뱀에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것들 왜 이러는 거야?]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했던 목소리조차도 지금의 상황에 대해 당황하고 있을 때쯤.

쉬이이익-

뱀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

그와 동시에 소년의 검회색 갑옷이 푸른 반딧불의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멍하니 서서 빛나고 있는 자신의 갑옷을 바라보았다.

[가호(加護)다.]

목소리의 말과 함께 어느새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 블라드는 앞을 바라보았다.

뱀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도 보이고 있었다.

쉬이이익-

소년의 갑옷이 빛나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소년을 그리고 목소리를 축복해주었다.

자신의 따뜻함으로.

“······.”

블라드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갑옷에서 청량한 레몬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0화 11

주어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들 (3)

불청객들은 모두 떠나고 이제 저택에 남아있는 손님들은 오직 요제프의 사람들 뿐.

진정한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북부에서 온 바예지드 뿐이었으니 알리시아는 그들이 떠나는 날에 맞추어 환송식을 마련해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크게 연회라도 베풀어주고 싶었지만 하이날 가문은 이제야 겨우 깨어진 균열을 맞추는 시기.

그 사정을 알고 있던 요제프가 미리 살짝 말을 흘림으로써 알리시아는 부담 없이 지금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바예지드의 종자인 쇼아라의 블라드는 알리시아 님 앞으로 나오시오.”

아직 붕대를 감고 있는 던칸의 부름에 따라 소년은 조금은 당황한 모습으로 앞으로 나섰다.

요제프나 자야르. 둘 중 누구에게도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릎을······아니 왼쪽. 그렇지, 꿇으시면 되오.”

던칸의 고갯짓을 보며 엉성하게나마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블라드.

여전히 순진해 보이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알리시아는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괴롭혀보고 싶었으나 자리가 자리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요.”

오직 알리시아와 던칸만이 상의한 자그마한 수여식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의 명예를 지켜주었고 사기극으로 점철된 결투를 밝게 비춰주기까지 하였으니 어떠한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고 할지라도 모자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야르를 빌린 대가는 이미 넉넉하게 치렀다.

그러나 소년에 대한 대가만큼은 직접 넘겨주고 싶은 것이 알리시아의 심정이었다.

그만큼 극적이었으며 감사했으니까.

알리시아는 자신의 품 안에서 고이 접어둔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보랏빛 천에 금실로 무언가가 수놓아진 손수건.

겉으로만 보아도 흐트러짐 없이 빛을 반사하는 것이 아주 고급의 비단으로 만든 손수건임이 틀림없었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기사보다 더 명예로웠던 그 날의 당신에게 제 이름을 맡기고 싶습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

하이날의 가신들이 소년에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건네주는 알리시아의 모습에 경악하고 있었으나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요제프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리시아가 어떠한 의도로 블라드에게 손수건을 건네려 하는지 눈치챘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여자다.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관계를 블라드라는 유망주를 공유함으로서 증명하고자 하는구나.

감사함을 표시함과 동시에 이득도 가져가려 하는 그야말로 최선의 발버둥이다.

‘그렇다면야.’

요제프는 자신도 모르게 갑작스레 마련한 수여식에 불만을 표시할 만도 했으나 적어도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기에 이 일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만약 조금 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 줄 알았다면 당연히 말렸을 테지만.

“······.”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려는 알리시아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했다.

‘귀족이 주는 것은 받아야 한다. 그것이 예의다.’

자야르가 했던 이 말은 블라드의 머리 깊숙한 곳에 박혀있었다.

‘또 얻어맞을 수는 없지.’

바예지드 저택에 처음 도착했을 때 루트거가 건넨 땅콩을 받지 않아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그러니 지금의 손수건도 받지 않으면 분명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자야르에게 또 얻어맞을지도 모르고.

“감사합니다. 알리시아 님.”

그렇기에 받기로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따라 공손하게 두 손으로.

“······!”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에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든 블라드를 보며 알리시아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점점 얼굴이 빨개져 가는 물빛 머리의 여인을 보며 블라드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그거, 그러면. 그러는 거 아닐세.”

그녀의 옆에 있던 노(老)기사 던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지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고.

“아, 아아. 그렇군. 몰랐겠어.”

요제프조차 탄식을 내지르며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뒷골목에서 자라왔던 소년은 귀족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잘······쓰겠습니다?”

고작 손수건으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 블라드는 그저 멀뚱히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

레이디가 자신의 명예를 상징하는 손수건을 건네주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검 끝에 매달아 주는 방법.

그리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주는 방법.

블라드는 방금 후자의 방법으로 그녀의 이름을 받았다.

※※※※

데어마르를 벗어나 스투르마로 돌아가는 길.

“······.”

마차 안에 앉아있는 요제프는 아까부터 계속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황당함이었다. 물론 나의 잘못이 크겠지만.”

“······죄송합니다.”

이제야 사정을 알게 된 블라드는 마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할 말이 없는 실수였기에.

“저번에 땅콩도 그렇고 대체 너는 뭘 받을 때마다 그렇게 난리를 부리는 거냐?”

마차와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던 자야르는 기다렸다는 듯 블라드에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냥······주길래.”

“무릎까지 꿇고 있었는데 그걸 굳이 엉금엉금 기어가 두 손으로 받아 챈 이유가 뭐야?”

“······귀족이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으니까?”

“하아······.”

자야르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말 위에서 크게 탄식을 내지르고 말았다.

애초에 몰랐다는 데 뭐라 할 수가 없고.

자신이 하라는 대로 했다고 하니 그것 또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본인의 속만 타들어 갈 뿐이었다.

무엇을 하나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야르는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그냥 앞으로 귀족들한테 뭘 받을 때는 나를 먼저 봐라! 알겠냐!”

“······.”

자야르의 호통에 블라드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레이디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받는다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명예를.

또 하나는 사랑을.

명예를 받는 검사는 검집을 내밀어 여인이 직접 손수건을 매달아 건네준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건네주는 경우도 있을 만큼 담백한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에서 손으로 받는 경우라면 달랐다.

그것은 오직 정인(情人)을 위한 응원의 의미였으니.

“이 근방 음유시인들은 당분간 밥벌이 걱정은 없겠군.”

요제프는 요근래 가장 오랫동안 웃고 있었다며 얼얼해진 얼굴 근육을 손으로 피기 시작했다.

“뭐 어쨌거나 준기사의 위치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

“준기사요?”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에 들어가 있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되물었다.

“그래, 너는 고귀한 귀족인 레이디 알리시아의 명예를 받은 남자니까. 적어도 그녀의 이름이 통하는 곳에서는 기사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기사라니.

기사라니!

방금까지만 해도 의기소침해 있던 블라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뭐 이제야 막 남작이 되었으니 그녀의 이름으로는 데어마르 정도에서나 인정받을 수 있겠지.”

“아아······.”

그래서 기사가 아니라 준기사라 하는구나.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만 같던 감정들이 급속히 식어 들어갔다.

‘하긴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겠지.’

그동안 본의 아니게 굉장한 기사들만을 만나왔던 블라드였기에 지금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준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아직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 있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쩝.”

블라드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알리시아가 건네준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게 와닿는 감촉이 꽤나 만지기 즐거웠다.

“받을 때는 실수로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절대로 그 손수건은 잃어버리지 말도록 해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블라드의 순수한 질문에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거다. 네가 두 손으로 받음으로써 그런 일이 되어버렸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겠네요.”

요제프의 대답을 들으며 블라드는 알리시아가 준 손수건을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다.

취급을 소중히 해야 하는 물건을 받은 것은 난생처음이었기에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뭐 마무리는 황당하긴 했지만 네 덕분에 일이 잘됐으니 이제 이건 필요 없겠군.”

요제프는 블라드의 앞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어 흔들었다.

깨알 같은 글씨들이 쓰여 있는 종이였다.

“다시 한번 너의 수고에 감사하마. 덕분에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어.”

“이것이 무엇입니까?”

블라드의 물음에 요제프는 이제는 쓸모없어진 종이를 건네주었다.

사건의 본질을 설명해줌과 동시에 소년이 어떤 위치를 맡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이것은 요제프가 블라드를 위해 해주는 수업 같은 것이었으며 또한 나름의 포상이기도 했다.

“결투에서 질 경우를 대비한 물건이지.”

“······아.”

요제프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으며 블라드는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요제프는 십 분만 버텨 달라고 했다.

자신이 준비한 일이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차······용증?”

하벤 덕분에 글자 정도는 깨우친 블라드가 더듬거리며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래도 용케 글자를 배운 것은 칭찬하마.”

“감사합니다.”

블라드는 요제프의 칭찬에 대답하며 차용증에 적힌 맨 밑의 서명란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알리시아?’

돈을 빌리는 사람은 알리시아 하이날.

액수는.

‘일만 골드!’

경악할 만한 액수를 발견한 블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건너편에 앉아있는 그의 주군은 까맣게 웃고 있었다.

“결투에서 졌을 경우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실제로 빌리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블라드에게서 종이를 빼든 요제프가 설명을 이어갔다.

“모든 지위를 잃게 되었을 경우 알리시아는 스스로를 내주기로 했었다.”

알리시아가 엔데르에게 패했을 경우 그녀는 아마 죽고 말았을 것이다.

엔데르의 입장에서는 조금의 싹이라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요제프는 자신이 먼저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명분을 세워놨다.

그리고 그 명분을 실행할 수 있을 만한 강제력까지도.

“알리시아······님을 굳이 데려올 이유가 있습니까? 결투에 지게 되면 계승권을 잃게 되는 것 알고 있었는데요?”

왠지 이름을 부르면 괜히 애틋해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소년이 물었다.

“그렇긴 하지.”

요제프는 차용증이었던 종이를 다시 품에 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잿더미 속에 숨겨져 있는 불씨와도 같아서 바람만 잘 만난다면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것이거든.”

엔데르가 하이날 가문의 새로운 남작이 되었다 할지라도 알리시아라는 존재가 바예지드의 손에 있다면 큰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분이란 그런 것이니까.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렇군요.”

조금이나마 귀족의 세계를 이해한 소년은 감탄했다.

어째서 귀족들이 명분을 따지며 살아가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면 제가 결국 파블로 경과 다시 결투를 붙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

블라드가 방금 배운 바에 따르면 아직 엔데르가 살아있으니 계승권의 불씨는 살아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아른슈타인의 파블로와 맞붙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요제프에게 물은 블라드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째서인지 미적지근한 반문일 뿐이었다.

요제프의 반응에 블라드가 의아해할 때쯤 순간 자야르가 창밖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

“요제프 님. 신원미상의 인원들이 저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옷 색깔은?”

“검은색 옷에 팔뚝에는 푸른색 스카프를 매고 있습니다.”

자야르의 보고에 요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했다.

“좋다. 신호를 보내봐라.”

“네.”

요제프의 명을 들은 자야르가 보르단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삐이이익-

늙고 뚱뚱한 기사가 호각을 꺼내 있는 힘껏 불기 시작했다.

얇고 가느다란 소리였기에 오직 훈련받은 자들만 알아챌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삐이이익-

혹은 청각이 예민한 블라드 정도나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이기도 했다.

“화답이 왔습니다.”

“그래. 결과적으로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말았군.”

“······?”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블라드가 멍청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부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길목을 지키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들.

“정당한 대가를 받아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요제프 님.”

“수고했군.”

그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아무런 제지 없이 마차로 다가와 요제프에게 검은색 보따리를 건네주며 물었다.

“이놈입니까?”

“그래.”

“벌써 근방에 소문이 다 나 있더군요.”

“나중에라도 좀 귀여워해 주게.”

처음 본 낯선 사내가 요제프와 스스럼없이 대화하자 대충이나마 아군이라는 것을 눈치챈 블라드였으나 긴장된 표정만은 숨기질 못하고 있었다.

“······.”

이제야 자신만의 세계를 피워낸 블라드.

그렇기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 깃든 소년에게 있어 눈앞의 남자는 충분히 경계할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얼굴에 가득 생겨있는 흉터와.

진득히 풍기는 위험한 냄새까지.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방심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같이 가겠나?”

“저희는 좀 더 빨리 복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쉽군. 수고에 감사하네.”

“바예지드의 검으로서 임무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흉터투성이의 남자가 보내는 신호에 따라 검은 옷을 입고 있던 사내들이 정련된 움직임으로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모양새가 마치 군대와도 같아보였다.

“흐음. 결투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아쉽게 되었다.”

“네?”

한참 바람같이 다가와 갑작스레 떠나는 남자들을 보며 블라드가 정신이 팔려있을 때쯤 요제프는 검은 옷의 남자가 준 보따리를 열어보고는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너의 레이디를 다시 보려면 아무래도 결투 말고 다른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은데.”

“······.”

블라드는 요제프의 농담 속에 담겨 있는 서늘한 무언가를 느꼈다.

뒷골목에서 익숙히 느끼고는 했던 그런 감각이었다.

블라드는 조심스레 요제프가 건네준 보따리를 열어보았다.

축축한 기운과 함께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

“······그렇겠네요.”

소년이 열어본 검은색 보따리 안에는 귀족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또한, 용서 없는 자들의 세계.

바예지드를 농락한 남자 엔데르.

그가 그곳에 있었다.

차마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채로.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1화 14

휴가 같지 않은 휴가 (1)

바예지드 백작령의 주도(主都)인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거대한 저택에서 머리가 반쯤 하얘진 남자와 하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례자의 일행이 저희 스투르마를 지나친다고 합니다.”

“마중해야겠는가?”

페테르의 질문에 조언자 라그무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조용히 지나쳐 용의 흔적을 보고 가신다고 하더군요.”

“매우 고전적이군.”

라그무스의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신의 목소리들이라니.

실로 오랜만에 신실한 순례자들을 보는구나.

“······그들 모르게 챙겨주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자격이 있는 것들은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

페테르의 성향과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라그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겠노라 대답했다.

“그리고 내 둘째 아들과······블라드.”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자격 있는 자들이 있었다.

다행이게도 이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자들이었으니 무엇을 챙겨준다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하게 일을 마쳤다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늙은이의 가슴조차도 뛰게 만드는 단어가 보고서에 들어있더군요.”

“음.”

라그무스의 말을 들으며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드마스터의 첫 번째 규율.

매우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단어에 페테르는 진심을 담은 미소를 지었었다.

“요새같이 기사를 귀하게 키우는 시기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었을 텐데.”

“그 자리에 있으셨다면 정말 좋으셨겠지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페테르는 라그무스의 말에 동의했다.

기사란 귀중한 존재이며 또한 많은 자원과 투자가 필요한 전략 병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가문들은 처음부터 검증된 고귀한 핏줄, 혹은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들을 선별해 기사를 만들기 위한 엘리트 교육을 펼쳐왔다.

철저하게 관리되는 원석들.

그렇기에 소드마스터의 규율이 필요할 정도의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치닫지 않는 젊은 기사들과 어린 종자들.

몇몇 오래된 기사들은 그 사정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시대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날 데어마르에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낭만 같은 것일 테다.

“좋아할 사람들이 몇몇 있겠군.”

“바예지드의 황금세대가 떠오르는군요.”

“늙은이들이 병아리를 위해 과자를 들고 오겠군.”

페테르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그렇다 해도 내 아들놈의 것이니 그 녀석의 허락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하신다면 요제프 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고민이 많군.”

페테르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숨을 헐떡이고 있길래 조금만 있으면 포기할 줄 알았더니 기어이 진흙탕을 뒤져 빛나는 것 하나를 주워왔다.

“고민이 많아.”

승리하기 위해서 진흙탕을 구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자신의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페테르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너무 못난 것들도 고민이지만.

너무 잘난 것들도 고민이었다.

결국에는 단 하나를 선택해야 할 테니까.

※※※※

“왜 계속 왼쪽 눈을 깜빡이고 있어? 돌멩이라도 들어간 거냐?”

스투르마로 돌아와 처음 하는 자야르와의 수련.

그곳에서 블라드는 부푼 꿈을 안고 자신의 성과를 확인하는 데 주력하고 싶어 했다.

“······내가 되지도 않는 거 하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그리고 그것은 스승이 가장 하지 말라는 행위이기도 했다.

소년은 방금 자야르가 내건 규칙을 무시했다.

“커억!”

블라드는 갑자기 달려드는 하늘을 보며 크게 구르고 말았다.

방금 얻어맞은 자야르의 일격은 언제나처럼 매서운 것이었으나 배려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일어나라.”

“끄으응.”

너무나 아프게 들어온 일격에 블라드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자신을 바라보는 자야르의 눈을 보며 서둘러 자세를 고쳐잡았다.

분노든 열정이든 혹은 기대감이든 언제나 불타는 것들로 소년을 대했던 자야르.

“데어마르에서 어설픈 반격기를 성공하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내가 말하는 것들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우스워진거냐?”

지금 그의 눈에는 차가운 실망감이 감돌고 있었다.

“······.”

기대하지 않으면 애초에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소년에게 있어 실망감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어른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소년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자야르는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억지로 하는 것이라면 오지도 말고 나 없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찾지도 마라.”

“······.”

평소와는 다르게 욕지거리 하나 없는 말이었으나 블라드는 차라리 욕을 먹는 것이 나을 것만 같았다.

멸시와 모멸, 그리고 하찮은 존재에 대한 조롱 같은 것들은 너무나 익숙했기에 아프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자야르가 보여주는 실망감만큼은 소년의 가슴 깊숙한 곳을 헤집고 있었다.

얼음 같은 소년의 심장을 깊게 찌를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바늘의 끝이었으니까.

블라드는 따뜻한 것에서 비롯된 차가움을 느끼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가봐라.”

“······네.”

한번 결정한 것은 쉽게 되돌리지 않는 자야르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수련은 끝났다.

그것은 어설프게 오러에 의지하려 했던 소년의 태도 때문이었다.

소년은 조급함을 이기지 못했다.

[기본기부터라니까.]

“······.”

목소리의 말을 들으면서 블라드는 침울하게 장식 없는 검을 집어넣었다.

[나라도 화를 냈을 거다.]

자야르는 블라드가 오러를 발산한 직후부터 소년을 매우 민감하게 다루고 있었다.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소년이 쌓아 올린 것들은 빛나면서도 대견스러운 것들이었으나 그것이 자리 잡은 곳은 바닷가의 모래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든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지 모르는 단단하지 못한 것들.

자야르는 소년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꺼내 보고 싶었을 뿐이라구요.”

[가능성의 발현이었을 뿐이다. 어서 잊는 것이 너에게도 좋아.]

그리고 목소리 또한 소년의 그런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중이었다.

모든 기사는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러를 사용할 줄 모르는 기사들은 수준이 낮은 자들인가?

그것 또한 아니었다.

오러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다른 기사들에 비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현일 뿐.

그것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고 실전에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진정으로 오러를 사용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검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오직 단단한 기반 위에서만 훌륭한 꽃이 피는 거다.]

“······.”

그러나 목소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한창때의 소년이 빛나는 검을 손에 잡았는데 당연히 휘둘러보고도 싶겠지.

누구라도 그럴 테지.

[자야르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라. 네가 마땅치도 않았다면 화를 내지도 않았을 사람이다.]

“알았어요.”

그러니 자신의 말을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야 꽃을 피운 소년이 수없이 다가올 유혹들을 견디고 하늘을 향해 똑바로 고개를 들기를.

씁쓸한 기분이 위장을 타고 올라왔지만 블라드는 입술을 찌푸릴 뿐 주저앉지는 않았다.

오늘의 수련은 어차피 글렀고 텄고 하여튼 망했다.

망했으니 별수 있겠는가.

일단은 잊어야지.

좌절의 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소년은 거짓된 감정에 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세상은 한 번 주저앉는 자에게 친절히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무릎까지 꿇리려 주저앉히는 것이 이 세상이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온 소년은 세상의 그런 냉혹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네.”

블라드는 금발 머리를 험하게 흐트러뜨리며 식당으로 나아갔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장식 없는 검을 차고 백작 부인이 준 셔츠를 입은 채 식당으로 들어오는 종자.

“······.”

“······.”

한 달에 가까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블라드에게 돌아온 반응은 어쩔 수 없는 침묵과 그리고 자그마한 경의였다.

소식 빠른 몇몇 종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가문을 통해 블라드가 데어마르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전해 들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있는 모두는 지금 있는 종자 중 가장 귀하고 뛰어난 사람이 누가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문의 위세가 좋고 나쁘고 신분의 격차가 높고 낮음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골목 싸움은 끝났다.

딛고 있는 세계가 다른 단 한 명의 등장으로서.

지금부터 이곳의 진정한 대장은 새롭게 굴러들어온 돌인 금발 소년이었다.

“왔어?”

“나 없는 동안 맞고 다녔냐?”

“아니, 아니야. 아무도 안 때렸어.”

포틀리는 식판에 담겨 있는 음식보다도 더 높이 쌓여있는 소시지들을 내밀며 블라드를 맞이했다.

“겁나 그리웠다. 이 고기들이.”

“많이 먹어.”

블라드는 포크를 들지도 않은 채 맨손으로 소시지들을 집어 들었다.

짭짤한 육즙과 함께 우울한 감정을 넘기는 데 성공한 블라드는 실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지.”

데어마르에 있을 때는 레몬소스로 만든 샐러드니 건강식 빵 같은 것들을 먹어왔었다.

분명 귀한 손님들을 위해 알리시아가 특별히 내놓은 것들이었고 요제프 또한 그것들을 매우 기꺼워하기도 했었지만 블라드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맛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맛이 없었다.

성장기 소년에게 고기만큼 맛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역시 맛은 짠맛이랑 단맛이지.”

“맞아. 그것이 진리지.”

블라드는 포틀리의 진심 어린 동조를 들으며 소시지를 크게 한 입 베어 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다들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알아?”

“대충은······.”

포틀리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혹시라도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대가를 바라는 얄팍한 호의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래.”

블라드는 손에 묻은 육즙을 빨아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종자들의 태도를 보니 왠지 모르게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이번 휴가 때는 뭐할 거야?”

“휴가?”

포틀리의 입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몰랐어? 종자들은 이번 주에 다들 휴가를 받았어. 일 년에 두 번 정도 있는 정기휴가인데.”

포틀리를 포함해 이곳에 있는 모든 종자는 귀족 가문은 아닐지라도 귀한 집에서 보내온 자식들이었다.

그런 종자들을 세심히 다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기에 바예지드 가문은 쌓여있는 긴장과 피로를 풀 겸 종자들에게 정기적인 휴가를 주고는 했다.

“······나도 휴가가 있나?”

그러나 블라드는 갈 곳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운 곳은 있었지만,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각오를 해야 할 테니까.

잠시 멍한 눈빛이 된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우리 아버지가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으시다는데?”

“너희 집?”

집이 먼 몇몇 종자들은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는 대신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인맥의 장을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한 번도 친구를 데려가 본 적이 없어서······.”

“실적이 없었구만.”

블라드는 포틀리의 사정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맥이라도 쌓으라며 어떻게든 종자로 밀어 넣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씁쓸한 소식뿐이었으니.

그렇기에 지금 세간이 주목하는 금발 소년에 대해 칸노르 가문의 가주가 가지는 관심은 비상했다.

가주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아비의 입장에서도 블라드라는 소년을 꼭 보고 싶어 하는 포틀리의 아버지였다.

“우리 집은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하거든.”

“음.”

블라드는 포틀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데어마르에서의 임무였다.

이제는 소시지 말고 갓 구워낸 고기도 먹고 싶기도 했고.

“말을 찾는다며?”

“응?”

그리고 포틀리는 블라드가 고기 말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집은 목축업과 축산업을 주로 하거든. 그 분야에서 북부 최고의 가문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근방의 말들은 우리가 수배할 수 있어.”

“······오.”

제법이다.

이것은 거절하기 힘들다.

“휴가가 있는지 물어나 보고······.”

“자야르 경의 말보다 혈통 좋은 녀석들도 몇 있다는데.”

“달라고 할게. 아마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야 요제프가 알아서 구해다 줄 테지만 미리 봐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남에게 받는 것보다 직접 보고 마음에 맞는 녀석을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고.

“윽!”

블라드는 장하다는 듯 포틀리의 뒤통수를 쳤다.

“좋아.”

포틀리가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블라드는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이것은 뒷골목에서 친한 사람들끼리만 쓰는 인사이기도 했으니까.

소년은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났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2화 11

휴가 같지 않은 휴가 (2)

달 밝은 밤. 아무도 없는 공터.

그곳에서 홀로 구슬땀을 흘리는 소년이 있었다.

“흡!”

소년은 노력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어떤 종자들보다도 더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허억, 허억.”

소년의 턱 끝에 맺힌 한 방울의 땀이 오늘의 달빛을 머금었다.

그러나 소년은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노력이란 단어는 멋지고 아름다우며 또한 빛나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그것을 밖으로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형편없이 굴러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어쩌면 약해 보일지 모르는 그런 모습들을 말이다.

“흐읍!”

예전 뒷골목 작은 공터에서부터 지금 종자들에게 빼앗은 수련장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했던 소년은 언제나 그래왔듯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허리가 좀 더 딱- 했으면 좋겠는데.]

“······허리를 펴라? 곧추세워라?”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게 조금이나마 해석할 수 있는 목소리의 조언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세를 바르게 교정했다.

목소리와 자야르는 소년에게 빨리 돌아가는 길 따위는 없다고 말했었다.

오직 반복으로 얻어낸 숙달과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후우······.”

온 힘을 다해 내일의 가능성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 같은 일인가.

소년에게 있어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했던 뒷골목에서의 삶과 비교한다면 지금은 천국과도 같은 것이었다.

블라드는 지금이 자신의 황금기와도 같은 시기라는 것을 훌륭히 자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벌써요?”

[하루 할당량은 이미 채웠다.]

목소리는 그런 소년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이 천천히 불탈 수 있도록 조절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너무 빨리 불타올라 스스로를 소진하지 않도록 말이다.

[마지막 몸풀기가 제일 중요한 거다.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니까.]

“알았다구요.”

블라드는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자야르가 알려준 마무리 자세를 취하며 근육을 이완시켰다.

어제 자신의 잘못으로 자야르와 수련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는 노력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언제나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들어가자.]

“흠.”

땀으로 온몸을 흠뻑 적신 소년은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를 피해 저택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

그러나 오늘의 밤에는 오직 소년만이 깨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멀리서 바라보고 있어 소년의 말소리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애꾸눈의 기사 또한 아무도 없는 공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을 키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어떤 것들은 그저 사랑만 주면 무럭무럭 자라고는 했지만, 사람에게는 따끔한 질책도 필요한 것이었기에.

그래야만 엇나가지 않았으니까.

소년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야 애꾸눈의 기사는 자리를 떴다.

각자의 자리가 어색하기만 한 두 남자가 많은 고민을 품은 밤이었다.

※※※※

“좋다.”

빛이 환히 비치는 집무실 안에서 요제프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조금은 불경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블라드는 아무리 빛이 비쳐도 사라지지 않는 요제프의 눈그늘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데어마르에서 돌아온 직후 며칠 앓기도 했었으니까.

“안 그래도 휴가를 줄 생각이긴 했었다. 게다가 알아서 갈 곳까지 만들어왔으니 보내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비록 요제프에게서 허락을 받아냈으나 블라드는 움츠러든 모습으로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계속 눈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음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애꾸눈의 기사가 있었기 때문에.

“······.”

요제프는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있었으나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중해줘야 하는 관계성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리 휴가라 할지라도 기사는 언제나 손에서 검을 놓으면 안 되는 법이다.”

미묘하게 이어진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애꾸눈의 기사였다.

비록 시선은 미묘하게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자야르는 분명 소년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돌아왔을 때 두고 보겠다.”

훈련이라는 것은 하루를 안 하면 본인이 알고 일주일을 하지 않으면 남들도 아는 법이었다.

자야르는 블라드가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기도 했다.

그는 종자를 포함해 사람 자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제야 자신을 상대해주는 자야르를 향해 블라드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도 말에 대해서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너의 문제는 칸노르 가문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일테니까.”

“······네.”

그러나 이어지는 요제프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기대감이 꺾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말들이 어느 정도 선까지 너를 거부하는지 정도만 파악하고 와라. 그 정도가 덜한 녀석들이 있다면 어느 지역에서 온 말들인지 알아 오도록 하고.”

요제프는 블라드가 말을 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소년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특수한 사례이기는 했지만, 간혹 블라드의 경우와 같이 말들이 사람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긴 했었다.

피 냄새가 너무 짙게 밴 사람이라거나 특수한 저주에 걸려 있는 경우.

또는 너무 강한 기세를 가진 기사의 경우가 그랬다.

‘······애초에 강한 기세를 가진 기사들은 본인들이 알아서 조절하고는 하지만 말이지.’

일단, 소년의 경우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알리시아의 일과 같이 어디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녀석이었으니까.

“가봐라. 일주일 후에 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올 때 선물은 필요 없다.”

“······네.”

선물을 가져오라는 것인지 아니란 것인지 모호한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집무실을 나섰다.

“칸노르 가문이라······.”

블라드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요제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잘하면 서로 만날 수도 있겠군요.”

“워낙 둘 다 눈에 띄는 인물들이니.”

블라드의 행선지를 안 요제프는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약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입술을 찌푸렸다.

“뭐 급하면 알아서 쓰겠지.”

“눈독 들이지 않을까요?”

자야르의 물음에 요제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서류에 고개를 박을 뿐이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와서 달라고 할 사람이다. 뒤에서 부리는 수작 같은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

자야르는 요제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요제프의 말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둘이었으니까.

※※※※

“내가 생각한 것이 시기가 아주 좋게 들어왔구나.”

햇살조차 오렌지빛 분위기가 감도는 옥사나의 응접실에서 블라드는 또다시 빳빳이 서 있었다.

주위를 이리저리 거니는 하녀들이 쉴새 없이 블라드에게 옷을 걸쳐보는 중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겪는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지금은 그저 멀뚱히 서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요제프의 집무실을 나선 블라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장 하녀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옥사나 백작 부인의 하녀라 자신을 소개했기에 마땅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꽉 잡힌 베개처럼 끌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런 모습이었다.

“색깔이 아주 잘 맞네. 가죽 갑옷이랑 같이 입힐 생각으로 맞춘 건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옥사나는 소년의 어깨에 두른 검은색 망토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블라드는 옥사나의 미소를 보며 조심스레 망토를 만져보았다.

따뜻한 울 재질로 만든 망토는 야영할 때 침낭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보온성을 가지고 있었다.

보기에만 멋진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실용성도 갖추도록 옥사나가 신경을 썼기 때문일것이다.

“확실히 골격이 건장하니 무엇을 둘러도 어울리는구나. 입히는 보람이 있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잘 들어맞는 색깔의 배합을 보면서 옥사나는 가볍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소년의 화려한 금발은 패션의 완성도를 높이는 훌륭한 방점이었다.

“칸노르 가문으로 휴가를 간다고?”

“그렇습니다.”

분명 방금 요제프에게 휴가를 허락받고 왔는데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저택 안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백작 부인의 권력을 아직 실감하지 못한 소년은 그저 앞으로 행동거지를 좀 더 똑바로 해야겠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갈 때는 훨씬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법이란다. 그것이 예의이고 부모를 욕 먹이지 않는 행동이지.”

“······.”

소년은 욕 먹일 부모가 없었다.

“그러니 나를 욕 먹이면 안 된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옥사나는 비록 소년의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그만한 책임을 져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블라드에게 해주는 지원은 이미 후원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데어마르에서의 일은 정말 고맙구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한 일이었지.”

옥사나는 단순히 블라드라는 소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아들에게 있어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한낱 종자인 자신에게 이렇게 해줄 정도인데 피를 나눈 아들인 요제프는 얼마나 끔찍이 생각할까.

“그러면 이번 휴가가 끝난 다음에 가정교사를 붙여줘야 하겠구나. 그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할 테니까. 그렇지?”

“······죄송합니다.”

옥사나가 비록 지금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알리시아와의 일을 들은 후 충격에 잠시 비틀거렸다는 것을 알았다면 블라드는 아마 죄송스러움에 무릎을 꿇고 있었을 것이다.

“네가 목표하는 기사라는 작위는 준귀족에 해당하는 위치이기도 하니 그에 맞는 행동을 배울 필요가 있어.”

“알겠습니다.”

가능성이 있으나 아직 모자란 어린 것들을 본다면 누구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옥사나의 마음은 다양한 형태를 통해 소년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좋다. 이제 가보거라.”

“감사합니다. 옥사나 님.”

응접실에 들어온지 한참 만에야 나가는 것을 허락받은 블라드가 딱딱한 걸음걸이로 그녀의 응접실을 벗어나려는 찰나.

“그리고 갈 때는 옆에 놓아둔 것들도 가져가도록 하렴.”

블라드는 옥사나의 말에 옆에 놓아둔 바구니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레몬이란다. 이번에 요제프가 가져온 것들인데.”

옥사나는 레몬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소년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남의 집에 갈 때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다.”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무언가를 뺏으려는 자들은 많이 보아왔지만 무언가를 안겨주려는 사람에게는 면역이 없던 블라드.

그렇기에 그저 감사하다 말하며 양손 가득 과일바구니를 들고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후······.”

언제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 가는 옥사나의 방을 나오며 블라드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었다.

블라드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며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에 멋들어진 망토. 그리고 양손에 가득 든 과일바구니까지.

어울리지 않았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3화 7

휴가 같지 않은 휴가 (3)

“크으······쿨럭.”

힘없이 벽에 기대어 피를 토하고 있는 중년의 기사.

서서히 쓰러지는 그의 뒤로 검붉은 핏자국만이 애처롭게 남아있었다.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그의 눈가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으나 기사는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지만, 자신은 마지막을 봐야 할 의무가 있는 자였으므로.

저벅-저벅-

남자의 귓가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시야, 윙윙거리는 귓가,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명들.

그런 것들과 함께 섞여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는 조용하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군.”

지금, 새빨간 피로 물들어가는 저택.

이곳을 지켰어야만 하는 의무를 진 기사가 복도를 걸어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볼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죽음뿐이리라.

“주군의 명이 첫 번째요······. 쿨럭, 자신의 명예가 두 번째라는 말은 무조건 명령에만 따르라는 말이 아닐 텐데.”

“······.”

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푸른 빛의 달빛.

그것과 함께 묵묵히 서 있던 남자는 서서히 쓰러져가는 기사의 마지막 넋두리를 들어줄 뿐이었다.

“전(前)대 가이다르 백작의 기사들은 이렇지 않았어.”

“······그래서 모두 죽었습니다.”

점점 감겨 들어가는 희미한 시야 속으로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검이 들어왔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 빛도 언젠가는 스러질 테지.”

“······.”

그 말과 함께 푸른 달빛의 기사가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달빛이 만드는 역광으로 인해 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딘. 가이다르 백작에게 전해주게.”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푸욱-

모든 것은 승자의 결정에 따라.

하얀색 복도를 따라 붉은 피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해드리지요.”

방금까지만 해도 비명이 가득했던 어딘가의 저택.

이제는 침묵만이 가득한 그곳에 푸른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곳곳마다 붉은색의 비명들이 칠해져 있었다.

※※※※

마차 창턱에 얼굴을 기대고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는 소년이 있었다.

“언제 도착하는데.”

“이제 거의 다 왔어.”

“아까도 거의 다 왔다며.”

“······.”

블라드는 낚였다.

자신의 집이 스투르마 안에 있다 하기에 아무리 오래 걸려도 반나절이면 도착할 줄 알았거늘.

그러나 블라드는 예상과는 다르게 반나절은커녕 아예 스투르마를 떠나 약 하루 정도의 거리를 더 움직여야만 했다.

이제 마차라면 지긋지긋한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형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이맘때쯤이면 우리 가족 전부가 여름 별장으로 이동하거든. 초원의 풀들이 올라오는 시기라.”

“별장으로 가는 거면 처음부터 말을 해줬어야 할 거 아냐.”

“······미안.”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포틀리의 가족들은 현재 스투르마 안이 아닌 도시 밖에 마련되어 있는 별장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즐거울 거라 포틀리가 입에 침을 튀기며 설명했지만 블라드는 그저 귀중한 일주일간의 휴가 중 이틀은 이동하는 데 쓰고 말았다는 사실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오······.”

“풍경이 괜찮지? 이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그러나 그 기분도 잠시.

과연 포틀리의 말대로 그저 언덕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확 달라진 광경이 블라드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시야마저 확 트이는 초원.

태어나 처음 보는 시원한 광경에 시큰둥하게 창턱에 얼굴을 걸치고 있던 블라드조차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히야······.”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보며 블라드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따뜻한 날씨에 맞춰 머리를 치켜든 풀들에 의해 사방이 온통 초록색뿐이었다.

나무조차 얼마 없어 지평선 저 너머까지 탁 트여있는 초원을 보며 블라드는 마치 초록빛 바다 한가운데 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있는 초원은 쭉 이어져서 바르나 앞까지 닿고 있거든. 원래는 가끔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이번 겨울은 요제프님이 몬스터 토벌을 하신 직후라 그 걱정은 없어도 될 거야.”

“아, 그래?”

“그래. 네가 했다던 그 토벌 있잖아.”

“아. 그거.”

모든 행동에는 의도가 있는 법.

지난해 겨울날 요제프와 처음 만나게 되었던 그때의 토벌이 지금의 초원을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니.

“그러면 지금의 풍경에 나도 조금은 지분이 있겠네.”

블라드는 자신이 이 푸르른 초원을 만드는데 뭔가 한 손 거든 것만 같아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리 지르고 싶다.”

“이해해. 나도 가끔 그러고 싶거든.”

지금이라도 마차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맘껏 달리고만 싶은 강렬한 초록빛의 세계.

저 멀리서 뛰어다니는 말들이 어떤 기분일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블라드는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입을 크게 벌려 달려드는 공기를 집어삼켰다.

“이야야아아아아-!”

“······그래. 충분히 이해해.”

초원 한가운데로 소년이 내지르는 함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평생을 어둡고 좁은 곳에서 살아왔던 블라드로서는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신선한 감정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싶을 뿐이었다.

※※※※

초록색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처럼 다른 색깔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별장.

그 앞에서 누군가가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 가문의 집사야.”

“오. 집사.”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길래 가족인 줄 알았더니 집사라니.

“집사가 필요할 만큼 집이 큰가 봐?”

“우리 가문에 집사는 총 두 명이 있어.”

“······그래?”

칸노르 가문은 비록 귀족은 아니었으나 스투르마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었다.

애초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포틀리와 친분을 맺은 것이긴 했지만 칸노르 가문의 부(富)는 뒷골목에서 자라왔던 소년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있었다.

“집사 오랜만이야!”

“저도 오랜만에 뵈어 반갑습니다. 도련님.”

강아지들은 자신의 덩치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주인에게 안기려 드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포틀리의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

어떻게든 통통한 포틀리를 안아 들려 하는 늙은 집사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칸노르 가문의 막내이기도 한 포틀리는 집사에게 표현하는 행동으로 보아 집안에서 사랑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던 블라드가 바로 앞에 당도했음에도 집사를 제외한 그 누구도 밖으로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쓴웃음으로 곤란한 상황을 표현한 집사는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양해를 부탁했다.

“가주님께서는 갑작스레 도착하신 손님들을 먼저 맞이하시느라······. 그러니 저희 가문이 자랑하는 목장을 먼저 구경하심이 어떠실지.”

갑작스러운 손님이 왔다라.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집사를 보며 블라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시죠.”

다른 손님이 왔으니 기다려 달라는 말은 실례에 가까운 말이기도 했으나 블라드는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 블라드를 보며 늙은 집사의 얼굴에 주름이 활짝 펴졌다.

[잘했다. 너그러운 마음은 언젠가 돌아오기 마련이니.]

‘······뭐 그런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을 들으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대접받아 본 적이 있었는가.

비록 나중으로 밀리긴 했지만,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조차도 예전에 비하면 꿈만 같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고작 데어마르에서의 일로 대접을 받으려 한다면 앞으로 무언가를 해 나갈 때마다 발은 둔해지고 고개는 빳빳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소년은 모든 일에 있어 가능한 한 대범해지기로 했다.

“대신 말들이 있는 곳부터 보고 싶습니다. 기대가 컸거든요.”

“물론 그렇게 하셔야죠. 정말 비싼 녀석들은 가주님께서 직접 소개하실 테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미리 봐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대신 나에게 허락된 것들은 찾아서 먹어놔야 하겠지.

양보할 수는 있으나 손해 보는 것까지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소년이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이었으니까.

※※※※

히이이이이잉-

푸드드득-

컹컹 컹!

“······.”

“······.”

소, 말, 양. 그리고 양치기 개까지.

목장 안에 있던 동물들 모두가 블라드를 보고는 기겁하며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이건 좀 심각하군요.”

포틀리와 블라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할 거라 예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늙은 집사는 얼굴이 새파랄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혹시······교회는 가보셨는지?”

“저의 신분 보증인이 바로 안드레아 사제님이십니다.”

“아아······죄송합니다.”

너 혹시 저주라도 받은 것 아니냐 돌려 물어봤던 집사였으나 블라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목축과 축산업을 하고 있는 칸노르 가문의 집사답게 그 또한 동물들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맹세코 지금 같이 말과 양들이 누군가를 피해 부리나케 달아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소 타는 것도 불가능해졌구만.’

옆에 있는 늙은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보거나 말거나 블라드는 그저 착잡한 심정으로 텅 비어있는 울타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고트가 우스갯소리로 소라도 타야하는 것 아니냐 말했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블라드는 우울해졌다.

“······.”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포틀리는 안쓰러운 마음에 블라드에게 약속했다.

“우리 목장에 있는 녀석들은 다 보고가. 너에게 한 마리쯤은 맞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잖아.”

이곳에 있는 모든 녀석들을 다 보여주겠다고.

전투용, 승마용, 작업용, 도축용 할 거 없이 전부 꺼내 보여주겠다고 말이다.

“그래도 나를 따라줄 녀석 한 마리쯤은 있겠지?”

“당연하지!”

그러나 약속이라는 것은 장담한다고 해서 언제나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며 목장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두 명이었으나 다들 블라드를 피하기 바쁜 녀석들일 뿐이었다.

그 와중에 애꿎은 집사만 혹사당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각오하고 있던 블라드였으나 막상 상상했던 광경이 눈앞에서 여실히 펼쳐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그나마 품고 있던 한 줌의 희망마저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오러를 쓰면 뭐하나.

말을 타지도 못하는데.

“남들이 멋지게 기마 돌격 같은 걸 할 때 나는 흙먼지나 먹으며 뒤꽁무니나 쫓아다니겠지······.”

“······아직 아버지가 데려온 혈통 좋은 녀석들이 있어.”

그러나 그 녀석들을 데려오려면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 할 터.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대감이 형편없이 꺼져버린 블라드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별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오늘의 태양이 소년의 축 처진 어깨를 붉게 물들여줄 뿐이었다.

※※※※

타닥-타닥-치익-

”······.“

식당에 들어온 블라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인들에 의해 화로 위에서 쉼 없이 구워지는 고기들.

그곳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침울해져 있던 블라드의 마음속을 다시금 훈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기 잘 왔네.’

비록 마차에서는 멀다며 불평했지만, 지금의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올 만한 가치가 있었다.

“어서 오게! 귀한 손님을 직접 맞이하지 못해 미안하군!”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기들 앞에서 망부석처럼 굳어 데굴데굴 눈알만 굴리고 있던 블라드.

칸노르 가문의 가주이자 포틀리의 아버지인 올슨 칸노르는 블라드의 꾸밈없는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듯 두툼한 손으로 소년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예지드 가문의 종자인 블라드입니다.”

“알지알지!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이미 스투르마 내에 쫙 퍼져 있으니!”

옥사나 백작 부인에게 배운 인사를 따라 자신에게 예를 취하는 블라드를 보며 올슨 칸노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실로 오랜만에 소드마스터의 규율을 발동시켰다는 소년.

그 소년이 자신들의 도시에 있다는 것을 안 스투르마의 사람들은 나름의 자부심과 함께 블라드의 관한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누고는 했다.

새로운 별의 탄생은 언제나 환영인 법이었으니까.

‘포틀리가 친구 하나는 잘 사귀어놨구나!’

올슨 칸노르는 자신의 앞에 있는 훤칠한 소년을 보며 아무것도 먹지 않았음에도 배가 불러오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동안 포틀리가 바예지드의 저택에서 적응에 어려워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여왔으나 지금 눈앞의 소년을 보니 그간의 걱정이 싹 사라지는 것만 같은 올슨이었다.

훤칠하고 믿음직해 보이며 무엇보다도 말라있는 것이 잔뜩 먹이고 싶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여기 앉지! 실로 오랜만에 듣는 소드마스터의 규율에 관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으니!”

블라드는 뒷골목에서의 습관에 따라 올슨의 태도를 보며 그의 성향을 유추해보려 했다.

시선과 품행에는 진심이 담겨있었으며 크게 웃는 그의 웃음에는 당당함이 담겨있었다.

흔히 말하는 호인의 느낌이었으며 손님 대접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아 상당히 외향적인 성격의 인물인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사업을 하기에 알맞은 성격의 사람같아 보였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 집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이 집안의 주인으로서 너무나 기쁘군!”

블라드는 올슨의 말을 듣고는 오늘 자신 말고 이곳에 찾아온 또 다른 손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다른 곳에서 온 손님들을 합석시키나?’

귀족 혹은 부유한 가문에서의 규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블라드였기에 그저 이곳의 주인이 알아서 했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게다가 여기 있는 모두가 바예지드의 사람들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지!”

‘바예지드?’

이곳에 온 또 다른 손님들도 바예지드에서 왔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블라드.

그렇게 손수 자신을 안내하는 올슨을 따라 자리에 앉은 블라드는 그때서야 또 다른 손님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기사들.

그것도 정련된 기세를 지니고 있는 수준 있는 자들.

오히려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야 세계를 조금이나 엿볼 수 있게 된 블라드로서는 그들이 내뿜는 기세가 버거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마치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듯 한 가운데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익숙한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블라드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그동안 잘 지냈나.”

자신의 주군과 닮았으나 안쓰럽게 깔려 있는 짙은 눈그늘 대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루트거 님.”

바예지드 가문의 장자인 루트거 바예지드.

그가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오늘은 나와 같이 무언가를 먹어도 되는지 모르겠군. 사양하기에는 너무 좋은 음식들 아닌가.”

루트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앉아 있던 기사들의 기세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럴만도 할 것이다.

모시는 주군의 호의를 거절한 애송이가 바로 앞에 앉아 있었으니.

“······.”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에서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돼지 통구이를 가리키며 찡긋거리는 루트거.

그를 보며 블라드는 생각했다.

그때 왜 땅콩을 먹지 않겠다고 뻗대고 말았을까.

이렇게나 흉포한 기세를 지닌 남자에게 말이다.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비록 위축되었다 할지라도 고개 숙이지는 않았다.

앞에 놓여 있는 포크를 결연히 잡은 채 똑바로 마주봐주었을 뿐이었다.

“저도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사나운 푸른 눈동자를 치켜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며 루트거는 진한 웃음을 지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4화 15

달 없는 밤 (1)

고요하기만 한 아침의 수녀원.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회색빛 돌로 만들어진 식당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이름을 날리는 종자가 있대.”

“데어마르에서 오러를 뽑아냈다며?”

비록 우중충한 회색빛 돌로 만들어진 수녀원이었으나 아직 수녀가 되지 못한 어린 소녀들의 지저귐 때문인지 분위기 자체는 그렇게 무겁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수녀원 내부에 돌고 있는 소문 또한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종자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는데?”

“금발에 푸른 눈이래. 어쩌면 귀족 출신일 수도.”

어린 소녀들의 분홍빛 상상을 자극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기에.

‘금발?’

잔뜩 웅크린 채 바닥에 솔질하던 붉은 머리 소녀는 옆에 있는 소녀들이 하는 말에서 그리운 단어를 들었다.

“젊은 나이에 오러까지 뽑아냈으니 분명 기사님이 되시겠지?”

“나중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가 될지도 몰라.”

‘······그럼 아니겠다.’

혹시나 싶어 귀를 쫑긋 귀울인 제미나였으나 이윽고 들려오는 허황된 이야기에 관심을 끊고 말았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기사를 꿈꾸던 소년.

분명 블라드와 가까운 단어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이 합쳐서 들려오는 순간 가능성이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뒷골목에서 겨우 빠져나간 그 녀석이 벌써 저렇게 잘나갈 리가 없지.

그저 건강히 살아만 있다면 좋을 텐데.

툭-

금발 소년을 생각하며 잠시 미소 짓던 제미나.

소녀의 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야 빨간 머리.”

“······.”

한참 떠들고 있던 소녀 중 한 명이 제미나에게 다가와 자신이 들고 있던 솔 하나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남은 건 네가 다 해. 우리가 이 정도까지 해줬으면 됐지?”

“그래 맞아. 너는 후원금도 안 내고 있잖아. 공짜로 밥 먹는 주제에.”

“그날 받아준 것만으로도 평생 일하며 갚아야지. 오히려 기회를 주는 우리한테 감사하라고.”

한 방 먹였다는 듯 꺌꺌 대며 웃는 소녀들.

그러나 제미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은 채 묵묵히 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맞는 말이지.’

소녀들의 말이 맞았으니까.

이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후원금을 내줄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그날 수녀원에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인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지금보다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너는 여기서 평생을 보내야 하잖아. 나가서 할 것도 없고 딱히 꺼내줄 사람도 없으니까. 그러니 미리 여기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제미나는 이곳에서 나간다 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둥지가 깨어진 것은 소년만이 겪은 비극은 아니었기에.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뒷골목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소녀는 이런 괴롭힘이나 따돌림에 굴할 사람은 아니었으나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그럼 우리 간다.”

“점심 전에는 다 해놔!”

평소의 성격같이 행동했다가는 수녀원에서 쫓겨나고 말 테니까.

그랬다가는 그날 밤 자신들을 위해 희생해준 마담 마르셀라를 볼 면목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미리 배워놓기를 잘했네.”

창관에서도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제미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식당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러나 닦아내도 닦아내도 지워지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이 있었다.

자신들을 수녀원 담장 안에 밀어넣고 정작 본인은 머리채를 잡힌 채 어둠 속으로 끌려가던 여인의 모습이 그랬다.

그녀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는데.

“흑······.”

그래서 소녀는 더욱 힘주어 솔을 밀어대었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밀어내고 싶었으니까.

커다란 눈 속으로 다시 눈물을 잡아 삼키는 소녀.

아직 채 자리 잡지 못한 소녀의 붉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어설프게 찰랑거리고 있었다.

※※※※

“너 진짜 오러 써 본거는 맞아?”

“······.”

낭랑한 목소리였으나 정작 듣는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그리 반가운 소리는 아니었다.

그 목소리로 자신을 쉴 새 없이 갈궈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지치지도 않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달구지 위에서 간신히 자세를 잡고 있던 블라드.

그 옆으로 말을 몰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여자가 있었다.

“어떻게 오러까지 뽑아냈는데 말을 못 탈 수가 있지? 순서가 바뀌어도 너무 바뀐 거 아냐?”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을 수도 있지.”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 새까만 눈동자. 그리고 쫑긋거리고 있는 새까만 귀까지.

“뭘 봐?”

끌어올린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색 송곳니가 비쳤다.

사람의 송곳니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모습.

블라드는 저 송곳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려오는 시비를 들으며 옆에서 루트거의 기사들이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마 자신은 땅콩 사건 이후로 이들에게 찍혀버린 모양이었다.

‘참자.’

그러니 참아야 한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찌보면 자신이 초래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소년은 이런 비웃음 속에서 평생을 참아왔다.

‘되지도 않는 휴가를 와서 이 모양이지.’

그러나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한숨마저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현재 블라드와 포틀리는 루트거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휴가를 보내러 왔다는 블라드의 말에 루트거가 같이 매사냥이나 가자며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안 따라오면 요제프 앞으로 땅콩을 두 상자 보내겠다.’

‘······.’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이었으나 전적이 있던 블라드로서는 어쩔 수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고기를 잔뜩 먹여준 칸노르 가문의 가주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고.

그의 입장에서는 포틀리와 루트거를 연결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테니까 말이다.

“수인족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가?”

“혹시 지금 그거 종족차별이니?”

평범한 하녀 같았으면 닥치라고 조용히 일러라도 줬을 텐데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바예지드의 가주인 페테르의 옆에는 마법사이자 조언자인 라그무스가.

그리고 루트거의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검은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그녀는 마법사였다.

“너무 긁지 마라. 도로테아. 빌려온 녀석이란 말이다.”

“저 자식이 저를 볼 때마다 똥 씹은 표정을 짓는다고요.”

“그렇게 괴롭히면 누구나 그래.”

자신을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루트거에게는 검은색 꼬리를 살랑거리며 대답하는 모양새가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심히 보기가 좋지 않았다.

‘고양이 같은 년.’

하는 꼴도 그렇고 생긴 것도 딱 자신이 싫어하는 고양이 같아 보여 블라드는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주위가 탁 트여 있으니 어디든지 잘 보일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인지 루트거는 주위를 둘러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

그저 주위를 살피고만 있었다.

정작 사냥에 쓸 매는 새장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말이다.

“저기 보입니다.”

“그렇군.”

마치 무언가를 찾기 위해 쉴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은 마침내 목표했던 것을 찾았던 모양인지 손가락을 들어 그곳을 가리켰다.

‘음.’

블라드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비록 먼 곳에 있어 가물거리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

사제들이었다.

“순례자의 일행을 보다니 운이 좋군.”

“그렇습니다. 이것 또한 인연일 것입니다.”

‘······일부러 찾아온 것 같은데.’

두런두런 말하는 루트거와 기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블라드는 지금의 매사냥이 다른 목적이 있는 나들이임을 깨달았다.

“깃발을 들어라. 우리의 의도를 보여서 불안하지 않게 해라.”

“알겠습니다. 루트거 님.”

루트거가 눈짓을 보내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깃발을 꺼내 매 장대에 매달았다.

마치 그러려고 가져온 장대같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천천히 사냥감이나 찾아볼까.”

비록 사냥하겠다 말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사냥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저 아래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듯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아래서 걷고 있던 순례자들도 루트거가 걸어놓은 깃발을 본 모양인지 자신들도 장대에 깃발 하나를 매달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대에 높게 매달려 있는 문양.

그것은 블라드의 신분패에 새겨져 있는 문양과 같은 것이었다.

일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블라드는 재빨리 달구지에서 뛰어내려 도로테아의 근처에서 벗어났다.

상대할 수 없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니까.

“어우. 멀미 나.”

“괜찮아. 블라드?”

마차도 아닌 잔뜩 흔들리는 달구지를 타고 와서 그런지 계속해서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아?”

“그렇지는 않고.”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블라드는 목소리가 말해주는 대로 근처에서 풀잎을 하나 뜯어 입에 물었다.

[이 풀도 기억해둬라. 미약한 각성효과가 있거든.]

‘진짜 뭐하던 사람이지.’

목소리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블라드는 새삼 놀랄 때가 많았다.

그가 가진 지식이나 식견은 요제프나 자야르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훌륭히 교육받은 귀족과 경험 많은 기사보다도 뛰어난 식견이라니.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목소리의 정체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라 생각한 블라드는 쓴맛이 나는 풀을 씹으며 저 아래 있는 탁 트인 초원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풍경만큼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탁 트여 있는 초원.

블라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풍경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응?”

순간,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의 시야로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어떤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두근-

“야생마 무리로군.”

루트거도 그것들을 발견했는지 눈을 찌푸리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야생마 무리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멋진 광경이기는 했으나 루트거의 입장에서는 반갑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무언가를 호위하는 데 있어 갑자기 등장하는 돌발상황만큼 부담되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이맘때의 야생마 무리라면 오히려 북쪽으로 올라갈 텐데요.”

기사의 말이 맞았다.

날이 풀려 초원의 풀이 가득해지는 시기라면 초원의 동물들은 남쪽이 아닌 북쪽을 따라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이제야 막 고개를 내미는 어린 새싹들이 그곳에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야생마 무리는 북쪽이 아닌 일행과 순례자들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전력 질주를 하며.

두근-

야생마 무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블라드의 심장도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흐음······.”

블라드는 언젠가 느껴봤던 감각 같다고 생각하며 루트거처럼 언덕 위에 서서 뛰어오는 야생마 무리를 바라보았다.

생명력 넘치는 모습들.

불끈거리는 근육과 거침없이 초원을 내달리는 야생마들의 모습은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낼만하게 하는 것이었으나.

“······.”

지금 이곳에서는 야생마들을 보며 감탄하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것들이 어디로 움직이나 살펴볼 뿐이었다.

“점점 순례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움직임이 기이하게 급박합니다. 마치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만 같은······.”

두근- 두근-

멋대로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블라드.

“······?”

눈이 마주쳤다.

비록 형체조차 가물거릴 정도로 먼 곳에 있었으나 블라드는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무리의 대장 같은 녀석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온통 새까만 녀석.

애초에 시선이 마주칠 수도 없는 거리였으나 분명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블라드는 마치 그 녀석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 느낌이었다.

“루트거 님!”

야생마들의 모습에서 수상한 기색을 감지한 기사 중 하나가 서둘러 땅을 짚고는 다급하게 루트거를 찾았다.

“무슨 일인가?”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두근-

시선을 마주한 소년도 알 수 있었다.

야생마들이 겁에 질려 있다는 것을.

쿠르르르르르--

기사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지진과 같이 땅이 흔들리고.

저 앞에서 그 진동에 놀란 순례자들의 무리가 주저앉고 말았다.

크아아아아아-

지진과 함께 초원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함성.

땅이 새까맣게 갈라지고.

그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던 거대한 것이 튀어나왔다.

히이이잉-

기어이 따라잡히고만 현실에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이 비통한 울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데스웜입니다!”

사나운 이빨에 의해 처참히 찢겨나가는 야생마들.

마치 비처럼 쏟아지는 가엾은 것들의 핏물들.

“······!”

소년의 심장만큼은 쉼 없이 쿵쾅거렸으나 전신을 맴돌고 있는 것은 뜨거운 피가 아닌 서늘한 감각이었다.

야생마의 무리는 도망치고 있었다.

도와달라 말하고 있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5화 13

달 없는 밤 (2)

데스웜.

몰락한 용의 잔재 중 하나.

평소에는 땅속을 파헤치고 다니며 가끔 숨을 쉴 때나 지상으로 몸체를 드러내는 몬스터.

거대하고 흉측한 모습과는 다르게 그것들의 주식은 땅속에 있는 광물이나 비옥한 흙에서부터 나오는 지기(地氣)였으나.

“무언가 이상해요! 데스웜은 본래 육식을 하지 않는데!”

그러나 저 아래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세간의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히이이잉-

크와와아아악-!

데스웜의 공격에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는 야생마들.

말들이 내뱉는 애처로운 비명이 끈적한 핏물과 함께 먹혀들어 가고 있었다.

시뻘건 피로 물든 데스웜의 미끈거리는 몸뚱어리가 스산해 보였다.

“······전원 승마하라!”

상황을 보며 판단을 마친 루트거는 큰소리로 기사들에게 외쳤다.

눈앞의 상황이 상식에 벗어났든 아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며 해야 할 것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임무를 받은 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순례자들을 지켜라!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

루트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속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보며 블라드 또한 재빠르게 달구지 위로 올라탔다.

“전진!”

“전진하라! 루트거 님을 따라라!”

루트거의 명령에 따라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푸른 언덕을 박차고 뛰쳐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아래 야생마들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는 지옥 같은 현장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당황해하고 있는 순례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조용했던 푸른 초원 위로 데스웜의 울음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설마 벌어질지 몰랐던 이 순간을 위해 페테르는 자신의 아들을 이곳으로 보냈다.

만약의 만약을 준비했던 가주의 안배는 지금 이 순간 장대 위에 높게 걸려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에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체입니다!”

도로테아는 말을 타고 달리는 도중에도 데스웜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크기도 그렇고 피부도 아직 단단해지지 않았습니다!”

도로테아의 비명 같은 보고에 루트거가 고개를 돌려 데스웜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말들의 사체를 씹어 삼키고 있는 데스웜은 그녀의 말처럼 생각보다 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분홍빛의 맨들맨들한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단단한 외피라는 데스웜의 성질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어린 개체였다.

“······.”

루트거가 말을 타고 달리며 상황을 확인하는 동안 블라드도 쉼 없이 흔들리는 달구지 위에서 저 아래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만 도로테아와 다른 점이라 한다면 소년은 데스웜 대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는 야생마의 무리를 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 보통 말들이 아니야.]

‘정령······.’

데어마르에서 보았던 하얀색 뱀.

블라드의 머릿속에 자신에게 가호를 보내준 존재가 떠올랐다.

[내 세계를 빌려주마.]

“알았어요.”

소년의 나지막한 대답을 요란하게 삐걱거리는 달구지 소리가 잡아먹었다.

“후······.”

소년은 기도하듯 자세를 낮추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왼쪽 눈으로 목소리의 세계를 떴다.

히이이잉-!

색깔이 선명한 세계.

소년의 세계보다 100여 개의 색깔은 더 있어 보이는 목소리의 세계가 말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잡아먹히고 짓밟히며 쓰러져가는 야생마 무리.

울부짖는 말들에게서 안개처럼 감돌고 있는 흰색의 연기가 보였다.

‘저건 뭐지?’

반짝이는 흰색의 연기.

그러나 너무나 옅어서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흩어지고 마는 것들.

이유는 모르겠으나 블라드는 그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검은 녀석을 봐라.]

‘······.’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블라드는 방금 자신과 눈이 마주친 새까만 말을 바라보았다.

무리의 대장인 듯 쉼 없이 주위를 뛰어다니며 데스웜의 주의를 끌고 있는 녀석.

그러나 녀석의 애처로운 몸짓에도 데스웜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달콤한 육질을 탐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의 광경과 겹쳐지는 장면 같아 블라드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뿔?’

목소리의 말대로 시선을 돌리자 과연 블라드에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다른 말들에게는 그저 옅은 안개일 뿐이었지만 그 녀석에게만은 하나의 형체로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저 말들에게 일각수(一角獸)의 피가 섞여 있는 것 같다.]

하얀색의 뿔.

온통 검은 녀석의 이마 한가운데는 마치 달처럼 떠 있는 하얀색의 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희미한 뿔을 바라보는 소년의 갑옷에서 그날의 레몬 향기가 풍겨왔다.

※※※※

‘저것은?’

말을 타고 달리던 도로테아의 시선에 순간 무언가가 잡혔다.

어린 데스웜의 이마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

그곳에서부터 마법사만이 느낄 수 있는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린 데스웜이 그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루트거 님! 데스웜이 고개를 틉니다!”

“순례자들! 순례자들을 보고 있습니다!”

“······젠장!”

갑작스러운 상황.

주어진 것은 짧은 시간뿐.

루트거의 검은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도로테아! 데스웜은 뭐에 반응하나!”

임무의 수행자이자 무리의 대장인 루트거는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데, 데스웜은 눈이나 귀가 없습니다! 오직 땅속의 진동만으로······.”

“저것을 유도할 방법을 강구해라. 도로테아!”

루트거는 재빨리 손짓으로 기사들의 무리를 둘로 나누고는 자신은 소수의 기사만을 이끈 채 데스웜이 있는 곳으로 뛰쳐들어갔다.

“너희는 내려라! 말들이 모자라다!”

기사들의 외침에 포틀리와 블라드는 재빨리 자신들의 이동 수단을 내주었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말없이 움직이고 있던 순례자들로서는 기사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야생마들조차 따라잡히고 만 속도를 가진 데스웜은 한번 포착한 목표를 쉽게 놔주지 않을 것이다.

루트거는 한 번에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크아아아아-!

한참 말들의 사체를 음미하고 있던 어린 데스웜은 이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와 함께 순례자들을 향해 몸체를 기울였다.

도망치고 있는 야생마들과 그 앞에 있는 순례자들.

데스웜이 원하는 혹은 누군가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저 앞에 있었다.

크아아아아-!

흉포한 함성과 함께 순례자들을 향해 뛰어오르는 데스웜.

“젠장! 어째서!”

“달려라!”

방금까지만 해도 야생마들을 집어삼켰던 데스웜이 어째서 갑자기 저 앞에 있는 순례자들에게 관심을 보인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결과의 분석보다는 사태의 해결이 더 급박한 상황.

“시선을 끌어라!”

루트거의 지시에 따라 데스웜에게 달려드는 기사들.

기사들이 야생마의 무리와 뒤섞여 데스웜의 전진을 막으려 애쓰는 동안 루트거는 조용히 분노를 불태웠다.

상식이 어긋나고 상황은 기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이 상황을 만든 인위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감히 내 아버지의 땅에서······.”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

그 피를 온전히 물려받은 기사가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

저 멀리서 순례자의 무리에 다다른 기사들이 보였지만 역시나 한 번에 움직이기에는 말들이 모자란 듯싶어 보였다.

“큰일 났네!”

“······.”

말과 달구지를 뺏긴 블라드와 포틀리는 도로테아를 보호하며 언덕 위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금발이랑 뚱땡이! 바람 막으라니까!”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도 바로 뒤에서 앙칼지게 날아오는 도로테아의 목소리.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 바닥에 주저앉아 루트거가 말한 대로 데스웜을 유도할 수 있는 각인을 만드는 중이었다.

“진동, 진동, 진동의 각인술이 무슨 색이었지······.”

바닥에 쏟아붓듯 늘어놓은 작은 병들.

마치 화가가 그림 그릴 준비를 한 것처럼 물감 같은 것들이 들어 있는 작은 병들이었다.

그것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법을 준비하는 도로테아.

조용히 읊조리는 그녀의 입술이 떨릴 때마다, 세심히 병을 붙잡는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바닥에 놓여 있던 작은 병들이 반짝이며 제 색깔을 찾고 있었다.

콰가가가앙-!

‘뭔 놈의!’

한참 그녀의 준비를 구경하고 있던 블라드의 얼굴로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어 왔다.

저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흉폭한 열기.

강렬하게 응축된 불꽃의 일섬이 데스웜과 함께 주변의 공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루트거 님이다!”

여기까지 전해지는 그 강렬한 기세에 포틀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번쩍 쳐들고 말았지만 블라드는 그저 자신의 세계까지 불태울 것 같은 기세에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과는 확연한 격이 느껴지는 세계였다.

[얕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어.]

그러나 어린 데스웜은 아직 강인한 외피는 없었을지라도 끈질긴 내구성으로 버텨내었다.

크아아아아-!

두드드드득-

루트거의 강렬한 일격에도 그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서둘러 땅속을 파헤쳐 들어갈 뿐이었다.

그나마 어린 녀석이라 자그마한 상처라도 낼 수 있던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어렵게 됐군.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할지라도 땅속에 있는 적은 어찌할 수 없을 텐데.]

방금 날린 루트거의 일격만으로는 한 번에 데스웜을 무력화시키기에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고요.

이 넓은 평원에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두드드드드득-

갑자기 지면이 울리며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갈라지는 균열이 향하는 곳은.

“젠장!”

“따라가라!”

순례자들이 있는 곳.

그와 동시에 도망친 야생마들이 지친 숨을 내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도로테아······.”

“왜!”

“빨리 해야 할 것 같아요.”

높은 언덕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블라드는 루트거의 분전만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거의 다 됐거든!”

“거의 다 됐으면 일단 주시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블라드.

“기다리라니까!”

그곳에는 자신의 꼬리에 기이한 색의 물감을 묻히고는 종이에 각인을 새기고 있는 도로테아가 있었다.

“······꼬리 써요?”

“이게 수인족 고유의 방식이야!”

마법사가 마법을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소년으로서는 그저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됐다!”

마침내 완성한 모양인지 손바닥만 한 종이를 들어 올리는 도로테아.

햇살에 비친 각인이 순간 빛났다가 제 색을 되찾았다.

“이걸 루트거 님한테 드리면 돼. 사용법은 대상에 대고 종이를 비비거나 베어내는 거야. 예를 들어 검 같은 거로.”

[늦었다.]

그러나 데스웜이 만드는 균열은 이미 순례자들이 있는 곳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도망치려는 야생마의 무리와 사제들을 태운 기사들의 움직임이 급박해지고 있었다.

“늦은 것 같은데······.”

“내 말을 타고 가!”

도로테아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포틀리를 바라보았다.

“할······. 해, 해볼 게 한번!”

도로테아는 급작스레 각인을 새기느라 기진맥진한 상황이었고 블라드는 말을 탈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루트거에게 이 종이를 전달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포틀리 뿐이었겠지만.

[말을 타도 늦는다. 땅속의 데스웜을 땅 위의 데스웜과 같은 속도라 생각하면 안 돼.]

“······지금 가도 늦을 것 같네요.”

도로테아는 최선을 다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니 그녀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떡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도로테아가 파래진 입술을 떨고 있었다.

“······.”

블라드는 알고 있었다.

데스웜을 쫓고 있는 루트거에게 이 종이를 제시간에 가져다줄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내가 갈게요.”

“너는 말 못 타잖아?”

블라드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내려간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서.

툭- 투둑-

발끝으로 쳐낸 돌맹이가 쉼 없이 구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절벽은 아니었으나 무작정 내려가기에는 각도가 살벌해 보이는 언덕이었다.

말을 타고서는 절대 내려갈 수 없을 가파른 언덕이었다.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별수 없죠.”

블라드는 어릴 적 소매치기를 할 적에도 단 한 번도 붙잡힌 적이 없었다.

본래 몸이 날래기도 했지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를 내려가면 시간 안에 닿아요.”

목표에 다다르는 가장 빠른 길은 직선이라는 것을.

길을 뚫고 벽을 넘어 가게들을 가로질러 도망가고는 했던 블라드를 잡았던 경비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긴 거의 절벽이야!”

“나중에 기사들한테 잘 말해줘요.”

도로테아의 각인을 빼앗듯 쥐어든 금발의 소년.

“그날 땅콩 안 받은 건 진짜 제 본의가 아니었다구요.”

말을 끝나기가 무섭게 소년의 금발이 보기에도 아찔한 언덕을 향해 흔들렸다.

“야!”

푹 꺼지듯 사라진 블라드를 찾아 언덕 아래로 고개를 들이민 도로테아.

“어······.”

그곳에는 마치 날개라도 달린 듯 급격한 경사를 뛰어 내려가는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타고났다더니.”

바예지드 가문에서 주목하며 후원하는 최고의 유망주.

금발 소년의 손에서 도로테아가 만든 각인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천천히! 천천히! 발끝에 힘을 주고!]

“시끄러워서 오히려 집중이 안 된다구요!”

도로테아의 각인을 받아든 블라드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언덕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내려가고 있었다.

오늘 먹지 않으면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소년이 목숨을 걸고 터득한 몸놀림을 통해서 말이다.

‘굳이 이렇게 나설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애초에 루트거라는 사람은 가주의 자리를 놓고 요제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기사 모두는 바예지드 가문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정예들이었으니 굳이 종자일 뿐인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렇게 하고 싶었다.

첫 번째는 자신과 요제프를 무시하는 루트거의 기사들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었고.

두 번째는 재해와도 같은 데스웜의 공격에 무리를 보호하기 위해 애쓰던 새까만 녀석 때문이었다.

‘동물 주제에 사람 마음 심란하게 하네.’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손쓸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자신의 둥지를 깨부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그날의 무력감은 소년의 영혼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상처와도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싫은 소년은 그렇게 지금의 행동을 스스로 변호하며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윽!”

잠시 딴생각을 해서일까.

살짝 헛디딘 발끝 때문에 블라드는 급경사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몸을 둥글게!]

“악! 악!”

악 소리와 함께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는 소년.

그러나 거친 땅을 구르고 돌무더기에 부딪히며 격렬히 구르고 있었음에도 블라드는 이상할 정도로 충격을 받지 않고 있었다.

만약 소년이 왼쪽 눈을 떠 목소리의 세계로 보고 있었다면 지금 자신의 갑옷이 하얗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얀 뱀의 가호는 소년을 지켜주고 있었다.

“······.”

그리고 언덕 아래에서도 소년이 보지 못하는 반짝거림을 대신 봐주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무리를 구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뛰어다녔던 새까만 녀석.

그 말의 눈에서는 소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하얗게 빛나는 별.

하얗게 자신을 불태우며 언덕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별 하나.

새까만 색깔을 가진 말의 세계에서는 소년의 모습이 그렇게 비치고 있었다.

달 없는 밤을 향해 하얀 별이 뛰어들고 있었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6화 18

봐라, 용이 쫓아온다 (1)

“아구구구······.”

마치 늙은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블라드가 몸을 일으켰다.

“······죽을 뻔했네.”

[뱀의 가호가 없었다면 정말 죽었을 거다.]

목소리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가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날 자신을 껴안았던 뱀의 가호가 이런 식으로 발현될 줄은 몰랐다.

“쓸만하네.”

[그러니까 나중에 한 번 더 가자.]

블라드는 목소리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이 이곳까지 온 목적을 상기했다.

점차 다가오고 있는 땅의 균열.

그 뒤를 쫓아오고 있는 루트거와 기사들.

그리고 저 아래에서는 자신이 굴러떨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당황해하고 있는 사제들과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

[······이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매우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드드드드득-!

소년이 당황하는 순간에도 초원을 가르는 균열은 거침없이 뻗어져 나가고 있었다.

루트거와 기사들이 기를 쓰고 따라잡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말처럼 땅속에서 움직이는 데스웜의 속도는 야생마의 무리도 따라잡을 정도로 기민한 것이었다.

“젠장!”

그리고 가공할 속도로 뻗어져 나가는 초원의 균열은 정확히 앞을 향해 나가고 있었다.

정확히, 똑바로, 망설임 없이 순례자들의 무리를 향해서.

“어서 사제님들을 모셔라!”

“준비된 자들은 먼저 떠나라!”

히이이힝-

기사들이 외침과 말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그 모든 소리를 삼키며 다가오는 악의 어린 균열.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 그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설마······.”

그 급박한 상황에서 블라드는 다급한 움직임으로 달구지에 오르는 사제 하나를 알아보았다.

소년이 아는 유일한 사제였으며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

꽂히듯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소년의 눈을 아프게 찔러와 가슴 속까지 닿아 들어갔다.

“젠장!”

우연은 가끔 운명과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선택을 강요하고는 한다.

잔인하게 다가오는 그 순간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쉬운 길을 택하고는 하지만 소년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랐다.

소년은 언제나 있는 힘껏 발버둥 쳐 온 사람이었다.

“······!”

이를 악물며 결심을 굳힌 블라드는 있는 힘껏 루트거를 향해 뛰어 내려갔다.

지금도 쉴 새 없이 쿵쾅거리고 있는 심장 박동 때문에 숨이 저절로 차고 있었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소년이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알리시아의 손수건.

그리고 또 하나는 안드레아가 보증해 준 소년의 신분패.

“사제님!”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처음으로 보증해 준 사람.

소년이 세상에 내디딜 뿌리를 처음 뻗게 해주었던 사람이 저 아래에 있었다.

방금 언덕에서 굴러내렸던 놀람과 아픔도 잊은 채 소년은 균열이 다가오는 쪽을 향해 내달렸다.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거대한 폭력을 향해서 소년은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

“여기요! 여기입니다!”

두 손을 휘적이며 어떻게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블라드.

“······!”

그리고 달리는 말 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검은 머리의 남자.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마 건너기 힘든 거대한 간격이 있었고 그 간격을 따라 순례자의 일행을 덮치려는 어린 데스웜이 있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맞췄지만, 공간이 맞지 않았다.

“안돼······.”

그 어떤 멈칫거림도 없이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균열을 보며 블라드가 멍하니 말을 내뱉었다.

“안 돼!”

블라드는 자신을 무시한 채 지나가는 데스웜을 향해 분노에 찬 일갈을 내질렀다.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 앞에서 또다시 이렇게 무력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

[블라드!]

블라드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목소리가 다급한 어투로 제지하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결심했다.

지금은 해야 할 때다.

해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는다.

블라드는 목소리의 외침을 무시한 채 꾸깃하게 쥐어든 각인을 공중으로 높이 내던졌다.

하얀색의 종이가 하늘 아래서 나풀거리고.

“여기다 이 새끼야!”

장식 없는 검이 만들어 낸 단호한 검의 궤적이 소년의 결심을 그려냈다.

종이가 찢기고 그와 동시에 장식 없는 검을 채워가는 빼곡한 문양들.

검은색으로 빛나는 각인을 따라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데스웜을 향한 소년의 분노와 함께.

[······모자라다. 너의 세계도 불러내라.]

가능한 한 말리고 싶었으나 누구보다도 블라드를 잘 이해하고 있던 목소리는 소년을 위한 조언을 해주었다.

어차피 시도한 일이라면 그 일에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동을 증폭 시켜야 한다!]

도로테아의 각인술은 훌륭한 것이었지만 이미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있는 데스웜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각인에 힘을 보태주어야만 했다.

“흐읍!”

목소리의 조언에 따라 블라드는 검을 땅에 내리꽂았다.

그리고는 왼쪽 눈을 감았다.

영혼 속에 있는 아직은 어설픈 자신의 세계를 꺼내기 위해서.

지금 상황에서라면 설사 이곳에 자야르가 있다 할지라도 소년의 행동에 대해 뭐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최선이었으니까.

“······나와라.”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신 앞에서 고한 그 날.

오색 창연한 색유리들을 통과해 자신의 어깨로 내려앉았던 그날의 햇빛을 소년은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푸근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사제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나와!”

소년의 외침과 함께 울고 있던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희미한 빛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얀색, 초록색, 그리고 푸른색.

아직 자신만의 색을 찾지 못한 소년의 세계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색깔로 가득했다.

미약했지만 아름다운 색깔들이었다.

웅-우웅-웅

도로테아의 각인이 소년의 세계와 맞물려 거대한 진동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떨림은 없었으나 공기를 물결치게 했고 소리는 없었으나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가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노라 외치는 소년의 함성 같았다.

“······!”

입에 피거품을 문 채 순례자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어린 데스웜.

그것 또한 소리 없는 소년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이마에서 앞으로 나가라 외치는 소리보다도 더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그렇기에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르르-

균열이 멈췄다.

거대한 세계가 소년의 세계를 알아보았다.

소년을 느낀 데스웜의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

“······.”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빛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웅-우웅-웅

아주 잠시였지만 소년의 존재감은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

“······도망쳐라!”

“블라드! 검을 나에게 던져라!”

계속해서 멈춰있을 것만 같던 데스웜의 고개가 살짝 움직인 순간 루트거의 외침이 들려왔다.

소년이 만들어 낸 존재감은 아주 잠시 초원의 시간을 멈췄지만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아직 소년의 세계는 미약한 가능성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목적에는 충분히 부합할 수 있었던 몸부림이었다.

크아아아아-!

목표물을 재설정한 데스웜이 땅속에서 튀어나와 소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목소리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른 움직임으로.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이.

[피해라!]

“끄으으······.”

목소리의 다급한 외침에도 블라드는 감은 눈을 쉽게 뜨지 못했다.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미약한 세계.

그 세계를 빠르게 여닫기에는 소년의 성취가 부족했으니까.

주춤거리고 있는 블라드의 머리 위로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은 절망을 뿌리려는 거대한 몸짓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돼!”

모두가 다음의 상황을 예측하고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루트거만큼은 어떻게든 소년을 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둘 사이의 공간은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좁힐 수 없는 것이었다.

[갑옷에 오러를······!]

목소리의 외침조차도 집어삼키는 거대한 존재감.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거대한 세계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년이 장식 없는 검을 내지르려는 순간.

“······!”

데스웜이 만드는 절망의 그림자보다 더 새까만 것.

달 없는 밤의 색깔처럼 고우며 어두운 것이 소년의 눈가를 가렸다.

콰가가가강-!

거대한 세계가 소년을 깔아뭉개려 하기 전에.

※※※※

“······.”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소년의 손을 통해 느껴지는 거대한 심장 소리.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피가 약동하는 근육들의 움직임이 소년의 손끝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

블라드의 등 뒤로 자욱한 흙먼지가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더러운 흙먼지들이 소년을 감싸 안기도 전에 이미 블라드는 반경에서 벗어난 참이었다.

너풀거리는 그것들로는 소년이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으니까.

감격과 놀람 그 어딘가.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말의 등 뒤에 올라타 있는 자신을 느끼며 블라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흐아아아······.]

“······말이다.”

이제야 한숨 놓았다는 목소리의 신음도 듣지 못한 채 블라드는 허리를 일으켰다.

바람 소리와 함께 주위에 모든 것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소년은 맹세코 태어나서 지금과 같은 속도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

블라드는 손바닥을 펼쳐 다가오는 바람을 맞이했다.

무겁게 다가오는 공기의 흐름이 손가락 사이로 세차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 하하하!”

방금까지만 해도 죽음의 위기에 시달렸던 블라드였지만 지금만큼은 크게 웃고 있었다.

그동안 꿈꿔왔던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기에.

크아아아아아-!

“······!”

아주 잠시였지만 현실을 잊고 만 소년의 뒤로 데스웜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의도는 성공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블라드! 블라드! 괜찮으냐!”

데스웜의 포효와 함께 달리고 있는 소년에게로 검은 머리의 기사가 말을 타며 다가왔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좋다!”

데스웜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던 루트거와 기사들은 소년이 스스로 자신의 검에 각인을 부여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자세.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두 번째 규율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소년은 비록 종자에 불과했지만, 이곳에 있는 어떠한 기사보다도 훌륭히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

“훌륭하고 용감한 결정이었다. 물론 칭찬받지는 못할 행동이었지만.”

“······.”

나중을 대비하지도 않고 일단 저질러버린 블라드의 행동을 지적한 루트거는 소년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균열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 움직일 수 있겠나?”

“네?”

이제야 겨우 말에 올라탄 것에 성공한 소년에게는 가혹한 요구였지만 루트거는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총기가 흐르는 새까만 말의 눈빛이 그런 확신을 갖게 했으니까.

“저 수상한 녀석을 베어내야만 순례자들이 안전해질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여기서 승부를 걸어야 해.”

“하지만 저건 데스웜······.”

“나는 할 수 있다.”

그 순간, 블라드는 볼 수 있었다.

루트거의 두 눈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잔재를.

“너는 도로테아의 각인을 가지고 있고 훌륭한 말 또한 타고 있지. 그러니 저 녀석을 유도할 수 있을 거다.”

블라드는 루트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블라드를 미끼 삼아 데스웜을 한 번에 베어낼 생각이었다.

“할 수 있겠나?”

“······.”

블라드는 대답 대신 새까만 녀석의 목을 쓰다듬어 보았다.

살짝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묘하게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구나.

너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구나.

“할 수 있습니다.”

“좋다.”

블라드의 확신 어린 대답을 듣자마자 루트거는 재빠르게 손가락을 들어 진행 방향을 설명했다.

“······이렇게 돌아 나에게로 와라.”

블라드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사실 루트거는 소년보다 그가 타고 있는 말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의 손가락을 보며 새까만 말이 고개를 끄덕인 것만 같았다.

“조심해라.”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과 말을 보며 루트거와 기사들이 떨어져 나가고.

크아아아아-!

대신 빛나는 먹이를 놓치고만 데스웜이 다시 땅으로 파고들어 소년을 쫓아오고 있었다.

“가자!”

안장도 없는 말 위에서 소년은 허벅지에 힘을 주며 새까만 녀석의 갈기를 붙잡았다.

히이이이잉-

아까와는 다른 울음소리.

죽어 나가는 무리를 향한 애타는 울음이 아닌 한 방 먹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담긴 소리였다.

각오와 함께 새까만 녀석이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으아!”

방금과는 또 다른 속도감.

이제는 공포마저 느껴지는 속도에 블라드는 말의 목을 껴안은 채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소년은 기마술 따위는 모르는 초보였으니까.

[검을 내려라. 확실히 저놈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너의 존재를 진동을 통해 알려줘야 한다.]

그러나 소년은 임무를 맡은 자였다.

그것도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다.

“······”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눈을 뜨기에도 버거웠지만 블라드는 저 멀리서 말에서 내려 검을 빼 들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으니까.

“흐아아!”

난생처음 맛보는 속도감.

말에게서부터 느껴지는 아찔한 지면의 박차.

모든 것이 처음이었음에도 블라드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땅을 향해 검을 늘어뜨렸다.

“한번······더!”

거의 옆으로 눕듯 쏠려있는 소년의 자세를 배려하며 새까만 녀석이 대신 균형을 맞춰주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균열을 힐끗 본 블라드는 장식 없는 검을 땅에 가져다 댔다.

까강- 까가가강-

땅과 쇠가 맞부딪히며 만드는 마찰열에 의해 장식 없는 검에서부터 요란한 불꽃이 튕겨 나왔다.

“봐라! 내가 여기 있다!”

그 불꽃들과 함께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소년의 세계.

오러를 실은 도로테아의 각인이 장식 없는 검을 통해 지하에 진동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깊숙이, 깊숙이.

베어 물지 않고는 도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크아아아아아-!

균열에서부터 땅이 갈라졌다.

그 아래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데스웜.

진동을 쫓아 나온 거대한 세계가 또다시 소년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래 여기다!”

그러나 지금의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달 없는 밤 위로 빛나고 있는 별 하나.

그 별을 쫓아 달려오는 몰락한 용의 그림자.

불합리하고 거대한 세계를 향해 소년이 목청 높여 부르짖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노라고.

크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초원을 찢어발길 듯 용의 잔재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 존재감에 맞서 소년 또한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한 치도 양보 없는 두 개의 세계.

모든 세계는 마땅히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지만, 서로가 부딪히고 말 운명이라면 더욱 빛나는 세계만이 살아남을 테다.

봐라, 소년아. 용이 쫓아 온다.

빛나는 너를 향해서.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7화 18

봐라, 용이 쫓아온다 (2)

크아아아아-!

“······.”

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는 데스웜의 포효를 들으며 루트거는 자신의 왼쪽 눈을 깊게 닫고 있었다.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을 보기 위해서, 좀 더 굳건하고 강인한 자신의 세계를 불러오기 위해서.

루트거의 세계는 붉은색.

활화산과 같은 분노와 열정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

“이마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것이 수상합니다. 마법과 관련된 것 같아요.”

지친 몸을 이끌고 내려온 자신의 마법사가 말했다.

누군가 데스웜을 조종하는 자가 있다고.

감히 바예지드의 땅에서 사특한 술수로 내 선조들의 땅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오는군.”

왼쪽 눈을 감은 채 분노어린 세계를 갈무리하고 있던 루트거.

크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

소년의 함성과 함께 그의 눈이 떠졌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치켜 올려지는 루트거의 검.

그의 검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

“······!”

[준비가 끝난 것 같다!]

달 없는 밤을 타며 데스웜을 유도하고 있던 블라드는 저 멀리서부터 흉폭하게 불타오르는 누군가의 세계를 느꼈다.

“······이건!”

[일시적으로 세계를 넓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기사군.]

블라드는 루트거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기세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기사보다도 거칠었으며 무엇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기에.

‘격이 달라!’

자신의 미약한 세계 정도는 얼마든지 삼켜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붉게 들끓고 있는 루트거의 세계.

목소리의 판단대로 루트거는 깊은 명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넓혔다.

오직 스스로를 깊게 관조할 수 있는 기사만이 쓸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자.

그만큼 단단하게 뿌리내린 사람은 없을 테니까.

-----!

그리고 블라드를 쫓던 데스웜도 루트거의 세계를 눈치챘다.

이 자리에 아무리 무지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루트거가 내뿜는 기세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데스웜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며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젠장!”

데스웜의 집중이 흐트러졌다는 것을 깨달은 블라드는 이를 악문 채 장식 없는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나 소년의 세계는 아직 미약한 빛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었다.

찬란히 타오르고 있는 루트거의 기세에서 데스웜의 시선을 빼앗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푸르르륵-

“어?”

상황을 파악한 새까만 녀석이 갑자기 몸을 돌려 데스웜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반전에 블라드는 그저 갈기를 꽉 움켜쥘 뿐이었다.

[······이야.]

“야 임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블라드는 빽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만큼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을 뿐이었다.

달리던 기세를 그대로 이어 빠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데스웜을 노려보는 새까만 말.

블라드는 몰랐겠지만, 목소리는 볼 수 있었다.

새까만 녀석의 이마를 향해 모이고 있는 희미한 안개의 움직임을.

히이이잉-!

뒷걸음질 친 것도 모자라 아예 양옆으로 빠르게 몸을 흔들며 데스웜을 도발하는 녀석의 움직임에 블라드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새까만 녀석의 의도는 성공했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안개가 데스웜의 감각을 어지럽히는 데 성공했다.

크아아아아아!

감히 자신을 도발하는 녀석의 움직임에 데스웜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블라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달려 있는 눈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한 게 아닌데!’

핏물을 질질 흘리며 달려드는 데스웜을 보며 블라드는 당황했지만 어쨌거나 의도는 성공했다.

히이이잉-!

새까만 녀석이 힘껏 울부짖으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소년의 갑옷에서 떨어지는 가호를 받으며.

소년의 세계에서 흐르는 오러를 모아서.

힘차게 달리는 새까만 녀석의 이마 위로 반짝이는 안개가 점점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모두가 볼 수 있는 현실의 세계에서도.

이제는 잊히고만 신비가 다시금 세계의 기억 속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가자!”

히이이잉-!

일각수의 가능성을 표출해 낸 달 없는 밤이 다시금 반전하며 데스웜을 꼬리에 매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활화산을 향해.

빛나는 소년을 태우며 달리는 달 없는 밤의 모습.

여기 이곳에서도 넓혀지는 세계가 있었다.

너와 내가 맞닿는 지평선에서.

나는 우리가 된다.

뿔 없는 일각수와 말 없는 기사는 서로의 세계를 통해 조금 더 완벽해지고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 위로 마침내 새하얀 별 하나가 떠올랐다.

크아아아아-!

“간격을 좁혀!”

“애송이! 지금 빠져나가라!”

적절한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루트거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데스웜의 양옆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크아-!

혹시 모를 데스웜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서서히 목을 조이듯 간격을 좁혀오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각자의 세계를 꺼내든 기사들의 도움으로 블라드에게는 잠시 한숨 돌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루트거 님!”

“······수고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별과 불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소년을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던 데스웜은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갑작스레 행로에서 이탈한 말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을 도발하던 새까만 말과 소년.

그러나 그들이 빠져나간 지금, 데스웜의 앞에 서 있는 것은.

“내 차례로군.”

루트거 바예지드.

바예지드의 적자이자 장자이며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기사.

“이곳은 바예지드의 땅이다.”

이 사태를 주도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서 루트거가 조용히 분노를 내뱉었다.

“너희들 따위가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 땅이지.”

붉게 타오르는 바예지드의 검이 하늘을 향해 높게 치켜세워졌다.

루트거의 검이 기이한 울림을 내며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새빨간 용암이 이 세계를 향해 터져 나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려치는 기사의 검 끝을 통해서.

그의 검과.

검에 맺혀 있는 분노와.

그리고 데스웜과 루트거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공기까지도.

모든 것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꺼져라!”

루트거의 일갈과 함께 푸른 하늘 아래에서 붉은 섬광이 쏘아 올려졌다.

타오르는 분노는 기사의 절제된 움직임을 통해 정확하게 거대한 세계를 베어내었다.

크아아아아-!

몰락한 용의 그림자가 반으로 갈라지며 비통한 울음을 내질렀다.

푸른 초원에 길게 울려 퍼지는 어린 데스웜의 단말마.

용암보다도 더 끈적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의해 데스웜의 이마에 달려 있던 반짝이던 것이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

“크윽!”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흉폭한 열기에 블라드는 몸을 움츠렸다.

[해치운 것 같군.]

“······.”

뒤를 돌아본 소년의 시야로 보이는 광경.

크에에에에-!

그곳에는 불타고 있는 몸통을 휘젓고 있는 데스웜이 있었다.

몸통의 절반은 이미 잘려져 초원 위에서 힘없이 꿈틀거리는 채로.

바람을 타고 뒤늦게 도달한 매캐한 냄새가 이제야 소년의 코끝으로 닿았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블라드는 얼이 빠진 모습으로 목소리에게 물었다.

꿈꾸어왔던 기사들의 세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자신이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거대하고 또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푸른 달의 기사도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을 받아준 성벽 같은 기사도 데스웜을 갈라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기사들의 진정한 세계인가.

[······너의 세계가 어떤 것에게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굳건하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광경을 보며 소년은 깊은 상념에 빠져있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산과도 같은 기사들의 세계.

소년은 자신이 이제야 겨우 출발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대지 아래로 검을 꽂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루트거.

바예지드의 검이 소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

“어서 와라.”

“······.”

감상은 끝났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

새까만 녀석이 이끄는 대로 터벅터벅 걸어간 블라드는 말 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괜찮으십니까?”

“······시원한 맥주 한잔이 마시고 싶군.”

후끈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땅 위에서 겨우 검으로 지탱하며 일어서려던 루트거.

“어이쿠.”

그러나 힘이 빠진 모양인지 모양 빠지게 땅 위로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세계를 일시적으로 넓힌 대가가 지금 찾아오고 있었다.

“······끄응, 안 잡아주나?”

“저도 죽겠습니다.”

지금도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데스웜의 사체.

그 거대한 것을 앞에 두고 블라드도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뜨끈하게 덥혀지는 엉덩이를 느끼며 블라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러려고 휴가를 온 것이 아닌데.

“말 잘 타던데.”

“제가 문제가 아니었거든요.”

능청스러운 소년의 대답에 루트거는 그저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블라드에게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데스웜을 몰이하던 기사들도 서서히 루트거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인데.”

“나중에 한번 보자.”

“잘했다. 짜식.”

곱게 말로 해도 되련만 굳이 등을 치고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년을 지나치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

블라드는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친밀감을 표시하는 기사들을 보며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살벌한 곳에서라도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온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뒷골목에서도.

그리고 불타오르고 있는 데스웜의 사체 앞에서도.

데스웜이라는 강적을 앞에 두었던 소년과 기사들은 오늘만큼은 전우나 마찬가지였다.

“루트거 님! 괜찮으십니까!”

삐걱거리는 달구지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또 다른 기사들.

저 앞에서 순례자들을 지키며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상황이 끝났음을 파악하고는 사제들을 이끌고 루트거에게 다가왔다.

“······흐.”

블라드는 달구지에 실려 오는 안드레아 사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이 지켜낸 세계가 저곳에 있었으니까.

“블라드?”

창백한 안색으로 달구지 위에서 헛구역질하던 안드레아가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사제님.”

부들거리는 허벅지를 붙잡으며 일어난 블라드가 안드레아에게 다가갔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비척거리며 움직이는 소년의 모습은 당황하고 있던 사제들의 눈으로 보아도 안쓰러워 보이기 충분한 것이었다.

“오오······그랬군.”

안드레아는 힘 빠진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년을 두 팔을 벌려 맞아주었다.

“······수고했네. 고맙고.”

멀리서 있어 자세한 사정까지는 몰랐지만, 블라드의 얼굴에 나 있는 자잘한 상처들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소년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이리 오게. 쇼아라의 블라드.”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벌려주는 사제를 끌어안으며 블라드는 눈을 감았다.

신 앞에서 이름을 고했었던 그 날의 햇볕만큼이나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신이시여. 오늘 여기서 당신의 뜻을 받은 소년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했으니 그를 긍휼히 여겨······.”

안드레아가 읊는 기도문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미의 미소에서는 지켜낼 수 없었다.

그때의 소년은 미약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오늘 소년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안드레아를 지켜냈다.

자신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뿌리 하나를 지켜낸 소년은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소년은 발버둥 쳐왔으니까.

푸른 초원 위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사제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기사들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

황혼이 지는 스투르마.

바예지드의 저택에서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던 페테르를 향해 라그무스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 도로테아가 수정구를 통해 보내온 전서입니다.”

페테르는 무심한 표정으로 라그무스가 전해준 쪽지를 받아들고는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새까만 눈썹이 꿈틀거리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설마 해서 보내놓았더니만.”

자그마한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들.

그 글자들에는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또다시 흑마법인가?”

“북부에 자리 잡은 녀석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라그무스의 말에 페테르는 고개를 돌려 성벽에 걸쳐있는 붉은 해를 보았다.

스투르마.

바예지드의 피로 쌓아 올린 도시.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가문의 역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제국이 헐거워지니 저주받을 옛것들이 슬며시 고개를 쳐드는군.”

“······.”

페테르의 한탄과도 같은 말에 라그무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한다.

그리고 페테르 바예지드는 어쩌면 가문의 역사 중에서도 가장 혼란한 시기에 가주를 맡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소식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 종자 말이지.”

페테르는 쪽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에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자신의 아들이 데려온 종자 블라드.

“요즘 들어 자꾸 그 녀석의 이름이 들려오는군.”

“특출난 녀석들은 어디에 있건 튀어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종자들과의 대련에서도 자신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종자.

지난해 겨울에 이루어졌던 몬스터 토벌에서부터 지금 순례자들의 일에 이르기까지 그 녀석이 없었다면 바예지드는 곤욕을 겪었을지도 몰랐다.

기특한 녀석이었다.

“자격 있는 것들은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지.”

그 말과 함께 페테르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종을 울렸다.

은빛 종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집무실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요제프를 불러와라.”

“알겠습니다.”

명을 들은 집사가 집무실을 빠져나가고.

“허가해주실 생각이십니까?”

“자격이 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크게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기특한 종자 녀석은 어디까지나 요제프의 것이었다.

후원을 해줘도 보상을 해줘도 어디까지나 요제프를 통해서 해주는 것이 맞을 터였다.

금발 소년의 공은 곧 요제프의 공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

페테르의 시선이 다시금 창밖에 있는 성벽에 닿았다.

붉게 물드는 황혼을 머금은 스투르마의 성벽.

피의 역사 속에서 세워진 성벽은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페테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8화 14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1)

“이 정도면······하이날 가문의 문장같아 보이나?”

오렌지빛이 감도는 햇살 아래서 초록 머리의 여인이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찌푸리는 여인의 인상을 따라 콧등에 얹어놓은 작은 안경이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시녀가 들어 올려주는 책을 자세히 살펴본 옥사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천에 바늘을 가져다 대었다.

“이런 거 처음 만들어 봐. 사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만드시는 것만 봤었거든.”

“그만큼 귀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집중하기 위해 찌푸린 콧등과는 다르게 옥사나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귀중한 전통 중 하나.

그것이 지금 고귀한 여인의 손끝에서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나?”

옥사나의 손끝에서 서서히 형체를 갖춰가는 하얀색의 나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심어진 하얀색의 나무가 고급스러운 자수의 모습으로 검은색 천 위에 새겨졌다.

“그러면 이제 다음 문장을 새겨주면 되려나.”

“여기······.”

“그건 됐구나. 머릿속에 확실히 박혀있으니.”

가문들의 문장이 그려진 책을 펼치려는 시녀를 제지한 옥사나는 새로운 실을 바늘에 꿰었다.

옥사나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새기고 있는 자수는 그녀가 모를 수 없는 가문의 문장이었으니까.

다시금 찌푸려지는 인상 속에서 바늘 끝이 이리저리 휘둘러지고 있었다.

새롭게 꺼내든 천위에서 옥사나의 손끝으로 세워져 가는 굳건한 성벽.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검 하나.

그것은 바예지드의 문장이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 모든 것이 멈춰있는 것만 같은 옥사나의 응접실.

햇살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먼지들만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공간에서 응접실 중앙에 홀로 꼿꼿이 세워져 있는 깃발 하나가 있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채 오직 흰색의 배경만이 가득할 뿐인 깃발.

깃발이 머금고 있는 흰색의 배경은 마치 소년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세계와도 같은 색깔을 비추고 있었다.

노인과 소녀가 건네준 장식 없는 검.

사제가 증명해 준 신분패.

고귀한 레이디가 자신의 이름을 새겨 건네준 손수건.

그리고 가문의 문장들이 새겨질 흰색 깃발까지.

모두가 소년의 뿌리를 이뤄줄 것들이었다.

모두가 소년이 이뤄낸 것들이었다.

※※※※

해가 떨어진 초원의 밤.

아무리 여름에 가까워지는 날씨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없이 뻥 뚫려 있는 초원의 밤은 아직은 추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마차와 수레들로 벽을 세우고는 그 안에서 야영할 준비를 마쳤다.

야영하기 위해 준비하던 분주한 시간이 끝나고 잠시간의 휴식 시간이 찾아오자 기사들은 기사들대로 사제들은 사제들대로 모여 자신들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

그들 모두의 모습이 반가웠지만, 어디에도 동질감을 느낄 수 없는 소년은 아무도 없는 곳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는 자그마한 모닥불을 피워올렸다.

스르르릉-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제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장식 없는 검을 꺼내 들었다.

모닥불에 비치는 검의 표면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비록 상처들로 인해 모닥불에 반사되는 빛들이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지만 말이다.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숫돌을 꺼내 장식 없는 검에 가져다 대었다.

스윽-스윽-

정성스레 장식 없는 검을 돌보는 소년의 모습은 저 앞에서 기도하는 사제들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어쩌면 소년은 장식 없는 검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소년과 검이 떠나온 곳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숫돌로 검을 가는 소리가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따뜻한 모닥불의 온기와 오랜만에 느끼는 혼자만의 평화에 소년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왜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나.”

“······루트거 님.”

술병 하나를 든 채로 블라드의 곁에 다가온 검은 머리의 청년.

루트거가 블라드가 만들어 놓은 자그마한 모닥불 앞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왜 혼자 있냐니까.”

“다들 바빠요.”

앞에서 다가오는 모닥불의 열기만큼이나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루트거에게서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뚱뚱한 녀석은?”

“도로테아가 데려갔어요. 일 시킨다고.”

“안드레아 사제님은?”

“기도하세요.”

소년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한 루트거는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한 모금 할 테냐?”

“지금은 검을 손질하는 중이라.”

“또 거부하는군.”

“······.”

한참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에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요제프의 집무실로 무엇이 날아올지 몰랐다.

“위스키네요.”

“귀족의 술이지.”

목구멍을 넘어가는 나무 향기를 느끼며 블라드는 조금은 묘한 표정으로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지금 소년의 혀끝에 감도는 술의 향기는 요제프가 건네주었던 그때의 술과도 비슷한 향이었기에.

아무리 같은 것을 놓고 다투는 사이라 할지라도 같은 피에서 비롯된 취향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검은 이번에 돌아가면 한 번 손봐야겠군.”

“······그렇긴 하죠.”

루트거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장식 없는 검을 모닥불에 비춰보았다.

실력 없는 대장장이가 뒷골목에서 만든 검.

누군가가 한평생 쌓아온 모든 것을 담아 때려 넣은 검은 여태까지 숱한 적들을 베어왔음에도 아직까지 굳건한 모습으로 주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응?”

루트거의 말에 무심히 대답한 블라드는 다시 숫돌을 들어 묵묵히 장식 없는 검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손잡이랑 검신의 결합 부분을 너무 제멋대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만든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아예 손잡이를 부숴야 날을 손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더라구요.”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인 검이군.”

루트거는 투박하게 생긴 검을 보며 술병을 치켜들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대장장이가 좋게 말해주기는 했지만 결국은 너무 엉망으로 만들었기에 검신을 제외하고는 다 부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아마 그것이 늙은 대장장이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거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해야죠.”

“그 사람이 어디 있는데?”

날카롭게 세워진 검날을 확인하기 위해 블라드가 검을 세로로 치켜들었다.

검날에서 반사되는 붉은색의 잔상이 소년의 눈가를 아프게 비추고 있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쇼아라요.”

“하긴 네가 맨날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외치고 다니긴 했지.”

루트거가 그것참 잘 어울리는 호칭이라 말하며 위스키를 들이키며 말했지만, 소년은 그저 장식 없는 검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력 좋은 대장장이가 손봐준다 했었지만, 소년은 거부했다.

이 검에 담겨있는 그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검에 새겨진 하나하나가 소년이 쌓아 올린 역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

루트거는 검을 바라보는 소년을 보았다.

많은 감정을 담아 검을 보고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가 조금씩 반짝이고 있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이래서 내 동생이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녔구나.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루트거는 머리를 끄덕이며 술병을 들이켰다.

“······조만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네?”

소년이 반문했지만 루트거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간절히 바라면 누군가는 알아주는 법이지.”

“······?”

“여태까지 네가 잘살아왔다는 뜻이다.”

블라드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루트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위스키의 알싸한 향뿐이었다.

“나는 내일 일을 준비해야겠군.”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돌아가는 루트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블라드.

“······.”

루트거가 떠나 다시 홀로 남은 모닥불 앞에서 블라드는 낡은 천에 기름을 먹여 마무리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숫돌과 기름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검의 상처들이 안쓰러웠지만 언젠가는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장식 없는 검과 소년은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으니까.

소년이 조용히 결심한 초원의 밤.

저 위에 있는 언덕에서 밤하늘만큼이나 새까만 말이 모닥불에 앉아 있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작은 빛이었지만 말은 소년이 만들어내는 색깔이 참 마음에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푸른 초원을 달리고 있는 마차들.

그리고 마차들의 행렬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야생마 무리.

인간과 자연의 무리가 어우러져 초원을 달리는 모습은 분명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마차 안에 타고 있던 사제들도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고 있던 기사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이었고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는 광경을 눈에 담기 위해 모두가 함께 달리고 있는 야생마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

금발 소년도 마차 창틀에 팔을 괴고는 가만히 밖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기분에 블라드는 괜스레 입술을 이리저리 찌푸리고 있었다.

블라드는 알고 있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듯이 새까만 녀석도 무리를 이끌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히이이힝-

무리에서 가장 앞서 달리고 있던 새까만 녀석이 투레질하며 서서히 멈춰서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던 대장이 정지하자 자연스레 멈춰서고마는 야생마 무리들.

여기까지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점점 멀어져 가는 새까만 녀석을 오랫동안 담기 위해 블라드의 고개가 자연스레 옆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마중이라도 하듯 언덕 위까지 올라와 저 아래서 달리는 일행을 지켜보는 야생마들.

밤하늘보다 새까만 녀석의 눈동자가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가득 담고 있었다.

“······잘 가라.”

이별을 이야기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멋쩍게 손을 들고는 흔들어주었다.

누가 보기 부끄럽다는 듯 조그맣게 흔들어주는 작별 인사였지만 새까만 녀석은 볼 수 있었다.

히이이잉-

앞발을 치켜들며 행렬을 배웅하는 달 없는 밤.

마치 흔들어주는 손에 맞추어 앞발을 드는 것 같은 모습에 블라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깊게 교감했던 새까만 녀석.

인연의 깊이라는 것은 단지 같이했던 시간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별을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게.”

소년의 앞에 앉아 있던 사제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저 말일뿐이에요.”

“하하. 사람은 솔직해지기가 참 어렵지.”

안드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성경을 펼쳐 들었다.

“우리의 삶은 이별과 만남의 연속일지니, 이별의 눈물로 흘리는 씨앗은 언젠가는 만남의 기쁨으로 돌아오리라.”

“······.”

소년은 사제가 읊어주는 성경 구절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자신을 위로해주려 꺼내든 말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내가 보아도 정말 멋진 인연이었으니 언젠가는 또 만나게 될걸세.”

“너무 늦으면 다른 말을 찾아야 해요.”

“그것 또한 인연이겠지.”

블라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멋진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소년은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데스웜을 뒤에 매달고 푸른 초원을 달렸던 그때의 느낌.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 중에서 가장 후련하고 강렬한 색깔들이 넘치는 그런 경험을 가져갔으니까.

휴가는 끝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49화 13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2)

성벽의 도시 스투르마.

그곳의 주인인 페테르 바예지드는 라그무스가 전해준 전보를 붙잡으며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라브노마 백작이 무너졌다라.”

페테르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 어루만지며 눈을 감고 말았다.

그동안 서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가이다르 백작 가문이 그만한 힘이 있었던가?”

“서부의 가문들이 연합했다고 합니다. 중과부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왕실은 어째서 가만히 있었지?”

“······저희로서는 중앙의 일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말하고 있었으나 라그무스 또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북부는 그 어떤 지역보다 자신들만의 색깔이 강한 곳.

확실히 벽을 세웠기에 왕실이나 중앙권력에서 뻗어오는 영향력에서 자유로웠으나 그만큼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었다.

“······한 나라의 백작 가문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그것도 맹약을 지키는 가문일진대.”

아무리 제국이 헐거워지는 난세라 할지라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급류는 여태껏 세워놓았던 규칙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여태껏 억지로 틀어막은 만큼 거친 모습으로.

“······난세(亂世)로군.”

페테르는 지금의 전보를 통해 자신이 어떤 시대 속에 서 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새롭게 힘을 쥔 자들에게는 과거에 세워놓은 규칙이나 전통들이 자신들을 옥죄는 사슬과도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서부의 질서는 재편되었다.

오랫동안 서부의 지배자였던 라브노마를 무너뜨린 가이다르 가문에 의해서.

라브노마 백작 가문의 몰락은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첫 번째 봉화일지도 몰랐다.

“······이런.”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페테르는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향해 다가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봄비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는 마차의 행렬.

저택으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보면서 페테르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순례자들이 아니었군.”

교회의 문양을 높게 든 채 바예지드 저택으로 들어오는 자들.

용의 흔적을 보기 위해 북부의 강철공(强鐵公)에게 간다던 그들은 순례자들이 아니었다.

오래된 맹약을 들고 온 피난민들이었다.

※※※※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블라드는 짐을 옮기고 있었다.

차가운 봄비 속에서 소년이 내뱉는 입김이 하얗게 올라오고 있었다.

‘분위기 묘하네.’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웃음을 나누던 일행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결정된 강행군과 함께 행렬의 분위기는 굳어지고 그와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정보다 하루 더 일찍 스투르마에 도착한 블라드는 삼엄한 경비 속에서 사제들이 가져온 짐을 옮기는 중이었다.

“조심, 조심!”

“시종들은 빠져라. 이건 우리가 든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자 블라드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기묘한 문장이 새겨져 있는 거무튀튀한 나무함이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소년의 시선을 잡아끄는 나무함이었다.

두근-

그러나 블라드는 관심이 가는 나무함에서 고개를 돌리며 서둘러 자리를 옮길 뿐이었다.

데스웜의 사체에서 흐르는 핏물이 비와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으니까.

‘영 안 맞나 봐.’

가슴이 뛰는 것은 아마도 피 냄새 때문일 것이다.

가끔 특정한 음식이나 향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자신의 경우에는 데스웜의 피가 그런 것이 아닐까.

“수고했다.”

바예지드 저택의 홀(hall) 앞까지 짐을 옮긴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리였지만 블라드에게 허락된 곳은 여기까지였다.

조용히 수고했다 말하며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루트거와 그의 기사들.

검은색 나무함을 둘러싼 채 그들을 뒤따르는 사제들까지.

모두가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이었지만 소년은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 할 자격이 없었다.

‘······.’

그들이 걸어 들어가는 틈을 따라 블라드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았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분함을 담아서.

“······!”

그리고 그곳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바예지드 가문에서 가장 높은 곳.

블라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감히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거대한 세계가 이미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테르의 존재감에 완전히 얼어버린 블라드는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굳어있었을 뿐이었다.

자격의 유무로 경계를 가르는 홀의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

“나는 가 볼게.”

“그래라.”

포틀리도 나름의 기대가 있었던 모양인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블라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데스웜이라는 훌륭한 사냥감을 잡았으니 나름의 포상이나 자그마한 연회 정도는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스투르마로 돌아온 두 명의 종자들.

그러나 그들은 늦은 봄비가 전하는 무거운 느낌과 함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는 포틀리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발걸음을 옮겼다.

같은 찬밥신세라 할지라도 그나마 불러주는 사람이 있는 블라드가 조금 더 나은 처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블라드는 복도를 걸어가며 아까 잠깐 마주쳤던 페테르의 눈빛을 생각했다.

‘기억이 안 나네.’

강렬한 첫인상인 것만은 분명했지만 정작 눈에 남은 모습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페테르의 생김새보다는 그가 보여준 존재감만이 소년의 뇌리에 남아있었으니까.

“흠흠.”

굳이 기억하지 못한대도 상관없겠지.

백작님의 생김새야 지금 만나려 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 분명하니까.

“저 왔습니다. 요제프 님.”

“들어와라.”

요제프의 집무실 앞에서 자신이 왔음을 알린 블라드는 익숙한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비록 바예지드의 영광스러운 홀은 블라드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지만, 요제프의 집무실만큼은 기꺼이 품을 내주었다.

“하루 일찍 왔군.”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대충은 들었다.”

옥사나가 특별히 자리를 보았다는 요제프의 집무실은 바예지드의 저택에서도 가장 오래 햇빛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블라드는 처음에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그 햇빛이 부담되었으나 이제는 나름 익숙해진 상태였다.

“몸은 괜찮나?”

“멀쩡합니다.”

“다행이로군.”

블라드는 담담히 질문하는 요제프와 그의 옆에 서 있는 자야르를 보며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혹시 날아올 질책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순례자들을 노리던 데스웜을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탠 것은 분명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제프 개인의 처지에서는 조금은 불편한 일일 수도 있었다.

결국, 루트거를 도와준 모양새가 되어버렸으니까.

그와 경쟁 관계에 있는 요제프로서는 마뜩잖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보지?”

그러나 요제프는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서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블라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질책받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했던 요제프의 모습 그 자체였기에 안심한 것이었다.

“몸은 괜찮다니 되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추스르는 것이 좋겠군.”

한참 서류를 뒤적거리던 요제프가 고개를 들어 블라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쇼아라의 뒷골목에 대한 사정은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이지.”

블라드는 갑자기 뒷골목 이야기를 꺼내는 요제프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직 간의 항쟁은 조직원 모두가 죽거나 항복할 때 끝난다고 들었는데 맞나?”

“······네. 아마도 그럴겁니다.”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자신의 가장 여린 부분으로 들어오려 하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조금 움츠러들고 말았다.

“그래서 편지도 보내지 못했었나?”

“무슨 편지 말입니까.”

“수녀원에 있는 자네의 연인에게 말이지.”

“······친구입니다.”

“뭐 어쨌거나.”

블라드의 대답을 들으며 요제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쇼아라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까 봐 제대로 소식조차 보내지 못했던 그간의 사정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야.”

창가로 걸어가 뒷짐을 진 채 잠시 내리던 봄비를 지켜보던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배려해주고 싶었지만,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서는 시간과 실적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외팔이 잭이라는 자는 나름 가치가 있는 자였거든.”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무리 뒷골목이라 하더라도 그곳 또한 바예지드 백작령에 속해있는 영역.

외팔이 잭이라는 사람이 뒷골목에서 날뛰기 위해서는 양지에 있던 권력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돈벌레라는 이명답게 많은 재력을 지닌 자였으니까.

비록 뒷골목 사람들의 눈물로서 비롯된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

블라드는 가만히 창가에 서 있는 요제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걸려있는 자그마한 깃발까지도.

그동안 수없이 드나들었던 요제프의 집무실이었지만 여태껏 보지 못했었던 물건이었다.

‘저건?’

직사각형 모양의 하얀 깃발.

여태껏 보아왔던 깃발들과는 조금 작은 모습이 마치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것만 같은 크기의 깃발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요제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너는 훌륭히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구나.”

그 말과 함께 요제프가 자신의 옆에 있는 깃발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네가 나를 위해 열심히 발버둥을 쳐줬으니 나 또한 약속한 대로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겠지.”

“······네?”

블라드는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요제프를 보며 아까 보았던 페테르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깃발을 들고 있는 요제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품이 그때의 존재감을 떠올리게 했다.

“······내 할아버지 대의 기사들은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깃발들을 들고 다녔다고 하더군.”

들고 있는 깃발을 오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요제프.

자신은 평생 지닐 수 없는 물건을 보며 요제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의 명예를 상징하는 깃발을 말이야.”

그러나 요제프는 선택한 사람이었다.

검과 깃발을 들 수 없으니 그것을 들고 있는 기사를 쥐겠노라고.

그리고 요제프의 눈앞에 그것을 할 수 있는 소년이 있었다.

“너는 너만의 깃발을 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자격은 하이날과 바예지드가 보증한다.”

블라드는 놀란 표정과 함께 자신에게 건네지는 흰색 깃발을 바라보았다.

온통 비어있는 것 같이 보였으나 깃발 왼쪽 위에는 자그맣게 두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하이날과 바예지드의 문장이었다.

“하, 하지만. 저는 아직.”

“이것을 들고 너의 고향으로 가라.”

“······!”

요제프의 말은 들은 블라드는 벼락이라도 맞은 심정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있었다.

바라왔고 꿈꿔 왔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하리라 마음먹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늘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이디 알리시아에게 이름을 받은 자이자 바예지드 가문의 종자인 블라드는 깃발 아래서 당당히 고개를 들어라.”

요제프가 쥐여주는 깃발을 든 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소년.

그러나 표정은 멍했을지라도 소년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간절히 바라왔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는 그곳에서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던 너절한 것을 베고 진실로 자유로운 모습을 찾아 다시 내 앞으로 와라.”

블라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뿌예져 가는 시선으로 들고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약속한 대로, 모든 것은 바예지드가 후원한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날의 계약에서.

소년과 청년은 서로에게 주고받겠노라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 소년이 들고 있는 명예로운 깃발 아래 확인되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곳에서 너를 옭아매고 있는 악연을 끊어라.

그리고 너의 것을 되찾아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소년은 들고 있는 깃발을 꽉 붙잡았다.

두 손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2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50화 22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3)

페테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나무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나무함.

화려하다 해야 할지 기괴하다 해야 할지 모를 문양이 새겨진 나무함이었다.

“······라브노마 백작 가문만이 오직 서부에서 맹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가문이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안드레아를 비롯해 많은 사제들이 페테르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에게 많은 부담을 지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을 내어드리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성의로 맹약을 지켜드리리다.”

페테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제들에게 말해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을 해주겠노라고.

맹약의 증거인 용의 흔적을 옮기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준비가 될 때까지 손님의 자격으로 편히 있도록 하시오.”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사제들을 보며 페테르는 그제야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서부지역의 지배자이자 맹약의 수호자였던 라브노마는 무너졌다.

그리고 사제들은 무너져가는 라브노마의 저택 안에서 옛 맹약을 끄집어내 자격 있는 자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페테르는 잠시 걸음을 옮겨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곳에는 무겁기만 한 이곳의 공기와는 다르게 반가운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깃발이군.”

마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그마한 깃발 하나를 매단 채.

페테르가 젊었을 적만 해도 자주 볼 수 있었던 깃발이었다.

“조금 쉬고 가도 되련만.”

“몸이 달아올랐겠지요.”

라그무스의 대답에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소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주인이 된 기사(Knight Banneret)들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깃발을 든 소년이 저택을 떠나고 있었다.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고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

오늘도 어김없이 쇼아라의 뒷골목을 헤매는 소년이 있었다.

뒷골목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소년은 그들보다는 조금 더 안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다.

새까만 피부.

멸시와 차별의 대상인 검은 피부를 지니고 태어난 소년은 쇼아라의 가장 어두운 곳이라 불리는 뒷골목에서조차도 무시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거 뭐 어디서 작업할 곳도 없고.”

검은 피부를 지닌 소년 네드.

눈을 떴으니 일어나야 했고 일어났으니 뭐라도 좀 먹어야 할 테지만 요즘 쇼아라의 분위기는 어디가서 한 끼 얻어먹기도 팍팍한 것이 현실이었다.

‘옛날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네드는 가만히 눈을 굴리며 뒷골목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동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녀석들은 아예 나자빠져 힘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고 그나마 일거리를 가진 사람들은 밤새워 일하고 있음에도 홀쭉해져 가는 볼을 보며 한숨지을 뿐이었다.

모두가 피를 빨리고 있었다.

황금을 탐하는 돈벌레한테.

“옛날이 좋았지······.”

나이에 맞지 않는 한탄을 하면서 네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느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람이 궁할 때는 언제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기 마련이었다.

‘이제 저기서 소매치기라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지.’

네드가 보고 있던 건물은 장미의 미소였다.

무뚝뚝한 보스와 사람 좋았던 마담이 있었던 창관.

그러나 이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팔려 가고 말았다.

언제나 듣기 좋은 음악과 함께 창녀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장미의 미소는 지금은 그저 처량한 신음소리와 불한당들의 고함만이 가득한 곳일 뿐이었다.

이제 저곳에서 소매치기를 하다 걸린다고 할지라도 네드를 구해줄 금발 소년은 없었다.

‘음?’

옛일을 기억하며 현실을 한탄하고 있던 네드의 눈으로 뒷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보였다.

돈 좀 있어 보이는 뚱뚱한 남자와 용병 같아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쌓여있는 욕망을 해소하러 왔는지 곧장 창관이 있는 거리로 향하는 그들을 보며 네드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잘하면 되겠는데.”

용병처럼 보이는 사람이 경호원인 것 같아 보였지만 이 정도라면 위험을 감수할 만했다.

걸려도 죽지만 않으면 된다.

언제까지나 형에게 의지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

굶주림과 조바심이 어린 소년의 판단력을 흩트리고 있었다.

천천히 두 남자의 뒤를 쫓는 네드.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잡동사니들로 능숙하게 몸을 숨기며 천천히 다가가는 소년의 모습은 충분히 칭찬해줄 만한 움직임이었다.

‘지금.’

하지만 네드는 언제 누군가가 그랬듯이 소매치기로 먹고살 실력이 안 되는 녀석이었다.

“······.”

바로 뒤에서 다가오는 검은 소년을 눈치챈 용병이 자연스럽게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점점 살기가 짙어지고 있었지만 네드는 느끼지 못했다.

집중력은 좋았으나 시야가 넓지 못한 것이 네드의 단점이었다.

뚱뚱한 남자에게 다가가려는 네드.

그런 네드를 보며 검을 뽑으려는 용병 사내.

다가오는 파국 속에서 오늘도 또 다른 끝이 뒷골목에 떨어지려는 순간.

“여전히 병신같이 구네.”

따악-!

순간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누군가가 있었다.

용병이 예측하지 못하게 사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어와 바람같이 빠져나가는 사내.

“억!”

네드는 얼얼해진 뒤통수를 부여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금발.

거기다 눈에 익은 걸음걸이까지.

“뭐야?”

그러나 네드는 그 모습에서 예전 장미의 미소에서 초를 팔았던 소년의 모습으로까지는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하고 커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놓쳤네.”

오늘의 사냥감을 놓친 대신 내일의 태양을 얻게 된 소년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외마디 욕설을 내뱉을 뿐이었다.

방금 자신의 뒤통수를 후리고 지나간 금발 남자를 향해서.

※※※※

황혼이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희미한 불빛을 밝히는 가게들이 있었다.

그중에 한 곳.

화려한 꽃을 파는 가게 중에서도 특히 사내들이 몰려들고 있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는 장미의 미소가 그랬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창관에 쏠려있었다.

“어이 여기!”

“다음에는 나야! 나랑 놀자고!”

“돈 많은 놈이 임자지! 마르셀라! 날 위한 술을 만들어 봐!”

“······.”

남자들이 벌건 눈을 밝히며 소리 지르고 있는 바(bar)의 뒤편에서 한 여인이 화장을 다듬고 있었다.

예전에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풍성한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의 머리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화려한 화장이나 장신구로 가릴 수 없을 만큼 시들어가고 있었으나 어쩌면 상관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한때 뒷골목의 상징이었던 그녀를 갖기 위해서 지금도 사내들은 욕망에 물든 금화를 내던지고 있었으니까.

“마르셀라. 준비됐으면 빨리 나가야지?”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여인이 마르셀라의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매캐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받아야 빚이 청산되지. 안 그랬다가는 몸이 삭아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갈 텐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년 여인은 주름 하나하나에 독을 새겨넣은 것만 같은 미소로 그녀를 비웃었다.

“······.”

충고를 가장한 비웃음이었으나 마르셀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분노, 슬픔, 혹은 공포.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등 뒤에 있는 여인에게는 달콤한 술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당당한 모습이 언제까지 가나 보자.”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중년 여인은 등 뒤에서 마르셀라의 턱을 쓰다듬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마르셀라는 그저 티 없이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오래 사세요. 마담.”

“······.”

마르셀라는 꺾이지 않았다.

다만 짓밟혔을 뿐이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비실을 나서는 마담을 보며 마르셀라는 다시 화장을 계속했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한 줌의 분을 더 끼얹는 것을 선택했다.

마르셀라는 고작 몸 파는 창녀 주제에 자신이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갔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쇼아라의 뒷골목은 추락하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든지 진심 어린 박수를 쳐줄 자들이 가득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했지.”

오직 마르셀라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에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슬프게 웃어주었다.

비록 추락의 아픔으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지라도 그녀는 이곳 뒷골목의 승리자 중 한 명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이었으니까.

심지어 파멸하는 방법까지도.

“안 나올꺼야!”

앙칼진 마담의 외침에 마르셀라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매력 대신 억지 화장으로 덧붙인 화려함을 달고서.

“마르셀라!”

“여기! 여기 내 금화를 가져가!”

화려한 조명 아래서 그녀가 등장하자 사내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르셀라는 가만히 지정된 자리에 앉아 눈앞의 사내들을 지켜보았다.

욕망에 지배되고만 가엾은 짐승들이 저곳에 있었다.

“······.”

요리는 할 줄 알았지만, 술은 만들 줄 몰랐던 그녀 앞으로 수많은 술병과 잔들이 놓여 있었다.

사실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었다.

가장 비싼 값을 부른 사내에게 술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녀가 들려준 술잔을 든 사내는 오늘의 승리자가 되어 마음껏 시들어가는 꽃의 향기를 맡는다.

그것이 전부일 뿐인 공간이었으니까.

“여기! 여기! 나는 1골드!”

“1골드로 무슨! 나는 2골드다!”

“여기 돈 모아서 해도 되나? 우리 둘이 합쳐서 3골드 내겠소!”

악다구니를 치는 사내들의 함성을 들으며 마르셀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앞에 있는 수컷들이 금화를 내던지고 있었으나 저들이 뿌리는 금화는 그녀의 발치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외팔이 잭이 억지로 채워놓은 빚의 사슬이 그녀를 얽매고 있었으니까.

방금까지 마르셀라를 비웃던 창관의 마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록 시들어가는 꽃일지라도 황금색 꿀을 만들어내는 그녀가 참으로 기특했다.

“그럼······.”

마담이 긴 담뱃대를 집어 들고는 가장 비싼 값을 부른 사내에게 마르셀라를 낙찰하려 할 때.

“100골드.”

아무도 없는 계단 아래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돌리고 말 정도로 너무나 선명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뭐?”

“100골드 내겠소.”

끼이이익-

마담의 놀람과 함께 낡은 계단의 판자를 밟으며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

귓가로 들려오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마르셀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며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장미의 미소에 파멸을 가져왔던 남자가 밟고 왔던 소리를 들으며 마르셀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끼이이익-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그녀였지만 그날의 기억이 주는 상처만큼은 아직도 마르셀라의 영혼에 깊숙이 박혀 상처를 헤집고 있었다.

“······손님, 100골드라고 하셨나요?”

창관의 마담은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사내에게 되물었다.

방금까지도 욕망에 헐떡이던 남자들 또한 너무나도 큰 액수에 입을 벌린 채 갑작스레 난입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당한 걸음걸이로 올라온 사내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르셀라가 앉아 있는 자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올 뿐이었다.

“여기서 주문하면 되나?”

“······그렇습니다만.”

비록 터무니없는 액수를 외쳤지만, 마담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했다.

일단은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이 사나웠고.

‘돈은 있어 보이는데?’

무엇보다 사내가 걸치고 있는 검은색의 망토나 가죽 갑옷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어딘가의 귀족 청년이거나 잘나가는 기사임이 틀림없었다.

100골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골드는 너끈히 낼 수 있는 사내 같아 보였다.

그렇다면 시들어가는 꽃을 안을 자격은 충분할 것이다.

“······메뉴판을 드릴까요?”

“됐어.”

이미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마담을 제지한 청년은 자신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창관의 마담은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의아해하고 말았다.

사내가 짓는 미소 어디에서도 욕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슬픈 미소일 뿐이었다.

“······여기를 떠나고 나서도 항상 이것들이 그리웠었는데.”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사내에게서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운 소시지랑 블랙 푸딩, 그리고 해시브라운에 하얀 밀빵······.”

술을 주문해야 하는 곳에서 아침 식사를 주문하고 있는 사내를 보며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다.

‘미친놈인가?’

이곳의 주인인 마담조차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으니까.

“······!”

그러나 마르셀라만큼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내가 내뱉은 단어들은 그리운 것들이었으니까.

그녀가 꿈꾸던 풍경에서 언제나 등장해왔던 음식들이었다.

“······호르헤가 늘 먹던 것으로 부탁해요. 마르셀라.”

그녀가 호르헤를 위해 언제나 준비해주었던 식단이었으니까.

마르셀라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마치 꿈결같이 들려오는 낯익은 소년의 목소리.

혹시라도 눈을 떠 눈앞의 현실을 봤을 때 자신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아아.”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천천히 눈을 뜬 마르셀라.

그녀의 입술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희뿌예진 시선 사이로 찬란히 흐드러지는 금발이 보였다.

“내가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마르셀라.”

쓰고 있던 후드를 벗는 사내에게서 찬란한 황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이곳에 있는 자들이 욕망으로 내뱉는 더러운 금빛 따위가 아니었다.

호르헤가 주워오고 마르셀라가 씻겨놓았던 그 날의 소년이 가지고 있던 색이었다.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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